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송건호
천지와 일월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며,
초목과 금석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고
깊은 바다와
끓는 기름 가마에 던질지라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예리한 칼과
날랜 탄환을 맞으면
작은 나는 죽을지언정
큰 나는 죽지 아니하나니,
신성하다 나여,
영원하다 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즐겨하며 노래하며
찬양함이 가하도다.
-신채호, <대아(大我)와 소아(小我)>에서
[6년간의 청춘을 항일언론에]
단재 신채호는 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이며 문호이고 언론인이기도 한 개화기의 지식인이다. 개화기의 지식인으로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방면으로 활동한 인사였지만 그는 그 투철한 역사의식과 행동으로 이 땅 현대사에 독특한 삶의 자취를 남겼다.
단재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신성우가 과거에 응시해 문과의 정원 벼슬까지 지냈으나 일찍이 벼슬을 내어놓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농사를 짓는 한편 한문 서당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신광식도 문재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떴으므로(38세) 집안은 더욱 가난했기 때문에 외가인 대전 근처 안동 권씨 묘막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콩죽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을 해왔다.
그가 후일 성장해서 일찍 유교의 보수주의에서 벗어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독립협회에 가담해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 같은 가난한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볼 수 있다.
7, 8세경 단재는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는데 재주가 비상해 9세 때 통감 전질을 해독하고 10세 때 행시를 지었으며 12, 3세 때는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근동에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18세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향학열을 만족시키기에는 시골에는 책이 너무나 귀했다. 할아버지 소개로 우연히 한말의 재상인 신기선의 집을 찾았는데 며칠을 드나들며 그 책을 모조리 읽어 신기선을 크게 놀라게 했다. 단재는 1898년 19세 때 상경하여 신기선의 소개로 성균관에 입교하였다.
단재가 독립협회에 가입한 시기는 1898년 말로서 독립협회는 의회개설 운동을 벌이면서 황국협회와 충돌하던 시기로 독립협회 운동이 민중 투쟁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단재는 성균관에 나가는 한편 시사문제와 더불어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22세 때에 문동학원 강사로 나가면서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논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한문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한문무용론은 당시의 사회상황으로 보아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독립협회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독립신문>이 그 무렵 순한글로 제작된 사실을 보면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일단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성균관에서도 한문 실력이 뛰어나 원장 이종원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단재가 한문무용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진보적 개화사상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단재는 1905년 2월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바로 이해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이를 반대한 민영환이 자결한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기도 했다. 단재가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들어간 것이 장지연의 초청을 받았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장지연이 독립협회의 같은 회원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서로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재나 장지연이 다같이 유학 출신이면서도 개화사상에 공명하고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장지연이 신채호를 신문사로 초청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단재가 <황성신문>에 언제 입사했는지 확실치 않고 그가 신문사에서 이내 사표를 내었는데 이것은 장지연이 문제의 사설로 구속된 후의 일이 아닌가 추측된다.
장지연이 사설사건으로 구속되고 그 후 <황성신문>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자 단재는 1906년 양기탁의 초청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옮겼다. 영국인 베델이 1904년 창간한 이 신문은 외국인이 경영했기 때문에 일본 당국의 검열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긴 후 5년 동안 열정을 쏟아 항일언론을 폈다. 단재의 이름은 이미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의 언론은 이미 일본 수중에 들어가 제구실을 못하는 때였다. 즉 1905년에는 일본 통감부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07년에는 고종이 일제의 압력으로 양위하고 내정 간섭을 용인하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했으며 7월 24일에는 이른바 '광무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언론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고 나왔으므로 신문다운 신문의 발행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908년에는 양기탁도 일본군의 압력으로 한때 구속되었다가 <대한매일신보>를 물러나게 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당시 언론계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문은 수십 종이 있었으나 모두 아부 아첨을 일삼는데 오직 <대한매일신보>만이 왕왕 격앙비분을 터트렸고 화와이 교민들이 발간하는 <신한민보>나 블라디보스톡 동포들이 발간하는 <해조신문>만이 먼 곳에 자리 잡은 탓으로 때로 항일언론을 펴는 정도였다."
