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 가는 길
방영주
천생 만민은 필수직업이 다 각각 달라
우리는 구타여 선인이 되어
먹는 밥은 사자밥이요, 자는 잠은 칠성판이라지
예날 노인 하시는 말쌈은 속언 속담으로 알어를 왔더니
금월 금일 당도하니
우리도 백년이 다 진토록 내가 어이 하자나
허공인지, 머리 안쪽인지, 내 주위에서, 아버지(이한국)의 "배따라기"가 맴을 돌고 있었다. 그것은 대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나 한숨 소리, 또는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른 것처럼 들렸다. 이는 아버지, 당신의 한(恨)을 풀어내려는, 가슴 저미는 애절한 가락이었다.
아버지는 민요를 잘 불렀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이었는데, 평안도 민요 창법에 능했다. 특히 "배따라기"를 잘했다. 아버지가 "배따라기"를 부를 때면, 콧소리로 얕게 떨거나, 콧소리로 길게 죽 뽑다가, 갑자기 속소리로 변하여 가만히 떨곤 하였다. 노래가 수면을 가볍게 부침 하는, 버들가지가 바람결에 속살거리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어떤 때는 한스러운 느낌이 복받쳐 올라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안에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을 터였다. 아버지는 가끔 동네 술좌석에서 "배따라기"를 불렀다. 일종의 망향가였다. 청자(聽者)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을 질금거렸다. 나도 부지간 목이 잠기어 들었다. 나는 어쩌다 "배따라기"를 청승맞게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혼자 술을 마시며 "배따라기"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배따라기"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어 보았다. 노래도 내용을 확실히 알고 불러야, 그 속에 감정이 적절히 배어들어,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배따라기는 서도 잡가의 하나로 이선가(離船歌), 이선(離船)이라고도 해. 배따라기는 배떠나기의 와전으로 박지원이 지은 한북행정록(韓北行程錄) 악부(樂府)에, 배타라기(排打羅其)라는 곡이 있는데, 방언으로 선리(船離)라 했다고 적혀 있어. 그 노래는 지금의 배따라기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경기민요인 "이별가"에 그 가사가 전해지지."
나는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배타라기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가 떠나는 모습을 나타낸 춤에 따라 부르는 노래로, 무석(舞席)에 채방(彩舫)을 놓고, 호복(胡服)의 세 기생이 삼사(三使)의 승선하는 시늉을 하며, 붉은 융복(戎服)의 소교(小校) 차림을 한 동기(童妓) 한 쌍이 군례(軍禮)를 행하며, 호령하면 들어가 취타(吹打)를 하지. 나상(羅裳)과 수군(繡裙)을 입은 기녀들이 배 좌우에 나누어 서서 대령을 하고, 주악에 맞춰 "어부사(漁夫詞)" "월출곡(月出曲)" "이선악곡(離船樂曲)"을 차례로 부른 다음, 축복을 하며 배가 떠나. 이는 불규칙 장단에 수심가형의 가락이 주가 되어 비장한 느낌을 주지."
아버지는 말을, 잠시 쉬었다, 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래. 중국에 사신이 갈 일이 없어진 다음부터는 뱃사람들의 노래로 바뀌어 갔다고 봐. 그것이 날개를 달아 민간의 노래에 편입된 게 아닌가 싶어. 민요란 민초들이 팍팍한 삶을 이어가기 위한, 다시 말해, 끊임없이 닥쳐오는 삶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풍전등화 같은 존재에 대한 탈출의 몸짓이었겠지. 특히 서도 민요가 그래. 관서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지 않았잖아. 따라서 왕조에 대한 불만도 많았지."
"유형지이며, 수탈지인, 호남 지방 민요도 그렇지요. 민요는 기층민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요. 착취와 억압 속에서 가난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살았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구슬프고 애상적인 가락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맞아. 하지만, 그들이 마냥 슬픈 가락만 읊조리면 인생은 더욱 서러워질 게 아냐. 그런 희망 없는 삶은 그야말로 형벌이지. 하여 다시, 삶의 질곡과 가난을 떨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로 한 거지."
"배따라기도 그래서, 구슬픈 가락이나 가사가 죽 이어지다가, 설움과 아픔은 어느덧 간 데 없고, 가락이 빨라지며 삶의 기쁨과 풍어를 기원하는 쪽으로 바뀌는군요. 더구나 후렴구는 "에 지화자자 좋다"로 되고 말씀예요."
"그렇지. 평양에서의 학창시절은 참 좋았어. 그곳은 동쪽으로 대동강, 서쪽엔 보통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지. 평양성, 금수산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 또 금수산 모란봉, 그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있는 부벽루 등에, 얼마나 많은 추억을 흩뿌리고 다녔던가. 언제나 한번 가 보려나……."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는 다시, 소리를 갑자기 내던지듯 내질렀다가, 슬며시 입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렁저렁 행성하여 가다가 좌우의 산천을 바라를 보니
운무는 자욱하여 동서 사방을 알 수 없다누나
영좌님아 쇠 놓아 보아라
평양의 대동강이 어데 바로 붙었나
"배따라기"는 아버지가 늘 입에 달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이 세상은 폭풍과 해일의 바다요, 당신은 한국동란과 그 이후 과도기의 험난한 여정에서, 우리 가족이라는 배의 선장이었지. 아버지는 안전운항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그리고 분노와 체념 사이를 오가며, 또 얼마나 가슴을 불태웠을까. 그것은 끝내 내장에서 시커멓게 타 암으로 자랐지. 갑자기 아버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한 지 오래였다. 일본에서 아버지를 찾아 현해탄을 건넌 어머니(가네무라 히지꼬) 역시 그렇다. 나도 이제 고희(古稀)를 넘어섰다. 얼마 안 있으면, 부모의 곁으로 갈 터였다.
