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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줌의 흙

열 줌의 흙

주요섭

 

카운터 앞 동글의자는 하나도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식탁들의 앞뒤에 놓여 있는 네모난 의자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제일 가까운 네모꼴 의자에 나는 주저앉았다. 카운터 앞 동글의자가 하나라도 비면 얼른 뛰어가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카운터 앞에 앉으면 아주 간단하고 값싼 음식-햄버거 하나와 커피 한 잔 정도-을 주문하고도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설탕과 크림은 얼마든지 공짜로 커피에 타 먹고도 돈은 육십 센트만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매부리코 남자 사동 하나가 내게로 가까이 왔다.

혼자시군요. 저쪽 자리로 옮겨 앉으셔요.”

라고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자식 건방지군. ‘미안하지만소리는 빼먹고…… 팁은 바라지도 마, 자식.’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화가 난 나는 일어섰다-곧장 밖으로 나가 버리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두 사람만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조그만 식탁 앞 의자에 앉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안심고기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했다-철없는 만용. 나의 이런 망발에 내 돈지갑이 움찔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간 내가 사먹을 수 있었던 최고의 식사는 질기기 한이 없는 한 달러짜리 스테이크뿐이었었다. 브로드웨이 오가 뒷골목에는 값싼 스테이크 전문 식당이 있었다.

별안간-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카운터 뒤에서 손님들 접대를 하고 있는 두 젊은 여급들의 모습이 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는 금빛 머리털에 파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머리칼이 까만 여자였다. 머리만 까만 것이 아니고 얼굴도 까맸다.

이 검둥이 여자의 움직임을 내 눈은 짓궂게 따랐다. 손님들의 머리 사이로 잠깐씩 나타나곤 하는 그녀의 옆얼굴, 혹은 정면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털과 얼굴이 까맣기는 했지만 얼굴 형태는 아프리카 산이 아니라고 내게는 보였다. 현대 인도인들의 얼굴 색깔보다는 좀더 검었지만 틀림없이 옛날 코카서스족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나이를 옳게 판정하는 데 나는 서투르지만 그녀의 나이는 스물 정도로 보였다. 매력 있는 여자였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속에 거의 죽었던 불씨를 소생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태 전에 날 버리고 가버린 한국 여성에 대한 원망심과-또 그리고 억제하기 힘든 그리움.

내 끈덕진 시선을 인식하기라도 했는지 카운터 뒤 검둥이 여자는 약간 경계하는 눈초리로 날 힐끗힐끗 보곤 했다.

그녀의 모습에 너무 황홀해진 나는 내가 애초 이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오게 된 참된 이유를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이 식당은 작기는 해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분주한 네거리 한 모서리에 있기 때문에 영업이 꽤 잘되리라고 생각되어 동정을 살피려고 나는 들어온 것이었다. 직업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나였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빨리 왔다-손님이 별로 많지 않으니까.

그러나 내가 식사를 반쯤 했을 때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자줏빛 모자에 금빛 숄을 단 터키모자를 쓰고, 자줏빛 코트가 아니면 아라비아식 저고리를 입은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좌석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식당 윈도에 크게 써붙인 귀족님들 환영이라는 표지가 마력을 십분 발휘한 모양이었다-아니 표지의 마력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미국 각 지방에서 일시에 모여든 이만여 명의 인파가 이 구석진 식당에까지 침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거의 백 년 전 바로 이 뉴욕 시에서 발족된 슈라인 협회연차 회의가 다시 이 시에서 개최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고 있었다. 종교단체는 아니라 하지만 협회의 각종 지위 명칭은 회회교 것을 따르는 단체였다.

단순히 사회사업-주로 무료병원 설립과 운영-과 회원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단체의 대표 이만여 명이 맨해튼 섬의 브로드웨이와 동서 오가 중심으로 집단 유숙하고 있는만큼 그들의 여파가 동 이십칠가에 있는 이 식당에까지 흘러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모두가 다 돈 많은 부자들인데다 축제 기분에 들뜬 그들이 돈을 물쓰듯 쓰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 식당에 손님이 많아지자 서비스가 더디어 손님들이 오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제 웨이터들이 소용되겠군…… 부엌에서도 손이 더 필요할 거고.’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손님들이 계속 밀려드는 것을 보는 나는 얼른 먹어 치우고 자리를 비워 줘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출입문 바로 안 한옆에 있는 데스크로 가 식삿값을 치르면서 나는,

몇 시쯤 식당 문을 닫습니까?”

