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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선우(1970~ )

 

가까운 아침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간이역

감자 먹는 사람들

개가 짖는 이유

개부처손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거꾸로 가는 생

거미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는 아니지만

걸식이 어때서?

검은 미사에서 나를 보았다

겨우살이

견주, 라는 말

고드름

고바우집 소금구이

고양이와 호랑이와 초록빛 무덤의 묘비 사이

고요한 필담

공화국의 모든 길은

관계

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날, 늙은 복숭아나무 아래서

그녀의 염전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그러니 애인아 –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그런 이유

그림자의 키를 재다

그 마을의 연못

그 많은 밥의 비유

그해 봄 처음으로 신(神)을 불렀다

깨끗한 식사

꽃밭에 길을 묻다

꽃, 이라는 유심론

꿀벌의 열반

나는 아무래도 무보다 무

나들의 시, 너의 무덤가에서

나들의 시, 달걀 삶는 시간

나들의 시, om 11;00

나들의 안녕

나비 한 마리로 앉아

나생이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나팔꽃

낙화, 첫사랑

내가 죽어지지 않는 꿈

내 뒤에서 우는 뻐꾹새

내 따스한 유령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내 손이 네 목 위에서

내가 죽어지지 않는 꿈

내꺼

내력

너의 똥이 내 물고기다

누렁이

눈 그치고 잠깐 햇살

눈 많은 그늘나비

눈, 비, 그래서 물 한잔

눈 속에

늙지 않는 집

능소화

다디단 진물

다르마(法), 사랑하는 동안

다른 손에 관하여

단단한 고요

대관령 옛길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

대포항

도솔암 가는 길

도화 아래 잠들다

돌담에 흥건한 절규같이

돌에게는 귀가 많아

둥근 기억들의 저녁

뒤쪽에 있는 것들이 눈부시다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떴다, 비행기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라오서 찻집

레볼루션, 동백 진 자리

마흔

만국의 바퀴벌레여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맑은 날

맑은 울음주머니를 가진 밤

매 발톱

목련 나무 우체국

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목포항

몸과 몸이 처음 만나 보얘진 그 입김을 말이라 했다

몸살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무꽃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무서운 들녘

무정자 시대

물로 빚어진 사람

물속의 여자들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

민둥산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바다풀 시집

바람의 옹이 위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로 앉아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반짝임에 대하여

백목련 진다

백설기

벌집 속의 달마

범람

벚꽃 잘 받았어요

변검

별의 여자들

보름밤 종려나무 그림자에 실려

보자기의 비유

봄날 오후

봄에 죽은 노랑부리멧새를 위한 시비(詩碑)

봄잠 – 산 밑, 사랑에 관한 두 마디 그림자극

부쳐 먹다

북궁에 기대어

북엇국

분꽃

불가사의 – 침대의 필요

불가사의 – 해변 묘지

불경한 팬지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비의 열반송

빈집

빌려 줄 몸 한 채

빗방울 밥상

사과꽃 당신

사랑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사랑의 거처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사랑의 정원

산청여인숙

상냥한 지옥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생리(生理)

석양에 들다

선운사, 그 똥낭구

성선설을 웃다

소낙비

소 발자국을 보다

수타(手打)

술잔, 바람의 말

숭고한 밥상

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시간에

시(詩)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시인 것

시체 놀이

신(神)의 방

쓸쓸하다

아나고의 하품

아름다운 식탁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아욱국

아직

애무의 저편

양변기 위에서

어느 날 석양이

어떤 비 오는 날 – 김수영의 방(房)을 생각하는 빈방(房)에서

어떤 아침

어떤 출산

어떤 포틀래치

어라연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어리고 푸른 어미꽃

어미 목(木)의 자살

얼레지

엄마 냄새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없는 꽃

여러 겹의 허기 속에 죽은 날이 나를 깨워

‘여’에게

여울목

여전히 반대말 놀이

연두의 내부

연못을 들고 오신

연밥 속의 불꽃

염소 신발 한 국자

옆 - 고구마밭에서

오, 고양이

오늘은 없는 날

오늘의 개더링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오브-라-디 오브-라-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완경(完經)

왕모래

요실금

우리 동네엔 산부인과가 다섯 개나 있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운주(雲株)에 눕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유령난초(幽靈蘭草)

유성 폭우 오시는 날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이런 이별 – 일월의 저녁에서 십이월의 저녁 사이

이런 이유

이 봄날, 누구세요

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입설단비(立雪斷臂)

입춘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자작나무 봉분

작은 신이 되는 날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

저 별의 눈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조금 먼 아침

좁은 문

쥐덫

지옥에서 보낸 두 철

지옥에서 보낸 세 철

집이 서늘하다

짜디짠 잠

천문

철로변의 봄

첫 번째 임종게

칠월의 일곱 번째 밤 – 곡비(哭婢)를 자청하다

카르마, 동물의 왕국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탁란(托卵)

태실(胎室)

퉁소

티끌이 티끌에게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포구의 방

포도밭으로 오는 저녁

폭포탕 속의 구름들

푸른발부비새, 푸른 발로 부비부비

풍찬노숙의 서(序)

풍찬노숙의 종(終)

피어라, 석유

하나의 환상처럼 quasi una fantasia – 에빌 킬레스의 moonlight를 들으며

하이파이브

한 방울

할머니의 뜰

할미꽃

해괴한 달밤

해 질 녘

햇빛 오일 – 당신을 위한 마술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화비(花飛), 그날이 오면

화비(花飛), 먼 후일

화염 도시 – 고로쇠 나무에게 바침

화전(火田)에서 소금을 캐다

흰 밤

흥수아이

Everybody Shall we love?

om의 녹턴

SNS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69 – 삼신할미가 노는 방

 

 

 

가까운 아침

김선우

 

너는 날개 없이 내게로 뛰어든다

 

너의 비상의 방식으로

나는 너를 받는다 온몸으로

날아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가고 싶은 거리

뛰어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알몸의 무게

 

오늘의

태양

 

하루라는

짐승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김선우

 

강릉 고향 집 엄마 방에서

엄마랑 낮잠 든 오후였습니다

물너미 하나 엄마 배를 타 넘어왔습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구닥다리 자개장

엄마만큼 늙고 병들었지만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낸 자개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는 늙은 몸 위에서

학이 날고

거북이 구름 속을 슬슬 기어가더군요

소나무 타고 내려온 달이

물속에서 첨벙, 밝아지는 몽유록

첫장을 펼치면 학이며 소나무가

물의 자궁 속에 둥글게 박혀 있었습니다

바다가 오래 매만져온 금조개

껍데기에 스며든 바닷물 소리가

갈피갈피 접혀 있었구요

물풀 위로 산란되던 무수한 내가

그렁그렁 떠올라 왔습니다

엄마 혼례 때 따라온 자개장 속에서

엄마랑 내가 흠씬 젖은 가을 오후였습니다

 

 

 

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 아. 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 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 오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 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감자 먹는 사람들

김선우

 

어는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 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한 식구 때꺼리를 감자 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 밝은 할아버지는 땅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믓해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 것을이 무서운데, 뿌리 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둘 숟가락 내려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알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어릴 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은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밑으로만 궁그는,

꽃 진 자리엔 얼씬도 하진 않는,

열한 개의 구덩이를 가진 늙은 애기집

 

 

 

개부처손

김선우

 

개두릅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꿈 개떡 같은

참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걸 말하는 개, 라는 접두사가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풀 앞에 그것도 좀 모자란 듯한

 

잘디잔 손바닥 앞에 이름 붙어 개부처손이라 했다

 

납작한 바위를 감싸며 깊은 그늘 만들고 있는

고작 엄지손톱만 한 초록빛 개부처손 앞에서 서성거린다

 

저잣거리의 좀 덜된 무명씨 같은 이도 부처 될 만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막된 人事보다 개가 부처를 이루는 게 도리라는 것도 같고

개나 소나 팽나무나 바위나 그저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이미 부처를 이룬 것들 수두룩할 것 같고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김선우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갯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춧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니고 살지 않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거꾸로 가는 생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 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거미

김선우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발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 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혼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는 아니지만

김선우

 

1

문득 미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림자 없이는 내가 증명되지 않는데

그림자로 살아본 적 없이 끌고만 다녔다는 게

 

실은 그림자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살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에요

 

오늘은 꼭 말 붙여보려 합니다

알록달록한 새들이 그림자를 열고 날아가는 꿈을 꿨거든요

산 그림자가 산속에서 푸드덕거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2

산, 파도, 크고 환한 나비, 따뜻한 돌, 검은 연꽃, 투명한 새, 이슬의 숲, 우아한 방랑자, 바람과 이끼,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 방울새 노래에 손뼉 치는 오래된 늪......

 

이렇게도 자유로운데

고작 사람에서 멈춰버린 나를 데리고 살아준 덕에

나라고 여겨지는 오늘의 내가 이만합니다

혹시 내가 아직 쓸만하다면 다 그림자 덕분입니다

 

 

 

걸식이 어때서?

김선우

 

세상에서 걸식아닌 밥이 어디 있니?

본래 자기 것이 없는데

서로 걸식하는 거지

 

형편 되는대로 빌어먹고 빌어 먹이고

오늘 내 무릎에 네가 기대고

 

언젠가 올 오늘엔 네 무릎에 내가 기대고

내 것을 준다는 의식 없이

 

그저 우린 서로를 빌려주며

먹고 먹이는 거지

 

걸식하고 남은 시간에 무얼 하냐고?

 

열렬히 노동해야지

영혼을 다듬는 거야

 

 

 

검은 미사에서 나를 보았다

김선우

 

여러 겹의 잠을 차례로 떠내는 중이네.

내 뼈의 나이테에도

고통이 키운 마디가 제법 되네. (누구나 그렇듯)

세월이란 푸른곰팡이 슨 고통의 마디마디

희고 검은 건반이 되는 동안, 이라 적어두는 게 좋으리.

누르면

어떤 장단으로든 음악이 되는

절, 룩, 절, 룩 (누구나 대개 그렇듯)

이 길이 치욕의 쪽인지 평안의 쪽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꺾여 있고 그것을 견디는 동안

뼈의 나이테에도 혼이 생겨서

혼을 닦아주러 오는 또 다른 혼들을 내 눈동자가 볼 뿐

초저녁 울음은 진혼가라는 것

진혼 뒤엔 드넓게 펼쳐진 밤의 힘줄을 딛고

검붉은 먼지구름의 신발이 다가오고

그 신발을 벗겨 머리에 쓰는 자,

발톱을 일으켜 세워 (이 순간 누구나는 사라지네)

문밖으로 나서는 자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

기다리는 그가 온다면 기꺼이

살 발라진 텅 빈 잠 속으로 나는, 다시

부대끼는 뼈들의 하모니 속으로 나는, 또다시

달려가고자 하는 검은 개요, 전속력으로

고통의 나이테를 화환으로 두른 자로서.

 

 

 

겨우살이

김선우

 

겨울 숲 새 둥지처럼 군데군데

한없이 여린 풀빛이 뭉쳐 있다

물세탁 된 지폐처럼 보드라운 풀빛

 

인간의 사전은 그 풀빛을 '기생'이라 부르지만

참나무와 겨울살이의 공생은 그들의 사정

옹이가 더러 굵어지고 열매를 조금 덜 맺지만

조금 덜 가지고 살 수 있어 참 재미난다고

쪼글한 입매를 가리며 웃는 참나무의 말을 들었다고 할까

 

이 나무 아래서 키스하면 결혼하게 된대!

전설을 즐기는 겨우살이와 참나무가

소소하게 벌이는 파티 소식

신비가 사라진 세상을 위로하는

겨우살이의 마법을 보았다고 할까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산천초목의 마음이 모든 인간의 사전 같을라구!

 

 

 

견주, 라는 말

김선우

 

주인 없는 개, 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

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

 

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

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분뿐 거지.

 

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야 개, 아닐는지?

 

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아는 좀 멋진 절친쯤 될 수 있겠소만.

 

 

 

고드름

김선우

 

흐르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자

(저 응집된 열망)

 

네 속으로 내가 흘러

약속한 듯 우리의 발밑 환해지고

자꾸만 튀어 오르는 물방울

지금은 다만 거꾸로 서자

 

흐르는 것

흘러서 네게 가는 것

몸의 능선을 따라

깊은 곳 여울질 수 있다면

어혈을 씻어내릴 수 있다면

(저 열망의 투명한 속!)

 

지금은 잠시 멈추자

멈추어 선 간격의 불꽃

네게 가리 나는 없고

(저 칼날의 꽃숭어리, 스며라 봄!)

 

 

 

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터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

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

환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 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 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

 

 

 

고양이와 호랑이와 초록빛 무덤의 묘비 사이

김선우

   

끝내 어딘가 삐딱한 그 말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던 시가 있다

 

이제 그대가 그 말을

허락해 주어도 좋은 시간이 왔다

 

백년도 넘게 방황한 나를 느낀다

 

평생 동안  현기眩氣를 앓아온 두 귀가

주저앉으며 그만 문 닫으려는 순간,

그 말이 올 것이다

 

묘비에 맺힌

얼룩 이슬

 

 

 

고요한 필담

김선우

 

무언극 배우처럼 그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7번 국도가 천천히 흘러가고

 

반쯤 눈을 감은 구멍가게 반백 머리에 한가롭게 매달린 햇살들

뽀얗게 먼지 앉은 과자봉지들이 구시렁거리며 떠오른다

먼지털이를 들고 고개를 까닥거려주던 할머니가 졸리운 눈 속으로 들어가더니

연둣빛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온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의 지팡이를 따라 더듬더듬 밝은 길이 만들어지고

한쪽이 기운 평상에 앉아 가끔씩 다리를 긁으며 파리를 쫓던

할아버지와 파리는 실은 놀이에 집중한 듯 아주 천천히 잡는 시늉을 하고

아주 천천히 도망가는 시늉을 한다

제삿날 생율을 치거나 어느 저문날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는 데 쓰였을

나무 손잡이 달린 반달칼을 들어 할아버지가 복숭아를 가른다

복숭아 살을 조금씩 베어 물고 아주 오래 씹는다 가끔씩 파리가 주름진 얼굴에 앉고

그들은 꼭 복숭아 한 개씩만 반쪽으로 갈라 나누어 먹는다 마주 앉아서

이것은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딴 것이 분명하다는 둥 이것은 서쪽 가지의 것이라는 둥

바람 많이 분 날이 너무 많았다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법한

연둣빛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파리 한 마리가 복숭아 씨앗에

아로새겨진 요철 점자를 읽는 사이

뒤꼍 복숭아나무 시름시름한 가지를 매만져주면

물관 속 깊은 곳을 지나는 도톰도톰한 말들이 만져진다

아직 덜 여문 복숭아 열매 속에서

복숭아나무와 노부부와 나와 파리 한 마리가 고요한 필담(筆談)을 나눈다

 

 

 

공화국의 모든 길은

김선우

 

대관령 관통 고속도로 생긴 후 돌개바람 심해지고 안개가 자주 낀다

아침저녁 안개의 점령지를 뚫고 헤드라이트 군단이 달려간다

안개는 도처에서 몰려오고 어디든 가는 무적이지만

대관령에 이르러 슬픔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구술한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적으며 꽃을 뿌리고 안개는 다만 떠다닌다

발자국 내면 그 뒤로 더 많은 발자국 들끓을까 봐

안개는 길을 내지 않는다 떠다닐 뿐

형상을 버린 세포만으로 새벽을 나부대면서

 

가장 오래된 안개의 족속 중 현자인 족장 하나가 물파이프를 빨아올린다

옅은 기침을 할 때

쪼개진 손톱 속으로 안개의 혼이 스민다

 

저 길이 두렵고 아뜩하다 강릉을 향해 직선으로 내뻗은 고속도로로 영혼은 직선을 타고 오는 법이 없으니 저 물 아래가 황량하구나, 현자의 목소리가 젖어 있어 나는 꽃대신 잔기침을 하며 펜 끝에 침을 묻힌다

공중으로 날 듯이 이 같은 동해를 향해 내려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실은, 이 공화국의 모든 길은

서울을 향해 놓인 것이다

 

 

 

관계

김선우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 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 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 위를 날게 해줄게

따뜻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김선우

 

뒤란의 고무대야 속에서 가물치가 울었다

낚시 바늘에 찢긴 아가미를 젖히면

깊은 동굴이 있을 것만 같았다

동굴 속에서 우웅 – 우웅 - 흘러나오는 가물치의 울음

가물치 낚시 따위엔 따라가지 말걸,

낚시 바늘에 미끼로 꿰어지던 개구리들이

마지막으로 내지르던 울음소리가

호숫가 갈대숲을 흔들다가 집까지 나를 따라왔다

보약이라고, 가물치의 목을 따

사발에 생피를 받아먹는 어버지가 미웠다

죽어가는 개구리 따위나 덥썩 물어버린 가물치가 미웠다

 

다음날 뒤란에서 귀가 달린 뱀을 만났다

뾰족하고 조그만 귀가 달린,

도마뱀인가 했지만 살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믿기로 했다 그가 이 뒤란을 지켜온 뱀이라는 것을

귀달린 뱀이 어린 나를 바라보았고

선의도 적의도 없는 뱀의 눈을 나도 들여다보았지만

내가 보고 있었던 것은 그 귀였다

개구리며 가물치며 갈대꽃들이

부풀어 오르고 사그라드는 소리를 죄다 들어온 귀

사람도 죽으면 귀만, 아주 오래도록 이곳에 남을 것 같았다

 

차르륵 차르륵 귓바큇 속으로 감겨드는 달빛을 맞아

환해지면서 주름지는 뒤란

그 둥근 귓속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슬픈 악기가 귀라고 믿어버렸다

 

 

 

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선우

 

골목길 돌아 나오다 누가 나를 불러

잠시 눈길 준 폐타이어 쌓인 창고 앞

조붓한 담장 아래 아기 어금니처럼 돋아 있는

귤싹 하나 만난다. 지난겨울 어느 늦은 밤

소주를 사러 점방 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귤씨 하나가, 아니겠지 설마 그 귤씨 하나가

 

큰맘 먹고 사놓은 백 개들이 귤 한 상자

한겨울 밤 야금야금 까먹던 그 귤들이

더러는 맑은 오줌으로 몸 밖을 흘러 나가고

사는 일이 서리 앉은 빨랫줄 같아,

푸념하면서도 하루를 견디게 한 어떤 열량이 되고

잔주름 생기기 시작한 눈가

지친 세포의 자살을 지연시키는 비타민이 되고

어두운 상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귤 몇 알이

그래도 천연스럽게 댕글댕글 빛나던 힘!

귤껍질에 빼곡히 열린 구멍이란 게 실은

저의 중심을 향해 세상의 향기를 흐르게 한 통로는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몸을 맞대고

껍질을 벗겨내도 흩어지지 않던 귤 조각

시고 달고 아린 저마다 다른 맛들이

열어둔 통로를 지나 중심으로 모이듯

귤 한 상자 놓여 있던 겨울의 귀퉁이가 문득 밝아지고

알전구같이 흐릿한 창밖의 그늘이

외로운 귤알들로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김선우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얼룩이 남는다

강아지 고양이 무당벌레 햇빛 몇 점

모든 존재는 있던 자리에 얼룩을 남긴다?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몇 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얼룩들은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서로를 안기 위해

안고 멀리 가면서 생을 완주할 힘을 얻기 위해

 

 

 

그러니 애인아 -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김선우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뭍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거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김선우

 

딱딱한 도시의 등딱지를 열고

게장 속을 비비듯

부패와 발효가 이곳에선 구분되지 않아요

그러니 잘 발효했다고 믿는 몸속에서 비벼진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듯

그대를 밥 먹이는 게 내 피의 이야기인 듯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

우리 사랑할래요?

지나온 가로수의 허방으로 미끄러져 간 계곡과 별빛

기어코 가시에 찔리죠 가시에 찔리고 싶어 걷는 봄날엔

 

그러니 총 대신! 빌딩 대신! 군함 대신! 지폐 대신!

건널목을 둥글게 휘어놓고

꽃잎 물고기와 사슴을 불러 해금을 켤까요

그대와 그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대와 그대 곁에서

그대들 위해 군함을 쪼개 모닥불을 지필까요

무릎뼈 위에 먹을 갈아

은행잎 댓잎 위에 번갈아 편지를 쓸까요 오세요 그대,

 

피 흘리는 벽들이 서로의 가슴을 칠 때

진동으로 생겨난 샛강 같은 골목들

그대와 나의 혈관을 이어 무수한 밤이 있었지만

밤의 등골 속으로 흰 새가 내려앉는 건 드문 일이죠

오세요, 단 한 모금 물을 찾아 하염없이 걸어야 할 밤이 오더라도

오세요, 그대가 천 번을 죽어나간다 해도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뼈마디마다 댓잎 이불 펼치고 그대 입술에 진홍 꽃잎 수놓으며

여기서 사랑 노랠 부를 거예요 오래전 핏속의 벌 나비 같은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굴 거예요

 

포성 분분한 차디찬

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

이것은 피의 이야기,

사랑을 구하는 피의 이야기,

 

 

 

그런 이유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드넓은 얼음장에 박힌 피 한 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그림자의 키를 재다

김선우

 

-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죽었다. 팔월이었다.

나는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하나의 유랑이 끝나고 또 다른 유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또다시 이스라엘 지배의 팔레스타인으로?

오, 이런! 나는 다시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죽는 순간 아주 살짝,

키가 준다고 생각하는 부족이 있다

 

안녕히! 나는 찢어진 당신 그림자에 인사한다

심장에 흰 제비꽃 무덤이 돋은 나를

내 그림자는 알고 있고

풀 무덤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안녕히! 당신 그림자의 키를 잰 최초의 여름이

풀꽃처럼 웃으며 지나가는 저녁이다

 

찢어진 그림자가 사뿐이 공중에 떠오른다

가벼위진 당신 그림자에 드리는 첫 입맞춤,

걱정 말아요 아주 살짝, 키가 주는 것일 뿐

 

당신은 잘 싸웠어요

잘 사랑했어요

쉼표처럼,

살짝 키가 주는 것

쉼표처럼,

살짝 쉬는 것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끝은

최초에 지나지 않는 최후의 그림자가

떨어진 조그만 흰 꽃으로 정성들여 입술을 닦았다

 

 

 

그 마을의 연못

김선우

 

연못이 있었다

마을의 서쪽 혹은 동쪽

 

흰 수련 만발하는 보름의 밤이면

여인들이 물의 아이를 낳으러 온다나

반인반수의 선지자가 새점을 친다나

금단의 열매 향기롭다 하였으나

이방인에게는

연못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울창한 전나무와 검은 딸기만 무성한

그곳은 깊고 푸른 늪일 뿐이더라고,

돌아와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 사내가 다가와 내 목을 졸랐다

다른 사내 가마니를 열였다

횃불을 치켜든 침통한 눈들,

나는 연못 속에 던져졌다

 

어두운 물속

유령처럼 떠도는 물풀들 사이로

나는 보았다 물구나무선 채 고요히 흔들리는

무수한 가마니들,

그 속에 더러 내가 던져버린 가마니들이

가라앉는 나를 향해 인광을 뿜는 것을

 

마음의 동쪽 혹은 서쪽에

깊고 푸른 연못 하나 있다

 

 

 

그 많은 밥의 비유

김선우

 

밥상 앞에서 내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 몸속이 여전히 깜깜할지 어떨지

희부연 미명이라도 깊은 어딘가를 비춰줄지 어떨지

아, 입을 벌리는 순간 췌장 부근 어디거나 난소 어디께

광속으로 몇억 년을 달려 막 내게 닿은 듯한

그런 빛이 구불텅한 창자의 구석진 그늘

부스스한 솜털들을 어루만져줄지 어떨지

 

먼 어둠 속을 오래 떠돌던 무엇인가

기어코 여기로 와 몸 받았듯이

아직도 이 별에서 태어나는 것들

소름끼치게 그리운 시방(十方)을 걸치고 있는 것

 

내 몸속 어디에서 내가 나를 향해

아, 입벌리네 자기 해골을 갈아 만든 피리를 불면서

몸 사막을 건너는 순례자같이

 

그대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가 아, 입 벌리네 어둠 깊으니 그 어둠 받아먹네

공기 속에 살내음 가득해 아아, 입 벌리고 폭풍 속에서

비리디 비린 바람의 울혈을 받아먹네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

 

 

 

그날, 늙은 복숭아나무 아래서

김선우

 

나를 부르는 목소리 들렸다.

응답했다.

    목을 쳐다오 나의 꽃은 -

나를 부르는 내 목소리 들렸다.

     실어증이 빚어낸 내 몸이니 -

아주 늙어 환해진 봄밤이었다.

 

 

 

그녀의 염전

김선우

 

첫눈 내린 어제저녁 세탁소집 여자가 우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주 운다 차양 밑에 빼곡하게

걸린 옷들 밑에서거나 옆집 애완 센터 토끼장 앞에서거나

다른 몸들을 덮어주었을 옷 밑에서 울 땐 조금만 운다

울다가는 긴 장대로 아무 옷이나 꺼내 흔들어 보곤 한다

옷들은 위험하게 흔들리고 그녀는 이내 눈물을 그친다

토끼장 앞에 쭈그려 앉아서 울 땐 오래 운다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앉아 오래도록 칫솔질을 하며 운다

토끼장 속 눈 붉은 토끼가 그녀를 먼저 외면할 때까지

그런 저녁이 있은 다음 날 아침이면 나는 그녀의 염전 앞을 가만가만 지난다

다리미 손잡이를 꽉 잡은 오른손 위에 말뚝처럼 포개어진 왼손.

어깨를 들어 올리며 그녀는 다림판 위로 온 힘을 모은다

기도하는 제 손을 내려다보는 황량하게 뚫린 두 개의 검은 염전.

당분간은 그녀도 수차를 젓지 않을 것이다

 

 

 

그해 봄 처음으로 신(神)을 불렀다

김선우

 

1

그 아이가 겨우겨우 당신을 이해할 때라도

심지어 당신에 대해 냉담할 때라도

당신은 끝내 그 아이를 이해해야 하는 존재라고

 

그 아이가 겨우겨우 당신을 사랑하거나

심지어 당신을 미워할 때조차

당신은 끝내 그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것이 신의 존재 이유라고 나는 소리쳤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죄 없는 그 아이를 살려내라고

이레 전 당신을 부른 내 목소리가 지금 나에게 닿는다

찢기며 금이 간 나의 내부가

수습할 수 없이 깨져버린 거울처럼 조용하다

 

불씨 한 줌을 꼭 쥐고 바닷속으로 내려간다

차마 입을 열 수 없는 슬픈 노래가

바다 거품처럼 떠돌았다

차가운 배 안에 불을 묻었다

 

이레 동안 당신을 불렀고

이레 후 당신을 떠나보냈다

 

불모의 신음 호명해 눈물이 바닥날 때까지 울다가

면죄부를 쥐여주고 돌려보낸 후

너덜너덜해진 그해 봄이 기울기 시작했다

 

차갑게 언 아이들이 물속으로부터 떠올랐다

 

 

2

흐린 펜으로 봄의 목록을 적어갑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기운을 차릴 것

기억할 것

노트를 마련할 것

증언할 것

눈앞의 아이들을 위해 작은 풀잎 창이라도 매일 닦을 것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아온 신이

먼 데서 부끄럽고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되는 곳을 잊지 마라

 

면죄부를 받은 값으로 그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씀이었다

 

낮은 땅이 몸을 떨며 눈물을 받았다

 

 

 

깨끗한 식사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 암사슴의 목을 돌도 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김선우

 

그런 것이다 사랑은

입동 무렵의 동백꽃

드레지게 들여다보다

눈물,

예각 둔각으로 마음을 찔러

활활 눈두덩이 뜨거워져 오는 것이다

머릿속 온통 붉어 오는 것이다

 

밤 내내 꽃잎 떨게 하던 별빛

무서리 맞은 그것이

마음을 스윽, 베고 들어 온다

나의 주파수가 들켜버린 것이다

 

 

 

꽃밭에 길을 묻다

김선우

 

1

어젯밤 나의 수술대에는 한 아이가 올라왔습니다. 작고 노란 알약 같은 아이의 얼굴. 신경들이 싸늘한 슬픔으로 명랑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수술용 장갑을 끼었지요

 

 

2

아이가 내 수술실을 노크한 건 지난 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태백에 가는 길이었지요. 태백산 지천으로 만발한 철쭉꽃. 수혈받으러 오라는 꽃들의 전갈을 받고 더러워진 내 피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식당칸 열차에서 바람이 허공에 절벽을 만드는 걸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북을 지날 때였어요. 버려진 폐광이 전족을 한 여자처럼 뒤뚱거리며 골짜기 사이로 곤두박질치는 길 끝에 회백색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지요. 산벚꽃나무였던가요. 꽃 그림자 소술한 평상 위에서 한 소녀가 기찻길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오도카니 모은 무릎, 기차를 바라보며 소녀는 긴 머리채를 하염없이 빗질하고 있었지요

그 때 그 태백행, 노랗고 질긴 점액이 접시 끝에서 늙은 꽃술처럼 떨어져 내렸지요. 외로움과 공포를 한꺼번에 알아버린 어린 짐승의 충혈된 눈이 천제단 붉은 철쭉 꽃잎 속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오지 마, 오지 마, 꽃대궁을 분지르며 나는 소리쳤지요.

