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서정인
천수건은 강을 끼고 걸었다.
풍경은 그가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면서 감탄할 때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며, 모래톱이며, 키 큰 소나무숲이며,
자갈들과 바위들은 아름답지도 신비스럽지도 않았고,
낭만적이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다리를 아프게 하는 현실일 뿐이었다.
달리는 차들이, 대형차들 못지않게 소형차들이, 그것을 악화시켰다.
매연이나 단순한 호흡 불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걸었다.
그 길은 자동차 전용 도로가 아닌 데도,
인도는 갓길에 두어 뼘 폭으로 흰 금을 그어서 차도와 구별되었다.
원근에 그처럼 그렇게 걷는 사람이 없었다.
보행자들이 없어서 인도가 퇴화했거나,
안전하게 걸을 길이 없어서 걷는 사람들이 멸종했다.
길 왼편은 철길이었고, 그 왼편은 산자락이었다.
길 오른쪽은 강이었는데, 물줄기는 흐름에 따라 길 아래까지 파고들기도 하고,
송림을 사이에 두고 저만치 떨어지기도 했다.
강 쪽으로 은어회와 매운탕을 파는 음식점들이 드문드문 물을 등지고 길로 나 있었다.
강남집? 강변집? 강나루집? 소나무집 같은 지리적 특성을 따지는 옥호들도 있었고,
순천집? 압록집? 광주집? 전주집 같은 지연, 지명을 딴 간판들도 있었다.
그는 칠안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장사 안 허요.”
그가 인도에 접해 있는 마당을 들어서서 부엌 쪽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건물 끝 쪽에서 여자가 하나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거기서 나오시오? 뒤 봤소?”
가게에서 손님을 안 받을 때는 다 그럴 만한 형편이 있겠지만,
이쪽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달갑지 않았다.
“왜 남의 집 칙간은 들여다보고 야단이요?”
“예? 주방 아니요?”
“정제는 저쪽에 있소.”
“거기가 화장실 아니오? 지금 아줌마가 거기서 안 나왔소?”
“왜 남의 집 변소는 아무 데나 갖다붙이오? 오늘 음식 안 돼요.”
“주인 여자가 병원에 갔소?”
“어떻게 아시오?”
“저, 의료원 아니요, 옛날 도립병원?”
“음마이.”
여자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혀 허튼 수작만은 아닌 성싶은 모양이었다.
“올라오시오.”
“영업 안 허는 집에 들어가면 뭘 헌다요? 작은집을 집 복판에 들여놨으니 병이 안 나겄소? 칙간허고 처가는 멀수록 좋소.”
“아, 요즘 집치고 집 안에 통새 없는 집이 어디 있다요? 딴 집에 가 보시오. 방방이 욕간이 있소. 저 윗집, 저 아랫집, 다 그렇소.”
“은어회 먹으러 왔지, 목간허러 왔소?”
“은어가 있간디 없간디. 돈 벌자니 헐 수 있소, 손님들이 좋아허는디? 어디는 닭도리탕 없어서 여기까지 오요? 경치 보시오. 안 좋소? 이런 데 오면 사람들 마음이 넓어지는 모양입디다, 남자고 여자고. 이집 주인허고 어떻게 되시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요, 주객간이지.”
“참말로 오골계 먹을라고 왔소?”
“누구허고 여기서 만나기로 약조를 했소.”
“들어가 기시오. 내, 얼른 은어 몇 마리 남은 거 썰어다 드릴게.”
“썩은 거 아니요?”
“당신은 신수가 훤헌디, 그놈의 주둥이가 방정이요. 저 길가에서 기다리든지, 모래밭에서 쉬든지 알아서 허시오.”
“내 들어가리다. 이 방이 구린내가 덜 나겄다냐?”
그는 토방에 구두를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크고 어두웠다.
한쪽 구석에 낡은 검은색 축음기 한 조가 있었다.
확성기가 유난히 컸다.
그는 사방을 휘둘러보고 한복판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았다.
방석이 전축 옆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원래 천의 색깔은 다 바래고 수많은 엉덩이들에서 묻어난 여러 가지 옷들의 빛깔들이 섞여서
거의 검은색이었다.
가부좌에는 맨바닥이 제격이었다.
벽에 반 벗은 젊은 여자의 온몸 사진과 하늘과 바다와 배의 돛에 달력을 곁들인
맥주 회사의 편 신문지 크기의 원색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방은 창고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멀고 가까운 지난 장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들은 순서도 연결도 없었다.
그가 그것들을 무시하고, 신경을 쓰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것들은 개수대에 물 빠지듯이 맴돌면서 점점 더 작아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어디론가 휙 하고 달아나버렸다.
하도 빨리 별똥처럼 날아가서 위로 갔는지 아래로 갔는지
양 옆들 중 어느 하나나 다른 하나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를 똘똘 뭉쳐서 먼 하늘 밖으로 던져버리자 현재가 가벼워졌다.