하고 회계원에게 물어 봤다.

새벽 두시…… 당분간은.”

지배인 좀 만나 뵐 수 없을까요?”

왜요? 직업 구하려고?”

.”

그럼 낸시를 만나세요…… 그녀가 주인이니까.”

어디 계신가요, 그분이?”

바로 저기.”

하면서 회계원은 카운터 뒤에 있는 검둥이 여자를 가리켰다.

지금은 몹시 바쁘니까 새벽 한시쯤 다시 들러 보는 게 좋겠지요.”

새벽 한시라면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나는 거리에 나섰다.

거리거리에서는 슈라인회원들이 진탕치게 놀고들 있었다. 최고급 요정에서의 만찬, 행진하는 밴드, 먹고 마시고, 구경하려고 모여드는 숱한 군중 앞에 자랑스런 만족감을 느끼며.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흑인촌 할렘에서는 평등권을 달라고 외치는 검둥이 폭도들과 흰둥이 순경들이 치고 받고 때리고 체포해 가고 도망 가고 하는 사실에는 아랑곳없이.

구경꾼들 속에 나도 휩쓸렸다. 오늘 밤만은 이곳저곳 자동식 식당들을 순례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오늘 저녁에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정말 오래간만에 나는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이다.

아까 그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루 종일 나는 커피 석 잔과 쇠젖 두 잔으로 요기했었던 것이다. 자동식 식당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돈 주고 사먹는 커피나 우유보다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공짜 설탕과 크림을 더 많이 뱃속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한 주일 전 어느 날, 나는 진종일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다녔었다. 자동식 식당 한쪽에 있는 공짜 얼음 물통으로 가서 유리컵에 물을 받아 가지고는 남들처럼 그 자리에서 쭉 들이켜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식탁으로 컵을 가지고 갔다.

식탁 위에 있는 공짜 설탕을 듬뿍 타마시곤 했었던 것이다-여러 자동식 식당을 순회하면서.

재수 좋은 날에는 자동식 식당에서 남들이 먹다 남기고 간 음식을 훔쳐(?) 먹을 수 있었다. 빵쪼가리, 파이 조각, 샐러드 두어 숟갈, 때로는 고기 조각도 먹을 수 있었다-이 식탁 저 식탁으로 옮겨 다니면서-빈 그릇 치우는 여급들과 단거리 경주를 하면서.

훔쳐 먹었다고?

글쎄, 자동식 식당 식탁에 남아 있는 음식-손님들이 사먹고 남기고 간 음식의 소유자는 과연 누구일까?

쓰레기통이 주인이지, 물론. 그런데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내 뱃속 쓰레기통은 쇠로 만들어 은박 입힌 쓰레기통보다는 훨씬 고급이 아닌가. 더구나 쇠로 만든 쓰레기통은 음식물을 소화 못 하는 데 반해 내 뱃속 쓰레기통은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소화가 너무 빨리, 너무 잘 되는 것이 나에게는 원망스러운 쓰레기통이었다.

십여 년 전 그러니까 1951년에 나는 한국 부산 근방 미군 주둔군 식당 쓰레기 버리는 덤핑 그라운드를 매일 배회하는 수백 명 어린이들 중의 하나였었다. 우리가 뒤져 먹는 음식은 꿀꿀이죽이라는 고상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름은 그랬지만 음식 자체는 정말 기름졌고 맛이 별미였다. 한 해 동안 내 배는 꿀꿀이죽 수십 톤을 거뜬히 소화했었다.

 

인적이 드문 샛길을 걸으면서 나는 아까 식당 회계원이 하던 말을 되새겨 봤다.

식당 규모가 작긴 하지만, 젊은 검둥이 여성이 어떻게 그걸 운영해 나갈 수 있을까. 아프리카족의 혈통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여간 새벽 한시 뒤에 가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러나 그때까지에는 아직 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걷고 있는 나는 자주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수건 한 개가 추할 만큼 더러워졌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새 손수건은 지닌 게 없는데.

