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이야기
김은숙
방문에 번지는 붉은 빛을 바라보는 김씨는 모로 누워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뒤척거리지 않는 까닭은 깊이 잠든 아내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방문 부근만 희끄무레할 뿐 방안은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내는 퇴원 후부터 하루에 절반 정도는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고질병인 비염 때문에 아내의 코에서는 듣기 고약한 소리가 났다. 김씨가 깼던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씨의 생각에 아내는 이미 시한부 인생이었다.
아내는 동맥경화라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혈관이 전체적으로 협착상태였다. 의사의 말처럼 약을 한줌씩 먹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는 병이었다. 관절이 좋지 않은 아내는 돼지고기, 닭고기가 해롭다고 멀리했었다. 알코올중독이던 김씨는 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비린내가 나는 생선을 먹으려 들지 않았고 유독 돼지고기만 선호를 했다. 따라서 부부의 식탁 위에는 채소류와 돼지고기뿐이었다. 오랫동안 채소만 먹었던 아내가 동맥경화라는 게 의아했지만 김씨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병원이 답답하다면서 퇴원하기를 원했고 퇴원하면서 약도 한보따리 챙겼다. 외관상 아내는 별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어느 날 김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이 잘 안 나온당께.”
자식들에게 아내의 병에 관한 설명을 세세히 들었던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넘의 말을 다 듣고 낭중에 대답을 해보소, 서둘지 말고.”
그들 부부가 늘 다정다감한 대화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씨는 일 년에 열 달 이상 술을 마셨다. 사오일 내리 마시고 하루를 쉴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아내를 찾아서 트집거리를 잡아 악부터 써대곤 했다. 김씨가 예순다섯 살이 넘도록 그러다 보니 아내는 김씨를 못견뎌했다.
삼 년 전쯤 자식들이 김씨를 반강제적으로 입원시켰다. 꽤 오랜 세월을 알코올 병동 신세를 져야했던 이유는 퇴원 한두 달 만에 술을 입에 댔기 때문이었다. 육 개월은 병원에서, 한두 달은 집에서 보낸 시간을 합친 세월이 이년 이상이었다.
김씨는 항상 소주를 마셨는데 마시는 스타일은 똑같았다. 맥주잔에 가득 찬 첫잔을 마신 후 두 시간 남짓이면 일 리터들이 병을 다 비우곤 했다. 중증 알코올중독자이던 김씨가 일 년 가까이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으니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금주 초기에 아내는 아는 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마을 사람들까지 붙들고 김씨에 대해 낙관 할 수만은 없다고 조심스레 말을 하던 아내였다.
이제 아내는 길거리에서 마을 사람과 마주치면 대화에 응하는 대신 소리 없는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언어구사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아내를 만나면 말을 거는 대신 아내 곁을 지나친 후 혀를 찼다.
치매가 우려된다는 차남의 전화를 받았던 날 김씨는 눈물을 훔쳤다. 차남의 입술에서 치매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김씨는, 알코올이라는 무자비한 힘을 빌려서 오랫동안 아내를 괴롭혀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치매가 오거나 반신불수가 되거나 아내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여생은 아내의 돌보미로 살고 싶었다. 아내의 코골이에서 단잠이 느껴져 김씨는 살그머니 일어났다.
불도 켜지 않고 밖으로 나온 김씨는 토방에서 내려섰다. 봄기운이 느껴졌지만 처마를 벗어나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개구리가 땅을 박차고 나온다는 경칩이었다. 어느 해의 경칩엔가 논에 삽질하다 반 토막 난 개구리를 보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기분 나쁜 생각 때문에 김씨는 담배를 꺼냈다. 김씨는 담배를 물고 변소로 향했고 논에 가려던 생각도 바꾸었다. 마을이나 한 바퀴 돌고 와서 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퇴원 후 아내는 된장찌개의 간도 맞추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김장김치에서는 돌이 씹히기도 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요즘 아내는 아예 입을 다물고 살았다.
김씨는 마을회관 앞에서 옆집 박씨를 만났고 직불금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다. 가진 놈들이 돈에 더 환장하더라고. 김씨의 말에 죄다 도둑놈이라며 박씨가 맞장구쳤다. 자식들을 대학 보내느라 논을 팔아버린 박씨는 여전히 그 땅에 모를 냈고 대신 가을이면 소득의 반은 포기를 해야만 했다. 대신 외지인인 논의 주인이 직불금은 꼬박꼬박 챙기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논의 새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주인은 탈곡 무렵에 소작을 받아가는 게 전부였다. 나가 약잔데 별수 있겄는가? 한탄하는 박씨는 끊었다던 담배를 다시 물고 있었다.
