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말한 것에 대해 그녀가 말하는 것
이남희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십여 년 전 내가 C시에 살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처럼이나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는가 하여 씁쓸해진다. 그때 우리는 정말 어렸고, 무지했으며, 둥지에 갇힌 어린 새들처럼 세상을 향해 날아가고 싶어 퍼덕댔었다. 우울하고 슬픈 날에도 햇빛만은 화창했으며 따라서 언제나 꽃 피는 봄만 계속되었던 것 같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로 어제의 일인 양 그때가 눈에 선하다. 눈부시게 밝은 햇빛, 까맣게 콜타르를 입힌 오래된 목조교실, 바람에 펄럭거리는 새하얀 사라사 커튼, 복도를 낭랑히 울려오는 책 읽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찬 바람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일제히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그때 우리는 아무 일에나 걸핏하면 웃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누구도 그걸 멈추게 하질 못했다. 그런 웃음은 실제로 우리가 행복해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저 그때 우리는 열여섯 살이었기 때문이고,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말똥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 흘리는’ 그런 나이였기 때문이다.
어제 여고시절 친구가 전화를 했다. 여름휴가 대신 친정이 있는 C시엘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윤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목소리 가득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끌고.
“이제 남은 건 뜬소문밖에 없게 됐지 뭐니. 누구 좋으라고 그런 식으로 끝나야 하는지…… 여자들이란 참.”
얼마 전 윤인자는 신문에까지 기사화될 정도로 크게 사고를 쳤고 심한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었다. 그 소식은 가물가물 잠들어 있던 내 기억을 일깨웠었다. 그런데 이젠 죽어버렸다.
“뜬소문만은 아니지,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말야.”
내가 정정했다. 침묵, 어수선한 잔해 속에서 쿵쿵 메아리가 달린 발소리를 울리는 침묵.
“넌 말야. 왜 그런 이야기는 소설로 쓰지 않니?”
갑자기 친구가 목소리를 높였다.
“뭘 쓰라는 말야?”
“인자 이야기 같은 거. 너 그런 걸 써야 하는 거 아니니? 또 전에 내가 얘기해준 것도 있잖아.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납치됐다가 그걸루 이혼하구 정신병원에 갔다는 우리 아파트에 사는 여자 이야기도 있구. 정말 그런 게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 아니니?”
친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글쎄, 너무나 뻔한 결말밖엔 없으니까 쓰지 않는 지도 몰라. 그런 이야기는 진부하잖아. 꼭꼭 감추면서 살거나, 미치거나, 죽거나……”
나는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럼 안 그런 일도 있니? 세상이 곪고 아픈 데 투성인 건 마찬가진데?”
“하긴 그래.”
전화를 끊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윤인자는 죽어버렸다. 그 이전에도 이미 그녀와 나 사이에 교분은 없었다. 우리는 풍문으로만 서로의 소식을 알고 지내왔다. 이제 이십여 년이나 지나 새삼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던 그 신문기사를 다시 떠올렸고 그걸 찾으려고 온종일 집안을 뒤졌다.
그 기사는 스크랩되어 내게 팩스로 날아왔다. 이른 아침에. 발신인도 밝히지 않고. 마치 내가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렸다는 양. 커피도 마시기 전이었다. 놀라 시계를 보았다. 여섯시. 어쩌면 밤새워 고민하다가 어렵게 결정을 내리고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런 시각이었다. 전화선 저쪽 끝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누군가가 진하게 실감되었다. 내 입속까지 손톱의 때맛이 씁쓸하게 퍼졌다.
지난 토요일 오후, C시 북이동 소재 북고등학교에서 주부 윤인자씨(37세)가 교장실에 난입, 불을 질러 본관 1층을 절반이나 불태웠으며 교장 김효준씨(55세)는 다치고 자신은 중화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다. 윤씨는 이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정모 군의 학부모로서 아들이 성적이 떨어져 우반에서 열반으로 이동하게 되자, 학생들의 좌절감을 이유로 들어 우열반 폐지를 주장했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격분한 윤씨는 휘발유통과 가스라이터를 갖고 교장실로 찾아가 실랑이를 벌인 끝에 불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란 이즈음엔 너무나 흔해서 아무런 주목도 끌지 못하고 뉴스의 쓰레기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밑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도록 선명한 한 문장이 손으로 덧붙여 씌어 있기 때문이었다.
너, 윤인자 기억나니? 김효준 선생은?
비수처럼 파랗게 벼려진 문장이 눈을 찔렀다. 흠칫 놀랐다. 오래 전에 매장해버렸다고 믿어온 망령이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하나 둘쯤은 있는 법이고 내겐 고등학교 시절이 그러했다. 특히 열여섯에서 열여덟, 그 어름의 가파른 나날들은 폐쇄공포증에 가까운 경련 없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잡아뗄 수는 없다. 고등학교 시절 윤인자는 나와 같은 반이었고 김효준은 국어교사였다. 그런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사가 조금은 특별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는 사이이다, 더구나 은사와 제자라는 진부한 단어를 붙일 수도 있는 그런 관계이다, 등등. 하지만 그거야 그들의 문제에 불과할 뿐,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소리인가, 혼란스러웠다.
물론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는 없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우연이란 인간이 추측할 수 없도록 감춰둔 신의 섭리라고. 그러나 C시라면 그 정도 사건에 우연이란 심각한 단어를 쓸 필요조차 없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운 사람과 우연히 만나고 싶다면 중심가에 나가 한나절만 서성거리면 된다고.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거기엔 문제가 있는데 그럴 작정으로 나서면 한나절 동안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까지 죄다,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도 더,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외생활을 단속하는 학생부 교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작은 도시였다. 그런 곳에 머물며 수십년씩 살아간다면 서로 마주치지 않고 살아진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우연일 것이다.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내내 한 싸이즈는 작은 모자를 억지로 눌러쓰고 있는 기분이 들었었다. 모자테가 작고 꽉 조여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어른들은 그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되며, 모자챙 밖을 내다봐서도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열여섯 살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얼이 빠진 상태이다. 소녀라고 말하기엔 너무 커버렸고 처녀라고 하기엔 아직 어리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못 된다. 갑자기 대학입시라는 말이 눈앞을 점령해버렸다. 새벽마다 도시락을 세 개씩 싸들고 학교로 간다. 그러고는 밤이 이슥해져야 집으로 돌아간다. 여덟 시간의 정규수업, 네 시간의 보충수업, 그리고는 시험, 시험뿐이다.
