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섭 브리가다
윤기정
낮과 밤이 없는 지하 300척 캄캄한 갱내로 첫 대거리 몇 패가 저마다 이마에 붙인 안전등을 번쩍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채탄 브리가다의 책임자인 리창섭은 내리 굴 바른편 막장에서 작업을 날래 끝마치자마자 잡은 참 왼편 막장을 향하고 급한 걸음걸이로 바삐 걸었다.
시꺼먼 탄가루에 더께가 앉은 갱도 바닥은 군데군데 곤죽이 된 수령이 있어 이리저리 골라 디디는 동안까지도 그는 사뭇 더딘 것만 같아 매우 불안한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창섭이는 자기의 손이 채 못 미쳐 뜻하지도 않은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염려로써 마음이 몹시 조이게 하였다.
이처럼 두 곳에서 그의 손을 기다리므로 컴컴한 갱내에서도 바쁜 걸음을 아니 칠 수 없었다.
갱내는 후덥지근하면서도 음산하다. 통풍 관계인지 약간 코가 매캐하고 목구멍이 알싸하다.
새까만 속에 오직 안전등의 희미한 불빛만이 여기저기서 번뜩인다. 그것은 마치 구름 사이로 별들이 껌벅이는 것만 같다.
바른편 막장으로 들어오는 어구에 두 개의 전짓불이 오도 가도 않고 고정된 채 명멸할 뿐이다.
창섭이가 그리로 차차 가까이 가서 보니 갱내 운반공인 박복례와 이명숙 두 여성이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밀차 울검지에다 제각기 손을 걸치고 서서 무슨 이야기인지 재미나게 하느라고 사람이 가까이 가는 줄도 모른다.
창섭이는 둘의 옆을 모른 체 하고 그냥 지나치려다가
"동무들 수고허우. 혼자 미느라고 너무 힘들지 않소?"
부드러운 그의 음성은 둘의 귀를 찔렀다.
그제서야 일제히 고개를 움찔하고 명숙은 바른켠 막장으로, 복례는 창섭이의 앞을 지나, 탄차를 제게 밀며 각각 헤어졌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국부 선풍기와 잉잉거리는 소리가 긴 갱도 안을 요란스레 뒤흔들어 놓는다.
"복례 동무! 몇 차째요?"
창섭이는 그리 많지 않게 쌓인 탄무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 갔다 와야 겨우 여섯 번인걸요, 뭐."
"오늘도 스무 차 넘긴 힘들겠군그래."
"흥 큰일났군! 의로 치나 둘러 치나 매한가지람. 두 패로 나누면 좀 날가 했더니…."
창섭이는 이렇게 웅얼거리며 막장께를 기웃이 들여다본다.
곡괭이질 소리가 우드럭 우드럭 난다. 암만해도 곡괭이 끝이 암팡지게 들이 박히는 소리가 아니다.
박봉규의 일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일제 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던 모양 그대로다.
창섭이는 불현듯 자기의 지나온 과거가 머리에 떠올랐다.
새벽같이 별을 이고 나가면 밤늦게야 별을 지고 돌아오던 일제 때의 고역살이는 회상만도 소름이 끼칠 만치 괴로운 생활이였었다.
아무런 보호시설이 없는 갱내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숫한 사람의 목숨을 시시로 노렸다. 생지옥과 같은 구덩이 속에서 마음 조이며 열네 시간 이상씩 일을 하고도 끼니를 제때에 못 끓일 만치 가난하기만 하였었다.
학대와 불안 속에 휩싸인 하루의 노동은 온 몸이 솜 피듯 누그러지는 무서운 피로를 가져올 뿐이었다. 물론 글을 배울 사이도 없었지만 뼈가 쑤시고 사지가 물러나는 듯한 피로에 견디지 못해 책은 읽을 생심도 나지 못했었다. 그래 글과는 아주 인연이 멀어졌다.
8․15 해방 전까지 문맹이었던 창섭이는 문맹 퇴치 운동의 혜택으로 쉽사리 국문을 깨쳤다. 차차 글 읽기에 재미를 붙였다. 신문과 쉬운 책들을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가서 수준이 무척 높아졌다.
이 세상의 가장 옳은 리치와 참된 일을 나날이 깨닫고 쉽게 가려낼 줄 알았다. 남을 위하여 나라를 위해서는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견디어 나가는 것을 배웠다. 그의 매일 같이 하는 노동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힘으로 되며, 통일 독립을 빨리 가져오는 길로 되며, 모든 사람들의 자유롭게 행복스런 생활을 누리게 하는 원천이 된다고 굳게 믿자 온갖 열성을 다 바쳐 흥겨웁게 일하였다.
그리하여 해방 두 돌을 채 맞기 전 5․1절을 앞두고 그는 노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애국심과 헌신성을 더욱 나타내어 뛰어나는 모범 노동자로 남들이 우러러보게 되었다.
"뭣에 틀려 후끈 달았는지 퉁퉁 부었어. 그러니 채탄이 불을 게 뭐람."
"승리의 기를 아주 먹긴 다 틀렸수."
창섭이는 아까 지나다 귓결에 들은 복례와 명숙이의 주고받던 말이 퍼뜩 생각난다.
