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사리
김승희
久遠謫居의地의一枝 一枝에피는顯花 特異한四月의花草 三十輪
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 萌芽와같이戱戱하는地平을向하여금
시금시落魄하는滿月 淸澗의氣가운데滿身瘡痍의滿月이刑당하여
渾淪하는 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 나는근근히遮戴하였……' 李箱의 시 「오감도 시제7호」 중에서
언니는 아마 지금쯤 서해안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빨강을 지나쳐 거무스레하기까지 한 튤립 같은 햇빛이 잔혹하게 쏟아지는 차창에 기대어 영웅적 정신이 폭주하고 지나가 이제는 폐광처럼 쓸쓸한 우수의 얼굴로 흔들리면서, 자꾸만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길을 따라 언니는 가고 있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것, 자꾸만 흔들리는 것, 너무 흔들리다가 뿌리째 파헤쳐져 몇 번이나 쓰러졌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일어선 삶. 일어서기를 거듭한 사람. 미강 언니는 아름다운 새벽을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너무 무더운, 너무 메말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여름의 한복판에서 모두들 물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 바로 그 그리운 물, 고마운 물이 아니라 참담한 물, 바로 그 물의 난리 때문에 지금 이른 아침 서해안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졸음에 겨워, 두 눈을 비비며, 꾸벅꾸벅 졸다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할 것입니다. 너무 많은 물, 분수에 넘치는 너무 많은 사랑, 물의 재난. 그래요, 언니, 우리 가족이 언제 그렇게 세상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있어서, 모두들 그토록 애타게 물 한 방울을 그리워할 때 그 그리운 물을 난리가 날 정도로 많이 받았을까요.
언니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전화 속에서 말했어요. “미소야, 어젯밤, 백중사리인 데다가 위니라든가 하는 태풍의 간접 영향까지 겹쳐 서해안의 해수위가 급상승해서 어머니의 논밭과 집까지 물에 잠겨버렸대. 해수위가 급상승해서…… 주택도 4백여 가구가 침수돼버렸다는 거야. 백중 해일이래.”
언니는 마치 객관적으로 보도를 하는 양,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그 말을 천천히 했지요. 백중 해일…… 아, 백중이었어? 어제가? 그냥 태풍을 맞았다, 홍수가 졌다 하는 것보다 백중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은 그 자리에서 파르르 칼이 꽂힌 듯했어요. 백중. 음력 칠월 보름.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 대중 앞에 허물을 말하여 참회를 구하고 백중맞이 재를 올리는 날. 우란분(盂蘭盆). 아, 아, 아,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져 괴로워하는 망령들을 위안하는 재. 그러나 우란분이라는 말 자체는 심한 고통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지요.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의 심한 고통을 위안하려고 목련존자가 고귀한 불공을 드렸다지 않아요? 그 뒤부터 여러가지 음식을 분(盆)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부처께 공양하는 풍습이 생겼다지 않아요. 백중, 우란분…… 이런 말을 생각해보지 않은 지가 십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 심한 고통을…… 또 게다가 대중 앞에 참회라니요…… 아귀도에 떨어진 망령들을 어떻게……
그러나 너무도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동안 뇌졸중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죽음, 아들의 횡사,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의 발병 등 그 숱한 고난의 역사를 뚫고 어머니는 드디어 서울 생활을 단념하고 칠십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서해안 지역에 농사지을 땅을 몇 평 구해 새로운 삶을 개척해가던 참이 아닌가요. 어머니마저 좌절하면 실어증에 광증까지 겹친 올케언니와 한창 학교 다녀야 할 조카들은 또 어떻게 하구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딸인 언니와 나는 이미 집안을 위해 쓸모있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들이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콩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착하고 공부 잘하고 바르게 컸던 언니가 지금 그 모양 그 꼴이니 팥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못나고 공부도 처지고 그림 그린다고 이기적으로 고집불통이었던 나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니, 언니는 내가 가족 걱정을 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언니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혹시 나의 비밀을, 혹시…… 그러나 결코 진짜 비밀은 모른다 해도 나는 그냥 일찍이 도망자였으니까, 그냥…… 왜 백중사리가 어머니의 집에 들이닥쳤는지, 그 백중의 물결이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말 못 할 언어인지 언니는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저 멀리 검은 세계에 펼쳐져 있는 우주와 내가 나누는 편지 같은 거라는 생각이…… '백중 사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느꼈어요.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나 말할 수 없다고……
마침 언니의 전화를 스튜디오에서 받았을 때 나는 시술용 비닐장갑을 끼고 막 시술을 끝내고 돌아서던 참이었습니다. 시술이라니 무슨 의학적인 일에 내가 종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디 내 일이 그런 일인가요. 아주 예쁘게 생긴, 근육질 서양 남자하고는 아주 다르게 연한 식물처럼 고운 이십대의 백인 남자가 문신을 하러 왔어요. 대부분 문신 스튜디오는 철저하게 예약제인데 그 남자는 예약을 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나의 보스인 빅댄은 요즈음 아주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냥 호기심으로 스튜디오를 한번 들러 나도 문신을 새길 수 있을까, 많이 아픈가, 피가 흐르면 어떻게 처치해주나, 문신의 문양엔 어떤 것이 있나 등등 하염없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스튜디오의 하얀 벽엔 빅댄이 유명인에게 해준 문신들의 문양이 사진 촬영되어 붙어 있고 ‘아메리칸이 좋아하는 문양 씨리즈’도 걸려 있지요.
금발의 머리카락을 어깨춤까지 길러 무슨 자줏빛 끈으로 묶은 그 백인 청년은 왼쪽 어깨에 새 날개 문양을 하나 갖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시술이기에 내가 하게 되었지요. 그날 빅댄은 사흘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앞가슴 전체에 걸치는 멕시코풍 태양 문양을 하고 있었거든요. 태양광선들이 '웃고 있는 중심'에서부터 부챗살처럼 확 퍼지는 글쎄, 고대 마야적인 태양 방사선 무늬 말이에요. 그런 문신을 가진 남자가 삐에르 가르댕 같은 하얀 고급 와이셔츠의 앞단추를 확 열면 그 육체에서부터 태양 방사선이 어질어질 앞으로 퍼져오는 것 같고 남자는 태양신적인 힘을 가진 근대인으로 서서, 근대의 멋과 원시의 매혹을 동시에 갖추고 숭고하도록 황홀하게 느껴지게 되는 거예요.
빅댄은 사모아에서 통과제의의 한 양식인 문신을 직접 배웠고, 일주일 동안 피를 쏟으며 전신에 사모아 거장의 문신을 받았으며, 또 미국 문신 예술가 친구들 열한 명이 시술해준 문신을 다 합쳐 기막히게 공들여 화려하게 꾸민 한 벌의 옷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요. 양어깨에는 용틀임하며 올라가는 용의 비늘들이 소용돌이치고 있고, 팔에는 인도의 윤회의 수레바퀴 같은 황금빛과 검은빛 색채의 동그라미가 타오르고 있으며, 등에는 온통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동양의 신들과 호랑이와 용과 꽃들이 만발해 있어요. 그는 그것을 '바디 수트'라고 불러요. 육체가 곧 타오르는 옷이에요. 그는 원시적인 마술과 상징적인 기호의 의미가 가득 찬 운명의 배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의 육체에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기억의 역사가 담겨 있고, 그의 육체는 삶과 죽음의 이미지들이 혼합된 기호의 극장과 같은 것이기에. 빅댄의 최대 마력은 사모아의 스승으로부터 받아왔다는 사람 뼈로 만든 채색 도구에서 나와요. 치과의사의 드릴 같은 시술도구나 바늘로 문신을 뜬 다음 그 '사람 정강이뼈'로 만든 도구로 색을 먹이지요. 인골의 기가 스며들어서 그런지 신비할 정도로 은은히 색이 잘 먹어요.
나는 조금 겁을 먹은 듯한 그 남자에게 어떤 새를 원하는지, 빛깔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묻고, 일회용 종이 시트가 깔려 있는 치과의사용 의자 같은 것을 뒤로 밀어 침대로 만들어 남자를 거기에 엎드리게 했어요. 남자는 오늘이 자기 생일이래요. 그래서 자기 생일선물로 새 날개를 문신해 갖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자기 생일날 문신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요. 자기가 자기에게 선물하는 것이지요. 운명을, 다시 태어남을, 새로운 재생의 힘에 넘치는 이미지를, 고통을 뚫고 피를 보고서 다시 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을 때가 있어요. 또 어떤 때는 문신은 굉장히 정치적일 수도 있지요. 아방가르드라는 것, 부정성이라는 것, 중심의 모순에 저항하는 변두리적인 것들의 반란이라는 의미에서 문신이 다시 정치적 순응의 시대인 90년대 중반에 문화의 복판으로 솟아오르고 있기도 하니까요. 문신을 갖고 싶은 욕망은 원시주의적 욕망과 같은 거지요. 이 제도권적 육체를 벗어나서 원시로 가자는. 사람들은 때로 근대인으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강력하게 원시인이고자 하기에 문신 문양으로 고대신화적인 것, 악령적인 것, 성경이나 모든 나라의 건국 신화 같은 데서는 추방되었을 동쇓식물 같은 것들이 사랑을 받겠지요. 요즈음엔 문신계에도 일본적인 것들이 몹시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래미상까지 받은 어떤 가수는 등에 온통 사무라이 문신을 가지고 있지요. 그것은 빅댄의 애인인 쥰꼬의 작품이랍니다.
