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과연 이건 꿈의 연속일까?'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한번 이렇게 생각했다. 조심스럽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는 이 뜻밖의 방문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럴 수가 있나!" 마침내 그는 의혹에 싸여 이렇게 소리 내어 외쳤다.
이러한 외침에도 손님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첫째, 오래전부터 당신에 대해서 매우 흥미있고도 유익한 소문을 수없이 들어왔으므로 한 번 가까이 사귀고 싶었습니다. 둘째, 댁의 여동생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어떤 계획에 대해서 어쩌면 당신도 도움을 거절하시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혼자서 소개도 없이 찾아간다면, 여동생께서는 어떤 선입관 때문에 마당에도 들여놓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도움만 있다면 그와 반대로 잘 고려해주지 않을까 해서요......"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저, 한 가지 묻겠습니다만, 두 분은 바로 어제 도착하셨다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젭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실은 나도 그저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 일에 대해선 새삼스레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에게 이 점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말이지, 그 사건에서 나에게 무슨 두드러진 범죄적인 데라도 있습니까? 편견을 버리고 상식으로 판단해서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기 집에서 의지할 데 없는 처녀의 꽁무니를 뒤쫓으며 '추잡한 청을 해서 모욕했다'...이런 말씀이죠? 내가 너무 앞질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말이죠!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도 인간입니다. et nihil humanum('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이라는 뜻)...한마디로 말해서 나 역시 유혹을 느낄 수 있거니와 사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물론 누구의 명령에 따라 되고 안 되는 건 아니거든요. 우선 그 점을 생각하신다면, 모든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해석될 것입니다. 이대 모든 문제는 내가 악한이냐, 아니면 반대로 희생물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희생자냐? 다름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세 미국이나 스위스로 함께 도망하자고 말했을 적에 나는 가장 경건한 감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뿐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구축하려고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니까요. 이성이란 정욕에 봉사하게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어쩌면 내 편에서 도리어 자기 자신을 망쳐놨는지도 모르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혐오의 빛을 띠며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막았다. "나는 무조건 당신이 싫습니다. 당신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만나기도 싫소. 돌아가세요. 나가주십시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아무튼 당신은....정말...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는 기탄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잔꾀를 좀 부리려고 했습니다만, 안 되는군요. 당신이 다짜고짜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말았으니!"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잔꾀를 부리고 있군요!"
"그러니 어쨌단 말입니다? 어쨌단 말이에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거리낌 없이 웃으면서 되풀이했다. "이것은 이른바 bonne guerre('정의의 싸움'이라는 뜻)이니까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잔꾀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내 말을 도중에 꺾어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그 정원에서 그 일만 없었다면 불쾌한 상황이라곤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그 마르파 페트로브나 역시 당신이 때려 죽였다더군요?"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거칠게 말을 막았다.
"아니, 그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하긴 못 들었을 리도 없겠지만...글쎄, 당신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도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지만요, 그렇다고 내가 뭐 어떤 근심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 사건은 지극히 조리 있는 정확한 상태에서 일어났으니까요. 검시를 한 의사도 배가 터지도록 식사하고 술을 한 병이나 들이켠다음 곧 물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뇌일혈이라고 진단을 내렸지요. 그리고 다른 사인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한동안, 특히 이번에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어요. 혹시 내가 그...불행을 어쩌다가 간접적으로 초래한 것은 아닐까? 무슨 정신적 자극이라든가, 아니면 뭔가 그 비슷한 원인으로.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걱정합니까!"
"아니, 왜 웃으시오! 생각해보세요. 나는 채찍으로 단 두 번 때렸을 뿐입니다. 그것도 매자국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제발 나를 파렴치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나도 그따위 짓이 추악한 행위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내 아니 마르파는 그런 나의 열띤 행동을 도리어 좋아했다는 것도 나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에 관한 얘기도 우려먹을 만큼 다 우려먹어서 아내는 사흘 동안이나 집에 들어박혀 있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읍내로 가져갈 거리도 없어졌고, 편지 낭독에도 -편지 낭독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셨겠죠 - 읍내 사람들이 싫증을 냈거든요. 그러던 참에 갑자기 그 채찍 두 대가 마치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떨어진 셈이지요! 그러자 아내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나위도 없지만, 여자란 겉으로 아무리 성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모욕당하는 것을 매우 흐믓해하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하기야 그런 경우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만, 대체로 인간은 모욕당하는 것을 퍽 좋아하거든요. 당신은 그렇게 느끼신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여자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오히려 모욕당하는 것만을 낙으로 삼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한때 라스콜니코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버림으로써 그와의 회견을 끝마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약간의 호기심과 일종의 타산 같은 것이 잠시 동안 그를 주저앉혔다.
"당신은 싸움을 좋아합니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건성으로 물었다.
"아니, 별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내하고도 거의 싸워본 일이 없지요. 우리는 매우 정답게 지내왔고, 아내도 언제나 나에게 만족했으니까요. 내가 채찍으로 매질을 한 것은 결혼 생활 7년 동안 단 두 번밖에 없었어요...하긴 세 번째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므로 그건 제외하고 말입니다. ...처음은 결혼 후 두 달 만에 시골로 내려간 직후였고, 또 한 번은 이번이죠. 당신은 아마 나를 지독한 악당이요, 반동주의자요, 농노제 지지자라고 생각하셨겠죠? 헤, 헤...조지온 로마느이치, 기억하십니까? 몇 해 전, 아직도 그 고마운 언론 자유 시대(1861년 농노 해방 전후의 비교적 검열제도가 완화되었던 시대)의 일입니다만, 어떤 귀족이 -이름은 잊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제히 공격받은 적이 있었지요, 기차 안에서 어느 독일 부인을 채찍으로 때렸다고 해서요, 기억하세요? 그때 또 하나, 역시 같은 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세기(世紀)>지의 추악한 행위' 사건이 일어났었지요....그 '이집트의 밤' 말이에요, 그때의 그 공개 낭독회, 기억하시죠? 검은 눈동자여! 오, 내 청춘의 황금시대여,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그런데 나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그 독일 여자를 때린 귀족에겐 별로 동정이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말이지 그것은...조금도 동정할 만한 행위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나는 이렇게 언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진보주의적 인간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보증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장담할 수 없는, 그런 도발적인 '독일 여자'가 이 세상엔 때때로 있는 법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관점에서 사건을 평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실은 이러한 견지야말로 진정한 인도적 견지라고 할 수 있죠.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또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사나이가 반드시 무언가 굳은 결심을 품은 빈틈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라스콜니코프에게도 명백했다.
"당신은 아마 요 며칠 동안 쭉 아무하고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건 그렇고, 당신은 아마 내가 이렇게 반죽이 좋은 데 놀라신 모양이군요?"
"아니, 정말이지 너무나도 반죽이 좋으신 데 놀랐습니다."
"내가 당신의 무례한 질문에도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인가요? 네, 그래서입니까? 하지만...화낼 게 뭐 있습니까? 당신 묻는 대로 대꾸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놀랄 만큼 소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아무런 문제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정말이에요"하고 그는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은 아무것도 흥미를 끌 만한 게 없습니다...하기야 당신으로선 내가 무슨 속셈이 있어서 비위를 맞추려 든다고 생각하셔도 무리는 아닙니다. 더구나 여동생에게 볼일이 있다고 나 자신이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요즘 아주 지루해 죽을 지경입니다. 특히 요 사흘 동안은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만난 것이여간 기쁘지 않습니다...로지온 로마느이치, 화내지는 마십시오. 당신도 내 눈엔 어쩐지 아주 괴팍한 사람같이 보이는군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에게 좀 이상한 데가 있어요. 특히 지금은, 그러나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요즘...아니, 그만둡시다. 더는 말하지 않겠으니 그렇게 낯을 찌푸리지는 마십시오! 이래 봬도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미련한 곰은 아니니까."
라스콜니코프는 음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만에, 당신은 곰 같은 사람일 수 없어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상류사회 인사이거나, 적어도 경우에 따라선 훌륭한 신사일 수도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의 어떤 의견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간 오만한 빛까지 엿보이는 어조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때로는 저속한 인간이 돼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 저속한 인간이라는 옷이 우리나라 기후엔 입기 편하고...또 천성적으로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하고 그는 또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 당신은 이곳에 아는 사람이 많다더군요. 그러니 당신은 이른바 '연줄이 많은' 사람일 테죠. 그런데 나를 찾은 용무는 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목적도 없으시다면서?"
"맞아요, 아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중요한 물음에는 대답도 안 하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상대방의 말을 받았다. "벌써 몇 친구 만났지요. 사흘 동안이나 돌아다녔거든요. 이쪽에서 아는 체하면 저쪽에서도 알아보는 모양이에요. 하기야 나도 옷을 단정히 입고 있으니까 대체로 궁상맞은 편은 아니죠. 우리는 농노 해방의 피해도 그다지 입지 않았고, 게다가 소유지는 숲과 강변의 목초지뿐이었으니 수입도 별로 줄지 않은 셈이지요. 그러나...그따위 친구들한테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전부터 이미 싫증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벌써 사흘 동안이나 싸돌아다녔지만 그런 작자들하곤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 어째서 이런 것이 러시아에 생겼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군요! 관리들과 가지각색의 신학생(神學生)들이 들끓는 도시! 하긴 8년 전에 내가 여기서 빈둥빈둥 세월을 보내던 시절엔 여러 가지 모르고 지낸 일도 많았어요. 이제 와서 기대를 걸 수 있는 거라면, 해부학 하나밖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해부학이라뇨?"
"그러나 각종 클럽이라든가 뒤소(레스토랑 이름)라든가 당신들이 좋아하는 발끝 무용이라든가, 그리고 또 진보적 사상이라는 것....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없더라도 잘되어갈 겁니다." 그는 다시금 질문을 무시하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사기 도박꾼이 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테죠!"
"당신은 사기 도박꾼 노릇도 했던가요?"
"안 할 수 있습니까? 8년쯤 전이지만, 우리 동료들은 정말 쟁쟁한 친구들이었죠, 한 세월 잘 보냈답니다. 모두 의젓한 친구들로 시인도 있었고, 자본가도 있었어요. 대체로 우리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세련된 예의범절은 모진 고초를 겪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느끼셨는지요? 내가 이렇게 된 것도 실은 시골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나도 남의 빚 때문에 감옥살이를 할 뻔한 일이 있었지요. 상대는 네진의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마르파 페트로브나라는 여자가 나타나서 상대방과 교섭 끝에 3만 루블로 나를 구해주었지요, 내 빚은 전부 7만 루블이었습니다만. 그래서 나는 마르파와 정식 결혼을 하게 되었고, 마르파는 나를 무슨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곧 자기 시골로 끌고 갔습니다. 아내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여서 나를 퍽 사랑해주었습니다. 나는 7년 동안 마을에서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어요, 아내는 나를 구해준 그 3만 루블의 차용증서를, 타인 명의로 된 그 증서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배반할 기색을 보이면 당장 그 함정에 빠지게 마련이었지요! 서슴지 않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여자였어요! 본시 여자란 그런 복잡한 감정의 혼합물이거든요."
"그 증서만 없었다면, 당신은 그 집에서 도망쳤단 말입니까?"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증서 따위에는 거의 구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마르파는 내가 우울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두 번씩이나 외국 여행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외국엔 그전에도 가끔 가본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불쾌하기만 했어요. 아침에 동쪽 하늘이 훤해질 무렵의 나폴리 만이며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뭔지 모르게 처량한 생각이 들거든요.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처량해지는 원인이 뭔지는 모르지만 실재한다는 겁니다. 그래요, 역시 고국이 제일 좋아요. 고향에선 적어도 모든 것을 남탓으로 돌려 자기변호를 할 수 있거든요. 나는 지금 가능하다면 북극 탐험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j'ai le vin mauvais('나는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라는 뜻) 그래서 술은 마시기 싫어하죠. 그렇지만 술까지 끊는다면 내게 무엇이 남겠어요? 하긴 끊어보려고도 했죠. 그런데 이번 일요일에 유스포프 공원에서 베르그가 커다란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데 요금을 받고 동승자를 모집한다던제, 사실입니까?"
"어때요, 한 번 날아보시지요?"
"내가요? 아니….난 그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정말로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사나이는 어떻게 된 걸까?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아니에요, 차용증서 따위에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계속했다. "나는 스스로 그 마을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벌써 그럭저럭 1년이 되었지만, 내 영명축일(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성인의 축일)에 마르파는 그 차용증서를 돌려주고 덤으로 상당한 액수의 현금까지 내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내는 상당한 재산가였으니까요. 그리고 '이만하면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믿고 있는지 아시겠죠, 아르카치 이바노비치'….정말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이런 말을 했으리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거니다. 아무튼 나는 마을에서도 의젓한 지주가 되어 그 지방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지요. 책도 주문해서 읽었습니다. 마르파는 처음에는 찬성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공부에 열중한다고 해서 늘 근심만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마르파 페트로부나가 몹시 그리워지는 모양이군요?"
"내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유령을 믿습니까?"
"어떤 유령 말입니까?"
"어떤 유령이라니, 보통 유령 말이에요!"
"당신은 믿습니까?"
"글쎄요, 당신을 위해서는 믿지 않는다고 해도 좋겠지만….그렇다고 전혀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유령이 나온단 말인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기묘한 눈초리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았다.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유령이 가끔 찾아오거든요"하고 이상한 미소로 입을 일그러뜨리면서 그는 말했다.
"찾아오다니, 어떻게?"
"벌써 세 번이나 찾아왔어요. 처음으로 본 것은 장례식 날 묘지에서 돌아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바로 내가 여기로 출발하기 전날 밤이었지요. 두 번째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그저께 새벽녘에 말라야 비세라 역에서 보았고, 세 번째는 두 시간 전에 내가 유숙하고 있는 하숙방에서 봤어요. 그때 나는 방 안에 혼자 있었지요."
"꿈이 아닌 생시에?"
"생시고말고요. 세 번 다 생시였습니다. 찾아와서 한 1분쯤 말을 하고는 문으로 나가버립니다. 언제나 꼭 문으로 해서 나가거든요. 발자국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왜 그런지 당신한텐 반드시 그런 이상한 데가 있으리라고 나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라스콜니코프는 불쑥 이렇게 말했으나, 그 순간 이런 말을 입 밖에 낸 자기 자신에 깜짝 놀랐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셨다고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놀란 어조로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두 사람에겐 어딘지 공통점이 있다고!"
"그런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라스콜니코프는 열띤 어조로 날카롭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가요?"
"하지 않았어요!"
"나는 한 줄 알았는데요. 아까 내가 이 방에 들어와서 당신이 눈을 감고 누운 채 자는 체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이 바로 그 사나이로구나!'"
"그건 대체 무슨 뜻이오, 그 사나이라니? 도대체 누구 말을 하는 겁니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소리쳤다.
"누구 말이냐고요? 하긴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솔직히 자기도 좀 당황한 표정으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서로 마주 보고만 있었다.
"부질없는 소리 말아요! 그래, 부인이 나타나 무슨 얘기를 합디까?" 라스콜니코프는 화가난 듯이 외쳤다.
"아내가 말입니까? 글쎄, 그게 모두 쓸데없는 군소리뿐이죠. 인간이란 묘하거든요, 그게 나를 화나게 만든단 말이에요.
맨 처름 나타났을 때는 - 아시다시피 나는 피곤했어요….장례식이다, 기도식이다, 미사다, 조문객 대접이다 해서 한바탕 치른 뒤에 겨우 혼자 서재에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었지요 -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여보,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오늘은 너무 분주해서 식당 시계에 태엽 감는 걸 잊으셨군요'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 시계는 7년 동안 쭉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맡아서 태엽을 감아주었으므로 어쩌다가 잊으면 아내가 일러주곤 했거든요. 그다음 날에는 이곳으로 떠났지요. 새벽녘에 정거장 식당으로 들어가서 - 전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 몸이 노곤하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 내가 커피잔을 들고 문득 옆을 보니까, 어느 틈에 마르파가 카드 한 벌을 손에 들고 내 옆에 앉으면서 '당신 여행을 점쳐드릴까요, 아르카지 이바노비치'하지 않겠어요. 아내는 정말 카드 점을 잘 쳤지요. 그런데 내가 깜짝 놀라서 도망치는 바람에 아내의 점괘를 얻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입니다. 하긴 그때 마침 발차 신호 벨도 울렸지만요, 그리고 오늘 말입니다. 오늘은 식당에서 주문한 지독히 맛없는 점심을 먹고 괴로운 위를 달래며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까, 또다시 마르파가 새로운 녹색 비단옷을 입고 긴 옷자락을 끌면서 불쑥 나타나지 않겠어요. '안녕하세요,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이 옷은 당신 맘에 드세요? 아니시카도 이렇게는 만들지 못해요' 하지 않겠어요….아니시카는 우리 마을 재봉사인데 농노 출신이지만 모스크바에서 양재 공부를 한 귀여운 처녀입니다. 그러면서 마르파는 내 앞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려 보았습니다. 나는 아내의 옷을 보고, 다음에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마르파 페트로브나, 당신도 꽤 변덕스럽구려, 그런 보잘것없는 일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괴롭히다니' 하니까, '어머나, 잠깐만 뵈로 온 것도 안 되나요!'하더군요. 나는 아내를 좀 놀려주고 싶어서, 나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야' 했더니,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그건 당신 마음에 달렸지만, 죽은 여편네의 장례를 마치기가 무섭게 딴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떠난다면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닐 거예요. 그것도 상대방을 잘 선택하면 모르되, 내가 다 일고 있는 그 애라고라면 당신이나 그 애나 다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밖엔 안 돼요' 하고는 곧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옷자락 스치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
"그러나 당신이 하나에서 열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압니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꾸했다.
"나는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대답했으나, 질문이 무례한 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럼 그전에는 한 번도 유령을 본 적이 없었나요?"
"아….아니, 다른 유령도 꼭 한 번 보았는데, 그것은 6년 전 일입니다. 우리 집에 필카라는 하인이 있었는데, 그 사내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에 내가 그전 입버릇대로 '필카, 파이프!'하고 소리쳤더니 그 하인이 얼른 나타나서 내 파이프가 놓여 있는 찬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지 않겠어요.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저놈이 나한테 복수를 하러 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놈이 죽기 전에 호되게 꾸중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넌 그런 팔꿈치 뚫어진 옷을 걸치고 잘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썩 물러가지 못하겠니, 이 돼먹지 못한 놈 같으니!' 하고 호령했습니다. 그러자 휙 돌아서서 그냥 나가버렸는데 그 후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르파에겐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 하인을 위해 위령제라도 지내주려고 했지만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습니다."
"의사한테 가보시죠."
"그런 충고는 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어디가 나쁜지 모르지만, 건강하지 않은 건 분명해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보다는 내가 확실해 다섯 배쯤 건강합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유령의 출현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유령의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겁니다."
"아니,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외쳤으나 그 음성에는 노기까지 어려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선 흔히 뭐라고 말합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한눈을 팔면서 고개를 좀 기울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 사람들은 '너는 병자다, 따라서 네 눈에 나타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밀한 이론이 없습니다. 그야 유령은 오직 병자에게만 나타나 보인다는 데는 나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령은 병자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유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은 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핏대를 곤두새우며 주장했다.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좀 도와주십시오….'유령은 이를테면 저승의 세편(細片)이요, 단편(斷片)이요, 그 시초다. 물론 건강한 사람에겐 그런 것이 보일 리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인간은 가장 지상적(地上的)인 인간이므로 충실과 질서를 위해서 이 세상의 현실적 생활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병이 들어 육체 조직이 정상적인 지상의 질서를 약간이나마 침범하면 곧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병이 심해질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빈번해진다. 그래서 완전히 죽어버리면 당장에 다른 세계로 가버린다.' 이런 이론을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만일 내세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런 사고방식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세 같은 건 믿지 않습니다."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떨까요, 만일 저승에 거미나 그 비슷한 것밖에 없다면." 불쑥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놈이군'하고 라스콜니코르는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나 영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무언가 크고 거창한 것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반드시 거창한 것이어야만 합니까? 어디 한번 그런 것 대신에, 시골 목욕탕같이 그은 좁다란 방이 있고 구석구석에 거미가 줄을 치고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영원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실은 이따금 그런 것이 내 눈에 가물거릴 때가 있거든요."
"도대체 당신 머리엔 그보다 좀 더 위안이 될 만한, 좀 더 공정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병적인 기분에 사로잡히며 이렇게 외쳤다.
"좀 더 공정한? 그런 건 모르겠는데요.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공정한 것인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리고 나는 일부러라도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야릇하게 웃으면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대답했다.
이 무례한 대답을 듣고 라스콜니코프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니,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생면부지였고 지금도 서로 원수같이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 사이엔 아직 처리되지 못한 용건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대한 용건은 젖혀놓고 이런 문학 얘기를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똑같은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한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초초하게 말을 이었다.
