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밤의 꿈
윤상영
차가운 2월의 밤공기를 가르는 이태호의 발걸음이 바빴다. 이태호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일곱 시 십 분이었다. 십 분이나 늦었다. 다리를 건너 개울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 ‘근화당(槿花堂)’에 도착했다. 앙상한 가지들을 치켜들고 서 있는 키 작은 무궁화나무 울타리가 출입문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출입문 오른쪽에 깃봉이 서 있었고 깃봉 끝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식당 주인 박미혜를 포함한 ‘근화회(槿花會)’ 회원 세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미혜는 혼자 식당을 운영하면서 월간 문학잡지 ‘창작과 미래’를 통해서 50대의 늦은 나이에 동화 작가로 등단했다. 그녀의 남편은 공기업에서 퇴직한 후 작은 납품회사를 운영 중이었다. 무역회사 출신인 중고차 딜러 김성락은 박미혜와 함께 ‘창작과 미래’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50대 중후반의 엇비슷한 나이 때문인지 그는 박미혜와 금방 친해졌고 자주 ‘근화당’에 들렀다. 재작년 7월에 김성락이 처음 박미혜를 따라서 ‘근화당’에 왔을 때 식당 앞 울타리에 무궁화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개울가에 군집(群集)한 무궁화나무들을 식당 앞에 옮겨 심고 당호(堂號)를 ‘근화당’이라고 지었으며 내친김에 태극기까지 내걸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에서 명예퇴직하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는 오십 대 초반의 최정수도 작년에 역시 ‘창작과 미래’를 통해서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그는 등단 선배인 김성락을 따라서 ‘근화당’에 출입하게 되었다. 모두 오십 대인 세 사람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로 뜻을 모으고 ‘근화당’에서 정식으로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김성락의 제안에 따라 모임의 이름을 ‘근화회’로 정했다. 서울에 작은 빌딩을 가지고 유복하게 살고 있는 이태호는 작년에 다른 문학잡지를 통해서 등단했으며 아내의 친구인 박미혜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근화회’에 가입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에 ‘근화회’ 회장인 김성락이 말했다.
-여러분, 두 달 만에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쓰는 글쟁이들입니다. 소설을 잘 쓰는 것이 글쟁이들의 공통된 목표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작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소설 창작의 기쁨을 공유하고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이 우리 ‘근화회’의 결성 취지입니다. 그런데 그 뜻은 좋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21 세기에 접어들어 정보통신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달했고, 최근 오륙년 동안 스마트폰이 급속히 보급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독서인구가 현저히 줄었으며 지금 소설가들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창작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더라도 우리는 소설로써 세상을 개혁하고 인류사회에 기여하기 위하여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창작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나간다면 분명히 활로(活路)를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은 소설의 위기와 관련해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먼저, 이태호 작가님부터 말씀 하시지요.
-예, 회장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은 합니다마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도 고민하고 있고 좋은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환경이야 여하튼간에 우선 좋은 작품을 쓴다면 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나 솔직허게 말허자면 요즘에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다 보니……. 삼층 세입자가 갑자기 전세금을 빼달라고 허는데 방을 보러오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아주 골치가 아파요. 거기다가 일층 치킨집에서는 월세를 두 달째 내지 않고 있어요. 설상가상으로 집 사람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데리고 다니다 두 달이 다 가부렀어요. 허지만 단편소설집 내는 것이 저의 일차 목표인 만큼 계속해서 소설을 쓰기는 쓸 것입니다. 김 회장님은 뭔 생각을 허고 계시지요?
이태호가 물었다.
-저 역시 고민 중입니다. 지금 중고차 단지는 무덤 속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마치 공습을 받은 것처럼 손님이 뚝 끊어지고 찬바람만 불고 있으니……. 가뜩이나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는데다 비수기까지 겹쳐 정말 죽을 맛입니다. 요즘은 단지 사무실에 출근하면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일이지요. 그 덕분에 두 달 동안에 그럭저럭 중편 소설 한 편을 거의 다 썼습니다. 작년에 발간한 장편소설에서 인세가 들어와 그럭저럭 밥은 굶지 않는 편입니다만 뭔가 독자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 독자들이 스마트폰을 매체로 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인터넷 소설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김성락이 말을 마치고 최정수를 바라보았다. 최정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좌중을 돌아보고 말했다.
