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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사냥

손희

 

1

조르주 상드는 우리 인생엔 단 하나의드르륵 드르륵, 추도예배의 정적을 깨고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A의 전화이다. 기도 중이다. 전화 받기가 곤란하다. 수신거부 화면으로 돌려놓는다. 드르륵 드르륵, 다시 전화가 온다.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조심히 휴대전화를 들고 예배 자리를 빠져나온 영은 밖으로 나와 계단에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무슨.” 영의 안부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다급한 A의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메아리친다.

이쪽으로 좀 빨리 와 줘. 지금!”

? 대체 무.”

지금 우리 집 창문을 소방관들이 부수고 들어오려고 해, 밖에 사람들이 있어!”

전화기 너머에서 A의 쏟아지는 다급함이 망치질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른다.

! 어떻게! 부서질 것 같아! 아아!”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는 A가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건지, 영은 느닷없이 가슴이 오그라들 것만 같다.

나 좀 살려줘! 너무 무서워!”

A는 쫓기는 사람처럼 떨리는 목소리이다. 영은 덜컥 겁이 난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영의 손이 바르르 떨려온다. 빨리 A에게 가봐야 한다. 전화를 끊고 예배 중인 거실로 달려 들어가 남편에게 귀띔한다. 영의 남편도 황급히 가방을 꾸리며 어머니께 양해를 구한다.

엄니, 친구가 지금 위급한 상황 이래네요. 급히 불러서 가봐야 한 께. 죄송해요.”

? 그리어? 뭔 일 인디? 그랴. 얼른 가 보그라.”

가방을 급히 들고 뛰어나오는 영은 초조한 마음에 신발이 잘 신겨지지 않는다. 하이힐을 대충 구겨 신고 절룩거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제발 A에게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먼저 뛰어나간 영의 남편이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온다. ‘끼익!’하고 급하게 차를 세운 영의 남편은 차창을 내리고 얼른 타라며 영에게 손짓한다. A는 나이에 비해 인생의 고비를 너무 많이 넘겨왔다. 그러나 오늘처럼 쇳소리 나는 간절함은 근래에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또 소방관은 뭔 일이래. ?”

망치 소리와 A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남편의 질문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창밖의 여름처럼 영의 속도 바싹 타들어 간다. 꽉 막힌 도로도 답답하기만 하다. 좀 더 속도를 내주었으면 좋겠으나 술병을 가득 실은 낡은 화물차가 오르막길에서 빌빌거리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차도 많은데 저 똥차는 또 뭐라냐잉? 아따!” 영은 손톱만 물어뜯는다.

 

A는 조그마한 가정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고3인 아들을 하나 키우고 있다. 얼마 전까지 어린이집 한쪽 방에서 아들과 함께 검은 달처럼 생활하다가 겨우 이사를 나간 지 대략 삼 개월쯤 되었다. 아들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만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곤 하였다. 이사를 나가면 생활비가 두 배로 들겠지만, 아들 상현은 매우 흡족해하였다. A는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편의 의처증으로 이혼하였다. 영이 가끔 A의 집에 들르곤 했다.

어느 날은 컴퓨터 모니터가 망치로 깨져 있었고 또 어느 날은 방문이 움푹 파이고 깨져 있었다. A가 더 측은해지는 건 이 날의 사건 때문이다. 영이 A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이미 거실의 큰 어항이 와장창 망치로 깨져 있었다. 어항에서 쏟아진 물로 흥건한 거실 바닥은 붕어들이 여기저기에서 팔딱이고 있었다. A의 머리채는 마구 잡혔던 흔적을 그대로 남긴 채 흩어져 있었다.

망연자실한 A의 눈가에서 투명한 세상을 꿈꾸는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 A의 입술에서는 행복을 갈망하는 짙붉은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에서 났을까. 쇠파이프를 들고 A에게 달려드는 A의 남편을 보며 영은 반사적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막아섰다.

당신! 미쳤어? 그걸로 지금 내 친구를 때리겠다는 거야? 당장 경찰을 부르겠어! 이거 내려놓지 못해?” 영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막아섰다.

불러! 저년이 바람이 났으니까 신고해!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고!”

