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매미의 일생

매미의 일생

최수철

 

1.

어느 날, 매미가 되어버린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나다. 나는 매미가 되었고, 이제 나는 매미로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우연히도 매미의 힘을 빌려, 단 하루 동안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처음부터 전혀 새로이 모두 살았다.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껍질을 벗고 탈바꿈을 해야 했으며, 그리하여 나는 매미가 된 것이다.

매미로서의 삶도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 나 또한 다른 매미들 속에 섞여서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울어댄다. 그러나 나는 짝짓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에 암컷 매미에게 덜 익숙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수컷 매미의 시각에서 볼 때, 암컷 매미의 매력은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매미들이 짝짓기와 상관없이 울며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이, 달리 말하여 인간 세상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가 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온갖 예감에 자기들도 모르게 감응되어 달리 어쩔 수 없이 부르르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며, 당신들도 아다시피 그 떨림이 소리가 되어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매미들은 자연계 속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매순간 임박해 있는 새로운 징조를, 그 위기감이나 기대감을 예언하거나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들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파국이나 대변화의 도래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서 때로는 비장한 사명감으로, 때로는 고통스런 체념으로 속절없이 우주의 닫힌 귀를 온몸으로 두드려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매미들은 인간 세상에서 원시 부족의 주술사들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감히 말하자면 이 세상이 이렇듯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도 우리 매미들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힐 때, 매미들은 스스로 우주의 주술사가 되어 그 도저한 울음소리로 신의 강림을 이끌어내어 사악하고 파괴적인 기운을 사전에 막아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미가 우는 것을 전적으로 짝짓기와 관련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그 외에도 인간들이 매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의 역사는 실로 깊다. 일례로, 동양에서는 매미의 생김새와 생태에 주목하여, 그리고 특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슬만으로 살아간다는 그릇된 판단에 근거해서, 군자지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울음소리가 공연히 요란하다고 하여 쓸데없는 의론과 형편없는 문장을 일삼는 선비에 빗대고 있다. 이때 와명선조(蛙鳴蟬塞)라고 하여, 매미의 울음소리를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는 실로 부당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매미의 울음소리에 배어 있는 삶의 공력으로 말하자면 개구리의 경우와는 결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고대 신화 속에서 매미들이 차지하는 역할도 한 마디로 매미들의 삶의 명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서론이 너무 길어지는 듯하니 이런 유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줄이기로 하자.

여하튼 매미가 된 후로, 나는 가급적 인간적인 입장을 모두 떨쳐버리고서 명실상부 매미가 되고자 했다. 나 또한 매미들에 대한 기존의 그런저런 오해에서 전적으로 자유롭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경주한 결과, 나는 그럭저럭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차마 떨쳐버리지 못한 인간적인 습성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나무에 앉을 때 다른 매미들과 달리 머리를 바닥으로 향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하늘을 향하는 나무의 방향과 내 몸의 자세를 일치시켜야 마땅했는데, 그 간단한 일이 내게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어쩌면 매미가 되긴 했어도 인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최소한 그쪽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처음 한동안 나는 수시로 마음을 다잡고서 바닥으로부터 등을 돌린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내 몸은 뒤로 돌려져서 다른 매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그러니까 거꾸로 앉아 있곤 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그런 행태에 대해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거꾸로 앉는 쪽을 택했다. 다른 매미들은 그런 나를 보고서 돌연변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변태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의 출신 성분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중에 나를 이해하고 암암리에 내게 동조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나의 자세가 상당히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심각한 천적은 다른 곤충이나 새 따위가 아니라, 인간 혹은 인간의 문명인 터라, 공중보다는 지상을 경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거꾸로 앉는 것이 약간 어색하고 거북하기는 해도, 자기들에게는 거꾸로 앉을 자유도 있는 것이며, 요컨대 어떻게 앉느냐 하는 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리하여 내 주위에서는 나처럼 거꾸로 앉는 매미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 시작했으며, 내가 앞서 매미로서의 삶도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한 데에는 이런 사실이 적잖이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레고리 잠자가 그 끔찍한 갑충이 아니라 매미로 변신했다면, 그토록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훗날 나는 누구에게든 매미로서의 삶에 대해 좀더 길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나는 서둘러야 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나는 인간의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서 매미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매미의 언어도 나쁠 것은 없다. 실제로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소리, 인간들이 그저 맴맴, 혹은 매애애앰맴매맴매애애앰이라고 표기하는 이 소리가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내가 떠나온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늦기 전에 그래야만 할 것이다. 나중에 매미의 언어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나는 내가 매미가 되어버린 그 날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내게는 그날 하루밖에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그날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이미 반쯤 매미가 되어버린 지금, 내게는 그날 단 하루만의 기억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

그날,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깼다. 나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나 급조된 것이 분명한 모텔의 어느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는 가까이에 소나무 숲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었고, 그 너머에 폭이 제법 넓은 강이 북서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로서는 내가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무슨 연유로 그곳에 찾아들었고 어쩌다가 그곳에서 깨어나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창가에 서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아마도 어떤 여자를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여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짐작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막연한 짐작일 따름이었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문에 내게는 심지어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들까지도 막연하고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눈을 떴을 때부터 소나무 숲으로부터 들려오는 매미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귓속으로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는데, 그 소리만은 부인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그 소리만이 유일한 실재였다.

나는 그 소리에 마취되고 최면을 당한 듯한 기분으로, 그 소리에 이끌려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모텔 주변은 쇠락한 유원지의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었다. 음식점 겸 술집으로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속이 텅 빈 채로 버려져 있는 낮은 건물 하나, 그리고 곳곳에 울긋불긋하게 장식된 가건물들 여러 채가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에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벗어난 채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서 모텔 건물을 돌아보니, 주차장으로 통하는 입구 위쪽에 <특수 조명>, <물침대> 따위의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바닥으로 반쯤 내려앉은 채 바람에 너덜거리고 있었다. 내가 잠들었던 방도 그런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가 생각해보았으나, 그것조차 기억이 선명하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머릿속이 멍멍해졌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로 인해 그 멍멍함은 더욱 더 극심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내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든 없든 그와는 상관없는 삶, 말하자면 과거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저쪽으로, 힘껏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한 여자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머리를 묶어서 등 뒤로 드리우고 있었는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잔뜩 웅크리고 단단히 팔짱을 끼고서 엉덩이를 비죽이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시선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과 거동이 내 눈에 확실하게 포착된 후에도, 나로서는 여간하여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걸음걸이에서 젊은 사람다운 탄력성이 약간 엿보이기는 했지만, 달리 보면 온갖 착잡한 감정과 지리멸렬한 상념으로 단단하게 응축되어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있는 품이 마치 벽의 모서리를 따라 맹목적으로 줄달음질치는 지네류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매미 울음소리를 뚫고 놀랍게도 생생하게 내게 들려온 그 기침소리는 분명 젊은 성대를 막 통과하여 나오는 그런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간밤에 꾸었던 꿈을 머리에 떠올렸다. 방금 전 그녀의 기침소리가 그러했듯이, 그 꿈에 대한 기억이 온갖 집단적인 장애물을 뚫고서 내게 돌아온 것이었다. 우리의 기억 체계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꿈을 우연히 되살리는 방식으로 작동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때로는 의식적으로 꿈을 복원하여 그 꿈속으로 이끌려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제부터 나는 잠시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3

완전한 정적의 세계였다. 모든 사물들이 자기들 모습의 정체를 숨기고 감추고서, 없는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정적의 세계 속에, 그 넓고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뚜껑이 열린, 제법 큰 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상자를 사이에 두고서 나와 한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피차 아무런 할말도, 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정적이 우리를 더욱 더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 두 손으로 내 몸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상자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가 나를 상자 속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상자에 담아서 뚜껑을 덮어버리려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마당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라도 내 쪽에서 먼저 그렇게 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저항했다. 누군가가 상자 속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나여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설명이나 설득이나 부탁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나를 상자 쪽으로 밀어붙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완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결국 나는 그의 두 손바닥으로부터 결정적인 일격을 받아 커다란 마분지 상자 위로 넘어졌다. 곧바로 그는 상자의 모서리에 걸쳐져 있는 내 팔과 다리를 안으로 밀어넣고서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막상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우니, 그런대로 편안했던 탓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도 상자 안에는 내 몸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막상 그가 뚜껑을 닫으면 내 몸 중의 일부가 밖으로 비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내가 일부러 그러는 줄로 생각하고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정작 내 쪽에서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팔다리가 밖으로 비어져나가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팔다리가 잘 접히지 않는 등신형의 인형일 따름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그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손길을 멈추고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심기일전하는 기색으로 두 손바닥을 바짓단에 쓱쓱 문지르고서, 다시금 계속하여 내 몸 중에 밖으로 빠져나오는 부분을 안으로 밀어넣고 뚜껑을 닫으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한 번은 팔이 빠져나갔다가 다음번에는 발이 빠져나가고, 다음에는 머리가 불쑥 내밀어지고, 몇 번은 엉덩이도 비어져 나가고, 그 와중에 몸도 여러 번 뒤집어졌다. 그로서는 마치 흘러넘치는 물을 주워 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을 지켜보건대, 이제 당혹감은 낭패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낭패감으로 말하자면, 내가 느끼고 있는 낭패감이 그가 느끼는 것보다 더 작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상자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사람보다, 상자 속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낭패감이 한결 더 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그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의 손놀림과 몸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거기에 맞춰 그 희극적이자 비극적인 상황은 점점 더 빠르게 반복적으로 진행되어나갔다. 결국 나는 한편으로는 거의 웃음이 터질 지경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내 얼굴 위로 뚜껑이 닫혔다가 이내 다시 젖혀졌다. 빛이 들었다가 어둠이 찾아왔고, 세상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하루의 낮과 밤이 빠른 속도로 교체되는 것과 흡사했다.