-등단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지만 아직 소설다운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써서 당장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어떻게든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집중이 안 되어 꾸벅꾸벅 졸다가 시간이 다 가버립니다. 솔직히 소설을 쓸 시간도 없고 전업 작가로 살아갈 자신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밤에 콜을 잡고 강남의 어떤 술집에 갔는데 거기서 대학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너 소설을 쓴다고 들었는데 대리운전을 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오고 말았습니다. 내 꼴에 등단작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自問)을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래도 제가 대리운전으로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야 어쨌든 저도 순수소설보다는 인터넷 장르 소설 쪽으로 눈을 돌려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정수가 말을 마치자 김회장이 박미혜에게 물었다.
-박 작가님, 동화책 출판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네, 다음 달에 탈고할 예정이라예. 출판사와 대략 이야기를 끝냈습니더. 책은 4월에나 나올 예정입니더. 동화책은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은 것 같아 다행으로 알고 열심히 쓰려고 합니더.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문을 향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껑충 큰 키가 거의 천정에 닿을 듯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 광대뼈 부분에 얽은 자국이 보였고 긴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구겨진 베이지색 자켓 앞쪽에 빨간 김치 국물 자국이 보였다.
김성락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이태호가 서둘러 말했다.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이 사람은 전영환 작가입니다. 제가 오락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전 작가 거기 앉어.
전영환은 박미혜 옆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삼겹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언니! 소주잔 하나 가져와요!
박미혜가 주방 쪽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아주머니가 소주잔을 가져왔다. 이태호가 술잔에 소주를 채워 전영환에게 건넸다.
이태호가 전영환을 돌아보고 말했다.
-전 작가는 몇 년 전에 인터넷 합평회에서 만났습니다. 독특한 문체에 상상력이 기발한 대단한 작가입니다. 한 동안 연락이 끊어졌는데 어쩌다 다시 연락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허게 되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이 전영환 작가의 입회에 동의해 주시면 감사허겄습니다. 오늘 술값은 제가 쏠랍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표정의 김성락 회장이 물었다.
-전 작가님도 소설을 쓰십니까? 아시겠지만 우리 ‘근화회’는 등단 작가들의 모임입니다. 등단은 하셨는지요?
-예. 부산 지역 문예지 ‘부산 춘추’라고 들어보셨능교? 마아, 잘 모르실낍니더. 그기서 단편 소설 ‘백두산’으로 등단 했습니더.
전영환이 말을 할 때 위쪽 앞니 하나가 빠진 모습이 보였다.
김성락 회장이 마지못해 전영환의 입회를 선언하고 모두 박수로 입회를 환영했다.
이태호가 전영환에게 눈짓을 했다. 전영환이 손으로 입술을 쓱 닦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지를 환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더. 앞으로 열심히 참석할 낍니더. 잘 봐 주이소.
전영환의 입에서 고기 부스러기들이 튀어나왔다.
감성락은 불쾌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백두산’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북한 문제를 다룬 소설을 쓰신 겁니까?
-아니라요. 남북문제를 가지고 썼습니더. 남과 북은 모두 백두산 정기를 받은 단군의 자손 아닌교? 같은 민족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면 안 되지예.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잘 살면 되는 기 아닙니꺼? 씰데 없이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기 ‘백두산’의 메세지라예.
-그건 전 작가의 말이 맞어요. 북한정권의 인권 탄압이니, 삼대 세습이니, 핵개발이니, 뭐니 허면서 시비를 거는 것은 죄다 북한의 체제를 부정하고 무너뜨리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요?
이태호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DJ나 참여정부 때 얼마나 남북관계가 좋았습니까? 그렇게 좋던 관계가 MB 정부 들어와서 다 망가져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대통령은 한술 더 떠서 ‘통일은 대박이다’는 천박스런 소리로 북한을 능멸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지요. 어떻게 대박이 나겄어요? 쪽박이 아니면 다행이지요. 안 그러요? 전 작가?