그것은 비워져서 마침내 없어졌다.
과거들이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검고 붉고 노란 현휘가 되어 망막 뒤로 꺼졌다.
존재가 몸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벅다리에서 느낌이 나가고, 조금 더 있으면 무게가 사라져서,
무거운 엉덩이가 공중으로 붕 떠오를 판이었다.
십 년, 칠 년. 산. 계곡. 숲. 호수. 들. 개천. 물. 자갈.
“에, 에?”
그가 눈을 떴다.
“염불허냐고요?”
여자가 쟁반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아, 내가 그새 잠이 들었나? 이 집이 초원회관이요?”
“어디요? 촌에요?”
“버드나무집이요?”
“무슨 집이요? 소나무집은 저 아래 잔솔밭에 있소.”
“민속촌 아니요?”
“낙안 읍성말이요?”
“자연의 집 아니요?”
“회나 드시요. 술은 안 하실랴오?”
“아, 술. 어제 내가, 오늘 새벽까지 마셨더니, 속이 좀 안 좋구랴.”
“과음허셨구려. 해장술 안 허실라요?”
“과음이라니. 떠드니라고 술은 별로 안 마셨소.”
“술 한잔허고 정신 채리시오. 술기운이 떨어져서 헛소리를 허는 갑소.”
여자가 웃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방을 나갔다.
“해장술이 속 깎는다.”
그가 여자의 등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술을 술로 푸냐, 물로 풀지? 속 쓰린 것이 술 먹는다고 가시냐? 또 취허게?”
그는 회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여자가 술 한 병을 작은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무슨 술?”
“마시는 술.”
“언제 달라고 했어?”
“아까.”
“시내 안 나가실라요?”
“기다리는 사람은?”
“여태 안 온 사람이 언제 오겄소?”
“얼마나 됐다고.”
“청도라고 혹시 아요?”
“정종 이름이요?”
“운암은?”
“아직 비몽사몽이요?”
“대아. 수만.”
“혼자 많이 떠드시오.”
여자가 일어섰다.
“왜?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떠들지.”
“독작허시오.”
“아니, 그럴 것 없소.”
그가 말했다.
“대작을 하리다.”
“혼자?”
“둘이.”
그때 한 젊은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니라.”
그가 말했다.
“아니, 니가 여기 웬일이냐?”
여자가 말했다.
“인사가 바꼈어. 누나가 어서 오라고 하고, 천형이 왜 오냐고 해야지.”
“아는 사람이냐?”
“아는 사람이냐?”
그들 둘이 그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 대신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저 사람?”
“저 사람?”
그들은 똑같이 반문하고,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아는 사람만 쏙 빼놓고, 모른 사람허고 놀았어.”
“놀다니,”
여자가 말했다.
“야가 시방 말이 어디에 닿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네. 니가 놀고 있다.”
“널 기다렸다. 막간에 말도 못 허냐?”
“막간에 무슨 대사.”
“아, 쉬는 시간에 담배 한 대 피웠단 말이다.”
“니 올 줄 모르고 문 닫아걸 뻔 봤다.”
“이 서여사가 제백사허고, 들어와서 널 기다리라고 허더라.”
“서여사는 또 뭣이다요?”
“서존만이 누나면 서여사 아니요?”
“차라리 서여자 그러시오. 저여자 그러든지.”
“난 줄 모르고 들어오라고 했으면, 나하고 상관이 없다만, 하여튼 고맙다, 누나야. 이쪽은 내 큰누나고, 저쪽은 어제 만난 천형, 아니 천씨 아저씨다.”
“그래, 알겄다. 니는 유유상종이라더니 니 겉은 사람허고 어울리는구나.”
“아니, 내가 어쨌게?” 천이 눈이 둥그레졌다.
“천아저씨가 무슨 실수했소?”
“니는 실수만 허고 사냐? 좋은 일도 더러 해라.”
“다 좋고 다 나쁜 사람이 어디 있다요? 사람이 점잖을 때도 있고 불량할 때도 있소. 나도 못될 때는 못되도 잘될 때는 사정없이 잘된단 말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난 또 나 욕인 줄 알고.”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나도 깜짝 놀랐네.”
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 니가 어찌 여기 올 생각이 났다냐?”
남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가 말했다.
“내가 났간디? 가자고 해서 왔지.”
“어찌 여기로 했소?”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내가 묻는 말이요. 여기가 왜 서여사 집이요?”
“누나 집은? 식모 살인디.”
“아, 집은 집 아니냐? 사는 디가 집이지 집이 별것이냐? 어찌 여기가 하필 서여사 집이요?”
“미안허요, 여기 살아서.”
“뭘, 미안헐 것 까진 없고. 저 아래, 남쪽으로 말이요.”
“남쪽이 아니라 동쪽.”
“아, 동쪽이 아니라 남쪽 말이요.”
