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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영재(1948~ )

가을 깊은 밤

가을날

가을 사랑

개돼지론

겨울 별사

겨울 산에서

겨울 산에서의 충고

겨울에서 봄으로

겨울 저녁

겨울, 한계령에서

곰소의 밤

그 산

꽃 되어 지던 것을

꿩의 바람꽃

나그네

나무들이 사는 법

나물 파는 할머니들

내 안의 당신

너라는 단풍

눈 그치고, 너의 모습

눈물

둥근 세상

떨고 있는 그리움

마음

멀리 있는 빛

모과 - 우걸에게

물푸레나무 사랑

밀물

밀애

바위와 소나무

바윗길

반야행(般若行)

밤길

백담사 가는 길

별이 뜨고 질 때까지

봄 나그네

봄밤의 시

봄비 만나러 가자

봄 산

불일암 장작

비빔밥

빈 잔

산국

선암사 무전에서

세상 길

소나무

손으로 보는 식물원

순댓국밥집에서

시 한 줄

아름다운 땀 냄새

야생화에게

어머니의 편지

오지 않는 사랑

외딴 묘지

우리의 사랑

운주사 석불

이슬

임진각 기차역

장백폭포

잡기(雜器)

저녁 산

적멸 시편

절벽

젖어서 흔들리는

종묘에서

쥐똥나무

지상의 식사

지워지는 슬픔

짧은 밤

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네

참 맑은 어둠

천왕봉 시편

첫사랑 단풍

추석 전야, 어머니

콩 눈

편지 받고

하산

하얀 뱃바닥

할미꽃

함부로 눈 위에 길을 내지 못한다

홍련화(紅蓮華)

홍매

홍어

화엄 동백

흔들림

 

 

 

가을 깊은 밤

김영재

 

은행잎

제 무게 못 이겨

지고 있는 가을 깊은 밤

나에겐

외로움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어두운

하늘 저편에

별똥별이 지고 있을 뿐

 

 

 

가을날

김영재

 

가을 햇살 앞장세워

아이와 밤 따러 간다

자유로 곧은 길 따라

임진강 가 어디쯤

알밤은 아이가 줍고

떫은 밤은 내가 줍고

 

한나절 놀았을까 허리 펴고 먼 산 본다

잡힐 듯 다가오는 그곳은 개성 송악산

이렇게 맑은 날이면 몸도 따라가겠네

 

밤 한 알 떨어지듯 밤하늘 별 내리듯

사람의 마음도 땅 위에 내려놓으면

강물 언 혹한의 밤도 따슨 손 펼 수 있겠지

 

 

 

가을 사랑

김영재

 

그대 없는 빈자리에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은 무심해서 낙엽을 두고 가지만

낙엽은 잠들 수 없어 이슬에 몸을 적신다

 

눈물에 적셔진 잠 아침을 맞이하지만

차거운 이슬방울 햇살에 몸 말릴 뿐

마음은 누런 풀잎 되어 콜록이며 기침 뱉는다.

 

 

 

개돼지론

김영재

 

민중은 개돼지요 자신들은 봉황이라

그 이유 들어보니 의외로 단순터라

민생은 먹고 사는 것 그들만이 해결사

 

망언자 욕할 사람 몇 명이나 되려는지

밥알만 입에 들면 남이야 죽든 말든

세상사 들여다보면 개돼지들 넘쳐나

 

 

 

겨울 별사

김영재

 

당신의 겨울 산의 속살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속살이 되어 내리는 흰 눈을 쓰고

눈 내린 시간을 지키는 등불이고 싶습니다

 

강물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는 철새처럼

나 또한 철새 되어 당신의 가슴으로 날아올라

칼바람 날개로 버티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겨울 산에서

김영재

 

속살까지 환하게 내보인 겨울 산이

눈이 내린다고 속곳 같은 눈이 내린다고

혹한을 죽비로 삼아 내 혼을 내리친다

 

 

 

겨울 산에서의 충고

김영재

 

영혼의 무게를 알려거든

겨울 산으로 가라.

그곳에서 결빙의 황홀을 맞이하려면

길을 버리고 계곡 숲으로 들라.

가는 곳마다

길이 막히고

완강한 차거움이 햇빛을 받아

번쩍,

눈을 찌를 것이다.