단재가 언론인으로서 활약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이던 1905년부터 나라가 일제에 병합 당한 1910년까지 6년간이었다. 이 6년간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같은 가장 격렬한 항일민족지에서만 활동했으므로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곧 항일투쟁의 일환이었으며 이 언론활동이 바로 그의 긴 항일독립투쟁의 시발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단재의 민족사학의 역사이론이 발상된 것은 1905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입사해서 다시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1907년 신민회 운동에 가담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망명한 1910년까지 즉 변법자강사상을 수용한 전후 6년간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단재가 언론인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것도 바로 이 6년간으로 이 사이에 그는 항일·민족자주의 언론으로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한편 1906년 <이태리건국 삼절전>을 역술하고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 그 취지문을 초하고 1908년에는 <가정잡지>라는 한글잡지를 편집했으며 <대한협회월보> <기호홍학회월보>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편 민족적 영웅에게서 애국적 교훈을 얻고자 1907년에는 <을지문덕>을, 1908년에는 <이순신전기>를, 1909년에는 <동국거걸최도통전>을 서술했다는 것은 한편 민족주의 사학의 애국적 계몽활동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한편 그의 사학이 영웅사관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재는 1908년 8월 27일부터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했는데 이것은 그의 사학이 사대사관을 극복하고 웅대한 한국사의 구상과 자강론적 애국주의에 깊이 영향 받은, 국사에 있어서의 주체성 모색을 말해준다. 단재는 문제의 이 '독사신론'에서 그때까지 한국사학에 뿌리박고 있던 사대주의 사관을 신랄히 비판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정착되기 전의 '동아시아' 고대 세계에서 한족과 비견할 만큼 웅장했던 한국 민족사의 전통을 더듬어 모방적 사대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한민족 중심의 민족사관을 구축했다.
[변법자강적 애국주의]
단재의 사관은 변법과 자강이었다. 변법은 모방적 사대를 부정하고 자주적 서구수용의 근대화 방향으로 구현되고 자강은 4강이 아시아 제국을 서로 다투어 식민지로 침략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약육강식·적자생존이라는 사회 '다위니즘'적 신화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대를 맞아 안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여 근대적 국민주의를 심고 민족적 영웅을 대망하여 부국강병의 근대적 주권국가를 확립하고 밖으로 적자생존의 대외 경쟁력을 강화하여 자주독립의 부국강병형 민족국가를 형성·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변볍자강'이라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을 토착화시키고 계몽·교화시키기 위해서는 본국사 즉 주체적 국사를 형성하고 애국심을 주입하는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청국 사상계의 '변법자강론'이 장지연, 신채호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강제로 실시한 1890년대의 위로부터의 행정적 개혁과는 서로 성격이 달랐다는 점이다. 즉 일제의 강압에 의해 추진된 개화는 '개화'라는 탈을 쓴 친일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변법자강론'은 서구사상의 수용에 의한 개화운동으로 보다 더 주체적 운동이었다.
즉 단재의 변법자강론식 서구 수용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탈아론(脫亞論)적 성격을 가진 개화 개혁과도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단재 등의 개혁운동은 탈아론적 개혁도 아니고 외세를 업는 개화운동도 아니었다. 청국 양계초의 변법자강론을 수용한 단재의 개화운동은 일종의 안으로부터의 근대화, 민족운동으로 나타나 항일 지식인들의 항일 민족주의의 이론적 거점이 되었다. 동일한 서구화운동의 맥락이면서도 하나는 항일운동의 기초가 되고 또 하나는 유신 일본의 근대화를 모델로 한 친일개화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같이 양계초의 변법자강론은 장지연 등에 의해서 수입되고 그것이 자강주의와 '대한자강회'의 정치적 실천으로 발전되어갔다. 장지연은 '자강주의'라는 논문에서 자강론적 인물로서 나폴레옹·콜룸부스·마찌니·링컨 등을 들었으며 모두 모험적 진취적인 경쟁의 승자요 환기국혼한 애국자이며 링컨을 일러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돌보지 않고 전쟁의 참극을 돌보지 않고 의연 노예들을 해방시킨 이상을 사랑한 사람"
이라고 평가했다. 장지연의 영향을 받아 단재도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의 전기를 통해 이들이 자강주의적 영웅으로서 국가주권이 존립하고 열강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국제 사회에서 우승자로서 가장 적합한 이상적 인간상으로 그리고 있다.
단재의 이 같은 자강론적 국사 인식의 발상은 그의 청년기에 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통한 언론활동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보호'로 위장된 일제강점의 침략과정에서 허울만의 대한제국 시대에 단재는 열강이 경쟁하는 한반도의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자립·자강의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모색하는 데 열중하였다. 단재는 그의 논설과 논문 속에서 그의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외경력과 자강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은 지난날과는 달리 시대적 명분의 질서가 아니라 오직 실력이 좌우하는 열강들의 세력균형에 입각한 냉엄한 권력정치의 무대였다. 이와 같이 힘이 지배하는 강자생존의 새 국제질서 속에서 구국·애국의 방책은 오로지 자강책, 다시 말해 근대적 국가주권의 확립과 부국강병의 국력배양이었던 것이다.
