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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무등병(無等兵)

장군과 무등병(無等兵)

이원우

 

1. 단초(端初)

현우가 용인에 올라온 지 어느덧 4년이다. 아직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거리도 낯설다. '수도권', 어쩐지 서울이라는 말보다 부담스러운 건 무슨 까닭일까? 촌 늙은이 입에서, 이래저래 탄식이 튀어나온다.

스마트폰을 켜고 거리에 나섰다. 도로를 건너서 산책을 하는데, 급보(急報)가 뜬다. JP, 즉 김종필의 부인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현우는 발길을 뒤로 돌렸다. 가보고 싶은 데가 있으니, JP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자 동지인 L 전 의원! 그가 생각나서다. 바로 걸으면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현우의 나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의 묘비가 서 있는 것이다. 용인이 낳은 큰 인물 중의 하나. 그보다는 5.16의 핵심 주체이자, 7선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는 걸 더 쉽게 판단하리라. 본관은 성주(星州). 묘비를 지나 올라가 본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밑에 있는 대중음식점의 재래종 개 한 마리가, 낯선 객을 보고 요란하게 짖으며 정적을 깨뜨린다. 드넓은 묘역에 성주 이 씨의 조상들이 잠들어 있고, 재실도 마주 보인다. 성주 이 씨는 명문거족이고말고. 한데 스마트폰에 뜬 자료를 보니, 성주 이 씨의 시조의 휘자(諱字)순유(純由)’란다. 그분의 12세손 (휘자 '장경')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름을 기막히게 지었다.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나? 여섯이었다면, 이경년(京年)! 현우는 본관이 성주가 아닌, 경주다. 현우는 웃었다. 다섯째분의 이름이 남으로부터 놀림감이 되지나 않았는가 싶어서. 516은 현우에게도 의미(?)가 있다. 그해에 발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에도 못 갔다. 물론 다른 지병도 있었지만.한데 묘하게도 군 출신 K 전 부산 시장 Y 전 도지사 K 전 대령(추후에 국회의원)등이 현우에게 직간접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었다

그래 주연(?)이 현우와 그의 가족인 드라마틱한 50년 역사를 얼른 머릿속에서 재구성한다. 조연(?)JP K 부산 시장 Y 전 도지사 K 전 대령(의원) 등 군 출신이다.(다들 육사 출신이나 기수는 같거나 다르다. 출생연도만은 1926, 우연의 일치치곤 기가 막힌다?) M 시장과 Y 서예가 등도 등장시켜야, 구색을 갖추게 된다.

현우는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육사 예비역 이종탁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분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내외분이 같이 있단다. 같은 성당에 나가고, 종친(항렬도 이 중장이 높다.)이라 현우는 항상 그분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바가 크다. 아흔 살인 그를 지난번 현우가 자신이 기자로 있는 <실버넷뉴스>에 모시기도 했다. 김종필보다는 육사로 치면 자그마치 대여섯 해 해 선배다. 나이도 김종필보다 한두 살 위다. 건강이 너무 좋아 육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종탁 중장이 파안대소하는 하던 말이다.

김종필 씨? 현역 때는 나를 보고 형님이라 하더니, 중정부장이 되니 선배님이라더군.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호칭이 바뀌는 거야. ‘이 선배라고 말이야.”

언젠가는 현우가 이 어른께 자신의 기구한 삶을 털어놓고, 같이 서울 중앙 화수회까지 방문하는 게 소원이고말고. 오늘 그 뼈대를 대충 메모한다.

 

2. 살인

현우(玄雨)는 일생을 통해 그렇게 '형형한' 눈빛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 바로 만송 어른, 그의 선고(先考)와 호형호제하시던 분이었다. 아니 형형(炯炯)하다는 표현 갖고는 부족할지 모르겠다. 현우는 한 번도 그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으니까. 뭐랄까, 그만큼 그분은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슴을 꿰뚫으시는 것이었다. 현우는 아버지 생전에, 당신의 심부름으로 저녁 늦게 찬샘절(절이라 해 봤자 암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였다)로 그분을 더러 찾아뵈었었다. 어떨 땐 무섭기도 했다. 기다랗고 허연 수염을 외풍에 나부끼도록 버려두셨다. 그건 정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이셨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방 안에서 남포를 켜놓고 나무판에 글씨를 새기곤 하셨다.

밤낮을 잊고 사시는 분? 그런 정도라 해도 괜찮으리라. 가끔 잔기침을 하면서, 땀을 흘리시는 모습에서 현우는 섬뜩한 느낌에 휩싸일 수밖에. 아니 소름까지 끼칠 정도였다 하자. 그런 날, 밤에는 흉몽에 시달려야만 했고. 그분은 그렇게 붓글씨를 손수 쓰고 그걸 능수능란하게 파 들어가면서,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맞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자.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니 크고 작은 절에서 그분에게 주문을 하는 수밖에. 뭐였느냐고? 주로 현판 비슷했던 것이었으리라.

현우의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시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였다. 현우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우죽(友竹) Y선생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써 드린 경서각(耕書閣)’이란, 화선지에 현판 암자로 찾아갔다. 우죽 선생은 이웃 삼랑진 초등학교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던 터였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우죽 선생은 현우 선고를 뵈러 자주 들르곤 했었다. 학문(한학)이야 상동어른이 더 깊으셨지만, 글씨는 우죽 선생이 훨씬 나았다. 20년 연세 차이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는 그때에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상동어른이 우죽 선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음은 물론이고말고. 상동 어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계시다가, 현우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죽거든 만송(萬松) 어른께 가서, 이걸 좋은 나무에 새기도록 해라이. 그 어른은 내가 고향에서 떠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이신즉. 그분의 말씀은 바로 아비의 말이다. 뵐 때 무슨 말씀 하시면 거역하지 마래이."

현우는 울기만 하고 있을밖에. 그로부터 말씀을 제대로 못 하시더니, 몇 달 만에 상동 어른(上東/ 현우 엄마의 친정이 청도 상동이어서 그 택호를 따라, 시골에서 살부터 붙여진 호칭이었다.) 기세(棄世)하셨으니까. 만송 어른이 그런 대로 절차에 따라 도와주셨다. 문상객은 현우 친구 두서넛과, 칠기점 부락에 사는 건우 형님 내외와 아지매 등등이 전부인 터라, 정말 초라한 장례였다. 집 건너편에 신흥 사이비 종교의 교회라 할 수 있는, **관 옆에 공동묘지에 유택을 마련하였다. 현우는 남은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 울고불고하셨다, 밤낮없이.

그런 가운데 틈을 봐서 그는 암자로 만송 어른을 뵈러 갔다. 만송 어른은 그날 밤에도 역시 칼을 들고 앉아 계셨다. 아니 열심히 작업 중이셨다. 천막 조각으로 무릎을 온통 덮은 채로.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방금이라도 방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현우가 인기척을 내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제야 아는 척하셨다.

선고께서 부탁하신 현판 글씨를 갖고 왔다고 했더니, 만송어른은 반기셨다. 현판엔 피나무가 좋다고 하셨고. 현우가 피나무가 있느냐고 여쭤 보았다.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고 하신다. 암자 주위에 피나무가 서른 그루쯤 자란다고도 덧붙이셨다. 피나무는 큰 건 20미터 가까이 자란다시던가? 만송 어른은 밭갈 , 라니 얼마나 의미심장하냐며, 현우에게 그 정신을 이어받으라 하셨다. 그러곤 고인의 아호 현판은 새겨 본 지가 오래전이라며,

"아마 자네 선대인은, 저승에 가셔도 낮엔 일하고 밤엔 글공부 하실 어른일세."

고 치켜세우셨고. 만송어른은 자당께서 좀 어떠시냐고 물으셨다. 밤낮없이 울고 계신다고 대답했더니,

"걱정이다. 앞도 못 보시는 어른이.인마, 니가 더 잘해드려야지. 요새도 니 장가 못 보낸 거 갖고 걱정하시제?"

". 스무 살짜리 병신 총각한테 누가 시집오겠습니까? 임시 교사 자리로 쫓겨났는데예."

"그래도 니 급하다 아니가? 자당 소원을 들어 드려야제, 이 노무 자슥아."

만송 어른은 자당 소원을 들어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분은 농담이며 욕까지도 서슴없이 뱉어내셨다. 차라리 현우에 대한 사랑이라고 치부하는 게 맘 편했다고 하자. 그럴 땐 어찌 된 셈인지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날도 현우는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훔쳐 가면서 한 시간쯤 꿇어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다.

"가만있자, 오늘이 초하루제? 보름날 다시 온나. 내가 뭐 보여 줄 끼 있다 아니가. 현판도 그때 갖고 가래이."

편안히 계시라고 인사드리고 나서 돌아 나왔다. 현우 엄마는 앞도 제대로 못 보면서, 콧물이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냥 손만으로 저녁 반찬을 만들고 계셨다. 뭐라 하시던지 물으셨다.

"내일모레, 아니 보름에 오라 카시던데예. 엄마 인자 눈물 거두이소오. 그란다고 아부지가 살아 돌아오십니꺼?"

엄마는 그러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눈물을 찔끔거리신다. 현우는 그로부터 꼬박 열흘 넘게 방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엄마의 소원은 이거다. 오직 며느리에게서 밥상을 한 번 받으시는 거. 그러고 떡두꺼비 같은 자식 하나 안으시는 것. 한데 현우는 정말 자신이 없다. 여태 세 번 선을 봤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나이가 어린 데다 병으로 인해, 임시 교사 자리까지 잃어 버렸으니 조건이 정말 나쁘다. 게다가 엄마 상동댁 눈이 어두우시신데, 누가 시집오려 하겠는가? 정신없는 사람 아니고선 말이다.

자기 폄하의 또 다른 원인. 현우는 중등증(中等症) 결핵까지 앓고 있었고. 또 있다. 부끄럽지만, 기차 통학을 하다가 '모터 복상'이라는, 친구의 아버지가 운행하는, 간이 기차에 치어 오른쪽 발가락 네 개가 없는 불구였다. 키도 작아 겨우 160센티미터를 살짝 넘겼다. 열등감에 빠지기 딱 알맞은 신체 조건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현우는 그 시절 극도로 신경이 예민했다. 오죽하면 엄마가 가끔 하신 꾸중이 이러셨을까? 현우 보고 간이 생기다가 말았다는 거다. 그러고 일침을 놓으셨다. 어지간한 건 잊어버리라고.

이현우(李賢雨). 맞다. 수재들이 모이는 사범학교 동급생 120명 중에서 항상 10등 안에는 들어갔는데, 성적이 조금만 떨어지면 울고불고했으니까. 친구와 말다툼이나 싸움질을 했다 치자. 상대는 쉽게 풀었지만, 현우는 그게 안 되어 오래 끙끙 앓았다

유일한 병원 삼랑진 의원은 전문 과목이 없었다. 시골 바닥에서 하물며 정신과이랴. 일찍 경북 의전 출신 안재구 원장은 사람이 워낙 바빠, 웬만한 환자는 조수인 박 의사에게 맡기기도 했었다. 안재구 원장의 둘째 아들과 또 다른 모범생 노윤길, 조연호 등 셋은 진짜 공부도 잘하고 행실도 착한 친구였다. 어쨌든 박 의사에게 상담하러 갔더니, 그이인들 뾰족한 처방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결핵이 나으면, 까짓 신경과민쯤은 사라질 거라나?

그러니 결혼이란 참으로 그에겐 난제라 할밖에. ()은 일찌감치 면제를 받았긴 하지만,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 그 몸으로 지내야 하다니 싶어 괴로웠다. 간이 생기다 만 놈이라는, 엄마의 걱정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발랐다. 부모님 말씀은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들었다. 효자란 소리도 현우에게 따라다녔다.

하기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현우 위로 형이 둘 있었더란다. 그런데 엄마가 봇도랑에 빨래를 하러 나갔다가-겨우 앞을 분간하실 정도의 시력으로- 그만 세 살 바기 첫째 아들을 잃어버리셨다. 아버지가 면사무소 호병게장을 하실 때였단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나 아들 하나를 또 얻긴 했으나, 오줌을 잘 못 누어서 그 아들마저 잃으시고 말았다. 그러니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까? 해서 엄마는 현우 하나 믿고 살아 오셨을 수밖에.

거듭 말하지만 오직 하나, 공부만이 전부였다. 영남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사범학교에서 졸업할 때 석차가 당당 5/120(남자)이었으니, 어지간히 노력을 한 셈이다. 4등까지 부산 시내에, 5등인 현우는 진해 대야초등학교에 임시 교사로 발령을 받았었던 거다.

어쨌든 보름이 다가왔다. 현우는 저녁을 일찍 챙겨 먹고, 만송 어른을 만나러 뵈러 절로 갔다. 그분은 여전히 나무판에다 글자를 새기고 계셨다. '경서각'은 완성되어 구석에 세워져 있었고. 명필에다, 선고의 말씀대로 최고의 전각가가 새긴 현판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만송어른은 작업 도구를 전부 물리고, 한참이나 수염을 매만지시더니 입을 열었다. 임오생(任午生)임을 이미 알고 계시지만, 또 시는 언젠지 물으셨다. 술시(戌時)라고 대답했더니, 혀를 차셨다. 쯧쯧, 옛날 같으면 아이 둘은 나았겠다며. 만송어른은 또 욕을 섞으셨다. 갑자기 호랑말코라는 말로. 현우는 약간 섭섭했지만, 현우는 절로 웃음이 터졌다. 만송 어른은 혼자 술시(戌時), 술시라 하고 두어 번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호통이시다.

"인마, ‘호랑말코, 니 선고와 곡차 한잔하고 나면 가끔씩 농으로 주고받던 말이다."

"잘 알겠습니더."

"호랑말코란 예의 없는 오랑캐들이 타는 말의 코란 말이다. 그러고 니가 아나 보자. 술시가 도대체 몇 시고?"

오후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인 줄 안다고 대답했다. 대견하다는 듯 현우를 바라보던 만송어른은, 무릎 곁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당겨 펴시는 거였다. 순간 현우는 탄성을 질렀다. 이 세상의 어떤 형용사를 동원해도, 그런 파르스름한 색깔을 나타내지 못할 ()’이었다. 마치 박꽃에 흩뿌려져 내리는 달그림자? 아니 자신의 그런 표현으론 근처에도 못 간다. 책 색깔이 너무나 신비스런 느낌을 풍겨, 방안 가득히 채웠다! 다시 만송어른의 말씀

"니 배필을 한번 살펴봐야겠다."

여쭈어보기도 전에, 혼잣말처럼 <명계(冥界)>에 관해 적은 것이라신다, 만송어른은, 그 책은 단순한 시문(詩文)으론 접근이 어림없고, <주역>이나 <명리학>보다 몇 단계 이치를 깨달은 사람도, 겨우 머리맡에 둘 수 있다고 하신다. 현우 선고도 고개를 가로저으셨다나? 만송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처럼 저승을 한 번이라도 갔다 온 사람이나 해득할 책이라신다. 워낙 어렵다는 말을 못 번이고 거듭하신다. 만송 어른은 그 책 3권에 배필에 관한 모든 게 적혀 있다고 하신다.

현우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어둠의 심연으로 빠져 들었다. 만송어른은 재빨리 책장을 넘기셨다. 현우는 계속 혼란스러움에 빠져 허우적댔다. 마치 이방(異邦)에 끌려와 있는 듯한 느낌? 뭐 그런 거 비슷했다고 하자. 이윽고 그분이 말씀하신다. 자당이 참 박복하다시며. 운을 떼더니

 

야 이놈아, 내 말 잘 들으래이. 너 임마 니 배필은 겨우 세 살이다!”