그때 문득 그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상자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의 곁에 우뚝 서자, 이번에는 그가 순순히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실패한 이상,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그의 몸이 상자 속에 채워진 것을 확인하고서 뚜껑을 닫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몸도 상자 안에 온전히 들어가지가 않았다. 그의 사지를 차곡차곡 접고서 이제는 됐다 싶어 뚜껑을 닫으면, 어김없이 몸의 일부가 천연덕스럽고 노골적이고 뻔뻔스럽게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이었다. 한 번은 팔이 빠져나왔다가 다음번에는 발이 빠져나오고, 다음에는 머리가 불쑥 내밀어지고, 몇 번은 엉덩이도 비어져 나오고, 그 와중에 몸도 여러 번 뒤집어졌다. 그 모습은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낯선 남자나 여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나 또한 그를 상자 속에 완전히 가둬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나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는 달리 내 손과 몸은 관성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나는 그 사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사실을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내가 나를 상자 속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자꾸 상자 밖으로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상태가 끝날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었다. 문득 보니, 내 몸에는 금이 잔뜩 가 있었고 여기저기에 각이 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금이 가고 각이 진 나의 몸이 바로 상자였다. 그때 마침내 뚜껑이 완전히 닫혔다. 나는 상자 속에 담겼다. 나는 내 속에 담겼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4

물론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비로소 방금 전의 상황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꿈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가려고 하다가, 아무렇게나 나를 내팽겨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세상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매미 울음소리가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소리에도 질량이 있음을 생생하게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매미 울음소리는 내게 파도처럼 밀려와서 온몸을 뒤덮었다. 가시처럼 내 몸의 모든 구멍으로 파고들어 나의 감각 체계를 단번에 장악해버렸으며, 약물처럼 혈관을 통해 뇌 속으로 스며들어 내 정신 세계마저도 제 수중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꿈속에서의 그 진절머리가 날 듯한 정적은 현실에서의 이 끔찍스런 울음소리 탓이었다. 그 정적 속에는 모든 사물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이 들어 있었다.

나는 누운 채로 오랫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매미 울음소리가 최면을 걸 듯 내게 집요하게 뇌까리고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너는 모든 것을 잊었다, 너는 기억상실자다, 너는 기억상실증 환자다. 맞는 말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 나는 완벽한 기억상실자였다.

나는 몸을 뒤채서 머리 밑에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웠다. 매미 울음소리는 당연히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치 땀에 전 무기를 던져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는 패잔병의 기분으로, 나 자신을 그 소리에 온통 맡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그 소리는 내 속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내 몸을 떨림판으로 삼고 내 속을 공명통으로 삼아서, 나로부터 맹렬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매미 울음소리가 내게 뇌까린 그 말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바로 한 마리의 매미였다.

과거가 없는 삶, 전부터 나는 얼마나 그런 삶을 꿈꾸었던가. 이제 마침내 나는 그런 삶을 얻었다. 그러나 매미에겐들 과거가 없겠는가. 허물을 벗어버린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허물로서 몸이 남겨져 있지 않은가. 나는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과도 같은 육체를 추스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자 속에 든 영혼이여, 내 영혼이여, 너는 왜 하필 이런 허약한 몸에 갇혀 버렸는가. 기억을 잃어버린 영혼이여, 네가 곧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잠에서 깨어난 강변을 선뜻 떠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곳을 벗어나면, 중심을 잃고서 내내 낯선 곳을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절박함에 사로잡혀 느린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우선 나는 모텔 앞의 버려진 건물을 살펴보았다. 그 건물은 죽어버린 거대한 곤충의 유해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출입문뿐만 아니라 모든 창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려 했으나, 하나같이 안쪽으로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나는 모퉁이마다 곤충의 다리처럼 비죽이 나와 있는 빗물 홈통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건물을 한바퀴 돌았다. 건물 뒤쪽에는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지하실 문을 열자 어둠 속으로부터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곳에서 나는 그 거대한 곤충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잡동사니가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시멘트 바닥에 시커먼 물이 고여서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건물 주위에는 정자 모양으로 지어진 가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의 출입문 위에는 노래방이나 간이주점 따위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문짝과 유리창이 허름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업을 하는 동안 주변을 얼마나 시끄럽게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때 강변 쪽으로부터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숲을 지나자 관광버스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강기슭에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바지를 걷고서 얕은 물 속에 들어가 있었다. 물에 잠긴 돌을 뒤집으며 뭔가를 찾는 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우렁이나 고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소음을 가까이에서 들으며, 나는 점점 더 맥이 빠지고 있었다. 이 강변은 나의 불안한 여정을 위한 출발점인 것이 분명했지만, 그러나 이곳에는 내가 찾아내고 확인하고 기억해둘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모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속에서 거북함과 불편함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불쾌한 감각에 내 몸은 거의 마비되어버릴 지경이었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주파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소리로 인해 내 몸의 마비증세가 더욱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마비증세야말로 나를 매미로 만들어버리는 힘에 다름아니었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서서히 매미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우렁이 잡던 사람들이 내게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5

마침내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모텔의 주차장에는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첫눈에 나는 그날 아침부터 내게 찾아든 일종의 감응력에 의해 그것이 나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열쇠에 의해 간단히 차문이 열렸다. 나는 자동차에 올라서 시동을 걸었다. 차체가 비상 직전의 매미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날곤충에게도 날아오르는 일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날아오르려 할 때마다 매번 긴장감으로 인한 전율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떨림이 내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나로 하여금 잠시 온몸으로 진저리를 치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몸과 내 몸을 관통하는 낯선 감각밖에 없었다.

나의 낡은 자동차는 쉬지 않고 부르르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그런대로 속도를 내어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처지라, 자동차의 빠른 속도는 내게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나아가는 느린 걸음걸이가 어울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서지도 못하고서, 무엇인가에 내몰리듯 초조하고 황망한 심정으로 앞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열린 차창을 통해 매캐한 냄새를 머금은 오염된 공기가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나 타이어가 마멸되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가루들뿐만 아니라, 중금속 입자들도 무수히 들어 있을 것이었다. 인간들은 그것들을 제거하여 공기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전에 인간 자신들의 몸이 그런 성분들을 거르는 일종의 기계인 셈이었다. 인간들은 그것들을 자기들의 몸 속에 받아들여서 호흡기와 소화기에 축적시킴으로써, 그야말로 몸으로 공기를 정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함유된 몸으로 죽음에 이름으로써, 그것들과 함께 부패되어 흙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의 눈 앞에는 푸르게 변색된 인간들 뼈의 환영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때 왼쪽으로 약간의 녹지대의 풍경과 더불어 공원 이름이 씌어 있는 팻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속도의 관성에 내밀린 채,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유턴을 하여 공원 입구 쪽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매미에게 그러하듯, 그곳에 가면 잠시나마 몸을 쉬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본능적인 느낌이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에, 나는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공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나 곧 포장도로가 끝나고 흙길로 된 산책로가 나오리라는 나의 기대는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시멘트길만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약간의 잔디와 나무가 누런 흙과 더불어 간신히 공원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간이 판매대와 화장실과 식당 따위의 낮은 건물들도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의 두 발이 시멘트만큼이나 딱딱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흡사 테니스공을 칠 때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리는 경쾌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단지 속이 텅 빈 무엇인가가 완강한 벽에 부딪히며 내는 공허한 소리에 가까웠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그 소리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 자신이 아무런 공기의 저항이 없는 곳에서 쉴새 없이 튀어 오르는 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약간의 휴식과 안주는 그곳에 없었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초반의 남자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 사내들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들, 지극히 진부한 조합의 사람들이 한 일행을 이루고 있었다. 강아지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들은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두가 암컷인 까닭인지, 하나같이 엉거주춤 몸을 쭈그리고서 바닥에 오줌을 싸고 있었다.

나는 포장도로와 사람들의 행렬에서 벗어나서 경사진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잔디는 별로 없었고, 발에 밟히는 흙은 너무도 퍼석퍼석했다. 여기저기 봉곳이 솟아오른 바닥이 약간 저항을 하는 듯하다가, 이내 너무도 간단히 부서져 발 밑에서 무너져버렸다. 오래된 유해의 두개골이나 갈비뼈를 발로 밟을 때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심장과 뇌는 어디로 갔을까. 유해는 심장과 뇌가 있던 자리의 표식일 터였다. 미처 준비도 없이 황망히 여름을 맞은 도심 속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의 표식으로 누렇게 들떠 있었다. 겨울 내내 간직하고 있던, 얼음으로 만들어진 심장이 녹아버린 것이다. 세상은 부황들린 환자와도 같은 모습이고, 나 또한 그 자연의 일부이므로 나 자신도 부황에 걸린 환자였다.

길은 계속하여 경사가 져 있었지만, 다행히 대체로 걷기에 무리가 없었고, 그나마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푸른 기운이 걸음에 다소나마 활기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커지는 몸의 움직임에 내 속에서는 들숨과 날숨이 서로 얽혀들어 부자연스런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헐벗은 나무들은 대부분 꺾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해 보이는 가지들을 어색하게 내밀고 있었다.

 

이윽고 공원의 후미진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청설모 한 마리가 재빨리 줄달음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청설모가 사라진 곳 뒤쪽으로 네댓 명의 청소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애초에 내 걸음의 방향이 그렇게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더 가까이에서 보니, 그들 중에는 여자아이도 눈에 띄었다.

서로 머리를 맞댈 듯이 하고서 뭔가 수군거리고 있던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내 쪽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뭘 어쩌자는 생각이 없이 계속하여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 중에 둘은 손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앳된 얼굴에는 알지 못할 음모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니들이 뭘 원하는지, 니들이 왜 그러는지, 나는 다 안다, 다 알아.