쉬는 시간이면 수위실로 달려간다. 거기엔 따뜻한 도시락을 가져온 어머니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나의 하루 몫 식사가 든 찬합을 싣고 와 기다린다. 나를 보는 즉시 우유를 한 병 사서 곁들여 먹으라느니 하고 잔소리를 시작한다. 거기엔 남자라곤 아버지밖에 없기 때문에, 또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게 창피해서 나는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며 딴전을 피운다. 얼른 수업종이 쳤으면 싶다. 같은 반 윤인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엷은 빛깔의 창백한 갈색 눈. 거기에 깃들인 그늘. 시장통 바느질집 딸이다. 바느질집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과부이다. 문득 그 눈에 깃들인 그늘이 이해된다. 나는 씩 웃어 보이지만 윤인자는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다.
나무들이 초록으로 무성해질 즈음 교련연습이 시작된다. 교련시범 학교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해선 안 되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수업을 늘리고 가장 학습능률이 떨어지는 오후 시간을 운동장에서 보내게 된다. 우리나라는 준전시국가이고 우리는 예비 간호병이다. 적십자 표시가 찍힌 구급가방을 메고 하얀 플라스틱챙이 달린 모자를 썼다. 긴 시간 동안 땡볕 아래서 행진이며 붕대 감는 연습을 한다. 자기 차례가 아닐 때는 열중쉬어 자세로 기다려야 한다. 명문과 부동자세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학교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질책과 함께 벌을 받는다. 시야는 점점 달아오른다. 눈앞엔 빨갛고 노란 빛무리가 명멸한다. 어지럽다. 쓰러져도 벌을 받기 때문에 이를 악물어야만 한다. 땀은 줄줄이 흘러내려 시내를 이루지만 훔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중에 교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면 땀은 하얀 소금기로 말라붙어 있다. 그런 사정은 아랑곳없이 마이크만 잡으면 ‘교육적 견지’에서 한없이 말을 계속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 교장이며 교련선생이 그러하다. 그들의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나무토막처럼 무뎌진 관용어와 고막을 박박 긁는 확성기의 잡음으로 뒤섞인 것이다.
“교육도시로 이름 높은 우리 고장의 시범학교로 지정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명문으로서 오랜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학교의 명예가 여러분의 어깨에……”
“그래, 그래, 너 굵은 거 아니까 그만 좀 해.”
견디지 못하고 학생 중 한 명이 구시렁거린다. 물론 우리끼리만 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이다. 다들 킬킬 숨죽여 웃는다. 소리 죽인 웃음이 퍼져간다.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조금씩 조금씩 불평이 일기 시작한다.
“정말 개똥 같아. 지들이야 그늘에 있으니까 상관없다 그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선생들이 있는 곳은 나무그늘일뿐더러 교단은 초록과 흰색 줄무늬 차양이 쳐져 운동장처럼 덥지는 않은 것이다. 두런거리는 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물결이 된다. 하얗게 소금기로 범벅이 된 우리는 일제히 우우 소리를 내게 된다. 훈시중이던 교장은 당황하여 교사들을 둘러본다. 교사들은 두 가지 반응이다. 나 몰라라 하고 구경만 하는 쪽, 또 하나는 나서서 조용히 시키려고 누군가를 벌하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쪽이다. 그러나 학생 한 명을 잡아 혼내주려고 해도 딱히 누구를 지적하기란 어렵다. 모두들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우우 소리만 내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진행을 맡은 김효준 선생이 마이크를 잡고 호통을 친다.
“조용히 해.”
그러나 그 소리는 우우거리는 소음에 파묻혀 사라진다. 갑자기 그가 막대기를 들고 마구 뛰어와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휘두른다. 재수 없는 아이가 맞게 된다. 문자 그대로 두들겨팬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미친 것 같다. 난폭함에 놀라 모두 말을 잊는다. 소리가 뚝 그쳐버린다. 교장이 헛기침을 하고 몇마디 더 말한 뒤 내려간다. 아무도 조금 전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겨우 해산명령이 내려진다. 허탈하다. 세시가 지났지만 길고 긴 수업들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축 늘어져 책상 위에 엎드린다. 그 나이엔 그렇듯 몸은 지쳐도 입은 쉬지 않는다.
“아, 난 오늘 그 주책, 인간성 다시 뵈더라.”
주책은 김효준 선생의 별명이다. 정말 주책다워서 자기 별명을 와인북이라는 영어단어로 바꿔 떠벌리고 다니기도 한다. 별명이 붙은 걸 인기가 좋다는 증거로, 인기가 좋은 걸 좋은 교사라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이 그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하긴 어렵다. 여고생인 우리에게 존재하는 남자란 아버지나 오빠 아니면 학교 선생들뿐이다. 총각선생은 두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는 학교에서 김효준은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이다. 그러나 그를 싫어하는 학생도 꽤 있다. 징그럽다는 의견이다. 지나칠 때면 “니 가슴 요새 얼마나 컸나 보자”라며 슬쩍 가슴을 만지는 시늉을 해서 비명을 올리게 만들거나 교무실에 간 학생을 보면 느물느물 웃으면서 큰 소리로 “야, 너 요즘은 생리통이 심하지 않은 모양이지, 결석 안하는 걸 보면?” 하고 창피를 주어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성이 나쁘다고 운을 떼자 너도나도 의견을 내놓는다.
