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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유령 작가

김은숙

 

1

쏴아 하는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창문 쪽으로 급히 걸어가는데 홑겹의 이불이 끌려오다 찢어졌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감긴 천을 떼어냈다. 창을 미는데 날카로운 쇠 마찰음이 내 귀를 베는 것 같았다.

창이 열렸다. 마치 끓어오르는 가마솥을 열었을 때처럼 습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재빨리 창을 닫고 유리창을 통해 정원을 내다보았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빗방울은 나뭇가지를 거쳐 유리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정원의 나무와 풀장 곁에 늘어선 몇 그루의 야자수까지 훑었다.

두어 시간 전쯤에도 정원 구석구석에 서 있는 서너 개의 가로등이 무색할 만큼 달빛이 밝았다. 지금은 하늘에 달빛은커녕 한 점의 별도 없었고, 빗금으로 그어지는 빗줄기가 가로등 앞쪽으로 선명했다. 나는 멀거니 그곳을 주시하다 발코니로 나갔다. 허드레 물건들 뒤쪽으로 돗자리가 세워져 있었다. 돗자리를 옆구리에 끼고 방으로 들어가 L을 깨웠다.

"무슨 일이야?"

"비 온다. 밖에 나가자."

"미쳤어?"

"빨리..."

손목을 잡은 채 채근하는 나를 바라보던 L은 알몸 위에 잠옷만 걸쳤다. 옷을 입으면서 부스스한 머리칼에 손가락이 걸리자 L은 인상을 썼다. 나는 L의 손목을 움켜쥐고서 잡아끌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돗자리를 까는 동안 L은 야자수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돗자리를 펴놓고서 L의 상체를 끌어안으면서 입술을 포갰다. L이 손으로 내 얼굴을 세차게 밀어냈다.

"옷 좀 벗어 봐. 잠깐이면 끝날 거야."

"놔둬. 그냥 하라니까."

내가 L을 주저앉히면서 잠옷을 어깨 쪽으로 밀어 벗기려 하자 L이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나는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는 L에게서 등을 돌리고 콘돔을 꺼냈다.

내 성기는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누우려는 L을 엎드리게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다. L은 나를 노려보다가 돗자리에 무릎을 대고 상체를 숙였다. L의 잠옷을 엉덩이 위로 밀어 올리고 나는 두 손으로 L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L의 몸에 내 몸을 밀어 넣자 낮은 볼트의 전류가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빗줄기에 등이 따끔거리면서 척추에서부터 오르가즘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섹스를 시작한 지 채 삼분도 되지 않아서 내 몸에서 생성된 뜨거운 물질이 쏟아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삼십 초 정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었다.

"변태 새끼!"

내가 몸을 빼내기도 전에 L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L의 목과 젖가슴에는 바닥에서 튀어 올랐던 모래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L은 모래를 털어 내면서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는 일어나서 성기에서 콘돔을 빼냈다. 아직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어 콘돔이 또르르 말리면서 벗겨졌다. 손이 미끈거려 팬티에 닦은 후 콘돔을 들어 몇 밀리그램에 지나지 않을 정액을 가로등에 비춰봤다. 늘어났을 때와는 달리 콘돔이 짙은 빛깔을 띠고 있어 배설물의 색깔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쓰던 만화 스토리가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콘돔을 던져버리고 나무에 기대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다시 심해지면서 빗살모양의 야자수 이파리에서 빗물이 후드득후드득 내 몸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지만 아직은 깊은 밤이었다. 핸드폰의 벨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기차 안의 사람들 일부는 깨어 있었고, 일부는 혼곤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되었네요. 핸드폰 속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여자가 미소를 머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담배 생각이 나서 피울까하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옆자리에 놓여있는 가방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캡이 달린 옅은 갈색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모자의 뒤쪽 구멍으로 묶은 머리를 잡아 뺐다.

"맥주 있습니다. 오징어 있어요."

수레가 지나가자 곁눈질로 실려 있는 물건들을 쳐다봤다. 옛날처럼 군침을 삼킬만한 먹을거리는 별로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볕 바라기하는 노파처럼 완행열차의 의자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쇠라도 씹어 먹을 수 있는 나이라서 수레에 실린 먹을거리가 뱃속의 회를 동하게 했던 것 같았다. 옆자리의 중년 여인이 껍질을 벗기던 계란을 쳐다보면서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침을 눌러 삼키곤 했다. 평소에는 닭똥냄새 때문에 삶은 달걀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냄새가 견디기 힘들 만큼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세 개로 묶인 계란을 사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역에 딸린 화장실 안에서 계란 껍질을 벗기는데 손이 떨렸다. 계란을 통째로 입에 넣고 수돗물을 연신 받아 마셨다. 수도꼭지 위에 네모난 거울이 붙어 있어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쳐지고 있었다. 때가 낀 거울 속의 나는 양아치나 다름없었다.

돈을 마련하기 힘들어 집에 있던 책을 팔아 여비를 장만했었다. 나는 화장실을 나와 발에 물집이 일도록 걸었다. 띄엄띄엄 농가가 흩어져 있는 마을 어귀에 도착해보니 먹을 것보다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린 바람이 바늘 묶음처럼 찔러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 채와 조금 떨어져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 창고에는 큰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고 그 옆에 외양간이 붙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갈 만큼 틈이 넉넉하지 않아서 나는 구유 위쪽으로 들어갔다. 여물이 구수한 냄새가 나서 씹어 봤지만 아무 맛도 느낄 수없어 뱉어버렸다. 소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방인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다행히 소는 끈에 매어있었다. 나는 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짚더미에 자리를 잡고 잠바를 벗어 덮었다. 얼었던 손이 녹으면서 고름이 든 것처럼 손가락 끝이 아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숨죽여 울다가 잠들었던 것 같았다. 어둠이 채 걷히기 전에 외양간에서 일어서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암소의 눈망울은 지금도 선하다.

첫 가출은 그보다 훨씬 시간을 거슬러 가야한다. 중학교 일 학년 여름이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소도시의 주변이었다. 새끼줄 마냥 흘러내리는 개울이 밭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리다 저수지에서 합쳐지곤 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나는 밭고랑에 앉아 다슬기를 잡았다. 다슬기 말고도 개울에는 별별 게 다 있었다. 간혹 소금쟁이가 엉금엉금 내 앞을 지나갔고 물속의 작은 돌을 들어 올리면 검은빛을 띤 가재와 깎아 낸 손톱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새우가 뒷걸음질 쳐 달아나곤 했다. 다슬기를 줍다말고 물방개가 그리는 일정치 않은 크기의 원을 한없이 들여다보았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일어나서 주변의 원두막으로 갔다. 배가 고파 참외 두개를 기둥 모서리에 깨트려 먹었다. 별과 달과 벌레 소리는 아늑함을 가져다주었다. 모기가 깨물어 웅크린 채 살갗을 비비다 보니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얼굴에 달려드는 햇살과 매미 소리에 나는 깨어났다.

가출한 날의 숫자를 천 조각으로 모은다면 퀼팅 이불 하나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리도 가출을 일삼았던 것일까? 고작 만화 스토리 작가가 되기 위해서? 나는 검은 유리창에 비친 나를 쳐다보면서 자조적인 질문을 던졌다. 여자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모자를 쓴 초라한 남자가 나를 마주 보았지만 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고 가방의 손잡이를 쥐었다. 기차는 여자가 사는 도시에 몇 분 동안 머물기 위해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차가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걸 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으로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바깥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 나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와 청바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듯한 차림이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이십 권이나 되는 만화가 들어 있어 가방이 좀 무거웠다.

발가락으로 그려도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겠소. 출판사의 사정이 나빠 요즘엔 아마추어들이 그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평을 올렸던 그 독자는 스토리를 만드는 나까지 물고 늘어졌다. 더 나가다가는 쓰레기가 될 것 같으니 제발 여기서 스톱하세요. 스톱하시면 작가의 개인적 사정으로 창작을 그만둔 줄 알겠습니다. 말하자면 해결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독자 말마따나 후속편을 계속 만들었던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에 연재되었던 인기 만화의 후속편을 연거푸 만들도록 내게 종용을 했다. 당시 그 만화 말고는 마땅하게 내 놓을 만한 후속 작품이 없었고 출판사는 기울고 있었다. 나 또한 매정하게 자르지 못한 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에서였다. 더 이상 그 만화를 이어가기는 힘든 상태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제 내 삶은 한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오른쪽 발을 플랫폼에 내려놓으며 숨을 크게 내 쉬었다.

플랫폼에는 몇 걸음 사이로 가로등이 배열되어 있었다. 가로등 바로 아래쪽은 대낮보다 더 밝게 느껴졌다. 내 발끝에 조그맣게 매달려 있다 옅어지면서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걷다가 전시용으로 놓인 긴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패랭이꽃이 한창이었다. 불빛을 등지고 있는 꽃잎은 화사함을 잃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앞서가는 몇몇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소 칙칙한 느낌의 복장은 얼마 전에 읍에서 시로 승격된 작은 도시에 왔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여자는 아직 나와 있지 않는 듯했다. 나는 역사를 빠져나가 어둔 광장을 서성거렸다. 광장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검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벨이 울리자 나는 재빨리 휴대폰 뚜껑을 열었다.

"이제 왔어요. 택시가 더디 오는 바람예요. 어디 계시죠?"

약간은 들뜬 듯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휘둘러보았다. 몸집이 다소 큰 여자가 십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줄무늬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는 본인의 표현처럼 뚱뚱해 보이진 않았다. 다만 골격이 커서 건장해 보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면서 나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짧은 파마머리였는데 웃을 때 감기는 쌍꺼풀진 눈에 조그만 입술을 가져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쳐다보다가 얼굴이 어떻게 생기든 관계없는 일이라고 재빨리 생각을 바꿨다.

"왜 그리 얼굴을 보세요? 이쁘지 않아 민망하네요."

간혹 거르지 않는 표현을 쓰는 건 글을 다루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자가 소설이 올려져 있는 홈페이지를 갖고 있었지만 관심이 없어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였다. 사이버 공간에서 흘러 다니는 글이란 거의 뻔했다. 나는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소설과 시 습작을 하던 이십대에 여자들과 어울려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줄 담배나 피울 줄 알았지 글에는 문외한처럼 보였다. 더구나 책조차 몇 권 읽지 않아 어쩌면 무식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여고 때의 열정과 문과대학에서 사보를 편집했다는 게 글쓰기를 하게 된 주된 이유 같았다. 나는 그때 나이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에겐 두려운 존재였다. 때로는 그때의 오만함이 내가 정상적인 길로 접어드는 걸 방해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아닙니다. 이 정도쯤이야..."

"하긴 작가시니 웬만한 건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겠군요."

내가 하찮은 만화가라는 얘길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눈을 껌벅거리고는 있었지만 웃음기가 도는 얼굴이 아니어서 진지해 보였다.

"만화 스토리 작업이야 소설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이죠."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만화 스토리를 만들고 그 뒤에 하는 콘티작업도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그것도 창작인데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요?"

"만화는 문학 축에 끼지도 못하잖아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긴 하죠. 조금 걸어도 되겠어요? 십 오 분쯤 걸으면 포장마차가 나타날 겁니다. 줄줄이 늘어서 있어 골라 들어가면 되거든요. 발을 천막 대신 사용하는 곳도 있어요."

여자의 말에 나는 문득 칠월 초라는 생각을 했다. 풍채가 있어 여자는 더위를 탈 것 같았다. 나는 여자가 자신과 흡사하다는 나이 든 여가수를 떠올렸다. 여가수는 밀어 올리는 브래지어를 한 탓도 있었겠지만 가슴이 유난히 풍만했다. 곁눈으로 보니 여자의 젖가슴은 상체에 비해 밋밋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나와 보조를 맞춰 걸으며 간간이 말하고 간간이 웃었다. 이미 통화를 해서 알고 있었지만 여자는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마주해보니 전체적으로 두루뭉수리해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용모였다. 나는 웃음을 띤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포장마차 어때요? 신데렐라가 탄 마차만큼은 안 되어도 운치가 있죠?"

발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오는 포장마차에 여자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불빛이 아니라면 낡고 보잘것없는 천막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간혹 이용하는 서울 대학가에 있는 포장마차와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사람까지 없어 썰렁해 보이는 포장마차였다.

"시간을 놓쳐 다시금 재투성이가 된 신데렐라를 기다리는 호박덩이 같은 마차군요."

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잘 나가는 대 작가와는 대화가 안 되는군요."

여자의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내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앞서서 발을 들치고 들어간 여자는 중간쯤의 자리에 앉았다.

"잘 나간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저는 고스트 라이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스트 라이터? 뭐지? 영혼으로 글을 쓰기 때문인가요? 누구나 영혼으로 글을 쓰는 것 아닌가?"

"하하...유령 작가요."

"유령 작가? 그런 것도 있나요?"

"스토리는 내가 만들지만 딴 사람 이름으로 출판되니까요."

"...그럼 대필가와 비슷한 건가? 약간 성격이 다르겠군. 대필가야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이야기를 만드는 거니까 순수창작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

말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습성이랄 수도 있었다. 내가 유리컵의 물로 목을 축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을 깜빡거리던 여자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는 버팀목으로 쓰이는 천장의 쇠막대를 쳐다보다가 안주감이 담겨있는 유리 박스로 시선을 옮겼다. 일부러 백열등을 내려 달아서 삶은 문어와 돼지 곱창, 먹장어는 다소 과장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껍질이 벗겨진 먹장어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실핏줄이 선명해서 붉은색에 가까웠다.

"안주가 제법 갖춰졌죠?"

둘러보던 여자가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나는 여자를 마주 보며 가슴 근처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모자를 써서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는 건가?"

여자는 내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웃으며 말했다. 실은 늘 그런 말을 듣고 있었다. 나보다 무려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여자로서는 내 나이에 대해 부담을 느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도 나이보다는 젊어 보이는 얼굴인걸요."

"그래요? 후후...그나저나 선배라고 부르니 편한 느낌이네요."

여자가 입을 오므려 웃으면서 턱을 괴었다. 까딱거리던 여자의 새끼손가락이 이 사이로 슬며시 들어갔다. 뻔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이혼남과 이혼녀의 만남이었지만 부르기에 부담이 되지 않는 단어를 골라야만 했다. 애정 관계라는 걸 표면화시키는 호칭은 되도록 피했다.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누님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여자에게 붙이기에는 어색할 것 같아 선배로 결정했었다. 만화계 쪽에서는 작가라는 호칭을 주로 썼지만 연배인데도 실력이 신통치 않을 경우에는 선배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주는 뭘 드실래요? 난 파충류를 좋아하는데..."

"개고기는 없나?"

나도 여자처럼 농담을 했다.

"그건 초복에 먹기로 하고 오늘은 꼼장어 드세요."

유머 감각은 젊은 세대와 비슷했지만 여자는 오십을 앞두고 있었다. L의 어머니가 올해로 딱 오십이었다. 이 여자보다 두 살 위이니 엇비슷한 셈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장모뻘 되는 여자와 연인관계가 되기 위해 마주 앉아 있었다. 여자와 한 침대로 가기 위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에게 연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이마 쪽으로 돋아나 있는 흰머리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만들어지는 두개의 턱을 바라보면서 나는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L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파마머리와 둥그스름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허접한 글이나 끼적거리면 딱 알맞을 이미지였다. 주부들까지도 취미 삼아 글을 쓰러 다니는 시대이다 보니 여자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저는요. 제 나이를 다 갖고 있어요. 요즘은 내가 늙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죠. 특히 지지부진한 글쓰기는 나를 무기력하게 하구요. 글을 쓴다고 해도 그 원고가 곧바로 책이 되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물론 자비로 책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난 자존심 상해서도 그렇게는 하지 못해요."

"그럼 등단은 하신 건가요?"

"아뇨...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에게 밀려났죠. 유명작가 제자가 되지 못한 탓이었어요. 인지도가 있는 작가들 입김은 대단하죠. 더러워서 지방으로 와 버렸어요."

중얼거리듯 여자가 말했다. 목소리의 톤으로 보아 등단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 듯했다.

"등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제도를 두고 있다 하죠. 몇몇 중견작가들은 자신의 제자 뽑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더군요. 그것도 일종의 영역 넓히기라고 볼 수 있죠. 속된 표현으로 패거리 만들기라는 말도 있어요. 제 살 도려내는 아픔이 없다면 개선되기 어려울 겁니다. 문학이 죽었다,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이니..."

여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위안이 되었는지 다물린 양쪽 입술 끝이 볼 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 꼴 보기 싫어 혈혈단신이다 보니 외로운 길이네요."

들고 있는 소주 한잔을 단숨에 비워낸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보다 다소 나은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여류작가들이 신변잡기를 다루는 것을 보아 온 터였다. 솔직히 나는 그런 작가들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따르는 대로 소주를 받아 마시던 여자는 내 담배 곽을 더듬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둔한 걸로 봐서 꽤 취한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뻐끔담배를 피우던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내 가슴에는 우물이 있어요. 슬픔이라는 그 우물은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마르질 않아요."

한숨을 내쉬더니 여자가 중얼거렸다. 여자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많은 것 같았다. 여자가 버린 담배를 발로 밟았다.

"퍼 올리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양수기로 퍼 올리느냐 아니면 바가지로 퍼 올리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슬픔의 물이 왜 고이는지는 아세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여자가 대뜸 내게 물었다.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상처 때문이죠."

". 그렇구나. 그럼 제가 마르게 도와드리죠."

"도와줘요?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이런 말이 있더군요. 어느 신문 칼럼에서 정신과 의사가 그랬어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한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아야했던 것이죠. 내가 존재하는 게 기분 나빠 나를 괴롭혔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요. 댁도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죠."

"무슨 말씀을... 난 절대 아닙니다."

나는 얼른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여자의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의 표현은 차라리 비약에 가까웠다. 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여자도 다시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다소 흥분되어 있었고, 여자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버린 듯 보였다. 나는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여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연민으로 쌓아진 두툼한 벽을 좀처럼 허물려 하지 않는 스타일의 여자였다. 게다가 자기 방어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허물려고 작정한다면 의외로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었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성격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여자는 내게 자신이 작가라며 소설을 쓴다는 말을 했다. 물론 글쟁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여자처럼 작가라고 드러내놓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했다. 채팅 공간에서 시를 쓴다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맞춤법조차 틀리는 어설픈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소설을 쓴다는 사람은 통 털어서 여자가 처음이었다. 컴맹 수준이었던 내가 사이버 공간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해 이 여자만 만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작가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긴 잘 나가는 작가라면 일부러 일반인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여자는 아이들처럼 지나치리만치 솔직했다. 성격의 모순이 그대로 드러났던 건 여자의 학력이 낮은 탓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 무식한 여자였다. 실은 여자가 소설을 제대로 쓰는 작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다만 나는 여자와 빨리 가까워지기 위해 일부러 밤 기차를 탔을 뿐이었다. 따라서 여자가 취했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함께 집으로 갈 수는 없죠. 그쪽은 외간 남자니까요."

