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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1946~ )

가엾은 리얼리스트

감을 따면서

고개

고목

고집

권력의 담

그날

그날 밤을 회상하면

그날이 오면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심 하나는

그 집을 생각하면

꽃이여 피여 이름이여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나의 꿈 나의 날개

나의 칼 나의 피

나 자신을 노래한다

날 저물어 캄캄한 밤

노래

노래하지 말아라

다시 시에 대하여

대통령 하나

도둑의 노래

돌멩이 하나

동지여

동행

돼지의 잠

똥파리와 인간

마지막 인사

망월동에 와서

모래알 하나로

무심(無心)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법 좋아하네

벗에게

별아 내 가슴에

별유천지비인간

병사의 밤

봄날에 철창에 기대어

봄이 오는 소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불꽃

사람의 얼굴

사랑

사랑은

사랑의 기술

사랑의 얼굴

사상에 대하여

사상의 거처

산골 아이들

산국화

산에 들에 봄이 오고

상념

새가 되어

설날 아침에

세상은 고이 잠들고

세상 참

세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수선화에게

수인(囚人)의 잠

시에 대하여

시의 요람 시의 무덤

시인은 모름지기

싸가지 없는 새끼

아기를 보면서

아버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아우를 위하여

아이고! Go!(날마다 날마다)

안부

어떤 관료

어머니

어머니의 밥상

어머님께

엉뚱한 녀석

연가

예술 지상주의

옛 마을을 지나며

오늘 하루

우익 쿠데타

원숭이와 설탕

의자

이 가을에 나는

이 겨울에

이 세상에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자유

장난

잿더미

적막강산

전사

전향을 생각하며

절망의 끝

조국은 하나다

조선의 딸

지는 잎새 쌓이거든

진혼가(鎭魂歌)

창살에 햇살이

철장에 기대어

청승맞게도 나는

청춘의 노래

추석 무렵

출항제

탁류

통일되면 꼭 와

투쟁과 그날 그날

편지

하늘과 땅 사이에

학살

한 애국자를 생각하며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항구에서

화가에게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엾은 리얼리스트

김남주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 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 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

 

 

 

감을 따면서

김남주

 

감을 따면서 푸른 하늘에

초가을의 별처럼 노랗게 익은 감을 따면서

두 발의 연장인 사닥다리의 끝에 서서

두 손의 연장인 간짓대의 끝으로 감을 따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뿌리가 있었다

네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과는 구별되는

 

나는 감 따는 노동을 중지하고

인간의 대지로 내려왔다 직립보행의 동물인 나는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감나무와 감나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렇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은 노동이었다

수천 년 수만 년 수백만 년의 노동이었다

숲과 강과 자연과의 싸움에서 노동 속에서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동물이 되었다 인간이 되었다

보라 감을 쥐고 있는 이 상처투성이의 손을

손과 발의 연장인 이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깎고 잘랐던 저 낫과 톱을

낫을 갈았던 저기 저 숫돌까지를 보라

노동의 손자국이 나 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노동의 과실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보라 내가 지금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평상을

이 평상 위에 놓은 네발 달린 밥상과 밥상 위의 밥을

보라 내가 짓고 있는 저 돼지막과

내가 기거하고 있는 저 초가집과

지붕 위에 우뚝 솟은 검은 굴뚝과

굴뚝에서 하얗게 피어올라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보라 장독대를 그 위에 가득 찬 옹기그릇을

옹기에 가득가득 담겨져 진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는 간장과 된장을

어느 것 하나 노동의 결실 아닌 것이 있느냐

모두가 모든 것이 노동의 역사 아닌 것이 있느냐

뿐이랴 내가 입고 있는 이 내의도

내가 벗어 놓은 저 저고리의 단추도 노동의 과실이자 옷의 역사다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장딴지의 굳은살도

굽혔다 폈다 할 수 있는 이 팔의 뼈도

그리고 내 가슴에서 뛰고 있는 이 심장의 피도

수천 년 수만 년 수백만 년의 노동이 창조한 물질이다

노동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 펜도

펜 끝에서 흐르는 언어의 빛도 종이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말의 행렬도 하나가

하나같이 노동의 결정이고 인간 역사의 기록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짐승과는 다르게

살과 뼈와 피를 빚어낸 마술이었다 기적이었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출발점이고 과정이고 종착역이다

한마디로 끝내자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짐승에 가까워진다

이제 분명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의 가장 가까운 적은 노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이다

아니다 노동에서 이미 멀어져 버린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된장 속의 구더기다 까맣게

감잎을 갉아 먹는 불가사의한 벌레다

쌀 속의 좀이고 어둠 속의 쥐며느리이고 축축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서식하는 이고

황소 뒷다리에 붙어 있는 가증스런 진드기이고

회충이고 송충이고 십이지장충이고 기생충이고 흡혈귀다

인간의 동지는 노동 그 자체다

 

 

 

고개

김남주

 

이 고개를 갑오년에는

빼앗긴 토지의 농민들이 넘었지요

짚신에 감발하고 을미적 을미적

죽창 들고 넘고는 했지요

 

이 고개를 을사년에는

빼앗긴 나라의 의병들이 넘었지요

무명수건 머리에 질끈 동이고

화승총 메고는 넘고는 했지요

 

넘었지요 넘고는 했지요 이 고개를

허울좋은 거품으로 온 해방은 가고

빼앗긴 독립의 빨치산이 넘고는 했지요

눈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어둠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이제 우리가 넘어야 할 차례지요 이 고개

빼앗긴 토지 나라의 독립을 찾아

이제 우리가 넘어야 할 차례지요 이 고개

피 흘리며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고목

김남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고집

김남주

 

아기 고집은 황소고집보다

세다

그 고집 엄한 아버지의 매로도 꺾을 수 없고

그 고집 다정한 어머니의

달램으로도 누그러뜨릴 수 없다

한번 토라졌다 하면

하고 싶은 일 하게 할 때까지

먹고 싶은 것 먹게 할 때까지 꺾이지 않는 그 고집

아기 고집

독재자 아니면 꺾을 자 없다

독재자가 휘드르는

칼 아니고는

 

 

 

권력의 담

김남주

 

나는 나가야 한다 살아서

살아서 더욱 튼튼한 몸으로

 

나는 보여줘야 한다 나가서

나가서 더욱 의연한 모습을

 

나는 또한 보여줘야 한다

놈들에게

감옥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전사의 휴식처 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무기를 바로잡기 위해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보라 창살에 타오르는 이 증오의 눈을

보라 주먹으로 모아지는 이 온몸의 피를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자들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나는 싸울 것이다 살아서 나가서 피투성이로

빼앗긴 내 조국의 깃발과 자유와 위대함을 되찾을 때까지

토지가 농민의 것이 되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권력이 민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날

김남주

 

솔직히 말하겠소

그날 나는 울고 싶었소

그날 정의가 불의에 패배하던 날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소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았소

 

솔직히 말하겠소

그날 나는 의연하게

패배를 맞이하려고 했소

그날 불의가 승리를 뽐내던 날

죽지 않고 기를 세우려고 했소

그러나 그렇게도 되지 않았소

 

그날 정의가 패배하던 날

그날 불의가 승리하는 날

농민이 와서 내 손을 잡고 울었소

노동자가 와서 청년 학생들이 와서

눈물 바람을 일으키다가 되돌아갔소

밥맛이 떨어졌다면서 아예 식음까지

전폐하고 드러누운 사람까지 있었소

 

그들에게 노동자 농민에게 나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소

나 자신이 누구로부터 위로받고 싶었소

그들이 돌아가고 나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소

 

이번에 싸움에서 이긴 것은

불의가 아니었다

이번에 싸움에서 진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선거에서 싸움에서 이긴 것은

돈이고 양키제국주의의 총칼이고 음모였다

 

정의와의 싸움에서 불의가 이겼다고 해서

불의가 불의 아닌 것은 아니다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은 아니다

 

 

 

그날 밤을 회상하면

김남주

 

불이 되어 차라리 불바다가 되어

붉은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싶은 밤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타버리고

빈 그릇 한줌 재로 남고 싶은 밤

아니 재 속의 조그마한 불씨로 되살아

한뼘 어둠이라도 물러나게 하고 싶은 밤

 

나는 걷고 있었다 그날밤

살얼음이 깔린 압제의 거리를

기역 자로 꺽어진 엿장수 골목을 돌아

밤참으로도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 노동자들

카바이트 불빛의 포장마차를 지나

내 이름 아닌 아무개 이름을 불러도

혹시나 나를 세워 몸수색이나 하지 않을까

호루라기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죄 안 짓고 죄지은 양 괜시리 불안해지는 곳

그런 파출소 앞을 지나

 

환청이었을까 '어이 학생'하는 소리에

환각이었을까 목덜미에 닿을 것 같은 검은 손의 촉감에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발걸음이 빨라졌고

급기야는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나는 생각했다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칵 뒈져나 버려라 이 겁보야

아냐 나도 할 수 있어 사내가 되어야 해

놈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고문에 대한

감옥에 대한

죽음에 대한

나의 이런 두려움이야 가슴의 이 동계야

이겨야 해 이 공포 이 동계를

비열한 놈들 네놈들에게 먹여줄 것은 다이너마이트뿐

이것만이 우리의 요구에 대답해줄 것이다

 

그날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아 그날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하나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날이 오면

김남주

 

그날이 오면

감옥이 열리고

활짝 내 가슴 또한 열리고

새악시 붉은 볼이 되어

내 팔에 그대 안겨오는

그날이 오면

내 그대

번쩍 들어 올려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이 되게 하리라

그날이 오면

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눈으로 들어차는

인간의 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김남주

 

"그대가 끝내지 못한, 그것이 그대를 위대하게 하리라" - 괴테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내린다

눈 위에 눈이 내리고

눈 위에 눈이 내리고

발밑까지 발목까지 내리고

길가의 솔밭의 무덤가에 내리고

하염없이 내리고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부질없는 눈물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굶주림의 한계를 알고 싶었을 뿐

그들은 오로지

어둠의 깊이를 알고 싶었을 뿐

결코 죽음으로 간 것은 아니다

결코 죽음으로 간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이 혁명도 그렇듯이

한 나무의 열매가

한 종자의 묻힘에서 비롯되듯이

그들의 죽음 또한

그들의 죽음 또한

한 나무의 열매를 위하여

하나의 씨앗이 되고자 했을 뿐

한 나무의 생명을 키워 주는

재가 되고 거름이 되고자 했을 뿐

한 나무의 성장을 지속시켜 주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자 했을 뿐

 

뿌리가 되고자 했을 뿐

 

그렇다

그들의 분신은

존재로 향한 모험이었고

그들의 할복은

칼로 깍아 세운 자유의 성채였다

 

 

 

그러나 나는

김남주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의 갈퀴질한다는 금(金)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근심 걱정 잠 안 오고

춘하추동 사시장철 뼈빠지게 일을 해도

허리 펴 느긋하게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맘 놓고 허리 풀어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납세고지서 징집영장 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그 인심 하나는

김남주

 

나 어제

홀로

김포에서 강화도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려다가

다리 입구 팻말에 씌어져 있는

시구 한 구절을 보고 탄복했노라

 

-- 홀로 가는 저 나그네

간첩인가 다시보자--

 

아무튼 대단하다 대한민국

서정적인 그 인심 하나는!

