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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편의점의 고양이

한밤, 편의점의 고양이

최대환

 

"뭐예요, 좀 열정적으로 날 대할 수 없어요?"

Y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토라진 얼굴로 말한다. 토라졌을 때 그녀의 모습은 꼭 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

"얼른 씻기나 해. 늦겠어."

"말 돌리지 말아요."

Y는 벗은 몸 그대로 서랍장에서 잘 개어진 속옷을 꺼내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쏴아, 하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면 그녀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감촉 좋게 마른 속옷을 입고 나오게 될 것이다.

오랜만이다, Y가 이브닝 근무를 나가기 전에 안아달라고 했던 것이. 딴은 Y를 기쁘게 해주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는데. 하기야 Y는 무슨 일이든 함께 하고 나면 밉지 않게 토라지곤 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일종의 감사 표시인 셈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한켠에 처박혀 있는 사각팬티를 주워 입는다. 붙박이 옷장을 열어 반소매 라운드 셔츠를 꺼내 입으려다가, 아직 내 몸의 땀을 씻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다시 넣어둔다. Y가 들어간 욕실의 물소리는 쉼 없이 계속된다. 물소리를 음악인 양 여겨 들으며, 저녁으로 무얼 만들어 먹을까, 하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본다. 과일과 야채 종류를 특히 좋아하는 나와 그녀의 냉장고 속에는 토마토, 사과, 양배추, 피망, 파슬리, 당근 등의 식물성 먹거리들만 보인다. 냉장실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문득 지난주에 대형 슈퍼의 농수산물 직거래 장터에서 구입했던 왕새우들을 생각해낸다. 냉동실, 아직 커다란 놈으로 두 마리가 남아있다. 그럼 버터는……, 그것도 남아있다.

"오늘 뭐 해 먹지?"

엷은 분홍빛의 속옷을 입은 Y가 긴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묻는다.

"우리 냉장고의 사정상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냉장실과 냉동실의 문을 활짝 열어 보여주며 Y에게 대답한다. Y가 미소 짓는다.

"뭔데요?"

"왕새우 버터구이를 곁들인 볶음밥과 샐러드, 어때?"

"사정상 별수 없다며."

Y의 샤워 시간은 십 분, 하지만 나는 오 분이면 된다. 밥은 내가 볶을 테니 샐러드를 준비해달라고 말해놓고 갈아입을 속옷을 꺼내어 욕실로 들어선다. 쏴아, 처음엔 좀 차가운 듯하던 물줄기가 조금씩 몸에 익숙해지며 편안하게 몸을 감아 돈다. 비누……, 너무 조그맣다. 비누 상자에도 남아 있는 새 비누는 없다. Y의 보디 클렌저는……, 아직은 반 이상 남아 있다. 이따가 열 개들이 비누 한 상자를 새로 사다 놓아야겠다.

속옷을 갈아입고 욕실을 나가자 헐렁한 박스형 셔츠를 입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Y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셔츠 아래로 길게 뻗어 있는 Y의 다리, 그 맨살의 빛깔을 보자 배가 고파온다. 나는 변태일까. Y에게 물어보려다 그냥 혼자 피식 웃어버리고는 붙박이 옷장에서 Y의 것과 비슷한 셔츠를 꺼내어 걸치고 싱크대로 가서 Y의 옆에 선다. Y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샐러드를 만들 과일, 야채를 적당한 크기로 다 썰어놓은 데다가, 내가 밥이랑 볶아낼 야채들까지 조그맣게 다져놓았다. 아직은 탄탄한 Y의 엉덩이를 탁, 하고 한번 치고, 귀엽게 흘겨보는 Y의 시선을 짐짓 모른 척 흘려버린 뒤에, 야채를 볶아내면서 왕새우 두 마리는 버터를 발라 오븐에 넣고 굽기 시작한다.

잠시 후 Y와 나는 파슬리 숲으로 둘러싸이고 노란 치즈 가루가 구름 그림자처럼 드리운 데다가, 색색의 야채가 섞인 밥알의 바다 위에 왕새우가 각각 한 마리씩 헤엄을 치고 있는 모양의 접시 둘, 그리고 샐러드가 듬뿍 담긴 넓은 접시 하나 등을 사이에 두고 조그마한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방 하나가 집 전체라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Y와 내가 함께 살기로 했을 때 그녀는 커다란 검은색 트렁크 두 개를 밀면서 내 아파트로 들어왔고, 원룸이라 둘이 함께 살기에는 좀 좁지 않을까 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는 한번 씨익 웃어주었다. 하긴 그녀의 아파트는 여기보다 더 작아서 그걸 처분하기로 했던 것이지만.

"기름기가 너무 많은걸. 샐러드는 참으로 맛있게 되었습니다만."

입을 오물거리며 Y가 말한다.

