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반(謀反)
오상원
4279년 늦가을, 해방 만 일 년의 환희가 혼돈된 갈등 속에 기울어져 가던 어느 날 저녁. 커다란 벽보가 신문사 게시판마다 나붙고, 가는 곳마다 커다랗게 쓴 먹글씨 위에 수없이 줄을 긋고 내려간 붉은 잉크의 무질서한 자국이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벽보를 급히 읽어 내려가는 의문에 가득 찬 시민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리고 불안한 듯 서로 말없이 얼굴들만 마주 보고 있었다. 호외! 호외! 네모진 종잇장은 특호 활자를 싣고 가두에서 가두로 쏜살같이 퍼져가고 있었다.
여기는 어느 뒷골목에 들어않은 조그만 선술집, 술 취한 실없는 친구들이 문을 나서기가 바쁘게 벽에 대고 오줌을 흘린 탓인지 구석지마다 해가 바뀌어도 축축이 습기가 떠돌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고 있다. 아직도 시간이 이른 탓인가, 호젓하다. 다만 삼십이 넘어 뵈는 두 남자가 아까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무언지 조용히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틈틈이 정객들의 이름이 그들의 입 사이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 정담(政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과는 달리 테이블을 하나 건너서 이쪽 구석지에 혼자 않아 술을 마시고 있던 25,6세 가량의 청년은 자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또 술잔을 훅 들이키곤 하는 품이 보기에도 초조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청년의 눈가에는 일종 불안한 그림자가 이따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삼팔선 철폐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야 돼.
마주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던 둘 중 키꼴 장대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술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즉 문질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고 움직여야 하거든. 지금 삼팔선 철폐 운동을 극구 주도하고 있는 자들 말이야. 실은 겉으로는 그러지만 그들 중에는 실지 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 삼팔선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자들도 있거든. 특히 이것은 좌익 계열 중에 농후한데 말이지, 결국 자기들의 세력 기반을 어느 정도 만들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거거든.
둥근 얼굴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눈을 가진 상대방은 그 어울리지 않는 눈처럼 음성도 가늘었다.
그러나 그런 자는 그 즉시로 해치우면 되는 거야.
가느다란 눈을 가진 상대방은 보기에도 날카로이 얼굴을 찌푸렸다.
테러가 정치의 전부는 아니야. 정치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한 요소일 뿐이지. 그것도 이용을 위한 요소일 뿐이야.
그 순간 이쪽 구석지에서 술을 먹고 있던 청년이 힐끔 그들을 한 번 노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어둡게 흐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술집 시근부리 아이가 네모진 종이쪽지 한 장을 들고 헐레벌떡거리면서 뛰어 들어왔다.
아저씨, 큰일났어요. 길거리마다 사람들이 막 웅성거리고 야단이에요.
주인 할아버지가 주춤거리며 종이쪽지를 받아들었다. 술을 먹고 있던 삼십이 넘어 뵈는 두 남자도 고개를 들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주인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종이쪽지를 읽다 말고 훅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모아가고 있던 가느다란 눈을 가진 친구가 곧 그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읽었다. 키꼴이 장대한 친구도 곧 따라 읽었다. 호외였다. 그들은 호외를 다 읽기가 바쁘게 거의 충동적으로 그것을 꾸겨 쥐었다.
아까운 인물이 또 하나 죽었군!
잠시 그들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긴장이 그들의 얼굴을 가로 덮고 있었다.
누가 쏘았을까?
물론 적대방이겠지. 알 수 있어. 결국 그자들일 거야.
그러나 잠잠히 생각에 잠겨가던 눈이 가느다란 친구는 곧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드시 적대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거야. 암살이란 반드시 정적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가장 긴밀히 손잡았던 쪽일지도 모르지. 조건도 유리하거든. 자기네가 죽이고 나서도 표면적으로는 최대의 애도를 표시하고 나오는 거니까. 결국 민중만이 속는 거지.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거거든…….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구석지에 앉아서 혼자 술을 먹고 있던 청년이 그때 고개를 들고 힐끗 또 다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호외를 꾸겨 쥐었던 키꼴이 장대한 친구가 청년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꾸겨 쥐었던 호외를 다시 펼쳐들고 청년 앞으로 다가와서 테이블 위에다 아직 주름살이 펴지지 않은 호외 쪽지를 내려놓았다.
