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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사십 년

박노갑

 

1

죽을 때 죽는 줄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낳을 때 낳는 줄을 모르는 것은, 하필 우리 황찬이가 도맡을 문제는 아니었다.

천구백오년! 이 해를, 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찬에게, 찬이가 낳은 해로 지적하여 주었다. 노산이므로 더욱 난산인, 이 아이의 탄생에, 온 집안은 겁을 낸 만큼, 기뻤더란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한 집안의 경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소작인 만보의 아낙이, 굶다, 애들에게 졸리다 못하여, 창서네 부엌에 들어가 찬밥덩이를 훔치다 들키어, 그것이 부끄러워 못 살겠다고, 우물에 빠져 죽은 것이 바로, 이 해의 일이었다. 온 마을이 벌컥 뒤집히었다.

이것은 물론, 한 마을의 소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작은 것은 으레, 큰 것을 당할 수가 없고, 큰 놈은 작은 놈을 이기고야 말리라던, 조선의 상식은 홱, 뒤집히고 말았다. 사억만 인구가 오줌만 싸도 파이고 말리라던, 일본 열도의 불개미 같은 무리에게, 노대국 중국의 장담은, 뿌리째 넘어박히고 말았다. 무엄한 모험에 맛을 붙인 난쟁이 일본은, 크나큰 노서아에 달라붙었다. 난쟁이에게 키 큰 제정 노서아가 달아나는 구경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투던 고기 조선은 이미 왜놈 밥통을 향하여, 왜놈 목구멍 붉은 고개를 애써 넘어가는 판이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란 것을 맺은 것이, 이 해! , 천구백오년이었다.

이것은 물론, 한 나라가 망하고 만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 몸의 영달을 위하여 붙을 놈은 붙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을 사람은 죽고, 그래도 끝까지 반항하여 싸울 사람은 싸웠다.

그러나 조선의 대동맥은 이미 끊지어, 그 피 벌써 저놈의 창자에 배기 시작하였다.

큰 갓 쓰고 나귀 탄 늙은 의병대장이 불타다 남은 오막살이로, 자주 아버지를 찾아오고, 아버지가 몰아쉬는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일 가망조차 없는 발가숭이 찬에게, 색다른 감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찬은 문득, 자라다 의식을 하고 보니 나라는 이미 없어진 것이었다.

역사에 남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대목은 곧, 자기의 평생에 속하는 일이었으나 그러나, 본 사실이 아니요, 들은 이야기였다.

나라라는 것이 정말 그처럼 필요한 것인가? 어른들이, 잃은 것을 그렇도록 원통해할진대, 잃어서는 안 될 것, 없어서는 안 될 것인가 보지?

조숙은 하였을망정, 세상에 무지한 소견으로는 혹, 그럴듯도 한 일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이까짓 세상! 다 산 세상! 우리네야 이미 죽을 날 받아 논 바에, 그리울 것 있을꼬마는 어린 저것들이 불쌍탄 말이라!”

노인들이 술잔이나 자시고, 눈에 눈물까지 지어 가며, 이럴 때는, 아닌게아니라 정말 큰일이로구나 싶었던 것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못 살 지경으로 변하였다는데, 할아버지 대에 하던 일이나, 아버지 대에 하던 일이나, 어린 자기가 할 일이나, 일은 늘 마찬가지 일을 하여야 되고, 길은 늘 같은 길을 걸어야만 되는 모양이었다.

호불백년이라! 오랑캐 제 비록 득세를 하였단들 백년을 가렸더냐!”

노인들은 왜놈이 꼭 망할 것을 자신 있게 말하였다.

동시에 돌아오는 것은, 예전 그 법으로 알았다. 예전 그 법이 나라를 흥하게 못 하였다는 것은, 구태여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중국은 졌어도 중국 글, 한문은 여전히 배워야 되고 요()와 순()의 시대는 멀어도, 도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놈에 대한 반감은 곧, 개화에 대한 반감이었다.

꺼풀만 남은 나라에서 삭발령이 내리었을 제, 사당 참배를 하고 차라리 머리털을 자를진대, 목숨을 자를 것으로 맹세를 한 분도 그네요, 한문을 폐하고 신학문을 숭상할진대, 자제의 교육을 폐할 뻔한 분네도 그분네들이었다.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는 것은 곧, 왜놈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알게쯤 되었다.

합병이 결국 되고야 말았든, 반감은 반감으로 달음질칠 뿐, 그네의 이 의기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한문 배우는 서당은 늘지언정, 줄지 않았다.

되지 않은 학구쟁이가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한 죄악이라고 외쳤자, 도리가 없었고, 연필자루, 종잇장으로, 학교에 오도록 꼬였자, 도리가 없었다.

당당한 이론이요, 애국 순정에 불타는 주장이었다. 한걸음 나아가서, 이것도 일종의 잃은 나의 것을 찾으려는 싸움이라고 한대도, 과장이 지나친 바가 아니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찬이가 한문을 수득하게 된 것은, 극히 순조로운 경로인 것으로, 유독히 찬의 아버지의 독단을 유표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찬은 지금이라도, 아버지의 교육방법만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찬은 죽는 날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의 정성이었다.

한때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업을 따르고자, 서울 출입에 화려하던 꿈도, 나라꼴이 요 모양 되자 던져 버리고, 일도 할 줄 모르는 일개 참약한 소작인으로 전락한 것을, 달게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대에 흔한 머슴이라고 하였지만, 먹일 양식부터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말하자면, 동네 머슴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만한 소작인이었다.

논 닷 마지기에 밭 오백 평, 일손이나 하는 친구네는 으레 그까짓 것, 하겠지만, 선비의 자집하는 농사로는 태산같이 답답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논에서 찔린 발뒤꿈치를 논에서 고치었고, 어머니는 밭을 매다, 밭골에서 내종이 터지게쯤 되었다.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을 밖에서 편지가 들어오면, 이것을 보아 달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있어도, 일에 몰려 사람이 죽을 지경에, 일 좀 거들어 주겠노라, 나서는 사람은 별로 보들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노상 인정만 나무랄 수가 없는 것이, 하루 일을 해 주고, 하루 대신 데려가야, 밥값도 뺄 수 없는 일꾼이 곧 찬의 아버지인 까닭이었다.

톡톡히 가는 정 없이, 오는 정을 바랄, 아버지가 아니었다.

일이 밀리면 밀린 대로, 병이 나면 난 대로, 일을 치를 대로 치르는 것이, 하는 수 없는 아버지의 처지였다. 객쩍은 탓을 남에게 퍼붓고, 실속 없는 쾌감을 느낄 엉뚱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비 한차례 지나가면, 추깃물 같은 썩은새 국물이 천장에서 쏟아지기로, 새삼스럽게 놀랄 것은 없었다. 해를 두고 집을 잇지 못하였을 제, 이미 각오한 바였다. 초라니 수염 같은 짚 몇 단 되지 않는 것, 그까짓 것을 가지고, 때고 어쩌고, 이엉을 엮을 수가 없었다.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대도 이 집안에 의외로운 일이 될 리 만무였다. 소작 그나마 도조로 다 빼앗기었다면, 지주는 그야말로 큰소리를 치고 나설 터였다.

제 따위 농사 개꼴같이 진 줄은 생각지 않고는! 논 토리를 탓해! 지주 인심을 탓해! 굶든 먹든, 남의 토지 작인 노릇을 하는 것은, 어쨌든 남의 덕인 줄을 모르고는!”

이렇게 하고도 오히려 말이 남을 판국이었다.

아따 이놈, 그러면 대수냐! 네 논이면 네 맘대로 뗄 터이냐! 사람이 꿀꺽꿀꺽 모든 것을 참고 있으려니까는…….”

아버지는 이렇게 항거를 할 듯도 한 일이었으나, 말을 참은 데에는, 역시 말이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당대의 지주에게는 절대의 권리가 있었으니,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운 지주의 말 한마디는, 만금 같은 작인의 목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판이었다.

소작인으로서, 어찌 지주의 성미를 모를 법이 있으랴. 말 한마디 오고 가는 데에, 복과 재앙이 달렸다. 소작인으로서, 어찌 지주의 생일을 기억해 두지 않을까 보냐. 다만, 명태 한 떼, 달걀 한 줄이라도, 마음의 표시였다.

남이야 죽든 살든, 주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표로는, 언제든지 작인이 갖다 주는 물건, 퇴하는 지주를, 작인은 본 일이 별로 없었다.

나라는 비록 망하였을망정, 지주들의 권리는 준 것이 아니었다. 줄지 아니하였을 뿐인가. 오히려 강성하게 되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은, 아직도 양반이 돈 있는 상놈을 호령할 여력이 있었고, 상놈은 아까운 돈이 귀찮아 곤란한 참이었다. 상놈도 지주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양반에게 쫓겨다니기란, 작인 보는데, 창피한 것 이상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야 말았다. 양반은 한갓 외화뿐이요, 돈 없는 양반은 돈 있는 상놈에게 점점 친하게 되어, 돈과 뼈는 서로 혼인 이야기에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한편은 돌아간 옛날의 꿈이 부러웠던 것이요, 한편은 기름진 현실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렇게 상놈 지주는 양반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양반 지주 또한 의병이나 화적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에누리 한푼 없이, 지주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하여, 그들은 물론, 엉뚱한 왜놈의 덕을 남 듣는 데 찬양할 리는 없었다. 그것은 글을 배운 동양 사람으로서, 억제할 수 있는, 도덕의 힘이었다.

그러나, 까마귀 날자, 떨어지는 배를 받아 든 것은, 수많은 소작인일 이치 없고 분명코 자기네 지주인 것은, 현실이 증명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네들, 중에도, 거개는, 망상에 가까운 꿈이 점점 깨어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는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 지주의 토지는, 조선 지주의 손에, 겸병이 되는 것이 아니요, 읍내에 좌정하여, 평생 듣도 못 하던 말을 쓰는, 왜놈에게인 것을 알게 되었다.

토지문서만으로 끝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도장이란 것을 가장 중히 여겨 찍는 곳이 상당히 많다. 차림차림은 까다롭고 복잡하고, 변리는 턱이 없이 비싸나 그러나, 빚을 준다면 꼭 주는 것이 신통하였다.

원수가 가져왔건, 개화란 바람에 안목이 느니 쓰임새가 늘 수밖에. 비싼 세금 강제 기부금, 이것저것 겸하면 돈을 마련해야 할 수밖에. 있는 것은 토지 하난데, 작인 착취도 한도가 있는 것이고 보니, 급한 대로 빚을 주는 놈의 돈을 썼고, 토지는 놈에게 저당이 될 수밖에.

이런 세음 조는 물론, 토지를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제 비록 소작인일지라도, 신용 있을 만한 연대보증인만 세우고 보면, 고마운 빚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연대보증인이라는 것은 전에 없던 법으로, 이 법에 걸려들어 돈은 한푼도 써보들 못하고, 억울하게 세간 집행을 당하고, 울지 않으면 견디들 못하였다. 전날 증인이란 것은, 빚 주는 것을 꼭 보았다는 증거를 대면 그뿐인 것이었다.

연대보증인을 증인인 줄 잘못 알고 도장을 찍었던 것이었다. 이놈의 도장 잘못 찍다 집안 망하였다고, 도장을 분김에 깨뜨리었으나, 살림은 한풀 꺾이어, 더는 연대보증인 설 만한 신용도 없게 되었다.

이만 것으로 본대도, 놈들에게서 받은 도장문명의 대가란 그렇게 헐한 것이 아니었다.

세쇄한 문서가 형식에 치우칠수록,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구원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공론이 없는 세상에 함부로 넘나드는 것은, 형식을 방패로 기웃기웃 숨어 있는 사기한의 얼굴들이었다. 인찰지와 인주와 도장은, 속일 수 없는 증거품이었다.

신통한 재주를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는, 왜국 사람에게, 새로운 경계의 눈을 주었자,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이 신통한 왜놈의 모습이, 어린 찬에게, 맨 처음 던져 준 인상은 그토록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허리에 전대 하나만 질끈 동인 벌건 살덩어리가, 앞뒤로 달린 바퀴 위에 납죽 엎드리어, 마을 앞 옛 가도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노인들은 오랑캐란 할 수 없다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을 들은 듯하다.

지금 생각건대, 제 나라 제 집에서 하던 버릇을 고치잖고, 더운 참에, 일을 보러 읍에서 읍으로, 훈도시 하나만 차고, 자전거를 탄 광경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속도도 속도려니와, 상당히 먼 거리에서 본 것이었다.

이번은 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이었다. 발가숭이보다도 더욱 기괴한 광경이었다.

가슴에 꼭, 쌍창문을 열어젖히고 온 것이었다. 아마 마을 누구에게 왜채 독촉 온 것은 틀림없겠지만, 세상에 가슴에다 문을 달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였다.

지금 다시 생각건대 갈라 젖힌 양복저고리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렇든, 찬은 이때부터, 분네들이 이 마을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독촉보다는 대개 집행을 온 것이었다. 솥에다도 종이쪽을 붙이고, 의장에도 붙이고, 쓸 만한 것은 골고루 골라서, 빼놓지 않고 붙였다. 이 종이쪽을 떼거나, 이 종이 붙인 물건을 움직이면, 징역을 간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실상 징역보다도 이 집달리, 이 일본 분네를 더욱 싫어하였다.

남이야 싫어하건 말건, 자주 드나드는 분네였으나 그러나, 찬의 집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찾아올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틀림없이 왜채를 쓰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자랑을 말라. 저마다, 왜채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찬의 아버지는 왜채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존재라서, 새삼스럽게 놀랄,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

언제 샐지 모르는 밤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난이었다. 그러나 참약한 자식의 힘을 팔아 이편의 가난에 보탬을 바라는 아비가 아니노라고, 술잔이나 자시면 눈물을 머금으며, 아들을 격려하는 아버지였다.

선생님의 월량은 동냥 구걸을 해서란대도 댈 터이니, 염려를 말고, 요나 이불을 가지고 갈 것이 없을 바에는, 포대라도 가지고, 글을 배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는 집에 본디 없는 것을, 새로 만들 힘이 없고,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어린 몸이 많은 애들 틈에 독차지한다는 것이, 실제 이용으로 보나, 도리로 보나 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이불은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고, 결국 포대를 정성껏 떨어서 단정히 개어 들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재 너머 글방으로 글을 배우러 가는 도중이었다. 이게 물론 찬의 첫 입학은 아니었다. 애초 첫 입학은 아버지께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뒤따라오는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아들은 공손히 대답을 하였다.

옛날 초한 시절에,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이, 팔 년 동안을 죽도록 싸울 때, 숙손통이란 사람은 들어앉아 예문 공부를 하였거든! 난리가 끝나면 예문이 급할 것 아니겠니!”

아버지의 이 말씀은, 오늘에야 처음 듣는 것이 물론 아니었다. 때마침, 음력으로 이월 초생인 듯, 찬에게는 기억되었다.

*

별수없는 방 한 칸이 왜 그리 넓었던지 모른다. 윗목에 꼬부리고 앉아, 아랫목 선생님 앉으신 데를 바라보면, 한 아이, 또 한 아이, 또 한 아이를 거쳐, 아랫목은 가마득하였다.

그 목소리, 돼지 목따는 소리였거나, 물잡은 텃논의 맹꽁이 소리였거나, 그 소리는 글을 읽는 소리이므로, 맑고도 아담한 소리라 하였다. 그러나,

과거도 없어진 세상에 글은 배워 쓸데 있을꼬마는, 펀둥펀둥 어린것들을 놀리기만 할 수도 없단 말이라!”

어느 학부형 한 분은, 가다 혹, 이런 의혹을 품지 않을 수도 없던 모양이었다.

그 무슨 소리를! 오랑캐 아닌 바에야, 글 없는 겨레가 있을꼬! 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을꼬!”

남의 귀한 자질을 맡아 가르치는 선생님의 점잖은 반박이었다.

한문처럼, 어렵지 않고 되는 글도 많지 않다오. 십 년을 배워야, 저마다 작도 편지 한 장을 못 쓰는 어려운 글이, 한문이 아니냐 말이오.”

학부형은 요 근방서 그 실례를 들라면, 몇백 명이라도 들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 딱한 소리도! 어려우니 배우려 욕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토록 쉬우면 배우려고 욕을 볼 까닭이 있느냔 말야! 그러기에 보배가 아닌가. 세상에 귀하고, 얻기 쉬운 것이 어디 있더람! 얻기 어려우니, 귀할 수밖에! 저마다 쉽게 글을 배울 수 있으면, 세상엔 글 못 하는 사람 없게, 될 말인가?”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 당신의 포부, 보배를 자긍하는 뜻도, 표시가 된 것이었다.

글쯤 세상이 다 알 수 있는 글이 되어서, 해로울 것이 있겠소. 흔히들 언문밖에는 모른다지만, 살림 적발, 급한 데 편지 한 장, 의사소통이야 못 하겠소. 나도 자식을 가르치기는 가르치지만, 제 따위 재주로는 백년 배워야, 한문 편지 한 장 쓸 것 같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하오. 다 제 노릇 제가 하는 탄식이거든요. 과거는 없는 세상이라니, 그건 그만두더라도, 그놈이 제법 한문을 배워서 선생님처럼 이렇게 선생 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는 노릇이거든요. 남들이 가르친다니, 나도 따라 안 가르칠 수 없어 가르치기는 가르친다지만!”

학부형은 예까지 자기 회포를 툭 떨어 바치었다.

그 무슨 말을 함부로 하는가. 세상은 밤낮 왜놈의 세상이 되고 만단 말인가! 하늘이 이 백성을 버리지 않을진대, 반드시 옛 성현의 도가 빛날 때가 있을 것이거든! 자네는 그래, 오랑캐의 세상이 영영 되고 말 줄 아는가?”

흰 눈썹 아래 가는 눈이 유독히 빛났다.

성현의 도가 좋기는 하다지만, 성현을 숭배할 줄 알던 조선 사람이, 조선 망할 줄은 모르지 않았어요.”

학부형은 내내 대거리를 하였다.

저런 무식한 소리가! 나라를 위하여 말년에 목숨을 바친 학자가 얼마나 많기에!”

선생님은 비분강개한 나머지,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러나 망한 것은 사실이지요. 안 망할 리가 있나요. 옛글에 요새 이야기가 들어 있을 리는 없으니까요.”

학부형의 말은 결국, 선생님의 노염을 사고야 말았다.

자네 틀렸네. 글을 그렇게 원수같이 아는 사람이, 자질 글을 어떻게 가르치겠나. 자네 말마따나, 글이란 그렇게 정성이 없고, 열이 없는 사람에게, 쉽게 될 리 있겠나! 더욱이 반대를 하는 사람에게! 자질 공부를 시키는 것이, 그토록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쉬운 이야기가. 자네 아들은 다려가도록 하면 그만 아닌가? 다려가게.”

선생님은 위풍당당한 우렁찬 목소리로, 이 마을의 이단자를 뜬것 물리치듯 하려는 판이었다.

아니, 다려가다니요?”

젊은 학부형은 눈이 똥그래서, 선생님을 보았다.

그럴 수밖에! 하고 싶다는 노릇을, 내가 말릴 도리야! !”

선생님은 더욱 흥분한 어조였다. 담뱃대를 힘들여, 재떨이가 깨져라고, 떨어 대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포부를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시거나, 내 자식이 한문을 배우지 못하거나, 그건 될 대로 되는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할 것 아닌가요. 내 언제, 내 자식 다려간단 말을 했나요. 남을 따라 하기는 하되는, 일은 그렇단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요.”

학부형 또한 못지않게 흥분하였다.

만승천자도 저 싫으면 그만두었지, 지나치고 못 미칠 것이 어디 있을꼬! 가다 해괴한 일을 다 보겠고.”

선생님은 상대편을 경멸하는 눈치까지 보이었다.

싫으면 제 법, 제 맘대로 않고 견디는 세상인가요? 왜놈 백성 노릇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십니까? 선생님은 그래 애들 가르치고 싶어서 가르치십니까?”

학부형은 어쩌면 입까지 삐쭉거릴 불공한 태도였다.

무엇? 내 그러면, 월량 받아먹기 위하여, 훈장질을 한다는 수작이지? 천하에 순, 괴악한 사람 같으니!”

선생님은 담뱃대를 들먹들먹, 안정을 못 하였다.

배우러 오는 아이를, 죄없이 거절하는 것은, 성현의 법인가요?”

학부형의 어조 또한, 더욱 학부형답지 못하였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안 된다는 데는!”

선생님의 결심은 단호한 것이었다.

누가 아니랍니까!”

……

그들의 입씨름은 이렇게 끝을 맺고 말았다. 이 학부형의 아들이 곧, 김진호였다.

동무들과 장난이 지나쳐, 싸우다 얻어맞아도, 좀처럼 울지 않는 애가, 진호였다. 그러나 한번 울기 시작하면, 선생님께 들키어 때린 놈 맞은 놈이 한목 종아리를 맞을 지경이라도, 그칠 줄을 모르는 아이도, 진호였다.

글 읽기도 동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않았고, 서당도 동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빠지지 않고, 잘 나왔다. 저녁을 먹으면, 남 뒤지지 않게, 어둡기 전에 오는 날이 많았고, 찬이처럼 포대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요, 쪽쪽한 새 무명 요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찬이와 마찬가지로 책상은 없었고, 싸가지고 온 점심밥 식기에 잡곡이 늘 반 이상 섞이는 것도 찬이와 비슷하였다. 다만 반찬이 서로 틀리는 것은, 찬이는 언제든지 고춧잎 장아찌 한 가지를 가지고 다니었는데, 진호는 가끔 더덕 장아찌를 가지고 다녔다. 찬은 가끔 진호의 이 더덕 장아찌를 얻어먹고, 어머니께 우리도 더덕 장아찌를 해먹자고 조른 일까지 있었다.

더덕 장아찌뿐 아니라, 가끔 진호는 또한 으슥한 곳으로, 찬을 불러내어, 노란 차조 누룽지를 주었다. 진호의 새까만 눈이 웃음 속에 깜박할 때, 찬은 따라가 보면, 진호의 손에는 언제든지, 노란 차조 누룽지가, 맛있게 놓여 있던 것이었다. 아이들의 눈을 피한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였다.

이러한 진호가 오지 않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찬이 궁금할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찬 이외의 모든 동무들도 역시, 비상한 주목을 하게 된 것은, 선생님과 진호 아버지의 싸움이, 그들의 눈앞에 벌어졌던 까닭이었다.

깊은 뜻이야 누가 알꼬마는, 자기들도 배우기 어렵고 싫은 한문이, 어려운 만큼 특별한 수도 없다는, 진호 아버지의 말 대목이, 구미에 당기었고, 다음 놀란 대목은, 진호가 오지 못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동무로 보나, 진호 아버지의 이야기로 보나, 아이들은 대개, 선생님 편을 들기보다는, 동무 진호의 편이었다. 무서운 선생님의 호령에, 동무가 보고 싶어도, 서당에를 오지 못하는, 약한 진호가 퍽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잃어버린 동무를 찾아올 도리가 없을까, 궁금할 판에, 진호의 아버지는, 친구 만수 아버지와 같이 서당에 나타났다.

대체, 이 판국에, 아이들은 읽던 글을 멈추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약속이나 한 듯, 글소리가 뚝 끊지는 순간에, 벼락같이 일어난 건 선생님의 호령이었다. 방 안은 다시, 와각와각 개구리 울듯 할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첫인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은 저희들 글소리 까닭으로, 저희들 귀에, 담아 들을 도리가 없었다.

, 말씀이야 바로 하옵지, 요 근방으로 본대도, 선생님 같으신 분이 돌아가시면, 누가 우리 자질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선생님 같으신 분이 우리 고장에 계시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네 자식들 선생님다운 선생님을 모셔 보았겠습니까? 가령 다른 고을서 선생님을 모셔올 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을 선생님은 그 고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 아닙니까? 어디 내 욕심만 채우기로 한대서야, 공평한 세상이 될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뿐입니까.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 밑에 왜 공부들을 못하느냔 말씀입니다. 우선 내 자식부터도, 제 재주 없고, 제 정성 부족하여, 공부를 못한단 말이거든요. 선생 탓하는 놈치고, 영락없이, 공부 잘 못하는 놈이거든요. 선생님 그저, 어찌 생각 마시고, 진호 그애는 가르쳐 주셔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배우려 드는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저 널리 생각하시어, 처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만수야, 너도 가서, 진호가 술상을 가지고 올 테니, 같이 들고 오너라. !”

만수 아버지의 이 말을 아이들이 듣게 된 것은 물론, 그만들 쉬어서 읽으란 선생님의 명령이 있은 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

선생님은 대답이 없이 담배만 빨 뿐이었다.

저 할 일 저 하였으면 그만인 걸, 무엄한 말씀을 드리어 여간, 죄송치 않습니다. 진작 못 와 뵈운 것이 더욱 죄송합니다.”

진호 아버지는 전과는 딴판으로 공손한 데, 아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어쨌든, 자네가 진호를 보냈으면, 내 무슨 심정으로, 끝끝내 쫓아보냈을 리는 만무거든! 그럴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이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염을 한번 멋있게 쓰다듬었다. 그의 존엄하던 얼굴에는 인자한 웃음까지 빛났었다. 술 좋아하는 이의 술 소식을 들은 기쁨으로만, 곡해할 것은 아니었다.

, 그야 물론, 그러시다뿐이겠습니까! 진호를 진작 보내지 않은 것이 잘못이고 말고 여부가 있습니까.”

만수 아버지는 연해 감탄을 하였다.

그야 잘잘못을 여기서 가리자는 것은 아니니까.”

선생님은 가로막다시피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러자, 진호와 만수가 가져온, 술상과 술병이 방 안에 들어왔다.

술을 따르고, 자시고, 술잔이 돌고 돌수록, 방 안의 화기는 더욱 넘쳐 흘렀다. 어른들이 다시는 입맛에, 아이들은 군침을 가만히 삼키었다.

아무렇든, 아이들은 동무 진호가 다시 돌아온 것만 다행으로 알았다.

세상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들은 여전히 맹꽁이타령을 부르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실상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희는 집안 걱정 참례할라 말고, 읽으란 글이나 읽어.”

하고, 부모는 크는 아이들에게, 뼈아픈 집안 걱정을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나, 코앞에 세차게 닥치는 탈을, 혹은 눈치로나, 혹은 말로나, 혹은 태도로나 태연히 숨길 도리가 없었다.

왜채에 몰린 조선놈의 땅이 왜놈에게로 넘어간 바에, 왜놈 새 지주는, 새 작인을 골라 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새 지주와 새 작인은 새로운 약조를 맺는 데, 가장 필요한 관계였다.

지주의 말에 의하면, 도조를 올리는 것은 지주가 아니라, 작인이라 하였다.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그 논 나를 주오. 나를 주면, 원 도조보다 한 섬을 더 내리다.

한 사람이 또 와서 가로되, 그 논 나를 주오. 나를 주면, 원 도조보다 한 섬 열 말을 더 내리다.

한 사람이 또 와서 가로되, 그 논 나를 주오. 나를 주면, 원 도조보다 두 섬을 더 내리다.

결국, 지주의 마음은 도조 많이 준다는 데로 끌린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요, 곧 지주 자신의 말이었다.

왜놈 지주가 하는 이 버릇을, 남은 조선 지주도, 본을 뜨게 된 것은, 자못 믿음직한 법적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말을 하기를, 그따위로 도조를 올리려 드는 놈은 대개, 남의 논 지어먹고, 도조 한 톨 안 내고, 도망갈 작정을 한 놈이니라고.

예전 지주를 꼬이는 데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왜놈의 법에, 연대보증이란 것은 도조를 받는 데도 적용이 된다.

소작인은 저희끼리 연대보증인이 되어, 그 중에 한 작인이 도조를 잘라먹을진대, 다른 연대책임자가 물어내야 한다. 억울한 것은 작인들이었으나, 도조 한 톨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은 지주이었다.

왜놈을 위한 이 천지에, 왜놈에게 해로운 법이 있을 리 없었다. 오죽 못났어야 이 판에 조선놈 지주 밑에 소작인 노릇 할 왜놈이 있으랴.

논이 떨어졌다. 논 없는 농부가 의지할 곳이 없다. 논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해 농사 죽도록 지어, 도조를 치르면 먹을 것이 없다. 논 없는 농부가 양식 없어, 무엇을 믿고 살까. 논이 있어도 죽고, 없어도 죽을 판이었다.

이 서당에 동접이 준 것은 다만, 선생님과 학부형이 싸웠다, 화해를 하고, 다시 돌아와, 일 년도 못 채우고, 결국, 신학문을 배우러, 외가를 따라, 도회지로 떠난, 진호뿐이 아니었다.

논 떨어지고, 밭 떨어지고, 소작인의 지위에서 몰락한 집들은, 여름에 보리 한 섬, 가을에 벼 한 섬 낼 가망이 없는 집에서는, 하루바삐 자기 아들을 이 서당에서 불러가야 되었다.

하나씩 둘씩, 동무를 잃었으나 그러나, 남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역시 세상은 별 변동이 없다는 듯이 맹꽁이타령을 하고 있었다.

찬이가 덮고 자던 포대는, 한여름 다시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가, 밭에서 걷어들인 잡곡으로 배를 채우기도 하였다.

그 포대가 다시 찬을 따라 서당 잠을 잘 즈음에는, 찬이 선생님의 전수를 받아, 글을 불사르고 선비를 죽인 진시황이 망해야 옳다는 것과 항우는 무도하여, 천하를 잃은 것이 옳고, 유방은 관후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토록 신통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진시황, 항우, 유방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알기로 친다면, 마을 최첨지가, 한문을 배운 자기네보다 몇십 배 나은 것이었다. 󰡔초한전󰡕이란 언문 이야기책을 줄줄 외다시피 하는 영감이었다.

한문을 못 배웠거나, 역시 진시황을 미워하고, 항우를 미워하고, 유방을 숭배하는 것은, 한문 잘하는 선생님과, 꼭 마찬가지였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란 것을, 동네 사람 누구의 사실인 것처럼,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도, 선생님과 추호 틀림이 없었다. 고구려와 고려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데,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홍문연에, 유방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항우가 어질고, 오강에서, 자살한 것을 보면, 항우는 곧은 사람이 아니냐고, 유방이 바꿔 되었으면 항우를 죽이었을 것이요, 오강에서 죽지 못하고, 강을 건너가 구차히 살려다가, 강동 사람에게 맞아죽었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찬은 하였다가, 선생님 꾸지람을 듣고는, 선생님 말씀대로, 글을 배우는 데는 별 말썽이 없었으나, 장담 못 할 것은, 기름 추렴, 자리 추렴, 이따위 추렴새였다.

집에 없는 돈을 억지로 구하여 가져오면, 이미 늦은 뒤였고, 다음 추렴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채우노라, 집에서는 늘 바쁘면서도, 늘 남에게 뒤지는 것이, 선생님께 여간, 이만저만 면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꾸지람을 들어도 이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뿐이 아니라, 동무들에게 미안한 바였다. 그러나, 역시 모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먹 같은 것은, 흔히 동무의 것을 빌려 같이 쓰는 대신, 이편이 갈아주면 되었다. 왜 내 먹을 쓰느냐는 것이 아니라, 왜 내가 갈아 놓은 먹을 쓰느냐는 문제일진대, 문제는 먹이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요, 먹을 가는 노력에 있는 것이었다.

이까짓 노력쯤이야, 찬으로서는 없는 돈을 들여 먹을 사는 데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찬은 대개, 자기의 벼루가 필요치 않았다. 비록 결과는 마찬가지라 친대도, 자기 벼루에 자기 먹을 가는 것과, 남의 벼루에 자기 먹을 가는 것은 감정상, 차가 없달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의 감정을 자극시킬 것이 없이, 온순한 방법으로, 자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위협도 아니요, 아첨도 아닌 지경에서, 찬은 항상 물질의 궁핍을 보충하고자 하므로, 적지 않은 기술이 들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찬은 그토록 과민한 신경은 쓰지 안하여도 되는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근거란 전연 물질과는 관계가 먼 딴 곳에 있다.

될 수만 있으면 선생님의 눈을 피하여, 종아리를 맞지 않고, 잘 놀고 즐길 수 있는 음모이면, 스스로 즐겨 참모 노릇도 하였고, 더러는 앞잡이 노릇을 한 데, 그 근거가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꾀로 능히 동무들을 즐기게 하고, 동무들이 두려워하는 벌, 종아리를 맞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모험이므로, 이 모험의 성공은 곧 참모의 명성을 올리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동시에 자칫 잘못하여, 몇이 종아리를 얻어맞았다가는, 칭원과 탓 속에, 얻었던 명성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 선생님을 오래 모시면 모실수록, 그 선생님의 성미를 알면 알수록, 짓궂은 제자들의 계획은 확실성을 갖게 되는 모양이었다.

이놈들! 고이한 놈들 같으니, 내가 너희들에게 속을 줄 알고!”

선생님은 미리 다짐을 하여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원래 속지 않는 사람이 없고, 속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

글공부는 겨울이라지만, 기나긴 밤에 굳어 오르는 궁둥이를 차디찬 구들에 붙이고 앉았기도 어려운 일이요, 포대쪽을 덮고 누워, 곱송그려 새우잠을 잔다는 것도 어려운 것이었다.

문장은 자고로 붉은 문 높은 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이러한 차디찬 갈자리 바닥, 쑥대문에, 얼어죽다 남은 괴로움의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참는다고 저마다 문장이 되기도 어려운 일이요, 저마다 참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예다 대면, 한여름 모정생활은, 모기가 어쩌니, 더위가 어쩌니 해도는, 삼동에 쌓인 냉을 삼복에 풀고 싶은 것 한 가지만으로도 우선, 맘을 놓음직한 생활이라 하였다.

모정은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터를 잡고, 쌍자리가 땅에서 멀면 멀수록 시원한 줄이야 누구는 모를꼬마는, 터가 너무 높은 것도 모진 풍우에 참기 어려울 염려가 있고, 쌍자리가 너무 높으면 낙상할 염려도 있으니, 그저 높도 않고 낮도 않은 알맞은 중용의 도를 주장하여, 모정 터는 산중턱에, 쌍자리는 한 길 이하로 하라는 것이, 언제나 선생님의 지도였다.

아이들의 생각으로는 나중에야 어쨌든지, 모정을 지을 테면 터는 산 상상봉 꼭대기에, 쌍자리는 두어 길 이상으로 매어, 시원할 테면 한번 마음속까지 시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생각, 위험한 생각이라 하여, 각하를 당한 것이었다.

각하는 당하였을망정, 마음대로는 못 하였을망정, 시원한 당시를 읊기란 과연, 침침한 등잔불 아래, 굵은 판박이 글자라고는 하지만, 틉틉하고 까다로운 줄글을 읽기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남의 시를 읊었으면, 시를 또한 지어 보아야 한다. 남들이 즐기는 장원을 찬이 또한 즐기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괴로움, 아버지의 괴로움, 자신의 괴로운 결과로 보아서는, 차라리 한 가지 기쁨이 애초 없어도 상관이 없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장원을 하였노라, 집으로 달려가면,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아버지도 기뻐하셨다. 돈 이삼십 전을 취하러 어머니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시었어야, 결국은 실패였다. 최후로 마을 주막에 외상 술 몇 사발을 간청하여 보았으나, 역시 실패를 하고, 뒤통수를 치고 돌아설 때는, 선생님, 손님, 동무를 볼 낯이 없었다.

