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후예
손정모
차바퀴 구르는 소리마저 드맑게 울리는 산골짜기다. 운전석의 현준은 힐긋 시계를 들여다본다.
새벽 3시 30분이다. 십여 분만 달리면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가슴이 마구 설렌다.
경남 산청의 지리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석불사(石佛寺). 20여 년의 세월을 산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머니인 윤 보살. 그녀는 사찰의 공양주 보살인 김 보살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마음을 닦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도반(道伴)이 된 터다. 빈한한 시골의 가정 형편으로 어릴 때부터 고생이 심했던 그녀다. 재산이라곤 없어서 종중산 기슭의 일부에 주거지를 마련한 상태다. 생계를 연명할 개인 소유의 논밭은 아예 없다. 그래서 종중 소유의 논과 밭을 경작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경작 대금으로 일정액을 종중에 넣어야만 한다. 윤 보살의 두 아들은 결혼하여 분가했다. 정동(鼎洞)의 현준의 생가에는 윤 보살만이 이따금씩 드나들 뿐이다.
지난날의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서였다. 호준과 현준은 둘 다 국립대학에 합격하여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둘은 일류 입시 학원의 강사로 취업했다. 호준과 현준은 3년의 시차를 두고 대학을 마쳤다. 그런 뒤에 호준은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현준은 학업을 계속했다. 세월이 흘러 현준은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교수가 되려는 인생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에서였다. 현준의 부모는 빚을 내어 들판에 비닐하우스를 세워 버섯류를 가꾸었다. 종중산에 널리 깔린 게 참나무였다. 참나무를 한 자 길이로 잘라 비닐하우스 내에 촘촘히 세웠다. 여기에다가 산림청에서 지원받은 버섯의 균주(菌株)를 이식했다. 실내 온도에 맞춰 주기적으로 물을 주어야 했다. 현준의 부모는 버섯뿐만 아니라 양식업에도 손을 대었다. 미꾸라지와 메기, 자라 등에 관련된 분야였다. 가난한 시골 여건에서 버섯과 양식업에 착수한 건 개선의 실마리였다.
현준이 진주의 G대에 조교수로 취직한 지는 불과 석 달째다. 미국의 UCLA에서 신소재 분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 2년만이다. 박사 후 수련 과정을 착실히 밟았던 탓이리라.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에 지원 서류를 G대학교로 보냈다. 그랬는데 곧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른다섯 살의 젊음이 그의 얼굴에 파도처럼 출렁인다. 일요일 새벽의 청정한 산기운에 몸을 적시며 그가 차에서 내린다.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찰 앞에까지 도로가 잘 포장된 상태다. 사찰 앞으로는 남강의 지류인 경호강(鏡湖江)이 굽이쳐 흐른다. 경호강 건너편의 높이 치솟은 산악 위에는 누각도 세워져 있다. 지리산 자락의 풍광에 취했던 선현들이 세운 것이리라. 경호강의 가파른 물살이 일으키는 물보라가 현준의 시선을 자극한다. 뭔가 강력한 힘을 일깨우는 정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서늘한 느낌에서 일어나는 생동감이랄까? 경내에 들어서자 향내가 은은히 밀려든다. 대웅전에서 피운 향불에서 흘러내린 것이리라. 천왕문을 지나자 왼쪽의 범종각(梵鐘閣)을 바라본다.
그의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잡힌다. 반가움이 뭉클 가슴으로 밀려든다. 언제나 그립던 어머니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사망한 뒤로 20년 세월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다. 그의 아버지가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때. 그 당시의 현준은 중3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갑이다. 힘들었지만 언제나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던 그의 부모였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호준과 현준은 어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전력을 다해 공부에 매진했다. 어떻든 합격만 되면 부업을 통해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할 계획이었다. 목표대로 형제는 자력으로 대학을 마치게 되었다. 현준이 과거의 부모의 모습을 잠깐 떠올리자 가슴이 알싸해진다. 그러면서 어서 그의 어머니에게로 다가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경제적인 궁핍감에 시달리던 어릴 때의 환경이었다. 그랬기에 부모와의 대화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가슴속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서려 있었다. 남들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부모를 대한 기억이 좀체 없었다.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불안감은 경제적인 궁핍으로부터 야기되는 거였다.
현준이 빠른 걸음으로 종루(鐘樓)로 다가서며 그의 어머니를 향해 말한다.
“어머님, 잘 주무셨어요?”
“인호 애비 왔구나! 이렇게 일찍 오다니!”
윤 보살의 얼굴이 환해지며 종루에서 내려서며 현준을 얼싸안는다. 현준도 그의 어머니를 소중히 안고는 숨결을 추스른다. 윤 보살이 현준을 요사채의 객방에서 기다리라면서 그의 손을 이끈다. 요사채는 공양간과 선방과 승방 및 객방까지 어우르는 사찰의 건축물이다. 윤 보살은 종을 막 울릴 참이었다고 말한다. 그 말에 현준이 윤 보살의 손을 살며시 밀어내며 종루에 오른다.
종루에 올라서는 순간. 사원 밖 200여 미터 거리에서 굽이쳐 흐르는 경호강(鏡湖江)이 보인다. 청정하기 이를 데 없는 물결이다. 산청의 지리산 자락의 풍광은 누구든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빼어나다. 골짜기를 타고 물안개가 엷은 망사처럼 흩날린다. 종루에 올라선 순간에 세상을 초월한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다. 굽이치는 강으로 기울어진 계곡의 언덕에는 관목들과 억새들이 널브러져 있다. 수목들의 선명한 색조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줄 정도다. 새벽 먹이를 구하려는 물새가 강변을 날기 시작한다. 파랗게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 수시로 흩날렸다가 소용돌이치는 뽀얀 산안개. 가슴 서늘할 정도의 청량한 공기. 풋잠을 설친 것이 안타까운지 수꿩이 꺽꺽대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짙고 푸르고 알록달록한 수목의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취해 춤을 춘다. 가만히 바라만 봐도 가슴이 저절로 벅차오를 정도이다. 잠시 풍광에 취했던 현준이 입을 연다.
