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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께

사랑하는 당신께

공지영

 

창밖은 칠흑처럼 깜깜합니다. 멀리서 밤길을 달리는 차 소리가 다가오다가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길에서 무척 속력을 내었나봅니다. 제 등줄기가 그 차소리를 따라서 쭈욱 굳어오다가 다시 편안해집니다. 혹여라도 당신이 오시나 했었나봅니다. 당신은 바쁜 사람인데 말이에요.

지금 막 청소를 마쳤습니다.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장 속의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놓고 먹다 남은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렸습니다. 빨래하는 내 손이 안쓰럽다면서 당신이 손수 골라주셨던 하늘색 세탁기 속에 들어 있는 빨래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사실은 조금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왜냐구요? 빨래라니요. 사실 이 밤중에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것도 이웃에서 행여 눈치챌까 봐 조심조심 그릇들을 챙기고 내 삶을 정리하면서, 그러면서 빨래라니요... 그런 자신이 조금 어처구니도 없고 그랬기 때문에 웃었던 겁니다. 하기는 그보다 더 우스운 일은 그다음에 생겨났습니다. 저는 세탁물을 뒤졌지요. 쿰쿰한 냄새가 나는 빨래 속에서 당신의 팬티와 런닝셔츠를 발견하고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빨았습니다. 언제나처럼... 하기는 그 옷을 손으로 빨기 전에 대야를 챙기고 비누를 꺼내들면서, 저를 비난하던 한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중독이라구요... 제가 당신을 위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 그녀는 그런 일들을 중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나요... 하지만 그 친구가 무어라 하든 저로 말하자면 당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해지는 마음입니다. "그것도 중독이야." 그 친구는 말했지요. 그래요, 그래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담담하구나, 하고 말이에요.

지금 저는 당신과 늘 마주 앉아 있던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집안이 윤이 납니다. 냉장고 손잡이에 붙은 알루미늄판이 거울처럼 반짝입니다. 싱크대 구석이나 가스레인지 아래에 낀 때는 너무 오래되어서 애를 먹기도 하였습니다만, 철 수세미로 문지르고 문질렀더니 겨우 제 빛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그것들을 윤내다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월들을 이렇게 닦아낼 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많은 눈물과 땀방울을 흘려서라도 처음처럼 다시 윤이 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잠시 저는 수세미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도 중독일까요... 아닙니다. 중독이라니요...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싫습니다... 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요, 습관이라는 말이 좋겠지요... 별로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지만 중독보다는 병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좋은 것 같군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자고 펜을 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오후엔 백화점에 다녀왔더랬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지요.

어제까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어제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김장을 했거든요. 절여놓았던 배추를 물에서 건져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놓고, 커다란 무를 씻어서 채를 썰었습니다. 그러고는 멸치젓을 달여서 한지에 받쳐 즙을 걸러내 놓고 갓하고 미나리도 다듬어 씻어놓았습니다. 며칠 전에 까놓은 마늘을 절구에 빻고 김칫속을 버무렸습니다. 일을 마치고 보니 벌써 겨울의 짧은 해가 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올겨울 내내 당신하고 이 김치를 먹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멸치다시를 낸 물에 잔치국수를 삶아 넣고는 볶아놓은 쇠고기 고명과 시금치 웃기를 얹고 이 김치를 얹어 먹으면 문득 겨울밤도 훈훈해지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 저는 조금 들떠버렸었나 봐요. 당신의 회사로 전화를 걸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또 늦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 너머로 또다른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컴퓨터의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겨우 말했습니다. "김장을 했어요... 열 표기를 담갔어요. 배추가 아주 달아요." "정말 피곤하다니까..."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제가 정말 미웠습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나쁜 여자인가 봐요. 당신은 괜찮다고, 바쁘니까 그냥 끊자고 하셨습니다. 괜찮다는 당신의 말에 용기를 내어서 저는 말했습니다. 굴이 싱싱하길래 조금 샀어요. 사태도 조금 샀어요. 보쌈을 좋아하시잖아요. 된장하고 고추장을 섞어 배춧국도 끊였어요...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드세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셨지요?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뚜우뚜우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끊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저 전화가 끊겼을 거예요. 우리 집 전화는 당신의 회사 다이얼만 돌리면 이상하게 고장을 일으키곤 하니까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당신 회사의 전화 상태가 좋지 않다고... 저는 어제 밤 열두 시가 되어서 보쌈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사태를, 마치 아몬드처럼 길쭉하게 모양도 예쁘게 빠진 걸로 정육점에 부탁해서 한 근이나 사두었었는데 그걸 삶아서 다 먹었어요. 살이 찌려나 봅니다. 당신은 살이 쪄도 절 사랑하신다지만 전 살찐 여자는 싫어요.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살이 잔뜩 쪄서 돌아온 탤런트를 두고 당신은 말씀하셨죠. 정말 보기 싫군...