박씨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붉은 햇살이 등을 어루만졌다. 막 시집왔던 아내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는데 정적이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내가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어서 미닫이문을 확 열어젖혔다. 집을 개조하면서 마루 가장자리에 내달은 문이었다. 잘 열리고 잘 닫히도록 마루 끝에 두 개의 레일을 달았는데 거기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여서 보니 바짓단의 실오라기가 풀려 있었다. 실오라기를 끊어내고 귀를 기울이던 김씨는 이상한 느낌때문에 방문을 확 잡아당겼다.
“뭔 일이여?”
“아...”
기어들어 가는 가냘픈 아내의 목소리였다.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앉아 있던 아내는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앉은걸음으로 방에 들어간 김씨가 팔목을 잡는 순간 아내는 짚더미처럼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라서 김씨는 멍한 상태로 이삼초 간 있었다. 정신을 차린 김씨가 내려다보니 아내는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김씨는 무서워서 아내의 팔을 놓아버렸다. 김씨는 허겁지겁 수화기를 들었고 떨리는 손으로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부터 눌렀다.
*
아내의 시신은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은 후 장례식장에 안치되었다. 김씨네 가족들은 지하 일층에서 손님을 맞았다. 차남이 몸담고 있는 관공서에서 들어온 몇 개의 화환이 입구에 배치되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들어오는 손님들의 팔에 외투가 걸려있기도 했다.
교회에서 감투를 쓰고 있는 장녀 덕에 장례식장이 북적거렸다. 두해 전에 이혼한 차녀는 달랑 혼자였다.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장남은 영주권도 없었고 비자도 없어 오지 못했다. 10년이 넘은 세월 동안 장남의 국적은 한국에 몸은 미국에 있었다. 대신 장남의 친구들이 조문을 왔다. 김씨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던 차녀는 어머니가 편해지셨다면서 곧 얼굴을 폈다.
다음 날 아침 염을 끝낸 고인을 보기 위해 가족들이 안치실로 모였다. 고인이 안장되어있는 안치실이 추웠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깨를 몸에 붙인 채 두 손을 맞잡고 고인을 바라보았다. 화장을 한 고인의 얼굴은 뽀얀 빛을 띠고 있었지만 얼굴 전체가 몹시 단조로운 색깔이었다. 염장이는 빼빼 마른 여자였는데 시신만큼이나 무심한 표정이었다. 가족들에게 몇 분 정도의 시간을 준 뒤 염장이는 고인의 얼굴에 세모꼴의 모자를 씌우고 끈으로 목을 묶었다. 끈을 어찌나 세게 잡아당기던지 김씨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관식이 끝난 한참 후 처제들이 몰려 들어왔다. 처제들은 장례식 입구에서부터 눈물바람이었다. 형부 불쌍해서 어쩌까, 어쩌까. 막내처제가 중얼거리면서 서럽게 울었다. 영정 앞에서의 엄숙함과는 달리 음식물과 술이 놓인 탁자 앞은 시끌벅적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이 많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김씨는 일박 이일 동안 받은 부조금을 손가방에 담았다. 장례식 비용을 계산한 후 혼자 사는 차녀와 사남인 막내아들에게 각각 이십만 원씩 주었다. 차녀는 손을 내젓다가 돈을 받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장례식장은 어수선하면서도 썰렁했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화환을 수거해가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배달했던 사람이었다. 거의 그대로 재활용 할 게 뻔했다. 일박 이일 간 상주들의 위신을 세워주고 쓰레기장으로 가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었지만 씁쓰레한 기분이었다. 김씨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서 한쪽으로 치웠다.
장례식장에서 장지까지는 30분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사위와 차남, 삼남, 사남이 관과 함께 승합차를 탔다. 붉은 천이 덮인 관 위에 한 다발의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뒤이어 차에 오른 김씨는 무심한 표정으로 관과 국화꽃을 바라보았다. 평소 성격이 불도저처럼 급하다는 소리를 듣는 김씨었지만, 승합차의 운전사가 사람들과 얘기를 하느라 늑장을 부려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
딸들과 며느리들은 남은 음식과 함께 중형버스를 타고 김씨네 집으로 갔다. 그들 외에 집으로 동행한 친지들은 김씨의 처가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과 손을 맞잡기도 하던 처가댁 식구들은 언제 울었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처가 식구들과 손자 손녀는 집에 남았고 며느리와 딸들은 선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도 30분 이상을 걸어야 선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자라도 쓰고 올걸. 얼굴 다 타겠다.”