A의 남편은 핏대 선 눈으로 미치광이처럼 영의 팔을 떨치려 했다. 영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A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울고 있다. 도저히 영은 그의 힘을 더는 버텨낼 수 없었다. 영은 있는 힘껏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으읔! 그가 뒤로 벌러덩 넘어진다.

! 빨리 뛰어!”

영은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에 A를 데리고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미처 데리고 나오지 못한 A의 아들 상현이. 어두운 방, 구석에서 귀를 틀어막고 울고 있던 상현의 모습이 영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A는 폭력은 피했지만 빈 몸으로 나왔기에 뼈를 삭히는 삶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갔다.

목을 길게 뺀 어둠은 A를 곡비처럼 살게 했다. 이혼녀라는 딱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 아들의 교육과 돌봄도 짊어져야 했다. 결국, 집에서 어린이집을 시작하였지만, A의 전남편은 이사 가는 곳마다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소주병처럼 쓴 속을 다 비워내도 삶은 늘 흐린 기억을 남기며 술병 속으로 다시 A를 몰아넣었다. 처음에는 아들을 전남편 집에 두고 무작정 뛰쳐나왔기에 시래기처럼 말라가는 것도 A의 몫이었다.

영이 A의 아들을 찾아가 보았을 때, A의 남편은 아이가 굶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었다. 아빠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상현이 혼자 라면만 끓여 먹었다고 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아파트 상가를 배슬거리다가 오락실을 전전긍긍하였다. 영은 A의 아들을 데리고 나와 A를 만나게 해주었다. A가 억척스럽게 아들의 양육 시비에서 승소하였기에 전 남편의 집어삼킬 듯한 행패는 더욱 거세져 갔다. 그때마다 경찰에 신고하였으니 경찰을 부르는 일은 A의 일상이 됐다. 그런데 오늘은 소방관이라니.

 

2

영이 남편과 함께 A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소방차가 두 대나 서 있다. 주민들이 모두 나와 웅성거린다. 소방차 사다리가 A의 창문 밑에 바짝 붙어 허기진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한 소방관이 달그락거리며 창문을 열려 한다. 금방이라도 A의 집 창문이 나무껍질 떨어지듯 떨어져 버릴 것만 같다. 영은 급하게 창 아래 서 있는 소방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저 집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갇혀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혈기가 오를 대로 오른 건장한 남자들이 고개를 빼고 창문을 주시하고 있다.

어머나, 세상에. 이것 보세요.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제가 이 집 주인을 아는데 지금 집에 원장님이 있어요. 당장 이 사다리 치우세요.”

보아하니, 혈기 띤 이들은 학부모들이고 저들이 분명 A를 괴롭히고 있는 듯하다. 영이 소방관에게 다가가니 저들이 영을 주의 깊게 살피는 눈치다.

? 집 안에 사람이 있다고요?”

창문을 열려던 소방관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는 영의 말을 듣고 멈칫한다. 영은 옆에 서 있던 소방관에게 다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어서 저분 내려오라고 하세요! 이거 불법침입입니다. 아시죠? 대체 소방서에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영의 과도한 몸부림에 소방관이 급히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아니, 원장님은 없고 아이들만 있다고.”

영은 이미 얼굴이 달아올랐다. 팔짱을 끼고 소방관들에게 다가간다. 멀리서 머리를 쭈뼛 세우고 떡대 좋은 젊은 남자가 영의 주위로 다가서며 귀를 세우는 것이 보인다. 소방관 앞에서 잔뜩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영이 짜증 섞인 투로 말을 한다.

아무나 열어달라면? 강도한테도 열어주실래요?”

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까 다가왔던 떡대가 저만치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무리 속으로 합류하는 것이 보인다. 이제 영이 A의 친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영도 힐끗힐끗 저들을 주시한다.

, 그럼 저희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철수하겠습니다.”

소방관 두 명을 데리고 영과 남편은 A의 집으로 향한다. A의 집은 아파트 3층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그냥 스쳐지나 계단으로 향한다. 소방관 두 명이 앞서고 영과 남편이 뒤따라 올라간다. 떡대와 몇 명의 남자들이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오려고 한다.

아따, . 소방관분들만 따라오시고. ? 딴 분들은 스따압! 요기서 스따압! ! 그냥!”

