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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5

5

 

두네치카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상대로 운명적인 결판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의 마음은 술 깬 뒤처럼 개운치가 않았다. 그가 참을 수 없이 불쾌하게 느낀 것은 어제만 해도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럴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던 그 사건을, 아제 와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점점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저이다. 상처 입은 자존시의 검은 뱀은 밤새도록 그의 심장의 피를 빨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쥔은 곧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밤사이 담즙이 온몸에 배지나 않았는지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은 아직 무사했다. 최근에 조 살이 오른 의젓하고 허여멀쑥한 자기 얼굴을 바라본 그는 어쩌면 좀 더 훌륭한 신붓감을 딴데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잠시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옆에다 퉤하고 침을 뱉었다. 이 행동을 본 그의 동거인인 젊은 친구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자트니코는 입가에 조소하는 듯한 무언의 미소를 띠엇다. 이 미소를 눈치챈 그는 곳 마음속으로 이것을 이 젊은 친구와의 대차계산에 포함시켰다. 최근 이 친구에 대한 그의 계산서 액수는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특히 어제의 면담 결과를 이 사나이에게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증오심은 한층 더 배가되었다. 그가 흥분한 나머지 말이 많아짐에 따라 그만 홧김에 지껄여보렸는데, 어제로선 두 번째 실책이었던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날 아침엔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불쾌한 사건만 잇달아 일어났다. 대법원에서 여태껏 온 힘을 기울여온 재판 사건의 실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화나게 한 것은 눈앞에 다가온 결혼을 생각해서 그가 세를 얻은 다음 자기 돈으로 수리까지 한 집의 주인이었다. 이 집주인은 벼락부자가 된 독일인 직공이었는데, 바로 얼마 전에 체결한 임대차계약을 좀처럼 해지해주지 않고,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거의 새 집같이 수리한 집을 그냥 돌려주겠다는데도 계약서에 적힌 위약금을 전액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가구점 주인 역시 예약만 하고 아직 가져오지 않은 가구의 선금을 1루블도 반환하려 하지 않았다. '가구 때문에 억지로 결혼할 순 없잖냐 말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혼자서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엔 다시 한번 최후의 희망이 번득였다. '정말 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이 영영 끝나버린 것일까? 또 한번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일일까?' 두네치카를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다시금 유혹을 받아 쑤시는 듯이 아파왔다.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이 순간을 꾹 참았다. 만약에 지금 당장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만으로 라스콜니코프를 없애버릴 수가 있다면,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서슴지 않고 실행했을 것이다.

'실책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모녀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그는 침울한 기분으로 레베쟈트니코프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에잇, 빌어먹을, 나는 왜 이토록 인색한 짓을 했을까? 전혀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 아니냐! 나는 그들에게 좀 더 가난을 맛보게 한 뒤에 나를 구세주같이 섬기게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 .만약 내가 그 사이에, 예를 들어 결혼 비용이라든가, 여러 가지 함이라든가, 화장 세트라든가, 보석이라든가, 옷감이라든가 하는 시시한 물품을 크노프 상점이나 영국 상사에서 1500루블어치만 사 보냈더라도 이번 일은 아주 깨끗하게. 확정적으로 결말이 났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렇게 간단히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 족속들은 파혼할 경우엔 선물도 돈도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일단 받은 것은 반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아깝기도 한 법이거든! 그리고 양심상으로도 꺼림칙할 테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돈을 아끼지 않고 친절히 대해주던 사람을 갑자기 뿌리칠 수는 없는 일이지.! 이만저만 실수가 아니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또다시 이를 갈면서 자기 자신을 바보라고 욕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그는 집을 나갈 때보다 곱절이나 독이 오른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추도식 준비는 어느 정도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어제 이미 이 추도식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자기도 초청을 받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이야기는 일절 귀담아듣지를 않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없는 사이에(그녀는 묘지에 가 있었다) 식사 준비가 된 탁자 주변을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레페베흐젤 부인한테 급히 찾아간 그는, 추도식이 성대히 거행될 예정이어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초대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는 고인과 전혀 안면이 없던 사람까지 끼어 있어고, 심지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싸움을 한 사이인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쟈트니코프까지 초대되었다. 그리고 끝으로 표트르 페트로비치 자신도 그저 보통으로 초대된 정도가 아니라, 이 집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손님으로 그의 참석이 매우 고대되고 있다고 했다. 또 그렇게 말하는 리페베흐젤 부인 자신도 지금까지 여러 가지 불쾌한 일이 많았음에도 정중히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흐뭇한 만족감에서 주인 대신 부지런히 일을 돌보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복이긴 했지만 아래위 새 비단옷에다 굉장히 치장을 하고서 의기양양해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과 정보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그 어떤 생각을 품게 했다. 그래서 그는 다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자기 방, 즉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의 방으로 돌아왔다. 다름 아니라 초대된 사람들 가운데 라스콜니코프도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는 무슨 까닭인지 이날 아침 줄곧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 사나이와 표트르 페트로비치 사이엔 일종의 기묘한, 그러나 어떤 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관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이 집에서 살게 된 첫날부터 그를 매우 경멸하고 증오했지만, 동시에 그를 약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이 사나이 집에 숙소를 정한 것은 단지 인색한 경제관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시골에 있을 때부터, 전에 자기 제자였던 안드레이 세묘느이치가 가장 전위적인 젊은 진보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흥미 있는 전설적 단체의 중요한 역할까지 맡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 소문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위력 있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인간을 경멸하며 또 만인을 폭로하는 단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특수한, 그러면서도 매우 막연한 공포였다. 물론 그 자신은 아직 시골에 있었을 때의 일이라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해선 개략적인 정도나마 정확한 관념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회지, 특히 페테르부르크에는 무슨 진보주의자라든가, 허무주의자라든가, 폭로주의자라든가, 기타 무슨 주의나 파()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명칭의 뜻이며 내용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곡해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몇 해 동안 그가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은 이 폭로로서, 이것이야말로 끊임없는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더구나 그 불안은 때마침 그가 자기 사업을 페테르부르크에 옮기려고 공상하던 때라 더욱 과장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마치 어린애가 겁을 집어먹듯이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몇 년 전에 그가 아직 시골에서 이제 겨우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까지 그가 기를 쓰고 매달렸던 현의 유력자이며 그의 보호자이기도 했던 인물이 무참하게 폭로주의에 희생된 경우를 두 번이나 보았다. 하나는 추문을 퍼뜨린 정도로 결말이 났으나, 또 하나는 하마터면 큰 파탄을 일으키게 될 뻔했다. 그래서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그 방면의 진상을 조사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 선수를 쳐서 '우리의 젊은 세대'에 아부하기로 결심했다. 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 그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라스콜니코프를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이미 들은 풍월로 판에 박은 유행어를 그럭저럭 막히지 않고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아주 단순한 속인(俗人)이라는 것을 재빨리 간파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신념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고, 또 원기를 북돋아주지도 못했다. 설사 다른 진보주의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바보들이라고 확신했다 해도 그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 모든 교의라든가, 사상이라든가, 시스템이라든가 하는 것은(이런 것을 무기로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그에게 대들긴 했지만) 그에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한시바삐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는 무엇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 과연 그 사람들에겐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 과연 그 자신이 두려움을 느껴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 만일 자기가 무슨 일이라도 꾸민다면, 과연 그들이 그것을 폭로할 것인가, 폭로하지 않을 것인가? 폭로한다면 대체 어떤 점을 노릴 것인가, 그리고 최근에는 주로 어떤 점에서 폭로를 자행하고 있는가? 그뿐만 아니라 만일 그들이 실제로 어떤 힘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든지 그들에게 속임수를 써서 잽싸게 그들을 농락할 수 없는가? 그것은 과연 필요한 일인가, 아닌가? 이를테면 그들의 힘을 역이용함으로써 자기의 출세에 도움이 되게 할 수는 없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앞에는 몇백 가지 의문이 산적되어 있었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는 어느 관청에 근무하고 있는 청년인데, 선병질(腺病質)인 작달만 한 몸집에 머리털은 이상할 정도로 노란 데다, 커틀릿 같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그것을 자랑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거의 언제나 눈을 앓고 있었다. 마음씨는 꽤 부드러운 편이었으나 말은 매우 자신만만해서 때로는 굉장히 거만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초라한 풍채하고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언제나 우스꽝스런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리페베흐젤의 하숙인 중에는 꽤 신용이 있는 편이었다. 즉 술주정도 하지 않거니와 방세도 꼬박꼬박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도 실제론 어딘지 좀 바보 같은 데가 있었다. 그가 진보주의자와 '우리 젊은 세대'에 합류한 것은 오로지 그 정열 때문이었다. 이 사나이는 경솔하게 최신 유행 사상에 부화뇌동해서 곧 그것을 속화(俗化)해버리고, 때로는 성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대번에 희화화하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수많은 속물과 나약한 팔삭둥이와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식쟁이 등의 잡다한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베쟈트니코프는 무척 호인이면서도 동거인이며 옛 후견인이기도 한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어느 정도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쌍방에서 서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비록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기는 해도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자기를 속이면서 속으로 은근히 경멸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푸리에(프랑스의 사회주의자, 1772-1827)의 체계와 다윈의 학설 등을 설명해주려고 시도했으나, 상대방은 특히 최근에 와서 어쩐지 냉소적인 태도로 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최근에는 험담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표트르 페트로비치 쪽에서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간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레베쟈트니코프는 평범한 얼간이일뿐더러 어쩌면 허풍선이인지도 모르며, 자기네 서클에서조차 중요한 일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저 들은 풍월로 조금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말에 조리가 없다는 점으로 보아 자기의 선전 사업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하니 폭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말이 나왔기에 겸해서 덧붙여두지만,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지난 한 주일 반 동안(특히 처음에는) 레베쟈트니코프에게서 아주 기묘한 찬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별로 항의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찬사라고 해봐야 예를 들면 머지않아 어느 메시찬스카야 거리에 새로운 '코뮌(공산당 자치단체)'이 창설되면 당신은 기꺼이 그 건설에 진력하리라든가, 또는 결혼한 그달부터 두네치카가 따로 애인을 만들 생각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으리라든가, 또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도 세례를 받게 하지 않으리라는 등 대개가 이따위 수작이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언제나의 버릇대로 자기 성질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든 항변하려 들지 않았고, 또 어떤 식으로 칭찬을 하든 묵묵히 허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모든 종류의 찬사를 좋아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날 아침 5푼 이자가 붙은 증권을 몇 장 바꿔온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탁자 앞에 앉아서 지폐와 채권 다발을 계산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거의 돈이란 걸 만져본 일이 없는 레베쟈트니코프는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그 돈뭉치에 무관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경멸하는 눈으로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레베쟈트니코프가 이런 큰돈을 보고도 실제로 태연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또 상대방대로 서글픈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자기를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를뿐더러, 자신의 무력함과 두 사람 사이에 큰 거리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돈뭉치를 풀어헤치며 자기 마음을 간질이고 조소할 기회가 온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레베쟈트니코프는 표트르 페트로비치 앞에서 새롭고 특수한 '코뮌' 건설이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테마를 늘어놓기 시작했으나, 오늘따라 상대방이 전에 없이 짜증을 내면서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판알을 튀기는 사이사이에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짤막한 항의와 비평에는 너무도 뻔한 의식적인 모욕과 조소가 넘쳤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레베쟈트니코프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정신 상태를 어제 두네치카와 파혼한 일 때문이라 생각하고, 한시바삐 화제를 그리고 가져가려고 서둘렀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 자기 선배의 실망을 위로해 줄 수 있을뿐더러 장래의 정신적 발전에 '반드시' 도움이 될 만한 진보주의적이며 선전 가치가 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거기선 어떤 추도식을 한다는 걸까? ... 과부 집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에서 끊어버리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전혀 모르시는 것 같은 말투군요. 바로 어제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런 모든 종교적 의식에 관해 내 생각을 전개시키지 않았느냐 말이에요...그리고 그 여자는 당신도 초대했을 텐데요, 나도 들었어요. 더구나 당신은 어제 그 여자와 직접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나는 설마 그 바보 같은 가난뱅이 여자가 또 다른 바보 놈팡이한테서 받은 돈을 추도식에다 몽땅 써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 지금도 그 옆을 지나가다가 깜짝 놀랐을 정도니까. 술이다 뭐다 해서 굉장히 차리고 있더군...손님도 많이 초대한 모양인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그는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듯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화제를 자꾸 그족으로 유도해갔다. "? 나도 초대되었다고?" 얼굴을 쳐들며 갑자기 그는 이렇게 덧붙었다.

"그건 언제 이야긴가? 나는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나는 안 갈 테니까. 그런 데 가서 뭘 하느냐 말이야? 나는 다만 어제 지나는 길에 그 여자와 잠깐 이야기했을 뿐인데.... 가난한 관리의 과부로서 일시 보조라는 형식으로 1년분 봉급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야. 아마 그래서 그 여자가 나를 초대한 게로군? , !"

"나도 역시 안 갈 생각입니다"하고 레베쟈트니코프는 말했다.

"말할 것도 없겠지! 제 손으로 때렸으니까 꺼리는 것도 당연하지. , , !"

"누가 때렸습니까? 누구를?" 레베쟈트니코프는 찔끔해서 얼굴까지 붉혔다.

"자네지 누구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한 달 전에 때린 건 자네지 누구냐 말이야! 어제 그 여자한테서 들었지... 그것이 곧 자네들의 신념이라는 거로군!... 그렇다면 그 여성 문제 논의도 의심스러운걸, , , !"

그렇게 말하자 마음이 후련해진 듯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다시 주판알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런 건 다 터무니없는 중상입니다!" 이 문제를 항상 겁내고 있던 레베쟈트니코프는 불끈 성을 내며 덤볐다. "그건 전혀 사실과 달라요! 그건 이야기가 달라요... 당신이 잘못 들은 겁니다. 정말 엉터리없는 소문입니다! 그때 나는 다만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에요. 그 여자가 먼저 나한테 덤벼들어 마구 할퀴려고 했으니까요...그 여자는 내 구레나룻 한쪽을 몽땅 뽑아버렸거든요.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 몸을 지키는 것쯤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나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폭력을 행사하는 건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게 내 주의죠. 그쯤 되면 전제주의와 다를 게 뭡니까? 멍청히 그 옆에 서 있어야 하나요? 나는 그저 그 여자를 떼밀었을 뿐이에요."

", , !" 루쥔은 능글맞은 웃음을 이어갔다.

"당신은 자기 일로 화나고 짜증이 나니까 이렇게 덤비는 거겠죠.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여성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만약 여성이 모든 점에서 체력가지도 남자와 동등하다고 하면 -이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그 경우에도 평등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하긴 그 뒤로 잘 생각해 본 결과 그런 문제는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왜냐하면 싸움이란 것은 있어서는 안 되며, 게다가 미래 사회에서는 그런 걸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물론 싸움하는 데서 평등을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아직도 싸움이라는 건 존재합니다. 장차는 없어지겠지만 아직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 자구 이야기가 탈선해버린단 말이에요! 내가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그런 불쾌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내 주의 때문에 가지 않는 겁니다. 추도식이니 뭐니 하는 추악한 편견에 끼어들기가 싫기 때문이죠. 그래요! 그야 가도 상관은 없겠지요. 비웃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사제들이 오지 않는다더군요. 그렇잖다면 나도 꼭 가겠는데."

"그럼 남의 집에 초대받고 가서 먹으라고 내놓은 음식상에다가, 그리고 자기를 초대해준 사람들에게까지 그 자리에서 침을 뱉겠다는 거로군? 안 그런가?"

"절대로 침을 뱉지는 않습니다. 다만 항의하는 것뿐이죠. 나는 보람 있는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겁니다. 계몽과 선전을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누구든지 계몽하고 선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하면 할수록 좋을지 모릅니다. 나는 사상을, 사상의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 씨에서 사실이 생겨나는 거죠. 내가 왜 그들을 모욕하겠습니까? 하기야 처음엔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내가 유익한 일을 했다고 자기들도 깨닫게 되겠죠. 우리 동지인 체레비요바는, 지금 코뮌에 가입하고 있는 부인입니다만, 가정을 뛰쳐 나와서...어떤 남자에게 몸을 맡겼을 때, 자기 양친에게 편견에 갇혀 살기는 싫으니까 자유 결혼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그러나 그건 너무 난폭하다, 자기 부모에겐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대해야 하며 편지도 좀 부드럽게 써야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건 다 어리석은 생각이며, 부드럽게 쓸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강경히 항의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저 바렌츠 같은 여자는 7년이나 남편과 같이 살았지만, 마침내는 두 아이를 버리고 편지로 남편에게 이렇게 선고했습니다. '나는 당신하고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자각했습니다. 당신은 코뮌이라는 방법에 의한 전혀 별개의 사회조직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리지 않고 속여왔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최근에 그것을 어떤 훌륭한 사람한테서 들었으므로 그분에게 몸을 맡기고 함께 코뮌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을 기만하는 것은 분명 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솔직히 알려드립니다. 당신 문제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나를 다시 데려갈 생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때는 이미 늦었으니까요.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이런 종류의 편지는 이런 식으로 써야 하는 겁니다!"

"그 체레비요바라는 여자는 자네가 세 번째 자유결혼을 했다고 말하던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아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제 겨우 두 번째지요! 그러나 설사 네 번째든 열다섯 번째든 그런 건 잠꼬대 같은 소립니다! 내가 만일 양친이 죽고 없다는 걸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입니다. 만일 양친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야말로 강경한 반항을 시도하여 두 사람을 골탕 먹였을 텐데, 하고 몇 번이나 공상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일부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와선 '떨어져나간 빵 조각' 격으로 헛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틀렸어요!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어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을 텐데! 정말이지 아무도 없는 게 유감천만이에요!"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고? , , ! 아무튼 그건 자네 마음대로겠지만"하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말을 막았다.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네는 그 죽은 관리의 딸을 알고 있겠지? 그 초라하고 허약한 여자 말이야! 그 여자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인가?"

"그게 도대체 어쨌단 말입니까? 내가 보기엔, 즉 나 개인의 신념으로는 그 여자야말로 여자로서 가장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어째서 그 여자가 나쁘다는 말입니까? 그게 바로 distinguons('차별'이라는 뜻)를 말하는 겁니다. 현재 사회에서는 물론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겠죠. 강제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미래 사회에서는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현재도 그 여자는 그런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자금, 이를테면 자본으로서 그것을 마음대로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물론 미래 사회에선 그런 자본도 불필요하겠지만, 그 여자의 역할은 별개의 의미를 지니게 되어 정연한 합리적 조건을 얻게 될 겁니다. 그런데 소피야 세묘노브나 한 개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현재 나로서는 그 여자의 행위를 사회제도에 대한 인간적인 반항으로 보고 있어요. 그 때문에 나는 그 여자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를 보기만 해도 절로 기쁨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 집에서 그 여자가 뛰쳐나간 건 바로 자네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레베쟈트니코프는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것도 중상입니다!"하고 그는 외쳐댔다.

"진상은 전혀 달라요, 전혀 달라요!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모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어댄 소리예요! 그리고 나는 결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노린 적이 없어요. 그런 야심은 털끝만큼도 없이, 오직 그 여자에게 반항 의식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고 그 여자의 정신적 발달을 바랐을 뿐입니다...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반항심뿐입니다....게다가 소피야 세묘노브나 자신이 이 집엔 더 있을 수 없게 된 거죠!"

"코뮌에라도 들어가라고 권고했던가 보군?"

"당신은 시종 빈정거리기만 하는데, 그건 매우 졸렬한 생각입니다. 실례지만 주의해드립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코뮌에 그런 역할은 없어요. 코뮌이란 그런 역할을 없애기 위해 설립된 겁니다. 코뮌이 되면, 이 역할은 현재의 본질을 완전히 변질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선 우월했던 것도 저기선 현명한 것이되고, 여기 현재 상태에선 부자연스러운 것도 거기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세상만사는 인간이 어떤 상태, 어떤 환경에 있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겁니다. 모든 것은 환경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인간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하곤 지금도 원만한 교제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그 여자가 아직 한 번도 나를 자신의 적이라든가 모욕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됩니다. 그렇고말고요! 나는 그 여자에게 코뮌 가입을 권고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 입각하는 겁니다! 당신은 뭐가 우습습니까? 현재 우리는 종전보다 훨씬 광범한 기초 위에서 우리 자신의 특수한 코뮌을 조직 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념에서 한 걸음 더 앞선 셈이죠.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부정합니다! 만약에 도브롤류보프(러시아의 유명한 사회 문예 비평가, 1836-1861)가 관 속에서 소생해 나온다면 나는 그와 한바탕 논쟁을 벌이겠습니다! 벨린스키(러시아의 1급 문예비평가, 1811-1848)까지도 납작하게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계속 계발하겠습니다. 그 여자는 실로 아름다운 성질의 소유자예요!"

", 결국 그 아름다운 성질을 이용하자는 거로군. 그렇잖나? , , !"

"아닙니다. 예녜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정반대라고! , ! 말만은 그럴듯하구먼!"

"정말이라니까요? 아니,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감추겠습니까, 안 그래요? 정반대예요.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죠, 내 앞에 나오면 그 여자는 어쩐지 굳어져서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순결하게 수줍어하거든요."