여보시오. 이걸 좀 읽어보시오.
그러나 청년은 호외 쪽지를 보려고도 않고 나머지 술을 쪽 들이켜고 난 다음 무표정하게 돈을 치르고는 이야기를 해온 사람에게 한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지저분하게 책상과 걸상이 흩어진 사무실, 어둠침침하고 행길가의 소음이 먼 거리를 두고 뜨음하게 들려오는 것을 보아 복 들어박힌 방임에 틀림이 없다.
자, 건배다. 인제 오겠지.
맑은 액체를 담은 투명한 유리컵은 경쾌한 음향을 남기며 서로 가벼이 부딪쳤다.
멋진 놈이야. 거뜬하게 해치워버리곤 하거든. 난 실패할까봐 몹시 초조했는데 내가 담배를 붙여 무는 순간 총성이 두 발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거야. 내가 담배를 꺼내어 물 때까지도 그 친구는 담뱃가게 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보았는지 바람 같다니까…… 그런데 이 친구가 해 이렇게 늦어…….
세모진 얼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게 날카롭다기보다는 독기가 엿보이는 이 친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시계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곧 창문 쪽으로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선 친구는 눌러쓴 중절모자를 가볍게 위로 추켜올리면서 실내에 있는 두 친구를 마주보고 고개를 한 번 끄떡한 다음 손에 들었던 신문지를 그들에게 내던졌다.
기사를 좀 읽어봐. 하여튼 만사오케이야.하고 이 친구는 또 한 번 고개를 혼자 끄떡하였다 실내에 있던 두 친구는 신문을 곧 펼쳐 들었다.
범인은 무직 청년, 의식 불명으로 배후 수사 불능. 사진은 상금도 의식도 잃고 얼굴의 형체도 갖추지 못하고 쓰러져 누워 있는 범인. 큰 제목과 사진 설명만을 급히 읽어 내려가던 세모진 얼굴의 청년은 훅 얼굴에 미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이번도 멋진 성공이야!
그런데 다음 신문을 또 봐요.
중절모를 쓴 친구는 벗겨진 이마 위에 잔주름을 지으면서 눈매를 한번 씰룩해 보였다. 그러나 세모진 얼굴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상기 그대로 떠돌고 있었다. 친구가 곧 다음 신문을 펼쳐 들었다. 과연 범인은 누구? 체포된 피해자는 진범이 아닌 듯.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소녀는 체포된 범인(?)의 여동생. 아래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
기사를 읽어봐.
여동생의 이야기…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오빠는 오늘도 돈을 구하러 간다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오빠가 그런 일을 결코 할 리가 만무입니다. 하느님 앞에 맹세합니다. 결코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소녀는 울음에 목메어 기자 질문에 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을 들으면서도 세모진 날카로운 청년의 입술에선 연상 미묘한 웃음이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하여튼 일은 끝났어. 그 이외의 일은 상관할 바 없거든. 자, 김도 한잔 들어.
중절모를 뜬 친구는 잔을 받아들었다. 세모진 얼굴의 청년은 술을 잔에 따르고 나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친구를 잠깐 눈주고 섰다가 빼앗듯이 신문을 끌어당겨 차곡차곡 개어서 그의 포켓 속에 집어넣어 주었다.
자식이 보면 좋잖아. 주머니에 넣어줬다가 집에 가서 봐요. 그런데 김?
중절모를 쓴 친구는 술을 죽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으며 세모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정 선생한데 연락 취했어? 준비는 됐겠지?
중절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근사한 걸로 골라다놨을 테지, 응?
중절모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세모진 얼굴의 가느다란 눈 가장자리에도 웃음이 훅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눈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그늘과 함께 수없는 물결이 주름잡혀갔다.