 

어젯밤의 실한 꿈도

'부질없어라'

등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하늘 떠난 바람이

작고 힘없이 굳어버린

몸을 할퀼 것이다

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볼 것이다.

지상의 일들은 그대와 무관하다.

 

그렇다고,

 

하늘을 탐하지 말라.

젖어 있는 바다도

그대와는 무관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천천히, 서늘하게

저무는 날을 맞이하라.

 

결빙의 절정을 안으로 녹여

다시 얼음으로 빛날 때까지

끊긴 절벽 아래서

길을 버려라.

길을 잊으라

 

 

 

겨울에서 봄으로

김영재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길에서 사랑을 듣는다.

결빙의 맑고 단단했던 사연들이

소리내는 물소리로 출렁인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잎들이 살아나고

아픈 이별까지 말해버릴 것 같다.

 

 

 

겨울 월정사

김영재

 

월정사 숲에 들어 곧게 선 나무에게

나무야 사랑해 귀엣말 고백하면

온 산이 붉게 물들어 제 몸을 불질렀지

 

가을비 지나가고 얼음 속 월정사

생애는 단풍 아닌 상처로 여물어

빈 절간 흰 산을 쓰고 곤히 잠든 동자승

 

 

 

 

 

사행천 계곡에 섶다리 위태롭다

 

펑펑펑 함박눈이 함박나무에 쌓이고

 

수북이 고봉밥 쌓던 어머니가 그립다

 

 

 

겨울 저녁

김영재

 

어두워지는 시간에 길가에 선 느티나무

비탈진 언덕길 따라 눈을 맞고 걸어가는

한 사람 지친 귀가를 위로하듯 지켜본다

 

마을은 어둠으로 빠르게 추워지고

바닥에 엉겨붙어 얼음으로 깔리는 생

멀리서 작은 불빛이 조금씩 밝아온다

 

 

 

겨울, 한계령에서 원각에게

김영재

 

한계령 깊은 골에서 사람을 그리는 일

어리석고 어리석다

단풍이 지고 있다

비단옷 곱게 뿌리친 나무들 알몸 아니냐

 

산에 들어 혼자서 외로움 삭히는 일

그 무슨 다짐이 있어

바람인들 벗이 되랴

어둠 속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적셔 보아라

 

술잔 가득 채우는 건 독한 외로움이 아니다

부질없는 육신의 불

아직 버리지 못함이니

문밖에 손이 와 있다, 마저 잔을 채워라

 

 

 

곰소의 밤

김영재

바다가 몸을 여는 곰소에 가보았느냐

염화미소 달이 뜨고 밤하늘 매끄러운

열나흘 공산의 밤을 달빛이 흐느끼는

바람 소리 고요해 뻘의 숨 깊고 넓다

아침이 오는 것이 무안해지는 뻘 괴는 소리

연꽃이 몸을 내밀어 한 사내 가두는구나

 

 

 

그 산

김영재

 

산이 거기 있어 나를 몸살 나게 한다

밤 깊은 시간에도 소리 없이 찾아와

그리움 뜨거운 그리움이 무엇인지 사무치게 한다

 

산을 오르는 일이 깨달음을 얻기 위함인지

참고 견디면서 나를 시험하기 위함인지

오르고 또 오르면서 나를 찾는 고난인지

 

바위산을 오를수록 육신이 헐거워진다

바위의 부드러운 힘이 나를 흔들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가벼움과 무거움이

 

 

 

꽃 되어 지던 것을

김영재

 

늦가을 나뭇잎이 떨어졌을 뿐인데

여윈 몸 가뭇없이 떨리는 까닭은

그대가 피는 봄날에 꽃 되어 지던 것을

 

 

 

꿩의 바람꽃

김영재

태백산 바람 속에 피어난 꿩의 바람꽃

작은집 신방살이 환하고 위태롭다

한 사람 미치게 그린 사무치는 몸짓까지

산 꿩의 짝짓기 다 풀어야 꽃이 되나

그대는 알을 낳고 그대는 새끼 기르고

바람꽃 꿩의바람꽃 저 혼자 지는 것을

 

 

 