"그래서 자네가 열심히 계발해주고 있단 말이군..., ! 그러니까 그런 수치심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입증시키고 있단 말이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정신적 계발이라는 말을 왜 그토록 저속하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아아, 정말 당신은 아직도 전혀 밑바탕이 되어 있지 않군요! 우리는 여성의 자유라는 걸 요구하고 있는데, 당신 머릿속에 있는 건 오직...나는 여성의 순결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문제는 그 자체부터가 무익한 편견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예 문제 삼지도 않기로 하고 있지만, 그 여자가 나에 대해서 순결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건 충분히 인정해줍니다. 왜냐하면 거기게 그 여자의 의지와 권리의 전부가 있으니까요. 그야 물론 그 여자가 자진해서 '나는 당신을 갖고 싶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내 스스로를 무척 행운아라고 생각하겠죠. 그 처녀는 아주 내 마음에 드는 여자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지금 현재로선 나보다 더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그 여자를 대하고 그 여자의 가치에 존경을 표시한 사람은 아직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여자에게 무슨 선물이라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네는 아직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도 말했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물론 그 여자의 처지가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그건 별문젭니다! 전혀 별문제예요! 당신은 전적으로 그 여자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오해로 경멸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만 보고, 그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인도적인 관찰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아직도 잘 모르십니다. 다만 한 가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은, 그 여자가 최근에 웬일인지 독서를 아주 중지해버리고 나한테도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전엔 자주 빌려 갔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반항에 대한 의욕과 결심은 충분하면서도 - 그 여자는 전헤 그걸 실지로 증명해 보인 적도 있습니다만 - 아직 독립심이, 즉 남의 것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자립심과 반항 정신이 부족해서 어떤 종류의 편견이나...가소로운 습관 등과 깨끗이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여자는 어떤 종류의 문제에 대해선 매우 훌륭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여자는 손에 키스하는 문제를 훌륭히 이해해주었습니다. 즉 남자가 여자 손에 키스하는 것은 불평등의 관념으로서 여자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동지들 사이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어서 나는 곧 그 여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프랑스 노동조합 문제도 그 여자는 열심히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여자에게 미래 사회에서는 타인의 방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는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최근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코뮌'의 단원은 다른 단원의 방에, 그것이 남자의 방이든, 여자의 방이든 어느 때를 막론하고 무상출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데...결국엔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그때 그 방 안의 남자나 여자가 불가피한 생리적 욕구를 수행 중에 있다면 어떻게 하지? , !"

레베쟈트니코프는 화를 벌컥 냈다.

"당신은 언제나 그런 추악한 '생리적 욕구'같은 말만 하시는군요." 그는 증오에 찬 어조로 외쳤다.

", 당신에게 사상 체계를 설명할 때, 그만 경솔하게 그런 추악한 '생리적 욕구'라는 말을 입 밖에 내버린 것이 나로서도 화가 나고 배알이 뒤틀려 죽겠습니다! 제기랄! 그건 당신 같은 사람들에겐 발끝에 돌부리예요. 무엇보다 나쁜 점은 미처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남의 이야기를 일소에 부쳐버리는 버릇입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으스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를 초보자에게 설명하는 데는 그 상대가 충분히 발당해서 방향이 옳게 결정된 후가 아니면 안 된다고요. 어디 한번 말씀해보세요. 시궁창이라고 해서 수치스럽고 경멸할 만한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누구보다 먼저 아무리 더러운 시궁창이라도 깨끗이 치워 보일 용의가 있습니다! 그건 자기희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기엔 단지 노동이 있을 뿐입니다. 사회를 위한 유익하고 고상한 활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건 다른 어떤 활동 못지않은, 예를 들어 라파엘이나 푸시킨 등의 활동보다 훨씬 고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유익하니까요."

"그래, 더 고상하겠지, 고상하고 말고, , , !"

"더 고상하다는 건 도대체 뭡니까? 인간의 활동을 정의하는 그런 표현은 나로서 알 수 없습니다. '더 고상한'이라든가, '더 관대한'이라든가 하는 건 모두 무의미합니다. 어리석어요. 편견에 젖은 낡은 말들입니다. 나는 그런 걸 부정합니다! 인류를 위해서 유익한 건 무엇이나 다 고상해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유익이라는 말뿐입니다. 어서 마음대로 키득거리세요. 그러나 역시 사실에는 틀림이 없으니까요!"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는 이미 계산을 끝내고 돈을 간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얼마의 돈을 무슨 까닭인지 그냥 탁자 위에 남겨두었다. '시궁창 문제'는 그 자체가 저속한 성질의 문제였는데도 이미 여러 차례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그 젊은 친구 사이에서 불화와 논쟁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스운 것은 레베쟈트니코프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는 점이다. 한편 루쥔 쪽은 언제나 장난삼아 했는데, 오늘은 유달리 레베쟈트니코프를 약 올리고 싶어 했다.

"당신은 어제의 실패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서 공연히 나한테까지 화풀이를 하는 거예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끝내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그 '독립성'과 반항 정신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표트르 페트로비치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반대할 용기가 없었다. 대체로 그는 아직도 상대방에 대해서 오랫동안 습관화된 일종의 존경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보다 한 가지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하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거만하고 무뚝뚝한 어조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챘다. "자네가 할 수 있을지...아니, 그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군. 자넨 지금 말한 젊은 여자와 정말 그렇게 친밀한 사이인가? 그렇다면 지금 잠깐 이 방으로 불러줄 수 있겠나? 다들 묘지에서 돌아온 모양인데... 저렇게 소란스럽게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잠깐 만날 일이 있어서 그래, 그 처녀하고."

"대체 무슨 일로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 좀 볼일이 있어서. 나는 곧 여기를 떠날 생각이라 그 여자에게 좀 알려두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물론 자네가 그동안 여기 같이 있어도 상관없겠지. 아니, 차라리 같이 있어주는 편이 좋겠군.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무슨 오해를 할지 모르니까."

"나는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습니다...그냥 물어봤을 뿐이죠. 만일 용건이 있다면 그 여자를 부르는 것쯤 문제가 아닙니다. 곧 갔다 오죠. 제발 안심하세요, 방해는 하지 않을테니까요."

과연 5분쯤 지나자 레베쟈트니코프는 소네치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매우 놀란 얼굴을 하고 언제나처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럴 때면 언제나 겁에 질리곤 햇고, 새로운 얼굴이나 새롭게 사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버릇은 그전부터, 어린 소녀 시절부터 그랬지만 요새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던 것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정답고 상냥하게' 소냐를 맞았으나, 거기엔 어색한 친근감 같은 것이 엿보였다. 하긴 그러한 태도는 표트르 페트로비치로 본다면 자기처럼 명예도 있고 의젓한 사나이가 소냐같은 나이 젊은, 어떤 의미에선 흥미 있는 여자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기도 했다. 그는 급히 그녀에게 '원기를 돋워주려고' 애쓰면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기 맞은편에 앉게 했다. 소냐는 의자에 앉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엔 레베쟈트니코프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돈을 보고, 다음엔 또다시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갑자기 시선을 옮기고는 마치 못박힌 듯이 그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문 쪽으로 나가려 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일어나서, 소냐에게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문가에서 레베쟈트니코프를 멈춰 세웠다.

"라스콜니코프는 거기 있던가? 와 있어?"하고 그는 속삭이듯 물었다.

"라스콜니코프요? , 거기 있더군요...왜 그러시죠? 거기 있었어요. ...방금 들어왔어요. 내 눈으로 봤습니다.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나는 더욱 자네가 여기 우리와 함께 남아주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저 ...처녀와 단둘이 있지 않도록 말일세. 별다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무슨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니까. 나는 라스콜니코프가 저기서 이상한 소릴할까 봐 그러는 거야...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 알겠습니다, 알겠어요!"레베쟈트니코프는 이내 알아챘다.

"그래요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어요....나 개인의 신념에 의하면 당신의 걱정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아무튼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여기 남기로 하죠. 나는 이 창 옆에 서 있을 테니까 당신들에게는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나는 확실히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소파로 돌아가서 소냐와 마주 앉았다. 그는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엄숙한, 약간 엄격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마치 '이봐, 너도 쓸데없는 걱정은 말도록 해, 아가씨'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냐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우선 당신 어머니한테 사과 말씀을 전해주십시오...확실히 그렇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당신에게 어머니가 되는 분이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자못 엄숙하면서도 꽤 친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가 매우 우호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한 것 같았다.

",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제 어머니되는 분이에요." 소냐는 겁먹은 표정으로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데 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점을 어머니에게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모처럼 친절하게 초대해주셨는데, 나는 댁의 다과회에 ...아니,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이금 곧." 소네치카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녀가 너무 단순하고 예의에 익숙지 못한 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만류했다.

"당신은 나를 잘 모르는군요, 소피야 세묘노브나. 내가 이런 대수롭잖은 나 개인의 일로 당신 같은 분을 일부러 불러서 수고를 끼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내 목적은 딴 데 있어요."

소냐는 급히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잿빛(25루블짜리)과 무지갯빛(100루블짜리) 지폐가 또다시 눈에 어른거렸으나, 그녀는 얼른 거기서 눈을 들어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얼굴을 보았다. 남의 돈에 눈을 준다는 것이 특히 그녀 같은 입장에선 무례한 행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왼손에 쥐고 있는 금테 안경과, 같은 손 가운뎃 손가락에 끼고 있는 크고 묵직해 보이는 무척 아름다운 황색 보석 반지에 시선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급히 눈을 돌려버렸으므로 하는 수 없이 또다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전보다 더 엄숙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어제 지나던 길에 우연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만나서 한두 마디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만, 그 한두 마디로 그분이... 부자연한 상태에 계시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부자연한 상태에 있어요"하고 소냐는 황급히 말을 받았다.

"또는 더 간단히,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병적 상태죠."

", 더 간단히, 알기 쉽게 ...말씀대롭니다. 병적 상태에 있어요."

"그렇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분의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운명을 예견하고 인도적 감정과 그리고 말하자면 그녀에 대한 동정심에서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렸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그 가엾은 가족들은 지금 오직 당신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 있는 것 같더군요."

"실례지만"하고 소냐는 갑자기 일어났다.

"당신은 어제 어머니에게 연금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셨다면서요? 어머니는 어제부터 나한테, 당신이 연금이 나오도록 힘써 주신다는 말을 하고 계세요. 그게 정말인가요?"

"아니, 결코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걸 기대한다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지요. 나는 다만 복무 중에 사망한 관리의 미망인에게 지급되는 일시적 연금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것도 적당한 연줄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돌아가신 부친께선 연한을 다 채우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엔 전혀 출근도 안 하신 모양이더군요. 그러니까 설사 희망이 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꿈같은 이야깁니다. 왜냐하면 실제 이 경우에는 보조금을 받을 아무런 권리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벌써 연금 같은 걸 생각하신다니..., , ! 참 빈틈없는 부인이시군요!"

"그래요, 연금 같은 걸 어떻게...그건 그분이 호인이라서 남의 말을 잘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좋아서 무엇이든지 다 믿고 말아요. 그리고......머리가 좀 이상해져서...그래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소냐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다.

"실례지만, 아직 내 말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 그랬던가요..."하고 소냐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 앉으세요."

소냐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 미망인이 불쌍한 어린애를 데리고 저렇게 지내는 걸 보니, 나는 아까도 말했듯이 무엇이든 힘자라는 데까지 도와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내 능력에 알맞은 정도로 도와드리려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만요. 예를 들면 그분을 위해서 의연금을 모은다든가, 아니면 자선 제비뽑기를 주최한다든가...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흔히 이런 경우에 친한 사람이든 제3자든 간에 불행한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기획하는 일이죠. 실은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으니까요."

", 좋으신 말씀입니다...당신의 후의에 대해서는......" 뚫어질 듯이 상대방을 주시하면서 소냐는 분명치 않은 어조로 말했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얘긴 나중에 다시...아니 오늘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저녁에 다시 만나서 여러 가지로 상의한 다음 이른바 기초 작업을 시작합시다. 어떨까요, 7시경에 다시 이리 와주십시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도 우리 계획에 동참해주리라 믿습니다만. 그러나 미리 꼭 한 가지 말씀을 드려둘 일이 있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실은 그 때문에 일부러 당신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즉 돈은 일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맡겨선 안 됩니다. 우선 위험하니까요. 그 증거로...오늘의 추도식을 보십시오. 당장 내일을 위한 빵 한 조각도 없고 신발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궁색한 형편이면서 오늘은 자메이카 럼주니, 마데이라 포도주니, 커피니 하고 마구 사들이고 있으니 말이오. 나는 지나는 길에 보았습니다. 당장 내일이면 마지막 빵 한 조각까지 모조리 당신에게 의지해야 할 형편이면서 말입니다. 그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연금 모금에 대해서도,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저 불행한 미망인에겐 돈 문제를 알리지 말고 오직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는 건 오늘 뿐일 거예요...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니까요...어머니는 그저 공양을 올리고 싶고, 훌륭한 추도식을 하고 싶다는 일념밖에 없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퍽 현명한 분이세요. 물론 그 일은 어떻게든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는 그저 마음속으로부터...가족들도 모두 당신께...하느님께서도 당신을....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소냐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선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나 개인의 분수에 알맞은 금액을 내놓을 테니 받아주십시오. 거듭 부탁합니다만, 절대 내 이름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자 그럼 이걸...나 자신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이것밖엔 못합니다만...."

이렇게 말하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10루블 지폐를 반듯하게 펴서 소냐에게 내밀었다. 소냐는 그것을 받아 들자 확 얼굴을 붉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어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갑자기 작별 인사를 시작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소냐를 문까지 전송했다. 흥분과 피로에 지친 그녀는 가까스로 방에서 나와 몹시 당황한 빛으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로 돌아갔다.

레베쟈트니코프는 이 일막극이 연출되는 동안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창 옆에 서 있거나 방 안을 거닐거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냐가 방에서 나가자 그는 급히 표트르 페트로비치한테 다가가서 정중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 귀로 듣고 모든 것을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하신 일은 고결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인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감사를 피하려고 하셨어요. 나는 봤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내 주의(主義)로는 개인적인 자선에 동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선은 악을 근절할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배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의 태도를 보고 만족을 느꼈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정말 내 마음에 드는 행위였습니다."

", 변변치도 못한 일인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약간 상기도니 얼굴로 레베쟈트니코프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처럼 어제 일로 모욕을 당하고 분개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불행한 사람을 동정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비록 자기 행동으로 사회적인 과오를 범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존경은 받을만 합니다! 나는 말이죠, 표트르 페트로비치,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당신의 사회관으로 미루어 볼 때...아아! 당신은 사회관이 얼마나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어제의 실패가 얼마나 당신을 흥분시켰느냐 말입니다." 사람 좋은 레베쟈트니코프는 또다시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호감이 커지는 것을 느끼면서 탄성을 올렸다.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당신은 그 결혼이 꼭 필요합니까, 그 합법적 결혼이? 표트르 페트로비치, 무엇 때문에 당신은 결혼의 합법성이 필요하죠? 내가 이런 말을 해서 화가 나면 나를 때려도 좋습니다, 나는 그 결혼이 파기되어 당신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당신이 인류를 위해서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 것을 기뻐한단 말입니다. , 기뻐하고 말고요! ..., 이게 나의 사심 없는 실토입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자네들이 말하는 이른바 자유결혼으로 뿔(아내의 부정을 뜻함)을 나게 하거나 딴 사내의 자식을 기르는 그따위 짓을 하기 싫기 때문이야. 내가 합법적 결혼을 필요로 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란 말일세." 무슨 대답이든 해야겠기에 루쥔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는 무언가 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식이라고요? 당신은 자식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셨지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마치 진군 나팔 소리를 들은 군마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이건 하나의 사회문젭니다. 가장 중요한 문젭니다. 그건 나도 동감이에요. 그러나 아이에 관한 문제는 다른 해결 방식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을 암시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아이를 부정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아이 문제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뿔에 대해서 논해봅시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건 내가 좋아하는 테마는 아닙니다. 저 추악한 경기병식의 푸시킨적 표현은 미래의 사전에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도대체 뿔이라는 건 뭡니까? 오오, 이게 무슨 착각입니까! 도대체 무슨 뿔입니까? 이런 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반대로, 자유결혼에는 그따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뿔이라는 건 오직 합법적인 결혼의 자연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합법적 결혼에 대한 수정이요, 반항입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금도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언젠가 - 그런 우연한 행위를 할 것이라 가정하고 - 합법적 결혼을 한다면, 그때 나는 오히려 당신이 저주하는 아내의 뿔은 환영할 겁니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데 그쳤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왜냐하면 당신은 훌륭하게 반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웃으시는군요? 그건 아직도 편견을 버릴 힘이 없다는 증겁니다! 하긴 나도 합법적 결혼을 한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다만 쌍방이 서로 천시하는 더러운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결혼에서처럼 그 뿔이 공공연한 것이 되어버리면 이미 뿔 따위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뿔이라는 명칭 자체까지 없어져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부인은 그 행위로써 당신을 존경하고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인은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내의 행복을 저해하지 안는 사람, 새로운 정부가 생겼다고 해서 아내에게 복수 따윈 하지 않는 정신적 발달을 완성한 사람으로 인정한 셈이니까요. 아아, 나는 이따금 공상합니다...만약 내가 시집을 간다면, , 내가 무슨 소릴 하지! 만약에 내가 결혼을 한다면 - 자유결혼이든 합법적 결혼이든 마찬가지지만 - 그리고 아내가 언제까지나 정부를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자진해서 아내에게 정부를 끌어다 붙여줄 겁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줄 테죠.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하지만 그보다 더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나를 존경하는 것이오...알겠소?' 어떻습니까, 내 말이 틀립니까?"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별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실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레베쟈트니코프도 그것을 눈치챘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흥분한 표정으로 손을 비비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나중에 이 모든 것을 상기하고, 뭔가 마음에 짚이는 점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혼란된 머리에 이런 터무니없는 추도식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마르멜라도프의 장례 비용으로 라스콜니코프한테서 받은 20여 루블이나 되는 돈에서 거의 10루블 가까운 돈을 써버렸다. 아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아말리아 이바노브나에게 고인이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선 훨씬 훌륭했는지도 모른다'는 것, 따라서 그들중 누구도 고인을 '얕잡아 볼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격식대로' 고인을 추도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가난한 사람 특유의 자존심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다만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서 최후의 힘을 짜내어 오늘날의 생활 습관상 누구에게나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회적 의식 등에 귀중한 저금을 죄다 털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지금, 그것을 기회로 해서 '비천하고 추악한 셋방살이들'에게 자기는 '의젓한 생활 방식과 접대법'을 알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이러한 신세가 되려고 양육되지는 않았으며 '훌륭한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대령의 가정'에서 태어나 손수 집안 청소를 하거나 밤중에 아이들 누더기 옷을 세탁하도록 양육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여봐란듯이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자존심과 허영심의 발작적 충동은 이따금 매우 가난한 생활에 짓눌린 사람에게도 찾아들어, 때때로 도저히 참기 힘든 조급한 요구로 변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결코 환경에 짓눌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록 환경에 시달려서 죽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압도되는 일, 즉 위협에 굴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소네치카가 그녀의 머리가 좀 이상하다고 말한 것은 충분히 근거 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그렇다고는 아직 단언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실제 최근 1년 동안 그녀의 가련한 머리는 너무도 시달림을 받아왔으므로 얼마쯤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폐병의 격심한 진전도 역시 지적 능력의 혼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주류라고 해도 갖가지 술이 고루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데이라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과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드카, 럼주, 리스본 포도주 등은 품질이 최하이긴 해도 양만은 모두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은 꿀밥 이외에 두세 가지 요리가 있었으나(그중엔 블린도 있었다.) 전부 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부엌에서 운반되어 왔다. 그 밖에 식후의 차와 폰스를 위해서 사모바르가 두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장보기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이, 무엇때문에 리페베흐젤네 집에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 건물에서 셋방살이하는 초라한 폴란드인의 도움을 받아 처리했다. 이 사나이는 곧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어제 하루 종일과 오늘 아침나절을 꼬박 뛰어다녔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까지 연방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달려와서 상의하고, 심지어 공설 시장까지 그녀를 찾으러 뛰어와서는 간단없이 그녀에게 파니 호룬지나('소위 부인'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바람에, 처음에는 이 '부지런하고 친절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라고 칭찬하던 그녀도 나중에는 싫증을 느껴 모리를 내젓고 말았다. 원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더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빛깔로 장식해서 사람에 따라서 민망스러울 만큼 성급히 칭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을 칭찬하려는 나머지 전혀 있지도 않은 일까지 꾸며내고는 자신도 진심으로 그것을 믿어버리지만, 얼마 후엔 환멸을 느끼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문자 그대로 숭배했던 사람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으면서 사정없이 밀어내는 성격의 여자였다. 그녀는 원래 웃기 잘하는 쾌활하고 온순한 성품이었으나, 끊임없는 불행과 실패를 겪은 결과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화와 기쁨 가운데서만 살기를 지나치게 원할 뿐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기 까지 했으므로, 생활상의 대수롭지 않은 부조화나 사소한 실패까지도 그녀를 거의 광분 상태로 몰아넣곤 했다. 조금 전까지 가장 빛나는 희망과 공상을 품고 있었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별안간 운명을 저주하면서 손에 닿는 대로 찢고 던지고 벽에 머리를 부딪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이 추도식이 계획되었을 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충심으로 모든 일을 돌봐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식탁 준비에서부터 식탁보와 식기, 그 밖의 것들을 마련하고 자기 집 부엌에서 요리를 만드는 일까지 도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모든 권한을 그녀에게 일임하고 빈집을 부탁한 뒤에 묘지로 갔던 것이다. 사실 만반의 준비가 훌륭하게 갖춰져 있었다. 탁자에는 제법 깨끗한 식탁보가 깔리고 식기, 포크, 나이프, 술잔, , 찻잔 등은 모두 물론 여러 집에서 빌려 온 것이므로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이었지만 하여튼 예정 시간에는 각각 제자리에 놓였다. 그래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훌륭히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느끼면서 검정 옷에 새 상장(喪章)을 단 실내 모자를 쓰고 완전히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다소 우쭐해하는 빛까지 보이면서 묘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기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왜 그런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마치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없었다면 식탁 준비도 못했을 거라는 태도로군, 정말이지 참!' 그리고 또 새 리본을 단 실내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저 못난 독일 여자는 자기가 여주인이랍시고 자비심으로 불행한 셋방살이 식구를 도와준다고 으스대고 있는 거 아닐까? 자비심이라니! 농담은 그만해두시지! 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대령이며 거의 지사에 비길 만한 신분이어서 때로는 40인분의 식탁을 마련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니까 신분도 알 수 없는 천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따위- 아냐, 류드비고브나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지 - 그런 여자는 아마 부엌에도 들여보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마음속으로 오늘은 꼭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골탕 먹여서 자기 분수를 알게 해주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모를테니까, 하고 결심했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히 대해주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불쾌한 사실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부분적 원인이 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장례식에는 묘지까지 따라온 폴란드인 말고는 초청된 셋방살이 동료들이 한 명도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그 후의 추도식, 즉 음식을 차린 추도식이 되자 그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더기라고 할 수 있는 가난뱅이들만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서도 좀 나이도 지긋하고 지위도 있어 보이는 패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쏙 빠졌다. 예를 들면 세 든 사람들 가운데 지위가 제일 높아 보이는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 같은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엊저녁에 이미 온 세상 사람에게, 즉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며, 폴레치카며, 소냐며, 폴란드인에 이르기까지 그 고귀하고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신사는 자기 선친의 친구로서 친정에 출입한 일도 있으며 각 방면에 교제가 넓은 분이어서 자기에게 상당한 연금이 나오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고 신이 나서 풍을 떨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두거니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설사 타인과의 관계와 상태를 자랑하는 일이 있다 해도 이해 관념이나 이기적 타산 같은 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감정이 넘쳐흐르는 대로 그저 남을 칭찬하고 그 사람에게 좀 더 가치를 높여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루쥔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의 흉내를 냈는지 '그 더럽고 비열한 레베쟈트니코프'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자는 도대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이 사나이야말로 순전히 자비심에서 초청했으며, 그것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한방에 살고 또 그의 친지라는 점에서 초대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과년한 딸'을 데리고 사는 오만한 여자도 역시 오지 않았다. 그 모녀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집에 세 든 지 아직 두 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마르멜라도프네 방에서, 특히 고인이 술에 취해 돌아왔을 때 일어나는 소동과 아우성에 대해서 몇 번인가 불평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통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싸우고 가족들을 죄다 이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위협한 끝에, '너희들 일가는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훌륭한 동거인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번에 일부러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부인과 딸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 부인이 거만스레 외면을 하곤 했으므로 더욱 못마땅했는데, 이렇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부인에게 '우리는 생각도 감정도 당신들보다는 고상하기 때문에 원한을 잊고 초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자기가 본래부터 이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식사하는 동안 자기 친정아버지가 지사와 거의 동등한 인물이었다는 것 등을 그들에게 설명해주고, 그와 동시에 오다가다 만났을 때 인사도 않고 외면해버리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도 넌지시 귀뜸해줄 작정이었다. 그 밖에도 뚱뚱한 육군 중령(실은 퇴역한 2등 대위)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은 어제 아침부터 '술에 취해 녹초가 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컨대 참석한 사람은 폴란드인과, 땟국이 흐르는 연미복을 입고 악취를 풍기며 여드름투성이 얼굴에 말이 없는 가난한 월급쟁이와, 옛날엔 어느 우체국에 근무한 일이 있으나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동정으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셋방에 신세 지고 있는 귀먹고 눈도 잘 못 보는 다 늙어빠진 노인 정도가 고작이었다. 또 한 사람, 주정뱅이 퇴역 중위가 와 있었는데 실은 식량국 관리로서 함부로 방약무인하게 커다란 소리로 웃어대곤 하는 사나이였다. 더구나 조끼도 입지 않고 있었으니 가히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지 정체도 모를 사나이 하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식탁 앞에 앉아벼렸다. 그다음 끝으로 어떤 사람 하나가 옷이 없어서 잠옷 바람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무례하기 때문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와 폴란드인이 간신히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폴란드인 자신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셋집에는 한 번도 산 적이 없고 이곳에선 아무도 모르는 폴란드인 친구를 두 명이나 데리고 왔다. 이 모든 일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을 말할 수 없이 불쾌하게 만들고 역정까지 나게 했다. '이러고 보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 모든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군!' 조금이라도 장소를 아끼려고 아이들은 방 안을 가득히 차지한 식탁에는 동석시키지 않고, 뒤쪽 구석의 상자 위에다 식탁을 만든 다음 두 어린아이를 벤치에 앉혔다. 그래서 폴레치카는 누이 구실을 하느라고 아이들을 돌보며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고 '어엿한 집안의 아이들처럼' 동생들의 코를 씻어주거나 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저도 모르게 여느 때보다 거드름을 피우며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손님들을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세 명에 대해선 우선 엄숙한 시선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고 나서 거만하게 자리를 권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어째선지 모든 불참자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집주인인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녀에게 몹시 불손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대방도 곧 눈치를 채고 감정이 크게 상하고 말았다. 이윽고 일동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모두가 묘지에서 돌아온 것과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가 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모든 손님 가운데 유일하게 '교양 있는 손님'인 데다 또 '모두가 알다시피 2년 후엔 이곳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맡을 예정'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가 곧 정중한 말로 장례식에 꼭 참석하려 했으나 부득이 그러지 못했노라고 사과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자기 왼쪽 옆에 앉혔다(오른편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앉았다). 그러고는 요리가 순서대로 잘 나와 고루 분배되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쓰며 조마조마해했다. 지난 이삼일 동안 병세가 악화된 듯 끈덕진 기침이 자꾸만 말을 중단시키고 목을 아프게 했음에도 끊이지 않고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건네고,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가슴에 쌓이고 쌓인 울적한 감정과 이 추도식에 대한 불만을 성급히 털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불만은 별안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손님, 특히 집주인에 대한 신랄하기 짝이 없는 조소로 대체되곤 했다.

