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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나무

키 작은 나무

김일광

 

복상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낮보다 저녁에 뒷산에 오르는 걸 좋아했다. 달리 가족이 없는 복상 할아버지는 키 작은 나무를 가족처럼 여겼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쉬엄쉬엄 산에 오르는 것이다. 비탈진 둔덕을 돌아서 개울을 건너고 다시 비탈을 한 차례 감아 돌면 큰 소나무에 둘러싸인 키 작은 소나무가 나타났다.

"내가 꼭 고쳐 주려고 했는데, 또 이렇게 하루를 지내고 말았네. 미안하이."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복상 할아버지는 소나무의 거친 등걸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붙였다. 키 작은 소나무는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가지를 두어 차례 끄덕였다.

다른 소나무들은 한 해가 다르게 키를 더하였다. 그런데 키 작은 소나무는 상처를 가슴 깊이 안고 있느라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다른 나무들이 점점 커 갈수록 햇볕을 쬐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사람들은 상처난 소나무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가는 것이 이젠 무서워.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단 말이야. 내가 며칠이나 더 견딜 수 있을지…… 휴우우."

복상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이렇게 키 작은 소나무를 찾아와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아, 복상 할아버지께 함께 저녁 드시자고 말씀드리려무나."

아버지는 추석날 저녁이면 복상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셨다. 한결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할아버지집으로 뛰어갔다. 복상 할아버지네 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비탈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골목에는 추석을 쇠러 온 차들이 가득했다.

"할아버지! 복상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는 것도 같은데 방문이 꼭꼭 닫혀져 있는 걸로 보아서는 계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뒤꼍에 계시는가 싶어 집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헛간에는 농기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데도 윤이 반짝반짝 날 정도로 말끔히 닦여 있었다. 복상 할아버지는 비록 농사일은 놓았지만 늘 농기구를 만지며 살았다.

복상 할아버지는 육이오 전쟁이 막 끝났을 때,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낼 생각으로 깊은 산골을 찾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한결이네 집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머슴으로 써 달라고 떼를 썼다. 마침 일손이 부족하던 터라 한결이의 할아버지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오갈 데 없다는 말을 듣고는 선뜻 받아들여서 농사일을 가르치며 함께 살게 되었다. 한결이는 물론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한결이 아버지가 한결이만했을 때 일이다.

'복상'이라는 이름도, 할아버지의 성이 박 씨인데 마을 사람들이 일본말로 '복상, 복상' 하면서 놀려 대던 것이 그만 이름처럼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결이도 사람들을 따라서 '복상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복상 할아버지는 그 후 오랫동안 한결이네 집 머슴살이를 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한결이네 할아버지가 밭자락에다 지어 준 것이다. 그렇게 일만 하면서 혼자 살아 왔다. 돌아가지 않고 이 곳에서 살고 있는 게 북에 있는 형제들에게 미안하다며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조차 꺼려 하였다. 들에 나가 고개 숙여 일만 하였다.

한결이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복상 할아버지는 일손이 없는 한결이네 농사일을 맡아서 하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힘이 달려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복상 할아버지 몫으로 떼어 준 논밭만 간신히 관리할 정도였다.

"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한결이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한결이는 발길을 돌렸다. 내리막으로 된 대문을 나서 마을을 향하여 엎어질 듯이 달렸다. 복상 할아버지의 집이 비탈진 밭자락에 있기 때문에 마을까지는 줄곧 내리막이었다.

"할머니, 복상 할아버지 안 계세요."

"벌써 뒷산에 올라간 모양이구나."

"뒷산 어디요?"

"그 키 작은 나무 있는 곳에 갔을 거야. 수술을 못해 줘서 안달이더니 또 거기 간 게야. 요즘은 부쩍 기운이 없어서 간신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키 작은 나무는 뭐고, 수술은 또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 그 있잖니, 너희들도 어릴 때 거기서 놀았잖아. 육이오 때 포탄 맞은 나무 말이야."

"아니, 그 나무가 아직 살았어요?"

아버지는 그제야 알겠다며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럼, 아직 살았지. 그런데 그 때 포탄 맞은 자리가 자꾸 썩어서 그런지 통 자라지를 못하고 있단다."

"내가 어릴 때도 노랗게 말라 갔는데. 밑둥치에 포탄을 맞았지, 아마. 허어 참, 벌써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직도 살아 있다니."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피난 갔다 돌아왔을 때, 마을은 온통 불타 버리고 연기만 풀풀 나고 있었다. 집뿐만이 아니었다. 뒷산의 나무들도 거의 다 불에 타 버렸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돌아와서 본 마을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바로 그 전쟁 속에서 밑둥치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지만 불타지 않고 남은 나무였다. 그 후 불탄 나무들을 베어내고 사방 공사를 할 때, 곧 죽을 것이라며 사람들이 베려고 했지만 복상 할아버지가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살게 된 나무였다.

"제가 그 나무도 한 번 볼 겸해서 아저씨를 모시러 갈게요."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섰다.

"저도 갈래요."

그런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결이를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달이 막 동쪽 산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맑고 환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솟아오르던 달이 산봉우리를 지나 동쪽 하늘을 한 뼘쯤 올랐을 즈음, 그 키 작은 나무가 있는 곳에 닿았다. 달빛은 제법 길을 환하게 열어 주었다. 달빛이 가득히 내린 마을은 파스텔을 덧입혀 놓은 그림 같았다.

"! 아빠, 저기 저어기."

한결이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솔숲 속에 희끗한 물체를 보자 가슴이 먼저 덜컥 내려앉았다.

"뭘 보고 그래? 으흠, 저기 계시는구나."