나는 지금, 얼마 전 서로 연락이 닿은 북한에 있는, 이복 오빠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당신의 뼈라도 고향에 묻기 위해서. 아버지의 정혼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애오라지 아버지만을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거였다. 모두 참 힘들게 산 분들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아산 설화산 밑, 외암리를 떠났다. 아버지가 왜 인생의 마지막을, 설화산 자락에다, 둥지를 틀었던가. 언젠가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고향과 닮아서……."
"박천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곳은 평안북도 남부에 있는 군이지. 북부는 태천군, 동부는 연변군, 서부에 운전군이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충적평야와 언덕 및 산지로 되어 있지. 청천강과 대령강 하류 연안은 넓은 평야를 이뤄."
"산은요?"
"300m 내외의 청룡산, 봉린산, 수리봉 등 비교적 낮은 산이 있는데,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수리봉 근처야."
"여기처럼 경관이 아주 수려하겠네요."
"맞아. 대부분의 지역이 3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를 이루고 있지. 청천강 본류와 대령강이 합류해 남부 경계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어."
"여기의 물들이 삽교천을 지나 서해로 흘러들 듯이 말씀이군요."
"아산처럼 농경지도 많지. 여기 외암리 민속마을은 500년 이상을 예안 이씨 집안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야. 우리도 예안 이씨잖아. 영암댁, 참판댁, 외종가댁 등 10여 채의 기와집과 50여 채의 초가가 원형 그대로 긴 세월을 지키고 있지. 자연석만으로 사람의 눈 높이보다 낮은 "막돌허튼쌓기"한 길고 긴 돌담이 이어진 고샅길이 정겨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녘에 두고 온 고향이 또한 그렇다는 말씀이군요."
"아무렴. 외암리 마을 뒤로 설화산(441m)이 우뚝 서 있고, 앞에는 냇물이 흐르지. 큰 강은 아니지만, 하여튼 고향처럼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야. 설화산은 문필봉이라고도 불리지."
"문필봉은 살화산이 꼭 붓끝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요."
"고향의 수리봉처럼 그 기세가 매우 영특하여 많은 문필가를 배출하였지. 설화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나직한 산들, 넉넉한 들판이 눈에 확 들어와. 인심도 그만이고. 꼭 고향 산을 오르는 느낌이야. 어쩌다 산중에서 누구를 보면, 꼭 고향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어. 북쪽의 부모형제가 산 속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툭 튀어 나와, 나를 맞아 줄 것만 같아. 남한의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던, 나는 결심했지."
"여기에 터를 잡자고요?"
"정착을 하자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흙을 주무르기 시작했어. 고향에 남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처럼. 흙에는 어떤 거짓말도, 그리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그놈에 "사상"이라는 것도 없었지. 그저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줘. 나머지는 흙 아닌, 사람들의 몫이지."
"흙에서 삶의 안정을 찾은 것이네요."
"아산 외암리, 참으로 고마운 땅이야. 하지만 고향은 아직도 멀어. 이승을 하직하면, 혼백이나마, 거기로 찾아 갈려나……."
"아버지 생전에 꼭……."
"……."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끝내 고향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지웠다. 나는 가끔 정신이 오락 가락하곤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보였다. 기억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느 부분은 세세한 부분까지 확연히 떠오르는데, 다른 부분은 필름이 끊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약간의 치매증세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몰랐다. 내가 잊고 싶은 것을. 또한 현실 저편의 숨은 것까지 보고 있다는 것을.
열차는 지금 막 개성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얼마간 달리면 바로 북녘인데, 양쪽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시간을 철책으로 막고, 서로 감시의 눈을 번뜩였단 말인가. 이념인가. 정권유지인가. 아니면, 강대국의 이해관계인가. 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의 결집체라 했지. 그런데 양측은 왜 이제야, 아버지가 세상을 바꾸고도 한참 후, 자유스러운 왕래를 허용했단 말인가. 그것이 더욱 한스러웠다. 아버지의 노래는, 아직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를 소요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고향 박천에 당도할 때까지 계속 그럴 터였다. 언젠가 다락에서 몰래 읽은 아버지가 피눈물로 꾹꾹 눌러 쓴 비망록, 그리고 어쩌다 들려주던 당신의 한스러운 삶의 궤적과 함께.
연파 만리 수로 창파 불리워 갈 제
뱃전은 너울 너울 물결은 출렁, 해도 중에 당도하니
바다에 저라 하는 건 노로구나
쥐라고 하는 건 돌아로구나
조부는 진남포를 거점으로 무역선을 부리고 있었다. 부친은 동경 유학을 마치고 이 바다 저 바다로 떠돌면서, 망국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한동안 조부를 따라 배를 탄 적이 있었다. "배따라기"는 그때 조부에게서 배웠다. 조부는 많은 부를 축적해, 고향 박천에 큰집을 지어 가족을 옮겨 살게 하고, 자신은 바다로 떠돌았다. 부친은 평양에서 하숙하며 김일성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에서는 조부의 배를 징발하여, 전함으로 개조했다. 조부는 가족이 있는 박천으로 갔다. 부친도 전쟁으로 휴학하고 귀향했다. 조부가 봉투를 내밀었다. 부친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뭔가요."
"징집명령이야."
"총알받이나 다름없을 텐데요……."
"그러게 말야……."
"어쩔 도리가 없군요……."
"일단 응해야 하겠지……."
인민군에 입대한 부친은 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낙동강을 건넜던 인민군은 다시 코앞까지 되밀려 오고 있었다. 전투에 함께 참가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시체 구덩이를 해치고 나온 부친은, 살길을 찾아야 했다. 다시 전선으로 가면 틀림없이 죽은목숨이었다. 야음을 틈타 고향으로 갔다. 미군이 자신의 집을 점거하고 있었다. 미군은 마땅히 주둔할 곳이 없자 조부의 집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한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 정부에 배를 내준 조부를 행랑채에 강금했다. 공산당원인 조부를 북한의 골수분자로 본 때문이었다. 게다가 큰아들은 공산당 간부였다. 조부의 집은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부친은 영어로 말했다.