"이즈막 후끈 달거나 벨이 돋기로 말하면 봉규가 아니라 오히려 이편이라고 창섭이는 생각하면서 그의 골이 난 이유를 더듬어 보았다.
‘왜 틀렸는지 모르지만 5․1절 증산 경쟁을 내걸고 한창 바빠 날뛰는 판에 자기 맡은 일을 저렇게 태공하는 것은 정말 돼먹지 않은 짓이야….’
생각하니 그동안 그의 한 짓이 한두 가지만 꺼림칙한 게 아니다.
봉규는 흘낏 돌아다보더니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곡괭이를 또 쳐든다. 참말로 량볼이 솜보퉁이처럼 퉁퉁 부었다.
"건방지게 웨 이 모양이여, 사람의 말이 말 같지 않어? 대답이 없게."
창섭이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예볏 나오려고 혀끝에서 뱅뱅 도는 것을 간신이 참았다. 그는 한술 눙쳐가지고
"몸이 아프지 않고야 꼭괭이질이 그게 뭔가? 탄이 아퍼헐가봐 겉으로 슬슬 다듬기만 허나?"
이렇게 봉규의 부아를 좀 건드려 보았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다. 아주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야. 창섭이는 자기 이마에 달린 전짓불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윤이 나는 탄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제보다 매우 단단해진 것 같다. 그래 손에 들었던 망치로 두드려 보았다. 탄벽이 어지간히 굳다.
"탄이 굳어 힘드는 모양인데, 웨 피크를 안 쓰구 그대로 강다짐만 허는 거야? 흥 사람의 성질두 어찌 그리 괴팍할까.“
하고 창섭이는 덕근이를 돌아다보며
"동무! 어서 코르피크를 가져 오구 압축기 줄을 이리 가차이 끌어오게."
"나두 피크를 써 보자구 몇 번 말했지만, 도제 들어 먹어야죠.“
하고 덕근이도 매우 못마땅해 입을 삐죽 내밀며 본갱 쪽으로 사라졌다.
창섭이는 동발을 세우면서 생각할수록 봉규의 빙퉁그러진 태도가 여간 괘씸하지 않았다.
‘일이 이처럼 뒤틀리고 서로 사이가 어근비근해지는 이유가 뭐며, 생산이 잘 안 되는 원인이 어디 있나? 누구의 탓일가? 아니다.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다. 오직 당원인 자기가 크게 책임져야할 노릇이다. 어떡하면 여럿을 한 사람처럼 움직이게 하나?
낙후한 봉규를 무슨 방법으로 다시 작업에 열성을 내게 하고 안일성을 뿌리 체 뽑아 주며 하루속히 우리 대렬 내에 끌어 들이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면서 창섭이는 일손을 더 자주 놀렸다. 그는 일을 통해서 남을 감복시키며 또 한 사람처럼 묶어세우겠다고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였다.
2양편 벽에다 맞붙여 굵직한 동발목을 세운 다음 그 우로 가름대를 질러 놓고 새새 틈틈에 얇고 두꺼운 쐐기를 쳐서 암만 흔들어도 움직여지지 않게 완전히 끝을 마치는 동안에 다른 때보다 사뭇 빨랐다.
덕근이는 부지런히 삽질을 한다.
쇼트판에 탄이 부딪쳐 가지고 마냥 미끄러져 탄차 우로 쏟아지는 소리가 귀청을 쏘는 듯이 요란스리 난다.
피크를 쓴 뒤로 낙탄이 훨씬 잘 되어 탄무지가 여간 붇지 않는다. 삽질이 무척 빠른데도 퍼낸 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 순식간에 시꺼먼 탄이 듬뿍듬뿍 쌓인다.
창섭이의 마음은 저으기 후련하고 흐뭇해졌다. 기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다.
탄광 전체의 1/4분기 책임량을, 열흘을 앞당겨 완수하자 전 직장적인 축하회를 가졌다. 그때 리창섭 브리가다는 <승리의 깃발>을 두 달 연거푸 받았다. 앞으로 계속해 한 번만 더 쟁취하면 영예의 깃발을 아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5․1절을 앞둔 이 달은 어느 브리가다 보다도 채탄 브라가다에서는 더 중요한 달로 되였다.
그날 창섭이는 여러 브리가다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승리의 깃발>을 받아 쥐는 순간, 무한한 기쁨이 가득 벅차게 부풀어 올랐었다. 내달에도 이와 같은 영예를 꼭 쟁취하고야 말리라고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였었다.
창섭이는 축하회를 마치고 한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하여 오는데 김용준이가 곁에서 바싹 다가오며 어숭그레한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동무네 브리가다가 번번이 우승을 하는 건 네가 용해서 이기는 줄 아나? 급수 높은 사람이 다른 데보다 월등 많은 까닭이지 뭐. 생각해보게. 그렇지 않은가, 일곱 사람 가운데 7급이 둘씩이나 되고 게다가 자네까지 8급도 둘이 안야. 그리고도 우승 못 헐 머저리가 어디 있담."
김용준이는 리창섭 브리가다와 내리 두고 경쟁하는 격수 브리가다의 책임자이다.
"이 사람아, 뭣이라구? 급수 높은 사람이 많아서 매번 이긴다고? 그럼 한 사람 데려 가려나?"