“워낙 그런 사람이래. 교장한테 잘 보이려고 눈알이 빨개진걸. 곧 장학사로 나가려고 저러나봐. 선배들 말로는 소문난 출세주의자라는데.”
교실은 금방 와글와글 시끄러워진다. 다들 김효준 선생의 난폭함을 비난하느라 피로도 잊은 듯하다.
“얘, 아냐. 아까는 우리가 잘못했던 거 아니니? 떠들었으니까 말야.”
갑자기 윤인자가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모두들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고 주목한다. 윤인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누군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은밀한 느낌을 주어 서로들 얼굴이 빨개진다.
“어머나아, 너어? 꿈 깨라 꿈 깨. 아무리 남자가 귀하기로서니…… 어유, 그런 간신 같은 인간을. 아까 그 눈빛 못 봤니? 꼭 미치광이 같았잖아.”
“난 그런 게 아냐. 다만 우리가 너무했다는 거지.”
윤인자는 극구 변명하려 하지만 우리는 더 들을 것도 없이 폭소를 터뜨린다. 생각만으로도 부끄럽고 그래서 더욱 크게 웃는다. 그애의 얼굴은 내내 빨갛게 굳어 있다.
저녁 무렵, 국어시간이 된다. 모두들 시큰둥하니 불어터진 표정으로 김효준 선생을 맞는다. 우리는 축 늘어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모른다. 우리가 분개해 있다는 것을. 달래고 어르지만 수업이 되지 않자 그는 진도 나가기를 포기하고 시를 읽어주겠다고 한다.
“누가 교무실 내 책상에서 명시선집을 가져오면 좋겠는데. 누가 갔다올래?”
“물어볼 거 뭐 있어요? 윤인자가 오직 선생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교실 한구석에서 누군가 용감하게 말을 툭 던진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진다. 그녀에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얼굴이 새빨갛게 굳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 김효준 선생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윤인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우리를 약올리겠다는 투이다.
“그래, 윤인자. 잘 알지. 착한 학생이지. 목소리 곱고 예쁘고 얌전하고…… 잘됐다. 인자 니가 가서 시집을 가져오고 낭독까지 해라.”
웃음소리는 스멀거리며 돌아다닌다. 교실엔 지쳐버린 정적이 감돌고 그 위로 윤인자의 가다듬은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퍼진다.
미라보 다리 아래 쎄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기억해야만 하는가
(…)
인생은 얼마나 더디고
희망은 얼마나 강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는 나에게 짝이 귓속말을 한다.
“얘, 저 주책, 우리가 그런 소리 했다고 윤인자를 쳐다보는 눈빛 좀 봐라. 아유, 징그러워.”
그것이 소문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기도 했다. 더구나 윤인자는 또래인 우리가 보기에도 여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머리털이며 눈빛이 엷은 편인 그녀의 안색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성숙한 분위기였고 키는 작았으나 통통한 몸매는 선머슴처럼 삐죽이 키만 자라 손이며 앞섶에 잉크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우리와는 달리 어른으로 보였다.
그런데 김효준 선생의 행동은 상식 밖이었다. 점점 더 그런 소문을 부추기는 식으로 행동했다. 우리가 빈정거릴수록 더 노골적으로 편애했다는 것이다. 보란 듯이 교무실로 불러다 심부름을 시키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네고, 국어시간엔 자꾸 쳐다보았으며, 채점을 도와달라며 방과 후에 남게 하는 일까지 있었다.
절정이었던 것은 어느 날 뜬금없이 윤인자에게 선행상이 수여된 일이었다. 조회시간에 이름이 불려지자 모두들 다 안다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소를 머금었다. 시상문제는 김효준 선생의 담당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제 1학년 학생이면 누구나 김효준 선생과 윤인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수군거리게 되었다. 윤인자는 고립되었다. 그 당시 김효준 선생이 그토록 학생들의 미움을 사지만 않았더라도 윤인자는 어느 정도는 동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이 나쁜’ 김효준 선생의 ‘귀염둥이’ 학생이어서 함께 미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점점 더 노골적인 편애를 했다. 왜 그랬을까? 학생들의 분위기를 몰랐던 걸까? 소문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걸까? 그때 김효준 선생의 나이를 훨씬 넘어버린 지금의 내가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어시간에 그의 시선이 그처럼 자주 윤인자에게 머물지 않았던들, 그의 입이 윤인자란 이름을 덜 불렀던들 그 소문은 그냥 흐지부지되었을지도 모른다.
열여섯 살 때의 기억으로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여름방학이고 보충수업이 끝난 오후이다. 물이 빠져나간 바닷가처럼 한산하다. 학생 서너 명이 교실에 남아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효준 선생이 창밖으로 지나간다. 시선이 마주친다. 학생들은 말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머쓱해진 선생이 말을 던진다.
“야, 학생들이 선생님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우리는 선행학생이 아니라서요.”
말에 고물이 묻을세라 일제히 대꾸한다.
“얌전한 처녀들 언행이 어찌 그러냐? 보기 싫은 줄도 모르냐?” 그는 짐짓 위엄을 부리려고 구식 말투를 쓴다.
“그럴테죠. 윤인자였더라면 보기 좋았을 텐데. 안됐네요.”
학생들은 말도 되지 않는 대꾸를 하곤 왁 하고 폭소를 터뜨린다. 선생은 잠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걸음을 멈추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단념하고 가버린다.
그 시절 ‘김효준이 윤인자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퍼진 게 여름방학 전인지 후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처럼 심한 우리의 반발에 얼굴만 붉히고 아무런 징계도 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때는 이미 소문이 돌 만큼 돌아다닌 연후였던 모양이다.