영의 남편이 오른손을 들어 칠 듯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이 멈춰 선다. 언뜻 봐도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다. 인상도 제각각이다. 현관문은 망치 자국이 선명하다.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린다. A는 초췌하고 창백해져 얼굴이 망가져 있다.

괜찮아?” A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소방관이 입을 연다.

안에 아이들이 없는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소방관이 이야기하는 뒤로 아까부터 따라오려던 낯선 이들이 멀찍이서 A를 보며 일제히 눈에 힘을 준다. A가 화들짝 놀래며 안으로 몸을 숨긴다.

안 되겠어요. 자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A의 집은 신혼집보다도 더 아기자기하게 꾸며 있다. 크지는 않지만 거실 한편에 A가 좋아하는 어항이 있고 어항 주변으로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다. 거실은 온갖 크고 작은 화초로 봄꿈처럼 향기가 난다. 소방관들은 아이를 찾는 것 보다 꾸며진 장식품에 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A는 아까부터 소파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다.

없네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소방관이 A에게 묻는다. 그러나 A는 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리 저으며 말한다.

아니에요. 확인하셨으면 이제 그만 가보세요. 나머지는 경찰과 얘기할게요. 어차피 경찰관도 아니시니.”

, .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무밥처럼 풀이 죽어가던 A가 제 살을 익혀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다. 영의 남편이 소방관들을 따라나서며 한마디 한다.

오째! 요런 망측한 일을 잉? 참말로 대략난감이지라. ? 즈가 난중에 소방서에 가서 확인서 한 장 떼야것쏘. ? ”

신고자들은 날 선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이었지 않은가. 소방관들 탓에 A가 받은 충격은 어쩌란 말인가.

인사를 마친 소방관들이 뭔가 저들만의 눈짓을 나눈다. 영은 소방관들의 표정에서도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확인서를 지금 당장 받으러 가야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여의치가 않다. 혹시 나중에 딴소리를 하면 아파트 CCTV 자료가 필요하다. 마침 근래에 이 아파트에 도난 사건이 잦았던 터라 부녀회에서 CCTV를 대거 설치해 두었다. A의 창문을 정면으로 비치는 것도 있다. 지금은 A를 더 챙겨야 하니 CCTV를 믿자.

 

영은 주방으로 가서 싱크대 위의 정수기에서 찬물과 더운물을 섞어 와서 A에게 주고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한다.

많이 놀랐지?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

A의 눈은 슬프도록 비탈져 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쉼 없이 떨고 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A가 서서히 입을 뗀다.

새벽부터 학부모들이 몰려 왔거든. 현관문을 부실 듯 난동을 피웠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돌아갈지 알았지. 그런데 한참 있다가 조용한가 싶었는데.”

다시 물 한 모금 축이려는 A의 손이 컵을 놓치려 한다. 영이 A의 입에 컵을 대어주니 천천히 물을 넘긴다. A가 숨을 돌리더니 말을 잇는다.

기가 막혀. 어떻게 소방서에?”

법적인 심각한 문제라도 있음이 밝혀지면 책임을 면키 어렵다. 배짱이 좋던지. 아니면 무식해서 용감하던지. A는 소름이 끼치는지 두 손으로 팔을 감싸 안더니 오싹해진 팔을 문지른다. 다시 심장이 떨리는가 보다.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른 채 사색이 되어 간다. 창 밖은 여전히 붉은 소음이 웅성거리고 있다. 멀리 정문 근처에서 아이들을 안고, 업은 젊은 여자들이 정자 안에 주름져 있다. 저들도 한패이다. 영은 다시 A에게 다가와 앉는다. 눈물이 무표정하게 섬뜩한 둑의 경계를 넘어설 때 A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어제부터 일어난 일이야. 흑흑. 세상은 왜 늘 내게서 등을 돌리는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왜 늘 나야? ?” 영의 남편은 식탁 위에 놓은 티슈를 찾아서 A에게 건네준다. 닦아도 닦아도 고이는 눈물이 A의 옷자락 위로 눅눅하게 떨어진다.

