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성당
가을의 시(詩)
가을의 시선
가을의 참회록
감전(感電)
강변북로
강 언덕, 폐차가 있는 풍경
갚아야 할 꿈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
개들을 위한 저글링
거대한 손
거울 속엔 나비 날고
걸어서 모닝콜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검은 땅, 흰 물
검은 비너스를 위한 연가
검은 현존
겨울나무의 기억에 대하여
겨울비, 하염없이
겨울 안면도
견우(牽牛)
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
고려(高麗)의 새
공장(工匠) 다이달로스
괄게 타는 불길 속에
광화문에서 프리허그를
구름의 산수
국화(菊花)
귀
귓밥 파기
그곳이 어디쯤일지
그늘의 조건
그대를 생각하기 위하여
그림 밖으로 내리는 눈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
그믐달
그해 가을의 일기
금강굴 가는 길
기계 도시 속에서
김유신(金庾信)에게
깊은 숯을 마음에 다스리고
까마귀 떼 날다
꽃
꽃의 말씀
꿈꾸는 돌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남행(南行)길
낮달
낯선 시간 앞에서
내 꿈의 문턱에 앞발을 걸친
내 또한 너의 밥이니
내 손에 남은 봄
내 이마의 꽃밭에서
냉장고를 노래함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농담에 대한 예의
누락
눈 내리는 날의 정물화
눈먼 사내 J
눈먼 새 이야기
눈웃음
늑막염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늦은 봄날
단풍의 속도
달
달콤한 향기
당신 가슴의 서랍엔
당신 앞에서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
데사파레시도스
돌과 시
돌 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 구름 같이
두 개의 인상
등반(登攀)
땅
땅을 샀다
떠도는 이를 위하여
뜨거운 뱀
램프의 시
레다를 덮친 백조처럼
루오, 1948년 11월 5일
루체비스타
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
마리안느 페이스풀
마술사의 밤
마음이 새고 있다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
막히지 않으면 서울이 아니다
말세리노의 추상(追想)
매죽리(梅竹里)
맨발의 아버지
멀리 보이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모쿠슈라
목련 회상
목소리만 비에 젖는다
목숨이란
목에 걸리는 말
몰입
무등 계곡에서
무등설청(無等雪晴)
문신(文信)의 시메트리를 위한 변명
물결 노래
물 먹는 사람
물상(物象)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물속에서 눈 뜨기
물 위의 오필리아
미지의 아이들
바다의 악보 - 벤 구센스의 Sweet song of the sea에 부쳐
바닷속의 언어
바람의 향기를 맡아라
바람이 센 날의 풍경
반려 인간
발다로의 연인들
밤길
밤 버스를 타고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
밤 아리랑
밤을 질주하는 나르시스의 바다
밤의 메트로
배낭을 짊어지고 아고라로 가는 사람들
벽오동 나무의 뒷이야기
벽에 걸린 바다
벽호(壁虎)가 온다
변두리에서
별
별들의 발자국
별이 지는 밤
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
병 속의 바다
보랏빛 남쪽
볼더비치에서 춤을
봄 꿈
봄날
봄 인사
봄 회상
북풍(北風)
분노는 파도처럼
불멸의 구도를 생각하다
불길 속의 마농
불은 내게 묻는다
불타는 노틀담
불편한 사랑
붉은 가면
붉은 벽돌
붉은 사막을 건너는 달
브릭스달의 빙하
비 오는 날의 소네트 - 눈먼 사내. F
비의 향기
빈손의 기억
사과의 시간
사랑의 간격
사랑의 기쁨
사련(邪戀)
사월병(四月病)
사이
사자공화국(死者共和國)
삭제되는 풍경들
산수유꽃 피기 전
살갈퀴 만나러 가는 길
살구나무 아래
삼각 해변을 달리는 개 - 끌로드 를르슈, 〈남과 여〉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상자 X
새벽 세 시에 내리는 비
새벽의 질문
새장
샤르트뢰즈의 나무 한 그루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성자(聖者)
세속 도시
세탁기 속에는 생쥐가 산다
세한도(歲寒圖)
손금에 갇힌 새
손을 그리는 손 - M. C. Escher의 석판화 「Drawing Hands」
숨바꼭질
숨어 사는 영혼처럼
스벵갈리(Svengali) 앞에 선 여인
스벵갈리(Svengali)의 거울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여자
슬픈 연애
슬픈 영혼 위에
시(詩)
시계 속의 뻐꾸기
시들지 말아라 원추리꽃
시민들 - 「프루프록의 연가」를 쓴 T. S. 엘리엇에게
신들의 놀이터
실성한 노래
씨
씨앗
아껴 신는 악몽
아랫것은 불편하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즈 와이드 셧
아직도 나는 스무 살이다
암스테르담
약수(弱水)에 갇히다
양파
어떤 사랑 이야기
어린 왕자
어머니의 자정
얼굴
엉거주춤
여름 안부(安否)
여섯 개의 하늘
연애 통화
열두 살의 구름
열차가 지나가는 배경
영원한 기념
영혼의 물 한 방울
오늘
오늘 새벽
오동꽃
오매불망(寤寐不忘)
오월의 어머니
오후의 실루뎃
오후 4시
왕궁 가는 길
왼손에 대한 데생
우렁각시
우레가 지나가는 풍경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우리나라 날씨
우물 속으로
우체통 안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나
웃는 얼굴
유칼리 나무 아래
유턴을 하는 동안
율리, 율리
율리의 초상
이것은 꿈입니다 – 칼레의 시민들
이른 새벽의 산보로(散步路)에서
이미테이션
이상기후(異常氣候)
이성계에게
인공위성이 빛나는 밤
인형(人形)
일력(日曆)
일획
임진강
입맞춤, 혹은 상처
입술
자수정(紫水晶)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자작나무 그 여자
자작나무 숲
잔다리목에서 싸리재까지
잠들기 전에 눈물이
잔설(殘雪)
장미가 부르는 편서풍
장미 열차
장미의 독
장인(匠人)의 꿈
저글링
저녁 밀물지는 마음
저녁 비가(悲歌)
적과의 화해
전라도여 전라도여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점화
젊은 베르테르를 위하여
제야의 시
조개
졸업 뒤에 알게 된 일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중력 가속도에 들어있는 에너지
쥐덫
지등설화(紙燈說話)
지붕 위의 황소들
지상의 봄
지퉁쟁이 설화
진리의 발생
차(茶)
철길의 유령
초겨울 사원묘지(寺院墓地)에 내리는 눈
춘당 춘색 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춘하추동(春夏秋冬) 비 내리는 - 베트남의 전사(戰士)들에게
출항제
크랙
타자기를 연주하는 남자
태어나지 않은 이름은 슬프다
테셀레이션
토파즈빌 통신
튤립이 보내온 것들
파로마 그릴 찾아가는 길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
팬지꽃
펜로즈 삼각형 위에 서다
편서풍
평생의 집
폐항
폭우
폭탄을 두른 리본
폭포
푸른 당나귀
푸른 심연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풀잎에 쓴 시
풀잎이 풀잎끼리
풀칠하기
풍경을 애완하다
풍경의 발작
풍란
프란치스코의 잠자리
프리즘
피할 수 없는 사랑을
하늘의 물고기
한밤의 블랙러시안
한 방울의 물
한여름 밤의 꿈
해바라기의 종언(終焉)
해변의 라오콘
해 지는 곳으로 가서
호주머니 속 악어
황사 속의 실루엣
황홀한 물살
회심(會心)의 순간
흐르는 물에 달을 떠내려 보내듯이
흘수선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흰 꽃, 붉은 열매
8번 출구로 가는 길 – 테오티우아칸
1961 어느 새벽의 장난
1965
가라앉은 성당*
강인한
물살 빠르게 휘도는 골짜기
맹골수로 저 아래에 모로 누운 거대한 여객선은
우리들의 성당이어요.
여기 따뜻한 슬픔의 휴게실은 우리들의 주소이고요.
머리카락에 붙은 부연 소문들
날마다 시린 무릎에는 퍼런 전기가 흐르지만
착하고 고운 지영 언니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요.
거짓말을 감추려 또 거짓말을
입술에 검게 칠하고 늑대들과 사는 여자는 참 불쌍해요.
한라산에 철쭉은 어디만큼 왔나
나비 앞장세워 찾아가는 길,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천천히 종탑의 층계를 오르는 동안
은빛 갈치 살같이 달려가는 그 골짜기로 봄이 오겠지요.
기다리던 답장이 오고,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끝없이 소라고둥처럼 내려가는 단조의 층계
야자나무 잎사귀에서 호두나무 가지로 통통 건너가는
별 하나, 별 둘,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어요.
눈 감고 가만히 기다리는 다영이, 수찬이, 차웅이
손 내밀어 봐, 별 모양 귀여운 불가사릴 줄게.
오라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볼우물 예쁜 최샘,
집게발 높이 들고 옆걸음치는 꽃게들, 뽀글뽀글 피워올리는
물방울 카네이션은 엄마한테 우리가 띄워 보내는 사랑이에요.
아, 우릴 부르는 저녁 종소리……
엄마 이제는 가셔요, 울지 말고 이제는 집에 가셔요.
* 가라앉은 성당 : 드뷔시의 피아노 《전주곡집》 제1집의 제10곡.
가을의 시(詩)
강인한
저 익어가는 후원(後園)의 금싸라기
별리(別離)를 아는 젊은이들의 은밀한 대화 속에서
가을이 호박(琥珀)빛 수심(愁心)을 달고
조심조심 후원의 담을 넘는 소리를
해거름녘에 나는 들었네.
여름날,
나의 여학생이 그 자그만 에이프런에
찰찰 넘치는 햇물을 담아
노역(勞役)에 지친 내 손을 씻어줄 때
나는 비스킷처럼 연한 애정을 깨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네
아주 먼 하늘을.
서쪽의 고원(高原)을 넘어오는 한 가닥의 미풍(微風)
황혼을 물고 새들이 오고 있네
그 새들이 깃을 치며
보내라, 여름에 얻은 모든 것을 보내라고
노래를 부르네.
여기 있는 한 무리의 새들이
시절에 맞추어 떠나고 나면
은익(銀翼)의 새들은 바람을 뚫고
내려앉을 것이네
비인 우리들의 가슴에 둥지를 틀 것이네.
고적(孤寂)이 흐르는 가을 담벼락 위에
나는 여름에 만난 여학생의 얼굴을 그리다 지우다
마을의 지붕을 덮는 꿈을
가버린 새들의 그 큰 그림자를 생각하네
가만한 숨을 내쉬어 보네.
가을의 시선
강인한
굴참나무 느릅나무 오리나무 조팝나무 들쭉나무 월귤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휘휘 감은 칡넝쿨서껀 이제 막 단풍 들기 시작하는 연두에서 노랑을 마중하고 노랑에서 주황을 받고 다시 빨강으로 넘기고 담갈색도 받아넘기면서 아직 남은 초록을 얼싸안듯 바라보노라면, 흔들바위에서 신흥사 골짝 비칠비칠 내려서는 어름 황홀하게 만나는, 색색 빛깔 화음을 부르는 소리 온 산에 가득, 비탈을 허덕허덕 내려오는데 이게 뭐냐. 오래전에 못 본 청동불상 하나 산문 앞에 떡하니 퍼질러 앉았으니 없던 것이 불쑥 솟아 어리둥절, 구구한 중생들 기와 불사에 완력으로 저도 한 몫 거드는 셈인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잘은 모르지만
다시 태어난다고 하였다.
골짜기 감돌아 물소리도 단풍이 잘 들어서 흰 돌 속으로
가만가만 들어서고 있었다.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알 수 없는 다른 생명으로 숨을 탄다고
등 뒤에서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도 단풍이 잘 들어서
돌아보니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꺼먼 너럭바위에 다람쥐 한 마리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달아나지도 않고 한참을 까만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하마 낼모레 벗게 될 내 몸 주워 입으려고
녀석은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연두에서 노랑을 마중하고 노랑에서 주황으로 다시 빨강으로 갈색으로 단풍이 지쳐 이냥 뚝뚝 져버리는 건 아니라고, 그런 것은 아니라고. 산빛 하나하나 색색으로 풀어서 나무에 돌에 하나하나 고운 이름 불러 제 자리에 앉혀주는 것이라고 물소리는 흐르고 또 흘러서 올올이 흰 바람이 되어 날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가을의 참회록
강인한
은행나무가 한 해 동안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빛깔을 빚어
하나 둘 떨어뜨린다
지상의 길을 천국인 양
금빛으로 덮어준다
사람보다 키 큰 저 나무에게
미안하여라
내 발로 이렇게 무참히 밟고
지나가도 되는 것인지
감전(感電)
강인한
2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아니었다 교회의 풍금소리였다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는데
늙은 맹인이 한 발 두 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검은 유리창 밖으로
시간이 번개같이 뒷걸음질치는 것을
그는 보았다
도련님, 십 년 뒤에 만나요
늙은 여인이었다 낯이 익었다
두 눈이 먼 여인의 얼굴이
그의 숨을 멈추었다
약속 장소에 그는 가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박힌 얼음 대못이
슬며시 사라져간 긴 세월을
하모니카 소리가 풀어내고 있었다
한쪽 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내일 모레 교회에서 식을 올린다며
옆머리를 빗어 올려 보여주었다
달팽이 같은 귓불이 하얬고
그는 스물 두 살이었다
처음이었다
도련님, 십 년 뒤에 만나요
하모니카 소리가 하얗게 멀어지고
한꺼번에 폭포소리가 그를 휩쓸었다
강변북로
강인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 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강 언덕, 폐차가 있는 풍경
강인한
먼 가로등 불빛 추억처럼 흘러서
강물로 나직이 넌출지는 곳
그린 듯이 고요하구나
비싼 내장을 여지저기 뜯긴 채
부끄러운 자세로 엎드린 한 마리 맹수의 시체
튀어나온 용수철이
싸구려 향수가 밴 인조 가죽을 찢고 나와
사라진 엉덩이를 그리워한다
일찍이 피보다 진한 주말의 절정을 향해
소리쳐 질주하단 네 발에서
탄탄한 발톱이 빠지고
허리 아픈 관절에서는 볼트가 풀어졌다
......무장 해제
아, 처치 곤란한 욕망의 구조여, 강철이여
네모난 시멘트와 목을 감는 아스팔트에
맛을 들인 입맛은
다시는 다시는 진흙길을 꿈꾸지 않았건만
알몸으로 달려온 길들이 뱀처럼 얼크러져
저 하늘에서 찔끔찔끔
한강을 부르며 기적을 부르며
아직도 빛나고 있나니
썩어서 뒹구는 수박, 찌그러진 깡통 맥주와
파리 떼들 곁에서
조용히 흙속으로 침몰하는 팔씹년대씩 꿈
그린 듯이 고요하구나
먼 가로등 불빛 추억처럼 흘러서
강물로 나직이 넌출지는 곳
갚아야 할 꿈
강인한
자정의 비는
가로등이 하얗게 빛나는 곳으로 몰려간다.
멈칫멈칫 내린다.
거기 있을 것이다.
느릅나무 이파리 뒤에 숨어
우는 민달팽이
푸른 울음, 기다란 한 줄이.
내밀어 더듬는 뿔에
당신의 붉은 꿈이 걸린다.
엎치락뒤치락 갚아야 할 당신의 꿈이.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
강인한
사람으로 살기
그저 순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사람 차마 못할 일
저지르며 살지 아니하기
독한 맘 먹지 않고 순둥순둥 살아가기
여기 어디라는데, 모질고 사나운
개가 개에게 물려 죽은 자리,
이 동네 어디쯤일까
흔적도 없네
늙은 내외가 도란도란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 저만큼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건네주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
오래전 사나운 개가 죽을 때
그때는 공기 중에 먼지도 아니었을 아이들,
앳된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네
삼삼오오 무전기 들고 서성거리네
그 개가 얼마나 사나웠는지
그 개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때 되면 배고픈 저 아이들 아무것도 모르네
짜장면을 시켜 먹었는지
아이들이 퍼질러 앉은 일대의 공기에 섞여
짜장면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세월은 가네
개들을 위한 저글링
강인한
맛있는 뼈다귀 거짓말을 개들에게 던져주자.
고소한 냄새 연기처럼 사라져
썩은 살점 드러나기 전
또 하나의 거짓말을 새빨갛게 발라서 던져주자.
어리석은 개들이
색깔 속 빈 냄새를 눈치 채기 전
또 다른 맛있는 거짓말을 개들에게 던져주자.
기름진 뼈다귀와 헛것의 그림자랑
한참동안 넋이 빠져 흥겹게 놀아나도록
던져준 거짓말이 봄눈처럼
모두 다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기억력 나쁜 개들
마지막 냄새를 향해
저 개들 한꺼번에 몰려들겠지.
개 위에 개, 개 옆에 개, 개 아래 개......
개를 위한, 개에 의한, 개의 피라미드 빛나겠지.
밤마다 사방팔방 네온의 십자가처럼
한데 얼크러져 세금이 없어 아름다운 개들의 나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겠네, 참 좋겠네.
거대한 손
강인한
덜거덕거리며 이동주택이 뒤집혀 날아간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트럭이며 승용차들
지상을 달리던 열차도
떼 지어 총알처럼 우주로 튕겨나간다.
새들이 놀라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저쪽에서 수만 톤의 모래알과 자갈이 날아오르고
기다란 강물이 찢어진 채
허공에서 너덜거린다.
물살을 헤치고 나온 대형선박이 컨테이너박스랑
풍선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오른다.
길을 가다 허방을 딛는 당신 얼굴에
죽은 고양이와 쓰레기더미가 스친다.
할머니 손 잡고 막 어린이집을 나선 아이들이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이들
키스를 나누던 공원의 애인들도 떠오른다. 거품을 물고
펄떡거리는 물고기, 일요일, 부서진 책상, 도마뱀,
모자, 유리병, 뻔뻔한 신문과, 검은 비닐봉지, 포클레인,
부자들의 왼손을 눈감아주고 다니는 하느님,
새로이 제정되는 입맛대로의 법령과,
스티로폼, 버려진 세탁기, 썩은 나뭇잎에 섞여
아무데도 발 디딜 곳 없이
뿌리 없는 것들은 모조리 뒤죽박죽으로
아악, 소리 지르며, 허우적거리며, 날아오른다.
우리들 등 뒤에서 누군가
지구의 중력 스위치를 슬쩍 내린 그 순간!
거울 속엔 나비 날고
강인한
키 큰 참나무들이 쿵쿵 발 구르며 산을 내려오는 밤
하얀 롤스크린을 등 뒤에 두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깊고 깊은 바닷속 분홍의 진달래 피고
꽃 이파리는 엷은 혼이 되어 밤하늘을 떠돌아도
꽃보다 예쁜 여자는 거울 속에만 살았네.
공주님, 공주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는
그건 하늘 아래 공주님 한분뿐이지요.
거울 속엔 노랑나비, 흰나비,
모두들 눈 감고 숨도 크게 쉬지 마라.
황금빛 실뱀을 목에 두르고 문을 나서면
바람 부는 들판이었네. 늑대가 달리는 거친 들판이었네.
걸어서 모닝콜
강인한
텐트의 가림막을 다 내렸다.
밤이 깊어가는데
하마들은 마라강에서 소리 지른다. 저 소릴 들으며
어떻게 잠을 이루나.
침대 속 따끈한 물통을 굴리다 이리저리
이리저리 새벽,
하마들이 또다시 끙끙거린다.
캄캄한 세 시 반.
강에서 하마들 누렇게 칭얼거리는 소리 돌돌 말아
당신이 내다보는 창밖 산딸나무 가장귀에 걸어주고 싶다,
는 우스운 생각을 궁글리다
풍덩 잠에 빠졌는데
내가 잠자는 천막 가까이 대고 굿모닝.
또 저편 우리 아이들 자는 천막에 대고 굿모닝.
페어몬트 마라 사파리클럽 직원이 직접 배달에 나선 듯
굿모닝 디스 이즈 모닝콜.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강인한
은빛 서걱이는 강변에
바람부는 갈밭, 검은
달이
에드벌룬처럼
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여 있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는 여기저기서
단칼에 허리가 꺾인다.
허리 아래 드러난
복두장이의 피묻은 너털웃음이
비비꼬여 달아난다.
쇠사슬을 절컥이며 절뚝절뚝 달아난다.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
시퍼렇게 녹이 슬려 인양된 뒤.
검은 땅, 흰 물
강인한
밤길을 간다.
비 많이 내린 뒤 캄캄한 먹물,
밤길을 혼자 걷는다.
검은 땅, 흰 물
한사코 흰 것을 딛고 싶은 마음과
내 발걸음은 힘겹게 싸운다.
내딛는 발밑은 벼랑인지
허방인지
단단한 대지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핏속에 흐르는 믿음을 택한다.
검은 것을 디뎌라. 검은 것을 디뎌야 한다.
흰 것에 속지 말라.
검은 땅, 흰 물
물은 희게 웃는다.
방심한 발을 흠뻑 적시기 위하여.
웅덩이는 희게 웃는다, 악마처럼.
검은 비너스를 위한 연가
강인한
새벽 꽃잎을 쪼으는 가장 날쌘 빛살 속에
너의 머리칼이 꿈틀거린다.
잔느여,
일 세기 전의 뛰어난 관능이 문득
이렇게 무수한 밤을 건너와
흰빛으로, 오 살아나고 있다.
검고 빛나는 피부 속 내밀하게 감춰진
피의 뜨거운 어둠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빛살,
젖은 너의 내부 속 깊숙이 기다리는
그 눈부신 기쁨을 찾아
한꺼번에 쏟아지고 쏟아져서 허물어지는
금빛 산산한 아픔을 본다.
잔느여,
잠들었던 세계의 구석구석
수만 파운드의 어둠을 일제히 휩쓸어 가는
이 눈부신 시간의 절정에 내가 서서
일 세기 전의 너를 부른다.
악의 시대에 태어난 한 미치광이 사내가
너의 가슴에다 전생애를 탕진하듯
잔느여, 내가 너를 부른다.
한 마리 주린 표범처럼
나의 온몸이 욕망하는 거대한 전율의 한가운데
저음의 대륙이 떠 있고
백설이 몰아친다.
머나먼 고원에서부터 나의 발목까지 잠기는
이 나라의 슬픔,
슬픔은 갓 태어난 아기의 입술도 적시고
허리 아픈 전쟁을 거느린 채
지금도 밤의 저쪽 기슭에서 철썩거리건만
잔느여,
가혹하고 주도한 율법에 시달려
죽었던 시편들
마침내 한 줄씩 되살아나고 있을 때,
내 영혼의 전역에선
칼날 바람이 눈을 뜬다.
기계들이 굳센 석탄의 힘을 물어뜯고
장미꽃 속에 이슬 방울이 빨려 들어갈 때,
새로운 자유의 이름으로
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차가운 은빛 비늘 빛나는 바다 위
어둠을 가르고 나타나는 검은 비너스
잔느 뒤발*이여
꽃잎 같은 너의 혈액을 향하여
오 가늘고 사나운 빛들이 소리친다,
눈부신, 눈부신 시간의 절정에 서서
너를 부른다.
* 잔느 뒤발 :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사랑한 여인.
검은 현존
강인한
모과나무가 대문 밖에 나와 비를 맞고 있다.
장미과의 수피에
불신처럼 이끼가 덮였고
턱에 걸린 명찰에는 빗물이 얼룩진다.
그런즉 한참 멀리서 왔다, 그대는.
어떤 상처는 고집이 세다.
중학교 일학년 때 뒤에 앉은 아이가
갑자기 펜을 들어 찍어버린 내 손등.
한 방울 피의 결정으로 손등에 그 점이 살아있다.
그때, 질풍 같은 분노의 일격과
그 아이도 나도 길항의 내용에 대해서 지금은 잊었지만
은근한 비밀로 내 몸은 기억하고
나를 각성시킨다.
모과가 찾아가는 뒤틀리고 먼 기억의 통로
놋날처럼 쏟아지는 빗발 아래 희미한 장미의 가계,
누가 끄집어낼 것인가. 장미도 모과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 집을 나온 장미 중의 어떤 가여운 따님이
오래도록 모과나무로 검게 살아가는 현존이 있을 뿐.
이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모과나무의 본적을.
겨울나무의 기억에 대하여
강인한
길게 부저가 울리고
자궁에서 태아가 밀고 나오듯
지하 차고에서 불끈 올라오는 차가 보인다
이 밤에 어디로 가려는가
갈 데 없는 우산나무들이 비에 젖는다
차선과 신호등이 거미줄로 목을 죄는
주소불명의 캄캄한 거리에서
나도 그렇게 헤매인 날이 있었다
사랑이여
내가 그대에게 드릴 것은 빈손뿐일지라도
우리 둘이 참새처럼 걷던
잎 진 나무들의 짧은 숲길,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은빛 물결과 빛나는 햇살을 기억하나니
홀로 눈뜨는 밤마다 그대의 안부가 그리워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핏덩이 같은 것, 한 덩이 검은 침묵 같은 것
사랑이여
눈이 맑은 이여
비 맞는 검은 가지마다 환하게 등을 밝히기 전
목련나무는 한참을 더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만 한다
겨울비, 하염없이
강인한
초겨울인데 개나리꽃 팔랑팔랑
찬바람에 홑적삼
도망 나온 가시내 가슴처럼
베란다의 철쭉도 꽃망울을 슬쩍.
시절이 왜 이럴까
세월이 거꾸로 가는지 환장을 하였는지.
분 바른 계집애들
치마는 허벅지로 샅으로 자꾸만 올라가고,
날궂이 살인마가 날뛰는 막다른 골목
이 골목인가 저 골목인가.
담배를 개비로 팔고
술도 잔술로 팔고
독한 추억에 취한 그네
시큰한 옛 노래에 실어
내리는 겨울비, 하염없이 늙은
개는 콧등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네.
겨울 안면도
강인한
돌아가기에는 해가 너무 짧은 오후
이제 곧 밤이 온다
다급하게 지나쳐 온 수목원의 솔숲에서는
죽었던 바람이 이빨을 세울 것이다
해변의 횟집 진열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식당 밖으로 내민 천막의 멱살을 뒤흔들 것이다
가을 밤 바닷가 모래톱에 나가본 적이 있다
갯우렁이 빨아먹고 놓아준 구멍 난 조가비들
녹슨 기억처럼 달빛 아래 뒹굴고
떠밀려온 해초가 낡은 그물이 되어 말라 가는 시간
소주 한 잔에 순하게 달이 뜨고
두 잔 석 잔에 파도가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을
기억한다 멀뚱멀뚱
제 살점을 한 점 두 점 집어먹는
젓가락을 뻐끔거리며 바라보는 눈
깨끗한 접시 위 생선의 발라낸 생살을 씹으며
오늘을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겨울 바다는 왜 이다지 산보다도 높고 추운 것이냐
밖에 나와 찬비 맞은 개처럼 떨며
돌아보니 나는 이제 너무 멀리 와버렸다
견우(牽牛)
강인한
내 외로 가는 고운 날에
두어 평 텃밭을 장만하면
거기에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에 뜨물 부어 새순 기르듯
눈물을 길어 잎을 틔우고, 씨를 얻어 보리.
아기씨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비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純金)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 소중한 금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 두꺼운 해가림하며
쉼 없이 보살피리.
잔등이에 금이 간, 저 소용돌이를 타는 거북이
거북이의 닳은 발바닥을 가슴에 얹고
이랑 진 등허리에 살을 출렁이게 하는, 아기씨
은은히 나부끼는 은실 웃음 보려면
굽이 저승에서 동아줄 늘여
내 꿈 낚는 한 백년
백년을 땀 흘려도 싫지 않으리.
살진 은어(銀魚)가 무지갯빛 비늘로
한 마장의 물결 걷어 올리는 모양 익히어
수정 속 같은 바람 더불어 한 백년 땀방울로
꽃밭을 매며 살아 보리,
살아 보리.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
강인한
아침저녁 강변을 걷는다는 건
물고기로 사는 일
물고기가 되어 저 푸른 상공을 헤엄치는 일.
가만가만 지느러밀 휘젓거나
불끈 쥔 주먹을 니은자로 코앞에 들어올리며
계절을 느끼는 일
등 뒤의 두런거리는 소리는 티끌처럼 날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생각한다.
아파서 오전 내내 누워 있다는 네 곁에
나도 모로 누워서 이마라도 짚어주고 싶은 생각
생각의 초록 이파리, 바람에 슬쩍 끼워 보낸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앞뒤로 마주보며 껴안고 있는 아이들 몸통에
보이지 않는 바늘이 꽂혀 고슴도치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들처럼
하낫둘 하낫둘
기분 좋은 흙길을 산책하며 문득 듣는
어디 가니, 이리 와 엄마한테 와
애타게 새끼를 부르는 개엄마의 목소리,
앞에서 뒤에서 귀가 가려운 이들
날개 달린 물고기들이 그 머리 위를 날아간다.
언제였을까, 북서풍에서 동남풍으로 전향한
대기의 숨결이 뺨을 간질인다.
하낫둘 하낫둘 내 옆구리에 붙어
동행하고 있는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고려(高麗)의 새
강인한
마침내 소리하여 울음을 다 쏟고
죽을 줄 아는
새는
얼마나 아름다우랴.
신문의 행간 좁은 여울로
오늘도 내 마음은 산산히 흐른다.
찢긴 돛폭을 사나운 바람에
내어맡기고
실은 별것도 아닌 밥을 먹기 위해
한밤에도
열 번 스무 번씩 높은 물살에 뒤채는
악몽의 벼랑을 지나
우리가 언제
훨훨 새가 되어 날으랴.
몸으로 온몸으로 소리하여
울 줄 아는 고려의 새가 되랴.
공장(工匠) 다이달로스
강인한
이 여름철에 내가 죽는다면
강물도 누렇게 괴어 흐르는 하늘까지야
이웃집에 다녀가듯 간단히
인사로 건너갈 수는 없거니.
큼직한 이승의 업보(業報)나 들고
천덕스러운 눈물을 흘리면
상제(上帝)가 손수 나와 술을 따르고,
어깨를 두드리겠지.
그래 전세(前世)의 어엿한 따님들은 꽃밭 너머로
다이달로스의 날갯죽지를 보듯
쓸쓸한 나의 손을 눈치 채고
종내에는 그 큰 눈망울을 섬벅이겠지.
내 이 두 손바닥만으로
능히 가릴 수 있는 얼굴로는
못 죽겠네,
차마 못 죽겠네.
육척 미만의 육신(肉身)을 덮을 도포(道袍)만큼은 넓게
세상의 여름을 가야지,
아아 더 큰 날개를 지어야지,
나의 이 손으로.
괄게 타는 불길 속에
강인한
괄게 타는 불길 속에
마른 솔가지를 던져주었다.
탁탁 튀는 불티가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구름 위에 펄떡이는
땀 젖은 물고기 두 마리.
태풍이 지난 다음
이윽고 잔잔한 바다가 나왔다.
천상의 기쁨을 감은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시원한 샘물이 흘렀다.
광화문에서 프리허그를
강인한
가시 많은 이 몸 벗을래요.
한국에 가면, 이백만 원 월급 받는 이가 청혼한댔어요.
나보다 스무 살 많은 아저씨, 이백만 원이면
승용차가 있고 기사도 둘 수 있겠지.
생각하고 베트남에서 왔어요, 제 이름은 프엉.
팔 년 됐어요. 일곱 살, 세 살, 오누이
손 잡고 구정엔 고향에 찾아가려 했는데
십팔 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요.
나비처럼 팔랑,
우리 세 식구 저쪽으로 건너가 같이 살 거예요.
가시 많은 이 몸 여기서 벗을래요.
십오만 사천 볼트 전기가 흐른답니다.
삼십 미터 송전탑 거기 사람이 올라가 있습니다.
벌써 두 달째여요.
서커스를 하느냐구요?
억울해서, 억울하고 분해서 알리고 싶었어요. 사람의
꿈을 꾸고 싶은데
턱턱 걸리는 가시 울타리가 무서워요.
겨울 해는 걸음이 빠르지요. 귀신 같은
내가 무서워요.
오래 참고 기다렸어요.
하지만 다시 또 기다려야 하는 당신,
더 이상 우리는 당신에게 질문할 게 없어서 미안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끌어안고 울어주는 것, 그것 말고는.
슬픔에 삭은 바람이 곧 혹한을 데려오겠지요.
쓰디쓴 희망은 식도를 넘어 우리들의 눈물이 될 뿐.
내일이나 모레 희망을 버릴 사람들.
오세요, 이리 오세요.
구름의 산수
강인한
한 뙈기 감나무 발치에 텃밭을 일궈
아욱 상추 고추 가지랑 강낭콩 들깨 시금치가 자랐다.
어머니는 푼돈을 주고 그걸 사서
내게 사철 국을 끓여주고 반찬을 해주고.
봄부터 안개를 헤집으며 생쥐는
마루 밑과 굴뚝 사이로 감꽃을 목에 걸고 다녔다.
셋방 젊은 총각이 행여 영그는 홍시 감을 따먹지 않을까
주인 노파는 일삼아 감을 세어 두었다.
초가지붕보다 높은 잔가지 끝에도
발갛게 감이 가물가물 열렸는데
노파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쑤셔대며
감 하나 나 하나, 감 둘 나 둘,
세고 또 세다가 눈이 시어서 다시 처음부터
감 하나 나 둘, 감 셋 나 넷.
국화(菊花)
강인한
한 시대가 물속처럼 깊어진다.
바람 푸르게 나부끼는 저녁 어스름
산발(散髮)을 한 이조 선비들의 혼이 돌아온다.
근심을 다 두고 돌아온다.
새로 바른 창호지에 피 묻은 귀를 대고
서릿발 속에서 치렁한 울음 소리를 건지고 있다.
한 덩이의 산이 강물 속에
실실이 풀릴 때까지.
귀
강인한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밖에 나가 쪼그려 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귓밥 파기
강인한
나는 아내의 귓밥을 판다. 채광가(採鑛家)처럼 은근히 나는 아내의 귓구멍 속에서 도란거리는 첫사랑의 말씀을 캔다 더 멀리로는 나에 대한 애정(愛情)이 파묻혀 있는 어여쁜 구멍아 내의 처녓적 소문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나는 그것들을 불어버린다.
아, 한숨에 꺼져버리는 고운 여인의 은(銀) 부스러기 같은 추억(追憶).
그곳이 어디쯤일지
강인한
엷은 새벽빛이 흘러와
벽에서 4호 액자가 떠오른다
삼십 년 전 전라도 어느 개울과 산이 날것으로 숨쉬다가
젊은 화가의 선과 색채를 입고
이 작은 액자 속으로 들어온 것이니
그 곳이 어디쯤일지
내 어린 날 어느 겨울이었으리
곤죽이 된 논바닥에 고무신 푹푹 빠지며 연을 날리는데
까마득한 하늘에서 홀연 실을 끊고 사라져버린
그 연의 행방이여
첫 여인의 소식처럼 지금도 슬프고 궁금하다
그늘의 조건
강인한
슬그머니 마음 한쪽이 꺼진다.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당신에게 보내는 텔레파시
조여 둔 알람의 나사가 풀어진 모양이다.
찌그러진 마음의 갓길엔 늘 푸른곰팡이가 피어
그렇게 한 주일
한 달, 두 달이 가기도 한다.
웃자란 풍경 저 너머로 새가 날아오른다.
등이 가려워서
새는 모래를 끼얹어 목욕을 하고
나는 당신 눈앞에 가려운 내 등을 내민다.
당신의 햇빛을 못 받은 마음의 아래쪽은
골짜기가 깊어서
언제나 빛깔이 서늘하다.
그대를 생각하기 위하여 - 물결 노래
강인한
가장 온전한 그리움으로 그대를
생각하기 위하여
이 어둠을 조용히 불렀거니
어디만큼에서 목마른 손을 나누고
우리가 헤어졌을까
오늘은 너무 멀리 떠나와
사랑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라
희미한 달무리로 번지는
내 옛날의 소중한 아픔
긁히고 부딪치는 돌자갈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이 밤도 흘러가나니.
그림 밖으로 내리는 눈
강인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속으로 들어와 눈을 털고
낡은 외투 뼈아픈 세월을 털고
검정 모자를 벗어든 저이!
깜짝 놀란 건 의자였다, 딸꾹질처럼 피아노가 멎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잿빛 시간 속으로
가뭇없이 눈이 내렸다.
미술관 유리창 밖으로도 먹먹한 눈이 내리고
당신은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참새처럼
러시아의 눈 내린 광장에 새 발자국을 쿡쿡 찍고
백 년 전 가난한 사람들이
손 흔들며 흩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 쌓인 눈의 무게를 마음에 달아 저울질하며
더운 커피를 번갈아 마시는 것,
타고 온 마차를 돌려보내고
돌아가는 바퀴 소리에 옛날의 아픔을 실어 보내는 것.
녹기 시작한 층계에 다시 눈이 내려
서로서로 꼭 붙들고 층계를 밟는 건 즐거운 일,
반짝반짝 아르페지오로 빛나는 음악
날리는 벚꽃 사이로 한 줄씩 섞여들었다.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
강인한
고소한 옥수수 또르띠야가 생각나요.
맛있는 하몽을 싼 또르띠야에 적포도주도 한 잔.
배경을 떨치고 살금살금 액자 틀을 뛰어내려 사뿐,
마요르 광장에 나갈 테니 눈감아주셔요.
비어 있는 액자 앞에서 구시렁거리는 사람들이야
나체의 체온 희미한 장의자에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쉬든지 말든지.
나도 그림 밖의 세상에서
다디단 공기를 숨 쉬고 맨발로 달리고 싶어요.
랄랄라 캐스터네츠 튕기며 멋진 춤을 추고 싶어요,
올레! 멀리 있는 별빛 그리운 말라게니아.
내 얼굴에 환희의 금실 은실 햇살을 받고 싶어서
방금 프라도 미술관을 빠져나온 길이에요.
프릴이 많이 달린 플라멩코 무용복인데 실은 좀 더러운가요.
미술관 회랑에서 빠져나온 걸 아무도 몰라요.
날마다 테레빈유 마시며 가슴이 먹먹했어요.
날마다 1808년 5얼 3일, 검은 밤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날마다 총소리, 총소리, 그리고 높이 팔 벌린 검은 비명소리
강물처럼 침대 밑으로 흐르고
제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피 묻은 아가리,
끔찍한 시간의 검은 괴물이 쫓아오고 있어요.
동트는 핏빛
아, 이제는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목 뒤로 손깍지 끼고
어둠 속에 빛나는 가슴 열어 한 송이 백합처럼
기다릴게요. 어서 오셔요.
두려움 없이 보셔요, 온몸으로 기다리는 내 모습을.
그믐달
강인한
그네를 타고 싶다
그믐달의 양쪽 뿔에 줄을 매고
스르렁 슬렁 스르렁 슬렁
구름도 젖히고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 바라보면
저 아래 산 너머 너의 집
새벽에 금빛을 흘리는 창 안에서
책을 읽는지
편지를 쓰는지 골똘한 네가 보이고
그믐달에 줄을 맨 그네를 타고 싶다
네 이름이 생각 안 나지만
그네 위에서 너를 보고 싶다
그해 가을의 일기
강인한
지금 내가 손바닥에 받아 보는
이 해의 가을 햇빛은
정말로 햇빛입니까.