성! 열여섯이던 우리에게 성은 금지된 영역이었다. 그런 단어는 입에 올려선 안되는 시절이기도 했다. 성이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분야였고 눈치껏 알아채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그 도시에서는 보고 들을 기회조차 별반 없었다. 조숙한 편에 속했던 나만 해도 겨우 중학교 3학년 때에야 남자와 여자가 한 이불 속에서 자면 아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가 그걸 가르쳐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의기양양해진 내가 친구들에게 그 정보를 설명해주자 한 친구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어머나, 어떡하면 좋으니? 난 남동생하고 한 이불에서 자는데.” 말주변이 좋았던 나는 잠깐 궁리한 뒤 “같은 핏줄끼리는 안 생기게 되어 있을 거야”라고 해결해주었다. 가정과를 맡은 교사들의 임무 중에는 학생들의 브래지어며 속치마 착용 여부를 검사하는 일도 들어 있다고 믿어지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조금 달라졌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학교를 다니다가 양호실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여고생 이야기가 먼 풍문처럼 우리 귀에도 들어왔다. 또 남학생과 교제하여 정학 당했다는 상급생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인생을 포기하고 막가는 학생이나 깡통학교 학생이 하는 짓’이었다. 가정선생들은 인상을 쓰며 그렇게 설명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수줍었고 지나치게 구식이었다. 수업에 들어와 표정을 잔뜩 굳히고 “오늘은 말야, 같은 여자로서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하고 말머리를 내놓으면 우리는 아연 긴장하여 입을 꼭 다물고 기다렸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의 태도는 우리를 잔뜩 겁먹게 했다. 순결교육(그땐 성교육을 그렇게 불렀다) 시간의 그 참을 수 없는 뜨뜻미지근한 분위기. 오줌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찝찝한 뒷맛. 화가 나고 울고 싶어지는, 근원 모를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이상한 느낌들…… 그건 우리가 열등한 육체에 묶여 있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이란 참 보잘것없었다. 막연했고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남자를 잘못 만나면 신세를 망친다는 것이고, 순결이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데 정조를 잃어버린 여자는 인생이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는 말뿐이었으며, 그래도 정 연애를 하고 싶다면 대학에 합격한 뒤에 해도 충분하다,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하게 되곤 했다. 여자들의 몸에는 복주머니 비슷한 보물주머니가 하나씩 달려 있다고. 그리고 세상은 그 주머니를 날치기하려고 호시탐탐 여자들을 엿보는 소매치기들로 가득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야만스런 세상을 거쳐온 것만 같다. 정말이지 그때 우리는 너무 무식했고 혼날 만했고 당할 만했다.
그렇게 무지한 아이들이 주고받는 소문이래야 뻔한 수준이었다. 끌어안았다든지, 키스를 했다든지, 교복 상의에 달린 단추가 모조리 떨어져나갔다든지 하는 정도의 말이 쉬쉬하는 가운데 돌아다녔다. 우리는 경악했으며 모이기만 하면 열띤 토론을 그치질 못했다.
“그럼 걔는 순결을 더럽힌 거네?”
“몰라서 묻니? 키스까지 했다잖아.”
“키스한 건 그런 게 아냐. 문제는 걔 윗도리가 찢어져서 어깨가 다 드러나고 그랬다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지.”
“어머, 임신했겠다. 그럼 애는 낳는 거니?”
“배가 부른 것처럼 안 보이던데? 니가 거짓말하는 거 아냐?”
“양호실에서 애 낳았다는 학생도 감쪽같이 속이고 다녔대잖아. 복대를 얼마나 친친 동여맸는지 만삭이 되어서도 아무도 몰랐대.”
은밀하게 주고받는 지식들, 장님들끼리 더듬거리며 서로를 이끌어보려 애쓰는 손짓들.
그해 여름 내내 그 화제는 비밀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최음제처럼 우리를 사로잡아 정신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들이 아이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김효준 선생은 갑자기 재혼을 했다. 신부가 만삭이어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지만 곧 중간고사가 다가오면서 시들해졌다. 사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여백의 낙서와 같았고 우리의 나날을 점령하고 있던 대부분은 공부였었다.
열여섯 살이란 삶의 미답지를 방황하고 있는 인자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다. 바람 거센 황무지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다. 휴일날, 학교에 나와 빙빙 돌아다닌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학교는 도서관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다. 오늘이 바로 그의 결혼식 날이다. 실컷 울었으면 했지만 눈물도 나지 않는다. 연못가에 앉아 나무에 몸을 기댄다. 그에게서 받은 시집을 들춰 「미라보 다리」를 읽어본다. “인생은 더디고 희망은 강렬하다.” 몇 번이고 되뇌어본다. 지난여름 이후로 내내 그런 심정에 빠져 있었다. 졸업만 하면…… 그러나 졸업은 2년 후이다. 하루하루는 얼마나 지루하고 또 미래는 얼마나 꿈처럼 먼가. 시간의 흐름이 정말 안타깝다. 그런데 그가 결혼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도 그의 손길을 생생히 느낄 수가 있는데…… 인자는 도리질을 한다. 기말고사 채점이 끝나던 날 6반 교실에서 단둘만 있게 되었을 때 벌어진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생전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꿈에 그리던 그 말을. 존경해온 선생님에게서.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펜을 놓쳐버리기까지 했어. 그 작은 소리에 우린 둘 다 놀랐어. 물론 전부터 그이가 날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했었어.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 행복으로 알겠다고 다짐해왔는데…… 그이만이 날 이해하고 있어. 그이만이 내가 외롭다는 걸 알아. 전부터 그이는 늘 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었지. “우린 둘 다 외로운 사람들이야.” 그런 말을 하며 손을 잡아줄 땐 그이도 날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졌었어. “넌 어찌 그리 조용하고 참하냐.” 그런 다정한 말도 해주었지. 그런데 드디어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던 거야. 펜 떨어지는 소리에 내가 놀라자 그이는 나를 끌어안았지. 억세게 죄어오던 팔, 마구 부벼오던 입술, 혀 위에 혀가 또 하나 얹힌 것 같은 얼얼한 키스의 느낌은 며칠씩이나 남아 있었지. 감미롭지는 않았어. 침을 뱉고 싶단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그이에게 안겨 있다는 게 너무 황홀했어. 또 애무는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러웠는지…… 뜨거운 숨을 자꾸 내뿜어서 조금 놀라기는 했어. 하지만 그이는 몇 번이고 말해줬어. 사랑한다고. 참을 수 있었지.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손이 스커트를 들추고 들어올 때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다른 손으로 막아버렸어. “괜찮아, 안심해. 넣지는 않을게”라고 말하며. 넣는다는 말의 정확한 뜻은 몰라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 존경하는 선생님이었고 이젠 눈을 감기로 작정했으니까 말야……