"인민군이 싫어 탈영한 사람이다."
미군 취조관이 받았다.
"인민군이 싫어 탈영했다?"
"그러니 믿고, 아버지 대신 나를, 붙잡아 둬."
"그래……?"
취조관은 부친의 취조 과정에서 깜짝 놀랐다. 부친은 영어와 일어에 아주 능통했다. 부친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생이었던 것이다. 미군은 부친이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미군은 김일성 대학생이었고 인민군이었던 부친을, 반신반의하며 조부 대신, 인질로 삼았다. 명색이 통역병이었으나 사실은 포로의 신분이었다. 부친은 하와이 출신 미군 스미스 대령과 항상 동행하게 되었다. 그가 가는 자리면 어디나 따라갔다.
전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조부의 집은 다시 임시 공산당사가 되었다. 조부의 집은 미군 사령부로 쓰이던 곳이고, 부친은 인민군에서 탈영하여 미군을 도운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종전이 될 거고, 그러면 부친은 남한이나 북한 어디에서건, 총살감이라 생각되었다. 입장이 참 묘하게 되었다. 부친은 양쪽을 모두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 남한으로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작정하였다. 부친은 조부모를 찾았다.
부친은 말했다.
"이제 그만 고향을 등져야 할 것만 같습니다."
조부는 잔뜩 흐린 하늘을 보았다.
"인민군에 붙잡히면 바로 총살이지."
조부는 조모를 보았다.
"현금과 값나가는 패물을 모아, 가방에 채워."
"……."
조모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묵묵히 조부의 말에 따랐다. 부친은 잠시, 정혼녀의 집에 보내졌다가, 수리봉 기슭의 굴에 숨겼다. 정혼녀는 밤이면 부친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그리고 사랑을 불태웠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의 강도가 어떠하였겠는가.
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자 부친은 남쪽을 향했다. 조모는 아들 하나 낳고, 오랫동안 뒤가 없어, 백일기도 끝에 부친을 낳았다. 40이 넘어서였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 했겠는가. 그런 아들을 사지로 보내며, 또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아무튼 아버지, 이한국, 당신의 고난에 찬 백척간두의 삶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만났더니 뱃삼은 갈라지고,
용총 끊어져 돛대는 부러져 환고향할 제
검은 머리 어물어물하여 죽은 자이 부지기수라
할 수 없이 돛대 차고 만경창파에 뛰어드니
이한국은 남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인민군, 국군, 미군 모두를 피해서였다. 어느 쪽에 붙잡혀도 자신은 죽은목숨이라 생각되었다. 여기 저기 그들 적이 산재해 있었다. 이한국은 야행성 짐승이 되어, 낮에는 동굴이나 숲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별을 보고 남으로 향했다. 어느 편인지도 모를 총탄이 비질하듯 주위를 쓸고 간 적이 몇 번이었던가. 바로 코앞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흙과 쇳덩이의 분수가 허공으로 떠올랐던 적은, 또 얼마나 되었던가. 이한국은 허기가 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뱀이고 개구리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그리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잠을 청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이한국은 몹시 피곤하여 큰 나무 옆에 몸을 눕혔다. 꿈과 현실 사이를 소요하다, 설핏 잠이 들었다. 한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지팡이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를 파 보아라."
"어디를 말씀인가요?"
"저 큰 소나무 옆."
"알겠습니다. 헌데,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
노인은 아무 말없이 바람결에 휙 사라졌다. 이한국은 극심한 갈증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당신은 노인이 지적한 곳을 살펴보았다. 몇 백년은 좋이 되었음직한 산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캐어 머리 부분에 고여 있는 물은 마시고, 뿌리까지 으적으적 모두 씹어 먹었다. 잔뜩 늘어져 있던 온몸에 힘이 고이고 있었다. 이한국은 벌떡 일어나 걸었다. 다리가 탱탱해지고 있었다. 당신은 천신만고 끝에, 부상 하나 당하지 않고, 한탄강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 영어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손들어!"
"살려줘!"
이한국은 엉겁결에 한국어로 소리지르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어둠 속에 있는 저들은 미군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더구나 저들이 후퇴하던 스미스 대령의 부하들이라면. 자신은 그들의 진중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허겁지겁 남행을 결행한 부대였다. 자신은 중공군과 인민군이 들이닥치자 그들을 피해 도망을 한 거였다. 그렇다면 혹시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손전등이 자신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살 운명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체포했던 미군은 스미스 부대였다. 다시 취조가 시작되었다. 별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한 미군은, 이한국을 다시 통역병으로 채용했다. 역시 포로의 신분이었다. 그것만해도 다행이었다. 이한국은 부모가 챙겨 준 가방을 자신만이 아는 곳에 은밀히 숨겼다.
이한국은 자신을 향해 허부죽 웃었다.
"이것은 언젠가 내 삶의 행로에 큰 힘이 되겠지……."
미군은 아무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에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한국은 그때마다 가방을 적절한 장소에 은닉했다. 그것은 종전이 되거나, 아니면 적절한 때에 미군으로부터 벗어나, 어렵고 혼란한 이 시대를 지탱해 가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일 터였다.
미군도 물자의 보급이 끊어져 굶주렸다. 그러자 소나 돼지의 내장을 먹는 한국인을 비웃었던 저들도 고기 껍질, 내장, 버터 등속을 섞어 끓여, 환장한 듯 잘도 먹었다. 사람이란 모두 다를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이한국은 항상 통역병으로 스미스 부대장과 참모들을 따라다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총알밥이 될 염려는 없었으나, 자신의 입장이 그런지라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하였다. 여기저기서 미군이나 국군의 정보원이 자신에 대해 감시의 눈빛을 번뜩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국군이든, 인민군 포로이든, 쓸데없는 말을 자제했다. 그저 미군이 시키는 일만 했다.