현우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엄마가 장가 못 보내 안달이신데, 이제 겨우 세 살짜리 계집애가 아내감이라면? 앞으로 적어도 15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다. 당시 친구, 그러니까 정식 발령을 받은 동기들 사이에는 유행되는 농담이 있었다.

"키워서 잡아먹는다.".

제자인 6학년을 열두 살로 보면 걔가 스무 두 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낚아채(?) 오면 되는 것이다. 그래 봤자, 8년이다. 총각 나이 서른 살 이쪽저쪽 아닌가? 그런데 세상에 현우더러 15년을 기다려 서른다섯이 되어야, 스무 살짜리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우는 콧방귀를 뀌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만송 어른의 결기와 강단 섞인 위엄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방안은 도무지 이의를 걸 수 없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보다 이게 만약 기왕지사라면, 엄마는 어떻게 되실까? 세 살 되는 계집아이를 15년이나 기다리라니! 그건 모두에게 충격이고말고.

자신도 모르게 몇 마디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튀어 나온 모양이다. 만송어른은 노기를 띠고 말씀하셨다. 안 믿긴다는 현우의 태도가 마뜩찮다는 표정이더니, 당신의 말씀에 이의를 걸지 말라고 못을 박으신다. 그러더니

"가 바라. , 잠깐만! 이런 나 참 기가 막힌데이. 계집아이는 기가 막히게도 지금 십 리 안에 산다. 드물데이, 이런 일이. 넉 달 뒤 보름날 아침에 말이다. 송지(松旨)(4일과 9일에 서는)에 새벽 다섯 시쯤 나와 바래이. 미전(美田)에 사는 누가 아니 어떤 할마시가 길목에 채소를 팔러 나올 끼다. 그 등더리에 업힌 기집애가 니 배필이데이. 바라 여기 적혀 있제? 가만있자, 그 전에 니가 또 큰일을 당할 끼다. 아차, 이 말은 안 하는 게 맞는데."

그러는 만송 어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불안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물어볼 수도 없고. 현우는 세상에서 처음 글자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한 책 한두 쪽에 시선을 박았다가 거두곤, 떨리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엄마한테는 함구불언일 수밖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말고. 맘에 걸렸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밤새 끙끙댔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어둠의 세계로 곤두박질쳐지니.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뒤에 만송어른의 말씀대로 현우는 정말 너무나 큰일을 당하고 말았다. 청천벽력, 그 이상이었다. 돌이키기조차 힘들지만 그 전말을 적어 보자.

아버지의 빈소에서 밤낮으로 울고만 계시던 엄마가, 그날은 아침부터 서둘러서 오 리쯤 떨어진 건우 형 집에 놀러 가시겠다는 거였다. 건우 형은 가방끈이 짧았었지만, 현우 선고로부터 한문을 배워 삼랑진에서 웬만한 데는 출입을 하는 현우 4종형님이었다. 현우가 가끔 엄마 손을 잡고 형 집에까지 모시다 드리면, 돌아오실 때는 엄마보다 연세가 훨씬 많이 드신 아지매가 바래다주곤 하셨다. 엄마로선 거의 반년만의 외출이셨다.

아지매는 연세가 여든이 넘은 데다가 잘 듣지 못하고, 엄마는 시력이 거의 제로인 상태에서 손을 잡고 기차 건널목을 건너고 계셨다. 그런데 당시 삼랑진에서 가장 갑부라는 김 면장(읍으로 승격되기 전에 면장을 지냈다고 하기도 했고, 오래전의 김해군 생림 면장으로 있다가 이사 왔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쨌든 대단한 재력의 소유자였다.)이 모는 승용차에 부딪혀서, 두 분 다 현장에서 숨을 거두신 것이었다. 물론 두 분의 잘못이 아니었다. 김 면장은 제법 음주를 한 상태였다. 읍 전체가 시끄러웠음은 물론이다. 당시만 해도 삼랑진 전체에 승용차라니, 겨우 한두 대 되었을 정도였음을 부연하자.

현우는 정신이 없었다. 목이 메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꺼이꺼이 울기만 하다가, 선고 유택 곁에 마련해 두었었던 가묘의 흙을 파헤치고 거기 엄마를 모셨다.

경찰서에 갇혀있던 김 면장은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현우 같은 장삼이사가 뭘 알랴만, 5 16이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서였기 때문에, 당연히 김 면장은 중형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그 직전에도 자기 차로 과실치사를 저질러서 집행 유예 중이었단다. 이번에 자칫하면 실형을 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김 면장은 사건 전에도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쳤다. 경남도지사로 파격 발탁된, Y 소장이 자기 친척이라며. Y소장 아니 Y 지사에 대해 한번 들먹여 보자. 그는 현역이라 언행이 직설적일 수밖에. 한번은 별판 두 개를 달고, 초도순시 차, 국전 대통령 수상 작가인 서예가 우죽 선생이 있는 송진 초등학교에 들르게 되었다.

교문은 항상 아치가 장식하게 마련. 그 글씨를 당연히 우죽 선생이 썼었다. , '혁명 과업 완수 어쩌고저쩌고'였으리다. Y 지사가 그걸 본 것이다. 그런데 한글 서예에 전혀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 궁체가 아니고 한자로 치면 예서체(隸書體). 뜻밖의 말이 지휘봉을 든 그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으니 기가 찬다. 그따위 글씨를 누가 썼어? 당장 바꿔!

아무튼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의 한글 서예에 대한 무지가 남의 입줄에 오르내렸음은 물론이다. 우죽 선생이 Y소장보다 항렬이 높았으니, 손가락질을 받았음은 물어보나마나.

김 면장 측은 현우 측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현우는 선고를 예사로 대접한 김 면장이 미워, 도무지 그럴 수 없어 미루적거리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현우 집 앞에 군 지프차가 한 대 멎어 있는 게 아닌가.

현우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가 의아스러워하는데, 차 문이 열리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 하나가 황급히 내리더니 거수경례를 올려붙인다. 도무지 영문을 몰라 할 수밖에. 그러자 대위는 현우를 다짜고짜 지프에 태우곤, 낙동교를 건너 국도를 타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현우는 은근히 겁이 나 자꾸만 움츠려들었다. 말 한마디 건넬 수도 없었다. 한 시간 반쯤 걸렸을까? 지프는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접어들었다. 어느 헙수룩한 사무실 앞에 지프는 멈춰 섰다. 2층으로 대위와 둘이서 같이 올라갔는데, 안은 으리으리했다. 집기도 제대로 갖춰졌고,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라도 하는 듯 소파도 스무 개쯤 자리 잡고 있었다.

이윽고 만면에 웃음을 띤 풍골 좋은 중년 남자가 별실인 듯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부장 K 대령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우선 커피 한잔하십시오."

현우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K 대령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현우에 대해. 나이가 20, 결핵을 앓고, 오른쪽 발가락을 세 개 잘린 것까지. 친구들과 십 리 떨어진 행촌 마을로 밤중에 올라가 벌통을 들고 나와 속의 꿀을 송두리째 꺼내 먹은 사실마저 그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기차 통학을 하면서 한 달 동안 무임승차를 한 것은 또 어떻게 파악했단 말인가? K 대령이 다시 덧붙인다.

진해에 첫 발령을 받았으나, 임시 교사여서 해임되어 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디다. 그래 남일해나 한명숙, 남백송 가수들을 따라다녔다면서요? 진해 중앙극장은 나도 압니다. 가수가 되는 게 꿈이시라던데.”

이만하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했다는 증거다. 현우 선고의 학문이 출중하셨다는 것도 들먹였다. 당신께서 단장면 국전리 음지에서 서당을 여셨다는 것조차. 엄마 그러니까 현우 선비(어머니)가 시각 장애인이시라는 것도 물론이고. 그쯤에서 현우는 몸서리를 쳤다. 너무나 당당한 대령의 태도 앞에 중압감에 빠져들 수밖에. 이윽고 그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선대부인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걸 위로합니다. 얼마나 충격과 슬픔이 컸겠습니까?"

그러곤 그 양반(김 면장을 지칭하는 건 단번에 알아 차렸다.)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 양반도 몸이 안 좋아 감옥에서 견디기 힘들다는 걸 털어놓았고. 큰아들이 법대 4학년이며 고시 공부를 하고, 하나는 육사 출신 초임 장교라는 사실도 슬쩍 들먹였다. 섭섭잖게 보상을 할 테니, 건우 형도 설득해서 합의를 해 달라는 게 결론이었다. 김 면장의 친척이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서류 메모 같은 것을 슬쩍 보더니, 단호한 말투로 질책한다.

"이 선생한테 이런 일도 있었더군요. 통학할 때, 해군 전용 곱빼(화물칸의 일본말)에 탔다면서요? 설탕을 도시락에 가득 담아 가도록 병사가 허락했는데, 친구랑 병사의 호주머니에 손을 댔고.이건 또 뭐지요? 2학년 때 버들 섬배 밭에 가서 배를 따 훔쳤고. 설마 어두운 데 들어가 살고 싶지는 않겠지요."

현우는 숨이 막힐 듯한 그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고. 상대는 무궁화가 세 개인,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혁명' 주체 세력 **부대 경남지부장이다. 현우에겐 합의 따윈 둘째라 여겨질밖에. 의지가지없는 현실에 맞닥뜨리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칫하면, 초등학교 도서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국사대관>을 들고나와 보수동 헌책방에 가서 팔아서 호떡 사 먹은 들킨 것까지 불거져 나올 판이다. 정말 감방에 가는가 싶어 어찌 지레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으랴. 한데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 튀어나왔다. 돌아가 있으면 섭섭잖게 현찰을 실어 보내 주겠다는 것. 현찰이라야 손쉽다는 말을 부연했다.

현우는 다시 지프를 타고 삼랑진으로 돌아왔다. 건우 형과 형수를 그날 밤 만나 자초지종을 전했음은 물론이고, 그리고 끝내 건우 형 내외와 현우는 김 면장을 풀어 주는 데 동의했다. 며칠 안 있어 김 면장은 삼랑진 거리를 활보했고. 한데 뒤숭숭한 소문이 어지러웠다. , 김 면장이 유부녀와 놀아나다 들통이 났다는 둥.그러나 한번 혼이 난 현우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 못된 김 면장 얘기에는 일언반구도 보태고 싶지 않았다.

두어 주쯤 지났으리라. 역시 전번의 그 대위가 지프를 몰고 왔다. 그리곤 마대를 두 개 싣고 왔는데, 큰 거는 현우에게 내려주고, 나머지는 건우 형 집까지 가서 전해 주었다. 상상외의 거액이었다. 50만 원이라던가? 현우의 임시 교사 봉급이 4천원 남짓이었던 터, 그걸 세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 오히려 질겁해야 했다고나 하자.

며칠 동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것도 현찰! 화폐 개혁이 있었던 터라, 그런 거래가 쉽지는 않을 텐데, 역시 **부의 힘은 막강했다.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대위는 잊지 않았다.

**부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느냐 하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실화 하나가 증명한다. 현우가 당사자에게서 직접 들은 거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과정의 교사 양성 기관을 거쳐, 시골에 임용된 '별 볼 일 없는' 교사가 있었다. 516 직전까지만 해도 학교 내의 비리가 만연했었더란다, 거기 불만을 가진 그가 정의감(?)으로 실명을 기록하여 K 대령에게 낱낱이 고발한 것. 며칠 만에 K 대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더니 입에 침이 마르도독 칭찬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소원이 뭐냐기에 얼떨결에 장학사-세상에 장학사가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어서-가 되고 싶다 했더니 며칠 만에 발령을 내주더라는 것! 꿩 잡는 게 매라 했다. 장학사를 거쳐 나중에 유명한 교장이 되고 교육계에서 이름을 드날렸으니.실제 그는 적어도 금전 문제만은 철저할 만큼 깨끗했다. 현우가 그를 돈키호테로 치부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다. 객관적으로 봐서, 현우의 거금 인수보다는, 평교사의 장학사 임용이 더 큰 사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일담인데, 그 교육자는 후회했단다. 차라리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차라리 그때 학무국장 자리 하나 달라고 할 걸 그랬어."

당시라면 학무국장이 아니라 교육장이라도 가능했다는데 듣는 현우가 뭐라 할 것인가? 어쨌든 현우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지어졌다. 건우 형은 그 돈으로 역전의 주류 도매상을 인수했다. 현우는 어찌된 셈인지 그걸 현찰로 갖고 싶어서 장롱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엄마가 워낙 돈을 못 만지셨기 때문에, 엉뚱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 내놓으면 누가 빼앗아 갈 것 같았다고 하자. 그는 중얼거렸다. 불쌍하신 당신…….

현우는 처음엔 불효인 줄 알면서 마구 돈을 뿌렸다. 일정한 철(토마토 딸기 수확)이 되면 삼랑진 전체가 흥청망청했다. 특히 '중국집'이 그랬다. 거리를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니나노 소리가 들렸다. 현우도 농부들 들뜬 분위기에 합류했다. 일부러 역전에서 주먹깨나 쓰는 우락부락한 친구들을 모아다 탕수육이며 팔보채, 양장피, 라조기 해삼탕 등을 시켜다놓고 먹으며 밤새 노래를 불렀다. 물론 술은 전부 친구들 몫이고. 주전자며 쟁반, () 등은 부지기수로 찌그러졌고 부서져 나갔다. 돈이 좋긴 좋았다. 한 번씩 현찰까지 쥐어 주는 현우를 보고 아무도 괄시를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 현우는 자포자기나 다름없어 중얼거렸다. 까짓 초등학교 교사 복직 못 하면 그만이지, 다리를 저는 처지에 체육 시간에 손가락질이나 받고. 중학교라면 모르지만.

황망 중에도 현우는 한 달 뒤, 열 나흗날 저녁 장날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만송어른이 나가 보라고 하셨었지. 또 밤을 그렇게 하얗게 지새웠다. 괘종시계가 다섯 번 울리는 소릴 듣고 현우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여명(黎明)이었다. 미전에서 나오는 도로 입구에 잠시 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근데 저 멀리서 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둘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누가'가 허리 굽은 노파임이 드러났다. 노파는 코를 흘리는 계집아이를 하나 업고 있었다. , 신음이 절로 터졌다. 모든 게 사실로 변해가는 찰나인 것이다. 가까이선 본 계집아이는 정말 예쁘게 생겼다. 세 살이라 했지? 만송 어른의 마지막 군더더기 말씀이 기억에 떠올랐다. 순간의 선택이 모든 걸 좌우한다며, '하기야……'를 흐리게 끝맺으셨던 걸 기억해 냈다.

순간의 선택하기야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 소름이 끼쳤다. 현우는 도무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판단력도 송두리째 날아갔다. 세상이 이럴 수가! 만송 어른의 말씀이 너무나 상황을 궂은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현실에 대한 반감이 생겼는지 몰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저 계집아이가 내 배필이라고? 엄마는 평소 여자가 여자다워야 한다고 하셨다. 저건 장난감이지 여자가 아니다. 나더러 15년을 더 기다리라고? 만송 어른은 저 계집아이와 나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갈라설 수 없다는 듯 말씀하셨지. 건우 형 내외도, 엄마는 아지매와 밤낮없이 내 결혼을 이야기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먼저 내가 살아야겠다. 결혼은 둘째 문제다. 여기서 벗어나자!"

현우는 이성을 잃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엄마의 유품이 잡힌다. 주머니칼이다. 당신이 애지중지하시던.당신은 그걸로 고향에서 떼어 온 한지를 손질하셨지. 어두운 눈을 껌벅거리시며, 한지를 손바닥만 하게 잘라서는 B 29 폭격기도 접으셨다. 잠시 뒤 현우는 노파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님이 참 예쁘게 생겼다고.