나는 남자에게 추상적인 독수리 날개 모양의 문신을 해주었어요. 몸의 안쪽이 가장 고통을 받는 곳이긴 하지만 어깨뼈도 아픈 곳이어서 남자는 뼈에 바늘이 들어갈 때 온몸에 미세하게 떨림이 퍼지더라구요.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잘 참아요. 그것은 용기가 있고 없고의 문제라기보다도 문신을 가지는 것을 개인적 의지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빅댄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더라구요.
“문신을 갖는 것은 하나의 확인이다. 사람들은 이 육체는 나의 육체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소유하고 즐기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문신을 한다. 문신이 왜 감옥 속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표현이고, 그곳에선 유일한 자유의 표현이다. 그들은 너를 넣고 문을 잠그고 모든 것을 통제하지만 나는 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육체에 문신을 할 수 있다. 즉 내 개인 의지의 행위로써 그것이 나의 길을 달라지게 하리라라는 반항의 표시가 되니까. 그러므로 문신을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억압에 항거하는 것이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일종의 권력 부여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문신을 가진 사람을 해군에 있었거나 알콜중독자이거나 범죄자 집단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문신은 정치적이고도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지하나 변두리에 머물러왔던 비천함들은 문명사회의 특징인 체계, 총체성, 균등성, 안정성 등을 공격함으로써 상징계에 대해 거부하고자 한다.”
파리하게 보이는 백인 청년은 자신의 생일선물을 자기에게 하고자 고통을 참으면서 검게 퍼덕거리는 새 한 마리를 어깨에 심고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어요. 남자의 얼굴 표정은 무언가 성숙의 단계를 지나온 것처럼 고요하고 엄숙했어요. 등뒤로 거울을 비춰주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어요. 나는 장갑을 벗고 남자에게 연고를 주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하고 있었지요. 그때였어요. 언니의 전화가 온 것은.
핏방울이 묻은 일회용 플라스틱 장갑을 왼손에 들고 나는 언니의 목소리가 담긴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언니는 신새벽 지금 막 고속버스로 서해안으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하였지요. 고속버스 터미널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중전화가 늘 그렇듯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웅성하는 소란스러움이 언니와 나 사이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백중사리……라니요.
“논도 밭도 집도 해일에 다 쓸려버렸대. 부엌은 물론이고 방에까지 물이 막 몰려들더라는 거야. 엄마와 올케언니가 물을 퍼내고 있다는데, 바가지로 물을 퍼서 어쩌겠니. 뭐? 제방 같은 게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바닷물이 사람 키를 넘어갔다는데…… 백중물이라고 하는 말이 원래 있잖아. 백중날이 일 년 중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달의 인력이 가장 센 날이래잖아. 게다가 조수가 가장 높은 보름 사리가 겹친 거래. 밀물 높이가 가장 높은 날인데 태풍 위니까지 지나갔대는구나. 조간신문에 그렇게 나와 있구나…… 몰라, 바닷물이 들어가 전기밥솥도 고장나 버렸대. 나 지금 전기밥솥 들고 가. 가서 또 전화할게. 전화도 읍내 나와서 하는 거라던데…… 미소야, 내가 가서 전화 되면 나중에 또 연락할게……”
나는 서해안 바닷가에 있는 엄마의 논밭과 집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엄마의 서해안 집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바닷가 어느 마을, 방파제가 높이 쌓여 있고 그 안쪽으로 논밭이 있는, 그러나 한창 키가 높게 자란 푸른 빛 논 속으로 죽음의 바닷물이 들어가 벼를 쓰러뜨리고, 근처에서 쓰러진 벼를 움켜쥐고 올케언니와 노구의 엄마가 머리를 풀고 울부짖는 모습…… 이런 것만이 뿌옇게 떠오를 뿐입니다. 집을 떠난 지 십 년, 이젠 가족의 얼굴도 추상이 되었나 봐요. 특히 올케언니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빠의 의처증으로 소나기 같은 매를 하도 맞아 실어증에 걸렸다는 올케언니의 얼굴은 나에게 그냥 무슨 덩어리처럼 뿌옇게 느껴질 뿐입니다. 갑자기 방문 틈으로 강한 햇살이 무리무리 뭉쳐서 퍼져 들어올 때처럼, 아니면 로마에서 도망치려던 베드로가 길가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머리 위에 일렁이는 빛의 뭉침만으로 예수의 얼굴이 표현될 때처럼 올케언니의 얼굴은 나에게 그런 말없는 추상입니다. 꽃이랄까요, 황금빛 씨앗을 얼굴 위에 왕관처럼 펼치고 웃고 있는 작은 민들레. 그 황금빛 씨앗들이 자기 머리 위의 왕관에서 다 흩어져 사라져가도, 황금빛 화판이 어느새 백발이 되어 쇠잔해가도 민들레의 얼굴은 백치처럼 웃고 있지요. 이렇게 나의 운명이 완성되어갈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사실 올케언니가 그렇게 된 것은 내 탓이에요. 내가 오빠를 죽게 하고 올케언니를 실어증에 걸리게 했어요……
그 대신 이상하게도 고속버스 터미널 주변이 싱싱하게 떠올랐습니다. 고속버스 터미널 주변은 늘 분주하고 술렁이고 더럽고 조금 의심스럽고 공중전화 부스 옆에 구두닦이 가게와 신문 가판대가 있고, 그 위에는 머리가 부스스하고 만만치 않게 보이는 독한 표정을 한 아주머니들이 파는 여러 종류의 복권들도 주욱 늘어서 있지요. 그런저런 사람들이 어딘지 꿈꾸는 기운을 느끼게 하며 술렁술렁 왔다갔다하는 거리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언니는 버스 출발시간이 조금 남아 약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문득 나를 생각해냈을 겁니다. 그래서 태평양 건너로 국제전화를 겁니다. 언니는 아마 오른손으로 수화기를 잡고 왼손으로는 조간신문을 들고 있을 것 같습니다.
아아, 이제야 언니의 모습이 뚜렷이 잡혀 옵니다. 오른쪽 어깨에는 아마 숄더백을 멨겠지요. 그리고 언니의 여름옷 주머니 속엔 이제 곧 출발할 버스 차표가 들어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무슨 보자기론가 한번 엉성하게 쌌을 전기밥통은 언니의 발밑, 공중전화 부스 바닥에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즈음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선 오줌냄새가 나는지요? 이상하군요. 가족들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나에게 늘 서울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나던 오줌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러오는 것은.
러시아 영화배우를 닮았다던 언니의 반듯하고 고운 이마엔 엄마의 손금보다도 더 굵은 주름살이 박혀 있지만 그래도 아직도 단발머리를 하고 대륙의 우수가 가득 찬 큰 눈을 가진 언니의 수심 가득한 모습은 아름답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대학 때는 씨몬느 베이유를 좋아했고, 아, 언니는 씨몬느 베이유 같은 데가 있었어요. 불행의 참된 모습을 사랑했던 씨몬느 베이유는 어릴 때 조국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하는데, 전선에 설탕이 부족하다는 군의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일선병사에게 보낸다며 설탕을 먹지 않고 모으기도 했고, 쏘르본느 대학을 다닐 때는 중국에 대기근이 휩쓸고 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교수직을 버리고 공장 직공 생활을 할 때도 빵 이외에는 거의 먹지 않고 급료의 절반을 실업자나 감옥의 정치범들에게 보내주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그녀 자신은 병약하여 평생 격렬한 두통에 시달렸고 늑막염에 결핵으로 34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감수하려고 했으며 처참한 인간의 편에 서서 살고자 했었지요. 70년대 말 한국에서도 씨몬느 베이유의 책들이 번역되었고 반유신운동과 노동운동 들이 맞물리면서 베이유의 사상이 급속도로 퍼져갔었지요. 씨몬느 베이유를 '빨간 처녀' '신비주의자' 혹은 '그리스도의 열애자' '성스러운 혁명가' 등으로 불렀는데, 나는 미강 언니가 베이유처럼 '빨간' 운동가였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그런 빨강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잠재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뿐입니다. 버클리 지역에서 생활하면서부터는 더욱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요. 씨몬느 베이유는 죽어서라도 프랑스 지성계에 순수하고 확실한 사랑의 실천가로 남았지만 언니의 고행 뒤에는 무엇이 남았나요.
학생 때 사심 없는 순수한 열정으로 반유신운동에서 시작하여 80년대 초에는 여성운동에서, 6.29선언 이후에는 양김 분열 반대와 단일화 그룹에서 일했고, 다음엔 동지들과 민초당을 만들어 조직을 위해 밤낮으로 일했고 또 민초당의 후보로 지방의회 의원선거에 청파구에 입후보하여 비록 낙선은 했지만 처음 생긴 당 후보로는 상당히 많은 표를 얻었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언니는 뭐예요. 직업도 없이 아픈 몸으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국어 과외나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을 따름이잖아요. 나이 사십이 넘었으면서도 사회 안에서 무엇 하나 버젓하게 내놓을 것이 없는, 아 어쩌면 그렇게 쓸쓸한 빈손이 되어…… 조직을 좋아하지 않는 분방한 기질이 있었지만, 대의를 위해선 개인주의 성향을 버려야 한다며 자기를 버리고 참으로 열심히 했었는데…… 민초당을 대중 속에 심는다며 바자회, 문화사업, 양로원 봉사, 윤락여성 재교육 등 얼마나 열심히 일했어요. 돈도 많이 썼고요. 그러다 3당 합당이 됐고, 대선 이후 청파구 야당 국회의원 후보이던, 언니의 동지 K씨가 야당을 버리고 집권당으로 흡수되어 들어가 버리자 당도 없어졌지요. 아니죠, 민초당은 어제까지 적이던 여당과 한 몸이 되어버렸죠. 도덕적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니는 혼자 버림을 받고 남겨졌지 않아요? 몰라요, 언니는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변절이라고 생각해요. 줄줄이 집권당 안으로 흡수되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언니는 그믐달 같은 마음만 가진 채 뒤에 남겨졌지요. 뒤에 남겨진 사람, 90년대라는 이상한 고속트럭이 깔아뭉개고 지나간 시신처럼 언니는 버려졌다고 봐요. 이제 언니는 대학 졸업장 한 장만 간신히 가진, 청춘도 무엇도 없이, 명함 한 장 박을 사회적 이름도 없이, 정말 남들 다 굴리는 자가용 한 대도 없이, 아니 자동차라니, 남편도 없고 그 넘쳐나는 자식 하나도 없이, 언니는 우리 시대가 버린 구시대의 성녀, 아니 자본주의의 맨 아래 계단에서 밥이나 겨우 먹는, 버려진 존재라고나 할까요.
