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쭉한 풍경
가뭄
가시
가죽
가죽장갑
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힘
강아지는 산책을 좋아한다
개
개는 어디에 있나
거부할 수 없는 유산(遺産)
거북이
거품
걸레질하는 여자
겨울밤
겨울새
겨울을 기다림
계란들
계란 프라이
고속도로
고양이 죽이기
고요하다는 것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
고행(苦行)을 끝내다
곱추
과식
과육(果肉)
교정 보는 여자
교통사고
구직
국수행 전철에서
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그루터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금단증상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김밥 천국
깜박했어요
껌
껌뻑이 형(兄)
꼬리는 있다
꽁치구이
꽃 지고 난 후의 연두
나귀
나는 매일 밤 너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바퀴를 안 굴리고 싶어진다
나무
나뭇잎 떨어지다
낡은 의자
낫
내성적(內省的)
너는 없다
너무 잘 크는 화초 하나
넥타이
노래에 대하여
노인이 된다는 것
누군가 매일 너를 보고 있다
눈
눈 녹으니
눈 먼 사람
늙는 순간에 대한 짧은 관찰
늙은 개
다리를 떠는 남자
다리 저는 사람
닭
닭살
대칭
대패삼겹살
독방
돋보기안경
딸
딸꾹질
또 겨울을 기다림
똥지게 할아버지
뚱뚱한 여자
마음아, 네가 쉴 곳은 내 안에 없다
마장동 도축장에서
말랑말랑한 말들을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매맞는 아이
맨발
머리 깎는 시간
머리카락 하나
먹자골목을 지나며
먼지에 대하여
면접
멸치
명태
모기는 없다
무단횡단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물방울 얼룩
물 위에서 자다 깨어보니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다
미야(迷兒)
미아 재개발 지구
바늘구멍 속의 폭풍
바람 견디기
바람 부는 날의 시
바퀴벌레는 진화 중
발자국
밥 생각
뱀
버스
버스에도 봄
벌레
베개
벽
병
보육원에서
복권 파는 여자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봄
봄날
불룩한 자루
비둘기에 대한 예의
비둘기 집
비린내
빗방울 거미줄
빗방울 길 산책
빗소리
사과 고르는 여자
사막에서의 반가운 해후
사무원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산낙지 먹기
살갑게 인사하기
삼겹살
삼계탕
상계동 비둘기
새
생명보험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성자(聖者)
소
소가죽 구두
소나무
소매치기
손가락들
손톱
송충이
수다 예찬
수압
수화(手話)
쉰 살
슬픈 얼굴
신생아
신선횟집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아기 앞에서
아기 재우기
아버지
아이는 아직도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야근
야생
양수리 여름밤
양철 낙엽
어둠도 자세히 보면 훤하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
어항 유리벽에 붙어 있는 낙지들아
얼굴
얼룩
얼음 속의 밀림
여름밤
여탕에서 목욕하기
연필
열대야
오늘의 특선 요리
오늘의 할 일
오래된 고독
오래된 땅
오지 않은 슬픔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오토바이와 개
왜 그러나 했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
우산을 잃어버리다
우주인
울다 깨다
유리에게
유리창의 송충이
유전하는 밤
은행들
인공 눈물
인수봉
잎새들
자가격리
자서(自序)
자전거 타는 사람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녁 6시 반, 헐렁헐렁하고 쭈글쭈글한
전자레인지
절룩절룩
졸음
종유석
주정뱅이
죽은 사람
쥐
즐거운 버스
직선과 원
쪼그리고 앉아서
첫 빗방울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초미니 원피스 입기
출퇴근길 풍경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치킨고로케
카톡
커다란 나무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코뚜레
키스
키 큰 여자
타이어
타조
탁상시계
태아의 잠
통화
틈
티셔츠 입은 여자
파리
파리 잡기
파마하는 여자
포장마차에서
풀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플라타너스 잎 하나
하품
한가한 숨 막힘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한숨 쉬는 사람
한여름 밤의 독서
해초
혀만 취한 사람
호랑이
화보 사진 찍기
화살
화석
화창한 주말
황사
황토색
회색 양말
Before-After
5인실
100살
가늘고 길쭉한 풍경
김기택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막대기 같은
길고 좁은 틈이 있다
길들 푸른 나무들 움직이는 것들은
그 투명한 막대기 속에 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줌마들 웃음소리 엔진 소리도
그 대롱 속에서 회오리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먼 산의 고요한 능선은 연필심처럼 짧아
언제나 직선이다
아침이 되면
막대기에 형광등같이 희고 기다란 빛이 들어온다
어둠도 눈도 비도 바람도
곧고 좁은 수직선 안에 끼어서 온다
가끔 검은 막대기 끝에서 별이 뜨기도 한다
가뭄
김기택
울음은 뜨거워지기만 할 뿐
눈물이 되어 나올 줄을 모른다
힘차게 목젖을 밀어 올리지만
아직도 가슴속에서만 타고 있다
매운 혀 붉은 입을 감추고
더 뜨거워질 때까지 더 뜨거워질 때까지
가시
김기택
가시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침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끼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 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가죽
김기택
살이란 본래 먹이가 아니던가
두려움이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나는 한 덩어리의 작은 살을 알고 있지
그 살을 덮고 있던 두껍고 튼튼한 껍질은
처음엔 연한 살에 돋은 두려움이었다네
차가운 이빨이 닿기도 전에 부풀어오른
붉고 말랑말랑한 종기였다네 우둘투둘 퍼져
땅바닥 비비도록 가려움을 만들고
그 격렬한 마찰 속에서 뜨거운 숨 뿜어내며
종기들은 더욱 붉어져 곪아터졌다네
터진 자리가 굳어져서 딱딱한 껍질이 되고
조금씩 튼튼해진 껍질을 뚫고
새로운 두려움이 다시 도지곤 했다네
두꺼운 껍질 속 물컹물컹한 살은
여전히 작은 숨 콩콩 쉬며 따뜻하게 숨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두려움을 튼튼하게 만들었다네
지금은 구두가 되고 잠바가 되고 허리띠가 되어
스타킹처럼 얇고 투명한 가죽들을 덮어주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네 저 가죽 안에 살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생명들을
추위와 이빨과 발톱을 견뎌내면서도
가쁜 숨과 더운 땀은 자유로이 통과시켜주던 가죽
안에서 착하게 떨던 여리고 약한 주인들을
가죽장갑
김기택
팔 없는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할 일을 다 잊은 다섯 손가락이 달려 있다.
손에서 갈라져 나온 손가락처럼
뭔가를 쥐려 하고 있다.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손가락마다 구부리거나 쥐었던 마디가 있다.
습관이 만든 주름이 있다.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라오다가
지금 막 들킨 것 같은 손금이 있다.
지워진 지문이 기억을 되찾아 재생될 것 같다.
털과 손톱도 가죽 깊이 숨어서
나올 기회를 틈틈이 엿보고 있는지 모른다.
피도 체온도 없이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빈 가죽 안으로 들어간 어둠이
다섯 손가락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있다
갈치
김기택
어부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긴 칼을 들어올린다.
칼은 은빛 강철의 빛살을 뿜고 있다.
칼자루에 힘을 주자 칼은 갑자기 둥글게 휘어지더니
힘껏 허리를 찬다. 빛살이 푸드덕거린다.
아내는 기다란 참빗을 도마 위에 놓고 도막도막 자른다.
아이는 빗살무늬 사이에 낀 비린 공기를 발라먹는다.
아이의 목에 빗살 하나가 걸려 푸드덕거린다.
아이가 캑캑거리며 운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힘
김기택
다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뛰는 강아지
눈이 있는지도 모르고 쳐다보는 강아지
꼬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흔드는 강아지
아직 이빨이 되지 않은 이빨은 순하고
아직 발톱이 되지 않은 발톱은 간지럽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
멀리서 나무들도 덩달아 가지를 흔든다
머리에서 나무로 이어진 긴 등뼈가 보일 것 같다
뛰고 흔들고 달려드는 힘들이 솟아나
산에는 나무들이 가득하다
발톱 달린 뿌리들이 땅속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와 꼬리 사이 머리와 산 강 하늘 사이
등뼈들이 돌아다니는 모든 길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꼬리뼈를 흔든다
하늘이 와서 강아지 눈을 닦아 준다
나뭇잎 바람이 와서 표정을 간질여 준다
햇살이 와서 발바닥을 드높이 올려 준다
강아지는 산책을 좋아한다
김기택
산책로 여기저기에 코를 들이대다가
수상한 구석과 풍부한 그늘을 콧구멍으로 낱낱이 핥다가
팔이 잡아끄는 목줄을 거스르며
냄새 속의 냄새 속의 냄새 속으로 빠져들다가
애기야, 어서 가자, 안 가면 코만 떼어놓고 간다
엄마가 사정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코를 박고 있다가
냄새에 붙들려 코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목줄이 아무리 세게 목을 잡아당겨도
냄새에 깊이 박힌 코는 뽑혀 나오지 않는다
콧구멍으로 이어진 모든 길을 거칠게 휘젓는 냄새에
코가 꿰어 끌려들어 간다
수천수만의 코와 꼬리가 뛰어다닐 것 같은 곳으로
이름과 표정과 살아온 내력과 가계와 전생까지
한 냄새로 다 투시하는 코들이 있을 것 같은 곳으로
냄새를 향해 뻗어 내려간 뿌리들의 끝이 보일 것 같은 곳으로
네 발바닥 질질 끌리며 끌려들어 간다
냄새는 점점 커지고 사나워진다
좁은 틈으로 수축했다가 동굴처럼 늘어나는 기다란 구멍이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삼키고
콧구멍에 매달린 머리통과 몸통까지 다 삼켜버릴 기세다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몸통은 보이지 않고
남아 있는 꼬리만 풀잎 사이에서 살랑거리고 있다
도와주세요! 냄새에 물린 우리 애기 코 좀 빼주세요!
개
김기택
1
먹을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개는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고
내 몸 뒤 끝없이 먼 곳을
철망과 담 산과 구름과 하늘
먹을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뚫고
아득하고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깨끗하다
고막이 제거된 개의 눈 속에서
먹은 것은 남김없이 영양분이 된
영양분은 남김없이 살이 된
살은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된
개의 눈 속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넘어 어디에선가
먹을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개의 눈 속에서
2
명치나 아랫배 어딘가를 꽉 누르고 있는
물을 들이켜도 똥오줌을 싸도 뚫리지 않는
기침해도 게워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힘차게 입 밖으로 뽑아내자
세차게 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울음소리에 이빨 달리더니
울음소리를 하얗게 덮으며 털이 돋더니
꼬리를 매달고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더니
개 한 마리가 대문을 향해 짖고 있었다.
너무나 많이 허공을 향해 짖어서
공기에 스며들자마자 바로 없어지는 울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개줄에 매여 있어서
나무말뚝 주위만 빙빙 도는 울음이었다.
주인 앞에서 너무나 많이 꼬리를 흔들어
아무 때나 스위치처럼 잘 켜졌다 꺼지는 울음이었다.
매에 여러 차례 단련되어
아무리 사납게 짖어도 둥글게 잘 뭉쳐지는 울음이었다.
대문 밖 인기척이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 울음은 묵직한 돌멩이 같은 것에 눌려서
게으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엿처럼 바닥에 찰싹 눌어붙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밥찌꺼기와 때가 굳어 붙은 찌그러진 밥그릇을
지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울음은 안테나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주위의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잡아챘지만
이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고여 있었다.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아침에 들렸던 개 짖는 소리가
밤 깊은 지금까지 들린다
아파트 단지 모든 길과 계단을
숨도 안 쉬고 내달릴 것 같은 힘으로
종일 안 먹고 안 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슬픔으로
울음을 가둔 벽을 들이받고 있다
아파트 창문은 촘촘하고 다닥다닥해서
그 창문이 그 창문 같아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주민들 같아서
울음이 귓구멍마다 다 돌아다녀도
개는 들키지 않는다
창문은 많아도 사람은 안 보이는 곳
잊어버린 도어록 번호 같은 벽이
사람들을 꼭꼭 숨기고 열어주지 않는 곳
짖어대는 개는 어느 집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개 주인은 없고
짖는 소리만 혼자 이 집에서 뛰쳐나와
저 집에서 부딪히고 있다
벽 안에 숨어 있던 희고 궁금한 얼굴들이
베란다에 나와 갸웃하는데
어디서 삼삼오오가 나타나 수군거리는데
흥분한 목소리는 경비와 다투는데
울음소리만 혼자 미쳐 날뛰게 놔두고
아파트 모든 벽들이 대신 울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거부할 수 없는 유산(遺産)
김기택
전동차 안에서 책을 읽는데
갑자기 글자들이 힘을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눈알에 힘을 주고
끊어지고 흐려진 글자들을 되살리려 애썼으나
내 시선은 과녁에 도달하기도 전에 굴절되어
글자 밖으로 자꾸 빗나갔다.
나는 잠시 책에서 눈을 거두어
눈알에서 힘을 빼고
아무 곳이나 닿는 데로 툭, 툭, 시선을 던졌다.
굳이 무엇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졸거나 신문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눈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여자!
몸에 착 달라붙는 소매 없는 쫄티!
팬티 같은 반바지!
때는 한여름이었고
털 한 오라기도 귀찮고 덥기는 하였다.
가릴 곳만 마지못해 가린 그녀의 옷은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암컷을
속수무책으로 막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 저것이었구나,
내 눈과 글자 사이의 공기를 격렬하게 흔들어
내 책 읽기를 방해한 힘은.
참 대단하구나,
굳이 견물(見物)(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자력(磁力)으로
내 눈을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이 生心은.
얼마나 오랜 것인가,
죽음처럼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대대로 이어받는 이 낡고 폭력적인 유산은
거북이
김기택
거북이 뭉툭한 발 속으로 시간이 들어가네
초침 소리 내지 않고 느릿느릿 기어가네
거북이 발 멈추고 먼바다 바라보면
시간은 잠시 돌 속으로 들어갔다가
생각나면 돌에서 발을 빼고 다시 걷는다네
시간은 부지런히 파도를 몰고 와
거북이 무딘 귀를 때리고 또 때리지만
이내 거품이 된다네 출렁출렁 물이 된다네
거북이 걸어가네 끝없이 걸어가네
걷는 것도 잊은 채 온종일 쉬엄쉬엄
거품
김기택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
방울에 올라타는 방울
다시 올라타는 방울
다시 올라타는 다시 올라타는 다시 올라타는
올라타는 올라타는 올라타는
방울 탱탱한 방울 커지는 방울
더 탱탱해지다 더 커지다
터지는
방울 새로 돋아나는 방울
터지는 터지는 터지는 돋아나는 돋아나는 돋아나는
둥근 방울을 찌그러뜨리며 올라서는
다시 찌그러뜨리며 올라서는 다시 찌그러뜨리며 올라서는
방울을 부풀리는 바람
허물어지는 바람 부푸는 바람 허물어지는 바람
부푸는 방울 덩어리
터져도 다시 돋아 부푸는 방울 덩어리
터져도 부푸는 터져도 터져도 터져도 부푸는
방울을 밀어 올리는 방울 꺼지는 방울 밀어 올리는 방울
꺼지는 밀어 올리는 꺼지는 밀어 올리는
꺼지는 꺼지는 꺼지는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방울
걸레질하는 여자
김기택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
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
큰절 올리는 몸으로
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
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
오라는 곳 없어도 밤낮없이 찾아오고
누구와도 섞여 한 몸이 되는 먼지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먼지들도 그만 승복하고
고분고분 걸레에 달라붙는다.
걸레 빤 물에 섞여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
매일 오체투지하듯 걸레질을 한다.
겨울밤
김기택
추 위 를 밀 어 내 지 못 하 고
전 등 주 위 에 만 붙 어 있 는
동 그 랗 고 딱 딱 한 전 깃 불
조 여 오 는 전 구 의 모 가 지
전 구 속 에 서 깨 어 지 는 빛
칼 날 같 이 채 워 지 는 바 람
얇 은 바 람 을 째 는 가 는 빛
빛 을 보 다 가 베 이 는 두 눈
두 눈 알 을 움 켜 쥐 는 어 둠
겨울새
김기택
새 한 마리 똑바로 서서 잠들어 있다
겨울바람 찬 허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고압선 위
잠 속에서도 깨어 있는 다리의 균형
차고 뻣뻣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저 다리는 결코 눕는 법이 없지
종일 날갯짓에 밀려가던 푸른 공기는
퍼져나가 추위에 한껏 날을 세운 뒤
밤바람이 되어 고압선을 흔든다
새의 잠은 편안하게 흔들린다
나뭇가지 속에 잔잔하게 흐르던 수액의 떨림이
고압선을 잡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 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 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날개를 펴듯 끝없이 넓어지고 있다.
겨울을 기다림
김기택
두꺼운 털 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운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 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계란들
김기택
계란을 잔뜩 싣고 달리던 용달차가
돌맹이 하나를 밟는다
바퀴가 움찔거린다
용달차 짐칸이 덜컹, 거린다
순간, 모든 계란이
10층 20층 높이로 쌓인 계란이
일제히 계란판을 박차고
일 센티미터쯤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액체의 날개들이 파닥거리느라
계란들이 울퉁불퉁 흔들린다
그리고는 저마다 무게를 다하여
얇고 둥근 머리통으로
철판 바닥 위에 쌓인 계란판에
힘차게 헤딩한다
10층 20층으로 쌓인 무게가
위에서 한 번 더 내리누른다
계란판 무게까지 더하여 누른다
타원이 찌그러지도록
계란들이 제 안에서 출렁거리느라
용달차가 크게 요동친다
잔금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계란판 사이에서 새어나올 듯하다가
둥근 홈 속으로 스며들었다
제 안에서 액체의 속도와 요동을 달래느라
껍질들은 모두 얇고 동그랗다
잠깐 속도를 줄이는 척 하다가
용달차가 다시 안심하고 속도를 낸다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끈적끈적한 국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계란 프라이
김기택
자궁처럼 둥글고 정액처럼 걸죽하고
투명한 액체인 병아리는 이윽고 납작해진다
후라이팬 위에서 점점 하얗게 굳어지면서 꿈틀거린다
뜨거운 식용유를 튀기며 꿈틀거린다
불투명한 방울을 들썩거리며 꿈틀거린다
고소한 비린내를 풍기며 꿈틀거린다
굳어버린 눈 굳어버린 날개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등뼈와 핏줄을 오그라뜨리며
한 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아무 것도 먹어본 적이 없는 노란 부리와
아무 것도 싸본 적이 없는 똥구멍이 평등하게 뒤섞여
굳어버린 계란 후라이 흰 접시 위에 담겨진다
고속도로
김기택
1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 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도 넘을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 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 새 없이 뽑혀져 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 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 나온다.
거칠 것 없이 뽑혀져 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
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
산과 부딪치면 산이 단숨에 두 쪽으로 가라지고
절벽이 가로막으면 밑으로 가차 없이 기다란 구멍이 뚫린다.
뽑혀져 나오는 길이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 바퀴를 맹렬하게 굴린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바퀴는 맹렬하게 굴러서
바람이 전기톱으로 베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처럼 얇고 넓적하게 잘린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눈을 후벼 파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올챙이 다리 달리듯 가로수와 전봇대와 건물에 시간이 돋아난다.
풍경은 속도와 반죽되어 윤곽이 지워지며 흐려지고
시간은 엿처럼 찍찍 늘어지며 창밖으로 지나간다.
4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 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가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태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고양이 죽이기
김기택
그림자처럼 검고 발자국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백미러를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 나지 않게 삼켜버렸던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더 속도를 내었다.
고요하다는 것
김기택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
김기택
복잡한 거리에서 우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머리통보다도 크게 입을 벌리고
힘차게 어깨를 들먹거리며
벌개진 눈으로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거리에는 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리는 너무나 적막하였다.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 이 침묵은
조금도 이상하지가 않다.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하다.
아마 나는 오래 전부터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귓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고 있는 이 고요가
사실은 거대한 소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딪치고 긁히고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아이 울음 하나 새어들어올 틈 없이 빽빽한 이 소리들이
바로 고요의 정체라는 것을.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소리들이 돌처럼 내 귓구멍을 단단하게 막아주지 않는다면
내 불안은 내장처럼 한꺼번에 거리에 쏟아져나오지 않겠는가.
일시에 소음이 사라져버린다면
심장이 베일 것 같은 차디찬 정적만이 남는다면
갑자기 내 내부의 정적은 공포가 되고
마음속 불안들은 모두 소음이 되어
내 좁은 머릿속에서 악을 써대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럴 염려는 없는 것이다.
아이의 아가리에 가득찬 저 고요,
아무리 목청을 다해 울어도 소리없는 저 단단한 돌맹이가
헤드폰처럼 내 두 귀를 굳게 막아주는 한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테니까.
만취하여 고래고래 돼지 멱따는 노래를 불러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이 튼튼하고 편리한 습관은 아늑하기까지 하다.
마치 꿈속에서 걷고 있는 것처럼.
고행(苦行)을 끝내다
김기택
가는 나뭇가지 팔을 뻗어
시냇물을 마시니
찬 기운이 갈비뼈를 따라
소용돌이치다 퍼진다.
마른 다리 아래로
시든 고욤처럼 매달린 불알,
까치가 날아와 쪼아보다 간다.
상쾌한 남루.
창피까지 벗어버린 나체.
지저분한 개밥 지꺼기에도
새롭게 돋는 맑은 식욕.
고통 속으로 느릿느릿 새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마음들.
마음이 씻겨나간 자리에 남은
상처들. 헐렁한 가죽들.
시냇물이 온몸으로 퍼지며
상처를 간지럽게 더듬는다.
고름이 터져나오던 자리마다
새로 어린 살이 붙는다.
곱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하나
시멘트를 응고 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크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과식
김기택
온갖 양념이 배어 냄새까지 잘 익은 갈비를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
고소하고 달콤한 맛속에 숨겨진
노린내와 비린내를 기어코 찾아내는 마음.
트림으로 그 냄새를 꺼내 되새김질 하는 마음.
배보다도 먼저 포만해지고 뚱뚱해져서
짧은 말 사소한 동작에도 숨이 가빠지는 마음.
제 몸무게에 제가 눌려 어쩔 줄 모르다가
반죽처럼 축 늘어져 방바닥에 눌어붙는 마음.
억지로 일어서니 몸속에 묵직한 주머니 하나
식도를 잡아당기며 흔들거린다.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겨우 달래
기우뚱 몸을 실어 좌변기에 앉힌다.
음식에 밀려나간 마음 조금이라도 돌아오라고
힘껏 몸을 비워 변기를 채운다.
침이 오르고 피가 도는 밥 생각,
한그릇만 먹어도 큰 기운이 될 것 같은
넓고 홀쭉한 마음, 제자리에 돌아오라고.
과육(果肉)
김기택
사과 속에도 살이 있네
그 살의 비린내 향기롭네
긴 겨울 매운 추위
겨우내 얼음불에 독하게 달여진 수액
그 불 속에서 증류된 향기
엉덩이처럼 흰 살 반으로 가르니
흰 정액 비린내 풍기며
씨알 두 쪽이 나오네
교정보는 여자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들은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맑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오래 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를 만져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 진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맛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은 표면의 우툴두툴한 편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잔등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 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교통사고
김기택
밤길을 달려온 차 앞유리에
반투명 반점들이 다닥다닥 찍혀 있다.
풀벌레들에게 자동차는 총알이었던 것.
주광성의 풀벌레들이 전조등 불빛을 보고
사차선의 사격장 안으로 달려들었던 것.
총알에 맞는 순간
터져버린 체액은 유리창에 남고
거죽은 탄피처럼 튕겨져나갔던 것.
빛만 보면 들끓던 피
빛을 향해 돌진하던 피는
삶에 대한 애착을 아교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새 육체인 유리창에 힘껏 들어붙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구직
김기택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쪘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 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되면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대중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깎아주는 세상 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닺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볼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젖가락과 이빨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하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국수행 전철에서
김기택
한낮에 국수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쌓아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쵯너을 다해 자세를 고쳐 앉아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깨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하다가 다시 못 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지만 다 탈 수 없는 전동차들.
텅텅 비어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물결치는 숲과 강이 보는 눈도 없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놈에 그 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에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때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엉큼하고 도적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귤
김기택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묻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앉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리 생긴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김기택
그녀가 죽었을 때
일생동안 그렇게 열심히 양치질하고, 스켈링하고,
가그린하던 이빨도 함께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샴푸와 린스를 하고, 갖가지 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폈다 죽였다 살렸다 하며 파마하던
머리카락도 함께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쌍꺼풀 수술한 예쁜 눈도, 항상 새로운 색으로
색칠하던 작은 입술과 긴 손톱도,
다양한 브래지어가 받쳐주고 모아주던 유방도
함께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끈질긴 식욕을 이겨내고 얻은 날씬한 몸무게도,
허리와 엉덩이에서 유연하고 섹시하게 흔들리던
테크노댄스도, 노래방에서 연마한 이정현의
「바꿔」도,
최후까지 배설되지 않은 채 몸안에 남아 있던
똥과 오줌과 함께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이렇게 깨끗하고 고른 치아와 부드럽고 윤기있는
머리카락,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희고 탄력있는
피부가 정말 죽은 거냐고 식구들은 오열했다.