 

 

3

그 아일 다시 만난 건 올여름입니다.

지독한 폭우의 끝, 여위고 남루한 것들이 먼저 휩쓸려 주저앉고 유복한 성곽들은 더욱 당당해지더군요. 희망이라는 病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가난한 아버지들의 삽질 소리는 맺지 못하고 범람한 하천에 깨진 유리구슬로 떠내려왔지요. 그 여름의 끝에서 그앨 본 겁니다. 널어놓은 이불 홑청 붉은 목단 꽃무늬가 작열하던 담벼락 끝,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가 금 간 담장 밑에 오도카니 서 있었어요. 녹슨 자전거 바퀴와 빈 라면상자가 길 잃은 염소처럼 엎드려 있었구요. 햇빛이 바큇살에 걸려 챙강거리며 울었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합니다. 행인 몇이 병나발을 불며 지나갔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어요. 깨진 벽돌 조각을 꼭 움켜쥐고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요

그때 그 사내아이 일렁이는 눈 그림자, 사북을 지나며 본 소녀의 얼굴임을 나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얘야, 해바라기를 보러 오지 않을래? 나는 아이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지요. 원한다면 내 수술실에 와도 좋아.

 

 

4

해바라기

긴 꽃대궁을

타고 오르는

챗빛 쥐

 

씨앗을 파먹힌

해바라기

슬픈

음부로

흘러드는

안개

젖빛 따뜻한

달의 피

 

안개 짙은 달밤, 씨앗을 파먹힌 해바라기를 통과해 어젯밤 그 아이가 내게 왔습니다. 아이의 긴 머리칼에서 달이 흘린 피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를 안아 수술대에 눕혔지요. 나의 늑골 위에서, 고산식물처럼 고개를 외로 틀고 아이는 곧 잠들었습니다. 꽃그늘 일렁이는 아이의 가슴팍, 나는 조심스레 메스를 그었지요.

 

 

5

나의 아이는 무사합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술이었어요. 산벚꽃잎을 열자 철쭉이, 철쭉 꽃술을 열자 붉은 목단이 뭉클거리며 피어올랐지요. 젖빛 따듯한 달의 피가 아이의 심장으로 흐르고, 나는 해바라기를 꺾어 잔인한 물살 위에 얹어주었습니다. 노랗게 빛나는 총신이 물살을 끌어당기며 폭죽처럼 씨앗을 쏘아 올리더군요. 창밖엔 능소화, 炎天을 능멸하며 핀다는 그 꽃이 제 꽃대궁 속에 두레박을 내려 길을 묻고 있었습니다. 印章처럼 붉은 달이 태양의 뒤편에서 서늘하고 뜨겁게 차오르는 밤이었습니다.

 

 

 

꽃, 이라는 유심론

김선우

 

눈앞에 열 명의 사람이 푸른 손을 흔들며 지나가도

백 명의 사람이 흰 구름을 펼쳐 보여도

내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꿀벌의 열반

김선우

 

어느 굽이 긴 터널을 통과해왔는지

꿀벌 한 마리,

내 방 쪽창 벤자민 화분에 떨어졌네

찢어진 날개 허공을 움켜쥐어

대기권 밖이 찰나, 수런거리는데

 

(얘야 석류꽃 피는구나…… 빨래 널던 어머니)

 

기일게 담배 한 개비 태워 무는 동안

허공이 몇백 번 움켜졌다 놓여나고

나 생각하네

괴롭구나 이제 그만 끝내줘야겠구나

벤자민 나무 아래 무명지로 무덤을 파고

꿀벌을 옮겨 넣었네 조용히

흰 구름 몇천 번 스쳐 지나고 뭉치는데

 

(얘야 석류꽃 지는구나…… 뜰을 쓸던 어머니)

 

아니었나 괴로운 게 아닌지도 몰라

생애 단 한 번 저이는

단 한 번 내 방 쪽창 벤자민 나무 아래에서

햇살이라든가 공기라든가 공기 속에 흩어진

몇 생애 전 꽃가루를 만나는가

가쁜 호흡,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는 것도 같아

쥐었던 흙 한줌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배냇적 네 잇몸 같은, 얘야 이 석류알 좀 보려무나)

 

 

 

나는 아무래도 무보다 무우가

김선우

 

무꾸라 했네 겨울밤 허리 길어 적막이 아니리로 울 넘어오면

무꾸 주까? 엄마나 할머니가 추임새처럼 무꾸를 말하였네

실팍하게 제대로 언 겨울 속살 맛이라면 그 후로도 동짓달 무꾸맛이 오래 제일이었네

 

학교에 다니면서 무꾸는 무우가 되었네 무우도 퍽 괜찮았네

무우- 라고 발음할 때 컴컴한 땅속에 스미듯 베이는 흰빛

무우밭에 나가본 후 무우- 땅속으로 번지는 흰 메아리처럼

실한 몸통에서 능청하게 빠져나온 뿌리 한 마디 무우가 제격이었네

 

무우라고 쓴 원고가 무가 되어 돌아왔네 표준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데,

 

무우- 라고 슬쩍 뿌리를 내려놔야 '무'도 살 만한 거지

그래야 그 생것이 비 오는 날이면 우우 스미는 빗물을 따라 잔뿌리 떨며 몸이 쓸리기도 한 흰 메아리인 줄 짐작이나 하지

무우밭 고랑 따라 저마다 둥그마한 흰 소등 타고 가는 절집 한 채씩이라도 그렇잖은가

칠흑 같은 흙 속에 뚜벅뚜벅 박힌 희디흰 무우사(寺)

이쯤 되어야 메아리도 제 몸통을 타고 오지 않겠나

 

 

 

나들의 시, 너의 무덤가에서

김선우

 

om 5:00

(24시 편의점 같은, 편의를 위한 24시 너머, 혹은 그 안쪽으로 당신이 놓친 시간들을 찾아서, 오늘은 이렇게 씁니다)

 

너의 손은 달처럼 변하네, 손금을 따라 밀물 드는 소리와 썰물 빠지는 소리가 나고. 파도를 뒤적인 손을 귀에 대어보네. 나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너는 바다처럼 남네.

 

 (생생하다는 게 그런 거라고 문득 생각합니다 꽝꽝 언 동백 같은 시간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오래전 죽은 별의 흩어진 육신으로부터 맑은 침 한 방울 흘러 내려 ---- 메마른 혀를 적시며 나의 아침이 온다 잠에서 깨면 나들이 물 한 잔을 마신다. 내 몸 끝에서 누가 깨는 소리 ---혹은 너의 몸 끝에서 내가 깨어난 느낌 ---어, 내가 왜 네 배꼽에서 태어나는 거지? 그렇게 아침이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침을 닮은 시간이 왔다) '해'라고 부를 만한 별이 빛을 쏟고 '달'이라고 부를 만한 별이 흰 얼굴로 안녕이라고 말한다. 점성술을 배운 회양목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양말을 신고 간밤 새로 태어난 별과 죽은 별을 헤아려 축하와 애도의 편지를 쓰고.

 

(짐작하시겠지만 죽은 별에게는 축하의 편지를. 탄생한 별에게는 애도의 편지를 쓰는 것이 내 오랜 휴머니즘입니다)

 

버려진 그림자들을 모아다 불을 지피는 건 오래 지속해온 나의 소임. 그림자 땔감으로 만든 불은 냄새가 좋다. 냄새가 좋은 불로 나는 오늘의 밥을 짓고 너를 부른다. 나라는 먼지는 너라는 별을 구성하는 중요한 진실이다. 너라는 먼지는 나라는 별을 구성하는 중요한 진실이다. 세상은 빌려 온 이름들로 가득해 너는 점점 야위어가고. 오늘에 어울리는 이름 하나를 주워 들고 너는 불 옆으로 오고, 우리는 포옹한 채 그림자들을 불 속으로 던진다. (어제가 죽어서 오늘이 오고 오늘이 죽어서 내일이 오고) 너를 안고 있는 나는 기쁘다. 살아 있는 모든 날은 오늘이다. 오늘 기쁜 너와 내가 종알거린다.

 

오늘은 어제 채집해둔 이름들을 반죽해 호박 칼국수를 끓일까?

아, 그런데 --- 24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 아냐? 그래도 --- 이리로 올래?

 

 

 

나들의 시, 달걀 삶는 시간

김선우

 

엄마 때문에 가끔 죽음이 두려워지면

달걀을 사 왔다

엄마는 반숙을 좋아한다

냄비에 물을 채우고

달걀을 넣은 후 가스 불을 켠다

말갛게 쫄깃한 흰자 속의 노른자

목숨이 되려면 우주

존재는 먹고 먹이고 먹힌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7분

반숙의 최적 기술은 시간을 맞추는 일

 

물이 팔팔 끓는 순간부터 시계를 본다

1분이 지난다, 놀라며 흔들리는

2분이 지난다, 견디는

3분이 지난다, 2분 전의 그 달걀이 아니다

다른 우주다 회오리친다

4분이 지난다, 1분 전의 그 달걀이 아니다

엉기기 시작한다 인생처럼

5분, 6분, 7분이 지난다

가스 불을 끈다

매 분마다 죽음을 통과해

매 분마다 달걀은 변한다

찬물에 집어넣는다

찬물 속에서 다시 5분

 

자주 내 이름을 잊는 엄마의 입속에

4 등분한 달걀 반숙을 넣어드린다

엄마가 웃는다

괜찮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변화해가는 것일 뿐이다

달걀도 엄마도 나도

물질도 정신도 마음도 우주도

존재한다면 신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힘껏 잘 변해보자고

내 이름을 잊은 엄마가 천진하게 웃는다

 

 

 

나들의 시, om 11:00

김선우

 

언젠가 죽어본 적 있는 그 시간이다

달이 찼다

영원히 살 것처럼 탐욕하는 부자들이 불쌍하다

 

이 별에서 꼭 해야 할 일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뿐

 

가을에 떠난 너의 이름을

다시 가을이 온 후에 비로소 불러보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여전히 사랑했다

 

산 사람들 속에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서

여기가 진짜 지옥이 되지는 않는 거라고,

나에게 보낸 너의 마지막 편지에

씌여져 있었다 달빛이 따스했다

 

착하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겠다고

달에게 약속했다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

am과 pm의 시간에서 누군가 말한다 그 순간 om의 시간이 그물처럼 스미며

 당신……여기가……어디라고 생각해?

 

 

 

나들의 안녕

김선우

 

먹는다는 것-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

살아있는 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

죽여서 살게 하는 것

 

먹는다는 것-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일

하느님을 죽여서 하느님을 살게 하는 것

부처님을 죽여서 부처님을 살게 하는 것

 

돼재고기를 맛있게 먹은 저녁엔 그 돼지의 삶이

닭고기를 맛있게 먹은 점심엔 그 닭의 삶이

그 무엇으로건 내 속에서 머물다 간다

오늘의 나를 이루어낸

그 배추 그 시금치 그 고등어 그 꼬막 그 복숭아

 

죽어서 나를 살린

밥 한 그릇 피 한 방울-

나 아닌 것이 없는 무섭고 고마운 세상

 

 

 

나비 한 마리로 앉아

김선우

 

봄꽃 그늘 아래 가늘게 눈뜨고 있으면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좋아

 

먼지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애틋해

비로소 몸이 영혼 같아

내 목소리가 엷어져 가

 

이렇게 가벼운 필체를 남기고

문득 사라지는 것이니

 

참 좋은 날이야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참 근사한 날이야

인간이 하찮게 느껴져서

 

 

 

나생이

김선우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을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리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나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두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2011년을 기억함

김선우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 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 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나팔꽃

김선우

 

십자로(十字路)

 

수벌 한 마리 그 길에 접어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기다려보자

 

언젠가 나도

저 문을 통해 나온 적이 있다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김선우

 

보기 어렵다는 꽃도 지극에 가깝다는 향 때문도 아닐 것이다.

제 손으로 제 목 밑에 새파란 검을 드리운 듯한

저 서늘한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빛이 비껴 걸리면 날 끝 더욱 예리해지는,

 

사양(斜陽) 아래 스스로 제 목을 친 자의 한 점 유골 꽃자죽.

 

 

 

내가 죽어 지지 않는 꿈

김선우

  

앉아도 서도 누워봐도 모든 자세가 편안하지 않아 아득한 벼랑에서 뛰어내렸더니 가슴뼈만 부서졌다 큰 곰을 사냥하고 돌아오니 찔러넣은 창날에 내가 피흘렸다

 

이제는 곧 죽을 수 있겠구나, 아끼던 것 모두 나눠주었다 손톱이 못생겼다고 투덜거리던 막내에겐 손톱을 주고 실명한 오빠에겐 눈알을 주고 심장, 머리칼까지 잡히는 대로 거두어 가지라고 유서도 마쳤는데 내가 죽어지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니 다시 벼랑 끝이었다 벼랑 밑은 고요한데 그 고요 무서워 누워 기다리던 상여를 확, 열어젖혔더니

내 것인 줄 알았던 머리칼 산발하고 우는 산벚꽃나무가 보였다 굴삭기가 파들어간 붉은 산허리,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눈동자를 품고서 나보다 먼저 죽은 계곡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린 아기 꽃들, 먼저 나간 상여는 꽃상여였다

 

 

 

내 뒤에서 우는 뻐꾹새

김선우

 

나는 목련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흰나비 모빌처럼 목련은 흔들리고 뻐꾹새 울음 그때 우리 사랑을 나누었던가......

그를 만난 건 성탄절 무렵이었다 눈은 내려 발등에만 쌓이고 걸음이 무거웠던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잠시 빌렸다 수척한 그가 소주잔을 들 때마다 손등에 선명한 못자국이 보였다 간간이 검붉은 피가 흘러 화무, 화무십일홍...... 술잔에 빠진 꽃잎을 건져내며 눈물이 날 때까지 우리는 웃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느낌표 뒤에 물음표가 와야 했던 건 아닐까 가지런히 젓가락을 놓는 그의 손끝이 떨렸다 탁자가 흔들리고 술잔이 떨어지면서 이미 젖어버린 깃발이 얼룩졌다 선명한 발자국들, 절망을 전유하지 않고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엘리, 엘리...... 엘리, 엘리...... 그날 밤 나는 그의 애인이기를 청하였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건 맑은 물 한사발. 그는 내 앞에서 꼭 두 번 울었다 그것도 한번은 등 뒤에서였으므로 뻐꾹새처럼 딸꾹질하는구나 뻐꾹새, 이봐, 봄이 오면 목련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림자 무게를 견디지 못한 꽃잎이 내 이마를 덮기 전에 내게로 와 불탄 자리처럼 선명한 얼룩이 심장에 남을 거야

그가 더 이상 내 앞에서 울지 않게 되었을 때 못자국에서도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만 나를 떠나줘 목련나무 아래에서 쇠못을 줍던 내가 말했다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비 비린내 냠냠......) 오늘 내게 말 붙인 유령입니다...... 아 그렇지 이거 비 냄새...... (응응, 비 냄새 냠냠냠......) 미래에서 온 비를 맞으며 너랑 같이 걸을 수 있어서 참 좋은 날이야 (응응, 당신을 했어요) 모르는 나를 어떻게? (미래에서 온 키스를 나눠 가졌잖아요)

 

방금 일어난 침대 흐트러진 시트에 아직 묻어 있는 온기...... 꽃 진 가지 끝에 여전히 꽃처럼 떠 있는...... 막 개봉한 편지에서 제일 먼저 느껴지는, 편지를 봉하기 직전의 숨결...... 휴대폰 액정에 살짝 떠오른 따스함, 발송 버튼을 막 누른 너의 손끝......

 

아주 많은 찰나에 사는 따스한 유령들을 지금부터 하나하나 말해보려 합니다 차고 습한 유령만 기억하면 다른 유령들이 외로울 테니까요 몸으로부터 왔으니 몸이 아니랄 수도 딱히 몸이라고 할 수도 없는...............................................................................................어쩌지 이토록 예민한 몸 아닌 몸으로 이 자욱한 지는 꽃의 거리를 너는 어떻게 건너가지?

(염려 말아요 오늘은 비...... 비 냄새 냠냠냠.....) 비 묻은 몸을 터는 강아지들 코끝에서 따스한 유령들이 강아지 따라 통통통 몸을 턴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2007년>

 

 

 

내 손이 네 목 위에서

김선우

 

신앙촌 고갯마루 버드나무는 자꾸 북쪽으로 휘어지고 아기 하나 등짐 지고 두 손에 보퉁이를 든 아직 젊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사금파리에 다친 어린 짐승처럼 기를 쓰며 우는 아이야 겁이 난다 나는, 내가 너를 죽일까봐

인형 뽑기 유리 상자에 둥그렇게 매달려 엄마 아빠와 깔깔거리는 또래 아이들 뒤에서 아득하게 뒷걸음질 치며 아득하게 다가가며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는 네 얼굴을 보면 겁이 난다 아이야 내가 너를 죽일까 봐 죽여줘야 할까 봐

시끌벅적하게 오늘이 밝고 내 아이만은 최고로 키우겠다는 자신만만한 엄마 아빠들이 텔레비전을 도배하는 이십일 세기가 와도 너희들은 어디선가 자꾸만 태어난다 공중 화장실 변기 속에서 모가지째 떨어진 붉은 동백 속에서 금 간 벽돌 속에서 철거촌 아지랑이 속에서 농약병 속에서 성채 그릇 속에서 마지막 투레질을 하는 황소의 뿔 속에서

󰡒형, 누나들. 아버지는 병에 걸려 몸져 눕고 엄마도 삼 년 전에 집을 나가……󰡓 손때 꼬질꼬질한 전단 뭉치와 초콜릿과 껌이 든 가방을 가슴께에 바투 메고 마지막 순환 전철 출입문에 기대어 잠든 아이야 갈라 터진 네 입술이 만드는 아득한 점묘화 속에서 흉터들이 더 어린 흉터들을 새끼치기 전에 아이야 내가 너를 죽일까 봐 난간 위의 내 손이 네 목을 조를까 봐 겁이 난다 나는,

어떤 손이 내 목 위에서 소리 죽여 오래도록 울었듯이

 

 

 

내가 죽어 지지 않는 꿈

김선우

 

앉아도 서도 누워봐도 모든 자세가 편안하지 않아 아득한 벼랑에서 뛰어내렸더니 가슴뼈만 부서졌다 큰 곰을 사냥하고 돌아오니 찔어 넣은 창날에 내가 피 흘렸다

이제는 곧 죽을 수 있겠구나, 아끼던 것 모두 나눠주었다 손톱이 못생겼다고 투덜거리던 막내에겐 손톱을 주고 실명한 오빠에겐 눈알을 주고 심장, 머리칼까지 잡히는 대로 거두어 가지라고 유서도 마쳤는데 내가 죽어지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니 다시 벼랑 끝이었다 벼랑 밑은 고요한데 그 고요 무서워 누워 기다리던 상여를 확, 열어젖혔더니

내 것인 줄 알았던 머리칼 산발하고 우는 산벚꽃나무가 보였다 굴삭기가 파들어간 붉은 산허리, 내 것인 중 알았던 내 눈동자를 품고서 나보다 먼저 죽은 계곡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린 아기 꽃들, 먼저 나간 상여는 꽃상여였다

 

 

 

내꺼

김선우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 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수가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 노동,

그게 싫어,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 더 현명하다면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

 

 

 

내력

김선우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 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너의 똥이 내 물고기다

김선우

 

목욕탕에서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김 오르는 엄마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알몸의 엄마가 안고 있는 알몸의 아가들

이뻐라,

밤벌레 같다

 

속살 찰진 생밤을 깨물다가

딱 만나게 되는 밤벌레들

육덕 좋은 엄마들이 흰 종아리 같고

실핏줄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갓난 아가의 동그란 알몸 같은,

생밤 한 알 속

후끈하게 고여있는 살냄새

 

신랏적 혜공 스님은

똥 누는 원효를 보고 그랬다 한다

니 똥이 내가 잡은 물고기라카이.

 

알몸의 아가를 바라보다가

알몸의 내가 빙긋 웃는 것도

아가의 똥 때문,

젖빛 고운 생밤 한 알 찰진 살내음 속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똥 누는 밤벌레들

날랜 물고기 몇 마리 지느러미 파닥거리는

생밤 한 알 공들여 맛나게 먹는다

 

귀하게 똥을 잡순 후에 내가 낳을 물고기!

더운 살 속으로 헤엄쳐 온다

 

 

 

누렁이

김선우

 

학교에 갔다 오면 고요만이 적적하게

앉아 있던 우리 집

그 고요를 열고 나온

누렁이가 나를 반기곤 했다

누렁이는

가족들이 과수원에 나가 일을 하면

집을 지키고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면

과수원으로 달려가 과수원을 지켰다

어느 날

친척 아저씨가 우리 자전거를 빌려

끌고 가려고 하니 집을 지키던 누렁이가

자전거 앞바퀴를 물고 놓아 주질 않는 것이다

아저씨는 자기를 몰라본다며 술김에

외양간 두엄을 치우는 쇠스랑으로

누렁이를 찍어 죽이고 말았다

 

세상 모든 부처님은 돌을 입고 앉았지만

그 돌 틈 골짜기마다 쑥잎처럼 자비가 돋고

그 쑥잎을 볼 때마다 우리는

지금도 저세상에서 한 조각 쑥개떡을 물고

내 유년의 집을 지키고 서 있을

누렁이를 생각한다.

 

 

 

눈 그치고 잠깐 햇살

김선우

 

지저분한 강아지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던

동해 바닷가 막횟집 평상 아래

눈 그치고 잠깐 햇살,

일어나 몸을 턴 강아지가 저편으로 걸어간 후

 

동그랗게 남은 자국,

그 자리에 손을 대본다

따뜻하다

다정한 눌변처럼

 

눈 그치고 살짝 든 평상 아래 한뼘 양지

눌변은 눌변으로서 완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주 조그맣더라도

 

조그만 나뭇잎 한장 속에

일생의 나무 한 그루와 비바람이 다 들어 있듯이

 

 

 

눈 많은 그늘나비

김선우

 

그지 같아! / 응? / 거지 같다구 사는 게 / 거지가 뭐 어때서? /

......가자 / ...... 그래 가자

 

야산 오솔길 벤치에 꼭 붙어 앉아 있던 두 사람, 일어나 약수터 쪽으로 걸어간다 눈 많은 그늘나비 벤치 밑에서 저공비행 중,

 

당신 정말 눈이 많군요

그렇담 그늘도 많겠군요

그런데 날개는 넉 장뿐이군요!

 

벤치 옆에서 까마중과 개망초 흔들린다 까마중 열매가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개망초 꽃자리에 후후 불을 켠다 어릴 땐 이걸 계란꽃이라 불렀어 계란 프라이 비명 몇점이 꽃대에 매달려 지, 글, 지, 글, 눈 많은 그늘나비 계란 꽃 위에 앉으려다 발 데어 벤치 밑으로 다시 들어가고,

 

거지 같아! / 응?/ 거지 같다구 사는 게 / ......가자 / ...... 그래 가자

 

약수터에서 물 한 통 받아 두 사람 벤치 앞을 다시 지난다 눈 많은 그늘 겹겹이 쌓인 벤치 밑, 나비가 호호 발을 분다 이 벤치엔 비밀이 많다 가장 가까운 비밀은 일주일 전 눈 많은 그늘 할아버지, 사흘째 잠에서 깨지 않은 채 딱딱해진 그를 나흘째 경찰이 와 마대자루에 담아갔다 지겨운 거지들! 벤치 밑의 눈많은그늘나비가 사람에게서 배운 그늘의 말이었다

 

 

 

눈, 비, 그래서 물 한잔

김선우

 

송이 송이 눈송이 눈

아주 늙은 영험한 노파들

 

비 오신다 비님 비님

지상의 모든 물방울은 삼십억년 이상 나이 먹었지

 

오늘 내가 마신 물 한잔

하늘땅 그득한 이야기들

 

 

 

눈 속에

김선우

 

휘어지다 더러 부러지기도 할 때

어떤 나무들

흰 병아리들처럼 보송보송해진 발가락으로

오종종 눈밭을 콩콩 뛰어다니는 듯

 

예뻐라, 어떤 방향으로든

제 몸의 가지가 길이 되지 않은 몸들은

길이 없어 눈물이 깨끗한 햇몸들은

 

 

 

늙지 않는 집

김선우

 

저 집을 기억하네 정한 물 발라가며 참빗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처럼

단정하게 앉은 그녀의 치마폭에서 늙수그레한 세 남자가

 

자그만 솥을 걸고 막걸리 추렴을 하고 있었네

 

새로 얹은 기와는 낭창하게 이쁜 청기와였네

꼬들꼬들한 풋봄의 바람이 한 소끔씩 불어왔고

 

불가에 가차이 간 아직 좀 찬바람이 화들짝 알을 낳았는지

 

검댕 묻은 솥 위로 팔랑팔랑 노랑나비 날아 올랐네

모여있던 세 남자 일제히 같은 고갯짓으로

 

하아-나비구나, 노랑나비로구나

눈가에 잔주름 접으며 청기와 지붕으로 노랑나비

낭창낭창 날아가는 것을 이윽토록 바라보고 있었네

 

 

 

능소화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 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凌) 야 능(凌) 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

이야 아니 되어도 능(凌) 야 능(凌) 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다디단 진물

김선우

 

내 몸속의 벌집에서 벌들을 꺼내려고 햇살이, 봄 햇살이 자꾸 나를 짓무르게 한다 꿀벌이 날던 내 안의 벌집은 죽은 지 오래인데 햇살의 섬모가 목덜미를 타 오르고 엄마, 발이 많은 벌레들은 떠날 곳이 많아 저렇게 슬픈 걸까? 어린 내가 꿀의 단맛을 맛보려고 잘 닿지 않는 빗장뼈에 간신히 혀를 댄다 뱀은 다리를 몸속에 가두는 데 일억 년이 걸렸다는데, 늙은 내가 부스럼을 긁어내며 가만 나를 바라본다 엄지손가락을 빨며 어린 내가 흰나비를 쫓아가고 근이 쑥 빠져야 꽃이 핀단다,

엄마가 내 어린 유두를 쓸어내리며 부스럼 약을 발라준다 오빠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어린 내가 묻고 늙은 내가 물끄러미 죽은 나를 바라본다 내 몸속의 날갯짓들을 살려내려고 햇살이, 봄 햇살이 자꾸 내 가슴을 간질러, 오빠가 죽은 해 아버지가 심었다는 늙은 복숭아나무가 자꾸 진물을 흘린다 봄 뱀이 둥치 아래 허물을 벗어놓고 사라지고 아픈 가지 끝에서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뽑고 여전히 나는 발과 다리가 시리지만, 햇살 알레르기를 앓는 붉은 반점 몇 낱이 내 가슴에 열꽃을 피웠다 엄마가 다시 태어나려는지 꽃 진 자리가 환장하게 가렵고, 늙은 복숭아나무의 시름, 그 다디단 진물 옆을 벌들이 난다

 

 

 

다르마(法), 사랑하는 동안

김선우

 

그대를 보내고 그대로 인해 내가 아프고

아픈 나를 염려해 먼저 간 그대가 아파서

연지(蓮池) 밖 천 리가 아프고

하여 내가 아프고

 

흥망의 수레바퀴 하늘 밖 경사진 벼랑으로 이울 때

신라가 오직 신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라 이후에 오는 것이 신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대의 감아쥔 청동 손바닥에 매달린 나여

내 뜨거운 손바닥에 매달린 그대여

 

사랑으로 인해 두루 아파본 몸이

물처럼 스미어 그대가 환해지길 비옵니다

스미어 그대인 나의 거울이여

세상 뜨락에 생명의 단비 뿌리길 비옵니다

 

 

 

다른 손에 관하여

김선우

 

아파트 놀이터에 한 아이 놀고 있네

웃으며 빵 부스러기 떨어뜨리네

다른 손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네

 

얘야 개미를 죽이지 마

 

죽이지 말라니까!

