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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3

3

 

라스콜니코프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그는 라주미힌에게 힘없이 손을 내저어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향한 조리 없는 열띤 위로의 말을 중단시킨 후 두 사람의 손을 잡고 2분쯤 말없이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는 그이 시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시선에는 고통 어린 강렬한 감정과 동시에 무언가 응고된 것 같은, 광적이라고도 할 만한 표정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얼굴은 창백하고, 그녀의 손은 오빠의 손안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주세요...저 사람하고." 그는 라주미힌을 가리키며 띄엄띄엄 말했다. "내일 또....내일이면 모든 것이...도착한 지 오래됐나요?"

"저녁때 왔다, 로쟈야"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대답했다. "기차가 몹시 연착했어. 그렇지만 로쟈,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옆을 떠나지 않겠다! 난 여기서 자겠다, 네 옆에서...."

"날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하고 라주미힌이 외쳤다.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손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성을 내라면 내라죠, ! 그쪽 일은 백부님이 맡아서 하실 테니까."

"정말이지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다시금 라주미힌의 손을 잡으면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하려 하자, 또다시 라스콜니코프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못 참겠어, 도저히 못 참겠어!" 그는 안타까운 듯 짜증을 내며 되풀이했다. "괴롭히지 말라니까요! 됐어요, 돌아가세요...정말 못 참겠다니까!"

"가요, 어머니, 잠깐 문밖에라도 나갔다 와요." 겁에 질린 두냐가 속삭였다. "우린 지금 오빠를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그럼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단 말이냐? 3년이나 헤어져 있었는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그는 다시금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모두 방해만 하니까 머리가 자꾸 혼란해져서 그럽니다...루쥔은 만나셨나요?"

"아니, 아직 안 만났다. 하지만 그이는 우리가 도착한 걸 알고 있을 거다. 로쟈, 듣자니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친절하게도 오늘 너를 찾아주셨다더구나?" 어머니는 다소 망설이는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 친절하게도 와주셨더군요...한데 두냐, 나는 아까 루쥔에게 층계 밑으로 떨어뜨리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당장 내쫓고 말았어......"

"로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는 아마...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깜짝 놀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으나, 두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녀는 이미 루쥔과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를 나스타시야가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녀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혹과 기대를 품으려 몹시 마음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두냐." 라스콜니코프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결혼에 찬성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너도 만나면, 내일 첫 마디에 루쥔을 거절해버려야 해. 앞으론 그 녀석의 냄새도 나지 않게 말이다."

"아니, 저런!"하고 어머니는 외쳤다.

"오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발끈해서 이렇게 말을 시작했으나 곧 자신을 억제했다. "아마도 오빠는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예요, 몹시 피로할 테니까"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헛소리를 하는 줄 아니? 아니야...너는 나 때문에 루쥔과 결혼하려는 거야. 그러나 그런 희생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내일까지는 꼭 편지를 써라...거절하는 편지를...그리고 아침에 그것을 내게 읽어줘.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그럴 수는 없어요!" 화가 난 누이동생은 이렇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권리가 있기에......"

"두네치카, 너도 참 성미가 급하고나. 그만 둬라, 내일...너도 알 만한데 왜 그러니...."어머니가 깜짝 놀라 두냐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다. "! 어서 돌아가는 게 낫겠다!"

"헛소릴 하는 겁니다!" 거나하게 취한 라주미힌이 외쳤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런 소릴 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만 되면 저런 바보 같은 소리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그 사람을 내쫓은 건 사실입니다. 그건 사실이예요. 그 사람도 화를 냈지요.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자기의 지식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쳐버렸지요......"

"그렇다면 그 말은 정말이군요?"하고 어머니는 외쳤다.

"그럼 오빠, 내일 또." 두냐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가요, 어머니...안녕, 로쟈!"

"알겠니, 두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되풀이했다. "나는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이 결혼은 비열해. 나는 비열한 놈이 돼도 좋지만, 너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우리 둘 중 하나면 족한 거야...비록 나는 비열한 놈이지만, 그런 동생은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나를 택하느냐, 루쥔을 택하느냐야! , 이젠 가도 좋다...."

"자넨 돌았군! 그런 폭군 같은 소릴 하다니!"하고 라주미힌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대답할 기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맥없이 소파에 쓰러져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라주미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라주미힌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 흠칫 몸을 떨기까지 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갈 수 없어요!"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라주미힌에게 속삭였다. "나는 여기 남아 있겠어요. 어디든 좋으니...두냐를 좀 바래다주세요."

"그러시면 몽땅 망쳐버립니다!" 라주미힌도 몹시 흥분해서 역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무튼 층계까지라도 나가시지요. 나스타시야, 불을 밝혀줘@ 사실 말씀이지만 실은......"층계에 와서도 그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실은 아까도 로쟈는 우리를, 나와 의사를 마구 때리려 들었습니다! 아시겠어요? 의사까지 말입니다. 의사는 흥분시키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래층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는 살그머니 빠져나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너무 자극했다가는 또 다시 나가서 이 밤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게다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어머님이 안 계시면 혼자 하숙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두 분이 지금 어떤 곳에 머무르고 계신지 아세요! 저 비열한 표트르 페트로비치라는 사내도 두 분을 위해 좀 더 나은 숙소를 마련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하긴 보시다시피 나는 좀 취했습니다...그래서 말이 좀 거칠어졌습니다만...제발 언짢게 생각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 집 안주인한테 가보겠습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하고 두냐를 오늘 밤만 아무 데나 한구석에서 묵게 해달라고 부탁해보겠어요. 나는 저 애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럴 순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안주인의 방문 바로 앞 층계참에 서 있었다. 나스타시야는 한 단 아래에서 그들에게 불을 비춰주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전에 없이 흥분해 있었다. 반 시간 전에 라스콜니코프를 배웅할 때는 자기 자신도 시인했듯이 지나치게 지껄였으나, 이날 저녁 굉장히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퍽이나 기운이 좋고 거의 평상시와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심리 상태는 그 어떤 환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동시에 여태까지 마신 술이 완전히 배가 된 힘을 지니고 한꺼번에 머리 위로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두 여인과 마주 서서 그들의 손을 움켜쥔 채 어떻게든 그들을 설복시키려고 놀랄 만큼 솔직한 태도로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거의 한 마디 한마디마다 두 사람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쥐곤 했다.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너무 아파서 이따금 그의 크고 억센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층 더 세계 끌어당겼다. 만일 지금 두 사람이 자기들을 위해 층계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라고 했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의심치 않고 당장에 그 일을 실행했을 것이다. 로쟈의 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 청년이 예의에 어긋날 만큼 너무 아프게 손을 꽉꽉 잡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동시에 자기로서는 이 청년이 구세주 같았으므로 그러한 사소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편 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해도 그다지 나약한 편이 아닌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오바 친구의 이 야성적인 불타는 듯한 눈초리를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공포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스타시야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 이 이상한 사나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끌고 그에게서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물론 그녀도 이제 와서는 이 사나이에게서 달아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10분쯤 지나자, 그녀는 눈에 띌 정도로 침착해졌다. 라주미힌은 자기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언제나 순식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나타내 보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곧 그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안주인한테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설득하려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설사 어머니라 하시더라도 여기 남아 계시면 로쟈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 들어보세요,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거기에는 나스타시야를 앉아 잇게 하고, 제가 어머님을 바래다드리죠. 두 분이서만 밤거리를 걸으실 수는 없으니까요. 이 페테르부르크라는 곳은 그런 점에서는....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이곳으로 돌아왔다가 15분 후에는 틀림없이 어머님께 보고를 하러 가겠습니다. 로쟈의 상태가 어떠하며, 잠이 들었는지 어떤지....등등을 죄다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말입니다. 쏜살같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서 조시모프를 끌고 오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있고 모두 취해 있을 테니까요. 조시모프는 로쟈를 봐주는 의사죠. 지금 집에 있긴 합니다만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취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취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로쟈한테 끌어다 놓고, 다시 곧 저는 어머님한테 달려가겠습니다. 결국 두 분께선 한 시간 동안 로쟈에 대한 보고를 두 번 받는 셈입니다. 의사의 보고를 받는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치의의 보고를요. 그건 제가 보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니까요! 만약 환자가 더 악화된다면 맹세코 제가 어머님을 이곳으로 다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용태가 좋으면, 그대로 편히 주무십시오. 저는 여기 문간에서 하룻밤 보내겠습니다. 여기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조시모프는 주인아주머니한테서 자게 하겠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 어떻습니까, 지금 로쟈를 위해서 두 분과 의사, 어느 쪽이 더 유익하겠습니까? 그야 의사 쪽이 더 유익할 테죠. 유익하고 말고요.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십시오! 안주인한테는 안 됩니다. 저는 괜찮지만 두 분께선 안 됩니다.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어리석기 짝이 없는 여자니까요...그 여자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때문에 질투를 할 겁니다. 물론 어머님에 대해서도 그럴 테지만...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 대해서는 틀림없습니다. 그 여자는 그야말로 괴상망측한 성격이니까요! 하긴 저도 역시 바보이긴 합니다만...하지만 그런 건 상관할 것도 없습니다!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어때요,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가세요, 어머니"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말했다. "이분은 약속대로 해주실 거예요, 저렇게 오빠를 살려주신 분인걸요. 그리고 의사가 정말 머물러주시기만 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아, 당신은 ....당신은...나를 이해해주시는군요, 그건 당신이...천사이기 때문입니다!" 라주미힌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갑시다! 그럼 나스타시야, 얼른 올라가서 환자 옆에 있어줘, 불을 밝혀놓고. 나는 15분 뒤면 돌아올 테니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더 반대하지는 않았다. 라주미힌은 두 사람을 부축하며 층계를 내려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라주미힌이 근심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민첩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약속대로 실행할 수 있을는지? 저런 꼴을 해가지고....'

"아아, 알겠습니다. 제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군요!" 라주미힌은 눈치를 채고 그녀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는 남다른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서 두 여인은 간신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염려 없습니다!...사실...저는 주정뱅이처럼 취해 있습니다만, 그러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취한 건 술 탓이 아닙니다. 어머님과 따님을 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겁니다...하지만 저 같은 건 문제 삼지 말아주십시오! 조금도 염려할 건 없어요.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두 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인간입니다...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말고요! 두 분을 배웅해드리고 나면 이 도랑에서 물을 두 통쯤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러면 문제없습니다...그저 다만 제가 얼마나 두 분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만 알아주신다면!...웃지 마십시오. 그리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다른 사람에게는 노여워하셔도 상관없지만, 저에게만은 노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로쟈의 친구니까, 따라서 두 분의 친구도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저는 그것을 예감했었습니다...지난 해의 일이지만,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하긴 결코 예감했던 것은 아니죠, 두 분께서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것처럼 별안간에 나타나셨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는 한잠도 못 잘 겁니다....그 조시모프라는 녀석도 아까는 로쟈가 정신 이상이 아닌가 걱정했으니까요...신경을 자극 하지 마라는 것도 실은 그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어머니는 소리쳤다.

"정말 의사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깜짝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사는 무슨 가루약을 먹이더군요. 저도 보았어요. 그때 두 분께서 오신 겁니다...아아, 두 분께서 내일쯤 오셨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나 저희들이 그곳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아무튼 한 시간 뒤에는 조시모프가 모든 것을 두 분께 보고할 거예요. 그 사람은 원래 취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그때는 술이 깰 겁니다....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취해버렸을까? 그건 저 저주스런 녀석들이 토론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토론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는데!...너무나 맹랑한 수작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하마터면 주먹다짐이 벌어질 뻔했다니까요. 저는 거기다 백부를 두고 왔지요, 좌상격으로 말입니다...그런데 아시겠어요, 그자들은 완전한 개성의 방기를 요구하고, 거기서 최대의 의의를 발견하고 있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니기를, 또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자기를 닮지 않도록! 이것이 그자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진보로 여겨지고 있답니다. 게다가 자기식으로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 잠깐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ㄱ의 말을 가로챘으나, 그것은 다만 상대방의 열을 더 돋우어줄 뿐이었다.

", 두 분께선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죠?" 한층 더 언성을 높이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그자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제가 이런다고 생각하시겠죠? 천만에요, 저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짓말은 모든 유기체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특권이니까요. 거짓말을 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겁니다! 저도 거짓말을 하니까 인간인 것입니다. 우선 열네 번쯤, 아니 어쩌면 백열네 번쯤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건 그것대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또래는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스스로의 지혜만으로는 안 됩니다! , 어서 거짓말을 해봐, 자기가 생각해낸 거짓말을 해보란 말이다, 그러면 나는 너한테 키스를 해주마. 독창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남의 흉내를 내어 외워둔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전자는 인간일 수 있지만 후자는 새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진리는 달아나지 않지만 생명을 때려죽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학, 진보, 사색, 발명, 이상, 희망, 자유주의, 이성, 경험, 그 밖의 모든, 그야말로 모든 영역에서 아직 중학 예과 1년 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의 지식으로 제 앞을 가리는 것이 쉽고 편하니까...완전히 거기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 말이 틀립니까?" 두 여인은 손을 꽉 쥐고 흔들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안 그래요?"

"어쩌면 좋아요, 나는 잘 모르겠군요." 가엾게도 폴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중얼거렸다.

", 그래요...물론 당신의 말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정색을 하고 덧붙였으나 이내 비명을 올렸다. 이때 그가 너무나 아프게 그녀의 손을 쥐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 이렇게 되면 당신은...당신은......" 그는 기쁨에 겨워 외쳤다. "당신이야말로 선()과 순결과 이지(理智), 그리고....완성의 원천입니다! 손을 내십시오, 손을. 어머니도 어서 그 손을 주십시오. 저는 당장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두 분의 손에 키스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느닷없이 길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다. 다행히 그 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두세요, 제발. 이게 무슨 짓이에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렇게 외쳤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시라니까요!" 하며 두냐는 웃었으나 역시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손을 내시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 그렇게요, 됐습니다. , 일어났지요, 갑시다! 저는 불행한 바보 자식입니다. 저는 두 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놈이고, 이렇게 술 취해서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저는 두 분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두 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것은 무지몽매한 짐승이 아닌 이상 각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무릎을 꿇은 겁니다..., 벌써 두 분의 숙소로군요. 이거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아까 로쟈가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내쫓은 것은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아니, 글쎄, 어떻게 이런데다 두 분의 숙소를 정할 수 있습니까?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여기가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인지 아십니까? 더구나 당신의 약혼녀가 아니냐 말이에요? 당신은 약혼녀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나도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런 짓을 하는 당신의 약혼자는 비굴한 인간입니다!"

", 라주미힌 씨, 당신은 이성을 잃으셨군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을 하려 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저는 이성을 잃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라주미힌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그러나...이런 말씀을 드렸다고 해서 두 분께서는 저를 노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성의껏 말씀드리는 것이지, 결코 그 어떤....! 그렇다면 비열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뭐 당신에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니, 이제 그만둡시다. 필요 없어요.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용기가 없습니다...아무튼 우리는 아까 그 사람이 들어 왔을 때, 우리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그건 뭐 그 사람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지지고 왔대서가 아니고, 또 그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성급히 피력하려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요컨대 그 사나이는 스파이이며, 협잡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같은 사람이고, 사기꾼입니다. 이건 뻔한 사실입니다. 두 분께선 그를 똑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그 녀석은 바보에요, 바보고말고요! 그런 사나이가 어떻게 당신의 배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아, 한심스러운 일입닏! 아시겠어요." 방으로 통하는 층계로 올라가다가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물론 우리 집에 와 있는 패거리는 모두 취했습니다만, 그 대신 모두가 정직합니다. 비록 우리는 거짓말을 지껄이긴 합니다만,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동안에 언젠가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올바른 길에 서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집에 와 있는 녀석들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그들을 모두 존경하고 있습니다. 자묘토프라는 자까지도 존경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니까요! 조시모프라는 녀석도 그렇습니다. 정직하고 자기 할 바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 그만둡시다. 할 말도 다 하고 용서도 받았으니까요. 물론 용서해주신 거죠? 그렇죠? , 갑시다. 나는 이 복도를 잘 압니다. 와 본 적이 있어요. 3호실에서 추문이 있었지요...그런데 두 분의 방은 어디지요? 몇 호실입니까? 8? 그럼 밤에 주무실 땐 반드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마십시오. 15분 뒤에 보고를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또 반 시간 후에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오고요. 두고 보십시오! 그럼 안녕히. 달려가 봐야죠!"

"아아, 두네치카, 이젠 어찌 되는 거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겁먹고 불안한 표정으로 딸에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어머니." 모자와 망토를 벗으면서 두냐는 대답했다. "그이는 어느 술좌석에서 바로 오긴 했습니다만,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려고 보내주신 거예요. 그인 믿을 수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더구나 그이가 지금까지 오빠를 위해서 애써주신 걸 봐도......"

"하지만 두네치카, 그 사람이 정말 돌아와 줄지 어떨지 알 게 뭐냐! 어쩌자고 나는 로쟈를 두고 올 마음이 생겼을까!....정말이지 그런 식으로 만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그 애의 그 무뚝뚝한 태도란, 마치 우리가 온 것을 싫어하는 눈치더구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는 잘못 보셨어요. 오빠는 중병으로 머리가 혼란한 거예요...모든 것이 그 때문이에요."

"아아, 그 병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날 게다. 무슨 일이 날 거야! 게다가 너한테 하는 말투는 또 그게 뭐냐, 두냐!" 어머니는 딸의 기분을 살피려고 겁먹은 표정으로 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두냐가 로쟈를 감싸주는 것으로 보아, 그만하면 오빠를 용서한 모양이라 생각하고 반쯤은 벌써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 애도 반드시 마음을 돌이킬 거라고 나는 믿는다." 어디까지나 딸의 마음을 떠보려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일도 오빠는 역시 같은 말을 하실 거라고 믿어요...그 일에 대해서만은"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말은 물론 지금 어머니가 입 밖에 내기를 매우 꺼려하기 때문에 미리 못을 박아놓기 위함이었다. 두냐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키스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라주미힌이 돌아오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역시 같은 기대 속에 혼자 생각에 잠겨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방 안을 거니는 딸의 모습을 겁먹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생각에 잠긴 채 이렇게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럴 때면 늘 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술에 취한 김에 밑도 끝도 없이 라주미힌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열렬한 애정을 일으킨 것은 물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본 사람이라면, 특히 지금처럼 팔짱을 끼고 방 안을 거닐며 생각에 잠긴 애절한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라주미힌의 평상시와 다른 심적 상태를 새삼스레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거의 대부분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놀랄 만큼 균형 잡힌 몸매였고, 강인하면서도 자신에 넘친 태도가 동작 하나하나에 드러났으며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결코 빼앗아 버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용모는 오빠를 닮았으나, 미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머리칼은 오빠보다 좀 더 밝은 밤빛이었다. 눈은 거의 까만 편이고 긍지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으나, 동시에 때론 순간적으로 무척 선량한 표정을 띠었다. 얼굴빛은 창백했으나 병적인 창백함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신선함과 건강에 넘쳐 빛나고 있었다.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선명하게 붉은 아랫입술은 턱과 함께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이것이 이 아름다운 얼굴에서 유일한 결점이었으나, 동시에 이 얼굴에 한 가지 특징, 특히 오만스러운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얼굴 표정은 항상 쾌활하다기보다 차라리 착실한 편이고 사색적이었다. 그 대신 이 얼굴에는 웃음이 매우 잘 어울렸다. 즐겁고 젊고 티 없이 맑은 웃음은 그녀의 얼굴에 얼마나 잘 어울렸던가! 열렬하고, 개방적이고, 순진하고, 정직하고, 고대 러시아의 용사처럼 힘찬, 더구나 이러한 모습을 본 적 없는 취중의 라주미힌이 한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욱이 기회가 마치 일부러 꾸며놓은 듯이, 처음으로 두냐를 그에게 보이기 위해 오빠와 만나는 사랑과 기쁨의 아름다운 순간을 안겨준 것이다. 그는 또 오빠의 파렴치하고 무정한 호령에 답해서 그녀의 아랫입술이 노여움에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로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취한 나머지 아까 층계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안주인인 괴벽한 프라스코비야 바블로브나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 대해서까지 반드시 질투하리라고 지껄인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한 말이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미 마흔셋인데도 그 얼굴에 여전히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명랑한 기분, 청신한 인상,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의 정열을 늙도록 잃지 않는 부인이면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녀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겸해서 덧붙여 말해두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잃지 않고 보존해가는 것만이 만년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머리칼은 이미 희끗희끗하고 숱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잔주름이 벌써부터 눈가에 나타나고 뺨은 근심과 슬픔으로 야위어 까칠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것은 20년 후 두네치카의 얼굴을 그려놓은 초상화와도 같았다. 물론 이것은 아랫입술의 표정을 제외하고 하는 말인데, 그녀의 아랫입술은 딸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감이 없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감상적이고 겁 많은 온순한 성질의 여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웬만한 일은 남에게 양보도 할 줄 알고, 때로는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일에도 동의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항상 성실과 계율과 신념의 정해진 한계가 있어서 어떠한 사정도 그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게 할 수는 없었다.

라주미힌이 가고 나서 꼭 20분이 지났을 때, 나지막하면서도 성급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라주미힌이 돌아온 것이다.

"들어가진 않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문이 열리자 그는 성급히 말했다. "곤히 잠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푹 잠들었어요. 제발 열 시간쯤 자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옆에는 나스타시야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일러두었죠. 이번에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할 겁니다. 그러면 두 분께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테죠. 몹시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두 사람의 곁을 떠나 복도를 달려갔다.

"어쩌면 저렇게도 재빠르고 ....믿음직스러운 청년일까!" 기쁨에 겨운 나머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외쳤다.

"정말 좋은 사람인가 봐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다소 열띤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고, 또다시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복도에 발소리가 울리고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여인은 이번엔 완전히 라주미힌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왔다. 조시모프는 두말없이 술좌석을 버리고 라스콜니코프를 보러 가는 데 동의했지만, 두 여인에게 오는 것은 술 취한 라주미힌의 말을 신용할 수가 없어서 어느 정도 의심을 품은 채 마지못해 끌려왔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곧 누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 정말로 자기를 예언자처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히 10분 동안 거기 앉아 있었으나, 그동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완전히 설복하고 안심시켰다. 그는 깊은 동정을 가지고 말했으나, 그 어조는 매우 조심스럽고 어색할 만큼 진지했다. 그것은 중대한 병상에 관한 상의를 받고 있는 스물일곱 살 청년 의사에게 딱 들어맞는 그러한 태도였다. 그는 본직 이외의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두 여성과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기색도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방에 들어설 때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눈부신 미모를 본 그는 거기 있는 동안 되도록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고, 다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만을 상대로 말을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더없는 만족을 주었다. 병자에 대해서는, 지금은 매우 만족스런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환자의 병은 최근 몇 개월 동안의 물질적 궁핍 외에도 몇 가지 정신적 원인이 수반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복잡한 정신적, 물질적 영향이나 불안, 두려움, 신경의 피로, 어떤 종류의 관념...등등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유심히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자, 조시모프는 이 주제를 좀 더 부연해서 설명했다. '다소 발광의 징후가 있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만'하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근심 어리고 겁먹은 듯한 질문에 대해 그는 침착하고도 밝은 웃음을 띠면서 자기 말이 다소 과장됐다고 대답했다. 물론 환자한테서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편집광적인 증세가 인정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의학상 매우 흥미 깊은 이 방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며, 환자가 지금까지 죽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겠고...그리고 또 물론 가족의 도착이 환자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어 결국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새로운, 특수한 정신적 충격만 피할 수 있다면'하고 그는 의미 있게 덧붙였다. 그다음 그는 일어나서 정중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두 여인의 축복과 진심 어린 감사와 애원을 받으면서, 게다가 자청해서 손을 내민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와 악수까지 나눈 다음 자신의 방문과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없는 만족을 느끼면서 그 방을 나섰다.