그녀를 만지면 아직도 아랫도리가 뻣뻣하게
설 것 같은데 단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남자친구는
주장했다.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그녀는
계속 살아 있다고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자리를 옮긴 것뿐이라고
탄식과 흐느낌에게 위로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손톱이 죽었을 때, 손이 기억하고 있는 촉감과
혀가 기억하고 있는 말이 죽었을 때,
털과 눈물과 비듬이 죽었을 때
그녀는 완전히 죽었다.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김기택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설 때
잠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서너 걸음 밟기도 전에 자가용 문이 열리자
그는 고층에서 떨어진 공처럼 튀어 들어간다.
휠체어에 탄 사람처럼 그는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닌다.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는다.
그의 몸무게는 고무타이어를 통해 땅으로 전달된다.
몸무게는 빠르게 구르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을 시간이 있었으나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새처럼 날아들어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 새 없이 지저귀느라
한 순간도 땅에 내려앉을 틈이 없다.
그루터기
김기택
한때
그 작은 연못은
커다란 분수였습니다.
땅속에 스며든 물방울 씨앗 하나가
거대한 물기둥으로 솟아올라
하늘을 덮고 큰 그늘을 거느리던 곳이었습니다.
지붕에
맺힌 물방울들은
떨어지고 맺히고 떨어지고 맺히고
꽃이 되었다가 잎이 되었다가 열매가 되었다가
후드륵 떨어지면 차고 커다란 바람이 되기도 하였다가
다시 무수한 물방울로 되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지금
분수가 있던 자리에는
키 작은 냄비같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땅속에서 이글거리는 뿌리의 불꽃을 받아
낮은 파문을 일으키며 끓고 있습니다.
솟아오르려고 하지만 작고 동그란 파문만 일어날 뿐.
작은
연못에 엉덩이를 대고
한 노인이 걸터앉아 있습니다
한때는 솟구치는 물줄기였지만, 불꽃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높은 키도 사라지고 조용하고 편편해서
오가다 지친 사람들은 누구나 앉아 쉬었다 가는 곳입니다.
금단증상
김기택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서 점점 느려지던 버스가
아예 멈춰버리자
의자에 조용히 붙어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의자는 자꾸 엉덩이를 들었다 놓고
손가락들은 목과 뒷덜미를 긁고
모가지들은 아무리 기웃거려도 움직일 생각 없는 창밖을
연신 두리번거린다
꿈쩍도 하지 않는 버스를 움직여보려는 듯
발들이 동동 구른다
땅바닥에 굳게 붙박인 나무와 건물이
계속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 모든 게 핸드폰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입들은 핸드폰에게 야단을 치고 짜증을 퍼붓는다
속도의 단맛에 중독된 유리창이
수전증처럼 덜덜 떤다
엔진은 곧 폭발할 듯 으르렁거리지만
근질근질한 바퀴는 터질 듯한 공기를 꾹 누르고 있다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김기택
밤낮이 없는 어둠 속으로
아직도 선사시대인 어둠 속으로
빠른 시간이 지나간 적 없는 어둠 속으로
죽어서야 들어간다는 어둠 속으로
썩은 죽음만 먹는 뿌리들이 산다는 어둠 속으로
숨 쉬는 콧구멍은 들어갈 수 없다는 어둠 속으로
수만 년 동안 죽은 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어둠 속으로
제 눈처럼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어둠이 되어
해골에 달린 눈구멍처럼 시력을 빨아들이는 어둠이 되어
아무리 크게 떠도 사방팔방 눈꺼풀이 눈을 덮는 어둠이 되어
갑자기 몸은 다 없어지고 허공에 멀뚱멀뚱 눈알만 남는 어둠이 되어
나를 둘러싼 거대한 눈알이 한 점 허공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어둠이 되어
긴 대롱을 지나야 그 끝에 간신히 숨구멍 뚫린 허파가 있을 것 같은 어둠이 되어
소음과 진동이 좁은 대롱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돌며 터널 벽을 긁어대는 어둠이 되어
김밥 천국
김기택
김밥
천국(天國) 문을 열고
반바지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나온다
이빨로 잘 다진 김밥을 차곡차곡 위장에 담고
제삿밥처럼 고봉으로 담고
탱탱해진 위장을 불알처럼 흔들며 나온다
혀가 이빨 사이에 낀 김을 쑤시는
울퉁불퉁한 입과 뺨을 우글거리며 나온다
시커먼 먼지 밥알이 붙은 쓰레빠를 신은
걸음을 끌고 나온다
죽는 순간 1초에 전생이 펼쳐진다는 파노라마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시간이 나온다
밥을 한 주걱 김 위에 올려놓고
조물조물 김밥을 마는 주먹처럼
위장이 한 그릇 김밥을 주물럭거리는 동안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다
혀 양치질로 긁어낸 걸쭉한 침이 보도블럭 위에 떨어질 때
아들이 개새끼라고 부르는 아버지도 없고
치석 냄새 니코틴 냄새 술 냄새 나는 한숨도 없다
김밥이 으깨지는 동안의 잠깐 천국
무명(無明)이 소화되고 해탈(解脫)이 항문에서 새오나오는 동안
소장 대장으로 한 줄 김밥처럼 말려 지나가는
물렁물렁 천국
깜빡했어요
김기택
저런 저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제가 요즘 이렇다니까요 도대체 뭘 하고 사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어,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미안해요, 통화하느라 깜빡했어요.
물이 넘치는데도 정수기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전 이런 일이 터질 걸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잠깐만요, 지금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어요.
이건 저만 알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요,
절대로 냄비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곰팡이나 바퀴벌레나 날벌레에게 퍼질 수도 있어요.
이건 당신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지금 닦고 있는 중이니까요.
냉장고 밑으로 흘러 들어간 말까지 다 닦고 있어요.
깜빡했어요,통화 중에는 말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입을 조금만 더 크게 벌려보세요.
걸레로 닦아야 해요, 이빨 사이랑 사랑니 안쪽까지도요.
어제 빨아서 입보다는 깨끗해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예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껌
김기택
누군가 씹다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는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 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껌뻑이 형(兄)
김기택
잠시도 눈을 껌뻑거리지 않으면 눈을 뜰 수 없던 껌뻑이 형
갑자기 빛살에 찔린 박쥐처럼 항상 놀란 눈을 껌뻑거리던 껌뻑이 형
자기를 쳐다보는 눈초리를 보면 더 맹렬하게 껌뻑거리던 껌뻑이 형
어두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껌뻑거리기를 그치지 않던 껌뻑이 형
술에 취하면 벌게진 눈이 더 격렬하게 껌뻑거리던 껌뻑이 형
한평생 그렇게 쉬지 않고 눈을 껌뻑거리다가
마흔에 폭삭 늙어 보육원 돼지우리 할아버지가 된 껌뻑이 형
돼지밥 돼지똥 지어 나르며 가구 하나 없는 구석방에서 살던 껌뻑이 형
부모도 형제도 없이 자라서 못생긴 아내 못난 아이도 못 둔 껌뻑이 형
보육원 돼지들만이 아내며 형제며 제 새끼 같았던 껌뻑이 형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소문으로 죽어 돌아온 껌뻑이 형
한번도 빛을 향해 크게 떠본 일이 없는 눈을 달고
헌 옷 헌 밥 헌 얼굴 헌 몸으로 살다간 껌뻑이 형
착하다 소리나 듣던 바보 마음마저도 버리고 떠난 껌뻑이 형
껌뻑거리는 눈말고는 누구에게도 기억을 남기지 않은 껌뻑이 형
꼬리는 있다
김기택
1
그의 크고 억센 손이 내 등을 토닥거려주었을 때
내 허약한 몸은 마구 꼬리를 흔들고 싶었다.
바지를 벗고 꼬리를 꺼내어
태극기처럼 열렬히 흔들어주고 싶었다.
그것을 전혀 표정으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개처럼 꼬리로 웃었고 꼬리로 감격했다.
2
최근 여러 일간지에서 패션특집으로 다양한 '꼬리 연출법'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꼬리는 우리 신체에서 배꼽과 함께 노출돼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배꼽 노출이 상식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꼬리 노출을 강조하는 꼬리치마 꼬리바지가 신세대 패션가를 강타하면서 패션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복의 품 넓은 치마와 바지는 꼬리를 효과적으로 가려 우리 고유의 품위와 은근한 멋을 느끼게 하는 데 기여해왔다. 그러나 빠른 서구화의 바람은 속곳을 팬티로, 치마끈을 브래지어로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치마와 바지마저 지퍼형, 단추형, 부착형의 다양한 꼬리치마와 꼬리바지로 바꾸고 있다. 꼬리를 바지와 치마 속에 감추고 마치 꼬리가 없는 듯이 다녀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던 시대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패션특집에 소개된 내용들을 보니, 그동안 꼬리 장식으로 흔히 사용되던 리본이나 레이스, 술, 액세서리 따위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꼬리털파마, 꼬리염색, 꼬리걸이, 꼬리찌, 무스를 이용한 다양하고 발랄한 연출은 '꼬리가 더이상 수치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드러내야 할 인체의 미'라는 신세대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꼬리패션은 장식에 치중되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노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최근에는 단순히 꼬리만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꼬리와 엉덩이 곡선을 강조하거나 엉덩이의 일부까지 과감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본능의 패션화' 욕구가 심층에서 수면으로 떠오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유행의 첨단이 이른바 '장식 없는 패션' 또는 '패션을 배제한 패션'경향이다.
3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데, 문득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서 둔탁한 것이 만져진다.
난처하다, 꼬리 없는 꼬리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꼬리 없는 엉덩이.
누구도 꼬리에 물을 끼얹지 않는다.
꼬리에 정성껏 비누칠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꼬리뼈는 엉덩잇살을 밀고 올라와
꾹꾹 눌러보는 내 손가락에 제법 저항하고 있다.
내 등뼈는 꼬리를 기억하고 있다.
꼬리가 있다는 증거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이 선명한 자국으로 보아
꼬리가 없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내가 자궁 속에 있을 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한 때 그녀를 사랑한 것도
그녀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엉덩이 위에서
물결치듯 경쾌하게 춤추던 꼬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꽁치구이
김기택
젓가락을 대보기도 전에 불길이 먼저
부드러운 혀로 구석구석 꽁치 맛을 본다.
꽁치는 불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으로 입을 벌려 보지만
불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과 입까지 핥는다.
간지러운 듯 지느러미를 가늘게 떨고
배를 조금씩 들썩거릴 뿐
꽁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붉은 혀에서 침이 흘러나와
꽁치에 번들번들 윤기가 흐른다.
게걸스럽게 끓는 침이 사방으로 튄다.
불길이 다 먹고 남은 꽁치
혓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꽁치를
젓가락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꽃 지고 난 후의 연두
?김기택
꽃 지고 난 후의 연두는
아직 말할 줄 모르는 어린 혀의 색이다
아직 제가 연두인지 모른 색이다
색이 없는 곳에 있다가
햇빛과 바람이 닿자마자 막 생겨난 색이다
하늘과 땅이 오래오래 감춰두었다가
조금씩 내어준 색이다
알 수 없는 색이 계속 스며들고
처음 보는 색이 제 안에서도 우러나오고 있어
아직 어떤 색인지 정해지지 않은 색이다
소리는 명랑하고 가락은 활발하지만
말은 할 줄 모르는 새가
우짖으며 여리게 퍼뜨리는 색이다
봄이 더 익어
굳은 살 단단한 살 짙푸른 살이 앞에 붙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색이다
나귀
김기택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같이 쳐다보자
안 그런 척 나귀는 슬쩍 눈을 돌렸다.
긴 인조 속눈썹을 단 여학생 같은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털가죽 속에서 흰 뺨이 붉어졌을 것이다.
희고 길고 가는 손가락들을
뭉툭한 발굽 어느 곳엔가 얼른 감췄을 것이다.
눈알 속은 넓고 넓어
하늘이 다 보일 것 같고
내장과 비린내와 부끄러움이 다 들킬 것 같은데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바닥까지 들여다봐도
아까 보았던 그 여학생은 없고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열 여섯 시간을 견딘
무거운 책가방도 어디에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억센 등뼈와 딴딴한 근육과 거친 숨소리만
열심히 나귀를 견디고 있었다.
눈이 너무 커서 다 내리까는데
몇 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쳐다보는 동안
나귀는 질긴 가죽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귀만 쫑긋 열어놓은 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 귀야.
나는 매일 밤 너의 얼굴을 쳐다본다
김기택
매일 밤 너의 얼굴은 증명사진처럼 무표정하다.
어두운 곳에서 우두커니 앞만 보고 있다.
네 얼굴은 어두워졌다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지고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이내 울긋불긋해진다.
네 두 눈에는 똑같이 사각의 불빛이 켜져 있고
그 불빛 속으로 온갖 세상사가 지나간다.
불빛은 천둥이 올 것 같은 번개를 일으키며
검은자위 다 지워지도록 눈동자를 지지고 또 지진다.
텔레비전은 그렇게 밤늦도록 지치지도 않고
너의 멍한 얼굴을 이글이글 태우며 쳐다본다.
나는 바퀴를 보면 안 굴리고 싶어진다
김기택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은
바퀴 굴린 일
할 일 없는 무거운 엉덩이를 올려놓고
무늬가 다 닳도록 바퀴나 굴린 일
미안하다
무슨 대단한 일이나 있는 줄 알고
시키는 대로 좆 빠지게 돈 바퀴들에게
뜨겁고 빵빵한 바퀴 속에서
터지지도 못하고 무작정 돈 둥근 공기들에게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문학행사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꽃나무들
늘 뚫려 있어서 심심한 구멍들을 채우느라
괜히 비운 밥그릇과 술잔들
이토록 먼 곳까지 왔으니
시인으로서 뭔가는 남겨야 하겠기에
문학적인 체취가 은은하게 묻어나는 사인처럼
정성껏 남기고 온 똥오줌
미안하다
배부른 엉덩이 밑에서
온몸으로 필사적으로 뺑뺑이 돈 바퀴들에게
나무
김기택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나뭇잎 떨어지다
김기택
나뭇잎에도 무게가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울 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낫
김기택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내성적(內省的)
김기택
빈속에 술을 마신다.
술이 몸의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밝은 공기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어두운 공기를 아무리 많이 퍼내도
변함없는 몸의 어둠.
발음되지 않은 말들이 사는 곳.
어둠에 익숙한 말들이 사는 곳.
술 지나가는 자리가 뜨끈뜨끈하다.
술은 제 뜨거운 기운으로
물컹물컹한 어둠속을 파고들어가
빛이 두려워 숨은 말들을 찾아낸다.
핏줄 속에 넣고 시뻘겋게 끓인다.
아직도 발음되지 않은 말들이
술에 데워진 필줄을 타고 올라오다가
빛이 보이자 급히 숨는다.
폐가 술냄새를 듬뿍 쏟아내고
밝은 공기를 크게 들이쉬면
혀는 이나 입술 어디쯤을 자꾸 더듬는다.
뿌리는 억세고 줄기는 여린 말들을
술기운이 힘껏 뽑아버린다.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애, 저, 말하자면......
줄기와 잎만 우두둑 잘려 나온다.
뿌리는 어둠속에 더 단단하게 박힌다.
너는 없다
김기택
너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지문이 아니다
손때 묻은 책이나 냄새나는 옷가지도 아니다
기억 속에 사는 목소리나 표정도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너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온기가 없을 뿐이다
날아와 여기 쌓이기 전에 너는
끈적끈적하거나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뜨거운 바람을 불어내며
단내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단내, 아, 그 숨막히는 열기여!)
사람과 사람 사이
베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살가죽 같은 공기를
걸치고 다녔을 것이다
식어버리자 쉽게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온기가 있다면
울거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지금 차갑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어도 풀썩거린다
그렇다 너는 없다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너의 흔적은 없다
너무 잘 크는 화초 하나
김기택
열대의 푸른 혈색을 지닌 화초 하나
창의 한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온몸 가득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다
창밖의 눈부신 설경을 배경으로 하여
닭벼슬처럼 붉은 꽃을 머리에 얹고
날아오를 듯 닭날개 같은 잎을 넓게 늘어뜨리고
당당하게 실내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화분은 깨끗하고 예쁘지만
비대한 화초가 들어가 살기에는 아무래도 작아 보인다
흙에 박혀 있는 굵고 억센 줄기를 보면
그 밑에 살고 있는 뿌리들을 생각해본다
좁은 화분의 벽을 힘 닿는 데까지 밀어보다가
끝내 구부러져 벽을 타고 빙빙 도는 뿌리들
둥근 실타래처럼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빽빽하게 뒤엉킨 수많은 잔뿌리들
물을 줄 때마다 물 한 방울 놓치지 않으려고
닭발처럼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물을 빨아올리는 줄기와
그 밑에서 서로 밀치고 아우성치며
일제히 주둥이를 들이대는 잔뿌리들
그래도 뿌리가 커져 화분이 터지는 일은 없으리라
줄기가 더 굵어지고 잎이 더 무성해져도
화초는 뿌리를 더 좁게 움츠리게 하고
가늘고 섬세한 잔뿌리들을 뭉툭하게 퇴화시켜
저 작은 화분의 집에서 마지막까지
움켜쥔 생명을 않으리라
넥타이
김기택
목이 힘껏
천장에 매달아놓은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공중에 들린 발바닥이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린다
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넥타이가 목을 껴안는다
목이 제 안에 깊숙이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다
발버둥 치는 몸무게가 넥타이로 그네를 탄다
다리가 차낸 허공이 빙빙 돈다
몸무게가 발버둥을 남김없이 삼키는 동안
막힌 숨을 구역질하던 입에서 긴 혀가 빠져나온다
벌어진 입이 붉은 넥타이를 게운다
수십 년 동안 목에 맸던 모든 넥타이를 꾸역꾸역 게운다
게워도 게워도 넥타이는 그치지 않는다
바닥과 발끝 사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줄어들지 않던 한 뼘의 허공이
사람을 맨 넥타이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노래에 대하여
김기택
울음우는 바람을 들이마셨네
꿈틀거리는 먹이처럼 목구멍과 식도를 지나며
바람은 소리죽여 떨었네 떨림은 두껍고도 굵어
첨벙첨벙 가슴을 흔들며 떨어졌네
바람은 우물 같은 가슴속에 깊이 가라앉아
오랫동안 두근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따스한 온기에 몸을 녹이다가 더러는 스며들어
눈물샘 뜨거운 물줄기를 더듬다가
원통형 어두운 저음이 되어 올라왔네
울음우는 바람을 불어 날렸네
지느러미 흔드는 육중한 소리가 되어
더 큰 바람을 끌고 긴 몸뚱이는 꿈틀거리며 나왔네
떼지어 날아다니는 울음들 속에 내 노래도 섞이겠네
울음의 무게를 못 이기면 더러는 가라앉기도 하겠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쌓이겠네
손끝을 대면 비듬처럼 묻어나오겠네
노인이 된다는 것
김기택
눈동자에서 초점이 빠져나가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 윤곽이 흐려 보인다.
아무리 깜박거려도 선명해지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눈과 웃음과 주름이
추억과 구분되지 않는다.
지금 오는 중이죠? 어디쯤이에요?
휴대폰에 뜬 문자에, 아차! 머리가 띵해진다.
분명히 기억했던 약속 날짜가
머리카락에서 빠져나가 갑자기 하얘진다.
몸시 슬프지만
슬퍼할 기운이 골수에서 빠져나가고 있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다.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눈썹 사이에서 주름이 사납게 굵어지지만
잠시 불끈거리다가 풀려버린다.
길가 횟집 수족관에 물고기들은 가만히 있는데
세차게 도는 물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싱싱해지고 있다.
죽어 뒤집힌 물고기도 얼떨결에 힘차게 돌고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조금 전에 하려고 했던 일들이
괴로워하던 일 짜증 내던 기분 흥분하던 계획들이
몸에서 가지런히 빠져나가고 있다.
진한 커피를 휘저으니
찻잔 속의 태풍이 머리통 안에서 맴돈다.
돋보기 안에서 갑자기 커진 눈알이
읽자마자 잊어버린 글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어깨 위에서 힘준 근엄한 표정이
가볍게 흩날리다가 어깨 위에 허옇게 떨어져 있다.
마모되어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
김치이, 치이즈,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입은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웃지 않는 내 얼굴 대신 사진 찍는 사람이 웃고 있다.
누군가 매일 너를 보고 있다
김기택
매일 밤 너의 얼굴은 증명사진처럼 무표정하다.
어두운 곳에서 우두커니 앞만 보고 있다.
얼굴은 어두워졌다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지고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이내 울긋불긋해진다.
두 눈 속에는 똑같이 사각의 불빛이 켜져 있고
그 불빛 속으로 온갖 세상사가 지나간다.
불빛은 천둥이 올 것 같은 번개를 일으키며
검은 자위 다 지워지도록 눈동자를 지지고 또 지진다.
텔레비전은 그렇게 밤 늦도록 지치지도 않고
너의 멍한 얼굴을 이글이글 태우며 쳐다본다.
눈
김기택
바람을 타고 흰 발바닥들이 뛰어다닌다.
고양이에서 몸과 다리를 뺀 가벼움이 날아다닌다.
고양이에서 털과 이빨과 발톱을 뺀 탄력이 날아다닌다.
고양이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고양이 몸을 떠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가벼움이
허공에다 제 몸을 마구 휘갈긴다.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지고는
새로 입은 가벼움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과 몸 없음과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공기조차 답답하고 가벼움조차 무거워
떨어지다 말고 어리둥절 머뭇머뭇 갸웃갸웃 서성거린다.
헤매다 돌다 마지못해
떨어진다.
사뿐,
땅에 닿자마자 발바닥들 녹는다.
녹아 동그랗게 스며드는 발자국들 찍힌다.
조금씩 지워져가는 땅바닥은 느닷없이 가벼워져서
어쩔 줄 모르다 사라지고
(땅바닥 밑에 눈 내리는 또 다른 허공이 있을 것만 같다)
고양이 흰 발바닥들만 남는다. 쌓인다.
거대한 한 마리 고양이의 흰 잔등 같은 들판 위로
몸무게가 누르는 발자국들이 찍힌다.
눈 녹으니
김기택
녹는 눈은 누더기처럼 해어진다.
부스럼 난 살갗처럼 푸석푸석 갈라진다.
흰 철문에서 붉은 녹을 드러내며 들뜨는
낡은 페인트처럼 벗겨진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눈 사이로
달동네 추운 맨살이 드러난다.
천막으로 지붕을 기운 집들
연탄재와 쓰레기와 개똥 위에 서 있는 담장들
지붕에 어지럽게 얹어놓은 잡동사니들
양분 부족으로 누렇게 말라가는 삶들이
억지로 잠에서 꺤 듯 드러난다.
개구멍 같은 쪽문에서
가끔 연탄재 들고 나오는
무릎 튀어나온 파자마와 슬리퍼 신은 맨발,
햇빛을 받자마자 녹슨 철사처럼
헝클어지는 머리와 축 늘어지는 주름이
돋보기로 확대해놓은 듯
어쩔 수 없이 꼼꼼하게 드러난다.
누군가 내장의 힘을 다해 게워놓은 것 같은
걸쭉하고 벌건 국물을 길가에 튀기며
차 한 대가 지나간다.
녹는 눈은 순순히 으꺠어지며 또 녹는다.
문드러진다 진물 흘린다 질척거린다.
지난 밤 백설공주를 덮었던
순백의 그 눈부신 살갗이
한나절도 안 되어 해골을 다 드러내며 녹는다.
눈먼 사람
김기택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 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에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어쩌다 지나가는 다리를 건드리거나
벽이나 전봇대와 닿으면
가늘고 말랑말랑한 더듬이 눈은 급히 움츠려든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 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늙는 순간에 대한 짧은 관찰
김기택
미니스커트처럼 맨살에 싱싱한 바람 감기는 배꼽티,
미니스커트에서 폭포처럼 곧고 하얗게 쏟아져내리는 다리,
움직임 없이 그녀는 그 자리에 눈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것은 단지 눈을 뜨는 데 필요한 힘조차 아껴 폭풍처럼 불어오는 피로를 견디기 위한 것 같았다. 한번인가 그녀는 잠깐 눈을 떴으나 그것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눈뜨며 살았던 습관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심하여 어렵게 차지한 명당자리를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고 지쳐 탄력 잃은 피부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루한 지하철 바퀴 소리가 그 주름 사이를 끈질기게 파 들어가고 있었다.