 

왜 개미를 죽이면 안 되냐고

다른 손의 아이가 내게 대드네

 

제발,

 

웃으면서 죽이지는 마

 

한 아이 울면서 빵 부스러기 떨어뜨리네

다른 손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네

아파트 놀이터에 한 아이 놀고 있네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 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대관령 옛길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화주(火酒) -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대천 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

김선우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 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대포항

김선우

 

항구에 막 닿은 '대양호'에서

아낙이 제 키만한 방어를 받아 내렸다

활처럼 몸을 당긴 등 푸른 아침 바다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물방울을 쏘아 올리는 사이

환한 비린내,

아낙의 아랫배를 지나 내 종아리까지 날아와 박힌

푸른 물방울 화살촉을 조심스레 뽑아 든다

손금 위에 얹힌 물방울 하나 속에서

수천의 방어떼가 폭풍처럼 울고

 

오냐 오냐

아낙이 큰 칼을 들어

방어의 은빛 아가미를 내리쳤다

오냐, 내가 너를 다시 닿으리라.

 

아낙이 등 푸른 물속으로 치마를 걷으며 들어가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마리 은빛 방어들이

정오의 태양으로 헤엄쳐 간다

 

항구에 남겨진 그 여자들의 눈부신 비늘 몇 낱.

 

 

 

도솔암 가는 길

김선우

 

이상하다 이 길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구부러져 있다

 

길을 따라 내 몸도 구부러져

두 다리에서 네 발로

온몸으로 길 위에 눕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비늘, 날랜 짐승 하나가

내 허리를 감치며 수풀로 사라지고

 

꿈이었을까

직립하던 슬픔은

 

스물아홉에 출가한 불혹의 누이가

내 전신을 스치며

동안거 든다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돌담에 흥건한 절규같이

김선우

 

돌담 아래

그득한 절규

 

고요히

고요한 것처럼

견디고 있다

 

구르고 싶은데, 구르며 닳고 싶은데,

세상의 다른 모서리와 면들을 경험하고 싶은데,

생의 증거를 만들고 싶은데

 

자꾸 욱여넣는다

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이렇게 높이 이렇게 견고히

 

질서정연하게 짜인 담장 속에

미쳐가는 돌들이 유독 많은 여기

 

 

 

돌에게는 귀가 많아

김선우

 

귀가 하나 둘 넷 여덟

나는 심지어 백 개도 넘는 귀를 가진 돌도 보았네

귀가 많은데 손이 없다는 게 허물 될 것 없지만

길 위에서 귀 가릴 손이 없으면 어쩌나

나도 손을 버리고 손 없는 돌을 혀로 만지네

이 돌은 짜고 이 돌은 시네

달고 맵고 쓴 돌 칼칼한 돌 우는 돌

단 듯한데 실은 짜거나

쓴 듯한데 실은 시거나

혀끝을 골고루 대어보아야

돌이 자기 손을 어떻게 자기 몸속에 넣었는지

알 수 있네 무미무취라니!

무취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귀가 많으니 돌이야말로 맛의 궁전이지

당신이 가슴속에서 꺼내 보여준

막 쪼갠 수박처럼 핏물 흥건한 돌덩이

맵고 짜고 쓴데 귀 가릴 손이 없으니

내 입술로 귀를 덮네

입술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어떻게 자기 귀를 몸속에 가두는지 보라 하네

 

 

 

둥근 기억들의 저녁

김선우

 

무 숭숭 썰어 고등어찌개를 끓이고 물김치 한 보시기 가득 떠놓으니 된장에 박은 장다리 생각 고향 뜨락을 넘어간다 여문 햇살에 옹기들의 쌔근거리는 낮잠 "저것들도 숨 쉬고 있어야!" 만삭의 기억을 쓸어안으며 환갑의 어머니 들창을 여신다

아홉 자식의 어머니는 연중 아홉 달 사리돈을 씹는다 형상기억합금 소재의 브래지어를 빨다가 나도 문득 아랫도리가 아팠던 적이 있다 비틀어짜 말려도 원상태로 돌아오는 둥근 가슴에 대한 기억...... 유산의 겨울 이후 파드득, 나의 그곳을 헤치며 날아가는 새는 어디에 머물다 해마다 다시 깃들여오는 걸까

어머니의 앞섶에 꽂혀 있는 돗바늘, 이제 그 바늘 좀 뽑아 버리라고, 짜증을 내다 고등어살을 뜯어 숟가락에 얹어드린다 "거꾸로 들어 두 시간이나 길을 찾더구나 네 길이 내 몸속엔 없는 줄 알았다" 둥글고 따뜻하던 양수의 기억, 나는 좀 더 머물고 싶었는지 모른다

"널 갖고 복숭아가 미치게 먹고 싶었어야" 복숭아를 깎아 무른 쪽을 집어드린다 달칵거리는 틀니 "저물었어야, 장독을 덮어야지 저녁 진지 드실 시간이구마" 팔년 전 돌아가신 조부님 진지 드리러 어머니 황망히 문간을 나선다 대관령 고갯길에 나부끼는 옷섶, 복숭아 열매가 둥글게 자라는 건 열매가 갖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뒤쪽에 있는 것들이 눈부시다

김선우

 

해변 풀밭까지 내려온 어미 말은 동그마니 잘 갈라진

바위틈에 코를 들이민 채 한나절을 푸르릉 조을고

아기 말은 흰 구름에 홀려 있다가도

어미 말의 크낙한 엉덩이 사이로 푸릉릉 코를 들이밀고

봄들꽃 환장하게 피었는데 섬은 자기 심장을 쿵쿵 쳐대며

자맥질하는 바다의 둥근 어딘가에 자꾸만 코를 들이밀고

나는 말방울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핀 꽃들의 옴팡하니 깊은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킁킁거리다가

눈부셔 혼음에 겹곤 하는 것이다

이 섬이 처음 생겨날 때 어미의 가랑이

뒤쪽에서 뭉개져 흐르는 것들의 냄새

새봄마다 조금씩 풍겨 나오는지 내가 돌보던 말들

대지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 거린다

아무렴 뿌리는 저속에 두었으니 꽃은 뒤쪽에 자리한 사원이지

엎드려 읽는 경전이 중심까지 달뜬 채 깊은 것이다

 

 

 

김선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김선우

 

차가운 무쇠 가래떡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듯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영원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흰 염소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안심하고 두 손에 받아들어도 무기라고 의심받지 않을 기다란 것이

 

말랑하고 따듯한 명랑한 웅변처럼!

 

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오는 뜨거운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 끝에서 먹어 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 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떴다, 비행기

김선우

 

강릉행 비행기를 처음 타던 날

音이 되고 싶은 내 날개

육천 피트 상공을 튀어오르네

구름이 스스로에게 실려 가듯이

이대로 떨어지면 땅에 닿기 전

살은 수증기로 그저 풀어지고

잘 마른 뼈만 대관령

희망이 웃자라던 은 사시숲에 떨궜으면

정강이 가슴뼈 두개골이 차례차례

푸르디푸른 화음으로 나부껴

떴다 비행기, 콜타르 같은

인간의 마을은 아득한데

아, 허공은 따뜻하구나

시속 팔백, 구백 킬로미터로

시든 어머니께 꽃 따 드리러 가는 길

스러지며 타닥, 초록 불씨를 지피는

산벚꽃나무 봄산에 만발하였네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 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 냄새 나네

 

 

 

라오서* 찻집

김선우

 

찻잔에 뜬 눈알들

삼켜도 삼켜도 끝나지 않을

물은 끓고 잔은 비고 눈알은 둥둥

 

찬 바람이 일제히 손가락질하면 병 없는 사람도 죽고 말거네

 

그러니까 눈빛을 잘 잠그거나 풀어야지

내 눈빛이 너를 찌를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 찔러보지 못한 채 찔려 죽은 눈알이

평생 내 뒤통수에 매달려 다닐 수도 있는 거니까

 

눈알은 둥둥

왕버드나무 꽃은 활짝

퀭한 눈구멍 매립된 호수에

부스스 털 달린 눈알들 둥둥

 

* 라오서(老舍): 중국 소설가. 1966년 문혁 당시 홍위병에게 수난을 당한 후 타이핑 호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레볼루션, 동백 진 자리

김선우

   

자신이 사라진 자리가

어떻게 붉은 먼지로 젖는지……

데드마스크를 쓴 청동새가 어느 각도에서 열매를 쪼으러 내려오는지……

열린 적 없는 열매를……

설마 먹으려고?

 

붉은 해를 빨아 당겨

꽁꽁 언 돌을 토하듯,

 

꽃의 흔적이 꽃보다 더 생생할 때

 

혁명이라는 말이 생겨

역사의 별자리에 놓인다

 

 

 

마흔

김선우

 

내가 피 흘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공기 방울이

내게 다가오는 저녁은 무서운가

 

나를 기억하는 공기 방울을 쫓아

수목원에 들어선 길이었다 들어서고 나니

마흔이었다 폐업 신고 중인 수목원에서

출가한 시인의 소식을 듣는다

꽃잎이 느리게 졌다

누가 죽었다는 얘기를

다시 태어나려 한다는 얘기로 들을 때처럼

평화롭다

 

바람이 느리게 불어

공기의 결에 난 상처 딱지를 살살 떼어내고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배꼽들에 연씨를 심어드린다

누군가는 아직도 내게 출가를 권하지만

 

출가해 수행자가 되면

내게 오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할 텐데

마흔,

나는 이제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그 모두를 사랑할 자신은 없어서

편협한 사랑이 용서되는 시인으로 남기로 한다

사라질 수목원의 정문 위에 붉은 공기 방울을 찍어 비문을 쓰면서;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 테다

 

(날이 저문다……킥킥……공기 방울들이 터진다……억울하지 않다……너를 찾으면서……킥킥……살아 있다면……누구나 마흔은 될 테니까)

 

 

 

만국의 바퀴벌레여

김선우

 

날개를 갖고도 왜 날지 않는지

세상이 피뢰침 끝인 걸 알았다면

어쩌면 너는 날아오르지 않았을까

 

팍, 신문 뭉치로 바퀴벌레를 내리찍었다

 

어디선가 만났을 나의 더듬이

팍, 뭉개진다

내장을 질질 흘리면서

뒤꽁무니에 악착같이 알집을 매달고서

바퀴가 굴러간다

집집마다 부패하며 시끌벅적해지며

집, 이 굴러간다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선우

 

나는 그를 죽이는 중입니다

잔뜩 피를 빤 선형동물, 동백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그는 떨어져 꿈틀대는 빨간 벌레들을 널름널름 주워 먹었습니다

나는 메스를 더욱 깊숙이 박았지요......

마침내 그의 흉부가 벌어지며 동백꽃이 모가지째 콸콸 쏟아 집니다

피 빨린 해골들도 덜걱덜걱 흘러나옵니다

엄마 목에 매달린 아가 해골이 방그레 웃습니다

앉은뱅이 해골이 팔다남은 사과를 내밉니다

사과는 통째 곯았습니다 그가 번쩍, 눈을 부릅뜹니다

흘러나온 것들을 단숨에, 뱃속에 도로 집어넣습니다......

나는 날마다 그를 죽일 궁리를 합니다

비대해져 살갗이 몸에 맞지 않게 된 그는

쪼가리 살갗을 들고 매일 내 방으로 옵니다

나는 그의 몸피에 새로 난 살갗을 재봉질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 일로 생계를 꾸려가지요)

그의 몸은 가속으로 거대해져 갑니다

숱한 살갗을 어디에서 벗겨오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싱싱한, 피냄새가 묻어 있습니다......

오늘 밤 나는 그를 죽일 겁니다

그는 내게 남은 마지막 진피를 원할 테지요,

자장가를 부르며 사타구니 살갗을 벗겨내겠지요

내일이면 그는 핑크빛 합성 피부를 가져와

손수 박음질해줄 겁니다

리드미컬한, 노동요를 부르며,

나는 보너스를 받겠지요

한 아름 붉은 동백꽃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또 한 번 그를 죽였습니다

나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혀는, 그의 입속에, 비굴하고 착하게 갇혀 있으니까요

 

 

 

맑은 날

김선우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 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겠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육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 웅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의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 있던

못 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으로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꺽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 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맑은 울음주머니를 가진 밤

김선우

 

집 앞 밭들 사이에 조그만 논이 있었다는 걸

개구리 울음소리 들려와 비로소 눈치챈다

 

어느 외로운 식물이 터뜨린

비린 씨앗 같던 올챙이들 어느새 자라

밤에게 둥근 울음주머니를 달아준다

떨어져 구르는 제 몸 어딘가에

울음주머니 하나씩 매달고

더러워진 봄꽃들이 맑은 하늘로 올라간다

 

부풀어 오른 둥근 울음주머니 저편으로

새로 생긴 잔별들이 보리잎처럼

까끌까끌 내 손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지나온 길들로부터

도대체 나는 어떤 피를 수혈받은 걸까

열망이 사라지고

다만 이 괴이한 평화로움

 

모든 오늘이

울음주머니 속에 숨고 싶다고 내게 말한다

더러워진 꽃들이 모두 승천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세상은 더러울 텐데.

 

 

 

매 발톱

김선우

 

야생화 전시장에서 산 거라고, 먼 곳에서

자그만 매발톱풀을 공들여 포장해 보내왔습니다

그 누구의 살점도 찢어보지 못했을

푸른 매발톱

한 석달 조촐하니 깨끗한 얼굴이더니

깃털 하나 안 남기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매발톱풀을 아랫녘 밭에 묻어주러 나간 날은

이내가 파근하게 몸 풀고 있는 저물 무렵이었는데

거름이나 되려무나

밭 안쪽에 화분 속을 엎었습니다

화분 흙에 엉겨 있는 발톱의 뿌리는

보드라운 이내 속 깊은 허공 같아서

여리디여린 투명한 날개들이

그제야 사각대며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아주 오랜동안 내 꿈속을 찾아왔으나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수천의 실잠자리 떼

이내 속 깊은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이내 : 해 질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남기(嵐氣).

 

 

 

목련나무 우체국

김선우

 

저렇게 고운 편지 봉투가

저렇게 환하게 가득한

 

꽃핀 목련나무를 본 봄날엔

흰 종이에 정성들여 편지를 쓰고 싶다

 

뽀얀 봉투에 편지지를 곱게 넣어

발신인 '목련나무 우체국'이라고 쓰고 싶다

 

목련 꽃봉오리처럼 환한 등불을

너의 마음에 켤 수 있으면 좋겠다

 

 

 

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김선우

 

목련꽃을 사랑하는 이에게

목련 열매를 마저 보여주어라

 

꿈지럭거리며 허물 벗는 무섬증 같은

 

여러 개의 심방을 가진 심장

분열하는 붉은 열매를 찢고

 

꽃이 사뿐 날아오를 때

 

꽃을 기억하는 사람의 꽃이 아니라

꽃이 기억하는 열매까지 보여주어라

 

꽃으로 보여주어라

 

 

 

목포항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 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 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기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몸과 몸이 처음 만나 보애진 그 입김을 말이라 했다

김선우

 

엄마가 나를 낳았지.

 

파독 간호사였던 K가 요양원 침상에서 되뇐 말.

스무 살에 독일로 가 평생 거기서 산 그녀의 모국어는 독일어. 한국어를 잊고 산 지 반백 년이지만, 치매가 생긴 후 잃어버린 말은 오히려 독일어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침상에 누워 동그란 손거울 들여다보며 k가 한국어로 엄마를 불렀다.

 

낳았지.

 

마른침 엉겨 붙은 k의 입가에서 시간이 어려지고 가끔 허공을 쓰다듬는 검버섯 핀 손등에 도드라진 푸른 핏줄이 기억에 없는 동구 밖 시냇물 같았다. 기억을 잃기 시작한 실개천처럼 떠오른 말. 반백 년보다 질긴 젖먹이 말. 몸과 몸이 만나는 따스함을 처음 알게 한 아스라이 보얗게 젖은 입김의 말. 어미 ---- 말.

 

 

 

몸살

김선우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다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 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김선우

 

- 미야자키 하야오풍의 질문

 

낡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늙어보기 전의 일이지. 팔십 년쯤 살아보니 알겠어. 늙을수록 이 장소가 좋아지더라고 여기는 절벽. 한해 한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라네.

열개의 손가락으로 움켜잡은 당신이라는 절벽, "뛸까, 우리?" 말하곤 하지. 꽃이 지는 느낌으로 아니, 막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나는 대답하곤 해. "걸어요,우리." 하루를 느리게 살아낸 뒤 쓰다듬어줄 수 있는 이 장소가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한해 한해 한걸음 한걸음이 갈수록 소중해지는 때라네. 그래, 충만하지.

알지 않나? 어떤 시간과 장소는 아주 낡은 채 불쑥 다가와 아예 드러눕기도 하거든. 무례하지. 하지만 이 장소는 낡지 않아. 늙을 뿐이지. 고통도 허기도 늘 새롭게 당도한다네. 내가 자네 나이땐 깊게 패는 주름이나 검버섯 같은 게 무척 신기하더라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것들이니까. 아직도 새로 도착하는 낯선 것들이 여전히 있어. 궁금하지. 늘 궁금해. 이 장소가 말이야.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자네는 얼마나 알고 있나?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무꽃

김선우

 

집속에

집만 한 것이 들어있네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 지나지 못한 한 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렀구나

빈집 구석 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김선우

 

버즘나무 이파리 서쪽으로 눕던 길,

그 길 끝에 놓여 있던 비둘기의 주검,

선명한 자동차 바퀴 자국.

새의 내장도 무겁구나,

파리해진 잎사귀의 반쪽을 가리며

오래도록 주검을 맴돌던 슬픈 애인이 펄럭였다

술잔 속에서 끊임없이 피 묻은 깃털이 올라오던,

그날 애인을 안고 속삭였던가

갓 태어난 아기들의 뱃속을 생각해봐

작은 정원 같은,

붉은 다알리아 콩닥콩닥 김을 뿜고

삐비풀이 연초록 길을 만들이

노랑 주홍빛 채송화, 토란잎 위에서 장난치는 피톨들,

붉고 흰 물방울.

물방울은 동그란 무덤이야

우린 누구나 무덤의 집이라구

따스한, 내 가슴에 떡잎처럼 매달려 우는 어린 애인,

덩 여문 내 꽃자리로 사르륵 통증이 지나갔고

나는 무덤을 열어 젖꼭지를 물려주었지만

 

어떻게 울음을 그쳤는지 모른다 그날,

내 애인은 동구 밖에 비둘기를 묻어주고

내 등에 업혀 돌아오던 다섯 살배기 동생이 되어

내게 말했다 고마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어줄게.

향긋한 냄새가 그 애의 정원에서 풍겨 나와 핑그르르,

내 무덤에서 정말로 젖이 돈 것만 같았다

 

 

 

무서운 들녘

김선우

 

깊고 캄캄한 잠 속에서

다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온몸 일으켜

서는 새싹들

낱낱 푸른 벼랑들

 

봄마다 나는 두려워 서성인다

지상에 산 것들 있게 하는 배냇힘.

초록의 독기 앞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

 

새싹의 말씀 들으며 네발 달린 짐승인 내가

처음 온 아기처럼 엎드려 독을 빤다

 

 

 

무정자 시대

김선우

 

정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킥킥,

실험실의 비커와 태아들의 머리가 해방되리라

 

사십 년 동안 평균 40퍼센트의 정자가 줄었다고 한다

최근 십 년간은 연평균 2.6퍼센트 감소율

키익, 나는 웃는다 2.6퍼센트만큼

매음녀들이 가계부가 실해지겠군

 

다만, 원죄가 아닌 것에 감사하라

화학약품이 몸 안에 축적돼 일어난 부작용이라고 한다 킥,

너만 먹었니?

 

어처구니없이 평화로운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

오대양 육대주의 늙은이들이 모여

반상회 하듯 마지막 제물의 숨통을 딸지도,

수정란의 구름이 어서 하강해주길

어린 인간의 울음소리를 단 한 번 들을 수 있기를!

 

허파와 자궁을 가진 동물 중에

저희끼리 살육, 착취하는 것 유일하니

달게 받으라 하늘 문이 열리고

썩은 탯줄 내려와 아랫배를 뚫으리라

 

무정자의 시대

무정란의 영혼들이

겨울 수숫대를 물들여

다음다음다음 해에는

붉은 수수꽃만 쩡쩡 피어나리라

 

 

 

물속의 여자들

김선우

 

늦봄 저수지 둑 위에 앉아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면

거기 무슨 잔치 벌였는지

북소리 징소리 어깨춤 법석입니다

 

바리공주 방울 흔들어 수문 열리자

시루떡 찌고 있는 명성황후가 보입니다

구름이 내려와 멍석을 펼치고

축문을 쓰고 있는 황진이 쪽찐머리

가르마 따라 흰 새 날고 바람 불어옵니다

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위해 소지를 사르다가

문득 눈을 들어 감나무를 봅니다

우듬지에 걸려 펄럭이는 나비연

황진이가 다가와 장옷을 걸쳐줍니다

두 여자 마주 보고 하하 웃습니다

명성황후 다가와 붉은 석류를 내밉니다

석류알 새금새금 발라 먹으며

세 여자 찡그려 하하하 웃습니다

물보라 치는 눈물,

 

이승을 혼자 노닐다 온 여자들이

휘모리장단을 칩니다 지전 흩어지고

까치밥마냥 미쳐서

술잔 속에 한 하늘이 천년을 헤매었습니다

 

물속에 웬 잔치 벌였는고?

어머니 입 속에 상추쌈 넣어드리니

저수지의 봄날이 흐득 깊어갑니다

 

 

 

물로 빚어진 사람

김선우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 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 주면 엄마의 몸 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 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 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

김선우

 

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 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 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 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김선우

 

바늘을 들여다본다. 바늘귀가 두근거린다.

깁고 이어 붙이고 꽃봉오리 같은 단추를 매달아주기 위해

바늘은 오늘도 온몸으로 귀 기울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은

자연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있다.

바늘은 당신 속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있다.

최초의 바늘은 아마도 짐승의 뼈였으리라.

구멍이 뚫려 있는 날카로운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구멍에 가죽실을 꿰었던 최초의 석기인들을 생각한다.

벗은 몸이 추웠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벗은 몸의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연민하고 글썽이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최초의 뼈바늘로 최초의 가죽옷을 지었을 것이다.

 

 

 

바다풀 시집

김선우

 

백수인 걸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안 해보고 살았죠

출퇴근, 이런 말이 나오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도망다녔죠 굶지 않을 만큼만 글 써서 벌고

죽지 않을 만큼만 여행할 수 있으면 족했죠

그런데 이제 취직하고 싶어요

생애 최초의 구직 욕망이에요(아, 살짝 부끄러워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내 손이 이력서를 쓰고 있어요

 

나무들의 유령에 쫓겨 발목이 자꾸 끊어지는

잊을 만하면 덜컥 나타나는 악몽이 지겨워요

청동 구두 같은 종이 구두가 무서워요(저 좀 들여보내주세요)

 

바다풀로 만든 종이로 시집을 묶고 싶어요

나무들에 대한 진부한 속죄는 말고

다가올 결혼식까지 속죄하긴 싫으니까

바다풀 냄새 가득한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바다풀 시집 自序엔 딱 세 줄만 쓸 거예요

 

나무의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아 아주 지겨운 날들이었어.

나는 그만 손 씻을래.

너를 사랑해.

 

 

 

바람의 옹이 위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로 앉아

김선우

 

봄꽃 그늘 아래 가늘게 눈뜨고 있으면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좋아

 

먼지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애틋해

비로소 몸이 영혼 같아

내 목소리가 엷어져 가

 

이렇게 가벼운 필체를 남기고

문득 사라지는 것이니

 

참 좋은 날이야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참 근사한 날이야

인간이 하찮게 느껴져서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김선우

 

그러니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별안간

젖꼭지처럼 보인 날이다

하늘을 쳐다보다 입안에 단침이 고인 날이다

거기에 입술을 대고 싶어

배꼽 밑이 찌르르해진 날이다

 

그러니까 오리온이라는 힘센 사나이의 중심

움푹 팬 상처처럼 고인 허공에서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느낀 날이다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시선으로

살맛 달큰한 비린내가 초유처럼 흘러든 날이다

 

은하는 깊은 곳으로 찔린 듯 쏟아지고

지구인 내 취향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이다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너의 별자리들마다

모조리 양성구유인 소한(小寒) 날이다

 

 

 

반짝임에 대하여

김선우

 

순천만 겨울 갈대숲 바람 속에 웅성거린다

가녀린 몸집의 도요새 떼

갈대숲 가장자리 차가운 진펄에 내려서서

바람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뼝대처럼 펼쳐진 북풍의 정면,

사소한 신음 한 줄기 새나오지 않는

민물도요 고요한 얼굴들

조그만 한 뼘 키에 삼생(三生)을 눌러 앉힌

면벽 나한들 같다

 

바람의 마음을 읽기 위해 오래 기다려온

입선(立禪)의 새 떼 마침내 날아오른다

모든 각도에서 낱낱이 다르게 반짝이는

정면을 기억하는 측면의 날갯짓들,

순천만 한 허공이 갈꽃무리처럼 반짝인다

 

저마다 다른 음역으로 바람을 허밍 하는

갈대의 꿈을 부리에 물고

모두 다 다르게 읽은 바람의 마음속으로

비상!

 

 

 

백목련 진다

김선우

 

이상하다, 계곡을 몰아쳐 오는 눈보라

저 눈꽃 떼를 어디서 만났던가

꽃으로 오기 전

네가 눈보라였다면 나는 무엇이었나

청명한 봄 한나절

돌연 단전 밑이 서늘해지고

내장을 따라 들어선 계곡에

꽃, 잎새도 없이 만개한 적멸보궁

 

얼음 녹아 아지랑이 흐르는데

왜 너는 그토록 서늘한 미소로 흔들리는지

네가 웃는 자리마다 조금씩 금이 가며

계곡의 뿌리가 시큰하다

 

독은 독으로 멸한다는데

동토를 녹인 건 열망의 독이었나

거꾸로 흐르는 눈보라의 꿈

 

사월 아침마다

목련꽃 져버릴까 두려웠더니

제 살 으깨며 번지는 석양 아래

눈보라여, 너는 자결을 준비했구나

뒤란에 나부끼던 무명 타래같이

새벽부터 곱게 몸단장 끝냈구나

 

꽃으로 오기 전 너는 무엇이었나

거꾸로 선 폭포였나 진흙창 뒹굴던 놋반지엿나

내 독은 아직 사타구니 뜨거운 희망이라서

절망을 멸하러 오는 절망의

맨얼굴을 볼 수 없다 네 발목을 잡을 수 없다

 

 

 

백설기

김선우

 

윗집 앵두나무 아래에서 우리 집 지나 꽤나무 밑까지 두들겨 맞으며 그 애의 엄마가 쫓겨 내려오는 날이면 불콰해진 얼굴로 그 애의 아버지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한 달포 평화롭고 서럽게 앵두나무 잎새 간질이는 달이 뜨곤 하였네

꽤나무 밑에 주저앉아 울던 그 애의 엄마가 피 터진 입가를 혀로 쓱 훔치며 일어설 때면 확 지펴 올린 아궁이 속 삭정이들처럼 꽤나무 밑둥치가 와글와글 뜨거워지곤 했네

그날은 우리 집 안택날이어서 팥시루떡과 백설기 찌는 냄새에 가족이 봉당의 물그릇처럼 오목해진 날이었네

어스름녘 백설기 나눠 담은 접시를 동네에 돌리고 마지막으로 그 애네 올라갔을 때 마당가 앵두나무를 타고 내린 달빛이 고요히 흙을 적시고 두꺼운 나무문 조금 열린 부엌에서 간간이 물소리 차오르고 있었네

아궁이 가마솥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등 돌려 앉은 젊은 엄마의 하얗게 벗은 등에 뜨거운 수건을 대어주는 그애의 작은 손이 보였네

그애네 집에 아무도 없어 백설기를 전할 수 없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김 오르는 희디흰 네모난 것을 미어지게 먹은 나는 급체를 앓았네 바늘로 딴 하얀 손가락 끝에서 스며나온 자줏빛 핏방울이 무서웠네

시루 하나 가득 김 구멍마다 숭숭 숨을 뱉던 백설기

희고 네모난 그 속내엔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시끄러운 한낮이 있을 것 같고

고깃배가 돌아오는 달포마다 온 동네가 고등어 등처럼 퍼릇퍼릇 해지는 우울한 축제가 있을 것 같고

또 뭔가 시루 하나 가득 뜨겁게 쪄 내리던 붉은 상처 자국이 있을 것도 같은,

가족에게 백설기 한 조각씩 돌아가면 시루는 이제 뜨거운 숨구멍 하나둘 닫고 밤 별들의 난망함 속으로 들어가네

우물 속 물바가지가 밤새 우물 벽을 치닫는 소리

가지꽃 보라색 슬픈 낯빛이 희디흰 재처럼 식어가고 아린 잎사귀 뒤에 숨어 어린 꽤들이 서둘러 익어 갔네

 

 

 

벌집 속의 달마

김선우

 

불영산 수도암에 갔다가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바탕 엉겼네

 

신랏적 부처들은 왜 그리 섹시하냐고

슬쩍 농을 건넸더니 반개한 두 눈 스르르 뜨시네

'실라'라는 발음은 로맨틱해요

허리춤을 간질였더니 예끼, 손을 저으시네

천년 예술의 균형미 따위

선화공주와 서동방은 아랑곳않을걸요

이사달 아사녀의 달아오른 눈빛이

부럽지 않았나요 허허, 웃는 비로자나 부처님

아름다운 귓불이 벌게지셨네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설한 부처의 몸을 빌려

관능을 조각한 석공의 번뇌.....