책장 위에 눈물이 툭 떨어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변덕스런 가을 날씨답게 회색으로 잔뜩 찌푸려 있다. 오후엔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서울에도 비가 내릴까? 그의 결혼식장은 서울이다. 결혼식날 눈이 내리면 행복하게 살고 비가 내리면 불행하게 된다는데…… 인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눈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의 모습이 선하게 살아난다. 얼굴은 뿌옇게 흐려 알아볼 수가 없다. 그 여자는, 아니, 안되지, 이제부터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만삭이라고 하던데. 만약 내가 임신을 했더라면…… 어디선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불길한 전조처럼 인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서 집을 비웠을 때였다. 키우던 개 해피가 까닭 모르게 자꾸 짖어댔다. 아버지가 얻어온 개였다. 어머니는 사방에 개털이 날린다고 질색했지만 아버지는 해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손수 먹이를 주며 애지중지했었다. 아버지는 자주 말했었다. “해피는 행복이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그날따라 해피의 짖는 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길게 끌며 잦아드는 듯 흐느끼는 울음소리. 그날 밤 내내 해피가 짖는 소리 때문에 어머니는 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처음엔 기절했고 정신이 돌아오자 날더러 혼자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왜 동물에게만 영감이 있을까? 그날 밤 잠을 쿨쿨 잤던 인자는 왠지 아버지가 자기는 빼놓고 해피에게만 살짝 작별인사를 하고 간 것처럼 느껴져 못내 외로웠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어머니는 해피를 팔아버렸다. 인자와 동생은 아버지 장례식 때보다 더 크게 울었으나 어머니는 냉정했다. 해피가 없어진 뒤로 집안은 행복하지 못했다. 밤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인자네 집을 어둡고 텅 빈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밤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낮엔 억척스러운 척했으나 밤엔 나약한 면을 드러냈다. 인자와 동생을 안방으로 오게 해서 데리고 잤다. 동생을 사이에 두고 인자와 어머니는 내 천(川)자로 나란히 누워서 자는 것이다. 자다 보면 가끔 어머니가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끼는 바람에 잠을 깨는 적이 있었다. 처음에 인자는 깨어나 어머니를 불렀고 어머니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써 태연하게 “별일 아니다. 넌 그냥 자라” 하고 외면하곤 했다. 그러면 인자는 같이 울고 싶었고 걱정되어 잠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이면 어머니는 말짱해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니들 성(性)만은 지켜줘야지. 그러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낫지.”
가게에 나갈 때면 어머니는 으레 기운을 북돋우려는 듯 그렇게 말하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세월이 흐르고, 차츰 인자도 알게 되었다. 그 눈물을 조금은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움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자기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서로에게 감춰둬야 할 것임을 알았다. 어머니의 눈물은 아침이 되면 흔적도 없이 말라버리듯 외로움도 인정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낮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다. 자신에게도 딸들에게도. 그리하여 인자가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순결을 잃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 어머니가 그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러했다.
“순결, 순결……”
인자는 그 말이 낯설게 느껴질 때까지 몇번이고 되풀이해 말해본다. 정말 알 수가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내 인생은 끝장나버린 걸까? 이제 난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이 된 걸까?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테야. 절대 후횐 안해. 아낌없이 주는 게 사랑이잖아. 난 그이를 사랑하고 있어.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그이만 사랑할 거야. 그이가 비록 딴 여자랑 결혼하더라도…… 아마 그건 어쩔 수 없어서……
인자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리곤 나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운다.
“인자야, 너 여기서 뭘 하니? 너도 공부하러 나왔니?”
같은 반 신남수가 인자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인자는 자신을 추스를 수가 없는 상태이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은 하나둘 떨어지다가 순식간에 굵은 비로 변해버린다. 인자는 빗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신남수의 가슴에 비비며 서럽게 운다. 남수는 끌다시피 강당 앞 처마 밑으로 데려간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내게 다 털어놔봐. 응?”
오랫동안 인자는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한다.
늙으면 현명해진다는 말들을 하지만 어쩌면 젊어서 모르겠던 일은 나이가 든 뒤에도 역시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자의 일을 곰곰 되짚어보면 열여섯 살이던 그 나이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처럼 이십년이 흐른 뒤의 내가 생각해보아도 어떻게 하면 좋겠다든지 하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그때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었다는 미진함은 앙금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흐느낌 반 고백 반을 쏟아놓는 동안 비는 억수로 퍼부었고 인자는 내내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끝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 역시 인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었다. 그날 비는 폭포처럼 시야를 가렸고 순식간에 불어난 빗물로 운동장은 물바다로 변했다. 인자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나는 ‘어쩜 그럴 수가’ 하는 대꾸조차 못했다.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자는 내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안 그랬다간 학교에서 쫓겨날 테고 엄마한텐 맞아죽을 것’이라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거였다.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킬 거라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약속했다. 그건 단순히 인자를 진정시키려고 둘러댄 말만은 아니었다. 당연히 비밀로 해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가만히 있지 말고 뭔가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사정은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때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많이 고민했고 지금도 역시 모르고 있다.