장원례도 못 할 장원을 하여 가지고, 남의 흥만 파하게 될진대, 남보다 글 잘 지은 것도 남에게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이후로 찬은, 장원은 해도 장원례는 못 하는 아이로 지목을 받기로니, 찬은 과연 그렇지 않다는 실력을 보여 줄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그런 관계로 찬의 재주는 오그라들었는지도 혹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이유는 별로 깊이 캘 것 없이, 어쨌든 손님 분이나 오고 술이 필요할 때의 장원은 좀처럼 찬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안하였다.

찬은 안심하고, 다른 애들 장원례 술 받으러 가는 데, 따라다닐 수가 있었다.

어떤 날의 일이었다. 선생님의 친구로 풍월깨나 하는 분네가 와서, 당신네도 시를 지었고, 아이들 글도 꼲았다.

찬은 역시 무난히 장원을 모면하였다. 실로 의외로운 장원이었다. 동접 중에 돈은 제일 많으나, 재주는 제일 없기로 유명한, 삼봉이가 뽑힌 것이었다.

찬이가 차작을 해준 그 한 짝이, 어쩌다 돋보여, 장래 싹수가 있다는 이유로 장원이 된 것이었다.

모처럼 장원이었으나, 돈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쓰는 것은, 돈 많은 삼봉 아버지의 두고 쓰는 특색이었다.

빈병을 든 삼봉이 하나를 앞세우고, 아이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따라 나섰다. 이런 계제에 맘놓고 한번 뛰고 놀아 보자는 수작이었다.

잔솔밭 새로, 회회 돌아나가던 산길은 어느덧 유첨지네 원두밭머리에 다다랐다. 손톱으로 찌르면 단물이 단번에 솟을 듯한 개구리참외가, 지나는 일행의 눈에 척척 안기었다.

, 한 개 따먹었으면 좋겠다.”

따먹자, 원두막에 아무도 없고나.”

집에서 문 열어 놓고 지키겠지. 보면 대수냐. 따가지고 도망하면 되었지.”

그들은 발이 곧 길 아래 밭으로 쏠리는 모양이었다.

가만있거라. 저 솔밭으로 가서 적삼을 벗고 오자. 벗은 몸뚱이 누군 줄 알겠니.”

찬의 발언에 모두들 그럴 듯 복종을 하였다.

조금 있다, 후두둑후두둑, 솔밭 새로 살살 기어내려온 검붉은 등어리들이, 먹음직한 개구리참외를 하나씩 안고, 다시 솔밭 속으로 사라졌다.

술은 받아 가면, 선생님과 손님들의 잔치요, 아이들 자기네의 잔치는 이 솔밭에서 하는 것이었다.

뒤에 쫓는 사람이 없었으니, 유첨지네 할멈이 멀리서 보고 소리를 쳤건 말았건, 못 들었으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아무 일 없이, 술을 받아 가지고, 다른 길로 돌아와, 선생님과 손님들을 대접하였다.

술에 흥을 더욱 얻은 선생님과 손님들은, 목소리를 드날려, 당신들의 지은 시를 다시 한번 읊고는 각기 돌아가면 되었다.

선생님은 거나한 주기를 띠고 담배를 뻐끔뻐끔 빨았고, 쌍자리 밑에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아까 먹은 개구리참외 맛을 다시 한번 생각할 참이었다.

아까 술 받으러 가던 동쪽 잔솔밭 길로, 서산에 뉘엿뉘엿한 석양을 안고, 충충, 노여운 걸음을 걸어오는 사람이, 퍼뜩 아이들의 눈에 띄었다.

그 문두룩한 머리로 보나, 새우등에 뒷짐을 진 것으로 보나, 원두 첨지 유첨지임에 틀림이 없는 것을 그들은 직각하였다.

큰일났다. 유첨지다.”

찬이가 목소리를 죽여 외치며 손가락질한 그편에, 모든 아이의 눈은 쏠리었다. 눈을 아무리 씻고 다시 보아도, 유첨지가 분명하였다.

걱정 마라, 앞을 지르는 도리밖에 없다. 눈치대로 하자꾸나.”

찬은 일어나, 유첨지가 오는 편으로 가는 것이 아니요, 쌍자리 위 선생님께로 올라갔다.

선생님!”

찬은 선생님을 공손히 불렀다.

?”

선생님은 조금 당황해하는 품이, 어느새에 엷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저희는 아까 유첨지네 할멈에게, 욕을 먹었어요.”

찬의 발언이었다.

욕을? 왜 남의 애들을 보고 욕을 해? , 욕을 먹고 다녀? 무슨 욕을?”

선생님은 펄쩍 흥분하였다.

저희보고 자기네 참외를 따먹었다니, 욕도 그런 애매한 욕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따먹은 줄을 아느냐고 물으니, 너희들이 그로 가자마자, 참외를 따가지고 도망한 놈들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너희가 아니냐고요. 그럼, 참외를 따가지고 도망하던 놈들은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으니, 눈이 어두워 자세히는 몰라도, 적삼을 벗은 모양일러라고요. 그럼, 적삼 벗은 것은 다 우리냐고 하니, 그럼 누구였겠느냐고 덮어놓고 뒤집어씌우려 들지 않아요. 눈 어두워 잘 보도 못 하였다며, 할멈은 괴악하게 굴지 않아요. 아닌게아니라, 저희들이 가는데 뒤에서, 웬 놈들이 웃도리를 벗고 솔밭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았지요만.”

찬은 이쯤 해두었다.

그래, 어쨌단 말이냐?”

선생님은 재처 물었다.

할멈이 당토않은 말을 하였으니, 우물쭈물하고 말았지요.”

찬은 실상, 이 이상 더 말을 꾸밀 수는 없었다.

그런 실없는 여편네가 어디 있더란 말이냐? 너희가 그랬을 리는 없지?”

선생님은 한번 다지었다.

없다뿐이겠어요.”

찬도 쾌히 대답을 하였다.

그렇겠지!”

선생님의 쾌한 허락이 내리었다.

이때였다. 선생님에게는 천둥에 개 뛰어들듯, 유첨지가 달려들었다.

선생님. 그래 그래야 옳습니까? 글을 배운다는 애들이 남의 농사를 망쳐 놓아야 옳습니까? 공자 맹자의 도는 그렇습니까?”

유첨지는 제법 험악하게 서둘렀다.

이 무슨 패담을 함부로? 대체 유첨지의 소회는 무엇이기에, 함부로 성현을 비방하느냐 말이오?”

선생님의 노여움은, 이렇게 아이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노여운 얼굴을 하여 가지고, 다음을 지키었다.

참욋값 물리어야 되겠습니다. 남의 걸 생판 대낮에 그게 무슨 짓이람! 아무리 애들이기로서니, 나무꾼도 아니고 글을 배우는 애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첨지는 이렇게 대거리를 하였다.

그렇고 안 그런 것은 따져 보아야 알 것이 아니냐 말요. 눈은 어둡다며, 우리 애들인 것은, 어떻게 알며, 적삼 벗은 아이는 어찌 다 우리 애들이 될 리 있을꼬? 도둑은 앞으로 잡지, 뒤로는 못 잡는다는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함부로! 글 배우는 애들이 그럴 법이 있느냐고, 비방을 할 줄 알 만하면, 글 배우는 아이들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신용을 하면 어떻단 말이오. 그렇소? 그렇지 않소?”

선생님은 점잖이 타이르듯 하였다.

내가 마침 어디를 가고, 우리 마누라가 집에서 지키들 안했겠습니까. 분명히 저애들이 그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그러자 일어난 일이라는데요. 머 틀릴 까닭이 있을라고!”

유첨지는 어성은 낮추었으나 그러나, 의혹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길이란 가기만 하는 것인가요. 저편에서 오기도 하는 것 아녀요. 참외 따간 애들이 웃도리를 벗었다지요. 우리가 참외밭을 지나 얼마 안 가서, 적삼을 벗은 애들 한 떼가 솔밭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았는데요.”

찬은 물론, 어른들 말끝에 참례를 하는 것이, 예에 당치 않은 것쯤은 알았지만, 이 한 말은 이 장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기에 한 것이었다.

그렇지, 댓 놈 되었어요.”

안말 편으로 갔는데.”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입증을 하였다.

! 오비이락이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셈이지. 의심을 혹 할 듯도 한 일이지만, 함부로 죄를 만들 것은 아닌데!”

선생님은 적이 승리를 느낀 판에, 유첨지의 돌아설 길까지도 마련하여 준 셈이었다.

, 내가 집에 없던 탓이었지요. 남을 탓해 무엇 합니까. 제 물건 제 잃어버린 것도 다 제 불찰이지요. 선생님 죄송스럽습니다.”

유첨지는 이런 말을 남겨 놓고 돌아가고야 말았다.

무엇보다도, 종아리를 맞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순박하고 솔직한 유첨지가, 너무도 쉽사리 넘어가고 마는 데는, 오히려 적막한 느낌을 그들에게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실상, 당시의 풍속으로 따지면, 다소 박해는 졌다고 할지나, 아직도 참외서리, 수박서리 따위로 도둑 취급을 하기는 꺼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좀더 전 세월로 치면, 돼지서리, 닭서리 따위로, 그것이 개인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럿이 놀다 먹기 위한 노릇이라면, 나중에 알고도 서로 용서를 하던 것이었으나, 이미 지나간 풍속을 다시 번복하려 들 사람도 없고, 받을 사람도 없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깨었다는 것이 박한 것이었고, 밝은 것이 또한 박한 것이 되고 말았다. 속인 결과요, 또한 속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 툭하면, 고소 소리가 거침새 없이 입에서 튀어나와도, 그것을 예사로 들어넘기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전 말이었다마는, 마을에 살 수 없는, 마을을 배반한 패륜 패덕자에게는, 마을로서 제재를 주는 것이, 받는 자의 의사에 구애가 될 리 없었다. 문 앞에 가시성을 쌓을 수도 있는 것이요, 우물을 못 먹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은 법률을 힘입어, 주재자의 채찍에 복종하는 한은, 마을을 상대로 하여 항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놈의 탓이었거나 말았거나, 세상은 억울하든 말든, 변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좋든 싫든 같이 안 가면 안 될 세월이었지마는, 일 년 뒤도 일 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년 뒤도 이 년 전과 같이, 애써 변하려 들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은 것은, 이 서당이었다.

십 리 밖은 고사하고, 오 리 밖을 맘대로 나가지 못하는 신세에, 글만은 천년 이천년 전 글을 읽는 것이, 어제와 꼭 같은 오늘의 노릇이었다.

오 리, 십 리는 고사하고, 잠잘 때까지도 맘대로 못 하는 굴레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한시가 어려운 이 생활을 조상들은 어찌 참았나, 그들은 어린 속에도, 그 위대한 참을성에 감복을 하였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던 것이었다.

선생님! 안말 춘우가 며칠째 오지 않는 게, 필연코 어디가 아픈가봐요. 잠깐 같이들 가서, 소식을 알고 오고 싶은데요.”

찬의 의젓한 이 말에, 선생님은 못내 감격을 하신 듯이,

그렇지! 옳은 말이다. 동문의 형제라니! 가다뿐이냐. 그런 일을 누가 말리겠니. 가서 다녀들 오너라.”

하시었다. 분명한 허락을 맡았다. 세상에 막을 사람이 누구냐. 그들은 맘껏 기뻤다.

한 모퉁이를 돌았다. , 한 모퉁이를 돌아간다.

꾀란 내고 볼 것이다.”

구경은 하고 볼 것이다.”

히 히히.”

하하 하.”

그들은 실컷 떠들어도 좋았다. 제아무리 떠들기로, 선생님이 알아들으실 이치 만무였다.

그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그들은 꼬리를 치고 놀아날 제, 서당에는 다리 앓는 머슴 춘서가 나타났다. 선생님이 비장한 홍영사를 얻어넣기 위함이었다.

귀한 이 약을 얻자면 언제든지, 지나친 감사가 필요하였다.

선생님! 애들이 역말 갔지요?”

춘서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 안말 저희 동무 문병을 갔지.”

선생님은 예사로 대답을 하였다.

선생님! 속으셨습니다. 하하!”

춘서의 밑도끝도없는 말이었다.

속다니?”

선생님은 눈이 둥그랬다.

역말에 꼭두장이패가 들어왔답니다. 그 애들이 역말, 꼭두장이패 구경을 갔지, 안말 문병을 간 줄 아십니까? 하하 참!”

춘서의 이 말에, 선생님은 벌떡 일어섰다.

춘서는 이 통에 결국, 약을 얻어넣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광목포장 앞에 서서, 돈 없어 들어가든 못하고, 들어가고는 싶고, 십분 주저를 하던 참이었다. 사람이 북적북적한 저편으로, 퍼뜩 선생님의 양 큰 갓이 보였다.

얼굴이 뵈기 전에 갓을 보고 숨었으니, 별 염려는 없으리라, 믿었다.

길 밑 똘로 내려서서, 쥐새끼처럼 무한량 쌀쌀들 기었다.

동구를 잡아들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었다. 실상 일이 없지는 않았다. 상순이가 발목을 삐었으나, 참고 억지로 따라왔다.

서당에는 춘서가 혼자 선하품을 치고 앉았다가,

구경들 잘 했니?”

하고는, 혼자 깔깔대고 웃었다.

구경은 무슨 구경! 쓸데없는 소리 좀 말아요. 얼른 가보. 주인집에서 부릅디다.”

찬은 이렇게, 춘서를 몰아내다시피, 쫓아내고야 말았다. 대체 고따위 불여우를 옆에 놓고는 일이 잘 되지 않을까 염려를 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잠깐 구수회의를 하였다. 저 건너 선생님이 오신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천수 하나 빼놓고, 그들은 선생님 맞으러 마주 나갔다. 선생님은 침묵한 얼굴에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선생님이 말씀을 안 하시니, 그들도 다음 일을 염려하며, 그대로 선생님 뒤를 따라오는 도리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신 방에는, 천수가 서 있고, 그 앞에는 막걸리 술상이 공손히 놓여 있었다.

선생님이 앉으시면 잡수시기 좋은 위치였다.

이게 웬 것이냐?”

선생님은 천수를 보시었다.

제 누이가 근친 왔어요. 술을 가지고 왔는데, 선생님 한잔 갖다 드리라고, 그래 가져왔어요.”

천수의 구김새 없는 천연스러운 대답이었다.

! 그려! 부어라.”

말을 마친 선생님은 천수가 따른 술을 맛있게 자시었다. 연하여 석 잔을 자시도록, 아이들에게는 이렇단 말이 없었다.

춘우 병은 대단친 않아요. 머리가 좀 아픈데, 나으면 곧 오겠다고요.”

찬은 이렇게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 것을 깨달은 것같이 보이었다.

참말이냐? 고이한 놈들!”

선생님은 은근히 한번 얼러 본 모양이었다. 아까보다는 노여움도 훨썩 풀린 것같이 보였다.

인제 다 나았으니, 내일이나 모레는 꼭 온대요.”

찬은 여전히 춘우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었다.

그럼, 어떤 말을 믿어야 옳단 말이냐? 나는 헛걸음을 했단 말이냐? 너희들 역말 갔었지?”

선생님은 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

찬은 도무지 모를 말씀이란, 어색한 표였다. 좌중이 꼭 같은 표정이었다.

구경 말이다. 구경 가지 않았었니? 나를 속였지 이놈들, 고이한 놈들 같으니!”

하면서도 선생님은 실상, 노여움은 아까보다도 더 풀리었다.

역말, 무슨 구경이 있나요?”

이 말은 찬의 혼자말만 아니란 듯, 좌중은 실로 의외라고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그러면, 춘서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구나! 남의 늙은이 선약(仙藥)을 공으로 갖다 쓰고, 남의 늙은이 공걸음까지 시켜! 그런 공짜 약은 좀 안 주고도 볼 일이로구나.”

선생님은 남은 술을 다시 따르도록 명하였다.

이쯤 되었으면 종아리는 확실히 면하였다. 춘서가 원하는 홍영사가 위태위태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돌아온 제자들에게 안심을 하고, 다시 옛날의 업을 계속하여 가르칠 수가 있었다. 추호도 틀림이 없는 옛날 그 법, 그 사상이었다. 천지가 변한대도 이것만은 변할 이치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성으로 가르치려 하였다. 그러나, 철모르는 제자의 마음 한구석에, 자신도 모르게 싹트는 동요란, 은폐할래야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시대와 시대와의 조화되지 못한 결합에는, 한갓 형식과 기만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

읍에 설치된 학교의 학생이 되어지라고, 학교 선생에게 끌려가던 윤섭이가, 읍 거의 가서는 똥을 누는 체하고, 보리밭골로 도망하여 왔다는 이야기가, 혹 지지를 받기도 하고, 혹 비방을 받게쯤, 세상이 되었다.

지지하는 편의 말은, 역시 별것이 아니요, 그까짓 왜놈 말은 배워서 무엇 하랴. 꾹 박혀 한문이나 읽자는 것이요, 비방하는 패는, 제아무리 왜놈이란대도 부려먹을 생각을 하면, 옳은 기술 잘못 일러줄 이치 없으니, 가르쳐 준다는 것, 안 배울 까닭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섭은 윤섭으로서, 보리밭골을 타고 도망해 온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머리를 깎기가 싫어서 도망을 한 것이었다. 당시 학교 입학이란 우선,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 머리를 기왕 깎은 바에는 할 수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고, 머리를 깎지 않으면, 종이 연필 다 당해 주고, 아무리 입학을 시켰어야, 도망하는 율이 훨썩 더 많으므로, 우선 학교를 다니게 하자니,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머리부터 깎아 놓는 노릇이라 하였다.

그러나, 학교가 장차 학생 없어 폐교할 염려는 없었다. 시간을 정하여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한 뒤에는 가로 뛰든지, 세로 뛰든지, 제 맘대로란 것이, 서당꾼의 마음을 끌었고, 공부를 파하면 밤은 자기 것이란 데, 더욱 마음이 끌리었다. 더욱이 노는 날이 주일마다 있고, 책을 한 시간에 한 가지씩 배우고, 이것도 저것도 구미가 당기는 대로 치면, 한이 없을 판이었다.

왜놈이 설시한 학교라서 언짢은 감정을 어린 그들이 가질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왜놈은 끝까지 싫었다. 그러나 학교는 다니고 싶었다.

오랫동안 간수하여 길게 아끼던 머리를 깎는 것이 아까울 것 같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더욱 남들이 기르는 머리를 혼자만 깎고 나선다는 것이 멋쩍을 것을 아주 생각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부형들이 아끼고, 떠드는 그런 정도까지는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왜놈 모습을 즐겨하고는 싶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는 왜놈만 깎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았다. 옛날 중이 깎았고, 서양 사람들이 깎았다는 것을, 왜놈도 본을 받았다는 것을, 부형들이 모를 이치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 학교를 보내 주셔요.”

찬은 어떤 날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보았다.

글이 배우고 싶지 않단 말이지?”

아버지는 이렇게 반문을 하셨다.

학교에 간들 글을 안 배우겠어요.”

아들은 실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기왕 시작을 한 것이니, 좀더 읽어 보아라. 이 장 떡이 싼가, 저 장 떡이 싼가,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은 아들의 용기를 돋워 주었을 리 만무였다.

찬은 더 조르지 못하였다. 주춤주춤하다 보니, 옛 업을 그대로 계속한 것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 앉은 새 모양이라고는 하지마는, 한 몸을 바친 업이라서, 찬의 한문 공부는 진경이 과연 없지 않아 있었다. 중용 대학을 읽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자기로는 깜냥대로 차려 읽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동무의 부러운 존재가 자기란 것을, 느껴 얻으면 느껴 얻을수록,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재분이 있다고, 자신을 하면 할수록, 찬은 더욱 현재의 위치에 안정을 지탱하기가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이 마을, 이 서당에서는 잊었던, 진호가 돌아왔다.

그는 왜놈처럼 깎은 대가리로, 선생님께, 조선절을 하였다. 선생님은 아예, 마땅치 않았으나, 옛날의 동무들은 동무들대로 반가웠다.

정다운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선생님이 안 계신 으슥한 곳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

학도들이 많으니?”

찬이가 물었다.

수백 명 된단다.”

진호의 대답이었다.

수백 명?”

찬은 놀랐다.

한 방에 몇십 명씩 되니까는.”

진호의 설명이었다.

그럼 한 방에서 배우는 사람만 해도, 우리 동네 두레꾼보다 많겠다. 방이 얼마나 크기에?”

찬 이외의 동무가 이렇게 쐐기질을 하였다.

그럼, 우리 서당 방 같겠니! 사람이 개미새끼 아닌 바에야.”

찬은 이러고 웃었다.

열 곱도 넘지. 학교서 꼭 같이 만들어 준 걸상에 걸터앉아서, 학교서 만들어 준 책상에다, 학교에서 준 같은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 것이 아니거든. 종을 땡땡 치면 공부를 시작하고, 종을 땡땡 치면 공부를 파하고, 놀러 나온단 말이다. 놀 시간에는, 뛰고 소리지르고 씨름하고 별짓 다 한대도, 선생님이 보셔도 암말도 안 하시거든!”

진호는 자기 구변이 부족하여 말을 다 못 하는 것이 유감인 눈치였다.

배우는 것은 무엇인데?”

어떤 동무가 물었다.

산술이랑, 역사랑, 지리랑, 한문도 배우고, 그렇지 머!”

진호는 되는대로 주워쳐 보았다.

배우는 게 어찌 그리 많으니? 어이구! 그런 걸 우리는 한문 한 가지 가지고, 요 꼴 요 모양이로구나! 왜말은 안 배우니?”

어떤 아이는 또 이렇게 물었다.

정작, 왜말을 안 배울 까닭이 있겠니! 어느 놈이 내인 법이라고, 너도 갑갑하긴!”

한 아이가, 한 아이의 말을 반박한 말이었다.

왜말 어렵데? 글보다 어렵데?”

또 다른 아이의 질문이었다. 글이란 한문을 가리킨 것인 모양이었다.

어렵긴 뭘 어려워. 배우면 배웠지! 한문보다 어렵잖아.”

진호는 자신 있게 대답을 하여 주었다.

그 숱한 것을 어떻게 다 배우니? 종아리 맞다 볼일 못 보겠다.”

어떤 아이의 공포였다.

종아리는?”

진호는 반문을 하였다.

배운 걸 다 못 외면 말야. 못 외면 종아리 맞았지 별수 있어!”

그 아이의 해석이었다.

외는 것이 아니거든! 알면 그만야. 무작정 덮어놓고, 뜻이야 알든 모르든 외려만 드는 것은, 서당 공부란다. 보고 잘 읽고, 뜻만 알면 그만이란다.”

진호는 과거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이 정말 다행이란 눈치였다.

그럼 거저 먹기 아니냐? 외지 않으면야, 그것 할 만하겠다 야!”

그 아이는 이 점에 비상한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 애뿐 아니라, 여기에는 더욱, 다들 동감인 모양이었다.

가짓수는 많다지만, 재미가 각각 다르고, 그림을 칠판에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걸어 놓고, 설명을 하니, 알기도 쉽단 말이다. 그뿐인가! 토요일은 반나절만 하면 되고, 일요일은 통째로 쉬고, 그런데 이레 만에는 꼭꼭 틀림없이 돌아온단 말이다.”

진호는 동무들이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고는, 더욱 말에 힘을 들였다.

다시 서당에 올 생각은 그럼, 나지 않겠지?”

찬은 모처럼 이렇게 물었다.

어이구! 옛날 일을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또 와? 없다 야. 너희들 무엇 하러 이러고, 답답한 방에서만 꿇어 엎드리어 있니? 싫다 야, 나는 학교가 좋더라.”

진호는 얼굴에 못내 냉소까지 띤 것같이도 보였다.

좌중은 진호의 이 말에 감정이 좋지 안하였다. 일종의 모욕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진호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네 자신을 스스로 비웃어 마땅한 것이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이단자 진호는 돌아가고 말았다. 마는, 그가 뿌려 놓은 이단의 씨, 개화에 대한 열망은 가시려야 가실 길이 없었다.

한여름 산에 잡목이 무성할 때야, 누가 소나무 푸른 줄을 알랬더냐. 그러나 가을 서리 한번 온 뒤의 산을 보아라. 가을 잎이 바람 앞에, 우수수 떨어지는 꼴을! 천지에 눈발이 날리고 온 산이 텅 비었을 제, 오직 새파랗게 사시장청 옛 빛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소나무가 아니냐 말이다. 사람은 앞을 내다보고, 살아야 한다. 발등만 들여다보면 되느냐 말이다. 사람들이, 개화 개화 하고, 개화에 제법 침을 삼키는 모양이지만, 철을 모르고 덤볐다가는, 여름 나비 불꽃에 타죽는 줄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 개화란 말은 개왜(改倭), 왜놈으로 고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어든 입지 말랬는데, 오랑캐의 의복을 입으려 들고, 선왕의 법언(法言)이 아니어든 하들 말랬는데, 오랑캐 말 못 배워 안달이라니, 이런 말세의 풍조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잃어버린 나라는 찾기도 전에, 절로 미친단 말야! 깎은 대가리거든, 애초 깎은 대가리끼리 상종을 하면 될 것이 아니냐. 제 따위 중대가리 절을 누가 그리 탐탁히 알았더냐! 제 노릇 저 좋은 대로 했으면 했지 왜, 남의 눈치를 살살 보고 다니느냐 말이다. 당초에, 그따위 놈들과는 놀도 말아라. 들어서 이로울 것이 없으면 들을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무슨 말로 꼬이든지, 당초에, 그따위 놈들의 꼬임에는 넘어가들 말아라. 큰일날라. 부탁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훈계하신 것은, 진호가 왔다 간, 바로 뒤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증왕부터 선생님의 애국심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게서 우러난, 왜놈을 미워하는 마음을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뿐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친척들에게서도, 마을 사람에게서도, 조선 사람이면 그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요, 느낄 수 있는 심정이었다.

건넛마을 김진사란 양반이 계시었다. 이 양반은 합병 이후로, 세금 안 내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오르건 말건, 그까짓 왜놈에게 세금을 내!”

진사님은 당당히 선언을 하였다. 아닌게아니라, 자기 손으로 세금 한푼 내본 일이 없었다. 잡혀가도 두려울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잡혀가 본 일도 없고, 집행을 당해 본 일도 없었다. 아들이 아버지 모르게 세금을 낸 까닭이었다.

이 이야기는 근동에 유명한 이야기로, 찬이도, 다른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였다.

이 세금을 안 내고도 낸 이야기는 남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진사님의 마음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남이야 웃건 말건, 진사님은 진사님대로, 당신은 언제든지 세금 한푼 안 내는 배일파였다.

*

마을 앞으로 신작로가 났다. 그렇게 넓고 곧은 길을, 마을 사람은 평생 본 일이 없었다.

곧기를 위하여는 남의 산소를 피할 것이 없고, 사는 집을 가릴 것이 없었다. 산을 당하면 산을 끊고, 골을 당하면 골을 메우고, 논이고 밭이고 헤아릴 것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뚫고 나가는 것이 그놈의 특성이었다.

다만 그것을 믿는 작인이, 내 논 내 밭머리에 앉아, 통곡을 하거나 말거나, 푯말 한번 박았으면, 신작로 그놈은 그것들을 무찌르고야 말았다.

친구가 친구의 논밭을 끊었다 하여, 친척이 친척의 무덤을 팠다 하여, 집을 헐었다 하여, 원망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국사에 강제로 동원이 된 나라의 일꾼이기 때문이었다.

옛 길 그대로 두면 어때서, 사람을 못살게 굴어, 하였자, 그것은 한갓 방 안 공론에 지나지 못한 것이었다.

신작로가 난 뒤에는, 소나 말이 끌지 않고도, 그보다 몇 배 빠른 자동차란 놈이, 우레 같은 소리를 치며, 달음질치기 시작하였다.

한동안은 이놈을 구경하고자, 깊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모여들었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놈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밥을 먹다가라도 일어서서 보고, 이놈이 지나간 뒤에야, 다시 앉아 숟가락을 잡는 것이 거의 버릇같이 되었다.

세상에 별 조화도! 끌지 않아도, 저렇게, 끄는 놈 몇 배 이상으로 잘 달아나는 놈이 있다! 왜놈들 재주는 아무렇든 용하다!”

평생 못 보던 괴물, 이상한 기계에 대한, 마을 사람의 의혹은, 좀처럼 풀릴 줄을 몰랐다.

논이 없어졌든 밭이 없어졌든, 평생 처음,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구경을 하였다.

찬이도, 이 총중의 한 사람이었다. 찬의 밭도 이 길에 반 이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과 같이, 자동차 본 이야기를 이 길 위에서 하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이렇게, 마을 사람들 구경만 시켜 주는 것이 아니었다. 만돌네 돼지 한 마리가 이놈에게 치여, 뼈가 으스러져 못쓰게 되었어도, 손해 한푼 못 받았고, 김첨지네 손자가 길에서 놀다가 하마터면 치여 죽는 것을,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이가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다. 자동차는 급정거를 하였다. 어린애는 자동차 밑에서 설설 기어나왔다. 어떻게 들어갔다, 어떻게 기어나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이 임자는 아이가 산 것만 기뻤다. 자동차 임자가, 아이 잘못 보았다고 퍼붓는 책망도 달게 받았다. 양복 입고 구두 신은 왜놈이 발을 구르며 하는 왜말이, 그런 책망인가 보다고, 누가 일러주니 그런 줄 알았지, 달리 안 것은 아니었다.

, 그놈의 것, 돼지를 기를 수가 있나! 자식을 기를 수가 있나!”

마을 사람들은, 이 듣도 보도 못 하던 괴물 자동차에 대하여, 공포와 탄식을 갖게도 되었다. 도대체, 이것은 길이 나기 때문이라 하여, 신작로를 더욱 탓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논에를 갈 때도, 장에를 갈 때도, 이른 아침 이슬 없는 이 길을 밟으며, 혹은 그믐 칠야에 등불 없는 이 길을 밟으며, 어쨌든 좋기는 좋다고, 이 길 칭찬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길은 통하는 것이요, 다니는 것이니,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맘대로 다니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길이 생기면서부터, 왜놈의 자전거가 점점 더욱 늘기 시작하였다. 이것 한 가지만 보더라도, 읍내에 왜관이 훨썩 늘었다는 것이, 적실한 말이었다.

그들이 앞들로 개파리 퍼지듯 한 것은, 다만 토지를 사고자, 답품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저당잡을 논 답품까지 겸한 것이었다. 통역을 통하지 않아도, 쉬운 말은 제법 지껄이는 분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좋겠다. 길 닦아 놓았것다. 빚으로, 차압한 것, 도조로 도둑질한 것, 몇천 석, 몇만 석이면 못 가져갈 염려 있는가!”

마을의 탄식은 더더욱 연발을 하게 되었다.

이때를 비롯하여, 고향을 쫓겨난 타고을 사람들이, 정처없이 가다 가다, 지친 발을 이 마을에 쉬게 된 것도, 필시 이 신작로가 이 마을 앞으로 통한 관계였을 것이었다.

그들은 남의 곁방 한 칸을 얻었으면 다행한 일이었고, 그도 못 하면 움을 모았다가, 남의 산에서 나무를 도둑으로 베어다가라도, 이듬해에는 토담집을 한 칸 짓고 만다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저앉은 곳이, 녹두밭머리였다. 사람은 많고 논은 적은데, 날노동 품삯이 별로 높을 리 없었으니, 싸나마 일을 할 수 있는 것만 고마울 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어디 가면, 이 판에 좋은 데가 있을 것 같지 않아, 한해 두해 주저앉고 마는 신세였다.

왜정 밑에 몰락하는 본바닥 가난과 터 바깥 가난은 한데 어울려, 밑도 없는 깊은 구렁으로 굴러떨어지기로만 작정이었다.

이즈음에, 찬이는 머리를 깎았다. 찬이가 머리를 깎았다니, 찬이가 갑자기 개화를 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못하였다.

찬이가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옛날 그 선생님의 의사가 아니었을 것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찬은 결국, 선생님을 갈아 섬기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아버지의 별 이유 있는 의사도 아니었고, 찬의 각별한 취택도 아니었다. 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아버지의, 아들 가르치자는 정성은 갈수록 더하면 더해졌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아버지의 살림은 점점 더욱 뒷걸음을 쳤다.

논의 소출은 늘지 않고, 도조는 올랐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혼자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세금은 이것저것, 하지 않은 세궁민도 빼놓으려 들지 않고, 차차 더욱 오르게 되었다. 도조를 가지고 다투다가는 논이 떨어질 게요, 세금을 안 내다가는 솥단지만 빼갈 뿐이 아니라, 그나마 살림을 못 할 것이었다. 끝모를 인내에 되는대로 되는 꼴을 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문제는 아들 찬에게로 미친다. 공부는 시켜야겠고, 다른 것은 고사, 보리 한 섬, 벼 한 섬, 월량을 도무지 짜낸다는 도리가 없었다.

이때에 마침, 요행한 길이 열리었다. 멀리서 새로 이사를 온, 건넛마을 김선생님이 제자를 물색하는데, 월량은 받지 않는 대신, 당신 아들의 벗이 될 만한 아이를 고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비상한 노력을 하였다. 과히 어렵지 않게, 교섭에 성공을 하였다.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을 구멍이 있다고, 사람은 모든 것을 단념만 할 것도 아니로구나! 이것이 너의 공부 복인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깎았을망정, 우리네 본바닥 글로는 당할 수 없는 모양이요, 월량 한푼 없는 것은 대단히 미안한 일이나, 자기는 돈 받아먹자는 훈장질이 목적이 아니요, 자기 아들을 가르치기 위한 노릇이라니, 더욱 좋지 않으냐 말이다.”

아버지는 무한 기뻐하였다. 딴 트집을 잡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들대로 바라는 것이 있던 것이었다. 서당에서 서당으로 선생을 바꿔 가는 것이 그의 소원이 아니었다. 서당을 학교로 바꾸는 것이, 그의 온통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소원이 그렇게 쉽게 달성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새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공손한 제자가 되었다. 찬의 첫눈에 제일 먼저 유표하게 느낀 것은 별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머리를 깎았고, 제자는 머리를 길게 따늘인 것이었다. 이 선생님 밑에 이 머리채는 길게 부지할 이치가 없을 것을 생각하면, 딴은 괜찮게 일이 되는 모양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문하에 들어온 지 한 달 다 못 가서였다.

찬아! 너도 그 머릴 깎아 버려라. 첫째 위생상 좋으니라, 목이 우선 굵어지느니라. 아버지께 여쭈어라.”

새 선생님의 새로운 말씀이었다. 찬으로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범연히 들었을 리 만무였다.

새 선생님 말씀을 한마디 빼놓지 않고, 아버지께 옮겨 전해 드리었다.

!”

하고는, 아버지는 무한 생각이었다.

그래, 네 생각에는 어떠냐? 깎고 싶으니?”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의 의사를 물었다.

.”

찬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할 수 없다. 네 맘대로 해라.”

아버지의 허락은 이렇게 내리고야 말았다.

이튿날 찬은, 까까중머리로, 내 집에 돌아왔다.

중머리가 그토록 좋으냐?”

아버지는 딴 몰골이 되어 돌아온 내 아들을 유심히 보았다. 대단히 섭섭한 모양이었다.

종이에 싼 머리카락 뭉치를, 찬은 어머니께 드리었을 제, 어머니는 그것을 펴들고, 눈물을 두어 방울 떨어뜨리었다.