"모든 게 이 뻐꾸기 탓이지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인지 아시겠어요? 저 여자에요, 저 여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집주인 여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글쎄 저걸 좀 보라니까요. 저렇게 눈을 부릅뜨는 걸 보니 우리가 제 흉을 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가 보죠? 하지만 무슨 얘긴지 몰라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군요. , 마치 올빼미 눈 같네요! 호호호...콜록, 콜록, 콜록! 저 여잔 모자를 뽐내고 싶은 거예요! 콜록, 콜록, 콜록! 눈치채셨나요? 저 여잔 말이죠, 자기가 항상 나를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준 건 나에게 영광을 베풀어주는 거라고 모두가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도 난 저 여자가 똑똑한 사람인 줄 알고 되돌고 훌륭한 분들을, 그러니까 고인의 친지만 초대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저 사람이 끌고 온 사람들을...하나같이 광대 같은 사람들뿐이군요! 저 불결한 꼴들이란! 저기 저 더러운 얼굴을 한 사나이를 좀 보세요, 꼭 두 발 달린 허수아비 같군요! 그리고 저 폴란드 사람들...호호호! 콜록, 콜록, 콜록! 아무도, 아무도 저자들을 본 사람은 없어요. 나도 오늘 처음 보는걸요. 저런 자들이 뭣 하러 왔을가요? 정말 왜 왔느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에요. 어쩌면 저렇게도 태연히 들러붙어 있을까요? , 여보세요!" 그녀는 그중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예보세요, 블린을 드셨나요, 더 드세요! 맥주도 드세요, 맥주! 보드카는 어떠세요?...아아, 저걸 보세요, 벌덕 일어나서 머리를 굽실거리는군요. 저것 봐요, 저걱 봐...무척 배가 고픈가 보죠, 가엾게! 상관없으니 실컷 먹게 내버려둡시다. 설마 난폭한 짓은 하지 않을 테죠...다만...다만 집주인 여자의 은수저가 걱정이군요!...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그녀는 갑자기 집주인을 돌아다보며 좌중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 댁의 은수저가 없어져도 난 책임지지 않겠어요. 미리 말해두지만요! , , !" 그녀는 다시 라스콜니코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집주인 쪽을 턱으로 가리키고는 자기의 기발한 착상을 기뻐하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래도 몰라요. 아직 모르고 있어요!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군요. 저 꼴 좀 보세요, 올빼미예요, 새 리본을 단 영락없는 저 암올빼미를, , , !'

이때 그녀의 웃음은 다시금 5분 동안이나 계속된 참을 수 없는 기침 때문에 끊어지고 말았다. 손수건에는 약간의 피가 묻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잠자코 라스콜니코프에게 핏자국을 보였다. 그리고 겨우 숨을 몰아쉬게 되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양쪽 볼에 홍조를 띠면서 소곤소곤 그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시겠어요, 실은 저 여자에게 그 부인과 따님을 초대해달라고 했어요. 누군지 아시겠죠? 말하자면 극히 미묘한 부탁을 했지요. 그런 경우엔 그야말로 가장 미묘한 태도로 아주 능숙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저 여자의 초대 방법이 서툴러서 그 떠돌이 바보 여자가, 그 거만한 빌어먹을 년이, 그 돼먹지 못한 시골뜨기가 초청을 받고도 오지 않게 만들어버렸단 말이에요. 그 소령의 미망인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연금을 타내러 올라왔다는데, 옷자락이 해지도록 관청에 들락거리며, 더욱이 쉰다섯이나 된 나이에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루주를 칠하고 있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그 썩어빠진 짐승 같은 여자는 초대를 받았으면 참석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경우의 보통 예절인 한마디 사과조차 없어요!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또 왜 안 오는지 까닭을 알 수 없군요. 그건 그렇고, 소냐는 어디갔을까? 아아, 소냐가 마침 들어오는군요. 소냐, 웬일이냐? 어디갔었니? 아버지의 장례 날인데 그렇게 쏘다니면 되겠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제발 이 애를 당신 옆에 앉혀주세요. , 여기 앉아라, 소네치카....뭐든지 먹고 싶은 걸 먹어라. 우선 젤리라도 들려무나, 그게 좋으니. 이제 블린도 나올 게다. 그런데 애들에게도 주었니? 폴레치카, 너희들한테도 다 있니? 콜록, 콜록, 콜록! 오냐, 그럼 좋다, 얌전히들 먹어야 한다. 레냐, 그리고 콜랴, 함부로 발을 한들거리면 안 돼. 도련님답게 점잖게 앉아 있어야지. 아니, 뭐라고, 소네치카?"

소냐는 곧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말에다가 일부러 수식까지 더한 최상급의 정중한 말씨로 그의 사과 인사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전했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여러 가지 용건에 관해 할 이야기도 있고 이후 취할 방법에 대해 상의도 하고 싶으므로 틈나는 대로 방문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소냐는 이 보고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진정시켜줄 뿐 아니라, 그녀를 기쁘게 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옆자리에 앉자 황급히 인사를 하고 흘긋 호기심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죽 그를 보거나 그와 말하기를 되도록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 얼굴만을 보고 있었으나 어쩐지 망연한 방심 상태에 있는 듯 싶었다. 그녀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상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상복이 없었던 것이다. 소냐는 짙은 갈색 옷을 입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단벌의 충충한 서양목 옷을 입고 있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에 관한 보고는 무사히 거침없이 통과되었다. 카체리나는 근엄한 얼굴로 소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역시 근엄한 어조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모두 들으라는 듯이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자기 집안에 대해서 아무리 깊은 성의를 갖고 있더라도, 또 자기 친정 부친과 옛날에 아무리 절친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그처럼 존경할 만한 훌륭한 신사가 이런 '터무니없는 모임'에 참석한다는 게 오히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일지 모른다고 라스콜니코프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당신이 이렇게 누추한 자리에 참석하여 이런 변번치 못한 대접을 쾌히 받아주신 데 대해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불쌍하게 죽어간 우리 주인과 그토록 친하게 지내셨으니까 약속을 지켜주신 줄로 압니다만."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번 오만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손님들을 둘러보고는, 갑자기 친절한 태도로 식탁 맞은편의 귀머거리 노인을 바라보며, "구운 고기를 더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리스본 포도주는 드셨나요?"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옆자리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무슨 말인지 오랫동안 알아듣지 못했다. 노인은 입을 떡 벌린 채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그것이 자리의 흥을 더욱 북돋워주었다.

"저런 바보가 어디 있담! 보세요, 저걸 보세요! 무엇 하러 저런 사람을 끌어왔을까요? 그런데 표트르 페트로비치로 말하면, 나는 항상 그분을 굳게 믿고 있었어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라스콜니코프를 보고 말했다. "물론 그분하곤 비교도 안 되지만요..."하고 큰 소리로 내뱉듯이 말하더니, 그녀는 갑자기 무섭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으므로 상대방은 그 기세에 찔끔 놀랄 정도였다. "그 현란한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런 족속들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죠. 그따위 무례한 모녀는, 우리 아버지 같으면 부엌데기로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죽은 우리 주인 같으면야 성인 같은 호인이니까 혹시 써주는 영광을 베풀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고말고요, 한잔하기를 좋아하셨죠. 술을 좋아하고 잘 드시는 편이기도 했죠!" 보드카를 열두 잔째 비우면서 식량국 관리가 느닷없이 고함을 쳤다.

"죽은 주인에게 그런 결점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갑자기 그 사나이한테 대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은 사람이 좋고 결백한 성질이어서, 자기 가족을 무척 사랑하고 또 존경했답니다. 단 한 가지 나빴던 것이라면 사람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어떤 건달이라도 모두 신용했고, 어떤 사람하고도, 자기 구두 바닥만도 못한 사람하고도 같이 술을 마시곤 한 점이죠! 하지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이 호주머니엔 닭 모양 당밀 과자가 들어 있었답니다. 죽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애들은 잊지 않았던 거예요."

"닭이라고요? 다아앍이라고 하셨다고?"하고 식량국 관리가 외쳤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 품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주인한테 너무 심하게 굴었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향해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예요! 주인은 나를 존경해주었어요! 정말 상냥한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따금 그이가 가엾게 여겨질 때도 있었어요! 묵묵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내 얼굴만 쳐다보곤 했는데, 그런 때는 여간 불쌍하지 않아서 친절히 대해주려고 하다가도 곧 마음속으로 '아냐, 친절히 대해주면 기분이 좋아서 또 모주망태가 될 거야'하고 생각을 고쳐먹곤 했지요. 조금이라도 그분을 붙잡으려면 엄하게 구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랬어요, 가끔 구레나룻을 뽑히곤 했죠.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식량국 관리는 다시 이렇게 외치고는 보드카를 또 한 잔 들이켰다.

"구레나룻을 뽑히는 것쯤은 약과예요. 세상에는 빗자루로 쓸어내야 효과를 볼 만한 바보들도 수두룩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우리 주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녜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식량국 관리에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볼의 붉은 반점이 점점 짙어지고 가슴은 크게 물결쳤다. 1분만 더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재미있어 보이는 듯했다. 모두 식량국 관리를 쿡쿡 찌르며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을 붙여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 실례지만 당신은 대체 누구 말을 하시는 거요?" 하고 관리가 입을 열었다. "누구에 대해서, 대체 그건 누구를 빈정대는 말이오!...당신은 지금....그만둡시다! 어리석은 일이지! 과부라! 과부를 상대할 순 없거든! 용서해 주지...좋아요!" 리렇게 말하고 그는 또 보드카를 꿀꺽 마셨다.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앉은 채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들의 언쟁을 들었다. 그는 다만 예절에 못 이겨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연방 접시에 옮겨주는 요리에 손을 대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소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소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안감에 휩싸여 몹시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녀 역시 이 추도식이 조용히 끝나지는 못하리라 예측하고, 공포심을 품으면서 차츰 격화돼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흥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그 부인과 딸이 무엇 때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초대를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묵살해버렸는지, 그 중요한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소냐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통해서 그 부인이 도리어 이 초대에 화를 내면서, "어떻게 내가 그런 여자와 내 딸을 한자리에 앉힐 수 있겠어요?" 하고 반문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귀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그녀, 즉 소냐에 대한 모욕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자기 자신과 아이들, 아니 아버지에 대한 모욕보다 더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현란한 옷차림의 모녀에게 자기네가 어떤 신분인지 알려주기 전엔' 결코 진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일부러 꾸미기라도 한 듯이 식탁 한쪽 끝에서 누군지 소냐 쪽으로 화살이 꽂힌 심장 두 개를 검정 빵으로 만들어서 접시에 얹어 보냈다. 그것을 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불덩이같이 격분해서 곧 탁자 저쪽에 대고, 그런 무례한 장난을 한 자는 물론 '술 취한 바보 지식'임이 분명하다고 소리쳤다. 역시 무엇인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동시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거만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한편으로는 좌중의 불쾌함을 털어버리고, 또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려고 밑도 끝도 없이 별안간 딴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가 아는 '약제사 카를'이라는 사내가 밤에 마차를 타고 갔는데, '도중에 마부가 카를을 죽이려고 덤볐습니다. 카를은 마부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매우매우 부탁했습니다. 울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빌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심장을 찔린 듯했습니다'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처음엔 싱긋 웃었지만, 곧이어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같은 사람은 러시아 말로 재담을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더욱 화를 냈다. "우리 아버지는 베를린에서도 매우매우 훌륭한 명사로서 언제나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돌아다녔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웃기 잘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더 참질 못하고 배를 안고 깔깔 웃어댔다. 그래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도 마침 내 참다못해 분통을 터뜨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글쎄, 저것 봐요, 꼭 올빼미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적이 유쾌한 듯이 곧 라스콜니코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손을 자기 호주머니에 찌르고 거닐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손을 남의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돌아다녔다는 의미가 돼버렸어요. 콜록, 콜록!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으세요? 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외국인, 주로 어디서 몰려오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독일인들이지만, 어째서 모두 하나같이 우리보다 바보들일까요! 지금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약제사 카를이 놀라서 심장을 찔린 듯했다'느니, 그 사나이가 마부를 잡아 묶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울었습니다, 매우 매우 부탁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정말 저런 바보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자신은 퍽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얼마나 바보인지는 꿈에도 모르거든요! 내가 보기엔 저 주정뱅이 식량국 관리가 훨씬 영리한 편이에요. 적어도 마지막 지혜까지 죄다 마셔버린 술망나니에는 틀림없으니까요. 그런데 저 진지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저들을 보세요...어머나,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앉아 있는 저 꼴이란, 노하신 모양이야! 단단히 노하셨어! , , ! 콜록, 콜록, 콜록!"