사춘기인 우리들에겐 친구들끼리의 비밀이나 맹세란 매우 신성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건 버스 안에서 남학생과 눈을 맞추었다든지 하는 식의 예삿일이 아니었다. 만약 알려진다면 친구의 신세를 망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어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예상과는 다른 엉뚱한 반응을 보이기가 예사여서 그 일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되지 않았으려니와, 그들의 고루한 설교는 첫마디만으로도 사람을 질리게 하는 거였다. 단 한 가지 내게 분명했던 것은 그들이 인자를 가만두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 해가 끝나기 전, 김효준 선생은 갑자기 장학사로 발령받아 가버리고 대신 새 국어선생이 왔다. 그는 늙고 말많은 노인이어서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학교는 예전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인자는 그렇지 못했다. 외면적으로 특별히 달라졌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전처럼 조용하고 구석에 숨은 듯 생활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두드러졌다. 아이들 속에 섞여 사는 성숙한 여자라는 느낌이었을까? 그녀를 둘러싼 이상한 기류가 그녀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것 같았다. 못말리는 날라리가 되었다는 소문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무 남자하고나 잔다는 말까지 들렸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도 여관엘 간다는 거였다. 엷은 눈빛 뒤에 드리워진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삶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이랄까, 옷고리를 풀어놓고 신발 뒤축을 구겨 신고 발을 질질 끄는 그런 느낌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뒤덮어갔다. 웬일인지 그렇게 변해버린 인자를 학교에서는 별 간섭 없이 버려두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기억 속에서 인자는 밤의 여왕인 양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남게 되었다. 어쩌면 그 무렵 유행하던 영화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여자」의 주인공들과 혼동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면 갑자기 어스름이 내려앉듯 세상의 모습은 흐려지고 빛깔이 엷은 얼굴만이 점점 뚜렷한 음영을 안고 나타나는 것이다.
하루 또 하루, 시간은 흐른다. 뒤돌아보면 눈 깜빡하는 사이에 흘러가버린 것 같지만 낱낱의 날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만큼 더디게 간다. 나는 여전히 열여섯살이고, 공부에 매여 있다. 기나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은 인적이 드물고 황량하다. 싸늘한 북서풍이 거리를 휩쓴다. 지쳐버린 나는 문득 내일도 꿈도 다 날아가버린 듯 허전해진다. 유체이탈을 한 기분으로 걸어간다.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골목 입구에서 승강이하는 남녀를 본다. 붉은 방범등 빛을 피해 전봇대 뒤에 서 있지만 그중 여자가 인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남자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나지막이 으르렁대고 있다. 인자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자니? 괜찮니?”
내가 기척을 내자 그 남자는 슬며시 손을 치운다. 흘낏 나를 노려본다. 재수없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저편으로 가버린다. 인자는 그제서야 몸을 바로 세운다. 교복 단추를 제대로 잠그고 하얀 덧칼라를 매만지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쓱쓱 훑어 내린다. 그런 동작에는 무너져 내리는 폐가와 같은 황량함이 배어 있어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다닌다는 소문이 거짓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였구나. 나 어때? 괜찮아 보여? 자칫하면 엄마가 또 사람 잡을라.”
나는 놀라지 않는다. 이미 전부터 수없이 보아온 장면인 듯 익숙한 느낌이다.
“너, 남학생 사귀는 거니?”
“촌닭처럼 놀라기는.”
인자가 픽 웃으며 덧붙인다.
“학생 아냐. 난 학생은 싫어. 젖비린내가 나는 거 같아서. 나이 좀 든 사람이 좋던데……”
“그래도 되는 거니?”
“뭐가 어때서?”
친구로서 충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한참이나 더듬거리자 인자가 톡 쏘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 보여주려구 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녀와 나 사이에는 깜깜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느낀다.
“사람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말야. 복수하는 거야.”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이에 인자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홱 돌려 골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2학년 때 인자는 가출한다. 그 엄마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 나도 알게 된다. 밤에 어머니는 나를 불러 대문 앞에 바느질집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만나고 오라고 한다. 봄 밤 흐드러진 라일락 향기가 어둠속에서 혼을 앗아갈 정도로 진동하고 있다. 정체 모를 스멀거림이 내 몸을 핥고 지나가는 듯하다. 까닭도 없이 울어버리고 싶다. 인자엄마는 웅크리고 서 있다. 되도록 작게 보이고 싶은 듯.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듯. 내가 들어오시라고 권한다. 사양한다.
“아니다, 아녀. 걔 소식을 알려구…… 느 부모님과 마주치면 민망해서…… 요즘은 그년 때문에 동네에서 얼굴을 들구 다닐 수가 있어야지.”
아줌마의 말소리가 향기 짙은 어둠속에서 애잔하게 퍼져나간다. 혹시 내가 인자와 연락이 있는가 해서 찾아온 것이다. 두루 찾아다니지만 인자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나와 인자 사이에 교제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이다. 다른 학교를 다니는 친구라고 해도 이처럼 멀지는 않을 것이다.
“이년이 어쩌다 바람이 나가지고…… 콱 죽이고 나도 죽든지 해야지……”
아줌마는 눈물바람을 하며 중얼거린다. 문득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불끈한다. 심장을 불길이 살짝 핥고 지나가는 듯 가슴이 아릿하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꼭 깨문다. 아줌마는 몸을 돌려 어두운 골목 저편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 발소리는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서 울린다.
어머니가 나를 부른다. 혹시 요즘도 인자와 만나는지 묻는다.
“앞으론 인자랑 만나지 마라. 나쁜 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는 법이야. 넌 공부해서 대학 갈 궁리나 해야지.”
“인자도 원래 나쁜 애는 아녜요. 엄마도 한동네 살면서 걔 크는 거 보셨잖아요?”