"이야기는 내일 하시지요. 오늘 밤은 곧 주무십시오, 부탁입니다!" 조시모프와 함께 나가면서 라주미힌은 다짐을 두었다. "내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보고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정말 매혹적인 아가씨더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조시모프는 침을 꿀꺽 삼키다시피 하며 말했다.

"매혹적이라고? 자네 매혹적이라고 말했지!" 라주미힌은 이렇게 짖어대듯이 말하고는 느닷없이 조시모프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만약 자네가 조금이라도 능청스러운 짓을 하면...알겠지? 알겠지?" 상대방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 벽에 밀어붙이며 그는 외쳤다. "알겠지?"

"이거 봐, 주정뱅이 같으니!" 조시모프는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손을 놓자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라주미힌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서 침울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물론 나는 바보야"하고 비구름처럼 음울한 표정을 하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자네도 마찬가지지......."

"아니야, 나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 나는 그런 어리석은 공상은 하지 않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의 하숙 근처에 이르러서야 라무미힌은 비로소 몹시 걱정스러운 낯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내 말 들어"하고 그는 조시모프에게 말했다. "자네는 사랑스러운 청년이야. 그러나 자네에겐 여러 가지 더러운 성질 말꼬 또 한 가지, 바람기가 있어. 그것도 아주 추악한 편이지. 나는 알고 있어. 자네는 신경질적이고 의지가 박약한 바보야, 기분파야. 피둥피둥 살만 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억제할 줄 모른단 말이야. 바로 이게 추악하다는 거지. 바로 추악으로 이끄는 길이란 말이야. 자네는 너무 기분파라서, 사실 말이지, 그런 짓을 하면서 어떻게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자못 의심스러워. 깃털 이불 따위를 덮고 자고, 의사가 말이야, 그러다가 밤중에 환자 때문에 일어나서 간다....그러나 3년만 지나면 환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없을 거야...아니, , 그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이거지. 자네는 오늘 밤 안주인 방에서 자는 거야....내가 겨우 그 여자를 설득했으니까! 나는 부엌에서 자겠네. 그야말로 자네에게는 그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그런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야! 그런 점은 조금도 없어...."

"나는 아무 생각도 없어."

"여보게, 그 여자는 말이야, 부끄럼을 잘 타고, 말이 없고, 소극적이고, 게다가 놀랄 만큼 정조 관념이 굳은 여자야. 더욱이...애처로운 한숨을 쉬며 밀랍처럼 녹아버리는 여자지! 제발 부탁이니 나를 그 여자한테서 구해주게나! 정말 애교 덩어리 여잘세! 사례는 하지, 맹세코 하겠네!"

조시모프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뭣 때문에 그 여자를!"

"괜찮아, 크게 염려할 건 없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옆에 앉아서 지껄이고만 있으면 돼. 게다가 자네는 의사니까 어디 치료라도 해주게나. 단언하건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집에는 피아노가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조금은 칠 줄 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라는 순 러시아 노래 하나쯤은 알지만 말이야...그 여자는 순수한 것을 좋아해. 그래서 노래로 시작했던 거지. 그런데 자네는 피아노라면 루빈슈타인과 다름없는 명수가 아니냐 말야....단언하네,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자네는 그 여자에게 무슨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군? 정식 계약서라도 썼나? 결혼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야......"

"천만에, 천만에,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그 여자는 절대로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 여자에겐 체바로프라는 사내가......"

"그렇다면 차버리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히 버릴 수는 없어!"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것뿐이야! 거기엔 그럴 수 없는 어떤 인연이 있어."

"그럼 왜 그 여자를 유혹했나?"

"아니, 나는 조금도 유혹하지 않았어. 어쩌면 나야말로 어리석은 성격 때문에 유혹을 당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나나 자네나 조금도 다를 게 없어, 그저 누가 곁에 앉아서 한숨만 쉬어주면 되니까. 그러니 여보게...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 자네는 수학을 좋아했지,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겠지, 다 알고 있어...그러니 자네는 그 여자에게 적분 계산을 가르쳐 주는 거야. 정말이야, 결코 농담이 아니야, 심각한 이야기야. 그 여자에겐 아무래도 마찬가지니까. 그 여자는 자네를 보고 한숨을 짓겠지, 그런 식으로 1년쯤 계속 해보는 거야. 나도 이틀 동안이나 계속해서 프로인센 상원(上院)이야기를 한 적이 있네, 대체 그 여자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말이야? 그래도 그 여자는 한숨만 쉬면서 땀만 흘리고 있었어! 다만 사랑 이야기만은 꺼내지 말게, 지나칠 정도 내성적이니 말이야. 그저 곁을 떠날 수 없는 듯한 표정만 짓고 있게. 그것으로 충분해. 아무튼 기분이 좋아, 마치 제 집에 있는 것과 같으니까. 책을 읽거나, 앉거나, 눕거나, 무엇을 쓰거나 제멋대로니까....키스쯤 할 수도 있겠지, 조심스럽게만 한다면......"

"도대체 그 여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야?"

"아니,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 수 있겠나! 이것 봐, 자네 두 사람은 서로서로 꼭 어울린단 말이야! 나는 전에도 자네를 생각한 적이 있거든...결국 자네는 그렇게 될 인간이니까! 그러고 보면 마찬가지야 뭐야, 늦고 빠르다는 차이뿐이지. 거기에는 여보게, 뭐랄까? 깃털 이불의 요소가 가득 차 있거든....아니, 단순한 깃털 이불의 요소만이 아니야! 거기에는 사람을 끄는 요소가 다 갖춰져 있어. 그곳은 세계의 끝이고, 배의 닻이며, 조용한 항구, 지구의 배꼽이고,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세 마리 물고기, 블린(팬케이크의 일종), 기름진 쿨레뱌키(고기, 생선, 캐비지 등이 든 만두의 일종), 저녁의 사모바르, 조용한 한숨, 따뜻한 여자의 옷,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 위 침상, 그러한 것의 에센스야. 어때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는 거지! 아니, 너무 지껄인 것 같군, 이제 자야지! 나는 밤중에 가끔 일어나서 환자를 보러 가겠네. 그저 가보는 거지. 쓸데없는 줄은 알지만, 아무 일도 없을 걸세. 그러니 자네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혹시 원한다면 한 번쯤 가봐도 좋고. 그러나 헛소리를 하거나 열이 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데가 있으면, 곧 나를 깨워주게.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이튿날 아침 7시가 지나서 눈을 뜬 라주미힌은 뭔가 좀 꺼림직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지, 예기치 못한 갖가지 새로운 의혹들이 갑자기 그의 신변에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눈을 뜨리라고는 일찍이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상세히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과 여태까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지금까지의 것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어떤 한 가지 인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자기 뇌리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공상이 절대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히 의식했다. 너무나도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저주스러운 어제' 이후 그대로 남아 있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와 의혹 쪽으로 생각을 돌려버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어제 너무 '비굴하고 추잡한' 짓을 했다는 점이었다. 단지 취했을 뿐만 아니라, 처녀 앞에서 그 가엾은 처지를 이용해 어리석게도 조금한 질투심으로 상대방의 상호관계나 내막도 모를뿐더러 당사자의 인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그녀의 약혼자를 모욕했다. 도대체 내게 무슨 권리가 있기에 그 사내에 대해서 그토록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을 내렸을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심판관이 되어달라고 했느냐 말이다! 또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같은 훌륭한 처녀가 단지 돈 때문에 하잘것 없는 사내에게 몸을 맡길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그 사내에게도 무슨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숙소는? 아니, 그 집이 그렇다는 것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는가? 더구나 그는 진짜 살 집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제기랄, 모든 게 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들이다! 내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변명이 된담? 그건 오히려 한층 더 자기 인격을 떨어뜨리는 비열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취중에 진실이 있다지만, 그 진실이 그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즉 깊은 질투심의 야비한 마음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만 것이다!' 과연 이러한 공상은, 비록 어느 정도 라주미힌이라는 사내에게 허용될 수 있을까? 도대체 나는, 주정뱅이 난폭자는, 어제의 허풍쟁이는 그런 처녀와 자기를 비교해서 어쩌자는 건가? '이렇게 창피하고 우스꽝스러운 비교가 있을 수 있을가?' 라주미힌은 이렇게 생각하자 비통한 나머지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갑자기 마치 일부러 꾸미기로 한 듯이, 바로 이 순간에 어저께 층계에 서서 안주인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때문에 질투할 거라고 두 사람에게 말했던 일이 불현듯 머리에 되살아났다.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 부엌의 페치카를 힘껏 내리쳤다. 그는 손에 상처를 입고 벽돌까지 한 장 떨어뜨렸다.

'물론...'하고 잠시 후 일종의 비굴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지금에 와서 그 비겁한 행위를 씻어버릴 수도 없거니와 변상할 수도 없다....그렇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아무 소리 없이 두 사람 앞에 내가....내 의무만을 다하는 거다....역시 아무 말도 말고....사과할 것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건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옷을 입으면서 어느 때보다 주의를 기울여 자기 옷을 살펴보았다. 갈아입을 옷도 없었거니와, 또 있었다고 해도 그는 갈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오기로라도' 갈아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남을 무시하는 듯한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타인의 감정을 모욕할 권리는 없다. 더구나 그 타인이 그를 필요로 하고, 자기 쪽에서 그를 부르고 있으니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정성껏 옷에 솔질을 했다. 와이셔츠는 평상시에도 깨끗했다.

이날 아침, 그는 세수도 공들여 했다. 나스타시야에게 비누가 있었으므로 머리에서 목, 특별히 두 손을 정성껏 씻었다. 그리고 꺼칠해진 수염을 깎을까 말까 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안주인에게는 죽은 남편 자르니츠이나 씨의 유물로 훌륭한 면도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단호히 용단을 내려 깎지 않기로 했다. ', 이대로면 어때, 내버려 두자! 그런 짓을 하면 그야말로 무슨 속셈이 있어서 깎았다고 생각할 거다...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

'그리고 ....그리고 중요한 문제는, 내가 거칠고 지저분하고 선술집 냄새가 난다는 점이다. 게다가 설사...설사 내 자신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데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이 여기서 대체 무슨 자랑거리가 되느냐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하고, 되도록 더 깨끗해야 한다....그러나 어쨌든, 나도 알고 있지만 내게도 가끔 이상한 데가...별로 파렴치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래도...마음속으로 생각한 일까지 들추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하고 비교해본다면! 에잇, 제기랄! 될 대로 되라지! 일부러라도 더럽고 기름때가 흐르는 선술집 차림대로 해두자, 까짓껏! 아니, 그보다 더한 꼴을 해 보이겠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의 응접실에서 하룻밤을 새운 조시모프가 들어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환자를 보고 가려고 바삐 들른 것이다. 라주미힌은 환자가 모르모트처럼 잘 자고 있다고 말했다. 조시모프는 스스로 깰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일렀다. 그리고 10시가 지나서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그저 집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좋으련만"하고 그는 덧붙였다. "제기랄! 환자조차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어떻게 치료를 한담!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기로 했나, 이쪽에서 그리로 가는 건가, 아니면 저쪽에서 이리로 오나?"

"저쪽에서 오리라 생각하는데." 질문의 뜻을 알아차리고 라주미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물론 자기들끼리의 집안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나는 슬쩍 빠지겠네. 그러나 자넨 의사니까 나보다는 더 권리가 있겠지."

"나를 뭐 신부로 아나?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돌아가겠네. 그것 말고도 일이 태산 같으니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미간을 찌푸리면서 라주미힌은 말을 막았다. "어제 나는 취한 김에 길을 걸으면서 저 친구에게 여러 가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나 봐....온갖 얘기를 다...그중에도 발광 증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자네가 걱정하더라는 말까지 했으니 말이야...."

"자네는 어제 여인들에게까지 그런 말을 지껄였어!"

"정말 내가 어리석었어! 그러나 어떤가, 자네는 정말 거기에 대해서 무슨 확고한 생각이라도 있었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잖아. 확고한 생각이고 뭐고 있을 게 뭐야! 그 사내를 편집광으로 본 것은 다름 아닌 자네였어, 나를 그에게로 끌고 갈 때 자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말이야...그런데 우리는 어제 장작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지. 그건 자네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야....칠장이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렇잖아도 그 때문에 정신 이상이 된 것같이 생각될 지경인 데다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만약 그때 내가 알았다면, 경찰서에 있었던 소동이며 거기서 어떤 미친놈이 그에게 혐의를 걸어 모욕한 일 등을 내가 정확히 알았더라면 어제 그런 이야기는 못 하게 했을 텐데. 아무튼 편집광이란 건 한 방울의 물로 바다를 만들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망상을 현실에서 직접 보기도 하니 말이야...내가 기억하는 한, 어제 자묘토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진상을 반쯤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그러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한 가지 실례를 알고 있는데, 마흔 살 된 우울증 환자가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가 식사 때마다 자기를 조롱한다면서 마침내 그 애를 죽여버린 사건이야. 그런데 이번 경우는 저렇게 초라한 누더기 옷에 파렴치한 경찰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병이 나기 시작했을 때 그런 혐의까지 받았으니 말이야! 더구나 이쪽은 광적인 우울증 환자거든! 그뿐인가, 지독히 자존심이 강한 사내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지! 어쩌면 병의 출발점은 전부 거기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저 자묘토프는 참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다만...어제 그 얘기를 모두 지껄여버린 것만은 잘못이었어. 굉장히 지껄이기를 좋아하는 친구더군!"

"아니, 또 누구한테 얘기했다는 건가? 자네와 나 말고?"

"포르피리한테 했어."

"포르피리한테라면 괜찮지, ."

"그건 그렇고 자네는 그분들에게, 어머니와 누이동생한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겠지? 오늘만은 환자를 대하는 데 조심하라고 일러주게......"

"어떻게 될 테지!" 라주미힌은 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자는 왜 그렇게 루쥔한테 대들었을까? 돈도 있고, 그 여자도 그다지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던데...그리고 그들은 무일푼이 아니냐 말이야? 안 그래?"

"자네는 뭣 때문에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라주미힌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무일푼인지 아닌지 내가 알 게 뭐야!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알고 싶으면...."

", 자네는 가끔 바보 같은 소릴 해서 탈이라니까! 어제 취기가 아직도 남아 있나 보군. 그럼 실례하겠네.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부나에게 하룻밤 재워줘 고맙다고 인사나 해주게. 문을 잠가버리고 내가 문틈으로 '봉주르'하고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었어. 7시에 이미 일어난 게 분명한데 말이야. 하녀가 사모바르를 가지고 부엌에서 복도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니까....아무튼 나는 얼굴을 뵙는 영광조차 얻지 못했네......."

9시 정각에 라주미힌은 바칼레예프의 하숙집에 나타났다. 두 여인은 퍽 오래전부터 가슴을 죄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7시나, 그보다 전에 일어나 있었다. 그는 비구름처럼 침울한 얼굴로 들어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곧 그 때문에 화를 내고 말았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고 그에게 달려와서 두 손을 꽉 잡고 그 손에 거의 키스라도 할 기세였다. 그는 머뭇머뭇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오만한 얼굴에도 이 순간 감사와 우정의 표정과 전혀 뜻하지 않았던 존경의 빛이(비웃는 듯한 시선과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경멸 대신에!) 넘쳐흘렀으므로, 사실 그로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도록 욕을 먹는 편이 훨씬 편했을 정도로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화제가 마침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급히 거기에 달려들었다.

'환자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러나 '경과는 매우 좋다'는 말을 듣자,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미리 꼭 의논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편이 오히려 잘됐다고 했다. 그다음 차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고는 함께 마시자고 권했다. 두 사람 다 라주미힌을 기다리느라고 아직 마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벨을 울렸다. 그러자 그 소리에 누더기 옷을 입은 더러운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이르자 얼마 후 겨우 차가 나왔으나, 그것은 두 여인의 얼굴이 붉어질 만큼 더럽고 조잡했다. 라주미힌은 한바탕 하숙집에 욕을 퍼부으려다가 문득 루쥔 생각이 나서 입을 다물고 우물우물해버렸다. 그러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연방 질문ㅇ르 해오자 그도 무척 신바람이 났다.

그는 쉴 새 없이 말이 가로막히고 질문을 되받고 하면서,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45분 동안이나 지껄여댔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라스콜니코프의 생활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일일이 이야기하고 이번 병의 상세한 보고로 말을 맺었다. 그렇지만 빠뜨린 것도 많았다. 이를테면 경찰서에서 일어난 촌극에서부터 그에 따른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은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를 마치고 듣는 사람들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했을 때도, 두 사람에게는 이제 겨우 시작인 듯한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 어서 얘기해주세요,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지...아 참, 용서하세요, 나는 아직 당신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서두르며 말했다.

"드미트리 프로코피치입니다."

"그러면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난 알고 싶은 게 무척 많아요. 일반적으로 말해서....그 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다시 말해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쉽게 말해서 그 애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합니까? 언제나 그렇게 짜증만 내나요? 대체 그 애의 희망이 무엇이고, 다시 말해서 지금 그 애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지금 그 애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고 있는 건 대체 뭡니까? 한마디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아이, 어머니도, 그렇게 많은 걸 어떻게 한꺼번에 대답하실 수 있겠어요!" 두냐가 주의를 주었다.

"아아, 정말이지 나는 그 애가 그런 꼴이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드미트리 프로코피치는 대답했다. "저한테는 어머니가 안 계셔서요, 그 대신 백부님이 해마다 이곳에 오시는데, 오실 때마다 저를 잘 못 알아보십니다. 얼굴까지도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입니다. 꽤 총명하신 분인데도 그래요. 그런데 두 분께선 3년 동안이나 헤어져 계셨으니까 변화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아무 소용도 없겠지요? 저는 로지온과 1년 반쯤 사귀어왔습니다. 특히 요즘에 와서는, 혹은 훨씬 전부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회의가 많아지고, 게다가 우울증입니다. 관대하고 선량합니다만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자기 생각을 입으로 나타내기보다는 차라리 잔인한 짓을 하는 편이지요. 그래도 어떤 때는 우울증 같은 점이 완전히 없어지고, 그저 냉담하고 인정미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감각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실 그의 내부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이 뒤섞여 있는 듯합니다. 간혹 지독이 말이 없을 때도 있어요. 늘 시간이 없다, 방해를 해서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을 조소하지는 않습니다만, 기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때든 모두가 재미있어하는 일에는 절대로 흥미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무섭게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권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아무튼 제가 보기엔 두 분께서 이곳에 오신 것이 그에게 더없이 유익한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제발 그래주었으면!" 로쟈에 대한 라주미힌의 비평에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면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외쳤다.

한편 라주미힌은 마침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좀 더 대담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흘끔흘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긴 했으나, 순간적으로 흘긋 바라보았을 뿐 곧 눈길을 돌려버리곤 했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탁자에 앉아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버릇대로 팔짱을 끼고 입술을 꼭 깨문 채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방안을 거닐기도 했다. 그러고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질문을 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 역시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엷은 천으로 만든 검정 옷을 입고 목에는 속이 비치는 하얀 숄을 걸치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모든 점으로 보아 두 여인이 얼마나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를 이내 알아차렸다. 만일에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여왕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그는 조금도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이렇게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그가 이 가난한 모습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공포심이 깃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말 한마디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그러지 않아도 자신을 신용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은 오빠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더구나 공평무사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나는 당신이 오빠를 숭배하고 계시는 줄로만 알았어요."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나 오빠 곁에 어떤 여자가 있다는 말도 사실 같군요."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어쩌면 말씀하신 대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언데요?"

"그러나 로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도 사랑하지는 않을 겁니다"하고 라주미힌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는 사랑할 소질이 없단 말씀인가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당신도 정말 오빠와 똑같군요. 모든 점에서!" 그는 저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러나 곧 그녀에게 말한 오빠에 대한 비평이 떠올라 그는 새우같이 빨개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당황하는 그를 보자 그만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로쟈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약간 화가 난 듯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지금 한 말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두네치카.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이 편지에 쓴 것이나...우리 둘이서 상상했던 것은 어쩌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그 애가 얼마나 엉뚱한지, 그리고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그러니까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거예요. 겨우 열다섯 살 때부터 나는 그 애의 성격에는 조금도 안심할 수가 없었어요. 그 애는 지금도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갑자기 해치울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그래요, 오래된 일은 그만두고라도 1년 반쯤 전에, 당신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느닷없이 자르니츠이나인가 뭔가 하는 하숙집 안주의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해서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걱정시켰는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뭔가 자세한 것을 아십니까?" 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물었다.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테죠"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열띤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의 내 눈물이, 내 탄원이, 내 병이, 번민으로 인한 내 사경(死境), 집안의 궁핍 등이 그 애의 생각을 돌이키게 했다고 생각하시겠죠? 천만에요, 그 애는 어떤 장애도 태연스럽게 밟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애는 정말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로쟈가 먼저 그런 얘길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하고 라주미힌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저는 자르니츠이나 부인한테서 조금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여자 역시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러나 제가 들은 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얘기였습니다."

"무엇을, 무슨 말을 들으셨는데요?" 두 여인은 한꺼번에 물었다.

",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색다른 것은 없습니다만, 다만 제가 들은 바로 그 혼담은 이미 완전히 결정되었었는데 신붓감이 죽는 바람에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머니 자르니츠이나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겁니다....그 밖에도 다른 사람들 이야기로는 신붓감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못난 편인 데다가....늘 병을 앓고....아무튼 이상한 처녀였나 봅니다. 그러나 어딘가 좋은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반드시 좋은 점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니까요...지참금 따위도 전혀 없었고, 하긴 로쟈가 지참금 따위를 바라는 그런 인간은 아니니까요...아무튼 이런 문제는 간단히 판단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분은 반드시 훌륭한 아가씨였을 거라고 믿어요" 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짤막하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참 안된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그 처녀가 죽은 걸 진정으로 기뻐했답니다. 하긴 우리 애가 처녀를 망쳐놓을지, 그 처녀가 우리 애를 망쳐놓을지, 그들 중 누가 누구를 망쳐놓을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말을 맺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쉴 새 없이 두냐의 얼굴을 훔쳐보면서(분명히 두냐는 불쾌한 모양이었으나), 로쟈와 루쥔 사이에서 일어난 어제 일에 대해서 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이 사건은 소름이 끼칠만큼, 무엇보다 무서운 걱정거리인 듯했다. 라주미힌은 다시 자초지종을 상세히 이야기했으나 이번에는 자기의 결론도 덧붙였다. 즉 미리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고의적으로 루쥔을 모욕했다면서, 라스콜니코프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병을 거의 변명의 구실로도 삼지 않았다.