"노력했잖아. 맛있게 먹자구."

마주 보고 식사를 하며 Y와 나는 특별하지 않은 오늘 같은 어떤 날, 나쁘지 않은 분위기의 이런 저녁 식사 자리에 곁들여지면 괜찮을 만한 얘기들을 주고받는다. Y가 일하는 병원에서 요즈음 환자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친절, 친절, 하고 어찌나 강조해대는지 오히려 간호사들의 얼굴을 더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 오늘 내가 만든 요리에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새우의 최후" 또는 "바다가 들린다" 정도가 좋지 않겠냐는 얘기, 우리 아파트가 있는 블록, 아파트로부터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하나 생겼는데 한밤중에 출출해지는 걸 참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참 잘된 일인 것 같다는 얘기, 그런 얘기, 저런 얘기……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나서 Y는 접시들을 씻고 나는 커피를 끓인다.

"그래도 한 삼십 분쯤 시간이 남네."

커피를 마시며 Y가 말한다.

"좋지 뭐,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별생각 없이 내가 대꾸한다.

"언제나 그런 대답."

"?

"언제나 그런 대답, 언제나 그런 삶."

"내 삶이 어떤데?

"당신은 너무 일상적이에요."

Y"일상적"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다.

"아까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좀 열정적으로 대해달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어?

", 말하자면 그렇죠."

", 열정적이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당신에겐 뭔가 모험이 결여된 듯한 느낌이에요."

", 모험이라……"

"얘기 그만 하고 싶어요?"

"미안, 계속해."

"당신은 소설가잖아요. 보통 사람과는 다른, , , ."

"그래서?

"당신처럼 일상적인 것들에 익숙해져서 대체 무슨 소설이 나오겠어요" 익숙한 일상은 사람을 고루하게 만들고, 그런 사람이 쓰는 소설 또한 고루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Y는 악의 없는 독설로 남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려나 보다.

딩동

벨이 울린다. Y는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듯한 눈짓을 보내고 철제 현관문 앞으로 가서 조그마한 렌즈 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본다.

"누구세요?"

낯선 사람인 모양이다.

", 아르바이트 대학생인데요, 예쁘고 편리한 감미료 케이스 세트가 나왔거든요. 한번 보시라구요."

아직은 여물지 않은, 여린 여자의 목소리다.

", 그래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문을 열 수가 없네요. 마침 필요하긴 한데……"

Y와 나는 속옷에 셔츠만 걸치고 있는 옷차림이다. 만약 저 아르바이트 여대생이 셔츠 아래로 흐르는 Y의 희고 긴 다리를 본다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물건들이 정말 좋습니다. 보시기만 하셔도 되는데요."

"실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이랑 일상과 모험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내일 다시 들러주시면 그땐 꼭 볼게요. 그리고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아마도 구입하게 될 것 같구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밖에서 네, 내일 꼭 다시 뵐게요,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여자가 내일 다시 올까. Y의 솔직함을 모르는 여자는 어쩌면, 별 이상한 방식의 거절도 다 있네, 하며 렌즈 구멍의 사정 거리 밖 어두운 회랑에 서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다 갔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얘기하다 말았죠?"

"내일 다시 오라는 얘기까지."

Y는 내게 눈을 한번 흘기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계속한다.

"맞아요, 거기까지였어요, 고루한 일상과 고루한 소설. 날 만나기 전까지 내게 얘기하지 않은 어떤 비일상적인 모험들이 당신에게 있었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듯하거든요, 너무나 일상에 익숙한 현재의 당신 모습들에서 그 이전에도 온몸을 전율케 할 만한 일탈의 사건들은 없었을 거라고 추측된다는 말이에요. 맞아요, 그렇지 않아요" 독자들이 왜 소설을 사 본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무언가 옆길로 빠지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설교를 듣거나, 설득을 당하겠다고 마음먹고 소설의 첫 장을 여는 독자는 없을 거라는 얘기예요."

"그럼 독자들이 직접 그 욕망을 해결하는 게 더 바람직하잖아?"

"만약 모두 그렇게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려구요?"

"당신도 나랑 크게 다를 것 없지 않나" 내게는 일상적이다, 모험이 없다고 얘기하면서, 그뿐이잖아. 왜 영화에서 보면 의사와 간호사 간에 종종 일탈적인 사랑에 빠지곤 하잖아, 유부남이든, 유부녀든간에."

"그거야 당신보다 더 날 사로잡는 의사가 우리 병원엔 한 명도 없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Y는 좋은 여자다.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고맙습니다만, 그건 그렇다고 하고, 정말로 내 소설에 그렇게도 모험이 없어?

"물론 있기야 있죠. 하지만 모험의 바닥에 이르기도 전에 너무 일찍 일상으로 돌아와 버리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지난번 소설 말이에요."