"어서 용건이나 말해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찾아 오셨는지 그 이유나 말해주세요. 그리고….난 바쁩니다. 시간이 없어요. 외출할 일이 좀 있어서……"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동생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루쥔 씨와 결혼한다죠,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제발 내 누이동생에 관한 문제는 일절 언급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내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만약 당신이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라면 말입니다. "
"하지만 그 여자의 일로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럼 어서 말해보시오. 그러나 되도록 간단히!"
"내 아내의 친척뻘 되는 그 루쥔 씨에 관해선 당신 자신도 이미 의견을 갖고 계신 줄 믿습니다. 비록 반 시간이라도 그를 만나보셨거나, 아니면 무엇이든 그 사람에 대한 확실한 소문을 들으셨다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배필이 될 수 없는 사내입니다. 내가 보건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이번 혼담에서 지극히 관대하게 타산을 무시한 심정으로 가족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들어온 당신에 대한 소문을 종합해본 결과, 만약 이해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 혼담을 취소할 수만 있다면 당신도 퍽 만족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고 보니 나는 그것을 아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도 어지간히 천진난만 하군요. 아니, 용서하십시오. 실은 너무 철면피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그건 곧 내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골몰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로지온 로마느이치. 만일 내 욕심만 차리려 든다면 이렇게 솔직히 터놓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 한 가지 당신에게 나의 기묘한 심리 상태를 고백하겠습니다. 아까 나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 대한 애정을 변명하면서, 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지 아세요, 나는 현재 애정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참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실제로 무언가를 느꼈는데 말입니다………"
"그건 당신의 나태와 방탕 때문이었겠죠"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막았다.
"사실 난 나태와 방탕의 혼합물이죠. 그러나 당신 여동생에게는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이 있어서, 나 같은 놈이라도 몇몇 인상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모두 실없는 소리죠. 나도 지금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았나요?"
"알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일이지만, 아주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그저께 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순간부터였습니다. 하긴 모스크바에 있을 때만 해도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청혼을 해서 루쥔 씨와 겨뤄볼 생각이었지요."
"말씀 도중에 실례지만, 제발 다른 말은 그만두시고 어서 나를 찾아온 용건부터 말씀해주실 순 없을까요? 나는 바쁩니다, 좀 외출할 일이 있어서……."
"네, 잘 알겠습니다. 실은 여기 도착하고 나서 이번엔 어떤….여행이라도 하려고 결심했으므로, 그 전에 여러 가지 필요한 조처를 취하고 싶스빈다. 내 자식들은 백모 집에 맡겨두었지만, 그 애들도 제각기 자기 재산들이 있으니까 나 같은 건 별로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 같은 게 무슨 아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1년 전에 마르파가 준 재산만을 갖고 왔습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이제 곧 용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루쥔 씨와도 결말을 짓고 싶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사람 때문에 마르파하고 부부 싸움까지 한 일이 있으니까요. 이 혼담도 실은 마르파가 주선했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나는 이번에 당신의 주선으로 여동생과 만나보고 싶습니다. 되도록 당신도 자리를 같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루쥔 씨와의 결혼은 결코 이롭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큰 손해를 입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동생에게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번의 여러 가지 불쾌했던 일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내가 1만 루블을 드리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쥔 씨와의 파혼에서 생기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 파혼에 대해선 여동생께서도 별로 이의가 없을 테고, 다만 적당한 기회만 오면 하고 생각하고 계시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 미치광이군요!"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소리쳤으나,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감히 그런 뻔뻔스러운 소릴 할 수 있소!"
"당신이 호통을 치리라는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나는 부자가 아니지만 그 1만 루블은 놀고 있는 돈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겐 조금도 필요 없는 돈입니다. 만약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받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필시 그 돈을 아주 허황된 일에 써버릴 겁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로 나로선 양심상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이 제안에는 타산이라는 게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지금은 이 말을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언젠가는 당신도,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내 마음을 알아주실 때가 있을 겁니다. 요컨대 문제는 내가 존경하는 당신의 여동생에게 일시나마 걱정을 끼치고 불쾌한 인상을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충심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돈으로 때운다든가, 내가 끼친 불쾌감에 대해서 배상을 한다든가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게다가 나라고 해서 실은 나쁜 짓만 도맡아서 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주십사하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일 나의 이 제안에 백만 분의 1이라도 어떤 타산이 포함되어 있다면 겨우 1만 루블 정도의 돈을 드리겠다고 하진 않을 겁니다. 5주일 전만 해도 그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드리겠다고 제의했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선 나도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여자와 결혼할지 모릅니다. 이 사실로도 내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유혹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깨끗이 소멸될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루쥔 씨와 결혼하셔도 이 정도의 돈은 받으실 겁니다. 다만 받는 대상이 다를 뿐이죠. 아무튼 로지온 로마느이치, 화만 내실 게 아니라 침착하고 냉정하게 잘 생각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서도 스비드리가일로프 자신은 지극히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였다.
"제발 그만해주십시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어쨌든 용서 못할 폭언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서로 부질없는 세속 형식 때문에 나쁜 짓만 되풀이할 뿐, 반대로 좋은 일을 할 권리는 털끝만큼도 없게 됩니다. 그건 어리석습니다. 가령 내가 죽고 유언으로 그만한 돈을 여동생께 남겼다고 해도 역시 그분은 거절하실까요?"
"물론 거절하겠죠."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정 싫다면 싫은 대로 하는 수 없겠지요. 하지만 1만 루블이란 돈은 경우에 따라서 요긴한 것이거든요. 좌우간 지금 한 이야기를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전하지 않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하는 수 없이 억지로라도 직접 만날 기회를 찾겠습니다. 결국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게 되는 거죠."
"그럼 내가 전하기만 하면 당신은 억지로 만나지 않겠단 말인가요?"
"글쎄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한 번만은 꼭 만나뵙고 싶은데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유감천만이군요. 하기야 당신은 아직 나라는 인간을 잘 모르시니까. 그러나 앞으로 좀 더 친해질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우리가 친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안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모자를 집었다.
"실은 나도 꼭 당신에게 수고를 끼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리 찾아오면서도 별로 기대는 걸지 않았습니다. 하긴 오늘 아침에 당신 얼굴을 처음 보고 좀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아침에 어디서 나를 보셨죠?"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불안스러운 듯이 물었다.
"우연히 본 거죠. 어째선지 자꾸 나하고 당신은 닮은 데가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걱정은 마십시오. 나는 남을 귀찮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기 도박꾼과도 어울릴 수 있었고, 먼 친척인 스비르베이 공작이라는 고관에게도 싫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라파엘의 마돈나에 관한 감상을 프릴루코바 부인의 앨범에 써넣을 만한 솜씨도 있었고, 마르파 페트로브나 같은 여자와 7년 동안이나 시골에 들어박혀 살기도 했으며, 옛날엔 센나야의 뱌젬스키 여인숙에 유숙한 일도 있고, 어쩌면 베르그와 함께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볼지도 모를 인간이니까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곧 여행을 떠나게 됩니까?"
"여행이라뇨?"
"아까 그 '여행' 말입니다.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행? 참 그랬지!……정말 여행에 관한 말을 했었죠. 그러나 그건 광범한 문제가 돼서….하지만 당신이 묻는 '여행'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그걸 당신이 아신다면!" 하고 그는 덧붙이더니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경우에 따라선 여행 대신 결혼을 할지도 모릅니다.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여기서요?"
"그렇습니다."
"어느새 벌써 그럴 겨를이 있었죠?"
"아무튼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진정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참….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군! 로지온 로마느이치, 여동생께 전해주십시오. 그분은 마르파의 유언으로 3천 루블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마르파는 죽기 일주일 전에 내 앞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2, 3주일 후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그 돈을 받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고말고요. 꼭 전해주세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나는 바로 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나가다가 문간에서 라주미힌과 마주쳤다.
어느덧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루쥔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바칼레예프의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누구지?" 거리로 나오자마자 라주미힌이 물었다.
"그 녀석이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자야. 내 누이동생이 가정교사로 있을 때 모욕을 준 그 지주란 말이야. 그 녀석이 그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그 애는 안주인 마르파 페트로브나에게 쫓겨나서 그 집을 나왔던 거지. 그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그 후 두냐에게 사과를 했다지만, 이번에 갑자기 죽엇다는 거야. 아까는 바로 그 여자 얘기를 했어.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그자가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자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기가 무섭게 이곳으로 떠나왔는데 말이야, 굉장히 변태적인 데다가 무언가 속으로 결심한 것이 있는 모양이야. 그 녀석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그자한테서 두냐를 보호해줘야겠어. 난 바로 이걸 자네한테 말하고 싶었던 걸세, 알겠나?"
"보호하다니! 그따위 놈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나? 하여간 고맙네, 로쟈, 그렇게 말해줘서….잘 보호해주어야지. 한데 그놈은 어디 살고 있지?"
"모르겠어."
"왜 물어보지 않았나? 거참, 잘못했군! 그러나 염려 없어, 내가 곧 알아내지!"
"그자를 봤나?" 잠시 말이 없다가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물었다.
"응, 봤어. 똑똑히 봐두었어."
"그자를 자세히 봤나, 똑똑히 봤어?" 라스콜니코프는 끈덕지게 물었다.
"응, 잘 봐두었어. 천 명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데 소질이 있거든."
그들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흠…. 그렇지, 그래." 라스콜니코프는 중얼거렸다.
"여보게….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것도 어쩌면 환상일지 몰라."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자네 말을 통 알아들을 수 없군그래."
"자네들은 모두 이렇게들 말하고 있잖나." 라스콜니코프는 쓴웃음ㅇ르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데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쩌면 나는 정말ㄹ 미쳐서 내가 본 것은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어!"
"대체 무슨 소실 하는 거야?"
"누가 알아! 어쩌면 나는 정말로 미쳤는지 모르지. 그리고 요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이봐, 로쟈! 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모양이군. 대체 그 사나이는 무슨 말을 했나? 무슨 일로 왔어?"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주미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 내 보고를 좀 들어보게"하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 자네 집에 들렀더니 자네는 자고 있더군. 그래서 식사를 한 다음 포르피리한테 갔었지. 자묘토프는 아직 거기 있었네. 나는 곧 그 얘기를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어디 말이 나와야 말이지. 아무리 애써도 제대로 말이 안 나오더군. 그 친구들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들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별로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어. 그래서 나는 포르피리를 창가로 끌고 가서 다시 얘기를 해봤으나 웬일인지 마음먹은 대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그자는 딴 쪽을 보고 나도 딴쪽을 보고 있는 형편이었지. 마침내 나는 그 녀석의 코밑에 주먹을 들이대고, 친척으로서 네놈의 콧등을 부숴놓겠다고 위협했지. 그런데 녀석은 내 얼굴을 흘긋 쳐다보고는 그만이야. 나는 침을 탁 뱉고 나와버렸어. 그게 다야. 참 어이없을 지경이지. 자묘토프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래서 도리어 일을 망쳐놨구나 생각했는데, 층계를 내려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나를 깨우쳐주었다네. 다름 아니라….왜 우리는 이렇게 안달하고 있을까? 혹시 자네한테 무슨 위험 같은 것이 닥쳤다면 그야 물론 조심을 해야겠지. 그러나 자네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자네는 이 일에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그런 녀석들에겐 침이나 뱉어주면 그만이야. 나중에 우리 한 번 그놈들을 실컷 놀려주도록 하세. 만일 내가 자네라면 좀 더 그 녀석들을 곯려주겠네. 두고 봐, 나중에 녀석들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게 될 테니까! 침을 뱉는 거야. 하긴 나중에 혼을 낼 방법도 있으니까 지금은 그저 웃어주기나 하지!"
"그야 물론이지!"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 친구도 내일이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라주미힌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은 한 번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이 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뚫어질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르피리를 방문한 데 대한 라주미힌의 보고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때 이후 그에게 아주 많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플러스 면에서도, 마이너스 면에서도!
그들은 복도에서 루쥔과 마주쳤다. 루쥔은 정각 8시에 와서 방을 찾고 있던 참이라 세 사람은 함께 방으로 들어갔지만, 서로 마주 보지도 않았거니와 인사도 하지 않았다. 두 젊은이는 앞서서 먼저 들어갔으나 루쥔은 예의상 문간에서 외투를 벗으면서 잠시 시간을 끌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를 맞으려고 곧 문간까지 나왔다. 두냐는 오빠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루쥔은 방 안에 들어서자 제법 상냥하게 전보다 더 점잔을 빼면서 여성들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다소 당황한 듯 아직도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도 어쩐지 어색한 표정으로 사모바르가 끓고 있는 탁자 둘레에 급히 자리들을 권했다. 두냐와 루쥔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맞은편 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라주미힌과 라스콜니코프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마주 보게 되었다. 라주미힌은 루쥔 옆에, 라스콜니코프는 누이동생 옆에.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루쥔은 향수 냄새가 풍기는 고급 삼베 손수건을 천천히 꺼내더니 신사다운 품위를 유지하면서, 그러나 손상된 자기 체면에 대해서 충분한 해명을 들으려고 굳게 결심한 듯한 태도로 코를 풀었다. 그는 문간에 들어설 때부터 그냥 외투도 벗지 않고 돌아가버림으로써 바로 그 자리에서 두 여성에게 모진 분풀이를 하여 모든 것을 깨우쳐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실행은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사나이는 분명치 않은 일은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므로 이런 경우 그에게는 해명이 필요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자기 명령이 유린된 데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선 그것을 알아야 했다. 응징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것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여행 중에 별고는 없었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는 새삼스럽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형식적인 말을 건넸다.
"네, 표트르 페트로비치, 덕분에 무사했어요."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피로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젊고 건강해서 조금도 피로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꽤 힘드셨던 모양이에요"하고 두네치카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나라 철도는 길기로 유명하니까요. 그래서 '어머니 러시아'는 위대하다지 않습니까. 어젠 꼭 마중나가고 싶었습니다만, 도저히 시간에 맞춰 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별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없는 게 뭡니까, 표트르 페트로비치. 우리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답니다." 특별히 억양에 힘을 주면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성급히 말했다.
"만일 하느님께서 어제 이 드미트리 프로코피치를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분이 바로 드미트리 프로코비치 라주미힌이랍니다"하고 덧붙이며 그녀는 루쥔에게 라주미힌을 소개했다.
"벌써 뵈었습니다….어제…." 못마땅하다는 듯이 곁눈질로 라주미힌을 흘겨보며 루쥔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체로 루쥔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면 겉으로는 자못 상냥한 듯하고 또 자기의 상냥함을 자랑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곧 자기 분수를 잊어버리고 좌중을 유쾌하게 하는 상냥한 신사라기보다는 도리어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리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다시금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라스콜니코프는 처음부터 굳게 입을 봉하고 있었고, 두냐는 때가 올대까지 침묵을 깨뜨리지 않을 생각이었으며, 라주미힌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저,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들으셨나요?" 특별히 간직했던 화제에 기대를 걸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물론 듣고 말고요. 맨 먼저 들었습니다. 지금도 실은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부인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곧 페테르부르크로 출발했다는 소식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적어도 내가 얻은 확실한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페테르부르크로? 이리로요?" 두네치카는 불안스러운 듯이 반문하고 어머니와 서로 눈짓을 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출발을 급히 서두른 점과 그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아무 목적도 없이 떠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도 물론 자명한 일입니다."
"큰일 났군요! 그 사람은 여기서도 또 두네치카를 괴롭히려는 걸까요?"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내 생각으로는 어머님이나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나 그다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야 물론 두 분이 그 사나이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나도 그의 행방을 쫓으며 지금 그가 어디서 머무는지 알아보는 중입니다."
"아아, 표트르 페트로비치, 당신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두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 돌아가신 마르파 페트로브나도 그 사람이 죽였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렇다고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지요. 하긴 그 사나이가, 이를테면 모욕이라는 정신적인 영향으로 사태의 진전을 촉진시켰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나도 굳이 부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자의 평소 소행이나 도덕적 경향에 대해서는 나도 당신과 동감입니다. 지금 그 자가 재산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그 자에게 얼마나 남겨주고 갔는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불원간 내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약간의 돈이라도 가지고 이 페테르부르크에 온 이상 그자는 곧 낡은 버릇을 드러낼 겁니다. 그자는 같은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방탕과 타락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니까요! 8년 전에 운수 사납게도 그자에게 반해서 그의 빚을 갚아준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또 다른 면에서도 그를 구해주었다는,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순전히 그 부인의 노력과 희생 덕분으로, 말하자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끔찍한 형사사건이 아주 초기에 말살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면 그 사내는 지금쯤 시베리아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마땅합니다. 아시겠어요? 그자는 그런 인간이랍니다."
"아아, 그럴 수가!"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갖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인가요?" 두냐는 위압적이고 엄격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나는 다만 죽은 마르파 페트로브나한테서 비밀히 직접 들은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법률상 견지에서 본다면 그 사건은 매우 모호한 성질의 것입니다. 이곳에 레슬리흐라는, 돈놀이도 조금씩 하고 다른 장사도 하는 외국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이 레슬리흐라는 여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옛날부터 몹시 친한 사이여서 일종의 비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겁니다. 이 여자네 집에 먼 친척뻘 되는 조카딸이 있었는데, 벙어리에다 귀머거리인 열다섯인가 열네 살 될까말까 하는 소녀였습니다. 레슬리흐는 그 애를 몹시 미워했지요. 무슨 일을 해도 욕설뿐이고 사정없이 매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다락방에서 목을 매고 죽지 않았겠어요. 그때는 자살이라는 판정으로 형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일이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어린 계집애가….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무참하게 능욕을 당했다고 밀고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가 매우 희미한 데다 밀고한 자 역시 다른 독일 여자로서 신용을 할 수 없는 불량한 사람이었거든요. 더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정식 고발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노력과 돈 덕택으로 이 사건은 소문만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당신은 물론 그 집에서 고문 때문에 죽은 하인 필카의 사건을 아시겠죠? 6년 전, 아직 농노제 시대의 얘깁니다만."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와 반대로, 필카가 제 손으로 목을 매 죽었다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끊임없는 학대와 박해가 그 하인에게 그런 강제적인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겁니다. 좀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자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거죠."
"그건 잘 모르겠어요." 두냐는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다만 몹시 이상한 얘길 들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필카라는 하인은 우울증 증세가 있는 엉터리 철학자여서 여러 사람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목을 매 죽은 것도 스비드리가일로프한테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더군요. 내가 그 집에 있을 때 그는 하인들은 친절이 다루어서 모두 그를 다르기까지 했어요. 물론 필카가 죽은 일에 대해 그를 책망하긴 했지만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어쩐지 당신은 그 사람을 변호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야릇한 웃음으로 입을 일그러뜨리며넛 루쥔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자는 여자에 대해서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탕아입니다. 저 괴이한 죽음을 맞은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그 슬픈 실례지요. 나는 다만 분명히 당신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그자의 새로운 계획에 관해 조언을 드리고 당신과 자당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 개인의 의견으로는, 그자는 다시금 빚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자한테 유산을 넘겨줄 생각은 털긑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사 무슨 유산을 남겨놓고 갔다손 치더라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별로 가치도 없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못된 버릇을 가진 사나이는 1년도 채 지탱해내지 못할 겁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두냐는 말했다.
"제발 그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이야기는 그만해두세요.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자는 방금 나한테 왔었어요"하고 비로소 침묵을 깨뜨리며 갑자기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사방에서 경악의 소리가 일어나고,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루쥔까지도 흥분할 정도 였다.
"한 시간 반쯤 되었을까, 자고 있는데 들어와서 나를 깨워가지고 자기 소개를 하더군."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계속했다.
"제법 허물없는 태도였고 유쾌한 표정이었어. 그리고 그자는 나하고 곧 친밀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그건 그렇고, 그자는 너를 꼭 만나고 싶다는 거야, 두냐. 나더러 그걸 좀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니! 너한테 무언가 제안할 게 있다면서 그 내용을 나한테도 말하더구나. 그 밖에도 두냐, 그자는 확실한 얘기라고 하면서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기 일주일 전에 유언으로 너한테 3천 루블을 주기로 했다고 말하더라. 그 돈은 불원간 네가 받을 수 있으리라는 거야."
"아이, 고마워라!"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성호를 그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라, 두냐, 기도해!"
"그건 사실입니다."하고 루쥔이 불쑥 말했다.
"그다음 또 무슨 말을 했어요?" 두냐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그다지 돈이 많지 않고 재산은 모두 지금 백모한테 가 있는 아이들 소유로 돼 있다더구나. 그리고 현재 내 하숙 근처에 유숙하고 있다고 했지만, 어딘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질 않았으니……."
"그런데 대체 무엇을, 무엇을 두냐에게 제안하려는 걸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미리 겁부터 집어먹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너한테는 말했니?"
"예, 말했어요."
"뭔데?"
"나중에 얘기하죠."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다물고 찻잔으로 손을 내밀었다.
루쥔은 시계를 꺼내 보았다.
"나는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얘기에도 방해가 될 것 같으니"하고 그는 좀 부르퉁해서 이렇게 덧붙이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가지 마세요.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두냐가 말했다.
