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정미경
-가장 좋았던 건 뭐였어요?
재이는 커피메이커에서 포트를 꺼내며 물었다. 그 순간 열판 위에 커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치익. 재이는 뜨거운 커피가 떨어진 게 제 이마이기라도 하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비가 왔었어. 항구도시들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도 비만 오면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바뀌는 거 같아. 함부르크, 샌프란시스코, 여수, 시모노세키, 맑은 날 보면 그토록 다른 도시들이 비가 오면 같은 표정을 짓거든. 비 냄새, 바다 냄새, 바다 위로 빗방울이 스미는 풍경, 그런 것들 때문일까. 피셔먼스 워프에 나갔었어. 해안가의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크램차우더 스프야. 비 오는 피셔먼스 워프에서 먹었던 크램차우더 수프. 그게 제일 좋았어.
재이는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여행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던가 하는 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대체로 무심코 했던 비슷한 질문에 수프 따위를 말한 사랆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사람들이 지난 여행에서 기억하는 게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고딕 성당의 실루엣이나 비명 같은 탄성을 자아내던 풍경만은 아닌가 보다. 이름 모를 거리를 걸어가다 부딪친 낡은 돌담 사이에 피어있던 노란 들꽃 한 송이, 혹은 버스가 모퉁이를 돌 때 스쳤던 찻집의 올리브빛 테이블클로스의 기억,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크램차우더 수프가 뭐지?
-얇은 밀가루 반죽 속에 수프를 넣고 오븐에 구운 요리야. 가리비나 랍스터 같은 해산물이 듬뿍 들어 있지. 뚜껑을 포크로 여는 순간, 여전히 바다 내음을 간직한 신선하고 뜨거운 수프의 향을 처음 맡는 순간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 갈색이 도는 빵의 뚜껑을 터뜨릴 땐 정말 조심해야 해.
-왜요?
-향에 매혹돼서 얼굴을 박고 있으면 좁은 곳에 갇혀 있다 터져 나오는 뜨거운 김에 코를 데거나 시력을 상실할 수 있어. 그때 덴 자국이야.
그는 코 옆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래된, 손톱자국과 섞인 여드름 흉터였다.
-우리 음식이 생각날 땐 그것보다 좋은 게 있어.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노천에서 파는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인 홍합 요리도 괜찮아. 요리라고 부르기엔 좀 그렇지? 싱싱한 홍합을 그냥 삶은 거니까. 여기서의 포장마차 홍합탕에 비해 비싸다는 생각이 들면 입이 활짝 열린 걸로만 골라 반쯤 먹다 웨이터를 부르면 돼. 심각한 표정으로, 조개가 싱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고 클레임을 걸면 한 접시를 새로 받을 수 있지. 중학생 때, 먹다 남은 자장면에 미리 준비해 간 파리를 한 마리 집어넣어 새로 자장면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련한 추엇에 젖게 되면서 즐거움은 두 배가 될 거야.
-해산물 요리를 좋아하나 봐요.
-그래. 해물 요리라면 방콕의 컴컴한 야시장에서 먹었던 볶음국수도 놓칠 수 없지. 죽순과 해산물을 넣어서 볶은 국수, 돌아오는 길에 먹었던 여러 가지 곤충 볶음의 고소함도.
-바퀴벌레?
-글세, 그건 잘 모르겠고 메뚜기, 전갈, 뭐 그런 것들. 선물을 못 사와서 미안해. 일정이 너무 빡빡했고 동행이 있었어. 면세점에서까지 가이드를 해줘야 했지. 다음에 러시아 출장을 가게 되면 마트로시카를 사다 줄게.
-그래요.
마트로시카라면, 재이의 서랍 속에도 한 세트가 들어 있다. 러시아가 아니라 동구의 어느 도시로 여행 갔던 친구가 사다 준 것이었다. 커다란 목각 인형을 열면 똑같이 생긴, 조금씩 작은 사이즈의 인형들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기념품. 재이는 마트로시카를 서랍 속에 사지고 있다는 얘긴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선물 같은 걸 사다 주는 성격은 아니니까.
-아니야. 재이한텐 그것보다 다른 선물이 어울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짧은 생각에 잠기는 척하더니 단정적으로 말했다.
-베니스에 가게 되면, 가면을 하나 사다 주지. 산마르코 광장 옆, 곤돌라 선착장의 뒷골목으로 걸어가면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핸드메이드 가면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어. 공장에서 찍어낸 싸구려 가면과는 다른 느낌을 주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된듯한? 뭐 그런 거야. 종이로 된 걸 원해? 아니면 석고?
-석고는 좀 무거울 거 같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크램차우더 수프라면 거기보단 못하지만 괜찮게 하는 델 알고 있어. 내가 한번 사주지.
-그래요.
선선히 대답하지만 재이는 알고 있다. 이 남자와 굳이 바깥에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건 이 작고 익숙한 공간 속에 모두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쯤 그가 여기로 와서 일용할 양식처럼 섹스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은닉된 삶의 한 조각씩을 이토록 풍요롭게 이토록 인색하게 보여주는 것 이상은 원하는 게 없으니까.
-시차 때문에 피곤하지 않아요?
-제트랙? 그런 건 내 사전에 없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은 조용하다.
처음엔 지독히 수다스러운 그를 보며 재이는 그가 원하는 게 친밀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냉정함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수다스러움이 두 사람을 가깝게 밀착시켜 주는 건 아니니까. 사람 사이엔 수다스러울수록 멀어지는 지점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는 그를 보며 재이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수다스러운 건 결코 어느 선 이상으로 가까워지진 않겠다는 본능적인 거리 두기인 것 같다는 생각.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고 싸늘히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 수그린 그의 이마에서 감추어진 영혼의 자락이 얼핏 보이면서, 커피를 마시기 전에 떠들었던 모든 말들이 사실은 무의미했음을 말없이, 그러나 완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고 싶었어,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리며 코스 요리의 마지막인 듯 그가 재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질 때 재이 역시 어쩐지 뜨거운 크램차우더 수프를 막 먹은 듯했다.