이태호가 전영환을 돌아보며 동조를 구하듯이 물었다.
-맞십니더. 맞고요. 여론조사 결과를 보이소. 통일을 찬성하는 국민은 겨우 20-30 프로인 반면에 반대하는 국민이 50프로가 넘습니데이. 우리 국민들이 바보가 아니라요. 지는 통일은 악몽이라고 생각합니더. 왜냐? 통일비용도 비용이지만서도 남과 북이 갈린 지 70년 가까이 됐고 따라서 남북 국민 정서가 많이 틀립니더. 통일을 하면 북한 국민들이 상처를 엄청 받을 낍니더. 그런 통일을 와 해야 합니꺼? 그리고 통일, 통일 하는데 누구 맘대로 통일입니꺼? 북한이 미쳤다꼬 핵을 개발했겠십니꺼? 그냥 한 방이면 다 끝나는 깁니더.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더.
잠자코 듣기만 하던 최정수가 끼어들었다.
-문학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는 듣기가 좀 거북하군요, 그쯤 해두고 회장님 말씀대로 지금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최 작가님, 이건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김성락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최정수를 쏘아보았다. 김성락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통일을 찬성하는 여론이 20-30 프로라는 통계는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제가 알기로는 60프로 가까이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DJ와 참여정부 때 남북관계가 좋았다는 이 작가님 주장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친년 개밥 퍼주듯 다 퍼주고도 계속 뺨을 맞았습니다. 1, 2차 서해교전, 속초 해안 잠수정 침투, 박왕자씨 피살 등이 그것입니다. 전 작가님은 통일을 반대하시는 모양인데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요. 이유 없이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친북적인 사고방식 때문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시면서 북한을 편드는 것은 매국 행위입니다. 전 작가님의 친북적 역사관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실은 제가 오늘 교학사 역사 교과서 구매 운동을 제안할 참이었습니다. 기왕에 말을 했으니 마저 하겠습니다. 역사교과서는 아이들의 역사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대로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전국 이천 이백 여든 두 개 고교 중 서울의 모 고교 한 학교만 교학사 발행 역사 교과서를 채택했습니다. 명백히 강압적 타의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웠다는 대한민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교과서 테러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생겼을까요? 전교조,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족문제연구소, 앤티MB,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좌경친북단체 사백 육십 오개가 모여서 결성한 소위 ‘역사정의실천연대’라는 전문 꾼들의 조직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압력을 가하고 협박한 결과입니다. 이중 백 오십여 단체는 2008년 MB정권 초기에 광우병 촛불 시위로 국민을 우롱하고 국기를 흔든 전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친북단체들의 이런 해괴하고 망국적인 역사 교과서 테러를 반드시 응징해야 합니다. 국가가 있고 그 다음에 문학이 있습니다. 과거 십년 동안 겪은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지고 문화가 좌경세력에게 점령당하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전복된 다음에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한 문화이고 문학입니까? 이천 이백 여든 두 개의 고교 중 한 학교만 채택한 역사교과서, 그것은 이 나라에 남은 ‘마지막 잎새’입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잎새’를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오는 3월에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발간됩니다. 저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구매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 운동에 온 국민이 동참하여 수 십 만권 수 백 만권을 구매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친북세력의 악랄한 시도를 무산 시킬 수 있습니다.
김성락의 결연한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소주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교학사 역사교과서 구매 운동에 동참하신다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최정수가 잔을 들었다가 도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박미혜가 잔을 들었다. 이태호와 전영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박미혜는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김성락과 전영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물었다.
-오늘 이 자리는 순수한 문학 모임입니더. 최 작가님이 말씀하셨듯이 정치를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더. 그냥 술이나 마시면서 소설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작가님들 어떠세요?
