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잊은 사람
이무영
[1]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
멀리 찬바람을 타고 온 노랫소리는 팔 년 만에 고향에서 맺은 나의 첫 꿈을 깨어버렸다. 부엉이 소리 사이사이에 토막토막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는 것도 괴이치는 않았지마는 팔 년간 그린 고향에서의 첫 꿈이니만큼 아끼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이 십년 가까이나 키 잃은 범선처럼 떠돌아다닌 나는 이 고향의 첫날밤에 무엇인지는 모르면서도 기대하는 것이 많았었다. 오래간만에 어머니가 손수 보아준 자리 속에 누워서 - 나는 그동안 주리었던 어머니의 애정을 마음껏 즐기었었다.
사실 나는 행복스러웠다. 입에는 젖꼭지를 물고 고사리만 한 손으로는 통통 불은 젖통을 만지작거리다가 젖통과 젖통 새에 머리를 폭 파묻고 색색 코를 골던 그 시절처럼 나는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에 팔 년간 천대만 받아오던 몸을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잠이 깨니 찬바람이 휘 - 돈다. 나는 이불자락으로 어깨통을 폭 싸고 다리를 마음껏 쭉 뻗어보았다. 금시에 키가 부쩍 늘어나는 것 같다. 생각하면 오랜 동안 나는 이불 한번 변변히 덮어보지 못하고 새우잠을 자 왔다. 이렇다고 내세울 만한 일은 한 것이 없으면서도 내로라 뽐내고 살아갈 계제도 못 되었다. 감시의 눈이 걷힐 때면 밥값에 질리어지기를 못 펴고 잠을 잤다. 그들 감시하는 눈도 밥값을 조르는 소리도… 아무것도 없다. 너는 오늘 밤만은 완전한 해방과 완전한 잠잘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그 인식을 굳게 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팔다리를 쭉 뻗었다. 우두둑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관절마다 짜르르 쑤신다.
램프 심지를 돋우고 담배에 불을 당기었다. 어머니가 사다 주신 담배라 그런가 곧 단맛이 나는 것 같다. 무서울 만큼 고요한 밤이다.
부엉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 사이 그 사이에 멀리서 노랫소리가 역시 토막토막 들려온다. '계수나무'니 '옥토끼'니 하는 소리가 토막 나서 들려오는 것을 본다면 그 새의 노랫소리는 바람이 삼키는 것 같았다.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
제법 노랫소리가 가까워온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듣다 말고 나는 불현듯 시간이 궁금해져서 시계를 꺼내 보았다. 열두 시 반이 훨씬 지났다. 농촌의 열두 시 반이라면 인적이 그칠 때다. 나는 그제서야 이런 삼경에 누가 저러고 다닐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째서 이때껏 그런 생각을 안 해봤던가 하고 홀로 웃었다.
나는 담배꽁초를 왕골자리 밑에 비비고 아까보다도 정성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부엉이 소리는 밀려가는 듯이 점점 졸아가고 노랫소리만이 가까워온다. 노래는 한결같이 한 가지다. 천년만년 소리가 들리고 나면 들어보지 못하던 가사가 몇 구절 뒤를 잇다가 또다시 '달아달아 밝은 달아'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발음까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노랫소리는 다가왔다. 공연히 '윙윙'하고 심술을 부리는 바람도 벌써 가사 전부를 빼앗아가지는 못하게 되었다. 뒤 봇둑을 타고 내려오는지 가빠하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그 노랫소리를 가까이 듣고서 나는 적지않이 놀랐다. 이렇게 밤늦게 '달아달아'를 찾고 다닐 위인이라면 정신병자가 아니면 아이들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사 미친 사람이란대도 아이들이 아니라면 멋적게 '달아달아'만을 되풀이할 리가 만무할 일이다. 하다못해 '노세노세 젊어 놀 - 아'를 어서 얻어들어도 들었을 게고, '이팔은 청춘에 -'쯤 귀동냥을 해도 옮길 줄 알 것이었다.
- 학교에는 발도 못 들여놓은 아이들도 '모시모시 가메요'쯤은 으레껏 부를 줄 아는 오늘날 세상이다.
-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른이래도 나이 삼십은 훨씬 넘었음직한 사람의 음성이다.
