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조경란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남자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
남자는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안개는 그 전날부터 혹은 그보다 먼 며칠 전부터 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건 여자가 온 날 남자는 안개를 보았다. 여자는 안개와 함께 왔다.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고 있을 때 남자는 발짝 소리를 들었다. 계단 모퉁이를 도는 발소리는 약간 망설이는 듯한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뜻밖에도 너무나 커서 남자는 숨을 죽이고 말았다. 발소리는 사층에서 멈췄다. 사층엔 노래방과 전당포밖에 없다. 남자는 화장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여자가 노래방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얼른 계단을 올라갔다. 철문은 부주의한 대문처럼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 여자는 곧장 그 문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전당포란 곳을 처음 오는 사람이다.
하나, 둘, 셋, 남자는 숫자를 세었다. 짤랑, 소리를 내며 노래방 유리문이 열렸다, 닫혔다. 넷, 다섯. 여보세요, 문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전기 이불을 밀쳤다. 반달 모양으로 뚫린 유리 칸막이 창구로 여자가 얼굴을 쑥 내밀고 있었다. 아직도 전당포란 것이 남아 있군요?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지만 남자는 어쩐지 여자의 얼굴이 체념에 길들여진 인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계단을 내려간 뒤엔 남자는 여자의 얼굴과 눈빛을 다시 기억해낼 수 없었다. 여자가 사라진 뒤에 남자는 막연한 고통을 느꼈다. 남자는 창밖의 희뿌옇게 낀 안개를 그제서야 발견했고 시정거리가 좁아든 답답하고 막막한 시계(視界) 속에서 약간의 공허감과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시간이 더 지난 후 그 느낌이 일종의 안도로 다가올 거라고는 남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경계를 짓는 듯한 유리 칸막이 밖에서 여자는 진열된 색색깔의 보석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가방을 뒤적거려 작은 상자곽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혹시 나를 압니까?라고 물으려던 남자는 입을 다물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순금이나 18K는 아니었다. 남자가 검안경으로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는 뚜벅뚜벅 소리를 내면서 비좁은 창구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여자의 걸음 소리가 남자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남한테 아쉰소리 안 하고 대출해줄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남자는 우쭐해지고 싶었다. 남자는 잠자코 반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주저하는 듯한 남자의 기색을 느꼈는지 여자의 눈은 각각 따로따로 움직이며 주위를 경계하거나 먹이를 찾는 카멜레온의 눈처럼 시시각각 다른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남자는 다른 보석들보다 금을 좋아한다. 금의 느낌과 감촉은 다른 보석들에 비해 순수한 느낌을 준다. 그건 아마도 다른 이물질이 거의 섞이지 않은 탓일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남자는 순금은 만졌을 때 물렁물렁하고 따뜻한 느낌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24K, 즉 순도 99.9퍼센트의 금을 함유하고 있을 때 그걸 순금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내민 반지는 차갑고 딱딱했다. 게다가 융으로 아무리 문질러도 광채가 나지 않았고 반지는 낯을 가리는 생물처럼 남자의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더욱 딱딱하고 차가워졌다. 그 느낌은 다소 배타적인 데가 있었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여자의 반지는 18K도 14K도 아니다. 금이 아주 함유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사실 금반지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다. 남자의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여자는 상자곽 밑바닥에 딱지처럼 접혀 있는 보증서를 펼쳐보였다. 그 손가락에서 본 긴장 때문에 남자는 웃을 수도 찡그릴 수도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순금은 일 그램으로 사방 일 미터의 넓이로 만들 수 있으며 두께는 일 인치 높이에 약 25,000장의 금박을 쌓을 수도 있다. 이때 금박은 불투명한 상태에서 거의 투명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금의 빛깔이 변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금박을 유리판 사이에 끼고서 햇빛을 통과시키면 금은 녹색으로 변한다. 금이 녹색으로도 변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 빛깔의 찬란함과 투명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러나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남자는 유리 칸막이 밖으로 여자의 반지를 밀어냈다.
……뭐가, 잘못됐나요?
여자가 물었다.
태극마크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여기 이것도 있잖아요.