이 새벽에 누구냐고 묻기에, 현우는 건너 한림정에 산다고 거짓말을 꾸며댔다. 친척 집에 다니러 오는 길이라고도 덧붙이고. 노파는 힘들어 보였다. 그는 그 틈을 타서 노파와 말을 섞는 척하며 계집아이를 받아 안았다. 노파는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렸다.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선, 손수 가꿔 수확한 듯한 참깨며, 보리쌀, , 수수 등을 늘어놓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특히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러나 꾀죄죄한 차림에 감기가 걸렸는지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현우는 아기를 정성스레 보살펴 주는 척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날을 빼놓았던 칼을 잡곤 아기에게 힘껏 찔렀다. 머플러로 칭칭 감쌌으나, 목과 어깨 사이에 빈틈이 보였던 것이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는 걸 뒤로하고 현우는 냅다 뛰었다. 노파의 다급한 목소리! 아이고 저 미친 놈 잡으소, 미친 놈 잡으소!

 

3. 도주

집에 들어왔다. 집이라 해봤자, 선고께서 나무로 얼기설기 뼈대를 세우곤 그 위에 천막을 덮어, 비나 피할 정도로 지으셨던 움막이었다. 곧 뜯기어 나갈.그는 위자료 등이 든 대형 가방과 자질구레한 물건으로 채워진 배낭을 챙겨 밖으로 튀어나왔다. 돈은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 두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교사 자격증도 끼웠다. , 엄마의 마련해 준 약간의 금붙이가 있어 그것도 깊숙이 넣었다. 생전 애지중지하시던 거였는데, 제법 많았다. 그리고 당신의 평소 말씀이 생각나 현찰을 받고 나서 그걸로 사 두었었던 또 다른 금반지 금목걸이 금비녀 금팔찌 금 거북 등 패물들도. 그 위를 교육 관련 서적 몇 권으로 덮었다. '경서각'도 그리 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에 들어갔다. 엄마의 평소 말씀을 기억에 떠올렸다.

야야. 배고 디기 고프거든 설탕을 사묵으래이. 허기가 없어진다 아니가. 그라고 돈 생기거든 금 같은 거 사 노아라. 씰 데가 있는 기라.”

얼마나 서둘렀는지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는 않았다. 숨이 가빴다. 역으로 절뚝거리며 줄달음을 쳤다.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하는 동해 경전 남부선 첫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일제 시대에 만든 송지교 밑으로 우중충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현우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끄집어내어 그 웅덩이 한가운데로 던졌다.

현우는 기차 통학을 6년 동안 했었다. 중학교와 사범학교 때. 철로를 따라가는 지름길로 알고 있었다. 쫓기는 신세인데, 더더구나 그 길을 택해야만 했다. 화장실 너머로 보이는 경찰지서, 출입문에 백열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데,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역 창구에 돈을 밀어 넣고 표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초겨울인데도, 땀이 비 오듯 했다. 완행열차는 정말 느릿느릿 기어갔다. 큰 가방을 선반 위에 얹고 배낭은 벗어 안았다. 일부러 창가에 자리 잡고, 내내 자는 시늉을 했다. 도중에 차장이 꼭 경찰관 같은 복장을 검표를 할 땐, 간이 콩알만 해졌고. 그 많은 돈이며 패물을 든 가방을 그대로 두고 화장실에 갈 때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여간 힘센 장정이 아니면 그걸 내리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내용물을 모르는 이상, 아무도 그걸 탐내지 않을 것임은 뻔한 노릇이다. 현우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내 굶었다. 아니 삶은 달걀 두 개를 가 먹은 게 전부였다. 학창 시절, 그렇게 꿀맛으로 여기던 그것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입안에 넣고 보니 모래알을 씹는 것과 다름없었다. 현우는 중얼거렸다. 지금쯤 지명수배가 내려졌겠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기침이 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두어 번 토하려고 하는데, 입안에 흥건하게 고이는 게 있다. 뱉었다. 시커먼 피! 객혈을 한 것이다. 예의 그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런 고생 끝에 열두 시간 만에 광주에 닿았다. 저녁 일곱 시였다. 사위가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현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역 구내에서 그때까지 퇴근(?)하지 않은 구두닦이에게 다가갔다. 구두통 위에 발을 얹자, 열대여섯 살 될까 말까 한 소년은 침을 뱉어가며 열심히 구두 광을 내주었다.

이윽고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구두는 광이 났다. 현우가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에 이거 어디 있느냐고? 현우가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자, 녀석은 온통 구두약으로 처바른 듯한 시커먼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롱이냐 쇼트냐 라며 반문했다. 녀석은 5 16 뒤라 그런 업소가 된서리를 맞고 있단다.

한 군데 있긴 하다면 단서를 붙이기에 앞장서라며 지폐를 또 한 장 건네주었더니, 녀석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린다. 역전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기차로 열두 시간 거리지만, 새벽의 살인(?) 사건이 전국 경찰에 통보되었다 치자. 경계가 삼엄해야 할 거 아냐? 한데 파출소도 역 대합실도 쥐 죽은 듯 조용하다니, 되레 귀신에 홀린 느낌일 수밖에. 어쨌든 현우는 녀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현우가 약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인 걸 눈치채고선, 광장을 지나는 큰 가방을 아예 녀석이 멨다. 녀석은 안에 든 게 뭐냐고 묻는다. 섬뜩했지만 현우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책이라고.

5분쯤 기다리자 택시가 와서 멎었다. 녀석이 뒷자리 문을 열고 제가 멘 구두통을 밀어 넣는다. 그러곤 현우 것까지 받아 실으면서 뭐라 귓속말을 하더니, 아예 앞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꽤나 익숙한 솜씨였다. 20분이 지나자, 과연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야릇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녀석은 그 바닥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는 듯, 어느 집 도어를 잽싸게 열고 현우를 끌고 들어갔다. 이윽고 뚱뚱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아주머니는 가물에 난 콩을 보듯 하는 눈으로 현우를 아래위로 훑는다. 이윽고 아가씨 둘을 부르곤 현우 더러 고르란 시늉이다.

현우는 가냘프고 앳돼 보이는 아가씨를 지목하고, 아가씨가 이끄는 대로 방에 들어갔다. 방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음이 약간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담담하게 말했다.

"일주일쯤 묵을 거야. 괜찮겠지? 화대는 충분히 줄게."

일주일 손님이라면 대단한 횡재다. 아가씨의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얼굴빛부터 달라진다. 그보다 저녁 식사 전인 것 같은데, 뭐 좋아하느냐고 반문했다. 자기가 한 끼 서비스할 테니 말하라는 것이다. 현우는 뭐든지 좋지만, 선지 국수를 곱빼기로 먹고 싶다고 했다. 아가씨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바로 앞 포장마차에 가면 있다는 거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적잖은 돈을 점퍼 지갑에서 끄집어내어 아가씨에게 건넸다. 화들짝 놀라는 시늉이었지만, 싫지 않은 표정임은 물론이었고말고. 무엇보다 현우 신분에 대해 별 의심을 않는 아가씨가 현우는 고마웠다. 이윽고 선지 국수가 들어왔다. 아침부터 거의 굶은 현우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후딱 먹어 치웠다.

마침내 잠자리가 펼쳐졌다. 아가씨는 잠자리 날개 같은 속옷을 입고 드러눕는다. 그런 곳이 처음인 현우지만, 짐짓 그 바닥에서 베테랑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야말로 순진한 질문을 던진다. 이름과 나이를 물은 거다. 유미-넉넉할 , 아름다울 -라고 했고, 나이는 열일곱 살. 거듭 확인(?)하다 아가씨의 대답에 현우가 기겁을 해야만 했다. 아가씨가 이 가(李哥), 아니 이 씨라는 게 아닌가. 그것도 본관이 경주라는 거다. 현우는 다시 수렁에서 허우적대야만 했다.

현우도 입을 열어 종씨임을 고백(?)했다. 내친김에, ()는 무엇이며, 항렬자가 어떻게 되느냐며 다그치다시피 했다. 이유미도 기왕지사라는 체념에서인지 상서공파란다. 게다가 중시조 이 거 자, 명 자 할아버지의 38세손이라는 게 아닌가? 육촌 오빠가 비 우() 자를 쓴다고도 덧붙였고. 그쯤에서 현우는 완전히 다시 한 번 혼란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처지에 돈 주고 산 여자가 말이다. 같은 본을 쓰는 일가요, ()며 항렬자마저 동일하다니!

근데 일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미라는 아가씨는 그런 데에 있어서는 안 될 착한 여자, 아니 소녀였던 것이다. 현우의 이런 고정 관념을 갖고 있었다. 조상을 알면 무조건 양반이라는. 사실 현우는 선고로부터 제대로 익혀 들은 결과다. 현우는 그런 면에서 유미가 오히려 두려웠다. 시치미를 떼고 현우는 가운데 자를 얼른 바꿔서 자신을 소개했다.

"난 광우란다. 자야. 유미 너 참 별다른 애로구나. 물어보자꾸나. 표암공(瓢巖)이 누구신지 알아?"

, 초기 신라의 육촌 중 알성 양산촌의 촌장님이셨다지요.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 할아버지가, 애초에 박 바위에 강림하셨다는 전설에서 유래된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빛 광이라면 어진 사람인 발 부수(部首)이군요.”

한자를 아는구나. 어쨌든 원위치! 그렇다면 실질적인 시조가 누구신지도 알고?”

, 휘자(諱字)가 살 거(), 밝을 명() 할아버지시고, 진골(眞骨) 출신이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자는 돌아가신 아버지께 좀 배웠습니다. <동몽선습>을 거쳐 <명심보감>을 중간쯤에서 그만두었어요.”

이런, 네가 진짜 양반이로구나. 경주 이 씨의 8대 파도 알겠구나.”

, 성암공파, 이암공파, 익재공파, 호군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다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현우가 기절초풍 아니 악전고투를 하는 기분이었다. 사인공파라고 덧붙이면서 현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상서공파 중 훌륭한 인물을 꼽으라면, 諱字 항복(恒福) 할아버지시지라며 아는 체를 했다. 그러고 유미를 다시 한 번 치켜세웠다. 그러자 유미가 이를 받았다. 현우야말로 보기 드문 분이라고. 정색을 한 유미는 현우가 광주에 어떤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현우의 대답이다.

"교편을 잠시 잡았었는데, 글쎄 결핵이라지 않나? 임시 교사 자리도 쫓겨나고 해서. 무작정 이리로 온 거야. 어디 깊숙한 곳에 가서 요양이나 하려고 해. 그리고 불구라, 초등학교 교사로서는 환영은 못 받아."

중학교라면 모르긴 하다는 말끝에 한숨을 이었더니, 유미가 돈은 있느냐고 물었다. 현우는 둘러댔다. 금은방을 운영하던 엄마 아버지 두 분 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유산이 조금 많았다고. 혈혈단신이란 마지막 말에 한숨을 묻혔다. 밤이 깊어지는데, 유미는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다. 선고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생전에 엄하게 훈계처럼 이르시던 거다. 경주 이 씨는 양반이니, 종친끼리 몸을 섞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그런 짓을 하면 죽어서 조상님을 못 뵙는다고.

뜸을 들인 뒤 현우는 유미에게 말했다. 참 묘한 인연이라고. 이어 둘이 동성동본이니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죽으면 죽었지, 상놈 되기 싫다며. 뭣하면 다른 방에서 다른 손님을 받아도 좋다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데 유미의 반응은 맹랑하다. 현우의 말이 한없이 고맙지만, 이불 따로 펴고 시중이나 들겠다는 게 아닌가?

현우는 그냥 곯아 떨어져 잤다. 새벽에 기침이 자주 나왔다. 유미는 진짜 약속대로 멀리 떨어진 잠자리에서 눈을 떴다. 유미가 많이 아프냐고 걱정을 했다. 사실 오한이 들고 온몸이 쑤신다. 기침이 좀 심하게 나왔다. 손수건을 유미가 건네주는데, 또 객혈이다. 그러면서도 큰소리. 심하진 않으니 걱정 말라고. 유미는 결코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좋겠느냐는 걱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현우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보였고.

집은 조용했다. 구두닦이 소년의 말이 맞았다. 파리를 날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드나드는 사내들이 없었다. 녀석의 '된서리 어쩌고저쩌고'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중압감 같은 걸 유미의 표정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초리? 아마 유미와 또 다른 아가씨는 그런 분위기 속에 생활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났다. 과연 돈이 좋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동성동본에게 손도 대지 않는, 다리 불구자에다 폐결핵 환자인 현우가 가엾게 여겨져서일까? 유미는 아침을 진수성찬을 차려 들여 놓았다. 둘은 마치 다정한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식사를 했다. 신문을 한 장 사 오라고 했다. 쪼르르 달려 나가더니 <광주 일보>를 한 장 들고 들어온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다. 혹시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이 보도되었나 싶어서 불안해서 샅샅이 뒤져봤지만, 없다.

현우는 하릴없는 사람이 되어 낮 동안 내내 유미 방에서 뒹굴었다. 유미는 가끔 무슨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미용 기술을 배워서 미용사가 되어 타처(他處)로 나가는 게 꿈이란다. 현우가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가면 될 거 아냐?"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여기 온 지 일 년 반 만에 빚이 제법 불어나 있는 걸요."

점심을 또 그렇게 거룩하게(?) 챙겨 들여 들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유미가 하는 말이다. 오빠라고 공손한 호칭을 붙이곤, 자기 고향에 가서 몇 년 요양하시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가가도(可嘉島)’가 고향이고. 목포에서 남서쪽 15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란다. 자기는 거기서 나서 힘들게 공부해서 비록 분교장(分敎場)이긴 하지만, 그곳 중학교를 수석으로-졸업생이라 해 봤자 대여섯 명이었지만- 졸업했단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재산을 다 날리시고, 그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게 아닌가. 너무나 기가 막힌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유미의 아버지 종절(鍾喆) 씨는 그냥 평범한 어부였다. 한자를 익혔고. 하지만 워낙 부지런해서 궁색하단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의, 말하자면 섬에서 유지였다나? 화수회(花樹會) 일에는 빠지지 않고 열심이었다. 흑산도든 목포든 몇 날 며칠 걸리면서까지 다녀오곤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 양반(李兩班)'이었다고.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의 형님 되는, 그러니까 유미의 가까운 친척이 불행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친척은 다짜고짜 대처에서 무슨 사업을 벌인다면서 종철 씨에게 보증을 좀 서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막무가내 그가 묘한 수까지 쓰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마침내 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1 보증을 친척의 친구가, 2 보증을 유미 아버지가 서는 조건이었다. 만약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1 보증인이 책임을 지니 걱정 말라는 감언이설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유미 친척은 야반도주를 했다. 당연히 제1 보증인이 책임을 져야 했다. 한데, 일이 더욱 꼬이려고 해서 그런지 그마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는 것. 그 빚을 유미 아버지가 몽땅 덮어썼으니 그야말로 가정은 풍비박산. 밥 먹기조차 힘들게 된 처지에 유미인들 어찌 크나큰 충격에 아니 빠졌을까?

등교도 중지한 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밤중에 청년 둘이 자취방 문을 부수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유미를 끌고 차에 태웠다는 것. 발버둥을 쳤으나 소녀가 어찌 힘센 청년 둘을 당할 수 있으랴. 이윽고 둘은 광주의 어느 술집에 유미를 내려놓고 떠나버렸다. 그러면서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억장이 무너진다. 네 아비가 보증 잘못 선 탓이다!

친척은 유미네 집을 그렇게 망가뜨렸다. 유미는 전전 끝에 어린 나이로 그 험한 바닥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유미 자신의 빚은 또 빚을 낳고 해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바로 몇 달 뒤 5 16이 발발했지만 그게 유미 발 묶은 끈을 풀어 줄 수 없었더란다.

