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최인석

 

1

하늘은 한 장 구겨진 신문지처럼 흩날렸다. 구름이 뒤덮여 한낮인데도 벌써 날이 저무는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잿빛 허공에 눈보라만이 가득 차 흩날렸다. 하늘이 땅 위로 내려앉은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길을 만들고 치달려와 세상을 뒤엎을 듯 휘몰 아치는 바람. 나무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길은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눈이 쌓이며 녹고,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였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눈이 그쳤다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시 눈이 쏟아졌다. 중앙분리대 옆에는 얼음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도로 위에도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자칫 바퀴가 미끄러지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거나 옆 차선을 달리는 차와 충돌할 것이다.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겨우 시속 40킬로미터 정도. 그런데도 차창 가득 덤벼드는 눈보라 때문에 순간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속도를 더 낮췄다. 멍하니 눈앞으로 덤벼드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운전을 하는 어떤 순간, 그는 문득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휑하니 뚫린 경부고속도로 한복판, 서울을 빠져나온 지 겨우 한 시간 남짓인데 길을 잃다니. 터무니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한 달 전에 죽었다. 아침마다 늘 하는 것처럼 산책을 나가서 빠른 걸음으로 산을 한 바퀴 돌고, 약수터에 들러 물을 한 사발 마시고, 콘크리트 벤치에 걸터앉아 후우, 하고 큰 숨을 들이마신 다음, 죽었다. 새벽 안개가 아비의 시신에 비처럼 축축히 흘러내렸고,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들은 안개 속에 미로(迷路) 같은 도형으로 얽혀 있었으며, 새들이 그 미로 속을 재재거리며 헤매다녔고, 약수터는 물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으며, 아버지는 그 가운데에서 아주 조용히 죽었다. 운동을 하던 노인네들은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 옆에 앉아 아들 자랑도 하고 며느리 욕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풍을 치료하는 데에는 어디 사는 한의사가 귀신의 솜씨라는 등의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아비가 죽었다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전혀 알지 못했다. 무슨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우선 고함부터 지르고 보는 것이 그의 평생 버릇이었으나, 죽음 앞에서는 그는 큰소리 한번 지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돌연 찾아온 죽음이 못마땅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성우는 서점으로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다 말고 허둥지둥 약수터로 달려 나갔다. 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달려오던 약수터 운동회 사람들과 아파트 광장에서 마주쳤을 때에 그는 그것이 가장 당연한 일인 듯 얼른 그 사람에게 등을 돌려대었고, 그 사람 역시 아버지를 얼른 그의 등에 옮겨 업혀주었다. 이미 경직이 시작된 것일까. 아버지의 엉덩이는 차고 딱딱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아비가 아니었다. 이미 하나의 그것이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줄기의 호흡과 주먹만 한 근육덩이의 몸부림, 맥박.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멈추면 사람의 몸은 이내 이처럼 굳어가는 것인가. 한 줄기의 호흡, 한 차례 염통의 몸부림. 그것이 과연 생명일까. 그러나, 과연 생명이란 그런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어떠한 존엄성이나 작은 위엄도, 돌아다볼 회한마저 없었다. 만일 사람에게, 세상살이에 그런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한 줄기 호흡, 근육덩이의 꿈틀거림 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 성우는 그런 생각을 뿌리치듯 승강기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곧 아,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서야 했다. 승강기 안에서 재깔재깔 맑고 소란스러운 얘깃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초등학교 이학년쯤 되어 보이는 너덧 명의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밀려나왔던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은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같았다. 성우는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고, 등에 짊어진 것을 얼른 감춰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은 그에게도 그가 등에 짊어진 것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깔깔 웃어대며 물방울이 굴러내리듯이 재빨리 달려나가 버렸다.

장례식은 무난히, 조용히 치러졌다. 성우는 울지 않았다. 도대체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아비가 마침내 죽었다는 사실만이 체한 음식물처럼 그의 몸 안 어딘가에 불편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아비는 한 길 흙 속에 묻혔다. 성우의 형제자매를 비롯한 친지들의 눈물과 한숨과 한탄과 추억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죽음 앞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요, 사람살이나 세상살이는 어떠한 눈물이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다기보다는 여전한 것이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한 길 두께의 흙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거리,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거리, 솔로몬의 지혜와 헤라클레스의 힘을 합쳐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리이다. 사람은 삶과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으로 구덩이를 파고 주검을 넣은 다음, 거기 한 길 두께의 흙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마치 조금 전까지도 그들과 더불어 삶을 누리던 자를 땅속에 묻어버린 것을 후회라도 하듯 비석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사람은 땅에 묻고 상징은 땅 위에 세우는 것이다.

성우가 저 찜찜하고 불편한 기분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모여들어 장례식을 의논하면서부터였다. 꼭 해야 할 어떤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 그로 인해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일까? 아무리 궁리를 거듭해봐도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난로를 켜둔 채로 서점 문을 닫아걸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막연히 장례식이 끝나면 이런 기분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처럼 갑자기 돌아가신 때문이리 라. 그러나, 아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밤, 피로와 술에 지쳐 잠에 빠져들었던 그는 한밤중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갑갑증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등에 커다란 혹 같은 것이, 그러나 살아 있는 혹 같은 것이 타고 앉아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건, 무엇을 하건 그 혹은 그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그것이 느껴질 때마다 온몸이 꽁꽁 결박당한 것만 같 은 기분이었다.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다지 마음이 무거운 것일까. 부음을 알려야 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일까? 그는 당장 방명록을 가져다 놓고 떠오르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꼽으며 대조해보았다. 없었다. 친가 쪽 어른들, 외가 쪽 어른들, 아버지 친구들의 이름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알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인가? 도대체 이 찜찜하고 무거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 기분을 무시하기 위해 애를 썼다. 평상시의 생활로 되돌아가 매일 아침 서점으로 나가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책을 팔고, 주문하고, 점심시간에는 아내와 교대를 하여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두어 시간쯤을 쉬고,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인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면 다시 서점으로 나가고 아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오천 원짜리 책을 팔면 천원의 이익을, 만 원짜리 책을 팔았을 때는 이천 원의 이익을 생각하고, 주문을 하고, 반품을 하고……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의 등을 타고 앉은 혹은 나날이 더 무겁게 그의 목을 졸라댔다. 그것은 덩쿨 식물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크게 자라 그의 몸을 칭칭 결박했고, 밤늦은 시각 가게 문을 닫는 그의 옆구리를 움켜쥐었으며,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그의 손목에 휘감겼고, 물줄기 밑에 서서 샴푸 거품을 뒤집어쓰고 머리를 감는 그의 눈자위를 찔러왔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술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든 그는 새벽 네 시쯤 고통스럽게 깨어났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고 숨이 막혔다. 무엇인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때 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놀라 아이의 방 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아이의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에 아이는 언제 소리를 질렀더냐는 듯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아이의 방, 아니, 그것은 아비의 방이었다. 할아버지의 방은 손자의 방이 되었다. 내 아비의 방이 내 아이의 방이 되었다. 성우는 아비의 방, 아니, 아이의 방, 아니, 이제 아비의 방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직은 아이의 방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방을 둘러보았다. 아비의 자취는 도배지에 남은 손때까지 말끔히 사라졌다. 아비의 은회색 도배지는 분홍색의 꽃과 나비가 엷게 아로새겨진 쾌활하고 포근한 줄무늬의 도배지로 바뀌었다. 커다란 글씨가 박힌 아비의 일력(日曆)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아이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이 빨갛고 노란 튜브를 타고 물장구를 치는 수영장,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 위로 날아오르는 우주선, 그보다 훨씬 높은 곳, 별들이 반짝이는 허공에서 수영장의 아이들과 날아오르는 우주선을 내려다보며 첼로를 연주하는 흰 드레스의 소녀. 엷게 칠해진 니스 속으로 나뭇결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책상과 책꽂이가 놓인 자리는 아비의 낡은 검고동색 양복장이 놓여 있던 곳이었다. 아비가 늘 침구를 깔고 개고 하던 자리에는 아이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아이는 거기, 배꼽을 드러낸 채 씩씩, 풍선 부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방인데 무섭지도 않은 것일까. 아이는 방이 생기고, 게다가 침대까지 생긴 것이 기쁨에 겨워 틈만 나면 제 방에 들락거렸다. 이제까지 아이가 쓰던 작은 방은 책상만 놓고도 아이의 작은 이부자리를 펴면 그만 발 옮길 자리가 없을 만큼 비좁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방이 탐이 났더란 말이냐.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그 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것이 그토록 기쁘더란 말이냐. 왠지 성우는 잠든 아이의 얼굴이 섬찟했고, 다시금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혹의 무게가 그를 압박해오는 것을 느꼈으며, 온몸이 결박당한 듯한 갑갑함을 느꼈고, 왠지 그 모든 것이 두려웠으며 …… 그는 서둘러 마루로 나왔다. 위스키병을 꺼내 반 잔쯤을 따르자 그는 단숨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식도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무엇인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째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 혹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냐. 잠들기는 틀린 일이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책이나 읽다가 서점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젖은 얼굴을 들어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으으,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는 비틀비틀 뒷걸음질했다. 거울 속에 그가 아닌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사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그가 거울 속에서 침울한 낯으로,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홀쭉한 뺨, 짙은 눈썹, 거뭇거뭇한 콧수염과 턱수염, 깊은 주름살로 갈라진 이 마, 그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흐트러진 머리칼…… 그 역시 성우처럼 뒷걸음질했다. 그 역시 놀라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잠깐 뒤에야 그는 거울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았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것은 바로 성우 자신,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 이었다. 십여 년 전의 그 자신이 거울 속에서 그를 불만에 차서 쏘아보고 있었다. ? 왜 그러는데? 목이 말랐다. 그는 다시 수돗물을 틀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거울 속의 젊은 성우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으니 문득 성우는 부끄러웠다. 낯이 뜨거워졌다. 젊은 성우의 그 시선 앞에서 그는 한 마리 닭처럼 털이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그의 어두운 뇌리, 먼지 덮인 갈피갈피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 여자. 그와 더불어 까맣게 잊고 있던 무수한 기억들이 고구마 줄기를 걷어 올린 듯 툭툭 망각의 흙을 걷어차며 거침없이 되살아났다.