지금 내가 하늘을 우러러
흘리는 눈물은
정말로 눈물입니까.
하느님, 아아 나의 하느님
지금 나는 어느 낯선 별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묻는 이 물음을
당신은 그 먼 곳에서
정말로 들을 수가 있습니까.
금강굴 가는 길
강인한
신록이 향기로웠다
비선대의 너럭바위에 토끼처럼 앉아
시린 여울에 발을 씻고 나선 길
엎어지고 포개진
바윗돌을 톺아가는데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굽이에서
아내는 자꾸만 뒤에 처진다
계면쩍은 은혼(銀婚)의 여행길
느지막한 오후 참에
금강굴로 오르는 길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마
늙은 느티나무의 작은 구멍을 향해
발밤발밤 기어오르는
불쌍한 개미들처럼
여보, 차라리 애기 하나
더 낳는 게 낫지
못 올라가겠어요
힘들고 가파른 길이
어디 금강굴 가는 길뿐이랴 싶어
숨찬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데
아내의 살쩍머리
저 아래 비선대 흰 물소리가
한두 올 슬펐다
금강굴 예까지 오는 데
이십오 년이라니.
기계 도시 속에서
강인한
도시에는 비가 내립니다
정오입니다
철로가 소리없이 비에 젖습니다
들어오는 열차도 나가는 열차도 없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시내버스도 그 많던 택시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스팔트 넓은 도로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부호처럼 걸어다닙니다
따르륵 따르륵 전화 다이얼이 저혼자 살아서
시내에서 시내로 걸려갑니다
비가 내립니다
도시는 거대한 전염병동
시뻘건 웃음소리가 검게 탄 건물의 벽에서
거미줄처럼 나직이 새어나옵니다
비가 내립니다
김유신(金庾信)에게
강인한
유신(庾信), 그대의 칼은
잘못이었어.
갈대숲에서 땔거리를 자르거나
낙동강에서 은어회나 칠걸
정말 잘못이었어.
칼은 누가 쥐는가
누가 칼을 쥐어야 하는가를
그대는 모르고 있었어.
저 푸르고 기름진 대륙에의 꿈을
무참하게 베어 버린
유신(庾信), 그대의 칼은
차라리 푸줏간에서 뻐얼건 말고기나
자르고 있을걸.
푸짐한 덤을 얹어서 우리들의 쓸개를 잘라서
주린 개에게 던져준 일
천번 만번 억울한 잘못이었어.
칼은 누가 쥐는가
누가 칼을 쥐어야만 하는가를
유신(庾信), 그대는 정말 모르고 있었어.
깊은 숯을 마음에 다스리고
강인한
산 빛깔이 엷어지고
슬픔은 극약처럼 짙어진다.
몰래 숨어 지켜보는 어떤 눈빛이
서늘한 당신 이마에 드리웠다
걷히어간다.
밤 내내 기울어 중천을 흐르는 달이여.
깊은 숯을 마음에 다스리고
내 휘황히 불타는 손을 들어
그대 어깨에 묻은 절반의 어둠을
가만히 덜어낸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남은 어둠을 향하여
더 엷은 그늘에 나래를 부스러뜨리는
빛의 벌레,
어둠 속에 스러진 한 줄기 흰 그을음.
몸 둘 곳 없는
아, 지상의 한 사람 투명한 갈증이
그대 앞에 마주 서 있다.
까마귀 떼 날다
강인한
올림픽 준비 이상 없음 오바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삼익아파트
상공에 불온 기류 떠 있음
두 시간 전부터
쑥색 포니 승용차로 대기중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아파트를 나오고 있다
새꺄, 군사문화가 어떻고
공권력이 어떻고 또 씹으면 재미없어
새꺄, 꺄, 까욱! 알아서 기라구
라구, 라구, 으아악!
칼은 펜보다 강하다 알갔어
팔팔년 팔월 육일 공칠시 삼십분, 과업 끝
날씨 좋고
올림픽 준비 이상 없음 오바,
까아욱!
꽃
강인한
어려서 넘어졌을 땐
흙 털고
무릎에 빨간 약을 발랐다.
오후가 되자 아내는
고만고만한 화분들에 물을 준다.
관음죽은 중년을 넘어 나보다 키가 크다.
바위틈에 지초처럼
나도 깊은 몸속 쓸개에 돌 하나 얻어 키운다.
이따금 못 알아본다고 떼쓰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에 달을 떠내려 보내듯
어둠 속에
황소가 물소리로 우황을 앓는 밤.
돌은 빨갛게 꽃도 피울 것이다.
꽃의 말씀
강인한
가까이 오세요
한 발만 더 가까이 오세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여인의 귓속말을
드릴게요
좀 더 가까이 오세요
한 발만 더 가까이 오세요
꽃의
맨 처음 피어난 빛깔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가까이 오세요
어지럼증이랑 가슴엣피 같은 것도
다 잊을 수 있게 씻은 듯이
가라앉는
한 옛날의 서러운 사람
향기로운 눈물로 닦아드릴게요
받아들일게요
내가 바치는
이 질그릇에 온전히
소중한 당신의
당신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꿈꾸는 돌
강인한
나는 당신 호주머니 속에 들었어요.
당신은 나를 가졌어요.
아주 가까이 나는 당신의 심장 뛰는 소릴 들어요.
손가락에 꾹 힘을 주고 벽을 밀어요.
의심하지 말고,
조용히 숨을 멈추세요.
오래지 않아 당신 몸이 스르르 벽을 통과하듯이
다음 백 년 너랑 살자,
달 없는 밤 나를 끌어내 손잡고 도망치는 모습.
간절하게 간절하게 마음속에 비춰보세요.
단단하게 뭉치고 또 뭉쳐 보세요.
이것이어요, 꿈꾸는 돌.
이 돌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내 하얀 맨발이
달 없는 밤이면 보일 거여요.
당신 가슴에 대고, 당신 붉은 피를 스르르 흘려 넣은
한 덩이 꿈같은 사랑.
가지세요, 모두 가지세요.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강인한
보아라, 짐의
일만 평 시름 위에 촘촘한 송곳으로 내리고 있는 비
오늘은 굳세게 검을 잡고
저들을 버히리라
가증스런 세 치 혓바닥을 함부로 놀려
제왕을 능멸하는 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율법의 준엄함을 세워서 보이리로다
한 나라의 안위를 코 앞에 두고
어릿광대의 쓸개를 희롱하는 자들이여
억조창생 앞에 겹겹 적막으로 몸을 두르고도
감출 수 없는 짐의 수고로움이야
몽매 무지한 저들이 어찌 짐작이나 하랴
짐이 한번 희다 하였으면
까마귀도 백 번 희어 마땅하거늘
작두 위에서 촛불 들고 춤추는
천한 목숨들이여
한칼에 버히면 피는 흐르고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낄낄낄낄
검다 희다, 희다 검다, 말도 많구나
가을 들판에 서서
허공을 나는 참새에게 물어보라
이 땅이 뉘 것이며
이 하늘이 뉘 것인가를.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강인한
그림자를 벗어버린 알몸으로
시간의 허물을 말리는 동안
박하 잎을 입에 문 꽃뱀이 바위 그늘로 내려가고
호박꽃 깊은 방 속에서
엉덩이를 치켜든 꿀벌은 체위를 바꿔가며
황홀에 골몰한다.
태초에 새였던 이녁이 불면의 밤을 뒤척이다
눈 붙인 한순간에 스치는 건
짧은 은빛.
먼바다 어디쯤일까,
기울어진 흘수선을 물고 당신 가슴 속으로 가라앉는
슬픈 배 한 척이 있다.
남행(南行)길
강인한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5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 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 지어 날아가는 남행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 눈이 내린다.
낮달
강인한
그대 손톱의 반달
그 적 보았었네.
몸 여전 튼실하시고
웃음 항용 당당하대만
하늘에는 구부러진 낮달
그대 손톱의 반달이
스르르 빠져 흐르고 있네.
어금니 앙다물고
두 줌 발끈 쥐고
왜 못 오고 마나.
그대 엄니 밭고랑에서
한 마지기만큼 허리 펴시면
건너오는 세상이라는데.
낯선 시간 앞에서
강인한
낯선 시간 앞에 서 있다
네가 벗어놓은 그림자가
여기 있다
카페모카의 오후 세 시, 달콤한 수요일
생크림으로 추억은 장식되었으나
이 추억은 치명적이다
내 앞의 빈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너의 그림자는 타르보다 쓰고
낯선 시간을 마주한 나는 시력을 잃는다
갑자기 초라해진다
봉인된 시간 속에서 나는
기억해 내고 싶은 것들을 찾아낸다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너의 얼굴을
조용히 들어올린다
내 꿈의 문턱에 앞발을 걸친
강인한
종착역에 닿았다.
승객들 모두 청춘이 되어 내린 다음
내 꿈이 이루어진
고요한 기쁨이 유리창에 번진다.
ITX 청춘열차는 지금 숨을 참고 있다.
한 호흡을 길게 내뱉고 예정된 출발을 위해
시선을 바꾸기로 한다.
두 개씩 나란히 서서 직각으로 꺾는다.
또 한 번 직각으로 꺾는다.
짧지만 정확한 절도,
사열대에서 귓가에 붙이는 거수경례처럼.
(역시 군인의 딸은 어딘가 달라요!)
짝을 지어 좌석들이 불쑥 일어선다.
물 밖으로 내뻗은 싱크로나이즈 선수 두 다리처럼.
검게 일렁이는 물결
내 꿈의 문턱에 미소를 물고 피 묻은 앞발을 걸친
저 짐승의 시뻘건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 또한 너의 밥이니
강인한
흐린 강물 속
왕잠자리 애벌레는 눈이 밝아
알에서 깬 올챙이를 날름 삼킨다.
적도 남쪽 맹그로브 숲에서 나온 거대한 비단구렁이가 어두운 밤에 한 달 치 즐거운 식량을 얻어냈다. 슬프고 뻑뻑한 짐승을 옥수수밭에서 통째로 삼킨 것이다. 풀숲에 숨어 한 달을 편히 쉬어도 좋을 참. 무나 섬에 사는 와 티바(54.여)는 전날 밤손전등과 정글도를 들고 밭작물을 헤집는 멧돼지를 쫓아내려 밭으로 나갔다 더운 바람 속 한 줄기 찬바람에 덜컥 소지품을 놓친 와 티바는 날이 새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한 달 치 먹이로 배가 부른 파충류의 길이는 7미터를 훨씬 넘고 159킬로그램의 무게라고 전해졌다.
몇 달 전 뒤풀이에서 한 시인이 나를 씹지도 않고
한입에 삼켰다, 그 후로
계속 속이 더부룩하다, 슬프고 뻑뻑하다.
언젠가 내 그를 통째로 삼키는 날에야 묵은 체기가 없어질까 몰라.
바람이 간지러운 왕잠자리를
한입에 와삭!
물풀에 눈을 감춘 개구리처럼.
내 손에 남은 봄
강인한
부드러운 능선의 칼금을 문 하늘 위로
제비가 왔다, 생일이면
내 전생에 상제의 딸을 엿본 죄로
여기 서서
담 너머 눈부신 향기가 날아오고
영롱한 구슬소리가
종일토록 늙은 벚나무 꽃잎을 털어
목욕을 마친 그대 속살의 분홍
그대 속살의 향긋한 흰빛을
다 비춰줄 때까지
기다린다
후생의 내가 살아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설고
오랜 기다림에 목이 말라
자꾸만 거울을 보는데
뒤꼭지 까만 밤이
발을 적실 듯 길게 흘러나온다
사랑이여, 펼치고 펼쳐서
내 손에 남은 봄이
이제 많지 않다
내 이마의 꽃밭에서
강인한
내 이제
이마의 조브장한 안마당에 터를 장만하면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水晶)에 뜨물 부어 순 기르듯이
눈물을 길어 잎을 티우고, 씨를 얻어보리.
아기씨의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부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純金)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이 소중한 금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草綠) 두꺼운 해가림 하며
쉬임 없이 보살피리.
잔등이에 금이 간, 저 소용돌이를 타는 거북이
거북이의 닳아진 발바닥을 가슴에 얹고
이랑 진 등허리에 살을 출렁이게 하는, 아기씨
긴 자락 나부끼는 은실 웃음 담으랴면
굽이 저승에서
동아줄 늘여
내 꿈 낚는 한 천 년을
천 년을 땀 흘려도 싫지 않으리.
살찐 은어(銀魚)가 무지개빛 비늘로
한 마장의 물결을 걷어올리는 모양 익히어
수정 속 같은 바람 데불고 한 천 년을 땀방울로
꽃밭을 매며 살아보리,
살아보리.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냉장고를 노래함
강인한
삼 년 전 월부로 사들인 냉장고
아래층에
달걀 한 줄과
김치 한 단지,
곯아버릴 수도 없고 시어 버릴 수도 없이
억지로 억지로 싱싱한 체함.
이층에는 오십원짜리
싸구려 아이스크림 세 개
학교에서 돌아올 우리 아이들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
내가 마실 맥주 몇 병과
아내가 마실 오렌지 주스는
처음부터 부재중.
아내와 나는 이 대형 냉장고 곁에
쪼그리고 앉아 미소 지으며
사진 찍기를 좋아함.
문을 열면
짜고 매운 한국의 냄새뿐이지만
그러나 문을 닫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하염없이
냉장고를 사랑함.
열려라 냉장고, 열려라 냉장고,
아이들은 열렬히 마술의 문에 매달려
꿈꾸며 노래함.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 산민 한승헌(1934~2022) 변호사
강인한
소년이 집 떠난 뒤
잘 듣는 귀 한 쌍의 마이산만 남았다.
먼발치에서 내다보는 운일암 반일암
바람 속에 다람쥐 끌어안고, 산은
소년의 등이 안 보일 때까지 그림자로 배웅해 주었다.
숲속 솔잎마다 맺힌 이슬
영롱하고 말간
인간의 사랑이 소년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자랑스럽겐 못 살아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한다.
군홧발로 짓이겨진 모진 30년
캄캄한 진흙 속 하루도
진실의 길을 가르쳐 준 스승
가람과 석정의 절절한 눈빛 잊은 적 없었다.
「분지糞地」필화사건부터 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사건, 사건, 사건들……
말도 아닌 우격다짐과 철벽에 맞서
꺾이지 않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수임료 대신 국립호텔에 초대되기도 하였네, 두 번이나)
청년과 장년의
파란과 만장을 마주하며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굽이치는 강물처럼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소리치며
북한산까지 찾아오는 푸른 별빛.
농담에 대한 예의
강인한
피투성이 탈레반 시신에다 오줌을 누는
유쾌한 해병대원의 인사
좋은 하루를 보내라, 친구여
악마의 개가 물어뜯은 아프가니스탄 하늘,
에도 밤이면
별이 뜬다. 저 별을 뜯어다 다이아몬드로 쪼개어 팔려고
카메룬에 다녀온 친애하는 형님의 오른팔이
상비 복용하는 약이 이거여,
하루 한 알이면 중년 남성여성을 신혼으로, 아암 암.
눈 딱 감고 한번 잡숴봐.
새벽이면 알아볼 팅께. 정말
알 수 있을까.
부리는 졸개들 네댓 식당으로 데려가
수육 2인분을 시키는 사람의 일생
근검절약을 나는 안다.
작은 종지 속에 사발을 꾹꾹 쑤셔 넣는 그의 마술,
전기로 끌어댄 청계천에 잉어를 풀어놓아
수십 톤의 금강산 흰 구름이 선녀처럼 놀다 가기도 하고
공손히 무릎 꿇고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바친 다음
인천 국제공항을 김밥으로 말아서 혼자 뜯어먹고 싶은 사람,
을 당신도 잘 안다.
춥고 배고픈 청춘 시절 그는 아니 해 본 것이 없었다며
이 밤에 만나는 노점상 청년에게 다가가
다정을 다하여 말한다.
내가 이 장사 해봐서 잘 아는데
(극비를 알려주는 은밀한 귓속말로) 열심히 하면 성공해.
열중 쉬엇, 차렷! 나가사끼짬뽕에 대하여 경롓.
누락
강인한
어디서 빠져나왔을까
아침에 방을 쓸다가 빗자루에 걸려
뒹구는 나사 하나
주방에서 발견된 쇠붙이
팥알만큼 작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누락
전기밥솥의 수상한 밑창에도
싱크대의 경첩에도
빠진 구멍이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았을까
내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
빈 아파트에서 울렸을 전화벨 소리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시간에
나는 빠져나왔을까
시내버스에 앉아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껄껄거리는
낯선 사내의 뒤꼭지를 보다가
문득 퓨즈가 나가버린
내 기억의 나사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엘리 나의 하느님.
눈 내리는 날의 정물화
강인한
석유난로 위에 주전자가 혼자 끊는다
넘 칠듯 넘치지 않는 이 겨울의 침묵
나직이 물 끊는 소리가
마냥 귀를 적신다
사무실 유리창 밖
잎을 다 떨궈버린 미루나무들
산모롱이를 휘돌아 성큼 다가오는데
한 줄 두 줄
문득 안개꽃이 날린다
희끗희끗 내리는 일악장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이윽고 하늘을 뒤덮으며 까맣게 내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악보
아, 꿈같은 이승 속에
한점 빠알간 기쁨이 켜진다
눈먼 사내 J
강인한
밤물결이여.
밀감빛 노오란 등불이
풍금 소리처럼 새어 나오는
눈 내린 골목길을
시리우스의 별빛만 한
외로움이 간다.
지난가을 누이의 혼례식장에
가만히 켜졌던 작은 눈물
비늘로 반짝이며
오늘은 어느 집 창가에서
잠을 자려나
물결이여.
제 얼굴 밖에서 서성이는
겨울의 꿈이여.
눈먼 새 이야기
강인한
벼락 맞은 고목나무가 검은 산발(散髮)을 하고 섰는
중학교 교정을 빠져나와
내 어린 사랑은
불붙는 황혼 속으로 달려가고,
바닷가 소금밭으로, 환희의 소금밭으로
즐거운 맨발로 달려가고 있었지.
그때 문득
새 한 마리가 교사(校舍) 뒤 수풀에서 솟구쳐 올라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가고 있었지.
그리고 어디선가 죽은 사람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날아와
새의 작은 가슴을 뚫고 지나갔지.
새는 뜨거운 조약돌이 되어
바다에 떨어졌고
파도 위 한 점 부표처럼 떠서 흐르는
내 어린 사랑.
상실의 슬픔은 그때부터
내 온몸의 구석구석에 검은 발을 드리우고
성긴 빗방울이 내 머릿속에 방울져 듣다가
마침내 흐득이기 시작하였지.
여름밤 서늘한 별빛이 자릴 옮겨 물먹는 지금
상처 난 어깨의 구멍으로
소금기 많은 바람은 불어오고
내 어린 사랑은 어둠에 묻힌 고목나무 가지에 숨어
한 마리 눈먼 새가 되어 울고 있지.
한 줌 회진(灰塵)으로 나직나직
바람에 불리우고 있지.
눈웃음
강인한
실실이 늘어진 버들가지
환하게 꽃 피었네.
한 줄 두 줄
바람에 그네를 타네.
주렴처럼 드리운 능수벚꽃
우리가 꽃나무 아래 들어와 보니
신방처럼 아늑하네.
저기 저만큼
돌탑이 아른아른 웃고 있네.
늑막염
강인한
산수유꽃이 피려는 겐지
옆으로 돌아누워 숨쉬기가 힘겨웠다
엑스레이를 찍고
마침내 입원을 하였다
뷰 박스에 걸린 사진을 의사가 짚어 준다
왼쪽 폐 속에 절반쯤 물이 차 있다고
세상에!
이 산 저 산, 골짜기 골짜기에서 찾아든
물줄기가 홍수를 이룬 폐허라니
젊은 수련의가 내 옆구리에 주사를 꽂고
링거병에 물을 뽑아 담는 동안
한 덩어리 캄캄하게 구부려 앉은 돌로
나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른 봄 고로쇠나무의 슬픔을
개나리 진달래 목련도 다 진 뒤
꽃 없는 하늘이 참 맑았다.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강인한
뜨겁게 데워진 돌벽 위에 손을 내밀었다
담쟁이의 망설임이 허공에서 파문을 만들었다
파란 물살에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걸렸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능소화는 담쟁이 허리를 껴안고 기어올라
한 덩어리 파아란 불길이 되어 그들은 타올랐다
사나운 비바람이 담쟁이를 흔들자
능소화도 담쟁이도 함께 흔들렸다
담쟁이는 제 가슴에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지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여름날
목을 꺾고 꽃이 떨어졌다
안아주고 몸을 빌려준 마음을 알았으므로
능소화는 한두 송이 꽃이 져도, 꽃이 져도 좋았다.
늦은 봄날
강인한
간장 항아리 위에
둥근 하늘이 내려오고
매지구름 한 장
떴다가
지나가듯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가끔은 내 생각도 하는지
늦은 봄날 저녁
머언 그대의 집 유리창에
슬며시 얹히는 놀빛
모닥불로 피었다가
스러지듯이
단풍의 속도
강인한
날마다 내려온다.
남하하는 우리나라 단풍의 속도는
시속 40킬로미터.
평창군 대관령면 올림픽로 715
화살나무 대궁에 꾹꾹 눌러 찍은 입맞춤,
빨가장히 물든 입맞춤.
내 그리움의 속도는 저와 같다.
애인이여.
달
강인한
그녀를 가질 때
허리 아래 두 손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3초 동안
귀 먹먹한 폭포 소리 들리고,
환한 어둠이
박하처럼 손을 적실 뿐이었다
서늘한 물줄기
점점 가늘어진 물소리가
아슬히 밤의 산등성이를 넘는 게 보였다
바람에 쏠리는 한 다발 풀포기처럼
허리 굽힌 아르테미스,
화살을 집는 희고 가는 손가락과
넥타이 매듭을 짓는 내 손가락 사이
칼날 벼랑이 다가서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두운 물결 위에 떠서 흔들리는
무심히 흔들리는 표적 하나
그녀의 시야에 들어서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
강인한
달콤한 향기가
대기 중에 실실이 풀려나간 게지.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거리
별이 그리운 신호등 옆 휴지통 위에
알미늄 빈 깡통이 세 개
햇볕 아래 침흘리며 졸고 있을 때,
말벌 한 마리
황급히 날아와 깡통 주위를
서둘러 기웃거리네.
잘못 택한 믿음의 방향이
길을 떠나게 하고
불확실한 소문은 담배 연기처럼 떠도는데
가엾어라,
빈 깡통의 깜깜한 아가리 속을
굽어보고 굽어보는 말벌이여.
당신 가슴의 서랍엔
강인한
당신의 예쁜 가슴
이 귀여운 단추를 혀끝으로 감아서
아래로 아래로 주욱 끌어내리면 발바닥이 간질간질.
초록빛 보드라운 융단에
실로폰처럼 퐁퐁 튀어 오르는 소리
색색의 빗방울을 내리는 눈 까만 구름들이 있을 거야.
이 달콤한 단추, 혀끝으로 눌렀다가
단숨에 열어보는 서랍엔
쏟아질 듯 위태롭게 번쩍이는 아, 눈부신 천둥 번개가 한 쌍.
한 겹 한 겹 당신의 몸을 벗기면
한 마리 참새만큼 작아지고 작아져서 홀연히
모아 쥔 두 손아귀를 새어나오는 유월의 장미꽃 한 다발.
당신 가슴의 서랍을 열면
어떤 알 수 없는 기류가 회오리바람을 불러오고
그 바람 속에 날뛰는 눈보라가 있고
엎질러지려는 찰나의 취한 바다가 토끼처럼 웅크려 있고.
당신 앞에서
강인한
나의 위치는 화분
산하가 다 보이는 곳이다.
나의 향함은 다만 결실
목숨의 마디마디를 끊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일이다.
푸르른 바람 앞에 서면
나는 기가 된다. 펄럭인다.
애련과 사랑으로 가득히
스치는 풍경에도
펄럭인다.
바람 속에 나부끼는
나의 팔다리에서 움이 돋아
나의 온몸에 비늘이 돋아
서걱이다가
그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나는 발가숭이로 선다.
떨어져나간 나의 분신들은
천 조각 만 조각 고향의 하늘 속에서
데모를 하고
유서가 되고......
하루의 피곤한 눈물이
줄줄이 흐르는 꽃
그래 나는 당신 앞에서 울음을 참으며
울음빛으로만
핀다.
높은 바람 속에서는
때로 기가 되어 보기도 하나
당신 앞에 서면
끊어도 끊어도 죽지 않는
목숨이 된다.
내가 밟아온 길에서는
흙먼지만 날리고
언제나 계절이 없던 것을.
나의 모국어는 강
흙탕물이 붉게 흐른다.
밤마다 밤마다 골수에 흐르는 붉은 눈물처럼,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강인한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사십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 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 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강인한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나는 행복했지.
포켓에 가득가득 채울 만큼의
딱지도 보물도 없으면서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네.
서랍이 많이 달린 책상을
내 것으로 물려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지.
감춰야 할 비밀도 애인도
별로 없으면서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네.
그리고 다시 십 년도 지나
방이 많은 집을 한 채
우리 집으로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행복했지.
그 첫 번째의 집들이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
태극기를 대문에 달고 싶을 만큼
철없이 행복했지
그때 나는 쓸쓸히 중년을 넘고 있었네.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
강인한
Ⅰ
여기서는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Ⅱ
폭풍 더미의 사이렌이 병사들의 가슴을 후벼팔 때
땅굴 속 그는 수정 같은 설편(雪片)을 보았다.
겨울이 없는 땅에서, 그의 고향은 퍼얼펄 솟아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때 그가 마지막 본 음울한 하늘에서는
문명한 새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은 비명보다 진한
폐허를 교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암벽을 녹이는 뜨겁고도 뜨거운 정염이었다.
Ⅲ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비취로 물든 건강한 하늘 아래에서 모자를 제껴 쓰고 말을 달렸다. 북소리 북소리,
땀 젖은 환호성을 펄럭이며 둥둥 두둥둥 울리는
북소리, 쇠북소리, 달리는 말굽소리 아편꽃이 흥건한 대지에 드넓은 만주의 호밀밭에
울려퍼지는 고구려의 고동소리.
Ⅳ
흥정을 마친 상선은 돌아오지 않고
남지나해 더운 몸부림이 잠을 쫓는다.
해안을 껌벅이는 새들의 붉은 눈빛이 머루알처럼 익어만 가고
아름드리 기둥을 향하여 벌떼처럼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사탕엿보다 달고 맛난 고함에 묻혀
그는 눈부신 태양을 이마에 댄 채 팔을 벌렸다.
그 가늘고 세찬 팔뚝에 엉겨붙은 평화를 힘껏 포옹했다.
몸채만한 기둥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조국은 조금씩 그렇게 균열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고원을 치달리는 우람찬 승전고,
뽀얗게 날리는 햇빛가루를 몸에 칠하고 삼림처럼 무성한 고구려의 사내들 ......
Ⅴ
삼림처럼 무성한 우계(雨季)가
그의 우러른 눈망울에 어리우고
휴전 고지의 캐터필러 자욱마다 쑥꽃이 피었다 지고
엄청난 사연으로 초병은 울고 있었다.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유성(流星)이 가만가만 어깨에 내려앉는 겨울 하이얀 눈구렁 속에서
조국은 떨고 있었다.
겨냥해야 할 진정한 적(敵)이 없는 지도 위에 엎드려
초병은 비운을 울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Ⅵ
무감각한 함성과 파도와 잘못 말려들어간 꿈속에서처럼
그는 비운의 상처를 끄을고 포복해 갔다.
이글대는 태양을 이마에 느끼고, 그가
드디어 곤두서 있는 기둥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내뻗은 두 손은 갑자기 가지를 쳤고, 그리하여
수많은 촉수를 지닌 벌레가 되어 그는
태양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서서히 그 아름드리 기둥나무는
그의 치미는 힘에 의하여 굴복하였다.
둥둥 울려 퍼지는 함성은, 북소리는
이내 그의 뜨거운 맥박이 되어 기운차게 뛰놀았고,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그때 그는 보았던 것이다.
어두운 남지나의 적의에 찬 땅굴 속에서
꿈틀거리는 고향의,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하이얀 설편을 보았던 것이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 쏟아지는 북소리보다 흰 고향의 눈을.
Ⅶ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끊임없이 해안선을 날며 불꽃 같은 새들은 교미를 하고
끊임없이 세기를 절단하는 톱질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 힘찬 고구려 사내의 포옹은 끈끈히 굳어버리고
비린내를 풍기며 그는 한 마리의 갑충이 되어 자빠지고 말았다.
톱질소리는 더 크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폭풍 더미의 사이렌을 항상 불어대는
조국의 새하얗게 눈 덮인 군사분계선의 어느 초소에
유성이 가만가만 내려앉을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고원에도
아름다운 겨울이 반짝일 것이다.
어디선가 병사는 조국을 어깨에 메고
비운을 겨냥할 것이다.
짐승처럼 몸부림칠 것이다.
Ⅷ
먼 데서도, 선택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 아주 먼 데서도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는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대운동회도 저물고,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도 이미 저물고
아이들의 만세소리만 스산하게 스산하게 파도에 씻기운다.
데사파레시도스*
강인한
어머니 새벽 안개에 옷깃을 적시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의 광장에 와서 울고 있는 어머니
인제는 그만 우셔요
흰 꽃들의 아침을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 우리들의 이름을랑 그만 부르셔요
사람은 한 번 죽는 것
비겁한 자는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이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고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
추악한 전쟁에 휘말려
다이너마이트로 산산조각 난 우리들의 꿈
온몸에 총알을 맞고
구멍투성이로 쓰러진 우리들의 사랑
짓밟히고 짓이겨져도 우리들의
더운 피는 마냥 붉게 타올라
조국은 아름다왔습니다
아, 첫 번째 모음의 나라 아르헨티나
마취된 채로 발가벗겨지고
한꺼번에 몇 명씩 묶여 조국의 하늘 높이 떠서
대서양 깊은 바닷속으로 내던져진 생죽음
다시는 부르지 마셔요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온 우리들의 이름을
더 이상 눈물로 부르지 마셔요
비둘기는 오전의 정부 청사 지붕에 올라
햇살 속에 드러난 맨발이 뜨거워서
보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웁니다
우는 것이 어찌 비둘기뿐일까요
날지 못하는 우리들의 말
팔을 잘리고 다리를 잘린 우리들의 말도
입술을 잃고 허공에서 떠돌아
안개 속으로 밤의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날며 웁니다
울긋불긋 저들의 가슴마다 빛나는 무공 훈장
모진 독재의 군화에 채여
아기를 몸에 지닌 당신의 젊은 딸이 능욕을 당하고
건초처럼 시든 엉겅퀴처럼
스러지기도 했지요 어머니
울지 마셔요
한꺼번에 파헤쳐진 공동묘지
비록 우리가 뼈와 슬픔으로 밖에 어머니를
대하지 못한다 하여도
아르헨티나는 우리들의 조국인 것을
용서해 주셔요
오늘의 역사는 어제의 것에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고
역사는, 오늘의 역사는
처음부터 새로이 쓰여지는 것이라고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
갇힌 지하실에서 껴안은 불길도, 불길 속의 죽음도
두렵지 않았어요
역사를 위하여……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성이 가리키는 올바름을 위하여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끝내는 지켜져야 할 인간의 순결한 자유를 위하여
단지 그뿐이었지요
겨울에 오히려 더운 피가 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의 광장에 와서 울고 있는 어머니
산비둘기 빨갛게 울고 있는 맨발
우리들의 어머니
인제는 그만 우셔요
전나무 빽빽한 안데스의 이마를 스쳐가는
저녁 햇살이 곱고
어린 양치기들의 휘파람 소리 들려오거든
아르헨티나를 온몸으로 사랑하였던
불길 뜨거운 당신의 아들 딸들을
기억해 주셔요
부르면 목이 메는 조국의 이름과 함께
기억해 주셔요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 어머니.
* 1976년부터 4년간은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의 살인부대가 수천 명의 정치범을 잡아 학살했던 시기다. 민정이 들어선 이후 1984년 1월에 그 당시 실종된 희생자들의 시체 6백여 구가 암매장되었던 곳이 발견되기도 했다. 데사파레시도스는 실종자들이라는 뜻. 그 무렵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정부 청사 앞 오월의 광장에서는 실종자들의 어머니들이 통곡을 하며 자식들의 생사라도 알려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었다.
돌과 시
강인한
햇빛이 부서져서 그물눈으로
일렁거리는 물속
고운 빛깔로 눈 깜박이는 돌빛
건져 올리면
마르면서 마르면서
버짐꽃이 피고
내가 쓰는 글도
물속 깊은 생각
치렁한 사념의 물빛에서 건져 올리면
햇빛에 닿아 푸석푸석
마른 돌꽃이 피고.
돌 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 구름 같이
강인한
이만치 서서 바라보면 잘 보이려나
청보리 물결 황토를 휘돌아 흐르는 연두바람
불어라 불어가라
적막을 조그맣게 뭉쳐 입 다문 돌탑에까지
말갛게 몸 비우고 스미는 연두바람
왕궁에 가시랴오
예서 왕궁이라면 낙낙한 오릿길
잠시 버선을 벗어 땀들이시라
늘어진 솔가지에 이녁 눈길 얹어보시라
어디선지 흘러오는 수수꽃다리 글썽한 향기
이녁의 옷고름에서 풀려나온 그 말간 향기는
돌손바닥에 앉고 싶어
돌에 스미고 싶어
왕궁탑 그늘에 한 몸의 시름을 적시고
바라느니 하늘에 떠가는 저 구름 가
이녁은 보랏빛 내 그리움
보랏빛 향기로운 그늘
사붓사붓 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
아, 적시고 적시어라 뜻으로 세워지는
고운 봄날에.
두 개의 인상
강인한
다들 불 끄고 잠든 밤
앞마당 우물에 나와 끼얹는 물소리
희다.
열여덟 블라우스 흰 교복
복숭아처럼 솟은 가슴
희다.
잠들락 말락 어렴풋한
틈새로
차갑게 끼얹는 한 줄기
물소리.
2
진심으로 달라고 하면
주고 싶데요,
나는.
지나간 남은 이야기처럼
말하는 목소리
들린다.
웃고 있는 사진 속
향연(香煙)처럼
흰 물소리.
등반(登攀)
강인한
전날의 미로(迷路)를 뚫고 다니던 기억들이
제각기 등반에 올랐을 때,
눈부시리라.
허한 바람 속에서 금광맥(金鑛脈)으로 뻗어가던
순수했던 열망,
뼈를 말리던 관능(官能)이며,
하잘 것 없는 사건에도 뒤따르던 작은 열락(悅樂),
그러한 기억들이
끊임없는 사랑과 격려로 땅을 젖게 하는
대기(大氣) 속에 산보를 하듯
약간의 곤한 등반을 할 때
한 순간의 예지(叡智)와 찬연한 충일(充溢)!
우리들은 만나리라.
영겁을 사는 생명의 대지에서
모성(母性)으로 드날리는 영원의 기류(氣流)에서.
땅
강인한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십년 만에 백오십 평 적막을 샀다.
반을 잘라 팔고 쌀계를 보태서
율리야, 우리도 짓자.
싸구려 블록으로라도 우리 집을
우리들의 지친 꿈을 누일
작은 성채를,
두 달 석 달 백지에 그리고 또 그린다.
십팔 평, 십칠 평, 십육 평 짜리를.
아아 즐거워 즐거워서
두 달 석 달 내내 잠이 안 와.
율리야, 네 소꿉상자 속 해바라기 씨를
올봄엔 불러내고,
코가 까만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와
같이 살자.
남의 지붕 아래서 남의 지붕 아래로
떠돌던 할머니 한숨도 한 움큼
텃밭에 뿌려서, 율리야
파릇한 배추 싹으로 키워볼 수 있거니.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십년,
십년 만에 백오십 평
무식한 적막을 샀다.
땅을 샀다
강인한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십 년 만에 백오십 평 적막을 샀다.
반을 잘라 팔고 곗돈을 타면
율리야, 우리도 짓자.
싸구려 블록으로라도 우리 집을
우리들의 성채
꿈꾸는 작은 성채를,
두 달 석 달 백지에 그리고 또 그린다.
이십 평, 십칠 평, 십오 평짜리를.
아아, 즐거워 즐거워서
두 달 석 달 내내 잠이 안 와.
율리야, 네 소꿉상자 속 해바라기 씨
내년 봄엔 불러내고,
코가 까만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와
같이 살자.
남의 지붕 아래서 남의 지붕 아래로만
떠돌던 할머니 한숨 한 움큼
텃밭에 뿌리면, 율리야
파릇한 배추를 싹 틔워 기를 수 있겠지.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십 년,
십 년 만에 백오십 평 서러운 적막을 샀다.
떠도는 이를 위하여
강인한
그러면 이제
썩은 살을 벗어 놓고 돌아가야 할 때
키를 낮추어 흘러가는 물소리
처서(處暑) 지나 백로(白露)로 가는 길에
그리운 사람 곁에 흘러라
헛되이 불어가는 바람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익어가는 낟알의 이삭 끝에 부서지는데
산길 굽이 돌면 박하 향기, 깻잎 향기
우리 고운 인연의 향
푸르게 젖던 그대 음성도
햇살 아래 잘 마르리
지난 봄
조등이 비치던 그대의 집 문간에
한 벌 외로움도 마저 벗고
밤이면 북쪽 하늘 맑게 떠서
별이여, 잠 없는 꿈이여
뜨거운 뱀
강인한
짚고 있는 손을 떼어야 한다.
올라탄 수레의 끝
덜컹덜컹
자갈이 튀고,
나는 바퀴의 진동을 느끼는데
마부의 채찍이
저기 다가오고 있다.
어서 수레에서 떨어져야 해.
하나, 둘
동무들은 떨어져 나갔고
눈이 떠지지 않는
악몽처럼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아.
한순간,
채찍이 내 등짝에 떨어졌다.
몸에 감기는
불꽃
뜨거운 뱀이었다.
램프의 시
강인한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마음이 마른 붓끝처럼 갈라질 때,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그러면 오렌지 빛깔의 나직한 꽃잎들은 하염없이 유리의 밖으로 걸어 나오고, 어디선가 문득 짤랑거리는 금방울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희미한 옛 성이 흘러나오고 그 속에서 장난감 말 두 마리가 청색의 어둠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것을 당신은 또 보실 수 있습니다. 검은 갈기를 물결치며 물결치며 달려오는 이 작은 쌍두마차의 뜻하지 않은 출현에 몇 파운드의 눈발조차 공중에 튀고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어둠에 얼어붙었던 모든 평화의 장식물들을 그래서 훈훈히 녹여주십시오.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 유리창에는 알 수 없는 나라의 상형문자가 나타나 램프의 요정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비단뱀이 땅속에서 꾸는 이 긴 겨울 밤의 천 가지 꿈에 대해서, 에로스가 쏘아부친 보이지 않는 금화살의 행방에 대해서, 아아 당신 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줄 것입니다. 램프의 요정을 찾아오는 어떤 바람결에는 당신의 이름이 섞여서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일에 시달려 당신의 온몸이 은박지처럼 피곤하여질 때, 뜨거운 차라도 한 잔 끓이고 있노라면 아주 먼 데서 미다스 왕의 장미꽃들이 눈 속에서 무거운 금빛을 툭툭 터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찻잔 속에 피보다 진한 밤의 거품이 가라앉고, 당신의 부름에 좇아 그리운 흑발의 머리칼이 떠올라선 어두운 당신의 얼굴을 포근히 감싸줄 것입니다. 찻잔 밖으로는 돛대를 높이 단 배 한 척이 눈보라 속을 홀린 듯 흘러나오고, 고운 가락의 옛 노래와 같이 어떤 두 사람의 끝없는 발자국이 먼 해안의 모래밭 속에 가만가만 감춰지고 맙니다.