서울 바닥에 그 흔해 빠진 자가용 한 대가 없어 전기밥솥을 오줌 냄새 풍기는 공중전화 부스 밑바닥에 놓고 그것도 소식이라고 하나 남은 먼 곳의 동기에게 국제전화를 걸고 있는 신새벽 언니의 모습은, 악마적일 정도로 화려하고 백치 같은 이 소비자본주의 시대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미강 언니의 분노가 백중 해일이 되었다고 해도 난 믿을 수 있었을 거예요. 아니 나의 한이, 엄마의 한이, 올케언니의 한이 백중 해일이 되었다고 해야 할지요. 달의 인력 때문에 밀물 높이가 최고였다는 어젯밤을……
핏방울이 묻은 장갑을 조심스레 버리며 나는 손을 씻는다. 수돗물을 최고로 튼다. 요즈음은 에이즈 때문에 하다못해 귀고리 구멍 하나를 뚫어도 꼭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손을 문질러 씻는 동안 흘러내리는 수돗물 소리에 맞춰 내 몸속으로 해일의 급류가 달려오는 것만 같다.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에 맞춰 나는 운다. 흑흑 운다. 엉엉 운다. 이 울음을, 이 울먹이는 몸을, 달의 인력 때문에 최고로 솟구치고 파도치는 해일을 따라 굽이치는 이 몸을, 오장육부 창자를 타고 넘실거리며 올라오는 이 백중물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나는 울음을 멈추고 세면대에 얼굴을 파묻고 얼굴을 씻는 척한다. 거울을 본다. 나의 눈 양옆에는 세 방울씩 눈물이 박혀 있다. 그것은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문신 눈물이다. 코울러 티어즈라는 것이다. 담즙의 눈물이라는 문신 이름이다. “너는 왜 코울러 티어즈를 했니? 너는 죄수가 아니잖아.” 나의 남편이었던, 화가이자 문신 예술가인 에드가가 물었다.
“나는 아주 슬픈 사람이야.”
“그래도 네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코울러 티어즈는 할 필요가 없지.”
나는 말했다.
“이건 내가 나에게 준 형이상학적 감옥이야. 나는 이 삶의 교도관이고, 이 육체의 교도관이고, 무어든지 무엇의 교도관이야.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해. 그것뿐이야.”
나는 스스로 바늘을 들고 세 방울의 눈물을 눈 양쪽에 심었다. 내가 미국으로 도망쳐오면서 가족들의 가슴에 심은 피눈물을,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과 올케언니의 발병을, 비싸게 낸 자유의 수업료를 잊지 않고자 그것을 얼굴에 새겼다. 그러나 에드가, 너도 결국 나에게 눈물을 보태주었을 뿐 아니야? 나는 거울을 향해 혼잣말을 한다. 유학이라고 와서 두 학기가 지나니까 돈이 한푼도 없어 학교를 중단해야 했을 때, 영주권이 없어서 학자금 융자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에드가였다. 그런 사정이었으니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엔 문신을 해서 하루 백불씩을 번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에이즈가 퍼지기 시작하자 일거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에드가는 사랑 중독자였다. 사랑중독은 끝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야 하는 정신적 질환이다. 그렇게 계속 함께 살 순 없었지…… 나는 물이 듬뿍 묻은 얼굴을 거울 앞에서 휴지로 닦으며 양쪽 눈가의 문신 눈물들을 꼭꼭 눌러본다. 변치 않는 약속을 배반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서서히 복도를 걸어 병원처럼 환한 스튜디오로 들어간다.
스튜디오 안에는 빅댄의 애인 쥰꼬가 왔는지 일본식 발음의 영어와 활발한 생명의 기운이 넘쳐난다. 빅댄과 쥰꼬, 나이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초월적 젊음의 소유자들이다. 척추를 중심으로 등 한복판에 검은 빛살처럼 확 퍼져 있는 쥰꼬의 뱀비늘 문신이 그녀를 악마적인 창의성과 힘으로 채우고 있는 것일까. 혹은 빅댄의 고대 마야의 태양신이? 그는 검은 머리를 의자 뒤로 넘실거리게 풀고 있는 여자의 발밑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들여다보고 있다. 쥰꼬가 왔군. 무릎에 국화꽃 문신을 한 쥰꼬. 오십 대인데도 늙어 보이지 않고 세월의 우아한 품위와 나이가 주는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그녀에게 빅댄은 거의 종교적일 정도의 존경을 바치고 있다. 어딘지 쓰디쓰고 씁쓸한 향기를 풍기는 국화꽃 문신. 그것을 그녀는 일본의 혼이라고 하고, “신이 없는 존재의 쓸쓸한 살결을 담은 가을 국화, 미치지 않았는데도 너무 예쁘다”라는 단가(短歌)까지 지어 찬양하고 있다. 그 단가 속엔 모든 존재는 미쳐야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쥰꼬의 생철학이 은근히 담겨 있다. 그녀의 예술적 광기는 백인 애호가들로부터 무척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렇게 오만한 재기를 뽐낼 수가 있다.
빅댄은 들어서는 나를 보며 오늘은 가도 좋아, 살짝 손을 든다.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 검은 별 하나가 떠서 나를 보고 인사한다.
어제 오후엔 평일인데도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여섯 명이나 몰려와 그룹 문신을 했다. 그 여학생들이 빅댄에게 스티커 문신을 나누어주었다. 우주인들이 달고 다니는 듯한 검은 별이었다. 그의 문신이 이번 달에 발행된 권위 있는 문신 전문지에 크게 다루어지자 명성과 첨단에 민감한 이 지역 사람들이 그의 스튜디오로 줄지어 오고 있다. 빅댄은 이제 문신 예술가를 한 사람 더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역신문에 광고를 냈으니 아마도 젊은 예술가들이 심심찮게 몰려오리라. 쥰꼬와 더불어 쌘프란씨스코 마켓 스트리트와 이곳 대학 앞에서 문신 스튜디오를 하고 있는 빅댄도 지난 몇년 동안은 간염이나 에이즈에 관한 나쁜 소문 때문에 영 수입이 없었으나, 완전히 일회용 전자기구를 쓰고 포스트모던 문화가 힘을 얻는 요즈음 다시 자기 자리를 일으키고 있다. 문신의 안전성과 '문신은 인간이 어린시절 에고를 정립할 때 거울이 잘못 만들어준 자기 육체의 기하학을 해체하고 자기 존재를 새롭게 구축해준다는 포스트모던 사고가 유행하자 그는 요즈음 다시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바야흐로 빅댄과 쥰꼬는 이곳 대학을 중심으로 지하 문화의 중심인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요즘 들어서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도 그룹 문신을 많이 한다. 글쎄, 흙에서 태어난 이 몸이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는 한패가 되어야겠다는 어떤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룹 문신을 하게 하는 것인가. 범죄자나 선원들만이 그룹 문신을 했다는 편견은 이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쥰꼬가 하는 말이 들려온다. 피어씽에 대해 이야기를 하나 보다. 요사이는 피어씽을 안한 사람들을 이 지역에선 만나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쪽 귀를 뚫고 코를 뚫고 미간을 살짝 뚫어 은고리를 짤랑거리는 소녀, 처녀, 청년들을 보면 어딘가 숭고한 자아의 철학이 있는 것 같고 무언가 신비한 힘과 서로 연락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쥰꼬의 말에 따르면 서양인은 자기 내면의 나쁜 것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몸에 구멍을 뚫고 동양인은 자기 몸속으로 좋은 광선이 들어오게 하고 싶어 구멍을 뚫는다고 한다. 쥰꼬가 말하면 빅댄은 그냥 그것을 믿고 또 신문 인터뷰 같은 때 그 말을 그대로 한다. 참 좋은 동반자다.
그들은 동반자의 표시로 왼쪽 복사뼈 위에 똑같은 까만 새 날개 문신을 나눠 갖고 있다. 그들은 오늘 밤 빅댄의 문신을 한, 그래미상을 받기까지 한 드럼 주자가 나오는, 대학 극장에서 하는 재즈 페스티벌에 간다고 한다. 둘이서 활기에 차서 떠드는 스튜디오엔 나 같은, 아직 자기의 독특한 상표(?), 즉 작품 디자인을 개발하지 못하고 손님의 주문에 응해서 아무 무늬나 새기는 조수를 강하게 비하하는 소외의 분위기가 있다. 말하자면 떠돌이 또는 삼류라고 직접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유명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하는 쥰꼬의 국화꽃 문신이나 사람을 매혹시키는 빅댄의 태양무늬 방사선 같은 자기 나름의 정신문화에서 나온 독특한 혼의 기호, 아니 상품을 발견, 아니 발명하지 않은 사람은 예술가라기보다는 기술자로 낮추보려는 오만한 냉기가 그들의 태도엔 소름 끼칠 정도로 배어 있는 것이다.