아닙니다. 전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해왔어요. 당신과 함께한 지 삼 년이 지났지만 전 아직 처녀 때 스커트를 입을 수 있거든요... 그래요, 오늘은 백화점에 갔었어요... 스커트를 한 벌 샀어요. 비둘기색 개버딘이에요. 처음에 한 번만 드라이를 해주면 그다음에는 손빨래를 해도 된대요. 세일이 끝나서 한산한 매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검정 카디건도 한벌 샀습니다. 흑진줏빛 블라우스도 한 벌 사고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구두도 한 켤레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주색 꽃무늬가 화려한 스카프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그만 지갑이 텅 비었더군요... 그동안 당신이 주신 반찬값을 조금 아껴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찾았거든요. 저는 매장에 있는 아가씨에게 그건 다음에 와서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꼭 사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는 상투적인 핑계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별로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자가 와서 그 스카프를 만지작거렸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채 유모차를 끌고 있던 그녀의 손 위로 그 스카프를 넘겨주었을 때, 마치 그 스카프가 가시덤불로 짠 거친 직조물처럼 제 가슴을 스쳐 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그것을 목에 둘러보고 결국 그것을 샀습니다. 저는 다른 스카프를 고르는 척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유모차에 앉아서 빤히 저를 바라보던, 토끼 모양의 목도리를 두른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지난달에 제가 모은 적금을 다 가져가셨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아닙니다. 그게 아닌데 글이 왜 이렇게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느낌을 숨김없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새로 산 옷들을 옷걸이에 잘 걸었습니다. 바라보니까 참 좋았습니다. 저걸 입고 어딜 가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차림으로 갈 곳이 없어요. 대리점도 그만두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혼자서 그 옷을 입어보았습니다. 구두도 신었어요. 방안의 장판이 구둣굽에 상처입을까봐 조심조심 걸어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에 저는 정말 촌스러웠지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보따리만 들려놓으면 영락없이 서울역 앞의 갓 상경한 소녀 같다구요... 사실은 뒤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입니다. 오빠 등록금 대기가 빠듯했어요. 제가 살던 그 소도시에 있던 여대 앞엔 나가보지도 않았지요. 너무나 입고 싶은 옷이 많아서 언제나 그 거리를 피해 다녔답니다. 저 여대생들은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옷가게에 걸린 옷들을 저렇게 잘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더는 하기 싫었던 스물한 살, 그때 나의 삶은 언제나 귀에서 아린 겨울바람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당신이 내 앞에 와주셨지요. 당신은 제가 근무하던 잡화점에 면도기를 사러 오셨습니다. 출장을 왔는데 그만 면도기를 빼놓고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때 당신에게선 벌써 애프터 셰이브 로션의 향취가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신용카드를 내미셨지만 우리 가게에선 그때 신용카드를 받지 않았지요. 당신은 몹시 당황해하셨습니다. 전 당신에게 그냥 맘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시고 대금은 다음에 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서울에서 오신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날 어떻게 믿느냐고 말이지요.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믿을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그게 운명은 아닐까 하고 저는 그후 내내 생각했습니다. 다음달에 다시 그 도시에 오신 당신은 제게 말했지요.