단재의 사상을 그의 역사인식을 통해 볼 때 그가 구성한 웅장한 고대사의 사상은 부여족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민족주의의 역사 인식인 동시에 한반도 주변 종족과의 경쟁 관계에서 생존경쟁·우승열패·강자생존의 외경사상을 고취, 자강론적 국사상과 애국주의적 영웅사상을 모색한 국사관 구성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사상은 항일독립을 위한 근대민족국가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형성과 그 보편화의 기초가 되는 민족주의적 교훈사관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따라서 단재에게 있어 국가와 국사 그리고 민족은 한 문제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한말의 자강론적 내셔널리즘의 국사상이 단재 사상에 전형적으로 구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재가 장지연을 통하고 또 직접 중국 서적을 통해 서구사상을 수용한 것이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였으며 그가 가장 활발하게 언론활동을 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바로 이 5년간이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망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양심 있는 지식인은 항일언론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만큼 신변에 위험을 느끼기도 했다.
단재가 앞장서 항일언론을 편 것을 물론이지만 그것은 위정척사식 항일이 아니고 유교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이미 수구사상의 영향을 받은 국민주의적인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어떠한 항일운동을 폈는가, 바꾸어 말하면 그의 자강론적 애국계몽적 항일운동이란 것이었나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대체로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그때의 애국지사와는 달리 그의 애국은 이미 왕가에 대한 충성으로서의 애국에서 벗어나 있었다. 단재는 왕에게 충성을 바친 충신이란 나라에 별반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단재가 배격한 이 같은 충신은 민주주의를 한다는 지금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인물형이다. 이른바 과잉 충성한다는 공무원이 바로 이들에 속한다. 그는 유교교육을 받고 성균관 박사가 됐으면서도 이른바 충의사상을 버리고 국민주의 사상과 국가에 대한 애국을 강조하였다. 단재가 이미 이때 정치적으로 놀라울 만큼 근대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개화의 열이 대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서구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려 했고 일본의 다소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해외문물에 대한 모방의 풍조가 풍미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처해 단재는 개화의 자세를 둘로 구분했다. 하나는 주체적 도입이요 또 하나는 노예적 모방이라고 했다.
해외문물에 대한 단재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민족의 주체성을 견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단재 자신 유교교육을 받았음에도 누구보다도 먼저 서구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일부 완미한 유생을 제외하고는 도도히 밀려오는 서구문명에 현혹되어 주체를 잃은 풍조가 있었다. 단재는 바로 이러한 사대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긍지를 동등한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썩은 교육계에 맹렬한 공격]
단재의 강한 민족의식은 당연히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당시의 교육계 상황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그의 교육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909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지 4년이 되는 해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바로 1년 전으로 사실상 식민지 상태였다. 교육계에서는 이미 애국교육이 금지되고 민족에 관한 언급도 불가능했다. 친일파들이 이러한 매국적 교육을 장려했다. 대세가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경쟁을 벌이는 것 같은 개탄할 풍조에 놓여 있었다.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고 거론하는 일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재가 분연히 애국의 교육계에 공격의 화살을 던진 것은 이때였다. '애국 2자를 구시(仇視)하는 교육가여'라는 논설에서 당시의 교육자들을 통렬히 비난 공격했다. 교육계는 이미 민족을 저버리고 일제에 아부·영합하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단재는 문교부의 이른바 교과서 검정 방침의 매국성에 대해 더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단재는 학부에서 결정한 교과서 검정 방침에 대한 항간의 언론이 분분한 데 대해 지금까지는 뒤에서 나라를 망치게 하는 문교부였지만 그래도 표면으로는 나라를 이롭게 한다고 자처하더니 이제는 아주 정체를 드러내 나라를 팔아먹는 일을 서슴지 않게 타락하였다고 통박하였다.
단재의 비분강개한 논설에 감동되지 않은 사람이 없겠으나 그보다도 단재의 폭로적 논설을 통해 당시 문교부가 얼마나 매국적 정책을 서슴지 않았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단재는 '경고 유림동포'라는 명쾌한 논설에서 유림의 훌륭한 전통을 인정하고 그들의 세력이 아직도 사회에 크게 남아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나라가 망하려는 중대한 순간에 각성하고 분발하라고 고무·격려하였다. 단재는 유림에 대해 아직 미련을 갖고 한 번 더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논설보다 1년이나 늦은 1909년 2월 28일 망국을 몇 달 앞두고 쓴 글이라선지 유림에 대한 힐책과 격려가 더욱 격렬하고 간절한 감을 주고 있다. 즉 '유교계에 대한 일론'이라는 논설에서 단재는 유림이 보수와 형식을 일삼고 입으로는 인의와 예의를 내세우나 실상인즉 부귀와 명예만을 추구할 뿐이니 이는 유교를 망치게 하고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단재는 '큰 나와 작은 나'라는 논설에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해도 그것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는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다분히 종교적 철학적 인생론을 전개했다.
