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장태일
며칠 동안 계속된 매서운 추위가 물러갔다. 한겨울에 찾아온 깜짝 선물 같은 따스한 봄날 오후였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활기에 넘쳐 보였다. 자동차들도 투명한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시원하게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노래인지 알 수도 없는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상록수 공원으로 들어섰다. 햇빛이 잘 드는 벤치는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운 책을 읽거나 날씨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공원 안을 살폈다. 그 친구는 건물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구석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선은 발치에 떨군 채 언제나처럼 뭔가에 골몰한 표정이었다.
“점심시간 산책 코스로는 너무 먼 거리 아니냐?”
나는 M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늘 속에 들어선 때문인지, 아니면 M의 심각한 표정 때문인지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택시 타고 왔어.”
그는 입술 사이에 사인펜 뚜껑을 물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친구였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론 물리학 박사였고 국가 연구소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 없는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박사 정도 되면 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 고 몇몇 친구들이 충고하면 M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리고 다음 모임에 나타나서 자신이 하는 일은 ‘분류’이며 앞으로 자신을 ‘분류사’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로 그는 심각한 분류사였다.
“여자 생겼구나?”
나는 M의 얼굴을 살피며 가볍게 말했다.
“어쩌면...” 하고 분류사가 대답했다.
“어쩌면? 뭐야, 너답지 않게? 분명하지 못한 걸.”
“사실은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퇴근길에 연구소 앞 사거리에서. 재수가 없었지.”
그는 평소처럼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재수’ 운운하는 건 그답지 않았다. 나는 분류사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쓱 훑어보았다. 특별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난 좌회전을 하고 있었는데 무리하게 직진하던 택시가 내 차 트렁크 룸에 충격을 가한 거지. 병원에 후송된 나는 뢴트겐과 씨티 촬영을 당했고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어. 사고당한 내 차는 바로 공업사에 들어갔고.”
분류사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고 경위를 설명했다. 그의 자동차는 생각보다 많은 수리 견적이 나왔고 수리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수리 기간 동안의 렌트 비용까지 계산해주는 보험 덕에 분류사가 손해를 본 것은 별로 없었다.
“니가 알다시피 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연구소에서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2,3일쯤의 휴가는 언제든 가능해. 창의적인 연구를 위한 연구소 측의 배려지. 자동차를 렌트할 만큼 특별히 바쁘다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야. 그래서 오랜만에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어.”
“거기서 문제의 여자를 만났나?”
“글쎄...뭐가 뭔지 모르겠어.”
분류사는 심각하고 모호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4B 연필로 스케치된 여자의 초상이었다. 물결치듯 늘어뜨린 건강한 머릿결, 갸름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후광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천상의 존재처럼 보였다. 여자가 내민 가녀린 손은 차마 덥썩 마주잡기가 주저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고등학교 때 각종 사생대회를 휩쓸었던 M의 솜씨는 여전했다. 화가가 되는 편이 그에겐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너, 그림이 좀 과장된 거 아니냐? 정말 너무 예쁘군. 아니, 아름다워.”
나는 그림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뭐랄까, 시달린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분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구체적이고 반복적이거든.”
“뭐가?”
“여자가 꿈에 나타나.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사고를 당한 다음부터인 거 같아.”
그의 꿈은 단순했다. M은 꿈속에서 산더미 같은 자료 더미에 묻혀 일을 하고 있다. 왼쪽에는 검토가 끝난 자료들이 분류되어 있고 오른편에는 처리해야할 데이터들이 쌓여 있다. 분류사인 그는 시간에 쫓기고 있다. 어딘가에 붙어 있는 거대한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그를 재촉하고 있다. 철컥철컥, 묵직한 초침 소리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일에 집중하라고 위협한다. 그는 분류하고, 또 분류한다. 철컥철컥, 철컥철컥. 어느 정도 오른편의 서류들이 줄어드는가 싶으면 영락없이 새로운 서류더미가 놓여진다. 작업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그는 깨닫는다.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사방을 휘둘러보지만 방안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뿐이지. 노래하는 듯 부드럽게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여자가 틀림없어.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만나야한다는 걸 난 알게 되지.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 분류 작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거야. 나는 책상 위로 올라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서류들은 책상 위의 내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어서 나는 그것들을 헤치고 나아가지만 무너지는 서류더미 때문에 좀처럼 쉽지가 않아. 저 끝에 환한 빛의 터널이 보여.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어. 터널 입구에 그녀의 실루엣이 떠 있어.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공포를 느끼게 되지. 무지막지한 공포야.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으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나는 알아.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데...그녀의 얼굴이 문득 무시무시하게 변해 있는 걸 깨닫게 돼.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는 거야. 매일 이런 꿈을 꿔.”
말을 마친 분류사는 식은땀이 배어나온 양손을 바짓단에 쓱쓱 문질렀다.
“일 때문에 너무 지친 거 아냐?”
“글쎄, 여태 한 번도 그런 강박증을 느껴보지 않았는데...한 번도 강박증을 느끼지 않았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사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내가 두려운 건, 그 여자의 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린 얼굴이야. 그건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는 그냥 느낌인데...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거든.”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어?”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그림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4B연필의 부드러운 질감으로 방금전 분류사가 묘사한 것 이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표현되어 있었다. 은은한 후광 속에 아름다운 미소가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그냥,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벤치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너 말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정신과 상담을 좀 받아보는 게 좋겠다. 그 분야의 의사들이 전문가니까. 좀 적극적으로 말야.”
“그래야겠지? 연구소도 일주일쯤 쉬고.”
분류사가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음 편하게 먹고. 단지 꿈일 뿐이잖아.”
나는 분류사와 헤어져 보도를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문제의 그림이 아직도 내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M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여자의 몽타주를 서랍에 넣었다. 언제고 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오후 업무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환상의 여인과 분류사에 대한 이야기는 내 기억을 거쳐서 지나가 버렸다.
퇴근 시간을 30분 넘겨서야 업무가 마감되었다.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일산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차를 가지고 움직이면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대지 못할 것 같았다. 복잡하긴 해도 빠르기로는 지하철만한 게 없다. 오랜만에 이용하는 지하철이었다. 플랫폼을 지나 승강장으로 내려선 나는 기둥에 몸을 기대며 무지근하게 밀려드는 하루의 피로를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멀거니 건너편 승강장 쪽 허공에 눈을 두고 있던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기댔던 기둥에서 몸을 퉁겼다.
그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분류사의 꿈 속에 나타난다는 그 여자, 그리고 지금은 내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몽타주 속의 그 여자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찬란한 후광을 등지고,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결치는 듯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한 손을 내밀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대체 뭐야?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안전선을 넘어 한 발을 내밀었다.
“이봐요, 조심하세요. 열차 들어온다구요.”
누군가 주의를 주었고 나는 멈칫했다. 여자는 곧 사라졌다. 건너편 승강장과의 사이에 설치된 대형 와이드 액정 화면은 샴푸 광고를 마치고 오늘의 주요 뉴스를 자막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류사의 환상의 여인은 분명 저 샴푸 광고 속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불행한 느낌 같은 게 입술에 느껴졌다. 분류사, 그의 삭막한 내면 풍경이 가슴을 아리게 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해서 광고 이야기를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환상을 깨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리는 전동차 안에 설치된 액정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환상의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면 오늘 밤에는 나 역시 그녀의 꿈을 꿀지 모른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