이 정경을 본, 찬은 자기도 어쩐지 눈물이 솟아오른 모양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러나, 별일없이, 일은 될 대로 되고 만 것이었다. 궁금할 때, 중대가리를 싸악싸악 문지르는 맛이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한 맛이었다.

찬은 이렇게 머리를 깎았다. 시원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문을 배우고 있는 것도 또한,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때는 이미 늦기 시작하였다.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속한 사람은 이미, 학교를 나와 군서기, 측량기수 따위를 다니며 활개를 쳤다.

일본말깨나 하면 반드시 등용이 되었고, 등용이 되면, 뻣내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아는 세상이 되었다. 군주사란, 옛날 아전이 아니냐고, 안 보는 데서는들 입을 삐쭉거리었다. 그러나, 당하고 보면, 대우는 권리를 쥔 놈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글씨깨나 쓸 줄을 아는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일본말을 하나, 못 하나, 면서기 운동을 다니고, 옛날 풍원에 불과한 것이라고 귀먹은 비방을 듣던 면장이, 돈 있는 양반에게, 닭 잡고 주는 술 대접을 받았다.

면서기는 권업이나 부역 감독을 나오면, 면민을 풀 먹은 개 나무라듯 해야, 반항 한마디 못 하고, 뺨 안 맞은 것만 다행으로 알 판이었다. 금테 두른 군주사에게까지 갈 것도 없다. 되잖게 이론을 캐려 드는 완만한 백성은 공무집행 방해로 붙이면 될 판이었다.

이것이 모두, 시키는 왜놈이 한 놈이면, 그 밑에 열 명 백 명, 조선놈이 붙어서, 자치가 자치를 잡아먹는 악독한 싸움이었다.

이따위 조선놈 등쌀에, 조선놈은 가마에 든 고기가 된 줄 알고, 왜놈은 깔깔 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치 싸게 덤비는 놈이야, 찬밥 한 술이라도 얻어먹는다. , 못생겨 굶어죽는 것을 누가 알아, 하면 그뿐이요, 추세꾼을 욕하는 놈은, 추세꾼에게, 봉변을 톡톡히 당하고, 손이 발 되도록 빌고, 도로 붙을 놈들이다, 염려 말고, 누르는 길에 바짝 눌러라, 염려 없다. 하잘것없는 조선놈들이다, 예의 동방은 무슨 얼어죽을 예의 동방! 머리 안 깎고, 발샅의 때 후비는 것이, 예의 동방이냐! 눌러라, 누른 뒤에 풀어 주어야, 천황 폐하의 고마우신 덕을 알리라. 놈들은 이러고 냉소를 하였음직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농부가 쇠스랑을 들고 들에 서서, 외치는 소리를, 놈들은 들었을 이치가 없다.

이 땅은 지어 무엇 해! 왜놈 다 갖다 주고 고맙단 인사 한마디 못 들을걸!”

한 부녀가 유월 폭양에 보리 곱삶이를 지으며 외친 소리를 놈들이 들었을 리 만무였다.

이 일은 뉘 놈의 아가리에들 들이자고 하는 일일까! 여편네 등골까지, 빼먹는 놈들을 위해서냐!”

한 농부의 말과 한 부녀의 말은, 곧 농부들의 말이었고, 부녀들의 말이었다.

내 너를 가르치는 뜻은, 왜놈의 종 노릇을 하여, 조선놈을 죽인 공으로 찬밥덩이를 얻어 오란 것은 아니거든!”

학교는 못 갔을망정, 아버지의 이 말씀을 찬이 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많이 들은 관계만은 아닐 것이었다.

*

장에 갔던 창쇠가, 지게조차 벗어 내버리고 돌아왔다. 창선이는 저녁때까지 오지 않았다. 누가 보니, 두름으로 엮인 사람 중에 창선이도 끼여, 경찰서로 잡혀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수천 군중이 합세를 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장판을 휩쓰니, 총소리 탕탕 타탕탕, 앞사람이 맞아 쓰러지는 것을, 그것을 밟고는 넘어뛰며, 잡히고, 흩어질 때까지,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부른 이날은 곧, 천구백십구년 삼월 일일이었다.

장에서 늦도록 못 돌아온 사람은 창선이뿐이 아니었다. 치서뿐이 아니었다. 광운이뿐이 아니었다. 판돌이뿐이 아니었다.

산 산 봉우리 봉우리마다, 해가 지기도 전에 불꽃이 하늘로 치달았다. 거기서는 독립을 부르짖는 웅참한 소리가 들리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서 준비한 마을 뒷산으로 몰려, 또한 불을 놓고, 소리소리 맘껏 높여 만세를 부르고 부르고,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소리소리 가운데 금년으로 열다섯 살 된 찬의 목소리가 섞인 것은 물론이었다. 되도록 크게, 악을 써서 불렀다. 목이 쉬고 마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산허리를 단단히 지켜라. 돌들을 준비하였다가, 수상한 놈이 있거든, 돌로 때려죽여라. 총도 무서울 것 없다. 죽일 놈은 죽이면 그만 아니냐!”

순오형님의 목소리였다. 찬은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이 산에도 준비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실상 준비가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 독립이 정말 되고 안 되는 것을 물을 겨를도 실상 없었다. 이 한마디 독립만세를 부르는 그것이 기뻤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실상, 우리 찬, 소년 한 사람만의 심경도 아닐 것이었다.

이 마을서는 누구 한 사람 어떤 연락을 받았다거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서울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이요, 지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지시나, 연락이 없었다고, 그것을 탓할 그들이 아니었다. 그런 여유도, 비판력도, 그들은 가질 새가 없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억울한 감정이, 틈을 타 폭발을 하였으며, 맘껏 그리운 독립만세를, 죽도록 힘있게 불러 본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대도회는 모르되, 마을에서는 마을에, 사람에게서는 사람에게, 말없이 전하게 된 것이었다.

찬은 더욱 소리를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자기는 답답한 것을 느끼었다. 마음과는 딴판으로, 자기 귀에 오는 효과는 줄어들었다.

이미 목이 쉰 모양이었다. 불꽃을 좀더 높이는 것이, 이편의 열렬한 뜻을 더 드날리는 좋은 방법인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목이 쉰 찬은 여력을 기울여, 이 불꽃을 한껏 크게 하여, 더더 멀리, 높이, 이 밤을 장엄하게 장식하고 싶은 나머지, 나무를 대는 데 주력을 하였다.

산 산, 봉우리 봉우리의 불과 불은 여전히 쇠할 줄을 몰랐다. 찬은 무한 기뻤다. 거기 뵈는 열렬한 불꽃은 곧 거기 모인 조선 사람의 열렬한 마음을 보인 것이었다.

방비는 하였으나, 방해를 하는 적은 마침내 오지 안하였다. 이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싱거운 일이었다.

나무가 없을 때까지, 불이 다 탈 때까지, 목에서 피가 나올 지경까지, 그들은 산에서 버티다가, 결국은 마을로 내려오고야 말았다.

이튿날부터는 궁벽한 이 마을에도 하나둘, 소식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장터마다, 총맞아 죽은 소문이 들어왔다. 어디 주재소를 불살라 버린 무용담이 들어왔다. 붉은 물총을 놓아, 가장 용감한 사람을 잡은 이야기가 들어왔다. 붉은 물을 흰 옷에, 쏘았다가, 단체가 풀린 뒤에, 골목에 매복하였다가, 하나씩 둘씩 잡아들여 갔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필시 이 물총을 맞았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틀이 지나도, 그들은 돌아오지 안하였다.

사흘 되던 날, 그들은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왔으나, 그들은 자리에 앉들 못하였다. 잔악한 태형을, 볼기가 해지도록, 함부로 실컷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한 짓을 후회하지 않았다. 부모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갑자기, 마을의 영웅으로, 마을 소년들에게, 추대를 받았다. 그들은 볼기가 쑤시고 아팠으나 그러나, 기뻤다. 이 통에 만세 못 부를 올바른 조선 사람이 없었을 터이니, 그들에게 엉터리없는 공매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찬은 자기도 한번, 저렇게 만세를 부르고, 그렇게 볼기를 맞아 보았더라면, 하는 공상을 해보았다. 자기는 실상, 그보다도, 어젯밤엔가는, 장에서 제일 앞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뛰어가다, 총을 한 방 가슴에 맞고, 콱 엎드러졌을 제 이편 등을 쾅쾅 밟고, 소리소리를 치며 넘어가는 것이, 아프지도 않고, 여간 유쾌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았구나! 생각을 하다, 깨니, 꿈이 분명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모든 것을 실지로, 당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이 아직도 꽉 잠겨, 말 한마디 맘대로 통할 수도 없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똑바른 사실이었다.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불러 본 것이 사실이었다. 저지난밤 일이, 꿈같았으나 그러나, 그것은 똑바른 사실이었다.

찬은 은근히 냉소를 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당한 자기도 스스로, 명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지난 이야기는, 수가 점점 더욱 늘었으나 그러나, 앞일에 대하여는 잠잠할 뿐이 아니었다. 답답할 판이었다.

유치장이 터질 만큼, 그들의 죄인은 잡히었고, 그들의 질서는 잡히는 것같이 떠드는 것은, 그들, 그놈들뿐이었다.

조선놈의 의사와는 달리, 세상은 다시 깜깜한 속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가 아니라, 믿게쯤 되었다.

될 일인가! 아가리에 문 고기를 그처럼 쉽게 내놓을 일인가? 만세 부른다고 될, 조선 독립이면, 왜 지금까지 독립이 못 되었겠나?”

그럼, 안 부른다고 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라는 것은, 이쪽의 의사란 말일세!”

보채지 않아도, 조선 독립을 줄 테란 말인가? 이 사람, 정신을 차리나?”

묵은 이야기가 아닌가.”

묵고 새로울 것이 있나!”

답답하단 말일세.”

그야, 자네 못지않은 나일 겔세.”

찬은 마을 어떤 사람들의 이런 대화를 들을수록, 더욱 답답하였다.

이 통에 도리어, 껑뚱 뛰어올라가고 기쁜 사람은 아무래도, 읍내 김순사밖에 없을 모양이었다.

놓아라 그까짓 것, 하고 놓았던지 어쨌던지는 몰라도, 만세 부르는 군중을 향하여 그가 총을 놓는 것도, 사람들은 보았고, 그 총에 사람들이 맞아 죽는 것도, 사람들은 보았다. 조선놈이 조선독립만세 부르는 사람을 쏘아 죽인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낱 순사가 경부보로 껑뚱 뛰어올라갔다. 조선놈 조선 사람 죽인 효과가 이토록 빠른 것을 조선 사람들은 자세히 보았다.

찬이 같은 소년도 잘 아는, 이 통에, 이 근방서는 제일 귀히 된 사람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 형을 잃은 아우, 아들을 잃은 아버지, 딸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슬픔대로, 왜관 속에 다시 벌어진 웃음은 웃음대로, 제각각 방향을 잡았다.

 

2

아저씨는 그래, 언제든지 이러고 있을 작정이오?”

이러고 있잖으면?”

케케묵은 판박이 속에, 무슨 맛이, 그리 달콤한 맛이, 들었단 말요? 우리 보기에는 쥐 오줌, 좀의 똥밖에는 뵈지 않던데!”

그야,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 그것은 너무 과도한 말이겠지!”

그렇다면?”

별것은 아니겠지 뭐!”

곰팡내?”

더러는 곰팡도 나고, 곰팡이 나지 않은 것도 더러 있고…….”

그래, 호랑이가 담배를 먹었으면, 노루는 무엇을 했더란 말이오? 옛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비웃을 것은 아냐. 이제 사람은 옛사람의 자손이니까.”

그렇지 않댔소 누가! 코앞에 닥친 급한 이야기를 제폐하고, 할머니 치마꼬리에 매달려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철모르는 애들의 수작이 답답하단 말이었지. 용서하오. 노여워하시던 마오.”

그렇게 말하면 그럴듯도 하고, 그렇잖게 생각을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알숭달숭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닌가베!”

그러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생긴 것이오? 모처럼 왔으니, 구경 좀 시켜 주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 내밀 것까지 있겠나. 오늘은 옛날의 뒤이니까, 옛날을 뒤적거려 본다는 수작이었지 뭐 별것이었겠나!”

옳소이다. 그 옛날을 뒤적거리는 것이 오늘의 자기인 것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옛날의 자기가 아니거든, 오늘의 자기란 말이오. 그렇잖소?”

그야 물론 그 말이 옳겠지.”

그렇잖소 글쎄! 수천 년 뒤 사람이 왜 수천 년 전 사람 행세를 하려 드느냔 말이오, 그 무슨 모순이오. 될 수나 있는 일이오? 내 비록 한문에는 무식지만.”

그야 어디 무식한 소린가!”

유식한 소리란대도, 별것이겠소. 세상 형편 돌아가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

알아도 별수가 없단 말이라.”

수가 어찌 없단 말이오?”

처지가 한걸음 나설 수가 없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

수가 있소.”

수가?”

아까운 재주를 썩일 것이 있소. 서울을 가면, 아저씨와 같이 뒤떨어진 분을 도와 주는 데가 있소.”

서울!”

가요, 나와 같이. 가면 설마 아버지께서 등 밀어 쫓기야 하시겠소. 밥 얻어먹으면 될 것 아니오.”

……

몇 해 걸 짧은 동안에 속성시키는 데가 있소. 염치 체면 어쩔 것 없이, 눈 딱 감고, 나만 따라가요. 글쎄.”

고마워.”

 

찬이가 이런 대화를, 척질 되는 이춘수라는 중학생과 주고받은 것은,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되는 해도 저문 어느 날, 춘수의 시골집에서인 것이었다.

춘수의 아버지요, 찬의 형뻘이 되는 분은 춘수를 공부시킨다는 이유로, 시골집은 시골집대로 두고, 서울 살림을, 몇 해 전에 시작하였다.

서울 살림이라 하면, 당시의 시골 사람은 덮어놓고 겁을 집어먹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반대로, 춘수 아버지의 서울 살림은, 절약생활임에 틀림이 없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시골서는 유명하던 부자가 서울서는 명색이 없게 되었다. 시골서처럼 남들이 떠받들어 주지 않는 것은 섭섭한 일이로되, 그 대신 무는 세금이 시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적었고, 반강제성을 띤 기부도 우선 적었다. 귀찮은 구걸꾼이 비싼 기차를 타고 오지 않으면 안 되므로,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시골 웬만한 지주들이 서울로 모여들 만도 한 것이었다. 당시의 서울을 일컬어 생산은 할 줄을 모르고 소비만 할 줄 아는, 지주의 도시라 하였기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찬은 서울을 가기로 하였다. 권임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호의요, 아버지의 호의는 아니었다. 절약에 맛을 들인 춘수 아버지의 심정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나중이요, 출발은 우선이었다. 우선 가놓고 볼 일이었다. 춘수와 같이 서울 갈 날짜를 탄탄히 정해 놓은 찬은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서울을 가겠어요.”

찬은 이렇게 말씀을 사뢰었다.

서울은 뜻밖에 왜?”

아버지의 의혹도 딴은 그럴듯한 것이었다.

춘수가 같이 가재요. 같이 학교를 다니자고요. 밥은 저희 집에서 먹고.”

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말 요령을 추리어들기에 힘을 썼다.

춘수가! 어린 맘에 고마운 생각이다. 마는!”

아버지는 어딘지 마음이 놓여지지 않는 눈치였다.

가놓고 볼 일이 아녀요. 가보겠습니다.”

찬은 이렇게 다시 한번 단안을 지어 보았다.

가면 그래, 언제 간단 말이냐?”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모레는 떠나야겠습니다.”

찬은 대답을 하였다.

모레?”

하고, 이번에 놀란 분은 어머니였다.

서둘 때는 서둘러야지요. 세상사를 누가 또 알겠습니까.”

열일곱 된 소년의 말로는 지나치게 노숙한 말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옷을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은 고사하고, 빨래라도 해 입고 가야 할 것이 아니냐?”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아들 옷 걱정을 하였다.

옷이 상관 있습니까. 나중에 부쳐 주십시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여 드렸다.

그렇다. 새옷 헌옷을 가려 주저리할 때냐! 내 편지 한 장을 써주마, 가지고 가보아라.”

아버지의 정숙한 판결이었다.

이틀 밤을 자고, 찬은 고향을 떠났다. 머리는 기왕 깎은 머리였으니까, 쓰던 개떡모자를 집어얹으면 그만이었다. 방 안 같은 기차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소년은, 몇 해 전에 자동차 구경을 다니던 그 소년이었다.

찬이가 춘수와 마주 앉아, 말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로만 듣던 층루고각이 늘어선, 화려한 서울의 거리가 아니었다. 예약한 일, 승낙받은 일 전연 없는, 이 출발의 결론이었다.

저녁에 내린 서울은 더욱 황홀하였다. 시골 대목장날 같은 혼잡이 한없이 연장된 것이었다.

복잡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몸을 처리할 곳은, 어디든지 따라 있었다. 겁내고 두려울 것은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주인형님께 드리는 인사는, 찬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어려운 대목은 별탈 없이 넘기어 보냈다. 확실한 것은 아직도 아니었으나, 그 확실성을 감정하려 들 자기의 처지도 아니므로, 일은 되는대로 순하게 맡겨 두는 도리밖에 없었다.

찬은 끝끝내 춘수에게 감사를 드려야 되었다. 그것은 지난 일에 대한 것뿐이 아니라, 앞일을 위해서도 그러하였다.

춘수와 같이 찾아다니며 만난 고향 학생들은, 그 누구 하나, 자기와 같이 초라한 존재는 아니었다. 외양이 그러하였고, 언론이 그러하였다. 자기가 놀랐던 춘수는 별사람이 아니요, 곧 그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이었다. 말만 듣던 신학문이란 과연 위대하고도 새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는 더욱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찬은 과연, 백번 생각하여도, 오기를 잘하였다고, 하늘같이 높은 희망에, 열이 올랐다.

저고리 속주머니에 탄탄히 함봉을 해둔 돈, 십 원, 이것은 그야말로 대금임에 틀림이 없는, 아버지의 막대한 주선이었다. 이것은 꼭, 입학이나, 책 이외에 써서는 안 될 것이었다.

어서 하루바삐 입학을 해야 되었다. 그러나 강습소도 이름이 있는 데는 만원인 형편이었다. 경영하는 사람은 돈벌이였거나, 말았거나, 그것을 가리고 어쩔 여유를 바쁜 그들은 갖지 못하였다. 가르쳐 주고 배울 수 있는 것이 그저, 다행할 따름이었다.

찬은 결국, 규모가 크던 못하나 그러나, 공부에는 괜찮을 듯한 어떤 강습소를 골라잡았다.

*

이로 오시오. 여기가 괜찮습니다. 과히 가깝도 않고, 과히 멀지도 않아, 백묵가루도 함부로 날아오지 않고, 강의도 잘 들리고, 괜찮아요.”

그는 찬보다 며칠 먼저 온, 이라는 강습생으로, 이마에는 망건 자리가 아직 가시려면 먼 친군데, 언제든지, 한문을 읽을 때에 하던 버릇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며, 찬에게 자기 옆자리를 권하였다. 찬이보다도, 나이는 아마 칠팔 년 위인 모양이었다. 털은 귀한 편인가 본데, 면도를 한 수염터가 새까맣게 내비쳤다.

찬은 그의 친절을 못 이겨, 그의 옆자리에 역시 발을 개고 앉아 흔들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루방에 돗자리를 깔아 놓은 교실은, 한 방 가득 차게 앉자면, 백 명도 훨썩 더 넘을 큼직한 것이었다. 일요일은 예배를 보고, 그 밖에는 이렇게 교실로 쓰는 것인데, 걸상도 없고 책상도 없는, 헤멀쑥한 것이었다.

오나 가나, 책상 복은 야속히 없구나!”

하고, 찬은 은근히 고소를 금치 못할 만도 한 것이었다. 다 알다시피, 그는 서당에서도 책상 천신을 못 하였던 것이었다.

난로는 있다 하나, 젊은 패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황이란 친구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강이란 친구도, 언제든지, 난로와는 꽤 먼 위치를 잡고 앉아, 두루마기 위에 팔짱을 끼고 흔들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황이나, 강이나, 유달리 흰 것은 고사하고, 아프게 패다시피 한, 이마의 망건 자리는 물론,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나이 또한 이보다, 오히려 한두 살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덜 먹지 않았을 것은, 하필 그들의 이마에 잡힌 주름살로만 가지고 추측할 것이 아니었다. 언어 태도 모든 것이 그러하였다.

이들을 최상급으로 친다면, 그 다음이 있고, 또한 그 다음 층이 있었다.

찬은 예서 확고한 자신을 갖게 되었다. 자기는 늦었다. 그러나, 그렇게 늦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에 부원장격이요, 매일 강의에 안 나온 법이 없는 유선생은, 전날 공립학교의 당당한 훈도로, 왕년 만세통에 징역은 모면하였으나, 학교는 쫓겨나오게 된 분이란 이야기가, 사실 여하는 모르되, 강습생 새에 들은 것이 사실이었다.

나이로 치면 이 교실의 최상급보다는 몇 살 아래면 아래였지, 위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당당한 선생이었다. 나중에 난 선생이었다.

그러나, 교수법이 좋고 나쁜 것은 오히려 둘째요, 그의 감개한 어조는 그의 행적과 결부를 시켜, 모든 강습생의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우리네 시설이 이렇게 빈약한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소. 책상도 없고, 걸상도 없고, 차디찬 방에 우리는 지금 앉아 있소. 그러나, 우리는 배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오. 왜 이렇게 모든 군색을 참아 가면서라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지 않소? 오직 한 가지! 내가 말을 안 해도, 이 한 가지는 여러분 자신이 알 것 아니오.”

유선생의 이 말은 강습생에게 절찬을 받는 대목이었다. 자칫하면, 설비 나은 다른 강습소에, 강습생을 빼앗길까 봐 한 불순한 의미가 든 말로, 들을 사람은 없었다.

다만 배우는 것이 새로운 데 흥미를 붙이면 그만이었다. 어른이, 애들 배울 것을 배우고 즐긴다고, 조소를 할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모르는 것은 한시바삐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말 발음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의미는 모를 까닭이 없다. , , , , 이만 나이에, 셈에 어려울 까닭이 없었다. 지리, 역사! 한문을 책으로 외던 버릇이 있다.

배우는 것은 곧 자기네의 지식이었다. 가르치는 이는 가르치고, 배우는 이는 배우고 보면, 보통학교의 전과정을 일 년 동안에 수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

찬이가 에치 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천 명도 넘는 아이들과 같이, 수험번호를 가슴에 붙이고 서 있게 된 것은, 그게 바로, 열아홉 살 나던 해 봄 일이었다.

많은 부형들이 각각, 내 자제의 입학을 기원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점심을 차리었고, 될 수 있는 대로는 식구를 동원하여, 한 아들의 일거일동을 보호하고 살피려 들었다. 부형의 정성과 위력으로 해서란대도, 이 아이만은 입학이 되어야만 할 참이었다.

찬은 여기서도, 서울의 위력을 보았다. 의지가지없는 시골뜨기의 하잘것없는 초라한 모습을, 다시 한번 본 것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다 못하여, 아버지가 둔 돈을 몰래 훔쳐 가지고, 온 통큰 아이가, 필시 저 모퉁이에 웅숭그리고 서 있는 얼굴 새까만 저 아이일 것이었다. 아버지 허락은 맡았으나, 밥값도 변변히 못 가지고 와서, 점심도 못 가지고 온 저 아이는 필연, 점심 먹을 걱정을 하고 섰는지도 모른다.

찬은 춘수가 사다 주는 왜떡을 감사히 받아 들었다. 멀리 계신 아버지를 원망하기에는 너무도 정직한 나이였다. 그에게는 춘수가 있는 것만 다행한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시험을 한번 더, 검정시험이란 것을 보는 것이, 보통학교 안 다니고, 한문만 읽은 벌이라면, 벌이라도 좋았다. 찬은 합격만 하면 그만이었다.

찬은 검정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찬은 비로소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입학시험 볼,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찬은 진짜 시험을 보았다. 한번 시험을 치러 본 찬은, 시험이란 별것이 아니요, 묻는 걸 대답하면 그만인 것을 알았다.

묻는 것을 일일이 써바친 찬은, 무엇으로 이 많은 사람을 떨어뜨릴 겐가, 궁금하였다. 자랑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던지도 마치 모를 일이었다.

아무렇든, 학교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들였을 리는 만무였다.

방을 보고 우는 애는 다 떨어진 애였다. 무엇을 그토록 울기까지야 할꼬! 방에 붙은 자기 번호를 보고도, 그토록 좋아 날뛸 줄을 모르는 찬은 혹, 이렇게 생각할 듯도 한 일이었다.

찬의 입학으로, 시골 아버지의 기쁨은 다시 걱정으로 변하였다. 없는 송아지를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답 논을 선도로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놈의 고리대금은 얻을 수 있으나, 연대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시골서 돈 걱정을 하는 동안에, 돈은 서울서 변통이 되었다. 이 돈은 결국 아버지가 갚아야 되는 것이었다.

찬은 입학수속을 하였다. 똑바른 에치 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된 것이었다. 걸상도 있고, 책상도 있는 버젓한 교실이었다.

모처럼 얻어걸린 걸상과 책상이었다. 기뻐할 만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앞이 가마득하였다. 가마득한 이 오 년을 자기 힘으로 넉넉히 치러 낼 수 있겠느냔 것이었다.

간판을 가지려는 세상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끌리려는 자기가 도리어 한없이 미웠다. 실력을! 실력을! 하고는 고쳐 생각을 하였다. 엉터리없는 부르짖음인 것을 알았다. 학교는 다녀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찬은, 가볼 대로 가보는 도리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여보게 이 사람! 객쩍은 짓 좀 그만두게, 한평생, 학교만 다니다, 죽을 작정인가! 되는대로 속성 강습소나 얼마 다니다, 세상 형편을 볼 일이지,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수작이란 말야!”

어떤 친구는 이렇게, 찬의 늦은 입학을 축하보다는, 충고 비슷, 비방을 하기도 하였다.

찬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종의 모욕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네 따위가 무슨 얼토당토않게, 제법 올바른 공부의 켜를 밟아 올라가겠느냔 데는, 부쩍 반감이 솟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별일은 없었다. 일은 계획대로 하면 되었다. 찬은 결국, 에치 학교의 정복 정모를 쓴, 올바른 중학생이 되고야 말았다.

아침밥이 늦으면, 늦은 보충을 위하여 뛰어가면 되었고, 비가 오거든, 맞고 가면 되었다. 이레 동안 엿새 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

아저씨나 가 공부 잘하오. 나는 그만두겠소.”

일 년 겨우 넘기고, 겨울방학에 같이 시골을 내려온, 춘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찬으로서는 과연 상상도 못 하였던 것이었다.

찬으로서는 맹랑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둘째고 말일세! 자네가 안 가는데, 내가 갈 수 있는 일인가?”

찬은 얼마 후에 이렇게 대꾸를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를 따라 아저씨까지 공부 못할 법이 있겠소. 하나가 못하는 것도 원통한데, 둘이 못할 법이 있겠소. 아저씨는 올라가요.”

춘수의 뜻은 이미 굳어진 모양인 것을 가히 알 수가 있었다.

내 문젠 내 문제대로 따로 따질 예산을 하고, 자네 문제를 따져 보세그려. 지금 중도에 공부를 단념하고 장차 어쩌잔 말인가?”

찬은 이렇게 문제를 돌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람이란 아무것도 않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한 가지 일을 중지하였으면, 으레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사람이 어찌, 일이 없을까 염려겠소. 아직도 머리가 진정이 되들 않으니, 이렇다 단정은 할 수 없지만, 길을 바꿔야만 될 것은 사실일 게요.”

춘수의 어렁투렁한 말이었다.

백년을 경영하는 인생생활에, 한 해의 실패를 그토록 과도히 생각할 것이 있는가. 한번 졌으면 이길 생각을 해보세그려! 길은 바른 대로 가야 할 것이 아니겠나? 이것이 아마도, 피차에 둘 다 살 수 있는 방도일 줄 아네마는.”

찬은 간곡히 권하였다. 동시에 옳다고 자신을 하였다.

사소한 염치는 모른 체하시구려! 내 일을 위해서는 남의 눈치쯤 모른 체해도 좋을 제는, 모른 체해도 좋지 않소? 둘이 왔다, 혼자 가기는 좀 어색은 한 일이지만, 별수 있겠소. 공부는 해야겠고, 모른 체해 두는 도리밖에 더 있소? 괜찮아요! 그저 모른 체하고, 참고 엎드려 견디시오.”

춘수가 이만큼 아직도 생각을 해주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고마운 줄을 알았다면, 찬은 찬으로서, 갚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자네도 결국, 같이 가는 것이 옳지!”

찬은, 다시는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

춘수가 다시 말이 없었다. 찬은 춘수가 가지 않으려는, 여러 가지 이유를 차차 짐작할 수가 있었다.

춘수는 결국 가지 않기로 작정이 되었다. 그러면? 하고, 찬은 자기 일을 생각할수록, 일은 점점 더욱 맹랑할 뿐이었다.

별로 짧게 생각되지 않던 겨울방학도 이미, 며칠 남지 안하였다. 찬은 더욱 초조할밖에 없었다.

일체를 허무에 몰아넣고, 불살라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는,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그는 아직도 일체의 생활욕을 포기할 수 없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가면 가고 말면 만다는 최후 간두에 그는 다다랐다.

와야만 될 아들은 오지 않고, 기다리잖는 손이 눈앞에 나선 것을 보는, 주인형의 심각한 심경을 상상할진대, 과연 그는 서울을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다시 죽고야 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찬은 이튿날 서울을 오고야 말았다. 기차 속에서, 이런 말 저런 말 준비를 하여 두었던 것은, 전달할 길이 없었다.

주인형이, 화풀이 술을 자시고 이미 혼몽중에 누워 있은 지 오랜 까닭이었다. 찬은 오직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춘수의 아우가 자기 앞에 자고 있는 것이었다.

, 나는 이 집의 가정교사인가!”

찬은 이런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바람은 여전히 창을 때리고, 문풍지가 울었다.

*

이런 비교육적이요, 비양심적인 교육에는 단연코 우리는 찬성할 수 없소.”

옳소.”

신성해야 할 학원에, 기만의 마수가 뻗쳐 들어오고, 학교 당국은 이것과 타협할 뿐이 아니라, 이따위 악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온갖 정조를 파는 매소부의 행동을 하고 있지 않소? 가장 씩씩하게 자라야 할 우리 청년 학도가 오직 한 가지 믿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소? 그것은 내가 예서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소이다. 이런 썩은 지도 밑에, 우리는 바랄 것이 무엇이겠소? 저희 혼을 파는 노예밖에는 될 것이 무엇이겠소? 여러분!”

옳소. 옳소.”

우레 같은 손뼉이 장내를 뒤집는다.

없소이다. 우리는 단연코 싸워야 됩니다. 끝까지 싸워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관철키 위하여, 그따위 매소, 아첨, 타협 세력을 우리 신성한 학원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우리는 단연코 싸울 것입니다.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이 있을 뿐이오. 우리가 성공을 하고 못 하는 것은 오직 단결을 하고 못 하는 데 달려 있소. 우리의 단결을 문란케 하고, 우리의 의로운 항쟁에 반역하는 비겁한 분자가 만일 있다면, 우리는 우리 천 명 학도의 이름으로 그를 처단해야 옳을 것이외다. 여러분! 우리는 굳게 단결을 합시다. 비겁하게 살진대, 차라리 당당하게 죽을 것입니다.”

옳소. 옳소. 옳소.”

박수 소리가 또한 더더욱 굉장하였다. 이때에 또, 한 사람은 요구 조건을 낱낱이 들어, 제안 이유를 설명하였다. 조건 중에 제일 큰 것은 교장 배척, 선생 배척 문제였다. 옳소 소리에 눌리어, 사사로운 의논은 감히 범접을 못 하였다.

만장일치로 가결이 된 진정서는 학교 당국에 전달이 되었고, 달근달근 학교에서 들어주지 않을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고, 스스로 정한 회답 기한이 넘었고 학생들은 자기네 예정대로 수업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것이, 난생 처음, 찬이가 경험한, 동맹휴학이란 것이었다.

찬이가 본 이 동맹휴학이란 것은, 그 사실 여하는 초면에 함부로 책임질 수 없어 그러되, 애족적 애국적 동기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왜놈의 정책에 반항하는 조선 학도의 부르짖음인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절대한 세력 밑에 괴로운 거행을 당하는 학교 당국자의 피치 못할, 억울한 희생인 것도 양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 당국은 학교 당국대로, 학생은 배우는 사람으로서, 덮어놓고 배우는 것이 본분을 지키는 것이므로, 애국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맹휴라는 것은 학생의 본분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그 이유 여하를 물을 것이 없이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교육자의 다대수가 가지고 있는 통념이었다.

그러므로, 맹휴한 학생은 반드시 처벌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맹휴한 학생을 전부 처벌할 수가 없으니, 여기에는 선동자란 이름이 판정에 오르게 되었다.

주먹을 쥐고 단에 올라서 연설을 하였거나, 진정서를 가지고, 학교 당국에, 전한 사람은, 이 선동자로 지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이 방법에 복종할 이치가 없었다.

우리는 선동을 듣고 한 일이 아니오. 우리들 자신의 의사였고 또한 행동이었소. 처벌을 할 테면 우리들을 다같이 해주오. 처벌한 사람들을 복교시키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만 공부를 할 수가 없소.”

이런 것이 학생 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학교로서는, 퇴학생을 절대로 복교시킬 수 없는 것이, 그것은 학교 위신에 관한 문제인 때문이요, 전체를 내쫓을 수 없는 것은, 학생 없이 학교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학생은 역시 학생답게 학교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본분인 것을 가르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었다.

약속을 하였으면 지켜야 하고, 개인 이해로 단체를 배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옳은 교육이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은, 학생의 단결을 파괴하기 위하여는, 심각한 이해로 개인을 달래는 것도 또한 학교를 위한 수단으로 용인이 되었다.

역시 구실은, 선동에 철모르고 헤매는 학생을 구해 내는 방법이란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대를 받는 이 선동자는 역시 일본제국 경찰의 법망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으로, 학교의 퇴학과, 경찰의 감방과는 서로 흔히 통하는 것이었다.

찬은 여기에서 조선의 혼을 보았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뒤를 이어 일어나는 실패! 이 맹휴에는,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일제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반항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찬은 이학년에서도, 삼학년에서도 맹휴를 안 치러 본 적이 없었다. 손뼉 안 쳐본 법이 없었다. 오지 말자는 때 와본 법이 없었다. 자기는 어느덧, 맹휴를 호흡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조선에 맹휴가 많은 것은, 특히 중학생의 맹휴가 많은 것은, 조선이 미개했다는 표다. 제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게지 뭐냐? 왜놈 앞에 망신이지 뭐냐?”

어떤 노인의 꾸지람을 받았을 때,

열리었으면 왜놈을 못 쫓았겠습니까? 왜놈의 식민지 노예 위에 더 덮을 망신이 있겠습니까? 마음놓고 어린 학생들이 공부에 전심토록 못들 하셨으면, 보고나 계실 것이 아닙니까!”

한 것도 찬이었고, 이 까닭으로 노인을 모욕하는 과격사상을 가진 놈이라고, 지목을 받은 것도, 찬이었다.