여자는 보증서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인상대로 순순히 체념을 한 것인지 여자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은 채 반지와 보증서를 챙기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계단을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양쪽 어깨 위에 두 개의 사기그릇을 올려놓고 걷는 듯한 모양새였다. 큰숨이 터져나올 것 같아 남자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부터 반지를 사실 거면 안쪽에 태극마크가 있는지 꼭 확인하십쇼, 그게 없으면 어딜 가도 받질 않습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계단참으로 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층 이후부터는 후다닥 뛰어내려간 것인지 여자는 벌써 건물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여자는 인파에 휩싸여버렸지만 남자는 여자의 약간 통통해 보이는 어깨와 등을 놓치지 않았다. 여자의 짤막하고 둥근 실루엣은 두꺼운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을 순금처럼 부드러운 육체와 그 육체의 쇠락에 대한 깊은 사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페 여자는 남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언덕 쪽으로 점점 사라지는 여자의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몽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도시 전체를 휩싸고 있는 축축하고 흐린 안개를 발견하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뺨에 와 닿는 감촉은 이제 막 끼기 시작한 안개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건 더 먼 이전부터 이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는 요지부동의 기세였다. 안개였다. 남자는 발밑부터 모래의 늪에 빠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보다 집요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러운 데가 있었지만 마치 순금을 햇빛에 투과해 찬란한 녹색을 발견했을 때의 미묘한 희열마저 섞여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알아차렸다. 그 느낌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모래늪에 빠졌을 때처럼 자신을 서서히 옭아맬 것이라고 남자는 짐작했다. 남자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맞은편 노래방 주인과 점심을 시켜먹은 후 남자는 전당포로 되돌아왔다. 노래방에서 전당포로 건너오는 그 짧은 복도에 난 창을 남자는 내다보지 않았다. 며칠째 같은 날씨가 되풀이되고 있는 참이었다. 아아, 정말 지겹군. 노래방 남자는 불어터진 면발을 휘저으며 창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었다. 노래방엔 창문이 없다. 한데도 축축한 우윳빛 안개가 실내를 휘감고 있는 느낌을 버릴 수 없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여길 내놓고 나면 뭘 할 건데? 노래방 주인이 물었다. 건물 주인이 세를 빼겠다고 통보한 건 두 달 전이다. 늦어도 석 달 후엔 가게를 비워야 한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당포는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남자는 개수대 한가득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았다. 수챗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썩은 사과 껍질과 미끄덩한 라면스프 봉투가 손에 딸려나왔다. 물은 그래도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남자는 배관공을 부르지 않는다. 이제 여긴 더 이상 오래 살 곳이 아니다. 그럼 어디로? 남자는 말끝을 올리는 노래방 주인의 말투를 흉내내 물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한 건 노래방 주인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물음에 대꾸라도 하는 양 개수대 물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솨솨솨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빛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여자를 만났을 때 남자는 여자의 눈빛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자의 눈이 아니라 다른 것을 눈여겨볼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종(種)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의 나비류가 화려한 날개를 가진 것에 반해 나방류는 주변 환경과 혼동될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날개색을 지닌 게 대부분이다. 그건 일종의 보호색이다. 여자의 보호색은 약간 각별해 보이는 데가 있었다. 여자는 볼 때마다 몸피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누군가 여자 몸에 긴 막대를 꽂고 위에서부터 한 입씩 핥아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여자는 아주 난쟁이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자는 명치께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여자는 어두운 곳에서 일한다. 그것도 천장 바로 밑에서. 여자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너무 높은 곳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는 듯이. 여자는 나방, 여자는 한 마리 나방, 이라고 남자는 속으로 읊조렸다. 여자의 정교한 은폐색은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새나 도마뱀 같은 포식자들의 시력과 몸짓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비가 아닌 나방인 여자를 만났다는 것에 남자는 약간 흥분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안도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훗날 기억했다. 그 뒤로 남자는 여자의 눈빛을, 여자의 줄어드는 몸피에서 보았던 나방의 은폐색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나방. 남자는 여자가 삶의 질곡이 무엇인지 아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여자의 은폐색이 더욱 짙어져 마침내는 검은 숲과 나무들 사이에서 그것들과 아주 흡사해져 남자가 구분해내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이번에 여자가 가져온 것은 삼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짙은 갈색의 보호색 속에서 여자의 표정은 다소 의기양양해 보였으나 그녀 자신은 그 표정 속의 어떤 먼 곳의 하얀 점처럼 혹은 깃발처럼 흔들리는 긴장과 불안을 깨닫진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거, 틀림없는 다이아몬드예요.
여자는 남자가 검안경을 들기도 전에 불쑥 말했다.
남자는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의 다이아몬드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매우 작은 이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이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다이아몬드는 빛의 굴절과 산란이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좋은 다이아몬드란 이물질이 적은 투명한 것이다. 그래야 눈부신 광채를 발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보석으로 평가되는 법이다. 무색의 다이아몬드. 그게 흰색 광선에 의해 밝게 산란될 때의 아름다움을 여자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진 건 여자의 반지를 확인하고 난 후다.
이거, 오이남 다이아몬드 반지예요.