미군은 후퇴를 하면서 조금만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양민도 대량으로 학살했다.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잘 판단이 안 설 때에는 포탄을 퍼부었다.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계곡이나 다리 밑에 몰아 넣고 난사를 하기도 했다. 이한국은 아무 죄도 없이 몰살당하는 동족을 보며 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추악한 전쟁은 누가 일으켰단 말인가. 빨리 이 더러운 전쟁이 종결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미군은 차로를 따라 빙빙 돌며 남쪽으로 밀렸다. 중공군은 산악을 타고 내려오며 퇴로를 차단하곤 했다. 그러다 그들에 포위되었다. 스미스 부대는 거의 전멸 상태였다. 이한국도 이때 눈을 한쪽 잃었다. 스미스는 남은 군인을 모아 후퇴를 거듭했다. 경기도 이천, 광주 등서 잠시 주둔하다가, 충주로 갔다. 거기서 휴전을 맞았다. 이한국은 시미스 대령의 배려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신은 숨겼던 가방을 찾아 들고 남한에 혼자 내팽개쳐졌다. 부모님과 정혼녀의 환영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으로는 한 발자국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입장으로, 낙착되어 가고 있었다.
갈매기란 놈은 요 내 등을 파고
상어란 놈은 발을 물고 지긋지긋 찍어 당길 적에
우리도 세상에 인생으로 생겨를 났다가
강호의 어북중 장사를 내가 어이 하자나
이한국은 잠시 대전으로 가 고등공민학교 영어와 국어 교사를 했다. 당신은 미군 통역병이었지만, 김일성 대학을 다녔고, 인민군이었다.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 갔고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교재나 교안, 그리고 수업도 체크되고 있었다. 거기도 오래 있을 곳이 못되었다. 이한국은 공주, 진천 등지로 돌아다니다, 아산 설화산 밑에 집을 짓고 둥지를 틀었다. 한동안 하는 일없이 빈둥거렸다. 이한국은 사상범으로 요시찰 인물에 올라 있은 지 오래였다. 북한에 있는 형은 요직을 거쳐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어쩌다 남쪽 신문에 난 적도 있었다. 온양 경찰서에서는 더욱 호출이 잦아졌다. 북한의 형과 어떤 연락이 닿아 있지 않나에서였다. 경찰은, 무슨 돈으로 집을 지었고, 일도 안하면서 무엇으로 먹고 사냐고, 생트집이었다. 이한국은 경찰서를 출입하다가 동경 유학 시절 하숙집 주인 가네무라 씨를 만났다. 가네무라는 바람둥이였다. 부인을 일본에 둘, 한국에 하나 두었다. 가네무라는 온양에서 자전거포를 하며 한국 여자와 살고 있었다. 가네무라는 경찰서장과 친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조사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가네무라가 일본에 연락을 하였는지 딸 히찌꼬가 찾아왔다. 이한국이 일본에 유학할 때 하숙집 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녀는 몸매가 작았는데, 당차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지적인 면도 강했다. 이한국은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끌렸다. 밤이었다.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한국은 하숙집 주인 몰래 그녀와 사랑을 불태웠다. 뜨거운 여자였다. 단내를 풍기며 착착 달라붙는 그녀를 멀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거였다. 기실 가네무라 내외는 이런 내막을 몰랐다. 가네무라가 일본에 있는 첫째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가운데, 우연히 하숙생이었던 이한국의 거취를, 슬쩍 삽입했었던 모양이다. 세상 참 좁다라는 말이라도, 함께 섞어서. 히찌꼬는 이한국의 소재를 알고는 홀홀 단신 현해탄을 건넜다. 이한국은 북한의 정혼녀를 그리며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였다.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북행은 이제 물 건너간 일이었다. 곧 히찌꼬를, 정식 아내로 맞아들였다. 가네무라는 이한국에게, 이런 저런 일들을 빌미로, 자전거포상을 확장하게 사업 자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이한국은 가방에 있는 것을 대충 처분하여 장인에게 맡겼다. 장인은 그것과 자전거포를 처분하여, 어디론가 도망쳤다. 이제 집 하나와 얼마간의 패물만 남은 거였다. 장인이 행방불명되자 다시 경찰서의 감시와 조사가 강화되었다. 살벌했다. 이한국은 다시 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관악일성에 북을 두려두둥실 쳐 올리면서
좌우의 산천을 바라를 보니
산도 예 보던 산이오 물이라 하여도 예 보던 물이다
이한국은 삽교를 근간으로 소장사를 시작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조씨와 함께 였다. 소를 끌고 전국 안 가본 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운이 맞아떨어졌던지, 소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소를 수용하기 위해서 삽교에 땅을 장만하기로 했다. 통장 관리를 조씨에게 믿고 맡겼다. 이한국은 토지를 계약하고, 중도금을 치르기 위해, 조씨를 찾았다.
이한국은 말했다.
"계약금 때문에, 통장을 줘야 해."
"맡겼는데."
"누구한테?"
"장터, 예산댁에."
"예산댁?"
"술집 하는 여자 말야."
이한국은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삽교로 돌아오면 조씨는 집에도 안 가고 과부인 예산댁네서 죽쳤다. 이한국이 "여우 같으니 멀리하라"고 충고를 해 오던 그녀였다. 하관이 빠른 얼굴에 분을 덕지덕지 바른 예산댁은 갈 데 없는 창부형이었다. 그녀는 갖은 교태로 조씨를 녹이고 있었다. 이한국은 조바심이 났다.
"빨리 가 보자."
"서두를 것 없어. 맡긴 통장이 어디 가나."
