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사인(1956~ )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가만히 좋아하는

가을날

강으로 가서 꽃이여

개나리

거울

겨울 군하리

고비사막 어머니

고요한 길

고향의 누님

공부

공휴일

귀가

그를 버리다

극락전

금남 여객

길이 다하다

김태정

깊이 묻다

나비

내 고향 동네

내곡동 블루스

네거리에서

노년

노랑나비

노숙

눈물이 저 길로 간다

뉴욕행

늦가을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다시 금강공원에서

다시 한강을 보며

달팽이

둥근 등

딸년을 안고

때늦은 사랑

마른 쑥대에 부쳐

맑은소리

먹는다는 것

미안한 일

목포

무릎 꿇다

바다

바보 사막

바짝 붙어서다

박영근

밤 기차

밤에 쓰는 편지 1, 2, 3, 4

별사(別辭)

보살

볼펜

봄 바다

봄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불길한 저녁

비둘기호

빈방

빈집

빗방울 화석

사격 훈련장 부근

사랑이 왔나?

삼우 무렵

삼천포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새벽 별을 보며

서귀(西歸)

서부시장

선운사 풍천장어집

섣달그믐

설움에 대하여

소주는 달다

시간들

시를 쓰며

시를 위하여

아무도 모른다

아카시아

약혼

엉덩이

에이 시브럴

여래 바다에 묻다

여름날

여수

영결(永訣)

영동에서

영월에서

예래 바다에 묻다

예언서

옛 우물

옛일

오누이

월부 장수

유리창

유필(遺筆)

은하 통신

인절미

입술

장마

적막에 바침

전주(全州)

조용한 일

졸업

좌탈(座脫)

주왕산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

중국집 전(全)씨

지상의 방 한 칸

진달래

청운(靑雲) 쪽을 보다

춘곤

치욕의 기억

친구들

칼에 대하여

코스모스

탈상

통영

풍경

풍경의 깊이

풍선

필사적으로

하루빨리

한강을 보며

한국사

한 사내

허공장경(虛空藏經)

화양연화(和樣年華)

화진(花津)

8월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60년대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김사인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는 쉬파리들 있었네

한 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 나는 된장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 개가 울밑네 숨겨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가을날

김사인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강으로 가서 꽃이여

김사인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길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개나리

김사인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러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소리

내 목숨 샛노린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

 

몇 날 몇 밤을 그대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어쩔거나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로다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 이기고

내가 가리

 

 

 

거울

김사인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쫒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겨울 군하리

김사인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 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 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우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 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지른다

 

 

 

고비사막 어머니

김사인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 지 벌써 다섯 해

고개 하난 넘으며 뼈 한 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륵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괴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꼭 당신을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가시고도 밥솥의 밥은 따뜻하고

못난 아들 형과 나는 있고

아이들은 눈싸움을 조르고

어머니 가시고도 꽃 피고 잎 지고

꺼끄러운 수염은 자라고

술도 있고요.

그곳은 그곳대로

모쪼록 그러하시길.

 

 

 

고요한 길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 낱과 쇤 고구마 줄기와 아주까리, 한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수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 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명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고향의 누님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 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 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빈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이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찬 바람에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 들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메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공휴일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가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 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 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 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귀가

김사인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그를 버리다

김사인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잔가지는 빨리 붙어 잠깐 불타고

굵은 것은 오래 타지만 늦게 붙는다

마른 잎들은 여럿이 모여 화르르 타오르고

큰 나무는 외로이 혼자서 탄다

 

묵묵히 솟아오른 봉분

가슴에 박힌 못만 같아서

서성거리고 서성거리고 그러나

다만 서성거릴 뿐

불 꺼진 뒤의 새삼스런 허전함이여

 

용서하라

빈 호주머니만 자꾸 뒤지는 것을

차가운 땅에 그대를 혼자 묻고

그 곁에서 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바람에 옷깃 여미고

용서하라

우리만 산을 내려가는 것을

우리만 돌아가는 것을

 

 

 

극락전

김사인

 

처마 밑에 쪼그려

소나기 긋는다

 

들어와 노다 가라

금칠갑을 하고 앉아 영감은

얄궂게 눈웃음을 쳐쌌지만

 

안 본 척하기로 한다

빗방울에 간들거리는 봉숭아 모가지만 한사코 본다

 

텃밭 고추를 솎다 말고

종종걸음으로 좇아와 빨래를 걷던

엣적 사람의 머릿수건을 생각 한다

부연 빗줄기 너머

젊던 그 사람을 생각한다

 

 

 

금남여객

김사인

 

창틀에 먼지가 보얗던 금남여객

대흥동 버스 차부 제일 구석에나 미안한 듯 끼여 있던 회남행 금남여객

판암동 세천 지나 내탑 동면 오동 지나 몇 번은 천장을 들이받고

엉덩이가 얼얼해야 그다음 법수 어부동 '대전 갔다 오시능규, 별고는

읎으시구유' 어쩌구 하는데 냅다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나까오리를

점잖게 들었다 놓아야 끝나는 인사 일습 마칠 수도 없던 금남여객,

그래도 굴하지 않고 소란통 지나고 나면 다시 '그래 그간 별고는

읎으시구유' 못 마친 인사 소리소리 질러 기어이 마저하고 닳고 닳은

나까오리 들었다 놓던 금남여객

보자기에 꽁공 묶여 머리만 낸 암탉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금남여객

하루 세차례 오후 네시 반이 막차지만 다섯 시 넘어 와도 잘하면 탈 수 있던 금남여객

장마철엔 강물 불어 얼씨구나 안 가고 겨울에는 길 미끄럽다 안 가던 금남여객

자취생 쌀자루 김치 단지 이리저리 처박던 금남여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달리던 금남여객

쿠다탕 퉁탕 신작로 오십 리 혀도 깨물고 반은 얼이 빠져 강변에 닿으면

색시처럼 고요하게 금강이 있지

사람은 차 타고 차는 배 타고 배는 다시 사람이 어여차 저어

강 건너에서 보면 그림같이 평화롭던 금남여객

벙어리 아다다처럼 조신하게 실려가던 금남여객

보얗게 흙먼지는 뒤집어쓰고

 

 

 

김사인

 

저 길

죽음으로 닿는 길

피할 수 있다면

도리질 치며 그러잡을 그 누구라도 있다면

저 길

내 지나간 발자국 바람 속에 흔적도 없을

참혹한 절망과 자유의 길

끝없는 잠 들어 꿈속으로도

그러나 피해 못 갈 길

차라리 이대로 죽음일 수 있다면

새 한 마리 해거름을 빗겨 나는데

내 몸부림의 길이만큼 뻗어 있는 길

피해 못 갈 저 헛된 갈증의 길

 

 

 

길이 다하다

김사인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이제 나에게 어떤 몸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눌린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김태정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데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 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던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달에 5만 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 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 김태정(1963~2011)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한권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5백만 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 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은 일이 있다.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

 

 

 

깊이 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잇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김사인

 

올해엔 말이지, 라고 쓰면

그 두 마디가 흰 팝콘이 되어 종이에서 튀어오르는 것

때죽나무 흰꽃으로 퐁퐁 피어날 때도 있어

언제나 돈이 모자란 아내가 한숨을 쉬면

순간 나는 담모퉁이로 날아가 시치미를 떼지

중년의 모과나무로 기대서지

오랫동안 점잖고 향기롭게

아이들이 지쳐 돌아오면

겨울비 속을 터덕터덕 걸어

나무인 나 평화시장 앞까지 나아가지

신호대기 붉은 등이 바뀌는 순간

숨죽였던 퀵서비스 오토바이 부대는

갈매기 떼가 되어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르고

우도나 지도까지의 저 우아한 활강

기분 좋은 날은 대마도 근처까지 스윽 한번 다녀오기도 하지

부은 발 어루만지던 노숙자는

갈매기에 놀라 지하도 벽을 쿵 들이받고

순간 등 검은 신사 고래가 되어

유유히 심해를 미끄러지네

쿠릴열도까지 희망봉까지

올해엔 부디 말이지, 라고 다시 써보네

흰 팝콘이 튀어 오를 때까지 갈매기와 고래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왜 이토록 긴 것일까!)