찬은 그뿐이 아니라, 많은 우수한 상급생들이, 이 맹휴 까닭으로, 학교에서 쫓겨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러다가는 사람 쓸 만한 것은 다 나가고, 남는 것은 찌끼뿐일 것 같았다. 그러나, 찌끼에서 맑은 샘이 솟아올랐다. 사람은 일꾼이 따로 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미 내쫓긴 그들은 마음을 고칠 도리가 없이, 내친걸음 반항의 길을 걷는 도리밖에 없으므로, 학교는 일찍, 이들의 투쟁의 연마장으로도 의의가 없지 않은 터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조선 사람의 마음은, 비록 방법은 다를망정, 한곳으로 통한 것이다.

*

삼사 평 넓은 마당이었다. 당시의 이 마당은 집 한 채 없는 넓은 벌판이었다. 한가운데 모여 앉았으면, 공을 차다 쉬는 것도 같고, 오다가다, 혹은 산에 올라갔다 돌아오다가, 남은 과자를 먹으며들 놀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 미심스러우면, 저 멀리서 오는 사람을 주의해 볼 일이었다. 그 사람의 태도가 수상할진대, 미리 알아차려, 얼토당토않은 잡담을 늘어놓을 것이었다. 왜놈의 끄나풀, 형사 아니라, 별것이란대도, 남의 별수없는 잡담 따위를 듣고 섰을 리 만무였다.

표 있는 곳에, 표 없는 것을 찾은 것은 지혜요, 약속한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인 것은, 그들의 뜻이 굳은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다들 모이셨지요. 인저?”

긴 목을 빼어, 좌중을 한번 휘 둘러본 것은, 적고도 유난히 빛나는, 양의 눈이었다.

틀림없겠지요.”

하고, 대답을 한 분네는, 얼굴 시꺼멓고 눈살이 꼿꼿한 염군이었다. 한번 뜻을 정하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기로 유명하단 소문이, 동무들 사이에 자자한, 그 사람이었다.

틀림없소이다.”

마르기는 했을망정, 강단은 있어 보이는 김이 다시 보고를 하였다.

, 그러면 시작할까요?”

양이 한 말이었다.

좋겠지요.”

뒷전에서 무슨 책인가, 책을 보고 있던, 얼굴 유난히 흰 이가, 보던 책을 덮으며 한 말이었다.

열 명은 확실히 되는 인원이었다. 이 중에 찬이가 들어 있는 것은 물어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가 비록 첫 모임은 첫 모임일지라도, 말이 없는 가운데 말은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러고, 유한 세월을 무작정 보낼 것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병만마로 적의 아성을 때려부순다는 것은, 말하자면 정면작전이 되겠지만, 그것을 지금 바랄 수는 도저히 없는 터였고, 될 수 있는 한도에서, 일을 가장 효과 있게, 진행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양은 이러고 좌중을 둘러보는 품이, 눈알을 아래로 옆으로 힘있게 굴리는 것하고, 예사롭지 않은 결심이, 마음 깊이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러다간 질식을 하고 말 것이 아니겠소. 침을 한 방 놓읍시다그려! 비록 그것이 별것은 아니란대도, 조선 사람 전체에 자극은 줄 수가 있지 않겠소. 나는 그런 방법에 매우 찬성을 하고 싶습니다. 사람 한 몸뚱이 제가 하면, 무슨 그리 특별난, 일만 추려 하겠소. 고깃값이나 찾았으면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큰 일 작은 일이 어디 따로 있겠소. 큰 것은 결국 작은 것을 모아 합해 놓은 것이 아니겠소!”

염이 또한 팔을 걷고 앉아서, 비분강개한 의견을 토하였다.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진행해 봅시다. 죽어 마땅한 일이면 죽어야 될 것 아니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 어떻게 효과를 내느냐 하는 데 귀착이 될 것 아니겠소?”

이번은 김이, 이야기를 한걸음 더 진전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긴 이야기는 제폐하고, 좋은 방법이 있지 않소 왜? 이 중에는 혹 못 들으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생각한 것이면 한번 해놓고 볼 것이 아니겠소.”

염이 다시 서두른 말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야기의 정체는 확실히 드러나지 안하였다.

진고개! 그 이야기 말이지?”

김은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말끝을 대신 맺어 주었다. 일부러 죽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고막을, 새삼스럽게 자극한 말이었다.

그렇고말고! 다른 무슨 도리가, 속하고 효과적인 도리가 있겠소. 서울 왜놈의 근거지, 조선 착취의 근거지, 놈들의 소굴을 재를 만들어 버립시다그려! 단순히 분풀이도 분풀이려니와, 영향이 여간, 이만저만 크겠소. 일은 닥치는대로 한 가지씩 하고 볼 것이 아니겠소.”

염은 이러고 숨을 한바탕 길게 삼키고는 매서운 눈을 뜨는 품이, 곧 현장으로 팔을 걷고 달려갈 듯한 모양이었다.

좌중이 고요하였다.

실례의 말씀 같지만, 벌써 겁들이 나시었소? 이 자리는 각 중학교의 그래도 그렇지 않은 분들이 모인 곳이 아니오?”

염은 역시 매서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좋소. 생각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오.”

얼굴 흰 김의 말이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이오?”

염의 반문이었다.

일은 구체적으로 따져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겠소.”

김의 칼칼한 대답이었다.

옳소! 우리가 무서워 도망하러 여기 온 것은 아니거든! 일을 하는 데는 계획이 있을 것 아니겠소? 일을 하고 못 하는 것은 그 계획에 달렸단 말이라! 덮어놓고 일을 하는 수가 있겠소? 어디 그 계획 좀, 들어 봅시다.”

이제껏 말이 없이 앉았던, 아래 위 모착한 윤군이 한 말이었다.

계획은 누구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워야 할 것이 아니겠소. 누구 한 사람의 명령을 받고자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아니거든요!”

양이 나서서 좌중의 혼돈한 감정을 정리하려 들었다.

좌중은 다시 고요하였다. 긴 동안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 침묵에는, 반드시 계획 자체만을 생각는 것만 아닐 것이다. 일 자체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아 있을 듯한 것이었다.

불로 치는 도리밖에 더 있겠소. 집에는 불을 놓고, 골목은 지켰다, 나오는 대로 때려잡고 이러면, 복판에서는, 타죽는 놈, 저희들끼리 밟혀 죽는 놈, 별놈 다 있을 것 아니겠소. 일은 거기까지 되면 성공이지 뭐요.”

언제든지 열렬한 염의 계획이었다.

어떤 주재소나 경찰서를 부수는 것과도, 이건 다른 것이 아니겠소? 왜놈이라고 불에 타죽으란 법만 있겠소. 불나면 소방대가 와서 끌 것이요, 저희들 죽이는 놈이 있으면, 총칼을 가지고 덤빌 것이 아니겠소. 저희를 보호하는 용산 군대가 있잖소, 경찰이 있잖소? 우리는 폭탄 한 개, 권총 한 자루 없이 무엇으로 놈들을 죽인단 말이오.”

저 끝에 앉았던 변이란 깡마른 친구가 한 말이었다.

안 되기로 치면 무엇은 되겠소.”

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면 우선 소방대를 때려부술 계획이 서야 할 것입니다. 군대는 몰라도 경찰과 대항할 계획이 서야 할 것입니다. 이만해도 작은 시가전의 모양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니겠소!”

이번은 귀 큰 남이란 친구가 한 말이었다.

그 소홀히 시작했다가는, 남의 집 불놓고 도둑질하려다, 들킨 도둑놈으로 몰리기 쉽소이다.”

백이란 친구의 이 말에는 자못 좌중은 실소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암만 쳐야 열 명밖에 안 되는 이 세력을 가지고, 그런 대작전을 어떻게 실행하겠소. 차라리, 섣부른 짓 하였다가 봉변만 당하는 것보다는, 계획을 두고 할 수밖에 더 무슨 도리가 있겠소!”

공이란 친구는 자신 있게, 이런 결론을 내리었다.

안 되오. 이런 계획이란 연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할 테면 서둘고, 말 테면 말아야 할 일이오. 연기는 필요치 않소이다.”

양의 이 말이 떨어지자, 염은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 염이 우니,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 것을 찬은 분명히 보았다.

이 모임은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이 모임은 되었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이 모임은 사라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까닭이 그 다음 육십만세로 통하여, 돈화문 밖에서, 달음질치던 자기를, 또한 찬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찬에게 닥친 세월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가고야 만 것이었다.

찬은 스스로 생각을 하였다. 자기는 평생 모험을 즐길 줄 모르는, 한낱 평범한 생활에 참아 넘어가는 존재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는 여전히 모험을 하여 온 것을 알았다.

사학년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생사에 대한 급격한 충동으로 인하여, 헤매던 나머지, 심하면 거리서 떠드는 목사의 말에까지 귀를 기울여 본 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별것이 아니었다. 벼룩은 제 길로 몇천 길 되는 데서 떨어져도 괜찮은데, 사람은 제 길로 한 길 겨우 되는 데서 떨어져도 못 견딘다는 인생의 무능을 탄식하는 말이었다. 어서 하느님을 믿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에도 돌아가 의지할 수 없는, 범속 그것이 곧, 자기인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이 속된 현실은 곧 자기의 생의 보금자리였다.

오학년 졸업을 하고야 말았다. 역시 비범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한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서울의 행정을 마치었으니, 일본 동경을 가보자는 것도, 말하자면, 한낱 평범한 과정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또한 모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도둑의 염통 깊이 들어가는 판이었다.

*

조선 사람을 잘 받아 주는 하숙이었다. 동경서 조선 사람을 잘 받아 주는 하숙이면, 그 등수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마루는 반드시 발꿈치를 들고 디뎌야 하고, 방에서 하는 이야기는 귓속이야길수록 좋고, 다다미 갓을 밟으면 못쓰는 것을, 즐겨 지켜 주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밥값을 가다 혹 몇 달씩 밀리고, 그것을 더러 떼어먹고 가고는 말이 없는 수도 없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을 치러 보지 않은 주인도, 조선 사람이라면, 들일 것도 안 들이고 만다. 그러므로 깨끗한 하숙에 들어 있는 사람은, 대개 거짓말을 한번씩 해본 사람이라고, 하여도 별로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구주나, 어디 사투리 심한 데서 왔다고 속여 놓고는, 모처럼 친구가 찾아와 조선말을 쓰면, 질색을 하는 친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조선 사람인 줄을 알면 쫓겨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드문 예였고, 대개는 들어가 놓고 토파를 하는 수도 있고, 제대로 맘대로 있으면, 주인이 저절로 아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고 저러고 귀찮으니, 애초 조선 사람 잘 받는 하숙으로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주인은 어찌 하필 조선 사람을 잘 받느냐면, 거기에도 이유가 자못 없지 않았다.

한번 어쩌다 조선 사람을 받고 보니, 몇 더 안 받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정말 제 나라 사람은 달아나고, 방은 비었다. 빈방을 조선 사람으로 채우다가, 제 사람으로 다시 채우자니, 제 나라 사람은 오들 않는 것이었다. 영업은 해야 먹고살겠고, 제 나라 사람은 오지 않고, 조선 사람으로라도 안 채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조선 사람 많기로 유명한 이 집에, 제 동네 사람은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마룻장을 도둑고양이처럼 살살 걸어도, 방에서는 벙어리가 되어도, 신용을 회복할 도리는 없는 것이었다. 집을 왜 그따위로 까치집 짓듯 하였느냐고, 비방을 하였자, 그들은 종주국 백성이었고, 이편은 그들의 식민지 백성이었다. 똥을 누고 손가락으로 밑을 씻는대도, 그들은 문명인이요, 이편은 야만인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찬이가 들어 있는 하숙은 그런 까다로운 문제가 붙을 까닭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조선 사람을 잘 받아 주는 하숙인 까닭이었다.

찬은 끼니때가 되면 위층 윤의 방에 가서 식사를 해야 된다. 윤의 밥을 반 나누어 먹거나, 윤이 사양하면 통째로, 한 그릇을 혼자 먹기도 한다. 극히 시장할 때면 윤의 이름으로, 밥만 한 그릇을 더 청해다 먹기도 한다. 하녀가 보는 데는 약간 창피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런 창피쯤은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주인 마누라에게, 혹 알린다기로, 상관없을 것이, 방세만은 틀림없이 주는 것이요, 남의 밥 둘이 먹거나, 혼자 먹거나, 저희에게 손해 없으면, 그만이었다.

하녀는 가다 혹 자긍을 하는 수가 있었다. 오늘은 밥을 많이 담았노라고.

아닌게아니라, 찬은 그에게 감사를 드리었다. 밥이 정말 많은 것을 본 까닭이었다.

하녀는 가다 혹, 탓을 하는 일도 있었다. 밥을 많이 담다가 주인 마누라에게 들키어 꾸지람을 들었노라고.

찬은 그에게 사과를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찬은 알 수 없는 이국 여인의 지나친 친절에 대하여, 처음에는 일종의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부 비록 끼니는 간데없을망정, 일개 왜국 여인의 가엾은 동정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낱 억측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시골 농부의 딸로, 아버지는 일찍 여순 싸움에서 전사를 하였고, 어린 그는 오빠의 양육을 받다가, 그도 어려워, 나선 것이 이 하녀 노릇이었던 것이었다.

일본의 수많은 농부들의 피는 일본제국의 기초를 쌓아 주었고, 농부는 여전히 가난할 뿐, 호강하는 놈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굶어 본 농부의 순박한 딸의 심정은, 여간 도회의 날카로운 신경을 무시해도 좋았던 것이었다. 그는 실상, 조선 사람이면 왜 천하냔, 그 연유조차 모르는 젊은 여자인 것 같았다.

머지않아, 그는 이 집에서 나가겠노라, 고별인사 겸, 주인 마누라의 험구를 하였다.

그의 이야기는 대개, 주인은 손님을 손님같이 보지 않는다는 것과, 반찬 한 가지라도 잘할 생각은 않고, 그까짓 것들 그러면 대수며, 잘해 주면 잘해 주는 줄을 아느냐는 것과, 비싼 것, 정한 것, 사줄라 말고, 썩은 된장국이라도 많이만 주면 좋아한다는 것과, 나중으로 한마디 더 첨부한 것은, 양들은 왜 그냥 돼지처럼 크냐고, 흉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렇든 그는, 저 갈 데로 향하여, 이 집을 나가고야 말았다.

다음에 온 여자가, 별명으로 이 집에서 부르는 똘똘이란 여자인데, 이 여자는 먼저 여자와 달라, 나가기도 전에 주인 마누라의 흉을 보고 다니는 것이 일종 재미인 것같이 보였다.

부엌에서 주인 마누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밥상을 가지고 오면, 꼭 전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그 가운데에도 찬의 귀에 제일 찔리는 것은 역시, 찬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방은 제 방을 가지고도, 밥은 남의 상에 붙어먹느냐는 알 수 없는 조선 사람의 풍속이라는 것이었다.

따지면 실상, 방도 세는 윤이 내는 것이니, 들기는 찬이 들었으나, 찬의 것이 아닌 것을 마저 알았으면, 주인 마누라는 한층더 놀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렇거나, 찬의 이 생활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을 겨우 요기할 정도로 강의에 나가 점심때를 넘기려면, 거짓말 조금 안 보태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에치 대학 휴게실에는 언제나, 많은 조선 학생이 넘나들었다. 그들은 가끔 찬에게 식당에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식당에 같이 가자는 것은 무슨, 한턱을 쓴다는 말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들 식으로, 다만 동행을 하자는 의미였을 것이었다.

찬은 청탁을 하고 같이 못 가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번 말해 보았다 안 들어, 두 번, 세 번을 실패하니, 겪은 사람은 다시는 단념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사양하고 난 찬은 찬대로, 휴게실에 얼굴을 찌푸리고 섰거나, 기대어, 책을 읽거나 말거나, 하는 꼴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토록 순탄하게 보였을 리는 만무였다.

밥을 먹으러 가자니, 밥을 먹으러 가나, 술추렴을 하자니, 술추렴을 하나, 찬의 교제는 별로 넓어지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찬은 괴상한 사람으로 천명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찬은 밖에서 본 그대로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뜻과 열을 중심으로 모인 연구 연마에, 자기 책임은 결코, 소홀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일본은 나날이 증가하는 공장 시설과 같이, 불어나는 노동자와 아울러 농민과, 착취계급과의 항쟁이 심각할 때였다. 일본의 혁명은 곧 조선의 해방을 의미하는 처지에서, 일본의 혁명가는 조선 사람과 악수를 할 수 있는 때였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 혁명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

약간의 젊은 조선 사람이 성명을 바꾸고, 그늘 속에 피신을 하여, 개인 향락에 도취한 일도 없지는 안하였다.

조선 귀족의 이름으로 굉장한 별장에 숨어서, 일본 요로 대관의 호의를 낚는 조선 신사도 없지는 안하였다.

그러나, 대체로는 나라를 알았고, 민족을 알았고, 친구를 알고, 돈을 모르는 체하려는 기풍이었다.

만나면 밤을 새워 가며라도 올바른 이론을 찾으려 애를 쓰고, 더러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술잔을 깨뜨리는 수도 가끔 없지 않아 있던 일이었다.

남자로서 여자를 사모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어찌 없을 수 있는 일이랴. 그러나, 그것은 한갓, 그 사람의 일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동무들 웃음의 소리로나 막간에 간혹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사조에 날뛰는 섬나라 일본은 과연, 뼈저린 투쟁을 통하여 확호한 장래를 약속하였던 것이었다. 국수주의자는 배를 가를 지경이요, 천황숭배자, 군벌, 자본가는, 자신의 수명 연장을 위한 비장한 음모가, 깊깊이 계획되던 당시였다.

동경 유학생이면 덮어놓고, 식민지 조선총독부 경찰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찬이가 모처럼 집에를 나오면, 그때는 반드시, 주재소 순사가 다녀가는 때였다. 도대체, 귀찮은 노릇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 사람이 일본 유학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할 뿐인가, 될 수 있으면 저해를 하려 든 것도, 당시의 사실인 것을, 찬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찬은 괴로우나 그러나, 즐거운 생활이었다. 항상 배가 고프므로, 항상 헛헛하였다.

그러나,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식당에 가면 으레, 아침 팔 전, 점심, 저녁은 십오 전, 이것으로, 양을 채우지 못한대서가 아니었다.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에 벌여 놓은 양과자를 보고 침을 삼킨 이야기는 좀, 창피한 이야기였다.

여보게, 우리 오늘은 배부르도록 한번 먹어 볼까?”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듣다 반가운 소리를 그는 들었다.

좋은 말일세. 마는, 우리 터에, 병준이 흉내를 내자는 것은 아니겠지?”

찬이 이렇게 수작을 하니,

병준이 흉내를?”

하고, 친구는 물었다.

병준이가 말일세, 하도 굶주리다가, 돈이 생겼거든. 이 친구 생각기를, 에라 이놈의 것, 이 돈 길게 내게 붙어 있을 것 아니고, 어디 한번 얼마나, 들어가나 원없이 시험을 하자고는, 돈 백 원을 딴 주머니에 넣었네그려! 이 돈 백 원은 먹는 외에는 달리는 한푼도 안 쓸 작정이라, 기한은 물론 하루고. 생각건대 그래도, 백 원이면 그토록 적은 돈이 아니니, 한번 고급으로 시작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다는 것 아니었겠나! 고급, 동경서 찾을 수 있는 고급은 다 다녀 보기로 하였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이 돈을 소비하려야, 이제는 고급 아니라, 더한 것이 있어도 속에 들어가들 안하니, 도리없이 돈 백 원 소비를 못 하였다는 이야길세! 듣기 드문 이야기가 아닌가? 하하.”

찬의 이 말에 친구도 따라 웃었다.

그들이 처음 시작한 것은 스시였다. 그 다음이, 만두, 그 다음이 일본 냉면, 더는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친구의, 처소로 돌아가고, 찬은 찬의 처소로 돌아왔다.

찬은 동경 와서, 이렇게 배부른 꼴을 당하지 못하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불렀다. 점점 더욱 불렀다. 밤새도록 죽을 고생을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설사를 하고야, 배는 꺼졌으나, 음식이면 냄새를 맡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며칠을 두고 밥맛을 잃었다.

찬은 이에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었다. 밥 너무 먹고 싶은데 밥맛 없게 하는 방법을.

괴로우나, 쓰나, 세월은 세월대로, 또한 가버렸다. 찬은 자기도 일찍 믿지 못하였던 졸업을 하게 되었다.

많은 동무들이 취직이 되었노라, 즐기는 꼴을 보았다. 조선놈의 세력이란 일본을 친치 않고는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비가 친일을 얼마나 훌륭히 하였는가 못 하였는가, 알 도리는 오직, 자식의 취직이 얼마나 훌륭히 되었는가, 못 되었는가인 것이었다.

찬은 흔히 들은 말이었다.

그놈들, 외국 가서 공부하였다는 놈들, 말을 그럴듯하게 해야, 제 아비 죽은 뒤에 들어서면, 작인들 고혈은 더 빼먹으려 들더라. 오히려 돼지 말 듣던 아비만도 못하더라!”

찬은 늙은 농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학생시대의 기분을 과도하게 믿는 것은, 믿는 사람의 실수인 것을 알았다.

무슨 계획, 무슨 계획, 학창시대에 밥 먹듯 하던 계획을, 학창 밖에 옮기려는 사람을, 그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학교란 결국, 대개 순조로운 환경에서, 밟아 가는 호화롭고 평범한 과정임을 새삼스럽게, 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삼스럽게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조선의 해방, 독립에 있어서, 동경 유학생은 잘하면 별동대는 될지언정, 그 주력부대는 아닌 것이었다.

혹자는 말하였다.

중국에서는 졸업을 하고 돌아가면 성장이 자동차를 가지고 모시러 나온다!”

그러나, 그는 중국 사람 못 된 것을 한할 것도 아니었다. 허다한 세월에 허다한 모험은 역시, 한 줄기 평범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는, 알았다.

 

3

어떻게 무얼로 나갈 참인가?”

찬의 졸업을 축하하러 온 먼 촌 아저씨의 말이었다.

나가긴 어딜 또 나갑니까?”

찬의 말이었다.

졸업을 했으니, 인제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아저씨는 계속하여 묻는 그 얼굴에 기쁜 웃음까지 담았다.

무엇이라도 하긴 해야겠습지요. 놀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찬으로서는 바른 그대로 에누리없는 대답이었다.

판사나, 검사나, 하나 해야 할 것 아닌가?”

아저씨는 기다리다 못하여, 이제는 구체적으로 물은 모양이었다.

판사나, 검사요?”

찬은 과연 생각해 볼 문제였다. 반문을 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탄식에 가까운 어조였다.

, 검사면 시골서는 그만 아닌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옛날로 치면, 원이 다, 하던 것이었지만.”

아저씨는 잠깐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찬이가 그따위는 다 간에 차지 않게 생각을 하는 줄로 안 모양이었다.

, 검사를 누가 준다나요.”

찬은 스스로 웃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안 줘?”

아저씨의 엉뚱한 반문이었다.

일본이 망했나요.”

찬은 스스로 탄식을 한 것이었다.

일본이 망하다니?”

아저씨의 크게 뜬 눈이 볼 만하였다.

그럴 것 아닙니까. 일본이 망하기 전에야, 제 차례에 오겠습니까. 심지어, 관청이면 심부름꾼까지 저희가 살아먹는 판인데요.”

찬은 콩콩이 따져 주었다.

,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래, 그것도 안 줘?”

아저씨는 화를 벌컥 내었다.

대학을 누가 다니래서 다녔나요. 공연한 화를 내십니다.”

찬은 빙그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고놈들이 본래 깍정이 같은 놈들이라, 고 쥐새끼 같은 놈들!”

아저씨의 의분은 상당하였다.

소용없어요 글쎄! 나 한 사람 잘된다고 뭐 조선이 독립되겠습니까? 아저씨가 별로 덕보실 것 있습니까! 그따위 주지도 않을 것 바라기는 무얼 바랍니까!”

찬은 그만큼 해두었다.

그래도, 모다들 바란 것 아닌가. 적어도 자네가, 군수 아니면, , 검사는 떼어논 당상으로 알았지. 그럴 것 아닌가, 읍내 김수찬이 아들로 말한대도, 제가 아전의 자식으로, 보통학교 겨우 졸업하고, 오래 쫓아다니더니, 요새는 군수가 되었다잖나! 이런데 그래, 대학 졸업생을 써주지 않는단 말이, 그 무슨 말이란 말야!”

아저씨의 흥분은 풀릴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 그렇게들 생각을 하십니까? 왜놈 왜놈! 하고, 엊그제까지도 이를 가시던 어른들이, 왜 벌써 그토록 변하셨습니까. 벼슬, 그까짓 왜놈의 벼슬은 명정감도 못 된다고들 하시지 않았습니까! 벼슬과 공부와 일과는 다른 것이거든요!”

찬은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마는, 아저씨는 여전히 섭섭한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어쨌든, 왜놈은 망해야 해! 요모저모 발라먹을 것은 실컷 발라먹고, 남겨 주는 것이 있느냔 말야! 어디 가 못 붙들려서, 붙들려도, 하필 못된 놈을 골라, 붙들렸단 말이라.”

아저씨는 연하여 탄식을 하다가 돌아갔다.

찬은 대개 같은 이야기를 마을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고, 그래도 무슨 도리가 있거니 생각을 하였을 듯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찬의 말과 부합하여 갈 제, 그들 중에는 혹, 찬의 무능을 비방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을, 상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찬은 소리가, 다른 사람의 귀를 통하여, 자기 귀에 들어온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혹, 세상은 이대로 굳어질 줄,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객쩍은 걱정은 여기에 필요치 않은 것을 그는 보았다.

문제는 체면이나, 명예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요, 생활 그 자체에 있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는 바와 같이, 그네의 생활은 날로 빈궁하여 가고 있지 않으냐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의 끝은 과연 무엇으로 날 것인가.

그들의 요구는 여전히 긴박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대로 믿어도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을 그는 또한 깨달았다. 긴 동안의 피로를 잠시 쉰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걸어가는 확호한 발자취 그것이 얼마나 뚜렷하게 남느냐가 문제였다.

찬은 이러고 이 시골에 있을진대, 내일이라도 우선 논에 들어가 풀을 뽑고 김을 매야 되었다. 논에를 못 들어가면 밭이라도 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 농촌에 각 도는 존재가 되는 도리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 농부들과 더불어 호흡을 하고 일하고 사는 도리는,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주의 아들도 아니요, 장사치의 아들도 아니요, 벼슬아치의 아들도 아니었다. 한낱 농부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로 하였다.

아버지!”

그는 이렇게 공손한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말이냐?”

아버지의 재촉이었다.

저는 당분간 농사를 짓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지으시던 농사를요.”

아들의 말은 더욱 공손한 목소리로 되었다.

농사를!”

아버지 또한 고요한 목소리였다.

.”

아들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게 소원이냐?”

아버지의 음성에는 엄숙한 기운이 돌았다.

소원은 아니지만, 해보겠습니다.”

아들은 실상 준비 못 하였던 대답이었다.

그러면 왜 진작 말을 못 하였느냐?”

아버지는 일층 엄숙한 목소리였다.

……

아들이 미처 대답을 못 한 것은, 아버지의 이 진작이란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모른 까닭이었다.

네가 재너머 서당에 갈 때 말이다. 그때 말을 하였더면, 좋았을 것이 아니냐? , 늦게 지금 와서 말을 하더람!”

아버지의 말씀은 여전히 엄숙하였으나 그러나, 노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들은 역시 준비 없는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생각을 해보아, 세상 것을 너는 너 혼자 맡아서 다 할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사, 그렇게 될 법이 어디 있겠니? 너는 학문을 했고, 다른 사람은 농사를 했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일을 해오지 않았겠느냐 말이다. 네가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다른 농부는 너의 학문을 할 수 있느냐? 이것저것 왔다갔다할 수가 있느냐 말이다. 농부라도 될 수 있는 학문이라면, 그것은 너의 학문을 얕본 소리요, 백면서생 아무라도 될 수 있는 농사라면, 그것은 농부의 농사를 얕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세상에 거저 된 것이 어디 있겠니! 모두 장담을 하란 법이 어디 있겠느냐!”

아버지는 말을 끝내고, 허허 한번 웃었다.

경우에 따라서, 하는 데까지 해보는 것이겠습지요. 장담이 아니옵지요.”

아들은 비로소, 못 하던 대답을 하게 되었다.

그게 다 막연한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곧 될 것을 한대도 틀리는 수가 있는 것을, 하는 데까지라는 게 그게, 막연한 소리거든!”

아버지는 또한 아들의 미거를 책망하였다.

하면 되는 수를 바라옵지요. 어찌 꼭 안 될 것을 알겠어요.”

아들의 대답이었다.

꼭 되기를 어찌 바라느냐? 공연한 공상이다. 너는 너의 할 일이 있는 줄 알아라. 내 너에게 하는 부탁이 별것이 아니다. 너보고, 왜놈 벼슬을 살아서, 나 고기 사달란 말이 아니다. 너는 네가 배운 학술로 네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보아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하는 부탁이다. 거적자리, 악의악식은, 내가 오늘까지 걸어온 길이니, 새삼스럽게스리 겁낼 것도 아무것도 없다. 내 말을 깊이 알아들어라.”

아버지는 인하여 긴 한숨까지 내쉬었다.

……

찬은 이런 때, 자기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찬은 과연, 이 아버지의 깊은 심정을 오늘에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날마다 무료한 찬에게 가장 자주 정다운 체 찾아 주는 친구는, 본면 주재소 순사였다.

갑갑하시지요?”

순사의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인사였다.

갑갑합니다.”

찬 역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대답이었다.

어디 작정되시었습니까? 아마 되시었겠지요?”

친절한 듯, 궁금한 듯, 역시 그 타령 그 모양으로 물었다.

없습니다.”

역시 그 타령 그 모양의 대답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서울 안 가셔요?”

이런 것이, 다 그의 필요한 용무인 것이었다.

아마, 곧 한번 가보아야 할까 봅니다.”

찬은 별로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안하였다.

며칠날쯤 떠나시겠어요? 가시면 오래되시겠지?”

용무는 점점 더욱, 골수를 파고 덤비는 모양이었다.

곧 떠날까 합니다. 오래되고 안 될 것은 보아야 알겠지요. 알쏭달쏭한 것을 함부로 말했다가, 관청 문서에 틀리면 야단 아닙니까.”

찬은 한바탕 껄껄대고 웃었다.

원 별말씀도!”

순사도 따라서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그럼, 다녀오시면 또 뵙겠습니다.”

순사는 돌아갔다.

순사가 왔다 간 이튿날 찬은 정거장에 차를 타러 나오다가, 한동안 주재소의 주목을 받고, 경찰서 유치장 출입도 더러 하던, 강이란 친구를 만났다.

한번 간다간다 하고는 벼르기만 하고 가 뵙들 못했어!”

강은 지나치게, 친절하였다.

피차 일반일세. 나도 왔으면 찾아야 할 텐데! 어디 그렇게 되던가!”

찬의 역시 같은 인사였다.

그래, 어디를 이렇게?”

강은 상대방의 위아래를 별로 허물없이 훑어보았다.

서울을 좀 가볼까 하고.”

찬은 간단한 대답을 하였다.

서울! 잘 가시지.”

강의 보통 아닌 소리였다.

서울을 잘 가다니? 잘못 가는 수도 있나?”

찬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초에 살 수가 없어! 놈들이 사람을 부지를 하게 해야지!”

강은 심각한 표정을 하였다. 그의 주름잡힌 양미간이 더욱 침침하였다.

서울은 별수 있나? 서울도 조선땅이 아니겠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찬은 그의 말이 듣고 싶은 김에 좀더 말을 길게 끈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금 나았겠지. 별 트집도 없이, 여차하면 잡아다 넣네그려! 사상단체란 말할 것도 없고, 친목에 관한 것이라도, 일호 사정이 없네그려. 툭하면 젊은놈, 선동했다고 잡아다 넣기를 밥 먹듯 하니! 젊은놈이 기를 펴고 살 도리가 없잖아! 이제는 아마 영영 먹은 콩으로 알고, 목을 바짝 조르는 모양이지 아마. 물건뿐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까지 부지를 못 하게 한단 말이거든! 우리 고을에 뭐 볼 것 있는 줄 아나. 요 모양일세그려! 꼼짝들을 못 하는 셈이지. 앙앙 하기는 하지만.”

강은 애써 저간의 소식을 전하려 애를 썼다.

그래,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

실상은 늦은 찬의 말이었다.

면사무소.”

강의 대답이었다.

면사무소는 왜?”

찬의 지나가는 말이었다.

구장을 보거든! 할 수 있던가! 하 참!”

강은 매우 무안한 모양이었다.

구장!”

찬 또한 한숨을 쉬었다. 천구백삼십일년, 만주에 독수를 대고야 만, 강도 일본제국주의는 결국, 기식이 음음한 조선의 산멱을 마지막 누르고 있는 꼴을 이 한 가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

고향 친구 순구는, 찬의 하숙을 잘 찾아온 것이, 퍽 신기하고도 신통한 듯이 찾아온 경로를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정거장에 척 내리니, 밤이 낮같이 밝은지라, 눈이 부시고 정신이 없더란 것과 찻속에서 사귄 친구를 차를 내리다 겨우 다시 만나, 전차는 잘 타고 왔으나, 네거리에서 하마터면 길을 잘못 들어 욕을 볼 걸, 묻자 그저, 묻다 만나니, 이 이웃 노인이라, 마침 동행을 잘하였다는 것이었다.

찬은 아직도 아까 그가 하숙을 찾아 들어올 때,

누가 왔소.”

집어던지듯 외치던 주인 마누라의 불쾌한 목소리, 그 소리를 따라 연상되는 가난! 군색! 아까까지도 밥값에 졸리던, 구중중하던 그 기억이,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쯤으로 허물없이 멀리 온 친구를 박대할 리 없고, 웃는 낯으로 대접하는 것이 그의 의무인 것처럼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십 전을 주고 호떡 두 개를 사먹었더니, 저녁은 안 먹어도 하룻밤 넉넉히 새울 수 있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보아서는, 퍽 자연스럽지 못한 주름잡힌 이마,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아직 낯을 씻지 않은 표로, 분빛이 검은 살 위에 아롱진 솟은 광대뼈, 움푹 들어간 두 뺨을 가진 얼굴을, 그는 연해 전등을 향해 들고 앉아, 찻속에서 변소문을 열다 낭패하고, 무한 애를 쓰다 필경은 깨닫고 알았다는 이야기며, 자기와 같이 헐벗은 사람도 많지만, 호사한 사람들도 많더라는 이야기를 찬에게 하면서도, 찬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을 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가 가장 잘 쳐다보는 곳은 내내 전등 아니면 벽이었다. 심하면 그는 단풍 갑을 꺼내어 궐련을 물부리에 박을 때에도, 시선을 그 벽과 전등에서 거둬들이지 않았다. 불을 보다가 눈이 피로하면 벽을 보고, 벽을 보다 무미하면 또 불을 보는 것 같았다.

저렇게 밝은데, 빈대가 어떻게 나올꼬!”

그는 서울에 빈대 많은 것을, 한 지식으로 알아 두었던 것이다.

서울 전등이 시골 것보다 훨씬 밝겠군!”

그는 시골 장터에서 기름 없이 켜지는 이 불의 조화를 알아 둔 것이었다.

무던히 심한 모양일세그려, 자네도 회색 저고리를 입었으니?”