 

2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성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망향 휴게소 주차장은 눈을 피하는 차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얼굴은 환했다. 적어도 성우가 보기에는,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오직 쾌활하고 즐거운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 같았다. 엑센트 한 대가 주차장에 멎자마자 안에서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의 파카를 입은 젊은이들이 우르르 뛰어내리더니, 빈터 한쪽의 더럽혀지지 않은, 눈이 쌓인 계단으로 달려가서 눈을 뭉쳐 서로를 향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열린 입, 흰 치아, 눈부신 얼굴, 그 얼굴 위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눈보라, 그리고 그들의 웃음과 활기는 그 눈보라 못지않게 거침이 없었다. 눈보라는 그들의 웃음과 더불어 환호하듯 흩날렸다. 성우는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잃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 집을 나선 것인가. 그 여자에게 아비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러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내가 그 소식을 전하면 그 여자는 별 엉뚱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그만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여자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 아닌가. 아버지가 그 여자를 안 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정말 거기 가야 하는 것일까? 거기 갔다 오면 이 무거운 기분이 사라질까? 아니, 내가 집을 나선 것이 정녕 그 여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일까? 어쩌면 나는 그저 집을 나서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아버지의 집, 나의 집, 아내의 집, . 서점. 매절(賣切)로 들여놨으나 팔리지 않아 손도 눈도 닿지 않는 책꽂이 꼭대기에 얹어두었던 책을 용케도 발견해낸 손님이 있어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그 책을 꺼냈을 때 책 위에 두텁게 덮여 있던 먼지. 삶은 그런 것이었다. 서점은 아파트 단지 상가 안에 있었고, 따라서 그는 단지 밖으로는 별로 나갈 일이 없었다. 하나의 작은 아파트 단지, 그것이 그의 세계였다. 조용히,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큰소리 한번 내 지 말고. 왜냐하면 이웃에게 방해가 되니까. 담배꽁초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인 시민의 덕목이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도 철저히 하고. 왜냐하면 그것은 환경보호를 위해 긴요한 일이니까. 온갖 세금이나 공과금은 꼬박꼬박, 연체하는 일 없이. 왜냐하면 그 역시 시민의 기본적 덕목일 뿐만 아니라 연체료를 내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손실이니까. 삶은 그런 것이라야 했다. 정연하고 차분한 것. 그는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혼란이 없어야 했다. 아비로 인하여 초래되는 혼란이 아니라면 그의 집에는 혼란이란 없었다. 그는 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아비는 죽었다. 따 라서 그의 집에는 더 이상 혼란은 없을 것이다. 먼지는 먼지가 쌓이게 되어 있는 곳에 쌓일 것이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사람 의 손이 닿지 않는 모든 곳에. 그러니까, 일상(日常)이 아닌 모든 것에.

만류하는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쓸 때까지만 해도,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성우는 꼭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집을 나선 지 이제 겨우 두 시간인데 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에게 아비의 죽음을 알린다 하여 이 혹이 사라질까. 이 결박이 끊길까. 그리고, 두려웠다. 그가 이제 마주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을 통한 부패의 동반자였던 그 여자가, 7년 전 죽은 어미의 평생의 저주였던 그녀가, 그리고 그 여자를 통해 마주치게 될 알 수 없는 것들이, 그 여자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두렵고 혐오스러웠다.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부터가 염증이 나고 혐오스러웠다. 돌 아갈까. 아니, 오랜만에 혼자서 이곳저곳 여행이나 다닐까.

"아저씨."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열일고여덟쯤 되었을까. 키가 훤칠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하나가 나란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이나 소녀나 이제 비로소 젊은 사람의 꼴을 갖춰가는 얼굴이었다. 여자아이의 희고 맑은 얼굴, 그 얼굴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 입술은 너무나 붉어 꽃잎 같았다. 성우는 멍하니 그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저희들 좀 태워주실 수 없어요?"

남자아이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멘 것은 배낭이라기보다는 요즘 젊은 여자들이 흔히 핸드백 대신 메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여자아이의 눈에 얼핏 초조감이 드러났고, 다음 순간에는 속내를 들켰는지도 모른다는 듯한 근심스러운 기색과 함께 낭패감과 불안감이 뒤얽혔다. 아직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마는 그 아이들의 새싹 같은 여린 눈빛이 성우는 안쓰러웠다. 성우가 어딜 가느냐고 묻자 남자아이는 반문했다.

"아저씬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성우는 부산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말했다.

"저희도요."

대답하고 나서 여자아이는 얼른 남자아이의 눈빛을 살폈다. 순간적으로 교차하고는 이내 흩어지는 두 아이의 눈빛이 불안감으 로 한층 어두워졌다. 남자아이가 다시 덧붙였다.

"부산 시내에만 들어서면 바로 내려도 돼요."

성우는 말했다.

"가자."

안 될 게 무어랴. 그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밖으로 나섰다. 눈보라가 덤벼들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지금이 학기 중이라는 생각이 난 것은 그 아이들을 태우고 나서 얼마간을 달린 뒤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일까? 아이들은 천진무구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때 묻은 얼굴은 아니었다. 거리에서 뒹굴며 사는 아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 또래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지금 학교가 아니라 고속도로 위에 와 있는 것일까? 더구나 어째서 휴게소에서 차편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그 휴게소까지는 무슨 차를 타고 온 것일까? 왜 휴게소에서 차를 바꿔 타야 했던 것일까? 성우는 먼저 짐짓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서울이라는 대답이었다.

"몇 학년이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남자아이가 대답했다.

"이학년요."

"그런데, 학굔 안 가고 어딜 가는 거냐?"

대답이 없었다. 성우는 그제야 이 아이들이 어쩌면 가출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부모가 지금 애가 타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이들의 가출을 돕고 있는 것이다.

"삼촌이 위독하세요."

남자아이의 대답이었다. 성우는 한눈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긴장하여 그다음 그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를 궁리하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가 뭐라고 묻건 아이들은 계속해서 거짓말만 할 것이 뻔했다. 그는 아이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성우가 도와주지 않았다 해도 이 아이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부산까지 내려갈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를 한다는 것도 멋적은 짓이었고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의 몇 마디 충고로 집으로 돌아갈 아이들이라면 처음부터 집을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성우도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북을 메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북은 갈갈이 찢고 깨어 서울역 화장실에 버렸다. 기차를 타고 천안까지 갔다. 그곳에서부터는 국도를 걸었다. 지나다니는 트럭을 얻어타기도 했다. 그때 그가 목적지로 삼은 곳도 부산이었다. 집에서 가장 먼 곳이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취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산은 대도시니까 일자리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이 있고, 돈이 눈에 띄기만 하면 그것이 누구의 돈이건 무슨 돈이건 거머쥐고 집을 나가 몇 날 며칠이고 세상을 떠돌다가 술에 만취하여 돌아와서는 다시 어머니와 다투는 아버지가 있는 집, 다투고 나서도 한밤중에 돌연 북을 내려놓고 덩덩두둥둥, 두들기며 흥얼흥얼 소리를 내놓는 아버지가 있는 집, 어머니의 울부짖음과 눈물과 한탄이 있는 집, 학교는 그만두고 어디든 취직하겠다고 어머니를 조르는 누이동생이 있는 집…… 성우는 고등학교 이학년이었고 부반장이었다. 그날 그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니고 있었다. 학급 아이들에게서 걷은 학급비" 그리고 참고교재를 일괄 구입할 돈이었다. 그 에게 돈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돈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이었다. 그 돈을 찾아 쥐고 사라졌던 것이다. 학교에 가려다가 그 돈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어머니 앞에서 울고불고 몸부림쳤다. 어머니는 이 웃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 그에게 내주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뒤에 소주병을 쥐고 사랑가를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성우가 아버지에게 항의하자 아버지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놈, 인간 말종 같은 놈. 애비한테 덤벼들어" 성우가 집을 나온 것은 바로 그 이튿날 새벽이었다.

그는 모르는 것이다. 이 아이들의 집은 어떤 집인지를, 어떤 아비가 있고, 어떤 어미가 있는 집인지를.

성우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눈은 쏟아지고, 그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차창닦이는 쉬임없이 흩날리는 눈과 흙탕물을 씻어냈고, 그 미끄러운 길을 시속 백 킬로미터 이상으로 치달리는 차들이 쌩쌩, 그들 곁을 스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긴장하여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성우는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둘이 서로 귓속말이라도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 음악을 켰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였다. 아버지가 북을 둥둥거리며 소리를 하면 그는 일부러 온종일 서양 고전음악이 나오는 에프엠 방송을 커다랗게 켰다. 아버지가 나서기도 전에 늘 어머니가 먼저 꾸중을 했고, 그러면 그는 리시버를 귀에 꼈다. 아버지의 북소리를 방해할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그 자신의 귀에는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대구를 지나 부산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사고가 나 갓길에 세워져 있는 차들이 보였다. 엑센트의 문이 일그러져 있었고, 크레도스는 앞부분이 크게 부서져 있었다. 그 차 옆, 쏟아지는 눈 속에서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의 파카를 입은 젊은 남녀가 사고가 아니라 잔치라도 만난 듯 여전히 눈보라보다 더 거침없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면서 성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고등학교 때에 가출한 적이 있다. 집이 싫고 아버지가 미워서였다. 여자아이가 머뭇머뭇 말했다. 우린 가출한 거 아니에요, 아저씨. 볼멘 소리였다. 그러나, 어색하고 자신 없는 어조, 불안감과 억지가 뒤섞인,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마는 어 조였다. 성우는 더 말하고 싶었다. 밉기만 하던 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 아버지의 옛친구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는 중이다. 아버지가 미웠지만, 나중에는 미움도 사람 사이의 여러 가지 관계 가운데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냐 미움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관계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움은 용서로, 사랑으로, 무관심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그 관계는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관계가 바로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 운명이 혐오스럽다. 아직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자아이가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가출한 거 아닌데.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제법 자신 있는 어조였다. 성우는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성우는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다. 금정 네거리에는 차들이 뒤엉켜 있었다. 유난히 키가 작은 교통경찰 한 사람이 길을 트기 위해 호루라기로, 손짓발짓으로, 악을 써가며 차들을 끌어내고 막고 돌려세우기 위해 허둥거렸다. 차들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면 하면 슬금슬금, 그가 이제 막 만들어낸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섰고, 그러면 그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동안에도 눈은 계속해서 쏟아졌고, 차 안에서는 바흐의 첼로가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으며, 뒷자리의 아이들은 귀엣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여자아이가 가방 손잡이를 꼭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성우는 그들이 내리려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말이든 들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비록 그의 터무니없는 노파심이나 별 근거도 없고 진정도 담기지 않은 상투적 윤리의식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출한 것이 거의 분명한 아이들을 아무 말 없이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뒤엉킨 차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린 시절의 가출 체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꼭 해줄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차가 가까스로 교차로를 건너자마자 아이들이 먼저 말했다.

"저희들 여기에서 내릴게요."

성우는 차를 세웠다. 길 건너편 모퉁이의 공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 지하철 공사 현장 사무소라는 간판을 내붙인 컨테이너 가건물이 서 있었다. 그는 그 건물을 가리키며 이미 차의 문을 여는 아이들에게 바삐 말했다. "난 내일 서울로 돌아간다. 너희 들이 만일 여기에서 일이 잘 안 되어서, 또는 생각이 바뀌어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내일 저 건물 앞으로 나와서 기다려라. 나는 내일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다.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다. 너희들이 오건 안 오건 나는 다섯 시 반까지 저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겠다."

아이들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들은 인사말을 귀찮은 짐처럼 내던지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그는 멀어져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자아이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라도 빨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곧 골목길로 사라져버렸다. 돌연 그들 뒤를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내일 여기에서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한 것부터가 멍청한 짓이었다. 아이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가라. 어서 가라.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말고, 돌아보지도 말고, 낯선 골목으로, 눈보라 속으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3

"溫泉別莊"은 동래의 온천장 거리를 슬쩍 외면한 골목에 버티고 있었다. 높다란 솟을대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그 안으로 널 찍한 자동차 도로, 그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회양목, 그 너머에 우뚝우뚝 곤두선 소나무와 잣나무, 목련과 은행나무가 보였다. 성우는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이곳일까. 이곳이 현정순이 경영하는 요정이란 말인가. 집을 떠났다가 되돌아올 때의 아버지의 초라하던 행색과 비교하면 현정순이 경영한다는 요정은 너무나 큰 규모였다. 그는 그저 자그마한 집칸에 방과 주방을 만든, 조촐한 술집쯤을 연상했던 것이다. 이런 요정을 경영하는 여자를 정부로 둔 아비가 그런 초라한 행색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여자는 아버지가 초라한 꼴이 되자 아버지를 버린 것일까. 아버지는 여자에게서 버림받자 비로소 어머니에게 돌아온 것일까.

