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1부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 한 젊은이가 셋집에 하숙하고 있는 S 골목의 자기 방에서 거리로 나오자, 어쩐지 좀 망설이는 듯한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K 다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다행히도 층계에서 안주인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방은 높다란 5층 집의 바로 지붕 밑에 있었는데, 사람 사는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롱에 가까웠다. 이 조그만 방을 하녀와 식사가 딸린 채 빌려주고 있는 하숙집 안주인은 한 층 밑의 딴 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밖에 나가자면 거의 언제나 층계 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주인집 부엌 옆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청년은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언제나 그 병적인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얼굴을 찌푸렸다. 하숙비가 잔뜩 밀려 있었으므로 얼굴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겁이 많고 나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부터 그는 우울증과도 같은 흥분하기 쉬운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골똘히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면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안주인뿐만 아니라 누구하고도 얼굴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가난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상태마저도 최근에 와서는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할 당면한 일까지도 모두 내동댕이친 채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실 말이지, 상대방이 어떤 일을 꾸미든 간에 그는 하숙집 안주인 따위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층계 위에 서서 자기에겐 아무 소용도 없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며, 끈덕진 방세 독촉이며, 협박이며, 애걸복걸하는 온갖 넋두리를 고스란히 들어준 다음 이쪽은 또 이쪽대로 상대방을 달래거나 사과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층계를 빠져나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일단 거리에 나와버리자, 빚진 여자하고 만나는 것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던 자기 자신에게 그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의 큰일을 단행하려는 주제에 그런 사소한 일에 두려움을 느끼다니!'하고 그는 기묘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흠...그렇다...모든 것은 인간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모든 것이 코 옆을 스쳐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겁쟁이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이미 하나의 공리(公理)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일까? 새로운 첫걸음, 새로운 자기 자신의 말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하고 있다. 그런 그렇고, 나는 너무 지껄이는 것 같군. 너무 많이 지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지껄이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밤낮 방구석에만 누워서...옛날이야기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그 지껄이는 버릇을 배워버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 걷고 있을까? 과연 나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은 진실한 얘기일까? 천만에, 진실하기는커녕 공상을 위한 공상으로 자기 자신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노리개다! 그렇다, 노리개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거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게다가 답답한 공기, 거리의 혼잡,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석회, 건축장의 발판, 벽돌, 먼지, 그리고 별장을 빌릴 능력이 없는 페테르부르크 사람이라며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 독특한 여름의 악취...이 모든 것이 거의 하나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뒤범벅이 되고 있는 청년의 신경을 불쾌하게 자극했다. 시내에서도 특히 이 근처에 널리 흩어져 있는 술집에서 풍기는 참을 수 없는 악취, 게다가 근무시간인데도 쉴 새 없이 마주치는 주정뱅이의 모습들이 이러한 정경의 추악하고 우울한 색채를 더욱 짙게 해주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깊은 혐오의 빛이 일순간 청년의 섬세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겸해서 말해두지만, 그는 아름다운 검은 눈에 밤색 머리를 한 보기 드문 미남자로서, 키는 중키보다 크고 날씬한 몸매에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깊은 명상, 아니 명상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망각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이미 주위의 사물에는 주의를 돌리지도 않고, 또 돌리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끔 혼잣말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곤 했다. 방금 그 자신도 고백했듯이, 독백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는 자기 생각이 가끔 뒤범벅이 되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는 이틀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매우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비록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누더기 옷을 입고 대낮에 거리고 나오기가 부끄러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구역은 복장 같은 것으로 남을 놀라게 하기는 힘든 곳이었다. 센나야(건초목장)가 가까이에 있고, 수없이 널려 있는 소문난 집들(사창굴을 말함), 그리고 특히 이곳 중부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와 뒷골목에 들끓는 직공과 노동자의 무리...이런 것들이 가끔 이 부근 일대의 거리 풍경을 괴상한 색채의 인간들로 얼룩지게 하므로, 색다른 사람을 보고 놀란다면 오히려 놀라는 쪽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청년의 마음속에는 증오 어린 멸시감이 쌓이고 또 쌓여 있었으므로, 때때로 느끼곤 하는 그 젊은이다운 섬세한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리에서 자기의 누더기 옷을 조금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안면깨나 있는 사람이나 대체로 만나기를 꺼리는 옛 친구 따위와 만났을 때는 또 별문제일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엄청나게 큰 말이 끄는 커다란 짐마차에 올라탄 주정뱅이가, 지금쯤 무슨 일로 어디에 가는지는 모르지만 거리를 지나가면서 느닷없이 그에게 "야, 이 독일 모자 쓴 놈아!"하고 소리치고는 삿대질을 하며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러자 청년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떨리는 손으로 자기 모자를 움켜잡았다. 그것은 운두가 높고 둥근 '침메르만'제 모자였지만, 이미 낡을 대로 낡아서 완전히 불그죽죽하게 변하고 온통 구멍과 얼룩투성이인 데다 테두리가 떨어져 나가고, 한쪽 귀퉁이가 보기에도 민망스럽게 옆으로 휘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그 어떤 경악과도 흡사한 감정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게 나쁘단 말이야! 이렇게 하잘것없고 사소한 일이 모든 계획을 망쳐버릴 수도 있는 거야! 그래, 이 모자는 너무 눈에 띄기 쉬워...꼴불견이기 때문에 눈에 띄기 쉬운 거야...이런 누더기 옷에는 아무리 낡은 빵떡 같은 거라도 학생모가 제일이야, 이런 벙거지 같은 거론 안 돼. 이런 걸 쓰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잖냐 말이다. 1킬로미터 밖에서도 눈에 뛰어 꼭 기억해버릴 거야...중요한 것은, 나중에라도 기억에 남는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그게 곧 증거가 되니까. 지금은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사소한 것, 사소한 것일수록 중요하다! 이런 사소한 일이 왕왕 전체를 망쳐버리거든....'
그는 그다지 오래 걷지는 않았다. 자기 집 문간에서 몇 걸음 된다는 것까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 730보였다. 언젠가 골똘히 공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째선지 그는 우연히 세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 자신은 자기의 공상을 믿지 않았다. 다만 추악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대담무쌍한 망상으로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전혀 딴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과 나약성에 대해서 온갖 자조적인 독백을 되풀이하면서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추악'한 공상을 이미 하나의 계획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붙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자기의 계획을 시험해보려고 걸어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가슴 고동은 점점 심해갔다.
그는 심장이 꺼지는 듯한 느낌과 신경성의 전율을 느끼면서 한쪽은 개천, 또 한쪽은 00거리에 접해 있는 굉장히 큰 건물로 다가갔다. 이 집은 전체가 여러 개의 작은 아파트로 되어 있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 가령 재단사, 자물쇠 장수, 여자 요리사, 각양각색의 독일인, 자기 몸을 팔아 살아가는 처녀들, 하급 관리 등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두 개의 출입문 밑과 두 개의 안뜰에는 언제나 집안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거기에는 또 문지기가 서넛이 있었다. 청년은 어느 문지기하고도 마주치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만족한 표정으로 문에서 곧 오른편 층계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숨어 들어갔다. 그것은 어둡고 좁은 '뒤층계'였다. 이미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잘 조사해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이라면, 아무리 호기심이 강한 시선이라도 위험할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렇게 겁을 집어먹으면 정작 실행할 단계에 가서 실제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경우 도대체 어쩔 셈인가?' 4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어느 아파트에서 가구를 들어내고 있는 군인 출신 인부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 아파트에는 가족을 거느린 독일인 관리가 산다는 것을 그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하, 그 독일인이 이사를 가는 모양이군. 그러면 이 층계, 이 입구로 통하는 4층엔 당분간 노파의 방 하나만 남는 셈이다...그거 참 잘됐다....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도....'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고 노파의 방 초인종을 울렸다. 초인종은 놋쇠가 아니라 함석으로 만든 듯이 약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집의 조그만 아파트에는 으레 이런 초인종이 붙어 있게 마련이다. 그는 벌써 종소리 같은 것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특이한 음향은 불현듯 그에게 어떤 것을 상기시키고, 무엇인가를 생생히 떠오르게 한 것 같았다....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지금 극도로 신경이 쇠약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빠끔히 문이 열리더니, 그 틈바귀로 여주인이 자못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손님을 훑어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 조그마한 눈만이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그러나 층계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노파는 용기를 내어 문을 활짝 열었다. 청년은 문지방을 넘어서 칸막이로 차단된 어두컴컴한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칸막이 저쪽은 좁은 부엌이었다. 노파는 말없이 그의 앞에 버티고 서서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술궂은 날카로운 눈과 조그만 뾰족코를 한, 체소하고 깡마른 예순 살 안팎의 노파였는데,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이는 아마 빛 머리에는 머릿기름이 번지르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닭다리처럼 가늘고 긴 목에는 낡은 플란넬 천 조각이 둘려 있고, 어깨에는 이 더위에도 닳고 닳아 누렇게 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노파는 1분이 멀다 하고 기침을 하거나 신음 소리를 냈다.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초리에서 뭔가 이상한 표정이라도 발견했는지, 갑자기 노파의 눈에서는 또다시 불신의 빛이 번쩍였다.
"라스콜니코프라는 대학생입니다, 약 한 달 전에 찾아뵌 적이 있는." 좀 더 상냥하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한 청년은 약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생각나는군요, 생각나다마다요. 당신이 여기 다녀갔던 일이."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경계하는 눈을 떼지 않으면서 노파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저...그때와 같은 용건으로..."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의심 많은 노파의 태도에 놀라면서 약간 당황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노파는 언제나 이럴지 모른다. 요전번엔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겠지'하고 그는 불쾌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노파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없다가 이윽고 한쪽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고는 방문을 가리켜 손님을 들여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들어가세요."
청년이 들어간 곳은 노란 벽지를 바른 그리 크지 않은 방으로,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몇 개 놓여 있고 모슬린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때마침 저녁 햇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겠지!' 저도 모르게 라스콜니코프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스쳐 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방 안의 상태를 연구하고 기억해두려고, 그는 재빨리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방 안에는 눈여겨 둘 만한 거라고는 별로 없었다. 가구라야 모두 낡아빠진 노란 목제품뿐으로, 커다란 등받이가 뒤로 휘어 있는 긴 의자, 그 앞에 몰려 있는 타원형 탁자, 창문과 창문 사이 벽면에 붙여놓은 체경 달린 화장대, 벽가에 세워둔 의자 몇 개, 새를 손에 든 독일 처녀를 그린 노란 액자에 든 싸구려 그림 두세 장, 이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방 한구석, 그리 크지 않은 성상 앞에는 빨갛게 등잔불이 타고 있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놀랄 만큼 깨끗했다. 가구도, 마룻바닥도 윤이 나게 닦이고, 모든 것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리자베타가 했겠지'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방 안 어느 곳을 보아도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술궂은 노과부 집은 으레 이렇게 깨끗한 법이야'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러고는 조그만 안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 드리온 옥양목 커튼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살짝 곁눈질해 보았다. 거기에는 노파의 침대와 장롱이 놓여 있지만, 그는 아직 한 번도 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 두 개 방이 노파가 사는 아파트의 전부였다.
"그래, 용건은?"하고 노파는 방으로 들어오자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고는 손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아까처럼 그의 정면에 버티고 섰다.
"저당 잡힐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자, 이겁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얄팍한 은시계를 꺼냈다. 뒤뚜껑에는 지구의가 그려져 있고, 시곗줄은 쇠줄이었다.
"하지만 먼저 것도 벌서 기한이 지났어요. 그저께로 꼭 한 달이니까."
"그럼 한 달분 이자를 더 내겠습니다. 조금만 더 봐주십시오."
"글쎄, 학생을 봐주든 그 물건을 당장 팔아버리든, 그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에 달린 거요."
"시계라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겠지요, 알료나 이바노브나?"
"언제나 쓸모없는 것만 가져오는구먼. 이런 건 통 값이 안 나간단 말씀이야. 요전번엔 반지 하나에 두 장이나 줬지만, 그것도 보석상에 가면 새것을 한 장 반으로 살 수 있거든."
"한 4루블만 돌려주십시오, 꼭 찾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시계니까요. 곧 돈도 올겁니다."
"1루블 반 하지, 그것도 선이자로. 그래도 좋다면."
"1루블 반이라고요!"하고 청년은 소리쳤다.
"마음대로 해요." 노파는 이렇게 말하고 시계를 다시 돌려주었다. 청년은 그것을 받아 쥐었으나, 울화가 치민 나머지 그대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별로 갈 만한 곳도 없었고, 게다가 여기 찾아온 것은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하세요!"하고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노파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찾으면서 커튼 뒤 안방으로 사라졌다. 청년은 방 한가운데 혼자 남게 되자 바싹 귀를 곤두세우고 이것저것 궁리하기 시작했다. 장롱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윗서랍일 게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열쇠는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군...한 뭉치로 쇠고리에 끼워서...그중엔 딴 것보다 세 배나 큰 톱니 모양 열쇠가 하나 있지만, 물론 그건 장롱 열쇠는 아닐 게다...그렇다면 따로 귀금속함이나 궤짝 같은 것이 있겠지...거참 재미있군. 궤짝에는 으레 그런 열쇠가 붙어 있는 법이니까...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비굴한 생각이냐...'
노파가 되돌아왔다.
"그럼 1루블에 대한 한 달 이자를 10코페이카로 쳐서 1루블 반이면 선이자로 15코페이카, 그리고 먼젓번 2루블에 대해서도 같은 계산으로 20코페이카를 미리 빼면, 모두 합해서 35코페이카. 그러니까 그 시계 대가로 당신 손에 들어갈 돈은 1루블 15코페이카가 되는군. 자, 받아요."
"뭐요! 아니, 1루블 15코페이카밖에 안 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청년은 다툴 생각도 하지 않고 돈을 받아 쥐었다. 그는 물끄러미 노파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무슨 할 말이나 해야 할 일이 남은 듯이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인지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알료나 이바노브나, 어쩌면 며칠 내로 물건을 또 하나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으로 만든 ...근사한 담배 케이스 하나를...친구한테 돌려받는 대로..." 그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건 또 그때 가서 얘기합시다, 학생."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그런데 할머니는 언제나 혼자 계시는군요. 동생은 어디 갔나요?" 하고 문간방으로 나가며 되도록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물었다.
"내 동생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뭐 별로. 그저 물어본 거죠. 그런데 할머니는 지금...안녕히 계십시오, 알료나 이바노브나!"
라스콜니코프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그곳을 나왔다. 마음의 혼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층계를 내려오면서도 그는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여러 번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거리로 나서자, 그는 참다못해 소리를 내어 이렇게 외쳤다.
'아아! 이 얼마나 추잡한 짓이냐! 정말, 난 정말...아니, 이건 어리석은 짓이야, 이건 바도 같은 짓이야!'하고 그는 단호히 덧붙였다. '이런 무서운 생각이 어떻게 내 머리에 떠올랐을까?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떠오르게 한 내 심장은 또 얼마나 더러우냐 말이다! 무엇보다 더럽고 비열하다, 추악하다, 추악해...그런데도 난 꼬박 한 달 동안이나....'
그러나 그는 말로도, 외침으로도 자기의 흥분을 표현할 수 없었다. 노파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부터 이미 그의 마음을 짓누르며 고통을 주기 시작했던 끝없는 혐오감은 지금 엄청난 크기로 성장하여 뚜렷이 그 정체를 드러내 버렸으므로, 그는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몸을 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오가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들과 몸을 부딪치면서 길을 걸어갔다. 그는 다음 거리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자기가 어느 선술집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술집으로 들어가자면 길에서 층계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야 했다. 바로 그때, 주정뱅이 두 사람이 문에서 나와 서로 몸을 기대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계단을 올라왔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라스콜니코프는 곧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제껏 한 번도 술집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머리가 빙빙 도는 데다가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찬 맥주라도 한 잔 들이켜고 싶었다. 더구나 갑자기 쇠약해진 곳도 공복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둡고 더러운 한쪽 구석 끈적끈적한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는, 맥주를 주문하고 첫 잔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곧 기분이 안정되고 생각도 선명해졌다. '이건 모두 어리석은 생각이야!'하고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황할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가 육체적인 장애 때문이야! 고작 맥주 한 잔, 빵 한 조각으로...이렇게 금방 머리가 명석해지고 의식이 맑아지고 의지도 확고해지니 말야! 쳇, 세상만사가 이렇게도 어리석다니!' 그러나 이렇게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경멸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어떤 무섭고도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한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그곳 사람들에게도 정다운 눈길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순간조차 모든 것을 좋은 각도로 받아들이려는 그 감수성 자체가 역시 병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예감하고 있었다.
이때 술집에는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층계에서 마주쳤던 주정뱅이 두 사람에 뒤이어 손풍금을 들고 여자 하나를 거느린 5인조 한 패가 우르르 밀려 나갔으므로 술집 안은 텅 빈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맥주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거나하게 취한 장사꾼 차림의 사내와 시베리아식 짧은 상의에 하얀 턱수염을 기른, 체격이 좋고 뚱뚱한 그의 친구였다. 그 사내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벤치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가끔 꿈꾸듯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가 하면, 두 손을 좌우로 벌리기도 하고 벤치에 누운 채 상반신만 들썩거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떤 노래 구절을 상기하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돼먹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년 꼬박 마누랄 애무했지
1년 꼬오박 마누랄 애무했지...
그러다간 갑자기 눈을 뜨고,
포지야체스카야를 걸어가자니
옛날 그 임을 만났다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행복에 공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묵한 그의 친구는 이런 감흥의 발작으로 오히려 적의 넘치는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한 사람, 퇴직 관리 같아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혼자 떨어져 앉아서, 주문한 술병을 앞에 놓고 이따금 한 모금씩 들이키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사람 역시 어느 정도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사람이 많은 곳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되도록 남과의 교제를 피해왔고, 특히 최근 와서는 더 심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지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졌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새로운 것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어떤 갈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꼬박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된 그 눈코 뜰 새 없는 번민과 음울한 흥분에 완전히 지쳐 있었으므로 단 1분 만이라도, 어떤 곳이라도 좋으니 딴 세계에서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불결하기 그지없는 환경인데도 그는 만족한 마음으로 이 술집에 앉아 있었다.
술집 주인은 딴 방에 있었으나, 어디에서인지 계단을 내려와서는 잠깐씩 가게에 나타나곤 했다. 그때마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은 가죽으로 크게 윗동을 접은, 윤이 나게 기름칠을 한 멋진 장화였다. 그는 반코트를 입고 반지르르 기름때가 묻은 검은 공단 조끼에 넥타이는 매지 않고 있었으나, 그 얼굴 전체가 기름칠을 한 무쇠 자물통처럼 번질거렸다. 스탠드 저쪽에는 열너덧쯤 된 소년이 있었으나, 그 밖에 또 한 사람, 주문이 있을 때마다 물건을 나르는 좀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거기에는 잘게 썬 오이며 검은 건빵이며 생선 조각들이 놓여 있어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가게 안은 숨이 막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게 전체에 술 냄새가 배어 있어서 그 공기를 맡기만 해도 5분이면 취할 것 같았다.
이 세상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인데도 말 한마디 건네보기도 전에 첫눈에 벌써 흥미를 느끼게 되는 기이한 해우상봉이 있는 법이다. 좀 떨어져 자기 잡고 있는, 퇴직 관리인 듯싶은 그 손님이 바로 이와 같은 인상을 라스콜리코프에게 주었다. 청년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이 최초의 인상을 상기하고는, 그것을 예감의 소치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그 관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물론 저쪽에서도 유심히 그를 바라보며 무척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관리는 가게에 있던 딴사람들에 대해서는(주인까지 포함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지루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분으로나 교양으로나 도시 말할 상대도 되지 않는 하층계급의 인간들을 대하기라도 하는 듯한, 일종의 오만스러운 경멸적인 태도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쉰 고개를 넘은 중키의 건장한 사내로, 반백의 머리에는 크게 대머리가 져 있었다. 끊임없는 음주 때문에 부석부석 부은 그의 얼굴은 노랗다 못해 푸르죽죽하고, 부풀어 오른 듯한 눈꺼풀 밑에서 조그맣게 째진 듯한,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충혈된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나이에게는 무언가 매우 색다른 점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의 눈초리에는 일종의 감격돠고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사려와 분별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번득이기도 했다. 그는 다 헤어지고 단추가 떨어진 검정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단추 하나가 겨우 남았으나, 그래도 체면은 잃기가 싫은 듯 단정히 그것을 끼우고 있었다. 남경목면으로 된 조끼 밑으로 쭈글쭈글 꾸겨지고 술로 얼룩진 더러운 셔츠 앞섶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딴 관리들처럼 얼굴에는 면도를 했으나, 그것도 꽤 오래전에 한 듯 벌써 푸르스름한 굵은 털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의 몸가짐에는 어딘지 모르게 관리다운 의젓한 데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근심 어린 빛으로 머리칼을 움켜잡기도 하고, 때로는 우수에 잠긴 채 끈적끈적한 탁자 위에다 구멍 뚫린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똑바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내 말 상대가 좀 돼 줄 순 없겠소? 보건대 당신의 외모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내 경험으로 봐서 교육받은 분인 것 같고, 또 술에는 그다지 익숙지 못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나도 성실성을 지닌 교양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9등관입니다. 마르멜라도프란 성을 가진 9등관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도 관청에 나가시는지?"
"아니요, 공부하는 중입니다...." 청년은 상대방의 능글맞은 어조와, 그토록 당돌하게 정면으로 말을 건네오는 데 적이 놀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어떤 사람하고든지 말을 해보고 싶었건만, 정작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생기자 그는 곧 자기 특유의 불쾌하고 초조한 혐오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개성을 건드리거나 또는 건드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럼 학생이시군, 아니면 대학에 다닌 적이 있는 전직 대학생!"하고 관리는 외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게 다 경험이죠, 다년간에 걸친 경험이란 말이오!"하고 그는 자랑이라도 하는 듯 이마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 "당신은 대학생이었거나, 아니면 학문적인 단계를 거쳐온 사람일 거요! 그럼 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자기 술병과 컵을 집어 들고 청년 쪽으로 다가와서 비스듬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취해 있었으나, 제법 웅변조로 잘 지껄였다. 다만 이따금씩 말을 얼버무리며 말끄을 끌 뿐이었다. 그는 게걸이 든 사람처럼 라스톨니코프에게 달려들었다. 그 역시 꼬박 한 달 동안 아무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한 사람 같았다.
"젊은 양반"하고 그는 자못 정중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이건 진립니다. 그리고 음주가 선행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아요. 아니 오히려 그쪽이 더 진리일 거요. 하지만 굶어 죽을 정도로 적빈(赤貧)이 되면, 학생, 그 정도로 적빈이고 보면...이건 죄악이란 말이오. 가난할 때까지는 그래도 타고날 때부터 지닌 선천적인 고결한 감정을 보존할 수 있지만, 적빈 상태에 이르면 아무도 그럴 수는 없거든요. 적빈 상태에까지 이르면, 인간 사회에서 두들겨 맞아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비로 쓸려버리고 마는 거요. 그보다 더 큰 모욕이 없게 말이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적빈 상태에 이르고 보면 우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모욕하고 싶어지니까요. 여기서 결국 술을 찾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학생, 약 한 달 전 일입니다만, 레베탸니코프란 자가 내 마누라를 때렸어요. 그런데 마누라는 나 같은 놈하곤 비교도 안 될 사람이거든요! 알겠어요? 단순한 호기심에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는데... 당신은 네바강의 건초선에서 자본 일일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그건 어떤 거죠?"
"실은 내가 거기서 왔다오. 벌써 다섯 밤 째나...."
그는 잔에 가득 술을 따라 쭉 들이켜더니 이내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실제로 그의 옷뿐 아니라 머리칼에까지 건초 나부랭이가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닷새 동안이나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세수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특히 기름때가 묻고 까만 손톱이 자란 불그죽죽한 두 손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 귀담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만은 분명했다. 카운터 저쪽의 소년들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술집 주인은 '어릿광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부러 윗방에서 내려왔는지, 천천히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마르멜라도프가 옛날부터 이 집 단골손님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수식어가 풍부한 그 어조도 각양각색의 낯선 사람들과 수없이 지껄여온 습성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이 습성은 어떤 종류의 술꾼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집에서 푸대접을 받거나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에겐 특히 심하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술친구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되도록이면 존경심까지 얻어보려고 항상 무진 애를 쓰는 것이다.