비탈진 길을 오르면서 큰딸이 말했다.
“저는 선크림을 다시 발랐어요.”
둘째 며느리의 얼굴은 뽀얗고 윤기가 흘렀다. 차녀가 돌아보자 둘째 며느리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을 부채로 가렸다. 삼월 말이었지만 한낮의 햇살은 눈을 부시게 했고 꽤나 따가워서 다들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비탈진 길을 오르고 나자 고갯마루가 나타났다. 몇몇은 뒤돌아서서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바라보았다.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어졌지만 아스팔트나 시멘트 따위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움푹 파인 곳이 많았다.
그들이 선산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뒤뚱거리듯 달려온 승합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승합차가 후진을 하자 가족들이 뒷걸음질 쳤고 명정에 덮인 관이 길바닥에 놓였다. 차남, 삼남, 사남과 사위가 관에 묶인 끈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네 사람이 낑낑대듯 비탈진 길을 올라갔고 관은 좌우로 흔들리곤 했다. 김씨의 눈에는 마치 쇳덩이라도 담긴 것처럼 무거워 보였다.
십여 기의 묘가 있는 산소 한쪽에서는 포클레인이 바닥을 파고 있었다. 마무리 상태였지만 주변은 아직 어수선했다. 켜켜이 쌓인 떼에 붙은 잎은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말라 있었다.
삽을 든 인부가 손사래를 쳐서 관을 유도했다. 사위와 차남 삼남, 사남은 앞으로 몇 걸음 내딛다가 반보 정도 뒤로 물러 선 후, 천천히 관을 내려놓았다. 땅속은 삽과 곡괭이를 사용해서 장방형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상태였다. 맨 처음 김씨가 삽을 들어 붉고 축축한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렸고, 이어 자식들은 한줌씩 집어서 뿌렸다. 장녀가 울부짖었다. 엄마, 미안해. 천당에서 만나.
*
아내를 땅에 묻은 다음 날 자식들은 각자 삶의 터로 돌아갔고, 집에는 김씨만 남았다. 그날 밤 김씨는 늦도록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아내와 함께 지낼 때는 취침에 들어가는 시각이 아홉시 반이었지만 그날은 열한 시가 넘어서야 자리에 누웠다. 피곤했기 때문에 곧 잠에 빠졌던 김씨는 이십 분이 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아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까닭이었다. 아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이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불을 켜 둔 채 눈을 감았지만 아내의 모습이 어른대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김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면 끔찍한 적막이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는 노래가 많지 않아서 금방 바닥이 났다. 할 수 없이 도돌이표를 붙인 것처럼 계속 되풀이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한 달 이상 노래를 지속적으로 부르자 김씨의 목은 쉬어버렸다. 가끔 전화를 하는 자식들에게는 잠을 자지 못해서 목이 쉬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계절이 하지를 향해간다는 점이었다. 동이 점점 빨리 트기 때문에 김씨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도 그만큼 짧아지는 셈이었다.
아버지의 목이 쉬어 걱정된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식들은 바로 달려와 주지 않았다. 김씨는 차녀에게 목이 쉰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들들에게는 어려워서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위안이 되는 자식은 근처에 사는 삼남이었는데 그나마 집에 오면 겨울 해처럼 짧게 머물다 갔다. 차남은 승용차로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살고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기도 힘들었다. 장녀는 가깝게 있었지만 교회 일로 바빴기 때문에 자주 오지 못했다. 사남은 거리가 워낙 먼데다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김씨의 사정이 아무리 나빠도 명절 외에는 오기 힘든 자식이었다. 사남도 종교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오히려 더 바빴다.
김씨의 가장 원망스러운 대상은 미국에서 사는 장남이었다. 어쩌다 국제전화를 해오는 장남은 김씨의 안부나 물으면 그만이었다. 장남은 총명했지만 김씨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결혼 후에는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가 직장생활을 하니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장남을 사돈집에 뺏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저세상으로 간 이후 꿈에서 자주 보는 자식이기도 했다.