 

 

 

그 집을 생각하면

김남주

 

이 고개는

솔밭 사이사이를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이 고개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욱신욱신 삭신이 아리도록 얻어맞고

친정집이 그리워 오르고는 했던 고개다

바람꽃에 눈물 찍으며 넘고는 했던 고개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어머니를 데리러 이 고개를 넘고는 했다

고개 넘으면 이 고개

가로질러 들판 저 밑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이끼와 물살로 찰랑찰랑한 징검다리를 뛰어

물방앗간 뒷길을 돌아 바람 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팽나무와 대숲으로 울울한 외갓집이 있다

까닭 없이 나는 어린 시절에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다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다

심지어 나는 우리 집에는 없는 디딜방아가 싫었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당부 말씀이 역겨웠다

나는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머슴으로 거처했다는 이 집의 행랑방을

 

 

 

꽃이여 피여 이름이여

김남주

 

내란의 무기 위에 새겨진

피의 이름

 

시가전의 바리케이드에서 피어나는

꽃의 이름

 

자유여 나는 부르지 않으리

함부로 그대 이름을

 

그대가 한 발짝 전진하면

그 뒤에는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고

 

그대가 한 발짝 물러나면

그 앞에는 시체가 산이 되어 쌓이고

 

오 자유여 무서운 이름이여

나는 부르지 않으리 그대 이름을 함부로

 

내란의 무기 위에서 시가전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피의 꽃으로 내가 타오르는 그 순간까지는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김남주

 

마을 앞에 개나리꽃 피고

뒷동산에 뻐국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꽃 피고 새만 울면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없다면

 

시냇가에 아지랑이 피고

보리밭에 종달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산에 들에

쟁기질에 낫질 하는 총각이 없다면

 

노동이 있기에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산에 들에 쟁기질 하는 총각이 있기에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나의 꿈 나의 날개

김남주

 

하늘을 나는 새가 나를 비웃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내 꿈의 높이가 하늘에 있는 줄 알고

그 꿈 키우다가 땅에 떨어져 이런 신세 철창 신세 면치 못한 줄 알고

그러나 웃지 마라 새야

십년을 하루같이 벽과 벽 사이에

갇혀

오가도 못하는 이 사람을 보고

팔다리 육신이야 이렇게 기막히게 철창과 철창 새에 끼여

옴짝달짝 못한다만

나에게도 날개가 있단다 꿈의 날개가

바람의 속도로 별과 달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무기의 꿈이 있고

햇님의 은총을 받아 기름진 대지에

달무리의 원을 그리며 씨를 뿌리고

만인의 입술에 가을의 결실을 가져다주는

노동의 날개가 있단다

그러나 새야

하늘 높이에서 나를 비웃고

철창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비켜가는 매정한 새야

나의 꿈은 너처럼 먼 데 있지 않단다

나의 날개는 너처럼 높은 데 있지 않단다

나의 꿈 나의 날개는

지금 이곳에 있단다 지상에 있단다

노동의 팔이 닿을 수 있는 인간의 대지에 있고

발을 굴러 산맥과 함께 강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벌판의 싸움터에 있단다

가장 높아야 내 꿈의 날개는

하늘 아래 첫동네 백두산에 있단다

그 산기슭에서 강가에서 숲 속에서

재롱을 피우며 자작나무 가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람쥐의 꼬리에 있단다

팔팔하게 뛰노는 붕어의 지느러미에 있단다

무지개 끝을 달리는 청노루의 뒷다리쯤에 있단다

다람쥐와 함께 붕어와 함께 청노루와 함께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는 온갖 잡새와 함께

인간세계를 이루고 사는 작은 농장에 있단다

무르익은 노동의 과실 맑은 물과 맑은 공기

하늘의 별과 산에 들에 만발한 꽃과

인간에게 공기와도 같은 것

밀이며 옥수수며 남새며 이슬이며 집이며

인간에게 기본적인 이런 것들이 너나없이 만인의 입으로 가슴으로

골고루 들어차는 그런 세상 바다에 있단다

가장 높아야 내 날개의 꿈은

기차로 한나절쯤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청천강 푸른 물결 위에 있단다

그 물결 위에 아롱진 이름이여 아침의 나라여

'조국은 하나다'에 있단다

'조국은 하나다'에 있단다

 

 

 

나의 칼 나의 피

김남주

 

만인의 머리 위해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살찐 그대 가슴 위에 언덕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자유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키워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 판검사가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형제들이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험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넘어 평지길 황토길 위에

사래 긴 발의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구석기의 돌 옛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자유를 자유의 나무여

 

 

 

나 자신을 노래한다

김남주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하려 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나는 듣고 있다 감옥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좀 더 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경박한 짓이었어

그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 10년 후퇴되었어

한마디로 미친 놈들이었더 미친 짓이었어

이에 상당한 책임을 그들은 져야 할 거야?하는 소리를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불을 달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가

스스로 제 왕궁을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 아무개와 박 아무개가

제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 희생 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은 전쟁이고

피를 흘림으로써만이 해결되는 것

나는 부르겠다 나의 노래를

죽어가는 내 손아귀에서 칼자루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혁명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되어 있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 사나운 적과 만나야 한다 싸워야 한다

 

나는 해방전사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도 용감 둘도 용감 셋도 용감해야 한다는 것

투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 속에서 그 속에서

자유의 맛 빵의 맛을 보고 싶다는 것 그뿐이다

 

 

 

날 저물어 캄캄한 밤

김남주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노래(죽창가)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錄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다시 시에 대하여

김남주

 

시의 내용은 생활의 내용 내 시에는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다

이제 그만 쓰자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자

가자 씨를 뿌리기 위해 대지를 갈아엎는 농부의 들녘으로

가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물과 싸우는 가뭄의 논바닥으로

가자 추위를 막기 위해 북풍한설과 싸우는 농가의 집으로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그 위를 찍어내리는 곡괭이와 삽의 노동이고

노동의 열매를 지키기 위한 피투성이의 싸움이다

대지 노동 투쟁----

생활의 이 기반에서 내가 발을 떼면

내 시는 깃털 하나 들어올리지 못한다.

보라 노동과 인간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의 적과 싸우는 이 사람을

피와 땀과 눈물로 빚어진 이 사람의 얼굴을

 

 

 

김남주

 

비수에 꽂힌 달

비수에 꽂혀 살해된 처녀의 달

비수에 꽂혀 비수에 꽂혀

학살된 아이의 달

 

달이여 피 묻은 피 묻은 오월의 달이여

노래해주마 당신들의 죽음을

시인인 내가 기억해주마

 

이방인의 침략처럼

원주민의 학살처럼

파괴당한 오월의 사자들이여

내가 노래해주마 기억해주마

가로수와 함께 쓰러진 당신들의 육체를

아침의 창살에서 교살당한 당신들의 미소를

압제자의 총알 때문에 벌집투성이가 된 당신들의 가슴을

 

 

 

대통령 하나

김남주

 

미군이 잡아준 터에

대한민국이 태어나고 마흔 몇 해

그동안 몇 십년 동안 성조기 아래서

대통령도 서너 개 있었다 없었다 했다

하나는

제 나라에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 섬으로 끌려갔다

하나는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총에 맞아 술잔에 코 박고 쓰러졌다

하나는

제 집에 살지 못하고 절간으로 쫓겨났다

 

대통령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그 한 사람으로

나 태어나고 자라고 마흔 몇 해

나는 왜 나를 친애까지 했던 그들을

이를테면 이아무개 박아무개 전아무개 같은 이들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사기꾼 폭력배 정상배 매국노 반역자…

그 따위 이름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가

혹시는 내 입이 워낙 더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혹시나 내 출생이 워낙 천해서 그러는 것일까

 

나 태어난 이 강산에서

아름다운 이름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나 죽어 이 강토에 묻히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자본가들 정치헌금이나

주둔군의 총구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공장에서

조국의 하늘 아래서

흙 묻은 손과 땀에 젖은 노동의 손이 빚어낸

그런 대통령 하나

 

 

 

도둑의 노래

김남주

 

밤은 이리 깊고

담은 저리 높은데

한번 해볼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한번 넘어 부잣집 담 한번만 넘어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밥 한 그릇 고봉으로 해들릴 수만 있다면

 

달은 저리 밝고

밤새워 야경은 담을 도는데

한번 해볼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한번 넘어 부잣집 담 한번만 넘어

우리 누나 순이 누나

술집에서 빼낼 수만 있다면

 

나 하나 묻혀

담 너머 저 어둠속에 묻혀

우리 부모 생전에 한번

밝게 웃으시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누나 시집갈 무렵에

박꽃처럼 하얗게

피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피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돌멩이 하나

김남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 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재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 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동지여

김남주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동지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목청껏 노래하고

힘껏 일하고

내달리며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쓰러지고 일어나면서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이 나이에 이 팔팔한 나이에 이 창창한 나이에

 

서른다섯의 이 환장할 나이에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동지여.

 

 

 

동행

김남주

 

밤하늘 희미한 구름 사이로

으스름 달빛 빛나고

바람은 불어 된새바람

솔밭 사이 황토밭 마른 수숫대를 흔든다

 

----- 진눈깨비가 오려나 보지요

 

달빛에 젖은 창백한 사내가 외투깃을 세우며

동행의 여자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 아까 그 차가 막차였나 봐요

어떡하죠 저 땜에 차를 놓치게 돼서

 

여자는 자기보다 큰 보퉁이를 애꿎게 쥐어뜯으며

미안해했다

딴은 그놈의 보퉁이가 차를 그냥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차는 멈출 듯하다가도 덩치 큰 짐을 보고 그랬는지

번번이 줄행랑을 놓고는 했으니까

 

----- 아니어요 운전사가 심통이 나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쁜 아가씨와 함께 있는 못생긴 남자가 아니꼬워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아가씨는 아까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조 섞인 말투로 공순이라 했고

나는 나를 소개하면서 멋쩍게 웃으면서 글쟁이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 그러지 맙시다

당신은 노동자 나는 시인 떳떳합시다

 

그리고 사내는 허리 굽혀 여자의 보퉁이를 어깨에 맸고

그러자 여자는 사내의 가방을 들고 뒤를 따랐다

가방에서는 고소하게 깨소금 냄새가 났다

 

읍내까지 시오릿길은 험했다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노동자와 시인은 밤길을 재촉했다

살얼음이 깔린 개울을 건너고 고개를 넘었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어쩌고저쩌고

나 태어난 이 강산에 투사가 되어 어쩌고저쩌고

그들은 에움길을 돌면서 노래도 불렀다

 

그들은 합의했다 너럭바위 언덕에서

읍내에 도착하면 대합실에서 한숨 붙이고

내일 아침 서울행 첫차를 타자고

 

 

 

돼지의 잠

김남주

 

밥을 달라고 그러는지

돼지가 꽥꽥 악을 쓴다

시끄러워 책을 읽다 말고 밖으로 나가

바가지를 찾아 들고 돼지에게로 다가가자

그는 거품을 하얗게 물고 끙끙거린다

 

썩은 감자며 호박씨며

알이 덜 여문 옥수수가 둥둥 떠 있는

구정물을 바가지로 퍼주자

그는 대가리를 처박고 먹기 시작한다

우적우적 수수깡을 깨물랴

꾸륵꾸륵 구정물을 삼키랴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젖꼭지를 찾으려고 빽빽거리는

새끼들의 울음마저도 잊은 지 오래다

 

핏발 선 눈

씩씩대는 코

탐욕스런 입

살진 목덜미

축 처진 배

이제 그는 짧은 다리로는

더 이상 제 무게를 가눌 수 없어서인지

바닥에 몸을 눕히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행복한 돼지의 잠

이런 잠을 나는 돼지에게서만 본 게 아니다

어느 중산층의 가정에서도 본 적이 있다

 

 

 

똥파리와 인간

김남주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릉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옛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을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먹다 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마지막 인사

김남주

 

오늘밤 아니면 내일

내일밤 아니면 모레

넘어갈 것 같네 감옥으로

증오했기 때문이라네

재산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네

노동의 대지와 피곤한 농부의 잠자리를

 

한마디 남기고 싶네 떠나는 마당에서

어쩌면 이 밤이 이승에서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유언이라 해도 무방하겠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지해준다네

한마디 더 하고 싶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않으면

공격을 삼가게 패배에서 맛본 피의 교훈이네

 

잘 있게 친구

그대 손에 그대 가슴에

나의 칼 나의 피를 남겨두고 가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만세!