이대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아버지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 못할지 모른다. 만일 기억하고 있다 해도 모르는 체할지도 모른다. 비좁은 골목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성우는 족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溫泉別莊}이라는 우람한 간판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여자는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까맣게 잊고 지내던 과거의 한 사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아들이 어느 날 문득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돌아서면 어디로 갈 것인가? 뒤에서 트럭이 나타나 경적을 울려댔다. 성우는 차를 골목 한쪽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트럭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차 곁을 스쳐 바로 그 요정으로 들어갔다. 솟을대문 안쪽에서 허름한 점퍼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트럭 운전기사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무슨 용무냐. 생선 날라왔다. 어디서 왔느냐. 부산 수산이다. 사내가 들고 있던 종이쪽지에 뭔가를 기록하고 손짓을 하자 트럭은 안으로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보자 성우는 더욱 안으로 들어서기가 싫어졌다. 그 사내는 무슨 용무로 왔는지 물을 것이다. 뭐라 대 답할 것인가. 과연 현정순의 요정이 이곳일까.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닐까.

그는 차에서 내렸다. 쏟아지는 눈 속에 높다랗게 솟은 솟을대문을 그는 우두커니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의 등을 타고 올라앉은 혹은 이제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는 더듬더듬 그것을 매만져볼 수도 있었다. 이 혹을 벗어던지기 위해 그는 집을 나섰다. 이 혹을 떼어내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 이제 돌아선다면 이 혹을 떼어내기 위해 그가 가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 성우는 요정 안으로 들어섰다. 점퍼를 입은 사내가 대문 안쪽에 알루미늄 상자처럼 옹색하게 지어진 경비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서 오셨능교? 현정순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 사내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동안 성우는 알 수 없는 초조감으로 속이 닳았다. 마침내 그 사내가 전화기를 집어들며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오셨다꼬 할까예? 성우는 대답했다. 황 영 자 준자 되는 분의 아들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뭐라꼬예? 성우는 다시 말해야 했다. 황 영자 준자 되는 분의 아들입니다. 사내는 전화번호 숫자를 몇 개 꾹꾹 눌러대더니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접니다. 여그 사장님 찾는 손님이 오셨는데예. 황 영자 준자 되 는 사람 아들이라꼬 하는데예. 사내는 그 말뿐, 곧 전화를 끊었다. 성우에게 기다리라는 말도, 올라가 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힐끔거리며 그를 훔쳐볼 뿐이었다. 삼사 분쯤이 지났을까. 한 여자가 비탈진 언덕길을 달려 내려왔다. 노란색 한복에 쪽을 진 머리,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엷은 화장이 덮인 얼굴 가득 황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이가 들긴 했으나 오래전 텔레비전에 나와 합죽선을 펴고 접으며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드는 대목을 굵은 목청으로 부르던 바로 그 여자가 분명했다. 경비원은 경비실에서 나와 여자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여자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성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우 역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여? 예인(藝人)? 예인 좋아헌다. 그년은 갈보여, 갈보. 여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황선생님 아드님이신가? 강한 호남 사투리, 그러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성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벌써 울먹이기 시작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더니 여자가 머뭇머뭇 다시 물었다. 돌아가셨는가? 성우는 깜짝 놀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걸 알려준다고 여그까지 그 먼 길을 오셨는가? 고맙네, 고마워. 어서 올라가세. 여자는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이 뜨거운 것에 성우는 놀랐다. 경비원이 나섰다. 손님이 차 갖고 오신 것 같던데예. 여자는 열쇠, 열쇠, 하며 성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우가 열쇠를 내밀자 경비원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여자가 말했다. 저그 안에 내 차 옆에잉, 내 차 옆에다가 세워놔, 권씨. 어서 올라가세, 어서 가. 여자는 아직도 울먹이고 있었다. 정말 고맙네, 고마워. 여자는 다시 성우의 손을 그러잡았다. 자동차 도로 옆에 가꾸어진 동산 사이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여자는 성우의 손을 잡고 그 계단으로 올라섰다. 조심허시게, 미끄러운게. 내가 허게를 혀도 되는 건가 모르겄네이. 근디 아이고, 참 자네가 황선생님 젊으셨을 적하고 똑같으네. 너무나 똑같어. 언제 그렇게 되셨는가? 혹시 지난 열이틀 언저리 아니었는가? 성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꿈이 말이여, 내 꿈이. 여그 계단 허물어졌네. 여그, 여그로 올라오게.

여자가 그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보료와 안석(案席), 장침(長枕)과 방침(方枕), 그리고 병풍, 그 옆에는 문 갑이 놓여 있었다. 어서 앉게, 어서 앉아. 성우가 자리를 사양하자 여자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보료 위에 앉혔다. 무슨 말씀이신 가. 이 먼 길 와준 것만도 내가 송구스러 어쩔 줄을 모르겄는디. 여그 재떨이도 있고 담배도 있응게 태우게. 여자는 전화기를 집어들자 벽력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어째 아직 소식이 없어? 뭣 났다고 이리 꿈지럭거리는 거여? 후딱 술상 내와얄 거 아녀? 그려, 그려. , 잔소리 말고 어서 내오랑게. 여자는 전화를 놓고 성우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날짜가 언제라고? 정확허게 좀 말혀 보게. 성우는 아비의 죽음의 경위를 그 정확한 날짜와 더불어 말해주었다. 여자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내 꿈이 말이여, 늙고 보니께 꿈이 신통히 맞어 들어가는 경우가 있드니…… 아이고, 그 양반이…… 성우는 여자의 얼굴이 희고 깨끗한 것에 놀랐다. 그가 혐오감이나 염증과 더불어 상상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운 귀부인 같았다. 나이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화장 때문일까.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의 주름살은 확연했다. 목덜미에도 귀밑에도 주름살이 가득했다. 그러나, 여자의 표정, 눈빛 어딘가에 그런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활기 같은 것이, 어찌 보면 미태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집착같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엿보였다. 그녀의 눈은 광택제를 바른 듯 번들거렸다. 그 번들거리는 눈이 탁한 흰자위 속에서 쉴새 없이 구르며 방안 구석구석을, 그의 얼굴 이모저모를 살폈고, 그동안에도 그녀는 성우를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만나 이미 속을 다 주고받은 사이인 듯이 허물없이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아는가? 내가 합천 해인사로 여행을 갔는디, 무슨 작은 집 앞을 지나는 중이었어. 근디, 그 집 대문에 그 양반이 네 활개를 짝 펴고 기대어 서 있는 거여. 오매, 저 양반이 여그 웬일이라냐, 하고 가까이 갔더니 눈이…… 그 양반이 눈이 없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갖고…… 잠을 못 잤제. 그 양반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는 생긴 것이 분명헌디…… 연만헌 양반잉게 일이라믄 돌아가실 일백이 더 있겄는가, 생각은 드는디…… 아무리 궁리를 혀도 알아볼 도리가 없으니 어찌나 폭폭허고 기맥힌지…… 문이 열렸다. 두 여자가 교자상을 맞들고 들어왔다. 생선회에서 신선로까지, 육포에서 불고기까지, 상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요리로 그득했다. 어서 한잔허게. 여자가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성우는 사양하고 그녀에게 잔을 권했다. " 여자는 술잔을 받게 될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놀라는 얼굴이었으나, 곧 잔을 받았다. 그려. 나도 묵제. 그녀는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성우가 술잔을 비우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놓치지 않고 술을 따랐다. 마음 푹 놓고 드시게. 나한텐 자네가 자네 부친이나 똑같네. 그 양반을 위해서라면 내가 목숨이라도 바쳤을 것이네. 어서 들어. 이것도 좀 묵어보고. 회가 아조 싱싱허네. 탕도 좀 뜨고. 우리 집 부엌에미가 아조 솜씨가 그만이여. 나랑 같이 소리 배우러 댕기든 여편넨디, 인물이 너무 박색이라 소리는 자 포허고 요리집에 들어가드니 세상에 귀신 같은 요리쟁이가 됐다네. 박색인 여편네들 소리허고 댕기는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데만. 자네 부친도 참 애끼던 여편네여.

여자의 얼굴빛이 갑자기 시커멓게 죽어가는 것을 성우는 놓치지 않았다. 여자의 생생하던 눈빛도 진흙덩이처럼 사그러들어 갔다. 여자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드리워졌고, 그제야 비로소 성우는 여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순 안팎이리라.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예순 고개의 여자가 어떻게 아직 이런 여자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을 수 있을까? 다시 어머니의 발악적 외침이 귓전을 울렸다. 그년은 갈보여, 갈보. 그제야 여자는 비로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술은 잘 못 묵네. 근디 자네 가 누군가" 아무리 못 묵는 술이라도 내가 오늘은 묵어야제. 여자는 금새 취해갔다. 내가 자네 부친을 처음 만난 날을 생각허믄 아직도 세상에 신선을 만난 것 같으네.

아버지는 나에게는 무엇이었던가? 신혼 초였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때였다. 전세금을 올려줘야 했다. 어찌어찌 성우가 돈을 마련하여 아내에게 맡겼다. 서점 문을 닫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 아내의 얼굴빛은 사색이었다. 아내의 그 얼굴을 목격한 순간 이미 성우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물론 아내는 아직 아버지가 어떤 버릇을 지닌 사람인지를 다 알고 있지는 못했다. 성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알리지 않아도 머지않아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그는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지를 물었다. 아내는 오후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아내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돈이 없어졌다는, 그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화를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돈 잘 간수해야 해. 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선이라. 아버지는 이 여자에게는 신선이었다. 여자는 거듭 말했다. , 신선이제. 자네 부친이 아니었으면 벌써 나는 이 세상에 없네.

 

4

어찌 말헐 것인가, 어찌 말로 다 혀. 그 양반헌테 입은 은혜를 말이여.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시집이라고 갔는디, 서방은 알거지에다 주정뱅이요 딸린 식구는 주렁주렁, 그뿐이면 차라리 나 슬 것인디, 장가 못 간 시동생이라는 놈이 호시탐탐 몸을 노리는디, 아이고, 어찌나 무섭고 징글징글헌지. 그것을 누구헌테 하소연을 허겄는가. 허구헌 날 술에 젖어 주먹질에 발길질, 욕질에 패악질로 덤벼드는 서방헌테 허겄는가, 묵는 것이라믄 새끼도 따 돌리고 제 입에 쑤셔넣기 바쁜 시에미헌테 허겄는가. 이웃집 밭에 나가 밭 매고 모내기허고 모내고 빨래혀주고 콩밭 매고 깨 털 고 제기(祭器) 닦고 청소허고, 잔칫집에 부엌데기 초상집에 설거지, 배추 뽑고 무 뽑아 감자 캐고 고구마 캐어 서너 개 얻어갖고 한두 개 훔쳐갖고 집으로 가져와서 죽도 끓이고 삶아도 묵고 험서 사는디, 여그 가면 천대 저그 가면 무시, 묵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고, 숨 쉬는 때보다 숨맥히는 때가 더 많은 세월을 살었제. 한 동네에 소리 선생이 하나 사는디, 그 양반 집에 일을 갔다 가 큰애기들 소리 공부허는 걸 귀동냥으로 들었겄다. 흥얼흥얼 따라허다봉게 소리 선생 귀에 들어간 모양이라. 어느 날 딱 불러 앉혀 놓고 너 소리 한번 혀봐라, 험서 북을 따닥딱, 치는 거여. 어느 양반 앞이라 거역을 허겄는가. 얻어들은 풍월로 사랑가를 한마디 혔드니 그 양반 허는 말씀. 너 목청은 타고 났다. 근디 다듬을라믄 애 쪼까 먹겄다. 생각 있으믄 나오니라. 돈 걱정은 말고.