여자가 불쑥 내 허를 찌르는 말을 했다.

"...저도 재워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나는 외간 남자니까..."

말을 받아넘기자 여자가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약간 튀어나온 앞니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낯선 느낌은 체형의 단점이나 얼굴의 못생긴 부분에서 묻어나곤 했다.

"그럼 어디로 가죠?"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다음 코스가 노래방일 거라는 건 짐작이 갔다. 여자는 자신이 잘하는 게 음주 가무라는 말을 했었다. 이성이 본능을 지배하는 구조를 가져서 주색잡기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여자의 성적 코드가 불능이라면 몰라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노래방 가서 술을 깨야죠."

새벽까지 하는 노래방이 근처에 없어 택시를 탔다.

"노래방은 지하가 아니라도 냄새가 좋지 않죠. 늙은이들에게서 나는 냄새 같아요. 나도 늙어 가지만..."

여자가 내려가는 계단 중간쯤에서 킁킁대더니 말을 했다. 여자는 다리가 휘청대자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노래방을 지키던 남자가 돈을 받으며 나를 흘끔거렸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느라 손님까지 없어 동굴처럼 음습한 느낌이 드는 지하 노래방을 둘러보았다.

여자는 내가 가사집에서 노래를 찾고 있는 동안 번호를 꾹꾹 눌러 대더니 한 곡을 불렀다. 저음과 고음 사이를 잘 이어가는 걸로 봐서 상당한 실력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런 목청이었다. 게다가 바이브레이션이 뛰어났다. 고음으로 올라가면서는 애조를 띠어 여자의 노래를 듣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좁은 공간에 담배연기가 맴돌면서 여자가 기침을 했다. 나는 음료수를 따서 노래를 끝내던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저는 피곤하면 기침을 하죠. 기관지가 좋지 않거든요."

여자가 목에 손바닥을 댔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기계의 숫자를 직접 눌렀다. 내가 블루스곡인 팝을 부르자 여자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여자의 몸에서 비누 향내와 담배 냄새가 섞여 났다.

기계의 숫자가 제로로 되자 다양한 불빛을 쏟아내던 회중전등이 꺼지고 형광등이 켜졌다. 침묵이 흐르자 여자가 곡 연주 없이 노래를 부르겠다는 말을 했다. 가곡 '그 집 앞'이었다.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잊어버리고 있던 가사 2절이었다. 나는 여자가 노래를 마치자 시계를 쳐다보았다. 애절한 이별 노래로 시작되는 아침이었다. 나오니 밖은 노래방의 형광등보다 훨씬 밝았다. 노래방 입구에서 택시를 잡았다.

 

2

택시가 멈춘 연립 앞에는 등나무 그늘이 있었다. 아침 햇살이 지붕 구실을 하는 윗부분에 머물고 있었지만 아래쪽이 음침했다. 갈색인지 검은색인지 나무 의자가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 앞을 지나치는데 서늘한 기운이 몸에 확 끼쳤다. 돋아있는 풀과 축축한 흙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털에 눈이 가린 강아지가 나를 보며 으르렁댔다. 여자가 강아지를 달래려고 안았다가 놓았다.

"이놈은 밖에 내다 놓아도 데려가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강아지 같죠? 실은 내가 털을 깎거든요."

여자가 강아지와 눈을 맞춘 상태로 말을 했다. 나는 털이 엉킨 뚱뚱한 강아지를 쳐다봤다.

"임신했나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나랑 같은 신세이지."

여자의 대답에 나는 웃으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여자의 시선은 딴 데에 있었다. 낡은 가재도구와 푸르스름한 빛깔의 벽지 때문에 분위기가 썰렁한 집이었다. 한쪽에 피아노가 있고 그 옆에 일인용 소파가 놓여있었다. 그 바로 옆에 식탁이 있어 그 소파가 자리하기도 비좁았다. 나는 피곤해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차 한잔하실래요?"

마음 같아서는 밥을 먹자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저녁조차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가 알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집이 좀 그래요.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 장만해야 하는데 능력이 있어야 말이죠. 돈 많은 영감이 해결사이긴 한데 치사한 인간들이 이쁜 여자만 찾아요."

여자는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나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며 웃어 주었다. 인조든 자연이든 예쁜 여자가 많은 세상이니 평범하고 몸집이 큰 여자는 이미 코너에 몰린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서울에 있는 집을 세 주고서 글을 쓴다며 지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여자는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황새걸음을 흉내 내는 뱁새일 뿐이었다. 어쩌면 돈을 벌어다줄 사람이 없어 궁상을 떨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제대로 써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한때 나는 스스로를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바닷가의 호텔에서 작업할 때였다. 철썩대는 파도소리가 열린 창으로 음향처럼 스며드는 밤이면 콘티작업을 하느라 밤을 꼴딱 새곤 했다. 그때는 쓰는 속도보다 생각의 속도가 훨씬 앞질러 가서 콘티작업도 속기로 했으면 싶었다. 때론 여자와의 섹스에 관한 장면 묘사를 위해 값비싼 콜걸을 부르기도 했다. 마네킹처럼 몸에 군살이라고는 없는 콜걸은 그림 작업이 끝나면 우아하고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둔갑했다. 그 시절이야말로 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따라서 출판사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생활에 허덕거리는 상황이 되자 내 머릿속은 공동 상태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월세로 있던 집에서도 작업이 안 되었지만 보증금마저 까먹고 남의 집에 얹혀사니 거지꼴이었다. 겨우겨우 조금씩 써 가는데 출판사에서는 밀려 놓은 원고료마저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다달이 마이너스가 나는 생활을 계속되다 보니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카드 대금이 밀려 이미 신용 불량자가 되어있었고 공과금도 몇 달씩 밀려 있었다. 전화 요금도 이달에 내지 않으면 끊길 상황이었다. 휴대폰은 받는 것만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아들만 없었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발리에서 나오면서 잠깐 맡으려했던 아들은 전처에게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중학 이학년인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드는지 전처의 남편을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의붓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일부러 잘 대했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관심으로 갔다. 물론 지금은 잘해주고 싶어도 형편 때문에 아들은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어르고 달랠 필요도 없이 아들은 다음달에 전처에게 간다고 했다.

발리의 L에게도 생활비를 두 달이나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L은 인도네시아 언어를 거의 익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다만 비자만으로는 취업이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어서 L이 서비스업에 종사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국내에서보다는 생활비가 적게 들어 그나마 위안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비 2분의 1정도로 기사와 하녀도 두고 살았다.

이번에 무협 계약을 하고 만화도 출판사 사정이 좋은 다른 곳에 계약을 하기 위해 잠깐 나왔는데 아들과 빚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여자에게 어느 정도 돈이 융통되면 부족한 나머지는 동료 작가에게 손을 벌리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발리의 집도 계약만료가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다. 대학 졸업 기념으로 잠시 발리에 여행을 왔던 L과 만화 작업을 위해 그곳에서 거주를 하던 나는 발리 해변에서 만났었다.

"두유 스피크 코리언?"

당시 L의 영어 구사는 노련했지만 한국 사람만이 갖는 억양이 배어 있었다. 스물네 살의 L은 엄지발가락이 슬리퍼의 고리에 끼워져 있었다. 내 시선은 L의 빨간 발톱과 갸름한 발을 거쳐 꽃무늬가 자잘한 치마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머리의 빨간 꽃에 꽂혔다. L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볼을 부풀려 웃음을 머금었다.

"한국 사람이세요?"

L은 활짝 웃으며 반갑다는 듯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L에게 만화가이며 글쓰기를 위해 발리에 거주한다는 말을 했다. 곧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녀는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나는 풋풋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처녀에 대한 호감이었다. 물론 그전에 나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발리의 처녀와 동거를 한 적은 있었다. 원어민 처녀들은 야들야들한 피부였지만 까매서 지저분한 느낌이었고 게다가 수입쇠고기처럼 몸에서 누린내가 났다. 샤워를 자주하는 데도 어떻게 씻는지 불결한 냄새를 풍기곤 했다. 짧은 영어 회화 실력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따라서 깊이 있는 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맨 처음 L에게 십대 후반에 지었던 내 시를 읊어줬었다. 처음에 그녀는 내가 작가라는 걸 믿지 않는 태도였지만 집에 가서 내가 쓴 시와 만화를 보여 주겠다고 하자 긍정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곁에 있던 키가 작고 팔다리가 굵던 친구는 L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내 생각은 L의 속살을 더듬던 그 시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혹 L은 까만 그물 속에 비스듬히 누워 신화 속의 여인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누워 마름모꼴의 그물 틈으로 탱탱하게 내민 젖가슴과 잔디처럼 하복부를 가득 메운 까만 음모를 바라보곤 했다. 스치는 바람에 음모가 떨리면 내 몸도 서서히 반응을 했다. 나는 일어나서 혀끝으로 L의 유두와 하반신을 더듬으면서 수음을 했다. 그물침대에 나신으로 누운 L이 떠올라 나는 눈을 감았다.

"피곤하세요?"

갑자기 무릎 위로 올라앉은 여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눈을 뜨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가 입술로 내 입술을 더듬었다. 여자의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 여자의 혀가 내 혀끝에 닿았나 싶더니 내 목에 둘렀던 팔을 스르르 풀었다.

"저쪽 방에서 주무세요. 나도 피곤해서 자야겠어요."

여자가 입술을 떼고 내게 말을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보수적으로 되어 버리는 게 아이러니 했다. 여자는 내 무릎에서 내려서더니 현관 옆방으로 갔다. 여자가 그 방에 이불을 깔고 나왔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여자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았다.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 주무실려구요?"

뒤따라 들어간 내가 물었지만 침대에 누운 여자는 눈도 뜨지 않았다. 나는 선 채로 손으로 이불자락을 움켜쥔 여자를 쳐다보다가 현관 옆방으로 가서 누웠다. 여자가 깔아 놓은 이불에서 특유의 냄새가 났다. 좀약 냄새와 오래 쓴 물건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 남의 집이기 때문에 맡아지는 냄새, 그러니까 나는 아직 이방인이었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뒷머리에 괴고 열린 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하다가 양쪽 벽을 의지하고 있는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방안의 눅은 냄새는 오래된 책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았다. 문학 서적들 틈에 두어 질의 동화가 섞여 있었다. 여자는 동화에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만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드라마나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시,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만화, 무협을 다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한쪽 귀퉁이의 키가 작은 책꽂이 위에 앨범이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던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몸을 일으켰다.

가족사진이 고스란히 끼워져 있었다. 여행을 많이 다녔던 듯 바닷가에서 찍은 게 많았다. 여자는 화장을 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선글라스도 착용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긴 파마머리였고 때론 쇼트커트였지만 수더분한 복장에 몸이 커서 항상 남자 같은 느낌이었다. 남편의 사업장에서 찍은 사진도 간혹 눈에 뜨였다. 규모가 그리 작아 보이진 않았고 사진에서 가족들은 밝은 표정이었다. 가게의 앞 유리에 부착되어있는 게 네온으로 된 다이아몬드여서 여자에게 설명을 듣지 않았어도 귀금속을 취급하는 가게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세 권째 앨범을 보다가 아이들의 사진만 주로 보이자 덮고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 메모용지를 식탁에 놓고 앉았다. 몇 자 적는 동안 손이 떨렸다. 메모지 위에 볼펜을 놓고 나는 일어나서 가방을 챙겼다.

 

3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거의 자지 못했고 집에 돌아온 후 눈을 붙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후에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여서 피곤하게 느껴졌다. 여자가 전화를 했다는 건 내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잖아도 그냥 나와 버려 미안했어요. 현관문이 열려 있어 내내 불안했죠."

"아니에요. 우리 집 멍멍이 밥 먹고 하는 일도 없는데요. ..."

"하긴 집 지키는 데는 남자보다 개가 더 나을 수도 있지요. 하하..."

여자도 나를 따라 웃었다. 재치도 있고 활달한 여자였지만 내가 보기엔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였다. 문학이라는 장르에서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여자는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여자는 세상 살기가 팍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이혼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의 남편이 자영업을 하고 있어 삶이 그런대로 윤택했었다는 말로 미뤄봤을 때 여자의 말과는 달리 남편에게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나는 거의 날마다 여자와 통화를 했다. 여자는 항상 반기는 기색이었다. 모든 일은 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여자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짐을 싸 가지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며칠간 통화를 하던 나는 슬그머니 그 얘기를 꺼냈다. 때마침 장마가 남쪽 지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어요. 지하라 비가 오면 창을 닫아야 하니 늘 찜통이네요."

"하긴 글이란 여건이 좋지 않으면 써지지 않죠. 게다가 장마통이니...혹 비 때문에 집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구요?"

"차라리 문제가 생겼음 핑계로 아들 녀석이랑 신세 좀 지는 건데. 하하..."

"저도 말리지 못하지요."

여자도 웃으며 말했다.

"소설은 잘 되어 가나요?"

지름길로 가다 복병을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조금. 이혼 전 갈등이 많아 거의 놀았으니 이제 써야죠. 한 삼 년 그런 세월을 보내고 나니 허망하대요. 글쓰기를 그만두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올해부터는 좀 써지네요. 사주쟁이 말이 맞나 봐요. 올부터 인수대운이어서 공부 쪽으로 좋을 거라는군요. 게다가 인연 운까지 온대요."

여자는 나와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 계획을 앞당겨도 될 것 같았다.

"그래요? 소설로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뻔한 실력이겠지만 나는 여자를 추켜세웠다. 소설로 돈 버는 사람이 소설가 중 몇 %나 될까.

"정말 올해 인연이 생긴대요?"

나는 연거푸 말을 했다. 여자의 의중을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게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 그렇다네요. 하지만 사주를 보면 좋은 말은 안 맞는다고 하잖아요."

"글쎄요. 맞을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길 바라죠. 삶이 하도 고달파서 사주 공부를 했지만 지나간 걸 풀어내는 걸 보니 상당 부분 맞더라구요. 그렇다면 미래도 어느 정도 맞겠죠. 과거를 가지고 유추해서 푸는 것이니까요. 사주란 현재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를 보는 거랍니다. 저는 과거의 삶과 현재를 가지고 미래를 풀었으니 비교적 맞겠지요."

그렇다면 여자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말을 이었다.

"혹 제가 인연이 아닐까요?"

"글쎄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여자에게서 흔쾌한 답을 얻어내진 못했지만 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조금 더 밀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글 못 쓰겠어요. 선배네 방이 두 개나 남으니 하나만 빌려주세요."

"저와 문호씨는 아직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닌 걸로 압니다만..."

대답은 부정적이었지만 여자가 이름을 부른다는 건 내 보기에는 한 걸음이 더 나아간 태도였다. 나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수화기를 놓았다. 하루만 더 기다려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4

여자는 충분히 나를 거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긴 나날을 외로움에 젖어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홈페이지를 갖고 있어 사이버 공간에서 팬들과 교류를 하는 여자에게는 꼭 필요한 한 남자가 없었던 것 같았다. 여자는 위로받을 수 있는 남자를 구하지 못해 때론 부나비처럼 사이버 밤 공간을 헤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사이버 공간은 나처럼 아차 하면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남자들이 목적을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정상인들도 많았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채팅방에 상주할 리는 없었다. 많은 남자들이 기회 포착을 위해 들락거린다는 것을 여자는 간과한 것 같았다. 아니 여자는 알면서도 본인의 말처럼 바깥세상과의 단절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그녀의 별명 벽장 속의 여자는 그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 여자의 집에 갔을 때 집이 좁진 않았지만 벽장처럼 어둡고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계단이 지저분하고 볕이 잘 안 드는 빌라여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란다의 유리창 앞쪽으로는 빨랫줄로 사용해도 될만한 거리에 전선줄이 지나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사다리만 걸치면 이웃 건물과 왕래가 가능해 보이는 비좁은 거리였다.

베란다에 빨간 플라스틱 통과 서랍장이 놓여있어 거실까지 음침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로 봐서 여자가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것이야말로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집에 도착하면 예의상 소설 한 편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칭찬을 해주는 것도 내 의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자는 싼 집을 얻느라 지방으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했다. 28평 아파트에서 가져온 물건을 23평 빌라에 집어넣다 보니 집이 비좁은 골목길 되어 버렸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자는 세 놓은 아파트의 전세와 지금 사는 집 전세금의 차액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간혹 여자는 여성회관에서 소개해주는 가정집 청소나 식당의 설거지 등 잡일을 했다.

"실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거든요."

고등학교 중퇴인 여자가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억지일 수도 있었다. 여자에게 독서 지도사 자격증은 있었지만 학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었다. 게다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걸 여자는 잊고 있는 것 같았다.

"학부모들이 까다로워서 아마 쉽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연락을 안 하더군요. 아파트에 붙인 전화번호는 떼어갔던데..."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 게 아니라 애들 장난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띤 얼굴로 청소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물질이 이끼처럼 낀...’ 이라고 변기의 상태를 묘사하듯 말했다. 락스를 뿌린 변기를 들여다보며 문지르는 여자가 상상이 되면서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L이 떠올랐다.

하녀가 있어 L은 화장실 청소는 할 필요가 없었다. L은 손에 물을 거의 묻히지는 않았지만 하녀가 꼼꼼하게 뒤처리를 하도록 다룰 줄을 알았다. 하녀의 행동은 복종에 가까웠다. 초기에 하녀는 투덜대다가 L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L이 인도네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진 못했어도 이미 귀가 트여있는 줄 하녀는 몰랐던 것이다. 하녀가 대학물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결과였겠지만 그건 L에 대한 판단 미스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외출을 할 때 화장을 하는 L을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곤 했다. 성형을 해서 조금 부자연스러운 눈은 적당한 길이의 인조 속눈썹을 붙이면 아주 자연스러운 쌍꺼풀이 되었다. 고용된 기사는 L의 까맣고 긴 머리칼을 보면서 뷰티풀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하지만 기사가 쳐다보는 곳은 L의 하얀 목덜미와 풍선처럼 둥글게 부풀은 젖가슴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기사를 내보냈다는 건 L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내겐 다행일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간혹 기사의 검붉은 입술이 떠오르면 신경이 쓰이곤 했다.

발리는 일 년이 같은 계절이니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바닷가로 산책을 다녀오면 그런 생각은 깡그리 없어지곤 했다. 바다는 노출의 부족에서 오는 다소 어둡고 진한 빛깔의 사진처럼 짙푸르렀다. 늘 나는 바닷물을 유리그릇에 담으면 유리그릇에 파란 물이 들 거라는 상상을 했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오는 길에 재래시장에 들리곤 했다.