찬은 그의 말을 대꾸하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였다.

색의 장려! 심하고말고!”

그는 찬의 말을 이어서 색의 장려로 고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너나 할 것 있나! 물고의 적삼에도 붉은 물칠을 하여, 장날 장에 갔다 오는 사람들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물고의 적삼에 물들이기가 그처럼 어려워!”

물들인 것 물에 입고 들어가면 물이 더 잘 빠지지.”

아무렇거나 흰 걸 입으면, 검은 살이 희어지며, 검은 걸 입기로, 검은 살 더 검어질 리 있겠나!”

이 겨울로 들어서는 흰 옷이라고는 없어졌지. 나다니는 사람치고는, 방에 가만히 앉았는 백발 노인 이외에는! 폐일언하고, 개도 안 짖으니까, 검정이를 보고도.”

시골도 가본 지가 꽤 오래니까 원!”

쓸쓸하지, 춥지, 춥고말고. ! 못 살아, 못 살고말고, 살 수 없지!”

이 사람! 서울은 춥지 않은가. 다 같은 겨울인데!”

그렇지만, 서울 사람이야 서울 비워 놓고 어디로 가겠나! 우리 동네처럼 비워 놓고!”

그는, 이 말의 끝을 가벼운 한숨으로 맺었다. 찬이 유심히 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예사로 넘기려는 듯, 그대로 깊은 침묵에 잠기려는 것을, 찬은 묵살할 수가 없었다.

무엇! 얼마나들 갔기에?”

백삼이도 갔지, 우선!”

백삼이가! 어디로.”

극락세계로.”

그려!”

이사도 갔었지, 이사를 간 것이 죽을 장본인이었던 줄이야, 당자도 몰랐으리. 이것 좀 보소, 그 굶주리던 창자에, 밥이 좀 생기니까, 잔뜩 먹었네그려. 성할 일인가 죽어 버렸지.”

이사는 어디로 갔던고?”

김진사가 다려갔지. 그전 상전일세그려. 하도 굶고 불쌍하니까. 같은 값이면 다려다 부리고 밥이나 먹여 주자는 것이었겠지. 그까짓 홀아비 한 몸뚱이 계집애 두엇 있어야, 먹으면 얼마나 먹으며 먹는 밥값이야 못 하겠는가!”

응 죽었다! 백삼이가!”

향나무 안 김진사네 행랑채에서 마누라, 딸 둘, 네 식구가 살다가 향나무 안집이 헐린 뒤, 움집 자리도 동네 속에서는 구하다 못 하고, 고개 너머 토끼골 잔솔밭 기슭에다 게딱지만한 움을 묻고 솔장수로 굶다 먹다 하다가, 마누라마저 죽어 버렸을 때 동네 마누라들은 잘 죽었지 잘 죽었어, 굶고 고생하느니하던, 백삼이의 내력을 찬은 잘 안다.

그는 오십밖에 안 되는 나이에 육칠십 먹은 늙은이처럼, 고통고통 하는 병객이 되고 말았으나, 삼십 사십 당년에는, 근동의 수머슴이었으며, 일 잘하고, 경위 잘 타고, 풍물 잘 치고, 근동의 젊은이는 감히 공대를 아니치 못하였고, 늙은이들도, 두레 공사마당에 한몫을 주고도 남던 터였다.

그러나, 손에 풀기가 걷기 시작하고, 굶주린 몸이 사십을 넘어 오십이 되고 보니 그를 데려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고, 기운은 없어도 품은 팔아야 먹고살 처지였다. 이후로는 한평생 그의 밭에 팬 논둑길에 그의 자취는 영영 드물고 말았다.

시털궂은 일꾼들의 객쩍은 눈치를 받아 가며, 들밥을 빌어먹으러 간간 나오는 외에는.

참고 아무리 굳게 견디려야, 그는 결국 그의 젊은 피와 땀을 바쳐 준 동네에서 백골도 묻히들 못하고, 죽음이 오기 전에, 자기의 발로 자기의 시체를 타향에 치워 버렸다. 종 노릇을 그만두었다가 종의 이름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백삼이 손으로 묶어 낸 시체도 아마 몇십 명 될걸!”

얼마 뒤에 이것은 찬의 물음이었다.

되고말고. 적게 쳐도 오십 명은 되고야 말걸!”

그렇겠지. 자기 마누라까지 자기 손으로 묶어 냈으니!”

그랬지. 동네 사람 별로 도와 주는 사람 없고!”

없는 놈이란!”

송장 많이 만진 사람치고, 신세 좋은 것을 못 보았네!”

신세가 좋지 못하니 송장을 만지게 되지, 만지라는 데야 안 만지는 재주 있나.”

그도 딴은 그려.”

그가 살던 움은 어떻게 되었노?”

그까짓 것 몇 푼 어치 되나!”

그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지.”

들었지 경상도 사람이.”

! 그 사람도 살 곳을 찾다 지친 모양일세그려?”

영재는 감옥 갔지, 모르나!”

그는, 그까짓 것, 아직도 멀었네, 좀더 들어 보게! 하는 듯이, 침을 힘있게 꿀떡 삼키고 단풍을 또 한 개 피워 물었다.

그건 또 웬일이여?”

도둑질을 한 까닭이지.”

아 그 사람이, 그 못난이가!”

못난 사람은 배고픈 줄도 모르나, 다 배부른 뒤의 장담이지!”

내 말을 바꾸어 들었지, 자네가. 못난 놈은 도둑질도 못 하거든, 굶어죽기 전에.”

참혹하지! 도둑질이라야 볏섬을 져왔겠나, 돈을 훔쳤겠나. 그게 아마 가을일인가베, 건넛마을 김참봉네 벼 줄가리에서 벼 두어 말 몰래 훑어다 먹은 모양일세!”

몇 해나 받았노?”

모르지, 잡혀간 뒤에 몇 달을 나오지 않으니, 감옥으로 넘어간 줄만 알지. 신문엔들 났겠나. 났은들 우리가 신문을 보았겠나!”

그럼, 그 처자들은?”

말씀 아니지, 지금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살던 집은 어쩌고?”

집이야 그까짓 것 몇 원 어치 되나, 사는 놈이 따로 있겠고, 먹을 것은 없고, 동네 사람들은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라도 도둑놈의 처자를 멸시하는 것이 자기네의 옳은 일인 것처럼 대하니, 부지할 수 있겠나! 떠났지. 집은 역시 떠들어온 사람한테 오 원인가 사 원인가 받고 팔고.”

그럼, 요전날 추위 못 넘겼겠네! 죽었겠네!”

그렇기 쉽지, 얼어는 죽었어도, 누더기 봇짐 속에 집 판 돈 사오 원은, 그대로 남았으리. 어떻게 지독한 여편네라고!”

장사지내 준 사람들 술값은 넉넉히 되었겠네그려!”

……

몇 호 되지 않는 동네에 두 살림이 망하고, 두 살림이 또 시작되었구먼!”

그의 침묵을 잠깐 틈타 찬은 한번 더 외쳤다.

그뿐인가 운선이 이력 아나? 운선이 일!”

그는 찬의 외침에 흥을 탄 듯, 한층더 흥분된 어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죽었지 목매어.”

그건 또 웬일이여?”

돈이지 돈 때문이지. 모두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빚 때문에?”

! 빚을 주나 누가, 없는 놈을! 금을 팠지요!”

돈이 어서 나서!

집 팔고 화곡 잡혀, 그 돈으로 광 구덩이 하나를 샀네그려! 며칠을 파지 않았겠나! 사람 하나를 사가지고, 그래 며칠을 강목을 쳤지. 노다지 나오기가 그냥 쉬운가! 있는 것 다 조겨먹고, 나중에는 정 베를 돈조차 없게 되어도 노다지는 고사하고, 납돌이나마 그럴듯한 것 한 덩어리가 나와야지!”

그래 죽었어?”

아니지. 이쯤 되니까, 세궁역진 아닌가. 하다 기진맥진하여, 그만두고 돌아와 누웠는 수밖에. 살 집도 없어졌고 먹을것도 없어졌다기로, 그렇게만 되고 말았단대도 어떨지 몰랐는데, 그전 왜놈 광주가 하루는 찾아왔네그려. ‘한번 우리집으로 오시오. 술 한턱 내리다. 당신이 파던 그 광에서 노다지를 캐었소. 천 원 어치는 되겠지 아마!’ 이 말을 광주가 전하고 간 뒤에, 운선이는 쓴지 단지 입맛도 모르고, 정신없이 이불을 쓰고 누워 버리지 않았겠나! 자기네가 십여 일 강목을 쳐가지고 만난 바위! 기진하여 못 뚫고 만 그 속에, 노다지가 들었던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어찌 분하던지 목을 매어 죽는 수밖에!”

그래, 죽었어!”

죽었지!”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못 죽은 사람은 어떡해! 그 아버지도 살아 있지 않은가, 이야기 잘하던 그 노인!”

암말도 못 하데 못 해. 귀찮은 인사꾼이 안 나오는 말을 어물어물 씹으려면, 영감님은 먼저 나의 죄는 진작 죽지 못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네!’ 할 뿐이니까 어색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어물어물하고 말았지. 돈 주고 집 산 사람이 집 안 벼내라겠나! 화곡 잡은 왜놈이 그 곡식 안 가져가겠나! 파산을 치고 나서는 꼴이란 어이구! 못 보겠데!”

운선이가 그 집을 팔기는 누구한테 팔았던고?”

새암골 최참봉한테 팔았지. 최참봉은 전라도서 온 광주리장수에게 오 원 남겨서 이십오 원에 팔고.”

그래, 어디로 갔노. 그들은?”

모르지. 지금은 어디 가 있는지! 그러나 살았으면 백리 안에 있을 것이요, 멀리 갔어야 극락세계밖에 더 갈 데 있겠나!”

아무렇든, 그 동안 많이 변했네!”

얼마 동안 방 안은 고요하였다.

그뿐 아니라, 만보는 만주로 갔지.”

그는 찬이 말없이 생각하는 양을 보고, 아니 생각은 듣고 나중에 하라는 듯이 또 하나 같은 제목에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만보가!”

그랬지, 이민으로.”

다른 것은 하여튼, 지금쯤 무던히 떨겠네그려!”

편지가 왔더래, 자기 종형께로. 못 온 것을 억울히 생각할 것 없다는 뜻으로. 자기 종형도 만주를 가려다 못 갔거든.”

만보네 살던 집은 또 누가 들꼬?”

무엇이니라 그게…… 김서방! 자네는 모르겠지. 뒷내 다리 공사할 때 윤십장을 따라온 사람. 그도 경상도 사람이지! 그 사람이 들어 있지.”

다리 새로 놓았나? 준삼이 잘 벌었겠네그려, 주막 하는 준삼이 말여!”

조금 벌었지. 그런데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넣은 것! 이야기를 하면 또 기가 막히지!”

무엇?”

등본이라는 일본 영감상이 찾아왔거든, 와서는 술자리를 벌이는 거라, 옳다, 수가 났다 했지!”

몇 사람이나 왔기에?”

혼자지.”

혼자인데 무슨 수가 나. 술을 먹으면 몇 사발이나 먹겠기에, 그까짓 막걸리를!”

혼자 먹나! 근처 동네 사람, 길 가는 사람, 보는 대로 청해다 먹는데, 이 술벗을 맞아들이기에는 영감상보다도 주인 준삼이가 아니었겠나?”

술을 팔아먹을 욕심으로!”

그렇지 술벗이 오는 것을 술 주인이 싫어하질 않는 눈치이니, 뒷손을 까불러 자꼬 끌어들였지, 통역은 박성이가 하고, 들여라 먹자, 들여라 먹자, 실컷 포식을 하지 않았겠나! 술고래 경천이가 어찌 먹었던지 똥을 다 싸고 사흘을 앓았다니 그만하면 족했지 무얼.”

그래?”

하룻밤을 이렇게 새우고 보니, 준삼이나 준삼이 마누라는 졸리지 않고 견딜 수 있겠나! 약간 눈을 붙였지. 아침에 눈을 다시 떠보니 영감상이 간곳없네그려!”

준삼이 심정도 칭찬은 못 하겠네!”

영감상이 어디를 간지 알아 글쎄. 꿍꿍 한숨을 쉬어 가며, 준삼이가 하던 말이 또 우습지! ‘돈 있고 세 좋은 왜놈이 도망할 줄은 몰랐어!’ 하지 않았겠나.”

망했네그려. 없는 놈의 살림에 몇십 원 까먹었으니. 왜놈의 덕택이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네그려! 이해 없이 왜놈이 조선놈 술 받아 줄 리 있나?”

말씀 아니지. 집도 그나마 팔아 버리고, 양조조합 술값도 떼어먹고, 정처없이 떠나 버렸는데, 장에서 혹 보면, 거지꼴을 하고 다니더래.”

그러면 그 주막은 아주 없어졌겠군!”

터가 있는데, 사람이 없을 수 있나! 터 밖에서 온 서서방이란 사람이 막걸리잔이나 갖다 놓고 팔지.”

술을 팔면 술을 먹을 놈은 누구이기에!”

그렇지. 풍년이 들어도 굶을 터인데, 물로 쓸어 버리고 술들을 먹을 놈도 없지만 안말 성남이며 만득이 같은 사람은, 아직도 상당한 술꾼이지. 아무래도 올 일 년은 넉넉할걸! 남은 토지만 팔아도 돈 백 원은 넉넉할 터이니, 그놈 팔면 올 일 년 술 먹고 못 지내겠나! 금년도 몇 달 남았다고!”

성남이 만득이도, 그곳 사람 노릇 얼마 못 하겠네그려! 그 사람은 홧김에 술로 그렇지만.”

다 한가지 아닌가, 술을 먹는 놈이나 술을 못 먹는 놈이나, 그곳 사람 노릇 못 하기는.”

자네도 술 못 먹는 패일세그려. 술도 못 먹어 가며 고향에서 쫓겨난다!”

그는 찬의 이 말에 잠자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다.

줄곧 차를 타고 왔나?”

찬은 곱집어 물었다.

아니, 이백 리는 걸어오고, 백 리는 타고 온 셈이지.”

자네 편지는 보았지만, 답장은 못 하였네. 내 편지가 고향에 가본 제도 꽤 오래겠네그려.”

그래, 자네는 어떻게 되었나. 잘 되었겠지?”

그가, 찬에게 묻는 깊은 뜻을, 찬이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찬은 과연 제집에서 대우 못 받는 놈은 나가서도 대우를 못 받는다고, 고향에서 쫓겨난 놈이 왜놈 등쌀에 무슨 얼어죽을 취직이 되었겠느냐!’ 이쯤만이라도 대답을 하기가 어쩐지 싫었다.

그러나, 찬의 얼굴을 쳐다보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더 길게 침묵을 지키기가 너무 안된 것처럼 느끼었기에, 어물어물 넘기는 수작으로 웃는 체하며,

그렇지 뭐!”

하고, 난 뒤에, 생각하여 보니 또한 이 웃음이 친구에게 대한 대답으론 너무 소홀 간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좀더 찬의 명확한 대답을 앞에 두고 아끼는 듯, 더 파묻진 않았다.

그러나,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그의 눈에 뜬 뜻을, 찬은 좀더 자세히 읽을 수 있으니,

나는 너를 믿고 왔다. 아무쪼록, 네가 취직이 되어 나를 돌보아 줄 수 있다는 대답을 하여 주기만 바란다. 틀리면 큰일이다. 묻기 전에 말을 하여 다오하는 듯한 것이었다. 좀더 까일러, 자기가 지금, 하숙료를 못 내고 할 수 없어 번듯한 얼굴을 병신처럼 숙인 대로, 끼니마다 소리나게 갖다 놓는 밥상을 들어다 먹는 줄을, 그가 알면 그의 고통은 자기보다 못지않을 것을 또한 상상치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씩둑꺽둑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 혼자 당하는 일인가. 돈 있어서 서울 구경을 왔겠나!”

그는 침중한 태도로 말을 먼저 또 시작하였다.

자네 이야기는 여태 하지 않았나, 자네가 이야기한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자네 이야기도 되고, 내 이야기도 되겠네그려!”

그렇지! 그렇지만.”

서울은 빈집이 없는가 봐! 빈집이나 있어야 집 없이 새로 밀려들어오는 사람이 잠시 쉬어라도 갈 수 있잖아! 지나는 사람도 없고, 쉬어 갈 사람도 없으면 우북한 쑥대밭이 되고 마는 수밖에! 그러나 그게 만일 좋은 터라면 돈 가지고 온 놈이 기와집은 못 짓겠나, 헐어 자빠진 집을 싹 쓸어내고! 이것이 길가 동네의 화와 복일 게니. 가벼운 행장에 가진 것 없이 나선 나그네는 바람에 불리운 구름밖에 더 되겠나. 바람 부는 대로 갈 수밖에! 빈 구멍만 찾아갈 수밖에! 서울도 좋겠지 비었으면! 그러나 서울이 자네나 나의 영주진 줄 알겠나. 부는 바람 막을 힘이 없는 한은.”

아무렇든 발이 성하고야, 앉아 굶을 수 있던가. 시골은 지금 못 먹은 수침 논을 다시 걷어잡을 힘들이 없고. 금보다도 귀한 노동 벌이는, 서투른 나는 그만두고 쟁쟁한 일꾼들도 눈을 씻고 보아야, 얻어 보지 못할 지경일세! 하천 공사, 그것도 그치고 보니.”

! 살기가 죽기보다, 힘이 들기야 하겠나!”

어떻게 한군데 밥 얻어먹을 데 없겠나? 내일부터라도.”

그는 지금까지 한 말이 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한 것처럼, 언제보다도 굳센 어조와 절박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내가 자네의 사정을 모를 리야 있겠나. 내가 아첨하여서 될 일이면 자네를 위하여, 하여도 좋지, 그러나.”

그는 찬의 그런 듯 만 듯 듣기에 힘들고 해석하기 괴로운 대답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자네야 나 하나쯤, 주선을 못 하여 주겠는가! 노동이란대도 웬만한 것은 견뎌 낼 터이니.”

찬은 그가, 너무 되는 것을 쉽게 알고, 안 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아는 듯 들리는 듯한 데는, 적이 불쾌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같은 힘을 너무 믿느니라 생각을 하면, 또한 지극히 참담한 일이었다.

자네는 그래도 설마, 취직이 되었겠지. 어디 좋은 데 다니게 되었겠지!”

이것은, 그가 찬의 침묵을 앞에 두고 전력을 들여, 희망과 기대를 향하여 쏜 말이었다.

천만에.”

그는 찬의 너무도 짧고 빠른 대답에 대하여, 약간 시간을 두고 비로소 깨달은 눈치였다.

그는 오직 하나의 희망을 놓쳐 버리고, 높은 절벽에 서서 끝도 없이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고 짓는 듯한 시달픈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못 하는 취직을 나를 어떻게. 무슨 수로.’

하는 듯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확 치달아 보이는 듯하였다.

갈 만한 데는 가보았네.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싫어하는 것을 보았네!”

그는, 찬의 이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꼼짝없이 앉았다. 시계는 땡 땡 땡, 새로 세시를 친다.

자세, 자야 내일 또 일찍 일어나지!”

찬은 일어나 이불을 폈다.

 

시 일보사의 편집실은 그리 좁은 방이 아니었다. 여기에 둘러앉은 편집원들은 그 차림차리가, 조선 어디서도 볼 수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젊은 외근기자 몇 사람이, 단벌 양복이나마, 아침마다 아랫바지 금을 내어 입을 뿐, 동정이 검었거나 말았거나, 고무신이었거나, 헌신이었거나, 새신이었거나, 옷은 입으면 되었고, 신은 신으면 되었을 것으로, 그런 등속에 관심을 갖지 않는 중년 이상의 분네가 대부분이었다.

단순한 관념문제란 것보다도, 그들은 말쑥히 차리고자 한들, 그들의 집안에 그러한 분에 넘치는 옷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돈냥이나 생기면, 우선 술잔이나 먹어야 하고, 양식도 좀 팔아야 하고, 어느 해가에 옷에 여력이 미칠 리 만무였다.

찬은 밖에 나온 그들의 의포보다도, 그들의 살림을 맡아 주는, 안에 숨은 여인의 모양을 상상하여 보았다. 의외에 누가 찾아오면, 방문을 닫고야 말, 남루한 꼴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끼니가 확보되지 못하였으나, 헐벗었으나, 그들이 오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남편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초라한 남편의 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일찍부터 항거를 하였다는 표로, 그들이 그들 이력서에 가장 뚜렷이 쓸 수 있는 것은, 징역의 햇수였다. 징역의 햇수는 곧 그들 투쟁경력을 말해 주는 지표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 지표를 작성하기 위하여, 일찍 조선 백성에게서 착취한 막대한 국고금을 아끼지 안하였고, 수천 수만의 인원을 동원하고도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이 지표는 대개 신용해도 좋을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정을 돌아볼 겨를이 일찍 있었을 리 만무였다. 못 먹고 못 입는 가운데에서나마 만날 수 없던 남편을 요행 만난 기쁨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용이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과거의 영웅 그들은 이렇게 초라한 빛으로, 마르는 물꼬에 송사리 몰리듯, 이 시 일보라는 최후의 외로운 성터로 몰린 것이었다.

이 최후의 성터를 일본 제국주의 경찰이, 한없이 미워하는 게, 당연 이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별수없는 트집이라도, 트집만 잡으려 드는 것, 별수없는 트집은 잡히지 않으려는 것, 이것은 웃음 속에 칼을 품고, 편집원이 서로 싸우는 장면이었다.

가다 혹 발매금지가 되었을 때, 신문은 이미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편집, 식자, 제판, 윤전기, 배달, 어느 것이 척척 손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전민족의 의사였다.

독자는 나온 글자보다, 안 나온 복자에 더욱 흥미를 느끼었고, 발매금지를 당한 신문 한 장을 몰래 갖다 주는 배달부에게, 특별한 치하를 하였다.

그 까닭으로, 한번 보기 시작한 신문이면,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일도 없지 않아, 가다 혹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바라는가? 독자도 편집자도,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같은 때문이었다.

침식을 가리지 않는 이 판에, 옷맵시, 신발 모양을 참견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갓 안 쓴 제왕이란, 자긍을 가진 것은, 외국의 일이었다. 일본 식민지 조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긍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쟁을 위해서였다.

찬은, 이러한 편집실에 앉았는 것이, 절대로, 의미 없는 일로 생각되지는 안하였다.

그러나, 대륙에 만만한 싹을 보고 나간 일제의 야망은, 저희 병참기지로서 조선에 대한 음흉한 계획이 점점 더욱 노골로 화하여 가는 참이었다.

일본을 내지라고 하란 데 대하여는, 일본 내지라고 어물어물 넘겨도 되었다. 일본을 우리나라, 또는 아국(我國)이라 해야 한다는 데 대하여는, 될 수 있는 대로, 아국이란 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기술적 문제이므로, 그리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신문의 핵심인 논조에 대하여, 간섭이란 것보다는, 명령 지시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신문이 죽을 것이요, 들어주면, 죽음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신문을 살리는 것은 결국, 신문을 죽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구차히 신문을 살릴진대, 최후의 성터는 무너질 것이요, 참는 것은 초라함 그것뿐일 것이었다.

모든 것을 제폐하고, 오직 조선말 하나를 보급시키기 위한 것만으로도, 신문은 살리고 보아야만 한다는 의논도 노상, 비겁한 의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이것은 다른 방면의 문제였다. 시 일보의 문제는 아니었다.

찬은 이 문제의 귀추를 잠잠히 지키었다. 관록과는 다른 무위한 퇴패의 빛이 많은 노장의 얼굴에 나타나기를 애써 원치 안하였다.

차라리 죽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문제는 이런 타협에 해결이 있지 않은 것을 새삼스럽게 놀라는, 노장들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판국에, 극히 확실한 소식이 조선땅에 들어왔다.

장소는 독일 서울 백림, 거기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 조선 사나이가 우승을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운동부 기자들은 물어 볼 것 없이 호외를 준비하기에 분망하였다.

각 신문의 윤전기는 다투어 돌았고, 호외는 다투어 나왔다. 내 호외가 먼저 나온 자랑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수의 얼굴이 보였다. 가슴이 보였다. 얼굴은 같은데 가슴의 표장이 다른 것을 보았다. 같은 운동복이언만 표장이 다른 것이었다. 시 일보 호외에 난, 선수 가슴에는 일장기가 없었고, 다른 신문에는 일장기가 분명히 있었다.

시 일보 운동 기자의 눈에 보기 싫은 일장기는, 기자의 손으로 말살을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올린 사진에, 일장기가 있을 리 없었다.

이것을 일러, 일본 사람들은 국기 말살이라 하였고, 조선 사람은 일장기 말살이라고 하였다.

없애지 못하여 애를 태우던 판에, 더 좋은 트집이 있을 리 없었다. 총독부 도서과에서는 책임자를 불러다 당당히 책망을 하고, 또한 정간을 명하였다.

시 일보의 운명은 예서 끝나고 만 것이었다.

초라한 사원들은 흩어지고, 성터는 비었다. 찬의 처음 겸 마지막 기자생활도, 이것으로 끝을 맺은 것이었다.

동시에, 찬이 기술 한 가지를 체득한 것은 사실이었다. 편집이란 아무도 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나, 아무나 잘할 수 없는 기술이므로, 역시 기술 축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었다.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물론, 찬으로서 기자라는 것보다도, 기자로서 찬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어때! 다시 발간될 가망이 있는가 원!”

정이란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정은 모 신문의 기자였고, 모 신문은 시 신문과는 다른 신문이었다. 총독부의 당당한 기관지였다.

된들 별로 기대할 것이 있겠나. 가혹한 조건이 붙어 나올 터이니까!”

찬은 사실대로 대답을 하였다.

조건이 문젠가. 그것보다도 급한 문제가 있지 않은가. 좀 창피는 하지만도.”

정의 말은 딴 방향으로 흘렀다.

창피라니?”

찬은 짐짓 물었다.

이판에 얻어먹자니 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정의 말은 과연 노골적이었다.

그야 물론, 얻어먹는 것이 어찌 수월한 문제겠나!”

찬 또한 솔직한 이야기였다.

자네, 우리 사에 오겠나?”

정의 말의 핵심은 여기 있던 모양이었다.

고맙네. 그러나, 기자생활은 이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마 좋을 것 같네.”

찬의 이 말은, 친구에게 여간 미안한 말이 아니었다.

친구는 무료히 돌아갔다. 찬은 역시 잘하였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찬이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평소에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이, 가서는 안 될 곳을 찾아가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는 대개, 시 일보에 있던 옛 동료들이었다.

하하. 저널리스트는 역시 저널리스트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고, 가다 혹 환멸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자기 한몸의 과거와 현재를 애써 연결시키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아무런 고통이 없이 끊고도 오히려 당당한 사람을 볼 때, 과연 자기의 처세에 재고를 요치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자기는 옳다고 생각되었다.

옳으면?” 하고, 그는 다시 한번 자기를 비판하였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자기는 자기의 길을 가기로 하였다. 그 길이 옳은 길이라 하였다. 대체 옳은 자기의 길이란 것이 무엇이냔 것이었다.

주저를 하고, 방황하는 것이, 자기 자신일진대, 자기는 걷고 있지 않을진대, 길은 분명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질꼬!

찬은 역시, 자기는 되는대로였다고, 하였다. 그것이 다행히 과히 틀린 것이 아니었으면, 그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는 충실히 살고 싶은 것이었다. 대개는 시 일보의 옛동료들도 그럴 줄로 알았다.

결국, 별것이 아니었다. 실사회에 나온 자기는 역시, 학생시대의 자기를 초탈치 못한 것이었다. 가련한 조선의 한 사람은 이렇게 옳은 것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옳은 것을 찾고자, 애쓰는 것은 사실이었다. 항상 적을 옆에 두고 눈을 흘기며 빙빙 돌기만 하는 것이 자기임을 알았다.

이럴 것이 아니다.”

자기가 항상 자기에게 한 말이었다.

이제는 거의 되었다는 듯,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하는, 적의 기침소리를 듣는 듯, 하였다.

*

엠 출판사 편집실에서, 제일 먼저, 시 경찰서에 검거된 사원이 이와 김이었다.

모두들 별일이야 없겠지 하였다. 일본은 이미 중국과 전쟁을 시작해 놓고 호언장담을 하며, 온갖, 전에는 듣도 보도 못 하던 것을 맘대로 강제하는 때이므로 으레 있을 듯한 일로는 알았다.

두 친구가 잡혀간 이튿날은 두 집에 찾아다니며, 위로인사를 다니느라, 찬은 사의 일은 변변히 보도 못 하였다.

그 이튿날 오전 열시쯤, 국방복 입은 세 사람이 기세 당당한 걸음으로 엠 사, 편집실에 들어섰다. 이자들의 행동이나 눈치로 보아, 보통 방문객이 아닌 것을, 찬은 눈치채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자들이 곧, 이와 김을 잡아가던 자들인 것을, 찬은 그때 마침, 외출을 하였기에 몰랐던 것이었다.

그자들은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둘은 이와 김의 책상을 맡고, 구레나룻 시커멓고, 눈썹 긴 자가, 찬의 앞에 와서는 명함을 내밀었다.

일본말로, 당신이 황찬이냐고 물었다.

황찬의 자리에 와서 황찬을 묻는 걸 보니, 자리는 이미 전에 알았던 모양이었다.

찬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그때부터는 책상을 좀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찬은 허락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다른 두 곳에서도 책상 뒤짐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찬은 과히 초조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무슨 비밀문서를 그리, 책상 빼닫이에 두었을 리도 없고, 조금 전에 한번 뒤적거려 보기도 하였으니, 안심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는, 매섭게 앉아 한없이 뒤지는 데는 적이 괴로웠다.

혹시 사람의 일을 몰라, 괴롭기는 하였지만, 찬이 놀랄 만한 것을, 그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찬은 옆에서 분명히 보았다.

그자는 혹 의심이 나서 그랬던지, 뒤지다 무미하여 그랬던지, 아무렇지도 않은 엽서 한 장을 무슨 귀중한 보물이나 얻은 듯이, 정중하게 집어내서는 찬을 슬쩍 뵌 것은 아마, 실례한다는 표인 모양이었다.

상관은 없으나, 어찌, 도둑을 맞는 것 같아서 불쾌하였다.

아무렇거나, 어려운 곡경은 치렀으니, 얼른 이 불쾌한 군네들이, 이 방에서 없어지기만 까맣게 바랐던 것이었다.

한데, 작자들은 냉큼 가질 않고, 주춤주춤하며, 방 안을 살피다가는, 눈썹 긴 군네가 와서, 담배를 빨고 섰는 황의 어깨를 두 손가락으로 꾹 찌르며, 일본말로, 잠깐 가자는 것이었다.

그 순간, 황은, 옳지! 걸렸구나, 직감을 하고는 맘을 눅히었다.

찬은 그들을 따라 전차를 타고, 시 경찰서로 가는 도중, 저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 사건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딴전들을 보고 섰는 품이, 능글능글도 하였다.

저희들은 저희들대로 무슨 짓을 하거나 말거나, 찬은 지금 가서 곧, 대답할 말을 이모저모로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서 들으면 놀랄 일, 가택 수색에 실수가 없을 것을, 염려도 해 보았으나 별일 없을 것으로 단정을 하고, 내두사에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랑해도 음침할 방 안이, 가뜩이나 침침하고 케케묵었다. 소제 한번 제대로 못 한 듯, 마룻바닥은 먼지가, 밟는 대로 풀썩거릴 지경이었다.

찬이 가지고 간 가방 속에는 점심이 들어 있었다.

저희들도 우선 점심들을 먹으니, 이편도 먹기를 청하여 쾌히 허락을 맡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도, 저희들은 저희들끼리, 세상은 태평하다는 듯, 객쩍은 소리를 지껄여 댔다.

점심이 끝났다. 담배를 한 개씩 피웠다. 일이 곧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아까 같이 온, 얼굴 앍죽앍죽한 군네가 찬을 불러 의자에 앉히었다. 예서 그 하나가와라고 부르는 조선인 부장이었다.

찬을 불러 앉힌 그의 태도는 갑자기 매서워졌다. 그는 발음된 일본말로는,

그대는 왜, 여기를 오게 된지 알겠지?”

하였다. 어린애 다루는 수작이었다.

가자니, 따라온 것 아닙니까?”

찬은 이러고 버틸 수밖에.

왜 오자고 하였겠나, 그 이유를 말야! 얼른 대답하고, 속히 가라고.”

하나가와는 인자한 그 태도가,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하면 곧, 놓아 줄 듯하였다. 많이 해먹던 수작이었다.

모릅니다.”

찬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모른다? 이편에서 알고 묻는데, 모른다? 공연한 소리를! 그러지 말고, 얼른 말하고 가요.”

얽은 그의 구멍마다, 살기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아시면 물으실 게 있나요. 모르는 나에게 알려주시오.”

찬은 이렇게 수작을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뭣이 어째?”

하나가와는 소리를 삑 질렀다.

……

찬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경관을 왜 희롱하느냔 말야. 그대는 농판으로 알았던가?”

하나가와는 도끼눈을 더욱 매섭게 떴다.

농을 누가 하였습니까? 나는 모르는 것을 아신다니, 알도록 애원할밖에 있습니까. 천만에 농이 당합니까.”

찬은 이번만은 또한 대답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 처음은 아닌가 본데! 말하는 솜씨가 전에 징역한 일 있는가?”

하나가와는 멋대로 놀았다.

없습니다.”

찬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없어? 경찰서는?”

웃는지 노한지 모를 그의 표정이었다.

역시 없습니다.”

찬은 내내 공손하였다.

황국신민 서사 외는가?”

하나가와는 인제, 이렇게 나갈 모양이었다.

못 욉니다.”

통 몰라?”

한번 더 캐었다.

보면 알겠습니다.”

찬은 늘 그대로였다.

보면 알겠다? 창씨 하였는가?”

하나가와는 창씨에다 유독 힘을 주었다.

못 했습니다.”

찬은 바른대로 대답이었다.

왜 못 해? 조선 총독부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반도 백성을 위해 한 노릇을, 왜 못 하느냐 말야?”

하나가와는 총독부 순사부장다운 훈계 비슷한 문초를 하였다.

……

훈계였으면, 찬은 내버려두고 싶은 것이었다.

황국신민 서사도 못 왼다! 창씨도 안 했다! 그것은 그렇고, 이영배와 친한가?”

하나가와는 결국 본길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같은 사원입니다.”

찬은 한술을 더 떠 미리 대답을 하였다.

서로 어떻게 앉았지?”

하나가와는 말소리가 다시 평온해 간다.

이웃 책상입니다.”

찬은 명확한 대답을 하여 주었다.

무슨 말소리고 서로 들릴 수 있겠지?”

점점 더욱 정숙해 가는 목소리였다.

들릴 수도 있고, 혹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찬은 요만 준비를 해두었다.

그것은 무슨 이유로?”

하나가와는 한번 더 채근을 하였다.

일 한창 바쁠 때야, 어디, 남의 말이 내게 관계없으면, 내 귀에 들어옵니까.”

생각하고, 하는 찬의 말에, 차착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한번 언제 누가, 이영배를 찾아온 일이 있었지?”

하나가와의 말은 이렇게 돌았다.

모르겠습니다. 누가 언제 이영배를 찾아오고 어쩐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영배를 찾은 일이 있겠지요. 이영배에게도 친구가 있을 터이니.”