나그네

김영재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이미 나그네가 아니다

덧없는 짝사랑의 소유자일 뿐

정처 없이 떠나는 바람이 아니다

나그네는 어둠에 기대지 않으며

사랑의 쓸쓸함에 물들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사랑은 예고 없이 문을 닫는다

 

 

 

나무들이 사는 법

김영재

 

나무가 자라면서 사이가 좁아지면

나무들은 하늘 향해 키를 조금 높인다

이웃을 밀치지 않고 사는 법을 익힌 것이다

 

 

 

나물 파는 할머니들

김영재

이름 봄을 불러내 꽃들이 앉아있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들이 웃고 있네

풋정 든 푸성귀들을 꽃들이 바라보네

 

 

 

내 안의 당신

김영재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를 버려야 하듯

당신을

만났으니

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당신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너라는 단풍

김영재

 

이제 너의 불붙은 눈 피할 수 없다

감춰야 할 가슴 묻어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누가 막는다 해도 저문 산이 길을 트고 있다

 

 

 

눈 그치고, 너의 모습

김영재

 

가야 할 곳 아득하고

창백한 어둠 내린다

지나온 길 돌아보니

청솔 위 흰눈 녹다

헤어진

너의 모습도

흰 눈처럼 녹고 있다

 

바람 소리 두 귀 막아도

마음은 혼자서 쓸쓸하다

길은 외길인데

두 마음이 길을 걷는다

솔가지

그 난간에서

녹던 눈이

떨어진다

 

내 곁에 너 보이지 않고

가슴 깊이 연꽃 봉오리

말로써 그 모습

다 말할 수 없어

하늘도 변방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떠돌고 싶다

 

 

 

눈물

김영재

 

떨어지는 내 눈물이

가을 잎으로 물든다면

돌아앉아 흐느끼는

겨울 산이 되겠네

가랑잎 혼자 잠이 든

선운사 그 어디쯤

 

 

 

둥근 세상

김영재

그 사람 구두 뒷굽이

바깥으로 다 닳았다

 

평생을 변방으로

떠돌던 까닭이다

 

중심에

들지 않는 삶

둥근 세상 그리웠다

 

 

 

떨고 있는 그리움

김영재

 

여름은 셀 수 없이 많은 햇살 묶음.

가을은 한 사람의 마음이 마른 남자.

겨울은 문 밖에 서서 떨고 있는 그리움.

 

 

 

마음

김영재

 

연필을 날카롭게 깎지는 않아야겠다

끝이 너무 뾰쭉해서 글씨가 섬뜩하다

뭉툭한 연필심으로 마음이라 써본다

쓰면 쓸수록 연필심이 둥글어지고

마음도 밖으로 나와 백지 위를 구른다

아이들 신나게 차는 공처럼 대굴거린다

 

 

 

멀리 있는 빛

김영재

 

이젠 떠난 자의 사랑 잊어야 하고

떠난 자의 돌아오지 않음을 생각하라

만날 때 주고 받던

지상의 모든 것

그것은 봄밤에 내린 철없는 눈발이었으며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멀리 있는 빛이었도다

 

나의 푸른 꿈이 너를 기다리던

, 떨고 있는 가등이 침침하도록

눈이 내렸고

잠든 이들에게 안식을 내렸지만

친구여 내게는 어두운 등불

목마름이 크도다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고

잠 못 든 잠을 사랑할 수 없도다

 

떠난 자의 돌아섬을 말할 수 없고

남은 자의 기다림을 말할 수 없도다

 

내 너무도 떠난 자의 아픔 사랑했으므로.

 

 

 

모과 - 우걸에게

김영재

 

친구가 택배로 보낸 잘생긴 모과 네 알

한 알이 익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사십 년 햇살이 뭉쳐 향을 품고 있었다

 

 

 

물푸레나무 사랑

김영재

 

, 멀리 길 떠나고 나는 온종일 비에 젖는다

물가에 앉으면 물이 되고

숲속 거닐면 푸른 잎으로 흔들리던 너

 

비 오는 강가에 앉아

흐르는 사랑을 만진다

 

너 없는 시간에 물속에 손을 담그면

하늘이 시리게 내려와

파랗게 베어든다

 

내 몸이 자꾸 서럽게

물푸레나무로 서 있다

 

 

 