"어릿광대!"하고 주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일을 하지 않는 거야, 왜 직장에 안 나가느냐 말이야, 관리라면서?"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이봐, 젊은 양반"하고 마르멜라도프는 마치 라스콜니코프가 물어보기라도 한 듯이 오로지 학생 쪽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왜 직장에 안 나가느냐고? 아니, 그럼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다고 해서 내겐 조금도 양심이란 것이 없는 줄 아시오? 달포 전에 레베챠트니코프 씨가 내 마누라를 때렸을 때만 해도 나는 술 취해 누워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했는 줄 아시오? 실례지만 젊은 양반, 당신한테는 이런 일은 없었던가요? 이를테면 가망도 없는 돈을 꾸려고 한 일 말이오?"
"있습니다...하지만 왜 가망이 없다는 거죠?"
"전혀 가망이 없을 때를 말하는 거요. 처음부터 그 사람한테서 돈 한 푼 꿀 수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때 말이오. 예를 들어 말입니다. 어떠어떠한 사람은...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유능한 시민인 아무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돈을 꾸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진작부터 잘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돈을 꿔줄리 있겠어요?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내가 돈을 돌려주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이오. 동정심에서라도 빌려주리라 생각하나요? 하지만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레베챠트니코프 씨 같은 사람은 요전번만 해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오늘날 동정이란 것은 학문상에서도 금지되고 있어서, 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는 이미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고요. 어때요, 이런 형편인데 그 사람이 돈을 꿔주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오, 돈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역시 그 사람한테로 찾아간다, 그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는 겁니까?"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찾아갈 사람도 없거니와 찾아갈 만한 곳도 없으니 할 수 없는 거죠! 어떠한 인간이든 적어도 발길 돌릴 데쯤은 있어야 하잖겠어요? 살아가노라면 어디로든지 꼭 가야만 하는, 그럴 때가 종종 생기게 마련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내 외동딸이 처음으로 노란 감찰(매음부가 지니는 감찰을 뜻함)을 가지고 나갔을 때, 나도 역시 밖으로 나갔어요... 내 딸년은 노란 감철로 먹고살거든요"하고 그는 다소 불안이 깃든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단서라도 붙이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괜찮아요, 젊은 양반, 괜찮고말고요!"
카운터 저쪽에서 두 소년이 웃음을 터뜨리고 가게 주인이 싱그레 웃음을 짓자, 그는 성급히,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잘라 말했다.
"암, 괜찮고 말고요! 저렇게 머리들을 끄덕이며 비웃는다고 해서 내가 뭐 당황할 줄 아십니까? 이젠 모든 것이 다 알려져서 비밀의 밑바닥까지 드러나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경멸은커녕 겸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사람을 보라!'지요. 그런데 젊은 양반, 당신은 하실 수 있겠소...아니, 좀 더 강하고 좀 더 적절한 표현을 빌린다면 하실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그럴 용기가 있소...지금 이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돼지가 아니라고 장담할 만한 용기가 있느냐 말이오?"
청년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하고는 또다시 방 안에 일어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변사는 한층 더 위엄이 깃든 장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돼지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내 마누라는 그래도 어엿한 부인이란 말이오! 나는 짐승 꼴을 하고 있지만 내 마누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영관(領官)의 딸로 태어난 교양 있는 부인이란 말이오. 나는 비굴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해도 무관하지만 집사람은 훌륭한 정신과 교육으로 높여진 고상한 감정으로 충실해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만...아아, 집사람이 좀 더 내게 동정심을 가져준다면! 학생 양반, 어떤 사람이든 한 군데 만이라도 동정받을 곳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그런데도 카체리나는 그토록 마음이 넓은 여자이면서도 옹졸한 데가 있어요...하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편네가 내 앞머리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것은 결국 나를 불쌍히 여긴 데서 나온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오. 조금도 거리낌없이 또 한 번 얘기하지만, 그 사람은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다닌답니다."
그는 또다시 키득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 더욱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만, 아아, 그 사람이 단 한 번만이라도....아니! 아니! 모두 소용없어, 할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단 말이오...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동정을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오. 그렇지만...이게 내 본성이니 어떡합니까, 난 태어날 때부터 짐승과 다름없는 놈이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하고 주인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마르멜라도프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이게 내 본성이란 말이오! 그런데 아시겠어요, 젊은 양반, 나는 마누라의 양말까지도 팔아 술을 마셔버렸어요! 글쎄, 구두 정도라면 그래도 납득이 갈지 모르지만 양말까지, 마누라의 양말까지 술로 마셔버렸으니까요! 그리고 마누라의 산양털 목도리까지 마셔버렸지요. 전에 어떤 사람한테서 선물 받은 건데, 내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 식구는 추운 칸막이 셋방에서 살고 있어서 마누라는 지난 겨울 감기에 걸려 기심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피를 토할 정도가 됐어요. 자식은 어린 것이 셋인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루를 닦고 빨래를 하고 애들을 목욕시키는 등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일에 파묻혀 살지요. 하긴 어릴 때부터 깨끗한 생활에 익숙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은 가슴이 약해서 결핵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거든요. 나도 그게 근심이 돼요! 그걸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마시면 마실수록 근심은 더해만 갑니다. 이를테면 술에서 연민과 감상을 찾으려고 마시는 셈이죠...고통을 배가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절망에 빠진 듯 탁자 위로 머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젊은 양반."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 얼굴에서 비탄에 젖은 듯한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소. 여기 들어오는 순간 곧 알아보았기 때문에 얼른 말을 걸어본 거요. 이렇게 당신에게 내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스레 말하지 않아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저 게으름뱅이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감수성이 풍부한 교양 있는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오. 아시겠어요, 내 마누라는 유서 깊은 공립 여중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식 때는 지사와 다른 내빈들 앞에서 숄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해서 금메달과 상장까지 받았답니다. 메달은...그 메달은...벌써 옛날에 팔아버렸지요. ...하지만...상장만은 아직까지도 마누라의 트렁크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얼마 전만 해도 그걸 여주인에게 보여주더군요. 여주인하고 마누라 사이엔 한시도 싸움이 그칠 때가 없지만, 그래도 누구한테라도 자랑을 하고 싶어서 지난날의 행복했던 추억을 들려주었던 게죠. 나도 마누라를 꾸짖지는 않습니다. 꾸짖지 않아요. 그 사람의 추억에서 남은 것이라곤 그것뿐이고 나머지 전부는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으니까요! 그래요, 정말 그 사람은 성급하고 거만하여 남에게 절대로 지기 싫어하는 여자지요. 스스로 마루를 닦고 검은 빵으로 연명할지언정 남한테 모욕을 받고는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란 말이오. 그러기에 레베자트니코프 씨한테도 무례한 짓을 허용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레베자트니코프 씨가 집사람을 때렸을 때도, 그 사람은 얻어맞아서라기보다는 분에 못 이겨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어린 자식 셋을 거느린 과부였는데 내가 맞아들인 거죠. 첫 남편인 보병 장교하고는 연애결혼을 한 사이로 양친을 버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기까지 했다더군요. 집사람은 첫 남편을 무척이나 생각했었나 본데, 사내는 도박에 미쳐 재판까지 받게 되고 결국 그 신세로 죽고 말았답니다. 그 사나이도 만년에 가서는 마누라를 곧잘 때린 모양이지만, 마누라 쪽도 호락호락 맞고만 있진 않았나 봐요. 여기에 대해선 나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잘 압니다만, 집사람은 지금까지도 첫 남편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과 비교해 나를 책망하곤 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기뻐하고 있지요, 그게 기쁘단 말이에요. 비록 공상으로나마 행복했던 한때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죠...이렇게 되어 첫 남편이 죽은 다음 어린 세 자식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한적한 벽촌에 남게 된 겁니다. 그때 나도 같은 지방에 살았습니다만, 그 비참한 꼴이란, 나도 꽤 많은 일들을 보아온 터이지만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친척들도 누구 하나 돌봐주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오만했습니다. 유별나게 콧대가 높았단 말이에요...그런데 그때 말입니다, 학생 양반, 그때 나도 전처 몸에서 난 열네 살짜리 딸을 거느린 홀아비였는데, 그 사람이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구혼을 하게 되었죠. 양가에서 태어나 교육도 충분히 받은 교양 있는 그 여자가 나 같은 놈하고 결혼하기로 한 점만 봐도 그 사람의 곤궁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린 같이 살게 되었죠! 그 사람은 울고 흐느끼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겁니다. 달리 갈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었으니까요. 아시겠어요, 이젠 아시겠습니까, 젊은 양반, 어디로도 갈 데가 없다는 그 뜻을 아시겠느냐 말이오? 아니, 당신은 아직도 알 수 없을 겁니다...그리고 만 1년 동안 나는 충실히 내 의무를 다했고, 이런 것엔(그는 손가락으로 술병을 가리켰다) 손도 대지 않았지요. 하긴 내게도 감정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아내의 기분을 맞출 수 없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실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내 과실이 아니라 정원 개정에 따른 감원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때 나도 이것을 손에 대게 된 겁니다...이젠 그럭저럭 1년 반쯤 되어갑니다. 우리는 방방곡곡을 헤매며 갖은 고생을 다 겪은 끝에 드디어 수많은 기념비로 장식된 이 호화스러운 수도로 들어오게 된 거죠. 여기서도 나는 일자리를 얻었습니다만 ...얻기가 무섭게 다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여기서는 내 잘못으로 쫓겨났죠. 결국 내 본성이 드러났으니까요...그래서 지금은 아말리야 표도로브나 리페베흐젤의 집 한구석을 빌려 살고 있지만 도대체 뭘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뭘로 집세를 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집에는 우리 식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소돔(사해 근처에 있었지만 신의 노여움을 받아 불타버렸다고 전해지는 거리)이라고나 할까....음...그렇죠...그러는 이에 전처 몸에서 난 딸도 어엿한 처녀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내 딸애가 계모한테서 받은 구박에 대해선 지금 새삼스레 말하지 않기로 하죠. 사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관대한 여자지만, 성급하고 발끈하기 쉬운 성격이어서 곧 폭발해버리는 게 탈이란 말입니다....그래요! 하지만 뭐 새삼스레 상기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짐작하시겠지만 소냐는 교육다운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4년 전쯤 내가 손수 지리와 세계사를 가르치려 했지만, 내 자신의 지식이 희박한 데다 적당한 참고서도 없고 해서, 그때 가지고 있던 책이라야....흠! 아니, 그 보잘것없는 책마저 지금은 한 권도 없어요. 결국 이렇게 되어 모처럼의 교육도 끝장을 보게 되었는데, 페르시아 왕 사이러스에서 중단된 셈이죠. 그 뒤 어엿한 처녀로 성숙해지자 소설 같은 책을 몇 권 읽었지요. 그리고 요 얼마 전에는 레베쟈트니코프 씨한테서 루이스의 <생리학>이란 책을 -당신도 아실 테죠?- 빌려다가 아주 재미있게 읽더군요, 군데군데 소리를 내어 우리에게까지 들려주었어요. 내 딸의 학문이란 이게 전부지요. 그런데 젊은 양반, 이번에는 내 쪽에서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해보겠는데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가난하면서도 순결한 처녀가, 역시 순결한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은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남다른 재능도 없고 그저 정직하기만 한 여자라면 하루 15코페이카도 벌기 힘들 겁니다. 그것도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5등과 크로프시토크 이반 이바노비ㅣ 같은 사람은 - 그 사람 이름을 들으셨겠죠?- 와이셔츠 반 타의 바느질삯을 아지까지 지불 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셔츠 칼라 치수가 안 맞는다니, 모양이 비뚤어졌다느니 생트집을 잡고는 발을 구르며 욕지거리까지 퍼부으면서 부당하게 그 애를 내쫓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어린것들이 굶주림에 지쳐 있지, 카체리나는 손을 맞잡고 비비면서 방 안을 서성거리지, 게다가 양 볼에는 붉은 반점까지 생긴 채 말이오. 이 병에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카체리나는 딸애를 붙잡고 '이 밥벌레 같은 년아, 넌 공짜로 먹고 마시고 따뜻하게 잠도 잘 오겠구나'하고 욕을 하는 거예요. 사실 어린것들마저 사흘 때 빵 껍질 하나 구경 못한 판에 어디 마시고 먹을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나는 자고 있었어요...아니, 거짓말을 한들 뭐하겠소! 실은 술에 취해 누워 있었죠. 그리고 소냐가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 그 애는 원래 말대꾸라곤 모르는 데다 목소리도 상냥하기 그지없고, 금발 머리에 얼굴은 늘 창백하고 여위었지만요 - '그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나도 그런 일을 하러 나가야만 하나요?'하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것은 다리야 프란초브나라는, 곧잘 경찰 신세를 지곤 하는 간악한 여자가 여주인을 통해서 벌써 서너 번가량 의향을 물어온 적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하고 카체리나는 조소 어린 어조로 대답하더군요. '뭘 그렇게 소중히 간직할 필요가 있어? 무슨 큰 보물이라고!'하고 말이지요. 그 사람을 나무라진 마시오, 나무라지 말아요, 젊은 양반, 나무라지 말아요! 제정신에서 한 말이 아니니까요. 감정이 격해진 데다 병중에 있는 몸이고, 애들은 배고파 울부짖는 상태에서 그저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을 테니까요...아무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런 성격이라서 아이들이 울면, 가령 배가 고파 운다 해도 당장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팬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고 있지니, 5시가 좀 넘자 소네치카(소냐의 애칭)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스카프를 쓰고 외투를 입고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만, 8시 좀 지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애는 돌아와서 바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쪽으로 가더니, 잠자코 은화 30루블을 집사람 앞의 탁자 위에다 내놓더군요. 그러는 동안에도 말 한마디 없을 뿐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드라데담직 녹색 스카프를 집더니만 -우리 집에는 공동으로 쓰는 드라데담 스카프가 있었지요 - 그것으로 머리와 얼굴을 푹 감싸고는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그저 어깨와 몸이 들먹일 뿐이었죠...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만...그때 난 보았습니다. 젊은 양반, 난 봤어요. 이윽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역시 말 한마디 없이 소냐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더니, 밤새도록 소냐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 그 발에 입을 맞추면서 일어날 생각도 않더군요. 그다음 두 사람은 그대로 함께 잠들고 말았습니다. 꼭 껴안은 채로...둘이서...둘이서...그런데도 나는 ...술에 취해 누워있었다니까요...."
마르멜라도프는 목소리가 끊어지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성급히 술 한 잔을 따라 마시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때부터 말입니다, 젊은 양반"하고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과 흉악한 사람들의 고자질로 해서 - 주로 다리야 프란초브나가 농간을 부린 거죠, 그 여자에게 응분의 경의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오 - 그때부터 내 딸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노란 감찰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하고도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답니다. 여주인인 아말리야 표도로브타가 소냐와 같이 사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전에는 자기가 먼저 다리야 프란초브나에게 충동질을 했으면서 말이오. 게다가 레베쟈트니코프 씨도...그렇죠...그 사내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사이에 있었던 사건도 결국은 소냐의 일 때문이었지요. 처음엔 자기가 먼저 소냐를 노리던 주제에 일이 그렇게 되니까 갑자기 도도해지면서 '나처럼 교육받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여자와 한 지붕 밑에 살 수 있겠소?'하고 나오지 않겠어요. 그러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지지 않고 대들었지요...결국 일은 이렇게 해서 벌어지고 만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소네치카도 해 질 무럽에야 집에 들르곤 하는데, 집에 와서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거들어주기도 하고 분수에 넘치게 돈을 보태주기도 하지요....그런데 그 애는 카페르나우모프라는 재봉사네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서 살고 있어요. 카페르나오모프란 사내는 절름발이에 말더듬이인데 그 많은 식구가 또한 모두 말더듬이들이고 그의 처마저 말을 더듬는답니다...그 많은 식구들이 한방에서 살고 있지만, 소냐는 칸막이로 막힌 딴 방을 가지고 있어요...암, 그래요...가난에 쪼들리는 데다 말을 더듬기까지 하니...그건 그렇고...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두 손을 들어 하늘에 기도를 드린 다음, 이반 아파나시예비치 각하 댁으로 갔습니다. 이반 아파나시예비치 각하를 아실 테죠?...모르신다고요? 그런 성인을 모르시다뇨! 그분은 마치 밀초 같은 분이시죠...주님 앞에 켜놓은 밀초 같은 분이세요. 그 밀초처럼 녹아내린다니까요! ...각하께서는 내 자초지종을 들어시고 눈물까지 흘리시면서 '알겠나, 마르멜라도프, 자넨 이미 내 기대를 한 번 저버린 사람이지만...그러나 한 번 더 내가 책임을 지고 자네를 채용하기로 하지. 그렇게 알고 돌아가보게!'하고 말씀하시지 않겠어요, 나는 그때 각하 발밑의 먼지를 핥았어요, 물론 마음속으로 말입니다. 그분은 저명한 고관인 데다 새로운 국가 의식과 문화 사상을 지닌 어른이니까, 실제로 그런 짓을 하는 걸 허용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다음 집에 돌아와서 다시 취직을 했다, 다시 월급을 타게 됐다고 보고했을 때, 아아, 그때의 기쁨이란!"
마르멜라도프는 몹시 흥분한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술꾼 한 패가 밖에서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문간에서는 술꾼에게 끌려온 뜨내기 손풍금수의 손풍금 소리와 '시골집'이란 노래를 부르는 일곱 살쯤 된 아이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가 소란해졌다. 주인과 심부름하는 아이들은 새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바빴다. 마르멜라도프는 새 손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꽤 지친 것 같으면서도 취기가 돌면 돌수록 더 말이 많아졌다. 최근의 취직 성공에 대한 회상이 그에게 원기를 돋우어준 듯 그의 얼굴은 어떤 광채로 빛나기까지 했다.
"그건 말입니다, 학생 약 5주일 전의 일이었어요. 그렇습니다...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소네치카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마치 천국에라도 옮겨간 듯한 대접을 받았어요. 그때까진 개돼지처럼 뒹굴면서 욕이나 얻어먹는 게 일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모두 발끝으로 걸어 다니며 애들에게도 이렇게 타이르지 않겠어요. '세묜 자하르이지(마르멜라도프의 이름과 부칭.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 쓰임)께서 일에 지쳐 쉬고 계신다. 쉿!' 출근 전엔 커피를 내오지 않나, 크림을 끓여주지 않나! 아시겠어요, 그 크림도 진짜를 가져오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11루블 50 코페이카나 들여 멋진 의상까지 마련해주었어요. 구두, 캘리코 와이셔츠...그것도 최고급으로, 그리고 제복, 이 모든 걸 11루블 50코페이카로 훌륭하게 갖춰주었단 말입니다. 첫날 내가 일터에서 돌아오니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요리를 두 가지나 만들어주더군요, 수프와 겨자를 바른 소금절임고기. 그때까지는 듣도 보도 못하던 것들이죠. 그리고 카체리나에게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어요...그야말로 벌거숭이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나들이를 나가는 사람처럼 말쑥이 옷을 차려입지 않았겠어요. 그렇다고 뭐 별다른 것이라도 있었다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데서 그 모든 걸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였다는 거죠. 머리에 빗질을 하고 제법 깨끗한 옷깃에 소매까지 달고 보니, 아주 딴사람이 되어 더 젊고 더 아름다워 보이더군요. 한편 귀여운 내 딸 소네치카는 돈만 벌어다 줄 뿐, 앞으로 당분간 남들 눈치도 있고 하니 자주 찾아오지 않겠으며,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을 타서 오겠노라고 말하더군요. 어때요? 기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점심을 마치고 잠시 쉬려고 집에 돌아오니, 글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여주인을 초대해 커피를 대접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여주인인 아말리야 표도로브나하곤 일주일쯤 전에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고 대판 싸움을 했으면서도 카체리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봐요. 두 사람은 두 시간씩이나 앉아서 소곤소곤 얘기를 주고받더군요. '이번에 우리 집ㅈ 세묜 자하르잊치도 취직을 해서 월급을 타게 되었답니다. 실은 이쪽에서 각하 나리를 찾아뵈었더니, 각하께서 몸소 나오셔서 다른 사람은 모두 기다리게 해놓고는 세묜 자하르이치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 옆을 지나 서재로 안내하시더래요.' 자, 어때요? 어떻습니까? '나는 물론 세묜 자하르이치, 자네의 공적을 잊지 않고 있다네. 자네는 그 술이라는 약점이 탈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번엔 자네도 약속을 다짐했고, 게다가 실은 우리 쪽에서도 자네가 없어서 곤란했던 참이니 - 어때요, 네, 어떻습니까! - 자네가 그 약속을 훌륭히 지켜주길 기대하겠네, 하고 말씀하시더래요.' 미리 말씀드려두지만, 이것은 모두 집사람이 자기 멋대로 꾸며서 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솔한 마음에서라거나, 또는 쓸데없는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마누라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즉 자기 공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셈이죠. 이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도 집사람을 비난하진 않아요. 어떻게 내가 집사람을 비난할 수 있겠어요. 엿새 전의 일입니다. 내가 첫 월급 23루블 40코페이카를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가니까, 그 사람은 나보고 '귀염둥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정말 당신은 귀염둥이구려!'하는 거예요. 그것도 단둘이 있을 때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도대체 내 어디에 귀여운 데가 있습니까? 아니, 내가 무슨 남편 구실을 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은 내 볼을 꼬집으며 '정말 당신은 귀염둥이구려!'하는 거예요."
마르멜라도프는 말을 멈추고 빙긋 웃으려고 했으나, 갑자기 턱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꾹 참아냈다. 이 술집, 타락한 광경, 건초선의 닷새 밤, 보드카 병, 그리고 동시에 아내와 가족에 대한 이 병적인 애정은 청년의 마음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긴장감과 더불어 어떤 병적인 느낌을 가지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여기 온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봐요, 젊은 양반!"하고 마르멜라도프는 원기를 되찾으며 외쳤다.
"아아, 학생 양반, 당신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얘기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겝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어리석은, 자질구레한 가정생활 얘기가 당신에겐 괴로움을 줄 뿐이겠으나, 내게는 웃어넘길 수 없는 일입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가슴에 사무치기 때문이죠...그런데 지금까지의 내 생애를 통해 천국과도 같았던 그 하루, 그리고 그날 하룻밤은 나 자신도 벅찬 공상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가버렸지요. 즉 모든 일을 잘 정리해서 애들에게도 입힐 것을 입히고 아내 고생도 덜어줘야지,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내 딸도 그 추악한 곳에서 다시 가정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해야지...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일들을 공상했지요...그럴 수 있는 일 아니겠소, 학생. 그런데 말입니다. 젊은 양반(마르멜라도프는 별안간 부르르 몸을 떠는가 싶더니 번쩍 머리를 쳐들고 뚫어지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런 공상을 하고 난 바로 그다음 날 -그러니까 꼭 닷새 전의 일이죠 - 저녁 무렵, 나는 교활한 속임수를 써서 밤도둑처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트렁크 열쇠를 훔쳐내어 내가 가져온 봉급의 나머지를 몽땅 빼내고 말았지요. 그 돈이 모두 얼마였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자, 모두 내 얼굴을 봐주시오! 집을 나온 지 닷새 째, 집에서는 아마 나를 찾고 있을 거요. 직장도 이것으로 결딴나고, 제복은 이집트교 근처 선술집에다 잡혔는데, 그 대신 받은 게 바로 이 누더기란 말이오...이제 만사는 끝장이 난 겁니다!"
마르멜라도프는 주먹으로 한 번 자기 이마를 탁 때리고 나서 이를 악물고 눈을 감더니, 탁자 위에 괸 팔꿈치에다 털썩 몸을 기댔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얼굴빛이 홱 변하더니, 일부러 꾸민 듯한 교활하면서도 뻔뻔스러운 태도로 흘긋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소냐한테 갔다 왔지요, 해장술값을 타내려고요! 헤, 헤, 헤!"