"오늘 저녁은 여기 죽 계실 작정으로 오셨을 텐데요. 그리고 어머니하고도 직접 하실 말씀이 있다고 편지에 쓰셨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루쥔은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의젓한 어조로 말했으나 모자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었다.
"사실 나는 당신과 존경하는 당신 어머니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었습니다. 지극히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요. 그렇지만 당신 오빠가 내 앞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제안을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나도 역시….다른 사람들 앞에서는….극히 중요한 문제를 얘기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또 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부탁드린 중요한 점이 이행돼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루쥔은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거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오빠를 이 자리에 동석시키지 말아달라는 당신의 희망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오빠의 참석을 고집했기 때문이에요"하고 두냐는 말했다.
"당신은 오빠한테 모욕을 당했다고 쓰셨는데, 그렇다면 곧 사정을 밝히고 두 분이 화해해주셔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만약 오빠가 당신을 정말로 모욕했다면 오빠는 마땅히 당신한테 사과해야 하며, 또 하리라 믿어요."
루쥔은 곧 기운을 되찾았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이 세상에는 마음씨가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모욕이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넘어선다는 건 위험합니다. 한 번 넘어서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불가능하니까요."
"내가 하려는 말은 그런게 아니에요,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답답하다는 듯이 두냐는 말을 막았다.
"잘 생각해주세요. 우리의 장래는 이런 모든 문제가 한시바삐 명백해져서 원만히 해결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아무 가식 없이 말씀드립니다만, 나는 그 밖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어요. 만일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를 아껴주신다면, 좀 어려울지 몰라도, 이런 문제는 오늘 안으로 반드시 해결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만약 오빠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오빠가 사과를 할 테죠."
"당신이 문제를 그렇게 보시는 데는 놀랍겠군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루쥔은 점점 더 초조해져 갈 뿐이었다.
"나는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하고 결혼한다는 행복을 희구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의무를 질 수는 없습니다………"
"아아, 제발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진 말아주세요.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두냐는 정다운 어조로 말을 막았다. "그릭 내가 항상 생각해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려 하는 그런 분별 있고 점잖은 분이 돼주세요.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약속을 했어요. 나는 당신의 약혼녀예요. 그러니 이 일은 내게 맡겨주세요. 그리고 내게 공평하게 처리할 힘이 있다고 믿어주세요. 내가 재판관 역할을 맡는 것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오빠에게도 역시 놀라운 일일 거예요. 나는 당신의 편지를 보고 오빠한테 꼭 이 자리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을 대도 내 생각은 조금도 오빠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발 잘 생각해주세요. 만약 두 분이 화해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이나 오빠 두 분 중 한 분을 택하지 않으면 안 돼요. 당신 쪽에서도 오빠 쪽에서도, 문제는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나는 이 선택을 그르치고 싶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위해서는 오빠하고 남매의 정을 끊어야 하고, 오빠를 위해서는 당신하고 헤어지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지금 분명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또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이가 나의 오빠인지 아닌지? 그리고 당신에겐…. 내가 과연 당신에게 소중한 인간인지 아닌지,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시는지 어떤지, 과연 당신은 내 남편이 될 분인지 아닌지를."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루쥔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말은 내게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당신이 허용한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말은 오히려 모욕적입니다. 나와 저…. 오만불손한 청년을 동렬(同列)로 다루려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기막힌 처사에 대해서는 새삼 말하지 않더라도, 방금 하신 말로 볼 때 당신은 나하고의 약속을 파기할 가능성까지 인정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루쥔이냐, 오빠냐?'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대수로운 의미를 가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는 셈이 됩니다. 나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로 보거나….의무로 보거나…도저히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두냐는 발끈했다.
"나는 당신의 이익을 이제껏 내 생애에서 소중했던 것, 지금까지의 내 전 생애를 형성하고 있던 모든 것과 동렬에 놓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ㅗㄷ 내가 당신을 충분히 존중하기 않는다고 그렇게 화를 내실 수 있어요!"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독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라주미힌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루쥔은 이 반박에는 아랑곳없이 한 마디 한 마디에 더욱더 힘을 주며 신경질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마치 그것이 취미에 맞기라도 한 듯이.
"앞으로 일평생의 반려가 될 사람, 즉 남편에 대한 사랑은 남매간의 사랑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교훈적인 투로 말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사람과 동렬에 설 수는 없습니다. 아까 나는 당신의 오빠 앞에서 방문의 용건을 말하고 싶지도 않고, 또 말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만, 하여간 나는 존경하는 당신의 어머님에게서 가장 근본적이며 나에게는 가장 모욕적인 점에 대해서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은 말입니다"하고 그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몸을 돌렸다.
"어제 라수드킨 씨….아니….그렇지 않던가요? 용서하십시오. 성함을 잊어서….(하고 그는 상냥하게 라주미힌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분 앞에서 내 생각을 고의적으로 곡해해서 나를 모욕했습니다. 언젠가 당신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허물없이 얘기하다가 나온 말이었습니다만, 세상의 고생을 맛본 가난한 처녀와의 결혼은 부유하게 자란 처녀와의 결혼 보다 도덕적으로 유익하므로 부부 관계에서도 유리하다고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아드님은 당신 편지를 근거삼아 고의적으로 말뜻을 나쁘게 과장해서 내가 마치 무슨 간악한 의도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비난했습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제발 나의 오해를 풀어 안심시켜주신다면 나도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내가 한 말을 로지온 로마느이치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떤 식으로 쓰셨는지 말씀해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기억하고 있지 않은데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저 들은대로만 써 보냈는데, 로쟈가 당신한테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어쩌면 그 애가 몹시 과장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자당님의 암시가 없었다면 아드님은 그렇게 과장할 리가 없을 텐데요."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근엄하게 말했다.
"나와 두냐가 당신의 말을 조금도 나쁜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여기 이렇게 와 있는 것으로도 증명되지 않겠어요."
"그래요, 어머니!" 두냐가 동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점에서도 내가 나쁘다는 말씀이군요!" 루쥔은 화를 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당신은 모든 일을 로쟈 탓으로 돌리시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엊그제 편지에 로쟈에 대해서 거짓말을 쓰지 않았습니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갑자기 기운을 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거짓말을 쓴 기억이 없는데요."
"당신은 썼습니다." 루쥔을 외면한 채 라스콜니코프는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어제 돈을 준 것은 바로 마차에 치여 죽은 사람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그걸 과부가 아니라 그 달에게 주었다고 썼어요, 나는 어제까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죠. 당신이 그런 거짓말을 쓴 것은 가족끼리 싸움을 붙이기 위한 농간이에요. 그 때문에 비열한 언사로 알지도 못하는 그 처녀의 행실까지 덧붙여 쓴 것입니다. 그건 모두 비열한 중상입니다."
"실례지만" 분노에 몸을 떨면서 루쥔은 대꾸했다. "그 편지에서 당신의 성격과 행동까지 언급한 것은 당신의 여동생과 어머니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즉 당신을 방문했을 때의 모양은 어떠했으며,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그런 점을 상세히 알려달라는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적된 편지의 내용 한 줄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돈을 낭비하지 않았나요, 또 그 가족이 가난한 것은 사실ㅇ라 할지라도 그들 가운데 더러운 인간이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 따위는 아무리 있는 장점을 다 긁어모아도 지금 당신이 돌을 던지고 있는 그 불행한 처녀의 새끼손가락만큼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여자를 어머니와 여동생과 교제시킬 만한 자신이 있겠군요?"
"원하신다면 말씀드리죠. 난 벌써 그걸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 처녀를 어머니와 두냐하고 나란히 앉혔으니까요."
"로쟈!"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는 외쳤다.
두네치카는 얼굴을 붉혔고, 라주미힌은 눈썹을 찌푸렸다. 루쥔은 독기 띤 거만한 웃음을 흘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보시다시피"하고 그는 말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화해가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이것으로 만사는 끝났고 모든 사정은 명백해진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제 더는 모자와 남매간 상면의 기쁨과 비밀 얘기를 방해자지 않도록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었다) 그러나 가기 전에 한말슴 더 드리겠습니만, 앞으론 이런 회합, 아니 이런 타협은 절대 삼가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존경하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당신한테는 특히 이 점을 다짐해둡니다. 더욱이 그편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한테 보냈으니까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도 이 말에는 다소 화가 났다.
"당신은 뭡니까, 우리를 당신의 권력으로 마음대로 휘두르시겠다는 건가요, 표트르 페트로비치? 당신의 희망대로 되지 않은 까닭은 방금 두냐가 말한대롭니다. 그 애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듯이 편지를 쓰셨더군요. 그래, 우리는 당신의 희망을 일일이 명령처럼 생각해야만 합니까? 오히려 나는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특별히 친절하고 관대히 대해주셔야 할 처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렇잖아도 우리는 지금 당신 손아귀에 들어 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느냐 말이에요. "
"아니, 전혀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특히 조금 전에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유언에 따라 3천 루블을 받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까요. 나에 대한 말투가 금방 달라진 점으로 보아도 그건 절호의 기회였던 것처럼 느껴지는군요"하고 그는 독기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우리의 무력한 신세를 이용하려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군요"하고 두냐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그런 것을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아르카치 이바노비치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의 비밀 제안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 사람은 오빠에게 전권을 위힘한 셈이니까요. 보건대 그 제안은 당신에게 중대한 의미를, 어쩌면 지극히 유쾌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 뭐라고요!"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라주미힌은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넌 이래도 부끄럽지 않니, 두냐?"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부끄러워요, 오빠"하고 두냐는 대답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썩 나가주세요!" 그녀는 분노에 질린 파리한 얼굴로 루쥔에게 말했다.
루쥔도 설마 이런 결말이 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권력, 그리고 두 사람의 무력한 처지에 너무나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이런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입술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이 문에서 나가버리면, 알겠소, 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잘 생각하란 말이오! 나는 일구이언은 안 합니다."
"아니, 그런 뻔뻔스러운 소릴!" 두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외쳤다.
"네, 나도 당신이 되돌아오길 원치 않아요!"
"뭐? 아니 뭐라고요!" 최후의 순간까지 이런 종말을 믿지 않았던 루쥔도 이제는 완전히 실마리를 잃고 저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아실 테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나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우리 애한테 그런 소릴 하시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도 후끈 달아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무슨 권리가 있다고! 정말이지 당신 같은 사람에게 내 소중한 딸을 내주다니! 자, 썩 나가요, 우리한텐 참견하지 말아요!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이었지, 이런 당치도 않은 일을 이루어보려고 했으니,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나빴어……"
"그러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루쥔은 미친 듯이 대들었다. "당신은 그런 약속으로 나를 속박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걸 파기하려는 겁니까….그렇다면 결국….나는 그 때문에 공연히 돈만 쓴 것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마지막 항의는 루쥔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으므로, 분노의 발작과 그것을 억제하려는 노력 때문에 창백해 있던 라스콜니코프조차 마침내 참지를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돈만 썼다고요? 대체 무슨 돈입니까? 설마 우리 트렁크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당신의 낯을 보고 차장이 거저 실어준 것이니까. 아니, 뭐 우리가 당신을 속박했다고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표트르 페트로비치. 당신이 우리 손발을 비끄러매는 것이지, 우리가 당신을 속박한 건 아니에요!"
"그만두세요, 어머니. 제발 그만두세요!" 하고 두냐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제발 나가주세요!"
"나갑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는 거의 자제력을 잃고 외쳤다.
"당신의 어머니는 이미 잊으신 모양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한 불미한 소문이 온 고을에 퍼지기 시작한 직후에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렸으니 물론 크나큰 보수를 바랄 수도 있고, 또 당신에게 감사를 요구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야 나도 겨우 눈을 떴습니다! 내가 여론을 무시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경솔한 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군요……."
"이 자식, 네 대갈통은 두 개인 줄 아니!" 라주미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당장에라도 대들 기세로 이렇게 호통을 쳤다.
"당신은 비열하고 간악한 인간이에요!" 하고 두냐는 말했다.
"말하지 마! 가만 놔둬!" 라주미힌을 제지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그러고는 루쥔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어서 나가시오!" 그는 토막 토막 끊기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 소리 마시고, 그렇잖으면……."
루쥔은 몇 초 동안 분노로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휙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버렸다. 지금 이 사나이가 라스콜니코프에게 품은 분노와 증오는 누구도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만을, 그 한 사람만을 일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그가 층계를 내려가면서도 어쩌면 일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모녀에 관해서는 아직도 '충분히' 회복할 가망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이러한 결말은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두 여인이 자기 세력에서 벗어나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 때까지 그토록 뻔뻔스럽게 버티어댔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크게 북돋아준 것은 그의 허영심과 자부심이라고 불러야 할 그의 자신(自信)이었다. 보잘것없는 처지부터 그만한 지위를 쌓아올린 루쥔은 병적일 정도로 자만심이 강했고, 자기 두뇌와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때로는 혼자서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사랑했던 것은 모든 노력과 온갖 방법을 통해 획득한 자기 돈이었다. 바로 그 돈이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던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에 앉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두냐에게, 자기는 불미한 소문이 있는데도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었다고 비통한 어조로 경고한 것은 어디까지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겁한 배은'에 대해서 그는 격렬한 분노까지 느꼈다. 하긴 그가 두냐에게 청혼했을 때는 이미 마르파 페트로브나 자신이 발 벗고 나서서 그런 풍문을 씻어버린 뒤였고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그런 건 잊어버리고 두냐를 변호하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것이 허무맹랑한 낭설임을 완전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런 사정을 그 당시부터 알고 있었음을 이제 와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두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주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커다란 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두냐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실은 지금까지 수없이 감탄해오면서 다소곳이 마음에 숨겨두었던 비밀스런 상념의 고백이었을뿐인데, 어째서 남들은 자기의 이 공적을 감탄의 눈으로 보아주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날 라스콜니코프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충분히 자기 공적의 성과를 거두고 더 없이 감미로운 찬사를 들을 양으로 은인처럼 자처하고 그의 방에 들어갔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그가 층계를 내려가면서 자기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 큰 모욕을 받은 듯이 생각하는 것도 실은 무리가 아니었다.
한편 두냐는 그에게 도저히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녀를 단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몇 년 동안이나 그는 결혼이라는 것을 즐겁게 공상하면서 끊임없이 돈을 저축하며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려왔다. 그는 달콤한 희망을 안고 남몰래 마음속 깊이 품행이 좋고 가난한(반드시 가난해야 했다), 젊고 예쁘고 좋은 가문에서 교육도 받고, 그러면서도 세상의 온갖 고초를 다 겪어 겁이 많아진 처녀, 끝까지 자기 한 사람에게만 순종하면서 한평생 자기를 은인으로 존경하고 숭배하는 그런 처녀를 공상하고 있었다. 그는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조용한 곳에서 이 매혹적이고 즐거운 테마에 관해서 얼마나 달콤한 에피소드와 장면을 공상 속에 그려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몇 년 동안의 공상이 거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의 미모와 교양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 의지할 데도 없는 호나경은 극도로 그 욕망을 자극했다. 게다가 거기에는 그의 공상 이상의 것까지 있었다. 이 처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의지가 굳고 품행이 단정하고, 교양과 두뇌의 발달은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그도 이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이토록 훌륭한 여성이 앞으로 한평생 그의 위업에 대해서 노예적인 감사를 바치면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그는 그 위에서 완전하고도 무한한 지배력을 휘두르려는 것이다!……때마침 그는 얼마 전부터 오랜 숙고 끝에 마침내 근본적으로 방침을 고쳐서 더 넓은 활동권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토록 갈망해오던 상류사회로도 서서히 발을 들여놓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도해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여자라는 것이 일을 하는 데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름답고 기품과 교양이 있는 여성의 매력은 그의 인생 행로를 장식해주고 사람들을 그에게 끌어들일뿐더러 그의 명성을 높여줄 것임에 틀림없다……….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아, 뜻하지 않은 추악한 결렬은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장난이었다. 바보 같은 얘기다. 그는 잠깐 거드름을 피워보았을 뿐 제대로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농다조로 좀 열중했을 뿐인데 이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다니! 더욱이 그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 두냐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는 벌써부터 그녀에게 군림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아니다! ….내일이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사태를 회복해서 응급조처를 취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일체의 원인인 그 젖비린내 나는 오만한 풋내기를 납작하게 혼내줘야겠다. 그리고 이때 병적인 감각과 더불어 저도 모르게 라주미힌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라주미힌에 대해서는 그도 이내 안심했다. '물론 그런 자는 그놈과 똑같은 족속일 게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잇던 것은….다르 아닌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많은 근심 걱정이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에요! 내가, 내가 제일 나빴어요!" 어머니를 껴안고 키스하면서 두네치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돈에 눈이 멀었던 거예요. 그러나 오빠, 맹세하겠어요. 나는 설마 그가 그렇게까지 졸장부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전부터 그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나를 책망하지 마세요, 오빠!"
"하느님이 구해주셨다! 하느님이 구해주셨어!"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방금 일어난 일들이 아직도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듯이 건성으로 입을 놀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두 서로 기뻐했다. 5분쯤 지나자 웃음까지 퍼져 나왔다. 때때로 두네치카만이 조금 전의 사건을 상기하면서 파리해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자기도 함께 기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루쥔과의 결별이 무서운 불행으로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주미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아직 충분히 기쁨을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마치 5푸드나 되는 저울추를 가슴에서 떼어낸 듯이 열병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온 생애를 바쳐서 이들 모녀에게 봉사할 권리를 얻은 셈이다. 사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래의 일을 생각하면 그는 더욱 겁이 나서 그런 생각을 몰아내고 자기 자신의 상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은 채 침울한 방심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루쥔을 물리치자고 주장했으면서도 지금 일어난 일에는 누구보다도 가장 관심이 없어 보였다. 두냐는 아직도 오빠가 자기에게 몹시 화나있다고 생각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오빠한테 무슨 말을 했어요?" 두냐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 차, 그래그래!"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꼭 너에게 1만 루블을 선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함게한자리에서 너를 한 번 만나고 싶다더구나!"
"만나고 싶다고! 절대로 안 된다, 안 돼!"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이 애한테 돈을 주겠다고! 아니,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릴 할 수 있단 말이냐!"
라스콜니코프는 (극히 무관심한 어조로) 스비드리가일로프하고 주고받은 얘기를 전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실제 필요한 것 말고는 하나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아서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유령 얘기는 빼버렸다.
"그래서 오빠는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하고 두냐는 물었다.
"처음엔 너한테 알리지 않겠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너를 직접 만나겠다고 우기는 거야. 그리고 너에 대해서 열을 올렸던 것은 일시적인 착란이었고,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보증하더군….그는 너를 루쥔과 결혼시키고 싶지 않은 거야….대체로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는 말이었어."
"오빠 자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인상을 받으셨어요?"
"솔직히 말해서 뭐가 뭔지 알수가 없더구나. 1만 루블을 제의하는가 하면, 자기는 부자가 아니라는 소리도 하고….어디로 멀리 가버리고 싶다고 하다가는 10분도 지나기 전에 자기가 한 그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리고 또 느닷없이 결혼할 작정이라면서 중매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하고. 물론 무슨 목적이 있을 테지만 십중팔구 좋지 못한 목적이겠지. 그리고 만일 너한테 불순한 생각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우둔하게 나올 리는 만무하거든, 하여튼 나는 너를 대신해서 그 돈 문제는 딱 잘라 거절했다. 대체로 그자는 몹시 변태적인 인상을 받았어. 아니, 오히려….발광할 징후가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어. 하긴 내가 잘못 추측했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단순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그러나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더군……."
"아아, 하느님, 그 여자의 영혼에 평안을 주옵소서!"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나는 영원히, 영원히 그 여자를 위해 기도하겠다! 얘 두나야, 그 3천 루블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겠니? 정말로 하늘이 주신 복 같다! 로쟈야, 글쎄, 오늘 아침 우리 수중에 겨우 3루블밖엔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하고 두냐는 빨리 시계라도 전당 잡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엔 그 사람한테서 돈을 빌리기 싫었으니까."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제안에 무척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 사람은 무언가 무서운 일을 생각해냈을 거예요!" 그녀는 부르르 봄을 떨다시피 하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누이의 극심한 공포에 눈치챘다.
"왜 그런지 나는 앞으로도 종종 그 자와 만날 것만 같다." 하고 그는 두냐에게 말했다.
"모두 조심합시다. 내가 그 자의 거처를 알아내겠습니다!" 라주미힌이 힘차게 외쳤다.
"계속해서 감시를 하겠습니다! 로쟈가 나에게 허락해주었으니까요. 로쟈는 아까 나한테 누이동생을 보호해달라고 했거든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당신도 허락해주시겠죠?"
두냐는 방긋 웃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근심의 빛은 그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조심조심 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3천 루블이란 돈은 분명히 그녀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15분 후에는 모두 활기 띤 대화를 나누었다. 라스콜니코프도 자신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동안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신 나게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은 라주미힌이었다.