 

법당 앞 고즈넉이 서 있는 삼 층 석탑

금 간 탑신 아래 주먹만 한 벌집이 매달려 있었네

천년 세월 돌꽃은 피고 지고

벌집 속으로 무상하게 드나드는 달마들

선남선녀 옷자락이 하염없이 스쳐 가네

 

이 뭣꼬!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네

 

 

 

범람

김선우

 

대전 가는 버스에 동행했던 사내를 대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막차에서 또 만났다

완행이었다 내 좌석 바로 뒷자리 술 냄새를 풍기며 사내가 곤히 잠들었다

가끔 손바닥으로 쿵쿵 등받이를 치면서 무거운 몸이 귀찮아 죽겠다는 듯,

늦가을 길 위에서 만난 늙은 풀벌레 헐거운 전신으로 "끙 -" 힘겹게 뒤척이듯이

여섯 시간 전 그 사내 버스에 올라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형에서 처조카 선배에서 후배까지 연신 전화를 해대던,

침묵이 두려운 이의 불안이 사뭇 쾌활하게 우렁우렁거리며 응 내가 북파 간첩이잖아,

응, 대전에 집회가 있어 가는 길인데, 응, 북파라니깐, 응, 서울도 가야지, 응,

데모하러, 응, 아니야, 이젠 말해도 돼, 가야지, 응, 내가……

 

충주 지나 강원도 들어 자그만 마을에 정차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리다가 씨발……

잠결에 한마디씩 독하게 내밷으며 씨발……

풀잎 끝 난간에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는 늙은 명주잠자리처럼

사내가 가끔씩 날개를 털었고 씨발……

그때마다 어두워진 들녁에서 모래바람이 붉은 반점처럼 번져왔는데

 

오십이 훌쩍 넘은 덩치 큰 사내가 뒤척이다 별안간 "엄마―"하였다

칼끝으로 그 말이 내 귀를 찔러 누군가 열어놓은 차창으로

왈칵 아까시 꽃냄새 밀어닥쳤는데 엄마……

 

시방을 떠돌던 남루한 내 연인이 짧고 괴로운 낮잠에 들었다가 "엄마―"

잠꼬대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늦은 봄날이 있었다

어깨를 가만 빌려주고 그의 손금을 쓰다듬어 벌레 먹은 잎사귀를 따내어 주던 그날도

내 귓속으로 아까시 아까시 희디흰 꽃냄새가 홍수로 번지던 완행버스 안이었다

 

 

 

벚꽃 잘 받았어요

김선우

 

이 봄에 아픈 내가

꽃을 놓칠까 봐

당신이 찍어 보내온 활짝 핀 벚꽃 영상

 

여린 꽃들 피어 무거운 가지 들어 올리는 저 힘

어디에서 왔나?

몇 뼘 둘레와 몇 자 키와 몇 근 무게로 측정될 벚나무 속에

두근거리는 저 기운은

 

벚나무 형상 속, 벚나무 형상 너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무언가

꽃으로 밀려와

오늘

당신과 섞였구나

 

활짝 핀 꽃나무 아래에서는

마음 섞이는 일이

몸 섞는 일이구나

 

기운을 내요

 

전해오는 당신의 마음

향기로운 살을 받아먹는다

 

응, 기운 낼게요

 

 

 

변검

김선우

 

우리가 남이니?

자기 그림자를 뜯어내려는 소년을 끌어안으며 어른이 운다.

그럼 당신이 나예요? 남이지.

난폭하게 잡아 뜯는 소년의 그림자에서 핏물이 떨어질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남이니?

어른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웃기시네. 나랑 같은 걸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척하기는.

어른의 울음소리가 소년의 차가운 웃음에 덮인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니?

담장 아래 흰개미 굴이 가득했다. 담은 곧 무너질 텐데.

남인데 남 아니라고 우기면 맘 편해요? 그럼 그러시든가.

소년은 소년대로 사무친 것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소년이 사무쳤다.

사무쳐서 봄이 왔고

사무쳐서 꽃이 피었다.

사무쳐 벌어진 것만 꽃이었다.

얼룩 같은

얼굴들이었다.

 

 

 

별의 여자들

김선우

 

태양의 흑점이 커지던 날,바람이 사라졌다

내가 도달한 다른 우주의 문은 찬바람이 걸어간 산길이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나는 지구 몸속의 다른 별에 들어섰다

내 몸속에 내가 모르는 다른 우주가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화창하게 갠 날이 저녁 가까이로 찾아왔다

화창한 날 저녁엔 목숨들이 하루살이처럼 가볍게 날고,

수많은 물고기뼈들이 공중을 헤엄치며 아무 데서나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셈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별의 여자들은 내내 이곳에서 살아왔다

잇꽃빛 번지는 노을 속에 여자가 그늘을 묻는다

여자의 푸른 유방에서 죽은 별들이 흘러나왔다

여자가 텅 빈 우주를 자궁 속에서 꺼낸다

지구 표면으로 통하는 모든 문 위에 붉은 부적을 걸고 싶은 날,

내 몸에 묻어온 독기에 찔러 여자의 손이 자꾸 허공을 짚는다

둥글고 푸른 별의 생장점이 꼬리를 끓고 흘러갔다

나는 속죄의 말을 찾지 못했다

 

구불구불한 꿈을 한없이 걸어 서늘한 산길이 걸어 나온다

인간의 마음이 저물고 내 몸 깊숙한 곳의 뼈들이

오래전 은하수의 수로를 따라 흘러간다

화창하게 갠 날에 가벼워지는 목숨들,

화창한 저물녘에 별의 여자들이 자기 몸을 비우고 또 비운다

텅 빈 여자의 중심, 지구 몸속의 또다른 별에서 지구가 눈물 한 방울로

 

 

 

보름달 종려나무 그림자에 실려

김선우

 

부두를 돌아 상여가 나가는 걸 지켜보는 계집애 둘

훌쩍이는, 달빛

 

가장 낮은 해변까지 내려온 상여를 맞으며

종려나무 그림자가 눕네

 

어떤 비밀을 알고 있으면 저토록

산산이 찢어진 잎사귀가 상여를 이끄는 손가락이 되나

 

밑을 다 벌린 채 그보다 더 밑까지 흘러들어온

잔물결, 훌쩍이는

아이들의 상한 그림자를 씻어주네

 

뜨거워 손에 쥘 수 없던

스물한 살 엄마의 심장을

갓 꺼낸 둥근 빵처럼 나란히 들고 돌아서는 계집애 둘

 

어리고 아름다운 것들 속엔 치욕이 많아

보름밤엔 손에 닿는 무엇이나 맥박이 잘 잡히네

 

* 가난한 항구의 섬 소녀들이 미혼모가 되는 일이 세상엔 드물지 않았다.

 

 

 

보자기의 비유

김선우

 

처음엔 보자기 한 장이 온전히 내 것으로 왔겠지

자고 놀고 꿈꾸었지 그러면 되었지

학교에 들어가면서 보자기는 조각나기 시작했지

8등분 16등분 24등분 정신없이 갈라지기 시작했지

어느덧 중년 -

시간의 보자기를 기우며 사네

조각난 시간들로 조각보를 만들며

시간을 기우는 바늘 끝에 자주 찔리며

지금 없는 과거의 시간을 기우네

미래를 덮지 못하는 처량한 조각보를 기우네

 

한번 기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지네

그러니 청년이여 우리는

가장 한쪽 심장에 지닌 보자기 하나는

손수건만 하더라도 통째로 가질 것

단풍잎만 하더라도 온전히 통째일 것

 

온전한 단풍잎 한 장은 광야를 덮을 수 있네

 

 

 

봄날 오후

김선우

 

1

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 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 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 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고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뿐, 엄마가 보고 싶다

 

 

2

그 집 뜰에서 오줌을 눴다

변소가 없었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냥,

다들 알몸이라서

채송화 작약 모란이 모두 알몸인데

나만 소란 떨기 뭣해서

 

그때 나비가 살, 랑, 지나갔다

나비의 것인지 내 것인지

살이 포르르 떨렸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마지막 오줌 한 방울이 떨어질 순간쯤

나비도 오줌을 누나?

그런 궁금증이 무연히 지나갔고

 

쿡, 내가 웃어서인지 바람 때문인지

무언가 뿌리를 간질였는지 아무튼지

배롱나무 끝가지가 포릉포릉 떨렸다

 

어, 그러니까, 나비 오줌에 대해

누군가 말해 줄 것도 아닌 것도 같은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봄날 오후

 

나비 오줌 한 방울에 묻은

채송화 냄새 같은 게

내 가운데서도 흐릿하게 풍겼다고

포슬하니 부풀어 숨 쉬는 봄 흙 위에

공기의 말로 써도 될 것 같았다

 

 

 

봄에 죽은 노랑부리멧새를 위한 시비(詩碑)

김선우

 

부표도 없이

봄도 없이

죽기 직전

새의 울음은

몸에 깃들이지 않은 단 한마디 말

 

울음은 그런 것이다.

 

 

 

봄 잠 - 산 밑, 사랑에 관한 두 마디 그림자극

김선우

 

한 무리의 군인들 몰려왔네

산벚나무 그늘에서 한 여자 끌려나왔네

다른 이념을 가진 그림자에게 밥 지어 먹인 죄라 하네

함부로 엎질러진 허공의 밥공기에서

돋지 못한 꽃눈들 애벌레처럼 쏟아졌네

다행이야 아주 차갑진 않아서 -

여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고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솟은 순간,

산벚나무 그늘에서 한 그림자 달려 나와 여자의 몸을 덮었네

낯선 그림자의 펼쳐진 옷자락 속

여자의 애벌레들 나비, 나비, 나비 떼로 펄럭대고

 

그림자 쓰러졌네

따스한 핏물이 쓰러진 그림자의 발목을 적셨네

밥물처럼 흥건한 나무 밑,

혹시는 이것도 사랑일까 쫓겨든 산속

멍울진 꽃눈들 파근하게 팬 오후에

밥 한 덩이 건네받은 적 있을 뿐

나비뿐일 듯 아주 찰나 손끝 스친 적 있을 뿐

 

산벚나무 밑에 잠든 늙은 여자를 본다면

그 여자 심장 위로 꽃잎 사무치게 져내린다면

잠든 그림자 가만히 열어 나비를 꺼내야 하리

꽃잎 져 내린 후 푸르게 남아 흔들리는 꽃받침,

그 흔들림까지 다 꽃이었으니

 

 

 

부쳐 먹다

김선우

 

강원도 산간에 비탈밭 많지요

비탈에 몸 붙인 어미 아비 많지요

 

땅에 바싹 몸 붙여야 먹고 살수 있는 목숨이라는 듯

겨우 먹고 살 만한

'겨우' 속에

사람의 하늘이랄지 뜨먹하게 오는

무슨 꼭두서니빛 광야 같은 거랑도 정분날 일 있다는 듯

 

그럭저럭 조그만 땅 부쳐 먹고 산다는 ……

부쳐 먹는다는 말 좋아진 저녁에

번철에 기름 둘러 부침개 바싹 부치고

술상 붙여 그대를 부를래요

무릎 붙이고 발가락 붙이고 황토빛 진동하는 살내음에 심장을 바싹 붙여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듯

바싹 몸 붙여 그대를 부쳐 먹을래요

 

 

 

북궁에 기대어

김선우

 

나보다 그대가 먼저였는지

내가 먼저였는지

사랑은 마음에서 탑을

살짝 들어내고

가만히 비워지는 일이었지요

그러지 않고서야

사랑이 뿌리내릴 말을 어디서 얻겠어요

개천 어귀까지

종소리가 맑은 말로 돌아나갈 때

가만히 기대어 본 세상은

진흙밭처럼 더웠습니다

바라는 것이 그대가 아니었다면

밑 모를 이 사바에 사랑이란 말

놓아주지 않았을 테지요

내 안에 그대가 비워져

북궁이 빌 때가 오면

사랑이 왔던 방향에서

살짝 들어온 비로자나,

노을 속 가득할 거예요

 

 

 

북엇국

김선우

 

길 가다 한 사내 보았는데

글쎄 낯이 익어

한 천 년 된 마음은 뜨거웁고

건널 수 없던 서늘한 강은 깊어

꽃잎 한장 나부껴 떠오더라는 얘긴데

 

이생에 어긋나면 어느 골짜기 바람이 될까

만취한 사내 아랫목에 누이고

북어를 땅땅 두드렸다는데

부끄러이 내 껍질 벗고 여윈 살점을 추려

더운 국물 한 사발 끓여 올렸다는데

 

한 천년 곰 삭여온

깊은 잠 달디달게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없더라는 얘긴데

밥상머리 정갈하게

내 뼈만 소복소복 쌓였더라는 얘긴데

 

눈부신 빈 사발

그제사 찰랑거리네

 

 

 

분꽃

김선우

 

'사바'라는 말 참 예뻐서

사바세계에 살고 싶었지요

'사바'라는 말 참 예뻐서

그 여자 못을 들어 제 가슴 찔렀지요

흰분홍노랑 못들을 박고

그 여자 여무는 까만 눈둥자

제 가슴 가만히 들여다보았지요

못들이 이렇게 많으니

곧 꽃이 피겠구나

못자국 깊어진 오후 네 시였지요

 

 

 

불가사의 - 침대의 필요

김선우

 

그런 날 있잖습니까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 속의 사람이

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릴 때

 

그런 날은 열 일 제치고 침상을 정리합니다

날 선 뼈들을 발라내 햇빛과 바람을 쏘이고

가장 좋은 침대보로 새로 씌우죠

 

         이봐요, 여기로

 

거울 앞으로 가 거울 속의 사람을 마주봅니다

거울 속으로 손을 뻗지 말고

여기서 손짓해 거울 밖으로

그를 꺼내야 합니다

 

         어서 와요.

 

정성 다해 만져줘야 할 몸이

이쪽에 있습니다.

 

 

 

불가사의 – 해변 묘지

김선우

 

생김 냄새 나는 바람이 불었다

살갗이 옷처럼 벗겨져 평화로웠다

가만히 벗은 내 껍질을 그림자로 뉘어놓았다

사람의 형상을 한 처음 보는 사막이 발치에서 말라갔다

그림자 없는 시간을 만나기 위해 떠돌던 여행자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떠난다

그림자의 새싹을 발아시키며 말라가는 낙엽처럼

덕장의 김발들이 나날이 향기로웠다

잘 마른 바람의 육신, 속으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불경한 팬지

김선우

 

봄날, 봄날의 무덤이 열리고

찬바람이 뮛등에 배를 끌며 몸시질한다

 

동대문야구장 공중전화부스 옆에서 쓰레기더미에 덮인 채 발견된 한 노숙자의 주검.

보름 동안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되었던 주검의 얼굴과 손의 살점은 쥐들이 갉아먹어 대부분 뜯겨나간 상태였다. 가난한 기억밖에 없다고,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형제들 중 누구도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가진 땅이 없어 언제나 남의 논에서 일을 했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고, 체념한 듯 담담하게 말하는 숨진 사내의 동생.

 

신문의 같은 지면에는

 

서울시청 광장 꽃밭에서 팬지꽃 모종을 심고 있는 인부들의 사진이 나란히 실리고,

사진의 제목은 '봄단장'. 먹고 살기 위해 공공근로를 나온 이들이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꽃모종을 심는다.

 

나무는 오직 나무의 힘으로

꽃은 오직 꽃의 힘으로 가까스로 서 있는데

기간 3개월, 1회 한정, 하루 이만오천 원

팬지를 심는 호미질에는 뭉친 흙처럼 가족들이 걸려 올라오고

봄 단장하는 관청은 노란 팬지로 아름답다

 

나무 둥치마다 휘발유 냄새가 피어나는 봄날

수레에 올라탄 땅 주인도

수레를 끌고 가는 힘 좋은 노새도

살점을 내어준 노숙자의 주검도

살점을 뜯어먹은 쥐의 가족들도 말하겠지,

저 아름다운 건물이 관청이구나

 

척박한 밥이 사랑을 만드는 세월은 오지 않는다.

눈물로 바닥을 채운 쓰레기 더미 무덤 앞에서

 

팬지꽃들이 불경한 부적을 만드는 봄날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김선우

 

비가 내린다 오늘은 (죽은 문(門)이 생피를 흘리듯)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

 

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

핏대를 세운 발꿈치를 들며 비 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

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 (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

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

총칼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

 

목 없는 마네킹에 입혀진 화려한 실크 드레스

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

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

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

당신의 드레스

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

(당신이나 나나 참,)

 

비 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

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

(정거장엔 빈 무덤들,

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

텅 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

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

 

이봐, 나 본 적 있지?

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

젠장, 빗소리는 왜 이리 질긴 거야,

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

 

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

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비의 열반송

김선우

 

당신이 아는 나의 이야기도

당신이 모르는 나의 이야기도

당신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나의 이야기도

내가 알거나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도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

 

누군가의 피로 자기 피를 만들지 않는

식물들의 귀가 커진다

 

어떤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함께 내리는 날

여기 - 안쪽에선 비 오는 날이라 하고

여기 - 바깥에선 위로와 정화의 날이라 한다

 

내가 아는 당신의 이야기와

내가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와

내가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이 알거나 모르는 나의 이야기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

 

 

 

빈집

김선우

 

불현듯 강바닥으로 내려앉는

빈집

 

황지였나 사북이었나

고분처럼 폐석 더미 쌓인 마당

발가벗은 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무엇이 고팠던 걸까

어린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토닥토닥 흙집을 만들던 마당가

이따금씩 개미가 손등을 타오르고

폐석 더미 옆 고즈넉이 깨꽃 붉었다

 

흰 구름 데리러 간 엄마는 왜 안 오나

깨꽃 입술만 흙집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빌려 줄 몸 한 채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빗방울 밥상

김선우

 

빗방울 밥을 지었어요

 

어떤 빗방울은 아직 설익고

어떤 빗방울은 너무 푹 익고

어떤 빗방울은 끈기가 너무 없고

어떤 빗방울은 악착같이 달라붙죠

 

그런대로 섞여서 밥 한 고봉이 되면

밥이라 할 수 없던 것이

밥이 되는 세월도 오죠

 

저마다 다르게 몸에 묻혀온

빗방울들의 냄새를

밥냄새라 생각하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죠

 

가끔 천둥 번개 우르릉대는 밤이 오지만

그런 날은 3백 날 중에 한 스무 날

깨지고 금 간 빗방울의 얼굴이 보여

식욕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곧 증발해버리는 빗방울 밥알 때문에

허기가 깊어지기도 하지만

 

오늘도 빗방울 밥을 지어요

내 관심은 밥보다 밥냄새니까

 

 

 

사과꽃 당신

김선우

 

사과나무 속으로 들어갈 테야

푸른 사과 속으로

사과씨 속으로

  노크

  노크

  노크

 

사과꽃 핀

사과나무 아래 달밤

귀 기울이면

  노크

  노크

  노크

 

입구와 출구

시작과 끝이

구두점 없이 서로를 향해

  노크

  노크

  노크

 

 

 

사랑

김선우

 

- 순례자들이 당도한 무덤의 묘비에 이 시가 적혀 있는 것을 우리는 읽었으나 곧 잊어버렸다

이 부주의함이야말로 사랑에 관한 한 우리의 원죄이니 기억하라 오늘 당도한 사랑의 순례자여

 

새장 속에 꽃을 기른 적 있지

새장 문을 열어 두어도

꽃은 날아가지 않았네

 

새장 속에 심장을 기른 적 있지

새장 문을 닫아둔 날

심장이 날아갔네 꽃이 날아갔네

 

잠긴 새장 바닥엔

무거운 핏빛 깃털 몇 낱

마르지 않는 고통 몇 잎

 

두려움에 문 닫은 자여

스스로의 무지를 애도할 것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김선우

 

자전거 바퀴 돈다 바퀴 돌고 돌며

숨결 되고 있다 풀 되고 있다 너의 배꼽에서 흐르는 FM 되고 있다 실개천 되고 있다 버들 구름 되고 있다 막 태어난 햇살 업고 자장가 불러주는 바람 되고 있다 초록빛 콩꼬투리 조약돌 되고 있다 바퀴 돌고 돌며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부스러기 시간에서도 향기로운 밀전병 냄새가 난다 밀싹 냄새 함께 난다 기운차게 자전거 바퀴 돌린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순간 없으리 안녕 지금 이 순간 너 잘 존재하길 바래 그다음 순간의 너도 잘 존재하길 바래

자전거 바퀴 돌리는 달리아꽃 빨강 꽃잎 흔들며 인사한다 다음 생에 코끼리 될 꿀벌 자기 몸속에서 말랑한 귀 두 짝 꺼낸다 방아깨비들의 캐스터네츠 샐비어 꿀에 취한 나비의 탭댄스 사랑에 빠진 자전거 되기 전 걸어온 적 있는 오솔길 따라 숲의 모음들 홀씨처럼 부푼다 아, 에, 이, 오, 우, 아, 아,

만약에 말이지 이 사랑 깨져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해도 안녕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달려간 이 길을 기억할게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행복한 생성의 기억을 가진 우리의 어린 화음들아 안녕

 

 

 

사랑의 거처

김선우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 「장자」 인간세편

 

 

살다 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 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어여쁜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잘디잔 보랏빛 총총한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곱게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을 채집하며 날갯짓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을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함께 가락을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나무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을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 어여뻐

아주 잊듯이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사랑의 정원

김선우

 

1 - 사랑이 와서 그대여

내 속에서 그대가 태어나고 싶어 하는걸

알았을 때 사랑이 왔어요

사랑이 늘 환한 것만은 아니어서

고통이 참하게 톱니 물려 있었지만

내 속에서 그대가 태어나고 싶어 하는걸

마음 다 해 돕고 싶었을 때 사랑이 왔어요

사랑이 와서 그대여

그대가 더 잘 사랑할 수 있게

못물을 가득 지피고 다리를 놓았어요

그대가 나를 향해 꼭 이 마음인 걸 알아챈 순간,

못물 반짝였어요 울창한 미리내 속

우주의 한 점 풀잎이 흔들렸던 걸까요

인드라의 이슬이 풀잎의 손금을 따라

그대에게서 내게로

내게서 그대에게로

흘러들었던 걸까요 오래 전 그대 바라보던

내 눈동자에 이런 못물 들어있었죠

비 지난 뒤 정원의 조붓한 목덜미에

살풋 오래 앉아 놀던 연꽃 그늘 메아리

한 사람을 위해 복을 지은 뒤

만 사람과 나누느라 아팠다고 말하네요

아파서 환했다고도 말하네요

무명을 헹구며 우네요 웃네요

사랑이 와서 그대여 울고 웃는 것 모두

내 속에서 태어나고 싶어 한

그대인 걸 알겠어요

 

 

2 -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 네 본디 얼굴은 어떠했느냐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이여

그대와 나 꽃속에 들어가네

그대와 나 꽃속에 들어가

천 개의 꽃잎을 보네 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마다

천 개의 꽃잎 가진 연꽃이 들어있어

처음 연꽃보다 작거나 크지 않네

상한 데 하나 없는 비로자나 비로자나

그대가 온 곳 몰라도

그대가 간 곳 몰라도

그대와 나 꽃속에 들어가네

그대와 나 꽃속에 들어가

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 속에

천 개의 꽃잎 가진 그대가 핀 걸 보네

 

 

 

산청여인숙

김선우

 

여행 마지막 날 나는 무료하게 누워 흰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여관이 으레 그렇듯 사랑해, 내일 떠나 따위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벽과 벽이 끝나고 만나는 모서리에 빛바랜 자줏빛 얼룩,

기묘한 흥분을 느끼며 얼룩을 바라보았다

두 세계의 끝이며 시작인, 모서리를 통해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다래순 냄새가 났다

다른 세상의 대기에 접촉한 순간 놀라며 내뿜는 초록빛 순의 향기,

머리를 받쳐준 그녀는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의 눈 속에서 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예요,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으며 내가 말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선 온갖 냄새가 뿜어나왔다

포마이카 옷장의 서랍 냄새, 죽은 방울새에게서 맡았던 찔레꽃 향기,

불에 덴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여름 소나기의 먼지 냄새,

엄마의 속곳 냄새......

세포 하나하나에 심장이 들어선 것처럼 나는 떨었다

들어왔지만 들어온 게 아닌, 마주 보고 있지만 비껴가는 슬픈 체위를 버려......

탄성을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잘 마른 밀짚 냄새, 허물어진 흙담 냄새,

할머니 수의에서 나던 싸리꽃 향기, 오월의 가두에

흩어지던 침수향을 풍기며 그녀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모든 시공이 얽혀 있는, 단 하나의 모서리로 그녀가 돌아간 뒤,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맡았던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상냥한 지옥

김선우

 

너와 너가 모여 너를 만든다

너와 너와 너가 모여 나를 만든다

못과 나무와 입김이 모여 책상을 만든다

햇살과 고양이 등뼈가 낮잠의 폭포를 만든다

이슬과 우렁이가 별의 밥을 만든다

공포와 갈망이 할 일 많은 신을 만든다

너와 너와 너가 만나면 너와 다른 너가 된다

별 하나에 너와 별 하나에 너처럼 끊임없이 다른 너가 된다

너와 너는 나를 합성하고

나와 나는 너를 합성한다

너는 나에 의존해 너가 되고 나는 너에 의존해 내가 된다

어제는 죽음에 의존해 오늘의 붉고 투명한 꽃술이 된다

마그마는 중력에 의존해 지구의 심장이 된다

눈물은 웃음에 의존해 낡았으나 해맑은 아침이 되고

즐거운 함성의 고요한 훌쩍임

반짝이는 새들의 웃음

모든 것이 영원한 천국은 얼마나 지루하겠니

불변이 없으므로

붙들릴 게 없다

소유할 게 없으므로

자유다 안녕!

마지막이란 없다는 것

심지어 나의 죽음 앞에서도

고마워 내 상냥한 지옥, 오늘도 안녕히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김선우

 

멀리 갔다 돌아오는 새들

날개 끝에서 흩어지는 불꽃들

 

어딘가 도착하기 위해선

바람을 탄 채 바람에 저항하며

스스로 방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보다 묵직한 장엄은 -

날기 위해선 어딘가에 발 디뎌야 한다는 것

생명은 몸 닿을 곳이 필요하다는 것

'새처럼'이 아니라 '새조차도'라는 것

날개는 발 다음이라는 것

 

 

 

생리(生理)

김선우

 

달걀을 깨는데 달걀 속에서

피 묻은 노른자와 흰자위가 쏟아졌다

 

노른자와 흰자위의 경계에 붉은 혈관들이

가느다란 실금을 이루며 멍울져 있었다

  

심장을 이루려 뒤채던 것이거나

고독한 붉은 벼슬이나 날개를 향해 가던 것들

  

장마 끝의 돌연한 폭염처럼

냉장고 속에서 핏덩이들이 쏟아졌다

 

 

 

석양에 들다

김선우

 

국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길이 내 몸을 지나갔다 유월에 보았던 나무들은 베어지고 없었다 어린 풀잎들이 내 어깨를 뒤척이는 소리, 너무도 일찍 인사도 없이 석양은 수천의 날벌레들과 함께 묻힌다 허공에 남긴 공중 무덤에 무어라 애도의 말을 해야 하는데, 내 실어증 속에서 바람이 흔들리고 쓸쓸해진 뒤에야 어린 꽃 하나 겨우 향기를 놓아준다 이 별은 지금 칠월, 붉은 절개지가 두근거리며 핏물을 쏟았다 이상하지 않니, 내 심장에 왜 저기 놓여 있을까? 석양을 향해 속죄하려 하면 길은 끊긴다 끊긴 길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붉은 뱀의 허물이 가로놓여 있었다 소멸의 열망은 너무 일러도 언제나 너무 늦고 사월에 아름다웠던 꽃들은 오월이면 차가워졌다 빈 들판이 절개지에 혀를 대어주는 시간, 국도를 걷고 있었다 아니다 길이 내 위를 걷고 있었다 칠월과 만난 것도 여기 칠월과 작별한 것도 여기, 저물녘 잠깐 아름다웠던 뱀의 허물 속에서 바람이 맑은 피처럼 흘러나와 딱딱하게 굳어갔다

 

 

 

선운사, 그 똥낭구 - 불혹의 누이 영덕 스님께

김선우

 

선운사에 와

해우소 앞 은행나무 아래 잠시 앉았습니다

이상한 냄새에 내 뒤춤을 자꾸 흘끔거렸는데

갓 여문 은행 열매가 피우는 냄새였습니다

 

애기똥 냄새...... 달작지근한,

저렇게 대기 속에 하초를 활짝 펼치고

배내똥 같은 열매를 길러낼 수 있다면

 

당신 생각이 생각났습니다

폐소공포증을 앓는 당신이 지하 서울역에서

황급히 뛰어 올라가 파하, 하던

그 계단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바랑을 지고 플랫폼을 들어서던

당신이 문득 그랬지요...... 썩자......