"집에는 엄마 혼자 살고 계세요. 방도 두어 개 있고요. 거기 가시면 사방 천지 생선이에요. 고기 반 물 반. 엄마가 육촌 오빠랑 같이 고기를 잡을 수 있어요. 참 오빠가 작은 발동선을 갖고 있어요. 실은 엄마 배지만."

"…….”

"바람 없는 날, 6촌 오빠랑 엄마가 오시면 돼요. 목포에 나가서 갈아타세요. , 그 배편이 아니면 무작정 기다려야 해요. 정기적으로 가는 배는 한 달에 한 번뿐인걸요."

"생각해 보자꾸나. 그건 그렇고, 유미는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전망이 있어?"

"글쎄요. 당국에서도 워낙 단속이 심하니 한 번은 된서리를 맞을 거예요."

현우는 유미에게 빚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유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그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추기 위한 제스처였는지 모른다.

현우는 다그쳐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가방을 열고 돈다발을 꺼내어, 수북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다 새 돈은 아니지만, 현찰이라는 건 눈부시다는(?) 걸 현우가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물며 형광등 밑이랴. 너무 거액이라 판단했는지, 다시 말해 현우의 생각보다는 빚이 크지 않다는 뜻인지 유미는 반쯤 도로 현우 앞으로 돌린다. 현우는 유미에게 명령(?)했다. 금반지 세 개도 건넸다.

"빠져나가거라. 이거면 되겠어? 경주 이 씨 상서공 파의 위신 문제야."

유미는 눈물을 보이다가 마치 다시 학생이라도 된 듯 맑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저렇게 며칠 밤낮을 보냈다. 신문을 사 보아도, 라디오를 틀어봤지만 현우가 저지른 살인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다. 참 궁금하기 이를 데 없어도 유미에게까지 그걸 고백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 그는 그것만은 함구하기로 결심했다.

유미는 자꾸 졸랐다. 자기 고향으로 가라고. 현우도 이끌렸다. 어디 몇 년 아니 15, 그러니까 공소시효 마감 날까지 푹 썩는 데는 그 섬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암묵적으로 현우는 유미의 청에 동의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유미는 계속 일기 예보를 들었다. 풍랑이 심하면 작은 통통배 따위론 무사히 닿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드디어 엿새 째 되는 날, 유미가 말했다.

"됐어요. 오늘 아침부터 모레 밤까지 바람이 세차지 않대요. 이미 엄마와 오빠가 출발했어요. 내일 아침 다섯 시 선착장에 나가시면 탈 수 있습니다. 엄마랑 오빠는 오늘 저녁 좀 늦게 목포에 도착하여 여관에 묵을 거예요."

다음 날이다. 현우는 유미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서는 거리로 나섰다. 택시가 하나 지나가기에 불러 세웠다. 현우는 무거운 가방을 들어 밀어 넣고는 공손한 말로 인사를 건네고, 목포로 가자고 했다. 기사는 이상한 데서 나온 작은 키의 남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현우가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미터 요금을 받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현우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포장은 되어 있었지만 도로는 울퉁불퉁했다. 택시는 빨리 달렸다. 미터기 요금에다 큰돈 한 장을 더 얹어 주었더니, 기사가 단박에 고개를 꾸벅하고 감사 표시를 했다.

혼자가 되다 보니 안절부절못하게 돼 다리가 후들거렸다. 유미와 유미 어머니, 유미의 육촌 오빠도 그를 그저 돈 많은 결핵 환자로 여길 뿐, 현우가 쫓기는 신세임을 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도 안달이 나서 그런지 입에서 냄새가 진동했다. 계속 기침은 터져 나왔고.

 

4. 가가도 섬 생활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15분이나 지났을까? 쉰이 조금 넘은 듯한, 보통 체격의 아주머니와 서른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남자가 현우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둘은 사람이 참 좋아 보였다. 둘은 허리를 굽히곤, 실례한다며 현우의 이름을 확인했다. 현우는 그들의 첫인상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선착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소형 발동선 하나가 묶여져 있었다.

"유미 년 어미입니다. 이야기는 유미 년한테서 들었습니다. 이 선생님을 만난 건, 조상의 음덕이지요. 얘는 내 재종질이구요. 지금부터 열 시간가량 가야 섬에 닿을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참으셔야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일가니까 마음 놓고 따라 가서 요양이나 잘하고 와야지요. 잘 부탁합니다."

사내는 자기 이름을 밝혔다. 찬우(燦雨)라 했다. 역시 항렬자를 그대로 쓰고 있어서 어쩐지 정감이 갔다, 성격이 굉장히 화통했다. 이윽고 발동이 걸리고 배는 출발했다.

배는 생각보다 작았다. 현우의 느낌을 눈치챘는지 찬우라는 청년은,

"왜 겁납니까? 괜찮아요. 0.5, 겉으론 보잘것없지만, 까짓 130킬로미터쯤 거뜬합니다. 복원력이 뛰어나요."

"정말 배라는 건 처음 타보는 수준이라 제가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용서하십시오."

"큰 선박이든 이런 소형 발동선이든 부양(浮揚)성 즉 배가 뜨느냐, 적재(積載)성 물자를 실을 수 있느냐, 마지막 이동(移動), 물 위로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걸 3대 요소라 하지요. 근데 이 '파랑호'는 적재성만 그렇지 다른 건 뒤지지 않습니다. 안심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보세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일지 않아요. 자 갑시다."

순간 바로 앞에 공원 비슷한 게 나타난다. 현우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자연적으로 튀어나오는 말, 아 유달산!

현우는 청년에게 물었다. 그 유명한 유달산 맞느냐고?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달산을 안다니 반갑다고 했다. 현우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그의 입에서 허풍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쫓기는 범법자+환자답지 않게, 노래 하나는 잘한다는 소릴 들을 뿐더러, 특히 목포에 관련된 세 곡을 애창한다고 떠벌였다. '목포의 눈물', '안개 낀 목포항', '목포는 항구다.' 등등. 유달산과 영산강, 삼학도 노적봉 등이 그대로 나온다고 덧붙였다.

"그럼, 좀 있다 우리 그 노래 세 곡을 부르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시다. 심심하지도 않고, 멋지겠네요."

현우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쫓기면서 피신하는 중, 목포에 관련된 노래를 경상도 사나이가 열창한다? 근 일주일 동안의 불안이 어쩌면 가실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바다 위는 안개가 제법 서려 있었다.

현우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목포의 눈물'부터 선을 보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넘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독창은 여기서 끝내야(?) 했다. 청년이 낚싯대 부러진 것 같은 막대로 장단을 맞추다가, 자기 숙모도 노래를 잘하니 3절을 맡겨 보라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도 동의할 수밖에. 유미 어머니 노래 솜씨도 대단했다. 들어보자.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네/ 못 오실 임이면 마음마저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유미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찌나 처연한지 듣는 이의 가슴을 헤집는 것 같았다. 발동선은 잔잔한 바다를 가로질러 제법 속력을 내고 있었다. 현우가 다시 입에 '목포는 항구다'를 올렸다. 근데 찬우도 만만찮아서 끝내 둘에게 노래를 맡기지 않았다. 셋이서 제창을 하게 된 것이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면/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네/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놀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내 고향 󰁓

셋은 다시 목에다 '안개 낀 목포항'을 얹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하자면 의기투합한 셈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노래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라고 자부하는 이들 아닌가? 더 열창할 수밖에

󰁔유달산 기슭에 해가 저물면/ 영산강 찾아가는 뱃사공 노래/ 떠난 님 기다리는 눈물이던가/ 안개 낀 목포항에 물새가 운다// 삼학도 파도 넘어 님을 보내고/ 이별에 원한품고 선창에 운다/ 언제나 다시 만날 부평초더냐/ 안개 낀 목포항아 말 물어보자󰁟

거짓말같이 안개가 약간 더 짙어지는 게 아닌가? 이윽고 걷히긴 했지만. 유미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이제 둘이서 노래 실컷 부르게 되었네. 아니 셋이서 부르자고. 내가 보기에 조카가 기타 치면서 우리 셋이서 노래하면, 천하일품이 될 거야. 가끔 유미 계집애도 와서 합류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찬우과 현우는 박수를 몰아 보냈다. 그러자 유미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셨다. 계집애라는 말을 연달아 쏟아내더니, 너무나 애절한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 쌍고동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

청년이 노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유미 어머니의 말에 의해 밝혀졌다. 특히 기타 연주가 수준급이란다. 현우는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거듭 밝히지만, 그도 노래라면 남에게 져 본 적이 없다! , 아니 셋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래에 묻혀 지내면, 세월 보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현우는 청년을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니 형이라 부르기로 했다. 진우 형은 가*도 중학교 분교장을 졸업하고 목포 시내 고등학교에 유학을 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아버지, 그러니까 유미 재종숙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목숨을 묻었다는 것이었다. 진우는 놀랍게도 웬만한 악보도 볼 줄 알고, 기타 연주도 수준급인데, 모든 걸 독습(獨習)한 거라니, 현우는 그에게 은근히 존경심 같은 게 생기는 것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찬우는 배를 어느 섬 가까이로 몰고 갔다. 파도는 여전히 잔잔했다. 유미 어머니가 김밥을 내 놓았다. 김치와 달걀 오징어볶음을 넣은 것이지만, 맛있었다. 게다가 잠시 엔진을 끄고 진우가 새우 미끼를 끼워 낚싯대를 드리우니 순식간에 고기가 물려 올라왔다. 도다리와 광어. 실팍한 놈들은 펄펄 뛰었다. 진우는 익숙한 솜씨로 회를 떠서 고추장에 버무려서 현우에게 건네준다. 그 맛이란! 비록 도피 중이지만, 정말 멋진 점심 한 끼를 해결한 셈이다.

찬우는 정말 익숙한 솜씨로 배를 몰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현우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큰 선박은 항로(航路)를 따라, 이 파랑호 같은 작은 배는 물길을 따라서."

그만큼 진우는 잔뼈가 발동선 위에서 굵어졌다는 뜻이리라. 뱃사람 특유의 감()으로 하는 말?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현우는 그런 진단을 했다.

열 시간 넘게 걸려 간이 선착장 옆에 접안했다. 여객선 급이라면 선착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발동선은 그렇지 않아 편리했다. 사위가 어두컴컴했지만, 내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진우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배낭은 현우가 어깨에 멨다. 20분이나 걸었을까? 50호쯤 되어 보이는 가장 깊은 마을로 셋은 걸어 들어갔다. 자전거로 겨우 다닐 수 있는 소로(小路)에서 한참 걸어 오른쪽에 유미네 집이 있었다.

마을 공동 우물도 보였다. 우물 밑에 조그마한 늪이 있었다. 가을이 되면 그곳의 물을 다 퍼내고 미꾸라지를 거둬들이는데, 그걸로 또 다른 보신을 한다고 덧붙였다. 보리쌀 뜨물 따위를 먹고 미꾸라지들이 토실토실 살이 찐다니 신기했다. 물론 지렁이 따위도 미꾸라지들이 먹겟지만. 하여튼 상당량이란다. 주인(유미 아버지가 쓰던 방) 없는 사랑방이 맨 먼저 반겼다. 그리고 마당이 나오고, 축담 위에 방 두 개짜리 본채가 나타났다. 뒤란 끝에 별채가 있다고 했다.

저녁은 생선회에다 매운탕, 마치 옛집에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인지 식욕이 돋아났다. 배불리 먹었다. 별채에 딸린 작은방을 현우에게 내 줄 테니, 그걸 쓰라는 말을 유미 어머니가 했다. 얼른 문을 열고 보여 주는데,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아무려면 어때? 극한 상황에 이르니 오히려 미안함 따위는 접어지는 것 같았다. 유미 어머니(이미 호칭이 아주머니로 바뀌었다.)와 찬우 형과 현우 등 셋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우가 달변이었다.

현재 이 섬 인구가 1천 명은 넘을 거요. 국토 최서남단(最西南端) 섬인 만큼 주민의 안보 의식이 남다르다오.”

현우는 속이 뜨끔했다. 혹시 주민들이 의심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이어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 그래, 철저히 심한 폐결핵 환자 노릇을 하기로 하자! 그리고 갖고 들어온 교육학 서적 및 중등학교 음악 준교사 검정고시에 필요한 서적-두서너 권은 보던 것이다.-상 위에 얹어 놓고 가급적이면 출입을 삼가고 틀어박혀 있기로 하고. 결핵약을 일부러 남의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기로 한다.

그때까지 복용했었던 결핵약은 그 성분이 '이소니아지도' 혹은 '리팜피신'이었다. 그래 약병에다 그 성분을 크게 써 붙이기도 했고. 비타민 여러 종류며 박카스 정(드링크제가 아니고 처음에는 알약으로 출시되었다.) 등 영양제도 수북이 쌓아 놓기로 하는 거다.

아주머니는 그에게 말했다.

이 선생 걱정마세요. 까짓 결핵 6개월쯤 약 먹으면, 남에게 전염되지도 않는다 합니다. 그리고 여기 뱀이 더러 있어요. 중탕을 내가 해 드릴게. 생선회며 매운탕 따위는 먹기 싫도록 먹을 수 있어요. 또 집 밖에만 나가면 후박나무지요. 소염제로 널리 쓰인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이 결핵에도 민간요법으로 더러 써요. 유미 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데, 세상에 이런 은인을 모시고 살게 되다니요.”

아주머니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여기서 요양하면서 지내면 저도 얼른 나을 것 같습니다.”

이튿날은 아주머니가 차려 주는 아침을 한 그릇 다 비웠다. 아주머니는 점심때 국수를 대접했다. 진우도 합석했고. 홍합이며 갖가지 조개 등속을 넣어 달인 육수가 침샘을 자극한다. 고명도 수두룩하게 얹어주었다. 원래 면을 좋아하는 터라, 현우에겐 꿀맛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진우가 오더니 해안선 구경을 가잔다. 현우는 너무 서둘러 자신을 바깥에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지만,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싶어 지난번 그 배에 올랐다. 바람이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파도도 잔잔할 수밖에. 진우는 해안선에서 3백 미터쯤 떨어져서 발동선을 몰아갔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솟아 섬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눈앞, 손에 잡힐 듯하지만,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내가 물었다.

형님, 저게 무슨 산입니까?”

둑설산이라고 해발 640미터 가까이 돼요. 서해안 섬들 산 중에서 제일 높지.”

올라갈 수가 있어요? 정상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현우 체력으로써는 무리란다. 정상엔 경비 초소가 있다는 말에 현우는 흠칫 놀란다. 바다에서 바라본 섬은 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빽빽이 숲을 이루는 나무는 거의가 후박나무라고 했다. 주민들의 적잖은 수입원이라는 말을 진우는 덧붙였다. 때가 되면 아낙네들이 후박나무 껍질을 벗기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껍질에서 여자 화장품 원료가 추출된다고도 소개했다.

진우는 가끔 들렀다. 둘이서 방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엔 어디서 구했는지 <새 대중가요>라는 책을 펼쳐놓고, 현우에게 기타 반주를 하며 가르쳐 주기도 했다. 반야월 작사, 이인권 작곡, 최무룡 노래라는 것까지 거기 표시되어 있었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곡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은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능금꽃이 피는!

갑자기 삼랑진이 한없이 그리웠다. 한마디로 말해 삼랑진은 복숭아와 딸기의 고장이니까 말이다. 복사꽃이라니 복숭아꽃 아닌가. 기약 없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서러워 눈시울이 젖었다. 오기택의 충청도 아줌마고향무정아빠의 청춘이미자의 저 강은 알고 있다’, 고봉산의 아메리칸 마도로스등등, 그때 같이 배우고 부른 노래는 수십 곡이 넘으리라.