 

 

 

망월동에 와서

김남주

 

파괴된 대지의 별 오월의 사자들이여

능지처참으로 당신들은 누워 있습니다.

얼굴도 없이 이름도 없이

누명쓴 폭도로 흙속에 바람 속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압제와 불의에 거역하고

치떨림의 분노로 일어셨던 오월의 영웅들이여

당신들은 결코 죽음의 세계로 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결코 망각의 저성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풀어헤친 오월의 가슴팍은 아직도 총알에 맞서고 있나니

치켜든 싸움의 주먹은 아직도 불의에 항거하고 있나니

쓰러진 당신들의 육체로부터 수없이 많은

수없이 많은 불굴의 생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

당신들이 흘린 피의 강물에 입술을 적시고

당신들이 미처 다 부르지 못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나

당신들이 흘린 눈물의 여울에 팔과 다리를 적시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당신들이 미처 다 걷지 못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이제 당신들의  자식들은 딸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원수갚음의 증오로 무장하고

그들은 당신들처럼 전진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대지의 별 오월의 영웅들이여

어둠에 묻혀 있던 새벽은 열리고

승리의 그날은 다가오고 있나니

일어나 받아다오 승리의 영예를 그때 가서는. 

 

 

 

모래알 하나로

김남주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술에 배부르랴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없어라 많지 않아라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

입히는 상처 그런 일 작은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은.

 

 

 

무심(無心)

김남주

 

아침 햇살이 은사시나무 우듬지에서 파르르 떨고

산골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귀에서 맑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따라 산사(山寺)를 찾아가고 있다

 

어머니 그동안 이 고개를 몇번이나 넘으셨어요

 

니가 까막소 간 뒤로 이날 이때까장 그랬으니까

나도 모르겄다야 이 고개를 몇차례나 넘었는지

 

옥살이 십년 동안 단 한번도 자식을 보러

감옥을 찾은 적은 없었으되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날 같은 날이면

한번도 빠짐없이 절을 찾으셨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실은 나도 모를 일이다]

자식이 보고 싶을때

감옥 대신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의 그 속을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니 그 절이 나오지요

 

그래 그래 하면서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

공양으로 바칠 두어 됫박 쌀차둥이를 머리에서 내려 놓고

후유 후유 한숨을 거듭 쉰다

 

니 나왔으께 인자 나는 눈 감고 저승 가겄어야

니 새끼가 너 같은 놈 나오면 그때는

니 여편네가 이 고개를 넘을 것이로구만

충진 세상에 남정네가 드나들 곳은 까막소고

아낙네는 정갈하게 몸 씻고 절을 찾아 나서는 것이여

 

 

 

물 따라 나도 가면서

김남주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건듯건듯 동풍이 불어 새봄을 맞이했으니

 

졸졸졸 시내로 흘러 조약돌을 적시고

겨우내 낀 개우쟁이의 발때를 벗기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오뉴월 뙤약볕에 가뭄의 농부를 만났으니

돌돌돌 도랑으로 흘러 농부의 애간장을 녹이고

타는 들녘 벼포기를 적시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음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동산에 반달이 떴으니 낼 모래가 추석이라

넘실넘실 개여울로 흘러 달빛을 머금고

물레방아를 돌려 떡방아를 찧으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봄 따라 여름 가고 가을도 깊었으니

나도 이제 깊은 강 잔잔하게 흘러

어디 따뜻한 포구로 겨울잠을 자러 가지.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아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울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압제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일어나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오월의 무기 무등산의 봉기는

총칼의 숲에 뛰어든 맨주먹 벌거숭이의 육탄이었다

불에 달군 대장간의 시뻘건 망치였고 낫이었고

한입의 아우성과 함께 치켜든 만인의 주먹이었다

피와 눈물 분노와 치떨림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아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은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바람에 일어나는 풀잎으로 '풀잎'은

피의 전투와 죽음의 저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학살과 저항 사이에는

바리케이드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오월의 광주에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김남주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부잣집 침대 위에서 태어난 아기나

염천교 다리 밑에서 태어난 아기나

똑같이 평등하게 태어나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집 없이 평생을 떠도는 도붓장수 박서방이나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사는 왕서방이나

허가 없이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서는 안 되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물 쓰듯 돈을 쓰고도 남아도는 재산 때문에

고민이 태산같은 자본가 장아무개나

무노동에 무임금이라

다음날 아침이면 다섯 식구 끼니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은 노동자 김아무개나

언제라도 아무 데라도 나라 안팎을

여행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랍니다 자유대한에서는

예 예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는

다문 입에 쌀밥이 보장되고

아니오 아니오 목을 세워 고개를 쳐든 사람에게는

벌린 입에 콩밥이 보장된답니다

 

참 좋은 나라지요 우리나라

자유 대한 길이길이 영원히 빛나라지요

 

 

 

법 좋아하네

김남주

 

즈그들에게 이로우면

반국가단체도 민족공동체가 되고

우리들에게 이로우면

민족공동체도 반국가단체가 되고

 

즈그들은 갔다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갔다 와서

들통이라도 나면

통치권의 행사가 되고

우리들이 갔다 와서

떳떳하게 갔다 와서

하늘 아래 밝히면

잠입에다 탈출죄가 되고

 

즈그들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를 주석이라 부르고 그것이 말썽이 나면

외교상의 관례가 되고

우리들이 아무 속셈도 없이

그를 주석이라 부르면

고무에다 찬양에다 동조죄가 되고

 

이게 법이지요

목에 걸면 그것은

부자들에게는 목걸이가 되고

가난뱅이들에게는 밧줄이 되지요

 

 

 

벗에게

김남주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살아 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지하의 물이 되어 숨죽여 흐르고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하고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이별의 때가 왔네

자네가 보여준 용기를 가지고

자네가 두고 간 무기를 들고 나는 떠나네

자네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준 말

- 참된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는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는

- 그 말을 되새기며

 

 

 

김남주

 

밤 들어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그리워 못 잊어 잠 못 이뤄

불 밝혀 지새우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별이라 그런다

기약이라 소망이라 그런다

밤 깊어

가장 괴로울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별이 되어

어머니 어머니라 부른다

 

 

 

별아 내 가슴에

김남주

 

학생들은 싸우고 있는데 바로 아래층에서

사흘 나흘 밥을 거부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위층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그들보다 넓은 공간에서 그들보다 많은 책을 쌓아놓고

 

밥을 입에 퍼담기는 하지만 그러나 넘어가지를 않는다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리고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인다

산다는 게 이런 것이냐-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나 철창에 선다 멀리 침묵의 산이 보이고

청천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는 수심도 많고……

정말이지 산다는 게 이런 것이더냐-

 

대답해 다오 별아 내 가슴에

깜빡깜빡 알 수 없는 눈짓의 신호만 보내지 말고

고개를 끄덕여 주든지 설레설레 가로저어 주든지

내가 묻는 물음에 대답해 다오 침묵의 산아

 

󰡒지는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감옥에서 특히 첫 싸움에서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지지 않기 위해서는

싸움의 스물네 가지 측면을 검토해야 하고

준비 없는 싸움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내가 세운 이 원칙이

악화된 처우의 개선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학생들의 싸움에 연대하지 않는 이유가 되겠느냐

내가 선뜻 이 싸움에 나서지 못하고 결단을 보류한 것은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냐

싸우다가 지기라도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그것마저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냐

 

어느 쪽이냐 별아 대답해 다오

불허 목록 철폐하라!

운동시간 연장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외치며 철문을 차며 싸우고 있는데

사흘 나흘 굶어가며 아래층에서는 싸우고 있는데

위층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나는

어느 쪽이냐 침묵의 산아 대답해 다오

 

 

 

별유천지비인간

김남주

 

꽃과 과일로 장식한 안주상이 들어오고

술병을 가슴에 품은 밤의 선녀들이

춤추듯 미끄러지며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옷부터 벗기 시작했다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고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의 덮개를 걷어내고

허리께로 손이 가는가 싶더니

치마가 소리도 없이 발목까지 흘려내렸다

그리고 그들 선녀들은 최후의 은신처에서

꽃잎 모양의 삼각천을 떼어내더니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내던졌다

그러자 초저녁부터 지상에 내려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선남들도

일제히 술잔을 치켜들고 부라보를 연호했다

 

요란스런 초야의 의식이 끝나자 선남선녀들은

술잔과 입술을 주고받고

옛부터 내려오는 음담과 패설을 주고받고

인구에 회자하는 노래를 주고받고 하다가

마지막 의식을 치르기 위해 각자 짝을 지어

밤의 보금자리로 기어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취하지 않았다

팔목의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고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전봇대를 껴안고 질금질금 오줌을 깔기는 사람

바닥에 주저앉아 으악으악 토악질을 하는 사람

질주하는 택시에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람

사내들을 붙잡고 섹스를 흥정하는 사람

밤의 서울은 별유천지비인간이었다

 

 

 

병사의 밤

김남주

 

눈이 내린다 삼팔선의 밤에

하얗게 내린 눈을 북풍한설에 날리고

바람은 울어 바람은 울어

가시철망 분단의 벽에서 찢어진다

내 귀에 와서 내 고막에 와서 아픔으로 터진다

 

눈은 밤새도록 내릴 것 같은 눈은

북을 향해 치달리다 허리가 끊긴 철길 위에도 내린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총을 메고 북을 향해 서 있는 보초병의 철모 위에도 내린다

눈은 이제 바람이 자고 소리없이 쌓이는 눈은

병사와 나를 잇는 뜨거운 시선 위에도 내린다

 

병사여 나는 불러 본다 그대를

어디서고 볼 수 있는 내 이웃의 얼굴 같기에

병사여 나는 불러 본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형 어쩐 일이오 하고 반겨올 것 같기에

서울로 팔려 간 서림이의 작은오빠같고

빚에 눌려 홧김에 농약을 마셨다는 서산 마을 농부같고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은 다정한 동무같기에

 

병사여 그대를 믿고 나는 물어 본다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누구의 밤이냐

호미 댈 밭 한 뙈기 없어

이 마을 저 마을로 품팔이하고 다니는 그대 어머니의 밤이냐

일자리 빼앗기고 거리에서 거리로

허공에서 허공으로 헤매는 그대 누이의 밤이냐

누구의 밤이야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미제 총을 메고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그대 나라의 국경선이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국경선이냐 저 삼팔선은

 

병사여 그대를 알고 나는 물어본다

그대는 누구의 밤을 지키는 용사냐

고향에 돌아가면 일구어야 할 땅 한 뙈기 없는 병사여

제대하면 누이를 찾아 가난의 거리를 헤매야 할 병사여

그대가 지켜야 할 땅은 재산은 어디에 있느냐

남의 나라 총을 메고 이 밤에 삭풍의 밤에

 

북을 향해 그대가 겨누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마을에

자본가가 이를 가는 노동자의 세계가 있느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도시에

아메리카합중국이 초토화시키고 싶은 증오의 대상들이 있느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금수강산에

압제자들이 찢어 죽이고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느냐

 

눈이 내린다 삼팔선의 밤에

하얗게 내린 눈은 북풍한설에 날리고

바람은 울어 바람은 울어

가시철망 분단의 벽에서 찢어진다

내 귀에 와서 내 고막에 와서 아픔으로 터진다

눈은 밤새도록 내릴 것 같은 눈은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눈은 이제 바람이 자고 소리없이 쌓이는 눈은

병사의 철모 위에도 내리고 내 발목 위에도 내리고

병사와 나를 잇는 뜨거운 시선 위에도 내린다

 

 

 

봄날에 철창에 기대어

김남주

 

봄이면 장다리밭에

흰나비 노랑나비 하늘하늘 날고

가을이면 섬돌에

귀뚜라미 우는 곳

어머니 나는 찾아갈 수 있어요

몸에서 이 손발에서 사슬 풀리면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어요 우리집

 

그래요 어머니

귀가 밝아 늘상

사립문 미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식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시고는 했던 어머니

사슬만 풀리면 이 몸에서 풀리기만 하면

한달음에 당도할 수 있어요 우리집

 

장성 갈재 넘어 영산강을 건너고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영암이라 월출산 천왕 제일봉도

나비처럼 훨훨 날아 찾아갈 수 있어요

조그만 들창으로 온 하늘이 다 내다뵈는 우리집

 

 

 

봄이 오는 소리

김남주

 

어느덧

땅 끝 마을에 파릇 파릇

수줍게 새잎이 열리고

 

타 탁

꽃 망울 벌어지는 소리

천상의 화음인가.