푹 썩어 맑은 물 한 국자 우려낼 수 있다면

 

목어가 울립니다

짭쪼롬하니 곰삭은 목어 소리 속에

온갖 허드렛물 이윽히 발표시키는

선운사 이 똥낭구가 나를 때립니다

 

 

 

성선설을 웃다

김선우

 

자연석 남근을 아홉 개나 들여놓은 지리산 온천이었네 노천탕에 몸을 뉘고 아기자기 참 잘생긴 남근석들 바라보네 아홉 남근이 온천탕에 와 있으니 천왕봉 마고할미 심심해서 어쩌나 산수유 졌으니 산벚꽃 간질러 철쭉을 내라고 꼬시는 중일 텐데 꽃을 내는 일만큼 큰 하늘이 어디 있나 수고 중인 우리 마고 어머님께 저 남근 두어 개 꽃수레 태워 보냈으면 싶어지는 내 마음을 키득키득 웃으시는지 아홉 남근 열 수레에 실어 내보내도 아홉 남근이 다시 남으니 걱정 말라 하시는 듯 입술이 귀에 걸린 얄상스레 늘씬한 흰 구름을 보이셔서 암요 그럴게요 세상 젤로 착한 길이 꽃길이지요 햇살 속 뜨듯한 물속에서 온몸의 털들이 찰방찰방 저 좋은 데로 쏠리는 느낌 이윽이윽히 즐기는 한낮

 

 

 

소낙비

김선우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어느 날은 온종일을 날카로이 가릉거리다가 턱을 쓰다듬는 내 손끝을 날렵하게 깨물고 놀란 내가 등짝을 때려도 떨어지지 않던 날처럼 햇빛 드는 쪽창가에 앉아 배어 나온 피를 할짝할짝 핥아먹던 날처럼 너를 안다가 나도 모르게 송곳니가 가려워져 너의 빗장뼈, 너의 목 언저리, 너의 귓볼 깊숙하게 날랜 이를 박고 싶은 날처럼

 

소낙비 내린다

송곳니를 박으며

핏물을 할짝이며

 

쪽창에 몇 방울 신산한 것이 되어 뭉쳐 있는

향그러운 비린내

 

소낙비의 어금니와 송곳니 사이로

내가 걸어 들어간다

 

얼음장을 끌어안고 산 것과 죽은 것 사이를 드나들던 겨울 연뿌리처럼

계절이 바뀌기 전에 몇 광주리의 피를 들이켜야 했던 날들처럼

서로의 몸에 깊숙이 이를 박은 쪽창과 창틀처럼

 

 

 

소 발자국을 보다

김선우

 

1

선짓국을 먹고 있었다

숟가락 꽂힌 뚝배기 주둥이를 따라

무덤 안쪽은

흙 한 줌이거나 뜨거운 피,

스타킹이 자꾸 말려 내려가던

골목길의 여자애처럼 맨드라미는

자꾸 자라는 자기의 목이

불안하다

 

 

2

창밖 맨드라미가

붉은 혀를 깨물고 국그릇을 들여다본다

뭔가 더 드시고 싶어 칭얼대다가

할머니는 죽었다

식탁 위

붉고 우련한 한 방울 국물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3

누군가 내 식탁에 공양해놓은

피 한 바가지

무덤 안쪽은

흙 한 줌이거나 뜨거운 피,

할머니는 새끼 낳은 어미 소의

늘어진 질구 가까이에서

여전히 배가 고프고

뭔가 드시고 싶으시다.

 

 

 

수타(手打)

김선우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반죽이던 것이

메기고 치대고 어르고 빗장 걸며

치열하게 엉겨붙던 것들이

자물통을 열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제곱승으로 길을 내며 기다란 면발들이

자기 알을 파먹으며 실을 뽑는 거미처럼

유연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다

 

저런 곳에 문이 있다니!

 

허공에서 날렵하게 열렸다 닫히곤 하는 문 앞으로 걸어간다

가볍게 집어올려져 덩어리 반죽 속으로 들어간다

컴컴하고 물렁거리는 알,

속에서 메기고 치대고 어르고 빗장 걸며 기다린다

저 손이 나를 다 파먹을 때까지

손가락 끝에 매달린 자물통을 노려보면서

 

 

 

술잔, 바람의 말

김선우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유리잔 이전이었던 세계, 바람이 나를 낳고

달빛이 이마를 쓸어주던 단 한 줌 모래이던 때

그때 아직 그리움은 배냇누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내게로 온 그녀는 날개 상한 벌을

백일홍 붉은 꽃잎 속에 넣어주던

마음을 다치기 이전의 그녀였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었다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강물을 길어왔고

입을 것이 없었으므로 맨몸인 우리는

상처에 꽃잎을 달아줄 수 있었다

한 줌 모래이던 사금파리 별을 잉태했던 우리는,

 

날이 밝기 전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은 지워져 달빛도 백일홍 꽃잎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몇 마디 욕지거릴 씹어뱉고 독주를 들이켜더니

화장을 고치고 나가버렸다

내 가슴에 선명한 입술 자국,

붉은 씨방을 열고 백일홍 꽃잎 떨어져 내렸다

 

 

 

숭고한 밥상

김선우

 

밥 잡채 닭도리탕 고등어자반 미역국

이토록 많은 종족이 모여 이룬

생일상을 들다가 문득, 28년 전부터

어머니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씨뿌려져

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

배냇동기 아닌가,

내내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생각이

 

지금 먹고 있는 닭 한 마리

내 할아버지를 이루었던 원소가

누이뻘인 닭의 깊은 곳을 이루고

누이와 살을 섞은 내 핏속엔 지금…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

비켜 갈 수 없는,

무저갱의 밥상 위에

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

 

어머니가 나를 잡수실 수 있게 말이지요

 

 

 

시(詩)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김선우

  

'나'를 읽을 때 '나들'이라고 자주 독해한다

1인칭 복수형이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나들'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읽는다;

 

우는 소녀여 네 눈물 때문에 내 두 눈이 빠질 듯 아프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으나 허름한 구름처럼 물방울 뼛조각을 떨구고 말았다

네 슬픔 때문에 목젖이 부은 오늘의 나는 밥을 삼키고 싶은 나와 삼킬 수 없는 내가 샴 자매처럼 붙어 있다 갈팡질팡하는 '나들' -

 

점거당한 심장 단호한 물질의 말이 우리를 먹어 치울 때

시인과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이들만이 아픔에 순진하게 공명한다

누군가 아파서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이것은 제 칠감(七感),

인류의 진화가 아름다워진 숨은 이유

 

지상에서 더 이상 시가 읽히지 않을 때

너의 아픔에 덩달아 아픈 '나들'은 합리적으로 사라지고

'나'이거나 '너'인 세상만 질서 있게 퇴화하여 남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첫 번째 이유

 

 

 

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김선우

 

강릉 바닷가에 사는 아홉 살 조카 서연이, 해먹에서 놀다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다.

왕왕, 왈왈왈, 캉캉, 크앙크앙, 와릉와릉...... 산책길에 만난 이웃집 강아지 생각이 난 듯. 너무 오래 짖길래 한마디 한다. "목 아프지 않아?" "쉬잇, 지금 중요한 이야길 하는 중이에요." 한참을 더 짖어대는 인간 아이가 눈부시다.

저런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아홉 살 열 살 열한 살, 어린 동생들과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싶어서 한없이 귀를 낮추던 때. 이윽고 귀가 물거품처럼 부풀고 공기 방울의 말이 내 몸으로 스르르 들어왔다 나가면서 바다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껴지던 신비한 순간들이.

오전 내내 조카를 보며 잘 늙어가고 싶은 어른으로 딱 한 가지만은 하지 않기로 한다.

네가 짖는 대신 개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면 되잖아, 이런 따위 말만큼은 하지 않는 걸로 시인 이모의 소임을 다하는 시간. 눈앞의 동심이 눈부셔 여름 아침이 투명하게 왈왈거린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김선우

 

이 골짜기에는

지나간 내 사랑의 별똥별이 묻혀 있다

손을 뻗어 만져보는 나뭇잎, 이런 느낌이라면

붉은빛이 섞인 초록 잎사귀가 분명해

 

눈 뜨지 않고도

빛깔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내 손가락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스쳐왔던가

 

초경의 나이는 얼마나 수줍게 와서

헉헉 서둘러 늙어버리고자 했던

갓 스물 스물하나 스물다섯의 열애처럼

아름다운 상처라고만 씹어 삼키기엔

우리의 깃발이 그렇게 아득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단풍 든 이 골짜기에서

서둘러 노스텔지어를 말하지 말라

한 시절의 그늘을 온몸으로 섬긴 후에야

겨울 산으로 돌아가는 자작나무

자작나무에 기대어서만 자작나무를 말할 일이다

 

별똥별, 뜨겁고 붉은 화인의 손바닥들

어느 날 그대 심장 깊숙한 유골 상자에

희고 아름다운 뼈가 다시 담기거든

가을 산으로 오라, 오후의 그늘이

정오의 햇살을 참빗질하는 이 시간에.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시간에

김선우

 

시간이……없다고? 마치 시간을 가져본 자처럼 말하는군 당신이 가진 24시간을 필요에 따라 나눠 쓴다는 듯이 시간이 든 알사탕 주머니를 소유한 관료처럼 제복을 입은 스물네 개의 병정 인형이 흰 계단과 검은 계단을 꾹꾹 누르며 악보에 적힌 대로 안녕하게 행군한다는 듯이 이봐, 모른 척하고 싶겠지만,

om의 초승달 속에서 검은 혀들이 자라나며 째깍, 째깍, 째깍거리고 검은 혀의 뿌리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의 족보를 추적하다 권총을 빼 드느 누군가 있다 고유한 자신을 살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잔인하고 우스꽝스러운 중독된 시간에 대하여……살의를 갖기 시작한,

반가워, 이런 노래를 들어본 적 있나.

시간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이 시간을 가질 수는 없어. 당신이 사라지면 시간도 사라지지. 왜냐하면 당신이 시간이니까. om의 초승달로 어릿광대를 보내줘* 당신…… 내가 아직 삶 이전이라는 걸 알아챈 내게, 어릿광대의 찢어진 붉은 모자를, 따스한 탄환을, 오늘 밤은 살의 가득한 찬란한 훈풍을, 끼이익,

 

*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Send in the Clowns」 : 뮤지컬 「A Little Night Music」의 삽입곡.

 

 

 

시인 것

김선우

 

어느 새벽 시를 두 편 썼다 󰡒이게 시가 되는가?󰡓 한 사흘 골똘히 들여다보다 한 편을 골라 들고 한 편은 버렸다?

시가 되겠다 판단한 시 한 편, 한 문장 한 구절 한 글자씩 뜯어보며 한 이틀 매만지다 벼락, 회의가 든다 󰡒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가 시에 갇혀버린 느낌 '시가 된다'는 느낌이 다시 감옥이 되어버린 느낌, 시가, '시가 된다'는 느낌을 깨고 나올 때까지 나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시가 아니려고 하는데 결국 시인 것 시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끝내 시인 것 파닥파닥한 시의 지느러미에 경계와 심부를 동시에 베인 듯한 여기를 베고 저리로 이미 흘러가는

그런 시를 기다린다 영원을 부정하자 사랑이 오듯이 영원을 부정해야 사랑 비슷한 것이라도 오듯이

 

 

 

시체 놀이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알 산새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신(神)의 방

김선우

 

이런 돼지가 살았다지요 반들거리는 검은 털에 날렵한 주둥이를 가진,

유난히 흙의 온기를 좋아하여 흙이랑 노는 일을 제일로 즐거워했다는군요

기른다는 것이 실은 서로 길드는 것이어서

이 지방 사람들은 통시라는 거처를 마련했다지요

인간의 배변 장소와 돼지우리가 함께 있는 아주 재미난 방인 셈인데요

지붕을 덮지 않은 널찍한 호를 파고 지푸라기 조금 깔아준 방 안에서

이 짐승은 눈비 맞고 흙과 똥과 뒹굴면서 비바람 햇볕을

고스란히 살 속에 아로 새기게 되었다는데요

음식물 찌꺼기며 설거지물까지 버릴 것 없이 모아둔 큰 독 속에서

한때 빛나던 것들이 제 힘으로 다시 빛날 때 발효한 이 먹이를 돼지가 먹고

돼지의 배설물은 보리밭 거름으로 이쁜 보리들을 길렀다는데요

그래도 이 짐승의 주식이 사람의 똥이었던 것은 생명은 생명에게 공양 되는 법이라

행여 남아 있을 산 것들의 온기가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될까

두려운 때문이 아니었는지 몰라

나라의 높은 분이 보기에 미개하여

시멘트 네 포대씩 무상 지급한 때가 있었다는데요

문명국의 지표인 변소를 개량하라 다그쳤다는데요

흔적이나마 통시가 아직 남아 내 몸 속의 방을 향해 손 내밀어 주는 것은,

똥 누고 먹는 일이 한 가지로 행해지는 그곳을

신이 거주하는 장소라 여긴 하늘 가까운 섬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쓸쓸하다

김선우

 

쓸쓸하다,는 형용사

하지만 이 말은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아나고의 하품

김선우

 

언젠가 횟집에서 아나고 한 마리 회 뜨는 걸 보았을 땐

머리 쳐내고 껍질 벗겨내면 그제사 퍼득퍼득,

몸통 전체로 희디흰 슬픔의 가시 같은 게 되어

자꾸 머리를 찔러대는 걸 보았을 땐

머리는 점잖게 거의는 고독하게 한번 크게 입 벌려

생애 마지막 하품을 하고는 영영 입 다물어버리는 것이었는데

한 생명이 몹시도 고적해졌구나, 나는 조금 슬펐더랬다

 

소록도를 지척에 둔 녹동 앞바다,

경매로 낙찰된 한 바구니의 아나고가 껍질 벗겨져

마흔 개의 머리 차례차례 입 따악 벌려 생애 마지막 호흡

천천히 행하는 걸 보았을 땐 웬일인지 슬픔이니 고독이니

끼어들 자리도 이미 없고 이상스레 차분한 적멸,

같은 것이 내 마음에 공(空)으로만 번지는 것이었다

 

원래 그들이 그러하였듯 돌아가야 할 무슨 연유라도

뜬금없이 생겼나 보구나 이렇게만 생각이 들고

아낙의 무심한 칼질과 아나고의 길고 조용한 하품을

그저 지켜 보는 것이었는데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냄새가

좀 흘렀지만 모든 과정은 이를 데 없이 평화로웠다

 

눈을 들면 지척에 흰 사슴과 문둥이의 섬이 보이고

내 머리에선 감청빛 뿔이 조금씩 돋아나

꼭 그만큼 손마디가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식탁

김선우

 

사마귀는 사랑 속에서 살을 나눈다

사랑한다고 믿을 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식탁

당신을 안고 빛나는 어둠을 먹으러 가고 싶다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김선우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아욱국

김선우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

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

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그 손이 짚어준 저녁의 이마에

가난과 슬픔의 신열이 있었다면

그보다 더 멀리 간 뻘밭까지를 들쳐 업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푸르른 관능의 힘,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

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 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

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아직

김선우

 

-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꽃 피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 시인의 부음이 그 전에 당도할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슬프지 않다고

습관이 되지 않았다고 아직

부재를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고

인간의 마을에 구름의 여린 눈꺼풀 위에

문 닫은 나무들의 냉담 위에

비린 바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붉은 바람이

 

여러 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깃발을 흔드는 죽은 시인이여, 장미 열매를 쪼개고

붉은 차돌을 꺼내 손에 쥔 아직 살아있는 시인이여 장미 덩굴 국경을 건너

 

가로수 밑 식탁에 작년 꽃의 두개골을 올려놓지 말 것

기억을 두려워해 기억을 배신하는 눈보라

식탁 위 말라붙은 심장이

붉은 장미 열매의 장화를 신고 눈보라 속을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자여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천둥소리 밑으로

웅크려 시를 듣는 자여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절망 때문에 질투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경쟁 때문에 증오 때문에 냉소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수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시취를 맡았다는 개들 아직 없고

미래가 중단되었다는 진단서 아직 없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방부된 속삭임 속에

아직 살아있는 시인은 죽을 때를 기다렸다

 

저 숱한 죽음의 이유는 비루하다 최선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말을 지껄이는 시인의 매장을 바라는

은밀한 마음들 애도하며 시인은 쓴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라고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검은 밑줄이

시인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밑줄의

오른쪽 끝에 힘이 들어가 씨앗처럼 잠시 반짝였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죽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꽃이 와야 할 필요 없어진 지 오래인

 

아직

사랑해서 죽은 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애무의 저편

김선우

 

웃통 벗고 수박을 먹는데

발가락에 앉았다 젖무덤을 파고드는

파리 한 마리

손사래도 귀찮아 노려보는데

 

흡, 부패의 증거인지도 몰라

 

눈치챈 걸까 이제 아무도 못 믿게 돼버린걸

구겨진 발톱, 숱하게 생발을 앓아온 희망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소화제 몇 알

비굴하지 않게 예스라고

말할 줄 알게 된 것도 다 들통나버린 걸까

 

질기고 안전한 아랫배 속에서

냄새를 피우는 영혼의 끌탕

(왜, 노출된 내장만이 추한 것일까)

 

섹스하고 싶어,라는 말 대신

미치도록 사랑해 널,

그의 내부도 부패 중인 걸까

어지러워, 나의 절정에

왕성하게 생식하는 저 황홀한 잡균들!

 

 

 

양변기 위에서

김선우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 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 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 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 나던

그 똥 한 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어느 날 석양이

김선우

 

하루가 저물어간다,

참 잘 곰삭은 저 저녁 풍경이

실은 천연스레 뒤를 보이고

앉아 볼일 보는 크낙한 엉덩이라면

저물녘 저 태양이 문이라면

금빛 항문-

어슴푸레 열리는 새벽으로부터

한낮 지나 저물녘에 이른 우리의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없이 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의 한 오분 시원한 용변과 같다면

수성이랄지 목성은 그녀의 젖가슴쯤

명왕성이랄지 천왕성은 쌔근거리는 정수리 문쯤이 될까

금빛 거웃 바람결에 흔들려 드문드문 하늘자리

젖는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할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

저물어간다,

허방지방 거미줄 치고 있는 목마른 나의 하루는

긴가 너무 짧은가 아득한 물병자리 옆얼굴이 슬몃 보였는데

뭉게구름 느릿느릿 금빛 항문을 닦아주며 흐르는데

 

 

 

어떤 비 오는 날 - 김수영의 방(房)을 생각하는 빈방(房)에서

김선우

 

1

가지고 있던 게 떠났으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꿈 없이 사는 일이

아주 무거워

 

꿈이 떠나서

몸이 무거워

 

 

2

세상의 물방울들아 쪼개진 것들아 쪼개져서도 흐르는 덜 자란 혁명의 격렬한 불면증들아 빙하에서 풀려난 물방울들이 더러워진 허공의 상주가 되는 비애를 생각한다 빈방울 마저 비운 창백한 몸들아 물방울 하나씩에 사금파리처럼 꽂힌 핏물을 보게 된 오늘의 내 시력이 무겁구나 눈 속은 뜨겁고 빈방은 무거우니 오늘의 숙박부에 나는 이렇게 쓴다

 

닥치시오. 나는 다만 물방울만 한 방을 원하오

 

 

 

어떤 아침

김선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수영을 하고 싶었다

눈 내리는 호수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호수 속에서 내 몸은 뜨거웠고

눈은 나의 수면에 닿기 전에 녹아 사라졌다

호수 표면에 눈은 쌓이지 않았고

호수물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다

 

덕분에 나는 노래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

동그란 눈물을 내놓기 직전의 가죽지갑 같은 얼굴로 나는 노래를 불렀다

 

내리는 눈의 덧없음을 나를 사랑하죠

사라져가는 존재들의 쓸쓸함을 사랑하죠

 

날이 풀리고 호수에 비가 내렸다

나는 태어나 처음인 것처럼 호숫가에서 비를 맞았다

젖은 페이지를 넘기듯

아침을 펼치는 중이었다

 

책을 펼치기 전 나는 그 책을 다 읽었어요

책을 펼친 후 내가 읽은 것을 단숨에 훅 불어

빈 페이지에 활자를 가득 채워 넣었죠

그것을 '책'이라 부른 사람은 아주 한참 후에야 간신히 나타났죠

 

 

 

어떤 출산

김선우

 

내 거처에 멧비둘기 한 쌍 날아와 둥지를 짓더니 보얀 알을 낳았네

하루에 한 알 다음날 또 한 알, 알을 낳을 때 어미는 너무 고요해서

몸 푸는 줄도 몰랐네 성긋한 해산자리 밖으로 일렁이며 흘러넘친 썰물……

알 속의 아기는 한 살인가 어쩐가 지금쯤 겨드랑이가 간지러울까 어떨까

뜻밖의 식구에 골몰하다 갑자기 든 생각은, 실은 발가락도 날개도 다 만들어진 다음인데

반가사유로 알 속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건 아닐까

나가야 할까 어쩔까 세상 밖은 정말 세상 밖인 걸까……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 다음엔 왠지 좀 억울한 것이 나는 아무래도 반쯤은 쫓겨난 것만 같아,

알로 나를 낳아주고 세상 밖으로 나갈지 말지는 저처럼 내게 맡겼으면 좋았을 걸 싶어지는 거였네

멧비둘기 부부는 무량하게 알을 품지만 다만 그뿐 강요란 없어서……

열이레가 지나고 알 하나에 고물고물한 아기가 나왔는데 다른 알에서는 소식이 없었네

엄한 생각 탓에 동티난 건 아닌지 갑자기 내 마음이 덜컥거렸는데……

이틀을 더 품어 보던 멧비둘기 부부가 묵언 중의 알 앞에 마주 앉아

껍질에 가만 부리를 대보던 오후가 있었네 너무 고요해서 나는 못 들었지만,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선택한 아기에게 축복의 말을 주는 듯했네

알 속의 그가 선택한 탄생 이전이 그것대로 완전한 생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네……

자기가 선택한 세계 속에서 온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보얀 알과 멧비둘기 부부의

극진한 고요 앞에 합장했네 지상의 새들이 날 수 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최선일 뿐 모든 새가 날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자고 일어나면 배 밑에 가시풀 같은 깃털이 묻어 있는 열아흐레였네

 

 

 

어떤 포틀래치

김선우

 

겨울 사막을 막 건너온 길이었다. 홑겹 단화 밖으로 맨발목이 발갛게 드러난 여자가 딸애의 누더기 바지를 벗기고 철화덕 옆에서 오줌을 누이고 있었다. 여자도 딸애도 얼어 터진 볼이 달빛처럼 붉어서 내 손이 여자를 향해 사막 식물처럼 뻗어갔다. 여자가 달빛을 털며 철화덕에서 꺼낸 군고구마 한 봉지를 넝쿨에 감아 주었다. 3위안이라 했다. 딸애가 나를 쳐다 보며 물 번진 성애꽃처럼 웃었다. 발갛게 언 엉덩이를 아직 내놓은 채였다. 나는 10위안을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거스름을 찾는 동안 딸애의 물기가 내 넝쿨 시든 잎사귀 몇 장을 적셔주었다. 그걸로 충분했으므로 나는 거스름을 사양했지만, 여자가 내 넝쿨을 휘잡아 채며 검고 큰 눈망울로 나를 닥아세웠다. 부야오*!

여자는 거스름을 주지 않앗다. 봉지를 도로 거두어 고구마를 미어지게 더 담은 후 내 넝쿨에 다시 올려 주었다. 여자가 무어라 빠르게 소리쳤고, 고개를 갸웃하자 내 손을 잡고는 알아들을 수 잇을 만큼의 말만 또박또박 넝쿨 위에 얹었다. 게이 니** , 리우***!

난전으로 파며 감자를 찰러 다녔던 엄마도 누군가의 넝쿨에 선물을 매달아준 적이 있을 것 같다. 필요없다! 대신 이건 선물이다! 적선을 받지도, 거스름을 돌려주지도 않은 여자는 군고구마 세 몫을 한번에 팔았을 뿐이었다. 함박눈처럼 여자가 판 것은 선물이 되었다. 여자 옆에서 어린 나도 누군가의 넝쿨을 적셔줄 수 있었을까. 너에게 줄게, 선물이야. 길 끝 여자의 달빛이 내 넝쿨로 번져와 말 배우는 아이처럼 입속이 환했다.

 

* '필요 없다, 이러지 말라'는 뜻의 중국어.

** '너에게 준다'는 뜻의 중국어.

*** '선물'이라는 뜻의 중국어.

 

 

 

어라연

검선우

 

강원도 정선

어라연 계곡 깊은 곳에

어머니 몸 씻는 소리 들리네

 

- 자꾸 몸에 물이 들어야

숭스럽게스리 스무 살모냥……

젖무덤에서 단풍잎을 훑어내시네

 

어라연 푸른 물에 점점홍점점홍

-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

 

어라연 깊은 물

구름꽃 상여 흘러가는

어라연에 나, 가지 못했네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김선우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소년을 끌어안은 채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자기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흘러내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 기억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네

응응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 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나도…… 사생어른이야……

 

 

 

어리고 푸른 어미꽃

김선우

 

사람이 하려면 어림없는 것인데

봐라, 하늘이 하시는 일인 거라.

마당에 내려선 어머니가 합장을 하였습니다

가뭄 끝에 단비 땅을 적시어

땅냄새 물큰하니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봉인을 풀듯 나직한 그림자 적시며

생땅 냄새,

푸른 꽃내음이 훅 끼쳐 왔습니다

 

50억살 먹은 어리고 푸른 꽃이

50억년 찰나 동안 피워올린 몸의 향기

 

라일락이랄지 감꽃이랄지

이윽한 것들의 향기 속에 배어 있던 흙내음이

어린 어미꽃의 몸냄새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가뭄 끝이었습니다

 

 

 

어미 목(木)의 자살

김선우

 

그녀를 지날 때 할머니는 합장을 하곤 했다.

어린 내가 천식을 앓을 때에도 그녀에게 데리고 가곤 했다.

정한 물과 숨결로 우리 손주 낫게 해줍소.

그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내 목덜미를 만져주곤 하였다.

 

오래된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할머니가 오줌을 누고 계셨다.

반가워 달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 오줌 방울에 젖은,

반짝거리는 은행잎이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날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 땅에 새 길이 포장될 거라고,

길이 나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은근히 힘주어 한 사내가 말하였다.

 

이상도 하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른 건. 꿈 없는 길,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는지도 몰라.

부러진 가지, 그녀가 매달았던 열매 속에서 피흘리는 엄마들이 걸어나왔다.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은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이 있었지만,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 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2

그날 내가 어머니의 살점을 씹으며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공, 거대한 눈동자인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안으로 확 열리며

눈동자를 감싸 쥐고 있던 실핏줄들이

일제히 버석버석 말라가기 시작하는데,

그날 내가 본 것은 숯 된 거대한 자작나무 가지였을까

강물에 띄워진 바리데기, 저를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을 헤매다 온 한 따님이었을까

환신, 환신치고는 고약스레 서러운 나뭇잎 한 장을

나는 조심스레 베어물었던 것인데,

검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늙은 혀 한잎은 배냇적처럼

얽혀들어 젖지를 못하고 서그럭서그럭

숯돌 소리로만 제 몸을 갈던 것이다

 

그랬지 저 눈동자, 허공을 발라내어

아직 따뜻한 살점 당신 숟가락에 얹어주고 싶었지만

바리, 내 어머니 죽음은 한 쌍으로 날아들더라

저승을 헤매어 구해온 영약은

기진한 그네의 희뽀얀 젖줄기가 아니었을까 바리,

피곤에 지쳐, 불어 터진 젖을 아비에게 물리고

한잠 곤히 든 저 겨울나무의 쐐기풀 같은 육신이 아니었을까

생이라는 이름의 죽음이 더 지독하더라.