기분이 더없이 유쾌해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곧 여러 가지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지금 진행 중인 연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자본으로 해서 반드시 고향 도시에서 양가의 여학생을 수용하는 기숙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아직 그녀 자신의 입으로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매력 넘치는 여러 가지 계획을 털어놓기에 열중해버렸다. 어느 사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예의 '상장'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남편 마르멜라도프가 언젠가 술집에서 라스콜니코프에게, 자기 아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 '지사를 비롯한 여러 귀빈 앞에서' 숄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이야기하며 자랑하던 바로 그 상장이었다. 이 상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 기숙학교를 설립하는 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그보다도 실은 그 화려한 옷자락을 질질 끄는 거만한 모녀가 추도식에 참석할 경우 그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은 가문이 썩 좋은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대령 집안에 태어난 딸로서, 요즘 부쩍 늘어난 여자 사기꾼들에 비하면 훨씬 훌륭하다'는 점을 명백히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준비했던 것이다. 상장은 곧 술 취한 손님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별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상장에는 실제로 그녀가 7등관이자 훈장을 받은 사람의 딸이라는 것이 en touteslettres('틀림없이 상세히'라는 뜻) 적혀 있었으므로, 사실 대령의 딸이라 해도[대령은 5등관에 해당하는 관등) 과히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다. 의기양양해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미래 T시에서의 아름답고 평온한 생활을 곧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숙학교 선생으로 초빙하는 중학 교사들이 이야기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이 학창 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운 망고라는 존경할 프랑스 노인 이야기며, 그 노인은 지금도 T시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으므로 보수를 적당히만 드리면 꼭 도와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내 이야기는 소냐에까지 미쳐서 "이 애는 나하고 함께 T시로 가서, 거기서 내 일을 돕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식탁 끝에서 누군가 픽 웃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곧 멸시해버리듯이 식탁 끝에서 일어난 웃음소리는 아예 듣지도 못한 체하려고 애썼으나, 이내 음성을 높여서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자기의 조수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충분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가 온순하고 인내력이 강하며, 자기 헌신적이고 결백하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냐의 볼을 살짝 두들기고는 몸을 좀 일으켜서 두 번이나 뜨거운 키스를 해 주었다. 소냐는 얼굴을 확 붉혔으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바보처럼. 도가 지나친 모양이군. 이젠 끝낼 때가 됐어, 마침 음식도 다 끝난 것 같으니 곧 차를 내오는 게 좋겠군'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한 번도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한데다가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데 몹시 분개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갑자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모험을 시도했다. 은근히 혼자서 애태우고 있던 그는 용기를 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이번에 생기는 기숙학교에선 여학생들의 속옷을 깨끗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 '반드시 속옷을 잘 감독할 수 있는 훌륭한 부인을 두어야 하며,' 둘째로는 '모든 젊은 여학생이 밤중에 몰래 숨어서 소설 같은 걸 일절 못 읽게'해야 한다고 어디까지나 지당한 말을 의미심장한 말투로 강조했다. 정말 몸이 불편해져서 손님 접대하기에도 싫증이 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즉시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당신 따위는 아무 것도 모른다, 여학생의 속옷 걱정은 담당 교사가 할 일이지 양갓집 학생을 맡은 기숙학교 교장의 할 일이 아니다, 또 소설을 숨어서 읽는다느니 하는 것은 무례하고 상스러운 말이니 제발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딱 잘라' 쏘아붙였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버럭 화를 내면서, 자기는 다만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이다' 더욱이 '당신은 오래전부터 집세도 안 내지 않았느냐'고 응수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에 대해서 곧 '나를 위해서'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증거로는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고인의 유해가 탁자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집세 재촉을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이 말을 듣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매우 조리 있는 논법으로, 자기는 '그 부인네 모녀를 초대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 모녀는 지체 높은 집안사람들이라 신분이 천한 여자 집엔 올 수 없었다'라고 말해버렸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얼른 말을 받아 '너 같은 건 무식한 여자라 어떤 게 진짜 훌륭한 가문인지 판단 못 한다'고 공격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참을 수 없었던지 곧 '우리 파터(아버지)는 베를린에서도 매우 매우 훌륭한 인물이라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녔다. 어제나 이렇게 푸흐! 푸흐! 하면서'라고 뽐냈다. 그리고 자기 파터의 위풍을 좀 더 완연히 표현해 보이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볼을 불룩거리면서 푸흐! 푸흐!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좌중은 일시에 와락 웃음을 터뜨리고, 두 여자 사이에 할퀴고 뜯는 싸움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부추겼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이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서 갑자기 좌중에 다 들리도록,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일정한 파터는 없다, 아말리야는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싸다니던 주정뱅이 핀란드 여자이며 전엔 필시 어디서 식모살이를 했거나 더 추악한 직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새우처럼 빨개져서, 어쩌면 아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야 말로 '아비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파터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기다란 프록코트를 입고 늘 푸흐! 푸흐, 푸흐!하고 계셨다'라고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경멸하는 듯이, 자기의 신분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고 자기 부친이 대령이었다는 사실은 이 상장에도 분명히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아비는(만일 아버지란 게 있다면) 우유 행상이나 하던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아버지라는 게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늘까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부칭이 이바노브나인지 류드비고브나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게 무엇보다 훌륭한 증거가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극도로 분개해서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자기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지 류드비고브나가 아니다, 우리 파터는 요한 이라는 이름이며 시장까지 지내셨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한 번도 시장 같은 벼슬은 못했다고 사나운 소리로 악을 썼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사나운 표정으로, 그 목소리만은 침착하게(비록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가슴은 몹시 물결치고 있었지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향해 '네가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파터를 우리 아버지와 동등하게 놓고 비교한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는 네 모자를 빼앗아 짓밟아버릴 테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자기는 이 집 주인이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달라'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별안간 식탁 위의 은수저를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욕지거리와 아우성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어댔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진정시키려고 그 옆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노란 감찰에 대해서 외쳐댔으므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를 떼밀고 모자 운운하던 조금 전의 위협을 당장 실행하려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문턱에 뜻밖에도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날카롭고도 조심스러운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그녀는 외쳤다. "아아, 당신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세요! 저 짐승 같은 년에게 일러주세요. 불행을 당한 고결한 부인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런 무례한 짓을 하면 재판소에서 벌을 받는다고요...나는 총독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어요...저런 년은 경을 쳐야 해요...제발 우리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저 고아들을 보호해주세요."

"실례지만 부인...실례지만 저 잠깐...."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손을 내저었다.

"부친과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한 번도 만나뵐 영광을 갖지 못했습니다....이것 보세요, 부인!(누군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끊임없는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나는 내 용무 때문에 왔으니까요. 나는 지금 당신의 의붓딸 소피야...이바노브나에게....급히 좀 할 얘기가 있습니다...확실히 이름은 그렇죠? , 비켜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옆을 지나 소냐가 있는 반대편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곳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녀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어째서 자기 아버지와의 교분을 부정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교분을 생각해낸 후부터 그녀는 그 공상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사무적이며 매정한, 모욕적인 위협에 가득 찬 태도는 그녀를 몹시 놀라게 했다. 그리고 좌중의 사람들도 그가 나타나자 왜 그런지 차츰 조용해졌다. 더구나 이 '사무적인 딱딱한' 사나이는 그 자리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슨 중대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 같았다. 그로 하여금 이런 자리에 나타나게 한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만은 능히 추측할 수 있었다. 소냐 옆에 서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그를 지나 보내기 위해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잠시 후 레베쟈트니코프의 모습도 문지방에 나타났다. 방안으로는 들어서지 않았으나 역시 특별한, 놀라움에 가가운 호기심을 띤 채 그 자리에 서서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뭐가 뭔지 오랫동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방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점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건이 제법 중대하므로...."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특히 누구에게 말한다기보다는 그저 막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모여 계시는 이 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당신은 이 집 주인의 입장에서 지금부터 시작하는 나와 소피야 이바노브나의 대화를 특히 주의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소냐를 향해서 말을 계속했다. "실은 나의 친구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의 방에서, 아까 당신이 다녀간 직후에 내 소유인 100루블 지폐 한 장이 탁자에서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는 어떻든 간에 당신이 만일 그 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셔서 가르쳐주시기만 한다면, 나는 명예를 걸고, 또 여기 계신 여러분을 증인으로 삼고 맹세하겠습니다만,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말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부득이 비상수단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당신은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울고 있던 아이들까지 잠잠해졌다. 소냐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선 채 루쥔의 얼굴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몇 초가 지났다.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뚫어지게 소냐를 바라보며 루쥔이 물었다.

"나는 몰라요...아무것도 몰라요." 소냐는 갸날픈 음성으로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모른다고? 모르신다고요?" 루쥔은 되묻고 나서 다시 몇 초 동안 입을 다물었다. "잘 생각해보시오, 마드무아젤." 엄격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이르는 말투로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요, 당신에게 좀 더 생각할 시간의 여유를 드려도 좋습니다. , 생각해보세요. 만일 확신이 없다면, 나만큼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부턱대고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험을 할 리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면에서 공공연히 근거 없는 죄를 씌운다면 설사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만한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나는 쓸 데가 있어서 액면 총액 3천 루블의 5푼 이자가 붙은 채권을 현금으로 바꿔 왔습니다. 그 계산은 지갑 속에 기록돼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그 증인이지만 - 그 돈을 세기 시작해 2300루블까지 세어서 지갑에 넣고 그 지갑을 푸록코트 옆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지폐로 500루블쯤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그 가운데 석장은 100루블 지폐였습니다. 당신이 들어오신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내 부름을 받고 말이오. 그리고 거기 있는 동안 당신은 무척 당황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세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웬일인지 황급히 나가려고 서둘렀습니다. 이것도 전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증명해주실 겁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아마 이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하고 내 말을 그대로 인정해주시리라 믿습니다만. 내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를 통해서 당신을 부른 것은, 다만 당신의 계모이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나는 추도식장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만- 사고무친이 되신 딱한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분을 위해서 무슨 의연금 모금이나 자선 제비뽑기라도 계획하면 얼마나 뜻있는 일일까 생각해 그것을 상의할 목적에서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그런 의견에 고마워하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나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로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요, 둘째로는 아무리 사소한 일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당신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는 탁자 위에서 10루블 지폐를 집어서 당신 계모를 위한 생활비 부조라는 명목으로 당신에게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의 눈앞에서 행해진 사실입니다. 그 뒤에 나는 당신을 문 앞까지 배웅했습니다. 그때도 역시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지요. 그 후에 나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와 단둘이 한 10분 쯤 이야기했습니다. 이윽고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도 나갔으믈, 나는 지폐의 셈을 마치고 전부터 생각한 대로 그것을 따로 간수해두려고 돈이 놓여 있는 탁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돈에서 100루블짜리 한 장이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고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를 의심한다는 건...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상상하는 것조차 부그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내가 계산을 잘못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오기 1분 전에 한 번 죄다 세어본 결과 총액이 틀림없음을 확인했으니까요. 당신 자신도 아시겠지만, 당신이 조마조마해하던 모습이며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조급히 돌아가려던 일, 그리고 당신이 한동안 탁자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 결과, 더구나 현재 당신의 사회적 환경과 거기 관련된 습성을 고려한 결과,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 나 자신의 의지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을, 물론 잔혹합니다만, 당연한 혐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단 말입니다! 덧붙여 말합니다만, 나에겐 충분하고도 명확한 학신이 있음에도 이런 고발이 나로선 역시 일종의 모험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그냥 우물쭈물 덮어둘 수가 없어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가증스러운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당신의 가난한 계모를 동정한 나머지 일부러 당신을 불러서, 나로서 할 수 있는 한도, 10루블이라는 돈을 당신에게 희사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당장 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보답하다니, 될 말입니까! 아니, 이건 정말 좋지 못한 일입니다! 당신에겐 교훈이 필요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의 진실한 친구로서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나 이상의 친구는 이 순간 당신에게 있을 수 없으니까요. 제발 정신을 차려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 어떻습니까?"

"나는 당신한테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하고 소냐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나한테 10루블을 주셨어요. , 도로 받아주세요." 소냐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매듭을 찾아 풀고 10루블짜리 지폐를 빼서 루쥔에게 내밀었다.

"그럼 나머지 100루블짜리 지폐에 대해서는 모르신다는 겁니까?" 그는 돈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책망하는 어조로 다그쳐 물었다.

소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무서운, 엄격한, 조소하는 듯한, 증오에 찬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흘긋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에 팔ㄹ짱을 낀 채 벽 옆에 서서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 하느님!"하는 외침이 소냐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경찰에 알려야겠으니 수고스럽지만 우선 이 집 문지기를 불러주십시오." 조용하고 상냥한 어조로 루쥔은 말했다.

"Gott der Barmherzige!('정말이지 기가 차는 일이군요'라는 뜻) 나도 저 애가 훔친 것을 알고 있었어요!"하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손뼉을 쳤다.

"당신도 알고 있었다고요?" 루쥔은 얼른 말끝을 잡았다. "그렇다면 전부터 그렇게 추측할 만한 근거가 다소라도 있었군요. 그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방금 하신 말씀을 제발 잊지 말아주십시오. 물론 증인도 많이 있지만요."

갑자기 사방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방 안은 소란해졌다.

"! 뭐라고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소리쳤다. 그리고 마치 묶였던 쇠사슬이 끊기기라도 한 듯이 루쥔에게 덤벼들었다.

"뭐라고? 당신은 이 애를 도둑년으로 모든 건가요? 이 소냐를? 아아, 정말 비열한 사람들이군요!"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소냐 옆으로 달려가서 그 깡마른 손으로 으스러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소냐! 너는 왜 저따위 사람한테서 10루블을 받아왔니? 바보 같으니! 그 돈 이리 내라! 어서 그 10루블을 이리 줘, 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의 손에서 돈을 빼앗아 손아귀에 꾸겨 쥐더니 손을 세차게 흔들어 루쥔의 얼굴에다 홱 던져버렸다. 구겨진 종이 뭉치는 루쥔의 눈에 맞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달려가서 그 돈을 집었다. 루쥔은 벌컥 화를 냈다.

"이 미친년을 잡아 묶어라!"하고 그는 고함을 쳤다.

이때 문가엔 레베쟈트니코프와 나란히 몇몇 얼굴이 더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는 시골서 올라온 모녀도 끼어 있었다.

"뭐라고? 미친년? 내가 미친년이라고? 이 얼간이 같은 놈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쳐댔다. "이 바보, 악덕 변호사. 짐승 같은 놈아! 소냐가, 우리 소냐가 네놈의 돈을 훔쳤다고? 소냐가 도둑이라고! 소냐는 도리어 네게 돈을 줄 애야, ,이 날강도 같은 놈아!" 이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갑자기 히스테리라도 일으킨 듯이 깔깔 웃어댔다. "여러분, 이런 바보를 봤습니까?" 그녀는 모두에게 루쥔을 손가락질해 보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외쳤다.

"아아! 네년도 마찬가지야!"하며 그녀는 갑자기 집주인 여자에게 대들었다. "이 소시지 같은 년아, 너도 지금 덩달아서 소냐가 훔쳤다고 맞장구를 쳤지, 치마를 걸친 더러운 프로이센의 닭다리 같은 년아! 하나같이 모두,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우리 소냐는 거기서 돌아오자마자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어, 이 바보 새끼야! 여기 로지온 로마느이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단 말이야!....그러니 그 애를 조사해봐라! 아무 데도 나간 일이 없으니까 만일 훔쳤다면 그 애 몸에 그 돈이 있을 게 아냐! 어서 조사해봐! 그렇지만 만약 돈이 나오지 않으면 그땐 널 그냥 놔두지 않겠다! 나는 황제 폐하께, 인자하신 폐하께 뛰어가서 용상 발밑에 엎드려 탄원할 테다. 지금 곧, 오늘 당장에라도! 나는 의지할 곳 없는 과부야! 내가 가면 들여보내줄 거다! 넌 내가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잠꼬대 같은 소린 마, 갈 수 있어, 갈 수 있고말고! 너는 우리 소냐가 온순하니까 그걸 약점 삼아 그따위 흉계를 꾸몄지? 너는 그걸 목표로 했지? 그러나 이봐, 난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단 말이야! 이제 그 본성이 드러날 거다! , 조사해봐, 조사해 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정신없이 루쥔의 손을 잡고 소냐 쪽으로 잡아끌었다.

"나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어요. 그러나 좀 진정하십시오, 부인, 진정하세요! 당신이 이렇게 대단한 성질이란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이건..., 이건, 어쩌면 좋지?" 루쥔은 중얼거렸다. "이건 경찰 입회하에 하는 건데...하긴 지금 여기 증인은 지나칠 정도로 많으니까...내가 해도 좋긴 합니다만...그러나 역시 남자로선 좀 거북합니다...뭣 보다 상대방이 여성이니까...만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손을 빌려주신다면....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대체 어떤 방법으로 조사해야 좋을지?"

"누구든지 좋아요! 누구든지 하고 싶은 사람에게 조사를 시켜봐요!"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소냐, 저 사람들에게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라! , ! 쓰레기 같은 놈아, 자세히 봐라, , 호주머닌 비어 있다! 손수건 말고는 텅비어 있어! 알았는냐! 이번엔 딴 호주머니, ! , 보이느냐! 보여!"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의 호주머니를 거꾸로 털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양쪽 주머니 속까지 까서 뒤집어 보였다. 그런데 두 번째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별안간 종이쪽지 하나가 튀어나와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루쥔의 발 밑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이 그걸 보고 있었다. 모두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루쥔은 몸을 굽히고 두 손가락으로 종이쪽을 집어 올리더니,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쳐 보였다. 그것은 여덟 겹으로 접은 100루블짜리 지폐였다. 루쥔은 손을 휘휘 내두르면서 모두에게 그 지폐를 보였다.

"이 도둑년!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순경! 순경!"하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추방해야 돼! 어서 이 집에서 나가!"

사방에서 외침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나 이따금 루쥔 쪽으로 흘긋 시선을 옮기곤 하면서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냐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이미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별안간 붉은빛이 얼굴에 확 퍼져 올랐다.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녜요, 내가 한 짓이 아녜요! 나는 가진 기억이 없어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녀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울부짖음과 함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몸을 던졌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녀의 몸을 얼싸안고, 마치 가슴으로 그녀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꼭 껴안았다.

"소냐! 소냐! 나는 믿지 않는다! 알겠니, 난 믿지 않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미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 이렇게 외치고는, 소냐를 두 손으로 아기처럼 흔들며 수없이 키스를 한 다음 손을 잡고 빨아대면서 손에도 키스를 퍼부었다.

"네가 남의 돈을 훔치다니! 어쩌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바볼가! 아아, 당신들은 바봅니다. 바보예요!"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그래요, 당신들은 아직 몰라요, 몰라...이 애가 어떤지, 이 애가 어떤 애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이 애가 훔쳤다고요, 이 애가? 알겠어요, 이 애는, 만일 당신네들이 필요하다면 입고 있는 단벌옷이라도 팔아서 자기는 헐벗고 다닐망정 죄다 줘버릴 애예요. 이 애는 노란감찰가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아이들이 굶어 죽게 됐으니까 우리 식구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한 것뿐이에요! 아아, 돌아가신 우리 주인, 여보! 세묜! 세묜! 이걸 보시나요? 보고 계세요? 이게 당신의 추도식이군요! 아아! 하느님! 이 애를 보호해주세요...아니, 당신네들은 왜 거기 멍하니 서 있죠!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까지도 그렇게 믿고 계시나요? 당신들은 모두, 모두, 모두 이 애의 새끼 손가락만도 못해요! 못해! 아아, 하느님! 제발 이 애를 보호해주옵소서!"

사고무친의 애처로운 폐병환자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눈물은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뼈와 가죽만 남은 병든 얼굴, 피가 말라붙은 메마른 입술! 정신없이 외쳐대는 목쇤 음성, 어린애의 울음과도 같은 애절한 흐느낌, 믿음에 가득 찬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그러면서도 절망적으로 보호를 구하는 애원, 이것은 누구나 이 불행한 여자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가련하고 안타까운 정경이었다. 적어도 소냐의 죄를 고발한 루쥔은 곧 동정의 빛을 나타냈다.

"부인! 부인!" 그는 달래는 듯한 어조로 외쳤다. "이건 당신과 조금도 관계없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이 나쁘다거나 공모했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당신 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집어서 범행을 폭로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명백합니다. 만약에 가난이 소피야 세묘노브나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게 했다면 나는 동정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드무아젤, 왜 당신은 자백하려고 하지 않았죠? 치욕이 무서웠던가요? 처음 저지른 일이기 때문인가요? 혹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하지만 무엇때문에 이런 짓까지 할 생각이 났을까요? 여러분!" 그는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여러분! 나는 말입니다, 지금 개인적인 모욕까지 받기는 했습니다만, 동정하는 뜻에서 기꺼이 용서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드무아젤, 오늘의 치욕은 좋은 교훈이 될 겁니다." 그는 소냐에게서 몸을 돌렸다.

"나도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하고 이걸로 끝맺겠습니다. , 그만둡시다!'

루쥔은 곁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흘긋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탁 마주쳤다. 라스콜니코프의 불타는 듯한 눈초리는 그를 곧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미 아무런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냐를 껴안고 키스만 퍼붓고 있었다 아이들도 조그만 손으로 사방에서 소냐에게 매달렸다. 폴레치카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면서도 눈물로 부어오른 귀여운 얼굴을 소냐의 어깨에 파묻고 흑흑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비열한 짓이야!" 이때 갑자기 문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루쥔은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비열한 짓이야!" 레베쟈트니코프가 그를 노려보면서 되풀이했다.

루쥔은 찔끔해서 몸을 떨기까지 한 듯싶었다. 모두 그걸 알아차렸다. (훗날 사람들은 이때 일을 상기했던 것이다). 레베쟈트니코프는 한 걸음 방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뻔뻔스럽게도 나를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말했지요!" 그는 루쥔 앞으로 다가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자넨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루쥔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중상가란 말입니다. 이게 내 말의 뜻이죠!" 레베쟈트니코프는 시력이 약한 조그만 눈으로 상대방을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열띤 어조로 말했다. 그는 몹시 격분한 표정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받아서 저울에라도 달아보듯이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새로운 침묵이 방 안에 군림했다. 루쥔은 특히 처음 한 순간 몹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내게 무슨 말이......"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자넨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나는 멀쩡한 정신이지만 당신이야말로...진짜 사기꾼입니다! 어쩌면 그토록 비열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소. 나는 모든 걸 정확히 이해하려고 여태까지 기다렸던 거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돕니다. 대체 당신은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나로선 영문을 모르겠군요."

"내가 뭘 어쨌단 말이야! 그다위 어리석은 수수께끼 같은 말은 집어치워! 혹시 자네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그야 당신같이 비열한 속물이라면 술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소! 나는 보드카 따위는 아직 입에 대본 일도 없소. 그건 내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이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사람은 자기 손으로 저 100루블 지폐를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이 눈으로 봤어요. 내가 증인입니다. 나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레베쟈트니코프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되풀이했다.