돈이 없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거? 사랑 없는 중매결혼?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주렁주렁 딸린 식구들 뒷바라지가 너무 힘들었어. 도망치고 싶었던 게 사실이야. 그럼 돈 없는 부모님이 죄야? 흑흑!”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고 했으나 영은 가난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불행이 시작된 A 앞에 서 있다. 가난은 A의 간절한 꿈 앞에서 너무 가혹했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면 A는 뭐라 말할까? 가난은 A에게 처절한 생존의 문제였지만, 유리 천장을 이고 있던 것이다.

어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연극관람을 하고 왔거든. 어린이집 입구에 차를 대려고 하는데 결근하겠다던 교사 한 명이 어린이집 앞에 와서 멀찌감치 서 있는 거야. 웬일인가 했지. 아이들을 한 명씩 차에서 내려주는데 그 교사가 돕지 않네.”

교사가 왜 그랬을까? 영은 뭔가 수상하다.

다른 선생하고 아이들을 내려주고 어린이집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갑자기 학부모들이 현관으로 들이닥쳤어. 엄마들은 자기 아이들을 급히 안아서 데리고 나갔고. 곧이어 남자들이 구둣발로 들어와서는 집기들을 엎고 부수는 거야. 흐흑.”

저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메마른 모래알처럼 황량이 울부짖는 A를 보며 사막처럼 건조한 삶을 마주한다.

. 요즘 내가 시청에 자주 드나들어야 하다 보니 어린이집을 자주 비워야 했거든. 요즘 시에서 어린이집 관리가 엄청나게 빡빡해. 내가 몸이 열 개라도 이걸 다 혼자서 감당하기가 벅차.”

영이 들은 바로는, 나라에서 지원은 적게 나오는데 교사 1인당 아이들 수는 정해져 있다고 했다. 아이들 인원수가 초과하면 불법이다. 빠듯한 회비로 교사월급 챙겨주고 나면 A는 급여를 가져가기도 힘들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A가 요즘 주방 일도 다 한다고 들었다.

서류도 너무 많아. 종일 서류만 만드는 교사가 따로 있어야 해.”

영이 아는 공무원들은 서류를 중시하다 보니 현장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서류만 완성해 두라는 게다. 어린이집도 예외가 아니었다니!

나처럼 작은 가정어린이집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문 닫으라는 거나 다를 게 없어.”

A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말이 좋아 원장이지. 차라리 식당 아르바이트가 낫겠다. A의 쓴 그림자가 피곤한 한숨을 내쉰다.

, 허리가 부러진다는 게 뭔지 아니? 다음 달에 허리 디스크 수술 날짜도 받았어.”

혼자 살면서 허리까지 망가지면 앞으로 상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려는 건지. A의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며칠 전, 시청에서 애들 식사를 제대로 주라고 전화가 온 거야.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냉장고 위에 녹음기를 켜두고 일을 보러 다녔어. 그렇지만 온종일 녹음 된 것을 다 틀어볼 시간이 어디 있겠어.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녹음만 했지. 교사들끼리 뭔가 일을 꾸민 거 같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말라 죽은 개구리를 보는 것 같다. 모래알이 이마를 때려 따가울 때 개구리는 숲 쪽으로 방향을 돌렸어야 했다. 이대로 두었다가 A는 뜨거운 태양 아래 말라버릴 것이다. 잠시 창밖을 살피며 다시 이야기한다.

시청에서 나오는데 말이야. 웃고 있는 나뭇잎들은 구김살이 없어 보였어. 내 삶도 해맑게 반짝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청 담당자 앞에서 얼마나 애간장을 졸이며 서 있었는지 몰라.”

 

시청의 어린이집 담당자는 A가 들어서자 불쾌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사진 한 장을 A 앞에 펼쳐 보이고는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원장님, 아이들에게 된장만 푼 국을 주신다면서요?”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진을 A 앞에 바짝 힘주어 밀어놓는다. 사진 속에는 A의 어린이집 식판이 찍혀있다. 흰 쌀밥 두 수저 가량에 말간 된장국과 단무지가 담겨 있다. 식판 앞에 A의 어린이집 아이가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고 있다. 콧물을 닦지 않아 입술까지 콧물이 흐른다. 게다가 더러운 턱받이를 한 아이가 글썽글썽 눈물까지 고여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항상 콧물 흘리는 아이들은 바로 닦아주도록 지시했었다. A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시청 담당자는 A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저는 이렇게 아이들 식사를 준 적 없거든요. 일단 제가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원장님! 행정처분 되고 싶으세요? 이걸 학부모님들이 보시면 어떻겠어요?