감미롭기만 하다.

 

나른한 오후

여인의 볼륨있는 맵시가

더 할듯 없이 편안해 보이고

물씬 이어지는 봄 이야기가

그렇게도 정겹기만 하다.

 

벌써

봄날같은 행복에 묻혀

여린가슴 파르릇

봄 꽃은 그리 떨고 있지만

 

아직도 불어오는

저 매서운 칼 바람

그 떨림들 조차 위태로와도

봄은 그렇게 그렇게도 여물어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남주

 

무엇하랴 

콧잔등 타고 내려

입술 위에 고인 눈물 위에

그대 이름 적신들

타고 내려 가슴에서 애를 태우고

발등 위에 떨어진 이슬 위에

그대 이름 새긴들

 

무엇하랴 

벽은 이리 두텁고 나는 갇혀 있는 것을

무엇하랴 

철창은 이리 매정하고 나는 묶여 있는 것을

오 새여 하늘의 바람이여

나래 펴 노래에 살고

내래 접어 황혼에 깃드는 새여 바람이여

 

나에게 다오 노래의 날개를

나에게 다오 황혼의 보금자리를

만인의 입술 위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고

대지의 나무 위에서 비둘기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고

압제자가 묶어 놓은 세상의 모든 매듭을 풀어

인간의 팔에서 날개가 되고 바람이 되기도 하는

새여 바람이여 자유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불꽃

김남주

 

불꽃이 타오른다

어둠이 싫어 어둠의 나라가 싫어

무등산에서 팔공산에서 태종대에서

활 활 활

불꽃이 타오른다

 

성조기를 살라먹고

반미의 불꽃이 타오른다

 

성조기를 살라먹고

반미의 불꽃이 타오른다

식민지의 하늘을 붉게 붉게 물들이고

해방의 불꽃이 타오른다

 

보라 이 불꽃을

이 불꽃에 놀라 개판 소판 재벌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튈거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튈거나

갈팡질팡 허둥대는 저 꼬락서니들을 보아라

 

보라 이 불꽃

이 불꽃에 놀라 이방인과 그 앞잡이들

경찰을 불러 곤봉으로 끌거나

병정을 풀어 군화발로 끌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저 꼬락서니들을 보라

 

불꽃이 타오른다

곤봉을 만나면 장작으로 패서 먹고

불꽃이 타오른다

군화를 만나면 가죽으로 삶아먹고

활 활 활

어둠이 싫어

어둠의 나라 억압의 그늘이 싫어

봉기의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이 타오른다

부자를 만나면 기름진 배때기

증오의 불길로 튀겨먹고

불꽃이 타오른다

흰둥이 깜둥이 이방인을 만나면

저주의 낙인 까맣게 하얗게 태워먹고

활 활 활

예속이 싫어

예속의 나라 식민지의 하늘이 싫어

 

 

 

김남주

 

어떤 비는 난데없이 왔다가

겨울 속의 꿈을 앗아 가지만

봄비는 나물 캐는 소녀의 까칠한

손등을 보드랍게 적시지 않는다

 

어떤 비는 폭군처럼 왔다가

들판을 마구 휩쓸어 가지만

여름비는 두레질하는 농부의 금간

논바닥을 다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살며시 왔다가

채전을 촉촉이 적시어 주지만

가을비는 김장하는 아낙네의 벌어진

손바닥을 아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당돌하게 왔다가

젊은 날의 언덕을 망가뜨려 놓지만

비의 季節에 미쳐 버린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

김남주

 

푸른 옷의 사내는

철창에 기대 담 쪽을 내다보며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면회 오겠다던 님을 기다리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면사포도 없이

양친 부모 승낙도 없이

혼자서 결혼한 여자는

면회가 되면

혹시라도 특별면회라도 되면

간수 몰래 남편 될 사람

손등이라도 한번

어루만질 수 있을까

담 곁에서 애를 태우고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분단과 식민지의 밤이 빚어낸 사랑의 한 얼굴인 것을

 

 

 

사랑

김남주

 

1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은

김남주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사랑의 기술

김남주

 

여전히 건강하다니 마음 놓이오

그림을 곁들인 당신의 편지 볼 때마다 나는

지그시 두 눈 감고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오

거기에는 굴레 벗은 망아지가 들판을 휘달리고 있기에

거기에는 꼴망태 옆에 차고 낫질하는 초동이 있고

거기에는 똬리끈 입에 물고 두레박을 내리는 소녀가 있기에

아 그때 당신의 가슴은 얼만 부풀었던가

아 그때 나의 심장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별빛 쏟아지는 바위산 언덕의 입맞춤은 얼마나 알알했던가

 

 나 또한 잘 있고

꼬옥꼬옥 씹어 주먹밥 삭이고 아침저녁으로

바닥에 대가리 처박고 고뇌하는 조국 눈 부릅떠 본다오

과히 염려 마오

차마 다 살라고요

십년 너머 또 반십년을

기다림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처럼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아픔보다 넓은 공간 없고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 만한 우주도 없다지

기다려요 기다리며 우리 배워가요

쇠사슬 달구어 칼을 벼리는 기술을

안팎으로 쑤쎠 들쑤셔 증오의 벽 무너뜨리는 기술을

입술과 입술을 만나게 하고

가슴과 심장을 만나게 하고

형제와 누이와 아버지와 아들이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기술을

 

 

 

사랑의 얼굴

김남주

 

푸른 옷의 사내는

철창에 기대 담 쪽을 내다보며

언제나 올까 저네나 올까

면회 오겠다던 님을 기다리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면사포도 없이

양친 부모 승낙도 없이

혼자서 결혼한 여자는

면회가 되면

혹시라도 특별면회라도 되면

간수 몰래 남편 될 사람

손등이라도 한번 어루만질 수 있을까

담 곁에서 애를 태우고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분단과 식민지의 밤이 빚어낸

사랑의 한 얼굴인 것을

 

 

 

사상에 대하여

김남주

 

새로운 사상은

썩고 병들고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난다

이를테면 동학이 그러했다 반봉건싸움에서

새로운 사상은 그 초년에는

거리와 시장의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문난적이라 박해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반역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것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한다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

처녀들은 깊숙한 곳에 호미로 그것을 파묻고

사내들은 억센 주먹으로 그것을 지킨다

밤이 그들의 옷이고 별이 그들의 미래다

고난의 긴 세월 낡은 껍질과의 싸움에서

새싹의 기운은 이기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지천으로 그 가지를 뻗는다

사상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민중의 피로 그것이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입으로 그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상의 거처

김남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갈 길 몰라 네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웬 사내가 인사를 한다

그의 옷차림과 말투와 손등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노동자일 터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집회에 가는 길이라며 함께 가자 한다

나는 그 집회가 어떤 집회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집회장은 밤의 노천극장이었다

삼월의 끝인데도 눈보라가 쳤고

하얗게 야산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추위를 이기는 뜨거운 가슴과 입김이 있었고

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한입으로 터지는 아우성과 함께

일제히 치켜든 수천 수만 개의 주먹이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날 밤 눈보라 속에서

수천 수만의 팔과 다리 입술과 눈동자가

살아 숨쉬고 살아 꿈틀거리며 빛나는

존재의 거대한 율동 속에서 나는 알았다

사상의 거처는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는 것을

사상의 닻은 그 뿌리를 인미늬 바다에 내려야

파도에 아니 흔들리고 사상의 나무는 그 가지를

노동의 팔에 감아야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잡화상들이 판을 치는 자본의 시장에서

사상은 그 저울이 계급의 눈금을 가져야 적과

동지를 바르게 식별한다는 것을

 

 

 

산골 아이들

김남주

 

이 아이들

자기들 담임선생과 함께 걷고 있는 나를

에워싸고 헬끔헬끔 쳐다보다가도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깔깔대며

천방지축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이 아이들

 

이 아이들

낯선 사람을 보면

그가 무슨 친절이라도 베풀면 그 길로

지서에 달려가 신고하는 아이도 있다 이 산골 아이들

 

이 아이들

집에 가면 어른처럼 일을 하고

갓난아이 보다 얼러 잠재운다

이 아이들

그 얼굴 아직은 함박꽃같은 웃음뿐이고

그 손은 아직 고사리손인 이 아이들

저만큼 쪼르르 빗속으로 달아난다

저마다 메밀꽃 뽑아 한 손에 모아

그래도 선생님과 나에게 내밀고

부끄러워 부끄러워 밤송이 같은 뒷머리 뒤로하고 달아나는 이 아이들

 

무엇이 될까 이 아이들은 커서

나이 사십에 구부러진 허리

죽으면 죽었지 서른다섯에 아직 장가도 못가는 이 산골에서

 

무엇이 될까 그러면 이 아이들 도시로 가서

 

 

 

산국화

김남주

 

서리가 내리고

산에 들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찬서리 내려 산에는

갈잎이 지고

무서리 내려 들에는

풀잎이 지고

당신은 당신을 이름하여 붉은 입술로

꽃이라 했지요

꺽일 듯 꺽이지 않는

산에 피면 산국화

들에 피면 들국화

노오란 꽃이라 했지요.

 

 

 

산에 들에 봄이 오고

김남주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거기에 갔다고

누가 와서 물었네 거기가 어디냐고

나는 대답했네 담 너머 하얀 집을 가리키며

자유가 묶여 발버둥치는 곳이라고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이번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무덤 하나를 가리키며

그는 지금 저기에 있다고

 

 

 

상념

김남주

 

더위에 불타는 한 낮의 뜨락

느닷없이 퍼붓듯 소낙비가 내린다

 

누워있던 소복의 여인 불현듯 일어나

활짝 장지문을 열어제끼고

 

창대처럼 꽂히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여인은 돌아서 거울 앞에 앉는다

싱싱한 파초잎에 주룩주룩 쏟아지는 거울 속의 빗줄기를 보며

여인은 머리를 빗기 시작한다

 

거울 속의 소낙비는 여인의 타는 입술을 적시고

한동안 고뇌의 무덤의 유방 사이에서 머물렀다가

 

타고 내려 하얀 배를 쓰다듬고

새벽의 골짜기를 흘러 골짜기를 흘러

 

발등을 적실 때까지 여인은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새가 되어....

김남주

 

이 가을에

하늘을 보면 기러기 구천을 날고

진눈깨비 내릴 것 같은 이 가을에

잎도 지고 달도 지고

다리 위에는 가등도 꺼진

이 가을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오직 되고 싶은 것은

새다

 

새가 되어

날개가 되어 사랑이 되어

불 꺼진 그대 창가에서 부서지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내 모든 것을 말하고

그대 전부를 껴안고 싶다

 

 

 

설날 아침에

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세상은 고이 잠들고

김남주

 

세상은 고이 잠들고 적막한데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유령처럼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이 있다

하나는 그 꼬리에 반딧불처럼 불을 켠 불온의 사상이고

하나는 그 머리에 탐조등처럼 쌍심지를 켠 관헌의 눈이다

잡히지 말아라 불온한 사상아 네 꼬리가 잡히면

어둠이 운다

뜬눈의 봉사

네 어머니가 운다

 

 

 

세상 참

김남주

 

있는 사람들은

진수성찬 먹은 둥 마는 둥 그대로 남기고도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배 터져 죽겠다고 급살하고

없는 사람들은

남은 음식 바닥까지 긁어 먹고도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배고파 못 살겠다 야단이고.