영화관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영화관 출입문 밖 공중에 걸려 있는 전등장치에 크게 나타나 있는 상영중인 영화 제목-그것이 날 유혹했다.

어둑신한 영화관 안은 에어컨디션이 돼 있어서 서늘했다-거의 추울 정도로.

은막에 비치는 누드콜로니(나체굴) 순례 천연색 영화가 내 눈에는 어디보다도 더 서늘하게 보였고, 내 관능을 몹시 뜨겁게 만들어 줬다.

두 차례 계속 앉아 나는 누드 영화를 감상했다-육체적인 욕망을 정신적으로 만족시키면서.

 

새벽 한시 조금 지나 나는 아까 그 식당으로 다시 갔다. 식당은 한 절반 비어 있었다. 회계원 모습도, 남자 웨이터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두 여급들만-낸시를 포함한-남아서 손님들 접대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 자리잡은 나는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졸금졸금 천천히 마시면서 용기를 북돋운 나는 낸시에게 말을 걸었다.

일거리가 혹시 없을까요? 접시닦기라든지…… 아무거나…….”

일본인이십니까?”

고 낸시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중국인?”

아니오.”

, 그럼 한국인?”

그렇습니다…… 그런데 난 놀란걸요. 내 국적을 단 세 번 만에 알아맞히는 미국 사람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미국인들 대다수는 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낸시는 빙그레 웃었다-말없이.

그녀의 미소-그 미소가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이태 전까지 미소로 날 그렇게도 즐겁게 해주었던, 그리고 지금 와서는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자학과 분노를 주고 있는 한 한국 여성의 미소와 낸시의 미소가 너무나 비슷했다.

미국 시민이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아닙니다. 공부하려고 유학 온 학생이에요…… 삼 년 전에…… 난 지금 직업을 구하고 있어요…… 결사적으로.”

글쎄요, 단 한 주일 가량만의 임시 일자리라도 가져 보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묻겠는데, 하루 여덟 시간…… 새벽 세시까지 일하고, 한 시간 임금은, 아 잠깐…… , 칠십오 센트입니다.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 실례했어요, 미스터…….”

헨리라고 불러 주세요. 그냥 쉽게 한국 이름을 가르쳐 드리면 기억하시기가 귀찮으니까요. 기억할 노력조차 안 했다가 다시 만나면 영락없이 찰리라고 부르더군요. 찰리는 질색이에요…… 헨리라고 부르세요.”

낸시는 깔깔 웃었다.

미리 말씀드려 둘 것은 임금은 한 시간에 한 달러입니다.”

좋습니다.”

숙소는 어디지요?”

하룻밤 방세 두 달러짜리 싸구려 방이 있는 호텔들은 모두 다 내 숙소지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낸시는 잠시 날 노려봤다.

그럼 부탁드려요…… 지금 당장 일 시작할 수 있으세요, 헨리?”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부엌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요. , 잠깐,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드릴게 잡숫고 시작하지요…… 나두 배가 고프니 우선 좀 먹어야겠어요.”

 

한 주일이 퍼뜩 지나갔다. 그리고 식당 영업이 한산하게 됐다.

낸시가 금방 해고통지를 내게 내릴 것 같게만 생각되는 내 마음은 초조하고 우울했다.

오늘 밤부터 식당문은 열한시에 닫기로 한다고 낸시가 선언했다. 내 마음속 결정은 이미 내려 있었다-내일부터는 또다시 한없이 걷는 내 발걸음으로 포장되어 있는 도로들을 뜨겁게 해줄 것이요, 따라서 나는 자동식 식당들에나 드나들면서 쓰레기로 내 배를 채우지 아니치 못하게 될 신세를.

나하고 얘기 좀 할까요, 헨리?”

라고 낸시가 말했다.

예기는 했지만 막상 해고선언이라고 생각되자 내 가슴은 떨렸다.

그러나 나는 좋습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기다려 줘요, 문 닫을게.”