"아니, 왜 여기서 떠나셔야만 합니까?" 그는 무엇에 취한 듯이 환희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시골 도시에서 무엇을 하신다는 겁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 분 다 여기 계셔야 하고,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얼마나 서로 필요한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세요! 비록 당분간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부디 저를 친구로서 한몫 끼워주십시오. 그러면 정말 멋진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제 그 상세한 계획을 말씀드릴 테니! 오늘 아침에,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기 전에 내 머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생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겐 백부가 한 분 계십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만 아주 훌륭하고 점잖은 노인입니다! 그 백부가 1천 루블쯤 갖고 있는데 그분 자신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조금도 궁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부는 2년 전부터 그 돈을 나더러 이용하라면서 이자는 연 6부면 된다고 귀찮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셈은 알고 있습니다. 백부는 다만 나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해엔 나도 그럴 필요가 별로 없었지만, 올해는 백부가 오시는 대로 그 돈을 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자당님께서도 그 3천 루블 가운데 1천 루블만 제공해주시면 착수금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자한 셈이 되지요. 그돈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하면?"
여기서 라주미힌은 자기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서적상과 출판업자가 자기 상품에 대해서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좋은 평들을 못 받고 있지만, 착실한 책만 출판하면 반드시 수지를 맞추고도 이익을 올려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라주미힌은 2년간이나 남의 출판사를 위해서 일을 했으며 유럽 3개 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출판업을 하려는 공상을 항상 품어왔던 것이다. 엿새 전에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독일어만은 '시원치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친구에게 번역 일을 반쯤 맡기고 선금 3루블을 쥐어주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도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자본의 하나인 자기 돈이 생겼는데 말입니다!" 라주미힌은 열을 올렸다.
"물론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을 합해서 일해봅시다. 자당님을 비롯해서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그리고 나와 로지온이 협력해서 말입니다. 몇몇 출판은 지금 굉장한 이득을 올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사업의 근본 문제는 요컨대 무엇을 택해서 번역하느냐, 그것을 잘 알아야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번역도 하고, 출판도 하고, 공부도 함께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나도 꽤 쓸모가 있을 겁니다. 경험이 있으니까요. 이미 2년 동안이나 여러 출판사를 돌아다녔으므로 그자들의 내막이라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까지 가져다주는데 그냥 밀어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아주 근사한 책을 두세 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번역해서 출반한다는 아이디어 만으로도 한 권에 100루블씩은 쉽게 받을 수 있는 비밀을 갖고 있거든요. 그중 한 권은 아이디어료만으로 500루블을 준다고 해도 응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미친 소리라고 의심할 지도 모르죠. 세상엔 바보들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인쇄라든가 용지라든가 판매 같은 잡무는 일체 내게 맡겨주십시오! 그 방면의 내막은 환하니까요! 처음엔 소규모로 시작해서 점점 사업을 키워가는 거죠. 적어도 그것으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설령 잘못된다고 해도 본전은 건질 수 있으니까요."
두냐의 두 눈이 빛났다.
"당신 이야기는 퍽 마음에 드는군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런 얘기는 하나는 모르지만…."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대답했다.
"그 계획은 좋을 것도 같군요. 하지만 장래의 일은 아무도 보증하지 못할 거예요. 새로운 일이라 어떨지 알 수가 있어야죠. 물론 우리는 당분간이라도 여기 머물러 있긴 해야겠지만………"
그녀는 로쟈에게 눈을 주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냐가 물었다.
"나도 참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해"하고 그는 대답했다.
"회사를 만든다는 공상까지 미리할 필요는 없지만 대여섯 권 정도의 출판이라면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어. 나도 틀림없이 잘 팔릴 책을 한 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친구의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사업적인 두뇌가 있거든. 그러나 아직 상의할 시간은 충분히 있어………"
"만세!" 라주미힌은 외쳤다.
"잠깐만! 여기 이 집에 같은 주인이 갖고 있는 아파트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방들과는 통로가 막혀서 아주 독립된 집 같고, 가구도 딸렸으며, 작긴 하지만 방이 세 개나 되고 집세도 퍽 쌉니다. 우선 그 집을 빌려드세요. 시계는 내가 내일 당장 전당 잡혀다 드리겠습니다. 그다음은 만사가 다 잘되어갈 겁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세 분 가족이 함께 사실 수 있다는 겁니다. 로쟈도 가족들과 함께……아니, 어디 가는 거야, 로쟈?"
"얘, 로쟈, 너 벌서 가려는 거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아니, 하필이면 이러한 때!" 하고 라주미힌은 외쳤다.
두냐는 의아스러운 듯 놀란 빛을 띠면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모자가 들려있었다. 그는 금방 나가려는 자세였다.
"마치 모두가 나를 장송(葬送)하거나 생이별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이군요." 그는 몹시 이상한 말투로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빙긋 웃는 것 같았으나 웃음이 아닌 것도 같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우리가 얼굴을 대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말을 문득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내고 만 것이다.
"아니, 너 왜 그러느냐?" 하고 어머니가 외쳤다.
"오빠, 어딜 가세요?" 두냐도 어쩐지 이상한 어조로 물었다.
"잠깐 꼭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자기가 말하려던 생각에 동요를 느낀 듯 그는 막연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창백해진 얼굴엔 그 어떤 단호한 결심의 빛이 어려 있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이리로 오는 도중에….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어머님께……그리고 네게도 두냐, 우리는 당분간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나는 기분이 좋지 않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또 오지요. 올 처지가 되면 내 발로 걸어오겠어요. 나는 어머니와 두냐를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내 걱정은 말아주세요! 나 혼자 내버려 두세요! 나는 전부터 이렇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심은 확고합니다….설사 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몸이 파멸해버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혼자 있고 싶습니다….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주세요. 그쪽이 편안합니다….아예 내 소식을 수소문하거나 하지는 말아주세요. 필요할 때는 내가 오든지….어머니와 두냐를 부르든지 하겠습니다. 부활할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지금은, 나를 사랑하신다면 단념해주세요……그렇잖으면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만 같아요….그럼 안녕히!"
"아아, 이를 어쩌나!"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어머니도 누이동생도 기절을 할 만큼 놀랐다. 라주미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쟈, 로쟈! 마음을 풀어다오. 다시 그전처럼 지내자꾸나, 응!" 가없은 어머니는 애원하듯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문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느릿느릿 방을 나갔다. 두냐가 그 뒤를 쫓았다.
"오빠! 어머니를 어떡할 작정이세요!" 분노에 타는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는 괴로운 눈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올 테니. 자주 들르겠다!" 자기 자신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는 듯이 그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매정하고 심술궂은 에고이스트!" 두냐는 외쳤다.
"저건 미, 미치광입니다, 매정한 게 아니라 머리가 돌았어요! 당신은 그걸 모르십니까? 모르신다면 당신이 오히려 매정해요!" 라주미힌은 두냐의 손을 꼭 잡으련서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는 열띤 음성으로 속삭였다.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그는 기절하다시피 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이렇게 외치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라스콜니코프는 복도 끝에서 라주미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뛰쳐나올 줄 알았네." 하고 그는 말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두 사람과 함께 있어주게….내일도 와서 함께 있어주고….그리고 앞으로도 죽, 나도 어쩌면 다시 올지 모르지….올 수만 있다면….잘 있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손도 내밀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대체 자네 어딜 가는 건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래, 이럴 수가 있나?" 어안이 벙벙한 라주미힌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네만, 다시는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게. 물어봐야 아무것도 대답할 게 없으니까. 나를 찾아오지도 말고. 어쩌면 내가 이리 올지도 모르지.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야. 그러나 저 두 사람만은 내버리지 말아주게. 알겠나?"
복도는 어두웠다. 그들은 램프 옆에 서 있었다. 1분쯤 그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한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라스콜니코프의 불타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시시각각으로 힘을 더해서 라주미힌의 영혼과 의식을 꿰뚫는 듯했다. 라주미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엇인지 괴이한 것이 그들 사이를 스쳐 간 듯한 느낌이었다….그 어떤 상념이 마치 암시처럼 번쩍 스쳐 간 것이다. 무섭고도 추악한, 그러나 쌍방이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그 무엇이……….라주미힌은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이젠 알겠지?" 라스콜니코프는 병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서 두 사람한테로 돌아가 보게." 이렇게 덧붙이고 그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날 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거처에서 생긴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쓰지 않겠다. 라주미힌은 라스콜니코프를 보내고 돌아와서 모녀를 위로했다.
로쟈는 지금 병중이라 정양(靜養)이 필요하다, 로쟈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날마다 올 것이다. 그는 지금 몹시 머리가 혼란되어 있으니 그의 신경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신, 곧 라주미힌은 그를 잘 보살피려고 좀 더 좋은 의사를 데려오겠다 등등을 약속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날 밤부터 라주미힌은 두 여인을 위해 아들이 되고 오빠가 된 셈이었다.
한편 라스콜니코프는 그길로 소냐가 살고 있는 운하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집은 녹색으로 칠한 낡은 3층집이었다. 그는 문지기를 찾아서 재봉사 카페르나우모가 어느 방에 살고 있는지 대충 위치를 알아보았다. 마당 한구석에서 좁고 어두운 층계로 통하는 출입문을 발견하고 간신히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안뜰에 면한 복도로 나왔다. 그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카페르나우모프가 살고 있는 방문을 찾으려고 머뭇거리고 있을 대, 문득 서너걸음 떨어진 데서 문 같은 것이 열렸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 문을 붙잡았다.
"거기 누구세요?" 불안스러운 여자의 음성이 물었다.
"나요,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고 조그만 문간으로 쑥 들어섰다. 거기에는 찌그러진 의자 위에 비틀린 구리 촛대가 놓여 있고 촛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나, 당신이군요!" 소냐는 가냘프게 외치고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당신 방은 어딥니까? 이쪽이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소냐도 촛불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촛불을 내려놓고, 뜻하지 않은 방문에 놀란듯이 말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망연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순간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깃들고 눈에는 눈물이 스며 있었다. 소냐는 싫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또 감미로운 기분이기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황급히 외면을 하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흘긋 바라보는 거산으로 방 안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방은 넓긴 하지만 천장이 몹시 낮았는데, 카페르나우모프가 세를 주고 있는 단칸방이었다. 왼편 벽에 주인네 방으로 통하는 문이 닫혀 있고, 반대편인 오른쪽 벽에는 언제나 굳게 닫혀 있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거기는 번호가 다른 이웃집 방이었다. 소냐의 방은 어쩐지 창고 같은 일그러진 네모꼴이었는데, 그것이 이 방에 그 어떤 불구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운하 쪽으로 창문에 세 개 달린 벽은 방 안을 비스듬히 지르고 있어서 한쪽 구석은 심한 예각을 이루며 희미한 불빛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들어가 있는 데 반해, 다른 한쪽 구석은 보기 흉할 정도로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넓은 방에 가구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치대가 있는 쪽 벽에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바로 그 옆에 청색 커버를 씌운 싸구려 탁자가 있고, 그 앞에 등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벽을 따라 예각을 이룬 구석 근처에 그리 크지 않은 조잡한 옷장이 버려진 듯이 혼자 놓여 있었다. 그 정도가 이 방 안에 있는 전부였다. 닳고 낡아빠지 누런 도배지는 구석구석마다 거무스름하게 그을어 있었다. 겨울이면 눅눅해서 탄산가스라도 낄 것 같았다. 가난한 생활임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침대 옆에 커튼조차 없을 정도였다.
소냐는 말없이 방 안을 염치 없이 둘러보는 손님을 지켜보았으나, 나중에는 마치 재판관이나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 앞에서 서 있는 듯이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 와서….벌써 11시는 됐겠죠?" 그는 여전히 소냐에게 눈을 주지 않으며 물었다.
"네." 소냐는 중얼거렸다.
"네 맞아요!" 마치 그 말 한마디에 자기의 운명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이 소냐는 황급히 대답했다.
"방금 주인네 방에서 시계 치는 소릴 들었어요….11시예요."
"나는 마지막으로 당신한테 들른 겁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기 온 것이 처음이면서도 침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어쩌면 당신과는 아주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디….여행이라도?"
"모릅니다……내일이면 모든 것이………"
"그럼 내일 우리 어머니한테도 오시지 못하겠군요?" 소냐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모르죠. 모든 것은 내일 아침에 봐야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나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기는 앉아 있는데 소냐는 아직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앉으세요." 그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조용하고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냐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동정 어린 부드러운 눈으로 얼마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여위었습니까! 그 손은 말이 아니군요.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게 마치 죽은 사람 손가락 같군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냐는 가냘프게 웃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집에 있을 때도요?"
"네."
"하긴 그럴 수밖에!"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 표정도 음성도 다시금 갑자기 변해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은 카페르나우모프한테서 빌리고 있나요?"
"네………."
"카페르나우모프네는 방문 저쪽이죠?"
"네…. 저쪽에도 이것과 똑같은 방이 하나 있어요."
"모두 한방에 살고 있나요?"
"네, 한방에."
"나는 이런 방에 있으면 밤에 꽤 무서울 것 같은데요"하고 그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은 모두 좋은 사람들에요. 아주 친절하고요." 소냐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내가 쓰는 가구들도 모두 주인네 거예요. 참 좋은 분들이에요. 아이들도 자주 내 방에 놀러 오곤 해요……."
"그 말더듬이 아이들 말이죠?"
"네….주인은 말더듬이에 절름발이에요….안주인도 역시….더듬는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나 말이 분명치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안주인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주인은 전에 자주 집에서 일하던 농부 출신인데 아이가 모두 일곱이나 있어요….제일 큰아이 하나만 말을 더듬고, 다른 아이들은 몸이 허약할 뿐이지 더듬지는 않아요….그런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소냐는 좀 놀란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당신 아버님이 죄다 말해주셨지요…그리고 당신 얘기도 들려주셨습니다….당신이 저녁 6시에 집을 나가서 8시에 돌아온 것도, 차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 침대 옆에 무릎 굻고 있던 일도."
소냐는 당황했다.
"나는 오늘 그분을 본 것 같아요." 소냐는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누구를?"
"아버지요. 이 근처 길모퉁이에서 9시 좀 지나서였을 거예요. 내가 길을 걸어가는데 앞을 걷고 있는 이가 꼭 아버지를 닮았어요. 어찌나 닮았는지 나는 곧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달려가려고까지 생각했다니까요……."
"산책을 하고 있었나요?"
"네." 소냐는 다시금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며 나직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과 같이 살 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을 심하게 구박했다면서요?"
"어머, 천만에요. 무슨 말씀을 하세요. 그런 일 없어요!" 소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을? 네, 그야 물론이죠."
소냐는 갑자기 괴로운 듯이 두 손을 모아 쥐면서 애처롭게 말끝을 끌었다.
"아아! 당신이 그녀를,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아신다면!…. 그녀는 어린애와 다름없어요….머리가 돌아버린 거예요….너무 고생을 해서. 그렇지만 예전엔 참으로 현명한 여자였어요…얼마나 마음이 넓고 상냥했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세요….아아!"
소냐는 흥분하고 괴로워하며 손을 비비대면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여러 가지로 강한 충격을 받았으므로 그것을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변호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 어떤 싫증을 모르는 연민의 정이 - 만일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 갑자기 소냐의 얼굴 전체에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구박했다니! 대체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 설사 그녀가 딸을 좀 때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단 말이에요! 네, 어떻단 말이에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세요! 그녀는 정말 불행한 분이에요. 아아, 얼마나 불행한지 몰라요! 게다가 앓기까지 하니….그녀는 매사에 공평이란 것을 원하고 있어요….그녀는 결백해요. 무슨 일이든지 공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요구하고 있어요….아무리 고통스러운 경우를 당해도 정의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세상 만사가 모두 올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초조하게 애태우고 있는 거예요….마치 순진한 어린애처럼 말이에요! 그녀는 올바른 사람이에요! 올바른 사람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소냐는 반문하는 듯한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보았다.
"가족들이 모두 당신에게 달렸으니 말이에요. 하긴 여태까지도 당신이 부양해왔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도 술값을 얻으려고 가끔 당신을 찾아다녔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소냐는 슬픈 듯이 대답했다.
"모두 그 집에 그냥 있게 되나요?"
"글쎄, 모르겠어요, 그 집엔 빚이 있거든요. 오늘도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했는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오히려 이쪽에서 한시도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더군요."
"그분은 왜 그렇게 호통만 치시죠? 당신을 믿고 그러시는 건 아닙니까?"
"아아,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우리는 다 함께 사는 한집안 식구예요." 소냐는 갑자기 또 흥분하여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카나리아 같은 작은 새가 화를 내면 그럴 거라고 생각될 만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어떡하면 좋겠어요?" 소냐는 흥분하고 열띤 어조로 물었다.
"오늘도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녀는 머리가 혼란되어 있어요. 당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완전히 혼란되어 있어요. 내일을 위해 격식대로 갖추어야 한다, 여러 가지 음식도 마련해야 한다….마치 어린애같이 이렇게 조바심하는가 하면, 두 손을 비벼대기도 하고 피를 토하며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갑자기 자포자기한 듯이 머리를 벽에 들이받기도 하거든요. 그러다가 진정되면, 아직도 당신만을 믿고서 구해줄 것이라고 말하곤 해요. 그리고 또 이런 공상도 하죠. 어디서 돈을 좀 변통해서 나하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가정의 아가씨들을 수용하는 기숙학교를 세우고, 나를 그 학교의 사감으로 앉힌대요. 그래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멋진 인생을 시작한다고 하면서, 나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위로해주는 거예요. 글쎄, 그런 꿈같은 공상을 완전히 믿고 있다니까요! 이러고 보니 어떻게 반대할 수나 있겠어요? 오늘도 온종일 빨래를 한다, 청소를 한다, 수선을 한다 하면서 그 약한 몸으로 큰 대야를 방 안에 끌어들이다가 숨이 차서 침대에 쓰러지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나하고 둘이서 폴레치카와 레냐의 구두를 사러 시장에 갔다 왔어요. 둘 다 망그러져 신을 수 없게 됐거든요. 그런데 예상했던 돈으론 모자랐어요. 조금만 모자란게 아니에요. 그녀는 굉장히 예쁘장한 구두를 골라잡았어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그녀는 눈이 높답니다. 그러자 상인들이 득실거리는 그 구둣방에서 돈이 모자란다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겠어요….아, 정말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야 그렇겠죠. 당신들이……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이상……" 라스콜니코프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불쌍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불쌍하지 않으세요?" 소냐는 다시 펄쩍 뛸 듯이 말했다.
"당신은 그때 아직 아무것도 보시기 전에 갖고 있던 돈을 죄다 털어 주셨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만일 모든 걸 다 보셨더라면, 아아, 그때야말로! 그런데도 나는 몇 번이나 그녀를 울렸는지 몰라요! 바로 요 전주만 해도 그랬어요! 아아, 내가 어쩌자고 그녀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어요. 나는 잔인한 짓을 했어요! 지금까지 그런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죠. 아아,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온 종일 가슴이 아파요!"
소냐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괴로운 기억을 참지 못해 두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당신이 잔인하단 말인가요?"
"그래요, 나는 잔인해요! 그때 내가 그 집으로 갔더니"하고 소냐는 울면서 말을 계속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소냐, 내게 책을 좀 읽어다오. 어쩐지 머리가 아파서 그런다. 뭐 좀 읽어주려무나…. 자, 여기 책이 있다' 하시기에, 보니 어떤 책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것은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쟈트니코프한테서 빌려 온 웃음거리 책이었어요. 그때 나는 '돌아갈 시간이 됐어요'하고 그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옷깃을 좀 보아달래려고 틀렀었거든요. 헌옷 장사를 하는 리자베타가 깃과 커프스를 헐값에 주었는데, 아직 새깃이나 다름없는 아름다운 장식이 달린 것이었어요. 그런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몸에 걸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더니만,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지 '이거 내게 주렴, 소냐, 내 소원이니'하지 않겠어요. '소원이다'고 했으니 여간 마음에 든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그녀가 그걸 가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저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이 되살아날 뿐이죠! 그녀는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 좋아했지만,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어요. 벌써 몇 해 전부터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에게 물건을 조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자존심이 강해서 오히려 없는 가운데서도 도와주는 성격이었지요. 그런 사람이 달라고 조르는 걸 보니 정말이지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가 봐요! '이런 것이 어머니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어요. 그래요,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어요. 이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랬더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군요. 내가 거절한 것이 퍽 섭섭했던 모양이에요. 정말 딱했어요. 어머니는 그것을 못 갖는 것보다도 나한테 거절당했다는 것이 섭섭했던 거예요. 난 그걸 알아요. 아아, 모든 걸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때의 그 말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나는 그때의 그 일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몰라요...하지만 내가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당신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인데......."
"당신은 헌 옷 장수 리자베타를 알았나요?"
"네... 당신도 그 여자를 아시나요?" 좀 놀란 듯이 소냐는 되물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폐병입니다. 그것도 악성이에요. 그녀는 머지않아 죽을 겁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오, 아녜요, 아녜요, 그렇잖아요!" 하며 소냐는 저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마치 그런 불행히 없게 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듯이.