여자가 재차 말했다. 오이남, 그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감정사다. 그는 죽었다.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의 죽음을 은폐한 채 그의 아들들과 일가들이 오귀남, 오희남이라는 여럿 유사한 이름으로 감정사 노릇을 하고 있다. 여자가 가져온 보증서에는 오주남, 이라고 쓰여 있었다.
반지는 여자의 말처럼 삼 캐럿도 되지 않았고 투명도를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이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마도와 색상 또한 형편없긴 마찬가지였다. 그 몇 분 사이에 벌써 여자는 착 까부라져 보였다. 그러나 당최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은 표정이라 남자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인 표정도 아니었다. 그건 거절하기 힘든 온유하고 간곡한 데가 있는 고집이었다. 남자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여자에게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여자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었다. 그 단순한 표정 때문에 남자는 여자가 전당포란 곳을 처음 와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했다. 여자는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여기저기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주민등록증을 남자는 유심히 바라봤다. 카페 여자의 본명과 생년월일, 그걸 알게 될 줄은 몰랐었다. 여자는 언제나 너무 멀리 있었다. 카페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손을 쭉 내뻗어본 적도 있었지만 닿을 턱이 없었다. 여자는 나비처럼 아니 나방처럼 팔랑거리며 카페 안을 날아다니곤 했으니까.
삼 개월 후에.
여자는 말했다. 삼 개월 후. 여자는 다시 온다. 삼 개월 후. 전당포는 이미 문을 닫고 없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온다면, 그전에 와야 할 것이다.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전표를 끊어주었다. 여자가 돌아서는 순간에 남자는 잠깐만요, 그녀를 불러세워 창구 밖으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행운기업사. 명함을 받아든 여자가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여자의 이미테이션 반지를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안개는 사흘째 연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낮 기온이 예년보다 크게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높은 기온 속에서 낮에 증발된 수증기가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작은 물방울로 응결된다. 그 작은 물방울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하고 남자의 뺨을 모래처럼 깔깔하게 쓸고 있었다. 사층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고 건조한 먼지와 매연 같은 고체 입자들이 대기 중에 떠 있어 물을 섞은 우유처럼 희뿌옇고 탁하게 보였다. 두꺼운 구름 속에 숨은 누리끼리한 햇빛 속에서 고체 입자는 미약한 채로나마 산란되어 옅은 노란색, 때론 적갈색, 청색 등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약하게 불고 있었다. 그 바람 때문에,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란색과 청색의 빛 때문에 남자는 지금 대기가 몹시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안 속에서 남자는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남자는 귀를 기울였다.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오늘이 기억할 수 없는 언젠가의 하루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가 왔고 안개가 끼었다.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창밖을 내다본 적이 있다. 그러나 뒤에 남은 모든 날들이 이처럼 반복되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남자는 알고 있었다.
여자가 사라진 거리 쪽으로 고개를 꺾어보았다. 그 울음소리가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이 어둠이 짙어졌다. 둔중한 악기 소리는 아직 가본 적 없는 그 호수의 종소리를 연상시켰다. 안개는 어둠 속에서도 밤꽃처럼 끈질긴 숨처럼 희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창고 속의 현악기들이 울고 있었다. 이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악기들이다. 팽팽했던 악기의 줄들은 습도가 높아질수록 늘어져 신음처럼 소리를 낸다. 남자는 등 뒤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문득 자신도 저 물건들, 악기나 수십 개의 먼지 낀 반지들, 로렉스 시계, 카메라 같은 누군가 잊어버린 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남자는 골똘히 생각한다. 안개 저편엔 무엇이 있을까.
남자는 더 이상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았고 여자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극심한 안개 때문에 항공편은 줄줄이 결항되었고 출근길은 정체되었으며 대형사고가 잇따랐다. 거리엔 방진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늘었고 건물 이층 내과엔 호흡기 질환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안개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던 시절은 지나갔다. 안개는 더 이상 신비하지도 몽환적이지도 않았다. 안개는 산성비보다 더 악영향을 끼친다. 산성비의 경우엔 비에 의해 씻겨내려가버리지만 안개는 수분량이 적기 때문에 나뭇잎 등에 부착될 경우엔 웬만해선 씻겨내려가지 않는다. 안개 낀 날은 외출을 삼가야 한다. 남자는 비좁은 전당포 내실에 전기장판을 깔고 앉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개수대는 막히고 손님은 오지 않고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오는 사람 또한 없었다. 안개는 소리 없이 피어올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열정처럼 혹은 절박한 열망처럼 세상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하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희미한 안개 속에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내팽개쳐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깊은 밤에 남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벽에서 물방울들이 후득후득 떨어져내리는 게 보였다. 베개도 흠씬 젖어 있었다. 전당포 내실은 물속에 잠겨 있었다. 남자는 그게 눈물인지 아니면 안개의 수없이 작은 물방울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물은, 아니 물방울들은 나무의 단단한 수피를 뚫고 들어가 수액을 빨아먹는 개미 떼들처럼 남자의 방 안으로 바글바글 끓어들었다. 남자는 물속에서 죽은 나무 한 그루를 떠올렸다. 남자는 우비를 꺼내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모로 누워 잠을 잤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전표들과 지폐뭉치들이 둥둥 떠다녔다. 극도의 불안이 남자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 불안은 며칠 뒤 갑자기 흔적도 없이 안개가 사라져버린 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남자는 그 땅에 두고 온, 봄이면 적색의 긴 타원형 열매를 맺던 산수유나무와 은사시나무를 기억했다. 이렇게 짙은 안개라면 나뭇잎들은 별다른 저항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고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작은 물방울인 안개가 맺혀 있다가 햇빛에 의해 수분이 증발되면서 잎 가장자리부터 싯누렇게 타들어갈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듯 향수 어린 공허감에 젖은 채 산수유, 은사시, 하고 나무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러보았다.