담당자는 A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않는다. A는 당황하여 자세히 알아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리 상현이가 몸이 약하잖아. 돈가스에 단무지를 좋아해서 사다 놓았던 거라고! 상현이 학교가 코앞이잖아. 학교 끝나고 뭘 먹지 않으면 걔가 체력이 안 되거든. 학원을 못 가.”

어릴 적 충격 때문인지 상현이는 늘 허약했다. A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영이 더 잘 안다. 요즘 젊은 애들 개성 있다 했더니 이것도 변형된 개성의 용기인가? 영이 마주한 A의 현실이 낯설다.

내가 혼자 사니 우습게 봤나 봐.”

사람이 제일 무섭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나 한솥밥 먹는 사람들마저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더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아닌가? 영은 세상의 뿌리가 썩어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런데 웃기는 건 말야. 그 교사 중에 아침에 내가 차 운행할 때면 한 애는 꼭 찬송가를 틀어달라고 한다. 또 한 얘는 독실한 불교 신자야. 지성 들인 떡이라고 맛있게 먹으라면서 생글생글 웃는데 누가 그런 교사들을 의심하겠어?”

서슬 퍼런 칼끝을 감춘 열 길 사람 속을 고요한 경계 밖에서 어찌 알랴. 그저 종교인이라는 게 가슴 시릴 뿐이다.

A는 쓴웃음을 뱉어놓는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늘 선홍빛 생생한 서늘함이 있다. 견고한 욕망의 군락이 심연의 골짜기 아래 생육하고 있음이다. 좋은 일은 하라고 해도 하지 않으면서 가르쳐주지도 않는 나쁜 짓은 잘도 한다. 그나마 교회에서 겨우 위로를 받아가고 있던 A였는데 하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영은 가슴이 답답해 A에게 말한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 그건 좀 알아주라. ?”

자자! 그런 몹쓸 것들은 똥뚜깐에 갔다 버려삘고. ? 교회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은께 그런 겨. ? 요런 눔, 조런 눔 다 교인이랍시고 댕기자녀. ? 언 눔이 익었는지 당최 모르니께 그려. ?”

우리가 익어가야 한다면 사람의 근성이 악한 게 맞다. 다만 종교인들은 종교로, 비 종교인들은 양심과 지성으로 더 익어가려고 노력하며 사는 거다. 그렇지만 종교인들보다 비종교인들의 범죄율이 훨씬 높은데도 비 종교인들은 개독교땡중이네 말한다. 종교인들만 욕먹는 괴상한 세상이다. 저 교사들까지 한 몫 보탠 것이니 영은 A에게 할 말이 없다.

멱살을 잡고 당장 보상하지 않으면 9시 뉴스에 내보내겠대. 내가 애들을 때렸다나? 한국을 떠나야 되나 봐? 여기서 어떻게 살아?”

유난히 어린이집 사건이 매스컴을 시끄럽게 하는 때이다. 사람 하나 매장하는 거 순식간이었다. 허위 보도도 종종 있었는데 방송된 어린이집마다 문을 닫는 건 자명했다.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흥분한 사냥개 같았거든. 하얗고 커다란 이빨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당장에라도 뜯어먹을 듯이 덤비고 있었다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녹음기 하나였어. 마침 주머니 안에 가지고 있어서 얼른 녹음기를 눌렀지.”

작고 딱딱하고 온기조차 없는 녹음기 하나만이 유일한 힘이고 위로였다니. 삶의 길을 걷다가 예기치 않은 구렁 속에 헛디뎌진 발이다. 손 내밀어줄 따뜻한 동반자가 있었다면 A가 덜 힘들었을 텐데. 외로운 삶이 남기는 발자국의 마른 등뼈가 애처롭다.

너도 알지? 이참에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 같아. 당장 6천만 원을 내놓으래.”