"그래, 주던가?" 새로 들어온 패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옆에서 이렇게 소리치고는 곧 목이 터질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바로 이 보드카 병이 소냐의 돈으로 산 거요"하고 마르멜라도프는 라스콜니코프 쪽만 바라보며 말했다. "30코페이카를 주더군요. 자기 손으로 있는 돈을 모조리 긁어서...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하더군요...이 세상의 눈이 아니라 천사의 눈 같았어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결코 나무라진 않습니다. 나무라진 않아요! 하지만 그편이 더 괴롭단 말입니다. 조금도 나무라지 않는 게 더 괴롭단 말이에요!... 30코페이카, 그렇죠. 하지만 그 애라고 그 돈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젊은 양반? 그 애도 이젠 깨끗한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니까요. 하지만 깨끗한 옷차림이라는 게 또 이상해서 돈이 들게 마련이죠.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어요? 우선 포마드도 사야 할 테고, 포마드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또 풀 먹인 스커트라든가, 물구덩이를 뛰어넘을 때 다리 모양이 예쁘게 보일 날씬한 구두도 사야 할 테죠. 아시겠어요, 학생, 그 깨끗한 옷차림이란 뜻을 아시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핏줄을 나눴다는 이 아비는 그 소중한 돈을 술값으로 빼앗아 왔단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시고 있는 거죠! 아니, 벌써 다 마셔버렸군요!...자, 그러니 나 같은 놈을 누가 불쌍히 여겨주겠느냐 말입니다! 어때요, 학생, 당신은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나요? 어때요, 말해봐요, 학생, 불쌍하지 아닌지를? 헤, 헤, 헤!"
그는 술을 따르려고 했으나 술이 없었다.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불쌍히 여길 게 뭐가 있소?"하고 다시 그들 옆에 와 있던 가게 주인이 외쳤다.
웃음소리가 터지고 욕지거리까지 튀어 나왔다. 얘기를 듣던 사람이든 안 듣던 사람이든, 모두 이 퇴직 관리의 모습만 보고도 웃음을 터뜨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불쌍히 여긴다고! 아니, 뭣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하고 마르멜라도프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손을 앞으로 뻗치며 일어나서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으로 갑자기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불쌍히 여길 필욘 없다, 이 말이지? 암, 그렇고말고!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욘 하나도 없지! 나 같은 건 손발에 못을 박아 죽여도 시원찮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불쌍히 여길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십자가에 매다는 거야, 알겠나, 재판관, 십자가에 매달란 말이야. 그러나 일단 십자가에 매단 다음에는 날 불쌍히 여겨주게! 그렇게 한다면 나도 자진해서 벌을 받으러 갈 테니. 내가 갈망하는 건 향락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이니까!...이봐, 술장수, 네놈은 이 술병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해줬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밑바닥에서 슬픔을, 슬픔을 찾은 거야, 슬픔과 눈물을 말이야, 그리고 그걸 맛보며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만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만백성과 만물을 이해하시는 하느님,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겠지. 하느님은 유일무이하시고, 또 하느님만이 심판관이 되시는 거야. 최후의 심판 날에 오셔서 이렇게 물으시겠지. '심통 사나운 폐병쟁이 계모를 위해, 배다른 어린 동생들을 위해 자기 몸을 판 딸은 어디 있느뇨? 인간 세상에서 방탕한 주정뱅이 아버지의 만행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긴 딸은 어디 있느뇨?'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자, 이리 오너라! 나는 그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준 적이 있다....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주었으나...이번에는 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것은 네가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해서 내 딸 소냐는 용서를 받을 거야, 암, 용서받다마다. 나는 잘 알고 있지, 그 애가 용서받으리라는 걸 나는 아까 딸애한테 갔을 때 이 가슴으로 분명히 느꼈거든!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재판하시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겠지, 선인도, 악인도, 현명한 자도, 겸손한 자도...그리고 일단 모든 사람에 대한 재판이 끝나면, 이번엔 우리에게도 차례가 와서 '너희들도 나오너라!'하고 말씀하실 테지. '주정뱅이 나오라, 나약한 자도 나오라, 파렴치한도 나오라!' 여기서 우리가 겁도 없이 걸어 나가 하느님 앞에 늘어서면, '이 돼지 같은 자들아! 너희들은 짐승의 상을 하고 있지만 너희들도 나오너라!'하고 하느님은 말씀하실 거야. 그러자 지인과 현인들이 말하기를, '주님이여, 왜 그들을 맞아들이시나이까?' 여기서 주님께서 이르시길, '지혜 있는 자들아, 나는 그들을 맞으리라. 현명한 자들아, 나는 그들을 부르리라.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두 손을 벌리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땅에 엎드리고...눈물을 흘리면서...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그때야말로 모든 걸 깨닫게 되는 거야! 우리 모두가 다...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그 사람도 역시 깨닫게 되는 거야...오, 주여, 그대의 왕국이 임하시기를!"
이렇게 말하자 그는 힘이 다 빠져 지쳐버린 듯 털썩 의자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주위의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도 바라보지 않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버렸다.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으나 곧 다시 아까와 같은 웃음소리와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판단이 그럴싸하군!"
"허풍이 대단하군그래!"
"관리라 다르구먼!" 등등.
"자, 갈까요." 갑자기 마르멜라도프는 머리를 들고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좀 데려다주시오...코젤리네 집 안마당으로. 갈 때가 됐어요...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고, 또 그 자신도 마르멜라도프를 도와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입보다도 발이 더 지쳐 있어서 완전히 청년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2, 3백 보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이 술 취한 사내의 얼굴에는 당황과 공포의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아닙니다." 하고 그는 가슴을 들먹이며 중얼댔다.
"그 사람이 내 머리칼을 쥐어뜯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칼이 뭡니까!...머리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녜요! 그렇고말고요! 머리칼을 쥐어뜯어 준다면, 오히려 그편이 내겐 더 낫지요. 내가 무서운 건 그게 아니에요...난...그 사람의 눈이 무서워요...그래요...그 눈이...그리고 볼에 돋은 붉은 반점도 역시 무섭고요...그리고 또 그 사람의 숨소리도...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숨소리를 들은 적 있소? ...극도로 흥분했을 때의 그 숨소리 말이오? 애들의 울음소리 역시 무섭지요...사실 말이지, 소냐가 길러주지 않았다면 그야말로...지금쯤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죠! 정말 몰라요! 그러니 내가 얻어맞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알겠소, 학생 나리. 그런 것으로 얻어맞는 것쯤은 아프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마음이 기쁠 정도죠...아니, 그것마저 없다면 나 스스로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겠소. 그편이 낫다마다요...마음대로 때려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편이...낫단 말이오...아아, 벌써 집에 다 왔군. 코젤리네 집이오. 돈 많은 독일인, 자물쇠 장수네 집이지...자, 좀 안내해주시오!"
그들은 안뜰로 들어가 4층으로 올라갔다. 층계는 위로 오를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그럭저럭 11시가 가까울 무렵이었다. 이런 계절의 페테르부르크에는 캄캄한 밤이라는 것이 없는 법이지만(북국 지방 특유의 백야를 뜻함) 그래도 층계 위는 몹시 어두웠다.
맨 윗계단 끝에 연기에 그은 조그만 문이 열려 있었다. 촛불 하나가 길이 열 발짝쯤 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 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방 전체가 문간에서 한눈에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갖가지 아이들의 누더기가 눈에 띄었다. 방 한쪽 구석에 구멍투성이 시트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 그 뒤에 침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밖에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곤 의자 두 개와 유포를 씌운 다 헤진 긴 의자 하나,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색칠도 않고 아무것도 씌우지 않은 부엌용 소나무 탁자가 전부였다. 탁자 가장자리에는 타다 남은 기름 초가 꽂힌 무쇠 촛대가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르멜라도프는 방 한쪽 구석이 아니라 옹근 방 하나를 빌려 쓰고 있는 셈이지만, 그러나 그 방은 다른 사람들의 통로 구실도 겸하고 있었다. 아말리야 리페베흐젤의 집은 새장 같은 조그만 방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안으로 통하는 방문은 벙긋이 열려 있었다. 거기는 매우 소란스러워서 외치는 소리와 커다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카드놀이를 하면서 차라도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때때로 몹시 야비한 말까지도 새어 나왔다.
라스콜니코프는 곧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제법 후리후리한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밤색 머리를 가진 몹시도 여윈 여자였는데, 듣던 대로 그녀의 두 볼은 붉은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헐어터진 입술로 고르지 못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크지도 않은 방안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열병에라도 걸린 듯 빛나고 있었으나 날카로운 눈초리는 움직일 줄 몰랐다. 그리고 흥분한 결핵성의 그 얼굴은 꺼질 듯이 가물거리는 마지막 촛불의 불빛을 받아 병적인 인상을 더해주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그녀는 서른 살 안팎으로 보였다. 그리고 사실 마르멜라도프에게는 너무 과분해 보였다...그녀의 귀에는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어떤 망각 상태에 빠져 있는 듯 귀도 들리지 않거니와 눈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방 안은 숨이 막힐 지경으로 답답했으나 그녀는 창문도 열어놓지 않고 있었다. 층계 쪽에서 악취가 풍겨 오는데도 층계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안쪽 방에서는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담배 연기가 파도처럼 흘러나와 연방 기침이 나는데도, 그녀는 그 문을 꼭 닫으려 하지 않았다. 여섯 살쯤 된 막내딸은 묘하게 쪼그린 앉은 자세로 머리를 소파에 기댄 채 마룻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한 살쯤 많은 남자 아이는 방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며 울고 있었다. 아마 지금 막 매를 맞고 난 뒤인듯싶었다. 아홉 살가량의 성냥개비처럼 가늘고 키가 큰 맏딸은 여기저기 구멍 뚫린 더러운 셔츠에 낡은 드라데담직 망토를 벌거숭이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무릎까지 닿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나마도 만든 지 2년쯤은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방 한쪽 구석 동생 곁에 서서 성냥개비처럼 여윈 가느다란 손으로 동생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소녀는 동생을 달래느라 뭐라고 소곤소곤 속삭이면서 어떻게든 다시는 울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어르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공포가 서린 그 휘둥그런 검은 눈으로 어머니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공포의 표정까지 띠니 그 눈은 유난히 더 커 보였다. 마르멜라도프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간에 무릎을 꿇고는 라스콜니코프를 방으로 떼밀었다. 여자는 낯선 사람을 보자 멍청히 그 앞에 걸음을 멈추었으나,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이 사나이가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을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그 방은 통로로 되어 있으니 다른 방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청년에게 주의를 주지 않고 문을 좀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지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편을 발견하고,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야아!"하고 그녀는 정신없이 외쳐댔다. "돌아왔군그래, 이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돈은 어디 있어! 주머니 속에 있는 걸 꺼내 봐! 게다가 옷도 딴 걸 입고! 그 신은 어떻게 했지? 돈은 어디 있고? 어서 말해보라니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남편에게 달려들어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르멜라도프는 아내의 호주머니 검사를 거들어주려고 순순히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돈은 한 푼도 없었다.
"대관절 돈은 어디 있지?" 하고 그녀는 외쳤다. "오오, 주여, 그 돈을 몽땅 마셔버리다니!...트렁크엔 12루블이나 남아 있었는데!"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남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르멜라도프는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순순히 그녀 뒤를 따라 무릎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한텐 이것도 즐거움이오!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란 말이오, 학생 나리!" 그는 머리칼을 잡혀 끌리면서도, 그리고 한 번은 마룻바닥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하면서도 이렇게 외쳤다.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잠을 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방구석에 서 있던 남자아이는 더 참을 수 없는 듯 와들와들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고는, 거의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이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누이한테 매달렸다. 큰딸은 자기 눈을 의심하며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다.
"마셔버렸어! 그걸 다 마셔버렸어!" 하고 불행한 여인은 절망적인 어조로 외쳤다.
"게다가 옷도 바꿔 입고! 저렇게 굶고 있는데! 저렇게 굶고 있는데 말이야!(그녀는 두 손을 비벼대며 아이들을 가리켰다) 아아, 저주받을 인생 같으니!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소!" 갑자기 그녀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대들었다.
"술집에서 온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말이오! 당신도 저 사람하고 마셨죠? 당신도 함께 술을 마셨죠! 어서 나가욧!"
청년은 한마디 말도 없이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더구나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거기서는 호기심 어린 몇몇 얼굴들이 내다보고 있었다. 궐련을 문 사람, 파이프를 문 사람, 둥근 모자를 쓴 사람, 능글맞은 조소를 띤 얼굴들이 길게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밖에도 잠옷을 입은 사람, 단추를 몽땅 풀어헤친 사람, 꼴사납게 엷은 여름옷만 입은 사람, 손에 트럼프를 든 사람까지 있었다. 마르멜라도프가 머리칼을 잡아끌리면서 '즐거움'이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모두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들은 방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기분 나쁜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말리아 리페베흐젤이 자기 나람대로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미 몇십 번이나 되풀이한 명령,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달라는 협박적인 명령으로 이 불행한 부인을 위협하려고 사람들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떠나기에 앞서 호주머니에 황급히 손을 집어넣어, 술집에서 1루블의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창틀 위에 놓았다. 그러나 층계로 나오자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소냐가 있지 않느냐, 돈이 급한 건 오히려 내가 아니냐말이야.'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도 없거니와, 설령 돌이킬 수 있다 해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손을 한 번 내젓고 자기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냐에게도 역시 포마드가 필요하다니까.' 그는 거리를 걸으면서 독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계속했다. '깨끗한 옷차림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댔어...흥! 하지만 소네치카인들 오늘이라도 당장 파산을 할지 누가 아느냐 말이야. 아무튼 그런 사업은 금광의 경영이나...여우 사냥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모험과 다름없으니까....그러고 보니 내 돈이 없었다면 그 집 식구들은 당장 내일부터라도 옴짝달싹못할 뻔했군...아아, 기특하다, 소냐! 그건 그렇고, 그들은 굉장한 광맥을 하나 파헤쳤군! 그리고 잘도 이용해먹고 있어! 그토록 잘 이용해먹고 있으니 말야! 그리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든. 그저 눈물을 찔끔 흘렸을 뿐 완전히 습관이 돼버렸단 말이야. 인간이란 비열해서 무엇에나 곧 익숙해진다니까!'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만약 내 생각이 틀리다면'하고 그는 저도 모르게 갑자기 외쳤다. '만약에 정말로 인간이, 인간 전체가, 즉 인류 그 자체가 비열한이 아니라면, 그 외의 것은 모두 ...편견이 되는 셈이다. 아무 근거도 없는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엔 어떠한 장애도 있을 수 없다. 그건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하는 거다!'
다음 날 그는 꽤 늦게야 불안한 잠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수면도 그의 원기를 돋워주지는 못했다. 그는 들뜨고 화난 험상궂은 기분으로 눈을 뜨자, 혐오에 찬 눈으로 초라한 자기 방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길이가 열 자 남짓한 협소한 골방으로, 여기저기 벽에서 떨어진 먼지투성이 누런 벽지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게다가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키가 좀 큰 사람이면 답답해서 못 견딜 지경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것만 같았다. 가구도 방하고는 잘 어울렸다. 불결하기 그지없는 낡은 의자 세 개와 색칠한 탁자 하나가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모두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거의 벽 전체와 방을 반쯤 차지하고 있는 볼꼴 사납게 큰 소파가 하나 있었는데, 예전에는 옥양목을 씌웠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라스콜니코프의 침대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옷을 벗는 일 없이 입은 채로, 시트도 없이 낡아빠진 누더기 학생 외투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누워 자곤 했다. 머리맡에는 조그만 베개 하나가 있고, 그 베개를 높이기 위해서 갖고 있는 속옷을 더럽든 깨끗하든 모조리 그 밑에다 쑤셔 넣고 있었다. 소파 앞에는 조그만 탁자 하나가 있었다.
이보다 더 가난하고 불결한 생활을 하기란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로서는, 적어도 그의 지금 정신 상태로 봐서는 그것이 오히려 유쾌할 지경이었다. 그는 거북이 껍데기 속으로 목을 움츠리듯이 완전히 모든 사람과의 교제를 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가 때때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그에게는 짜증과 발작적인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어떤 일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편집광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하숙집 여주인이 식사를 주지 않은 지 벌써 2주일째지만, 그는 아무것도 안 먹고 앉아 있으면서도 아직껏 여주인을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주인이 두고 있는 하나뿐인 하녀이자 요리사인 나스타시야는 하숙인의 이러한 심정을 반기기라도 하는 듯 방 정리나 청소를 뚝 그쳐버리고, 한 주일에 한 번쯤 생각난 듯이 비를 들고 나타날 뿐이었다. 지금도 그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그 나스타시야였다.
"일어나세요, 언제까지 주무실 거예요!"하고 그녀는 하숙생의 머리 위에서 소리쳤다. "9시가 지났단 말이에요. 차를 가져왔어요. 차 안 드시겠어요? 몹시 시장하실 텐데?"
하숙생은 눈을 떴다. 그리고 몸부림을 한 번 치고는 나스타시야를 알아보았다.
"그 차는 주인아주머니가 보내준 건가?" 그는 병적인 표정으로 소파 위로 일어나 앉으면서 천천히 물었다.
"주인아줌마가 잘도 주겠네요!"
그녀는 재탕한 차를 담은, 금 간 자기 찻잔을 청년 앞에 놓고 누런 설탕 덩어리를 두 개 집어넣었다.
"저, 나스타시야, 미안하지만 이걸 가지고"하고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그는 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다) 동전을 한 줌 꺼내면서 말했다. "빨리 가서 흰 빵 좀 사다 줘. 그리고 푸주에서 소시지도 조금, 싼 걸로 말이야."
"흰 빵을 곧 사다 드리겠지만, 소시지 대신 양배추 수프는 어때요? 맛있어요, 어제거지만. 어제부터 주려고 남겨두었는데, 학생이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참 맛있어요."
양배추 수프가 나오고 그가 먹기 시작하자, 나스타시야는 학생 옆 소파에 앉아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골뜨기라 퍽 수다스러웠다.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안주인)가 학생을 경찰에다 고발한대요."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경찰에? 무슨 일로?"
"돈도 안 내고 나가지도 않으니까 그렇겠죠, 뻔하지 뭐요."
"쳇, 그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한가, 망할 여자 같으니." 그는 이를 갈면서 중얼거렸다. "아냐, 지금은 좀...곤란해...정말 그 여자는 바보로군"하고 그는 큰 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오늘 주인아주머니한테 가서 말해보지."
"주인아줌마도 나처럼 바보임에 틀림없어요. 하지만 똑똑한 체하는 당신은 왜 이꼴이죠? 만날 부대 자루처럼 뒹굴고 있을뿐 일하는 모습이라곤 한 번도 볼 수 없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러 다니더니, 요샌 왜 아무 일도 안 하는 거죠?"
"하고 있어...... " 라스콜니코프는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엇을 하죠?"
"일을 하지...."
"무슨 일을요?"
"생각하는 일"하고 그는 잠시 말이 없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스타시야는 느닷없이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그녀는 워낙 웃기를 좋아하는 여자여서 우스운 일만 생기면 소리도 안내고 온몸을 뒤틀어 흔들면서 속이 메스꺼워질 때까지 웃기를 계속했다.
"그래, 생각하는 일을 해서 돈이라도 많이 버셨나요?" 그녀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구두가 없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러 갈 수도 없거든. 게다가 그런 일은 딱 질색이야."
"그런 말을 하면 벌을 받는데요."
"애들을 가르쳐봤자 고작 동전밖에 들어올 게 없어. 그 동전 몇 푼으로 뭘 하느냐 말이야?" 마치 자기 자신의 상념에라도 대답하는 듯 그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그럼 단번에 한밑천 잡겠다는 건가요?"
그는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한밑천 잡아야지"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힘 있게 대답했다.
"어머, 가만가만 말하세요, 놀라지 않게 그렇게 무서운 눈을 하고. 그보다도 빵을 사 올까요, 그만둘까요?"
"맘대로 해."
"참, 깜빡 잊었네! 어제 학생이 없을 때 편지가 왔어요."
"편지라니! 내게! 어디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우체부한테 내 돈 3코페이가를 물었어요, 그 돈 갚아주실 테죠?"
"그래, 빨리 좀 갖다 줘. 자, 어서!"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흥분에 싸인 채 이렇게 소리쳤다. "아아!"
잠시 후 편지를 가져왔다. 예상대로 R 현의 어머니한테 온 편지였다. 편지를 받아 들자 그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기까지 했다. 벌써 오랫동안 편지라곤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외에도 뭔가 다른 것이 갑자기 그의 심장을 압박했다.
"나스타시야, 제발 부탁이니 좀 나가줘, 자, 여기 3코페이카는 줄 테니. 자, 빨리 좀 나가줘!"
편지는 그의 손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하녀 앞에서 편지를 뜯고 싶지 않았다. 그 편지하고 단둘이만 남고 싶었던 것이다. 나스타시야가 나가자 그는 재빨리 그것을 입술로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그토록 정답고 낯익은 비스듬히 눕혀 쓴 잔글씨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겉봉을 뜯었다. 편지는 2로트(1로트는 약 13그램)쯤 될 만큼 두툼했다. 커다란 편지지 두 장에 잔글씨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리운 내 아들 로쟈(라스콜니코프의 이름, 로지온의 애칭)야' 하고 어머니는 쓰고 있었다.