“새벽에는 스물여덟 번을 울리는 거죠?”
“그래, 맞아. 반면에 저녁에는 서른세 번을 울리는 거래.”
응답한 뒤에 윤 보살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얼굴 표정 가득 현준이 대견스럽게 비치는 듯하다. 그러더니 윤 보살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인다. 그녀의 눈빛에 꿈꾸는 듯한 행복한 표정이 남실댄다. 현준은 숨결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타종 막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종루의 천정에 쇠사슬로 묶여 연결된 막대기다. 이윽고 타종 막대가 범종에 닿으면서부터다. 범종의 장중한 종소리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마치 도도한 강물같이 흘러내리는 종소리다. 강한 울림이 산야를 휘돌아 새벽을 뒤흔든다. 현준이 열심히 종을 치고 있을 때. 윤 보살은 눈감은 자세로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십여 분의 시간의 흐른 뒤다. 타종을 마치고 현준이 종루에서 내려선다. 수고했다는 표시인 듯. 윤 보살이 현준을 감싸 안는다. 현준도 윤 보살을 감싸 안고는 새벽의 정취에 젖어든다. 한없이 따사로운 정감이 강물처럼 모자(母子)의 가슴으로 굽이친다. 눈부신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때처럼 현준의 가슴이 알싸해진다. 왠지 눈시울에 금세 눈물이라도 비칠 듯한 심정이다. 그만큼 마음이 청정하고 순수해졌음을 뜻한다.
“어머님, 늘 보고 싶었어요.”
“오냐, 인호 애비야.”
어려서부터 줄곧 궁핍한 생활에 쩔쩔매던 그의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를 줄곧 봐 온 현준이 아닌가? 그런 어머니로 인하여 현준의 어머니에 대한 정감은 각별한 터다. 언제 어디서건 어머니를 대할 때는 정답고도 경건한 자세의 현준이다. 진심으로부터 형성된 경건함이기에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다. 또한 평소의 윤 보살의 거동도 단아한 품격으로 일관된 상태다. 그런데 과거의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탓이리라. 윤 보살은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못 한 상태다. 스스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문자를 깨친 거다.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을 극복한 윤 보살이다.
일요일인 그 날은 산신제(山神祭)를 올리는 날이다. 산청 주위의 많은 신도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산신제를 올리는 날엔 분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준은 어머니를 격려하기 위해 산사를 찾았다.
현준의 생가는 진주의 개양역(開陽驛) 맞은편인 어현곡(魚現谷)의 동편 산기슭에 있다. 동편의 거대한 산악이 현준의 종중산이다. 산봉우리로부터 솔숲이 빽빽이 깔려 울창한 삼림을 이룬다. 산기슭 발치 부분에는 너른 영역에 걸쳐 죽림(竹林)이 펼쳐져 있다. 죽림 앞에는 밭과 논이 펼쳐진 평야 지대다. 아득한 평야 건너편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다. 평야와 산야의 접경지대를 따라 동서로 철도가 내뻗쳐 있다. 어현곡엔 원래부터 인가가 적은 편이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있어도 사람 구경이 힘든 곳이다. 마을 사람들의 경우에 인근 동네의 사람들과의 교류는 잦은 편이다. 어현곡 마을의 종중산의 발치. 거기는 확실히 일반적인 산기슭의 형태와는 좀 다른 형상이다. 발치와 평야가 접하는 부분쯤에서다. 해도(海島)처럼 생겨서 봉긋하게 솟아서 작은 봉우리가 돌출한 언덕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원형의 봉우리의 직경은 50여 미터에 달한다. 봉우리의 높이는 40여 미터에 이른다. 마치 봉분 같기도 하고 해도(海島) 같기도 한 지형의 언덕이다. 그 작은 산봉우리의 지형은 절해고도(絶海孤島)를 엄청나게 닮은 형상이다. 그 언덕의 남쪽 기슭에는 죽림이 펼쳐져 있다. 그 죽림 속에 자리 잡은 게 현준의 생가다. 거기에는 이제 어머니만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이다. 어머니마저도 주로 절에 머물기에 생가는 거의 빈집처럼 여겨질 정도다. 집을 점검하려는 차원에서 호준과 현준의 가족이 이따금씩 다녀가는 정도다.
석 달 전이었다. 대숲 속의 뒤란에서 현준이 땅을 파게 되었다. 숱하게 비가 내린 뒤에 손질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에서 흘러내린 토사물이 수북하게 쌓인 상태였다. 토사물을 제거하느라고 삽을 들었다가 땅을 넓게 판 거였다. 그러다가 청동 그릇(靑銅盒)을 발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청동합인 줄도 모른 채 지냈다. 그런 얼마 후였다. 가야 시대의 유적을 찾느라고 떠돌던 G대 대학생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곧바로 청동합임을 알아챘다. 정확한 고증을 위해 G대 사학과 교수의 자문까지 받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유적 탐사팀들이 생가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현준의 허락은 받고서였다. 생가 주변의 논과 밭. 심지어는 대숲의 곳곳마저도 파헤치곤 했다.