그들은 계속하여 나와의 거리를 넓히려 하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거리를 좁히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들의 뒤를 쫓는 형국이 되고 있었다. 매미들만이 울고 있는 한적한 숲에 갑자기 침입자가 나타나 매미들이 어지러이 날아오르고, 나는 그것들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허둥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들을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합류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일행에게서 떨어져나온 어린 코끼리처럼 당황한 나머지, 때늦게 일행의 뒤를 따라 열심히 내닫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내게는 그들이 나를 자기들 속에 끼워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있었다. 그 조바심은 까닭 모를 절박한 안타까움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다.

그들이 언덕 아래쪽의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빨리 했다. 곧 나도 모퉁이를 돌았고, 그때 나는 갑자기 그들 모두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자기들을 미행하는 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리고 나를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반원을 그리며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나는 명백히 그들의 미행자였다.

 

그때 그들 중에 가운데 서 있던 아이가 다짜고짜 두 손바닥으로 나의 양쪽 어깨를 세게 밀쳐냈다. 뭘 어쩌자는 거야. 그때 나는 갑자기 매미 울음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소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내게 계속하여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지만, 나는 귓전을 점령한 매미 울음소리 때문에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아까 혼자 중얼거렸던 말을 그들에게 했다. 니들이 뭘 원하는지, 니들이 왜 그러는지, 나는 다 안다, 다 알아.

그러자 다시금 내 몸에 충격이 가해졌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잠시 나는 얼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까닭이 그들의 느닷없는 폭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점점 더 크게 울려대는 매미 울음소리 때문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저 소리를 들어봐, 저 소리를 들어보라구. 그러나 그들은 매미 울음소리는 고사하고 내 말조차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속하여 그들의 손과 발이 내 몸에 와 닿았고, 결국 나는 주저앉듯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뭘 하자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뭐가 있는지 살펴봐, 기왕에 돈 가진 거 있는지도 뒤져보라구, 가진 걸 다 빼앗아버려. 대충 그런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들의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죄의식을 느끼게 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를, 아마도 과거의 일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자꾸 건드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니들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 안다, 다 알아,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땅 위에 드러누운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내 손 안에는 매미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그 매미는 쉬지 않고 날개를 퍼덕거렸다. 주먹을 움켜쥔 채 나는 무작정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쫓겨갈 곳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로 쫓기고 있었다. 공포감과 흡사한 마비감으로 인해 나는 온몸이 뻣뻣해져 있었다. 그때 한 아이의 손이 내 상의 주머니를 뒤져서 지갑을 끄집어냈다. 그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의 표정이 어렸다. 그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꺼내고서 지갑을 내 몸 위로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아이들도 그와 함께 내게 등을 돌렸다. 그들은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나는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 상태로 나는 정면을 응시하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눈 앞에서는 수많은 매미들이 분분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환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들이 차츰 나를 자유롭게 했다. 어차피 과거와 단절된 마당에, 나는 자유로웠다. 환상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나무가 되기도 하고, 청설모가 되기도 하고, 또 매미가 되기도 했다. 그 광경에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현기증이야말로 내가 자유롭다는 증거였다. 나는 두 손 가득히 흙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나는 한 줌의 흙이었다. 그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혼이여, 나를 떠나라, 나를 여기 버려두고 너 혼자 멀리 멀리 떠나라.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분명 환청이 아니었다.

 

6

언뜻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금 차갑고 단단한 금속물질에 둘러싸여 있었다. 자동차 안이었다. 인간들이 광물이나 금속으로 주위를 꾸며놓고서 다소나마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오만함이 아니라 차라리 가련함이었다. 이 사실은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허물을 벗는 매미와 같은 곤충들이 애초에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욱이 그 광물이나 금속에 속도가 붙게 되면, 고속도로 위에서의 사고가 증명하듯, 하시라도 흙덩어리나 종잇장 같은 것에 불과해질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동차를 버릴 수가 없었다. 마땅히 행선지라고 해야 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맹목적인 속도감이 내게 순간 순간 방향을 설정해주고 있었다. 자유로운 만큼 거칠 것이 없었다. 후회나 미련은 느리게 움직일 때만 들러붙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 몸도 또한 광물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허약한 틀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나는 허물과 허물로써 자동차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다가 국도로 접어들었다. 도중에 길 가장자리의 깊게 팬 바닥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여,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이 튀어 오르고 운전대가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두 번쯤 무인 속도감시기와 마주치기도 했다. 공중에 매달린 카메라가 시야에 들어올 때, 나는 그 기계의 외눈을 정확히 응시했다.

도심의 외곽지역에 진입하면서부터, 나는 가급적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두 갈래 길이 만나는 곳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망각과 각성, 두 갈래 길을 앞에 두고서 나는 내 정신의 두 가지 가능성인 망각과 각성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그때 쾅 소리가 일어나면서 차체와 더불어 온몸이 크게 흔들렸다. 순간, 내 귀에는 거대한 매미가 꽥 하고 지르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나는 자동차라는 거대한 매미 속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충돌과 동시에 차 안에 어중간하게 자리 잡고 있던 카세트테이프 등속의 물건들이 왈칵 쏟아져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치 두개골 속의 뇌가 밖으로 쏟아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뒷목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실내 후면경을 통해 뒤쪽을 보니, 흰색 승용차의 앞유리창이 작은 사각형의 거울 속에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흰색 차 한 대가 뒤에 지나치게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듯싶더니, 기어이 추돌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내가 차를 인도 쪽으로 붙이자, 흰색 차도 뒤를 따라왔다.

나는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는 진부한 동작을 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내 차는 왼쪽 깜박이등이 깨지고 범퍼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흰색 차는 겉보기에 아무런 손상도 입고 있지 않았다. 내가 자동차들의 앞뒤를 살펴보고 난 후에야 흰색 차에서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아마도 운전이 초보인 듯했고, 사고도 처음 당하는 것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자는 놀람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듯 당황한 표정으로 약간 비틀거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말없이 내 곁에 바짝 붙어섰다. 그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어서, 내 쪽에서도 아무런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거의 몸이 닿을 듯이 서서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대의 자동차를 걱정스런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이나 보행자들의 눈에는 우리가 서로 친분이 있는 두 남녀로 보였을 것이다.

가까운 정비소로 같이 가시죠. 그녀가 고개를 돌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험으로 처리할게요. 나는 그녀의 입가와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새겨져 있는 미세한 주름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을 그리고 있는 그 주름살들은 갓 태어난 애벌레들이 서로 몸을 포개고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 애벌레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짧은 순간이나마 내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귀에는 애벌레들이 내는 소리, 중얼거림 같기도 하고 그냥 아기처럼 칭얼대거나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 여하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가까운 소리가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들리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있었다. 또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잘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구둣발로 자동차의 타이어를 툭툭 차는, 또다시 진부하기 짝이 없는 동작을 보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가세요.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목을 뽑아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대며 물었다. 뭐라구요? 나는 혹시 그녀가 지독한 근시이거나 아니면 가는귀라도 먹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에게서는 상대방을 대할 때 가능한 한 밀착된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노력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습관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인지, 아니면 뭔가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은근한 향기와 더불어 미지근한 체온이 내게 전해지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 위에서는 작은 애벌레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마를 찌푸리고 눈에 힘을 주어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서 몸을 돌렸다. 나는 내가 지금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하고 보상을 받고 하는 현실적인 일에 무심해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의 내 정신으로는 그런 번거로운 일을 담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 딴에는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태도에 놀란 나머지, 내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나의 차 쪽으로 걸어가서 막 문을 열려 할 때, 그녀가 내 뒤를 따라와 몸으로 앞을 가로막듯이 하며 다시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에서는 고마움보다는 조심스럽게나마 오히려 불신과 두려움의 기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심중에 나와는 다른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선뜻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는 몸을 비켜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내게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나한테는 그런 게 안 통해요, 속셈이 뭔지 다 안다구요,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말아요, 물론 댁도 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이런 식으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니 나한테는 이러지 말아요, 나와 함께 지금 정비소로 가요, 그래야 해요, 그 편이 좋겠어요.

그녀의 입에서 갑작스레 쏟아져나온 말의 홍수 혹은 말의 세례에 나는 머릿속이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그 말들이 무슨 뜻을 가지는지, 그녀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는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태를 명료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한동안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무심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해도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마당에, 이런 식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부당한 노릇이었다.

그때 때맞춰 저 멀리에서 순찰차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순찰차는 도로 위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남녀를 발견하고서 속도를 줄여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흰색 차 뒤에 멈춰 섰다. 정복 차림의 경관이 나타나자, 그녀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나의 기색을 살폈다. 경관은 맞닿아 있는 두 대의 차를 옆눈으로 힐끔거리며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곧 나를 제외한 두 사람 사이에서 끊길 듯 끊길 듯하면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하는 말을 옆에서 들어보니,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던 바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내가 일단 자기를 안심시키고 돌려보내고 나서 나중에 뺑소니로 몰아 금품을 뜯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세상에 누가 이렇듯 스스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선선히 가해자를 보내주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한마디로, 초보 운전자의 피해의식이 과도하게 드러난 결과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거나 화가 치미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으며, 마음속으로 그녀의 영민함과 주도면밀함에 경탄을 느끼고 있었다.