“물이 동쪽으로 흐르요.”
“남해 바다로 가는 강이 어째 동쪽으로 흐르요?”
“저기 큰 다리 지나서부터는 북쪽으로 방향을 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 강이 백두산으로 갈란 간디?”
“어른들이 왜 싸우요? 심심하고 지겨운데, 강이라고 그 긴 길에 한쪽으로 흐르겄소? 산세 따라 들세 따라 굽이굽이 열두 굽이, 매암돌고 휘돌으고 감돌아서 가는 길을, 낮은 데로 터진 데로 불사주야 가다보면, 동서남북 아무 데고 닿는 데가 망망대해. 다툴 일이 무엇이요, 이야기나 계속허쇼.”
“무슨 말끝에 동쪽이 나왔냐? 아, 동쪽이면 어떻고 북쪽이면 어떻냐? 왜 남의 말허리를 잘라먹냐? 에이, 말할 기분 싹 가셨다. 그래, 맞어. 남쪽으로 저기.”
“동쪽으로.”
“나, 말 안 해.”
“누구 아플 사람 있냐?”
“동쪽은 동쪽인갑소.”
존만이가 또 중재에 나섰다.
“객지 사람이 산수를 놓고 그 바닥 사람을 이기겄소?”
“나도 안다.” 천이 말했다.
“저 해를 봐라. 이 집이 지금 남향으로 앉았다. 강이 남쪽으로 흐르면 집이 서향이지 어떻게 남향이 되겄냐? 강이 동서로 흘러야 집이 남향이다.”
“암서 왜 우기쇼?”
“뭣이여? 남해 바다가 한반도 동쪽에 있냐? 하동 포구 진상으로 빠지는 강이 어째 동으로 흘러? 큰 가닥을 봐야지, 큰 가닥을. 답답헌 친구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존만아, 내가 왜 외지인이냐? 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 강 옆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다. 그동안 쭉 나는 저 물이 남쪽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남해 바다에 갈 것 아니냐? 내가 오십 년 동안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온 것을 하루아침에, 아니, 하루 낮에 바꾸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맘대로 허슈. 강물이 당신 생각에 겁을 먹고 방향을 바꿨으면 좋겄고만.”
“그래, 남으로 흐른다고 헙시다. 거기에 뭣이 있소?”
“진즉 그럴 일이지. 동남이 문제가 아니요. 내 맘속에서 저 강은 남쪽으로 흐르고 있소. 왜냐면 그래야 허기 때문이요. 당위허고 현실이 부딪치면, 당연히 당위를 취해야지요.”
“문자 쓰고 있네.”
“누나, 겁내지 마. 아무것도 아니여. 마땅히 그래야 허는 것허고 실지 형편허고 서로 다르면, 마땅한 것을 옳다고 허라는 말이여.”
“나도 안다. 내가 밥만 푸는 줄 아냐? 내 눈에도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이고, 내 머리에도 남해 바다가 둥둥 떠 있고, 해를 안 봐도 동서남북, 천지현황이 훤허다.”
“나는 지금 저 강이 아니라 내 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강이 중허겄냐, 맘이 중허겄냐? 강물은 지 흐르고 싶은 대로 흘러라고 해라. 동쪽으로 흐르면 어떻고 북쪽으로 흐르면 어떻냐? 내 맘속에서 저 물은 남으로 가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말이다. 저것이 동으로 가거나 북으로 갔으면, 너한테 여기로 오라고 하지 않았다. 남으로 흐르는 강물의 오른쪽 물가에 한 학교가 있었다. 동으로 흐르는 물가의 오른쪽에는 한 학교가 없다. 아니,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다. 동으로 가는 물 왼쪽도 마찬가지다. 북으로 가는 물도.”
“그만 해둬.” 여자가 말했다.
“더 하면 동쪽이 또 나오요.”
“나오라고 해. 해 빠질 때까지 어디 한번 해보자. 나는 해가 짧겄다. 그 학교에.”
“누나, 먹다 남은 식은 밥이라도 가져와야겄어.”
“그래야 헐랑갑다. 물은 골짜기를 흐르고, 골짜기는 봉우리 사이를 달린다.”
“무슨 소리?” 동생이 물었다.
“산골에 해가 짧다는 소리다. 시는 또 언제 했냐?”
천이 말했다.
“그 학교 철문을 쇠사슬로 묶고 녹슨 자물통을 채웠더라.”
“처음부터 슬었겄소, 비바람에 시달리다 보니 그리 됐지? 느그들만 시 쓰냐? 나는 쓰면 안 되냐?”
여자가 방을 나갔다.
“느그들이라니?”
남자가 말했다.
“느그 형제는 말 놓는데 소질이 있구나. 집안 내력이냐?”
“집안 들먹이지 마쇼. 나 안 건드릴라면.”
“너 화 다 안 냈냐? 더 낼 것 남았냐? 학교가 폐쇄됐더라.”