*
카드 키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어둠이 차갑고 커다른 손처럼 자신의 온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싫다는 생각 같은 건 이제 하지 않는다. 시차 때문에 머리는 멍했고 부족한 수면상태에서 재이와 나누었던 섹스의 피로는 묽은 커피 한 잔으로는 가시지 않았다. 가시지 않는 건, 육체의 피로만은 아닐 것이다. 재이에겐 출장이라고 했지만 휴가를 몰아서 샌프란시스코엘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의 여행이 짧거나 혹은 아주 긴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편의 연극을 보러 그곳까지 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와 아이들을 껴안는 순간부터 자신이 우연히 공연을 보러 갔다 무대 위 고소공포증이 극대화된다는 높이에서 외줄을 타며 입으로는 활짝 웃어야 했던 즉흥 공연의 어리둥절한 관람객처럼 생각되었다.
공항의 환영객들 틈에 서 있던 아이들을 꼭 껴안았던 그 순간 등뒤에서 웃고 있던 아내가 지독히 낯설어 보였던 건 너무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색 색깔 의 아트지로 I LOVE YOU DADDY라고 장식해 놓았던, 작지만 온기 가득한 그 아파트에서 지낸 며칠 동안 내내 누군가가 캠코더로 찍고 있기라도 하듯 행동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진 건 지나친 나의 예민함 때문이었을까.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가 6개월쯤 친정 오빠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겠다고 했을 때,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연년생인 오누이는 저희들끼리라도 보내달라고 옆에서 졸라댔다. 방학 한 달 연수 다녀와서는 영어 실력의 향상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다는 아파트 여자들의 중론에 다라 공부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한 학기 동안만 다녀오겠다는 아내의 말에, 생각해 보자며 몇 달을 뭉기적거릴 때였다. 그러다가 모든 사소한 문제들을 접어버리고 헤어져 지내기로 한 건 두 해전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깨끗하게 정돈된 식탁에서 주간지를 읽고 있을 때 아내는 금방 갈아서 뽑은 블루마운틴 커피를 들고 와 맞은편에 앉았다. 시나몬이나 헤이즐넛 같은 향커피를 아내는 좋아했지만 그따위 인공향으로 위로 받아야 할 만큼의 상처가 내 인생에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블루 마운틴만을 고집했다. 커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당신 커피는 이제 예술이야.
예술적인 커피에 어울리는 짧은 미소를 보여준 후 아내는 말했다.
애들 방학 시작하면 바로 떠날 거야.
어딜?
6개월만 다녀올게. 애들도 애들이고.
멜로드라마에서 어려운 얘기를 꺼내기 전에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아내도 말을 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입에 커피가 들어 있지 않았다면 난 뭐? 하고 되물었을 것이다. 아내와 같이 있는 시간이면, 모든 게 연극처럼 느껴지는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아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것 같아. 당신을 견딜 수 없어. 모든 걸. 국을 떠먹는 모습도, 수그린 머리의 가르마도, 웃는 모습도, 잠든 모습도, 엎드려서 신문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 모든 게, 당신을 보고 있으면 나라는 여자와 살고 있는 당신이 불쌍해. 그 불쌍한 모습도 이젠 견딜 수가 없어.
실내에 브람스가 흐르고 있는 걸 그때야 알았다. 음악이 없었다면 이 침묵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나는 아내의 고백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술을 마시고 아무 데나 토한 거라든가, 새로 산 리넨 시트에 담뱃재를 떨어뜨린 일이라든가, 아내의 배 위에서 트림을 한 일, 또 함부로 방귀를 뀌는 따위, 아내가 늘 화를 내던 일에 대해 못 견디겠다고 그랬다면 그토록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르마라니, 내가 웃고 있을 때조차 마음속으로 견딜 수 없어, 중얼거려야 했다니. 아내의 진술은 충격이었다. 아내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가지뿐이었다. 헤어져 있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자 6개월의 시간이 두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처럼 절실해졌다.
나는 나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아내의 입술을 바라보며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끝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모양을 바꾸어 가는 것들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굳건한 어떤 것들의 범주 속에 분류해 놓은 것이 한순간 어이없이 무너짐을 보면서, 내 껍데기의 표정만이라도 굳세게 붙들고 있어야 했다. 거목의 부리가 헤집어도 와해되지 않는 돌의 사원처럼 굳센 껍데기 말이다. 나는 이후로 브람스를 다시는 듣지 않는다.
6개월은 금방 지나갔다. 무심코 웃다가도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10년 이상을 한 공간에서 지내고도 가르마가 보기 싫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아내의 의견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려 애썼다.
아이들은 자주 메일을 보내왔다. 아빠, 한 달이나 아빠를 못 보다니. 그 다음에도 메일이 왔다. 아아, 세 달이나 아빠를 못 보다니. 만나면 꼭 안아줄 거야. 그 다음부턴 아이들은 날짜를 세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메일의 끝에 아이들은 낯선 이름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아들아이가 마이클, 딸년이 에밀리였다. 마이클, 에밀리, 차안에서도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틈틈이 중얼거리며 나는 아이들과 그 이름을 연결시켜 보려 애썼다.
6개월이 되자 아내는 전화선 속에서 말했다. 1년은 채워야 될 거 같아. 이제야 아이들이 친구들과 떠듬떠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 지금 돌아가긴 너무 아까워. 당신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굶지는 마.