그 한순간 나는 생각하네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어깨

 

 

 

나비

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 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케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내 고향 동네

김사인

 

내 고향 동네 썩 들어서면

첫째 집에는

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 작은아들은 사람 때려 징역에 들락달락

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가 막걸리 판다

둘째 집에는

고등고시한다는 큰아들 뒷바라지에 속아 한살림 말아올리

고 밑에 애들은 다 국민학교만 끄을러 객지로 떠나보낸

문씨네 늙은 내외가 점방을 한다

셋째 집은

마누라 바람나서 내뺀 지 삼 년째인 홀아비네 칼판집

아직 앳된 맏딸이 제 남편 데리고 들어와서 술도 팔고 고기도 판다

넷째 집에는

일곱 동생 제금 내주랴 자식들 학비 대랴 등골이 빠져

키조차 작달막한 박대목네 내외가 면서기 지서 순경 하숙쳐서 산다

다섯째 집에는

서른 전에 혼자된 동네 누님 하나가 애들 둘 바라보며 가게를 하고

여섯째 집은

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김씨 내외

 

옛 마을은 다 물속으로 거꾸러지고

산날망 한 귀퉁이로 쪼그라붙은

내 고향 동네 휘둘러보면

하늘은 더 낮게 내려앉아 있고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헌 바지저고리

삭막한 바람과 때없이 짖어대는 똥개 몇 마리가 산다

 

 

 

내곡동 블루스

김사인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뭐랄 수도 없는 국정원은 내곡동에나 있고

모두 무서워만 하는 국정원은 알 사람이나 아는 내곡동에 박혀 있고

 

국정원은 내 친구 박정원과 이름이 같고

제자 전정원은 아직도 시집을 못 갔을 것 같고

최정원 김정원도 여럿이었고

성이 국씨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러나 정원이란 이름은 얼마나 품위 있고 서정적인가

정다울 정 집 원, 비원 곁에 있음직한 이름

나라 국은 또 얼마나 장중한 관형어인가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내곡동에는 비가 내리고

바바리 깃을 세운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사내가

지포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좌우를 빠르게 훑어볼 것 같은 국정원의 정문에는

「007 두 번 산다」의 그런 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비가 내리고

어깨에 뽕을 넣은 깍둑머리 젊은 병사가

충성을 외칠 뿐이고

할 수만 있다면

저 우울하고 뻣뻣한 목과 어깨와 눈빛에 대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위로하고 싶은 것이고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하니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과 같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하니

좀 음산하지만 또 겸허하게도 느껴지고

아무튼 모른다 아무도

다만 비가 내릴 뿐

우울히 비가 내릴 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밖의 삼인칭 우수마발(牛?馬勃)도 알 리 없고

원격 투시하는 천안통 빅 브라더께서는?

그러나 그이야 관심이나 있을까

내곡동의 비에 대해

내뿜는 담배연기에 대해

우수 어린 내곡동 바바리코트에 대해

신경질적인 가래침에 대해

하느님은 아실까

그러나 그걸 알 사람도 또한 국정원뿐

그러나 내곡동엔 다만 비가 내릴 뿐

 

 

 

네거리에서

김사인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노년

김사인 

 

먼 데서 바람이 오니

굴참나무 잎새도

실핏줄이 아리어

 

가을걷이 지나간 자리에

새떼 무심타

 

장 속에 미리 사둔

양말 두 켤레

 

올 추석엔 아이들

돌아올 것가

 

저만치 빈 논가에

전봇대 하나

 

 

 

노랑나비

김사인

 

내 벗은 어깨 위에

모양 없이 시든 오뉴월 흉년 꺽정 보릿대 위에

마른 쑥대 위에

보람 없는 여름 긴 한낮 위에

노랑나비

길가에 앉아 끝내 다 못간다 사랑아

네 웃음 얼굴마저 이제 눈 앞에 흐리고

고개 들면 쏟아지는 허연 살피듬

파란 하늘에 얼비치는 낯익은 사내 하나

길가에 앉아

굽은 어깨 위에

그리움의 녹슨 반쪽 거울 위에

진무른 눈꺼풀 위에 눈물 위에

초라한 풀꽃의 늙은 이마 위에 덧없는 졸음 위에

노랑나비

 

 

 

노숙

김사인

 

1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몸이 있으나 몸을 부려둘 공간이 없다 그들에게는

소비할 공간이 없다 먹고 죽을 공간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발을 두나 머리를 두나 먹을 입과 담아둘 위장과 배설할 항문을 어디에 두나 똥은

또 어디에 내려놓나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은

존재일 수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시간도 꽃필 수 없음 나프탈렌처럼

또는 유령처럼 생으로 졸아들다가 증발한다

그러니 그들의 시간도 튀긴 구정물처럼 길가 담벼락이나

애꿎은 바짓자락 같은 곳에 묻어 오갈들 뿐

그 떳떳하던 공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정말로

그 싱싱한 공간들을 다 먹어치운 것인가 소문처럼

그 착한 공간들을 어디서 똥 뉘 치운 것인가

마이너스 공간에서 반(反)물질을 소비하며 그들은 있다

아닌 공간의 그들을 인 공간에서 보면

없다, 떼먹은 공간을 변제하고 그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한계는 현재는 오직 게워냄에 있다 제 안을 밖으로

뒤집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운다 제 목구멍을 제 내장을 제 항문을 항문 바깥의 우수마발(牛 馬勃) 장삼이사를 돗긴갯긴을 피눈물을 마지막으로 게우는 제 입까지를 게운다

구강에서 항문까지 속통의 안팎이 홀딱 뒤집힌 채

그들은 있다, 있음인 체해본다 한사코

그들은 완성이자 죽음인 블랙홀이다 모든 공간은 몰수되고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게워낸 공간 안에 다시 게워져 있다

 우리는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다음에 있다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움 울며 굴러서 간다

 

 

 

뉴욕행

김사인

 

딸년은 제 사촌들과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슬슬 이 땅 떠나 이륙하고

손바닥만 한 창으로 엄마! 아빠!

소리치며 빠이빠이 하고

새끼들 얼굴 창에 비칠 때마다

'오냐 잘 댕겨온나' '편지해라'

같이 소리지르며 손 흔들어대는데

 

한 바퀴 돌 때마다

열심히 고개 내밀고 에미 애비 찾아 쌓는

그것들 보니

하이고야, 제법 그럴듯하게

코 찡하고 가슴 써늘하더라

그러나 슬며시 겁나더라야

부산행 서울행보다

뉴욕행 빠리행 타겠다고 떼쓰는 저것들

나중에 정말 뉴욕행 빠리행 해가지고

오도 가도 안하면

그때 심정 어쩔까나

 

어디다 말도 못 하고 걱정되더라

부산 금강공원

500원짜리 뺑뺑이 비행기에

딸년은 실어놓고

 

 

 

늦가을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 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 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다시 금강공원에서

김사인

 

그날

개인 하늘 아래 식구들은

등 뒤로 지나간 찬 바람 한 줄기를

어찌 몰랐던가

주전부리 파는 아주머니의 치맛자락 끝이었던가

사진사 노인의 낡은 구두 뒷굽이었던가

숱 많은 아내의 머리칼 속이었던가

허공 뒤편 어느 한 점이었던가

오호, 숨어, 뱀 같은 눈으로,

어둠이, 우릴, 겨누고 있던 곳은!