면허증 좀 봅시다. 경관이 내게 말했다. 당연히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면허증이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내게 면허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관의 쏘아보는 시선에 밀려, 반사적으로 몸을 더듬었다. 다행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이 만져졌다. 아까 바닥에 내던져진 것을 챙겨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털린 지갑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은행 카드 한 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행동을 지켜보던 경관의 얼굴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짓궂은 호기심이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차문을 열고서 운전석 앞의 햇빛가리개를 내렸다. 거짓말처럼 면허증은 그곳에 꽂혀 있었다. 나는 면허증을 찾았고, 또한 여유를 되찾은 것이었다.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경관이 면허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도 사고에 대한 보상을 받으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경관이 내게 면허증을 되돌려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심드렁했으나, 그의 얼굴은 속도감시 카메라처럼 불쾌한 금속성의 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자니, 실제로 기계 외눈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로 이 일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시나요? 이어지는 경관의 말에 나는 방금 전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서약서를 받을까요? 경관이 이번에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눈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더욱 더 심한 낭패를 겪고 있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서 나와 경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내 쪽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치 앰프라도 동원한 듯 쾅쾅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침내 다시금 매미 울음소리가 되어 내 귀를 뒤덮어버렸다. 오늘 아침부터 내게서 감정의 수위가 어느 선에 이르면 매번 습관처럼 찾아오는 현상이었다. 랄랄라, 나는 입 안에서 혀를 움직여 가락 없는, 가망 없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흘러서, 그토록 맹렬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할 때, 그녀와 경관은 각기 자기들의 차로 돌아갔다. 그녀의 차가 먼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순찰차도 차도로 진입하여 이내 나로부터 멀어져갔다.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말하리라, 이 시대는 도저한 정신문명과 과도한 기술문명 사이에 끼여든 인류의 신경증의 시대라고. 나는 할말을 잃고서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내가 하릴없이 다시 차문을 열려 할 때였다. 얼핏 저 앞쪽에 흰색 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서 정차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서 계속 그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흰 차에 후진등이 들어왔다. 초보 운전답게 자동차는 짧게 짧게 지그재그를 그리며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돌아오고 있었다. 잘못된 만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동차의 뒷걸음질이 끝나고 후진등이 꺼졌을 때, 문득 내 속에서 까닭 모를 어떤 안타까움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정확히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마치 화가 잔뜩 난 듯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내게 기회를 주세요. 그녀가 여전히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녀가 내게 바짝 다가섰다.

 

7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동안, 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정확히 맞물리는 순간의 절박함. 나는 줄곧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겠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내게 집착했다. 그녀는 방금 전의 과거를 어떻게 해서든 자기 식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방향에 따라 미래 속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맡겼다. 그녀가 제시하는 방향에 저항할 만한 나만의 방향이 따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이끌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소경처럼, 행려병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사실 나는 아까 그녀가 떠나갈 때 까닭 모를 아쉬움을 강하게 느꼈었다. 그 아쉬움은 이를테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매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을 때의 조바심과 흡사한 것이었다. 조바심으로 인해 나 또한 그녀에게 집착했다. 그녀가 돌아와서 내게 자신과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을 때, 내가 선뜻 승낙을 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나는 서슴없이 내 자동차를 골목 안쪽의 빈 공간에 세워놓고서 그녀의 차에 올랐다. 나는 집단생활에서 본의 아니게 떨어져나온 한 마리의 곤충이 그러한 것처럼 다시금 무엇인가에 연루되고 싶었다. 때로 곤충들이 보여주는 게걸스러움, 한데 모여 맹목적으로 바글거리는 것, 바로 그런 욕망이 내 속에도 있었다. 더욱이 꽁무니를 훼손당한 자동차는 이미 내가 벗어버려야 할 껍질 같은 것이었고, 일단 그로부터 빠져나온 이상 그리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얼마 후, 나는 그녀와 함께 어둠침침한 지하 카페로 들어갔다. 실내의 중앙에는 타원형으로 칵테일바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주위에 사면의 벽 쪽으로 탁자들과 의자들이 붙어 있었다. 아직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바텐더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탁자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뭔가 가시적인 어수선함과 잠재된 부산함이 음험하게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스탠드바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고음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매미 우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군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실제로 나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서 입을 열었다.

"여긴 좀 특별한 곳이에요. 누구든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심지어 소리를 지르고 탁자를 두드려대도 허용이 되지요. 춤을 춰도 되고요. 벌써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도 그 때문이예요. 비록 아직은 그런대로 조용한 편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모두들 광란의 소음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거예요. 매미 울음소리 정도는 비교도 안 되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서 뭔가를 주의 깊게 살피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을 때, 문득 나는 그녀로부터 뭔가 까칠까칠한 것이 내게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드러움이었지만, 나와 맞닿은 그녀의 감촉은 까칠까칠함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부드럽게 느껴지고 있었지만, 나와 그녀가 앉아 있는 이 자리, 그리고 나와 그녀가 맺고 있는 관계는 까칠까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묵묵히 앉아 있자, 약간 맥이 빠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하필 이런 곳으로 모신 이유는, 어쩌면 이곳의 분위기가 선생님께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바깥 세상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를 포기한 듯한, 그 차갑게 가라앉은 정적인 모습에서 뭔가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거지요. 나도 나름대로 절박함을 느꼈어요. 그런데 혹시 이곳이 거북하지는 않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기에 들어오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이 세상에 매미와 인간만이, 그 두 종의 생물만이 살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느낌이 점점 더 생생해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내게서 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아주 잠깐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어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자꾸 매미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우는 법을 잃어버린 매미처럼 보이네요. 내 말이 실례가 되었나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확히 보신 겁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매미가 한 마리 들어 있습니다. 그놈이 자꾸 내게 매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매미에 대해 말을 하게 하는 겁니다. 사실, 아까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적잖이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바깥에서는 그 소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서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요. 지금 나는 매미들의 세계에, 그러니까 매미들의 소굴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곳의 매미들은 이제나저제나 모두 함께 한바탕 울어대기 시작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고요.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매미인 거지요."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내가 선생님을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니라, 애초에 그쪽에서 원격 조종을 해서 나를 앞장세워 이곳으로 함께 오도록 한 거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나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매미처럼 울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나 자신이 매미라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나의 말에 결국 그녀는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할 말을 잊고서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은 듯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마주 앉아 있었으나, 눈길은 상대방의 얼굴 너머 뒤쪽의 사물들에 허약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렇듯 허약하고 허망한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 때, 문득 실내의 조도가 반쯤 낮아졌다. 그동안 비교적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도 헤비 메탈까지는 아니어도 하드락 계열의 것으로 바뀌어서 실내의 공기를 어지럽게 휘저어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술잔을 나르던 세 명의 여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 바 앞에 나란히 서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는, 운동경기장에서 치어리더들이 그러하듯이 팔을 흔들고 다리를 들어올리는 격렬한 율동과 함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소리높여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음성과 움직임은 곧 실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나의 오감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그 소음과 움직임은 그러나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나는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얼굴에서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까닭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천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맞은편 벽에 내실 쪽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이 열리면서 한 깡마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뼈대만으로 이루어진 사지를 건들거리며 천천히 실내를 가로질러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선 채로 내 맞은편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보아도 그는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여 얼굴뼈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탓에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그를 발견하고서 선뜻 엉덩이를 움직여 옆자리로 옮겨 앉았고, 그는 서슴없이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상체를 뒤로 잔뜩 젖힌 자세로 그녀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때, 어깨동무를 푼 여종업원들 중의 하나가 곁에 와서 섰다. 그는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서 그녀에게 마르그리타 세 잔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호기심에 찬 그의 눈길을 의식한 그녀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불쑥 말을 던졌다. 이 분은 자기가 매미랍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잠시 그녀와 나를 번갈아 힐끔거리더니, 정색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인간은 매미지요. 생태적으로나 습성으로나 동물들 중에 매미만큼 인간과 유사한 게 따로이 없지요." 그러고서 곧 그는 옆자리의 여자와 공모자의 눈길을 슬쩍 주고받은 후에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내가 바로 매미다 하고 나설 수는 없는 거지요. 아무도 자기가 매미라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몸을 앞으로 굽혀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요, 나는 기억을 상실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어제 이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매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지금 나는 매미처럼 고목 등걸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 눈에는 다른 사람들도 나무 위에 앉아서 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진하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 쯧쯧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적어도 아직은 매미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겠지요."

"당신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스스로 진단을 내리자면, 나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정신병자이기에는 뭔가 모자릅니다."

"그렇지요, 당신은 단지 기억상실자일 뿐이라는 거지요."

"엄밀히 말하면, 나는 제대로 된 기억상실자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는 사이비 기억상실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이 매미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저 행복해지려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실제로 행복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정치적인 말이군요. 하지만 인생은 형벌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를 임상 실험하고 있답니다."

"모두들 자기 삶은 무척이나 복잡하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그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풀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정말 매미군요. 그래서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거군요"

"이제 곧 내 허물이 사람들의 손길에 훼손되고, 자연에 의해 풍화되겠지요."

나의 말에 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내리깔았을 때, 내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책을 씁니다. 책은 언어로, 문자로 이루어지는 건데,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언어들이 내게 덤벼듭니다. 내게 공격을 가합니다."

"나도 예술가입니다. 예술가 중에서도 실험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중독된 실험은 더 이상 실험이 아니더군요. 그런데도 기회만 생기면 모든 사람들이 내게 공격적으로 달려듭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말들이 이렇게 연속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군요."

"그래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계속 진행된다는 게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천재는 가장 비천함과 가장 비참함 속에 있답니다."

"당신은 계속하여 저 여자와 공모의 눈길을 교환하는군요."

"사랑하되, 욕망하지 말아야지요. 그래야지요."

"인간들에게 가장 깊고도 보편적인 성향은 낭만성이지요. 인간들 누구에게나 도저한 낭만성이 있지요."

"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내려 했어요. 하지만 그 대답이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요, 나도 몰라요."

"저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저 철없음에 치가 떨립니다."