요즘 자식 태도가 좀 이상해 뵈지 않아?
자기 어머니가 죽은 다음부터 좀 저조해지긴 했어.
포켓 속에 꾸겨 넣은 신문을 다시 끄집어내어 들던 신경질적인 비쩍 세모진 얼굴은 입맛이 쓰게 침을 바닥에 뱉었다.
그것보다도 주관에 동요가 생긴 게 아냐 응?
그 순간 세모진 얼굴은 급히 말을 끊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드르륵 열리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쏜살같이 방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하여튼 축하해.
세모진 얼굴은 술컵을 쳐들고 입술 가득히 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들어온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문간에 우뚝 선 채 동료들을 잠시 마주보고 있다가 테이블 앞으로 터덕터덕 걸어왔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눈도 주지 않고 술병을 들고 그대로 한두 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바로 아까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청년이었다. 술기가 불그레 젖어가는 눈 가장자리에는 어딘지 어두운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막 술에 젖은 붉은 입술이 눈 가장자리에 뒤덮인 어두운 그늘과 이상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벌써 어디서 한잔 걸쳤군, 응? 우리는 지금껏 너하고 한잔하려고 기다렸는데…….
세모진 얼굴은 넌지시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술잔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세모진 얼굴과 자기 앞에 내민 술잔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 한 잔 더 들고 여자한테로 가는 거야.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을 테니까…… 준비는 이미 다 되었고, 지금 여자 혼자서 쓸쓸히 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세모진 얼굴은 그의 감정을 몽땅 자기 손아귀에 쥐고나 있는 듯한 어조로 지껄이며 입가에 버릇처럼 떠도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격렬한 순간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초조감, 그리고 그다음에 내리 덮이는 어두운 그늘, 사람을 죽인 다음엔 반드시 뒤따르는 감정이거든. 그럴 땐 여자가 제일인 거야. 즉 여자의 살결 속에다 채 가시지 않은 나머지 정열을 다 배설해버리는 거지. 그러고 나면 폭 잠이 쏟아져오거든. 다음에는 모두가 다 평상시처럼 가뿐해진단 말이야.
말끝과 함께 세모진 얼굴은 힐끗 그를 노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흐려가고 있었다.
자, 한 잔 더 들고 여자한테로 가요. 부드러운 살결이 침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 순간 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모진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나 청년은 곧 멋쩍은 듯이 숨을 훅 죽이고 입을 열었다.
여자를 돌려 보내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세모진 얼굴의 입가에는 일종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그럼 어디로……
집으로.
집?
의문에 찬 가느다란 시선과 어둡고 흐려가는 두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농담은 그만둬. 집이라니?
청년의 눈앞을 한줄기 어둠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
청년은 세모진 얼굴을 다시 한번 올려 치어다보며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세모진 얼굴은 가느다란 눈을 깜작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속으로 죽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청년은 술을 한 잔 따라 단숨에 마신 다음 돌아서 나와버렸다. 세모진 얼굴은 잠시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며 무거운 침묵을 씹고 있다가 술병을 들고 그대로 죽 들이켰다. 그의 입술 언저리에서 흘러내리는 술의 여적이 턱을 스쳐서 목줄기로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쉬고 난 다음 또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다 마시고 난 빈 병을 화풀이나 하듯이 멋쩍게 한 구석지로 굴려 팽개쳤다.
어둠이 쪽 깔려간 밤하늘에는 별들이 빙판(氷板)에 얼어붙은 구슬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찬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발밑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그는 지금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는 바지 포켓 속에 꾸겨 넣은 신문지를 다시금 손으로 꾸겨 쥐었다. 어머니,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아래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 라는 신문 구절과 함께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어머니 얼굴과 겹쳐서 떠올랐다. 그러나 곧 모두가 조국을 위해서다하는 음성이 그의 마음을 뒤덮고 지나갔다.