늙은 개
김기택
희고 부드러운 털 안에 숨어 있어도
무관심조차 귀찮아진 표정까지 가릴 수는 없다
주름진 가죽 안에 고작 개 한 마리 가두어 놓고
시간은 마비되어 가고 있는
팔다리와 허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마음 닿지 않는 곳이 시키는 대로
눈꺼풀 근육만 아직도 끔벅거리고 있다
주인이 들어오면
팔짝팔짝 뛰던 종아리와 짖던 소리는
꼬리에 붙어 마지못해 느릿느릿 흔든다
이젠 발정도 햄과 소시지도
털 안에서 사는 것들을 마음껏 괴롭히진 못한다
끔벅거리는 눈 안에 숨어
아는 얼굴 하나가 능청스럽게 나를 쳐다본다
이젠 개와 나의 경계도 점점 늙어가고 있다
죽어서 서로 똑같아질 때까지
늙음은 천천히 개와 사람의 차이를 지워간다
늙음이 천천히 삶을 지우고 있을 때
개도 따라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늙은 개는 차츰차츰 움직임을 줄여나가고 있다
개였던 모든 것을 줄여나가고 있다
개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것이
안락의자 위에 한껏 늘어진 채
돋보기 같은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다리를 떠는 남자
김기택
컴퓨터 자판을 두리리면서
그는 명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다리 저는 사람
김기택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기둥이 되어 우림하게 서있는데
그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닭
김기택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목 잘리지 않으려고 털 뽑히지 않으려고
닭발들은 온 힘으로 버틴다 닭집 주인의 손을 할퀴며
닭장 더러운 나뭇바닥을 하양ㅎ게 긁으며.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손아귀 끝에서
그러나 허공은 닭발보다도 힘이 세다.
모든 움직임이 극도로 절제된 손으로
닭집 주인은 탱탱하고 완강한 목숨을 누른다.
짧은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길고 느린 동작.
힘의 극치에서 힘껏 공기를 붙잡고 푸르르 떠는 다리.
팔뚝의 푸른 핏줄을 흔들며 퍼져나가는 은은한 울림.
흰 깃털들이 뽑혀져나간 붉은 피가 쏟아져나간
닭의 체온은 놀랍게도 따뜻하다.
아직도 삶을 움켜쥐고 있는 닭발 안에서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공기 한줌.
떨어져나가는 목숨을 붙잡으려 근육으로 모였던 힘은
여전히 힘줄을 잡아당긴 채 정지해 있다.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닭살
김기택
좌판 위에 쌓인, 털이 없는 추운
한무더기 하얀 닭살.
온몸 가득 탱탱하게 돋은
오돌토돌한 닭살.
억센 손아귀가 낚아챘을 때
놀라 온몸이 가려웠을 닭살.
식칼 앞에서 전율했을 때
더 힘차게 돋아났을 닭살.
추울수록 힘이 생겨
딱딱하게 발기되는 닭살.
발 없는 다리 머리 없는 목에서도
조금도 움츠러들 줄 모르는 닭살.
고기가 된 지금도 가시처럼
꼿꼿하게 머리를 내미는 닭살.
대칭
김기택
1 - 사팔뜨기
옆으로 약간 기울어진 뒤통수를 보고
그가 사팔뜨기라는 걸 알았다
왼쪽 눈으로만 들어오는 거리를
수평을 잃고 삐딱하게 들어오는 거리를
제 눈높이에 맞추어 보려다가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기울어진 길과 균형을 이루려고
발걸음이 조금씩 왼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눈과
중심을 벗어나 한가로이 먼 곳으로 가는 눈
그 사이에서 대칭점을 헛디뎌
멀쩡한 두 다리가 조금씩 절뚝거린다
휘어진 대칭축을 따라가다 비뚤어지는 걸음을
그는 고집스럽게 고쳐 걷고 또 고쳐 걷는다
한쪽 눈이 없어져도 균형은 있다고
기울어진 몸 속에 튼튼한 중심이 살아 있다고
2 - 최민식 사진 「인간」
어이, 신문----
외팡에 신문뭉치를 들고 껑충껑충
외다리 사내가 뛰어간다.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불안하고 빠른 뜀박질을 쳐다본다.
외다리에 튼튼한 대칭축을 박고
외다리를 박차며 달리는
허리와 엉덩이.
외팔의 대각선에서 팔처럼 움직이는
머리와 모가지.
기울어질 듯 바로 서는 몸.
쓰러질 듯 일어서 힘이 붙는 속도.
헉헉거리는 신문을 하얀 손이 집어간다.
동전 하나가 땀에 젖은 손바닥에 떨어진다.
어이, 신문----
다시 흔들리는 외팔. 껑충껑충 뛰는 외다리.
땀흘리며 쫓아가는 비대칭의 균형.
대패삼겹살
김기택
대패로 깎아 무얼 만들겠다는 거지?
100% 돼지로 만든 식탁
삼겹살과 핏줄과 신경의 무늬가 생생한 책장과 장롱
숨 쉬는 통돼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친환경이라는 목조주택
신문에 끼어 온 전단지에서 본 그 광고들인가?
전기톱은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드리 라지화이트종 한 마리를 골라 베었겠네
잎과 가지가 다 흔들리도록 비명을 지르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돼지는 풀썩 쓰러졌겠네
고소한 비린내가 나무향이 되도록
사방으로 튀던 피와 비명이 무늬목이 되도록
얼마나 오랫동안
대패는 그 돼지를 쓰다듬고 핥으며 길들였을까
건강에는 역시 채식이 최고야
성인병도 예방하고 환경도 살리는 웰빙 음식 아닌가
가구나 집이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부수어 불판 위에 올리게
구워지면서 나무는 비로소 돼지고기가 된다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이 생생한삼겹 나이테 살 좀 보게
이토록 완벽한 돼지고기맛 퓨전 채식을 먹게 되리라고
예전에 누구 꿈이라도 꾸어보았겠나
독방
김기택
150cm 40kg의 몸매 속의 자유.
독방처럼 어둡고 좁은 몸 안에서
탈옥은 곧 죽음인 몸 안에서
그녀는 필사적이다.
가슴과 배꼽, 엉덩이와 흰 다리로
티셔츠를 밀쳐보고 청바지를 찢어본다.
아무리 꽉 조이게 입어도
티셔츠와 청바지는 헐렁헐렁하다.
몸밖에는 환한 햇살.
몸 안에서는 무엇이 자꾸 부풀어오르는데
내 가슴은 너무 작고 납작해.
부풀어라 가슴, 부풀어라 꽃!
그녀는 심장에다 볼륨 높은 헤드폰을 대고
혈관이 울리도록 비트 리듬을 쏟아붓는다.
가슴이 술먹은 듯 커지는 느낌이다.
얇은 티셔츠가 점점 팽팽해지더니
가슴이 비져나오는 것 같고
속옷같이 흰 배꼽도 드러나는 것 같다.
독방 안이 한결 넓어 보인다.
그녀는 재빠르게 핸드백을 뒤져
손바닥이 작은 거울로
독방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비추어보고
야심만만하게 화장을 고쳐본다.
한껏 부푼 마음이 떠오른다.
높은 창까지 떠오른 그녀는
독방 창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밖을 본다.
창밖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남자들.
티셔츠가 울퉁불퉁한 남자들.
독방을 으스러지게 껴안아 부러스뜨려줄 팔뚝들.
굉음 울리는 오토바이 뒤에 독방을 싣고
쏜살같이 달아나줄 귀엽고 푸른 청춘들.
크게 숨을 들이켜니 그들이 빨려올 것 같다.
니코틴처럼 속이 확 뚫릴 것 같다.
아, 이 몸매의 탄력으로 튀어오르면
날개 없이도 날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자 때맞추어 핸드폰이 울린다.
글쎄, 엄마, 집에서 저녁 안 먹는다니까.
오늘도 그럴 일이 있어서 늦는단 말야.
으, 지긋지긋. 핸드폰을 끄면서 그녀는 씩씩거린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독방을 감시하러 오는
저 잠 없고 빈틈없는 간수!
그녀의 독방은 다시 무덥고 퀴퀴해진다.
확 벗고 찬물 좀 끼얹었으면!
쥐와 바퀴벌레가 너무 들끓어 미치겠다구!
돋보기안경
김기택
벗어서 책 위에 올려놓은 후에도
안경은 여전히 무엇엔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뭇거뭇한 것이 렌즈 안에서 꾸물꾸물 형체를 갖추더니
곧 선명한 글자들이 된다.
책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렌즈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머뭇거리고 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파리는 검은 덩어리에서 나와
잔털이 촘촘하게 돋은 몸통과 다리가 된다.
헬멧처럼 커다란 눈으로 덮인 얼굴이 된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짠 날개가 된다.
너무 오래 껴온 탓에
안경에 붙박인 눈알이 빠지지 않는다.
눈이 자는 동안에도 안경은 눈을 감지 않는다.
잠시도 깜박거리거나 한눈파는 일이 없다.
어둠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잔글씨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힘찬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내 얼굴은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다.
꿈이 안경테 안으로 모인다.
꿈 틀이 열심히 꿈틀거리더니 곧 또렷해진다.
안경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꿈들은 안절부절못한다.
결코 감을 수 없는 크고 두꺼운 눈에
파리는 여전히 붙잡혀 있다.
안경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도망가지 못한다.
파리가 렌즈에 박힌다. 양각된다.
알몸이 다 드러난 채 종이에 붙박여 움직이지 못한다.
딸
김기택
바퀴 달린 커다란 바윗덩어리, 지게차에
정면으로 받혔다고 한다. 아빠는
피가 쏟아져나오던 콧구멍으로
몇번인가 강제로 숨을 더 몰아쉬었다 한다. 까르르
세살 여자아이가 장의버스 안에서 웃고 있다.
죽음이라는 말이
한번도 건드려본 적 없는 그 웃음을 보고
겨우 참았던 울음이 여기저기서 나직하게 터지고 있다.
딸꾹질
김기택
아기는 신기하기만 하다
목구멍에서 솟아나오는
이상한 새소리
발구르며 날갯짓하며 소리쳐 웃는다
깔깔깔깔 딸꾹,깔깔깔깔 딸꾹,
경쾌하게 튕겨져나오는
딸꾹질,그 희한한 구슬
아기는 무섭기만 하다
한참을 지나도 그치지 않는다
갑자기 웃음이 그치고 조용해지자
느닷없이 팽팽해지는 식도 속의 진공 상태
뻥, 목구멍이 터질 때마다
놀라 동그래지는 두 알의 큰 눈
소리쳐도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터져나오는 울음
아랑곳없이 규칙적으로
울음을 토,딸꾹,막토막 잘,딸꾹,라내는 소리
또 겨울을 기다림
김기택
허, 고것 참 맵다! 참 맵다! 노인은 굽어진 등뼈로 힘차게 허리를 펴본다.
수십 년간 얼었다 녹았다 하느라 쭈글쭈글해진 얼굴 가죽을 추위가 마음껏 후려친다. 성에가 서걱거리는 눈은 연신 꿈벅거리며 눈물을 추스른다. 코는 너무 매워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턱은 단단하게 굳어 이젠 떨리지도 않는다. 귓날은 곧 유리처럼 깨질 듯 얇게 얼어 있다. 귓구멍 속으로는 뱀 혓바닥 같은 바람이 날름거리며 쉬익쉭 소리를 내고 있다.
어험! 고놈 참 고약허기도 하다. 요 독오를 대로 오른 놈 좀 갖다가 한여름에 약으로 쓰면 참 용하겄다. 험, 어험!
뚱뚱한 여자
김기택
눈을 떠보니
어느 작고 어둡고 뚱뚱한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뒷덜미에서 철커덕,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너무 크고 무거웠으므로
끊임없이 마음을 낮게 구부려야 했다.
창문을 찾아 기웃거릴 때마다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벽도 따라 움직여서
어디가 바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눈에 띄는 대로
빛이 뚫려 있는 콧구멍에다 얼른 얼굴을 들이밀고
급한 대로 차가운 빛줄기 몇 가닥을 들이마셨다.
숨통을 통해 바깥이 조금 보였다.
밖으로 나가려고 몇 차례 몸을 뒤틀어보았으나
모든 문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었고
나를 찢거나 부수지 않고는 열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홉 개의 좁은 구멍을 찾아 간신이 빠져나간 건
거친 숨과 땀방울과 뜨거운 오줌과 입 냄새뿐이었다.
숨 쉴 때마다
나를 가둔 벽은 출렁거리며 뒤룩뒤룩 융기하였으며
브래지어는 팽팽하게 부풀었다.
엉덩이며 젖가슴, 겨드랑이, 사타구니까지
막힌 숨이 가득 차 있었고
터져나가지 못하도록
온갖 시큼하고 구린 비린내로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살펴보니
거울 속이었다.
어항 같은 눈을 뻐끔거리고 있는 얼굴이
살 속에 숨은 눈으로 살살 밖을 쳐다보는 얼굴이
포르말린 같은 유리 안에 담겨 있었다.
나자마자 마흔이었고 거울을 보자마자 여자였다.
그렇게 관리를 하지 않고서야
언제 시집이나 한 번 가볼 수 있겠느냐는 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들어왔다.
그게 구르는 거지 걷는 거냐고
내 뒤뚱거리는 걸음을 놀려대는 소리가
벽을 뚫고 살을 콕콕 찌르며 들어왔다.
움직일수록 더 세게 막혀오는 숨통을 놓아주기 위해
나는 방 하나를 통째로 소파 위에 누이고
개처럼 혀를 다해 헉헉거렸다.
마음아, 네가 쉴 곳은 내 안에 없다
김기택
누웠다 일어났다 먹다
신문을 보다 티브이를 보다 자다
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 때
몸은 하나의 정교한 물시계 같다
미세한 방광의 눈금으로 한 방울 두 방울
몸이 버린 물들이 고이는 것이 느껴진다
눈금이 모두 채워지면 방광에 종이 울린다
그때는 아무리 게으른 몸뚱이라도 정확하게 몸을 일으켜
오줌을 누어야 한다
물시계가 죽지 않도록 물을 잘 쏟아야 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꼬박 먹고 마시는데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몸무게는 그대로다
그 동안 먹은 밥 마신 물 모두 어디로 갔나
대부분 배설물 분비물로 빠져나갔겠지만
머리카락이 되어 깎이고
손톱 발톱이 되어 잘리고 때가 되어 밀려나가고
기운을 써서 소모시켜버렸겠지만
더러는 말이 되어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어 부풀기도 하고 적아지기도 하다가
끝내 기억만 남겨두고 다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슬픔이나 분노 절망 기쁨 같은 마음이 되었다가
표정이나 행동으로 울음으로 노래로 바뀌지 않았을까
방광의 눈금이 차올라 또 오줌을 누니
변기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른다
증기는 대기로 스며들어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줌이 물과 온기와 냄새가 되어 나왔을때
거기 마음도 함께 섞여나오지 않았을까
화내고 한숨 쉬고 웃고 소리치던 마음도
으르렁거리던 마음도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리던 마음도
함께 흘러나와 변기와 대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았을까
아무리 편하게 몸을 누이고 있어도
마음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뒤채고 끙끙거린다
맑은 잠속까지 꿈이 되어 들어와 흙탕물을 일으킨다
어쩌다 이 갑갑한 몸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까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진다
마음도 털처럼 몸에 뿌리박고 산다는 것
내장이 소화시킨 것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 것
먹지 않으면 몸뚱어리처럼 굶어죽는다는 것
어려서는 아름답고 크고 자유로웠지만
어른이 되면 더러워지고 작아지고 딱딱해져서
평생을 앓다가 죽는다는 것
그런 마음을 보면 불쌍한 몸보다도 더 불쌍해 보인다
마장동 도축장에서
김기택
아무도 생명과 음식을 구별하지 않는다네
뒤뚱뒤뚱거리던 걸음과 순한 표정들은
게걸스럽던 식욕과 평화스럽던 되새김들은
순서 없이 통과 리어카에 포개어 있네
쓰레기처럼 길가에 엎질러져 쌓여 있네
비명과 발버둥만 제거하면 아무리 큰 힘도
여기서는 바로 음식이 된다네
음식이 된다네 희고 가는 손들이 자르고
하루 세 번 양치질하는 이빨들이 씹을 음식이 된다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
저것들은 당당하게 자궁을 열고 나왔다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 생명이 되려고
통닭들은 노른자를 빨아들이며 커간다네
똥오줌 위에 흘린 정액을 밟고 들어가면
슬픈 눈동자들은 곧 음식이 되어 나온다네
말랑말랑한 말들을
김기택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어린 발음으로
딸아이는 자꾸 무어라 묻는다.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있고 흥겨운지
듣고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종일 짖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만으로도
너무 할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김기택
겨울 아침, 창문을 여니 찬 산바람이 들어온다
맑은 공기에는 언제나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맑은 공기가 더 맑아지는 비린내
아침 냄새가 더 아침 냄새 같은 비린내
그 비린내를 마시니
폭포를 먹은 듯 머리가 세차게 헹구어진다
흙 속에 사이좋게 섞여 썩고 있는
무수한 눈과 귀, 손과 발의 냄새들
마른 풀과 낙엽에서 녹아나오는 푸른 냄새들
아직도 공기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투명한 심장과 미세한 허파와 안개 같은 핏줄들
희미한 냄새만 남은 웃음소리들 흐느낌들
덜 깬 잠을 때리는 이 냄새에는 귀신 냄새가 서려 있다
깊이 들이마시면 허파가 시리다
귀신들도 비린내처럼 맑은 곳에서만 산다
이 냄새들이 산 속으로 계곡으로 더 깊이
절과 굿당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비린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있다
매맞는 아이
김기택
회초리를 기다리는 종아리는 차갑다
회초리가 감겨오자 종아리가 번쩍거리더니
뜨겁고 따가운 떨림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간다
마른 오줌이 몹시 마렵다
곧 종아리도 쓰라려지고 뜨거워진다
열 손가락이 열심히 종아리를 문지른다
문지르는 손가락 위로 회초리가 지나간다
손가락은 겨울나무 가지처럼 시리고 뻣뻣해진다
오줌 냄새 나는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눈물 닦는 손가락마다
옥도정기처럼 빨갛게 눈물이 발라진다
종아리에 연달아 회초리가 지나간다
부어오르는 푸른 종아리 위에서
손등과 손가락도 벌겋게 부어오른다
그래도 손은 제 아픈 줄 모르고
울퉁불퉁 부푼 종아리만 열심히 문지른다
부러진 회초리 대신 새 회초리가 지나간다
손가락은 터진 종아리를 더 힘차게 문지른다
종아리는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을 피로 닦아준다
맨발
김기택
집에 돌아오면
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가죽 구두를 벗고
살껍질처럼 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검정 양말을 벗고
발가락 신발
숨쉬는 살색 신발
투명한 바람 신발
벌거벗은 임금님 신발
맨발을 신는다.
머리 깎는 시간
김기택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
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
스프레이로 촉촉하게 물을 뿌린다.
이 무성한 가지를 어떻게 剪枝하는 게 좋을까
빗과 가위를 들고 잠시 궁리하는 눈치다.
이발소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 조용하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간다. 가위 소리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도록 귀 기울여 듣는다.
싹둑, 머리카락이 가윗날에 잘릴 때
온몸으로 퍼지는 차가운 진동.
후드득, 흰 천 위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덩어리들.
싹둑싹둑 재깍재깍 후드득후드득․․․․․․
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
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에, 풀잎에, 도랑에, 돌에, 유리창에, 양철통에
저마다 다른 빗소리들이 서로 겹쳐지는 소리.
처마에서 새끼줄처럼 굵게 꼬이며 떨어지는 소리.
물뿌리개로 찬물을 흠뻑 부으며
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
머리가 더 동굴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
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머리카락 하나
김기택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나온다.
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만 자라던 것이
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
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니,
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
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
머리카락 속에서 용쓰던 힘과 냄새는
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
하나씩 죽음이 보태질 때마다
바람에도 조금씩 힘이 더 붙는다.
그 바람이 낡은 집을 붙들고 요란하게 흔들어대니
문짝들 창문들은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며 밤새 앓는소리다.
난로 위에는 이제 더이상 머리카락이 아닌 것이
상처자국처럼 꺼멓게 늘어붙어 있다.
먹자골목을 지나며
김기택
먹자골목을 지나는 퇴근길
돼지갈비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냄새를 맡자마자 어서 핥으려고
입과 배에서 침과 위산이 부리나케 나온다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삶의 냄새란 말인가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로지 감칠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다
정말 이것이 죽음의 맛일까
비리고 고약한 냄새인데
혀와 위장이 잠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죽음을 품어 아름다워지고 풍요해진 산처럼
한몸 속에 삶과 죽음을 섞어놓으려고
서로 한 곳에서 살며 화해하게 하려고
혀와 위장을 맛의 환각에 홀리게 한 건 아닐까
지근지글 타고 있는 것이 고기이건 시체이건
돼지갈비, 그 환각의 맛과 냄새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먹자골목
먼지에 대하여
김기택
주광성(走光性) 하루살이 떼처럼
한 줄기 빛 속으로 먼지들이 모여든다
어지럽게 빛을 뒤틀고 돌리며 날아다닌다
손짓 발짓 같은 움직임들이 끈질기게
내 주위에서 기웃거린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몸짓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누구의 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누구의 슬픈 편견들이 삭아 부서진 것인지
난 알지 못한다 눈물에서도 잉크에서도
묻어 나오고 있지만, 말할 때마다 떨며
목소리에 섞여 나오고 있지만
면접
김기택
긍정적인 마음,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본인의 장점이라고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그래서 당신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게
3분 내로 우리를 설득해 보시오
면접관이 물었을 때
나는 바지 지퍼 같은 입술을 열어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는 말을 덜렁 꺼냈다
얼굴 대신 아랫도리가 벌개졌다
뺨 대신 손바닥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음모가 머리카락에서 돋아나 마구 구불거렸다
진취적으로 적극적으로 목청을 돋우어
침 튀기는 내 억양과 제스처 앞에서
면접관은 킁킁거리며 눈알을 굴리다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담은 웃음을
비밀을 알아낸 자의 득의만만한 웃음을
웃음은 단 1%도 함유되어 있지 않은 웃음을
눈꺼풀과 주름으로만 웃는 웃음을
땀구멍과 소름으로 들어오는 웃음을 웃으며
희고 물렁한 내 말을 쿡쿡 찔러보았다
귀 대신 뒷벌미로 말이 들려왔다
성급하게 나온 헛말을 얼른 덮으려고
내 입은 바바리맨의 바바리처럼 활짝 벌어졌고
발갛고 축축한 혀는 더 노출되었다
눈알 둘 곳이 보이지 않았다
손이 어느 팔에 붙어야 할지
발이 어느 다리에 붙어야 할지
머리가 어느 목에 붙어야 할지 마땅치 않았다
침묵에서 억지로 뽑아낸 말들을
숨어도 땀구멍까지 낱낱이 보이는 표정을
표정에서 미처 가리지 못한 아랫도리를
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들키고 있었다
앞뒤가 자꾸 어긋나는 문장을 다시 꿰맞추는 말이
제멋대로 나오도록 내버려 두고
이 곤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답이
필사적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지신 있어 보이려고 애쓰는 혀 밑에서
나는 침묵을 지켰다. 면접관 앞에 있으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혼자 있었다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나마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명태
김기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은 악쓰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 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모기는 없다
김기택
내 손이 갑자기 내 뺨을 매몰차게 때린 것은
손바닥과 뺨 사이에 모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뺨따귀를 얼얼하게 맞고 나서야 모기가 없다는 걸 알았다.
모기 소리가 들리자마자 피가 다 가렵다.
핏줄을 긁으니 살갗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뇌 한가운데를 가는 철사 핏줄이 관통한다.
잠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계속 잘 것인지 묻는다.
어제 잤던 잠까지 모두 깨어난다.
수없이 모기를 죽였지만 모기 소리까지 죽이진 못했다.
모기 소리를 죽인다 해도
귓구멍 뿌리에 붙박여 있는 소리까지 죽이진 못할 것이다.
귓구멍 뿌리에 붙박인 소리를 죽인다 해도
이미 뇌수가 되어버린 소리까지 죽이진 못할 것이다.
냉장고 모터 도는 소리, 커피포트 물끓는 소리 속에
모기 소리들은 건재하다. 파리채와 모기약이 닿지 않는
모든 틈새에 안전하게 숨어 있다.
창밖에서 음산하게 아우성치는 바람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금방 피 빠는 주둥이와 피를 돌리는 날개가 된다.
모기는 내 몸속에서 수챗구멍과 침대 밑과 변기를 찾아내어
다시는 잡히지 않도록 숨는다.
