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한 연정
신문웅
눈 오는 어느 추운 날이었다. 섣달 바람은 매섭게 불고 때론 눈발도 날린다. 정화(正華)스님은 본사(本寺) 큰절에 가야할 일이 생겨 일찍 절을 나와 한참이나 눈길을 헤치고 큰길까지 나왔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이곳 외진 산골에는 버스가 하루 한 번만 다니기 때문에 놓쳐서는 안 된다.
기다리던 버스가 열한 시나 되어서야 왔다. 그나마 버스 안은 따뜻하였다. 승객은 단지 할아버지 한 분과 젊은 청년 한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 버스는 산골 비탈진 길을 흔들거리며 내려간다. 아마 4시간이나 걸려야 큰절이 있는 도시에 도착하리라.
차창에 비친 산골 마을은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때론 산비탈에 외롭게 한 채씩 서 있는 외딴집은 매우 춥고 외로워 보였다. 그래도 나지막한 굴뚝에는 정겹게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소복하게 눈 덮인 지붕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사립문 밖의 키 큰 버드나무 아래 아담하고 소박한 인적 드믄 산촌 외딴집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한 정경들은 정화스님에게는 그리 낯설지는 않다. 정화스님이 몸담은 조그마한 절도 외롭고 고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절에도 봄날의 사월 초파일 이외는 찾는 신도나 불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는 비탈진 산길을 따라 접어들고 모퉁이를 돌아 굽어진 길을 내려간다.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차가 튀어 춤을 추게 하며 엉덩이가 들썩거리기도 한다. 그러기를 한두 시간이나 왔을까. 차가 멈춰 섰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만져도 보고 두들겨도 보고 한참이나 애를 썼지만, 차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손님! 차가 고장이 나서 안 되겠군요.”
“고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난감한 일이었다. 인적 드믄 산골 외딴길에서 차가 고장이 났으니,
“운전사 양반 어떻게 좀 안 되겠소?”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 기사에게 물어본다.
“저기, 저…, 좀 힘들겠습니다.”
운전사는 난처한 기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러기를 30여 분이 지났을까. 그때 마침 나무를 가득 실은 산판 트럭 한 대가 온다. 운전기사는 손을 들어 산판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버스로 다시 올라와서 “손님들, 제가 시내에 가서 부속을 사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외딴집을 가리키며
“손님들께서는 저기 저 길가 집에 들어가셔서 좀 기다리십시오. 제가 얼른 가서 부속을 사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기사는 트럭을 타고 갔다.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외딴집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노파가 나와서 문을 열어 맞아준다.
“어휴 어쩐 일이예유.”
“예, 버스가 고장이 나서 몸을 좀 녹이며 기다리려고요.”
“그럼 들어오세유. 아 스님도 계시네유.”
집은 크지는 않았으나 안방은 넓어 보였다. 세 사람은 안방에 들어가서 노인은 아랫목에 앉았고 청년과 정화스님은 윗목에 앉았다. 정화스님에게는 몹시 불편한 자리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인 노파는 부엌으로 갔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시는 감유.”
“봉영사에요.”
또한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는…….”
“아, 예… 저는 오늘 원주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군대에 입대하러 가는 길이예요.”
그때 주인 노파가 고구마를 쪄 가지고 들어온다.
“하나씩 잡수어 보세유. 산골이라 뭐가 있어야지유.”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고구마 그릇을 받아들고 그중 한 개를 집어서 노인에게 드리고 정화스님에게도 한 개를 집어 준다. 그때서야 청년을 바라봤다. 얼굴이 반듯하고 귀티가 있어 보인다. 선이 곧은 흰 얼굴에 오뚝하고 큼직한 코와 맑은 눈빛은 강한 인상을 주고, 얼굴에는 잔잔한 웃음을 띠워 표정도 매우 밝아 보였다. 정화스님은 이렇게 남자와 같이 마주앉아 본 일이 없다. 매우 어색한 자리였으나 부끄러우면서도 왠지 싫지는 않았다.
“그래, 젊은이는 무엇을 하였소.”
“아, 예 저는 학교 선생이예요.”