너하고 편지로 이야기한 지도 그럭저럭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나도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워서 가끔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단다. 하지만 너도 이 부득이한 나의 침묵을 책망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게다. 너는 우리 집안의 외아들, 내게 있어서나 두냐에게 있어 너는 우리의 전부이고 희망이며, 또한 기대이기도 하다. 네가 학비를 댈 수 없어서 몇 달째 대학을 쉬고 있고 교사나 그 밖의 다른 일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느냐! 1년에 120루블이라는 연금으로 어떻게 너를 도울 수 있었겠니? 넉 달 전 너한테 보낸 15루블도, 너도 알다시피 그 연금을 저당 잡혀서 이 고장 상인 앞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한테서 얻어 온 것이다. 그분은 선량한 사람이고 네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분에게 연금 받을 권리를 양도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부채를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단다. 그 빚을 이제야 겨우 다 청산했으니, 그동안 네게는 한 푼도 송금할 수가 없었던 거란다. 그러나 이제부턴 다행히 너에게도 송금을 하게 될 것 같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 집의 가운도 어느 정도 틔는 것 같기에, 우선 그 얘기부터 너에게 전하고 싶구나. 우선 로쟈야, 너는 놀랄지 모르지만 네 여동생은 벌써 한 달 반째나 나하고 함께 살고 있단다. 그리고 앞으론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다. 다행히 그 애의 고생도 이젠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지금까지 우리가 너에게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차근차근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너는 두 달 전에 두냐가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댁에서 갖은 모욕을 받으며 참고 있다는 얘기를 누구한테서 듣고 자세한 내용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내게 보냈지만, 나는 그때 뭐라고 회답을 써야 할지 몰랐다. 만약 내가 사실대로 죄다 써 보냈다면 필경 너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걸어서라도 집으로 돌아왔을 게다. 나는 네 성질도 마음도 잘 아는데, 너는 자기 여동생에 대한 모욕을 보고 가만히 참고 있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니? 그땐 나 자신도 사건 내용은 충분히 알지 못할 때였으니까. 그런데 무엇보다도 곤란했던 일은, 작년에 두네치카(두냐의 애칭)가 가정교사로 그 집에 들어갈 때 월급에서 다달이 공제하는 조건으로 100루블을 미리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가정교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단다. 그 돈은 바로, 이젠 속속들이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있다만, 내 귀중한 로쟈야, 그때 네가 꼭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작년에 우리가 부쳐준 60루블, 그걸 너한테 보내고 싶은 마음에 두네치카가 빌렸던 거란다. 그때 우리는 너를 속이고 두네치카가 전부터 모아두었던 저금에서 빼낸 돈이라고 말해두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하느님의 자비로 모든 일이 갑자기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어가므로 두냐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고, 떠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꼭 너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젠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스비드리가일로프 씨는 처음부터 그 애를 무례한 태도로 대했고, 식사 때도 여러 가지 실례되는 말을 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했다더구나...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지금, 이런 불쾌한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음으로써 공연히 네 마음을 흔들어놓고 싶지도 않다. 그래, 간단히 말해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부인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비롯해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친절하게 잘해주는데도 두네치카의 입장은 매우 괴로웠던 것 같다. 특히 스비드리가일로프 씨가 예전에 군대에 있던 습관대로 바쿠스(그리스 신화의 술의 신)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는 더욱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글쎄, 생각 좀 해봐라, 그 미치광이 같은 사람은 훨씬 전부터 두냐에게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두냐에게 난폭한 언동과 무례한 짓을 한 것이 아니었겠니. 어쩌면 그 사람은, 이미 나이도 지긋한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한 자기가 그런 경솔한 야심을 품게 된 데 스스로도 부끄럽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 때문에 그만 본의 아닌 화풀이를 두냐에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애한테 무례한 언동과 조롱을 함으로써 자기의 야심을 남들 눈에 안 띄게 하려 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침내 참을 수 없었는지 그는 뻔뻔스럽게도 두냐에게 노골적으로 추잡한 제의를 해오게 된 거란다. 여러 가지 보수를 약속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단둘이 어떤 시골이나 외국으로 떠나자고 말하더라는구나. 그러니 그 애의 고통이 어떠했겠니, 너도 좀 상상해봐라! 빚도 있거니와,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생각해서도 당장 그곳을 뛰쳐나올 수 없었던 거다. 그렇게 하면 부인은 금방 의심을 품을 테고, 집안에 풍파를 일으킬 우려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네치카로 봐서도 큰 스캔들이 될 것이고, 그대로 무사히 넘길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두냐는 만 여섯 주일 동안을 그 무서운 집에서 뛰쳐나올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단다. 물론 너는 두냐가 얼마나 영리하고, 또 얼마나 굳은 성격을 가졌는지 잘 알 게다. 두네치카는 웬만한 일이면 참아낼 수 있는 애다. 그리고 어떤 죄악의 상태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애란 말이다. 그 애는 나한테까지도 쓸데없는 근심을 끼치지 않으려고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거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써 보내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예기치 않은 결말이 오고야 말았다. 다름 아니라,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우연히 두네치카를 구슬리고 있는 남편의 말을 정원에서 엿듣게 된 거란다. 그러자 그녀는 모든 것을 거꾸로 판단하여 모두가 다 두냐 탓이라고 생각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그 애의 잘못으로 돌리고 말았다. 곧이어 정원에서는 무서운 소동이 일어났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두냐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그 애를 때리기까지 했단다. 근 한 시간이나 외쳐댄 다음, 그 애의 소지품과 속옷, 옷가지 등을 꾸리지도 싸지도 않고 그저 손 닿는 대로 마구 짐수레에 처넣고는, 당장 두냐를 태워 내가 있는 거리로 쫓아버리라고 명령했다는구나. 게다가 공교롭게도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마구 창피와 모욕을 당한 두냐는 지붕도 없는 짐수레를 타고 농군과 함께 40여리 길을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단다. 잘 생각해봐라, 이런 사정이고 보니 두 달 전에 받은 네 편지의 회답으로 내가 무슨 말을 쓸 수 있었겠니? 무슨 말을 쓸 수 있었겠어? 나 자신이 원통해 죽을 지경인데, 어찌 너에게까지 사실을 전할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안다면, 원통한 마음에 사로잡혀 슬프고 분한 마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네 자신을 스스로 파멸로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고. 게다가 두네치카 역시 말리더구나. 그렇다고 그런 슬픔이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데 뭔가 딴 시시한 이야기로 편지를 메운다는 것도 역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한 달 동안 이곳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뜬소문이 온 시내에 죽 퍼지고, 끝내는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바람에 나와 두냐는 교회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였고, 개중에는 우리 앞에서까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있었단다. 안면깨나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인사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점의 점원이나 관청의 서기 등이 우리 집 때문에다 콜타르를 칠해서 우리에게 속된 모욕을 주려고까지 했다더구나. 이런 상태이고 보니, 집주인도 방을 내놓으라고 재촉할 수밖에. 그러나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두냐를 비난하고 흉본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덕분이지. 그 여자는 이 고장 사람들과는 잘 아는 사이라서, 지난달에는 뻔질나게 이 거리를 드나들곤 했는데 원래가 좀 수다스러운 데다가 자기 집안 얘기뿐만 아니고, 특히 나쁜 것은 남편에 대한 불평까지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늘어놓기를 좋아해서 순식간에 그 소문은 시내뿐만 아니라 군내 방방곡곡에 파지게 되었단다. 나는 병에 걸리고 말았지만, 두네치카는 나보다 훨씬 마음이 굳더구나. 그 애가 온갖 고통을 다 참아내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던 모습을 네가 보았더라면! 그 애는 정말 천사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고통도 이 짤막한 기간으로 끝을 보게 되었단다. 다름 아니라 스비드리가일로프 씨가 마음을 고쳐먹고 참회를 했으니 말이다. 아마 두냐를 가없게 생각한 게지. 두네치카의 완전한 결백을 증명해주는 확실한 증거를 마르파 페트로브나에게 제시해주었다는구나. 그것은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두 사람을 정원에서 발견하기 이전에 그 사람이 강요하는 밀회와 밀담을 피하려고 두냐가 마지못해 그에게 써 보낸 편지였는데, 두네치카가 그 집을 떠난 뒤에도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수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편지는 마르파 페트로브나에 대한 그분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책망하고, 한 집안의 아버지이고 가장이기도 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불행하고 의지할 곳 없는 처녀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추잡한 행동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으로서, 분노에 넘친 격렬한 문장이었다. 한마디로 귀여운 로쟈야, 그편지는 얼마나 훌륭하게 감동적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만 흑흑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편지를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서는,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두냐의 결백을 하인들이 증언해주기까지 했단다. 그 사람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또 알고 있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 여자 자신의 말마따나 '또 한 번 얻어맞은' 셈이 되고 만 게지. 대신 그 여자는 두네치카의 무죄를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급히 성당으로 마차를 몰고 가서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는, 이 새로운 시련을 참아 내가 자기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힘을 베풀어주십사 하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는 거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성당에서 바로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우리 집으로 와서는,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우리에게 말하고 목 놓아 울기까지 하더구나. 그리고 마음속 깊이 후회를 하고, 두냐를 껴안으면서 제발 용서해달라고 애원했다. 바로 그날 아침, 이 여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 나간 그길로 시내의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애의 결백을 입증하고, 그 고상한 마음씨와 행동을 극구 칭찬함으로써 두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단다. 그뿐만 아니라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에게 보낸 두냐의 편지까지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큰 소리로 읽어준 다음 그편지의 사본까지 만들게 했다는구나, 내가 보기에도 이건 너무 지나친 일 같긴 하다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 여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시내의 아는 사람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그중에는 딴 사람에게 먼저 읽어주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서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순번까지 정하게 되었다는구나. 그리하여 어느 날은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누구 집에서 그편지를 읽는다는 것이 알려져서 미리부터 거기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생기고, 편지 낭독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집이나 남의 아는 집에서 이미 순번에 따라 몇 번씩 들은 사람들까지도 다시 우르르 몰려들 정도의 소동이 일어났단다. 내 생각으론 너무 지나친 것 같지만 그것이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성격이고 보니 하는 수 없었지. 그러나 어쨌든 두네치카의 명예만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추잡한 사건의 장본인인 그 여자의 남편만이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뒤집어쓰게 되어 나는 도리어 측은한 생각까지 들더구나.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아. 두냐에게는 곧 몇몇 집에서 가정교사로 와달라는 청이 들어왔으나, 그 애는 모두 거절해 버렸다. 아무튼 갑자기 모두가 그 애한테 특별한 존경을 표시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일들이 원인이 되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서 우리 모두의 운명이 트게 되었다는 거다. 사랑하는 나의 로쟈야,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이 두냐에게 청혼하고 두냐도 승낙해서 그 사실을 네게 급히 알리는 것이란다. 너와 의논도 없이 정해버린 일이지만, 아마 너는 나에 대해서나 두냐에 대해서도 불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너도 이해해주리라 믿지만, 네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결정을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라도 직접 보지 않는 한 만사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니. 사정은 이렇다. 상대방은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이라고 하는 7등 문관인데,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혼담에 대해서는 그 여자가 여러모로 힘을 써주었단다. 처음엔 그이가 마르파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사귀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도 예절 바르게 초대하고 커피를 대접했는데, 바로 다음 날 편지를 보내 아주 정중한 말로 청혼을 하고 곧 확답이 있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이는 실무자라 몹시 바쁜 몸이고 지금은 피ㅔ테르부르크로 상경을 서두르고 있어 단 1분이 아쉬울 지경이라고 한다. 물론 처음엔 우리도 너무나 뜻밖에 들이닥친 일이라 깜짝 놀랐을 수밖에. 우리 두 모녀는 그날 하루 종일 여러 가지로 곰곰 생각해보았단다. 그이는 믿을 수 있고 생활보장도 될뿐더러 두 군데나 근무하고 있고, 이미 자기 재산까지 가지고 있다는구나. 하기야 나이가 벌써 마흔다섯이긴 하지만, 제법 호감을 주는 인상이어서 아직은 여자들도 따를 만한 얼굴이더라. 게다가 전체적으로 매우 듬직하고 점잖은 사람이고, 그저 좀 무뚝뚝하고 거만한 데가 있어 보이지만, 아마 첫인상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게도 미리 주의해두지만,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사람과 만나거든 -이제 곧 만나게 될텐데- 첫눈에 뭔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언제나 네가 그렇듯이 너무 성급하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진 말아다오. 그이라면 네게도 반드시 좋은 인상을 주리라고 믿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덧붙여둔다. 이 일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을 알려거든 오해를 하거나 편견에 빠져들지 않도록 긴 안목으로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런 선입견은 나중에 좀처럼 지우기도 힘들거니와 고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아주 훌륭한 인물이다. 처음 찾아왔을 때 그이는 우리에게, 자기는 실제적인 인간이지만 많은 점에서, 그 사람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나라 새 세대의 신념'에 공감하고 있으며 모든 편견의 적이라고 하더구나. 그 밖에도 많은 얘기를 했단다. 그이는 다소 허영심이 강한 듯하고 남이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더라만, 그렇다고 이런 것이 무슨 결점이랄 수 있겠니. 물론 나는 잘 모르지만, 두냐가 하는 말로는 그이가 그다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리하고 선량한 사람 같다고 하더라. 로쟈, 너도 동생의 성질을 잘 알겠지만, 그 애는 아주 의지가 굳을 뿐 아니라 분별심과 참을성도 있고 격렬한 성격이면서도 도량이 넣은 애다. 그것은 내가 잘 안다. 물론 이 혼담에도 그 애 편에서나 그 사람 편에서나 특별한 애정이라곤 없다. 하지만 두냐는 영리할 뿐만 아니라 천사와도 같은 고결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잘 알 테고, 또 남편은 남편대로 자연히 그 애의 행복을 염려해줄 것임에 틀림없다. 두냐의 행복에 대해서는 사실 너무 갑작스레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걱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게다가 그이는 앞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니까 남편으로서의 자기 행복은 두네치카가 행복해질수록 한층 확실해진다는 것쯤은 물론 그 자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성격 차이라거나 낡은 습관, 의견 차이 등은 다소 있겠지만 -이런 건 아무리 의좋은 부부 사이에도 피할 수 없단다 - 거기에 대해서는 두네치카도 자신이 있다고 내게 말하더라. 그리고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다. 앞으로의 관계가 결백하고 공명하게 계속되기만 한다면, 자기로서는 웬만한 일은 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이지 사람의 외모란 믿을 수가 없더구나. 예를 들어 그이만 해도 처음엔 무척 까다로워 보이더라. 그러나 그것은 그이가 너무 고지식하기 때문이었을 게다,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두 번째로 찾아 왔을 때는, 그때는 이미 결혼 승낙을 받은 후였지만,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두냐를 알기 전부터 자기는 무엇보다 성실한 처녀를, 지참금 따윈 없어도 한 번쯤은 곤경을 겪은 처녀를 맞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더구나. 그이의 설명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한테 조금도 의를 느끼지 않고 아내만 남편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거야. 덧붙여 말해두지만, 그이의 어조는 내가 여기 쓰는 것보다 좀 더 부드럽고 상냥했다. 아무튼 나는 그이가 한 말 그대로는 기억 하지 못하고, 그저 그 뜻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 이도 결코 미리 준비했다가 한 말이 아니라, 어쩌다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새어 나왔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부드럽게 고쳐 말하려고 애쓰더구나. 그래도 나로서는 역시 그 말이 좀 지나친 것 같아서 나중에 두냐에게 말했더니, 두냐는 도리어 불쾌한 얼굴로 '말뿐인데 뭘 그러세요'라고 대답하더라. 하긴 그 애 말도 옳아. 그렇지만 정작 결정을 내리기 전에 두네치카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그 애는 내가 벌써 잠든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밤새도록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나중에는 성상 앞에 무릎을 굻고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내게 마음을 결정했다고 말하더구나.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근간 페테르부르크로 떠날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썼지만, 그이는 그곳에 여러 가지 큰일들이 많아서 페테르부르크에 변호사 사무소를 열 생각이란다. 그이는 벌써 오랫동안 여러 가지 소송 사건을 취급하고 있고, 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큰 소송 사건에서 이겼다더라. 페테르부르크로 꼭 가야 하는 것도 실은 대법원에 중요한 용무가 있기 때문이란다. 귀여운 로쟈야, 이런 까닭에 그이는 네게도 큰 도움을 줄지 모른다. 그래서 나와 두냐는 네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오늘부터라도 앞으로의 입신출세를 위해 확고히 걸어 나가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아아, 정말 그렇게만 돼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직접 내려주신 자비로밖에는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행복일 게다. 두냐는 그것만을 공상하고 있다. 우리는 벌써 그 문제에 대해 두세 마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그이는 조심스레, 물론 자기도 비서 없이는 일을 해 나갈 수 없으니 월급을 남에게 주느니 집안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은데, 만약 당자가 그런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네가 그런 일을 못할 리 있겠니!- 하더구나. 그러나 대학 학업도 있으니까 사무소에서 일할 겨를이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하더라. 그땐 그것으로 얘기가 그쳤지만, 두냐는 지금 다른 문제는 젖혀 놓고 요 며칠 동안 그 일에만 열중하여 장차 네가 소송 사건에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동료, 아니 협력자가 되어 일해줄 것을 생각하고 벌써부터 자세한 계획까지 짜놓았단다. 네가 법과에 적을 두고 있으니까 더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로쟈야, 나도 그 애 의견에 동감하고, 그 애의 계획이나 희망이 확실하다고 보고 기뻐하고 있다. 아직까진 확실한 언질을 주지 않고 있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이는 아직 너를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두냐는 장차 남편을 잘 감화시키면 무슨 일이나 잘돼 나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나도 이러한 앞으로의 공상에 대해, 더구나 네가 그이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겐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이는 실제가니까 헛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두냐도 네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학비를 보태주었으면 하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한마디도 그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그런 문제는 앞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고, 구태여 이쪽에서 말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꺼낼 것임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두네치카의 그 정도 청을 들어주지 않을 리 있겠니! 더욱이 너는 사무상 훌륭히 그의 오른 팔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번 돈으로 공부하는 셈이 된다. 두네치카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나도 그것은 대찬성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 얘기를 그에게 꺼내지 않은 것은 머잖아 너와 그이가 서로 만날 때 너를 그이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냐가 너를 극구 칭찬하자,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누구든 사람을 판단하려면 자기 스스로 그 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구나. 즉 너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은 너를 직접 만나보고 나서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다. 귀중한 나의 로쟈야, 여러모로 생각해본 결가, 결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어쩌면 늙은이의 변덕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나는 두 사람의 혼례가 끝나면 그들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혼자 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이는 훌륭하고 세심한 사람이니까 자기 쪽에서 먼저 나한테 앞으로 딸과 헤어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제의해올 것이라고 믿는다. 여태까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야. 그러나 나는 거절할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나는 장모란 사위에게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내게 먹을 것이 조금이나마 있고 너와 두네치카라는 자식이 있는 동안은 내 마음대로 홀가분히 살고 싶다. 하지만 너흳르하고는 되도록 가까운 곳에 살고 싶구나. 사실은 말이다. 로쟈야, 나는 일부러 기쁜 소식을 편지 끝에 남겨두었단다. 다름 아니라 머잖아 우리는 모두 한곳에 모여 그럭저럭 3년 만에 셋이 서로 안아볼 수 있을 것 같구나. 두냐와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제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어쩌면 내주일지도 모른다. 만사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지시에 달렸으며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일이 끝나는 대로 그이가 곧 이리로 알려주게 돼 있다. 그이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되도록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단다. 될 수 있으면 이번 사순절에, 만약 그것이 빠르다면 성모승천제 후에는 꼭 식을 올리고 싶다는 거야. 아아, 너를 이 가슴에 안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두냐도 너와 만날 기쁨에 몹시 들떠 한번은 농담으로, 그저 그것만을 위해서라도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단다.정말 그 애는 천사다! 그 애는 이 편지에 아무것도 써 보내지 않지만, 네게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지금은 도저히 펜을 들 용기가 없단다. 대여섯 줄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고 그저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 뿐이라며, 이렇게 전하라는 구나. 그리고 너를 꼭 껴안고 수없이 키스를 보낸다고 써달란다. 하여간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만날 수 있으리라고 ㅅ애각하지만, 나는 근일 중으로 되도록 많이 네게 돈을 보내줄 생각이다. 이젠 두네치카가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져 내 신용이 갑자기 좋아졌단다. 그래서 상인 앞나시 이바노비치도 지금이라면 연금을 잡고 75루블쯤은 융통해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네게도 25루블이나 30루블은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보내면 좋겠지만 우리 여비도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친절하게도 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비 일부를 자기가 부담했다. 즉 우리 짐과 큰 트렁크를 자기가 부쳐주기로 했는데, 누군가 아는 사람을 통해 부치는 모양이더라만, 그래도 우리는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후의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처음 며칠 동안이라도 돈 한 푼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두네치카와 둘이서 세밀히 계산해본 결과 여비는 얼마 안든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서 기차 정거장까지는 약 90킬로밖에 안 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친한 농부에게 마차를 부탁해두었다. 거기서부터는 3등차로 편안히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네게 25루블이 아니라 30루블은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그만 써야 할 것 같다. 편지지가 가득차 쓸 곳이 없구나. 무척 긴 얘기가 되어버렸다. 하긴 여러가지 얘기가 산더미처럼 밀렸으니까! 자, 그럼 나의 조중한 로쟈야, 가까운 재회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너를 포옹하고 어머니의 축복을 보낸다. 로쟈야, 네 누이 동생 두냐를 사랑해주어라. 그 애가 너를 사랑하듯이 너도 그 애를 사랑해주어라. 그리고 그 애는 너를 한없이,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애는 천사다. 그리고 너는, 로쟈야, 너는 우리의 전부다. 우리 희망, 우리 기대의 전부다. 너만 행복하다면 우리도 역시 행복해지는 거다. 로쟈야, 너는 전같이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니? 나는 요즘 유행하는 불신앙에 너도 빠지지 않았나 마음속으로 근심하고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생각나지 않니, 로쟈야, 아직 네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내 무릎 위에 앉아 잘 안 돌아가는 혀로 기도를 드리던 일을. 그리고 그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그럼 잘 있거라. 아니, 그보다 다시 만날 날까지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너를 꼭 껴안고 한없는 키스를 보낸다.
영원토록 변치 않을 너의
풀헤리야 라스콜니코바의
편지를 읽기 시작한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는 내내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은 시종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자, 그 얼굴은 파리해지고 경련으로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입가에는 괴롭고 들뜬, 심술궂은 미소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헐어빠진 납작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심장은 몹시 고동치고 생각은 흩어졌다. 드디어 그는 다락이나 궤/짝처럼 이 누런 골방 안이 갑갑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눈도 머리도 더 넓은 곳을 찾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움켜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층계에서 누구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따위엔 마음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은 잊어버렸다. 거리를 지나, 마치 볼일이 있어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처럼 바실리예프스키 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언제나의 버릇처럼 주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뭔가 중얼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큰 소리로 혼잣 말을 하면서 걸어갔다. 길 가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통행인들은 대부분 그를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편지는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편지를 읽는 동안 한순간도 의혹이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결정되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따위 결혼은 시키지 않겠다. 루쥔 씨 같은 것은 될 대로 되라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느냐 말야'하고 그는 자기 결심의 성공에 벌써부터 짖궂은 승리감을 느끼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안 됩니다, 어머니, 안 돼요. 두냐, 내가 속을 줄 아니!...게다가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빼놓고 결정한 것을 사과하다니! 물론 그럴 테지! 이젠 혼담을 망쳐놓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디 두고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를! 그 변명이 참 그럴듯하군. 그이는 굉장히 바쁜 분이어서 역마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라도 결혼식을 올려야 할 정도로 바쁜 분이다, 라고. 아니다, 두네치카, 빤히 들여다보인다. 네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있다. 네가 밤새껏 방 안을 거닐면서 열심히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머니 침실에 걸린 카잔의 성모상 앞에서 무엇을 기도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자니 괴로울 수밖에. 흠...그러니까 완전히 결정을 보았단 말이지...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두냐의 본명), 그래, 너는 실무적인 사람이고 분별 있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감명적이거든 - 두 군데나 직장을 나가고 새 세대의 신념에 공감하는 -이건 어머니의 말이지만- 더구나 너 자신의 관찰에 따르면 선량한 것 같은 남자에게 시집을 간단 말이지. 이 '것 같다'는 게 무엇보다 근사하군! 그 착실한 두네치카가 '것 같다'와 결혼한다니...훌륭해! 암, 훌륭하고말고!'