이미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만이 있는 몸이다. 지금의 네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보람 있는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버려야지,
약 2개월 전 일이었다. 그가 투신하고 있는 비밀결사는 한 사람을 암살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계획된 그날 밤 오랜 신병 끝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그의 어머니가 숨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클랙슨 소리가 짧게 밖에서 또 한 번 울려오고 있었다. 정각에서 삼십 분 전. 야광 초침이 파란 빛깔을 그으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나열된 동그란 원반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클랙슨 소리가 다시 짧게 울렸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들고 어둠과 마주 섰다.
연기는 안 돼. 생각해봐. 우리가 오늘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나를…… 그것뿐만이 아니라 오늘 실패하는 경우엔 이미 우리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지금 우리는 삼이라는 성공 숫자 앞에 와 있다 알겠지? 어머니는 우리가 맡을 데다. 조국을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 우리가 아니냐.
나직하면서도 몹시 초조한 음성이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무겁게 방안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난립(亂立)하는 정당, 무질서한 사상의 혼돈된 갈등 속에 청년들의 정치의식은 더욱 강렬히 자극되고 범람하는 정쟁(政爭)의 전위(前衛)로 청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들어갔다. 누구나가 조국을 위해서였다. 중학을 마치고 조그만 회사에서 꾸준히 일하고 있던 그는 중학 동창인 세모진 얼굴에게 여러 번 자극되어 비밀결사에 가담하였다. 비애국자들에 의하여 조국은 늘 굴욕과 타락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비애국자를 색출하여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이 비밀결사의 목적이었다. 조국을 위해서다. 죽어야 할 자는 마땅히 조국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사격을 배웠다 운동신경이 예민한 그의 사격은 어느 사이엔지 목표에 거의 적중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목표물이 파열되며 쓰러질 때마다 그는 일종의 흥분과 보람을 갖는 것이었다. 이윽고 토론이 거듭되었다. 진주(進駐)한 미군 사령관은 한국 실정에 어두웠다. 그에 대하여 한국의 실정을 왜곡되게 주입시키고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는 자가 누구냐? 그자의 이름이 자주 토론석상에서 오르내렸다. 치밀한 계획이 다시금 다시금 거듭되었다. 그는 거의 집을 잊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더 무거워갔다. 모든 계획과 저격수로서 그가 지명된 날 밤 그는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어머니는 방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천장이 툭 처져서 내려앉은 방안은 더욱 답답하고 어두웠다. 그는 어머니 앞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꿇어앉았다. 고개를 약간 모로 눕히면서 아들 모습을 더듬어가고 있는 그 눈빛은 다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희미하게 등잔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노파는 아들의 음성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간신히 흔들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의사가 왔었어요?
그러나 노파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가 하여 다시 한 번 어머니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 표정을 조용히 지켰다. 험하게 주름져간 입술이 움직거리는 것 같았다. 어머님 손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므로 그는 어머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만을 꾹 움켜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곧 아들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미 시선과 손의 감각만으로는 아들을 느껴볼 수가 없는 듯이 아들의 손을 자기입술에 가져다 대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 뜨거운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며칠 전 집을 나갈 때 간신히 입을 열고 중얼거리던 어머님 말씀이 눈앞에 또렷이 아로새긴 것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언제 돌아 오냐?
오늘은 못 돌아올 것 같아요. 저 옆집 아주머니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좀 돌봐달라고 돈도 드렸으니까 근심 마세요. 의사도 이따 저녁에 다시 한 번 들를 거예요."
"오냐."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허공에 눈주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만을 위해서 있단다. 나이 들면 들어갈수록…… 그러나 아들이야 그럴 수 있겠니, 제 할 일이 더 중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쇠한 어머니의 애틋한 기대를 깨닫지 못하는 바 아니었으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자기 손을 끌어당겨다 입술 위에 대고 어루만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자기 손을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손은 맥없이 그대로 멈추어졌다. 그는 뼈만이 앙상한 여윈 어머니의 손가락으로부터 어머니 눈 위로 시선을 옮겼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희미한 어머니의 눈빛, 마치 그것은 먼지 속에 퇴색되어버린 유리알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지금 아들의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어두운 선을 그으며 지나갔다.