창섭이는 누글누글한 태도로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줘만 보라구, 어련히 안 데려 가리."
"정 그렇다면 자네 소원을 풀어 줄 테니 그래두 졌다간 혼날 줄 알어."
그 이튿날 창섭이는 지도부와 상의한 다음 8급짜리 한 동무를 보내고 그 대신 7급인 고병삼을 데려 오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봉규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것을 찬성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틀이 채 못 가 브리가다 중 가장 낙후한 성적으로 뒤 꼬리만 줄창 따라 오던 전경수 브리가다에서도 또 한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간청해 왔다.
그때 창섭이는 한참 망설였으나, 봉규만은 선참 나서서 두 번째 바꾸는 데도 선선히 동의하였다.
봉규가 어떠한 꿍꿍이세음을 품고서 이처럼 찬성한다손 치더라도 누구보다 일에 욕심이 많고 고집에 센 창섭이라 간청하는 편이 오래두고 가장 낙후한 브리가다가 아니라면 종내 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허지만 계속해 뒤떨어져 내려오던 패가 치열한 조국 해방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5․1절을 맞이함에 지금까지의 불명예를 깨끗이 씻고 생산을 한번 버쩍 올려 보겠다는 데는 이편이 좀 불리하더라도 끝끝내 버틸 수는 없었다. 그래 그 곳 6급과 이쪽의 7급 짜리 한 사람을 또 바꾸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함에 창섭이의 속심은 진정 전체를 위하는데 있었으나, 봉규의 배짱은 틀림없이 딴 데 있었다. 급수 많은 사람이 한둘씩 줄어들면 도급제의 분배를 급수에 따라 쪼개므로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이로우리라고 불순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은연중 장사치의 심보가 또 떠올랐던 것이다.
허나 봉규의 바라던 것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열흘 동안에 새로 온 두 사람이 겨끔내기로 무단결근을 하여 출근율에 검은 점을 찍었다. 그리하여 사업 조직에 큰 혼란을 일으켰으며 생산에 적지 않은 지장을 가져왔다.
창섭이의 입맛은 소 쓸개나 씹는 듯 여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동무들은 둘에게 대하여 사뭇 원망도 하고 욕설까지 물 퍼붓듯 했지만 책임자만은 회의 때 한 번 몹시 비판을 준 외에 다시는 입을 뗀 적이 없다. 생산 기준량에서도 매일 몇 톤씩 떨어져 내려오던 차에 결근까지 있은 날은 더 말이 아니었다. 일곱 사람이 하던 것을 여섯 사람이나 다섯 사람이 하게 된 생산이 줄 것만은 정한 노릇이다. 더구나 먼저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이 서로 손이 잘 맞지 않아 지장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날그날의 책임량조차 채우지 못하고 허덕지덕할 지경이었다.
창섭이는 매일 같이 생산이 떨어지고 있는 데에 무척 초조하였다. 속에서 사뭇 불이 이는 것만 같아서 진정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참고 견디다 못 해 그는 마침내 당에다 자기의 의견을 내놓고 옳은 지시를 받았다.
당은 올바른 지시를 주었다. 창섭이는 자신이 노동자들의 앞장서서 전쟁 승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노동당원의 영예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 이튿날 작업 비판회 끝에 창섭이는 무거운 입을 떼였다.
이미 줄어든 책임량을 보충하며 더 나아가 승리의 기를 꼭 앗아오기 위해 한 개의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운반 거리가 좀 멀어진다면 전혀 쓰지 않던 사업 조직 방식이니, 두 패로 나눠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양쪽 막장을 캐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되던 여성 둘이 저마다 나서서 혼자 힘으로 넉넉히 탄차를 밀 수 있다고 열렬히 토론하였다.
복례는 인민군대인 자기 남편이 지금 이 시각에도 전방 화신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적과 용감히 싸우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문제가 안 된다고 기세를 올렸고, 명숙이는 자기 아버지가 국기 훈장까지 받은 모범노동자이기 때문에 저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또한 전선에서 영용히 싸우는 전사들만 못지않게 일하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다진 것이었다.
다른 동무들도 한결같이 찬동하였다.
그러나 박봉규만은 끝까지 어물어물하다가 마지못해 토론이랍시고 겨우 한마디 한 것이 미적지근하였고 끝끝내 우물쭈물하는 태도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창섭이는 두 곳으로 달리다시피 뛰어 다니며 동발을 꾸리기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봉규와 병삼은 각각 두 곳의 선산으로 곡괭이를 들고 채탄을 하였다.
봉규의 불만은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운탄하는 동무들이 줄곧 자기 맡은 일을 도와주므로 삽질이나 슬슬 하던 것을 선산을 시켜 혼자서 탄을 연달아 캐야만 되니 무척 고되었다. 그래 점점 일에 짜증만 나서 전혀 열성을 내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전날에 가만히 앉아서 상점을 보던 시절을 눈앞에 그려보기도 하였다.