A는 가끔 이 동네 얘기를 해줄 때가 있다. 차 운행 시간이 다 돼도 나와 있지 않은 엄마들이 많단다. 집으로 찾아가 보면 원룸에서 속옷 바람에 세수도 안 하고 있다고 했다. 눈곱도 떼지 않은 애들만 들쳐 안고 나오는 게으른 사람들이라 했다. 어느 날은 아이 회비를 안 주고 결석해서 가보면 야반도주하고 없단다. 모기 한방만 물려가도 병원비 내놓으라며 난리란다.

6천만 원?”

내 통장을 봤거든.”

6백도 눈이 뒤집힐 텐데, 수천만 원이 든 통장을 보고, 제 정신이 아니었나보다. A1020원만 싸게 줘도 수백 미터 떨어진 상점을 걸어가서 물건을 사는 친구이다. A의 돈 냄새를 맡고 욕심을 부렸겠으나,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 화를 부르는 욕심의 손짓이 너무 맹렬하지 않나.

어제는 끌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어.”

끌려다녀? 다친 데는 없었고? 전화했어야지!”

A의 눈은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가 되어버렸다. 어리고 싹싹했다던 교사들이 돈 몇 푼 때문에 가련한 A의 삶을 이토록 험악하게 짓밟다니! 순수를 갈망함은 단순히 꿈인가? 양심은 정말 환상이란 말인가? 윤리를 부정하는 판단이 양심을 삼켜버렸다. 의심만 홀로 세상을 독식하게 하고 공포와 공격이 나약한 거리를 활보하며 순수를 쓸어버리고 있다. 어떻게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영도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3

얼마 전엔 A가 영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공원 산책하던 길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름밤 별똥별들이 멀리서 떨어지고 있었다. A는 걸음을 멈추고 개천이 내려다보이는 다리에 손을 짚고 섰다. 꽃향기가 올라와 실낱같은 A의 하루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다.

영아, 이제 내가 가진 게 하나 더 생겼다. 돈이야.”

A가 희소 짓는다.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에 영도 A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바람이 A의 이마를 가른다. A는 두 팔을 벌리고 저녁 향기에 취해갔다. 크게 만족해하는 A를 보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6천만 원을 벌어두었다는 것이었나 보다. A가 힘겹게 손에 쥔 행복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것마저 뺏으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주머니 속에서 미꾸라지처럼 쑥 빠져나가려는 얄궂은 돈 앞에 사람은 너무도 무기력하다. 영은 소름이 돋는다.

저 사람들이 내 뒤에 바짝 붙어 은행을 하나씩 찾아다니는데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기계를 누르는데 머리가 쥐가 나고 손가락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거야.”

얼마 전, 주택가에서 도망가던 여자가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문을 열고 나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내용을 TV에서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영이 은행에서 소리쳤던들 누가 도와주었을까? 영은 그저 A가 살아있어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나한테 연락했어야지! 나한테!”

영은 속상해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A와 함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응답도 없는 방안에서 영과 A의 목마른 울음소리가 뒤엉킨다. 누군가 삶은 가난처럼 슬프다 했던가. A의 행복은 또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캐묻고, 삿대질하고, 땅바닥에 무릎 꿇고 빌라고. 내 머리를 쥐어박았어. 세상이 다 뱅글뱅글 돌더라.”

A는 넋이 나간 듯 힘없이 웃고 만다. 법의 눈을 피한 어둠의 외딴집에서 A의 목을 조르며 거머리처럼 피를 빨아먹으려 했단 말인가?

각서를 쓰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미 은행 문을 닫은 시간이었어. 다행인 건, 아무리 생각해도 통장 비밀번호를 모르겠더라고.”

A의 말을 저들이 믿어주었다는 걸까? 마침내 영은 그들이 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오늘 난동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입금만 했지 출금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진짜였어.”

얼마나 A가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건지. 그렇게 쪼들린다면서도 통장에서 돈을 뽑아 쓰지 않았다니.

오메. 징하게 구두쇠였고만요 잉? 스쿠루지가 따로 읍씨유. ? 그랴서 오찌된 겨. ?”

영의 남편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웃는다.

거래 정지가 됐어요.”