"잠 못 드는 그녀?

"그래요, 잠 못 드는 그녀. 결혼을 며칠 앞둔 여자가 도대체 잠을 이루질 못한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역시 잠드는 데에 실패한 그녀는 일 년 전에 혼자서 여행하던 중에 딱 한 번 들렀던 적이 있는 도시를 향해 무작정 떠난다. 그 도시에는 일 년 전 그날 그녀가 혼자 술을 마시러 들어갔던 클럽 정크라는 바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바에서 옆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 결국 그 도시에서 함께 밤을 지새었던 낯선 남자와의 기억 때문에 그렇듯 무작정 클럽 정크를 찾은 거였다."

"줄거리를 잘 기억하고 있네."

"말 돌리지 말아요. 어쨌든 거기까진 좋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요. 첫째……"

"첫째" 대단히 분석적인 걸?"

"그래 봐야 두 가지밖에 안 되니까 좀 들어봐요. 첫째, 일 년 전 그날 두 사람은 바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클럽 정크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환하게 불을 켜놓은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밤을 지새게 되죠" 그곳에서 둘은 상당히 가까워지는데, 오래 전 여자 친구의 자살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해온 남자를 여자가 따뜻하게 위로해주잖아요. 그때 분명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어요. 맞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둘은 덮개 있는 쓰레기통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기로 하고는, 쓰레기통에서 몇 가지 먹을 것을 꺼내 바닥에 놓고 어디선가 쳐다보고 있을 그 조심스런 고양이가 다시 나타나기만 기다리며 밤을 지새우잖아요. 그러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는 그 고양이랑 아는 사이라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지, 아마."

"맞아, 그랬지."

"맞아, 그랬지,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도대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는 두 사람이 거리의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목적 때문에 그렇게 밤을 허비할 수 있는 건가요" 그리고, 기다리다 지쳐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어보니 바닥의 음식 부스러기들은 이미 그 고양이가 다가와 먹고 없더라, 까지는 이해가 가요. 그러고 나서, 어떻게 두 사람은 서로의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고 그토록 허무하게 헤어질 수가 있어요?

Y는 목이 마른 듯 잠시 식은 커피를 몇 모금 홀짝거린다. Y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고, 나도 한 개비를 피워문다. 나는 이 예쁘고 성실한 비평가를 싫어할 수가 없다.

"Y가 그렇게 얘기할 때면 내가 썼는데도 꼭 내 소설이 아닌 것만 같아. 하지만 어쨌든, 상당히 재미있는 것만은 사실이야, Y의 얘기."

"나 그만할래요."

"?"

"난 지금 남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미안, 계속해."

"기분은 조금 상했습니다만, 그럼 둘째, 일 년 전의 그 남자가 불현듯 생각나 결혼을 며칠 남겨두지도 않은 채 그녀는 결국 클럽 정크가 있는 도시로 가요. 거기까진 좋아요. 그러면, 그런 정도의 모험을 감수한 그녀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클럽 정크로 들어가서 바에 혼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그 남자와 밤을 지샌 편의점 앞으로 가서 혼자 캔맥주를 마신다, 그날처럼 쓰레기통의 덮개를 열어 먹을 것을 바닥에 꺼내놓고 고양이가 와서 먹어주길 기다리다 잠이 든다, 희뿌옇게 날이 새는 즈음 쓰레기통으로 가보니 이번에는 음식 부스러기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그러고 나서 결혼할 남자가 있는 도시로 돌아가서 잠에 빠져든다. 허망하지 않아요, 당신은?"

Y는 정말이지 허망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 여자의 삶이니까."

"당신이 썼잖아요?"

"내가 쓴 얘기는 맞지만 말야, , 뭐랄까, 마치 당신과 환자의 관계와 같다고나 할까. 당신은 죽어가는 환자에게 약을 먹이고 주사를 주지만, 궁극에 환자가 살아나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그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 바로 당신이 내게 해준 거잖아."

"두 손 들었어요, 당신의 갖다붙이는 솜씨에는."

"얘기 다 끝난 거야?"

", 내가 싫어하는 고양이라는 동물이 왜 그렇게 당신 소설들마다 끈덕지게 등장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거야 독자 중 한 사람에 불과한 내 취향이나 기호에 관련된 문제니까."

실은 아까부터 Y의 등 뒤쪽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오늘 이브닝 근무 아니던가?"

"어머."

Y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본다. 이미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지만 Y는 아직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는 둥, 다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이제서야 말한 게 아니냐는 둥 투정을 부리며 Y가 나를 넘어뜨려 올라타고는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한다. Y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앞으로 내려와 멈춘다. 안고 싶다.

"이번에는 열정적으로 대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렸습니다만."