"……물질과 껍질로 된 거짓 나와 작은 나를 뛰어나서 정신과 영혼으로 된 참 나와 큰 나를 쾌히 깨달을진대, 일체 만물 중에 죽지 아니하는 자는 오직 '나'라. 천지와 일월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며, 초목과 금석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고, 깊은 바다와 끓는 기름가마에 던질지라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예리한 칼과 날랜 탄환을 맞으면 작은 나는 죽을지언정 큰 나는 죽지 아니하나니, 신성하다 나여. 영원하다 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즐겨하며 노래하며 찬양함이 가하도다."
단재는 자기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여러 예를 들어 설명했다. 왜 자기는 영원히 죽지 않는가. 그 이유를 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만 내가 아니라, 천하의 유심한 눈물을 흘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토하면 피를 토하는 나의 창자만 내가 아니라 천하의 값있는 피를 흘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뼈에 사무치는 극통지원의 원수가 있으면 천하에 칼을 들고 일어나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단재의 애국의 논리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않는다는 논리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신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자기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다. 그의 애국 논리가 이와 같았으므로 단재의 항일투쟁은 굴복을 모르는 용감성·일관성을 보여주었다.
단재는 친일파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단재는 '일본의 큰 충노 세 사람'이라는 논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국권이 동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사람이 다 통곡하더라도 나는 홀로 통곡치 아니하며 한국내 제반 이익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사람이 다 통곡하더라도 나는 통곡치 아니하며, 한국 정부에 일인이 날로 더 오는 것을 사람이 다 통곡하더라도 나는 홀로 통곡치 아니하며, 한국 토지에 일인이 식민하는 것을 사람이 다 통곡하더라도 나는 홀로 통곡치 아니하는 바이어니와, 한국에 일본의 큰 충노가 세 사람 있는 것은 내가 부득불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하느님을 부르고 땅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아니치 못할지로다. 저 세 사람의 일본 대총노가 다만 저의 일신만 노예되고 말진댄 내가 마땅히 묻지 아니할지며, 저의 일신만 노예가 되고 말진댄 내가 마땅히 슬퍼하지 아니할지나 귀가 막히고 참혹하도다. 저희들로 인하야 무고양민들이 모두 노예의 굴속으로 몰려 들어가니, 귀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는가. 내 말을 좀 살펴 들을지어다.……"
단재는 3대 친일 매국노로서 송병준·조중응·신기선을 들고는 자기가 3대 매국노를 통박하고 통곡치 않을 수 없는 이유로서 일인들이 한국에 침략해 들어오는 것은 그들이 외국인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나 한국 지도자로서 자신이 노예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무고한 수많은 국민들까지도 노예의 구렁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땅을 치며 통곡해도 시원치 않을 일이라고 개탄했다.
단재는 사회 '다위니즘'을 받아들이어 약육강식을 국제무대의 생존원리로 생각하고 있던 만큼, 일제가 한국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어찌 지도층으로서 영향력 있는 한국인이 자신들뿐 아니라 부고한 국민들까지도 노예의 구렁으로 몰아놓으려 하느냐고 한탄한 것이다.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친일파]
단재의 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일 것이다.
이 글은 단재의 애국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진회 가입 등으로 친일로 기울어진 자들의 생태와 심정 그리고 이런 자들이 자기들의 친일을 어떻게 합리화하고 궤변을 늘어놓았던가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이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평소에 눈을 부릅뜨며 팔뚝을 뽐내고 천하일을 논란하던 노형으로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항상 하늘을 부르짖으며 땅을 두드리고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던 노형으로서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일진회에 들더라도 노형은 독히 들지 아니할 줄로 믿었던 노형으로서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노형이 향일에 우리나라는 사천 년 이래로 하루도 완전한 독립이 없음을 홀연히 탄식하기에 노형의 조국을 나삐 여기는 것을 의심하였으나, 일진회에 들 줄은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향일에 우리나라 힘으로는 필경 자주독립하지 못하겠다하기에, 노형의 동포를 업수이 여기는 것을 애석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드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향일에 민영환·최익현·이준·김봉학 제씨는 다만 그 몸만 죽고 나라의 이익이 없는 줄로 평론하기에, 노형의 언론이 돌연히 변하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들 줄은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평소 송병준·이완용·박제순·이지용도 역시 한때 영웅이라 목전에 부귀가 자족하니, 국가와 인민의 멸망하는 것을 알리요 하기에 노형의 사상이 홀연히 변하는 것을 민망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들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노형으로서 지금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오호! 내가 이로 좇아 노형과 절교하노니, 노형이 지금 일진회에 든 바에야 내가 비록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며, 노형이 스스로 주국을 잊은 바에야 내가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며, 노형이 스스로 동포를 잊은 바에야 내가 비록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니 오호라!