은행에서 비밀번호 오류 횟수를 제한한다더니 덕을 본 것이다.

오늘 아침 10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다들 집으로 간 줄 알았지. 그런데 내가 어디로 도망갈까 봐 밤새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나 봐. 은행 문 열면 바로 나를 데리고 가려고.”

A는 물컵만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A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은 유리잔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세상이겠지. A가 허리가 부러지도록 벌어들이는 돈을 가지고도 구정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현실이 영은 가슴 아프기만 하다. 아니, 어쩌면 그 돈이 결국 또 다른 구정물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은 갑자기 상현이를 건져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스친다.

그런데 상현인?”

저 사람들이 오기 바로 전에 학교에 갔어. 상현이가 학교에 간 다음이라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몰라. 안 그래도 약한 우리 상현이 요즘 입시 준비로 한참 예민해 있거든. 그나저나, 바보 같은 사람들. 저 사람들의 바닥을 보고나니 나도 생각이 바뀌었어.”

영은 A를 도와야 한다. 일단, 변호사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그때 또다시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 열어! 당장 나오지 못해?”

피를 빨아먹으려고 덤벼드는 좀비들이다. 영은 떨고 있는 A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가 경찰서에 전화할 테니까. 자기는 변호사 좀 알아봐 줘.”

 

잠시 후 변호사와의 통화를 마친 영의 남편이 다가온다.

뭔 눔의 세상이 죄다 도둑눔들이여 잉? 조 눔들도 변호사도 다 도둑눔이네 잉? 아차 하믄 그냥 돈 몇천이 눈앞에서 쉬잉! 날아가는 세상이구마 잉? 돈 음씀 오디다 발을 붙이고 서 있어야 허는 거여? 변호사 비용이 2천에서 3천이랴 잉?”

사람들은 돈이 행복의 기준은 아니라 말하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돈을 움켜쥐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남편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쓰레기 보듯 하는 세상이니 돈 없이 발붙이고 설 수 있는 곳은 쓰레기통밖에 없다. 낙담하고 있던 A가 잠시 생각하며 말을 꺼낸다.

내 옆에 너희가 함께해 준다면 나도 싸워보겠어. 상현이를 봐서라도 일어서야 하니까. 이럴 땐 난폭했던 상현이 아빠라도 옆에 있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편 없이 혼자라는 게 이렇게 뼈가 저린 거였다니. 영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본다. 영의 남편이 엄지로 코를 훌쩍 문지르며 영에게 윙크를 날린다. A의 얘기를 듣고 나니, 영은 남편의 저런 행동도 밉지 않아 보인다.

나마저 없다면 상현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난 꼭 이겨야 해!”

A의 음성은 비장했다. 소용돌이치는 세상 속에서 누구보다 굳건히 버텨낸 생솔가지 같은 A를 영은 말없이 끌어 안아주며 솔향에 눈물을 섞는다. 그러는 사이 경찰이 도착했다.

밖에서 저분들 얘기를 대강 듣고 왔는데요. 얘기 들어보니 학부모님들이라고 하던데. 잘 상의하셔서 서로 좋게 합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고소하실 거면 서로 오시면 됩니다.”

경찰은 A의 집을 휙 한 번 훑어보더니 그냥 나가버린다.

뭐여? 시방 경찰이 바람과 함께 걍 사라진 거여? ?”

모두가 황당하여 말문이 막혀버렸다. 영은 구정물로 가득한 A의 세상 뚜껑을 힘차게 따줘야 할 것만 같다. 모조리 비워내 주리라. A를 사막의 개구리처럼 놔두지 않으리라.

! 문 열어! 경찰들도 합의하라잖아! 당장 이 문 열라고!”

남자들의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현관을 뚫어버릴 것만 같다. 정신을 차리는 쪽이 인간사냥에 성공하는 것이다. 먹느냐 먹히느냐가 관건이라면 이대로 사냥감이 될 수는 없다. 영은 A를 위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다.

당신들 모조리 다 고소할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곧 변호사가 올 거야!"