"포르노와도 흡사한 일상의 강한 힘이 마약처럼 나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일상의 그 강력한 손아귀로부터 놓여나는 것은 육체의 노쇠를 통해서일 뿐입니다. 젊음이라는 것, 자신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말로 자기 자신을 움켜쥐고 중독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내게는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없습니다.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자의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외로움으로 인해 일을 벌여놓고 나서, 그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진정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이데올로기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덜그럭거리며 어디론가 옮겨지는 존재들이지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비록 미미하게라도 행복감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용감한 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에 제대로 저항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공연히 고통스러운 자의식에 젖어서 신경증에 시달리는 것은 가장 비겁하고, 가장 허약한 태도입니다. 실상은 삶에 대해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뭔가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시간의 지옥 속에 빠져들어서, 그 후로 시간의 물살에 휘말려들어 어쩔 수 없이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줄로 조종하는 인형, 마리오네트가 우리가 처한 운명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수력발전소식 동력을 만들어서 우리의 팔다리를 쉴새없이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은 얼마쯤 있다가 우리를 다른 것으로 갈아치웁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해서, 우리 대신 우리의 자식들을 가지고 놀며 지루함을 피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매미처럼 울어대고 있군요."

"지금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발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끊이지 않고 말이 오가는 동안에, 그와 나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나가다가 급기야 서로를 향해 악을 쓰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 순간 우리의 대화도 중단되었다. 그녀는 거칠게 몸을 움직여서 자리를 벗어나더니, 내 오른팔을 움켜쥐고서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내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의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나와 작별 인사를 대신하여 악수를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내 손을 잡아당겨서 나를 그녀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내가 손에서 힘을 풀자 그도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가지지 못한 채, 다시금 그녀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쐬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마치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로서는 그녀가 우리의 말싸움을 견디다 못하여 우리를 서로에게서 떼어놓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사이가 갑작스레 너무도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질투심을 참지 못하여 나를 되찾기 위해 끌어당긴 것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8

"이게 내 두 번째 삶이에요."

자동차를 골목에 세워놓고 낮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녀가 한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소박하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거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는 마치 허물을 벗은 곤충처럼, 전혀 다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파출부로 보이는 중년 여인을 돌려보내고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에 혼자 남겨졌다. 소파 위에는 사내아이 하나가 누워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푸른색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녀가 내게 찬 물을 컵에 따라 가져다 주었다. 그러고는 아이 곁에 앉아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말했다. 삼 년쯤 전의 어느 날 저녁에 집을 나간 후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때문에 지금 그녀는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지극히 모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가 잠을 깼다.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일어난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엄마의 손길을 밀어내고 내 쪽으로 달려와서 덥석 품에 안겼다. 잠결에 나를 자기 아버지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외로움과 심심함에 대한 단순히 반동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아이의 행동에는 어딘가 가슴 뭉클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나는 두 팔로 어설프게 아이를 끌어안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다시 잠이 들려는 듯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한편으로는 두 손으로 내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꼼지락거리며 주머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옛날 일을 생각해 내고서 그러는 걸 거예요. 맞아요, 그 아이는 지금도 간간이 그 이야기를 하지요. 남편이 사라지기 며칠 전에, 하루는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가 바지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돌아왔어요. 얼굴에는 장난기 섞인 웃음이 가득했지요. 남편은 아이를 앞에 세워놓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끄집어냈어요. 그건 놀랍게도 매미였어요. 매미가 그이의 손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지요.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젖혔어요. 매미도 놀라고 아이도 놀란 거지요. 그때 그이의 주머니에서 또 한 마리의 매미가 나왔어요. 그 매미도 공중으로 날아올랐어요. 그리고 또 주머니에서 매미가 나오고 날아오르고, 계속해서 매미가, 매미들이, 수십 마리의 매미들이 끝날 줄 모르고 쏟아져나와서 천장에 닿을 듯이 날아다녔어요. 아이는 까르륵거리며 웃었어요. 아이와 함께 나도 오랫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했어요. 그날 밤, 매미들은 커튼에도 앉고 문짝에도 앉고 찬장 위에도 내려앉아서 늦게까지 울어댔어요. 우리는 다음날 저녁에야 창문을 열어서 매미들을 내보냈지요. 다시 여름이 와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니까, 저 애도 그때 일이 기억나는 모양이에요. 사실, 당신을 만나서 처음 매미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남편을 머리에 떠올렸는데, 공교롭게도 저 아이도 당신에게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군요. 그러고 보면 당신에게는 정말 매미와 흡사한 데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아이의 움직임도 그쳐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걸어와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방에 데려다 재워야겠어요. 그녀는 내 뒤쪽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금 혼자 남겨진 나는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상체를 뒤로 젖히고서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내가 천천히 환몽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에서 다시금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아주 가까이에 매미들이 앉아 있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사물들 하나하나에 밀착하여 붙어 있는 매미들은 그 사물들만큼이나 내게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내는 소리는 내게 건네지는 인간들의 말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그곳은 나를 위해 꾸며진 공간이었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곳은 그녀가 나만을 위해 미리부터 적절히 꾸며놓은 공간이었다. 지금 나는 더욱 깊이 그녀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두 팔이, 그 두 팔의 환상적인 감각이 뒤에서부터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껴안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줄곧 까닭모를 조바심을 느끼게 하던 그녀가 내 품에 들어온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고서 몸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긴 했어도, 또한 실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여전히 우리 서로에게 상대방의 몸은 너무도 까칠까칠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조심스레 매미를 포획하듯 서로를 손에 넣었다. 다시금 내 손 안에 매미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매미가 손에 들어오자, 차츰 그것은 처치 곤란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움켜쥔 그 매미가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풀어 그 매미를 놓아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달리 어쩔 수도 없었다. 대신 나는 그 매미를 입에 넣고서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나 내 손에서는 매미가 끝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하여 씹고 또 씹었다. 나는 돌아온 남편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 아이는 지금의 정사로 우리가 낳은 것이었다. 오늘, 지금, 나는 결혼을 하고 정사를 하고 출산을 했다. 출산을 마치고 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정말로 나와 잠을 자고 싶었군요. 반쯤 마비된 내 귓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 들어왔다. 그러면 이제 잠을 자도록 해요. 나는 알아요, 욕망이 가라앉고 나면 내 몸은 추해 보이겠지요, 그러니 이제는 꿈을 꾸세요. 아무 걱정도 하지 마세요. 나는 새장 안에 갇혀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새로 착각하고서 모이 대신에 죽은 매미들을 새장 안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나는 바싹 마른 매미들을 뜯어먹었다. 그리고 먹으면 먹을수록 나는 그녀에 대한, 그녀의 몸에 대한 갈증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그때 막연하게나마 어떤 확신이 내게 찾아들었다. 나에게 자연은 여자뿐이었다. 아니, 여자의 몸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내 몸은 기계적이었다. 아니, 기계였다. 나는 내 몸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처럼 토막이 나서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자가 물었다. 당신한테도 아이가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없다기보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누구세요?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녀가 물었다. 왜 그래야 하죠. 내가 말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무 걱정도 하지 마세요. 그때 인기척과 비슷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기 누구세요? 누구냐구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잠속으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9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반쯤 잠이 들어 있었다. 또한 나는 반쯤 깨어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그 위로 반투명의 흰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때때로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 가볍고 선선한 바람은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의 영혼처럼 나의 몸 위를 넘어다니면서 실내의 곳곳을 기웃거렸다. 대기의 스산한 움직임, 그 바람은 내게 사람의 영혼을 연상시켰다. 태풍은 집단으로 비명횡사한 이들의 영혼이 불길한 운명으로 한데 엉겨 원한과 증오와 미련을 악의 씨앗처럼 지상에 뿌리고 다니는 것. 그리고 미풍은 오랜 병으로 앓다가 언제 죽는 줄도 모른 채 숨을 거둔 이들의 영혼이 아스라한 여운처럼, 미세한 울림처럼 지상에 남겨져 있는 것.

그때 창문의 커튼이 소리 없이 걷혔다. 나는 누군가의 몸이 바람처럼 실내로 밀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정체를 드러낸 바람의 몸이었다. 나는 바깥의 풍경이 환영이 되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된 죽은 자의 영혼이 생전의 육체를 내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꿈만은 아니었고, 내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육체도 결코 죽은 자의 것만은 아니었다.

낯선 방문객의 몸짓은 신중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는 서두르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여유로워 보일 정도로 찬찬히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장애물을 피하듯 발을 높이 들어올려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가볍게 춤을 추는 듯, 물고기가 물 속을 유영하는 듯했다.

나는 반쯤 벌려진 눈까풀 사이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사내가 그렇듯이 지극히 여유로운 심정이었다. 나 역시 오히려 경이와 찬탄의 심정으로 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바깥으로부터 벽을 통과하여 실내로 스며 들어온 그림자와 같이 여겨졌다. 그는 계속하여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윽고 그는 방 한가운데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약간 놀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텅 비어 있는 줄로 알았던 이 방의 침대 위에 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곧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자는 내가 실내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를 마치고서 침대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 옆에 멈춰 섰을 때, 나는 눈을 번쩍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가 흠칫 몸을 움츠리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나는 거대한 매미, 거의 인간의 몸 크기만 한 매미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이제 보니 매미였다. 매미는 툭 불거져 나온, 광물처럼 매끄러운 두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도 딱딱하게 경직된 눈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미동도 없이 오랫동안 서로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매미의 모습은 내게 그리 기괴하게도 심지어 낯설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일종의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오랜 갈증 같은 것이 해소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단지 바라볼 수만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피차 시선만으로 상대방을 얽어매고 있는 동안, 나는 차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 매미로부터 달아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는 찌르는 듯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에게 나의 눈동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히려 내 쪽에서 그의 눈알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조금씩 나의 눈과 그의 눈 사이에 길을 이루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 꿈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나요?"

매미가 내게 불쑥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미가 말을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매미의 목소리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여인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잠이 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꿈을 꾸게 되면 종종 생기는 일이지요. 당신은 어떤가요? 잠이 들 때 미리 대비를 했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에게 물었다.