둘은 예산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술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예산댁은 줄행랑을 놓은 거였다. 온양 경찰서를 비롯하여 다른 경찰서에도 몇 군데 신고를 했다. 예산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이제 무엇으로 가족을 부양한단 말인가. 이한국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한국은 남은 소 50마리로,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다. 조씨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인지 장사는 안하고 연일 술만 마셨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돈과 정을 모두, 사기 당한 거였다. 조씨는 얼마 안 가 폐인이 되었다. 게다가 폐병까지 찾아 들었다. 중증이었다. 조씨는 꼬치꼬치 말라 갔다. 그러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집착했다. 조씨는 기동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한국은 조씨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권했다.
조씨는 고개를 가로 젖었다.
"날 받아 줄 사람은 없어. 가정을 위해, 뭐 한 게 있어야지……"
"그럼, 우리 집에."
"미안해서……."
"자, 가자고."
이한국은 조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갔다. 김절자로 개명을 한, 가네무라 히찌꼬는, 안색을 찌푸렸다.
이한국은 아내를 달랬다.
"필요할 때는 가까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하면, 못쓰는 겨."
김절자는 마지못해 응했다.
"알았어요."
김절자는 외간 남자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병수발을 다했다. 그러나 조씨는 곧, 세상을 바꾸고 말았다. 조씨의 집에 연락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조씨의 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한국은 조씨를 설화산 자락에 묻었다.
이한국은 혼자 소를 끌고 장을 떠돌았다. 그러다 예산에서 도고로 오는 고개의 낭떠러지에서, 소들과 함께 굴렀다. 대부분의 소들이 도망을 쳤다. 겨우 20여 마리만 건져, 다친 다리를 끌고, 집에 갔다. 자신은 더 이상 방랑을 그만두고, 설화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찰서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면, 그만일 터였다. 고향 박천 수리봉과 같은 설화산 자락의 흙을 만지고, 가정을 지키며, 열심히 살기로 하였다. 흙은 사상도 없으며, 사기도 없고, 자신이 일한 만큼 줄 터였다. 그렇게 흙에 묻혀 살다 보면, 고향에 발을 딛을 날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이한국은 한 마리만 남기고, 남은 소를 모두 처분하여, 논과 밭을 샀다. 온몸에 흙과 물을 바르고 논밭에서 살았다. 그리고 외동딸, 매화를 낳았다.
해 다 지고 저문 날에
잡새는 깃을 찾아 무리무리 다 날아들고
야색은 창망한데 갈길조차 희미하고나
나, 매화는, 한여름, 설화산 자락의 진초록 속에 묻혀 있었다. 꽃들도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활기차게 피어 있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매앰- 매앰- 맴-, 매미의 울음소리가 다소 어지러웠다. 그 속에 각종 산새들의 지저귐도 들렸다. 나는 아직 그 새들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깃털이 노란, 빨갛고 초록인, 꽁지만 붉은, 그런 식으로 분류할 뿐이었다. 새들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나는 새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새들이 있는 나무 근처에서 발길을 멈췄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날아가지 말고 나하고 놀자."
새들은 웬일인지 내가 다가가자 날개를 퍼덕이며 어디론가 날아 몸을 숨겼다. 다소 섭섭했다. 저 새는 내가 싫은가. 아니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가. 나는 뭔가 큰 것을 잃은 것만 같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 자리에 털부덕 주저앉았다. 눈가에 물기도 조금은 배어 있었다. 뇌리에 문득 어제의 일이 번개처럼 휙 스쳤다. 저녁 무렵이었다. 해가 산너머로 조금씩 잠기어 들고 있었다. 늘 그러하듯 구름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런데 엄청나게 커다란 구름 하나가, 오색으로 영롱했다. 얼마 후, 구름의 문이 열리며 시녀들로부터 호위를 받는 한 예쁜 여자가 나타났다. 틀림없는 여왕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우며 나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오라는 손짓을 했다. 너무도 선명했다. 절대 환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가 산을 완전히 넘자, 구름은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귀가하여 부모에게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부모는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래, 우리 공주님은, 꼭 그런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노름꾼인 남편을 잘못 만나, 화가의 꿈을 중도에서 접고, 힘들고 외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모, 특히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훌륭한 화가로 대성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던가. 아버지는 소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다. 그런 아버지는 내 삶의 푯대이기도 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도 이 세상을 견뎌 왔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냐. 나는 이를 악물고 자식을 키웠다. 지금 그들은, 모두 제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건실히 담당하며, 잘 살고 있다. 그 징그럽던 남편도 이제, 이승을 하직하고 없다. 남편은 아버지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던가. 아무 잘못도 없는 아버지가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돈을 내어놓으라고. 오늘 따라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아버지는 혼이나마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갔을까. 기차는 평양을 지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는, 차창 너머로, 파도에 부침하는 배처럼 가물거렸다.