몸통만 피를 터뜨리며 으깨지고
머리통에 박힌 소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소리들은
이명(耳鳴)과 이식(耳識)이 닿는 곳은 어디든 새카맣게 붙어 있다.
어떤 두통도 바로 소리로 번역된다.
모기는 없다!
고 외치는 순간 모기 소리가 다시 울려댄다.
눈치 없는 손이 뺨과 종아리를 맹렬하게 긁어대기 시작한다.
무단횡단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김기택
아직 김이나 수증기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끓는 물을 보더니 물에서 연기 난다고 소리친다.
물에서 연기가 난다?
그렇지. 물이 끓는다는 건 물이 탄다는 말이지.
수면(水面)을 박차고 솟구쳐 오르다 가라앉는
뿔같이 생긴, 혹같이 생긴 물의 불길들,
그 물이 탄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거지.
잔잔하던 수면의 저 격렬한 뒤틀림!
나는 저 뒤틀림을 닮은 성난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을 견디느라
끓는 수면처럼 꿈틀거리던 눈과 눈썹, 코와 입술을.
그때 입에서는 불길이 밀어올린 연기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지.
그 말의 화력은 바로 나에게 옮겨 붙을 듯 거세었지.
물이나 몸은 기름이나 나무처럼 가연성이었던 것.
언제든 흔적 없이 타버릴 수 있는 인화물이었던 것.
지금 솥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솥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란 불방울이 되어
무수히 많은 뿔처럼 힘차게 수면을 들이받는다.
악을 쓰며 터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리던 물은
부드러운 물방울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물방울 얼룩
김기택
바싹 마른 물방울 먼지가 유리창 가득
붙어 있다 둥근 표면장력이 떼 지어 붙어 있다
먼지조차 중력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먼지 속에 남아 있는 액체의 무늬가 무게를 잡아당기고 있다
흘러내리면서 유리 절벽을 꽉 붙들고 있다
손톱자국처럼 유리창을 잡으며 미끄러지고 있다
손톱으로 유리판을 다
움켜지려고 딱딱하고 미끄러운 표면을 긁고 있다
손톱 긁는 소리를 끌어내리는 난폭한 중력
녹지 않는 얼음에는 할퀸 자국이 나지 않는다
먼지들은 미끄럽게 빛나는 표면에 뿌리처럼 박혀 있다
유리를 빨아들이는 이끼처럼 자라고 있다
유리 속에 갇힌 햇빛이 환하게 켜지자
먼지들도 물방울 기억을 되찾아 반짝거린다
뼈만 남은 물방울들
햇빛 화장이 끝나 푸석푸석한 물방울들
다 말라버렸는데도 여전히 먼지 속에 남아 있는 불방울들
물 위에서 자다 깨어보니
김기택
배 위에서 잠이 들었다.
바람소리에도 흔들렸고 물소리에도 흔들렸다.
망망대해 나 혼자였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사방에서 소란스러웠다.
오래 전부터 들어온 소리처럼 편안하였다.
바다처럼 커다란 아가미로 숨쉬었다.
출렁거리는 들숨 날숨마다
무수한 햇빛 방울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갑자기 파도가 커지고 높아지더니
배가 한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전동차 안이었다.
나는 선 채로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거친 파도소리를 내며
급제동으로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다
김기택
시장은 폭우를 맞은 듯 물이 흥건하였다.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눈알이 박혀 있었다.
숨 쉬지 않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헤엄치지 않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다.
비늘 속에 뚱뚱하게 고여 있었다.
시장은 물이 타는 냄새로 가득하였다.
식당에 달린 환풍기 빨대들은
탁한 연기와 냄새를 맹렬하게 빨아내고 있었다.
죽은 물을 먹고 사는 물들이
의자마다 앉아서 굽고 삶아낸 물을 먹고 있었다.
뼈 사이로 물을 발라내고 씹느라
발음이 뭉개진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시장 옆 도로에서는
물을 가득 실은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버스들이 와서 물을 울컥울컥 쏟아냈다가는
금방 새 물로 다시 채우고 있었다.
거리에서 파도치는 물이 시장까지 밀려와
좌판에 누운 물을 찰싹찰싹 건드려보고 있었다.
물은 해변의 바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아(迷兒)
김기택
엄마가 없는 공포.
엄마 손인 줄 알고
꼭 잡고 다녔던 막대사탕.
갑자기 놀라 떨어지는 막대사탕.
아무리 소리쳐 엄마를 불러도
기둥처럼 소리없이 내려다보는 사람들.
엄마가 보일 때까지
무작정 달려나가는 울음.
모든 소음이 놀라 비켜서도록
사라진 엄마가 당장 나타나도록
구둣발 사이를 자동차 경적 속을
뛰어다니는 울음.
잠속에서도 메아리치는 엄마.
자장가처럼 심장처럼
몸속에서 울리는 엄마.
미아 재개발 지구
김기택
집들이 덤프트럭에 실려 간다.
트럭이 느릿느릿 흔들릴 때마다
냉동육처럼 족발과 순대처럼 흔들리며 실려 간다.
포클레인이 집을 떠내 트럭에 싣고 있다.
트럭에 실리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집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포클레인이 잘 떠낼 수 있도록
기왓장과 벽돌담, 철근과 변기, 타일과 스티로폼,
깨진 거울과 계란판, 교회 간판과 의자가 뒤엉켜 붙어 있다.
연탄 리어카가 겨우 들어가던 골목길도
모과빛 불빛이 새어나오던 창문도
발자국 소리만 나면 컹컹 짖어대던 녹슨 철대문도
시멘트 덩어리 사이에 뒤죽박죽 끼어 있다.
아직 도살되지 않은 헌 집 몇 채가
거대한 집 더미 바로 옆에 서 있다.
오랫동안 떨고 있었는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다.
문짝들은 너덜거리거나 떨어져 있다.
'사람 있음'이란 판자때기를 세워놓고
끝까지 살며 버티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마자
갑자기 늙어버린 집들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듯이 겨우 서 있다.
'세입자 주거권도 보장하라'고 데모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나니
이젠 포클레인이 툭 건드려주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즉시 쓰레기가 되어버리겠다는 듯
마지못해 직립하고 있다.
라면봉지, 캔, 우유팩, 생리대와 뒤섞여
집들이 덤프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릉가르릉 소리가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 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지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바람 견디기
김기택
널자마자 얼어버린 빨래 하나
아직도 용을 쓰며 빨랫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허공에 양팔을 묶인 가는 뼈
그 끊어진 듯 휘어진 선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야윈 살가죽
바람 부는 날의 시
김기택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바퀴벌레는 진화 중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가지고 있었을까.
로보트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발자국
김기택
1
눈 속의 공기를 밟으며 가고 싶다.
발자국 없는 걸음 걷고 싶다.
그러나 눈 위에는 생김새만큼 크기만큼
정확한 몸무게가 찍힌다.
눈 속의 차고 하얀 공기가
뽀드득, 발밑에서 빠져나가는 소리.
햇빛이 나면 곧 녹아 스며들 저 허공 위에
숨 멈추던 사방으로 흩어질 무게가 누르는
발자국, 저 절묘한 색즉시공(色卽是空)!
2
희디흰 산언덕이네
봄꽃 대신 설화 만발한
검은 나무들이네
깊고 높지만
먹이라면 마른 쭉정이까지
다 덮어 감춘 겨울산이네
아무리 찾아 헤매도
남는 것은 내 발자국뿐이네
여우더러 너구리더러 사냥꾼더러
나, 토끼 잡아먹으러
잘 찾아오라는 발자국뿐이네
죽음은 아직 몰라도
두려움은 잘 아는 새끼들처럼
두 줄로 서서 잘도 쫓아오네
발자국들 작은 발자국들
밥 생각
김기택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 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리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 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뱀
김기택
팔과 다리란 무엇인가
왜 살가죽을 뚫고 몸에서 돋아나는가
나는 안다 팔다리 달린 몸들을
그 몸들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그 끓어오르는 몸 속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들어 있는가를
갓난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꺼내야만 하고
평생 동안 부지런히 지껄여
말들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난폭한 힘을 배설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자신의 열기에 못 견뎌 뇌는 녹고
심장은 타고야 말 것이다
몸 속의 열기가 살가죽을 밀고 터져나오지 않도록
살가죽 터진 자리마다 거추장스런 팔다리가
돋아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온몸에 차가운 피가 흐르도록
모든 힘을 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음처럼 차고 빛나야만 맑아지는 독
그 푸른 힘으로 끓어오르는 열기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가늘고 긴 선 하나만 몸에 남게 될 것이다
가벼워라 아아 편안하여라
팔과 다리 털과 꼬리 모든 것이 생략되고
한 줄의 긴 몸으로 단순화되니
머리와 심장으로 언제나 땅을 만질 수 있고
마음껏 땅의 차가운 힘을 마실 수 있고
그 즐거움으로 독은 더욱 올라 꼿꼿하게
날이 서는구나
나무처럼 땅의 고요한 기운을 받아 숨쉬니
굶을수록 눈은 광채를 더하고
빠를수록 몸은 바람보다 소리가 작구나
번잡스럽게 바둥거리던 팔과 다리
그 몸에서 줄창 쏟아내는 비명과 아우성도
독으로 소화시키면 이내 형체를 버리고
열기와 소음도 버리고
기꺼이 화사한 꽃비늘이 되는구나
버스
김기택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버스는 온몸에서 진저리 치는 소리를 냈다.
구슬픈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만 달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앞차와 부딪칠까봐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옆걸음으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게 되어 있는
동그란 다리,
속도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다리를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시 출발하면
옆 차선에 대가리를 들이대고 팍팍 끼어들면서
버스는 사납게 내달렸다.
기세등등한 엔진소리 사이로
숨어 우는 아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버스 앞유리,
깨질 것 같은 눈물이 가득한 눈
잠자리 눈처럼 얼굴을 다 가린 커다란 눈
눈꺼풀이 없어 감을 수도 없는 눈을 뜨고 있었다
버스에도 봄
김기택
버스에 앉아 있다 선남선녀
비닐 의자 위에 핀 생화들
꽃향기가 밀어 올리는 말소리 웃음소리
그 싱거러운 봄의 정물 속으로 한 노인이 들어온다
노인이 두리번거리자마자 갑자기
선남선녀 위에 붙어 있는 노란 스티커 `노약자석`
아무리 건강해도
젊은이 못지 않은 기력이 뻗쳐도
늙음은 버스 타면 젊은이에게 눈치 주어야 하는 것
앉을 자리 찾느라 부산하게 눈치 보아야 하는 것
선남선녀 앞에 노인이 바짝 다가선다
움직이는지 않는 아름다운 정물들
스스로 그림 속에서 나올 수 없는 꽃처럼
노약자석에 딱 붙어버린
그래도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선남선녀
창밖은 시선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착한 봄 날씨
핸드폰에는 꽃과 함께 도착한 동영상 메일
젊은은 도저히 난처할 겨를이 없다
넘쳐 오르는 색과 향기를 어쩌지 못하고
피어오르는 일 하나만으로도 너무 바쁘다
노약자석에서 일어날 틈이 없다
아무리 위엄 있게 헛기침을 해도
제 기침에 오히려 제 허리가 구부러지는 노인
주름살 속으로 다시 깊숙이 들어가는 장유유서의 눈치
갑자기 바짝 쪼그라든 정정함과 당당함은
노약자석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낡은 버스 실내가 은은한 광채로 넘치도록
출렁이는 봄 눈부신 선남선녀
벌레
김기택
2
끊임없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벌레 한 마리 걸어 간다
한껏 긴 몸을 늘였다가 움츠릴 때
몸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으면서
몸 아래에 둥근 공간이 생긴다
긴 몸으로 그 공간을 밀어
벌레는 앞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벌레의 걸음을 들여다보니
흰 알을 까며 가는 것 같다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할 때마다
하나씩 품어져 나오는 그 알을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굴리며 가는 것 같다
베개
김기택
귀가 두근거린다
옆으로 누운 귀에서 베개가 두근거린다
베개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난다
동맥이 보낸 박동이 귀에서 울린다
두근두근이 들어오고 나가느라
베고 있던 머리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베개와 머리 사이엔 실핏줄들이 이어져 있어
머리를 돌릴 수가 없다
숨소리들이 모두 입술을 벌려
베개에서 나오는 두근두근을 마시고 있다
고막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잠든 귀를 지나 꿈꾸는 다리로 퍼져 간다
소용돌이치는 두근두근을 따라
온몸이 동그랗게 말려 있다
벽
김기택
옆구리에서 아까부터
무언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작은 할머니였다.
만원 전동차에서 내리려고
혼자 헛되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빈틈없이 할머니를 에워싸고
높고 튼튼한 벽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중얼거리며 떠밀어도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태아의 발가락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
전동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닫혔지만
벽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는 동안
끔틀거릴수록 점점 작아지는 동안
승객들은 빈틈을 더 세게 조이며
더욱 견고한 벽이 되고 있었다.
병
김기택
병이 들어오면 몸은 뜨거워집니다
한 그릇 고요한 물처럼
마음은 찬 데 있어야 투명하고 맑아지는데
뜨거운 그릇 속에 앉아 있자니
울렁울렁 속이 일어나 뒤집히고
한 방울 두 방울 기포도 생겨 떠오릅니다
그릇 오목한 바닥에 착실하게 엉덩이 붙이고 싶어도
자꾸 들썩거리게 되고
끝내 마음은 소리지르며 끓기 시작합니다
끓어오르느라 온몸 가득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도 병을 이기려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음도 한몸 속에 너무 오래 담겨지면
먼지도 앉고 잡균도 꼬여 흐려지겠지요
비우지도 않고 마냥 채우기만 하면 더 흐려지겠지요
사는 곳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은 가끔 이렇게 푹푹 끓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보육원에서
김기택
내가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팔 벌리자마자 갑자기 아이 앞에 나타나는 허공
어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허공
내 품에 안기자마자, 철컥
아이는 자석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아이 뒤에는 다른 아이들이 있다
어린 눈마다 뚫려 있는 거대한 허공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복권 파는 여자
김기택
빨간 지붕, 하얀 벽돌, 작은 반달창,
동화 속의 집 같은 예쁜 복권 판매점에
오늘도 그 여자는 앉아 있다.
시커먼 손, 누런 손, 하얀 손, 주름지고 딱딱한 손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너덜너덜한 돈을 들고 와서
빳빳하고 깨끗하고 오색찬란한 복으로 바꾸어 간다.
복권으로 복을 받을 확률은? 십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오, 얼마나 단단하고 두껍고 높은 희망인가.
이제 저 희망을 손에 쥐었으니
저들은 칼잠, 새우잠, 선잠, 불안하고 얕은 잠 속에서
필사적으로 돼지꿈을 꾸어야 하리라.
복권 파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낡은 천 원짜리가 들어온다.
점쟁이처럼 그녀는 모든 걸 한눈에 보아버린다.
얼마나 불쌍한 손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는가를
그 돈이 얼마나 떠돌며 구겨지다 왔는가를
그 손이 받아갈 복이 얼마나 힘없이 찢겨질 것인가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그녀는 헌 돈을 새 복권으로 바꾸어 준다.
지루하게 줄 서 있는 저 출구 없는 삶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있는 저 삶들에 대한
그녀의 확고하고도 유일한 처방은
언제나 단 하나 ― 복권이었다.
얼마나 많은 오갈 데 없는 돈들을 복으로 바꾸어 주었던가.
오늘도 얼마나 많은 복을 나누어 주었던가.
그래도 아직 복권은 많다.
주택 복권, 월드컵 복권, 더블 복권, 또또 복권 ……
2억, 4억, 7억, 10억 ……
당첨금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복을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녀는 요염하게 하품을 한다,
복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귀찮다는 듯
마법의 성처럼 예쁜 집에서
복을 관리하는 여신 노릇도 이제는 시시하다는 듯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김기택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 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봄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며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불룩한 자루
김기택
겨울 아침. 집 앞 쓰레기통 옆에 낯선 자루 하나, 배가 불룩하다. - 치웠어? - 응, 자루에 넣어서 버렸어. ㅡ 잘했어. 글쎄, 요즘 통 밥을 안 먹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거야. 이상해서 만져 보니까 차갑고 딱딱하더라구. 국밥은 얼어 있다. 늘 비어 있던 너무나 열심히 핥아 바닥이 반질반질하던 찌그러지고 가장자리에 때가 새까맣던 개밥그릇. 오늘은 밥으로 불룩하다. 산 같은 쓰레기 매립장. 그 속은 뜨겁다고 한다. 그 속에 관을 박아 뽑아올린 가스로 불도 때고 라면도 끓여 먹는다고 한다.
비둘기에 대한 예의
김기택
차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둘기는 비키지 않았다.
뻔히 타이어를 보면서도 날아갈 기미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가면서 위협했지만
먹이를 향한 순도 높은 집념과
수많은 구두들을 다 비켜가게 했던 배짱이
타이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피와 깃털로 타이어를 더럽힐 수 있는지
물컹거리며 짓뭉개지는 느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기세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차를 피했다가는
먹이에 붙어있는 부리에서 머리통이 우두둑 뜯겨버릴 것 같았다.
뒤차가 빵빵거렸지만
먹이 쪼는 부리는 바닥에 둔 채
몸통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몰아일체와 무아지경을 깨트리고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험을 두둑하게 들어놓고
비둘기 자해공갈단이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볼 것 같아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비둘기집
김기택
쫓아도 자꾸만 온다.
베란다 난간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와서 앉는다.
날개는 있지만 날려고 하지 않는다.
처음엔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나중엔 늙은 늑대 울음소리가 나왔다.
너무 울어 목쉰 통곡 소리였다.
들짐승들이 목청에 우글우글하였다.
한밤중에 우는 소리들이었다.
일요일 아침
봄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는
꽃나무 대신 화분에 비둘기가 심어져 있다.
잎은 떨어져도
뿌리는 자꾸 제 화분으로 파고든다.
뽑아내도 자꾸 자란다.
주문한 지가 언젠데 여태껏 안 오냐고
언성을 높여도 치킨은 안 오고
털도 뽑지 않은
튀겨지지도 않은 비둘기만 자꾸 온다.
비둘기집 일체형 베란다는
아파트 계약에 기본 선택사항이다.
베란다를 통째로 뜯어버리지 않는 한
비둘기를 쫓아봐야 헛일이다.
밖에 나가서 볼 땐 비둘기였는데
안에 들어와서 보니
실외기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똥이다
비린내
김기택
땅바닥에 코를 대고 뒤뚱뒤뚱
개 한마리 걸어간다.
구석구석 수상한 냄새가 감춰져 있는 길.
풀숲을 헤치고 낙엽과 쓰레기를 어지럽히며
개 한마리 걸어간다.
가을 국화와 코스모스 짙은 향기가
콧구멍을 건드려보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노랑 분홍 하양 푸짐한 꽃잎들이 하늘거리지만
조금도 한눈팔 줄 모른다.
저렇게 공허한 형상과 배고픈 냄새가 있을까?
소도시의 온갖 냄새 속에 숨어 있는
한줄기 질기고 강한 냄새.
끊임없이 코를 씰룩거리게 하지만
정체도 방향도 알 수 없는 냄새.
갖가지 향기와 색과 소리를 일시에 지워버리는,
시각과 청각, 촉각을 뭉뚱그려 후각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음과 생각과 발걸음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무엇일까, 이 난폭한 냄새의 실체는.
이 길 어딘가 분명히 이 냄새의 주인은 있을 것이다.
개는 하나하나 냄새의 기억들을 꺼낸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행복과 불행, 슬픔과 분노, 즐거움과 희열......
코의 정교한 감식력으로 냄새들은 낱낱이 분류된다.
보다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개는 다시 갇는다.
쓰레기 더미 같은 냄새의 혼란 속에서
눈과 귀를 닫고 오직 코 하나로
꼭꼭 숨어 있는 냄새를 찾아,
모든 냄새를 다 지우고도 남을 냄새를 찾아.
빗방울 거미줄
김기택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하루 종일 거미줄 내리친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거미줄에 달려드는
더 굵은
더 힘찬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비 그친 아침
거미줄 칸칸마다 다닥다닥
날벌레처럼 잡혀 있는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길 산책
김기택
비 온 뒤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 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 놓은 길
발자국으로 흐트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빗소리
김기택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산에 가득하였다.
큰비가 올 것 같아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았다.
한참 지나도 비는 오지 않고
빗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렸다.
귀를 한껏 열어 소리를 따라가보니
빗소리가 나는 곳은 바람 속이었다.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치는 나뭇잎들이었다.
그 많은 잎들은 다 붙잡고 어쩔 줄 몰라
마구 흔들리기만 하는 가지들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올라 곧 토할 것 같은 내 허파였다.
소리는 그냥 쏟아져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솟구치기도 하고
숲을 통째로 들어올릴 듯 뒤흔들기도 하고
점점이 흩어져 날리기도 하였다.
빗소리에 맞아 나무 근육들은 꿈틀거렸고
뿌리들은 땅 위로 기어나와 들썩거렸고
잎들은 하얗게 뒤집혀 버둥거렸고
땅은 콧김을 뿜어댔고
내 입에서는 비린내가 덩어리처럼 확확 뽑혀나왔다.
산꼭대기에 이르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내 몸은 휘몰아친 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과 고르는 여자
김기택
복잡한 백화점에서 사과를 고르던 한 처녀가
갑자기 눈이 동그래지며 두리번거리더니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순간,
처녀의 얼굴에 20여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그 시간 속에 한 소녀가 숨어 있다.
그 뒤에 한 젖먹이도 숨어 있다.
한 꼬마가 사과 더미 사이에서 엄마를 찾는다.
사과를 고르는 수많은 손가락들.
손가락에 매달린 기다란 팔들.
그 팔에 연결된 수많은 얼굴들.
두근거리며 하나하나 살펴본다.
진자 엄마 같아 얼른 부르려 하면
어느새 마귀할멈으로 변하는 얼굴들.
겁먹은 눈으로 쳐다본다.
긴 손톱에 가려진 날카로운 송곳니들.
깊고 컴컴한 입속에서 울려나오는 웃음들.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서서 꼬마가 운다.
갓난아이가 운다.
태아가 배를 격렬하게 찬다.
만삭의 임산부가 사과를 고르다 말고 놀라
잠시 배를 만지며 숨을 고른다.
사과를 고르던 한 처녀가 눈이 동그래지며
두리번거리다가 소리친다.
엄마----
사막에서의 반가운 해후
김기택
지하철에서 눅음기 반주로 노래 부르며 구걸하는 장님 지팡이에 바닥을 기어다니던 거지 다리가 걸린다 장님이 얼른 피해가려 하자 다리 없는 거지가 급히 붙잡는다 나요 나 형님! 아 아우도 나왔구먼!
수백 눈알의 수상한 눈초리를 견디기 위해 모래알처럼 건조해지고 단단해졌던 두 사람은 전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잠시 물렁해져서 눈 아픈 친구와 다리 아픈 친구가 된다
동전 바구니를 내밀던 늙은 손으로 전차 바닥을 손바닥 닳도록 밀던 새카만 손으로 매일 똑 같은 찬송가를 부르던 입으로 수많은 다리 사이에서 굳게 다물던 입으로
서로 신기한 듯 만져보고 형님 아우 몇번씩 불러보고 큰 소리로 떠들다가 무슨 중요한 말인지 소곤거려보다가 지팡이로 뭉툭한 다리 툭툭 쳐보다가 검은 안경 벗겨서 써보고 폼잡아보다가 오랫동안 웃지 않던 웃음을 커다랗게 웃는다
가도가도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눈 없는 사람은 다리 없는 사람에게
다리 없는 사람은 눈 없는 사람에게
사무원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손익관리대장경(損益管理臺帳經)과 자금수지심경(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 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김기택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 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을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산낙지 먹기
김기택
한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죽으면 꼼짝 않고 있어야 된다는 걸 몰랐기에, 제 힘과 독기를 모두 모아 거친 물굽이처럼 요동쳤다.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죽음엔 눈과 팔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방향도 없이 앞으로만 기어가다 저희들끼리 마구 엉켰다.
흰 접시는 마치 제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라미 안에서 빨판들을 물방울처럼 튀기며 거칠게 파도쳤다. 그러나 죽음이 달아나기엔 접시의 반경이 너무 짧았고, 모든 길은 오직 우스꽝스러운 꿈틀거림으로만 열려 있었다. 토막난 다리와 빨판 들은 한 마리의 통일된 죽음이기를 포기하고, 한 도막 한 도막이 독립된 삶이 되어 접시 밖으로 무작정 나가려 했고, 씹는 이빨 틈에 치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씹을 때마다 용수철처럼 경쾌하게 이빨을 튕겨내는 탄력.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있는 죽음과 죽어있는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탄력. 한 번에 다 죽지 않고 여러 번 촘촘하게 나누어진 죽음의 푹신푹신한 탄력. 다 짓이겨지고 나도 꿈틀거림의 울림이 여전히 턱관절에 남아 있는 탄력. 목 없고 눈 없고 손 없는 죽음이 터무니없이 억울할수록 이빨은 더욱 쫄깃쫄깃한 탄력을 받고 있었다.