끊을 수 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영혼이 끓어오를 때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그 조용한 불길의 칼에 지나온 눈물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고요의 은빛 바다가 말없이 열리고, 빨간 루비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가슴 설레며 몰려가 저마다의 정다운 꽃등을 높이 든 채 바다로 나가고……. 아 그럼 사랑하는 이여, 당신도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램프를 밝혀 들고 조용히 흔들어주시렵니까. 꺼지지 않는 루비의 램프를.
레다를 덮친 백조처럼
강인한
늦가을 아침 산과 나무 그림자가
강물 위에 제 낯을 비추며 기웃거릴 때
큰황새왜가리* 외발로 섰다가
오그렸던 다리를 편다.
큰 걸음으로 나선다.
물냄새가 바람에 실려오고
수초 사이를 누비는 굵고 기다란 놈에
시선을 꽂는다.
작은 물고기들이 방향을 틀며
소란하다. 한순간
깃을 쳐 레다를 덮친 거대한 백조처럼
큰황새왜가리 훨훨
날갯짓으로 바람을 일군다.
늠름한 이륙,
낚아챈 먹이가 부리에서 꿀꺽
목을 넘어 사라진다.
왜가리 뱃속에 캄캄하게 갇힌 물뱀,
물뱀은 꼬리가 송곳
안 되면 될 때까지, 안 되면 되고야 말 때까지
송곳으로 찌르고 또 찔러라.
마침내……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왜가리 목덜미를 뚫고
우산 지붕을 받친 굵은 우산대,
혹은 신성한 사랑의 배설물처럼
드높은 허공에서
죽음을 이겨낸 물뱀이 떨어지고 있었다.
* great blue heron
루오, 1948년 11월 5일
강인한
머리가 언제부터 벗겨졌는지 몰라
백색 중절모를 눌러쓴 그가 벽난로 속에
집어던진다 던지고 또 던진다
필생의 누추한 허물이며 칠 벗겨진 명예를
불쌍히 여기소서
배가 고프다고 시뻘겋게 소리치는 아궁이
그 속에 먹이를 던지고 또 던진다
은제 십자가를 닦다가 해진 마른걸레 같은 것들
활활 타오르는 저 검은 아궁이는 배가 고프다
작업을, 앞으로 남은 짧은 햇빛으로는
도저히 끝마칠 수 없는
미완의 작품을 이렇게 포기하느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백… 이백… 삼백 점을 넘어서도
일흔일곱의 노인은
쌓아둔 오랜 증오를 헐어내듯
페인트와 기름 냄새 밴 캔버스 쪼가리들
그 미련을 미련 없이 불구덩이 속에
조르주 루오는 처넣고 있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벚나무 갈색 이파리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날려서 떨어지는 늦가을 저녁
검정 테를 두른 높다란 십자가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수염 텁수룩한 사내 하나가
서쪽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루체비스타
강인한
깊은 서랍 속 내 4B연필이 그리고 싶은 것은
렘브란트의 야경 밑으로 배어 나오는 따스한 추억
호수 위에 조는 아라베스크 희미한 별빛,
그러나 실연의 아픔에 머리 풀고 우는 버드나무처럼
노을이 빌딩 유리창에 던지는 거대한 실루엣을 나는 본다
어떤 새들이 노래하고
어떤 새들이 울고 갔을까 연필로 그린 새소리가
청계천 돌돌거리는 수면 위에서 지워져 가는 동안
내 안호주머니엔 부쳐야 할 축의금과 조의금이
무순으로 섞여서 우체국을 꺼낸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
철사처럼 가늘다
냉장고에 숨어서 가슴을 부여안고 조금씩 미쳐버린
검은 비닐봉지 속의 안부가 걱정스럽지만
속상한 햄과 진작 토라진 우유팩이
골수 보수정당처럼 뭉쳐서 부패의 향연을 벌일 때,
라일락나무의 개화로부터 은행나무의 낙엽까지
나는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다
타르 3.0과 타르 6.0 사이의 거리를 오고가며 선택하며
무수한 경고를 얼마든지 나는 무시하였다
어쩔 것인가
묻노니 도저한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력인가 끝끝내
아프간에 뿌리내리고 싶은 선교의 야망인가
나는 살고 싶어요,
김선일의 목젖을 떨어 울리는 비참한 단말마를
돼지고기 한 근 썰어 저울에 올리듯
무슬림의 칼이 천천히 베어내고 있을 때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는가
너의 기도는 턱없이 모자라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는 영세하고 영세한 슬픔이었던가
밤에만 눈뜨는 루체비스타
허깨비의 풍경이여, 동아일보사 앞에서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청계천에 나는 감동한다
유령잉어가 유유히 헤엄쳐 가는 거기
산소호흡기를 물고 뛰노는 붕어와 날치들
위대한 전기의 꿈으로 이 도시는 불멸의 역사를 향하느니
친애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이층과 삼층의
어느 전시실에도 빈센트 반 고흐의 잘려진 귀 한 짝을
찾을 수 없고, 그의 침실은 소실점으로 졸아들다가
마침내 감자 먹는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서
십이월이 다 가도록 오지 않았다
네온의 십자가 아래 기도가 충분치 못한 탓이었다
보라, 루체비스타가 휘황한 이 광장 지하에는
지상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개미집의 개미들처럼 웅성거리며 여기서 스테이크를 자르고
저기서 카푸치노를 마신다 아니, 아니,
거대한 냉장고 속 검은 비닐의 옆구리를 비집고
천원짜리 중국산을 만나러 깊이 깊이 들어간다
꿈보다 깊은 마취를 즐기러 땅속 깊이 들어가는 순간
온라인으로 충돌하는 약소한 기쁨과 슬픔
허공에서 문득 파랗게 파랗게 스파크를 일으킨다
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
강인한
지난밤 그 여자의 하얀 레이스 달린 파란 실크 잠옷 그림자가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침실 창문에 검정나비 실루엣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피폐해진 주민들의 안녕 위로 사금파리가 싸락눈처럼 한 줄 두 줄 아프게 흩날리는 그 시간. 잿빛 어두운 마음의 문을 열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 차가운 손을 잡아주셔요, 그리고 내게 당신의 피를 넣어주시면 당신을 주인으로 섬길게요. 붉은 가방을 손에 들고 여자가 자신에게 날아온 동박새를 도끼눈으로 내쫓으며 말했다. 저리 가, 가버려. 가방의 아가리는 이를 악물고 닫혔으나 벌어진 지퍼의 잇바디 사이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한 연기는 뱀의 혀처럼 갈라져 주민들의 한두 가닥 가냘픈 희망을 단숨에 빨아들였다.
리아스식 해안 가까운 바다에서는 날마다 빈사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허옇게 배를 내밀고 떠올랐다. 안간힘을 써서 검은 수면 위로 뛰어올라 그 여자가 손짓을 하면 물고기들은 가끔씩 날개 달린 뱀처럼 날았다. 죽은 아버지의 망령도 그 틈에 끼어 선글라스를 쓰고 날아올랐다. 신화 속에서 끄집어 낸 시간의 비늘들은 단단한 쇠줄로 꼬여 그 여자의 믿음직한 허리띠가 되었다. 그 여자를 에워싼 제국의 부로들이 구세주를 대하듯 엄숙히 가스통을 어깨에 메고 나서는 아침, 그들의 빨간 내복에 여자가 손키스를 뿌리자 제국의 겨울은 일제히 바닷가 검은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강철같이 뭉쳐진 제국의 겨울은 불타는 돌멩이가 되어 가망 없는 미래에 연합하기 위하여 허공을 날아갔다.
장난감 공룡을 손에 든 채 태어난 차세대의 아이들은 엉덩이에 벗을 수 없는 형극을 문신으로 두르고 불온한 소문의 식물로 성장했다. 그 밤에 저주 받고 태어난 아이들은 아홉 개 꼬리를 가진 붉은 여우의 울음을 좇아 몽골의 사막으로 떠나갔다고도 하며 일부는 페리호를 타고 후쿠시마로 떠났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돌려줘, 내 피를 돌려줘. 여자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다가 죽은 아이들은 타다 남은 약속의 숲에서 흰 숯으로 발견되었다. 번쩍번쩍 손을 들어 번개를 내리칠 때마다 그 여자의 증오심은 청동 지붕에서 유황연기를 피워 올렸고, 깊은 새벽이면 행복한 신음을 흘리며 핏발 선 눈이 항상 지상을 두리번거렸다.
마리안느 페이스풀*
강인한
간절하면 이루어지나 봐요, 마리안느
미안해요 당신을 간밤 꿈속에서 만났어요
나랑 둘이서 피나콜라다를 마시기 위해
구석진 카페에 앉았는데
안타깝게도 어둠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그 어둑한 두 그림자가 졸아들어
촉촉한 슬픔의 촉을 올려 오늘 내 가슴 속 어딘가
키 작은 제라늄 꽃나무로 돋아나고 있어요
당신은 낯선 곳에 가서도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꽃들의 하염없이 작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착한 여인, 깊은 눈빛 아름다운 여인
나는 당신의 발가벗은 몸에 장미 꽃다발을 바쳐요
장미꽃으로 앙증맞은 당신의 가슴을
장미꽃으로 간지럼을 기다리는 당신의 배를
장미꽃으로 당신의 허벅지를 다리를
가볍게 가볍게 두드려요
나를 보는 당신은 가을하늘 새털구름, 셀로판지 같은
웃음을 던져주고
마리안느, 당신의 깊은 눈동자 속에 장미꽃
장미꽃 한 잎의 꽃잎에 작은 물방울
물방울에 갇히고 마는 오토바이 한 대
지금 내 귓속에는 작은 새처럼
당신이 날아오는 안개 낀 새벽
오토바이의 길고 긴 폭음이 눈부신 금빛으로 붕붕거려요
이제 턱 밑에서부터 지퍼를 내가 열게요
신비로운 당신의 가슴골과
비밀스레 떨고 있는 아랫배까지 열어갈게요
검정 가죽슈트를 한숨에 열어서 당신의 흰 알맹이를
꺼낼 거여요
그리하여 내 입에 머금은 피나콜라다를
당신에게 부어주고 싶어요, 마리안느
예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듯이
성당의 성수대에 성수를 흘려 넣듯이
* 망디아르그의 소설 「오토바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알랭들롱과 함께 출연한 영국 가수, 배우.
마술사의 밤
강인한
귀를 팔았다
이 범람하는 어둠 속에서는 휘휘 내젓는
손이면 충분하였고
무능보다 차라리 부패를 선택한 뒤
날마다 발등을 찍고 있었으므로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귓속에서 자랐다
자라서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고
마침내 목젖 깊은 데까지 숨어들어
칼끝처럼 찌르는 것이었으니
눈을 감는다
주춤주춤 팔을 앞으로 뻗고
발부리에 걸리는 물컹한 걸 느낀다
살짝 비켜서는 한 걸음이면
모든 게 분명해지리라
차마 참기 어려운 건 치욕보다
비열한 소문을 불어서 뇌관을 터뜨리기
벼랑 끝 허공에서 내딛는 단 한 걸음
그 순간 눈을 감았다
풍선이 터지며 극채색의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마음이 새고 있다
강인한
꽉 조여지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차랑한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서 동그랗게 풍경을 담아낸다
아침부터 마음이 새고 있다
마음이 새고 있는 거기
맺혀서는 똑 떨어져
아슬아슬 건너오는 먼 풍경
쟁그랑 챙
아침 밥상 위에
식구들 숟가락 놓는 소리, 동그랗다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
강인한
깊은 마음 속 어두운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그렇게 한 십 년을 내리다가
길어 올린다.
캄캄한 밑바닥에 배 깔고 엎드린
잉어의 퍼덕이는 금빛
울음을 길어 올린다.
무서움도 없이
밧줄이 견디는 힘의 그 끝까지
길어 올린다.
마침내 두레박에 실려 나와
빛 부신 햇물과 만나
용이 되어 날아갈지라도,
몇 조각 비늘에서 쏘여지는 금빛으로
내 눈이 멀지라도
길어 올린다.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이다.
막히지 않으면 서울이 아니다
강인한
막히지 않으면 서울이 아니다
그렇다 강북이 막히고
강남도 막히고
때로는 시력도 막히고 인간도
막혀버려
여의도광장을 죽어라 죽어라
폭주하던 사내
경찰서마다 국법 질서 확립
시퍼런 표어가 눈을 부릅뜨지만
그렇다 그렇다 보호를 받기 위해
죽자사자 매달려
매달려서 살아야 하는 우리네 눈물을
시속 백사십 킬로미터로 달려가버린 사내
드디어 그는 꽉 막힌 벽 안에 갇히고
남과 북이 막히고
동과 서가 막히고
거룩한 선량과 하수도가 막히고
막히고 막히고
막히지 않으면
무슨 맛으로 흐르랴.
말세리노의 추상(追想)
강인한
내 어린 날의 잿빛 안개 속엔
측백나무 가지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작은 새처럼
부끄럼 많은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마누에라,
금단추 교복에 모자를 이마까지 눌러쓰고
그 가난한 골목 어귀 전신주에 기대어
소년은 오늘 밤도 가로등처럼 추억을 밝히며 서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반색하며 다가오다, 눈길 마주치면
그냥 안개의 커튼 뒤로 얼굴을 감추는 키 작은 소년.
마누에라, 언제인가 꽃집 미모사에서 당신은
여왕의 입술처럼 붉은 장미꽃 화분을 사서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잠깐 당신이 장미의 꽃말을 헤아렸는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얼마나 재빠른 습격이었던지.
뛰어가는 당신 가랑머리에서 나풀나풀 파란 리본이
환상의 나비처럼 보이던 그때
마누에라, 당신은 아직 수줍고 어린 아가씨였지요.
밤 여울 물소리가 돌돌 산의 어깨를 감아내려
노랗게 발갛게 물들일 무렵,
당신이 귀 기울이던 허밍의 어떤 화음은
소년의 가슴에 닿아 설레는 꽃잎으로 날렸습니다.
그해 가을 죄보다 짙붉은 피는 마룻장에 구르는
낙엽으로 지기도 했는데요, 마누에라
그리고 당신은 소년을 투명한 물방울로 허공에 튕긴
스러질 듯 안타까운 저녁놀이었습니다.
사라사테의 고운 바이올린 선율 아래에서
깊은 밤 편지를 꺼내어 읽고 또 쓰던
소년의 분홍빛 볼을 당신은 이 밤에 떠올릴 수 있겠지요.
마누에라, 내 어린 시절 꿈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는
비스킷 지붕 새하얀 동화의 집이 가물거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 거기 살고 있습니다.
매죽리(梅竹里)
강인한
나이 마흔이면
슬며시 산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어느 날 아침
어금니가 문득 찬물에 시린 나이.
이 가을에
새로 난 이가 건강한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간다.
버스를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고추밭을 걸어 콩밭을 걸어
우수수 우수수
길 솟은 수숫대를 흔드는 바람
고적한 아버지의 바람.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매죽리
아랫매대 사람들은
하나둘 집을 비우고
지난 가을 라면을 팔던 주막집 문짝에도
☓표로 빗장이 걸렸다.
웃매대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개울물이
아랫매대의 한길 옆에서
게으르게 비늘을 턴다.
저녁 산이 조용히 흔들린다.
맨발의 아버지
강인한
대통령이 발령한 임명장이 있었다.
기억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시간은 불타버리고
호박잎에 까맣게 햇빛이 기총소사로 튀고 있었다.
목천포 다리를 건너는 내 등에는 란도셀 가방,
가방 속엔 성냥 한 통과 1학년 교과서와 공책과
아버지 숨죽여 떠는 여름밤이 들어 있었다.
베잠방이만 입은 맨발, 자갈돌에 긁히고 나뭇가지에 찍히고
전주(全州)에서 솜리[裡里]까지 아버지가 걸은 맨발의 산길, 밤길.
모두 다 놔주고 퇴각하라,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들은 전화 지시를 따랐다.
전주형무소 문을 활짝 열었다.
내 신발, 내 옷가지를 찾아 꾸물대는 이들을 보며
아버지는 맨발로 뛰쳐나왔다.
‘놔 주고’가 아니라 ‘쏴 죽이고’, 라는 전언이었음에
아버지 등 뒤에서 한참 만에 따발총 소리 불붙기 시작하였다.
멀리 보이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강인한
유령들을 본다
동아줄을 목에 매달고 눈에서
초록빛 인광을 뿜는 그들
질퍽거리는 시궁에서 막 일어난 것일까
검고 비릿한 비늘이 온몸에 돋아난 사람들
지워진 악몽의 그림자를 복원하기 위해
피를 달라고
손을 내밀어 친절한 악수를
청하는 그들
머리에서 호박 넝쿨이 머리카락처럼 자라고
알 수 없는 비밀계좌로
내 뼈아픈 노동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흡수해가는 그들
유령들을 또다시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노예의 언어로 말하고
그래도 옛날이 좋지 않았느냐고
밤마다 건강에 좋은 망각의 식은땀을 흘리라고
당당하게 권유하며 웃는 그들이
맨션아파트에서 나오고
국립묘지에서 나오고 지하도에서 나오고
대낮의 쓰레기통 속의
신문지 위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본다
거울 속에 그림자가 없는
그들을 본다
모쿠슈라
강인한
어디로 갈까, 가야 하나
붉은 사막을 맨발로 건너가는 달을 보았다
배스킨라빈스의 나이 서른하나가 너무 늦은 거라면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내게 말했다
언제고 그렇다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죽음이 내일 생각지 않은 쓰나미 속에 묻어올지라도
오늘은 늦은 게 아니지
창밖으로 흰눈을 내다보는 키 작은 백량금은
알알이 붉은 열매를 매달고
겨울 건너 봄 한철을 또 견디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문제는 상처다
뼈에 가까운 상처는 지혈이 어려워
그런 상처만 아니라면
저 붉은 사막을 나는 걸어갈 수 있겠다
낙타가 없어도
내가 낙타가 되어서 가야하지 않겠느냐
모쿠슈라
회오리바람 치솟는 어둑한 하늘 아래
우리가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고 기쁨이었다
저 붉은 사막에 걸쳐지는 검은 그림자를
네가 보는 거기는
어디냐, 물결 소리 낮아서 평화로운 거기는.
* 모쿠슈라 : 게일어로 '나의 소중한 혈육'이란 뜻임.
목련 회상
강인한
하루 일을 마친 일터에서
피로한 날개를 쉬고 차 한 잔을 들다가
문득 그를 생각했다
아직 내 날개가 튼튼하고
날아야 할 하늘이 바다보다 넓은 시절
초여름 산에서였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
목련꽃 떨어진 목련나무 아래서
스님이 된 제자가 웃고 있었다
세상 시름 모르고 연두빛으로
마악 돋아난 이파리만 골라
정한 그늘에서 말린
작설차 한 잔을 건네주는데
차 따르는 소리에 옥빛 하늘이 고왔다
집 없는 새들이 무리 지어
이승의 하늘을 떠나갔다는 우울한 소식으로
어제는 종일 황사 바람 불고
오늘은 비가 내린다
어느 산을 그가 넘어가고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에
뜨락의 목련이 등을 끄고 있었다.
목소리만 비에 젖는다 – 부재(不在)
강인한
우산을 접고 현관에 들어섰다
연립주택 같은 신발장엔
호봉순으로 이름이 붙어 있고
그의 이름도 보였다
이.상.렬.
이틀 전에 그는 죽었다는데
이름 아래에 낡은 구두 한 켤레
꾸부정히 남아 있었다
참 오랜만이네 어서 와 어서 와
근영여자고등학교
현관 앞 국기 게양대에
비가 내리고
운동장 둘레 어깨동무를 한
버드나무에도 파아랗게 봄비가
내리는데
구두의 주인은 맨발로 어디 갔는지
희미하게 떠도는 그의 목소리만
비에 젖는다
가랑비를 맞으며 수돗가에서
붓을 씻는 아이들 일학년생들
재작년에 병으로 휴직한 선생님 이름을
알 리가 없어
저희끼리 웃으며 장난치며
나풀나풀 달려간다
목숨이란
강인한
내 그림자를 걷어
일상의 퀴퀴한 냄새를 말리는
좀 좋은 낮볕인가
그래도 한밤중이면
얄팍한 내 소망에 비 뿌리는
꿈의 한 자락에
푸울 풀 떨어지는 햇볕
목숨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목에 걸리는 말
강인한
인간을 믿으세요?
쓸쓸히 묻는 당신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그것을 안다.
까마귀 떼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이 는개 속에서
당신 말의 뼈가 목에 걸린다.
희디흰 당신의 외로움을
등 뒤에서 나는 찌를 수가 없다.
당신의 말은
타오르는 석윳불,
밤이 깊어지면 나의 말은
그 불에도 타지 않는 씨가 된다.
인간을 믿으세요?
내 말의 씨는 떨구어진다.
불꽃 속에, 당신의 슬픈 영혼 위에
광물질의 뿌리를 내린다.
자욱한 바람이 분다.
몰입
강인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층계가 있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층계에 여자사람 하나와 남자사람 하나가
몸을 감고 입 맞추고 있네.
내려오는 층계에서는 못 보지만
올라가는 층계의 사람들은
두, 두, 두, 두, 두… 시선의 총탄을 매섭게 쏘아붙이네.
총탄은 그 두 사람 주위로
빗발치듯 퍼부어지지만
호박꽃 속 꿀단지에 빠진 벌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층계가 있네.
흰둥이와 누렁이가 꽁지를 맞댄 여름날
둘러 선 동네 꼬마들 앞에
몽롱한 눈빛으로 서로 다른 델 보는 두 마리 개처럼.
무등 계곡에서
강인한
여기저기서 돌들이 입을 열지라도
한철의 혀끝에서 나온 검은 쇳소리가
저기 초록의 나뭇잎을 차마 흙빛으로야
물들이겠느냐
이끼 낀 세월의 한 귀퉁이를 어루만지며
흐르고 흘러서
산자락의 순한 물줄기는 어디까지
무등이여 그대 천 년의 그리움까지도
닿아서 끝내는 푸르게 적실지언저
치렁한 물소리
초록초록의 물소리 위에 내 마음도 한 조각
슬며시 얹어보면
참나무 떡갈나무 키 큰 소나무들이 삼킨
한 시절의 어둠이 뿌리로 내려가느니
진초록빛 나뭇잎과 나뭇잎들이
살그머니 옷 벗고 내려와
여울물에 잠시
참방참방 천 년의 햇살 데불고 놀다 가느니
무등설청(無等雪晴)
강인한
눈썹 허연 의도인(毅道人)이 혼자 앉아
춘설차를 따른다.
차 따르는 소리가 병풍 속으로 길을 내고
어디서 새가 운다.
산빛 속으로, 그분이 피운 안개 속으로
의도인이 걸어간다.
산빛 속으로 걸어가는 길이 저물고
겨울 산을 입에 문
새 한 마리 北溟을 향하여 날아간다.
동그란 새의 눈 가장자리에
북명의 소금기가 허옇게 묻어 있다.
새 울음소리 또르르 비늘 져서
굴러 떨어진 깊은 눈구렁 속
연둣빛 삐비 순이 붓끝처럼 돋아난다.
문신(文信)의 시메트리를 위한 변명
강인한
빛나는 금속 재질의 기쁨 두 그루
연둣빛 잔디밭에 심었네
햇볕을 온몸에 받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우는 그리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리는 깨끗한 눈물
저 두 그루 기쁨에는 구멍이 있어
나비가 그 뚫린 허공으로 하늘하늘 날아가네
나비 날개에 묻은 꽃향기가 서너 발짝 따라가다가
한 걸음만큼 뒤처지는 게 보이네
당신의 왼쪽에서 내 오른쪽으로
내 오른쪽에서 당신의 왼쪽으로
실바람이 입술에 얹혀 풀빛 휘파람으로 울리던가
빗방울이 연못에 뛰어들어 실로폰 소리를 내던가
내 왼쪽 가슴 아래의 힘찬 박동을 받아
당신 오른쪽 가슴이 할딱거림을 자아올릴 때
꼭 일치하지는 않았네
조금씩 달리 살아가는 사람살이처럼
빗나가거나 잠시 한눈을 파는 체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영혼을 받아 내쏘는 검은 기쁨이여
은빛 눈부신 절정이여.
물결 노래
강인한
가장 온전한 그리움으로 그대를
생각하기 위하여
이 어둠을 조용히 불렀거니
어디만큼에서 목마른 손을 나누고
우리가 헤어졌을까
오늘은 너무 멀리 떠나와
사랑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라
희미한 달무리로 번지는
내 옛날의 소중한 아픔
긁히고 부딪치는 돌자갈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이 밤도 흘러가나니
물 먹는 사람
강인한
윤슬.
윤슬이 튄다. 반짝반짝.
오후 세 시, 11월
윤슬을 데리고 물오리 혼자 논다.
한강에서
모터보트가 끌고 가는 한 사람.
보트 뒤 물살 비틀어
건너다니는 지그재그
즐거운 스키어.
유턴의 지점
보트가 멈추고 고요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사람.
일분, 이분…
삼분 만에 다시 검정콩 같은
강물 위의
점.
점이 끌고 나온 몸통,
꼿꼿한 몸통 일으킨 채로 상쾌하게
물살을 가른다.
멀리 윤슬이 반짝인다.
수정 구슬.
물상(物象)
강인한
한 컵의 물이 공중에서 엎질러진다.
물은
침묵이 무서워서 저희끼리 부둥켜안은 채
공처럼 떠 있다.
무서움과 무서움으로 결합된
물의 혼은
허공에서 일순 유리공의 탄성을 지닌다.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강인한
엊그제가 입동(立冬)이던가
코트 깃을 세우며 퇴근하는 길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상하여라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걸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내었구나
뿌리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의 은빛 그리움이 스스로 깊어져서
바람에 볼 비비며
잎새마다 부서져 물소리를 내는 것을
내가 잊고 있던 부끄러운 사랑도
뿌리 깊이 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무심히 내다보는 유리창에
물소리로 물소리로 흐를 것인가.
물속에서 눈 뜨기
강인한
내 나이 여섯 살이며, 이리세무서장 관사에서의 일입니다.
작은 연못 가슴에 품은 정원이 있고
정원에서 대문 쪽으로는 시멘트 담벼락이 이웃집
계집애의 보조개와 한길의 경사를 비스듬히 부축하고 있었지요.
흙을 갈아엎은 밭이 한길까지 얼씨구절씨구 흥에 겨워서
관사 내부와 밖의 소문, 봄과 꿈의 경계에 선
측백나무를 참새 소리들이 지지고 볶고 꼬득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비좁은 가지와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간절한 세상 풍경이
거리의 소란과 어우러져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고 안달복달할 적이면
가만히 발걸음을 숨긴 채 나는 측백나무 울타리 쪽에
이따금 눈길을 묻곤 하였는데요.
어느 날은 흰옷 입은 사내가 나타나 쪼그리고 엎드린 내 눈앞에
막무가내로 들이대며 바지춤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낯선 사내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바지를 까고 힘차게 내쏘는 물줄기를 조마조마 지켜보는데
내 생전 그렇게 커다랗고 거무칙칙한 물건을
본 적 없어 무척 놀랐습니다.
눈을 뜬 채 한순간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사내의 검고 길쭉한 것처럼 생긴 방망이들을
높은 하늘에서 몇 개씩이나 떨어뜨리고 가는 비행기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보았습니다.
이후로 우리 식구들은 손마다 보따리를 들고서
측백나무 울타리에 내 가오리연도 걸려있는 관사를 떠났습니다.
그건 단기 사천이백팔십삼 년 여름의 시작이었지요.
물에 잘 녹는 슬픔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물 위의 오필리아
강인한
그래요, 한 마리 물뱀인가 봐요.
부끄러움은 차라리 부스럼처럼 아픈 무늬로 빛나는 것
햇살이 초록 그늘과 연두의 빛 그늘을 빗질하며 흘러내려요.
사랑하는 이여
햇살 아래 내 부끄럼의 얼룩
흐르는 그늘 따라, 따라와 보셔요.
당신은 멀리 가서 꿈으로 오시는 이.
한때는 내 무릎 가져가 베개 삼던 다정한 이여.
그 아련한 잠을 당신은 어떻게 잊나요.
잊을 수가 있나요.
숲에서 나는 실국화를 땄어요.
머리에 운향 꽃을 꽂고
자란이며 제비꽃, 쐐기풀을 다문다문 내 머리에 꽂았어요.
화관으로 치장한 내 모습 당신은 못 보고
지금 어디서 헤매는가요.
설만들 안개 자욱한 레테 강에서 헤매는가요.
나의 기도는 하늘로 오르고
마음은 이 지상에, 냇물 위로 떠내려가요.
흘러가는 속삭임
나직나직 속삭이는 물결의 노래 나를 잠재워요.
눈부신 당신 웃음 오래 담고 싶어서
가만히 나는 눈을 감아요.
어여쁜 로빈 새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데
당신의 새벽 깨워드리는 잿빛 보얀 가슴
사랑스런 로빈 새가 되고 싶은데……
종탑에서 내려온 까만 고깔모자
귀여운 종소리들은 지금 어디쯤 찾아왔을까요.
초록 그늘과 연두의 환한 빛,
가지런히 빗질하며
햇살은 흘러 허밍처럼 꿈결처럼 떠내려가요.
미지의 아이들
강인한
마침내
태어날 수 없는 미지의 아이들.
이들이 세계의 구석구석 -
열사(熱砂)의 해안에 표류한 상어의 등뼈,
잉카의 조각품에 찍힌 형광,
어두운 늪 속 가라앉는 한 조각의 빵,
또는 등속도(等速度)로 날아가고 마는
우주의 어느 발광분자(發光分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을 이끌고
가끔씩 우리들의 목숨을 겨누기도 하는
그 미지의 아이들.
날리는 눈 속,
익어서 지는 열매 속,
분주한 생성의 이파리 속에
조금씩은 숨어 있는.
미지의 아이들은 때때로
우리들의 뽑혀나가는 분비물에 묻어나가
공중에서 하하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다의 악보-벤 구센스*의 Sweet song of the sea에 부쳐
강인한
바다가 저만치 물러나자
썰물이 뱉어놓은 모래밭에 악보가 드러났다
당신의 입술은 동그랗게 모음을 발음하다가
그만 악보 받침대에 갇혀 나를 바라본다
오, 달콤한 붉은 입술은 적포도주를 담은 글라스
아니 두 장의 장미 꽃잎 같다
하지만 오래 전 당신은 이 해변을 떠났다
저만치 과거로부터 떠밀려온 트렁크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두근거리며
들키고 싶은 당신의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두려운 비밀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자국마다
한 장 두 장 물 젖은 악보가 따라오고
입 벌린 소라고둥이 트렁크 위에 앉아 소리친다
이제 곧 태풍이 불어온다고 내 마음 속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이 해변에 떠도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두고서는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 벤구센스(Ben Goossens)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바닷속의 언어(言語)
강인한
여름날
제왕이 걸어 두었던
무지개에 녹이 슬었어.
야차(夜叉)처럼 날뛰던 법령이
이것 봐, 땃땃하게 녹아내리는
여기는 천국.
달디단 음성과 입술이 있어.
샤갈의 동네 사람들 술렁이는
잠이 있어.
동상(銅像)이 눈뜨는
눈을 떠 시간을 흔드는
거대한 바람이 있어.
제왕의 홍옥빛 의자를 침몰시킨
사람들의 연두빛 눈물.
눈물 속 뼈를 깎는
소금이 있어.
이것 봐, 이것 봐,
홍옥의 달빛을 문지르던
여자의 늑골이 있어.
바람의 향기를 맡아라
강인한
한때 나는 뉴스 생산자였다.
피곤한 일이었지만
수고한 만큼 찰진 보람도 있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탄다.
내게 다가와 얼굴을 어루만지며 뒤로 자빠지는
강바람은 한 템포 느린 감정을 지녔다.
구름과 별을 제치며 나는 달린다.
이 강변의 자전거전용도로를 달리는 자들, 그들은
대대손손 행복하리라.
오래오래 이 뉴스 생산자를 기억하리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일찍이 나는 빗자루를 탄 마녀가 돼서
번개처럼 날아간 적이 있다.
이것은 일급비밀,
기브 앤 테이크는 만고불변의 외교 원칙이다.
익사자들 마흔여섯 명을 영웅의 반열에 봉헌하는 일은
아무나 행하지 못할 일,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애국적으로 폭발하는 군함이 있다.
나는 유머를 좋아하는 뉴스 생산자.
어린이날 뜨락에 놀러온 병아리들에게 나는 말했다.
나쁜 아저씨들 때문에 날마다 속을 썩이고
그들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기 위하여
밤잠 못 잘 때가 많아요.
하지만 여러분들을 보면 한없이 즐거운
나는 정직한 뉴스 생산자.
때로는 카오스의 뉴스가 윤슬처럼 빛나는 곳,
아직 코스모스는 피지 않았지만
튼튼한 댐 위로 불어오는 초록빛 바람을 흠, 흠, 흠,
나는 흠향한다. 녹차라테의 향기,
오르가슴으로 뒤트는 강물의 기쁨을.
바람이 센 날의 풍경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몸을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 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 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려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버린 진보와 개혁 그 허깨비 같은 잔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비리고 썩은 양심은 아래로 잦아들어
언젠가는 뿌리 깊은 영양이 되겠지만
뭉칫돈을 거래하는 시궁 속의 검은 혀
아무 데서나 주무르는 시뻘건 후안무치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많아서 상처투성이의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나무들은 바람 속에 아우성치는 것이다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
강인한
요즘 모두들 한 줄로 코를 꿰어 정신이 하나도 없소.
이 특별한 감기를 전 세계에 고루 나누어
지구인이 한 동네 한통속이란 사실 배우고 때로 익혀
진리의 깨우침을 주기 위함일지니
너는 왜 안 죽고 뭐 하냐?
다들 깊은 땅속에, 산중에 진작 들어 제자릴 찾아갔거늘.
백 년 전 세월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늙은이들은
젊은것들 손에 열쇠 물려줬을 나이로
지금도 치매나 가지고 놀려구? 예끼
네발 달린 거라면 들짐승, 산짐승
책상다리 빼고 다 잡아먹는 중국에서 나왔는지
버릇없는 식성 시커먼 박쥐 콧구멍에서 연기처럼 나왔는지
그래 잘났네, 중국, 한국, 일본
올림픽에 목매다는 일본의 크루즈에도
후춧가루처럼 뿌려주고 시나몬처럼 뿌려주고
이란, 인도, 호주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콧대 높은 미국엔들 안 주면 섭섭하지.
러시아와 이집트에 한 꼬집씩, 브라질도 한 움큼……
예전에는 반세기 1세기마다
전쟁을 설설 풀어 인구를 맞추던 신통방통 묘수
홍역이며 에이즈가 안 되니 오늘은 COVID-19로,
어렵고도 어려운 지구상의 인구 문제
야훼와 알라가 머리 맞대고
종횡무진 널뛰며 쿵더쿵, 길길이 풀어보는 중.
오존층 더 벌어진 축복의 구멍으로 눈부신 햇살 모셔내어
북극 빙산 깨뜨려 흐물흐물 조각난 얼음덩이 속
수천 년 동물 사체가 기지개를 켜네요.
그 사체에서 죽은 듯이 지내던 바이러스 해방시키고
살판 죽을판, 몽땅 떨이 펜데믹이니
어이쿠,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
밤 아리랑
강인한
금 동아줄에 목매달고
천년 묵은 상사병을 맷돌에 가는
밤입니다.
꽃가루 날리는 밤 강물 속에
감쪽같이 몸을 푸는
계집을 지고
맷돌을 지고
휘파람
후이후이 불며 가며.
소금이랑 새우젓이랑
옹기그릇을 팔던
빈 저잣거리에
빨간 갑사댕기라도 한 쪽
입에 물고 눈 뜨면
노루 피 쩔쩔 끓는
밤입니다.
열 달을 회오리치던 뜨건 바람
목구멍에서
온통 붉은 똬리나 틀고
돌무더기 무너져
천년의 가슴엣 피 무너져
내리는 밤입니다.
손톱에 시름 맺어
온 산을 파헤치는 사내
뒤꼍엔, 뒤꼍엔
금쪽의 그림자 어른거려
밤 새워 옷고름만
풀며 말며.
밤을 질주하는 나르시스의 바다
강인한
그를 향하여 사수들은 전진하고 있었다. 부서져 날리는 은빛 광선과 반역을 꿈꾸어 온 굵은 눈썹이 이마에서 녹아내리며 수인들은 가장 찬란한 죽음을 총구에서 느끼고 흔들리는 바람을 깨물었다. 풍부한 영양을, 나부의 지체처럼 서서히 풀려나오는 시간을.
많은 손들이 의문을 품고 항상 지표 위에서 움텄다. 그리고 유린해 갔다. 하나의 문제를 유산시키고 파도를 타고 육박해 들어오는, 그것은 생명. 사수들이 조준을 끝내고, 빼앗기도 전에 생명은 무너져 내렸다. 가슴에서 어깨에서 무너져, 무너져 내리는 바람.
하구로 밀려 흐르는 바람이다. 추방당한 꿈을 부르며 가거라. 가거라. 빗나간 탄환들은 가거라. 황야에서 울부짖던 밤의 영(靈)들이여.
끈적끈적한 음모의 시선에 결박된 세기의 고아, 나르시스여. 캄캄한 죽음의 껍질에 둘러싸였다가 한 마리 순한 짐승으로 태어났다가 아득한 시원의 돌이 되었다가 영롱한 눈 속에 갇히고 마는 아름다운 바람. 바람은 겁(劫)의 한 순간을 표류하는 나르시스의 시신.
그는 눈을 뜬다. 그는 무릎을 꿇는다. 그는 손을 든다. 그는 손을 들어 더듬는다. 산산이 흩어지는 영원의 실체…….
탈출하고 있음인가, 야반의 지혜로운 동작 끊임없이 계속되더니 가장 치열한 시간이 나부끼는 저 검
은 해면(海面)에서 무수히 부활하는 나르시스. 나르시스. 나르시스.