엄마의 말을 증명하듯 그 날 마이클의 메일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빠, 오늘은 친구 녀석과 싸웠는데 영어가 막 나오는 거 있지. 그전엔 더듬다가 화가 나면 한국말로 욕했거든, 야, 이 새끼야. 근데 오늘은 신나서 마구 싸웠어. 아빠, 요즘 우리 학교 매점엔 떡볶기가 새로운 메뉴로 등장했어.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맵진 않은데 나도 이젠 이게 더 맛있어. Daddy I miss you. 마지막 문장을 보자 케첩으로 색깔을 낸 떡볶기의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갔던 건, 세 사람이 잘 지내는지 보러 간 게 아니라 이제 그만 귀국하기를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크램차우더 수프 같은 건 없었다. 그 날 넷이서 피셔먼스 워프에 갔을 땐 너무 햇살이 따갑고 무엇보다 지독하게 건조해서 비라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을 뿐이다. 바닷가에 죽 늘어선 가게에서 찐 게를 사먹었다. 치과 도구처럼 보이는 길고 날렵한 기구를 사용하여 게살을 파먹으면서도 나는 계속 누군가가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봄날 서해안에 놀러 가서 꽃게를 쪄 먹었을 때의 어지러운 달콤함이 떠올랐다. 금문교 아래를 오가는 유람선을 타자는 아이들에게는 비행기 멀미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며 엄살을 부렸다. 따가운 햇살 때문에 아내는 서투른 치과기공사처럼 손을 움직이면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 게를 먹는 아내는 컬트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화장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햇살은 내 얼굴 위에서만 가벼운 통증을 유발했다. 재이에게 얘기를 하고 났을 땐 진짜 비 내리는 피셔먼스 워프에서 크램차우더 수프를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떠나긴 전 마지막 받은 이메일에 딸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 엄마와 오빠가 꼭 돌아가야만 한다면 난 혼자서라도 여기 남아 있을 거야. 아빠가 여기 와서 같이 살면 안 돼? 샌드위치 가게를 하든 야채 장사를 하든.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빠가 보고 싶긴 하지만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죽어도, 라는 단어는 열 살짜리가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메일을 보낸 건 딸아이지만 그 메일 속엔 세 사람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라면을 끓여서 냄비째 들고 와 바닥에 신문을 깔고 마감뉴스를 보면서 먹었다. 김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라면을 먹고 빈 냄비를 들어 올리니 신문이 들러붙어 같이 따라왔다. 라면 국물로 얼룩진 신문에는 화물선의 창고에 숨어 영국으로 밀입국하려던 중국인 스물 아홉 명이 고온과 산소 부족으로 전원 사망한 외신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라면 냄비를 든 채 그 기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죽어도, 라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라면 국물처럼 신문지에 배어 있었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돌아오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밀입국하려던 중국인들처럼, 아내는 여기만 아니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들에게 그곳은 좀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게 한스러운 낙원이었다.
*
퇴근하면 습관처럼 켜놓기만 할 뿐 잘 보지는 않는 텔레비전 앞으로 재이가 간 건 낯익은 음색과 억양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프라이팬에 찬밥을 볶다 마루로 달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 남자였다. 비 오는 피셔먼스 워프에서 먹었던 크램 차우더 수프.
화면 위의 제목은 ‘자발적인 이산, 기러기 아빠’였다. 기러기 아빠라면, 아이들과 아내를 유학 보내고 여기서 혼자 지내는 남자들을 얘기하는 게 아닌가. 재이로선 약간 놀라긴 했지만 충격적일 것까진 없었다. 벗은 등을 어루만지던 남자를 화면에서 보자니 언젠가 실제로 가보았던 여행지를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에로스와 우정을 오가는 듯한 이런 관계에서 중요한 건 질문하지 않는 거라는 걸 재이는 알고 있다. 너무 많은 걸 알려 하면 관계는 삐걱이기 시작한다.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대답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재이는 부엌으로 달려가 자작거리는 소리를 내는 프라이팬을 들고 와서 바닥에 앉았다. 그는 푸른 폴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도 그는 밝았고 여전히 수다스러웠으며 몇 번인가 보기 좋게 웃었다.
물론 외롭죠. 빈방들 틈에서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외롭고 싫어서 살던 집은 세주고 원룸으로 옮겼어요.
재이는 옷을 입은 것보다 알몸이 더 익숙한 남자를 순간 낯설게 바라보았다. 다만 외로움 때문에 좁은 원룸으로 옮겼다는 남자는 쿨해 보인다. 그가 외롭지 않다면 이 원룸의 엘리베이터에게 우리가 만났을 리가 없을 것이니.
괜찮아요. 사랑하니까 감수하는 거죠. 무얼 위해서 이렇게 헤어져 살아야 하나, 싶다가도 한 번씩 가보면 자식이라도 이런 환경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돈이 있어도 여기선 누릴 수 없는 것들, 승마라든가 강변을 따라 달리는 조정 같은. 여기 과외비 생각하면 학비가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구요.
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굳은 밥풀을 하나씩 떼어먹고 있었다. 하긴 지금 강남에선 다 큰 새끼와 와이프 끼고 사는 사내들이 모자라는 인간으로 오르내린다지. 폼 나려면 텔레비전에 풀연해서 눈물 한 방울 섞어 이렇게 말해야 해. 애들도 보고 싶고 집사람 없으니 사는게 아니죠. 언제 시간 내서 아이들한테 가서 아버지 노릇도 하고 싶어요. 쿨 한 남자답지 않게 화면 속의 그는 미간에 약간의 끈적이는 감정을 드러내며 고개를 떨군다.
가장 외로울 때요?
늘 사무친 정서인 듯 그의 대답은 금방 나온다.
안방불을 켜기 전에 현관등이 꺼질 때, 혼자 밥 먹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늘 켜놓는 자신을 보면서, 서랍에서 아내의 속옷을 보았을 때. 사랑이요? 아이들 때문에 헤어져 있긴 하지만 아내는 날 너무나 사랑하죠.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헤어져 있을 진.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재이 역시, 그에게 일상의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배신감 같은 걸 느낄 이유도 없다. 그의 감춰진 부분을 끝내 모르는 채로 그리고 모르는 체하며 살고 싶다. 타인의 외로움이나 공허함까지 같이 껴안고 싶진 않으니까. 그의 현실 속으론 절대, 엉기며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과장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쾌활함, 밝음, 기어이 웃게 만드는 현학 취미, 재이는 그 모습만을 보면 된다. 굳이 그가 보여주지 않는 부분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일뿐이다. 달의 이면裏面처럼.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까닭 없이 좀 울적했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재이는 리모콘으로 오디오를 끄고 전화를 받았다.
나야, 커피 마시러 가도 돼?
여기, 병원이에요.
그래? 조용하네?
그럴 시간이잖아요.
귀찮은 환자들에게 수면제를 주사했군. 그렇지? 다음엔 케타민 앰플을 하나씩 주사해 줘.
케타민?
악몽을 꾸게 하는 약물이지. 끈끈하고 진저리나는 악몽과 불쾌한 환각에 시달리게 하는 마취제야. 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현실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온하며 따스한 곳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돼. 불친절하네 어쩌내 사소한 불평 따윈 안 할거라구.