"정말로 미친 모양이군. 애송이 같은 놈!" 루쥔이 기를 쓰며 외쳐댔다. "지금도 그 장본인이 여기 자네 앞에 있어. 저 여자가 방금 여기서, 여러 사람 앞에서 자백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10루블 외엔 나한테 받지 않았노라고. 그렇다면 받지도 않은 돈을 내가 어떻게 주었다는 거야?"

"나는 봤소, 봤단 말이오!" 레베쟈트니코프는 되풀이해서 외쳤다. "이런 일은 본시 나의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나는 당장에라도 재판소에 나가서 어떤 선서든 다 하겠소. 당신이 저 아가시 호주머니에 슬쩍 돈을 찔러 넣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그때만 해도 나는 바보라 당신이 자선을 베푸는 줄로만 알았소! 문 앞에서 저 아가씨와 작별할 때, 아가씨가 되돌아석 당신이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당신은 다른 손, 즉 왼쪽 손으로 아가씨 호주머니에 살짝 돈을 찔러 넣었어요. 나는 그걸 보았소!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루쥔의 얼굴은 갑자기 창백해졌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그는 맹렬히 외쳐댔다.

"자넨...창 옆에 서 있었는데 어떻게 돈을 알아보았다는 건가? 자넨 착각을 일으키고 있어. 어떻게 그런 근시안으로, 자넨 지금 잠꼬대를 하고 있어!"

"천만에 착각이 아닙니다! 나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모든 걸, 모든 걸 똑똑히 보았소. 물론 그 창가에서 그게 돈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보기는 어려웠소. 그건 당신 말대로요. 그러나 나는 다른 특별한 이유로 그것이 100루블 지폐임에 틀림없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10루블 지폐를 줄 때, 나는 잘 보고 있었소만, 그때 당신이 탁자 위에서 100루블 지폐도 집었기 때문이오. 그땐 내가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소, 그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으므로, 당신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은 그 100루블 지폐를 접어서 손에 쥔 채 죽 갖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나는 그 일을 거의 잊다시피 했는데,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걸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쥐면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또 아까와 같은 생각, 즉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저 아가씨에게 자선을 베풀려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어때요, 내가 그걸 주시하고 있었으리라는 건 상상하실 수 있을 테죠.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가씨의 호주머니에 슬며시 돈을 찔러 넣어주는 걸 보게 된 겁니다. 나는 봤어요,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나는 맹세해도 좋습니다!"

레베쟈트니코프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여러 가지 외침 소리가, 무엇보다도 놀라움을 나타내는 외침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위협적인 어조를 딘 외침도 섞여 있었다. 모두 루쥔한테로 몰려들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레베쟈트니코프한테로 달려갔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나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습닏! 제발 저 애를 보호해주세요! 저 애의 편은 당신뿐입니다! 저 애는 불쌍한 고아예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하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튼소리 작작 해라!" 미칠 듯이 격분한 루쥔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자넨 언제나 헛소리만 하고 있어. '잊었다, 생각났다, 잊었다'가 뭐냐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지폐를 넣었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도대체 나하고 이 여자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무슨 목적으로?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겠다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그러나 내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내가 잘못 볼 리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더러운 범죄자군요. 더구나 그때 내 머리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올랐던 걸 지금도 분명히 기억할 정도니까요. 당신에게 감사를 하고 당신의 손을 잡았던 발 그때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사람은 아가씨 호주머니에 몰래 돈을 집어넣었을까? 다른 것은 고사하고, 몰래 집어넣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근본적으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자선을 내가 부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저 내게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뿐일까? 그래서 결국 내가 보는 앞에서 그런 큰돈을 희사하기가 거북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그 밖에도 어쩌면 이 사람은 그녀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가서 자기 호주머니에 100루블이라는 큰돈이 들어 있는 걸 발견케 해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죠. 왜냐하면 어떤 자선가들은 자기의 선행을 그런 식으로 희롱하기를 퍽 좋아하니까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가씨의 마음을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돈을 발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는가 안 오는가를! 그리고 또 이른바 '자기 오른손에도 알리지 마라'는 식으로 이 사람은 감사를 피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해봤죠. 아무튼 한마디로 말해서...그때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잘 생각해보기로 했던 겁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음을 당신 앞에 드러낸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즉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그걸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혹시 그 돈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하고 말입니다. 실은 내가 여기 오기로 결심한 것도, 그녀를 불러내어 호주머니에 100루블이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리 오는 도중에 우선 <실증적 방법의 일반적 추론>이란 책 한 권을 전하고 특히 피데리크의 논문을, 바그너 것도 함께 소개하기 위해 잠시 코브일랴트니코바 부인 방에 들렀었습니다. 그 후 여기 와보니 벌써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 어때요? 만약에 내가 저 아가씨 호주머니에 100루블 지폐를 넣는 걸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상상이나 판결을 내릴 수 있겠소!"

레베쟈트니코프는 이러한 논리적 해석을 결론으로 한 기나긴 고찰을 마치자 심한 피로를 느꼈고,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아, 그는 러시아 말로도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하기는 다른 나라 말 역시 하나도 몰랐지만)! 그는 이 변호하는 대업을 성취하고 나자 단번에 기력이 쇠진하여 피골이 상접할 만큼 수척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연설은 놀랄 만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비상한 열의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말했으므로 모두가 그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루쥔은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네 머리에 무슨 바보 같은 의문이 떠올랐든,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그는 외쳤다.

"그런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그건 모두 꿈속에서나 봤겠지! 꿈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단언하건대 자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자넨 나한테 어떤 악의를 품고 거짓말로 나를 중상하고 있는거야. 내가 자네의 자유사상적인, 무신론적인 사회사상에 공명하지 않는다 해서 원한을 품고 그 앙갚음을 하려는 거라고. 틀림없어!"

그러나 이런 변명은 루쥔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사방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일어났다.

"아니, 이야길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레베쟈트니코프 쟈트니코프는 외쳤다.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군! 순경을 불러라, 나는 증인 선서라도 하라면 할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이 작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비열한 짓을 했는가 하는 점이야! 정말이지 가련할 만큼 비열한 인간이군!"

"무슨 목적으로 저 사람이 그런 대단한 짓을 했는지 내가 설명하죠. 만일 필요하다면 나도 맹세하겠습니다!" 마침내 라스콜니코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착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언뜻 보기만 해도 좌중에게는 어쩐지 그가 실제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침내 이 사건도 결말에 다다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분명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레베쟈트니코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이 사건이 시작될 때부터 여기엔 무슨 비열한 간계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은 나만이 알고 있는 어떤 특별한 사정 때문인데, 그것을 지금부터 얘기하겠습니다. 모든 비밀은 거기에 들어 있으니까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당신이 말씀하신 귀중한 증언으로 모든 게 근본적으로 명확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잘 들어주십시오. 저 양반은 (그는 루쥔을 가리켰다) 최근에 어느 처녀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내 누이동생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라슬콜니코바에게 청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 온 후에, 그저께 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 두 사람은 싸움을 했고 나는 저 사람을 방에서 쫓아냈습니다. 여기엔 증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뱃속이 시커멓기로 유명한 인간입니다. 물론 그저께만 해도 나는 저 사람이 이 집 셋방에서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와 함께 묵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따라서 싸움을 한 바로 그날, 즉 그저께 내가 돌아가신 마르멜라도프 씨의 친구 자격으로 그 미망인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장례식 비용에 보태 써달라고 부의금 얼마를 드린 것을 저 사람이 다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그 사실을 곧 우리 어머님한테 편지로 고해바치기를,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아니라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피야 세묘노브나의...그 성질에 대해서 지극히 비열한 말을 써 보냈습니다. 즉 나와 소피야 세묘노브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듯이 암시한 겁니다. 이것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겠지만 내가 육친이 마련해준 귀중한 돈을 좋지 못한 목적에 낭비해버렸다고 중상함으로써 나를 어머니와 누이동생한테서 이간시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젯밤 나는 저 사람 앞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돈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장례식 비용으로 주었지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준 것이 아니며, 소피야 세묘노브나와는 그저께만 해도 알지 못하는 사이였고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해서 그 일의 진상을 명백히 했습니다. 그때 나는 거기서 덧붙여서, 이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에게 너 따위는 모든 장점을 다 긁어모아도 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새끼손가락만 한 가치도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내는, 그럼 너는 네 누이동생을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한자리에 앉힐 용기가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날 이미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중상을 해도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나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저 사람은,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는 무례한 언사를 함부로 뇌까려서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결렬이 일어났고, 저 사람은 집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어제 저녁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기서 특히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지금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도둑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저 사람은 우선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자신의 의심이 정당했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즉 내가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누이동생을 동등하게 취급한 데 대해서 저 사람이 분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나를 공격한 것은 내 누이동생, 즉 자기 약혼녀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됩니다. 요컨대 이 사건을 통해서 저 사람은 다시 한번 나를 가족과 이간시킴으로써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환심을 사려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개인적인 복수를 기대했다는 건 세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왜냐하면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명예와 행복이 나에겐 지극히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저 사람은 갖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저 사람이 노린 목적의 전부입니다. 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이 원인의 전부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대충 이렇게 자기의 설명을 마쳤다. 물론 그의 말은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으로 여러 번 중단되긴 했으나, 그런 방해가 있음에도 그는 끝까지 침착한 태도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그의 날카로운 음성과 신념에 가득 찬 어조와 준엄한 표정은 모든 사람에게 색다른 감명을 주었다.

"맞습니다, 맞아요!" 레베쟈트니코프는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우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손님 가운데 당신이 보이는지 물었거든요. 저사람은 일부러 나를 창가로 불러서 슬그머니 그걸 물어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은 당신이 이 자리에 꼭 있어주어야만 했던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어요!"

루쥔은 말없이 경멸의 미소를 디었으나 그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이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그 기회만 노리는 눈치였다.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시바삐 이 자리에서 도망쳐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기에게 가해진 비난이 모두 사실이며, 정말로 자기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중상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사내들은 대단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식량국 관리는 취중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누구보다 떠들어대면서 루쥔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몇 가지 처치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방이란 방에서 구경꾼들이 모여든 것이다. 폴란드인은 셋 다 몹시 분개해서 끊임없이 그에게 '저 악당!'이라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으며, 그대마다 뭔가 위협적인 말을 폴란드어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마치 졸도했다 깨어난 사람처럼 아직도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구세주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괴로운 듯이 씨근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누구보다도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린 채 영문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다만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어째선지 몹시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만을 보고 알았을 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 욕설을 퍼붓고 위협하면서 루쥔의 주위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쥔은 겁내는 기색도 없었다. 소냐를 더 죄인으로 만들려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자, 그는 느닷없이 뻔뻔스러운 태도로 나왔다.

"잠깐만, 여러분, 잠깐만. 이렇게 밀지 말고 길을 좀 내주시오!" 그는 군중을 헤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제발 그런 위협은 하지 마시오. 아시겠어요.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위협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니까요. 당신들은 오히려 폭력으로 형사사건을 은폐한 죄로 법 앞에 책임을 져야 할 거요. 여자 도둑의 범행은 완전히 폭로되었으니까 나는 끝까지 추궁하겠소. 재판관은 그렇게 장님도 아니며...주정뱅이도 아니니까, 이 두 친구들, 악명 높은 무신론자, 선동자, 자유사상가인 이 친구들의 말 따위엔 귀 기울이지도 않을 거요. 이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게 복수하려 하고 있소. 이자들은 바보이기 때문에 그걸 자인하고 있어요...., 좀 비켜주시오!"

"다시는 내 방에서 냄새도 나지 않게 지금 당장 나가주시오. 이것으로 우리의 관계도 끝난 겁니다! 아아, 생각만 해도 더럽군, 나는 그래도 온갖 힘을 다해서 열심히 설명해주었건만...꼬박 두 주일 동안이나...."

"이봐,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아가 자네가 한사코 만류했을 때도 나는 딴 데로 이사하겠다고 분명히 말해두지 않았느냐 말이야. 이젠 다만 자네가 바보라는 것만 덧붙여둘 뿐이야. 마지막으로 나는 자네의 그 대갈통과 보이지 않는 눈깔을 잘 치료하길 바라겠네. ,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여러분!"

그는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식량국 관리는 단순한 욕설만으로 그를 놔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의 컵을 집자마자 루쥔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빗나간 컵은 보기좋게 여주인에게 명중했다. 그녀는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편 식량국 관리는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고 탁자 밑에 쿵 쓰러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서 루쥔은 자기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30분 후에 이미 그의 모습은 이 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부터 겁이 많은 소냐는 자기가 누구보다 가장 희생되기 쉬운 존재라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거의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자기를 모욕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바로 이 순간까지 그녀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착한 마음씨와 순종하는 태도로 그럭저럭 불행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이번의 환멸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물론 소냐는 무슨 일이든, 심지어 이런 재난까지도 거의 아무 불평 없이 꿋꿋이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 야속했다. 그래서 지금 자기의 결백함이 증명되어 승리를 얻었음에도, 최초의 경악과 실신 상태가 가신 후 모든 것을 똑똑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자기의 의지할 곳 없는 무기력함과 모욕의 쓰라림이 참을 수 없게 가슴을 억눌렀다.

마침내 그녀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자기 거처로 달려갔다. 그것은 루쥔이 나간 바로 직후였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컵에 얻어맞고 여러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자 이제는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악을 쓰면서 덤벼들었다.

"집을 내놔! 지금 당장! 어서 나가!"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그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마룻바닥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칠 대로 지쳐서 금방 졸도할 듯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가련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그녀는 녹초가 되어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쌍방의 힘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마치 새털이라도 불어버리듯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떼밀어버렸다.

"뭐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 망할 년이 나한테까지!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남편 장례식 날에, 배가 터지도록 얻어 처먹고선 애들과 함께 거리로 내쫓다니! 나보고 어디로 가란 말이야!" 가련한 여자는 울부짖고 숨을 헐떡이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오오, 하느님!" 갑자기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이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입니까! 우리 같이 불쌍한 고아를 보호해주시지 않고 누구를 보호하시렵니까? 그러나 두고 봐라! 이 세상에는 반드시 심판도 있고 진리도 있을 게다, 있고말고, 나는 그걸 찾아내겠다! 천벌을 받을 더러운 년아, 어디 두고 보잔 말이다! 폴레치카, 동생을 데리고 여기 있어라, 나 좀 나갔다 올 테니.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밖에서라도 좋으니! 난 나가서 찾아봐야겠다, 이 세상에 진실이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말하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르멜라도프가 언젠가 이야기 끝에 말하던 그 녹색 모직물 숄을 머리에 쓰고 아직도 방 안에서 주책없이 서성거리는 셋방살이 주정뱅이들을 헤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으려 거리로 뛰쳐나갔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서든지 정의를 발견하려는 막연한 목적을 품고서. 공포에 질린 폴레치카는 아이들과 함께 방구석 궤짝 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동생을 껴안고 오들오들 떨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방안을 뛰어다니면서 울며불며 닥치는 대로 마구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광태를 부렸다. 셋방 든 사람들은 제각기 멋대로 떠들어대며, 지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저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자희들끼리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움을 하는 자도 있고, 그중에는 노래까지 부르는 자도 있었다.

'나도 이젠 가봐야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 소피야 세묘노브나, 어디 들어 보자, 이번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는 소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가슴속에 그토록 큰 공포와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도 루쥔에 대해서는 용감하도록 적극적인 소냐의 변호사였다. 그러나 이미 아침나절에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은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쌓여버린 자기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뜻에서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을 오히려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냐를 변호하고 싶은 그의 노력에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면 문제로서 그의 머리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무서울 만큼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눈앞에 다다른 소냐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누가 리자베타를 살해했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무서운 고통을 예감하고, 그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그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나서면서 ', 이번엔 무슨 말을 하지, 소피야 세묘노브나?'라고 외쳤을 때는, 아직도 루쥔에 대한 승리감이 가시지 않은 채 그 어떤 용감하고 도전적인 흥분 상태에 휩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카페르나우모프의 집에까지 이르자 그는 갑자기 힘이 빠지고 마음속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누가 리자베타를 살해했는지 꼭 말해야 할까?'하는 괴의한 의문을 품으면서, 망설이듯 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의문은 실로 기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비록 일시적이나마 이 순간을 연장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불가능한 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에 대해서 자기가 무력하다는 괴로운 의식에 그는 거의 압도될 지경이었다. 그는 더 생각하거나 고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급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지방에서 소냐를 보았다. 그녀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 있다가, 라스콜니코프를 보자 후다닥 뛰어 일어나서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맞으려고 걸어 나왔다.

"당신이 와 계시지 않아더라면 정말 난 어떻게 됐을까요?" 방 한가운데서 두 사람이 마주서자 그녀는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이 말만은 한시바삐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린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탁자 옆으로 와서 방금 소냐가 일어선 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서 두 걸음쯤 앞에 와서 섰다.

"어떻소, 소냐?" 그는 말했으나, 문득 자기 음성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건 '사회환경과 거기 관련된 습관'에 뿌리박고 있는 거요. 당신은 아까 그걸 깨달았소?"

고뇌의 빛이 소냐의 얼굴에 나타났다. "제발 어제 같은 말은 말아주세요, 그렇잖아도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까요...."

그녀는 이처럼 비난 비슷한 말을 하고,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나 않았나 해서 급히 웃어 보였다.

"나는 바보라 거기서 그냥 뛰쳐나왔어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나는 당장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어쩐지 곧 ...당신이 오실 것만 같아서."

그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그들에게 집에서 나가달라고 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진실을 찾으려고' 어디론지 뛰어나갔다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어머나, 이를 어쩌면 좋아!" 소냐는 외쳤다.

"그럼 빨리 가봐야죠."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망토를 집어들었다.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하는군요!"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초조하게 말했다.

"당신 머릿속엔 그 사람들 생각밖에 없으니 말이오! 나하고도 좀 같이 있어줘요."

"하지만...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런 식으로 집을 뛰쳐나간 이상 반드시 당신 생각을 할 거요. 이제 당신한테 들를 테니 보시오. 그때 당신이 여기 없으면 도리어 나쁘지 않겠어요......"

소냐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마룻바닥만 내려다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는 루쥔이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하고 그는 소냐 쪽은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만일 그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런 타산으로 당신을 친 것이라면 당신은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나하고 레베쟈트니코프가 그 자리에 없어더라면 말이오! 그렇잖소?"

"그래요."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불안한 듯이 방심한 어조로 이렇게 되풀이했다.

"사실 말이지 나는 거기 없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오! 더욱이 레베쟈트니코프가 거기 나타난 건 정말 우연이었으니까."

소냐는 잠자코 있었다.

"만일 감옥에라도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시오. 어제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소?"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잠시 기다렸다.

"나는 당신이 또 '아아,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만두세요!'라고 외칠 줄 알았는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웃기 시작했으나, 어딘지 어색하게 보였다. "왜 또 말이 없습니까?" 잠시 후 그는 또 물었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할 게 아니오? 나는 레베쟈트니코프가 말하는 하나의 '문제'를 당신이 어떻게 해결할지, 그걸 무척 알고 싶은 거요(그는 머리가 혼란해지는 모양이었다). 보시오, 당신이 루쥔의 계획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때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아이들도, 그리고 덤으로 당신까지도 함께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덤이라는 거요- 파멸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즉 그런 흉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소. 폴렌카도 마찬가지죠...그 애도 역시 같은 길을 밟게 될 테니까. , 여기서 말이오, 만일 이때 모든 것이 당신 결심 하나에 달려 있다면, 즉 이 세상에서 루쥔과 그 아이들 중 어느 쪽이 살아야 하느냐? 루쥔이 살아서 추잡한 일을 할 것이냐? 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죽어야 하느냐? 이렇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겠소? 둘 중 어느 쪽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걸 묻고 싶은 거요."

소냐는 불안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간접적인, 멀리서 슬며시 접근해 들어오는 듯한 말 가운데 무언가 특수한 것이 숨어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전부터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시리라는 예감이 들었어요"하고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좋군요. 하여튼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겠소?"

"왜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일에 대해 물으시는 거죠?" 혐오의 빛을 디면서 소냐는 물었다.

"그럼 루쥔이 살아서 추잡한 짓을 계속하는 게 좋다는 말이군요! 당신은 그것조차 해결할 용기가 없소?"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왜 물어선 안 될 말을 물으시죠?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세요? 그런 일이 내 결단에 달려 있다는 건 말도 죄지 않는 소리예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살아선 안 된다는 그런 심판의 권리를 대체 누가 나한테 주었어요!"

"하느님 뜻을 거기 개입시킨다면 말하나 마나겠지." 라스콜니코프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보다도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하고 소냐는 괴로운 표정으로 외쳤다. "당신은 또 엉뚱한 데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하는군요. 당신은 다만 나를 괴롭히기 위해 여기 오셨나요!"

그녀는 더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세차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우울한 우수에 잠긴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5분쯤 지났다.

"하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몰라, 소냐." 이윽고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안간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의적인 뻔뻔스러움도, 허세로밖엔 보이지 않는 도전적인 태도도 사라져버렸다. 음성까지 갑자기 약해졌다. "어제 나는 오늘 용서를 빌러 오진 않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지금은 거의 용서를 비는 듯한 말로 얘기를 시작했어...내가 루쥔과 하느님의 뜻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나는 용서를 빈 거야, 소냐."