'...그런데 어머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새 세대란 말을 써 보냈을까? 단지 본인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목적, 이를테면 내게 아첨을 해서 루쥔을 잘 보이게 하려는 속셈이었을까? 아아, 정말 교활하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사정도 분명히 알고 싶다. 도대체 어머니와 두냐는 그날, 그날 밤에, 그리고 그 후 어느 정도까지 서로의 심정을 털어놓았느냐 말이다! 두 사람은 숨김없이 다 털어놓고 얘기한 걸까. 그렇잖으면 두 사람은 서로 한마음 한뜻임을 알아채고는 구태여 그런걸 입 밖에 내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말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마 그런 것 같다, 편지를 봐도 알 수 있거든. 어머니는 그 사내가 좀 까다로워 보였고, 사람이 너무 좋아서 자기가 느낀 대로 솔직히 두냐에게 얘기했겠지. 누이동생은 물론 화를 내고 불쾌한 듯 대답했을 테고. 당연하겠지! 고지식하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든 일이 명백해 새삼스레 할 말이 없는데, 누군들 화를 안 내겠느냐고. 그리고 어머니는 또 뭐라고 썼지...두냐를 사랑해주어라, 로쟈, 그 애는 널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아들을 위해 딸의 희생을 동의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론 은근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가 보군. 우리의 희망, 우리의 전부라니...아아, 어머니!'...분노는 점점 더 심하게 그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만약 지금 루쥔 씨를 만난다면, 당장 그 사내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흠...그 말은 옳긴 하다.' 그는 회오리 바람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을 쫓으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그 말은 올아, 확실히. 사람을 알려면 긴 안목으로 주의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루쥔 씨의 경우는 너무도 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척 바쁜 사람이고 선량한 것 같다니 말이다. 정말 웃기는군, 짐은 자기가 맡아서 큰 트렁크를 부쳐주겠다니 말야! 그러고 보면 선량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군그래. 그런데 이쪽 두 사람은, 신붓감과 어머니는 거적 씌운 농사꾼의 짐마차를 타고 가는 거야. 나도 그걸 많이 탔었지! 뭘, 상관없겠지. 겨우 90킬로밖에 안 되니까. 기차 정거장부터는 3등차로 편안히 가겠다니, 천 킬로 여정을 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무엇이나 자기 분수에 어울려야 한다는 속담도 있으니까. 그러나 루쥔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쨌든 그 애는 당신의 신붓감 아니냐 말이오...게다가 어머니가 연금을 저당으로 하여 여비를 꾸어 쓰려 한다는 걸 당신도 모를 리는 없잖소? 하기야 그것이 당신네들 공동의 장사 거래라면 이익도 같이 나누고 비용도 반반씩 물어야 하겠죠. 속담에 빵과 소금은 같이 먹어도 담배는 제 것을 피운다는 말이 있으니까. 과연 여기서도 실무가답게 두 사람을 속이고 있군. 짐을 부치는 운임은 여비보다 싸게 먹히고, 어쩌면 공짜로 부치는지도 모르니 말야. 왜 두 사람은 그것을 모를까?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걸까? 게다가 그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단 말야!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진짜 연극은 이제부터니,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실제로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자의 인색함도 아니고, 욕심도 아니며, 전체적인 그 태도에 있는 거야. 결혼 후에도 죽 그런 태도로 나갈 테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예언인 셈이지...그런데 어머니는 왜 쓸데없이 돈을 쓸까? 무슨 돈이 있다고 페테르부르크까지 오신다는 걸까? 루블 은화 세닢이나 지폐 석 장쯤 가지고, 그 전당포 노파의 말마따나...흠! 게다가 어머니는 장차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실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결혼 후엔 비록 잠시라도 두냐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계시면서? 그 친절한 사나이가 아마 슬쩍 귀띔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기야 어머니는 양손을 내저으며 절대로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도대체 어머니는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려는 것일까? 아파나시 이바노치의 빚을 뺀 연금 120루블? 그렇지 않아도 결울철엔 잘 안 보이는 늙은 눈을 상해가면서 목도리를 짜고 수를 놓고 계시면서. 그러나 편물이나 자수로는 연금 120루블에다 고작 1년에 20루블쯤 보탤 정도다, 뻔한 거야. 그렇다면 역시 루쥔 씨의 훌륭한 마음씨를 의지하고 있는 거다. 자기 쪽에서 먼저, 제발 같이 사십시다, 라고 나오기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걸! 아름다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공작 털로 상대방을 장식해놓고는 좋은 면만 보려 하고 나쁜 면은 보지 않으려 하거든. 그리고 일의 진상은 절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점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군. 결국 아름답게 장식된 인간이 스스로 정직한 자를 웃음거리로 만들 때까지는 한사코 진상을 숨기려 드는 법이지. 그건 그렇고 루쥔 씨는 훈장을 가지고 있을까? 암, 틀림없이 단춧구멍에 안나 훈장이 달려 있을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그자는 그것을 청부업자나 장사꾼들의 연회에 달고 다니겠지. 자기 결혼식에도 달 거야! 그러나 그까짓 녀석 아무려면 어때....'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대로 좋다고 하자, 원래가 그런 분이니까. 그러나 두냐는 어떻게 된 거야? 두네치카, 귀여운 내 누이동생,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벌써 스무 살이었다. 그러니 나도 네 성격은 잘 알고 있어. 어머니는, 두네치카는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나는 2년 전부터 그런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2년 반 동안 나는 줄곧 두네치카는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만을 생각해왔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와 그 때문에 생긴 많은 결과조차 참아냈으니까, 사실 어떠한 일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어머니와 함께, 가난에서 구해준 남편 덕을 보게 되는 아내의 장점을 운운하는 법칙을 확언한, 그것도 거의 초대면 때부터 그러한 루쥔 씨도 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설사 그자가 분별 있는 위인인데도 어쩌다가 그런 실언을 했다고 하자, 아니 어쩌면 실언이 아니라 오히려 사전에 자기 태도를 명백히 밝혀두려고 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두냐는, 두냐는 어떻게 된 거냐? 그 애는 남자의 인품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더욱이 한평생을 같이 살 사내니까. 그 애는 검은 빵을 씹고 물을 마시며 살더라도 결코 자기 마음을 팔 아이가 아니다. 안일한 생활을 위해 정신적 자유를 팔 여자가 아니야. 루쥔 씨는커녕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을 몽땅 준다 해도 그럴 애가 아니다. 더군다나 루쥔 씨 같은 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아는 한 두냐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지금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스비드리가일로프 부부 댁에선 괴로웠을 테지! 평생을 200루블짜리 가정교사로 떠돌아다닌다는 것 역시 고달픈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 동생은 제 몸 하나의 이익을 위해 존경하지도 않고 상대조차 안 되는 사내와 영원히 운명을 맺고 자기 영혼이나 도덕감에 먹칠을 하느니, 차라리 식민지의 농장주한테 노예로 달려가든가 발트 해 연안의 독일인한테 식모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그리고 설사 루쥔 씨가 순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의 합법적인 첩이 되는 것을 승낙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승낙했을까? 도대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의 열쇠는 어디 있는가? 뻔한 일이다. 자기를 위해, 자기 안일을 위해, 아니 그뿐만 아니라 자기 몸을 사지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자기를 팔 아이는 아니지만, 남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팔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경모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팔려는 거다! 바로 여기에 열쇠가 있다. 오빠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팔려고 한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오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도덕감도 억누를 것이고, 자유도, 안일도, 끝내는 양심까지도 죄다 넝마 시장에 내놓고 만다! 자기 일생 같은 건 아랑곳도 없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이유를 만들어 제수이트파 흉내를 내면서 그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량한 목적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잠시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교도 하리라. 우리는 이런 인간인 것이다. 만사는 대낮처럼 명백하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는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가 관계자이며, 더구나 그 주인공이라는 것도 명백하다. 그것도 좋다고 하자. 오빠의 행복을 계산하고, 대학도 계속 다닐 수 있게 하고, 법률사무소의 공동 경영자로 만들어주고, 일생의 운명을 보증할 수도 있다. 그래서 후에는 아마도 명예에 싸여 사람들이게서 존경받는 부자가 될 지도 모른다. 또는 훌륭한 인간으로 평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다, 문제는 로쟈인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로쟈, 외아들 로쟈! 이런 외아들을 위해서라면 비록 그토록 훌륭한 딸일지라도 희생시켜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으랴! 오오, 얼마나 갸륵하면서도 그릇된 생각들이냐! 아니, 그러다가는 우리도 소네치카의 운명을 답습할지 모른다! 소네치카, 소네치카 마르멜라도바, 이 세상이 계속된는 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소네치카여! 당신네들 두 사람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을, 희생의 참뜻을 충분히 생각해본 일이 있는지? 어때? 힘에 겹지 않은지? 무슨 이득이 있지? 이치에 맞는 걸까? 두네치카, 너는 알고 있니? 소네치카의 운명은 루쥔 씨와 맺어지려는 네 운명에 비해 조금도 더럽지 않다는 것을? 그 애한테는 사랑이란 있을 리 없다고 어머니는 쓰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랑은 고사하고 존경조차 없다면, 아니 그뿐 아니라 혐오와 멸시와 증오가 있다면, 그때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는 너도 역시 산뜻한 옷차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렇지 않니, 응? 너는 알겠지, 알 수 있겠니, 그 산뜻한 옷차림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루쥔 부인의 산뜻한 옷차림은 소네치카의 산뜻한 옷차림과 같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더러운, 더 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네치카, 네게는 뭐니뭐니 해도 다소 편하게 살려고 하는 타산도 숨어 있지만, 소네치카에게는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그 산뜻한 옷차림이란 건 비싸게 먹힌다, 두네치카. 그런데 만약 나중에 힘에 겨워 후회하게 된다면? 그때 그 슬픔은 얼마나 클 것이며, 탄식과 저주, 그리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얼마나 많겠느냐! 너는 마르파 페트로브나와는 다르니 말이다.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되겠니? 어머니는 벌써부터 불안을 느끼고 번민하고 계신데, 만약 만사가 분명해지는 날엔 어떻게 되겠느냐 말이다. 그리고 나는 또 어떻게 되고?...정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나는 너희들의 희생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두네치카, 그리고 어머니, 나는 싫소!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짓은 시킬 수 없소. 암, 시킬 수 없고말고!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걸음을 멈추었다.
'시킬 수 없다고? 그럼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넌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금지시키겠다고? 그러나 네게 그럴 권리가 있느냐 말야? 그런 권리를 갖기 위해 너는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해줄 수 있느냐?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을 얻으면 자기 운명의 전부를, 자기 장래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바치겠다는 거냐? 그런 말은 싫증이 나도록 들었다. 떡 주는 사람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려는 격이지 뭐냐? 어쨌든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느냐 말야? 넌 그걸 알고 있느냐? 그런데도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말이다. 너는 도리어 그들을 착취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그들의 돈은 연금 100루블과 스비드리가일로프네 집에서의 시중과 저당을 담보로 마련한 것이니 말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나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 같은 무리에게서 너는 어떻게 그들을 지켜낼 작정이냐? 미래의 백만장자,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우스 신? 10년 후에 보자는 건가? 그러나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머니는 목도리를 짜는 일과 눈물 때문에 아마 장님이 되고 말 게다 아니, 그뿐 아니라 영양실조로 꼬장꼬장 여위고 말 게다. 그리고 누이동생은 10년이 지난 뒤, 아니 그 10년 동안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라. 어때, 이제 알겠느냐?'
이렇게 그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리고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면서 이러한 물음으로 스스로를 우롱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며, 오래전부터 앓고 있는 낡은 병증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들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현재의 이러한 괴로움이 그의 마음에 생긴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인데, 그것이 차차 자라고 쌓이고 쌓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무섭고도 기괴한 환상적인 의문이 되어 완전히 성숙하고 응결한 것이다. 이 의문은 어쩔 수 없는 해결을 요구하면서 그의 감정과 이성을 괴롭혀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받은 어머니의 편지는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타격을 주었다. 이제는 이미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동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똑똑히 직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곧, 한시바삐 무엇이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전적으로 인생을 거부해야 한다!' 갑자기 그는 광분에 사로잡혀 외쳤다. '있는 그대로의 운명을 한평생 순순히 변함없이 받아들임으로써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일체의 권리를 단념하고, 자기 내부의 모든 것을 짓눌러 죽여버려야 한다!'
'아시겠어요, 젊은 양반, 어디로도 갈 데가 없다는 그 뜻을 아시겠느냐 말이오?' 어제 마르멜라도프의 질문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어떠한 인간이든 적어도 발길 돌릴 데쯤은 있어야 하잖겠어요....'
그는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역시 어제와 같은 상념이 하나 또다시 그의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그러나 그가 몸을 떤 것은 이 상념이 번쩍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즉 그는 이 상념이 반드시 '번쩍일'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념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한 달 전까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금은 갑자기 공상이 아니고 뭔가 새롭고 무서운, 전혀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자신도 대번에 그것을 의식했다. 그는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얼른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든 앉고 싶어 벤치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K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백 보쯤 앞에 벤치가 보였다. 그는 되도록 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중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 때문에 잠시 동안 그의 주위는 그곳으로 쏠리고 말았다.
벤치를 찾다가 그는 스무 걸음쯤 앞에서 걸어가는 어떤 여인을 보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태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그 여인에 대해서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집에까지 돌아와서도 자기가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걷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앞에서 걷고 있는 여인은 처음 본 순간부터 이딘지 이상한 데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의 주의는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고 어쩐지 불쾌하기까지 했으나, 차츰 강한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그 여자의 어디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이 별안간 알고 싶어졌다. 첫째, 그녀는 아주 젊은 처녀인 모양인데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모자도 쓰지 않고 양산도 안 가지고, 장갑도 안 끼고, 우스꽝스럽게도 두 손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괴상한 옷차림이어서 단추도 아무렇게나 채우고 뒤 허리께에서 스커트 위쪽 부분이 몹시 찢겨 있는 데다가 그 찢어진 조각이 뒤로 늘어져서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에는 조그만 목도리가 걸쳐져 있었으나 그것도 비뚤어져 옆으로 처져 있었다. 더욱이 처녀는 비틀비틀 넘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마침내 이 뜻밖의 만남은 라스콜니코프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벤치 바로 옆에서 처녀를 따라잡았으나, 벤치에 이르자 그녀는 한쪽 끝에 털썩 쓰러지더니 등받이에 머리를 던지고 기진맥진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 모양을 보고, 처녀가 몹시 취했다는 것을 그는 금방 알아챘다. 이런 꼴을 보니 이상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몹시 젊어 보여서,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밖엔 안 돼 보이는 조그마한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홍당무처럼 빨개진 그 얼굴은 어딘지 좀 부어오른 것 같았다. 처녀는 거의 의식이 없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개놓고 있었으나, 그 얹힌 무릎이 보통보다는 훨씬 높았다. 모든 점으로 보아 그녀는 자기가 한길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앉지도 않고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망설이듯 그녀 앞에서 있었다. 이 가로수 길은 언제나 한적한 곳이지만, 지금 1시가 지난 무더운 이맘때는 거의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열댓 걸음쯤 떨어진 한길 저쪽에 한 신사가 서서, 무슨 목적을 품고 처녀에게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도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고 뒤를 쫓아온 것이 틀림없었으나, 라스콜니코프가 방해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쪽에 눈치를 채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라스콜니코프에게 원한에 찬 시선을 던지면서, 거지 같은 룸펜 녀석이 가버리고 빨리 자기 차례가 와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사태는 명백했다. 신사는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유들유들하게 살찐 사내였는데, 핏속에 우유라도 섞인 듯이 윤기 있는 장밋빛 입술 위에 콧수염을 기르고,아주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왈칵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어떻게든 이 유들유들한 멋쟁이 녀석을 모욕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처녀를 내버려 두고 신사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스비드리가일로프! 당신은 여기 무슨 볼일이 있소?"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격분한 나머지 거품이 이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신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거만하게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위엄 있게 반문했다.
"어서 꺼져버리란 말이오!"
"뭣이, 건방진 놈 같으니!"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단장을 휘둘러 올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덩치 큰 신사가 자기 따위는 둘쯤 문제없이 당해낼 수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잡았다. 그들 사이에 순경이 끼어든 것이다.
"그만들 하시오. 한길에서 싸움을 하면 안 됩니다. 대체 왜들 이러시오? 자넨 뭔가?" 라스콜니코프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자, 순경은 준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순경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른, 이해심 있어 보이는 눈을 가진 늠름한 군인 타입의 사나이였다.
"마침 잘 오셨소." 그는 순경 손을 잡으며 외쳤다. "나는 대학에 다니던 라스콜니코프란 사람이오...당신도 사정을 알 수 있을 거요." 그는 신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리 가십시다. 보여드릴 게 있으니......"
이렇게 말하고 그는 순경의 손을 붙잡고 벤치 쪽으로 끌고 갔다.
"자, 보십시오. 완전히 취했습니다. 방금 이 가로수 길을 걸어왔답니다. 어떤 여자 인지는 몰라도 직업적인 여자 같지는 않군요. 필시 어디서 강제로 술을 먹은 다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합니다...처음으로 말입니다....아시겠죠? 그러고는 이렇게 거리로 쫓겨난 거예요. 보십시오, 이 찢어진 옷을, 그리고 이 옷 입을 꼴을. 이건 누가 입혀준 것이지 자기 손으로 입은 게 아닙니다. 서투른 남자의 손으로 입힌 게 뻔합니다. 그럼 이번엔 이쪽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싸우려고 한 이 멋쟁이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길에서 술에 취해 정신없는 이 처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처녀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까 접근해서 제 손에 한 번 넣어보려 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거죠...그게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어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만, 저자는 이 처녀를 지켜보며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방해가 되니까 빨리 가버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지금 좀 떨어져서 담배를 빠는 시늉을 하고 있군...어떻게 해서든지 저자한테 이 처녀를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까지 데려다 줘야 해요. 어떻게 좀 생각해주십시오!"
순경은 곧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뚱뚱한 신사에 대해서는 명백했으므로 남은 것은 처녀 문제뿐이었다. 순경은 좀 더 찬찬히 보려고 처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동정하는 빛이 나타났다.
"아, 정말 가엾군!" 그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인데, 속았군. 틀림없어. 이봐요, 아가씨!" 그는 처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집은 어디요?" 처녀는 뿌옇게 흐려진 눈을 뜨고 질문하는 사람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순경 아저씨"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자,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20코페이카를 끄집어냈다. 마침 돈이 있었다.) 이걸로 마차를 잡아서 마부더러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일러주시오. 주소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아가씨! 아가씨!" 돈을 받아 들자 순경은 다시 묻기 시작했다. "곧 마차를 잦ㅂ아서 집까지 데려다 드리겠소. 집은 어디요? 예? 어디 사시오?"
"저리 가!...귀찮아!"
"참, 이거 큰일 났군! 젊은 아가씨 부끄럽지도 않소, 이게 무슨 꼴이오!" 그는 겸언쩍어하기도 하고, 동정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이거 야단났군!"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돌아보더니 다시 한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훑어보았다. 이렇게 남루한 옷차림을 한 주제에 남에게 돈을 내놓는 것이 아마 이상했던 모양이다.
"당신은 멀리서 이 두 사람을 발견했소?" 하고 순경은 라스콜니코프에게 물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처녀는 가로수 길을 비틀거리며 내 앞을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벤치까지 오더니 별안간 쓰러져버리더군요."
"정말이지 요즘 세상엔 별의별 추태가 다 있어요! 이렇게 어린 처녀가 벌써 술에 취해 다니고 있으니! 속아 넘어갔을 겝니다, 틀림없이! 이 찢어진 옷을 좀 보시오... 참 타락한 세상이란 말이야!...집안은 좋은가 본데, 아마 지금은 몰락한 가정인가 보군요...요즘은 이런 게 많아졌거든. 꼴을 보니 귀엽게 자란 좋은 집안 딸 같은데 말야..."
그는 또 한 번 처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혹시 그에게도 이런 딸이 있는지 모른다. 마치 지체 놓은 집안의 딸처럼 귀엽게 자란 듯 교양 있는 체하고 온갖 유행을 쫓기를 좋아하는 딸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혼자 몸이 달았다. "어떻게 해서든 저 악한한테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 처녀를 다시 욕보이려 하고 있어요. 저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합니다. 보세요, 저 악당은 물러가려고도 하지 않아요!"
라스콜니코프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똑바로 신사 쪽을 가리켰다. 신사는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경멸하는 시선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고는 천천히 열 발짝쯤 물러서더니 다시 멈추었다.
"저런 사람에게 내주지 않을 순 있습니다만"하고 하사관 출신인 경관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단지 어디로 데려다줘야 할지 그것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잖으면...아가씨! 아가씨!" 그는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소녀는 눈을 번쩍 뜨고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알아차린 듯 벤치에서 일어나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뻔뻔스런 놈들이 아직도 날 쫓아다니는군!" 그녀는 다시금 한 손을 내젓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재게 걸음을 옮겼으나,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멋쟁이도 가로수 길 건너편을 걸으며 처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염려할 건 없소. 절대 안 내줍니다." 콧수염을 기른 순경은 단호히 말하고 두 사람을 뒤쫓았다. "아무튼 타락한 세상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소리를 내어 되풀이 했다.
이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무엇인가에 쿡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기분이 홱 뒤집히는 듯했다.
"이거 보시오!" 그는 뒤에서 콧수염 순경에게 소리쳤다.
순경은 뒤돌아보았다.
"놔둬요! 참견할 것 없어요! 내버려 둬요! 실컷 재미 보라고 하시오. (그는 멋쟁이를 가리켰다.) 당신이 끼어들 필요가 뭐요?"
순경은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쳇!" 하고 순경은 손을 크게 내젓고는 멋쟁이와 처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아마 라스콜니코프를 미친놈 아니면 그보다 더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내 돈 20코페이카만 없어져버렸군.' 혼자 남게 되자 라스콜니코프는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저놈한테서도 받으라지. 그리고 저 처녀를 놈에게 내주면 그만이야.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동정을 베풀었지! 나 같은 게 남을 돕다니? 내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그들은 서로 살아가며넛 먹고 먹히는 거야! 그것이 내게 어쨌단 말이냐? 무엇 땜에 나는 그 20코페이카를 선뜻 내주었을까? 아니, 그게 내 돈이었나?'
이런 괴이한 생각에도 그는 괴로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그는 텅 빈 벤치에 걸터 앉았다. 머릿속은 산란하기만 했다. 이럴 때일수록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고 푹 쉬고 나서 새롭고 산뜻한 기분으로 다시 출발하고 싶었다.
'가엾은 처녀군!' 텅 빈 벤치 한 귀퉁이를 바라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이윽고 정신이 들면 눈물을 흘릴 테지.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도 알게 되고...처음엔 그저 손으로 맞다가 나중엔 회초리로 얻어맞게 되어 아픔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어쩌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아니, 쫓겨나진 않아도 어차피 다리야 프란초브나같은 무리가 냄새를 맡게 되면 이 처녀도 여기저기 드나들게 되겠지...그다음 곧 병원을 찾을 거야, 이런 일은 극히 결백한 어머니 슬하에 살면서 몰래 나쁜 짓을 하는 무리에게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다음엔...그다음엔 또 병원...술...술집...그리고 또 병원...이렇게 2,3년이 지나노라면 폐인이 되고 말 게다. 그래서 그녀의 생애는 겨우 열 여덟이나 열아홉으로 끝나고 마는 거야...나는 지금까지 그런 여자를 수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던가? 뭐, 모두 저렇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지...쳇! 될 대로 되라지!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들 말한다. 해마다 그만한 퍼센티지는 나오게 마련이라니까...가소롭다. 필시 다른 사람들의 순결을 지키고,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겠지. 퍼센티지! 정말 근사한 말이군. 그럴싸한 과학적인 말이야. 퍼센티지, 이렇게 한마디 해두면 아무것도 근심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것이 만약 다른 말이라면, 그땐 아마...이렇게 안심하고 있지는 못할 게다...그러나 만약 두네치카가 그 퍼센티지에 들어간다면! ...이쪽이 아니라 다른 쪽의 퍼센티지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문득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오긴 했는데. 편지를 읽고 나서 나왔지...아, 그렇지,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라주미힌한테 가는 길이지, 그렇다,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친구한테 가려 했지? 어째서 이런 때 라주미힌한테 갈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나도 모를 일이야.'
그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주미힌은 대학 시절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지만, 라스콜니코프는 대학에 다닐 때 친구라곤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피해서 아무도 찾아다니지 않았고, 또 남이 찾아 오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친구들도 이내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는 전체적인 회합에도, 친구끼리의 모임이나 놀이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존경을 받았으나, 아무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몹시 가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만하고, 비사교적이고, 마음속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친구들이 보기에, 그는 마치 자기들을 어린애로 취급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교양도 식견도 신념도 그들보다는 뛰어났으며, 그들의 신념이나 취미를 저급하게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라주미힌과는 어째선지 이상하게도 뜻이 맞았다. 뜻이 맞았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낼 수 있었다. 하기야 라주미힌하고도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는 유달리 쾌활하고 시원스런, 단순할 만큼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단순함 속에는 깊이와 위엄이 숨어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것을 이해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는 때로 바보처럼 보이는 수도 있었으나 상당히 영리한 편이었다. 그 풍채도 인상적이었다. 키가 크로 마른 데다가 검은 머리에 언제나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난폭한 짓을 하곤 해서 장사로 통했다. 한번은 밤의 연회석상에서 6척이 넘는 거구의 문지기를 한 대에 때려 누인 일도 있었다. 술을 한없이 마실 수도 있으며, 조금도 입에 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지나친 장난도 했으나, 장난을 전혀 하지 않고 참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라주미힌의 특징은, 어떠한 실패를 해도 끄떡없고 아무리 곤경에 빠져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붕 위에서도 살 수가 있고, 지옥과도 같은 굶주림이나 모진 추위도 능히 참을 수가 있었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그는 완전히 혼자 힘으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서 돈을 버어 자기 생활을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일하기만 하면 퍼낼 수 있는 재원을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겨우내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지낸 적도 있는데, 추운 편이 잠이 잘 온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 그는 하는 수 없이 대학을 쉬고 있지만, 그것도 오랫동안이 아니고, 다시 학업을 계곳할 수 있도록 사태를 회복하려고 열심히 서두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벌써 넉 달 동안이나 그에게 가지 않았고, 라주미힌도 라스콜니코프의 하숙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두어 달쯤 전에 한 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으나, 라스콜니코프는 외면을 하고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반대쪽으로 건너가버렸다. 라주미힌도 그를 보긴 했으나, 친구의 마음을 흔들어놓지 않으려고 그대로 자나쳐버렸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요 얼마 전만 해도 라주미힌한테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려고 했었지, 가정교사 자리든지 뭐든지 일자리를 구해달라고...'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가 어떻게 나를 도울 수가 있다는 거냐! 가령 가정교사 자리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의 수중에 1코페이카라도 있어 마지막 1코페이카까지도 나누어준다고 하자. 그것으로 가르치러갈 때 신을 구두도 사고 옷도 수선할 수 있다고 하자...흠...그다음엔 어떻게 되지? 몇 푼 안 되는 동전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가 있다는 거냐? 지금의 네게 필요한건 거런 것일까? 정말 가소롭구나, 라주미힌을 찾아가려 하다니...'