살갑게 인사하기
김기택
목젖을 뭉개고 올라오는 말을
흰 손이 저절로 주먹이 되려는 말을
상대방이 즉시 씹새끼로 만들려는 말을
눈알에서 빳빳한 뱀대가리가 곤두서는 말을
무엇이든 손에 닿는 대로 마구 휘두려는 말을
피가 입으로 몰려 아무 구멍이나 닥치는 대로 쑤시려는 말을
결코 근대화되지 않는 좆의 DNA에 새겨진 모든 짐승이 다 드러나는 말을
꽉 졸라맨 넥타이로 틀어막고
단단하게 채운 바지 지퍼로 틀어막고
할 말 없을 때마다 하는 날씨 얘기로 틀어막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친 반들반들한 문장으로 틀어막고
존체금안과 고당만복과 하시옵기를 앙망하나이다로 틀어막고
제 주먹으로 제 발로 제 대갈통으로 제 심장으로 제 구역질로 꽉 틀어막고
반가워요 반가워요 반가워요
볼 때마다 행복해지는 웃음, 잡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손을
다시 만나니 정말정말정말 행복해요
삼겹살
김기택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차 있다,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치처럼 틀어막고 있다,
고기 냄새를 聖人의 後光처럼 쓰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안 내가 서있던 자리에는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상쾌한 바람이 한꺼번에 고기냄새를 날려보낸다,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 쉬는 사이
고기냄새는 잠깐 파리떼처럼 날아올랐다가
바로 끈적끈적한 발을 내 몸에 찰싹 붙인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있는 내 몸 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
삼계탕
김기택
1
뱀 아가리 속같이 길고 컴컴한 당신의 목구멍과 식도 속으로
닭이 된 어린 영혼 하나가
들어간다 털과 목과 다리와 내장을 칼날로 씻기고
끓는 물에 비린내와 뻣뻣함과 질김까지 다 씻기고 나서
들어간다 영혼의 눈알 같은 기포들이 잠깐 세상을 보고 사라지는 국물 속에서
마침내 보들보들하고 뽀얗고 고소한 죽음이 되어
들어간다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어린 닭이 묻힌 당신의 몸 위에서 자랑처럼 닭살이 무성하게 돋아나도록*
*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패러디.
2
살은 물이 되도록 물은 살이 되도록 끓고 있는 삼계탕에서 분리 수거된 깃털과 내장과 닭똥과 닭똥 묻은 닭발과 부리와 피와 발톱과 벼슬과 느닷없는 날갯짓과 휘둥그레진 눈알과 허공을 맹렬하게 긁어대는 소스라침과 칼 잡은 손목을 뒤흔드는 전율과 갑자기 칼날에 베어진 피와 뚱뚱한 쓰레기봉투를 터뜨리며 부풀어 오르고 있는, 코에 닿자마자 고약한 비린내를 찔러대는, 비듬 같은 닭털가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조각조각 흩어진 닭의 기억을 막무가내로 이어붙이고 있는 닭들, 닭 아닌 것들, 닭이었다가 닭일 뻔 했다가 닭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들
상계동 비둘기
김기택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
김기택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생명보험
김기택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
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이요.
사랑이 얼마나 진지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김기택
가슴 대신에 머리에서 끓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냄비의 얇은 금속성들은 낮은 소리로 악을 쓸 것이다
그대 지식의 갖가지 자양분을 지니고 있는 흰 골은
이제 계란처럼 딱딱하게 익을 것이다
생각들은 삶은 머리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깨어지면 물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애써 배운 것들은 얼룩을 남기며 바닥에 스며들 것이고
비린 점액질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씻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심하라 깨져도 여전히 둥글둥글하고 튼튼한 생각 속에서
희면 희다 노라면 노랗다 확실하게 구분된 말들이
까기 좋고 먹기 좋고 잘생긴 말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영양가까지 계산하여 잘 삶은 목청 속에서
말들은 강한 억양을 타고 근엄한 틀을 갖추어 나올 것이고
짭짤하고 구수한 양념들이 그 위에 뿌려질 것이며
더 이상 떫은 비린내는 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나 돈을 내고 사고 싶어지도록 탐스러워질 것이다
그대 머리는 냄비처럼 점점 튼튼해질 것이고
그대 목소리도 비례하여 점점 요란해질 것이다
시끄러워서 그대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자(聖者)
김기택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 넣는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 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소
김기택
1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2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3
저 쇠가죽 부대 속에 한때는
풍선 같은 바람이 들어 있었다네
가죽 구석구석 팽팽하게 부풀어
뛰어다니기도 하고 쟁기를 끌기도 하고
목구멍으로 음매에 떨며 나오기도 하였다네
가죽 부대를 빠져나오려고
길길이 뛰고 발길질도 하였지만
결국 바람은 잔잔해지고 풀을 뜯으며 커갔다네
그러나 이제 바람이 빠져나갔다네
백정이 칼을 들어 한가운데를 가르자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네
바람 빠진 가죽부대 털레털레 실려가고
떠돌던 바람들이 모이고 자라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는 저녁
우연히 천막 안으로 들어간 바람 하나
천막을 들고 일어나려 하네
밤새도록 천막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들먹이며 그르렁거리네
마치 내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장의 어두운 통로마다
냄새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 비린 냄새를 진동시켜
울을 소리를 내고 있다는 듯이
그 떨리는 목울대 끝에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달려 있다는 듯이
소가죽 구두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소나무
김기택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쪽해지고 단단해져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 자국,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
아무리 더워도 늘어지는 법 없다.
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
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지고 서늘해진다.
지금도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을 움직이며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
그 아래 어둡고 찬 땅 속에서
우글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
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
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
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소매치기
김기택
내 재산은 저금통장이나 부동산에 있지 않다. 거리마다 돌아다니는 핸드백과 지갑 속에 현찰로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구태여 저금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으랴. 구차하게 예금청구서를 쓰고 신용카드를 자동인출기에 넣다 뺐다 하랴. 친절하게 세어서 내어주는 돈은 도무지 맛이 없다. 내
손은 거의 움직임이나 소리 없이, 지나가는 돈들을 내 주머니에 정확하게 옮긴다. 그렇게 날아들어온 돈은 비린내처럼 싱싱하다. 주머니에서 펄쩍펄쩍 뛰는 것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손이 저 혼자 일을 한 적도 있다. 어떤 아주머니가 백 속에 든 지갑이 없어졌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떤 놈이 무례하게 남의 구역에서 일을 하나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데, 뭔가 이상했다. 순간 안주머니를 만져보니 웬 두툼한 지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하, 내가 그런 경지까지?
돈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쉬지 않고 손에서 손으로 지갑으로 금전등록기로 뛰어다니다. 우둔한 사람들은 그걸 숨 막히는 금고나 저금통장에 가두고 굳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만들어 안전하게 죽여 잡는다. 죽으면 골치 아픈 숫자가 되는 돈을...... 그러나 거리는 살아 있는 돈으로 가득하다. 인파 속을 미끄러져 들거가면 충성스러운 돈들이 이 주인을 알아보고 주머니에서 핸드백에서 고개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게 보인다. 그래도 난 그 감칠맛 나는 냄새를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언제나 그놈들은 새 주인이 아름다운 솜씨로 낚아채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손가락들
김기택
옷을 갈아입고 외출하다
뭔가 쓰려고 보니 주머니에 볼펜이 없다.
적어놓지 못한 생각들이 불안하다.
얼른 종이에 찰싹 들러붙지 못해 우와좌왕한다.
쓰는 데 중독된 손가락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공연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으로 수첩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손가락들
다섯 가닥으로 갈라지고 마디가 있는
포클레인처럼 한 방향으로만 굽어지는
버스 손잡이든 신문이든 쥐고서
흙과 돌을 잔뜩 움켜쥔 뿌리를 흉내 내고 있는
꽃과 잎을 잔뜩 매단 나뭇가지를 흉내 내고 있는
잇몸에서 돋은 이빨처럼 무엇이든 곧 물 준비가 되어 있는
손가락들
겨울나무처럼 이파리 하나 없이 비어 있는 동안
손가락은 볼펜심처럼 단단하고 뾰족하다.
무언가 쓰려는 듯 올라와서
허공에서 어디로 갈까 멈칫거리다
하릴없이 머리를 긁고 또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코를 만지작거리고 콧구멍을 더 깊이 후비고
손톱
김기택
방금 전에 분명히 깎은 것 같은데
손톱이 벌써 길게 자라 있다.
그동안 잘라냈던 자리를 다 밀어내고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초침 지나간 자리처럼 빈틈이 없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눈금이 새겨져 있다.
잘라낸 손톱 길이만큼 딸아이가 자라 있다.
딸아이가 보는 동안에도
손톱은 딸아이 키만큼 또 자라고 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손톱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다.
손톱 자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나는 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신호등마다 정류장마다 서는 답답한 속도에 화를 내며
택시로 갈아탄다.
손톱 자라는 속도를 먹여 살리느라
출근하고 침 튀기며 말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웃음을 다하여 전화를 한다.
이 정도면 꽤 헐떡거리며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달력을 넘기자마자
또 한껏 자라있는 손톱이 보인다.
전에 깎아낸 길이보다 더 길게 자라 있다.
한 번도 안 깎은 것처럼 자라 있다.
할퀼 것도 없는데 긴 날을 세우고 있다.
잠깐 전화 받고 나서 보면 그 자리에 또 있다.
거울 안에서도 자라 있고
양말을 벗을 때마다 발가락에도 자라 있고
아침에 눈 뜨면 해처럼 둥글게 솟아있다.
세수하다 손톱을 보고 내 입은 또 쩍 벌어진다.
아이쿠, 또 늦었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송충이
김기택
아삭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푸른 빛 속에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 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수다 예찬
김기택
말은 그의 삶에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주었던가
이제 그의 몸은 악기가 되었고 그의 말은 음악이 되었다
그가 말을 연주할 때
혀와 이와 입술은 얼마나 정교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던지
파리 구엄 같은 코는 얼마나 정확하게 바람을 조절하던지
배는 큰북처럼 얼마나 정확하게 바람을 조절하던지
그 좁고 어두운 입 안에서도
발음과 억양은 지느러미처럼 날렵하고 경쾌하게 헤엄쳤다
혀가 얼마나 힘차게 꼬리를 차며 물을 튀기던지
연달아 내 얼굴에 침이 튀곤 하였다
숨 쉴 겨를도 없이 말들이 쏟아져나왔으나
어느 발음도 이에 깨물리거나 혀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말이 말처럼 달리면 사방에서 숨이 막히도록
깔깔거리는 소리들이 바람과 흙먼지 되어 일어났고
그 웃음소리가 채찍이 되어 말의 가속도는 늘어났다
갈수록 말은 제 흥에 겨워 점점 더 힘이 붙었고
말의 장단에 박자를 맞추느라 몸은 잠시도 쉼 틈이 없었다
즉흥환상곡 악보인 그이 표정에서는
매 순간 연주될 음악이 현재 진행형으로 그려졌고
음악에 심취한 두 팔은 지휘봉처럼 격렬하게 떨었으며
두 발은 피아노 페달을 밟듯 연신 바닥을 두드렸다
오줌이 마려워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그는
잠깐 말을 그치고 얼른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은 듯했으나
제 속도에 취한 말들은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갔다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많은 말이 들어 있는
커다란 소리통을 몸으로 갖고 있으니
이미 말들은 소리통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으니
수압
김기택
비어 있는 것 같은 횟집 수조 안에
얼룩덜룩한 바닥이 있다
우글거리는 게 있다
누르는 게 없는데도 눌리는 게 있다
밀대로 미는 듯 얇게 펴지는 게 있다
납작한데도 더 납작해지느라
가장자리에서 지느러미가 비어져 나온다
빛바늘 퍼져나가듯
등뼈에서 가는 가시들이 갈라져 나온다
비닐처럼 얇은 숨통이
어디선가 들썩거리고 있을 것이다
먹자마자 압착되는 먹이가
납작한 내장으로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뜰채가 수조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바닥에 두 구멍이 뚫리더니
압력의 반동으로
제 몸에 쟁여둔 모든 압력의 반동으로
불뚝 눈알이 튀어나온다
공기 방울이 거세게 부글거린다
바닥에서 바닥이 우두둑 뜯겨 나온다
뜰채로 뜨면 도다리가 된다고 한다
광어도 되고 가자미도 된다고 한다
수화(手話)
김기택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였다.
때로 그들은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봐 가끔 움찔하였다.
고성이 오갈 때에는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해달라고 할까봐
가끔은 눈치가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고
이따금 손바람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쉰 살
김기택
흐려지고 탁해진 눈동자가
머리카락에서 검은 진액을 빨아드리고 있다
눈썹과 수염에서 검은 윤기를 빨아 마시고 있다
눈이 소문과 댓글과 뒷담화를 속속들이 꿰뚫는 동안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고 있다
눈알이 문을 뚫고 옷을 뚫고
은유와 반어와 풍자와 생략으로 겹겹이 꼬인 말을 뚫고
귓속에 숨은 귓속말을 잡아내는 동안
속살에 가려진 속살을 들춰내는 동안
비듬이 퍼석퍼석 떨어지고 있다
눈치가 표정과 웃음과 농담에 감춰진 온갖 사건들을
마구 파헤치는 동안
피부는 주름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사타구니는 시들고 음모는 더 오그라들고 있다
눈꺼풀이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감아도
눈알의 발기는 풀리지 않는다
슬픈 얼굴
김기택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웃음을 당장 패대기칠 수도 있었지만
슬픔은 그가 더 호탕하게 웃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잘대는 주둥이 깊숙이 주먹 같은 울음을 처박을 수도 있었지만
침이 즐겁게 튀는 말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웃음과 수다에 맞추어 목과 이마의 핏줄이 굵어질 때마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게 보였다.
웃다가 조금이라도 표정이 일그러지면
아무리 환하게 웃어도 좀처럼 다시 펴지지 않았고
웃음이 고음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떨리면
기다렸다는 듯 즉시 울음소리로 바뀌려 하였다.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슬픔이 들킬까봐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었다.
웃음과 수다가 갑자기 그칠까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신생아
김기택
1
저 혼자 열심히 바둥거리며 움직이는
아기의 작은 팔다리를 보니
아무래도 땅 위의 것 같지가 않다.
저 움직임은 무중력 속에서 살았었거나
바다 같은 중력을 타고 다니다 왔으리라.
양수가 출렁거리는 둥근 우주,
그 먼 곳에서 이 땅 위로 내려왔지만
아기는 아직도 여기가 땅인 줄 모르는 모양이다.
제 하늘에서 떠다니다 문득 딱딱한 방바닥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때대로 아기는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세상 밖 어딘가를 보고 있다.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여전히 몸이 생기기 전의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제 몸이 없는 줄 알고
크고 아득한 표정을 만들어
아기는 저 혼자 가만히 웃음 짓는다.
그러다 갑자기 제가 몸속에 들어 있는 것을 느끼고는
금방 사람의 얼굴이 되어 또 울음을 터뜨린다.
2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
3
아기의 맑은 울음소리
시냇물 소리로 듣는다
바람 소리로 듣는다
어두운 귀 열어
그 원시림을 한껏 들이쉬니
사각의 아파트 실내가 문득
깊어지고 울창해진다
신선횟집
김기택
사흘 전에 죽어 있던 큰 민어가
아직도 수조 안에서 뒤집어진 채 떠다니고 있습니다.
죽도록 팔리지 않은 민어도 끈질기지만
죽도록 사먹지 않은 손님들도 그 못지않게 끈질깁니다.
끝까지 사먹지 않는다면
맵고 짠 국물에다 푹 끓여 내놓을 생각으로
그대로 놔두는 횟집 주인은 며칠 더 끈질길 예정입니다.
이래도 안 사먹을지 어디 두고 보자고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민어는 눈깔을 허옇게 뒤집고 주둥이를 컴컴하게 벌리고 있습니다.
안 팔리는 민어, 안 오는 손님, 하품하는 주인 앞에서
짓이겨진 파리가 말라붙은 파리채는
별일 없다는 듯 식탁 위에 한가하게 놓여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
김기택
울음이 입을 열 때마다
엄마가 동그랗게 새겨지는 입술
엄에 닫혔다가 마에 열려서
울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말 엄마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 울음과 함께 태어난 말 엄마
첫울음에서 나온 첫말 엄마
입보다 먼저 울음이 배운 말 엄마
아무리 크게 울어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는 말 엄마
울음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엄마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다
엄마 찾는 길을 아는 것 같다
지치지 않고 나오는 울음을 다 뒤져서
나기 전부터 제 몸에 새겨진
엄마를 찾아내는 것 같다
울음이 몸을 다 차지하면
아기는 노래하며 노는 것 같다
엄마 심장 소리를 타고 노는 것 같다
우는 동안은 신났다가도
울음이 그치면 아기는 시무룩해지고
엄마라는 말만 입술에 덩그러니 남는다
울음이 더 남아 있다고
딸국질이 자꾸 목구멍을 들이받는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김기택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저랗게 달게 자고 나니, 하룻밤에 이 세상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눈알들은 아침을 보고 잠시 휘둥그레지고 어리둥절해진다. 전생이 기억날 듯 말 듯 모든 것이 아주 낯선 모양이다. 그러다가 아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금방 친해져서 온몸으로 그 즐거움을 참지 못한다.
아기 앞에서
김기택
아직 제가 태어나자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릎 꿇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얼굴로 가서 입 벌리고 멍해진다
아기 재우기
김기택
얼른 재우고
딴짓하고 싶은 마음에
안고 업고 자장가 불러
겨우 아기를 눕힌다.
드디어 자는구나 싶어
조심조심 일어나 나가려는데
호랑이 눈처럼 떠지는 아기 눈.
포효하는 울음소리.
놀라 허둥지둥 달려와
한참 등 토닥거리다가
이젠 정말 잠들었구나 싶어
고양이 걸음으로 나와
살살 문을 닫으려는데
네 이놈! 어딜 가는고!
호통치는 울음소리.
어이쿠 큰스님 한분이
들어앉아 계셨구나.
머리 긁으며 냉큼 달려와
다시 아기 등을 두드린다.
아버지
김기택
아이들은 투명하고 맑았다 깨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큰 발 잔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었으나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아이들은 금이 갔고 거기서 자주 울음이 새어나왔다
소를 쓰러뜨려 뻘건 고기를 만들던 큰 손으로 그는 아이들 눈물을 닦아주었다
뻣뻣한 털에 긁혀도 상처나는 흰 얼굴에서 조금씩 슬픈 표정들이 지워졌다 그의 목구멍으로 잠시 소 울음 같은 바람이 지나갔으나 그는 표정 없이 울었다
다만 머리카락과 콧구멍을 잡아당길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머리를 숙였고 짜증 내고 투정하는 소리가 들어오도록 귀를 열었다
때로 깨끗하고 낭랑한 웃음 소리가 햇빛에 부서져 멀리 퍼져나가기도 했으나 곧 날씨가 흐려졌고 아이들은 잔물결이 되어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찰랑거리는 물결이 갑자기 파도처럼 소리 내며 일어나지 않도록 그는 조심스럽게 숨을 쉬었다
물에 떠 있는 것처럼 기우뚱거리는 그의 걸음에 아이들은 찰싹찰싹 부딪혀왔다 떨어지곤 하였다
아이들 손을 잡을 때마다 딱딱해지고 무거워지는 아버지 자꾸자꾸 커져서 벽이 되고 지붕이 되는 아버지
아이는 아직도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김기택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못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눈빛은 이젠 밥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침과 코, 오줌과 똥을 만들기 위해
생명은 살과 피를 짜내고 골수를 캐내고 있다.
손톱과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도록
눈알을, 혀를, 뇌수를 마지막까지 빨아들이고 있다.
생명이 뼈만 남기고 온몸을 다 파먹은 대가로
아이는 여전히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파리떼가 배 위에서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가라앉도록
큰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고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들어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야근
김기택
퇴근 시간에 긴급 업무 지시가 내려와서
오늘도 해는 서쪽에서 뜨고
퇴근은 출근이 된다
앉는 것이 노동이다
한가하게 땀 흘리며 뛰어다닐 틈이 없다
눈알과 손가락만 움직이는 몸무게가
의자 장딴지에 근육을 키운다
모니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눈알이 조금 더 돌출된다
졸아도 모니터가 훤히 보여서
눈이 감겨도 숫자들이 목표에 꽉 매달려서
손가락은 자판 위를 계속 달린다
엉덩이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
모니터로 골인하는 거북목
인체 일체형 PC 안에서
목표를 부수며 치솟는 시뮬레이션 그래프
망막에서 그래프가 찢어지는 순간
눈알에서 실핏줄이 터진다
야생
김기택
환하고 넓은 뒷골목에
갈라지면서 점점 좁아지는 골목에
어둠과 틈과 엄폐물이 풍부한 곳에
고양이는 있다.
좁을수록 호기심이 일어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어서 더 들어가고 싶은 틈에
고양이는 있다.
막 액체가 되려는 탄력과 유연성이 있다.
웅크리면 바로 어둠이 되는 곳에
소리만 있고 몸은 없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단단한 바닥이 꿈툴거리는 곳에
종이박스와 비닐 봉투가 솟아오르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작고 빠른 다리가 막 달아나려는 순간에
눈이 달린 어둠은 있다.
다리와 날개를 덮치는 발톱은 있다.
찢어진 쓰레기봉투와 악취 사이에
꿈지럭거림과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에
겁 많은 눈 더러운 발톱은 있다.
바퀴와 도로 사이
보이지 않는 속도와 틈새를 빠져나가려다
바퀴와 도로 사이
보이지 않는 속도의 틈새를 빠져나가려다
터지고 납작해지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양수리 여름밤
김기택
양수리 어느 시인의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글자들 사이에 자주 조그만 얼룩들이 생긴다.
얼룩이 점점 많아진다.
책에 모기 물린 자국이 가득하다.
글자들이 시원해지도록 책을 벅벅 긁어준다.
창마다 모기장이 있지만
모기장 보다 더 작은 날벌레들이
때론 모기장으로 들어오기엔 꽤 커 보이는 모기들이
손바닥에서 짓이겨지려고 달려든다.
팔뚝의 검은 반점이 자꾸 꾸물거리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내리쳤더니
그대로 살 속에 박혀 점이 되어버린다.
여름밤의 글자들은 책 속에 갇혀 있는 걸 싫어해
앵앵거리며 머리 주위를 어지럽게 맴돈다.
너무 작아서
몸뚱이와 날개와 다리가 구분되지 않는
그저 날아다니는 점일 뿐인
눌러 터뜨리면 바로 색즉시공이 되어버라는 날벌레들처럼
글자들은 빛에 땀 냄새에 살갗에 자꾸 붙는다.
모기 물린 자국이 많은 눈과 귀 속으로
한밤의 시냇물이 들어오기도 한다.
시냇물에서 놀고 있는 크고 작은 물굽이들이
물굽이 속에서 지저귀는 온갖 명랑한 소리들이 흘러 들어온다.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맑고 우렁찬
풀벌레 소리도 들어온다.
이 모든 소리들이 스며들어
날개와 다리와 목청이 움직이는 소리들이 남김없이 스며들어
풍성해진 침묵도 들어온다.
혼자 있는 시간이 보약이 되어
약이 잘 듣지 않는 내 몸속으로 쑥쑥 흡수된다.
시골 밤공기에 취해 나는 빈둥거리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나 대신 밤늦도록 책을 읽어주는
양수리 여름밤.
양철 낙엽
김기택
또 겨울.
나무 밑에 전봇대와 담벼락 주변에
몰려 있던 낙엽들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온다.
구두들에게 밟히고
타이어들이 밀어낸 바람에 날린다
아스팔트와 마찰할 때마다
속이 텅 빈 금속성 소리가
잎맥에서 새어 나온다.
오프너로 딴 날카로운 깡통뚜껑 자국이
잎 가장자리에 삐죽삐죽 나와 있다.
한때 양철에 그려져 있던
푸른 과실의 그림과 바람의 긴 글자들은
이미 붉은 녹이 되어 있다.
쓰레기와 뒤섞여
담을 오를 듯 홍게들처럼 우글거린다.
산성비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한다.
어둠도 자세히 보면 환하다
김기택
창문 하나 없던 낡은 월세 자취방.
한낮에도 어둠이 빠져나가지 못하던 방.