아버지는 한결이의 손을 가만히 떼어놓으며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저씨, 복상 아저씨! 거기 계세요?"

한결이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나뭇가지 사이로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부르며 다가갔지만 움직임이나 기척이 없었다.

"아저씨, 주무세요?"

아버지는 복상 할아버지 앞에 앉는 것 같았는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무서움과 함께 한결이의 온몸을 감쌌다.

"한결아, 내려가서 삼촌들 모두 올라오라고 해라."

아버지의 말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한결이는 당황했지만 더 물어 보지도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갔다. 할아버지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면서 발걸음이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삼촌들과 보건소 아저씨들이 달려가더니 복상 할아버지를 업고 내려왔다.

복상 할아버지의 집에는 마당에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마을 사람들이 서둘러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결이는 분주하게 오가는 어른들을 할머니집 마당에서 건너다보고 있었다.

"한결아."

할머니가 천천히 마당으로 내려왔다.

"할머니, 복상 할아버지 집에 가 보시게요?"

"아니다, 내가 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뛰어가서 네 아빠 좀 오라고 하여라. 내가 전할 말이 있구나."

한결이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아버지를 모셔 왔다.

"어머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버지는 마루로 올라서며 말을 꺼냈다.

"그래, 이리 앉아 보아라. 복상 노인이 묻힐 곳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네 아버지가 묻힌 그 산자락이 어떨까 싶어서 불렀다. 살아 있을 때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으니까 네 아버지도 그걸 원할 것이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어느새 젖어 있었다. 할머니는 먼저 간 할아버지와 복상 할아버지가 함께 산으로 들로 다니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복상 아저씨를 그 곳에 모실 수 없을 것 같아요."

",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아저씨를 업고 방에 들어가 보니 편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을 아끼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이어 갔다.

"편지라니, 어디서 온 것인데? 혹시 북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아뇨, 아저씨가 제게 몇 가지 부탁 말씀을 적어 두셨더군요. 마치 돌아가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듯이."

"그래, 대체 뭐라고 했더냐?"

"키 작은 나무 곁에 묻어 달라고…… 그 동안 상처로 자라지 못한 나무의 거름이 되겠다고…… 또 나무 수술도 대신 부탁한다고……"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더 말이 없었다. 한참 후 할머니는 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주어야지. 그 노인이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둔 말이야. 꼭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 어머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 수술이라는 건 우리 손으로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걱정입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무 수술을 걱정하였다.

대문까지 아버지를 따라가던 한결이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 좋은 생각이 있어요."

"무슨?"

"나무 수술 말이에요."

"그래?"

"제가 좋은 방법을 찾아서 달려갈게요."

"그러려무나."

아버지는 복상 할아버지 집을 향해 바쁘게 걸어갔다.

한결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나무 병원'을 검색했다. 몇 곳을 찾아서 올려진 내용들을 읽어보다가 '무료 수술'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 게시판에다 글을 올렸다.

 

'급합니다. 소나무 한 그루가 육이오 때 포탄에 맞은 상처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수술을 도와 주세요. 빨리 연락 주세요.'

 

이렇게 적고는 그 밑에다 연락할 수 있도록 전화 번호를 남겨 두었다. 한결이는 전화기 앞에 쪼그려 앉아서 전화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밤 안으로 게시판을 보지 않으면 다 헛수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만 초조해졌다.

"얘야, 그만 자거라. 많이 늦었다."

할머니가 보다 못해 한결이를 말렸다.

"할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볼게요. 곧 전화가 올 거예요."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더니 하늘 가운데까지 올라온 달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잘 가요. 외롭던 이 세상의 삶일랑 다 잊고 이제부터는 가 보고 싶은 곳에 다 가 봐요."

그 때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한결이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전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속에서 가느다란 대답 소리가 들렸다.

"김한결 씨 계세요?"

", 제가 김한결이에요.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고 전화하셨지요?"

"어른이 아니고 초등학생이로구나. 나무에 대해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려무나."

한결이는 키 작은 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급하게 게시판에 글을 올린 까닭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나무 병원 아저씨들이 여러 가지 장비를 들고 마을로 찾아왔다. 한결이는 그 아저씨들을 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갔다. 마을 사람들도 우루루 따라 붙었다. 나무 병원 아저씨들은 키 작은 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날카로운 칼을 꺼내서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부분을 도려 내기 시작했다.

"아니, 파편이 다섯 개나 박혀 있네. 이걸 몸 속에 두고 견뎠으니, 쯧쯧쯧."

아저씨들은 파란 녹이 슨 파편을 일일이 도려 냈다. 그 파편들이 물관을 거의 다 가로막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야. 정말 생명력이 강한 나무야."

"그러면 그렇지, 이 뿌리 좀 보게. 이렇게 강하게 얽힌 이 뿌리가 나무를 살린 거야. 강하게 땅을 움켜쥔 뿌리가 있는 한 나무는 죽지 않거든."

아저씨들은 썩은 부분을 도려 내고 생명토로 그 곳을 채웠다. 움푹 파여서 보기 흉하던 부분도 말끔히 수술했다. 수술을 끝내고 바라보니 나뭇잎이 한결 푸르러진 것 같았다.

다음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복상 할아버지의 상여를 메고 산길을 올랐다. 한결이는 복상 할아버지의 큰 사진을 안고 맨 앞에 서서 상여를 인도했다.

복상 할아버지는 소원대로 키 작은 나무 곁에 누웠다.

할머니는 그날 내내 마당을 서성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친구가 찾아갔으니, 아래로 위로 정답게 다니세요."

할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햇살이 무척 맑은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