그는 빙긋이 웃으려고 했지만, 그 창백한 미소에는 무언가 끝을 맺지 못한 맥없음이 서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이상한 감정이, 소냐에 대한 그 어떤 날카로운 증오감이 그의 마음을 스쳐 갔다. 그는 스스로 자기 감정에 놀라며 머리를 번쩍 쳐들고 뚫어질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유심히 보고 있는, 불안에 찬 괴로울 만큼 애처로운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거기엔 사랑이 어려 있었다. 그의 증오감은 환영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다만 그 순간이 왔음을 뜻했다.

그는 다시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별안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냐를 흘긋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그녀의 침대로 옮겨 앉았다.

이 순간은 라스콜니코프의 감각 속에서, 그때 그가 노파 뒤에 서서 도끼를 고리 끈에서 빼 들고 이젠 '한순간도 주저할 수 없다'고 느끼던 순간과 무섭게도 흡사했다.

"왜 그러세요?"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도대체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자신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침대 위에 나란히 걸터앉고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는 심장이 심하게 고동쳐서 금방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여자에게로 돌렸다. 그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고 애쓰면서 힘없이 일그러졌다. 공포감이 그녀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아니, 왜 그러세요?" 그녀는 흠칫 몸을 도사리면서 이렇게 되풀이했다.

"소냐, 아무것도 아니야. 놀랄 건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잘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의식을 잃은 열병 환자처럼 이렇게 중얼댔다.

"왜 나는 여기 와서 당신만을 괴롭히는 걸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는 불쑥 덧붙였다.

"대체 왜 그럴까? 나는 아까부터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어, 소냐...."

그는 사실 15분 전엔 이 질문을 자신에게 했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온몸에 계속적인 전율을 느끼면서 완전한 허탈 상태에 빠진 채 거의 정신을 잃고 이 말을 하고 있었다.

"아아, 당신은 무척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괴로운 듯이 그녀는 말했다.

"모든 게 다 바보 같은 짓이야!....그런데 소냐(그는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파리하고 힘없는 표정으로 한 2초 동안 비시시 웃어 보였다)...어제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하나?"

소냐는 불안한 얼굴로 기다렸다.

"나는 어제 돌아갈 때 어쩌면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일 또 오게 되면 당신한테...누가 리자베타를 죽였는지 알려주겠다고 했어."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그걸 말해주려고 온 거야."

"그럼 당신은 어제 정말..."소냐는 간신히 소곤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시죠?" 퍼뜩 정신이 드는 듯 그녀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소냐는 괴롭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알고 있어."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찾아내셨나요, 그 사나이를?"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니, 찾아낸 건 아냐."

"그럼 어떻게 그걸 아세요?" 다시 1분쯤 잠자코 있다가ㅏ 이번엔 드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여자 쪽으로 몸을 돌려 뚫어지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 맞혀봐." 조금 전처럼 맥없이 일그러진 미소를 디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냐는 온몸에 경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아아, 당신은....나를...왜 당신을 나를 그렇게....놀라게 하세요?" 어린애처럼 애처롭게 웃어보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나는 그 사나이와 막역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겠지...내가 그를 알고 있는 이상." 라스콜니코프가 이제는 눈을 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 사나이는 리자베타를...죽이려 했던 건 아냐...그는 그 여자를...우연히 죽이게 되었을 뿐이야. 그는 노파만을 죽이려 했어...노파가 혼자 있을 때...그런 생각으로 갔던 거야...그런데 거기 리자베타가 들어왔어...그래서 그만 그 여자까지 죽여버리고 말았지...."

다시 무서운 1분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래도 알아맞히지 못하겠나?: 높다란 종류에서 껑충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냐는 거의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이렇게 말하자 예전에 경험했던 그 낯익은 감각이 또다시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소냐를 바라보는 순간 그 얼굴에서 리자베타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도끼를 들고 다가갔을 때 리자베타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그는 선명히 상기했다. 그녀는 얼굴에 어린애 같은 경악의 빛을 띠고 한 손을 앞에 내밀고는, 그가 다가감에 따라 벽쪽으로 뒷걸음질을 쳤었다. 그것은 갑자기 무엇에 놀란 어린애가 자기를 놀라게 한 상대방을 불안스레 바라보면서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조그만 손을 앞으로 내밀고 비슬비슬 뒷걸음질을 치는 것과 똑같았다. 지금 소냐에게도 거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은 허탈한 표정으로 똑같은 경악의 빛을 띠면서, 그녀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끝으로 가볍게 그의 가슴을 떼밀고는 조금씩 몸을 뒤로 빼면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몸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갔으나, 그 얼굴로 쏠린 그녀의 시선은 점점 더 굳어져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공포는 갑자기 그에게로 옮겨졌다. 똑같은 모양으로 그도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똑같은 어린애 같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이젠 알았겠지?" 마침내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아!" 그녀의 가슴에서 무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맥없이 침대에 쓰러지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그러나 이내 곧 몸을 일으키더니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두 손을 잡고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으스러지게 꼭 그러쥐면서 또다시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그의 얼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 최후의 절망적인 눈초리로 그녀는 무언가 한 가닥 희망이나마 발견하여 잡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한참 뒤에 이때 일을 회상했을 때도 그녀는 언제나 이상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었는데, 도대체 그녀는 무슨 근거에서 이미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대뜸 단정해버렸을까? 예를 들어 그녀가 그런 종류의 것을 예감했다고는 차마 그녀로서도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가 그 정도의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확실히 전부터 예감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만둬, 소냐!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아줘!" 그는 괴로운 듯이 애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고백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벌덕 일어나더니 두 손을 맞비비면서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갔으나, 몸을 돌려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와 거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엇에 찔린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 몸을 던져 무릎을 꿇었다.

", 어쩌자고, 어쩌자고 당신은 그런 짓을 하셨어요!"하고 그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몸을 던지며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라스콜니코프는 흠칫 몸을 비키고는 서글프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야, 소냐.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그런 나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다니. 당신은 아마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아녜요, 아녜요, 이 넓은 세상에서 지금 당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히스테리라도 일으킨 듯이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들어 대번에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도 그 감정에는 반항라려 하지 않았다. 눈물 두 방울이 눈에서 흘러나와 속눈썹에 맺혔다.

"그럼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거지, 소냐?" 한 가닥 희망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그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어디든 따라가겠어요! 아아, 하느님!...나는 얼마나 불행한 여잘까요! , 왜 좀 더 빨리 당신을 알지 못했을까요! 왜 당신은 좀 더 빨리 나한테 와주지 않으셨어요! 아아!"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 말이야."

"지금 오시다니! 지금 와서 무얼 해요! ...함께...우리 함께!"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듯이 다시 그를 끌어안으면서 되풀이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징역이라도 가겠어요!"

그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입술에는 아까처럼 증오에 찬, 거의 오만스럽기까지 한 미소가 또다시 퍼졌다.

"난 말이야, 소냐, 아직 징역 갈 생각은 없는 지도 몰라"하고 그는 말했다.

불행한 사나이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인 괴로운 동정이 가라앉자, 다시금 살인자라는 끔찍스런 관념이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돌변한 그의 어조에서 그녀는 문득 살인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움찔하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어찌하여, 무엇을 위해서 이런 사건이 저질러졌는지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의문들이 일시에 그녀의 의식 속에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정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살인자라니! 그럴 수가 있을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는 걸까!" 그녀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깊은 의혹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자고 당신은, 어쩌자고 당신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건가요? 정말로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저 돈을 빼앗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이젠 그만둬줘, 소냐!" 그는 피곤한 듯이 짜증 섞인 어조로 대꾸했다.

소냐는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먹을 것이 없었군요! 당신은...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그렇죠?"

"아냐, 소냐, 그게 아냐" 그는 외면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난 그렇게까지 굶주리지 않았어...물론 어머니를 돕고 싶었지. 하지만...그것도 완전한 이유는 못 돼....나를 더 괴롭히지 말아줘, 소냐!"

소냐는 손뼉을 탁 쳤다.

"그럼 모든 게 사실이란 말인가요! 아아, 그게 어떻게 사실일 수 있어요!...누가 그런 걸 사실로 믿겠어요? 자기 돈을 털어서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 돈을 빼앗으려고 살인을 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아!"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그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주신 돈도...그 돈도...아아, 그 돈도 역시...."

"그건 아니야, 소냐." 그는 급히 말을 막았다. "그 돈은 그렇지 않아, 안심해! 그건 어머니가 어느 상인을 통해서 나한테 보내준 돈이야. 나는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그 돈을 받았지만, 그날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준 거야. 라주미힌이 봐서 알고 있어...그 사내가 나 대신에 받았으니까...그건 내 돈이야, 틀림없는 내 돈이야."

소냐는 의아스러운 듯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 말인데...나는 거기 돈이 있었는지 그것조차 몰라." 그는 생각에 잠기는 듯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때 노파가 목에 걸고 있던 지갑을 빼앗았어. 속이 가득찬 양가죽 지갑이었지...그러나 나는 지갑 속을 열어보지도 않았어. 아마 지갑을 열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겠지...그리고 물건은 주로 커프스단추나 장식줄 따위뿐이었는데 나는 이틑날 아침에 그런 걸 모두 지갑과 함께 거리의 어느 빈터 돌 밑에다 감춰버렸어...지금도 그대로 거기 파묻혀 있을 거야...."

"그럼 왜 ...돈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어요. 자기는 하나도 갖지 않았으면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그녀는 성급히 물었다.

"모르겠어...나는 아직 결심이 서 있지 않았던 거야. 그 돈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는 또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으나,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싱긋 맥없이 웃어 보였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릴 하고 있지, 안 그래?"

소냐의 머리에는 순간적으로 '정신이상이 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아니, 무슨 다른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것 봐, 소냐." 그는 갑자기 어떤 영감에 사로잡힌 듯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좀 들어줘, 만약에 내가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하고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면서 수수께끼라도 내듯이, 그러나 진지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엇다.

"만약에 그랬다면 나도...지금 행복했을 거야! 제발 그것을 알아줘!"

"그러나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야!" 잠시 후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외쳤으나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절망적인 느낌마저 엿보였다.

"지금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참회한댔자 그게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야! 아아, 소냐, 난 그런 것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냐!"

소냐는 다시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침묵을 지켰다.

"어제 내가 당신더러 함께 가달라고 청한 건, 내게 남은 거라곤 당신뿐이기 때문이야."

"어디로 가는데요?"하고 소냐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도둑질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줘." 그는 빈정거리듯이 히죽 웃었다.

"우린 서로 다른 세계의 인간이니까...그런데 소냐, 나는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어제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가려고 했는지를 분명히 알겠어! 어제 그런 말을 할 때는 나 자신도 어딘지 몰랐던 거야. 내가 함께 가달라고 청한 것도, 오늘 여기 온 것도 목적은 단 하나야. 소냐, 날 버리지 말아줘, 버리지 않겠지, 소냐?"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 무엇 때문에 죄다 고백했느냐 말이야!" 잠시 후 그는 한없는 고뇌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절망적으로 외쳤다. "지금 당신은 내 설명을 기다리고 있어, 소냐. 당신은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도 그걸 알아. 하지만 난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어차피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저 그 때문에 더 고민하게 될 테니 말이야...바로 나 때문에! 저런, 당신은 울면서 또 나를 포옹하는군.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포옹하는 거야? 내가 혼자 견딜 수가 없어서 '너도 함께 괴로워해라, 그럼 나도 좀 편해질 테니까!'하고 자기 고통을 남한테 떠넘기려고 찾아왔기 때문인가? 아니, 이런 비열한 사내라도 당신은 사랑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당신 역시 고민하고 계시잖아요?"하고 소냐는 외쳤다.

또다시 그의 가슴엔 아까와 같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한순간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소냐, 내 마음은 악독해. 그걸 알아야 해. 모든 건 그것으로 설명이 되니까. 나는 악독한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 온 거야. 개중에는 오지 않는 자도 있지. 그러나 나는 겁쟁이야...비열한이야! 하지만....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야...지금 그걸 말해야겠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군......"

그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우린 서로 인간이 달라!" 그는 다시 외쳤다. "아무래도 합쳐질 순 없어!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길 왔을까? 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녜요, 아녜요, 오시길 잘했어요!"하고 소냐는 외쳤다. "내가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마음을 결정한듯이 그는 말했다.

"그건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사람을 죽인 거야...., 이젠 알겠지?"

", 아니요." 소냐는 순진하게도 겁에 질린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지만...제발 말씀해주세요! 난 알 수 있을 거예요, 마음속으로 모든 걸 다 알 수 있을 거예요!"

"알 수 있을 거라고? 좋아, 그럼 말해보지!" 그는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었다.

"실은 이런 거야. 언젠가 나는 이런 문제를 내 자신에게 제기해본 적이 있었지. 예를 들어 나폴레온이 내 위치에 놓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의 진로를 개척하는 마당에 툴롱도, 이집트도, 몽블랑 정복도 없고, 그런 아름답고 위대한 것 대신에 오직 괴상망측한 14등관 과부 할멈뿐이고, 더구나 그 노파의 트렁크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서는 -출세의 길을 열기 위해서야, 알겠지? -노파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면, 그것밖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로 나왔을까? 그것이 너무나 속악한 짓이고 또 너무나 ...죄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주저했을까? , 그래서 말이야, 난 이 '문제'로 무척 오랫동안 고민했어. 그러다가 겨우 어쩌다 문득 나폴레옹 같으면 그런 걸 주저하기는커녕 그것이 속악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테고...오히려 그런 걸 주저해야 할 이유도 몰랐을 것이다....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어. 만약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물론 우물쭈물 생각에 잠길 것도 없이 단숨에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생각하는 것을 집어치우고...단숨에 해치운 거야. 위인의 예에 따라서 말이야. 바로 이렇게 해서 일어났던 거야! 소냐, 당신한테는 우습게 보일 테지? 그러나 소냐, 여기서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 사건이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는 그 점일지도 모르지...."

소냐는 조금도 우습지가 않았다.

"좀 더 솔직히 말씀해주세요...그렇게 비유만 하지 말고" 그녀는 더욱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는 소냐 쪽으로 몸을 돌려 처량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래 , 이번에도 당신 말이 옳아, 소냐. 이건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야. 무의미한 군소리에 지나지 않아! 실은 우리 어머니가 거의 무일푼의 가난한 노파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누이동생은 어쩌다 우연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남의 집 가정교사 노릇이나 하며 돌아다녀야 할 신세지. 그러니까 두 사람의 희망은 오직 나 하나에 달려 있었던 거야.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대학을 계속 다닐 수가 없어서 학업을 잠시 중단해야 했어. 설사 그대로 공부를 계속했다 하더라도 10년이나 12년 후에, 그것도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야만 기껏 어디 교사나 관리가 되어 1년에 천 루블 정도의 봉급을 받는 게 고작이었겠지...(그는 암송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어머니는 고생과 슬픔 때문에 말라버리실 거야. 그러니 나는 어차피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릴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누이동생...누이동생에겐 더 나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아니, 도대체 뭐가 좋아서 한평생 모든 걸 방관만 하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어머니를 잊고, 예를 들어 누이동생의 치욕을 얌전히 참아야 하느냐 말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매장하고 그 대신 새로운 것, 아내와 자식을 얻은 다음 그들 역시 돈 한 푼 없고 빵 한조각 없는 처지로 남겨두기 위해선가? 그래서...그래서 나는 결심한 거야. 노파의 돈을 손에 넣으면 처음 몇 해 동안의 비용을 충당하고, 어머니의 고생도 덜어드리고, 마음 놓고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대학을 나온 이후 사회생할의 첫걸음에서 밑천으로 삼자...그리고 모든 걸 크게 철저히 해치워서, 완전히 새로운 출세의 길을 열고 새로운 독립된 길에 들어서자!...그래서 ...아니, 이게 다야. 그야 물론 노파를 죽인 건, 내가 나빴겠지..., 이젠 그만해둬!"

힘없는 어조로 간신히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아아, 그건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소냐는 처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나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진실을!"

"그게 무슨 진실이에요! 오오, 하느님!"

"나는 다만 이 한 마리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백해무익한 더러운 이를."

"어머나, 사람을 이라고요!"

"그야 나도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대답했다.

"하긴 나는 지금 거짓말을 늘어놓는 거야, 소냐"하고 그는 덧붙였다.

"아까부터 거짓말만 하고 있었어...여태까지 말한 건 죄다 엉터리야. 사실은 당신 말이 옳아. 여기엔 전혀, 별개의 원인이 있어!...나는 벌써 오랫동안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든. 소냐...아아, 나는 지금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아."

그의 눈은 열병환자처럼 불타올랐다. 그는 거의 헛소리나 다름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 언저리에는 불안스런 미소가 감돌고, 흥분한 마음의 그늘에서는 지칠 대로 지친 무기력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고민하는지 소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도 어쩐지 이상했다.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아아, 하느님!' 그녀는 절망 속에서 두 손을 쥐어짰다.

"아니야, 소냐, 그건 그렇지 않아!" 갑자기 새로운 상념에 충격을 받고 흥분을 느낀 듯이 그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또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않았어! 차라리...이렇게 생각해줘(그래 확실히 그편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고, 내가 자존심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은 간악하고 비열하고 복수심이 강한 놈이라고...게다가 발광하기 쉬운 경향ㄲ지 있는 인간이라고 말이야.(이렇게 된 이상 죄다 실토해버리마! 발광 증세는 전부터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어!) 아까 나는 당신한테 대학을 계속다닐 수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몰라. 등록금 정도는 어머니가 송금해줄 것이고, 신발이나 옷이나 빵을 살 돈은 내 힘으로 벌 수 있었을 테니까, 틀림없어! 가정교사질만 해도 한 번에 50코페이카는 받았으니 말이야. 라주미힌도 그렇게 일하고 있거든! 그러나 나는 베알이 꼴려서 일하려 하지 않았던 거야. 맞았어, 배알이 꼴렸던 거야.(이건 정말 근사한 말이군!) 그래서 나는 거미처럼 제집 한구석에 틀어박혀 버렸어. 당신은 게딱지 같은 내 방에 왔었으니까 알겠지만....소냐, 알겠지,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은 인간의 마음을 머리까지 짓눌러버리게 마련이야! 아아, 나는 얼마나 그 게딱지 같은 골방을 저주했던 것일까! 그래도 어쨌든 나는 그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어! 일부러 나오려고 하지 않았던 거야. 며칠이고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일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먹으려고도 않고 줄곧 누워만 있었지. 나스타시야가 가져다주면 먹고, 가져다주지 않으면 그대로 하루가 지나가 버리는 거야. 일부러 고집을 부려 갖다 달란 말도 하지 않았어! 밤엔 불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뒹굴었지만, 촛불 값도 벌려고 하지 않았지! 공부는 해야 했는데도 책은 다 팔아버리고, 탁자 위 노트와 수첩 따위엔 손가락만큼 두툼하게 먼지가 쌓였을 정도야. 나는 무엇보다도 그냥 누워서 생각하기를 좋아했지. 그래서 밤낮 생각만했어....그리고 줄곧 꿈만 꾸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말할 수 없이 기괴한 오만 가지 꿈을 말이야! 그러니 그 무렵부터 점점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어, ....아니, 그것이 아냐! 또 쓸데없는 소릴 하려 했군! 그때 나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하곤 했지. 나는 왜 이렇게 바보일까? 만일 남들이 모두 바보이고 그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왜 나는 좀 더 현명해지려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후에 나는 깨달았어, 소냐. 모든 사람이 다 현명해지기를 기다리려면 그야말로 너무 기나긴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그리고 또 나는 깨달았지. 그런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앟고, 인간이라는 건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또 누구도 인간을 개조할 수는 없다고. 그런 데다가 공연히 노력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인간의 법칙이다. ...법칙이야, 소냐! 정말로 그래!...그리고 나는 이제야 두뇌와 정신이 확고하고 강한 인간이 그들 위에 설 수 있는 지배자라는 걸 안 거야! 많은 일을 용감히 해치우는 자가 올바른 인간이 되는 거지! 보다 많은 것에 침을 내뱉을 수 있는 자가 인간의 입법자가 되고, 누구보다도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누구보다도 올바른 인간이 되는 거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오직 맹인만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줄곧 소냐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녀가 과연 알아듣는지 어떤지는 이미 마음을 쓰지 않고 있었다. 강렬한 열정이 완전히 그를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그는 일종의 어두운 환희에 싸여 있었다. (사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냐는 그의 음산한 신조가 그의 신앙이 되고 법칙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 깨달았어, 소냐." 그는 환희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권력이란 다만 그것을 잡기 위해서 용감히 몸을 굽힐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단 한 가지, 그저 대담하게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때 내 머리엔 난생처음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그건 나 이전에는 누구 한 사람,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거야! 어느 누구도!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게 태양처럼 명백해졌어. 이러한 불합리 옆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 꼬리를 잡고 흔들어대는 정도의 아주 간단한 일조차 해치운 자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나는....그것을 해치우고 싶었어. 그래서 죽인 거야...나는 다만 해치우고 싶었을 뿐이야. 소냐, 이것이 노팔르 죽인 원인의 전부야!"

"아아! 그만두세요,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소냐는 손뼉을 탁 치면서 외쳤다.