아침에 퇴근하여 햇빛을 받고 들어가면
직사광선이 일제히 꺾이어 흩어지던 방.
잠시 눈꺼풀에 낀 잔광도
눈을 깜빡거리면 바로 어둠이 되던 방.
퀴퀴하고 걸쭉한 어둠이 항상 고여 있던 방.
방에 들어서면 눈알이 어둠속에 깊이 박혀
이리저리 굴려도 잘 돌아가지 않던 방.
어둠이 보일 때까지
어둠속의 무수한 빛과 색깔이
내 눈을 발견할 때까지
오래오래 어둠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방.
자세히 보면 어둠도 환하게 보이던 방.
방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큰 숨을 들이쉬며
느릿느릿 어둠을 빨아들였다가
제 속에 든 빛을 오래오래 발산해주던 방.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서로 비춰주고 되비쳐주며
제 안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낮은 빛을
조금씩 끊임없이 나누던 방.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김기택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은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 위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뜸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
김기택
입에서 팔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연약한 떨림을 덮는 손이 나온다.
맘껏 뛰노는 벌판을
체온으로 품는 가슴이 나온다.
혀가 목구멍을 찾아내
살아 있다고 우는 울음을 핥는다.
혀가 눈을 찾아내
첫 세상을 보는 호기심을 핥는다.
혀가 다리를 찾아내
땅을 딛고 설 힘을 핥는다.
혀가 심장을 찾아내
뛰고 뒹구는 박동을 핥는다.
혀가 나오느라 꼬리가 길다.
혀가 나오느라 귀가 빳빳하다.
혀가 나오느라 발톱이 날카롭다.
어항 유리벽에 붙어 있는 낙지들아
김기택
젖 빠는 입처럼 작고 동그란 빨판들
주둥이를 들이대고 헛되이 유리벽을 빨고 있네
빨면 빨수록 유리벽은 더 세게 빨판들을 잡아당기네
말랑말랑하던 낙지다리 이제 바위처럼 딱딱하네
빨판에 더 힘을 주어라
횟집 어항 유리벽에 붙어 있는 낙지들아
빨판의 힘으로 저 먼 갯벌이 달려오도록
갯벌 속에서 오래오래 익은 짠물과 비린내의 단맛
빨판에 깊이깊이 스며들던 진흙의 공기
진흙의 바다 진흙의 하늘 미친 듯이 달려오도록
빨판의 힘으로 유리벽이 깨질 때까지
어항의 물이 사방으로 터져 쏟아질 때까지
유리 파편들이 물방울처럼 사납게 튀어나갈 때까지
그 사나운 파편들이 빨판으로 빨려들어올 때까지
파편의 칼날에 빨판들이 너덜너덜 찢길 때까지
흰 흙먼지 뒤집어쓴 너희들 거리에 굴러다닐 때까지
얼굴
김기택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낸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기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커다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얼룩
김기택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얼음 속의 밀림
김기택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 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절망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법(法)과 도(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본다
청정한 법(法)과 도(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여름밤
김기택
1
바람 들어오라고 창문을 열어 놨는데
매미 우는 소리가 들어온다
개 짖는 소리가 들어온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어온다
매미 우는 소리에는 날개가 달렸다
개 짖는 소리에는 이빨이 달렸다
아이 우는 소리에는 콧물이 달렸다
바람이 데리고 들어온 것들이다
바람 타고 날아다니는 것들이다
2
바늘구멍만큼 깨어난 잠이
모기 소리를 따라가네
모기 소리 바늘구멍보다 가늘어
보이지 않네 잡히지 않네
칭칭 꿈을 감아 공처럼 커진 잠
누에처럼 숨어 보이지 않는 잠
아직도 모기 소리 찾으러 나오네
감긴 실 따라 돌며돌며 나오네
3
어둠은 점, 점, 이, 온다
밝은 유리 하늘에 한 점 한 점씩
파리처럼 내려와 앉는다
까만 점들은 점점 촘촘해져서 이윽고
이 어둠을 팔을 휘저어 날리고 싶다
일제히 수천수만의 파리 떼들은 흩어지고
밝은 하늘이 나타나리라 그러나
어둠은 거미줄 같아 다만 팔에 휘감길 뿐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어두워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다
눈으로 입으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로
어둠은 스며들어 가려움이 된다
소리만 남은 날개들이 긁는 소리를 타고 다니며
가려운 곳마다 앵앵거린다
어느 별이든 떠서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걸
알게 해다오 어느 바람이든 불어서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해다오
여탕에서 목욕하기
김기택
탕으로 들어가려는데 주인이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쪽은 남탕이 아니라, 내부수리를 해서
남탕은 여탕이 되고 여탕은 남탕이 되었다고,
나는 아랫도리를 가리며
다 벗은 여자들의 목소리와 공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남탕으로 들어간다.
탈의실의 조명과 화분, 거울과 액자가 놀란 듯
막 팬티를 까고 나오는 내 아랫도리를 흘끔거린다.
여자옷만 받던 탈의실 옷장의 눈치를 보며
속옷을 슬쩍 밀어 넣는다.
아직 남탕으로 바뀌었는지 모르는 샤워기로 가서
마구 물만 끼얹는다.
가슴에서 둥글고 탄력 있게 튀어 오르려던 물줄기가
거침없이 가슴 절벽 밑으로 떨어지다가
아랫도리에 턱, 걸리자
거울이 깜짝 놀란다.
여탕을 남탕으로 바꾸면서
여자들 몸이 각인된 거울은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내부수리를 해도 여탕은 여탕인데
벗은 남자들 비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거울을
그대로 둔 채
벌거벗은 아랫도리들만 바꿔 놓은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웅성거리고 깔깔거리는 소리들은 이미 남탕인데
열탕에서 부글부글 솟구치는 물줄기는 아직 여탕이다.
나는 자꾸 물을 끼얹어
아직도 쑥스러운 내 피부에 여탕을 덮어씌운다.
안 보는 척 낱낱이 쳐다보는
엉큼한 거울과 타일의 시선으로 남성의 체면을 단련시킨다.
털 달린 살갗을 덜렁덜렁 입고 보란 듯이 다니니
정말 여기가 남탕인 것 같다.
연필
김기택
떨어진 연필이 굴러간다
뱀처럼 벌레처럼
제 기럭지를 구부렸다 펴면서 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굴러서만 간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고 있다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여과시켜서
나무는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낸다
뾰족해진 연필심도 덩달아 뭉턱해진다
도망가는 연필을 잡자마자
다리는 연필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이 연필을 꽉 쥘 때
흰 종이 밑으로 지층이 깊어질 때
짧고 힘찬 진동이 연필 속에서 버둥거린다
걷다가 머뭇거리다 멈추다
종이가 패이도록 달린 발자국이 남는다
열대야
김기택
트럭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트럭은 굵고 짧고 느리다.
반경 수백 미터 이내의 허공에 가득 찬 소음이 몰려와
한없이 느린 트럭을 밀어내고 있다.
소음이 아무리 악쓰며 밀어도 트럭은 빨라지지 않는다.
더 많은 소음이 몰려오고 트럭은 더 느리게 올라간다
소음을 견디기 위해 아파트들은 모두 콘크리트이고 사각이다.
더위를 피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돛자리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거대한 아파트는 언덕에 붙은 트럭 소리를
고목에 붙은 매미 울음 소리로 듣고 있다.
여름 밤은 깊어가고 잠은 오지 않고
트럭도 이 밤 내내 저 언덕을 다 올라가지 못할 것 같다.
여름이 다 가고 나면
소음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매미의 허물이 남게 될것 같다.
오늘의 특선 요리
김기택
높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후에 구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차갑고 맑은 시간에 터져 나오는 새벽닭의 힘찬 울음만을 엄선하여 바삭바삭하게 튀겼습니다.
시속 111킬로미터로 달리는 치타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탄력만 가려내 담백하게 고았습니다.
발톱과 이빨이 간지러워 우는 고양이의 갓난아기 울음에서 애절한 눈빛만 솎아내 고소하게 볶았습니다.
수천 미터 밖 물살의 힘과 방향을 읽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푹 끓여 고감도 감각만을 진하게 우려냈습니다.
두근거리는 토끼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 있는 그대로 발라내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주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개 꼬리에서 명랑하게 들뛰는 유전자만을 갈아 즙을 냈습니다.
씹지 않아도 녹아서 핏줄로 전율하며 스며드는 육질과 육즙의 싱싱한 발버둥만을 양념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할 일
김기택
가만히 앉아 숨쉬기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구리고 비린 나를 들이마시기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
생긴 대로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이 되기
머리통에 피가 몰리는 기억을 꺼내 터진 뇌혈관 다시 터뜨리기
단단한 벽으로 된 입과 귀에다 깨지기 쉬운 간절한 말을 쑤셔 넣기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녹여 나에게로만 들리는 진한 한숨으로 바꾸기
숨구멍 막는 끈끈한 가래 같은 숨을 조심조심 뚫어가며 숨쉬기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
고삐를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안오는 잠을 강제로 자기
오래된 고독
김기택
쓰다듬기 좋은 흰 털 속에
손바닥에 알맞게 들어오는 야구공만 한 머리통이 있다.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강아지는 꼬리를 흔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 귀여움에 깜빡 죽어
만지고 안고 비비고 뽀뽀한다.
푸들이라고 한다. 한 달여 전에 분양받았다고 한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어린애지만
이 강아지를 고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할 말이 있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쳐다보는 눈을 보니
그 속에 아직 강아지가 된 걸 모르는 한 전생前生이 있는 것 같다.
복슬복슬한 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당신.
깨물어도 간지럽기만 한 작은 이빨에 갇혀,
눈과 코와 귀에 갇혀, 장난감 같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갇혀
보이지 않는 당신.
움직이는 것, 체온 있는 것, 살 냄새나는 것, 소리 내는 것만 보면
팔짝팔짝 뛰며 달려들고 깨물고 핥는 당신.
오랫동안 허물없이 함께 지내왔다는 듯
빨간 리본을 달고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달려오는 당신.
왜 그 어린 고독 속에 들어가 있나요.
옛날에 갇혔던 늙고 정든 고독은 어디에 있나요.
멍멍 짖는 소리 안에 말과 울음을 모두 가두고 있는 당신.
오래된 땅
김기택
살갗 밑으로 푸른 뿌리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목에서 이마로
가지 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거죽 밖으로 나오려는 굵은 뿌리를
살가죽이 간신히 누르며 덮은 곳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알도 붉은 잔뿌리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살도 오래된 땅이라는 듯
비바람에 패이고 그 주름고랑으로 땀 흘러내리고
그 위로 들풀 같은 털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살은 안에 감추고
거죽은 황야처럼 한껏 질겨지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받았다가 밀어내는 흙길처럼
손바닥 닿는 자리에 두툼한 주름살이 만져집니다
쭈글쭈글하다는 건
살가죽과 속살 사이에 팽팽하던 공기가 빠지고
그 자리에 허공이 가득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오지 않은 슬픔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김기택
급히,
멈춘 전동 휠체어가
갑자기 나타난 계단 내리막길을 굽어보고 있다
어떻게 내려갈까
눈과 목이
계단과 휠체어 바퀴를 번갈아 살펴보고 있다
내려갈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심장은 엉덩이에서 쿵쾅쿵쾅 흔들린다
아직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머리통과 팔다리는 벌써 굴러가다 넘어지고 있다
계단 모서리에서 미리 튕겨 나간 숨소리는
불규칙한 직각이다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내려가는 발이 보이는
평범한 계단 길
둥근
발바닥이 굴러 내려가려 하면
경사는 가팔라지고 직각은 날카로워지는
울툭불툭 계단 길
계단 지름길을 앞에 두고 되돌아가는 동안
바퀴 소리가
통, 통, 통,
가보지 못한 길을 저 홀로 내려가고 있다
계단 길을 내려다보는 눈은 그 자리에 두고
돌고 돌아서 온
평탄한 길
고르지 못한 노면이 가끔 심장을 툭, 툭, 친다
오토바이와 개
김기택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 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 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 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부챗살처럼 늘어난다.
사정없이 목을 잡아당기는 개줄에 저항하면
네 다리는 갑자기 하나가 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며 아스팔트에 끌린다.
아무리 달려도 서 있을 때처럼 조용한 바퀴 옆에서
심장과 허파를 다해 헐떡거리는 다리.
오토바이 굉음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헐떡거림.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종종거려도
도저히 둥글어지지 않는 네 개의 막대기.
느슨해지자마자 팽팽해지는 개줄.
왜 그러나 했더니
김기택
갑자기 미간이 찌푸려지기에
왜 그러나 둘러보니
승객들을 헤치고 동전 바구니를 앞세운 찬송가가 오고 있다
뜬금없이 동작이 멈춰지기에
왜 그러나 살펴보니
모든 동작 그만이 하의 실종 여자 다리를 쳐다보고 있다
뒤뚱뒤뚱 달려온 할머니 앞에서 전동차 문이 닫히자
손이 자동으로 문틈에 지팡이를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물질이 낀 채로 전동차는 출발하고
전동차 안 승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끌려가면서도 할머니는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다고 한다
으스러지고 터지는데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삼만 원밖에 없어서 지갑을 돌려주려 했지만
이미 지갑의 주인을 죽여서 어쩔 수 없이 챙겼다고 한다
문에 걸리고 자꾸 어깨들과 부딪치기에
왜 그러나 돌아보니
자동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내가 나가고 있다
지하철역 변기 앞에 서자마자
십여 미터 전부터 헐레벌떡 열어둔 지퍼에서
억지로 내려도 조금 덜 열리는 지퍼에서 오줌이 터진다
찌게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공깃밥이 반이 없어지고 김치 그릇은 비어 있다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김기택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할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번개의 뿌리처럼 전율하며 끝없이 갈라지는 길은
괴팍하고 모난 돌멩이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너의 길은
길을 막고 버티는 바위를 휘감다가 끝내 바위가 되기도 하는 너의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몰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 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꽃들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몸으로 꽃처럼 많이도 임신한 너의 자궁은
불룩한 배를 가지마다 매달아놓고 무겁게 흔들리는 너의 자궁은
이빨 가진 입들을 빌려 자궁을 부숴버려야 밖으로 나오는 너의 씨앗들은
땅에 붙박인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살아도 죽어 있는 것만 같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지나온 네 몸이 발산하는 침묵은
발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
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
김기택
빈틈마다 발 하나라도 더 집어넣기 위해
밀고 밀리고 비비틀고 움츠린 끝에
사람들은 모두 사각기둥이 되어 있다.
승객들을 벽돌처럼 맞추어 빈틈을 없애버린
놀라워라, 전동차의 저 완벽한 적재효율!
전동차가 급정거하자 앞쪽으로 사람들이 기운다.
사각기둥들은 일제히 흐트러지며 찌그러지고
그동안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던 비명들이
찌그러진 사각기둥에서 일제히 터져나온다.
영자야엄마나여기있
어밑에아기가깔렸어
요숨막혀내핸드백내
구두나좀내리게그만
밀어어딜만져이짐승
쌍년아야귀찢어져손
가락에귀걸이걸렸어
어딜자꾸만주물러소
새끼침튀겨개년말새
드디어 전동차 문이 폭발하듯 열리고
파편처럼 승객들이 퉁겨나간다.
승객들이 미쳐 다 밀려나기도 전에
한떼의 승객들이 또 밀려들어온다.
빈틈, 퉁겨져나간 사람들 뒤에 생긴
저 좁디좁은 빈틈을 향하여
머리와 팔다리와 구두들이 밀려온다.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벽도 온몸으로 부딪쳐 밀면
발자국 하나 디딜 공간이 나온다는 것을
노련한 승객들은 잘 알고 있다.
차곡차곡 구겨넣어진 사람들을 한번 더 누르며
전동차 문이 있는 힘을 다해 닫힌다.
전동차가 출발한 다음에도 비명과 신음이
찌그러진 사각기둥마다 새어나오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정사각기둥을 되찾아가고
몸 비틀 때마다 벌어지던 빈틈도 모조리 메워버린다.
빠르고 정확하다, 우리나라 승객들의
자동화된 저 순발력!
비명과 짜증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찌그러졌던 사각기둥들은 어느새 반듯하게 펴지고
사람들은 다시 질서정연하고 고요해진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김기택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제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잃어버려졌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제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 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은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우주인
김기택
1
허공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허공에서 허우적 발을 빼며 걷지만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기댈 무게가 없다는 것은
걸어온 만큼의 거리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나는 여러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引力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자국 발자국이 보고 싶다
뒤꿈치에서 퉁겨오르는
발걸음의 힘찬 울림을 듣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고 삐뚤삐뚤한 길이 보고 싶다
2
몸무게 없는 몸으로 그는 검푸른 창공에 홀로 떠 있습니다. 깊디깊은 공기에 익사하여 온통 부력만 남은 무중력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펼쳐진 광활한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 놀란 입을 벌리고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는 공포는 아직도 우주선에서 조난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혼과 천연방부제가 배합한 우주 공기는 오래 묵은 미라를 칭칭 감아 하늘 높이 별처럼 띄워 놓고 있습니다.
울다 깨다
김기택
잠에서 깨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꿈은 깨지 않은 채
잠만 깨어 울고 있었다.
가지가 불인 나무가
아직도 내 내장에 뿌리를 뻗고
두개골을 달구며
활활 자라고 있었다.
빨갛게 달궈진
잔가지들과 실뿌리들 때문에
내 모든 실핏줄들은
몹시 따갑고 간지러웠다.
잠에서 깨자마자
내 눈을 뚫고 나온 가지 하나는
아침 공기에 닿자마자 녹아
뺨이 벌겋게 데이도록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우는지 기억나지 않는데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유리에게
김기택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지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유리창의 송충이
김기택
유리창에 송충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아파트 10층 창문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송충이가 기어 온 긴 높이를 생각해 본다
오를수록 더 높아지는 높이
아무리 힘차게 꾸물거리며 기어도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온몸이 허리로 된 송충이는 그래도
부지런히 뒤 허리로 앞 허리를 밀어 올린다
허리 밑 다닥다닥 점 같은 다리들이
유리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흰 갈대잎 같은 털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몸도 털이 휘어지는 방향으로 기우뚱거린다
습관의 힘이 아니었다면
송충이는 벌써 10층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져도 부러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다 갑자기 허리 걸음을 멈추고
송충이는 허리로 된 머리를 높이 들어
여기저기 허공을 한참 더듬는다
이 나무는 가도 가도 거대한 평면 사각뿐이다
이파리 하나도 없이 어떻게 광합성 하나
아무래도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늘였다가
깊은 주름이 생기도록 줄이면서
송충이는 11층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유전하는 밤
김기택
자신에게 포위되어 자신을 겨누는 날
누군들 자신을 해치고 싶겠는가
그리운 먼 곳 저편 어디인지 몰라 아득할지라도
젖을 빨 때부터 눈엔 별이 반짝였던 것을
아파트에 서는 칠일장, 달걀이며 시금치며 두부를 파는
노인이 생각나는 겨울. 뺨을 보자기로 감싼 채
지나는 이를 애타게 올려보던 눈빛이며
다리를 저는 아들이며 골판지를 깔고 먹는 찬밥이며
누군들 누군들 따뜻한 뺨을 부비며
어미로부터 멀어지려 하겠는가
노인의 죽은 어미가 우는 밤
그 울음 끝에 노인 홀로 우는 밤
자신에게 포위되어 자신을 겨누다가
자신을 부둥켜안고 가위눌리는 비명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온 인생 몇 권 소설로 옮겨 적는 밤
은행들
김기택
발 디딜 틈이 없다
길바닥은 바글바글하고 발바닥은 물컹물컹하다
달리는 바퀴에 터지고 뭉개져 도로가 끈적끈적해지지만
지나가는 발에 밟혀 보도블록이 지저분해지지만
가지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어
다 익은 은행들은 막무가내로 떨어진다
행인들 눈치도 보지 않고 마구 구린내를 풍긴다
사내 하나가 똥 밟은 표정으로
풀밭에 구두 바닥을 맹렬하게 문대고 있다
비가 오고 은행과 낙엽이 썩어 문드러져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은 도저히 비옥해지지 않는다
아무도 따지 않는데 줍지 않는데
무작정 다닥다닥 열리기만 해서 은행은 귀찮아진다
바람 불 때마다 떨어져서 낙엽은 귀찮아진다
시원한 파도 소리를 내며 출렁거리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서 나무들은 쓸데없이 푸르다
양산을 쓰고 썬크림을 발라도
얼굴이 타서 피부가 거칠어져서 햇빛은 골칫거리가 된다
쓸어 한 곳에 모아놓은 쓰레기를 흩트러버려서
잘 빗은 머리를 헝클어놔서 바람은 성가시기만 하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아서
노숙자들은 지하철역에 무료급식소에 모이고
쓰레기는 어두운 곳 눈 잘 띄지 않는 곳마다 쌓이고
은행들은 자꾸 떨어지고 걸음은 귀찮아진다
인공 눈물
김기택
울음을 한 통 샀다 작은 플라스틱 통 안에
아직 울지 않은 울음이 들어 있다
마음이 울지 않아도
눈은 우는 울음이 가득 들어 있다
눈알이 잘 돌아가려면
눈알을 빠르게 굴려 눈치를 잘 보려면
그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먼저 그를 피하려면
눈알에 힘주느라 이마와 눈가에 주름 생기는 걸 막으려면
눈물로 눈알에 기름칠해야 한다고 한다
제가 우는지 저도 모르는 울음
너무 깊이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 울음
막는 힘이 밀어내는 힘을 이길 수 없는 울음 대신에
눈물을 넣는다 울 일 없는 눈에 넣는다
눈물이 있는 동안은 눈알이 시원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슬픔으로 닦지 않았는데도 시원하다
인수봉
김기택
바위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다.
속도는 거대한 절벽이 되어
허공에 영원히 정지해 있다.
한순간도 낙차의 힘을 놓치지 않는
오랜 결빙의 힘이
그 빙하 같은 봉우리를 지키고 있다.
까마득한 봉우리 아래
돌의 폭포가 내리꽂히는 곳에서는
나무들이 물보라처럼 일어나고 있다.
무수한 나뭇잎들이 물방울처럼
공중으로 튀어올랐다가
푸른 물굽이가 되어 산을 온통 뒤덮으며
숲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잎새들
김기택
푸른 새들이 가지마다 가득 앉아 있었다.
한 마리도 지저귀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개를 펴
격렬하게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뒤집혀진 날개들이 떨며
세차게 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무들을 하늘로 들어올리려는 듯
날갯짓은 나뭇가지들을 끈질기게 잡아당겼고
새들을 한꺼번에 떨어뜨리려는 듯
나뭇가지들은 온몸을 사방으로 흔들며 뒤틀었다.
날개 상한 새 몇 마리가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였다.
나무들이 들어올려질 듯 들썩거리는 바람에
산은 출렁거리다가 여러 차례 기우뚱하였다.
날갯짓은 힘차고 가벼웠지만
어느 새도 가지를 박차고 날아가지 않았다.
모든 날개 아래에는 가는 다리들이
나무에 붙박인 채 떨고 있었다.
자가격리
김기택
거리는 행인들이 없어 썰렁했으나
숨 쉴 때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날숨은 사람들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들숨으로 사람들이 노크도 없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날숨은 들숨을 눈치 보고 들숨은 날숨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말들은 목소리가 아니라 침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귀가 아니라 코로 들려오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밀착된 적이 있었나?
내 숨이 이렇게 많은 숨과 연결된 적이 있었나?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에 묻은 사람들을 씻어냈다.
반갑다고 손을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강제로 밀쳐내고 떼어내느라 꽤 오래 걸렀다.
한 지인이 코로나19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와 접촉하여
자가격리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리 둘러봐도 말과 손과 숨을 둘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도 저절로 자가격리 되었다.
허파도 심장도 생각도 따라서 자가격리 되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 때에도 늘 혼자였기에
자가격리는 맞춘 듯 내 몸에 잘 맞아서
방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는 더없이 좋았으나
아무리 집중해서 읽으려 해도
눈이 글자에만 머물고 문장 속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따라 눈이 나한테 왜 이러나 했더니
아까부터 머리통 속에서
생각만으로도 감염되는 신종 바이러스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
김기택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 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이 솟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그 연료가 타는 힘으로 당신의 다리는 굴러간다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 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투명한 콧김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어지는 당신의 등뼈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김기택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지만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이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 봉투를 뒤지고 있엇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 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긴 제 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동안 멀어져갔다
저녁 6시 반, 헐렁헐렁하고 쭈글쭈글한
김기택
저녁 6시 반, 햇빛에 단풍 든다. 직사광선을 찍어 내리던 한낮의 해는 순하고 붉은빛으로 저녁을 채우고 있다. 햇빛은 이제 내 눈을 찌르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져준다. 검고 무겁던 구름들은 빈 가죽 부대처럼 한껏 헐렁해지고 가벼워져서 붉은 노을을 가득 받으며 느릿느릿 떠다닌다.