극도의 불안이 지나간 후 남자에게 남은 것은 긴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남자와 남자의 비좁은 공간, 그리고 낡은 사층 건물을 통째로 휘감아버린 채 저 보이지 않는 광대하고 짙푸른 지평선과 평원 속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오랜 병석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남자는 복도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습습한 공기가 맨살에 감겨왔다. 높고 뾰족한 건물들은 안개 속에 절반쯤 형체를 감춘 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고 채 일 킬로미터도 돼 보이지 않는 가시거리 속에서 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나래비로 선 좌판에서 흥정을 하고 편지를 배달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노란빛과 청색이 어우러진 대기는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해질녘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두운 구름을 뚫고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박명의 하늘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간도 계절도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이 몹시 익숙하다는 것에 남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흐릿한 광채와 습기가 남자의 몸을 에워쌌다.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의 팔과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산수유나 은사시나무처럼 손끝 발끝부터 서서히 누렇게 고사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수모와 고통만이 감옥은 아니었다.
남자는 진열대 가장 위쪽에 놓여 있는 시계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로렉스 시계 하나를 꺼냈다. 금빛 시계는 로렉스만의 정교한 왕관 모양과 열두 시와 여섯 시 방향으로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 시계는 남자가 보유하고 있는 시계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것이다. 육 개월인 유전기간이 지난 건 벌써 몇 달 전이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로렉스 시계는 충격이나 방수기능이 뛰어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계는 아직 로렉스만한 것이 없고 업소에서도 가장 높이 치는 게 바로 로렉스 시계다. 로렉스 시계를 차고 난 남자는 약간 우쭐한 기분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반지 하나도 제대로 살 줄 모르는 카페 여자가 이 시계의 값어치를 알아봐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전당포 철문을 굳게 닫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뜨개옷의 한 코가 툭툭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급습하기 시작한 습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한 코 한 코 툭, 투르륵 풀어져 급기야는 젖은 실뭉치가 된 채 길바닥에 나뒹굴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 밑의 안개는 사층에서 내려다본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안개는 불타는 나무처럼 이글거리는 짐승의 젖은 눈동자처럼 속수무책으로 켜켜이 전신을 육박해오고 있었다. 남자는 옷 앞섶을 꽉 여미곤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음을 빨리 옮겨놓았다.