며칠간의 작업이 부단히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다. 대숲이 우거진 원통형 언덕의 하단에서였다. 원통형 언덕의 남쪽 하단(下端)에 현준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현준의 생가 뒤뜰에 해당하는 언덕의 아래쪽에서였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사학과 학생들이 금동관(金銅冠)의 파편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엔 사학과 교수 셋이 생가를 찾아왔다. 교수들은 조심스레 어떤 추측 내용을 현준에게 털어놓았다. 집 뒤로 솟구친 원형의 언덕은 가야시대의 왕릉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청동합(靑銅盒)과 금동관(金銅冠)은 가야시대 왕족의 대표적인 부장품이라고 했다. 교수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 넘길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현준은 문화재청에도 연락을 취했다. 며칠 뒤였다. 문화재청에서도 사람을 보내어 탐사 작업에 합류했다. 언덕의 서쪽 측면을 비스듬히 굴삭기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묘혈의 구조가 발견되기만 하면 되는 터였다. 굴착을 시작한 지 나흘만이었다. 석관으로 연결되는 묘혈이 발견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무덤의 축조시기를 알려주는 관련 명문(銘文)까지 발견되었다. 그 때부터 학계가 들끓기 시작했다. 가야시대의 왕조를 입증할 결정적인 유적임에 틀림없다는 거였다. 그런 중에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금동관의 본체가 발견되지 못한 점이었다. 명문까지 발견된 상황에서도 금동관이 드러나지 않은 터였다.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던가? 이것을 제시할 만한 근거는 금동관에 새겨진 문자에 달려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탓이었으리라. 탐사작업은 정부에 의해 의도적이고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한 달가량의 탐사작업을 지속한 뒤였다. 그때까지도 금동관의 종적은 끝내 묘연하기만 했다. 정부는 마침내 탐사작업을 종료했다. 더 이상은 단서를 찾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탐사작업이 종료된 지 4주째에 접어들던 날의 어스름 때였다. 2명의 낯선 여인들이 생가를 방문했다. 50대의 뚱뚱한 여인과 20대 초반의 늘씬한 아가씨였다. 여인들은 명성이 알려진 무녀(巫女)와 그녀의 제자였다. 기차를 타고 마을 앞을 지나던 중이었다. 여인들은 돌연히 어현곡(魚現谷) 마을에서 내뻗는 강한 음기(陰氣)를 느꼈다. 여인들은 즉시 음기의 근원을 헤아려 보았다. 건너다보이는 마을의 농가(農家) 주변에서 발생하는 기운이라고 판정했다. 여인들에게는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발걸음을 되돌려 어현곡을 찾은 터였다. 어현곡의 정동 마을에는 때마침 현준이 생가에 들러 머물고 있었다.
여인들은 현준을 찾아와 통성명을 나누었다. 무녀는 매스컴으로 잘 알려진 박성혜였고 제자는 신혜림이었다. 잠시 성혜의 눈길이 둥그런 언덕의 북쪽 사면으로 이끌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덩달아 혜림과 현준도 성혜를 따라갔다. 마침내 둥그런 언덕의 북쪽 사면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붉나무와 칡덩굴이 지천으로 뒤얽혀 있었다. 그래서 평소 때엔 사람의 발길이라곤 닿지 않던 곳이었다. 북쪽 사면의 물이끼가 낀 땅의 언저리를 성혜가 눈여겨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느껴지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성혜가 눈을 감은 채였다. 자꾸만 그 주변 일대를 오락가락하며 탐색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그러다가 성혜가 현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금만 땅을 파 보자는 얘기였다. 이미 정부에서는 탐사 작업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현준은 다시 땅을 파헤치겠다는 데에 약간 심기가 불편했다. 발굴한 뒤의 땅을 원위치로 환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탐사 업체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말끔히 마무리를 해 주는 탓이었다. 하지만, 시골이라 경작하는 농작물이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힘들여 가꾼 농작물에 피해가 생기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리하여,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명한 무녀의 말이라면 분명 어떤 단서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탐사에 있어서 의외로 어떤 수확을 건질 수도 있으려니 여겼다. 그래도 마지못한 듯 성혜를 향해 말했다.
“직접 여기까지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뭔가 근거가 있으리라고 믿어요.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중장비의 사용료는 제가 지불할 테니까 굴삭기를 좀 불러 씁시다. 또한 훼손될 농작물의 대금까지도 제가 계산해 드릴게요. 마침 저기에 경지 정리를 하는 굴삭기가 보이네요. 그 사람을 좀 불러서 이 근처를 좀 파 봅시다. 그러면서 현장을 좀 지켜보는 게 어때요?”
현준은 고개를 끄떡이며 경지 작업 중인 굴삭기를 향해 걸어갔다. 굴삭기의 주인은 동네의 주민이었기에 현준의 제안에 선뜻 응했다. 굴삭기의 날이 두어 차례 흙더미 속을 드나들었을 때였다. 예상치 못했던 인골들이 몇 무더기 발굴되었다. 인골들의 곁에는 놀랍게도 뼈대만 남은 탄약통이 나뒹굴었다. 6?25 전란 때였다고 했다. 언덕 어디엔가 방공호가 있었다는 얘기를 현준이 들은 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나 듣던 마을 사람들의 얘기에서였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에서였다. 유엔군의 공중 폭격에 못 견뎌 지리산으로 인민군들이 퇴각할 때였다. 인민군의 잔당이 언덕 주변에서 기총 소사를 당했다는 거였다. 현준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성혜는 크게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전쟁이 죄 없는 목숨을 많이도 죽였구나. 이 주변에 가득 서린 음기(陰氣)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이 음기는 언제부턴가 언덕이 평야의 물줄기를 끊으면서부터 생긴 것이에요.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 중에도 음기의 피해자가 많았겠는데요?”
