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 난로 선생님
최성각
입담이 좋은 사람을 시쳇말로 우리는 ‘이빨꾼’이라고 말하곤 했다. 왠지 그 말에서는 격식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근감이 있는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의진 형님이 그랬다. 의진 형은 내가 광산에 있을 때 만난 형이다. 내가 총각일 때 광산촌의 교사였던 시절, 그를 처음 만나 우리 큰애가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근 20년이 되어 간다. 나는 광산촌의 교사였고, 석탄합리화정책으로 광산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광업진흥공사 홍보계에 근무했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청담동의 한 연립주택에 자리 잡았다. 그 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2호선 선릉역 언저리의 한 유명 대찰(大刹)에서 불경을 설파하고 있다고 했다.
청담동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후에야 알았지만, 그가 20대 때 우연히 지니게 된 청담 큰스님의 단주(短珠) 때문이었다. 청담동과 청담 스님은 아마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주 젊었을 적 한 때에는 절에 있기도 한 듯싶은데, 그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왠지 좀 신비롭게 놔둬야 할 일일 것 같았다. 형은 이빨꾼이었다. 공부는 대학에 들어갔다지만, 졸업을 하진 못했으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고 있는 일에 일일이 자기견해를 지니고 피력하시는데, 그런 이들을 일컬어 잡박(雜博)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종종 그 잡박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좀 더 세부로 들어갈라치면 앞의 견해와 뒤의 견해가 서로 충돌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만큼은 나름대로의 일가견을 갖추고 있어 특유의 재담으로 사람의 마음을 건들곤 했다. 쉬운 비유를 걸쭉하게 쓰는 그를 우리는 흔치 않은 ‘이빨꾼’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일 년에 서너 차례 그를 만나곤 했다. 어떤 해에는 일 년에 서너 번 전화만 주고받기도 했다. 곰곰이 골똘하게 생각해보면 그 해에는 틀림없이 무슨 중요한 선거가 있기 십상이었다. 다른 일들에서야 그와 부딪칠 일도, 그의 독특한 이빨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지만 유독 나와 그의 상통할 수 없는 차이점은 정치적 견해였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나 정당과 그가 지지하는 사람이나 정당은 한결같이 달랐다. 이를테면 내가 한결같이 안 되는 쪽의 대통령 후보이거나 소수당 성향이라면, 가장 최근의 한번을 제외하고 그는 한결같이 되는 사람에게 찍었고 다수당 성향이었던 것이다. 육이오 때 굶어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는 근대화를 일궜다고 자처하는 세력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이에 반해 나는 그가 지지하는 세력들이 바로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거들을 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선거철에는 서로 안 만나는 게 상책이었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우리 사회의 경우, 자칫 관계의 훼손으로 이어지기 쉬운 일이었다. 이를테면 박정희 숭배자와 박정희 시대를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맺을 우정이 어떻게 반듯하게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고통스럽지만 얼마간 안 만나는 게 상책이지 않겠는가.
“물질전송이란 말야. 기(氣)를 먼저 이해해야 돼. 기를 사람들이 미지의 에너지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야. 미지의 에너지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에너지라 이 말씀이야. 이제 보라구, 사람의 마음을 측정하는 기구도 개발될 테니깐. 그러니 내 얘기는 고주파 전자장 같은 것도 일종의 기라 이 말씀이야. 세민이 아빠, 내가 미국에 갔을 땐데 말야. 미국에 사는 할머니가 일본에 사는 친구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자기가 요리한 닭고기 요리를 공간이동 시키겠다는 광고가 흐르고 있더라구…….”
의진형이 말했다.
몇 달 전에는 우리 부부가 형님 내외에게 저녁 식사를 냈기에, 그날은 그가 청담동의 한 돼지갈비집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었다.
물질전송 이야기는 그가 광산에 살 때부터 하던 이야기였다. 그의 관심사는 물질전송에서부터 세계의 불가사의, 염력이나 기에서 해외토픽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여자들은 이미 물질전송 이야기를 수차 들어봤기에 여자들만의 화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거기 가면 정말 싸. 물건도 괜찮고…….”
“어머, 그래요? 우리 동네엔 그런 장이 안 서요.”
의진 형의 물질전송 이야기는 2차 대전 막바지에 필라델피아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의 길이 100미터에 1천5백 톤이나 되는 선박이 강력한 고주파 전자장에 쪼여 홀연히 사라지더니 360킬로미터 떨어진 노포크항에 다시 나타났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로 흘렀다.
“거기 탔던 승무원들은 거의 다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켰다는 거 아냐. 미국은 지금도 고주파를 실험중이라니까.”