"그건 병이 나기 전부터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하고 그는 덧붙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를 몹시 놀라게 한 것은 라주미힌이 이번엔 표트르 페트로비치(루쥔)에 대해서 말할 때 신중한 태도를 보일뿐더러 어떤 경의조차 표시하는 듯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까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에 대해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따님의 장래 남편 되실 분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하고 라주미힌은 열띤 어조로 똑똑히 대답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어떤 빈말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건...그건....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 자신이 자기 의사대로 선택하셨다는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런 겁니다. 혹제 제가 어제 그분에 대해서 나쁘게 말했다면, 제가 꼴사납도록 취해서....전혀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완전히 돌아버렸어요...그래서 오늘은 부끄러워서 뵐 낯도 없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도 얼굴을 붉혔으나 침묵을 깨뜨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루쥔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딸의 조언을 받지 못해서 분명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녀는 연방 빨의 눈치를 살피면서 지금 어떤 한 가지 일이 몹시 마음에 걸린다고 주섬주섬 말했다.

"실은 말이에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분에게는 죄다 털어놔도 괜찮겠지, 두네치카!"

"그럼요, 어머니."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름 아니라"하고 그녀는 괴로움을 털어놓아도 좋다는 승낙을 받자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내려놓듯 급히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아침 일찍 표트르 페트로비치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어제 도착한 것을 알려준 데 대한 회답이지요. 사실 그이가 역으로 마중을 나와준다고 약속했는데 이행을 못 하고, 이 하숙집 주소를 적은 쪽지를 가진 어떤 하인 같은 남자를 대신 보내서 우리를 맞게 했답니다. 그리고 그이 자신은 오늘 아침에 찾아오겠다는 전갈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본인은 오지 않고 이 편지만 왔군요....이야기하기보다는 직접 한번 읽어보세요. 편지 속에 매우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어서...그것이 무엇인지는 읽으시면 곧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 숨김없는 의견을 들려주세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당신은 누구보다도 로쟈의 성격을 잘 아시니까 가장 좋은 충고를 해주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두네치카는 처음부터 이미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데 나는...나는 아직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못잡고 있어요...그래서...당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답니다."

라주미힌은 어제 날짜로 된 편지를 펼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뜻하지 않은 어떤 부득이한 사정으로 플랫폼까지 마중 나가지도 못하는 실례를 범했습니다만, 그 대신 매우 민첩한 남자 한 사람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내일 아침으로 예정했던 방문의 영광도 피치 못할 대법원의 용무 때문에 부득이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을 위해서,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와 더불어 모자와 남매간의 오붓한 상면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내일 오후 정각 8시에 숙소를 방문해서 인사를 드리기로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꼭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내일 만나 뵐 때 로지온 로마느이치는 동석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실은 어저깨 문병 갔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예의 건에 대해서도 상세히 의논을 드리고 아울러 당신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미리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만일 제가 원하는 바를 무시하고 로지온 로마느이치와 만나게 된다면 저는 즉각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때의 모든 책임은 당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양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저께 문병 갔을 때 정말 중병같이 보였던 로지온 로마느이치가 두 시간 뒤엔 갑자기 완쾌된 것 같았고, 따라서 외출할 때 들를 수도 있는 일이라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이 직접 목격하여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어젯밤 말발굽에 밟혀 죽은 어떤 주정뱅이네 집에서 아드님은 추잡한 영업에 종사하는 그 집 딸에게 장례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25루블을 내주었습니다. 저는 그 돈을 만드시느라 당신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잘 아는 터이므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으로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에게 제 한없는 존경의 뜻을 전해주시고, 당신에게 바치는 제 경의와 심복의 뜻을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

P. 루쥔 올림

 

"어떡하면 좋겠어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풀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울먹울먹하며 말했다. "어떻게 내 집으로 로쟈에게 오지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 애는 어저깨도 그처럼 완강하게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거절해버리라고 했는데, 이쪽은 또 이쪽대로 그 애를 방에 들여놓지 마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아니, 그 애는 이런 일을 알면 그야말로 일부러라도 올 거예요...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의 결심대로 하시면 되겠지요." 라주미힌은 침착하게 즉시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안 돼요! 딸이 말하는 것은....딸은 당치도 않은 말을 합니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딸의 말은 로쟈도 오늘 저녁 8시에 오게 해서 두 사람을 동석시키는 편이 낫다는 거예요. , 그편이 꼭 좋다는 건 아니지만, 무엇 때문인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군요...하지만 나는 로쟈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힘을 빌려서 무슨 꾀를 써서라도 그 애가 오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그토록 성미가 급하니 말이에요...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조금도 모르겠어요....도대체 어떤 주정뱅이가 죽었다는 건지, 딸이라는 건 또 뭔지, 무슨 이유로 그 애가 그 딸에게 있는 돈을 다 털어주었는지...그 돈은...."

"그토록 수고해서 만든 돈인데, 그런 말씀이죠, 어머니"하고 아브도치아 로마노브나가 덧붙였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어조로 라주미힌은 말했다. "만약에 두 분께서 어제 로쟈가 음식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신다면! 확실히 머리는 좋은 친굽니다....! 어디서 사람이 죽었다는 일과 어떤 처녀가 어떻다는 얘기는 어제 집으로 돌아갈때 저한테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어요...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어제는......."

"그보다도 어머니, 우리가 오빠한테 가보는 편이 좋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곧 알게 되겠죠, 확실히 그래요. 게다가 시간도 다되었어요. 어머나! 벌써 10시가 지났네요!" 목에 늘어뜨린 자기의 금시계를 흘긋 보고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것은 가느다란 베네치아식 사슬이 달리고 칠보가 든 훌륭한 금시계여서 다른 의상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약혼자의 선물이군'하고 라주미힌은 생각했다.

", 정말 시간이 됐구나...시간이 됐어, 두네치카, 시간이 됐어."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불안스레 서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 꾸물거리다가는 어제 일로 화가 난 줄 알겠다. 아아, 야단났군!"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급히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썼다. 두네치카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가 끼고 있는 장갑은 낡은 정도가 아니라 여기저기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라주미힌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보기에도 초라한 이 복장이 오히려 헙수룩한 옷을 훌륭하게 입을 줄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어떤 특수한 기품을 이 모녀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경건한 마음으로 두네치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녀와 동행한다고 생각하니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 여왕은' 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옥중에서 양말을 손수 기웠다는 그 여왕은, 더없이 화려한 의식이나 행차 때보다 차라리 그 순간이 더 진짜 여왕답게 보였을 것이다.'

"아아."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탄식했다. "정말이지 내가 내 아들을, 사랑스럽고 사랑스런 내 아들을 만나는 걸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다니.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정말 두려워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두려워할 것 없어요, 어머니." 두냐는 어머니에게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그보다도 오빠를 믿으세요. 난 믿어요."

"아아, 어쩌면 좋으냐! 나도 믿고는 있다. 하지만 간밤엔 한잠도 못 잤단다"하고 불쌍한 부인은 외쳤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 두네치카, 내가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였을 때 뜻밖에도 죽은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꿈을 꾸었단다...온통 흰옷을 입고 말이야....내 곁에 와서 손을 잡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이지를 않겠니. 그야말로 사나운 얼굴을 하고 마치 나를 힐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겠지! 아아, 정말 무섭더구나.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당신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었답니다!"

", 전 모릅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누굽니까?"

"글쎄, 갑자기 죽었다니까요!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나중에 하세요, 어머니." 두냐가 참견했다.

"이분은 아직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누군지 모르시잖아요!"

"아니, 모르시던가요? 나는 또, 무엇이든지 죄다 알고 계신 줄만 알았는데. 용서하세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요 며칠 동안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어서...나는 완전히 당신을 우리의 구세주같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뭐든지 다 아시는 줄로만 알고. 나는 당신을 한집안 식구처럼 생각하고 있어요...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노엽게 생각지는 마세요. 어머나, 저런, 오른손이 왜 그렇죠?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나요?"

", 좀 부딪쳤습니다." 라주미힌은 행복에 겨워 중얼거렸다.

"나는 가끔 지나치게 허물없이 얘기를 하곤 해서 두냐가 늘 고쳐 준답니다....아아, 그건 그렇고, 그 애는 어쩌면 그런 다락방 같은 데서 살고 있을까! 그런데 이젠 일어났을까요? 그런데도 안주인은 그걸 방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런데 당신은 아까 이렇게 말하셨죠, 그 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털어놓길 싫어한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원래의 그 못된 성격 때문에 그 애를 귀찮게 만들지나 않을는지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그 애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가르쳐주세요. 난 보시다시피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까요."

"혹시 얼굴을 찡그리거든 너무 귀찮게 여러 가지 묻지 않도록 하십시오.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묻지 마십시오, 싫어하니까요."

"아아,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어머니 노릇하기가 이렇게도 괴로운가요! , 벌써 층계로군요...어쩌면 이 층계가 이다지도 무서울까!"

"어머니, 안색이 창백해요, 진정하세요, 제발. "

두냐는 아양을 떨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보고 오빠가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어머니 쪽에서 그렇게 괴로워하시면 어떡해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일어났는지 어떤지 제가 먼저 보고 오겠습니다."

두 여인은 앞서가는 라주미힌을 따라서 조용히 층계를 올라갔다. 그리고 4층까지 올라가서 안주인네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방싯하게 열린 문틈으로 날카로운 검은 눈 두 개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엿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양쪽 눈이 부딪치는 순간, 문은 갑자기 꽝 닫혔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좋아요, 좋습니다!"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으면서 조시모프가 명랑하게 외쳤다. 그는 10분쯤 먼저 와서 어제처럼 소파 귀퉁이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옷을 단정히 입고, 공들여 세수까지 하고, 머리를 빗고 맞은편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방은 일시에 가득 차버렸으나, 그래도 나스타시아는 손님들을 따라 비집고 들어와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실 라스콜니코프는 거의 건강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특히 어제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다만 안색이 매우 나쁘고, 주의력이 산만하고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어디를 다쳤거나, 그렇잖으면 심한 육체적 고통이라도 참고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술은 꽉 다물고, 눈은 타는 듯 번쩍였다. 그는 마치 무슨 의무라도 이행하듯이 마지못해 입을 놀렸으나, 그 거동에는 어딘지 불안한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손에 붕대라도 감았거나 손가락에 엷은 비단이라도 두르고 있다면, 가령 손가락에 곪아서 몹시 쑤신다든가 손에 부상을 입었다든가 아무튼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창백하고 음울한 얼굴도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들어섰을 때는 순간적으로 반짝 빛난 듯했는데, 그것도 다만 전의 괴로운 방심 상태의 표정에 한층 더 집약된 고민의 빛을 더해준 데 지나지 않았다. 빛은 곧 사라졌으나 고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환자 치료를 갓 시작한 의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다운 정열로 자기 환자를 지켜보며 연구하고 있던 조시모프는, 육친을 만난 기쁨 대신에 앞으로 한두 시간 피할 수 없는 고민을 견디려는 남모르는 괴로운 각오의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계속된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환자가 숨기고 있는 상처들을 건드려 자극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동시에 어제는 사소한 말끝에도 거의 미친 듯이 흥분하던 저 편집광이 오늘은 용케도 자기를 억제하고 감정을 감추는 솜씨에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젠 나 자신도 거의 건강을 회복한 것을 알 수 있어요." 상냥하게 어머니와 동생에게 키스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이 한마디로 어머니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이건 어제 식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그는 라주미힌을 돌아보고 정답게 그 손을 잡아 흔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오늘 이 사람을 보고 놀랐을 정돕니다." 불과 10분 만에 환자와의 대화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잃고 말았던 조시모프는 세 사람이 들어온 것을 기뻐하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대로 간다면 삼사일 후에는 완전히 이전 상태로 회복될 겁니다. 그러니까 1개월, 아니 2개월... 혹은 3개월 전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오래전에 시작돼서 죽 잠복해 있던 병이니까요...어때요, 이젠 고백하시죠, 당신 자신에게도 짚이는 데가 있을 테니?" 또 무슨 일로 환자를 자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그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라스콜니코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런 뜻에서 말하는 겁니다"하고 조시모프는 마음을 놓고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어요. 지금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이 점만은 특히 강조하고 싶군요. 즉 당신의 병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최초의 원인, 말하자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해지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악화될 겁니다. 그 근본적 원인이 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총명한 분이니까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관찰을 시도하고 계실 테죠. 내가 보기에 당신은 대학을 그만두면서부터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규칙적인 일을 하고, 장래의 확고한 목표를 정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맞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롭니다....앞으로 나도 되도록 빨리 대학에 복학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만사가...순조롭게 잘될 겁니다......"

여인들에 대한 효과를 노려서 이러한 충고를 시작한 조시모프도 말을 마친 뒤에 상대방의 얼굴을 힐끗 보고 그의 얼굴에서 어김없는 조소의 빛을 발견했을 때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었다. 풀헤리야 엘렉산드로브나가 곧 조시모프에게 인사를 하고, 특히 어제 밤중에 숙소까지 와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람이 밤중에 찾아갔었다고요?" 라스콜니코프는 놀란 듯이 물었다. "그럼 오랜 여행을 하시고 제대로 잠도 못 주무셨겠군요?"

"아니다, 로쟈, 그건 2시 전의 일이야. 집에 있을 때도 나나 두냐는 2시 전엔 자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 역시 이분에겐 무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계속했다. "돈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하고 조시모프를 돌아보았다) 나는 왜 당신한테서 이렇게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서...그래서 나는 도리어 괴로울 지경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노골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 그렇게 화내실 것까진 없습니다." 조시모프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첫 환자니까, 하는 정도로 해두지요. 사실 갓 개업한 우리 의사들은 최초의 환자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법입니다. 개중에는 거의 반하다시피 하는 의사도 있거든요. 게다가 아직은 환자도 그다지 많지 않고요."

"저 사람에 대해선 뭐 새삼스레 말하지도 않겠습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라주미힌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저 사람 역시 나한테서 받은 거라곤 모욕과 수고밖에 없으니까요."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넨 오늘 좀 감상적인 기분인가 보군그래?" 라주미힌이 외쳤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좀 더 예리한 통찰력이 있었다면, 결코 감상적인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기분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오빠를 지켜보았다.

"어머니, 어머니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마치 아침부터 외워둔 글귀라도 읽어 내려가듯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어머니가 어제 여기서 얼마나 마음 졸이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갑자기 웃음을 머금고 누이동생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아까와는 달리 꾸밈없는 진실한 감정이 반짝이고 있었다. 두냐는 곧 내민 손을 잡고, 기쁨과 감사가 깃든 마음으로 오빠의 손을 꼭 눌러주었다. 이것이 어제의 언쟁 이후 그가 처음으로 누이 동생에게 보여준 태도였다. 말없이 이뤄진 남매간의 완전한 화해를 보고 어머니의 얼굴은 환희와 행복으로 빛났다.

"이래서 나는 이 친구를 좋아하는 거야!" 무슨 일이든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라주미힌은 의자에 앉은 채로 힘차게 몸을 돌리면서 속삭였다. "저 친구에겐 이런 멋진 제스처가 있단 말이야......"

'저 애가 하는 일은 모두 저렇게 잘돼 나간다니까!'하고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즉흥적인 동작이야! 어제 있었던 동생과의 의혹을 어쩌면 저렇게 간단히 부드럽게 풀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저 슬쩍 손을 내밀고 상냥한 눈길을 보냈을 뿐인데...그리고 저 애의 저 아름다운 눈, 저 아름다운 얼굴! 두네치카보다도 아름답다니까....그렇지만 아아, 저 해의 옷차림, 어쩌면 저렇게 지독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까! 아파나시 이바노비치네 가게에서 심부름하는 바샤도 저보단 나은 꼴을 하고 있는데..., 당장 저 애한테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다....그리고 실컷 울고 싶다 하지만 무섭다, 무서워....어쩌면 저 애가 저렇게....아아! 저렇게 상냥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나는 무서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무서운 걸까?'

"아아, 로쟈, 너는 믿어지지 않겠지만"하고 아들의 말에 황급히 대답하려고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을 꺼냈다. "두네치카도 나도 어제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나고 지나가 버렸으니 우린 다시 행복하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말도 하는 거지만, 생각해봐라, 너를 안아보려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아무 데도 안 들르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그 여자가..., 거기 계시는군, 안녕하세요. 나스타시야! 저 사람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지를 않겠니. 네가 고열로 누워 있었는데, 조금 전에 의사 몰래 열에 들뜬채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모두 찾으러 나갔다고. 그때의 우리 심정은 아마 너도 모를 게다! 나는 곧 집에서 친근하게 지내던 네 아버지의 친구 포탄치코프 중위의 비극적인 최후가 생각나더구나. 너는 아마 생각나지 않겠지만, 그 사람 역시 고열로 그렇게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마당 우물에 빠져버렸단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끌어올렸지. 물론 우리도 자꾸만 과장해서 생각이 되더구나. 그래서 표트를 페트로비치의 힘이라도 빌리려고 그 사람을 찾으러 막 나가려던 참이었단다...글쎄, 얘야, 우린 단둘뿐이 아니냐, 단둘이서 어쩌겠니"하고 그녀는 가련한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끌었으나, 문득 이젠 다시 모두 행복해졌는데도 루쥔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 그래요....그야 물론...화나실 일이죠...."라스콜니코프는 대답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그 표정이 하도 산만하고 거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어서 두네치카는 놀란 얼굴로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열심히 생각해내려고 애쓰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 그렇지, 제발 어머니, 그리고 두네치카 너도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제가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기가 싫어서 이리 와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로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도 역시 놀라서 소리쳤다.

'왜 오빠는 저렇게 의무적인 말만 할까?'하고 두네치카는 생각했다. '화해하는 것도, 사과하는 것도 마치 기도문이나 학과 내용을 암송하는 것 같으니.'

"저는 눈을 뜨자마자 가려고 했지만 옷 때문에 못 갔어요. 실은 어저께 이 사람에게...나스타시야에게 말해두는 걸 잊어서...피 묻은 것을 빨아달라는 걸...그래서 이제 막 옷을 갈아입은 참입니다."

"피라니! 도대체 무슨 피?"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질겁했다.

'실은 이렇게 된 거예요...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 피라는 건 다름 아니라, 어제 약간 열에 들뜬 듯한 기분으로 거리를 헤매다가 마차에 치인 사람하고 부딪쳤기 때문이에요...어떤 관리하고 말이에요."

"열에 들떴다고? 그래도 자넨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군 그래." 라주미힌이 가로챘다.

"그건 사실이야." 무언가 특별히 마음 쓰는 데가 있는 듯한 어조로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모든 걸 다 기억하지. 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하고 나오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건 아주 잘 알려진 현상이지요." 조시모프가 끼어들었다. "일의 실행은 때로 지극히 교묘하고 교활할 정도지만, 그 행위의 지배력, 즉 행위의 근본은 혼란스러워서 여러 가지 병적인 인상에 좌우되죠. 이를테면 꿈 같은 것이겠지요."

'저 친구는 나를 광인과 다름없이 보고 있나본데, 어쩌면 그게 유리할지도 모른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겅강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불안한 듯 조시모프를 보면서 두네치카가 지적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조시모프는 대답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대개의 경우 사실 광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환자'는 우리보다 발광의 정도가 심할 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한계를 그어둘 필요가 있죠. 완전한 조화를 지닌 인간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만 명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몇십만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 있을까요. 그나마도 꽤 불완전한 표본에 지나지 않겠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화제에 열중해버린 조시모프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광인'이라는 낱말에 좌중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아무런 주의도 돌리지 않은 듯이 파리한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띤 채 사색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 치인 사내는 어떻게 됐지? 아까 내가 말을 중단시켰지만........."라주미힌이 성급히 소리쳤다.

"뭐라고?" 라스콜니코프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반문했다. ", 그래...그래서 그 사내를 집까지 옮기는 걸 거들어주다가 피투성이가 돼버린 거지. 그런데 어머니, 저는 어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가지 저질렀습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어머니가 보내주신 돈을 어제 몽땅 줘버렸어요. 그 사람의 아내에게...장례 비용으로. 지금은 과부가 된, 폐병을 앓는 불쌍한 여잡니다. 고아와 다름없는 세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어요. 집안은 텅 비고, 그 밖에 또 딸 하나가 있긴 합니다만...정말 그 꼴을 보셨더라면 어머니도 아마 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나한테 그럴 권리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마련해주신 돈인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남을 도우려면 우선 그 권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Crevez, chiens, si vous n'etespas contents('그게 싫다면 마음대로 뒈져라, 개자식'이라는 뜻)이니까요!"하고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렇지, 두냐?"

"아니, 그렇지 않아요"하고 두냐는 또렷이 대답했다.

"저런! 그럼 너도...그런 생각인가 보구나!" 그는 증오에 가까운 눈초리로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조소하듯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의당 그걸 생각했어야 했어. 하지만 뭐, 괜찮아, 잘된 일이야. 너한텐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어느 선까진 가보는 거야. 그리고 그걸 넘어서지 않으면 불행해지지만, 넘어선다 해도 한층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선이지. 그러나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이야기야!" 저도 모르게 열을 올린 것을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그는 짜증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저는 그저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띄엄띄엄 말을 맺었다.

"이제 그만해라, 로쟈, 나는 네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훌륭하다고 믿으니까!" 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했다.

"믿지 않는 편이 나을 거예요." 미소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대답했다. 침묵이 뒤를 이었다. 이 모든 대화, 침묵, 화해, 그리고 용서에도 그 어떤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모두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군.' 치뜬 눈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훑어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잠자코 있을수록 더욱더 두려움을 느꼈다.

'헤어져 있을 대는 나도 두 사람을 무척 사랑했던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 로쟈야,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라뇨?"

"저런, 마르파 페트로브나 말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부인! 그 부인에 대해서는 편지에도 여러 번 써 보냈는데."

"아아, 생각이 납니다. 그 여자가 죽었다고요? 정말이에요?" 그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별안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죽었어요? 왜요?"

"글쎄 그게, 아주 갑작스레 죽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들이 흥미를 보이는데 용기를 얻어 성급히 말했다. "바로 내가 너한테 편지를 낸 그때였다. 바로 그때였어. 바로 그날이지! 듣자니 그 무서운 남자가 아무래도 그 원인인 것 같아. 남자가 부인을 몹시 때렸다는 거야!"