내가 노형을 끊지 아니하면 조국이 장차 나를 끊을지며 동포가 장차 나를 끊을지니 내가 노형을 끊을지언정 어찌 조국과 동포에게 끊기리오. 그러나 내가 지금 노형을 끊지 아니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하여 또 차마 절교치 못하는 인정이 있으니, 슬프다 노형이여, 우리가 지금 아니 끊지 못할 겅우를 당하여 가히 끊지 아니할 도리를 연구하여 볼지니 끊지 아니할 도리는 다름 아니라 노형이 스스로 조국과 동포를 배반치 아니하면 내가 언감히 노형을 끊으리오.
이 글에서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일진회에 들어간 친일파들이 거의 대부분 일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독소에 이미 다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은 사천 년 이래 한 번도 자주독립을 못했다느니,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독립할 수 없다느니, 민영환·최익현·이준 열사 같은 애국자의 죽음은 무의미하다느니, 즉 독립에 별 도움을 못 주었다는 등의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원주민으로부터 자주독립정신을 빼내기 위해 퍼뜨리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이론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독립정신은 하루도 없어지지 아니하였거늘 지금 노형이 사천 년 이래로 하루도 완전한 독립이 없다 하며,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독립을 하고자 하면 이것은 물에 들어가면서 빠지지 아니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니, 미국의 힘을 빌어 독립코자 하면 미국의 노예를 면치 못할지며, 프랑스의 힘을 빌어 독립코자 하면 프랑스의 노예를 면치 못할지어늘, 지금 노형은 장차 일본인의 퇴물상을 빌어 충복지계를 하고자 하니 이것은 몇 백 세라도 걸인의 이름을 면치 못할지며 민·최·이·김의 한 번 죽음이 외양으로 보면 비록 아무 이익도 없는 듯하나 그 실상으로 볼진댄 지금 교육이니 실업이니 국권회복이니 하는 것이 이 제공의 끼친 바람이어늘 노형이 어찌 쓸데없이 그 몸만 죽음이라 하며, 저 오적·칠적의 잠시 득세가 비록 영광인 듯하나, 대저 한 집과 한 사람만 망케 하더라도 반드시 현저한 앙화를 받거늘, 하물며 우리 사천 년 국가 기업을 전복하여 이천만 인민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어찌 아무 일도 없으리요. 사람이 미워하고 귀신도 노여워하여 앙화 받을 날이 불원하였거늘 노형이 지금 저것들(이완용·송병준·박제순·이지용)도 또한 일시 영웅이라 하니 노형의 오해가 어찌 그리 심하뇨.……
……노형이 근일에 <국민신보>와 <대한신문>의 두 마귀의 신문을 구람하더니 홀연히 혼을 잃었는가. 노형이 근일에 '개진교육회'와 '대동학회'의 두 마귀 당파를 추축하더니 홀연 지조를 변하였는가.
슬프다! 노형아. 저희들의 말을 나도 또한 들었노라. 저희들이 항상 하는 말이 일진회원이 날로 강성하고 의병의 당류가 날로 감쇠하여야 생령을 가히 보존하며 국권도 가히 회복하리라 하나니, 의병의 해가 없는 것은 아니로되 그 해는 다만 외면상으로는 생명과 재산의 해뿐이어니와, 일진회의 해는 곧 내면상으로 국민정신을 해롭게 하나니, 국민의 정신을 이미 잃은 후에야 어찌 국권을 회복하리요.
이것은 나의 허회 탄식하는 바이며 저희들이 항상 말하되 참 일본을 친근히 하는 자라야 능히 일본을 배척한다 하니(<국민신보>, 제587호 논설), 대개 그 뜻인즉 겉으로는 일본을 친밀히 하여도 속으로는 일본을 배척한다 함이나, 그러나 한 번 일본을 친하여 오조약이 성립되었고 두 번 일본을 친하여 칠협약이 성립되었고 세 번 일본을 친하여 군대가 해산되었고, 네 번 일본을 친하여 한국내에 식민하는 문제가 제출되었고, 전선·우편도 일본을 친하여 빼앗겼으며……
........일본을 친하여 이러한 일은 있거니와 하루도 참 배일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며 듣지도 못하였으니, 아지 못게라.
저희들이 장차 우리 사천 년 국가가 영망하고, 이천만 동포가 몰사한 후에 새로이 총중고골을 일으키며 천상귀졸을 몰아 저희 소위 배일이라는 것을 행하려는지 이것은 나의 항상 통곡하는 바이며, 저희들이 또 말하되 지금 시대는 인종끼리 서로 전쟁하는 시대라 황인종이 성한즉 백인종이 쇠하고 백인종이 흥한즉 황인종이 망하나니, 우리들이 일본과 한국은 같은 황인종이라 불가불 사소한 혐의를 잊어버리고 동양 제국이 서로 단결이 되어서 저 가장 강한 일본을 맹주로 추천하고 한·청 양국이 차제로 진보하여야 가히 서로 보존하리라 하나니, 오호라. 저희들이 취중에 취담을 하는가. 몽중에 섬어를 하는가.……
........천만인이 모두 침을 뱉어, 살아도 영광이 없고 죽어도 씻을 수가 없으리니, 노형아, 무엇이 괴로워서 그리 하는가.