다음날 그는 밀회 시간을 어기고 그대로 어머니 곁에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집 앞에서 급히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된 노릇이야?"
문을 열고 들어서며 조급히 지껄여대는 동료의 말을 손짓으로 막으면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
동료는 곧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색을 흐렸다.
그럼 내가 의사를 불러다 네 대신을 할 테니 곧 그리로 가야 할거야.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정된 장소로 정각까지 직행할 데니 모두에게 그렇게 일러줘.
동료의 얼굴 위에 다시금 초조한 긴박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동료는 마치 그의 마음이 동요를 일으킨 것이나 아닌가 하고 짧게 의문을 남기며 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다만…….
다만?
나는 다만 내게 용납될 수 있는 순간까지만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서야.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약간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알고 있어. 결정된 하나만을 위해서 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어머니 곁에 암아 있었다. 의사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햇볕이 점점 창문가에서 이어지고 잔광(殘光)이 높은 축대 위 옆집 담 너머로 뚝 떨어지자 회색빛 그늘이 나지막한 이 집 마당으로 넘어지듯 내려섰다. 그리고 곧 창문가로 밀려오는 어둠의 연한 물결과 함께 혼돈된 의식이 어머니 입가에 떠돌기 시작하였다. 하얀 가운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검은 가방을 들고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 맥을 짚고 조용히 머리를 떨구고 밝아 있는 의사의 손가락 사이로 노파의 맥박은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밖에서 요란스럽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끊일 듯 이어가는 어머니의 주름진 눈꺼풀 위로 죽음의 그늘이 서서히 내리덮고 있었다. 그때 클랙슨 소리가 짧게 또 한 번 밖에서 울렸다.
그날 밤 어머니는 임종하였던 것이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그날 밤 숨져가며 자기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눈물에 젖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임종할 때의 광경을 이야기해주던 한 동료의 말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울음에 목메인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그 동료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서러워하지 말아요. 어머니는 눈을 감으시면서도 만족해하시는 것 같았어. 거의 숨져간 임박에 자주 네 이름을 부르더군. 그래 내가 네 대신을 했었지, 잠시 후 무엇을 자꾸 더듬기에 내가 손을 잡았더니 내 손을 간신히 끌어당겨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시고 오래도록 비벼보시더군. 그리고 나서 곧 운명하셨어. 그러니까 네가 없었다 해도 어머니는 네가 자기 곁에 있는 줄 아시고 눈을 감으셨던 거야. 물론 네가 아닌 나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너로 믿고 만족하며 눈을 감으셨으니까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아. 자, 그만해요.
그는 차가운 밤하늘에 총총히 눌어붙은 별들을 쳐다보며 이처럼 무거운 생각에 잠겨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포켓 속에 꾸겨 넣은 신문지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뒤얽히는 여러 가지 생각에서 빠져나갈 한 가닥들을 찾아 허덕이는 자신을 눈앞에 그리면서 그는 묵묵히 발밑에 흩어진 담배의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파의 얼굴이 어머니 얼굴과 겹쳐지면서 다시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꾹 꾸겨 쥐고 있던 신문지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한 번 휘둘러본 다음 가로등이 눈에 띄자 그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는 곧 신문지를 펼쳐서 삼면을 뒤집었다. 급히 띄엄띄엄 기사를 이리저리 눈주어가다가 한 구절을 입 속에서 두세 번 중얼거렸다.
택시! 올라타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방향을 묻는 운전수의 시선을 향하여 한강로 쪽으로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차가 U자(字)형으로 오던 길을 돌아 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다시 어두운 생각에 잠겨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약간 그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기가 한 행위는 하나의 의의를 갖는 반면 하나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정치적 혼돈은 더욱 극심해져가고 있었다. 저명한 애국 투사들간에 일어나는 분열과 반목, 집회석상에서의 노골적인 폭행과 선동, 복잡 미묘한 배후와 배후는 서로 얽히면서 모반(謀反)은 거듭되어가고 있었다.