"그 부부는 전에도 그랬었니?" 누이동생을 보면서 물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예요. 부인한텐 늘 관대하고 친절했어요. 대개의 경우 부인의 성격에 대해 지나치게 대범했을 정도죠, 7년 동안이나. 그러다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울분을 터뜨린 거예요."

"7년이나 참아왔다면 그다지 무서운 사내도 아닞 뭐야. 두네치카, 너는 그 사내를 두둔하는 것 같구나?"

"아녜요, 아녜요. 그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상상도 못 할 정도예요." 두냐는 몸서리라도 칠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침에 일이 일어났어."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성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부인은 점심 식사를 마치면 곧 시내에 나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렀지. 그이는 언제나 그런 때면 시내에 나가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식사 때도 매우 맛있게 먹었다는 거야......"

"매를 맞은 후에도요?"

"아무튼 그 여자에겐 언제나 그런 습관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내에 늦지 않도록 곧 목욕탕에 들어갔던 모양이야. 보건대 그 여자는 목욕 요법을 하고 있었나 봐. 거기에는 냉천이 있어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물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발작이 일어났다는구나!"

"그야 그렇겠죠!" 조시모프가 말했다.

"무척 심하게 때렸나 보군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두냐가 한마디 했다.

"! 하지만 어머니는 참 남의 일에 호기심도 많군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다 하시는 걸 보니."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초조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뇌까리듯이 말했다.

"얘야,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두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건 정말 사실이에요." 두나는 엄한 눈초리로 오빠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층계를 오르실 때부터 무서워 성호를 긋기까지 했어요."

그의 얼굴은 금방 경련이라도 일어날 듯이 비뚤어졌다.

",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두냐? 로쟈, 제발 화내지 마라. 두냐, 어쩌자고 또 그런 소리를!"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하기야 나는 이리 오는 도중에 기차에서 죽 공상을 했지. 우리가 서로 만나는 광경이며, 서로 여러 가지 묵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을...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어찌나 기쁜지 먼 길도 잊을 정도였다! 아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두냐, 너는 정말 쓸데없는 말을....나는 네 얼굴을 보고 있기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로쟈......"

"그만두세요, 어머니." 그는 외면을 한 채 어머니의 손을 꼭 쥐면서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얘기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또다시 최근의 그 무서운 감각이 죽음처럼 싸늘하게 그의 가슴을 스쳐간 것이다. 불현듯 그는 지금 자기가 무서운 거짓말을 한 것을 다시금 똑똑히 자각했다. 앞으로는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겠거니와,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또 어느 누구하고든 더는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괴로운 상념이 그에게 준 인상이 너무 강했으므로, 그는 한순간 거의 자기 자신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아니, 왜 그래?" 라주미힌이 그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모두 따분하게 앉아만 있나!" 그는 별안간 이렇게 소리쳤다. 그것은 정말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좀 해요! 정말이지 왜 이렇게들 멍청히 앉아만 있는거요! , 무슨 이야기든지 하세요! 이야기 합시다...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잠자코 있단...., 무슨 이야기든!"

"아아, 다행이군! 나는 또 어제 같은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지!"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왜 그래요, 로쟈?" 미심쩍은 얼굴로 두냐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실은 나도 혹시나 했습니다만...."소파에서 일어나며 조시모프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이만 가봐야 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참 훌륭한 분이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 훌륭하고 우수하고 교양 있는 똑똑한 사람이죠...."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전에 없이 원기 있고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병이 나기 전에 어디서 만났는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나는군. 분명히 어디서 만나긴 한 것 같은데...하지만 이 친구도 역시 좋은 사나이입니다!"하며 라주미힌을 턱으로 가리켰다.

"마음에 들지, 두냐?" 그는 누이동생에게 묻고는 왜 그런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 무척" 하고 두냐는 대답했다.

"에잇, 이 사람아...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몹시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진 라주미힌은 이렇게 말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방긋이 웃었으나 라스콜니코프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이봐, 어딜 가려나?"

"나도...볼일이 있어."

"볼일은 무슨 볼일이야. 남아 있어! 조시모프가 가니까 자네도 가려는 거지. 가면 안 돼...그러나 몇 시나 됐지? 12? , 멋진 시계를 갖고 있구나, 두냐? 그런데 왜 모두 잠자코 있지? 나만, 나 혼자만 지껄이게 하고......"

"이건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선물로 준 거예요." 두냐가 대답했다.

"굉장히 비싼 거란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덧붙였다.

"그래! 그런데 너무 커서 여자 시계 같지가 않구나."

"나는 이런 게 좋아요"하고 두냐는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약혼자의 선물은 아니었군'하고 라주미힌은 생각하자 공연히 마음이 기뻤다.

"나는 또 루쥔의 선물인가 했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아니다, 그이는 아직 두네치카에게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았단다."

"그랬군요! 그런데 어머니, 생각나세요? 제가 언젠가 연애를 해서 결혼하려던 일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화제의 전환과 그런 말을 끄집어낸 아들의 어조에 적이 놀란 모양이었다.

", 생각나고말고!"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말하고, 두네치카와 라주미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렇지! 그런데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까?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으니. 아주 병약한 처녀였죠." 그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정말 허약했어요. 거지에게 적선하기를 좋아했고, 늘 수도원만을 꿈꾸었죠. 한번은 나한테 수도원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 그래...생각나는군. 지독히도 못생긴 여자였습니다. 정말 왜 그때 그런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요. 아마 늘 앓고 있었기 때문일거예요. ...게다가 절름발이든가 꼽추였다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죠.(그는 생각에 잠긴 듯 방긋 웃었다) 글쎄...봄날의 꿈이었다고나 할지요......."

"아니에요, 봄날의 꿈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두네치카는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유심히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말은 잘 못 들었든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한테 다가가서 키스를 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너는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는구나!"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감동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를? 아직도? 아아, 그렇죠...어머니는 지금 그 여자 이야기를 하시는 거로군요! 아닙니다, 이제 그런 일은 모두 저세상 일 같아서....그리고 까마득한 옛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이 이 세상 일 같지가 않아요......"

그는 유심히 좌중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 계시는 어머니조차도...마치 천리 밖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에잇, 제기랄! 도대체 우린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왜 꼬치꼬치 캐붇는 거예요?" 그는 화가 난 어조로 이렇게 덧붙이고 입을 다물더니 손톱을 깨물며 또다시 생각에 잠겨버렸다.

"그러넫 네 방은 어쩌면 이 모양이냐, 로쟈, 마치 관 속 같구나"하고 괴로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불쑥 알렉산드로브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우울증에 걸린 것도 절반은 아마 이 방 탓일 게다."

"방 말이에요?" 그는 멍청히 대답했다. "그래요, 방도 많은 작용을 했겠죠...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그러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머니는 아마 못 느끼셨겠지만 지금 아주 기묘한 착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띠면서 불쑥 이렇게 덧붙였다.

이 상태가 조금만 더 계속되면 이 모임도, 3년 만에 만난 이 육친도, 그리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에서 주고받은 이 친근한 어조도 그로서는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 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오늘 결말을 지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가 그가 눈을 떴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었다. 여기서 그는 좋은 돌파구가 생겼다고 기뻐하며 그 문제에 달려들었다.

"그런데 두냐." 그는 진지하면서도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물론 사과하지만, 그 근본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나의 의무로 다시 한번 너에게 다짐해둔다. 나를 택하느냐 루쥔을 택하느냐다. 나는 비열한 놈이 되어도 할 수 없지만, 너까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누구든 한 사람이면 충분해. 만일 네가 루쥔한테 간다면 나는 그때부터 너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로쟈, 로쟈! 그건...어제와 똑같은 이야기지 뭐냐!"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애절하게 외쳤다. "너는 무엇 때문에 자신을 비열한 놈이라고 하는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어제도 마찬가지였어......"

"오빠"하고 두냐 역시 냉랭하고도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오빠에게 잘못이 있어요. 나는 밤새껏 생각해보고 그 잘못을 발견했어요. 즉 문제는 이거예요. 오빠는 내가 누구한테 누군가를 희생으로 바치려 한다고 상상하고 계신 모양이지만, 그런 일을 절대로 없어요. 나는 다만 나 자신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뿐이에요. 우선 나 자신이 괴로우니까요. 물론 그 때문에 내 육친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동기가 되어 내가 결심한 건 아니에요...."

'거짓말을 하는군!' 그는 홧김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만한 것 같으니! 속으론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면서도 그걸 자인하려 들지 않는구나! 아아, 모두 비열한 성격들이다! 저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증오와 다름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니까...아아! 모두 꼴 보기 싫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하겠어요." 두네치카는 말을 계속했다. "그 이유는 괴로운 일 두 가지 중에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쪽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그이를 속인다고는 할 수 없어요...오빠, 왜 지금 그런 웃음을 지으셨죠?"

그녀 역시 발끈 화를 냈다. 그리고 그 눈에는 분노의 빛이 번쩍였다.

"모든 것을 이행하겠다고?" 그는 독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되물었다.

"어느 정도까지는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구혼할 때의 태도와 그 방식으로 보아, 그이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곧 알았으니까요. 그는 물론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이는 내 가치도 평가해주리라고 믿어요...아니, 왜 또 웃으세요?"

"하지만 넌 또 왜 얼굴을 붉히느냐?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알겠니? 넌 억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여자다운 고집만으로 나한테 자기주장을 내세워 보이기 위해서, 너는 루쥔을 존경할 수 없어...나는 그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도 해봤다. 결국 너는 돈 때문에 자기를 팔려는 거야. 그러니까 어쨌든 비열한 행위임에 틀림없지. 그러나 나는 네가 아직까지 얼굴을 붉힐 수 있다는 것만도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요. 난 거짓말이 아녜요!" 두네치카는 차츰 냉정을 잃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나도 그이가 내 가치를 인정하고 아껴주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결혼하지 않을 거고요. 다행히 나는 오늘이라도 그 확신을 얻게 될 거예요. 이 결혼은, 오빠가 말씀하시는 것이 옳고 내가 정말 비열한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내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오빠로서는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어째서 오빠는 자기에게도 없을지 모르는 용기를 나한테 요구하시는 거죠? 그것은 지나친 횡포예요, 억압이에요! 만일 내가 누군가 남의 일생을 망친다면 또 몰라도, 이건 다만 나 혼자의 일이 아니냐 말이에요....나는 아직 남을 죽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죠? 왜 그렇게 파랗게 질리세요? 로쟈, 왜 그래요, , 로쟈!"

"아아, 이를 어쩌나! 또 기절해버렸군!"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외쳤다.

"아니, 아니...그런 소리 말아요...아무것도 아니에요!....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지 기절은 무슨 기절이에요...뭐든 다 기절인 줄 아세요!...흐음! 그래서...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 그렇지, 너는 오늘 당장 네가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있고 그 사람도 너를 인정해주리라는 확신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건 무슨 뜻이니, ? 너는 아까 분명히 오늘이라고 말했지?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어머니,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편지를 오빠한테 보여주세요." 두네치카는 말했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손으로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는 남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받았으나, 펼쳐보기 전에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한 얼굴로 두네치카를 바라보았다.

"이상한데." 마치 무언가 새로운 상념에 몹시 놀라기라도 한 듯이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쓰는 걸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지? 제 마음대로 아무하고나 결혼하라고 내버려 두면 되잖나 말이야!"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으나 목소리는 꽤 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어떤 이상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하여 두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누구보다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뭔가 색다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

"이거 참 놀라겠는걸." 잠깐 생각한 뒤에 편지를 어머니에게 돌려주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변호사라 늘 소송 사건만 취급해서 그런지 말할 때도...더러운 버릇이 있지만, 글 쓰는 데도 영 무식쟁이나 다름 없군."

좌중에 약간 동요의 빛이 보였다.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쓰잖아." 라주미힌이 불쑥 주석을 달았다.

"자네도 읽은 게로군?"

"."

"우리가 보여드렸다, 로쟈. 우린 아까...서로 의논을 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이른바 재판소 식 문체라는 거야." 라수미힌이 가로막았다. "재판소 문서는 아직도 그런 투로 쓰고 있거든."

"재판소 식? , 이게 재판소 식, 사무가 식이라는 거군. 전혀 무식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학적인 것도 아니고, 결국 사무가 식이로군그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자기가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진 않아요. 오히려 혼자 힘으로 자기 길을 개척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오빠의 새로운 어조에 다소 모욕을 느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자랑으로 삼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두냐, 내가 이 편지에 대해서 이런 경박한 비평밖에 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는 기분이 나쁜 모양이구나. 그리고 내가 홧김에 너를 곯려주려고 이런 쓸데없는 말을 끄집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게 아니야. 이 편지의 문체와 관련해서 이번 경우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책이믄 당신들에게 있다'는 매우 의미심장하고도 분명한 표현이 있을뿐더러, 내가 가면 즉각 그 자리를 물러가겠다는 위협은...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두 사람도 버리고 말겠다는 공갈과 마찬가지란 말이다. 페테르부르크까지 불러 올려다놓고 이제 와서 버리겠다는 거야.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루쥔한테서 이런 식의 편지를 받고도 가령 이 사람이나(라주미힌을 가리켰다) 또는 조시모프나, 그렇잖으면 우리 가운데 누구한테서 그런 편지를 받았을 때처럼 화도 낼 수 없다는 거냐?"

"그게 아녜요." 두네치카는 활기를 띠며 대답했다. "나도 잘 알겠어요, 이 편지는 너무나 유치하다는 것을. 그리고 문장을 쓰는 재주도 없다는 걸 알겠어요...오빠의 평은 정말 적절했어요. 난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예요......"

"이게 재판소 식 표현이라는 거다. 하기는 재판소 식으로 쓴다면 이렇게밖엔 쓸 수가 없으므로, 어쩌면 그 사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례해졌는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나는 너를 조금 더 실망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편지에는 또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 나에 대한 비방이지. 그것도 꽤 졸렬한 비방이야. 나는 어제 곤경에 빠진 폐병쟁이 미망인에게 돈을 주었어. 그러나 '장례 비용이라는 명목으로'가 아니라, 분명히 장례비로 준 거야. 게다가 그 집 딸, 그 사람이 말하는 '추잡한 영업에 종사하는 처녀'에게, 생전 처음 보는 그 여자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니라 바로 미망인에게 주었다. 이러한 모든 점으로 보아, 그 사람이 나를 중상하고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너무나도 성급한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이것 역시 재판소식 표현일 테지. 즉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성급하고 단순한 수법이야. 그 사람은 영리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 모든 것으로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너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요는 네게 교훈이 될까 해서고, 또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야......"

두네치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아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다만 저녁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면 로쟈, 너는 대체 어떻게 결정할 작정이냐?" 뜻하지도 않은 그의 사무적인 어조에 더한층 불안을 느끼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요?"

"글쎄,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지금 말한 대로 오늘 저녁에 네가 오지 않도록...만약 네가 오면 곧 물러가겠다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오겠니?"

"아니, 그거야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첫째로 어머니가 결정하실 일이지요. 만약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요구를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두냐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역시 모욕을 느끼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나는 두 분이 좋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무관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두네치카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나도 거기에 찬성이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오빠, 나는 그 자리에 오빠가 꼭 참석하시도록 부탁하기로 결심했어요." 두냐는 말했다.

"오시겠죠?"

"가지."

"그리고 당신한테도 오늘 저녁 8시에 우리한테 와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라주미힌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분도 오시라고 했어요."

"잘했다. 두네치카. , 이제 모두 그렇게 결정했으니"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덧붙였다. "결정한 대로 하도록 하자. 나도 그편이 마음이 편하다. 나는 눈가림을 한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하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그다음에야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화를 내든 말든 알 게 뭐냐!"

바로 이 순간, 조용히 문이 열리고 겁먹은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 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그쪽을 돌아다보았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녀가 누구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였다. 그는 어제 이 처녀를 처음 보았지만, 그러한 순간이고 그러한 환경이기도 한 데다 또 그녀도 그러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억 속에는 전혀 다른 인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녀는 초라할 만큼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직 무척 어려서 앳된 소녀처럼 보였는데, 몸가짐은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표정만은 맑았지만 어딘지 좀 두려워하는 빛이 드러나보였다. 그녀는 몹시 허술한 평상복을 입고 유행에 뒤떨어진 낡은 모자를 썼으나, 손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파라솔을 들고 있었다. 뜻밖에도 방 안에 사람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녀는 당황했다기보다 완전히 얼어버려서 마치 어린애처럼 겁에 질려 곧 되돌아가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아아...당신이었군요......" 라스콜니코프도 무척 놀라서 이렇게 말했으나, 곧 자신도 당황해버렸다.

바로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루쥔의 편지로 '추잡한 영업에 종사하는 처녀'의 존재를 다소나마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방금 루쥔의 중상을 반박하고 그 처녀는 처음 만났을 뿐이라고 해명했는데, 갑자기 그 본인이 이 자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추잡한 영업에 종사하는 처녀'라는 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반박하지 않았던 것을 상기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어렴풋이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좀 더 유심히 처녀를 쳐다보는 사이에 그렇지 않아도 비하된 존재가 더욱더 자신을 비하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그녀가 가여워졌다. 그리고 그녀가 공포를 느낀 나머지 도망치려는 듯한 몸짓을 했을 때는 마치 가슴 속에서 무언가 홱 뒤집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눈짓으로 그녀를 멈춰 세우면서 그는 황급히 말했다. ", 어서 앉으십시오. 아마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심부름으로 오셨겠지요. 아니, 이쪽 말고 그쪽으로 앉으십시오...."

세 개밖에 없는 라스콜니코프의 의자 가운데 하나를 문 옆에 놓고 앉아 있던 라주미힌은 그녀에게 길을 비켜주느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라스콜니코프는 조시모프가 앉아 있던 소파의 한쪽 끝을 권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지나치게 다정한 듯도 하고, 또 소파는 자기의 침대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급히 라주미힌의 의자를 가리켰다.

"자네는 이쪽에 앉게"하고 그는 조시모프가 앉았던 한쪽 구석에 라주미힌을 앉혔다.

소냐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다시피 하며 자리에 앉자 겁먹은 눈으로 두 여인 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녀는 어떻게 자기가 이런 사람들하고 나란히 앉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싶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면서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했다.

"....저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서 들렀는데, 방해가 되어 죄송합니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카체니라 이바노브나 심부름으로 왔어요. 아무도 보낼 사람이 없어서...어머니가 내일 장례식에 꼭 참석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오라고 해서...아침에 ...기도식이 있습니다. ...미트로파니예프스키 묘지에서...그다움 우리 집에서...간단한 식사라도 들어주시면...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어머니의 당부였습니다."

소냐는 말이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도 역시 일어서서 대답했으나, 그 역시 중간에 말이 막혀 끝까지 말해버리지는 못했다.

"제발 좀 앉으십시오." 그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나를 위해 2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소냐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또다시 겁먹은 눈으로 흘긋 두 여인을 보고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라스콜니코프의 파리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의 온몸은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했고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타기 시작했다.

"어머니"하고 그는 강압적이고 굳센 어조로 말했다. "이분은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마르멜라도프씨, 어제 내 앞에서 마차에 치인 그 불행한 사람의 따님입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흘긋 소냐를 보고 가늘게 실눈을 지었다. 로쟈의 집요한 도전적 눈초리에 당황했음에도 그녀는 이런 태도로 일종의 쾌감을 맛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두네치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련한 처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미심쩍은 듯이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소냐는 소개의 말을 듣고 다시 눈을 들려 했으나, 이번에는 전보다 더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당신에게 묻고 싶었습니다만"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급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댁에서는 일이 잘 처리되었습니까? 시끄러운 일은 없었나요?...가령 경찰에서라든지..."

"아니요, 다 끝났어요....사망 원인이 아주 명백하니까 별로 귀찮은 일은 없었어요. 다만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화를 내서...."

"무슨 일로요?"

"시체를 오랫동안 놔둔다고 해서...날씨가 더우니 냄새가 날 수밖에요...그래서 오늘 저녁 기도식 때 묘지로 가져가서 내일까지 예배당에 맡겨두기로 했어요. 처음에 어머니는 싫어하셨지만, 지금은 당신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아셨으므로......"

"그럼 오늘이군요?"

"어머니는 내일 교회 장례식에 당신도 참석해주시길 바라십니다. 그다음 집에서 있을 추도식에도 들러주십사고요."

"어머니는 추도식을 하신답니까?"

", 그저 간단한 식사를. 어머니는 특히 어제 도와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꼭 드리라고 하셨어요...정말이지 당신이 안 계셨으면 장례도 치르지 못할 뻔했으니까요." 갑자기 그녀의 입술과 턱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황급히 다시 눈을 내리깔고는 용기를 내어서 꾹 참아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라스콜니코프는 유심히 그녀를 관찰했다. 몹시 마르고 야윈, 창백한 데다 별로 윤곽이 고르지 않은, 어딘가 뽀죡한 느낌이 드는 조그만 얼굴이어서 조그마한 코와 턱도 뾰족해 보였다.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대신 푸른 눈은 투명하고 맑아서 그것이 생기를 띨 때는 누구나가 끌릴 만큼 얼굴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선량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나 그 모습 전체에는 한 가지 뚜렷한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열여덟 살인데도 그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소녀라기보다 오히려 어린애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어떤 때는 우스울 정도로 그녀의 행동에 나타났다.

"그런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적은 돈으로 어떻게 일을 다 치르고, 게다가 식사까지 대접하려는 겁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끈질기게 말을 계속해 나가면서 이렇게 물었다.

"관도 보통으로 하고...그리고 모든 것을 간략하게 하니까 얼마 들지 않아요...실은 아까 어머니와 둘이서 계산해보았더니 추도식을 할 만큼은 남았어요...어머니는 꼭 그렇게 하고 싶어 하세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어머니한테는 그것만이 위안이니까요...아시다시피 그런 어머니신걸요...."

"알겠습니다, 알고말고요. 그야 물론이지만....그런데 왜 그렇게 방을 둘러봅니까? 아까도 우리 어머니가 마치 관 같다고 하셨답니다."

"어제 우리한테 몽땅 털어놓으셨군요!" 소네치카는 힘 있고 빠른 소리로 속삭이듯 말하고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과 턱이 또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써 아까부터 라스콜니코프의 가난한 살림살이에 충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두네치카의 눈은 이상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조차 상냥한 눈으로 소냐를 바라보았다.

"로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 이따 우리 함께 식사를 하는 거다. 두네치카, 가자....그리고 로쟈, 너는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고 잠시 누워서 쉬는 게 좋겠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오너라...너를 피로하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 , 가고말고요." 그는 일어서면서 황급히 대답했다. "그러나 볼일이 좀 있는데...."

"아니, 설마 식사까지 따로 할 생각은 아니겠지?" 깜짝 놀란 듯이 라스콜니코프를 쳐다보면서 라주미힌이 외쳤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그래, 가고말고, 물론...그러나 자네는 좀 여기 남아주게. 이 사람은 지금 필요 없죠, 어머니? 내가 가로채는 건 아니겠죠?"

"아니다, 그럴 리가 있니! 그럼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당신도 꼭 오셔야 해요, 아시겠죠?"