여자의 의상은 약간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차라리 교복을 차려입거나 아니면 밤무대 의상 같은 요란하고 번쩍거리는 옷을 입었더라면 되려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굽이 낮은 단정한 까만 구두에 두꺼운 감색 투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여자가 일층 계단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 쪽을 돌아다봤다. 외설스런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선을 보러 나가는 단정한 여자처럼 여자는 예의 그 어깻죽지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걷는 듯한 걸음걸이로 이층까지 타박타박 올라왔다. 여자의 옷차림이 교복이나 앞섶이 푹 패인 옷을 입은 것보다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남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 카페가 생긴 것은 일 년 전이다. 남자는 여자가 이곳에서 일하기 전부터 이곳에 와 맥주나 뜨거운 차를 마시곤 했다. 여자가 오고 난 후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혼자 온다는 것뿐이다. 카페는 일이층을 다 텄다. 외곽을 따라 테이블을 둘러놓고 천장을 높게 만들었다. 천장엔 그네가 매달려 있다. 매일 밤 아홉 시가 되면 여자는 두 시간 동안 그네를 탄다. 카페 손님들은 여자가 그네를 타는 동안 여자 밑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여자를 올려다보기도 한다. 애초부터 거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짐짓 딴전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다. 남자는 후자 쪽이긴 하지만 오늘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행이 지난 감색 투피스를 입긴 했지만 작은 체구에 약간 통통한 그녀는 남자 눈에는 잔뜩 색깔을 입힌 부활절의 달걀처럼 화려하게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던 여자가 이쪽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자 쪽을 돌아봤다. 혹시, 나를 기억합니까? 남자는 묻고 싶었다. 여자는 낯선 행인을 쳐다보듯 남자를 일별했다. 그리곤 마저 계단을 올라가 단 한순간에 평균대를 뛰어넘어야 할 사람처럼 숨을 고르더니 훌쩍 그네에 올라탔다. 야야, 저 여자 좀 봐라! 카페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층에 앉아 있었다. 아래층에 앉아 있으면 거뭇한 여자의 아랫도리만 보인다. 남자는 될 수 있으면 여자와 더 가까운 위치에 앉고 싶었다.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는 한순간 아주 가까워졌다가 아주 멀어지곤 했다. 그 반복 속에서 남자는 차츰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여자도 그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는 뜨거운 차를 후륵후륵 마셨다. 조도가 더 낮아진 카페는 다시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쾌락과 유희의 순간을 지나보낸 듯 다시금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 외에 실내는 침묵 속에 잠겼다. 여자는 나비처럼, 아니 나방처럼 팔랑거리며 카페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찰나의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이란 것은 한 올의 말총으로 매단 다모클레스의 칼 밑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쾌감과 싸늘한 생의 절연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깨닫곤 허리를 바싹 곧추세웠다. 여자는 가느스름한 눈을 크게 뜨고 어디 먼 곳에 시선을 붙박아두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지점은 분명 여기는 아닐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아래턱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안개는 카페 안까지 진군해왔다. 남자는 손바닥 안에 뭉쳐지는 습기를 꽉 모아쥔 채 순금의 반지를 손에 넣었을 때처럼 그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여자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숨을 들이마셨다. 남자는 여자의 입과 그녀의 깊은 폐 속으로 한없이 밀려들어가고 있는 미세한 물방울들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여자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남자는 의아했다.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 여자의 얼굴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봐야만 전체가 제대로 보이는 섬세한 모자이크처럼 불분명하고 흐릿하게 보였다. 여자가 이쪽으로부터 멀어질 때, 남자는 비로소 여자의 뚜렷한 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남자는 눈을 크게 벌리곤 멀어질 때 되려 가까워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고 또 보았다.
열한 시가 되자 여자는 구르던 발을 멈추고는 그네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녀는 천장에서 어깨를 잡아올리는 듯 상체를 빳빳하게 세운 걸음으로 두 시간 전에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갔다. 자칫하면 여자는 그대로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이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여자가 직원외금지, 라고 쓰여진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카페 밖, 어두운 골목 모퉁이에서 여자를 기다렸다.
안개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듯, 아니면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버린 안개의 집요함에 체념을 한 것인지 남자는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낯선 동네를 한참이나 걸어다녔다. 그 낯선 곳에서 남자는 길을 잃었다. 남자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희고 붉은 간판이 안개 속에서 간신히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손목에 차고 있던 로렉스 시계를 풀어 손바닥 안에 움켜쥐었다. 남자는 길앞잡이 밤벌레처럼 반짝거리는 전당포 간판 조명을 따라 건물 안으로 쓱 기어들어갔다.