나도 나의 것을, 나의 예술혼이 담긴 디자인을, 내 이름을 유명하게 할 예술상표를 가지고 말 거라는 각오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생활 10년 만에 그런 방만한 치기는 많이 사라졌다. 다원주의 문화이니만치 '너는 뭐냐?' '너는 무엇을 가졌느냐?'라는 것을 미국문화 자체가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온 친구들은 스핑크스, 일본인은 학이나 국화꽃이나 사무라이, 중국인은 달마상이나 신비하고 회화적인 무수한 상형의 한자, 인도인은 코끼리나 힌두교의 여신들, 중남미인은 마야의 신비한 문양의 문신을 자랑한다. 그렇게 자기 민족 배경의 뿌리에서 나온 자기의 것으로 세계시장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나혜석이나 최욱경, 씬디 셔먼이나 조지아 오키페 같은 기막힌 여성 화가가 되겠다고 부모님 몰래 유학, 아니 도망쳐온 내가 고작 문신 스튜디오의 기술자로 살다가 죽는다면, 더구나 남의 주문에나 응하면서 자기 디자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건 너무 허망하고 말이 안 되지 않아? 그렇잖아? 하는 처절한 울먹임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아, 비천(飛天)을, 아름다운 비천 문신을 공개한다면 아마도 모두들 다투어 갖고자 할 것이다…… 아, 그러나……
그리고 사실 한국에서야 문신이라면 범죄자 집단이나 희대의 재색녀였던 어우동이나 연상할 테니 어찌 나를 예술가로 보겠는가? 미강 언니도 내가 아무리 꿈을 버리고 타락했다고 해도 지금 문신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것은 아마 모르고 있을 터인데…… 그러나……
언니, 거리로 나왔어요. 이 거리는 아마도 전 세계의 왼손잡이들이 다 모여든 곳일 거예요. 왼손잡이들이라면 누구일까요. 아마도 나처럼 죄를 짓고 자기 나라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이곳 미국에서 소수로 분류되는 흑인, 아시안, 아메리칸 인디언, 펑크족, 게이, 레즈비언, 뉴에이지 운동에 깊게 빠진 국적을 초월한 사람, 노숙자 등등이 아닐까요. 이 동네에서 별의별 보석이나 은제 장신구나 토착 인디언들의 소품이나 히피가 좋아하던 무늬옷이나 아프리카 인형이나 향 따위를 노점에서 파는 사람들도 거의 인종적으로 소수계들이니까요. 또 이 거리엔 세상의 모든 무지개들이 다 모여들어요. 무지개들이란 동성연애자들의 상징이에요. 자기들 차에나 가게, 노점에도 척 하니 무지개 표시를 걸어놓을 정도로 개방적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자기가 무지개족이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하나의 취향 같은 것일 뿐이에요.
그러나 길바닥에 앉아 '페니를 달라'고 외치는 가죽재킷에 가죽바지를 입은, 머리칼을 온통 푸른빛이나 빨간빛으로 물들인 예쁜 펑크들은 다 백인들이고요. 워낙 각양각색의 인종과 옷차림과 별종들이 다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고정관념이라든지 편견이라는 건 해체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기에 나처럼 아시안, 여자, 이혼녀라는 세 개의 주홍 글자를 가슴에 단 사람도 주홍 글자의 주홍색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아요.
조금 운이 좋거나 혹은 조금 운이 나쁘더라도 어떤가, 운이 좋은 사람은 운이 좋은 대로, 운이 나쁜 사람은 운이 나쁜 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라는 허무주의적이고 평화스러운 생각이 이 거리엔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왼손잡이는 왼손잡이대로 무지개는 무지개대로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잡이대로 무색자는 또 무색자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아무리 외롭다가도 이 거리로 나오기만 하면, 이 사람들 속에 섞이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언제나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이 세상엔 나처럼 방향도 없고 뿌리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어요.
대학생 하나가 안나 앞에 얼굴을 바싹 내밀고 앉아 있다. 안나는 지금 막 카드를 뒤섞는 중이다. 카드 점을 쳐주고 생계를 이어가는 안나는 3년 전 소련, 아니 러시아에서 이민 온 사십 대 후반의 집시 여인이다. 그녀의 카드 점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다. 안나는 러시아에서 가져왔다는 커다란 수직 식탁보를 깔아놓고 카드를 뒤섞고 있다. 한 5분쯤 기다려야 안나의 점괘는 나오리라.
“너의 별은 큰곰자리, 그 별의 지배를 받고 있군. 어디로 도망쳐도 너는 큰곰자리에 묶여 있어. 큰곰에서부터 뻗어 나온 여섯 개의 별이 국자 모양을 이루는데…… 이상해, 북두가 안 보여. 아, 혹시 너의 집안의 형제나 자매 중에, 혹시 위대한 사람이 탄생했니? 그리고 혹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니?”
나에게 그런 점괘를 봐준 적이 있다. 위인은 무슨…… 하다가도 안나의 카드 점괘가 마냥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안나에게 한마디를 해주었다. '그러니? 그래…… 그래서, 아니 그래도, 난 그 곰자리로부터 도망쳐온 사람인걸.'
언니, 언니는 지금 서해안 바닷가 엄마의 집으로 가고 있겠지요. 엄마의 집은 해일의 성난 물결 속에 파묻혀 전화가 연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화기와 전기밥솥에도 소금물이 들어갔고, 이불, 가족사진 틀, 밥그릇, 책상, 오빠의 책, 내가 남기고 온 그림들 속으로도 깊은 심연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심해의 바닷물이 들어가 모두 못 쓰게 되어버렸겠지요. 언니, 나는 그 소식이 이상하게도 비보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내가 생각해온 것이 실현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을 뿐…… 왜 하늘이 무너지는 막막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일까요. 오랫동안 나는 운명을 소독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었지요. 특히 똑똑하게 태어났으면서도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고 죽은 오빠를 생각하면…… 그리고 언니, 미안한 이야기지만 좋은 교육 받고 노동자를 위한 일이나 여러 가지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정치 일선에도 뛰어들어보았지만 지금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여 고독하게 살고 있을 뿐인 언니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지요,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장 먼저……
언니는 서해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조는 듯 조는 듯 조금씩 몸이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언니는 피곤할 거예요. 나는 언니의 피곤을 압니다. 언니의 피곤은 가족사의 피곤이기도 하지만 재야운동의 피곤이고 여성운동의 피곤이고 야합으로 문을 연 90년대 한국 정치의 피곤입니다. 언니도 그 피곤에 짓눌려 눈을 무겁게 감고 유리창에 피곤한 왼쪽 뺨을 잠깐 대어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언니는 전기밥솥을 들고 백중 해일이 쳐들어온 엄마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을 것입니다. 언니는 지금도 대학 시절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지요. 대학 시절 언니가 이야기하던 착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아버지가 중학교 선생님이었는데도 우리 집 자식들은 이상하게 제도권 교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조리 실패한 인물들이 되었지요. 아버지로부터 바른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바른 교육을 받았다고 모두 다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것일 테니까요. 잘못된 세상을 쉽게 받아들이는 게 좋은 사람인가, 잘못된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바른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게 바른 사람인가 하는 것을 물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씨몬느 베이유가 최후로 남긴 문장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안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다”였다지 않아요. 정말 안다는 것의 의미를 잘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요?
시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하룻밤 자고 나면 대통령 긴급조치가 새로 나오던 계절, 오빠는 고시 공부한다고 고시원에 들어가 있었으니 물론 그날도 보이지 않았고 저녁 밥상에는 아버지와 언니만 있었습니다. 나도 배가 고팠는데 엄마가 조금 있다 먹으라고 하여 아마 마루에서 방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같아요. 언니는 그날따라 아주 진지하게 아버지께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언니가 즐겨 했던 말이 씨앗사상 이야기와 사마리아 이야기였거든요. 언니가 그 당시 영향을 받은 스승들은 씨앗 선생님과 사마리아 교수님이었어요.
그때는 대륙에서부터 황사가 날아들던 계절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가끔씩 황사와 최루탄 연기를 구별 못했어요. 최루탄이 거리에 자욱하면 왜 봄도 아닌데 황사 바람이 부나……라고 혼동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아버지는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며 식사를 하시고 언니는 수저를 들지 않고 조용히 두 팔로 방바닥을 짚은 자세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배가 무척 고팠던 나는 언제 밥을 먹을 수 있나 엿보면서 그 이야기를 참 자세히 들었습니다.
“아버지,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언니가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어요.
“아버지는 교육자고 교인이시니까 누가복음 10장을 아실 거예요.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갔지만 이방의 착한 사마리아 여인이 데려다가 살려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모든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만큼 남을 위해 일하지도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만큼 불의에 항거하고 남을 돕고 잘못된 침묵을 부수어나간다 해도 우리 사회가 바로 서기 어려울 텐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한참 각성이 모자라요. 그리고 문제는 또 있습니다. 가령 사마리아 여인처럼 강도를 당해 죽어가는 이웃을 구원해준 것으로 우리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우리 젊은 학우들은 여기에서 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웃을 구해주기만 하면 되느냐, 강도가 우글거리는 사회를 그대로 두고 한 사람을 여관에 데려다 물을 먹여주었다고 해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죠.”