그가 지금 무엇 때문에 라주미힌한테 가려고 했느냐 하는 의문은, 그 자신이 느낀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는 불안을 느끼면서, 이 지극히 평범한 행위에서 자기에게 흉조가 될 만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
'아니, 그렇다면 나는 라주미힌 한 사람의 힘으로 만사를 회복하려고 했단 말인가, 모든 해결을 라주미힌에게서만 구하려고 했단 말인가!' 그는 놀라움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랜 생각 끝에 우연히, 뜻밖에도 한 가지 괴이한 상념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흠...라주미힌한테로....'그는 갑자기 최후의 단안이라도 내리듯이 매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라주미힌한테로 가자. 물론 가야지...그러나 지금이 아니라...그 친구한텐....그것을 끝낸 다음 날 가도록 하자. 그것을 끝냈을 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을 때......'
그러자 그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끝낸 다음?' 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일어날까? 정말 그것을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벤치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는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그 구석방에서, 그 무서운 다락 같은 골방에서 벌써 한 달 이상이나 그것이 성숙해오지 않았던가.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신경성 전율은 일종의 열병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는 오한까지도 느꼈다. 이 무더위에도 그는 오싹오싹 추워졌다. 그는 내부의 어떤 필연적인 요구에 쫓겨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엇에 쫓기는 듯한 기분으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뭔가 눈요깃거리라도 없나 하고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그것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는 점점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다가 부르르 몸을 떨고 다시 고개를 쳐들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디를 지나 왔는지조차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그는 바실리예프스키 섬을 지나서 말라야 네바강가로 나오자, 다리를 건너 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목들의 푸름과 상쾌한 공기는 거리의 먼지며, 석회며, 빽빽들어차서 억누르는 듯한 커다란 건물만을 보아온 피로한 그의 눈에 처음 얼마 동안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는 무더위도, 악취도, 선술집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청신하고 상쾌한 감촉도 곧 병적인 초조한 기분으로 변하고 말았다. 때때로 그는 푸름 속에 아름답게 칠을 한 별장 앞에 서서 울타리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발코니나 테라스 위의 화려한 옷차림을 한 부인들과 정원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끈 것은 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꽃을 바라보았다. 그는 또 화려한 마차, 말을 탄 신사나 귀부인들도 만났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보았으나,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벌써 그들을 잊어버리곤 했다. 한번은 걸음을 멈추고 호주모니에 들어 있는 돈을 세어보았다. 30코페이카쯤 있었다. '순경에게 20코페이카, 나스타시야에게 우편 값으로 3코페이카. 그러고 보면 어제 마르멜라도프네 집에 47코페이카쯤 놓고 온 셈이군.' 무엇 때문인지 이런 셈을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 왜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싸구려 음식점 같은 어느 요릿집 옆을 지나갈 때였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음식점에 들어가 곧 보드카를 한 잔 기울이고, 속에 뭘 넣었는지도 모를 고기만두를 한 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길거리로 나와 먹다 남은 것을 마저 먹었다. 퍽 오랫동안 보드카를 입에 대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 한 잔 마셨을 뿐인데도 금방 효력이 나타났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고 몹시 졸리기 시작했다. 그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페트로프스키 섬까지 다다르자 그만 완전히 지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길에서 길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풀밭 위에 쓰러져 그대로 곤히 잠들어버렸다.
병적인 상태에 있을 때 꾸는 꿈은 가끔 이상한 입체성과 뚜렷한 선명함, 놀랄 만한 현실과의 유사성을 그 특색으로 한다. 때로는 기괴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 꿈의 상황이나 그 과정 전체가 장면의 내용을 충실케 한다는 뜻에서 예술적으로 완전히 부합하는,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상세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록 푸시킨이나 투르게네프 정도의 예술가라 할지라도 생시에는 쉽사리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다. 이러한 꿈, 이러한 병적인 꿈은 언제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교란되고 흥분된 인간 조직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법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유년 시절 지방 시골 거리에 있었을 때의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일곱 살쯤이었고, 축제일 저녁 무렵 아버지와 둘이서 교외를 산채하고 있었다. 우중층한 계절, 후덥지근한 날씨, 주위 경치도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기억 쪽이 지금 꿈속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희미할 정도였다. 마을은 주위에 미루나무도 한 그루 없어 마치 손바닥을 펴놓은 듯 사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어딘가 먼 하늘가에 조그만 숲이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마을 어귀의 채소밭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큰 술집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그 옆을 지날 때마다 언제나 그에게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인상, 인상이라기보다는 공포까지 불러일으키는 술집이었다. 거기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잔뜩 모여 앉아서 큰 소리로 외쳐대고, 웃어대고, 욕지거리를 하고, 쉰 목소리로 추잡한 노래를 부르고, 곧잘 싸움을 하곤 했다. 술집 주위에는 언제나 이런 주정뱅이며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득실거렸다.......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는 아버지를 꼭 붙들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술집 옆에 한길이 나 있었는데 시골길이라 언제나 흙먼지가 뽀얗고, 그 먼지는 시꺼먼 빛을 띠었다. 길은 앞으로 구불구불 뻗어 나가다가 300보쯤 되는 곳에서 마을 묘지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묘지 한가운데는 녹색 둥근 지붕의 석조 교회당이 있었다. 그는 거기에 1년에 두어 번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의 추도식이 있을 때마다 부모를 따라가곤 했다. 그의 부모는 언제나 흰 접시에 성찬을 담아 그것을 냅킨에 싸가지고 갔다. 성찬에는 설탕이 들어 있고, 쌀밥 속에 건포도를 십자 모양으로 박아 넣었다. 그는 이 교회당과, 그 안에 안치된 거의 장식 없는 낡은 성상들과, 머리를 흔들흔들 흔드는 늙은 신부가 좋았다. 평평한 비석이 있는 할머니의 무덤 옆에는 생후 6개월 만에 죽은 동생의 조그마한 무덤이 있었다. 그 동생도 전혀 기억에 없었지만 동생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으므로, 그는 묘지에 올 때마다 종교적인 기분으로 이 무덤에도 경건하게 성호를 긋고 머리를 숙이고 비석에 키스를 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꿈에 본 것은 이러했다. 아버지와 함께 묘지로 가면서 술집 옆에 다다랐을 때 그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무서운 듯이 그쪽을 보았다. 그러자 어떤 특이한 광경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마침 그곳에는 무슨 축제라도 있는지 화려하게 차려입은 장사꾼 아낙네와 농사꾼 여편네, 그리고 그들의 남편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술집 입구 층계 옆에는 짐마차가 한 대 서 있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짐마차였다. 그것은 커다란 말이 끄는, 짐이나 술통을 나르는 큰 짐수레의 하나였다. 긴 갈기와 굵은 다리를 가진 말이, 짐이 없는 편보다 도리어 있는 편이 편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산더미 같은 짐을 유유히 정확한 걸음걸이로 가볍게 끌고 가는 것을 보면 그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큰 짐마차에 뼈가 앙상한 조그만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도 곧잘 보았지만, 그것은 때로 장작이나 건초 따위를 높이 싣고 끌다가, 마차가 진창이나 수레부퀴 자국에라도 빠지면 꼼짝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그런 종류의 허약한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부는 사정없이 콧등이나 눈두덩에까지 마구 채찍질을 한다. 그것을 보면 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금방 울먹이기 때문에 언제나 어머니가 보지 못하게 창가에서 그를 떼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금, 주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붉고 푸른 셔츠 위에 농부용 외투를 걸치고 만취한 덩치 큰 농부들이 외치고 노래하고, 발랄라이카(우크라이나의 민속 발현악기)를 치면서 우르르 술집에서 몰려나왔다. "자, 타라, 모두 타!"하고 목이 굵고 젊은 사내 하나가 외쳤다. "모두 태워줄 테니 어서 타!" 그러자 곧 웃음소리와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말라빠진 말이 어떻게 끌어!"
"이봐, 미콜카, 너 돌지 않았냐? 그런 말라깽이 말에 이렇게 큰 수레를 달다니!"
"이래 봬도 이 말은 아마 스무 살은 됐을 거야!"
"자, 타도록 해, 모두 데려다 줄 테니!"
미콜카는 맨 먼저 마차에 뛰어오르면서 이렇게 외치더니 고삐를 잡고는 마부석에 우뚝 섰다. "밤색 말은 아까 마트베이가 몰고 갔어"하고 그는 마차 위에서 외쳤다. "그런데 이 암말은 말썽만 부려서 야단이야.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정도지, 밥벌레 같은 놈이. 자, 타라니까! 한번 신나게 달려 보인대도!" 그는 채찍을 들고 장난삼아 말을 때릴 듯한 시늉을 했다.
"어서들 타지, 왜 안 타!" 군중 속에서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달려 보인다지 않아!"
"저 말은 벌써 10년쯤 달려본 일이 없을걸."
"이제부터 달리는 거야."
"걱정할 건 없어. 자, 모두 채찍을 들고 준비를 하세!"
"그래그래! 맘껏 후려갈겨!"
모두 큰소리로 웃고 농담을 하며 미콜카의 짐마차에 올라탔다. 여섯 사람쯤 탔으나 아직 앉을 자리는 있었다. 일행은 얼굴이 붉고 뚱뚱한 여자를 하나 태웠다. 여자는 분홍색 무명옷을 입고, 유리구슬로 장식한 두건을 쓰고, 발에는 장화를 신고, 호두 알을 달그락거리며 웃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같이 웃고 있었다. 사실 이 초라한 암말이 이만한 무게를 끌고 달리려고 하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마차 위에서는 두 젊은이가 미콜카를 도우려고 제각기 채찍을 들었다. "이랴!"하는 소리와 함께 바짝 마른 말은 있는 힘을 다해 끌기 시작했으나, 달리기는커녕 보통 걸음으로 걷기조차 힘이 드는 듯 그저 다리를 앞뒤로 움직일 뿐 연거푸 등에 떨어지는 채찍 세 개에 신음하면서 금방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마차 안팎에 울리는 군중의 웃음소리는 전보다 더 높아졌다. 화가 난 미콜카는 정말로 말이 달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더욱더 세차게 말 등을 내리쳤다.
"여보게들, 나도 태워주게." 젊은이 한 사람이 구미가 당기는 듯 군중 속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타라! 다들 타!"하고 미콜카가 외쳤다. "모두들 태워주마. 좀 더 때려!" 이렇게 말하며넛 마구 내리치니, 나중에는 정신들을 잃고 이 이상 무엇으로 때려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아버지, 아버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예요! 아버지, 가엾은 말을 마구 때려요!"
"자, 가자, 가자!"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주정뱅이들이 못된 장난을 하고 있구나. 바보 같은 놈들, 자, 가자, 보지 마!" 이렇게 말하면서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가려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정신없이 말한테로 달려갔다. 하지만 가엾은 말은 이미 완전히 지쳐 있었다. 말은 허덕이며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한번 안감힘을 썼으나,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죽을 때까지 쳐라!"하고 미콜카는 소리쳤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다. 때려누여야지!"
"이놈아, 네겐 십자가도 없느냐, 이 악당아!" 군중 속에서 한 노인이 소리쳤다. "저런 말에 그렇게 많은 짐을 끌리는 건 생전 처음 보는군"하고 다른 한 사람도 덧붙였다.
"뻗어버리겠다!" 또 한 사람이 고함을 쳤다.
"개수작 말아! 내 말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더 타라! 모두 타라, 내 꼭 달려 보이고 말 테니!"
갑자기 와아 웃음소리가 터지면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암말이 계속되는 채찍질에 견디다 못해 힘없이 뒷발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조차 참지 못하고 히죽 웃었다. 이 보잘것없는 말이 아직도 건방지게 발길질을 하려 들다니!
군중 속에서 또 젊은이 둘이 양쪽에서 말을 때리려고 각기 채찍을 들고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좌우에서 각각 달려들었다.
"콧등을 쳐라, 눈두덩을, 눈을 쳐라!"하고 미콜카는 외쳤다.
"자, 노래를 부르자!" 누군가 마차 위에서 외쳤다. 그러자 마찬 안의 무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추잡한 노래가 울려퍼지며 북이 둥둥 울리고, 사이사이 휘파람 소리가 일어났다. 뚱보 여자는 호두를 깨며 웃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말 옆으로 뛰어갔다.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말의 눈에, 정통으로 말의 눈에 채찍을 내리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는 울었다. 심장은 고동치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사람이 휘두른 채찍이 그의 얼굴을 때렸으나 그는 그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손을 비비고 외치면서, 머리를 가로저으며 이 일에 대한 비난의 뜻을 표시하던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게 매달렸다. 어떤 여인 하나가 그의 팔을 붙들고 데리고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뿌리치고 다시 말 옆으로 달려갔다. 말은 곧 숨이 넘어갈 듯하면서도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정말!" 하고 미콜카는 기를 쓰며 소리쳤다. 그는 채찍을 내동댕이치고 허리를 굽히더니, 마차 밑에서 크고 굵직한 멍에를 꺼내 두 손으로 쥐고는 힘껏 말 위로 쳐들었다.
"박살을 내려는군!" 주위 사람들이 외쳤다.
"때려잡을 생각이야!"
"내 말이야!"하고 미콜카는 외치며 힘껏 멍에를 내리쳤다. 퍽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쳐라, 쳐! 뭘 꾸물거려!" 군중 속에서 이런 소리들이 울려 나왔다.
미콜카는 두 번째로 멍에를 쳐들었다. 두 번째 타격은 불운한 말의 등에 떨어졌다. 말은 털썩 주저앉았으나, 다시 뛰어 일어나 수레를 끌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사방으로 잡아당겨보았다. 그러나 어느 쪽을 향해도 채찍 여섯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세 번째로 멍에가 내리쳐졌다. 그다음 다시 네 번째로 사정없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었다. 한 번에 때려누일 수 없었으므로 미콜카는 이미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꽤 질긴데!" 하고 주위에서 떠들어댔다.
"이제 곧 쓰러지고 말 거야. 뻗어버릴 때가 됐어!" 군중 속에서 구경꾼 한 사람이 말했다.
"차라리 도끼로 하지 그래! 단숨에 뻗어버리게." 세 번째 사람이 소리쳤다.
"에잇, 망할 자식! 저리 비켜!" 미콜카는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멍에를 버리더니, 또다시 마차 안으로 몸을 굽혀 이번에는 무쇠지레를 꺼냈다. "견뎌봐라!" 그는 이렇게 외치고는 지렛대를 휘둘러 올렸다가 가엾은 말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멍에는 부서져 내렸다. 말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가 다시 한번 매달리려 했으나, 지렛대가 다시 힘껏 등을 내리치는 바람에 다리 네 개를 한꺼번에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아주 때려누여야 해!"하고 미콜카는 외치면서 정신없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역시 술에 취해 얼굴이 벌건 몇몇 젊은이들도 채찍, 막대기, 멍에 등 손에 닿는 대로 집어 들고는 금방 숨이 끊어질 듯한 암말 옆으로 달려갔다. 미콜카는 말 옆에 자리 잡고는 무쇠 지렛대로 말 잔등을 마구치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말은 코끝을 축늘어뜨리고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쉬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해치웠군!" 하는 소리가 군중 속에서 들려왔다.
"달리지 않은 죄야!"
"내 말인데 무슨 상관이야!" 미콜카는 손에 무쇠 지렛대를 든 채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이제는 더 때릴 게 없어 서운한 듯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정말 너는 십자가도 지니고 다니지 않는가 보구나!" 이젠ㄴ 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군중 속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가엾은 소년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군중을 헤치고 말 옆으로 다가가 숨진 피투성이의 콧등을 안고 그 눈과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조그만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미콜카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아까부터 아들 뒤를 쫓고 있던 아버지가 겨우 그를 붙들어 군중 속에서 끌어냈다.
"자, 가자, 가"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집으로 가자!"
"아버지! 왜 저 사람들은...불쌍한 말을...죽여버렸나요."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나 숨이 막혀, 말은 억눌린 가슴속에서 외침이 되어 튀어나올 뿐이었다.
"주정뱅이들이...장난을 치는 거다...네가 알 일이 아니야. 자, 어서 가자!"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는 두 팔로 아버지를 끌어안았으나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다시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은 채 눈을 떴다. 머리칼은 땀에 축축이 젖었고, 숨이 가빴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꿈이었구나!' 그는 나무 밑에 앉아서 깊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열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이런 기분 나쁜 꿈을 꾸다니!'
그는 전신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속은 어수선하고 어두웠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는 두 손에다 머리를 얹었다.
'아아!'하고 그는 외쳤다. '정말 나는 도끼를 휘둘러 사람의 머리통을 내리쳐 두개골을 깰 작정인가...끈적끈적하고 뜨뜻한 피바다를 미끄러지며 자물쇠를 부수고 도둑질을 한 다음, 후들후들 떨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도끼를 들고 몸을 숨겨야 하는 걸까...아아, 정말 그런 짓을?'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종잇장처럼 몸을 떨었다.
'아니, 난 왜 이러는 걸까!'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면서 깜짝 놀란 듯 말을 계속했다. '그것을 내가 해낼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걸까! 바로 어제만 해도, 어제만 해도....시험을 해보려고 갔을 때, 도저히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지 않았느냐 말이다...그런데도 지금 와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지금까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거야? 바로 어제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건 비열한 짓이다, 파렴치한 짓이다, 저열한 짓이다, 라고...그 일을 생각만 해도 당장 메스꺼워지고 소름이 끼치곤 하면서....'
'아니, 나는 할 수 없어, 도저히 할 수 없어! 설사 이 모든 계산에 아무런 의혹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난 한 달 동안에 결정한 모든 일이 태양과도 같이 명료하고 수학과 같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아아! 역시 나는 그것을 결행할 수 없다! 나는 해낼 수 없어, 할 수 없고말고...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그는 일어나서 놀란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기가 이런 곳에 와 있어 놀라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는 T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창백하고, 두 눈은 불타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갑자기 호흡이 편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자기를 압박하고 있던 그 공포의 무서운 짐을 이제는 깨끗이 벗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속이 갑자기 가벼워지고 평온해졌다.
'주여!'하고 그는 빌었다. '저의 갈 길을 인도해주소서. 나는 이 저주받을...망상을 버리겠나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는 조용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네바강을 내려다보고, 또 선명하고 붉은 태양이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몸이 쇠약했는데도 그는 아무런 피로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심장 속에서 한 달 동안이나 곪았던 종기가 갑자기 터진 듯한 기분이었다. 자유, 자유! 지금이야말로 그는 그러한 마력에서, 마법에서, 현혹에서, 악마의 유혹에서 해방된 것이다!
훗날 그는 이때의 일을, 요 며칠 사이에 그의 신변에 일어난 모든 일을 일각일각,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상기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어떤 한 가지 사실이 거의 미신에 가까울 만큼 그를 놀라게 했다.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 후 언제나 무슨 운명의 예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으므로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해서 돌아오는 편이 좋았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센나야를 돌아서 왔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고 설명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그다지 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것은 전혀 불필요한 우회의 길이었다. 물론 그가 지나온 길을 기억 못하고 집에까지 돌아온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훗날 언제나 이렇게 자문했다. 왜 그토록 중대한, 자신의 전 운명을 좌우하는, 그리고 지극히 우발적인 센나야(그곳을 지나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에서의 조우가 하필이면 자기 생애의 그러한 때, 그러한 순간, 더욱이 기분이 그러한 상태일 때 이루어졌을까? 그때 상황에서 이 조우는 운명에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영향을 줄 만한 유일무이한 기회 아니었던가? 마치 이 조우가 거기서 그를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센나야 광장을 지나가게 된 것은 9시경이었다. 나무상이며, 목판이며, 판자며, 구멍가게에다 장사를 벌여놓았던 노점 상인들은 각기 가게를 닫고 물건을 챙겨 정리하면서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집으로 흩어져 갈 때였다. 아래층에 자리 잡은 작은 음식점 부근, 센나야 광장 집들의 악취를 풍기는 더러운 뒤뜰, 특히 선술집 근처에는 온갖 직공들과 누더기 옷차림의 무리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아무 목적 없이 거리로 나올 때면 어느 곳보다 이 일대와 근처 뒷골목을 헤매는 것이 제일 좋았다. 여기서는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어느 누구도 거만스런 시선으로 흘끔흘끔 훑어보는 일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멋대로의 옷차림으로 거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K골목 한 모퉁이에 장사꾼 부부가 목판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실이나 노끈이나 옥양목 머릿수건 같은 잡화를 벌여놓고 있었다. 그들 역시 돌아갈 채비를 하다가, 지나다 들른 잘 아는 여자와 얘기를 하느라 늦어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어제 라스콜니코프가 시계를 가지고 시험해보러 갔던, 14등관의 미망인이며 돈놀이하는 노파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동생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였다.(사람들은 흔히 리자베타라고만 불렀다). 그는 오래전부터 리자베타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그녀도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멋없이 키가 크고 겁 많으며 온순한 서른다섯이나 된 노처녀인데, 언니 집에서 노예처럼 밤낮없이 일만 하면서 언니 앞에서는 벌벌 떨고 매까지 맞는, 백치라고 해도 좋은 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보따리를 들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장사꾼 부부 앞에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부부는 뭔가 열심히 그녀에게 권하는 모양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문득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 조우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데 갑자기 어떤 경악과도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시겠소,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당신 맘대로 어서 결정하시오"하고 상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 7시경에 이리 오시오. 그쪽 사람들도 올 테니까."
"내일요?" 리자베타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듯이 말꼬리를 끌면서 말했다.
"당신은 알료나 이바노브나한테 꼭 쥐여사는 모양이야!"하고 활달한 장사꾼 마누라가 잰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꼭 조그만 어린애 같다니까. 언니라고 해도 친언니가 아니라 의붓언니면서, 그렇게까지 쥐여살 게 뭐람."
"그렇지만 이번 일은 알료나 이바노브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요"하고 남편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그렇게 하길 권하겠소, 그러니 언니한텐 아무 말 말고 오시오. 아무튼 잇속이 있는 일이니까. 언니도 나중엔 이해해줄 거요."
"그럼 와볼까요?"
"7시예요, 내일. 그쪽에서도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해요."
"사모바르(러시아의 주전자)라도 준비를 해둘게요"마누라가 덧붙였다.
"좋아요, 올게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그래도 리자베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때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가게 앞을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나중 말은 잘 뜨지 못했다. 그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그머니 눈에 띄지 않게 지나쳤다. 그의 처음 놀라움은 차차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는 마치 등골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우연히, 정말로 뜻하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내일 저녁 정각 7시에 노파의 유일한 동거자인 동생 리자베타가 집에 없다는 것을, 따라서 노파는 저녁 7시 정각에는 반드시 혼자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의 하숙까지는 불과 몇 걸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사형선고라도 받은 사람 같은 걸음걸이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또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자기에게는 이미 의지의 자유도, 의지 자체도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이 갑자기 최후의 결정을 보았음을 온몸으로 느꼈을 뿐이다.