밀물

김영재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바다가 잠잠해서

 

 

 

밀애

김영재

 

흔들림도 없이 심심한 느린 햇살 속으로

도토리 알몸 한 쌍이 재빠르게 떨어진다

가을은 혼자 속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네

 

 

 

바위와 소나무

김영재

바위와 소나무

함께 못 살 것 같지만

바위에 솔씨 떨어져

말없이 안기면

신랑이 신부를 맞듯

바위가 몸을 연다

 

 

 

바윗길

김영재

 

바위가 막는 곳에 또 다른 길이 있다

바위가 길이 되어 사람을 걷게 한다

외로운 바위로 남아 길이 되는 사람 있다

 

 

 

반야행(般若行)

김영재

 

산속에 혼자 지낸

노스님을 찾아가

왜 토굴에 사시느냐

참말로 물었더니

빈말로 꿍치는 말씀

너나 잘해라 그러신다

 

 

 

밤길

김영재

 

먼지 쓰고 누운 샛길 따라

끝내는 쫓기듯 나왔다

아버지 산소는

더 높은 하늘로 오르고

마지막 햇살 한뼘도

돌아서던 저물녘

 

소매 끝에 땟자국 가신

새 옷으로 차려입고

제각기 흩어져 갈

기약 못할 정붙이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둠 속 막막함을

 

어디로 가는 길이냐

낯익은 길도 설다

바람도 낯선 바람이

어쩌자고 길을 재촉할까

차라리 어둠에 묻혀

땅이 되어 잠길거나

 

 

 

백담사 가는 길

김영재

 

양수리, 양평 홍천 지나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가다, 가다 보면 길옆에 누워 있는

삶은 옥수수, 삶은 찰옥수수

검게 탄 손차양하고

누군가를 기다리지요

 

백담사 만해 축전

거나하게 열렸지요

 

휴가철 물놀이 접고

가방 하나 챙겨 버스 타고 가다 보니

동강, 물 신음소리 들리고

아우라지 가락 귓가 맴돌다 스러지고

차창 밖 불볕더위 등짐 지고 서서

 

옥수수, 삶은 옥수수

외치는 농부들 얼굴

 

칡꽃 향기 맡으며

백담계곡 오르면서

만해선사께 묻고 싶네요

삶이란 옥수수입니까

아니면, 찰옥수수입니까

찰지디 찰진, 값이 더 나가는

 

 

 

별이 뜨고 질 때까지

김영재

 

별들이 어둠에 박혀 내려오지 않고 있음이란

그 위험스런 찬란함

그 장엄한 광채란

깊은 밤 구천동 들어 걷지 않으면 모르리

통이 트면 별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얼음쪽 같은 상현달

잎 진 가지 끝에 맺히지

산과 산 그 틈 사이로 안개 속 세상이 열리고

 

 

 

봄 나그네

김영재

 

서낭당에 소원 빌고 나도 한 잔 음복했다

신선이나 되자고 솔바람에 취해 잤다

선잠 깨 눈을 떠보니 개살구꽃 그늘 밑

 

 

 

봄밤의 시()

김영재

 

그대 가슴 쓸고 가는

바람 가닥 몇이길래

밤새 앓던 열병이

아침 비로 흐느낀다

꽃잎은

열리다 말고

마침표로 멈춰 있다

 

눈감고 얼굴 돌려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빗물에 젖어 빛나는

그대의 크렁한 모습

앞뒤에 내리꽂히는

아 맨처음의

사랑

 

 

 

봄비 만나러 가자

김영재

 

봄 꽃놀이도 즐겁지만

우리 봄비 만나러 가자

가서, 작은 목소리로 안부 묻자

찬 겨울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말

대꾸 안 하고

톡 톡 톡 꽃잎 때리는

 

사는 일이야 허공 가득

빗금 긋는 빗물 같은 것

우리 한때는 어둠이었고

산 넘다 무릎도 다친다지만

그렇게

비우고 살다 보면

빛나는 생의 눈물이 되리니

 

들판에 나가 봄비 소리를 들으면

매 맞고 싹 틔우는 철부지도 만나고

만나서,

매 맞는 소리만 듣고도

그 이름 눈치채는 사랑도 배우고

 

 

 

봄 산

김영재

 

봄 산에 가면

뻐꾸기 운다

그리운 이름 부르며

목메어 운다

사람은 죽어 산이 되고

풀잎은 죽어 바람 되는데.