"그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요, 죽는 편이?"
"아녜요, 낫지 않아요, 낫지 않아요, 절대로 낫지 않아요." 소냐는 질겁하며 정신없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만약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아이들을 어디로 보낼 작정이죠, 당신이 맡지 않는다면?"
"아아,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소냐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어조로 외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수없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는데, 그가 다만 그것을 입 밖에 내주었을 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지금이라도 갑자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가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죠?" 그는 사정없이 물고 늘어졌다.
"아아, 당신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절대로 그럴 리는 없어요!" 소냐의 얼굴은 무서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럴 리가 없다는 거죠?" 라스콜니코프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면서 계속했다. "당신에게도 그런 보장은 없잖겠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온 식구가 구걸하러 거리로 나가겠죠. 그녀는 콜록콜록 기침하며 동냥을 하고...오늘처럼 어느 벽에 머리를 들이받기도 하겠죠. 아이들은 울어대고, 마침내 그녀는 거리에 쓰러져서 경찰에 의해 운반되어 병원으로 가서 죽어버리겠죠. 그러나 아이들은......"
"아, 아녜요...그런 일은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짓눌린 소냐의 가슴에서 겨우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의 애원 가운데 두 손을 모으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듯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일어나서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1분쯤 지났다. 소냐는 무서운 고민에 사로잡혀 두 팔과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저금은 할 수 없습니까,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하고 갑자기 그는 소냐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서 물었다.
"없어요"하고 소냐는 속삭였다.
"물론 할 수 없겠죠! 그러나 해보려고 애쓴 적은 있습니까?" 그는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있었어요."
"안 되더란 말이군요!" 하긴 뻔한 일이지! 물어볼 것도 없이!
그는 다시금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또 1분쯤 흘러갔다.
"날마다 버는 건 아니겠죠?"
소냐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했다. 또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아녜요." 그녀는 간신히 속삭이듯 대답했다.
"폴레치카도 필경 같은 운명이 되겠지"하고 그는 불쑥 뇌까렸다.
"아녜요! 아녜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소냐는 마치 누구한테 칼부림이라도 당한 듯이 정신없이 외쳐댔다.
"하느님이 그런 무서운 일은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용서하고 있는 걸요."
"아녜요, 아녜요! 그 애는 하느님이 돌봐주실 거예요. 하느님이!" 그녀는 정신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하느님도 전혀 없는지 모르지요." 라스콜니코프는 일종의 간악한 쾌감까지 느끼며 대답하고는,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소냐의 얼굴에는 무서운 변화가 일어나고 경련이 그 얼굴을 스쳤다. 소냐는 형언할 수 없는 비난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통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당신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했지만, 당신 자신도 머리가 좀 이상하군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5분쯤 지났다. 그는 여전히 그녀한테는 외면을 한 채 말없이 방 안을 거닐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우는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메마른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날카롭고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별안간 그는 재빨리 온몸을 굽혀 방바닥에 몸을 던지더니 그녀의 발에 키스했다.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미친 사람이라도 대하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실 그는 미친 사람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나같은 여자 앞에서?"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녀의 심장은 아프도록 죄어들었다.
그는 곧 일어났다.
"나는 당신한테 머리를 숙인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고통 앞에 머리를 숙인 거요." 그는 거칠게 뇌까리고 나서 창가로 물러갔다.
"내 말 들어요." 1분쯤 지나서 그녀에게 돌아오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까 어느 무례한 녀석에게 이렇게 말해줬소, 너 같은 놈은 소냐의 새끼손가락만한 가치도 없다고...그리고 오늘 나는 내 누이를 소냐와 나란히 앉힘으로써 누이에게 영광을 주었다고도 말해줬다오."
"어머나,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다니! 동생께서도 거기 계셨나요?" 소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나하고 나란히 앉은 게 영광이라고요! 나 같은 더러운 죄인하고...아아,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다니!"
"나는 당신의 불명예나 죄악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오. 당신의 위대한 고통을 두고 한 말이지. 당신이 위대한 죄인이라는 건 사실이오." 그는 감격 어린 어조로 계속했다.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무 보람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제 몸을 팔았기 때문이오.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소! 그토록 증오하는 이 시궁창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짓을 해봐야 누구를 구하지도 못하며 어떤 불행에서 구해내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이건 조금만 눈을 떠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 이게 어찌 무섭지 않단 말이요! 그건 그렇고, 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그는 거의 광분에 사로잡혀 말했다. "이렇게 수치스럽고 비열한 짓이 어떻게 당신의 내부에서 그와는 정반대인 신성한 감정과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단 말이오? 차라리 거꾸로 물속에 뛰어들어 단숨에 결말을 내버리는 편이 천배나 옳고 사리에 맞는 영리한 방법이 아니겠소?"
"그럼 저 사람들은 어떻게 돼요?" 소냐는 괴로운 듯이, 그러나 그의 이런 제의에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며 가냘픈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소냐의 눈초리 하나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이미 그녀의 마음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몇 번이나 절망 끝에 어떻게 하면 단숨에 해치울 수 있을까 하고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해봤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상대의 말에서 잔인함조차 느끼지 못했다(그의 비난의 뜻도, 그녀의 수치스러운 행위에 대한 그의 특수한 견해도 물론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점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더럽고 부끄러운 처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오래전부터 그녀를 얼마나 괴롭혀왔는지는 그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단숨에 죽어버리자는 결심을 지체시키고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이때야 비로소 그는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어린애들과 반미치광이가 되어 머리를 벽에 들이받는 비참한 폐병쟁이 계모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소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만한 성격이고 부족한 대로 다소의 교육이나마 받은 소냐가 결코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해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점이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녀는 이토록 오랫동안 이런 처지를 감수해올 수가 있었을까? 물속에 뛰어들 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미쳐버리지도 않았을까? 물론 소냐의 처지가 불행히도 유일한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는 없어도 하여튼 사회의 우연한 현상이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름 아닌 이 우연성, 그녀가 받은 약간의 교육, 그리고 여태까지 보내온 그녀의 모든 생활은 이 더러운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에서 그녀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지체케 했을까? 설마 음탕한 마음은 아니겠지?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는 다만 기계적으로 그녀를 건드린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진짜 음탕은 한 방울도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지 않는가......
'이 여자에게 세 가지 길이 있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운하에 몸을 던지든지, 정신병원에 들어가든지, 그렇잖으면...그렇잖으면 마지막 방법으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화석으로 만드는 음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마지막 생각은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회의파였고, 나이가 젊고, 추상론을 좋아했다. 따라서 그는 잔혹했으므로 마지막 출구, 즉 음탕이 가장 있을 수 잇는 길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직도 정신적인 순결을 보존하고 있는 그녀 같은 인간도 결국에 ㄴ저 더러운 악취가 풍기는 구렁텅이 속으로 멀쩡한 의식을 가지고 끌려 들어가게 마련인 것일까! 과연 그 유혹의 손은 이미 뻗쳐진 것일까? 그리고 소냐가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참을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 추악한 행위가 별로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다., 그럴리는 없다!' 그는 조금 전에 소냐가 외쳤듯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니다, 지금까지 이 소냐에게 투신자살을 만류시켜온 것은 죄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그들, 그 사람들 때문이다. 만일 소냐가 여태까지 미치지 않았다면...하지만 그녀가 미치지 않았다고 누가 보증하는가? 과연 이 여자는 건전한 판단력을 갖고 있을까? 건전한 사람이라면, 과연 아까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멸망의 심연 위에, 이미 자기를 끌어들이기 시작한 더러운 구렁텅이 위에 서서 위험의 경고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손을 내젓고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기적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음,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다 발광의 징후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는 집요하게 이 상념에 골몰했다. 이 결론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더욱더 뚫어질 듯이 소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군요, 소냐?"하고 그는 물었다.
소냐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옆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어떻게 살아왔겠어요?" 하고 소냐는 힘 있게 빠른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갑자기 빛나는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흘끔 보면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아아, 역시 그랬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기도의 보답으로 뭘 주시지?" 하고 그는 캐물었다.
소냐는 대답할 바를 모르는 듯이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 연약한 가슴은 흥분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아무 말도 마세요, 묻지 말아주세요! 당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요!" 성난 눈으로 매섭게 그를 노려보면서 소냐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그랬구나, 역시 그랬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십니다!" 다시 눈을 내리깔면서 그녀는 빠른 소리로 속삭였다.
'이것이 해결이다! 이것이 해결의 설명이다!' 극도의 호기심에 사로잡힌 채 유심히 그녀를 뜯어보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새롭고도 불가사의한, 거의 병적인 감정을 품으면서 그는 그 파리하게 여윈, 윤곽이 고르지 못한 도드라진 조그마한 열굴과 불길처럼 타오르는가 하면 준엄하고 강렬한 감정에 빛날 수도 있는 그 상냥한 푸른 눈과 아직도 분노와 흥분에 떨고 있는 그 조그마한 체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더욱 이상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광신자다! 광신자야!'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장롱 위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책이 있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마침내 손을 들고 보았다. 그것은 러시아 말로 번역된 신약성서였다. 손때가 묻은 가죽 표지의 헌책이었다.
"이건 어디서 얻었소?" 그는 방 한쪽 구석에서 물었다. 그녀는 탁자에서 서너 걸음쯤 떨어진 곳에 여전히 서 있었다.
"누가 가져다준 거예요." 그녀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요?"
"리자베타가 주었어요, 내가 부탁했더니."
"리자베타라니! 이상한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소냐에 대한 모든 것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이상하고 기이해졌다. 그는 책을 촛불 옆으로 가지고 가서 책장을 들추기 시작했다.
"나사로의 부활은 어디지?" 그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소냐는 골똘히 마룻바닥만 응시하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나사로의 부활은 어디지? 소냐, 좀 찾아줘요."
그녀는 곁눈으로 그를 보았다.
"거기가 아녜요...제4복음서예요!" 그녀는 옆으로 다가가려고도 하지 않고 준엄한 어조로 속삭였다.
"찾아서 읽어주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자, 탁자에 팔꿈치를 세우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괸 다음 들으려는 자세를 취하면서 침울한 얼굴로 공간의 한 점을 응시했다.
'3주일쯤 후엔 7킬로미터 되는 곳(정신병원)으로 와주시지! 나도 아무래도 그쪽으로 갈 것 같으니까...더 악화만 되지 않는다면'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미심쩍은 듯이 라스콜니코프의 기묘한 청을 받고 머뭇머뭇 탁자로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성경책을 집어들었다.
"아직까지 읽어보신 적이 없나요?" 그녀는 탁자 너머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음성은 점점 엄숙한 빛을 띠어갔다.
"옛날...학교 시절에. 어서 읽어요!"
"교회에서도 듣지 못하셨어요?"
"난...가본 적이 없어. 당신은 자주 나가나?"
"아, 아뇨." 소냐는 속삭이는듯이 대답했다 .
라스콜니코프는 히죽 웃었다.
"그럴 테지...그럼 내일 아버지 장례식에도 안 가겠군?"
"가요, 난 요 전주에도 갔다 왔어요...추도 미사에."
"누구?"
"리자베타요, 그 여자는 도끼에 맞아 죽었어요."
그의 신경은 점점 초조해졌다.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리자베타와 친하게 지냈나?"
"네, 리자베타는 마음이 정직한 여자였어요....여기도 왔었어요, 이따금....자주는 못 왔지만. 둘이서 함께 성경도 읽고...얘기도 하곤 했어요. 그녀는 하느님을 맞을 수 있을 거예요."
무미건조한 이런 말들이 그의 귀에는 이상하게 울려퍼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리자베타와 남몰래 만나곤 했고, 둘 다 광신자라는 사실도 그에게는 역시 새로운 소식이었다.
'이런 데 있다가는 나도 광신자가 될 것 같군! 감염될 것 같아!'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서 읽어요!" 그는 갑자기 강요하는 듯한 어조로 초조하게 외쳤다.
소냐는 여전히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그에게 성경을 읽어주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그는 '불행한 광녀'를 고통에 가까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읽으라는 거죠? 당신은 믿음이 없잖아요?" 그녀는 나지막하면서도 숨 가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읽어줘! 듣고 싶어서 그래! 리자베타에겐 읽어줬겠지."
소냐는 책장을 뒤져서 그 대목을 찾아냈다.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을 고쳐 읽었으나 두 번 다 그 첫 구절이 잘 발음되지 않았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소냐는 가까스로 겨우 여기까지 읽었다. 그러나 셋째 구절부터 목소리가 갈려서 지나치게 죈 현악기의 줄처럼 툭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왜 자기에게 읽어주기를 꺼리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면 알수록 그는 더욱 초조해져서 더욱 낭독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전부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쓰라리라는 점을 라스콜니코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 실제로 현재의 비밀을 형성해주었으리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비밀은 어쩌면 훨씬 전부터, 일찍이 어린 시절 불행한 아버지와 슬픔 때문에 미친 계모 옆에서 굶주린 아이들과 차마 들을 수 없는 아우성에 찬 가정에 있을 때부터 그녀의 가슴속에 싹트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 성서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번민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번민과 공포에도 그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다름 아닌 그를 위해 -'비록 나중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꼭 읽어서 들려주고 싶은 욕망으로 그녀 자신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는 그것을 그녀의 눈에서 읽었으며, 그녀의 감격어린 흥분에서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을 억제하고 1절 첫머리에서 낭독을 멈추게 했던 목의 경련을 진정시키면서 '요한복음' 11장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19절에 이르렀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로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계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여기서 그녀는 다시 낭독을 멈추었다. 또다시 목소리가 떨려서 더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부끄러웠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소냐는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한 구절 한 구절 힘을 주어 읽었다. 마치 온 세계를 향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이라도 하듯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녀는 잠깐 낭독을 멈추고 재빨리 그의 얼굴에 눈을 주었으나, 곧 자기를 억제하고 다음을 읽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의자에 앉아서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탁자에 팔꿈치를 세우고 허공을 응시한 채 꼼짝도 않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32절을 읽어 내려갔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라스콜니코프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흥분 가운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역시 그랬구나! 그녀는 이미 진짜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대미문의 위대한 기적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다가가고 있었다. 위대한 승리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음성은 금속 같은 맑은 음향을 띠기 시작했다. 내부에 충만하여 넘쳐흐르는 승리와 환희의 감정이 그 음성에 힘을 주었다. 눈앞이 어두워져서 글줄과 글줄이 서로 섞갈렸으나, 그녀는 책이 없어도 암송할 수가 있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하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자, 그녀는 음성을 낮추어 믿지 않는 맹인인 유대인의 의혹과 비난과 중상을 전하고 또 그들이 1분 후엔 벼락이라도 맞는 듯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신앙으로 들어간 심정을 불타는 듯한 열정으로 전했다.
'이 사람도, 이 사람도….역시 맹인으로서 믿음이 없는 이 사람도 이제 이 기적을 들으면 믿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이제 곧, 지금 당장!'하고 그녀는 공상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쁜 기대감에 온몸을 떨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그 죽의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녀는 특히 '나흘'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그녀는 마치 자기가 눈앞에 보기라도 한 듯이 오들오들 몸을 떨면서 벅찬 감격에 높은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때)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녀는 그다음을 읽지 않았다. 또 읽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책을 덮고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사로의 부활은 이게 전부예요." 그녀는 띄엄띄엄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는 그를 보기가 부끄러운 듯 옆으로 몸을 돌린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녀의 열병적인 전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비뚤어진 촛대에 꽂힌 타나 남은 촛불은 이 초라한 방에서 영원한 책을 읽기 위해 기묘하게 만난 살인자와 매춘부를 희미하게 비추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꺼지려고 가물거리고 있었다. 5분,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라스콜니코프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냐 옆으로 다가갔다.
소냐는 말없이 그에게 눈을 들었다. 그의 눈초리는 매우 준엄했고, 그 속에는 뭔가 거친 결의의 빛이 어려 있었다.
"오늘 나는 육친을 버렸어"하고 그는 말했다.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이제 그들에겐 가지 않을 생각이야. 거기서 완전히 인연을 끊고 왔으니까."
"아니, 왜요?"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조금 전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만났던 일은 그녀 자신도 분명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녀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지금 그가 자기의 육친과 인연을 끊었다고 하는 얘기를 그녀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기분으로 들었다.
"나한텐 이젠 당신 한 사람이 있을 뿐이야"하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 함께 가….그래서 나는 일부러 온 거야. 우리는 다 같이 저주받은 인간이야. 그러니 함께 가자는 거야."
그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반미치광이로군!' 소냐는 또 소냐대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공포 가운데 그녀는 이렇게 묻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건, 우리가 같은 길을 간다는 것 뿐이야. 그 점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 다만 그것뿐이야. 우리의 목적은 하나야!"
소냐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 보았으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그가 무섭도록 한없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딴 놈들에게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하고 그는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알았어. 당신은 내게 필요해.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소냐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차차 알게 되겠지. 당신도 나와 같은 짓을 했으니까, 당신 역시 한계를 뛰어넘었어….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을 제 손으로 자기를 해치웠어. 당신은 하나의 생명을 멸망시켰단 말야…. 자기 생명을!…. 어차피 마찬가지야!……당신은 정신과 이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결국은 센나야에서 마칠 운명이지. 하지만 당신은 그때까지 참아내지 못할 거야. 만일 혼자 남으면 나처럼 미칠 거야. 당신은 이미 머리가 돈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우리 둘은 함께 같은 길을 가야 해, 같이 가는 거야!"
"왜 자꾸 그런 말만 하세요!" 그의 말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소냐는 이렇게 말했다.
"왜라니?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이유야! 이젠 어린애처럼 울거나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울부짖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진지하게, 솔직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돼! 만일 내일이라도 당신이 병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지? 미치광이 같은 폐병 환자는 머지않아 죽겠지만,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돼? 폴레치카가 파멸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이곳 거리 모퉁이에서 제 어미를 위해 구걸질을 하며 다니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나? 그런 어머니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 거기선 아이들도 아이로 남아있을 수 없어. 거기서는 일곱 살짜리 아이도 음탕하고 도둑질을 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아이들은 그리스도의 화신,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잖냐 말이야. 하느님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명하셨어. 그들이야말로 미래의 인류지…."
"그럼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좋아요?" 소냐는 히스테릭한 울음을 터뜨리고 두 손을 비비면서 되풀이했다.
"어쩌면 좋으냐고? 때려 부수는 거야. 그것으로 끝나는 거지. 그리고 고통을 한 몸에 떠맡는 거야! 뭐? 모르겠다고? 차차 알게 돼. 권력, 특히 권력이지! 전전긍긍하는 겁쟁이에 대해서, 개미 떼 같은 버러지에 대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거야!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지! 이것을 알아둬! 이것이 당신에 대한 나의 이별 선물이야! 어쩌면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지 몰라. 막약 내일 내가 다시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그때는 지금 내가 한 말을 상기해줘. 그리고 언젠가 몇 년 후에, 생활을 거듭하노라면 내 말의 의미를 알게 될지 모르지. 그러나 만약 내일 다시 오게 되면, 그땐 말해주지, 누가 리자베타를 죽였는가를. 그럼 안녕!"
소냐는 너무도 무서워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신은 아시나요, 누가 죽였는지?" 그녀는 공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알고 있으니까 말하겠다는 거지….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 당신에게 용서를 빌려고 오는 건 아니야, 다만 그것을 알려주려 오겠다는 거지. 나는 당신 아버지한테 처음 당신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사실을 알릴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던 거야. 그리고 리자베타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안녕, 손을 내밀 건 없어. 그럼 내일!"
그는 나갔다. 소냐는 미친 사람이라도 보듯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녀 자신도 역시 미친 사람 같았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아, 그는 어떻게 리자베타를 죽인 범인을 알고 있을까?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아아, 무서워라!' 그러나 이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은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전혀, 전혀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아아, 그는 굉장히 불행한 분일 거야!….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버렸다니. 무엇 때문일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대체 그는 나한테 무슨 말을 했을까? 그는 내 발에 키스하고 그런 말을 했어….그런 말을 했어. 그는 분명히 말했어,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아아, 하느님!' 소냐는 그날 밤을 신열과 악몽 속에서 보냈다. 그녀는 이따금 벌떡 일어나서 울기도 하고 안타깝게 두 손을 비벼대기도 하다가는 다시 열병환자처럼 정신없이 자기도 했다. 그녀는 폴레치카며, 카체리나며, 리자베타며, 복음서를 읽는 광경이며, 그리고 그의 꿈을 꾸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 눈은 불길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발에 키스하며 울고 있었다….오오 하느님!