비가 막 쏟아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음산하고 살벌한 감정이 서로의 시선과 시선 속에 스쳐가고 있었다. 세모진 얼굴의 눈매는 더욱 날카로이 독기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유달리 미묘한 그 웃음을 자주 쿡쿡 입가에 터뜨리고 있었다.
비좁은 지하실 쪽 문을 통하여 한 친구가 걸레조각 같은 것으로 손을 문지르며 올라왔다. 그 손가락 사이에는 검붉은 혈흔이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어때?
세모진 얼굴이 힐끗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갓 올라온 친구는 다만 멋적게 입맛을 한 번 다셨다.
허리를 구부리고 비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민은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땅과 잇대어 구형으로 들린 조그만 철창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광선 속에 한 청년이 벽에 기대어 죽은 듯이 쓰러져 누워 있었다. 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가 청년 앞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음인지 청년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반항적인 몸짓을 했다. 그리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은 저주와 항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민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귀밑으로 풀어진 머리카락은 핏물에 젖어 얼룩지고 목줄기에도 핏멍어리가 엉켜 있었다.
또 심문을 하려는 거야? 아예 죽여줘!
청년이 입을 움직거리자 다시금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민은 아무런 표시도 없이 다만 그를 지키고 섰다가 양쪽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
그럼?
민은 다만 가볍게 입속으로 숨을 죽였다. 그의 이지러진 모습과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갈 이 동료의 얼마 남지 않은 종말을 생각할 때, 민은 더 이상 그 앞에 머물러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한 걸음 올라서려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금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청년은 뭐라고 핏물을 입가에 등기면서 중얼거렸다.
너도 나를 배반자라고 생각하고 있니?
민은 아무런 표시도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듯이 노려보던 청년의 시선 속에 한 줄 그늘이 다시 스쳤다.
나는 다만 반대 정당 친구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눴을 뿐이야. 물론 그들과의 접촉은 빈번했어. 그러나 그것은 나를 더 명확히 알고 싶어서였어. 내가 그들에게 기밀을 팔았다고? 제기랄!
청년의 시선은 점점 저주스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핏물에 젖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정치강령은 그야말로 근사했어. 그래 들어왔거든. 나만이 아닐 거야. 누구나 다 그럴 거야. 결국 우리 이십 대가 너무도 정치의식이 박약했던 때문이야. 정치적 훈련이 없었던 탓이거든. 조국, 조국 하고 있지만 우리는 조국이 무엇인지를 기실은 모르고 있어. 즉 맹목적인 정열뿐이지.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정치가들이거든. 나는 처음에는 몰랐어. 하지만 내 의지에 혼돈이 일어나기 시작했단 말이야. 우리만이 아니거든. 어느 정당 단체를 막론하고 그 강령은 다 멋진 바 있어. 내가 반대당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하게 된 게 뭔지 알아?
청년은 피거품을 입가에 가득히 문 채 정치적 거물들의 이름을 죽 나열하였다.
자 봐요. 그들은 과거에 모두 애국자였어. 그러나 지금부터의 애국자는 그들 중 누구인지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있는 거야. 과연 지금부터의 애국자가 그들 중의 누구라고 할 수 있겠어? 우리가 그야말로 생명을 내걸고 따를 수 있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그 공적. 즉 과거에 애국자였다는 이름을 내걸고 지금 그들은 각자 자기 밑에 누구보다도 많은 당원을 흡수하여 자기 정권을 수립하려는 판국이거든. 그러나 우리 청년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정계에 투신한 건 아니야. 그야말로 우리 손에 돌아온 조국을 순수한 입장에서 확립해보자는 거였지. 그러나 그들은 그야말로 정권욕 뿐이야. 하루해가 지기 무섭게 무질서하게 난립(亂立)하는 정당들의 동태를 보란 말이다. 그 속에 우리는 휩쓸려 들어가서 조종되고 있거든. 다시 말하면 조국에 대한 우리의 순결한 정열이 더럽혀져가고 있단 말이야. 청년단체들의 충돌과 그 빈발하는 유혈극을 봐도 알 수 있는 거거든. 그 미묘한 배후에 얽히면서 충돌하는…….