“원래 나쁜 애란 없는 거야. 어쩌다 삐끗해서 길을 잘못 들면 그걸로 끝장인 거야. 여자는 특히 그런 거다. 아무튼 바느질집이 어떻게 해서 딸년들을 키우는데 그따위로 보답을 하니…… 요즘 시장통에선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애비 없이 키우니까 결국 그 꼴밖에 안됐다고 혀를 찬단다.”
울컥하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행방을 감추었던 인자는 임신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한바탕 소동이 난다. 그 골목에선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아우성이 그치지 않는다. 몸을 푸는 대로 결혼할 거라고 한다. 애아버지가 뒤따라 나타났다고 한다.
나는 대학 1학년이고 겨울방학이라 집에 가 있다. 길에서 우연히 인자와 마주친다. 어느 날 밤에 그랬듯 인자는 전봇대 옆에서 웬 남자와 함께 서 있다. 이번에는 한낮이지만 곧 눈이 내릴 듯 잔뜩 찌푸린 날씨여서 전봇대 뒤로 뻗은 골목이 어두컴컴해 보인다. 인자의 모습은 아주 낯설다. 그러면서도 고백을 들은 후로 줄곧 내가 상상해온 모습이라는 걸 안다. 허리에 손을 대고 배를 쑥 내밀고 있는 자세. 통통한 몸매여서 배는 더욱 불러 보인다. 두꺼운 월남치마에 스웨터를 걸쳤는데 배는 혼자 살아 있는 고무공처럼 억지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망설인다. 인자가 먼저 말을 건넨다.
“방학이라서 집에 내려왔구나.”
인자는 옆에 선 남자를 쿡쿡 찔러 인사를 하게 한다. 거무죽죽하게 죽은 얼굴에 입술빛까지 새카맣다. 낮과 밤을 뒤바꿔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뚱뚱하고 인자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 눈빛이 여간 아니다. 나를 샅샅이 뜯어보는 품이 소름끼치게 싫다. 인자의 말로는 직업이 어느 호텔 바텐더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자와 결혼해서 살려고 C시에 온 것이다. 인자는 바텐더를 빠텐이라고 발음하며 자랑스러운 듯 그 남자를 소개한다.
“결혼식은 여기서 하니?”
“그럼. 우린 결혼해서 여기서 살 텐데 뭐.”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작별한다. 잘살기 바란다고 말해준다. 인자가 까르륵 웃는다. 눈앞에서 커다란 배가 마구 흔들린다. 위악적인 잔뜩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뜨거운 증기처럼 내 얼굴을 휘덮는다. 남자도 멋모르고 덩달아 따라 웃는다. 나는 웃음소리에 쫓겨가듯 바삐 걸어간다. 멀어진 뒤에도 웃음소리는 여전히 내 귓전에 남아 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후 우리 집도 C시를 떠났고 나도 풍문으로만 그녀의 근황을 전해듣곤 했다. 아들을 낳았다, 칵테일 바를 열었다, 알고 보니 애아버지는 기혼자였다더라, 모씨와 바람을 피워 시내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바느질집 아줌마는 작은딸을 따라 서울로 갔지만 돌아와 인자와 함께 살고 있다…… 급한 산비탈을 마구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 들리는 소문마다 뒤숭숭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깜깜한 밤의 한가운데서 소문으로 무성히 자라난 그녀의 모습을 가지 쳐내고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쓴다.
어느새 중년 살이 붙어버린 인자. 통통했던 몸매는 마구 불어나 호리병 모양으로 변해버렸고, 전체적으로 색이 엷은 편인 그 모습에 희끗희끗한 흰머리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아니, 염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반짝이던 갈색 머리털이 아니라 염색으로 손상되고 더욱 색이 바래 누런 지푸라기처럼 부스스한 머리로 둘러싸인 인자의 얼굴. 창백한 갈색 눈은 더욱 깊이 그늘지고 눈 주위엔 검은 테가 동그랗게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인자는 눈을 뜬다. 어리둥절하다. 그녀를 둘러싼 방의 모습은 난장판이다. 온통 망가진 물건투성이다. 화장대의 거울은 금이 가 있고 문짝이 비틀린 채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옷장이며 유리조각이 수북한 방바닥…… 춥다. 이곳이 가게에 딸린 내실이고 어젯밤 자기가 술주정을 했다는 걸 기억해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요즘은 북이동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 곧 남의 손에 넘어갈 집. 여지껏 그녀가 모은 전 재산이다. 어머니는 작년에 죽었고 아들은 집을 나가버렸다. 한동안 아들은 제 아버지가 사는 서울로 전학 가겠다고 시위했었다. 엄마를 봐도 본체만체했고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공부를 방해한다고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걸 안 후이다.
애인이던 부동산 사장이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빼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상가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돈이 돌지 않는다는 거였다. 늦어도 한두 달이면 분양이 끝날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아마 그 인간도 처음부터 사기 칠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분양이 생각처럼 되질 않았을 것이다. 사장은 잠적하고 아파트는 허공에 떠버렸다. 어쩔 수 없이 가게에 딸린 방으로 옮겨 앉아야 한다. 아들은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요즘 내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 거 안 보여? 우리 선생이 뭐랬는줄 알아? 땅이 척박해서 꾸불꾸불 자란 나무더러 땅이 척박해서 참 안됐다고 동정하진 않는대. 그저 비틀린 나무라고 구박할 뿐이지. 난 비틀린 나무가 되긴 싫어. 나는 공부를 잘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이런 환경에선 안돼. 우선 엄마가 술먹고 그렇게 다니는 게 창피해. 여기서 살았다간 나까지 손가락질을 받는다구. 아버지한테 가서 살 테야.”
아들은 소리를 지르기까지 한다. 속이 상해 술을 잔뜩 마신 인자도 맞서서 고함친다.