그럴 게요. 케타민.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은데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다. 다국적 제약회사에 근무하며 두 달에 한 번 꼴로 해외 출장을 간다고 말했지만 이번 여행은 개인적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왔다고 말했고, 그의 가족이 있는 곳은 샌프란시스코라고 텔레비전에서 말했다. 혹은 출장 길에 가족을 만나고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궁금한 건 그의 아내의 얼굴이었는데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그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끔찍이 남편을 사랑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는 그 여자는.
*
재이는 지금 집에 있을 것이다. 너무 가까이 사는 게 좋지 않은 건 이럴 때이다. 늦게 들어오면서 올려다본 그녀의 창엔 불이 켜져 있었다. 하긴 오늘은 보고 싶지 않아, 라고 말라는 걸 듣는 것보단 병원이라고 거짓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지 않다거나 당신을 견딜 수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한다는 건 말하는 사람의 짐작보다 훨씬 더 가혹한 폭력이다.
퇴근길에 들른 할인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전처럼 보이는 것마다 이것저것 집어서 카트에 담진 않았다. 다섯 개씩 묶인 라면도 선반에 적힌 가격을 비교하며 골랐다. 식품 코너에선 덤이 붙은 것을 집는 게 습관이 되었다. 살던 아파트를 세주고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을 얻고 나서 은행에 넣어둔 돈은 눈에 띄게 줄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오빠네 있다 올 거예요, 했던 아내는 한 달도 안 되어 오빠 네를 나갔다. 세 가지 이유를 들면서. 올케 눈치가 보인다는 것과 사촌들 간의 미묘한 감정 대립에서 아이들을 기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사촌들과 한국말만 해서 도대체 왜 여기 왔는지 모를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세 가지 전부, 가르마나 웃는 모습처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집세는 테헤란로 임대료 못지 않았고 게다가 월세였다.
처음 혼자 지내게 됐을 땐 그래도 자신이 그 생활을 약간은 즐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금 나이트클럽에 들렀고 스물 몇 살짜리 여자애들과 술을 마시고 함께 자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모텔에 갔을 때의 비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섹스가 끝난 후면 거대한, 지루한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낯선 여자와 깨고 싶은 연대감 속에서 모텔의 복도가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며 걸어 나오는 일도 곧 지겨워졌다. 지하 주차장이나 자동차 극장에서 카섹스를 해본 적도 있다. 몰래카메라에 찍혀 졸지에 포르노 배우로 데뷔하고 싶진 않아, 말했지만 나로서는 그때도 은행 잔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하면 흥분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호기심으로 한번 해볼 때가 아니면 좁고 불편하고 끊임없이 신경이 쓰일 뿐이다.
재이를 만나기 전엔 그런 생활을 꽤 오래 했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집 근처의 마켓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고를 때 스쳤던 재이와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자 나는 약간 웃으며 목례를 했다. 둘이서만 엘리베이터를 낱 적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섞여 탄 적도 몇 번 있었다. 늘 혼자였다. 혼자 살면서 특별한 연인도 없는 싱글들에게 토요일은 삶이 파삭거리는 모래처럼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이다. 아무래도 1년은 채워야겠어, 아내가 그렇게 통보했을 무렵이었다. 숫자판에서 눈을 준 채 물어보았다.
영화 보러 가실래요? 티켓이 있는데.
티켓이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제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대중성이 있는 영화는 아니라 표는 언제라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여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추었다.
아니에요.
여자는 거절한 게 미안한 듯 살짝 웃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말했다.
놓치면 후회할 영화예요. 한 시간 후에 현과 앞에서 봐요.
대답을 듣지 않고 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여자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혼자 살면서 늘어난 건 여자에게 작업할 때의 순발력뿐이다. 열두시가 조금 지나서야 여자가 나타났다. 샤워를 했는지 피곤한 기색도 없어지고 씻은 배추처럼 싱싱해져 있었다.
좀 자야 되는데, 퇴근하는 길이었어요.
병원에서 근무하시죠?
어떻게 아세요?
귀 옆에 실핀이 꽂혀 있더군요. 너스캡을 보면 늘 그걸로 고정돼 있던데요.
관찰력이 대단하시네요.
아무나 관찰 하는 건 아니죠.
실핀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나는 설핏한 소독약 때문이었지만 낯선 여자 앞에서 코를 킁킁대는 남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프랑스 영화가 대게 그렇듯 영화는 공부하듯 보면 재미를 느낄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지루했다. 여자는 중간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졸았다. 잠이 든 순간에 젖내 같은 게 살짝 맡아졌다. 나올 때 OST 시디를 사서 여자에게 주었다. 복잡한 로비에 잠시 멈추어 서서 여자는 포스터 속의 여자 얼굴을 쳐다보았다. 극장 근처에서 국물이 지나치게 달콤한 일본 우동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재이가 물었다.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세요?
그다지. 그냥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재이는 시디를 꺼내 오디오에 넣었다. 생이 자신에게 던지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켓에서 쇼핑을 하던 여주인공의 모습위로 흐르던 음악이다. 이 음악이 흐를 때 재이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멜로디가 슬프고도 아름답네요. 가사의 뜻이 뭐예요?
나도 불어는 몰라요. 아깐 자막에서 그렇게 나오던데. ........여름의 끝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
여자는 앞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름의 끝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네. 헤어지기에?
그러면서 질문하듯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웃으며 한 번 더 일러주었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
고개를 끄덕이며 재이는 중얼거렸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
갑자기 두 사람이 오래된 연인처럼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탐색의 열의가 사라진. 그 노래 때문일까. 이후의 우리의 관계의 내면은 대체로 그러했던 것 같다. 그건 장점이 많은 관계이다. 그건 장점이 많은 관계이다. 열렬한 집중 대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날카로운 칼에 쓸데없이 마음을 찔릴 일은 없는.
-아, 정말 맛있어. 하루키는 뜨거운 우동 국물을 먹는 어느 순간에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고백을 했는데 말이야. 이 김치찌개야말로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단 생각이 들게 하는데?