거듭거듭 제 죄로 죽을병에 걸려 앓아눕는 아버지,

이제 그만 죽어주세요.

달같이 벗은 자작나무 온몸에 열꽃이 돋아

꽃잎을, 하혈을, 마지막 꽃잎을,

강물처럼 쏟아내는 밤이 오고 있었는데

 

방울과 칼을 주렴 아가야

요령 소리를 내며 나뭇잎 혼절하게 흔들리던 그 밤에

내가 씹어삼킨 메마른 혀는 어느 눈동자에 박힐 칼이었을까

 

 

4

죽은 엄마를 데려왔다 벌판으로부터. 남루한 허리통을 드러내고 버려져 있었으므로.

 

염을 하고 수의는 입히지 않는다 잠그지 못한 단추 같은 마른 잎사귀 몇 개 마저 따내고 가파르게 굴곡진 옹이 눈 속에 오래전 말려둔 수레국화를 꽂아주었다 자살한 영혼은 환생하지 못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말하자면 유기된 시체와 사랑에 빠진 셈일 텐데 나는 단지 그녀가 편안하게 말라가길 원했을 뿐이다 한때 아름다운 그늘을 빚던 손금을 가차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

 

그런데 말이다 여리고 긴 목을 지닌 연둣빛 풀 하나가 옹이 눈 속에서 돋아나온 거였다 기이한 통증에 나는 서둘러 주인집 정원 볕 드는 귀퉁이에 죽음 엄마를 다시 내다 버렸는데

 

한동안 잊었던 그녀가 문득 생각나 내려가 본 해뜰녘. 거멓게 속이 타들어 간 이 나무 밑둥치가 말이다 구멍 속에서, 펄럭이는 수천의 손 수천의 잎새 흰개미 알 매미 껍질 보드라운 음지 식물들이 난리법석을 떨며 살고 있더란 말이다 보잘것없는 제 아기들의 어미 된 것들이 죽은 나무 둥치 갈라 터진 틈새마다 그득그득 흰 빵을 물려주고 있더란 말씀이다

 

유기했던 내 사랑의 그늘진 자리에서 죽음을 껴안으며 젊어진 엄마가 아침 소세를 끝내고 말갛게 나를 올려다보는 거였다

 

 

5

반쯤 죽은 호두나무가

파란 호두알을 매달았다

 

호두알 속에 옹송그린

쪼글쪼글한 아기들

 

검버섯 핀 몸속에

어머니는 호두나무를 키웠다

 

태양이 폐광 위를 지나고

물통 속의 바람이 호두나무를 만지고

어머니가 산통을 앓는다

 

여울목을 지나면서

쪼글쪼글해진 호두나무

 

내 어머니는 지금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있다

 

 

 

얼레지

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 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 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엄마 냄새

김선우

 

가족들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제일 그리운 건

엄마 냄새

따뜻한 엄마 냄새

따뜻하다는 게 어떻게 냄새가 될 수 있는 걸까?

신기한 엄마 냄새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김선우

 

저 여자는 죽었다

죽은 여자의 얼굴에 생생(生生)히 살아 있는 검버섯

죽은 여자는 흰꽃무당버섯의 훌륭한 정원이 된다

 

죽은 여자, 딱딱하게 닫혀 있던

음부와 젖가슴이 활짝 열리며

희고 고운 가루가 흰나비 분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반짝거리는 알들

 

내 죽은 담에는 늬들 선산에 묻히지 않을란다

깨끗이 화장해서 찹쌀 석 되 곱게 빻아

뼛가루에 섞어달라시는 엄마 바람 좋은 날

시루봉 너럭바위 위에 흩뿌려달라시는

 

들짐승 날짐승들 꺼려할지 몰라

찹쌀가루 섞어주면 그네들 적당히 잡순 후에

나머진 바람에 실려 천․지․사․방․훨․훨

가볍게 날으고 싶다는

찹쌀 석 되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엄마는 이 괴상한 소망을 품게 된 걸까

 

저 여자, 흰꽃무당버섯의 정원이 되어가는

버석거리는 몸을 뒤척여

가벼운 흰 알들을 낳고 있는 엄마는

아기 하나 낳을 때마다 서 말 피를 쏟는다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수의 한 벌과 찹쌀 석 되

벽장 속에 모셔놓고 기다리고있는 것이다

기다려온 것이다

 

 

 

없는 꽃

김선우

 

흰 밤이었다 푸른 유리 조각을 밟으며 너에게 가고 있었다

 

꽃잎이 튀었다 핏방울처럼, 붉은 꽃잎이 돌에 가 박혔다

 

언젠가 이 돌이 꽃 필 때

최초의 씨앗이 피 한 방울이었음을 증언해도 좋은가

거기에 이미 꽃은 없을 것이므로

증언은 헛되어도 좋으리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때 너는 정말 너였을까

웃고 있는 몸의 한쪽이 어두운 너는

울고 있는 몸의 한쪽이 환한 너는

 

들숨을 쉴 때 우묵해지는 그림자에 피가 고였다

날숨을 쉴 때 가만히 부푸는 그림자, 푸른 나비가 발을 적셨다

 

흰 밤이었다 이미 사라진 번개를 아름다운 더듬이로 드리운 채

나비가 왔다 없는 꽃에게

 

 

 

여러 겹의 허기 속에 죽은 달이 나를 깨워

김선우

 

혼례의 밤이 왔지 나는 배가 고팠네 서둘러 고개를 넘는데 접시만 한 불덩이가 앞을 가로막았지 배 밑에 품은 야윈 새끼도 보여주었네 팔 한 짝 주면, 다리 한 짝 주면…… 다람쥐만 한 주먹, 토끼만 한 종아리를 다 베어주었지만 다람쥐보다 무거운 내 팔뚝이 다람쥐보다 가벼웠네 토끼보다 무거운 내 허벅지가 토끼보다 가벼웠네 콩새도 오소리도 내 몸 전체로 바꿔야만 근수가 같아지는, 두려운 만월이었네 오도 가도 못하는 고갯길, 육탈한 해골들이 바람을 끓여 빚은 혼례의 술이 넘쳤지만 다리 한 짝 팔 한 짝 엉덩이 한 짝, 베어주면 줄수록 나는 배가 고팠네 초례청에서 기다리던 오래전 죽은 달들이 내 허기를 달래러 와주었지만, 이글거리는 불덩이, 굶주린 호랑이의 둥그렇게 벌린 입속으로 무릎걸음으로 기어들면서야 알았네 초승이거나 그믐이거나, 구름 속이거나 밖이거나, 살거나 죽었거나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살린 것들 다 이렇게 두려웠겠구나 만월이었고 혼례의 밤이었네 온몸을 가득 채운 여러 겹의 허기가 참을 수 없이 슬퍼져 그대 몸속으로 통째 걸어 들어갔네 온몸을 통째 으깨어 먹였네

 

* 붓다의 전생 이야기들 중, 굶어 죽어가는 호랑이 입속에 스스로 몸을 던진 일화에서 모티프를 취했다

 

 

 

`여`에게

김선우

 

신문을 보는데 `여`가 나를 꼬나본다

백여 명 천여 명

삼만여 십만여 육백만여 오천만여

모든 집계에는 언제나 `여`가 있다

 

천의 `여`인 하나, 열 서른은 천에 포함되고

육백만의 `여`인 백, 이백은 육백만에 포함된다

`여`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거린다

 

누구도 `여`에 속하고 싶지 않지만

대다수는 `여`가 될 수밖에 없는 산술법을

태생으로 가진 무엇인가의 뱃속,

우리는 컴컴하게 처박힌 것 같은데

 

`여`에 속한 것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시간은

어디쯤에 이르러 최후의 `여`가 될까

 

 

 

여울목

김선우

 

무릉계에 와서 알았네

물에도 뼈가 있음을

 

파인 돌이 이끼 핀 돌 안아주고자 하는 마음

큰 돌이 작은 돌에게 건너가고자 하는 마음이

안타까워 물은 슬쩍 제 몸을 휘네

튕겨오르는 물방울,

 

돌의 이마 붉어지네 물 주름지네

주름 위에 주름이 겹치면서

아하, 저 물소리

내 몸에서 나던 바로 그 소리

 

나 그대에게 기울어가는 것은

뼛속까지 몽땅 휘어지는 일이었네

 

 

 

여전히 반대말 놀이

김선우

 

행복과 불행이 반대말인가

남자와 여자가 반대말인가

길다와 짧다가 반대말인가

빛과 어둠

양지와 음지가 반대말인가

있음과 없음

쾌락과 고통 

절망과 희망

흰색과 검은색이 반대말인가

  

반대말이 있다고 굳게 믿는 습성 때문에

마음 밑바닥에 공포를 기르게 된 생물,

진화가 가장 늦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가르쳐주렴 반대말이란 없다는걸 

알고 있는 어린이들아 어른들에게

다른 놀이를 좀 가르쳐주렴!

 

 

 

연두의 내부

김선우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아마도 사랑의 일처럼

 

 

 

연못을 들고 오신,

김선우

 

길 있었네 개망초 우거진 좁다란 길이었네

언제부터 그곳이 길이었는지

마을의 청년도 모른다 했네

가끔씩 낡은 경운기 쓸쓸히 그 길을 지나갔고

 

비 많이 오신 여름 그친 아침에

천둥오리 떼 길을 물고 날아갔는지

길 사라지고 자그만 실개천 생겨나 있었네

오모록한 황톳물 연못도 하나 고여

흩어진 몇 낱 깃털이 옥잠 같았네

 

그 길이 본디 개천이여, 통일벼 심을 적

물길 틀고 자갈 메워 농로로 만는 길이라고

마을 오랜 노인이 젖은 눈으로 깃털을 건졌네

물이 제 길을 다시 찾은 게라고

속눈물 고여 연못까지 덤으로 오신 게라고

 

비 많이 오신 먼 날이었네

 

 

 

연밥 속의 불꽃

김선우

 

연탄을 때는 집이었다

사북, 1989년이었고 갓스물이 된 나는

여인숙 방에 누워 겨울 연못

얼음장 위로 비죽 솟아 있던 딱딱하고 검은

연밥을 생각하였다 오래 퇴적되어 석탄처럼 시커메진

연밥 한덩이, 땅 밑이 얼마나 추웠으면

그렇게 많은 구멍을 지니게 된 걸까

삼월에도 사북은 춥고

연밥이 지닌 숨구멍은 난사 당한 과녁처럼 위태로웠지만

기이한 평화에 소리없이 문이 생기고

주인 할머니가 들어와

방바닥을 만져보고 나가는 것이었다

라면도 팔고 소주도 파는 간판 없는 여인숙

다리를 저는 할머니는 광주 사람이라 하였다

광주,라는 말이 누란이라는 말처럼 아득하였다

그날 밤 나는 달의 어두운 저편으로 누란을 떠올리고

보이지 않는 누란을 향해 타박타박

낙타를 타고 걷는 꿈을 꾸었다

낙타 발자국이 만드는 모래구멍

사막은 전부가 길이어서

발자국은 금새 모래로 채워지고 금 간 유리창에

눈보라가 불꽃처럼 타닥타닥 부딪쳤다

얼음 연못에 지펴진 모닥불꽃 타는 소리

사북도 광주도 얼음 연못이었지

얼음장 위로 비죽 솟은 연밥 한 점은

기이한 평화 속에 납골처럼 차가웠고

내가 던진 투석은 얼음을 지치며

모서리로만 날아갔지만,

연탄이 사위는 시간 할머니는 어느새

숯 지피는 처녀로 돌아가 있었다

사위는 연탄구멍 속에 얼음 연못이 따뜻하였다

1989년 나는 스물이었고

빈혈을 앓는 역사가 그 곁을 지나갔다

연밥 구멍 속으로 누군가 고요히

수혈하는 밤이었다

 

 

 

염소 신발 한 국자

김선우

 

걷다가 일없이 삐긋할 때

이 애가 나를 무거워하는구나, 생각한다

 

가죽가방 가죽옷을 갖지 않은 지 오래됐으면서

신발만큼은 진짜 가죽을 선호해온 나는

 

신발이 쿵쾅거리며 노래하는 것

맘에 드는 다른 신발에게 연애 걸고 싶어 하는 것

고단하면 잠자고 싶어 하는 것에 통 관심 없었지만

 

물소야 양아 악어야, 너의 가죽이 감싸고 있던

땅 위에 발붙이게 하는, 흰 소야 돼지야 어린 염소야

 

한 걸음을 얻기 위해 오체투지로 탁발해온

누천년 낡은 새봄이 지나가건만,

한 걸음만 더 다오

한 국자만 더 다오

여태 나는 너희들에게 투정이나 부린다

 

 

 

옆 - 고구마밭에서

김선우

 

척박한 땅이어서 더욱 단단해진

비구상(非具象)의 슬픔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을 꾹 닫은 심장 같다

 

꾸덕꾸덕한 심장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여리고 따뜻한 누군가의 목숨줄이 생겨나

너는 좀 넓은 데서 숨쉬라고 가만히 뱉어놓은,

 

주먹만 한 자줏빛 심장들이

그렇게 밭 하나를 이룬 것 같다

 

땅 밑 어둠 속

옆에서 옆으로 번져간 뿌리줄기

자기 옆의 슬픔에 가만히 기댄 듯한,

 

꽃을 본 적 없는데 꽃의 향내를 품게 된

내 캄캄한 당신의 옆

 

 

 

오, 고양이!

김선우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 받아 현미경에 얹는다

보세요, 당신의 적혈구들이예요.

몸 밖에서 나를 쏘아보는 내 피 한 방울,

수백 마리 고양이 눈알을 삼킨 듯 검사실의 모니터가

오글거리는 눈동자로 발광(發光)한다

 

어느 산길에서 갓 낳은 산고양이 두 마리를 보았다

어린 고양이들 혀를 내밀어

가을볕 냉큼냉큼 받아먹고 있었는데

이뻐서 그저 무심히 쓰다듬었던 노랑털

어린것은 다음날 죽어 있었다

어린것의 몸에 밴 사람 냄새에

어미는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한 방울 피가 방주를 밀어 올리며 범람하는 모니터 안,

싸늘하게 식은 어린것의 눈알과 제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어미의 눈알이 나를 노려본다

 

어느 깊은 새벽 검은 도둑고양이에게 돌팔매질을 한 적 있다

밤마다 쓰레기더미를 파헤쳐놓는 도둑고양이

산으로 가, 비굴하게 인간의 쓰레기 따위 뒤지지 말고

돌아가 제발, 돌멩이를 던지던 내 맨발이

가로등 불빛에 찔려 피 흘리던 밤

후미진 담벼락을 걷던 달 속에서

눈썹 성근 새끼고양이 밤새 울고

 

보아라 무엇인가 그리울 때마다 너희가 흘려놓은

저 적의를 찢어발겨 놓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얼굴을 쳐들고 나를 쏘아보던 이글거리는 눈알,

오 내 핏속의 고양이,

내 안의 그리운 것들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오늘도 몇구의 고양이 시체를 넘어왔다

이 많은 고양이는 다 어디서 오는지

국도에 눌러 붙은 수많은 고양이 가죽들 길을 물들이면서

천천히, 야금야금, 전신을 샅샅이 훑으며 스며들다가

푹신한 살에 싸여 식탁 위에 올려진 내 몸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단번에 찢어놓고 간다

식탁에 떨구어진

내 피 한 방울 속에서 나를 쏘아보는 저 수천의 눈동자들!

 

 

 

오늘은 없는 날

김선우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 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 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의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 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을 눌러 당신 목소리를 들어요

나야, 바람이 좋아

나와 함께 당신이 살아 있어 이렇게나 좋아

더 많이 아낄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날

사랑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안 할래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늘

많이 행복해서

당신과 함께 산으로 가요

없는 날의 자유

푸른 바람 속을 무한무한 걷고 달려요

 

 

 

오늘의 개더링

김선우

 

ㄱ과 ㄴ이 모여 ㄷ의 안부를 얘기한다

ㄱ과 ㄴ과 ㄷ이 모여 ㄹ의 안부를 얘기한다

ㄱ과 ㄴ과 ㄷ과 ㄹ이 모여 ㅁ의 안부를 얘기한다

 

(눈치챘겠지만, 안부란 우아한 표현이다)

  

ㄱ과 ㄴ과 ㄷ과 ㄹ과 ㅁ이 모여 ㅈ의 안부를 얘기하다

셋씩 갈라져 ㅊ과 ㅋ의 안부를 얘기하다

화제를 바꿔 ㅌ과 ㅍ과 ㅎ의 안부를 얘기하다

 

흩어진다

 

서로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 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때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밖까지 땅끝까지 강물 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딸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오브-라-디 오브-라-다

김선우

 

얼음 냄새를 따라 이곳에 왔죠

눈 오는 밤 개처럼 죽고 싶어 한 사내들이 사는 마을

그 마음들 슬퍼 예수는 광야로 갔을 거에요 오브-라-디 오브-라-다*

오늘 큰 눈 오시어 나무들의 생식기가 투명한 얼음 속이네요

이 별의 생식기가 사막 장미 열매처럼 뜨거워질 때

투명하게 일렁이는 큰 밤이 올 거에요

스무 살에 내가 사랑했던 로자는 쇄빙 도끼를 피해다녔죠

열 살에 나는 뒤란에서 혀를 깨문 엄마의 입속에

노란 수건을 틀어막으며 소리 질렀죠

죽지- 마- 죽지- 마- 미쳤어?

오브-라-디 오브-라-다. 살아서 복수해요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

사극 속의 영웅들은 저마다 편을 갈라 전쟁을 하면서

어머니의 복수! 어머니의! 라고 외쳐대죠

어머니의 이름으로 더러운 피도 맑은 강이 된다고 설교하죠

어머니들은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 관을 풀어 가시 풀 요람을 짜고

붓다는 슬픔을 피해 보리수 아래 숨었나 봐요

붓다를 보리수 밑으로 기꺼이 피신 보내고 홀로 밀밭을 베는

야수다라* * 의 슬픔 쪽이 한결 깍아지른 탁발이어서

오브-라-디 오브-라-다, 춤춰요 야수다라

깊이를 알 길 없이 눈 속을 가는 바람처럼

이렇게 한 몸이 오브-라-디 오브-라-다

열 살의 얼음 냄새에 배를 붙인 채

이토록 희게 눈이 내려 내 살이 유정해요

큰 눈 속으로 들어가니 큰 숲이 있곤 했어요

은빛 살의 켜들이 지나간 오브-라-디 오브-라-다

눈 속에서 물소리, 물소리가 흘러요

 

* 오브-라-디 오브-라-다 : 비틀스의 곡. 나이지리아에서 통하는 말. 영어로는 Life goes on.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

* 야수다라 : 석가모니 출가 전의 아내

 

 

 

오후만 있던 일요일

김선우

 

우리 동네 목욕탕 '목욕합니다' 입간판 옆

찡그리며 웃는 삐에로의 입매 같은

이발소 표지등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기 때문

허름한 건물 조가비 같은 타일이 총총 붙어 있는

창밖으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기 때문

화단이랄 것 없는 틈새에 사철나무가 두 그루

그늘 밑엔 명아주며 냉이꽃 민들레가

철마다 아름다운 허물을 보여주기 때문

민들레 꽃잎을 열고 사철나무 줄기를 잰걸음으로 걸어

나무꾼의 잔등에 날개옷을 덮어준

여자들이 하하호호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오래된 연못이 있기 때문

일요일 오후에 내가 목욕하러 가는 것은 이 때문

연못의 입구에서 늙은 개가

무화과 속처럼 붉은 혓바닥으로

떠도는 어린 개들의 샅이며 잔등을

핥아주는 풍경을 더러 만날 수 있기 때문

늙은 개의 혓바닥이 쓰다듬고 간 자리에

아득한 수심으로 고이는 연못

그곳에서 따스하게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때문

저마다의 연못을 품고 낑낑거리는

어린 개들에게서 꽃 없이 열매 맺은

무화과 향내가 배어나기 때문

 

 

 

완경(完經)

김선우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왕모래

김선우

 

강릉 정동 봄바다

오랜 지병의 어머니와

달마중하러 나왔는데

모래 한 줌 쥐니 솨아아, 봄날은 가고

모래 한 줌 속에 일곱 남매 눈망울이 영글어

 

"이쁘쟈?"

왕모래 몇 알갱이 손에 건네주신다

안 하던 일을 하면 북망이 멀지 않다는데

틀니 달칵거리며

소녀처럼 "이쁘쟈?"

가슴이 출렁한다

 

모래는 조약돌을 기억하고 있을까

조약돌은 바위였을 때를 그리워할까

 

봄바다 아득하게 밤은 깊은데

솨아아, 한 생애를 키질하는 어머니

 

늑골에서 울던 무엇의 뼈가 닳아져

손바닥 위에 반듯하게 누었나

 

대관령 고갯마루

속금 터지는 바위 한 채 달을 이고 섰다

 

 

 

요실금

김선우

 

일찍이 오줌을 지리는 병을 얻은 엄마는

네 번째 나를 낳았을 때 또 여자아이라서

쏟아진 양수와 핏덩이 흥건한 이부자리를 걷어

내처 개울로 빨래 가셨다고 합니다

 

음력 정월

요실금을 앓는 여자의 아랫도리처럼

얼음 사이로 소리 죽여 흘렀을 개울물,

결빙의 기억이 저를 다 가두지 못하도록

개울의 뿌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수액을 조금씩 흘려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한의 겨울에도 동네마다

얼어붙지 않은 개울이 한두 개쯤 있었고

나는 종종 보곤 했던 것입니다

한겨울 비루해진 개울이 뜨거운 제 살 속에서

흰 눈을 폭포처럼 퍼올리는 것을

 

먼 길을 걸어온 여자(女子)들이

흰 눈을 뭉쳐 조금씩 녹여 먹으며

겨울나무 줄기에 귀를 대고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오줌 한번 시원하게 눠봤으면 좋겠다던

엄마의 문이 눈밭 위에서 활짝 열리곤 하였습니다

 

 

 

우리 동네엔 산부인과가 다섯 개나 있다

김선우

 

월요일이 거울 속에 갇힌다 화요일이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수요일이 목요일이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 차례차례 거울 속에 갇힌다 비명을 질러대지만, 비명의 뿌리는 거울 속에 있다

금이 간 얼굴로

최00 산부인과 뒷골목에서 서성대던 여중생들, 잘게 씹은 면도날을 퉤 뱉으며 금속성으로 깔깔거리는 짧은 교복 치마가 거울 속에서 펄럭인다 담배 연기를 뿜어 올리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산부인과 뒷벽을 넘으며 꽃무늬 밥상보처럼 어룽거리고 밥상보를 젖히면 쏟아지는 식은 찬들, 멍든 손발들, 아기 울음과 구급차와 수술실과 분만실이 차례로 쏟아진다 들것에 실려 내린 퉁퉁 부은 얼굴의 산모가 밥상 한가운데, 차갑게 식은 찌개 그릇 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우두커니 거울을 바라본다

금이 간 얼굴로

월요일에 태어난 아이가 거울 속에 갇힌다 화요일에 죽은 아이가 거울 속에서 식어간다 수요일의 아이가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의 아이가 차례차례 거울 속에 갇힌다 거울은 뻘처럼 깊고 비명은 뻘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 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 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 냄새 나네

 

 

 

운주(雲株)에 눕다

김선우

 

가시연꽃을 찾아 단 한 번도 가시연꽃 피운 적 없는 운주사에 가네

참혹한 얼굴로 나를 맞는 불두, 오늘 나는 스물아홉 살.

이십사만칠천여 시간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나의 시간은 늙은 별에 닿지 못하고 내 마음은 무르팍을 향해 종종 사기를 치네

엎어져도 무르팍이 깨지지 않는 무서운 날들이 만가도 없이 흘러가네

 

운주에 올라, 오를수록 깊어지는 골짝,

꿈꾸는 와불을 보네 오늘 나는 열아홉 살.

잘못 울린 닭울음에 서둘러 승천해버린,

석공의 정과 망치 티끌로 흩어졌네

거기 일어나 앉지 못하고 와불로 누운 남녀가 있어

출렁, 남도땅에 동해 봄바다 물밀려 오네

 

참 따뜻하구나, 물속에 잠겨 곧 피가 돌겠구나

걷지 못하는 부처님 귀에 대고 속삭였네

 

달리다쿰, 달리다쿰!*

누가 자꾸 내 귀에 대고 소녀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지만

 

운주에 눕네 엄마를 기다리다 옷장 속에 숨어

홀로 든 낮잠처럼,

오늘 나는 아홉살.

낮꿈 밤꿈 지나 새벽꿈에 이른 나는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졌네

더욱 넓어진 바닷속에 누워 바라보네

동해 깊은 물,

어머니 몸속 어딘가 묻혀 있던 구근에서 꽃대가,

생살 - 물의 살을 찢고 솟구쳐오르는 것을,

핏덩어리 꽃숭어리 - 태양이 뜨는 것을

 

온 바다에 가시처럼 박혀 흔들리는,

문둥이 부처님들 사이에 누워 울었네 울지 못했네

출생 이후 나는 잠들기 시작하였으니

꽃을 벗어나고 있는 가시연꽃을

끝까지 바라볼 수 없었으니.

 

* "소녀여 일어나라"라는 뜻의 히브리어. 성서에는 예수가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 하자 소녀가 일어나 걸었다고 한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김선우

 

그 밤 축축한 언어들이 떨어져 내렸다

여자는 눈물을 다섯 번 닦았다

떠난 남자는 이제 개자식이었지만

용서받은 것 같았다

솔직했기 때문에

솔직한 것은

늘 고마운 일이었기 때문에

 

희미한 불빛도 없는 방에서 여자는 눈을 더욱 꼭 감았다

맞아, 지나간 것은 깜깜하면 더 잘 보이는 법이지

 

울고 있었다 내 동생이

눈물을 여섯 번째 닦으며 말했다

가슴에 품었던 것들이 한순간 후드득 날아가고

다 익어 무거워진 열매를

더 이상 맛 볼 수 없는 기분들에 대해

 

나는 그 애가 무서워졌다

 

눈을 뜰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도 없이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갇혀

밤의 안개를 위하여 젖어가는 모습이

짙은 밤을 묽게 만드는 그 눈물이

너무나 솔직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한 사람을

존경해왔기 때문에

 

 

 

유령난초(幽靈蘭草)

김선우

 

향기도 빛깔도 거두고 땅밑을 흐르는 바람을

홀로 매만져 주고 있을 당신 가끔 햇빛이 톰방거리며

물 건너오는 소리 그리워지는 걸 보면

땅밑에서 잎 틔우는 당신의 아름다운 독,

내 속으로 흘러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젯밤 내 꿈 밖을 서성이다 돌아간 당신,

당신 삶은 땅 밑으로 오고 내 삶은 땅 위로 오기에

뛰어나가 당신을 맞지 못했습니다

죽은 네 오빠가 흙을 헤치고 다시 나올 것만 같구나,

당신의 안부를 영영 잃을까 경계에서 피고 저무는

어머니는 올해 더욱 야위었습니다

땅 밑 깊은 꽃대궁 속으로 어머니가

긴 숨을 몰아쉴 때 세계가 슬픔으로 멈칫하였습니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당신은 땅 밑에서 꽃을 피운다지요.