"아가씨, 서울로 취직하고 싶지 않아?"

그래요, 서울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다시금 기억이 살아납니다. 마치 오래 덮어두었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선명하게 말이에요... 제가 스물한 살이던 그때 그 소도시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의 마당에는 성모상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 성모상을 지나치면서 늘 빌었습니다. 아아,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주세요. 누군가가 와서 내 삶을 뒤흔들게 해주세요... 저는 한 번쯤 내 귓가에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스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영화 구경을 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 싶어... 나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잖아? 누군가게에 그렇게 대어들고 싶기도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물어주셨던 겁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어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저는 말했습니다. 저를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저는 당신의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당신 한 분뿐이었어요. 공중전화를 들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그 전화의 꼬불거리는 줄이 마치 제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유일한 줄, 이런 표현이 괜찮다면 마치 탯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이고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인 듯이 말이에요. 만일 당신이 그 전화가 이어진 그 선의 끝에계시지 않으면 숨이 턱하고 막혀버릴 듯이 겁이 났었지요. 당신은 거기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예정된 운명처럼요. 그리고 저는 당신 친구의 전자 대리점에 취직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대리점에 오셨어요. 가끔 절 데리고 나가 양식을 사주시기도 했지요. 처음 포크와 나이프가 여러개 있는 식탁에 앉았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그것들은 내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처럼 식탁 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황하는 제게 무척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몇 잔 드시고 저를 빤히 바라보셨지요. 제가 예쁘다는 말을 하실 때 떨리던 당신의 입매를, 그 입매의 괴로운 듯한 뒤틀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기혼자였고 한 아이의 아빠였음을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자의 남편인 당신... 여기서 그만 당신과의 만남을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미 이루어놓은 생애에 끼어드는 건 옳지 않다고 다짐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꼭 그만큼의 끌어당김이 내 마음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요. 그 자리를 맴돌던 제게 어느 날인가는 또 당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대리점 사장님인 당신 친구분하고 당신하고 또 한 친구분-당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말했습니다-들이 모여서 갈비를 먹기도 했지요. 그때 우리 대리점 사장님이 저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람...

또 한 친구분도 말했습니다.

"이놈 정말 좋은 놈이에요."

그 며칠 후인가 당신이 제게 여행을 제의하셨을 때 제가 당신을 따라나선 것은 아마도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남자... 나는 사람들이 어떤 여자를 가리킬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제의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남자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당신하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이 한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대천 바닷가에 엷은 주황색 노을이 깔릴 때, 그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당신은 지금 별거중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이고 그리고 괴롭히고요... 당신 아내의 의심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남자인 당신을 당신의 아내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고요. 직장을 여러 번 옮긴 것도 그 아내 때문이었다고요.

도망가고 싶은 의무감과 당신 쪽으로 끌려가고 싶은, 팽팽히 이어진 내 마음의 망설임이, 그 팽팽한 현이 제 가슴속에서 툭, 끊어져버렸습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자의 아내를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던가요, 사료값도 안 되는 값으로 소를 팔아버린 후 아버지에게서 도지기 시작한 그 병...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터무니없이 의심할 때 오는 불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였기에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뜬눈으로 새운 제 귓가에 밤새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귓가에서 처음으로 겨울바람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었지요.

"전 당신에게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래요, 그 밤에 당신이 먼저 잠드셨을 때 저는 혼자 다짐했습니다. 좋은 여자가 되겠다고 말예요.