“야, 이 나쁜 놈아. 에미는 속이 상해 죽게 생긴 것두 모르고…… 크나 작으나 저만 아는 남자새끼들은 그만 신물이 난다. 그동안 애면글면 널 키운 게 누군데 창피해? 내가 가게라도 안했어봐. 너 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 줄 알아? 근데 에밀 버리고 애비한테 간다구? 니 애비는 어서 옵쇼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
“그래도 거긴 여기보단 날 거 아냐? 거긴 적어도 정상적인 가정이잖아. 아님 하숙이라도 할 테야. 엄마는 할머니가 죽은 뒤로 더 개판이 됐어. 우리 선생이 그러는데 사람은……”
“선생 같은 소린 집어치워, 이 나쁜 놈아. 우리 가게에 오는 사람 중에 애들이 젤 싫어하는 게 선생이야. 겉으로는 혼자 도덕군자인 체 말은 많지. 하지만 룸에 들어가봐. 젤 더럽고 치사하게 껄떡거리는 게 선생이야. 추잡해서 다들 들어가기가 싫대. 선생? 흥. 니 엄마도 소싯적에 선생 믿다가 이 꼴이야.”
말의 흐름이 질질 끌려 아무 소리나 막 내뱉던 인자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입을 탁 친다. 아들은 말끄러미 노려보고 있다.
“난 엄마를 경멸해.”
아들은 집을 나갔다.
인자는 은행에 갚을 돈을 구하려고 뛰어다니는 동시에 아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행방이 묘연하다. 학교에서는 퇴학시킨다고 으름장이고 은행에선 곧 경매에 부칠 거라고 협박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둘 다 인자로선 역부족이다. 힘이 쭈욱 빠져나간다. 가게문도 열지 않는다. 잠을 자다가도 몇번씩 벌떡벌떡 깨어난다. 술을 마셔도 소용없다. 술주정만 심해질 뿐이다.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간다. 하루를 보내는 게 뜨거운 양철지붕에서 맨발로 서 있는 것 같다. 가슴을 들여다보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심장이 보일 것이다.
그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한 달 전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몸 어느 구석엔가 몰래 씨앗이 뿌려져 있던 것일까? 내면에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들의 학교에 불려갔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친다. 인자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지만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무심히 지나친다. 인자는 불현듯 자기 내부에서 물컹하니 자라버린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 없다. 악의일까? 원한? 그리움? 사랑?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종류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그녀를 점령하여 억세게 조여온다. 몸속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밤이면 인자는 잠에서 깨어나 골똘히 그것을 들여다본다. 머릿속엔 지난날이 조각난 영화필름처럼 스쳐간다. 미혼이라고, 돈을 빌려달라고, 아들을 같이 잘 키워보자고, 이혼하겠다고, 융자만 빼주면 곱으로 갚겠다고 속삭이던 수많은 남자들의 모습이 그의 모습 하나로 응결되어버린다. 그것은 점점 자라난다.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운다.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도, 어머니의 병도, 아들의 가출도, 아파트의 저당도 다 그의 탓인 것이다. 그는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멀거니 천장을 보며 누워 있는데 김양이 방문을 연다.
“아직도 자, 언니? 요즘 술주정이 부쩍 는 거 같아. 이젠 감당을 못하겠더라. 속 좀 작작 끓여. 집 날라 갔다고 사람까지 죽어?”
인자는 대꾸하지 않는다. 그대로 상념에 잠겨 누워 있다. 김양이 빗자루를 가져오며 재잘댄다.
“오늘부터 영업을 다시 한다면서 뭐하고 아직도 자? 일어나. 여긴 내가 치울 테니까 목욕이라도 다녀와.”
무슨 객쩍은 짓이냐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는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죽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자신을 타이른다. 그래, 우선 목욕부터 하자. 끙 하고 몸을 일으킨다. 죽으면 썩어버릴 육신이 왜 이리 무거울까. 목욕하고 나서 학교에 가봐야지. 교장실에 가서 그를 만나야지. 틀림없이 그는 내 부탁을 들어줄 거야. 최소한 퇴학만은 당하지 않게 해야 돼. 인자는 목욕바구니를 들고 가게를 나선다. 오전나절, 거리의 분주함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아, 토요일이었군. 인자는 걸음을 멈추고 거리 저편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막 분주함이 시작되어 서서히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다. 손차양을 만들며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을 서 있다. 햇살은 하얗게 빛난다.
어느 봄날, 우편함에서 나는 동창회 초대 엽서를 발견할 것이다. 거기엔 ‘20주년 홈커밍 데이’를 알리는 안내문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십 년이나 지난 뒤 C시 입구에 있는 플라타너스 우거진 그 길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다. 나무들은 더욱 무성히 자라 이젠 하늘을 볼 수 없도록 빽빽할 것이다. 그 길 끝에서 기다릴 친구들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눈부신 빛 속에서만 떠오르는 그 시절의 기억처럼 강가에 있는, 숲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그 학교의 회색 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십년 전의 친구들을 여전히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음에 놀랄 것이다. 이렇게 많이 달라졌는데도 서로를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소녀처럼 손뼉치며 깔깔거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는 중간중간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 침묵과 서늘하게 등을 스치는 냉기를 느껴 자꾸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 빈 공간 때문에 한번 더 후두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문득 김효준 선생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는 교육감이 되었는데 동창회의 주요 내빈으로 축하하러 왔다고 할 것이다. 그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으면 모두들 갑작스런 냉기에 소스라칠 것이고, 수군거릴 것이고, 그 소리는 점점 불어나 다시금 우우 하는 입엣소리로 퍼져 강당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때도 그랬듯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짐짓 점잔 뺀 목소리로 “현모양처를 길러내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학교의 전통……” 어쩌구 하며 연설을 계속하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오랫동안 울 것이고 그가 어리둥절해하면서 울음소리에 떠밀려 강당에서 나가버린 뒤에도 눈물을 그치지 못하리라.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눈물은 아무 도움이 못되니까 어서 그치라고. 하지만 그런 슬픔 뒤에 무엇이 올지 누가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