나는 그날 확실히 아버지는 좋은 교육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아버지들 같으면 누가 그런 시덥잖은 운동권 자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묵묵히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참 좋은 아버지에 교육자이셨지만, 여자들의 꿈과 욕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한국의 평균적인 아버지라고 해야겠지요. 아버지는 계속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아마 머릿속으로는 오빠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들이 드디어 고시에 합격했을 때 이런 딸이 혹시 아들의 공적 장래를 망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느끼셨을 거예요. 아버지의 박봉에서 일순위로 오빠의 고시원 비용을 지출할 정도로 우리 집의 모든 운을 오빠의 고시 합격에 걸고 있었으니까요. 언니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계속했지요.
“아니지요. 아버지. 그 경우 강도가 없는 사회를 만들지 않고선 근본적으로 피해자를 구원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이제 개인 구원으로는 되지 않아요. 사회구원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거예요. 모두 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지요. 착한 사마리아 여인의 참여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교육자시니까 아버지……”
언니는 착한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갈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좀 더 생각해보고 이야기하자”고 하셨기 때문에 언니는 결국 승낙을 받지 못하고 집을 나가게 되었지요. 그 뒤로는 당국의 눈을 피해 인형 공장에 취직을 했다, 인천 유리 공장에 취직을 했다, 안양에 있는 기계 정밀 공장에 취직을 하여 도시빈민 노동자 실태를 조사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조마조마하셨을 거예요. 딸이 반정부운동을 하고 다니니, 교육자인데다 이제 곧 사법고시에 합격할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셨겠어요. 아마 아버지는 그때부터 뇌졸중의 싹을 키우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언니는 유신 말기에 학내 신문에 쓴 글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사색이 되어 조회 때 학생들에게 할 말을 모르겠다고 하시며 술이 늘었고, 자식의 가정교육에 실패하여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고 가슴을 치셨어요. 그래도 구치소로 찾아간 대학신문 지도교수에게 언니가 했다는 말을 듣고는 집과 나라를 어지럽혔지만 패륜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시긴 했던가 봐요. 문제가 된 언니의 글을 읽기도 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오빠의 앞날에 누가 될까 두려워하셨지요. 아버지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 세력에 양심적으로 동조할 수 있으면서도 가족의 장래가 파탄 나는 것을 두려워한 전형적인 소시민의 모순을 가졌던 분일 겁니다. 언니의 글이었어요.
“언론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언론은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만일 언론이 사실을 외면한 채 독자대중을 저버리는 편집 태도를 계속한다면 3천만 민중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언론은 공정해야 하며 어느 특정인을 위해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언론은 언론인이 내는 신문인가, 상인이 내는 신문인가? 정치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라. 특히 자주적인 편집을 방해하는 기관원을 신문사에서 축출하라……”
아버지는 친일파라는 단어만 들어도 일제때 사범학교를 나온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이었으니, 아들은 고시원에, 딸은 구치소에 두고 마음이 오죽하셨겠어요. 언니가 지도교수와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지요.
“학생들은 학원 안에서 이야기하고 학교 밖에서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면, 학교 안에서만큼은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학내에서까지 통제하니 결국 지하로 들어가 미등록 프린트물을 내거나,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지 않아요? 이처럼 비교육적인 처사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는 언니가 말한 “비교육적 처사”라는 말이 옳다고도 하였습니다. 언니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는 순간 아버지는 어린 학생들에게 그렇게 비교육적으로 대하는 부정으로 가득 찬 권력의 횡포를 느꼈고, 반대로 그런 부정한 권력 체계 안에서 법관이 되어야 할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리는 뒤죽박죽의 공포를 붙들고 살아갔을 겁니다. 그 나이에도 평교사 이상으로 승진되어본 적이 없는 것을 보아도 무언가 아버지의 불안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다 오빠가 70년대의 마지막 해에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히 뒤바꾸어놓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제 어떻게 해서든지 이 권력, 이 정부, 이 사회가 옳다고 말해야 하는 그런 쪽으로 기울었을 거예요. 서울역 집회가 지나가고 5월 학살이 지나가고 공포의 침묵이 왔습니다. 무궁화가 피었다 지고 진달래와 철쭉도 피었다 졌습니다. 어머니는 언니가 오빠의 앞길을 막을까 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고, 교회 생활에 광적으로 빠져들면서 그저 오빠가 무사히 공직자 생활을 하도록 빌고 또 빌었지요. 하나 있는 아들에다 칠전팔기 고생고생을 해왔기 때문에 정말로 오빠는 더 소중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아, 저기 버클리의 명물 '헤이트맨'이 지나가는군요. 그는 미국의 모든 것,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증오한다고 하여 이름이 헤이트맨이 된 사람입니다. 지역 텔레비전에도 나온 적이 있어요. 그는 가끔 분노에 뼈가 사무친다는 듯 고함을 질러대곤 해요.
“나는 증오해, 모든 것을. 미국을, 텔레비전을, 특히 넥타이를 매고 신사복을 입고 스프레이 향수를 뿌리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소 하고 말하는 상판때기들을, 조지 부시와 클린턴 같은 작자들을, 나는 증오해. 증오가 내 할 일인 것을 알아.”
몰라요. 헤이트맨은 나이가, 글쎄, 그의 나이를 어떻게 알겠어요. 수염이 부스스하고 머리카락은 언제부터 길렀는지 어깨 정도까지 닿는데, 그것을 길에서 주은 고무줄 같은 것으로 매고 다녀요. 백인으로 잘생긴 편인 얼굴에는 때와 눈곱과 뭔가 말라붙은 것들이 잔뜩 들러붙어 있어서 그의 나이를 아는 건 그의 고향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러나 그는 이 거리를 주거지로 하는 펑크들, 뜨내기 음악가들,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다운 존재랍니다. 아마 60년대 히피의 잔존물인지, 아니면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살아있는 거리의 철학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게다가 그가 유일한 사유재산인 슬리핑백을 어깨에 걸치고 험악한 얼굴로 지나가면 일년 전의 것인지 이 년 전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오줌냄새가 주변에 진동해요. 향수 냄새를 풍기는 미국의 제도권 남자들에 대한 저항의 무기로 그가 특별히 고안해낸 자신만의 향수인지도 모르지요. 그의 오줌 냄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이 사기꾼들의 시대야, 향수를 뿌리고 무스와 로션을 처발라봐야 너의 피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너는 남의 피 위에 서 있다. 봐라, 네 주위에 질펀하게 고여 있는 그 피의 웅덩이를. 그위를 너는 고급 렉서스 자동차를 몰고 간다. 그래도 핏자국은 너를 따라간다. 봐라, 핏자국이 동부에서부터 서부까지 붓으로 그은 듯이 퍼져 있다, 북부에서부터 남부까지 번져 흘러내리고 있다. 마차의 핏자국, 모카씬의 핏자국, 자동차 타이어의 핏자국. 미국은 이 피를 딛고 일어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또 힘을 바탕으로 세계지도를 금화 피로 물들이려고 한다. 인도, 과떼말라, 파키스탄, 뻬루의 어린 소녀들이 하루 20시간의 노동을 하며 피와 눈물을 섞어서 짠 러그 귀퉁이에 '우리는 어린이에게 노동을 시키지 않습니다'라고 써놓으면 핏자국이 지워질 줄 아는가? 간다, 간다, 제국주의는 간다. 온다, 온다, 피묻은 자본주의가 온다. 나는 증오한다, 증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자기 한 사람이 저항한다고 하여 미국의 운명이 바뀌고 세계평화가 이루어지고 노동착취와 억압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을 텐데도 그는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당국에 대한 저항으로 오줌 냄새를 풍깁니다. 그가 험악한 얼굴을 찡그리며 거리를 내려가 민중 공원으로 들어갑니다. 민중 공원은 그야말로 집이 없는 노숙자 거지들이 모여서 잠도 자고 운동도 하고 놀기도 하는 쉼터입니다. 이곳은 대학 땅이지만 대학 당국도 함부로 이곳에서 그들을 추방하지 못합니다. 리버럴리스트들이 가만히 있나요. 헤이트맨도 가만있지 않을 거구요. 그래서 이곳은 아무도 철거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꽃도 가꾸고 농구도 하고 낮에도 슬리핑백 속에 드러누워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옆 빌딩 벽에다 벽화를 그리기도 하는 거지들의 모습이 아주 평화롭고 태평스러워 보입니다. 가난도 일단 지나치다 보면 무심이랄까 하는 천연덕스러운 경지에 닿게 되는 모양입니다.
참, 그렇군요. 소독할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가족들을 버리고 몰래 유학이랍시고 와서는 겨우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느냐고 지금 누가 묻는다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이제 나도 삼십대 중반을 넘어섰잖아요. 때때로 삼십 대는 자신의 이십 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끔찍해하고 증오할 때가 있어요. 그렇죠…… 아니, 참, 어쨌거나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의 냉소와 패배주의는 자랐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고등학교 때 별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지방에 있는 삼류대학 미술과에 들어갔지요.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도 들어갔더라면 데모라도 실컷 해봤을 것을, 하고 나는 서울서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지방대학 중에서도 그저 며칠 전에 생긴 삼류대학, 누가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싫었던, 그저 논밭 가운데 건물 두어 개 지어놓은, 한번 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대학이었어요. 공부는 오빠와 언니가 잘했으니 나는 일류대 입학에 대한 집안의 압력도 느끼지 않았고 어떻게 하다보니 삼류 지방대학 외에는 갈 곳도 없더라구요. 서울 학생들은 아, 참, 데모도 많이 하던 그 봄에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나 왔다 갔다 했을 뿐 뭐 배운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드디어 법복을 입은 오빠 때문에 부모님들은 조금 들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에겐 조금 무관심했다고 할까, 아니 관대했다고나 할까, 그저 학교 나오면 시집은 가겠지, 아니면 어디 시골 학교에 미술 교사라도 되면 좋겠지 정도로 생각하셨을 거예요. 대학이라고 시골의 논밭을 파고 지어놓은 데를 다니면서 만약 데모를 한다면 우스울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정치, 사회 문제에는 아주 맹탕인 머리들만 모여서인지, 나는 데모 대열에 한 번 서 보지도 못하는 것이 어쩐지 서글펐습니다.