허둥지둥 화장을 끝내고 옷을 걸치는 Y에게 정류장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하자, Y는 혼자 뛰어가는 게 더 빠르다고 말하며 아침에 보자는 인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삽시간에 집 안이 조용하게 바뀐다. 음악을 틀고, 이제 몇 자 적어보려 컴퓨터를 켠다. 위잉, 하고 컴퓨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실내의 공기가 탁해졌나보다, 뒷목이 뻐근해온다. Y와 이 년여를 살면서 이런 시간에 혼자 글을 쓰는 일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처음 얼마간은 익숙한 기분이었다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낯설어지는 느낌이다. 혼자 있는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있는다는 것. Y가 이미 내 삶의 반 이상을 차지했는지도 모른다. Y가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 자꾸만 새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도시에서 새소리가 들려올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철사로 된 새장에 새를 가두고 지저귀게 하는 짓 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문득 혼자 앉아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내 자신이 탐탁지 않게 느껴진다. 언젠가 한 잡지사의 여기자가 인터뷰 도중에 나에게 글을 쓴다는 일은 "즐거운 생산"일 것만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 글을 읽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난 허탈하게 한번 웃어 보인 뒤에 내가 혼자서 글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만약 그 모습을 본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좀이 쑤시다 못해 어거지로 이루어지는 생산" 정도의 이름을 붙였음에 틀림없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글이란 속에서 여물 때까지 놓아두었다가 저절로 술술 풀려날 때가 되어서 써야 한다"는 한 저명한 수필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여물 대로 여물었다 싶을 때에 글을 시작해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냥 나의 내부에서 나오는 대로 자연스레 써내려갈 뿐이죠, 이렇게 말하면 그런대로 멋스러울 법도 하지만, 그런 대답은 꼭 미인 대회에서 입상한 얼굴 반반한 미녀가, 내적인 미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겠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뻔한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들 뿐이다.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도 실내의 공기가 탁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더 앉아 있어봐야 헛일이다. 붙박이 옷장을 열어 반바지를 하나 꺼내 셔츠에 맞춰 입고, 담배와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려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 거기 일상적인 소설가의 집인가요?

Y일 줄 알았다.

"그런데요."

"뭐 하고 있어요?"

Y는 내가 글을 쓰고 있을 줄 알면서도 늘 이렇게 묻는다.

", 뭘 좀 쓰다가, 잠깐 외출하려는 참이었어."

"출출해졌군요?"

"그렇기도 하고, 답답해져서. 나가는 참에 비누도 한 통 사야겠고."

"어머, 어느새 비누가 다 떨어졌나요" 미처 못 봤네. 미안해요."

"미안하긴, 뭐가?"

"당신은 내 보디 클렌저도 다되면 사다 놓고 그러잖아요, ."

"미안하면 빠른 시일 내에 기회나 한 번 더 주지 그래."

"기회?"

"열정."

"나 원 참. 글이나 써요."

"알았어. 내일 봐, 그럼."

우리 아파트가 있는 블록은 조용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매우 조용하다고 할 수 있는 구역은 블록의 안쪽 주택가뿐이고, 바깥 큰 도로로 가까이 나갈수록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다가 도로에 면한 거리에 이르면 꽤나 복작거리고 부산스럽다. 가끔 실내가 답답해져서 집을 나설 때면 산책로의 코스는 정해져 있다. 그렇게 정하고 싶어 정한 건 아니고, 여러 번 걷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동밖에 없는 우리 아파트를 나와서 얼마간 걷다 보면 상당히 고풍스러운 주택들이 길 양편으로 여러 채 이어져 있는데, 커다랗고 매끈한 고급 벽돌들로 이루어진 높다란 그 담장들 사이를 한밤에 걷게 되면 마치 클래시컬한 옛날 영화 속으로 들어가버린 듯도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담배 한 개비. 그 길 끝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걸으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초등학교가 하나 나오는데, 이 학교는 담이 없어서 한밤중에도 운동장으로 들어가 한가로이 거닐 수가 있다. 어둡고 텅 빈 운동장을 거닐며 담배 두 개비 정도. 그러다가 초등학교 뒤편으로 돌아 나가면 큰 도로와 만나게 되고, 내 아파트가 속한 블록을 경계지어주는 그 도로 건너편, 그러니까 이웃 블록에는 커다란 상가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그 상가 건물의 앞 공간은 꽤나 널찍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상가가 문을 닫고 나서도 벤치에 앉거나 우두커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곳 벤치에 앉아서, 가끔 어둠을 뚫고 지나는 차들, 취한 남자들, 여자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담배 세 개비. 한밤 나의 산책로 코스는 그렇게 대략 담배 여섯 개비와 함께 끝이 난다.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아파트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에야 나는 비누를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낸다. 애초에 나는 산책과 더불어 비누도 살 겸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 들러보고 싶었던 거다. 아파트로 들어서던 발길을 되돌려 걷기를 한 오 분, 제법 큰 평수의 세 동짜리 아파트 단지와 마주하고 불을 밝히고 있는 파란색 간판의 편의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블록의 바깥쪽 번화한 큰 도로에서도 간판이 보이기는 하겠지만,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결코 좋은 자리는 아니다. 환한 간판 아래 유리문을 지나 밝은 실내로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스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가 카운터에 앉아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인사를 한다. 밤 시간은 여간해서는 여자 점원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아마도 일할 사람이 없었거나, 그도 아니면 저 여자 점원이 일자리가 급했나 보다.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는 환한 실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찬 진열대 사이를 거닌다. 실내에는 점원과 나, 그렇게 둘뿐인 모양이다. 아니다, 한 사람이 더 있다. 한켠의 유리벽에 기다랗게 마련된 붙박이 테이블에 커다란 까만색 가방과 함께 여자 하나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뒷모습만 보이는 터라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허리께의 살이 하얗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셔츠에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나이가 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여자는 전자레인지에 데웠을 조각 피자를 반쯤 먹다가 만 상태로 왼손에, 플라스틱 덮개가 덮인 커다란 종이 콜라컵에 빨대를 꽂아 오른손에 들고 있지만,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그 자세는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 그녀의 고개가 들려진 각도로 보아 맞은편 아파트 단지의 높은 지점 불 켜진 창문들 중 하나를 보고 있는 것도 같지만, 어쩌면 시선만 그곳에 둔 채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진열대 사이를 거닌다. 내가 왜 이곳에 왔더라. 비누, 그래, 비누를 사러 왔던 거다. 열 개들이 비누 한 상자를 집어 들고 카운터로 걸어가 여점원의 앞에 내어민다.