낮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초조해진 남자는 기상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떨어진 간장을 사기 위해 슈퍼로 갔다. 하늘을 쳐다보지도 행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슈퍼에서 돌아온 남자는 사온 식료품들을 정리하다 말고 정작 간장은 사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면과 소금, 참치 캔 등을 창구 앞에 죽 늘어놓고 바라봤다. 남자는 소금 봉지를 뜯어 거꾸로 흔들어보았다. 유리 창구 앞과 바닥에 쏟아진 소금이 진열대의 보석들처럼 반짝거렸다.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끝으로 소금을 찍어먹었다. 마른 손 끝에 소금이 묻지 않자 남자는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축축해진 손바닥 안으로 소금이 가득 묻어났다. 남자는 아무 데나 퉤퉤 침을 뱉고 물뿌리개로 사방에 물을 뿌려댔다. 습한 냄새가 풍겨났다. 남자는 자신의 아래께가 봉지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방울들은 금세 말라버렸다. 남자는 봉지처럼 푹 꺼져버렸다. 어제 아침, 안개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전당포에 오는 손님들에게 남자는 어느 때보다 친절했다. 장물을 갖고 오는 사람들과도 새로 거래를 시작했다. 손님이 뜸한 오전 시간에는 맞은편 노래방에 가 혼자 노래를 불렀다. 점심시간엔 노래방 주인과 자장면을 시켜먹고 커피를 배달해 마셨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따금씩 악기들의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그 먼 섬의 종소리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희미한 소리들이 이명처럼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한밤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발가락을 오그린 채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든 척했다. 손님이 다소 늘기도 했다. 일상은 반복되었다. 그러나 남자는 예전과는 분명 뭔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하고 무난한 날씨가 이어졌다. 남자는 궁지에 몰린 듯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남자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뜨거운 햇살이 남자의 얼굴로 쏟아져내렸다. 남자는 기겁하듯 얼른 창문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다시 기웃기웃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보았다. 한 점 구름 없는 하늘로 점처럼 작은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새로 씻어낸 듯한 건물들의 반짝거리는 유리창들, 손을 베일 것 같은 외곽의 형태들이 낯설게 보였다. 때없이 피어난 봄꽃처럼 창밖은 불과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 남자를 놀라게 했다. 남자는 청명한 하늘을 호선의 무지개처럼 두른 청색과 노랑과 붉은빛, 그리고 거리의 간판과 버스와 행인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생경한 빛 속에서 알몸을 드러낸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빛은 만지면 만질수록 부드럽고 둥글게 뭉쳐지는 물기가 아니라 수천 개의 바늘이 맨몸에 와 꽂히는 느낌이었다. 색채의 찬란함이 주는 무한한 공포 속에서 남자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비상구를 찾듯 남자는 허겁지겁 카페 여자를 만났던 그 밤을 기억해냈다.
여자의 얼굴은 그네를 타고 가까워졌을 때처럼 윤곽이 흐릿했지만 남자는 안심했다. 여자에게도 남자의 얼굴은 그렇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짙은 밤안개 속에서 남자는 용기를 냈다. 대화가 끝났을 때도 문양화(紋洋畵)의 일부처럼 희미한 채로나마 여자는 남자에게 지울 수 없는 무늬로 각인되었다.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누, 누구세요?
……!
거기 얼굴이, 잘 안 보여요.
여자는 말을 더듬었다.
그쪽 얼굴이 잘 안 보이기는, 나도 마찬가집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켰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전당포 남자를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했다.
그 허공 속에서 그네를 탈 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두껍고 광대한 구름의 무리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처럼 안개가 여자와 남자 사이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막의 뒤편에 몸을 가리고 있을 때처럼 남자는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여자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남자는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이 여자에게 보이지 않을까봐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북구의 민요처럼 슬프고 조용했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를 듯 한쪽 팔을 허공 속으로 치켜올렸다. 발짝 소리가 났다. 남자는 여자가 안개 속을 뚫고 한 걸음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팔목에 찬 금장 로렉스 시계가 번쩍 빛을 발했다.
난, 이제 거긴 다신 안 갈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남자는 여자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아직 뭔가 맡기고 찾아갈 게 있다는 건 다행한 일 아닙니까.
……
농밀한 안개가 입김처럼 뜨겁게 다가왔다. 남자는 그러다가 여자의 얼굴이 아주 보이지 않게 될까봐 초조했지만 그것이 막이 걷히듯 확 사라질까봐 더 두렵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있고 중요한 건 그 틈을 없애는 게 아니라 지켜나가는 것이라면 그 순간 남자는 여자와 자신 사이의 틈을 안개가 대신 채워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네를 타는 여자는 너무 높은 곳에 있고, 여자는 안개를 안개라 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꿈결인 양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둠과 안개 속에서 남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다 지난 일이라는 걸, 남자는 믿을 수 없다.
