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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쓴비

단비 쓴비

안선모

 

", 비다. 비야!"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후려쳤다.

점심을 먹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창문을 닫았다.

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비였다. 메마른 운동장에서 폴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비는 뜨겁게 달구어진 운동장을 식혀 주었다.

'사람들은 이런 비를 단비라고 하겠지. 그동안의 가뭄을 말끔히 해소시켜주는... '

단비는 운동장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쏟아지는 비를 감상했다

"이 단비, 밥 안 먹고 뭐하니? "

진영이가 도시락을 들고 다가왔다.

"으응, 곰퉁이 생각하고 있었어."

"곰퉁이? 그러고 보니 곰퉁이 생각난다. 보고 싶다. 그치?"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단비의 말에 진영이가 얼른 말했다.

"뭐하긴? 보나 마나 졸고 있겠지 뭐."

"그래...... 아마 그렇겠지?"

둘이는 마주 보고 웃었다.

"곰퉁이가 다시 시골로 가게 된 건 정말 잘된 일이야."

"그래,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면서 창구 아버지가 다시 돼지를 키우기로 하셨다잖아."

단비와 진영이는 마주 보고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봄날 안개처럼 슬그머니 나타났다 사라진 아이.

조 창구란 버젓한 이름이 있었지만 곰퉁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리는 아이.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봄이 왔다지만 날은 스산하고 추웠다. 3월은 언제나 을씨년스러웠다.

", 오늘 새로 전학 온 친구입니다."

선생님의 소개에 창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첫눈에 단박 시골에서, 그것도 아주 첩첩 깡촌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얼굴, 촌스러운 옷차림. 삐져나올 듯이 탱탱한 얼굴 속에서 순박한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아이들이 입을 막고 크득크득 웃었다.

"크게 웃거래이. 그래야 스뜨레쏘가 확 풀리지."

처음 전학 온 아이답지 않게 창구가 넙죽넙죽 말했다.

그 소리에 아이들이 대놓고 크게 웃어제꼈다.

"스뜨레쏘? 야들아, 스뜨레쏘가 뭐냐? 무슨 이탈리아 음식 이름 이당가?"

뭐든지 흉내 잘 내는 정수가 톡 나섰다. 정수의 사투리 때문에 아이들이 다시 한번 배꼽을 쥐었다.

"창구야, 저기 3분단 넷째 줄반장 옆에 앉아라. 단비가 잘 가르쳐 줄 거야."

단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으악, 저런 촌뜨기와 짝이 되다니...'

창구와 앉기 싫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반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님께 실망을 끼쳐 드리는 일은 하기 싫었다. 단비는 1분단 진영이를 흘낏 보았다. 진영이도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딱 마주쳤다. 진영이가 피시식 웃었다. 의미 있는 웃음이었다.

'아유, 저 여우. 고소하다고 춤추겠네.'

단비는 어제의 반장 선거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진영아, 너 그렇게 잘났어도 나한테 졌잖아.'

처음부터 아슬아슬하게 시작된 반장 선거는 단비의 승리로 끝났다.

진영이와 단비는 모든 면에서 라이벌이었다. 단비는 진영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진영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자, 참아. 참는 것도 이기는 거야.'

단비는 진영이에게 보란 듯이 창구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쟤네들은 정말 별종이야. 뭐든지 이기려고만 하고. 좀 지면 어때! "

정수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남자아이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여자들은 정말 이상해. 힘든 일은 쏙쏙 미꾸라지처럼 빠지고 여우짓만 골라 하고...."

"그러는 너희들 남자는 우리보다 나은 게 뭐 있니?"

진영이가 톡 쏘았다.

"우리가 여우면 너희들은 모두 늑대야."

단비도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둘이가 마음이 맞아 한 편이 된 건 처음이었다.

"난 늑대가 아니고 곰퉁이다."

생게망게한 창구의 말에 아이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댔다.

"곰퉁이, 곰퉁이가 뭐야?"

진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늬들 그렇게 똑똑한 가시나들이 곰퉁이도 모르나? 곰 말이다, !"

그러고 보니 창구는 한 마리 우직한 곰이었다.

청소 시간이면 창구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 애는 곧잘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도화지나 연필을 찾아내어 잔소리를 하곤 했다.

"하여튼 도시 아이들은 고생 좀 해 봐야 한다. 이렇게 멀쩡한 걸 버리다니...... 땅을 파 봐라, 땡전 한 푼 나오나."

점심 시간에 아이들이 반찬을 남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정신들 못 차렸구만. 니 같은 아이들은 아직 멀었다. 굶어 봐야 진짜 세상을 아는기라."

그러면서 창구는 아이들이 남긴 반찬을 몽땅 먹어 치웠다.