“누나는 당신이나 나 같은 유식헌 사람들이 유식헌 소리를 하면 닭살이 돋소. 누나는 학교에 못 갔소.”
“학생들이 없어서 문을 닫았다더라. 공원을 한다더라. 이 강이 다 자연인디 거기다 또 조경을 하냐?”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공부가 사람을 별로 바꾸지 못헌다고 생각허요.”
“시민 휴양소라고 써붙여놨더라. 폐교는 수련원이나 휴게소 말고는 할 것이 없냐? 여관은 어떠냐, 자동차 여관 말이다.”
“공부라면 지나치고, 학교 말이요. 교실이 어떻게 사람을 만들겄소? 건물이야 벽돌만 있으면 얼마든지 올라가요. 뭐든지 안 가져보고 안 가본 것은 대단한 것으로 보이요. 안 가지고 안 본 것이 해가 아니라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요. 사람이 아무리 영리해도 병신 짓 한 가지씩은 꼭 움켜쥐고 있거든.”
“운동장은 주차장, 1층 방은 방 앞에, 2층 방은 그 뒤에. 안 좋냐? 제 방 앞에 차를 대는 여관을 자동차 여관이라고 헌다. 너무 기냐? 자관? 차관?”
“모화관이 좋겄다. 우리 누나한테서 사대 사상을 없애는 것이 참 어렵소. 당신처럼 뚜렷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치기도 쉽고 폐해도 적소. 없는 것을 없애자니 이거 힘들어서 못 해먹겠소.”
“내버려둬라. 없으면 됐다. 없는 걸 자꾸 없애라 없애라 허면 생긴다. 없앨라고. 니가 병이다.”
“밥 먹자. 어사 상이다.”
여자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반찬이 셋, 밥이 셋이었다.
국은 없었다.
“찬밥이 아니네, 잔반이 분명한데?”
동생이 토끼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말했다.
“대궁이를 뎁혔다. 언제 새로 짓냐?”
“반은 그렇고, 음식점이라 찬이 많네.”
“느그들이 손님이냐? 아이고 미안허요, 싸잡아서. 오늘 영업 안 헌다. 다음에 돈 내고 묵으면 걸게 차려주마. 오늘은 우리가 끼니 먹는 대로 먹자.”
“밥값이야 내면 될 것 아니야, 몇 푼이나 된다고?”
“먹어. 밥값은 천천히 내고.”
남자가 은어회 접시를 상 위에 올렸다.
“몇 푼이 문제가 아니다. 주인이 문 열지 말라고 했다.”
“주인만 무섭냐? 손님은 안 무섭냐? 주인 욕심만 채리고 어떻게 접객업 허냐? 어떤 종업원이 화가 나서 주인 망하라고 고기를 손님들헌테 몽씬 줬더니,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벌떼겉이 몰려들었단다. 손님 많으면 돈 버는 것 아니냐?”
“주인 없다고, 주인 몰래, 막 퍼먹냐? 그렇게 해서 주인이 부자가 된다고 해도 그리 못 허겄다.”
“가난해진다면 허겄냐?”
“웬수졌냐?”
“부자가 부자인 것하고 가난뱅이가 가난뱅이인 것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냐?”
“왜 없냐? 천석지기 하나 만들자면 열섬지기 백 명 허리가 휜다.”
“일장공성에 만골고라. 누나, 사대주의가 뭔지 아냐?”
“내가 어떻게 아냐? 주인 것 돌라 먹으면 사대주의가 아니냐?”
“아니, 그것 말고. 잘 사는 나라 좋아하기. 부자 좋아하기. 힘센 놈 좋아하기.”
“누가? 누가 좋아해?”
“조선 사람들이.”
“언제?”
“언제라니, 늘. 옛날에는 중국, 그다음은 일본, 요즘은 미국.”
“그래? 나는 나만 미련헌 줄 알았더니, 니도 보통을 넘는구나. 나는 니가 멍청헌 소리를 헐 때마다, 화도 나고 기쁘기도 허고 그런다.”
“무슨 소리야? 헷갈려. 한 가지만 해.”
“비싼 월사금 주고 배운 것이 원통해서 그러고, 없는 돈에 안 배운 것이 다행스러워서 그런다.”
“왜 누나는 나를 기회 있을 때마다 바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기회는 니가 만든다.”
“그것을 만드는 것은 나지만, 그것이 그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누나야. 누나 머릿속에는 멍텅구리 동생을 두었다는 생각이 가득 찬 모양이야. 그것이 위안이 되면 그렇게 해라. 나는 마 게얀타.”
“어리석은 말을 안 헐 궁리는 안 허고, 투미하다는 말은 듣기 싫은 갑다.”