"날씨가 참 덥죠?"

물건값을 치르는 동안 여점원이 싹싹하게 말을 건네온다.

"참을 만은 한데요."

그러고 있는 사이 등 뒤로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유리벽 앞 붙박이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가 나가는 모양이다.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곧 실내는 조용해진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려다 보니 갑자기 출출함이 느껴진다. 뭘 좀 먹고 가야지, 생각하고 냉동 식품이 있는 개방형 냉장고를 살펴본다. 조각 피자, 햄버거, 삼각 김밥, 동글이 소시지…… 햄버거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타이머를 일 분 삼십 초에 맞춘다. 천천히 햄버거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어머, 다 남겼네."

여점원의 독백이 들려온다. 붙박이 테이블의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조각 피자와 콜라를 다 먹지 않고 테이블에 그냥 남겨두고 갔나 보다. 기다란 테이블을 깨끗이 닦고 난 점원은 먹다 만 피자와 콜라를 들고 진열대 사이를 가로질러 우선 실내의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통으로 간다. 저 통은 아마도 먹다 남긴 음료수나 컵라면 국물 등을 모으는 용도일 거다. 통에 콜라를 붓고 나서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점원은 샐쭉한 표정이 되어 반쯤 남은 조각 피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덮개가 덮인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참 아깝다, 그렇죠?

실내로 들어와 카운터로 돌아온 여점원이 전자레인지 앞에서 햄버거가 익기를 기다리는 날 향해 묻는다.

"고양이라도 주면 어떨까요?"

무심결에 말이 나갔다, 딱히 대답을 구하는 질문도 아니었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거려주거나 웃어주면 되었을 것을. 점원은 예상치 못한 내용의 대답에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풀고는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는 투로, 맞아요, 그러면 되겠네요, 하고 맞장구친다.

전자 레인지로부터 따뜻하게 데워진 햄버거를 꺼내고, 점원으로부터 콜라가 가득 든 길다란 종이 콜라컵을 받아 유리벽 앞의 붙박이 테이블에 앉는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환한 실내에서 어두운 밖을 내다보는 것은. 늦은 밤인 데다 번화한 거리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들어와 있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다.

