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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인간

이기적 인간

김이구

 

아침나절의 수퍼마켓은 조용하다. 나는 심리학개론 책을 뒤적거리다가 차라리 대본소에서 방학기 극화나 몇 권 빌려올까 생각하였다.

작은아버지는 오늘 일찍 장가간 친구 아들 결혼식이 있다고 가게를 내게 맡겨놓고는 천안에 내려가셨다. 평일날 결혼식이라니. 예식장에서 똑같은 국화 빵틀에 찍혀나오는 신랑 신부들의 모습이 생각나는데, 평일날 결혼하는 신랑 신부는 그래도 뭔가 조금은 다를 듯싶다.

심리학 관련으로 레포트를 하나 써내야 되는데 무얼 쓸지 막연하다. 개론 책을 뒤적거려 보지만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양들의 침묵] 같은 비디오나 보면서 연구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그새 아파트 단지 아줌마들이 서너 사람 와서 화장지와 세탁기에 넣는 비누와 라면 따위를 사 갔다.

오분 전쯤에 합성세제와 스낵류 등을 사간 키큰 아줌마가 다시 들어온다. 뭘 빼놓고 산 모양이지. 그런데 진열대로 가지 않고 영수증 쪽지가 든 손을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학생, 이백 원 덜 받았는데."

", 그래요?"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 제대로 거스름돈을 준 것 같은데 참으로 이상하다.

쪽지를 들여다보니 만이천사백 원어치 물건을 사고 이만 원을 냈다. 계산이야 금전등록기가 해주니까 찍힌 대로 칠천육백 원을 거슬러줬을 듯한데 자신이 없다. 아줌마는 손을 펴 거슬러 받은 돈을 보여준다. 동전은 백 원짜리 네 개뿐이다. 칠천육백 원을 준다고 생각하면서 물건값의 끝자리 사백 원과 혼동되어 칠천사백 원만 주었나보다.

"아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얼른 서랍에서 동전을 꺼냈다. 아줌마는 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동전 두 개를 채뜨려 가며 쏘아붙인다.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나는 무안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까짓 이백원 안 받아도 그만일 텐데 기어코 되돌아와 악착같이 받아야 되나. 이백 원을 덜 받은 게 아니라 더 받았더라면 꿀꺽 삼키고 말았겠지. 그리고 내가 이백 원을 더 줬는데요, 돌려주세요 하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겠지. 증거가 있느냐고 우겨대면서.

인간은 확실히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다. 벌써 네 사람째 시험을 했건만 모두들 시치미를 떼고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사십 대 아줌마, 이십 대 후반의 청년, 상가 3층의 미용사 아줌마, 모두가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또 실험 대상이 등장했다. 심리학 레포트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고 이기심에 지배를 받는 동물인지에 대해서 써얄까 보다. 같은 조건이 주어졌을 때 이기심에 따라 반응한다. 똑같이 거스름돈을 잘못 받은 상황인데, 돈을 덜 받으면 이를 와서 따지고 내놓으라고 하지만 더 많이 받았을 때는 입을 싹 씻고 모르는 척한다.

아니, 저 아줌마는 조금 전에 왔다 간 507동의 영민이 엄마다. 중학교 선생님을 하다 작년에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아까도 거스름돈을 천 원이나 더 주었는데, 분명 몰랐을 리가 없는데, 시치미를 떼고 다시 온 것이다. 저 낯빛이 어딘가 켕겨하지 않는가. 아마 내가 '아줌마, 아까 거스름돈 천원 더 드렸는데 돌려주세요' 하면 '난 더 받은 일 없어' 하고 우길 것이다. 우기면 네가 무슨 대책이 있니 속으로 생각하면서 계속 버틸 것이다.

라면 다섯 봉지와 맥주 세 병, 설탕 한 봉지, 식용유와 참기를 등등을 샀다.

"이만이천오백 원이에요."

말하기도 전에 만 원짜리 석 장을 들이민다. 웬 만 원짜리가 그리 흔한지 새우깡 한 봉지를 사면서도 만 원짜리들을 내는 세상이다. 나는 심리학책을 열심히 보는 체하면서 돈통을 열고 거스름돈을 꺼낸다. 칠천 원을 꺼내야 하는데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석 장을 꺼내고 그 위에 오백 원짜리 동전을 얹어 시선을 그대로 책을 향한 채 영민 엄마에게 밀어놓는다.

머릿속에서 금방 계산이 될 텐데도 날래게 거스름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물건 봉지를 양손에 나눠지고 총총히 사라진다. 너무 뻔뻔스럽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심의 노예라 하지만 연거푸 천 원씩 거스름돈을 더 받고도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 찔리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양심에 가책은커녕 웬 횡재냐 하면서 속으로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 레포트엔 사례가 풍부하게 기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인간이란 이렇게 조그만 이익은 철저하게 따지고 자기가 유리한 대로 행동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나 더 크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선 오히려 무심하고 그래서 더 큰 몫을 잃어버리지 않는가.

또 누가 온다. 영민 엄마다. 벌써 세 번째다. 천 원 벌이하는데 재미를 붙였나 보다. 그새 집에 갔다 온 건지 손에는 물건 봉지가 들려 있지 않다. 쌀가게와 채소가게 앞을 지나 역시 수퍼로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심리학책에 고개를 박고 책을 보는 척하지만 옆눈으로는 영민 엄마의 행동이 다아 보인다.

영민 엄마의 빨간 원피스가 진열대 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게 아니고 계산대 앞에 와 있다.

"학생, 책만 보지 말고 가게도 좀 잘 봐야지."

그러면서 계산대에 올려놓은 오른 주먹을 펼쳐 천 원짜리 한 장을 떨군다.

"아까 천원을 더 받았더라구요."

카랑한 영민 엄마의 목소리가 쏘프라노 가수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답게 들린다.

", 그랬나요. 감사합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꾸벅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면 처음에 천원을 더 받은 건 그런 줄도 몰랐다는 얘기다. 두 번째의 실험에서 내가 천원을 더 준 것만 뒤늦게 알아채고 일부러 돌려주러 온 거다.

아아,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중에도 아직 천원을 더 받은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당연히 맞게 받았겠지 하고는 천원이 두 장이 왔는지, 석 장이 왔는지 무심한 사람들.

그래,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절망은 아냐. 나는 심리학 레포트를 어떻게 써야 할지 다시 고민이 되었지만, 갑자기 유쾌해져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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