"제발 와주세요"하고 두냐도 간청했다.

라주미힌은 인사를 했으나 그 얼굴을 기쁨에 빛났다. 그 순간 모두 왠지 갑자기 어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럼 안녕, 로쟈. 아니, 그게 아니지, 이따가 또 보자, 나는 '안녕'이라는 말이 싫어. 안녕, 나스타시야...어머, '안녕'이라고 해버렸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소네치카에게 도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둥지둥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나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마치 자기 체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머니를 따라 소냐의 곁을 지나치면서 공손히 정성 어린 정식 인사를 했다. 소네치카는 놀라고 당황하여 몹시 허둥대며 답례를 했으나,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정중한 태도와 마음씨가 그녀에게 오히려 거북하고 괴로웠는지 그 얼굴에는 일종의 병적인 느낌마저 떠올랐다.

"두냐, 그럼 잘 가거라!" 문간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외쳤다.

", 손을 내줘!"

"어머! 방금 악수하시고서도, 잊었어요?" 상냥하면서도 어색하게 오빠 쪽으로 돌아서며 두냐는 대답했다.

"어떠냐, 한 번 더 하자!" 이렇게 말하고 그는 동생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두네치카는 방긋 웃어 보이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빼고 어머니의 뒤를 쫓아갔다. 왜 그런지 온몸이 행복에 겨운 듯했다.

", 이제야 됐군!" 방에 돌아오자 밝게 갠 눈으로 소냐를 보면서 그는 말했다. "주여, 죽은 자에게는 평안을 주시고, 산 자에게는 더 살것을 허락해주시옵소서!....그렇지 않습니까? ? 그렇지요?"

소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별안간 명랑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죽은 마르멜라도프가 들려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이 순간 불현듯 그의 기억에 되살아났다.

"아아, 두네치카!" 밖으로 나오자마자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말을 꺼냈다.

"거기서 나오니 왜 그런지 나 자신이 이렇게 기뻐지는구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퍽 가벼워진 것 같다. 사실 말이지, 어제 기차 안에서는 설마하니 이런 일을 가지고 기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머니, 오빠는 아직도 불편한 몸이에요. 그걸 어머니는 모르세요? 어쩌면 우리 일을 너무 걱정하다가 건강을 망쳐버릴지도 몰라요. 우리는 좀 더 관대해져야 해요, 그러면 많은 것을 용서해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너도 관대하게 대한 건 아니었어!"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곧 열띤 어조로 시기하듯이 딸의 말을 막았다. ", 두냐, 나는 너희 둘을 비교해보았는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오빠를 닮았니, 얼굴 생김새뿐 아니라 성미까지 말이다! 너희는 모두 우울하고, 침울하고, 화를 잘 내고, 오만하고, 그러면서도 둘 다 마음이 넓어...그런데 그 애가 이기주의자라니, 될 법이나 한 말이니, 두네치카? 그렇지?....아아,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결국 일어날 건 일어나게 마련이에요."

"두네치카, 지금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너도 좀 생각해보려무나! 표트르 페트로비치한테 거절당하면 우린 어떻게 되겠니?" 가엾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경솔하게도 불쑥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값어치가 있겠어요!" 두네치카는 멸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오길 참 잘했구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황급히 딸의 말을 가로막았다.

"로쟈는 어디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조금은 밖을 산책하고 맑은 공기라도 마시는 게 좋겠지....그 방은 숨이 꽉꽉 막히고 정말 지독하더라. 그런데 여기선 어딜 가면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거리에 나와도 바람구멍 하나 없는 방 안 같으니! 아아, 무슨 도시가 이럴까...얘야, 이쪽으로 좀 비켜서라, 깔려죽겠다. 뭔가 나르고 있어! 어머, 피아노를 날라오는구나. 아니, 저런 ...부딪치겠다니까....나는 처녀도 역시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

"어디 처녀 말이에요, 어머니?"

"바로 그 처녀 말이다. 방금 온 소피야 세묘노브나라는 처녀......"

"아니, 왜요?"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드는구나, 두냐. 글쎄,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처녀가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아무 까닭도 있을 리 없어요!" 두냐는 화가나는 듯이 소리쳤다.

"어머니 예감도 참 곤란하군요. 오빠는 어제 처음으로 그 처녀와 만났을 뿐이고, 들어왔을 때 얼른 알아보지도 못했잖아요?"

"글쎄, 두고 보렴!....나는 그 처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제 두고 봐라, 두고 봐. 나는 정말 가슴이 섬뜩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란, 나는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생각나니? 오빠가 그 처녀를 소개할 때 말이다. 난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로쟈는 그 처녀를 우리한테, 더구나 너한테까지 소개하다니! 그러고 보면 그 처녀는 로쟝한테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다!"

"편지 같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어요! 우리에 대해서도 세상에선 마찬가지로 여러 말을 하고 쓰고 했잖아요. 다 잊으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 처녀는....훌륭한 여자이고, 그러한 소문은 모두 터무니없는 낭설인 것 같아요."

"제발 그래 주었으면!"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주책없는 떠버리니까요." 갑자기 두네치카가 이렇게 잘라 말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대화는 끊어져버렸다.

"그런데 여보게,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는데......" 라스콜니코프는 라주미힌을 창문 쪽으로 끌고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당신이 오시겠단다고 전하겠습니다. ...." 소냐는 돌아가려고 인사를 하면서 성급히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소피야 세묘노브나. 우리 이야기는 비밀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아직 나는 당신한테 한두 마디 할 말이 있으니......" 그는 말을 맺기도 전에 뚝 끊어버리고 얼른 라주미힌 쪽으로 돌아섰다.

"자네는 그 친구를 알고 있겠지...뭐랬더라 아,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말이야."

"알다마다! 친척인걸. 그래, 그 친구가 어쨌다는 건가?" 솟구치는 어떤 호기심을 느끼며 라주미힌은 되물었다.

"그자가 지금 그 사건을....그 살인....사건을 말이야....어제 자네들이 얘기한 ....그걸 맡는다고 했지?"

"....그래서?"라주미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전당 잡힌 사람들을 조사하는 모양인데, 실은 나도 거기 전당 잡힌 게 있거든.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건 내가 이리로 떠나올 때 누이동생이 기념으로 준 반지와 아버지의 은시계야. 다행히 5,6 루블밖에 안 나가는 거지만, 그래도 내게는 아주 귀중한 물건이지. 기념품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가 않아, 특히 시계는 말이야. 실은 아까도 두네치카의 시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머니가 그걸 보여달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네. 제대로 남은 아버지의 유일한 유물이거든. 만약에 그것이 없어지면 어머니는 병이 나고 말 거야! 아무래도 여자니까!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 가르쳐주게!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는 건 알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포르피리에게 직접 의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튼 손을 빨리 써야 할 것 같아. 두고 보게,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어머니가 말을 꺼낼 테니!"

"경찰은 절대 안 돼. 직접 포르피리한테 가야지!" 라주미힌은 웬일인지 매우 흥분하여 외쳤다.

"거참 재미있는 일이군! 꾸물거릴 필요는 없어, 당장 가세. 바로 요 옆에 있으니, 아마 집에 있을 거야!"

"그럼...가볼까......"

"그 사람도 자네와 사귀게 딘 것을 무척, 아주 무척 기뻐할 거야! 자네 이야기는 많이 해두었지, 기회 있을 때마다...바로 어제도 얘기했다네. , 가세 ....그럼 자네는 그 노파를 알고 있었나? 그건 좋아...일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걸!..., , 소피야 이바노브나...."

"소피야 세묘노브나야." 라스콜니코프가 정정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이 사람은 내 친구 라주미힌입니다. 좋은 친구지요......"

"지금 가셔야 한다면......" 소냐는 라주미힌을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으나, 그 때문에 더욱 당황했다.

"그럼 같이 나갑시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결정을 내렸다. "오늘아라도 댁에 들르겠습니다. 그런데 소피야 세묘노브나, 어디 사시는지 그것만 좀 가르쳐줄 수 없겠습니까?"

그는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허둥지둥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소냐는 자기 주소를 알려주었으나 그때 확 얼굴을 붉혔다. 세 사람은 함께 나갔다.

"문은 잠그지 않나?" 두 사람을 따라 층계를 내려가면서 라주미힌이 물었다.

"한 번도 잠가본 일이 없다네!...하긴 벌써 2년 동안 늘 자물쇠를 사고 싶다고는 생각해왔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문을 잠글 필요가 없는 인간은 행복하겠지요?" 그는 웃으면서 소냐에게 말했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와 대문 밖에 멈춰 섰다.

"당신은 오른쪽이죠, 소피야 세묘노브나? 그런데 제 거처는 어떻게 찾아냈죠?" 그는 자꾸만 그녀의 조용하고 맑은 눈을 보고 싶었으나 어쩐지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어제 폴레치카에게 주소를 가르쳐주셨잖아요."

"폴레치카? 아아, 그렇지....폴레치카! 그 조그만 애...그 앤 당신 동생이지요? 내가 그 애한테 주소를 가르쳐줬던가요?"

"어머, 잊으셨어요?"

"아니...생각납니다."

"그리고 당신 이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어요...하긴 그때 ㄴ아직 성함도 몰랐었고...아버지도 역시 몰랐던 모양입니다만, 오늘 댁에 갔을 때는 어제 당신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어서 라스콜니코프 씨 댁이 어디냐고 물어봤죠. 당신 역시 셋방살이를 하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저는 이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그녀는 마침내 두 사람과 헤어진 것이 몹시 기뻤다. 그녀는 눈을 내리뜨고 걸음을 재촉했다. 되도록 빨리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 다음 거리로 접어드는 오른쪽 모퉁이까지 스무 발자국을 한시바삐 지나서 혼자 천천히 걸으며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눈여겨보지 않으며, 지금 이야기한 한 마디 한 마디, 장면 하나하나를 생각하고 되씹고 고려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커다란 새로운 세계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마음속에 아련히 스며들었다. 그녀는 문득 라스콜니코프가 오늘이라도 방문하고 싶다고 한 말을 상기했다. 어쩌면 오전 중에, 아니 어쩌면 지금 곧 올지도 모른다!

"제발 오늘만은 오시지 말기를, 제발 오늘만은!" 마치 조그마한 어린애가 겁먹고 애원을 하듯이 그녀는 가슴을 죄며 중얼거렸다. "아아! 나한테...그 방에...그분이 보시면...아아, 어쩌나!"

그래서 그녀는 그때 낯선 신사가 뒤를 밟으며 끈기 있게 따라오는 것을 물론 알 턱이 없었다. 사나이는 그녀가 문을 나서자 이내 뒤따라온 것이었다. 라주미힌과 라스콜니코프와 그녀가 복도에 서서 얘기하던 바로 그때, 이 통행인은 옆을 지나치면서 언뜻 들려온 '라스콜니코프 씨 댁이 어디냐고 물어봤죠'라는 소냐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재빨리, 그러나 주의 깊게 세 사람을, 특히 소냐에게 말하고 있던 라스콜니코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온 집을 유심히 바라보고 기억에 새겨두었다. 이것은 모두 순간적으로 걸어가면서 생긴 일이었다.

사나이는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대로 좀 지나쳐서는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걸음을 늦추었다. 그는 소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세 사람이 작별을 고하는 것을 보고 소냐가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어디서 본듯한 얼굴인데.' 그는 소냐의 얼굴을 되새기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알아봐야지.'

모퉁이까지 이르자 그는 거리 맞은편으로 건너가서 뒤돌아보았다. 소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뒤에서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모퉁이까지 오자 마침 그녀도 똑같은 쪽으로 굽어들었다. 그는 건너편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는 쉰 살쯤 되어 보이고, 키는 중키보다 약간 큰 편이며, 넓은 어깨가 좀 올라갔기 때문에 약간 등이 굽어 보이는 뚱뚱한 몸집의 사나이였다. 그는 편안하고도 멋진 복장을 하고 아주 의젓한 신사다운 모습이었다. 멋진 스틱으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보도를 똑똑 울리고, 손에는 새 장갑을 끼고 있었다. 광대뼈가 좀 높은 널따라 얼굴은 인상이 좋고 얼굴에도 생기가 넘쳐흘러서 페테르부르크 사람 같지가 않았다. 머리털은 아직 숱이 많았고, 약간 희끗희끗할 뿐 완전한 금발이었다. 삽 모양으로 기른 폭 넓고 짙은 턱수염은 머리칼보다 훨씬 연한 빛이었다. 눈은 하늘빛이고, 싸늘하면서도 생각에 잠긴 듯한 두 눈은 찌르는 듯이 날카롭고 입술을 타는 듯이 빨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젊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기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소냐가 운하 옆에 나왔을 때 길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그녀를 자세히 관찰하던 그는 그녀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방심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집까지 이르자 소냐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으나 다소 놀란 눈치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그녀는 자기 방으로 통하는 층계를 향해 오른쪽 구석으로 돌아갔다. "어렵쇼!" 정체불명의 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뒤따라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소냐는 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3층으로 올라가자 복도를 꺾어 들어 문에 분필로 '재봉사 카페르나우모프'라고 쓰인 9호실의 벨을 울렸다. "아니, 이건!" 정체불명의 신사는 신기한 일치에 놀라 또다시 되풀이했다. 그리고 이웃인 8호실의 벨을 울렸다. 두 출입문은 서로 여섯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카페르나우모프 집에 사시오?" 그는 소냐를 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제 그 사람은 내 조끼를 주선해주었어요. 나는 바로 옆집 레슬리흐, 게르트루다 카를로브나 부인 집에 살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인연이군요!"

소냐는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웃이군요." 그는 유난히 유쾌한 듯이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 도시에 온 지 겨우 사흘쨉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소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는 왜 그런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어째서인지 가슴이 섬뜩하기도 했다.

라주미힌은 포르피리에게 가면서 전에 없이 흥분해 있었다.

"자네, 참 잘 생각했어." 그는 몇 전이나 되풀이했다.

"나도 기쁘네! 나도 기뻐!"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기쁘다는 걸까?' 라스콜니코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자네가 그 노파한테 저당 잡힌 줄은 전혀 몰랐거든. 그래....그건 오래된 일인가? 그러니까 거기 간 게 오래됐느냐 말이야?"

'이 순진한 바보 같으니라고!'

"언제냐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그 노파가 죽기 사흘 전쯤인 것 같아. 그러나 나는 지금 그 물건을 되찾으러 가는 건 아닐세." 그는 이상하게 서두르면서 특히 그 물건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얼른 말을 이었다. "나한텐 1루블밖에 없어...어제 그 저주스런 열 때문에!"

그는 열이라는 ㅁ라에 특별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 그래그래, 맍아!" 라주미힌도 함께 서두르며 무슨 뜻에선지 연방 맞장구쳤다.

"아아, 그래서 자네는 그때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자네는 그때 혼수상태에서 무슨 반지니, 끈이니 하고 연방 헛소리를 했거든! 아아, 그랬군...이제야 알겠서, 이제야 모든 게 명백해졌어."

'저것 봐! 저놈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어! 저 녀석은 나를 위해서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지만, 그런데도 내가 반지에 대해서 헛소리를 한 이유가 명백해졌다고 기뻐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놈들의 머릿속엔 그러한 생각이 완전히 뿌리박혀 있었군 그래!'

"그런데 지금 가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소리 내어 물었다.

"그럼, 만나고말고." 라주미힌은 얼른 대답했다.

"그는 참 좋은 친구야. 만나면 알 걸세! 좀 무뚝뚝한 데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살이에는 익숙한 인간이지. 나는 다른 의미에서 무뚝뚝하다고 하는 거야. 매우 영리해. 도저히 바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영리하지만, 사고방식은 좀 특이한 데가 있어...의심이 많은 회의파고, 비꼬기를 잘 하고...놀려주기를 좋아해. 아니, 놀려준다기보다 우롱하기를 좋아해...물질주의적인 낡은 수법이지...그러나 자기 일만은 잘 처리하지, 잘 처리해...지난해에도 거의 오리무중인 살인 사건을 훌륭하게 처리해버렸거든! 자네하고는 무척 사귀고 싶어 하더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귀고 싶어 하지?"

"뭐 별다는 이유는 없겠지만...사실 요즘 자네가 병이 나고부터 자네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자주 있었지...그래서 듣고 안 거야. 그런데 그는 자네가 법과에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 졸업을 못하고 있는 것ㅇ르 알고 '참 안됐다!' 고 말하기도 했다네. 그래서 나는 결론을 지었지만 말이야...즉 이런 일이 모두 합쳐져, 아니 뭐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지만...어제도 자묘도프가...이봐, 로쟈, 어제 취중에 내가 뭐라고 자네에게 지껄였지, 우리 함께 집으로 올 때 말이야....그래서 나는 자네가 그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나 하고 걱정하고 있다네. 실은......"

"뭐 말인가? 모두가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고 있다는 것 말인가? 아니, 그건 사실일지도 몰라."

그는 긴장한 듯 웃었다.

"그래그래...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아무튼 내가 말한 건 모두, 그 밖의 다른 말도 포함해서 다 술김에 한 헛소리였어."

"자네는 뭘 그렇게 변명하나! 이제 그런 일은 지긋직듯해!" 라스콜니코프는 몹시 초조한 듯이 외쳤으나, 반은 연극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좋아, 알고 있어. 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줘.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야......"

"부끄럽거든 그런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라주미힌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혐오를 느꼈다. 라주미힌이 지금 포르피리에 대해한 말도 역시 그에게는 불안을 더해주었다.

'그자에게도 역시 하소연해서 도움을 받아야지....'그는 가슴의 고통을 느끼며 창백해진 얼굴로 이렇게 생각했다. '되도록 자연스러벡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애써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 너무 애쓰면 또 부자연스러워진다...아무튼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두고 보자...이제 곧 ...그러나 지금 이렇게 찾아가는 게 과연 좋을까, 나쁠까? 나방이 스스로 촛불에 뛰어들 때가 있으니 말이야. 가슴이 뛰는 군. 아무래도 좋지 않은걸!'

"저 회색 건물이야"하고 라주미힌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제 내가 저 마귀 할멈 집에 가서...피에 대해 물은 일을 포르피리가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우선 이것부터 첫눈에 알아차려야 한다. 상대방의 안색으로 알아야 한다. 그렇잖으면....아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 테다!'

"그런데 말이야?" 그는 갑자기 라주미힌을 보고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 자네가 아침부터 몹시 흥분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어때, 맞지?"

"흥분이라니? 나는 조금도 흥분한 일이 없어." 라주미힌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야, 뻔히 나타나 보였는걸. 아까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여느 때와는 전혀 달랐어. 이상하게 의자 끝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것 같더군. 공연히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쓸데없이 금방 성을 내는 가 하면,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달콤한 얼음 사탕 같은 얼굴이 되기도 하고, 더욱이 얼굴까지 붉히더군 그래, 특히 두냐가 식사에 초대하자 아주 홍당무가 되던데."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마.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그럼 자넨 왜 어린애처럼 갈피를 못 잡는 거야? 저것 봐, 또 빨개졌군!"

"넌 정말 돼지만도 못한 놈이구나!"

"그럼 뭣 때문에 당황하지? 이봐, 로미오! 가만있자. 오늘 어디서 이걸 좀 폭로해야겠군, 하하하! 그래서 어머닐 웃겨드려야지...그리고 다른 사람도...."

"이봐, 이봐, 내 말 좀 들어봐. 글쎄 이건 농담이 아니야, 그러면 정말...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 말이야? 제기랄!" 라주미힌은 겁에 질려 오싹 소름까지 끼치면서 완전히 갈피를 못 잡았다.

"도대체 그분들에게 무슨 소릴 하겠다는 건가? 나는 이봐...에잇, 이 돼지만도 못한 놈아!"

"아무것도 아냐, 그저 봄날의 장미꽃이지! 자네한텐 정말 잘 어울리는걸. 그걸 자네가 볼 수 없는 게 유감이야, 6척이 넘는 로미오! 한데 자네 오늘은 몸치장을 단단히 했군. 손톱까지 닦았군그래? 여태까지 그런 일이 있었나? , 이거 놀랐는걸, 머릿기름까지 발랐잖아! 좀 숙여보게!"

"이 돼지 같은 놈!"

라스콜니코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마침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리고 계속해 웃으면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의 방으로 들어갔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웃으며 들어가서 현관에서 아직도 높은 소리로 웃는 것을 안에서도 듣게 하고 싶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네 대갈통을...부숴놓겠다!" 라스콜니코프의 어깨를 움켜쥐며 라주미힌은 미친 듯이 속삭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방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웃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참는 듯한 얼굴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완전히 기가 죽어 처참한 형상이 된 라주미힌이 작약꽃처럼 빨간 얼굴로 부끄러운 듯이 어슬렁어슬렁 어색하게 들어갔다. 그 얼굴 표정과 전체 모습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워서 라스콜니코프의 웃음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초면에 아직 소개도 받지 못한 라스콜니코프는 방 한가운데 서서 미심쩍은 듯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주인에게 인사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으나,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들뜬 기분을 억제하면서 두세 마디라도 자기소개를 하려고 몹시 애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진지한 태도로 되돌아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다시금 무심코 라주미힌을 돌아본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참고 참았던 웃음은, 여태껏 참아온 정도가 강했던 만큼 한층 심하게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뱃속에서 우러나온' 웃음소리에 대한 라주미힌의 보기 드문 처참한 모습은 이 전체 장면에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명랑한 기분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스러움을 더해주었다. 라주미힌은 일부러 약속이나 한 듯이 더욱 그 효과를 돋우어준 것이다.

"에잇, 망할 자식!" 그는 한 손을 왝 내저으면서 짖어댔으나, 그 순간 빈 찻잔이 놓여 있는 조그마한 둥근 탁자를 내리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쟁강쟁강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니, 뭣 때문에 의자를 부수나? 이건 국고 손실이 아니냐 말이야!"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유쾌한 듯이 소리쳤다.

이때의 광경은 우선 다음과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손이 주인의 손에 잡혀 있는 것도 잊고 한바탕 웃어대기는 했으나, 그래도 정도는 알았으므로 되도록 빨리, 그리고 자연스럽게 끝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를 쓰러뜨리고 컵까지 깨뜨려 극도로 당황한 라주미힌은 침울한 얼굴로 컵 조각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침을 탁 뱉고는 창가로 몸을 돌려 여러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선 채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더 웃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무슨 영문인지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한구석 의자에 자묘토프가 앉아 있었으나,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얼른 일어나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있었다. 특히 라스콜니코프를 보는 눈에는 어딘지 당황한 기색조차 엿보였다. 예기치 않았던 자묘토프와의 동석은 라스콜니코프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었다.

'저 녀석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그는 일부러 당황한 척하면서 입을 열었다.

"라스콜니코프입니다......"

"천만의 말씀을. 매우 반갑습니다. 더욱이 들어오는 모습들도 무척 유쾌하더군요....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사람은 인사하기도 싫은가 보군요?" 포르피리는 라주미힌을 턱으로 가리켰다.