 

왜 못 알아들었을까

그 음험한 바람 사이로 나뭇잎새들이 외치는 말들을

돌계단들이 순한 등으로 받쳐올리던 귀띔을

키 큰 선인장의 우울한 그늘을

딸아이 손을 놓친,순간을 스쳐가던 철렁함의 뜻을 두려움을

 

몇 해 지나 새끼들 안부도 모르는 채

먹는지 거르는지 애써 모르는 채

용케 이 항구까지 살아 떠내려와

혼자 다시 찾아온 곳

딸아이 좋아하던 뺑뺑이 비행기는 없고

이제 임진 동래의총 사당이 푸르다

쪼그라든 산수유 뮥은 열매가 쓸쓸하게 붉다

 

 

 

다시 한강을 보며

김사인

 

멀리서 보면 고요한데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면

흐른다

돌에 이마를 부딪치며

오만 잡쓰레기들끼리 얼크러져

서로 기대고 또 감싸 안고

피 튀기며 거칠게

비켜서서 숨돌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깊은 설음은 더 깊이 다스리고

치받는 신명은 소용돌이쳐 푼다

간발의 틈도 없이

사정없이 부닥쳐

박살이 나면 다시 몸 추스려 더욱 세차게

 

삶의 이 진저리나는 격렬함

그러나 다시 멀리서 보면

한강은 백치같이 무심한 얼굴로

또 한 번 우리를 갈긴다

 

 

 

달팽이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둥근 등

김사인

 

귀 너머로 성근 머리칼 몇 올 매만져두고

천천히 점방 앞을

천천히 놀이터 시이소오 옆을

쓰레기통 고양이 곁을 지난다

약간 굽은 등

순한 등

그 등에서는 어린 새도 다치지 않는다

어린 감이 떨어져도

터지지 않고 또르르 구른다

남모르게 말랑말랑한 등

남모르게 다스운 등

업혀 가만히 자부럽고 싶은 등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구부려 참고

세상 쪽으로는 순한 언덕을 내어놓는다

천천히 걸으며 몸은 점점 작아지지

모두 잦아들면 이윽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먼 윗대 봉분

가끔 철 이른 눈도 내려 무심히 쉬어 가는

 

 

 

딸년을 안고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 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을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 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을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때 늦은 사랑

김사인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마른 쑥대에 부쳐

김사인

 

마른 쑥대여

해설핀 섣달 저녁의

성긴 눈발이여

 

어머님 산소는 먼 곳에 있다

알고나 있는가

마른 쑥대여

 

잊지는 않았겠지

컴컴한 호두나무 그늘이며

기계충 머리로 보채던 어린 누이며

손등에 사마귀 많던 동무들......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비명에 간 없는 집 종손

마른 쑥대여

 

 

 

맑은소리

김사인

 

알이 아홉 달린 대추나무 단주 하나

어디서 덕원 수좌가 훔쳐다 나를 주었는데

딩 딩 딩 맑은소리가

마음 안으로 울려오는 것 같아

여자를 만날 때도 술을 먹을 때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쪼물거렸는데

 

어느 날부턴가

아무 소리 안 들린다

나는 얼씨구

비로소 개잡놈이 된 것이냐

 

 

 

먹는다는 것

김사인

 

내 안을 허락한다는 것.

너에게 내 몸을 열고 싶다는 것 내 혀와 이빨과 목구멍과 대장과 항문을 열어준다는 것 그렇게 음탕한 생각.

또한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다는 것 지금의 죽음이고 싶은 것 다른 나이고 싶다는 것 사랑을 느낀다는 것.

너를 내 안에 넣고 싶다는 것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 너이고 싶다는 생각 네가 아닌 나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의욕.

너를 먹네

포충 식물처럼 끈끈하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활짝 열어 너를 맞네 세포 하나하나까지 너에게 내주네.

그러므로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 모든 구애가 그렇듯이

밥이건 고기건 사람이건

먹는다는 것은 먹힌다는 것 죽음처럼 아찔한 것 같고 황홀한 키스 먹는다는 것은 갖고 싶다는 것 새 자동차를 장화를 장미를 새끼 고양이를 향해 눈이 빛나는 것 같이 있고 싶다는 것 한 몸이 되고 싶다는 것.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랜 식욕의 역사

봄 너머 영혼 속까지 너를 들이고 싶은 것 네가 되겠다는 것 기어이

먹는다는 것은.

 

 

 

목포

김사인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나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가리라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내고 흰 목을 젖히며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무릎 꿇다

김사인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미안한 일

김사인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튀어나오도록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멋쩍은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바보 사막

김사인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헌 우체부 자전거는 훔쳐 타고

달밤 무지개길 씽씽 달려

(야호! 엉덩이 높이 들고 오두방정도 떠시면서)

술벌갱이라고들 소문이 도는 하눌님 영감네 동네로 마실 가셨단 말이지

볼록볼록 보드라운 보도블럭길 걸어

흰 구렛나룻으로 한 몫 먹고 드는 그 심술 영감한테로

내기 장기나 한판 두러 가셨단 말씀이지

 

달무리 같은 터번은 쓰고 어린 하마와 고슴도치와 염소와 낙타를 업고 걸리고

바보 같은 사막 천치처럼 건너서

그대는 왕자같이 잘도 가셨나 본데

가을 햇살 속은 조용히 환한데

(귓속말인데, 김종삼 천상병 박용래 같은 프로들은 거기 다 계시지요? 한편 부러워요 혹 채광석 박영근 같은 이들이 왈왈거리며 말 트자고 덤비더라도 속상해 마세요 괜히 그러지 속은 여린 사람들이예요 하기야 든든한 이문구 성님이 통반장 한 구찌쯤은 맡아보고 계시겠군요)

 

그런데 누구일까 저 백수광부(白首狂夫)

앞자락 풀어헤치고 광화문 네거리 둥둥 떠 흘러가는 저 사내

검붉게 술에 탄 얼굴 다북솔 머리 헐렁한 바지

이 슬픈 시간에

  

* 바보사막은 61세를 일기를 10월 16일 떠난 신현정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제목이다.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냥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박영근

김사인

 

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것.

그렇게 술에 절어 손도 발도 얼굴도 나날이 늙은 거미같이 까맣게 타고 말라서 모두 잠든 어느 시간 짚검불처럼 바람에 불려 세상 바깥으로 가고 싶은 것.

 

그 적의 어느 어슥한 밤 쪽으로

선운사 동백 몇 송이도 눈 가리고 떨어졌으리.

 

받아주세요 두 손으로 고이

어디 죄짓지 않은 마른땅 있거든 잠시 쉬어가게 해주세요.

젊은 스님의 애잔한 뒤통수와 어린 연두빛 잎들과 살구꽃 지는 봄밤 같은 것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것이니까요.

 

* 시인 박영근은 전북 부안 사람으로, 다섯 권의 시집을 남기고 2006년 5월 11일(48세) 세상을 떠났다. 눈물과 노래가 일품이었다.

 

 

 

밤 기차

김사인

 

모두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왁자하던 입구 쪽 사내들도

턱 밑에 하나씩 그늘을 달고 묵묵히 건들거린다.

헤친 앞섶 사이로 런닝 목이 풀 죽은 배춧잎 같다.

 

조심히 통로를 지나 승무원 사내는

보는 이 없는 객실에 대고

꾸벅 절하고 간다.

 

가끔은 이런 식의 영원도 있나 몰라.

다만 흘러가는 길고 긴 여행.

 

기차 혼자 깨어서 간다.

얼비치는 불빛들 옆구리에 매달고

낙타처럼.

 

무화과 피는 먼 곳 어디

누군가 하나는 깨어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이 늙은 기차.

 

 

 

밤에 쓰는 편지

김사인

 

그대로 하여

저에게 이런 밤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려

오가는 사람들을 더 바삐 서두르고

우산이 없는 여학생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울상입니다

팔다리가 있는 짐승들은 모두

어디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기

몇 안 남은 잎을 바람에 마저 맡기고

묵묵히 밤을 견디는 나무들 있습니다

빛 바랜 머리칼로 찬비 견디는 풀잎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하여

저에게 쓰거운 희망의 밤이 있습니다

 

 

2 - <반고문전>에 붙여

아버지

저희가 캄캄한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대의 볕으로 자란 풀과 꽃

성한 목숨들이 사정 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개들이, 어둠 속에서 더러운 개들이

X지를 홀딱 까고

아무데에나

낄낄거리며 그걸 들이밀고 있습니다

어린 풀들은 소스라치고

차가운 시멘트 위에서

사금파리들은 다시 또 산산이 부서져

아뜩한 비명으로 하늘을 찢습니다

이 무량수겁 어둠의

추운 윗목 발치에

처자식 데리고 쥐새끼처럼 꼬부려 앉아

아아 숨죽인 제 통곡 덧없습니다

 

 