그는 한 입 물었던 피거품을 뱉었다. 그리고 핏덩어리 같은 것을 줄줄 흘리면서 그래도 말을 이었다.
너희는 처음 집에서부터 나를 고의적으로 유인해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어. 나는 이상 더 내 정열을 헛되게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나와 같은 동세대의 친구들과…… 그것뿐이야. 그러나 너희는 나를 오해했어.
여기까지 이야기하였을 때였다. 이 동료는 갑자기 잔기침을 하다가 그냥 피를 연거푸 토했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저주스러이 눈을 부릅뜨며 피거품을 입가에 가득히 문 채 미끄러지듯 벽을 스치며 쓰러졌다. 그 순간 민은 눈을 꾹 내려감았다.
정쟁(政爭)의 도(度)는 어두운 그림자를 마치 태양의 그림자처럼 배후에 서로 드리우면서 가열해져가고 있었다. 정치적 결탁은 모반(謀反)을 끼고서만 이루어져갔다 이윽고 ×××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자는 입으로는 우리와 손을 잡고 있으면서 실은 우리의 정적인 ×파와 협상 중에 있다. 그자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시선과 시선, 입과 입을 따라 오르내렸다. 그리고 드디어는 ×××에 대한 암살이 계획되었다. 사수(射手)의 부주의로 인한 실패. 계획은 다시 어그러졌다.
민, 너는 요전번처럼 멋지게 해치울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겠지?
민은 그리 자신이 서지 않는 표정을 하였다.
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자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야.
왜? 왜? 왜? 하는 질문이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연거푸 떨어줬다. 세모진 날카로운 시선…… 그는 그 날카로운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겉으로 받아넘겼다. 날카롭던 상대방의 시선이 곧 부드럽게 개여갔다.
또 어머니 생각이 날 모양이군. 응? 그러나 우리는 하나만을 위해서있지 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지
그만! 민은 상대방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다.
다만 쏘아달라고만 해.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많은 난관이 겹쳐서 일어났다. 십육 시, 대낮이다. 쏘는 것은 문제없지만 도망하는 것이 곤란하다. 다만 유리한 조건이란 인적이 드문 행길이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곧 묘안이 제의되었다. 즉 정각 이십 분 전부터 한 동료와 함께 담뱃가게 앞에 서 있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담뱃가게 쪽을 향하여 서 있고, 한 동료는 길 건너편 건물 입구 족을 향하여 서 있는다. 만일 그자가 나오면 그에게 암시를 주고 길을 건너간다. 곧 뒤따라 길을 건너가다 앞서가는 그 동료를 엄폐물로 이용하며 틈을 보아 상대방을 쏘아넘기고 맞은편 골목길로 뛴다. 그러면 그 주위에 대기시켰던 동료들이 그자의 호위 경관이 달려오기 전에 범인을 잡는 듯이 보이며 그 골목으로 추격한다. 다행히 그 시각에 골목 안을 지나가고 있는 청년이 있으면 무조건 그를 때려눕힌다. 그리고 그를 범인처럼 만든다. 그런데 될 수 있는 한 수사 기간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의식 불능케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불행히도 그 시간에 그 골목 안을 통과하는 청년이 없으면 비상 수단으로 추격하는 척하며 길을 방해하다 도주한 방향을 모호하게 만들어놓는다.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시각에 그 골목을 지나가던 청년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청년은 계획대로 범인으로 체포되고 신문은 그대로 보도하였다.
그는 저격 후 그곳에서 가까운 한 동료의 집에 들르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잠시 쓰러져 누워 있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얼마 후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선술집에 들렀다가 나오던 길에 석간 신문을 사보았던 것이었다.
자동차가 갑자기 끽 소리를 무겁게 남기며 정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 잃은 사람처럼 쿠션에 그대로 파묻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강론데요!