새 방식으로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날 하루의 책임량조차 채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창섭이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두 사람씩이나 바꿈질을 한 자기의 처사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고 처음에는 후회도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점에는 도리어 잘한 짓이며 떳떳한 노릇을 한 거라고 누구 앞에서나 서슴지 않고 말할 만치 자신이 차차 생겼다. 자기의 브리가다도 점차 성적을 복구하게 될 것이며 다른 브리가다에서도 전에 비해 현저히 생산을 높인다면 전체를 위하여 여간 보람 있는 일을 한 게 아니라고 굳게 믿어지기 때문이다.
창섭이는 덕근이와 봉규 사이에 섞여서 그들과 함께 갱도 바닥을 터벅터벅 걸었다.
"봉규 동무! 피크를 쓰니까 힘이 훨씬 덜 들지 않던가?"
창섭이는 약간 고개를 뒤로 들이키며 다정스런 말씨로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난 몰라, 어느 게 힘이 덜 들구 더 드는지를."
봉규는 아주 퉁명스럽게 입안에서 내뱉듯이 쏘아 부친다.
"허허, 난 모르겠다? 그럼 누가 아누? 대관절 뭣이 못마땅해 그러는거야?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기 혼자만 속에다 넣구 꿍꿍대니 남이야 알 수 있어. 시연스리 말이나 좀 해보게."
봉규는 또 아무 대꾸가 없다. 다시 잠잠한 채 걷기들만 하였다.
한참만에 창섭이는 추근추근하게도 또 입을 떼였다.
"봉규 동무! 그러지 말구 무슨 불평이 있으면 작업 비판회 때 죄다 툭 털어놓게."
"난 불평이구 뭐구 없어!"
"그럼, 웨 그러는 거야? 남들은 지금 5․1절을 뜻 깊게 맞이하기 위해 어떡하면 다른 달보다 더 많이 생산을 낼가 하고 저마다 1분 1초를 다퉈 가며 서로 경쟁을 허고 우리 브리가다만 허드라두 승리의 깃발을 아주 차지하려고 눈에서 불이 날 만치 날뛰는 판인데, 동무는 암만해도 일부러 태공하는 거 같으니 우리 브리가다를 아주 망쳐 먹자는 심본가?"
좀 체로 성을 잘 안 내는 창섭이지만 너무 참고 견디다 못 해 볼멘소리를 하였다.
"흥, 기멕혀! 날더러 망쳐 먹는다구!"
봉규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하는 말에 날래 눈치를 챈 창섭이는
"그만 허면 다 알았네. 사람 바꾼 게 불만이란 말이지? 두 패로 나눈 것 허구."
"맞았어 맞어! 호통을 해 바꿔 놓고 일이 노끈처럼 꽤들어 가니까 두 패로 나눈다? 웨 열 패로 나누지 않구!"
"그럼, 동무는 웨 반대허지 않구 좋다구만 했나? 그랬다구 해서 내가 아주 책임을 안 진다는 건 안야. 허나, 우리 직장의 전체 생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잘한 노릇이라구 생각하니까, 여기 대해 정 내게 불만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시비를 가려보세."
"시비 가릴 것 없이 두나 다른 데로 보내 줘, 서로 속 시원허게."
창섭이는 벌컥 화를 내며
"뭣이 어쩌구 어째? 날 다른 데로 보내 달라고? 딴 브리가다에 가서도 그 따위 행세를 허게. 그런 돼먹지 않은 배짱을 부려 누구의 망신을 더 시키자구."
봉규는 밉살스럽게 축 늘어진 태도로
"웨 자네 망신을 더 시켜. 내 혼자 욕먹으면 욕먹었지."
"이 딱헌 위인아. 좀 깊이 생각해 보라우. 우리 브리가다에서 1년 동안이나 함께 일한 사람이 칭찬을 받지 못할망정 노상 깨우기만 헌다면 자네 망신이 내 망신이 아니겠나."
봉규는 이 말에 약간 찔림이 있었던지 맞대들던 기세가 좀 수그러지며 한풀이 꺾였다.
창섭이도 말을 더 계속하지 않았다.
탄이 묻어 시꺼멓게 된 작업복을 입은 세 사람이 얼마 사이 두지 않고 갱도 밖으로 천천히 걸어들 나왔다.
구름 한 점 없이 훨쩍 트인 쪽빛 하늘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햇볕이 쌩쌩 내리쪼여 눈이 부시다. 탄가루가 땀에 반죽되어 끈적끈적한 얼굴에도, 강기슭을 스치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홱 끼친다. 무더운 속에서 머리가 휭 하던 게 새 정신이 버쩍 들만치 상쾌하였다.
갱도로 들어가는 어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민주 선전실 안으로부터 낮방송의 음악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다.
휴게실 안에는 점심 식사가 한참 벌어졌다. 먼저 식사를 끝낸 각 브리가다의 남녀 노동자들이 한둘씩 선전실 안으로 모여든다.
복례와 명숙이도 선전실 문안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생산 도표가 붙여 있는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복례와 명숙이는 무척 속이 상했다. 생산 도표를 암만 들여다보아도 자기네 브리가다가 제일 뒤떨어진, 차마 볼 수 없는 꼬락서니다.
경쟁에 줄창 지기만 하던 김용준의 브리가다조차 기준량을 훨씬 넘쳐 생산하고 있는 게 력력히 표시되여 있다. 그래 둘의 마음은 졸아붙는 듯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정면 벽에 붙은 <5․1절을 증산으로 맞이하자!>는, 붉고 푸른색으로 큼직하게 쓴 구호가 눈에 언뜻 띠인다.