카페에 다시 가볼 요량으로 남자는 철문을 잠갔다가 도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 또한 안개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수천 마리의 말 떼가 이마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깊은 밤이었다. 보안장치가 왕왕 울리고 있었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철문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이쪽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기척도 없었다. 거기, 누구요? 자리에 도로 눕던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썩은 냄새를 풍기며 한가득 물이 고여 있는 개수대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물이 싱크대 밖으로 넘쳐흘러 발등을 적셨다. 수챗구멍 속으로 더 깊이, 더 밑으로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크륵, 크르륵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뿌리를 뽑듯 마지막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확 빼냈다.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딸려나왔다. 죽은 자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 사람처럼 남자는 진저리를 치며 손을 털어냈다. 갑자기 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물이 개수대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건 안개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구들장을 뚫고 엄지손가락만한 새순 하나가 돋았다. 남자는 그게 씀바귀나 금낭화 같은 야생화 종류일 거라고 짐작했다. 연둣빛 새순들은 방바닥 전체를 빽빽이 채우며 쑥쑥쑥 돋아났고 눈깜짝할새에 남자의 허리만큼 자랐다. 남자는 허겁지겁 지붕 위로 기어갔다. 새순은 이제 새순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바뀐 낯선 꿈처럼 수천 그루의 나무 둥치로 변해 있었다. 지붕이 확 뚫리면서 나무들이 솟구쳐올랐다. 지붕 한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남자는 곤두박질치며 땅으로 떨어졌다. 집 한 채를 통째로 잠식해버린 바오밥나무들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남자는 눈앞이 희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집을 뒤덮고 있는 것은 설원의 폭풍처럼 맹렬한 기세로 회오리치며 차오르고 일어서는, 야성의 힘으로부터 거침없이 밀려나오기 시작하는 안개의 무리들이었다. 남자는 오그린 발가락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한 군데 젖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다시는 잠들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전당포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는 금은방으로 갔다. 반지를 고르기 전에 남자는 망설였다. 청금석 반지를 사고 싶었고 루비반지를 사고 싶었다. 사파이어 종류인 청금석은 금빛이 도는 짙푸른 색깔의 단단한 돌이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사랑이 싹트게 해주거나 기쁨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기쁨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깊은 신뢰를 주며 삶의 용기를 가져다준다는 전설의 돌. 그건 십이월의 탄생석이다. 남자는 여자의 생년월일을 기억한다. 칠월의 탄생석인 루비를 만지작거렸다. 강렬한 붉은 빛깔의 루비는 그 빛깔의 정도에 따라서 첫 번째 피, 혹은 황소의 피라고 불린다. 그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은 짙고 맑고 밝은 비둘기의 피라고 불리는 종류다. 전당포 남자는 자신이 보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게 그때처럼 유용하고 기쁜 적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청금석 반지나 비둘기의 피, 그리고 순금의 반지는 남자의 전당포에도 있긴 했다. 여자에게 새것을 사주고 싶다.
남자는 포장된 상자곽을 가슴팍 주머니에 찔러넣고 금은방을 나왔다. 금 시세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으나 남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직 순금만큼 현금으로 즉시 교환하기 쉬운 건 없다. 언제 다시 여자가 전전긍긍하며 전당포를 찾아다니게 될지 그건 남자도 여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남자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여자에게 순금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줄 것이다. 어쩌면 여자가 투명한 햇빛 속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순금의 투명하고 찬란한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전당포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 뜻밖의 정답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기대와 일념 속에서 투명한 유리병 두 개를 더 샀다.
유리병의 표면은 매끄럽고 균일했다. 작은 유리병을 큰 유리병 안으로 집어넣었다. 남자는 팔팔 끓인 물을 팔십 도로 식혔다. 유리병 하나에 더운물을 채워 병 전체가 따뜻해지도록 만들었다. 유리병이 따뜻해진 것을 확인하곤 유리병에 채웠던 물을 한 뼘쯤만 남기고 쏟아버렸다. 병 입구에 얼음덩어리를 올려놓았다. 남자는 어림짐작으로 한 삼십 분쯤 흘렀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분쯤 더 지났을 무렵부터 바깥쪽 유리병에 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고 그걸 발견한 지 삼사 초쯤 더 지났을 땐 안쪽 작은 유리병 내부로부터 서서히 김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자는 얼굴 가까이 유리병을 끌어당겼다.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남자의 입김이 유리병 표면에 성에꽃처럼 피어났다. 남자는 병을 도로 밀어놓고 멀찍이 떨어졌다. 작은 유리병 안에 생기던 뿌연 김이 한껏 피어오르지도 못한 채 사그러들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자는 새로 물을 끓이고 유리병을 덥히고 물을 따라버리고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일을 반복했다. 한밤이 돼서야 남자는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해냈다. 너무 뜨거운 물에 의해서는 김서림 때문에 막 생기기 시작하는 안개의 관찰이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병을 데울 때는 물을 병의 입구까지 채워 전체적으로 충분히 따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을 말이다. 작은 유리병 안으로 안개들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걸 남자는 열띤 눈으로 지켜보았다.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물방울들이, 그 미세한 물방울이 모여 이룬 안개의 무리가 내실 전체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물방울들은 남자의 뺨으로 유리 칸막이 창구로 사방 벽으로 다닥다닥 흥건하게 달라붙었다. 한데 뒤엉킨 물방울들은 한줄기 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남자는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벽에 찰싹 달라붙어 개처럼 핥아댔다.