무궁화가 피었다 지고 진달래가 피었다 지고 낙엽이 내리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공포와 침묵으로 해는 흘러갔지요. 오빠는 그 무섭던 시절에, 그 피와 공포의 아수라 같던 시절에 어떤 판결을 했는지…… 법에 따라서 어떤 정의 사회 구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법을 다루는 일이니까 고시 공부를 8년간이나 한 오빠가 자기 직업에서 무능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법관은 물론 모든 기성 권력의 하수인들에게 불신과 증오가 퍼져 있어서 오빠도 자기의 위치에 마냥 도취되어 편하기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학교에 가니까 무슨 행사가 있어서 수업이 없대요. 그래서 할 일도 없고 해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 그냥 오빠 집으로 갔어요. 전화 걸어볼 생각도 별반 하지 않았어요. 올케언니야 집에 있는 사람이고, 혹시 없더라도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는 터여서 그냥 아파트로 올라갔지요. 그 집 동생인 줄 아니까 수위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어서 외출했나 싶어 손잡이를 돌려보니까 그냥 문이 열리데요. 그래서 문을 열고 조카 이름을 부르면서 안방으로 들어갔지요. 그냥 들어갔어요. 그런데 법원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오빠가 어마어마하게 화가 났는지 마구 물건을 집어 던지면서 폭언을 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도망치지 못하게 침대 다리에 묶여 있고 입가로 피는 흐르고 옷은 찢어져 목둘레가 젖가슴 아래로까지 쭉 파여 있더라구요. 나는 너무 놀라 어, 하고 돌아서서 나오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나는 볼 것을 다 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채찍인지, 혁대인지를 휘두르다가 높이 올린 오른팔 아래로 눈이 마주친 오빠는 너무 화가 나서인지 나를 얼른 알아보지도 못하더라구요.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 바른대로 말하라고, 거짓은 금방 탄로 난다고 하면서 금방 어떤 남자랑 집에 있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거였어요. 올케언니는 아니라고, 나는 그동안 집에서 이불을 꿰매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옆에 흩어져 있는 이불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거였어요. 그 절망의 폐색적 분위기로 보아 나는 이 잔혹극이 오래 되풀이되어온 일이어서 올케언니 쪽에서 자기 결백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저항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없이, 대답 안 하면 더 맞을까 봐 정신이 나가 버린 모습으로 한두 마디 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더 화가 난 오빠는 깨끗한 이불을 왜 빨았느냐, 더 수상하지 않느냐며 목이 메어 말도 크게 못하면서 주먹으로 벽을 막 치는 거예요. 올케가 이불깃을 빨았던 게 아니고 꿰맸다고 하니까, 그 이불이 어때서 빨았느냐, 혹시 그놈과 무슨 일이 있어서 빨려고 했던 게 아니냐고 하더니 나를 흘낏 보고 나가려고 해요.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지요. 나는 그때 와이셔츠 소매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손으로 가리켰어요. 그러자 오빠는 더 화가 나서 장롱문을 열더니 에잇, 하고 그 속의 것들을 손으로 휘저어 와이셔츠 하나를 홱 낚아채더니 밖으로 나갔어요. 장롱 속에는 세상에 처음 내린 흰눈보다도 더 하얀 와이셔츠들이 흠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림질되어서 백화점 진열장보다도 더 아름답게 늘어서 있더라구요. 그것을 오빠는 그냥 잔혹하게 휘저어서 다 망가뜨려 버렸지요. 나는 지금도 그것이 가슴 아픕니다. 누군가 다림질까지 해서 눈부시게 손질해놓은 그 흰옷의 질서를 깨뜨려버린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 같았어요. 정성을 다해 차려놓은 밥상을 엎어버리는 그런 나쁜 마음도 정말 용서받을 수 없지요.
오빠가 뛰쳐나가고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우리 집에선 올케언니와 오빠의 문제를 한 번도 걱정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들은 대학 4학년 때부터 사귀어왔고, 8년 동안이나 고시 공부 하는 오빠를 올케언니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도와주며 오빠가 시험에 합격하기만을 기다리다가 이제 뜻을 이루어 잘살고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아, 참 어린 조카가 있었지요. 민주라고요. 그때 민주는 옆방에서 자고 있었나 봐요. 모르겠어요……
그들은 연애 감정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뜻이 맞았고 그래서 74년인가요, 정권이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동아일보에 광고가 끊겼을 때 자기들 둘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격려광고를 내기도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어요.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합니다. 우리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민주로 딸을 낳으면 민화로 이름 짓겠습니다 '' 어느 법대 졸업생과 그 약혼녀”라고, 글쎄 둘이서 광화문까지 걸어가 광고비를 내고 문안까지 작성했었대요. 그렇게 사이좋은 두 사람 사이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방바닥에 떨어진 내 눈물로 그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어요. 올케언니는 '아버님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말아달라,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간곡히 말했어요. 하긴 자기 남편이 다른 무엇도 아닌 판사인데 어떻게 아내를 구타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어요. 또 누가 올케언니 편에 서서 아파해주겠어요. 판사 남편이 얼마나 잘 판단해서 그러겠느냐며, 자기에게 의심이 몰릴까 봐 언니는 두려웠는지도 모르지요. 나는 막내여서 그들 부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막상 끼어들기도 어려웠어요.
남들은 그녀더러 판사 부인이 됐으니 이제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부러워했고,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올케언니의 홀어머니는 사위가 예뻐서 항상 웃으며 우리 집 문지방을 건너오시곤 했어요. 같은 교회 집사님이기 때문에 심방 때면 거의 함께 모이거든요. 나는 무슨 악령영화 한 편 본 기분으로 집에도 알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온몸에 멍이 들었는지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했어요. 숨도 못 쉬고 사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점점 남자가 되어갔어요. 옷도 일부러 함부로 입고 머리도 거의 다 잘라서 볼품없게 만드는 등, 못난 머슴 같은 차림에 간신히 세수나 하고 사는 눈치였어요. 새옷이나 화장품, 향수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지요. 교회 사람들은 판사 부인이 왜 저렇게 검소하냐고, 우리 어머니에게 정말 복덩어리를 얻었다고 늘 좋은 말을 했어요. 그러나 언니의 얼굴은 늘 파랬어요. 그녀는 오빠의 의심을 촉발시킬 만한 조그마한 단서도 만들지 않고자 항상 과민했기 때문에 어떤 말도 두렵게 듣기만 했어요. 나는 돌덩어리처럼 굳어져 가는 그녀에게서 말 못 할 아픔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나만은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추석 때인가 집에 와서 일을 하던 올케언니가 잘못하여 뜨거운 식혜가 담긴 들통에 발이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어요.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뜨겁고 끈적끈적한 식혜가 몽땅 쏟아진 언니의 옷을 벗겨내려다가 언니의 몸을 보고 말았어요. 거기엔 하루하루의 매질의 역사가, 절벽처럼 일어선 시퍼런 멍이, 담뱃불로 지졌는지 붉게 팬 살점이 지옥도처럼 그려져 있었어요.
어머니는 너무 놀라 “아가, 이게 무슨……” 하면서 식혜통 앞으로 엎어지셨고, 두 여인은 온몸에 끈적끈적한 엿기름을 묻히고 앉아 벌벌 떨면서 햇빛 아래 드러난 진실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지요. 오빠는 의처증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신과 의혹이 교차하여 법원에서 일을 하다가도 간통 장면 같은 것이 생생하고 아찔하게 그의 눈앞으로 다가온다고 해요. 어쩔 수 없는 병이랍니다. 하는 수 없이 올케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오빠의 의심을 살 여지가 있는 것과 오빠의 의심을 살 여지가 없는 것으로 분류하면서 살아갔어요. 중성이 되고자 했어요. 오빠의 평화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중성이 되면 그만이라고 각오한 사람이었어요. 그 흔한 머리핀 하나 못 가졌고 씰크 블라우스는커녕 색깔 고운 옷 한번 입지 못했어요. 언니의 육체는 언니의 육체가 아니었고 언니의 목숨은 언니의 목숨이 아니었어요. 나는 오빠를 증오했어요. 그것을 알면서도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교육자 아버지와 판사 아들 평판에 흠이 갈까봐 쉬쉬하는 어머니도 모두 절망적으로 보였어요. 하긴 판사 아들에게 누가 이래라 저래라 판단을 해서 나무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건 올케언니였지요. 그녀는 교사 생활까지 한 현대 여성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짐승보다 못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무기력한 늪에서 숙명이려니 하고 살 수가 있는지, 나는 그녀를 무서워했어요. 만일 무서워하지 않고 연민을 느꼈다면 내가 너무 괴로워서 살 수가 없을까 봐 나는 그녀를 그냥 무섭게만 보았나 봐요.