"취했나?"
하고 다시 그 노랫소리를 붙들어 따져보아도 취한 사람도 아닌 성싶었다. 음성이 한 가닥도 갈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발음만 해도 단 한마디를 얼버무려 넘기지 않는다.
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음도 울적하고 하여 심심파적으로 부르는 노래로 해서도 너무 무미했다.
그럴진대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서 남의 아내가 되어가는 그날까지 대문 밖을 나가보지 못하는 규중처녀들도 오히려 부르지 않는 이 곰팡내 나는 노래만을 그렇게 정성으로 부를 리가 만무했다.
아니 그보다도 방안의 물그릇이 쩍쩍 갈라지는 매서운 추위다. 아까 시작하던 요량한다면 지금쯤은 눈도 두세 치는 쌓였을 것이었다.
'찬 밤 - 눈 내리는 밤에 '달아달아'를 부르고 다니는 사나이…'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에게는 로맨틱하게 들리겠지마는 부르는 사람은 아무 흥취도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보다도 내가 놀란 것은 그의 부르는 가사였다. 물론 그러려니 하고 들었던 탓이었던지, '초가삼간 집을 짓고'의 다음 가사가 '양친부모 모셔다가'로만 들었던 것이 가까이서 듣고 나니 그렇지 않았다. '양친부모'대신에 그는 '우리 님'이라고 고치어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의 '천년만년 살고지고'를 '천년만년 사쟀더니'하고는,
봉화뚝엔 불꺼지고
………………………
라는 전래민요에 없는 가사를 꾸미어 넣고 있다. 이렇게 노래를 마치고 나서는 그는 으레껏,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고 자배기 깨뜨리는 소리를 내어 공소하는 것이었다.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노던달아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우리 집 대문 근처서쯤 시작한 노래는 나의 방 들창을 조금 지난 곳에서,
천년만년 사쟀더니
봉화뚝엔 불꺼지고
.................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고 끝이 났다.
나는 웃음소리에 놀라 잽싸게 장독대로 뛰어나갔다. 송판으로 얽은 우물 둘레에 한 발을 올려놓고 넘겨다보았으나 벌써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도 눈은 퍽퍽 쏟아지고 있건마는 몇 발자국 안 가서 그는 또 노래를 시작한다.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노던달아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나는 나의 오른발이 어디 놓여 있다는 것도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목줄기에 눈이 쌓이도록 - 아니 그 눈이 녹아서 등받이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노랫소리가 골목을 빠져서 큰 거리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물 둘레에 올려놓은 발이 되똑하는 바람에 나는 성큼 뛰어내렸다.
노랫소리도 멀리 사라졌건마는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머니라도 깨었으면 물어보고도 싶었지마는 아무리 내게 달게 구시는 어머니기로서니 그것만을 묻자고 곤히 주무시는데 깨울 수도 없었다.
이불을 술항아리처럼 싸고 앉았기도 하다가 번듯이 누워 반자 구멍을 헤어보기도 하였다. 불을 꺼도 보았다.
그래도 어쩐지 '달아달아'소리가 귀에 울려 솔깃이 잠귀가 어두워지다가도 반짝 눈이 뜨였다. 나는 기지개를 큼직하게 한번 켜고 아랫목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번에는 부엉이가 추운 듯이 끙끙거린다.
[2]
고향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중앙 지대나 다른 지방에 가서는 이렇다는 사회적 지위도 갖고 아무개 하면 세상이 뜨르르 울리는 사람들도 고향에 돌아오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마는 법이다. 소위 출세한 사람이 제 고향과 인연을 끊는 것은 다른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마는 이러한 심리가 많이 작용하는 법이다. 그러나 나의 평범은 그것도 아니다. 십 년을 나가돌아야 옷 한 벌 반반한 것 못 얻어걸린 위인, 서울 시골로 멀리 동경까지 돌아다니었다면서 그 '시글시글'한 여학생 하나도 못 꿰차고 들어왔다는 등, 우물 둥천에 모이면 손을 혹혹 불어가며 나의 흉을 잡아낸다는 소문이 한 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나의 움쑥한 골방을 찾아들었다. 뭐라고 하든 탄할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의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기는 하였다. 손아래 누이를 모두 출가시키도록 '편발'대로 있는 나를 가리키어 '집안 망신시킨 자식'이라고 부른다. '굴뚝에서 불 때는 집'이라고도 하였다.