6 25 한국전쟁도 모른 채 지나갔다는 섬인데, 진우 형은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섬엔 물론 텔레비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축음기도 한 시절 갔으니, 노래는 주로 잘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를 통해 배웠다. 어느 날 진우가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현우 보고 남진이란 가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현우는 묵묵부답일 수밖에. 그러자 남진이라는 목포고등학교 출신 대형 가수가 등장했는데, 그가 부른 가슴 아프게가 바야흐로 히트를 치고 있다는 게 아닌가. 현우는 중얼거렸다.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진우 형은 가슴 아프게를 한 소절씩 기타로 연주하며 현우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멜로디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두어 시간이 안 되어 완전히 습득을 할 수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릇 사람이란 게 인연이나, 우연의 일치 앞에 섬뜩할 만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어쩌면 현우의 이 현실과 가사 내용이 이렇게 같은가 싶어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진우 형은 남진이 일취월장하는 조짐이 보이는 노래들을 가르쳐 줬으니, 그게 현우가 남진의 열렬한 팬으로 평생을 보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하자.

마침내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날도 둘이서 남진이 새로 취입했다는, ‘울려고 내가 왔나를 연습 중이었다.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여길 왔나/ 낯서른(낯선)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 하늘마저 날 울려 궂은비는 내리고/ 무정할 사 옛 사랑아 / 그대 찾아 천리 길을 울려고 내가 왔나/ 그 누가 찾아왔나 ……󰁑󰁝

때맞춰 바깥엔 거짓말같이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할 일도 없는 아주머니가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합류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목포의 눈물을 제창하였다. ‘목포의 눈물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일제 강점기의 저항 노래라는 것도 원인이지만, 손목인(孫牧仁)이 남녀의 키(음역)에 맞게 작곡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지 모른다. 외로운 세 사람이 절창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닷바람과 부딪쳐 처연한 화음을 이루는 것 같았다. 뜬금없이 아주머니가 얘기한 것이었다.

이난영만 한 가수가 없지. 이난영이 목포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한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난 기구한 인연으로 졸업했는데. 이난영이 두 살 많았었지, 내가 입학했을 땐 이난영이 3학년이었어. 4년제였고. 한데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둔 것 같아.”

서로 잘 알았겠네요.”

알다말다. 오가기도 예사로 한 정도였으니까. 나도 한창 땐 이난영에 지지 않을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우.”

허풍이라고 깔아뭉개기에는 아주머니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였다. 그리고 사실 아주머니의 노래 솜씨는 대단했다. 그 날 셋은 밤이 이슥할 때까지 노래에 열중했다. 노래 도중에 아주머니가 건네는 말이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동춘 서커스단을 들먹인다. 목포에서 결성된 동춘 서커스단. 단원들의 곡예도 곡예지만, 배삼룡 허장강 서영춘이라는 배우들이 희극을 선보이고 노래를 불러 관객들을 사로잡는다나? 진우도 가끔 관람했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아주머니는 고향 아니 친정이 압호도라 했다. 그 압호도에서 하도 어렵게 살다가, 목포 공립보통학교 교무실에서 잔심부름하는 조건으로(말하자면 사환?) 학적부에 이름을 올려 두었다는 것이다. 교장 사택에서 먹고 자고. 그러니 학교가 집이었고 집이 학교였다.

까짓 학년 따위 개념도 없었고, 세월이 가다 보니 졸업은 하게 되었다나? 열대여섯 살 때. 졸업을 하고도 학교에 남아 있던 중, 어느 해 뭍으로 경주 이 씨 종친회 일을 보러 나온 스무 한 살 청년 유미 아버지를 우연히 만나서 결혼하고 가*도로 옮겨와 산다는 것.

"이난영의 두 딸이 있었어. 숙자/ 애자라고 말이야. 그리고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 민자 등이 두서너 해 전에 미국으로 갔다지?"

현우가 받았다.

"김 시스터즈. 미국에서 인기가 대단하던 모양인데요. 아시아 최초의 걸 그룹 미국 진출이라나요? 미국 사람보다 더 훨씬 고액 납세자란 이야기 들리던데요."

현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갔다.

"형님은 아세요?"

"?"

"딘 마틴."

"잘 모르겠는데.가수 아니던가?"

"이름난 가수로 알려졌지요. 한데 나는 그를 영화로 보았습니다. 서부극 '리오 브라보'. 딘 마틴이 마을의 술꾼으로 출연합니다."

"한데 왜 그를 들먹여요?"

"그의 다재다능한 말하자면 탤런트가 워낙 유명해서.김 시스터즈를 그가 돌보고 있다고 해요."

"이 선생 뭘 많이 알고 있네그려."

"기차 통학하면서 친구들한테 들은 낙수(落穗)지요. 우스운 얘기 하나 더. 딘 마틴이 파리채를 들고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는 일화가 있어요."

"정말이오?"

거의 새벽이 가까웠을 무렵에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찬우였다. 이미자가 여자 가수로서 인기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아도, 떠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우가 유달산아 말해 다오라는 가요를 자기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른 것이다.

󰁞󰁔꽃 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던 처녀야/ 달뜨는 영산강에 노래하던 총각아/ 그리움을 못 잊어 천리 길을 왔건만/ 임들은 어디 갔나 다 어디 갔나/ 유달산아 말해 다오 말을 해 다오// 옛 보던 유달산도 변함없이 잘 있고/ 안개 낀 삼학동에 물새들도 자는데/ 그리워 서러워서 불러보는 예 노래/ 임들은 들으시나 못 들으시나/ 영산강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

다들 방을 나가고 난 뒤에 잠이 올 턱이 없었다. 현우는 새벽까지 이리저리 뒤척였다. 동틀 무렵에 잠시 눈을 붙이마마나 했을 수밖에.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인간이 간사하다는 걸 현우가 다시 한 번 깨닫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약간씩 적응하다 보니, 겁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잘 먹어서 그런지 건강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물물교환 수준의, 간이(簡易) 5일장이 서는 초등학교 근처에까지 혼자 가보기도 했다. 중학교 분교장 안에도 발을 들여 넣어보았는데, 학생들은 20명 남짓한 것 같았다. 국민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와 중학교 분교장의 합동 학예 발표회 때도 놀러갔다.

, 할 달 건너 유미한테서 편지가 왔다. 군산인가 어디 미용실에 취업할 거라는 반가운 소식을 담았다. 결핵에 좋다는 홍삼이며 치료제도 보내 주었다. 찬우 형의 발동선으로 유미는 서너 달에 한 번씩 다니러 오기도 했다. 물론 저녁에 도착하여 새벽이면 나갔다. 이웃의 눈이 있어서였음은 물론이다. 손바닥만 한 마을이라 그게 무서웠다. 유미는 얼굴에서 수심이 많이 사라지고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친구와 자취를 한다고 했다.

세월은 역시 유수 같았다. 출장소 근처에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하였다. 어느 날 cksd 형의 소개로 이장(里長)을 만났다. 이장은 사람이 참 좋았다. 그는 마을 구석구석까지를 꿰뚫고 있었다. 누구 네 집 숟가락 수까지 다 안다는 말이 있지만, 이장 임종찬 씨야말로 그랬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고말고. 현우는 특별히 그를 두어 번 찾아갔다. 유미가 보낸 준 홍삼을 한 상자 들고서. 이장은 그런 현우를 별 의심하지 않았다.

현우가 그곳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순탄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장 덕분이었다. 그 뒤로도 음으로 양으로 이장은 현우를 배려해 주었다. 머리가 길면 진우 형이랑 같이 이장한테 가서 깎았다. 사실 이발만큼은 -중이 제 머리 어쩌고저쩌고 라는 말이 있지만-이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근본적으로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한결같이 좋아 타관에서 흘러 들어온 현우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면 기침을 일부러 해대는 것만은 예사였고.

세월 따라 적응의 요령도 생겨나서 견디기가 수월했다. 어느 해 어린이날 초등학교로 바람을 쐬러 갔다. 날씨가 따뜻해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교실마다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어린이는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운동장가 게시판에서 정말 신기한 게시물 한 장을 보았다. ()에 관한 동화 모집 광고였다. 주인 아들을 따라 사냥 길에 동행했다가, 주인 아들이 중상을 당하자 마을로 내려와, 학생 둘의 바짓가랑이를 물어 끌어 산으로 가서, 끝내 목숨을 구했다는 것. 대대적으로 이 견공을 기리는 행사를 치르는데, 동화도 거기 포함되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신문 기사 두 장도 오려서 게시해 두었다. 그날 현우가 메모한 내용이다.

라츠는 독일 세계 셰퍼드견 전람에서의 화려한 상력을 자랑하는 부견(父犬) 페어 폰 베어스타펜 군와 모견(母犬) 예리 폰 브라이킨벨하우스 양의 사이에 난, 세계 최고의 명견 혈통 후예란다. 수입시의 가격이 62년 봄 150만 원!

현우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일련의 숨 막히는 사건을 거쳐 왔지만, 워낙 경제에 대한 관심과 일상 생활비 계산에 무딘 현우로서는 도대체 돈을 얼마를 어떻게 썼는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남은 현찰에 대해서이랴. 제 방에 들어와서야 현우는 유미 어머니에게서 빌려 써왔었던, 반닫이에서 돈을 끄집어내 세어 보고 주먹구구를 해댔다. 개 한 마리가 150만 원이란다. 자신이 받은 돈은 그 1/5 정도라면 얼추 맞는 것 같다. 뭉칫돈으로 유미한테 2만 원 정도 줬으리라. 그리고 하숙비 삼아 천 원 남짓 지불했으니 2만 원 넘게 소요됐고. 현찰을 세어 보니, 1/ 3은 남은 것 같았다. 현우는 그제야 비로소 10여 년을 견디려면 규모 있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런 뒤 학교를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약속이나 한 듯이 교실에서는 노래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 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승리의 노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통일 행진곡)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도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6 25의 노래) 등등.

가만히 보니 어린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면서도 어김없이 어린이들은 이 노래들을 불렀다 현우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세월이 흐른 뒤 설사 천만 요행으로 복직을 한다 해도 절뚝거리며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생각은 현우에겐 없었다.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때로는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한 노릇 아닌가. 중등학교 음악과 준교사 검정고시! 두말할 것 없이 그게 목표였다. 음악 선생만 되면, 체육 수업을 안 해도 된다. 전공만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그런 정신으로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책을 더 사기로 했다. 우체국도 없던 시절이라 전신전화국에 가서 유미한테 전화로 부탁했더니 이윽고 소포가 왔다. <시창(콜위붕겐)><청음>< 음악개론> <음악사>< 합창> <지휘법> <화성학> <음악감상법>< 악기론><건반화성><중고등학교 음악과 교과서> <한국가곡200선집> <외국 가곡 및 민요> 등등. 유미는 똑똑해서 시내 큰 서점을 누비듯이 하여 그것들을 구한 것 같았다. 헌 서점에서 나온 것도 있었지만, 상태도 비교적 좋았다.

1차 합격을 하면 실기 시험도 쳐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부탁하여, 헌 오르간을 한 대 구입하였다. 그리고 그걸 수시로 연주하였고. 그 공부라는 게 현우에겐 투병 자체와 같은 지상 덕목이었다. 투병+공부=막연한 기대. 이런 등식을 세워 놓고 살아갔다.

게다가 대중가요도 찬우 형을 통해 접목할 수 있는 터, 그야말로 음악 아니 공부는 거칠 게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번씩 가곡이나 외국민요, 예를 들어 O Sole Mio 혹은 Oh Danny Boy 등을 연습할 때, 바이브레이션이 너무 심하게 나타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걸 또 바로잡느라 고생깨나 했다고 하자. <가고파>는 사범학교에 다닐 때 2절까지 배웠었는데, 세상에 책에 3절이 나오지 않는가. 거기 매료되기도 했다.

, 뱀이라는 게 특효가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결핵은 워낙 흔한 질병이었고, 유미 아버지도 잠시 앓았었는데, 뱀탕을 밥 먹듯 했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아주머니의 뱀 다루는 솜씨는 남달랐다.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현우가 잡아 오는 뱀들을 며칠 통 안에 가둬 두었다가, 약탕기 안에 대여섯 마리를 넣는다. 그리고 그 위에 접시를 얹고, 약탕기와의 사이를 밀가루 반죽한 것으로 봉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가마솥에 물을 붓고 그 위에 약탕기를 담근 다음 은근한 불로 이틀 동안 중탕을 한다. 삼베 보자기에 중탕이 된 뱀을 넣고 한약 짜듯이 하면, 노르스름한 물이 만 사발쯤 나오는데 그걸 쭉 들이키면 된다. 그리고 편강 한 조각.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으나 갈수록 그 맛에 길들여져서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렇게 5년을 지냈다. 유미는 일정 기간 한 번씩 집에 들르곤 하였다. 유미는 미용 기술이 상당해서 현우를 머리를 직접 깎아 주었다. 스포츠형이 아니라 가위로 신사 머리 스타일로. 때로는 가르마를 반듯하게 내고 그야말로 정발(整髮)을 하고 보니 들어올 때보다 인물이 훤해져 있었다. 비듬이 심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유미가 샴프인가 뭔가를 쓰라고 주기에 그대로 따라 했더니 훨씬 덜 가려웠다.

유미는 그뿐만 아니라 홍삼이며, 비타민, 기타 영양제 등을 한가득 싸들고 왔다. 그래서 그런지 현우의 결핵은 확실히 차도가 있었다. 다만,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봐야 했으나,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그냥 칩거하는 수밖에.

그해 가을이었다. 유미가 미장원을 개업한다며 집에 걸음을 하였다. 그동안 상당히 미용 기술도 늘었으니, 독립하는 게 순서라는 게 아닌가? 현우는 정말 친동생 일처럼 여겨져,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유미에게 돈다발을 몇 개 건넸다. 아마 광주에서와 비슷한 액수이리라. 그리고 금목걸이와 금팔찌도. 한데 유미 표정이 심상찮다. 뭔가 입을 떼려다가 머뭇거리기에 현우가 다그칠밖에.

뭐 걱정이라도 있어? 나한테 말해 보렴. 돈이 부족해?”

아뇨, 지난 다섯 해 동안 오빠가 보살펴 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는데요. 오빠는 뭐가를 감추고 계시는 것 같아요. 단순한 요양을 위해 천 리 땅에 오신 게 아니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제게만 살짝 일러 주실 수 없으세요? 저 오빠한테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비밀을 지킬게요.”

유미는 역시 눈치와 머리 회전이 빠른 애였다. 속도 넓고. 일이 거기까지 이르렀고, 현우가 같은 경주 이 씨 양반 후손인 유미에게 계속 일을 다물겠는가? 그는 마침내 그동안의 일을 발설하고 말았다.

이름도 광우가 아니라, 현우(玄雨)라는 걸 알렸고. 어쩌다 삼랑진이라는 말까지 뱉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데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굉장히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왜 자수를 하지 않으셨어요? 오빠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지금이라도. "

"유미야, 난 수형(受刑) 생활을 견디지 못할 또 다른 이유가 있어."

“?"

살인죄의 공소 시효가 15년이랬지? 아마. 그때까지 여기서 지낼까 보다.”

그날 밤, 현우는 처음으로 자기 양심이 그 정도로 불량한가 싶어 괴로워했다. 만송 어른의 말씀이 어떠셨든 간에 사람을 죽였으면 죗값을 받는 게 도리다. 물론 비록 자신이 선천적인 요로협착증 때문에 항상 소변 불통에 시달려왔음을 감안하자.

여럿 앞에서 소피를 못 보는 것이다. 교도소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여태껏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병에다가 결핵, 불구, 거기다가 신경 쇠약까지 덮쳐 있으니 죄수들과의 공동생활을 너무 힘든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 그러나 그는 긴 한숨 끝에 비로소 내뱉는 소리다.