“누나, 한 번 더 말할까? 학교 다니는 것은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야. 지식 너무 많아. 아무리 줘도 다 못 줘. 어디서 구멍이 나도 꼭 나. 학교는 잡학 왕을 만드는 데가 아니야. 거기는 불포화 지방산을 몰라도 창피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데야.”
“알았다, 알았어. 내가 어쩌다가 이중 결합 지방산 한 번 어디서 줏어들어가지고 이 봉패냐. 바보 상자가 유죄다.”
“그래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역시 누나가 아니라 내가 공부허기 잘했다 싶어.”
“언제는 못 했다 싶었냐?”
“그야 처음부터지. 내가 학교에 갔을 때 누나는 늙었어. 너무 늦었지. 누나가 학교에 가야 했을 때 나는 어렸어. 아무것도 몰랐지.”
“잘했다 싶은 건 또 왜 그냐?”
“내가 학교를 안 갔어봐라. 갔어도 이 모양인디.”
“학교가 효험이 있기는 있는갑다. 사람이 제 못난 것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디.”
“아니, 내가 진짜 엉터리냐? 안 그런데?”
“아이고, 저 벅구.”
“이번에는 어디서 터졌지?”
“흠, 이야기가 한참 빗나갔그만.”
밥만 먹고 있던 천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야기야 항상 헛나가지.”
“행유여력이면 즉이학문이라.”
여자가 말했다.
“사람 구실허고, 그러고 나서 남은 힘이 있으면 공부허라고 했다. 나, 공부 못 헌 것 후회 안 헌다. 사람 노릇허기가 어디 쉽냐?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중허지 학문이 중허냐? 학문은 사람 되는 데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갑다. 사람이 못 되면 학문이 소용이 없고, 사람이 되면 학문이 필요 없다. 나, 학문에 그렇게 원한 없고, 그것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옳은 말씀. 공자를 알면 증시가 보인다더라. 왜 중국에만 공자가 있을거나? 조선 사람은 없냐?”
“그야 공자가 하나니까 그렇지.”
“그 하나가 한국에 있으면 안 되냐?”
“왜 안 돼? 공자가 아니어서 탈이지.”
“그는 중국에만 있냐?”
“할 수 없지. 욕심이사 한국에도 하나 두고 싶지만, 가치를 감정으로 바꿀 수 있냐?”
“사대주의도 감정이지.”
“니, 아까부터 사대, 사대, 허는디, 니가 그걸 좋아허는갑다. 사대가 아니라, 애국이 감정이다.”
“그래. 애국은 좋은 감정, 사대는 나쁜 감정.”
“애국은 감정, 사대는 사리. 벼락에 숫벼락 암벼락이 있다더니, 감정에도 좋은 것 나쁜 것이 있냐?”
“벽력에 암수가 있다니, 무슨 소리요?”
남매의 이야기에 천이 끼어들었다.
“애국이 좋은 감정이냐? 나쁜 감정 아니냐? 좋을 때도 있고, 험, 나쁠 때도 있는 것 아니냐?”
“사대가 사리라니, 사리사욕 말이냐, 사리판단 말이냐?”
동생이 말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디, 맞은편 의자에 열 살쯤 돼 보이는 머리칼이 노랗고 눈알이 퍼런 서양 애하고 열예닐곱 돼 보이는 조선 처녀가 앉았다.”
누나가 말했다.
“요즘 같으면 염색인디. 눈깔은 말고.”
“맞은편 의자에서 그들을 찬찬히 보고 있던 한 아줌마가 무심결에 미국 놈 봐라, 하고 혼잣말을 했는디, 소리가 조금 컸다.”
“무식하기로는. 서양 사람이면 다 미국 놈인 줄 알어. 옛날 반정부 군중 집회에 학생들보다 먼저 현장에 나타나는 한 서양 사람을 학생들이 저 미국 놈이 그들보다 항상 빠르다고 투덜대자, 그 벽안이 그는 미국 사람 아니고 프랑스 사람이라고 정정을 했어. 요즘에는 여기서 사는 외국인들 여기 말 곧잘 하거든. 옛날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몇이 그곳 신부를 찾아가서, 학교서 배운 서툰 영어로 그들이 누군지 설명을 하자, 신부가 유창한 한국말로 어서 오라고 대답을 해서 그들이 놀랐더니, 그 성직자가 그는 그들이 태어나기 십 년 전에 아일랜드에서 한국에 왔다고 하더랴.”
“중국에 말이다,”
천이 또 끼여들었다.
“청조 땐데,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가 천하에 복음을 전헐라고 지금으로부터 꼭 삼백 년 전, 서른두 살에 북경에 왔다가, 거기서 근 오십 년을 살고 여든에 죽었다. 그 사람은 중국 사람보다 중국말을 더 잘했다. 그 나라 사람이라고 그 나라 말을 아무나 다 잘하냐? 그 신부는 악마가 복음이 중국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한문을 열심히 배워서 깨쳤다. 그는 황제들의 역사 교과서인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송나라 주희가 요약한 통감강목을, 청나라 성라오가 만주말로 옮긴 것을 불란서말로 옮겼다. 열세 권으로 된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십여 년 전에 완성되었지만, 그가 죽은 지 삼십 년 만에 출판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가 중국의 역사를 성경의 연대에 맞춰서 축소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에 예수를 퍼뜨리려고 갔다가 악마를 프랑스로 가져왔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더라.”