찬은 자기대로, 또한 짐짓 농락이라면 농락도 해보는 셈이었다.

이영배의 그 친구 말야, 그게 누군지 알겠지?”

하나가와의 뒤집어씌우는 수작이었다.

허다한 이영배의 친구에, 그가 누군 줄을 내 어찌 알겠습니까? 이영배의 친한 친구가 누군지 나는 모릅니다.”

찬은, 이야기가 이쯤 되니, 이렇게 할 만도 한 것이었다.

친하다며 그것도 몰라?”

하나가와는 이렇게 둘러댔다.

친타고 하였습니까. 같은 사원이라고 반드시 친한 것은 아니니까요.”

찬이 일부러 준비한 말을 잊을 리 만무였다.

어쨌든, 그대는 이를 찾아온 사람과 셋이 앉아 이야기를 하며, 이 말이 밖에 새서는 안 된단 말을 한 일이 있지 않은가? 그 이야기를 하란 말야! 예까지 이야기를 하였으면, 가히 짐작을 할 것이 아닌가? 어서 그 이야기를 하고, 곧 나가란 말야요.”

하나가와는 이러고 한바탕 코웃음을 쳤다.

서로 샐 것을 염려한 그런 것, 나는 모르는 이야깁니다. 세 사람은 그만두고 단 두 사람끼리란대도, 그런 일, 그런 말을 한 일 통 없습니다.”

찬은 여기서 그의 음모를 알았다.

말을 정히 못 해? 이래 보여도 이십여 년 경찰의 밥을 먹었어! 당장에 못 하면 좀 두었다 할까? 그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밖에!”

하나가와는 이만큼 위협으로 나왔다.

내 무슨 거짓말이란대도, 당신네 마음에 맞게만 하면, 곧 돌려보내 주겠습니까?”

찬은 참다못해, 이렇게 한번 질러 보았다. 생긴 꼴이 쉽게 얼른 나가, 저녁을 집에서 먹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바른대로 얼른, 유치장에 넣기 전에.”

하나가와는 발까지 굴렀다.

말씀대로, 바른대로 말씀드리었습니다.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찬은 이러고, 저희들이 할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갖다 넣지!”

그러지.”

저희들끼리 주고받고 한 말이었다. 눈썹 긴 사나이가 찬의 어깨를 흔들어 일으켰다.

찬은 그자의 뒤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군수군. 소곤소곤.

모발은 길 대로 길었고, 눈은 들어갈 대로 들어갔다. 얼비친 등불 아래나, 음침한 대낮에, 웅기중기 달린 얼굴얼굴이, 사람의 얼굴 같지 않은 얼굴얼굴이, 터진 입을 억제치 못하는 귓속이야기였다.

새로 들어온, 철모르는 친구가 엉뚱한 목소리를 내었을 제, 좌중은 질색을 하였다. 아까도 똥통 옆에 앉은 소도둑 김서방이 이따위 목소리를 내었다가,

누구냐? 떠든 놈이? 너지 너야. 이리 와. 얼른 손 내밀어.”

해가지고는, 살창을 안고 서서, 한차례 죽도록, 두들겨맞은 것을, 모든 사람은 남의 일같이 보지 않았다.

이야기는 과히 떠들지 않는 정도면, 못 본 체해도 좋으련만, 간수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이것은 감방 규칙이니, 별수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터진 입을 가지고, 말을 맘대로, 못 한다는 것은, 먹는 것 첫째치고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는, 그런 때는 또 그런대로 넘기는 방법이 있어 비록 구차는 하지만, 이 방 안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못 해본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중에도 자기의 범행을 툭 털어놓고, 누구에게나, 잘 소곤거리는 것은, 전과 삼범이란, 좀도둑 김이란 청년인데, 그는 일구월심 소원이, 얼른 속히 감옥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감옥살이의 나은 점을 들어, 풋범인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생님! 속히 좀 넘겨 주셔요. 오늘은 됩니까? 조서가 거의 끝났습니까?”

그는, 그의 담당 형사가 살창 밖에 퍼뜩하기만 하면, 정말 학생이 선생님 부르듯 해가지고, 이렇게 애원을 하면,

그래 걱정 마라. 오늘은 안 되어도, 곧 송국하도록 해주마.”

하고, 형사는 대답하는 품이, 무슨 그야말로, 학생을 위하여, 상급학교 입학 수속이나 해주는 어조였다.

이따위 정경을 예서 볼 수 있는 것은, 좀도둑 김에게서뿐이 아니라, 전과 재범인, 소매치기 이란 청년도 그따위로 마찬가지 행투였다.

다만 여기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은 풋내기 초범들이었다. 이네는 어쩌면, 첫번이니, 용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써, 나가면 우선 호떡을 한번 실컷 먹어 보겠다는 둥, 설렁탕을 실컷 먹겠다는 둥, 돼지고기를 사다가, 술하고 실컷 먹어 보겠다는 둥, 먹는 이야기에 취하여, 감옥생활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기도 하는 것이었다.

공연히 담당 형사를 불러 선생님, 선생님 하고, 굴지 않는 패로는, 전과 삼범이란 사기꾼 장이었다. 그는 지능범으로서, 법률은 거의 막힐 데가 없다는 듯, 좀도둑, 큰도둑 들에게 판사 행세를 하는만큼, 자기가 당할 법은 이미 알고 있다는 자존심만으로도, 여간 형사 따위에게는, 쓸데없이 보챌 필요가 없다는 눈치였다.

같이 아첨 않기로 치면, 긴 윗수염을 항상 쓰다듬고 앉아서, 종교가다운 인자한 웃음을 웃으려는 목사, 황이라는 이였다. 그는 신사에 참배를 거부하는 패에 관련된 사건으로 들어왔다는 그, 자기가 목도하였다는 외국 이야기를 하여, 방 안의 존경을 받는 중년밖에 안 되는 분네였다.

공정가격을 위반하였다는 둥, ‘야미를 하였다는 둥, 전에 없던 경제범이란 분네들도 대개는 그러하였다.

백묵으로 붉은 벽돌담에다, 태극기를 그렸다는 둥, 조선독립만세를 썼다는 둥, 말하자면 사상범으로 들어온 어린 중학생만은, 가끔 담당 형사에게, 초조한 자기 일을 묻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 방에서는, 그는 이상한 것이 아니요, 유다른 것도 아니었다. 똥통 냄새가 이미 코에 배고, 그것이 괴로운 줄을 모를 만하면, 이 방의 생활은 곧 모두가 자기 몸에 밴 증거였다.

사람 앞에, 점잖은 사람이 궁둥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는 것은, 똥이 잘 나오지 않을 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똥은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차차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개가 똥을 누는 것이나, 사람이 똥을 누는 것이, 별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수천 년 동안 야만으로부터 애써 문화를 쌓아 왔다는 사람이, 꼭 이런 야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도둑을 잡은 사람은 표창을 받고 유치장과 감옥은 충만하였다. 도둑이 잡히고 잡히고, 없어지는 날, 폐업을 두려워할 일본 경찰이 있을 리 없을 것이었다. 민족의식을 가진 조선 사람을 잡아 없애면, 고등경찰원이 실직하고 말 것을 두려워할,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있을 리 없었다. 도도하게 흐르고 흘러, 천지를 뒤집고야 말 이 단계에, 착취를 당하는 백성은 제 자신을 묶어 가는 일제에게, 막대한 부담으로, 국고에 국세를 바쳐 온 것이었다.

찬은 감방 한가운데,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목사 황은 물었다. 무슨 종교를 믿느냐고. 눈을 감고 앉아서 하는 꼴이, 종교를 믿는 사람같이 보이었던 것이었다. 찬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대답할밖에.

대체 무슨 사건이 그토록 두고 문초도 않느냐고, 그는 다시 물었다.

물을 말도 없고, 대답할 말도 없으니, 그럴밖에 있느냐고, 찬은 설명을 하여 주었다.

대관절 창씨를 하였느냐고, 그는 다시 물었다. 찬은 안 한 것을 안 하였노라, 대답을 할 수밖에. 그랬더니, 황은 눈을 크게 뜨며, 그것 하나로도, 미움을 받고 남을 것이 아니냐고, 자기의 창씨한 억울한 경로를 들려주었다. 겸하여 황은, 놈들이 트집을 잡아 일을 꾸미는 모양이니, 미리 알아차리는, 걱정까지 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찬은 늘 잊지 않는 그 점이었다. 이와 세 사람이 만났다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날 저녁때였다. 취조를 받으러 나갔다 온 중학생이 전하는 소식이 있었다. 이제야 진짜를 잡았노라고, 고등계 형사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두 시간 되었을까말까 한 때, 흐릿한 등불 아래, 눈썹 긴 그자에게 끌려 들어온 사람은, 틀림없이, 엠 사 편집장 남이었다.

찬이가 들어 있는 감방은 마침, 기역자로 꼬부라져 돌아가는 목이었고, 겸하여 간수가 차리고 앉았는 바로 옆방이었으므로, 간수의 이목이 너무 가까워 폐로운 점도 있으나 유치장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다 볼 수 있는, 특점도 있었다.

편집장이 신체검사를 받으러, 찬의 살창 앞에 들어설 제, 찬은 살창 앞에 다가서서, 손을 들었다. 편집장 남은 피씩 웃으며 손가락 셋을 들었다. 셋이 왔다는 표였다. 남이 검사를 마치고 옆방으로 들어갔을 때, 과연 엠 사 사원 곽과 변이 들어왔다. 이러고 보면, 엠 출판사 편집실은 텅 빈 모양이었다.

찬은 곽과 변, 두 사람에게도 역시 전과 같은 식의 알은체를 하였다.

화끈화끈한 몸이 감방 마루에 누웠는지, 공중에 떠 있는지, 감각을 잃었다. 마룻바닥을 비빈 손바닥에,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얼비친 등불 아래 보았다. 물론 빈대 피였다.

언제나 괴로운 밤이 새었다. 소제시간이다. 심한 먼지에 못 참는 간수가 코를 쥐고, 유치장 문밖으로 잠시 피난을 갔다.

남형! 나 찬이오.”

찬은 옆방을 향하여, 긴 목소리로 편집장을 불렀다.

, 나 남이오. 별일 없었지요?”

, 별일 없었소. 그리고, 나는 통 한 말이 없소, 앞으로도 그렇겠소.”

, 잘 알았소.”

찬과 남은 이렇게 통방을 하였다. 그러자 간수가 들어왔다. 언제나 너무도 부족한 꽁보리밥이 얼마 뒤에 들어왔다. 어제 저녁부터 기다리던 한 덩어리를 가지고, 무섭게 씹고, 삼키고들 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 경제범에게, 눈독들을 들인다. 남으면 혹 돌아올 것이 있나 바라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실망이었다. 어제까지도, 그나마 반도 못 먹던 친구가, 오늘은 다 먹고도 오히려 부족한 모양이었다.

배고픈 데는 그저, 좀도둑이나, 사기범이나, 경제범이나, 사상범이나, 똑같이 급한 것이었다. 호떡, 인절미, 시루떡, 설렁탕 타령이 공상처럼 방중에 또 떠돌기 시작한다.

세월은 또한 가고야 마는 것으로, 지긋지긋하던 빈대는 없어졌으나, 차디찬 밤중에 얇은 담요 한 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당기고 별짓 다 하자면, 약한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감방 창을 가리었던, 오동나무 잎이 다 떨어지고, 쓸쓸한 가지 새로 보이는 하늘은 유독히 파랬다.

지금쯤 집식구들은 굶어죽지나 안하였는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였다. 차라리, 이를, 악물고 단념을 하는 것이 옳았다.

하루는 아침에, 눈썹 긴 작자에게 끌려나간 구석방 김이, 다 저녁때 얼굴이 해쓱한 채 축 늘어져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하하, 놈들은 시작하였구나! 악독한 고문을.”

찬은 또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튿날은, 옆방 편집장 남을 불러갔다. 서서 따라나간 사람이, 허리 부러진 개 모양으로 기어들어왔다.

찬은 지금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몸에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옛사람의 잔악한 형을 받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선배에게, 이 일제 경찰의 잔악한 고문 이야기를 듣던 것을 생각해 보았다. 이 감방 안에 흩어진 고문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목전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찬은 퍼뜩 깨달았다. 그따위 고문은 미리 생각지 마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모든 의리를 흐려 놓는 비겁한 원인이 될까 염려였던 것이었다.

대체 언제 끝날는지,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답답한 이 처지에, 뼈가 부러지든 목이 부러지든, 놈들과 맞닥뜨리고 싶은 충동도, 불현듯, 치밀었다.

이튿날 점심때 채 못 되어, 눈썹 긴 그자가 와서, 찬이 있는 감방문을 열고, 찬을 손짓하여 불렀다. 찬은 새삼스럽게 놀랄 것은 없었다. 그가 자기를 부르기 전에, 그가 자기 방에 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라 나서는 찬은 각오를 하였다. 일은 될 대로 되어라, 하였다.

마음과는 딴판으로,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올바로 걸으려야 걸어지지 안하였다. 그는 이층 취조실을 간신히 걸어올라갔다.

실내에 나타난 아내의 얼굴! 그 뒤에 서 있는 조카! 찬은 과연 오늘 이 자리에 상상치 못한 바였다.

조카는 울었다. 찬의 지나치게 파리한 꼴, 쑥대머리가, 젊은 조카의 마음을 자극하였던 모양이었다.

찬은 약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하여, 얼굴을 돌리었다. 찬은 처음으로, 집에서 해온 점심과, 아내가 사다 준 담배를 두 개나 거듭 피웠다. 방 안이 핑 돌았다. 좀처럼 정신이 들지 안하였다.

그러나,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야 되었다.

아내와 조카를 등지고 돌아서서, 이층 계단을 내려올 때, 삐끗 자칫하면, 자빠질 뻔하였어도, 손에 쥔 담배 한 개는 떨어뜨리지 안하였다.

언제나 부족하던 점심그릇이 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쩔꺽, 찬을 갖다 넣고 잠그는 감방 자물쇠 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앉은 찬은, 밥을 간직한 사람에게 밥을 주고, 담배는 좀도둑 김에게 주었다.

밥은 지킨 사람이 지킨 공으로 먹을 것이요, 담배는 좀도둑 김이, 불 잘 붙이는 재주가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양말목에 성냥골이 지금도 들어 있을지 모른 까닭이었다. 이것 한 개만 가져도, 온 방 안에 한 모금씩은 다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배가 우선 부르니, 마음이 우선 놓이는 것 같고, 그까짓 호떡 설렁탕 이야기에 군침을 삼키지 안하여도 된 판에, 오늘 일을 다시 한번 되풀이해 보았다.

놈들의 악독한 고문을, 그는 오늘 당하지 안하였다. 아내가 그처럼 사정사정을 해도 면회를 시켜 주지 않던 면회를, 시켜 주었다.

죄를 만들다 못한 눈치를, 그는 오늘 그자들의 얼굴에서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료 김이 늘어져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편집장 남이 기어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결국, 이 고문에 있었을 것이었다.

김과 남은 여기에 백전 노졸이었다. 이러저러한 풋내기가 아니었다. 귀둥대둥할 그들이 아니었으리라. 문제를 좁히는 말, 친구에게 얼이 미치지 않는 말, 필요한 말을 골라잡기에, 그들은 과연 얼마나 이를 악물었으랴, 정신을 차렸으랴! 고문과의 투쟁은 극렬하였을 것이었다. 결과로, 하나는 기어들어왔고, 하나는 늘어져 돌아왔을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우정에 넘치는 눈물이 새삼스럽게 흘렀다.

두 사람의 당한 고문은 결국,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요, 여러 사람, 그 중에 자기 몫이 들어 있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건의 귀결은 결국, 고문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이날 저녁때, 눈썹 긴 친구는 찬의 방문을 열었다. 찬이 일어선 뒤에 그는 나오란 명령을 하였다.

고등계 주임실에 모인 동무들은, 얼굴이 강파른 주임의 훈시를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등주임은 위의를 갖추어, 일장의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오랫동안 수고를 하셨소이다. 이것은 물론 국가라는 최고 지상관념 밑에서 진행된 일이었고, 절대로 사세한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들은 반도의 최고 지식을 가진 분들이니까. , 그러니까, 반도의 최고 지식자인 여러분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게 된 나는 매우 편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을 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실상, 충분치 못한 언어보다도, 서로,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 아시다시피, 황국 일본은 지금 전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공영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에 편견을 가지고, 아직도 철없는 생각을 고집하는 반도 동포가 아주 없지 않으나 그러나, 문제는 이론보다도 실지에 돌아가서, 삼천만 반도 동포가 사력을 다하여, 열렬히 협력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이 누구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물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민중은 언제든지 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고귀한 지식을 가지고, 이 민중의 앞에는 서지 못할망정, 민중에게 뒤져서야 되겠습니까. 사실, 조선의 민중은 조선의 식자보다 앞선 것이 사실입니다. ,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말씀 더 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 확호한 양식을 살리어, 널리 시국을 재인식하고, 민족 천년의 행복을 위하여, 적극 협력을 하는 것이, 또한 망극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인 줄 압니다. , 이번 이 사건에 있어서는, 추궁을 하자면 추궁할 점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법이란 반드시 징계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은 예서 일단 끝을 맺고, 특히 여러분의 우수한 기능을 살리어,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무쪼록, 황국 일본을 위하는 길이 곧, 반도 삼천만 동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것을 자각하시고, 건투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고등주임의 이야기가 끝나고, 어쩌고, 찬은, 두 달째 하루 모자라는, 유치장생활을 벗어나, 다른 동무들과 같이 내 집을 찾게 된 것이었다.

*

엠 출판사가 해체된 것은 물론, 이 사건에 직접 원인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석방을 하였다고는 하나, 그렇게 달근달근 말을 듣고, 전환을 할 것 같지도 않을 뿐인가, 합법적이라고는 하겠지만, 슬슬 눈만 속이려 드는 것이, 눈꼴에 틀리니, 이번에는 사업주에게 간접 직접으로 얼러대는 것이었다. 사업주로 말하면, 원 사업, 돈벌이 사업은 따로 있고, 이것은 방계 사업으로, 돈을 쓰는 사업인데, 왜놈의 천지에, 이 돈 쓰는 사업으로 인하여, 돈 버는 사업에 지장이 있어서는 큰일이라 싶어, 이 사업은 중지를 한 것인데 구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엠 출판사는 문을 닫게 되었지만, 실상인즉, 끌고 나갔어야 별 뾰족한 수도 없을 것이었다. 조선 글뿐이 아니라, 말까지 금하려 들고, 조선 글로 내는 신문이면, 아첨 아니라, 더한 것을 한대도, 쓸어 없애는 오늘의 정센데, 엠 출판사쯤 문제가 될 리 없을 것이었다.

쓸데없는 수명 연장 운동에, 비위를 맞추어 주려 들었던들, 일도 안 되고, 꼴만 흉하였을 터이니, 미리 없어진 것은 그리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또한 없지 않아 있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군데서 쫓기어 한군데를 가니, 거기서도 쫓긴 것은, 다만 찬이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명색 조선의 지식층이, 사분오열, 창피한 꼴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못하여, 끼리끼리 모인 꼴이, 결국은 이 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 지식인들은, 시대 또는 객관적 정세가 변하였다는 말을 즐겨 입에 올린 것이 사실이었다. 찬은, 이 말이 자기네 개인의 변절을 변호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도도하게 떠들어대는 것을 보았다.

시대란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냐, 누구의 힘으로 변하는 것이냐고 친구들과 충돌을 한 적도 없지 않아 있었으나, 충돌은 충돌대로, 상당한 사람들이 폭력에 휩쓸려 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나룻배에 못 오른 뒤떨어진 동행을, 동정하는 꼴까지 본 것이 사실이었다.

*

아침잠을 안고 맴도는, 번거로운 꿈과 다못 생각을 차버리고 일어앉아, 찬은 방금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해가 서쪽에서 뜰라는가 보오. 갑자기 부지런해졌으니.”

부엌에서 들어온 아내의 말이다. 그의 해사한 얼굴에는 엷은 웃음까지 띠었다.

남 부지런해진 생각만 했지, 자기 게을러진 생각은 통 못 한단 말야. 해가 동쪽에서 뜨건, 말건, 그 길 그대로면, 하루가 이틀 될까 뭐.”

찬은 말을 그치자, 피씩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아내는 요즈음 아침을 전처럼 일찍 짓지 않아도 되었다.

게을러지지 않았으면 뭣 하오. 전처럼 시간밥 지어 놓고, 당신 깨우려 객쩍은 욕을 볼 게 뭐요. 당신 출판사 다닐 때야말로, 언제 한번, 아침 늦어서 지각해 본 일 있었소. 요새야, 객쩍은 부지런을 피웠다간, 찬밥만 먹을 것 아니오.”

아내는 이렇게, 전보다는 한 시간도 넘어 늦게 아침을 짓는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누가 아니래. 당신 부지런한 덕분으로는, 출판사를 몇 해 지각 한 번 하잖고 다녔고, 당신 게으른 덕분으로는, 늦잠을 자도 좋을 판인데, 그것도 복이라고, 늦잠을 자자니 늦잠이 오지 않는다는밖에는.”

찬은 또 한번 피씩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

지각 한 번 않고 부지런히 다녔어야, 별 뾰족한 수 있소. 종말은 요꼴이 아니오. 소위 서울 살림을 한답시고, 이게 몇 번째요 글쎄. 어디 취직이 되어도, 그만두는 걱정을 미리 해야 되잖았소. 시골서는 서울 월급쟁이생활을 하늘같이 보는 모양이지만, 실지로 당해 보면, 건 우물 내려다보는 것 같을 줄은 모르고.”

아내는 가느다란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러니 시골로 내려가자는밖에.”

찬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관 빤 얼굴을 젖혀 들고는, 밭은기침을 하였다.

시골로 가기만 하면, 무슨 수가 있겠소. 밤낮 시골 시골 하니.”

아내는 이렇게 몰 만도 한 일인 것이, 찬이 다니던 데를 그만두게 되던 며칠 전부터, 찬은 이 내막을 아내에게 설파하기보다 먼저, 시골이 해롭지 않으리란 말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그러고 운만 띄웠을 뿐이었으니, 그때는 그저, 떼어놓고 하는 말이거니 생각을 하였으면, 아내는 들은 둥 만 둥 했을 만도 한 일이었다.

무슨 수? 농사를 지어먹고 살면 그만이지, 수는 무슨 툭 터진 수야. 왜놈을 단박 찍어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은 사내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놈들에게 억지로 빌붙어 찬밥 한술 얻어먹으려다, 믿는 건 단벌밖에 없는 정조까지 빼앗기는 것보다 못하던 않겠지, 설마.”

얼마 후에, 찬은 이렇게 말 몇 마디를 집어던지고는, 담뱃재를 떨었다.

그렇지만 농사는 저마다, 아무나 지어먹는 줄 아오. 제 논 제 밭이나 있으면 혹 또 몰라도. 뿐이오.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아내는 입을 비쭉거리었다.

옳거니, 농부의 여편네 노릇은 싫단 말이지.”

찬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모진 볕에 그을기 아까워할 만도 한 살결이었다.

걱정을 마시오. 누가 내 걱정까지 맡아 하랬소. 농부의 여편네 노릇은 그만두고, 농부와 섞이어 품은 못 팔겠소. 나 농부의 여편네 노릇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당신 농부 노릇은 아무래도 쉽지 않으리다. 버선 신발에 단장 짚고, 석양관에 논두렁 오락가락하는 것도, 정말 농부요. 당신이 그렇게 농창거릴 터무니나 있소 웬.”

아내의 엷은 입술 안에서는 제법 모진 말이 이렇게 쏟아졌다.

왜 못 해. , 참약한 여자들이 하는 일을, 내 명색 사내로 태어나 못 한단 말야. 누구는 괴로운 줄을 모르나, 참으면 되겠지 뭐. 여자란 되잖은 일에 으레 사내를 업신여긴단 말야. 보다 더한, 독립운동도 하지 않나.”

찬은 코웃음으로 말끝을 맺었다.

선비란 여자보다 강한 줄 아오. 여자 하는 일을 그래, 하는 줄 아오. 자기 발에 신고 다니는 양말 한짝을 빠는 줄 아오. 반찬 잘못했다고 음식 투정을 하라면, 그건 그대로 하겠지만, 찌개 한 가지, 김치 한 가지 할 줄 아는 줄 아오. 글로는 논 물구멍을 안으로 막아야 한다며, 실지로는 밖을 막더란 말이 있잖소. 서울 안 선비들이 모다 농사일 할 줄을 알아 보오. 약한 여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할 일을 남겨 놓겠소. 선비가 무슨 농사를 지오. 먹잘 것 없는 이름만 걸어 놓고, 남의 논밭만 묵혀 주었지 뭐요. 선비가 손수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독립운동 젖혀 놓고, 아마 굶는 것 참기보다 어려우리다. 선비 굶는단 말은 흔히 들었어도, 선비가 손수 농사짓는단 말은 별로 못 들었소 나는.”

아내는 적잖이 흥분을 한 모양이었다.

무엇? 농사일을 못 한다고, 덮어놓고 선비를 비방할 것이 아니거든. 그리고, 자고로 몸소 밭을 갈은 선비가 좀 많기에. 선비 들에 있으면, 밭을 갈고, 밭을 갈다 쉴 제는, 정자나무 밑에서 옛글을 읽고, 이러는 게 옛사람들도 한 일이었지 못 한 일은 아니거든. 남도 해본 일이니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남들이 흔히 못 하는 일이니까, 나는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고, 왜놈들 등쌀에 사세 또한 그러지 않고는 도리가 없으니, 이야말로 세 박자가 맞잖았느냐 말야. 겸하여 농부의 아내 노릇은 하고도 남는댔겠다. 지금 와서 되잖은 우열을 다툴 것이 없지 않으냐 말야. 허허허.”

찬은 이렇게, 아내가 흥분할수록 배짱을 눅히었다.

그러니, 어쩐단 말이오. 혼자만 누그러지고 늙지 않으면 제일이오.”

아내는, 남편이 누그러질수록 속을 졸이었다.

그러니, 꽃을 심잔 말야.”

찬은 문득 이렇게 말머리를 틀어 대었다.

꽃이라니, 밑도끝도없이 무슨 꽃이오?”

아내는 따라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토담집이라도, 이 방 한 칸보다는 나을 것 아뇨. 부엌 한 칸 아랫방 한 칸 윗방 한 칸은 될 것이고, 앞마당이 있고, 뒤울안이 있을 것 아뇨. 집안 씨서리를 깨끗이 하고, 뒤울안 장독대 앞에는 꽃을 심되, 무엇보다도 먼저, 봉숭아를 심읍시다그려. 그 봉숭아가 피거든 그걸로 당신 손톱에 빨간 물을 들입시다그려. 그 장히 곱지 않겠소, 허허허.”

찬은 자기의 입을 지키는 아내의 눈을 보았다.

무궁화는 어쩌고, 봉숭아를 심오, 누가 미쳤소. 애들처럼 봉숭아 물을 들이게.”

아내는 은근히 무엇을 믿었던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늙는 것이 원통하면, 애들처럼 되어도 해롭지 않지 뭐. 나 혼자만 늙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거든. 원래 사람이 늙지 않는 수야 있나. 하지만 억지로 들어켜 늙을 까닭이야 있느냔 말야.”

찬은 말을 마치고, 벽을 의지하여 몸을 놓았다.

꽃만 심으면, 배 곯지 않고, 덜 늙을 수 있소?”

아내는 점점 생각할수록, 누그러진 남편이 얄밉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안팎이 나서서 농사를 힘써, 짓는 것이 아니오 글쎄. 내 걱정일랑 말래도. 당신은 당신 일만 하면 된대도.”

찬은 짐짓, 아내의 흥분을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모양이었다. 참견 안 해도 괜찮을 것을 참견했다. 객쩍은 괴로움을 당하기가 싫은, 약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무렇든, 머슴을 하나 두어야 할 것이 아니오? 머슴 치송을 무엇을 가지고 하오?”

아내는 끝끝내 달걀 노른자만 후벼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여적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해도 믿질 않는단 말야. 머슴은 곧 나요 당신인데, 무슨 머슴을 또 둔단 말야. 가제나 사람 귀한 이 판에, 무슨 머슴을 그토록 두어. 누가 머슴 농사지러 시굴 간댔소.”

찬은 여전히 시침을 땄다.

그러니 말이오?”

아내는 좀처럼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논농사는 되도록 적게 짓는단 말이라. 서투른 솜씨에 첫째, 김을 매기가 어렵거든. 말하자면 부족한 신력을 꾀로 보충해 보잔 생각이 아니겠소.”

찬은 벽에 내맡겼던 몸을 다시 일으키었다.

적게 지면, 힘이 덜 드는 줄이야 누구는 모르오. 가을에 가 먹을 게 없을 것이 걱정이지.”

아내는 내내 들어야 시원한 맛이 없는 남편의 대답에 좀처럼 머리를 끄덕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논을 적게 짓는 대신, 밭을 많이 짓거든. 우리 고향은 논농사에 힘쓸 줄만 알았지, 밭농사에 힘쓸 줄을 모른단 말야. 근래로 보리에 힘쓸 줄은 안다지만, 보리를 거둔 뒤의 밭 닦드리란 너무도 부실커든. 그러므로 자연 논 얻기보다 밭 얻기가 좀 쉽지 않으냐 말야. 그러니까, 우리는 이 쉬운 것을 틈타, 될 수 있는 힘을 맘껏 들여 보자는 것이 아니겠소. 내가 논 김은 못 맨다더라도, 밭 김은 맬 수가 있지 않은가 말이거든. 어떻소? 내 말이 엉터리없는 거짓말 같소.”

찬은 비로소 자기의 속 계획을 이렇게 설명하여 주었다.

……

아내는 모처럼 대꾸를 않고, 아래로 뜬 눈을 깜박이었다.

원두 몇 두렁만 놓으면 참외 실컷 먹을 것, 물외 몇 포기만 놓으면 외지 실컷 먹을 것, 수박 한 두렁만 놓으면 수박 실컷 먹을 것, 울타리에 호박 올리면 호박나물 실컷 먹을 것, 지붕에 박을 올리면 바가지 싫도록 쓸 것, 이런 것을 돈 주고 살 까닭이 있느냐 말야. 제 몸만 부지런하면 모다 될 것이라!”

말을 듣고만 있는 아내에게, 찬은 적이 흥을 얻어 이렇게 줄줄 늘어놓았다.

그런 거야 설만들 서울 같겠소. 이웃 덕을 입기로니.”

아내의 말이 이쯤 나갔다.

뿐인가, 애들 사탕 대신으로는 단수수를 심어 주고, 벌을 한 통만 쳐도 온 식구가 진짜 꿀을 먹을 수가 있지 않으냔 말야. 그걸로 충당을 못 하겠거든, 있는 보리로 엿기름을 길러 조청을 해먹으면 되지 뭐야. 설탕가게에 가서 고기 꿰미처럼 늘어서지 않아도 되거든.”

찬은 두 손으로 젖힌 무릎을 짚고 앉아서, 아내의 동정을 꼿꼿이 살피며, 군침을 꿀떡 삼키었다.

꿀이나 조청은 예서도 구할 수 있지만, 단수수 못 본 지가 얼만지 모르겠소. 걸은 마당가에 심으면, 시퍼런 놈이, 너울너울 잘도 자랐지. 어떤 놈은 달기는 또 여간 달오.”

아내는 이 단수숫대로 인하여, 다디달던 그 옛날의 미각을 통하여, 적지않이 향수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뿐이 아니거든, 과실이 먹고 싶을 것이 아닌가. 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몇 주만 심으면 될 것이 아니냐 말이지. 하면 되어요. 다른 것은 모르되 그따위 것이야 안 될라고.”

찬은 이미 아내의 마음이 솔깃한 꼴을 안지라, 생각나는 대로 좋은 것은 추려 들어 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웃음은 물론 금물이었다.

과실은 그까짓 것 좀, 안 먹으면 어떻겠소. 몇 달 며칠에 과실을 따먹게 되는 줄로 아오. 어렸을 제 보아도, 배나무, 사과나무는 유달리 벌레를 타고, 여간 손질을 하여서는 잘 되지 않는가 보던데.”

아내의 이 대답은, 찬이 바란 바가 아니었다.

세상에 적공 안 들이고 되는 것이 있겠소. 사람들이 바라는 것치고야.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과실을 구태여, 피할 것은 뭐야.”

찬은 다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였다.

갑자기 먹는 것도 하도 많으니, 어떤 것을 먼저 먹을지 모르겠소.”

아내는 말을 마치고, 제법 소리쳐 웃었다.

그뿐인가, 고구마를 또 놓아 먹어야 한단 말야. 황토질 땅이면 한 밭 다 놓지 뭐. 그리고는 고구마 막을 지어 놓고, 나는 밤중에 혼자, 글을 읽든지, 무엇을 생각든지, 그것은 당신이 통 관계할 필요가 없거든. 고구마 판 돈은 송두리째 당신이 맡아 가더라도 내 상관할 반가. 오히려 좋고.”

찬은 다시 벽을 의지하여 자세를 풀었다.

에그, 그러면 왜놈 탓을 왜 하였겠소! 헛배 불리려다, 된장찌개 다 달렸다.”

아내는 일어서 부엌으로 다시 나가 버렸다.

찬은 빈 방 안에서 홀로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찬은 애초 고향을 떠날 때, 들고 왔던 가방 몇 개와 이불 보퉁이를 도로 들고 가면 될 뿐이었다. 서울서 이럭저럭 장만한 세간 집물은 서울서 이럭저럭 팔아 버렸다.

이따위 것들을 처분할 제, 아내는 손때 묻은 그릇을 좀처럼 놓기 싫어하였다. 시골 가서도 살림을 도로 차릴 바에야, 고를 만한 것은 골라 가지고 가기를 주장하였다.

찬은 그럴듯 처음에는 여겨도 보았으나, 아내의 그릇 사랑은 폭이 원래 넓은 것이어서, 데금데금 골라 놓은 놈이, 원래 별수도 없는 살림살이에 되잖게 많아 통틀어 반대를 하고야 말았다.

다만 그들 일행의 유다른 표는, 고향을 나올 때, 없던 다섯 살 먹은 딸과 세 살 먹은 아들이 딸린 것이었다.

그들은 마을서 외따로 떨어진 오막살이 한 채를 내 집으로 정해 들었을 제, 그것은 마치 지나던 체장수나 바디장수 패가 하룻밤 빈집을 빌려 자는 것같이밖에는 안 보였다. 동네서 솥은 하나 얻어다 걸었다지만 살강도 장독대도, 좁은 집구석이, 텅 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동네 복판이 못 되거든, 동네 변두리도 되들 못하고, 외딸기는 왜 이리 외따냐는 불평을 아내는 이 오막살이에 퍼부었지만, 남편 찬은 찬으로서 딴 의견이 없지 않은 것이었다.

나가서는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즐길 수가 있고, 돌아오면 남에게 누를 끼칠 것 없이, 홀로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오막살이를 사랑한다는 그의 이유였다.

찬은 애써, 도배를 하고, 진흙을 뭉치어 헐어진 벽을 보첨하였다.

샛문은 없고 문턱만 있으나마, 윗방은 사랑 겸 내 방을 만들었고, 아랫방은 물론 아내의 차지였다. 웬만큼 형세가 피면, 앞뜰 위에는 장차 마루를 놓을 작정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알심있게 꾸며만 놓으면, 그야말로 서울 초가집 셋방살이보다는 문 한번을 맘놓고 열어 놓아도, 나으면 나았지, 못할 턱이 없는 것이었다.