 

길을 버리고

잡목숲 접어든다

초록 잎 터지는 소리에 두 귀가 맑아지고

없던 길

낯선 숲 깊이

환한 길 보인다

 

허리를 낮추고

비탈을 휘어돈다

돌부리에 넘어져 이젠 더 갈 수 없다

공손한 물줄기 몇이

낮게낮게 흐른다.

 

산은 가득 차 있고

산은 비어 있다

차고 비어 있음은

마음 주기 달린 일

한 생애 번잡스러움이

나이테로 감긴다.

 

 

 

불일암 장작

김영재

 

법정 스님 계셨던 송광사 불일암에

작년 것도 아니고 더 오래된 장작더미

혹한에 언 손이 오면 제 몸을 사르겠단다

내가 쬘 군불 아닌데 참나무 뻐개는 소리

조계산 굴목재 넘어 선암사까지 울렸다

한 사람 떠나간 적막 속 아궁이가 환하다

 

 

 

비빔밥

김영재

섞일수록 거침없이 섞여야 비빔밥이지

새록새록 맛이 도는 고추장과 참기름

너와 나 뒤범벅으로 뒤섞일 수 있는

양 볼이 미어지게 쓰윽싹 몰아넣는

비빔밥이 되려면 통하라 무조건이다

몸 따로 사랑 따위는 한 줄 연애도 아니다

겨울 녘 등불 아래 기러기 시린 발 본다

내 발이 시린 건 당신께 날고 싶다는

칼바람 역풍 속에서 몸과 맘 섞고 싶다는

 

 

 

빈 잔

김영재

 

그대

떠난 빈자리에

낙엽이 지고 있다

가을은 혼자가 아니라서

슬픔까지 껴안는다

찻잔엔 바람 머물다 가고

나는 빈 잔으로 남는다

 

 

 

산국

김영재

 

산길 오르다 만난 산국

바위틈에 홀로 피었다

벌 나비 찾지 않아도

고요, 너무 찬란해라

그 순간

아찔한 벼랑!

내 몸이 날개를 달다

 

 

 

선암사 무전(無憂殿)에서

김영재

 

잎 진 가지 사이로

찬비 내린다

젖어 넉넉한 건

깔려 있는 나뭇잎이다

무우전(無憂殿) 추녀 밑에서

침묵의 귀를 키운다

 

 

 

세상 길

김영재

주인 없는 길 따라 나그네가 걷는다

능선과 계곡이 갈리면서 모이는 산

물길은 따로따로 와 하나 되어 흐르듯

새가 날다 잠이 든 조침령(鳥寢嶺) 쉬어갈까

오백 년 숨 고르는 문경새재 넘을거나

넘어서 갈 길 많지만 조심스런 세상 길

 

 

 

소나무

김영재

 

무덤가 잔디가 시름시름 죽어갔다

절개 굳은 소나무의 짙은 그늘 때문이었다

소나무, 잘려 나갔고 사철 푸른 것이 죄였다

 

 

 

손으로 보는 식물원

김영재

눈을 떠도 세상이 안 보이는 눈 오는 날

광릉 숲 찾아가 나무 안아보아라

나무들 심장 뜨거워 제 이름 고백할 테니

나무의 심장에 처음처럼 입술을 대면

사각사각 타오르는 사과나무 불꽃 냄새

사랑도 그와 같아서 영롱한 가슴 되리

 

상처가 열려 있어야 사랑 볼 수 있다는

광릉 국립수목원 손으로 보는 식물원

상처는 잎이 돋기까지 얼마를 돌아왔을까

 

 

 

순댓국밥집에서

김영재

 

공덕동 재래시장 국밥집 들어앉아

순댓국 소주 한 병 시켜놓고 생각한다

삶이란 국밥에 술 한 잔 먹을 자격 있던가

 

한 잔 술 털어 넣고 푹 삶은 내장을 문다

걸신으로 살아온 꼬였던 삶을 문다

생수를 안주 삼을까 그 삶을 토해낼까

 

생이란 부끄러운 엄살 더께 외로움

닭 목 하나 못 비튼 참담함 연약함이여

서울의 목로에 앉아 주린 배를 채운다

 

 

 

() 한 줄

김영재

 

집 한 채 짓고 살기

한평생 걸린다지만

마음에 시 한 줄 긋고 사는 일 얼마나 쓸쓸한가

각박한 세상살이에

!