3

한강아

강가에 나아가 가만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나 값싼 눈물 몇 낱으로

저 큰 슬픔을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큰 분노와 슬픔으로 흐르는 것인 줄을

진즉 알고는 있었습니다

한강아

부르면서 나는 저 소리 없는 흐름에게 무엇을 또 기대했던 것인지요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던 것인지요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그 곁에 서서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

 

 

4

아버님, 안쓰러워 마십시오

누워도 잠 못 들어 뒤척거리고

선잠 들었다가는 소스라쳐 잠을 깨는

못난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불면증이라고, 자꾸 병이름 붙이지 마십시오

밤에 잠들지 못하겠습니다 아버님

제 어린 새끼들의 무구한 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저희보다 더 살기가 어려운

건너편 집 가장의 끊일 듯 말듯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또 저는 지키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많은 사내들이 감기는 눈 억지로 뜨며

이 밤에 곳곳에서 깨어 있습니다

잠든 식구들을 애잔하게 지켜보며

또는 영영 걷히지 않을 듯한 이 어둠의 끝을 고대하며

혹은 기계를 돌리고 혹은 차가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밤은

시커먼 손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제 식구들과 병든 벗들을 길가로 내몰 것만 같습니다

잠들고도 싶습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밤은 저를 꾀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세상엔 소리 없이 깨어있는 많은 이들이 있어

비록 흐릿하지만 하늘엔 별들도 저렇게 반짝입니다

저보다 세상 오래 사신

아버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병이 아닌 줄을

아버님 너무 안쓰러워 마십시오

 

 

 

김사인

 

술 번쩍 깨리

두고 온 이들 떠올라 목은 메아리

 

밥 한 그릇의 묵묵한 의관 정제!

 

그 곁에서

흩어지는 몸 겨우 추슬러봄

풀린 눈 다시 힘주어 뜨고 무릎 꿇어봄

복받쳐 오름이여

오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로다

저 흰밥 고봉 너머 고향의 강물 넘실대고

낫질하던 팔뚝들

적적하게 돌아눕는 노모의 좁은 어깨

 

대체 나는 어디에 엎질러져 있단 말인가

 

돌아앉아 담배만 빨고 있는 굽은 등

밥 한 그릇

 

 

 

별사(別辭)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다고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골똘히 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보살

김사인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날을 나도 힘도 안 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허요. 그저 좋아 자꾸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쯔르르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먼,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길로 그만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믄 허라우.

 

 

 

볼펜

김사인

 

볼펜이 자빠져 있네.

다 쓴 자지 같네.

쩔은 과메기 토막 같네.

나는 왜 저 볼펜이 시무룩하다고 생각할까.

볼펜은 그 여자의 하이힐 소리와 냄새와 작은 손등과 푸른 실핏줄을 기억할까.

 

펄쩍 뛰어라도 봐 볼펜!

논두렁의 개구리처럼 괜히 한번

털렁거려봐 볼펜!

시골길 쇠불알처럼 천연덕스럽게.

 

 

 

봄 바다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링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겠지

 

 

 

봄밤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 ㅑ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도 ㅑ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떄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처들어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 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여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 집 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싸며 푼수 주모(50세)가 빈 자리 남는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 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갔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불길한 저녁

김사인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그러면 그렇지 이 나라에

'요행은 없음'

명패를 붙이고 밤이 내리네

 

유서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진술 같은 안개가 깔리고

코스모스 길고 여린 모가지 흔들리네

별은 뜨지 않네

 

불가항력의 졸음은 오고

집요한 회유같이 졸음은 오고

피처럼 식은땀이 끈적거리네

 

슬프자, 실컷 슬퍼버리자

지자, 차라리

이기지 말아버리자

 

 

 

김사인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심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비둘기호

김사인

 

여섯 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 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 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 리를 더 가야 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빈방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왔나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 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빈집

김사인

 

문 앞에서 그대를 부르네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 이름 부르네

나 혼자의 귀에는 너무 큰 소리

대답은 없지 물론.

닫힌 문을 걷어차네.

대답 없자 비로소 큰 소리로 욕하네

개년이라고.

 

빈집일 때만 나는 마음껏 오지.

차가운 문에 기대앉아 느끼지.

계단을 오르는 그대 발소리

열쇠를 찾는 그대 손가락

손잡이를 비트는 손등의 흉터

문 안으로 빨려드는 그대의 몸, 잠시 부푸는 별꽃무늬 플레어스커트

부드러운 종아리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소리들 새어나오지.

남아 떠도는 냄새를 긴 혀로 핥네.

그대 디딘 계단을 어루만지네.

그대 뒷굽에 눌린 듯 손긑이 아프지만

견딜 수 있지 이 몸무게 그리고 둥근 엉덩이

손이 떨리네 빈집 앞에서.

 

 

 

빗방울 화석

김사인

 

처마 끝에 비를 걸어 두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놓고, 몇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쫓아다니던

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듣는 일

가난한 골목길을 따라 퉁퉁 부은 다리로 귀가하는 밤길

긴 통화를 하며

길바닥에 부딪는 똑똑똑 소리를

내 방문 노크 소리처럼 받는 일

툇마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헤아리다가

나는 묵은 편지를 마저 읽으리라

빗방울 받아먹는 귀만큼

귀 깊숙이만큼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또르르 굴러가던 방울이 쏘옥 들어가 박히던

움푹 팬 자리,

그런 자리 하나쯤 만들어 놓고

 

 

 

사격훈련장 부근

김사인

 

산꿩 운다 멧비둘기 운다

솔꽃을 가득 이고 소나무는 무료하다

숲은 아직 연초록이다 순진해 보인다

열두 살 이라크 소녀 같다 폐허 속의

진한 눈썹과 큰 눈에도 초록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구한 피곤일까 아니면 죽음 같은 절망일까

산꿩이 또 운다 궁상이다

혐오도 연민도 없이 다만 유구무언으로

부시와 럼스펠드라는 미국 사내들을 나는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소나무도 연초록일까?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유구무언의, 울음도 채 이루지 못한 울음을 껑 껑 산꿩은 운다

열두살 소녀와 그의 젊은 아비의 나라에도 꿩은 있을까

공중은 날파리 떼의 잔치판이다

운동장에 풀어놓은 초등학교 3학년들 같다

철부지를 우리는 참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뻔뻔한 무지에는 희망이 없다

비싸야 팔리는 백화점의 풍습과 29만 원이 전 재산이라는 어느 전직과 텔레비와 프로스포츠 같은 것들을 부득불 떠올린다

고요를 깨고 새 한 마리가 푸드득 솟구친다

그래 아무래도 좋다(아니 좋지는 않다)

지난 시대를 생각하면 목구멍으로 쓴 물이 넘어오지만

누구도 탓할 마음은 없다 이제 와서

우리는 사이좋게 오래 꿈꾸어온 그 무엇과 닮아가고 있는 중(말하자만 돼지나 하이에나 같은)

풀들은 여전히 순진하고 나른한 표정

개미들은 우왕좌왕 부산을 떨지만

그다지 탐욕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버려진 지 오래인 담배꽁초 하나가 그것들 사이에

한 식구인 듯 때 묻어 같이 누워 있다

산꿩이 운다

 

 

 

사랑이 왔나?

김사인

 

꿈인가, 무슨 이런 꿈이

저기 저 혈혈단신 죽음 같은 어둠

앞뒤로 지고

연꽃 하나

오롯하게도 아니고, 그 왜 뜬금없이

연꽃 하나 하이야니 떠오를 수도 있나

사랑이 왔나? (아고 참 한심도)

그런데 저 백랍빛 얼굴과 젖어 긴 머리채

익사한 심청인가 심청이 그이,

죽어서야 이제 돌아온 건가

저 죽음의 캄캄한 물 우흐로

물에 불은 연꽃 하나

 

칠순에 자식을 보다니

(아이고 참)

 

 

 

삼우 무렵

김사인

 

서리태 한두홉을 냄비에 볶습니다.

서리태를 볶아 와

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

콩을 먹습니다.

 

어머니는 가시고

장맛비가 오는데

갓 올린 봉분 안부를

아무도 묻지 않고

오독오독 콩을 깨뭅니다.

 

콩그릇 곁으로 삼대가 둘러앉아

찧고 까부르는 테레비,

테레비만 멀거니 건너다봅니다.