체육 시간이면 무거운 매트, 뜀틀 나르는 것도 모두 창구 몫이었다.

"난 공부하는 것보다 일하는 게 좋아."

창구는 정말 공부엔 취미가 없는 것 같았다.

멍하니 딴생각하다 선생님께 지적받기 일쑤였다.

"창구, 집에다 호떡 숨겨놓고 왔나? "

"? 호떡이라꼬요? 호떡은 일평생 먹어 본 적도 없고요, 대신 움광에 고구마 숨겨놓고 왔습니다."

창구의 대답에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갈 듯 웃어댔다.

"자식 넉살은......공부 시간엔 정신 차리고 설명을 들어야지."

선생님도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언젠가 미술 시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던 판화 시간이었다. 단비는 다 새긴 고무판에 등사용 잉크를 바르던 중이었다. 마악 화선지에 찍으려던 참이었다. 창구의 팔꿈치가 툭 건드리는 바람에 끈적끈적한 잉크가 손에 잔뜩 묻었다.

"아이, 신경질 나. 너땜에 망쳤잖아."

"미안해. 모르고 그랬어."

"잘못해 놓고 모르고 그랬다면 다니? 이 손 좀 봐.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손은 더러워지면 닦으면 되지만 마음은 안 돼. 닦을 수 없어."

"? "

단비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체육 시간이었다.

"단비야, 너 이번 학기엔 올 수 못 맞겠다. 체육 때문에..."

소영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지난번 뜀틀 5단에서도 단비는 구름판 앞에서 멈칫 서버렸었다.

치타처럼 몸을 날려 거뜬히 넘어가던 진영이.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은 두 팀으로 나눠 간단한 시합을 하겠다. 물론 정해진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겠지?"

선생님의 경기 진행 설명에 따라 아이들이 움직였다.

단비와 진영이 차례가 되었다. 단비와 진영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름사다리를 넘었다.

둘이는 똑같이 정글짐 꼭대기를 통과하여 미끄럼틀까지 올라갔다.

"단비 화이팅!"

"진영이 화이팅!"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서니 단비는 숨이 차서 가슴이 콱 막혔다. 진영이가 앞으로 나섰다. 먼저 내려갈 참이었다.

'지는 건 정말 싫어. 얄미운 기집애.'

단비는 앞서서 내려가는 진영이의 발을 슬쩍 걸었다.

", ..."

진영이는 어처구니없이 고꾸라져 굴러떨어졌다.

"진영이가 떨어졌다!"

응원하던 아이들이 화다닥 진영이에게로 몰려갔다. 미끄럼틀 위에 있던 단비는 깜짝 놀랐다.

'다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단비의 눈이 창구의 눈과 마주쳤다. 단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다. 뼈에는 이상이 없고 약만 바르면 되겠어."

놀라 달려오신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근데 진영이가 웬일이야? 치타도 미끄럼틀에서 떨질 때가 있나?"

"선생님, 죄송해요. 발을 헛디뎠어요."

진영이가 발을 절뚝거리며 양호실로 갔다.

"'원숭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진짜 명언이 네 그랴."

진영이의 뒷모습을 보며 정수가 말했다.

"이번 시합은 무승부다. 모두 교실로!"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종이 울렸다. 단비는 터덜터덜 수돗가로 갔다.

'그래.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슬쩍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야. 그렇게 고꾸라진 자기가 잘못이지 뭐.'

단비는 마음속으로 거듭 말했다. 수돗가에서 말없이 손을 씻던 창구가 중얼거렸다.

"넌 단비가 아니고 쓴비데이. 땅을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가 아니고 땅을 못 쓰게 만드는 쓴비. "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누가 뭐라 해도 끄떡도 안 했었는데....

창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가 되어 단비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단비는 창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이 콩닥 콩닥거렸다.

얼굴 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창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섰다.

무심한 얼굴이었다. 얼마 후에 창구는 다시 제 고향으로 전학을 갔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단비야, 너 창구보고 싶지?"

진영이가 단비의 허리를 꾹 찔렀다.

", 간지러워.... "

"창구 공부는 지지리 못했지만 참 괜찮은 아이였어."

"진영아, 너도 참 괜찮은 아이야."

단비는 진영이의 손을 꼭 잡았다.

"너 그때 체육 시간에 내가 일부러 밀었다는 거 알았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니?"

"글쎄......그때 사실대로 말했다면 너랑 나랑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난 그때 쓴비였었어."

", 쓴비? 푸하하하하 ..."

진영이가 크게 웃었다.

"네 이름은 누가 뭐래도 단비야, 단비."

"그래, 내 이름은 단비야."

단비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랜 가뭄을 녹여 줄 단비가 촉촉히 얼굴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