그녀는 나를 자기 자가용 자동차에 태웠다-내 숙소까지 바래다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를 몰기 시작하자 내 숙소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는 그녀는 앞만 내다보며 센트럴 파크 중간길을 몰고 있었다.

헨리, 난 당신의 신상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라고 그녀는 불쑥 말했다. 눈은 앞만 보면서.

나는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근처 가로수 그림자 아래에 그녀는 차를 멈췄다. 나더러 차 안에 그냥 남아 있으라는 뜻으로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린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보도로 올라가 파킹 미터에 동전을 집어넣은 그녀는 차께로 도로 왔다.

차를 다시 타는 그녀는 차 안 전등을 껐다. 가로등 불만 비치는 어스름한 차 안에서 그녀는 자기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 헨리, 당신 얘길 죄다 들려 주셔요.”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 무슨 턱에 내 사생활을 캐려고 드는 거지요? 지금 당장 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은 다른 무엇보다도 언제쯤 내가 해고당하는가 하는 공포예요.”

그러세요? 그럼 당신 가족에 관한 얘길 해주세요…… 당신이 어떤 분이란 걸 내게 다 알려 주시면…… 당신이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당신은 그냥 계속 우리 식당에서 일하시도록 제가 붙들겠어요…… 좀더 좋은 조건 밑에서…… 내가 그 식당 주인이라는 걸 알고 계시지요.”

그녀의 말, 그리고 가까이 느끼는 그녀의 체온, 둘 다 내 신경을 자극시켰다. 언뜻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가버린 미스 송이 날 다시 찾아와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나는 느꼈다-화해하자고 온 것인지, 날 더 괴롭히려고 온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낸시를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나는 느꼈다.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다지 신경쓰실 필요는 없어요, 헨리. 고향이 어디지요?”

북한 평양 근처에 있는 한 촌락에서 태어났지요.”

그래요? 그 동리 이름이 뭐지요?”

이름 대봤자 당신네 귀엔 치치푸푸로밖엔 안 들릴 텐데 뭘 그러시오.”

그래두 말씀해 보세요.”

정 원한다면 내 말 듣고 한번 기억해 보려고 애써 보세요…… 칠골.”

…… 칠골…… 북한…… 평양서 가까운 칠골…… 부모님 다 거기 사시나요?”

몰라요, .”

그녀는 몸을 떨었다.

한숨을 길게 쉬고 난 그녀는,

소련군이 그 지방을 점령할 때 당신은 도망쳐 나왔다, 그 말씀이군요.”

라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너무나 풍부한 지식에 나는 놀랐다. 미국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낸시, 참 난 놀랐습니다. 당신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참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당신 혼자 남한으로 내려왔나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내 물음은 대답 않고.

그래요, 참 잘 맞혔어요…… 당신의 한국에 대한 지식 훌륭합니다. 놀랐습니다, 낸시. 호기심을 끄는구려…… 다른 미국인보다 당신은 너무나 다르니까…….”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결혼하셨나요, 헨리?”

하고 그녀는 불쑥 물었다.

나는 그녀를 포옹했다. 그녀를 미스 송으로 착각하고.

낸시는 내 포옹에 순순히 응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조용히 그녀는 내 키스를 음미하는 것이었다. 서로 꼭 껴안고 입술을 마주 댄 채 우리들은 오래 앉아 있었다.

제 집으로 가보실 순 없으세요, 헨리? 우리 할아버지를 좀 만나 보시게.”

라고 낸시가 속삭였다.

왜 하필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 한 분만 모시고 사니까요. 우리 식구는 단둘…… 한국에서 오신 분이 그일 찾아봐 주시면 그이는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

할아버지께서 말씀드릴 거예요.”

 

낸시의 아파트먼트 실내장치에 호되게 놀란 나는 정신을 잃고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오동나무로 짠 옛날 한국식 장롱들-물론 모조품이었지만 궤를 짠 기술은 진짜 뺨칠 정도였다. 자개 박은 나전칠기들. 한국산 인형들-장식품인 성춘향과 이몽룡이가 나란히 서 있는 인형.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환상이 스러져 없어질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 시원한 거 좀 드셔요, 헨리.”