오호라 노형이 차마 조국과 동포를 끊지 못하면 나도 또한 노형을 차마 끊지 못하려니와 지금 노형이 스스로 조국과 동포를 끊으니 내가 어찌 노형을 끊지 아니하리요.
[개화와 척사의 통일 지양]
한편 단재는 아무리 오늘의 우리 현실이 험난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이 살아 있으면 마침내 흥하고야 만다고 논했다. 망국을 1,2년 앞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국민에게 희망을 잊지 말자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희망은 모든 영광과 성공을 이룩하는 데 없어선 안 될 보배스러운 정신적 힘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단재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격려한 것이다.
단재는 '대한의 희망'이라는 논설 속에서
"지금 우리 대한은 망하고 인민은 자유가 없으며 돈의 주조권이 없으며 사법권이 없으며 삼림을 빼앗기고 광산을 빼앗기고 철도를 빼앗겼으며 대교육자·대신문가·대철학자·대문호·대이상가·대모험가가 없으며 그 현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가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고 강조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역경에 처해도 미래에 희망을 갖고 분투·노력을 하면 살길은 저절로 생긴다는 뜻이다.
망국을 앞두고 온 나라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단재는 단연 일어나 결코 실망하지 말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희망을 갖고 분투·노력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절망적 분위기가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속에서 불굴의 용기로 민중을 고무·격려하는 단재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볼 때 사회진화론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단재는 그런 점에서 위정척사의 유림하고는 대립되어 있었으나 한편 개화파의 비자주성을 비판하고 강한 민족주체의식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척사파와 통하고 있었다.
이같이 단재의 애국계몽운동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을 종합·지양시켰다는 점에서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일보 전진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컸다.
단재가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10년 4월이었다. 나라가 망하기 꼭 4개월 전이었다. 이때는 이미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압력이 날로 가중되어 도저히 항일언론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최남선의 <소년>지에 '독사신론'이 전재되고 또 <대한매일신보>에 '동국거걸최도통전'을 연재중이었으나 이미 주위의 사정이 험악해 연재물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고국을 떠났다.
그가 압록강을 건널 때 단촐한 여장 속에는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친필 원본이 들어 있었다. 그는 후일 국사연구에 이 책을 많이 참고하여 썼다고 한다. 국경을 무사히 탈출한 단재는 안동현에게 기선을 타고 우선 망명지사들의 모임에 참석하고자 청도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동지들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1년 후인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라는 이곳 교민단체에서 독립운동의 한 수단으로 창간된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게 되었다. 권업회는 이상설·이동휘 등도 참여한 시베리아 지방의 조선민족 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한 교민단체였으며 교포들에게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고 산업을 장려하고 교포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운동과정에서 단재가 신문을 통해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대일 관계를 염려해 '권업회'와 <권업신문>을 해산과 동시 폐간시키고 말았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톡의 기후는 너무나 차고 병약한 단재는 생활고까지 겹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이때 상해의 신규식으로부터 여비까지 보내며 굶든 먹든 같이 지내자는 연락을 받고 1913년 북만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그러니까 단재가 <권업신문>에서 활동한 것은 2년이 채 안되었지만 하여간 단재의 언론생활로서는 이것이 제2기가 되는 셈이다. 그의 나이 33세에서 34세까지의 일이다.
단재의 활동 제3기는 조선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들어 이승만의 임시 정부 대통령 추대를 반대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상해에 온 단재는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단체에 가담하는 한편 신규식의 후원으로 영국 조계에 '박달학원'을 세우고 국내에 있는 조선 청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김규식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영어는 이미 국내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므로 영어 원서를 읽을 수준에 있었으나 발음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 1914년 단재는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만주의 서간도인 봉천성 회인현으로 가서 한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단재는 이곳에서 윤씨 형제가 세운 동창학교에서 동포 청년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는 한편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사료를 수집하고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동반한 신백우에게 자기 반생을 되돌아보는 시를 지어 남겼다.
인생 40년 지리도 하다.
병과 가난 잠시도 안 떨어지네
한스럽다 산도 물도 다한 곳에서
내 뜻대로 노래 통곡 그도 어렵다.
[상해 임정과 손을 끊다]
1915년 서간도에서 북경으로 간 단재는 그곳 도서관을 출입하면서 역사 연구와 함께 문학 활동에 몰두했다. 1916년 3월에 탈고한 '꿈하늘'이라는 소설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와 독립운동의 길을 상징적으로 극화한 작품으로 후기에 집필된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1928)과 함께 단재의 대표적 문학작품이 되었다.