무녀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현준의 가슴이 뜨끔했다. 생가 옆집 남자인 1935년생인 오준택의 오른쪽 다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현준의 생가 아래편으로 10여m의 거리에는 이웃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준의 생가와 이웃집을 제외하고는 인가가 한없이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즉, 1km의 반경 내에는 다른 인가(人家)는 없는 동네였다. 현준이 그의 어머니인 윤 보살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동란이 일어나던 그해의 11월이었다. 10리가량 떨어진 호탄동에서 어현곡으로 오준택 일가족이 이사하던 날이었다. 방천(防川)길을 따라 오준택이 이삿짐을 나르던 중이었다. 호탄동에서 어현곡으로 진행하는 도중에는 두 갈래의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 지점에는 커다란 구덩이에 해당하는 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마침 웅덩이에는 물이 바짝 말라 있었다. 평소에 웅덩이 지점은 도보 통행로로 쓰이고 있었다. 호탄동에서 어현곡으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그 웅덩이를 지나야만 했다. 웅덩이는 평소에 거의 물이 흐르지 않았다. 우기 때에만 가득 물이 찰 뿐이었다. 그 날 따라 웅덩이에는 물이라곤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웅덩이 우묵한 지점에서였다. 초등학교 3 ∼ 4학년생으로 보이는 소년들 셋이 둘러앉아 뭔가를 두들겨대었다. 당시에 준택은 16살이었고 3살 위인 사촌형인 현택과 이삿짐을 날랐다. 거의 마지막 단계로 이삿짐을 나르던 무렵이었다. 수로의 교차점이자 보행로의 교차점이기도 한 웅덩이. 웅덩이 부근의 방천 언덕에 지게를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지게엔 등줄기의 땀이 배어 끈적대었다. 둘은 웅덩이 곁의 방천 언덕에 잠시 지게를 받치기로 했다. 피로가 좀 회복되자 막 일어날 참이었다. 소년들 셋이 두들기던 시커먼 쇠뭉치에서였다. 느닷없이 섬광이 일며 산악을 뒤흔들 만한 폭음이 울렸다. 바로 그 때 뭔가 격렬하게 휭휭 날아올랐다. 그러던 찰나에 현택과 준택은 날아드는 쇳조각에 맞아 실신해 버렸다. 폭발음을 듣자마자 인근의 아랫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소년 셋이서 두들기던 쇠뭉치는 불발 상태로 땅에 묻혔던 포탄이었다. 소년들이 돌멩이로 두들기자 뇌관이 터지면서 폭발한 거였다. 소년들 셋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들로 해체되어 버렸다. 소년들로부터 네댓 발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던 현택과 준택이었다. 이들 사촌형제는 포탄의 파편을 맞고 실신했다. 이윽고 앞서 짐을 실어 나르던 준택의 부모에게까지 연락이 갔다. 준택의 부모가 현장에 닿았을 때에 준택과 현택은 피투성이로 나뒹굴었다. 곧바로 대나무와 가마니로 급조(急造)한 담가(擔架)로 현택과 준택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파편을 맞고 피를 많이 흘린 현택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졌다. 준택은 오른쪽 다리의 무릎 관절에 파편을 맞은 터였다. 오랜 수술 끝에 살기는 살았지만 끝내 무릎은 망가지고 말았다. 전시 상태라 진주의 국군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관절이 망가져 다리를 굽히고 펴지 못하게 된 터였다. 그 길로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게 된 준택이었다.
현준의 얘기를 차분히 듣고 나더니 무녀가 말했다.
“아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겼을 거예요. 이 모든 게 치솟은 언덕이 수맥을 차단하면서 생긴 일이에요. 봉분 형태의 언덕의 북쪽 경사면을 조금만 더 긁어냅시다. 그러면 수맥의 방향이 바뀌고 음기가 곧바로 분산될 거예요. 이런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재앙이 누적될 거예요. 시간이 급하니 당장 굴삭기로 해치워 버리죠.”
무녀에게는 저돌적인 추진력이 있었다. 굴삭기가 작업을 한 지 십여 분쯤 되었을 때다. 뭔가 예리한 금속음이 들리며 넓적한 금동제의 금속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의 모양은 직육면체의 형태였다. 금속 상자의 넓이는 가로가 30cm, 세로가 20cm가량 되는 크기였다. 상자의 표면은 금동(金銅)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자의 표면에는 용(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생동감이 잔뜩 느껴질 정도였다. 용의 발에는 여의주가 뚜렷이 쥐어져 있다. 상자 내에는 청동 방울과 청동 부채가 들어 있었다. 방울은 5가닥의 방사선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청동 부채는 합죽선(合竹扇)의 형태였다. 얇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채의 길이는 한 뼘 정도였다. 부채의 얇은 면마다 하늘로 치솟는 용의 모습이 담겨 있다. 주형을 떠서 청동을 녹여 부어 만든 듯하다. 용의 형상과 모양이 너무나 정교하여 실제 모습을 묘사한 듯하다. 가공의 동물을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처럼 묘사하는 재간이 놀라울 정도였다. 주물로 제조한 청동 절편으로 가지런히 이어 붙인 정교한 제품이었다. 부채의 명문에는 ‘대가야(大加耶)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부장품’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 제일의 왕국이었다. 그 마지막 왕이 도설지왕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후기 가야 연맹은 5세기 후반기부터 위세를 드러내었다. 대가야의 수도는 오늘날 경북 지방의 고령에 해당한다.