마침내는 달려가고 있었다. 꽃의 정령들은 절대의 생명을 향하여 미친 듯이 해면을
밤의 메트로
강인한
소리가 열차를 끌고 간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 밤을 끌고 간다
칸칸이 불을 밝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소리에 끌려 구불구불 미끄러지는 열차
나는 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강을 지나는지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푸른 밤하늘 위에
열차의 내부가 환하게 떠 있다
멀리 가로등이 흘러가는 야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옛날에 잊어버린
젖은 이름 하나가 비누방울처럼
밤하늘에 켜졌다가 사라진다
반려 인간
강인한
한강공원 쪽으로 난 굴다리 앞에서였다.
내 앞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걸음이 느린 여자가 보였다.
저만큼 이쪽으로 유모차를 끌고 오는 중년 여자도 있었다.
좁은 길에서 유모차 두 대가 잠시 멈추더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다른 길로 비켜갔다.
내 앞으로 지나가는 유모차엔 고양이 한 마리
빤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걸음 느린 유모차를 앞질러 보니 강아지가 한 마리
그 속에 앉아 있고.
- 고관절이 안 좋아서 유모차를 끌게 한 거라고
- 당뇨가 심해서 새벽 운동을 시키는 거라고
전생에 사람이었던
고양이와 강아지의 대화를 아까 들은 것 같았다.
발다로의 연인들
강인한
독화살이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맑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가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 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 년, 다시 또 몇천 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랑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밤길
강인한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동화책을 샀지.
양심을 두 개씩 달고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이 겨울도 비척이는 밤
밀감이며 바나나 그득한 과일상회랑
신나게 요란한 백화점, 제과점을 지나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동화책 한 권을 샀지.
서둘러서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구십 원짜리 시내버스를 타고
차창 밖 까맣게 젖어서 흐르는
네모 난 밤을 내다보았지.
아빠 아빠,
삼십만 원도 안 되는 선생 노릇을
아빠는 뭐하려고 십오 년씩이나 해?
식구들 몰래 눈물을 지우던
딸아, 내 어린 딸아,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운바람 속
아빠가 들고 가는 이 작은 선물이
하루만이라도 곱다란 기쁨이기를.
추운 사람들의 내뿜는 하얀 입김
유리창 밖 웅크린 풍경 위에 가만가만 덮이고
소주에 취해서
길고 긴 겨울은 술병처럼 흔들리지만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아빠는 동화책 한 권을 샀지.
밤 버스를 타고
강인한
절망으로 가는 길만이 터널처럼 뚫린다.
겨울밤을 달리는 버스의 전방
아우성처럼 부딪쳐오는 눈보라 속을
벌거벗고 뛰어가는 우리들의 마음,
흉측하고 거대한 손이
이 시대의 하늘에 떠서
주시하고 있다.
벗어날 생각은 말라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날리면서 떠 있다.
밤의 메트로
강인한
소리가 열차를 끌고 간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 밤을 끌고 간다
칸칸이 불을 밝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소리에 끌려 구불구불 미끄러지는 열차
나는 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강을 지나는지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푸른 밤하늘 위에
열차의 내부가 환하게 떠 있다
멀리 가로등이 흘러가는 야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옛날에 잊어버린
젖은 이름 하나가 비누방울처럼
밤하늘에 켜졌다가 사라진다
배낭을 짊어지고 아고라로 가는 사람들
강인한
아고라의 아침은 비둘기들의 조찬으로 시작된다.
가로등 아래 진설된
말라붙은 컵라면과 한밤의 토사물과
지난밤 다른 도시에서의 테러와 소요
종교부족 간의 전쟁 기사를 싣고 뒤척거리는 신문지들.
우리들의 내부에서
녹슨 태양이 술렁이는 아침
우리들의 과거는 검푸른 이오니아의 바다
학교에서 바라본 금환일식, 금테 두른 태양
혹은 노래도 꽃도 없는, 진실이 없는
신문지.
모두들 헤어져 간 소년들의 운동장에서,
은밀한 숲속 산책로에서
발길에 차이는 마스크, 마스크, 마스크……
가위눌린 꿈속,
떠나간 친구들의 엉뚱한 변모
집배원의 피곤한 손에서 반려되는 우리들의 안부.
경광등 번쩍이며 사이렌이 울리고,
우리들의 영웅은 없고 슈퍼맨도 오지 않는
시시티브이를 피해서
유아를 학살하는 어린이집 지붕에 비둘기와 낮달
울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삭은 이에
순금의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의 분분한 낙하, 그것들이 맑은 음색으로
대낮의 시가지를 뛰어다닌다.
주말이나 휴일 우리들은 영화관에 갔다가 외식을 하고
바람이 이는 엷은 미열을 느낀다.
(선별진료소로 찾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파이프 오르간 기분 좋은 모음과 함께
우리들이 마련하는 한 줄씩의 귀가
일몰이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서
지그시 머리를 드는 식욕
고궁의 뒷길을 가는 잿빛 부연 눈물
눈물 속에 잠기는 참 작은 세상, 잿빛의 카페
잿빛의 포장마차에서 문득
죽은 친구들의 하얀 손이 나온다.
그들의 하얀 손이 나와서 어두운 우리들의 이마를
뭉쳐져 있는 기억을 더듬는다.
나무가 자란다.
가시 돋친 나무가 철근처럼 지붕을 뚫고 자란다.
그 나무 등걸 안에 은밀한 음성과 식탁,
아침 식탁을 앞에 두면 우리들은 마리오네트
즐거운 마리오네트
우리들의 내부에 순순히 귀항하는 늙은 태양.
두 개의 국기를 배낭에 창검처럼 꽂고
국경일 아침마다 아고라로 나서는 사람들
검찰의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와 선택적 정의를
사랑하는 영원한 보수주의자들, 할렐루야
눈부신 은총 속 이 도시엔 소문이 많다.
이면도로 질척이는 헛소문에
돼지들이 빠진다.
돼지들 꿀꿀거리는 온종일
하늘엔 안개처럼 축복처럼, 방사능 미세먼지가 뿌옇다.
벽오동 나무의 뒷이야기
강인한
측간 가는 길을 비켜서 주춤
키 큰 벽오동 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하늘엔 옥돌 부딪치는 소리
푸른 가을
벽오동 넓은 이파리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덜어 주었다
아내는 요즘
어릴 적 벽오동 나무보다
굵은 허리로
짧은 가을볕 낮잠이 달다
벽에 걸린 바다
강인한
아버지 내 말 들리세요.
침실 벽에 봄 바다를 걸었어요.
가로는 에메랄드빛 잔잔한 지중해
세로는 지금도 빨려 들어가는 수직의 와류,
백금 장식 액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궁 안의 누군가 바꿔치기한 모양이네요.
검푸른 산화물로 부식된 알루미늄 액자
네모난 액자를 바라보아요.
침대에 앉아 바라보면 들리지요. 요정들의 노랫소리
너울거리는 파도를 타고 들려오지요.
어디에도 선실 유리창을 깨고 녹슨 꿈을 두드리는
망치 소린 들리지 않고
그림 속을 부침하는 비몽사몽만 껴안고
나는 스르르 잠들어요.
위는 아름다운 여인, 아래는 말의 다리가 달린
켄타우루스가 저예요.
아버지는 천상의 어둠에 절반,
나머지 절반은 광명한 인간계에 나와서
지금도 탕탕탕, 총알구멍으로
날마다 일곱 시간 동안 피를 흘리고 있나요.
더럽고 비참한 추억이
언제나 머리맡 오르골에서 핏빛으로 풀려나오는
내 방 침실,
나는 저 액자를 보아요, 그 검푸른 바다를 향해 걸어가요.
일곱 나라 일곱 난쟁이들처럼
서로 다른 말로 서로를 부르며 물어뜯는
이빨이 톱니처럼 사나운 저 물고기들 이름이 무얼까요.
보랏빛 모차르트의 레퀴엠 긴 허리띠로 서로의 몸에 감고
사라져 간 열일곱, 열여덟의 소년과 소녀
그들이 벗어놓은 달콤한 잠을 내 눈 속에 부어주세요.
아버지 나를 데려가주세요.
아주 멀리 나를 구름처럼 데려가 주세요.
벽호(壁虎)가 온다
강인한
골리앗크레인이 내려놓은 컨테이너는
냉동박스였다.
빗장을 풀자 차가운 냉기
희뿌연 어둠 속에 드러난 그건
돼지고기도 쇠고기도 아닌, 영하 25도
영혼도 얼어붙은 시신 서른아홉 구였다
"곧 봄이다" 글을 남기고,
네일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열아홉 살 막내.
영국 에식스 주 산업단지 2019년 10월 23일
새벽 부두였다.
재깍재깍, 밤 깊으면 벽호가 찾아왔다.
하마 잘 들어갔겠지,
막내 소식 궁금한 호이안의 고향 집
재깍재깍, 처마 밑을 새끼 벽호가
운다,
기어 다닌다, 재깍재깍 재깍재깍.
변두리에서
강인한
전셋방을 얻으러
몸뻬 입은 여편네가 소개쟁이를 따라 나선
신개발지구 배추밭 샛길은 질척이고
살얼음 끼인 미나리깡을 돌자
염소 울음 소리가
찬밥 덩이처럼 시리다.
건너편 아파트 신축 공사장 주변엔
죽창 같은 삼각 깃발이
음산한 겨울 바람을 날리고,
새로 낸 소방도로의 한쪽에 비켜 앉아
무심히 철근을 끊는 인부가 둘.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버짐 피듯 눈발이 흩어져 있다
별
강인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밥 먹고 옥상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밥알처럼 많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봅니다
소년은
별을 향해 신호를 보냅니다
별 속에도
소년이 하나 살고 있습니다
저녁밥 먹고 계수나무에
앉아서
이쪽을 내다봅니다
그렇게 깜박입니다
별에서 별로 가는
계절의 수레바퀴는
오늘 밤 파아란 봄빛을 굴러갑니다.
별들의 발자국
강인한
가문 날 오후
허공에서 가늘고 짧은 은빛
스타카토, 스타카토……
눈 번득이는 감잎을 하나둘 만져보고
토닥토닥 단풍나무 다섯 손가락도
튕겨주는 당신,
지난봄 보랏빛 라벤더 향기 속에
내 손을 잡던
당신 눈빛을 생각한다.
나뭇잎, 나뭇잎에 가만가만
보이지 않는 어린 별들이 발자국을 찍으며
하염없이 돌아다닌다.
별이 지는 밤
강인한
어둠 속에서 문득
한 줄 네 마음의 실이 끊어져 나갔다.
어디선가 꽃 지는 소리, 밤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산사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얼크러진
산 여울의 은빛 비탈을 넘어
머언 둑을 소요하고 있을, 설레고 있을
내 소년의 바람이여.
잃어버리는 것, 잊혀지는 것 애석지 않아
사는 것, 내 사는 것이 호젓하였다.
끊어져 나간 네 마음의 끝 간 데에서
바람은 지금 길눈이 캄캄할 것이다.
어리석은 속단처럼
여기저기 흰 밤별이 떨어졌다.
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
강인한
수박 맛있지요
열매가 둥글다는 상식을 넘어
네모 난 수박은 상식보다 맛있을 거야
정사각형 틀 안에 가두고
키운 멋진 수박
처럼
네모 난 유리병 안에
새끼 고양이를 키워 보실래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새끼 고양이를 병 속으로 유인하세요
얼른 병마개를 닫은 다음
두 개의 빨대를 끼우세요
하나는 먹이를
또 하나는 배설을 위한 장치
들어가면 나온다는 철학을 위한 장치
사랑도 정기적으로 확인이 필요하듯
가끔씩 뼈를 유연하게 하는 약물을
투입하기도 하면
귀여운 고양이는 병에 맞춰 자라지요
자라면서 끝내는 유리병 모양이 된다나요
사뿐한 도약 호기심 많은 질주는 거세된 채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미덕인지
고양이는 잘 알지요
분재 고양이 아니 본사이 키튼
네모 난 고양이를 보세요
얼마나 정직하고 우아한지요
죽을 때까지 유리병에 갇혀서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본사이 키튼
당신의 맨션에 살아서 빛나는 소품
본사이 키튼.
병 속의 바다
강인한
캄캄한 아가리 벌리고 가시만 남은
유령상어들이 덤벼든다.
왁자한 웃음소리 덜렁거리며 모자 쓴 유령들이
달려온다.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도망치다 혼자 남은 잭 스패로우
텅 빈 술병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투명한 유리병 속 바다가 출렁인다.
한 송이 꽃처럼 활짝
바다 위에 범선이 떠있다.
평생 쫓겨 다니는 사내 발바닥에
눌어붙은 그림자,
지긋지긋한 건달의 껍데기를 벗어나려
그림자는 몸부림친다.
오욕으로 찌든 사내의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힘껏 벗어버리고
병 속의 바다를 향해
출렁출렁, 그림자 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보랏빛 남쪽
강인한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싱싱한 초록이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잎에 앉은
청개구리
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볼더비치에서 춤을
강인한
오늘은 네 생일이야 자카스
생일 선물 뭐가 좋을까.
색색 고운 무지개 아이스크림 흘려주는 테이블마운틴
그 산의 노란 데이지를 선물하고 싶은데
요즘 방문객들은 치사해, 기념품 하나 가져오질 않잖니.
자카스 네 친구 중에 데이지가 있지.
그 애가 차려 입은 샛노란 봄의 원피스가 궁금하지만
난 네 춤이 더 좋아 자카스.
어젯밤 꿈 속에 너는 감청색 박쥐우산을 돌리며
레인 레인 레인 멋진 탭댄스를 추었어.
끈적이는 관능의 살사댄스도
아르헨티나의 넓은 치마를 망토처럼 날리는 탱고도 나는
좋아하지만, 자카스
가장 좋은 건 네 춤이야.
까만 연미복을 입고 재빠른 발놀림 귀여운 탭댄스.
귀여운 내 사랑, 자카스
난 지난여름 소풍을 잊을 수 없다.
멀리 희망봉의 해안을 돌아오는 해류를 타고
가장 높은 파도 위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
노을빛을 가득 담은
네 눈을 들여다보는 건 내 삶의 보람,
내가 살아가는 이유.
자카스, 관목 숲에서 종알거리는 네 흥겨운 콧노래를
먼 날의 꿈속에서도 나는 듣는다.
꿈결처럼 고래가 물 뿜는 하머너스 해안에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파도,
억센 파도에 어깨와 어깨를 정답게 부딪치며
자갈자갈 구르는 몽돌들의 고운 노랫소리를.
봄 꿈
강인한
이 거리에 처음 와 보았으나
언젠가 나 여기 왔었다
조붓한 샛길을 돌아 삐걱이는 마루 소리
꿈결이듯 들리는 곳, 저 건너 金閣寺가 보이는
이 집 마루 끝에 누가 서 있었다
내 이름을 가만히 두 번 부르며 숨던 그 치맛자락
저기 꽃구름으로 풀어지고 있는가
봄날은 비단 허리띠처럼 길어
호르르 호르르 새 점을 치는 노인이
그 때 저쪽에 앉아서
내 전생을 읽어주고 치렁한 햇살이 따라 읽고
내 점괘를 웃음으로 짚어가던
그 누에나방 같은 눈썹은 어디로 갔을까
눈감고 열 걸음쯤 뒤따르다가 비틀거리다가
내 손에 쥐어진 것을 펴보았을 때
깃처럼 보얀 꽃잎,
아 그것이 벚꽃이던가 복사꽃이던가
꽃나무는 보이지 않는데 바람결에 분분한 낙화
가늘한 손가락으로 튕긴
한 줄 현의 떨리는 음정, 높다란 추녀 끝에 닿아
흰 손가락엔 꽃잎 같은 피가 맺혔다
분홍의 살 냄새 아지랑이로 숨막힐 듯
글썽한 눈을 들어 바라보는 놀빛
저 멀리 학이 날아가는 모습 하늘에 떠 있었다
봄날
강인한
헬리콥터가 날아온다,
한 대, 두 대.
두 줄 가득 털 난 굉음을
풀어놓는다.
시끄러운 부분만 가위로
동그랗게 오려낸다.
물 위에 띄운다.
청둥오리들이 부지런히 쫓아와
동그란 하늘의 털 난 꽁무닐
콕콕 쪼아댄다.
버들개지 눈이 찔끔
놀라서 바라보는
저쪽,
안 보이는 별들이 좌르륵 쏟아져 내리는 저쪽
물살에 은비늘이 튄다.
봄 인사
강인한
사층 교실에서 구운몽을 읽는데
운동장 건너편이 문득 환해진다
그늘진 산자락을 밟고
온몸 가득 꽃을 피운 나무 한 그루
지난 한 해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더니
북풍받이 기슭에서
겨우내 어렵사리 꽃눈을 마련하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알은체를 한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저 산 너머 개발 지구엔 모래바람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허물을 트는 동네 아낙들이
잎 피는 나무 아래 모여 있으리
운동장 저편에 오도카니 서 있는
돌배나무 한 그루
수업 중인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게
꿈결보다 낮은 소리로 하얗게 하얗게.
봄 회상
강인한
찻물을 끓이며 생각느니
그리움도 한 스무 해쯤
까맣게 접었다가 다시 꺼내 보면
향 맑은 솔빛으로 내 안에서 우러날거나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보기엔
천지에 봄빛이 너무 부신 날
이마에 손가리갤 얹고
속마음으로만 가늠했거니
보이는 듯 마는 듯
묏등을 넘어 푸르릉푸르릉
금실을 풀며 꾀꼬리가 날아간 하늘
누님의 과수원에
능금꽃 피던 날이었을거나
능금꽃 지던 날이었을거나
북풍(北風)
강인한
힘세고 까다로운 놈은 피해서
헐벗고 만만한 자의 살에
부딪쳐보고 싶었다.
채찍으로 내려치는 눈보라에 등을 밀리어
미류나무 몇 그루
밤길을 가고 있는 변두리 마을
불빛 새는 처마 밑으로 스미고 싶었다.
내 고달픈 하루의 꿈을 끄고
그리움에 몸을 부비고 싶었다.
창틀마다 낮게 낮게 비척거리는
헐렁한 잠꼬대들
엷은 이불자락을 들추다가
홀로 눈뜨고 살아가는 부끄러움이여
부끄러움이여
굳게 잠긴 도시를 열고 소리치며 달려가
수도꼭지 속에 차라리
캄캄하게 얼어붙고 싶었다.
불길 속의 마농
강인한
어지러워요 저 불길
당신의 사랑은 너무너무 높아서 어지러워요
저 불길을 누가 좀 잡아줘요
어려요 저는 어리고 당신은 높으신 분
말 많은 당신을 누가 사랑해요
사랑해요
잊어버리세요 저것들
거렁뱅이들의 소동쯤 당신의 거대한 배짱으로
밀어버려요 불도저로 밀어버려요
까짓 양복점 직공의 항변쯤 눈감으면 그만
벗어 놓은 제 브래지어로 차라리
눈을 가리세요
보지 마세요 듣지도 마세요
무시해버려요 말짱 미친놈들만 박테리아처럼
박테리아처럼 우글거리는 이 도시의 공기는
담배보다 해롭고
구할이 외상이에요
타네요 이 시디신 공기
악질의 근성 근대식의 멋진 연애가
아주 잘 타네요
늦잠 자던 산타클로스가 저봐요
뛰어내리네요 나비처럼 사뿐히
불길 속을 뛰어내리네요 자꾸만 자꾸만
어지러워요 어려워요 어려요
절 놓아주세요
닥치는 대로 부수고 닥치는 대로 세우는
미끈한 당신의 폭력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속고 또 믿어요
믿을 수 없어요
놓아주세요 절 좀 놓아주세요
이렇게 높은 창틀에 올라서면
저는 여왕이에요 난초 열끗이에요
뛰어내릴 테요 금리처럼 단호히 내릴 테요
아주 잘 타네요 저 불길 잘 타네요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누가 듣고 있어요
이 도시는 빈 놋그릇처럼 울려요 날마다
꽝꽝 울려요 하늘도 땅도
울려요 어지러워요
어디서 오셨나요 당신의 유니폼이 겁나지만
뭘 드시겠어요 총을 들고 버티겠어요
저는 당신의 포로 그래요 마농예요
주간지에서 절 보셨다구요 아이 기뻐요
밤이 되면 전활 걸어주세요
저기 오빠가 달려와요
절 죽이러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어요
어지러워요 막 타네요 저 불길
농축된 당신의 욕망이 프로판가스처럼
치솟아 오르면서 타네요
세계에서 제일 쓸쓸하고 화려한
돈 돈 돈자천하지대본이 타네요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저 불길
붙잡아주세요 아무도 없나요
분노는 파도처럼
강인한
묻노니 세월이여
이 악물고 조국을 버리고 가는 이의 마음을 아는가.
등 돌려 러시아로 가버린 빅토르 안이며,
씨랜드 화재로 여섯 살 아들 잃은 국가대표 하키선수 김순덕
김순덕이 훈장을 우체통에 던져버리고
머나먼 뉴질랜드로 떠나가서 사는 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묻노니 세월이여
한 입으로 두말하는 뱀의 혀,
쥐새끼처럼 반들거리는 눈빛으로
없는 죄 뒤집어씌우려 증거서류를 위조하는 정보기관
지금도 여일하신가, 원장님도 안녕하신가.
충직한 아랫것들 노고로 수천수만 리플 귀고리로 달랑거리며
당당히 왕궁에 입성한 여인은
늙은 늑대 좌우로 거느리고 건강하신가,
밥맛은 아직 좋으신가.
다시 묻노니 세월이여
분노는 일어나, 분노는 집채만한 파도처럼 일어나
비통한 에너지가 되고
기어이 태풍의 핵이 되고 말 것임에…….
물이 허리까지 차고,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고
물이 얼굴을 휩싸고, 물이 캄캄한 죽음으로 끌어들일 때
국민소득 2만 6천 달러가 무색한 간판들, 우왕좌왕
빠진 쓸개를 찾아 허둥거릴 때
우리가 돌아가 기댈 정의가 있기는 있는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하늘이여, 2014년 4월 16일
저기 저 눈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침몰하는 세월이여.
불멸의 구도를 생각하다
강인한
겨울의 차가운 별들이 시리우스를 바라본다.
보름 전 이태원 항구를 떠난 젊은 별들은
지금 어느 하늘을 항해하고 있는가.
키 작은 명자나무랑 꽝꽝나무 아래서 통통 튀는
탁구공만 한 참새들이
정글짐처럼 우거진 측백나무 가지 새로
파고드는 오후 세 시
셔터의 마법이 떠도는 시간이다.
시선을 십오 도로 끌어올려 연민의 각도를 높인다.
내 일찍이 살아온 발자국
밟아온 발자국마다 언젠들 꽃이 피었으랴.
황금의 삼화음이 불꽃처럼 터졌으랴.
역사란
허구와 집념의 꿈을 반죽하여 밀어붙이는 것이지.
국가애도기간이 끝난 뒤, 이방의 병든 소년을 끌어안고
수없이 연습한 기도의 자세를 시전하는 것.
내 인생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위한
열네 살 소년의 집에서 풀어놓는 자비의 포즈.
셔터 없는 자비란 난센스일 뿐.
슬픈 주검을 무릎에 앉힌 성모의 구도를
내 프로필 뒤
눈부신 역광으로 거룩하게 드리운다.
불은 내게 묻는다
강인한
문밖에 바람이 불고
부드러운 어둠이 이방의 도시를 지나온다.
어디선가 진정한 기도소리가 들린다.
순금의 회상이 시작된다.
소리 없는 폭우 속으로 들이 달리고
촛불 속에 깜박이는 동양의 산문,
내가 읽다 만 문장이
문득 장미의 불에 날개를 적신다.
마음속에 잠들지 못하는
그대 자정의 뒤척임도 사라져 갔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울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서는.
풀밭에 떨어지는 희미한 별빛
벌레 울음소리마저 깊숙이 파묻히고
한 마디 대지의 흐름을 빌어
불은 내게 묻는다.
안에서 내다보는 캄캄한 혼란과
밖에서 들여다보는 눈부신 질서를.
마음과 마음 사이에 서성거리는
시간의 어두운 그림자,
내 몸 안에 전 생애의 그늘을 던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불타는 노틀담
강인한
그레브 광장 기쁨의 불놀이를 보기 위해
문 앞에서, 창가에서, 채광창에서, 지붕 위에서
수천의 얼굴들이 밀치고 떠밀고
곤두박질치며 들어가는, 흥성스러운
사람들의 자취
이제는 깊은 물속처럼
흔적 없이 고요하다.
창, 창문마다 드리운 채색이 황홀한
반투명 스테인드글라스
커다란 일곱 기둥
조용하다, 죽음 이후인 듯.
검은 연기를 높이 드높이 끌어올리는
불길 속의 노틀담,
중세 고딕의 꿈이 불에 타는데
온몸으로 콰시모도가 울리던 종소리도 불타 버리고.
에스메랄다가 맨발로 춤추던 빈 광장에
꾸역꾸역 개코원숭이들이 모여들어 수군거린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종말이라고.
인류세의 종말이라고.
불편한 사랑
강인한
어린 것들을 재우고
자리에 누워 아내를 껴안아본다.
동그랗게 껴안아본다.
팔 하나가 몸통에 눌려
무심코 거북하다.
한 팔만의 사랑은
아무래도 미지근하고
남은 한 팔이 마음에 걸린다.
정식으로 마주 앉거나
정식으로 마주 서서 껴안는
그것이 원칙이겠지만,
우리 내외가
저 높은 구름 속
물방울이 물방울끼리 껴안 듯
그렇게 공중에 나란히 떠서
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래,그래,
이 불편한 방식을 참기로 한다.
물방울이 될 때까지 참기로 한다.
붉은 가면
강인한
걸쭉한 노을이 거대한 레미콘에서 빠져나와
까무룩 잦아드는 교정,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키 큰 나무들
시커멓게 날개 접은
가지와 가지에서 불길한 예언처럼 흘러나와
정문의 사비오 동상에서 루르드 성모동굴 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는 것들,
그렇게 찍찍거리는
츳츳츳 침을 뱉는
날개 치는 수백 마리 저것들은 박쥐, 박쥐 떼였다.
동굴에서 걸어나온 오월의 성모가
지그시 밟고 선 발밑
두 갈래 빨간 혓바닥을 입에 문 뱀이 몸부림치는 밤,
박쥐 떼가 달려들어
우리들의 악몽을 향해 할퀴며 덤벼들어…….
아침 햇살이 황금빛으로 비치는 성모동굴 앞
땅바닥에 시든 장미처럼 나뒹구는 건
간밤 박쥐들의 저주가 끈적거리는 우리들의 얼굴,
붉은 가면들이었다.
붉은 벽돌
강인한
어린 살모사가 겁 없이 저보다 몸집이 큰 지네를 삼켰다.
뱃속에 갇힌 지네는 뱀의 내장을 다 파먹고
아랫배를 뚫고 나오다 대가리만 내밀고 죽었다.
동강 난 뱀도 죽었다.
원한 많은 자의 이갈림이 연두를 깨뜨리고
짐승으로 터져 나오는 법.
연두의 무른 속살을 찢고
경면주사가 풀리는 하늘, 노을로 빠져들면
온통 핏빛.
도립병원에 가 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우걱우걱 빵을 사먹던 날들이, 아직도 거기
허기진 포클레인 앞에 지네처럼 붉은 벽돌로 박혀 있다.
붉은 사막을 건너는 달
강인한
친절한 억압만이 눈 가리고 손 내미는 시대
모래바람 치솟는 하늘 아래
내가 너를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배스킨라빈스의 나이 서른하나가 너무 늦은 거라면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내게 말했다.
언제고 그렇다,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죽음이 내일 쓰나미처럼 떼 지어 닥쳐올지라도
오늘은 늦은 게 아니지.
어디로 갈까, 가야 하나
붉은 사막을 맨발로 건너가는 달을 보았느냐.
창밖으로 흰눈을 내다보는 호랑가시나무는
알알이 붉은 열매를 매달고
겨울 건너 봄 한철을 또 견디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문제는 상처일 뿐.
뼈에 가까운 상처는 지혈이 어려워
그런 상처만 아니라면
저 붉은 사막을 나는 걸어갈 수 있겠다.
낙타가 없어도
내가 낙타가 되어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붉은 사막에 걸쳐지는 보랏빛 구름
그림자를 넘어서면 거기
물결 소리도 나직하게 평화로운 곳,
모쿠슈라, 둥지 속에 새처럼 네가 잠든 곳으로.
브릭스달의 빙하
강인한
설레는 오로라 때문일까요,
잠이 오지 않아요.
빙하를 보았지요. 푸른빛이 눈을 찔러요.
브릭스달의 빙하, 저 높은 이마를 가진 빙하도
이제 많이 늙었어요.
눈꺼풀이 무겁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내 나이 열일곱에 만난 당신
그때 만난 당신은 늠름한 청년이었지요.
이제 나도 마흔을 넘겼어요,
빙하의 푸른빛이 온통 내 눈으로 흘러드나 봐요.
어젯밤 우리들의 딸이
저희 반 남학생이랑 함께 지낸 걸 알아요.
빙하가 우레처럼 울고 난 뒤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요.
오늘 새벽 그 사내애를 만났어요. 화가 나서
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당신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났어요.
저 빙하의 푸른빛이 산골짜기마다 넘쳐요.
이렇게 많은 푸른빛에 싸여서
나는 언젠가 눈이 멀 거예요.
당신이랑 작은 보트를 빌려 타고
피오르드에서 송어를 낚던 지난여름이 생각나요.
흥정도 없고 덤도 없는 세상.
이제 알아요. 나는 푸른빛에 둘러싸여서
머지않아 눈이 멀 거예요.
아름다운 브릭스달의 빙하도 언젠가는 폭포로
폭포 아래의 호수로 모두 다 풀어질 거예요.
내일 아침엔 노란 튤립 화분을 주방 창틀에 내놓겠어요.
아픔 반 기쁨 반, 딸애도 알게 되겠지요.
해가 없는 여섯 달, 해가 지지 않는 여섯 달
아이들은 알게 될 거예요.
블루베리는 보랏빛으로 익어가고
월귤 열매는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비 오는 날의 소네트 - 눈먼 사내. F
강인한
그대 쓸쓸한 마음의 전역에 비는 내린다.
천의 바람을 거느리고 천 개의 유리창을 두들긴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산 자의 마지막 말,
조용히 나는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일찍이 우리는 서로 사랑하였다.
뛰는 고동 소리를 아끼고, 만남의 오랜 동안을
휘어진 밤에 실어 보냈다.
돌아와 나는 시를 쓰고, 얼굴을 묻고 그대는 기도하였다.
한 달 동안의 깜깜한 시간을
상자 속 같은 방에 드러누워 나는 마시고
지난날의 어리석은 야망을 찢어 태웠다.
눈먼 사람처럼 더듬어 더듬어 빗물은 기어내리고
나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바라본다.
죽은 풍경이듯 우리는 씻겨 흐르고 있었다.
비의 향기
강인한
산초(山椒)나무 잎새들이 비에 젖는다
서늘한 너의 속눈썹이 생각났다
헤어지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너의 등에서
문득 산초 냄새가 난 것 같았다
새 울음소리 낭자하던
자귀나무
혼자 비를 맞는 밤
네 젖은 몸
깊은 곳
산초(山椒)나무가 있을 것이었다.
빈손의 기억
강인한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 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사과의 시간
강인한
미루나무 끈적끈적한 그늘 아래
한 줄기 길이 스타킹처럼 말아 올려지고
클레멘타인의 시간은
증발해버렸다
흰 살은 갈색으로 시들어 갔다
풍문처럼 떠도는 단물 냄새를 좇는 개미들
넘어가고 넘어오는 줄넘기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붉은 사과의 하얀 속살을 안고 빛나는
과도의 날처럼
한 줄로 이어진 사과 껍질처럼 깎아지는 파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넘어오고 넘어가는 파도 위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사랑의 간격
강인한
잎 무성한 목련나무는
봄밤에 등을 켠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이름표를 떼고
이웃한 모과나무에게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한다
벌레들이 뜯어먹다 버려 둔 이파리
모과나무는 이 여름
갈색으로 대롱거리는 철 이른 낙엽을
의붓자식 바라보듯 무심하다
달걀만 한 어린 모과 열매들
푸른 잎 사이 조마조마하게 눈만 반짝이며
숨었다
향기까지는 여름이 길다
사랑하는 이여
뜨거운 내벽을 두드리는 나의 질문에서
그대가 들려주는 응답까지의 거리는
기억력이 나쁜 목련나무와 시력이 안 좋은 모과나무의
사이 좋은 여름나기
그래 그래 꼭 그만한 거리일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기쁨*
강인한
목이 마르다고 했다
너는 몹시 두려워하며 물을 움켜쥐었다
저 언덕 너머 뒤쫓아 오는 추격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고 너는 말했다.
나는 네 손바닥 위에 한 움큼의 물을 보태었다
떨리는 너의 손가락 사이로
물은 금방 새나가는 것이었다
모래언덕 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한 모금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번개같이
내려진 기요틴의 칼날 아래
눈뜬 채 웃고 있는 내 머리가 뒹굴었다.
내 눈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 너의 모습이 비쳤다.
* 사랑의 기쁨 : 마르티니 작곡의 음악.
사련(邪戀)
강인한
나는 바람이다.
흔들어라,
흔들어라,
나무에서 돋아나는
저 파란 땀방울같이
날 흔들어라.
물속에 가라앉아
글썽이며 몸 비트는, 누이여
내 어린 날의 눈물을 흔들어라.
소주 먹고 울었지.
그저만 솟구치는 서러움이 배암처럼
내 얼굴에 감겨들어
아버지의 제삿날 저녁을
사랑해 보았지.
소주 한 잔 먹고
헤식은 한때의 사랑을
나도 해보았지.
그리고는 두려워라.
이마를 짚고
그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과 꽃을, 그것들이 떠서 흐르는 바다를
우리는 보았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바다를 향해
나무가, 온몸을 떨면서
자라고 있었지.
내 눈물의 모두는
꽃잎으로 팔랑이다가
그 저녁때의 술잔 속에 고이는
한 가닥의 바람.
살닿는 한 순간에는
피를 생각하였느니
무서워라, 무서워라, 아버지의 제삿날
저녁 어두운 땅속에서
꾸무럭거리는 바람이여
누이여.
사월병(四月病)
강인한
학교 풀밭에 엎드려 사월이면
구슬을 따듯이 또옥똑
시계꽃을 따 모으던 아이,
우유빛 여린 손목에 감긴 시계꽃에
제 나이만큼의 밥을 주고
사월이면 누이처럼 혼자 웃어보던 아이,
눈부신 햇빛 속을
빨강 노랑 바람개비를 입에 물고
달려오고 달려오던 아이,
사과향이 배인 이마로 사월이면
젖은 머리칼을 늘이우고
쪼그려 앉아 땅뺏기를 하던 아이,
뱅글거리는 아지랑일 단추 구멍에 끼우고,
고개를 외로 꼬으며 눈보다 은은한
흰 꽃길을 좋아라 걷던 아이, 사월이면
밤에는
먼 머언 데 산다는 좋은 나라의
좋은 사람들의 꿈을 꾸고
학교 측백나무 밑에서 작은 새처럼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고
꽃빛 울음을 가만가만 달래이던 아이,
때때로 누이처럼 혼자 웃어보곤
사월이면 웃는 입술이 붉던 아이,
눈망울 안에
남모르는 별을 키우던 아이.
사이
강인한
한여름 삼겹살집 앞 24시 편의점 그늘
땅바닥을 보며
남녀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두 사람 주변에 명함 쪽지 같은 전단지 뿌려져
반경 일백 미터 안에
은밀한 키스방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여자애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울음의 원인은 아마도 곁엣 사내 같았다
젊은 사내는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그 무릎이 절벽처럼 까마득하고
절벽 아래
소리 없는 강물이 깊었다
24시 편의점 그늘에 바람이 부는
사이
내가 바라보는 풍경에
투명한 실금이 뻗어나가고
물속에서 유리에 발바닥을 벤 것처럼
아픔이 누락된
사이
삼겹살집 간판이 은행으로 바뀌었다.
사자공화국(死者共和國)
강인한
1
부서진 목마(木馬)에 걸터앉아
아폴로는 목 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 사랑이여. 폭발하라, 폭발하라, 폭발하라.
용암으로 흘러내리는 화산지대의 사랑이여.
질주하는 바다 위에 서성거리며 찌글찌글 끓는
대륙의 내부
사자(死者)들이 만나 음모하는 대륙의 내부에서는
파란 동상(銅像)들이 서로의 몸뚱이를 깨물며 위대하였던 일생을 사랑하며 괴로워하며
피우는 유황 연기.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은
절망하지 않고 다만 누군가의 선동과 누군가의 자살과 누군가의 반역을.
2
폐허의 신전에는 금빛 과일나무가 분홍색 뿌리를 태우고
역사(轢死)한 당신의 튀어나온 동공에서 피는 붉은 꽃,
꽃잎은 하늘하늘 날아다니더니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몸을 파고드는 때
호화로워라 눈(雪)빛처럼 젊은 광선,
늦게 배달된 세기(世紀)의 광선이여.
3
굉음(轟音)을 내고
성난 군중을 뜯어먹으며
생활하는 도시(都市)의
검은 각혈,
철조망에 널린 병사들의 내의와
비누칠한 친구의 동정(童貞),
그리고 숱한 타인들과의 비밀한 거래가
남김없이 하늘에 반납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탄로 나지 않은 비밀을 축하하는 빛살, 빛살, 빛살,
우리들의 얼굴은 번쩍거린다.
죽음이 두려워서.
일상의 슬픔을 모르는 당신에 대하여 나의 성대(聲帶),
아담의 사과는 의문부호(疑問符號)의 결정이 된다.
두려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4
안개 속에서 밀선은 창백한 얼굴로 정박하고
도개교(跳開橋)를 들고 마중하여 달려 나가는 귀항지,
그러나 사월에는 얼어붙는 항구여.
반도(半島)를 핥고 지나가는 데모크라시여.
그리고 소셔리즘이여.
빈한한 거리거리에 밤마다 창궐하는 대량생산의 사랑과
해저에 파묻히는 역사와
유탄에 쓰러진 혁명은
누구를 사랑하였음인가.
참으로 지극한 창부의 사랑.
창부처럼 달려들던 밤의 반도,
집과 옷이 없음을 탓하지 말라.
굶주렸던 사랑, 너무도 굶주렸던 사랑이므로.
5
유리 상자 속에서 숨을 죽이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옛날에 사는
나의 신부(新婦)여
울어서는 안 된다.
광물질의 날카로운 터럭으로 부서지는 이를 칫솔질하며
날마다 조금씩 죽음을 입가심하는 것을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검은 음부(音符)를 밟고 내려오는
당신의 피곤한 살갗에 입맞추며
빛 무너져 흐르는 출구로
내보낼 때,
살아 있는 목숨에서 의식이 붕괴하는 아픔 같은 것은… 아픔 같은 것은…….
6
봄이 쌓이는 공화국 광장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어깨 없는 비너스는
어여쁜 석주(石柱),
죄가 있다면
당신에게 죄가 있다면 반구형 유방에서 분수로 터져 나오는
불륜(不倫),
요원한 초록의 산하를 우윳빛으로 물들일 것이었다.
홍등(紅燈) 속에 명멸하는
꽃 같은 남자들의 끊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가
오롯이 타는 불빛, 불빛, 불빛만으로도
눈만 감으면 된다.