자주는 아닌데 이 남자는 전화를 해서 뭔가가 먹고 싶다는 애길 한다. 솔직히 귀찮다. 내가 지 마누라야. 김치찌개 해놓고 기다리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비용이나 수고가 드는 요리를 원하는 것은 아니어서 재이는 대체로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얼리지 않은 갈치를 붉은 고추를 듬뿍 썰어 넣어 조린 것이라든지 두부를 넣은 매운탕, 혹은 깻잎을 넣은 김치볶음 따위. 결코 요리를 잘하지도 않는 재이가 해놓은 음식들을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연발하며 먹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잠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년 가울에 파리에 일주일간 출장을 갔었는데 대학 동기가 마침 한국에 다니러 가서 비어 있는 친구네 아파트에 묵게 해주었어. 한기가 뼛속을 스미는데 그렇게 라면이 먹고 싶을 수가 없더라구. 걔보고 야, 라면 몇 개 갖다 줘, 전화했는데 응 해놓고는 올 때까지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라면 몇 개에 인간이 그렇게 분노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 그래, 이놈아 한국 가면 나는 박스로 사다 놓고 먹을 거야, 이를 갈았지. 지금도 그놈 생각하면 열 받아.
-잊어버렸겠지.
-아니야. 아까워서 안 줬을 거야.
-아침은 굶는 편이에요?
-그렇진 않아. 마늘 냄새를 풍기면 안 되니까 영국식 아침식사를 하지. 바싹 구운 토스트 한쪽, 달걀프라이, 블루마운틴 그리고 브람스.
-아침에 듣는 브람스는 어때요?
-브람스는 그랬지. 고독하되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난, 고독해야만 자유로움을 느껴. 고독은 내 일상의 에너지야.
안방불을 켜지 전에 현관등이 꺼질 때, 혼자 밥 먹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보지도 않는 텔레비를 늘 켜놓은 자신을 보면서, 서랍에서 아내의 속옷을 보았을 때. 그의 수다 위로 또 다른 그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식탁을 훔치고 재이는 커피포트를 뽑아 불고기 모양의 나무판 위에 내려놓았다.
-블루마운틴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블루마운틴이 제일인 줄 알지. 세상에는 다양한 커피가 있어. 커피의 물질적인 분류에 대해 알고 싶어?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분류?
이 남자, 그냥 놔두면 한 시간도 좋을 것이다. 원래는 아라비아의 비약의 재료였다는 커피의 기원에서부터 알려지지 않은 그로테스크한 용도. 그것도 이미 두어 번씩 들은 것들.
-제일 맛있는 커피는 뭐예요?
-제일 맛있는 커피. 그건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야. 커피의 취향이란 이성에 대한 기호만큼 주관적이고 다향하니까.
-가장 비싼 커피는?
-기호식품을 가격으로 매기는 건 개장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하노이에 가게 되면 말이야, 여우똥이란 걸 마셔 봐.
-여우똥이라면 베트남어?
-아니. 그야말로 여우의 배설물 속에서 골라낸 커피원두를 볶은 거야.
-왜 그게 맛있을까?
-내 추측으로는.
그는 오래 생각해 온 문제라도 되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얘길 했다.
-여우란 놈이 약아서 아주 잘 익은 원두만 골라서 먹기 때문이라는게 하나의 추측이고, 긴 소화기관을 지나면서 원두가 미묘한 성분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일 수도 있어. 어쩌면 둘 다 독특한 커피 맛의 원인일 수 있지. 어쨌거나 베트남에 가서 이 커피를 사려면 가격이 비싼 걸 사도록 해. 요즘은 그놈들이 약아져서 무조건 포장지에 여우 그림을 찍어 넣기 시작했거든.
그는 지난주에 하노이의 커피 가게에 다녀오기라도 한 것 같다.
-비슷하지만 더 귀한 게 있어. 수마트라의 고양이똥 커피. 이건 고양이 배설물에서 골라내 거지. 이게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커피원두야. 파리에 갔을 땐 채식주의자를 위한 레스토랑에서 마셔봤어. 알로에 칵테일과 장미꽃 샐러드도 거기서 처음 맛보았지.
-이상한 냄새가 배어 있진 않았어요?
-노.
단호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니 너무도 평범한 커피를 내놓은 게 미안해졌다.
똑같은 한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면을 볼 것이다. 누구는 그 사람의 맑은 눈빛을, 유난히 긴 팔다리를, 자잘한 주름으로 기억되는 웃음을, 혹은 돈을, 권력을, 숨겨진 냉혹함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재이가 그에게서 처음 본 건 외로움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영화 보러 가실래요? 물었을 때 아니라고 끝내 거절하지 못했던 건 그의 웃음 띤 눈빛 뒤의 외로움이었다. 이후에 그에게서 많은 다른 것들을 보게 되었지만 그를 생각할 때면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춰진 외로움이 맨 먼저 떠올랐다. 다만 그 커피 찌꺼기 빛쌀의 외로움 앞에 이토록 현란한 지적 허영심과 포즈로서의 삶이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으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던 그가 갑자기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왜? 왜 그래요?
고통을 참는 그의 표정은 낯설다. 조심스럽고 길게 숨을 내쉬며 그가 물었다.
-여기가 아픈 건 왜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짚고 있었다.
-어떻게 아파요?
-조이는 것 같기도 하고 뻐근하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해.
-언제부터?
-두어 달 전에도 한 번 그랬었는데.
-검진 한번 받아봐요. 심장 때문일 수도 있고 위산이 식도 쪽으로 역류했을 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니까.
-그래? 어떤 게 더 치명적이지?
-물론 심장이지.
-그럼 그걸로 할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듯 그는 갑자기 크게 웃어댔다. 이마에 엷게 땀이 밴 채 터뜨리는 그의 폭소는 마음속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한 것처럼 약간 서투르게 들렸다.
*
현관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침에 나가면서 불을 켜놓고 나온 모양이다. 문득 내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안방등을 켜기 전에 현관등이 꺼질 때. 그 프로그램은 방영이나 했을까. 언제라고 얘기해주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재이의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가슴이 심하게 아파왔다. 격통이었다. 통증을 참으며 미소를 짓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마셔보지 않는 수마트라 고양이똥 커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입으로만 웃는 나를 재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등에 차가운 땀이 배어났다. 통증이 오래가진 않았다. 섹스를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커피를 마시고 나서 재이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식사와 커피, 섹스는 고정된 스케줄이었으니까. 다행히 재이는 중년 남성의 숨겨진 사망 원인 중 복상사가 의외로 많다며 냉정하게 내 손을 밀어냈다. 오늘은 안 돼. 그런 깜직함과 냉정함이 좋다. 물론 재이는 절대 제 집에서 재워주지도 않는다.