 

 

 

세월

김남주

 

압제와의 싸움에서 나는 지고

이곳에 내가 갇힌 지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9년이란 세월 그것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아홉 바퀴 돌고

달이 지구의 둘레를 백여덟 바퀴를 도는 행로라 합니다

나는 그동안 9년 동안

동산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서산 너머로 달이 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자연으로부터도 버림받았으니

별 하나 내 머리 위에서 빛나지 않습니다

 

자본의 세계에서 쫓겨나

이곳에 내가 갇히고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9년이란 세월 그것은

신랑이 신부를 맞아 신방을 꾸미고

결혼 십 주년을 바라보는 해와 달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나무처럼 자라서 재롱을 피우고

아침저녁으로 징검다리 건너 학교에 갔다 올 나이입니다

나는 어제 보았습니다 거울 앞에서 반백이 된 내 머리를

그리고 돌아서서 나는 그려보았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며

6년 후의 내 모습과 마흔다섯 살이 될 한 여인의 얼굴을

 

취침나팔 소리가 들리고 밤이 깊어갑니다

이제 내 귀는 가까워졌다 멀어져가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밖에 듣지 못합니다

이제 내 눈은 벽과 천장과 이따금 감시통으로 나를 엿보는

간수의 눈밖에 보지 못합니다

나는 보고 싶습니다 이 밤에

잠자리를 펴는 여인의 허리를

나는 듣고 싶습니다 이 밤에

아기를 잠재우는 어머니의 자장가를

나는 보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행주치마 허리에 두르고 밥상을 차리는 주부의 모습을

나는 듣고 싶습니다 잠자리에서

늦잠꾸러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의 잔소리를

나는 보고 싶습니다 먼 훗날

바람에 날려 대지에 씨를 뿌리는 농부와 그 뒤를 따라오면서

흙으로 씨를 덮는 농부의 아내를

 

먼 훗날 사내가 다시 동에서 뜨는 해를 보고

서으로 지는 달을 보게 될 그런 날

 

 

 

김남주

 

이 손을 보게 친구

얼풋 보아 그 생김새가 짚불에 구부러진 갈퀴 같네

거칠기는 옹이와 상처투성이로 늙어빠진 상수리나무같고

삭풍에 사이가 벌어진 잔솔밭의 송꽁이처럼 꺼끌꺼끌 하네

나는 알고 있네 이 손의 주인과 그 내력을

열여섯 살까지였던가 웃마을 고씨집의 꼴머슴으로 잔뼈가 굵었고

스무 살 훨쩍 넘어서까지 저 아래 기와집 상머슴이었다네

밤과 낮의 눈코 뜰 새 없는 노동이 그의 하루하루였고

제 앞으로 땅 한 뙈기 가지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네

그 꿈은 이루어졌다네 나이 서른둘에

늦은 장가와 함께 이루어졌다네

새우배미 열두 다랑치를 합배미하여 서 마지기 논배미로 만들었고

그는 그것을 이름하여 구천지기라 했다네

성씨가 구씨인데 봉천지기였기 때문이라네

정금나무와 산돌로 깡깡한 주인집 야산을 파헤쳐

네모반듯한 산밭을 하나 일구었는데 3년 전에는 그것을

제 앞으로 문서에 올려놨다네 으흠

 

자네는 볼 수 있을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면

일분일초를 가만있지 못하는 이 손을

금방까지 싸리비로 안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손은 뒤안에서 장작을 패고

소죽솥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또 어느새

변소에 가서 합수와 보릿대를 이겨 참거름을 만드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한시도 일하지 않으면 배겨내지 못하는 이 손

이 손은 싸운다네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는 그날그날의 양식을 위하여

봄이면 살을 에이는 눈녹이바람과 싸우고

씨 뿌려 병충해가 생기면

죽음의 농약과 함께 싸운다네

가뭄을 만나 어제까지는 물과 싸우는가 하면

홍수를 만나 오늘은 무너져 내린 둑과 싸우고

다 자란 자식 고개 숙인 황금의 이삭을 부둥켜안고

가을이면 태풍과 싸운다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네 아직

이 손의 주름이 부자들의 웃음처럼 펴지는 것을

제 노동의 주인이 되어 이 손이

제 입으로 쌀밥을 가져가는 것을

노동의 기쁨이 되어 이 손이

춤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제 노동의 계산이 되어 이 손가락이

나락금을 셈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나는 묻겠네 친구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한낮의 이랑 속에서 배추포기를 키우는 사람이

가장 싱싱한 채소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척박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고 땀을 흘리는 사람이

과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먹어서는 안 되는가

지성으로 자식보다 귀하게 소를 키운 사람이

겨울의 화롯가에서 등심구이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연장 대신에 이 손에 무기를 쥐어 주고

그 무기를 내 시가 노래해서는 안 되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 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수인의 잠

김남주

 

겨울이다

감옥의 해는 짧아 날은 벌써 저물고

밤이 와서 차가운 벽을 흙바람이 와서 때린다

그 소리 바람 소리 내 귀에 와서 울고

그 소리 울음소리 내 가슴에 와서 떨고

나는 깐다 서둘러

얼음장 같은 마룻장 위에 가마니때기를 깔고

그 위에 다시

어머니가 넣어준 밤색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다시

혼자 결혼한 여자가 넣어준 연두색 담요를 깔고

나는 담요와 담요 사이로 내 몸을 밀어넣는다

동상 걸린 발끝을 밀어넣고

시린 무릎을 밀어넣고

배와 허리를 밀어넣고

목에서 귀까지 밀어넣고

눈만 떴다 감았다 천장만 끔벅끔벅 쳐다본다.

 

 

 

시에 대하여

김남주

 

할머니는 산그늘에 앉아 막대기로 참깨를 털고

어머니는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호미로 고추밭을 매고

아버지는 이랴 자랴 소를 몰아 논수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나는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산에 들에 나가

망태 메고 꼴을 베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기도 했지요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깨를 터시다 말고 막대기를 훼훼 저어

모밀밭을 해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춧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 -

산짐승 진딧물 진드기 같은 것이 자주 나오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런 것들을 내치느라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우리 식구들이 대신 들었던 것들 -

막대기 사금파리 꼬챙이 같은 것이 많이 나오지요

 

 

 

시의 요람 시의 무덤

김남주

 

과거의 시는 표현이 내용을 능가했다. 그러나 미래의 시는 내용이 표현을 능가할 것이다 - 마르크스

 

당신은 묻습니다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었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투쟁과 그날그날이 내 시의 요람이라고

 

당신은 묻습니다

웬놈의 시가 당신의 시는

땔나무꾼 장작 패듯 그렇게 우악스럽고 그렇게 사납냐고

나는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하다 보면 목청이 첨탑처럼 높아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나오는 게 아니냐고

저쪽에서 칼을 들고나오는 판인데

이쪽에서는 펜으로 무기 삼아 대들어서는 안 되느냐고

세상에 어디 얌전한 싸움만 있기냐고

제기랄 시란 게 무슨 타고난 특권의 양반들 소일거리더냐고

 

당신은 묻습니다

시를 쓰게 된 별난 동기라도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혁명이 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면서

부러진 낫 망치 소리와 함께 가면서

첨으로 시라는 것을 써보게 되었다고

노동의 적과 싸우다 보니 농민과 함께 노동자와 함께

피 흘리며 싸우다 보니

노래라는 것도 나오더라고 저절로 나오더라고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시라는 것을 억지로 써 본 적이 없다고

내 시의 요람은 안락의자가 아니고 투쟁이라고 그 속이라고

안락의자야말로 내 시의 무덤이라고

 

 

 

시인은 모름지기

김남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 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 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 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싸가지 없는 새끼

김남주

 

햐얗게 이마에 천년의 눈을 이고

파랗게 가슴에 억년의 물을 안고

웅장하게 광활하게 펼쳐지는 화면을 보고

문자 그대로 장관으로 전개되는

백두산을 보고 백두산 천지를 보고

원더풀! 원더풀! 뒤에서 누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떤 놈이 우리말 좋은 말 놔두고

남의 말 코쟁이 말을 쏟아놓는고 뒤를 돌아보니

빈대코에 마늘 냄새 풍기는 한국 놈이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주먹으로 아갈통을 쥐박아줄까 하다가

와! 화! 우리말 조선말 까먹고

원더풀! 원더풀! 혀 꼬부라진 소리치는 것도

꼭 제 탓만은 아니렸다! 싶어

그만 놔둬버렸다

 

 

 

아기를 보면서

김남주

 

제비꽃을 만지작거리는 아기의 손가락

봄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고사리 같고

 

장다리밭에서 나비를 쫓는 아기의 눈동자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초저녁의 샛별 같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품은

비 온 뒤 쑤욱쑤욱 자라나는 죽순 같네

 

오 여보게 친구 우리 아기 좀 보게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호미를 쥐어줘야겠네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괭이를 쥐어줘야겠네

봄이면 들에 나가 나물이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가을이면 산에 올라 칡뿌리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콩나물 한 그릇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서울이 무서워서 그러네

별 하나 아름답게 키우지 못한 서울 하늘이 저주스러워서 그러네

고기 한 마리 병들지 않고 살지 못하는 서울의 강이 싫어서 그러네

우리 아기 고운 아기

나물이나 뜯어 먹고 칡뿌리나 캐 먹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지언정

맑은 물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가까이 벗하며

흙과 더불어 시골에서 살았으면 싶어서 그러네

 

 

 

아버지

김남주

 

망할 자식 몹쓸 자식은

폐허 질러 가로질러

갈 곳으로 가버렸는데

똥값보다 못한 곡식

등지고 가버렸는데

나오자마자 또다시

나오기가 무섭게 가야 할 곳

갈 곳으로 뒷걸음질 치며 가버렸는데

 

아비야

땅을 쳐

가슴팍 치고

하늘 보면 뭣한다냐

발만 동동 구르면 뭣한다냐

 

남의 자석들은

중핵교만 나오고도

맨써기 군써기 착착 해묵고

콩 심어 팥 심어라

통일벼에 줄모 심어

큰소리 떵떵 치는데

팔 뻗어 턱 밑으로

삿대질 팡팡 해쌓는디

 

아비야

확확 숨통 터지는

논바닥을 기다니면

보람도 없이 뽁뽁

논바닥을 허물면 뭣한다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김남주

 

추수가 끝난 들녘이다

나는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밤길을 걷는다

마른 옥수숫대 사이로 난 좁다란 밭길이 끝나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논길로 꺾이는 어귀에서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논가에 쓰러져 있는 흰옷의 허수아비를 일으켜 세운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절 받으세요

그동안 숨어 살고 갇혀 사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허수아비는 대답이 없다

야야 거그서 뭣하냐 어서 오지 않고

저만큼에서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어머니

가뭄의 논바닥에 물을 댄다고

아버지와 같이 여기서 이슬잠을 자다가

새벽에 제가 피똥을 싸는 배를 앓았어요

나도 알고 있어야 그해 가을 일은

그때 느그 아부지 놀래가지고 너를 업고

어성교 약방으로 달려가던 모양이 눈에 선하다야

그날 새벽에 니가 꼭 죽는 줄 알았어야

나는 다시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또랑을 건너고 솔밭 사이 황톳길을 들어선다

다 왔다 저기 저것이 느그 아부지 묏등이어야

니가 서울서 숨어 살 때 돌아가셨는디

참 불쌍한 사람이어야 일만 평생 죽자살자 하고

자식덜 덕 한번 못 보고 저승 사람 됐으니께

느그 아부지가 너를 을마나 생각했는 줄 아냐

너는 평생 돈하고는 먼 사람일 것이라면서

저 아래 징갤 논배미는 니 몫으로 띠어놓으라 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단다

 