“고등학생은커녕 대학생 가지고도 안 되겠다.”
“비행기도 없고, 기차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여객선도 없는 때, 저승길만큼이나 길이 멀었겄소.”
“먼 길도 가면 가깝고, 가까운 길도 안 가면 머요.”
“이름이 뭣이요?”
“마선생이요.”
“마오 쩌 퉁?”
“그 사람은 모선생이지요.”
“마르코 폴로요?”
“그는 홀필열 때 사람이요.”
“성길사한 때 아니요?”
여자의 동생이 거들었다.
“아니, 성길의 손자 때. 사백 년 전. 지금부터 칠백 년 전. 이 마선생은 예수회 회원이 아니고 장사꾼 모험가였소. 그는 한 이십 년 원나라에 머물다가 인도, 페르시아를 거쳐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갔소.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해군으로 싸우다가 제노바에서 붙잡혀 일 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소. 그의 고향은 동해안 북분데, 갇힌 것은 서해안 북분 것을 보면, 어지간히 돌아다녔던 모양이요. 역마직성이 들렸소. 거기서 그는 감방 친구한테 받아쓰게 해서 그의 동방 견문을 책으로 썼소. 아마 그가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의 책 일백만은 결코 햇볕을 못 보았을 것이요.”
“글 쓰라고 여관에 처넣는다는 말은 들었어도 감옥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요.”
“사형수 보에티우스는 죽음 앞에서 철학의 위안을 썼고, 사마천은 옥중에서 사기를 썼고, 노자는 나라를 빠져나가려다가 관문지기에게 잡혀서 도덕경을 구술했소. 편하면 책 안 쓰요. 책 쓰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은 아마 감옥밖에 없소.”
“마테오 리치?”
여자가 말했다.
“그마 선생도 아직 너무 빠르요. 백 년 전이요. 그는 우리 마선생과 마찬가지로 예수회 회원이고, 중국에서 삼십 년을 포교 사업 하다가 북경에서 환갑도 못 보고 죽었소.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소.”
“불란서 사람은 배웠고, 이탈리아 사람은 가르쳤소? 국적도 목적도 달랐소?”
“그런 셈인데, 그렇다기보다는 어떤 사람은 고집을 했고, 어떤 사람은 마음을 열었고, 어떤 사람은 주머니를 채웠소.”
“또 어떤 사람들은,” 동생이 말했다, “대포알을 가져왔다.”
“니는 자다가 봉창 뚫냐, 문화 교류에 웬 뚱딴지 같은 포탄이냐? 장사도 문물 교류 아니냐? 피차 이문이 남아서 바꾸는 것 아니냐?”
“총알 주고받는 것도 교역이지. 이익도 많고. 치우쳐서 탈이지.”
“그것이 바꾸는 것이냐, 빼앗는 것이지? 폭리는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이고 뺏는 것이다.”
“사기로 안 되면 주먹으로 하고, 외교로 안 되면 군사로 한다. 선교가 수교를 가져오고, 수교가 침공을 끌고 온다. 선교사 꼬리가 길다. 대포로 끝난다.”
“곱게 와서 공자나 배워가면 즈이도 좋고 청나라도 좋고, 다 좋은데, 어디 양이가 그러냐?”
천이 오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오랑캐가 군함에 대포 싣고 와서 공자 배우겄냐?”
동생이 말했다.
“그래서 오랑캐 아니냐? 서융도 사서 삼경을 배우면 동이처럼 예의지국이 될 텐디, 꾀를 딴 데다 쓰는구나. 배운 것이 그것뿐이니 할 수 있냐?”
누이가 말했다.
“무슨 이?”
동생이 눈을 부릅떴다.
“큰 활 이. 동쪽 오랑캐 이. 죽일 이, 평평한 땅 이, 기쁠 이. 왜, 뭐 잘못됐냐?”
누이도 만만치 않았다.
어디서 작은 눈을 부라리냐?
“잘못됐냐? 사람이 세상 살아감서 어찌 실수가 없으리오. 과즉물탄개. 고치면 돼. 고치자면 잘못한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과오를 범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더 큰 병이다.”
“과오냐, 실수냐?”
천이 말했다.
“그게 그거 아니요?”
“과녁에 화살을 맞추지 못한 것은 잘못이냐, 실수냐?”