희한하게도 마음을 제일 많이 써주는 사람은 사위였다. 전화도 자주 했고 들르는 날은 꼭 곁에서 자고 갔다. 물론 지척에서 직장 생활하고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위가 자고 가니 고맙기도 하련만 김씨는 사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위는 구두쇠였다. 때문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밥은 늘 한 그릇 이상 먹었고 김씨가 해놓은 찌개를 다 먹어 버릴 때도 있었다. 사위가 집안을 휘휘 둘러볼 때면 가져갈 게 있나 찾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 형부가 자식들보다 낫네요.”
전화기를 통해서 사위 얘기를 듣던 차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긴...사위는 다 도둑놈이라는데 아버지가 좋아하겠어요?”
차녀가 비틀어서 말을 했지만 김씨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김씨는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너한테 쪼까 헐 말이 있는디...”
김씨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런 말을 헐 때가 아닌 것 같다마는...”
“뭔데 뜸을 들이세요?”
“아무려도 나가 장가를 가야쓸랑 갑다.”
“예?”
차녀의 대답이 날카로워지자 김씨는 침묵을 지켰다.
“장사 지낸지 얼마나 됐죠? 기가 막혀서. 술만 마시면 행패부리고 엄마를 때리고 하더니 그것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네. 엄마한테 반성이나 하면서 사세요!”
매몰차게 쏘아붙이는 딸에게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김씨가 담배를 찾느라 벗어 놓은 상의 주머니를 뒤질 때까지도, 차녀는 전화기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
“아버지!”
승용차에서 내린 차남이 불렀지만 빈집처럼 조용했다. 차남은 텃밭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장 곁에 선 감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푸른 이파리 사이로 노릇노릇한 감이 숨바꼭질 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돌쩌귀 소리가 나면서 마루 끝에 붙은 방의 문이 열렸다.
“우리 차남 왔냐?”
문을 열고 나온 김씨의 눈이 빨갰다.
“할아버지 술 마셨어요?”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손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술은 먼 술이여. 밤에 당최 잠이 안와서 낮잠을 한숨 잤다. 느그덜만 왔냐?”
“예. 다들 곧 오겠죠.”
“아빠. 가서 감 따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던 손자가 차남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감 따러 온 줄 알아?”
“그럼 뭐 하러 온 건데? 작년에도 감 땄잖아.”
초등학교 일학년인 손녀의 핀잔에 유치원생인 손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김씨의 생일은 음력으로 쇠었지만 철이 늦거나 이르거나 감을 딸 수 있었다. 단감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며느리는 다섯 살 먹은 아들이 대견하다는 듯 웃음을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차남과 둘째 며느리는 사들고 온 물건을 마루에 놓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두 아이는 벌써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얘들아. 물 튀잖아. 마당으로 가서 놀아.”
수돗가로 가던 둘째 며느리가 언성을 높이자 애들이 장독대를 지나 마당으로 달려갔다.
“동서는 가까우면서도 아직 안 오네?”
“퇴근해야 올 테지.”
차남은 엉거주춤 선 상태로 대답을 했다. 토방에 걸터 앉아있던 김씨는 애들에게 다친다는 말을 하더니 뒷짐을 진 채 밖으로 나갔다.
“항상 혼자 일을 다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둘째 며느리가 수돗가로 가면서 투덜거렸다. 삼남의 집은 근처의 읍내에 있었다.
“오늘은 내가 도와줄게. 분부만 내리셔.”
차남은 양쪽 팔목의 옷소매를 밀어 올렸다. 직장에서는 직급이 사무관이었지만 아내 앞에서는 왜소해지는 차남이었다. 어머니 장례식 이후부터는 더욱 입지가 곤란해진 상태였다. 미국에 있는 장남은 돈 몇 푼 보내오면 그만이었고 김씨의 뒤치다꺼리는 거의 다 차남의 몫이라고 생각해오던 둘째 며느리였다. 장남은 부모가 대준 돈으로 대학까지 편하게 다녔는데, 차남은 낮에는 돈을 벌고 야간대학을 다녔다는 사실까지도 둘째며느리에겐 불쾌한 일이었다. 아내의 의중을 잘 아는 차남은 대파를 다듬어씻고 시금치단을 얼른 풀었다.
“장남 노릇까지 하느라 우리 남편이 고생이네.”