1917년 그는 단 한 번 국내에 몰래 잠입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조카딸 향란의 양육 문제와 아끼던 제자 김기수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접한 때문이었다. 단재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남포를 거쳐 서울에 잠입하였다.
1918년을 전후해서 그는 북경의 보타암에서 기거하며 한국사의 연구와 집필 생활에 몰두하였다. 그러는 한편 중국 신문 <중화보>에 사설을 집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무렵 그의 생활고는 극도에 달해 굶는 날이 많았다. 단재가 북경에서 굶주림을 참으며 국사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서계대전의 진전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했다.
1917년 상해에서는 신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이 결성되고 이해 연말에는 시베리아 교포들이 '전러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했다. 1918년 6월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으며, 후일 1919년 4월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기고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18년 8월에는 상해에서 여운형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1919년 2월에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때맞추어 '대한독립의군부'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고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에 단재도 서명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터지자 중국을 비롯한 해외 각지의 지사들도 의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북경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단재는 감격과 흥분으로 전신을 떨었다. 그는 이때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상해로 달려갔다.
단재는 이때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당초에는 가담하였다가 회의 도중에 퇴장해버렸다. 미국 정부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어떻게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그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추대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파의 선봉 논객이었다.
임시의정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이 청원했다는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고 이승만이 임정의 수반으로 선임되자 의정원 전원 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박차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는 임정과 손을 끊었다.
단재는 외교론이나 점진론을 주장하는 이승만이나 안창호 노선을 반대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철저히 항전하자는 군사노선을 주장했다. 그는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2개월 후인1919년 10월 17일 임정노선과 대립되는 주간지<신대한>을 발간, 주간으로 활약했다. 이 <신대한>은 신규식의 후원으로 발간되었으며, 이 신문의 선명하고 통쾌한 논지는 교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임정 측에서는 기관지 <독립신문>만 남기고 <신대한>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공작을 폈고 <독립신문> 주간으로 있던 이광수가 단재를 찾아온 것도 이때였다.
이광수는 단재를 만나 <신대한>을 폐간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단재는 외교론이나 도산의 교화주의적 독립노선을 맹렬히 공격하고 이승만이 이끄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동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여운형의 '타협적'노선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했다. 이리하여 단재는 마침내 임정 자체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8·15 후 애국열사 단재가 이승만 치하에서 거의 거론조차 못된 것은 이때 이승만이 품은 감정 때문이었다.
[조선혁명선언]
단재는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행동은 추호도 용서하지 못하는 철저한 비타협 민족주의자였다. <신대한>은 오래 계속하지 못했다. 단재가 1920년 북경에서 제2회 '보합단' 조직에 참가한 것으로 보아 이 신문은 1920년 이후 계속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부터 단재의 활동무대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옮겨갔다. 그가 <천고>라는 한문 잡지를 심산 김창숙과 함께 1921년 1월부터 창간한 것도 북경에서였다. 7호까지 속간된 것으로 알려진 이 <천고>지는 거의 단재의 힘으로 지면이 메워졌다.
그는 이 무렵 <천고>에 실을 원고 집필을 위해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조선독립 및 동양평화'를 비롯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신랄히 공격하는 글을 매호마다 발표하여 교포뿐 아니라 중국인 사회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로부터 얼마 후인 4월 19일에는 단재를 비롯한 54명이 서명한 '이승만 성토문'이 발표되었다. 성토문은 단재가 작성했다.
이 무렵 상해에 나타난 이승만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어떠한 포부를 가져보지도 않고 또 무엇보다 급한 정치자금도 전혀 가져오지 않아 상해에서는 실망이 컸다. 이승만은 약 반 년쯤 중국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1922년 전후부터 단재의 사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임정노선에 불만을 품고 북경에 온 단재의 주변에는 철저한 항일론자와 무력투쟁론자가 많았으며, 그는 1922년 겨울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게 됐다. 그의 주변에는 이회영·김창숙·유자명 등이 은연중 일종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재를 맞은 김원봉은 비로소 존경할 만한 항일투사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행동강령과 앞으로의 투쟁목표를 모두 털어놓고 단재에게 이야기하고 의열단의 활동지침이 될 역사적인 선언문을 기초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리하여 마련된 것이 저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었다.
이 선언문은 비단 의열단의 행동 선언만이 아니라 1920년대의 민족독립사상 및 민족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한 독립투쟁 선언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만했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적 담당 세력으로 민중의 구실을 정면으로 강조하면서 그 실천 방법도 임정의 독립노선인 온건론·준비론이 아니라 암살·파괴·폭동 등 무력에 의한 독립투쟁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 선언문은 1920년대 초 일제의 회유책에 휘말려 국내의 일부 사이비 민족운동자들 사이에서 대두된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자치론', '문화운동론' 등 타협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통렬히 비판, 신채호의 독립사상이 얼마나 철저하고 또 단호한 것인가 하는 점 뿐만 아니라 통치방법과 식민지 현실의 참상을 절실하게 상기시켰다.