소쿠리에 물건을 담아놓고 그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을 부르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재래장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번 누런 이가 듬성듬성한 노인들과 물건을 흥정하곤 했다. 열대과일이나 다양한 꽃, 무늬가 현란한 옷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장터가 마치 총천연색의 집합소 같았다. 빛깔과 소리와 흥정에 묘미를 느껴 나는 재래시장을 자주 이용했다.

낮엔 덥기 때문에 음식을 해 먹고 음악을 들으며 잠을 잤다. 저녁 무렵부터 선선해져서 콘티 작업에 들어가기 딱 알맞았다. 밤중에서 새벽은 항상 가을밤 같았다. 다만 우기에는 끈적거림이 있긴 했지만 나는 비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기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게다가 비 오는 날 승용차 안에서의 섹스는 환상적이었다. 어슴푸레해질 무렵 정원의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나와 L은 섹스를 즐기곤 했다.

OFF 버튼을 눌러 유리창의 틈을 조금 벌려 놓고서 L의 옷을 하나씩 벗기면 첫 키스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용차 지붕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섹스에 몰입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 같았다. L은 섹스를 시작할 때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절정의 순간에는 고양이 소리처럼 옥타브가 올라가곤 했다. L이 내지르는 소리는 공간이 좁아 더 확대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야생 동물과의 교접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 우리는 우기의 절반은 밖에 나가 주린 짐승처럼 섹스를 했을 것이다.

차 안에서의 섹스가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부터는 모래 위에 비닐 천을 펼쳐놓고 비를 맞아가면서 섹스를 했다. 그것이야말로 별미였다.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세차게 비가 쏟아지면 온몸으로 섹스를 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 온 후 빗속에서의 섹스를 가장 그리워했다. 얼마 전에는 섹스에 대한 갈망 때문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쏘다니다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들어갔었다.

물론 낭비벽이 없었다면 계획에 차질도 없었을 것이다. L과 나는 정기적으로 한인들을 만나서 파티를 즐기곤 했고 때론 슬롯머신을 하기 위해 클럽에 가곤 했다.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털어 내는 것처럼 후련하기까지 했다. 전처와 결혼 할 무렵 그러니까 정확히 14년 전 나는 생활을 위해 만화를 시작했었다. 결혼이란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쓰던 사람이 만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출판사에 약 두어 권 분량의 콘티작업을 해서 보냈더니 당장 오케이였다. 만화를 시작할 무렵 나는 돈을 좀 모으게 되면 소설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5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만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만화의 원고 쓰기는 내겐 전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고, 써 가면 그 분량만큼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두 눈을 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내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 게 돈이었다.

아내와 이혼할 무렵 만화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벌면 쓰기 바빴다. 그 무렵엔 파리 떼처럼 사람들이 꼬이기도 했다. 골방을 가득 메운 담배와 사람들의 열기, 그곳에서의 도박은 내 의식을 몽롱하게 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탕진하는 생활이 내게 희열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만화를 쓰지 않는다면 이어나갈 수 없는 게 내 생활이니 희망이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쓰는 여자를 만나다 보니 한편 소설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J시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줄곧 잡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자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전혀 없었다. 다만 나를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의 내면이 몹시 궁금했다. 여자는 재산 정도로 보아서 맞선이라도 본다면 안정된 남자를 찾을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조급증이 있는 데다 융통성이 없어 고집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자신의 신체에 관한 단점을 얘기하면서도 상대를 유쾌하게 하는 유머 감각 때문에 여자의 성격이 부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틀 전 통화에서는 갑자기 하마가 등장했었다.

"뼈대 굵은 집안 딸이다 보니 처녀에게 하마라는 별명을 붙여주더라고요."

통뼈처럼 보이긴 했지만 하마가 연상될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껄껄 웃었다.

"하마야 잡식성도 아니고 육식성은 더더욱 아니니 순하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아마 덩치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수영은 못하는 데다 쓸모없이 몸집만 커서 그런 별명을 붙여줬을 거예요. 물 속에서 사는 동물 중에 하마만 수영을 못한다나? 어쩌면 어리석은 동물이겠지요. 물에서 사는 동물들에겐 수영이 필수니까요."

"어떤 동물이든 상황에 적응해가면서 사니 하마를 어리석다고만 말 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가요?"

여자가 조금 웃었다.

"입이 하마처럼 크지 않아 억울하긴 했지만 나는 그 별명이 싫진 않았어요."

"왜요?"

"그 별명을 얻은 얼마 후 하마가 사육사의 팔을 물어뜯은 사건이 발생했거든요."

"이런...그 하마가 사육사의 팔을 먹었나요?"

나는 일부러 그렇게 질문했다.

"참내... 제가요. 기르던 소에게 개구리를 삶아준 적이 있어요. 여물에 양념으로 넣어봤는데 안 먹더라구요. 초식동물은 죽었다 깨나도 육식은 하지 않아요."

"글쎄...광우병을 일으키게 한 주원인은 소가 먹었다던 양 육골분이었으니 육류라 할 수 있겠죠?"

"그런 식으로 먹인다면 어떤 초식동물에게도 가능하겠죠. 그건 억지로 먹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하긴... 그나저나 사육사의 팔을 물었던 하마는 대단히 화가 났었나보죠?"

"그 당시 관람객이 하마에게 돌을 던져 약을 올렸다는 것 같았어요."

"오호...그렇다면 선배님도 화가 나면 무서운 분이란 말씀이죠?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내 말에 여자가 한참동안 웃었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세상 물을 먹어 영악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는 어수룩한 느낌이었다. 자기 관리가 거의 안 되는 여자라는 걸 나는 사이버 공간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여자가 어떤 종류의 소설을 쓰는지 몹시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와 동그란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담배를 물었다가 빼냈다. 버스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버스는 이제 강을 끼고 달리고 있었다. 피서객들이 강가에 쳐놓은 여러 가지 빛깔의 텐트가 얼룩덜룩 창을 스쳐 지났다. 강에 반쯤 몸을 담근 애들이 암록빛을 흐려놓고 있었다. 마음은 복잡했어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내 눈은 J시로 가는 길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 머문다는 J시는 주변에 아름다운 강이 많아 제법 수려한 곳이었다. 어설픈 작가라면, J시란 글을 핑계 삼아 유유자적하기에 딱 알맞은 고장이었다.

 

5

터미널에서 나는 묵직한 짐을 택시에 실었다. 많은 원고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지만 여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여자가 내 실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이십대 때 써 두었던 시까지 함께 가져 왔었다. 내 원고에 흠뻑 빠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자는 소설에 대한 시각은 객관화되어 있겠지만 시를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리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을 할 때는 상당수의 멤버들은 나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십대 초반에 등단을 하면서 오히려 시를 등한시했던 건 소설에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고 같은 중요한 물건들을 여자의 집에 당분간 놓아둘 필요가 있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속의 여자는 수다스러움이 다소 가셔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무작정 쳐들어가니 여자로서도 고민될 거라는 짐작은 갔다. 택시는 오 분이 채 안 되어 회색빛의 빌라 앞에 섰다. 택시 기사는 뒤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 내 얼굴을 백미러를 통해 흘끔거렸다. 모자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이 눈에 거슬렀던 것 같았다. 여자들은 내 긴 머리에 호감을 갖곤 했지만 남자들은 건달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었다. 몇 달 동안 내 손에 쥐어진 원고료는 얼마 되지 않았고 빚에 시달려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까. 나는 바퀴가 달린 가방을 들고 계단을 비척비척 올라 사층까지 갔다.

현관문을 열어주던 젖은 머리의 여자가 나를 보며 함빡 웃었다. 자세히 보니 죽은 깨가 양볼 위쪽에 작은 씨앗처럼 박혀 있었다. 웃음기 때문인지 그늘져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모한 결정을 하기엔 많은 고민도 했겠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챙겨온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인 다음 나는 가방에서 시가 인쇄된 에이포 용지를 꺼냈다.

"이게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에 썼던 시랍니다."

"꽤 많네요."

"집에 더 있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자가 한 장 한 장 읽었다.

"그러니까 이게 82년도 작품이에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나는 그때 철도 안 들었던 것 같은데요."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나는 학교에서 천재 시인으로 통했었다. 간혹 가출을 하는 버릇만 없었다면 모범생이랄 수 있었다. 학교를 오갈 때 나는 늘 발끝만 내려다보고 걷는 습관이 있어 누가 봐도 얌전한 모습이었다. 가출했다 돌아올 때마다 학교에서 나를 받아주었던 이유는 천재에 대한 배려였고 소위 삼류에 속하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어 툭하면 가출을 했거든요."

"가출?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했구요. 다만 문호씨가 시를 쓰던 시절에 난 공순이었죠."

"공장에 다녔어요?"

"밭매기 싫어 공장에 갔죠. 한여름에는 해를 등에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고 밭을 매야 하는데 그거 죽을 맛이에요. 게다가 운 나쁘면 시골 총각에게 시집 갈 수도 있고..."

"그 시절 학교 다녔던 사람들보다는 글을 잘 쓰실 것 같은데요. 특히 소설은 경험으로 쓰는 거라서..."

"글쎄..."

여자가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문득 어수룩한 소설 쓰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를 잘 모르긴 하지만 아주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을 하면서도 여자는 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날 새벽에 드셔야 할 해장국을 오늘 끓였네요."

여자는 탁자에 시가 인쇄되어있는 에이포 용지를 놔둔 채 반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탁자 가장자리로 종이를 밀었다. 내 손을 따라오던 여자의 시선이 방향을 바꿔 내 얼굴에 닿았다.

"아무거나 있는 대로 먹어도 되는데...성찬입니다."

내가 식탁을 둘러보면서 말을 하자 수저를 내 앞에 내밀던 여자가 웃으면서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안주 만드는 걸 좋아해서 낙지볶음을 했구요. 이건 부추를 넣어 끓인 올갱이국이에요. 해장국으로는 그만이지요."

"올갱이?"

"다슬기 말예요."

"아아...그럼 묵혔던 숙취를 해결해 보도록 하죠. 하하..."

", 별로 술은 안 드시던데. 오늘도 반주나 하죠. 제가 술을 좋아하니까."

좋죠."

나는 위장이 좋지 않아서 발리에서 나오자마자 약을 계속 먹고 있었다. 약국에서 일 년 정도 복용하길 권해서 거의 반년 분량을 미리 조제해 놓은 상태였다. 요즘에 신경 쓰는 일이 많아 위경련까지 종종 찾아오곤 했다. 술을 먹어서는 안 될 상태이지만 오늘만큼은 여자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했다. 내가 갖고 있는 여자에 대한 감정을 애정이 아닌 동료 의식 정도로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알고 있어야만 했다. 요즘에는 애정 없이 섹스를 하는 커플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여기 온 것은 마음의 끌림이긴 해도 아직 사랑이라는 느낌은 아니구요."

내가 머뭇거리면서 그 말을 꺼내자 여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시선이 베란다 창 쪽으로 옮겨갔다. 여자의 얼굴은 잠깐 동안 어스름이 스며드는 바깥 풍경처럼 어두워졌다.

"사랑? 글쎄요... 문호씨가 온다 했을 때 나도 막지 않았어요. 아이러니 하지만..."

어리석게도 여자는 늪 앞에 발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 걸음을 더 떼고 있었다. 여자는 흐려졌던 얼굴을 이내 폈다. 여자의 속내야 어떻든 관계없었다. 최종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여자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제 만화 어떻든가요?"

"만화요? 아직..."

여자가 입에 대었던 소주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천천히 읽으셔도 되고요."

"만화란 말 몇 마디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잖아요. 토막 쳐놓은 걸 연결해 가며 읽기가 싫거든요. 이상하게도 드라마 극본이나 시나리오도 읽히지 않아요."

내 작품에 관해 무관심한 것 같아 실망스러웠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약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 위장에 대한 생각이 앞서면서도 잔을 들어 소주를 들이켰다.

"하긴 만화는 십 대나 즐겨 읽는 거지요."

여자가 낙지볶음 접시를 내 앞으로 밀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아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반 가까이는 만화를 좋아할 겁니다. 아직도 무협이나 만화는 인기 유지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영상매체에 밀려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십오 년 가까운 세월 만화를 써온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감각이 예민했다. 만화업계도 기업처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 불황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소설이나 시는 어떻겠어요."

"인터넷 발달이 문제라고 하죠. 제가 쓰는 무협이나 만화도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죠. 야설이라든가 십 대의 수준에 맞춰 쓴 글들이 인터넷 공간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어요. 이런 시대이니 인내를 하며 읽어야할 소설들은 맥을 못 춘다고 봐야죠."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문장이 좋고 내용이 깊은 소설도 얼마든지 있긴 하죠. 그런 소설들이 많은 독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나처럼 재능이 없는 글쟁이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나는 책이 아닌 에이포 용지만 끌어안고 있다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생각하면 문호씨가 부럽기도 해요. 만화 쪽으로는 정평이 나 있으니까."

"에이...만화는 만화일 뿐이죠."

"그래도요. 문호...대문호... 좋은 이름이에요. 실명인가요?"

"그럼요."

실은 가명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많은 돈을 주고 이름을 짓는 건 이름이 그만큼 중요해서일 것이다. 이름이란 유명한 연주자가 소장한 값나가는 악기와 같은 거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유령 작가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내 필명은 보통 사람들이 쓰는 이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십 대 그즈음에는 서문호라는 작가의 소설이 서점마다 좍 깔릴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 라이벌 관계였던 친구 중 하나는 문단에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나는 문호라는 이름에 익숙해있었지만 정작 만화계에서는 유령 작가였기 때문에 그리 쓸모가 있는 필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료 작가들은 내 실명이 문호인 줄 알고 있었다. 여자가 계속 문호 어쩌고 하더니 다른 소주병의 뚜껑을 비틀었다.

"그만 마셔요."

나는 소주병 뚜껑을 닫아 식탁 아래 놓았다. 여자는 아쉬운지 바닥을 내려다보다 일어나 식탁을 치웠다.

알코올은 위장의 내용물 중 단 몇 %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이든 여자라는 부담감을 없애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시트만 있는 침대에 여자와 나란히 누웠다. 섹스를 위해 스탠드가 꼭 구비되어야할 이유는 없었지만 형광등 불빛이 너무 밝아서 진료대에 누운 환자처럼 어색한 느낌이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잠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워?"

취기 때문에 혀가 꼬인 목소리로 여자가 내게 물었다. 침대에 함께 누워있기 때문에 쉬이 반말이 나온 것 같았다. 담배를 물었던 것은 어색함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저녁 먹은 후 이를 닦지 않은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벗기려면 갑각류의 껍질처럼 애를 먹을 것 같았다. 다만 저녁에 섭취한 알코올 제법 되어서 스스로 벗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나는 간혹 꿈속에서도 줄담배를 피는 걸요. 그러니 끊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 담배는 배우지 말아야겠군."

여자가 중얼거리면서 왼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손에 뭐예요?"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여자가 왼손을 재빨리 등 뒤로 감췄다.

"이리 내봐요."

나는 여자의 왼팔을 잡아챘다. 여자의 손이 순식간에 뒤집혀 손바닥이 드러났다.

"흉터야. 가스렌즈를 짚었지."

여자는 의외로 쉽게 이유를 밝혔다. 흉터는 자잘한 동그라미 형태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반반하게 펴놓고 붓두껍으로 찍은 것처럼 흉터가 아물어 있었다.

"어쩌다가?"

"후후...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6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죽기엔 딱 알맞은 높이구나 생각은 늘 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지. 처참한 모습을 나는 이미 봤거든. 하얀 골수에 붉은 피가 엉겨있고 그 옆에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어."

여자는 그 장면을 떠오르는지 턱을 치켜들고서 눈을 위로 치켜떴다.

"에이...죽는 용기로 살아야 한다고 하잖아."

"하긴 그래. 일 년에 너덧 번씩 맞고 산다고 죽으면 안 되겠지. 아이들도 있으니까..."

"맞았어요?"

"그럼. 각목으로 맞을 때는 잘못했다고 빌었지. 다섯 대인가 맞은 다음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인간의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샛노란 피부에 무표정했고 눈의 흰자위가 빨갛게 달아 있었어. 두 손으로 싹싹 비니까 다음부터 조심하라면서 그만 때리드라야. 그런데 참 우습지. 왜 맞을 때보다 빌고 있을 때 모멸감이 더 하지?"

나는 연기 때문에 다소 흐릿해진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부분 맞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들죠. 힘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맞을 수밖에 없잖아요. 항복하는 게 그 당시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자가 내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나는 나와 만나던 첫날 포장마차에서 여자의 손놀림이 부자연스러웠던 기억이 나서 내 손바닥으로 여자의 왼손바닥을 가만가만 쓸었다. 마구 들이킨 연기가 호흡기와 식도를 구분하지 못했는지 여자가 연기를 토해내면서 캑캑거렸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태우지도 못하면서..."

내가 여자의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를 뺐다. 이로 물고 있었는지 담배가 부러졌다.

"한 군데 더 볼래? "

여자가 재떨이에 필터를 뱉더니 웃으면서 이마의 머리를 제쳤다. 다지류처럼 생긴 흉터였다. 오 센티 가까이 될 것 같았다.

"개다리소반에 찍힌 거야. 아프진 않고 피만 콸콸 쏟아졌어. 브래지어 때문에 피가 흘러내리지 못했나 봐. 가슴의 복판이 빨갛게 젖었지. 여기 말야."

여자가 젖가슴 사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대로 삼십 분만 버티면 죽었을 수도 있는데 살고 싶어서 그 남자를 따라 병원에 갔네. 후후..."

나는 말없이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가스렌즈 받침대를 치우고 손바닥을 대니까 손에 물이 묻어 있어 지지직 소리가 나더군. 소리보다 오징어 타는 냄새에 비위가 상했어. 그 후부터 나는 오징어는 절대 먹지 않아."

"잊어버려요. 내가 옆에 있잖아."

내 목에 팔을 두르면서 여자가 씩 웃었다. 웃음에 앞서 밀려 나오는 여자의 앞니 두 개가 유난히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자의 입에 입술을 대면서 소곤거렸다.

"이크...이를 안 닦은 것 같은데..."

"사포지 같은 내 혀로 당신의 이를 닦아줄게."

쏙 밀려 나오던 혀가 완강하게 다물린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당신의 입에서 나는 담배 냄새는 내겐 향기예요. 박하 향처럼 쌉싸름한 향기..."