"차라리 유미 말대로 할까? 결핵도 이제 많이 나아졌으니.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선천성 요로 협착증(尿路狹窄)만 아니라면."

"그게 무슨 병이에요?"

"여자인 네겐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넘어가지."

그러나 그 병은 젊은 현우에게도 하나의 멍에였다. 그로 인해 소피를 여러 사람과 함께 못 보는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자수 결심은 그래서 진작 안 섰고 지금도 마찬가지. 엄마의 말씀이 가슴을 꿰찔렀다.

"죽은 니 형하고 니는 와 오줌도 잘 못 누노? 쯧쯧."

이튿날 유미는 다시 군산으로 떠났다. 불안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유미에게서 등기 편지가 왔는데, 죽어도 남에게 전하지 않을 거라며, 안심하라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었다. 유미의 편지를 받고 나니, 섬 생활에 점점 더 적응해 나가는 것 같았다.

 

5. 귀향

다시 한겨울이 다가오고 혹독한 추위가 섬을 에워쌌다. 바람이 세차서 바깥출입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책과 씨름하고, 진우 형이 오면 늘 하던 대로 노래 부르고 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중국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린다고 할 만큼 섬은 육지에서 떨어져 망망대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세월과 계절은 달음질쳐 이윽고 봄은 소리 없이 가가도 바위 병풍에 와서 부딪히며 대자연의 화음을 뿜어 대고 있었다.

4월 어느 날 유미가 소문도 없이 찾아왔다. 제법 돈벌이가 되는 듯, 옷차림새가 더욱 세련되고, 얼굴이 팽팽해져 있었다. 오랜만이라 큰방에서 모녀간의 회포를 푸는 듯, 가끔씩 웃음소리를 흘려내 보내고 있었다. 현우가 이집 가족이라도 된 듯 흐뭇한 느낌이 안 들었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저녁에 사립문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까, 유미가 쪼르르 달려왔다. 이야기 좀 하자면서. 둘은 방안으로 갔다.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더니, 여태 약속을 잘 지켜온 걸 전제하기에, 현우가 고맙다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현우가 한마디 했다. 그게 고마워서라도 10년을 더 견디겠다고. 가가도가 좋고 정도 들어서라고. 그런데 이번에 유미가 심각한 표정으로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논 없이 큰일을 저질러서 죄송하다고까지 한다.

아니, 유미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고 유분수지. 그게 무슨 말이냐?

현우는 가슴이 사뭇 떨리고 평발 친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그런데 유미는 얄미울 만큼 거침없다.

오빠, 5년 전, 그날 오빠는 그 아기에게 정말 살의(殺意)가 있었어요?”

무슨 뜻이냐? 난 만송 어른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황망 중에 주머니칼로 계집아이를 찌른 거야. 계집애를 15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 너무 충격적이어서.심신 미약. 앞뒤 가릴 판단력이 내게 없었던 거고.”

오빠, 과실치사나 폭행 아시지요?”

알지, 그건 왜?

한데 말이에요. 제가 그동안 오빠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쳤다는 자괴지심(自愧之心)에 시달려 왔거든요. 오빠는 절대 살인을 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 왔어요. 그래서 변호사를 두어 달 전에 찾아갔었어요.”

유미의 기가 막히는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자신에게 몸서리쳐지는 광주까지 일부러 나가, 변호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정중한 예를 했더니, 사무장이 아닌 변호사가 직접 상담해 주더란다. 물론 유미도 현우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려고, 전후 사정을 조리 있게 풀어 나갔다. 변호사의 말이란다.

삼랑진이라 했지요?”

.”

됐습니다. 알아볼 테니 들어가세요. 일주일 뒤에 다시 오세요.”

유미는 일주일 뒤 약속한 날짜에 변호사를 만나러 사무실로 갔다. 변호사는 유미를 얕잡아 보지 않더란다. 하기야 옷차림부터 단정했고, 똑 부러지게 생긴 유미니까 그런 인상을 주었겠지. 변호사는 알아봤더라는 것이다. 62년에서 63년도 사이에 삼랑진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는지를.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세 살 바기 여자 애가 하나 그 무렵에 칼에 찔린 일은 있다는 것. 할머니가 애를 업고 바로 이웃 삼랑진 의원으로 달려가 치료를 받았다나? 그 뒤 할머니와 손녀는 서둘러 다른 데로 떠났고, 그 뒤로 삼랑진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는 죽었습니까?”

죽다니요? 그냥 다친 것뿐이에요. 당시 가해자가 심신 미약 상태였다든지 하면, 처벌은 가벼워집니다. 그건 그렇고, 그날 흉기의 날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모르지만, 주머니칼이라니 아주 작았겠지요."

"날 길이가 짧을수록 처벌이 가벼워지는데."

현우는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싶었다. 전후 뉘앙스를 봐서는 어린이가 죽지 않았다는 데에 무게가 실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 행동의 결과로써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진짜 살의는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주머니칼의 날 길이는 4센티미터? 그래 아버지와 만송 어른의 당부를 잊지 않고 저지른 -심신 미약 상태일 만큼 그는 불행한 시절을 보냈었지 않은가? 왜곡된 효(결과적으로는 만고의 불효지만)를 저질렀을(?) 따름이다. 유미가 이윽고 다시 입을 떼었다.

이제 귀향하세요. 잡혀도 처벌 받지 않으실 확률이 95% 이상이에요.”

실로 어처구니없었다. 유미의 말대로라면 고생 아닌 고생을 가가도에서 한 셈이다. 현우는 가가도를 떠나기로 했다. 5년 만이다.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휙휙 스쳐 지나가는 꼴이었다.

유미 어머니와 진우 형의 뒷바라지로 짐을 챙겼다. 그동안 책이 많이 모아져서 그렇지, 다른 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땐 세월이 흘러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오가는 터라, 목포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목포에 도착하니, 유미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광주까지 갔고, 광주서 기차로 갈아탔다. 격세지감이라더니, 그 옛날의 완행열차처럼,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고여덟 시간 만에 열차는 현우를 삼랑진역에 내려다 놓았다.

옛날과 다름없이 삼랑진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합실의 시침이 10을 가리키고, 비슷한 시각에 도착한 부산 발 서울행 열차에서 내린 여객들이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마주보이는 삼일여관의 간판은 그대로였다, 지서는 파출소라는 이름을 대신 달고 새 단장을 한 채 몇 미터 뒤로 옮겨 자리 잡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현우는 애써 이를 진정시키고, 제법 폭이 넓어진 도로를 걸었다. 목포에서 출발할 때 아니 가*도에서 결심한 대로, 그는 2킬로미터 떨어진 칠기점으로 향해 걸었다. 거기 건우 형 내외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도매상을 인수했다지만, 어쩐지 둘이 거기서 다른 데로 이사 가기는 않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였다.

한산한 곳이라 다행히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있었다, 그 자리에! 찬우 형의 집이 말이다. 지붕을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꿔 얹고 건평이 넓어졌을 뿐, 어쩐지 옛 정취가 그대로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현우는 문패 밑에 붙은 초인종을 눌렀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그러자 안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렸으니, 들어오라는 거다.

그건 바로 찬우 형 목소리였다.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자, 방문이 열리고 형이 마루로 나오는가 싶더니 형수 또한 뒤따랐다. 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

이 밤중에 누고?”

찬우 형은 술 도매상 가게에서 방금 퇴근하고 저녁 식사 후 상을 물린 듯, 숭늉 그릇이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형님, 형수요. 접니더. 현우요.”

건우는 현우를 보더니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숫제 닫았다. 대신 형수가 하는 말이다.

아이고, 세상에 이기 무슨 일이고? 대럼(도련님)이 어디 가 죽었는 줄 알았는데 구신(귀신)이 나타났단 말이가? 아이고 상동아지매요, 대럼이 돌아왔습니데이.”

상동 댁은 현우 엄마의 택호(宅號). 건우 형 내외는 엄마 생전에 엄마한테 그렇게 잘해 드렸으니, 저승에 계신 엄마께 현우 귀환을 일러 드릴 만하고말고. 현우는 건우 형 내외가 그럴 수 없이 고마워서일까? 방안에 들어서자말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마침내 펑펑 통곡을 하고 나니 형이 침묵을 깼다.

야 이노무 자슥아, 니 어데 갔다 왔노? 가슴을 칠 노릇이데이.”

그것보다 형님 형수님, 이제 제가 5년 전, 사람 죽인 거 처벌 안 받아도 되는 거지요?”

아니 그기 무슨 소리고? 사람을 쥑이다니.”

현우는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껴야만 했다. 바야흐로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셋이서 동문서답 놀이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특히 형수의 표정이 지난 세월을 읽기에는 지나칠 만큼 안온했다. 여전히 형수의 목소리 하나만은 컸다.

젊었을 때부터 가는귀가 어두웠는데, 세월은 형수의 청력을 많이 앗아 간 것 같았다. 바깥에서 들었으면 서로 싸우는 줄 알았으리라. 통역을 사이에 두었다고 생각하고 여기 그 대화를 고스란히 옮겨본다.

형수님. 그 계집아이 뒷얘기 들었습니까?”

가시나, 아니 계집아이라니 그 무슨 소리인교?

“5년 전에 내가 찔렀던 세 살짜리 딸애 말입니다. 고거 때문에 여태 숨어 지냈다 아닙니꺼?”

아이고 대럼도. 인자 알겠다. 시상에 기가 차 죽겠네 고마. 가가 죽었는 줄 알았다 말이고, 우야꼬?”

아니 그러면 어떻게 됐다는 말입니까?”

이윽고 건우가 질겁해서 개입(?)했다.

이 노무 자슥아, 씰데없는 소리 작작해라. 내사 마 말이 안 나온다. 그날 새벽에 미전에 사는 목포때기() 할마시 손녀를 칼로 찔렀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기 니란 말이가?”

어찌 되었는데요?”

경상(輕傷)이었단다. 삼랑진 의원에서 두 바늘인가 깁고 다 나았다는 것이다. 물론 삼랑진이 좀 시끄러웠지만, 이내 사건은 묻혀 버렸단다. 다만 행불이 되어 버린 현우가 문제였다. 남의 입줄에 두어 해 오르내렸었고.

현우가 부모를 거의 동시에 잃고 자신도 신병에 걸리다 보니, 약간 정신이 혼미했을 거란 얘기가 돌아다니더라나? 현우가 범인(?)이라고 짐작을 했으나, 끝내 그도 읍민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 버린 건 당연지사.

형님, 그 할마시하고 계집아이는 지금 어디에 삽니까?"

모르지. 할마시가 그길로 손녀를 업고 어디로 떠났는지 뒤로 소식이 없다 아니가. 목포로 떠났다는 풍문도 있고. 잊아뿌라."

실로 아연실색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고 무언가? 죽지도 않은 세 살짜리 계집아이 하나 바람에 허송한 세월이 5! 어디서 보상을 받는단 말인가? 현우는 그동안의 동안의 일을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건우 형의 작은방에서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건우가하는 말이다.

"맞네. '월하빙인(月下氷人)' 소리 들었네. 인마야. 실은 말이다. 그 어른이 암자에 찾아오는 젊은이들한테 상습적(?)으로 월하빙인을 들먹였는 기라. 니가 떠나기 얼마 전부터 그 어른의 정신이 맑지 않았다고 카더라. 돌아가실 무렵엔 거의 치매 수준이셨다. 그걸 믿었단 말이가? 아무래도 그렇지 세상에 고등학교, 아니 영남의 수재가 모인다는 사범학교까지 나온 놈이, 그런 거를 믿나? 우연의 일치이고말고. 그라고 말이다. 지서 주임 말로는 그 일은 본서에 보고도 안 됐다 카더라. 사건화 되었다 캐도 과실 치상 정도라 안 카나. 인자 걱정 없다. 고도(孤島)에서 불구덩이에 빠진 기 아니고 뭐꼬? 자슥아."

현우는 그만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선고께서 그토록 그분의 말씀을 어기지 말라고 강조하셨고, 그분이 버릇처럼 말씀하신 오래 전의 수수께끼'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데, 그분은 입적하셨다?

물론 이튿날부터 현우는 조심을 하면서도 돌아온 삼랑진에서 별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친구도 만났고.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아니 않을 뿐더러, 그동안의 그의 행방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큼 삼랑진은 정이 넘치는 고장이 아니었다. 안창회와 노윤길은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도 나온 데다 직장마저 그럴싸한 걸 얻었다. 조연호 장광선 등도 만나 자깐씩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상당수는 타관으로 나가 있어서 만나기조차 힘들었고,

거리엔 낯선 얼굴들도 많았다. 그게 편햇다. 그와 아는 누구도 현우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고. 건우 형은 아들 둘을 두어서, 초등학교에 학교에 다니는지라 집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그게 또 현우에게는 좋았다. 가끔 녀석들 공부도 봐 주고 했다. 밀양 보건소에 가서 X를 찍어 보았더니, 정말 다행이다! 소장의 말. 결핵을 앓은 흔적이 조금 보이긴 해도 완치되었다는 것.

당분간 현우는 건우 형한테 얹혀살기로 했다. 건우는 아들 둘을 두어서, 초등학교에 학교에 다니는지라 집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그게 또 현우에게는 좋았다. 가끔 녀석들 공부도 봐 주고 했다. 건우 형이 새로 구입한 60씨씨 오토바이에 두 말 들이 탁주 통을 하나씩 싣고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기로 했다. 강 건너 김해 안양리 마을까지 소주 두 상자씩을 날아다 주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도로 포장이 안 되어서 낙동강 다리(구 철교를 도로로 만든 것)를 건너가면 철도 건널목까지는 굉장히 가팔랐다. 거길 힘도 부족한 60cc 오토바이로 오르며 거기가 걸림돌이었다. 일단을 넣어도 엔진 힘이 부쳤다. 자연히 진로 소주가 한두 개 도로 위에 떨어져 나둥그러지게 마련. 깨지기도 했다. 그러면 그 소줏값을 모른 척 현우 자신이 부담했다.

건우는 물론 수고비를 줬다. 충분할 정도로. 가가도에서 쓰고 남은 돈이 조금은 있어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는데도. 현우 발가락이 네 개 없다는 정도는 발걸음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못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강변하자. 건강이 좋아지니, 그런 장애 정도는 감춰졌다. 가끔 선고와 엄마 산소에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광경이 실려 장관이었다. 맞은편 매봉산의 싱싱한 푸름이 한꺼번에 몰려와 허파꽈리를 부풀게 하는 것 같았고. 그러나 쉽사리 희망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현우는 변해 있었다. 복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우선 초등학교다. 현우는 다리 저는 자기 장애에 물론 신경을 썼다. 게다가 다 나았는데도 현우는 폐결핵을 앓았던 전력이 마음에 걸렸다. 5년 동안의 도피 아닌 도피 생활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에 휘둘렸고.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중등학교 음악과 준교사 시험? 한데 합격은 자신 있지만, 임용이 문제였다. 그건 나중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시 그렇게 2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현우 나이 스물일곱 가까이 되었을 넘기려 할 무렵,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도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몇 달 교육 뒤 바로 교단에 설 수 있다는 게 아닌가?

현우는 쾌재를 불렀다. 광주와 목포를 거쳐 다시 삼랑진에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했었던 교사 자격증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할 때, 교육부 장관(당시 문교부 장관)이 준 것이다. 그는 그걸 들고 교육청으로 가서 초등계장에게 내밀었다. 워낙 다급했던지, 초등계장은 무슨 인재를 발굴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고. 초등계장의 말이다.

“31일 자로 발령 나도록 해 드릴게요. 필요한 서류는 갖고 오셔야 합니다. 겨울 방학 때 2주일 보수 교육만 받으시면 되구요.”