도설지왕의 명문이 발견된 직후부터였다. 굴삭기에 의한 발굴 작업은 조심스레 진행되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밀려들었다. 작업은 뒷날로 이어졌다. 이어서 이틀이 더 소모된 뒤였다. 언덕이라 간주된 곳에선 더 이상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 더 깊이 땅속을 파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무녀와 현준이 발굴 작업을 중단하려 할 때였다. 굴삭기 날에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뭔가 무더기로 올라왔다. 알고 보니 십여 구에 달하는 인골들이었다. 물기가 질척질척하게 묻은 검붉은 토양층에서였다. 썩지 않은 군복이 인골에 휘감겨 나왔다. 복색으로 판단컨대 인민군의 군복임이 틀림없었다.
현준은 마을의 이장인 67세의 장용철을 불렀다. 이장이 나타나자 현준과 무녀가 나란히 일어서며 이장을 맞이했다. 굴삭 작업도 잠시 중단한 채였다. 무녀가 이장에게 곧바로 질문했다.
“발굴된 상태로 보면 십여 구의 인민군들 시체 같은 데 틀림없죠? 혹시 인민군을 매장할 때에 주변에서 지켜본 적이 있으세요?”
“아마 지리산을 향해 달아나던 인민군들 같아 보여요. 당시에 마을은 임시 소거 상태였어요. 그래서 시신의 매장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거예요.”
이장이 당시를 회상하며 몇 마디의 말을 덧붙였다. 동란이 끝난 뒤에 들린 얘기들을 간추린 내용들이었다. 소거된 마을에 잠입한 인민군들을 향해 비행기의 기총 소사가 벌어졌다. 몇 차례에 걸친 기총 소사가 야단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국군의 수색대원들이 마을에 진입했다. 그 후에 인민군들의 시신들이 줄줄이 발견되었다. 그리고는 국군들에 의해 시신들이 어디엔가에 집단 매장되었으리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장이 뜸을 들여가며 얘기를 마쳤을 때는 땅거미가 짙었을 때였다.
이장이 먼저 자리를 떠나자 현준이 성혜와 혜림을 바라봤다. 무녀인 성혜가 현준에게 말했다.
“길도 멀고 시간도 이르지 않군요. 혹시 방 하나 마련해 줄 수 있으세요?”
현준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G대학 부근의 아파트 단지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내가 곧 건너오겠다고 응답했다. 차를 몰면 십여 분 정도의 거리밖에는 안 되었다. 현준의 아내가 도착하자마자 성혜와 혜림이 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현준 내외가 성혜와 혜림에게 저녁 식사까지도 제공했다. 현준 내외는 밤이 되어 사립문 밖의 밤나무 아래로 갔다. 밤나무 아래에는 목제 평상이 항시 놓여 있었다. 모기향을 피워 헌 병 위에 올려놓았다. 현준의 아내가 잠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내 현준의 아내가 해산물이 든 밀가루 전(煎)을 지져 내왔다. 구수한 냄새가 주위로 퍼지면서 일행이 평상 위에 둘러앉아 먹었다. 충분한 시골 후식(後食)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성혜의 제자인 22살의 헤림이 입을 열었다.
“왕의 무덤이 고령에서도 엄청나게 떨어진 이곳에서 발견된 이유가 뭘까요?”
현준이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신라군에게 추격당하여 여기까지 밀려와 살해당한 건 아닐까요?”
“보다 상세한 사료가 있으면 좋으련만 현재로선 추측할 근거가 솔직히 없어요.” 봉분의 크기를 따져 보면 결코 단시일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판단되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넷은 둘러앉아 열띤 토론을 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에야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재차 굴삭기로 파헤쳐 인골들을 마저 발굴했다. 발굴된 인골의 수는 열다섯 구에 해당했다. 인골들을 다 발굴한 뒤였다. 굴삭기가 조금 더 파 들어가자 물줄기가 마구 치솟아 올랐다. 무녀의 말대로 남쪽으로 흐를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경로가 변경되어 있었다. 국군들이 인민군을 매장하면서 인위적으로 물줄기를 바꿨음이 드러난다. 물줄기를 바꾼 원인에 대해 생각하자 석연히 추정되었다. 원래의 물줄기의 방향은 평야 지대인 남쪽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인위적으로 북서쪽으로 바꾼 원인은 시신들의 매장과 관련되었다. 물줄기를 시신들이 묻힌 곳으로 돌리면 부패가 촉진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탓으로 시신들은 거의 부패되어 있었다. 발견된 것은 썩지 못한 인골과 군복에 불과했다. 군복에 달린 명찰이 눈에 띌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은 애잔했다. 음기가 발산된 원인이 경로가 바뀐 물줄기 탓이라고 성혜가 주장했다. 현준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무녀의 신비한 예언력에 놀란 표정들이었다. 성혜의 신통력이 곧바로 입증되자 사람들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발굴한 인골은 추슬러서 시 당국에 인계했다. 시에서는 인수한 뒤에 절차를 밟아서 화장할 예정이라고 의사를 밝혔다. 인골이 나온 봉분 모양의 언덕은 더 이상 발굴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명문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발굴하여 고대 군왕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녀와 그녀의 제자가 나란히 정동(鼎洞) 마을을 떠난 뒤였다. 현준은 형인 호준을 불렀다. 호준은 Y고교 부근의 사천시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승용차로 도착했다. 현준은 형한테 집 뒤 언덕에 대해 자세한 내력을 들려주었다. 호준은 깜짝 놀라 가슴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562년에 신라의 사다함과 이사부 장군의 군졸들에게 추격당하여 패망했던 왕조. 대가야 마지막 제왕의 무덤이 시골집 뒤쪽 언덕이었다니? 산기슭에 바짝 붙어 볼록하게 섬처럼 치솟은 원형 모양의 언덕. 이 언덕이 가야 왕국의 무덤이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터였다. 왕족의 무덤임을 드러내는 명문에다가 부장품까지 발굴되지 않았던가? 발굴된 청동 방울과 청동 부채는 문화재청(文化財廳)에 등록하도록 되어 있다. 호준과 현준은 형제끼리 의논을 했다. 곧바로 문화재청에 등록 절차를 밟겠다고. 그랬음에도 호준 형제의 어머니가 잠시 등록을 보류하자고 했다. 법으로서는 곧바로 등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잠시 보류하자는 견해였다.