둘의 가슴은 일시에 선뜩해졌다. 그리고 새가슴처럼 작아지는 것 같았다.
증산은커녕 이 달 책임량을 해 내기에도 바쁘다. 생산이 자라 모가지처럼 움츠러들기만 하다가 이즈막 좀 나졌다는 게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몸이 열 조각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의 기는 꼭 쟁취하고야 말테다. 우리 브리가다가 여지껏 지녀온 빛나는 영예를 또 한 번 떨쳐야 전시하의 5․1절을 뜻 깊이 맞는 보람이 있지. 그래야만 전선에서 용감히 싸우는 그이에게 대한 명목도 서고….
복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사이에 선동원이 선전실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이제부터 작업 비판회를 갖겠으니 리창섭 브리가다원은 건너편 언덕으로 다들 모이라고 한다.
한 길 남짓한 소나무가 정성 드뭇이 섰고 그 아래로 새파란 잔디가 쪽 깔린 펑퍼짐한 곳에 일곱 사람이 한 가족처럼 다정스레 둘러앉았다. 그러나 봉규만은 마치 성난 사람처럼 뿌루퉁해가지고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먼저 창섭이로부터 오늘 작업 비판회를 미리 다가서 점심시간에 갖게 된 이유를 말하였다. 오늘 낮대거리가 끝나면 넘어켠 방공호 회의실에서 파란 탄광 노동자로부터 보내온 500여 점의 지성어린 원호 물자를 받은 감사 대회가 있어 모두 참석해야만 되기 때문에 점 시간에 간단히 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복례와 명숙이는 번갈아 일어나 작업 도중에 철길 중간에 서서 담화한 것을 내놓고 자기비판을 하였다.
창섭이는, 봉규가 탄이 굳어진데도 피크를 쓰지 않아 오늘의 채탄 능률을 높이지 못했으며 생산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다고 비판 주었다.
뒤미처 복례가 또 일어섰다.
"봉규 동무한테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이즈막 선전실 안에 붙은 생산 도표를 매일 보는지, 안 보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안 보셨다면 이 회가 끝나는 대로 즉시 가 보시고, 벌써 보고도 태공을 했다면 크게 문제를 세워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브리가다가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 아십니까? 아주 말이 아닙니다. 10여 개나 넘는 채탄 브리가다 중에서 제일 뒤떨어졌습니다. 이리고서야 어떻게 전쟁 승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브리가다가 오늘날까지 이런 창피한 일이 한 번이나 있었습니까? 매달 첫째 둘째를 다퉜지 어디 셋째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범 브리가다가 아녜요? 나는 끝으로 봉규 동무에게 이제부터라두 있는 힘을 다 내여 열성껏 일허기를 충심으로 부탁헙니다."
그러나 봉규의 태도는 아주 태연하였다. 겉으로만 그럴 뿐 아니라 속으로도, ‘여자가 주제넘게 나서서 웨 이 모양새야, 잘 한다, 잘 해. 어디 실컷 지껄일 대로 지껄여 봐라.’하고 뱃심 좋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봉규에게는 모두가 눈꼴이 틀리고 비위에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창섭이는 봉규에게 자기 비판할 것을 권고하였다.
봉규는 고개를 숙인 채 오랫동안 잠잠히 앉아만 있다.
다른 동무들은 울화가 나서 눈총이 그에게만 쏠리며 비판을 은근히 재촉하였다. 허나 끝끝내 일어서지 않는다. 모두들 참다못해 차차 분개하기 시작하였다.
작업 비판회의 공기는 전에 없이 불안하여졌다.
그래 창섭이는 하는 수 없이 화제를 딴 데로 돌리고 말았다. 내일부터 작업 분공에 약간 변동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번연히 틀릴 줄 알면서도 봉규더러, 자기가 하는 동발 작업을 대신 하겠는가고 물었다.
봉규는 자기 재간으로 두 곳을 제 때에 보장할 수 없다는, 남이 듣기 좋은 구실로 물러나고 만다. 창섭이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그러면 누가 두 군데로 다니며 동발 작업을 사고 없이 제때에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두 사람이 일제히 손을 쳐들었다.
한 동무는 기능이 좀 부족한 선동원이었고 또 한 동무는 새로 온 고병삼이였다.
병삼이는 그동안 책임자 동무의 작품에 감동되어 절실히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면서 과히 아프지도 않은데 두 자루씩이나 무단결근한 것과 게다가 수차 지각까지 있는 것을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이후부터는 있는 힘을 다 바쳐 열성껏 일하겠으니 기어이 자기에게 동발 일을 맡겨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병삼이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하고 그 대신 선동원을 선산으로 치켜 올렸다.
모범 노동자 리창섭은 번쩍이는 국기 훈장을 왼편 가슴에 차고서 주석단에 의젓이 앉았다가 파란 대사가 손수 주는 좋은 양복 한 벌을 감격에 넘치는 마음으로 받았다.
창섭이는 그 귀중한 선물을 옆에다 끼고서 폭격에 허물어진 로동회관 앞을 지나며 이 시각에도 동부 전선 어느 고지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을 아들의 름름한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였다.