여자가 속삭이면서 두 눈을 감은 채 혀로 칫솔질을 하듯 내 이를 더듬었다. 속눈썹에 느린 속도로 바람이 지나가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붙인 채 상체를 눕혔다. 타액이 혀에 의해 섞이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여자가 하반신을 밀착해왔다. 길게 내민 개 혓바닥처럼 축 쳐져있던 내 성기가 서너 번 진저리를 치더니 발딱 일어섰다. 내가 팬티를 벗자 여자가 이불을 당기고 그 속에서 속옷을 벗었다. 나는 덮었던 이불을 밀어버리고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갔다. 여자가 억센 팔 다리로 내 몸을 감았다. 마치 내 몸이 함몰되어버릴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여자는 몸을 천천히 움직였고 몇 달 동안 수음으로 견디어 온 나는 허겁지겁 여자를 탐했다. 나는 짐승처럼 본능에 충실한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 여자와 리듬이 맞지 않았다. 상대가 발리의 L이었으면 하는 잡념까지 꼬여 들면서 갑자기 내 성기가 바람 빠지듯 주저앉았다.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뜨니 여자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엎드리게 해 놓고 어깨뼈부터 마사지하듯 손을 놀렸다. 여자의 호흡에 신음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기가 되었지만 섹스를 시작하자마자 사정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절정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린 채 잠을 청하던 여자를 끌어당겨 안았다.

 

6

"어쩜 그리도 잠을 잘 자? 남의 집인데..."

그 소리에 눈을 뜨니 벌써 아침이었다. 말하는 여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글쎄...선배가 편해서였겠지. 실은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자거든요."

"거짓말."

여자가 자르듯이 말했다. 여자의 아마에 브이자로 잡힌 주름을 바라보면서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여자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머리칼처럼 가느다란 음모가 손에 잡혔다. 여자가 내 손을 밀어내자 귓불에 입술을 댔다. 세수하기 전이라 이미 노화가 진행되는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피부 안에서는 벌써 검버섯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에 떨어졌던 것은 몸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싱글 침대를 쓰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밤에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들과 잠자리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했다. 얹혀사는 그 집의 내 방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크기였다. 목적만 아니라면 한 달만 푹 쉬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배 여기서 좀 묵으면 안 될까?"

여자가 턱을 끄덕거렸다.

"그래. 하숙비만 낸다면 얼마든지..."

"하숙비를 내면 있을 곳이야 여기 말고도 많겠죠."

"그럼 관두고..."

싱거운 결론이었다.

"소설 공부 시작한 지가 10년째라면 그때 선배의 나이가 서른여덟쯤?"

"그렇지."

그 나이에 시작한다는 건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지명도가 있는 모 작가가 사십이 넘어 등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십 대에 대학에서 글을 써보았다거나 중간중간에 공부를 해서 문장의 노하우라도 있어야 가능한 얘기였다. 십 년 정도는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소설 쓰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습작생들의 얘기였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소설 쓰기를 시작하면 문장이 구태의연함이나 식상함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직도 문장이 좀 식상하다는 느낌이고 제대로 만든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을 늘 갖거든. 물론 동아리 활동을 할 때는 잘난 맛에 쓰기도 했지만..."

여자가 웃음을 띤 채 얘기를 하면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가벼운 마찰만으로도 친밀감이 느껴져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어디서 공부를 했어요. 선배?"

"문화센터를 거친 후 작가가 운영하는 전문센터에서 했는데 문화센터는 다니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다만 내가 맞춤법까지 엉망이어서 처음에는 유명 작가가 운영하는 전문적인 곳엔 갈 엄두도 못 내긴 하였지만..."

나와는 달리 여자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려는 의지가 강한 여자였다. 게다가 감춰야할 부면까지 굳이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품격이 낮아 보이는 것 같았다. 며칠 있다 보면 나는 여자 가족의 치부까지 다 알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사고의 미숙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미사여구를 남발해서 소녀티를 벗지 못한 삼류 소설이 떠올랐다. 조금 더 후하게 점수를 준다면 중년의 불륜이나 삼각관계를 다룬 드라마 같은 소설이나 쓰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 소설 좀 볼 수 있을까?"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물었다.

"? 문호씨가 봐주는 거야 영광이지."

여자가 이불을 걷어내면서 일어났다. 도르르 말린 팬티를 빠른 속도로 꿰어 입고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몸에 웃옷을 걸쳤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팬티와 티셔츠를 입었다. 거실로 나가자 벌써 프린터 기계에서 인쇄물이 빠져나오는지 같은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인쇄물을 챙기는 여자를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이십 대 때 습작을 하면서 동아리 멤버들의 작품을 대했었다. 젊은 층들의 습작품들은 대부분 자신의 고뇌를 그저 나열해 놓았을 뿐이었고, 나이가 든 여자들은 소설인지 수필인지 통 분간할 수 없게 써 왔었다. 품평을 하기 위해 인내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여자가 컴퓨터에서 인쇄물을 받아 내는 동안 발을 까닥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바깥에서 매미가 빽빽거리다가 멈추곤 했다. 읽는 동안 곤욕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까지 뜨거웠다. 어느새 내 오른쪽 다리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떨거나 발을 까닥거리는 건 지루함이나 권태로움의 표현이었다.

", 읽어봐."

여자가 몸을 돌려 인쇄물을 내 손에 건네주었다. 읽어 내려가는 순간 등줄기를 훑고 가는 무엇인가에 내 고개는 뻣뻣해지고 있었다. 늘 연필을 쥐고 있어 간혹 쥐가 나는 오른 손의 느낌이 이상해서 손을 쥐락펴락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가 흐르는 소설이었다. 일단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호흡 조절을 했다.

"인상이 왜 그래? 내 소설이 좀 그렇지?"

"아니... 단지 시점이 조금 불안하고 현재와 과거의 교차점이 매끄럽진 못하지만 잘 쓰셨네."

내 반응에 긴장했던 여자의 얼굴에 서치라이트가 지나가듯 밝아졌다. 여자는 잇몸까지 드러나 보이도록 웃더니 다시 컴퓨터 쪽을 향했다.

"하나 더 뽑아 줄께. 도대체 난 내 작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연기가 빙 돌아 지나는 여자의 머리 뒤쪽에도 흰 머리칼이 제법 많았다. 자신이 쓰는 소설과는 달리 너무도 평범하게 늙어 가는 여자였다.

"다른 거 인쇄했어요?"

침묵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다소 큰 소리로 물었다.

"... 다 되었어. 아마추어 작품을 보려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텐데..."

여자는 중얼거리며 뽑아낸 인쇄물을 가지런하게 맞추느라 용지를 식탁 위에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았다. 스테이플러로 찍어주는 원고를 받아 선 채 읽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서사적 구조의 작품이었다. 여자는 궁금증이 일었는지 읽어 가는 동안 컴퓨터 앞 의자를 돌려서 나를 줄곧 쳐다보았다.

"도입부가 너무 길어요. 그리고 상징적 의미인 꽃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주 나와서 뻔하달까..."

"그래. 그럴 거야. 아무래도 서투니까."

여자는 실망한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서툰 건 아니고...뭐랄까..."

내가 뭔가 설명을 하려고 말을 길게 빼는데 여자가 인쇄되어 나온 다른 원고를 가져왔다.

"잠깐. 이번 거 봐봐."

그대로 가져와서 페이지가 거꾸로 된 원고였다. 원고를 읽는 동안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렸다.

"이거는요..."

나는 세 번째 원고를 들여다보면서 말을 꺼내었다. 식탁 귀퉁이의 토끼 모양 장식물에 꽂힌 연필을 집어 들었다. 여자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어제 먹은 술 탓에 여자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상당히 좋은데 몇 군데 손 봐야 해요. 이 부분... 설명 없이 남자가 등장하잖아. 이건 쓸데없는 친절이고."

내가 설명하는 동안 여자는 긴장하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고서도 나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음주벽으로 보자면 알코올성 지방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거의 눈동자가 누렇고 피부가 거무죽죽했지만 여자는 눈의 흰자위가 깨끗한 편이었고 피부도 맑아 보였다. 여자를 보고 있자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소설 쓰는 방법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연필을 식탁에 놓으며 소파에 등을 붙이고 꼿꼿이 앉았다.

"앞으로도 공부를 많이 해야겠지?"

"잘하시는데요. 프로라 할만한 실력인걸."

물론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아마추어는 결코 아니었다.

"정말?"

과장된 내 표현에 여자는 활짝 웃으면서 내 얼굴에 얼굴을 붙였다. 어색해서 나는 상체를 뒤로 젖혀 여자와 간격을 두고서 조목조목 짚어 설명했다. 내가 습작품 위에 따옴표를 찍거나 포물선을 그리는 동안 여자는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끝부분의 문장과 대화의 위치를 바꿔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내가 만든 수백 권의 만화가 마치 배설물처럼 느껴졌다. 20대 때의 내 재능은 만화 스토리를 만드는 동안 훼손되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속기라 할 수 있는 스토리 작업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만화란 곧바로 돈이 되는 상품이었다. 그건 내가 소설로 방향을 틀 때 족쇄의 구실을 할 수도 있었다.

맨 처음 만화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 당시 내게 쥐어진 돈은 윤택한 생활을 할만한 액수였다. 차츰 나는 소설을 쓰고 시를 쓰던 시절에서 멀어져갔다. 만화 시작한지 삼 년째부터는 신문에 연재된 만화에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료 작가들의 부러움과 시샘도 받았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니 내리막도 있을 수밖에. 화려했던 시절도 잠깐이었다. 과다한 분량의 스토리 작업은 삶을 풍족하게 했지만 글의 질이 나빠지는 역할도 했다. 때로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빚에 내몰리게 되자 마치 추위에 손이 곱아버린 사람처럼 연필조차 잘 안 쥐어졌다.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정신적인 공황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몇 달 동안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벽 바라다보기를 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여자를 사이버 공간에서 만났고 돌파구 마련을 위해 짐을 싸들고 이 집으로 들어 온 것이었다.

"이제 아침밥 해야지."

여자가 중얼거리며 밝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과음을 한 것처럼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설사할 조짐이었다. 뱃속을 무엇인가가 빠른 속도로 돌면서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나면 그건 하루 이틀에 나을 병이 아니었다. 내가 먹는 위장병 약은 소화제가 들어 있는데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위장의 조건이 열악한데다가 신경성 위염까지 겹친 상태였다. 배를 문지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주방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여자의 종아리에 얽힌 정맥류가 눈에 띄었다. 여자의 다리가 덩굴에 감긴 고목처럼 보였다. 험악한 종아리와는 달리 여자의 발걸음은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다리를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갔다.

 

7

"선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 읽었어요?"

여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첨 듣는 제목인데..."

국내에는 그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라서 그 책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거 세 권짜리 장편인데 읽으면 소설 쓰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예요."

1, 2, 3권이 각기 다른 이야기랄 수도 있고 같은 이야기랄 수도 있는 장편이었다.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접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앞으로 한 일 년 정도 100권 정도의 장편소설을 읽으시면 상당한 실력의 작가가 될 겁니다."

"100권씩이나?"

여자는 벌린 입을 얼른 다물지 못했다.

"많이 읽으면 그만큼 실력이 좋아지는 거니까. 물론 지금까지의 독서량도 상당하시겠지만..."

"아이고...백 권을 언제 다 읽을까."

"읽으면서 작품을 쓰면 되죠."

"그래... 집에 책이 구비되어 있는 게 아니니 인터넷이나 큰 서점을 뒤져봐야지."

", 없는 책도 있을 거야. 그건 헌책방에 가 봐요."

나는 헌책방을 뒤져서 열댓 권씩 책을 사 오기도 했었다. 물론 일반 독자가 아닌 작가 지망생이 취할 태도는 아니어서 헌책을 들고 도망치듯 서점을 나오곤 했다.

"고전은 읽으셨을 테고... 그 후에 쓰인 명작들도 많아요."

나는 여자가 읽어야 할 책을 죽 나열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십 권 이상이나 되는 제목을 일일이 적었다.

"문호씨가 내 소설 지도를 좀 해 주라. 어차피 문호씨 형편이 어려우니까 내가 도우면 될 것이고..."

예상 밖의 말이 여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여자가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냐. 이제 문호씨도 만화 일은 그만해야지. 소설을 쓰지 못하면 절름발이 인생이 되잖아. 그렇다고 내가 생활비를 다 댈 수는 없겠지만 일부는 댈 수 있어. 문호씨가 벌은 돈은 모아 줄 테니 이삼 년 후부터 소설 쓰기를 하는 거야. 어때?"

어쩌면 좋은 제안이었다. L이 없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선택했을까? 아니었다. 찾아보면 이 정도의 조건이 될만한 여자는 많을 것 같았다. 나야 이미 소설을 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소설 쓰기를 하는 여자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만화계에서는 알아주는 작가이니 좋은 조건을 가진 여자 만나기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삶에 찌들려 지낼 땐 내 스스로를 양아치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거야말로 작가들만이 가질 수 있는 프리미엄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불안정한 상태라 여자의 제안이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의 얼굴에 L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당장 발리행 비행기를 타고 싶어졌다.

발리는 휴양지라서 벼라 별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라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스물여섯인 L과의 16년이라는 나이 차이도 특별한 건 아니었다. 중년의 한국 여자들이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하는 것은 현지의 젊은 남자들과 섹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체면은 따질 필요가 없으니 발리는 내게 낙원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만화와 무협의 계약이 잘 이뤄지고 생활이 안정되면 L과 발리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었다. 물론 결혼식이란 혼인신고도 포함했다.

여자와 만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봐서는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여자가 원한다면 혼인신고는 아니더라도 내가 이혼남이라는 증거물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꺼낼 말을 여자가 먼저 꺼내어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어서... 실은 선배랑 살게 되면 형식적으로라도 가족이나 친구들을 모아놓고 조촐한 식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증표로 반지도 마련하고요."

"아냐.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내 호적에는 아무도 올리지 않을 거야. 그저 한 공간에서 서로를 도우며 지내자는 거지."

여자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내 말을 곧바로 잘랐다. 내가 바라는 대답에서는 빗나갔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자네 집에 오기 전에 L에게 전화를 하면서 그런 말을 꺼내긴 했었다. 재수가 없으면 다른 여자의 호적에 올라갈 수도 있을 거야. 나는 웃고 있었지만 L은 쀼루퉁해졌는지 잠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웬만하면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게. 믿지? 그만한 일에 수선을 피울 L은 아니었다. 다만 좀더 나은 결과를 위해 여자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선배네 가족과 함께 만나면 어떨까?."

"내 가족? 아이들?“

아니 형제간들 말야. 어른들도...”

에이...관둬. 내가 이상한 남자 만날까봐 신경 쓰는 사람들이니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

"하긴 그래. 선배, 내 돈이 제대로 들어오게 되면 좀 더 큰집으로 이사하자. 이 집은 어둡고 좁아."

"집이 좁으면 글을 못 쓰나? 난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개인 주택은 춥던데..."

"그래도 넓은 집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요즘엔 시골로 가면 새로 지은 넓은 집들이 많아요. 돌아다니면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언제 함께 찾아보자고요."

여자의 집은 글쓰기에는 절대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함께 살 일이야 없겠지만 여자는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었다. 함께 섹스를 나눈 사이였고 한때 신세를 진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는 격이겠지만 무엇이라도 한 가지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여자는 내가 말을 하는데도 환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여자의 눈빛을 보니 생각이 갈등의 교차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선배, 구체적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는 말이 없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마무리를 지었다. 침묵이 흐르자 여자가 긴 바지로 바꿔 입었다.

"저녁 먹어야지. 뭐 사다 줄까?"

담배 몇 값을 사다 달라고 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빼내 주자 여자가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여자가 들고 온 봉지에는 막걸리가 담겨있었다. 여자는 막걸리를 식탁에 올려놓은 채 햄과 새우, 김치를 썰더니 볶음밥을 만들었다. 빠른 손놀림이었지만 간이 입에 딱 맞았다.

역시 선배는 음식솜씨가 좋아.”

밥을 먹은 그릇에 막걸리를 따르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는 한잔을 홀짝 마시더니 한잔을 더 따랐다.

마실래?”

내가 고개를 젓자 여자가 마셨다.

"문호씨가 만화를 쓴다고 했을 때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지. 게다가 피 뽑아서 술 먹고 돈 떨어지면 다시 피를 뽑는다며?"

피 뽑아 술 먹었다는 말은 내가 번 돈을 함부로 쓰며 살았다는 뜻이었다. 말은 막 나갔고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자신의 소설에서처럼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냉기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시시하다는 생각에 내 만화를 안 읽는구나."

나는 가까스로 말을 뱉어냈다. 언짢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느라 뻣뻣해진 얼굴에 가까스로 미소를 담았다. 발리의 L은 내게서 만화 공부를 할 때면 나를 깍듯이 대했고 스승님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물론 L은 애교 차원일 수도 있겠지만 여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만화 스토리도 쉽게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미안. 나는 진지한 글쟁이가 되고 싶거든."

여자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선배가 옳은 말을 하는 거예요. 이런 상태가 오다 보니 만화의 길로 들어선 게 후회막급이네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는데 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여자는 내가 던져버린 라이터를 들어 단번에 불을 켰다. 나는 가슴속의 화염까지 끌어 낼 것처럼 연기를 토해냈다. 만화계에서는 유령 작가일 수밖에 없었지만 만약 소설을 쓰고 있다면 지금쯤 나는 중견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레벨이 맞지 않아 이 여자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허점이 많은 소설을 투고한 습작생과 심사위원으로나 만났을까? 낡은 가구가 자아내는 음습한 분위기의 거실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오래 쓴 가구에도 귀신이 붙는다는 말처럼 가구는 거실분위기를 한층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불을 켜는 걸 잊는 건지 늘 어둑어둑한 상태로 앉아 있곤 했다.

"솔직히 저는요. 예쁘고 세련된 여자들을 좋아하는 게 아녜요. 선배처럼 열정을 가진 여자가 좋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선배가 열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이 더 많았더라도 좋아했을 거예요."

내 곁에 L이 없다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사전에 연상의 여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늙음이란 죽음보다 못하다는 속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로서 생명이 다할 이 여자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늙은 여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스트레스일 것 같았다. 전처도 나에 비해 일곱 살이나 젊었고, 우유처럼 희고 싱싱한 피부를 지닌 L은 실제 나이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나는 L을 볼 때마다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발리 해변에서 L과 장난을 칠 정도로 금방 친숙해졌다. L이 간혹 아저씨라고 부르다 반말을 하면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나는 약속대로 L을 집으로 데려 갔었다. L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만화를 뒤적거리더니 낱권 하나를 읽었다. '이 남자 주인공에겐 카리스마가 부족하네. , 제임스 본드를 여자 스파이가 결국 사랑하는 줄 알아요? 외형적으로는 부드러운 이미지의 남자인데 내부적으로는 단단한 몸과 동시에 섹스어필함을 가졌기 때문이지. 섹스를 끝내주게 잘할 것 같은 남자로 보이잖아.'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영화를 빗대어 당돌하게 표현하는 L이야말로 섹시어필 그 자체였다.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나는 L의 입술을 훔쳤다. L과의 첫 키스는 아이 적에 혀로 핥던 야생화 꽁지처럼 달콤했다.