그러나 서류 중 힘든 게 있었다. 신원 보증인지 신원 진술서인지.고민하던 현우는 K대령 아니 K의원에게 서신을 띄웠더니, 그에게서가 아니라 교육청으로부터, 서류 염려 말라는 연락이 왔으니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드디어 31일이 다가왔다. 현우는 옛날 살던 삼랑진 송지리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상남면 오산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건우 형 집에서 자전거로 통근이 가능한 데였다. 물론 도중에 샛강을 건널 때는 자전거를 나룻배에 실어야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근무한 결과, 6년 넘게 거기서 근무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다시 몇 년이 후딱 흐르고 난 뒤 삼랑진읍 관내 숭진초등학교로 전보시켜 주었고.

그러나 건우 형 집에서 출퇴근하려면,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 숙직실 옆에 부엌이 있고, 거기 또 하나의 노는 방이 딸려 있지 않은가? 취사를 하는 데 별 불편이 없도록 되어 있었으니 거기서 자취를 하기로 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세 명의 여교사가 같이 부임하게 된 것이다. 검정고시를 거쳐 자격을 얻은 사람들인데 모두가 고만고만해 보였다. 오랜 공백은 인생 공부를 한 셈으로 치기로 했다. 그러니 교사 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항상 노래를 불렀으니, 그 소문이 자자해서 학구 내 동네 환갑잔치에 불려가 가수 아닌 가수가 되어 분위기를 띄워 주었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남자 기생’! 한 번은-58일 전후였다.- 학교장이 학부모 위로 잔치를 한답시고, 어린이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을 모시고 노래잔치를 벌였는데, 정말 가관 아니 장관이 벌어졌다. 그의 노래에 맞춰 수백 명의 흰 옷 입은 부녀자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정말 즐거웠다.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 현우 자신이 착각을 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덧붙여야 할 게 있다. 현우는 민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세마치와 굿거리장단을 장구로 넣으면서 '아리랑' , '밀양 아리랑', '진도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양산도' 등 비교적 쉬우면서도 널리 알려진 민요 등을 밤하늘에 쏘아 올리면, 환갑잔치에 모인 시골 노인들이 열광했다. 과연 남자 기생다웠다고나 하자.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굽이야 굽이야 눈물이 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을 아라리가 났네// 진공단 이불이 열에ㅐ 열두 채라도 / 정든 임 있어야 깔고 덮고 잠자지/ 아리아라랑

그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본동(임천리)에 사는 동료들 집에 가서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라 했으니, 그땐 장구 장단에, 민요만 아니라 흘러간 옛 노래 (대중가요)가 얹히기 예사였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갈치 밥국(생갈치를 김치랑 갖은양념, 쌀을 넣어 끓인 것)'! 그 맛을 뉘라서 지금 기억해 낼까?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발령 동기 배 선생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현우에게 다가왔다. 거의 울먹이는 표정이었다. 큰일났다는 것이다. 숙제 안 해온 어린이 종아리를 때렸는데, 그만 그 자리에 퍼렇게 멍이 들었단다. 어린이의 할머니가 노발대발하여 자기를 부르니, 어쩌면 좋겠느냐고 말끝을 흐린다. 현우는 우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현우는 그날 배 선생 구하기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일곱 시쯤 자취를 하는 세 여교사와 현우, 이렇게 동기(?) 넷이서 할머니 집을 방문하게 된다. 할머니의 표정은 한 마디로 무서웠다. 그야말로 노발대발, 현우가 봐도 수습은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장죽을 들고 재떨이를 땅땅 내려치며 서슬이 퍼래 울부짖었다.

그래 어느 가시나고? 귀한 우리 대천이 다리를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기 말이다. 얼른 안 나오나? 가시나야. 니도 한 번 맞아 바라.”

배 선생은 그저 발발 떨고만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밖에. 한데 현우는 그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에서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다. 초점이 흐린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할머니가 하는 말.

앞 못 보는 내가 만져 밨다. 이래 부었는데, 얼마나 아푸겠노? 어서 나와 내 앞에서 다리 걷어라, 가시나야.”

현우에게 섬광(閃光)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사발가’! 그래, 엄마가 좋아하시던 사발가를 여기서 한번 뽑아보자. 현우는 순간적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대천이 할머니, 엄마도 평생 앞을 못 보셨습니더. 차에 부딪혀 돌아가셨습니더.”

댁은 누군교?”

현우는 같이 부임한 이 선생이라고 하고 나서 자신의 엄마를 끌어들였다. 엄마한테 불러 드리던 생각이 난다며, 에헴 에헴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뜸을 들여서도 안 되었다. 만류할 틈도 없었다. 현우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시골 할머니의 방에서, 간장을 쥐어짜듯 하는 애절한 목소리로 사발가를 뱃속 깊은 데서부터 뽑아 올렸다.

󰁔석탄 백탄 타는 데 연기만 풀썩 나고요오오호/ 요내 가슴 타는 데 연기도 짐(-수증기의 사투리)도 안 난네이/에헤야하하 데헤야 어여라난다 디여라하아/ 허송 세월을 말어라 󰁕

자신이 들어도 그건 절창(絶唱)이었다. 아니 이승과 저승을 건너뛰는 노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가 노여움을 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걸로 끝나지 않고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이 선생이라 캤제? 총각인교?”

그렇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현우 노래가 진짜 자기 마음에 든다는 거였다. 현우 나이를 묻기에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장가가 왜 늦었느냐며, 엄마 가슴이 많이 아팠겠다고 오히려 현우를 위로했다.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담임을 찾는다. 발발 떨던 배 선생이 다가가 할머니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는 한결 누그러졌다.

아까는 미안했데이. 대천이 일은 없는 걸로 합시데이. 그런데, 몇 살이고, 어디서 왔는기요? 부모와 형제는?”

목포에서 왔구요. 올해, 만으로 스무 살입니다.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형제도 없습니다.”

우짜꼬? 한데 말이다. (나이) 차가 나지만, 궁합이 딱 맞네. 내 시키는 대로 하소잉. 내가 중매 서꾸마. 만약 안 그라면 낭패 볼끼다. 내가 이래도 점쟁이데이.”,

일행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세 여교사는 자기들끼리 웃고 귓속말도 나누는 것 같았다. 현우만 멀리 떨어져 낭패날 일이 뭔지 잔머리를 굴렸다. 정답은 안 나왔지만, 여차하면 다시 화를 내서 교육청에 일러바치겠다는 거? 하기야 그 서슬 퍼런 할머니가 무슨 일인들 못 벌이랴.

한데 말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그 날 밤 사건이 빌미가 되어 소문이 나고, 상천이 할머니가 상천이나 상천이 아버지 손을 잡고 부지런히 학교에 드나들었다. 더듬거리며 교장실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학교장도 할머니 앞에서 듣기 좋으라고, 아니 더 이상 말썽 내지 말라는 뜻에서 배 선생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 모양이고.

이미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막기 힘들 없을 정도로. 일가붙이 하나 없는 장애를 가진 노총각과, 천애 고아 배 선생의 결합을 은근히 부추기는 동료와 학부모도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어린이들의 입에서 예언(?)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니 그게 오히려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해도 과언 아니리라.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현우가 덤블링 60인조 4층탑 쌓기-정말 힘들고 위험하다-연습을 하는데, 녀석들이 공공연히 현우와 배 선생을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고 놀려댔다. 현우는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 차라리 꿈만 같았다 하자.

"얼레리 꼴레리"

현우는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 차라리 꿈만 같았다. 손바닥만 한 시골에서, 더 이상 미루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특히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양반 가문 장() , 집안에서 학교에 압력을 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서둘러서 가정을 이루어야 어린이들에게 흉잡히지 않는다고. 그런저런 모든 외적 요인도 현우에겐 솔직히 말해 꿈만 같았다.

어쨌거나 현우는 이듬해 4월 말 배 선생에게 면사포를 씌우게 된다. 운동장에서 전교생 1,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학교장이 주례를 섰고. 내빈은 학부모와 건우 형 내외, 현우의 친구 몇몇 정도가 고작이었다. 대천 할머니는 가장 상석에 앉았다. 어린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군대기도 했고.

", 역시 배 선생님이 우리 하교에서 최고 미인이시다. 노총각. 호랑이 이 선생님 정말 장가 잘 드시네."

그런데 아주 특별한 하객이 있었으니 목포 수녀원에서 온 원로 수녀(修女), 소화테레사 수녀와 엘리사벳 수녀다. 그리고 유미 내외. 선생이 귀띔을 해 줬지만, 세세하게 묻는 것도 무엇 해서 현우는 그때까지 얼버무리며 지내왔는데, 만나고 보니 신비스럽다는 느낌조차 들었다. 수녀는 이상한(?) 휴가를 얻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는 것!

그리고 기가 막히는 일이 이어졌다. 조그만 학교에 둘 다 오래 비우는 것은 수업 지장이 크므로, 둘은 겨우 34일 특휴(特休)를 얻어 배 선생의 고향(?) 목포로 신혼여행을 간다, 아니 잠은 광주에 자고 이틀이 채 못 되는 시간을 목포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데 수녀 둘이 기어이 현우 내외의 첫날밤을, 곁에서 지켜보기로(?) 하겠다는 게 아닌가? 드디어 넷은 광주 신양 파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밤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호텔 커피숍에서 넷이서 차를 마셨다. 밤이 이슥해지자 소화 테레사 수녀가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기쁜 날 이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망설이는 눈치다.

수녀님이 제게 머뭇거리시는 것도 있습니까? 여태 딸처럼 보살펴 주셨는데요.”

어쩌면 사필귀정이라고 입을 여는 수녀의 표정이 정말 진지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알게 된 배 선생의 과거사는 모두를 경천동지할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윽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되었으니 축복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기를 등에 업고 삼랑진에서 경전선 열차를 탄 노파가 있었다. 1월도 중순을 넘겼을 무렵이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 살을 에었다. 12시간에 걸쳐 광주역까지 간 노파는, 역무원에게 통금(通禁)과 관련된 고무도장을 손에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무얼 좀 사 먹이는가 싶더니, 여관에 들었다. 이튿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다시 역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창구에다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기차표를 샀다. 그러곤 호남선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날씨가 찌뿌듯하다. 방금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르랴, 나주역을 지날 무렵엔 폭설로 바뀌었다. 도무지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도 다시역, 고마원역 등을 거쳐 기차는 느리지만 별 일 없이 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차장이 한 번 지나가다 차표를 체크했다. 할머니가 든 기차표에는 임성리라는 역 명이 찍혀 있었다. 차장을 보니 불안해 보이던 할머니의 얼굴이 펴지는가 싶더니, 부탁했다. 임성리역에 내려야 하는데 나중에 좀 가르쳐 달라고. 차장은 안심하라고 하고선, 한 정거장 앞두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할머니는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할머니는 차장에게 넋두리 삼아 지난 얘기를 하고 만다. 차장이 워낙 사람이 좋아 보여서겠지.

할머니는 삼랑진 사람들을 나무랐다. 살벌하고 인정머리가 없다고도 했고. 외손녀가 다친 이야기인들 어찌 빠뜨리랴. 아기의 어미 아비는 몇 년 전 애를 맡겨 두고 부산에 돈 벌러 간다고 떠나더니 소식도 없더란다. 삼랑진에 시집와 딸 하나 키워 시집보냈는데, 미전(美田)이라는 촌구석 농토 하나 없어 고생만 했을 수밖에. 그러니 뼈 빠지게 가난했음은 물어보나마나. 영감도 일찍 세상을 떴다. 할머니의 입에서 지난 가을 어느 날 새벽 송지 장터에서 손녀가 당한 일이 터져 나왔다. 연신 쯧쯧 혀를 차던 할머니가 하는 말, 임성리가 친정인데 일가붙이가 하나 있어 무작정 거기에 가서 잠시 지내다가 올 생각이라는 것.

차장은 이야기를 5분 넘게 듣고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다음 칸으로 이동했고, 할머니가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다. 창밖을 내다보려 했으나, 눈은 더 세차지고 있다. 한 치 앞을 분간 못 할 정도다. 도무지 어딘지 모르겠다. 차장도 안 보이고. 건너편에 중늙은이기 하나 있기에 물었다. 임성리역이 다 되어 가느냐고. 시골티가 나는 중늙은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음 역에 내리면 된다고 말이다.

할머니는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아기를 업었다. 이윽고 끼익 하고 기차가 멈추자 중늙은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만다. 눈 때문에 사위는 깜깜하다. 아니 천지가 온통 새하얗고 신발 바닥이 닿는 데는 미끄럽기만 하다. 할머니는 위태위태한 걸음걸이로 집찰구로 나왔으나, 역무원은 표만 받아들고 별 인사도 없다. 근데 역 앞 광경이 전혀 낯설기만 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선 크게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그게 할머니의 이승 이별이었다. 역사(驛舍)에는 몽탄이란 이름이 걸려 있었다.

역무원이 출근하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급히 경찰지서에 연락하고 아기는 역 안으로 옮겨 진정시키려 했으나,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기만 한다. 겨우 한숨을 쉬고 나서 물었더니, 자기 신분에 대해 딱 아는 건 세 개, 성은 배(), 이름은 숙이. 나이는 세 살.

이 실랑이(?)를 마침 고향에 다니러 온 수녀원의 수녀가 본 것이다. 워낙 아이가 예쁘게 생겼는데, 초라하게 입은 옷이며 차림새가 안 되어 보여, 수녀는 역무원에게 부탁을 한다. 참 가엾으니, 갈 곳이 없으면 나중에라도 자기가 돌보겠다고.

중늙은이의 잘못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알아보고 안내를 했더라면, 능히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고말고. 이튿날엔가 그렇잖아도 임성리역 못 미쳐서 없어진 할머니 때문에, 내내 찜찜했던 사건 당시 차장도 후회가 막심할밖에. 한 번만 더 다녀갔더라면 하고.

전후 사정을 여기서 다시 풀어 보자.

이틀이 지나도 할머니의 연고자는 나타나지 않고 해서 동사무소에서 장례를 치렀다. 다시 거짓말 같이 수녀와 연결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배숙이(裵淑伊)-이 이름이 참 아리송해서 배찬숙인지 희숙인지 정숙인지 진숙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나?-는 목포의 어느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초등학교와 천주교 재단 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공부는 항상 전교 1! 착하고 예쁘고, 지나칠 만큼 영민해서 두 살을 보태어 호적에 올리고, 모든 신상(身上)도 그렇게 정리했다.

모니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숙이의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대모(代母)는 성당 아가타 사무장.

고등학교 졸업 후 당연히 수녀가 되려 했다. 그게 주님의 부르심이라 누군들 안 느끼겠는가? 그런데 숙이는 진주에 펜팔을 통해 알게 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초등학교 준교사 검정고시 공고를 보고 응시한 것이다, 친구는 낙방한 대신 숙이만 합격하게 된 것!

여기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숨이 막힌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던 현우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다.

"수녀님, 아니 하느님! 그 죄를 지은 장본인이 여기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호텔 커피숍이 어찌 눈물바다가 아니 될 수 있으랴. 현우가 지난 14년의 이야기를 풀어 놓을 차례다. 오랜 시간 그들은 부둥켜안다시피 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커피숍의 손님들도 이 보기 드문 이 광경에 넋을 잃었고말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배 선생이 눈물범벅이 되어 수녀를 쳐다보았다. 그러고서 물었다. 당연히 부모님의 생존 여부다. 수녀의 말은 실망과 희망을 반반 섞었다. 자기들도 두 분을 찾으려 애써 봤지만, 헛일이었다는 것. 하나 힘센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나?

 

6. 반전/ 목포에 간 요동 흰 돼지

현우 내외는 34일 중 오가는 교통편을 빼면, 실제 즐길 수 있는 날짜는 겨우 이틀 반 남짓이었다. 둘은 그 기간, 낮 시간은 목포에서 보냈다. 택시를 빌려 타고서. 적잖은 경비가 소요되었으나, 한 번뿐인 신혼여행 아닌가?