산언덕바지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무덤은

일곱 마지기 우리 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아 니가 그러고 댕긴다고 세상이 뒤집힐 것 같으냐

첫 감옥에서 나와 무릎 꿇고 사랑방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꾸중이 떠올랐다 가엾은 양반

 

 

 

아우를 위하여

김남주

 

없는 놈은 농자금도 못 타 쓴다더냐

있는 놈만 솔솔 빼주기냐

조합장 멱살을 거머쥐고

면상을 후려치던 아우야

 

식구마다 논밭 팔아

대학까지 갈쳐 논깨

들쑥날쑥 경찰이나 불러들이고

허구헌 날 방구석에 처박혀

그 알량한 글이나 나부랑거리면

뭣한디요 뭣한디요 뭣한디요

터져 분통이 터져 집에까지 돌아와

내 얄팍함에 귓창을 찢었던 아우야

내 사랑하는 아우야

 

오늘 밤과 같이

눈앞이 캄캄한 밤에는

시라도 써야겠다

쌓이고 맺힌 서러움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고이고 고인 답답함

가슴으로 터지는 네 사랑을 위하여

차마 바로는 보지 못하고

밥상 너머로 훔쳐보아야만 했던

내 눈 속 네 얼굴을 위하여

시라도 써야겠다

오늘 밤과 같이

눈앞이 아찔한 밤에는

 

 

 

아이고! I Go!(날마다 날마다)

김남주

 

차에 깔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흉기에 찔려 죽고

총기에 맞아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임이다

공부 못해 죽고 대학 못 가 죽고

취직 못 해 죽고 장가 못가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아이는 단칸 셋방에 갇혀 죽고

에미는 하늘까지 치솟는 전세값에 떨어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농부는 농가 부채에 눌려 죽고

노동자는 가스에 납에 중독되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여름이면 흙 사태에 묻혀 죽고

겨울이면 눈사태에 얼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낮에 죽고 밤에 죽고

아침에 죽고 저녁에 죽고

시도 때도 없이 세상을 온통 죽음의 공동묘지

이 묘지에서 고개 들고 죽음이 세계에 항거한 자는

쇠 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고

최루탄에 가슴이 터져 죽는다

 

 

 

안부

김남주

 

헐벗은 나뭇가지에 눈보라가 치고

삭풍이 철창에서 우는 곳

그곳에 겨울이 다가옵니다

봄 여름 가을 없이

한 줄기 햇살도 스며들지 못하는

그곳에 겨울이 다가오면

북풍한설을 막아보겠다고 당신은

비닐판으로 철창을 가리고

종이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문틈이며 마루 틈이며

틈이란 틈을 죄다 막겠지요

그리고 화로도 없고 인정도 없는 그곳에서

영하 십 도 이십 도의 추위를 이겨보겠다고

가슴에 미지근한 식수통을 껴안고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느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밤을 새울지도 모르고요

 

부디 건강하세요

사슬 풀려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당신이 겪은 고난은 무익하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겨울에도 끝이 있는 법이니까요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 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 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 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디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성실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어머니

김남주

 

1

일흔 넘은 나이에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아픔처럼 손바닥에는 못이 박혀 있고

세월의 바람에 시달리느라 그랬는지

얼굴에 이랑처럼 골이 깊구나

 

봄 여름 가을 없이 평생을 한시도

일손을 놓고는 살 수 없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좋아했다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이날 이때까지

세상에 근심 걱정 많기도 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사랑했다

나의 피이고 나의 살이고 나의 뼈였던 사람

 

 

2

그 옛날 제가 외지로 나설 때마다

동구 밖 신작로에 나오셔서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니

가가 먼 길 구풋하면 먹어두라고

수수떡 계란이며 건네주시고

옷고름 콧잔등에 찍어 우시던 어머니

 

이제는 예순 넘은 나이로

끌려간 자식놈이 그리워

철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 챙겨 들고

흰 고개 검은 고개 넘나드시는 어머니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날 두고 언 놈이 뭔 말을 하더라도

내 또래 친구들 발길 뜸해지더라도

 

어머니 저를 결정할 사람은 저들이 아니니까요

사형이다 무기다 10년이다

사형 구형 놓기를 남의 집 개이름 부르듯 하는

저 당당한 검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높은 공부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사슬 묶인 나를 굽어보는

저 준엄한 판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날 키워 준 이 산하 이 하늘이니까요

해방된 민중이고

통일된 조국의 별이니까요.

 

 

 

어머니의 밥상

김남주

 

예나 이제나

어머니 밥상은 매한가지다

묵은 배추김치에

멸치 두세 마리 가라앉은 된장국에

젓갈에 마늘장아찌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리밥 대신 쌀밥이다

 

어머니 살기 좋아졌지요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모든 기계가 척척 심어주고

제초제를 뿌리고 비닐만 씌워주면

오뉴월 땡볕에 진종일 콩밭에 나앉아

그놈의 김을 매지 않아도 되고요

 

그러나 짐짓 물어보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의 대답은 시큰둥하다

좋아지면 뭣한다냐 농사짓고 산다 하면

총각이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시상인디

이런 시상 난생처음 살아야 그뿐인 줄 아냐

사람이 죽어도 마을에 상여 멜 장정이 없어야

지난봄에 아랫말 상돈이 아부지가 죽었는디

저승 가는 사람을 상여소리도 없이

식구끼리 리야까에 싣고 뒷산에 갖다 묻었단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며 사흘 낮 사흘 밤

마을이 온통 초상이고 축제였는디......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머니는 숟갈을 놓으시며 한숨을 쉬었다

 

봄이 와도 이제 들에 나가 씨 뿌릴 맘이 안 생겨야

쭉정이만 날릴 가실 마당을 생각하면

 

 

 

어머님께

김남주

 

일제 30여 년 동안

낫 놓고 ㄱ자도 모르셨던 어머니

미제 40여 년 동안

호미 쥐고 ?표도 모르시는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자식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어머니

지금 나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속자라 부르지 마세요

양심수라 부르지도 마세요

정치범이다 뭐다 시국사범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애국자라 하세요

 

일제 30여 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 본 것이라고는 징용 통지서밖에 없으셨던 어머니

미제 40여 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 본 것이라고는 세금 통지서밖에 없으신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글 한 줄 쓰신 적 없고 편지 한 줄 읽으신 적 없어도

자식 사랑은 한으로 쌓여 가슴이 막히신 어머니

지금 나 같은 사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사람들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마세요

독재자라 부르지도 마세요

보수다 뭐다 반동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매국노라 하세요

달리 부르는 놈이 있으면 그놈 주둥이를 호미로 찍어 주세요

달리 쓰는 놈이 있으면 그놈 손모가지를 낫으로 잘라 주세요

지금 이 나라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게 아니어요

우익과 좌익이 있는 게 아니어요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어요

그 중간은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머니.

 

 

 

엉뚱한 녀석

김남주

 

나를 보고 싶어 일부러

감옥에 오겠다는 녀석이 있다 한다

 

나의 어디를 보겠다는 것일까 그 엉뚱한 녀석은

판판이 지기만 했던 그날그날의 내 싸움들

남은 것은 이제 철창에서 타오르는

증오의 뼈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사랑의 무기라도 깎아보겠다는 것일까

그 무기로 내 대신 압제자의 등에 꽂혀

자유의 원수라도 갚아주겠다는 것일까

 

무엇을 보여줄까 오늘이라도 당장 그 엉뚱한 녀석이

부러진 날개의 새 내 앞에라도 나타난다면

없다 나에게는 자랑스런 보여줄 아무것도 없다

지하실의 고문 때문에 구부러진 내 엄지손가락말고는

나이 사십에 온통 하얗게 시들어버린 내 머리카락 말고는

나는 나의 패배와 그 흔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연가

김남주

 

잠든 솔숲에 머문 달빛처럼이나

슬픔이 가라앉아 평화론 미소 되게 하소서

 

깎아 세운 돌기둥에

비스듬히 기운 연지빛 노을의

그와 같은 그리움일지라도

오히려 말 없는 당신과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본시 슬픔과 간난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짙푸른 수심(水深)일수록

더욱 연연히 붉은 산호의 마음을

꽃밭처럼 가꾸게 하소서

 

눈물과 말을 가져

내 마음을 당신께 알리려던 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덜했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저

돌과 같은 침묵만이

나의 전부이오니

 

잊음과 단잠 속에 홀로 감미로운

묘지의 큰 나무를 닮아

앞으론 묵도와 축원에 넘쳐

깊이 속으로만 넘쳐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여

 

 

 

예술지상주의

김남주

 

예술지상주의 그것은 애초에

이승은 떠남의 세계였고 현실은 네미씹이었다

그에게는 예술지상주의자에게는

문명은 파괴되어야 할 적이었고

자학과 광기와 절망이 삶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나이도 없었다

예술이라면 제 애비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이 예술지상주의였다

염병할! 그놈의 사후의 명성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부질없는 무덤이었다

예술이라면 예술 아닌 모든 것이

저주해야 할 대상이었다 쓰레기였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 나서 보들레르는

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

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

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

시에다 똥을 싸라 침을 뱉고

 

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

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수석과 분재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학식과 덕망의 국회의원으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자르르 교양미 넘치는 입술로

자본가의 접시에 군침을 흘리면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에끼 숭악한 사기꾼들

죽으면 개도 안 물어가겠다

그렇게 순수해가지고서야 어디 씹을 맛이 나겠느냐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오늘 하루

김남주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들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우익 쿠데타

김남주

 

쿠데타는 언제 일어나는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풀들이 바람에 일어 고개를 쳐들고

회복기의 자유가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고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을 때 일어난다

창문을 열면 거리마다 무거운 군화발 대신에

오가는 시민들의 가벼운 발자욱 소리가 신선하고

이제 아무도 제 이웃의 거동을 의식하지 않고

사라져 없어진 총칼의 그림자도 의식하지 않고 때마침

머리 위를 날으는 새의 자유를 노래하고 그 높이와

한계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쿠데타는 일어난다

 

그렇다 쿠데타는 자유를 적으로 삼고 일어난다

가진 자들이 강요한 생활의 질서 그 가위눌림으로부터

긴긴밤의 악몽으로 깨어나 가난뱅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이마를 맞대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 꿈의 번성을 위하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조합의 결성과 동지의 단결을 호소하고 농촌에서는

농부들이 숫돌에 낫을 갈며 갑오년의 그날을 떠올리고

당돌하게도 부자들의 독점물이었던 통일문제까지 가난뱅이들 좋을 대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을 때

그때 소위 쿠데타라는 것은 일어난다

 

이를테면 이럴 때 쿠데타는 일어난다

노동과 가난의 거리에 그날그날의 자유가 넘치고

그 넘침의 자유가 착취의 거리까지 흘러들어

부자들의 발등을 적시고 무릎까지 배꼽까지 차올라

목에까지 차올라

부자들의 재산과 생명이 위험수위에 찼을 때

바로 그때 우익 쿠데타는 일어나는 것이다.

 

 

 

원숭이와 설탕

김남주

 

참 우습기도 하다

인디언들이 원숭이를 잡는 법은

그들은 이렇게 원숭이를 잡는다는 것이다

코코야자 열매를 따서 옆구리에 구멍을 판다

원숭이의 빈손이 겨우 들어갈 만하게 파서

거기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설탕을 넣고

높다란 나뭇가지에 그것을 매달아 놓는다

그러면 영락없이 원숭이가 와서 잽싸게

구멍에 손을 찔러 넣고 덥석 설탕 덩어리를 움켜쥔다

그러나 설탕 덩이를 거머쥔 원숭이의 주먹손은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 않는다

뻘뻘 땀이 흐르도록 팔이 빠지도록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는다

설탕을 놓아 버리면 쉽게 손을 뺄 수 있으련만……

그러나 어찌 그 좋은 것을 감히 포기하랴

사람이 접근해서 손짓발짓으로 위협을 해도

막대기로 빨간 똥구녁을 쑤셔대도 막무가내인 것이다

결국 인디언이 쏜 화살에 맞고서야 죽고 나서야

주먹을 펴고 설탕을 놓는다는 것인데

참 우습기도 하다

원숭이가 움켜쥔 설탕을 놓는 것 하고

후진국의 대통령이 움켜쥔 권력을 놓는 것 하고는.