맞은편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움직이는 듯 굳어 있는 듯 무엇인가 서 있다.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물고 콜라컵의 빨대를 빨아 오물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바라본다. 커다란 까만색 가방, 허리께의 살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셔츠에 미니스커트……, 아까 그 여자의 뒷모습이다. 여자는 내게 뒷모습만 보여줄 작정인가 보다. 아파트 단지 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들어 높은 곳 불켜진 어느 창문을 향해 시선을 못 박고 있다. 여자가 있는 쪽으로 자전거 한 대가 다가간다. 자전거가 좌우로 비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자전거를 몰고 있는 나이든 남자는 술에 취한 모양이다. 여자에게 가까워지는 즈음에 자전거를 탄 남자가 여자를 향해 뭐라고 소리친다. 길을 비키라고 하는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어린 여자의 노출 많은 옷차림을 보고 뭐라고 참견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자전거는 비틀거리는 모습 그대로 여자를 스칠 듯 가까이 지나쳐서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시간이 흐른다. 그 동안 나는 몇 번에 걸쳐 햄버거를 조금씩 베어먹으며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는 그렇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내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여자가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온다. 편의점의 실내로부터 퍼져나간 환한 빛의 사정권 안으로 잠시 들어온 여자는 곧 방향을 틀어 큰 도로가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사라져버린다. 짧은 순간, 주의 깊게 여자의 얼굴을 본다.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짙은 화장으로 덮인 얼굴, 두 눈에 고인 물기가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여자는 울고 있었던 것일까.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한곳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선을 못박고 바라보던 창문은 여자의 집일까. 그렇다면 여자는 저 까만색 가방에 옷가지를 챙겨 오늘 밤 집을 나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헤어진 남자의 집 앞에 와서 오랜 시간 불켜진 창만 바라보다 돌아가는 것일 수도, 젠장.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내 버릇은 도대체가 고쳐지질 않는다. 한밤의 산책은 이렇게 무용한 것이 되고 마는 건가, 집을 나서기 전 쓰고 있던 글에 대한 생각은 이제 손바닥만큼도 내게 남아 있질 않으니. 조금 전까지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사라져버린 저 어린 여자처럼, 이제 내 손에도 반쯤 먹다가 식어버린 햄버거와 콜라컵이 들려져 있다.

비누 한 상자와, 글을 쓰면서 마시려고 산 캔맥주 몇 개가 담긴 봉지를 들고 편의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돌려 담 없는 초등학교로 향한다. 이대로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집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할 수 있도록.

텅 빈 운동장에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그네에 앉아 담배를 한 개비 피워문다. 내 담배의 빨간 불꽃을 제외하면, 이 널따랗고 어두운 공간에 빛을 발하고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 저 멀리 교사의 일층 창문 하나뿐이다. 누군가 숙직을 서고 있는 것인가. 아니, 요즘은 숙직이라는 게 없어졌다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외부 용역 업체의 직원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는, 혹은 그녀는 이토록 널따랗고 어두운 공간에 혼자 남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이럴 때가 아니다. 내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내 일, 쓰다 말고 꺼버린 내 글. 이번 글을 시작할 때 나는 "그녀"가 결국에 ""를 떠나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쓰다 보니 그 둘 사이에 나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감정들이 생겨나더니, 이젠 차마 나의 의도대로 글을 끝낼 수 없는 정도의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그녀"를 만나볼 수만 있다면. ……혹 어둠이 까맣게 깔린 이 운동장 저편에 그들이 있진 않을까, 그들을 만나면 나는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까……

"저기요."

헛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나무랄 즈음,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네에서 떨어질 뻔한다. 짧은 사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뒤를 돌아다본다.

멍한 얼굴이 된 내 뒤에 언제 다가온 것인지 여자 하나가 서 있다. 커다란 까만색 가방, 허리께의 살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셔츠에 미니스커트……, 그 여자, 편의점에서 보았던 어린 여자다. 놀라움은 어느새 알 수 없는 반가움으로 바뀐다.

"담배 한 개비만 줄래요?"

여자가 묻는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를 빼어주자, 여자는 커다란 가방을 땅바닥에 털썩 내려놓고 내 옆의 그네에 앉는다. 나도 한 개비를 피워물고, 그렇게 해서 나와 여자는 나란히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의 앳된 얼굴은 굉장히 피곤하고 허탈한 듯한 기색을 띠고 있다. 물어볼까, 왜 그런지.

"알아요, 아저씨가 뭘 궁금해하는지."

여자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먼저 입을 연다.

"……"

"나이도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이 시간에 뭘 하고 돌아다니느냐, 담배는 또 언제 배웠느냐, 이랬느냐, 저랬느냐, 맞죠?"

"그런 거 아니야."

"……"

"너무 힘들어 보이잖아, 얼굴이."

"하루종일 일을 했는데 별 소득이 없어서, ……"

"무슨 일이길래?"

"저걸 팔러 다녀요, 감미료 케이스 세트."

여자가 땅바닥에 놓인 커다란 가방을 가리킨다.

"오늘은 특히나 팔리질 않아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아파트 앞에서는 화가 나서 한참 동안을 서 있었지 뭐예요."

"그럼 혹시……"

"?"

"저녁때 우리 아파트에 왔었던 그 아르바이트 대학생?"

나의 물음에 여자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린다.

"대학생은 무슨 대학생. 그런데, 날 어떻게 알까" 난 아저씨 처음 보는데."

"문은 안 열고 이상한 얘기로 거절하던 집이 기억날지 모르겠네. 사실 그건 거절이 아니라 예약이었지만."

여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잠시 어두운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곧 무엇인가 떠오른 얼굴이 되어 나를 돌아본다.