"이 꿈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매미가 여러 개의 다리를 어지럽게 움직이며 말했다.

"평소에 잠이 들기 전에 미리 장치를 해놔야지요. 꿈속에서 어찌 해보려 할 때는 이미 늦은 거지요. 나도 삼 년 전에 이 꿈을 꾸었어요. 물론 아무런 대비도 없었어요. 매미들이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밤이었어요. 매미 한 마리가 내게로 와서 곁에 재워달라고 부탁했지요.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그토록 소원하기에,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 그 매미가 죽어 있었어요. 그 매미가 바로 남편이었어요. 나는 너무도 놀라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요. 그러다가 그만 내가 지르는 소리에 갇혀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남들의 꿈속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지요."

나는 머릿속이 어찔어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매미가, 아니 그녀가 계속하여 말했다.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겠지요? 그럼 가족에게로 돌아가야지요. 이 방에도 우리 가족에 관한 모든 추억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저 벽 속에 우리가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지요. 사면의 벽에 우리 셋이서 찍은 사진을 가득 붙여놓고서 그 위에 다시 벽지를 발랐어요. 벽지만 뜯으면 사진들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거지요. 당신도 그런 상황일 테지요. 누구나 마찬가지니까요."

나는 다시금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신은 꿈을 꾸고 있어요. 나도 그랬지요. 모든 인간은 하나의 도그마이자, 꿈이에요. 당신과 나 사이의 지난 모든 일도 한바탕의 꿈이에요. 꾸고 나서 한 차례 크게 울어야만 할 꿈이지요. 꿈은 언제까지고 살아 있는 문자처럼 꿈틀거리며 납처럼 냉랭한 우리의 언 발을 녹인답니다. 나는 순간의 영원 속에서 눈을 깜박이듯 당신을 꿈꿨지요. 그러니 이제 그만 가족에게로 돌아와요. 나는 줄곧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벽지 속에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가득 붙여놓고 당신을 기다려왔어요. 당신은 우연히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에요. 내가 이 방과 더불어 당신을 꿈꾸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나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매미는 내게 바짝 다가서서 나를 껴안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빼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그녀의 착란적인 행동에 빠져들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벽에 기대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의 냉담한 반응을 확인한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가 없다고 했지요. 나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낳게 되면 마치 내가 우주의 하수구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이제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고, 내 몸을 통과하게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도 원한다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머물다가 언제라도 다시 나갈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쉬움과 회한이 한데 섞인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 때문에 하마터면 당신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뻔했군요."

그녀의 얼굴 위로 절망과 고통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수많은 끔찍한 육체들 중에 유독 당신의 육체에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게 정말 놀랍군요. 하지만 어쨌든 이제 당신은 이 꿈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도 헤어지게 되겠지요. 그래도 당신과 내가 이렇게 한 순간이나마 경험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에요. 부적을 찢어서 나누어 가지는 거, 혹은 거울을 쪼개어 나누어 가지는 거, 지금 나는 그런 걸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는 너무도 힘들어요. 그것만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도 없어요. 당신과 함께 한 나의 경험이 나를 비로소 혼자 있게 해줄 거예요. 당신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에요."

그때 나는 매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져내리면서 그녀는 공기의 일렁거림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내 바람이 되어 창밖으로 사라졌다.

 

10

나는 여자의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어두운 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이내 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 한가운데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도처에서 사람들과 차량들이 계속하여 어딘가로 밀려가고 끊임없이 어딘가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온갖 종류의 기이한 존재들이 질주하며 교차하는 사거리 한가운데에 서서, 어디로도 발을 떼놓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에 나를 감싸고 있던 침묵과 정적, 그리고 부드러운 속삭임의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두 귀는 다시금 매미 울음소리와 흡사한 소음으로 인해 먹먹해져 있었다. 나는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서 자동차를 찾으러 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주민등록증 따위를 찾아내서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대로 나의 거주지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게는 이미 나의 집도 자동차도 허물 같은 것, 매미와 같은 곤충들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흡사 매미가 얼마 전에 자기가 빠져나온 허물 속으로 되돌아가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끔찍스러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내게 속해 있는 모든 것, 과거에 내게 속해 있던 모든 것은 허물일 수밖에 없음을 나는 다시금 확인했다.

나는 강하게 불어오는 역풍을 몸으로 받아내듯 고개를 떨구고 어깨에 힘을 주고서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물이라면, 과연 나는 살아 있는 매미이기는 한 것인가. 아까 본 여인이 그러하듯이, 혹시 지금의 나 또한 그런 허물들 중의 하나인 것은 아닌가. 진짜 나는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존재했다는 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입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나는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인가, 허물을 벗어놓은 매미인가. 만약 내가 매미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당장이라도 눈에 보이는 저 고층 건물의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서 짝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울어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만약 내가 매미가 아니고 허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허물로 세상에 남겨진 것이라면, 대체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 것일까.

도심의 곳곳에서는 현란한 색채의 크고 작은 발광체들이 부산스럽게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자연계에서 색이란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이듯이, 도시에서도 사정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색뿐만 아니라 소리도 생명체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요소임이 분명했다. 주위에 온통 생존본능으로 인한 격렬한 떨림이 가득했다. 실제로 나는 그 발광체들에게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어찌 들으면 매미의 울음소리와도 흡사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속에서는 세상에 대한 조소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공허한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소리가 그러했듯이, 실상 그 발광체들이 내비치고 있는 색이라는 것도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부터 내 눈에는 세상이 그저 창백한 색채의 셀로판지를 이어붙여 놓은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순간 나는 내 앞에 하나의 커다란 껍질, 거대한 매미의 허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나의 두 눈에 급작스레 공포감이 어리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나 자신이 들어 있는 세계의 모습이었다. 그 허물은 너무도 장대하여서 더할 나위 없이 거창하고 위압적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얇고 건조하여서, 땅의 미약한 진동이나 약간의 바람에도 바스라져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허물과 더불어 나 자신도 당장에라도 재처럼 부서져버릴 존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주위를 살폈다. 내게는 어딘가 머물러 있을 곳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이렇듯 나를 과거의 수렁 속에 남겨둔 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해야 했다. 그때 골목 안쪽으로 사진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라면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도,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별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진관의 출입문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초라했다. 문을 미는 순간, 나는 종잇장이 펄렁이는 듯한, 허물의 일부가 찢겨지고 틈이 벌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진들이 진열되어있는 유리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위쪽의 유리판을 두 손으로 짚고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 그것은 곤충들을 채집해놓은 상자처럼 보였다. 그 속에 사람들과 풍경들의 허물이 죽은 곤충들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바로 그 상자 속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기억을 상실한 나는 허물을 벗은 자인 동시에 허물로만 남은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사진관으로 들어올 생각을 했던 것은, 사진을 찍음으로써 나 자신의 허물을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으로써 또 다른 하나의 허물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그리하여 내 몸이 포르말린에 적셔지거나 오랫동안 정성스레 말려진 뒤에 그 상자 속에 전시되기 위한 것임을. 기왕에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어쩌면 허물이 더 이상 끔찍하지 않고 오히려 정겹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남는 것은 허물밖에 없고, 어차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어차피 우리는 허물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조금 나아진 나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인기척을 냈다. 잠시 후, 안쪽의 휘장이 걷히더니 머리가 덥수룩하고 몸집이 작은 초로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주인 사내는 지독한 근시인 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안경 너머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군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의 눈은 그에게 나를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마도 그는 단지 의례적인 말을 던진 것이거나, 아니면 나를 다른 누군가와 착각한 모양이었다. 여하튼 분명 그는 손님과 주인 사이에 흔히 오갈 수 있는 말에 내가 과민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심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 하루 동안 황막한 시간을 보냈던 터라, 내게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정겹고 따뜻한 말이 건네진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적어도 그 사내만은 나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실상은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나를 알아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나만 그들을 못 알아보고 있고, 모두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진을 찾으러 오신 게 아닌가요?"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로 인해 그에 대한 나의 기대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실망감과 더불어 배신감 같은 것이 내 속에서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가 무척이나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쉽사리 얼굴을 붉히는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예민함에 일말의 기대를 거는 것 또한 무의미한 일일 듯했다. 방금 전에 단지 눈길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워하던 그가 어느새 사업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무심하고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게다가 공연히 하찮은 일로 무안을 당한 사람처럼 조금은 불쾌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나와 그 사이에서 돋아나려 하던 동질감의 싹도 슬그머니 문드러져 버렸다. 나는 그의 태도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혹시 그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직업상의 수완을 발휘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상점을 찾아온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면 짐짓 기억상실자 혹은 기억불능자인 척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도 역시 좀처럼 입을 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그와 나의 역할이 서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필요하다면 세상의 모든 기억상실자들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기억상실자로 자처할 용의가 있는 사람 같았다. 우리는 까닭 모르게 우는 법을 잃어버린 매미처럼 그렇듯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서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맹렬히 울어대고 있으면서도, 피차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두 마리 매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나는 사진을 찍고자 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절감했다. 어떤 종류의 사진을 찍으려 하십니까.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인은 이미 내게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나는 증명사진을 찍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몸을 구부정하게 하여 한쪽 팔로 휘장을 걷고는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촬영실 안은 어둡고 눅눅했다. 그가 스위치를 올리자 몇 개의 조명기구에 불이 들어오면서 실내가 단번에 환해졌다. 그러나 답답하고 음습한 느낌은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피부에 감지되었다.