 

 

 

삼천포

김사인

 

담배 문 손등으로 비가 시린데 말이지,

갯가로 시집간 딸아이 웅크린 등에도 이 찬 비 떨어지겠고 말이지,

쉐타 팔짱 너머, 널어놓은 가재미 도다리나 멀거니 내다 보겠지,

터럭도 사나운 다리를 숭숭 걷골랑,

토수(土手)질 간 사위놈은 말이지,

지집 우흐로 용을 쓰던 그 딴딴한 아랫배며 장딴지로,

재 너머 고래실 흙반죽이나 찌거덕찌거덕 밟아쌓겄지,

비는 그새 굵어지는데 말이지,

 

 

2

할망구는 망할 망구는 그 무신 마실을 길게도 가설랑 해가 쎄를 댓발이나 빼물도록 안 온다 말가 가래 끓는 목에 담배는 뽁뽁 빨면서 화투장이나 쪼물거리고 있겄제 널어논 고기는 쉬가 슬건 말건 손질할 그물은 한짐 쌓아놓고 말이라 캴캴 웃으면서 말이라 살구낭개엔 새잎이 다시 돋는데 이런 날 죽지도 않고 말이라 귀는 먹어 말도 안 듣고 처묵고 손톱만 기는 할미는 말이라 안즐뱅이 나는 뒷간 같은 골방에 처박아놓고 말이라

올봄엔 꽃잎 질 때 따라갈 거라?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김사인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숨죽이고 눈 내리깐 채 몸의 제일 후미진 구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 년 인류사 규모의 배경을 갖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린 아이들과 유고 내전의 성폭행들과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까지, 온갖 유구한 상처의 넋들이 그 숨마저 죽인 다소곳함 속에는 서려있다고 내겐 보였다.

그래서 한순간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나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을 조금 당기고 치맛자락을 끌어내려 그것을 슬며시 덮고 마는 것이었다.

 

 

 

새벽 별을 보며

김사인

 

서울에서 보는 별은 흐리기만 합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

그래도 흩어지는 정신 수습해

변변찮은 일감이나마 잡고 밤을 샙니다.

눈은 때꾼하지만 머리는 맑아져 창밖으로 나서면

새벽별 하나

저도 한잠 못 붙인 피로한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서로 기다려온 사람처럼

말없이 마주 봅니다.

잃은 만큼 또 다른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대도 시골 그곳에서 저 별을 보며

고단한 얼굴 문지르고 계신지요.

 

부질없을지라도

먼 데서 반짝이는 별은 눈물겹고

이 새벽에

별 하나가 그대와 나를 향해 깨어있으니

우리 서 있는 곳 어디쯤이며

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저 별을 보면 알 듯합니다.

딴엔 알 듯도 합니다.

 

 

 

김사인

 

하늘빛은

색이 아니다

 

고요하다는 그 돈 강처럼

스와니 강물처럼

다만 멀고 먼

 

먼 것은 푸르고

푸른 것은 깊어

 

그러니 알 수 있으리

그가 얼마나 깊은 것을 견뎠는지

그가 얼마나 멀리까지 닿았는지

 

생을 마친 그의 창백한 얼굴

 

 

 

서귀(西歸)

김사인

 

날 잊지 말아라 노래 부르네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나 이승의 연(緣) 다하여

먼 길 가는 날

살쩍 고운 귀밑머리 흰 목덜미

그대 두고는 차마 못 가

자욱마다 소나기 오리

울고불고 몸부림치리

 

그래도 아마 나 시치미 떼리

시치미 떼고 휘파람 불리

한사코 무덤덤히 가서

한번도 뒤 안 돌아보리

머리털 한 오락 안 빠뜨리리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을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서부시장

김사인

 

굴 한 다라이를 서둘러 마저 까고

깡통 화톳불에 장작을 보탠다

시래기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며

테레비 쪽을 힐끗 홀긴다

누가 당선되건 관심도 없다

화투판 비광만도 못한 것들이 뭐라고 씨부린다

 

판은 벌써 어우러졌다

추위에 붉어진 코끝에 콧물을 달고

곱은 손으로 패를 쥔다

인생 그까이꺼 좆도 아닌 거,

옛다 똥피다 그래, 니 처무라

아나 고맙데이 복 받을 끼다

겹겹이 쉐터를 껴입고 질펀한 욕지거리에 배가 부르다

진 일로 뭉그러진 손가락에 담배를 쥐고

 

세상 같은 것 믿지 않는다

바랜 머리칼과 눈빛뿐

믿고 자실 것도 더는 없는 일

인생 그까이꺼 연속그만도 못한 거

고등어 속창보다 더 비린 거.

 

 

 

선운사 풍천장어집

김사인

 

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

고요하고 환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 년 삼십 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섣달그믐

김사인

 

또 한 잔을 부어 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 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 넣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이만하면 괜찮다

 

 

 

설움에 대하여

김사인

 

내 뒷모습으로 온다

간신히 담벼락에 기대 소피를 보고

부르르 떠는 내 어깨로 온다

오스스 돋는 몇 알 소름으로 온다

멋대로 팔을 뻗고 잠든

딸아이의 납작한 코 위에 온다

말려 올라간 종아리 위에 온다

바라보는 내 취한 눈에 온다

마른 버즘 돋는 아내의 터무니없는 맑은 눈빛으로 온다

내 에미 애비의 바랜 얼굴과 그 석 자 이름 위에 온다

벗들, 벗들의 처진 어깨 위로 온다

눈꺼풀 덮어 누르는 야속한 졸음으로 온다

 

 

 

소주는 달다

김사인

 

바다 오후 두 시

쪽빛도 연한

추봉섬 봉암 바다

아무도 없다.

개들은 늙어 그늘로만 비칠거리고

오월 된볕에 몽돌이 익는다.

찐빵처럼 잘 익어 먹음직하지

팥소라도 듬뿍 들었을 듯하지

 

천리향 치자 냄새

기절할 것 같네 나는 슬퍼서.

저녁 안개 일고 바다는 낯 붉히고

나는 떨리는 흰 손으로 그대에게 닿았던가

닿을 수 없는 옛 생각

돌아앉아 나는 소주를 핥네.

 

바람 산산해지는데

잔물은 찰박거리는데 아아

어쩌면 좋은가 이렇게 마주 앉아

대체 어쩌면 좋은가.

살은 이렇게 달고

소주도 이렇게 다디단

저무는 바다.

 

 

 

시간들

김사인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누워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시를 쓰며

김사인

 

칼이 하나 있어야겠다

애꿎게 썩은 호박이나 쑤셔대는 그런 것 말고

만만한 닭모가지나 치는 그런 것 말고

서진룸싸롱 그런 식도 말고

 

당당하고 총명한 칼 한 자루

산맥과 같이 장하고 깊은 강의 설움으로 오래 벼린

뜨겁고 눈빛 맑은 칼 한 자루

 

누구 있어 저 침묵의 하늘

써억 배 가르리

새 빛 속에 제 몸 버텨 세우리

 

 

 

시를 위하여

김사인

 

강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강의 잔해만이 초라할 뿐

시는 씌여지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슴에 강물이 고일 때를

고인 강물이 옷을 벗고 알몸이 될 때를

강물이 몸을 일으켜 제 아랫도리를 굽어볼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혼자 떠나는 강물의 뒷모습을

떠난 강물이 남긴 발자욱들을

그 발자욱에 남아 있는 잠든 새끼 강물들까지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떠난 강물을 만나러

대신 강물이 되어 비우고 간 자리에 눕지 못한다

새끼 강물을 배지 못한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

시가 씌여지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축축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젖하던 옛 동네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단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아카시아

김사인

 

먼 별에서 향기는 오나

그 별에서 두 마리 순한 짐승으로

우리 뒹굴던 날이 있기는 했나

나는 기억 안 나네

아카시아

 

허기진 이마여

정맥이 파르랗던 손등

두고 온 고향의 막내 누이여

 

 

 

약혼

김사인

 

꽃처럼 곱던 시절은 다 갔구나

까칠한 네 얼굴을 보니

지난 몇 해가 어제만 같다

다 그런 거라고 나는 능청을 떨지만

손쉽게 다 그럴 수는 없는 거였지

 

꽃같이 여리던 시절도 이제 다 가고

험한 세상 없이 살자면

튼튼한 몸뚱이 밖에 믿을 게 없다

오직 말할 것은

굳세거라 마누라야

 

저 세상 갈 때까지 한 솥밥 먹으며 부대껴 보자고

마른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날

실없이 나는 눈물 난다

이 아름다운 약속이

기쁘기도 해서 섧기도 해서

 

 

 

엉덩이

김사인

 

영주에는 사과도 있지

사과에는 사과에는 사과만 있느냐,

탱탱한 엉덩이도 섞여 있지

남들 안 볼 때 몰래 한입

깨물고 싶은 엉덩이가 있지.