맑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창고에 처박아둔 악기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보안장치가 울리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의 귀를 자꾸만 두 손으로 잡아당겨 늘렸다가 비틀어버리기도 했다. 창밖은 내다보지 않았다. 오래전 이곳에 왔던 한 여자와 또 두어 명의 사내들이 맡겨두었던 노트북과 카메라와 진주반지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오는 발짝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귀는 흘러내리기라도 할 듯 어깨 밑으로 축 늘어졌다. 신문을 읽고 잠을 자고 녹슨 철문을 닦았다. 날카롭게 날을 민 도루코 면도기로 매일 수염을 깎고 치렁거리는 귀를 싹둑 잘라냈다. 한층 예민해진 귀는 아주 먼 데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도 다 감지했다. 현악기들의 울음소리는 자박자박 가슴을 밟아대듯 애절한 데가 있었지만 남자는 창고로 내려가지 않았다. 창고로 내려가는 길은 그 먼 곳의 호수를 혼자 찾아가는 일 만큼이나 멀고 아득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여자도 알고 있는 호수일지도 몰랐다. 그 호수의 작은 섬에는 흰 집이 한 채 있다. 그건 교회라고도 불리고 성당이라고도 했으며 어떤 이는 그냥 버려진 낡은 집이라고도 했다. 그 교회에는 소원의 종이라는 이름의 종이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배를 타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종을 치는 모든 이들은 바라던 소망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거길 가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짙은 안개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안개 속으로 한번 사라진 사람들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그 길을 떠난 사람의 안부를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섬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소원의 종이라는 전설을 남자는 기억할 따름이었다. 안개…… 남자는 다시 안개를 생각했다.
여자도 그걸 안개라고 부를 것인가. 남자는 자꾸만 반문했다. 안개는 지상에 내려온 구름이다. 땅에 서 있는 사람이 높은 산의 정상에 있는 미세한 물방울의 무리를 보면 그 사람은 그것을 구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주위의 안개일 뿐이다. 남자는 안개를 본다. 여자는 구름이라고 한다. 남자는 구름을 본다. 여자는 그걸 안개라고 말할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각각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이름으로 그것을 부를 것이다. 그것을 땅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이슬이라고 부른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이름을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남자는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이라 지칭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아주 그것이 되고 싶었다. 남자는 만약 여자가 그네에서 영영 내려오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았다. 남자에겐 안개인 것이 여자에게도 안개일 것이며 남자에겐 구름인 것도 여자에겐 안개가 될 것이다. 물방울일 것이다. 남자는 카페 여자가 그네에서 내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전당포는 안개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본 건 정말 안개였을까. 남자는 중얼거린다.
*
여자는 계단을 올라갔다. 긴 치마가 자꾸만 구두에 밟혔다. 넘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올라가 그네 한끝을 잡았다. 여자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 쳐다봤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네에 앉아 천천히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거리는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여자는 조바심치며 전당포가 있던 건물을 찾았다. 새로 반듯하게 지어진 사층 건물로 올라갔다. 전당포가 있던 자리에는 노래방 간판이 붙어 있었고 노래방이 있던 자리는 안과로 변해 있었다. 여자는 노래방 주인에게 전당포 남자의 행방을 물었다. 여자는 사내의 얼굴을 기억했다. 사내는 전당포 맞은편에 있었던 바로 그 노래방 주인이었다. 노래방 주인은 그가 간 곳을 아무도 모른다 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밧줄을 꽉 쥔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밧줄은 아주 단단하게 고정돼 있었다. 두 다리로 허공을 탁 찼다. 일층에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들의 윤곽은 뚜렷하진 않았지만, 남자는 거기 있을지도 몰랐다. 밑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늘 한 뼘쯤 엇나가 보인다. 여자는 자신의 반지를 보관하고 있을 남자를 기다리기도 했고 기다리지 않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발끝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하체를 쭉 내뻗는다. 그런데 내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여자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안개 속에 서 있던, 아주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 남자는 전당포 남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를 만났었다는 유일한 증거일지도 모를 오래된 전표 한 장이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것을, 그 전표를 이제 막 계산을 치른 남녀가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것을 여자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남자는 여자에게 물었었다. 당신은 그네를 탈 때 무슨. ……나는, 나는 나비죠, 나는 비에요, 나는 눈이야, 나는 달이야, 나는 한줄기 바람, 나는 새. 생각을 하나요? 나는 구름, 나는 안개야, 나는 물방울. 여자는 어디에 있어도 남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한껏 큰소리로 외쳤다. 남자는 커다란 통에 팔팔 물을 끓였다. 여자는 아랫도리로 한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내실의 벽을 유리로 덧대고 안쪽에서 틀어막았다. 그네의 회전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남자는 천장을 뒤덮은 유리 위에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올려놓았다. 여자는 그대로 새처럼 높이 솟구쳐올라 산산이 부서지고 녹아내리고 증발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하나의 물방울이 되고 싶었다. 여자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남자의 방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여자는 두 다리를 힘차게 구른다. 개포동 전당포 남자는 안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