주방에서 나온 둘째 며느리가 대파를 받더니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차남은 씻은 시금치를 밀어놓고 콩나물을 먼저 씻어서 주방으로 들이밀었다. 콩나물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는데 차녀가 왔다. 둘째며느리는 쌀을 밥솥에 안치고 버튼을 눌렀다.
차녀까지 함께 타고 온 삼남의 트럭은 낡아서 문을 열 때 삐그덕 소리가 났다. 삼남은 홍어와 과일을 내놨고 차녀는 돈벌이가 없다는 이유로 빈손이었다. 김씨가 마루에 올라서자 차녀가 얇은 봉투를 꺼내서 김씨에게 내밀었다.
“얼마 안 돼요.”
“너 살기도 힘들텐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씨는 냉큼 받아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내가 있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자식들이 아내의 손에만 용돈을 쥐어주었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에 몰래 담배를 뻐끔거리기도 했었다. 용돈 때문에 아내가 떠올랐던 김씨는 술 생각이 나서 입맛을 다시다가 눌러 참았다. 술 끊은 지 이제 삼년 차였다. 평생 마신 술로 독을 채웠다면 몇 백이 아니라 몇 천 독은 될 것 같았다. 아내뿐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엄청난 상처를 준 세월이기도 했다.
전을 부치느라 집안에 기름 냄새가 흘러 넘쳤다. 김씨는 미리서 사둔 돼지고기를 헛아궁이에 걸린 솥에 넣고 된장을 풀었다. 솥뚜껑을 덮고 장작을 가지러 뒤꼍으로 갔다. 처마 밑에 쌓아놓은 장작을 꺼내는데 거미 서너 마리가 도망쳤다. 팔과 손등에 묻은 거미줄을 떼느라 아궁이 앞으로 돌아오는데 한참 걸렸다.
장작더미 밑에 마른 솔가지를 놓고 불을 붙이자 연기가 솟았다. 마당에서 물총을 쏘고 있던 손자들이 달려왔다.
“할아버지 고구마 구워먹어도 돼요?”
“그려. 쪼께 기다리거라. 아이고, 물총을 이짝에다 대고 쏴 불면 안 되제.”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변성기 때문에 어색한 목소리의 손자가 아궁이를 향해 물총대신 엄지와 검지를 겨눴다.
불이 잦아들 무렵 김씨는 솥뚜껑을 확 열어젖혔다. 젓가락으로 고깃덩이를 쿡쿡 찌르는데 장녀의 차가 마당에 들어섰다. 돌아보던 김씨에게 무스로 머리를 한껏 세운 외손자가 인사를 했다.
“먹을 것도 많은데 돼지고기를 삶으시네.”
장녀가 보자기에 싼 그릇을 토방에 놓으면서 말했다.
“말 사람들 줘야제.”
“요샌 시골 사람들도 입이 고급스러워져서 좋은 것만 먹는다드만. 소불고기 넉넉히 재왔어요.”
“돼야지 괴기가 시골에서는 최고여. 광견병이라등가? 그것 땀새 소고기는 겁나서 안 먹는다고 하드라.”
“광견병이 아니라 광우병이에요.”
손자들이 웃으면서 합창하듯 말했다.
“그래서 한우로 해왔어요.”
장녀는 들통을 보자기 채 들고 주방으로 가지고 갔다. 수돗가와 주방 사이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대숲이 수돗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가 다 되었네. 빨리해서 밥 먹어야지.”
“나는 느그덜이 늦는다고 혀서 아침을 든든하게 묵었다.”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아 돼지고기를 썰고 있던 김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김씨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밥상에서도 남들이 앉기도 전에 숟가락을 드는 버릇이 있었다. 김씨가 돼지고기를 우물거리자 둘째며느리가 김치를 가져왔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김씨는 수레에 몇 가지 음식을 실었다. 과일은 박스 채 담았다. 김씨가 끄는 수레가 마당을 빠져나가자 차녀가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가져왔다. 날짜보다 사흘 빨리 생일을 잡았지만 사남의 가족은 여전히 참석을 못한 상태였다. 기질적으로 김씨를 가장 많이 닮은 차녀는 맥주를 두 잔째 비우고 있었다.
“니가 딸들에게는 유산이 필요 없다고 했다면서?”
차녀가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방안의 소음이 딱 멎었다. 지목을 받은 차남은 얼굴이 굳어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봤다.
“그런 뜻이 아닌데...”