"당신은 하느님을 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벌을 내려 악마한테 넘기신 거예요!"

", 그 말이 나왔기에 말이지, 소냐, 난 어둠 속에 뒹굴고 있을 때, 이건 악마에게 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제나 머리에 떠오르곤 했어, 어때?"

"잠지코 계세요! 농담 같은 건 그만두세요. 당신은 신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아, 하느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가만 있어, 소냐! 나는 절대 농지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냐.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어, 나는 악마에 홀린 거야. 그러니 소냐, 아무 말도 말아줘!" 그는 음울한 어조로 집요하게 되풀이했다.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런 건 이미 그때, 어둠 속에 누워 있을 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몇 번이나 나 자신에게 속삭였던 일이야...그런건 모두 이미 세밀한 점에 이르기까지 검토를 거듭한 문제라서 나는 죄다 알고 있어, 죄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넋두리엔 진저리가 날 만큼 싫증이 났던 거야! 나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 소냐. 그런 넋두리같은 자문자답은 집어치우고 싶었어! 당신은 내가 무턱대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나? 나는 지자(知者)로서 행동했던 거야. 그러나 결국은 그런 걸 몰랐다고 생각하나? 내게는 권력을 내게는 권력을 가질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수없이 자문하면서 거듭 생각한 걸 보면, 그것은 곧 권력을 가질 권리가 없었다는 증거였어. 그리고 인간은 이냐 아니냐 하고 내가 자문한다면 나에 있어서는 이가 아니고, 다만 이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한 사람에게만, 아무런 의문도 없이 전진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인간이 이 같은 존재라는 걸 내가 몰랐다고 당신은 생각하나? ...아아, 나폴레옹 같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안 했을까 하는 문제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한 걸 보면, 스스로 나폴레옹이 아니란 걸 나는 명확히 느꼈던 거야. 나는 그런 부질없는 넋두리의 온갖 괴로움을 견뎌냈어. 그러고 나서 그런 고민을 내 어깨에서 떨어버리고 싶었어. 나는 말이야, 소냐, 그저 무작정 죽이고 싶었던 거야. 나 자신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던 거야! 이 점에 대해선 나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니야. 천만에! 또 돈과 권력을 손에 넣어서 인류의 은인이 되려고 죽인 것도 아니야. 당치도 않은 소리지! 나는 그저 죽였을 뿐이야. 나를 위해서 죽인 거야.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의 은인이 되든, 일평생 거미처럼 모든 인간을 거미줄에 얽어서 생피를 빨게 되든, 그 순간의 나에겐 어차피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필요했던 건 돈이 아니라는 점이야. 나는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어. 제발 내가 말하는 걸 이해해줘. 나는 설사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앞으로 살인 같은 짓은 절대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다른 걸 알고 싶었어. 그것이 내 등을 떼밀었던 거야. 나는 그때 한시바삐 알고 싶었어. 나도 남들과 같은 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그걸 알아야 했던 거야. 나는 밟고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몸을 굽혀서 감히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나는 전전긍긍하는 벌레 같은 존재냐, 아니면 권리를 가진 인간이냐......"

"사람을 죽일?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가졌다는 건가요?" 소냐는 기가 차다는 듯이 손뼉을 탁 쳤다.

"이것 봐, 소냐!" 그는 화를 내며 외치고는, 무어라고 반박하려다가 갑자기 경멸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남의 말을 꺾지 말아요, 소냐!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만 말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다름 아니라 그때는 악마 녀석이 나를 유혹해놓고 나중에 가서 '네게는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이에 지나지 않으니까'라고 나한테 설명하더란 말이야! 악마란 놈이 나를 우롱했던 거야. 그래서 난 지금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거야! , 어서 손님 대접을 해야지! 만약 내가 이가 아니라면 뭣 하러 당신한테 찾아왔겠어! 실은 그때 내가 노파한테 간 건 그저 시험 삼아 가봤던 거야...그 점을 알아줘!"

"그리고 죽였군요! 죽였군요!"

"그런데 어떻게 죽였다고 생각해? 살인이란 그렇게 하는 걸까? 내가 그때 간 것처럼 그렇게 사람을 죽이러 가는 걸까? 내가 어떤 모양으로 갔었는지 그건 언젠가 다음에 이야기하지. 정말 나는 그 노파를 죽인 걸까? 아냐, 나는 나 자신을 죽였지 그 노파를 죽인 게 아니야! 나는 거기서 단숨에 나 자신을 죽여버린 거야, 영원히!...그 노파를 죽인 건 악마의 짓이지 내가 아니란 말이야..., 됐어, 됐어, 소냐, 이젠 그만 날 내버려 둬." 갑자기 경련적인 고민에 몸부림치면서 그는 외쳤다. "제발 날 내버려 둬!"

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서 집게로 죄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아, 이런 고통이 또 어디 있을까!" 괴로운 비명이 소냐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 이젠 어떡하면 좋지, 말해줘!" 그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절망한 나머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어떡하면 좋으냐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는 외쳤다. 그러자 지금까지 눈물이 글썽거리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일어나세요!(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곧 여기서 나가 네거리에 서세요. 그리고 거기 엎드려서 우선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에 사방으로 돌며 온 세계를 향해서 절을 하고 똑똑히 들리게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하게요!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다시 생명을 내려주실 거예요. 가시겠죠?" 그녀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이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그의 두 손을 움켜쥐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는 놀랐다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이 뜻밖의 감격에 어떤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당신은 징역 이야길 하고 있는가 보군, 소냐? 자수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침울한 어조로 물었다.

"고통을 받고 그것으로 속죄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해요."

"아냐! 나는 그런 자들에겐 가지 않겠어, 소냐."

"그럼 어떻게, 대체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세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갈 작정이세요?"하고 소냐는 부르짖었다.

"지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어머님께선 뭐라고 하시겠어요? 아아, 그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아니,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을까! 당신은 이미 어머님도 누이동생도 다 버리셨어요. 아주 버리셨어요. 버리셨어요! 아아, 이 일을 어쩌나!"하고 그녀는 외쳤다.

"당신 자신도 잘 아시잖느냐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있어요!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둬, 소냐."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가라는 거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그런건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아....그들은 자기 손으로 몇백만의 인간을 살육하면서도 자기대로는 선행을 베푼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들은 모두 사기꾼이고 비열한이야, 소냐! 나는 가지 않겠어. 게다가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사람은 죽였지만 돈을 훔칠 용기가 없어서 돌 밑에 감추었습니다, 라는 말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빈정거리듯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면 놈들은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할 테지. 이 바보야, 왜 그 돈을 갖지 않았어, 겁쟁이 바보 같으니라고! 놈들은 아무 것도, 아무것도 몰라, 소냐.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가야 하지? 난 안 가겠어.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둬, 소냐......"

"당신은 반드시 고민할 거예요. 고민할 거예요." 처절한 애원의 빛을 띠고 두 손을 내밀며 그녀는 되풀이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너무 학대했는지도 몰라." 생각에 잠기는 듯한 음울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인간이지, 이가 아닌지도 몰라. 너무 조급히 자신을 책망했는지도 몰라...나는 좀 더 싸워보겠어."

오만한 웃음이 그의 입술 언저리에 떠올랐다.

"그토록 무서운 고민을 안은 채! 어떻게 한 평생을, 한평생을!"

"그러는 동안 익숙해지겠지...."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울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1분쯤 지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만 울어줘, 이제부터 용건을 말해야 하니까.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놈들이 내 뒤를 쫓으며 체포하려 하고 있다는 걸 당신한데 알리기 위해서야......"

"아아!"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아니, 왜 그런 소리를 지르지? 아까는 나더러 징역을 가라고 해놓고 이번엔 또 그렇게 놀라다니!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그런 놈들에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테니까. 확실한 증거라곤 없거든. 어제만 해도 나는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서, 이젠 틀렸구나 생각했었지. 오늘은 사정이 달라졌어. 놈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모두 양쪽 끝에 꼬리가 있어서, 그러니까 놈들의 기소 자료를 나는 내게 유리하게 역용할 수 있단 말이야, 알겠어? 정말로 역용해 보일 테야. 이젠 요령을 알았거든. 그러나 일단 구속은 당할 거야. 만약에 어떤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쯤은 감옥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몰라. 하긴 이제부터라도, 오늘 중으로 감금될지도 모르지...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 소냐. 얼마 후엔 다시 석방되게 마련이니까...왜냐하면 놈들은 정확한 증거라곤 하나도 갖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런 증거가 나타날 리는 만무하거든. 장담할 수 있어. 하여튼 지금 놈들이 갖고 있는 증거로 사람 하나를 망쳐버릴 순 없단 말이야. , 이젠 됐어...난 그저 당신에게 랄리기만 하면 되니까...누이동생이나 어머니한텐 어떻게 해서든 잘 납득시켜서 놀라지 않도록 할 생각이야. 하긴 이번에 누이동생의 신상 문제는 보증된 셈이니까...따라서 어머니도..., 내 말은 이게 다야. 그러나 당신도 조심해줘, 만일 내가 감금되면 면회 와주겠어?"

", 가고말고요! 가고말고요!"

그들은 마치 폭풍 뒤에 단둘이 황량한 바닷가에 밀어 올려진 사람들처럼 풀이 죽은 처량한 모습들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소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푸근하게 자기를 감싸주고 있는가를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괴롭고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무서운 느낌이었다! 아까 소냐한테 오는 도중만 해도 그는 자기의 모든 희망과 모든 활로가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려 있다고 느꼈었다. 그는 자기의 고민을 얼마만큼이라도 덜어주기를 바랐었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알자 갑자기 전보다도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을 느꼈고 의식했다.

"소냐"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형무소로 가더라도 역시 면회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소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다.

"당신 십자가를 갖고 계세요?" 하고 문득 생각난 듯이 소냐는 갑자기 물었다.

처음에 그는 질문의 뜻을 몰랐다.

"없죠? 없으시죠?..., 그럼 이걸 가지세요, 노송나무로 만든 겅예요. 나한텐 리자베타가 준 구리 십자기가 또 하나 있어요. 리자베타하고 서로 십자가를 교환했었죠. 그녀는 나한테 십자가를 주고, 나는 그녀한테 조그만 성상을 주었어요. 난 앞으로 리자베타가 준 십자가를 걸기로 하고, 이건 당신한테 드리겠어요. , 받아주세요....이건 내 것이에요! 내 것이라니까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우린 함께 고통을 받는 거예요, 함께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받아두지!"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받으려고 내밀었던 손을 이내 움츠리고 말았다.

"지금은 안 되겠어, 소냐. 나중에 받을께."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 알겠어요. 그게 낫겠군요, 그게 낫겠어요." 그녀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고통을 받으로 갈 때 이걸 걸고 가세요. 저한테 들르시면 제가 걸어드리겠어요. 그리고 같이 기도를 올리고 함께 떠나도록 해요."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세 번 노크했다.

"소피아 세묘노브나, 들어가도 좋습니까?"

누군지 무척 귀에 익은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냐는 깜짝 놀라며 문께로 달려갔다. 레베쟈트니코프의 금발 머리가 불쑥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레베쟈트니코프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이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하고 그는 갑자기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무슨 다른 생각에서가 아니라...그저 그렇게...하여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실은 댁에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광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젖혀놓고 갑자기 소냐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냐는 앗 하고 비명을 올렸다.

"적어도 그런 것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있어야죠! 아까 그분이 돌아왔는데, 돌아왔다기보다는 어디서 쫓겨 온 듯했어요. 더구나 매까지 좀 맞은 모양이더군요...적어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분은 자하르이치의 상관한테 달려갔었는데 주인은 집에 없더랍니다. 상관은 어느 다른 장군 댁에서 식사 중이었었나 봐요...그런데 아시겠어요, 그분은 그 식사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는 거예요...그러니까 그 장군 댁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떼를 쓰다시피 해서 상관을 불러냈답니다. 아직 식사 중인 사람을 말이에요. 그다음 어떻게 되었는가는 쉽사리 짐작이 갈 겁니다. 물론 그분은 쫓겨 나왔죠. 본인 말로는 그 상관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고 무엇을 던지기까지 했다는군요. 글쎄, 그런 일을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어떻게 돼서 그분이 붙잡히지 않았는지는 이상할 지경입니다! 지금 그분은 모든 사람한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한테까지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더군요. 고함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고 해서, 아 참, 그분은 이런 소릴 하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손풍금을 들고 거리로 나가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하고 나도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돈을 벌어야겠다, 그리고 날마다 그 장군 댁 창문 밑에 가겠다....그리고 '관리 아버지를 둔 양갓집 아이들이 거지들처럼 거리를 방황하는 꼴을 그자에게 보여줄 테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을 마구 때리는 바람에 아이들은 울고 불고 야단입니다. 레냐에겐 '고향 마을'노래를 가르치고, 사내아이에겐 춤을 가르치고, 폴레치카에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옷이란 옷은 닥치는 대로 갈기갈기 찢어서 그걸로 아이들에게 씌울 광대 모자를 만드는가 하면, 자기는 악기 대신 두드린다면서 대야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남의 말은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군요.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아무래도 제정신 같지가 않아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말을 더 계속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때까지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냐는 갑자기 망토와 모자를 집어 분주히 몸에 걸치면서 방에서 뛰쳐나갔다. 레베쟈트니코프도 뒤따랐다.

"미쳐버린 게 분명해요!" 그는 함께 한길로 나가면서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했다.

"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폐병 환자는 그런 증상이 뇌에 나타나는 수가 있다더군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의학에 전혀 문외한입니다만. 하긴 그분을 좀 달래보려고도 했지만,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질 않아요."

"당신은 결핵이라는 걸 그분에게 말했습니까?"

"아니,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런 건 본인이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겁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울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우는 걸 그치는 법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당신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람 살기가 너무 편하지 않을까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꾸했다.

"죄송합니다만, 잠깐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겐 이해하기 꽤 어렵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모르십니까, 파리에선 이미 논리적인 설득만으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해서 진지한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는걸? 최근 사망한 유명한 학자인 모 교수가 그러한 치료 방법을 생각해냈답니다. 그 사람의 근본적인 생각은, 광인에게 신체 기관의 특별한 장해가 있는 게 아니다, 정신착란은, 이를테면 논리적 오류, 판단상의 착오, 사물에 대한 부정확한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교수는 병자를 서서히 논리적으로 논박해서 마침내 좋은 결과를 얻었다더군요! 그러나 그때 그 교수는 샤워에 의한 냉수욕도 병행했으므로, 그 치료 결과에는 물론 아직도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자기 집 앞까지 오자, 그는 레베쟈트니코프에게 머리를 끄덕해 보이고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레베쟈트니코프는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골방에 들어가서 한 가운데 멈춰 섰다.

'뭣 하러 나는 여기 돌아왔을까?' 그는 누렇게 바래서 너덜거리는 벽지며, 먼지며, 소파 따위를 보았다. 안뜰 쪽에서는 무언가 날카로운 음향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선지 못질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발돋움을 하고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뜰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뜰은 텅 비어 있고 못을 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왼편의 딴채 집엔 여기저기 열린 창문이 보이고, 창틀 위에는 초라한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었다. 창밖엔 빨래가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그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지금껏 이런 무서운 고독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소냐를 전보다 더욱 불행하게 만든 지금, 어쩌면 정말로 그녀를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한번 이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 여자의 눈물을 구걸하러 갔을까! 무엇 때문에 나는 그 여자의 생활을 방해할 필요가 있었던가? 아아, 이 얼마나 비열한 짓이냐!"

"난 혼자 남는 거다!" 그는 갑자기 단호하게 외쳤다.

"소냐도 감방에 면회하러 오진 않을 거야!"

5분쯤 지나자, 그는 고개를 쳐들고 이상하게 빙긋 웃었다. 그것은 괴상한 상념이었다.

'어쩌면 형무소 쪽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상념들을 상대로 얼마 동안이나 자기 방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두냐가 들어왔다. 처음에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아까 그가 소냐를 바라볼 때처럼 문턱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어제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그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 화내지 말아요, 그저 잠깐 들렀을 뿐이니까"하고 두냐는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으나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눈길은 맑고 차분했다. 그는 누이동생 역시 애정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오빠, 난 이제 무엇이나 다 알고 있어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가 죄다 설명하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오빠는 어처구니없는 더러운 혐의 때문에 추적당해 고민하고 있다더군요. ...그러나 드미트리 프로코피치의 말로는,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오빠가 공연히 공포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으며, 또 그 원한이 영원토록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난 그게 두려워요. 오빠가 우릴 버리신 데 대해서도 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어떻게 감히 오빠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전번에 오빠를 책망한 걸 제발 용서해주세요. 만일 나한테 그런 큰 슬픔이 있었다면,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서 몸을 피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한테 이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빠 이야기는 자주 하겠어요. 오빠의 전갈이라는 형식으로, 곧 찾아올 거라고 말해두겠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걱정은 말아주세요. 내가 잘 안심시켜 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오빠도 어머닐 너무 괴롭히진 마세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와주세요. 그분이 오빠의 어머니란 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두냐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혹시 무슨 일이든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거든, 아니...내 목숨이라도 좋으니 뭣이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그땐 곧 날 불러줘요. 언제든지 달려올 테니까요. 그럼 안녕!"

그녀는 홱 몸을 돌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두냐!"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누이동생을 불러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 라주미힌,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참 좋은 사람이란다."

두냐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요?" 조금 기다린 뒤에 그녀는 물었다.

"그 친구는 민첩하고 근면하고 정직할뿐더러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사나이야...그럼 잘 가거라, 두냐."

두냐는 낯을 확 붉혔으나 곧 다시 불안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린 정말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그런 유언 같은 소릴 다 하면서?"

"어차피 마찬가지야...잘 가거라...."

그는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곁을 떠나 창가로 갔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불안한 가슴을 안은 채 방을 나갔다.

아니, 그는 결코 누이동생에게 냉담했던 것이 아니다. 한순간(마지막 헤어지는 순간) 누이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이별을 고한 다음 모든 걸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났었으나, 그는 누이동생에게 손을 내주는 것조차 망설였다.

'지금 그 애를 안아준다면, 나중에라도 그걸 상기하고 오싹 소름이 끼치리라. 그리고 내가 자기의 키스를 훔쳤다고 생각할 테지!'

'그런데 그 여자는 참아낼 수 있을까, 어떨까?' 몇 분 후에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아냐, 참아내지 못해, 그런 족속들은 참아내지 못할 거야! 그런 여잔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야...."

그는 소냐를 생각했던 것이다.

창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밖은 이미 아까처럼 햇볕이 내리쬐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급히 모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물론 자기의 병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수 없었고, 또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끊임없는 불안과 정신적인 공포는 아무 흔적도 없이 그대로 지나가버릴 리 없었다. 아직도 그가 진짜 열병에 걸려서 병상에 쓰러져버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이 그의 다리를 지탱하고 의식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처 없이 방황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그는 어떤 특수한 우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속에 각별히 자극적인 것이나 가슴을 애태울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무언가 끊임없는 영원한 느낌이 풍겨 나와서 그 싸늘한 죽음과 같은 우수의 기나긴 세월이 예감되고, '1아르신 공간'에서의 무서운 영원성이 예감되었다. 대체로 해 질 무렵이면 이 감촉은 더욱 심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몰 따위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순 육체적인 쇠약에 빠져 있으니, 단단히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가는 무슨 바보짓을 할지 모르겠다. 소냐한테 간다는 것이 엉뚱하게 두냐를 찾아갈지도 모르니 말이야."

이때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레베쟈트니코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실은 댁에 갔었습니다. 당신을 찾으려고. 글쎄, 그 미망인은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겨서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답니다. 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함께 간신히 그들을 찾아냈습니다. 그 여자 자신은 프라이팬을 두드리고 아이들에겐 춤을 추게 하고 있잖겠어요. 아이들은 훌쩍훌쩍 울고요. 네거리나 가게 앞에서 그 짓을 하고 있는데, 구경꾼들이 그 뒤를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 어서 가봅시다."

"그럼 소냐는?" 레베쟈트니코프의 뒤를 급히 뒤따라거면서 라스콜니코프는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니,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아니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말입니다. 하긴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정신이 없습니다. 아무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에요.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저러다간 모두 경찰에 끌려가고 말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될지 당신도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그들은 지금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거처에서 아주 가까운 다리 옆 운하가에 있습니다. 이제 다 왔어요."