 

4

영이 A를 데리고 경찰서에 오는 것이 이번이 몇 번인가? 쾌쾌한 담배 냄새가 뿌연 조사실 안을 맴돌고 있다. A가 힘겹게 녹음하였다는 내용이 흘러나온다. A 옆에 나란히 앉은 우악스럽던 그들이 서로 힐끗힐끗 찔러대며 A를 노려보고 있다. 녹음기가 소란을 떨수록 저들도 함께 흥분되어 간다. 껌을 짝짝 씹고 있던 떡대가 입을 연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돈을 뺏지는 말자고 했잖아!”

니가 언제 그랬어? TV 9시 뉴스에 전화하겠다고 저 여자 머리를 쥐어박은 게 누군데?”

저러다 곧 몸싸움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다. 한 남자가 교사들을 향해 소리 지른다.

! 니가 시킨 거잖아! 솔직히 말 못해?

조용히 하세요!” 경찰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친다.

저 선생이 다 시킨 거라고요! 일이 잘 될 거라고 했는데. ! 이게 뭐야? 너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뭐냐고?”

아이를 때린 것도 제가 아니에요. 저 선생이 때린 거예요. 진짜예요. 잘 들어보세요. 제 목소리가 아니잖아요. 믿어주세요.”

모든 것이 녹음기 안에서 실타래 풀리듯 풀려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을 조종했다는 또 다른 교사는 아무런 대구도 하지 않고 껌만 씹다가 창밖을 보며 눈을 흘긴다. 그때 조사실 철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수갑을 찬 채 끌려 들어오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세상에! 그는 A의 전남편이 아닌가. A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걸음을 멈춰 선다. A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에 찬 수갑을 보고 있을 때였다. 껌을 씹으며 창밖만 응시했던 교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A의 전남편에게로 다가간다. 교사는 냅다! 그의 뺨을 내리쳤다. “!!” 나이도 어린 교사가 때린 그의 뺨은 어느새 검붉게 손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나쁜 놈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니가 나를 꼬시지만 않았어도 내가 왜 이 진창에 섞여 있어야 하는 건데? 이게 너 때문이라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책임져! 책임지라고!”

A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영의 부부가 A를 부축하며 A의 전 남편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A의 전남편이 꾸민 일이었다니. A는 오열하며 울부짖는다.

야아! 이 인간아! 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그래도 저 사람들이 나를 짓밟을 때 너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나쁜 노옴! 이 나쁜 놈아! 그러고도 니가 상현이 아비라는 거야? 아아아!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땅을 치며 통곡하는 A의 소리가 조사실 밖으로 쩌렁쩌렁 울려 나갔다. 그 순간 조사실 철문 안쪽으로 누군가 픽! 하고 쓰러진다. 조사를 진행하던 경찰들도 모두 놀라 일어서서 보니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쓰러진 것이다. 울고 있던 A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굳어간다. A는 기어가다시피 하며 그 학생에게로 옮겨간다. 상현이었다.

어머! 우리 상현이! 상현아! 상현아아! 어떻게! 니가 어떻게 여길? 상현아아!!”

A의 오열은 새끼를 잃은 어미 사자처럼 포효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게 조사실에서 천장을 뚫었다.

"내 아들 상현이! 우리 불쌍한 상현이! 상현이 살려주세요! 내 아!“

A가 상현이를 부르다가 그만 쓰러지고 있다. 조사실은 시커먼 정적이 흘렀다.

 

며칠 후, 병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영이 내린다. 병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영의 손에는 꽃다발과 도시락이 들려있다. A와 상현이 함께 병실에 입원해 있는 것이다. 영은 A가 행복했던 그 밤을 떠올리며 병실을 향한다. A와 다시 하늘의 별을 보고 꽃향기로 여름을 노래하며 마음을 나누고 싶다. 병실 손잡이를 열려는데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영은 걸음을 멈춘다. 상현이와 A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문에 고개를 기대어 선다.

엄마. 미안해. 내가 아빠 몫까지 보태어서 잘해줄 게.”

문밖에서 듣고 있던 영은 코끝이 찡해 온다. 드디어 A의 가슴에도 이제 또 다른 별 하나 반짝이려나? 영은 조용히 병실 문을 연다. 그리고 조그만 장미꽃 한 송이 A의 가슴에 얹어준다. 상현이가 영의 허리를 감아쥐며 눈물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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