시 한 줄이라니

 

 

 

아름다운 땀 냄새

김영재

지독하고 아름다운 땀 냄새 맡아보라

북한산 향로봉 밑 칼끝 같은 바윗길

절면서 산길 오르는 장애인 사내 뒤에서

사내는 절며 걷지만 세상을 딛고 오른다

땀 냄새는 쿠데타다, 골수에서 터진 순수

누군들 성한 다리로 온전히 걸어왔는가

 

 

 

야생화에게

김영재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란 걸 알아요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 있는 외로움

창 열린 낯선 민박집 별을 헤던 그날 밤

 

 

 

어머니의 편지

김영재

 

맞춤법이 엉망인

고향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나의 마음은

웬일일까

가을 들풀처럼

눈물겹다.

 

 

 

오지 않는 사랑

김영재

 

기다리는 사람 오지 않고

풀잎은 흔들렸다

풀잎이 흔들릴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내려와

기다림의 가슴을 지우고 갔다

 

 

 

외딴 묘지

김영재

 

깊은 산속 양지 비탈

외딴 묘지 하나 있다

하늘과 바람, 벗하며

무심하게 누워 있다

살아서 했던 것처럼

온 산을 짐 지고 있다

 

밤이면 어둠 침묵하고

아침이면 파랗게 눈 떠

사는 일이 비탈이며

비탈이 생()의 한 켜임을

살아서 했던 것처럼

온몸으로 일러준다

 

사라졌다 다시 오고

왔다가 멀어지는

안개 산 능선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저 묘지 거기 있는 까닭은

삶이 여기 있는 까닭이리

 

 

 

우리의 사랑

김영재

 

이젠 잠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랑

다시 물로 만나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하나가 되나니

저 작은 풀씨조차

떨어져 누운 자리 지키며

얼었던 땅을 뚫고

잎을 피우나니

바람과 추위가 얼리고 간 사랑

사람들은 돌아서서 불빛 속으로 떠나고

우리의 사랑 얼음으로 남아

긴 밤을 떨고 있었나니

너와 나의 가슴에 얼지 못한 피

목마른 그리움,

이젠 잠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랑

다시 물이 되어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운주사 석불

김영재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좋지

 

체면치레 행색보다

모습부터가 홀가분하지

 

망가진

얼굴일 바에

목 없는 세월을 산다

 

 

 

이슬

김영재

열반을 믿는다면 내 사랑은 꽃이다

수렁에 뒹굴어도 아득한 품속이다

닫혀진 수련에 갇혀 천 년을 잠들고 싶다

다시 수련 벙글면 영롱하게 태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알몸으로 반짝이리

사랑할 시간 넘쳤으나 사랑을 몰랐으므로

 

 

 

임진각 기차역

김영재

임진각 기차역에 어둡도록 내리는 눈

슬픔 없이 잠이 들 사랑 찾아 날린다

오래된 먹물을 풀어 그리는 그림처럼

빈들에 눈이 내려 땅과 하늘 한몸이다

너와 내가 밟는 발자국도 하나이다

박봉우 <휴전선> 시비 누구, 기다리고 서 있다

 

 

 

장백폭포

김영재

 

목어는 속 비워야 소리가 맑아지고

밴댕이 속 좁아서 망망대해 제 것이다

장백산 일자(一字) 폭포는 떨어, 떨어져야

 

 

 

잡기(雜器)

김영재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조선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하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것 아니라 백성의 밥이었거늘

 

*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일본인 무네요시가 이도다완에 바쳤다 함.

 

 

 

저녁 산

김영재

 

어둠이 내려오니 산들이 누워버렸다

얼떨결에 갇혀버린 어린 돌부처 하나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갈길 간다.