그는 나를 등받이가 없는 푹신한 긴 의자에 앉게 했다. 긴 의자는 앉기에 편안해 보였지만, 막상 앉고 보니 자세가 어색하고 거북했다. 나는 두 발을 벌리고서 양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고 보니 실내의 장식과 시설이 모두 구식이었다. 아까부터 흡사 시간이 정지된 곳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벌려진 내 두 다리를 오므려주며 물었다. 정확히 어떤 판형을 원하는 건가요? 증명판, 명함판, 반명함판, 여권용 중에 말입니다. 나는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싱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어본 게 언젠가요?

그러나 그 질문은 나를 더욱 난감하게 했다. 이제 겨우 하루의 삶을 산 나로서는 <마지막으로>라는 말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서 사진기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무척 창백하시군요. 어디 멀리 떠나시려는 게 아닌가요? 그렇다면 여권용 사진이 필요하겠군요. 이어진 그의 질문에도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서 사진기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만은 끈질기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지방을 넘어설 때, 이 세상이 내게 부여한 나 자신의 허물, 곧 나의 사진들이 내 두 손에 들려 있게끔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일종의 통행증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그 단어들은 채 밖으로 발설되지 않은 채 입 안에서 작은 벌레들처럼 혓바닥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한데 뒤섞이고 있었다.

주인은 내가 물러서려 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호기심을 느끼고서 내게 다가왔다. 주인은 조각상을 데생하는 미술학도처럼 면밀히 나의 자세를 살피고는 사진기에 붙어 있는 검은 보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의 머리가 시커먼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금 어쩔 수 없이 허물을 벗는 곤충의 모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다시금 두서없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것들이 굳게 닫힌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지요, 생각해보니 나는 떠나려는 게 아니에요. 그 반대지요. 나는 여기에 영원히 정착하려는 거예요. 사진은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내게는 증인이 필요해요.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증인 말이지요. 당신과 당신이 찍는 내 사진을 가지고 나는 이 세상에 지문을 남기려는 거예요. 당신들이 내가 이대로 소멸해버리고 마는 걸 막아줄 거예요. 그러니 빨리 시작합시다.

나는 순교자처럼 입을 약간 벌리고서 눈을 위로 치떴다. 내 몸이 의자 위에 붙박여서 정물처럼 그 자세 그대로 응고되었을 때, 플래시가 강한 불빛을 터뜨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살갗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동시에 사방의 벽이 옥죄어 들어와서 그 어둡고 좁은 공간 속에 나를 가두어버렸다. 그때 나는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사진기는 나를 잡기 위한 포충망이었고,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나는 그 포충망 속에 빨려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사진사는 일부러 어리숙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유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 내 발로 걸어서 그곳에 들어왔음에야.

나는 몸을 뒤틀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을 순간 순간 섬광이 번개처럼 종횡으로 가로질렀고, 그때 나는 내 주변에 수많은 허물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이 두 번 검은 보를 벗었고 더불어 몇 번에 걸쳐 플래시가 터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세상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허물 속을 한없이 헤매고 다녔다. 때로 허물이 찢기면서 속에 들어 있던 빛덩어리로부터 날카로운 섬광이 쏟아져나오기도 했고, 걸쭉한 체액이 흘러나와 몸에 엉겨붙기도 했다.

주인은 내게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나는 촬영실에서 나와 사진 진열대 앞의 소파에 앉아서 상체를 웅크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좁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계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마비되어 있었다. 간간이 사람들이 들어와서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찾는 일이 되풀이되었는데, 내 눈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들의 다리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곤충의 가늘고 거친 다리들처럼 부산하게 파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나의 팔다리이기도 했다. 나의 팔다리가 끈끈한 인화지에 들러붙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점차 내 온몸이 인화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납작하게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때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다른 쪽 손에는 사진들이 들려 있었는데, 주인의 얼굴은 표백된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긴장된 눈으로 사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우려했던 대로 그 속에는 예외 없이 낯설고도 친숙한 어떤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지만, 또한 한 마리 매미의 모습이기도 했다. 방금 전에 인화지 속으로 빨려들던 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사진을 든 손에 잔뜩 힘을 주고서 그 기괴한 형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사진 속의 존재도 더듬이를 곧추세우고서 그 돌출된 겹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몸집에 비해 머리가 훨씬 큰 그는 옷깃이 벌어져 드러난 가슴과 팔뚝이 각질화된 살갗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털이 부숭부숭 나 있었다.

순간 나는 긴장감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사진들이 내 손에서 벗어나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들처럼 더욱 세차게 팔랑거리며 바람을 일으키더니 모두들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진들은 각기 한 마리의 매미가 되어 허공에서 분분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향해, 그 매미의 환영들을 향해 두 손을 내뻗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계속하여 허공으로 날렸다. 나는 온몸으로 퍼드덕거리고 있었다. 나의 거대한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로부터 수없이 많은 작은 매미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내 몸은 조각조각 부서져서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사진들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나는 매끄러운 인화지 위에서 한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주인은 잔뜩 질린 얼굴로 내 곁에 서 있었다. 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그의 눈에는 공포감에 가까운 감정이 어려 있었다. 생각은 달아나고 격한 감정에 얼이 빠져 쭈글쭈글한 가죽으로만 남은 그의 얼굴은 매미의 허물과 흡사했다. 그는 누군가가 벗어놓은 허물, 혹은 그 자신의 허물이었다. 그의 손에서 포충망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그에게 속해 있던 사진기들, 그 흉측한 모습의 기계들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계들이 내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포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좁은 사진관 안에서 삽시간에 벌어진 그 혼란은 내게는 하나의 축제였다. 나는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사진들을, 그 매미들을 손으로 붙잡아서 닥치는 대로 나의 입에, 그리고 사진사의 입에 처넣었다. 그가 견디다 못해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사진사의 몸을 통과하여 사진관을 빠져나왔다. 그의 몸은 나를 가두고 있던 뜨겁고 끈끈한 허물이었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11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걸었다. 여전히 내게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턱없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게는 만 하루의 시간만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 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모두 살아내야 했다. 그렇다면 내게 남아있는 삶의 단계는 어떤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삶의 마지막 과정인 죽음이 아닐까.

저만치 앞에서 지하도가 직사각형의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아가리는 건조한 먼지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입김을 내 쪽으로 후후 불어대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모퉁이를 돌면 어릿광대를 만날 것이다. 신탁이 내리듯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찾아들었다.

사방을 메우고 있는 매끄러운 타일들이 전등빛을 받아 번들거리며 질퍽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각진 모서리들에 의해 하나같이 각진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뒷모습 또한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듯 눈 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곳이 바로 심연임을, 내가 거대한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끝나지 않을 듯이 이어지던 계단에서 마침내 벗어나 심연의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가까운 곳에서 뭔가가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지하의 통로가 직각으로 꺾여 있었던 탓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날개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만은 선명하게 귀에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한 늙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 외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만치 앞의 또 다른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순백색의 통로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 앞의 풍경에 멍한 눈길을 보냈다. 그때 그 노인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반백의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퀭한 두 눈이 노려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절실한 감정이 어려 있었는데, 그것은 공포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를 발견한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등을 벽에 붙인 채 뒤로 슬슬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붕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 소리는 그 늙은 사내의 몸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이끌리듯, 그에게로 빨려드는 듯 그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면서 계속하여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붕붕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 소리가 그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나는 긴장감으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네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쓰러진다면, 아니면 몸을 돌려 달아나다가 넘어진다면, 너 또한 한 마리의 매미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신탁이 내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늙은 남자가 갑자기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이내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어쨌든 그가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니 그는 두 눈을 꾹 지려 감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팔을 잡고 흔들어보았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워서 등에 들쳐업었다. 그의 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를 업은 내가 오히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계단을 올라가 땅 위로 나왔을 때, 그동안 축 늘어져 있던 그의 몸에 다소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딜 가는 거야? 노인이 내 귀에 미지근한 입김을 쏟으며 물었다. 병원에 가야지요. 내 말에 그가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병원에는 안 가.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어디를 가나요? 가야 할 곳이 있나요?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초대를 받았어. 계절이 왔거든. 그러니 그곳으로 가야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내려놓으려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내 몸에서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완강한 힘으로 내 몸에 들러붙었다.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밧드가 다섯 번째 여행에서 만난 그 고약한 노인이 여기에도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야지. 이제 그는 몸까지 흔들어대며 채근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나를 초대했지. 내게는 매미들이 여자들이야.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매미들이라니요? 그곳이 어디지요? 내가 묻는 말에, 노인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미들의 나라지. 나는 무심결에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가 말에 박차를 가하듯 발을 흔들었다. 그냥 곧장 앞으로 가면 돼.

나는 그를 업은 채 앞쪽으로 똑바로 나아갔다. 그 상태로 우리는 함께 차도를 가로지르고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내가 계속하여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초조해하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러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도처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점점 더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저 소리가 들리지? 저게 시간의 유한함에 대한 처절한 절규가 아니고 뭐겠어. 매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생명력을 소진시키기 위해서 저렇게 울어대는 거야.

그때 나는 노인의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욱 더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노인이야말로 말을 하면서 점차 생명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하는 건 자신의 생명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노인은 스스로 가벼워지기 위해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떼고서 물었다.

"그런데 노인께서는 어떻게 매미들에게서 초대를 받은 거지요?"

"사실은 매미들이 초대를 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내가 매미들의 세계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자네가 가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자네를 안내하고 있는 거고. 아직도 모르겠나? 나는 이제 죽을 날이 하루도 채 남아있지 않은 늙은 매미야. 그동안 나는 줄곧 자네를 미행해왔지. 때가 되면 자네를 데려가려고 말이야. 그러다가 조금 때 이르게 자네에게 들키고 말았지."

"내가 왜 매미들의 세계로 가야 하는 건가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시간의 광란을 보지. 비극은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거야. 때문에 젊음은 시간이 일으키는 발작 현상 중의 하나인 셈이야. 자네도 지금 그 발작 상태에 들어 있어. 나는 자네를 거기에서 꺼내 주려는 거야."