“활 쏘요? 국궁이요, 양궁이요? 양궁은 그게 어디 활이요, 기계지? 상산 조자룡이 백보 앞에서 버들잎을 맞춘 것은 조준경 없이 막대기를 휘어서 시위로 묶은 국궁 아니요? 서양도 마찬가지요. 왜 활 아닌 것을 활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소. 활이 활이 아닌데, 어찌 활이냐 활이냐. 고 불고 고재 고재. 그래, 못 맞췄소? 그야 실수지 일부러 그랬겠소? 노란 복판을 꿰뚫고 십 점을 따지 못한 것은 서운하고, 그 변두리 푸르고 붉은 띠를 못 맞춰서 팔 점 구 점도 못 딴 것은 괘씸하지만, 그게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랬겄소? 일부러 잘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없냐? 잘못은 다 실수냐?”
“실수는 다 잘못이지만, 잘못은 다 실수가 아니요.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헌 것은 실수요. 잘못인 줄 알고 잘못헌 것은 실수가 아니요.”
“활을 쏠 때는 맞출라고 쏜 것 아니냐? 못 맞춘 건 분명 실순데, 그게 잘못이냐?”
“잘못이 아니면 잘한 일이요?”
“내가 동이를 동이라고 한 것은 알고 헌 것이다. 실수가 아니다.”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한심하다고 헌다. 왜 동이냐? 그건 중국의 시각 아니냐?”
동생이 말했다.
“동이라는 말이 중국말 아니냐? 내가 중국말 쓴 것이 한심허다면 한심허다. 조선말 한본 해볼 거나?”
“해봐라. 들어보자.”
“사대, 사대 허지 마라. 그건 배운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이 헌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 안 한다. 그것을 알지도 못 헌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그런 것 없어도 아무 탈 없다는 말이다. 아줌마가 미국 놈 봐라, 했더니, 미국 애가, 나 미국 놈 아니요, 미국 사람이요, 하더라.”
“애들은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들은 진짜로 죽는다.”
“장난으로야 했겄냐. 무심코 뱉었다. 우리가 서양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속내는 안 그렇다. 양놈이라고 헌다. 옛날 조선조 때 조정에서는 중국을 종주로 떠받들었는지 몰라도 백성들은 중국 사람들을 되놈이나, 똥뙤 놈이라고 불렀다. 왜정 때 백성들은 조상한테서 물려받은 왜놈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칭호는 옛날 왜구 이래 면면히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즈그들은 경제 대국이라고 우쭐대고, 그리고 돈이 많으면 돈만 많냐, 문화도 대국이다, 자랑할 것도 많겄지만, 조선 사람들 그거 하나 안 부럽다. 몇몇 철딱서니 없는 젊은애들이 부화뇌동해서 머리고 옷이고 소리고 뽄 딸라고 발광하고, 몇몇 어른들이 그것에 영합해서 돈을 벌라고 그것을 부추기는갑다만, 철없고 눈먼 사람들만 바라보면 쓰겄냐?”
“무심코 허는 소리가 진짜 속마음이지. 무심결에 본심이 드러난다. 정신 차리고 정식으로 말하자면, 미국 분이나 미국 사람님, 허겄지.”
천이 말했다.
“방송국에서 송화기 들이대면 초등학생들이 전라도고 경상도고 표준말 나오는 거나 매 한가지. 방송 사진기나 송화기 앞에서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점잖아지냐? 국회의원들이 하품 벅벅험서 잡담하다가도, 뭣만 떴다 허면 목에 핏대 올린다더라. 어떤 사람은 점잖다 못해서 우리나라를 저희 나라라고 하더라. 지 겸손한 것은 좋은데, 도매급으로 넘어간 저희 나라 사람들은 어쩐다냐?”
“몇몇이 많아서 탈이지.”
동생이 말했다.
“노랑머리, 빨강머리가 대학로에만 있다면 누가 걱정이나 허겄냐? 돈에 눈이 안 뒤집힌 어른이 몇이나 되냐?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기는 허지만, 정신든 소리가 넋 나간 소리만 못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
“멀쩡헌 정신으로는 허고 싶은 말 다 못 헌다는 소리다. 니는 헐말 다 허고 사냐?”
“입 뒀다 어따 쓰냐? 나는 알다시피 미친놈 겉이 산다. 생각나는 대로 씹어 뱉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괌을 지른다.”
“속은 시원허겄다. 넘이사 어찌 됐든.”
“그러면 됐어. 내가 지금 넘 사정 보게 됐냐?”
“그래. 니 앞부터 닦고, 옆엣 사람들 형편 살펴라. 넘이라지만, 니 겉은 넘이다.”
“병원에 안 가시랴오? 시간이 안직 안 되겄소?”
천이 끼어들었다.
“지났소. 서두를 것 없소. 병이 시간 정해놓고 오고, 때가 되면 가요?”
“사람은 그요.”
“병은 무지막지해서 사람을 몰라보지만, 사람은 처량해서 병을 외면할 수 없소.”
그녀는 일어섰다.