당신은 저를 자주 찾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속옷도 빨아드리고 머리도 잘라드렸습니다. 머리를 자르려고 목욕탕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당신의 모습은 천진한 소년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이 사람을 악마 같은 부인으로부터 구해드리자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뛰어들겠다고요. 아아, 정말이지 내 몸 하나 부서져서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 같은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좋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일년 후 우리는 산부인과로 갔지요... 의사는 경고했지요, "세 번이나 이러시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울먹이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내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당신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난 후 의심증이 생겼지 때문에 당신은 아이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전부인하고의 상처가 너무 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내 뱃속에서 세 번째나 꿈틀거리는 이 생명들에 대해 더 집착이 생기기 전에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괴로워하셨습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지만 당신은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마취에서 덜 깨어나 힘이 없었던가봐요. 저는 더 힘차게 고개를 저어드릴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그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저를 간호해주셨습니다. 제 건강은 이미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대리점도 그만두고 늘 누워야 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제가 기운을 좀 차리자 당신은 제 손을 이끄셨습니다. 우리는 강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지요. 봄볕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리고 벚꽃이 흩어져 휘날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옆좌석에 앉아서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마에 손을 짚었습니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였습니다. 내 인생의 겨울바람 소리는 당신을 알게 된 후 사라졌지만 이 화사하기만 한 봄볕은 어쩐지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습니다. 내 행복감이 이 봄날의 꽃 이파리처럼 그저 흩날려버릴 것만 같아서 저는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강변이 잘 내려다보이는 까페에 차를 세우셨고 우리는 그리로 들어가 싫토록 봄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당신은 그 집의 토분 항아리에 가득 꽂힌 패랭이꽃 다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아까부터 그 황토색 토분에 가득 꽂힌 연보라색 패랭이꽃다발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꽃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엄지손톱만 한 수백의 꽃송이들로 이루어진 패랭이꽃 다발...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물으셨습니다.

"저 꽃이 조화일까 진짜일까?"

우리는 함께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꽃은 완벽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보랏빛은 진줏빛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잔디잎새 같은 연초록 이파리는 알맞게 늘어져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조화 같다고 하셨고 저는 진짜 패랭이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기를 걸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왜 진짜라고 생각하지?"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아까부터 그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저는 그 아름답기만 한 꽃의 아랫부분, 그러니까 토분과 맞닿은 언저리에서 시들어 누렇게 된 이파리를 하나 발견했던 겁니다. 조화라면 그런 걸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요.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것만 만들어도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가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는 분명히 생채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그걸 알고 있습니다. 들꽃이나 나무에도, 새나 강아지나 들고양이에도, 하다 못 해 구르는 돌멩이까지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생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걸 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당신이 웃으실까 봐 겁이 났습니다. 터무니없다고도 말씀하실 것만 같았어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우리는 말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토분 언저리에 있는 누렇게 시든 이파리를 집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그저 우연히 끼어든 불순물일 뿐이라구."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당신은 좋은 생각이 있다면 주인 모르게 패랭이꽃 한송이를 집어내셨습니다. 패랭이꽃은 진줏빛 광택을 입힌 듯 은은하게 빛났습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같았습니다. 당신은 잠시 궁리하더니 그 연한 연보라색 꽃 이파리를 손톱으로 누르셨습니다. 그것이 가짜 꽃이었다면 당신의 손톱 밑에서 구겨졌다가 다시 펴지겠지만 진짜 꽃이라면 다시는 예전처럼 꽃 이파리를 펼 수 없겠지요... 아아,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는 꽃이었습니다. 당신의 손톱 끝에는 금방 푸른 물이 들어버렸고 당신의 손아귀에 있던 패랭이꽃은 푸른 즙의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뭉개진 꽃은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해가 질 무렵 노을을 마주 보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당신의 손톱 밑에 푸른 패랭이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을까요? 저는 그 후로도 오래오래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산 것을 짓이긴 벌이었을까요? 당신은 저의 집에 발길이 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제 가슴속에 패랭이꽃이 피었다가 짓이겨져 푸르게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세들어 사는 집의 낡은 한옥 기와 위로도, 너무 오래되어서 얇은 꺼풀이 일어나는 나무로 된 저의 창틀 위에도 비는 내렸습니다. 당신의 아내가-,,라는 말을 쓰기가 힘이 듭니다. 아내가 그분이니 저는, 저는 당신의 무엇이 되는 겁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제게 단 하나의 이름도 허락하지 않으셨나요?-저를 찾아온 날도 그랬습니다. 제가 문을 열었을 때 그분은 낡은 감색 우산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눈동자가 제 눈과 마주쳤습니다. 바라보시는 눈빛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저는 눈길조차 돌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그분의 동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끝내 제 방안으로 발길을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분의 눈 아래에서 귓가까지 검푸르게 덮인 기미 자국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입매가 선명해서 자존심이 센 분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분은 저를 한참이나 바라보시다가 말했습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고 전해줘요."