하는 것은 낸시의 목소리였다-분명. 나는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낸시가 분명 서 있었고, 번지 잘못 찾은 가구도 그대로 엄연히 놓여 있었다.

조금 기다리시면 우리 할아버지 만나 보시게 될 거예요…… 그이 침실로 들어가야 만나 볼 수 있어요.”

 

너무 놀란 나는 우뚝 섰다. 침대 머리맡 기둥에 등을 기대고 반쯤 일어나 앉아 있는 노인. 얼굴에는 주름살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은 늙고 늙은 할아버지-한국인에 틀림없는 늙은이였다.

자네 날 만나려고 와주어서 참 고맙네.”

라고 그이는 한국말로 말했다.

, 여기 이 의자에 앉으라구…… 난 턴디신명께 감사 감사하네…… 내 간절한 소원을 풀어 주셨으니꺼니. 내 듣기에 자넨 칠골 출신이라구…… 나로 말하면 칠골에서 오 리 떨어데 있는 조그만 촌에서 나서 거기서 자랐는데…… 헨리, 여보게, 자네 성은 뭔가?”

목소리가 저음이기는 했으나 건강한 음성이었다.

황가올시다.”

, 황씨. 칠골에는 황씨가 많이 살고 있디…… 모두 둏은 사람이야. 나는 고가 성을 가진 사람일세…… 칠십여 년 전에 미국으로 왔어.”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얼마 동안 나를 눈여겨봤다-마치 내 인품을 저울질해 보기나 하는 듯이.

낸시를 보려고 내가 뒤를 돌아봤으나 그녀는 방 안에 없었다.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이 딴엔 미소를 띠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 자네 합격권 내에 들었네. 자네가 우리 낸시를 둏아한대디. 사랑하나? 허긴 자네가 낸시를 사랑하건 말건 그건 상관이 없어. 자네는 걔와 결혼해야 되니꺼니…… 그 애는 자네가 둏다구 그랬으니, 턴생연분이디. 턴디신명은 남네 짝지어 주는 데 실수를 절대 안 하셔…… 밤이 이미 너무 깊었구. 자네가 피곤할 것두 난 알구 있어. 허지만 내 얘길 끝꺼정 들어 줘야 되네.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꺼니…… 지금 당장 내가 죽어두 난 한이 없어…… 이 행복한 순간에 죽어문 더욱 둏디…….”

이때 노인의 말은 중단됐다.

소반에 찻종과 찻잔 둘을 담아 든 낸시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 인삼차!”

라고 노인은 말했다.

인삼차라는 말만으로도 그의 생기가 한결 돋우어지는 것 같았다.

, 이 차 같이 마시자구. 인삼차 마시문 기운이 소생되디. 나로서도 자초지종 자세히 니야기할 기운이 소생될 거야…… , 참 둏군, 뜨끈하구 향기롭구…….”