이유를 묻는 아들들에게 어머니인 윤 보살이 천천히 설명했다. 기차를 타고 가던 무녀의 눈에 띄도록 음기가 서렸던 곳. 거기가 지금껏 가족들이 살던 터전이었던 사실에 그녀가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껏 자식들을 교육시켰던가 싶어 무척 놀랐다. 기막힌 유적지인 줄도 모르고 마을에서조차 현준의 집터를 명당이라고 불렀다. 30여 호에 달하는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대학 진학자조차도 없었다. 이런 판국에 현준의 집에서만 대졸자가 나와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이런저런 내력이 결국은 제왕의 무덤에 집을 지은 덕이라고 여겨졌다. 예로부터 제왕의 유택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터다. 제왕의 유택 자리에 집터를 잡았으니 풍수설로는 최상의 자리라 여겨졌다. 비록 풍수의 달인인 도선이 태어나기 265년 전에 묘혈이 조성되었다지만. 그리하여 개양 보살은 현준에게 보류에 대한 사유를 말했다. 청동제 부채를 가을의 산신제 때까지만 갖고 있자고 했다.
산청의 석불사(石佛寺) 뒤쪽의 산자락은 지리산의 발치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석불사 뒤쪽 산록에는 식물의 종류도 풍부하고 자연의 풍광이 빼어나다. 전국을 떠돌던 객승들도 석불사에만 발을 디디면 며칠씩이라도 체류하고 싶어진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만 가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심정이다. 그래서 사찰로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현준이 요사채의 객방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다. 창 밖으로 토종벌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광경이 눈에 띈다. 벌들의 이동 현상을 지켜보다가 현준이 창 쪽으로 일어나 걸어간다. 이윽고 창에 이르러 시선을 멀리 밖으로 내다본다. 사찰 담장의 밖. 널따란 공지에는 관광버스 2대가 막 주차하고 있다. 흘깃 봐도 진주시에서 대절한 버스임이 명확하다. 현준의 어머니를 따르는 신도들이 차를 대절하여 왔음이 분명하다. 곧 이어 차에서 신도들이 줄줄이 내리고 있다. 대략 80여 명은 되어 보인다. 산신제에 작은 마을에서 그 정도의 인원이 왔다면 호응은 대단하다.
오전 7시 무렵부터 아침 공양이 시작되어 8시 무렵에 종료되었다. 9시 무렵부터 주지승이 신도들을 이끌고 가람의 뒷산을 타 오른다. 여러 마을에서 온 200여 명의 사람들이 등산에 동참한다. 현준은 윤 보살에게 갖고 갈 짐이 없느냐며 가만히 묻는다. 윤 보살이 활짝 웃으며 보따리 하나를 내민다. 현준이 미소를 지으며 보따리를 받아들고는 윤 보살의 뒤를 따른다. 대략 반시간이 지났을 때다. 일행은 뒷산의 중턱에 올라선다. 중턱에서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다. 느닷없이 현준의 시야를 막아서며 미소 짓는 여인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동 생가에서 만났던 혜림이다.
현준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여기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어요?”
혜림이 재차 생끗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교수님의 어머님과 저의 스승과는 잘 아는 분이시더군요. 무속계에서는 두 분의 교분이 상당히 친하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현준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는 혜림과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혜림이 고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는 교태를 부리듯 말한다.
“교수님은 결혼했어도 여전히 총각 같으세요. 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도 교수님은 제가 충분히 장악했을 텐데 아쉽네요.”
자연스레 농담을 하는 혜림을 바라보며 현준이 웃으면서 응답한다.
“산신이 혜림 씨의 말을 방금 다 들었거든요. 혜림 씨한테만 산신이 벌을 내릴지도 모르는데 겁나지 않으세요?”
둘의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 둘은 깔깔거리며 허리를 꺾는다. 시원한 산바람이 귓전을 스치며 청량하게 파고든다. 뒷산의 중턱에 올라서니 발 아래로 시원스레 개천이 드러난다. 개천은 곧장 내리 뻗어 경호강으로 합쳐지게 되어 있다. 개천의 길이는 거의 1km에 달해 보이고 폭도 7~8m에 이른다. 수량도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풍부한 편이다.
정확히 오전 10시가 되자 주지승이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연다.
“여러 신도님들,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먼 길까지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산신(山神)이란 천지 자연을 다스리는 신령님입니다. 산신제라는 것은 천지자연에 대해 경배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산신은 대자연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산신을 영접하려는 우리들의 마음 자체가 이미 산신입니다. 그리하여, ...”
주지승의 설법이 한동안 이어진 뒤다. 주지승이 목탁을 치며 천수경을 청아한 목소리로 암송하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된 부드럽고도 매끄러운 목소리가 골짜기를 적신다. 절제된 목탁 소리와 청아한 목소리. 세월의 몇 굽이를 단숨에 뛰어넘는 듯한 공허감이 바람결에 나풀거린다. 적어도 현준에겐 공허감으로 비친다.