"이 양복은 그 놈이 돌아오건 꼭 입혀야지."
입안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보니, 마음이 비할 데 없이 흐뭇하다. 걸음걸이조차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창섭이는 폐허대로 남아 있는 스산한 사택거리를 걸었다. 자기 집터를 바라보며 행복스럽던 과거 생활을 회상하고, 또 폭격하던 날 밤에 불바다를 이루었던 이곳을 그려보니 적개심이 불길처럼 치밀어 오른다. 치가 떨리고 주먹이 제절로 힘껏 쥐여진다.
창섭이는 길옆 좀 어슴푸레한 곳에 누구인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을 발견하였다. 거기는 폭격을 당하기 전 봉규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차츰차츰 가까이 보니 뒷모양이 암만해도 봉규가 분명했다.
"봉규 아닌가? 웨 혼자 우두커니 앉어 있어?…."
봉규는 약간 놀래는 듯 몸을 가벼이 움칠하며
"인제야 오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죽은 놈 생각이 더 나서 아예 발길이 안 돌아서네 그려."
지난번 폭격에 공교롭게도 봉규의 집은 직격탄을 맞아 열 살 난 아들을 시신도 없이 잃었다. 봉규는 밤일을 나갔었다. 그의 아내는 어린 것들을 데리고 잠시 본가에 갔었기 때문에 죄다 죽을 것을 면하였다.
"그런 생각 자꾸 해 뭘 허나, 속만 상하지."
봉규는 목이 멘 소리로
"바로 이 자리야, 그 놈 죽은 데가. 시체만 있었대두 덜 원통해. 아무 죄 없는 것이 그렇게 허황히 죽다니, 생각헐수록 기가 맥혀 못 견디겠어."
창섭이는 그의 언짢아하는 심정이 자기가 당한 것처럼 아팠다.
잠시 지난 다음 창섭이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지금이야말로 봉규의 그릇된 생각을 돌리게 하여 일에 열성을 내도록 할 좋은 기회라고 여겨졌다.
"봉규 동무! 원쑤 갚을 마음은 없나?"
"그게 무슨 소린가! 원쑤 갚을 생각이 웨 없겠어. 그 애 죽인 놈을 만나기만 하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 쥑여도 시연치 않은 텐데."
그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목소리조차 어룰해진다.
"하필 죽인 놈이 꼭 맛이 아닐세, 또 직접 총이나 대포를 쏘는 것만이 원쑤를 갚는 게 안야. 자네나 내가 탄을 더 많이 캐내는 일도 적을 없애는 길이야."
"그럴까?"
"그럴까가 아냐, 꼭 그래. 자네가 매일 같이 허는 일에 부쩍 힘을 써서 열성을 낸다면 탄은 더 많이 캐질 거지. 탄이 많이 캐지면 그만치 조국의 승리에 이바지할 거 아닌가. 이것이 곧 자식의 원쑤를 갚는 게 되고 진정 조국을 사랑허는 거란 말일세."
봉규는 그의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앉아 있는 사이에 일찌기 느끼지 못하던 것이 새삼스레 느끼는 듯싶었다. 마음은 유난히 설레어진다.
창섭이는 자기가 하는 말을 그럴싸하게 듣고 있는 그의 다소곳한 태도를 눈치 채고서 더욱 힘을 얻어 말한다.
"여보게,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훌륭헌 원호 물자를 생각해 보란 말야. 멀고 먼 나라들에서도 적을 어서 물리치고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승리허라구 싸우는 조선인민을 이처럼 도와주는데 우리가 어떻게 생산을 덜 내고 견디겠나. 깊이 생각해 보게, 오늘 낮에도 여러 동무들이 말하지 않던가."
봉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속에 있는 말을 처음으로 털어 내놓으려고 간신히 입을 떼였다.
"나도 틀려먹은 줄은 잘 알어…."
"알면서도 웨 못 곤치나? 깨닫고 알았으면 직시 고치려고 애써야만 허느니."
"그렇게 못 허는 게 내 병통이라니까."
"노력허면 안 될 리 없어. 자네도 나만치 어지간한 고집이야 그 고집을 옳은 데로 돌리면 퍽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 내일부터라도 열을 부쩍 내서 일해 보자구. 자, 그만 일어나 함께 가세."
"먼저 가게. 난 좀 더 앉았다 가겠네."
"또 고집야. 어서 일어나서 같이 걸으면서 이야길 좀 더 허세 그려. 죽은 놈 생각하다 짧은 밤 길바닥에서 새지 말구."
창섭이는 봉규의 겨드랑이를 추켜세워 가지고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사면은 고요하다. 둘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만이 원쑤의 폭격에 폐허가 된 거리로 울려 퍼진다.
창섭이는 봉규와 헤여져 혼자 걸으면서 오늘 밤 그의 태도가 약간 달라지는 듯한 데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어서 나날이 달라져 속히 딴사람처럼 됐으면!’
장마때 사태 나듯 무연탄이 허물어진다.
창섭이의 억센 손아귀에 쥐여진 곡괭이가 쉴 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적마다 탄무지의 사태이다. 시꺼먼 탄벽이 힘껏 틀어쥔 곡괭이 끝에 내리 찍혀 보잘것없이 와르르하고 무너진다.