낸시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꺼정 니야기했더라? , 그렇디. 내가 미국에 온 건 칠십여 년 전이었어. 낸시는 내 외손녀인데 걔 어멈은 한국 네자야…… 내 사랑하는 딸 정옥이, 그리구 낸시의 아범은 흰둥이, , 아니디, 뒤늦게 아니끼니 그 개새끼는 사실 백인과 흑인 간의 트기였다…… 그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게 사실이 발견됐디…… 칠십여 년 전 나는 처음엔 하와이꺼정 왔어. 거기서 사탕농당 일을 했디. 십여 년 동안 참 열심히 일했디…… 하루두 쉬딜 않구. 그래 삼천 달러의 미국 돈을 데툭할 수 있었거든…… 그 당시에는 삼천 달러문 큰 부자였디. 그래서, 그래서, 난 한국 네자한테 당갤 들구 싶었어. 오십여 년 전에 소위 사진 결혼이라는 게 성행했었다는 사실은 자네두 아마 들은 적 있을 거야. 미국 한인협회가 주관해서 한국에 사는 체니들과 미국에 와 사는 한국 총각들이 서로 사진을 교환해 보구 피차 둏으문 짝을 지었디. 내가 받아 본 첫 체니의 사진에 난 홀딱 반해 버렸어…… 칠골 사니 사는 체니. 그리구 그녀도 내 청혼을 데꺽 받아들였거덩…… 물론 내 사진을 보구 나서 결덩지었겠디. 그녀가 미국꺼정 오는 네비와 혼인 비용 전부 다 내가 치렀디. 그때 그녀의 나이가 열여덟이었어. 나보다 십오 년이 젊은. 난 디독히 행복했었디. 그녀가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가 버리기 전까지는 말야. 도무디 두 달밖에 더 안 난 애기, 우리 정옥이, 즉 낸시의 어머니를 버리구 그년이 어떤 놈팽이하구 함께 도망가 버린 거야. 그 뒤 난 일을 더 열심히 했어…… 나와 또 제 어린 딸을 버리구 도망 간 화냥년에 대한 분노감을 억누르려고. 그리구 또 내 눈동자같이 소중하고 귀여운 딸 정옥에게 온갖 사랑을 다 쏟으며 일을 열심히 했어. 하와이가 싫어딘 나는 미국 본토로 이사 와서 조그만 골동품 상점을 개업했디. 돈 참 끔찍이 많이 벌었디…… 재혼은 아니 허구…… 계집들 믿을 수가 없었거든. 내 온갖 정성을 내 딸 정옥이에게만 쏟아 걔는 건강하게 자랐고 학교에 가서는 공부도 무던히 잘했고 또 날 끔찍이 따랐어. 그러는 동안 정옥이는 아주 예쁜 체니가 됐디. 그런데 말이디, 우리 정옥이가 열여덟 나는 해에 그 애가 내 가슴에 또 못을 박아 줬단 말이야…… 걔 어미가 박은 못보다 백 배나 더 큰 못을…… 어떤 흰둥이 놈팽이에게 꾀임 받은 정옥이가 그놈하구 나 몰래 도망을 갔단 말이야. 난 미칠 것 같았어. 허지만 이듬해 봄에 걔가 임신둥이란 편질 받고는 내 마음의 얼음이 풀렸어. 우리 조상들 풍습에 따라 걔더러 친정에 와서 해산하라는 편지를 띄웠디. 그런데, 그런데 우리 정옥이가 낳은 딸이, 그 딸이 검둥이였어…… 낸시. 내 딸 정옥이가 검둥이를 낳은 걸 본 내 사위녀석은 제 처가 흑인하구 간통했다는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정옥이를 버리구 가버렸어…… 영 가버렸단 말야…… 검둥이 피가 실은 그 녀석의 피인데두 말야…… , 나무아미타불, , …….”

노인은 경련을 일으켰다.

놀란 나는 낸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아직 낸시는 불러들이나마나 괜찮아…… 인삼차, 인삼차나 한 잔 더 따라 주게…… , , 둏아…… 자넨 참 착해.”

인삼차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 보라구. 난 아무렇디두 않아. 그 불쌍한 년…… 내 딸 정옥이 말일세…… 그녀는 목매고 자살해 버렸어.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걸 본 나는 미칠 것 같았어. 허지만 한편 그녀의 행동이 자랑스러웠어. 한국 여성들만이 감행할 수 있는 떳떳한 일이 아닌가. 그때 낸시는 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젖먹이였어. 고아가 된 낸시를 내가 극진히 키웠디…… 긴 니야기를 줄여 말하면 이렇네. 낸시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해서든지 걔는 고향으로 데리고 가 훌륭한 한국 남자와 짝을 지어 주고 싶었단 말야…… 내 재산은 몽땅 다 걔에게 물려줄 거니끼니 지참금은 어마어마하디. 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검둥이에 틀림없는 체니가 내 고향 땅에 가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 수가 있을까 하는 염려가 날 괴롭혔어. 자네도 아다시피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트기는 싫어하구 또 자꾸 놀려 주디 않는가. 이 생각이 날 여러 해 동안 괴롭혔어. 그러다가 말일세, 천구백사십오년부터 난 새로운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네…… 그해 가을에 미군이, 흰둥이와 검둥이의 혼성부대인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디 않나. 해방된 조국에서 오는 신문들을 읽어 보니까니 남한에는 흰피 검은피가 섞인 트기들이 많이 생겼다구 했더군…… 그래 검둥이인, 겉으로만 검둥이인 내 손주딸 낸시도 고향에 가문 꽤 어울리리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어. 특히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나를 아는 사람들이 혹시 여태 살아 있으문 그녀 대우를 잘해 주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 더군다나 그녀가 한국인의 아내가 되는 경우 남편 테면을 봐서라두 그녀를 아껴 주리라구 나는 생각했어. 지금 내 수중에 오만 달러가 있네……그거 다 낸시의 것, 아니 그녀와 그녀의 남편, 물론 한국 남자의 공동 소유가 되디. 여보게, 헨리, 아니 황군, 명심해 듣게. 자네가 바로 낸시를 아내로 삼아 데리고 고향 땅으로 갈 그 사람이야. 적당한 한국인 남편을 물색하기 위해 낸시는 거의 일년간 식당에 나가 일을 했네. 식당을 차리는 게 둏겠다구 생각한 건 바루 나야…… 만국에서 모여드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데일 자주 들르는 곳이 식당이거덩.”