"정말 왜 저렇게 미친 듯이 성을 내는지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만 오는 길에 그가 로미오를 닮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그 밖에 별로 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돼지 같은 놈!" 라주미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단 한마디로 저렇게 화내는 걸 보니, 무언가 매우 중대한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포르피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뭐야, 자넨! 예심판사 근성이로군!....너희들하곤 상종도 하기 싫다!" 라주미힌은 내뱉듯이 외쳤으나, 느닷없이 자기도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쾌한 표정으로 포르피리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하세! 모두 바보투성이야. 그보다도 용건에 들어가지. 이쪽은 내 친구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야. 첫째로 여러 가지로 자네 말을 듣고 서로 사귀기를 원하고 있고, 둘째로는 자네한테 좀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네. 아니, 자묘토프! 자네는 어떻게 여기 왔나! 자네들은 아는 사인가? 전부터 알고 있었나?"

'이건 좀 이상하군!' 라스콜니코프는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자묘토프도 당황한 듯했으나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어제 자네 집에서 알게 되었지." 그는 구김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덕분에 내 수고가 덜어진 셈이군. 실은 포르피리, 지난주에 이 친구가 자네를 꼭 소개해 달라고 나한테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자네들은 나를 빼놓고 친해졌군 그래....담배는 어디 있나?"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가운을 입고 무척 깨끗한 셔츠에 낡은 실내화를 신은 편한 차림새였다. 나이는 서른대여섯, 키는 중키보다 약간 작고 뚱뚱한 몸집에 배가 좀 나온 편이며,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모두 깨끗이 깎고 특히 뒤통수가 동그랗게 튀어나온 크고 둥근 머리는 짧게 깎여 있었다. 약간 납작한 코와 둥글고 투실투실한 얼굴은 병적으로 누런빛을 띠었으나, 제법 원기가 있어 보이고 남을 조소하는 듯한 표정까지 엿보였다. 누구에겐가 눈짓이라도 하듯이 노상 깜박거리는, 희끗희끗한 속눈썹으로 덮인, 끈적끈적 물기 어린 빛으로 번들거리는 그 눈의 표정만 없었더라도 그 얼굴은 제법 선량한 인상까지 풍겼을지 모른다. 그 눈초리는 여자다운 데가 있어 보이는 몸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첫눈에 느끼는 인상보다는 훨씬 성실한 분위기를 그 모습에 더해주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손님이 자기에게 '볼일'이 있다는 말을 듣자 곧 그를 소파에 앉히고 자기도 한쪽 끝에 앉아서 즉시로 용건의 설명을 기다리며, 지나칠 정도로 성실한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상대방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러한 주의는 특히 상대가 초면인 경우에 첫대면부터 마음을 무겁게 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더욱이 용건이 그다지 대단한 주의를 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간단하고 요령 있는 말로,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명확하게 자기 용건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사이에 포르피리의 사람됨을 잘 관찰할 수있는 여유까지 가졌다. 포르피리도 그동안에 한 번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을 상대해서 같은 탁자 맞은편에 자리 잡은 라주미힌은 쉴 새 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성급할 만큼 열심히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좀 지나칠 정도였다.

'바보 같으니!' 라스콜니코프는 속으로 욕했다.

"경찰에 신고해야합니다."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포르피리는 대답했다. "이러이러한 사건, 즉 그 살인 사건에 대해 들었고 사건의 심리를 담당한 예심판사에게 이러이러한 물건이 자기 것이므로 그것을 매수하고 싶다고 통고해주기 바람...등등으로 말입니다. 하긴 경찰서에서 잘 알아서 써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겁니다만, 나는 지금......" 라스콜니코프는 되도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수중에 돈이 없어서...그만한 푼돈 조차 만들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 물건이 내 것이긴 하지만 돈이 생겼을 때...찾겠다는 것만을 신고하고 싶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마찬가집니다." 포르피리는 돈에 관한 그의 설명을 냉정하게 듣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나한테 직접 서면을 제출하셔도 무방합니다. 역시 같은 뜻의 것을. 즉 이러이러한 사건을 듣고 이러이러한 자기 물건에 대해서 신고하니 여사여사한 선처를 ......"

"보통 용지로도 됩니까?" 다시금 재정적인 사정을 걱정하여 라스콜니코프는 급히 말을 막았다.

", 아무 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포르피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윙크라도 하듯이 조소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것은 순간적이었으므로 라스콜니코프에게만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은 있어 보였다. 라스콜니코프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르피리가 자기에게 윙크를 선사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죄송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수고를 끼쳐서." 그는 다소 더듬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내 물건은 불과 5루블 정도밖에 안 나가는 거지만 내게는 둘도 없이 귀중한 기념품입니다. 그것을 준 사람들 때문에.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 그래서 자네는 그렇게 놀라군그래. 어제 내가 조시모프에게 포르피리가 전당 잡힌 사람들을 조사한다고 말했을 때 말이야!"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셈으로 라주미힌이 참견했다.

이젠 더 참을 수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참다못해 분노에 불타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제정신이 들었다.

"자네는 또 나를 놀릴 셈인가?" 재치 있게 분노를 가장하면서 그는 라주미힌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물론 자네 눈에는 내가 그런 하잘것없는 물건 때문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 것처럼 보일 걸세.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를 에고이스트라든가 욕심쟁이라고 욕할 수는 없어. 게다가 내 눈으로 보자면 그 두 가지 하잘것없는 물건도 매우 소중한 것이니까. 이미 자네한테도 말했지만, 그 서품의 값어치도 없는 은시계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야. 나를 비웃겠으면 얼마든지 비웃게. 그러나 이번엔 어머니가 오셨으니까"하며 그는 갑자기 포르피리 쪽으로 향했다. "만일 어머니 귀에 들어가면"하고 일부러 목소리가 떨리도록 애쓰며 그는 또다시 라주미힌 쪽을 향했다.

"시계가 없어졌다는 걸 알면, 이만저만 낙심하시는 게 아닐 거야! 아무튼 여자니까!"

"아니, 절대 그게 아니야! 나는 결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야! 오히려 정반대야!" 라주미힌은 안타깝다는 듯이 외쳤다.

'이쯤 하면 됐을까? 자연스럽게 들렸을까? 지나치게 과장한 건 아닐는지?' 라스콜니코프는 내심 은근히 걱정했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여자니까, 라는 말을 뭐 때문에 덧붙였을까?'

"아니, 어머니가 오셨다고요?" 무엇 때문인지 포르피리는 되물었다.

"."

"언제 오셨지요?"

"어제저녁입니다."

포르피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신의 물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없어질 염려는 없습니다."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벌써부터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담뱃재로 양탄자를 마구 더럽히고 있는 라주미힌에게 얼른 재떨이를 내밀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포르피리는 여전히 라주미힌의 담배에 정신이 팔려서 그를 보지도 않는 듯 했다.

"뭐라고? 기다렸다고! 자네는 알고 있었나? 이 사람이 거기다 전당 잡혔다는 걸." 라주미힌이 외쳤다.

포르피리는 정면으로 라스콜니코프 쪽으로 돌아앉았다.

"당신의 두 가지 물건, 시계와 반지는 함께 종이에 싸여서 그 여자한테 있었습니다. 종이에는 당신 이름이 연필로 뚜렷이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그 물건을 잡은 날짜도 역시...."

"참 조사도 잘하셨군요...." 라스콜니코프는 특히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려고 애쓰며 매우 어색한 웃음을 지었으나, 끝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당 잡힌 사람이 꽤 많았을 텐데...그들을 전부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런데 당신은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히 기억하고 계실뿐더러, 게다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군! 이런 맥 빠진 소리를 하다니!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덧붙였을까!'

"전당 잡힌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태껏 오지 않은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지요." 보일 듯 말 듯한 조소를 띠며 포르피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몸이 좀 불편했기 때문에......."

"그 말도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정신 상태가 매우 혼란하다는 얘기도요. 지금도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안색은 조금도 나쁘지 않습니다....이젠 완전히 건강해졌습니다!"라고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어조를 바꿔 독기 어린 말투로 거칠게 잘라 말했다. 분노가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그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성을 냈다가는 지껄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이자들은 왜 나를 괴롭히는 걸까......'

"몸이 좀 불편했다고?" 라주미힌이 말꼬리를 잡았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거의 인사불성으로 헛소리만 지껄인 주제에....내 말 듣게, 포르피리. 간신히 설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몸으로 어제 우리가, 나하고 조시모프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옷을 입고 살그머니 빠져나가서는 거의 밤중까지 싸돌아다녔거든. 더구나 전혀 제정신이 아니면서 말이야. 이런 일을 자네 상상할 수 있겠나! 정말 놀랄 만한 일이지 뭔가!"

"전혀 제정신이 아니었다니? 거참, 놀라겠군!" 어딘지 모르게 여자 같은 몸짓으로 포르피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 그런 말 믿지 마세요! 그렇잖아도 곧이듣지는 않으실 테지만!" 라스콜니코프는 홧김에 그만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열에 들떠 있지 않았다면 왜 밖으로 나갔겠나?" 하고 라주미힌은 갑자기 핏대를 올렸다. "왜 나갔어?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살그머니 빠져나갔느냐 말이야? 이래도 그때 온전한 의식이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모든 위험이 사라졌으니까 나도 기탄없이 자네에게 말하는 거야!"

"어제는 정말이지 저자들이 귀찮아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도전하는 듯한 능글맞게 웃으며 갑자기 포르피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두 번 다시 이 자들에게 발견되지 않게끔 새로운 방을 찾으려고 도망쳐 나왔던 겁니다. 돈도 두둑이 가지고 나갔지요. 저기 자묘토프 씨도 그 돈을 보았습니다. , 자묘토프 씨, 어제 내가 제정신이었는지, 아니면 열에 들떠 있었는지, 이 논쟁을 좀 해결해주시죠?"

그는 이 순간 자묘토프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눈초리와 침묵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당신 말투는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오히려 교활할 정도였어요. 다만 지나치게 초조한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요." 자묘토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늘 니코짐 포미치 서장한테서 들은 얘기지만"하고 포르피리가 말했다. "어제 밤이 꽤 깊었을 무렵에 마차에 치여 죽은 어떤 관리 집에서 당신을 만났다더군요......"

"글쎄, 그 관리의 일만 해도 그렇지!" 라주미힌이 말을 가로챘다. "어때, 그 관리 집에서도 제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박박 긁어서 장례 비용으로 과부한테 몽따아 줘버리다니! 굳이 도와주고 싶으면 15루블이나 20루블 정도면 어때, 적어도 3루블 정도는 수중에 남겨놓았어야 하는데 25루블을 몽땅 주다니, 그게 될 말인가?"

"그렇지만 내가 어디서 보물단지라도 발견했는지 자네가 어찌 알겠나? 어제도 그렇게 마구 돈을 뿌렸으니까...., 자묘토프 씨는 내가 보물을 발견한 걸 알고 있지! ...., 이거 용서하십시오." 그는 입술을 떨면서 포르피리에게 말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반 시간이나 방해를 해서...아마 지루하셨겠죠?"

"천만의 말씀, 오히려 그 반댑니다, 반대예요! 당신이 내게 얼마나 흥미로운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보고 있으나 듣고 있으나 아주 재미가 있군요...그래서 실은 당신이 와주셔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럼 차라도 좀 내놓게나! 목이 타서 죽겠군!" 라주미힌이 소리쳤다.

", 좋은 생각이야! 모두 함께 드시죠. 그런데 어떤가....차를 들기 전에 뭔가 배를 채울 만한 것으로 하면?"

"빨리 갔다 오게!"

포르피리는 차를 부탁하러 나갔다.

갖가지 상념이 회오리바람처럼 라스콜니코프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문제는 무엇보다 놈들이 내 앞에서 감추려 하지 않을뿐더러 꺼리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내 일을 전혀 모른다면 무슨 까닭으로 니코짐 포미치 서장과 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놈들은 개처럼 내 뒤를 쫓아다닌느 것을 이제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거다! 이젠 아주 맞대놓고 침을 뱉고 있는 거야!' 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때리면 정면으로 때릴 것이지, 고양이가 쥐를 앞에 놓고 놀리듯 희롱하진 말란 말이다. 그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느냐,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나도 이대로 가만있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벌떡 일어나서 너희들의 상관에게 진상을 낱낱이 토해버리마. 그때야 말로 내가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너희들도 알게 될 거다......' 그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만약 이것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고, 모든 것이 내 오해라고 한다면? 경험이 없는 탓으로 공연히 화를 내서 이 비열한 역할을 끝내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어쩌면 저놈의 말은 별다른 속셈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지 않는가? 놈들이 하는 말은 모두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무엇인가 들어 있다....언제든지 흔히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드지 무언가가 있기는 있다. 왜 저놈은 '그 여자한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을까? 왜 저놈들은 그런 어조로 말하는 걸까? 그렇다...어조다....그런데 라주미힌은 같은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 아니, 그 순진한 바보는 언제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또 열이 나는군! ...아까 포르피리는 나에게 윙크를 한 걸까, 안 한 걸까, 아니면 나를 곯려주려는 걸까? , 모든 것이 신기루일까, 아니면 놈들이 알고 있는 걸까? 자묘토프는 거만할 걸까? 자묘토프는 하룻밤 새 생각이 달라졌군. 나도 녀석이 생각을 바꾸리라고는 예감했지. 녀석은 오늘 여기 처음 왔다면서 마치 제 집처럼 행동하고 있군그래. 포르피리도 손님이라고 여기지 않는 모양으로 녀석에게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서로 친해졌어! 순전히 내 일로 친해졌을 거야! 아마 우리가 오기 전에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지!...그런데 내가 그 집에 갔던 걸 알고 있을까? , 한시바삐 그걸 알았으면! ...내가 어제 방을 구하려고 도망쳐 나갔다고 했을 때, 녀석은 잘 듣지도 않고 별로 문제 삼지도 않았지만...아무튼 방 이야기를 꺼내기를 잘했다.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거다. 열에 들떠 있었다고 하면 되는 거야! ..., , ! 녀석은 어젯밤 일을 죄다 알고 있군그래!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온 것만은 모르고! 그런데 마귀할멈이 연필로 날짜까지 적어놓았다고! ......거짓말 마, 누가 그런 수단에 넘어갈 줄 알고!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고 단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사실을 제시해달라고 해야지! 방을 보러 간 것은사실이 아니야, 열 때문이었으니까. 녀석들에게 얘기할 구실은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방에 관한 걸 알고 있을까? 그걸 알아내기 전에는 안 돌아가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지? 그런데 나는 지금 이렇게 등이 달아 있는데, 아마 이게 바로 사실이라는 거겠지! 제기랄,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화를 잘 낼까! 하긴 어쩌면 이쪽이 좋을지도 모른다....병적인 역할을 하는 거니까. 나를 떠보고 있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테지. 아아,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길 왔을까?'

이러한 모든 상념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곧 돌아왔다. 그는 웬일인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말일세, 어제 자네 집에 다녀온 후부터 어쩐지 머리가....게다가 웬일인지 온몸의 나사가 다 빠져버린 기분이야." 그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웃으면서 라주미힌에게 말했다.

"어때, 재미있었나? 나는 어제 한창 재미있을 때 빠져나왔지만 말이야. 그래, 누가 이겼나?"

"물론 아무도 이긴 사람은 없어. 영원한 문제를 타고 허공을 날았을 뿐이니까."

"로쟈, 어제 우리가 문제를 논했는지 아나? 범죄가 있느냐 하는 문젤세. 나중에는 별의별 엉터리 이론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네!"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평범한 사회문제지." 라스콜니코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문제는 그런 형식상의 것이 아니었어요." 포르피리가 지적했다.

"그렇지는 않았어, 그건 사실이야." 라주미힌은 늘 하는 버릇대로 성급하게 열을 올리며 곧 이렇게 동의했다. "알겠나? 로쟈? 들어보고 자네 의견도 좀 들려주게. 꼭 듣고 싶네. 어제 나는 그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했어. 그래서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지. 나는 여러 사람에게 자네가 온다고 말했었거든....이야기는 우선 사회주의자의 견지에서 시작되었어. 그 견지란 잘 알다시피 범죄는 비정상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항의라는 거야. 다만 그뿐이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것 말고는 어떠한 원인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또 거짓말을 늘어놓는군!" 포르피리가 외쳤다. 그는 눈에 띌 만큼 활기를 띠고 연방 웃으면서 라주미힌의 얼굴을 보고는 한층 그를 부추겼다.

"아무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단 말일세!" 라주미힌은 열띤 어조로 말을 막았다. "거짓말이 아니야!...뭣하면 그들의 책이라도 보여주지. 그들의 말로는 '환경에 침식당했기' 때문이라는 걸세.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들이 좋아하는 판에 박은 문구지! 그 이론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만약 사회가 정상적으로 조직되면 모든 범죄도 한꺼번에 없어져버린다는 결로닝 나오는 거야. 결국 합의할 이유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대번에 올바른 인간이 디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거지.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염두에도 안 두고 있어. 인간의 본성은 제거되고 무시당하고 있는 거야!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인류는 역사적인 산 과정을 밟아 끝까지 발전하여 마침내는 스스로 정상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무언가 수학적 두뇌에서 뽑아낸 사회적 시스템이 곧 전 인류를 조직하여 모든 살아 있는 과정에 앞서고 모든 살아 있는 역사적 과정도 없이 삽시간에 그것을 올바르고 죄 없는 사회로 만든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은 본능적으로 역사라는 것을 싫어하지. '역사란 모두 추악하고 우열한 것이다'라고 하며, 모든 것을 우열함으로만 설명하고 있어! 그러므로 인생의 산 과정은 좋아하지 않고 산 영혼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거야! 산 영혼은 생명을 요구한다. 산 영혼은 기계학을 따르지 않는다, 산 영혼은 의심스럽다, 산 영혼은 반동적이다! 그러나 이쪽 인간은 약간 송장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고무로 만들 수가 있다. 그 대신 살아 있지 않다, 그 대신 의지가 없다, 그 대신 예속적이고 반역도 모른다! 그래서 그 결과는 다만 공동 숙소(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가 제창한 생활 공동체)의 벽돌을 쌓든가, 복도나 방의 배치에 대해서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공동 숙소는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숙소를 위한 인간의 본성은 아직 안 돼 있다. 본성은 생활을 하고 싶지만, 생활을 위한 과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무덤에 가기엔 아직 이르다는 거지! 단지 이론만으로 자연성을 뛰어넘을 순 없는 거야! 이론은 다만 세 가지 경우만을 예상할 뿐이지만, 실제로는 무수히 많으니까! 그 무수한 경우를 다 무시해버리고 모든 것을 안락이라는 한 가지 문제에 귀결시키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보다 쉬운 방법은 없다는 거야! 정말 구미가 당길 정도로 명백하지. 도대체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바로 이 점이야! 인생의 온갖 비밀도 인쇄지 두 장에 전부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드디어 터졌어, 막 쏟아져 나오는군! 손이라도 붙들어 매야겠는걸." 포르피리는 웃었다.

", 상상이 되시죠?" 그는 라스콜니코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젯밤에도 이랬다니까요, 여섯 사람이 모두 핏대를 세우고...게다가 그전에 실컷 술을 퍼마셨으니까요. 대개 상상할 수 있겠지요?....그런데 여보게, 그건 틀려, 거짓말이야. 범죄에는 '환경'이라는 것이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어. 그걸 내가 증명하지."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럼 한 가지 내 질문에 대답해보게. 마흔 살 된 남자가 열 살짜리 소녀를 능욕했다면, 이것도 환경이 시킨 일인가?"

", 물론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도 역시 환경 탓이랄 수 있지." 놀랄 만큼 엄숙한 어조로 포르피리는 이렇게 말했다. "소녀에 대한 범죄는 얼마든지 '환경'으로 설명될 수 있어."

라주미힌은 미칠 듯히 흥분해버렸다.

"좋아,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증명해주지"하고 그는 짖어댔다. "자네의 속눈썹이 하얀 것은, 다름 아니라 다만 이반 대제(大帝)의 사원 높이가 7.5미터나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확 명료하게 진보적으로, 어디 그뿐인가, 자유주의적인 느낌까지 곁들여가며 훌륭하게 증명해 보이겠네. , 들어! 어때, 내기라도 할까!"

"좋아! 어떻게 증명하나 들어봅시다!"

"언제까지나 저렇게 시치미를 떼려 들거든, 망할 자식!" 라주미힌은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서 한 손을 내저었다.

"이 친구하곤 정말 이야기도 못하겠다니까! 모두가 일부러 그러는 거야. 로쟈, 자넨 아직 이 친구를 모를 거야! 어제도 이 녀석은 사람을 우롱하고 싶어서 그들 편을 들었어. 게다가 어제 이 녀석이 한 말이란, 아아, 그런데도 그자들은 그걸 기뻐하더란 말이야...아무튼 이 녀석은 그런 식으로 두 주일쯤은 견디어낼 작자야. 작년에도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도사가 되겠다고 우리를 믿게 하고, 두 달이나 고집을 부렸지! 불과 얼마 전에도 결혼한다, 식 준비도 다 되었다고 우리를 속이려 했어. 옷까지 새로 맞췄으니 말야. 그래서 우리는 정말 축하까지 했지. 그런데 신붓감도 없거니와 그런 기미도 없어. 모든 게 신기루야!"

"또 거짓말을 하는군! 옷을 그전에 맞춘 거야. 새 옷이 되니까 자네들을 곯려주려는 생각이 났던 거지."

"당신은 정말 그렇게 시치미 떼기를 좋아하십니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셨나요? 기다리십시오, 이제 당신도 한번 곯려줄 테니...., , . 아니, 그렇지만 당신한테는 사실을 말하지요. 범죄라든가, 환경이라든가, 여자라든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지금 문득 생각났습니다만,아니 지금까지도 늘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당신의 그 논문 말입니다. 범죄에 대하여...라든가 뭐 제목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만, 2개월쯤 전에 <월간 논단>에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내 논문이라고요? <월간 논단>에서>" 라스콜니코프는 놀라서 반문했다. "사실 나는 약 반년 전에 대학을 그만둘 때 어느 책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썼습니다만, 그때 나는 그것을 <월간 논단>이 아니라 <주간 논단>에 가져갔었는데요."

"그러나 <월간 논단>에 실렸더군요."

"하긴 <주간 논단>이 폐간되었기 때문에 그때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주간 논단>은 폐간과 동시에 <월간 논단>과 통합되었으므로, 당신 논문도 두 달 전에 <월간 논단>에 실렸습니다. 전혀 모르셨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 참, 놀라겠군요. 당신은 논문의 고료를 청구할 수도 있을 텐데! 당신 성격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자기와 직접 관계되는 일까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고독한 생활을 하시니. 하여튼 이것은 사실입니다."

"브라보, 로쟈! 나도 역시 몰랐어!"하고 라주미힌이 외쳤다. "오늘이라도 당장 도서관에 가서 그걸 빌려 보세! 2개월 전이랬지? 날짜는 언젠가? 아니, 아무래도 좋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거참, 재미있군! 그래 놓고도 아무 말도 없었으니!"