‘왜 불경 소리와 목탁 소리가 공허감으로 느껴질까? 내 마음이 텅 빈 탓은 아닐까?’
현준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안간힘을 쓴다. 천수경을 듣는 순간에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며 급격히 가슴이 뛴다. 이전에 없던 일이라 여겨진다. 현준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곧게 편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 광대원만무애대비심(廣大圓滿無碍大悲心) 대다라니(大陀羅尼) 계청(啓請)’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으며, 넓고 크고 둥글며 막힘이 없이 크게 자비로운 마음을 지닌 관세음보살의 커다란 주문을 진심으로 불러들입니다.’
현준은 굳이 종교에 얽매이지는 않으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공학도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점에 있어서 편향됨이 없게 하려는 취지에서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관점을 존중하여 절에까지 겸허한 마음으로 왔다. 종교의 관점을 떠나서 마음을 정화하려는 측면에서 현준은 산신제를 지켜본다. 산신제에 임하는 승려와 신도들의 자세와 자신의 마음까지도 함께 관조한다. 그 자체가 커다란 수련이며 마음을 정화하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세상의 본질은 하나인데 관점이 달라 분규와 갈등이 생긴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마음의 정화 작업은 종교를 초월하여 중요하다고 여기는 현준이다. 신도는 아닐지라도 경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깊이 음미하고 싶은 현준이다. 광장에 늘어선 200여 명의 신도들을 현준이 눈여겨본다. 하나같이 경건한 자세로 의식에 임하고 있다. 잔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현준은 산신제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산신(山神)이란 특정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명확히 산신이 없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의 공전이며 자전이 일어나는 현상만 해도 간단한 이치가 아니다. 중력이 미치는 지구의 상공에선 물체가 곧바로 지표면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무겁다는 지구는 허공에 떠 있지 않는가? 그것도 그냥 떠 있는 것이 아니다. 1년에 한 번씩은 태양 둘레로 공전을 한다. 그뿐이랴? 24시간에 걸쳐서 1바퀴씩 자전까지 하는 기교를 부린다. 누가 이런 지구를 두고 오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지구가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공전 궤도를 허허로이 밟아 가지 않는가? 이를 두고서도 우주에는 신비로운 점이 없다고 할 것인가? 하찮은 자존심에 얽매여 신비로움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간교함이나 없다면 모를까?
현준은 다른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산신제에 참여한다. 주지승의 염불 선창에 따라 주문을 따라 외치기도 한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후련해지며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전신의 관절과 신경 마디에 맺혔던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기본도 모르면서 문장 분석을 한답시고 덤벼드는 객기(客氣) 같은 부자연스러움이랄까! 능동과 피동이 적재적소에 쓰이는지를 알아볼 만큼의 식견(識見)도 없는 답답함이랄까? 하여간 억지로 꿰맞춘 듯한 부자연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듯한 쾌감에 젖어든다. 온몸에 켜켜이 쌓인 듯한 답답함이 일시에 내풀리는 듯이 후련하다. 너무나 후련해서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환상마저 인다.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진언과 다라니를 주지승과 함께 반복하여 암송한다. 오랜 세월 도를 닦은 어머니의 맑은 영혼에 다가설 듯하다. 설혹 다가서지 못할지라도 어머니의 영혼의 맥놀이에 충분히 감응할 듯하다. 두 자식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노고가 많았을지 알 것만 같다. 그러면서 알싸한 감동의 물결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한다. 현준이 합장을 하여 마음속으로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효성을 다해 모셨던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진실로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서서히 현준의 눈시울에 뽀얀 물기가 맺힌다. 외롭고 힘든 환경에서 불심 하나로 자식을 키워 낸 어머니. 그 어머니가 승복 차림으로 주지승을 도와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주지승의 목탁 소리 사이로 간간히 흘러드는 청량한 요령 소리. 주지승과 불심으로 연결되는 어머니의 손동작으로 요령 소리가 울리고 있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만큼이나 청아한 요령 소리다.
산신제가 종료되기까지에는 3시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주지승의 불경 암송과 설법. 신도들의 진언과 다라니의 합송(合誦). 또 다시 주지승의 불경 암송과 설법. 주지승의 손짓에 따라 일시에 읊조려지는 진언과 다라니의 합송. 반복적인 절차였지만 면면이 새로운 의식이 펼쳐진 산신제다.
의식이 종료된 뒤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주지승과 신도들은 점심 공양을 위해 산사로 내려간다. 산사의 요사채의 공양간에서는 이미 점심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 김 보살과 윤 보살 및 주지승을 따라 신도들이 하산한다. 된장국 냄새를 비롯한 구수한 음식 냄새가 허기를 일깨운다. 신도들이 요사채의 공양간을 빠져 나와 사원 마당에서도 식사를 한다. 이래저래 식사 시간만큼은 누구한테나 반갑고 즐겁다. 식사를 나누며 서로 간의 소식도 묻는 한껏 화기로운 분위기다.
식사가 완료된 뒤다. 신도들을 실은 차량들이 차례차례 산사를 떠나기 시작한다. 사찰 마당에는 주지승과 두 보살과 현준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석불사는 태고종에 등록된 사찰이다. 공양주 보살인 김 보살이 사실상 사찰의 주인이다. 주지승은 김 보살에게 고용된 승려이다. 윤 보살은 김 보살과 도반의 관계이면서 무녀(巫女)이기도 하다. 김 보살에게는 남편도 있고 회사원인 자식도 둘이나 있다. 자식 둘은 객지 생활을 한 지 오래다. 김 보살과 윤 보살은 맥이 흡사하여 서로 잘 지낸다. 서로 지기가 된 처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윤 보살은 20여 년을 석불사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산신제를 지냈지만 이런 연유로 윤 보살은 절에 머물 예정이다. 현준이만 제일 마지막에 작별하게 된 터다. 김 보살과 주지승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다. 윤 보살은 현준을 배웅하러 산문 밖에까지 나온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운 때다. 오후 2시를 막 지난 시점이다. 현준이 활짝 웃으며 그의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님! 잠시 저랑 정동에 같이 안 가실래요? 너무 절에 오래 있어도 좀 따분하지 않으세요? 약간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윤 보살 역시 활짝 웃으며 응답한다.