충분한 비밀이 된다.
여자여, 당신은
나의 의문부호에 목을 매어 자살한 뒤 저축하였던 죽음을 꺼내어
지금은 어느 불빛 아래에서
대리석의 어여쁜 어깨를 자르고 있는가.
끝없는 대륙의 내실에 스며들어 어느 동상의 괴로운 종언(終焉)을
대변하는가.
조각하는가.
아, 차라리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7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
무한한 황금의 바람 속에 나부끼며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국왕은 기다릴 것이다.
국왕은 사라질 것이다.
8
찰나마다 폭발하는 바다, 도도하게 진주하는 대륙의 내부에
무수히 존재하는 허무한 자아(自我)들
갈가리 찢겨나가는 귀곡성(鬼哭聲)만이 여기저기 낭자하게 흩어져 있고
일시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떤 예감도 없는 몸짓을 사려 국왕의 거대한 동공 안으로
끌려 들어갈 뿐
음향관제의 생명이다.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모조리 추억할 수조차 없이 젊은 생명은.
삭제되는 풍경들
강인한
눈이 내린다
먼 산이 삭제되고
건너편의 거리가
한 줄 두 줄 하얗게 삭제된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이사온 화분들
소리 없이 푸르다
고무나무 콤펙타
바킬라 켄차야자
슬며시 손을 내리는 스킨다비스
아침에 문득 거실 바닥에 떨어진
동그란 열쇠고리
아니, 부처님의 손가락처럼
몸을 말아 뻣뻣이 말라죽은
지렁이 한 마리
어느 화분에서 기어 나왔는지
그놈은 상대를 밝히지 않은
관엽식물과의 불화 끝에
단식을 하다가
마침내 자살한 것인지
눈이 내린다
하루종일
모음과 자음 따로따로 삭제되고
삭제되는 문장들.
산수유꽃 피기 전
강인한
산수유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다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살갈퀴 만나러 가는 길
강인한
이촌로 88길 30의 이른 아침에
똥아저씨네 애인이 졸업한 학교 골목
마광수가 살았던 빌라를 지나면 목련이
개나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국제부동산 지나
평화부동산 연세부동산 소망약국 지나, 샤인부동산
산수유와 라일락을
지난다. 진입 금지에 볼륨을 낮춘
저팬타운을 끼고 봄으로 가는 초록버스 3012와
강변북로 옆구리를 뚫고 지나가는 굴다리 건너
이촌한강공원, 두 줄로 마중 나온
산책길의 미루나무
초록초록 풀숲에는 살갈퀴, 아기 손톱만 한 살갈퀴
애잔한 분홍을 편다.
살구나무 아래
강인한
살구나무 한 주가 탱자울타리 안에 서서
연년생으로 아이 셋을 낳고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지
그리고 어느새 봄이 가는지도 모르게
도랑물에 귀를 적시고
문 밖에서 보리가 익어갈 때
스스스 바람소리를 내며
보리까시락은 아기 업은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싶어하였다
낮은 굴뚝에서 삭정이를 때는 굴풋한 연기
마당에 구름처럼 퍼지는
가을 해거름이 나는 좋았는데
사르락사르락 격자문의 창호지에
깊은 밤 눈발이 부딪는 소리를 손에 쥔 채
젖먹이를 안고 잠든 아내는 왕후의 꿈을 꾸었다.
삼각 해변을 달리는 개 - 끌로드 를르슈, 〈남과 여〉
강인한
위.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뛴다. 말 한 필이 뛴다.
말이 뛴다. 말 두 필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 세 필이 뛴다.
새도록 짖으며 달리고 또 달리는 장 루이의 차.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네 필의 말이 뛴다.
아이들이 소리치며 해변을 달린다. 파도처럼.
파도가 짖으며 해변을 달린다. 개처럼.
새벽 유리창에 흐르는 배기음.
삼각해변을 달리는 개.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위.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강인한
초식동물에게도
산다는 것은 본능,
적응하는 건 삶의 수단이다.
아가야,
옛날 코끼리들에겐 길고 아름다운
어금니가 있었단다.
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
그 불쏘시개로 필요한 상아.
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하는
코끼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래서란다.
어금니 없이 태어나는 모잠비크의 코끼리
아가야,
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그 슬픈 행복을 너는 아는 거니?
상자 X
강인한
택배 트럭이 도착한다.
닫혀 있는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모르는 기사는 경비실로 상자를 들고 간다.
상한 여름이 스티롬 박스 안에서
슬슬 부패한 소문의 알을 슬기 시작하는 오후-.
기억 속으로
끝없이 기억 속으로 침몰하는 군함이 있다.
상자 X가 있다.
날 좀 꺼내다오, 그리고 제발
내 눈과 입에 가새표로 붙여놓은 이 테이프를 떼어다오.
새벽 세 시에 내리는 비
강인한
빗속에 운다.
울부짖는다, 핏빛
울음소리.
나는 문득 잠을 깬다.
어제 몸을 풀었는데
녹슨 철문 앞.
새벽 세 시다. 울울창창하다.
먹빛 하늘 쏟아진다.
짤막짤막한 은빛, 쏟아진다.
직선의
이 은빛은 독이 묻어있다.
층계 밑으로 구르는
무녀리와 눈도 못 뜬 어린 것들,
눈앞에 목줄이 너무 짧다.
쇠못 같은 빗줄기.
벼랑 끝에서, 간신히 나는
손바닥에 받는다.
밤의 냇물에서
가만히 건져 올린다,
숨 쉬는 꽃잎들.
새벽의 질문
강인한
밤이라 해도
눈떠 보면 한밤의 어둠
흐릿한 흑암 속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먹지에 앉은 한 방울
이슬이 하얀 빛을 빨아들이던 때인가.
불사르는 소지에서
죽은 아버지의 말을 만나던 때인가.
불이 불 속에서 닳아 스러지듯이
나는 영원히 없는 존재인가.
영혼이란 없는 것인가.
영혼의 빛깔을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죽음을 만날 것이다.
우리를 형성했던 살과 피와 정신은
바스러질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름 없는 것으로 물속의 잉크처럼
풀어질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아아
마른 풀뿌리가 빛을 받아 가늘어지고
한 알의 나프탈렌에서
나프탈렌의 영혼이 사라지는 것을.
새장
강인한
야생의 새 한 마리 새장에 갇혀 있었습니다. 길고 긴 꿈결인 듯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부리에 머물던 햇빛 삭은 지 오래고, 예전의 깃털을 간질이던 차가운 바람결도 갇혀 사는 새를 잊어버렸습니다. 동그란 눈망울에는 새파란 하늘이, 하늘이 여름을 넘기고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야생의 새 한 마리 사시사철 벙어리로 벙어리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달도 별도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었습니다. 비비비비비(非非非非非)! 꼭 한번 새가 울었습니다. 오, 문득 그때였습니다. 새장의 굵은 철사가 핏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 것은.
샤르트뢰즈*의 나무 한 그루
강인한
협곡 위로
쏜살같이 흐르는 구름
별들의 운행.
나무여 보는가.
고립이 두렵지 않은 기나긴 곡선의 내부
침묵으로 벽을 쌓은 서른 개 독방
1인분의 음식을 나눠주며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
돌바닥에 깔리고
무반주의 그레고리안 찬트.
나무여 듣는가.
기도를 위해
널빤지에 무릎 꿇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작은 불빛, 조용히
한 방울
두 방울
검은 파문을 짓다가
내면의 고백을 움켜쥔 빗줄기.
나무여 아는가.
쏟아지는 장대비
골짜기 가득
허연 물보라.
* 샤르트뢰즈 : 프랑스의 남동부 알프스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봉쇄수도원.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강인한
가난한 남녘 산골에서 태어난 계집애였네.
안 이쁜 엄마와 범상한 아빠 사이의 밉지 않은 딸이었네.
학창시절에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칠 줄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수술을 받고
꽃보다 무명 배우가 됐다네.
그 다음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신문사주가 흐흐 옷을 벗기고
방송국 대머리 아저씨가 헐레벌떡 깔아뭉개고
악마는 서른 하나, 백 번도 넘게 접대를 하며 울었다네.
어머니 제삿날에도 끌려가 짐승들의 노리개가 되었다네.
별이 되고 싶어, 까만 하늘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눈물로 쓴 편지, 피로 쓴 호소문
그게 다 가짜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구린내를 덮고 똥 막대기를 감추려는데
히히히 상하이 스캔들이 터지니, 얼씨구절씨구
이것으로 덮을 수 있으려나 몰라.
불길 위에 부은 기름인가 씩씩한 소문은
끝도 없이 타오르네, 연기도 없이 타오르네.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하늘도 무심치 않은 게지, 무심하지 않은
땅인가, 바다인가, 무심치 않은 바다 속인가
백 년 만의 대지진에 이웃나라 전체가 흔들흔들
쓰레기를 앞세워서 쓰나미가 밀려오네, 밀려오네.
쓰레기를 앞세워서 덮고 싶은 세상 덮어버리고
덮고 싶은 뒷구멍 덮어버리고…… 고마운 대지진이여, 쓰나미여.
산골에서 자랐지만 별이 되고 싶었던 계집애
예쁘지 않았지만 별이 되어 웃고 싶었던 계집애.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 쓰나미에 묻히네, 휩쓸려 가네.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
성자(聖者)
강인한
오목눈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작은 둥지
눈물 찔끔 알을 낳았는데
하늘빛 제 설움으로 낳았는데
뻐꾸기가 몰래 떨구고 간
하늘빛 둥근 알
눈도 못 뜬 고 벌거숭이가
등으로 등으로 오목눈이 알들을 밀어내네
밀어내서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네
가엾어라
제 새끼들을 죽인 뻐꾸기 새끼인데
오목눈이 먹이를 물어다 먹이네
그나마 목숨은 한 가지라고
제 몸집보다 훌쩍 큰 남의 자식을
오목눈이 지성으로 먹여 살리네
세속 도시
강인한
4
중환자실에 들어간 수술 의사가
오 분만에 씩 웃고 나와 고무장갑을 벗고
초록빛 수술 가운을 벗었다
세상에 가장 손쉬운 수술이었노라고
그는 손을 씻으며
소리나게 코를 풀었다
회복실로 들어간 환자를 따라 보호자들이
우르르 쥐떼처럼 몰려 들어갔다
환자는 대형 거울 앞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의 복부에는 쓸개도 없었고
간도 없었고 아아, 안면도 없었다
환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다.
세탁기 속에는 생쥐가 산다
강인한
쥐구멍이 있어
세탁기 속에 안 보이는 쥐구멍이 있어
양말 한 짝을 생쥐가 물어가 버리고,
감춰둔 양말 한 짝을
또 살그머니 갖다놓기도 하였다.
자정 가까운 때
이불 속을 파고드는 비몽과 사몽의 틈을 비집고
드러누운 잔등이
내 손이 닿지 않는 달의 뒤편처럼 캄캄하다.
남의 손을 빌려야
닿을 수 있는 미지의 단말 구역
시원한 손의 방문을 기대한다.
정곡을 짚어서 시원하게 뚫어주기를 기대하건만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건조대에 널기 위하여
내복을 털다가
생뚱맞게 소매 속에서 양말 한 짝
미안한 듯 밤톨처럼 굴러 나온다.
아하, 거기였네. 생쥐가 물어간 쥐구멍이 바로 그것이었는가.
꼭 당신의 손이 필요한 시간
아니, 필요한 당신을 사나운 가려움증이 깨우쳐준다.
당신의 손이 허둥지둥
이리저리 뒤집고 살펴도 거기, 거기가 아니다.
마침내 내 손수 속옷을 벗어들고
활활 털어도 떨어지지 않던 건
바로 요것, 등판에 붙어서 끝끝내 시치미 떼던
한 가닥 머리카락이었다.
이 작은 발견의 기쁨은 보름달처럼 환하다.
세한도(歲寒圖) - 1998년 6월 2일, 비
강인한
비 오는 날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굽은 등허리에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일렬횡대로 쪼그려앉아
밥을 먹는다
용산역 앞 광장
담벼락을 앞에 하고 주기도문을 마친 다음
다같이 슬픔으로 따뜻한 국물을 떠서
무료 제공의 한 끼 식사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
집을 나온 우리 나라의 아버지들
빗속에 나란히 앉아서
추운 겨울 하늘 오선지에 앉은 참새들처럼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오전 열한 시에 땅바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
손금에 갇힌 새
강인한
어느 여름이었을까,
땀 뻘뻘 흘리며 잠을 자다 꿈을 꾸었지.
꿈속에서 길을 찾다 불타고 허물어진 마을 어귀에서
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그 먼 꿈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찾지 못해
해 지도록 울며불며 헤매기만 하였네.
서른 살 풋내기 교사, 내 젊은 날은 꿈에 갇혀 못 나오고
꺼멓게 타고 남은 교실 층계 뒤로 돌아가며 멀리서
수업 시작 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하였지.
까마귀처럼 웃는 아이들 유리창마다
기웃기웃 어떡하나,
꿈 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아직도 모르는데.
손을 그리는 손 - M. C. Escher의 석판화 「Drawing Hands」
강인한
흰 드레스셔츠에서 빠져나온 손
연필을 쥐고
과거에 매달리고 있는 기억력이 나쁜 손이 있다.
의심이 많아서
만져보기 전엔 절대로 믿지 않으며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는 실증(實證)의 습관.
완벽하고 높은 일상의 궤도에 진입하기를 기도하는 손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꿈속에서 건져낸 표정은
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루하다.
검은 탁자 위 회색 중절모 속에 접혀 있다가
줄줄이 풀려나오는 붉은 리본,
꾸깃꾸깃 접혀 있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한 마리 흰 비둘기는 당신의 두 손이
간절히 바라는 꿈.
인생이라는 두꺼운 책 표지를 잠시 덮어두고
당신은 오른손으로 연필을 쥔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림자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늘게 그려지는 선, 선들을 모아
쌍둥이처럼 닮은 당신의 오른손을 향하여
연필 끝으로 좇아가고 있는 내 오른손의 목마름이여.
숨바꼭질
강인한
하혈(下血)이 있던 날
안해의 면구스러워하는 낯꽃만큼
해야,
하이얀 해야.
간밤에 우리 집 대문간에서
쥐 한 마리가
덫에 치어 죽었다.
- 나도 언젠가는 덫에 치인다.
바람이 쏟아지는
대문간에서.
백지와 숯과 고추와 출입금지(出入禁止)
신명나게 엮어 다는 나의 엄마
피 붉은 이끼가 언제나 피어있는
대문간에서
초산(初産)의 안해 낯꽃만큼 노랗게
춤 덩실 추는 나의 엄마.
해야, 해야,
아들이 자랑스런 나의 엄마를 봐라.
덫에 치인 쥐의 하복부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아침에 나는 뒤란에 숨어
태워 보았다.
- 안해의 자궁에서 삐져나온 태(胎)를 엄마는 마당에서 태웠다.
해야, 우리는
부끄럽다, 응?
내가 치일 덫은 지금 안 뵈지만
해야, 우리 숨바꼭질 하자야.
하늘 꽁꽁
땅 꽁꽁
꼭꼭 숨어라.
안해야, 안해야,
숨도 쉬지 말아라.
숨어 사는 영혼처럼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스벵갈리 앞에 선 여인
강인한
겹겹 두려움을 껴입은 어둠 속에서 너는 무엇을 보느냐.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눈짓에 소스라쳐
휩쓸리는 파도 속 해파리처럼 너의 가녀린 어깨는 떨고 있다.
지난봄 어느 날
유원지를 빠져나간 샛길 끝 작은 승용차 안에서
비밀요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처자식을 남겨둔 채 번개탄을 피우고
끝까지 비밀을 가져간 사내의 신의에 충분한 보상이 내려지리라.
만약 나에게도 그런 선택이 불가피하다면
나는 백합꽃 한가득 차에 싣고
그 속에서 한 오백 년 잠들어도 좋으리.
치사량의 황홀에 파묻혀.
죽은 네 어머니 목소릴 갖고 왔다. 들어볼래?
가여운 내 딸, 거울 앞에 서 보아라.
내 손이 가리키는 거울 속 수은의 길을 꿈꾸듯 걸어가 보아라.
한번 뒤돌아보면 재가 되는 세상이 나올 것이다.
내가 꺼내줄 때까지
내 귓속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검은 구더기들
목구멍을 열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개구리들.
개구리 한 마리가 어깨에 올라 문득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흔들리며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속 이 개구리가 네 어머니인 것을.
지금 내가 갇힌 사각의 벽엔 거울이 없지만
내 마음 속 굽이도는 나선의 층계를 내려가면
정면에 면경이 걸렸고, 거기 젊은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있다.
장터에서 유리전구를 와삭바삭 깨물어 먹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여자여 너는 들을 것이다.
일곱 번 몸을 바꾼 스벵갈리의 목소리.
이리 오라, 백합 같은 처녀여 백치의 내 사랑이여.
간절함만을 안은 채 무서워 말고 내게로 오라.
연가시 유충이 귀뚜라미 머릿속에 들어앉아
그리운 물 냄새를 찾아가는 것처럼.
죽음 앞둔 코끼리가 머리 들어 킬리만자로의 달을 바라보는 것처럼.
스벵갈리(Svengali)의 거울
강인한
겹겹 두려움을 껴입은 어둠 속에서 너는 무엇을 보느냐.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눈짓에도 소스라쳐
파도에 휩쓸리는 해파리처럼 너의 가녀린 어깨는 떨고 있다.
지난봄 어느 날
유원지에서 빠져나간 샛길 끝 작은 승용차 안에서
비밀요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처자식을 남겨둔 채 번개탄을 피우고
비밀을 끝까지 가져간 사내의 신의에 충분한 보상이 내려지리라.
만약 나에게도 그런 선택이 불가피하다면
나는 백합꽃 한가득 차에 싣고
그 속에서 한 오백 년 잠들어도 좋으리.
치사량의 황홀에 파묻혀.
죽은 네 어머니 목소릴 갖고 왔다. 들어볼래?
가여운 내 딸, 거울 앞에 서 보아라.
내 손이 가리키는 거울 속 수은의 길을 꿈꾸듯 걸어가 보아라.
한번 뒤돌아보면 재가 되는 세상이 나올 것이다.
내가 꺼내줄 때까지
내 귓속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검은 구더기들
목구멍을 열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개구리들.
개구리 한 마리가 어깨에 올라 문득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흔들리며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속 이 개구리가 네 어머니인 것을.
지금 내가 갇힌 사각의 벽 속엔 거울이 없지만
내 마음 속 굽이도는 나선의 층계를 내려가면
정면에 면경이 걸렸고, 거기 젊은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있다.
장터에서 유리전구를 와삭바삭 깨물어 먹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여자여, 너는 들을 것이다.
일곱 번 몸을 바꾼 스벵갈리의 목소리.
이리 오라, 백합 같은 처녀여 백치의 내 사랑이여.
간절함만을 안은 채 무서워 말고 내게로 오라.
연가시 유충이 귀뚜라미 머릿속에 들어앉아
그리운 물 냄새를 찾아가는 것처럼.
죽음 앞둔 코끼리가 머리 들어 킬리만자로의 달을 바라보는 것처럼.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여자
강인한
달걀에 우유를 섞어 당신은 힘차게 휘젓는다
차려 자세의 벚나무 두어 그루 창밖에서
스크램블드에그를 기다리는 동안
만성소화불량의 기색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내 사랑, 한때는 멋진 남자였는데
비의 씨앗을 잉태한 보랏빛 구름은
추억을 기울여 과일 접시 속으로
사월의 꽃향기를 가만가만 흘려 넣는다
시들어버린 야망, 시들어버린 사랑을
뱃속에서 지우고
당신은 붉은 핏방울을 방울방울 떨군다
번져가는 불길한 소문처럼 카펫이 붉게 물든다
당신이 내다보는 남쪽
창밖으로 초록빛 느린 시간이 흘러가고
한꺼번에 붉은 물감이 쏟아진다
죽은 포도나무 가지는 붉은 식탁보를 넘어
당신 몸을 뚫고 주방의 붉은 벽지를 타고 오른다
벽에 걸린 새빨간 태피스트리의 문양에
검은 번개가 긁힌다.
슬픈 연애
강인한
이제 우리 만나지 말아요
그대의 제의에 나는 끄덕였다.
그래 만나지 말자고 내가 발설하는 순간
나의 말은 비상을 중단하고
생명을 가진 것에 환희를 채색하던 힘을 잃고
늪 속으로 가라앉는 돌이었다.
서서히 조여오는 이 괴로움의 뿌리를
그대는 모르리라.
맹목이며 필생의 지향일 수밖에 없는
그대 앞에서 나는 한 그루 나무
잘라내도 잘라내도 살아나는
이 아픔의 잎잎을 그대는 모르리라.
던져진 나의 말은
기쁨으로 빛나는 꽃눈 하나 티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나의 내실에는 바닥 없는 심연이 있고
나의 말은 그리로 떨어진다.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운 섬광,
그대에게로 가던 나의 말은
그대 침묵의 암벽에 부딪히며
언제까지 피 흘리며 부서져야 하는 것일까.
그 언젠가 나는 그대를 향하여
갈기를 나부끼며 초원을 질주하는 백마였고,
그치지 않는 노래로 흐르는 아침의
시냇물이었다.
밤의 차가운 대기를 풀어내는 별빛
파괴할 수 없는 왕국 속에 홀로 숨어
그대는 총명한 여자, 살아가는 방식을 안다.
나의 말에 사물은 움직이지 않고
내게서 내게로 사라지고 마는 나의 말은
그대의 잠 위에 뜬 방황 하나도
아아 이제는 건져내지 못한다.
슬픈 영혼 위에
강인한
1 - 불꽃
소멸해야 하는 것들 곁에서
여섯 날 여섯 밤을
나의 잠은
가혹하게 잘려나간다.
인어의 혀처럼 잘려나간다.
여섯 날 여섯 밤을
장미의 꽃잎 속에 찰랑이는
시레네스의 물결이다가,
살은 살대로 피는 피대로 나뉘어
외로운 항해를 한다.
유랑하는 무형의 안개 자욱하고
슬픈 것들의 나직한 영혼 위에
나는 가만히 떨구어본다,
한 방울의 빛나는 아픔을.
시
강인한
백지에 시를 쓴다
흰 수반 위에
혈액 같은 몇 송이 꽃
신은 잠들고
진흙 처럼 시달린 정신에
한 사발의 찬물,
한 사발의 그 정결한 해갈이,
손을 씻으면
손끝에 젖는 하아얀 신의 음성
시계 속의 뻐꾸기
강인한
어두운 진흙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
네가 부르는 소릴 듣는다
적막한 심연의 바다 어디선가
태엽이 풀리고
나는 눈을 뜬다
세상은 한겹 잠 밖에서
오늘 하루도 소란스러운 것을
아침 이슬 빛나는
초록 숲 그늘에서 떠온 너의 목소리만
기계 속에 살아서
혼도 없이 몸도 없이
뻐꾹 뻐꾹 뻐꾹
네 울음소리 파아란 길을 따라나서면
오래 잊었던 청년의 산과 강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느냐
박제된 너의 울음 소릴
내 귀는 껍데기로만 들으면서
건성으로 뻐꾹 밥을 먹는다
건성으로 뻐꾹 집을 나선다.
시들지 말아라 원추리꽃
강인한
백 년 전에도 너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층 전시실에서
발뒤꿈치의 시간을 뜯어내고 내려온
모네의 원추리꽃
시들지 말아라 여인이여
해 뜨면 하늘 푸르러지고
죽었던 짐승도 노래 속에 다시 살아난다
내가 돌아볼 때까지 눈물을 닦고
거기 서 있어라 길고도 슬픈 목을 세우고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살그머니 돌층계에 앉는 바람
당신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 한 잔
우리들 사랑도 이처럼 쓰고 또한 달콤했거니
세월이 가도 시들지 말아라
꽃이여 내 여인이여
아직은 당신의 이름 불러줄 사람
저 어두운 지하철역 출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시들지 말아라 오랜 옛날에도 아름다웠던 사랑
오늘 다시 네 앞에 꽃피울 사람 있으니
시민들 - 「프루프록의 연가」를 쓴 T. S. 엘리엇에게
강인한
이 도시에는 영양이 많다.
밤이면 페가수스가 달려와
은빛 나래로
가난한 우리들의 잠 속을 헤엄치는
이 도시에는
몇 개의 마스코트
아라베스크 무늬가
고운 이마로 늘이어
스적스적 흐늘거리는 몇 개의 마스코트
자정 녘의 이 도시에 깔려 있는
우리들의 사랑
영양 많은 우리들의 잠덧.
지난밤에 있었던
다른 도시에서의 내란과 주정
몇 조각의 전쟁 기사를 싣고
떠오르는 한 척의 태양
우리들의 내부에서
한 척의 태양이 술렁이는
아침
우리들의 소년기는
무성한 이오니아의 바다
학교에서 바라본 금환일식
혹은 노래도 꽃도 없는
조국도 없는
신문지.
모두들 떠나간 그 해변의 운동장에
그 잔영(殘影)에
나뒹구는 만국기
행진곡이 펑펑 쏟아지던 거리거리
가가호호의 뜨락에서
가끔씩 이 도시를 떠나간 친구들의
다정하고 엉뚱한 변모가
아침에 피는 풀꽃
지는 잎새에
맺히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는데
우체부의 피곤한 손끝에서
반려되는 우리들의 안부.
바람이 불고
사이렌이 불고
우리들의 정오는 없고
유치원이 있는 성당
지붕에 웅크린 비둘기와 낮달
울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삭은 이에
순금의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의 분분한 낙하
그것들이 맑은 음색으로
시가지를 뛰어다닌다.
뛰어다니며 예감하는
건강한 우리들의 죽음.
명절날 우리들은 영화관에 갔다가
기념사진을 찍고
바람이 이는 엷은 미열을 느낀다.
파이프 오르간의 기분 좋은
모음과 함께
우리들이 마련하는
한 가닥씩의 귀가(歸家)
여자들이 집집마다 화장한 얼굴로
기다리는 저녁 무렵
전화로 사랑을 이야기하면
여자들은 페넬로페
땅속의 무지갯빛 샘물을 길어
밥을 짓고
뜨개질을 하고.
일몰이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서
지그시 머리를 드는 식욕
고궁의 뒷길을 가는 잿빛 부연 눈물
눈물 속에 잠기는 참 작은 세상
잿빛의 고서점
잿빛의 주점 안에서 문득
떠나갔던 친구들의
하얀 손이 나온다.
그들의 하얀 손이 나와서
어두운 우리들의 이마를
뭉쳐져 있는 기억을 더듬는다.
언제고 없이 바람 부는
사이렌이 부는
아스팔트를 지나서
우산을 들고
우리들이 서성거려 보는
시장 어구에
부서져 날리는 랩소디
이 도시는 얼마쯤은 초원
꿀벌들이 잉잉대는
사월의 초원
젖줄이 흐르는
그 사월의 온화한 말씀이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은 율리시즈
인어의 노래가 묻어 있는
침침한 실내에서
우리들을 맞아주는 침침한 실내에서
영양이 많은 잠 속
뒤척거릴 페가수스의 별빛은
유리창에 긁혀 떨어진다.
우리들은, 우리들은 수부(水夫) 율리시즈
침침한 실내
아른대는 청동(靑銅)의 바다.
나무가 자란다.
금빛의 잎새 달린 나무가
지붕을 뚫고 자란다.
그 나무 등걸 안에
은밀한 우리들의 음성과 식탁
식탁을 앞에 두면우리들은 마스코트
아라베스크의 마스코트
우리들의 내부에 순순히 귀항(歸港)하는
한 척의 태양
눈부신, 눈부신 갈채를 내리며
한 척의 태양이 정박하는
이 도시에는 영양이 많다.
미명(未明)의 바닷속에
움트는 꽃나무 끊이지 않는 노래
우리들이 가져보는 벅찬 조국이
꿈틀거리는 지느러미의
바닷속에 자욱이 꿈틀거리는
우리들의 연애에 미명의 바닷속에
순금의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의 분분한 낙하
그것들이 맑은 음색으로
시가지를 뛰어다닌다.
뛰어다니며 예감하는
건강한 우리들의 죽음.
신들의 놀이터
강인한
태초에 말씀이 있어도 좋고
장엄한 노을 아래 배경 음악을 까는 것도 좋겠지
삼면을 장벽으로 세우고
한쪽은 바다가 좋아 평화로운 바다 지중해
대낮의 길거리 아무 데도 도망칠 곳이 없는 거리에
아이들이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
날아오는 비행기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하마스의 로켓탄을 던져봐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화우라늄폭탄도 몇 개
백린탄은 반짝반짝 폭죽처럼 아름답지
밤의 커튼 아래로는 신성한 달빛을 좀 흘려줄까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
철근이 꽃대처럼 목을 뽑아 내다보는 거기
어린 사내아이의 연한 뱃가죽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물고 가는 개
포도알처럼 달콤한 소녀의 눈을 파먹는 쥐들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
이 풍성한 성찬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어
유서깉은 원한을 그윽한 향불로 피우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봐, 붉은 피와 흰 뼈가 검게 타고
증오가 다윗의 별로 빛나는 그곳.
실성한 노래
강인한
샛노란 은행나무 잎새가
자욱이 떨어져 내리는
어두운 고샅
늙은 내외의 철 늦은 금슬
노란 정담이 너울거린다.
어깨춤이 들썩이는
때 묻은 조끼 안에서
은전을 세어 주듯
가장 손쉬웠던 사랑
가장 어려웠던 사랑을
떠나보냈다.
자식을 저승 보낸
쓸쓸한 동행.
다정했던 속삭임
애잦아 서낭당에 걸쳐두고
잊었던 고운 말씀들
몇십 년 만일까,
이 밤눈 뜨는 외론 말씀들끼리
겨울 암수의 뱀들처럼
땅속까지 스미어
훈훈한 은행나무 뿌리가 되고.
몇십 년 만일까
눈이 머는 내외의 정
오, 오래 오래 살아온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사자(死者)의 손가락은
까불거리던 여린 잎사귀는
전진(戰塵)에 더럽혀져
녹슨 고철보다 이미 낡은 것을…….
지금도 꺼지지 않는
앳된 손까불
돌아오마고 앳된 손까불
꺼지지 않는 잎사귀.
암수의 은행나무가
이슬방울을 비비고
몸 그리워하듯
서로의 허전한 손바닥에
쥐어지는
백년해로(百年偕老).
얼굴을 마주하고 보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은 죄업(罪業).
오, 오래 오래 살 것이며
그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별빛이 쏟아진다.
은행나무 가지가 꺾어진다.
부챗살의 잎새가 자욱이
안개로 흘러내려
흔들거리는 늙은 내외의
여생(餘生)을 뒤덮는다.
저승에서 녹슬어 가는
아들의 손까불이
은행나무 고샅 가득히 나부끼고 있다
씨
강인한
금빛 히멘에 무한한 가능성.
그 가능성을 찢고
생명이 율동하는 황홀한
분계점에서
상당히 슬픈 이륙(離陸).
세기(世紀)를 절단하는 빛과
전진(戰塵)으로 헐떡이는 호흡 속에
반짝이다가 더러는 침몰하는.
지구는 하나의 씨알.
지금 발아(發芽)하고 있을 것이다.
히멘의 저 곤충 허물보다 연한
가능성은.
싹트고 있을 것이다.
찢어져 피어나는 꽃잎을 위하여
씨앗
강인한
참외를 먹다가 나도 모르게 참외 씨를 삼켰다.
아아, 큰일 났다.
낼모레 내 몸에서 참외 싹이 파랗게 돋아날 테니.
여름 텃밭
줄줄이 뿌려 심은 며칠 만에
파란 싹 뾰조록이 나오던 배추 씨처럼.
어떡하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참외 씨를 꿀꺽 삼키고야 말았으니.
아껴 신는 악몽
강인한
지난달까지 신었던 악몽의 실밥이 풀어졌나 봐요.
잠을 깨고 나서도 한 짝이 헐렁헐렁 속눈썹을 떴다 감았다,
신기료장수에게 꿰매러 갔더니
벗어놓고 오후에 찾으러 오래요.
습관성 악몽을 몸에서 떼어내면
허전해서 나는 밥맛을 잃어요, 헛구역질을 하고
이 나이에 임신인 줄 알고 수캐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놀려요.
코에서 고름 같은 침 흘리고
발굽에 물집이 생겨 발을 저는
소와 돼지들도 지하철마다 킬킬거려요.
너무나 빠른 바이러스의 회전속도와 싸우다가 싸우다가 지쳐
못해먹겠다고, 등 푸른 생선을 향해 환승하든가
무제한 수입을 풀라든가.
아저씨의 명석한 두뇌회전은 어디서 학습한 결과인가요,
강남인가요 노량진인가요.
흙더미를 들추고 산에서 내려와
주둥이로 석회 가루를 뿜으며 달려드는
돼지, 저 성난 돼지들이 나는 무서워요.
배추이파리 같은 귀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저 돼지들이 고공에서 뿌리는 고린도전서 13장,
그것은 허기진 우리들에게 아저씨가 나눠주는
일용할 양식이었는데요.
맡겨논 악몽을 찾으러 저녁 무렵 구두수선집에 갔는데
휴가 중이니 잠을 깨우지 말라고
다소곳한 알림장이 붙어 있고
예쁜 주먹이 가문의 문장(紋章)처럼 그려져 있네요.
가운뎃손가락 하나 우뚝 솟아 있고요.
아랫것은 불편하다
강인한
쉬 잠들지 못하는 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모로 누워 칼잠이라도 청해 보는데
오른다리 아래에 깔린 왼다리가
무심결에 뻐근해진다
고개를 돌리면 왼다리 아래의 오른다리가
은근히 불편해진다
잠든 아내의 다리 위에 슬그머니
내 다리를 얹어보았더니
하하 이렇게도 내 온몸이 세상없이 편안하고
깃털처럼 가벼울 수가
하지만 잠결에도 아내는 기를 쓰고 밀쳐낸다
바위처럼 무겁고 답답하다면서
끙끙 용을 쓰며
내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걸쳐 온다
아이고 그렇구나
나무 뿌리 위에 나무 뿌리가 포개어져도
눈 위에 눈이 쌓여도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겹쳐져도
아랫것은 아무래도 위엣것의 반성 없이는
하염없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을
윗물 밑의 아랫물도
그래서 천근 만근 무겁게 흐르는 것을.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강인한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속으로 들어와 눈을 털고
낡은 외투 뼈아픈 세월을 털고
검정 모자를 벗어든 저이!
깜짝 놀란 건 의자였다, 딸꾹질처럼 피아노가 멎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잿빛 시간 속으로
가뭇없이 눈이 내렸다.
미술관 유리창 밖으로도 먹먹한 눈이 내리고
당신은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참새처럼
러시아의 눈 내린 광장에 새 발자국을 쿡쿡 찍고
백 년 전 가난한 사람들이
손 흔들며 흩어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 쌓인 눈의 무게를 마음에 달아 저울질하며
더운 커피를 번갈아 마시는 것,
타고 온 마차를 돌려보내고
돌아가는 바퀴소리에 옛날의 아픔을 실어 보내는 것
녹기 시작한 층계에 다시 눈이 내려
서로서로 꼭 붙들고 층계를 밟는 건 즐거운 일,
반짝반짝 빛나는 음악
날리는 벚꽃 사이로 한 줄씩 섞여들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인한
무서웠다. 소년은 변소에 혼자 가는 밤보다
이를 뽑는 일이.
실에 묶인 잠자리처럼
흔들리는 이에 기다란 실을 묶고 소년은 한없이 달아났다.
어디로 달려갔는지
알 수 없다. 소년의 추억은 문득
거기서 벼랑에 선다.
눈 딱 감고 뛰어내린 허공
얼굴에 닿는 바람,
호숩고 호수운 무중력의 공중이었다.
내 이는 모두 서른 개
두 개가 모자라는 억울함을 어디에 항의해야 하는가.
보철을 해준 치과의사는 대답을 주지 않고
오래전 간이 나빠 죽어버렸다.
아이즈 와이드 셧
강인한
황금빛 침묵의 마우스피스
입에 물고 지금부터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눈을 가렸으니 내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따라오십시오.
옆에는 비탈이며 개울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여기 풍찻간 속 비밀층계로 자, 내려갑니다.
갈색의 굵다란 바게트, 아니 사뮈엘 베케트 식으로
언어에 구멍을 뚫는 작업은 마냥 즐겁지요.
옷은 모두 여기 벗어놓고 박쥐 마스크를 쓰고
맨살에 붉은 망토를 걸치세요.
낼모레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검찰총장이 되실 분이시여,
여고생 코스프레를 각별히 좋아하시는 고상한 취향
인정해드릴게요. 검은고양이 마스크의 파트너
혹시 아시더라도 하체를 제외하곤 알은체하면 안 돼요.
쉬잇, 드디어 분홍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무대에 제3막이 올랐어요.
다음엔 고객님 차례입니다.
자기 성기에 입이 닿지 않아 차라리 새우가 되고 싶은 남자와
자신의 유두에 혀를 대고 자웅동체 달팽이 체위가 가능해진 여자가
뱀처럼 엉키기 전 빨리 준비하세요,
나보코프인지 나부콘지 분간하기 어려운 롤리타가 둘
히브리합창단의 노예가 셋,
우리 대머리 회장님이 전율하시는 2대 3 파티지요.
이제 벗으세요, 아니 마스크 말고
망토를 벗고 달려가세요, 눈썹을 날리며
몰약을 바른 알몸으로 날렵한 그레이하운드처럼
언어에 구멍을 뚫는 굵다란 바게트처럼, 아니아니 베케트처럼.
당연히 누리셔야죠,
선택받은 1퍼센트의 특권을.
아직도 나는 스무살이다
강인한
깨어진 유리 조각들이 튀어오른다
끈끈한 자력으로 엉겨붙는다
쨍그랑
여자의 입술에서
격렬하게 떨어져나간 사내가
성큼성큼 뒷걸음질친다
◀ ◀
그렇게 삼십년 세월을 되감아보면
젊은 날의 그리움과
최루 가스 속에
아직도 나는 스무 살의 어린 남자다.
암스테르담
강인한
공짜로 휴대폰을 바꿔준다는 전화가 또 왔습니다.
만원짜리 지폐가 든 봉투를 코앞에 흔들며
신문을 바꿔 보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는 게 유행이고 미덕이랍니다.
냉장고를 바꾸고, 비포에서 애프터로 얼굴을 바꾸고
정당을 바꾸고 심장도 바꾸고, 그러므로 비행기를
바꿔 타는 환승은 당연한 절차.
고흐씨, 빈센트 반 고흐씨
한 시간 반 동안의 무색무취,
당신의 고국 네덜란드와 차단된 거기를 뭐라 할까요,
마드리드에서 인천으로 가기 위한 환승구역.
말썽 부리는 맹장처럼, 시간을 없애기 위해 있는 곳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의 한 점.
가을 잠자리가 시간을 모으는, 죽은 나뭇가지 끝의 한 점.
그때 잠자리는 환승구역에 머무르는 중이었을까요.