"그런데 나라는 걸 어떻게 아셨지요, 나는 이름 머리글자만 서명했는데?"

"이삼일 전에 우연한 일로 편집자한테 들었습니다. 아는 사이거든요...매우 흥미를 느끼며 읽었어요."

"나는 범죄 수행 전 과정에서의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고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렇습니다. 범죄 행위는 항상 질환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더군요. 그야말로 독창적인 의견이에요. 그러니까...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당신 논문의 이 부분이 아니고, 논문 끝머리에 잠깐 비쳤던 당신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다만 암시적으로 쓰여 있을 뿐이어서 명백하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말해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온갖 불법이나 범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아니,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진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을 위해서는 법률 따위는 없는 것과 같다....이러한 것을 암시하고 계시더군요."

라스콜니코프는 고의적으로 과장한 자기 사상의 곡해에 대해 빙그레 미소를 흘렸다.

", 뭐라고? 범죄에 대한 권리라고? 그럼 '환경에 침식당했기 때문'이 아니잖아?" 무언가 겁에 질리는 듯한 표정으로 라주미힌이 물었다.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니지"하고 포르피리는 대답했다. "문제는 이분의 논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범인(凡人)'비범인(非凡人)'으로 분류된다는 점이야. 범인은 항상 복종 가운데 살아야 하고 법을 초월할 권리 따윈 갖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범인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비범인은, 특히 비범인이란 이유만으로 모든 범죄를 행하고 어떠한 법률도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아마 이런 의견이었지요, 내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어!" 라주미힌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또다시 씽긋 웃었다. 그는 문제의 초점이 어디에 있으며, 상대방이 어디로 자기를 유도하려는가를 얼른 알아챘다. 그는 자신의 논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도전에 응전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쓴 것은 당신의 의견 그대로는 아닙니다." 그는 솔직하고 겸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거의 정확하게 그 내용을 말해주셨습니다. 아니, 완전히 정확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그는 완전히 정확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몹시 흐믓했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비범인이 언제나 불법을 행해야 하고 온갖 불법을 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논문이라면 발표될 수도 없었으리라고 생각될 정돕니다. 나는 그저 간단히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했을 뿐입니다. 즉 비범인은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공적인 권리가 아니라 어떤 장애를 넘어서는...자기 양심에 허용할 권리를 스스로 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이념, 때로는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념의 실행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 한합니다. 당신은 내 논문이 명백하지 못하다고 하셨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되도록 자세히 설명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당신이 아마 그러길 원하시리라고 생각해도 틀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럼 실레지만 말해보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케플러나 뉴턴의 발견이 어떤 복잡한 사정 때문에 한 사람이나 열 사람, 백 사람, 또는 그 이상 되는, 이 발견에 방해가 되거나 장애물로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에 알리 ㄹ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 뉴턴은 그 발견을 온 인류에 보급하기 위해 그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의 인간을...제거할 권리를 갖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까지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뉴턴이 아무나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거나 날마다 시장에서 물건을 훔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확실히 나는 그 논문에서 이런 식으로 논지를 전개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예를 들어 인류의 입법자가 건설자는, 고대의 인물로부터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그 법률에 따라 종래의 사회이에서 신성시되어온, 조상 적부터 전해 내려온 낡은 법률을 파기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모두 훌륭한 범죄자였던 겁니다. 그리고 물론 자기를 돕는 길이 오직 피의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때때로 낡은 법률을 위해 용감히 흘린 무고한 피도 있긴 했지만, 유혈의 참변조차 그들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은인, 건설자 대부분이 특히 무서운 살육자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은 누구든지, 위인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범속의 궤도를 벗어난 사람은, 즉 조금이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천성에 의해서, 물론 다서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반드시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궤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궤도에 남아 있는 것도 역시 본래의 천성 때문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될 의무까지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지금까지의 나의 이론에는 보시다시피 특별한 새로운 점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벌써 몇천 번이나 쓰이고 읽혀온 것입니다. 그런데 범인과 비범인의 분류에 대해서는, 나도 다소 독단적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정확한 숫자에 근거를 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다만 내 자신의 근본 사상을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인간은 자연법칙에 따라 대략 두 등급으로 나뉩니다. 즉 자기와 동등한 것을 생식하는 일 말고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말하자면 단순한 소재(素材)에 지나지 않는 저급한 등급 곧 범인과, 또 하나는 본래의 인간, 즉 생존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발언을 하는 천품이나 재능을 지닌 사람들로 나뉩니다. 그것을 자세히 구별하자면 물론 한이 없겠습니다만, 이 두 범주를 구별하는 특질은 어느 정도 명백한 것입니다. 첫 번째 등급, 즉 소재적 인간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예의 바르고, 복종을 일삼고, 복종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에 그들은 복종적이어야 할 의무조차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니까요. 거기에는 그들 입장에서 굴욕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번째 등급은 모두가 법률을 범하는 파괴자든가, 또는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재능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요.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상대적이며 물론 다종다양하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갖가지 성명을 토앻 더 나은 장래의 명목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파괴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만약 자기의 이념을 위해서 시체나 피라도 밟고 넘어가야 할 경우 그들은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라 피를 밟고 넘어가도 된다는 허가를 스스로에게 내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이념의 성질이나 이념의 규모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 이 점을 주의해주십시오. 다만 이런 의미로 나는 그 논문에서 범죄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논하고 있으니까요....이 논의가 법률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대중은 거의 어느 시대에나 그들의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벌하고 교수형에 처해버리니까요...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극히 공명정대하게 자신의 보수적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시대가 되면 바로 그 대중이 전에 벌을 준 범죄인을 상좌에 모시고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첫 번째 등급은 언제나 현재의 지배자요, 두 번째 등급은 미래의 지배자입니다. 첫 번째 등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유지하고 양적으로 확대해갑니다. 두 번째 등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움직여서 목적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양쪽 다 동등한 생존권을 갖는 것입니다. 요컨대 내 생각으로는 누구나 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Vivela guerre eternelle('영원한 싸움 만세'라는 뜻)이지요. 물론 새로운 예루살렘이 올 때까지만!"

"그럼 당신은 역시 예루살렘을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는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양탄자 위의 한 점을 골라 그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시다면 하느님도 믿습니까? 이상한 질문을 해서 실례입니다만."

"믿습니다." 눈을 들어 포르피리의 얼굴을 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되풀이했다.

"그럼 나사로의 부활도 믿습니까?"

"믿습니다. 왜 그런 걸 묻지요?"

"문자 그대로."

"그래요...그저 호기심에서 좀 물어보았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묻겠습니다. 다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만, 비범인은 언제나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개중에는 도리어......"

"살아서 승리를 구가하는 자들도 있다는 거죠? 그거야 그렇지요. 개중에는 살아 있는 동안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자기 쪽에서 남을 처벌하기 시작한다, 그런 말입니까?"

"필요하다면, 아니 대부분 그렇게 되겠지요. 아무튼 당신의 관찰은 매우 예리하군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말씀해주십시오. 도대체 무엇으로 범인과 비범인을 구별합니까? 날 때부터 무슨 표지라도 붙어 있습니까? 내 말뜻은, 거기엔 좀 더 정확성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좀 더 외면적인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이것은 실제적이고 온건한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걱정거리라고 생각하시고 양해해주십시오. 그러나 어떨까요. 가령 특수한 제복을 입는다든가, 무언가 몸에 달고 다닌다든가, 그보다도 낙인 같은 것을 찍는다든가 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잖으면 혹시 혼란이 일어나서 한쪽 등급에 속하는 인간이 자기는 다른 등급에 속해 있다는 망상을 일으켜, 당신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 그건 정말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당신의 이번 관찰은 아까보다 한층 더 예리해졌군요......"

"고마운 말씀입니다."

"아니, 천만에요. 그러나 이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오해는 단지 첫 번째 등급, '범인' -이것은 매우 졸렬한 호칭이었는지 모르겠습니만 -쪽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복종을 좋아하는 천성적인 경향이긴 해도, 자연의 희롱으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 꽤 많은 자들이 스스로 선구자나 '파괴자'라고 망상하고 '새로운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진지하다니까요. 동시에 그들은 진짜 '새로운' 인간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비열한 사고방식의 인간으로 경멸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거기에는 별로 대단한 위험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걱정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큰일을 저지르지는 못하니까요. 물론 주제넘게 날뛸 때는 제 분수를 알려주기 위해서 가끔 채찍 맛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형벌의 집행조차 필요 없을 정돕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채찍질합니다. 원래가 품행이 방정한 사람들이니까요. 저희들끼리 서로 형벌을 주고받는 수도 있겠고, 개중에는 자기 손으로 자기를 벌하는 자도 있겠지요....그리고 여러 가지로 대중 앞에 회오(悔悟)의 뜻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조금도 염려하실 필욘 없습니다...그러한 법칙이 있는 것이니까요."

", 적어도 그 방면에는 다소 나를 안심시켜주셨습니다만, 또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만, 도대체 그 타인을 죽일 권리를 가진 사람, 즉 비범인이라는 건 많이 있나요? 나는 물론 언제든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겠어요?"

"아니, 그것도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역시 같은 어조로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이었다.

"대체로 새로운 사상을 가진 인간은, 아니 그뿐만 아니라 무슨 새로운 말을 겨우 할 수 있을 만한 인간도 극히 소수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놀랄 만큼 적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은 이들 등급이나 세분(細分)에 속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순서가 어떤 자연법칙으로 매우 정밀하고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법칙이 무엇인지 물론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반드시 존재하며 앞으로 언젠가는 명백해지리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인류의 거대한 대중, 즉 소재는 결국 어떤 노력을 거쳐서 오늘날까지 신비에 쌓여 있는 일종의 과정이나 종족과 혈통 교차 등의 방법으로 진통을 겪은 끝에 비록 천 명에 한 사람만이라도 독립적인 정신을 지닌 인간을 낳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은 만 명에 한 사람 정도밖에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저는 알기 쉽게 개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그보다 더 광범한 정신의 소유자는 십만 명에 하나 정도, 천재적인 인간은 백만 명에 한 사람밖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위대한 천재 곧 인류의 완성자는 몇백만 몇천만 명을 흘려보내고 난 뒤에야 겨우 태어날까 말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것이 생성되고 있는 증류기는, 나도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만, 일정한 법칙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여기 우연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자네들은 뭐야, 농담들을 하고 있나?" 마침내 라주미힌이 외쳤다.

"서로 속이기 내기라도 하는 것 같군그래? 마주 앉아서 서로 놀리고들만 있으니! 로쟈, 자넨 진정인가?"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그를 향해 창백하고 서글픈 얼굴을 들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조용하고 서글픈 얼굴과 포르피리의 노골적이면서도 끈덕지고 초조하면서도 불손하리만큼 독기 어린 표정을 비교해보자, 라주미힌에게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보게, 정말 그것이 진정이라면...그건 물론 자네가 말하는 대로 전해 새로운 것이 못돼. 우리가 몇천 번이나 읽었거나 들은 것과 아주 비슷한 이야기니까. 그러나 그중에서 참으로 독창적인 의견, 즉 자네 자신의 의견은, 무서운 일이지만 자네가 양심에 비추어 피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야...실례지만 거기에는 환상적인 데가 없지 않아...따라서 이 점에 자네 논문의 근본 사상이 들어 있다고 해야겠지. 그러나 양심에 비추어 피를 허용한다는 것은,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피를 흘려도 좋다는 공적인 법률상의 허가보다 더 무선운 일이야......"

"사실 그래, 그것이 더 무섭지...."하고 포르피리가 말을 받았다.

"아니, 자네는 어쩌다가 끌려든 거야! 여기엔 확실히 오류가 있어. 내가 한번 읽어보겠네....자네는 저도 모르게 끌려 들어갔을 거야! 자네가 그런 걸 생각할 힐 없어...어디 한 번 읽어봐야지."

"논문에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어. 그저 암시가 있을 뿐이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그래요, 맞습니다." 포르피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범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너무 귀찮게 물어서 정말죄송합니다만 -너무 괴로움을 끼쳐드려서 면목이 없을 정도입니다! - 사실은 아까 두 가지 등급의 혼동이라는 오해에 대해서는 나를 무척 안심시켜주셨습니다만, 그러나...아직도 나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경우가 마음에 걸려 죽겠군요! 가령 어느 한 사나이가, 또는 청년이 자기를 리쿠르고스, 물론 미래의 리쿠르고스나 마호메트인 양 망상하여...당장에 모든 장애를 제거하려 든다면 어떨까요...눈앞에 대원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원정에는 돈이 필요하다...그래서 자금 조달에 착수한다...아시겠어요?"

한쪽 구석에서 갑자기 자묘토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그쪽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도 거기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죠. 어리석은 놈이나 허영심이 많은 놈은 흔히 그러한 유혹에 잘 걸려들 겁니다. 특히 젊은 층이."

"그렇겠지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어떻게 될 것도 없지요." 라스콜니코프는 비시시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책임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현재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늘 그럴 겁니다. 지금도 저 친구는(하고 라주미힌을 턱으로 가리켰다) 방금 나한테 피를 허용한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런 게 어쨌다는 겁니까?사회는 유형, 감옥, 예심판사, 징역 등으로 충분히 ㅁ보증되어 있지 않느냐 말이에요....걱정할 것이 뭐 있습니까? 그저 그 도둑을 잡아내면 되죠!"

"그래서 만일 잡아낸다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할 테죠."

"당신은 정말 논리적이군요. 그러면 그 자의 양심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것까지 당신이 상관할 건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저 좀 인도적인 감정에서 묻는 겁니다."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기의 과오를 자각한 이상 스스로 고민하겠짐요. 그것이 그자에 대한 벌입니다, 징역 이상의...."

"그럼 참으로 천재적인 인간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라주미힌이 물었다. "즉 살인의 권리가 부여된 인간은 자기가 흘린 피에 대해서도 전혀 고민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어째서 이 경우 '안 된다'는 말을 쓰지? 거기에는 허가도 금지도 있을 수 없어. 만약 희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멋대로 괴로워하라지...대체로 고민과 고통은 원대한 자각과 깊은 심정의 소유자에게 항상 필연적인 것이야. 내 생각에 참으로 위대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비애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 그는 갑자기 이야기의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눈을 들어 침울한 표정으로 좌중을 돌아보고 웃으며 모자를 집었다. 그는 아까 들어올 때에 비해서 매우 침착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 일어났다.

"욕하시거나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군요"하고 포르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이거 대단히 죄송합니다. 실은 한 가지 생각난 게 있어서 그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건데 그냥 넘기고 싶지가 않아서...."

"좋습니다, 당신의 그 생각을 말해보시죠." 라스콜니코프는 파리하고도 진지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선 채 질문을 기다렸다.

"이런 겁니다...글쎄, 어떡하면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만...그 생각이라는 게 너무 장난스러운....심리적인 것이어서....실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그 논문을 썼을 때 말입니다. 설마 그런 일을 없었겠지만, , , 당신이 당신 자신을 말이에요, 혹시 새로운 말을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는지...즉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라스콜니코프는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라주미힌은 몸을 움찔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 자신은 그런 일을 결심하지는 않았나요? 말하자면 무슨 생활상의 실패나 곤경 때문에 또는 전 인류에 대한 어떤 공헌을 한다는 이유로...장애를 밟고 넘어설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까? ...가령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한다든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또 갑자기 왼쪽 눈을 껌벅여 윙크를 하고 아까하고 똑같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설사 내가 밟고 넘어섰다 하더라도 당신한텐 물론 말도 안 할 겁니다." 도전하는 듯한 오만한 경멸의 빛을 보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저 약간 흥미를 느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만 문학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 어쩌면 저렇게 빤히 들여다보이는 뻔뻔스런 수작을 할까!' 혐오감을 느끼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한마디 드리겠습니다만" 그는 무관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자신을 마호메트나 나폴레옹이나...그러한 종류에 속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인물이 아닌 내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말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 러시아에서 스스로를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갑자기 몹시 친숙한 태도를 보이며 포르피리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 말의 억양에서까지 어떤 명백한 의도가 엿보이는 듯했다.

"지난주에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죽인 것은 그 미래의 나폴레옹 같은 자의 소행이 아닐까요?" 난데없이 한쪽 구석에서 자묘토프가 불쑥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포르피리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라주미힌은 침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까부터 어떤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성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침묵이 1분쯤 흘렀다. 라스콜니코프는 빙그르 몸을 돌리고 나가려고 했다.

"왜 벌써 가시렵니까!" 사뭇 정답게 손을 내밀며 포르피리는 상냥하게 말했다. "이렇게 알게되어 정말 무척 기쁩니다. 의뢰하신 건에 대해서는 염려 마십시오. 내가 말한 대로만 써 보내세요. 요 이삼일 안으로...뭣하면 내일이라도 좋습니다. 11시 경에는 틀림없이 나가있습니다. 모든 걸 처리해버립시다...그리고 이야기도 좀 하시고...당신은 그곳에 간 최후의 한 사람으로서 무슨 얘기든 해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그는 지극히 호인다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신은 정식으로 나를 취조할 셈입니까, 모든 걸 다 갖추어놓고?' 라스콜니코프는 날카롭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요? 아직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뭔가 오해하고 계십니다. 하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전당 잡힌 사람들과는 거의 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개중에는 증언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그래서 당신도 최후의 한 사람으로서..., 마침 잘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기쁜 일이라도 생각난 듯이 외쳤다. "마침 생각났군, 나도 참!" 그는 라주미힌을 돌아보았다. "그 니콜라이 일로 자네는 그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내게 이야기했었지...그 문제라면 나도 알고 있어, 잘 알고말고" 그는 또 다시 라스콜니코프 쪽으로 돌아섰다. "그 청년은 결백해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결국 이번엔 미치카에게 혐의가 넘어갈 수밖에요...그래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만, 당신이 그때 층계를 지나치면서...실례지만 당신이 갔던 것은 7시가 지나서였죠?"

"7시 지나서였습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가 대답했으나, 그 순간 이런 것을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걸 하고 불쾌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7시 지나서 층계에 올라갈 때, 당신도 보지 못하셨나요? 2층의 열려 있는 방 안에, 기억하세요, 두 칠장이가 있었던 것을?... 아니면 그중 한 사람이라도? 거기서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는데, 알지 못했습니까? 이건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

"칠장이라뇨? 아니, 못 봤습니다. ...." 라스콜니코프는 기억을 되살리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동시에 그는 온몸을 긴장시키면서 한시바삐 함정이 있는 곳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섣불리 실언을 하면 큰일이다, 하는 생각에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보지 못했어요. 문을 열어놓은 방이라고는 본 기억이 없는데요..., 4층에서(그는 이제 함정이 어디 있는가를 완전히 알아차리고 개가를 올렸다.) 한 관리가 이사하고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그것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군인 출신의 인부가 소파 같은 것을 짊어지고 나가면서 나를 벽에다 떼밀었으니까요....그러나 칠장이는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여튼 문을 열어 놓은 방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없었습니다...."

"이봐, 자넨 무슨 소릴 하고 있나!" 라주미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정을 알았다는 듯이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페인트칠을 한 것은 살인이 있던 바로 그날이고, 이 사람이 간 건 그보다 사흘 전의 일이 아니냐 말이야? 자넨 뭘 묻고 있는 건가?"

"아차, 완전히 혼동을 했군!" 포르피리는 자기 이마를 탁 쳤다. "제기랄, 나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머리가 돌아버렸어!" 그는 사과라도 하는 듯이 라스콜니코프를 돌아보았다.

"내가 요즘 누구든 그 방에서 7시 지나서 두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하는 것만 열심히 생각하다 보니까, 당신에게 물으면 알 것 같아서 그만...아주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군!"

"그럴수록 더 조심을 해야지." 라주미힌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마지막 대화는 현관에서 오갔다. 포르피리는 지극히 상냥하게 그들을 문간까지 배웅했다. 두 사람은 어둡고 침울한 얼굴로 한길로 나와서는 몇 걸음을 걷는 동안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라스콜니코프는 깊숙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믿지 않아! 믿을 수 없어!"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라주미힌은 열심히 라스콜니코프의 결론을 뒤엎으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되풀이했다. 두 사람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두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바칼레예프의 하숙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이 사건을 입 밖에 내서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당황하고 흥분해버린 라주미힌은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자꾸만 길 한가운데 멈춰 서곤 했다.

"믿지 않아도 좋아!" 라스콜니코프는 냉정하고 무심한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자네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데, 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저울질하고 있었어."

"자네는 의심이 많으니까 저울질 같은 걸 하는 거야. ....사실 포르피리의 말투는 퍽 이상했어, 그건 나도 동감이야. 특히 그 바보 같은 자묘토프 녀석까지!.... 자네 말대로 녀석에겐 확실히 뭔가 있었어. 한데 왜들 그러지? 왜들 그래?"

"하룻밤 새 생각이 달라진 거야."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만일 녀석에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있다면 그야말로 온 힘을 기울여 그것을 감추고, 나중에 한 몫 단단히 보기 위해 자기 카드를 엎어놓으려고 애쓸 거야...그런데 오늘은 ....너무 뻔뻔스럽고 조심성이 없었어!"

"만약 놈들이 사실을, 확실한 사실을 잡고 있다면, 또는 다소나마 근거가 있는 혐의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커다란 승리를 얻으려는 기대에 정말 승부를 비밀로 했을지도 모르지....그러나 그때는 이미 오래전에 벌써 가택 수색을 했을 걸세! 하지만 그들에게는 확증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야. 모든 것이 신기루야, 모든 것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붙잡을 수 없는 허공에 뜬 관념뿐이지. 그러니까 녀석들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이쪽을 골탕 먹이려고 애쓰는 거야. 그러나 어쩐지 확증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내고, 또 홧김에 터뜨렸는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무슨 계략이 있는지도 몰라...그자는 그래도 꽤 영리해 보이니까...아니면 아는 체하면서 나를 위협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거기에는 또 그 나름의 심리학이 있는 거야...하지만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는 건 참 더러워. 그만두세!"