 

어쩌자고 벌건 대낮에 엉덩이는 내놓고

낯 뜨겁게시리 뜨겁게시리

울 밖으로 늘어진 그중 참한 놈을 후리기는 해야 한다네 그러므로,

후려 보쌈을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영주에서는

업어온 처자 달래고 얼려

코고무신도 탈탈 털어 다시 신기고

쉴 참에 오줌도 한번 뉘고

희방사 길 무쇠다리 주막 뒷방쯤에서

국밥이라도 겸상해야 사람의 도리!

 

고개를 꼬고 앉은 치마 속에도

사과 같은 엉덩이가 숨어 있다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

정미소 둘째 닮은 허여멀건 소백산쯤

없어도 그만이다 싶기도 하지

남들 안 볼때 한입 앙,

생각만 해도 세상이 환하지 영주에서는.

 

 

 

에이 시브럴

김사인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 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 보니 깜북 좋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 한 채 날은 저물고

 

바로 이때 나직하게 해보십지

'에이 시브럴ㅡ '

양말 벗어 팽개치듯 '에이 시브럴ㅡ '

자갈밭 막 굴러온 개털 인생처럼

다소 고독하게 가래침을 돋워

입도 개운합지 '에이 시브럴ㅡ '

갓댐에 염병에 ㅈ에 ㅆ, 쓸 만한 말들이야 줄을 섰지만

그래도 그중 인간미가 있기로는

나직하게 피리 부는 '에이 시브럴ㅡ '

(존재의 초월이랄까 무슨 대해방 비슷한 게 거기 좀 있다니깐)

얼토당토않는 '에이 시브럴ㅡ '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

크게는 못하고 입안에서 읊조리는

'에이 시브럴ㅡ '

 

 

 

여름날

김사인

 

푸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 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여수(麗水)

김사인

 

함바 구들장은 쩔쩔 끓고

순천 석수 정씨는 종일 잠만 잔다

신월동 바닷가 겨울 저녁

광주로 공부 나간 둘째는

끼니나 제대로 찾아먹는가

몸만 상하고

돈은 마음같이 모이질 않고

간조가 아직도 닷새나 남았는데

땡겨먹은 외상값은 쌓여만 간다

바다는 촐랑촐랑 무언가를 졸라대고

개들은 바람을 좇아 컹컹컹 짖고

 

잠이 깬 정씨가 바다 쪽으로 부스스 괴타리를 푼다

힘없이 오줌이 옆으로 날린다

 

 

 

영결(永訣) 

김사인

 

산 이들 남아

흰옷 입고 절 올리니

하늘은 맑게도 개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한평생이 아득도 합니다.

그 굽이굽이 돌아

당신은 내 앞에 누워 계시고

살아남은 우리는 또 목숨 이어갈 궁리를 합니다.

많은 돈도 벌지 못했고

남부러울 벼슬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현고학생부군신위' 작은 위패가 초라해도 보입니다만

사느라고 살아왔습니다.

아름답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영영 이별입니다.

다시는 손도 잡아볼 수 없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날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지요.

희끗한 머리 가다듬고

내 남은 것 모두 모아

마지막 절을 올리오니

받으소서.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 또 만나겠습니까.

다시 만난들 어찌하겠습니까.

 

 

 

영동에서

김사인

 

잎 넓은 감나무 가로수길 되도록 천천히 걸어

바람과 초가을 볕에 흠뻑 젖을 일.

읍사무소 뒤켠 그늘 얌전한 아무 식당으로나

슬쩍 스밀 것.

객방은 정갈하고

다만 올갱잇국,

햇정구지도 향기로운 올갱잇국을 한그릇 주문하는 것.

 

먼저 내온 버섯무침을 맛보며

올갱이 잘 줍던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푸근하던 웃음과 눈매 떠오르고, 올갱이 줍던 그 희고 통통하던 종아리들 생각나고,

저녁상 물린 뒤 삶은 올갱이 옷핀으로 빼먹던 생각 나고

이빨로 올갱이 꽁지 뚝 땐 다음 단번에 쪽 빨아 먹던 형님들 생각나고

나도 따라 해보다가 이 아파 쩔쩔매던 생각도 나다가

 

올갱잇국 오고

그 쌉싸름한 맛에 마음 다시 아득해져

꼬지지한 염생이 수염 몇 올과 퉁방울눈의 윤 아무개가 있어

막걸리라도 한잔 같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창밖으로 문득 눈이 가는데,

 

감들은 나무에 편안히 잘 달려 계시고

길 건너 자전거 안장 위에 초가을 햇살도 순하고 다복하시고

간간이 지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다 조금씩 먼저 간 그를 닮았다는 것, 아아.

 

 

 

영월에서

김사인

 

무엇을 기다리나 산들은

해마다 목을 빼고 나무들은

우두커니 물들은 모래들은

밤마다 어디로 가서 무너지나 한번씩

어둠 속 가로질러

온통 가슴이 주저앉나 무엇을 기다려

옥수수 벌판을 헤매다

아침이면 돌아오나 바람으로 우수수

 

기다림이 아니고야

이렇게 있을 리가

살이 마르고 가죽 쪼그라들 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어떻게 죽을 수나 있을까?

 

한데 무엇을?

이렇게 있다는 것이

기다림인 줄을 까맣게 잊고

모든 길 끊어진 영월에서

나는 대체 누구의 잠을 대신 자는가

누구의 밥을 대신 먹는가

누구의 걸음을 대신 걷는가

 

 

 

예래 바다에 묻다

김사인

 

눈 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거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거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이 내 입안엔 신 살구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 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써리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 곳에 마음에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속울음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

 

* 예래는 제주의 중문 동쪽 바닷가 마을이다.

 

 

 

예언서

김사인

 

1

방언으로 기도를 올리는 자들아

잘린 혀 말 못 하는 한의로

이 강가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울었다

이 교도에게 몸을 팔아

너희들 값진 패물과 향유로 치장하고

낯선 우상 앞에 엎드렸을때

배다른 네 형제들은

눈 덮인 벌판에 버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신전에서 두 무릎을 꿇고

너희는 하늘과 땅에 가득한 은혜를

입 모아 찬양할 때

너희 살찐 포도밭 앞에서

네 형제 들은 허기진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제 들어도 듣지 못하는

너희를 위하여

보아도 볼 수 없는 너희를 위하여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 의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너희의 혼을 위하여

 

 

2

내가 기어코 너희를 멸하리라

형제의 피가 제단 위에서 마르기도 전에

돌아앉아 단 포도주를 입에 붓는 자들

제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한 자들

내가 기어코 너희 두 눈을 빼고 두 귀를 잘라 벌판으로 내몰리라

벌판의 까마귀떼로 하여 너희 염통을 쪼게 하리라

 

 

3

나는 그대 눈부신 이름 부르지 못합니다

몸 더러워지고 넋마저 바스러져

외마디 비명도 이제 내 것 아닙니다

부르지 않아도

부르지 않아도 오실 줄을 믿습니다

이 참담한 흔들림 사이에

그대 서늘한 눈매 깃들 것을 믿고 믿습니다

부르튼 발과 깨진 무릎

어루만져 주실 것을 믿고 또 믿습니다

 

 

 

옛 우물

김사인

 

늙은 거미처럼이라고 적는다.

버려진 집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둑방 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이라고 적는다.