당신이 마중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
무색무취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암스테르담에서
잠시 동안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고흐씨, 빈센트 반 고흐씨
겨울이 돼서 당신의 것과 비슷한 모자를 하나 샀습니다.
당신의 별에도 지금 눈이 옵니까,
이제 곧 이 별에서 당신의 별로 바꿔 탈 때가 다가옵니다.
약수(弱水)에 갇히다
강인한
맑은 강물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벽 속에 갇혀 있습니다.
- 제발 나를 꺼내 주세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탈바가지들 기웃갸웃,
- 아무도 없네.
투명한 벽을 지나 사람들 등 돌려 가버립니다.
* 약수(弱水)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 속의 강. 길이가 3천 리나 되며 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양파
강인한
지난겨울에 사 쟁여 놓은
양파 다섯 관이
연탄과 화분을 이웃하며
시멘트 부엌에서 겨울을 났다.
우리 집 찌개 속에도 들어가고
국거리랑 양념 속에도 간섭해 주며
긴긴 겨울을 나는 동안
여나믄 개가 남아서 정구공같이 궁글고 있다.
껍데기 안에 또 껍데기를 껴입은 채
하얀 섬유질의 그리움으로
겹겹이 싼 알맹이는 무엇이었나
나는 잘 모르지만
가엾어라,
마당의 수도꼭지가 더운물을 필요로 하는
이 겨울 동안에 소근소근 눈을 뜨더니
입춘날 아침엔 제법
새끼손가락만 한 파란 줄기를 내고 있었다.
냉혹한 부엌 바닥에 마른 뿌리로 누워서도
양파는 기어이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었는가
빈사의 몸뚱이 속에
불보다 뜨거운 자유를 한 줄기 태우고 있었다.
신앙보다 깊은 봄을
양파는 아아, 온몸으로 피워내고 있었다.
어떤 사랑 이야기
강인한
스무 살 무렵
내 사랑은 설레는 금빛 노을이었다.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서른 살 무렵
내 사랑은 희미한 꿈결 속을 서걱이는
가랑잎이었다.
속절없는 바람이 불고
바람 위에 매운바람이 불고
인제 사랑은
삶보다 어렵고 한갓 쓸쓸할 뿐,
어느 쓰라린 어둠 속
한 덩이 빛나는 슬픔으로
내 사랑은 운석(隕石)처럼 묻혀 있을까.
어린 왕자
강인한
내 어린 날의 몽당 크레용을 주세요.
까실까실한 흰빛 도화지에 나는 그리고 싶어요.
밤 검은 산에서 혼자 돌아오던
아홉 살의 보랏빛 산길을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
일요일의 심심한 하모니카 소리도 그리고 싶어요
내 어린 날의 색종이를 주세요.
불쌍한 네로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의
그 붉은 풍차를 오려 붙이겠어요.
바람 부는 날 팔랑거리는 옥색 대님도
내 손바닥을 간질이던 눈 까만 강아지 이름도
인젠 다아 기억할 수가 있어요.
소아과 병원에 끌려 들어가면
싸아하니 밀려오는 하이얀 병원 냄새
뺨 비빌 때 콕콕 찌르던 아버지의 턱수염도
안 잊혀요, 영영 안 잊혀요.
내 어린 날의 몽당연필을 주세요.
나는 적고 싶어요.
양지바른 골목길을 졸랑졸랑 달려오는
기쁜 발소리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이는 사, 이삼은 육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내 어린 날의 좋은 기억을 주세요.
그 어려운 병이래도 좋아요. 아주 다 주세요
어머니의 자정
강인한
뇌수의 어디쯤
명주실 같은 혈관이 막혔을까
세롤 주사를 빼고
틀니 한 짝도 빼버리고
혼수에 빠져버린 뇌혈전의 어머니
비가 내리고
시멘트 같은 침묵 속의 10병동
유리창 밖 저 아래엔
도시의 악령이 울긋불긋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밤은 깊은데
내 첫아이를 업고
잠덧을 달래주던 골목길에서 듣던
그 개구리 울음소리를
어머니는 찾아가고 있을까
너 하나 장가보내고 죽을란다
그런 십여 년 전의 과거를
어머니는 혼자서 찾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쌀 닷 되만큼 무거운 손주딸의 책가방을 들어주기 위해
이 깊은 밤 마중 나가고 있을까
김정식 선생님 응급실로
황영기 선생님 9층 A동으로
잿빛 수은의 목소리가
병실 문틈으로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병동 복도에 떨어진다.
얼굴
강인한
바라볼 수 있으랴.
바람이 스미는 결을 따라 빛깔 속을 잠겨들며
곤두박질하듯
눈물로도 모두 헤일 수 없는 크막한 가슴,
껄끄러운 돌거죽에 불이 나게 부비던 가슴을.
돌이 닳고 닳아서 이렇게 마알간 저녁에
밀리는 보랏빛 서쪽의 구름
정녕 구름 탓도 아니야,
이녁이 보고 싶은 날엔 문득
죽어라고 땀방울을 흘리던
그런 옛 일이 생각나서
빛깔 속에 가라앉으면
잃어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저 생각하며 바라보고만 앉아
눈물 지우랴.
참으로 기인 기다림의 빛깔을 골라 짚고
쓰러지듯 기대이며
오늘은 어느 하늘을 기억해 보리.
무늬를 짜며 늘이는 지나간 때의
흘리던 땀방울들이
불씨 꺼지듯이 목숨인 것처럼
이렇게 오늘 다시 생각나다가도
언젠가는 잊혀지고 말 것을,
어찌 바라보리야.
바람 속결을 흐르며
그저만 뚜욱 뚝 눈물지을 수야.
엉거주춤
강인한
두 대로 다가간 사파리 차량이 소리 없이
네 대로 늘어났다.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
저 건너 여덟 마리 코끼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선두의 차량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칸트의 산책 시간, 덩치 큰 한 놈이 가로질러 나선다.
사반나의 마른풀을 코로 감아 뿌리째 뽑아
제 정강이에 대고 탁탁 흙을 턴다.
이렇게 먹는 게 모범 식사법이라고
식사 중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씹고 또 씹는다.
맨 뒤에 따르던 수코끼리가 푸덕푸덕
한 버킷의 대변을 떨군다. 오줌도 주르륵, 무념무상의
하아 저놈도 저런 자세구나,
나처럼 허리를 뒤로 뺀 엉거주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일부가 상쾌해졌다.
여름 안부(安否)
강인한
신문을 읽는다
궁금한 소식 더욱 궁금함
최고 기온 삼십사 도
엿새째 퍼지르고 앉아버린
북태평양 고기압
공설운동장 건너편
산허리를 깎아내리는 공사장
황토빛 단층이 선연히 드러났다
문득 떠오르는 친구
직장을 그만둔 중년의 친구
해리 벨라폰테를 좋아했었는데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 뒤
아무 소식 없음.
여섯 개의 하늘
강인한
번개가 친다. 유리창에
무명(無明)으로 뻗은 길이 보인다.
길은 뱀처럼 꿈틀거린다.
소리치는 바람,
은사시나무 가장귀에 매어달린 바람은
등 뒤에서 일제히 비수를 던진다.
소리 없이 허공에 꽂히는
칼끝에서
하얗게 피 흘리는 길,
하얗게 절명(絶命)하는 길을 따라
바람을 따라
휘파람새가 날아간다. 새는 부리 가득
한 장의 어둠을 물고,
어둠의 뒤에서 한 송이 만다라화(曼陀羅華)가 핀다.
번개가 친다.
유리창에 어룽지는 꽃잎,
만다라화 넓은 꽃잎이 뚜욱 뚝 시들어
여섯 가닥의 길이 탄다.
여섯 개의 하늘이 열린다.
연애 통화
강인한
가을이면
금빛 동전을 짤랑거리는 노란 은행나무
둥치를 사이에 두고 만나기
만나서 손잡기
사랑하는 이여.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아아 끝없이 끝없이 눈이 내려서
집도 세상도 폭삭
눈에 파묻히게 되면
삽으로 눈 속에서 굴을 파기
너희 집에서 우리 집까지
굴을 뚫고 오가기.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죽으면
무덤을 나란히하고 누워
깜깜한 땅 속에서
드러누운 채로 팔을 뻗어
나무뿌리처럼 팔을 뻗어
서로 간지럽히기.
열두 살의 구름
강인한
흰 염소를 보았나
담배도 먹고
내가 찢어낸 공책도 야금야금
씹어먹던 흰 염소
언덕배기 돌배나무 밑동을
휘휘 감고 돌다 짧아진 목줄이 아파서
매애매애 울던
구름, 흰 구름이었나
어디에도 흰 염소가 보이지 않는다
기차표 고무신을 신고
달리다 엎어진 언덕길 기다란 줄이 끊어져서……
눈보라 속의 십리 밤길
소금장수가 귀신에게 홀린 산길을 피해
철도 침목 또박또박 받아 읽으며
바람을 안고 가다 뒤돌아보았을 때,
이마에 하얗게 불 밝히고 덤벼드는 철마
소스라치던 열두 살의 ‘미카’도
외할아버지 수염 같은 턱수염의
그 흰 염소를 끌고 철둑 너머로 간
구름이었나
열두 살의 구름, 흰 구름.
열차가 지나가는 배경
강인한
벚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그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지나간 청춘처럼 등뒤로 열차가 지나갔다
벚나무 가지에는 잘 익은 바람이 찰랑거리고
바람들은 여기저기 작은 파문을 일으켜 잎을 떨구고
여름 가고 가을이 갔다
벚나무 아래
벚나무의 그림자처럼 그가 서 있었다
한 떼의 소란스런 눈보라가 스쳐가고
이른 봄 파아란 강물이 벚나무에서 흘러나왔다
벚나무에서 나온 강물은
그 일대의 쓸쓸한 배경을 적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강 건너로
쓸쓸한 배경처럼 청춘이 지나갔다 어느 날은
비를 맞으며 벚나무 아래 강둑에 그가 서 있었다
벚꽃이 피고 파아란 강물 위로 문득
새가 날아올랐다 눈이 예쁜 작은 새 한 마리
벚꽃 흰 그늘에 다리 오그려 쉬고 있었다
입술 붉은 물고기들이 웃으며 강물에서 뛰어올라도
벚나무 아래 그는 오지 않았다
봄 가고 다시 여름이 오고
강이 마르고 벚나무 이파리가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벚나무는 제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서쪽 하늘 붉은 강 위에
벚나무 검은 그림자가 떠서 흐르고 있었다
영원한 기념
강인한
88 올림픽 그때 다들 흥분했지.
빚도 많은 나라 더 많은 빚을 지면서
올림픽만 치르면 금방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처럼
‘손에 손 잡고’ 금빛 노래 거리거리 날리고.
- 1936년 여름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본부석
아돌프 히틀러가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해 서 있었어.
88 올림픽 영원히 잊지 말자고
기념주화를 만들어 팔았지.
순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한 개 샀어, 먼 훗날의 가보가 될 거라고.
- 제 손으로 대장 진급을 한 통치자가
쓰디쓴 88담배와, 너무 깊어서 쓸쓸한 양심만 허락할 때
깊이 아주 깊숙이 양심처럼 간직한
황금빛 기념주화
언젠가 행운을 가져다줄 88 기념주화.
낼모레면 또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기념주화도 만들 거라는데
가만있자 지금 그게 어디 갔지, 어디로 사라져버렸지?
영혼의 물 한 방울
강인한
한 줌 흙이었을까
아니었으리
너무나 쉽게 부스러지고
더러는 서늘한 그림자 같은 것도 드리워져
호미로 긁으면 붉은 살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고운 황토 흙은 더욱 아니었으리
깊은 강 고요한 흐름에 마음을 띄우고
바깥 풍경에 이따금 눈 깜박이는
강물 속의 한 개 돌멩이였을까 어쩌면
그럴는지도 몰라, 하지만
바람과 시간과 햇볕에 닿아
푸석푸석 날아가 버리는 기억들…
아니었으리, 흙도 돌도 아니고
한 방울 물이었는지
혹시 그럴는지도 몰라
초록빛 향기로 가득한 갈참나무 숲
나무들의 굳센 줄기 속에 숨어 있다가
슬며시 내려와 골짜기를 돌아 흐르다가
난데없는 바윗돌에 부딪혀 소스라치고
아니, 아니,
낮게 내려온 하늘 먹구름에 매달려
발바닥이 간지러운 빗방울
한 점 티없는 공포, 허공에 떠있는
물 한 방울이었는지 몰라
날마다 새벽 꿈길에서 곤두박질쳐
소스라쳐 소스라쳐 깨어나는
물 한 방울이었는지 몰라
내 영혼은.
오늘
강인한
오는 날을 위한 꽃
꽃다움은
공명할 수 없는 항아리
속으로 지는
잎새.
지난날을 잊기 어려워
차마
버릴 수 없는
곳
그 점을 두고
까악
까악
우짖는
갈가마귀.
- 배앵 돌다
아래로 떨어진다.
아아,
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날개를 퍼덕이다
가루 된
심장.
나갈 수 없는
구멍으로
바람
바람
불어와
오는 날을 앗아가는
항아리 안
벽.
오늘 새벽
강인한
오늘 새벽, 지층이 삐걱이며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세기(世紀)의 어둠이
한 번 들썩,
꼭 한 번 들썩이던 소리를 들었는가.
우리들의 귀는
박명(薄明)을 뚫고 우끈우끈
동아시아의 지도를 짓밟고 가는
혈색 좋은 군화 소리밖에 듣지를 못했지만
모든 시계의 바늘이 한 번 부르르
떨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른 봄의 모든 꽃나무에 정지된 몇 순간의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오늘 새벽, 새로이 드러난 지각(地殼) 위에는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들이 흘린 몇 방울의 정액.
오늘 새벽, 모든 성좌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한 번 기울었다가 우뚝 서던 몇 순간의
절대적인 광채를 보았는가.
빛나던 항성들, 무서운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하늘을 본 이는 아무도 없지만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선가
은빛 군번 메달이 지도에 없는 하늘에서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마치 운석인 듯,
가족사진의 안타까운 맨 뒷자리에서
한 개의 평화가 스르르 빠져나갔을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볼 수 없지만
세상에 취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모든 여인의 성염색체가 돌연 뒤바뀌어진 것은 사실이다.
모든 식물의 뿌리가 지축에서 약간 비스듬히 꽂힌 것은 사실이다.
오늘 새벽, 새로이 나타나 던져진 별빛은
우리들의 뒤바뀌어진 아들 딸 혹은 손자 손녀 들이
침실에 들기 전 마실 것을 들다가
사랑을 발견하듯
문득 그 별빛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어려우리라.
그 별빛은 오늘 새벽에야 와 닿았으므로.
지층이 삐걱이며
세기의 어둠이 들썩이던 소리,
기울었다가 우뚝 서던 하늘의 모든 별빛.
백발의 아르키메데스가
머언 명왕성의 지렛대로 오늘 새벽,
지구를 들어 올렸다 놓은 것을
아는 그이는 누구인가.
오동꽃
강인한
철쭉 지고 난 뒤
비에 젖는 오동꽃
글썽한 눈매
비에 젖는 어머니
젊은 시절의 회장저고리
밥물 냄새 그리운 오동색 끝동
비 맞는 비 맞는
늙으신 어머니의 실어증(失語症)
산을 적시고 하늘을 적시고
오동꽃을 적시면서
종일토록 내리는 비
서른 해도 전
청상(靑孀)으로 핀 꽃가지.
오매불망(寤寐不忘)
강인한
어쩌란 말이냐, 바보들아
바꿔줬잖아.
바꿔줬으면 그걸로 됐지.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바보들아.
바보들아.
이제는 너희들 멋대로 가
가버려, 동서남북 맘대로 가버리라고.
나는 내 집으로
강아지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피갠독싸우스* 들어갈 테니
귀찮아, 따라오지 마!
* Pig & Dog's House
오월의 어머니
강인한
오월의 부신 아침 햇살이
키 작은 사철나무
새로 돋은 여린 잎새에 빛날 때면
어머니,
꿈 같은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외갓집 가던 길
파아란 하늘은
구름 둥둥 하얗게 목화꽃을 피우고
징검다리를 건너서
논둑길을 건너서
어머니가 내게 펼쳐 보여주신
우리 나라의 오월은 아름다웠습니다.
어머니,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어쩌다 동무들과 어울려
땅뺏기며 구슬치기로 해를 넘길 때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긴 목으로 서성이며 기다리던
어머니,
밥물 냄새 은은한
어머니의 치마폭은
한없이 넓은 평화였습니다.
철없이 나이 들어
슬프고 험한 세상
어지러운 나날로 달이 가고 해가 가도
어머니는 언제나
그리운 오월입니다.
지친 등허리를 다둑거려 쓸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던 어머니,
당신은 사철나무 여린 잎새에
꿈같이 맺히는 아침 햇살입니다.
맨 마지막까지 기다려주는
넉넉한 사랑입니다.
오후의 실루엣
강인한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
카페 손님이 그래서 많다
당신은 내 앞에
떠 있다
강이 있고
건너편에는 내가 떠 있다
우리들은 하반신이 지워진 채 마주앉아
앞에 놓인 강에
뛰어들 것인지 말 것인지
오래 들여다본다
지워진 다리들이
비가 내리는 산책로에 우산을 같이 쓰고
가만가만 걸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걸음을 멈춰 마주보고 있을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
그리고 오후의 카페를 나선다
언젠가 비가 왔고
비에 젖어 눈을 뜨던 길들이
소리 없이 등 뒤로 사라진다.
오후 4시
강인한
항아리를 기울인다.
빛을 기울여
오후 4시를 붓는다.
그림자 비스듬히 흘러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길어진다,
조금씩
가라앉는 시간의 틈새로
숲속의 키 큰 나무들,
짙은 그늘 속에
엄격한 명암
부드럽고 뚜렷하게 세운다
왕궁 가는 길
강인한
이만치 서서 바라보면 잘 보이려나.
청보리 물결 황토를 휘돌아 흐르는 연두바람
불어라 불어가라.
적막을 조그맣게 뭉쳐 입 다문 돌탑에까지
말갛게 몸 비우고 스미는 연두바람.
왕궁에 가시랴오.
예서 왕궁이라면 낙낙한 오릿길
잠시 버선을 벗어 땀들이시라.
늘어진 솔가지에 이녁 눈길 얹어보시라.
어디선지 흘러오는 수수꽃다리 글썽한 향기
이녁의 옷고름에서 풀려나온 그 말간 향기는
돌손바닥에 앉고 싶어
돌에 스미고 싶어.
왕궁탑* 그늘에 한 몸의 시름을 적시고
바라느니 하늘에 떠가는 저 구름 가
이녁은 보랏빛 내 그리움
보랏빛 향기로운 그늘.
사붓사붓 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
아, 적시고 적시어라 보랏빛 그늘.
* 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왼손에 대한 데생
강인한
초승달이 떠있다.
달은 내가 끄는 카트 속에서 출렁거린다.
누구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인생을,
나는 월요일 밤 쓰레기를 분류하며 세월을 느낀다.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버린다.
중학교 1학년 미술 시간에 연필로 그린 내 왼손을
버린다. 오래 망설이다가
가라, 돌아오지 마라.
더러운 애착처럼 멀리 내던진다.
오래된 스크랩과
대학 시절 습작노트,
백과사전보다 두터운 총동창회 명부,
유치한 일기장, 눈 시린 추억들은
손잡이 헐거운 부재의 서랍으로 옮긴다.
초승달을 버리고 다음 주엔
보름으로 가는 달을 박스째 출렁출렁
기억의 서랍에서 망각의 서랍으로 옮겨야 한다.
한때는 기쁨으로 빛나던 나를
망각의 강에 내다 버린 젊은 연인이여,
놀라지 마라.
두근대는 당신 가슴을 점자처럼 더듬는 건
스케치북을 찢고 뛰쳐나온 내 소년의 손이다.
우렁각시
강인한
부엌 아궁이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여운 젖가슴을 다 드러낸 채
그냥 울고 있었다
어머니, 이 애 쫓아내지 마셔요
하염없는 눈물에 타닥타닥 솔가리
매운 불티가 비치고
자다가 쫓겨 왔다고 했다.
시오리 밤길을 맨발로 쫓겨 왔다고 했다.
솔방울처럼 작은 몸 웅크려
떨고 있는 여자,
조붓한 어깨가 슬픈 순이
꿈에 너를 보았다.
우레가 지나가는 풍경
강인한
새소리 바람에 실린다
가늘고 뾰족한 깃털을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펼쳐든다.
초록 빗살들
사바나에 바람 불면
수사자 금빛 털도 바람에 날린다.
건너편 풀숲에 숨어
마사이 전사는 숨을 참는다.
먼 데서, 아늑하게
우레가 잦아든다.
풀숲에서 비죽 솟은 창과 창들.
조금 웃고 많이 우는 게 사랑이라고
풍경을 흐리며
낮은 목소리 들린다.
여기 또 저기
켄차야자 기다란 창이 배를 가르면
침묵을 뚫고 환호처럼
새의 부리가 줄줄이 터져 나온다.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강인한
사람 사는 일이란
오늘이 어제 같거니 바람 부는 세상
저 아래 남녘 바다에 떠서
소금 바람 속에 웃는 듯 조는 듯
소곤거리는 섬들
시선이 가다 가다 걸음을 쉴 때쯤
백련사를 휘돌아 내려오는 동백나무들
산중턱에 모여 서서 겨울 눈을 생각하며
젖꼭지만한 꽃망울들을 내미는데
내일이나 모레 만나자는 약속
혹시 그 자리에 내가 없을지 네가 없을지
몰라 우리가 만나게 될는지
지푸라기 같은 시간들이 발길을 막을는지도
아니면 다음 달, 아니면 내년, 아니면 아니면
다음 세상에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겠지
일찍 핀 동백은 그렇게 흰눈 속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지겠지 단칼에 베어진 모가지처럼
선혈처럼 떨어지겠지
천일각에서 담배 한 모금 생각 한 모금
사람 사는 일이란
어제도 먼 옛날인 양 가물거리는
가물거리는 수평선, 그 위에 얹히는
저녁놀만 같아서.
우리나라 날씨
강인한
우리나라에도 4계(四季)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습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흑염소 몇 마리 풀을 뜯고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내리막길엔
보신탕 몇 그릇 땀내고 있지요.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보면
당신도 아시게 됩니다.
영하 이십 도와 영상 사십 도의
왕복 여행 속에
겨울 혹은 여름이 있고
감기 몸살에 젖는 봄, 가을은
너무나 희미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분명한 겨울
분명한 여름이 있을 뿐입니다.
분명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물 속으로
강인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보았네
가물고 가문 그 해 여름의 복판에서
삼남의 논밭이 타들어가고
머리칼을 세우던 두려움도 마르고
깊은 우물도 말라가고 있었네
감나무에 땡감이 퍼렇게 멍든 날
썩은 동아줄도 없이
맨발로 내려갔네
비죽거리는 우물벽돌이
내 손과 발을 더듬더듬 받아주고
게걸음으로 게걸음으로 버티며
어둠 속으로 내려갔네
겨울 밤에 들여다본 저 깊은 곳에는
처용의 얼굴 같은 것 처용의 웃음 같은 것
하얗게 일렁이더니
댓 장 깊이의 우물 바닥에
마침내 맨발로 내려섰을 때
구렁이 샘물이 눈을 뜨고 배시시
발등을 차갑게 어루만져 주었네
죽은 모래와
사금파리와 칫솔이랑 건져서
한 두레박씩 퍼 올려보내는
저 허망한 우물 밖에는
내가 벗어 놓은
스무 살의 여름 해가 소금으로 타고 있었네.
우체통 안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나
강인한
수직으로 천년, 돌은 뿌리를 내린다.
빨간 외투를 걸치고
몇날며칠 귀를 열어두고 있었으므로
소리의 사연들은 고물거리며 바닥을 기어다닌다.
날개 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씩
깡통에 던지는 동전처럼 발치에 웃음을 던져주고 갔다.
초등학교 삼층 난간에 날아 앉는 비둘기 떼,
측백나무에서 은행나무 우듬지로 날아오르는 직박구리,
직박구리에 놀라 까무라치는 어린 참새들.
빙글빙글 둥근 양철통으로 만든 운동장 안
바람의 심줄 찢어 날리는 솜사탕이며
보랏빛 매지구름에서 일렬종대로 떨어지는 비의 씨앗들이
온갖 새들의 울음소릴
천둥소리로 꿰어 오고 있었다.
달이 검은 해를 베어 먹는 밤
저 늙은 우체통 뒤로 가만히 다가가 껴안을 듯
귀 대고 들어봐, 잘 들어봐.
한숨 소리, 옆구리 풀어 상처를 내뵈는
땅속 푸른 뱀의 울음소리.
떨어지는 제 그림자를 냉큼 부리로 물고 가는
세 발 까마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저 까마귀
숯불처럼 붉은 천년의 울음소리 들릴 것이다.
웃는 얼굴
강인한
변기가 살아 있다, 이 밤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변기 저 혼자 클클클 웃는 소리.
부글부글 용암이 솟구치듯 이따금씩
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
불쑥 내지르는 주먹.
휩쓸어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물살 속에
너도 들어오라고
클클클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
유칼리나무 아래
강인한
유칼리나무는 코가 없다
유칼리나무에 매달려 잠든 코알라
귀엽고 순한 코알라는
브리스베인의 보호구역에 산다
맨발로 걷다가 걷다가 지치는
브리스베인의 가없는 골드코스트 백사장
소금기를 뺀 파도가 달려오고
비린내를 뺀 파도가 달려온다
인간의 피보다 붉은 수액이 흐르는
유칼리나무, 나뭇잎을 먹고 사는
코알라는 초식동물
유칼리나무의 언어는 바닷바람보다 상쾌하다
여자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해, 귀여운
코알라를 안고 사진을 찍는다
유칼리나무 아래 사람과 동물, 아름다운 모델
근사한 스냅 사진의 뒷면
뱃속의 빨랫줄 같은 수평선까지 끄집어내는
우엑, 코알라의 고약한 악취여
유칼리나무는 코가 없어 좋았다
유턴을 하는 동안
강인한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회전 신호가 없다,
지나친다.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 유턴을 한다,
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
꽃을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 버렸다.
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
이번 세상에 만나지 못한 꽃
그대여, 그럼
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
율리, 율리
강인한
어두워진 겨울의 차창에서
불빛은 섬처럼 떠오르고 있었어.
스물다섯 살 아무렇게나 깊어진
내 청년의 골짜기
빨간 루비의 꽃들은 흰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어, 율리.
야간 버스의 흐려진 유리창에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썼어.
내 손끝에는 웬일로
당신의 은백의 슬픔이 묻어나고
긴 눈이 내리는 밤
더운 차를 홀로 마실 적엔
추녀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의 촉
방울방울 맺히는 당신의 불면을
나는 가만히 엿들었어.
겨울 산에서 함께 돌아오던 날
내 몸 속의 잔신경들이 풀어져
흐르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눈 속엔 더욱 차고 말간
환상의 꽃잎들이 흐르고 있었어.
품어볼 어떤 야망도 없는 시대
세상의 구석진 어느 곳에서는
힘차게 힘차게 평화만이 무너지고 있는 때
율리, 당신은 까만 외투 깃을 세우고
찬바람 속에 웃으며
겨울을 나야 하는 작은 새처럼 쓸쓸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말하여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음악보다 낮게 당신은 글썽거렸어.
문 닫힌 겨울 찻집 앞에서
길길이 얼어붙은 분수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깊어져버리고
율리, 율리, 내 가슴 속으로는
끝없는 눈다발이 펑펑 쏟아져 내렸어.
율리의 초상
강인한
의사의 딸 율리,
여학교 때 반장을 하던 단발머리
촉촉하게 젖는 오월의 밤이슬에
외로울 때 맺히곤 했다.
내 싱거운 이야기에 곧잘 웃고
내 비겁한 이야기에도 곧잘 끄덕이고
항상 눈이 흰 겨울을 살고 싶다는 율리,
네 따스한 손바닥에
내 작은 생애를 얹어보고 싶었다.
때때로 술에 취하면 화가 나서
난폭하게 편지를 쓰고
마리안느*의 사슴처럼 장밋빛의 피 흘리며
네 곁에서 죽고 싶었다.
아카시아 향내가 네 눈에서는 풍겨
안타까운 너의 꿈을 찾아간
오월의 어느 날
그날 밤 거리에는 안개가 피어올라
네 피로스런 단발머리를 빗질하며 있었다.
율리, 너는 별이 뜨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고
불붙는 위티를 나는 마셨다.
깊은 밤 빠알갛게 타는 불씨를 보며
네 순한 고집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율리,
떠나오는 내 여행은 언제나 비에 젖는다.
차창 밖으로 뿌려지는 산골짜기의 꽃 무데기
주정을 던지고 던지는 나에겐
적막하게 웃는 율리, 네가 보였다.
어머니의 가슴에 자줏빛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돌아서 조용히 우는 내 착한 누이,
네가 지금 보인다.
저 먼 불빛이 영그는 풀잎 사이로
걸어가는 조브장한 어깨.
주일이면 까만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자그마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오래 기도하는 율리,
네 작은 손바닥에 가만히
낙엽 같은 내 이름을 얹어보고 싶었다
이것은 꿈입니다 - 칼레의 시민들
강인한
전라도의 오월 하늘입니다
마약처럼 우울합니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울음소리 떼 지어 들려옵니다
한 사람의 눈물이 칼에 찔리고
두 사람의 눈물이 구둣발에 뭉개지고
열 사람, 백 사람의 눈물이
박살난 채 내던져지는
이것은 꿈입니다
벙어리들이 울고 있습니다
멍든 심장에 쇳덩이를 무겁게 매달고
수천수만의 벙어리들이 모여
한 덩어리로 울고 있습니다
벗기어진 알몸인 채
두 손이 묶여 있습니다
어디론가 아스라이
강철의 불길 속으로 끄을려가는
피투성이 울음소리, 울음소리
아닙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밤이면 밤마다 꽁무니에 불을 단
총알이 날고
유리창 밖에 죽음이 서성이는
오월의 전라도 광주
아카시아 향기가 저주처럼 풍기는
철길엔 열차가 끊어지고
시외전화도 끊겼습니다 아아, 형님
보고 싶은 누님
여기는 지도에 없는 섬입니다
허공에 떠 있는 섬입니다
내려갈 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오는 길도
지워져 버린
오월은 아직 이승의 계절입니까
말 못하는 벙어리들 피 묻은 울음소리를
당신들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별보다 먼 나라에
그리운 당신들의 안부가 있습니다
까마득한 하늘에서는 알 수 없는 삐라가
칼춤 추며 까물까물 내려오는데
쇠사슬에 묶인 칼레의 시민들은
오늘 다시 이 땅에 청동의 발걸음을 내어딛는데
햇볕만이 침묵으로 타는 학교 둘레
돌담에 기대어
장미는 핏방울로 툭툭 피어나도 좋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아득한 석기시대 야만의 꿈입니다.
이른 새벽의 산보로(散步路)에서
강인한
계절이 윤회하며
가난한 시민의 지붕 위에 내려 쌓일 때
어린 남자의 방 피곤한 어둠을
쓸어주는 별.
밤마다 어린 남자의 꿈 가운데
성장(盛裝)을 하고 나오는
사랑스런 여자들
젊은 여자들.
어린 남자의 쓸쓸한 늑골에서
서걱이는 가랑잎
늑골 속에 파묻혀 홀로 눈 뜨는
여자의 머리카락.
그것들이
뿌리 없는 어둠을 찍어 넘기는
미명(未明)에서
조금은 적적하게 갈증을 달래고
저만큼의 거리에서 간단히
손 흔들며 인사
아아 최후의 하직을 고하면,
가가호호
괴로워하는 이들의 가슴 위에
불 켜듯 매어달리는
비애(悲哀).
마침내 도회의 밤을 횡단하는
어린 남자의 죽음
가을 빗발 속에 나붓거리는
하얀 잎사귀.
이미테이션
강인한
광장에 들어서자
갓 구운 마늘빵 냄새 부드럽게 날아가는 곳
빵가게 앞 선착장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연애는
곤돌라를 타고 흥겨운 수부의 콧노랠 들으며
흘러간다, 싱싱한 가슴살
일 파운드를 도려내야 하는 젊은 안토니오
그 린넨 망토가 허옇게 돌이 되고
얼굴도 돌로 굳어져 마침내 대리석 석상으로 선 채
어린 연인들이 휘파람 같은 별들의 소리를 찾아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머리 위
새들도 날아가다가 까맣게 멈춰버린 지점이 있어
바라보고 바라보노라면 이윽고
저 석양 하늘은 언제나 오후 여섯 시,
가짜다 세상은 모두 미쳤거나 가짜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대리석 베니스의 상인이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발치의 바구니에 지폐를 던져주면
당신의 팔짱을 끼고
친절한 셔터 모델이 돼주기도 하고
산다는 건 속인다는 것
저 하늘 위에 천국의 객실이 있다
호텔 베네치아, 하늘을 뜯어내면
십이성좌가 한꺼번에
슬롯머신 속으로 좌르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이상기후(異常氣候)
강인한
황토 흙에서 태어나
황토 흙을 먹고 자란
내 친구,
골목에서 목말이 되어주던 내 친구
기와집에 쌀밥을 소원하던 내 친구.
그 날,
검붉게 끓어오르는 남지나해를 향하여
한 꺼풀씩 한 꺼풀씩
친구의 목숨은 벗겨져 갔네.
그 날,
국회의사당에선
욕설과 주먹다짐과 푸짐한 오찬이 벌어지고
아메리카 젊은이라면
주말여행을 떠났을
자가용을 몰고 마이아미 비치라도 돌아 보고팠을
아무렇지도 않은 그 날.
으슬으슬 감기 드는 찬비가
낮은 언덕을 기어 넘고
한 무더기의 봄꽃들이 동구 밖에서
뒤척이고 있었을
그 날,
친구의 그 진한 음성은
고향의 개보다 쓸쓸히
세상에서 지워져 갔네.
남지나해
뜻 없이 타는 세기의 불길 속으로
친구의 초라한 소원은
마른 양파 껍질처럼 벗겨져
조용히 침몰해 갔네,
찢어져 갔네.
찢어진 친구의 가슴에선
왕잠자리며 유리구슬이며 작은 새 새끼들
그 어린 시절의 기쁨이 삐져나오고,
친구에게 행복을 틔워준
아, 내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고운 가시내
진자줏빛 옷고름도
찢어진 가슴에서 풀려 나왔네.
이윽고 텅 빈 친구의 목숨,
친구네 집이 있는 골목길
그 가늘고 서러운 창자 속을
몇 개의 탄환이 빨간 열대의 괴조가 되어
푸덕이고 있네,
으슬으슬 감기 드는 찬비를 맞고 있네.
이성계에게
강인한
4 - 아아 역사여
1909년 10월 26일 그대는 알까 몰라
대륙에 불던 바람
피 묻은 바람 소리를,
아, 성계(成桂)여
그대의 회군은 잘못이었어.
압록강을 뒤돌아 건너오는 그대의 칼
녹슨 칼로
가리킨 것은 끝끝내 대의(大義)였던가
죽어도 명분(名分)이었던가.
1909년 10월 26일
차가운 동풍이 불고
찬바람 속에 거꾸러진 쥐 한 마리
육백 년 전의 그대를 손가락질하데.
무인의 길과
제왕의 길이 이미 다름을
아 그대가 꿈엔들 알았으랴.
만주벌을 뒤덮은 고구려 병사들의
고함 소리 햇빛으로 날리는데
중국 대륙의 외딴 곳 산동반도 그 어디쯤
백제 동성왕의 너털웃음은
바람 소리
1909년 10월 26일
대륙에 불던 피묻은 바람 소리.
그대의 회군은
잘못이었어. 백 번, 천 번 잘못이었어.
아, 성계(成桂)여.
*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조선 통감 이등박문을 사살한 날.
인공위성이 빛나는 밤
강인한
못 보던 은빛 신호 깜박거리는 봄밤이었다.
자세한 위치 모르겠어요?
- 지동초등학교에서 못골놀이터 가기 전….
지동초등학교에서.
- 못골놀이터 가기 전요.
누가, 누가 그러는 거예요?
- 어떤 아저씨요. …아저씨! 빨리요, 빨리요!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 잘못했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CCTV 속
어둠을 찢고 나온 커다란 짐승이
젊은 여인을 덮쳐서 질질 끌고 간 그 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생선을 토막 치듯
280토막 살을 가르고 뼈를 잘랐다.
비닐봉지 14개에 20조각씩, 해체된 돼지고기처럼,
신중하고도 치밀한
야간작업이었다.
액정화면 꺼져버린 밤하늘
어제는 서쪽에서 빛났고, 오늘은 동쪽
낮은 하늘 은빛 싸늘하게 인공위성이 빛나는 밤.
인형(人形)
강인한
흐르고 있었다.
그 날,
단 한 번의 주어진
얼굴을
어떤 몸짓으로
이끌어야 할지
밀물이 넘치는 저녁 거리를
당신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차(茶) 속에서 수런거리며
잔 밖으로 새어나오는
당신의 음악(音樂)이
유리벽(壁)에 닿을 때,
다만 당신의 음악이
유리벽을 뚫고
들려왔을 때
손을 치켜든 채로
나는,
가장 괴로운 색깔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가늘게
실내를 흔들고 가는
바람에 밀리어
단조(短調)의 음계(音階)만을 오르면
당신의 방
문을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까지
점점이 물들어
파아란 잎사귀로 하늘대다
언젠가는 나도
당신의 빠알간 심장 같은
꽃을 피게 하여,
연민에 젖는 얼굴의
한 그루 화분식물(花盆植物)이 되는 걸까.
아, 모두를 변질시키는
영원한 시간(時間)이
살결에 묻어
진실로 화사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력(日曆)
강인한
햇살이 부챗살로
창문을 붉게 번지는 아침
지긋지긋한 여름날의
일력 한 장을 뜯어낸다.
세상 저편
어둠 속에서
누군가 큼직한 손이 나와
남아 있는 내 삶의 가지에서
일력 한 잎을 뜯어낸다
일획
강인한
자가웃 넘는 눈 위에
더 내려서 쌓이는 눈
흰 어둠으로 앞이 안 보인다
고요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다가
우지끈, 손을 놓아버린 솔가지
포르르포르르 열 두 줄로 눈가루 날리고
찢겨 나간 소나무 흰 속살이 보인다
날것의 저 생채기에서
뿜어져 나온 수액의 향기가
찬 공기 속으로 번지는 동안
아늑한 관능의 상형문자가 펼쳐지는 동안
눈 밑에 찍힌 발자국들
더욱 단단하게 짐승의 기억을 옥죄고
먼 데서 일획을 그으며
눈더미가 나무 가지를 꺾고 떨어지는 소리
짐승의 털이 한 순간
바늘처럼 귀를 세운다
임진강
강인한
1
괴로운 빛깔을랑
가슴으로 문지르자.
찢기운 나랫자락
강물은 굽이 흘러
나비의 나랫짓 위에
선연한 종, 종소리.
2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로나 서볼거나.
나비가 내다보는
가슴 안의 바람 속을
피 먹은 울음빛으로
떠오르는 산하(山河)여.