소리헐 생각은 애당초 없었제. 소리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소리 선생 집에 드나드는 거이 좋았던 거여. 소리보담도 이 년이 사는 보람이 하나 생긴 것이제. 사람 대접이 이런 거구나, 처음 알었응게. 근디 어쩌끄나. 서방이 샘을 내더니 시에미가 샘을 내더니 시동생까장 샘을 낸다. 트집 잡아 발길질이요 서방질헌다 주먹질이다. 서방질허는 년 보지는 어찌 그리 자주 찾는지. 밤마다 덤벼드는디 아직도 정말 모르겄다, 이년이 받은 몸이 서방 몸인지 시동생 몸인지. 배 곯아 지쳐 일허다 지쳐 매 맞다 지 쳐 천대에 지쳐 자다 보믄 배가 무겁고 졸다 보믄 아랫도리가 서늘혀도 서방이겄제, 허고 그냥 잤응게. 어흐, 이년의 팔자가 어 찌 그리 고단혔는지. 근디 이상허다. 그럴수록에 소리가 더 허고 싶은 거여. 도망을 혀야제 도망을 가야제 이년이 팔자를 고쳐야 제, 다짐을 허고 또 허는 판인디, 재수가 없는 년은 빠뜨리면 두레박이요 건져올리면 썩은 새끼줄뿐이라드니, 애기가 선 거여. 애기 낳고 애기 땜시 오래 참었제. 한탄험서 참고 움서 참고 무식헌 게로 참고 멍청헌 게로 참고 폭폭헌 년인 게로 참고 죽으까 험서 참고 죽이까 험서 참고, 무던히도 참었는디, 그 속도 모르고 뜬금없이 서방놈 헌다는 말. 너 이 죽일 년아, 당장 소리 그만둬라. 내일부터 못 간다. 시동생 옆에 섰다 허는 말. 발씨 못 가게 혔으믄 얼매나 좋았으꼬. 서방놈 시동생놈이 서로 쳐다봄서 웃는다.

인자는 못 참겄다 도망백이 길이 없다, 맴을 묵고 마지막으로 소리 선생 댁에를 가서 땅을 침서 움서 하소연험서 말씀을 올링 게 선생이 눈 꾹 감고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연다. 새끼는 어쩔라냐" 이년의 대답이, 야반도주허는 년이 어찌 새끼를 데꼬 가겄소" 무슨 수로 멕여살릴라고 데꼬 가겄소. 선생님이 이러 말씀헌다. 가그라. 쥐도 새도 모르게 가그라. 니가 영 안 올라고 작정을 허고 갈라믄 새끼를 데꼬 가고, 영 안 올 자신이 없어도 새끼를 데꼬 가라. 니가 행여나 그 똥통에 다시 빠질까 무섭다. 니 새끼 그 똥통서 살아도 좋겄냐" 옛날에 명창들이 그보다 더헌 똥통서 죽네사네허든 사람 한둘이 아니요, 지금도 벨로 다를 게 없이 사는 사람도 많지만, 세상이 그걸 다 알면서도 누가 그런 걸 갖고 명창헌테 숭보는 사람 있드냐. 니 말 허는 게 아니라 명창 얘기 허는 거잉게 맘 푹 놓고 듣그라. 똥통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똥통이 너도 똥통으로 만드는 것이 무서운 거다. 세상이 무서 운 거이다. 무서워허는 연놈헌테는 더 무섭고 서러운 연놈헌테는 더 서럽고 아픈 연놈헌테는 더 아프다. 아냐? 지금 몰라도 알게 될 거이다. 니가 명창 되믄 그것이 더 서러울지도 몰러. 그려도 그 똥통보다는 나슬 거이다. 그 똥통 다 잊어불라믄 새끼 데꼬 가고 못 잊겄어도 데꼬 가그라. 니가 가든 안 가든 여그는 다시는 오지 말그라. 긍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헌테 혀주고 싶은 얘기 가 하나 있다. 맴 푹 놓고 그냥 듣그라.

니가 북 내력을 아냐" 알 리가 없제.

너 울 거 없다. 똥통에 빠졌다가 똥통서 나가는디 울 일이 어디 있냐. 예인헌테는 이보다 더헌 일도 비일비재다. 너 지금부터 울 일이 더 많을 거이다. 예인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으믄 별 재미없다. 사람들 울 때 웃어불고, 사람들 웃을 때 울어부는 것이 재미있다. 씻김굿 가보믄 상() 났는디 굿쟁이들이랑 문상객들은 한판 걸지게 놀고 웃는다. 좋 은 날 잔칫집서 소리쟁이는 심청이 물에 빠진다고 소리허고 사람들은 그거 보고 눈물 흘린다. 눈물 닦고 내 얘기 들으믄 우는 거 보다 낫다.

내가 우리 스승님헌테 들은 얘기여. 아무헌테도 혀본 적 없는 얘긴디 너헌테 처음 허는 거이다. 세상에 북이 어떻게 생겨났는 지 아냐? 옛날 옛날 한옛날 호랭이가 댐배 피고 여우새끼 처녀로 둔갑허여 총각 호리든 때래여. 서로 좋아허는 총각 처녀가 있었 단다. 근디 어쩐다냐. 총각 에미 애비도 처녀 에미 애비도 둘이를 못 만나게 혀. 총각은 도망가 살자 허고, 처녀는 못 가겄다 허고, 씨꺽써꺽 싸움질을 허는 판인디, 큰물이 졌단다. 온 동네가 나라 안이 다 물에 잠겼단다. 게우게우 총각이 산으로 도망을 혔 제. 세상에 천생연분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몰러. 그런 연분을 만나본 적이 없응게. 이런 걸 보고 천생연분이라고 허 는지는 모르제만 산에서 그 처녀를 만난 거여. 둘이서 신방을 차렸제. 나라도 그렀을 거이다. 너라믄 안 그렀겄냐? 세상에 둘백 이 없는디 둘이서 고로큼 보고 싶었는디 아침에 일어남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그 생각뿐인디 못 보는 거이 그냥 한스런 판에 산속에서 단둘이 딱 만나부렀는디 어쩔 거여. 물이 빠지고 나서도 둘이는 산에서 안 내려갔단다. 근디 암만 생각혀봐도 그것이 벌 이제. 새끼가 생기들 않었단다. 새끼도 없이 둘이서 숨어 살았단다. 둘이서 보듬고 자고 보듬고 놀고 먹음서는 눈으로 보듬고 일 험서는 일로 보듬고. 금슬이 고로큼 좋은디 새끼가 안 생기는 것은 어쩐 일이었으까이. 사내가 계집 가슴에 귀를 대니까 묘헌 소 리가 들리드란다. 너도 알겄지만 서방 각시가 노는 일이 조이 고되드냐. 한바탕 놀고 나서 각시 젖통에다 얼굴을 대고 있으믄 각시 몸 안에서 뭐가 뭉둥이질허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거여. 자네 젖 안에서 뭐가 몽둥이질을 허네. 서방이 말을 헝 게 각시도 그러드란다. 당신 배 안에서도 누가 홍두깨질을 허요. 그렇게 금슬 좋게 사는디, 이를 어쩌끄나. 각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허드란다. 서방이 세상에 내려가 온갖 명약을 다 구혀 갖다멕여도 기운을 못 차리는 거여. 결국 숨이 넘어가는디 여보 여보, 서방 저그, 저그, 하면서 보따리를 손가락질허다가 끝내 말을 못 마치고 각시가 세상을 하직을 허고 마는구나. 사내가 계집을 혼자서 장사지내고 혼자 자고 혼자 깨어 우두커니 앉았다가 픽 고꾸라져 또 혼자 자고 혼자 깨기를 몇 날 며칠을 허는디, 자 도 자는 것 같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 것이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각시 생각뿐이드란다. 각시 죽은 것이 원통허고 절 통하고, 각시 젖 안에서 나든 그 소리 한번 들었으믄 원이 없겄구나.

연분이라는 것이 천벌이라. 사람하고 생긴 연분이건 소리허고 생긴 연분이건 연분이 천벌이여. 내가 널 언제 또 보겄냐. 내가 젊은 때는 소리에 반헌 적도 있었제. 지금" 지금은 나 소리 안 좋아혀. 소리가 지긋지긋허다. 근디 인자 소리가 날 안 놔준다. 그놈의 연분이 천벌은 천벌인디 천벌만이 아니드라. 그것이 운명인갑드라, 글제. 천벌이나 운명이나 그것이 그것이겄제.

사내가 멍청히 각시 생각만 험서 사는디, 문득 각시가 숨이 넘어갈 적에 하든 말이 생각이 나드란다. 하여 그 보따리를 풀었드니 그 안에서 절구통 같기도 허고 맷돌 같기도 헌 난생 첨 보는 이상한 물건이 나오는디, 이것이 무엇일꼬, 하고 툭, 건드려보니, 앗다, 그놈이 소리를 내는디, 그 소리가 똑 각시 젖 안에서 들리든 그 소리드란다. 그때부터 사내가 혼자 자고 혼자 깨다가, 혼자 일허고 혼자 묵다가, 각시가 그리워지믄 그 북을 꺼내 두들기고, 이렇게도 두들겨보고 저렇게도 두들겨보고, 두들김서 각시도 불러보고, 신세도 한탄해보고,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고, 신이 날 때도 두들겨보고 화가 날 때도 두들겨보고, 슬플 때는 시름 없이 기쁠 때는 신명나게 두들겨보는디, 그것이 똑 각시 살았을 적에 산딸기라도 따묵음서 마주 서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고 받는 맛이라. 자고 나면 그 북을 끼고 살았으니, 눈만 뜨면 그 북소리에 실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슴에 맺히는 대로 지껄이고 살았으니, 그 북에 그 소리에 혼이 실리고 정이 실린 건 당연지사, 그 북을 침서 각시를 소리쳐 부르기를 골백번 만에 결국 각시가 되살아났고, 그리허여 신랑 각시가 백년해로를 혔다드라.