아내 또한 맘을 돌리었던지, 안팎 씨서리를 게을리 않고, 집 닦달을 제법 열심으로 하였다.

항아리 투가리를 꼭, 사들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쓰다 낡은 항아리를 친척들이 혹, 큰맘 먹고 주기도 하고, 서슬이 멀건 투가리를 치맛속에 감추었다가, 자기 남편 몰래 주고 가는, 색다른 마을 여인도 없지 않았다.

이 집에서 된장이 한 투가리, 저 집에서 간장이 한 투가리씩, 쓰고 단 것을 가릴 것 없이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찬은 고향 덕을 보았지, 안 보았을 수는 없었다.

논은 사촌이 짓는 것을 닷 마지기 갈라 얻었고, 밭은 육촌이 붙이는 것을 한 자리 얻고, 마을 친구의 것을 한 자리 얻었다. 밭 두 자리에 칠팔백 평은 될 모양이었다.

, 별수없는 오막살이나마, 집이 있다. 몇 마지기 안 되는 소작이나마, 논이 있다. 밭 두 자리가 있다. 나중에야 어쨌든, 우선 잡곡이라도 좀 팔아 먹을 만한 것은 있다. 몸소 벗어붙이고 나서면 요만 농사는 지을 것도 같았다.

찬은 요만 가망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건만, 마을 사람들과 일가들은 좀처럼 허락을 하려 들지 않았다.

찬이도 애여 생각을 잘못 했지. 제 손으로 농사를 지어 먹는 놈도 죽을 판인데 될 말인가. 그 사람 손수 할 수도 없지, 고까짓 농처를 가지고, 머슴을 둘 수도 없지, 농처가 좀더 많기로서, 머슴 믿고 하는 농사에, 무슨 그리 틈진 이익이 있겠느냔 말야. 비싼 도조 내지, 세금 물지, 품삯 제하지, 이것저것 빼면 얻어먹을 것 많것다. 그저 붓대로 벌어먹던 사람들은 그 출로 벌어먹을 게 아니냔 말야. , 좀 좋은가. 서늘한 집 속에 들어앉아서 붓대만 깨딱거리면 되지 않나. 객쩍은 짓도.”

누가 아니라나. 이 세월에 머슴 살 놈은 그토록 많다던가. 전처럼 한만한 세월로 알았다간, 공연히 헛다리 짚지. 왜놈의 천지에 살 데가 대체 어디야! 당초에 잘못 생각이었지. 선비치고 세상 물정 아는 사람, 별로 없는 줄로 나는 아네.”

마을서 자기들끼리 기탄없이 지껄인 이런 이야기를, 찬은 역시 마을 사람의 입을 통하여 들었다.

이웃 말 걸려 듣고, 골을 낸다는 것은 찬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저리어도 참고, 한바탕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

쓰거나 달거나, 앞으로는 웃음을 배우자는 것이, 은근한 그의 생활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이른 봄에 시골을 내려간 그는, 힘 자라는 대로 세간을 정돈해 놓고는 바로 농사지을 준비를 해야 되었다.

저마다 바쁜 마을 사람들이건마는, 찬의 꼴에, 틈틈이 눈을 지릅뜨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짐작한 바와 같이 찬은 머슴을 두지 않았다. 머슴을 살아지라, 자청을 할 사람도 없고, 남의 일에 내 일 젖혀 놓고 구하도 않는 머슴을 구하러, 비싼 신발을 헤뜨리고, 다닐 사람도 없었다.

남들이 씨나락을 담글 제, 찬도 따라서 씨나락을 담갔다. 그까짓 씨나락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담갔기로, 그것을 장하게 볼 사람은, 이 마을에 별로 없을 모양이었다.

울타리 밑에 각시풀잎이 너울어지고, 울타리 위에 참죽나무 순이 곱게도 돋아올랐다.

명주 옷고름보다도 부드러워 보이는 촉촉한 들길로, 발 벗은 농군들이 오락가락하였다.

날이 화창하고, 먼산에 아지랑이 짙을수록, 못자리 일이 점점 더욱 바빠졌다.

찬은 마침, 이웃 논 못자리판을 가는 소를 빌려, 계제에 자기 못자리판까지 갈아 놓게 된 것은, 일이 여간 수나롭게 된 것이 아니었다.

모심을 때와 달라, 일꾼 하나쯤 얻으려면, 아직은 그토록 못 될 일은 아니었다. 찬은 마을 유서방을 일꾼으로 얻었다.

유서방이 쇠스랑을 들고 물에 들어섰을 제, 찬도 쇠스랑을 들고 들어섰다.

일꾼은 자기 하난데, 애초 집을 나올 제, 쇠스랑 둘을 가지고 오게 된, 의혹이 비로소 풀린 듯이, 유서방은 찬의 쇠스랑 든 자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건 뭘 그러오, 나 혼자 해도 실컷 할 텐데.”

유서방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디 해봅시다그려. 혼자 할 걸 둘이 하면, 좀 나았지 않겠소.”

찬은 좀, 어색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피씩 웃고 말았다.

되나요 웬! 몸만 괴로웠지.”

유서방은 종시, 찬의 꼴이 일시 장난으로밖에는 안 뵈는 모양이었다.

안 될 게 뭐란 말이오. 흙덩이를 찍어 당기면, 제가 넘어왔지, 설만들 도망이야 하겠소. 괴로운 것은 참으면 될 것이고, 참다 못하면, 쉬면 될 것이 아니오.”

찬은 내내 멋쩍은 웃음을 웃었다.

그래, 늘 이래 볼 작정이오?”

유서방은 다시 물었다.

시작하기가 불행이지, 하루 이틀 하다 그만둘 테면, 뭣 하러 시작했겠소.”

찬은 순순히 대답을 하였다.

제발, 맘을 돌리도록 하오. 우리 같은 인생은 글도 못 배우고, 평생 배운 재주가 이뿐이니, 두더지처럼 땅을 뒤져 먹다 한세상 보내지만, 선비 손, 붓 들던 손에 쇠스랑이 당하오.”

유서방은 말을 마치고는, 두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서두는 품이 일은 곧 단단히 시작이 될 모양이었다.

유서방도 글을 배우고 선비 노릇을 해보았으면, 이 판국에 농부 노릇도 해보고 싶었을지, 누가 아오.”

찬은 말을 마치자, 보습밥 큰 놈 한 덩어리를 물속으로 풍덩, 찍어 넣었다.

유서방의 쇠스랑 자루는 유서방의 손에서 가볍게 놀았다. 기름 바른 기계처럼, 미끄럽고, 척척 장단이 맞아 넘어갔다.

찬은 실상 자기 일을 하기보다, 유서방 일하는 구경에, 더욱 정신이 팔리었다.

찬은 반 참도 못 하여 쉬고 싶었다. 쉬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아도, 쉬고 싶은 것이었다.

좀 쉬어 가지고 합시다.”

찬은 먼저 청하였다.

한 참이나 되어야 쉬지 않오. 쉬고 싶건 혼자 실컷 쉬오. 누가 말릴 사람 있소.”

유서방은 일종 조소에 가까운 웃음까지 웃었다.

쉬고 싶지 않거든, 혼자 실컷 하오. 쉬고 싶지 않은 일꾼을 만나는 것도, 일 주인으로는 그 하루의 복입넨다.”

찬은 코웃음을 치고는 논둑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였다.

일 욕심 없는 일 주인을 만나는 것도, 일꾼으로는 그 하루의 복이 아니고 뭐요. 남들은 일꾼이 쉬잔다고 성환데, 정반대가 아니오.”

유서방은 찬의 말을 되받아 이러고는, 껄껄대고 웃었다.

그 다 서투른 탓인가, 허허허.”

찬은 담배를 푹푹 피웠다.

어떠오? 해먹겠습디야? 논둑에서 보는 것과는 틀리지 않오. 하하하.”

유서방은 또 한번 화제를 틀었다.

유서방이 내 고통을 알겠소. 유서방은 상일을 일찍 배우지 않았소!”

찬은 이러고 일어서 다시 쇠스랑 자루를 잡았다.

마을 사람치고는, 근방으로 지나는 사람은, 찬의 이 서투른 꼴을, 얼마씩 서서 보고 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혹, 농사란 아무라도 지어 먹을 수 있다는 듯 뵈기 쉬운 찬의 태도에, 자기네는 당당한 일꾼으로서, 반감을 사기도 한 모양이었다. 가엾이 보는 사람도 혹, 있을 듯한 일이었다.

찬은 자주 쉬기는 하였을망정, 이날 일은 끝까지 마치었다.

찬은 저녁도 얼마 먹지 못하고, 잠에 떨어져 앓는 잠꼬대를 할 제, 마을 사랑에는, 찬의 서투른 솜씨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튿날은 아침밥도 생각이 없어, 찬은 눈이 쑥 들어간 채로 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빨았다.

잘못하다 병나리다. 무리를 해도 분수가 있지, 생판 그게 될 일이오. 내 무엇이랬소.”

아내는 또 장차, 종달새 열씨 까듯 할 모양이었다.

, 예언이 그새, 그렇게 쉽게 들어맞을 테면, 세상에 예언 못 할 사람 없게!”

찬은 실로 코웃음을 쳤다.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몸이 제일 아뇨. 첫째 몸이 성하고야 볼 일이 아니오.”

아내는 점차로 샐쭉해지는 모양이었다.

몸이란, 쓴다고 닳기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 몸은 단련을 통하여 더욱 튼튼해진단 말야. 몸뚱이란 정말 묘하게 된 것이지. !”

찬은, 공연한 일에 짜증은 아예 싹도 뵈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여보, 단련도, 좀더 젊었을 적 이야기지, 삼십을 넘어 사십이 다 되지 않았소. 인제 부지런히 단련이 무슨 단련이오. 왜놈처럼 단련은 왜 그리 찾아요.”

아내는 계속하여 늘 답답한 표정이었다.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단련이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거든. 기왕에 지난 나이를 다시 줄일 수는 없는 것이니까. 왜놈들이 저희 좋아하는 단련을 내가 하기로, 그것조차 막을 리는 없고.”

찬은 여전히 늘어진 대답을 할 뿐이었다.

당신은 암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여지들 않는 것을 어떻게 하오.”

아내는 여전히 답답하였다.

걱정을 말아요. 내 걱정은 말래도는 걱정을 왜 자꾸, 사려 드느냐는 말이거든.”

찬은 하품을 입이 찢어지도록 쳐보았다.

어이구, 밤낮 장담을 해야, 어제 저녁 앓는 소리는 너무도 잘 합디다. 거울을 좀 보오. 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아내는 참다못해, 할까말까 망설이던 말까지 쏟아 버렸다.

하룻밤 앓은 것이, 뭣이 그리 대단해. 눈이 들어갔으면 나오게 할 수도 있겠지. 걱정을 말아요. 허허허.”

찬은 말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가, 전에 다듬다 남겨 둔 마당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오막살이에 딸린 마당이었으니, 얼마나 넓으랴마는, 가을에 가서 곡식단이 이리로 하나만 차도, 그들은 굶어죽을 염려가 없는 것이었다.

찬네 못자리는 나날이 자랐으나, 가물은 계속되었다. 이러다가는 마른갈이가 될까 보다고, 마을 사람들은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른갈이가 모조리 되었다가, 못비만 제때 오고 보면, 잘 탄 논은 거름 몇 벌씩 얻는 줄을, 그들이 모른 것은 아니었다.

가물이 계속되면, 못자리 물 구원도 걱정이려니와, 못비가 느닷없이 쏟아지면 일품에 답쌓여 여간해선, 손품 없는 사람은 일꾼 구경을 못 하는 것이, 그들 경험이었다. 더구나 늦비가 오면야, 그 북새란 말이 못 되는 것이었다.

봄비가 고루 찾아, 논마다 물이 고였을 양이면, 모심기에 품 융통이 순조롭게 될 수 있으니, 예서는 거른 마른갈이보다는, 물갈이 되는 시절을 바라는 것이 보통이었다.

찬 처지로 본대도, 해마다 물갈이가 되어서 해로울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일꾼 하나, 천신을 한대도.

그러나, 시절은 여러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물갈이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못자리를 구원키에, 물을 뿜어올리다 못하면, 우물까지 파게 되었다.

논 흙이 보얗게 타도 비는 냉큼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초조할 때까지 비가 안 오니, 소와 사람이 노는 틈을 타서, 찬은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논을 두벌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논을 쉽게 간 것은 가뭄 덕이었지만, 모심을 고비에 욕볼 생각을 하면, 놀아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날은 내내 버티고야 말았다. 초복을 미끈 넘겨 놓고, 중복도 허리에사, 못비가 쏟아졌다.

덜 먹고 못 먹는 것을 헤아릴 겨를도 없다. 비를 맞아 가며 모를 찌고 모를 심고 동네가 온통 뒤집힐 듯 바쁜 것이었다.

그저 내 모 한 포기라도 더 꽂으려고 눈이 붉은 이 판에, 찬네 앞에 밀려올 일꾼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어림도 없는 일꾼을 얻어 보려고, 말만 귀양 보내며 허겁지겁 밤길을 쏘대느니, 숫제 일찍 누워 잠을 자는 것이, 오히려 몸에나 이로울 것이었다.

찬은 비 오던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알다리에 각반을 감으며, 남은 의미 모를 웃음을 한바탕 껄껄 웃었다.

식전 댓바람에, 웃음은 웬 웃음을 그렇게 웃소?”

아내는 도저히, 듣고 못 들은 체할 수가 없던 모양이었다.

일꾼 밥 세 그릇을 해놓오.”

찬은 간단한 대답을 이렇게 해주었다.

일꾼 있소? 이 통에 어디 가 일꾼을 셋이나 얻었소?”

아내는 그야말로 여간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꾼이 어디 있소. 허허허.”

찬은 스스로 생각을 해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무엇? 그럼 밥은 뭣 하러 하랬소? 그러잖았소?”

아내는 너무도 실망이 컸다. 어쩐 셈판을 몰라 두릿거렸다.

, 내 말을 좀 들어 보오. 일꾼은 하나도 없는데, 나 혼자 모를 쪄야지, 논을 꾸며야지, 모를 심어야지. 세 사람 일을 한꺼번에 해야 되잖오. 한 몸뚱이 세 사람 일을 하였으면, 세 사람 밥을 먹기로, 못된달 인심이 있느냐 말야.”

찬은 또 한바탕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하오? 일꾼은 얻을 수가 없고.”

아내는 하나마나한 걱정을 되풀이하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래도. 모 쪄가며, 논 꾸며 가며, 모심으며, 하는 도리밖에 더 있소. 밥 세 그릇 대신, 그러면 반찬이나 잘해 놓오. 된장도 좀 맛있게 지지고.”

찬은 코를 풀고 일어섰다.

혼자 그러면, 끝날 때가 언제요? 모는 내가 쪄보리다. 끊지잖게 뽑기만 하면 될 것 아니오.”

아내는 나가려는 남편의 뒤통수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무엇?”

찬은 머리를 돌리어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끊지잖게 뽑기만 하면 될 것 아뇨. 아무리 서투르기로, 당신 심는 거야 못 당하겠소.”

아내는 이미 결심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그 귀한 일꾼이, 바로 한집에 있었구먼! 허허허.”

찬은 말을 마치고 잠깐 망설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서투른 일꾼끼리 잘 만났지 뭐요. 서로 흉볼 것 없이.”

아내는 정말 차고 나섰다.

그래, 정말이오?”

찬은 재차 물었다.

그럼 누가, 거짓말을 하였겠소.”

아내는 또 한번 쾌락을 하였다.

그야말로 쩍진 농삿집이 되었구먼. 밥은 지어 주며 해야 할 것 아니오. 굶고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각반일랑 내 것을 치고 하지. 논에도 사람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란 놈이 있단 말야. 어쨌든, 아침이나 지어 놓오. 내 다녀올 테니.”

찬은 이러고, 시급한 논으로 나가 버렸다.

아침 뒤에, 찬 부처는 들로 나갔다. 아내는 모를 찌고, 남편은 논을 꾸미고 모를 심었다.

그들은 자주, 논에서 나와 쉬는 대신, 자주, 논에 들어갔다.

모는 뜨는 모가 잘 심는 모란다고. 모를 꼭꼭 박아 심으면 재미가없단 말이겠지.”

찬은 아내를 가르치기 위하여만 한 말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한 말이었다.

이 욕을 보고 심었으면, 제대로 먹기나 해야 할 텐데, 너무 시기가 늦다잖오?”

아내는 제일 염려로운 이 말을 다시 뒤져 내었다.

뒷날 할 탓이겠지. 어쨌든, 힘을 써놓고 볼 일이 아니오.”

찬은 아내의 마음을 이렇게 다독거려 주었다.

허리만 아프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겠소.”

아내는 허리로 손 가는 것이 거의, 버릇이 되다시피 하였다.

누가 아니래. 하지만, 그렇도 않으면 일이라고, 이름을 질 수도 없지 않은가 말야.”

찬은 역시 웃음으로 말끝을 맺었다.

그들은 이 논 닷 마지기를 심기에 일 주일도 넘겨 걸렸다. 그야말로 그들은 이 일 한 가지를 마치기에, 젖먹던 힘까지 바쳐 버렸다.

그 독으로, 찬은 몸살로 이틀을 죽게 앓았고, 아내도 하마터면 앓고 누워 밥도 못 끓여먹을 뻔하였다.

아무렇든, 그들은 모를 다 마친 것이, 생각할수록 신통하였다.

이 논 닷 마지기에, 맹색 둘이 덤벼서 일 주일을 넘어 걸린 데 대해서는, 그들로서는 그 이유가, 한갓 자기들의 일손이 서투른 데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었다.

한번 말랐던 못자리가 아니었으면, 그토록 모 찌기가 힘들지 않았을 것이요, 그랬으면, 날짜가 훨씬 덜 걸렸을 것이란 것이었다. 겸하여 손으로 논을 꾸미들 말고, 소로 써리기만 하였어도, 그건 거저 먹기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따지면, 그들은 실상, 첫 농사일에 적잖이 자신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뒷날만 잘하여 물 마르잖고 벼가 싹수만 있고 보면, 남편은 그만두고, 아내까지도, 논둑이 닳도록 나다닐 참이었다.

모를 심은 뒤에 열흘도 다 못 가서, 한 번 말랐다가, 다시 물이 고였다. 노란 것이 아시를 맸어도 늘 그 모양이었다. 재를 갖다 좀 주어 보았으나, 역시 별수가 보이지 않았다. 금비는 늦게, 주어도 오히려 해로울 것이 전해에 두엄을 장만하여 밑거름 못 한 것이 한이었다. 그러나 찬은 올에사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힘을 들였거든, 힘들인 보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건 싹수가 노랗단 말이야.”

찬은 논에만 갔다 오면 이러고 코웃음을 쳤다.

이 논배미에서 곡식 구경을 하자면 앞으로도 두벌 세벌 김을 매야 할 것을 생각하고, 찬은 또한 얻기 어려운 일꾼을 얻어 댈 것을 생각해 보았다.

호미를 들고 논김을 매는 데는, 아무래도 찬으로서는 자신이 나서들 않았다.

그러나, 찬으로서는 낙망을 할 필요는 없었다. 서서 매는 김을 생각한 것이었다. 기계를 개량하고 방식을 고치면, 누구든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지 않으냐고까지 생각을 해보았다.

찬은 자기가 애초에 아내를 꼬인 것이 발간 거짓말은 아니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벌써 농사에 머리를 흔들고 돌아설 트집을 잡는다는 것이, 될 수 없는 말이었다.

벼룩처럼 오사바사 뛸 것이 무엇인가. 느릿느릿 걷되, 한평생 지치질 말겠다 생각을 하면, 찬은 또한 은근히 졸이던 마음이 풀리는 것이었다.

찬은 이미, 하면 될 것을 알았고, 차차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자기가 외따로 뵈지지 않는 것이 괜찮았다. 그나저나, 다 같이 부지런한 백성이요, 농사지어 먹는 백성으로 여기고만 지나면 그만이었다.

과만한, 선비란 말이, 이 마을에는 그토록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의혹이 드는 어려운 말을 꺼내어, 뭇사람에게 파흥을 시켜 주고 마는 것보다는, 먼저 뭇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을 하였다.

물으면 대답을 하되, 모르는 것은 피하고 말아도, 객쩍은 책임은 느끼지 말 일인 것이, 책임을 지다 지나치면, 거짓말이 나오기 쉽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이 오히려 많았다.

찬이 초저녁부터 내 집에 외로이 누워서 동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혼자 홀로 높다는 교만으로, 뭇사람을 내려쳐 본 관계라고 하면, 오해가 너무도 과한 것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꼭, 한맘 한뜻으로 바라는 것은, 아무쪼록 뒷날이 순조로워 늦은 벼가 툭툭 여무는 것이었다.

 

찬이 지금 풀을 매고 있는 목화밭 머리에는, 그늘이 과히 성기지 않은 왕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소나무가, 밭 곡식에는 해가 아주 없다 할 수 없으나, 한여름 폭양에 건처에서 일하던 사람 쉴 자리로는, 여간 고마운 정자가 아니었다.

찬은 그만저만 쉬고 싶은 것을 참고, 일을 계속하였다. 예서 말하는 한 참이란 동안을, 자기도 기어이 한번 채워 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야말로 밭일은 논일과 달라, 찬은 제법 장담을 하래도 할 듯한 것이었다. 그야 무슨 떼어놓고 밭일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은 아니었다. 워낙이 논일에 톡톡히 욕을 본 뒤끝인 관계일 것이었다.

찬은 밀댓짚모자 아래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씻으며, 얼마 더 일을 계속하였다.

얼마 뒤에 그는 호미를 들고 일어서서, 숨을 후유 돌리었다. 뜨거운 날이었다. 나무 끝을 보면 바람이 아주 없던 않은 날인 모양이었다.

찬은 아까부터 그립던 그 소나무 밑으로 와 밀대모자를 벗고, 이마에 줄진 땀을 씻었다.

더위가 가실수록 사지가 노곤한 것을 더욱 느낄 수가 있었다.

찬은 담배 한 대를 태우는 둥 만 둥 하고는, 호미등을 베고 풀 위에 누워 버렸다.

솔잎 새로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거기에는, 목화 송이송이가 한데 어울린 듯한 흰 구름이 오락거렸다.

먼산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뻐꾸기 소리 점점 멀어지고, 하늘도 구름도 솔잎도 아몰아몰하였다. 조금 있다 찬의 눈에는, 하늘도 구름도 솔잎도 다 없어졌다. 찬의 귀에는, 뻐꾸기 소리도 없어졌다.

 

허허, 이게 누군가?”

뒤에서 찬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누구야!”

분명, 그는 그의 친구 남군이었다. 아마 종로 어설 어디였다.

꽤 오랫동안 못 보았지. 아니, 상당히 오래잖았나?”

친구의 말이었다.

그랬지, 그럴 수밖에.”

찬의 말이었다.

그렇다니?”

친구 이렇게 물으니,

시골로 나려갔거든. 벌써 오래전 일이었지.”

하고, 찬은 대답을 하였다.

옳아. 그러니, 만날 수가 있느냐 말야. 모이면 궁거워 자네 이야기들을 하였지. 그래서?”

친구 또한 캐어물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었지. 도조 받아먹을 것은 애초 없었으니까. 허허허.”

찬의 대답이었다.

소 세고, 머슴 두고? 그러고도 셈이 맞는단 말이지?”

친구의 말이 이쯤 가니,

소는 무슨 소를. 머슴은 무슨 머슴을. 다 일없었네.”

찬의 말은 이쯤 갔었다.

내 손으로 직접 지었네. 허허허. 이 손으로 지었단 말야.”

찬은 대답을 더 계속하였다.

무엇?”

친구가 이러니,

아무렴, 그렇게 물을 테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말 반 푼 어치 없고, 누구나 하면 될 수가 있는 일이거든.”

찬은 이러고 대답을 하였다.

대관절, 농사는 잘 지었는가? 심평이 어때?”

친구는 자꾸 물었다.

식구 양식을 장만해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일세. 심평 심평 하지마는, 심평은 심평을 잡을 탓이거든. 한여름 내 손으로 농사를 지어 주고, 나는 나대로 다닌단 것이었는데. 허허허.”

찬은 이렇게 또 대답을 하였다.

서울이 또 그립더란 말이지. 서울을 버리고 갔어도. 하하하.”

친구는 은근히 비웃는 말인지도 몰랐다.

서울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지. 하지만 서울을 왔다고 반드시, 서울이 그리운 것은 아니거든. 조선땅에서 왜놈을 피한다는 것이 원래 될 말인가.”

찬도 한바탕 웃어 주었다.

아무렇든, 온 걸 누가 잘못이라고야 하였겠나.”

친구는 한편으로 풀어 이르는 수작이었던지도 몰랐다.

자잘못을 가릴 것이, 여기 있잘 까닭이 있는가.”

찬은 코웃음을 쳤다.

대관절, 그러면 자네도 인제 객질 텐데, 여관 어디다 정했나?”

친구 이렇게 물으니,

내 여관이 알고 싶은가? 내 숙소를 알고 싶으면 말야. 허허허.”

이러고, 찬은 말을 중도에서 끊어 버렸다.

알아야지, 자네 숙소를 알아 두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친구는 더욱 알고자 들었다.

아무라도 찾기가 쉽거든. 그걸 못 찾아서야 바보가 아닌가.”

찬은 이러고 말을 또한 비칠 뿐이었다.

어딘데?”

원체 굳게 묻는 데는 해볼 장사가 없는 것이었다.

남대문 밖일세. 남대문서 곧게 내려가면, 마주 뵈는 큰 집이란 말야. 그렇게 가리켜도 모른단 말인가.”

대답은 제법 애써 한 것 같아야 듣는 사람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정거장 근처 여관이란 말인가.”

묻는 사람은 묻기도 딱한 것이었다.

정거장 근처가 아니라, 정거장이 바로 내 숙소일세. 허허허.”

이것이 결국은 듣고 싶던 그 대답이었다.

무엇?”

듣는 사람은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

허허, 그렇게 되었네. 좀 괴롭기는 하지만 도리가 있나. 나 볼일만 보고, 갈 때 가면 될 것 아닌가. 올 제 잘 제야 그야말로 좀 편한가. 문 앞에서 차를 타니. 그리고, 왜놈에게 세금 바칠라, 지주 비위 맞출라, 시골 논을 지어 가지고야, 어디 서울 여관에 들 수가 있더냐 말야. 허허허.”

말을 하는 사람은 되롭서 태평히 웃었다.

식사는?”

아는 김에 알 건 다 알아 두고 싶은 것이었다.

호떡, 가끔 설렁탕이면 되었지 뭔가. 그렇지 않고야, 시골 농사꾼 서울 좀처럼 와보겠나.”

대답의 끝은 또한 웃음으로 막고야 말았다.

여보게, 인제 술이나 한잔 먹으러 가세.”

그러세.”

친구를 따라가다 찬은 깜짝 놀랐다.

 

찬은 잠을 깨고 보니, 말간 물 한 방울이 양미간에 떨어졌다. 해가 동동 떠 있는 멀쩡한 하늘이었다. 소나무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었다.

한여름 소나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그 한 방울이었다. 남 보기에는 혹, 이날 이 땅에서만 볼 수 있는 지식층의 처참한 광경이었을지 모르나, 자기는 역시 농부! 이 땅에 흔한 농부의 얼굴에, 이 나무에 흔한 이 한 방울이 떨어진 게, 별일은 아니었다.

찬은 곰곰 생각을 해보았다. 이편의 현재를, 또한 장래를, 조선의 현재를, 또한 장래를.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

열 평 울안이었다. 가까운 산을 보다가 앉았으면 먼산이 보인다. 뒤로 돌 길을 돌아 올라가면 또한 산이었다. 산밑이었다. 동시에, 산마루이었다. 그러나 대경성의 복판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성으로 돋아오른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열 평 울안은 명랑하였다. 겨울 볕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찬은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 해가 돋기를 기다렸다. 시골 서투른 농사꾼이었던, 그의 오래간만에 다시 친한 태양이었다.

찬이가 이 집을 고를 제, 아내와 같이 다니며 고른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집을 고를 제, 안식구와 다니기가 폐롭다는 것은, 요새에야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부엌이 좁다, 넓다는 것은, 둘째였다. 수채가 잘 빠진다 안 빠진다는 것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방위가 어떻고, 옳은 장군방이 어떻다는 것도 혹, 있을 듯한 일이었다. 아내 남편의 뜻을 알아차려, 그까짓 것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눈치를 보인다지만, 모처럼 이사에, 이웃 여인들이 마수 없는 소리를 하도록, 객쩍은 말거리를 줄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들었기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못 들은 체하였으면 상관이 없건마는, 이따위는 들은 것이 안 들은 것만 못하다는 것도 딴은 우스운 것이었다.

아무렇거나, 호화로운 말임에 틀림이 없다. 뒷다리가 밀렸으니, 앞다리를 시급히 구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었다. 집주인 눈치를 하루도 몇 번씩 보는 터에, 책력 놓고 그믐 초하루를 따지고, 객쩍은 방사에게 동이 바르고, 북이 바른 여부를 물을 여부가 있을꼬, 도대체 객쩍은 만큼, 할 만한 말이었다.

찬이가 이 골짜기에 이 집을 정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도회의 골목은, 누구보다도 못지않게 안다는 옛 주인이 앞을 서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찬이가 들었던 집 주인이었고, 찬이가 들어 있던 방을 내놓아지라, 사정한 분이었으니, 내 방을 내 소용에 속히 쓰기 위해서라도, 성의가 범연할 이치는 만무였다. 서울 사정 과히 어둡지 않은 곁방살이꾼이 제 비록 오막살이일망정, 방이 아니라 집을 찾는 판이다. 사실은 이번에도 방을 구하다가 못 하니, 옆에서 보던 친구가 보다못해 자기로선 적으나, 찬에게는 많은 돈을 돌려주는 판이었다.

찬은 찬대로 당사자였으니, 당사자의 책임이 가벼울 리 만무였다. 이럭저럭 무슨 턱으로 친대도, 일은 꼭 마음껏 해야만 될 판이었다.

어쨌든, 명색 집만 되고 보면, 찬은 곧 옮겨야겠고, 주인은 방을 쓰면, 그만이었다. 돈이야 많건 적건, 집만 구하면, 이편 저편의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되는 판인데, 자원이 워낙, 부족한 것은 찬이나, 주인이 다 같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너무도 부족한 자본을 가지고, 어디 가 족한 집을 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족하고 부족한 것이 한계야 없을꼬마는, 주인과 찬은 자연 견해가 다를 듯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소망은 어쨌든, 찬의 실력은 실력대로 나타나고 말 것이 사실이었다.

찬이 이미, 복잡하고 번화하고 비싼 중앙지대에 감히 뜻이 없는 줄을 너무도 잘 알아챈 주인은, 찬과 행동을 같이하기에, 힘들 이치가 도무지 없었다.

별수없지요, 아무 데 근처를 가, 더듬어 보아야겠지요 하면, 아무렴요 하고, 주인은 대답을 하였지, 그렇지 않단 법이 없었다.

이렇게 의사가 같고, 행동이 같다. 그러나, 일의 책임과 핑계는 으레 찬에게 있는 것을, 찬은 너무도 잘 알고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찬은 새삼스럽게 적막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세상사 그러므로, 오히려 네 일 내 일이 간편하게 처리되는 것같이도 생각되었다. 세상에 없이 좋은 의견이 백출을 하고, 당치 않은 반대가 애초 문제가 안 되는 경우에도, 그것을 최후로 결정할 사람은 오직 자기일 것을 찬은 통절히 느끼었다.

찬은 낮에 다니며 거둬들인 자료를 아내에게 보고한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기초로 아내의 의견도 들어 보지 않은 바는 아니나, 결국 이 일을 작정한 건, 찬 자신이었다. 찬이가 이 집을 정해 놓고, 아내에게 이 집을 보였을 제, 아내는 족하나 부족하나, 집 없던 사람이 집을 들게 된 기쁨밖에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는 것이, 적잖이 섭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찬은 이 집의 덕담을 부지런히 하였다.

여기는, 발치보다, 꼭대기가 좋단 말이거든.”

찬이 이러고 말 허두를 내었을 제, 아내는 무엇이라 대답을 하였던가.

층층대, 꼭대기가 뭣이 그리 좋오. 올라다니려면…….”

아내 이랬을 제, 찬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오르는 맛을 모르는 말이거든. 오르는 맛은 결국, 꼭대기에 있는 줄을 모른단 말야. 꼭대기에서는 내려다보는 맛이 있잖소. 내려가 치어다보는 것과, 내려다보는 것이, 그 맛이 어떻게 같을 게냔 말야. 뿐인가, 수채가 밑으로 내려가지, 위로 올라오. 산밑이라 공기 좋고 시원할 것 아니냐 말야. 여름철에 좀 보오. 바닥 사람들이 꾸역꾸역 제 안 올라오고 견디는가. 뿐인가, 정남향이니, 겨울에는 해가 바른 것, 겨울에 다순 집이 여름에 시원타는 것, 아니냔 말야. 기와집을 갑자기 바랄 것 있나. 비록 몇 평 안 되는 터전이지만, 요따위 양명한 초가, 꼭 들어맞었지 뭐야. 석비레 마당에, 아이들 신발 더럽힐 염려 있을까, 그대로 주저앉기어든, 옷에 흙 묻을 염려 있소. 빨래 자주 안 해도 되었지 뭐야. 빨래 한 가지 덜 하는 것도 어디라고. 뜰앞에 국화나 가득 심어 놓고, 향기를 실컷, 누가 맡지 말랬나. 안방에서는 밥을 먹고, 건넌방에서는 글을 읽지요. 안방에서는 또 바느질을 하면 누가 말리겠소. 집 탓을 할 필요가 있느냔 말이거든.”

찬은 이렇게 주워섬겨 놓고도, 실상은 속으로 은근히 웃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탓이야 누가 탓이오. 집 탓을 내가 하였겠소. 무슨 그리 거창한 살림이라고, 집 부족해 살림 못 하겠소. 남의 집 곁방에서도 살았을라느니, 이제 무슨 한이 있겠소. 오직 한 가지 걱정은 물 걱정이 아니오. 그 걱정이 좀한 걱정이오. 허드렛물은 허드레 우물에 가, 길어 온다지만, 적어도 하루 한 지게씩 먹는 물, 수돗물은 꼭꼭 달아 올려 먹어야 할 것 아니오. 이제껏 방은 협착했어도, 물은 흔하게 쓰지 않았소. 물 흔케 쓰는 것도 얼마요 글쎄. 물장수를 댄다지만, 예선, 값은 고하간에, 한 달이면 며칠씩 빼먹기가 예사라지 않오.”

아내의 걱정은 실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아내뿐이었나, 찬 또한 아내 못지않게 생각을 하였던 바였다.

밥을 굶어 보아야 밥 고마운 줄을 안다는 셈으로, 물 고마운 줄을 장차 철저히 알아볼 테란 말이지. 진작 알아야 할 것을 안다는 데야, 반대를 할 사람이 있을라구. 하하하. 애초에 물장수를 믿을 것이 있는가. 장사는 하다, 저 싫어 그만둔다는데, 이편이 억지로 시키는 수가 뭐냐 말야. 내가 내 일을 직접 하면, 시시비비가 있을 까닭이 있겠소.”