“야! 올케! 니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하던데, 얘기 좀 해봐.”
마당으로 들어서던 김씨는 수레를 놓아버렸다. 스텐 광주리가 와르르 소리를 내자 마당에서 어울려 놀던 손자들이 달려와서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느그덜 싸우러 왔냐?”
김씨가 안방 문을 열어젖히면서 소리쳤다.
“아버지에게 그랬다면서요. 딸들은 유산 주지 마라고. 니까짓 게 뭔데 그런 말을 해?”
둘째 며느리는 이마의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넘들 들으깜습다. 내가 알어서 헐팅게 너는 좀 가만히 있어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차남과 삼남은 산을 주고 딸들은 논 한 방구 팔아 줄 것이여.”
“산은 칠천 평이나 된다는데 어떻게 논 한 방구와 같아요? 요샌 산이 논보다 더 비싸다는 것 모르는 사람도 있나? 이쪽 지역도 골프장이 들어서네 어쩌네 해서 산이 평당 만 오천 원이나 간다고 들었다고요.”
“논이 비싸지 산이 비싸? 산은 공시지가가 800원이드라. 니가 한번 띠어봐라.”
“거래 시세가 중요하지 공시지가가 무슨 소용이에요? 그리고요. 난 공평한 게 좋아요. 미국에 있는 동생까지 똑같이 나눠주세요.”
“그놈은 한 뙤야지기도 없다.”
“왜 안줘요? 그 애가 큰일에는 돈을 얼마나 쓰는데...”
“그놈이 대학 댕길 때 공납금을 두 번이나 까먹어 부렀다. 그것 땀새 느그 엄니가 호랭이나 물어가 부렀으면 좋겄다고 혔어. 오죽 혔으면 그렸겄냐? 솔직히 나는 고등핵교만 나온 아들덜을 더 주고잡다.”
“그럼 중학교밖에 안다닌 딸들은요?”
“출가외인이라는 거 몰라서 허는 소리여? 이 말 사람들은 딸 헌티는 한 푼도 안 준다드라.”
“왜, 딸은 어릴 때부터 계속 불이익을 당해야하는데요?”
차녀는 맥주잔이 깨져라 상을 내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차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헌데 너 아부지 생일 상 채린다고 온 거 맞냐? 쯧쯧쯧...”
다른 사람들은 슬그머니 차녀를 외면했고 차녀는 벌떡 일어나서 주방으로 나갔다. 주방 쪽을 흘깃 바라본 김씨는 엉덩이를 쳐들면서 일어났다. 김씨가 마당으로 나가자 차남의 아들이 들어와 감을 따자고 졸랐다. 둘째 며느리는 아들의 따귀를 후려쳤다.
*
그날 이후부터 김씨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김씨는 술을 마시면 전화통을 붙들고 살았다. 새벽에도 전화를 해서 자식들을 놀라게 했다. 김씨의 상태가 나빠지자 돌아가면서 모시자는 얘기가 나왔다. 둘째 며느리가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차녀는 혼자 살고 있어 불편하다는 말을 했고 사남은 집이 비좁아서 어렵다고 했다. 어느 자식이건 먼저 모셔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인사불성인 김씨를 환영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는 장남의 책임론까지 나왔다. 그러다가 전화를 하면서 싸우게 되었고 결국 돌아가면서 모시자는 말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재혼을 시켜드리자는 말이 나왔고 재혼 후 들어가는 생활비를 분담하기로 했다. 미국의 장남이 가장 많은 액수를 내야한다는 의견을 나오자 다들 찬성을 했다. 장남이 없는 상태로 의견교환을 했기 때문에 쉽게 얻은 결론이었다. 딸이 덜 내니 어쩌니 하다가 유산을 공정하게 배정받자는 말을 하면서 똑같이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자식들의 의견을 김씨에게 전달하기 위해 둘째 며느리가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좋은 사람 있으면 재혼하세요.”
며느리의 싹싹한 말투에도 김씨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다.
“술 줄이시면 만나는 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저희가 생활비 걷어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무담시 느그덜에게 짐을 주면 쓰겄냐? 나 재혼 안 헐란다.”
잠자코 있던 김씨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며느리는 멍해졌다.
“끊자. 요금 자꼬 올라간다.”