북소리가 사람 심장이 뛰는 소리다. 목구녁 소리도 다를 게 없다. 소리가 사람 숨쉬는 소리여. 심장이 뛰고 숨을 쉬어야 사람 이 사는 법이고, 심장허고 숨허고 장단이 맞어야 사람이 사는 법이다. 소리도 다를 게 없다. 소리가 사람을 쥑이기도 허고 살리 기도 헌다. 사람 쥑이는 소리 내가 많이 들었다. 내 목구녁서도 사람 쥑이는 소리 나온 적 없다고는 내가 말 못 헌다. 나도 모르 는 사이에 사람 쥑이는 소리 허고 산 세월이 있었응게. 근디 알고봉게 그것이 소리가 아니드라. 사람 숨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소리의 근본이여. 근디 사람 사는 법에 안 맞는 소리를 어찌 소리라고 허겄냐.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소리여. 우는 사람 웃기고 웃는 사람 울리는 것이 소리여. 섰는 사람 자빠뜨리고 자빠진 사람 세우는 것이 소리여. 소리에 혼이 들어가믄 그렇게 된다드라. 나도 모르제, 내가 그런 소리 혀본 적이 없응게. 니가 지금 찾아가는 길이 니 목숨을 찾아가는 길이다. 혼을 찾아가는 길이여. 너 그 똥통서는 못 산다. 니 새끼도 못 산다. 가그라. 동구 밖 나감서 여그는, 나까지도 딱 잊어묵어부러라. 가그라. 돌아볼 것도 없고 부끄럴 것도 없다. 웃음서 가그라. 신명내서 가그라. 살기 힘들고 죽고 싶고 외롭고 고달프믄 소리혀 라. 소리로 풀어라. 소리가 묘헌 것이다. 널 괴롭히기만 허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로도 헐 것이다.

집을 나왔제. 새끼를 데꼬 나왔제. 어쩌끄나. 먹고 살길 막막허다. 이년이 촌에 숨을 수는 없고 그려서 전주로 나왔는디, 아 는 일은 땅에 엎어져 사는 것뿐이고 남의 집살이 허는 것뿐인디, 이놈의 전주에는 땅이 없구나. 땅을 갈아달라는 사람도 없고 갈아엎을 땅도 없는 거여. 이년 믿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남의 집에서도 안 받아주는 거여. 이년 굶는 건 견디겄는디 새끼 배가 푹 꺼져서 울고불다 지쳐 잠들어, 자다가도 배가 고파 자지러지게 울어쌓는디, 차마 그 꼴 못 보겄다. 차라리 고아원에라도 주고 싶어 고아원 앞까지 갔다가, 못 주고 그냥 오고, 못 주고 그냥 오기를 몇 번, 안 되겄다, 이년이 불쌍헌 새끼 굶겨 죽이겄다, 이를 악물고 시작헌 것이 뭔지 알겄는가? 동냥질이었네. 알겄는가? 이년이 동냥아치를 혔다네. 장바닥에 굴러댕기고 역 앞에도 굴러 댕김서 밥도 얻어 새끼헌테 멕이고 돈도 얻어 새끼헌테 멕이고…… 소리 공부는 꿈도 못 꾸고 동냥질만 허고 댕긴 거라네.

자네 부친 못 만났으믄 내가 동냥아치로 살다 벌써 죽었을 것이네. 내 새끼도 동냥아치로 살았을 거여. 내가 그날을 못 잊네. 죽어도 못 잊을 것이네. 동냥질 다니다가 자네 부친을 만난 거제. 역전 앞에 나가 누더기 걸치고 손 내밀고 댕기는디, 어떤 잘생 긴 양반이 두 눈 딱 부릅뜨고 날 쳐다봄서 허시는 말씀이, 니가 관상이 거지가 아닌디 어째 이러고 댕기냐, 허는 것이라. 내가 놀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디, 그 양반이 날 따라오니라, 허시는 거여. 역전 앞 식당으로 끌려들어갔제. 역전 앞 식당주인 이사 내가 동냥아치라는 것을 아닝게 쫓아낼라고 허는디, 그 양반이 식당주인을 불러 이 여자가 세수를 좀 혀야 쓰겄으니 물 있 는 데 좀 데려다주쇼, 허고, 나헌테는 세수나 허고 방으로 올라오니라, 허고 방으로 들어가니 식당주인도 암말 못 허고 나를 수 도깐으로 데꼬 갔제. 세수를 허고 방으로 들어가니 그 양반이 수육허고 설렁탕을 사준다. 고기 본 지는 말헐 것도 없고 밥 본 지 도 오랜만이라, 허겁지겁 묵고난게 어찌 된 연고인지 사연을 얘기허라네. 이년이 태어나 동냥아치 되기까지 얘기를 허는디, 아이 고, 설움이 복받치고 숨이 막혀 한 마디 허고 울음이고 두 마디 허고 통곡이라. 누더기에 싸서 옆에 눕혀 놓은 새끼까지 덩달아 울어댄다.

내 사연 얘기 다 듣고 나드니 그 양반이 소리 한번 혀보라데. 혔제. 제대로 못 배운 대로 배우다 만 대로, 그 동안 살은 세월 그동안 쌓인 설움 소리로 다 쏟아냈제. 눈물이 반이요 소리가 반, 그것도 소리라고 그 양반 추임새까지 넣어감서 눈가까지 붉혀 감서 듣고 나더니 말씀을 이리 허시네. 니가 목소리는 명창이다. 니 목청이 깊고도 우람허고 그윽허고도 세밀허다. 내가 소리는 못 혀도 귀는 뚫렸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디, 이런 목청 내가 난생 처음이다. 동냥질이 니 일이 아니다. 그 양반이 돈을 내놓는디, 그것이 쌀 두 가마 값이었네. 쌀 두 가마믄 그 시절에 작은 돈이 아니었제. 이년이 황송허고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 커니 앉았으니, 그 양반 말씀이 이러하다. 집 주소나 갈쳐주고 가그라. 내가 며칠 내로 사람 시켜 소리 선생헌테 데려다주마.

이년이 자네 부친과 헤어지자마자 그 돈을 움켜쥐고 집으로 가서 궁리를 거듭허는디, 이 돈을 그냥 쓰면 안 되제, 묵고 살기 반을 마련혀야제, 허여, 쌀을 팔아 보리쌀 반 가마니 사 들여놓고, 나머지 돈으로 풀빵 기계를 샀겄다. 이틀이 지나니께 어떤 사람이 찾아왔는디, 그 사람 따라가니 소리 선생 집이라. 그때부터 풀빵 장사를 험서 소리 공부 새로 시작하였제.

자네 부친이 나 안 만나겄다고 겔심헌 게 한두 번이 아니네. 부인은 그만두고라도 커가는 자식들헌테 챙피허고 낯 안 선다고, 인자 안 만나도 서로 살지 않겄냐고, 날 달래기도 하고 화도 내고…… 그때마다 이년이 그 어른 무릎 아래 매달렸제. 그 양반 없 으믄 못 살겄응게. 그 양반 없으믄 내가…… 살 자신이 없응게. 아니네, 아니여. 자네도 인자 세상 속내 다 알 것인디 뭣 났다고 내가 감추겄는가. 어찌 정이 안 들었다고 허겄는가. 그런 양반허고 어찌 정 안 들고 살겄는가만 그것이 남녀 사이 정분만은 아니었네. 이년이 자식새끼 앞세우고 죽을라고 혔을 적에, 게우게우 모은 돈 사기당혀 다 날렸을 적에 날 살린 양반이 자네 부친이 시네. 이년이 무슨 대회에서 눈곱만헌 상 하나 받았을 적에 나보다 더 좋아헌 양반도 자네 부친이셨고. 이 썩을년이 묵고 살기 힘들어서 술상 앞에 나앉아 술꾼들헌테 소리허고 돈 조깨씩 얻어서 묵고 살고 헐 적에 자네 부친이 뭐라셨는지 아는가. 너헌테 동냥아치 팔자가 있는가부다. 긍게 또 동냥아치질이제. 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아직 한 달에 쌀 두어 가마는 또 사줄 수 있응 게 갖다 묵어라. 이러셨다네. 근디 이년의 팔자가 요 모양으로 풀려부렀다넝"이년이 술 중독도 부족허여 마약까지 시작헐 제 어찌 알고 오셨는지 이년 붙잡고 마약 끊어주니라고 날밤을 새움서 뒤치닥거리 헌 양반도 자네 부친이시네. 말도 말게, 말도 말아. 이년이 신선을 만난 거제.

이제 와 생각허믄 자네 부친 만난 것을 운이라 헐지 불운이라 헐지 당최 모르겄네. 세상에 그런 양반 계신 거를 몰랐으믄 이놈의 세상 허는 대로, 험허믄 험헌 대로 아귀 겉으믄 아귀 겉은 대로, 나도 아귀도 되고 나찰도 됨서 그럭저럭 살었을 것인디, 그런 양반 만나고본게 세상이 꼭 그런 것이 아니란 것도 알고, 그렇게 사는 게 전부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어 차라리 세상 살기 더 힘들어졌는지도 모르겄네. 세상이 자꼬 싫어지는 거여, 내가 자꼬 싫어지는 거여, 살기가 귀찮아지는 거여. 정말로 살기가 귀찮어. 이년이 동냥아치로 떠돌다 죽었으믄 차라리 나슬 것을, 허는 생각이 드는 적이 있는 걸 어쩌겄는가. 이년이 멍청헌 년이고 망덕(忘德)헌 년이제. 참 망덕헌 년이여.

 

5

날은 저물고 눈은 그쳤다. 현정순의 눈은 이제 취기로 반짝거렸다. 그녀는 할 얘기가 많았다. 성우는 이제 일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어서지 못했다. 아직 등짝의 혹덩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비의 여자에게 아비가 죽었다는 것을 알렸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무엇을 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집을 나선 것인가? 현정순은 두 손으로 그의 잔에 술을 따랐고,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려 해도 두 손으로 술을 받으려 해도 아이고 그 손 치우시게, 하며 끝내 한 손으로 따르고 받게 만들었다. 이런 죄 많은 년이 어떻게 자네 겉은 사람헌테 두 손으로 술을 받겄는가. 이렇게 마주 앉아 술 한 잔 묵는 것만 혀도 영광인디. 내 욕 많이 혔제? 성우는 대답하지 않았 다.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전주 대사습놀이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성우가 나란히 앉아 그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정순이 나왔고,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다음 자리쯤 되는 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이미 그 여자를 알 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눈에 불을 켜고 아버지를 쏘아보며 저런 걸 뭣 났다고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감격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소리 말어. 저 사람들이 예인이네. 긍게 나라에서도 대회를 열고 상을 주는 것 아닌가. 어머니는 발끈하여 버럭 소리쳤다. 예인? 아이고, 예인? 예인 참 좋아헌다. 저것들은 갈보여, 갈보! 내가 그 양반이 좋아서 만난 중 아는가? 그 양반이 내가 좋아서 날 찾은 중 아는가? 아니네. 그것이 아니여. 인자사 변명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겄는가만, 그것이 아니란 것만은 알아줬으믄 좋겄네. 그려야, 나야 아무시랑도 않제만, 자네 부친이 한을 풀 것이네. 우리는 말이여, 우리는…… 여자는 갑자기 얘기를 그쳤다. 성우는 기다렸다. 서로가 좋아서 찾은 것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그처럼 악착스레 이 여자를 찾았고, 이 여자는 나중에는 거지꼴이나 다름없던 아버지를 여전히 맞아들였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주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철든 이래 그의 삶은 아비와 그 삶의 방식에 대한 반발이었다.