물론 그가 이런 계획을 안고 앞으로 몇년이고 호기를 기다린다 해도, 지금 확실한 계획 성취의 첫걸음을 기대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일 그 시각에 범행의 대상이 될 노파가 정말로 혼자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바로 전날에 더없이 정확하게, 어떤 위험한 질문이나 탐색 없이 알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훗날 라스콜니코프는 상인 부부가 리자베타를 자기 집에 초대한 이유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고장에서 이사 와서 살다가 살림이 옹색해진 어떤 가정이 가구와 옷가지와 그 밖의 모든 여자용 소지품을 팔게 되었는데, 시장에 내다 팔면 손해이기 때문에 그것을 팔아줄 여자 상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리자베타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구전을 받고 일을 처리해주곤 했는데, 무척 정직하여 언제나 최대한의 값을 불렀고, 또 한 번 값을 불러놓으면 조금도 깍지 않아서 단골이 많았다. 그녀는 대체로 말수가 적은 데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겁이 많고 온순한 여자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최근 들어 미신적인 경향이 짙어져 있었다. 그 흔적은 나중에까지 오래도록 남아서 거의 지워버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사건 전체에 관해서도 그는 그 후 언제나 일종의 불가사의함과 신비성 같은 것을 느끼고, 뭔가 특별한 힘과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졌다. 바로 지난 겨울에 친구인 대학생 포코료프가 하리코프로 떠날 때 무슨 얘기 끝에 혹시 전당 잡힐 일이라도 생기면 찾아가 보라고 알료나 이바노브나 노파의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때는 가정교사 자리가 있어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기에 그는 오랫동안 노파한테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달 반쯤 전에 그 주소가 생각났다. 그에게는 전당 잡힐 만한 물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낡은 은시계고, 또 하나는 누이동생이 작별할 때 기념으로 준 붉은 빛깔 보석이 세 개 박힌 조그만 금반지였다. 그는 반지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노파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노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는데도 첫눈에 벌써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다. 그는 지폐 두 장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싸구려 음식점에 들렀다. 그는 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기괴한 상념이, 마치 달걀 껍데기를 깨뜨리는 병아리처럼 그의 머릿속을 콕콕 찌르며 금세 그를 사로잡아버렸다.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은 탁자에는 그가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대학생과 젊은 장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당구를 치고 나서 차를 마시는 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대학생이 장교에게 14등관의 미망인인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 얘기를 하고 그 주소를 가르쳐주는 소리를 들었다. 벌써 그것만으로도 라스콜니코프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거기서 나오는 길인데 여기서도 그 노파의 얘기를 듣다니. 물론 그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몹시 이상한 인상이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고 있는 터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도우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학생은 갑자기 자기 친구에게 알뇨나 이바노브나에 관한 여러 가지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굉장한 노파야"하고 그는 말했다. "그 노파한테 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돈을 얻을 수 있거든. 유대인 못지않은 부자야. 한 번에 5천 루블도 빌 수 있는데 1루블짜리 물건도 싫다지 않거든. 우리 친구들도 많이 신세 지고 있다네. 지독한 노파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대학생은 노파가 얼마나 심술궂고 변덕스러운가를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라도 기한이 지나면 전당 잡은 물건을 처분해버리고, 돈은 그 물건 값어치의 4분의 1밖에 빌려주지 않으며, 이자는 한 달에 5부에서 7부까지 받는다고 했다. 대학생은 한참 지껄인 끝에, 노파에게는 리자베타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 작달막하고 추악한 노파는 늘 동생을 때리곤해서 적어도 다섯 자 여섯 치나 되는 몸집 큰 리자베타를 마치 조그만 어린애 다루듯 완전히 노예 취급을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것 역시 드문 현상이라고나 할지!"
대학생은 이렇게 외치고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다음 그들은 리자베타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에 관해서 대학생은 어딘지 만족스런 어조로 얘기하면서 시종 싱글벙글 웃었다. 장교도 자못 흥미를 느낀 듯이 귀를 기울이다가, 그 리자베타에게 속옷 수선을 시키자 자기한테 한번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즉석에서 이해했다. 리자베타는 노파의 친동생이 아니고 배다른 동생인데, 나이는 이미 서른다섯이었다. 그녀는 언니를 위해 밤낮없이 일을 했는데, 집에서는 부엌일과 빨래를 도맡을 뿐만 아니라 부업으로 삯바느질도 하고 마룻바닥을 닦아주는 삯일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죄다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의 승낙 없이는 어떠한 주문이나 일거리도 결코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노파는 이미 유언장을 써놓았는데, 거기에 따르면 가재도구나 의자 따위 말고는 리자베타에게 주지 않기로 되어 있으며, 리자베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은 전부 N현의 어느 수도원에 사후의 영구공양을 위해 기부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리자베타는 관리의 딸이 아니라 장사꾼의 딸이었다. 얼굴도 몸집도 지지리 못생긴 여자로 키만 크고, 길고 굽은 듯한 다리에 늘 닳아빠진 산양 가죽 구두를 신었는데, 그래도 옷차림만은 언제나 깨끗했다. 그러나 대학생이 놀라움을 나타내며 히죽거리는 원인은 리자베타가 늘 애를 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넨 그 여자가 굉장한 추녀라고 하지 않았나 말야?" 하고 장교가 한마디 했다.
"그렇지, 살결이 거무튀튀한 게 꼭 가장을 한 병정 같은 얼굴이지만, 아주 추녀는 아니야. 그 여자는 무척 선량한 얼굴과 눈을 가지고 있어. 보통 선량한 정도가 아니지. 그 증거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좋아한단 말이야. 조용하고, 얌전하고, 온순하고, 유순해서 무슨 말이든 고분고분 잘 듣는 여자지. 게다가 그 웃는 모습이 또 멋지거든."
"그럼 자네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그래?"하고 장교는 웃었다.
"색다른 맛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나는 그 저주받을 노파를 죽이고 돈을 죄다 빼앗는다 해도 절대 양심의 가책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대학생은 열을 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장교는 또다시 껄껄 웃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건 또 무슨 기괴한 일이냐!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한 가지 진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네." 대학생은 더욱더 열을 올렸다. "내가 지금 한 말은 물론 농담이야. 그러나 알겠나, 한편에는 무지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심술궂고 병든 노파가 있어.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로운, 자기 자신도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더구나 내일이라도 혼자 죽어갈 노파가 있단 말이야. 알겠나? 알아듣겠나?"
"그래, 알겠어." 열띤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장교는 대답했다.
"자, 그다음 말을 들어봐. 다른 한편에는 뒷받침이 없어서 무참히 쓰러져가는 젊고 싱싱한 힘이 있어. 그것도 도처에 수없이 많단 말이야! 수도원에 기부하기로 한 그 노파의 돈만 있다면, 건설하고 복구할 수 있는 몇백 몇천 가지의 훌륭한 계획과 사업이 있단 말이야! 그것으로 몇백 몇천 생명이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수도 있고, 또 몇십 가정이 빈곤, 부패, 파멸, 타락, 성병환자 수용소 등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을거야.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그 노파의 돈으로 가능하단 말이야.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는 거야. 그러나 이후에 그 돈을 가지고 전 인류에 대한 봉사, 공공사업에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친다는 조건하에서지.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조그만 범죄가 몇천의 좋은 일로 보상될 수는 없을까? 단 한 생명으로 몇 천 생명이 부패와 타락에서 구제되는 거야. 하나의 죽음이 백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야. 이건 간단한 산수 문제가 아니냐 말야! 게다가 그 무지하고 간악한 폐병쟁이 노파 하나의 목숨이 사회 전체의 묵ㅔ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나 바퀴의 목숨과 다를 게 뭐냐 말야. 아니, 그만한 값어치조차 없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남의 생명을 뜯어 먹고 사는 거야. 요전에도 홧김에 리자베타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하마터면 잘릴 뻔 했지!"
"물론 그런 건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하고 장교는 말했다. "그러나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야."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은 자연을 수정하면서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잖나 말야. 그렇지 않다면 영영 편견 속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고서는 위대한 인물이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할 거야. 사람은 흔히 '의무'니 '양심'이니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의무나 양심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잠깐, 자네한테 또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겠네. 들어봐!"
"아니, 기다려, 내가 먼저 자네한테 문제를 내야겠어 들어보게!"
"좋아!"
"자네는 지금 열변을 토했는데, 어떤가, 자네는 자기 손으로 노파를 죽일 수 있겠나?"
"물론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그저 정의를 위해서 말하는 거야...그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거든......"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자네가 스스로 결행하지 않는 이상 정의고 뭐고 있을 수 없어! 자, 가서 게임이나 다시 하세!"
라스콜니코프는 극도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이런 말은 그 형식이나 제목이 다르긴 하지만, 그도 여러 번 들어본 적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해빠진 청년들의 의논이며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떠오른 바로 이때, 왜 하필이면 여기서 그 노파의 얘기를 듣게 되었을까? ....이 우연의 일치가 그에게는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싸구려 음식점에서의 대화가 장차 사건 발전에 비상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마치 거기에 일종의 숙명, 일종의 계시라도 있었던 것처럼....
센나야 광장에서 돌아오자 그는 소파에 몸을 던진 채 한 시간 동안이나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날이 어두워졌다. 초도 없었거니와 불을 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후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아까와 같은 열과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쁘기까지 했다. 이윽고 무서운 납덩이같은 졸음이 엄습해왔다.
그는 여느 때와는 달리 꿈도 꾸지 않고 오랫동안 깊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10시에 그의 방으로 들어온 나스타시야가 간신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차와 빵을 가지고 왔으나, 차는 역시 재탕이었고 찻잔 역시 그녀의 것이었다.
"잘도 주무시네!" 그녀는 화가 난다는 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밤낮 잠만 자고 있으니!"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쿡쿡 쑤셨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좁은 방에서 빙그르 몸을 돌렸으나 또다시 소파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또 주무시는 거예요?" 하고 나스타시약는 외쳤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라도 마시지 그래요?"
"이따가."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나스타시야는 잠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정말 병이 났나 보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녀는 2시에 다시 수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차도 그대로였다. 나스타시야는 화가 치밀어 그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왜 잠만 자는 거죠?" 밉살스러운 듯이 그를 흘겨보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는 일어나 앉았으나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방바닥만 바라다보았다.
"어디 편찮으셔요?" 하고 나스타시야는 물었으나 이번에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밖에라도 좀 나가보면 어때요"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좋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뭐 좀 드셔야죠?"
"이따가." 그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나가줘!"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대로 서서 딱한 듯이 그를 보다가 나가버렸다.
몇 분 후 그는 눈을 들어 오랫동안 차와 수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빵을 집고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욕이 없어서 마지못해 서너 숟갈을 기계적으로 먹었다. 두통은 조금 가셨다. 식사를 마치자 그는 다시 소파 위에 누웠으나, 이제는 잘 수도 없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쉴 새 없이 환상이 어른거렸다. 모두가 이상한 환상이었다. 제일 많이 본 것은 어딘지 먼 아프리카나 이집트의 오아시스 같은 곳에 가 있는 환상이었다. 대상이 쉬고 있고, 낙타들이 조용히 엎드려 있다. 주위에는 무성한 야자수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있다. 모두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는 옆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엎드려 물만 마시고 있다.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다. 그리고 멋진 코발트 빛깔의 차가운 물이 갖가지 돌과 금가루를 뿌린 듯한 모래 위를 흐르고 있다......
갑자기 시계 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고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들어 찿문을 보면서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완전히 정신이 들어, 마치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듯이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께로 가서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아래층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은 무섭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층계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그는 어제부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게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시계는 벌써 6시를 쳤는지도 모른다....그러자 갑자기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 어떤 어수선한 초조감이 졸음과 자기 망각을 대신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준비라고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사를 잘 생각하여 무엇 하나 잊은 것이 없도록 모든 힘을 긴장시켰다.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고동쳐서 숨을 쉬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우선 올가미를 만들어 그것을 외투 속에 꿰매 달아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1분이면 될 일이다. 그는 베개 밑에 손을 넣어 거기 처박은 속옷들 중에서 몹시 해지고 세탁도 하지 않은 낡은 셔츠를 하나 꺼냈다. 그 누더기에서 한 치 폭에 길이 여덟 치쯤 되는 헝겊을 찢어내어 그것을 두 겹으로 해서, 두꺼운 무명으로 만든 튼튼하고 헐렁한 여름 외투(그가 가진 단 하나의 코트다)를 벗어서 안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 그 헝겊 양쪽 끝을 꿰매기 시작했다. 꿰매면서 그의 손은 덜덜 떨렸으나, 그는 스스로를 극복해냈다. 그래서 다시 외투를 입었을 때는 겉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바늘과 실은 훨씬 전부터 준비해 종이에 싼 채 탁자 서랍 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올가미로 말하면 매우 교묘한 그의 착상으로, 도끼를 숨기기 위해서 고안해냈다. 도끼를 손에 들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거니와, 외투 속에 감추려 해도 역시 겉에서 손으로 눌러야만 했다. 그러면 남의 눈에 띄기가 쉽다. 그런데 지금은 끈으로 이렇게 올가미를 달았으니, 거기에 도끼를 걸면 가는 길에 도끼는 안쪽 겨드랑이 밑에 안전하게 꽂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바깥 주머니에 넣으면 흔들리지 않게 도낏자루를 누를 수도 있다. 게다가 외투가 마치 부대처럼 헐렁했기 때문에, 호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누르고 있어도 밖에는 알려질 리가 없었다. 이 올가미 역시 이미 두 주일 전에 그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이 일을 끝내자 그는 터키식 소파와 마룻바닥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왼쪽 구석을 더듬어서 전부터 준비해 숨겨두었던 저당물을 꺼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저당물도 아무것도 아니고, 은제 담뱃갑만 한 크기와 두께로 매끄럽게 깎은 널빤지 조각에 불과했다. 그 널빤지 조각은 그가 산책하는 길에 이웃 골목의 어느 뒤뜰 한 공장 딴채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뒤에 역시나 언젠가 길에서 발견한 매끈매끈하고 얇은 철판을, 아마도 어떤 물건의 한 조각인 철판을 그 널빤지에 붙였다. 철판이 널빤지보다 약간 작았으나 그는 그것을 실로 열십자 모양을 내어 묶었다. 그리고 정성껏 깨끗한 흰 종이로 보기 좋게 싼 다음, 풀기 힘들게 다시 그 위를 실로 묶어놓았다. 그것은 노파가 매듭을 풀기 시작했을 때 잠시 그녀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게 하고, 그사이에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철판 조각은 노파가 처음 한순간만이라도 '물건'이 나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때가 오기까지 소파 밑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가 저당물을 꺼냈을 때, 갑자기 뒤뜰 어디선지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렀다.
"6시는 벌써 지났어!"
"벌써! 이거 큰일났군!"
그는 문 옆으로 달려가 귀를 기울여보고는, 모자를 움켜쥐고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여가며 열세 단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일, 부엌에서 도끼를 훔쳐내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훨씬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접었다 폈다 하는 원예용 나이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나이프에는, 특히 자기 힘에는 기대를 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도끼를 쓰기로 낙착한 셈이었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이 문제에서 그가 취한 모든 최종 결심에 관한 한 가지 특수성을 지적해두겠다. 그의 결심에는 이상한 특질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의 계획이 단호한 성질을 띠면 띨수록 그의 눈에는 그것이 점점 추악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토록 괴로운 내적 투쟁을 계속해왔는데도 그는 그동안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 계획의 실현성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설사 언젠가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점까지 분석되고 최종적인 결정을 본 다음 더는 아무런 의혹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되어서도 그는 전체 계획을 불합리하고 추악하고 불가능한 일이라 해서 단념해버리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해결이 안 된 점과 의혹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도끼를 어디서 구하느냐 따위는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다. 이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스타시야는 곧잘 집을 비우고, 특히 저녁에는 이웃집이나 가게에 잘 갔다. 그리고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것만으로도 곧잘 그녀와 싸우곤 했다. 그러므로 때가 오면 살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 도끼를 가지고 나갔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이미 만사가 끝났을 때) 다시 부엌에 갖다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한 시간쯤 지나 그가 도끼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마침 나스타시야가 돌아와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모르는체하고 지나쳤다가 다시 그녀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약 그사이에 도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고 떠들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혐의를 받게 된다. 적어도 혐의를 받게 될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거니와, 또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점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질구레한 점은 자신이 만사에 확신을 얻을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러나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로 실현될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를테면 그는 어느 때건 자기가 생각하기를 끝내고 일어나서, 태연히 그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얼마 전의 시험(즉 철저히 현장을 조사할 작정으로 방문했던 일)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한번 시험해보았을 뿐이지 실제 행동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한번 가서 시험해봐야지. 공상만 해서 뭘 한담!'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곧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런 일을 한 자기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라 침을 탁 뱉고 그냥 도망쳐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튼 문제의 도덕적 해결이라는 의미에서는 모든 분석이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옳고 그름 판단력은 면도날같이 날카로워서, 이미 자기 내부의 의식적인 반박론은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후 단계에 접어들면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를 강제로 그쪽으로 끌고 가기라도 하는 듯이 노예 같은 비굴한 태도로 모든 것에 끈덕지게 반론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찾아와서 만사를 금방 해결해버리고 만 최후의 날은,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그에게 작용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맹목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흡사 옷자락이 기계 바퀴에 걸려서 그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과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하긴 이미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왜 거의 모든 범죄는 그처럼 쉽사리 발견되고 그 정체를 폭로 당하고 마는 걸까? 그리고 또 왜 거의 모든 범죄의 발자취는 그토록 명료하게 남는 걸까? 그는 차츰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범죄를 은폐하는 물질적 불가능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범죄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범죄자 자신은 거의 누구나 예외 없이 범죄를 저지르려는 순간 의지와 이성의 상실 상태에 빠질 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경솔에 사로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이성과 세심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이 이성의 혼미와 의지의 상실은 병마와도 같이 사람을 엄습하여 차차 강대해져서 범죄 수행 직전에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대로의 상태가 범죄 순간까지, 사람에 따라서는 범죄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윽고 그 상태가 지나버리고 만다. 그러나 병이 범죄를 낳는 것인지, 아니면 범죄 그 자체에 그 비슷한 특질이 있어서 늘 병과 유사한 무엇을 동반하는 것인지...하는 의문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아직 해결할 힘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그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이러한 병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계획을 수행하는 동안 이성과 의지는 조금도 흐려짐 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계획은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가 이런 최후 결심에 도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나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으니까....다만 한 가지 덧붙여둘 것은, 이 일에 따르는 실제의 물질적 곤란은 그의 머릿속에서 대체로 2차적인 역할밖에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만한 곤란쯤은 자기 의지와 이성을 완전히 보유하고만 있으면, 일의 모든 데이터를 세밀하게 연구해가는 동안 자연히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일은 좀처럼 시작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최후 결심을 여전히 믿지 않고 있었으므로 막상 때가 이르자 모든 것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어떤 사소한 사건이 층계를 다 내려가기도 전에 그를 당황하게 했다. 여느 때처럼 활짝 열려 있는 부엌문까지 오자 그는 슬쩍 곁눈질을 해서 나스타시야는 없더라도 혹시 주인아주머니가 거기 있지 않은지,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도끼를 가지러 들어갈 때 어쩌다 그녀가 내다보지 않을지,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잘 닫혀 있는지 어떤지를 미리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스타시야는 부엌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빨래를 광주리에서 꺼내어 줄에 너는 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를 보자 그녀는 일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그가 지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외면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지나쳤다. 모든 것은 끝났다. 도끼가 없으니! 그가 받은 충격은 무엇운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보고 그런 계산을 했던 것일까?' 출입구 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저 여가자 지금쯤 틀림없이 집에 없으리라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을까?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렇게 결정한 것일까?' 그는 호되게 한 대 얻어맞고 모욕까지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홧김에 자기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우둔한 야수 같은 분노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문간에 멈춰 섰다. 산책이라도 하듯이 보이기 위해 거리로 나가고도 싶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방으로 되돌아가기는 더욱 싫었다. '모처럼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마는구나!' 문간에서 그는 역시 열려 있는 어두운 문지기 방을 마주 보고 서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두 걸음쯤 떨어진 문지기 방 걸상 밑에 무엇인지 번쩍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문지기 방으로 다가가서 나직한 소리로 문지기를 불러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집에 없구나. 그러나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어딘가 이 뜰 근처에 있겠지.' 그는 얼른 도끼에 덤벼들었다(그것은 도끼였다). 장작개비 두 개 사이에 뒹굴고 있는 도끼를 걸상 밑에서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것을 외투의 올가미에 꽂고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그곳을 나왔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악마의 짓이야!' 하고 그는 기묘한 웃음을 띠며 생각했다. 이 우연은 그에게 크나큰 원기를 돋우어주었다.
그는 어떤 혐의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침착한 걸음걸이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별로 통행인을 보지 않았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남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갑자기 모자 생각이 났다. '아차! 사흘 전 돈이 있을 때 학생모로 바꿔두는 걸 잊었구나!' 저주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우연히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거기 벽시계는 벌써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만 길을 우회해 반대쪽에서 그 집으로 접근해야 한다......
전에, 이런 것을 아직 상상만 하던 그때는 정작 닥치면 몹시 무서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아니,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이 순간의 그는 도리어 아무 관계도 없는 딴생각에 마음을 쏟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편적인 상념들뿐이었다. 유스포프공원 옆을 지날 때, 그는 모든 광장마다 높다란 분수를 설치하면 얼마나 공기를 상쾌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거의 몰두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레트니 사드(여름공원)을 마르조보 폴레 연병장까지 확장해서 미하일롭스키 왕실 유원지와 합친다면, 거리를 위해서도 매우 유익한 시설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공상을 펼쳐갔다. 그때 문득 모든 대도시에서 인간은 단지 필요에 쫓겨서만 아니라, 특히 그 어떤 이유로 공원도 없고 분수도 없고, 더러움과 악취와 그 밖의 온갖 추악한 일에 가득 찬 부분에 살거나 자리를 잡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센나야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 자신의 산책 코스가 생각나서, 그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게 좋겠다!'
'아마 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도 틀림없이 이렇게 도중에 만나는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러한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번갯불과도 같이 그저 번뜩였을 뿐이다. 그는 서둘러 이 상념을 지워버렸다......그러나 벌써 목적지는 다가왔다. 벌써 그 집이다, 저기 문이 보인다. 어디선가 갑자기 시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벌써 7시 반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아마 시계가 빠른 게지!'
다행히 이곳 문도 역시 무사히 통과했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커다란 건초 마차가 먼저 출입문에 닿아 있어서,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가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차가 문에서 뜰로 들어가자, 그는 재빨리 오른쪽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차 저쪽에서 몇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었고 누구 하나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이 커다란 사각형의 안뜰을 향한 많은 창문은 이때 모두 열려 있었지만, 그는 머리를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노파의 방으로 통하는 층계는 출입문에서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그는 벌써 층계 위에 와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른 다음, 잠깐 도끼를 만져보고는 다시 한번 위치를 바로잡은 후 조심스레 끊임없이 귀 기울이며 그는 살금살금 층계를 올라갔다. 이때 층계는 텅 비어 있었고, 문이란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2층에 빈방이 하나 있어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칠장이 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고는 다시 올라갔다. '물론 여기 저놈들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 두 층이나 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벌써 4층이었다. 저기 문이 보인다. 맞은편 아파트 역시 빈방이다. 3층에도 노파가 사는 방 바로 밑 아파트는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문에 붙었던 명함이 떼어져 있었으니까. 이사를 간 게지!...그는 숨이 막혔다. '그냥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노파의 방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번에는 다시 층계 아래쪽에 귀 기울였다. 오랫동안 주의 깊게 귀 기울였다......그것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신경을 도사리고 자기 몸을 한 번 만져보았다. '너무 흥분하지나 않았는지? 노파는 의심이 많으니까...좀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심장 고동이 멎을 때까지....'