"매미들이 왜 유독 내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자네 속에 있을 거야."

"나는 단지 나 개인의 욕망의 채널이 아닌, 어떤 다른 채널로 세상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되겠지."

"이 세상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단 한 줌의 살덩어리뿐이었습니다. 내가 움켜쥐고 매달리고 빨고 뜯어먹고 칼로 찌르고 구멍을 후벼파서 내 살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한 줌의 살 말입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되는 거지. 그리고 그런 면에서 자네는 나와 아주 흡사하지."

"그렇다면 이제 나도 노인처럼 한 마리의 매미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노인께서는 자신이 매미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하에서의 그 오랜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살았고 이제 매미가 되었으니, 지상에서의 삶이 내게는 지하에서의 삶이 되는 거겠지. 그리고 지상에서 사는 동안 남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는 데 한평생의 시간이 걸렸으니, 이제는 내가 다른 매미들과 똑같은 매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남은 시간을 바쳐야겠지."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도저히 나의 이 육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매미가 된다니요."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자네는 오래 전에 이미 늙은이였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어른이었고, 인생 낙오자였어. 나이보다 훨씬 늙은 얼굴을 가진 노쇠한 스피노자 거지였고. 자네는 사소한 일에도 아주 기뻐졌다가 또 아주 불행해지기도 했어. 자네는 한 번도 자기 욕망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어. 그러면서도 뭔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지. 자네 머릿속에서는 매미 한 마리가 날개를 붕붕거리며 울어대고 있었어. 낡아빠진 문틀에서 문풍지가 붕붕거리며 떨리고 바람 새어드는 소리가 슉슉거리며 일어나듯이 말이야. 이 땅의, 이 지상의 허약한 풍토가 자네 속에서 찢겨진 미농지처럼 펄렁거리고 있었어. 자네 자신을 망각한 일상의 미봉책이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어. 그건 적어도 자네 자신에게는 아주 절실한 문제였지. 그래서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된 거야. 마치 매미들이 온갖 착잡한 감정과 온갖 잡다한 상념의 결과로 몸을 떨며 울어대듯이 말이야."

노인과 나는 그렇듯 업고 업힌 채 끝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무수히 많은 거리를 지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몸을 스치며 지나쳤다. 그리고 이윽고 도시를 벗어난 후에는, 바람을 맞으며 산도 넘고 발목을 적시며 물도 건넜다. 노인의 몸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거기에 비례하여 나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결국 내 두 다리가 둔중한 움직임을 더는 계속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택을 해야겠지. 아주 자발적인 선택 말이야. 내게도 악마가 찾아와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제시를 했지. 이대로 노후에 이르러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비록 고통스럽고 때로 끔찍하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볼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후자를 택했고, 그 결과로 매미가 되었지."

그의 말에 나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제 보니 노인께서는 내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군요. 노인이야말로 내 죽음의 모습이군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음은 선택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야. 게다가 죽음은 우리와 친숙해지지도 않지, 죽음은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지지 못하게끔 끊임없이 뭔가를 분비하니까. 일종의 독을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번잡한 세상에 중독된 상태를 벗어나서 돌아갈 길을 과감히 끊어버려야겠지.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죽음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야겠지. 어차피 삶이란 죽음에 집중하는 행위니까. 우리 속에는 집착을 떨치고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크나큰 욕망이 들어 있어. 그런데 그 큰 욕망이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욕망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쐐기가 박힌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마침내 그의 말은 내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가 쏟아대는 말을 그저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끔찍한 장광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를 떨쳐버리기 위해 상체를 격하게 흔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내 몸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져 있었다. 노인이 내게서 허물처럼 벗겨져나간 것이었다. 아니, 나야말로 노인이 벗어놓은 허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 나는 살인을 저질렀다. 그로 인해 그 노인과 나의 영혼이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그 노인은 나의 감옥이 될 것이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자의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나는 강력한 죄의식과 더불어 온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12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어두웠다. 조금 전에 지나쳐온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이 어슴푸레 사위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아까부터 내 오른쪽에서 사람 키 높이의 담장이 줄곧 나와 동행을 하고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의 바닥은 포장이 되어 있고, 담 안쪽으로 키 큰 나무 여러 그루가 나뭇잎 무성한 가지를 길 쪽으로 내뻗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 장소에 익숙해져왔다. 어쩔 수 없이 아마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이리저리 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한여름이 채 끝나지 않은 시기에 낙엽이라니. 게다가 대기 중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찌는 듯한 더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 낙엽이, 아니 내가 낙엽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그냥 되는 대로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발길이 다가갈 때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스라치듯 놀라서 부르르 몸을 떨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나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발 끝에 힘을 주어 조심스레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그 낙엽 같은 것들이 단말마의 고통에 사로잡힌 작은 곤충처럼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맴을 돌았다.

오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후 내 발 주변의 그 격한 소란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것들, 그 작은 프로펠러 같은 것들이 실제로 살아 있는 생물, 바로 매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낮 동안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토록 모질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어찌 된 일인지 풀 한 포기 없는 이 딱딱한 바닥에 집단으로 떨어져내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예기치 못한 인간의 발길에 놀라 파닥거리는 것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매미들이 발에 밟혀 툭툭 터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두 발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나는 낯선 존재들이 그리는 작은 원들에 의해 포위되고 그 원들의 함정에 빠졌으며, 이제 비로소 나는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엊저녁의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음을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는 내가 어젯밤에도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어제 나는 바로 이곳에서 까닭 모를 광란의 고통에 사로잡혔고, 그 순간 기억을 상실한 것이었다. 물론 반드시 이 장소, 이 시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나는 나도 모를 어떤 힘에 의해 밖으로 튕겨나갔다가 크게 원을 그리며 한바퀴를 돌아와서 이제 다시금 출발의 자리에 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인식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광란의 고통이라는 것도 단지 막연한 미래형의 예감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터널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텅빈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었다. 세상의 노한 파도가 세차게 몰려와서 내 몸을 뒤덮고 있었다. 온몸이 저리고 으슬으슬 떨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비로소 세상의 물살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야말로 나는 기억상실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나를 기억상실자로 기억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나는 기억상실자로 살아갈 것이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내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내 나의 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알의 껍질처럼 갈라졌다. 부화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내가 탈바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단조로움과 역겨움으로부터 힘들게 빠져나와, 일말의 평온과 휴식을 향해 끈질기게 다가갔다. 그토록 미만했던 고통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윽고 내 몸이 갑작스레 차가운 공기의 흐름에 노출되어 한쪽으로 휘청하고 쏠렸을 때, 나는 내 몸 속의 아주 깊은 곳, 혹은 내 기억의 가장 깊고 먼 곳에서부터 어떤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분명 매미의 울음소리였다. 그때 내 등은 완전히 반으로 갈라졌고, 마침내 나는 거대한 매미의 환영을 이루어 나로부터 걸어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날개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잠시 후에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키 큰 참나무의 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어느새 나의 시야는 매미들의 세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3

이제 나는 매미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방금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나 자신을 미행해왔음을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미행한 것도, 노인이 나를 미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때 이미 내게서는 매미로의 탈바꿈이 시작된 것이었다. 매미 울음소리에 최면이 걸리듯 나는 기억상실자가 되었고, 그것이 내가 매미가 되어가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찾아든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하루에 사람으로서도, 매미로서도 평생을 살았다. 어미의 자궁을 빠져나와 태어나고, 홀로 성장하고,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싸우고 사랑하고, 한 여자를 만나 정사를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 거지 노인이 길가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나도 그 옆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사진관 옆의 진열창에는 형편 없이 늙어버린 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원점에 이르러, 나는 단 하루에 늙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비로소 시간 속에 제대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느낀다. 이 우주의 억겁의 시간대 속에서 내가 점유한 시간, 지극히 짧은 이 시간만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지금의 어느 순간에 다행히 추락을 모면했다고 해도 다행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파멸에 처해졌다고 해서 불행해할 일도 아니다. 현재는 시간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간의 흐름 속에, 그리고 우주 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더욱 깊이 이 시간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시간의 문이 열릴 때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참나무 등걸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을 제공하고 있다. 일종의 가슴 저린 향수가 느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내 발치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는 나무에 거꾸로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씁쓸한 회한에 젖어든다. 그러나 이미 나는 지하의 삶을 청산했다. 어쩌면 그들도 또한 나에 대한 기억을 청산하고서 마무리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막연하게나마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나 또한 오랫동안 보통 사람들의 삶에 연루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껴왔고, 실제로 그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겁 없이 다른 인간에게 다가가는 일을 즐겨 했고, 그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때로 파괴적이기까지 한 힘을 나는 사랑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대개 일회적이었기 때문에 매번 충동으로 끝났다. 어둠이 끈끈한 접착력으로, 일종의 끈처럼 내 손을 묶어서 춤을 추게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일종의 반의식적인 절대 고독 속에 빠져들어,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비웃었다. 내가 보기에 인간들은 지상의 삶에서 자연의 드라마를 몰아내고 있다. 자연의 드라마와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인간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나로서는 그 점이 적잖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매미 울음소리가 우레처럼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 속에는 군홧발 소리와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도 들어 있었다. 내 주변에서, 그리고 내 속에서 내란이 발발한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내란에 동참했다. 내란의 동기는 나 자신에게도 여전히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만큼 내게는 더욱 더 절실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절박함이 바로 급기야 나를 매미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관성적인 고통의 결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것이 내 몸에 금이 가게 하고 주름이 잡히게 하여,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이제 비로소 나는 야유를 그칠 수 있을 듯하다. 야유란 조롱과 자조가 서로 비벼져서 일어나는 마찰음에 불과한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바람과 비와 나무와 더불어 살아갈 것이고, 그것들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마리의 매미로서.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