이렁저렁 나가다가 다행으로 고향 배를 만나
건져주어 살아를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원표귀범에다 돛을 달고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언뜻 보면 가까운 듯하면서도 아주 멀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경외감과 거부감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외모나 말투부터 확연히 차이가 났다. 설화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무지렁이 농투성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시원한 이마에 완강하면서도 단정한 얼굴, 그리고 시원스런 키가 귀공자 타입이었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과의 서먹한 사이를 좁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기교와 재치, 때로는 해학으로, 어쩌다 인정이나 도움으로, 접근해 들었다. 그러나 타성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항상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아버지는 농담이나 장난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놀리기도 했다. 그들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자신이 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그 도가 넘쳐 났다. 좀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었다. 분명히 위악적이었다. 내가 생각해 왔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어쩌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애쓰며, 울분을 삭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더욱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썼다. 아버지의 심중이나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알고 나서였다. 아버지는 이 사회나 다른 남자를 판단하는 한 잣대가 되었다. 남편은 영 아니었다. 항상 무엇에 홀려 있는 듯한 몽롱한 눈빛, 그것은 돈이 생기는 즉시, 생기를 찾았다. 그리고 노름방으로 내달렸다. 학창시절, 단 한 번의 강간으로, 임신을 했다. 아이를 지우려는 나를 살인범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대학에 그런 내용을 현수막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예식장에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아버지를 보아 참았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협력하여 나를 대학으로부터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림도 못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장사를 시켰다. 잘되었다. 그러면 무엇하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노름이란 그런 거였다. 나는 남편을 피해 친정에 몸을 숨기곤 하였다. 아버지와 더욱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때는 마츰 어느 때뇨
중추 팔월 십오야에 광명 좋은 달은 두려두둥실 밝아를 있고
항릉묘산에 두견이 울고, 창파녹림에 갈마기 울고
원정객사에 잔나비 회파람 소리
아버지는 농한기에 다시 소장사를 했다. 가정은 제 궤도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잘 지었다. 동네 사람들이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소장사도 잘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구름이 끼어 있었다. 항상 무엇에 좇기는 인상이었다. 아버지가 왜 그래야만 했는가. 그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찾아 장터 한쪽에 있는 쇠전으로 갔다. 설화산 기슭에서 온양 시장까지는 10리가 조금 넘는 거리였다. 어쩌다 트럭이라도 한 대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이는 구불텅한 길을 따라, 나는 혼자 타박타박 걸었다. 내가 소시장으로 가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데리고, 먹거리들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음식을 주로 파는 곳으로 가면서 물었다.
"오늘은 또, 뭘 사줄까?"
"아무 거나요."
아버지의 배는 항상 불룩했다. 그게 돈을 넣은, 전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과자, 사탕, 팥죽, 전, 떡, 국수, 국밥 등 그때그때 입맛에 따라, 아버지가 사주는 대로 먹어 주었다. 덤으로 연필, 공책, 지우개 등도 얻었다. 어떤 때는 선술집에도 따라 갔다. 아버지는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얘는, 내, 딸입지요."
술청의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지껄였다.
아버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나를 자세히 보았다.
"꼭 살아 있는 인형 같아. 어쩜 저렇게도 예쁠까?"
아버지는 나를 품에 안았다. 아버지의 가슴에서 잘 쑨 쇠죽 같은 구수한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동네에 가 아버지가 사 준 것들을 들고 다니며 자랑을 했다. 이거 우리 아버지가 사줬다.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버지 주위에서, 어떤 심상찮은 조짐을 읽기 시작했다. 집안에 불길하고 음산한 음조의 노래가 슬그머니 넘보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가끔 집 주위를 배회하는 검정 양복 둘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시장에도 가끔 나타나곤 했다. 어쩌다 쇠전 아버지 근처를 서성이기도 하였다. "검정양복"들은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아버지의 정체를 분명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그 "검정양복"들을 따라 다시 온양경찰서 출입이 잦아졌다. 아버지의 형은 북한에서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다. 물론 이런 내용을 확실히 안 것은 좀 더 나이를 먹어서였다. "검정양복"들이 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아버지를 감시하는지도.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자신이 장에 나오면 단순히 딸을 보고 반가워 한 것만은 아님을 눈치 채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와의 평범한 일상을 남에게 의식적으로 내보이며, 자신은 이렇게 한 범부에 불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를 통해,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막연한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애쓴 것일 터였다.
"검정양복"의 출현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오늘 아버지는 어머니와 뭔가 긴밀히 속삭였다. 부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늘은 우리 셋이 함께 장에 가자."
"정말요?"
늘 하던 재주도 멍석을 깔아 주면 놀기 싫다고 했던가. 나는 왠지 오늘, 시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기분도 안 좋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단지 "기분"일 뿐이었다. 부모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목소리를 키우며 되물은 거였다. 목 졸린 음성이 되고 말았지만.
어머니가 덧붙인다.
"장에 가서 학용품과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좋아요……."
아버지는 내가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사주겠다고 한 것들을, 먹고 쓰다 남을 정도로 구입해 줬다. 나는 배를 두드리며 먹었다. 학용품만은 애오라지 근검절약을 내세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껴 썼다. 연필은 손에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공책은 겉장서부터, 도화지는 뒷면에도, 크레용이나 지우개는 바스러질 때까지. 나는 밤을 낮 삼아 열심히 읽고, 쓰며, 그렸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던가, 학업성적과 미술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당연히 학용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상 서랍에는 아직도 그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늘 어머니가 참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 쪽으로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왜 저러실까? 혹시 그 "검정양복"들 때문에? 그렇다면 함께 동행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어떤 사명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시장 초입에 들어서며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도 그랬다. 나는 더욱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정양복"들이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음에 내 눈에 띄면, 다시는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한 방 먹여야지. 나는 양손에 오진 힘을 박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머니가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우리 뒤를 밟는 사람 없지?"
나는 등을 돌리고 두리번거렸다.
"없어요."
"있으면 말해라."
"예!"
"그만해. 아이 주눅들게 하지 말란 말야."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어머니는 무르춤해졌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걸었다. 아버지는 지금 어머니에게 화를 낸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우리는 난전 팥죽집의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팥죽이 세 사발 나왔다. 그것으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두 "검정양복"이 다가왔다. 그들은 온양경찰서 방첩과 형사들이었다.
왼쪽 뺨에 칼자국이 있는 "검정양복"이 말했다.
"이한국 선생, 오늘은 가족끼리 장사를 나온 모양이군. 아직 저쪽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소. 있으면 말해요. 안 그러면 좋지 않은 일이 연달아 발생할 거요."
칼자국은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버지는 발딱 일어났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이오!"
"아, 아, 그만, 애 앞에서, 화는 그만 내시고……."
칼자국은 다른 "검정양복"에게 가자는 눈짓을 했다. "검정양복"들은 자리를 떴다. 아버지는 무슨 벌레라도 씹은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정수리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다시 불끈 쥐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정양복"들을 향해 달렸다. 나는 그들 앞을 막아섰다.