언니, 미강 언니,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그렇게 역설하던 언니는 그때 집안일엔 관심도 없이 그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디론가 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지요.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빛나는 서릿발이 모두의 목숨을 시래기처럼 만들어가던 시절에도 언니의 두 눈은 날뛰는 유언비어의 싱싱한 춤처럼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요, 그 시대엔 유언비어만이 날개를 활짝 펴고 싱싱하게 살아 있었지요. 언론에 대해 불신하는, 정부에 대해 불신하는, 자기 지도자의 인격에 대해 불신하는 상황에선 유언비어밖에 진실을 전해주지 못하지요. 유언비어가 생산해내는 불신, 유언비어를 억누르고자 하는 세력이 생산해내는 불신, 국영 텔레비전과 민영 텔레비전들이 손에 손잡고 생산해내는 불신, 의혹……
정말 그 시대엔 얼마나 불신과 의심이 깊었는가 하면 82년 가을인가 광주교도소에서 박관현이라는 학생이 죽은 적이 있었지요.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이던 그 잘생긴 학생 말이에요. 그의 사인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증폭되자 정부는 “단식이나 가혹행위에 의해 죽은 게 아니고 심장 계통의 병에 의해 죽었다”고 발표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오히려 단식이나 가혹행위에 의해 죽은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지요. 정말 의혹과 불신은 들불처럼 번져가서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고 그것이 곧 진실이 되었던 시기였죠. 그러자 법무장관이 국회에서 “서른세 끼니를 굶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인이 아니고, 나팔꽃 씨가 일부 식사에 섞였지만 그것도 사인이 될 수 없고, 가혹행위는 일체 없었으며 단지 그가 규칙을 위반해 징벌방에 가둔 적은 있었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그러한데 왜 여러분은 시중에 떠도는 소리를 더 믿으려 하고 장관의 말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이제야말로 진짜로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박관현은 서른세 끼니를 굶고 나팔꽃 씨가 섞인 음식과 가혹행위와 징벌 때문에 죽었다고 굳게 믿어버렸지요. 나팔꽃 씨가 섞인 음식이 사람에 해롭고 그것이 죽음을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부의 발표와 반대되는 것이 곧 진실이라는 등식이 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대니 언니가 집에 들르는 것만으로도 행여 오빠에게 해가 될까 봐 집안에 두려움이 엄습했었지요. 여전히 언니는 “광주의 영령 기만하는 기성언론 자폭하라” “군부파쇼 지원해준 미국은 반성하라” “학살 원흉 처단하고 민족자주 이룩하자” 등등이 적힌 유인물들을 가방 속에 담고 다녔어요. 그랬던 시절인지라 언니는 올케언니에 대해 착한 사마리아 여인의 역할조차도 해주지 못하고 말았지요. 그뒤 언니는 너무 큰 자책의 고통으로 '구타 당하는 여성을 위한 가정의 전화'를 만들어 많은 이들을 돕기도 했지만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며느리의 아픔에 찢어지는 가슴의 고통을 느끼다가도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그럴 만한 남모르는 이유가 있다는 봉건적 생각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아버지는 그냥 유교식으로 가부장 의식에 젖어 판사 아들이 옳고 그른 것은 잘 알아서 하려니 하면서 사태가 나아지기만을 바랐지요. 민주와 민화는 낮에도 오줌을 쌌답니다. 그냥 서 있다가 긴장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는 거예요. 미친 판사가 지배하고 있으니 사회가 좋아질 게 뭐예요. 판사만 미친 게 아니라 검사, 대통령, 장군, 장관, 사장, 회장, 기자 뭐 이런 기득권층의 사람들이 전 계급적으로 다 미친 사회가 아니었을까요.
괜히 향을 사고 싶은 기분이 되어 나는 노점상 앞에 멈춘다. 장미향, 유칼립투스향, 연꽃향, 딸기향, 사과향, 오렌지향…… 여름인데도 털로 짠 벙거지를 쓴 흑인 남자가 인도산 향을 팔고 있다. 나는 사과향을 한 다발 산다. 옆에 서 있던 티셔츠 파는 여자가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히스패닉 계의 타냐다. 그녀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34세의 여인이다. 이 동네에서 몇년이나 같이 일했는데도 며칠 전에야 지하철에서 만나 아파트까지 걸어가며 이야기를 처음 나누었다. 그녀가 늘 자기 노점 앞을 지나다니던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정폭력죄로 구속되었던 전남편이 며칠 전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는 자동전화 연락을 받고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여자다. 경찰로부터 가해자가 석방되었으니 집이나 직장으로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어디로 도망가버릴까, 어디로 도망쳐야 무사할까……” 하면서 희미하게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에게서 나는 말 못 할 혈연감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의 타냐는 밝게 웃으며 손에 든 전화기 같은 것을 흔들어 보여준다. 무어냐고 묻는 나에게 “휴대폰이야. 집 밖에서 가해자가 나에게 접근하면 전화를 걸라고 이동 전화기 회사 GTE에서 나에게 주었다”고 자랑한다. 그녀는 자신감에 차 있고 안정되어 보인다. “그 말을 들으니 기뻐”하고 말하자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안 써봤어. 그래도 안심되는 거 있지. 밖에 나올 때도 물론 가지고 오지만 집안에서 화장실 갈 때도 늘 들고 다닌다. 이 휴대폰을 받은 뒤부턴 항상 누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안전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고 서글프게 웃는다. “먼저 갈게”하고 인사하며 나는 다시 걷는다. 힘은 정직함에서 구해지는 것일까.
미강 언니,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 왼손잡이들의 거리, 무지개의 거리가 끝나고 지하철역이 나와요. 나는 거기서 지하철을 타야 돼요. 나는 쌘프란씨스코에서도 30분쯤 내려가는 콜마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어요. 그 동네는 아마도 이 아름답고 멋진 쌘프란씨스코 인근지역에서 제일 월세가 싼 곳일 거예요. 그 도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거든요. 도시의 85퍼센트가 묘지예요. 영혼들의 도시예요. 70년 동안이나 쌘프란씨스코의 공동묘지 역할을 해왔으니 명사들의 묘지도 많지요. 혹시 보안관 어프라는 사람 이야기 들어봤어요? 신문왕 허스트는요? 그 유명인사의 묘도 우리 동네에 있답니다. 이 하얗고 평화로운 도시는 하루에도 여남은 번씩 장례차가 드나들 뿐 거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에요. 나는 거기 작은 아파트에서 7년 동안이나 살고 있답니다. 오늘밤 지구를 반바퀴 돌아왔을 백중 달을 보면서 향을 피울게요. 그리고 언니에게 다 말할게요. 내가 어떻게 해서 제 나라 제 땅을 도망쳐왔는지를.
아, 조금 더 걸어야 지하철역이 나오겠군요. 조금만 더, 그러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할 게요. 아, 빨간불이 들어왔군요. 왜 그런지 나는 빨간 신호등만 보면 그것이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아 가슴이 막 뛰어요. 영원히 파란불이 안 들어올 것 같은 것 있지요? 아 참,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어디 취직할 데가 없었어요. 그런 지방대학을 나와 어디에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겠어요. 그래도 나는 취직을 해보려고 했어요.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누워 계시고 오빠와 올케는 어린애들 데리고 한창 자기 살림을 꾸려가기 시작할 때라, 집이 어려운데 대학까지 나와서 놀고 있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더라구요. 취직을 못 하면 당연히 시집이나 가라는 말이 나올 텐데 나는 연애 같은 데는 관심도 없었어요. 마음속엔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있었고 냉소적인 자신이 아직 어른이 덜 된 느낌도 있어서 결혼이라는 건 정말 너무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꼭 취직을 하려고 노력했지요. 아버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어디 시골학교 미술 교사 자리를 얻어볼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실업자 생활을 하던 중 내 친구 난이 있지요, 왜 금은방집 딸 말예요, 그 애도 회화과 나왔잖아요. 어느 날 광화문 크라운 베이커리에서 그 애를 만났는데 그 애는 자기 교수가 발도 넓고 아는 사람도 많은 아주 유력한 분이라고, 취직 부탁하러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난이를 따라 어영부영 묻어갔는데 그분이 그냥 교수가 아니고 원로, 거물…… 그런 분…… 그렇게 막강한 분인가 보대요. 하도 학생들 취직을 많이 시켜줘서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 고맙다고 돈을 모아 글쎄 그분에게 오피스텔을 한 채 사드렸다지 뭐예요. 그 당시는 오피스텔이라는 게 막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얼마나 덕을 많이 베푼 분인가, 하고 입을 딱 벌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그분은 아주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지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미소의 앞날에 힘이 될 사람들이니까 잘 알아두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가끔 난이를 따라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하면서 그 화실 겸 오피스텔을 드나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어요. 내가 워낙 연애라든가 남녀문제 같은 데 관심이 없었기에, 항상 선머슴애처럼 겅중거리고 자기 생각만 꽉차 있어서 겁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니지요, 그런 덕망, 그런 권위, 그런 자애, 그런 품격…… 하여튼 그분 작품 구경도 할 겸 가끔 오피스텔을 다녔는데, 항상 방문객이 그치지 않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작품은 그야말로 삼류예요. 이발소 그림만도 못한데 그래도 얼마나 비평가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비평가도 다 제자 아니면 제자의 친구, 친구의 친구, 신문기자도 다 제자 아니면 제자의 친구, 친구의 친구일 텐데요, 뭘……