이태호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순수도 좋고 문학 토론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문학의 차원에서 정치도 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매우 중요헙니다. 친일을 미화하고 남북분단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은 시정되어야 허지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총칼로 밟아분 5.16 군사 쿠데타 독재 세력은 비판 받어야 허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어야 헙니다. 지역 차별 또한 이 나라를 병들게 했습니다. 호남 출신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차별을 당하고 설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호남 출신입니다. 아까 김 작가님은 과거 십년 동안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졌고 문화가 좌경세력에게 점령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동의허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십년 동안에 비정상의 정상화가 일부나마 이루어졌다고 생각헙니다. 친일사관의 극복, 외세를 배격한 남북의 자주적인 통일기반 조성, 지역 차별적 인사의 완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재평가작업이 그 때 이루어졌다고 생각헙니다. 우리 역사상 언젠가는 한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확실히 짚었다는 것이 국민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좀 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근현대사를 바라보아야 헐 것입니다. 김 작가님의 시각이야말로 매우 우편향적이고 폐쇄적입니다. 김 작가님도 고향이 호남 아닌가요?
이태호가 여유 있고 득의의 미소를 지으면서 김성락에게 물었다.
-그래요. 제 고향은 민주화투쟁의 메카인 광주(光州)입니다. 저도 대학교 다닐 때 민주화 투쟁을 나름대로 한 사람입니다.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면서 돌을 던지고 스크럼을 짜고 데모행렬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 때는 그것만이 정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제가 생각한 정의는 불변하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요악이라는 것도 엄연히 있으며, 차선책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최선책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역 차별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역 차별을 이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건국초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남북 분단이 과연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전후의 미소 냉전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한반도를 덮친 것이지요. 이승만과 한민당을 주축으로 한 민족세력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은 불가피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다시 그 상황에 처해 진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고 봅니까? 통일을 위한 통일,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현실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공산주의 체제로의 통일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선택의 호악(好惡)과 시비(是非)는 바로 지금 모든 분야에서 크게 벌어진 남북간 국력의 차이가 명확히 가려주고 있습니다. 5.16 쿠데타와 개발 독재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친일과 군사독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史實)을 평가할 때 어느 한쪽만 집중적으로 찬양하거나 비판한다면 필연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반영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서술은 객관성을 유지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평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일제 식민지배와 5.16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 하는 것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 4.3폭동, 여순반란사건 등 6.25 직전의 좌우대립과 살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해방 이후 근현대사를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보고 평가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사실을 부정,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일본 아베신조(安倍晉三) 내각의 역사교과서, 정신대, 독도, 신사참배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시대착오적인 광기의 발로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역사 교과서 문제도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유럽이나 중동, 동남아, 그리고 북미, 전 세계 곳곳에 있는 많은 나라들도 우리와 비슷한 침략과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처럼 이렇게 심각하고 격렬한 내부분열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왜 우리만 이런 현상을 보이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북한이라는 야만적이고 전근대적인 전체주의 왕조체제의 엄연한 현존(現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내의 현실 불만 세력들이 의지하고자 하는 반국가 단체의 수괴가 바로 북한 아닙니까?
-닥치시오!
갑자기 전영환이 술잔을 탁자에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북한을 반국가 단체의 수괴라고 비방하는 기요? 내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소. 북한은 우리 민족이 아닝교? 북한의 지도자 동지는 저절로 선 것이 아니란 말이요. 북한 인민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해서 민주적으로 뽑은 민족의 지도자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교? 내가 ‘백두산’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남한은 미제의 앞잡이이며 썩어빠진 자본주의에 물들어 이제 막바지에 온 깁니다. 민족의 정기를 이어가고 천년만년 발전을 위해서는 정통성이 없는 친일 반민주 독재정권을 박살내야 하고 그라기 위해서는 먼저 미제를 몰아내야 합니더. 미군이 와 아직도 있어야 하능교? 당신은 명색이 소설을 쓴다면서 그렇게 썩어빠진 정신으로 헛소리를 내뱉고 있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역사의 죄인 소리를 듣기 싫으몬 조용히 입 닫고 있으소. 그라고…….
-왜들 이러세요? 작가님들, 제발 진정하세요. 그만들 하시고 아까 이야기 하던…….