통증은 사라졌는데 이마는 여전히 차가웠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켰다. 아이들은 아빠 잘 도착하셨어요? 하는 안부 이후로는 메일이 없다. 그만 돌아오라고 얘기할 것 같은 아빠가 두려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죽어도, 라는 말을 쓴 건 그 아이가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메일 화면을 지워버리고 나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단어를 검색칸에 써본다. 맞추픽추. LA에서 에어로페루를 타고 가야 하는 잉카제국의 마지막 도시. 쿠스토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우르밤바 강 옆의 피삭에 도착하면 사라진 공중도시로의 여해이 시작된다. 태양에 바쳐진 제물처럼 산의 정상에 펼쳐진 놀라운 고대의 영화榮華. 산 사람의 가슴을 예리한 칼로 갈라 심장을 뜯어내서 제단에 바치는 제사. 희생 제물로 선택되는 것을 젊은이들은 지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여전히 뜨겁게 펄떡이는 젊은이들의 심장을 뜯어내는 부분에서 재이는 약간 눈썹을 찌푸릴 것이며 언젠가는 맞추픽추에 가보고 싶어, 중얼거릴 것이다. 쿠스코에 가면 한국인이 하는 라면 가게가 있다는 얘기도 들려줘야지.
모든 검색어에 대해 컴퓨터는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준다. 파리의 채식주의자 식당도, 샌프란시스코의 그램차우더 스프도, 파도가 미친년처럼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달려든다는 그 바닷가, 히피들의 천국이라는 코사무이 해변도 모두 인터넷이 알려준 것들이다. 출장을 자주 가긴 하지만 그런 곳까지 들를 여유는 없다. 시간도 돈도, 밤의 인터넷에는 외로운 인간들이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달려든다. 혼자 있는 밤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천일양화인들재이에게 못 들려줄까.
재이에게 가면을 사주기로 했었지. 가면 카니발을 검색해 보았다. 베니스. 4백여 개의 다리. 카사노바의 활동 무대였던 불륜의 도시. 이 도시에는 유곽이 없다. 온 도시가 유곽이니까. 곤돌라 선착장 옆의 오래 된 골목길로 들어서면 가면 가게들이 있다. 진열장 아래 얌전히 누워 있는 가면들. 눈은 검게 열려 있고 입술은 닫혀 있어. 외로운 영혼을 부르는 표정으로 귀와 귀를 맞대고 나란히 누워 있지. 제 외로움의 주파수와 맞는 가면을 고르면 돼. 냉정하면서도 앙큼한 재이에겐 눈언저리가 황금 분으로 치장된 창백한 석고 사면이 어울릴 거야. 그 가면을 쓰고 길게 휘어진 황금 손톱을 손가락마다 붙이고 치렁한 망토를 걸친 채, 습기에 부식되어 가는 낡은 건물의 입구에 앉아 손톱을 펼친 애 미스를 한다면 모든 남루한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거야. 재이.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
내게 어울리는 가면은 어떤 것일까. 온통 검은, 뚫린 눈 부분이 오히려 희게 보이는 우울한 표정의 가면. 아니면.
아내는 내가 있는 동안 잘해 주려 애를 썼다. 그런 아내가 연극배우처럼 느껴졌다.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틈을 내서 지망 공연을 내려온 여배우 같은. 오래 전에 식탁에 앉아 내뱉었던 자신의 말들, 나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없다던 말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표정. 일주일의 끝 날엔 무대 막이 천천히 내려올 듯했던 하루하루. 오죽했으면 배 위에서 아내가 허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샤론스톤을 떠올렸을까. 사정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스다듬었던 아내의 등은 오전 열 시에 신문을 읽고 있을 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금박이 화려한 이 가면은 아내에게도 어울릴 것이다. 하긴 썩은 물이 출렁거리는 베니스의 뒷골목, 어두운 건물 계단에 앉아 이 가면을 쓰고 두 번 휘어진 황금 손톱을 달아준다면, 아내와 재이가 다를 게 무엇인가.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면은 설탕보다, 화장지보다, 혹은 와인빛 루즈보다 더 필요한 것일 텐데.
*
-누구세요?
-꽃 배달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였다. 현관문을 여니 사람보다 먼저 장미꽃 다발이 코앞으로 쑥 다가왔다.
-어머.
식탁에 앉으며 그는 자신이 가져온 장미를 탐색하듯 지그시 노려보았다.
-발칸의 장미야.
-발칸?
-존재가 바로 고통인 땅이지. 아이로니컬하지 않아? 미식가들이 수마트라 고양이똥 커피를 최고로 친다면 장미의 여왕은 단연 발칸의 장미야. 알바니아. 겨울엔 비와 진흙 때문에, 여름엔 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는 곳이지만 그것보단 어디서 저격병의 총탄이 날아와 옴에 박힐지 모르는 처절한 내전의 땅이지. 그 발칸 반도의 어둠이 흩어지기 전, 무거운 공기가 흔들리기 전, 자정부터 새벽 사이에 줄기를 자른, 강한 향기가 고스란히 가두어져 있는 그곳의 장미가 지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받는 거야.
길거리 좌판에서 샀음이 분명한, 이미 끝이 검게 변색하기 시작한 장미 다발은 겉모습만은 비와 진흙으로 범벅된, 처절한 내전의 땅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종이 다발은 찢어져 있었고 오늘이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꼴이었다. 화병에서는 제대로 목도 가누지 못할 것 같아 재이는 현관에 있는 빈 못에 꽃다발을 거꾸로 걸어두었다.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야겠어.
처음 사온 선물치곤 심했어, 라는 말을 삼키며 재이는 그렇게 말했다.
-장미는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상징하지. 조지 오키프의 장미 그림을 본 적이 있어? 그의 장미는 여성의 뜨거움과 파괴성과 습기와 매홍, 슬픔과 손대고 싶은 유혹을 성기보다 정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너의 그것처럼.