수승식 채탄법에 가장 능수인 창섭이의 솜씨에는 탄벽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양켠 마구리와 천판이 보잘것없이 푸썩푸썩 주저앉는다.
그가 섰는 앞뒤로 덩어리 섞인 무연탄이 순식간 그들먹하게 들이쌓인다.
봉규는 채 삽질할 사이가 없어서 내려지는 탄을 주체 못 한다.
그러나 창섭이는 돌아가는 기계처럼 여전히 곡괭이질을 계속한다. 힘차고 억세게 들이캐만 들어간다. 그의 둥글넓적한 얼굴에서는 연해 구슬 같은 땀방울이 비 오듯 한다. 그러나 땀을 씻으려고도 않고 줄기차게 곡괭이만 들었다 놓는다.
봉규는 곁눈으로 기운차게 내리치는 그의 탄 캐는 모습을 다만 어안이 벙벙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간 사람으로서는 따를 수 없을 것 같다. 과연 벼락같은 선산이다.
"참말 일꾼이야. 우리 탄광에선 좀 체로 당할 사람이 드물어."
봉규는 이렇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낙탄된 것이 수북히 쌓였다.
대여섯 차는 넉넉히 됨직하여 보인다.
창섭이는 곡괭이를 옆에다 기대세우고 잠간 숨을 돌린 다음, 여벌로 있는 각삽을 집어 들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봉규와 엇비스듬히 서서 수북히 쌓인 탄을 퍼 옮기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그만두게. 내 혼자 헐 테니. 그처럼 세차게 힘을 쓰고도 맥나지 않나? 좀 더 쉬기나 해. 어서."
봉규는 이와 같이 창섭이의 삽질하는 것을 한사하고 말렸다.
"괜찮어. 내 념려는 말구 자네 헐 일이나 허게."
창섭이는 웃는 낯으로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삽질을 더 다그친다.
봉규는 자기의 할 일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창섭이 앞에 섰기가 참말로 부끄럽다. 억세게 탄을 허물어 내던 그가 얼마 쉬지도 않고 금시 삽을 들고서 줄기차게 탄을 퍼 옮기는 모습이 봉규를 위압하면서 한편으로 무한 감탄케 하였다.
그래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봉규는 마침내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창섭이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자기도 본받아야 하겠다고 속으로 다지면서 탄을 수북수북 퍼 옮겼다.
어제 밤 창섭이가 여러 차례 거듭해서 간곡히 부탁한 말이 방금 곁에서 나는 듯 귀에 쟁하다.
‘창섭이처럼 착실하게 일하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남만치 열성껏 탄을 캐자!’봉규는 탄을 한 삽 듬뿍 퍼서 억세게 밀쳤다. 또 한 삽 잔뜩 퍼서 힘차게 앞으로 내쳤다.
채탄 브리가다의 이 달 들어서 두 번째의 세포 총회 때다.
창섭이를 비롯해 선동원과 복례는 각기 일어나 열렬한 토론을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얼마 남지 않은 5․1절을 앞두고 기어이 승리의 기를 쟁취하도록 비상한 노력을 할 것이며 다른 달보다도 더 우수한 성적을 내여 증산 경쟁의 성과를 빛내고야 말겠다고 저마다 결심을 다졌다.
창섭이는 아직 노동당원이 아닌 박봉규의 교양을 위하여 앞서보다 더한층 노력하겠다는 것을 한 가지 더 첨부해 토론하였다. 그동안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계속해 그를 교양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복례는 금년도 전체 책임량을 두 달 당기여 2월 7일,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기념일 안으로 달성하자고 결성한 것을 옳게 접수하고 자기 맡은 책임량과 자기 브리가다의 것을 반드시 넘쳐 실행하며, 나아가 모든 여성들을 고무 추동하여 그 기일 내에 어김없이 보장하고야 말겠다고 굳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오늘도 복례는 열의를 내여 쉴 새 없이 일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빈 차를 속히 밀고 와서 쇼트판에 들이대었다. 줄대서 떨어지는 탄덩이가 궤짝 속에서 덜그덕거리며 요란스럽게 소리를 낸다.
낮대거리와 중대거리의 교대 시간이 되여 창섭이 브리가다원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나오는 길로 오늘의 작업 비판회를 가지려고 민주 선전실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용준이는 밖으로 막 나오려다가 창섭이와 마주쳤다. 그는 의기양양해 가지고 창섭이를 마구 놀려댄다.
"그렇다니까, 욕심꾸러기가 왼통 급수 많은 사람만 몰아가지고 있어 줄창 이겼지, 무슨 딴 재간으로 이긴 줄 알어? 창섭 동무! 인젠 별수 없이 손들었겠다."
창섭이는 뱃심 좋은 태도와 아주 유한 음성으로 말한다.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지고 이기는 건…. 어디 이 달이 다 갔나, 앞으로도 열흘이 더 남았는데."
"이 사람아, 보긴 뭘 봐? 자네 지는 걸 보란 말이야…. 보려거든 저기 붙은 생산 도표나 보게 그려."
"다 봤어, 권허지 않어두."
"보고도 그런 소릴 해…. 우리 브리가다에서 꼭 첫째를 해가지고 우승길 탈지 그건 채 몰라. 그러나 자네 네게 이길 건 뻔한 노릇이야."