박미혜가 당황하여 제지했다. 이태호가 박미혜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진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기왕 말이 나왔응께 마저 해붑시다. 김성락 작가님, 작가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호남 출신이라면서 어째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허고 있어요? 역대 보수정권에서 물먹은 호남사람들의 한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시는 모양인디……. 박정희, 5, 6공 때는 더 말헐 것도 없고 MB 정권에서 밀려난 호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요? 저 역시 중소기업에 다니다가 5공 때 물먹고 뛰쳐나와 개 고생하다가 DJ 때 청와대 빽으로 어찌어찌 쪼그마한 정부 산하단체 간부자리 하나 얻었소. 그런데 그 꼴을 못보고 MB가 정권을 잡자마자 단칼에 짤라불더군요. 저는 그래도 부모덕에 이나마 살고 있어요. 여기 마산 출신인 박 작가님과 부산 출신인 전 작가도 있지만, 저는 특정지역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그 상황을 제대로 보고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헙니다. 자, 여러분들, 이제 그쯤 하고 술이나 마셔붑시다.
김성락을 제외한 최정수, 박미혜, 전영환 세 사람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소리치고 술을 마셨다. 김성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최정수가 김성락에게 한쪽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했다.
-김 회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북한이라는 존재가 남남갈등을 일으키고 있죠. 그런데 지금 북한의 상황은 거의 막장 수준 아닙니까? 그러니 북한은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도 없지요. 우리에게는 창작에 전념하고 좋은 작품을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교학사 문제는 우리가 나설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문단을 비롯한 예술계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소설가답게 현실을 보고 느끼고 쓰면 그만이라고 봅니다. 저는 밤마다 서울과 경기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가지가지 인간들을 만나고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김 회장님께서 우려하실 만큼 우리나라 국민들의 수준이 낮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석기의 R.O.같은 좌파급진세력이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실제 세력은 미미한 정도이고 국민들도 점차 착각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석기와 그 일당이 일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헌재의 통진당 해산판결도 조만간 나올 겁니다. 6월에 있을 지방 선거에서 민심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분명히 그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선거 결과라꼬? 이것 보시오. 최 작가님! 말씀 삼가시오.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국민들의 함성이 작가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거요?
연거푸 술을 마셔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전영환이 최정수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곁에서 김성락이 맞받았다.
-부정선거를 인정하라고 했소? 지난 대선 때 국정원 댓글 사건을 말하는 모양인데, 당신 같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나보다 훨씬 잘 알 테니 한 번 물어봅시다. 지금 당장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오. 좌경 포스트와 댓글들이 얼마나 많은지 반대하는 글들과 비교해 보시오. 당신들 편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소? 그 중에는 해외 친북사이트와 국내 간첩들의 글이 많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지지 않았소?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국정원과 국방부에서 국가 안보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한 것이 선거개입이고 부정 선거라면 결국 당신들 생각은 국가기관이 직무를 유기하고 수수방관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국가보안법 유지를 위한 국정원의 정당한 직무수행이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의 직무수행과 비교해서 뭣이 다르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 작가님이 말하는 그 국민들은 누굴 말하는 거지요? 당신 같은 한 줌도 안 되는 친북, 종북 세력이 어찌 국민들 운운하면서 대다수 국민들을 모욕하고 속이는 거요? 오늘 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이런 자리라면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정수가 깜짝 놀라면서 만류했다.
-김 회장님! 진정 하세요. 회장님이 안 나오시겠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근화회’는 순수한 소설 동호회이고 회장님이 만드신 모임입니다. 무책임하게 그러시는 게 아니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태호와 박미혜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각자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고 그 견해는 작품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회장님의 견해를 저는 존중합니더. 그러니 뜻을 거두세요.
-제 뜻을 거둘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근화회’의 취지에 어긋나는 인물을 소개하신 이태호 작가님께 유감을 표합니다.
말을 마친 김성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태호도 혀를 끌끌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서 이태호는 지갑에 있는 수표를 꺼내서 박미혜에게 건넸다. 뒤에서 전영환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태호, 최정수, 전영환은 ‘근화당’에서 나온 후에 가까운 곳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최정수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이념이니 정치니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고 소설가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 이야기입니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경향, 오타쿠의 출현 그리고 서브컬처와 관련하여 이야기 해볼까요? 일본의 대중문화를 알면 우리 문화의 발전방향을 추측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럽시다. 지금 독자들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대중소설은 이미 실종돼부렀습니다. 극소수의 인기 작가를 제외하면 수천 명의 소설가들은 실업상태지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인기작가가 되거나 부업을 해야 헙니다. 그래가꼬 어떻게 문학의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소설가와 소설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부렀으나 소설가가 없고 소설이 없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헙니까? 방금 전에 이야기 했지만 인기작가가 되는 것, 아니 탁월한 작품을 쓰는 것이 우선 첫째 과제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문화의 흐름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겄어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장르소설이나 인터넷 소설, 웹툰, 노벨 게임, 그 밖에도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지요.