"그래 대관절 너는 무슨 생화를 하느냐?"
어머니는 가끔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지셨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아니 그보다도 나 자신 무엇을 하고 사는 인간인지 모르고 있는 터다. 한동안 사회의식에 눈을 뜰 만하다가 두어 달 동안 - 겪고 나서는 자기도 모르게 거기서 발이 떴다. 되지도 못한 글줄이나 쓰는 것이 나의 생화라고 내세우기에는 너무도 나는 소영웅적 인간이었다.
"장가도 들어야 하잖니?"
이렇게도 퉁기어보다가 면 서사나 하나 얻어 해보라고도 권하는 것이었다.
군 서기라도 했으면 어머니 마음은 탐탁하련만 그것을 바라는 것은 허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권유에 나는 그저 코대답으로 며칠을 지냈다.
하루는 동무들이 찾아왔다. 네다섯이나 되는 사람이 모두 나이 어릴 때 동무였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기덕이며 단섭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서로 서먹서먹하게 생각해오던 종대도 찾아왔다.
납작 바위에서 콩청대를 해 먹다가 주인한테 들키어 쫓기던 이야기도 났다. 용명학교 다닐 때 교실 안에서 자는 참새를 잡아서 숯불(그때는 난로가 없었다)에 굽다가 '꼬맹이 홍 선생'한테 주먹뺨을 맞던 이야기도 났다.
동무들이 찾아온 것을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였다. 근 십 년 동안 자식 없는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집안에서 사내들 웃음소리가 떠돌아 북적북적하니까 그것이 퍽도 대견한 눈치였다.
떡국이 날라졌다. 따끈따끈하게 데운 약주술도.
"많이들 먹게."
어머니는 막내 사위나 온 때처럼 가끔 방문을 열어보았다.
"내가 모르지마는 이야기 들으니 자네 하는 노릇은 참 재미있겠데나그려."
"뭣이?"
"아, 여기서는 칠십 노인도 면서기 따위한테 반말지거리에 수틀리면 닷 냥짜릴세. 그런데 자네야 불평이 있으면 쓱쓱 써내면 되잖나."
"웬걸, 그렇지도 못하다네."
나는 이렇게만 대답하였다.
그때 한동안 잊었던 노랫소리가 또다시 내 방 들창 밑을 찾아왔다.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우리님네 모셔다가
………………………
"대관절 저게 누군가?"
노랫소리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어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이렇게 물었다. 묻는다 묻는다 하면서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다.
"아, 둘째 성녹이군! 우리 동네 귀동일세!"
기덕이가 입술로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둘째 성녹이라면 알까? 아니 알겠군!"
"성녹이락게?"
"왜, 있잖았나. 허우대가 크고 물부리만 물고 다니던 친구…"
"아, 옳지! 그래 성녹이가 지금두 여기 있나!"
"사람두, 성녹이 말에 그렇게 반색을 할 게 뭐람!"
종대는 손을 내밀었다. 담배를 달라는 것이다.
아랫방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지더니,
"망할 녀석이, 십 년 동안을 돌아다녀도 성녹이 소식이 젤 궁금했나보우."
하고 어머니가 맞쳐다 보고는 하지 못하던 불평을 갖다 문질렀다.
"성녹이 죽은 지가 여러 해지?"
단섭이가 종대를 치어다보았다.
"박정화가 성녹이 죽던 날 미쳤으니까 꼭 삼 년째군."
"성녹이가 죽었소?"
"죽었다네. 성녹이가 죽은 것을 꾹하니 내려다보고 있더니 박정화가 그대로 외마디 소리를 치고 미쳤지. 아까 '달아 달아'를 찾던 위인이 있잖은가? 그게 바로 박정활세."
"뭐야?"
나는 자리가 옮겨지도록 놀랐다.
성녹이가 죽었다는 것도 내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지마는 그보다도 내가 놀란 것은 박정화의 실진이었다.