그분의 눈매가 왜 그렇게 슬퍼 보였을까요? 저는 덜덜 떨면서 그분이 딛고 선 땅위에서 그분의 흰 카바 위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빗방울 속에 흙탕물이 튀기고 그분의 낡은 구두코는 질퍽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셨습니다. 이 말을 당신께 이제서 전해도 될까요? 그분은 가시기 전에 다시 말했습니다.

"아가씨도 돈을 떼었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드렸어요"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분의 말이 제 입을 막았습니다.

"정신차려요. 그 인간은 악마야."

그날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이제사 다 고백할랍니다. 저는 그 길로 뛰쳐나가서 당신의 회사 앞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오랜 친구가 하는 말과 당신의 아내였던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제 일생을 걸었는데 이제사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당신이 악마라고 하다니요...

퇴근하는 당신은 낯선 여자와 함께 계시더군요. 저는 밤 열두시 반 종로 3, 알전구가 늘어진 그 많은 포장마차의 대열 속에 당신들 둘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신들은 몹시 취해 있어서 제가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가도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하시더군요. 그래요, 저는 그날 밤부터 잠들지 못했습니다. 천 개의 눈을 가지고도 제가 가진 보물을 지키기 위해 한 개의 눈은 감지 않고 부릅뜬 전설 속의 용처럼 눈을 감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제 마음 속의 한눈은 퍼렇게 눈을 뜨고 제가 사는 집 밖의 좁은 골목길과 큰길가의 버스정류장과 아스팔트 위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어떤 여자와 함께였습니다. 당신은 거기서 다른 소녀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법을 가르쳐주고 당신은 거기서 한 여자에게 돈을 받아내고 또 거기서 당신은 패랭이꽃을 짓이겨서 그 여인의 눈 아래에서 귀밑까지 파란 꽃물을 들이고 계시더군요.

처음에 저는 몹시 울었습니다. 당신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장을 보고 상을 보아두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이 제가 끓인 생태찌개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드시는 모습을 보자 그만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당신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달라, 마음이 없어도 여자를 만나고 이빨을 쑤시고 그리고 잠을 잘 수 있어... 그럴 때 남자들은 좋은 줄 알아? 남자도 괴롭다구... 하지만 그게 남자야. 여자들은 그럴 수 없지... 그게 남녀의 차이야.

그래요, 저는 당신의 말을 믿었습니다. 저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요. 저의 엄마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면 자지 않습니다. 그래요... 떼를 쓰듯 제가 반박하자 당신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창녀들은 다르지... 걔네들은 그런 여자의 속성 때문에 희생되는 여자들이야. 그러니까 여자도 아니지.

당신은 울고 있는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함께 자는 건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건 사랑하고는 분명 다른 일이고 저를 보면 애처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요. 제가 울면 당신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고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남자니까 그러실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물론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제 생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실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남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여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이제 새벽이 오려나 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가서 보았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창밖이 푸르게 변해갑니다. 깊은 강물처럼 그윽하게 푸른 빛입니다. 저는 이제 이 글을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야겠지요, 아침이 오기 전에. 그래서 방안으로 비춰드는 보자기만 한 햇빛에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이끼라도 낀 것처럼 검푸른 제 얼굴의 기미가 보이기 전에 말이에요.