나는 다리를 딱 벌리고, 오지게 쥔 주먹을, 양쪽 허리에 척 붙였다.
"우리 아빠가 사람을 죽였어요? 남을 못살게 했어요? 아저씨들을 괴롭혔어요? 왜 매일 우리 아버지 근처를 맴돌며 못살게 굴어요? 아저씨들 말 좀 해봐요!"
"검정양복"들은 기습을 받고 입만 뻥 벌리고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허허, 웃었다. 칼자국이 먼저 발길을 옮기며 한 마디 씹어 뱉었다.
"참, 피는 못 속인다더니……."
나는 이때부터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말을 아끼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무심결에 던지는 어떤 말이라도 남에게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각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느 누가,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냐?"
라고 물으면, 자극을 받은 조개처럼 입을 다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언젠가는 담임 선생이 반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자랑을 해보라고 시켰다. 애들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나는 다만,
"우리 아버지는 농사만 져요."
그게 다였다. 나는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우선 마음의 문부터 닫고 듣는데 익숙했다. 당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외로움을 공부와 미술로 극복해 갔다. 달리 말하면 어린 나의 마음에 한이 쌓여 가는 것이며, 언젠가는 폭발하고야 말 시한폭탄들을 하나씩 내적해 두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어디에서고 그것은 터지지 않았다. 어떻게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이, 거대한 톱니바퀴에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아버지처럼 꾹꾹 눌러 참으며, 많은 세월을 속수무책 버텨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날 날이 멀지 않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누구든 한 달만, 사법당국에 어떤 혐의점이 있어, 감시당하거나 쫓긴다고 추정해 보자. 가끔 불려 가 취조를 받는다 치자. 그러면 집안의 개나 닭, 또는 쥐까지도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생각할 거다.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일까. 손에 어떤 일이 잡히겠는가. 게다가 고향산천과 부모와 형을 잃었다. 지척에 두고도 가볼 수 없다. 동경 유학생 아버지는 그런 것들을 잊기 위해서 농투산이가 되어 죽살이 땅만 팠다. 그러다 북한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아버지는 경찰서 출입이 더욱 잦아졌다. 평생을 누군 지도 모를 사람들이 놓은 덫에 걸려 그렇게 살았다. 전쟁터에서 한쪽 눈을 잃고, 종전 후에는 고문으로 손톱이 빠지고, 나이 사십이 안되어 이미 백발이 성성한, 아, 가엾은 우리 아버지.
나는 설화산의 암울한 추억을 지웠다. 눈가에 묻은 물기를 손수건으로 찍어내었다. 열차는 제 갈 길을 향해 바삐 달리고 있었다. 얼마 후면 박천에 닿을 거였다. 거기서 버스로 갈아타고 가면, 수리봉이 나올 터였다.
가뜩이나 심란한 중에
새북 강남 외기러기는 옹성으로 짝을 잃고
한수로 떼떼떼 울면서 감돌아드는데
다른 생각은 제 아니 나고
동동숙 동동식하시던 친구의 생각에 눈물 나누나
아버지는 머리로 농사를 지었다. 그때는 대중 전달 매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예전부터 해 오던 대로 논밭을 경작했다. 아버지는 발전기로, 호스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어 연결해, 채소밭에 물을 공급했다. 수박 농사도 남달랐다. 다른 집은 한 평에 수박 한 통 꼴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너 통은 좋이 챙겼다. 품질도 좋았다. 대부분 수박씨를 띄엄띄엄 심었다. 아버지는 수박씨를 촘촘히 심고 곁가지를 계속 쳐주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수확이 많았다. 아버지는, 남들 1000평 농사를 3000평으로, 지은 셈이었다. 모두 땅과 호흡해 살며 터득한 이치였다.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말했다.
"농사가 어디 장사 속과 견줄 수 있던가. 농사란 성질을 부려서도, 꾀를 부려 대충해서도 안되는 겨. 성실히 하면, 그대로 돌려주는 게, 흙이여."
어머니가 꼭 후렴을 달았다.
"저 사람, 이제, 흙도사 다됐어."
아버지는 농사일을 끝내면 동네 초입에 있는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배따라기" 창을 하며 "아바이", "어마이"를 목놓아 불렀다. 그 즈음에 나는, 아버지의 비밀 서재, 다락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거기엔 영어, 일어, 한문으로 된 서적이 많았다. 그것들이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상서나 철학서였음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국문으로 된 고전소설이나 시집도 있었다. 아버지가 쓴 시들, 그리고 비망록과, 고향에서 찍은 것들이 주종을 이루는 희미하게 바랜 흑백 사진첩도 있었다. 그것들에게서 나는 곰팡이 냄새가 섞인 구수한 향기가 좋았다.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것들을 읽었다. 다락방은 나의 작은 왕국이기도 했다. 거기서 공주가 되고, 왕자를 만나며, 왕비가 되고, 화가도 되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아버지의 비애와 고통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끔 다락문을 열고,
"우리 공주님, 재미있어?"
하고는 그만이었다. 나의 왕국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서일 터였다. 경찰서에서 "검정양복" 둘이 다녀간 후였다. 그들은 다락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나를 몰캉스럽게 밀어붙이며 책을 모두 꺼내 불 태웠다. 비방록과 시, 그리고 사진첩까지도. 불꽃은 어둠을 잡아먹으며 타올랐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도 핥았다. 아버지는 짐승처럼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펜이나 책을 잡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간첩도 아니고, 반미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올곧고 진보적 성향이 다소 강한 편이었을 뿐이다. 또한 탈영한 인민군이었으며, 김일성 대학 중퇴자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만은 꼭 지키며 산 분이었다. 적당히 타협했으면, 그렇게 힘든 삶을 살지 않았어도, 될 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친일, 우익, 좌익을 갈아타며 득세를 하여 부귀영달을 누렸던가. 아버지는 그것만은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격 탓이었다. 달리 표현하여, 자존심이 강한 때문이었다.