“거 참,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나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롭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에도 나고 영화로도 나왔다니깐. 웬만한 미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 끝에 어쩌다 ‘선생님 이야기’로 화제가 흐르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선생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나였던 것 같다. 대학 때 은사 한 분에게서 그날 오전에 전화가 왔던 것이다. 그 분은 영화배우 안성기 씨의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던 분으로서, 무슨 아침 텔레비전 프로에 안성기 씨로부터 출연요청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글판에 있으므로, 은사는 그 또한 국문과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성기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주연한 「축제」 때문에 원작자 이청준과 그 작품의 소설적 성취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게 은사가 내게 전화를 건 요지였다.
“그래서 그랬지요. 선생님,「축제」이야기는 안 나올 겁니다. 저도 텔레비전을 잘 안 보지만 그런 프로라면 영화 얘기를 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아마 주로 안성기 씨 고3 때 이야기로 흐를 겁니다. 그랬더니 은사님 말씀이 안성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으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국민배우라고 그랬죠. 커피 광고에 그렇게 장수 출연한다는 게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데, 사생활 깨끗하고 연기 폭이 넓고, 여성들한테 특히 인기가 높은데 그 까닭은……어쩌구저쩌구 말씀드렸죠. 그런데도 자꾸만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아마 텔레비전에 출연하게 된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으셨던 모양이지.”
“그런 모양이에요.”
고3 때 57등인가 뒤에서 네 번 째 성적에 머물렀던 안성기 씨가 은사를 모신 까닭은 은사에게 받은 정신적인 영향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4·19 때 자신이 한 역할은 물론 대학을 네 번이나 쫓겨난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계셨다. 내가 은사에게 준 정보 중의 하나는 “씨름에 이만기, 바둑에 이창호, 야구에 박찬호 그러듯이 영화배우 하면 안성기인데, 그런 정상에 있는 제자가 자랑스럽다, 더욱 조신하고 열심히 노력해라” 어쩌구 그런 말을 맨 끝에 덧붙이면 멋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은사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정말 내가 드린 말씀을 그대로 멋들어지게 옮기고 계셨다.
“듣다보니 가수에 조용필이 빠졌네.”
의진 형 옆에서 과일을 깎던 형수가 말했다.
그러다 보니까 화제는 자연스레 누구에게나 한 두분 기억속에 간직하고 있을 은사님 이야기로 흐르게 된 것이다.
“나도 안성기처럼 텔레비전에 나가서 은사님을 모신다면 모실 분이 몇 분 있지. 내 경우엔 세 분이야. 누굴 모셔야 할진 어려운 일이지만 말씀이야.”
“아, 그렇겠군요. 어떤 선생님이셨는데요?”
내가 형의 말을 반겼다. 안성기 은사 이야기를 내가 꺼냈으므로 이번엔 그의 차례였던 것이다. 의진 형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좌중을 늘 즐겁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거 왜 그땐 학예회 그런 게 있었잖아. 내가 그땐 공부도 잘 하고 예쁘장했거든. 지금은 이렇게 빼빼 말라서 한 사나흘 굶은 사람 같이 볼품없지만 말야.”
“에이구 형님이 뭐 어때서요? 훤출한 키에 좀 마르긴 했지만, 미남형이죠.”
“그래? 거짓말인 줄 알지만 듣기 좋군…… 내가 나가서 무용도 하면서 독창을 하게 됐던 모양이야. 할머니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내 무대복을 깨끗하게 다려 주셨지. 두근반세근반 가슴을 졸이면서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말씀이야. 먼저 무대에 나가게 된 고학년 선배들이 바쁘게 무대에 나가면서 어린 나한테 자기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맡기는 거라. 꼬마야 이거 잘 보고 있어, 하면서 말야. 몇 녀석들이 내게 옷들을 앵겼는데, 갑자기 캄캄한 기분이 되는 거라. 어렸지만 기분도 되게 나쁘고 말야. 다음엔 내 차롄데 말야.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해서 가슴에 가득 앵겨받은 옷들을 바닥에 확 팽개치고, 징징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버리지 않았겠어. 할머니가 의진아, 왜 이레 일찍 왔나? 하셨겠지. 대꾸도 않고 더 크게 울었겠지, 아마. 그리고 저녁이 오고, 밤이 됐는데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 꾸중들을 생각을 하니까 잠이 안 오는 거라.”
“그랬겠네요. 그래서요?”
“근데 이튿날 선생님이 야단을 안 치시는 거라. 여선생님이셨는데 참 인자하신 분이셨어. 애들 다 집에 보낸 뒤에 박의진만 남으라고 하시더니, 어제 왜 무대에 안 나왔지? 하시는 거야. 그래서 울먹이면서 무대 뒤에서 기다리는데 선배들이 옷을 맡기길래 기분이 나빠서 집으로 가버렸다고 말씀드렸지, 그랬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마시는 거라. 아무런 야단도 안 치시고 말야.”