그러던 어느 날 난이랑 함께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난이가 갑자기 치통이 심해 못 가겠다고 해서 혼자 그곳에 갔었지요.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요즈음 말로 한다면 남자로부터 한 방의 총탄을 맞은 거예요. 검은 입에서 나온 들끓는 하얀 흉탄.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뜻밖의 일이라 믿어지지도 않고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도 없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관계는 너무나 뻔한 통속적인 그림으로 그려져요. 취직을 간절히 원하는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여자, 그녀의 욕구를 잘 알고 또 그것을 이루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남자, 그 남자가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여자, 그것을 여자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남자. 그런 여자만큼 만만한 존재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 여자에게만큼은 아무 말이나 다 뱉을 수 있고 권력을 즐겨볼 수 있고 아무리 권력을 휘둘러도 상관이 없지 않겠어요. 옳은 말이건 그른 말이건 상관없이 그 여자 앞에서 그의 말은 헌법일 것이고 그가 미친 사람이건 개 같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권력은 행해져도 괜찮은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몇 날을 토했어요. 몇 달을 토했어요. 나는 육체에서 정신이 분리되는 유체이탈의 체험을 한 것 같았어요. 토막난 신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여자의 생식기와 끊어진 팔, 다리, 모가지, 유방 들. 육체와 정신이 그렇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평생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라나는 손톱이, 옥수숫대처럼 뻗치는 머리카락이 증오스럽고 낯설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헛구역질이 나고 두통도 심하고 가슴 폐색증인지 숨이 막혀왔어요. 용기를 내고 내어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병원에 가봤더니 복부에서 고름이 나오는 혈농증과 종양이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 오빠, 어머니의 얼굴이 노랗게 떠오르더군요. 특히 교육자이신 아버지, 판사 오빠의……
그 남자에게 이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으나 그것은 온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더러운 일 같았어요. 그럼 누구에게 말을 해요?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서 이해를 구해요? 이해를 구하고 동정을 구하고 눈물을 얻고 저주를 나누어서 무엇을 어쩌게요? 나는 올케언니에게 갔어요. 그래도 올케만은 비밀을 지켜주고 아픔을 묻어줄 것 같았어요. 언니는 남자의 이름 같은 건 묻지도 않았고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맹세도 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돈을 구해(오빠는 절대로 올케에게 월급을 갖다주지 않고 푼돈으로 생활비를 주었죠) 함께 병원으로 가주었어요. 우리는 종양을 지우기로 했어요. 언니, 그런데 무슨 악마의 인연인지 마취가 잘못되어 나는 수술 도중에 깨어나 우연히도 수술의 끝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았답니다.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떼어낸 핏덩어리 같은 것을 두 손에 들고 나가는 모습이었어요. 나는 그때 아주 작은 핏덩어리 종양의, 그래요, 핏덩어리 종양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요, 그 붉은 종양의 가녀린 어깨선 비슷한 것을 보았답니다. 그건 분명 어깨선이었어요. 그 초승달처럼 연약한 어깨의 선, 새의 날개처럼 작고 가녀리게 퍼들거리던 그 고운 떨림의 선……
미강 언니, 언니는 이 죄를 알아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이 광기로 몰아가는 혼자만의 고독한 그런 죄악을 알아요? 종이육체를 만들어 그것을 가위로 오리고 붙여 보고 갈가리 찢어보고 또 종이 육체를 만들어 가위로 서리서리 오리면서 일년 반을 보냈어요. 그래도 그때 죽지 못한 힘으로 미친듯이 작품을 했지요. 미전에서 상도 몇 개 받았었죠. 비극적 어둠 속에 둥둥 떠다니는 절단된 육체, 비천한 발과 흡반 같은 성기와 비천한 창자들이, 부르즈와적 신체의 위계질서 속에서 숭고한 의미를 부여받아온 높은 머리, 푸른 눈썹 등과 얽혀 있는 가면극적 분위기의 작품들 또는 인광이 깔린 푸르스름한 어둠의 배경에 두 팔을 올리고 벌을 받고 있는 듯한 고인돌 연작들을 많이 했었지요. 물신으로서의 여성 육체를 해체한 한국의 씬디 셔먼, 기괴함과 역겨움을 미학의 장으로 끌어들인 기괴주의 화가, 죽은 뒤의 허무에 서 있는 여자, 제2의 나혜석 같은 강력한 야수파 터치라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항상 환청을 듣고 있었어요. 초승달 같은 그 어깨선이 나에게 자꾸만 자꾸만 말하고 있었어요. 가라, 가라, 가라고. 내가 문신을 배운 후 처음으로 내 자신의 왼쪽 어깨에 비천을, 연꽃 방석에 앉아 두 손으로 꽃을 뿌리며 산화공양을 하는 비천녀를 새긴 것은 그 무명(無明)에 가득 찬 붉은 종양의 넋을 위로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였어요. 그 비천상은 쥰꼬의 국화꽃 문신이나 빅댄의 방사선 태양 무늬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심오하며 우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선뜻 상품으로 내놓기가 좀……
환청을 듣는 밤이면 가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그 오피스텔의 남자에게 우리 오빠가 판사라는 것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 복수의 공상을 해보기도 했지요.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어사와 관원들이 탐관오리 앞으로 우르르 쏟아져나오던 춘향전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실성한 듯 웃기도 해보았고요. 그러나 언니, 만약 오빠가 안다면 어사의 칼에 먼저 쓰러질 사람은 바로 누구겠어요.
언니, 그 가냘픈 어깨의 선이 나를 내 땅으로부터 떠나게 했어요. 가라, 가라, 가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라. 새로 살기 시작하라, 가라, 가라, 가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래서 나는 식구들 몰래 유학을 준비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누워 계시는데 내가 유학 간다면, 대학 때 공부도 안 하던 게 외국까지 가서 무슨 잘난 공부할 게 있다고…… 하는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를 받을까 봐(그 일 뒤로 그렇게 자기 모멸과 비하가 더 심해지더라구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사실 아무 구체적 희망이 없기도 했구요.
그러다 떠나기 전날 민주 민화도 볼 겸 올케언니에게는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 아파트로 갔었어요. 올케언니가 민주를 피아노학원에 데려다준다고 막 나가던 참이라 나는 혼자 거실에 앉아 있었어요. 오빠가 샤워실에 있다면서 언니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텔레비전 위에 놓인, 신문지로 싼, 종이뭉치 같은 것을 보았어요. 몰라요, 내가 왜 텔레비전 위에 놓인 신문지 뭉치를 끌러보았는지. 아마 휴지뭉치인 줄 알고 버려주려고, 항상 올케언니의 일을 하나라도 거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무심히 손에 집어들었을 거예요. 의외로 무언가 묵직해서 별생각 없이 펼쳐보니 돈이더라구요. 그 돈을 들고 나는 그냥 나왔어요. 아마 악령이 지폈던 모양이에요. 그 땅을 떠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돈을 보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엄습했던 모양입니다. 언니, 그렇게 해서 나는 집을 떠났던 거예요……
내가 떠나오던 날, 바로 그 6월의 축제가, 항쟁이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답니다. 이한열의 만장이 꽃상여의 색채처럼 아름답게 펄럭이며 '가자, 가자, 함께 가자' 부르는 것 같았어요. 나는 김포로 가면서 그 두 진영의 사람들을 다 부러워하는 마음이 되었어요. 저렇게 깃발을 흔들며 이상주의적인 무엇을 꼭 외쳐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과 저렇게 철통같이 무장을 하고 죽어도 꼭 지켜내야 할 무엇이 있는 로마의 병정들. 아, 그들의 꿈과 열망, 혹은 절망과 고통은 적어도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이고, 적어도 '나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부러움과 처절한 쓸쓸함으로 철철 눈물을 흘리며 김포를 떠났던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죽음의 도시 콜마로 가기 위해서예요. 그 방은 너무 가난해서 전화도 없고 좋은 촛대도 없지만 오늘밤 나는 보름달 아래 향을 피울 거예요. 사과향을요. 그래요, 그런데, 언니, 미강 언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요? 이야기를 안 하고자 하는 용기로 십년을 버텨왔는데 어떤 때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욕망과 이야기를 안 하고자 하는 욕망 중에 무엇이 더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난, 잘 모르겠어요. 백중 물이 높군요. 아, 머리 위로까지 와아와아 막 몰려오는 이 백중물을……
이사 갈 새집에 지불하려고 퇴근길에 오빠가 찾아온 중도금을 잠깐 사이에 잃어버린 올케언니는 오빠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고 그날 밤 불신과 의혹의 악령에 쫓기던 오빠는 음주 운전에 과속을 하다가 한강다리 난간을 받고 추락사했지요. 나의 비밀을 지켜주려고 실성까지 할 정도로 죽도록 맞은 올케언니를 위해, 아니 백중 해일을 맞고도 다시 또 꿋꿋이 일어날 어머니를 위해, 세상을 떠났으나 아직도 지상의 인연을 못 잊어 파괴적인 해일이 되어서라도 해일이 되어 온몸으로 기어서라도 다시 오고 싶은 오빠의 그 끔찍한 사랑과 증오를 위해, 그리고 실패한 씨몬느 베이유, 그 금강석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정신의 향기를 아직도 믿고 있는 미강언니를 위해, 그리고 그 슬픈 초승달의 어깨선을 가졌던 그 종양 핏덩이의 무명의 혼을 위해 오늘 밤 나는 홀로 사과향을 피우겠어요. 나의 백중재를…… 그리고 나는 두 팔로 무거운 운명의 돌을 들고 고인돌처럼 서서 어둠 속에 아마 오래오래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싸고 노끈으로 겹겹이 묶은 여자 시체가 서해바다를 떠돈다는 소문이 들리면 바닷가로 나와보세요. 안쪽의 종이에 빽빽이 시를 써서 그 종이로 몸을 묶고 낯선 바다로 뛰어들어 자유를 찾아 새로운 세계로 가기를 원했다던 해동 조선국의 시인 옥봉의 시신처럼, 나도 언젠가는 그 절단되고 끊어진 육체의 부분들을 주워 모아 하나하나 의미 부여의 문신을 새긴 뒤 천지창조처럼 온몸을 나의 작품으로 친친 감고 노끈으로 겹겹이 묶은 뒤 나에게 살과 피와 뼈를 주신 어머니와 올케에게로 흘러흘러 가닿을지도 모르니까요. 언니, 자, 안녕히, 이번에는 꼭 지하철을 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