재이의 목을 쓰다듬는 그의 눈빛이 은근해진다.
-나 오늘 나이트야.
-언제 나갈 거지?
-지금.
-그래? 그럼 데려다 줄게.
그는 금방 표정을 바꾼다. 끈적거리지 않는 그의 태도를 좋아하지만 이토록 쉽게 포기되는 열정도 아쉽다. 핸드백을 들고 형광등 스위치를 내리기 전 잊었다는 듯 재이는 말했다.
-뒤에서 할래? 머리를 망가뜨리기 싫어서.
엉덩이 주사를 맞을 때처럼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재이는 스커트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오른손으로 재이의 팬티를 내리며 그는 스위치를 내렸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땐 달빛 아래서야, 중얼거리며. 베란다 창으로 달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둡지도 않았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재이의 마음속에 희미했던 친밀감이 조금씩 커졌다.
-달은 없어.
-달은, 네 눈 속에 있어. 공주의 엄지손톱만 한 작고 노란 달이 네 눈 속에.
깊은숨을 들이쉴 때 장미향이 비로소 느껴졌다. 발칸의 장미? 그러고 보니 장미향 속에는 따스한 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채 식지 않은 몸 때문인지 바깥으로 나오자 뺨에 닿는 바람이 서늘했다. 신도시의 외곽에 있는 병원에 다다랐을 땐 가녀린 비가 부리기 시작했다.
-소독약 냄새보단 페인트 냄새가 더 강하게 날 것 같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내부도 호텔 수준이야.
-파리 캉봉 거리에 샤넬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리츠호텔이 있어. 다이애나 왕비가 죽기 전 연인과 마지막 만찬을 즐겼던 곳이지. 헤밍웨이는 그랬어. 천국의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곳은 리츠호텔이다. 하지만 아무리 리츠호텔의 스위트룸 같아도 난 병원에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아.
-간단해. 아프지 않으면 돼.
-넌 별걸 다 아는구나.
재이의 코를 그는 아프지 않게 살짝 눌렀다.
-나른해?
-나른하긴. 기운이 넘쳐.
재이는 남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제 속의 정액을 다 쏟아 부은 여자에게까지도 끝내 지친 표정은 보이지 않는 남자, 마지막 순간에도 포즈를 의식할 것 같은 남자. 돌아서 달려가는데 차창을 내리고 그가 외쳤다.
-잊지 마, 케타민. 귀찮게 구는 화자들에게 사흘만 주사하면 전부 퇴원해 버릴 거야. 악몽보단 육체의 통증을 선택하는 게 인간이지.
*
오래전에 읽은 책을 펼쳐보면 붉은 색연필이나 심이 두터운 연필로 밑줄을 그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건 다시 읽어보아도 왜 밑줄을 그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문장도 있다. 사람도 그러하다. 이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좋아했던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일도 있다. 아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때는 내가 운명처럼 느껴진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막이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지친 배우처럼 우울한 얼굴 위에 웃음 띤 가면을 쓰고 견디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말하기 전까지. 우리 둘의 관계의 끝 어디쯤 두터운 무대 막이 내려올 것을 예감하고 있긴 했지만 이토록 상투적인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내는 묻고 있었다. 이메일 속에서.
........무얼 위해서 이 상태를 견뎌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뭐가 두려운 거지?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그 사람과 새로 시작하고 싶어. 당신에게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로선 헤어져 지내는 동안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있길 바랬는데 지난번 당신이 여기 왔을 때, 당신의 얼굴을 봤을 때 깨달았어. 바뀔 수 있는 건 남아 있지 않다고.
*
초인종 소리르 듣고 나간 재이는 현관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이 그라는 걸 알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약속 없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건 싫다. 버릇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현관 앞에서 돌려보내려 했는데 문 앞에 서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재이는 현관문을 조금 더 열어주었다. 감추기엔 너무 커다란 돌이 가슴에 얹혀 잇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룰을 어겼다는 걸 깨우쳐주긴 해야 했다.
-무슨 일이예요?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난 수마트라 고양이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재이는 고양이를 닮았어.
그뿐 그의 수다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커피를 갈고 여과지에 담아 스위치를 누르고 다시 식탁에 앉을 때까지도 그는 조용했다. 이건 익숙하지가 않아. 재이는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화제에 올려본다.
-버버리 셔츠네. 늘 명품만 입어.
-집사람이 보내줬어.
재이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내 앞에서 한 번도 아내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미국에 있어.
-그래요? 떨어져 살아보니 어때?
-집사람은 내 열렬한 팬이야. 아침저녁으로 메일을 보내지. 계절이 바뀔 땐 이렇게 옷도 보내고.
그가 원하는 건 나의 질투심일까. 커피를 가지러 일어나며 재이는 그의 셔츠 뒤쪽을 뒤집어보았다. 셔츠는 이미테이션 이었다. 아니, 유사상표일 뿐이었다. 버버리의 로고는 알파벳 대문자로만 되어 있다. 앞부분의 세 글자만 대문자로 된 건 이미테이션 축에도 못 낀다. 재이는 모른척하기로 한다.
-그래, 이런 건 선물이 아니면 선뜻 사긴 어려워. 예쁘네. 자긴 어때?
-뭐가?
-당신 와이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 말은 아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방금 한 모금 마신 커피에 대한 품평처럼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던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성급하게 재이를 껴안았다. 몸속으로 들어오기 전, 그는 팔을 펴서 몸을 버틴 채로 재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나 사랑하니?
이런 질문은 정말 싫다는 걸 왜 모를까. 자기답지 않게. 재이는 대답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는 다만 섹스가 하고 싶어 찾아온 사람처럼 손이 미끄러지도록 땀을 흘리며 재이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랑을 나눈다기보다 불안하게 쫓기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 좀 가져다줄래요?
죽은 사람처럼 엎드린 그가 너무 무거워 물을 가져다 달라고 말할 때까지 그는 재이의 가슴 위에 젖은 빵처럼 엎드려 있었다. 재이는 냉장고로 걸어가는 그의 벗은 뒷모습을 보았다. 큰 키에 비해 어깨도 좁고 엉덩이도 무척 작았다. 연민을 느끼고 싶지 않아 재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재이가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려 그는 조심그럽게 물었다.