산정 2동에 있는 산정동 성당부터 들러 미사에 참례했고, 배 선생을 품으로 안아 줬었던 수녀회에도 들렀다. 엘리사벳 수녀도 다시 만났다. 목포 시내의 경동 성당 / 내성동 성당/ 북교동 선당/ 연동 성당에도 들어가 조배를 했다.

신혼여행에 엘리사벳 수녀가 내내 동행했다. 돌아본 데가 수월찮다. 유달산 영산강변 노적봉 삼학도 심지어는 이난영이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는 목포공립보통학교, 아니 이름이 바뀐 북교초등학교에도 들어가 보았고. 북교초등학교 동창 중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정치가 김대중 선생이라고 엘리사벳 수녀가 신혼부부에게 귀띔해 주기도 했다. 또 배 선생 출신 학교인 용당동 소재, M회 고등학교 운동장을 밟아보기도 했다. 아 참, 슬픈 전설이 있는 삼학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현우가 가가도를 떠나 귀향할 당시에는 시작 수준이었는데…….

'목포의 눈물'이 탄생한 배경이 생각났다. 대략 생각나는 대로 배 선생에게 설명한다.

"옛날 목포에는 목화가 군산에는 쌀이 많이 났다는 거야. 근데 그걸 전부 일제에게 수탈당하고 나니, 남정네들이 타지로 돈 벌러 많이 나갔다더군. 그래 목포에서 새악씨와 신랑이 헤어지는 노래가 바로 '목포의 눈물'이야."

"아시는 것도 많네요. 그래서 일제시대의 흔적들이 많은가 보지요. 좀 전의 유달산 자락의 옛 일본 영사관을 포함해서 말이에요."

"아니 그건 배 선생이 더 잘 알 것 아냐? 나는 그저 주워들은 얘기를 전할 따름이오. 내가 워낙 일제 강점기의 노래에 관심이 있어 부르다 보니까 말이야. '눈물 젖은 두만강' 있잖아? 그것도 독립 운동가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오. 대신 '대지의 항구' 따위는, 일제 말엽 우리 백성을 만주로 이주시키기 위한 명분 축적용 노래라는 얘기도 있고. '남자 기생' 시절에도 그래서 '대지의 항구' '복지만리' 따윈 안 불렀지.

배 선생은 통제 속에서 자란 터라, 정작 자기를 키워 준 목포가 낯설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 선생은 수시로 눈시울을 적셨다. 선착장은 현대적인 시설로 변모했고, 그 옛날을 생각하는 현우도 만감이 교차했음은 물론이다. 5월 초의 해면은 잔잔했고, 저 멀리 가*도가 눈에 들어올 듯,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는 착각을 갖게 했다.

그 신혼여행이 숙명적이었다 하자. 둘 다 삼랑진에서 광주로 향해서 떠났다가 역순으로 돌아온 셈이니. 현우에게는 그게 옛날 옛적 전래동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학교 숙직실 옆방을 확장해서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안 있어, 현우는 다시 K 대령, 아니 K 의원에게 연락을 취한다. 주소를 알아 육필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이 안 됐는데, 처부모 즉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소식을 알았다는 것이 아닌가? 현우는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의 말이 생각나서다. ‘힘센사람!

배 선생은 그렇게 부모님을 만났다. 그동안의 사연. 돈벌이는 안 되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나이 들어 외지에까지 가서 노동을 했더란다. 한번 다니러 미전리에 들렀다가 사건을 듣고, 둘 다 그만 까무러쳤다는 것. 그러고 나서 두어 번 더 찾아왔으나, 종무소식임을 알고 삼랑진에 발을 끊었고. 임성리에까지 발걸음 했으나, 아무도 소식을 모르더라는 것. 비로소 이름을 대는데, 본래는 옥빛 경(), 맑을 숙()이었다고 하며 두 분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호텔 커피숍이 완전 울음바다였고말고. 조그마한 식당을 하다가 두 분은 얼마 전 저승으로 떠나셨다.

 

7. 낙수(落穗)

현우는 처부모님의 유해를 안성시 유토피아 추모관에 옮겨 봉안하였다. 거기 가면 현우가 죽어 저승 가면 친구가 되고 싶다는 갑장 가수 박상규/ 수술 잘못 받은 탓에 숨을 거두었다는 신해철도 있다. 왕년의 액션 스타 장동휘/ 평소의 생각대로 뇌사 상태에 빠지자, 거침없이(?) 자기 장기를 기증한 세계 챔프 최요삼 등등도 거기 잠들어 있다.

현우는 중등학교 음악과 준교사 자격 검정고시를 76년도에 봤었다. 부산진여중에서. 1차 및 2차 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 하지만 중학교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몇 년 뒤부터 초등학교에서도 교체 수업이라는 게 도입되어서다. 체육 시간에 다른 교사가 들어오는 대신 그 반 어린이의 음악은 현우가 가르쳤다.

고비 때마다 현우를 도와주던 K 대령도, 그러나 2009년에 그도 작고했다. 한 지역의 맹주(盟主) 소리까지 들으며, 일세를 풍미하던 그도 병마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26년생이니 향년 83세를 일기로. 거듭 말하지만, 현우 자신에게도 그는 베일에 살린 인물이었다. K라는 이니셜을 따서 적은 것도 사실 겁이 난다. 확실한 것은 그의 처가가 목포라는 것!

이쯤에서 K 시장을 어찌 거론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세월이 흐른 뒤 현우에게 K시장이 전화를 했다. 부산 시장에 출마하니 찍어 주는 것은 물론 일가친척 이웃에도 홍보해 달라는 것. 여부가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몇 군데 전화도 했다. 장인어른께도 단단히 일렀고. 드디어 당일, 투표를 하고 나오시는 장인어른께 바로 찍었느냐고 여쭈어보았으렷다? 장인어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뭐라 카노? 너거 정신없네. 투표지를 보니 우리 종씨 배씨가 나오던데, 누구를 찍는다는 말고?"

하지만 지금도 그의 자부인 정훈희와는 연락이 된다. 정훈희의 남편이 김태화다. 정훈희는 작년 가수협회 회장 선거장에서 만났다. 원작이 무진기행인 영화 안개에서 그가 이봉조에게 발탁되던 일화를 들먹이며 둘은 웃었다.

 

M 전 시장만 해도 그렇다. 작년 123, 위민 의정대상 시상식에 주인공(이경혜 시의원)의 초청을 받아 참석했는데, M 시장을 국회 도서관 입구에서 만났다. 현우가 부산노래와 호남노래(목포 노래뿐이다)를 섞어 콘서트를 열었을 때, 그가 우정 출연한 뒤 5년 만의 해후였다. M 시장은 콘서트 당일 그 시각 자녀 혼사가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 사돈을 만나야 했었다, 하지만 현우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걸 몇 시간 뒤로 미루고, 콘서트 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불러 준 것이다. 민추협 시절 이야기도 들먹이고 하의도 방문한 추억담도 들려 줬다. 정종득 목포 시장을 소개해 준 이도 그이였다.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메시지는 노무현과 공통분모?

현우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딸은 고등학교 교사다. 현우 내외는 지금 그 사이에서 난, 사내아이 둘을 돌보는 게 임무(?).

어릴 때 너무나 신경이 과민했다는 것은 사실이 일생에 큰 악재로 작용하는가 싶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조실부모하고, 혼자 세상을 헤쳐 나가는 도중에 오히려 순기능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정기 건강 검진, 설문에 대한 답을 보고 담당 의사가, 정말 긍정적으로 산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다른 정신과 의원에도 가보았는데, 의사의 반응은 한 마디로 말해, 자기도 부러울 정도다.’였다. 그러니 '선천적 요로 어쩌고저쩌고'는 신경과민이 낫고 보니 씻은 듯 사라졌다. 현우의 건강은 지금 60대 중반!

늦게 그러니까 나이 일흔에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정식 오디션에 통과한 것이다. 새로 다시 출범한 대한가수협회의 남진 회장 앞에서 가슴 아프게''목포의 눈물'를 불렀다. 앨범은 현우가 그 옛날 취입한 부산 노래’ 19CD로 갈음했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배 가수가 있으니, 삼랑진 출신 남백송 선생이다. KBS 가요무대 최다 가수로 알려진 남백송 아닌가? 그러니까 남남(南南)-남백송과 남진-갈등이 아닌 남남호흡이 현우를 이부가(李釜歌)라는 늦깎이 가수로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 현수는 남진을 가물에 콩 나듯 만나도, 동시대의 가요 스타 나훈아는 방송으로도 못 본다.

매주 금요일 열두 시에 인사동 동원 뷔페에서 전통 가요 공연이 있다. 현우 아니 이부가(李釜歌/ 부산가요에서 따온 것/ 그는 부산 노래를 저작권료 물고 취입했다)는 거기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올라간다. 스무 대여섯 명의 고만고만한 가수가 출연하는데, 다 출연료를 받는 게 아니다. 모두 자기 돈을 낸다. 현우는 그게 진정한 가수의 길이라 자위한다. ‘목포의 눈물’, '해운대 엘레지' 등 다양한 트로트를 선보인다.

가수들의 발성 혹은 발음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맹렬히! ‘부산 노래를 비롯하여 모든 대중가요에 못 잊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걸 몬니저로 하는가 아니면 모디저로 하는가 등등. 국어학자 류** 박사와 머리를 맞대는 것도 숙명이다. ‘전선야곡에서 나훈아와 이미자가 틀렸다(?). '단잠을 못 이루고''단잠을 모 디루고'로 불러야 한다고 류 박사가 가 이야기하더라만, 정답은 둘 다 맞다는 국립국어원의 유권 해석. 둘에게 미안하다.

어느 금요일 오후 두 시쯤, 서울 근교 무료 급식소에서 배식 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문득 노래가 부르고 싶어 택시를 잡아 인사동으로 달렸다. 노인들이 1백여 명 모여서 춤추고 야단이 났다. 노래 신청을 했더니 현우 차림새를 보고선 접수대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현우 더러 예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날 현우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맞춘 게 30만 원짜리 무대 복이다. 넥타이도 꼭꼭 맨다. 구청에서 단속을 나오면, 가수증이며 무대 매너까지 확인한다는 미확인 소문도 들었을 바에야, 가수 노릇 제대로 해야겠다는 결심이다. 관중은 손님이고 가수는 택시 기사다. 손님이야 술에 취하든 말든 운전기사가 음주를 해서는 안 된다. 실버넷 뉴스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원로 군 출신 및 문화 예술인을 대상으로 인터뷰한다. 다음 주에는 엄정행 교수의 아버지 합창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러 양산행이다.

유미는 군산에서 미용실 겸 미용학원을 운영한다. 남매를 낳아 다 짝을 지어줬다. 진우 형은 뭍으로 나와 광주에서 자동차 정비 공자 일을 본다나? 결국 그도 가수의 꿈을 이루어 연예협회 광주 지부에서 회원증을 받았단다.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얘기. 현우는 군 미필자지만, 군에 대한 애정은 조금 있는 편이다.

그가 하는 일 중 하나가 육군 전() 사단의 공식 카페에 들어가서 거기 올라 있는 사연들을 읽는 거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데가 있는 것조차 모른다. '밀리터리'를 두드려 보자. 자기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넘쳐난다. 어느 날 2*사단 밀리터리를 훑어나가다가 해당 부대로 전압한 아들의 소식이 궁금해 견디기 힘들다는 아버지가 실명으로 올린 글을 읽었다. 댓글을 다는 등 법석을 떤 끝에 통화가 되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우죽 선생의 글씨를 보고 나무라던 그 Y도지사(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도 나중에 한국 최고의 명필이 되었다. 우죽 선생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2011211일 고인이 되었다. 우죽 선생의 글씨는 경서각외에 진영 노인대학에 가면 있다. 그가 세필로 상당량을 쓴 것이다

김 면장은 사건 뒤로 다른 데로 이사 갔다. Y 도지사와의 관계는 김 면장이 지어낸 거짓말이었음이 확실하다.

삼랑진 건우 형에 대한 후문은 몇 년 전을 끝으로 들을 수 없다. 강화도로 갔다던가? 풍문일 따름이다. 아지매와 형 내외를 생각하면 현우의 눈시울이 항상 젖는다.

요즘 현우는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는 게 일상이다. 집에서 말이다. 현우가 열네 살 때 발매된 흘러간 옛 노래다. 또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김수희가 부른 남행열차’. 그 끝도 목포다. 내친김에 현우는 목포를 무대로 한 대중 가요(트로트)를 하나 만들어 보고 싶다. 작사도 작곡도 녹음도 자기 자신이 하는.남녀의 키가 같은 '목포의 눈물'과 같은 음역으로. 색소폰으로 연주해 가며, 음표와 쉼표, 임시표 등을 그려 넣을 생각이다. 제목은 '목포의 추억'

타관의 사나이와 목포 아가씨/ 아름답고 끈질긴 인연 따라서/ 사랑을 이뤘으니 축복이어라/ 목포와 모든 타관 한 이웃이다// 유달산 영산강 삼학도 노적봉/ 눈길과 발길로 쌓은 추억들/ 세월은 흘러가도 변함이 없고/ 목포는 영원토록 잊지 못할 곳

뭐니 뭐니 해도 현우가 가가도에서의 피신 생활과, 어린 모니카가 중학교 입학하기 전까지의 성장. 그 기간의 교집합은 해석이나 추정이 불가하다, 저승에 계신 만송 어른도 그것까지는 언급을 안 하셨었지 않은가? 말년엔 정신도 없으셨고. 아무튼 부산과 밀양, 목포를 잇는 마음의 가교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일 따름이다.

가가도 현 임진욱 이장과 전화(010-2929-498*)를 주고받는 게 현우의 즐거움 중 하나다. 임 이장은 물론 현우가 가*도에 있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 '경서각은 현우의 서재 앞에 가로로 걸려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김 열사의 수유리 419 묘지에 가보기도 했다. 최 시인은 가가도 출신 최초의 시인이다. 그도 만날 것이다.

 

<에필로그>

어떻게 보면 현우는 요동시(遼東豕)’에 가깝다. 요동에 농부가 살았는데,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 한데 한 마리가 흰색이다. 이건 굉장한 경사다 싶어, 그놈을 임금에게 드리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대궐로 향했다는 것이다. 한데 가는 곳마다 흰 돼지가 수두룩했고, 사람들이 농부를 비웃기만 하더라나? 현우야말로 요동흰돼지(遼東豕)일 수밖에. 그 요동흰돼지가 목포에 얽히고설켰었다.

그러나 요동 흰 돼지인 그에게도 세상과의 인연은 끝이 없다. 인연은 현우를 다시 붙잡는다. 남진을 근래 두 번 만난 것이다. 몇 달 전 대한 가수협회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그랬고, 그제 주일 가까운 새 에덴 교회에서 다시 조우했다. 그 교회 집사를 통해서 그가 새에덴교회에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봉헌했다는 얘길 들었다. 참 영상으로도 보았었지. 똑 같은 성가 혹은 찬송가라 곡은 그대로인데, 가사가 다르다. 악상도 그러하다. 딱 하나만 예로 들자. ‘찬송가에는 별다른 지시가 없는데 반해 <성가> 집에는 Calm(조용히)라 되어 있다.

현우는 성당이나 교회가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 같은 문인인 담임 목사에게 청하여 그 찬송가를 부를 계획이다. 그런 게 다 자신의 죽음을 향한 전조임은 한 달 전 영등포의 밤오기택을 인터뷰할 때 다시 깨달았다. 오기택 남진 둘 다 해병대다. 그러고 보니 군과 노래, 이를 통해 현우의 인생이 막을 내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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