그러나 심장 고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도리어 반대로,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심하게 고동칠 뿐이었다. ....그는 더 참지를 못하고 천천히 손을 뻗쳐 초인종을 울렸다. 30초쯤 지나서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대답이 없다. 마구 울려봐도 소용이 없을 테고, 게다가 지금의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다. 노파는 물론 집에 있겠지만, 그녀는 의심이 많은 데다 지금은 혼자뿐이다. 그도 그녀의 버릇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붙였다. 그러자 그의 감각이 그토록 예민해져 있었는지(그렇게 상상하기는 대체로 곤란한 일이지만), 아니면 실제로 잘 들렸는지 아무튼 그는 손잡이를 조심스레 쥐는 소리와 문짝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바로 문 앞에 서서, 그가 이쪽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숨을 죽이고 엿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 문에다 귀를 대고 그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일부러 몸을 움직여 자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무언가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윽고 그는 세 번째로 초인종을 울렸으나, 그것은 조금도 초조한 빛이 보이지 않는 침착하고도 조용한 태도였다. 훗날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 순간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고력이 때때로 순간적으로 흐려져 자신의 육체조차 느낄 수 없었던 그때 도대체 어디서 그런 교활한 지혜가 생겼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잠시 후 방문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은 요전과 마찬가지로 빠끔히 열리고, 또다시 어둠 속에서 의심에 찬 두 눈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이때 라스콜니코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그는 자기와 노파 두 사람뿐이라는 데 노파가 공포를 느끼는 것이 두려웠고, 또한 자기 모습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다는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노파가 다시 문을 닫아버리지 못하도록 문짝을 앞으로 홱 잡아당겼다. 노파는 그것을 보고도 방문을 도로 닫으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손잡이를 쥔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그는 문과 함께 노파를 거의 층계 어귀까지 끌어낼 뻔했다. 그래도 노파가 문간에서 앞을 막고 서서 그를 들여놓지 않으려 하자, 그는 노파를 밀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놀라 비켜서면서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안 나오는 듯 눈만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알료나 이바노브나." 그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하려 했으나, 음성은 자꾸만 끊어지면서 떨려 나왔다. "당신한테...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자, 저쪽으로 가시죠....밝은 곳으로......" 이렇게 말한 그는 노파를 내버려 둔 채 허락도 없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뒤따라 달려들어 왔다. 그녀의 혀가 겨우 풀리기 시작했다.
"이봐요! 대체 무슨 용건이오?....당신은 누구요? 용건이 뭐요?"
"왜 그러세요, 알료나 이바노브나...다 아시면서... 라스콜니코프입니다....일전에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노파 앞에 저당물을 내놓았다.
노파는 물건을 바라보려다가, 곧 다시 이 불청객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고도 심술궂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1분쯤 지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무언가 조소에 가까운 빛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가 몹시 당황하고 있음을 느끼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렇게 그녀가 30초쯤 더 아무 말 없이 그냥 노려보았다면 그는 노파 앞에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왜 그렇게 보시죠?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하고 그도 역시 퉁명스런 어조로 불쑥 뇌까렸다. "마음에 들거든 잡아주시고, 안 들거든...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바쁘니까요."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오고 말았다.
노파는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손님의 분명한 어조가 겨우 그녀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젊은이, 너무 뜻밖이라서...대체 이건 뭐요?" 물건을 보면서 그녀는 물었다.
"은으로 만든 담뱃갑이에요, 요전에 말해두었었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죠? 저런, 손을 다 떠는군! 무엇에 놀라기라도 했나요?"
"열이 좀 있어서요." 그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별수 있습니까,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먹을 것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는 간신히 입을 놀려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고는 또다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대답은 그럴싸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노파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대체 이게 뭐요?" 노파는 다시 한번 라스콜니코프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는 손으로 무게를 달아보면서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담뱃갑이죠...은으로 만든 ...보면 아실 겁니다."
"글쎄, 아무래도 은 같지가 않은데...단단히도 묶었군."
끈을 풀려고 애쓰면서 노파는 밝은 창문쪽으로 몸을 돌렸다(이렇게 무더운데도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그를 내버려 둔 채 뒤로 돌아섰다. 그는 외투 단추를 끄르고 도끼를 올가미에서 벗겼으나, 아직 완전히 빼지는 않고 외투 속에서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양손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마비되고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도끼를 꺼내다가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뭣 하러 이렇게 꽁꽁 묶었을까!"하고 노파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하며 그에게로 조금 몸을 움직였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도끼를 빼 들자 몽롱한 의식 속에서 두 손으로 도끼를 추켜들었다. 그리고 거의 힘도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노파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이때는 힘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으나, 일단 도끼를 내리치자 금방 그의 몸속에 힘이 솟구쳤다.
노파는 언제나처럼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흰 머리털이 드문드문 섞인 숱 적은 금발 머리칼은 여느 때처럼 번지르르 기름을 발라서 쥐 꼬리처럼 가늘게 땋았는데, 그것이 뿔빛 조각에 감겨 뒤통수에 삐죽 꽂혀 있었다. 도끼는 바로 정수리에 맞았다. 그녀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내질렀으나, 극히 약한 소리였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로 가져가긴 했지만 털썩 그대로 마룻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 손엔 아직도 '저당물'을 쥐고 있었다. 그때 그는 다시 한두 번 도끼뿔로 정수리를 힘껏 내리쳤다. 피는 컵에서 엎질러진 듯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노파의 몸은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 노파가 쓰러지는 것을 본 다음 곧 노파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벌써 죽어 있었다. 눈은 금방 튀어나올 듯이 부릅뜨고, 이마와 얼굴 전체는 주름투성이가 되어 경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도끼를 시체 옆 마룻바닥에 놓고, 흐르는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얼른 그녀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전번에 열쇠를 꺼낸 바로 그 오른쪽 호주머니였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되찾고 더는 혼미나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래도 손만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훗날 그는 이때까지 자기가 무척 주의 깊고 세심하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고심했던 것을 상기했다....곧 열쇠를 꺼냈다. 요전처럼 모두 둥근 쇠고리에 꿰어 있었다. 그는 열쇠를 들고 다짜고짜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방은 몹시 조그만 방으로, 큼직한 성상함이 있고 벽 쪽에는 비단 헝겊 조각을 모아 만든 솜이불이 덮인 크고 깨끗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또 다른 벽 앞에는 장롱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열쇠를 장롱에 끼려다가 열쇠꾸러미의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 속에서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또다시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었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하여 문득 또 한 가지 불안한 상념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을 때 그는 스스로 냉소하듯 히죽 웃기까지 했다. 다름 아니라 어쩌면 노파는 아직 살아 있어서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열쇠도 장롱도 다 내버려 두고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도끼를 집어 들고 다시 한번 노파 위에 추켜들었으나 내리치지는 않았다. 노파가 죽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까이 허리를 굽히고 더 자세히 노파를 살펴보니 두개골이 부서져 옆으로 조금 처져 있는 것까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려다가 얼른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사태는 명백했다. 그사이에 피는 웅덩이같이 괴어 있었다. 그는 문득 노파의 목에 끈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잡아당겨 보았으나 단단해서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가슴팍에서 그냥 꺼내려 했으나 무엇인가 방해가 되어 걸렸다. 그는 초조한 나머지 다시 도끼를 들고, 끈을 시체 위에 놓은 채로 끊으려 했으나 차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거기서 2분쯤 안달을 하며 손과 도끼를 피투성이로 만든 끝에 겨우 시체에 도끼를 대지 않고 끈을 잘라냈다. 과연 그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갑이었다. 끝에는 나무와 동으로 만든 십자가가 두 개, 그 밖에도 에나멜 성상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기름때가 묻은 그리 크지 않은 양피 지갑이 달려 있었다. 지갑은 터질 듯이 불러 있었다. 라스콜리코프는 조사해보지도 않고 그것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십자가는 노파의 가슴팍에 내던지고는, 도끼를 들고 다시 침실로 달려갔다.
그는 몹시 서둘렀다. 열쇠를 잡고 다시 옷장을 열려고 했으나, 왜 그런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열쇠가 구멍에 들어맞지 않았다. 손이 그다지 심하게 떨리는 것도 아닌데 자꾸 틀리기만 했다. 예를 들어 열쇠가 틀려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같은 것을 집어넣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생각이 났다. 다른 작은 열쇠에 섞여 흔들거리는 톱니 모양의 큼직한 열쇠는 분명히 장롱 열쇠가 아니라(이것은 전에도 그의 머리에 떠올랐던 일이지만) 아마도 트렁크 열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렁크 속에 전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장롱을 내버려 두고 곧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늙은이들은 대개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어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과연 거기에는 길이 1아르신(약 70센티미터)이 넘는, 불룩한 뚜껑이 달리고 붉은 양피가 씌워져 강철못이 가득 박혀 있는 제법 훌륭한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톱니 모양의 열쇠가 딱 들어맞더니 뚜껑이 열렸다. 위에는 하얀 천 밑에 빨간 안감을 댄 토끼 가죽 외투가 들어 있었다. 그 밑에는 비단옷, 또 그 밑에는 숄, 그리고 밑바닥에는 너저분한 옷들뿐인 것 같았다. 그는 우선 피투성이 손을 빨간 모피 외투에 씻으려고 했다. '붉구나, 붉은 데다 씻으면 피도 눈에 띌 리 없겠지'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갑자기 제정신이 들었다. '아아, 나는 지금 미치지 않았을까?' 그는 공포에 질린 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너저분한 옷가지를 조금 들추자 느닷없이 모피 외투에서 금시계가 떨어져 나왔다. 그는 트렁크 안을 들추기 시작했다. 과연 옷가지 사이사이에는 금붙이가 들어 있었다. 아마 기한이 지났거나, 아직 기한이 안 된 저당물일 것이다. 팔찌, 목걸이, 귀고리, 핀 등이 어떤 것은 주머니에 어떤 것은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꼼꼼하고 면밀하게 종이를 두 겹으로 해서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는 속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포장지를 풀지도 않고 일각도 지체함 없이 그것들을 바지와 외투 호주머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이 집어넣을 여유는 없었다....
갑자기 노파가 쓰러져 있는 방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멈추고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주위는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별안간 가느다란 외침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끙끙 낮은 소리로 신음을 하고는 잠잠해진 것 같은 인기척이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다시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1, 2분 계속되었다. 그는 트렁크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을 죽이고 동태를 살피다가, 벌떡 일어나며 도끼를 집어 들고는 침실에서 뛰쳐나갔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보따리를 손에 든 리자베타가 온몸이 마비된 듯 우뚝 서서 피살된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서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달려 나온 그를 보자 그녀는 나뭇잎처럼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고, 경련이 얼굴 가득히 스쳐갔다. 그녀는 한 손을 조금 들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역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똑바로 그를 응시하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한쪽 구석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려 해도 공기가 부족하기라도 한 듯 여전히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는 도끼를 추켜들고 덤벼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가련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조그만 어린애가 몹시 놀라서 무서운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금방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것과 똑같은 꼴이었다. 이 불행한 리자베타는 너무도 순박하여 밤낮 학대를 받고 아주 기가 죽어버린 여자인지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도끼는 이미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졌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오른손을 가까스로 쳐들기는 했으나, 그것도 얼굴보다는 훨씬 아래쪽이었다. 그러고는 상대방을 밀어젖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천천히 그 손을 그에게로 뻗쳤다. 도끼날은 바로 두개골을 내리쳐서 이마 위를 완전히, 거의 관자놀이께까지 깨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만 얼떨결에 그녀의 보따리를 낚아챘으나, 다시 그것을 내동댕이치고는 문간방으로 뛰어갔다.
공포는 점점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더욱이 이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살인 뒤에는 점점 더 공포가 더해갈 뿐이었다. 그는 한시바삐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이 순간 좀 더 정확하게 보고 또한 판단할 수 있었다면, 현재 상태의 곤란과 절망과 추악함과 우열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이보다 더한 갖가지 곤란을 극복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더 큰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분명 모든 것을 내던지고 곧장 자수하러 갔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걱정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포와 혐오 때문에. 더구나 혐오감은 시시각각 그의 마음속에서 성장해갈 뿐이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트렁크 옆은 고사하고 그 방에조차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종의 방심 상태라고나 할까, 명상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이 차차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잊고, 아니 그보다는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자꾸만 사소한 일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 부엌을 들여다보고 반쯤 물이 든 물통이 의자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손과 도끼를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끈적끈적했다. 그는 도끼날을 아래로 물속에 집어넣고, 창틀 위에 있는 이 빠진 접시에서 비누 조각을 집어서 물통 속에 넣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손을 씻고 나서 그는 도끼를 꺼내 우선 도끼날부터 씻고, 오랫동안, 거의 3분이나 걸려서 비누칠까지 해가며 피 묻은 도낏자루를 씻었다. 그러고는 부엌 가득히 널어놓은 빨래로 깨끗이 닦은 다음, 한참 동안이나 창가에서 주의 깊게 도끼를 조사했다.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도낏자루가 축축할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도끼를 외투 안의 올가미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어두컴컴한 부엌의 빛으로 외투와 바지와 구두를 살펴보았다. 얼른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구두에 얼룩이 져 있었다. 그는 넝마에 물을 축여 구두를 닦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로서는 잘 분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은 몰라도 남이 보면 금방 눈에 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괴롭고 암담한 상념이 그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 순간 사물을 판단할 수도 없고, 자신을 지킬 힘도 없으며,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이거 큰일 났군!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해! 그는 중얼거리며 현관 쪽으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다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으나 아무래도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이, 현관에서 층계로 통하는 바깥문이, 아까 그가 초인종을 울리고 들어온 그 문이 열린 채 손바닥이 들어갈 정도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잠그지도 않고 빗장도 지르지 않은 채 그동안 죽 열려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노파는 만일을 위해 그가 들어온 다음에 일부러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그 후에 리자베타를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녀가 어디로 들어왔는지를 생각도 안 해보다니! 설마 벽을 뚫고 들어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가 빗장을 질렀다.
'아니, 이게 아니다, 또 엉뚱한 짓을 하는구나!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해....'
그는 빗장을 빼고 문을 연 다음, 층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 멀리 아래쪽, 아마도 출입문 옆이리라, 누군가 두 사람의 높다란 목소리가 외치고, 싸우고,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자식들, 뭘 하는 걸까......'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드디어 뚝 끊어진 듯 일시에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가버린 것이다. 그는 복도로 나가볼까 했다. 그러나 이번엔 바로 아래층에서 층계로 향한 문에 요란스레 열리더니,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렇게 계속 시끄러울까!'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기다렸다. 이윽고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인기척도 없어졌다. 그가 층계에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또다시 누군가의 새로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꽤 멀리서, 아마도 맨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이때 어째선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 이것은 분명히 이곳으로, 4층ㄹ 노파의 방으로 오는 것이 틀림없다고 의심했다. 그는 후에도 이 일을 매우 똑똑히 기억했다. 어째서였을까? 그 발소리에는 뭔가 특수하고 뜻있는 울림이라도 깃들어 있었던 걸까? 그것은 무섭고 규칙적이고 느린 발소리였다. 아아, 벌써 그 사내는 1층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고 있다. 점점 발소리가 뚜렷해진다! 올라오는 사나이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3층이다....이리로 오는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기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속에서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는데, 자기는 땅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손님이 드디어 4층 층계를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로소 부르르 몸을 떨고 미끄러지듯 재빨리 방 쪽으로 들어가서 뒤로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다음 빗장을 잡고 살며시 소리 나지 않게 고리에 걸었다. 본능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마치자, 그는 숨을 죽이고 바싹 문 옆에 붙어섰다. 미지의 사나이도 벌써 문밖에 와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 마주 서 있다, 마치 얼마 전에 그와 노파가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귀를 기울이던 것처럼.
손님은 몇 번이나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임에 틀림없군.' 손에 든 도끼에 힘을 주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손님은 초인종 끈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양철 소리 같은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문득 방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몇 초간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까지 했다. 미지의 사나이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울리고 잠시 기다려보더니, 더 참지 못하고 힘껏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공포에 질려 빗장 고리 속에서 날뛰는 돌쩌귀를 바라보면서, 금방 빗장이 벗겨질 것만 같은 공포를 안고 기다렸다. 사실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만큼 세차게 잡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빗장을 누를까도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면 사나이가 눈치챌 염려가 있었다. 그는 또다시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쓰러질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이 번득였다. 그런데 이때 미지의 사나이가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고 있는 건가, 아니면 목 졸려 죽기라도 했나? 제기랄!" 하고 그는 통 속에서라도 외치는 듯한 소리로 짖어댔다. "이봐요, 알료나 이바노브나, 마귀할멈!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절세의 미인, 문을 열어요! 쳇, 제기랄, 모두 잠들었나?"
그리고 또다시 화가 난 듯이 계속해서 열 번쯤 힘껏 초인종을 울렸다. 물론 이 사나이는 이 집에서 세력이 있는 친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이때,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는 빠른 발자국 소리가 가까운 층계 위에서 들려왔다. 또 누가 온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처음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도 없습니까?" 다가온 사나이가 초인종을 울리고 있는 먼저 온 손님에게 잘 울리는 쾌활한 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코흐 씨!"
'목소리로 보아 아주 젊은 사내인가 보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자물쇠를 부숴버릴 뻔했소"하고 코흐는 대답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아시죠?"
"아니, 엊그제 함부리누스에서 당구를 칠 때 내리 세 번이나 당신을 이겼잖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두 사람 다 없나요? 이상한데. 이거 정말 놀랄 일이군요. 대체 그 할멈이 어디 갈 데가 있을까? 좀 볼일이 있는데."
"나도 볼 일이 있다오!"
"그러나 하는 수 없군요, 돌아가는 수밖에. 제기랄! 돈을 좀 꾸러 왔더니만!" 젊은 사내가 소리쳤다.
"물론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왜 시간까지 정했을까? 망할 놈의 할멈 같으니, 자기가 시간을 정해놓고선.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군. 이거 괜히 돌아가게 됐는걸. 제기랄. 밤낮 들어앉아서 다리가 아프니 뭐니 엄살을 부리더니만, 하필 지금 놀러 나가다니!"
"문지기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무엇을?"
"어딜 갔는지, 그리고 언제쯤 돌아오는지."
"흠....빌어먹을...물어볼까...그러나 그 할망구 어디 갔을 리가 없는데...."
그는 다시 한번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제기랄, 할 수 없군, 가보지!"
"잠깐만!" 하고 갑자기 젊은 사내가 소리쳤다. "보세요, 잡아당기면 문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문은 잠긴 게 아니라 빗장이나 고리만 걸려 있는 거예요! 들어보세요, 빗장 소리가 달그락거리죠?"
"그래서?"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둘 중 한 사람은 집에 있어요. 만약 둘 다 나갔다면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지, 안에서 빗장을 지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때요, 자, 들어보세요, 빗장 소리가 달그락거리지요? 안에서 빗장을 질렀다면 집에 사람이 있어야죠, 그렇잖아요? 그러고 보면 집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열어주지 않는 거예요!"
"음, 과연 그렇군!" 코흐는 놀란 듯이 말했다. "그럼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맹렬히 문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잠깐만!" 젊은 사내는 다시 외쳤다. "잡아당기지 마세요, 여기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습니다...당신이 초인종을 울리고 문을 잡아당기고 햇는데도 열리지 않으니, 두 사람 다 기절해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우리 이렇게 합시다! 문지기를 불러봅시다. 그 사람을 시켜 깨우게 하죠."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잠깐! 당신은 여기 남아 계십시오. 내가 얼른 달려가서 문지기를 불러올 테니."
"왜 남아 있으라는 거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나는 예심판사가 될 준비를 하는 중이에요! 이건 반드시 뭔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젊은 사내는 열을 올려 소리치면서 재빨리 층계를 내려갔다.
코흐는 남아서 다시 한번 조용히 초인종을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초인종은 한번 짧게 울렸다. 그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검사라도 하듯이 살며시 문의 손잡이를 움직여보았다. 문이 안에서 빗장만 질려 있는지 어떤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이 밀어보고 당겨보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씨근거리며 쭈그리고 앉아서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안에서 열쇠가 꽂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일 리는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도끼를 움켜쥔 채 서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이 들어온다면 두 사람과 싸울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며 말을 주고받을 때, 그는 대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고함을 칠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또는 그들이 문을 열기 전에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실컷 놀려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빨리 결말을 내다오!'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1분, 2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코흐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쳇, 이게 무슨 꼴이야!" 갑자기 그는 이렇게 외치며 더 참지 못하고 감시하는 일을 포기한 채 황급히 층계를 구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발소리도 사라졌다.
'아아, 어떻게 한다?'
라스콜니코프는 빗장을 빼고 문을 빠끔히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와 되도록 문을 꼭 닫고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층계를 세 단 내려갔을 때 갑자기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숨을까! 그러나 숨을 곳은 없었다. 그는 노파의 방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야, 이 새끼야! 좀 기다렷!"
이렇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아래층 방에서 뛰어나와, 달린다기보다 데굴데굴 구르듯 계단을 내려가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이 뒈져버릴 놈앗!"
이윽고 그 외침은 외마디소리로 끝나고, 마지막 소리는 밖에서 들렸다.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몇 사람의 목소리가 큰 소리로 지껄이면서 요란스럽게 층계를 올라왔다.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아까 그 젊은 사내의 목소리를 가려들을 수 있었다. '그 패거리다!'
이제는 완전히 자포자기가 되어 그는 곧장 그들 쪽을 향해 나갔다. 될 대로 되라! 불러 세우면 만사는 끝장이다.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어차피 마지막이다. 얼굴을 기억하게 될 테니까. 이미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과의 사이에는 이제 층계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의 구원이 나타났다! 몇 계단 밑 오른쪽에 열려 있는 빈방 하나가 있었다. 칠장이들이 페인트칠을 하던 2층 방인데, 마치 일부러 방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 모두 일을 마치고 나간 뒤였다. 조금 전에 떠들며 내려간 것은 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마룻바닥은 방금 칠이 끝나서, 방 한가운데 조그만 통과 페인트 솔이 든 이 빠진 접시가 놓여 있었다. 순간 그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벽 뒤에 몸을 숨겼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다. 이때 그들은 2층 어귀에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그들은 옆을 지나 4층을 향해 올라가면서 큰 소리로 지걸여댔다. 그들을 지나 보내자, 그는 발끝으로 걸어 나가 곧장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층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문가에도 역시 없었다. 그는 재빨리 때문에서 거리로 빠져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이미 노파의 방에 들어갔으리라는 것도, 바로 조금 전까지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리라는 것도, 그들이 이미 시체를 발견했으리라는 것도, 방금 그곳에 있던 범인이 어디엔가 숨었다가 그들의 옆을 빠져 도망쳤다고 상상하고 추정하기까지 단 1분도 안 걸리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위로 올라가는 동안 범인이 빈방에 숨어 있었음을 알아챘으리라는 것도...이 모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첫 모퉁이까지는 이제 100보쯤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그는 도저히 걸음을 빨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 집 문 밑에라도 숨을까, 아니면 어디 남의 집 층계 같은 데서 기다리면 어떨까? 안 된다! 그건 그렇고, 도끼는 어디다 버리는 게 어때? 마차를 잡아탈까? 아, 큰일 났구나!'
이윽고 옆 골목 어귀까지 왔다. 그는 초주검이 된 채 골목 어귀를 돌았다. 여기까지 오면 벌썬 반은 산 셈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혐의를 받을 염려도 적고, 게다가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므로 그는 모래알 같은 사람들 속으로 끼어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갖가지 괴로움이 심신의 힘을 죄다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려 목덜미가 흠뻑 젖었다. "흥, 어지간히 마셨구나!" 그가 개천가에 나왔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이미 분명한 의식이 없었다. 앞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개천가에 나왔을 때, 그는 오가는 사람이 적다는 데 놀라서 이런 곳에선 남의 눈에 띄기 쉬우니 다시 골목길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으나, 그래도 길을 돌아서 정반대 방향으로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 집 대문간을 지날 때도 그의 의식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층계를 오르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도끼 생각이 났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직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도끼를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도끼를 지금 당장 갖다 놓지 말고 나중에 언제라도 좋으니 남의 집 뒤뜰에라도 던져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사는 무사히 끝났다. 문지기 집 문은 닫히기는 했으나 잠겨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문지기가 방에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도 그는 전혀 사물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곧장 문지기 방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만약 문지기가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면, 그는 대뜸 도끼를 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지기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의자 밑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처럼 장작개비로 가려두기까지 했다. 그는 거기서 자기 방에 갈 때까지 아무도, 누구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네 방문도 닫혀 있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는 잠들지는 않았지만 망각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면,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을 것이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단편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중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었고, 또 어느 하나에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