3
별들이 물에 잠긴
잿빛 강물 굽이에는
꽃내음 흩뿌려져
촉수마다 젖는 비원(悲願).
뒹구는 탄피(彈皮)의 울음
한결 맑은 사랑아.
4
눈 멀은 땅이런가
울음빛 타는 하늘.
울려라, 종을 울려
기폭인 양 퍼덕여라.
해와 달 흐르는 강을
강을 넘는 나비여.
입맞춤, 혹은 상처
강인한
나는 확신한다
이 느닷없는 입맞춤이
나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너를 가만히 끌어올리고
한 개의 작은 달걀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플루토에서 온 이 얼굴을 바라본다
스무 살 성처녀, 네 머리칼에서
희미하게 라일락 향기가 떠돌았고
더운 내 입술은
너의 눈 위에 포개졌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새가 날아갔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
강인환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 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것은
심장에 깊숙히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자수정(紫水晶)
강인한
1
등 뒤에서 천둥처럼 들리는 사자의 포효와
너털웃음에 소녀는 웅크려 떨었어.
관능과 도취의 향기 넘치는 술항아릴 들고
껄껄 웃는 사내,
한 옴큼 놀란 가슴은 작은 새처럼 콩닥거리고
폭풍처럼 휩쓰는 발소리에
주변의 꽃들은 새벽 이슬을 떨군 채
숨죽여 내다보았어.
소녀는 마지막 기도를 외우고 뒤돌아보았어.
진한 포도 향기가 그때
사자 갈기처럼 헝클어진 머리칼 새로 풍겨왔고
으악 소리치는 순간 소녀의 심장은
싸늘하게 굳어버렸어.
한 덩이 차고 투명한 돌이 되어
아 그렇게 가여운 소녀 아메티스트*
순결한 그 눈물이 이미 죽음을 넘고 있었어.
2
포도의 술에 스미는 한없는 뉘우침이여.
내 이 술잔을 기울여 그대 깨끗한 영혼 위에 눈물로
죄를 씻으려 하느니, 아메티스트
비정한 사내의 길을 그대는 이렇게 밝혀 주는구나.
바람결에 나부끼던 검은 머리칼,
조바심에 떨던 붉은 심장이 티끌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
이제는 유리보다 투명한 그대 온몸에
나를 비추는구나.
잔인한 슬픔을 끝끝내 내게 보이는구나.
아메티스트, 나는 포도의 술을 붓는다. 그대 고운 이마에
어깨에, 내 어리석은 사랑 위에 붓는다.
아침 포도의 액은 온몸에 애잔히 흘러들어
슬픈 기원의 마지막 음절까지를 적신다, 아메티스트
보랏빛의 순수여. 뼈아픈 빛깔이여.
* Amethyst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강인한
먼 과수원에서 끝물의 복숭아가
마지막 기쁨의 무게를 참아내고 있을 때
꽁지를 까불며 모감주나무 가슴을 파고든 직박구리였다.
저기서요, 「즐거운 사라」를 쓴 페미니스트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 거 아셔요?
숨차게 새가 부리로 가리키는 붉은 벽돌 담 너머
한 마리 독한 슬픔이 똬리를 풀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세상에, 그이가 목을 매 죽었대요, 오늘.
모감주나무는 무릎 아래 하얀 장미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그가 목메어 부르며 찾던
장미여관은 어디 있을까요.
도독고양이가 햇살 따가운 마당을 쪼르르 건너와
고개를 쳐들고 하얀 장미에게 물었다.
그는 복숭아나무가 장미과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이 만든 허구의 덫에 걸려
그는 마침내 목걸이 대신 밧줄로 목을 감았던 것.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끝물의 복숭아 하나가 장밋빛 하늘가에서 뚝 떨어졌다.
- 자유를 향하여.
* 마광수 시인이 연세 교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패러디한 말.
자작나무 그 여자
강인한
자작나무를 사랑했네
비 갠 날 늦은 산책길, 자작나무 그 여자
햇살 비낀 아름다운 숲에서 만났네
구부러진 산책길의 길섶엔
손 내미는 봄꽃들 눈부신 빛깔에 숨이 막혀
어지러워라
자작나무에 기대어 발을 멈췄네
어두워지는 가슴 속 검은 바위틈에
먼 옛날 사라진 불씨가 눈을 뜨는가
차라리 이 숲에서 눈멀어 길을 잃고 싶었네*
비 갠 숲 향기에 취하여
이는 오래 전 나에게 마련된 저주인 듯
풀 수 없는 주술에 걸려 치어다보느니
바람결에 점점이 흐르는 연둣빛
사월의 자작나무 이파리들
그 여자 속눈썹을 모르는 척 바람이 스치네
미처 깨닫지 못한 맑고 시원한 울음이
가늘고 여린 가지를 흔드는지
자작나무 이파리 툭툭 찍혀 있는 하늘 가
잊었던 그리움이 내 눈썹 끝에 맺히네
*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 정양(鄭洋) 시집 제목에서 가져옴.
자작나무 숲
강인한
자작나무 숲에는 바람들이 산다
꼬막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작은 아씨들
날씬한 허리가 휘어지며 자지러지는
자작나무 숲에
눈이 동그란 새, 바람의 딸들을 불러와
간지럼을 모아서 한꺼번에 터뜨려 놓고 달아난다
자작나무 우듬지의 흰 속살
사랑스런 내력을 더듬거리다가
나는 눈 딱 감고 자작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잔다리목에서 싸리재까지
강인한
잔다리목에서 싸리재 쪽으로
파란 하늘에 초승달이 길을 내고 있었다
쌀 씻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별들이 기울었다
조는 듯 깜박이는 별빛을 핥으며
문간에서 포도가 익어가고
추녀 끝에서인지
수런거리는 포도 넝쿨 아래선지
하얗게 여치가 울었다
쌀 씻는 소리를 시늉하며
여치가 숨어서 울었다
잔다리목에서 싸리재까지
궁금한 소식이
하늘에 걸려서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눈물이
강인한
그게 나이 탓일까
잠들기 전 베개를 베고 잠시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나와
오늘밤이 어쩌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인 것처럼
말없는 한 순간의 기도
혼자 시드는 밤
둑길의 망초꽃
잠들기 전 베개를 베고
귓가로 흘리는 눈물
잊어서는 안 될 슬픔이
길섶 어딘가에서 피고 지는지
몰라
맨발 벗은 슬픔이
이 밤에
멀어져 간 나를 부르며
잠들기 전 한때 나를 적시는지도
몰라
잔설(殘雪)
강인한
유성 가는 길
번쩍이는 칼날
검은 들판에 비닐하우스들
눈을 찌르는 은빛
시루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처럼
저기 녹지 않은 눈 사이
응달에서 먹다 남은
흙의 맨살들
그 위에 부러진 뼛조각들
흙 속에 뼈다귀를 파묻는 개
모란시장
철망 속에 갇힌 한 무리
녹슨 눈빛들
도마 위 시뻘건 생고기 한 덩이
유성 가는 길
겨울 들판에 놓여져
번쩍이는 은빛
언제나 배후에 숨어 있는
칼날
장미가 부르는 편서풍
강인한
굴레와 채찍을 벗어날 수 없다.
눈을 감아도 나는 안다.
저 길이 내 몸속에 들어와 요동치다가
망각처럼 몽롱해지는 것을.
장밋빛 암벽의 페트라 협곡을 지날 때
방울 소리와 이천 년 전의 물소리가 반죽이 되어
때로는 영혼의 기도가 된다.
그러나 그뿐 희미한 이명으로 스러진다.
게으른 몸을 태우기 위해 내 허리는 잘록하고
베두인의 채찍을 견딜 만큼 옆구리는 아직 튼튼하다.
알 카즈네 신전을 출발하여 꼭대기의 수도원까지는
무릎이 꺾이는 층계, 층계, 돌층계들
굴욕과 소금의 길.
둘러봐야 연대해야 할 동지들이 없다.
저들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눈을 내리뜬다.
모르는 척 수그려 귀를 닫는다.
나바테아인들의 수도원, 절벽을 늘어뜨린 산 정상에서
이방인들이 느릿느릿 등에서 내린다.
향나무를 쓰러트릴 듯 바람은 편서풍이다.
이 고통을 끝내자. 바로 지금이다,
자갈을 차며 앞으로 내달린다.
밑바닥이 바람처럼 번개처럼 다가온다.
ㅡ당나귀! 당나귀가 떨어졌다!
구불거리는 협곡,
검푸른 심연에 흰 별들이 소용돌이친다.
몸을 벗고
바람 속에서 나는 웃는다.
장미 열차
강인한
부드러운 슬픔을 친구의 어깨처럼 기대고
그대는 나직나직이 울고 싶은 게지
퀸 엘리자베스
장미의 이름으로 피어있는 오늘.
겹겹이 여민 분홍 베일 사이로
향기는 흐른다.
오랜 옛날도
바로 어제처럼 기억하며
내가 타지 않은 열차를 떠나보낸다.
잠들지 못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또 하염없이 열차를 떠나보낸다.
작은 장미 정원에서
밤마다 피고 지는 꿈
한 닢 두 닢 헤아리는 그대에게
오월에 떠나보내는 장미 열차.
장미의 독
강인한
건드리지 마,
붉은 외마디가 터져 나온다
뭉쳐진 대기가 한순간 살의를 머금고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내가 마련한 것은 독(毒)이었다
저 유월의 태양에서 얻어온 유황불의 뜨거움과
뿌리에서 길어 올린 몇 그램의 치명적인 잠
나는 살이 여위고
희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못 이룬다
하늘을 향해 열린 나의 자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그러므로 당신을 죽이고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오랜 종(種)의 기억
이 기억 속에 번져가는 유혹의 향기를
나는 거두지 않으리
뾰족하게 치켜든 내 손톱의
저주를 잊지 말라 내 손을 움켜쥐는 자
나는 그대의 피를 원한다
혹여 내 입술에 그대의 눈꺼풀이 스칠지라도
나는 그대를 실명시키고야 말리라
아니 내 증오의 독은
바다로 빨려드는 강물처럼
펄떡이는 그대의 심장에 흘러들어 온몸의 혈관에
번제(燔祭)의 새빨간 독을 풀어 넣을지니
헛된 아름다움을 취하는 그대
나는 그대에게 한목숨을 청구한다
도취의 꿈에 눈멀어 내 손톱에 할퀴는 순간
그대는 나와 하나가 되는 것, 두려워 말라
연옥의 불길에 닿아 있는 나의 사랑을
두려워 말라 검붉은 강물 속으로 우리 함께 흐르는 것을.
장인(匠人)의 꿈
강인한
이 여름철에 내가 죽는다면
강물도 누렇게 괴어 흐르는 하늘까지야
이웃집에 다녀가듯 간단히
인사로 건너갈 수는 없거니.
큼직한 이승의 업보나 들고
천덕스러운 눈물을 흘리면
제왕이 손수 나와 술을 따르고,
어깨를 두드리겠지.
그래 전세(前世)의 어엿한 따님들은 꽃밭 너머로
다이달로스 날개쭉지를 보듯
쓸쓸한 나의 손을 눈치 채고
종내엔 그 큰 눈망울을 섬벅이겠지.
내 이 두 손바닥만으로
능히 가리울 수 있는 얼굴로는
못 죽겠네,
차마 못 죽겠네.
육 척 미만의 육신을 덮을 도포(道袍)만큼은 넓게
세상의 여름을 가야지,
아아 더 큰 날개를 지어야지,
나의 이 손으로.
저글링
강인한
익어가는 열매 속을 가을 햇살이 단맛으로 스며들 때
고갯마루에서 마녀가 바구니에 든 사과를 꺼냈습니다.
붉은 사과, 노란 사과, 푸른 사과.
사과 세 알.
- 이것들을 해 지도록 차례차례 높이 던져
공중에서 떨어뜨리지 않아야만
하얀 여우들을 평생 종으로 부릴 수가 있어.
먼저 붉은 사과를 높이 던져 올렸습니다.
사과를 받은 허공은 금세 분홍 그림자를 흘리고
분홍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푸른 사과를 던졌습니다.
사과를 받은 허공은 금세 연둣빛 그림자를 흘리고
연둣빛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노란 사과를 던졌습니다.
사과를 받은 허공은 금세 하얀 그림자를 흘리고
마녀도 없는데 붉은 사과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조작조작조작조작 시간이 흐르는 소리.
마녀도 없는데 푸른 사과가 공중으로 오르며
조작조작조작조작 먼바다 잦아드는 파도 소리.
마녀도 없는데 노란 사과가 공중으로 오르고
조작조작조작조작 숲속의 나무들 허리 부러지는 소리.
마녀는 성처녀,
그날 아무도 마녀의 얼굴을 본 이가 없습니다.
치렁치렁 거먕빛 드레스 자락에 아홉 가닥 붉은 꼬리가 살랑.
저녁 밀물지는 마음
강인한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어, 바다는
흰 이빨 모래톱에 박으며
무릎으로 무릎으로 기어오고 있었어.
저녁 일곱 시
지나간 발자국들을 훔치며 바라보는
일몰의 시간에 바람 키득거리는 해안 도로.
아직 가시와 잎만 달고 해당화가
가만히 귀를 세우는 것을,
짙은 바다안개가 한 점 붉은 꽃잎을
송두리째 품에 안고
잘 익은 홍옥을 단숨에 베어 먹듯...
보이지 않는 수평선 위로
불길한 소문이 빠르게 번졌어.
축축한 안개가 내 얼굴을 적시고
오지 않는 꿈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이여,
길가의 해당화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휴대폰 뚜껑을 덮는 손
떨리는, 봄밤에 지는 꽃잎들.
아 저것들이 결국은 우리들의 상처에 뿌려지는
독하고 아름다운 슬픔이라고
소리쳐 일러주고 있었어. 몰아붙이는 검은 파도가
잃어버린 사랑을 깨우쳐주고 있었어.
저녁 비가(悲歌)
강인한
이 나라 목판본(木版本)의 가을
한쪽으로 기러기 떼 높이 날아
칼끝처럼 찌르는 일 획의 슬픔
- 갈대여.
끝끝내 말하고 죽을 것인가.
어리석은 산(山) 하나
말없이 저물어 스러질 뿐
역사란 별것이더냐
피 묻은 백지, 마초 한 다발.
적과의 화해
강인한
두렵지 않아 이제는
열쇠를 기다리는 현관문의 자물쇠처럼
나는 조마조마하지도 않아
열릴 것인가 혹시 이 철문이 나를 거부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리지나 않을까
치과에 간다 씹을 수가 없어서
이발소에 가듯
나는 이제 거세된 두려움을 아득히 그리워하며
길게 편안히 눕는다
상처 난 잇몸을 확인하고
의사는 틀니를 꺼내 바라본다 그윽하게
예전에는 성치 못한 치아를 갈고 깎던
내 온몸을 송곳으로 관통하던
저 기계 소리가
마취주사의 끔찍한 바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조용히 기다릴 뿐
바쁘지도 조급하지도 않아
의사가 기계 수리공처럼
섬세하게 다듬어준 틀니를 물고 나면
이 세상의 먹을 것들이
온통 적의뿐이었던 그것들이
내게 다시 한번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
아직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깝기는 하여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거야
검고 긴 두려움의 구멍 내가 끌러야 할 그 문이
아직은 아직은.
전라도여, 전라도여
강인한
1
거덜이 난 고향,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유창한 서울말을 구사하러
친구는 서울로 가버렸지.
컬컬한 막걸리를 버리고
드는 낫을 버리고 친구는
도시로 나가 운전을 배우고 맥주도 홀짝이고
그리고는 택시 운전수가 되었지.
월남에 가서 아슬아슬한 목숨을 달랑이며
친구는 달러에 맛을 들이곤
변해버렸지.
거덜이 난 고향,
사우디 아라비아로 더러는 아주아주 멀리
서독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버리고
전라도는 누가 지키나.
차마 못 버리는 에미 애비의 땅에 서서
한 그릇 찬밥덩이 앞에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굴을 배우고
양심 같은 맹물을 마시며
불러볼 노래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네.
전라도여, 전라도여.
2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흐르는 곳
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여, 오 갯땅이여.
황산벌에서 찢어진 마지막 깃발이여.
무너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에서
나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구나.
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를 보며
황해로 지는 해를 보며
오월에 나는 무너지고 싶구나.
할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신새벽에 빌었지.
구리 궤짝 속에 엽전 꾸러미 시퍼렇게 녹이 슬도록
빌고 빌었지.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갈재 갓바우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르고
휘황히 빛나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어
할머니는 귀머거리가 되었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
할머니는 이냥도 귀머거리.
새야 새야
울지 마라.
3
아버지가 끄을려 가고 있었지.
먼 데 개짖는 소리 속으로
그 어둠 속으로 아버지는 끄을려 가고 있었지.
우리사 아무 죄도 없응게,
걱정 마라, 후딱 오마.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었지.
총소리, 폭격 소리에
돌담 위의 호박 잎새 숨죽이는 여름날
강변엔 뙤약볕만 먹고 자란 뱀딸기
핏빛으로 핏빛으로 익고 있었지.
전라도여, 전라도여
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까칠한 턱수염
내 뺨을 비비고 부르르 떨리더니
먼 데서 개짖는 소리 들리더니
귀신들 도깨비들, 수지니 날찌니
해동청 보라매 훠이훠이 다 날아가버리고
개짖는 소리 데불고
밤 늦은 길을 이제는 내가 돌아가네.
시들은 바람 속을 내가 돌아가네.
4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흥얼거림
저 바람 속에 들리는 것을.
설움빛까지 드러난 황토 흙에 부리를 씻고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열 굽이 스무 굽이
바람도 목이 쉬고
검게 탄 바윗돌이 울먹이는 산마루
철쭉꽃 같은 철쭉꽃 같은
봉화가 오른다.
한 무더기 철쭉꽃이 타오른다.
북소리, 고함 소리
관솔불 높이 이글거리는 밤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녹두꽃 흐드기는
샛바람을 따라 새털구름을 따라
짚신발로 뛰어가던 황톳길
할아버지 죽창 들고 거꾸러진 벌판,
나이 어린 빨치산이 부르튼 발을 안고
숨 거둔 골짜기,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5
산 적적, 흰 그리메
불 같은 그리움을 다스려
칡넌출 벋어간 곳,
전주에서 솜리까지 밤길 칠십 리
칼날 선 내무서원 눈길을 피해
달아나온 아버지의 맨발
삼베 잠뱅이, 거뭇한 수염 그리워.
지금은 비어 있는 마을
젊은 놈들은 도시로 가고
잘난 놈들은 돈벌러 가고
약은 놈들은 등을 치러 가고
쑥떡만 남아서 지키는 고향.
웃으면 눈이 이쁜 가시내들
과자 공장으로 다방으로 술집으로
더러는 밑천도 팔러 다 떠나가버리고
비어 있는 마을에 햇살은 고와
어어이 부르면
어어이 뒷소리로 넘기던 모내기는 누가 하나.
전라도여, 전라도여.
만세 만세, 만세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던 할머니의 삼월도 가고
사월도 가고
슬픈 오월 하늘.
6
발치에 섬진, 영산강을 두고
제 설움에 돌아눕는 만경, 금강을 다둑이고
크막하게 갈재가 뻗쳐
솟은 재를 넘는 옛날도 옛날
소금 장수 시드러진 가락에
무더기 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산도둑놈 거친 숨소리에
소쩍 소쩍 새도 울어라.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여.
이 나라의 가장 후진 백성들의 한숨이
모여서 삭는 곳
오늘도 질척이는 갯땅, 오 갯땅이여.
한 그릇 찬밥덩이 앞에들 놓고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꿀꺽꿀꺽 돌려 마시는 한 사발의 찬물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여.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강인한
솟아오르는 빛의 샘물이여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다오.
시들은 꿈의 정령이 피로한 내 가슴에
지친 나래를 접기 전에,
불씨를 입에 물고
눈 내리는 밤의 광야를 향해 떠나간
작은 새들은
이 밤에 돌아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숨은 충혈된 살의를
아 벗어나지 못한다.
밤의 기슭을 흐르는 아름다운 추상이여
빛의 샘물이여
몰려오는 어둠의 피 묻은 발자국 소리를
지금 내가 듣는다.
강철의
어둠 속을 캄캄하게 날뛰는 개,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는
강철보다 강한 이 밤의 신념을 다오,
내가 듣고 볼 수 있도록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빛의 샘물이여
불씨를 입에 물고 떠나간 작은 새들은
이 밤에 돌아오지 않는다.
점화
강인한
인화지에 웃음이 스며들기 직전의 여자
눈빛이 주위의 풍경을 빨아들인다.
거기에 모른 척 빨려든 적이 있다.
흰 바탕에 파란 체크무늬 원피스 산뜻한
오전 한 때
깨끗한 기쁨을 손으로 까서 내 입에 넣어준다.
박하향이 날 것 같은,
아이스크림 같은 구름의 오월.
우리들 곁으로 둘씩 둘씩
손잡고 팔랑거리는 노오란 유치원생들.
얕은 하늘에 나직이 떠서
새는 왜가리,
아랫도릴 벗고 알몸으로 날아가는 왜가리.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걸며
‘삽입!’
가벼운 파열음을 비눗방울처럼 띄우며 웃던
여자,
목을 맨 게 겨울이었다.
목덜미 아래로 가늘고 흰 손가락이 흘러
진초록에 금빛 네일아트가 빛났는데
여자의 몸속에는
세찬 여울이 있었나 보다.
카네이션 두 송이 쓸쓸한 납골함 주변에
잔인한 시간을 호명하는 바람소리.
‘삽입!’
분홍 입술의 파열음, 시든 꽃의 셀로판지가
투명한 소리를 낸다.
젊은 베르테르를 위하여
강인한
광우병에 걸려 눈 뒤집힌 채 도살된 소
싱크홀처럼 구멍 숭숭 뚫린 뇌 사진을 보셨는지,
베르테르여.
자본의 강철드릴로 여기저기 싱크홀을 뚫고 또 뚫어
지층에서 느닷없는 추락을 끌어내릴 때,
보란 듯이 가슴에 국기를 차고
웅장한 핵미사일 로켓이 워밍업을 하는 아침.
주민들의 자자한 원성과 맥도날드와 일확천금과 VIP들을 모시고
사방에서 뽕잎 갉아먹는 세 벌 잠 앞둔 누에
누에처럼 베르테르여,
우리들의 정신이 한없이 말랑해질 때
은하계를 향하여 내 이름의 로켓은 발사될 것,
베르테르여 당신을 흠모하는 내 이름으로 또한 말하노니
보라, 나는 거인이다. 사람들아
히노마루 아래 다카키여 시게미쓰여 공군참모총장의 모가지여,
삼백 년 전에도 시민계급과 귀족들 간에
간극은 지당하고 엄연하였다.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나러 온 지난해 봄 벚꽃은 자취도 없고
이제 두 번째 겨울 황량한 시멘트 숲에서
흙수저로 체념하고 절망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깊이 모를 크레바스의 천국이 저희 것이요,
금수저로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메울 수 없는
탐욕의 허기는 지금 우리 눈앞에 바벨처럼 우뚝하다.
밤새운 편지를 찢어버리고야 마는
젊은 베르테르여.
제야의 시
강인한
이제는 그대와 작별할 때
책상 위에 촛불을 켜고
고요하고 둥그런 빛의 둘레에
길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리
꿈결인 듯 아닌 듯
강물 같은 종소리가 금실은실
천상의 길을 밝혀 주리니
뒤돌아보면
슬픈 날들은
발이 빨간 새가 되어
이 밤에 날아가리
돌아오지 않는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을 부르며 날아가리
이제는 그대를 전송할 때
촛불을 켜야 하리
저 광막한 우주 속으로
별이 되어 떠나는 그대여
잘 가라 잘 가시라
조개
강인한
산다는 것은
맨몸으로 소금밭을 밀어가는 일이었다.
캄캄한 뻘흙 속
진실은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다.
발가벗은 몸뚱이에
머언 먼 파도 소리 새겨져갈 때
흐린 물살에 쓸려
슬픔도 저와 같이 풀려가는지.
아니다! 아니다!
소리치는 혀에 꽂히는 모래알
모래알의 아픔이 살을 찢는다.
언제쯤이랴,
죄 없이 찢어지는 이 아픔도 닳아져서
둥글고 은은한 빛이 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산다는 것은
뻘흙 속에서, 캄캄한 뻘흙 속에서
손 닿지 않는
천상의 등불을 찾아 헤메는 일이었다.
졸업 뒤에 알게 된 일
강인한
숨이 차올라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다 보면
동무들은 나보다 저만큼 앞질러 달려갔다.
운동장에서 넷이건, 여섯이건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내가 꼴찌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결승선까지 숨을 참아야 한다는 걸,
숨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것을.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강인한
흐르는 저 물길 위에 그대 욕망의 물결이 베일처럼
가벼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가, 술탄이여.
죽은 자들의 그림자 우쭐거리는 밤마다 죄를 머금은
이슬은 사이프러스의 촉수 끝끝마다 별빛을 끌어내린다.
장미꽃이 초록빛 작은 입술을 내밀어 관능의 목을 축이는 밤마다
인간의 슬픈 기원이 들린다. 방울방울
젊은 목숨들 잦아진 곳,
한때는 소리 없이 밤새처럼 한 쌍의 그림자 스며들어
죽음도 무릅쓰는 사랑에 기뻤으매
비단바람이 어루만져 나뭇잎을 환희에 떨게 하였으며
생명의 음률을 스스로 읊으며 분수가 뿜어져 나오게 하였는데
금기를 범하여 처단된 술탄의 여인,
그 사랑하는 병사와 더불어 목이 걸렸고
저들에게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 나는 뿌리를 잘렸다.
처형의 전말을 목격한 죄로 나는 가지를 잘렸다.
죽어서 이루지 못한
슬픔으로 피는 꽃들의 이름을 아아, 나는 모른다.
그 밤의 천둥 속에서 소스라치던 내 이름도 잊고
몇 백 년 물길은 흘러서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잊었으니
불꽃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먼 데서 깊은 밤 사자들이 배회하고
설화석고 흰 돌에 얼굴을 비추는 벙어리, 물의 정령들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며 아라베스크의 춤을 출 때면
횃불에 비친 궁전의 벽은 핏빛으로 어룽지고 있거늘, 술탄이여
나는 다만 눈뜬 채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는 한 개 나무토막,
이 깊은 성 안에서 잠 못 드는 영혼들 하염없는 손짓을 기억할 뿐
한 그루 죽은 나무로 나는 여기
불멸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알람브라의 정원에 서 있느니.
중력 가속도에 들어있는 에너지
강인한
믿을 수 없다.
가문 여름 내내 벚나무에 붙어 악쓰던
매미의 검은 울음 속에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벽돌을 들어 올린 소년의 두 손에
먼 거리의 표적을 기어이 맞히고 싶은 의지가
꿈틀거렸다.
열 살 소년의 몸속에 조용히 스며든 그것은
체온을 1도 높여주지도 않았고
두려움 앞에 글썽이는 눈물이 되지도 않았다.
아줌마는 화단에 쪼그려 앉아
고양이 집을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집 없이 떠도는 고양이 동그란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디붉은 대가리
화단 구석 해바라기를 쳐다보는
선혈처럼 붉은 맨드라미 볏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
18층 옥상에서 아래로 던진 시멘트 벽돌은 오후 네 시
시속 113 킬로미터로
과녁인 사람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권총이 발사될 때의 두 배 에너지
저 중력 가속도 속에는 살의라는 에너지가 들어 있었다.
쥐덫
강인한
덫에 걸렸어요.
하늘이 납작 내려앉아서 숨이 막혀요.
이 광명한 대낮에
멀쩡한 소리 말라고, 웃기지 말라고
모두들 깔깔거려요.
정말이어요, 덫에 걸렸어요.
그렇게 엉성한 덫에 누가 속을 거냐며
법도 모르고 밥도 모르는 이들은
까맣게 웃고 있어요.
옛날의 그물이 내려오고 있어요.
더 크고 튼튼한 그물이
빛나는 강철의 눈을 반짝이면서
웃고 있어요.
당신들 머리 위에
당신들 눈 위에 강철그물이 내려요.
멀쩡한 대낮에
헛소리 말라고 깔깔거리는 당신들 코앞에
상한 생선 토막이 걸려 있어요.
당신들은 믿으려 하지 않지만
소리 없이 내려치는 바람 소리,
소리 없이 덜미를 후려치는
강철의 바람 소리 들리지 않나요.
들리지 않나요.
지등설화(紙燈說話)
강인한
욕계(欲界)를 훌훌 털듯 지등(紙燈)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지등(紙燈)에 꽃들이 탄다.
눈먼 선조(先祖)들의 숨결 소리 흐범벅지는 밤내
땅속에선 땅속에선
짐승들의 울음소리, 꽃들의 몸살.
어둑어둑 눈이 머는 부엌에서
무수한 손가락질
아가 아가 부르는 밥솥에 손가락질
새애기 꽃잠에는
가신 이의 손가락질이.
살 맞대고 짜 낸 우리들의 꿈
장화(薔花)의 고무신은 붉은 댕기는
비오! 비오! 파랑새 되고 파랑새의
색신(色身) 고운 부리가 되고.
도련님 눈썹에 눈 내리는 돌개바람
돌개바람 속에 북 소리, 쇠북 소리
명계(冥界)를 길어내는 피리 소리
도련님 눈썹에 사향 노루
사향 노루 뒷굽에 은빛 젖가슴
펄펄 끓는 북녀(北女)의 은빛 젖가슴.
강산(江山)에 열두 달 눈이 쌓여라,
장천(長天)에 열두 달 돌개바람 불어라,
저승에서 이승으로 옮아 다니는
세세대대(世世代代) 사람의 가슴을 옮아 다니는
불! 불! 불! 불!
불만 있으면......
땅속에선 땅속에선
짐승들의 울음 소리, 꽃들의 몸살.
길조(吉兆), 길조(吉兆),
지등을 걸어두었던 문설주에
홀연히 사무쳐 있는 신설(新雪)을 본다.
지붕 위의 황소들
강인한
닷새째 내린 비로 도로는 강이 되고
어- 어- 하다가 물이 차올랐어.
그리곤 기적처럼 둥실 떠오른 게야.
간질거리는 물살들이 아랫배를 밀어올리는
기분 좋은 부력,
이참에 여행이나 떠나볼까
떠오른 것들이 저희끼리 신나게 노래하고 있잖아.
물침대 고무 매트도, 깔깔거리다
뒤집어진 냉장고도, 둥실둥실 귀여운 승용차도
지나가잖아. 그냥 서로 바라보며 떠올라 웃고 웃고
울고불고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물 밖에 고개만 내밀고 흘러가는데,
샌프란시스코 9,023킬로미터, 카이로 8,485킬로미터,
상파울로 18,330킬로미터……
놀이공원 이정표도 떠서 건들대며 지나가는 거야.
공항 가는 리무진이 떠내려오면 그걸 타야지.
저거야. 지구별에 불시착한 어린왕자처럼
올라보니 지붕이잖아.
아냐, 요술 담요야. 자 이제 떠나자.
저기 북극성을 향해
하쿠나 마타타, 아브라 카다브라!
지상의 봄
강인한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 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진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 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지퉁쟁이* 설화
강인한
내 나이 스물두 살쩍에 상리 지퉁쟁이 살 때였네.
시암 가상에 석류낭구 한 주가 서 있었는디
시꺼먼 깜밥 손등에 피가 비어 나오는
석류낭구 가쟁이 새이로 흰 낮달이
걸려 있었는디
몰래 빨아서 널어놓은 홀엄씨 서답같이
넘부끄러운 듯 넘부끄러운 듯
떠 있는 반달은 풀이 죽어서…
갱겡이에서 온 새비젓장시의 목쉰 소리만
싸리울타리를 넘어오고 옷고름마냥 풀어지고.
석류꽃 피맹키로 붉은 여름,
학독 우에 땡볕이 자글자글 볶아대는 점심참을 지나
아칙에 매조가 떨어졌는디
오늘 무신 반가운 기별이 올랑갑다 혀도
내 고여 소냥읎었네.
모가지 질게 빼고 내다보는 고샅길,
날한질라 뜨건디 바람 한 점 없이
또랑갓집에 우체부 자징기 방울소리만 떨어지고.
보고자픈 것들 기리운 것들 포도시 참는
저녁 냉갈에
나는 눈이 씨애려서 눈이 씨애려서.
* 전라북도 정읍군 정주읍 상리에 있는 마을.
진리의 발생
강인한
자 보라,
맥주 한 컵 위에 소주 한 잔을
붓는다. 넘친다.
오늘의 번뇌.
이번엔 순서를 바꿔
소주 한 잔 컵에 붓고 거기에다 맥주를 붓는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고요하다.
소주는 아래, 맥주는 그 위
이는 명상의 체위일지니.
가령
깨뜨리거나, 삶지 않은 달걀을
테이블 위에 모로 세워보라.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비틀비틀 쓰러지고
술 취한 성기처럼 쓰러지는 중력의 법칙.
아니다. 중력을 거부하라, 되받아쳐라.
달걀을 손에 쥔 채 팔을 휘두르는 원심력, 빙빙 돌리고
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돌리고 돌려서 무게 중심을 단전에 모아
세우면 설 것이다. 오뚝이처럼
새벽의 남근처럼.
차(茶)
강인한
나직이 밤에 끓는 물소리 맑은 올올
내가 사는 하루란 차 한 잔의 깊이뿐
앙금이 내리는 길을 오늘 다시 걸었다.
산이 날아와서 창호지에 그린 능선
사는 것 허망해도 가슴 죄며 바라보곤
오롯이 건네는 정을 두 손으로 받든다.
글썽한 목소리로 가라앉은 빛깔 위에
이녁의 고운 아미 사르르 물살지면
내 눈물 흙이라건만 체온보다 따숩다.
별빛도 아아라히 가슴벽을 흐르는 밤
지나온 생애의 길 기럭 울음 저편인가
오스스 시린 손으로 새날빛을 젓는다.
철길의 유령
강인한
이리(裡里)에서 오산(五山)까지 3.4 킬로미터
나도 걸을 만한 거리였다.
자갈 많은 신작로엔 미루나무들이 그림붓처럼 서있었다.
밤에도 걸을 수 있는
이리에서 오산까지 철길이 좋았다.
콜타르 칠한 침목은 또박또박 내 걸음에 응답해 주고
6학년의 밤길에 레일은 내 동무였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때리며
조개탄 같은 자갈들이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비죽거릴 때
문득 뒤돌아본 내 눈앞에
시커먼 미카!
눈보라 속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지금의 나는
예순 해도 전 그 겨울밤 철길을 걷는 유령인지 모른다.
초겨울 사원묘지(寺院墓地)에 내리는 눈 -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강인한
차디찬 영하의 햇빛이 광장 저편에서
교회 용마루를 금빛으로 물들일 때
그대는 스물여덟의 젊은 이상주의자로
처형대에 묶여 있었다. 사형선고가 내리고
늘어선 병사들이 천천히 총을 들어
그대 하얀 속옷을 붉은 피로 적시기 직전
아아, 나팔 소리는 울리고
황제의 특사령이 그 자리에서 낭독되었다
기억하는가 표도르
꿈으로만 흐르는 강물 소리 그리운 초원을
시베리아, 옴스크 요새 죽음의 집
벽돌을 져나르고 돌아온 저녁
두 발에 무거운 쇠사슬을 절렁거리며
좁은 욕실에서 떼뭉쳐 목욕하는 아수라 속에서도
표도르, 그대의 영혼을 악마도 뺏을 수가 없었다
빈민구제 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악질의 병과 도박에 하염없이 시달리면서
뼈를 깍아세운...... 인간의 대륙
저 뜨겁고도 광막한 대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대가 죽도록 사랑한 므이쉬낀과 알료사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의 슬픈 이름이
초겨울 사원묘지에 내린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대를 부르며 폐대르스부르크에 눈이내린다.
춘당 춘색 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강인한
돈두(豚頭)가 폐포파립으로 앉아 도승지 펼쳐 내건 시제(詩題)를 본다.
춘당춘색(春塘春色)이 고금동(古今同)이라
풀어쓰면 이르되,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란다.
일광수산 횟집에서 먹은 싱싱한 생선회며 폭탄주가 슬슬 취흥을 돋운다.
그래 바로 이 맛과 이 흥을 먹물에 풀어 쓰는 것이라,
칠언절구를 일필휘지하였으되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에 민루낙(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한 줄로 도열한 대검, 지검, 중검, 소검들 일렬로 조아릴 제
대취타(大吹打)― 소라 나발을 불고 하늘 높이 태평소를 끌어올린다.
섰거라, 물렀거라. 대리 기사 납신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때에도 우리나라 사신은 압록강 넘어
나귀나 말 등에 바리바리 조공 싣고 동짓달에 심양으로 출발했던지라
동짓달에 떠나야 그 동지사(冬至使) 터벅터벅 설날에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러니
서럽고 작은 나라, 지극정성 큰 나라[大國]를 섬겼더란다.
어언간 시대는 바뀌어 짐승 등에 갖은 선물바리 싣고 가는 대신
이천이십삼 년 오월, 손 없는 날 골라 비행기에 조공사절단 태우고 가서
풍채 좋은 국빈(國賓)으로 아메리칸 파이 도리도리 불러제끼고
큰 나라에 투자 선물 호기롭게 퍼주고 오는 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춘당춘색(春塘春色)이 고금동(古今同)이라
아흐, 스스로 알아서 바짝 쭈그러드는 돈두여!
춘하추동(春夏秋冬) 비 내리는 - 베트남의 전사(戰士)들에게
강인한
춘하추동(春夏秋冬) 비 내리는
이 고장의 젊은이들
눈동자에
비가 내리는 거리에
주정꾼이 제가끔씩 흩어져 가는
읍내의 장터에
벌거벗은 나무에 비가 찢기는
춘하추동
순수한 피곤의 비늘
내 작고도 어두운 귀로(歸路)에 깔리는
비늘 조각 깔리는 거리에
주춤거리는 나의 성장이
누구 하나 손 잡아주는 이 없는
공허한 마중이
주저앉은 역두(驛頭)에
춘하추동 비 내리는
교외(郊外)의 지붕 위에
날아가는 부엉이의 울음이
올 것이 오지 않는 강산에
비가 내리는
이 고장의 젊은이들
눈동자에
돌아오지 않는 돌아오지 않는
목이 쉰 바다 건너
비가 내리는
춘하추동
목숨보다 뜨거운 불이 내리는
진초록 활활 타는 비가 쓸리는
출항제
김명인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
내 목숨같던 애인이여.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지난 봄 갈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맨 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
눈 내리는 세계
우리들의 항해일지 속 뜨거운 체험으로 끼워 넣으며
불손했고 쓰라렸던 사랑을 덮는다.
감동도 없이 붙들어 지킬 신념도 없이
한 때 깊어 빠져가던 우리들의 탐닉,
일상의 식탁과 우울한 밤의 비비적거림이
한갓 구설의 불티처럼 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
아, 실어 올린 전생애는 제 나이만큼 선창 속에서 보채고
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켜들고
먼 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
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 가는
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차가운 눈발의 동행 속에서
하얗게 서려 오던 유년의 숲,
꺾어진 꽃 대궁을 끌어안고
그 때 눈물로 다스리던 가슴이여.