이태호의 말에 최정수는 이태호와 전영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순수문학을 바탕에 깔고 젊은 2, 30대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애정물이든, 판타지든, 탐정물이든 마찬가지죠. 그리고 웹 소설에도 본격적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미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그런 데서 활동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도 늦었지만 그 쪽으로 눈길을 돌려서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전영환이 별안간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무신 말씸들을 하능교? 술이나 마시지 무신 어려운 말들을 하면서 술맛 떨어지게 하는 거란 말이요? 내사 오타쿠니 포스트모던이니 그딴 건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 그만 하시고 술이나 마십시더,
최정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태호가 전영환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눈짓을 했다. 최정수가 말했다.
-전 작가님, ‘백두산’으로 등단하신 후에 어떤 작품을 쓰고 계십니까? 제 이야기에 전 작가님도 주목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등단 작가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문단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톱스타들을 보세요. 가수, 배우, 프로 선수 등등. 물론 개중에는 거품이 끼어있는 경우도 있고 시대를 잘 만난 실력 없는 스타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개인기(個人技)가 출중하다는 점, 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대중이 열광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탁월한 개인기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보수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모순이고 부조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까뮈가 지적한 바로 그 부조리 말입니다. 스타 MC만 해도 개런티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일회 출연에 수 백에서 수 천 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부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고 황금알을 낳는 마법의 거위입니다. 그런 스타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를 즐기고 명예도 얻지만 시대를 리드하는 보너스까지 챙기고 있잖습니까? 우리는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토론하고 고민해야 된다고 봅니다.
전영환의 얼굴 표정이 풀렸다가 다시 굳어졌다. 그는 최정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정수는 말을 멈췄다. 이태호가 슬그머니 전영환을 돌아보면서 말을 했다.
-그래요. 최 작가님 말씀이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아까 그 부조리……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하셨는데……, 분명히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이사 어쩔 수 없질 않겄어요? 내가 보기에는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 아닙니까?
전영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소설가들, 아니 모든 예술가들이 대동단결해서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합니더. 도대체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 되겠습니꺼? 전 솔직히 유신(維新)과 5공 때 콩밥도 먹어봤습니더. 보안사에 끌려가 죽도록 매도 맞아 봤습니더. 많은 동지들이 배신하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더. 그러나 지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더. 사회의 모순은 그대로 두고 내가 변할 수는 없었지요. 최 작가님은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자고 하는데 명색이 작가라는 분이 우찌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꺼? 작가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싸울 때는 싸워야 하는 기 아닝교? 말씀 하시는 걸 보이 소설로 밥벌이는 못 하시는 거 같은데……. 실례지만 지금 무신 일을 하십니꺼?
비아냥거리는 듯한 전영환의 말에 최정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잘 물어 보셨수. 나 대리운전 뛰고 있소. 됐어요? 여담이지만 대리운전 우습게 보지 마세요. 매월 기백만 원씩 버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골방에 앉아서 불평불만이나 하고 인터넷에 헛소리나 올리는 좌빨좀비들보다는 백배 천배는 훌륭한 사람들이죠. 전 작가님은 소설로 밥벌이를 하고 있나요?
최정수가 두 사람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전영환에게 물었다.
-저 말입니꺼? 전 후원자가 있십니더. 소설이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십니더. 얼마 전에 민주화 운동 보상금도 받고 해서 그럭저럭…….
전영환이 우물쭈물 넘어가자 이태호가 화제를 돌렸다.