", 아저씨 그 집에 사는구나, 일상과 모험?"

"맞아, 일상과 모험. 용케 기억하네."

"기억하고 말구요. 그럼, 그 여자분과는 결혼한 사이예요?"

"아니, 결혼한 건 아니고, 함께 살아."

"좋겠다."

"……"

"나도 얼마 전까진 함께 사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남자가 떠나기라도 했나?"

"아니요, 여자가요. 한 달 전에 죽었어요, 우리 엄마."

"……"

내가 아무런 말을 못 하는 이유는 여자의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서라거나, 더 이상 그 문제에 관해 말을 계속하게 한다는 것이 미안해서가 아니다. 한 달 전에 죽었어요, 우리 엄마, 하고 말하는 여자의 말투가 마치, 완전히 망쳐버렸어요, 이번 기말고사, 하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문득 편의점에서 사 들고 온 캔맥주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맥주 하나를 따서 여자에게 내어밀고, 내 것도 하나 꺼내어 딴다. 그렇게 해서 여자와 나는 그네에 나란히 앉아 흔들리며 맥주를 홀짝거리게 된다. 여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에, K예요, 하고 자기를 소개한다. 나도 내 이름을 말해준다.

"기말고사 잘 쳤니?"

"헛짚었어요. 엄마 죽고 나서 곧바로 학교 그만뒀거든요. 덕분에 내 학력은 이제 중졸로 끝난 게 되었지만."

"장례식은……, 했고?"

"아직 못 했어요."

"혼자서 살아가려면 힘들겠다."

"옛날에 엄마 남편이던 남자가 다른 도시에 산다는데, 매달 약간의 돈을 부쳐와요. 난 본 적도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대요."

"그럼 저것들 파는 일은 왜 해?

", 그거요. 그 남자가 보내오는 돈은 그야말로 딱 생활비거든요. 배우고 싶은 일이 있어서 따로 돈을 모으려고 시작했어요."

"맞춰볼까?"

"……"

"노래, 아니면 춤."

K가 약간 놀라는 것으로 보아 대충 들어맞았나 보다.

"목소리가 너무나 고운 걸로 봐서 노래, 몸이 너무나 예쁜 걸로 봐서 춤."

"맞췄어요, ."

"언제 K가 춤추는 거 볼 수 없을까?"

"아마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얼마 전에 팀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도시 여기저기 밤거리서 공연을 하거든요."

거기까지 얘기하는 사이 K와 나는 맥주 한 캔씩을 다 마셔버렸고, 봉지를 열어보니 두 개의 맥주가 더 남아 있다. 이제 좀 아껴서 마시자, 하고 말하며 K에게 맥주를 건네자 씨익 웃음을 흘린다. 담배를 한 개비씩 피워물고 그걸 다 피울 때까지 K와 나는 말이 없다.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다가 침묵이 찾아들자, 이곳이 이렇게나 조용한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다. 저 멀리 교사의 일층 창문은 어두운 운동장 저편에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어쩌면 날이 샐 때까지 저 창의 불은 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의 남자, 혹은 여자는 무얼 하고 있을까. 잠이 들었을까. 어쩌면,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네에 앉아 있는 수상한 존재들을 알아차리고 표나지 않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음식 부스러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갈 기회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고양이."

"고양이?"

", 고양이. 왜 그렇게 놀라?"

"……"

"……"

"실은 요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상한 일이 있거든요."

"고양이와 관련된……?"

"맞아요. 고양이예요."

이야기를 시작하는 K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호기심 같은 종류의 느낌보다는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나른한 슬픔"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느낌이 배어 있다.

"엄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이었어요. TV 심야 쇼프로를 보며 댄서들의 춤을 녹화하고 있는데, 출출해져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식빵이 없지 뭐예요. 난 밤이든 낮이든 출출해지면 오븐으로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거든요. 마침 연유도, 햄도, 피자 치즈도 적당히 남아있길래 식빵만 있으면 되겠다 싶어 편의점에 가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죠. 우리집은 상당히 깊숙한 곳에 있어서 편의점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되는데, 식빵을 사서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꼭 누군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 몇 번을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다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 추적자의 정체가 드러났어요."

"고양이였구나."

"맞아요, 까만 고양이. 녀석이 바로 편의점으로부터 집까지 줄곧 내 뒤를 쫓은 추적자였던 거죠."

"거기까지로 봐선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닌데."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날 밤을 시작으로 해서 녀석은 밤이면 내 뒤를 쫓아오는 거예요. 하루종일 감미료 케이스 세트를 팔다가 지쳐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 근처에 다다랐다 싶을 때 뒤를 돌아보면 녀석은 어김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어요. 처음에 난 녀석이 배가 고파서 그러나 싶어 먹을 걸 던져줘보기도 했는데, 이건 이상하게도 내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으면서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날 응시하기만 하는 거예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보지 그래?