"정말 그럴까? 믿기지 않는데..."

여자가 튀어나온 앞니를 드러낸 채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이미 키스는 했지만 바라보기에도 거북스런 입이었다. 스무 살이 더 많았더라도 라는 내 표현에 고무되었는지 여자의 볼에 붉은 기가 잠깐 돌다 사라졌다.

"결코 행복예감은 아닌 것 같아."

막걸리 한 병이 비워지자 여자가 중얼거렸다.

"선배...잘할게."

"글쎄...후후..."

여자가 식탁 한쪽에 놓여있던 과일주가 담긴 유리병 뚜껑을 돌리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바람에 요동치는 나뭇가지처럼 여자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여자는 붉은 빛을 띤 과일주를 줄곧 따라 마셨다.

"빨리 소설 써라. 너는 유능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야."

여자는 머리가 무거운지 고개를 푹 숙이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여자의 정수리는 머리털이 부족해서 여러 갈래로 길이 난 것처럼 보였다. 여자가 술잔을 잡으려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나는 여자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알았어요. 선배. 근데 선배는 술을 끊고 나는 담배를 끊어야겠다."

"? 안돼. 나는 술잔 들고 죽을 거야. 다만 우리 아버지처럼 정신병원에서는 죽고 싶지 않아서 하루를 걸러 마시고 있지."

잔을 마저 비우지도 못하고 여자가 일어섰다. 여자는 유리병 뚜껑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서 휘청휘청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를 쳐다보던 나는 병뚜껑을 닫았다. 욕실에 들어간 나는 이만 닦고 나와서 침대에 누웠다. 옷을 입은 채 엎어져있던 여자가 코를 골았다.

 

8

슈퍼에서 사 오는 반찬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며칠간 여자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생선이 밥상에 올라와야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곤 했다. 여자는 나와는 반대 식성이었지만 끼니때마다 어류가 한 가지 정도는 식탁에 꼭 올라왔다. 밥을 먹을 때 반찬에 대한 칭찬을 했던 것은 그런 점에 대한 표현이었다.

여자와 나는 종일 대화에 빠져 있곤 했다. 때로는 오전 10시쯤부터 시작한 대화가 저녁 9시나 되어야 끝이 났다. 그런 날은 침대로 가기 위해 끝을 맺었다고 해야 옳았다. 여자가 술에 몹시 취했던 날만 빼놓고는 섹스를 했다. 심혈을 기울여야했기 때문에 내겐 스파르타식 섹스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여자의 절정을 위해 사정시간을 늦추려고 애를 썼다. 여자는 시나브로 타는 숯불 같았다. 천천히 오르고 천천히 식어 내게는 정말 지루한 섹스였다. 내가 오랄 섹스를 시도했지만 L에게서 듣던 그런 괴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섹스란 가학성이나 변태성을 띠어야 재미있는 것이지만 여자는 지나치리만치 무덤덤했다. 음식을 잘하는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한 것 같았다. 전날 밤에도 섹스를 지루한 상황으로 몰고 갔던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나를 보고 헤헤거리며 웃었다.

예쁜 여자는 소박을 맞아도 요리를 잘하는 여자는 소박을 맞지 않는다는데...그건 서양 속담에 지나지 않나 봐.”

아침부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혹 섹스와 연관 있는 말인가 해서 나는 되물었다. 여자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 버림받았잖아.”

버림받았어? 누구에게?”

몰라도 돼.”

여자는 웃기만 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한국 속담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데리고 살 수 없다는 게 한국 남자들의 영원한 취향이었다. 여자의 남편도 그랬을 것 같았다. 아마 여자는 앞으로의 삶에서도 남자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아야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밥해야 하는데 일어나기 싫다야. 딸도 올 거니까 반찬거리도 사 와야 하는데...”

밥은 반찬 때문에 못 하겠고, 슈퍼에 심부름이나 갔다 와야지.”

아이구... 고맙네요. 아저씨.”

내 팔을 베고서 미적거리던 여자가 일어났다. 나는 여자가 거울 앞에서 머리 만지는 걸 누워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섹스는 재미없었어도 눈만 감으면 잠에 빠져들곤 했다. 아침이면 머리 속이 너무 개운해서 건망증 환자처럼 잊은 걸 찾아야 할 정도였다. 며칠 지나자 여자의 집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희미해질 때가 있었다. 일주일 이상을 지내다보니 아침에 깨어도 내 집 같았다. 게다가 서로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털털한 면도 그렇고 한없이 얘기하려는 욕심도 그랬다. 얘기를 하다 눈으로 천장을 더듬는 것까지 여자와 나는 흡사했다.

여자의 딸아이가 온다 하니 그만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딸과 신뢰를 쌓으면 더 좋은 결과물이 얻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슈퍼에 가기 위해 티셔츠 위에 조끼를 걸쳤다.

딸아이가 도착했다고 터미널에서 전화를 하더니 10여 분 후쯤 현관문을 밀고 들어 왔다. 현관 쪽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덩치가 큰 아이였다. 쳐다보는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고개만 꾸벅했다. 이미 내 얘기를 했는지 여자와 딸은 별 대화가 없었다.

엄마...”

여자의 딸은 내가 여자와 침대에 누워 얘기하는 동안 문을 두들기며 불렀다. 염탐하려는 것 같진 않았지만 빠끔히 열린 문으로 눈빛이 밀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짙은 눈썹에다 눈빛까지 유난히 강렬해서 일본인처럼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

밥 좀 줘.”

얘는... 차려 먹잖고...”

여자는 딸아이를 귀찮아하는 거 같았다.

내가 차려줄까?”

아냐, 냅둬.”

여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바람소리를 내면서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둘 사이의 대화를 얼핏 들으니 딸이 토라져 있는 것 같았다. 여자를 닮아 딸도 팔등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낙제점을 받을만한 몸의 부위는 남자처럼 벌어진 어깨였다. 허리에서 엉덩이 쪽으로는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었지만 배에 지방질이 끼어있는지 의자에 앉으니까 겹쳐진 살이 옷 위로 드러났다. 여자가 처녀였을 때의 몸매가 상상되었다.

선주야. 회사 생활 고달프지 않아?”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나는 그렇게 물었다.

힘든 줄은 모르겠지만 지루하긴 해요. 12시간씩 일해야 하니까요. 중간에 쉬는 시간이 끼어있긴 하지만 시간이 참 안가거든요.”

야야...그게 뭐가 힘드냐. 내 나이가 되어봐라. 식당의 설거지도 그렇고 네다섯 시간 청소를 하다 보면 걸레질에 따라 왜 사냐는 소리가 가락처럼 흘러나올 정도야.”

딸이 눈을 모로 뜨면서 입술까지 돌아가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어쩌다 하는 일이잖아.”

이런. 엄마가 이십 년 가까이 맞벌이를 했다는 거 잊어버린 모양이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젠 일하기도 벅찬 나이야. 낼모레이면 오십이잖니. 난 쉬면서 소설만 쓰고 싶어.”

나는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어 커피만 홀짝거렸다. 여자가 식은 커피를 단번에 마셨다.

어이구 커피에서 담배 맛이 나네. 잘못 탔나봐.”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했다.

냉동 건조 커피는 원두커피와 달리 씁쓰레한 맛이 나.”

나는 여자와 딸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했다. 딸아이는 커피 잔을 아예 들지도 않았다. 딸아이의 볼 아래쪽 근육이 딱딱해 보였다.

다른 애들은 부모들이 등록금 다 해줘. 나나 공장 다니지.”

엄마가 이혼하면서 그런 말했잖아. 대학 등록금은 네가 벌어 다니라고..”

엄마가 돈도 안 되는 소설에 매달리니까 나까지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말을 하면서 딸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 , 앉아봐.”

엄마 맘대로 살잖아.”

...”

목청을 높이던 여자가 팔을 뻗었지만 허공만 내젓다 말았다. 딸은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기더니 성큼성큼 방으로 가버렸다. 여자가 금방 고개를 떨어뜨렸다. 식탁 유리에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철없는 애 말이니 신경 쓰지 마.”

나는 휴지로 유리를 문지르면서 한쪽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자의 눈물이 멎은 것을 보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됐어요. 아저씨는 상관 마세요.”

에이...그럼 안 되지.”

외면하던 딸아이는 얼굴을 돌려 똑바로 쳐다봤다.

아저씨가 도와주실 건가요? 손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죠.”

아이는 차갑게 말을 뱉었다. 나는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다 시선을 피했다. 맞부딪는 건 되도록 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어. 하지만 엄마에게 사과는 드려야지.”

나를 쏘아보던 눈빛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아이가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는 곧장 거실로 갔다.

엄마. 내가 힘들어서 그냥 해본 소리야. 난 소설 쓰는 엄마가 자랑스러워. 친구들이 나보고 부럽다고 하는걸.”

여자가 고개를 들고 딸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붉혀진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힘들어도 체험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해라. 너도 글을 쓰려면 고생을 고생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야.”

성대가 비좁아진 것처럼 여자는 가까스로 말을 토해냈다. 딸아이는 더듬거리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엄마, 난 사람이 많은 데서 일하기가 싫어. 때로는 내 몸의 일부가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딸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선주야. 걱정하지 마. , 타자 잘한다며? 아저씨가 무협을 계약하게 되면 계속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데 네가 하면 되겠다."

고심하고 있던 차에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원고는 여자에게 맡겨도 될 분량이었다. 계약 후의 타자는 발리의 L 몫이었다.

"그래요?"

"그럼."

딸아이가 눈빛을 누그러뜨리긴 했지만 여전히 의아해하는 눈초리였다. 여자보다 훨씬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복잡한 표정을 가진 아이였다. 나는 딸이 자칫 일을 망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선배도 걱정하지 마. 글만 제대로 쓰게 되면 고생 안 시킬 거야. 한 달에 이 백만 원은 가져다줄게."

"에이...믿지도 않는다."

여자가 오리주둥이처럼 입술을 내밀더니 눈을 흘겼다.

"정말이야. 옛날에는 오백만 원씩 벌었어. 못 믿겠으면 통장 복사해서 보여 줄게. 요즘 출판사 사정이 좋지 않아 못 받은 돈도 있고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글이 좀 안 써져서 그렇지. 무협도 조금 더 쓰면 계약할 거예요. 글이 안 되면 절에 가서라도 써야지. 한 달 후쯤엔 목돈이 들어올 것 같아."

여자의 표정은 밝아졌고 딸아이도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오후에는 여자의 딸에게 오래전에 시작해 놓았던 무협의 일부를 타자해 달라고 했다. 만화 콘티 작업이야 손으로 했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 자판을 익힐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십대 때 잠시 썼던 소설 습작도 나는 원고지에 직접 했다. 무협 원고는 에이 포 용지에 깨알처럼 쓴 것인데 흘림체라서 나 이외에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딸아이는 글쓰기 지도를 받았는지 내가 불러 주는 걸 정확히 타자했으며 비문도 가려낼 줄 알았다. 무협은 독자들의 흥미만을 위한 글이다 보니 내게 있어서는 치부나 마찬가지였다. 딸아이의 옆얼굴을 잠깐씩 쳐다보곤 했는데 아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타자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나는 아이의 타자 속도에 거의 맞춰서 원고를 읽었다.

딸아이가 여자에게 첫 독자라면 내겐 L이 첫 독자였다. L의 만화 스토리 공부는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었다. L이 만화에 대한 감성이 유난히 발달되어 있어 시작한 일이었다. 앞으로 L이 만화 스토리를 쓰게 된다면 나는 소설만을 쓸 계획이었다. 물론 그때 L은 만화 스토리를 만들면서 내 소설의 타자까지 겸할 예정이었다. 여자의 딸아이를 L과 비교하다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귀 앞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당기는 버릇이 있는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마지막 원고를 읽었다. 아이는 타자가 끝나자 컴퓨터 앞의 회전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다. 나는 인쇄물을 챙기고는 고개를 까딱하는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웃어 보였다. 아이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는데, 무심한 건지 아니면 냉소가 어린 건지 분간 못 할 정도의 미묘한 표정이었다.

선주야 잠깐만...”

내게 등을 보이고 섰던 아이가 고개만 돌렸다.

수고를 했는데 수고비를 빼 먹으면 되겠니?”

그 말을 하자 아이가 돌아섰다. 나는 도서 상품권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펼쳐 들었다. 갑자기 L이 활짝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진 속의 L은 친구의 어깨에 깍지 낀 손을 얹고 있었다. 둘은 대학에서 미모로 라이벌이었다. 노트처럼 얇은 L의 앨범에 있던 이미지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내 지갑에 넣어 두었는데 그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은 도서 상품권을 꺼내는 데 손이 떨려 꽉 쥐었다. 그때 마침 소파 앞쪽에 앉아있던 있던 개가 갑자기 일어섰다. 내 손에 쥐어진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내 지갑 쪽으로 다가왔던 아이의 시선이 개에게로 옮겨갔다.

, 줄 것이 아냐.”

손가락으로 개의 머리를 톡톡 치면서 아이가 말했다. 아이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다섯 장의 상품권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상품권으로 책 사 보거라.”

아이는 두 손으로 상품권을 받았다.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딸아이는 일박이일 동안 집에 있다가 갔다.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없는 공간만 찾아다니는 걸로 봐서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내 수첩에서 L의 사진을 봤다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여자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이가 겉돌 수도 있었다.

아이가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빌려 오는 걸 보면서 언제 영화나 함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개인적으로 만나겠다는 건 여자가 나를 신뢰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형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건 택시를 타기 위해 연립 앞길에 아이와 함께 서 있을 때였다. 일부러 나는 배웅을 나왔었다. 아이는 미적거리다가 전화번호를 내 수첩에 적었다. 나는 아이에게 차비를 쥐어주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9

딸아이의 태도로 봐서 남자가 들락거렸을 것 같기도 했다. 여자의 입에서 수첩의 사진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문득 애인이 있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가자, 나는 여자의 사생활이 궁금해서 흔적을 살폈다.

집에는 남자에게 필수품인 면도날은 있었지만 그 외 남자가 사용할만한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화장품이 대부분 값싼 제품이었고, 여자의 팬티가 거의 무색 계통인 것으로 보아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긴 남자가 좋아할 만한 매력이 거의 없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이 전적으로 맞을 리도 없었다.

"선배, 나랑 함께 산다 해도 연애는 맘대로 하세요."

소파에서 개를 안고 있다 생각 끝에 뱉어낸 말이었다. 여자는 치자색 플라스틱 수저를 빨다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결혼 후 외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물론 혼자 지낼 때는 남자와 연애는 했지만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어."

여자가 잘라 말하고는 아이스크림을 수저로 떠서 내게 내밀었다.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몇 숟가락 분량은 되어 보였다. 나는 목구멍에 걸릴 것 같아 힘을 주어 삼켰다.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식도에서 멈칫멈칫하다 겨우 내려갔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자유로워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글쎄... 그럴까?"

마뜩찮은 표정이었지만 여자는 반박하려 들지는 않았다.

"선배를 얼마 겪진 않았지만 엄청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배의 소설에서는 성적인 억압이 느껴진단 말예요.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거든요. 다만 섹스 장면은 잘 다루더라. 경험이 많은가?"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참내, 맘대로 생각해라."

실은 섹스에 대해 가르친다 해도 진도가 나가기 어려울 것 같은 여자여서 나는 껄껄 웃었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여자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내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열었다. 콘티 작업 보조자인 후배였다. 내 수입의 30% 정도는 후배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몇 달째 계산을 못해주고 있었다. 요즘에는 원고료가 얼마 되지 않아 그 후배에게 갈 돈은 거의 없었다. 나는 후배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베란다 창을 통해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눈높이의 산 밑 철로에 기차가 지나는 게 보였다. 절름발이가 다리를 끄는 것처럼 기차의 바퀴에서 절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배, 여윳돈 있어요?"

휴대폰을 닫은 후 한숨을 쉬며 내가 말했다. 여자도 대충 짐작은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여자가 씻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내 앞으로 왔다. 내가 비켜나자 여자는 통을 베란다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아니..., 근근이 살잖아. 나도 이젠 대출받아 살아야 해."

의외로 냉정한 말투였다. 하지만 여자처럼 단순하면서 솔직한 사람은 거의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설득만 잘하면 어려울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만화 스토리 작가 14년 동안 많은 내 손을 거쳐 간 무수한 양의 돈을 떠올렸다. 가장 씁쓸했던 일은 이혼 후 간혹 다니던 사창가에서였다. 나는 한 창녀의 고객이 되었고 얼마 후 그 창녀의 빚을 청산해 주었다. 그 여자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도움을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집에 들어와 6개월 정도 살았다. 담배야 맞담배를 피우면 그만이었지만 그녀는 무슨 일에든 절제라는 걸 몰랐다. 내가 냉정하게 대하자 집을 슬그머니 나가더니 그 여자는 다시 창녀 생활로 돌아갔다.

그 당시 내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기분이 내킬 때면 주변 사람에게 돈을 찔러주기도 했다. 그들은 막상 내가 필요해서 연락을 하니 대부분 떨떠름해했다. 뭉텅이로 돈이 들어오기도 했고 마음대로 가불해 쓸 수도 있었던 그 시절에 나는 저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넉넉하게 살던 사람이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은 출판사가 사경을 헤매니 나 또한 그 처지였다.

"출판사에 이천만 원이나 묶여 있어. 사장은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여자가 의자를 돌려 나와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나는 쓰다듬던 개를 내려놓았다.

"그럼 생활은 어떻게 하는데?"

"남의 돈으로 살고 있지. , 빚쟁이야. 그래도 선배 집에 온다면 받아 줄래?"

"밥이야 해줄 수는 있겠지."

여자가 내 발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리고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내 엄지손가락을 여자의 입술에 대자 입을 조금 벌렸다. 여자가 혀끝으로 내 손가락 끝을 간질거렸다.

"천만 원 정도만 있으면 모든 일이 풀릴 것 같아. 공과금이 가장 큰 문제고 카드 대금도 그렇긴 하지. 까짓거 빌린 돈이야 좀 미루면 되지만... 출판사 개자식들..."

"한 오백은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지만. 천만 원을 만들려면 융자 받아야 할 거야. 내 사는 꼬라지도 이렇고 해서 담보 융자 같은 건 받고 싶잖아."

"물론 담보 융자는 나도 싫으네. 선배...고마워. 내가 무슨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럼 오백만 어떻게 해볼까?"