운전수가 일깨워주어서야 비로소 그는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서도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신문지를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주소를 다시금 확인한 다음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러 방향을 물었다. 그는 약 한 시간 가량이나 이렇게 길을 물으며 골목길을 배회하다 드디어 철로변에 내려앉은 다 쓰러져가는 오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기설기 퇴색한 신문장으로 풀칠되어 있는 문을 열고 나서는 소녀는 분명히 무모하게 범죄자로서 체포된 청년의 여동생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경찰에서 오셨어요?" 하고 대번에 말을 더듬는 소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
그는 대답 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오빠는…….
소녀는 입을 열려다 곧 울음이 북받치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간신히 말을 이었다.
오빠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오빠를 놓아주세요. 네? 선생님!
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럼…… 신문사에서 오셨군요?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고 좀 써주세요 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오빠가 결코 범인이 아니라고 한마디만이라도 좀 써주세요. 어머니가 불쌍해요. 어머니가 불쌍해 못 보겠어요. 오빠는 어머니 약값을 구하러 나갔던 거예요. 어머니는 이대로 돌아가셔요
소녀는 흑흑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소녀의 시선은 놀랍게 빛났다. 낯선 이 청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은 소녀에게 자기의 눈물을 뵈지 않으려고 약간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그래 의사가 왔었소?
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말을 잊어버린 듯이 의아한 시선으로 다만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민은 포켓에서 돈을 꺼내어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의 손은 차돌처럼 싸늘히 식어 있었다. 소녀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아무런 반응도 없이 다만 그가 쥐어주는 돈을 그대로 받아들고 마치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싫을 뿐이었다. 그는 너무도 가슴이 벅차서 그대로 돌아섰다.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몸을 움직거렸다.
저, 누구신지…….
그는 대답 없이 소녀를 잠시 돌아보았다.
오빠는 곧 돌아올 거요. 안심하고 어머님 잘 돌보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그는 가볍게 머리를 한 번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저택 민은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초조스럽게 서로의 호흡을 죽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세모진 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이 번득 빛났다
나는 너한테 심문을 받고 있는 게 아니야!
민은 그의 발언을 묵살이나 하듯이 쿡 찔렀다. 그 순간 세모진 얼굴은 그 기묘한 웃음을 또 입가에 훅 날렸다.
신경이 몹시 날카롭군, 응? 너와 나는 그러한 사이가 아닐 텐데……그렇잖아? 왜 너는 아홉이라는 숫자 앞까지 와서 마지막 한 숫자를 스스로 버리려나 말이다. 눈앞에 점점 트여가는 큰길을 못 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민은 그 말을 상대하지 않았다.
잘 들어둬. 나는 평범한 인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해보고 싶어졌단 말이다. 위대한 일 하나의 성공보다는 나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라도 더 소중해졌단 말이다…….
너는 아직 역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군.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러한 희생을 강요하는 역사를 요구치 않아.
그럼 너는 의의라는 것을 부인한단 말이냐?
인간의 의의를 묻고 살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묻지 않고 살기를 원해.
변절이야.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아. 나는 돌아가겠어.
어디로
집으로.
집?
세모진 얼굴에 조소가 어두운 그늘을 깔며 스쳐갔다.
자수할 생각이냐?
그처럼 어리석진 않아.
민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이 벌떡 일어서며 권총을 빼어들었다. 순간 긴장이 물결처럼 쪽 깔려갔다. 그러나 민은 한 점 표정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태도로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총성이 요란하게 주위를 뒤흔들었다. 민은 멈칫했다. 머리가 갈래갈래 부서져서 공중으로 획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총성이 까마득히 외부 세계의 일만같이 사라져버리자 다시금 부서졌던 머리 조각들이 제자리로 모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그대로문간에 서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나갔다.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동료들의 시선은 천천히 걸어나가는 민의 뒷그림자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의 뒷그림자가 까마득히 사라지자 그들은 총탄에 파열된 마룻바닥을 무기력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만한 위협으로 그가 돌아올 리는 만무다.
세모진 얼굴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민은 침착한 걸음걸이로 길 한복판을 서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소녀의 얼굴과 앓아 누워 있다는 소녀 어머니의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과 겹쳐져서 떠돌고 있었다. 마치 그는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마음이었다.
《현대문학》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