 

 

 

의자

김남주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이 가을에 나는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 내려

염소에서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에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겨울에

김남주

 

한파가 한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는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듬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삭풍에 눈보라가 쳐서 살이 터지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그 나무 몸집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상수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낸 척후병으로 서서

싸리나무 옻나무 너도밤나무와 함께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밤에는 하늘가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이 세상에

김남주

 

사슬로 이렇게 나를 묶어놓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는

 

벽으로 이렇게 나를 가둬놓고

주먹밥으로 이렇게 나를 목메이게 해 놓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부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개처럼 묶어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짐승처럼 가둬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주먹밥으로 목메이게 해 놓고

잠자리에서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그럴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봐라

 

나와서 이 사람을 보아라

사슬 묶인 손으로

주먹밥을 쥐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이 사람 앞에서

묶인 팔다리 앞에서

나는 자유다라고 어디 한번 활보해 봐라

이 사람 앞에서 굶주린 얼굴 앞에서

나는 배부르다라고 어디 한번 외쳐 봐라

 

이 사람 앞에서 등을 돌리고

이 사람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마음 편할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있어 봐라

 

남의 자유 억누르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남의 밥 앗아 먹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어느 백성 이야기

김남주

 

전쟁이 터지고 우리는

쌈 터로 끌려갔지요

앞장세워져 맨 앞 부자들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두고

나라 국경 지키는 용사라 했지요

 

쌈질이 끝나고 고향은 쑥밭이 되고

우리는 건설대에 끌려갔지요

소나 말이 되어 게거품을 흘렸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두고

나라 살림 일으키는 역군이라 했지요

 

겨울이 오고 한파가 밀어닥치고

굶주림과 추위 혹사에는 더는 못 견뎌

에헤라 가더라도 내일 삼수갑산 들고 일어섰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감옥으로 끌려갔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두고

나라 팔아먹은 역적이라 했지요

 

 

 

자유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찍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은사(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장난

김남주

 

감방

문턱 위에

걸쳐 있는

다람쥐 꼬리만큼 한 햇살

삭둑삭둑 가위질하여

꼴깍꼴깍 삼키고 싶다

언 몸 봄눈 녹듯 녹을 성싶어.

 

 

 

잿더미

김남주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질러

황혼을 만나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꽃을 닮고 있던가

피를 닮고 있던가

죽음을 닮고 있던가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버린 별

죽으러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적막강산

김남주

 

콕콕

콕콕콕

새 한 마리

꼭두새벽까지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어둠의 한 모소리를 쫀다

콕 콕콕 콕콕콕......

 

이윽고 먼데서

닭 울음소리 개 울음소리 들리고

불그레 동편 하늘이 열리고

해 하나 불쑥 산너머에서

개선장군처럼 솟아오른다

 

이렇게 오는 것일까 새 세상은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고

새 세상은 정말

새 세상은 정말

어둠을 쪼는 새의 부리에서 밝아오는 것일까

 

 

 

전사

김남주

 

1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 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분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 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신분을 잊은 적이 없었다.

 

 

2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산악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어갔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민족해방투쟁의 나무를 보아다오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그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끄럽게 쑥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전향을 생각하며

김남주

 

총칼의 숲에 싸여

눈 감고 아웅 하는 꼭두각시놀음

나는 나의 최후를 놈들의

법정에서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이 파 놓은 굴속 같은 방

나는 내 최후의 그림자가 감옥의

벽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동지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놈들의 총칼 앞에 무릎이라도 꿇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허리 굽혀 놈들의 발밑에 엎디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아 대지와

민중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한번 사랑을 껴안는 것이었다

보기 흉한 패배에

옛 상처의 무기에 입맞춤하고

다시 한번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아보는 것이었다

 

서른일곱의 어쩌지도 못하는

이 기막힌 나이 이 환장할 청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덤을 지키는 지조 높은 선비는 아니다

나에게는 벗이여

죽기 전에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싸워야 할 사랑이 있고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있다

기대해다오 나의 피 나의 칼을

기대해다오 투쟁의 무기 나의 노래를

 

 

 

절망의 끝

김남주

 

그동안 내 심장은 십 년 이십 년

바위 끝을 자르는 칼바람의 벼랑에서 굳어 있었다

너무 굳어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등성이를 타고 에움길 돌아

종다리 우는 보리밭의 아지랑이 속으로

가서 내 심장 춘삼월 훈풍에 녹이자

그동안 몇십 년 동안

때라도 묻은 것이 있으면 고개 넘어

불혹의 강물에 가서 씻어내리고

그러자 그러자 잠시

찬바람 이는 언덕에서 내려와

찔레꽃 하얗게 아롱지는 강물에

내 심장 깊이깊이 담그고 거기

피 묻은 자국이라도 있으면 그것마저 씻어내고

내 마음의 거울 손바닥만 한 하늘이라도 닦자

맑게 맑게 닦아 그 자리에

무엇 하나 또렷하게 새겨넣자

이를테면 별처럼 아득한 것

절망의 끝이라든가

내가 아끼는 사람 이름 석 자 같은 것이라든가.

 

 

 

조국은 하나다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

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

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

조국은 하나다 라고

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

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행동

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눠 가지는 인간의 길

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례의 양식이여

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 올린

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에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도

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 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 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중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조선의 딸

김남주

 

저기 가는 저 큰애기를 보아라

새참으로

막걸리 든 주전자를 들고

보리밥과 김치로 가득한 바구니를 이고

반달 같은 방죽가를 돌아

시방

논둑길을 들어서는

부푼 저 가슴의 처녀를 보아라

 

마른자리 반반한 풀밭을 골라

빨갛게 파랗게 원앙을 수놓은 하얀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들밥을 차리는 농부의 딸을 보아라

이 마을에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검은 치마 하얀 저고리를 보아라

 

- 아부지 그만 쉬었다 하셔요

저만큼에서 허리 굽혀 나락을 베는 아버지 곁으로 가

아버지 대신 나락을 베고

- 아저씨 밥 한술 뜨고 가세요

지나가는 낯선 사람도 불러

이웃처럼 술도 한잔 드시게 하는

조선의 딸 그 마음을 보아라

마을에 하나뿐인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지는 잎새 쌓이거든

김남주

 

당신은 나의 기다림

강 건너 나룻배 지그시 밀어 타고 오세요

한줄기 소낙비 몰고 오세요

 

당신은 나의 그리움

솔밭 사이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

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

오세요 당신은 나의 화로

눈 내려 첫눈 녹기 전에 서둘러

가슴에 당신 가슴에 불씨 담고 오세요

 

오세요 어서 오세요

가로질러 들판 그 흙에 새순 나거든

한아름 소식 안고 달려오세요

당신은 나의 환희이니까요.

 

 

 

진혼가(鎭魂歌)

김남주

 

1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2

쓰고 있다

지금 나는 쓰고 있다

세 겹으로 네 겹으로 갇혀 쓰고 있다

내 탓이다라고

서투른 광대의 설익은

장난 탓이다라고

어설픈 나의 양심 탓이다라고

미지근한 나의 싸움 탓이다라고

모두가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움푹 패인 주먹밥 위에

주먹밥에 떨어진 눈물 위에

눈물 같은 국물 위에

환기통 위에 뺑끼통 위에

시멘트 바닥에 허공에 천장에

벽 위에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침 발라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혓바닥으로

마르도록 벗겨지도록

피나도록 쓰고 있다

 

여러 골이 쑥밭이 된 것도

여러 집이 뒤집힌 것도

설익은 광대의 서투른

장난 탓이다라고 함께

사랑했다는 탓으로 불려다니고

끌려다니고 밥줄이 막히고 끊어지고

스승의 난처한 입장도 나의

어설픈 양심 탓이다라고

법관의 어색한 표정도

간수의 안타까운 동정도

또 누구의 미안한 응원도 모두가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고

미지근한 나의 싸움 탓이다라고

 

공포(恐怖)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데

가장 좋은 무기(武器)이다라고

 

 

3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양심과 나의

미지근한 싸운은 참기로 했다

양심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피와 불이 자유를 닮고

자유가 시멘트 바닥에 응집된

피 같은 불같은 꽃을 닮고

있다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응집된 꽃이 죽음을 닮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양심

미지근한 나의 싸움

양심아 싸움아 너는

차라리 참아라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참아라

 

 

 

창살에 햇살이

김남주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철창에 기대어

김남주

 

잡아보라고

손목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오

옥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이리 꼬시고 저리 꼬시고

별의별 수작을 다 해도

입술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입으로 속삭였다오 면회장에 와서

기다리겠어요 건강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

 

15년 징역살이를 다 하고 나면

내 나이 마흔아홉 살

이런 사람 기다려 무엇에 쓰겠다는 것일까

5년 살고 벌써

반백이 다 된 머리를 철창에 기대고

사내는 후회하고 있다오

어쩌자고 여자 부탁 선뜻 받아들였던고

 

 

 

청승맞게도 나는

김남주

 

청승맞게도 나는

뼁끼통에 쭈그리고 앉아

유행가를 불렀다네

 

때는 마침 팔월 초순이라 철창 너머 하늘가에는

송편처럼 어머니의 반달이 걸려 있고 해서

나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네

 

감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재수 사납게도 나는 간수한테 들켜

나의 노래 미처 다 부르지 못하고

엎드려 볼기짝에 곤봉 세례를 받았다네

피멍 든 맷자국 쓰럽게 쓰럽게 만지며

나는 철창에 기대어 남은 노래 마저 불렀다네

 

고향집에 대추나무 빨갛게 익으련만

철창 너머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청춘의 노래

김남주

 

[늙은 군인의 노래]의 곡에 맞춰

 

나 태어난 이 강산에 투사가 되어

노래하고 싸우기 어언 석삼년

어디서 살았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압제의 타도에 우리 모두 나섰다

아 사월이여 붉은 피 청춘이여!

자유 위한 싸움에 나아가자 전진하자

 

나 키워 준 이 조국에 전사가 되어

힘 길러 단련하기 어언 석삼년

어디서 살았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해방의 전선에 우리 모두 나섰다

아 오월이여 붉은 피 청춘이여!

통일 위한 싸움에 나아가자 전진하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생사를 같이하기 어언 석삼년

흩어져 패할 거냐 단결하여 이길 거냐

혁명의 대열에 우리 모두 나섰다

아 해방자여 붉은 피 청춘이여!

유혈의 전투에 나아가자 전진하자

 

 

 

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게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 번 쓰윽 훑어 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출항제

김남주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

내 목숨 같던 애인이여.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지난봄 갈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맨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

눈 내리는 세계.

우리들의 항해일지 속 뜨거운 체험으로 끼워 넣으며

불손했고 쓰라렸던 사람을 덮는다.

감동도 없이 붙들어 지키리 신념도 없이

한때 깊이 빠져가던 우리들의 탐닉,

일상의 식탁과 우울한 밤의 비비작 거림이

한갖 구설의 불티처럼 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

아, 실어 오린 전 생애는 제 나이만큼 선창 속에서 보채고

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켜들고

먼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

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 가는

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차가운 눈발의 동행 속에서

하얗게 서려오던 유년의 숲.

꺾어진 꽃대궁을 끌어안고

그때 눈물로 다스리던 가슴이여.