"아무튼 모욕적이야. 모욕적이고 말고! 자네 심정은 잘 알겠어! 그러나....우리도 이렇게 말을 꺼낸 이상 -결국 분명히 말을 꺼낸 것은 참 잘한 일이야, 나는 기쁘네!-나도 이젠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기하겠네만, 나는 벌써부터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었어. 그동안 죽 물론 보일 듯 말 듯 약간 꿈틀거리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런데 비록 꿈틀거리는 정도였다고는 해도 도대체 어째서일까?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어? 어디에, 도대체 어디에 그런 근거가 숨어 있는 걸까? 내가 얼마나 분개했는지 자네는 아마 상상도 못할 걸세! , 들어보게. 가난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불우한 대학생이 열 때문에 의식을 잃은 그 무서운 병에 걸리기 전날에, 그러나 어쩌면 이미 병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때에 말이야...알겠나! 이 의구심 많고 자존심 강한, 자기 가치를 알고 있는 사나이가, 더욱이 6개월 동안이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던 사나이가 누더기 걸치고 밑 빠진 신을 신고....사람 같지도 않은 경관들 앞에 서서 그들의 모욕을 꾹 참고 있다. 거기에 뜻하지 않은 빚...7등관 체바로프에게 준, 기한이 지난 어음이 눈앞에 내밀어진다. 게다가 썩은 페인트 냄새, 섭씨 30도의 무더위, 숨 막힐 듯한 공기, 들끓는 사람들, 그 전날에 방문한 사람이 피살된 이야기 등등히 한꺼번에 공복에 밀어닥친 거야! 그러니 누군들 졸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느냐 말이야! 그런데 이것을 일체의 근거로 삼으려 하다니! 망할 자식들, 정말 분통 터질 일이야, 그건 나도 알겠어. 그러나 로쟈, 내가 만일 자네라면 녀석들을 맞대놓고 통쾌하게 비웃어주겠네. 아니, 그보다도 녀석들의 얼굴에다 퉤 침을 뱉어주겠어. 그것도 끈적끈적한 가래침을 말이야.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스무 대쯤 뺨을 갈겨주는 거야. 이게 제일이야. 녀석들에겐 언제나 이런 식으로 본때를 보여줘야 해. 그렇게 끝장을 내야 하는 거야. 침이라도 뱉어주라니까. 기운을 내! 내가 부끄럽지도 않나!"

'하지만 이 친구도 제법 그럴싸하게 설명하는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침을 뱉어주라고? 그러나 내일은 또 신문을 받아야 해!" 그는 비통하게 말했다. "과연 그런 자들한테 변명 같은 걸 해야 할까? 어제 술집에서 자묘토프 같은 바보를 상대한 것만해도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제기랄! 내가 포르피리한테 가보지! 그리고 이번엔 친척으로서 한번 압력을 넣어서 속속들이 다 털어놓게 해야겠어! 그러면 자묘토프 같은 건...."

'드디어 알아차린 모양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잠깐만!" 갑자기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잠깐만! 자네 말은 틀렸어! 가만 생각해보니 자네 말은 옳지 않아! 그게 무슨 계략이란 말인가? 자네는 칠장이에 대한 질문이 계략이라는 거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게, 만약 자네가 그 짓을 했다면 칠장이가....벽을 칠하고 있는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설사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자기에게 불리한 자백을 할 놈이 어디 있겠나?"

"만약에 내가 그 짓을 했다면 틀림없이 칠장이도 방도 봤다고 했을 거야." 눈에 띄게 혐오의 빛을 띠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내키지 않은 어조로 대답을 계속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그야 신문할 때 무조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시골뜨기가 아니면 경험이 없는 풋내기나 하는 짓이니까!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고 경험이 있는 인간이라면 부득이 한 표면적 사실은 되도록 죄다 자백하려고 애쓸 거야. 다만 뭔가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거기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 전혀 생각지도 못할 만한 독특한 사실을 삽입하는 거야. 포르피리도 내가 반드시 그러한 답변을 하여, 사실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보았다고 답변하고 설명조로 뭔가를 좀 삽입하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면 그자는 당장 그 자리에서 말꼬리를 잡고는, 이틀 전에는 그곳에 있었을 리 없다, 그러니까 자네는 살인이 있던 날 7시 지나서 그곳에 있었다, 라고 말한다는 거지.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로 꼬리를 잡겠다는 거로군."

"그래, 녀석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거야. 내겐 잘 생각할 만한 여유라곤 없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사실처럼 대답하려고 초조해져서 사흘 전에 칠장이가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어떻게 그런 것을 잊을 수 있겠나?"

"흔히 있을 수 있지! 그러한 극히 하잘것없는 일로 교활한 족속들이 곧잘 걸려들게 마련이거든. 인간이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그런 사소한 일로 꼬리를 잡히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으니까. 지극히 교활한 인간은 가장 하잘것없는 일로 꼬리를 잡아야 해. 포르피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바보만은 아니야...."

"그런 짓을 하는 걸 보니 그자도 역시 비열하군!"

라스콜니코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기가 최후의 변명을 시도했을 때 그렇게까지 활기를 디고 적극적이었던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의 대화는 분명히 어떤 목적에 따라 침울한 혐오의 기분으로 마지못해 계속해왔던 것이다.

'화제의 관심이 딴 곳으로 흐르고 말았군!'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순간에 뜻하지 않았던 불안한 상념에 놀라기라도 한 듯 그는 갑자기 초조감을 느꼈다. 불안은 차츰 더해갔다. 두 사람은 어느새 바칼레예프의 하숙집 앞까지 와 있었다.

"자네 혼자 들어가게." 갑자기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곧 돌아올 테니까."

"어딜 가려고? 벌써 다 왔는데!"

"난 좀 가봐야 해, 일이 있어서....30분이면 돌아오지...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게나."

"마음대로 하게. 나도 따라가겠네!"

"아니, 자네까지 나를 괴롭힐 생각인가?" 하고 그는 외쳤으나, 그 눈에는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초조와 절망의 빛이 감돌았으므로 라주미힌은 그만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주미힌은 한참 동안 입구 계단에 서서 라스콜니코프가 자기 집이 있는 옆 골목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침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오늘이라도 당장 포르피리 녀석을 레몬처럼 쥐어자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자기들이 너무 오래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해하고 있을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안심시키려고 층계를 올라갔다.

라스콜니코프가 자기 집에 이르렀을 때 관자놀이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숨결도 매우 거칠었다. 그는 부리나케 층계를 올라가서 열려 있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 곧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그대 장물을 감춰두었던 한구석 구멍 난 벽지 쪽으로 달려가서, 그 속에 손을 집어넣고 구석구석까지 벽지의 접힌 곳을 뒤집어보기까지 하면서 몇 분 동안 샅샅이 뒤져보았다. 아무것도 없음ㅇ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일어서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바칼레예프의 집 문앞까지 이르렀을 때 혹시 무슨 물건이, 가령 쇠사슬이라든가 커프스단추라든가 또는 그것을 싸서 노파가 손수 이름을 적어둔 종잇조각 같은 것이 어쩌다가 빠져서 어느 틈바구니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라도 뜻하지 않은, 확고부동한 증거가 되어 느닷없이 그의 눈앞에 제시되는 경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모욕을 당한 듯한, 반쯤 무의식적인 괴상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이윽고 그는 보자를 집어 들고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문으로 내려갔다.

"바로 저분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문지기가 자기 방문 앞에 서서, 누군지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 사나이게게 자기를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가운 같은 옷에 조끼를 입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여자같이 보이는, 얼른 보기엔 상인 같은 차림의 사나이였다. 기름때가 묻은 모자를 쓴 머리는 아래로 푹 수그러지고 전체 모습도 어쩐지 등이 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들어 빠진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그를 쉰 살 이상으로 보이게 하고, 조그맣고 흐릿한 눈은 침울하고 엄하며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문지기 쪽으로 다가가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상인은 곁눈질을 하며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찬찬히 조심스럽게 그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아무 말도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당신 이름을 대면서 여기 이런 대학생이 있느냐, 누구 집에 하숙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내려오기에 내가 가르쳐 주었더니 그냥 가버리지 않습니까. , 별사람 다 보겠네요."

문지기도 좀 의아스럽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지라 약간 고개를 갸우뚱한 뒤에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상인 뒤를 쫓아 달려가서 이내 그를 발견했다. 여전히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발긑만을 내려다보면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거리 저쪽 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곧 사나이를 따라잡이 얼마 동안 뒤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사나이와 나란히 걸으며 옆으로 얼굴을 보았다. 저쪽에서도 그를 알아차리고 흘끔 보았으나, 다시 눈을 내려뜨고 말았다. 이렇게 그들은 1분쯤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나를 찾으셨죠....문지기한테?" 드디어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열었으나 웬일인지 몹시 작은 목소리였다.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없었다.

"당신은 뭐요...사람을 찾고도...잠자코 있으니...대체 무슨 일이오?" 라스콜니코프의 목소리를 더듬거렸고, 어째서인지 그 말조차 똑똑히 발음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상인도 이번에는 눈을 들어 기분 나쁜 음울한 눈초리로 라스콜니코프를 쏘아보았다.

"살인자!" 갑자기 사나이는 나직하나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어.

라스콜니코프는 그 사나이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두 다리는 무서울 만큼 힘이 빠지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순간 심장은 얼어붙는 듯하더니, 이윽고 걸어놓았던 빗장이 벗겨진 듯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다시 아무 말 없이 100보쯤 걸어갔다.

상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은...아니...누가 살인자라는 거요?" 겨우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라스콜니코프는 중얼거렸다.

"너는 살인자야." 사나이는 더한층 명확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증오에 찬 승리의 웃음이라도 풍기는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또다시 라스콜니코프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생기 잃은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두 사람은 그대 네 거리에 이르렀다. 상인은 왼쪽 길로 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자리에 선 채 오랫동안 그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사나이가 50보쯤 걸어갔을 때 홱 몸을 돌리더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분명히 볼 순 없었지만, 이번에도 사나이가 냉정하고 증오에 찬 승리의 웃음을 빙긋이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기진맥진 힘없는 걸음걸이로 무릎을 덜덜 떨면서 마치 꽁꽁 언 사람처럼 되어 라스콜니코프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모자를 벗어 탁자 위에 놓고 10분 가량이나 그 옆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힘없이 소파에 쓰러져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면서 병자처럼 누웠다. 눈이 감겼다. 이렇게 그는 30분쯤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상념, 상념이라기보다 상념의 단편들이, 혹은 환상 같은 것이 질서도 연결도 없이 머리를 스칠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거나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났을 뿐 아무래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얼굴, V사원 종각, 어느 요릿집의 당구대 옆에 서 있던 장교, 어느 지하실 담배 가게 시가 냄새, 목로주점, 구정물로 더럽혀진 달걀 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언제나 캄캄한 뒤 층계, 그런가 하면 어디선가 일요일의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이렇게 갖가지 대상들이 뒤바뀌며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쳤다. 그중에는 마음이 끌리는 것도 있어서 거기에 매달려보기도 했으나, 곧 사라져버렸다.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무엇인가 내부에서 그를 억누르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도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오한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마저 역시 쾌감을 주는 듯한 감촉이었다.

라주미힌의 바쁜 듯한 발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체했다. 라주미힌은 방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듯이 문지방에 서 있다가, 얼마 후 살며시 방 안에 발을 들여놓고 조심스레 소파로 다가왔다. 나스타시야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건드리지 마세요. 푹 쉬게 하세요.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게 좋겠군." 라주미힌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다시 30분쯤 지났다. 라스콜니코프는 눈을 떴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받치고 다시 몸을 반듯이 누였다.

'그 녀석은 대체 누굴까? 땅속에서 솟아난 듯한 그 사나이는 대체 뭐 하는 놈일까? 어디 있다가 뭘 본 것일까? 그 녀석은 모든 것을 다 봤어, 틀림없다. 그렇지만 대체 그때 어디 서서, 어디서 보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이제야 마루 밑에서 솟아난 듯이 나타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볼 수 있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 오싹하는 오한에 몸을 떨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미콜라이가 문 뒤에서 발견했다는 주머니, 그것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증거? 10만분의 1 정도의 조그만 것이라도 어쩌다 떨어뜨리면 마지막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만큼의 증거가 되니까! 파리가 한 마리 날고 있었는데, 그놈이 본 게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갑자기 기력이 쇠진한 것을, 육체적으로 기력이 쇠진한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혐오를 느꼈다.

'나는 마땅히 이럴 줄 알았어야 하는 거야' 하고 그는 쓴 웃음을 흘리면서 생각했다.

'왜 나는 나 자신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예감하면서도 도끼 따위를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짓을 했을까? 나는 미리부터 알았어야 하는 거야....아니, 나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절망한 나머지 신음하듯 속삭였다.

이따금 그는 어떤 상념 앞에 꼼짝도 못 하고 멈춰 서곤 했다.

'아니, 그러한 인간들은 애초부터 종류가 다르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진짜 통치자는 툴롱을 페허로 만들고, 파리에서 대학살을 감행하고, 이집트에 대군을 내버리고, 모스크바 원정에서 50만 인명을 소비하고, 빌뉴스에서는 말 한마디로 해치우고서도 어디까지나 태연하다. 게다가 죽은 후에는 그런 인간을 모두 우상으로 떠받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인간들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어떤 뜻하지 않은 빗나간 상념이 떠올라 그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나폴레옹, 피라미드, 워털루....거기에 빨간 가죽 트렁크를 침대 밑에 감추고 있는 야위고 꾀죄죄한, 관리의 미망인인 돈놀이 노파, 이쯤 되면 아무리 포르피리라 해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자들이 어떻게 이것을 소화한담! 미학(美學)이 방해를 할 테니까....'나폴레옹이 설마 노파의 침대 밑에 기어들라고!' , 시시하다!

때때로 그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열병적인 환희에 젖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노파 따위는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는 열심히 끈질기게 생각했다. '노파는 어쩌면 과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노파는 단순한 질병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밟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주의(主義)를 죽였다. 주의를 죽이기는 했으나 밟고 넘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이쪽에 남고 말았다...그저 죽이는 일만 해치운 것이다. 아니, 그것도 이제 보니 제대로 해내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주의는? 바보 같은 라주미힌은 또 뭣 때문에 아까 사회주의자들을 욕했을까? 그들은 일을 좋아하는 수완 있는 장사꾼들이고 '인류 공동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은가...그렇다, 인생은 나에게 한 번 주어질 뿐 두 번은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도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데 어떠냐?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을 기다리면서 자기 돈을 주머니 속에 움켜쥐고 굶주린 어머니 곁을 모른 체 지나치기가 싫었을 뿐이다.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을 건설하기 위해 벽돌 한 개를 운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 ! 어째서 자네들은 나를 빠뜨렸지? 어차피 나도 한 번밖에 살지 못하니까 나도 남처럼 살고 싶단 말이다....아아, 나는 미적(美的)인 이().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대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 나는 정말 이다.' 그는 짓궂은 기쁨을 느끼면서, 이 상념에 매달려 그것을 파헤치고, 희롱하고, 즐기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그것은 다음의 이유만으로도 명백하다. 첫째, 지금 나 자신이 이라는 것을 고찰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둘째, 나는 전지전능의 신을 증인으로 끌어내 꼬박 한 달 동안 나의 이 계획을 내 육욕이나 생욕(生慾) 때문이 아니라 위대하고 유쾌한 목적 때문이라고 해서 공연한 폐를 끼쳤다는 점이다. , ! 그리고 셋째, 그것을 실행하는 데 되도록 공정과 중용과 척도와 수학을 준수하려고 결심하고 많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유해무익한 놈을 선택했고, 또 그것을 죽이고 나서도 자기의 첫걸음에 꼭 필요한 정도만을 알맞게 취하려고 했다는 점이다...나머지는 유언장에 따라 자연히 수도원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 ! 따라서 나는 역시 이밖에는 안 되는 인간이다'하고 그는 이를 갈면서 덧붙였다. '어쩌면 나 자신이 살해당한 이보다 더 더럽고 혐오할 만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죽이고 난 뒤엔 반드시 이런 독백을 하리라고 미리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아 아, 이 두려움에 비길 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아아, 이 저속함! 이 비열함....아아, 이제는 나도 이해하겠다. 말을 타고 대검을 휘두르면서, 알라의 신이 명한다. 복종하라, 떨고 있는 버러지 같은 놈들아! 라고 호령한 저 예언자를 알 만하다! 어느 거리를 가로막고 거창한 포열(砲列)을 짓게 하고, 죄가 있든 없든 구별없이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용서 없이 쏘아대는 예언자는 그야말로 정당하다. 복종하라, 떨고 있는 비열한 자들아, 희망을 품지 마라, 이건 너희들이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아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 노파를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머리털은 땀으로 흠뻑 젖고, 떨리는 입술은 바싹 마르고, 움직이지 않는 눈초리는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 나는 이 두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 그 두 사람을 증오하는 것일까? 그렇다, 그들을 증오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증오하고 있다. 곁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로...아까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서 키스를 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를 포옹하면서, 만약 그 일을 알게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아니, 그렇다면 차라리 죄다 말해버릴까? 어차피 그렇게 될 테니까....! 어머니도 나와 다를 게 없지 않느냐.' 그는 마치 자신을 사로잡는 악몽과 싸우기라도 하듯이 열심히 생각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아, 정말이지 그 노파가 미워 죽겠구나! 만일 그 노파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또 한 번 그녀를 죽일 것이다. 가엾은 리자베타! 무엇 때문에 그런 곳에 불쑥 나타났을까! 그러나 이상하다, 왜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을까, 마치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리자베타! 소냐! 두 사람 다 상냥한 눈을 가진 가엾고 얌전한 여자다...착하디 착한 여자들, 왜 그녀들은 울지 않는가? 왜 신음하지 않는가? 그녀들은 모든 것을 다 주면서도...그 눈은 상냥하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소냐! 소냐! 조용한 소냐!'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새 어떻게 해서 거리 한가운데 서 있는지 기억이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미 늦은 저녁녘이었다. 황혼 빛도 짙어지고 둥근 달도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어째선지 공기는 유달리 후텁지근했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직공이나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흩어져 가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산책하고 있었다. 석회며, 먼지며, 시궁창 냄새가 풍긴다. 라스콜니코프는 수심 어린 침울한 모습으로 걸었다. 그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집을 나왔으므로 무엇인가 해야 하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맣게 잊었다. 문득 그는 발길을 멈췄다. 한길 건너편 보도 위에 한 사나이가 서서 그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길을 건너서 그 사나이 쪽으로 갔다. 그러자 사나이는 휙 몸을 돌리더니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보지도 않을뿐더러 자기가 부르지도 ㅇ낳은 것 같은 태도로 걷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정말 저 사내가 부른 걸까?'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으나, 그래도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열 걸음도 채 가기 전에 그 사나이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가운 차림의 등이 굽은 아까 그 상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조금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 후 어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나이는 여전히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상인은 어느 큼빅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라스콜니코프는 급히 그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나이가 돌아보지 않을까, 자기를 부르지나 않을까 하살피기 시작했다. 과연 사나이는 대문을 지나 뒤뜰로 발을 들여놓자 홱 뒤를 돌아보며 다시 그에게 손짓한 듯했다. 라스콜니코프는 곧 문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뒤뜰에 상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나이는 바로 앞 층계를 올라간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뒤를 쫓아 올라갔다. 과연 2층쯤 위에서 누군가의 규칙적인 여유로운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층계는 어딘지 눈에 익었다! , 저기 아래층 창문이 보인다. 달빛이 침울하고 신비스럽게 유리를 통해 비쳐 들고 있다. 이제 곧 2층이다. ! 이것은 칠장이들이 페인트칠을 하던 바로 그 방이구나... 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을가! 앞에가던 사람이 발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걸음ㅇ르 뭠췄던가, 아니면 어디엔가 숨은 모양이다.' , 이제 3층이다. 더 올라간 것일까? 어찌나 조용한지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더 올라갔다. 자기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그를 무섭고 불안하게 했다. , 어쩌면 이렇게 어두울까! 상인은 분명히 어딘가 이 근처에 숨었을 것이다. ! 그 방의 문은 층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은 깜깜하고 텅 비어 인기척이 없고, 가구류도 죄다 실어 내간 듯했다. 살그머니 발끝으로 걸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방 안 전체가 선명한 달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여기는 모든 게 전과 다름없었다. 의자, 거울, 노란 소파, 액자의 그림들, 커다랗고 둥근 달이 붉은 구릿빛을 내며 창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달빛 때문에 이렇게 고요한가 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달은 지금 나한테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을 게다.' 그는 서서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달빛이 조용하면 할수록 그의 심장은 점점 더 세게 고동쳐서 나중에는 아플 정도였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갑자기 나뭇조각이라도 꺾이는 듯한 메마른 소리가 일순간 정적을 깨뜨렸으나 주위는 다시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을 깬 파리 한 마리가 놀란 듯 날아가다가 유리에 부딪혀 애처럽게 윙윙거린다. 마침 이 순간 한쪽 구석의 조그마한 찬장과 창문 사이 벽에 걸려 있는 여자용 외투 같은 것이 눈에 띄였다. '왜 저런 곳에 여자 외투가 걸려 있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전엔 저런 것이 없었는데....' 그는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러자 외투 뒤에 누가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조심조심 외투를 걷어보았다. 거기에는 의자가 놓여 있고, 그 한 귀퉁이에 노파가 걸터앉아 있었다. 몸을 앞으로 꺾고 고개는 푹 숙이고 있으므로 얼굴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 노파였다. 그는 잠시 노파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무서워하는군!' 하고 그는 생각하고, 살그머니 올가미에서 도끼를 빼어 노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한 번, 또 한 번, 그러나 이상하게도 노파는 도끼로 얻어맞고도 옴짝달싹 않는다. 마치 목상(木像)과도 같았다. 그는 깜짝 놀라 좀 더 가까이 몸을 굽히고 노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는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에 닿을 만큼 몸을 굽히고 밑에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마치 송장처럼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노파는 앉은 채로 웃고 있지 않은가. 그가 들을까 봐 열심히 참으면서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웃고 있었다. 갑자기 침실 문이 방긋이 열리고, 거기서도 역시 사람들이 웃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힘을 다해 노파의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끼로 내리칠 때마다 침실의 웃음소리와 속삭임은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높이 들리고, 노파는 온몸을 흔들면서 웃어젖혔다. 그는 도망치려 했으나 현관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층계로 향한 문들은 모조리 열려 있고 복도에도, 층계에도, 그리고 아래쪽에도....머리들을 서로 맞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 숨을 죽이고 말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그는 가슴이 죄어들고 발을 뿌리가 박힌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려다가...퍼뜩 눈을 떴다.

그는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문은 활짝 열려 있고, 문지방 위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한 사나이가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눈을 뜨기도 전에 다시 감아버렸다. 그는 반듯이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직도 꿈의 계속일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살피려고 저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살며시 속눈섭을 쳐들어 보았다. 낯선 사나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나이는 조심스레 문지방을 넘어서, 뒤로 살그머니 문을 닫고는 탁자로 가까이 다가와 1분쯤 기다렸다. 그사이에도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다음 조용히 소리 나지 않게 소파 옆 의자에 앉고는, 모자를 옆의 마루 위에 놓고 두 손을 스틱 위에 포개고서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끝까지 기다릴 모양이다. 깜박이는 속눈썹 사이로 본 바로는, 그는 이미 젊은 편이 아니며 엷은 빛의 숱 많은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건장한 몸집의 사나이였다.

10분쯤 지났다. 아직 밝기는 했으나, 날은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층계 쪽에서도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힘차게 날다가 유리창에 부딪혀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소파 위에 앉았다.

", 말하시오, 당신은 무슨 볼일이 있소?"

"아니, 나도 당신이 잠든 것이 아니고 그저 잠든 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낯선 사나이는 침착하게 웃으면서 기묘한 어조로 대답했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나는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스비드리가일로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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