짧고 팽팽하던 그림자들은 점점 늘어져 흐물흐물해진다. 나무 그림자 하나가 옆 나무에게 어깨를 기댄다. 옆 나무 그림자도 그 옆 나무에게 어깨를 기댄다. 그 옆 나무 그림자는 옆집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아예 머리를 들이민다. 그 집 담장의 직각 모서리 그림자도 오랫동안 닳은 듯 두루뭉실하다.
내 손등 위에도 붉은 햇빛이 든다. 주름들은 깊은 놈이나 얕은 놈이나, 긴 놈이나 짧은 놈이나, 곧은 놈이나 구부러진 놈이나, 듬성한 놈이나 복잡하게 얽힌 놈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음껏 편하게 늘어져 있다. 땀구멍이며 털, 도드라진 핏줄, 좁쌀 점들은 나른한 주름에 싸여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다.
쏜살같은 하루, 날카롭고 첨예한 시간들이 잠시 쉬어 가는, 한없이 헐렁헐렁하고 쭈글쭈글한, 저녁 6시 반. 단풍 드는 햇빛.
전자레인지
김기택
불도 없는데
생선 비늘 들썩거린다
이글이글,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퍽,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들린다
은비늘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다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생선,
김과 열을 뿜는 흰 접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다
불도 없는데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이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성한 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절룩절룩
김기택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가 지나간다
머리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팔과 어깨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점퍼를 절룩거리며 지나간다
발자국도 절룩거리며 그를 따라간다
아무리 똑바로 걸어도 절룩거린다
다리는 조심조심 걷는데 온몸이 절룩거린다
절룩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더 절룩거린다
그 걸음을 보다가 내 눈이 절룩거린다
그 박자를 따라 내 심장이 절룩거린다
그 공기를 숨쉰 내 허파가 절룩거린다
절룩거리는 걸음이 지나가는 동안
좁은 골목길은 더 삐뚤삐뚤해진다
기운 전봇대가 좀더 기울고
헐거운 창문과 대문도 더 삐걱거린다
걸음은 벌써 지나갔는데
허름한 간판 하나가 아직도 바람에 절룩거린다
과일행상 리어카가 울퉁불퉁 지나간다
사과 하나가 툭 떨어져 절룩절룩 굴러간다
막 뛰어가던 아이 하나가 기우뚱하더니
땅바닥에 뺨 갈기듯 넘어진다
가방이 팽개쳐지고 필통과 연필이 절룩절룩 흩어진다
졸음
김기택
멍청하게 앉아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목은 힘주어 머리를 떠받치고 있다
졸음이 자꾸 목의 힘을 빼앗아가려 한다
한 순간 목은 긴장된 힘을 놓쳐 머리를 꺾고 만다
머리는 갑자기 무게가 된다
근엄하고 꼿꼿하게 서 있던 무게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처럼 인력의 법칙 속으로
들어간다
꾸벅 꺽어지는 무게를 목이 얼른 들어올린다
무게는 다시 머리가 되려고 눈을 깜박거리며
풀어진 수정체를 응축시며
창밖의 빠른 풍경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잠시 다시 수정체와 목뼈에서 힘을 빼려 한다
수정체와 목뼈는 서서히 눈과 머리를 놓아버린다
휘청거리는 한 덩어리의 둥근 무게
꾸벅, 옆사람을 밀고, 꾸벅, 의지 모서리에 부딪힐
때 마다
꾸우뻑,허공을 한바퀴 돌 때마다
놀라 고개를 흔들며 머리가 되는 무게
이제 무게는 아예 고개를 꺾은 채
가속도 속을 달리는 의자에 앉아
가속도로 달리는 잠 위에 편안하게 얹혀 있다
버스가 급정거하자 의자는 억센 힘으로 가속도를
잡아 당긴다
가속도를 잡아끄는 의자에서
가속도를 못 이긴 무게가 가볍게 떨어져 나간다
버스 바다닥에 굴러가는 슬픈 무게 한 덩어리
종유석
김기택
동굴 따라 꾸불꾸불 길게 누운 어둠 속에서
이 딱딱한 바위들도 한때는 흘러다녔구나.
어둠 구석구석을 꼬리치레 도롱뇽처럼 기어다녔구나.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고드름으로 수세미로 버섯으로
꽃으로 아이스크림으로 마음껏 녹았었던 움직임들은,
한번도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생각처럼
바위는 돌을 벗어나 유연하고도 자유로웠겠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형체가 되어
생각 속에 박힌 편견들처럼 튼튼해지고 말았구나
이제 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처럼 깨어질지언정
다시는 움직여 꽃이 되지 못하리라.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소리를 내며
퍼져 나가던 깊은 물은 그 물줄기들은
돌 속으로 들어가 돌과 섞이고 돌을 움직이더니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돌이 되었구나.
주정뱅이
김기택
그는 말이 없는 사내이다.
어젯밤엔 내내 취해 끓었으나 날이 밝은 지금은 식어 차갑고 조용하다.
그의 굳은 몸은 바위처럼 제 무게 속에 깊이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끙끙거리며 그는 억지로 몸을 잡아 일으켜세운다.
삐걱거리는 느린 몸을 힘들여 끌며 그는 하루 종일 자갈을 져나르고
철근을 잇고 물과 모래로 시멘트를 갠다......
그리고 저녁. 어두운 몸이 환해지는 저녁. 그는 술집으로 간다.
술이 들어가면 몸은 무게에서 풀려난다.
굳어 있던 말들은 녹기 시작한다.
자물통 같던 입도 풀려 열리고 식은 심장도 끓기 시작한다.
끓는 몸속에서 녹아나온 말들은 쉴새없이 입으로 올라간다.
말들은 억양의 힘찬 리듬을 타고 경쾌하게 나왔다가
꼬부라진 혀끝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서 병 목마다
귓구멍마다 붕붕거리고 잔마다 그릇마다 쩌렁쩌렁한
소리를 채운다. 말이 빠져나간 자리에다 그는 연신 술을 채운다.
찰랑찰랑 술이 넘치는 뚱뚱한 몸을 기우뚱거리며 그는 술집 문을 나선다.
비틀거릴 때마다, 출렁거리며 좌우로 쏠리는 힘에 박자를 맞추어 걸으며,
그는 노래부른다.
노래가 너무 기분에 취해 심하게 기우뚱거리자 그는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엎어진 술통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말들. 소새끼, 말새끼, 개새끼,
막노동판에서 평생 질통이나 지다 뒈질 놈...... 그는 자기를 넘어뜨린
자를 향해 고래고래 퍼붓는다.
몸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부글거리던 말들이 때를 만났다는 듯 한꺼번에
토사물로 쏟아져나온다.
한참을 쏟아내고도 다 꺼내지 못한 말을, 침과 토사물이 질질 흘리는 말을
거리에 흘리며 그는 비틀비틀 집으로 간다.
거의 다 끓은 그의 몸이 때절은 이불 위에 쿵! 하고 쓰러진다.
욕들은 아직도 열기가 남아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침을 튀기며 나온다.
크고 거친 소리는 중얼거림이 되고 그것도 몇번인가 끊기더니
이윽고 욕이 되다 만 상태에서 굳어진다.
그는 이내 잠이 든다.
말들은 제 몸무게에 눌려 이제 바위처럼 조용하다
죽은 사람
김기택
한껏 벌어져 다시는 다물지 못하는 입처럼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씹고 있는 음식물을 느닷없이 밀고 나온 토사물처럼
입에서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토사물처럼
옷들이 주르르 옷장 밖으로 엎질러져 있다
한 덩어리의 옷더미 속에 팔이 솓아나와 있다
다리가 여러 개 빠져나와 있다
누군가가 입고 있다는 단추를 꼭꼭 채우고 있다
황급히 몸이 빠져나간 자리에 목이 솓아났던 구멍이 있다
팔다리에 손발이 돋아났던 자리가 있다
숟가락을 물고 식은 죽처럼
먹다가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입을 기다리는 죽처럼
뭉개진 모양 그대로 굳는다
목에 팬티를 덮아쓴 채 굳는다
팔에서 양말이 돋아난 채 굳는다
팔다리와 목과 가랑이가 머리카락처럼 엉킨 채 굳는다
몸 없는 채로 몸의 기억을 끈질지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 굳는다
병원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늙은 개의 눈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킁킁거리며 찾는 코처럼
옷에는 하나같이 구멍이 뚫려 있다
제 안의 구겨진 어둠으로
구멍들이 황급히 빠져나간 목과 팔다리를 보고 있다
쥐
김기택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 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 당기는 냄새를 향햐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이 나아 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즐거운 버스
김기택
버스 운전사가 하품을 한다.
도로 한가운데를 막고 있던 절벽 하나가
덩달아 크게 하품을 하더니
버스는 어느새 터널 속을 달리고 있다.
뽕짝의 볼륨을 높이고 난폭하게 껌을 씹어도
운전사는 음악에 맞추어 꾸벅.
흔들리는 차의 리듬에 맞추어 꾸벅.
눈 감아도 너무나 훤하게 보이는 길.
눈 감아도 여전히 푸른, 푸른 신호등.
신나게 달리는 가로수와 전봇대와 빌딩들.
버스 운전사가 하품을 한다.
제 마음대로 달리는 속도에 맞추느라
발은 형식적으로 가속기를 밟는다.
버스가 급정거하는 걸 보고 놀란 발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운전사가 조는 줄도 모르고
속도를 늦추지 않는 바퀴.
운전경력 이십년에 길을 다 외워버린 핸들과
핸들에 붙어 둥그레져버린 팔.
운전사는 마음껏 졸게 내버려두고
스스로 좌회전 우회전 하다 멈추는 바퀴.
버스 운전사가 하품을 한다.
눈 감고도 잘 보이던 길이 깜짝 놀라
횡단보도 앞에서 급히 붉은 신호동을 켠다.
비명소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뒤차 운전사가 다가와 뭐라고 소리지른다.
버스운전사는 큰 하품으로 대꾸한다.
뒤차 운전사는 하품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삿대질을 해대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고
하품 속에서 뽕가락만 늘어지게 나온다.
버스 운전사가 하품을 한다.
하품 속으로 긴 터널이 또 들어왔다 나간다.
버스가 지나갈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붉은 신호를 참고 있다가
지나자마자 얼른 푸른 신호를 바꾸는 신호등.
저절로 피해가는 앞차와 옆차와 뒤차들
가끔 잠을 깨워주는 경적들.
지그재그 달리는 버스에 맞추어
구불거리는 차선들 비틀거리는 가로수들.
눈 가려도 정확히 과녁에 꽂히는 주몽의 화살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우리의 즐거운 버스
직선과 원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쪼그리고 앉아서
김기택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피우는 담배 연기를
햇빛이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
느릿느릿 움직이며 얽히는 연기 타래의 결들을
햇빛이 하나하나 풀고 있다.
연기 뭉치를 푸는 햇빛 가락에는
손톱이 달려 있을 것 같다.
그 가락이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풀어줄 것 같다.
제멋대로 길을 내며 얼굴을 지나가는 주름도
가지런히 빗어줄 것 같다.
바쁠 게 없는 담배 연기를 닮아
지나가는 사람들도 느리다.
아무리 느리게 풀려도
결코 다 풀리지 않은 적이 없는 연기를 닮아
지나가는 차들도 느리다.
마땅히 갈 데도 없는데
괜히 발들은 지나가고 괜히 바퀴는 구른다.
괜히 뭉게뭉게 구름은 떠 있다.
고양이는 핥던 발바닥과 똥구멍을 또 핥는다.
등은 구부러지고 배는 들어가서
강아지처럼 올려다봐야 하는 자세.
맨발에 쓰레빠가 딱 어울리는 자세.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 바지가 좋아하는 자세.
쪼그리고 앉아 피워서
담배 연기는 꽃보다 느리게 피어난다.
첫 빗방울
김기택
물먹은 바람이 온다
마른 바람이 세차게 떠밀려 간다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나무들이 날개처럼 숲을 크게 흔든다
숲이 하얗게 뒤집혔다가 놀라 일어서고
흙먼지는 바람 앞에서 숲처럼 부풀어 오른다
첫 빗방울, 마른 땅에 떨어진다
순간 하얗게 마른 흙먼지들 달라붙는다
빗방울을 구슬처럼 동그랗게 말아 올린다
빗방울들 둥글둥글 땅 위에 굴러다닌다
빗방울들 삼삼오오 모이더니 점점 커지더니
흙탕물 거센 물줄기가 갑자기 온 땅을 덮는다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을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 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초미니 원피스 입기
김기택
작은 원피스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녀는
이미 충분히 몸을 다시 줄인다
숨 막히게 압박하는 허리에 맞춰 위장을 비운다
찢어지기 쉬운 얇은 옷감에 적응하기 위하여
맨살을 옷으로 만든다
자꾸 부풀어 오르는 살을 깎고 조이고 기름 친다
몸무게를 위아래로 잡아당겨 기럭지로 만든다
남자의 이별과 폭음과 울음에 한눈파는 사이
꼭 맞던 원피스가 갑자기 작아지면
몸을 뭉게고 반죽하여 처음부터 다시 빚기도 한다
몸매가 아무리 가늘어져도
가슴과 히프는 밖으로터져 나오려고 옷을 밀어내다가
옷이 찢어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추다
가림과 노출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높이 더 높이 안 입은 느낌을 향하여
치맛단이 올라간다
더 이상 길어질 수 없을 때까지 늘어난 다리를
킬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늘려
미니가 확 짧아지면
초미니 원피스는 저절로 몸에 달라붙어 피부가 된다
출퇴근길 풍경
김기택
아침마다 산은 어린아이처럼 시끄럽다.
새들이 숨어 있는 나무들은
긴 목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쉴새없이 빠르게 지저귄다.
아침마다 만원 지하철은 조용하다.
피곤한 팔다리들은 얕은 잠에 취해 있고
그 위로 무뚝뚝한 얼굴이 가득 돋아 있다.
저녁이 되면 지하철은 시끄러워진다.
얼굴들은 발그레해지고 표정 넘치도록 깔깔거리고
술 먹으러 가는 팔다리들처럼 활기차다.
저녁이 되면 산은 고요해진다.
바람이 곁을 달라고
어두운 나무들을 흔들어보다가
오히려 깊은 어둠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김기택
비틀거리며 그는 밤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이미 나를 투시하고
거리의 차들과 행인들을 넘어
세상의 허공과 무의식이 뒤범벅이 된 어느 곳을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어느 곳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어라고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억양과 리듬은 있었으나
정작 발음 달린 단어와 문장은 그 말에 없었다.
이미 뭉개져 말의 형태가 없는데도
그 말에는 울음과 한탄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밤 공기를 붙들고 후려치고 뒤흔들며
비명 같은 노래가 되기도 하였다.
말과 노래가 흔드는 대로
그의 가볍고 허름한 몸은 마음껏 비틀거리고 있었다.
취한 시간에만 보이는 그곳
취한 시간에만 나오는 그 말을
그러나 술이 깬 그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치킨고로케
김기택
달지 않고 맛있는 빵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한창 찾고 있는데
오늘따라 빵들이 조용하고 엄숙하다
온몸을 닭발처럼 오그려 동그랗게 뭉쳐 있다
맛있는 냄새로 가리고 있지만
낮게 엎드린 등 밑에는
고요하게 관절을 접은 다리들이 보인다
어떤 맛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맛있어 보이는 이름
몇 개를 사서 빵집을 나갈 때까지
진열대의 빵들은 공손하게 목과 허리를 숙이고 있다
눈알 없는 얼굴 발톱 없는 발이 덩어리 안에 있을 것이다
덩어리는 빵의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손잡이 없는 빵 봉지 주둥이를 틀어쥐니
억센 손아귀에 잡힌 닭 모가지처럼 빵이 끌려온다
봉지 안에서 기포를 터뜨리며 튀겨지는 치킨 냄새가 난다
잘게 빻은 가슴과 눈알과 심장에서
파닥거림 없는 날개 발버둥 없는 다리 냄새가 난다
대가리 없는 명상 냄새가 난다
우는 어깨처럼 들썩거리며 기름에 튀겨지면서도
저 낮게 엎드린 자세를 유지했으리라
카톡
김기택
카톡!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심장에서 허파에서 진동하며 나오는 소리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는 소리처럼
손가락을 열심히 뛰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에 목청과 혀가 달려 있다는 듯이
말은 오래전에 입에서 손으로 넘어갔다는 듯이
사람들이 꽉 찼는데도 지하철은 조용하다
조는 사람 하나 없지만
모두가 입과 귀를 닫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제쳐두고
보이지 않는 얼굴 들리지 않는 귀와 얘기하느라
손가락은 수다스럽고 입은 할 일이 없다
카톡! 고양이처럼 카톡! 카톡! 강아지처럼
배고픈 소리들이 울고 있다
어서 손가락으로 먹이를 찍어달라는 듯이
커다란 나무
김기택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다
갈라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 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이전부터이미갈라져있었다는듯갈라진다
태곳적부터 갈라져 있는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헤아릴수도없이가보아서눈감고도알수있는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에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김기택
덤프트럭 앞에서 짐자전거가 앞만 보며 달린다
갓길 없는 좁은 2차선 도로
아무리 빠르게 페달을 밟아도
느릿느릿 돌아가는 자전거바퀴
사자 같은 경적이 쩌렁쩌렁 울며 뒷바퀴를 물어도
헛바퀴만 돌리며
아직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전거
자전거를 삼킬 듯 트럭은 꽁무니에 붙어서 오고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 줄에 달고 가듯 바퀴는 한적하고
발과 페달은 자전거 바퀴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코뚜레
김기택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 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 버렸으니!
코는
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드러운 곳
붉은 혀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깊은 구멍일 뿐인데
저렇게 단단하게 잠가 둔 걸 보니 수상해.
그렇다면 그건 순결을 감금시킨 정조대?
그 구멍에서 가끔 뜨거운 공기가 나오고
신음소리도 나오고
히고 걸쭉한 분비물로 나오는 걸 보니 더욱 수상해.
근질근질해서 결딜 수 없는 열쇠
열쇠구멍 없는 자물쇠를 열 유일한 열쇠, 도끼가
어느 날 자물통을 부술 거야.
하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
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
도끼에 겁탈 당할 이마
겁탈 당할 피 겁탈 당할 죽음을,
겁탈 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
그 속에 든 발갛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
키스
김기택
처음 네 입술이 열리고 내 혀가 네 입에 달리는 순간
혀만 남고 내 몸이 다 녹아버리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온 혀가 식도를 지나 발가락 끝에 닿는 순간
열 개의 발가락이 한꺼번에 발기하는 순간
눈 달린 촉감이 살갗에 오톨도톨 돋아 오르는 순간
여태껏 내 안에 두고도 몰랐던 살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
뜨거움과 질척거림과 스며듦이 나의 전부인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갗으로 덮여 있는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이 되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순간
네가 나의 심장으로 펄떡펄떡 뛰는 순간
내가 너의 허파로 숨쉬는 순간
내 배안에서 네가 발길질을 하는 순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
키 큰 여자
김기택
내가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 자라고 있다.
내 시선에서 수분과 양분을 쫙 빨아들이며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다.
어느새 나는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늘여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미 충분히 높은데도
발과 다리는 분수처럼 키를 뿜어올리고 있다.
땅바닥 닿은 자리마다
킬힐은 즉시 깊은 구멍을 뚫어 지하수를 퍼올리고
물은 연어 꼬리처럼 사납게 물방울을 차며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곧은 직선이 무서운 기색도 없이* 솟구치다가
팔과 젖가슴에서 몇방울 튀다가
머리 위에서 환한 부챗살 햇빛을 받으며
사방으로 둥글게 휘어진다.
그녀의 키가 내 눈에 찰랑찰랑 고인다.
몇방울은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올려다보면
그녀는 온몸으로 내 시선을 남김없이 갈취하여
곧은 다리 곧은 허리로 키를 만들고 있다.
직선을 빼앗긴 내 키가 구부정하게
졸아들고 있다.
타이어
김기택
놀라 돌아보니 승용차가 트럭앞에서 급정거 하고 있다
그 찢어지는 소리가 도살당하는 돼지의 비명소리를 닮았다
도로가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이어를 강제로 잡아당기니
두려움의 끝까지 간 마음이 내지르는 소리가 나는구나
둥글고 탄력있는 타이어도 극한 상황에서는
돼지의 성대를 지나가는 공기처럼 진동하며 우는구나
일그러진 승용차가 견인차에 끌려 떠난 자리에
두 줄기 길고 검은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다
최후까지 악쓰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버린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이어들이 씽씽 밟고 지나간다
타조
김기택
실제로 보니
타조(駝鳥)는 새보다 낙타(駱駝)를 더 닮았다.
타조가 낙타보다 새에 더 가깝다는 증거로
날개라는 것이 달려 있기는 하다.
타조도 가끔은 가슴을 펴고 날갯짓을 하지만
깃털 몇 개로
큰 낙타를 하늘로 들어올려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잘라버렸음이 분명하다.
타조를 처음 본 순간
나도 타조의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타조의 이 확고한 의지는
나무 기둥 같은 다리로 곧게 뻗어나가
말굽처럼 단단한 발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 의지에 눌려
날개는 몸속으로 깊이 들어가
유난히도 길고 유연한 목으로 솟아오르고
말처럼 빠른 다리로 뛰어나가고 있다.
날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타조는 나무랄 데 없이 완전한 새.
그래도 타조를 새라고 생각하니
낙타 같은 얼굴과 걸음걸이며
뱀같이 구불거리면서 먹이를 찾는 목 따위가
참을 수 없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타조는 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슬픔을
전혀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참 동안 타조를 보고 나서
타조의 이 방약무인하고 당당한 슬픔에
나는 다시 한 번 전적으로 동의하고 말았다.
소 닭 보듯
타조들이 높이 나는 새들을 보고 있다.
탁상시계
김기택
내 낡은 탁상시계는
재깍재깍 이십 년이 넘은 낡고 거친 소리를 낸다.
뻑뻑한 관절 소리, 가래 끓는 듯한 잡음이
아직은 정정하고 우렁차다.
너무 오래 곁에 두고 있어서인지
그 큰 소리도 귀에 박혀 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소리는 오랫동안 폐로 들어와 숨을 쉬었고
책 읽을 때마다 박자를 맞춰주었으며
밥 먹을 때면 밥알처럼 규칙적으로 씹히곤 했다.
이미 내 심장 속으로 들어와
마음껏 쿵쿵거리며 늙어왔다.
이제 가끔 내 위장은 배고프면 재깍재깍 울며
내입도 재-꺽 하고 트림을 하는 것이다.
약속에 5분이라도 늦으면 두통이 얼마나 재깍거리는지
온몸이 허둥지둥, 안절부절이 되기도 한다.
시계가 가장 기분이 좋은 때는
내가 막 잠들려고 하는 조용한 시간.
다른 젊은 소리들이 거의 잠든 틈을 타
제 낡은 몸을 다하여 어린애 웃음처럼 명랑해진다.
시계소리가 너무 커서 잠이 올까 싶다가도
마취제에 숫자 들어가듯 잠 속으로 스며든다.
시계 옆에 가만히 있으면
재깍재깍 소리가 나는 곳은 내 심장이나 맥박이다.
관절이나 목뼈도 촉각촉각 소리를 낸다.
트림에서 독한 시간의 냄새가 난다.
얼굴 주름이나 손금도 갈라진 시멘트를 닮아간다.
그동안 먹은 소리들이 조금씩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이다.
태아의 잠
김기택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따뜻한 실핏줄마다 그것들은 찰랑거린다 때로 갈비뼈 안에서 멈추고 오랫동안 둔중한 울림이 되어 맴돌다가 다시 실핏줄속으로 떨며 스며든다 이 소리들이 흘러가는 곳 어딘가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한 아이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생각 없는 꿈이 되려고 놀란 눈이 되고 간지러운 손가락 발가락 꿈틀거림이 되려고 소리들은 여기 한 곳으로 모이나보다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 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 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통화
김기택
1
느닷없이 나에게 다가와 뭐라고 뭐라고 말을 건다
누구신데요?