사랑하는 당신, 이 글의 서두에서 제가 말씀드린 제 친구는 제게 그랬습니다. 당신을 떠나라고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훨씬 전인 맨 처음부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사랑했기 때문에, 이미 운명이라고 느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기약의 징표처럼 제 얼굴에 돋은 검푸른 기미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께 애원했었습니다. 술에 취해 가끔씩 찾아오는 당신 앞에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건 저뿐이고, 다른 여자는 그저 다른 여자일 뿐,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

사랑하는 당신.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옛날 옛날에 어떤 여자가 살았답니다. 그 여자에게는 글공부를 하는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늘 과거에 떨어지는 바람에 살림은 너무나 가난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비장한 각오로 서울로 시험을 보러 떠나고 여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그날 밤, 그 여자를 사모해오던 동네 머슴이 그녀의 집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안으려 했답니다. 여자는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답니다. 은장도로 가슴을 찌른 거지요... 서울로 가던 그녀의 남편은 어떤 주막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 말하기를 "몇날 몇시 어떤 주막에 가면 아무개라는 이름의 수험생을 만날 것인즉 그 나그네와 붓을 바꾸어 가집시오" 했답니다. 꿈에서 깨어난 남편은 길을 가다가 아내가 꿈에서 일러준 대로 어떤 주막에 당도해 아무개라는 나그네를 찾으니 그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그 나그네와 하룻밤을 새우면서 과거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난삼아 붓을 바꾸자고 했답니다. 이미 친하게 된 그들은 붓을 바꾸었고 부인의 예언대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 원하는 일이 있다면 죽어서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요. 살아 있었다면 그 부인은 남편을 도울 수 없었을까요?

사랑하는 당신.

언젠가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다리에서 강물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신발을 벗어놓고 강물로 뛰어드는데,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은 언제나 그들이 떠나온 육지를 향해서 벗어져 있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구절을 읽다가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왜였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신발을 그쪽으로 벗는다는 건 그의 온몸을 그쪽을 향해 비틀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들은 바라보았을까요? 떠나기 전에, 영영 이별하기 전에 그들이 걸어왔던 삶이 묻은 그곳을...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몸을 비틀었던 것은, 그리하여 그들이 살았던 육지를 향해 신발을 벗어놓게 만든 것은 혹시나 희망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들의 구두코는 육지를 향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희망을 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만일 그들이 죽기 전에 바라본 그 지나온 삶에 대한 한오라기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희망은 그들이 이미 살았던 육지에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깊고 푸른 강물은 정녕 절망이기만 할까요?

새 구두가 좀 발에 끼이는군요. 방금 저는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새 구두를 벗어서 당신이 늘 웃으며 들어오시던 문 쪽으로 돌려놓았어요. 이제 좀 발이 편안합니다.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소희약국에서 다행히 저를 믿고 약을 주었습니다. 제가 지난 한해 동안 꾸준희 약을 사갔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당신이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방을 뺀 돈은 아주 작겠지만 당신의 아내에게 전해주십시오. 저는 이 순간까지도 내내 당신 아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분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사죄하고 있다고요. 저는 한때 그녀가 어리석다고, 너무 어리석어서 악마가 되었다고 착각했었습니다. 그걸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비키니 옷장 밑바닥에 모아둔 돈이 약간 있습니다. 당신의 바바리가 낡은 것 같아서 하나 장만해드리려고 했던 것이니 주저 말고 좋은 것으로 골라 사세요. 그러고 나서 전화를 반납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면 제 장례비는 나올 겁니다. 집에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그 시절은 죽음을 걸고서라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제 방값이 당신의 아내에게 가고 당신이 새 바바리코트를 고르고 제가 한줌 흙으로 뿌려지고 나면, 저는 아마도 뻑뻑한 구두를 벗은 발이 편안해지듯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 편안함으로 저는 늘 당신의 등 뒤에 있겠습니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문득, 또는 소녀를 만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다가 문득,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등뒤에서 짓이겨진 채로 한 줌 즙으로 화해버린 검푸른 기운이 느껴지시면 제가 왔다고 생각하세요.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가 당신의 괴로운 남자됨에서 당신을 구해드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할머니의 옛 얘기 속의 정절 깊은 여인처럼 저도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당신이 제게 생전에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을 잊지 않은 채로 저는 푸릇푸릇하게 이 대기에 스밀 것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러면 안녕히.

<1993, 샘이 깊은 물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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