북풍처럼 사납게 몰려와서

목숨의 한끝을 쪼아대는 이웃의 이목 속에서 피 흘리고

문득 생사의 늪에 앙상한 채 버려지던 지난날,

마지막 한 방울의

숨어 있던 야성의 피가 깡깡 굳은 풍토병을 적시고

한 세대의 사슬을 의롭게 풀어내던 것을,

질기고 칙칙한 동면을 몰아세우고

우리들은 깊이 잠든 식솔들을 마저 깨웠다.

불면으로 지새우며 밤새껏 항해도를 뒤적이며

아, 버려진 모든 목소리를 새롭게 걸러내며

내 울음이 시대의 물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 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

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다.

풀려나는 긴장으로 또 한 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 내고

성실한 두 팔로 기어오르는 불안을 뿌리칠 때,

차고 맑은 파도처럼 떠도는 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끈한 적의를 안개처럼 피워 올리며

난파의 갯벌을 휩쓸며 바람은

한때 우리들이 열던 출항의 부두로 내리 몰지만

허나, 굳센 믿음의 밧줄을 이어 잡으며

목숨의 한끝을 건져내는 강인한 힘,

우리들은 불의함에 온몸을 태운다.

아직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하염없이 쓰러지며

이마 윙 솟는 피만큼 검붉게

흉중을 헹궈내는 식률이여,

이제는 내 돗폭의 그늘에 마저 숨어라.

신선한 믿음도 밑바닥이 보이잖게

금린 밝게 떠드는 물빛, 아침의

아아, 무한한 폐활량.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 속으로 떠난다

온 핏속에 또다시 떠도는 체험의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탁류

김남주

 

탁류에 휩쓸려

하류로 하류로 떠밀려가는

수천수만의 고기떼를 보네

어떤 놈은 아가리를 벌리고

탁류에 욕을 퍼붓기도 하고

어떤 놈은 대가리를 쳐들고

탁류를 거슬러 오르려고도 하네

그러나 그때마다

누가 던진 작살에 찍혀

땡볕의 모래밭에 내던져지네

 

나는 보네

튀어나온 물고기의 눈에서

한 시대의 분노를

나는 보네

흙탕물로 가득 찬 물고기의 입에서

한 시대의 저주를.

 

 

 

통일되면 꼭 와

김남주

 

장병락 선생님 그는

일심(一心)이라고 팔에 문신을 한 뱃사람이었지

북녘에서 남녘으로 조선 쌀이 오던 날

우리 둘은 얼싸안고 울었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언약도 하나 했지

통일되면 꼭 놀러 오라고 꼭 놀러 가마고

그는 내가 그의 고향 원산에 가면

명사십리 해당화를 구경시켜 주겠다 했고

나는 그가 내 고향 해남에 오면

실낙지에 막걸리를 대접하겠다 했지

고향에 홀어머니를 두고 왔다는 그는

내게 편지가 올 때마다 어머니한테서 왔냐며 묻고는

어머님 잘 계시냐 어디 아프신 데는 없느냐

앞으로 나가게 되면 효도 많이 해드리라 신신당부 했지

철창으로 으스름 달빛이 젖어드는 밤이면

내 심사 울적하여 청천하늘의 잔별을 헤아리다가

옆방의 그를 불러내어 이런 부탁 가끔씩 하고는 했지

'장선생님 나오셔셔 노래나 한 곡조 뽑아주시오'

그러면 그는 한사코 또 어머니 생각나냐며

'수천 년 수만 년 그 모습 여전해

세상에 근심 걱정도 많네……'

볼가강의 뱃노래를 고적하게 불러 주거나

'이 한 몸 다 바쳐 쓰러지며는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금수강산 삼천리에

통일의 그날이 오면 만세소리를

자손아 불러다오'를 목메이게 불러 주었지

그런 그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어딘가로 모르는 곳으로 이감을 가게 되었지

나는 부랴부랴 내 십오 년의 징역 보따리를 뒤져

덧버선이며 귀마개며 장갑이며를 꺼내

어쩌면 통일의 그날까지 징역살이를 할 줄도 모르는

어쩌면 통일의 그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옥사할지도 모르는 그에게

철창 너머로 사슬 묶인 그의 손에 건네주었지

폐가 나빠 자주 각혈을 하고는 했던 그는

교도관한테 끌려 가면서 뒤돌아 보면서

백지장 같은 얼굴에 눈물 빛내며 다짐했지

 

'통일되면 꼭 와' '통일되면 꼭 와'

 

 

 

투쟁과 그날그날

김남주

 

당신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배웠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우고

침착 기민하게 대처해 나가는 기술을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동지애로

당신은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비판과 자기비판은 혁명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채찍이라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당신이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끊임없이 당신은 학습하고

끊임없이 당신은 실천하고

그런 당신의 생활 속에서 나는 알았습니다

이론 없이 바른 실천 없고

실천 없이 바른 이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사생활을 공생활에 종속시켰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오직 혁명에 신명을 바쳤고

꿈속에서도 당신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대중을 사랑하고 신뢰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자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이유를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은 혁명을 떠받쳐주는 기반이고

혁명을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원동력이고

최후까지 혁명을 지켜주는 철옹성이기 때문이라고

 

혁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어떤 일 무슨 짓이라도 해냈습니다

기꺼이 서슴없이 당신의 그런 행동 속에서

나는 새로운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혁명에는 혁명에 고유한 도덕이 있다는

제 신발에 흙탕물이 묻는 것을 꺼려하고

적의 피로 제 손이 더럽혀질까 두려워하는 자는

아예 혁명의 길에 나서지 않는 게 낫다고

당신은 나에게 일어주었습니다

 

당신은 또한 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분일초를 어기지 않고 당신이 지켰던 약속으로

시간 엄수는 규율 엄수의 제 일보라는 것을

 

위기의 순간에 당신은

혀를 깨물어 조직을 구하고

다문 입술로 당신은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비밀엄수는 조직 사수의 최후 보루라고

 

철의 규율과

불굴의 의지로 단련된 바위

당신은 갔습니다

소위 저세상으로

꼭 다문 당신의 입을 통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마디

 

"미래의 자식들을 위한 투쟁에서

오늘 죽음까지 불사했던 사람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을 것이다

만인의 승리와 함께 그 이름은 별이 되어

지상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밥과 자유, 민족해방투쟁 만세!

 

 

 

편지

김남주

 

1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쟁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혹시나 면 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헛간이며 부엌엔들

청솔가지 한 가지 보이는 게 없을까

허둥대시던 어머니

빈 항아리엔들 혹시나

술이 차지 않았을까

허리 굽혀 코 박고

없는 냄새 술 냄새 맡으시던 어머니

 

늦가을 어느 해

추곡수매 퇴짜맞고

빈속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놓으시며 우시던 어머니

순사 한나 나고

산감 한나 나고

면서기 한나 나고

한 집안에 세 사람만 나면

웬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아버지 푸념 앞에 고개 떨구시고

잡혀간 아들 생각에

다시 우셨다던 어머니

 

동구 밖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혹시나 또 누구 잡아가지나 않을까

머리끝 곤두세워 먼 산

마른하늘밖에 쳐다볼 줄 모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다시는 동구 밖을 나서지 마세요

수수떡 옷가지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는 신작로가엘랑 나서지 마세요

끌려간 아들의 서울

꿈에라도 못 보시면 한시라도 못 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엘랑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하늘과 땅 사이에

김남주

 

바람의 손이 구름의 장막을 헤치니

거기에 거기에 숨겨둔 별이 있고

 

시인의 칼이 허위의 장막을 헤치니

거기에 거기에 피 묻은 진실이 있고

 

없어라 하늘과 땅 사이에

별보다 진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학살

김남주

 

1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은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 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2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당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3

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조종자들이 횟미의 미소를 짓고 있다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나라 국경 지킨다는 군인들이 지금

학살의 거리를 누비면서 어깨총을 하고 있다

옥좌의 안보를 위해

시민의 재산을 지킨다는 경찰들은 지금

주택가에 난입하여 학살의 흔적을 지우기에 광분하고 있다

옥좌의 질서를 위해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검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권력의 담을 지켜주는 세퍼드가 되어 으르렁대고 있다

학살에 반대하여 들고일어선 시민들을 향해

판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학살의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꼭둑각시가 되어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의 주먹을 치켜든 시민을 향해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보아다오 파괴된 나의 도시를

보아다오 부러진 낫과 박살난 나의 창을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잘려나간 유방을

보아다오 학살된 아이의 눈동자를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인들

보아다오 보아다오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머리카락 그 하나하나는

밧줄이 되어 너희들의 목을 감을 것이며

학살된 아이들의 눈동자

그 하나하나는 총알이 되고

너희들이 저질러놓은 범죄

그 하나하나에는 탄환이 튀어나와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너희들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한 애국자를 생각하며

김남주

 

- 그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혁명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애국자였다 -

 

이국 만리

비바람 눈보라와 싸우며

평생을 나라의 독립 위해 바치고

돌아와 해방된 조국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사람

위에서도 아래서도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설 자리가 없었던 사람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쓰러졌다

미군에 고용된 매국노들에게

황혼에 넘어진 고목처럼

삼팔선에 허리를 걸치고 쓰러졌다

머리는 위로 하고

다리는 아래로 하고.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김남주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 모든 여자들 중에서

첫 키스의 추억도 없이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갔나 그 좋은 여자들은

바위산 언덕에서 풀잎처럼 누우며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의 내 정열을 받아들였던 그 여자는

어디로 갔나 황혼의 바닷가에서 검은 머리 날리며

하얀 목젖을 뒤로 젖히고 내 입술을 기다렸던 그 여자는

뭍으로 갓 올라온 고기처럼

파닥이며 솟구치며 숨을 몰아쉬며

내 가슴에서 끝내 자지러지고 말았던 그 여자는

 

지금쯤 아마 그들은 어느 은밀한 곳에서

나 아닌 딴 남자와 마주하고 있겠지

사내의 유혹을 예감하며 술잔을 비우고

유행가라도 한가락 뽑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윽고 밤은 깊고 숲속의 미로에서

비밀 속의 비밀을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죽일 년들! 십 년도 못 가서 폭삭 늙어

빠진 이로 옴질옴질 오징어 뒷다리나 핥을 년들!

 

아 그러나 철창 너머 작은 마을에는 처녀 하나 있어

세상 모든 남자들 중에서 나 하나를 기다리고 있나니

이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양 그렇게 안아주세요

속삭일 날의 기약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나니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항구에서

김남주

 

이제 항구에는 이별이 없다

이별이 없으니 손수건에 눈물 찍어 우는

슬픈 여인도 없다

 

그러나 나 어제 군산 앞바다에 가서

울었다

술도 없이 노래도 없이 슬피 울었다

부끄러워서

조선의 해와 달이 부끄러워서

속으로 남몰래 갈대처럼 울었다

󰡒고릴라처럼 덩치 큰 미국 병사에게

다람쥐처럼 작은 우리 누나가 매달려가는 것을 보고

나는 슬펐다󰡓

고 써놓은 제자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스승도 슬펐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이별 하나 있어야겠다 이 슬픈 항구에

뱃고동 소리 짐승의 신음처럼 들리는 선창가 전봇대에서가 아니라

술취한 마도로스 담뱃불에서가 아니라

기지촌이 있는 미군기지에서 이별 하나 있어야겠다

성조기와

팬덤기와

미사일과

위장된 평화와 자유와

이별 하나 더럽게 있어야겠다

술도 없이 노래도 없이 멀뚱한 눈으로

저들을 보내야겠다 저들을 보내야겠다

이 슬픈 항구에서

 

 

 

화가에게

김남주

 

동해바다

무한한 공간의 저 영원한 침묵

그대로 둬라

섭섭하거든 화가여

꼭 하나 무엇 그려 넣고 싶거든

화가여, 저 높은 곳에

천둥이나 하나 큼직하게 달아놓아라

너무 빨리도 말고 너무 늦게도 말고 바로 지금

그것이 시인의 마음이나니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남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 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이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 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