내 시선과 머리가 갸웃거리는 사이
그의 눈은 내 눈을 지나쳐 눈이 닿지 않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말은 내 귀를 통과하여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그의 걸음은 내 몸을 투과하여 지나가고 있다
혼자 걸어가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제가 한 말을 두 손에 꽉 쥐고 흔든다
놀란 눈알처럼 입을 벌린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머리를 쥐어뜯는다
미간을 쭈글쭈글하게 구긴다
손사래를 친다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친다
이를 드러내고 눈알을 부라린다
두 손에 허공을 쥐고 격렬하게 흔든다
하늘에다 삿대질을 한다
손바닥 칼로 허공을 힘껏 내리친다
바람에다 종주먹을 들이댄다
공기를 세차게 구기며 멱살을 잡는다
이어폰에 사람이 들어 있다는 듯이
말에 이목구비와 손발이 달려 있다는 듯이
손발 달린 말이 송신된다는 듯이
말로 바뀐 몸이 스마트폰으로 드나들고 있다는 듯이
세상이 다 녹아 말로 들어가 버렸다는 듯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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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큼! 틈, 틈,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고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티셔츠 입은 여자
김기택
탱탱한 피부처럼 살에 착 달라붙은 흰 셔츠를
힘차게 밀고 나온 브래지어 때문에
그녀는 가슴에 알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혹 팔짱을 끼고 있으면
흰 팔을 가진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처럼 은은한 빛이
그녀의 가슴 주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일으켰다는 고주몽이나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복잡한 거리에서 대낮에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다.
길을 가다 멈춘 남자들은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집요하고 탐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만졌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그 눈빛들을 햇빛처럼 쬐었다.
타조알처럼 두껍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겁 많고 부드러운 알들은 그녀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마음껏 두근거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그녀의 허리가 너무 가늘어 보였지만
곧바로 넓은 엉덩이가 허리를 넉넉하게 떠받쳤다.
산적처럼 우람한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기를 안고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파리
김기택
쓰다 말고 던져둔 시 거미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다리 많은 호기심이 발발거리더니
멈칫,
'거미줄'이란 글자 앞에 선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엇엔가 옭아매인 듯 꼼짝 못한다.
파리는 갑자기 두 앞다리를 모으더니
싹싹 빈다.
서 있어도 저절로 오체투지가 되는 몸으로
빌고 또 빈다.
파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미줄에서 몇 글자 건너
'거미'라는 글자가 떡 버티고 있다.
수성 잉크가 번져 글자마다 털이 돋아 있다.
글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파리도 한 글자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파리 잡기
김기택
파리채를 높이 들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파리와 모기 날갯짓 소리는
귓구멍을 찌르고 피를 간질이고
쓸데없이 힘을 한데모아 정신을 집중하게 한다
멍청하게 점 하나 선 하나에 정신통일하게 한다
날개 있는 파리가 잡혀주지 않으면
날개 없는 파리채는 파리를 잡을 수 없다
가끔 인심 쓰듯 파리는 알맞은 사정거리에 와 준다
살갗의 소름을 간질이던 날개와 털다리가
순순히 으깨어지러 와준다
파리채가 파리를 겨냥했을 때
파리는 나처럼
잠시 후에 닥칠 일을 하얗게 모르고 있었다
명상으로 모든 동작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때가 놈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이미 내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렸을 때
콧구멍으로 숨 쉬는 회수만큼
치욕이 내 몸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을 때
그 치욕을 판 대가로 시 몇 편 쓰고 문학상 받았을 때
파리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수천 년 단련된 민첩함으로 바닥을 박차고 떠올랐지만
날개가 전혀 쓸모가 없을 만큼
파리와 파리채 사이는 결정적으로 좁혀져 있었다
나는 고르고 평온하게 숨 쉬고 있었는데
왜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었다
발모제를 뿌려도 점점 넓어지는 대머리가
제 무게로 고개를 꺾으며 자꾸 기울어지고 있었다
털 한 가닥 비듬 하나 어눌한 말 한 마디로도
나는 꼼짝없이 드러나 버렸고
도저히 가려지지도 감춰지지도 않았다
으깨어지기 전까지는 세포 하나까지도 온전한
바로 이때가 삶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파마하는 여자
김기택
어떤 머리로 해 드릴까요, 언니. 바람이 불지 않아도 항상 휘날리는 바람머리로 할까요? 올해의 히트 상품, 파도머리는 어때요? 이마에 부딪쳐서 머리 위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물보라가 일품이죠. 언니는 얼굴이 넓으니까 파도를 높이 빗어올리면 정말 바다 같겠어요. 올 가을 신상품이요? 황금들판인데, 요즘 한창 뜨는 중이예요. 황금빛 염색 갈피갈피에 일렁이는 가을바람 무늬를 넣지요.
여자들은 머리에 파마캡을 두르고 여성지를 보거나 요구르트를 빨며 앉아 있다. 오늘 파마한 머리가 성공적으로 푸른 싹을 틔우도록 산부인과의 임신부들처럼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 새로 태어날 멋지고 잘 생긴 머리를 태교하듯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다. 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살게 될 얼굴을 그려보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여자들 머리에서는 늦가을 황금들판이 출렁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포장마차에서
김기택
칼자국 무늬로 나이를 먹은
늙은 도마 위에서
산낙지 한마리
내리치는 식칼과 싸우고 있네
희고 말랑말랑한 살로
맹렬한 꿈틀거림으로
모가지에서 뿜는 피처럼 싱싱한 비린내로
풀
김기택
콘크리트 바닥이 금이 가는 까닭은
단단한 등딱지가 쩌억, 쩍 갈라지는 까닭은
밑에서 쉬지 않고 들이받는 머리통들이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가 땅을 덮고 누르기 전
그곳에 먼저 살던 원주민이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밑에 깔린 수많은 물줄기들이
봄이 오면 깨어나
밖으로 솟구쳐 나오려다 목이 꺾여 죽으면
새 물줄기들이 몰려와 다시 들이받기 때문이다.
물렁물렁한 물대가리들이 치받는 힘에
딱딱한 콘크리트가 간지러워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의 시간이 솟구쳐
콘크리트가 들썩거리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갈라진 자리마다
푸른 물줄기가 새어 나온다.
물줄기는 분수처럼 솟구쳐 포물선을 그리지만
땅바닥에 뚝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쉬지 않고 흔들려도 떨어지지는 않는다.
포물선의 궤적을 따라
출렁거리는 푸른 물이 빳빳하게 날을 세운다.
약한 바람에도 눕고 강한 바람에도 일어난다.
포물선은 길고 넓게 자라난다.
풀줄기가 굵어지는 그만큼 콘크리트는 더 벌어진다.
연하고 가느다란 풀뿌리들이
콘크리트 속에 빨대처럼 박히자
커다란 돌덩이리가 쭉쭉 콜라처럼 빨려 들어간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플라타너스 잎 하나
김기택
급히 팔을 잡아 당기는 손길이 있어
돌아보니
막 떨어지고 있는
커다란 손 같은 낙엽이였다
팔 없는 손은 내 팔을 더 붙잡지 못하고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마침 뒤에서 오고 있던 발 하나가
무심히 밟자
바스락!
발밑에서 무수한 틈이 갈라지는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발이 멀리 가버린 뒤에도
소리들은 틈 사이에 남아
오랫동안 저희들끼리 바스락거렸다
가을 햇빛이 주름살을 쓰다듬듯
깨어진 마른 핏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넓은 잎은 크고 아상한 손바닥을 오므리며
바스러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허공을
오래오래 쥐고 있었다
하품
김기택
다 본 스포츠신문을 다시 훑어보는
묘한 얼굴이 잠시 긴장하더니
갑자기 가뿐 숨을 몰아친다.
콧김과 입김이 심상치 않더니
코와 입과 턱에 근육이 돋더니
입이 공기를 크게 베어물며 열린다.
턱뼈에 무게를 싣고
느리지만 힘차게 벌어지는 입.
얼굴의 중앙을 한껏 밀어올린 정점에서
입은 숨을 멈추고 잠시 정지해 있다.
포효하는 지루한 침묵.
나태 속의 짧은 긴장.
수축된 안면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한 텐데
둥근 공기의 힘에 밀려 닫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로 단련된 이빨도
공기 한줌의 완력에 밀려 할 일이 없다.
다물려 할수록 커지는 입속으로
무덥고 탁한 것들이 거세게 빨려온다.
입을 찢듯이 벌려 제 일 다 보고 나서
공기는 슬며시 입에서 빠져나온다.
얼굴 주위에서 파리처럼 날던 권태는
입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 몰려와 덕지덕지 앉는다.
눈은 더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좌우로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검은자위로 흰자위를 닦아보지만
붉은 실핏줄만 더 선명해질 뿐이다.
이렇게 소화 안되는 공기는 처음이야.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굴은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지하철 어둡고 어지러운 공기로 채워진 뱃속은
불만족스러운 듯 그르렁거리고
목젖은 딸꾹질처럼 맵다.
덩치와 폐활량에 비해 턱없이 작은 콧구멍이
수상하다는 듯 다시 두 구멍을 벌름거린다.
한가한 숨막힘
김기택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김기택
달려가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어올리자
사내는 조금도 꾸밈이 없는 동작으로
빙그르르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전혀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혔다
얇은 가죽으로 막아놓은 60킬로그램의 비린내
안에 들어있던 분노와 꿈이
일제히 터진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신속하게 완벽하게 제 위치를 찾아갔다
꿈은 흰 쌀밥 위를 오르는 김처럼
모락모락 공손하고 착하게 흰 골을 떠나
거대한 스모그 속으로 스며들었고
분노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따라
하수도 속으로 얌전하게 흘러 들어갔다
크고 믿음직스런 두 손이 있었으나
체온이 있을 동안만 가늘게 떨었을 뿐
곧이어 차고 뻣뻣한 힘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지 아침부터 해장 한 번 잘했군
지나가던 버스 운전사가 킬킬거렸고
손바닥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들이
킁킁거리며 비린내를 향해 몰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핏줄의 끝 수만 뿌리 모세혈관으로
모여 기지개가 되고 주먹이 되고
눈동자 속으로 빛이 되어야 할 힘들이
해골을 뚫고 풀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간 후
사내는 이제 진짜 육체가 된 것이다
무기력하고 아무 할 일도 없어 마냥 착하기만 한 육체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순한 육체가
한숨 쉬는 사람
김기택
그는 애연가처럼 독한 한숨을 맛나게 불어댄다. 한숨이 어찌나 잘 익었는지 단내 나는 신음도 간혹 섞여 나온다. 한숨이 어찌나 진한지 한번 내뿜을 때마다 몸이 한줌은 녹아 나오는 것 같다. 늘 고만고만하게 앓는 병에 약이라도 되는지 식전 식후에 빠뜨리는 일도 없다.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도,자잘한 걱정들을 하나도 놓지지 않고 제 새끼들마냥 일일이 다 챙기는 것도,중독은 중독인 모양이다.
한여름 밤의 독서
김기택
짧게 그은 밑줄 하나에 다리들이 달려 있었던 것일까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밑줄은 안 보이고
밑줄이 지나간 길만 남아 있다
기어 다니는 밑줄 하나가 어찌 저리 빠를 수 있을까
책상 위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길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미로를 빠져나온 미로가 다시 미로로 들어가고 있다
그 길을 눈으로 좇다가 시선이 꼬인다
손바닥이 내리치는 순간
밑줄은 길을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뜨리며 날아오른다
밑줄이 사라진 지 한참 지난 자리를 손바닥이 내리치고 있다
공중에도 밑줄은 보이지 않고
허공은 다시는 풀 수 없도록 헝클어져 있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혼란스러운 밑줄의 회로가 책 위에 다시 나타난다
밑줄이 마구 내달리는 기세를 피하려다
글자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흩어졌다 뭉쳤다를 되풀이하다 문장의 대오가 뒤엉킨다
제자리로 돌아오려던 글자들이
미로를 풀다가 미로에 얽혀 묶이고 또 묶인다
완강한 평면과 사각을 지키지 못하고
책상도 울퉁불퉁해지면서 구불거리면서 모서리를 찾고 있다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나
꼬인 시선을 풀지 못한 채 독서는 한창 헤매는 중이다
해초
김기택
납작납작
가자미는 눌리고
울툭불툭
새우 눈알 튀어나오는
무거운 바닷속
물결과 물결 사이
얇은 틈에
넓게 허리 펴고 서서
떠오를 듯 떠오를 듯
하늘하늘
혀만 취한 사람
김기택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말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난다.
알코올에 절인 혀 냄새가 난다.
주정이 마비시킨 발음 냄새가 난다.
느린 혀가 발음을 만들기도 전에
뜨겁고 힘센 말들이 가끔 굼뜬 혀를 깨문다.
보란 듯이 멀쩡한 얼굴 늙은 대머리로
보란 듯이 대낮에 혼란스러운 전철 안에서
팬티도 입지 않은 혀를 덜렁덜렁 내놓고 있다.
단단한 '말' 대가리를 빨아대고 있다.
몇 시간째 지치지도 않고!
아랫도리로는 못 하고 손으로도 못 하고
입으로만 '자유' 행위를 하고 있다.
만취한 니기미 씨발과 씹좆과 개새끼가
혀에서 사정된다. 걸쭉하고 허연 침이
제 몸을 한껏 우려낸 엑기스가
사방으로 튄다. 우글우글한 올챙이들이
그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꼬리를 흔들고 있다.
혀에는 오톨도톨 전율이 돋아 있다.
작은 돌기들 모두가 잔뜩 성이 나 있다.
그 말이 내 귓구멍에 딱딱한 대가리를 들이대고
게걸스럽게 쑤셔대는 바람에
귓구멍이 다 늘어나고 헐 지경이다.
호랑이
김기택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싼 잠은 무거울수록 기분 좋게 출렁거린다
정글은 잠의 수면 아래 굴절되어 푸른 꿈이 되어 있다
근육과 발톱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털은
줄무늬 굵은 결을 따라 들판으로 넓게 뻗어 있다
푹신한 털 위에서 뒹굴며 노는 크고 작은 먹이들
넓은 잎사귀를 흔들며 넘실거리는 밀림
그러나 머지않아 텅 빈 위장은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리라
다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리라
느린 걸음은 잔잔한 털 속에 굵은 뼈의 움직임을 가린 채
한번에 모아야 할 힘의 짧은 위치를 가늠하리라
빠른 다리와 예민한 더듬이를 뻣뻣하고 둔하게 만들
힘은 오로지 한 순간만 필요하다
앙칼진 마지막 안간힘을 순한 먹이로 만드는 일은
무거운 몸을 한 줄 가벼운 곡선으로 만드는 동작으로 족하다
굶주린 눈초리와 발 빠른 먹이들의 뾰족한 귀가
바스락거리는 풀잎마다 팽팽하게 맞닿아 있는
무더운 한낮 평화롭고 조용한 정글
화보사진 찍기
김기택
카메라가 첫 셔터를 눌렀을 때
목 위에 묵직하고 뻐끈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표정들이
얼떨떨한 그대로 렌즈에 연거푸 박히고 있었다.
얼굴은 목에서 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어리벙벙한 표정 속에서
렌즈는 어설픔과 난처함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움직이는지 모르고 움직이던 목 근육 어깨 근육을
랜즈가 막대기처럼 단정하게 경직시켰다.
웃는지 모르고 웃던 웃음을
김치 웃음과 치즈 웃음으로 바꿔주었다.
모든 제멋대로가 재빨리 공손해졌다
사진에 고정되기 전에 미리 부동자세가 되었다.
자세는 품위 있는 위치를 찾지 못해
어쩡쩡하게 세련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여보라는데도
몸과 표정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렌즈에 포착된 우스꽝스러운 순간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어디를 어떻게 렌즈에 붙들렸는지 몰라
몸에 갇힌 몸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화살
김기택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며 퍼져나가고 있다
화석
김기택
그는 언제나 그 책상 그 의자에 붙어 있다.
등을 잔뜩 구부리고 얼굴을 책상에 박고 있다.
책상 위엔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두 손은 헤엄치듯 서류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루종일 쓰고 정리하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거북등 같은 옆구리에서
천천히 손 하나가 나와 수화기를 잡는다.
이어 억양과 액센트를 죽인 목소리가 나온다.
수화기를 놓은 손이 다시 거북등 속으로 들어간다.
때때로 그의 굽은 등만큼 배가 나온 상사가 온다.
지나가다 멈춰서서 갸웃거리며 무언가 묻는다.
등에서 작은 목 하나가 올라와 고개를 가로젖는다.
갑자기 배 나온 상사의 목소리가 커진다.
목은 얼른 등속으로 들어가 나올 줄 모르고
굽어진 등만 더 굽어져 자꾸 굽실거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모래밭에서 한참 거북등을 굴려보다 싫증 난 맹수처럼
내 나온 상사는 어슬렁어슬렁 제 정글로 돌아간다.
겨울이 지나고 창 안 가득 햇살이 들이치는 봄날,
한 젊은이가 사무실에 나타난다. 구둣소리 힘차다.
그의 옆으로 와 멈추더니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는 기척이 없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젊은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굽은 등을 툭툭 친다.
먼지가 일어나고 등이 조금 부서진다.
젊은이는 세게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조그만 목이 흔들리다가 먼저 바닥에 굴러떨어진다.
이어 어깨 한쪽이 온통 부서져내린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버린 그의 몸을 들어낸다.
재빠르게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새 의자를 갖다놓는다.
화창한 주말
김기택
아직 찌그러지지 않아 날렵한 차 하나가
아직 뭉개지지 않아 햇살이 잘 미끄러지는 차 하나가
오늘따라 유난히 잘 빠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아직 박살 나지 않아서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바닥에 흩어지지 않아서 유리창은
흰 구름과 가로수를 원색으로 받아 영상으로 바꾸고 있다
아직 찟어지는 소리로 바닥을 긁지 않아서 타이어는
아직 튕겨 나가지 않아서 타이어는
정지한 듯 고요히 150킬로미터의 속도를 굴리고 있다
아직 짓이겨지지 않은 정강이뼈와 종아리 근육은
엔도로핀이 팍팍 나오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긋이 밟고 있다
아직 깨지지 않고 찟어지지 않아 피부는
잘 관리된 주름살을 촉촉한 윤기로 감추고 있다
내장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비명이 나오지 않아 입은
급히 끼어드는 차에 씨발 놈과 좃같은 새끼를 퍼붓고 있다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일그러지지 않아서 그는
느긋하게 담배를 빨며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황사
김기택
흙먼지 비린 냄새.
중국 냄새. 몽골 냄새.
고비 사막 냄새, 타클라마칸 사막 냄새.
사막에서 햇빛에 곱게 갈린
죽음들의 냄새.
모든 분비물과 소리와 동작이 정화된 후에
고요하고 거대한 흙의 질서 속으로 들어간
살과 피와 뼈들의 냄새.
내 코에 안착할 때까지
바람의 길을 따라 멀리도 날아왔구나.
바람의 입자처럼 미세한 알갱이에
사막과 바다를 덮고도 남을 거대한 날개를 달고
살아서 이동한 거리보다
더 멀리 항해했구나.
하나의 몸이
하나의 生에 그토록 단단하게 결박되었던 몸이
흙과 바람으로 깨끗하게 씻기고 나서
무수히 많은 입자로 쪼개지고 나서
이렇게 광활하게 대기와 대지에 퍼지고 있구나
숨쉬는 것들마다 찾아다니며
모든 구멍과 틈으로 스며들고 있구나.
그 깨끗한 향기에 매연과 중금속을 뒤집어쓰고
다시 세상의 상처가 되어
지금 막 내 폐 속으로 들어왔구나.
또다른 몸
또다른 결박 속으로 들어왔구나.
황토색
김기택
겨울 산은 울퉁불퉁한 등을 구부리고 엎드려
누렇게 그을린 햇볕을 받고 있다
그 밑에서 집들도 납작하게 누워
졸음 많은 햇볕을 쪼이고 있다
늦은 2월, 남녘의 햇빛은 황토색이다
겨울 산도 겨울나무도 겨울 들판도
햇빛이 깊이 들어 따뜻한 땅 색깔이다
짙은 황토색 땅을 닮은 황구와 황소들이
어느 집 마당에서나 졸고 있다
남녘에는 황토색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햇빛을 받으면 수만 년 묵은 빛깔이 우러나와
쳐다볼수록 눈이 따뜻해진다.
회색 양말
김기택
회색 양말을 신고 나갔다가 집에 와 벗을 때 보니
색깔이 비슷한 짝짝이 양말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비슷하면 무조건 똑같이 읽어버리는 눈.
작은 차이를 일일이 다 헤아려보는 것이 귀찮아
웬만한 것은 모두 하나로 묶어버리는 눈.
무차별하게 뭉뚱그려지는
숫자들 글자들 사람들 풍경들 앞에서
주름으로 웃는 눈.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이젠 아무래도 좋단 말인가.
빨래 바구니에 처박히자마자
저마다 다른 발 모양과 색깔과 무늬와 질감을 버리고
빨랫감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양말들.
Before-After
김기택
Before를 쳐다보는 내 시선이 깎이고 있다.
사납게 튀어나온 각진 선들을 그 선에 깊이 새겨진 짜증과 신경질과 분노와 체념을 둥글고 부드럽고 순하게 깎아내고 있다.
얼굴이라고 나라고 우기는 울퉁불퉁한 지방을 도려내고 있다.
사주팔자가 손금처럼 새겨진 사납고 드센 외곽선을 갸름하게 만들고 있다.
웃거나 찡그릴 때마다 정해진 운명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려내고 있는 주름을 펴서 없애버리고 있다.
한 번 자리 잡으면 평생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고집스러운 선을 그 선에 달라붙어 단단하게 굳어버린 고정관념을 갈아버리고 있다.
좁은 구멍 안에 갇혀있는 눈 가늘게 째진 구멍 안에 숨어 밖을 노려보는 눈을 잡아 빼고, 시선을 빨아들이는 깊고 푸른 눈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눈 내 상상이 가끔 불러오는 커다란 반달눈을 그 자리에 박아 넣고 있다.
내 눈이 본 형상들을 다 가짜로 오류로 착각으로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내 눈이 보고 있는 것들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으로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밀어내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시간 꿈꾸면 언제든지 현재가 될 수 있는 시간을 그 자리에 채워 넣고 있다.
한 번 태어나면 결코 바꾸지 않는 형태를 한번 결정되면 결코 변하지 않으려는 표면을 딱딱하고 수정 불가능한 고형물을 물렁물렁하게 주물러서 팽팽하고 탄력 있는 촉감으로 바꾸고 있다.
5인실
김기택
아까부터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한평생이 가고 있다.
삐끗하면 어딘가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일으키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침대에서 다 일어난다면 그동안 없었던 발이 나와
떨리는 슬리퍼를 신을 것이다.
하면 된다는 일념이
링거 거치대를 밀며 코앞의 머나먼 화장실로 갈 것이다.
누군가 먼저 들어가 있는 화장실에서는
오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끙끙거리는 소리만 끈질기다.
건너편 침대에서는 요도에 관을 넣어
피 섞인 오줌을 빼내는 투명 플라스틱 통이 있다.
벌건 오줌이 반쯤 차 있다.
그 옆에는 일생일대의 힘을 쥐어짜 숨 쉬는 침대.
또 그 옆에는 기계로 목구멍 찰거머리 가래를 빼는 침대.
모터 소리에 맞추어 내지르는 지루한 비명.
그 소음 속에서도
깰 힘이 없어 할 수 없이 잠들어 있는 침대.
갑자기 유리창이 흔들리고 커튼이 펄럭이더니
병실 밖 어디선가 고성과 욕설과 악다구니가 들려온다.
아까운 건강이 함부로 낭비되는 그 소리를
번쩍 눈을 뜬 열 개의 귀가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링거 맞듯이 엿듣고 있다
100살
김기택
기어코 오고야 말았구나
삶과 시간이 낱낱이 새겨진 주름살을 이끌고
앳된 미소를 거칠게 우그러뜨린 표정을 덮어쓰고
비누와 향수도 단번에 삼켜버리는 제 구린내와 시취를 마시며
심장의 일용할 양식인 노심초사와 불안을 품고서
웃음과 농담 사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덮치는 암과 교통사고를 피해서
친구와 지인의 죽음을 다 지나야 하는 여기까지
이빨 없는 잇몸으로 삭을 때까지 씹는 질긴 나물을 지나서
침 흘리며 쭈그리고 앉아 존경받는 경로석을 지나서
도둑이야 소리쳐 쫓아내고 보니 아들이었다는 치매를 지나서
엉덩이 밑에 개가 깔려 있는지도 모르고 앉았다는 몸무게를 지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물가물한 졸음을 지나서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벗었는지 입었는지 쌌는지 싸야 하는지 헷갈리는 순간들을 지나서
엄마보다 먼저 죽은 자식의 차디찬 얼굴이 각인된 손을 지나서
썩은 음식물 냄새를 맡고 눈과 귀로 몰려드는 파리들 모기들을 지나서
똥 냄새와 밥 냄새의 경계가 흐릿한 코를 지나서
똥오줌이 제멋대로 드나들어도 멍하니 벌어져있는 괄약근을 지나서
이미 죽었는데도 여전히 눈이 떠지고 밥알이 들어오는 아침과 저녁을 지나서
오고 싶어도 아무나 올 수 없다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