오른쪽 방문, 소냐의 방과 게르트루다 카를로브나 레슬리흐의 방을 가로막고 있는 저쪽에는, 여시 레슬리흐 부인의 주택에 속한 중간 방이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그 방은 셋방으로 내놓아서, 조그만 종이쪽지에 쓴 광고가 문 앞과 운하 쪽을 향한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소냐는 그전부터 그 방에 사람이 살지 않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빈방의 방문 바로 옆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동안 죽 서서 숨을 죽여가며 엿듣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나가버리자 그는 잠시 동안 그냥 서서 생각한 뒤에, 발끝으로 걸어서 빈방 옆에 붙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의자 한 개를 들고 소냐의 방으로 통하는 문 옆에다 슬그머니 갖다 놓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매우 흥미 있고 의미심장해서 그에게도 무척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이를테면 내일이라도 오늘처럼 한 시간 동안이나 서서 엿듣는 고역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점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되도록 편한 자리를 만들려고 일부러 의자까지 갖다 놓은 것이다.
그다음 날 아침 정각 11시에 라스콜니코프가 지구 경찰서로 들어가 예심판사 사무실로 출두하여 포르피리에게 면회를 청했을 때, 그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데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렸다. 그의 계산으로는 다짜고짜로 자신에게 달려들 줄로 알았다. 한편 그가 대기실에 서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가고 왔다 갔다 했으나, 보건대 그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인 듯싶었다. 사무실처럼 보이는 다음 방에서는 서기 몇 명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중 누구 하나 라스콜니코프가 누구며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불안하고도 미심쩍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근처에 간수 같은 자가 있지나 않나, 그가 어디로 가지 못하도록 감시 명령을 받은 비밀의 눈이 있지 않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다만 바쁜 듯이 서성거리는 사무원 몇 사람과 그 밖의 몇 명을 보았을 뿐, 그가 지금 곧 어디로 뛰어나가더라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만일 수수께끼 같은 어제의 사나이가, 저 땅속에서 솟은 그 환상의 사나이가 정말로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라스콜니코프로 하여금 이렇게 서서 태연하게 기다리도록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굳어져 갔다. 또한 그가 11시나 되어서야 겨우 제 발로 어슬렁어슬렁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멍청히 기다리고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사나이가 아직 아무런 밀고도 하지 않았든가, 혹은... 혹은 그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가, 전혀 보지를 못했든가, 그중 하나다.(그러면 그렇지, 제깟 놈이 어떻게 볼 수 있담!) 그렇다면 어제 라스콜니코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역시 초조한 병적 상상으로 과장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러한 추측은 이미 어제부터 가장 심한 불안과 절망 속에서도 그의 심중에 굳어지고 있었다. 지금 모든 것을 회상하고 새로운 투쟁을 다짐하면서 그는 문득 자기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저 죽이고 싶도록 미운 포르피리가 두려워서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에는 분노까지 끓어올랐다. 그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또다시 그자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는 그자를 한없이 증오했다. 그 증오감 때문에 어쩌다가 그의 앞에서 자기 정체를 폭로하지나 않을까, 그런 것까지 근심될 정도였다. 분노의 도가 너무 심한 때문인지 도리어 몸의 떨림은 곧 멎고 말았다. 그는 침착하고도 대담한 표정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침묵을 지키며 상대방을 살피고 귀 기울여서 눈치를 살피자, 적어도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적으로 혼란되기 쉬운 자기 성질도 스스로 극복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마침 이때 그는 포르피리에게 불려 들어갔다.
포르피리는 자기 방에 혼자 있었다. 그의 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큰 탁자, 그 앞에 유포를 씌운 소파, 사무용 탁자, 한구석에는 책상, 그리고 의자 몇 개 등이 있었는데, 전부 손질이 잘된 황목 제품의 관용물이었다. 구석진 벽면에, 벽이라기보다 차라리 칸막이 판자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닫힌 문이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 칸막이 저쪽엔 다른 방문이 더 있을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가 방에 들어서자 포르피리는 곧 그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그들은 단둘이 마주 앉게 되었다. 포르피리는 겉보기에 매우 유쾌한 상냥한 태도로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불과 몇 분도 지나기 전에 라스콜니코프는 두세 가지 징후로 그가 좀 당황하고 있는 듯한 눈치를 챘다. 그것은 무슨 뜻밖의 일로 어리둥절했거나, 혹은 남몰래 무슨 비밀스런 일을 하다가 들켰을 때 같은 그런 당황스러움이었다.
"아아, 선생, 이거 참....이렇게 먼 길을 오시게 해서...." 포르피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자, 어서 앉으십시오, 노형! 참 당신은 노형이니...선생이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군요! tuou court?('그러시죠'라는 뜻) 너무 허물없이 군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고...자, 어서 이 소파에...."
라스콜니코프는 상대방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먼 길을' 이라든지, 허물없는 태도에 대한 변명이라든지, 'tout court' 따위의 프랑스 말 등은 모두 특수한 징후였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두 손을 다 내밀었다가 한 손도 쥐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다 빼버리고 말았군.' 이러한 의심스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스쳤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쌍방의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재빨리 눈길을 돌려버렸다.
"이 서류를 갖고 왔습니다...그 시계 건으로....이겁니다만, 양식은 이걸로 됩니까? 다시 고쳐 쓰지 않아도 될까요?"
"뭐, 서류라고요? 아, 좋습니다. 좋습니다...염려 마십시오, 그걸로 됐습니다." 포르피리는 급히 나갈 일이라도 있는 듯이 이렇게 성급히 말했으나, 서류를 들고 본 것은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이었다.
"이걸로 좋습니다. 다시 쓸 필요는 없어요." 그는 여전히 빠른 어조로 말하고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이미 딴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다시 탁자에서 서류를 집어서 자기 옆 책상 위로 옮겨놓았다.
"당신은 어제 분명히 나에게...그...살해된 노파와의 관계를...정식으로....묻고 싶다고 말하신 것 같은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쳇, 나는 왜 분명히라고 필요 없는 말까지 덧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아니, 나는 또 왜 분명히라고 말한 것을 이토록 걱정하고 있을까?'하는 반대의 생각도 번개처럼 번쩍였다.
그러자 문득 그의 위구심이 포르피리와 단 한번 접촉한 것만으로, 한두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 한두 번 시선을 부딪친 것만으로 순식간에 놀랄 만큼 크게 성장해버렸다는 것을...그리고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신경은 초조해지고 마음의 동요는 더해갈 뿐이었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또 실언을 할지 모른다!'
"예, 예, 그렇습니다! 염려하실 건 없어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탁자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포르피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로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게 창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가 하면 사무용 탁자 쪽으로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탁자 있는 데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의 의아스런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한자리에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곤 했다. 둥글둥글 살찐 조그만 그의 몸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갔다가 사방의 벽과 구석구석에서 도로 튀어 오는 모양은 말할 수 없이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늦지 않습니다, 늦지 않고 말고요!... 아 참, 담배 피우십니까? 가지셨어요? 자, 한대, 궐련이지만." 그는 궐련을 권하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지금 이 방으로 모셨습니다만, 내 숙소는 바로 저 칸막이 저쪽입니다. 관사요. 그러나 지금은 임시로 사삿집에 있습니다. 좀 수리를 해야겠기에, 하긴 집수리도 거의 끝났습니다... 관사라는 건 그대로 쓸 만하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쓸 만할 테죠." 비웃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쓸 만하죠, 쓸 만해요...." 갑자기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듯이 포르피리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암, 쓸 만하고말고요!" 그는 문득 라스콜니코프에게 시선을 던지고,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서면서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관사는 쓸 만한 것이라는 실없는 말의 반복은 그 저속한 점에 있어서 그가 지금 손님에게 쏟고 있는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수수께끼 같은 시선과는 너무나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라스콜니코프의 분노를 더 촉발시켰다. 그는 이 부주의한 냉소적 도전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신도 아시겠지만...."하고 그는 거의 뻔뻔스러울 만큼 대담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그 대담성에 스스로 기쁨이라도 느끼는 듯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거의 모든 예심판사에게는 일종의 재판상 원칙이랄까, 법률가적 방법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즉 처음엔 멀찍이 우회해서 아주 부질없는 얘기 또는 비록 진지한 화제라 하더라도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피신문자에게 기운을 주고, 아니 좀 더 절절히 말하면 주의를 산만케 해서 경계심을 잠재워놓고, 그다음에 느닷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가장 치명적인 위험한 질문을 정면으로 퍼붓는단 말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이것은 아직까지도 모든 법규와 훈규 속에서 성스럽게 가르쳐지고 있다더군요?"
"아, 그래요...그럼 당신은 내가 숙소 얘기를 꺼낸 것도 역시 그런 수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포르피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무언가 유쾌한 듯한 교활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갔다. 이마 주름살이 펴지고 눈이 가늘어지며 얼굴의 윤곽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는 라스콜니코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온몸을 물결처럼 흔들며 신경질적으로 길게 웃어댔다. 라스콜니코프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포르피리가 상대방도 따라 웃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거의 자줏빛으로 변할 만큼 허리를 잡고 웃었으므로 라스콜니코프의 혐오감은 순식간에 일체의 경계심을 압도하고 말았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포르피리가 무슨 속셈이 있는 양 오래도록 계속 웃고 있는 동안 상대방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경계심의 해이는 쌍방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포르피리는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웃어대고, 손님이 자기 웃음을 증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그런 상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라스콜니코프에게 지극히 의미심장했다. 그는 조금 전에 포르피리가 전혀 당황했던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함정에 빠진 것은 자기, 곧 라스콜니코프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여기엔 반드시 자기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무슨 목적이 있다, 어쩌면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어서 지금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본성을 드러내어 그의 머리 위에 솓아져 내릴지도 모른다....그는 급히 용건에 들어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어 들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단호한 어조이긴 했으나 몹시 초조한 음성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제 신문할 일이 있다며 나더러 와달라고 하셨죠(그는 특히 신문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왔습니다. 물을 것이 있으면 어서 물으십시오. 그렇잖으면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볼일이 있어서요.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말에 밟혀 죽은 관리의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하고 그는 덧붙였으나,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구나 싶어 이내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더욱 초조해지면서 이렇게 항의했다.
"이런 문제엔 이제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시겠어요, 벌써 오래전부터...나는 이 문제로 병이 났을 정돕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이 났다는 한마디는 더욱 큰 실언이었다고 느끼면서 그는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곧 신문을 하든지, 아니면 당장 돌려보내 주든지 하시오. 그리고 만일 신문을 하겠으면 반드시 정식으로 해주시오! 그렇잖으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을 신문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포르피리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어조도 표정도 바꾸면서 마치 투정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도 염려는 마십시오." 그러고는 또다시 이리저리 걷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를 자리에 권하기도 하면서 수선을 피웠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그리고 그런 건 문제 삼을 것도 안 됩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이렇게 일부러 찾아주신 걸 기뻐하고 있습니다...당신을 손님으로 맞을 수 있게 된 것을 말입니다. 방금 함부로 웃은 실례에 대해서는 용서해주십시오. 로지온 로마느이치...아마 그렇죠, 당신의 부칭은? 나는 원래 신경질적인 인간이라 지나치게 날카로운 당신의 관찰이 우스워서 참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나는 때로 마치 고무 제품처럼 온몸을 떨면서 웃곤 합니다. 게다가 그런 웃음이 반 시간씩이나 계속될 때가 있어요...아무튼 잘 웃는 편이죠. 그런 체질이라 졸도할 우려가 있을 지경입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자꾸 그러신다면 단단히 화나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전히 화난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잠자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튼 그는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모자는 그냥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 얘기해줄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 성격의 설명이라는 거죠." 방 안을 부산스럽게 거닐며 그는 말을 이었으나, 여전히 손님하고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는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나는 독신자로서 사교계란 것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다 끝난 인간, 아주 굳어버린 인간이고 이미 열매가 맺힌 인간입니다. 그래서...그래서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도 아마 느끼셨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즉 우리 러시아에선, 특히 이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선 서로 각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서로가 존경하는 총명한 두 인간이, 예를 들면 지금의 당신과 나 같은 인간이 한자리에서 만났다고 하면 30분쯤이나 아무 화제도 찾지 못하고 쌍방이 다 굳어져서 어색하게 앉아 있게 마련입니다. 대체로 화제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컨대 여자인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사교계의 인간, 상류사회의 인사들도 화제는 언제나 갖고 있지요. C'est de rigueur.('그건 꼭 필요하니까요'라는 뜻) 그런데 우리 같은 중류층 인간은 하나같이 수줍어하고 구변이 없어요. 다시 말해 사색형이거든요.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우리에겐 사회적 흥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정직해서 서로 기만하길 원치 않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그 모자를 내려놓으시죠. ...곧 가시려는 것만 같아서 보기에 민망스럽습니다. 나는 도리어 이렇게 기쁜데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모자를 내려놓았으나,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한 얼굴로 포르피리의 공허하고 두서없는 요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 이 사나이는 이런 실없는 잡담으로 내 주의를 산만하게 하려는 생각일까?'
"커피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그러나 친구하고 기분을 풀기 위해 한 5분쯤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요."하고 포르피리는 쉬지 않고 지껄여댔다.
"아무튼 이런 직무상의 의무란 것은....그러나 노형, 내가 이렇게 앞뒤로 거닐며 서성거리는 것을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례지만, 실은 당신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몹시 염려됩니다만, 나에겐 운동이란 게 꼭 필요하거든요. 노상 앉아만 있기 때문에 단 5분 동안만이라도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이 여간 유쾌하지가 않습니다...치질 증상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이 병을 고쳐볼 생각이죠. 풍문으로는 5등관이나 4등관, 심지어 3등관 관리들까지 자진해서 줄넘기 운동을 한다더군요. 아무튼 과학 만능의 시대니까요....정말 그래요. 한데 이곳의 여러 가지 직무라든가 신문이라든가, 그런 형식적인 일들은....방금 당신도 신문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사실 말이지, 노형,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 신문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신문당하는 사람보다도 신문하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때가 있답니다. 그것은 노형께서 방금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지적하신 대로입니다(라스콜니코프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한 기억이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밤낮 같은 소리만, 마치 북을 치듯이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게 되는 거죠! 다행히 개혁이 진행중이니까 우리는 하다못해 명칭만이라도 변경되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헤, 헤, 헤! 그런데 법률가적 수법에 대해선 -기지에 넘친 당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말입니다 - 전적으로 당신 의견에 찬성입니다. 어떤 피고든지, 머리가 우둔한 농민 출신의 피고들까지도 그만한 것은 잘 알고 있거든요. 즉 처음엔 아무 관계도 없는 질문을 퍼붓다가 - 당신의 훌륭한 표현에 따르면 말입니다 - 그다음에 느닷없이 정면을 내리치죠. 헤,헤, 헤! 바로 정면을 말이오, 당신의 그 훌륭한 비유에 따라서 말입니다. 헤, 헤, 헤! 그만한 것쯤은 누구다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관사 얘기를 꺼내서 당신을...어떻게 하려 했다고. 헤헤! 당신도 꽤 비꼬기를 좋아하시는군요. 아니, 그런 말은 그만둡시다! 아 참 ,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원래 말이나 사상은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끌어내게 마련이죠...당신은 아까 형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즉 신문의 형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식으로란 대체 뭡니까! 형식이란 건 대개의 경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죠. 경우에 따라선 친구처럼 허물없이 얘기하는 편이 훨씬 편할 때가 있어요. 형식이란 것은 결코 도망치지 않으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서 형식이란 대체 뭡니까?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식 따위는 어떤 경우에도 예심판사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예심판사의 일은, 이를테면 일종의 자유 예술이거든요. 일종의 그 어떤 ...헤, 헤, 헤!"
포르피리는 잠깐 숨을 돌렸다. 그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수작을 늘어놓는가 하면,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뇌까리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실없는 수다를 피우면서 지껄여댔다. 그는 거의 뛰다시피 방안을 걸어 다녔다. 그 짧고 굵은 다리를 재게 놀리면서 여전히 마룻바닥에만 눈을 준 채 오른손은 등 뒤로 돌리고 왼손은 연방 흔들어대면서, 말의 의미와는 놀랄 만큼 동떨어진 갖가지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안을 돌아다니는 도중에 두어 번쯤 문 옆에 잠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 듯한 것을 라스콜니코프는 눈치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실은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하고 포르피리는 유쾌한 듯이 유달리 솔직한 태도로 라스콜니코프를 보면서(그 때문에 오히려 이쪽은 흠칫 몸을 떨면서 한순간 정신을 가다듬을 정도였다)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법률상 형식에 대해 실로 날카로운 조소를 퍼부었지만, 사실은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헤, 헤, 헤! 그 의미심장한 심리적 방법이란 것은,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지극히 우스꽝스러워서 너무 형식에 치우치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고말고요...아니, 또 형식으로 되돌아왔군요. 그런데 만약 내가 위임받은 무슨 사건로 A나 B나 C를 범죄자로 인정한다, 아니 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용의자로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법률가를 지망한다고 하셨죠, 로지온 로마느이치?"
"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당신에게 한 가지, 이를테면 장래의 참고로 말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당신에게 주제넘게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은 그처럼 훌륭한 범죄론을 발표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고말고요. 나는 다만 한 가지 사실로 조그만 실례를 들려는 것뿐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내가 A나 B나 C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합시다. 이러한 경우에 비록 내가 증거를 잡았다 하더라도 시기가 무르익기 전에 본인을 불안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기야 때로는 지체없이 체포해야 할 경우도 있죠. 그러나 개중에는 성질이 다른 인간도 있거든요. 이건 사실입니다. 그런 자에 대해서는 잠시 거리를 산책하게 내버려 둬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헤, 헤! 그런데 당신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내가 그 사나이를 너무 빠릴 미결감방에 잡아넣으면, 그 때문에 도리어 그 사나이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지주를 주게 되는 셈이거든요...헤, 헤! 당신은 웃고 계시는군요(라스콜니코프는 웃으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이글거리는 시선을 포르피리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종류의 인간에 대해선 특히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지각색이지만,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당신은 곧 증거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실 테죠. 물론 증거가 있다고 해둡시다. 그러나 증거란 것은 대부분 양쪽에 꼬리를 달고 있거든요. 나는 예심판사이면서 동시에 마음 약한 인간이라 고백합니다만, 예심이란 것은 수학적으로 명확히 내밀고 싶다, 2 곱하기 2는 4 같은 확실한 증거를 잡고 싶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확고한 증거를 잡고 싶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를 시기가 무르익기 전에 체포해서 수감 해보십시오, 비록 내가 그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사나이에 대한 그 이상의 증거를 잡을 방법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셈이 됩니다. 왜냐고요? 그를 수감함으로써 나는 그에게 일정한 지위를 주고,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일정한 방향을 주어서 그를 안정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나를 떠나서 제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즉 자기는 죄수가 됐다고 깨닫게 되는 거죠. 여기 이런 말이 있더군요. 세바스토폴(크림반도의 남단 해군 기지. 크림전쟁 때의 포위전으로 유명함)에서 알마 강 전투 직후, 식자들은 당장에라도 적이 총공격으로 나와 일거에 세바스톨을 함락하지나 않고 매우 두려워했답니다. 그런데 적이 공공법에 의한 포위 작전을 택하고 첫 번째 평행호를 파는 광경을 보자, 그들은 몹시 기뻐하면서 안심했다는 겁니다. 즉 정공법에 의한 포위 작전으로는 적어도 두 달 동안은 함락이 연기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아니, 또 웃으시는군요.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그야 물론 당신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옳아요, 옳고말고요! 이건 모두 특수한 경우니까요, 당신의 말씀대롭니다. 지금 예로 든건 정말 특수한 경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로지온 로마느이치, 여기서는 다음 사실도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모든 법률상의 형식과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고려되는, 책에도 쓰여 있는 그런 일반적인 경우라는 것은 실제론 결코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 모든 범죄는 그것이 현실에서 발생하자마자 곧 하나의 특수한 경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전혀 전례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우스꽝스런 사건이 생기는 수도 흔히 있습니다. 가령 내가 어떤 혐의자를 멋대로 혼자 내버려 둔다고 합시다. 체포도 하지 않거니와 별로 불안도 주지 않지만, 그 대신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밤낮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끈덕지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끊임없이 느끼게 한다. 적어도 그런 의심을 품게 한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그 사나이가 항상 나한테서 혐의를 받고 위협을 받고 있다고 자각하게끔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나이는 반드시 머리가 혼란되어 마침내는 자수하게 됩니다. 더욱이 나로서는 2곱하기 2는 4라는 이른바 정확한 수학적 증거까지 얻을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이런 일은 신경이 무딘 농민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처럼 현대적 두뇌를 가진, 더구나 어떤 방향으로 발달한 인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발달한 인물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경이죠, 신경이에요, 당신은 중요한 이 점을 잊고 있어요! 오늘날 이런 족속들의 신경은 모두 병적이요 영양실조인 데다가 항상 들떠 있거든요. 이를테면 담즙 작용이죠. 그들에겐 이 담즙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것은 사실 일종의 광맥 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제멋대로 거리를 싸돌아다녀도 나로서는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뭐, 멋대로 당분간 산책하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제멋대로. 그런 것 없이도 나는 그 사나이가 내 손아귀에 든 희생물이며, 결코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또 도망가려야 도망갈 곳이 있어야죠, 헤, 헤! 외국으로요? 외국으로 도망치는 것도 폴란드 정도나 가능하지, 그 사나이는 안 됩니다. 더구나 나는 항상 그를 감시하면서 적당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국내의 어느 깊은 시골로라도 도망친다면? 그러나 거기엔 농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순진하고 곰 같은 진짜 러시아 백성이 살고 있어요.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면 그 외국인 같은 우리나라 백성과 함께 사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할 겁니다. 헤, 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대수롭잖은 표면적인 문젭니다. 도대체 도망이라는 건 뭡니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 사나이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게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이미 도망치지 못하는 거죠, 헤헤, 어떻습니까, 멋진 표현이죠! 즉 그 사나이는 비록 도망해 숨을 곳이 있더라도 자연법칙에 의해서 도망치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은 촛불에 모여드는 나방을 본 일이 있겠죠? 마치 그것처럼 그 사나이는 항상 내 주위에서 뱅뱅 돌겁니다. 마치 나방이 촛불 주위를 뱅뱅 돌듯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유도 달갑지 않고 침울한 생각에 잠겨 머리가 점점 더 혼란해집니다. 그리고 그물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 제 몸을 묶어 버리고 죽도록 혼자 고민할 것이 뻔합니다. 뿐만 아니라 2 곱하기 2는 4식의 정확한 수학적 증거를 자기 쪽에서 나를 위해 제공해주게 됩니다, 내가 막간을 좀 길게 잡아주기만 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주위를 돌면서 그 행동반경을 차츰 좁히다가, 마침내는 탁 걸려듭니다! 곧장 내 입속으로 뛰어드는 거죠. 그러면 나는 꿀꺽 삼켜버린다 이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유쾌한 일이죠, 헤, 헤, 헤! 당신은 믿어지지 않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긴장된 표정으로 포르피리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파랗게 질린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럴싸한 설교로군!' 온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어제처럼 고양이가 쥐를 놀린ㄴ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이자가 공연히 자기의 힘을 과시하거나...나한테 조언할 리는 없다. 그런 짓을 하기에 이자는 너무나도 영리하다...필시 딴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일까? 흥, 어리석다, 너는 나를 위협해서 골탕을 먹이려는 거지! 하지만 네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을 뿐더러 어제의 그 사나이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는 나를 당황하게 하여 초조와 불안 속에 몰아넣은 다음 그 틈을 타서 덜컥하게 할 속셈일 거다. 천만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엉뚱한 수작만 늘어놓고 내가 거기 넘어갈 줄 알고! 그런데 대관절 무엇 때문에,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자는 이렇게까지 나한테 조언을 해주는 걸까? ...나의 병적인 신경을 고려하고 있기라도 한가 보지. 네가 아무리 잔재주를 피워도 네 정체는 드러나게 마련이야...어디 두고 보자, 네가 얼마나 잔재주를 피우는지.'