폐분교의 엉터리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과

오래전 버려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이라고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 울음소리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옛일

김사인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 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 새끼처럼

몸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 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약혼

김사인

 

꽃처럼 곱던 시절은 다 갔구나

까칠한 네 얼굴을 보니

지난 몇 해가 어제만 같다

다 그런 거라고 나는 능청을 떨지만

손쉽게 다 그럴 수는 없는 거였지

 

꽃같이 여리던 시절도 이제 다 가고

험한 세상 없이 살자면

튼튼한 몸뚱이밖에 믿을 게 없다

오직 말할 것은

굳세거라 마누라야

 

저 세상 갈 때까지 한솥밥 먹으며 부대껴 보자고

마른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날

실없이 나는 눈물난다

이 아름다운 약속이

기쁘기도 해서 섧기도 해서

 

 

 

오누이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리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 본다

 

안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 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월부 장수

김사인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 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밥솥을 마저 멕이나

 

바람은 바짓자락을 붙잡고 핑핑 울어쌓는데

저무는 길가에 철 놓친 수레국화 몇 송이

꺼츨하게 종아리 걷었네

 

 

 

유리창

김사인

 

사랑하기로 한다

5분이 지나면

마른 풀과 짚으로 만든 잠자리에 돌아가

혼자 눕기로 한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두 개의 강이 되기로 한다

만나면 몸짓으로만 사랑하기로

돌아가 먼 곳에 하나씩

어린 물고기를 키우기로 한다

 

 

 

유필(遺筆)

김사인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힌 중지마다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 소리

 

 

 

은하 통신 - 에스컬레이터에서

김사인

 

이렇게 살이 쪘군요 나도 그대도

어디에서 어긋났던 걸까요 아득한 은하의

이 별로 흘러와

질척이는 뒷골목을 악몽처럼

이십 년

삼십 년

아니, 사십 년을!

 

- 당신은 또 어느 별에서 오신 분일까요

사열식의 우로 봐 시간 같은 낯선 고요 속에서 생각해요

살찐 그대의 낡은 외투 끝단과 바깥이 닳은 구두굽을

살찐 내가 아프게 보네요

무엇이 우리를 데려와 이렇게 볼품없이 풍선부는 걸까요

불다 팽개쳐 쭈그러트리는 걸까요

- 당신은 그 별에서 어떤 소년이셨나요

또 다른 당신이 내 뒤에서 소리없이 묻네요

전에 어디서 우리가 만났던가요

우리를 싣고 오르는 이 기계도 말 못하는 외로운 짐승이군요

잠시 후 지상에 닿으면 우리는 또 바삐 흩어지겠지요

질척거리는 뒷골목으로 돌아가

침 묻혀 지폐를 세는 아버지겠지요

허겁지겁 국밥을 먹는 늙은 아버지이겠지요

 

기억 못 하겠지요 그대도 나도 함께한 이 낯설고 짧은 시간을

두고 온 별들도 우리를 기억 못할 거예요

돌아갈 차표는 구할 수 있을까요 이 둔해진 몸으로

부연 하늘 너머 기다릴 어느 별의 시간이 나는 무서워요

당신도 그런가요

 

 

 

인절미

김사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입술

김사인

 

명옥헌 못에 숲이 비친다

숲은 제 그림자와 만나 도톰한

입술이 된다

떠가는 배 같고, 물고기 같고

산에 벚꽃 피면

일찍 뜬 달 같기도 한

아래와 위가 포개진 못 가장자리를

눈에 띄지 않게 달싹이고 있다 복화술사처럼

 

그 입술에 연지를 입히려고 배롱나무를 심었던가

꽃은 떨어져서 꾹 다문 입술에

주름을 만든다

 

 

 

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릉지나 한 덩어리 얻어 먹으로 갈까

긴긴 장마

 

 

 

적막에 바침

김사인

 

그대는 강 건너서 잠이 드시고

곤하여 가랑가랑 코도 고시고

나는 나는 창 저편

강물로 스미는 눈송이에나 기대네

무심한 서양 노래나 따라서 흘러가 보네

그대 깊은 잠 흔들릴세라

마지막 한잔을 조심히 비우고

목젖 떠는 소리도 조마로워라

강 건너 단잠 속에 그대를 묻고

이만치서 누리는 적적한 평화

이 생각도 저 생각도 나지 않고

먹먹하게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

 

 

 

전주(全州)

김사인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맞으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 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이다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 타고 놀러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것이다

 

 

 

졸업

김사인

 

선생님 저는 작은 지팡이나 하나 구해서

호그와트로 갈까 해요

아 좋은 생각,

그것도 좋겠구나.

 

서울역 플랫폼 3과 1/4번 홈에서 옛 기차를 타렴.

가방에는 장난감과 잠옷과 시집을 담고

부지런한 부엉이와 안짱다리 고양이를 데리고

호그와트로 가거라 울지 말고

가서 마법을 배워라.

나이가 좀 많겠다만 입학이야 안되겠니

 

이곳은 모두 머글들

숨 막히는 이모와 이모부들

고시원 볕 안 드는 쪽방 뒤로

한 블록만 삐끗하면 달려드는 '죽음을 먹는 자들'.

그래 가거라

인자한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과 주근깨 친구들

목이 덜렁거리지만 늘 유쾌한 유령들이 사는 곳.

 

빗자루 타는 법과 초급 변신술을 떼고 나면, 배고프지 않는 약초 욕먹어도 슬퍼지지 않는 약초,

 

분노에 눈 뒤집히지 않는 약초를 배우거라. 학자금 융자 없애는 마법 알바 시급 올리는 마법 오

 

르는 보증금 막는 마법을 익히거라. 투명 망또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그곳이라고 먹고살 걱정 없을까마는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저 흑마술을 잘 막아야 한다.

그때마다 선량한 사냥터지기 해그리드 아저씨를 생각하렴.

나도 따라가 약초밭 돌보는 심술 첨지라도 되고 싶구나.

 

머리 셋 달린 괴물의 방을 지나

현자의 돌에 닿을 때까지,

부디 건투를 빈다

불사조기사단 만세!

 

 

 

좌탈(座脫)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주왕산에서

김사인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면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중국집 전(全)씨

김사인

 

가령 그토록 빠르게 면발을 뽑아내는 일

훔쳐보는 코흘리개들 쪽으로 큰 눈 찡긋 우수 어린 웃음 지어주는 일

앞으로 목을 빼고 큰 키 휘청휘청 걸어가는 일

더러운 앞치마는 뭉쳐 시답잖다는 듯 홱 구석으로 던지는 일

기묘한 악센트로 말하는 일 중국집 전(全)씨처럼.

 

장래 희망으로야 대통령도 장군도 싫지는 않았지만

돈 많은 사장이나 비행기 조종사도 꼭 싫지는 않았지만

 

눈부셨지 껌 잘 씹던 중국집 전(全)씨

입을 움직일 때마다 따닥따닥 소리가 나던

휘파람을 불면

지나는 처녀들 어김없이 킬킬거리던

뱀 모가지를 맨손으로 눌러서 잡던.

 

어느 가을 웃말 누구한테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며 울던 홀아비 전(全)씨

다 찢어진 난닝구 서러운 갈비뼈처럼은 아니고 싶었으나

기둥 뒤에서 섧게 따라 울던 그의 아들처럼은 아니고 싶었으나

(나도 슬퍼 조금은 따라 울었지만)

 

벚꽃 질 무렵

어린 아들 데리고 사라진 중국인 전(全)씨

아모레 아줌마하고라던가

가게 안집 큰누나하고라던가

 

그길로 제 별로 돌아간 걸까.

그곳에서 다시 중국집을 내고 난닝구 바람에 껌을 씹으며

멋지게도 면발을 뽑고 있을까

어린 날의 내 우상 중국집 전(全)씨.