여자는 멍하니 성우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성우는 그녀가 얘기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하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리고 이 여자가 서로에게서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 자란 자식들에게 멸시를 받으면서도 아버지가 악착스레 이 여자를 찾았다는 것을 성우는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가 잠에서 깨어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따뜻한 것을 찾을라고…… 우리 소리 선생님 말씀마따나 세상이란 게 무서워허는 사람헌테는 더 무섭고, 서러운 사람헌 테는 더 서럽고, 아프고 추운 사람헌테는 더 아프고 추운 것이데. 자네 부친이나 나나 추워서…… 세상이 너무 추워서 살 수가 없어서…… 생각혀보게. 자네 부친이 이 늙은 몸뚱이가 탐이 나서 날 찾았겄는가. 성우는 추궁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로에게 매달렸던 겁니까? 당신 때문에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죽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한 길 땅속에 묻혔다. 어머니가 성우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네 애비 원망 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앓고 있는데도 몇 푼 돈을 움켜쥐고 집에서 나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은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남긴 말은 그래서 성우에게는 더 욱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성우는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성우는 말했다. 돈이 필요하시면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여행 다녀오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경이 에미한테 시켜서 여비(旅 費)부터 가방 꾸리는 일까지 필요한 거 다 마련해드릴게요. 몇 푼도 안 되는 돈 그렇게 몰래 들고 어느 날 갑자기 도망가듯이 떠나지 마시구요. 성우의 잔소리가 길어지자 아버지는 말했다. 나 여행 댕겨온 거 아니다. 성우는 그럼 뭐냐고 힐문했다. 아버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엉뚱한 소리를 내놓았다. 나 극락에 댕겨오는 거이다. 극락 가는디 여비는 뭐고 준 비는 다 뭐냐. 성우는 구역질을 느끼며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극락? 겨우 술집 아닌가. 매춘부나 다름없는 술집 여자 아닌가. 거기가 당신에게는 극락이란 말인가. 조부가 모은 논이니 밭이니 집이니 임야니 하는 적지 않은 재산을 한량놀음으로 다 탕진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이것저것 사업을 벌였던 것은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역시 한량놀음의 한 방법에 불과했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실패를 거듭했다. 마치 일부러인 듯 아비가 벌이는 일은 하나같이 실패로 끝이 났다. 아직 한량놀음을, 혹은 실패를 거듭할 수 있었을 때에는 아버지는 적어도 초라하지는 않았다. 늘 당당했다. 아버지의 호통은 우렁찼고 그의 호통 한 번으로 집안은 살얼음판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임야와 집을 저당 잡혀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한 뒤부터 아버지의 어깨는,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릎 밑까지 늘어져버렸다. 아이고 불쌍헌 양반. 그 많던 재산 헛놀음으로 다 날리고 저 꼴이 뭐라냐. 그렇게 귀허게 태어난 양반이 어쩌다가 그 몹쓸 년 만나갖고…… 악연(惡緣)도 악연도 …… 그때 늘어진 아버지의 어깨는 한 번도 온전히 펴지지 않았다. 그때, 어딘가 떨리는 것도 같고 그저 허탈한 것도 같던 아버지의 음성은 지금 생각해봐도 기이했다. 성우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이미 집안은 기울 대로 기울어 성우와 어머니는 학기마다 등록금 걱정에 시달렸으나, 아버지는 그런 걱정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늘 라디오로, 녹음기로 소리나 들으며 걱정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가 아버지에게 소리가 그렇게 좋으시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도 알랑가 모르겄다만 산다는 게 참 비루헌 노릇이다. 누추헌 노릇이여. 근디…… 소리라는 것이 참 묘허다. 좋은 소리를 듣고 있으믄 내 혼이 날아오르는 것 같어. …… 좋다. 이 비루헌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 같어. 자유스러워. 그것뿐인 줄 아냐. 걸레쪽 같기만 허든 내 존재가 전연 다른 것으로, 새로운 것으로 비로소 실감이 되는 거여. 내 존재가, 아니, 세상도 똑같이 팽창하는 것 같은 거여. 그 소리를 따라 무의미의 세계가 유의미의 세계로 소리도 자취도 없이 변화하는 거여. 그런 좋은 소리는…… 인자 들을 길도 없어졌다만. 극락이 있다믄 바로 그런 거겄제. 존재의 충일함, 존재 자체로, 그냥 여기 있다는 것 자체로 그만 아무 부족한 것도 탐나는 것도, 그렇제, 생각마저도 없어지고 마는…… 해탈이 다른 거겄냐. 그런 거이 해탈이제.

여자가 술잔을 놓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판소리나 타령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흘러온 타향 하늘 날이 저문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외로이 우나니 눈물도 하염없어라 갈 데 없는 신세라오…… 소리로 단련된 탁 트인 음성으로 부 르는 유행가는 가수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춤추며 아양 떨며 부르는 그것과는 맛이 달랐다. 거기에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오르는 듯한 간절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음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홀했다. 싸구려라 치부했던, 술이나 취해야 노래방에 들어가 디지털의 삭막한 반주에 맞춰 함부로 불러젖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던 저 유행가에 그 많은 고비고비가 있고 절절함이 있다는 것에 성우는 놀랐고, 현정순의 유행가를 듣는 동안 몇 번이나 소름이 끼쳤다. 노래가 끝나자 성우는 말했다. 유행가를 하시다니 뜻밖입니다. 소리를 한 자락 하시려나 생각했는데. 여자는 술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이 칼끝처럼 성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다시 그의 등을 타고 앉은 혹이 요동을 했 다. 그와 더불어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되살아났다. 그는 다시금 여기가 아니다, 하고 생각했다. 이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가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막막할 뿐이었다. 여자가 문득 말했다. 나 소리 못 허네. 내가 소리꾼은 무신 소리꾼인가. 숭내만 내다 만 거제. 내가 자네 부친 앞에서만은 소리꾼이었제. 내가 소리를 잘 혀서가 아니라 자네 부친이 소리를 잘 들으셔서, 덕분에 내가 게우 소리꾼이었제. 그러니 이년이 복도 많은 년이제. 나중에는 자네 부친이 행색이 너무 초라하여 내 마음이 아프데. 돈도 디려보고, 자네헌테는 미안헌 얘기네만, 여기 내려와서 사시라고 권허기도 혀봤다네. 그 무렵부터 발길을 안 허시데. 그러더니, 인자 자네가 대신 내려오셨구만이. 여자가 성우를 쳐다보는 눈이 돌연 그윽해졌다. 그 눈길 앞에서 성우는 자신이 아비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비가 눈으로 본 여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지극히 짧은 순간 선명히 그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소름이 끼쳤고 무서웠다. 아득한, 끝이 보이지 않는, 결코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위험한 비밀이 숨 쉬는 구덩이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자도 같은 것을 느낀 것일까. 서로의 시선이 얽혀 있다는 것을 의식한 순간 그들은 곧 시선을 옮겼다. 성우는 술잔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고, 여자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그 탕허고 전 좀 새로 내와라이. 술도 더 갖고 오고.

그러나,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성우는 몸이, 그와 더불어 혼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의식했고, 자신이 더듬더듬,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 얼핏 본 그 구덩이를 향해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본 것이 무엇일까.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이 두려움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구덩이 속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 것인가. 거기 분명히 그를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실감과 함께 다시금 두려움이, 두려움만은 아닌, 호기심만도 아닌 것이 그의 몸속을, 빈집에 불어 드는 바람처럼 서늘하게 휘돌았다. 그리고, 그는 문득 다빈치와 그의 날개를 떠올렸다. 아아, 어째서 이런 까맣게 잊고 있던 일까지 기억나는 것일까. 그는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것마저 두려웠다.

성우는 일어섰다. 고만두십시오. 이제 가서 자야죠. 많이 마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가 일어서려 하자 여자는 얼른 그를 붙잡았다. 그게 뭔 섭섭한 소리여. 그런 말씀 마시게. 여그 집 놔두고 어디 여관방에 가서 주무신단 말이여. 여그서 주무셔야제. 이 년 가슴에 못을 박을라고 이러시는가. 어서 앉으시게. 갈 생각 말어. 피곤헌가? 피곤허다믄 나는 내려갈라네. 여자는 완강히 그 를 끌어 앉혔다. 맘 푹 놓고 여그서 주무시게. 자네 부친도 여그서 주무신 적이 있다네. 한두 번이 아니었제. 아무 때나 내려오시라 혀도 요 몇 년은 통 내려오신 적이 없지만…… 아이고, 무심헌 양반이제…… 어서 술 더 드시게. 어서. 이년헌테도 한잔 주고.

현정순이 북을 내놓았다. 자네 부친 북이네. 내가 그걸 드린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는디 웬일인지 가져가시지를 않데. 자네가 가져가시게. 내가 맹근 북도 아니고 내 살가죽을 벗겨 맹근 북도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북이여. 한 소년이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북을 찢고 있다. 오직 북을 찢기 위해 집에서 가지고 나온 과도가 북의 측면을 뚫어 구멍을 내자 뻥, 하는 소리가 텅 빈 골목을 울린다. 소년은 질기고 단단하여 칼날이 먹지 않는 쇠가죽을 이를 악물고 찢고 찢고 또 찢는다. 그가 찢은 것은 북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북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기에도, 그리고 이 여자의 가슴속에도. 어쩌면 바로 아버지의 가슴속에도. 그날 소년이 찢은 것은 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소년이 그토록 힘들여 찢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여자는 멀거니 북을 쳐다보고 있다가 북채를 그러쥐어 두둥둥 따닥, 쳤다. 방 안에 북소리가 물결처럼 오래오래 흔들렸다. 아비의 음성이 흥얼흥얼 들려오는 듯했다. 명월사창(明月紗窓)에 슬피 우는 저 두견아 네가 울랴거든 남의 창전(窓前)에 가 울지 세상을 잊고 사자는디 앞에 와 슬 피 울어 남의 심사를 산란케 허느냐…… 아버지가 앉아있다. 그 앞에 여자가 앉아있다. 여자가 소리를 한다. 아비는 눈을 지그 시 감고 옳지, 잘헌다, 추임새를 넣으며 두둥 따닥딱, 북을 친다. 거기 내가 앉아있다. 내 앞에 여자가 앉아있다. 내가 북을 친다. 따닥딱. 여자가 소리를 한다. 아비가 앉아있다. 그 앞에 어머니가 앉아 소리를 한다. 내가 앉아있다. 그리고…… 낯선 소녀가 앉아 소리를 한다. 아니, 낯선 소녀가 아니라 몇 시간 전에 내가 금정에서 내려준 소녀다. 아비가 앉아있다. 거지가 앉아있다. 거지가 소리를 한다. 아비가 추임새를 한다. 아비가 거지가 되어 앉아있다. 여자가 돈을 내놓는다. 여자가 소리를 한다. 아비가 소리를 한다. 내가 소리를 한다. 어머니가 소리를 한다. 여자가 앉아있다. 어머니가 앉아있다. 내가 앉아있다. 아 비가 앉아있다. 소녀가 앉아있다. 바람이 분다. 어딘가 깊고 깊은, 어둡고 어두운 구덩이에서 서늘하고 서늘한, 음산하고 음산한, 황홀하고 황홀한 바람이 불어오고…… 누가 저 거대한 퉁소를 부는 것일까. 그 바람 소리는 퉁소 가락처럼 세상을 떠돌다가 하늘하늘 술상에 떨어지고 술잔에 흩어지고 나는 술잔을 든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저그…… 십만억 불토(佛土)를 지나가 믄 거그 극락이 있다네. 거그서는 바람이 불믄 나무랑 구슬, 꽃이랑 풀, 지붕이랑 기둥에서 소리가 나는디, 그 소리가 백천 가지 음성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 같아서 그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세상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네. 만나고 헤어지는 괴롬도 없고 태어나고 살고 죽는 괴롬도 없다네. 우리 눈에 눈물이 아니라 꽃이 피고, 우리 입술에 한숨이 아니라 보석이 열리고, 우리 가슴에 한이 아니라 천도(天桃)가 열린다네. 거그로 가는 길에 우린 여그서 그저 잠시잠깐 만난 거여. 춥다봉게 소리도 허고 술도 묵고 미워도 허고 쌈질도 허고 몸도 섞고 사기도 치고…… 인자 거그…… 거그서 만나서…… 거그서 만나믄…… 거그서 만 나야제, 거그서 만나서……