 

 

 

적멸 시편

김영재

 

산에 가서 누구는

겸손을 배운다지만

산정(山頂)에 홀로 올라

사라짐을 배웁니다

바람 앞

티끌이 되어

흩어지는 나를 봅니다

 

 

 

절벽

김영재

 

우리 앞에 가로막는

절벽은 있어야겠다

사정없이 후려치는

바람에게 뺨 맞고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 있어야겠다

소금 창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소금 창고 한칸 짓고 싶다

비좁고 허름하지만

왕소금으로 가득 찬

그 창고

문을 밀치면

큰 바다가 세상을 뒤덮는

 

 

 

젖어서 흔들리는

김영재

 

근심 없는

코스모스

가을비

맞고 있다

 

가녀린

너무 가녀린

예쁜 몸

젖고 있다

 

젖어서

흔들리는 건

사람 사는

일뿐이라고

 

 

 

종묘에서

김영재

 

고궁 연못 위로 꽃잎이 지고 있다

봄바람 칼질하듯 꽃그늘 어지럽다

봄맞이 실직의 가슴

멍으로 눕는 자리

 

갈 곳 없는 그대

등 내치지 않는다

무겁고 힘든 발길

받쳐준 든든한 댓돌

언젠가 일어서리라

북악이 불을 켠다

 

이 땅에 태어나서 집 한 칸 짓고 산다

생명의 심줄로 솟구치는 근력으로

내 오늘 잊지 않으리 떨고 있는 꽃잎이다

 

 

 

쥐똥나무

김영재

 

겨우내 웅크리던

쥐똥나무가 잎을 피운다

쥐똥나무가 쥐똥나무이기 위해

작은 잎을 무성히 피운다

이 세상 큰 열매 많지만

쥐똥만 한 열매를 위해.

 

어깨를 비비고 키 재기 하며 크는 나무들

쥐똥보다 못한 일 흔해도 비웃지 않고

말 없는 울타리 되자고

비와 바람을 맞는다

 

잠들어서는 안 된다

다투어 깨어 있는 잎들

찬란해라, 아름다워라

소리치지 않아도 큰 울림이여

그들은 귀엣말로 속삭인다

오래오래 쥐똥나무로 살자고.

 

 

 

지상의 식사

김영재

 

지하도 계단에서 손 내밀던 그 노파

내가 가던 횟집에서 고등어 조림 드신다

지상의 한 끼 식사는 성스러운 예배였다

 

 

 

지워지는 슬픔

김영재

전깃줄에 새들이, 어두워지는 시간에,

더욱더 어두워지면서, 하나씩 지워지고

지워진, 그 자리에는 슬픔마저 지워지고

 

 

 

짧은 밤

김영재

 

밤비에 목련꽃이 하얗게 젖고 있다

당신의 기다림이다 당신의 사랑이다

떨면서 꽃을 지키는 봄밤이 너무 짧다

 

 

 

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네

김영재

 

마음이 심하게 추위를

타는 날은

사람이 다니는 길을 피해

나무들이 몸 비비고

서 있는

산길 오른다.

 

바다가 보이는 산.

노여움도 미워함도

흩어져 버린 곳.

나는 오를수록 힘들어하면서

정상이 보일 때까지

쉬지 않았다.

 

어디선가 땀 젖은 가슴을 열고

온 산을 울리는

징 소리가 들렸다.

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고.

바다는 내게 소금 되라고.

 

 

 

참 맑은 어둠

김영재

 

사랑을 버리고 싶다

버릴 사랑

어디 있느냐

 

백담사

구비 오름길

어둠이

참 맑다

 

스님은

혼자 서 있고

산은

여럿 모여 산다

 

 

 

천왕봉 시편

김영재

 

오르는 길 멀고 길지만 머무를 시간 너무 짧구나

이제껏 오르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본 곳

단 한 번 꼭 오르고 싶었던

내 삶의 정수리

 

내 대신 누가 험한 산길 오르고 오르겠느냐

두 무릎 꺾이며 꺾이며 어리석었던 나를 버렸다

산 아래 고요히 누운 세상

! 그걸 보며 나를 또 꺾는다

 

 

 

첫사랑 단풍

김영재

 

내설악 들어섰더니

첫사랑 단풍

거기 있었네

스무 살 첫눈 맞던 날

눈발 따라 떠난 그대

붉은 멍

가슴 그대로

눈꽃으로 피고 있었네

 