-김성락 회장님이 화를 많이 내셨는데 최 작가님이 내일이라도 연락을 해 보시요. 홧김에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화가 쪼끔 풀리면 맘이 바뀔지도 모르지 않겄어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 모임을 이렇게 끝장낼 수는 없겠지요. 앞으로는 정치성 발언은 지양하도록 합시다. 결국 싸움으로 끝날 게 뻔하거든요.
세 사람은 술을 계속 마셨다. 뚱뚱한 이태호는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 잠시 후에 세 사람은 포장마차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어느덧 밤이 깊은 듯 행인들의 발길이 뜸했다. 전영환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고 이태호와 최정수는 전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전철역 입구에서 최정수는 이태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역 계단을 내려갔다. 이태호는 전철역을 지나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누군가가 이태호의 팔을 잡았다. 전영환이었다.
-아니!, 전 작가, 버스 타러 간 줄 알았는데, 아직 안 갔나?
-이 작가님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더 하십시데이.
-술을 더 마시자고? 난 취해서 도저히 더는 못 마신다. 그냥 어디 가서 이야기나 하세. 옳지! 저기 공원이 있군. 저기 벤치로 가세.
이태호와 전영환은 길에서 약간 들어간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의 가로등이 희미했다. 인적이 없어서 고즈넉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이 작가님, 오늘 지가 실수를 했지요? 죄송합니더. 허지만 지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더. 썩어빠진 꼴통보수 놈들만 보면 지도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 아닙니꺼. 하지만 앞으로는 입조심을 하겠십니더. 다시 한번 사과 드립니더.
-됐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우리가 합평회 할 때는 무슨 건설 회사 다닌 걸로 알고 있었는디.
-그저 그럭저럭…….
-작품 활동은 어떻고?
-노가다 뛰면서 어떻게 소설을 쓰겠능교?
-내가 전 작가의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어서 ‘근화회’ 멤버들에게 소개했는데 오늘 일이 이상하게 돼부렸어.
-약속하겠심더. 앞으로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겠심더.
-그럼 됐어. 난 택시를 타고 갈 테니 자네는 버스를…….
-저, 이 작가님, 부탁 하나 하입시더.
-뭔데? 말해 봐.
-다른 게 아니라 저, 저…….
-뭣인디 그래?
-저, 백 만 원만 빌려 주이소. 내일이 카드 결제일인데예, 못 막으몬 전 죽십니더…….
-뭣이라고? 돈을 빌려달라고? 이 사람이! 일 이 만원도 아니고 백만 원이나 빌려 달라니! 자네 카드 결제하고 내가 뭔 상관이 있다고 그런가? 나 돈 없네.
-그라지 마시고……. 우리 사이에 그까짓 백만 원 갖고 뭘 그리 놀라능교? 솔직히 이 사장님에게는 껌 값 아닌교? 사장님 삘딩에서 나오는 월세가 얼만데 그라능교?
-그까짓 백만 원이 껌 값이라고? 워매! 자네가 나를 한참 잘못 봤네. 나 돈도 없고 함부로 펑펑 쓰는 놈도 아니여.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사이여? 이제 보니 자네 돈 때문에 오늘 나왔구만? 에끼, 순! 죄다 없던 일로 허세.
-지가 돈 띠어묵울까봐 그라능교? 그라지 마시고 지 사정 좀 봐 주이소. 오죽했으면 이 작가님에게 아쉰 소리를 하겠능교?
-이 사람이! 그리 못 알아듣것능가? 돈을 띠어묵고 안 묵고 간에 없는 돈을 달라고 애들처럼 떼를 쓰면 어쩌잔 말인가?
어둠 속에서 전영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애들처럼? 내를 뭘로 보고……, 죄다 없던 일로 하자꼬 했지요? 그랍시다. 당신 돈이 욕심나서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소. 당신처럼 약자편인 척, 정의로운 척 위선적이고, 돈 앞에서는 제 잇속만 챙기는 몰인정하고 썩어빠진 부자가 꼴통보수보다 더 나빠.
전영환이 이태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목에 큼지막한 두 손을 갖다 댔다. 만취상태인데다 둔중한 이태호는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소리 없이 벤치 위에 넘어졌다. 전영환이 잽싸게 이태호의 윗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공원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전동차가 지나가는 굉음이 들리고 땅이 희미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