다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냐가 살고 있는 집에서 두 집밖에 떨어지지 않은 운하가에 사람들이 떼 지어 모여 있었다. 특히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쥐어짜는 듯한 목쉰 소리가 다리 쪽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정말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평상시의 낡은 옷을 입고 드라데담직 숄을 걸치고, 보기 흉하게 한쪽으로 일그러진, 너슬너슬한 밀짚모자를 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야말로 진짜 광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피로에 지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폐병 환자다운 그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욱 괴로워 보였다(게다가 폐병 환자는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바깥 햇빛 속에서 더욱 병자 티가 나고 추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흥분 상태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고, 시시각각으로 더욱 더 격화되어 갈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군중 앞에서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가 하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를 애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버럭 화를 내며 그들을 때려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기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군중한테로 달려가서, 조금이라도 깨끗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면 곧 그 사람을 붙잡고 '지체 있는 귀족이라고 할 만한 양갓집' 아이들이 이런 기막힌 꼴이 되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혹 군중 속에서 웃음소리나 놀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당장에 그 무례한 자에게 덤벼들어 욕을 퍼붓곤 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웃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하여튼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들을 이끌고 거리에 나온 미친 여자를 구경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흥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레베쟈트니코프가 말한 프라이팬은 없었다. 적어도 라스콜니코프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폴레치카에게 노래를 시키고 레냐와 콜랴에게 춤을 추게 할 때는 프라이팬 대신에 그 까칠하게 마른 손바닥을 치면서 박자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그때마다 괴로운 기침 때문에 둘째 구절에서 끊어지곤 했다. 그 때문에 또 짜증을 일으켜서 기침을 원망하며 울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화를 돋운 것은 콜랴와 레냐의 울음소리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사실 아이들의 옷차림에는 그들을 거리의 광대처럼 분장시키려는 충분한 의도가 엿보였다. 사내아이는 터키인처럼 꾸미려고 흰 바탕에 빨간빛이 섞인 두건을 머리에 감고 있었으나, 레냐에겐 적당한 의상이 없었으므로 머리에 죽은 남편의 붉은 털실 모자(모자라기보다 나이트캡이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를 씌웠는데, 거기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할머니의 유물로서 여태까지 가보처럼 상자에 간직해두었던 흰 타조 깃이 꽂혀 있었다. 폴레치카는 평상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겁먹은 눈으로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감추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발광을 눈치채고 불안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거리의 군중 때문에 완전히 겁을 집어먹고 만 것이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곁을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쉴 새 없이 눈물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만둬라, 소냐, 그만둬!"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콜록거리면서 빠른 소리로 외쳤다.

"너는 지금 네 자신이 뭘 부탁하는지도 모르는구나, 꼭 어린애처럼! 나는 아까도 너한테 말하지 않았니...그 주정뱅이 독일 년 집에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온 세상 사람에게, 온 페테르부르크 사람에게 보여주련다. 평생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근무했고, 근무 중에 순직했다고 해도 좋을 부친을 둔 지체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 이렇게 구걸하고 다니는 꼴을 보여주겠다(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어느새 이런 환상을 만들어내서는 무조건 믿고 있었다). 그 돼먹지 못한 장군 녀석한테 보여주겠다. , 보여주고 말고. 그런데 너도 참 바보구나, 소냐. 도대체 앞으로 뭘로 먹고살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신물이 나도록 너를 고생시켜왔으니 더는 네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아,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외쳤다.

"제발 이 바보 아이한테 잘 일러주세요, 이 보다 더 현명한 방법은 없다는 걸! 거리의 손풍금수도 제법 벌이가 되거든요. 사람들이 우릴 곧 알아줄 거예요. 지금은 거지꼴이 됐을망정 근본은 좋은 가문의 불쌍한 가족이라는 걸 알아줄 거예요. 그 장군 놈은 머지않아 면직되고 말테니 두고 보세요! 우린 날마다 그놈의 집 창 밑에 갈 거예요. 그리고 황제께서 거동하시면,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애들을 모두 앞에 내세워 보여드리면서 '아버지시여, 우리를 보호해주십시오'하고 말하겠어요. 황제는 고아의 아버지시고 자비로운 분이니까 반드시 보호해주십니다. 두고 보세요. 그놈의 장군 따위는 ...레냐! Tenze-vous drote!('몸을 바로 세워라'라는 뜻) 콜랴, 너는 어서 또 한 번 춤을 춰라. 뭣 때문에 훌쩍이니? 또 울기 시작하는 구나!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우냐. 바보 같으니, 아아, 정말 이 애들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 애들이 얼나나 내 속을 태우는지, 당신이 아신다면! 아아, 이것들을 어쩌면 좋을까!"

그녀 자신도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그렇다고 연방 빠른 소리로 지껄여대는 말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훌쩍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켜 보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집에 돌아가도록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자존심에 호소해보리라 생각하고, 손풍금수처럼 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그녀의 체통에 맞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양갓집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장이 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해보았다.

"기숙학교라고요, ! ! ! 꿈만은 아름답죠!" 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치며 웃었으나, 이내 심한 기침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녜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꿈은 이미 사라져 버렸어요! 우린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더구나 그놈의 장군은...아시겠어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그놈에게 잉크병을 던졌답니다. 마침 사환 방 탁자 위에 잉크병이 있었거든요. 방문객이 서명하고 가는 서류, 나도 거기 서명했지만, 그 서류 옆에 있기에 그것을 장군 놈에게 내던지고 도망쳐 왔지요. 아아, 그렇게 치사스런 놈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치사스런 놈이에요.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이제부터 나는 내 손으로 벌어 저것들을 먹일 테니까, 아무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 애한테도 신물이 나도록 고생을 시켰으니까요(하고 그녀는 소냐를 가리켜 보였다)! 폴레치카, 얼마나 모였는지 좀 보자! 아니, 겨우 2코페이카야? 정말 치사하구나! 혀만 내밀고 남의 뒤를 따라다닐 뿐 돈 내는 놈은 하나도 없구나! 저기 저 등신 같은 놈은 뭘 웃는 거야?(그녀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렇게 된 건 모두 이 콜랴가 못나게 굴기 때문이에요. 저렇게 속상하게만 구니! 넌 어떻게 된 거냐, 폴레치카? , 나한테 프랑스어로 말해봐라. Parlez moi fancais('내게 프랑스어로 말해봐'라는 뜻) 내가 가르쳐주었으니 몇 마디쯤은 알고 있을 게 아니냐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의젓한 집안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고, 너절한 거리의 손풍금수와는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니! 우린 거리에서 '페트루쉬카(인형극)'를 해보이는 게 아니고 품위 있는 로맨스를 부르는 거다..., 그렇고 말고! 하지만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을까? 너희들이 방해만 하기 때문에 우린...실은 로지온 로마느이치, 우리가 여기 잠깐 멈춰 선 건 좋은 노래를 고르기 위해서였어요, 콜랴도 맞춰서 춤을 출 수 있는 노래를....아시다시피 우린 아무 준비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잘 상의해서 완전히 연습을 한 뒤에 네프스키 거리로 나갈 작정이에요. 거기 가면 상류 사회 인사들도 훨씬 많으니까 우리를 곧 이해해줄 겁니다. 레냐는 '고향 마을'을 알고 있어요...하지만 요즘은 어딜가나 '고향 마을'이 유행이어서 어중이떠중이 다 그 노래를 부르고 있거든요. 우린 그런 것보다 고상한 걸 불러야 해요..., 넌 무슨 노랠 생각해냈니? 폴랴? 너만이라도 이 어미를 도와 주려므라! 난 이제 완전히 기억력이 없어져버렸다. 그렇지만 안다면 내가 생각해내는 건데! 그렇다고 '경비병이 장검에 기대고'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아, 그렇지, 프랑스어로 'Cinq sous'('5수라는 뜻)를 부르자! 내가 너희들한테도 가르쳐주었지, 가르쳐주었잖아. 무엇보다도 이 노래는 프랑스어니까 너희들이 상류 가정의 자녀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을 거고, 또 딴 노래보다 훨씬 감동을 줄 거다. 그리고 'Malborugh s'en va-t-en guerre!'('말브뤼는 전쟁터로!'라는 뜻)도 좋겠구나! 이건 진짜 애들 노래라서 상류 가정에선 어디서나 아기를 재울 때 부르는 거니까."

 

Malborugh s'en va-t-en guerre(말부뤼는 전쟁터로),

Ne sait quand reviendra(돌아올 기약도 없이)...

 

하고 그녀는 부르기 시작하다가......

"아니다, 이것보다는 역시 'Cinq sous'가 좋겠다. 콜랴!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어서, 레냐, 너도 저쪽으로 돌아라. 나하고 폴레치카가 노래를 부르며 박자를 쳐줄 테니!

 

Cinq sous, cinq sous (단돈 5, 단돈 5)

Pour monter notre menage(이걸로 살림을 꾸려가지니)

 

콜록, 콜록, 콜록! (그녀는 몸부림치면서 기침을 했다.) 옷을 고쳐라, 폴레치카, 어깨가 처졌구나."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더욱 몸가짐을 주의해서 점잖게 굴어야 한다. 보는 사람들이 모두, 양갓집 자녀로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그때 허리를 좀 더 길게 해서 두 폭으로 재단해야 한다고 말하잖았니. 그런 걸, 소냐 네가 그때 옆에서 자꾸 '좀 더 짧게, 좀 더 짧게'하는 바람에 저 애 꼴이 저 모양이 되버렸어...아니, 너희들은 왜 또 그렇게 우는 거냐! 울긴 왜 울어, 이 바보들 같으니! , 콜랴, 빨리 시작해라, 자 빨리, 빨리 하라니까..., 정말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Cinq sous, cinq sous.

 

또 순경이 왔구나! 대체 당신은 무슨 일로 왔소?"

실제로 순경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며 나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관 제복에 외투를 걸치고 목에 훈장을 건(이것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몹시 기쁘게 했으며 순경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쉰 살 전후의 의젓한 신사가 다가와서 말없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3루블짜리 초록빛 지폐 한 장을 쥐어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지한 동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돈을 받아 들자 공손하기보다는 정중히 예절 바른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녀는 갑자기 점잔을 빼며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거리를 쏘다니게 된 건...돈을 잘 간수해라, 폴레치카. , 봐라, 이처럼 불행에 빠진 가련한 귀부인을 이내 도와주시는 고결하고 관대하신 어른도 계시단다. 나리, 이 애들이 어엿한 귀족들과 관련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집안의 고아들이라는 건 곧 알아보시겠죠? 그런데 그 장군 놈은 태연히 버티고 앉아 멧닭 요리를 먹으면서...내가 찾아와 귀찮게 군다고 발을 구르면서 야단치지 않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죽은 세묜 자하르이치를 잘 아실 테니 제발 그가 남기고 간 고아들을 보호해주십시오. 돌아가신 주인의 친딸이 쓰레기만도 못한 비열한에게 터무니없는 중상을 받았습니다...더구나 주인이 돌아가신 그날에....'아아, 또 저 순경이! 제발 도와주세요!"하고 그녀는 관리를 향해 외쳤다. "왜 저 순경은 우릴 못살게 굴까요? 메시찬스카야 거리에서도 못살게 굴어서 이리로 쫓겨 왔는데...아니,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야, 바보 같으니!"

"거리에서 이런 짓은 금지되어 있소. 이런 점잖지 못한 행동은 안 됩니다!"

"너야말로 점잖지 못하구나! 나는 보통 손풍금수와 다를 게 없으니, 네놈이 참견할 일은 못돼."

"손풍금수라면 허가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은 허가 없이 제멋대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댁은 어디십니까?"

", 허가라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오늘 남편 장례식을 치렀을 뿐인데, 허가라는 게 다 뭐야!"

"부인, 부인, 진정하시오"하고 관리가 참견했다.

", 가십시다. 내가 모셔다드릴 테니...이렇게 사람이 모인 데선 보기도 안 됐고...게다가 보인은 몸도 편치 않은 것 같으니...."

"아니에요, 나리,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우린 이제부터 네프스키 거리로 가는 길이에요...소냐, 소냐, 아니, 이 앤 어딜 갔을까! 역시 울고 있구나. 너희들은 왜 모두 이 모양이냐!...콜랴, 레냐, 너희들은 어딜 가는 거냐?" 그녀는 갑자기 놀란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 바보 자식들 같으니! 콜냐, 레냐, 너희들은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거리에 모여든 군중과 미친 어머니의 괴상한 행동에 겁을 집어먹은 콜랴와 레냐는 순경이 자기들을 잡아서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을 보자,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맞잡고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엾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통곡을 하고 울부짖으며 아이들의 뒤를 쫓아갔다. 숨을 헐떡거리고 울며불며 달려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모습은 처참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소냐와 폴레치카도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데려와라, 저 애들을 데려와, 소냐! 아아, 어미의 마음도 모르는 저 바보 자식들 같으니! 폴랴! 어서 두 놈을 붙잡아라...난 너희들을 위해서......"그녀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발이 걸려 길바닥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나, 몸을 다쳐서 저렇게 피가!....아아, 이를 어쩌나! 소냐는 비명을 올리며 그녀 위로 몸을 굽혔다.

군중이 와 몰려들어 주위를 둘러쌌다.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는 맨 먼저 달려들었다. 동정하던 관리도 급히 달려왔다. 순경도 뒤따라왔으나 귀찮아질 것을 예견하고 손을 내저으면서 "이런 제기랄!"하고 중얼거렸다.

"비켜요, 비켜!" 그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군중을 쫓아냈다.

"다 죽게 됐군!" 누군가가 외쳤다.

"미친 여자야!"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아, 하느님 맙소사!" 한 여인이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그 계집애와 사내는 붙잡았나? 아아, 저기 끌려오는군. 누이가 잡았구면 ...정말 말썽꾸러기들이야!"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몸을 잘 살펴보니 그녀는 소냐가 생각한 것처럼 돌부리에 채어 다친 것이 아니었다. 길바닥을 빨갛게 물들인 선혈은 그녀의 가슴에서 토해진 각혈이었다.

"이건 나도 압니다. 본 일이 있어요."하고 관리가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폐병입니다, 이렇게 왈칵 피를 토하고 목이 콱 막혀버리는 건. 우리 친척 여자 하나가 최근에 이렇게 각혈하는 걸 보았어요. 컵으로 하나 반쯤...그것도 별안간에...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이러다간 곧 죽어버릴 텐데."

"저리 가요, 저리, 내 집으로!"하고 소냐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는 바로 저기 살고 있어요!...바로 저 두 번째 집이에요...빨리 내 집으로 모셔주세요. 빨리!" 그녀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애걸했다. "의사를 불러주세요...아아, 이를 어쩌나!"

관리의 노력으로 일은 잘 진행되었다. 순경까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옮기는 일을 거들었다. 그녀는 거의 죽은 상태로 소냐의 방으로 운반되어 침대에 눕혀졌다. 각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녀는 차츰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소냐 말고도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 그리고 관리와 군중을 쫓는 순경이 일시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구경꾼 가운데 몇 사람은 문 앞까지 따라왔다. 폴레치카는 벌벌 떨면서 울고 있는 콜랴와 레냐의 손을 끌고 왔다. 카페르나우모프네 집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집주인은 절름발이에다 애꾸눈이였는데 억센 머리칼과 구레나룻이 솔처럼 뻣뻣하게 일어선 괴상한 사나이였다. 어째선지 노상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와, 끊임없는 놀라움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주인집 아들 네댓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다. 이런 혼잡한 군중 속에 갑자기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모습을 나타냈다. 라스콜니코프는 군중 속에선 그를 거의 본 기억이 없었기에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의사와 신부를 불러야겠다는 말이 나왔다. 관리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의사는 이미 소용없게 되었다고 속삭이면서도 의사를 불러오도록 조처했다. 카페르나우모프 자신이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숨을 좀 돌리고 각혈도 잠시 멈췄다. 그녀는 병적이면서도 마음속까지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가련한 소냐의 얼굴을 응시했다. 소냐는 계모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윽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양쪽에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침대 위에 앉혔다.

"애들은 어디 있니?"하고 그녀는 가냘픈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그 애들을 데려왔니, 폴랴? 바보 자식들 같으니라고! ...글쎄, 왜 도망을 치는 거야...아아!"

그녀의 마른 입술에는 아직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사방을 살펴보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여기가 바로 네가 사는 곳이구나, 소냐! 난 한 번도 와보지 못했는데....결국 이렇게 오게 되다니...."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소냐를 바라보았다.

"우린 너를 너무 괴롭혔어, 소냐...폴랴, 레냐, 콜랴. 이리 오너라..., 다 모였구나. 소냐, 제발 이 애들을 맡아다오...내 손에서 네 손으로 넘겨준다. 나는 다됐어....이걸로 끝장이야! 나를 놓아다오, 제발 죽을 때만이라도 좀 조용히 죽게...."

사람들은 그녀를 눕혔다.

", 신부님? ...필요 없다...우리에게 어디 그럴 돈이 있겠니?...나한테 죄라곤 없어...그런 것 없이도 하느님은 용서해주실 거다...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잘 알고 계실 테니까...그러나 용서하지 않으신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불안한 실신 상태가 점점 강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따금 그녀는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고 한순간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으나, 곧 다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쉰 소리를 내며 괴롭게 숨을 헐떡였다. 뭔가가 목에 걸려 꾸르륵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분한테 말했어...각하!" 한 마디 한 마디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외쳤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나 그 년이 ...아아, 레냐, 콜랴, 손을 허리에 얹고, 빨리, 빨리, 글리세, 글리세, - -바스크!('매끄럽게 매끄럽게 바스크 스텝으로'라는 뜻) 발로 장단을 맞추면서....점잖고 훌륭한 애가 되야 한다.

 

Du hast Diamanten und Perlen(다이아몬드와 진주는 그대의 것....)

 

그다음은 뭐더라? 옳지, 이렇게 불렀지....

 

Du hast die Schonsten Augen(더없이 아름다운 눈을 갖고서),

Madchen, was willst du mehr(아가씨야, 그밖에 무엇을 더 바라느냐?")

 

그래, 이게 틀림없어! was willst du mehr라니...정말이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릴까! 아참, 이런 것도 있었지...

 

한낮의 더위에, 다게스탄의 골짜기에서....

 

아아, 나는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을까...나는 이 노래가 미칠 듯이 좋았단다. 폴레치카...이건 네 아버지가...약혼 시절에 곧잘 부르시던 노래야...아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그래, 이게 좋다, 이 노래를 부르자! 그런데 어떻게 부르더라? ...아아,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한번 생각해봐, 어떻게 부르는지!" 그녀는 몹시 흥분하여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마침내 한 마디 한 마디 외치는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경악의 표정을 띠고 찢는 듯한 무서운 목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한낮의 더위에!....다게스탄의!

골짜기에서!...가슴에 총알을 품고!....

 

"각하!" 갑자기 그녀는 눈물을 쏟으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고아들을 돌봐 주십시오! 죽은 세묜 자하르이치의 충성심을 생각하셔서!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아아!" 그녀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깜짝 놀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소냐를 알아보았다. "소냐! 소냐!" 소냐가 앞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는 정답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냐, 귀여운 소냐! 너도 여기 있었니?" 사람들은 또 한 번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이젠 그만이야! 가야 할 때가 왔어!...잘 있어라, 소냐, 불행한 자식 같으니, 여윈 말을 죽도록 부려먹은 거야. 아아, 이젠 나도 기운이...없구나!" 그녀는 증오에 넘친 절망적인 어조로 이렇게 외치고 털썩 베개 위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혼수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수척하고 싯누런 얼굴은 뒤로 축 늘어지고, 입은 떡 벌어지고,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쭉 뻗었다. 그녀는 깊이깊이 숨을 몰아쉬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냐는 시체 위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껴안더니 바싹 여윈 가슴패기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폴레치카는 죽은 어머니 발 밑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그 발에 키스를 했다. 콜랴와 레냐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무언가 굉장히 무서운 것을 예감하고 두 손으로 어깨를 맞잡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한꺼번에 입을 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두 아이는 아직도 광대 의상을 걸치고 있어서 하나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하나는 타조의 깃으로 장식한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상장'이 침대 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시체 곁에 놓여 있었다. 바로 머리맡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창가로 물러갔다. 레베쟈트니코프가 그 옆으로 달려왔다.

"죽고 말았군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말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에게 한두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다가왔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눈치 빠르게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어리둥절해하는 라스콜니코프를 더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이번의 모든 뒤처리는, 곧 장례식이라든가 그 밖의 모든 일은 내가 도맡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고, 전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한텐 지금 여분의 돈이 있으니까요. 나는 이 꼬마 둘과 폴레치카를 되도록 시설이 좋은 고아원에다 넣어주겠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게끔 세 남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아이 앞에 1500루블씩 맡겨놓겠어요. 그리고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구렁텅이에서 구해주겠습니다. 참으로 착한 아가씨니까요. 그렇잖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그 사람의 1만 루블은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주십시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자선을 베푸시는 겁니까?" 라고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 ! 의심도 많으시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그 돈은 내게 필요없는 돈이라고. 그래, 당신은 단지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 저 여자는(하고 시체가 놓여 있는 구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돈놀이 하는 어느 노파처럼 ''는 아니었거든요. , 어때요. '루쥔이 살아서 비열한 짓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저 여자가 죽어야 하느냐?' 그러니 만일 내가 돕지 않으면 '폴레치카 역시 같은 길을 밟게 될'게 아니냐 말이에요......"

그는 눈을 끔벅이며 눈짓이라도 하는 듯이 명랑한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라스콜니코프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가 소냐에게 한 말을 그가 되뇌는 것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뚫어질 듯이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응시했다.

"아니, 어떻게...당신은 그걸 알고 있죠?"

그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여기, 이 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레슬리흐 부인 댁에 머물고 있거든요. 이쪽은 카페르나우모프, 저쪽은 레슬리흐 부인, 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죠. 그러니까 바로 이웃인 셈이죠."

"당신이?"

"그래요"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 친애하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당신에게 놀랄만큼 흥미를 느꼈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우린 반드시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분명히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잘 어울리게 됐군요. 내가 얼마나 사람이 좋은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나하고라면 역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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