찬이 이러고 장담을 하였을 제, 아내와의 대화는 더욱 번거로워진 것이었다.

내라니, 누가 물을 긷는단 말이오?”

나는, 나지 누구겠소. 미리 겁을 낼 필요도 없대도, 하하.”

겁은 무슨 겁을 내오?”

내가 한대도, 당신보고 하란 말이 아니란대도.”

당신 물 긷는 거동을 보고, 다른 사람 목에 물이 넘어가겠소.”

?”

왜는 뭐요. 남 하는 일이면, 나도 으레 되는 줄로만 아시오.”

안 될 게 뭣이람! 농사도 못 짓는다 물도 못 긷는다! 내 남만큼 키가 못 컸단 말야, 나이를 못 먹었단 말야. 나이 사십이면 과히 모자랄 것 없지 않은가. 다섯 자 다섯 치는 넉넉한 모양이니, 키 또한 모자랄 것도 없지 않은가. 아그, 여인네들이 하는 짓을, 열네댓 살 먹은 계집애들도 하는 짓을, 내가 명색 대장부로 태어나서, 못 한단 말이 무슨 말이람. , 하하.”

나중에는, 여편네 계집애 일까지, 도급을 맡으시려오. 되나 못 되나, 나는 흉내를 내도, 당신은 아마도 못 하시리다. 언제, 물 한 통 들어나 보았소. 두 통 지는 건 고사하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을 모르는 수도 있다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염려는 과히 말라는 밖에는. 두고 보라는 밖에는.”

이렇게 말을 맺은 찬이었다. 지덕은 사납다 하지만, 하루 물 한 지게 긷는 이야기가 너무도 장황한 데는, 찬 자신으로도, 적잖이 열적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동네에서는 누구 하나 눈도 거들떠보지 않으려는, 가장 범상한 문제를 가지고, 가장 큰 일인 듯 노닥거리는데, 찬의 장단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정신노동을 추앙하다 지나쳐, 육체노동을 내려치는 습속에서 옮아온 것이 아닐 것이었다. 결국은 습속문제가 아니요, 실력문제, 곧 체력문제요, 단련문제요, 경험문제일 것이었다. 이렇게 문제를 걸면 걸수록, 문제를 만드는 것만 같아, 다 집어치고 찬은 우선, 이사도 오기 전에, 물통을 장만하였고, 이사온 그 이튿날 물지게를 장만하였다.

무슨 큰일에나 떠나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심사가, 찬은 스스로 미웠다. 말은 통통히 해붙였지만 물통 둘이 정말 땅에서 올라올는지, 자기가 주저앉고 말는지 모르는 자신을 생각할수록, 더욱 자기가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물통을 한몫 물턱에 메치고, 어이없어하는 꼴을 동네 마누라들에게 안 뵈기 위하여, 동네 마누라들 안 뵈는 데서 미리 자빠져 볼 필요는 없었다.

신발은 가벼워야 할 것, 옷은 헌것으로 바꿔 입어야 할 것, 돈 일 전을 준비하여야 할 것, 빈 물통은 반드시 두 손으로 쥐고 내려갈 것. 그러면 대개 되는 것이었다.

새벽이면 이를수록 좋고, 밤이면 오히려 늦은 것이 좋았다. 이는, 열 평 울안에 물이 들어올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

*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늙은 여인이 물값을 받되, 어둔 밤에도 만주 돈을 용케 가려낸다.

물통과 물통이 두 줄로 열을 짓되, 선후가 분명하였다. 물통이 차례를 지킨 바엔 사람은 아무렇게 서도 상관이 없다. 간혹 버릇 사나운 물통이 새를 노리려다가도, “, 새치기 안 되오한마디면 누가 새치기해요. 먼저들 길으시오하고, 그만이다.

그 누구 한 사람, “새치기하면 어때하고, 들받고 덤비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통만 있고 임자 없으면 임자 있는 통이, 임자 없는 통을 넘어가도, 상관이 없는 법이었다.

좁은 물턱에, 주인 없는 물통이 왜 이리 많아.”

집에 둘 데가 없어, 이런 데 둘 테거든, 물통 없는 사람, 줘나 보지. 고맙단 말이나 듣지.”

누가 아니라오.”

이렇게 간혹 불평도 하고, 비꼬기도 하지만, 그걸로 말썽이 되어, 물턱이 소란할 까닭은 없었다. 볼일 볼 것 보고, 조용히 나와, 놓았던 물통에 차례대로 물을 길어 가면 되었다. 물통을 미리 놓아 둔 게 그야말로, 밑질 건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없을 때는 뒤질지언정, 있을 때는 뒤질 까닭이 통 없는 일이었다. 앞 뒤 중간에, 버텨, 여유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결국, 주인이 없으면 넘어갈 수 있는 법은, 이 통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근본이 된 것이었다. 통의 행렬이 길다, 함부로 낙심은 말 것이, 이렇게 통은 통을 넘어가는 법이 있지 않으냔 말이다.

변통은, 그뿐이 아니었다. 앞사람이 한 통 가득 찬 물통을 들어낸다 치면, 다음 사람이, 앞사람의 다음 물통을 알맞게 대어 주는 것이었다. 수돗물은, 한 모금 객쩍게 땅으로 떨어질 새가 없이, 통에서 통으로만 흐르게 마련이었다. 다 같이 차례로 돌려 받는 덕에, 누구 한 사람 제 차례 제 구실을 소홀히 할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받아 담는 물을 지고 일어서 올라오려면, 길 가는 사람은 으레 길을 비켜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골목이 좁으면 으레, 물지게를 보내 놓고, 통행을 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희나 검으나, 양복을 걸쳤거나, 안 걸쳤거나, 그들이 골목 안 사람이었으면 대개, 물 무게가 어떻단 것을 알고 있을 듯한 일이었다. 물지게를 지고 층계를 오르는 맛이 어떤가 알 것이었다. 골목 안 집치고, 물지게 없는 집이 별로 없을 터이니, 그들이 물지게에 길을 사양하는 것은, 다른 바깥 경우와도 물론 다를 일이었다.

찬의 이따위 지식이 점차로 늚에 따라, 그의 물 긷는 기술도 점차 느는 셈이었다.

물 두 통을 적당한 거리에 대령해 놓았다. 질빵을 다시 한번 골랐다. 양편 갈구리에 양편 물통을 걸고자, 허리를 굽히었다. 다리를 오그렸다. 힘을 번쩍 썼다. 일어섰다. 망신은 면하였다. 마는, 다리가 비틀, 하마터면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였다. 신기로운 자기가 가소롭기도 하였다.

찬은 며칠을 가도, 이때의 기억은 더욱 새로웠다.

결국 알고 보니,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두 통을 한꺼번에 올리려 든 것이 잘못이었다. 양쪽을 걸었거든 한쪽을 먼저 올려라. 그리고 기울어진 어깨를 바로만 잡으면 되는 것을, 두 통을 동시에 져올리려다, 두 통을 한목 엎을 뻔한 것이었다.

터득을 하고 난 뒤의 요령은 간단하였다. 지고 일어서는 품은 제법 수단이 난 체해도 될 듯하였지만, 지고 오르기란, 내내 숨이 차고, 다리가 터벅이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앞에 가는 여인이 무난히 가는 것을 보고는, 이편이 한껏 가증스러운 판에,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숨이 더욱 찼다. 그러나, 한편으론 위안도 되었다.

나도 수단이 나면 설마, 저폭은 되겠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 오던 그 여인이 중간에 쉬는 것을 볼 때는 또한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지기도 하였다.

수단이 나도 결국, 어렵기는 어려울 것이로구나,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가 아니냐 하고 생각을 돌릴 제는, 자기는 자기가 사나이란 것을 꼿꼿이 믿고 싶었다.

그게 다 오히려, 객쩍은 생각이었다. 기껏 쳐야 열네 살 되었을까 한, 아이가 제 몸뚱이보다도 작잖은 물통을 둘이나 지고, 층계를 조아 올라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어른도 어려운 층계 길을, 바짤은 꼬마동이가 정복을 하는 것이었다.

, 너 정말 장사로구나!”

찬은 이러고, 그 아이의 뒤를 따라와 본 뒤로는, 세상없이 어려워도 다시는 중간에 쉬지 않고, 장참을 대기로 작정을 해보았다.

힘을 모아 쓰고 쉬지 않기란, 단거리 이외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쉬지 않고 장거리를 정복하는 법이란, 힘을 두고두고 쓰는 법일 것이었다.

예서 그는, 쉬지 않고 쉬는 법을 알았다. 한 계단에서 한 계단을 보면 되었다. 발 한 자국, 한 자국을 줄이다 보면, 계단은 이미 끝나는 줄 모르게 끝나고, 그 다음 개천을 건너갈 여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왕에 아는 길, 정한 길이면, 미리 당황할 게 없이, 짐을 달래고, 힘을 얼러, 지치잖고,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 보자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힘을 아껴도, 그는 힘이 부족한 줄을 알겠고, 이마에 구슬땀이 서린 것을, 그가 깨달은 때는 이미, 그가 물지게를 지고, 가장 높은 계단을 올라온 때였다.

웬일인가, 내 울안에 물지게를 벗어 놓고 나면, 지리하던 그 길 그 시각이, 갑자기 짧아진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물지게를 벗어 놓은 뒤의 숨소리가 순해지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는 아내 역시, 새벽이나 저녁으로 남편이 물 한 지게쯤 긷는 것을 이상하게 보들 않는 모양이었다. 물독에 물이 없으면 그것은 으레, 찬의 책임이 되고 말았다.

그것 되시겠어요. 달리 어떻게 변통을 해야지요.”

하던, 조카애도,

학자님이 어떻게 물을 길으시오. 평짓길 가깝기나 하면 몰라도!”

하던, 옛 친구의 부인도, 더는 이렇다저렇단 말이 없었다. 물터를 간대도, 전처럼 뒷전에서 서름서름할 필요가 없고, 착 차고 들어서서, 동네 늙은이들 말참례도 해보고, 차례를 범하는 눈치가 보이면 제법, 효유도 하는 품이, 그도 이제는 정말 한패에 어울린 듯하였다.

뚱뚱보 할멈이나, 말라깽이 여편네나, 키다리 멋쟁이 각시나, 텁석부리 영감이나, 코보 영감이나, 다들 조용턴 않아도, 내 앞들을 가리려 들었지, 덮어놓고 남의 앞을 범하려 드는 이들은 아니었다. 다같이 살기에 바쁜 분들이었다.

그들 중에 누구 한 사람, 찬이가 안 나오면, 그이 웬일인가, 궁금해 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찬으로서 생각할 터무니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옳지, 서투른 그 새 물꾼이, 오늘도 빠지잖고 또 왔구먼, 할 만한 정도는 될 듯한 일이었다.

이렇게 쌓여 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마는, 진짜 물장수는 고사하고, 가짜 물장수란대도, 열 모에 한 모 익숙한 그 째를 배웠노라, 그는 생의를 할 까닭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꼭 한 번 지나친 대접을 받았다. 물론 어른에게는 아니었다. 아이에게였다.

그 물, 한 지게 얼마요?”

아이는 대단 급한 심부름을 나온 모양이었다.

얼마?”

찬은 너무도 의외로운 장사에, 한번 웃어 보고 싶었다.

얼마여요? 낱물장수 아녀요?”

아이는 급한 만큼, 급히 물었다.

안 팔겠다.”

찬은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으나, 덮어두었다.

삼십 전 줄게 팔아요. 삼십 전이면 되지 뭐요. 파셔요.”

아이는 삼십 전에 낱물을 꽤 많이 사본 모양이었다.

안 판다. 일 전 주고 사온다. 하하. 일 전이 많으냐? 삼십 전이 많으냐?”

찬은 부질없이 걸음을 멈출 것까지는 없었다.

일 전요?”

아이는 알 수 없는 물장수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삼십 전 가졌으면 이따위 물, 서른 지게 긷지 않겠니? 가 너희 아버지 뵙고, 물 빨리 길으시래라. 이 아래 수통에서 물 막 싸게 판다. 알았지 응! 빨리 뛰어가.”

찬은 말을 마치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이는 객쩍은 놀량에, 급한 사람 시간만 허비하였다는 듯 이편을 노려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줄곧 내뛰었다.

달에 얼마씩 값을 정하고, 남의 집 물을 긷거나 어쩌거나, 물장수는 돈맛에, 도중에서 낱물을 판다. 중간에 새인 물을 기다리다 못하면, 그 역시 낱물을 중간에서 사게 된다. 결국은 네 물과 내 물을 비싸게 바꿔 먹는 셈이었다.

흔한 이 그물 한 코에, 물 긷기 한 달도 못 된 서투른 찬이가 걸린 것이었다.

어쨌든, 찬으로는 이도 손도 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찬의 수업에 반 점 영향이 미칠 리 만무였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바람은 노호를 하였다. 앞집이 가린 것이 고마웠고, 높은 언덕이 고마웠다.

오늘 같은 날은 그만두었으면 좋겠소.”

아내는 지성으로 걱정을 하였다.

그만두다니, 무얼 그만두어?”

찬이가 그 의미를 몰라, 물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물 말요.”

아내 또한 남편이 모를까 봐, 한 대답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춥다고, 물은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신통한 방법이 있다면, 오늘만 아니라 앞으로 내내라도, 물 길을 필요 없지 않오.”

남편은 이렇게 나가는 게 행투였다.

그랬으면 작히나 좋겠소. 누가 아니라오.”

아내의 대답이었다.

아니고 길 건 뭣이람! 물은 길으면 먹을 것 아냐? 세상에 물같이 흔한 게 없는데, 물도 못 먹으면, 없는 놈이 그래 뭣을 먹는담! 맘껏 먹어요. 길어 댈 테니. 사람으로 태어나, 그래 물배도 못 채운대서야…… 남편 덕인 줄을 아오, 하하하.”

찬은 이럴수록, 재촉이나 받은 듯, 물 길을 차비를 하였다.

내려갈 제 생각을 하면, 올라올 제는 거짓말같이 더웠다.

난 다른 어른인 줄 알았지요.”

찬의 뒤에서 이 말을 준 사람은, 찬이 일찍 감탄한 꼬마둥이 물꾼이었다.

넌 아래 물턱으로 갔었니?”

찬이 물으니,

그렇다고, 그는 대답을 하였다.

다른 사람으로 알았다니, 어쩐 말이냐?”

찬은 채출해 물었다.

전과는 딴판으로 물을 잘 길으시니 말여요.”

꼬마의 대답이었다.

사람은 밤낮 그 사람이란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찬의 물통은, 어제도 오늘도, 열 평 울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하얗게 왔다. 열 평 울안에도, 밖에도, 온 조선에도, 왔을 것이었다.

찬은 역시 시장한 눈으로 먼산에 온 눈도, 가까운 산에 온 눈도, 골고루 볼 수가 있었다. 백비탕을 따라 놓은 찻잔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평범한 날을 마르지 못해 애쓰는, 한 떼, 이 땅 인텔리의 구차한 일면이었다.

*

찬이가 주제넘게, 에스 여학원에 교편을 잡게 된 것은, 자기 딴으로는, 이유가 자못 없지 안하였다.

몇 푼 월급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그것을 내세울 수는 없고 하니, 첫째는 가로되, 징용은 피해야겠다. 도망을 해서라도 피해야 될 게, 가서 죽고 산다는 것은 고사하고, 일본을 때려부수지는 못할망정, 일본제국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마음부터 용서를 할 수 없는 일이요, 정작 친일파는 피할 수 있는 것을, 친일파도 아닌 놈이 일본을 위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옳다, 당하면 빠질 권리도 없고 하니, 명색 직업, 선생 노릇을 하자 한 것이요.

둘째는 가로되, 학원이면 정규 학교와 달라, 어디가 붙은지 모를 미미한 존재에 간섭도 좀 덜할 터이니, 오히려 다행하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들으면, 좀 섭섭할 소리지만, 솔직히 말하면, 찬은 이 두 가지 이유로써 선생 노릇을 한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처음에는 그럴듯도 하였다. 어느 누가 와서 간섭을 하는 것도 아니요, 명색 선생인 것을, 애국반장도, 조장도, 정회 사무원도 아는 터였다.

조선말을 조선 애들이 쓰는 것을, 조선놈이 애써 쫓아다니며 말린다고 달근달근 들을 애들도 아니었다. 병아리 지키는 주인처럼, 솔개가 오나 안 오나 하는 심정으로, 일본 시학이 오나 안 오나 보아 주면 그뿐이었다.

월급이야 말못되지만, 징용을 피하는 데는 혹, 어떨까 하고, 모인 동무가 또한 없지 않으니, 일본 사람 험구를 하기로 별 염려는 없는 터였다.

이러고 보니, 뜻을 얻지 못한 조선의 지식인은 또한, 학원으로 몰린 감도 없지 안하였다. 아이들은 알도록 가르치면 될 것, 지키는 놈에게는 눈치껏, 그대로 넘길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세는 점점 절박하여,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본의 피는 마를수록, 볶이는 것은 조선이었다. 징용, 징병, 공출의 이야기를 예서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는 성명도 없던 여학원에, 고등여학교인 양, 여자 정신대를 뽑아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이 에스 여학원에서 실시되지 않을 조건은, 있어도, 여간 이만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가려고 안 하여, 선생들이 성의가 없어, 학부형이 보내려 들을 리 없어, 명령 아니라 별것이 있대도, 강제로 잡아가기 전에는, 제 발로 갈 리가 없었다. 상사의 책망을 듣는 것이 당연하였다.

형사가 실정 조사를 나왔다.

귀학원에서는 아직 한 명도 없었지요?”

없었습니다. 부형들이 듣지 않습니다. 강제가 아니고 지원인 담에, 학교에서는 도리가 있어야지요.”

지원은 지원이지만, 국가의 지상명령이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 그렇지요만.”

귀학원에서도 권유는 해보셨나요?”

그야 그렇게 물으시면!”

실례했습니다. 다른 데는 지원자가 있는데, 하필 여기만 없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워낙 인원수가 적으니까요. 다른 규모가 큰 학교와 같을 수도 없지요. 그리고 학교와 학원이 또 하나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학교는 학교의 명령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권위가 있지만, 학원은 그까짓 것, 그만두라면 그만둔다는,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그려! 다르면 여간 다른가요!”

학원이라도 상당히 정신대원을 뽑은 데가 있지 않습니까. 아시겠지요?”

경우가 다를 뿐이지,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요 다음 차례에는 가망이 있겠습니까?”

성패를 장담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최선껏 해봐야지요.”

잘 알았습니다. 바쁘신데 미안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형사가 왔다 갔다고, 안 갈 정신대가 가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 학생들에게 힘껏 권하지 안하였느냐고, 불평을 하는 학부형이 있을진대, 그 학부형의 딸을 보내면, 그의 소원도 성취가 되고, 에스 학원 대우도 받고, 편리한 점이, 여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었다.

마는, 그런 조선 학부형이 있을 리 없으니, 에스 여학원의 정신대 문제는 다시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 정리문제가 대두하였다. 결국은 실시가 되고야 말았다. 가르치던 학생은 졸업을 시키되, 다시 신입생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곧, 학원을 곧 폐쇄시킨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입생을 가지고 꾸려나가는 학원에, 몇 명 남지 않은 상급반을 위하여 돈을 쓸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 학원에서는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결생이라 하고 일학년이란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학년임에 틀림이 없었다.

형사 못잖은 일본 시학이 조사를 왔을 제, 선생은 상급 보결생이라고 하였으나, 학생은 일학년이라고 한 것이, 말썽이 되어, 에스 학원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았다.

그러나, 상급반은 학원 당국의 처사를 원망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자기들도 공부를 못 하였을 것이니까.

에스 여학원의 운명은 위태한 채로, 천구백사십오년 팔월을 접어들자, 서울은 온통 살 구멍을 찾아, 남은 사람도 피난에 미쳤었다.

조선 사람은 삐 이십구를 못 본 사람이 없고, 소련의 만주 공격이 급한 때였다. 일본의 패망을 의심한 조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서울이 폭격을 받느냐, 안 받느냐, 의심들을 하였다.

서울 상공에는 미국 비행기가 떼를 지어 들어왔다. 그러나 폭격이 아니었다. 서울의 시민들은 숨을 내쉬었다.

서울의 전시민은 십오일 오정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었다. 중대 방송이 있다는 포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십오일 오전 열한시, 오십오분! 육분! 칠분! 구분! 열두시! 라디오를 통하여 흐르는, 일본 천황의 말은,항복이란 말을 변호하기 위한, 허다한 말의 낭비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 한마디를 듣기에, 삼십육 년의 춘추가 걸린 것이었다.

*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점심 먹을 줄도, 저녁 먹을 줄도 모르고, 해방 만세를 부르던 조선 사람들이었다.

총독부가 조선에서 손을 떼게 되니, 건국준비위원회가 나섰고, 조선의 치안을 조선 사람 자신이 맡게 되었다.

모처럼 해방이 되었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본 주민을 용서하자는 말에 찬동 안 한 사람이 없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단의 문제도, 곧 설 정부의 공정한 처단에, 맡겨도 좋을 참이었다.

약간의 불평은 애초 입밖에 내지 말자, 이제까지도 참았으니, 사소한 고통은 잊어도 좋지 않으냐.

일리가 있는 말들이요, 전날 식민지 백성이 아니고, 당당한 독립 국민으로서, 의당 할 듯한 말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었다.

, 무엇이 그리울 것이 있느냐. 해방이다. 독립이다.

하였으나, 일은 맹랑하였다. 곧 갈 줄만 알았던 총독이 다시 고쳐앉아 호령을 하고, 일본 제국의 군대가 총칼을 가지고, 조선 사람 가슴을 겨누었다.

일본이 다시 조선을 통치하리라, 믿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총독은 건재하였고, 왜병의 총칼에, 으슥한 골목에서 맞아죽은 조선 사람의 시체가 보였다. 조선은행에서는 지폐를 아직도 저희 맘대로 남발을 하였고, 옛날 민족반역자는, 내놓고 하는 모리에, 수천만 원의 부를 누리고 있다.

서울은 대체 누가 들어오느냐? 미국이냐? 소련이냐? 그것조차도 알 수 없었고, 일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인민은 인민대로 궁금 답답할 판이었다.

누가 오든지 올 테면 얼른 와야겠고, 안 올 테면 우리끼리라도, 무엇을 얼른 해야겠는데,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는 여전히 조선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때 나타난 것이, 미국 비행기였다. 뿌린 삐라에 하였으되, 자기네가 올 동안의 모든 책임은 일본 제국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틈을 타서, 이것을 구실로, 일본 제국주의는, 최후의 권력을 한번 더 자세히 본 것이었다.

미국 군대가 서울에 온다는 것을, 조선 사람이 확실히 알게 된 때에, 조선 사람들은 평생 상상도 못 하였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남북을 끊어 놓은 삼십팔도 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들은 이 말, 이 사실에 대하여, 조선 사람들은 적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주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는, 호의로 해석을 하려 들었고, 희망적인 판단을 갖기에 힘을 썼던 것이었다.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을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환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꽉 쩐 일본 군대의 압박 밑에, 맘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멀리 온 손님을 성대히 맞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일본 제국주의가, 역시 져야 할 것이었다.

그들은 오는 사람마다, 조선의 해방,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왔다고, 언명을 하였다. 그들은 확실히 조선 사람의 천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일본 사람을 조선에서 쫓아 줄 그들이었고, 따라서, 조선의 해방,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써 줄 그들인 까닭이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일본 사람은 차차로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완만한 것을 탓하여서는 안 되었다. 지금까지도 참아 온 터이었으니까.

조선 사람이 무슨 정부를 세웠거나 말았거나, 그들은 군 정부를 세워 놓고, 차근차근 일을 시작하였다.

일본 사람 있던 자리에, 조선 사람을 등용하였고, 등용된 조선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은덕을 노래할 만도 한 것이었다.

이렇게, 질서를 밟아 나가는, 군 정부는 곧, 조선 사람의 복리를 위한 것이요, 또한 조선 독립을 위한, 한 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주장해 왔었다.

독립이라면 그저, 모든 것을 참아도 좋다는 것이 조선 사람들의 기원이었다.

오직 카이로, 포츠담, 선언이, 조선에 실시되기를 바라던 조선 사람에게, 또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이었다.

이 협정에 신탁이니, 후원이니, 하는 문제가 붙어, 조선은 소란하였다.

조선 서울 덕수궁에서는 조선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것이, 반탁운동을 싸고 도는 협의 대상 문제로 무기 휴회에 들어갔고, 그 동안, 남조선 단독정부 이야기가, 떠돌게 되었다. 단독정부라면, 그것쯤은 곧 되는 것처럼, 항간에 유포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미소, 두 나라 외상이 새로운 서한을 주고받은 것은 이때였다.

그 결과로, 서울 덕수궁에는, 다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었다.

협의를 원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들어갔다. 모스크바 삼상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당도 사회단체도, 반탁운동을 하는 정당도 사회단체도, 학교 동창회도, 회원 없는 단체도, 들고 싶은 단체는 한목 다 들어 보았다. 조선 인구의 갑절 이상인 칠천만이 남조선에서, 협의 대상으로 참가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의 미소 공위가 고심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과연 통일 임시정부를 원하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안 할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통일 임시정부를 원하니까, 특별한 조선 사람 이외에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 밀가루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면, 쌀 먹을 수 없는 조선 사람이 굶어죽었을 터이니까.

그러나, 조선 사람 위장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먹고는 견디고 참아 온 것은, 조선 독립을 바라는 까닭이었다.

쌀 한 말에 칠백 원이었다. 그러나 월급은 이천백 원이었다. 그러나 참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것은, 역시 조선 독립을 바라는 까닭이었다.

외국에 망명을 갔던 혁명지사가 돌아왔을 제, 환영 행렬을 한 것도,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일생을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가, 불의의 참변을 당한 애국지사의 장례식에, 폭양을 무릅쓰고 참례한 것도,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저녁을 굶은 사나이가, 한 사나이와 밤새도록 이론 투쟁을 한 것도,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시골 농부가 짚신을 벗어 들고 덕수궁을 바라보고 서서, 저문 날 바쁜 길을 갈 줄 모르는 것도,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헬로 헬로 하고, 미국 병정을 따라가는 것은, 껌을 얻어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조선의 해방자로 맞으려는 것이었다. 일찍 일본 병정에게 그래 본 법이 없었다. 그들은 침략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들 또한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소련 대표가 탄 자동차가 지날 제, 환성을 일반이 보낸 것도 또한, 조선 독립을 바란 까닭이었다.

산에서도, 들에서도, 방에서도, 부엌에서도, 삼십팔년 이래로 바라던 독립이었다.

이러한 독립이, 해방을 하였다는 뒤로, 가을, , 가을, , 또 가을을 맞으려 하여도, 소식이 아득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대관절 어떻게 생각을 하시오?”

모처럼 찾아온 옛날의 은인 춘수의 질문이었다.

어떻게 생각을 하다니?”

찬은 모르고 반문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이렇게 묻는 것이 또한 당연한 순서인 것 같기도 하였다.

이번 미소 공위가 대관절 될 것 같아요?”

춘수의 이 질문은 되지 않으리란 의미가 말 속에 포함이 된 모양이었다.

그저 얼른, 독립이 되기를 희망하는 도리밖에.”

찬의 이 대답은 물론, 춘수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찬은 찬으로서 주견이 있는 것이었다.

희망! 조선 사람은 그 얼마나 많은 희망을 가졌었소?”

춘수는 못내 찬 웃음까지 웃은 모양이었다.

그렇잖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희망조차 갖지 못할 자유가 어디 있겠나.”

찬도 따라서 찬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희망을 누가 갖지 말랬습니까! 희망을 가졌거든, 남들이야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책임은 제가 해야 할 것 아니오!”

춘수는 강개한 어조였다.

그야 물론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찬은 춘수의 의견에 찬성을 한 것이었다.

보시오,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일을 하오? 농촌에서는 농부가 일을 하오? 정권을 노리는 정객들은 당파 싸움에 눈코 뜰 새가 없고! 이러고서야 되겠소. 하나도 건설은 없고 파괴만 일삼는 이 땅에 독립이 올 리 있겠소?”

춘수는 더욱 비분강개하였다.

그것은 자네 같은 사람이 할 말이 아니잖은가?”

찬은 더 찬성을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누가 할 말이겠소?”

춘수는 못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자네는 당당한 정치가, 집권자가 아니냐 말일세.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농부는 들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보게그려. 일 없이 굶기를 좋아할 노동자가 있으며, 농사 안 짓고 굶어죽기를 좋아할 농부가, 세상에 있더란 말인가!”

찬은 어떻게 기다란 설명을 안 할 수 없었다.

법은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실행하는 데 있지 않오. 책임전가가 아니라.”

춘수는 흥분하였다.

노동자나 농민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도, 아니란 말이 아닌가!”

찬은 따라서 새삼스럽게 흥분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대관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로 아시오? 아저씨는!”

춘수는 생각할수록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그야, 쉽다는 말을 한 것이겠나! 자신 여하는 하는, 사람의 일이겠지만.”

찬은 애써 옛날 고마운, 점잖은 조카의 감정을 자극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한다는 말씀이오?”

춘수는 백면서생, 아저씨의 대답이 듣고 싶은 것이었다.

미소 공위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나. 우선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할 것 아닌가.”

찬의 이야기는 결국, 춘수가 묻던 그 문제에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말이지요?”

남북을 통일한 정부를 말이지!”

찬은 정부에다 힘을 주었다.

탁치의 길이 아니겠소?”

춘수의 말소리는 날카로웠다.

독립의 길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겠나!”

찬은 또한 독립에다 힘을 주었다.

그것은 이편의 희망이 아니겠소? 세상사 흔히 희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춘수는 가장 명철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신탁통치를 원하는 조선 사람이, 조선에 있을 이치 있겠는가! 원조라면, 원조는 이편이 급한 것이겠지만.”

찬은 별로 흥분하여 말을 할 것까지는 없었다.

굴레를 씌우련 힘은 강하고, 커도 말입니까? 희망은 희망으로 남는데도!”

춘수는 실무를 모르는 서생에 대한, 실천가의 우월감을 가진 어조 같기도 하였다.

남조선 단독정부란 말인가?”

찬은 이렇게 물었다.

하기야, 그것도, 어쩔 수 없는 한 방법이 아니겠소.”

춘수의 대답이었다.

유엔도 좋아요. 어디서고 속히 해결만 해달란밖에. 그러나 어디서고 미소관계는! 미소관계거든! 조선 사람은 무슨 까닭으로, 남북이 갈리어, 없는 동포끼리 피를 흘리고 싸울 의무가 있단 말인가?”

춘수 보기에 찬은 한낱 서생에 지나지 안하였으나, 이렇게 당당히 차고 나섰다.

아저씨는 그럼 뭐요? 중간파요? 좌익이오?”

춘수의 이 말에는, 그만저만 단념하는 눈치가 보이었다.

중간이 그른 것이라면, 나는 중간을 버리겠네! 중간이 옳으면 나는 중간을 갈 수도 있을 것일세. 좌우간, 그른데도 불구하고, 중간이니까 간다는 중간이니까 좋다는 나는 아마, 아닐 것일세.”

찬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옛날 은인에게, 말이 너무 지나쳤는가 보아서, 약간의 미소를 하였다.

아저씨의 뜻은 장하나 그러나, 아저씨는 역시, 조직을 벗어난 외로운 병정이오. 실례의 말씀일지는 몰라도.”

춘수는 또한 별로 악의 없는 웃음을 웃었다.

외로운 병정!”

찬은 이 말을 도로 씹었다.

……

춘수는 잠잠히 앉았다.

그게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네. 그때 나는 늦도록 한문을 읽고 있지 않았던가?”

찬은 이러고, 지금과는 다른 옛날 이야기를 꺼내었다.

, 느닷없는 옛날 이야기가 나왔소? 이제부터는 복고주의요? 허허.”

춘수도 지금과는 딴판으로 껄껄대고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그때 나를 인도하여 준 게. 누구냐 하면 자네거든!”

대체, 이러고 나서는 찬의 의도를 춘수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뜻밖에 왜 그런 말씀은?”

춘수는 역시 의아한 눈초리로, 갑자기 변하는 다음 차례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도 자네 말이 옳았지! 지금도 꼭 이 한마디 말은 옳단 말야! 나는 두고두고 늘, 조직을 떠난 외로운 병정이었네. 조직에서 떠났어도, 싸우기는 싸우는 것이니까, 나를 대접하여서, 병정은 병정이란 말인가. 하하.”

찬은 이러고, 한없이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면 한턱을 내시구려! 그렇게 좋은 것을 그러고 말 수 있소.”

춘수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턱을 내는 것쯤이야 문제가 아닐세.”

찬은 역시 웃음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면 문제가 무엇이오?”

춘수는 물었다.

은혜를 갚아야지!”

찬은 춘수의 얼굴을 보았다.

은혜?”

춘수는 마주 보았다.

자네가 한문 서당에서 나를 불러 준 것처럼 말야. 서로 손은 이끌고, 조선 사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독립에 가장 빠른 조직을 갖자는 말일세, 외로운 병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가 그만하면 은혜를 갚는 셈은 되겠지. 하하하.”

찬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춘수는 잠잠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춘수의 대답이 없으므로, 그들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노동자도, 농민도, 학자도, 월급쟁이도, 너도, 나도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사람의 파도, 그것은 오직 한곳을 향하여 넘실거렸다. 독립을 부르짖는 기념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십만, 이십만, 삼십만, 사십만…… 이런 숫자는 눈으로 얼른 판정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저 많을 뿐이었다. 그저 많을 뿐이 아니라, 여기에는 질서가 있고, 단결이 있고, 목적이 있었다. 지축을 울리는 절규(絶叫)가 있고, 깊은 못과 같은 정적(靜寂)이 있었다.

귀가 있으면 들었을 것이었다. 삼십팔 년 만에, 아직도 절규하는 독립만세 소리를! 눈이 있으면, 보았을 것이었다.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 들고는 내릴 줄 모르는 손과 손을.

누구나 조선의 통일 민주 정부를 세워 주지 않는다는 사람이 없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조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진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준다는 사람이 있고, 받을 사람이 있으나, 독립은 냉큼 되지 않았다. 여기에, 약자의 비애가 있고, 전취(戰取)를 절규하는 소리가 치밀어오른다.

고요히 서 있는 찬의 어깨를 꾹 찌르는 사람이 있다. 옛날 일제에게 쫓겨다니던, 신문기자 시대의 친구였다.

저편에서 머리를 꾸뻑하는 친구가 있다. 유치장에서 친한 친구였다.

가까이 와 찬의 손을 꽉 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진호! 옛날 서당 선생님의 배반자요, 마을에 제일 개명꾼이었던 진호였다.

이 사람, 알아보기를 용케 알아보았네!”

찬은 반가웠다. 진호를 여기서 만난 것은 더욱 반가웠다.

만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의 갈 길이 통한 것은 하나이니까.”

진호 또한 찬을 여기서 만난 것이 더욱 반가운 모양이었다.

자네 댁 더덕 장아찌 아직도 있는가? 참 맛있더니!”

오늘 캔디보다 더 맛이 있어!”

그들은 웃고, 다시, 통일정부수립 만세! 자주독립 만세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대체, 언제나 이룰지 끝날지 모르는 절규였다. 찬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춘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열망이 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혼돈한 국내외 정세는 천구백사십칠년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출전:육문사(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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