“그 선생님, 참 생각이 깊은 분이셨네요. 그렇게 반응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다른 선생님 같으면 그냥 안 뒀을 텐데 말예요.”
“으음,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분이셨어. 늘 조용하시고 항상 미소를 지으셨던 것 같아. 지금쯤 할머니가 되셨겠지. 아마 아름답게 나이 드셨을 거야. 꼭 한번 뵙고 싶어.”
그 여선생님이 그의 첫 번째 잊을 수 없는 은사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그땐 국민학교라 했지. 3학년쯤 되었을 거야. 겨울인데 내가 톱밥난로 당번이었던 거야. 난 애를 쓰느라 톱밥을 부지런히 넣었는데, 그날 그만 수업 중에 톱밥난로 아랫부분의 톱밥이 다 타서 화로에 푹 빠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어. 그게 원래 그렇거든. 그러니까 톱밥을 일정하게 계속 넣어줘야 하는데, 잠시 한눈 팔면 그렇게 되거든. 그러면 얼른 톱밥을 다시 넣으면 되는 거라. 근데 연기가 조금 났다고, 오늘 톱밥난로 당번 나오라는 거야. 그래서 나갔더니, 다짜고짜 귀싸대기를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거라.”
“어머 어쩌면?”
아내가 복숭아 조각을 입에 넣다 말다 낮게 비명을 질렀다.
“저쪽에 나가떨어지지 않았겠어요(유일하게 소리내 반응한 아내를 바라보며).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울면서 대들었지요. 난 할머니한테도 한 대도 안 맞고 컸는데 선생님 왜 때려요? 하고 대들었지. 그랬더니 요 쥐방울만한 새끼가 대꾸한다고 또 후려패는 거라. 톱밥난로 연기 좀 났기로서니 얼른 톱밥을 넣으면 그만일 일을, 그게 무어 그리 잘못된 일이라고, 그토록 모질게 어린것을 패다니…… 쯔쯧!”
당사자가 혀를 찼다. 모두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못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에 잠시 잠겼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저도 못된 선생님들 기억이 더 많아요. 그냥 월급쟁이였을 뿐인 사람들이 더 많았지요. 아주 간혹 훌륭한 선생님도 계셨지만.”
“또 한 분은 6학년 때 담임이었는데, 태백에 있을 땐데, 삼척군 무슨 기관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됐지. 그때 연사가 세 분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의 성함과 얼굴이 어디서 많이 뵌 분인거라. 확인해 봤더니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인 거라. 그래서 아주 반가웠지. 내 차례가 그 분 뒤였는데, 이분이 날더러 먼저 하라는 거야. 그래서 먼저 했지. 그러구났더니 이분이 세 번째로 연단에 올라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전의 박의진 선생님이 바로 내가 가르친 제자올시다’ 이렇게 운을 떼시더구먼. 그분도 참 좋으신 분이셨어.…… 그래 자넨 어떤 선생님들이 떠오르는가?”
“떠오르는 분들이야 많지만, 전 기억할 만큼 훌륭한 분들이 별로 없었어요.”
유신시절이던 대학 때 떠오르는 분이 없지 않았지만, 의진형님 앞에서 대학 선생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형님이 만약 텔레비전에 나가서 한 분 은사님을 모셔야 한다면 어떤 분을 모셔야 할까요?”
“학예회 때 그분?”
형수가 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의진형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뗐다.
“아냐, 그 분은 굳이 안 모셔도 아름답게 나이 드셨을 거야. 틀림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을 거야, 내가 딱 한 분을 모셔야 한다면 톱밥난로 연기 냈다고 내 귀싸대기를 그토록 나가떨어지도록 팬 그 선생님을 모셔야 할거야. 그리곤 여쭤보는 거야, 아주 정중하게, 선생님 톱밥난로 연기를 좀 낸 일이 그토록 심하게 얻어맞을 일이었습니까?” 하고 의진형이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소리 내서 웃었다.
“늙은 은사 모셔서 전국적으로 봉변주기네요.”
형수가 한참 동안 웃다가 입을 가리고 물었다.
“이노무 자석, 같이 늙어가면서 또 한번 맞아볼래? 하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손을 번쩍 들면 어쩌려구요?”
이번에는 손을 번쩍 드는 시늉을 내며 내가 물었다.
“하모, 한번 은사면 영원히 은산데, 늙으신 그분이 또 패야겠다면 맞아야지 우짜겠노! 전국에서 다 지켜볼 때 맞아드려야지, 하모 하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