-자고 가도 돼?
재이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고개를 저었다.
*
어둠 속을 걸어가다 책상에 부딪치자 모니터가 환하게 밝아왔다. 나는 몰래 도망가다 들킨 아이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이의 집에서 자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질문 앞에 다시 서기가 두려웠을 뿐이다. 뭐가 두려운 거지? 혼자 남는 것? 언제부터 혼자였는데. 아이들과의 이별? 죽어도,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때부터 이별이었다. 나는, 그저 너무나 넓은 바깥에 쫓겨나 있을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튀김 기름과 찌개 냄새가 밴 그 작은 아파트의 바깥, 이토록 넓은 바깥에.
차가운 물을 한 잔 들고 부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보았다.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는 웃음. 손가락으로 오른쪽 눈썹 위쪽의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넘겨보았다. 가르마는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손을 떼자 머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손바닥에 스치는 이마가 싸늘하다.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커피 때문일 것이다. 혹은 커피를 마신 후의 격한 섹스 때문 일 것이다. 누군가가 강철 기구로 가슴을 조이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그 기구를 뜯어내기라도 한 듯 나는 손을 뒤로 휘저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지 마, 제발.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려 했다. 마음은 일어서는데 몸은 조금 더 웅크려 책상에 엎드린다. 몸은 작게 오그리고 싶은 듯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머릿속이 점액질의 액체처럼 불규칙하게 출렁거렸다. 고통은 짧은 순간에 극심해졌다. 견딜 수 없어, 당신의 모든 것을. 웃는 모습도, 가르마도, 마이클과 에밀리. 죽어도,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게만 쓰라렸던 피셔먼스 워프의 햇살. 안방등을 켜기 전에 현관등이 꺼졌을 때 나를 덮쳐오던 어두움.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나는 의아했다. 어쩌면 이토록 짧은 순간에, 이토록 많은 기억들이 밀려올 수 있는 걸까. 파도가 미친년처럼 머리를 풀고 달려드는 코사무이 해변의 격랑처럼. 모든 파도가 일순에 덮쳐오듯 비일상적으로, 현실감 없이.
그렇게 모든 기억들이,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는군.
어쩔 수 없이.
*
위쪽을 향해 일제히 등을 돌린 사람들이 재이의 집 앞까지 서 있었다. 재이는 키를 꽂으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안쪽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고 있던 경관이 재이를 쳐다보더니 안에 대고 뭐라고 얘기를 했다. 숱이 적은 머리에 재이보다 키가 작아 보이는 남자가 나와 손짓을 했다. 계단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아래층에 사십니까?
-그런데요.
-며칠 사이 위층에서 무슨 이상한 기척을 못 느꼈어요? 비명 소리나 다투는 소리 같은.
-무슨 일인데요?
-혼자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마루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사흘 째 연락 없이 출근하지 않아 회사에서 나와본 모양이에요.
마루에 놓은 들것에 그는 눕혀져 있었다. 자고 가도 돼? 그날 밤 입었던 버버리 셔츠를 입은 팔이 흰 시트 틈으로 보였다. 재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듯한 표정의 머리숱 적은 경관과 공허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재이는 오래전에 보았던 프랑스 영화가 생각났다. 젊은 날의 말론 브란도가 나왔던 영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영화의 장면이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날까. 난 몰라요. 그 남자를 몰라요. 고개를 젓던 여자의 깜찍한 표정. 삶과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표절하는 것 같다.
모른다는 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다. 재이는 함께 지내지 않을 때의 그에 대해선 거의 몰랐다. 마지막 입었던 셔츠가 그를 무척 사랑하는 아내가 보내준 선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셔츠가 유사상표일 뿐이라는 것, 그 외에는 특별히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셔츠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런데 그날 밤 그 셔츠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자신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말한다면 그가 재이에게 퍼부었던 길고도 현란했던 대부분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랬던 건 아닐까. 남루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비밀이 필요하니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른 장미 다발이 보였다. 장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알싸한 향기도 어둠과 고통 속에서 축적되는 것일진대 향기로 응축되기엔 너무 독한 어떤 것이 그의 생에 있었을까.
현관 등이 어느 순간 꺼져버렸다.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자 뭔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희미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잘 몰랐었는데 그가 있음으로 해서 생의 순간이 풍요로웠던 적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 등이 꺼지고 안방 등이 켜지기 전, 어둠 속에서 그의 마음도 이렇게 조금 추웠을까.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긴 이야기 끝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의 적은 술탄보다 더 냉혹한 것이었는지. 그가 했던 무수한 말들을 웃음 끝에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가 없는 지금은 그것들이 꼭 거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긴 알바니아에서 가져와야만 발칸의 장미일까. 짙은 안개가 낀 날이면 안개에 몸을 가리고 눈물도 가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다 저격병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 웃고 있는 등뒤로 누군가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 소멸의 시점을 알 수 없는 것, 먼지와 안개와 결핍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그건 그곳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이는 마른 장미 다발을 못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넣었다. 여름의 끝이라 해도 날씨는 더웠다. 미약한 부패의 냄새가 번지고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이 머릿속을 꿰뜷고 지나갔다. 자고 가도 돼? 그날 밤이었을 것이다. 저격용 베레타를 들고 있지 않은 제 손을 재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쓰러지기 전까지 무수하게 박혔던 보이지 않는 총탄 중 하나가 이 손에서 날아간 건 아니었을까.
재이는 불을 켜고 시디 케이스를 뒤져보았다. 처음 그와 영화를 보았던 날 샀던 시디를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살짝 졸았는데 그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그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밤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두 살인자의 모습뿐. 졸음에 겨워 눈을 반쯤 뜬 채로 텅 빈 밤의 주차장이 뜻밖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을뿐이다.
질문을 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후에야 그의 수다스러웠었던 생의 이면이 약간은 궁금해졌다. 가사를 들려주었던 그의 목소리도 조금은 그리워진다. 그가 몸 속으로 들어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 할 때면 생겨나던 희미한 친밀감이 뜬금없이 사물거린다. 재이는 어쩐지 밤마다 그가 들려주던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잊은 줄 알았는데 노래의 가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름의 끝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