리창섭 브리가다원들은 누구나 지독한 모욕을 당하는 것만 같아 속으로들 분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창섭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다.
"우리 질 때까지만 살게 그려."
"에이, 이 사람아, 그럼 날더러 쉬 죽으란 말이지?"
"그렇게 꼭 이길 줄만 알다가 큰코다치리…."
창섭이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어댄다.
"어디 두고 보세.“
하고 용준이는 그래도 우쭐거리는 걸음걸이로 선전실 문밖을 나서서 갱내로 들어갔다.
뒤미처 창섭 브리가다는 어느 때 보다도 긴장된 가운데 저마다 흥분된 채로 작업 비판회를 가졌다.
용준의 모든 행동과 말은 여럿의 신경을 몹시 자극하여 놓았다. 얕잡아 보던 그의 태도에 대한 모욕감이 가셔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창섭이는 물론, 두 곳 막장으로 갈라져 일하는 브리가다원 전체가 더욱 분발해 그날그날의 책임량을 훨씬 넘겨 생산하였다. 작업을 시작하기 30분 전에 미리들 나와서 그날 작업 준비를 갖추는 데도 모두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갱내에 들어가서도 저마다 꾸준히 일하였다. 누구나 몸을 가볍게 재빨리 놀렸다.
그중에도 봉규의 일하는 태도는 놀랄 만치 변하였다. 삽질을 하는 손이 무척 빨라졌다. 그런데도 창섭이는 새새 봉규의 일을 도와주었다.
이처럼 전체가 한 사람 같이 움직였다. 자기 맡은 일에 줄곧 열성을 내었기 때문에 창섭이의 믿었던 바와 말한 그대로 앞섰던 용준 브리가다를 며칠 안 가서 쉽사리 뒤로 물리쳤다.
그러나 창섭이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창섭이가 세 번째 탄차를 밀고 밋밋하게 경사진 그 앞에까지 이르러 권양기 와이야 줄에다 탄차의 고리를 걸고 막 움직이려 할 때, 정전이 되였다. 소리가 요란스럽던 선풍기와 압축기는 일제히 뚝 서버렸다.
갱내는 자는 듯이 고요해졌다.
창섭이와 복례는, 바른편 막장에서 일하던 동무들이 가스 냄새에 참고 견디다 못해 나오므로 그들과 휩쓸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뒤따라 곧 나오리라고 믿었던 봉규가 한참이나 지나도록 눈에 띠우지 않는다.
창섭이는 암만 생각해도 의심쩍어 다시 갱도 내로 급히 뛰여 들어갔다.
왼편 막장 어구로 잡아들자마자
"봉규 동무!"
창섭이는 커다랗게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 퍼뜩 떠오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목청을 돋우어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러 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다. 갱내는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만치 고요할 뿐이다.
창섭이는 더 빨리 걸어서 막장 가까이 갔다.
봉규는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안전등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백지장 같이 해쓱하다. 몸을 만져보니 더운 기운이 돈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암만 흔들면서 불러 보아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에는 곡괭이 자루가 꼭 쥐여져 있다.
창섭이는 봉규를 들처 업고 밖을 향하여 급히 걸었다.
창섭이는 그를 업은 채 간신히 굴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휙 끼치니 금방 토할 것 같다. 속이 메스껍고 골치가 아파서 한참 휴게실에 누워 있었다.
까무러쳤던 봉규는 얼마 만에야 소생되었다. 창섭이를 위시해 모든 동무들은 진정 그를 반기며 다정스레 들여다보았다.
봉규는 창섭이가 없는 사이에 이미 낙탄 된 것을 다 퍼서 옮겼다. 그는 또 곡괭이를 집어 들고 탄을 캐기에 너무나 골몰해 냄새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마침내 까무러치고 만 것이다.
봉규는 얼굴이 부석부석해가지고 그 이튿날도 일찌감치 나와서 전과 다름없이 일에 열중하였다.
이에 격려된 복례는 다른 날보다 더욱 신바람이 나 무거운 탄차가 한결 가벼워진 듯 기운차게 밀며 내달렸다. 그의 머릿속에도 아까 갱 밖에서 본 가지가지의 새로운 것들이 쉴 새 없이 번뜩인다. 참으로 기쁜 마음이 용솟음 쳐 오른다.
민주 선전실 안에 붙은 생산 도표에는 리창섭 브리가다가 다른 브리가다들보다 붉은 선이 제일 높이 올라갔다. 채탄 브리가다 중에서는 맨 앞장을 섰다.
갱내 들어가는 바로 옆 언덕받이에 서있는 커다란 벽보판 영예란에는 <자기의 책임량을 135%로 넘쳐 생산하고 있는 리창섭 브리가다의 모범을 따르자!>고 큼직하게 써 붙여 있다.
그러나 창섭이는 마음을 놓지 않고 더욱 힘차게 내뻗쳤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여섯 동무들도 일매지게 일손을 늦추지 않았다.
5․1절을 앞둔 사흘 전에 리창섭 브리가다에서는 이 달 책임량을 완수하여 마침내 승리의 기를 세 번째 쟁취하게 되었다. <195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