북풍처럼 사납게 몰려 와서
목숨의 판 끝을 쪼아대는 이웃의 이목 속에서 피 흘리고
문득 생사의 늪에 앙상한 채 버려지던 지난 날,
마지막 한 방울의
숨어 있던 야성의 피가 깡깡 굳은 풍토병을 적시고
한 세대의 사슬을 의롭게 풀어내던 것을,
질기고 칙칙한 동면을 몰아세우고
우리들은 깊은 잠든 실속들을 마저 깨웠다.
불면으로 지새우며 밤새껏 항해도를 뒤적이며
버려진 모든 목소리를 새롭게 걸러내며
내 울음이 시대의 물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 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
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던.
풀려나는 긴장으로 또 한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내고
성실한 두 팔로 기어오르는 불안을 뿌리칠 때,
우리들은 순수한 믿음의 항해 속
차고 맑은 파도처럼 떠도는 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새로운 부활을 감지한다.
끈끈한 적의를 안개처럼 피워 올리며
난파의 갯벌을 휩쓸며 바람은
한 때 우리들이 열던 출항의 부두고 내리몰지만
허나, 굳센 믿음의 밧줄을 이어 잡으며
목숨의 한 끝을 건져내는 강인한 힘,
우리들은 불의 힘에 온 몸을 태운다.
아직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하염없이 쓰러지며
이마 위에 솟는 피만큼 검붉게
흉중을 행궈내는 식솔이여,
이제는 내 돛폭의 그늘에 마저 숨어라.
신성한 믿음도 밑바닥이 보이잖게
금린 밝게 떠도는 물빛, 아침의
아아, 무한한 폐활량.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 속으로 떠난다.
온 핏속에 또 다시 떠도는 체험의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크랙
강인한
물고기가 낚시에 걸렸다 풀려난 뒤
다시 낚시에 걸릴 수 있는 건 3초
기억의 한계가 불과 3초라고 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반칙에 대하여
성낼 줄 알지만, 또 너그럽게 눈감아주기까지
짧으면 몇 달 길어야 1년
그게 우리가 노는 그라운드의 슬픈 규칙이다
헐렁한 옷과
어쩐지 몸에 조이는 옷
그 틈에서 비정규적인 꽃샘바람이 불었던가
진눈깨비라도 살짝 뿌렸던가, 옛날에
잊지 않기 위해서
팔에 문신을 하고, 멋 부리기 위해서
배꼽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 내가 피어싱을 한 당신과
한 몸이 되어 서로의 누드에 탐닉하는 건
만지는 살과 만져지는 살의
틈새를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윽한 사과 향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부적절한 네거리에서
추상의 사과 냄새를 미늘에 매단 속임수
그 우아한 눈물과 재채기로
캑캑, 크랙, 숨통을 조르며 피어오르는 악몽을.
타자기를 연주하는 남자
강인한
지휘봉 하나에 칠십 개의 시선이
자장 안의 쇠붙이처럼 모여든다.
치켜든 지휘봉에 수은의 정적이 맺혀 반짝 빛나는
한순간, 봄의 기병대가 뛰쳐나가고
여름의 악장이 강물처럼 넘실넘실 흐르다
섭씨 삼십육 도와 사십일 간의
지글거리는 폭염을 끌고 프레스토로 이어져 갔다.
모든 악기들이 땀을 들이고
지휘봉을 든 여자 앞에 한 남자가 앉는다. 종이를 끼우고
천천히 타자기를 치는 남자.
- 토드락 탁 토드락탁탁 톡탁 타르륵
탁탁 토르르르 탁 톡톡
배롱나무 태양처럼 붉은 꽃들, 하르르 지고
배롱나무 흰 꽃들, 붉은 꽃들 사이사이 흩어지는 소리.
타자를 다 마친 남자가 일어서서
종이를 꺼내 지휘자에게 두 손으로 바친다.
접힌 종이를 편다. 백지에 핑크 하트!
태어나지 않은 이름은 슬프다
강인한
알게 모르게 평형수를 줄이고
귀신의 숟가락 귀신의 보따리만 챙기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건강을 위하여 아암, 시민들의 상쾌한 건강을 위하여
담뱃값을 올리고
다이어트를 위하여 지나친 포식을 자제하기 위하여
친절하게 밥값을 올려주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금수강산 배달민족 그런 말 지금도 사전에 있느냐.
금수처럼, 짐승처럼, 그래그래 치킨을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국물 많은, 짐승처럼
짬뽕을 배달시켜 먹는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고말고.
금모래 은모래 반짝이는
이 강 저 강 파헤치는 배달민족
보를 쌓고 댐을 쌓아 홍수를 막았느니 재앙을 막았느니
녹조라테 넘실, 큰빗이끼벌레 너도 늠실,
저것도 먹으면 틀림없이 몸에 좋을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져가 연구해 보라고 해봐.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골목골목 CCTV만 설치하면 근심걱정 그걸로 끝—
어두운 새벽 밤길에 잡은 처녀를 토막 내고
노파도 토막 내서 가방에 담고,
바다 속에 삼백 명을 눈앞에서 수장시키고도
그래도 그게 교통사고 사망자보담 적은 수 아니냐고.
떼죽음 생방송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팔짱 끼고 바라만 보고 바라만 보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1박 2일로 숭례문이 불타고, 완벽하게 불탈 때까지 바라만 보고
그때 진작 알아봤지, 아암 두 손 놓고 불구경에
넋을 놓아버렸을 때
이 나라 망해버린 것 진작 알아봤어야 했지.
망해버린 자궁에 더 이상 들어서지 마라,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아이들아.
테셀레이션
강인한
에셔의 도마뱀은 연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책으로 쌓은 층계를 오르다
지금 발치에 걸린 삼각함수에 골몰하고 있다.
도마뱀을 덮은 후박나무 이파리, 초록에서
초록이 다 빠질 때까지
위가 허약하고 근골이 약한 나는 반하후박탕이나 달여 먹을까.
내가 당신의 안으로 들어가고
당신이 또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그걸 사랑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삶은 가지무침을 먹을 때
내 혀가 감아 들이는 물컹한 당신의 혀
혹은 당신이 빨아들이는 가지처럼 말랑한 내 혀.
어제 떠난 이별의 그림자가
내일 저녁 우리들의 발치에 붙어서 빗발처럼 머뭇거릴 것이다.
푸른 여름의 은행알들은 작년의 황금빛을 기억하며 후드득 떨어진다.
거울 속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5도의 사랑이여.
거울 속 내 체온은 내려간다, 자꾸만 내려간다, 영하 10도의
사랑이여, 내 발가락이 사라지며 잿빛 꼬리가 돋아나는 게 보이느냐.
토파즈빌 통신
강인한
주방의 쪽창에 비치는 풍경이 덜컹거린다
토파즈빌 114동과 토파즈빌 115동
저 두 개의 건물 사이 옹색한 얼굴로 산이 끼여 있고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사계가 지나간다
나는 설거지하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겨울을 보았고
색맹검사표같이 어지러운 눈발 속
모든 새의 이륙과 착륙이 금지된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느티나무가 내려다보는 놀이터
그네가 매 맞은 나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빗속에 승용차에서 내려 얼른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가는
여자의 품안에 개가 안겨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토파즈빌 114동에서도 115동에서도
비가 오거나 말거나 열심히
고가사다리차가 이삿짐을 실어 내리고, 실어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
절뚝거리며 벚꽃이 날리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
설거지하는 아내의 등뒤에서
푸짐한 허리를 가만히 안아보다가
저리 비켜, 발부리에 채인 강아지처럼 나는
유순하게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이 입국하는 건 시간 문제라는데
내가 사는 토파즈빌 113동의 주방 쪽창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유유히 외출하는 여자가 보였다
하릴없이 나는 풍경을 갈아 끼운다, 잔뜩 근엄한
최고통치자의 지당한 유시가 웬일로 코미디 대본으로
착각되는 때가 많은 환절기였다
튤립이 보내온 것들
강인한
바람들이 차갑게 또는 서늘하게
길 위에서 서로 다른 체온을 비비며
색실처럼 넘나드는 아침 여섯 시의 공기.
길바닥에
지렁이들 나와 죽어있다.
어제는 얼마나 먼 길 찾아 나서 땡볕에
말라 죽었느냐, 느린 걸음으로
울며 가는 달팽이들.
갈대숲 푸른 덤불을 감고
길 가는 미루나무 새잎을 향해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나팔꽃 넝쿨손.
강아지랑 고양이
식구들 유모차에 다 태우고
한강공원 산책 나선 할머니.
강변북로 아래 굴다리 지나
튤립 꽃은 가고 없네. 공원 관리사무소 옆
돌돌거리는 유모차에 쫑긋쫑긋 귀를 버리고.
파로마 그릴 찾아가는 길
강인한
오전의 햇살이 동쪽에서 새들어온다.
꽝꽝나무 아래 숙취의 부스러기
참새들 금빛에 홀려 토독토독 쪼아댄다.
입춘을 넘긴 후쿠오카
파로마 그릴 찾아가는 이면도로
꽝꽝나무들 줄줄이 표어를 달고 행진한다.
제국 군대처럼
- 음주운전을 박멸하자!
- 음주운전을 박멸하자!
확성기 소리로 울부짖는 까마귀
신사 근처에 숨어 있다가 언제 날아왔나.
꽝꽝나무들 머리 깎고 반성하고 있다.
꽝꽝나무 속 생쥐 한 마리
참새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까만 눈빛으로
(스물여덟 윤동주가 죽어간 형무소가 어디쯤인지)
그늘 한 장 빼내려다 움츠린다.
꽝꽝나무 속 스크럼은 검은 초록빛,
악몽처럼 무섭다.
소름 돋는 후쿠오카 까마귀.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
강인한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
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
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
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
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
공항이다.
엄정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아부심벨에 두고 온 사랑을 생각한다.
불타버린 심장으로 느낀다.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오벨리스크가 침묵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
까마득한 이방의 시간과 대지 위에 서 있다.
팬지꽃
강인한
허공에 높이 떠 있습니다
내려갈 길도, 빠져 나갈 길도
흔적 없이 사라진 뒤
소문에 갇힌 섬입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한 주일 만에 나선 오후의 외출에서
꽃상자 속에 담긴 꽃들을 만났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키 작은 꽃들
가혹한 슬픔을 향하여
벌거벗은 울음빛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 시늉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펜로즈 삼각형 위에 서다
강인한
차에서 내린 당신 앞에 펼쳐진 카펫,
붉은 카펫이
없어서 미안하다.
아침 햇살이 유리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보도블록 위에, 타일 위에
청사의 유리 도어에 수은처럼
흘러내리는 클라리넷 선율
당신이 미치게 반가워서 하늘 높이 솟구친다.
어제의 모래와 작년의 진땀과
십년 전의 새빨간 혀가
새처럼 삼각 꼭짓점을 물고 있다.
어떠한 완력으로도 찌그러지지 않는다.
절대의 도형
혹은 독사의 대가리.
당신은 날름 뱀의 혓바닥으로 핥아먹고 싶겠지,
러브 유어셀프 承 Her.
머리 위로 찢어진 구름 떼가 빠르게 지나간다,
펄럭펄럭 밤의 정령들이 지나간다, 금빛 하늘이
지나간다, 파란 하늘이 지나간다, 하루
이틀 사흘……이.
플란다스의 개를 안고
당신이 타고 신나게 달리는 심야의 승용차를 향해
달걀이 날아간다,
가래침이, 한 송이 장미꽃이 날아간다,
폭죽이 터진다, 날아간다.
나이스 샷, 풀 샷, 옜다 받아라.
새벽 0시의 풀 스윙
이건 평생 허기진 당신을 위한 머그샷이다.
편서풍
강인한
요르단 암만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늙은 가로수들
쓰러질 듯 숨차게 따라온다.
북쪽의 국경 너머는 시리아
신전 돌사자 깨부수고 인질의 목을 베는
검은 옷자락.
어쩌다 페트라 암벽에
뿌리박은 무화과나무는
천년 물길의 붉은 얼룩을 보며 목이 탄다.
시리아에서 떠나와 낯선 터키 해변
모래톱에 얼굴을 묻은
아일란 쿠르디는 세 살.
평생의 집
강인한
거위벌레 햇살 좋아 집 짓는다
제 한 몸 동그랗게 들어갈
집 한 채 짓는다
한 목숨 더위 피하고 사나운 눈길 피하려고
실도 가위도 없이
나뭇잎 한 장 그것도 많아
붉나무 이파리 옆구리를 주욱 잘라낸다
동글동글 말라내어
보란듯이 초록빛 굴뚝 하나 세운다
붉나무 나뭇잎은 한 철 지나 시들게 마련
이승에서 살아갈 목숨은 달포 남짓
나뭇잎 굴뚝 속에 거위벌레
콩알처럼 웅크려 잠자는 사이
비 오고 바람이 불면
가만가만 그네를 타는 집
달빛이 가끔은 푸른 이슬 내리는
가난해서 아름다운 거위벌레 평생의 집.
폐항
강인한
마을은 비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줄포로 가는 길, 야간 통행금지 구역의
언뜻언뜻 스치는 진눈깨비 사이로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빈집
고추를 말리고 감자를 캐던 이들은
밤도망으로 멀리 떠나가 버리고
몇 해째 이엉을 이지 않은 낡은 초가집
썰렁한 흙 바람벽이
헌 고무신짝으로 띄엄띄엄 버려져 있었다.
갯벌에 촘촘히 박힌 발자국들 위로
바람은 날을 세워
징그럽게 울고 있었다.
줄포는 옛날에 항구였느니라,
고깃배, 소금 배 둥싯거리던 포구가
바로 여기였느니라.
손가락질하는 곳에는
곰보로 얼룩진 뻘 흙바닥
갯지렁이를 훑어 파는 새삼스런 기쁨으로
갯벌은 질척이는데
허물어진 선착장 가까이
저녁 햇빛 아래 폐선으로 남은 거기
겨울 하늘이 나직이 내려오고 있었다.
폭우
강인한
먹물이 번지는 하늘에서
하늘에서 검은 쇠못이
화살처럼 쏟아진다
은빛 강철의 손들이
무수한 손들이 아우성치며
땅바닥을 기어다닌다
찢겨져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나뭇가지
검은 바람이 달라붙어서
거칠게 이파리를 뜯어먹는다
소리가 소리를 지우는
거대한 침묵 속에.
폭탄을 두른 리본*
강인한
사슴이었다.
아름다운 관능의 향기는 짙푸른 피톤치드와 섞이고
다육식물과 칡넝쿨과 침엽수들 얼크러진 숲에서 꽃들은 부르고 있었다.
검정, 노랑, 초록빛 나비, 나비를……
숲속 어디선가 번개가 날아왔다. 소리 없이
빗발쳐 쏟아지는 은빛,
온몸에 꽂히는, 꽂혀서 피 흘리는 쇠못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생각났다.
푸른 리본을 목에 두른
그녀는 그 맨 처음의 눈물이 그리운 사슴이었다.
* 앙드레 브르통이 프리다에게 한 말.
폭포
강인한
천제연에 갔다. MB 4년 3월 24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천제연
폭포는 간 데 없고 벼랑 아래 웅덩이만 푸르렀다.
어떤 미친놈이 저 폭포를 바리바리 거두어 가져갔나,
후루룩 마셔버렸나.
폭포소리가 들린다.
주야장천 열린 창문으로 폭포소리가 들린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털북숭이 폭포소리가
물 없는 천제연 폭포소리가, 강변북로
시속 백 킬로의 아스팔트에 밤낮으로 깔려 있다.
푸른 당나귀
강인한
천장에서
고개 돌려
슬그머니 바라본다.
눈길 닿는 곳에
이방인들 둘러앉는다.
식탁엔
흰 접시
포크와 나이프.
파이윰 오아시스는 카이로에서 세 시간.
하얀 배, 푸른 등의
말 없는 당나귀
네 발로 천장을 걷는다.
뒤집힌 세상을
하루 종일
또각또각 밟고 간다.
푸른 당나귀.
푸른 심연 - 오페라의 유령
강인환
노래의 날개 위에 극장이 있고
도취의 하늘이 거기 떠있었다
내 사랑의 깊이는 지옥보다 깊어서
오, 두려워라
저 푸른 심연을 소라고둥처럼 내려가고
내려가면 거울의 방
소용돌이 속에 떴다 가라앉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섬이었다
갈채는 거미줄이 되어
샹들리에를 휘감아 흔들더니
내 심장이 터질 듯 슬픈 날이었다
우레처럼 떨어져 산산 조각이 난 샹들리에
죽음의 오페라는 막을 올리고
나는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눈부신 삶을 노래하는
디바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절망에 입맞춘 내 입술로 지옥의 사랑을
하소연해도 부질없을 뿐
이제 나의 노래는 어둠 속에
삐걱이는 층계와 벽 속에 숨어 있느니
그대가 바라보는 거울 뒤에 숨어 있느니
춤추며 노래하는 그대여
그대의 발길을 희미한 꿈결로 따라갈 뿐
그림자처럼 거미줄처럼
풀밭 위의 점심 식사
강인한
여러분의 자랑스런 후일담이 되어드리려고
벌거벗고 앉아 있어요,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의 고양이가 되어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두더지가 한사코 땅을 파듯
저 멀리 흐르는 강물 소리엔
꿈의 운하를 파는 삽질 소리가 암암리에 섞여 있지요
내 곁에 한쪽 다리를 뻗고 느긋한 파트너는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지요, 그리고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지지요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들을 인화하기 위해서
내 얼굴의 턱을 괴고 있어요
거리에서 떼쓰다가 불타 죽은
못된 불량배들에 대한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
감춰진 샅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숲속
이 그늘이 참 좋아요
굴참나무 속에 섞인 한 그루 자작나무처럼
알몸으로 앉아 있어요, 강가에서 뒷물을 마친 친구가
건너편 남자의 짝이 되기 위해 돌아오고 있네요
방부제가 섞인 이 식빵과
농약이 스며 색깔 고운 과일들, 주기도문과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을 함께 들어보셔요
죽어도 우리들은 썩지 않을 거예요
썩지 않는 우리들의 사랑 먹고 마시어요
이 신선한 공기는 십 년만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들의 풍경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내 허벅지 사이로 기어 들어와
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 뜨거운 시선
도대체 도대체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구지요?
풀잎에 쓴 시
강인한
내 어린 사랑을 담아
맺히거라.
순한 새가 되어
네 어깨에 기대고 하루쯤
나는 울고 싶다.
바람이
네 고운 몸짓을 틔워주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쁜 저녁 햇살과 만나서
반짝일 때
어둠 속에서
가만히 기쁨의 뿌리를 내어
나에게로 올 때
작은 풀잎이여.
풀잎이 풀잎끼리
강인한
풀잎이 풀잎끼리 뿌리내리듯이
이삭이 이삭까리 뺨 비비듯이
지금 바람은
춘향과 도령의 흙더미 속에서
그 맑은 눈을 비비고
내 꿈에는 보여요
꿀을 길어올리는 봄꽃이랑
구름 속을 나래치는 황조, 금조
가만가만 밥그릇에 담기는
즐거운 입속말이......
비인 곳을 어루어 채워주는
기대이고 기대어오는 착한 바람 부네요
우리 오래오래 살다가
풀잎이 되어요, 이삭이 되어요.
풀칠하기
강인한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일과 시간표를 새로 작성해서
분필통에 붙히던 날
마흔두 살의 동료 교사가 죽었다.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보다 건장하던 그였다.
요쿠르트 아줌마가 박 선생의 소식을 듣고
고개 숙여 울었다.
윤 여사, 왜 어제 거기로 안 나왔지?
박 선생의 실없는 농담이
그의 책꽂이에 아직도
해법 수학으로 꽂혀 있는데,
풀 속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친화력이 들었나 보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시간표와 분필통은
서로를 죽자 사자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례식날 아침
그의 어린 유가족을 보았다.
우리 집 아이들 또래
그 애들은 울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 울었다.
이십 년 가까이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삶의 함수를 하루내 풀던 사람
내가 단락을 나누고 문장을 자를 때
옆 교실에서
인생보다 어려운 문제에 매달리던 사람,
그에게는
아말감으로 때운 어금니가 두 대
충치로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그는 자신의 입을 벌려
치료된 어금니를 보여주었다.
휴식 시간의 햇살이
박 선생의 어금니를 기웃거리던
그게 지난가을이던가.
풀칠을 단단히 해서
책상의 한 귀퉁이에도 나는
시간표를 붙여 놓았다.
아마도 이게 호구의 상책이지 싶어서.
풍경을 애완하다
강인한
유리 성(城)의 뜨락에는
유리의 햇살이 찰찰 부서지고,
까만 눈썹
사과 빛 뺨이 언제나 수줍은
네덜란드 소녀.
화사한 마음으로
미소하는 입 언저리에
해말간 꿈빛이 돌아
둥실한 구름 한 점
구름 속 새 울음 한 점
없어도
겨우내 외롭지 않은
귀여운 아이.
먼 고향 하늘엔 풍차가 도는데
네덜란드 소녀
커다란 눈망울에
파란 봄이 어린다.
풍경의 발작
강인한
혼잣말로 가시를 발라낸 물길이
상리를 지나
중시암을 거쳐
한 무더기 안개를 피워 올린다.
각시다리 한가운데
벼랑처럼 우뚝 선 사내.
울부짖는 강아지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
새어나오는 개의 비명
흙지렁이 같은 머리칼 사납게 흔들며
피범벅 이빨로 사내는 물어뜯는다.
옥수수 알갱이를 뜯어먹듯이.
- 저게 개지랄이여.
다리 밑 돌멩이에 걸린 걸레 쪼가리처럼
멀찍이 둘러선 사람들
혹은 시궁의 핏빛 돌이끼처럼
놀란 발걸음 주춤, 주춤거리고.
소동에서 먼
읍사무소 화단
붉은 칸나가 꽃대를 간신히 밀어올린다.
풍란
강인한
벼랑 끝 바윗돌에 붙어 꿈꾸다가
내려다보는 저 아래에는
물새 울음 한 점 흐르지 않고
붉은 산호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없으므로
나는 비명도 못 지른다
검푸른 바위옷이 발치에서 말라간다
이 밤에
나는 위험하다
벌거벗은 뿌리에 본드를 칠하고
매끈한 먹빛 수석 위에 결박당해
붙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수반 위 세 치 높이에서
한 줌 물안개도 피지 않는 허공이
천 길 벼랑인 것을
차라리 나에게
목숨을 날릴 태풍을 다오
뛰어내릴 쪽빛 바다를 다오.
프란치스코의 잠자리
강인한
죽음 이후의 투명한 슬픔을
바람이여 그대가 데려왔는가.
점심을 마친 한낮
식당 너른 마당에 나왔더니
내 손등에 잠자리 한 마리 날아 앉는다.
바람이 건드려도 그 자리 그렇게
겹눈을 뒤룩거리며
생각의 실마릴 더듬는지, 하소연을 삼키는지
오랜 눈물을 참고 있는지
내가 조용히 손을 들어
가거라 멀리, 떠나가라, 날려 보낼 때까지.
어느 날의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내 어깨 위에 놓인 네 손처럼.
프리즘
강인한
딱! 딱!
손벽을 치며 왼쪽으로
딱! 딱!
손벽을 치며 오른쪽으로 고기를 몰았다
왼쪽/ 오른쪽/
숨을 곳이 다급해진 붕어가 허둥지둥,
지느르미 하르르 흔들며
살며시 기어든
돌 틈,
가만가만 다가가, 와락
움킨다
손아귀에서 파닥파닥!
살아있는 햇빛
피할 수 없는 사랑을
강인한
간명한 슬픔을 두어 줄 완성하고 싶다
적막을 보는 당신 앞에서
밤의 차가 자꾸만 투명해진다
어느새 이런 나이로 밀려가고
밀려가고 있음이여,
검은 밤 귀신처럼 열렬히 시에 매달리다가
어느 날 아침 그를 만났다
별로 낯설지 않은 모습,
간밤에 하얗게 죽은 담뱃재가 살아나
빈 뇌를 가득 채웠다
아, 어지럼증
헛것인 듯 나는 소리없이 쓰러졌다
가벼운 체중마저 이기지 못한
내 의지가 문득 쓸쓸해지고
결국은 쓸쓸한 만큼 웃으며 나는
당신을 그리워했다
피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했다
하늘의 물고기
강인한
벚나무 꽃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 두 장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다
떨어진 수많은 꽃잎들이 맨땅에서 서로 손잡고
빙글빙글 원무를 추며 흙에 섞일 때
그렇게 시들어감에 순응하고 있을 때
물살에 실려 멀리 떠내려가기로
작정한 물고기처럼
기류를 타고 높이 솟구쳐 오르고
간질거리는 이승의 소식이 차마 그립지 않은 듯
날아올라 허공에서 맴돌며 가슴 죄며 꽃잎들은
바라보는 것일까 저 먼 피안의 기슭을
환하고 둥근 비늘
하늘의 물고기가 된 꽃잎 두 장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른다
알 수 없는 향기와 빛이
낯선 이름으로 파닥이는 곳, 당신의 꿈속을 향해
한밤의 블랙러시안
강인한
내 시력에서 너의 안부가 빠져 나간다
점점 멀어지다가
네 어떠한 표정도 다 지워지고
희미한 기억으로 너는 존재한다
한밤의 블랙러시안
갈색 차가운 소용돌이 속으로
미치고 싶은 내 혈액이 달려간다, 사랑아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에 막혀
우편마차의 방울소리는
흰눈이 내리는 자작나무 숲을 돌아
까마득히 사라져 가버렸다
눈감고 듣는 먼 바람소리
내 귓가에 환하게 들려오는 밤의 갈피 갈피
늑대 울음은 나의 것이다
피 묻은 늑대 울음은 나의 것이다
한밤의 블랙러시안
집을 뛰쳐나와 비틀비틀 걸어가는
사랑아 네 모습이 유리컵에 어른거린다
유리에 내 더운 입술이 닿는다.
한 방울의 물
강인한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
저 물방울 속엔
바람 부는 풀밭이 있다
풀밭 위에는 작은 새끼 사슴
사슴을 감싸는 부드러운 바람과
흰 구름이 있다
허공에 떠 있는
한 방울의 물
당신의 가슴 아래로 떨어지는
내 눈물 한 방울.
한여름 밤의 꿈
강인한
청춘은 슬프다.
그렇다, 이 땅의 청춘은
스무 살의 슬픔을 어깨에 삐뚜름하게 걸치고
터벅터벅 맹장 같은 밤의 골목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보안등이 만든 그림자
소주병은 깨져서 담장 위에 칼날이 될 때
모든 그림자가 육체를 지우고, 육체를 버리고
여름날의 대지로 스며드는 시각
자귀나무는 붉은 영혼을 살며시 뜨고
분홍의 부채를 활짝 펴든다.
저, 저 눈부신 절정에서 피는 황홀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장단으로 치닫는 황홀한 질주.
삼십 리 밖 사람의 마을로 향하는
골짜기 서두르는 여울을 내려다보며
숲속의 자귀나무는 웃는다, 눈으로 묻는다.
죽음의 비밀을 머금은 입술 오므리듯
잎잎 다물어 포갠다.
데칼코마니로 어깨를 겯는 혼령들의 여행
그대, 나와 함께 영원의 이파리, 초록빛 작은 선실에
즐거이, 감쪽같이, 갇히고 싶지 않은가.
한 줄기 차가운 별빛이
뿌리 끝 영롱한 한 방울 독약처럼
당신의 향기로운 잠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해바라기의 종언(終焉)
강인한
거짓말 같은 목숨이었다.
어쩌다가 잘못 돋아난 사마귀처럼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릴 수도 없이
부끄러운 반생(半生)
자신만만하였던 칠월도 가고 팔월도 가고 난 뒤
죄 없이 모멸을 씹던 못난이, 못난이는
돌이킬수록
뉘우침 많은 반생을
은빛 바람에 떨리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어도
모래처럼 흙빛으로 부서지는
꽃이파리
휩쓸려 피어나던 여름이
이제는 한 잎 비틀린 꽃이파리가 되어
되돌아오는데
오늘 다시 찾아온 진홍(眞紅)의 아침은
초라한 나의 씨앗을 위해선 너무도 화려하였다.
해변의 라오콘
강인한
던져진 한 알의 사과가 있었다.
신념 하나로 창을 던졌다.
저 기분 나쁜 목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사제가 돌아설 때
파도 속에서 뜷고 나온 검은 창날처럼
화살처럼
바다뱀이 달려왔다,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거대한 압박이 달라붙어 라오콘을 옥죄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심장, 숨 쉬기가 버거워
벌어진 입에서 짐승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똬리를 틀며 어깨에서 옆구리로, 다시
허벅지를 휘감은 압박에
바스러지는 흙덩이처럼 육체도 끝내 부서지는 것일까.
두 아들도 똑같이 그의 곁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이는 몸짓으로
속절없이 바다뱀에 감겨죽고,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성벽도 바다도 불타고,
처참한 살육과 무참한 십 년 세월이었다.
거기에 묻혀 간
불티처럼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사과 한 알은 하나의 유혹이지만,
이후로도 무수한 시간의 운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해 지는 곳으로 가서
강인한
해 지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
아들아
우물에서 냉수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시고
잎 진 감나무 한 그루를
활활 태우고 넘어가는
저녁놀 속에
나도 잎 진 감나무 한 그루로
서고 싶다
해 지는 곳에서
꿈 같은 그리움을 부비며
하룻밤인 듯 남은 목숨을 태워
거기서 살고 싶다.
호주머니 속 악어
강인한
내 호주머니에 악어가 산다
볕 좋은 날 호주머니를 까뒤집고 탈탈 떨면
있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숨던 땀나는 시간과
병든 사람의 기억처럼 헐떡거리던 섬모와
참을 수 없는 것들이 그리워
실실이 빠져나온 담뱃가루 속에
그 속에 있다
추분 가까운 어느 가을날
호주머니를 떨어내다가, 공기 속으로 떨어져나가는
은빛 빛나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차마 꺼내기 어려운 고백의 첫 발음인지
몰라, 숨기고 싶은
추한 욕망의 한 자락인지 몰라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사내는
제 손을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이번에는
제 머리를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어쩌면 사내의 위험한 저 행동의 끝에는
피 묻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예비되어 있을 것
내가 그대에게 결정적인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머뭇거리는 입술이 첫 음절에 매달려 목마른
호주머니를 뒤질 때
악어가 덥석 내 손목을 문다.
황사 속의 실루엣
강인한
도열해 서 있는 자들
캄캄한 땅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홀연 눈을 뜬 죽음들,
갑주에 창검을 들고 서 있다. 진흙덩이로
불 속에 태어난 돼지들.
천 년에서 다시 천 년을 더 가면 거기다.
기원전 암흑 속에 불로장생의 욕망이
아직도 부스럭거리는, 저 녹슨 금빛.
주둥이로 황사 바람을 내뿜어
관람자들의 발걸음을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 수천의 돼지들.
*
지난겨울 독한 역병이 쓸고 간 축사는 텅 비었다.
마을 입구에서 출입이 제지되는 차량들
허연 소독액을 뒤집어쓴 면상으로
털털거리며 돌아간다. 좋구나, 한 세월
철새 떠나고 돌아올 줄 모르는 미루나무 우듬지
빈 둥지에
밤마다 검은 달이 내려온다. 내려와서 이 나라의
죽어가는 강줄기를 끌어안고 젖을 먹인다.
어디서 흙바람이 분다.
황홀한 물살
강인한
3 - 떠도는 이를 위하여
큰비 그친 뒤
개울가에 귀를 적실 듯 귀를 적실 듯
흘러가는 물살을 본다
친구여,
넌출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흔들려선 마침내 드러누워버리는
물풀의 기나긴 몸짓을 본다.
이른 봄에 환하게 피어나서는
웃음 반 울음 반으로 반짝이다가
흔적 없이 지고 마는 풀꽃,
친구여, 세상이란
우리가 풀꽃으로 한철을 누리다간
훌훌 떠밀려가는 언덕이거니.
먹빛 아픔을 벗고
짐 지기 차마 어려운 사랑마저 벗어버리고
허공에 살을 섞는 茶毘의 고운 연기
그 끝을 따르고 따르는 시선에
황홀한 물살이 어린다
친구여.
회심(會心)의 순간
강인한
겨울 동해 장터,
바싹 마른 북어를 역도선수처럼 치켜들고
하늘 향해 울부짖는
뻘건 돼지머리가 있다, 대낮이 있다.
깽매 깽매 깨갱 깽깽깽……
고액권 지폐가 입에 물린 건
옛날이었다.
뻔뻔한 이마가 햇빛에 빛나는
오른쪽 눈썹 위
투명테이프로 붙인 흰 개의 터럭
한 오라기
서릿발 칼[劍]이 빛났다,
그 순간.
흐르는 물에 달을 떠내려 보내듯이
강인한
기침을 할 때
옆구리에서 피가 나온다.
두 사발쯤
정결한 그릇에 피를 나누어 담아
말씨가 바른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태어남을 본다.
그대가 일천의 강에 발을 적시고
울어도, 온 가을을 넉넉히 울어도
건질 수 없는
저녁 산에 스치는 구름 같은 것.
만 리 밖에
퍼덕이는 대숲의 푸른 비 울음 사이로
숨탄것들이 내어뱉는
작은 울음실이랑 분분한 자취 소리,
만 리 밖에 어둑히 선
마음이여, 모두 놓아주어라.
그대 발끝에 놓여지는 한 벌의 그림자
그림자만으로
이 세상의 적막을 못 가리우랴.
흐르는 물에 달을 떠내려 보내듯이
노래로써 노래를 풀어내리듯이.
흘수선
강인한
더듬거리네.
넘실거리는 물결
지그시 눌러보는 체중.
킬킬 간지럼 타는 당신의 바다 위에
물살이, 물살의 혀가 송곳처럼 꼿꼿해지다
끝없이 오르는 금빛 수평선 뒤집어 버릴 듯
위로 아래로
배의 몸통을 어루며 어루만지며
물살은 더듬거리네, 가장 비밀스런 언어로
더듬거리네.
멀고 먼 데서 시작된 희미한 선율이
한꺼번에 찾아온다.
마침내 당신의 바다를 끌어올린다.
솟구쳐 폭발하고, 산화하는 금빛 소용돌이.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강인한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의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흰 꽃, 붉은 열매
강인한
아가위나무 흰 꽃
오월에 그대를 만났네.
장미가 바람에 향기를 풀어 넣어줄 때였지.
꽃 진 나무에 동그란 열매
붉어지는 내내
그대 까만 눈이 보고 싶었네.
아가위나무 열매 알알이 붉어
그 단단한 붉음 위에
아가위나무 꽃보다 흰 눈
눈이 내리네.
8번 출구로 가는 길 - 테오티우아칸
강인한
막 도착한 행성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이 골짜기는 별빛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곳
태양의 피라미드를 보며 낮에는 루드베키아가 피고
달의 피라미드를 보며 밤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한 떼의 환승객과 어깨를 부딪치며
엇갈리는 걸음으로 스쳐가야만 하는데
그렇게 사람의 운명이란 빗나가는 것일까
불타버린 도시 신의 도시에서 온 사내
그는 떠돌이 악사, 8번 출구 골짜기 그늘에 서서
펜플룻을 분다 그가 연주하는 악기에서 한 줄기
연기처럼 천 년의 하늘이 퍼덕이며 흘러나온다
그 밤의 신전 위에 잠자는 독수리 접은 날개가 고요하다
이 행성에서 건너편의 행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에서 졸고 있는 저 불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죽으면
바람은 우리의 몸을 거두어 흙으로 만들고
사람의 죽은 몸은
언젠가는 다시 밤에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죽음의 거리를 건너가는 저 그림자, 그림자들
스크린도어 앞에 한 줄로 옥수수처럼 늘어선
이 사람들은 잠시 후 사라질 것이다
바람이 되어 8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골짜기를 범람하는 펜플룻의 선율을 타고
아득히 꿈꾸는 섬을 향해 이제 막 떠난 행성열차에
그는 천 년 전 자신의 영혼을 실어 떠나보냈다
1961 어느 새벽의 장난
강인한
오늘 새벽, 지층이 삐걱이며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세기(世紀)의 어둠이
한 번 들썩,
꼭 한 번 들썩이던 소리를 들었는가.
우리들의 귀는
박명(薄明)을 뚫고 저벅, 저벅, 저벅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짓밟고 가는
혈색 좋은 군화 소리밖에 듣지를 못했지만
모든 시계의 바늘이 한 번 부르르
떨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른 봄의 모든 꽃나무에 정지된 한 순간의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오늘 새벽, 새로이 드러난 지각(地殼) 위에는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들이 흘린 몇 방울의 정액.
모든 성좌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한 번 기울었다가 우뚝 서던 한 순간의
절대적인 광채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항성들이 회전하는
그 하늘을 눈여겨 본 이는 아무도 없지만
이 세상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선가
은빛 군번의 메달이 지도에 없는 하늘에서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별똥별처럼,
가족사진의 안타까운 맨 뒷자리에서
한 개의 평화가 스르르 빠져나갔을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볼 수 없지만
세상에 취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모든 임신부의 성염색체가 돌연 뒤바뀐 것은 사실이다.
모든 식물의 뿌리가 지축에서 약간 비스듬히 꽂힌 것은 사실이다.
오늘 새벽,
새로이 나타나 던져진 별빛은
우리들의 뒤바뀐 아들 딸 혹은 손자 손녀 들이
침실에 들기 전 마실 것을 들다가
사랑을 느끼듯
문득 그 별빛을 발견할 수는 없으리라.
그 별빛은 오늘 새벽에야 와 닿았으므로.
지층이 삐걱이며
세기의 어둠이 들썩이던 소리,
기울었다가 우뚝 서던 하늘의 모든 별빛.
아아, 백발의 아르키메데스가
머나먼 명왕성의 지렛대로 그 새벽에
슬쩍 지구를 들어 올렸다 놓은 것을.
미래 30년간 동북아시아 기류에 악취가 미만(彌滿)하게 됨을
1965
강인한
Ⅰ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처럼 급히 왔다.
Ⅱ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 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Ⅲ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Ⅳ
칫솔에 묻어난 피를 닦는 일상의 어느 아침
문득 받아든 에어 메일,
친구의 얼굴이 두 손바닥으로 감쌀 수 있는
그래서 안녕이 더 그리운 수만 리 밖의 체온
체온을 만질 수 있는 문명을
감사해야 할까,
날아온 친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는,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 집 마당도 쓸고
보리밥 된장찌개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낯선 바람에 깎여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진다고
사랑하는 친구는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Ⅴ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겨울이
우리들의 내장 속에서 정박을 하고
우리들은 지금, 글러먹은 땅에서 어차피 굴러먹는다.
창자 속에 얼어붙은 겨울을 꺼내어
개선장군처럼 웃는다.
산다는 것이 즐거워서 웃는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Ⅵ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우리가 떠나온 그 교정의, 그 미루나무 아래에선
우리들의 동생이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마시며
아, 무섭게 자란다.
미루나무는 이파리도 없이 무섭게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