1924년 특히 단재는 심각한 경제난에 부닥쳤다. 그는 며칠을 굶는 일쯤 예사였다. 이 무렵의 단재의 북경생활은 실로 암담했다. 그는 한때 북경의 관음사로 들어가 삭발하고 참선을 하면서 승려의 계를 받기 위해 고행에 들어갔다.
1924년 여름 관음사에 딸린 암자에 머물면서 '전후 삼한고'를 비롯해 '조선상고사' '총론' 등을 집필했고 뒷날 국내의 <시대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발표된 대부분의 역사 논문과 저작들은 모두 이 무렵에 집필 또는 추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 이후에도 신채호의 한국사 연구와 집필생활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영양실조인 데다 무리한 독서와 집필 탓으로 안질이 심해져 고통을 받았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이라고 할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일체 타협을 거부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된 단체였는데 단재도 신간회 발기인이 되었다. 그와 교분이 두텁던 홍명희·신석우·안재홍·한기악 등의 요청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믿어진다.
이 무렵 단재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을 창립하고 그 운동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 1926년 전후로 믿어진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민중직접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된다고 믿은 그는 적의 일체의 중요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 제조를 계획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외국 수표를 위조함으로써 마련코자 했다. 단재가 책임진 돈 액수는 1만 2천 원이었다. 단재는 위조수표를 가지고 돈을 찾으려고 일본 고베를 거쳐 대만 기륭항에 상륙했다가 대기하고 있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만주 요동반도에 있는 대련 감옥에 수감된 그는 재판의 연기가 거듭되어 어둡고 지루한 미결감에서 지내다가 거의 반 년 만인 1928년 12월 13일 대련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단재는 범행을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고 조선독립을 위하는 일이라면 조금도 나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당당히 진술하였다.
1930년 4월 28일 신채호는 2년여의 지리한 미결감 생활 끝에 대련 법정에서 1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서 다다미 한 장 위에서 홀로 지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일제도 이름 있는 단재가 만약 옥사하면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누군가 조선의 유력자가 신원을 보증해준다면 가출옥시켜줄 뜻을 밝혀 그의 친척이자 또한 친지인 친일파 모씨가 나타났으나 친일파의 신세는 질 수 없다고 거절하여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대의와 지조를 지켜 추호의 타협도 없었으나 결국 그는 감옥 생활을 한 지 8년, 자유의 몸이 될 날을 1년 10개월 남겨둔 채 얼음같이 찬 만주 여순감옥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외아들 신수범이 임종도 못한 채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그는 눈을 감았다.
단재의 유해가 일본 헌병의 감시 속에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역에는 생전 고인의 동지인 안재홍·정인보·홍벽초·원세훈·여운형 등이 통곡을 하며 눈물로 말없는 유해를 맞았다. 단재의 유해는 다시 서울을 출발, 조치원을 거쳐 밤이 깊어서야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에 도착했다. 민사령 이전에 망명을 한 그는 호적도 없는 처지였다. 동지·친척들의 눈물 속에 암매장되는 수밖에 없었다.
8·15 후에도 이승만 치하에서는 누구 하나 단재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고 일제시대나 다름없는 금기의 인물 대접을 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그는 겨우 햇빛을 보게 되었다.
철두철미 항일투쟁으로 생애를 마친 단재가 만약 오늘의 민족적 현실을 보면 무어라 말하고 무어라 신문 논설을 쓸까. 나라가 망한지 40년간 그간 수많은 항일투사가 나타났으나 그중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 없는 투쟁의 생애를 미치기는 아마 단재만한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쓴 <조선혁명선언>은 읽기만 해도 피가 끓고 원수 일본에 대한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승만에 대해 끝까지 성토를 그치지 않은 것에도 대의와 명분 속에 살려는 단재의 기개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는 본래 유가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유학의 완미한 독선과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서구사상을 수용하고 자강론에 기울어 개신 유학자로서 신문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논설로 이름을 떨쳤고, 만년에 가서는 민중 속에 역사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여 마침내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정체하지 않고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여 정지할 줄을 몰랐다. 생전에 단재가 그의 웅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사학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실천가로서 투쟁하기보다 민족의 대의를 위하고 민족사학의 연구와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누를 길 없다.
일제 36년간의 민족 수난기에 우리가 단재와 같은 인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단 시대인 지금 백범을 가진 것이 민족을 위해 무한한 자랑이 되듯이 똑같은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을 생각한다고 우리는 이 땅에 또다시 단재 같은 인물이 나와 주기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