노인은 단추를 눌렀다.

낸시가 들어왔다.

낸시야, 그 화분 이리 가지고 온!”

하고 노인이 외손녀에게 말했다.

낸시가 들고 오는 조그만 화분에는 파란 풀이 자라고 있었다.

여보게 황군, 여기 자라난 이게 뭔디 아나?”

나는 머리를 저었다.

조야, . 바루 한국 흙에 심은 한국 조란 말야.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조는 대대손손 한 뙈기 땅에 해마다 조를 심고 거두어 왔다네…… 내가 집을 떠나 미국으로 올 적에 그 땅흙 여남은 줌과 좁쌀씨 여남은 톨을 가지고 왔거덩. 내가 이 미국에서 미국인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것터럼 이 흙은 미국 거름을 받아 가며 해마다 조를 길렀디…… 칠십여 년 내리. 고향 농토의 소유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고 디주였디. 그러나 이 화분에 담긴 흙은 내 거야, 나의 분신. 그런데 말이디, 이 흙과 낸시를 내 고향으로 데리고 가줄 사람은 바로 자네야. 나두 물론 고향으로 가서 뼈를 묻고 싶지만 난 먼 네행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고 몸이 쇠약해. 자네와 낸시와 흙이 지금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북 땅으로 곧 갈 수는 없다는 걸 나두 잘 알구 있디. 허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 너희들이 당분간 남한에 살고 있다가 북한이 해방되는 날 선두에 서서 고향으로 달려갈 사람은 자네 아닌가. 내 고향은 자네 고향에서 오 리 안팎에 있어. 자네 고향으로 가거덩 큰 농장을 사라구. 돈은 물론 넉넉히 있으니꺼니. 그래 가지구 이 화분 속에 칠십 년이나 갇혀 있었던 흙을 그 농토에 부어 섞으라구. 이 흙 속에는 내 혼이 깃들어 있으니까니. 농토가 자연 비옥해질 거야…… , 너희 둘 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 늙은 몸이 이상 더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아…… 세월은 자꾸 흐르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이 너희들 짝을 지어 주련다. 너희 둘 손을 포개 쥐어라…… , 그렇게. 둏다. , 너희들의 포개 쥔 손을 내 손이 이렇게 겹으로 포개 쥔다. , 잠깐…… 나 인삼차 한 잔 더.”

나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우의 홀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도는 날이 새는 데 있다고 우리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었다.

, 참 둏다, 그 인삼차…… , 너희들 손을 다시 포개 쥐어라. 그렇디, 그렇게.”

라고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 , 너희들의 손 참 따스하구나. 너희 둘이 지금 부부가 됐다는 걸 난 턴디신명께 품고한다.”

노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었다.

턴디신명이 너희들의 부부 됨을 인정하고 축복해 주실 거다…… 지금 난 죽어도 안심하고 눈을 감겠다. 선조에 대한 나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나서 죽는 나는 세상에 여한이 없다…… 난 기쁘기만 하다…… 정말 됫새 기뻐…….”

노인은 혼수상태에 들어갔다-주름살투성이인 얼굴에 만족하는 미소를 띤 채.

출전:현대문학149(19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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