이렁저렁 죽은 사람 동리 찾어가니
죽은 사람의 동생이며 일가친척이 모두 다 나와
파선 뱃사람 온단 말 듣고
선창머리 내달으며 뱃전을 부여잡고
애곡을 불러라 통곡을 하며
영좌님과 화장 아해는 천행만행으로 살어 왔거니와
우리 당손 아바지 물결 쫓아 흘러를 갔다네
애고 애고 설리 울 적에
백일이 무광하야 산천 초목에 눈물이 나누나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는 설화산 자락에 가 있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오라고 해서였다. 아버지는 2년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위에 혹이 생겼다.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재발하여 임파선까지 침범하였다. 2차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암세포가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이지, 강박감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슴에 쌓인 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 모두의 결합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은 더욱 카랑카랑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자식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아버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에 꼭 가 보셔야 할 텐 데요."
"다 틀렸어."
"지금 지뢰 제거 작업 끝내고, 철도 개설을 하잖아요."
"양쪽의 농간일 따름이야."
"이번만큼은 한번 믿어 보세요."
"혹, 죽어서라면 모를까……."
"……."
나는 몸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는 임진강 성묘단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산가족 신청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더불어 여기에 있는 가족에게 무슨 사단을 부를까 봐 였다. 아버지는 몸 속에 암을 키우며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어쩌다 의식의 끈이 삶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혀 타의에 의해, 내가 탄 월남선(越南船)은, "배따라기"의 음조만큼이나 아프고 서글펐지. 또 고통스러웠어. 나를 보내는 사람들도 그랬지. 정혼녀는 배웅을 하며 속으로 "배따라기"를 수도 없이 불렀을 거야. 부모들도 그랬을 터이지. 그리고 정혼녀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나를 애타게 그리며, 또 얼마나,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힘이 드는지, 말을 잠시 쉬었다, 계속했다.
"납빛 얼굴에 검은 망토를 걸친 저승 사자들이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연속일 테니까. 죽음은 "돌아가는 것" "환원" "부활" 등을 의미하지 않아? 나는 죽음을 통하여 잃은 것들을 다시 찾을 수가 있을 거야. 저 북녘의 산하와 지인들, 그리고 거기에, 아니 가슴에 묻어 두었던, 북쪽의 내 가족들을. 그리고 정혼녀와 그녀의 복중에 있었던 내 자식을…… 나 때문에, 평생을 가슴 졸이며 힘겹게 산 저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아버지는 숨이 턱턱 막히는 모양이었다.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래가 갸르릉거렸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어머니와 나는, 뭔가 준비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삼년만에 집이라고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니
당손 어마니는 당손 아버지 삼년생 마즈막 가는 날이라고
갖은 제물 차려놓고 제 지날 적에
한잔 부어 놓고 두잔 부어서 참배를 하고
석잔 부어 퇴배 연 후에
그 애 아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여부는 알 수 없어도
그 애 아바지 혼신이라도 있거들랑
술 한잔이며 밥 한술이라도 흠향을 하소서
이리 설리 울 적에 방문 열고 들어서니
열차가 끼이익, 몸서리를 치며 멎었다. 박천 역사를 빠져나가 수리봉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렸다. 이복 오빠의 마을이 가까워 왔다. 사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수리봉은 꼭 설화산 같았다. 고향에라도 온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왜 설화산 자락에 터를 잡았는지 이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주위의 풍광도 비슷했다. 수리봉 기슭에 도착했을 때에는,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만상을 포박해 들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오빠의 집을 물었다. 오빠는 오늘 작고했단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허망했다. 나는 오빠네 집으로 향했다.
또 정신이 가물거렸다. 오빠네 집 문에는 "謹弔(근조)"라 쓴 등이 달려 있었다. 문을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랐다. 방안에는 아버지가 북을 두드리며 어떤 남자와 창을 하고 있었다. "배따라기"였다. 그 앞에서 두 여인이 춤을 추었다. 분위기가 참 좋아 보였다. 그들을 자세히 보았다. 하나는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부모의 혼은 벌써 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임종일에 한 말이 생각났다. 혹, 죽어서라면 모를까……. 아버지는 "죽어서"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온 거였다. 이제 당신들의 유골만 이쪽으로 옮기면 될 터였다. 다른 여인은 어머니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였다. 저 남자와 이 여자는 누구일까?
아버지가 앉은 채로 말했다.
"내 정혼녀와, 네 이복 오빠란다."
어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인사드려라."
나는 손바닥을 펴 부모를 가리켰다.
"저분들의 딸이에요."
아버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한가족이 모두 만났으니, 한판 걸직하게 놀아 보지."
어머니가 받았다.
"그럽시다."
나는 스스럼없이 그들 속에 용해되었다. 어느덧 나의 입에서는 "배따라기"의 끝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평화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목청을 더욱 높여 갔다. 수리봉의 부엉이가 설화산에서처럼, 부엉-! 부엉-!, 뻐꾸기가 뻐꾹-! 뻐뻑꾹-!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한쪽 발을 들고 양팔을 올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의 몸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신명을 내기 시작했다.
울든 당손 어마니는 화다닥닥 뛰어서 달려를 들며
섬섬옥수를 부여잡고 애곡을 불러라 통곡을 하며
그 애 아바지 나간 날로 분수하며는
오날이 대상 마즈막 날이외다
죽었나 살았나 죽었나, 혼신이 왔나요
역신이 왔나요, 신의 신체가 왔나요
일희일비하야 나삼을 부여잡고 애곡을 불러라 통곡을 할 제
부모님이 나앉으며 하시는 말쌈
일후일랑 밥을 빌어다 죽을 쑤어먹을지라도
뱃사람 노릇은 다시 하지 말잔다
윤회윤색은 다 지나가고 황국 단풍 다시 돌아오누나
- 에 지화자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