성녹이란 것은 우리 동리의 이단자였다. 다른 곳 사람이 우리 동리에 들어와서 처음 성녹이를 만나면 슬슬 피해 다닐 만큼 그의 체구는 컸다. 그러고는 대개,
"아이구, 저게 사람이오?"
하고는 혀를 만다.
육척이 넘는 키에 이십사오 관은 무려 된다. 물레덩치만 한 머리통에다가 머리까지 고수머리라 푸스스하니 거리를 걸어 다니면 흡사 흑인종 같아 보였다. 성을 아는 사람도 없고 확실한 나이도 몰랐다. 그는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다.
성녹이는 벙어리였다. 대개의 벙어리는 안 되는 말이라도 해보려고 떠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마는 성녹이는 한 번도 그런 시험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좋다는 뜻, 싫다는 것을 고개로 표시할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 몹시 분할 때도 입을 딱 봉하는 것을 본다면 그렇지는 않은 성도 싶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벙어린지 아닌지는 몰론 나도 모른다.
성녹이는 삼십 평생에 한 번도 양을 채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높은 밥 한 그릇은 넉가래만 한 술로 몇 번만 꾹꾹 누르면 그만이었다. 먹고 나서 시쁘면 냉수를 벌떡벌떡 들이키었다. 먹는 만큼 볏섬쯤은 어깨에 메고 다닌다. 그는 동리 소처럼 밥 한 그릇만 주면 아무 집 일이나 해가 지도록 했다. 돈을 주어도 그는 받지 않았고 혹 돈이 생기면 그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만다.
성녹이가 소와 다르다는 것은 그가 발이 둘이라는 것뿐일 것이었다. 그는 소와 같이 언제든지 단벌옷이었다.
어떤 추운 겨울 갑자기 성녹이가 동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일을 시킬 욕심이 없으면 찾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성녹인지라 아무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지 며칠인가 지나서 메추라기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이 물방앗간에서 성녹이를 발견하였다. 다 떨어진 거적을 쓰고 그는 빳빳해 있었다.
어느 해나 겨울 한철은 성녹에게는 수난기였다. 농번기가 아니면 아무도 그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품값도 주지 않는 성녹이지마는 일을 안 시키면 밥도 주지 않았다. 일 년 내 단벌옷으로 버티는 그를 재워주는 집은 다 쓰러진 물방앗간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비참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 억울한 죽음을 조상해주는 사람은 일을 시켜 먹던 몇 집뿐이다. 반드럽기로 유명한 도 서방, 인색한 송 참봉, 그 외 몇이 그의 죽음을 아끼었다.
그러나 그것도 성녹이의 불우한 일생을 조상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돈 안 주고 일 시킬 '소'를 잃어버렸다는 의식에서였다.
성녹의 강시를 보고 그들은 외면을 했다. 장사는 고사하고 송장 치울 사람도 없었다.
"젤 많이 부려먹은 사람이 모여서 치우자."
하는 공론이 어디선지 일어났다.
"누가 그런 어림없는 소리를 해! 이 동리서 성녹이 안 부려 먹은 사람이 있더란 말인가?"
도 서방이 펄펄 뛰었다.
"나도 일을 시켜먹었지만도 금옥 같은 밥 해먹이고 시켰어! 왜 이래!"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둘 꽁무니를 뺐다. 이것을 옆에서 꾹 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정화는 그들의 앞을 딱 막아섰다.
"안 되오! 성녹이 장사는 이 동리 사람이 지내줘야 하오!"
그러나 하나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 힐끗 얼굴을 치어다보고는 슬금슬금 돌아섰다.
박정화는 성봉수를 중심으로 한 신화청년회원이다.
하나둘 흩어졌다. 벌써 시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꾹하니 흩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섰더니 튀는 총알처럼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이 죽일 놈들아! 집도 없고 말도 못 하는 병신을 실컷 부려 먹고 얼어 죽이느냐! 그러고도 장사도 안 지내줘! 이 죽일 놈들아!"
그는 팔을 걷고 이를 북북 갈았다. 그러고는 외마디소리를 '억!'치면서 도 서방한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에 변화를 가져왔다. 순식간에 거기 모인 칠팔 명을 때려눕혔다.
- 그들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머리를 가진 단섭이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맛있던 떡국 맛도 달아났다.