전화를 끊은 후 둘째 며느리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김씨가 그러는 이유가 따로 있었지만 둘째며느리는 알지 못했다. 이미 김씨는 지인으로부터 몇 번 여자를 소개받았었다. 소개받은 이유는 성욕 때문이 아니라 외로움 때문이었다. 김씨의 성기는 예순 이후로 발기가 된 적이 없었는데 알코올중독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저 등이나 토닥거리면서 살 여자를 구하려는데 요구하는 돈이 너무 많았다. 소개를 받았던 여자들 대부분이 고급식당을 원했고 돌아갈 때는 택시비까지 쥐어줘야만 했다. 여자들은 전답 몇 마지기라도 이전해줘야만 함께 살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미리 전답부터 달라는 건 도둑심보나 마찬가지였다.
김씨가 다시 술에 입을 대면서부터는 주사를 부리게 되니 마을 사람들조차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여자를 새로 얻으면 주사를 부린다는 이유로 사느니 안 사느니 하다가 전답만 떼이고 말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혼을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 무렵 김씨네 집을 자주 들락거리던 사람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 마을을 들르는 고물 장사였다. 처음에는 리어카를 밀고 왔는데 쇠붙이 종류만 사갔다. 마루 밑에서 쇠붙이를 꺼내다가 나막신이 걸려 나왔는데 고물 장사는 그것도 돈을 쳐주고 가져갔다. 나막신의 재질이 나무라서 김씨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물 장사는 시간이 넉넉할 때면 김씨와 점심도 먹었고 점심값이라며 담배를 서너 갑 놓고 가기도 했다. 김씨가 취해서 주사를 부려도 곁에 있어주곤 했기 때문에 고물 장사가 자식들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
리어카를 밀고 다니던 고물장사가 트럭을 가지고 오던 날 김씨는 그를 집으로 들였다. 아주머니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이런 물건을 두세요? 잠자리 사납겠네. 먼지가 많았지만 고물 장사는 틈새까지 들여다봤다. 오래된 물건은 다 치우는 게 좋아요. 아저씨가 돌아가시면 이거 다 쓰레기입니다.
빈집 치우는 걸 김씨도 본적이 있었다.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었는데 쓰레기의 양이 산더미를 방불케 했다. 김씨는 고물 장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는 웬만한 건 고물 장사에게 다 내주었다. 고물 장사는 김씨의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도 차에 실었다. 오래된 항아리까지 실으니 마치 이삿짐 같았다. 김씨가 받은 돈은 십만 원 정도였다. 그날 김씨는 고물 장사에게서 전자파가 전혀 없다는 전기장판을 구입했다.
고물 장사는 기계를 하나 들고 와서 둘째 며느리가 사다 준 옥장판의 전자파 세기를 측정했다. 겁을 주는 바람에 김씨는 고물 팔아서 받은 십만 원을 얹어서 고물 장사가 가져온 장판과 바꾸었다. 말하자면 집에 있던 많은 물건을 전기장판 하나와 바꾼 셈이었다. 고물 장사는 쓰다가 이상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면서 명함을 주고 갔다.
장판에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김씨는 고물 장사에 대해 털끝만큼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차녀를 통해서 할머니의 혼수인 장롱이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격이 이삼백만 원 정도 간다고 하자 그때서야 김씨는 광에서 꺼내 준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와 놋그릇, 떡살을 떠올렸다. 물레와 베틀에 쓰이던 부품까지 가져갔다는 말에 차녀는 김씨에게 미쳤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김씨는 허탈해하다가 명함을 찾았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 소리에 명함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김씨는 몇 시간 동안 전화기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후부터는 그런 비슷한 멘트를 들으면 가슴이 울렁거리곤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술 탓이라고 생각한 김씨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토요일 아침,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사는 장녀에게 전화를 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위가 받았다.
“나 병원에 입원할라네.”
사위가 반색을 하면서 장녀를 바꿔주었다. 김씨는 오전 열 시가 채 되기 전에 입원을 했고 병원의 방을 배정받았다. 그 방에는 침대 열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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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의 말마따나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병원에서는 반찬이 잘 나왔고 집에서와는 달리 따뜻한 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자식들이 면회도 자주 왔다.
“아버지 갇혀 지낸다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니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을 거예요.”