“그래, 나도 수일 내로 한 번 들를게. 절에 있으면 일단 정신이 맑아지고 잔병도 없어지는 것 같더구나. 잠시 기다려 봐. 네게 줄 게 있어.”
윤 보살이 보자기를 풀더니 청동 부채를 꺼내 든다. 어현곡(魚現谷) 정동(鼎洞)의 뒷산 언덕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대가야의 마지막 임금의 유물이라는 청동 부채다. 청동 부채를 펼쳐 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산신제를 지낼 때까지만 문화재청에 등록하는 걸 보류하자고 했었지? 이제 산신제도 치렀으니 이걸 너한테 줄게. 처리는 네가 잘해 주리라 믿는다.”
잠시 말을 끊고는 절 앞을 힘차게 흘러가는 경호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지 나지막한 한숨까지 토해내더니 말을 잇는다.
“네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도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어.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잘 키워 보겠다던 양반이었는데 세월이 덧없구나. 아버지를 잃고도 이렇게 잘 자라 준 형과 네가 자랑스러워. 황량한 종중산 기슭에 자리 잡는다는 게 하필 무덤 앞이라니! 그렇게 커다란 언덕을 누가 무덤이라고 생각했겠니? 가야 임금의 무덤을 집터로 삼았는데도 탈이 없었던 게 놀라워. 너희들의 노력으로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할 입장이 되었잖아?”
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윤 보살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전란 이후에 무사했던 모든 게 명당의 영검(靈驗)일지도 모른다는 견해다.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신(神)을 받아 무녀가 된 윤 보살이다. 신을 받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절에 머무는 게 마음이 편안한 이유도 신장(神將) 탓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당장 현준과 함께 정동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들려준다. 신장 탓이든 분묘의 명당 탓이든 탈 없었기에 다행이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며칠간 명상에 잠겼다가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준아, 내 생각으로 너희들은 제왕의 후예라고 여겨진다. 직접적인 피를 나누어 받은 건 아닐지라도 제왕의 무덤에서 자랐잖아? 내가 청동 부채를 줄 테니까 제왕의 입장에서 받아주기를 바래. 그런 뒤에 문화재청에 신고를 해도 늦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현준은 그의 어머니의 기발한 생각에 탄성을 내지른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듯하다. 그래서 현준은 경건한 자세로 어머니로부터 청동 부채를 받아든다. 부채를 받아들고는 천천히 부채를 펼쳐본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혔던 물건이지만 잔뜩 영기(靈氣)가 느껴질 정도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동에 실리는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시킨다. 분수처럼 햇살을 반사시키는 광경이 현란할 지경이다. 햇살의 반사광처럼 신라 장군의 검날에 살해당하는 왕의 장면이 연상된다. 섬뜩하면서도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는 정경이다. 가야의 왕족들이 가까스로 왕의 유해를 옮겨 봉분을 만들었다면? 참으로 피눈물 나는 정경이었으리라 여겨진다. 현준은 잠시 들끓는 마음을 호흡을 통해 정화시킨다.
마음을 추스른 뒤다. 현준은 떨려 오는 마음을 가다듬고는 어머니를 향해 절을 한다. 제왕의 신물(信物)을 전해 주는 어머니는 신의 대행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의 대행자가 다름 아닌 무녀가 아닌가? 현준은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앉는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제왕의 후예라는 관념도 새겨 볼 만한 뜻이 있다고 여겨져요. 산사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눈 것 역시 소중하다고 봐요. 어머님이 저를 제왕의 후예라고 여기시면 저도 그렇게 믿고 살게요. 빈한한 환경에서 이만큼 성장하게 된 건 어머님 덕이라고 생각해요.”
“오냐,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시간이 오래 된 것 같으니 곧바로 가려무나.”
현준은 땅바닥에서 일어서며 어머니와 잠시 포옹한다. 윤 보살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이윽고 현준은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는 승용차에 오른다. 승용차에 오르는 순간이다. 창 밖으로 비치는 세상이 가슴 벅찬 정경으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푸른 하늘. 맑게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 솔숲을 따라 산울림처럼 퍼지는 산새들의 울음소리.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용솟음치는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지금껏 살아온 삶보다도 더욱 활기차게 삶을 살겠다는 의욕이 치솟는다.
이러한 의식의 굽이를 반영함일까? 도로를 타고 산허리를 내려오는 길에서다. 도로변의 바위에 두 마리의 멧비둘기가 나란히 앉았다가 함께 날아오른다. 평범한 현상에 불과할 수도 있었겠지만 현준에겐 영감의 근원이 되었다. 현준은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힘껏 주먹을 쥔다. 제왕이란 만물이 함께 비상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제왕의 핏줄이 아니어도 제왕의 도를 일부라도 깨친 행복감이 엄청나다.
‘주변의 이웃들이 다 함께 비상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자.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격려해 주자.’
세상의 산새들이 일제히 숲을 날며 활동하기에 분주한 시각. 현준을 태운 승용차는 황금 햇살을 가르며 경호강변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강심에서 반사되는 햇살마저 강렬한 에너지로 굽이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