여자는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의 무릎에서 발을 내리고 여자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갔다 댔다. 밖은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거실은 어느 정도 어두운 상태였다. 그동안 얘기를 하느라 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서 소파에 여자를 앉히고 식탁 의자에 있던 방석 두 개를 가져다 거실에 깔았다. 나는 방석에 무릎에 꿇고서 여자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반응이 없을 것 같던 여자의 몸에 내 입술이 닿자 조금씩 꿈틀거렸다. 여자의 몸이 빨리 젖지 않아 발기되었던 성기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나는 일부러 L과의 섹스를 떠올렸다.

한 아름이나 되는 태양이 바다 끝에 앉으면 하늘에서 바다로 붉은 물이 번졌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L의 몸은 금빛을 띠어 마치 인어 같았다. 기온이 약간 떨어지면서 L의 몸에 모래알 같은 소름이 좍 퍼졌다. 탱탱해진 L의 젖가슴에 방울토마토 같은 유두가 살짝 얹혀있는 듯이 보였다. L의 젖은 머리칼에서 비릿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혀끝에 닿는 L의 몸 구석구석마다 짭짤한 소금간이 배어 있었다. 자맥질을 하듯 바다로 뛰어드는 해를 보면서 L의 몸속을 파고든 내 몸은 절정을 향해 줄달음쳤다.

차츰 흥분이 되는 것 같아 여자의 가슴을 더듬으면서 눈을 떴다. 나이 든 흑인 여자처럼 시들시들한 수세미 모양의 젖가슴에 내 시선이 꽂혔다. 여자의 젖가슴은 정면을 향해있지 않아서 마치 유두가 삐뚤게 붙어있는 것 같았다. 힘차게 일어섰던 내 성기가 갑자기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계속 흐느적거리는 물건과 씨름을 하다 마스터베이션을 시작했다. 천천히 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기는 바람을 주입하는 길거리의 광고용 애드벌룬처럼 일어날 듯 일어날 듯하다 겨우 일어섰다. 반쯤 누운 자세의 여자가 두 팔로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10

문호씨는 토끼이고 내가 거북이라는 것 알고 있어?"

은행에 가기 위해 옷을 입던 여자가 거울 앞에서 하는 소리였다. 다소 엉뚱한 말이라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손에는 살이 굵은 빗이 들려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 선배가 나보다는 더 토끼에 가까운 얼굴인데..."

"내가 토끼같이 생겼나? 하는 짓은 미련한 거북이인데... 거북이는 토끼와의 경주에서 뻔히 질 줄 알면서 토끼의 제안을 받아들이잖아."

여자는 말을 하면서 머리를 빗던 빗을 놓았다.

"결국 경주에는 거북이가 이기잖아."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면서 말했다.

"그렇긴 하지."

여자가 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나는 여자가 말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그런데 하필 나는 토끼일까?"

"토끼는 영리하잖아."

여자가 정색을 하고 말을 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아이큐가 좋다는 걸 빗대어서 하는 말 같진 않았다.

"토끼는 낮잠 때문에 경주를 망치잖아."

나는 말을 하면서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로션을 바르더니 한참동안 뚜껑을 닫았다.

"그 결론은 머리 좋은 토끼가 제 꾀에 넘어간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지. 토끼는 토끼끼리 경주를 해야 하고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해야지 공평 한 거야."

"에이 선배도...그럼 우화라고 볼 수 없잖아."

"그건 그래."

여자는 애매하게 말을 시작해서 애매하게 끝내고 있었다. 대출을 받지 못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자가 썼던 날이 듬성듬성한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제대로 빗어지지 않았지만 입에 물고 있던 줄로 그냥 묶었다.

"정말 미안해."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챙기는 여자를 보면서 내가 말했다.

"약속이나 잘 지켜."

여자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걱정 마. 아마 한두 달 새에 다 갚을 거야."

물론 떼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잠시 빌리는 것일 뿐이었다. 오늘 손에 쥐어질 돈으로는 우선 카드빚과 공과금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발리행 비행기 삯과 한두 달 정도의 생활비만 마련되면 손을 더 벌릴 필요도 없었다. 몇 번 더 거짓말을 하면 발리행 비행기를 무난히 탈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약속을 꼭 지키는 놈이야."

신발을 신느라 펑퍼짐한 엉덩이를 쳐들고 있던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소설로 문단에 얼굴을 들이밀려면 오점을 남기지 않는 게 좋았다. 여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오겠지만 그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그때 해결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어제 내가 무협 원고 독촉 전화 받았잖아. 계약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계약금으로 삼백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여자에게 돈을 지금 더 받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물론 무협 계약을 하루 이틀에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계약금을 원하는 대로 받는다는 것도 미지수였다. 여자가 책을 낸 적이 없어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여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내 무협 소설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여자가 700만 원을 대출하겠다는 대답을 한 건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시계를 보니 은행과의 거리가 걸어서 딱 15분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15분이라는 게 내겐 너무 고마운 시간이었다.

 

11

서울역 광장에서 여자의 딸아이와 만나자고 했던 것은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여자의 딸아이가 기거하는 원룸에서도 지하철역이 가까웠기 때문에 마지막 프로를 본다 해도 지장은 없을 터였다. 아이가 근무하는 공장은 서울 근교 도시였다. 좀더 일찍 만나봤자 돈만 더 깨질 것 같았다. 8시쯤 시작이 되니까 6시 반에 만나면 시간이 딱 맞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서울역에서 광화문역까지는 10분이면 충분했다.

더위를 피해 역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건물 안은 에어컨이 작동되고 있어서 그런대로 시원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사람을 피해 구석에 서 있다보니 에어컨 바람이 거의 미치지 않아 몸이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특이한 복장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버릇처럼 나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앞의 거울에 다가서서 얼굴을 살폈다. 별다른 건 없었다. 다만 지하 골방에 늘 갇혀있어 피부가 희다 못해 창백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내 등 뒤로 지나가는 남자들을 살폈지만 대부분 비슷한 빛깔의 얼굴이었다. 나도 발리에서는 어느 정도 그을려서 그들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피부가 달라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 눈은 쌍꺼풀 선이 선명해서 여성스럽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내가 한국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습관적으로 남을 훑어보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밀려 밖으로 나왔다.

낮 내내 후끈 달은 아스팔트가 열기를 내뿜고 있어 광장에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다. 비둘기들이 간혹 내려왔다가 먹이를 던져주는 사람이 없어 다시 건물로 날아오르곤 했다. 새로 지은 역사 때문에 기존 역은 초라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비둘기 똥이 희뜩희뜩 달라붙어 있는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건물이 비둘기 똥에 부식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아래쪽에 몇 명의 노숙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도 눈에 띄었다.

모로 누워있는 한 노숙자는 침이 흐르는 입 주변에 몇 마리의 파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구걸한 몇 푼으로 술을 마셔버리는 그들의 삶은 악순환의 반복일 수밖에 없었다. 이십 대에 썼던 내 글 속에서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황금 나팔을 구걸의 수단으로 쓰는 그 남자는 노숙자였다. 한때 나는 삶이 버거워 그 주인공처럼 자유로워지길 원하기도 했었다. 그 시에서의 황금나팔은 자유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건 참혹한 자유일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여자의 딸아이였다. 아이는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잠시 내 상념이 끄는 대로 과거의 시간을 다녀왔던 나는 초라한 내 옷을 훑어보았다. 한국에 들어 온 후 나는 거의 옷을 사 입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가 신용 대출을 해준 700만 원 중 200만원은 발리로 보냈고 나머지로는 겨우 발등의 불이나 끈 셈이었다. 여자에게 돈을 좀더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아이를 선택했지만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아이의 성격상 제 어머니를 위해 악역을 자청할 수도 있기 때문에 친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광장에서 기다리니까 좋으네. 이야기 거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잖아.”

내 턱짓에 아이가 노숙자들을 쳐다보았다. 혐오감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질 만도 했지만 아이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걸으면서 간혹 아이를 돌아보곤 했는데 줄곧 아이는 나와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면서 걷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걷는데도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옷이 달라붙어서 배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냉방이 잘된 음식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간판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네온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 환한 시간이라 제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냉면 좋아하니?”

. 괜찮아요.”

빠른 속도로 대답을 해서 말을 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십여 미터쯤 떨어진 건물을 향해 걸었다.

나는 음식점 안을 둘러보고 차림표에 눈길을 주었지만 아이는 종업원이 가져온 물 컵만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만두도 먹을래?”

아뇨.”

아이는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아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게 질문이 있을 것 같았지만 저녁을 먹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여자와는 달리 이가 가지런해서 아이는 긴 냉면을 톡톡 잘라 먹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먹는 모습이 꽤나 여성스러웠다. 냉방 장치가 잘된 식당인데도 아이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아이가 비빔냉면을 시켰기 때문에 그냥 따라 먹었는데 냉면에 들어간 고춧가루가 꽤나 맵게 느껴졌다.

인도네시아 음식도 후추를 사용해서 얼얼한 편이었지만 고춧가루와는 다른 맛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나왔을 때 고춧가루가 든 음식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렸었다. 게다가 위장병에는 고춧가루가 상극인 것 같았다. 나는 육수를 더 달라고 해서 벌컥벌컥 마셨다. 아이는 냉면을 먹은 뒤 물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고서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첨단 건물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매달려있었다. 후미진 골목에 있는 극장과는 달리 간판의 화보에 실린 배우들의 얼굴은 실물과 흡사했다. 일층에 세워져 있는 세모꼴의 조형물이 영화관 입구였지만 영화관은 7층과 8층만 사용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인데다 한국 영화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타입의 영화가 아니라서 관객이 많지는 않았다. 가벼우면서 코믹한 내용의 영화나 할리우드식의 영화가 아직은 강세였다.

양쪽 가장자리 객석의 거의 비어있었다. 이 층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는 남녀가 눈에 뜨였는데 엉겨있는 모양새가 영화는 뒷전인 관객이었다. 나는 둘러보다가 지정석을 찾아갔다.

잘 보이니?”

요즘 아이들은 눈이 나빠도 안경을 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들도 시력이 0.5를 밑도는데도 콧등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걸 꺼려 해서 안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먼지가 낀 아들의 안경을 서랍에서 꺼내 써보니 어른어른했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아요.”

아이가 눈으로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영화 화면에서는 속옷 광고를 하는 중이었다. 아이는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거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 쌍의 젊은 연인이 출연하기 때문에 정사 장면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칼에서 옅은 향내가 났다. 잠깐씩 아이를 쳐다보곤 했는데 줄곧 꼿꼿한 자세였다. 게다가 아이의 눈빛이 도드라져 보여 내내 부담스러웠다. 영화관에 들어오기 전에는 손은 잡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랬다가는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아이가 놀라는 꼴을 볼 것 같았다.

세 쌍의 사랑 이야기를 절묘하게 연결시킨 멜로물이었는데 내용이 다소 어려웠다. 스토리가 시공을 넘나드는 데다 다소 관념적인 내용이었다. 아이가 선택한 영화였기 때문에 다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결말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화면이 멎고 천장의 불이 켜지자 아이는 발딱 일어섰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아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호프라도 한잔할래?”

아니에요.”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다. 만나는 내내 한두 마디로 끝나야 하는 대화인 셈이었다.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거부감을 갖고 있어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내게 호의적이 되길 바라서 일부러 만났던 것인데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영화까지 보여줬으니 나쁜 감정은 갖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기요...”

아이가 앞서 나오던 나를 불렀다. 사람들이 흘끔거리기는 했지만 별 관심이 없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다. 딸아이가 일 층의 구석 쪽으로 다가갔다. 지하도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의 반대편 공간이었다. 이제야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 나이에는 내용을 전부 다 이해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었다.

울 엄마에게 해꼬지를 하면 저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아저씨 이름을 인터넷 공간에 도배할 거라구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벼랑 끝처럼 아슬아슬한 곳에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렸다. 태연한 척하느라 얼굴에 담았던 미소는 그대로 두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야 했지만 이리저리 둘러볼 수도 없었다.

무슨 소리니?”

몸이 전체적으로 뻣뻣해졌다. 나는 얼굴에 담은 미소 때문에 불편한 상태였다.

그때 사진 봤어요.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무슨 사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지갑의 사진 말예요.”

...오해를 했나보네. 그 친구들 나이가 서른 중반은 되었을 거야. 팬들이거든. 물론 홀애비로 지내다 보니 사진을 못 버리게 되드라마는... 지금은 어디 사는지도 몰라.”

외워둔 이야기 줄거리처럼 말이 죽 이어져 나왔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벽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구나.”

이제 됐어요.”

아이는 바깥으로 돌린 시선을 거두어 바닥을 내려다봤다.

영화, 잘 봤어요. 안녕히 가세요.”

내가 대꾸를 못 하는 틈을 타서 아이가 인사를 했다. 아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아이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모양이네. 잘 가. 담에 보자.”

말을 한 다음 손을 들어서 흔들었지만 아이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 내 이름을 도배해봐야 알아 볼 사람은 없겠지만 씁쓸했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건너편에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는 고층 건물이 별조차 가려내기 힘든 먹빛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에는 불이 켜진 창이 많지 않았다.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이 이리저리 흩어졌겠지만 인도로 들어서자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냉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하철 안은 후덥지근했다.

집에 도착하니 현관문은 여전히 잠겨 있지 않았고, 아들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녁 먹었니?”

.”

아들이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네. 아빠가 왔음 쳐다봐야지.“

아들이 잠깐 얼굴을 돌리더니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움직임이 꼭 자동인형 같았다. 나는 아들 뒤통수 보면서 한참 서 있었지만 나무라지도 못했다. 아들도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벅찬 나이라는 생각이었다.

주방 앞에는 나갈 때부터 있던 상이 그냥 있었다. 점심에 먹다 남은 샌드위치와 비빔밥을 먹었던 그릇이 상 위에 놓여있었다. 샌드위치에서는 쉰 냄새가 났다. 나는 빈 그릇에 샌드위치 조각을 넣고 비닐로 쌌다.

문을 열고 나가자 옆집에서 내다 놓았는지 음식점의 그릇에 붙어 있던 파리 떼가 흩어졌다. 외등이 약간 붉은빛을 내뿜고 있어서 내놓은 그릇이 보기 흉했다. 게다가 지하 통로라 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해 파리가 꼬이는 것 같았다. 나는 비닐로 싼 그릇을 문이 움직이는 자리를 비켜서 놓았다. 잠깐 문밖에 서 있는데 어느 집에서 개가 사납게 짖고 있었다.

 

12

후배가 외박을 할 때면 그 방에서 원고 작업을 했다. 나는 저녁 식사 후 줄곧 원고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방은 좀 넓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럭저럭 작업이 되는 듯하다가 갑자기 멍청해졌다. 어느 틈에 내 뇌리는 여자에 관한 잡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딸처럼 똑 부러지는 성격이 못되었다. 대출 후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만 여자는 또 이 백 만원을 쉽게 보내 주었다. 너무 순순히 응해서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간혹 여자네 집에 머물렀던 시간을 떠올리다 보면 허전하기도 했다. 그 열흘이 길고 긴 세월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은연중 단조롭고 지루하던 여자와의 섹스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J시에서 머무는 동안 여자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권하는 책을 읽고 틈틈이 나와 토론을 한 게 전부였다. 나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잡념 때문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때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진실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의 속마음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나면 국내 현대 작가들의 소설이나 세계 명작에 관한 평을 할 때가 있었는데 여자는 웬만하면 내 말을 수용했다. 나는 소설을 한번만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기억을 했다. 줄거리와 주인공의 성격 정도를 파악하는 여자와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었다. 물론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는 여자로서는 생소한 경우가 많아 독서량의 부족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여자의 집을 다녀온 후로 날마다 전화를 했다. 통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번호를 눌렀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늘 가라앉아 있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마주쳤을 때 첫 느낌이 수다스러움이었는데 그게 싹 가셔 있었다. 두 번이나 돈을 마련해 주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후부터 차츰 말이 줄어든 것 같았다.

돈이 제시간에 되지 않을 거라고 여자가 지레짐작할 수도 있었다. 물론 많은 약속들은 거짓이었지만 돈은 깨끗이 해결하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L에 관해 여자가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오랜 시간 후의 얘기였다. 달리 말하면 그건 여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는 여자와 통화가 끝나면 누워있거나 근처의 가로 공원까지 걸어갔다 돌아오곤 했다. 보통 때에도 마음이 심란하면 그 길을 따라 걷다 나무 의자가 보이면 넋 놓고 앉아 있기도 했다. 역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라 공기도 더러웠고 시끄러웠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노숙자가 우글거리는 광장 쪽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상황은 진전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글을 거의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작업을 했던 만화 원고를 의도대로 다른 출판사로 가지고 갔다. 떨떠름해하는 출판사 관계자와 최악의 조건으로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협 원고는 부지런을 떨면 일주일 안에 계약을 할 수 있겠지만 잘못하면 수준 이하의 원고가 될 수도 있었다.

만화 스토리 작업을 하던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무협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협 소설을 하다보면 본궤도인 순수문학으로는 돌아오기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지낼만했지만 L을 만난 후 점차 상태가 나빠지면서 결국 나는 막다른 길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면 원고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다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밤부터 새벽까지 골목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간혹 밖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면 마치 내 귓가에 욕설이 퍼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집 창가에서 가래침을 뱉고 가는 사람까지 있어 글을 쓰다가 용지를 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 무질서한 것 같았다. 재개발이라는 말이 나돌고는 있는 상황이었다.

7~8월이 되면서는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있는 날이 거의 드물었다. 잠을 제대로 잔 건 여자네 집에 머문 기간 동안이었다. 게다가 글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다 보니 어설픈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고 낮에는 가위눌림을 당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벽에 걸린 내 옷이 사람처럼 다가와서 목을 조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여자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해도 내 상황을 헤쳐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절에 틀어박혀 두어 달간 글을 썼다면 돈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판단력의 미숙에서 오는 결과가 무엇일까 생각하자 요즘 유행하는 무뇌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중학생 때 아이큐 검사에서 전교생 중 최고였던 내가 이처럼 무뇌충이 될 수도 있었다. 오늘따라 매미는 방충망에 붙어 철공소에서나 들을 수 있는 기계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바퀴벌레에 쓰는 약을 가져다 마구 뿌렸다. 약을 제 자리에 가져다 놓는데 전화벨이 울려 시계를 쳐다보니 10시였다. 발리의 L이었다.

"아이고..우리 리나. 밥은 먹었니?"

여자의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아홉 시인데...대충 먹었어, 시아가 해주는 음식은 입에 잘 맞지 않잖아."

"조금 더 여유가 생겨야 들어가겠네. 리나 쭈쭈 좀 만져봤음 좋겠다."