“학교는 어떻게 됐소?”
“무슨 학교?”
“북쪽인가 남쪽에 있는 학교 말이요.”
“문을 닫았다요.”
“학생 수가 적어서 수지가 안 맞았는개비요.”
“아들은 즈그 동네 학교에 다닐 권리가 있소. 걸어서 다닐 권리.”
“부모들도 반대했지요.”
“서른 명이 많으면 열도 많고, 열이 많으면 다섯도 많소.”
“닫힌 학교는 왜 찾소?”
“찾은 학교가 닫혔지, 닫힌 학교를 찾았겠냐?”
동생이 말했다.
“폐교헌 줄 몰랐간디, 문 닫아건 지가 언젠디?”
“언제요?”
“여러 해 되었소. 언제 와봤소?”
“오래되었소. 한 십 년 됐냐? 더 됐냐? 잘 모르겄소.”
“요상허요. 선변 분교가 대문에 빗장 안 질렀더라도 볼일이 없겄소.”
“강산이 변헌다는디, 학교라고 그대로 있겄소?”
“사람 만나러 온 것 아니요?”
“경치 보러 왔으면 강으로 가지 왜 집으로 왔겄소?”
“빈집인 줄 모르고, 혹시나 해서 왔소?”
“아니요. 사람은 죽었소.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때도 와본 적이 없소.”
“없는 줄 알고 왔단 말이요, 경치 구경도 아니고?”
“오백 년 도읍지를 왜 필마로 찾아들었겄냐?”
젊은이가 늙은이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인걸이 간 데 없는 줄을 몰라서 왔겄냐? 냄새라도 맡을라고, 냄새가 없으면 흔적이라도 찾을라고, 흔적도 없으면 없는 줄이나 알라고 왔다.”
“냄새 맡았소? 흔적이 남았습디요? 나는 물허고 모래 보로 온 줄 알았소.”
“여기서 그것들 빼뿔면 뭣이 남겄소? 물 내 나고, 모래 내 납디다.
학교 안은 들어가도 못했소. 흙이 있고,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니, 학교 안 좋소?”
“그것들이 없으면 학교 나쁘요?”
“높은 집들, 달리는 차들, 검은 매연, 귀먹은 소음, 흐린 하늘이 있어도, 즐겁소.”
“당신이야 연고가 있어서 기나 고동이나 재밌겄지만 나는 뭐요? 왜 데리고 왔소?”
여자의 동생이 말했다. 여자가 상을 들고 나갔다.
“데리고 오다니, 강아지냐? 제 발로 걸어왔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했소? 당신은 여기에 사연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여기에 아무 원한이 없소.”
“없으면 됐다. 잡아떼지 마라. 수상허다. 여기가 여긴 줄 알았으면 여기로 약속 안 했다.”
“나도 안 왔소.”
“어딜 안 와?”
여자가 들어왔다. 옷이 달라졌다. 앞치마를 벗었다.
“왔으면 왔고, 안 왔으면 안 왔다. 왔는디 안 오고, 안 왔는디 오냐? 나, 병원에 가야겄다.”
“어디 아프냐?”
“영안실에 간다.”
“나도.”
천이 말했다.
“당신은 왜?”
“피부과에. 풀독.”
“매일 가요?”
“주사.”
천이 소매를 걷어 보였다.
“나도 갈까?”
“시체 보관소에 아는 사람 있냐?”
“있지. 사장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어제저녁에.”
“오늘 아침.”
여자가 말했다.
“간이 아니라 췌장.”
남자들이 방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따라나오면서 계속했다.
“왜 서양은 철갑선을 몰고 동양으로 왔다요?”
“그때 그 사람들 형편이 안 좋았소. 굶주린 거지 떼가 파리 거리를 메웠소.”
“칠안 들어간 차가 나올 때가 됐는가 모르겄소. 왜 일용할 양식이 없소? 농토는 다 어쨌다요?”
“차가 시간 정해놓고 안 다니요? 달걀을 깰 때, 둥근 쪽 끝을 깰 것인가 뾰쭉한 끝을 깰 것인가를 놓고 사생결단을 하느라고 농사 질 틈이 없었소. 즈그들허고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 태워 죽였소.”
“들어가는 시간은 일정헌디, 나오는 시간은 들쭉날쭉이요. 10분도 쉬었다 30분도 쉬었다 그러요. 얻어먹을라면 곱게 얻어먹지 웬 행패요?”
“누구, 나?”
“배운 것이 그것뿐이디 어쩔 것이요. 저기 차 오요.”
“아니요. 그건 직행이요. 여그 안 스요.”
“어찌 아요? 잘 안 보이요.”
“소리 들어보면 아요. 여그 오요.”
그녀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들은 차를 탔다.
차는 텅 비어 있었다.
“은어를 강에서 잡소?”
창밖을 내다보고 천이 말했다.
“양어장에서 가져오요.”
여자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