짙푸른 하늘, 다빈치가 거대한 날개를 달고 날고 있었다. 좋은 바람을 탄 독수리처럼, 다빈치는 날갯짓도 하지 않았다. 유유히, 아아, 바람처럼, 원래 거기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사는 것처럼 그는 편안하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6

어제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뜬 성우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침침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찾아 다시 보았다. 분명히 열두 시에서 몇 분이 못 미치는 시각이었다. 가야지. 성우는 벌떡 일어섰다.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우선 수도꼭지를 틀어 차디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 순간 불현듯 너무나 어린 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붉은 한복, 해말간 얼굴, 그 보송보송한 얼굴선들. 그 여자아이가 목을 떨며 소리를 하던 것도 생각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현정순이 여자아이를 불 러들여 소리를 시킨 것일까? 그 늦은 시간에? 아니, 꿈이었을까? 젊은 현정순과 젊은 아비, 어머니, 그리고 그가 같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북 치고 소리를 하는 꿈을? 그러나, 그 여자아이의 얼굴은 너무나 또렷했다. 샤워를 마치기까지 그 여자아이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외투까지 걸치고 방을 나서려다가 그는 방 가운데에 멈춰 섰다. 윗목에 놓인 북을 발견했던 것이다. , 북채, 그리고 그 옆에는 남색의 북 주머니. 결국 아버지의 북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온 셈인가. 혹은 여전히 그의 등짝에 올라앉아 그를 타 누르고 있었다. 이게 아니었다. 아직도 뭔가 하지 않은 일이 남아있다. 이 혹을 벗어던지기 위해 여기까지 아비의 여자를 찾아왔으나 그것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뭘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 혹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인가? 그는 북을 주머니에 넣어 들고 방을 나섰다. 가지에, 이파리에 눈이 가득 쌓인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희디흰 빛이 눈속을 파고들었다. 눈두덩이 갑자기 한 근이나 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기둥을 짚으며 구두를 찾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바깥 골목에 차가 달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는 뜰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조벽(照壁) 앞을 지나 일각문(一角門)을 지났다. 한 여자가 속곳 바람으로 마루 끝에 앉아 햇빛 아래에서 눈썹을 뽑고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 여자는 깜짝 놀라며 드러난 다리를 속곳과 함께 싸안아 감추는 듯하더니, 그러나 그뿐, 배시시 웃으며 빤히 그를 넘겨다보았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가시게요" 방문이 열렸다. 안에 서 또 다른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목을 가리는 붉은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를 발견한 순간, 그는 아, 하고 짤막하게 신음했다. 어머. 그 여자아이는 곧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가 꿈이라고, 환상이라고, 현정순의 젊은 모습이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열여덟쯤이나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저 어린아이가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금 어제 부산까지 태워다 준 두 아이들 가운데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그 여자아이와 이제 방문 틈으로 얼핏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진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우는 그러나, 얼른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는 현정순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마담언니요? 마담언니. 그것이 현정순의 호칭이었다. 여자는 따라오세요, 하며 일어나려다가 얼른 주저앉으며 속곳으로 다시 다리를 감쌌다. 그녀가 다시 그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서 짙은 붕괴의 냄새가 났다. 맑은 햇빛 아래 그 냄새는 화장품 냄새처럼 짙었다. 물으면서도 여자의 수작을 들으면서도 성우는 그 너머의 방문이 다시 열리기를, 그 여자아이가 다시 얼굴을 내밀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속곳 바람의 여자는 손을 들어 그가 이제 막 나 온 안채를 가리켰다. 저기 맨 안쪽 방이에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옷 좀 입고 제가 안내해드릴 텐데. 성우는 아닙니다, 하고 말하며 되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일각문을 넘어, "홍희(鴻喜)"라는 글자가 양각된 조벽 앞을 지나, 뜰을 가로질렀다. 현정순의 방문 앞에 이르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안에서 현정순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여? 들어와. 성우는 미닫이를 밀었다. 쨍한 한낮의 햇빛 아래 서 있었던 탓일까. 방안은 어둑했다. 그보다 더 먼저 그가 의식한 것은 화장품과 향수 냄새와 어우러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하기 힘든 이상한 냄새였다. 방은 작았다. 벽에 기대어 세워진 가야금이 보였다. 민화(民畵)로 만든 팔폭 병풍 속의 맨드라미와 잉어, 개와 닭. 아직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고, 속옷 바람의 현정순이 무릎 밑으로는 이불을 덮은 채 앉아있었다. 이부자리 바로 앞에 작은 소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머리가 깨어져 나간 작은 증류수 앰풀, 그리고 희게 번쩍거리는 가루가 담긴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뻣뻣이 굳은 듯했다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주름살이 가득한 시커먼 얼굴, 퀭한 눈, 검은 입술, 헝클어진 긴 머리칼은 등께에 구불구불 늘어져 있었고, 그녀의 한팔 상박부에는 노란색 고무줄이 묶여 있었으며, 다른 한 손에 쥐 어진 주사기는 그 팔을 겨냥하여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 꽂히기 직전의 바늘이, 방 안이 무덤 속처럼 침침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희고 또렷하게 성우의 눈 속을 파고들었고, 그는 눈이 시었다. 현정순은 얼어붙은 듯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뚫린 구멍 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7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다시금 그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직 그가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는 것일까. 혹은 더욱 커지고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현정순에 대하여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비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짊어진 혹에 관한 한 그것은 해결이 아닌 것 같았다. 더이상은 갈 곳도, 해야 할 일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언제까지 이 혹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성우는 높은 파도가 부서지는 광안리의 바닷가를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아비는 며칠 동안 집을 나갔다가 만취한 채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어머니를 붙들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으므로, 허공에 대고 투덜거렸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여. 이렇게 살라는 게 아니여. 이런 건 분명히 아니여. 그때마다 성우는 혐오감을 품고 혼자서 야유했다. 이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식의 돈을 훔쳐 집을 나가는 게 사는 거란 말인가? 처자를 배신하는 것이 사는 거란 말인가? 도대체 저 아비는 삶이 무엇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비의 북을 찢으면서 그는 아비와의 인연 역시 그렇게 찢어냈다고 생각했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저 아비의 아들이 아니다. 그에게 계획이 있다면 단 하나,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였다. 평생 선원으로 바다에서 살다 죽어도 좋다. 막노동판에서 막걸리 한 사발, 쌀 한 됫박으로 사는 하루살이가 되어도 좋다. 공장에 들어가 하루 열다섯 시간씩 기계 앞에 붙어 앉아 있어도 좋다. 어물전에서 하루 온종일 생선비늘을 뒤집어쓰고 살면 또 어떠랴. 혼자 몸, 어디 간들 견디지 못하랴. 그러나, 나이 열일곱의, 객지 생활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장과 공단을 헤매고 다니다가, 돈이 떨어지자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 역시 떨어진 뒤에야 그가 얻어낸 일자리는 여관이었다. 그나마 애걸복걸한 끝에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봉급은 일금 만 원. 밥은 먹여주고 잠도 재워줄 테니, 벌이는 팁으로 요령껏 하라는 것이 주인의 말이었다.

그가 이제까지 보아온 도시나 사람,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도시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새로이 발견한 도시의 모든 것은 오직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비좁은 골목 가운데에 자리 잡은 여관 바로 뒤에는 교회가 있었고, 교회의 종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댔으며, 여관 현관문에도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작은 종을 울리며 손님들과 매춘부들이 드나들었다. 남자들은 성우에게 돈을 주며 말했다. 여자 한나 불러 온나. 소주 한 병 사 온나, 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여관주인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여 여자들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가 조금 일에 익숙해지자 여관주인은 그에게 일을 맡겼고, 그때부터는 여자를 주문하는 일도 그의 몫이 되었다. 자장면을 주문하듯 여기 세 사람만요, 혹은 한 사람요, 하고 그는 말했다. 여자와 손님이 떠나고 나면 그 방을 청소했다. 그는 이부자리에 묻은 정액과 거웃과 머리카락을 닦고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러면 잠시 후에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여자 하나 불러 온나, 하거나 또 다른 남자 여자가 들어와 비슷한 자취를 남기고 떠나갔다. 여관주인은 매춘부 몫의 돈 가운데 일부를 차지했다. 여관주인이 없을 때는 그 자신이 여자들의 돈 가운데에서 여관 주인 몫의 돈을 챙겨야 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그가 내미는 지폐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돌아서며 뚜쟁이자식,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그렇다. 그는 충격 속에서 깨달았다. 그는 뚜쟁이였다. 천하기 이를 데 없는 아비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는데, 그는 어느새 아비보다 더 천한 자가 되어 있었다. 아비 같은 이들에게 여자를 불러다 주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단 말인가. 그곳을 떠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곧 마음을 돌이켰다. 집이라 하여 이곳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당장 그곳에서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만한 시간을 얻을 수 없었다. 오전 중에는 여관을 찾는 손님들이 많지 않았으나, 그 시간은 숙박 손님들이 떠난 방을 치우기에도 바빴다. 그래야 곧 한낮에 잠깐씩 찾아드는 손님들을 맞을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관에 매 여 뚜쟁이 노릇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릇 인지를. 진정 그는 천하고 혐오스러운 자였다. 아버지보다도,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던 가난보다도 아예 세상이 싫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가출할 곳이란 없었다. 이제 그는 세상에서 떠나야 했으니까. 세상에서 떠나는 방법이란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그 여관이었다. 어느 날, 여관방에서 한 남자가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여관의 달력 종이를 찢어 남긴 유서에는 "세상이 싫다, 사람이 싫다, 나도 싫다"라고 씌어 있었다. 아아, 세상에서 가출하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나왔듯이 세상에서 나가면 되는 것이다. 가출, 자살. 자살, 가출.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집에서 나왔듯이 "인간(人間)", 즉 세상이라는 집에서 나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살을 망설이고, 망설이며 방법을 생각해보고,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그가 만난 것이 다빈치였다.