여기서 그는 예측할 수 없는 가공할 파국에 대비하여 온몸의 힘을 모아 굳게 마음을 도사렸다. 가끔 그는 포르피리에게 덤벼들어 당장에 목을 졸라 죽여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이 방으로 들어오면서도 이런 증오심이 폭발하지나 않을까 염려했었다. 그는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에 침이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침묵을 지키고 시기가 올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현재의 자기 처지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쪽에서 무슨 실언을 할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침묵으로써 적을 초조하게 하고 적으로 하여금 또 무슨 말이든 지껄이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이것을 노리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아무래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군요. 그리고 내가 무슨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는 줄로 아시는 것 같습니다." 포르피리는 점점 더 유쾌하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방 안을 돌기 시작했다. "그야 물론 당신이 옳겠지요. 보시다시피 나는 이 몸뚱이부터가 남에게 우스꽝스런 느낌을 주게끔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어릿광대지요.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노인의 말이다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아직 젊고, 말하자면 한창 청춘기에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보통 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혜라는 것을 존중하게 계십니다. 즉 발랄한 기지라든가 이지의 추상적 연역 따위에 당신은 유혹을 느끼시겠짐요. 그것은 내가 군사에 관해서 판단하는 한, 마치 오스트리아의 군사 회의와 똑같은 겁니다. 그들은 종이 위에선 나폴레옹을 분쇄하고 포로로 잡기까지 했습니다. 자기네 서재에선 종횡의 기지를 발휘하여 모든 계획을 세우고 적을 술책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마크 장군은 전군을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헤, 헤, 헤! 아니, 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내가 문관 신분이면서 군사상의 실례를 드는 게 우습다는 거죠?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 약점이니까요. 실은 군사 문제에 취미가 있어서 전쟁 보고서 따위를 읽는 것이 퍽 재미있습니다. 정말 나는 길을 잘못 들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군대에서 복무하면 좋았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못 됐어도, 적어도 소령쯤은 됐을 테니까요, 헤, 헤, 헤! 그건 그렇고,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그 특수한 경우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현실이라든가 자연이란 것은 실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주도면밀한 계획까지도 일거에 뒤집어 앞을 때가 있으니까요. 자, 노인의 말을 좀 들어보시오. 나는 진정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이렇게 말했을 때 서른다섯 살밖에 안 된 포르피리는 정말 갑자기 늙은이같이 보였다. 음성이 변하고 허리까지 구부정하니 굽은 것 같았다). 더구나 나는 개방적인 인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때요, 당신 생각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이런 것까지 당신한테 공짜로 가르쳐주고 아무 사례도 청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헤, 헤! 자, 그건 그렇고 얘기를 계속합시다. 도대체 기지라는 건 내가 보기에 참으로 멋진 것이어서, 이를테면 자연의 아름다움, 인생의 위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무슨 요술이든 능히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망상에 열중해 있는 하잘것없는 예심판사 따위는 도저히 그것을 간파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지요. 이런 일은 흔히 있는데, 예심판사도 역시 인간이니까요! 그런데 인간성이란 것이 이 초라한 판사를 구원해주거든요. 이것이 곤란합니다! 그런데 자기 기지에 열중해서 '모든 장애를 밟고 넘어가는' -이것은 어제 당신이 말한 묘하고도 현명한 표현입니다만 -청년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묘하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어떤 사나이가 말이에요. 즉 특수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남모르게, 교묘하게, 감쪽같이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걸로 이젠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기지의 성과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천만뜻밖에도 퍽 쓰러져버립니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동을 일으키기 쉬운 장소에서 퍽 하고 졸도 같은 걸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야 갑자기 병이 났다거나, 아니며너 방 안 공기가 너무 탁하든가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그래도 역시 상대방에게는 어떤 암시 같은 걸 주게 됩니다! 그 사나이는 거짓말은 교묘하게 했지만 인간성을 계산에 넣는 걸 잊었던 겁니다! 엉뚱한 곳에 복병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자유분방한 자기의 기지에 현혹되어 자기에게 혐의를 걸고 있는 상대방을 우롱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이, 제법 연극처럼 새파랗게 질려 보입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그럴사하게 질려 보이기 때문에, 또다시 상대방은 그럴싸한 암시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 한 번은 속여 넘겼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눈치채고 맙니다. 아무튼 하나하나가 다 이런 식이죠! 그뿐이겠습니까, 자기 쪽에서 먼저 앞지르는 가하면, 묻지도 않은 말을 불숙 뇌까리기도 하고, 또 그와는 반대로 잠자코 있어야 할 때 함부로 지껄이거나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하기도 합니다. 헤, 헤! 나중에는 제 발로 어슬렁어슬렁 찾아와서, 왜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체포하지 않소, 하고 따지고 들게 되지요, 헤, 헤, 헤! 더구나 이것은 기지가 매우 발달한 사람들, 심리학자나 문학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거든요! 자연은 거울입니다, 거울이고 말고요, 가장 맑은 거울입니다! 자신을 비춰 보고 즐기는 게 좋겠죠! 바로 이거예요! 아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졌습니까? 답답하십니까, 창문이라도 열어드릴까요?"
"아니, 그런 걱정 마십시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포르피리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도 갑자기 껄껄 따라 웃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의 그 발작적인 웃음을 뚝 끊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으면서도 커다란 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똑똑히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 노파와 리자베타의 살인범으로서 확실히 나한테 혐의를 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똑똑히 말해두지만, 벌써부터 나는 이런 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만일 당신이 법에 따라 나를 조사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서 조사해보시오. 체포하겠으면 빨리 체포하란 말이오. 그러나 맞대놓고 조롱하거나 괴롭히는 일은 나로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별안간 그의 입술은 떨리고 두 눈은 분노에 불타면서 여태까지 억제하던 음성이 쨍쨍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들립니까,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용서할 수 없어요!"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또!" 포르피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노형!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봐요! 대체 왜 그러십니까?"
"용서할 수 없어요!" 라스콜니코프는 또 한번 외쳤다.
"제발 좀 진정하시오! 남이 들으면 달려와요! 그러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포르피리는 자기 얼굴을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대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수 없단 말이오!" 라스콜니코프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했으나 그 음성도 어느새 속삭이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포르피리는 얼른 몸을 돌려 창문을 열려고 달려갓다. "방 안에 공기를 넣어야지, 신선한 공기를! 그리고 당신은 물이라도 좀 마시는 게 어때요, 이건 발작이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물을 가져오도록 이르려고 문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마침 그쪽 구석에 있는 물병을 발견했다.
"자, 좀 드십시오." 그는 물병을 들고 라스콜니코프에게로 달려오더니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좀 도움이 될 겁니다...." 포르피리의 놀라는 표정과 간호하는 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므로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다물고 의아심과 호기심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물은 받지 않았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봐여! 정말 그러시다간 자기 자신을 미치게 만듭니다. 정말이에요. 자! 어서! 물을 좀 마시세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시십시오!"
그는 억지로 물이 든 컵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입술로 가져갔으나 퍼뜩 정신이 들어 불쾌한 표정을 띠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요, 당신은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다간 또 전의 병이 재발합니다."하고 포르피리는 정다운 어조로 지껄여대기 시작했으나, 그 얼굴엔 아직도 당황한 빛이 엿보였다.
"큰일이군요! 당신은 왜 그렇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어제도 라주미힌이 왔었는데요...하긴 나한테 빈정거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건 나도 압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아십니까....말씀 마십시오! 그 친구는 어제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와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어찌나 지껄여대는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저 두 손을 벌리고, 이거 큰 봉변을 당하는군, 하고 생각했을 정도죠. 대체 그 친구는 당신이 보냈습니까? 자, 좀 앉으세요, 어서!"
"그는 내가 보낸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당신을 방문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방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다름 아니라 로지온 노마느이치, 나는 그밖에도 당신의 행동에 대해 굉장한 것을 알고 있어요. 속속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해가 저물어서 밤이 될 무렵 당신이 셋방을 구하러 가서 초인종을 울리고, 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해서 인부와 문지기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사실까지 정확히 알고 있거든요. 그야 당시 당신의 정신 상태를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짓을 하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건 진담이에요! 머리가 돌아버리고 맙니다! 당신의 내부엔 여러 가지 모욕 때문에...우선은 운명에게서 받은 모욕, 다음엔 경찰 친구들에게서 받은 모욕 때문에 고결한 분노가 강렬히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한시바삐 모든 사람의 입을 열게 해서 대번에 완전히 결말을 지어버리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즉 그런 맹랑한 공상과 혐의가 싫어서 참을 수 없는 거겠죠. 어떻습니까, 그렇죠? 당신 마음을 잘 알아맞혔죠? 그러다가는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라주미힌까지 미치게 만듭니다. 그 친구는 정말 사람이 좋거든요. 그건 당신도 잘 아시겠죠? 당신이 그러시는 건 병 때문이지만 그 친구가 그러는건 우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이란 전염되기가 쉽거든요...아니, 지금이라도 당신의 기분이 가라앚ㅅ으면 내가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십시오. 얼굴빛이 아주 말이 아닙니다. 자, 좀 앉으세요."
라스콜니코프는 의자에 앉았다. 전율은 차츰 가라앉았으나, 그 대신 온몸에 열이 올랐다. 깊은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그는 주의력을 긴장시키고, 허둥지둥 열심히 간호해주는 포르피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포르피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은 이상야릇한 욕구를 느끼면서 실은 한마디도 그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셋방을 구하러 갔었다는 포르피리의 뜻밖의 말에 그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어찌 된 걸까? 그럼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알고 있군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더구나 자기 쪽에서 그걸 내게 말하다니!'
"그렇습니다. 그와 똑같은 심리적 사건이 우리가 취급한 재판 사건 중에 있었어요. 즉 그런 병적인 사건 말입니다." 포르피리는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역시 어떤 사나이가 자기 자신을 살인법이라고 단정해버렸는데 그 방법이 또한 교묘했습니다. 자기가 본 환각을 끌어내서 사실을 구체적으로 늘어놓고 그 현장의 상황까지 상세히 진술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을 모두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아주 우연히 무의식중에 어느 정도 살인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은 문제 삼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자기가 살인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안 뒤에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해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결국 망상에 사로잡혀 완전히 발광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가 살인범이라고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이 사건을 명료하게 해명해주었으므로 그 불행한 사나이는 무죄가 증명되어 요양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법원 덕분이랄 수 있겠죠!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도 자꾸 그러시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밤중에 초인종을 울리러 가거나, 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거나 해서 자기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고 싶은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열병 정도는 쉽사리 일으키게 마련이니까요! 이런 심리라면 나 자신의 실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 창문이나 종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그런 유혹은 굉장히 매력적이거든요. 밤중에 초인종을 울리는 것 역시 같은 성질의 것이죠...병입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병이고말고요! 당신은 자기의 병을 너무 경시하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경험 있는 의사한테 진찰을 받아보시는 것이? 당신의 그 뚱보 의사는 틀렸어요!...당신은 열에 들떠 있는 겁니다. 그런 건 모두 열에 들떠서 정신없이 한 짓입니다!"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주위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것같이 느꼈다.
'이자는 과연 지금도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그는 그런 상념을 밀어냈다. 그는 그런 상념이 자기를 어떠한 광분에 몰아넣을지 모를 일이며, 그 광분의 결과 아주 발광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열에 들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제 정신으로 한 겁니다!" 포르피리의 연기를 간파하려고 온갖 이성의 힘을 다 경주시키면서 그는 외쳤다. "제정신이었어요! 제정신으로 한겁니다! 내 말이 들립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다 듣고 있어요! 당신은 어제도 열에 들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열에 들떠 있지 않다는 것을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암, 알고말고요! 그러나 로지온 로마느이치, 제발 부탁이니 내 말좀 들어주십시오. 만약에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범죄자이거나 또는 그 끔찍한 사건에 다소나마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열에 들떠 무의식중에 한 일이 아니라 완전히 의식해서 한 일이라고 제 입으로 강조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그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집요하게 강조한다, 대체 그럴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가 보기엔 그와 정반대입니다. 만약에 당신에게 무슨 켕기는 일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반드시 '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해야만 할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예? 그럲잖아요?"
이 질문에는 무언가 교활함이 느껴졌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한테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들이대는 포르피리를 피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미심쩍은 눈으로 말없이 상대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라주미힌 군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어제 나한테 얘기하러 온 것은 자기의 의사에 따른 것이냐, 아니면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의 입장으로선 라주미힌 자신의 의사로 온 것이라고 말하고,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감춰둬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감추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당신은 거짓말만 하는군요." 그는 병적인 미소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 약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또다시, 내 술책을 빤히 알고 있고 내 대답을 죄다 미리 알고 있다는 걸 나한테 과시하고 싶은 거죠?" 그는 자기가 이미 말을 선택하는 데 마땅히 해야 할 주위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이렇게 말해버렸다. "당신은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그렇잖으면 다만 나를 우롱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갑자기 끝없는 증오가 다시금 그의 눈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거짓말만 하고 있어요!"하고 그는 외쳤다. "범인의 입장에서 감추지 않아도 무방한 것은 되도록이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가장 능란한 기만 방법임을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잖나 말이에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하고 포르피리는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당신한텐 손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한텐 모노마니아(편집광) 비슷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내 말을 믿지 않는단 말씀이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당신은 이미 나를 믿고 있다고. 적어도 4분의 1아르신 정도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1아르신 전부를 믿도록 해 보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충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으니까요."
라스콜니코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바라고 있고말고요. 그래서 분명히 말해둡니다만..."하고 그는 자못 정답게 라스콜니코프의 팔꿈치 위를 가만히 잡고서 말을 계속했다. "분명히 말해둡니다만, 당신은 자신의 병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 당신한텐 가족이 와 계시니 그분들에 대해서도 좀 생각을 하셔야 할 게 아닙니까. 당신은 그분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해드려야 할 텐데, 도리어 그들을 놀라게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미를 가지십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역시 나를 감시하고 있고, 또 그렇다는 것을 나한테 보이려는 거죠?"
"무슨 말씀을! 그건 모두 당신한테서, 당신 자신의 입에서 들은 얘기가 아닙니까! 흥분한 나머지 당신 자신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얘기한 것까지도 모르시는군요. 하긴 라주미힌한테서도, 드미트리 프로코피치한테서도 어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얘기를 상세히 들었습니다만, 아니, 그보다 당신은 내 말을 중간에 막고 말았어요. 그래서 다시 계속하겠습니다만, 당신은 그 시기심 때문에 날카로운 기지를 지녔으면서도 사물에 대한 건전한 판단력까지 잃고 만 겁니다. 예를 들면 또 같은 얘기가 됩니다만, 그 초인종 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귀중한 정보 자료를, 그만큼 중대한 사실을 -그야말로 굉장한 사실이거든요!- 나는 죄다 당신한테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예심판사인 내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만약에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당신을 의심한다면 과연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우선 당신의 의심스런 생각을 흐리게 해놓고, 내가 이미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눈치도 보이지 말아야 할 겁니다. 당신의 주의력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는 느닷없이 정수리를 내리치고 -당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말이죠- 그다음 계속해서 '도대체 당신은 밤 12시, 아니 11시 가까운 시각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집에 가서 무엇을 했소? 무엇때문에 초인종을 울렸으며, 또 무엇 때문에 피에 대해 물었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경찰서에 가자느니, 경찰서 보좌관한테 가자느니 하면서 문지기를 골탕 먹였느냐 말이오?' 하고 묻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추궁하는 게 옳았을 겁니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한다면 말입니다. 모두 격식대로 당신한테서 신문 조서를 받고 가택수사를 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나가지 않은 이상 당신한테 아무 혐의도 품고 있지 않다는 건 명백하지 않으냐 말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건전한 판단력을 잃고 있기 때문에, 거듭 말합니다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온몸을 떨었다. 그것은 포르피리까지도 똑똑히 눈치챌 정도였다.
"당신은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하고 그는 외쳤다. "어떤 목적에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신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아까 당신이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해할 리 없어요...당신은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포르피리는 분명히 화난 표정으로 이렇게 반문했다. 여전히 유쾌한 듯한 조소 어린 표정을 간직한 채, 라스콜니코프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그렇다면 아까 내가 당신한테 취한 행동은요? 내가 말이오, 예심판사인 내가! 나는 자진해서 당신한테 가능한 모든 변호 방법을 암시하고 털어놓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면 '병이라든가, 열병의 발작, 극도의 모욕, 우울증, 경찰관들'....이런 심리적 묘사까지 내 입으로 열거하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헤, 헤, 헤! 하긴 그런 건, 말이나왔으니 말입니다만, 그런 심리적 변호법이나 변명이나 구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될 수 있어서 하나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병이나 열병의 발작이다. 잠꼬대다, 확각이다, 기억에 없다' 등등은 모두 실제로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병을 앓거나 잠꼬대를 할 때 왜 하필이면 언제나 그런 환각만 보이고 다른 것은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다른 것도 환각 속에 나타날 수는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헤, 헤, 헤!"
라스콜니코프는 경멸하는 눈으로 오만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말해서"하고 그는 포르피리를 조금 밀치듯이 일어나서 어디까지나 강경한 오조로 크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게 완전히 혐의가 없다고 인정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알고 싶습니다. 어서 말해주시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분명히 딱 잘라 말해주시오, 자, 어서!"
"당신은 정말 까다롭군요! 당신에겐 정말 손들겠습니다." 포르피리는 자못 유쾌한 듯이 태연자약한 능글맞은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여러 가지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겁니까, 아직 아무도 당신에게 폐 끼치는 일은 하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오! 그렇다면 어린애와 다를 게 뭡니까, 손에 불을 쥐여달라, 빨리 쥐여 달라고 보채는 것과 뭐가 다르냐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걱정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떼를 쓰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예? 헤, 헤, 헤!"
"되풀이하지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분연히 외쳤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뭣을요? 분명치 않다는 것 때문인가요?" 포르피리는 말을 가로챘다.
"약 올리지 마십시오! 나는 싫습니다! ...나는 싫단 말이오!....더는 참을 수 없소!....알겠소? 알겠느냐 말이오?" 또다시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이렇게 호통을 쳤다.