L이 콧소리를 섞어 웃었다. 애교를 부릴 때의 귀여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싸해졌다.

"나도... 근데 그 늙은 여자랑 정든 게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검지로 연필을 퉁겨 돌리며 언성을 조금 높였다. 손에서 연필이 떨어지더니 또르르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을 굴러갔다.

"그러면 언제 와?"

"아마도 앞으로 보름 후쯤이면 가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바람에 실내로 불어 드는지 파리약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 나는 선풍기의 앞면이 창을 향하도록 발로 밀었다.

"빨리 와, 아찌. 보고 싶어 죽겠다. 아찌... 찐다 빠다..."

"그래, 나도...러뷰..."

또박또박 아찌 찐다 빠다라고 말하는 L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전화요금 때문에 수화기를 놓아야만 했다. 나는 여자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L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곳 언어를 익혀서 능숙하게 얘기를 하는 L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곤 했다. 게다가 L에게는 미모의 친구들이 많았다. 작년 여름에 L의 고교 동창들이 발리에 여행을 와서 일주일 정도 묵은 일이 있었다.

L의 친구들은 아름다운 속살까지 내 보이고 싶어 깊게 파인 티와 짧은 반바지만 입는 것 같았다. 카드보다 화투를 집어 들었던 건 가느다란 팔목을 때릴 때의 짜릿함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내가 화투를 교묘하게 섞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나는 타짜에 가까운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L의 친구들이 떠나고서도 투명하게 느껴지는 깔깔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물론 L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 일을 떠올리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은 만화에서 필요한 캐릭터와 같은 나이였기 때문에 개개인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이 내겐 중요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왔던 두 친구는 아쉽게도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들 중 L이 유난히 돋보였던 건 완벽한 몸매와 깨끗한 피부 때문이었다.

L의 몸은 햇볕에 알맞게 태우면 분홍빛을 띠곤 했다. 때로 나는 복숭아 빛 L의 몸에 까만 그물을 감았다. 농염한 포즈를 취하면 L은 나만을 위한 포르노 걸이었다. 발리에 돌아가면 하녀를 핑계대어 밖으로 몇 시간 내 보낸 다음 승용차에서 1코스로 섹스를 하고, 두 번째는 그물침대에서 시도해 보고, 세 번째는 풀장에서 하고 싶었다. 다음 마무리로 침대에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풀코스 섹스를 생각하자 성기가 팬티를 뚫을 듯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원고용지를 밀쳐놓고 불을 껐다. 지상으로 반쯤 올라와 있는 유리창으로 주차장의 엷은 불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을 대어보니 내 성기는 낙하산처럼 펼쳐져 있었다. 자기 귀두 둘레가 몇 센티이지? 버섯구름처럼 솟구치는 거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 L의 젖은 목소리가 내 귀두를 핥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켰다 뿜어내는 걸 반복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수음이 끝날 것 같아 수건을 집어 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호흡 조절을 하느라 다섯 번째 벨이 울렸을 때 받았다.

"? 선배."

"왜 그리 헐떡거리냐? 그렇게 더워?"

여자의 목소리가 능청스럽게 들렸다.

"아냐. 매미 때문에 글이 안 써지네."

"글이란 게 아무 때나 써지면 좋게? 나도 못쓰고 있잖아.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선배, 고마워... ...선배, 보고 싶다."

내 턱을 조준하고 있는 성기를 지그시 누르면서 말했다. 내 입에서 약간 갈라진 소리가 나왔다.

"나도...그런데 목소리가 피곤해 보인다야. 오늘 밤엔 글 쓰지 말고 일찍 자라. 아플라."

정색을 하며 여자가 말했다.

"아냐. 작업은 해야지. 돈 많이 벌어야 선배 호강시켜주지. 그 동안 선배가 고생 많았잖아."

"후후... 고맙네. 후배."

여자의 목소리는 섹스 때처럼 가라앉아 있어 허스키하다는 느낌이었다. 여자에게서 잠깐 매력을 느꼈을 때는 노래방에서였다. 나방이 흉한 번데기를 거쳐 은빛 비단실을 만들어 낸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자의 음폭은 허스키에서부터 애조를 띤 바이브레이션까지였다. 갑자기 여자와의 섹스가 그리웠다. 나는 몽롱한 기분에 돈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성기는 활시위처럼 아직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배랑 지내면 속상해서 글이 안 써진단 말야. 만화 관두고 소설 쓰고 싶은 생각만 불쑥 불쑥 솟아오르니... 조금만 참아. 곧 돈이 제대로 들어오게 될 거야."

"글쎄...차라리 로또를 사는 게 빠르지 않을까?"

"참내. 농담이 아니야."

나는 짐짓 화를 내는 척 그렇게 말했다. 출구를 찾는 성기 때문에 나는 양쪽 다리를 벌린 채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밀려 올라온 액체가 쏟아질 것 같아 수화기를 어깨로 누르고 두 손으로 수건을 잡았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데 수화기에서 마치 날벌레가 윙윙대는 것 같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이 하지 않고 있으니까 여자도 침묵을 지켰다. 내 코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과 여자의 숨결이 수화기 속에서 뒤섞였다. 총알을 끼워놓고 조준하고 있는 시간처럼 유지되었던 긴장이 풀리며 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나오면서 수건을 뚫을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뭐하고 있어?"

아직 뻣뻣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성기를 수건으로 감싸 쥐고 있는데 여자가 물었다.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닦아내느라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수화기가 어깨에서 떨어질까 봐 다시 손으로 잡았다.

"왜 그래?"

여자가 조르는 아이처럼 채근했다.

"아냐. 매미 때문에... 소리 안 들려?"

"..."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말없이 있더니 잘 지내라는 말을 했다. 얼결에 나도 수화기를 놓았다. 수화기를 잡았던 손바닥이 끈적끈적했다. 나는 팬티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다행히 아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들은 내가 여자와 전화를 해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혼 후 나는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동료 작가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때로는 술을 마시다 보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무더기로 엉켜 잘 때도 있었다. 아들은 방학이 되면 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 심심찮게 보아온 일이었다. 사귀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도 아들은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다만 아들은 내가 전처와 합쳤으면 하는 생각을 고집스레 갖고 있었다. 한 번씩 아들이 질문을 툭 던지면 나는 늘 딴전을 피웠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인지 아들은 당장에 대답하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나는 화장실로 가면서 타인처럼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아들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들과 함께 지낼 날도 얼마 되지 않았다. 중학 이 학년생이었지만 아들은 혼자서도 학원을 다니고 저녁도 시켜 먹을 줄 알았다. 내게 온 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도 불만이 없는 건 의부 때문인 것 같았다. 집을 비울 때면 후배네 집에 얹혀사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출 후 여자가 준 200만 원도 다 나간 상태였다. 물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게 많았다. 다만 신용 불량의 상태가 되면 외국에 나가는 데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카드 대금은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였다. 급한 공과금은 해결했고 나머지 공과금은 국내에서 머물지 않을 것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개인에게 진 빚은 스토리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걸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미뤄도 되었다. 이제 여자에게 돈을 한 번만 더 융통하면 될 것 같았다. 하긴 곧 발리로 나가야 하니 돈 얘기를 거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며칠간 고민 끝에 병원비를 생각해냈다. 그건 비행기 삯으로 쓸 예정이었다. 무협 계약금이 좀 들어오겠지만 그 돈은 발리에서의 생활 여유자금으로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전화로 여자에게 늑막염이라는 얘기를 했다.

"늑골에 물이 고였다는 거야."

이십 대 때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떨어졌다는 얘기를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옛날에 공사장에서 다쳐서 그렇대?"

"글쎄.. MRI 촬영까지 하긴 했는데 병명이 나오겠지. 모레 선배 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의료 보험이 안 되어서 이틀간 입원비가 벌써 육십 만원이야. 여러 가지 검사와 MRI 촬영을 하더니 계산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돈은 어떻게 하냐?"

"에이 몰라...어떻게 되겠지."

여자는 걱정하느라 어느 병원이냐고 묻지 못했다. 물론 내가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집에 있을 경우에는 아들은 거의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에 벨이 울리면서 뜨는 번호만 주의해서 보면 된다.

"선배에게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네."

돈을 빌리자는 얘기를 꺼내는데 조금 전에 깎아 먹었던 참외 조각이 목구멍에서 치받쳤다.

 

13

짐을 꾸렸다. 몇 가지 장만했던 전자제품은 그 집에 두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아들 짐은 책상과 한 박스의 책, 그리고 옷과 신발이었다. 사는 게 궁색했어도 아들에게 소홀히 할 수가 없어 옷이 제법 되었다. 짐을 싸는데 아들 입에서 계속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짐을 거의 다 싸자 아들이 갑자기 피자 타령을 해서 아침 겸 점심으로 피자를 먹어야 했다. 아들은 피자를 혼자서 거의 다 먹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겨우 한 조각을 우물거리다가 전처의 전화를 받았다.

전처는 소리를 지르는지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리만치 언성을 높이다가 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수화기를 콱 놓았다. 내게 아들을 올려 보냈을 때 발리에 다시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날 만도 했다. 도박과 잦은 가출로 인해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옛날얘기를 끄집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해야 했다. 게다가 지금은 수화기를 들고 시간을 보낼 상황이 아니어서 전처가 빨리 전화를 끊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전처는 내가 젊은 여자랑 발리에서 사는 걸 안다면 아들 핑계로 찾아와 행패를 부릴 수도 있었다. 꾸린 짐이 몇 박스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내 얼굴은 땀과 먼지로 새까매졌다.

용달차가 올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서 전학 서류를 떼었다. 지방 학교에서 올라왔다 다시 그 학교로 가는 게 담임에게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다들 서울에서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서도 담임은 내 얼굴을 계속 흘끔거렸다.

제가 지금은 한국에서 살지만 작품을 위해 외국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이가 걸리기는 합니다만 작가의 삶이 워낙 부초와 같아서...”

상황 설명을 하자 담임은 이해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초라는 변명은 내가 듣기에도 궁색했다. 서류를 아들 손에 들려서 용달에 태웠다. 데려다 줘야했지만 전처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자의 집에 짐을 가지러 가는 일이었다. 불상사가 생길까 봐 나는 며칠 전부터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일을 보느라 왔다 갔다 하는데 길바닥이 금방 공사를 끝낸 뜨거운 아스팔트처럼 신발이 쩍쩍 달라붙었다. 군데군데 모아져 있는 쓰레기 봉지에서 누런 물이 길바닥으로 흘러나온 게 보였다. 냄새 때문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쓰레기장을 멀리 돌아서 간혹 이용하는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

수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겨우 입을 떼었다. 찌는 더위라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었다. 내일부터 장마가 다시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창을 통해 점점 찌푸려져 가는 하늘을 응시했다. 누르스름한 구름이 전깃줄에 턱걸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째 갈아입지 않은 팬티까지 젖어 들고 있었다. 가방을 미리 싸 놓고 나왔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며칠 있으면 출판사에서 만화 원고료가 나올 것이고 뒤이어 무협의 계약금을 받게 된다는 말을 거울 앞에 서서 미리 연습을 했다. 표정을 어떻게 짓느냐는 것도 중요했다. 다달이 이 백 만 원 이상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을 사족처럼 달 예정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날짜도 언급할 생각이었다. 여자의 집에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가 문제였다. 꼬리를 밟힌다면 비행기 시간을 놓칠 수도 있었다. 발리행 비행기표는 일주일 전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꼭 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에이포 용지에 인쇄된 시 때문이었다. 미발표 작품이 많아 내겐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를 팔면서 파일에 저장해 놓는다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에 번거로워진 상태였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전처와 헤어지고 L을 만나기 전, 삶이 싫어서 수백 권의 시집과 미발표 작품까지 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습작을 하던 너덜너덜한 노트가 남아 있어서 최근에야 나는 그것들을 다시 손질했었다. 다행히도 훼손된 시는 거의 없었다.

중요한 건 태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돈만 갚으면 여자와 나와의 관계는 원수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여자의 감정이 희석이 되면 다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내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다만 내가 물건을 챙길 때 여자가 의아해하면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에 익숙해 있었지만 앞으로 해야 하는 거짓말은 마치 고양이 새끼를 호랑이 새끼라고 우기는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

여자는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일 좀 보다 보면 늦어지겠네. 출판사에서 작가들 모이라네. 돈은 안 주면서 뭔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밤늦게나 도착할 거야."

"그래...아들딸 둘이 다 와 있으니 천천히 와."

"애들 왔어?"

영화를 보던 날 딸아이에게 받았던 수모가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걱정 마. 교육 잘 시켜 놓을 테니..."

여자가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했다. 하긴 아들은 고3이고 딸은 직장인이니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누군가가 버리고 간 꽁초를 신발바닥으로 짓이겼다. 목욕탕 한증막처럼 공중전화부스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여자네 집에서 챙겨야 할 물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옷과 시디도 챙겨야 했다. 음악은커녕 소리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기도 했지만 나는 글을 쓸 때도 음악이 꼭 필요했다. 속옷도 빠트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내가 연락을 끊게 되면 여자가 분노를 해소하기에 딱 좋은 물건이었다. 가위로 자르거나 불태워 버릴 것 같았다. 그보다 더 험악한 상황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L과 시상식장이나 팬 사인회에 참석했을 때 관중들 앞에서 팬티를 흔들어 대는 여자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단순 무식함이란 때론 폭발적인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었다. 블랙 코미디 같은 그런 상황이 올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버스 안에서도 잠을 청했지만 머릿속에서 타악기가 연주되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나는 여자에게 주기 위해 샀던 책을 꺼냈다. 뭔가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백으로 된 맨 뒤쪽을 펼쳤다. 쓰고자 하는 내용이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것 또한 사실대로 쓸 수는 없었다. 몇 마디 적다 읽어보니 피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인 '그대, 이유 없는 삶에 눈뜨기를 바라며...' 라는 구절은 마치 나를 향한 독백 같았다. 볼펜으로 썼기 때문에 지울 수도 없어 나는 책표지를 덮었다.

현관문 앞에서 벨에 손을 대는데 다리까지 떨렸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여자가 문을 밀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여자의 아들은 어깨가 넓고 배구공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손도 컸다. 첫 대면이라 다소 긴장되었지만 아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면서 표정이 온순해졌다. 딸과는 달리 군데군데 부드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아들도 딸처럼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다. 딸은 영화까지 함께 봤는데도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은 티끌만큼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늘 여자를 가운데 두고 있었다. 이혼을 하면서 아들과 떨어지는 게 어려웠다는 여자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L과 섹스를 앞두고 있어서 여자와의 섹스는 피하고 싶었다. 오늘 같은 경우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핑계를 댈 필요도 없이 섹스를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 듯한 구실을 댄다 해도 나흘 내내 안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내일 오후에 각자 갈 곳으로 간다 하니 울며 겨자 먹기 상황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닷새 후 발리에서의 풀코스를 위해서는 오늘 섹스를 하되 사정을 하지 않는 방침을 세웠다.

며칠 만에 여자와 만났기 때문에 몸이 어느 정도 호응을 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발리의 처녀와 관계를 가질 때처럼 손가락 끝의 신경조차 무디어져 있었다. 게다가 발기가 되었다 일 분도 채 안 되어 쓰러지곤 하는 성기를 일으키느라 나는 절절맬 수밖에 없었다. 여자를 절정까지 끌고 가야하는 부담 때문에 성기가 더욱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의 몸도 유난히 뻣뻣한 느낌이었다.

"선배 흥분 좀 해봐. ..."

내가 여자의 유두를 깨물며 말했다.

"애들이 둘이나 있잖아."

여자가 소리를 죽였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위로 올라갔다. 여자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동작만 반복했다. 나는 긴장성 두통까지 일어 머리가 쭈뼛거리는 바람에 움직이던 허리를 간혹 멈추곤 했다. 나만 겨우 사정을 했고 여자가 내게서 떨어졌다. 몸이 찌뿌듯해서 여자가 섹스를 요구한다 해도 응해줄 수 없는 상태였다.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일어나서 속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내려서는 나를 잡지는 않았다. 방에서 나오면서 앞으로 사흘은 요령껏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14

"선배 심부름시킬 것 없어? 슈퍼에 좀 다녀올게."

출판사에도 전화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들이 잘 도착했는지 전화를 해야 했다. 내 휴대폰은 돈을 내지 못하고 있어 이달 말일이면 해지가 될 거라는 통고를 받은 상태였다. 집 전화는 이미 해지시켜 버렸지만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여자가 알 턱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던 여자가 손을 닦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어젯밤의 일은 잊어 버렸는지 밝은 표정이었다.

", 옥수수차, 맛살, 오이 좀 사다 줘. 낮에는 국수 비벼 먹자."

여자가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적어가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메모지를 식탁에 놓았다. 너덧 개가 아니라 10여 가지도 금방 외워버릴 수 있었다. 외운다기보다는 한번 읽어보면 바로 머리에 입력이 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여자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가슴이 벌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아들은 헤어진 지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내게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전처가 시켜서 그랬을 수는 있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L과의 통화로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아 버렸다.

"아빠가 한국에 오면 너랑 함께 살 거야. 발리에서 일년 열심히 하면 생각대로 될 것 같아. 어차피 발리의 집 계약기간도 일 년 정도 남았고. 아빠 기다릴 수 있지?"

"..."

내 거짓말에 손톱을 물어뜯는지 아들이 한참 있다 대답을 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과 옷이나 그 외에 다른 쇼핑을 할 때 내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점을 빼고는 별문제가 없는 아이였다.

"네가 엄마 아빠가 합쳤으면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어.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알았어요."

아들은 천천히 수화기를 놓았다. 이제는 아들과 함께 지낸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서 멍하니 공중전화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슈퍼 앞 공중전화 박스라는 걸 깨달았다. 출판사에도 전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 이제와?"

여자가 물기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빤히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 나는 봉지를 식탁에 놓으며 여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슈퍼에 물건이 다양해서 아이쇼핑 좀 했지."

"...근데 이게 뭐야?"

여자가 제과점 봉지를 보면서 물었다.

"빵이랑 팥빙수야."

내 말에 여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슈퍼를 돌아보는데 여자의 두 아이들이 떠올라서 오다가 제과점에 들렸다. 여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철없다고 하려고 그러지, 선배? 에이 막내아들이라고 생각해라."

여자가 눈을 흘기면서 웃었다. 방에 있던 아이들이 소리를 들었는지 나왔다.

"국수 먹고 팥빙수는 후식으로 먹자."