어머니 젖무덤에서 부화하던 바람은

언제쯤 당신의 어두운 방 앞에서 문 두드렸을까

애써 모르는 척 당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아직 피지 않은 꽃잎 속 실핏줄을 후

후 불어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태양을 등진 식물인 당신 햇빛과

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당신이 꿈 밖에서

어머니 맨발에 입 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햇빛을 가리며 물밥을 던지고

나는 문 안쪽으로 숨죽였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독을 지녔으니

내 영혼의 음지로 흘러든 독을 모아

등잔을 띄웁니다

긴 독백을 이기고 환한 등 하나

당신의 기약 없는 꽃대궁에 가 맺힐 수 있을까요

당신이 두고 간 발자국 하나 하나 따뜻한 흙으로 덮어가는

어머니의 새벽 염불 소리 멈추지 않습니다

 

 

 

유성 폭우 오시는 날

김선우

 

천 년 전쯤 만나 천만번쯤 사랑한

내 연인

죽은 그녀가 세수를 한다

오래전 어느 새벽빛 속에서

이슬방울 털어 말갛게 두 눈을 씻은

그 개숫물을 내가 들이켠다

그녀가 뒤울 가득한

흰 싸리꽃 무덤 속에 들어가 누울 때

내 잠 위로 돋아나던 먼 별들의 씨앗

뒤란의 우물 속에서

이름을 여윈 별자리들이 흘러넘치고

떨어지는 유성 꼬리마다 촘촘히 피어나던 싸리꽃들

아리따운 내 연인은 유성폭우 오시는 날

하늘의 무덤을 대야 가득 담아놓고 세수를 하곤 하였다

 

천 년 전쯤 만나 천만번쯤 사랑한

내 연인

추운 그녀를 위해 한밤중 물을 끓인다

밤하늘엔 무덤이 너무도 많아 사방이 켜켜이 밝아지고

주전자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며 끓는 내 연인

혼령이 오시는구나,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김선우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씨(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씨(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 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그러니 내가 만든 이 얼음 구두 한 짝은 누구에게 선물할까 두 짝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구두 한 짝은

 

 

 

이런 이별 - 일월의 저녁에서 십이월의 저녁 사이

김선우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 트리와 어린 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일월이 시작되었으니 십이월이 온다.

 

이월의 유리 불씨와 삼월의 진홍꽃잎과 사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오월의 찔레 가시와 유월의 푸른 뱀과 칠월의 별과 꿀, 팔월의 우주먼지와 구월의 청동거울과 억새가 타는 시월의 무인도와 십일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십이월이 와서,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사랑해. 안녕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일월이 시작되면 십이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십년 동안 나는 참 좋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이런 이유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부푸는 얼음장에 박힌 피 한 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이 봄날, 누구세요

김선우

 

왜 이래 나 누구야? 대답해봐 내가 누구야 응? 갑작스런 벼랑이 몸속에 팬 듯 놀라 당신을 다그친다

가만히 날 바라보며 웃기만 하는 당신, 웃음 끝에 누구세요..... 살그머니 묻는다

건너다보이는 벼랑이 고단하다는 듯 당신은 이내 귀찮은 표정으로 눈 감았다 뜬다 그리곤 이편으로 돌아와 있다

봄이 오면 심곡항에 소풍 가자 거기서 시를 지어다고. 봄바다 그 빛깔 그려다고. 치잇, 시인이 음풍농월하는 사람인 줄 알어? 그럼 딴 거 뭐가 좋을라나 시인이 정하시게.

다문다문 이야기하다 또 아스라이 묻는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시오?

 

봄 바다 밀려왔다 나가길 여러 번

글썽이는 나침반처럼 누구세요......묻는 사람

짠 내에 젖은 벼랑 무너져 흰 모래펄  펼치고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가느다란 탄식 푸르디푸른 물빛, 손에 움키면 부서져 사라지는 그 푸른빛 속에 이번 생의 기억들을 세탁하기 시작한

어머니가 물으신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나는 누구인가

 

 

 

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선우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능과 오만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된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돌아올 때까지 너희의 이름을 부르겠다.

살아 있어라. 제발 살아 있어라.

 

 

 

입설단비(立雪斷臂)

김선우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 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 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 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 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입춘

김선우

 

아이를 갖고 싶어

새로이 숨 쉬는 법을 배워가는

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

숨을 나누어 갖는

둥근 배를 갖고 싶어

 

내 몸속에 자라는 또 한 생명을 위해

밥과 국물을 나누어 먹고

넘치지 않을 만큼 쉬며

말을 나누고

말로 다 못 하면 몸으로 나누면서

 

속살 하얀 자갈들

두런두런 몸 부대끼며 자라는 마을 입구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 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김선우

 

보라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을 조금 찢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염소의 몸 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 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 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 나오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망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내 고향은 검은 염소의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과 혼열이어서 나는 손톱니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손으로 무른 밥을 먹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새 나를 잊었지만, 괜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거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자작나무 봉분

김선우                                   

  

낮잠에 들었다 깬 맑은 가을 오후 저, 저, 저 나비 잡아라

꿈속의 내가 평상을 박차며 허둥댄 것도 같은

내 낮잠 속으로 누군가 자러 들어와 한잠 곤히 들었다 방금 나간 것도 같은

 

깨어보니 나는 큰대자로 잠들었던 모양인데 나비를 쫓으러 퍽이나 달렸는지

침대 발치에 머리를 누인 거꾸로 놓인 큰대자인지라

  

떡 벌어진 다리는 말고 조금은 섬섬하게 다리를 벌린

거꾸로 선 매촐한 큰대자 같은 자작나무 한그루 떠올린 것이다

말하나마나 몸빛은 재처럼 희디희어서 사바사나*, 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 것인데

 

거꾸로 선 희디흰 자작나무의 잠,

송장 자세로 삶을 건너는 고즈넉한 휴식이 나는 대번에 그리워져

내 죽음의 형식을 벼락처럼 알아채고 만 것이다

 

화장한 나를 묻은 뒤 자작나무 묘목 한 채 심어주면 좋겠구나

원한다면 언젠가 내 옆에 그대의 육신도 좋은 나무 한 채로 이사와도 좋겠구나

그곳은 너무 울창하지 않은 이제 막 꿈꾸기 시작한 황무지여도 좋겠어서

하나둘 이사 온 사람들이 한 백 년쯤 뒤에는 숲 한 채 넉넉하게 이루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 내가 사랑한 자작나무 한 그루 노란 잎새 나비 떼처럼 떨구고 있는

한적한 가을 오후 저, 저, 나비 잡아라 희디흰 송장에서 비끄러져 내려오는

수천수만의 저 나비 떼, 나비 떼 말이지

 

 * 요가 동작의 하나. 산스크리트어로 송장 자세를 뜻함.

 

 

 

작은 신이 되는 날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 점인 내가

먼지 한 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글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 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

김선우

 

비 그친 후 세상은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간밤 바람 소리 솎으며 내 날개를 벗기던 이 누구?

큰 파도 닥칠까 봐 뜬눈으로 내 옆을 지킨 언덕 있었죠

날이 밝자 언덕은 우렁각시처럼 사라졌죠, 아니죠,

쓰러졌죠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비 그친 후 세상은

하루의 반성은 덧없고 속죄의 포즈 세련되지만

찰기가 사라졌어요 그러니 안녕, 나는 반성하지 않고

갈 거예요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

 

수 세기의 겨울이 쌓여 이룬 가을 봄 여름이에요

비 그친 후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한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

이 빛으로 감옥을 짤래요 쓰러진 당신 위에 은빛 감옥을

덮을래요

 

나는 울어줄 손이 없으니

당신의 감옥으로 이감 가듯 온몸의 감옥을 접붙일래요

 

 

 

저 별의 눈

김선우

  

왜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별에 대해서만

흔히 노래하는가

 

풀잎 끝 굴러떨어지기 직전의

이슬의 불안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영롱함만을 노래하는가

 

저 별이 바라보는 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그것이 궁금한 소녀 소년들이

신인류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나락에서 인류를 구할 것이다

아주 간신히

풀잎의 떨림처럼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김선우

 

생리혈 가장 붉은 월경 둘쨋날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으로

진달래 나무가 건너온다

아가야, 달래 다오

절벽 끝으로 저를 밀고 가

절벽을 받아 안는 저

늙은 여자의 말을

 

 

 

김선우

 

나는 지금 애인의 왼쪽 엉덩이에 나 있는

푸른 점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 내가 당신이었을 때

이 푸른 반점은 내 왼쪽 가슴 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과학 시간 칠판에 점 하나 쾅, 찍은 선생님이

이것이 우리 은하계다! 하시던 날

솟증이 솟아, 종일토록 꽃밭을 헤맨 기억이 납니다

한 세계를 품고 이곳까지 건너온 고단한 당신,

당신의 푸른 점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갑니다

푸른 점 속에 까마득한 시간을 날아

다시 하나의 푸른 별을 찾아낸

내 심장이 만년설 위에 얹힙니다

들어오세요 당신, 광대하고도 겨자씨 같은,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나, 시시로 사나워지는 것은

불붙은 뼈가 물소리를 내며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나오려 하는 것은

푸른 별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당신과 내가 풀씨 하나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먼 아침

김선우

 

나비는 네거리로 갈 것이다

한 나라를 상여에 싣고 장지로 가는 동안

먹은 것 없이 자주 체하는 백 년이에요,

낭인의 노래 위에서 나비가 잠시 졸고 끝없이 잠시 졸고

도시는 격렬한 척 시든다?

 

꿈에서 만난 죽은 사람에게

흰죽을 한 숟가락 떠먹이는 자세로

나는 네거리에서 흰죽을 먹고 있다?

 

숟가락을 진 오른손의 그림자

아주 희미한 나비의 웃는 그림자?

 

당신은 어느 쪽이에요?

나는 어젯밤 나를 만났어요.?

 

가객의 본업은 죽은 사람을 만나 못다 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

가객의 부업은 산 사람의 고단한 저녁에 피가 도는 날개를 달아주는 일

 

 

 

좁은 문

김선우

 

초상집,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고 구석에선 국이 끓었다

삼삼오오 조의금을 모으거나 화투를 치는 이들 속에

더러 아는 얼굴이 보였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벗들,

맙소사! 나는 마흔세 살에 죽은 것이다

열려 있는 관 속에 누르딩딩한 내 얼굴,

마당 가득 연보랏빛 수국이 피어 있었다

죽음에 어울리는 꽃이라고 생각했던

생전의 기억이 별안간 나를 슬프게 했다

열흘째 썩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부패를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썩기 시작해야 관을 닫고 장지로 갈 수 있었다

썩는다는 건 망자의 혼이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 증거,

불행히도 징조가 보이지 않자 생전의 내 행적에 대해

수군거리는 말들이 퍼지고 있었다

한 사내가 수척한 얼굴로 들어섰다

분주한 틈을 타 그는 내 얼굴과 등뒤로 구더기를 넣어주었다

몇몇은 그의 행동을 알아챘지만 못 본 척했다

썩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구더기들은 곧 내 눈과 콧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순간 나는 재채기를 할 뻔했지만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므로 참기로 했다

드디어 썩기 시작했어!

향을 갈던 누군가 소리쳤고

사람들이 서둘러 관뚜껑을 닫았다

드디어 나는 좁은 문에 들어 선 것이다

문턱을 넘을 수 있게 도와준 그가 나를 사랑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무거운 육체를 거느리고

붉게 파헤쳐진 묘혈에 누우며 보았다

지난날의 수국꽃 그림자가

시계추처럼 이마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쥐덫

김선우

 

늦은 밤 전세 사는 아파트 후문을 들어서다

만났어 굽은 등의 잿빛 쥐 한 마리

저놈을 언제 보았더라

왠지 낯이 익어 걸음을 늦추는데

 

유리알 같은 눈알을 통과해

고향 집 뒷마당으로

쥐덫과 연탄집게를 든 아버지가 걸어나왔지

이놈, 이노옴!

그날 이후 사춘기 나의 유다락엔

곰팡내를 풍기며 마른 꽃들이 부서졌지

 

있잖아, 쥐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갉아댈 수밖에 없대

이빨이 창살처럼 길게 자라나

제 몸을 찌른대 쥐는, 말이야

귀를 막으며 이불 속에서 누이가 속삭였고

나는 꿈을 꾸곤 했지

벌겋게 달구어진 연탄집게가

내 영혼의 가죽을 지지며 들어오는

 

술 취한 옆집 사내가

서성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몸을 덜며 쥐덫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지옥에서 보낸 두 철

김선우

 

보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보다,의 지옥

인간의 땅

 

 

 

지옥에서 보낸 세 철

김선우

 

그렇습니까?

나는 있습니까?

나는 무엇입니까?

혹시 나는

나에 대한 습관 아닙니까?

 

 

 

집이 서늘하다

김선우

 

어젯밤 꿈에 고래가 죽었습니다

고래가 꽃을 피운다고 한다지요 선원들은

작살을 맞은 고래가 죽기 직전 뿜어내는

피를, 붉은 꽃송이를

어쩌면 적막하여

차마 지켜보지 못한 이도 있었겠지요

 

꽃잎을 거두어 지등을 만듭니다

창에도 천장에도 등을 달았습니다

어쩌면 이 낡은 집은 오래 전부터

자살 의지를 가졌던 것만 같고

비 오는 밤이면 사각사각 목말랐던 핏줄들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것도 같고

 

물마루 위에 지등을 띄웁니다

이 별의 어디엔가

고래들이 죽으로 돌아오는 해안이 있다지요

허파와 자궁의 기억을 못 버릴 줄 알면서

고래는 왜 바다로 가야 했을까요

 

두 마리의 고래가 죽었습니다 어젯밤 꿈에

작살을 쫒은 채 오래도록 떠돌아온

큰고래 자궁 속에 새끼고래가 죽어 있었습니다

문 틈새로 치가, 붉은 꽃송이가

놀이터와 가로수길을 적시며 흘렀습니다

해안은 먼데

죽은 집에 벌써 서늘하였습니다

 

 

 

짜디짠 잠

김선우

 

동안거 끝낸 스님네와 차를 마신다

안거할 곳 없는 내 겨울잠은

새 발자국 모양의 가지 끝에서 천일염을 만든다

 

찻잎이 너무 많았는지

묵상이 너무 길었는지

진하게 우려진 차 한 모금

차가 짭니다. 한 스님이 입을 연다

짭니까 차 달이던 스님이 나를 보고 물으신다

 

독하다고 해야 할지 쓰다고 해야 할지

차 맛 하나를 두고 오만가지 생각을 짚어보다가

짜군요 내가 대답한다

 

하늘의 구름에도

구름을 길어 올린 나무뿌리에도 염분이 있어

차나무의 겨울잠은 아찔하게 짜고

새순을 따는 순간 어미로부터 떠나는 잎새의 절박함에도

찻잎이 덖어지는 순간의 설레임에도 염분이 있어

눈물 같은 맛,

내가 떠나온 그곳도 드넓은 염전과 같았을 것이다

 

스님네와 짠 차를 마신다

아무런 미련도 슬픔도 없다고 생각한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싱거운 경(經) 하나가 겨울잠을 자고 난 후

짜딘짠 문자들이 내 목울대로 쏟아진다

 

 

 

천문

김선우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 우주라는 거

 

수백억 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사양하기 전에.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철로변의 봄

김선우

 

봄이어도 아직은 쌀쌀한 봄날인데

빨갛게 언 생강처럼 엉덩이 이쁜 아이 하나

고추 달랑거리며 철둑길에 놀고 있는

철없는 초봄인데 마른 삭정이 주워들고

무진무진 공들여 지우고 또 그리고

갸우뚱갸우뚱 제 놀이에 집중한 봄날인데

초록빛 천중 하나 기적소리 물감 풀며

기우뚱 지나가고 아지랑이를 불러볼까

철로변에 오줌을 누며 깨복쟁이 어린 봄이

고추를 달랑거리다가 얼굴 발개졌네

오줌 방울에 젖은 민들레꽃 한 송이

이제 막 벌고 있는 중,

삭정이로 그려놓은 그림들이

서로 말을 걸기 시작했네

 

낮술에 취해 철길 베고 잠들었던

가난한 아버지들 튕겨 오른 피 묻은 더운 살점이

민들레 잎새 아래 수런수런 깨어나네

누가 자꾸 말을 걸어

나비 고치들의 잠 깊어지지 않네

아버지 없는 철로변의 아이들,

봄마다 새로 피는 꽃술 속에서

덜컹덜컹 기차 바퀴 소리를 듣네

 

 

 

첫 번째 임종게

김선우

 

목련 꽃술 들여다보다 내가 말한다

근사하다! 너의 그곳 같아

목련 꽃술 들여다보다 네가 말한다

근사하다! 너의 그곳 같아

 

근사한 바람...... 젖빛 목련...... 흔들린다...... 통째로...... 흔들린다.....

 

나무 연꽃에 닿은 바람 물고기

반짝이는 은빛 물결 일으킨다

 

그대에게 가닿는

모든 것이 근사하다!

단 하나의 터럭도 빠짐없이 근사하다

 

 

 

칠월의 일곱 번째 밤 - 곡비(哭婢)를 자청하다

김선우

  

그대 발 끄는 기척, 밖에서 안으로 우거집니다

그대 어깨 위 수레 무거우니 함께 밀겠어요, 그대가 말했지요

그대를 먼저 보내놓고도 한참인 여름빛 칠월의 일곱 번째 밤 우련하니

오늘은 내가 곡비(哭婢)로 하늘머리 이고 서서 오작교를 내놓아라, 큰 곡을 부르나니

그대를 두 손으로 꼭 움키었다가 불에 덴 듯 손목을 베였습니다

손가락마다 꽃불 받쳐 들고 내 손목 아래 누운 그대의 침묵을 경청합니다

내 하루가 천날 같이 무거워 두 손에 움켜쥐고 있던 그대를 풀어드립니다

스스로 있는 그대여, 떠나가셔도 좋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서럽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참 좋습니다

 

 

 

카르마, 동물의 왕국

김선우

 

어린 새끼를 입에 물고 옮기는 호랑이를 보았다

천천히 클로즈업으로 잡은 호랑이 입속의 호랑이를

보다가 밥 먹던 숟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먹잇감을 물었을 때나 새끼를 물었을 때나

이빨!

잡아먹거나 사랑하거나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그곳엔 이빨!

입에 물고 옮기는 호랑이나 입속의 호랑이나

어떤 서늘한 갈등이

등골을 버티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지나갔다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김선우

 

가령 이런 것

콩나물 시루 지나는 물줄기- 붙잡으려는-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지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물줄기 지나간다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오직 이 순간이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쭉 편다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이 아-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 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야!

 

 

 

탁란(托卵)

김선우

 

암자의 겨울 아침은 난생(卵生)설화로부터 시작된다

계곡 아랫녘엔 노보살의 빨래 방망이질 소리,

푸른 강보에 쌓인 갓 낳은 알 하나가

목젖 부은 뻐국새 울음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남의 둥지에 슬픔 한알을 낳아놓는 순간이

한겨울에도 부득불 얼음장 깨고 앉은

노보살의 목쉰 빨래 방망이질 소리로 쏟아진다

남의 알을 물어올 수밖에 없었던 자의 치욕이

가진 것 없는 어미의 단단한 슬픔이

타악, 타악 후려치는 방망이질 소리로

일주문을 때린다 장엄하거나 치욕인,

일주문 바깥이 시퍼렇다

 

찬 돌 위에 쪼그려 우는 뻐국새 울음 듣는다

 

* "탁란" : 어떤 새가 다른 종류의 새의 집에 알을 낳아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일

 

 

 

태실(胎室)

김선우

 

춘분 지난

부석사 사과밭

이른 나비 날았지만

사과나무들은 아직

겨울 쪽에 기울어 있네

새로 돋은 붉은 가지

그림자 닿는 곳

지난해의 사과 한알

아랫도리가 썩고 있네 황홀한

출혈,

뭉크러지며

지난해의 사과 한알

낭떠러지를 향해 가는 사이

사과꽃 피네

겨울 쪽에 기대어

새로 돋은 이로 탯줄을 갉고 있는

꽃자리, 꽃자리를

 

 

 

퉁소

김선우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느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애인이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 라고 말하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그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내가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 같아, 라고 말하였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요일

가난한 연인들이 되풀이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우리도 걸었고

쓰러져 가는 담장의 뿌리를 환하게 적시며

용케도 피어난 파꽃들의 무덤을 보았고

변두리 야산 중턱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오래도록 함께 쳐다보았을 뿐

평생토록 한 곳에서 저렇게 흔들려도 좋겠구나,

속삭이는 우리의 낮은 목소리 위에서

생채기를 만들지 않고도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란 새가 퉁소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한 장난처럼

가끔씩 구름 조각을 옮겨다 거는 동안

나와 애인은 머리를 맞대고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이다

너무 길지 않은, 너무 짧지도 않은

그 시간에 어떤 손들이 우리 이마를 쓸고 지나간 걸까

 

십이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애인의 목젖 아래 아름답고 깊은 항아리로부터

우주, 라는 말이 왜 떠올라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노래 소리와 구름 조각을 옮기던

새의 깃털 하나하나가 퉁소 구멍처럼 텅 비어

맑게 울리는 게 보였다

 

 

 

티끌이 티끌에게 -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김선우

 

내가 티끌 한 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 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구름에게 배운 것

김선우

 

구름이면서 구름들이지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지

 

두려움 없이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즐거운 놀이라는 듯

다시 나타날 땐 갓 태어난 듯 기뻐하지

그게 다지

곧 변할 테니까

 

편히 잠들기 위해 몸을 이동시키는 법을

나는 구름에게서 배웠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그러니 즐거이 변해가는 것

내가 가진 의지는

그게 다지

 

 

 

포구의 방

김선우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소라 냄새 나는 배개에 코 박고 있노라면

 

푸른 연어처럼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더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부르며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큰소리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붓다도 레닌도 맨발의 내 어머니도

아픈 날은 이렇게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여물게 살 좀 섞어도

흉 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포도밭으로 오는 저녁

김선우

 

포도밭에 갔습니다.

포도 철의 마지막 무렵이었습니다.

포도밭 할머니가 전지가위와 바구니를 내주며

손수 담아오라 하였습니다.

바구니를 건네주는 손바닥에 못이 많았습니다.

 

 

십자가를 등짐 지고 야위어가는

포도나무 못자국 난 손바닥을 들여다 보다

나는 자꾸 헛가위질을 하고....

조심조심 걸어 들어온 포도밭 할머니가

단번에 잘라내야 덜 아프다고

가만히 일러주고 갔습니다.

낡은 플란넬 앞치마에서

향유 냄새가 나는 듯하였습니다.

못이 많은 늙은 손이

포도나무 발등을 쓰다듬고 갔습니다

 

바구니 속은 동굴처럼 어둡고 깊어

나는 자꾸 헛가위질을 하고...

소스라치며 질겨진 포도나무 그늘로

향유 단지를 들고 오는 저녁이 보였습니다.

포도나무가 흘린 피로 흥건하여진

포도밭 이랑이 따스하였습니다.

 

 

 

폭포탕 속의 구름들

김선우

 

24시간 찜질방 사우나 폭포탕에서

구름 여자들 폭포 줄기를 맞고 있네

어깨 등허리에 물줄기 맞는 동안

새근새근 일렁인 건 구름들의 뱃살

 

여자들의 뱃살 한 번씩 흔들리자

잘 익은 노을 자르르 주름 일며 수평선이 자욱한데

 

나는 여자들의 뱃살이 좋아

내 기원에 밀접한 가장 안쪽

꽃밭의 흙 농밀한 살집,

살 집으로 푸르고 추운 구름이 흘러왔네

서리 맞은 청무밭

푸릇푸릇 온몸에 멍자국 깊은

여자의 부르튼 뱃살 저편

 

첫 번째 구름의 손가락이 뭉게뭉게 번져왔네

폭포를 맞았더니 멍이 들었나봐 지금 막 들었나 봐 지금 막․․․․․․

푸른 구름여자 팔뚝을 문지르며 묻지 않은 혼잣말 하네

고개 끄덕거려주며 다섯 번째 구름이 젖은 뺨을 보였네

아홉 번째 구름이 푸른 구름 여자에게 찐 달걀을 내미네

 

늙은 구름이 지금 막 배꼽을 열어 낳은 듯한,

따스한 보얀 달걀

터진 입가 한껏 벌려 열두 번째 구름이 달걀을 삼키네

 

입 속 가득 미어지게 흰 달덩이 밀어 넣듯

막 비친 젖은 것을 몸속에 다시 밀어 넣듯

 

캄캄해진 폭포 아득한 저 안쪽 왁자하여,

오늘 밤 비 오시겠다

 

 

 

푸른발부비새, 푸른 발로 부비부비

김선우

 

부스락, 푸른 발

한쪽씩 들어 보이며 구애를 하지

으쌰으쌰, 받아줘받아줘사랑하자사랑하자

 

바스락, 푸른 싹

봄마다 새잎 밀어 올리는 이 힘은 대체 어디로부터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내게갈게네게갈게

 

다정하고 장엄한 이런 아침

네가 웃자 바스락,

네 뺨을 감싼 공기의 한줄기 끝에서

새싹이 돋듯

이랑이 막 깨어난 듯

 

인생 별거 없다

안다

그래도 좋다

그래서 좋다

이런 순간이

바스락,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인생별거없다그래도좋다그래서좋다너를안으니좋다

단순한 낙천성의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힘

 

꼬리를 살랑거리다 가버린 빛에 대해 말하는 것이

꼬리를 끌고 막 도착한 빛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런 바스락,

 

우리에겐 다만 빛 드나드는 마음의 창문을 열어두는 연습이

으쌰으쌰, 으쌰으쌰

바스락, 바스락

 

 

 

풍찬노숙의 서(序)

김선우

 

나의 가슴에 품은 하늘에 너라는 새를 묻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너는 하늘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풍찬노숙의 종(終)

김선우

 

내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

 

당신이 죽는 날

나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처음처럼

 

 

 

피어라, 석유!

김선우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모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하나의 환상처럼 quasi una fantasia-에빌 킬레스의 moonlight를 들으며

김선우

 

내 혈관을 짚으며 외계가 물었다

"다음 꿈, 인간입니까?"

대답이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정성껏 말했다

"가장 오래된 울음이 피 도는 몸인 걸 압니다.

노래가 여기서 나오는 걸 압니다."

 

혈관 악기, 라고 기록되었다

본 적 없는 촉각의 문자였으므로 혀를 대보았다

비릿한 노을이 빠르게 스몄다

 

"절망마저 진부하다면 노래를 그칠 겁니까?"

나는 그만 문을 닫으려 했다

"인간을 지속하길 원합니까?"

문밖이 조금 초초한 듯했지만

 

다음 꿈, 인간일까?

지금껏 저질러 온 인류사만으로도

인간과 꿈은 지독히 먼데

 

"살아있는 동안 쓰는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시를 쓰는 자로서의 내 유일한 능력은

무엇이 되려는 꿈을 흩어버릴 수 있다는 것

 

관 밖에서 누군가 훌쩍거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노래를 이어가기로 했다

오늘 밤은 피아노에 어울리는 혈관 악기로서

 

 

 

하이파이브

김선우

 

일 년에 한 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

커튼 뒤에서 다리가 벌려지고

차고 섬뜩한 검사 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

세계사가 남성의 역사임을 학습 없이도 알아채지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

최소한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을 꾹 참아주다가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

두 마리 청개구리 손바닥을 짝 마주치듯 맞아요, 맞아!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한다니까요, 자요, 어서요, 하이파이브!

 

 

 

한 방울

김선우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다

한 방울

오줌 방울의 느낌

 

물은 빠져나가니까

몸에 갇히지 않으니까

어디서든 기어코 흐르니까

 

가두는 자가 아니라

흐르고 빠져나가는

저 역할이 마음에 든다---- 중얼거리며

 

물로 태어나리라

처음은 비

 

입술로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실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할머니의 뜰

김선우

 

토담 아래 비석 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악아, 개미집 허물면 수리님이 운단다

매지구름 한 소쿠리 는개 한 자락에도

듬산 새끼노루 곱아드는 발

싸리꽃이 하얗게 지곤 했더랬습니다

 

토담, 사라진 기억의 덧창에

고가도로 삐뚜루 걸리는 저녁

마음들일 데 없는 할머니 흰 버선발

찬비에 저만치 정처없습니다

 

 

 

할미꽃

김선우

 

키 작은, 햇볕을 탐하지 않아

아주 작은 그녀는 발목 밑을

떠도는 바람의 한숨을 듣지

 

하필 무덤가 같은 곳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

사람들은 말하지

다소곳한 자태!

더러는 그녀에게서

외진 데 거하는 이의 슬픔을

읽기도 하지 그럴 때면 그

녀는 어깨 더욱 곱수그려 삐딱하게

머리채 흔들며 킬킬, 혼자 웃는다네

 

약속을 위해 꽃잎을 떨구지 않지

그녀는 하르르 눈물로

지는 꽃들을 경멸한다네(․․․)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길 소망한 그녀,

바위를 쪼개며 생장하는 뿌리를

거부한 그녀가 어느 날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네(․․․)

 

 

 

해괴한 달밤

김선우

  

딱 - 딱 -

따귀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이 중천에서

때마침 기다란 손바닥 같은 구름이

달을 가리며 지나는데

따악 -

 

아이쿠 저거, 달이 따귀를 맞고 있는 거 아냐?

연거푸 달려온 구름들의 뭇매를?