교회에 다니는 장녀는 그럴듯한 말을 했지만 그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는 몇 안 되었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몇몇은 가족들에게서 버림은 받았는지 외출은커녕 면회를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담배조차 사 피울 수 없는 사람들이 흔한 곳이었다. 담배 곽을 아무데나 두면 담배 몇 개비가 사라지곤 했기 때문에 김씨는 잠을 잘 때도 주머니에 곽을 넣어두곤 했다. 담배를 품고 자는 건 담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남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도 담배가 피고 싶어서 손을 입에 자주 가져가는 사람을 볼 때면 담배 두어 개비를 꺼내서 손에 쥐어주곤 했다.
김씨는 그들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자식들이 면회도 자주 왔고 외박이나 외출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자식들 몇몇이 근거리에서 살고 있어 그런 것들이 용이할 수도 있었으나 김씨는 특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우울했다. 어느 땐가 외출했다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허망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가시가 되어 마음 안에 자리를 잡았던 까닭이었다.
세끼 걱정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세뇌시키다 보니 병원 생활이 거의 적응이 되고 있었다. 병원 생활 10여 개월 되어서였다. 그러던 중 김씨는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장남이 영주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곧 입국을 한다는 차남의 전화였다.
장남이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산 이유는 복합적이었지만, 김씨는 아들이 아버지 때문에 서둘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남이 입국하는 날짜에 맞춰 김씨는 퇴원을 했다.
10여 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 온 장남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느라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집으로 오지 않았다. 장남은 술자리에서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 딱 한 번 전화를 했을 뿐이었다. 퇴원을 할 때 장녀가 김씨를 집으로 데려다주기는 했지만 다른 자식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장남이 오는 날에 맞춰 삼남과 차녀가 온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느낌에 지들 육남매는 벌써 만난 것 같았다.
장남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를 할 때 김씨 부부는 배신감을 느껴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는 밤만 되면 훌쩍거렸다. 맏아들이 장모를 모시고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아내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인 것 같았다. 그때 김씨는 아내를 위로하느라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장남이 효자라는 칭찬을 했지만, 솔직히 김씨도 장남이 탐탁했던 건 아니었다.
입국한 지 열흘 만에 집에 온 장남은 별 말이 없었다. 김씨가 며느리와 손자의 안부를 묻자 그때야 가족 얘기를 했다. 그래도 장남과 한 방에서 누워있으니 아내와 한 이불을 덮고 있을 때처럼 편안했다. 기분이 약간 들뜨기도 했다.
내 집보다 편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차피 병원은 외출이 자유로워도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온전한 자유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홀아비 생활 삼 년 동안 김씨는 반찬 솜씨도 제법 늘었고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손수 해 먹기도 했다. 장남이 돌아가면 아내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열심히 살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며칠 묵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남은 하루 만에 집을 떠났다.
장남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집을 떠난 닷새 후였다. 인천공항이라면서 열한 시 비행기로 출국한다는 장남의 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통화 후 김씨는 먹던 아침 밥상을 밀어버리고 자리에 누웠다. 김씨가 이불을 밀치고 겨우 일어났을 때는 오후 세 시였다.
우선 무엇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김씨는 주방으로 가서 찬장 문을 열었다. 김씨의 눈에 들어온 그릇은 노란빛깔이 벗겨진 양은대접이었는데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찌그러져 있었다. 김씨는 양은대접을 들고서 거실을 가로질러 광으로 갔다.
쌀가마니 뒤쪽에서 한 되짜리 소주병을 찾아냈다. 반병쯤 남아 있었는데 오래되어 김이 새어버렸을 것 같았다. 소주가 양은대접에 반쯤 차오르자 김씨는 소주병의 뚜껑을 돌려 닫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씨는 양은대접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한쪽 손으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창고 속의 어둠에 적응하느라 김씨는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이삼 미터 쯤 거리에 농약 박스가 보였다. 텃밭에 뿌리기 위해 버리지 않고 둔 농약병이 몇 개 남아 있었다. 누런 재질의 종이 박스는 한쪽이 짜부라져 있었다.
양은대접을 놓고 한 병 한 병 뽑아서 읽었다. 유성 매직으로 큼직하게 쓴 글씨가 읽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쓴 글자처럼 비뚤비뚤했다. 살충제 살균제 제초제...아내가 병에 붙은 인쇄지를 보면서 썼기 때문에 글씨는 정확했다. 김씨는 꼼꼼한 아내가 쓴 글씨를 읽고 또 읽었다.
김씨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김씨가 살충제의 뚜껑을 따서 소주에 타니 거품이 약간 일었다. 흰 거품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던 김씨는 양은대접을 들어서 입에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