나는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잠이 들 만하면 박정화의 노랫소리는 나의 귓전에 울려오는 것이었다.
"우리 님네 모셔다가 천년만년 사쟀더니…"
하는 구절에 가면 뭣인지 가슴을 쿡 찌르는 것 같았다.
[3]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박정화에 관한 지식을 줍기에 충실하였다. 나는 박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박정화를 잘 아시오?"
하고 물었다.
나는 도처에서 그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그가 밟아온 길을 보았다. 그 길에서 그의 업적을 주웠다. 사재의 거의 전부를 털었다는 야학에서 이미 폐인처럼 된 그를 추억하며 눈물을 짓기도 하였다.
××지를 잃은 청년회 간부들의 뒤를 이어서 조직된 소년회에도 그의 커다란 발자국은 뚜렷뚜렷 남아 있었다.
"박 선생이 성녹이 죽은 것을 보고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나 그렇지 않지요. 바로 그햅니다. 박축골 조 참봉이 한 섬 받던 도조를 모두 한 섬 엿 말로 치켜매서 법석이 났었지요. 그때도 앞잡이를 나선 것은 박 선생이었어요. 그것이 화가 돼서 박 선생은 약 이 개월간…"
소년회를 찾아갔을 제 야학 교재를 꾸미고 있던 박 소년이 이렇게 내게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때 다녀 나오신 후로는 통 교수도 못하셨어요."
그는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나 자신 겪어본 일이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을 듣고 나니 그도 그럴듯하였다.
아니 성녹이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나 역시 그를 미치게 한 것은 그 소년의 이야기대로였으리라고 나도 생각하였다.
"독서도 그때부터 딱 그쳤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방안을 혼자 거니시다가 갑자기 '에익! 죽일 놈들'하고 누군지 모르게 분해하셨어요. 아마 제 생각건대는 같이 일을 하던 동순 씨가 타락하고 이찬호 씨는 ××되고 성봉수 씨는 도에 취직을 하고 하니까 그것이 박 선생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해요…"
이러한 소식은 나도 언젠가 고향 친구가 서울 올라왔을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의 변절이란 이렇게 쉬운가 하였다. 그것이 마침 내가 독거 생활을 시작한 직후의 일이다. 몹시 가슴에 사무치었다. 그가 나더러 들어보라고 일부러 꾸미어 하는 이야기같이도 내게는 들리었었다.
밤이 되면 나는 은근히 노랫소리를 기다렸다. 그것은 담너머 휘파람 소리를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과도 같았다. 혹시 초저녁잠이 깜박 들었을 때는 깨는 고짜로,
"어머니, 박정화 지나갔수?"
하고 묻는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했다.
그날도 종일 돌아다닌 탓인지 누웠다가 그대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깨어 나는 기계적으로 물었다.
"어머니, 박정화 지나갔수?"
"안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상해서 꼬치꼬치 캐더니 인제는 어머니도 아무 말 없이 이렇게 대답하게까지 되었다. 이때나 저때나 기다려도 '달아달아'소리는 나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노랫소리가 나의 창 밑을 지나가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이튿날도 그는 나의 창 밑을 찾지 않았다. 낮에도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종대를 만나서 물어보았다.
"글쎄, 요샌 며칠 안 보이더군. 아마 읍에 들어간 게지."
"읍에도 가끔 들어가오?"
나는 또다시 물어보았다.
"가구말구. 원 근거지는 읍인데 아내도 읍에다 두고 말하자면 여기는 출장을 나오는 셈이지, 히…"
종대는 그를 비웃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박정화를 비웃는 그 태도가 싫었다. 그래서 더 묻지도 않았다.
"그래, 어쩐지 요새 사오 일 동안은 통 앓는 소리를 들을 수 없더군!"
"사오 일까지 안 가지, 인제 사흘짼데."
하고 내가 돌아서면서 정정하였더니 그는,
"아따, 손꼽아 헤었던 모양일세나그려."
하더니 '너도 그놈과 사촌격은 되는 놈이구나'하는 듯이 웃기는 하면서 어딘지 깔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단섭이네 집 앞 돼지우리 앞에서 그와 헤어졌다.
저녁상을 받고 났을 제 박 소년이 찾아왔다.
