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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지

가락지

이무영

 

두루마기에 도리우찌’(鳥打)라고 불리어지던 캡을 쓰고 돈이라야 30원도 못 되는 것을 가지고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었고 보니 정말 무모한 짓이다.

가면 어떻게든지 되려니 해서였지만 이 어떻게든지라는 것부터가 실로 비과학적인 이야기다. 그래도 나는 조금도 불안이 없이, 마치 적진을 쳐들어가는 장군처럼 대담했었다. 30전씩이나 하는 벤또라는 것도 용감하니 턱턱 사먹었고, 캐러멜도 5전짜리가 아니라 10전에 스무 개짜리를 샀었다. 30원이라는 큰돈을 처음 쥐어보는 내게는 5전짜리 호떡이 6천개나 되는지라, 일종의 천문학적 숫자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30여 년 전 내가 열일곱 살 때 이야기다.

왕년의 곰보피처가 중학 동창이었던지라, 그 김 군 집에서 며칠을 놀고서 부산행 퐁퐁선을 타기는 웅천(熊川)에서다. 이른 새벽이었다.

"늬 나마까신 사묵지 마래이! 단것 묵으믄 이거라!“

하고 김 군은 토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네버 마인!“

끊어진 생쥐 꼬리만한 영어를 뽐내고 쓰던 시절이나 사실 나는 겁나는 것이 없던 때였다.

"잘 있재미!"

나는 며칠 동안에 들어 배운 경상도 사투리로 작별을 하고 손을 흔들었었다. 김 군은 웃고 있었다.

정원은 50명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손님이 붐비지 않는 때였다. 20명 남짓했었다. 나는 수학여행이나 가는 기분이었다.

바다가 처음이었다. 바다라는 것이 이렇게 넓은 줄도 몰랐었다. 집채, 아니 산더미 같은 물결이 뱃전을 후려쳐도 나는 즐거웠다. 갈매기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다행히 나는 뱃멀미는 않는 체질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정말 즐거웠다. 위대한 소설가가 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라 나는 또 한 가지 즐거울 수 있는 거리가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 쌍 꺼풀진 정말 귀엽게 생긴 소녀와 동무가 된 것이었다.

소녀는 부산 고모 댁에를 가노라 했었다.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일지 몰랐지만, 피기 시작한 꽃처럼 소담스러웠다. 귀밑머리를 귓바퀴 위로 쪼옥 처뜨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은 쌍가락지를 낀 손이 담신 쥐어보고 싶게 이뻤다.

그러나 나의 즐거움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파도가 세었다. 바다는 어미 빼앗긴 어린것처럼 뒤잡이를 했다.

"방귀가 잦으믄 똥 싸지얘."

옆 노인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노인의 말대로 되고 말았다. 배에 물이 든다는 것이다. 아니 벌써 선창에까지 새어들고 있었다.

법석이 일어났다. 여자들은 깨옥깨옥 울어댔다. 어른들도 눈이 뒤집혔다.

"내사 죽으믄 우얄꼬 우얄꼬!“

소녀는 나를 붙들고 이렇게 울어댔다.

소녀만이 아니라 나도 그랬다. 나도 죽기는 싫었다. 우리는 서로 붙들고 이리저리 물을 피했다.

그러나 벌써 절망이었다. 물결은 더 사나워졌고, 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창 안의 물은 이미 정강이에 찼었다.

완전한 절망 상태였다. 죽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에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은반지를 빼서는 나를 주고 가지라는 것이다. 경황이 없었지만 나는 기뻤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던 찰나가 최후였다. 배는 가라앉고 말았다.

누군지 나를 흔든다. 꿈속 같았다. 그러나 꿈이 아니다. 26명 중에 열두 명이 구조 되었는데, 나도 그중에 끼였던 것이다.

몽롱하던 정신이 빙 돌아왔다. 소녀를 본 것이었다. 나를 깨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소녀가 아니던가.

"!"

감격에 넘쳐서 나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소녀는 살며시 빼며 내게다 이렇게 따지던 것이다.

"아까 준 가락지 우얫노? 인 도오가! 날래 도오가, 내사 빨랑 갈끼라. 어서 도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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