숙박비를 내지 않은 채 달아난 사람이 남긴 책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였다. 우연히 그 책을 집어 들었다가 그는 단번에 열중하여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다 읽어냈다. 그는 처음으로 다빈치가 단순히 <모나리자><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화가인 동시에 빼어난 과학자였다는 것도, 그가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도, 사생아였기 때문에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장인(匠人)의 공장에 들어가 일을 배워야 했다는 것도, 그가 왼손잡이였다는 것도, 그 때문에 평생 악마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는 것도, 돌덩이 하나, 구리덩이 하나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얻었다가도 다시 빼앗겼기 때문에 구상이 모두 끝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서 "알았다. 그리고, 그가 날개를,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캄캄한 여관방에 엎어져 있다가 현관문이 여닫힐 때마다 울리는, 깨어져나가는 듯한 종소리가 들리면 벌떡 뛰쳐나가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하고, 술과 담배와 김밥과 여자를 사다 주고, 여자에게서는 몸값의 일부를 빼앗는 일을 하면서, 자살을 생각하면서 그는 다빈치가 날개를 달고, 프로펠러를 달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다빈치가 만든 날개도, 비행기도 결코 하늘을 날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나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는 것은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상상 속에서 다빈치는 언제나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바람처럼 날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그는 다빈치와 더불어 날개를 한껏 펴고 하늘을 날았다. 어디로 갈까. 다빈치가 물으면 그는 대답했다. 피렌체로, 밀라노로, 플로렌스로, 앙부아즈로. 그는 다빈치의 날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날개가 세상에서 나가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조각할 돌덩이 하나를 허용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출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그가 그토록 징그러운 인체의 해부에 몰두한 이유를, 그것이 이곳의 세계가 아니라 저곳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가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비로소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일기를 쓴 까닭을, 그것 역시 거울 이편의 세계에서 벗어나 거울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그의 날개였다는 것을, 그의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살을 결행하기 전에 그 여관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결국 그 생활은 끝장이 났다. 도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여관주인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끝에 혐의는 벗었으나, 그 와중에 그가 가출 학생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오지랖 넓은 형사가 집에 연락을 하였으며, 그리하여 어머니가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어머니와 더불어 서울로, 저 진흙탕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밤 열차 속에서 그는 다빈치와 그의 날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8

그가 금정의 지하철 공사장 앞에 닿은 시각은 네시 반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선 횟집에, 자동차 대리점에, 다방과 가게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흐린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 저물어오고 있었으며, 차들은 전조등을 번쩍이며 사방에서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그 한가운데에 어제 본 적이 있는 키가 작은 경찰관 한 사람이 대책 없는 재난을 마주한 사람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그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 황급히 골목 안으로 사라지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우가 그 시절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가출 외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우와 마찬가지로 아이들 역시 제 발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을 것이다. 성우는 알면서도 그들과 약속한 다섯 시 반까지는 기다릴 작정이었다. ? 왜 기다리는 것인가? 왜 그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 만일 그가 지금 고교시절 그 시절의 입장이라면 그는 다시금 가출을 결행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 그는 아이들이 여기 와주기를 바라는 것인가? 고스란히, 한 여관방이 생각났다. 좁고 습기 찬 여관방에 엎드려 있다가, 여관 현관문에 매달린 종이 울릴 때마다 나가서 손님을 맞아 노란 양은 물주전자와 플라스틱 컵과 양은 재떨이와 휴지를 양은 쟁반, 얼룩덜룩한 꽃이 그려져 있으나, 매일 아침의 수세미질로 거의 긁혀나가 버린 양은 쟁반에 올려 받쳐 들고 앞장서서 방으로 안내하고, 손님이 청하는 대로 술과 담배와 화투와 김밥과 여자를 사다 바치는 한 어린 소년이 생각났다. 언젠가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을 때에 그녀는 그가 결국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자 천만다행이지, 하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날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가 뭔가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아니, 어쩌면 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차창을 두들겼다. 성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소년이었다. 성우는 자신도 우스울 만큼 반색을 하며 얼른 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소년은 혼자 서 있었다. 성우는 아직 밖에 서서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머뭇거리는 소년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소년이 배낭을 벗어 뒷좌석에 밀어 넣은 다음 앞자리에 올라탔다. 짓눌린 표정이었다. 어딘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 다. 왜 혼자일까. 소년은 묵묵히 앞쪽만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년은 말이 없었다. 성우가 물어보았다. 왜 혼자냐? 여자 친구는 어디 있어?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성우는 "온천별장"의 나이 어린 여자를 떠올렸다. 성우는 다시 물었다. 여기에서 만나기로 한 거냐? 소년은 차 안의 시계를 끈질기게 훔쳐보다가 다섯 시 반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시간 있으시면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안 돼요? 성우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궁금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하여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된 것일까? 그러나, 소년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성우는 추궁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여섯 시가 지났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소년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얼굴에 초조감이 더해갔다. 날은 이제 완전히 어두웠고, 거센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돌출간판들이 뒤흔들렸고 비닐봉지가 높다랗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람은 소년의 길지 않은 머리칼을 있는 대로 헝클어댔다. 소년은 그 바람 속에서 비질비질 진땀을 흘렸다. 여섯시 반이 되었다. 마침내 소년이 차에 올랐다. 가요, 아저씨. 안 올 모양이에요. 그러나, 성우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 가출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실종신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성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소년은 묵묵히 어둠 속을 넘겨다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어쩌다가 헤어지게 됐어요. 싸웠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성우가 만일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 지를 묻는다면 소년은 그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만났어요.

더이상 기다린다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비로소 성우는 시동을 걸었다. 달리는 동안 그들이 나눈 말은 몇 마디에 불과했다. 소년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이 서울 어디냐? 돈암동이요. 집 나온 지는 얼마나 됐어?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 생각한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확신도 없이 그가 말했다.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여자 친구는 어떻게 됐어? 소년이 머뭇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이 갑자기 울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성우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가 다시 물었으나 이번에도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울기만 했다. 그저 꺽꺽 울 뿐이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성우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울음을 그친 뒤에도 성우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소년의 눈빛은 불안정했다. 너무나 침울해 보였다. 성우는 어두운 여관방에 엎드려 자살을 궁리하던 한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현듯,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소름이 끼쳤다. 문득, 소년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소녀는 요정 "온천별장"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젠장, 이 무슨 터무니없는 생각이냐.

한참 뒤에야 소년이 마침내 스스로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는요…… 성우는 기다렸다. 저희 어머니는…… 소년은 마른기침을 쿨럭쿨럭 하고, 머뭇거리다가, 생각을 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집은…… 저는 도저히……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소년은 다시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소년의 말문을 터주기 위하여 궁리해낼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좀 쉬다 갈까?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추풍령 휴게소로 들어선 성우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화장실에 갈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있을래요. 성우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깡통 커피와 깡통 식혜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의 배낭도 없었다. 성우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배낭을 메고 화장실에 갔을 리는 없었다. 잠깐 뒤에야 그는 깨달았다. 소년은 떠난 것이다. 어제 하행선의 망상 휴게소에서 성우의 차를 얻어탔듯이 이곳에서 또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탔을 것이다. 소년은 서울로도, 집으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소년은 성우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까 봐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달아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아니, 돌아올지도 모른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을 수도 있다. 전화를 하러 갔거나 화장실에 갔는지도 모른다. 배낭 안에 당장 필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가 없는 사이에 성우가 그 배낭을 실은 채 혼자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배낭을 메고 간 것인지도 모른다. 성우는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소년이 떠났다는 증거가 곧 눈앞에 드러났다. 계기판 앞에 놓아두었던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보이지 않았다. 동전꽂이의 동전 역시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뜻 입맛이 썼으나 그는 곧 스스로를 위로했다.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소년이 청했더라면 그보다 더 큰 돈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도둑질은 뚜쟁이짓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휴게소에서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배낭을 멘 소년이 눈보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떠올랐고, 문득 그 아이가 부러워졌다. 갑작스럽게 외로움을 느끼며 그는 가속기를 밟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카세트를 켰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흘러나왔다. 그는 볼륨을 한껏 높였다. 차 안에 바흐가 가득 차 출렁거렸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비가 극락에 다녀왔다고 말했을 때에 젊은 성우는 그를 비웃었다. 아비가 이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한탄할 때에도 그는 아비를 야유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비를 비웃을 수도 야유할 수도 없었다. 아비가 가고 싶었던 극락은 무엇이었을까? 아아, 지상의 절벽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을 때에 다빈치가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거울 저편으로 넘어 들어가 닿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그리고, 내가 가고 싶었던 피렌체, 플로렌스, 앙부아즈는 어떤 곳이었을까? 현정순은 말했다. 십만억 불토를 지나면 극락이 있고, 거기에서는 바람이 불면 세상 삼라만상이 그 바람을 따라 신묘한 음악을 연주하며, 우리 눈에 눈물이 아니라 꽃이 피고 우리 입술에 한숨이 아니라 보석이 열리며 우리 가슴에 한이 아니라 천도가 열린다고. 그리고, 지금 현정순은 무덤 같은 방에 홀로 앉아 혈관에 마약을 찔러넣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발이 더욱 짙게 흩날렸다. 그 눈발 속에서 환상처럼, 어제 망상 휴게소에서 만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거기에 아침에 요정에서 본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졌으며, 그 어린 여자아이가 사랑가를 하는 모습이 떠올랐고, 그와 더불어 옷 한 조각 걸치지 않은 희디흰 몸이, 둥근 어깨가, 작은 가슴과 거기 돌기처럼 솟아 있던 작은 젖꼭지가, 그리고 둥글고 흰 배가 선명히 떠올랐다. 그 어린 여자아이의 가슴을 더듬는 두툼한 손이 있었다. 한 사내가 그 여자아이의 입술과 목덜미와 가슴을 탐 식하는 것이 보였다. 여자아이가 비명처럼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저게 누구일까. 누가 저런 짓을 하는 것일까. 이건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성우는 으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성우였다. 그 여자아이의 몸을 거칠게 파고드는 사내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머리가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내가? 내가? 내가? 갑자기 아득히 시야가 멀어지는 것 같았고, 그 가운데 현정순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건 여그 풍습이네. 풍습엔 옳고 그른 게 없는 법이네. 그렁게 내가 허라는 대로 허시게나. 이년 맘 편허게 혀주믄 얼매나 고마우꼬.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성우는 황급히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먹먹한 기분으로 그는 눈발이 흩날리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격정으로 가슴이 꽉 막혀왔다.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엎드려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슬픔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 쓰러뜨렸다.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억억, 울먹임이 목구멍을 타 넘어왔다. 그는 거리낌 없이 소리 지르며 울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리고 후회가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를 결박하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던 것들이 그 눈물과, 그 혐오감과 더불어, 후회와 더불어 씻겨가는 것처럼 여겨졌고, 좀더 오래, 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비로소 아비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아비의 장례식은 이제야 비로소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울먹이며 그는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를 열었다. 거기, 현정순이 그에게 준 북이 있었다. 그 북이 문득 무서워졌다. 그 무서움에 대한 반발이 목구멍을 치받았다. 그는 북을 꺼내 들고 고속도로변의 어둠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잠깐 망설였으나, 그 잠깐 사이에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북을 찢는 소년이, 극락에 다녀왔다, 하고 말하던 아비의 얼굴이, 그년은 갈보여 갈보, 하고 발악하는 어미의 얼굴이, 현정순이 팔뚝에 주사바늘을 겨누고 있던 모습이 어둠 속에 스쳐 갔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더 고속도로변으로 걸어가 어둠 속으로 힘껏 북을 내던졌다.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비의 것이거나 어쩌면 현정순의 것에 불과했다. 만일 그에게 북이 필요하다 해도 그 북은 아니었다. 비탈진 숲속으로 북은 떼굴떼굴 굴러 사라졌다. 등 뒤에서 커다란 15톤 트럭 한 대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그를 새하얗게 도려내며, 경적과 굉음을 울리며 치달려갔다. 다시 어둠이 뒤덮여왔고, 돌풍과 함께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비로소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리라 는 것을. 북을 버리고 찢어도, 세상의 모든 북을 태워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다빈치의 날개가, 그리고 이해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현정순의 극락이,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북 하나가 어느새 그의 가슴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는 길을 잃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길을 잃은 지 벌써 오래였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