나흘째 되던 날 박 소년과 나는 자전차로 읍에 들어갔다.
일찍이 서신만으로 알아 온 지 군은 마침 그날이 장날이라 수금을 나가고 없어서 혼자 시내 구경을 마치고 늦게야 돌아와서 만났다.
지 군은 여러 가지로 나를 향응(饗應)하였다. 저녁 끝에 기를 쓰고 술을 권한다. 나는 굳이 사양하였다. 네댓 잔이나 마시면 못 마실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 밤 여러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튿날 밤 나의 동리인 R시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났을 제 지 군이 중심이 되어서 발간되는 월간잡지 ‘아성(我聲)’의 동인인 정 군이 박정화 이야기를 꺼내었다.
"참, 여기 들어왔다던데요."
하고 나는 일동을 쳐다보았다.
"오늘 밤엔 아마 못 나올걸요? 아까 이찬호한테 몽니를 펴고 덤비었으니까."
"이찬호? 참 이찬호가 여기 있다지! 어때요? 좀 다릅니까?"
"아주 달치요!"
하고 지 군은 대답하였다.
그 다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의 다르다는 말이라는 것은 그의 말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 이찬호와 박정화가 서로 만난다면 두 사람의 심경이 어떠할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울해지고 말았다.
"박정화는 읍에 들어오면 반드시 지국에 들릅니다. 신문을 꼭 주어야 가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박의 이야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들의 말을 빌린다면 박정화는 모름지기 현대의 영웅 '거리의 영웅'이었다. 그는 가장 행복된 사람이다 - 이렇게 지 군은 그를 평하였다.
어디 가거나 그렇지마는 그에게는 일정한 숙소가 없었다. G주교 밑이 그의 본거였다. 그렇잖으면 용산리 저쪽 물방앗간이었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신문이다. 그는 날마다 신문을 들고는 다리 밑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박 군을 누구보다도 귀히 여기는 거리의 패자(覇者)들 걸인군(乞人群)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G주 읍에서 누구보다도 늦게 자고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난다. 밤에도 늦도록 '달아달아'를 부르며 거리를 헤매이다 가끔 요리점에 나타나 야료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음식을 구걸한다든가 주는 것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객 중에서 아무나 하나를 불러내었다. 머리가 좀 다른 사람은 그럴 리도 없지마는 장사치들도 그를 괄세치는 않았다. 미친 사람을 탄한대야 소용이 없다는 데서 그런 것도 같았다.
"이 사람들!"
하고 그는 아무를 보거나 이렇게 불렀다.
"이 사람들아! 그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짓들을 한단 말인가? 역발산 할 만한 팔다리에 젊은 피를 가지고 계집이 따라주는 술잔만 쪽쪽 빨고 앉았다? 개탄 개탄이다…"
새벽 먼동이 틀 때면 그는 벌써 G주교 난간에 나타난다. 한 뼘은 되는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물고 섰다가 소바리가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쇠고삐를 잡는 것이다.
"아, 박 서방이오? 오늘두 좀 줘야지."
읍에 드나드는 소바리꾼은 박정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벌써 삼 년 동안 낯익은 터라 그들은 귀치 않아서도 나무면 한줌, 무면 한 개씩 던져주고 간다. 혹 소식을 모르고 잡아떼는 사람이면 늦도록 승강이를 받게 된다. 새벽같이 왔다가도 새벽 저자를 못 보는 수가 종종 있었다.
"이 사람! 그래, 내가 이것을 갖다가 우리 마누라하고 끓여먹는 줄 아나? 아닐세! 자 보게. 자네 집 식구는 끽해서 네다섯이지? 난 삼십여 명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다리 밑을 가리킨다. 사실 그 다리 밑은 이십여 명이나 되는 거지들의 본거지였다. 나머지 십여 명은 용산리 물방앗간에서 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튿날 아침에 잠이 깨는 길로 G주교 밑을 엿보았다. 박이 무사했는가가 궁금도 했던 것이다. 내가 간 것은 정화가 커다란 주전자에다 국 국물을 얻어가지고 들어간 것과 거의 동시였다. 장작잎나무 솔가리 시탄상의 전람회처럼 나무가 놓여 있다. 인절미니 밥덩이 같은 음식이 그릇에 채여 있었다.