"글쎄 그게 안 된다니까요. 함께 들어갈 생각으로 문을 열고 한참을 기다리면 저도 멀리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에 내가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문틈으로 살짝 엿보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려요.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건 말이죠……"

"정말로 이상한 건?

"가까이 마주한 적이야 없지만, 멀리서라도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 슬퍼 보이는 눈빛이 왠지 낯설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난 될 수 있으면 녀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요. 너무 슬퍼 보여서, 그러고 있으면 꼭 내가 울어버릴 것만 같거든요."

"……"

"무슨 생각 해요?

".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었거든."

"고양이와 관련된?"

"그래, 고양이. 까만 고양이."

"말해줘요."

"벌써 오래전, 다른 도시에서 살 때의 일이야. 나랑 서로 좋아하던 여자가 죽었어, 자살이었지. 그런데 그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어. 다가오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그냥 내 주위에 존재하기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

"……"

그넷줄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내 이야기를 듣던 K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전체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어찌 보면 아까의 그 "나른한 슬픔"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기도 하다. K의 표정이 내게 얘기를 계속하라고 재촉하는 투도 아니고, 나 또한 과히 밝지도 않은 오래된 기억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만다. 어느새 K와 나는 새로 딴 맥주 캔 두 개를 다 비웠다. 오랜 침묵이 흐른다. 내게 엄마의 죽음에 관해 말해준 K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조금씩 나의 입을 열어놓으려 하고, 난 어느새 독백처럼 스르르 입을 열어 말을 흘려보낸다.

"어릴 적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사람들이 죽으면 얼마간은 고양이가 되어 소중한 사람의 주위를……"

나는 이야기를 그만두기로 한다. K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K는 그넷줄을 붙잡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소리 없이 울고 있다. 격렬하진 않지만, 울음은 꽤 길게 이어진다. 내 그네에서 일어나 K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꼬옥 안아주자, 조금 후에 내 셔츠가 K의 눈물로 젖는다. K는 흐느낌 속에서 언뜻 엄……, 뭐라고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한데, 내 배와 가슴 부분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무슨 소리인지 확실치가 않다. 어쩌면 그건 울음을 참으려고 입을 악물었을 때 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비누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지금 몇 시쯤이나 되었을까,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K와 얘기를 나눈 것이 꽤 오랫 동안이었고,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새벽 세시쯤은 되지 않았을까. 한동안 울기를 계속하던 K는 울음을 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쌩긋 웃어 보이고는, 자기가 속한 팀이 공연을 한다는 거리를 일러주었다. 나는 내 전화번호를 적어 K에게 건네주며, 혹시라도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K는 내게 연락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라져갔다.

도중에 편의점의 파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치면서 보니 점원 여자가 음식 부스러기를 문밖 한쪽에 내려놓는 것이 보인다.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자, 여자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어머, 아까 그 아저씨네."

고개를 끄덕거려 인사를 하자, 여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있어요, 정말로. 고양이 말이에요."

". ……"

"그래서 지금 먹이를 주려구요."

나는, 잘됐네요, 하는 내용도 없는 아리송한 대꾸와 함께 가볍게 웃어주고 다시 걷기를 시작한다.

"……, 피곤하다."

보들보들한 살결이 내 옆으로 파고든다. 거의 날이 샐 때까지 머리를 쥐어짜다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던 것이 기억난다. 방이 환한 걸 보니 아침이다. Y가 들어왔다. 나는 밤새 일에 지쳐 옷을 벗어던지고 내 옆에 누운 Y를 꼭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한다.

"밤새 글 썼어요?

".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어."

"그럼 그렇지."

"?"

"어젯밤도 그저께 밤과 다름없이 그저 그런 일상적인 밤이었다는 얘기잖아요."

"뭐 별일이 있겠어, 나한테."

"으응……, 졸려."

어젯밤 K와의 일을 이야기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다. 그리고, 무엇보다 Y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Y에게 그녀가 싫어하는 고양이가 줄곧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좋지 않은 기분에 깊이 잠들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Y에게서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잠든 채로 내 어깨품에 머리를 기대어온다. 그녀의 목 언저리께에서 낯선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져온다. 시트러스 향인가, 주로 남자들이 쓰는 향수. 성격이 좋은 Y는 친하게 지내는 의사의 책상 위에 있는 향수를 빼앗아 뿌려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지난밤에 Y는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어떤 매력적인 의사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강한 질투심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오롯이 나의 몫일 뿐인 그런 질투심으로 인해 그녀의 비일상을 내 일상으로 끌어내려 누추한 빛을 띠게 하고 싶진 않다. 사실 정말로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Y의 숨소리가 나를 다시 나른하게 잠으로 몰아가고, 낯선 향수의 내음마저 감미롭게 내 졸음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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