 

 

추석 전야, 어머니

김영재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밤 기차가 지나간다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다

 

내 설움,

여기쯤에서 그만둘 걸 그랬다

 

 

 

콩 눈

김영재

 

개망초 피었네요 돌아오세요 어머니

돌아와 나랑 함께 계란꽃 놀이 해요

잠자리 콩눈 굴리며 까불까불 날지 않아요

 

 

 

편지 받고

김영재

 

그렇게 살아갈 날들 얼마나 있을까요

몇 줄의 편지 받고 지난 만남 생각합니다

비 오고 지친 마음이 창을 조금 닫습니다

 

 

 

김영재

 

이름 모를 풀이라 해도 함부로 밟지 마라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에게

밟히며, 그래 짓밟히며 이름 없이 사셨단다

 

 

 

하산

김영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내 육신의 눈꺼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잡을 수 없는 세월

하산길 돌틈에 낀 가랑잎이 내 발목을 잡는다.

 

 

 

하얀 뱃바닥

김영재

갈매기 뱃바닥이 하얗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음란하게 그녀의 배가 하얗겠지 마음먹었다

철 이름 봄 바다를 보며 배가 고픈 것이었다

 

 

 

할미꽃

김영재

산비탈 오르다 만난

무덤가 꼬마 할미꽃

무덤 안 할머니

무척이나 작으셨나

어머니

병중에 작아져

살아서도 할미꽃

 

 

 

함부로 눈 위에 길을 내지 못한다

김영재

 

뜬금없는 너의 소식처럼

일요일에 내린 눈은

마른 풀 위에 내리고

잎 진 가지에도 쌓였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던 것들이

밤사이에 모두 얼어붙었다

 

함부로 눈밭 걸을 수 없다

내 발자국 빗나갈까 봐

그 누군가 믿고 걷다가

어둠 속에 갇힐지 몰라

눈 위에 길을 내는 일

잠 못 이룬 사랑보다 두렵다

 

 

 

홍련화(紅蓮華)

김영재

 

진창물 탁한 늪에 알몸뚱이 드리우고

탈세속 이제염오(離諸染汚) 드높은 뜻 이루려는

긴 세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시름 깊은 구도자

 

오취온(五取蘊) 껍질 벗고 붉은 땀 훔쳐내니

구경각(究竟覺) 푸른 세상 두 눈에 들어오는

말법시(末法時) 오탁오세(五濁惡世)에 불 밝히는 열반화(涅槃花)

 

 

 

홍매

김영재

 

이런 봄날 꽃이 되어 피어 있지 않는다면

그 꽃 아래 누워서 탐하지 않는다면

눈보라 소름 돋게 건너온 사랑인들 뜨겁겠느냐

 

 

 

홍어

김영재

 

술 취한 친구의 한잔을 위하여

잘 삭은 홍어 되어 몸속으로 빨려든다면

어두운 살의 바다에 독한 냄새로 남으리

해일을 만나면 해일로 뒤집히고

알몸으로 만나면 알몸으로 섞이어

다시는 환생치 못할 썩어 푹 썩어 있을

 

 

 

화엄 동백

김영재

 

뚝뚝 목이 지는 화엄사 동백을 만나

일자리 작파하고 유랑하는 친구의 말씀

지리산 반야봉 너머 환한 세상 있것다

 

천왕봉 상상봉에 매어놓은 바람집 한 채 바람을 부르면 슬픈 가락이 되고 구름 몰려오면 벼락 치는 노한 소나기로 우르릉 쾅쾅, 섬진강 은어 떼 뛰듯 철없이 튀어 올라 평사리 무논 바닥 잡풀 자라듯 그렇게 한 시절 살아보려 했는데 절뚝이며 절뚝이며 술잔 비우네

 

동백은 생살로 목이 뒹굴고

어둠은 말 없는 산을 감춘다

 

 

 

흔들림

김영재

 

때로는 흔들리면서 사는 일이 아름답다

더불어 살아가면 더불어 흔들리고

혼자서 길을 걸으면 혼자서 흔들리겠지

 

느리게 기어가면 느리게 흔들리고

빠르게 달려가면 빠르게 흔들리는

이것이 사람살이의 또 다른 깨달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