내가 간 후에도 오륙 명이나 몰려왔다. 그들은 하나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정화는 넘치는 기쁨을 억제치 못하는 눈치였다. 싱글벙글하며 여럿이 모아온 음식을 커다란 함지박에다 쏟고 냄비에다가 국을 들이 붓고는 솔가지를 뚝뚝 꺾어 넣는다. 그러더니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함지박을 에워싸고 쭉 둘러앉는다.
그들은 하나도 자기만의 것이 없는 성싶었다. 자세히 보니 박정화는 왼쪽다리를 몹시 절었다. 양쪽 볼은 부은 것 같고 오른쪽 눈등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에 주정을 한 게군!"
전날 밤 신문지국에서 지 군이 이야기하던 소리를 깜빡 잊어버린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었다.
[4]
이튿날 나는 집으로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K씨에게서 온 전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는 여러 가지로 마치 어린애나 달래듯이 붙잡는 것을 역시 어린애 달래듯 해놓고 나는 밤차로 고향을 떠났다. 오랫동안 문의해 오던 취직건이 해결된 것이었다.
아무 애착이 없는 고향이지마는 언제 또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니 서글펐다. 더욱이 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기덕 군이 술을 몇 잔 권하는 대로 받아먹은 것이 올라서 더욱이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도 떠날 제는 기덕군더러 며느리한테 못 보고 간다고 이르라는 등 허튼소리까지 하였다.
차장이 탄 맨 끝엣칸에 나는 자리를 잡았다. 차 안은 벅차지 않을 만하다. 경편차이니만큼 양복 입은 사람도 별로 없고, 청주장을 대어 가는 사람들이 승객의 대부분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신기루를 그리듯 바라던 취직일이 해결되고 나니 인제는 자유롭던 지금까지의 생활이 되레 그리웠다. 먹는 것만은 해결되었다 해도 이제부터 작가로서의 자살행동인 직업 노동자가 되는구나 생각할제 네댓 잔 한 술까지 작용되어 도수장을 찾아가는 소의 마음처럼 그지없이 자기라는 인간이 가엾게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공상에 잠겨 있을 제 갑자기 나는 귀에 익은 노랫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노랫소리는 들을 때마다 이상한 충동을 가슴속에 일으켜주는 "달아달아 밝은 달아"였다! 나는 그 소리 나는 쪽을 찾지도 못하고 마음속에 부르짖었다.
'박정화다!'
과연 그것은 박정화였다.
검정 두루마기에 고동색 중절모자를 쓴 그는 뒷짐을 지고 차창에 기대어 앉아서 시름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름 대신에 노끈이 매어졌고 얼굴에는 요전보다도 심히 상처가 여러 군데 있었다. 목줄기의 상처는 유독히 심하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한가로운 여행의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옆에 찬호가 조일인지 부도(敷島)인지 제물물부리 달린 담배를 뻑뻑 빨고 있었다.
찬호는 노래를 못 부르게 주장질을 하는 모양이었으나 박정화는 태연한 듯이 '달아달아'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이때까지 들어오던 그 노랫소리보다도 더 애조를 띤 곡조같이 들려졌다. 뼈끝을 쏙쏙 쑤시는 것 같은 마지막 가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였다. 그렇건마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은 폭포처럼 우렁찬 웃음소리는 역시 변하지 않았다.
아니 되레 박정화 - 그만이 웃을 수 있는 웃음의 특징을 보다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
아아 그는 어찌나 될 것인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터널을 지나가는지 바퀴소리가 유달리 울린다.
그 후 얼마 동안 나는 정화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바로 며칠전 훈군이 고향에 갔다 왔다기에 "정화는?" 하고 물으니까 훈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뻐언히 쳐다보고 앉았더니 시름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던 날 정화도 마침 나왔다기에 만나보았지."
"그래, '달아달아'는?"
"잊었다고 그러데."
"잊었다고?"
"응 -"
훈이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한 다리 건너 멀리 서울까지 온 그 심정이건마는 훈이에게서 정화 - 바로 그 사람의 표정을 읽은 듯 가슴이 뻐근하였다.
"잊은 게 아니겠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었다.
<중앙 13·14호, 1934년 11월·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