 

 

 

지상의 방 한 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진달래

김사인

 

한밤 졸리움 속에

그대마저 쓰러지고 나면 어쩌리

 

푸른 보리밭 지나

가느단 흙길 끝난 데 산 밑

홀태바지 가랑이도 땀에 젖고

깨진 옹기 조각들 햇빛에 날세우네

 

부황든 그대 참꽃 물 파란 입술 가리고

고개 돌리면 어쩌리

 

죽어가던 이들의 아득한 눈빛

지난겨울 하얗게 잦아들던 눈들의 비명이 아직 생생한데

가서 또 가서

돌아 못 오면 어쩌리 그대

 

 

 

청운(靑雲) 쪽을 보다

김사인

 

늙은 거미처럼 이라고 적는다

빈 집 마당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 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둑방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 이라고

폐교의 싸구려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 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

오래전 버려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 이라고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 울음소리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 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춘곤

김사인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치욕의 기억

김사인

 

영화배우 전지현을 닮은 처녀가 환하게 온다

발랄무쌍 목발을 짚고(다만 목발을 짚고)

스커트에 하이힐 스카프는 옥빛

하늘도 쾌청 그런데(뭔지 생소하다 그런데)

오른쪽 하이힐이 없다

오른쪽 스타킹이 없다

오른쪽 종아리가 무릎이 허벅지가 없다

나는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지 못한다

묻건대

이러고도 생(生)은 과연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친구들 - 마굿간 시절

김사인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들이다

헌털뱅이 파카나 걸치고

이번엔 누구를 약 올려 줄까

눈에 개구가 반짝반짝 올라서들 온다

개구진 헌털뱅이들은 화투도 반은 입으로 친다

판에 오천 원 내기 바둑이 하도나 꼬수워

낄낄낄 어쩔 줄을 모른다

구경하는 치들도 낄낄낄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쇠죽 쑤는 아랫목인 듯

그 낄낄낄 위로 뒹굴며 모두 같이 등을 지진다

푹 삶은 누룽지처럼 서로를 한 대접씩 마시고

속을 데우는 것이다

 

오늘도 수세미 수염에 부스스한 머리들을 해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담배 냄새를 구수하게 풍기며 이 어둑한 구석으로

옛날 아버지들처럼 모여들 것이다

 

 

 

칼에 대하여

김사인

 

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마르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나면 차라리 다시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앉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되는 것이다

입은 마치 웃는 것처럼 잇바디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 피식 웃음처럼 새는 것이다

누더기인 듯 온몸이 날인 것이다

 

한두 십 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떡이 되어 이백 년 삼백 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거무티한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탈상

김사인

 

영정을 고여놓고

떡 고기전 괴고

조율 사이 홍동백서 진설하고

메 올리고 삽시하고 나서

땅땅땅 세 번 정저 소리 울리고

유세차 축도 읽고

일곱 살짜리 상주

꾸벅 절하고 잔 올리고

미망의 여읜 아내 울먹

절하고 잔 올리고 큰동생 절하고

친구들 하나둘 절하고

막내 여동생도 잔 올리고

밖은 어느덧 어둡고

안개비 깔리고

그대 육신 이제 흙 속에서

많이 상했으리

잘 가라 그대

이승의 마지막 밥이니

배불리 들고

술 취해 흔들흔들

잘 가라 그대

 

 

 

통영

김사인

 

설거지를 마치고

어린 섬들을 안고 어둑하게 돌아앉습니다.

어둠이 하나씩 젖을 물립니다.

 

저녁비 호젓한 서호시장

김밥 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니댁이

도구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끙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 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께서도

억세고 정겨운 통영 말로 봄장마를 고시랑고시랑 나무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어

끙,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드리면, 이래 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 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서

옛된 보슬비 업고 걸려 민주지산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아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풍경

김사인

 

산모퉁이 잡초 욱은 길로

땡볕 맞으며 가네 흙투성이 늙은이 하나

황소 한 마리

새소리도 없네 바람 한 점 없네

발 밑엔 푸석한 먼지

저 풍경, 아무도 말하지 않네

실한 팔다리들 다 어디로 가고

이 빠진 늙은 것들만

기침에 넘어오는 가래를 우물우물 되씹어 넘기네

말하는 이 없네

세월은 홀로 저만큼 앞서가고

금간 사발 몇 개 남아 있네

땀 흘러

헤진 샤쓰는 등에 붙었네

 

 

 

풍경의 깊이

김사인

 

1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 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 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2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 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풍선

김사인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 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필사적으로

김사인

 

비 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땀 배고, 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 땅 한 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 던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 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희미한 옛 벗들 그림자, 환등(幻燈)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에 우산, 또 한 손엔 내용불상(內容不詳)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하루빨리

김사인

 

석 달 열흘 입고 버틴 속옷처럼 뻔뻔하구나

몰염치의 나라여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장쾌하게 술이나 퍼마시는 일

하루라도 빨리 몸을 망쳐

이 별에서

내려서는 일뿐이냐

 

비열한 이 땅의 가갸거겨들이여

기구한 이 땅의 아야어여들이여

 

쌍욕 한 번 못 지르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한심하다 나여

 

 

 

한강을 보며

김사인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한국사

김사인

 

얼빠진 집구석에 태어나

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

내 새끼들도 십중팔구

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가 취생몽사하리라.

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

길은 없어리라.

 

친구들 생각하면 눈물 난다.

빛나던 눈빛과 팔다리들

수주병 곁에서 용접기 옆에서 증권사 전광판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져

눈도 감지 못한 채 우리는 불쏘시개.

 

오냐 그 누구여

너는 누구냐.

보이지 않는 어디서 무심히도 풀무질을 해대는 거냐.

똑바로 좀보자.

네 면상을 똑바로 보면서 울어도 울고 싶다.

죽어도 그렇게 죽고 싶다.

 

 

 

한 사내

김사인

 

한 사내 걸어간다 후미진 골목

뒷모습 서거프다 하루 세 끼니

피 뜨거운 나이에

처자식 입 속에 밥을 넣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은 외로운 일

몸 팔아야 하는 것은 막막한 일

그 아내 자다 깨다 기다리고 있으리

찻소리도 흉흉한 새로 두시

고개 들고 살아내기 어찌 이리 고달퍼

비칠비칠 쓰레기통 곁에 소변을 보고

한 사내 걸어간다 어둠 속으로

구겨진 바바리 끝엔 고추장 자욱

 

 

 

허공장경(虛空藏經)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증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을 맸다.

내려 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화양연화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새벽의 물안개처럼 저녁노을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어디론가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누구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는 어느 날부터 누구도 우리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가가 무르지 눈 멀고 귀 먼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잘 가렴 눈물 겨운 날들아

빗속을 어깨 겯고 너희는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살아가거라

 

 

 

화진(花津)

김사인

 

태풍 오면

철없는 어린 갈보처럼

마음은 펄럭이리

살 속으로 바람 가득 들고

먼 데 하늘 돛폭같이 부풀 때

늙은 노새의 나

끝내 화진(花津) 가리

굼실거리며 덮쳐오는

수만 코끼리떼 기다리리 말향 고래 떼 기다리리

쏟아지는 몸엣버캐 거친 숨소리

화진(花津), 온몸 열어 새 사내 맞는

화진(花津), 그 유정한 이름 복판에 서서

늙은 나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겠네 한번

초라한 갈기 곤두 세우고 부르르 떨겠네

기어이 나도 저 바다 하리

 

 

 

8월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

야마하 150

부다당 들이밟으며 쌍,

탑동 바닷가나 한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

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

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

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

부다당 부다다다당

내리꽂고 싶은 거지

깡소주 나발 불 듯

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 고교 졸업 30주년

김사인

 

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

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야 할 시간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갈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날 명예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저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데요 ' 마누라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 아 벌써 그렇게 됐나 ' 마음 아득해지는 꿈

 

30년, 하고 중얼거리며 차가운 거울 앞에 서면

헐거워진 머리칼 너머 주름살 너머 먼 저곳

수1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를 우겨넣은 가방을 끼고

발갛게 상기된 까까머리 앳된 그가 달려간다

 

30년, 하고 다시 가만히 말해보면

명치끝 어디선가 화아한 박하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잘 삭은 젓국냄새도 도는 듯하다

궂은 저녁의 쓰디쓴 소주 한 잔과 뉘우침의 냄새가 도는 듯하다

마른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도는 듯하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교실로 뛰어가는

거울 속 까까머리

그의 새벽 꿈자리가

기뻤는지 슬펐는지

알 길은 없다

 

 

 

60년대

김사인

 

가을빛 부신 산길에

꿩 한 마리

아이는 외조모 손을 잡고

재를 넘는데

껑- 껑-

부서지는 햇살 너머로

목이 메는 식구들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