싱긋 웃는 얼굴이 장난끼마저 있는 듯하다.
“아! 스님은 참 아름답습니다.”
젊은이는 짐짓 정색인 듯이 말을 하고 싱긋 웃는다. 정화스님은 놀라 얼굴을 붉히며 마음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 이는 진심이 아닌 것을’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표정은 약간 상기되었다.
어려 여덟 살에 천애 고아로 입산하였으니 절에는 묵언(黙言)의 생활 속에서 어여쁘다, 아름답다, 곱다는 표현은 없다. 언제나 미망(迷妄)의 오고(五苦)를 끓기 위해서는 침묵과 정진만이 구도의 길이다.
그런데 자리가 약간은 불안하면서도 눈길은 짐짓 청년의 얼굴을 살짝 흘깃 지나치면서 본다. 남자는 이런 것이구나. 매우 씩씩하고 힘이 넘쳐 보인다.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된 감정이 담겨져 있다. 귀티가 나는 웃음 띤 밝은 표정은 쑥스러움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절에서는 남정네를 바라본 일이 없다. 그것은 ‘이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존재이기나 하듯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청년은 무료한 이 시간을 메우기나 하려는 듯 그가 읽은 책이야기를 한다. 문학이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역사와 문학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강의나 하듯 그의 말은 계속된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듯는 듯 조는 듯하다. 불가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나 언어는 쓰지를 않는다. 불교공부 이외에는 문학, 사상, 철학, 예술세계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듣지를 못하였다. 아마 그는 공부를 많이 하였나 보다.
산속 밤은 깊어 가는데 버스는 오지를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밤샘을 하여야 하는가 보다. 그 청년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때론 불교 이야기도 한다.
어느새 노인과 주인 노파는 잠이라도 든 듯하다. 사방은 고요한데, 그의 말은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고, 듣기에도 부드럽다. 학교 선생님이라 많이 알고, 이렇게 잔잔한 이야기도 잘하는가 보다.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의 말은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신기한 천상의 음악을 듣는 듯 마음이 떨리고 저려오며 아프다. 어쩌면 여성이 아닌 남자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을까? 참 신기하기도 하다. 이제까지 남정네에 대한 무시와 별세계의 인간이겠거니 하는 생각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정화스님의 마음은 뭉클하게 가슴이 저려온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하던 무엇이, 마음에 혼란을 일으킨다. 간절한 그리움 같은 그 어떤 느낌이 온몸의 힘을 빠지게 한다. 밤은 점차 깊어 가는데 그의 말은 그칠 줄을 모른다. 정화스님은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신경과 귀는 그의 말에 집중하고 눈은 그의 얼굴에서 뗄 수가 없다.
큰 스님의 얼굴도 나타나고, 법당의 부처님도 스쳐 지나가니 마음의 안정을 얻을 길 없다.
“나무관세음보살.”
번민(煩悶)과 고(苦)의 원인은 욕망 때문이고, 욕망은 곧 고(苦)를 낳게 한다.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고(苦)의 원인이 된다. 생사(生死)는 윤회(輪廻)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려 자신을 버리고 욕망을 소멸케 해야 한다. 존재치 않은 무아(無我)의 실천의 길은 곧 지도피안(智到彼岸)을 이르는 것이니 이 또한 집착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아, 나는 무엇인가? 열여덟 나이의 내가 흔들림인가? 이 우주의 생성에 있어서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치 않을 수 없고 창조주의 괘도에서 나의 존재 즉 ‘존재의 인정’과 ‘무아로서의 존재는 우주의 범주 안에서 결코 다름이 아닌 하나일 수밖에 없다.’
새벽녘에 대체 버스가 올 때까지 청년 선생님의 이야기는 밤을 새워 계속되었고, 스님은 빤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청년 선생님은 군복무를 잘하였는지, 그리고 제대를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까지 남자와 같이 밤을 새워 본 일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그의 말은, 표현은, 감정은, 알지 못하는 천상세계에서의 이야기인 듯 잊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 오래도록 정화스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때론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 머리를 흔들어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럴수록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