토라진 구름 씩씩대는 구름 입술을 잘근 씹는 구름

저마다 자기 사연이 가장 애달프다는 듯

명랑하게도

 

왜 네 빛은 나만 비추지 않는 거야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외간 것들에게도 웃어주는 거야 왜 따뜻한 거야 왜 모두에게 다정한 거야

보름달 밤

오른쪽 왼쪽 볼이 푸르스름해진 달

아유, 이 난경을 어쩐다지?

구름 많고 바람 잘 날 없는 해괴한 달밤

놀이터 벤치에서 연인들은 천 년 전처럼 사랑타령이고

달맞이꽃은 무더기로 훌쩍훌쩍 울고

 

 

 

해 질 녘

김선우

 

조루증을 앓나 잎 떨군 은행나무

흰 뼈 나부끼며 지느러미 쓰윽

노을 속을 미끄러져 헤엄쳐 오는 사이

 

한 노인이 극장 간판 아래 서성이고 있습니다

고개 들어 여배우 젖꼭지를 지그시 물어봅니다

달큼한 입 속, 어린 시절 어머니가 물동이 이고 와

젖이 담긴 바가지를 그에게 내밉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귓볼에 분꽃귀고리 달아드립니다

웃을 때마다 딸그랑거리는 분꽃에서도 젖이 흘러나옵니다

꽃잎 감추며 새색시는 무명치마 말기에 새들을 풀어놓습니다

벌게진 얼굴의 그가 분첩을 내밉니다

아이들이 속곳 속에서 굴러나오며 새소리 연을 날립니다

노을 속을 지즐대며 날아가는 쪽빛 연,

연 위에서 맨발의 어머니가 앞섶을 풀며 그를 부릅니다

 

잎 떨군 은행나무 지느러미 즈려 타고

그 노인, 변두리 극장 안으로 헤엄쳐 들어갑니다

마지막 잎새 노을 속에 흠뻑 붉습니다

 

 

 

햇빛 오일 - 당신을 위한 마술

김선우

 

사랑하는 당신이 시장 골목 좌판에 앉아 있다(나는 당신 옆에) 저만치 같은 반 친구들이 걸어온다

(나는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모르는 머언 눈으로(아는 사람? 아니!)

파꽃처럼 부스스 햇빛 떨어지고(나는 뒷길로 가만히) 골목 담장에 기대 모기소리만큼 조그맣게(엄마 미안해)

  

어느새 나는 비둘기 모자를 썼다 두 손을 활짝 벌려 자투리 햇빛을 받는다 차곡차곡 손바닥에 쌓이는 햇빛, 오른손의 햇빛을 왼손에 포개 얹고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네모를 그린다 왼손 가득 쌓인 햇빛을 허공의 네모 속에 집어넣는다 거기는 급속 냉동실, 햇빛을 탱탱하게 얼린다……………………무거운 발등을 끌며 해가 지평에 내리고 엄마의 어깨가 까무룩 어두워지기 전 냉동 저장한 햇빛을 꺼내 녹이는 거다 뒷골목 담장에서 열한 살의 내 입술이 헤벌어지고……………………어스름 내려온다 꽁꽁 얼린 네모난 햇빛을 꺼내 두 손에 받쳐 든……………………금빛연두의 햇빛이 손바닥을 따뜻하게 물들이고……………………냉동한 나머지는 방앗간에 가져가리라 참깨 들깨를 짜 기름을 내는 기계 속에 냉동 햇빛을 바둑 얼음처럼 잘라 집어넣으리라 따뜻하게 흘러내리는 고소한 햇빛 오일을 빈 소주병에 가득 채워 당신 손에 건네리라 마개를 막은 뒤에도 흐르는 오일은 파꽃처럼 부스스한 당신 머리칼에(금빛연두의 엄마!)

 

서른아홉 살 크리스마스이브에 비둘기 모자를 다시 쓴다 여전히 어둔 골목길에 금빛연두의 햇빛 오일을 풀어놓으러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김선우

 

(머리가 깨진 날 기뻤어요

내상보다 외상이 덜 위험하거든요)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

바리케이드 위에 살점을 널던 팔십년대

그 격렬한 외상의 날들

자고 일어나면 새살이 돋아 있곤 했지요

추억의 쓴물에 어금니를 담그거나

이 적성 표현은 아닙니다

 

구십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어서

걸핏하면 넘어지고 발목을 삐는데

피 한 방을 흐르지 않고 멍만 듭니다

세계 인구의 열 배도 넘는 세포가 모여 이룬,

육체의 나날은 출혈 없이 평화롭습니다

 

그런데 어제 머리를 깼지요

만취해 돌아오다 길에 누워버렸습니다

두개골은 멀쩡하고 상처도 크지 않은데

 

폭포처럼, 피 흘리는 머리칼

친구의 웃옷을 벌겋게, 치마를 물들이고

길바닥에 누워 해실해실 웃더랍니다

"아아 상쾌해"하면서 말예요

 

빨간 다알리아꽃들이(기억나요?)

뭉텅뭉텅 꿈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렷어요

- 내 몸은 나를 보호할 의지가 없나봐

방금 당신께 전보를 쳤습니다

- 안 보이는 상처가 나를 시들게 해

다알리아 꽃모갱이를 꺾으며 울었습니다

 

 

 

화비(花飛), 그날이 오면

김선우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머리채를 묶은 후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처음처럼 눕겠네

꽃의 은하에 무수한 눈부처와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

하늘을 보아야지

당신을 보아야지

화(花), 비(飛), 화(花), 비(飛),

내 눈동자에 마지막 담는 풍경이

흩날리는 꽃 속의 당신이길 원해서

그때쯤이면 당신도 풍경이 되길 원하네

 

그날이 오면

내게 필요한 건

이름 붙이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와

당신뿐

당신뿐

대지여

 

 

 

화비(花飛), 먼 후일

김선우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나무 아래서

꽃잎을 묻어주는 너를 본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너는 아름다울 것이다

네가 있는 풍경이 내가 살고 싶은 몸이니까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평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쓴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간다

완전한 연소였다

 

 

 

화염 도시 – 고로쇠나무에게 바침

김선우

 

불구경 간다 불구경 가

불 속에 이지러지며 날아오르는 그림자 본다

누구라도 지옥 한두 개쯤 아래 가져보지 않았겠는가

누구라도 한 번쯤

불구덩이 속으로 몸 던지고픈 순간이

도둑처럼 찾아들곤 하지 않았겠는가

아름다운 너에게도 있지 않았겠는가

 

때가 되면 나무들은 몸을 기대고

서오의 몸을 비벼 불타기 시작할 것이니

몸 전체로 불구덩이였던 나무들은 안다 전설이란

오래 울어 충혈된 꽃눈의 폭풍

피 붇은 동공의 실어증 같은 것

불타는 나무들의 도시로부터

그을린 뜨거운 혀들이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

 

보라, 자신의 문명을 불태우기 시작한 숲들

가장 나중의 임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

문병은 비워진다 보라, 사람아

모든 문명이 惡이어서라기보다

극점에 도달하면 비워야 하는 것이

지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수억만 년 수수수억만년 전부터

 

불구경 간다 불구경 가

아주 오래도록 제 몸의 피를 짜내어

사람을 먹이던 어미 아비의 검은 유골 삭정이 본다

 

 

 

화전(火田)에서 소금을 캐다

김선우

 

강원도 산골 깍아지른 비탈의 화전을 지난다

삼복 무더운 날 소금단지를 열었을 때

훅, 끼쳐오던 소금내음 밭고랑에 물큰하다

고갯길 지나 하늘벽 지나 시골집 뒤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한 자락 짜디짜다

하루 세 번 손가락 끝에 불꽃을 매달고

소신공양하는 낡은 집 굴뚝으로

참매미 울음소리 소금 짐을 지고 온다

지상의 며칠을 필사의 노래로

오체투지 하는 매미울음 짜디짜다

몸 피할 바람 한 점 없는 불붙은 폭염의 날이라야

소금밭에는 향기로운 소금이 오신다고 하였다

맨무릎으로 땅에 엎드린 집 한 채 속에

오체투지로 웅크린 검은 아궁이,

한 끼 밥도 사랑도 오체투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화전의 타는 맨발이 짜디짜다

 

 

 

흰 밤

김선우

  

밤의 길쭉한 씨앗을 너에게 줄게

내 오래된 영혼의 흰 머리카락

그것으로 탄생의 노래를

 

아기들은 전생의 기억이 명료하다 하였으니

대지에 차고 넘치는 색색깔의 귀신들에게

밥을 주어야지 명랑하게 울어야지

 

지구별에 환생할 운명을 가진 아이들이

흰 감자꽃 만발한 달에서 썩은 감자알처럼

죽어가는 지구가 슬퍼 흰 감자꽃 따주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더란다 오랫동안 달에서 구전되던

(꽃을 따네 구름이 울고 꽃을 버리네 열매가 자라고)

 

한 아기가 지구에서 태어나고

한 아기가 달로 건너가는

 

질기디질긴 흰 밤

미사포 속의 백골처럼 흰 노래

 

 

 

흥수아이

김선우

 

낮고 평평한 돌 위로 흙모래 흘러가네

꽃잎을 밟고 온 맨발이네

물결 이는 돌담요의 귀퉁이를 살짝 덮고

그 애가 자꾸 꽃을 달라 칭얼거리네

자꾸만 흙탕물을 토하네 토한 것들이

낮은 돌의 상한 지느러미 사이를 흘러 다니는 동안

흰 달이 자라고 억새꽃이 칼에 맞고

엄마가 돌아오지 못한 돌무덤이 병드네

 

미동 없이 번쩍이는 타워팰리스

언젠가 이 콘크리트 무덤들도

다른 유적들처럼 꽃 아래 묻힐 것이네

늙은 태양이 딱딱하게 병들어가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유적지를 아픈 새처럼 흘러다니는

그애의 노래를 듣네 꽃들이 조등처럼 환해지는 계절이 오면,

 

돌덩이가 아주아주 늙어 고부라지면 흙이 될 텐데

흙덩이가 아주아주 늙어 고부라지면 돌이 될 텐데

내 다리뼈로 퉁소를 만들어줘

새장처럼 엄마를 베고 누워 웅장한 너의 유적을 바라볼게

상하지 않는 노래를 부를 게 안녕 흙이 될, 안녕 돌이 될

 

번쩍이는 장대한 콘크리트 유적지

병든 태양의 두 눈에 꽃을 덮으며 흰 달이 퉁소를 입에 무네

입 속으로 번지는 꽃비린내…… 엄마가 나를 찾을 텐데

내 무덤 속에서 울다 가버린 엄마를 나는 어디서 찾는다지?

입술 없는 꽃들을 주워 먹으며

그애가 노래를 부르네

 

* 흥수아이 :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의 어린아이 유골.

 

 

 

Everybody shall we love?

김선우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딱딱한 도시의 등딱지를 열고

게장 속을 비비듯

부패와 발효가 이곳에선 구분되지 않아요

그러니 잘 발효했다고 믿는 몸속애서 비벼진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듯

그대를 밥 먹이는 게 내 피의 이야기인 듯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

우리 사랑할래요

지나온 가로수의 허방으로 미끄러져간 계곡과 별빛

기어코 가시에 찔리죠 가시에 찔리고 싶어 걷는 봄날엔

 

그러니 총 대신! 빌딩 대신! 군함 대신! 지폐 대신!

건널목을 둥글게 휘어놓고

꽃잎 물고기와 사슴을 불러 해금을 켤까요

그대와 그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대와 그대 곁에서

그대를 위해 군함을 쪼개 모닥불을 지필까요

무릎뼈 위에 먹을 갈아

은행잎 댓잎 위에 번갈아 편지를 쓸까요 오세요 그대,

 

피 흘리는 벽들이 서로의 가슴을 칠 때

진동으로 생겨난 샛강 같은 골목들

그대와 나의 혈관을 이어 across the universe!

무수한 밤이 있었지만

밤의 등골 속으로 흰 새가 내려앉는 건 드문 일이죠

오세요, 단 한 모금 물을 찾아 하염없이 걸어야 할 밤이 오더라도

오세요, 그대가 천 번을 죽어 나간다 해도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뼈마디마다 댓잎 이불 펼치고 그대 잎술에 진홍 꽃잎 수놓으며

여기서 사랑 노랠 부를 거예요 오래전 피 속의 벌 나비 같은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굴 거예요

 

포성 분분한 차디찬

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

이것은 피의 이야기.

사랑을 구하는 피의 이야기.

 

 

 

om의 녹턴

김선우

 

회(回)

 

허공을 떠돌며 돌들이 울었다

돌 우는 소리 때문에 달이 붉었다

 

"엄마, 슬픈 사람들이 떠다녀."

 

누구나 볼 수 있으나

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더 많았다

모두가 보았을 때에도 누구나 울지는 않았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눈이 멀 것 같은 밤이었다

  

귀(歸)

 

없는 너를 덮어쓴 흔적들이 무겁다

 

네 몸에 남았을 내 포옹의 흔적처럼

그림자들이 여리게 들썩인다

 

검은 주름들 사이에서 검은 싹이 돋는 것을 지켜보다가

너를 아는 누군가 이삿짐을 쌀 것이다

 

식은 잿더미에서 투명한 불의 날개를 가진 새들이 날아오르고

검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하늘의 대지를 이룬 밤이다

 

새들이 울며 부리에서 떨구는 것이

침묵임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이 너무 가득해지면 몸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지."

"그런데 그것이 악몽인가?"

  

내(來)

 

"뭐 별거 없어요. 태어나고 이동하고 소멸해가는 거요."

(…………………)

"하루 동안 나는 서른 번 이상 죽기도 합니다."

(………………………)

"당신을 만나 이마에 키스한 후 나는 행복하게 사라졌다오. 그렇게 한번 죽은 거죠."

(………………………………)

"한밤중 당신과 통화할 때 나는 아기처럼 막 태어난 상태라오."

(……………………………………)

"이름은 몰라요. 그 순간 나를 순이라 부르든 조약돌이라 부르든 달리아라 부르든."

(…………………………………………)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사정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이름 없어도 모두 반짝이지. 살아 있는 것은 다 숨을 쉬니깐."

(……………………………………………………)

"아 좋아요. 좋습니다. 막막해서 평화로워요. 이대로 소멸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다는 마음이 떠오를 새도 없이 오오. 나는 벌써 소멸 중이오."

(………………………………………………………………)

  

거(居)

 

밤의 공기를 한 줌씩 쥐었다 놓을 때마다 내가 만진 허공에서 가시가 돋는다

 

누구나 볼 수 있으나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찾고 있다

  

련(戀)

 

"우체통을 보면 손을 넣고 싶어져."

"심장을 기대하니?"

"것도 좋고, 너의 머리칼이어도 좋고."

 

너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곳에 있다

우체통 속에 든 너

간혹 손을 넣어 너의 안부를 만진다

어느 날의 연둣빛 손가락, 진초록 발, 검은 유리의 머리카락……

보이지 않지만 접속하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이 사는

 

(우체통 같은 세상이라고 하자

오래 그리운 것은 우체통 속에 산다고 하자)

 

수많은 사연이 모여들어 도시를 이루지만

이 도시는 사연들을 돌보지 않네

 

인간이 별처럼 흘러가는 하수구, 가녀린 안부들

 

우체통 속에서 들리는 밤물결 소리……

 

누군가 돌 하나를 방금 떨구었다

우체통 속으로

  

막(幕)

 

별이 떨어진다

 

"여기서 보는 별의 임종은 정갈합니다."

"다행히도."

 

하늘 가득한 성좌들, 떨어질 때는 모두 혼자이다

 

"떨어지는 별도, 별을 놓는 허공도 모두 정갈합니다."

"다행히도."

 

홀로임을 받아들인 자들이 밤을 창조한다

 

"나를 만나면 나를 죽여야 합니다."

"가혹한가?"

"그럴 리가. 그렇게 시인은 자기를 해방합니다."

 

오늘도 별들이 떨어진다

거듭되는 매일의 임종게와 탄생게

원시은하로부터 아기우주에 이르기까지

육신을 이루는 낱낱의 세포들을 별이라 부른다

 

"죽은 별들의 무덤이 거기냐고?"

 

(막과 막 사이)

 

"무덤은 영영 도래하지 않소. 나는 천국에서도 천국을 상실할 테니!"

  

시(詩)

 

잠,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쾌락

너를 초대할게

잠,

속으로 들어와

오늘은 너의 쾌락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픈 날이기도 하다

잠,

그리고 섹스,

섹스는 몸의 대화

통하는 몸들의 기쁨

네 몸이 펼치는 모든 말을 구두점 하나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만진다

이 쾌락은 포에지에 가깝지

포엠이 사라져도 포에지의 꿈은 남네

다정(多情)한 몸의 통화(通話)

시정(詩情)이라 할 만한

아직…… 우리가 인간인 한

 

다시

잠,

쾌락 속에서 나는 쓴다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진 않아

쓰기 위해 홀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좋아

홀로 출발하지만 홀로를 넘어

물과 불과 바람과…… 풀잎…… 풀뿌리들인 나들과

노는 시간

"삼라만상 혼들과의 섹스입지요."

 

잠,

속에서,

나는 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읽는다

(읽는 당신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쓴다'는 행위를 사랑한다는 자각이 명료할 때 나는 직업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

지상에서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쾌락

오늘은 잠,

속에서 너와 섹스하고

시를 썼다

시인이 직업인 자의 아름다운 커튼콜

무대 뒤편에 시궁쥐들이 우글거렸으나

망한 극장의 먼지 가득한 폐허 속에서도 외롭지 않았다

  

생(生)

 

여행기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참 많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여행기를 쇼핑하는 사람들은 더 많소

(이렇게 죽어갑니다)

 

여기까지 와도 여전히 길은 멉니다

본래 먼 것이……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이라는 듯

또 얼마나 멀리 걸어야 하는 겁니까?

 

(시인의 생도 마찬가지요

한 시집에서 다음 시집 사이를 어떻게 살아냈느냐, 이로써 가름됩니다

살아 있기가

끝없이 멉니다)

 

한 걸음씩

지금 여기에서

오직 한 걸음씩

  

통(通)

 

밤의 한가운데 유독 천천히 마치 빈 배처럼 내려오는 나뭇잎 한 장이 보인다

(저 나뭇잎 한 장은 빈 배 때문에 빈 배처럼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를 들자면 채찍을 말하고 싶다 저 나뭇잎 한 장은 찢어지는 공기를 본 것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내달린 존재들이 공기를 찢으며 뿜는 피냄새를 맡은 것이다 자신을 상하게 하며 추락하는 슬픔, 피냄새를 맡은 자는 변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를 들자면)

 

공기의 결을 다치지 않게 팔랑팔랑 천천히 빈 배처럼 오는 나뭇잎 한 장을 이 늦은 가을엔 끌배로 쓰소서

  

난(亂)

 

밤엔 모든 감각이 예리해집니다 후각이 특히 그렇소 콩기름에서 돼지 냄새가 납니다 포도에서 시멘트 냄새가 옥수수에서 제초제 냄새가 딸기와 토마토에서 넙치 아가미 썩는 냄새가 상추에서 콜타르 냄새가 물에서 표백제 냄새가 아아 코가 아파 미치겠습니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생산해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벌이는 짓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람입니까?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라고 믿을 수가 없군요 기괴한 냄새들이 내 안의 분노를 깨워 사나워지는 내가 무섭습니다

  

인(忍)

 

자정의 종탑에서 종이 울린다

 

"누가 부딪혔어요."

종소리가 무서워 달려오던 소년이 있었다

내 품에서 그렇게 운 지 아주 오래인 겨울이었다

"살아 있을까요?"

 

나는 그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부딪혀서 가벼워지는 중일 수도 있어"라고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끝내 꺼내지 않았다

 

3백 년쯤 전 그 수도원에서 살 때였다

 

새들이었을까?

새뿐이었을까?

나 역시 밤의 종소리가 무섭고 서러웠지만

 

끝내 수도원을 떠나지 못했다

수도원 바깥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쾌(快)

 

밤의 부드러운 노동요

밤은 노동을 즐기네

 

노동은 타락을 막는 항생제

밤은 스스로를 지키네

 

건강한 노동은 착취 없는 노동

좋은 노동은 자유를 향하지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노동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밤은 버려지지 않네

  

은(恩)

 

그이는 지금 잠들었을까 폐지 수레 끌고 건널목에 서 있던 노란 가방을 멘 소년이 건널목을 뛰다 넘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년을 일으켜 안던 안녕을 확인하자 이내 굼뜬 노파로 돌아가 소년에게 천천히 밤빛 양갱을 건네던 노쇠하고 남루한 그 손 앞에 주춤거리던 소년은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가 노파의 손을 쳐내며 아이를 안을 때 울음을 터뜨린 소년에겐 말하기 어려운 어떤 미안함이 있는 듯했고 소년에게 답하듯 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 가득한 손을 아래위로 끄덕이며 괜찮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 깨끗한 아이에게 더러운 노파가 건네려던 밤빛 양갱 같은

 

밤의 빛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연약한 고귀함이 밤의 빛 속에 떠 있다

  

초(招)

 

"네가 그 노래를 죽였니?"

라고 물으며

바람이 자꾸 창문을 흔들고 간다

 

내가 죽인 노래에 대해 생각하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켰다

 

오래전 어떤 부족들은

시집을 읽을 때 향을 피웠다

 

사라진 시집의 사라진 페이지를 펼쳐

소리 내어 읽으며

나는 참회했다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너무 아팠으므로 노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 어떤 노래들을 제가 죽였습니다."

 

시인으로서 직무 유기였다

  

린(隣)

 

나무 곁으로 가고 싶은 나무

돌 곁으로 가고 싶은 돌

금붕어 곁으로 가고 싶은 금붕어

 

(어느 사하촌, 절 들어가는 숲길에 한 전나무 쓰러져 옆의 전나무 밑둥치에 우듬지 대고 있었지 지난여름 폭우 속에 번개 맞았다는 전나무, 길게 누운 임종의 방향에 대해 생각했네)

 

- 1년 동안 금붕어를 잘 돌보면요.

  그 시간만큼 우린 더 살 수 있어요.

 

금붕어를 방생하러 가는 길

잘 돌보면 그 시간만큼 살 수 있다는,

수명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

삶이 조금 더 반짝거리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금붕어의 몸빛처럼

 

- 서둘러줘요, 기사 양반. 정오까지 알리의 샘*에 가야 해요.

 

정오의 곁으로 가고 싶은 정오

저녁의 곁으로 가고 싶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겨울 곁의 겨울

그 외로움에 대해서도

겨울 곁을 지키는 끝내 따스한 밤에 대해서도

   

소(消)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시를 쓰고 싶어.󰡓

너는 말하고 나는 들었다

(내가 말하고 네가 들었을 수도 있다)

 

쓰는 자마저 사람이 아니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때도 시는 시인지

묻지 않았다

 

밤의 숲에 시들이 이미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머뭇거린다

   

로(路)

 

벌거벗는 중인 11월의 나무들

낱낱 한 그루의 성소(聖所)

밤의 나무들에게로 가 무릎 꿇는다

 

[몸]이라 부르는 단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몸의 느낌

이미 이룬 것에 집착이 없는 자유

 

물과 흙보다 바람의 냄새에 가까운

그 모든 것보다 돌의 냄새에 가까운

(더 가깝긴 해도 다른 것이 없는 것은 아닌,

모두 안고 한 발 더 나아가는)

 

겨울로 가는 나무들이 풍기는 몸냄새가 밤의 살빛 속에 가득하다

 

한 몸에 공존하는

생명과 비생명의 팽팽한 대결

 

이런 것이 온몸이다

   

관(觀)

 

12월에 첫 고드름이 얼었다

말할 것이 있어서 고드름이 된다고 믿던 유년이 내 속에 아직 있다

봄이 되면 흐르는 고드름 밑에서 말들을 모으느라 환장하던

얼었다 녹는 것들을 바라보다 눈멀어도 좋을 것 같던

 

지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함께 있는 저녁에

첫 선율이 시작되었다

 

달과 해를 한 눈씩 가진 신비로운 얼굴이 지상을 본다

광대역의 오드아이

윤곽이 없어서 모든 걸 품는 얼굴로

경계선이 없어서 끝없이 깊은 두 눈으로

 

괜찮다,

보고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네)

 

나 자신에게 정직하면 된다

그것이 자유의 첫걸음

 

꽝꽝 언 나들에게 안녕을 전한다

   

음(音)

 

누군가 세계의 틈을 벌리고 노래를 흘려 넣는 한밤중이다

미음 같은 빛이 검다 푸르다 이윽고 희다

당신이 있는 풍경이 나를 잠시 떠올렸다는 걸 느낀다

이 느낌이 나의 노래다

   

소(簫)

 

오라, 나는 격렬히 고요해질 것이다

   

방(?)

 

당신이라는 나무 물고기

뜨거운 등지느러미를 두드리는 밤의 손가락

 

닳고 해진 비늘을 솎아낸 자리에 오목하게 뿌려진

 

빛의

씨앗들

 

바람 이는 모든 방향에 당신이 있다

 

* 금붕어와 알리의 샘은 이란 영화 「택시」의 변용. 반정권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2010년 구속 수감되었던 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20년간 영화 연출과 해외 출국 금지, 언론과의 인터뷰 금지라는 중형을 받았다.

 

 

 

SNS

김선우

 

현실의 식탁과 보여지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등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외로워서 SNS가 필요한 것인지

그로 인해 개인이 더욱 외로워지는 것인지

네, 간단치 않은 문제로군요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음모의 발명과 음지의 발굴, 심판의 욕망에 관해서도

손쉽게 전시되고 빠르게 철거되는 고통의 회전율에 관해서도

공유하고 분노한 뒤 달아오른 속도만큼 간단히 잊히는 비참의 소비 방식에 관해서도

늘 새로운 이슈가 필요한 삶의 소란스러움과 궁핍에 관해서도

점점 더 가벼워지는 눈물의 무게, 녹슨 피의 온도에 관해서도

 

네, 정말 간단치 않네요

몸 없이 몸을 이해하는 일처럼

아니 그보다 몸 없이 몸을 그리워하는 일처럼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13월에게

김선우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더 많은 피의 비밀이 있을 텐데

고작 네 종류밖엔 감당하지 못하는 걸 테니까

네 종류 피는 질서 유지의 한도

네 종류 피 속에 숨어 있는 팔만 사천가지 비밀 얘기들이 궁금해

나는 전사가 되었어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저 새의 혈액형을 알아다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돌고래의 혈액형

귀여운 펭귄과 신비한 늙은 코끼리의 혈액형

아카시아잎 오물거리는 푸른 자벌레의 혈액형

기린과 오로라의 혈액형, 나를 흘리는 모든 존재들의 피가 궁금해

어젯밤 시실리에 떨어진 운석에 묻어 있는

얼음 종족 당신의 혈액형도, 알려주세요

 

당신에게 헌혈할 수 없어 안타까워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내게 남은 스물세번의 12월, 그 첫번째 12월

팔만 사천개의 혈액형이 반딧불처럼 발광하는

13월을 불러줘요 내 피를 줄게요

 

 

 

69-삼신할미가 노는 방

김선우

 

오랜만에 고향집 안방에서 한낮을 백년처럼 뒹구는데 까츨하고 굽실한 희끗한 터럭 하나, 집어 들고 햇살 속에 이윽히 뜯어보니 이것은 분명 그곳의 터럭 어머니의 것일까 아버지의 것일까 오래전 돌아간 조부모의 그것이 장롱 밑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햇볕 쪼이러 시남시남 나와본 걸까 희끗한 터럭 집어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사이에 마음이 뜨끈하게 여울져오고 별안간 이 오래된 삼신할미 같은 방이 쌔근쌔근 더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는 거라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방이 무덤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만 사방이 69 천지인 거라 방구들과 천장의 69, 전등과 전등갓의 69, 문틀과 문의 69, 한 시와 두 시의 69, 이불과 요의 69, 자음과 모음의 69, 모서리와 벽의 69, 두 시와 세 시의 69, 얼룩들의 69, 얼룩이 얼룩을 낳고 얼룩이 얼룩 속에 제 몸을 비벼넣으면서, 쥐오줌과 곰팡이꽃의 69, 숟가락과 국그릇의 69, 주춧돌과 두꺼비집의 69, 옛날 옛적 산이었던 이 터와 지붕 얹힌 것들의 69, 죽은 것과 산 것들의 69, 어머니 태 속의 나와 어머니의 69

그러고는 이 삼신할미 같은 방이 맨 나중으로 펼쳐 보여준 것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69였는데,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가 외할머니 젖을 빨듯, 시든 아버지가 할머니의 젖을 빨듯, 이상하게도 자분자분 애틋한 소리가 온 방에 가득해져 오는 거라 방구들이 천장에게, 모서리가 벽에게, 한 시가 두 시에게, 삶이 죽음에게 젖을 물리며 늙은 방이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