여자가 냉동실에 팥빙수를 넣었다. 아이들이 입술을 내밀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여자와 아이들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 틈에 앉아 있던 나는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왔다. 피곤한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여자가 침대 끝에 서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멋쩍어서 웃으면서 시선을 옮겼다. 나를 쳐다보면서 침대에 걸터앉던 여자는 아이들이 부르자 나가버렸다. 나는 여자 뒤에 있던 화장대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에는 침대 머리맡의 벽에 붙어있는 달력이 있었다. 숫자가 거꾸로 가는 달력은 아직도 지난달이었다. 여자는 숫자 위에 동그라미나 별표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표시해놓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달력을 못에서 뺐다. 나와 함께 했던 날에는 어김없이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달력을 거꾸로 넘기자 나와 얘기를 주고받았던 날까지 기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처럼 여자는 잊어버릴 것 같아 표시를 해 두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방금 방문을 열고 나갈 때 옷에서 떨어져 날리던 먼지만도 못한 추억이 될 거라는 걸 여자는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달력을 접어 침대 가장자리에 놓았다. 나는 다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가 버리고 나자 집이 텅 빈 것 같다고 여자가 중얼거렸다. 내가 식탁의 원고 앞에 앉으려는데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저녁은 아까 사 온 빵으로 때울래? 나는 좀 누워있고 싶다."

여자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흐릿한 초점으로 나를 쳐다봤다. 섹스에 대한 갈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고 웃음기도 없었다. 나는 여자가 안방 쪽으로 몸을 돌리자 원고 앞에 앉았다.

다른 집들의 불이 거의 꺼지자 매미가 떼거리로 몰려왔다. 매미는 셀로판지 같은 날개를 부스럭대다 숫제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남의 집이라서 차마 바퀴벌레약을 뿌릴 수는 없었다. 밤이 늦어 불을 켜둔 집으로만 몰려드는 것 같았다. 나는 원고를 앞에 두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이틀째 비는 오지 않고 벽지가 눅눅해질 정도로 습도가 높아 몸이 까부라질 것만 같았다. 거짓으로 꾸며댄 것처럼 늑골에 물이라도 고인 걸까? 갑자기 오른쪽 늑골 근처가 쿡쿡 쑤시고 있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올라갔다. 여자는 잠이 덜든 상태처럼 몸을 뒤척거렸다.

나는 여자 옆에 누워 화장대 거울 위의 시계를 쳐다봤다. 초침이 없어 멈춰버린 시계라는 걸 알아채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얼마 전 이집에 머물 때는 분명 제대로 가던 시계였다. 어젯밤에 거울 속의 달력까지 봤으면서도 그 위쪽의 시계가 멈춰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우연하게도 그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놓았을 수도 있었다. 멈춘 시계를 바라보고 있으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15

내일은 발리에서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원고를 앞에 두고 있던 나는 L을 떠올렸다. L은 콘티 작업만 끝낸 원고를 읽으면서도 킥킥거리곤 했다. L은 생긴 것과는 달리 청소년기 때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 발리에서 나와 함께 지낼 때 L은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L은 컴퓨터로 생산해낸 게임 속의 여자처럼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를 갖고 있었다. 달빛에 빛나는 박처럼 하얀 젖가슴은 누워있어도 납작해지지 않았다. 하얀 박을 반으로 쪼개서 나란히 엎으면 딱 L의 엉덩이 모양이었다. 섹스하는 동안 L은 액체처럼 흘러 녹았다 정사가 끝나면 다시 제 모습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L과의 섹스를 떠올리다가 하마터면 원고에 침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치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여자는 거실에서 서성거리다 들어가곤 했다. 술을 마시면 발산되는 열을 감당하지 못하는 탓에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었다. 거실 천장에 붙은 원반 모양의 형광등이 몸의 군더더기 살까지 제대로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 여자의 몸을 쳐다보다 원고지로 시선을 옮겼다. 작업하는 걸 여자가 직접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불안해서 나는 원고를 뒤바꿔놓기도 했다. 스토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고를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곁눈으로 계속 여자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약 45도 정도의 각도여서 그늘져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여자가 원한다고 해도 섹스를 해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여자가 잠이 들 때까지 작업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건넌방에 가서 작업할 원고용지를 전부 다 가져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와?"

내 물음에 여자는 눈도 뜨지 않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오른편 날갯죽지 쪽에 팥알만 한 점이 있었다. 등이 넓은데다 점이 있어 보기 흉했다. 차라리 옷을 입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자란 아름답게 늙을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거의 맨얼굴인 여자에게서는 도회지적인 세련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얼굴과 몸매라는 생각을 하면서 원고를 뒤적거렸다. 이곳에 와서 사흘 동안 작업했던 원고가 채 스무 장이 안 되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해서 소리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매미 소리에 가려졌던 것 같았다. 점점 크게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엉엉 우는 여자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나는 서랍에 있던 수건을 꺼내어 여자의 얼굴을 닦았다.

"왜 그래? ?"

"나한테 고맙다는 생각은 했어?"

", 고마워.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뻘겋게 변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코까지 완전히 막혀 있어 여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지 마. 거짓말은 싫어..."

여자는 도리질하더니 겨우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어서 자.”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한번 여자의 얼굴을 닦았다. 거실로 나와 원고용지를 들여다보았지만 눈이 침침해서 내가 쓴 글자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침대로 가서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어느 틈에 잠들어 있었다. 말려 올라간 윗입술 아래 뻐드러진 이 두 개가 토끼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어찌 보면 귀여운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사랑이 식었나 봐. 반찬이 빈약한 걸 보니."

아침 식탁에는 된장찌개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텔레비전 광고를 흉내 내자 여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나 때문에 통장에 돈이 거의 바닥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내 수중에 넘어온 돈이 다시 여자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나는 부숭부숭한 여자의 눈두덩을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왜 울었어?"

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말하자 여자가 눈을 내리 깔았다.

"산다는 게 막막해서..."

"내가 돈 갖다준다고 했잖아."

"그 약속 믿어지지 않아."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난 약속은 꼭 지키는 놈이야."

여자가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 말 두 번 한 것 알아?"

"언제?"

"내 엉덩이에 대고 했잖아."

실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만화 써서 돈 가져오라고 해서 나 밉지? 조금만 하다 보면 길이 있을 거야. 솔직히 문호씨가 만화를 쓰고 있다는 건 나도 싫어."

"고마워 잘할게."

마지막까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일어섰다. 내일 오전 12시 비행기를 타려면 오늘 가야했지만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우나 하는데 시간 좀 걸릴 거야."

20여 분 만에 돌아오자 여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울 가야겠어. 원고 덜 되었어도 가져오라네. 낼이면 돈이 좀 될 것 같아."

그래?”

여자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나를 쳐다봤다.

돈 많이 갖다 줄게.”

"얼마나?"

나는 순박한 웃음이 담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잠깐 내렸다.

"이백만 원은 꼭 갖다줄 거야."

"그렇게나 많이?"

다시 쳐다보니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 돈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눈물이 밀려 나온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도 금방 눈물을 흘리는 특이한 여자였다.

나는 물건을 챙기기 위해서 안방과 건넌방을 오락가락했다. 여자는 거실에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곧 올 텐데, 뭘 다 가지고 가?”

아들 녀석 비위 맞추려면 며칠 걸릴 수도 있어. 내일은 우선 돈만 부치게 될 거야.”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여자에게 팬티를 달라고 하자 여자가 두 장을 가져왔다. 낡은 것은 가방에 넣고 세로줄 무늬가 있는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여자가 벗어놓은 팬티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이건 놓고 가. 빨아 놓을게.”

며칠동안 입어서 지저분한데...”

괜찮아.”

나는 그동안 세수만 했다. 그러니까 팬티는 일주일 가까이 입은 셈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이 많아서 팬티의 엉덩이 부분에 누런 이물질이 끼어있었다. 마치 치부를 놓고 가는 것처럼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우길 수도 없었다.

가방에 내 원고를 다 챙기는 동안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자는 현관문에서 몸을 반만 내밀고 잘 가라는 말을 했다. 여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고 있었지만 곧 사라졌다. 나는 왼손을 들어 미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오른손으로는 바퀴 달린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걷다가 복도가 구부러지기 직전 문득 돌아봤다.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얼굴 높이만큼 올라온 여자의 손이 바람에 흔들리듯 조금 움직였다.

 

16

서울에서의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고 며칠동안 여독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고통으로만 기억될 것 같았다. 발리가 고향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발리 사람이었다.

다소간의 휴식이 필요했지만 발리에 온 첫날부터 L에게 섹스를 요구했다. 공항까지 나오지 않아 의아하기는 했지만 L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피부가 조금 검어져서 매력이 더해 보였다. 나는 샤워만 하고 L의 몸을 더듬었다. 그날 나는 잠깐 동안 발기 불능처럼 성기가 말을 듣지 않아 섹스를 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다음날 풀코스 섹스를 시도했다. L은 기다림에 지쳐서 그런지 열정이 식은 듯했다. 따라서 풀코스의 섹스는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물침대는 섹스를 시작하자 그물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아랫배에 힘을 주는데 내 다리가 벌어진 그물 틈으로 빠졌다. 빠져나간 다리가 덜렁거려서 리듬을 제대로 탈 수가 없었고 점점 L과 박자가 엇나가고 있었다. 섹스 도중 L이 눈을 뜨고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그물 틈에서 다리를 빼고서 엉금엉금 기어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소 뻣뻣해져있는 L의 몸을 마사지로 풀어주면서 달래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동안 나는 그물침대를 흔들어야 했다. L의 표정이 풀리자 나는 L의 알몸을 끌어안고 풀장으로 들어갔다.

욕조에서 L과의 섹스 경험을 살려 풀장 한쪽에 몸을 기대고 섰다. 물이 깊어서 그런지 몸의 밀착이 쉽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수초처럼 몸이 흔들리곤 했다. 겨우 삽입은 되었지만 마치 반항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리듬은커녕 몸을 밀어 넣는 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미끈거려서 아무 재미가 없었다.

갑자기 L이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쳐다보니 오르가슴에 가까워지는 표정이었다. 나도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내 성기가 갑자기 장소를 이탈했다. 눈을 감고 있던 L이 연체동물처럼 내 몸에 달라붙었다. 내 성기는 본래의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사정이 되어버렸다. 정액이 플랑크톤처럼 흩어지자 L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씨...물만 더럽혔네.”

L의 짜증 섞인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잠수를 했다. 물에서 빠져나오는데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때서야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동안 무리한 섹스를 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L과 이 년 동안 못해도 이틀에 한 번은 섹스를 나누고 살았으니까. 게다가 사흘째 되던 날에는 조금 불쾌한 일이 있었다. 이 년 동안 섹스를 하면서 지내왔어도 나는 L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겨드랑이털 사이에 있던 조그마한 흉이었다.

"? 양쪽에 똑같은 흉이 있네."

애무를 하던 내가 겨드랑이를 쳐다보면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이거? 유방을 아주 조금 키웠어. 아직 몰랐어?"

당당하게 말해서 오히려 변명처럼 들렸다.

"... 예뻐졌으니 된 거지 뭐."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나는 방부제를 너무 많이 넣어 몇 달이 지나도 모양이 그대로이던 빵을 떠올렸다. 여자가 늙어 쭈글쭈글한데 젖가슴이 이십 대 그대로라면 끔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섹스를 할 때마다 떠올렸다. 더 이상 L과의 섹스가 환상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닷새가 지나고 나니까 L은 생리가 시작되었다. 생리 때에도 원할 때가 많았지만 L은 나흘 동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잤다. L이 몸을 뒤척일 때 생리혈에서 나는 듯 비릿한 냄새가 풍겨나도 L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곤 했다.

간혹 집 전화벨이 울리면 L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언뜻 눈에 띄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다른 냄새를 풍겼다. 적어도 통화를 하는 사람이 동성은 아닌 것 같았다. L과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때로 L은 핑계를 대고 건넌방에서 자곤 했지만 나도 만류하지 못했다. L과 나는 그런 식으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화도 무협도 손을 대지 못하는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벌써 발리에 온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두어 달 살 돈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글을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글이 써지지 않자 사이버 공간을 들락거렸다. 거의 각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L은 상관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났던 공간이어서 나는 다른 아이디를 만들어 접속을 했다. 접속했을 때 벽장 속의 여자라는 별명도 더 이상 그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의 홈페이지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차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늙은 년이랑 제법 정이 들었나보군."

내가 사이버 공간에 들락거리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말다툼을 할 때면 L은 꼭 여자 얘기를 끄집어내곤 했다.

"말조심해라. 그래도 도움을 받은 사람이야."

나는 밥을 뜨려다가 숟가락을 놓으면서 약간 언성을 높였다. 하녀를 내보낸 후 L이 식사 준비를 하게 되면서 밥상 앞에서 자주 다툼이 일곤 했다. 그전 같으면 밥하는 것은 내 몫이겠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돌기 때문에 L이 점심 준비를 하는 건 일주일에 한두 번이 될까 말까 정도였다.

"도움? 지가 좋아서 쓰라고 준 돈이잖아."

L은 밥 위에 놓여있던 젓가락을 아예 치웠다. 밥을 그만 먹겠다는 뜻 같았다.

"?"

나는 벌떡 일어났다. L도 밥상을 밀어내면서 일어났다. 나는 L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뿌리치듯 놓고 돌아섰다. L이 밥상을 차는지 와그르르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무작정 가출을 했던 옛날처럼 갈 데가 없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후 내내 나는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해가 포물선을 그리듯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몇 분 간격으로 쳐다보곤 했다.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바다 쪽으로 기울던 해가 점점 커지더니 몇 분 사이에 바다로 풍덩 빠졌다. 어둑어둑해지자 시커먼 물살이 나를 덮칠 듯 밀려왔다가 천천히 밀려가고는 했다.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은 채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뜨자 진저리쳐질 만큼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17

며칠째 집에서 뒹굴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개미들이 떼지어 다녔다. 청소기로 줄을 지어 다니는 개미 떼를 밀어버리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눈에 띄었다. 집에 확 불이라도 싸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국에서 사 왔던 담배가 바닥이 나서 비싼 말보로를 피워야 했다. 천장에서 흔들거리던 거미줄이 떨어져 팔에 감겼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매달려있어 먼지 때문에 털실처럼 굵어진 줄이었다. 거미줄을 털어 내면서 이제 우기가 시작되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건기와는 달리 우기에는 잡념에 시달리곤 했다. 우기에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자주 나다녀 기사가 불만이 많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이 고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오면 차는 황톳물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기사는 검은 얼굴을 구기면서 거친 행동으로 차를 닦았다. 기사를 내보냈으니 그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보다 이번 우기에는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며칠간 무기력 증이었다.

"물 좀 갖다줄래?"

외출하고 들어와서 옷을 벗던 L의 등을 보면서 말했다. L의 등에 흰줄이 엑스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옷 하나를 벗었는데 L의 몸에는 달랑 팬티 하나만 남았다. L은 옷을 둘둘 말아 빨래 바구니에 넣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물병을 꺼내 들고 오는데 L의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나는 거만하게 솟아오른 두개의 유방을 외면했다. L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보세요?"

전화벨이 울리자 L이 받았다. L은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내가 듣기에는 생소한 인도네시아어를 썼다. 나는 일부러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았다. 전화기를 들고 줄이 팽팽해지도록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서 통화를 하던 L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소파에서 자세를 바꿔 팔을 축 늘어뜨렸다.

새벽녘에 나는 사이버 채팅 공간으로 들어갔다. 문학방에 들어가 언쟁을 벌이다가 나와서 조금 난잡한 제목이 빼곡히 들이차 있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인사를 했다. 여자의 아이디는 밤이슬이었다.

"안녕하세요?"

"밤이슬이라...별명이 예쁘군요."

그런가요? 각자 자기소개를 하기로 하죠.”

그러죠.”

밤이슬은 타자가 빠른 편이었다. 내가 사용자 정보를 클릭해서 공간에 올렸다.

예술가시네요.”

...아닙니다. 무직인데 멋져 보이려고요.”

ㅋ ㅋ

밤이슬의 캐릭터가 올라온 글자와 함께 웃었다. 밤이슬의 사용자 정보창도 올라왔다. 사용자 정보창의 캐릭터는 미니스커트 차림에 긴 생머리였다.

이방을 찾아오시느라 밤이슬에 젖으셨죠?"

밤이슬이라는 별명에 의미를 두라는 말 같았다.

"저는 이슬에 젖은 것보다는 밤이 깊어서 외롭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자판을 두들겼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외롭지 않을 텐데요?"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언어였다. 밤이슬이라는 여자는 이런 종류의 대화에 익숙한 것 같았다. 밤이슬에게서 섹스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나는 바지의 자크를 내리고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깊이 들어가도 외롭네요."

나는 바지에서 손을 빼 10개의 글자를 조립해서 엔터 키를 눌렀다. 독수리 타법이라 그동안 내 성기는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박는 기술이 시원찮은가 봐요. ㅎㅎ."

밤이슬의 그 말에 혐오감이 일면서 호기심이 싹 사라졌다.

"이슬님 죄송. 아내가 화장실에 가려는지 일어났어요. , 나갑니다."

쫓기듯 그 방을 나와 버렸다. 컴퓨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창이 검게 변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검은 장막을 밀어냈다. 더듬더듬 여자의 영문 홈페이지 주소를 주소창에 찍었다.

게시판에는 새로운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여자는 컴퓨터를 켜면 버릇처럼 게시판에 들어와 살피곤 했다. 여자는 늘 미소를 머금고 게시글을 읽었지만 만지면 쓸쓸함이 분필 가루처럼 묻어날 것 같은 꼬리글을 달곤 했다. 게시글을 읽고 나서 나는 홈페이지 창 위쪽에 붙은 제목을 따라 차례차례 클릭을 했다. 장편소설이 하나 실려 있었다. 여자는 습작 중이긴 했지만 마무리를 못 해 그동안 장편을 홈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소설을 읽었다. '나는 신기루를 보았을 뿐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 소설의 제목이기도 했다. 나는 컴퓨터를 껐다.

밖으로 나왔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함이 엄습했다. 하루 이틀 새에 우기가 시작되겠지만 서쪽 하늘에 있는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걷다가 멈춰선 나는 달빛이 스며들어 푸른 기운이 감도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가로등 가까이 서 있는 야자수는 풀장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날 만큼 달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어깨를 문지르던 나는 야자수와 그림자를 번갈아 보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리듯 뱉어내었다.

나는 신기루를 보았을 뿐이다.’

내 그림자는 서울역 광장에서 잠이 든 노숙자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림자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먼 곳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양손으로 팔을 붙잡고 있던 나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잠깐 사이 모래 바람이 일면서 나뭇가지와 잎이 거친 파도소리를 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았다. 바람이 멎자 얼굴에서 손을 떼고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 펼쳐진 야경이 처음 마주친 세상처럼 낯설었다. 내가 마치 아득한 공간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달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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