"아하, 조용히 하세요, 조용히! 남이 듣겠어요! 진심으로 충고합니다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농담이 아니에요!" 포르피리는 속삭이듯 말했으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노파같은 선량함도, 놀라는 듯한 표정도 그 얼굴에 떠오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눈썹을 찌푸리고서 모든 비밀과 모호한 태도를 일시에 내동댕이쳐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맞대놓고 엄격하게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한 대 얻어맞아 어리벙벙해진 라스콜니코프는 극도의 광분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분노의 발작이 최절정이었는데도 다시금 조용히 말하는 상대방의 명령에 복종하고 말았다.
"더는 나 자신을 괴롭힐 수 없어요!" 그는 갑자기 조금 전과 같은 어조로 속삭였으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고통이나 증오와 함께 순간적으로 의식했다. 그리고 그 의식 때문에 더욱 격심한 광분에 빠져들었다.
"나를 체포하시오, 가택수색을 하시오. 그러나 모든 행동을 정식으로 해주시오. 공연히 사람을 우롱하지 말란 말이오! 그런 무례한 짓은...."
"뭐, 그런 형식 따위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포르피리는 여전히 교활하게 웃고 만족스러운 듯이 라스콜니코프의 격분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말을 가로챘다. "나는 오늘 당신을 가정적으로 초대한 것이니까, 순전히 우정에서 부른 겁니다."
"당신의 우정 따윈 바라지도 않소. 그런 돼먹지 않은 소린 하지도 마시오! 아시겠소? 자, 나는 이렇게 모자를 들고 나갑니다. 어쩌겠소, 체포할 생각이면 뭐라고 해야 할 게 아니오?"
그는 모자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보다도 뜻밖의 선물이 하나 있는데 보고 싶지 않소?" 포르피리는 또다시 라스콜니코프의 팔꿈치 위를 붙잡아 문가에 멈춰 세우며 히히히 웃었다. 분명히 그는 더욱더 유쾌하고 장난기 서린 기분에 잠기는 듯싶었다. 그 때문에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말았다.
"뜻밖의 선물이란 뭐요? 대체 뭐냐 말이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겁먹은 듯이 포르피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뜻밖의 선물은 저기 문 저쪽 내 방에 있습니다. 헤, 헤, 헤! (하고 그는 자기 관사로 통하는 칸막이에 붙은 닫힌 문을 가리켰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두었지요."
"대체 뭡니까? 어디 있어요? 뭐예요?" 라스콜니코프는 다가가서 열려고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대체 뭡니까? 어디 있어요? 뭐예요?" 라스콜니코프는 다가가서 열려고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잠가두었다니까요. 자, 여기 열쇠가 있지요!"
포르피리는 정말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라스콜니코프에게 보였다.
"네 녀석은 거짓말만 하고 있어!" 라스콜니코프는 더 참지 못하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거짓말 마, 빌어먹을 어릿광대 같으니!" 그는 이렇게 고함을 치며 포르피에게 덤벼들었다. 포르피리는 출입문 쪽으로 뒷걸음치기는 했으나 위축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포르피리에게 대들었다.
"너는 거짓말만 하면서 내가 실토하도록 놀리고 있는 거야......."
"이젠 더 실토할 것도 없을 거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게 자꾸 고함을 치면 사람들을 부르겠소!"
"거짓말 마,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사람을 부르겠으면 불러봐! 너는 내가 병에 걸린 걸 알고 미칠 때까지 내 신경을 자극해서 실토케 하려는 거겠지? 그게 네 목적이었어! 그러나 안 돼, 증거를 제시해! 나는 다 알고 있어! 네 놈에겐 증거가 없단 말이야, 다만 자묘토프 식의 황당무계한 추측이 있을 뿐이야!....너는 내 성격을 아니까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해놓고는 느닷없이 사제나 입회인을 데려와서 내 혼을 빼려는 거야...너는 그자들을 기다리고 있지, 응? 무엇을 기다리고 있어? 어디 있느냐 말이야? 어서 내놔봐!"
"이봐요, 여기 무슨 입회인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정말 엉뚱한 것까지 다 생각해내시는군요! 그래서는 당신 말대로 정식으로 하긴 다 틀렸소! 당신은 이런 일에 대해선 너무 몰라요....형식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젠 스스로 알게 될 거요......"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포르피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실제로 이 순간 다음 방의 바로 문 옆에서 무슨 소음이 들렸다.
"아, 오는군!"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네가 저놈들을 부르러 보냈지?....너도 저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너는 계산에 넣고 있었어. 자, 모두 이리 오라고 해. 입회인이든, 증거든, 누구든지 맘대로...어서 내놔보란 말이야! 나도 각오가 되어 있으니, 각오가!"
그러나 이 순간 보통 때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라스콜니코프는 물론 포르피리까지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도저히 예기할 수 없었을 만큼 돌발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이 순간의 일을 상기할 때 라스콜니코프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광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문 저쪽에서 들렸던 소음이 별안간 커지며 문이 빠끔히 열렸다.
"아니, 왜 그래?"하고 포르피리는 몹시 못마당한 듯이 외쳤다.
"내가 미리 일러두지 않았느냐 말이야...."
한순간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문 저쪽에는 사내들 몇 사람이 누군가를 떼밀려는 것같은 눈치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포르피리는 근심스러운 듯이 되풀이했다.
"미결수를 데려왓습니다, 니콜라이를"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필요 없어! 저리 데려가! 기다리게 해! 아니, 무엇 때문에 이런 데 데려오는 거야! 질서가 이래서야!" 문 쪽으로 달려가서 포르피리는 외쳤다.
"하지만 이녀석이......" 또다시 같은 목소리가 대꾸를 하려다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2초도 채 지나기 전에 문 저쪽에서는 진짜 격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 또 하나를 홱 뿌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곧 얼굴이 창백한 사내 한 사람이 느닷없이 포르피리의 사무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 사나이는 첫눈에 보기에도 이상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눈에는 굳은 결심의 빛이 어렸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형장에라도 끌려가는 사람처럼 죽음의 창백한 그림자가 그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핏기를 잃은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평민 복장에 머리는 짧게 깎아 올리고 얼굴은 여위고 갸름한, 호리호리한 중키의 아주 젊은 사나이였다. 갑자기 그에게 떼밀렸던 사나이가 그의 뒤를 따라 먼저 방에 달려 들어와서 간신히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는 호송 간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팔을 빼며 다시금 간수를 뿌리쳐버렸다.
문가에는 구경꾼들도 몇 명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방 안에까지 들어서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은 거의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리 가, 아직 일러.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어쩌자고 이렇게 미리 데려오는 거야?" 포르피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몹시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별안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야, 넌?" 포르피리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짓입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숨을 헐떡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큰 소리로 니콜라이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10초쯤 침묵이 흘렀다. 모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간수까지도 엉겁결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는 니콜라이한테 접근하려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뒷걸음질 쳐서 문 옆에 멈춰 섰다.
"뭐라고?" 순간적인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자 포르피리는 이렇게 외쳤다.
"제가....죽였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니콜라이는 다시 되풀이했다.
"뭐라고....네가!....어떻게...누구를 죽였어?"
포르피리는 분명히 낭패한 꼴을 하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다시금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 동생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제가 죽였습니다. ...도끼로. 돈에 눈이 멀어서...."그는 불쑥 이렇게 덧붙이고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포르피리는 생각에 잠긴 듯이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껑충껑충 뛰면서 제멋대로 모여드 증인들에게 나가라고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들은 이내 사라지고 문은 닫혔다. 그리고 그는 한쪽 구석에 서서 놀란 눈으로 니콜라이를 보고 있는 라스콜니코프에게 흘긋 눈길을 주고는 그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바라보고 다시 곧 그 시선을 니콜라이에게로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금 라스콜니코프와 니콜라이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무엇인가에 열중한 듯 또다시 니콜라이한테로 달려갔다.
"너는 무엇 때문에 돈에 눈이 어두웠느니 뭐니 하며 부르지도 않았는데 뛰어드는 거야?" 하고 그는 거의 증오에 찬 어조로 외쳤다.
"네가 눈이 멀었는지 아닌지 나는 아직 그런 건 묻지도 않았어...자, 말해봐, 네가 죽였다고?"
"제가 죽였습니다. ...자백하겠습니다"하고 니콜라이는 대답했다.
"망할 자식! 그래, 무엇으로 죽였어?"
"도끼로요, 미리 준비했었죠."
"이봐, 천천히 말해! 혼자?"
니콜라이는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혼자서 죽였느냐 말이야?"
"혼잡니다. 미치카한테는 죄가 없어요. 그녀석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미치카 얘긴 할 필요 없어! 이런 제기랄......."
"그럼 넌 어떻게 그 층계를 뛰어 내려갔지, 문지기가 너희들 둘을 보았다던데?"
"그건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그래서 그때...미치카하고 함께 뛰어 내려갔던 겁니다." 니콜라이는 미리부터 준비해둔 말을 몹시 서두르며 늘어놓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흠, 역시 그랬구나!" 포르피리는 증오에 찬 어조로 외쳤다.
"제멋대로 꾸며대고 있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그 순간 문득 라스콜니코프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그는 니콜라이에게 정신이 쏠린 나머지 잠시 동안 라스콜니코프를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약간 당황하는 기색조차 엿보였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정말 실례했습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달려왔다.
"이러니 하는 수 없군요....어서 돌아가주세요...여기 계셔야 별수 없으니. 게다가 나 자신도...보시다시피 이런 뜻밖의 선물이 있어서!...자 그럼!"
이렇게 말하고 그는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고 문 쪽을 가리켰다.
"당신도 아마 이런 일은 예기치 못했나 보군요?" 물론 라스콜니코프는 아직도 뭐가 뭔지 사태를 똑똑히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사이에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당신 역시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하셨겠죠, 손이 그렇게 떨리는 걸 보니! 헤, 헤, 헤!"
"하지만 당신도 떨고 있군요,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나도 떨고 있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두 사람은 이미 문가에 서 있었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가 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의 선물이라는 건 결국 보여주지 않는 겁니까?"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직도 떨리는지 입 안에선 이를 부딪치고 계시는군요, 헤, 헤! 당신도 참 익살이 심하십니다! 자,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나는 이걸로 영원한 작별인 줄 아는데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달렸어요!" 야릇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포르피리는 중얼거렸다.
사무실을 통과할 때 라스콜니코프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현관 대기실의 군중 가운데 그때 밤중에 경찰에 가라고 말한 그 집 문지기 두 사람을 재빨리 알아보았다. 그들은 거기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층계에 발을 내딛자마자 갑자기 등 뒤에서 포르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포르피리가 헐레벌떡 쫓아오고 있었다.
"한마디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 모든 건 하느님의 뜻에 달렸겠지만, 그래도 역시 정식으로 무언가 좀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또다시 만나게 될 테죠,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포르피리는 웃는 얼굴로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안 그렇습니까?" 하고 그는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그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보다도 포리피리 페트로비치, 아까 일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좀 흥분했었기 때문에 ...." 약간 허세를 부려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라스콜니코프는 이런 식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포르피리는 기쁜 듯이 말을 받았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원래 비꼬기를 좋아하는 성미라서...늘 후회하죠, 후회해요!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시라면 우리 한번 멋지게 만나보도록 하죠...."
"그래서 철저히 서로 이해해보잔 말이군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받았다.
"그렇죠, 철저히 서로 이해해보십시다"하고 포르피리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영명축일 잔치에 가십니까?"
"장례식에 갑니다."
"아, 참 장례식이었군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자기 몸을...."
"그럼 나로선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이미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한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을 받고는 갑자기 포르피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으로 더 큰 성공이 있기를 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당신의 직무는 굉장히 희극적인 데가 있군요."
"왜 희극적이라는 거죠?" 역시 그 자리를 떠나려던 포르피리는 귀가 솔깃했는지 이렇게 물었다.
"그렇잖아요. 그 가엾은 미콜카(니콜라이)만 해도 그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자기 특유의 그 심리학적 방법으로 틀림없이 골탕을 먹이고 괴롭혔을 겁니다. 밤낮없이 '너는 살인자다, 너는 살인자다....'하며 꼬리를 잡으려고 애썼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그가 자백하고 나니까 이번엔 또 반대로 '거짓말 마, 너는 살인자가 아니다! 너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제멋대로 꾸며대고 있어! 하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그를 괴롭히려 합니다. 자, 이래도 희극적인 직무가 아니란 말입니까?"
"헤, 헤, 헤! 방금 내가 니콜라이한테 '제멋대로 꾸며대고 있다'고 한 걸 알아채셨군요!"
"알아채지 않을 수 있겠어요?"
"헤, 헤! 예민하시군요, 정말 예민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다 눈치를 채시니 말이오!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기지로군요! 가장 희극적인 점을 용서 없이 찌르시니...헤, 헤! 작가 중에서도 그런 천분을 최고도로 지녔던 사람은 고골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고골이죠."
"예, 고골이었어요. 자, 그럼 다시 뵐 때까지."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너무나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몸을 던지고 잠시 쉬면서 조금이라도 생각을 바로잡아보려고 애쓰며 15분쯤 꼼짝않고 있었다. 니콜라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니콜라이의 자백에는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뭔가가 담겨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니콜라이의 자백은 어디까지나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 사실의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그에겐 명백했다. 허위는 반드시 폭로되기 말녀이다. 그때는 다시 자기에게 화살이 돌려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는 자유의 몸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사이에 자기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무슨 조처를 강구 해두어야만 한다. 어차피 위험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 위험은 어느 정도일까? 사태는 차츰 명백해져 가고 있다. 조금 전 포르피리와의 장면을 대충 돌이켜 생각만 해도 그는 다시금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아직도 포르피리의 목적을 죄다 알 수 없었고, 아까만 해도 상대방의 술책을 속속들이 다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술책의 일부는 폭로되었다. 그리고 포르피리의 작전상 그 '한 수'가 그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는 물론 그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하마터면 그는 사실상 완전히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병적인 성격을 알고 그의 사람됨을 대번에 간파하고 파악한 포르피리는 지나칠 정도 대답하게 나오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행동은 거의 정확했다. 이번에도 라스콜니코프가 지나칠 정도로 자기 몸을 위태롭게 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그래도 아직 사실을 폭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은 아직도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모든 것이 다 지금 그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일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오늘 포르피리는 어떤 결과로 이끌어가려 했던 것일까? 정말로 포르피리는 오늘 무언가 준비해두었던 것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만약 니콜라이의 출현에 따른 그 뜻하지 않은 파국이 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오늘 어떻게 헤어졌을까?
포르피리는 자기의 술책을 거의 다 보여주었다. 물론 모험이었겠지만, 하여튼 보여주었다. 만약에 정말로 포르피리에게 그 이상의 계획이 있었다면 그 역시 보여주었을 것이다(라스콜니코프에게는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뜻밖의 선물'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만 조롱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무슨 의미라도 있었을까? 그 말 뒤에는 무언가 사실 같은 것이 숨어 있는 것일까? 어제의 그 사나이일까? 그 사나이는 도대체 어디로 꺼졌을까? 그 사나이는 오늘 어디에 있었을까? 만일 포르피리가 무슨 확실한 것을 쥐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어제의 그 사나이와 관련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머리를 푹 수그리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온몸이 신경질적인 전율에 떨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들고 잠시 생각한 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는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거의 절대적으로 안전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마음속에서 거의 기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는 한시바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가고 싶었다. 장례식에는 물론 늦었으나, 추도식에는 맞춰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곧 소냐를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자 병적인 웃음이 그 입술에 떠올랐다.
"오늘이다! 오늘이다!" 그는 혼잣말로 되풀이했다. "그렇다 오늘이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별안간 그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문이 천천히, 조용히 열리더니 느닷없이 사람이 나타났다.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은 어제의 그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문턱에 서서 말없이 라스콜니코프를 흘긋 보고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과 복장이었으나, 얼굴과 눈초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그는 어쩐지 풀이 죽은 꼴을 하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다 다시 손바닥을 한쪽 볼에 갖다 대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영락없이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오?"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죽은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채 물었다.
사나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별안간 허리를 굽히더니 마루에 닿도록 그에게 절을 했다. 적어도 오른쪽 손끝은 마루에 닿았다.
"왜 그러시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사나이는 조용히 말했다.
"뭐가요?"
"제가 나쁜 생각을 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화가 났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거기 오셔서, 물론 취하기도 하셨겠지만, 문지기더러 경찰에 가자고 하시는가 하면 피에 대해서 물으시기도 하는데, 그걸 단순히 주정뱅이 짓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저로서는 화가 났던 겁니다. 어찌나 분하던지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습니다. 마침 당신의 주소를 따로 외고 있어서 어제 여기 와서 여러 가지 물어봤습죠……."
"누가 왔었단 말이오?" 라스콜니코프는 순간적으로 기억을 되살리며 말을 막았다.
"접니다.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한 짓을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그 집에 사시오?"
"예, 거기 삽니다. 그때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문 옆에 서 있었습니다만, 벌써 잊으셨습니까? 우린 그전부터 그 집에 일터를 갖고 있습죠. 우리는 모피 가공을 하는 직공인데, 주문을 받아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그런데 제가 무엇보다 화가 났던 것은…."
그러자 문득 라스콜니코프는 그저께 그 집 대문 옆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똑똑히 기억에 되살아났다. 거기에는 문지기 말고도 몇몇 남자들이 서 있었고, 여자들도 몇 명 끼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당장 경찰에 끌고 가라고 말하던 어떤 사내의 목소리를 그는 상기했다. 그는 그렇게 말한 사내의 얼굴이 어땠는지 생각나지도 않고 또 지금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 없겠지만, 그때 자기가 그 사나이한테 뭐라고 대답했던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어제의 공포는 완전히 결말이 난 셈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할 때 무엇보다 소름이 끼치는 것은 이런 하잘것 없는 일 때문에 하마터면 파멸해버릴 뻔했다는 사실, 하마터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할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을 빌린다는 말과 피에 대한 이야기 말고 이 사나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프로피리 역시 그때 열에 떠서 한 짓 이외에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양쪽에 꼬리가 있다는 심리적 추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을뿐더러 확실한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상 아무런 사실도 나타나지 않는다면….그런 것이 더 나타날 리가 없다. 절대로, 절대로 나타날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그렇게 되면 그들인들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나를 체포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유로 나의 유죄를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포르피리는 조금 전에야 내가 셋방을 구하러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그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포르피리한테 그런 얘길 한 건 당신이었군요….내가 거기에 갔었다는 얘기를 한 건?" 그는 뜻밖의 상념에 놀라면서 이렇게 물었다.
"포르피리라뇨?"
"예심판사 말이오."
"예, 제가 얘기했습니다. 그때 문지기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갔었죠."
"오늘 갔었소?"
"당신이 오시기 조금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도 죄다 들었습죠."
"어디서? 무엇을? 언제?"
"바로 거기, 칸막이벽 뒤에서요. 저는 죽 거기 있었으니까요."
"뭐요? 그럼 뜻밖의 선물이라는 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실은 이렇게 된 겁니다!"하고 직공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문지기들은 내가 아무리 말해도 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미 늦었다느니, 뭣 때에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야단을 맞는다느니 하면서요. 나는 화가나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기 시작하다가 어제야 모든 걸 다 알아보았기에 오늘 갔던 겁니다. 처음 갔을 때는 그분이 없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또 가니까 이번엔 만나주지를 않았습ㄴ디다. 세 번째 가니까 겨우 들여보내 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면서 '아니, 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날강도 같은 놈아! 진작 그런 줄 알았다면 당장 수감 해버렸을 텐데!' 하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달려가서 누군지 불러다가 그 사람과 구석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저한테 와서 여러 가지 물어보기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꾸지람을 들었는데도 저는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고 어제 당신에 제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더라는 얘기며 제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더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또다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자기 가스을 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당신이 왔다는 말을 듣자 '자, 저 카낙이로 들어가서 얼마 동안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꼼짝 말고 가만 앉아 있어'하고 명령하고는, 손수 내게 의자까지 날라다 주더니 문을 잠가버리더군요. 어쩌면 내게도 신문하게 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니콜라이가 끌려오고, 그다음 당신이 돌아가시자 저를 놓아주었습니다. 앞으로 다시 불러서 신문하게 될 거라면서요……"
"그래, 당신이 있는 데서 니콜라이를 신문하던가요?"
"당신을 돌려보내고 저도 이내 내보내고, 그다음에 니콜라이를 신문하기 시작했습니다. …."
직공은 말을 끊더니, 별안간 또 다시 손끝이 마루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제가 나쁜 마음을 먹고 당신을 중상한 걸 용서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 거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직공은 또 한번 절을 했으나, 이번에는 마루에 닿을 정도는 아니고 허리춤 정도까지 숙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자, 이젠 모든 것이 애매해졌군, 모든 것이 애매해졌어!"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되풀이하고는 전에 없이 힘찬 표정으로 자기 방을 나왔다.
"자, 이제부터 다시 싸워야지." 그는 층계를 내려가면서 증오에 찬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증오는 자기 자신에게 돌려진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소심함'을 상기하고 경멸과 수치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