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황주리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몰라요.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를 당신이라고 불렀지요. 사이가 무척 좋았는데, 왠지 두 분 모두 여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지독히 아쉬을 때만 찾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 비슷한 것을 할 때 '당신' 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지금,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당신이라도 좋고, 어디선가 몇 번쯤 스쳐간 적이 있는 당신이어도좋아요. 그냥 제 얘기를 늘어놓고 싶어지네요.
때로 나는 외로운 누군가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아이가 없어 불행한 사람에게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요. 갈 곳 없는 불쌍한 노인들에게 천국 같은 양로원을 지어주고 싶어요.
실행 불가능한 이 무책임한 상상들을 끌어안고,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아침이면 정확히 홍당무 네 개와 셀러리 두 줄기, 사과 한 개를 주서에 넣고 주스를 만들어 먹지요.
서양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you are what you eat. 너는 곧 네가 먹는 것이다.
아무것도 잡아먹어 본 적이 없는, 단지 물과 이슬과 거름밖에는 먹어 본 적이 없는 홍당무와 사과를 많이 먹어서인지, 몇 년 사이 나는 정말 순해졌어요.
적과 동지는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요즘은 정말 적도 라이벌도 없어요. 그 사람이 밉다가도 떡 하나 더 줄 생각을 하면 곧 동지가 되기도 하지요. 친하다고 믿고 함부로 하면 곧 적이 되기도 하듯이. 아이들은 내 편 네 편을 쉽게 가르지만, 적도 동지도 없는 세계는 어쩌면 더욱 쓸쓸한 어른의 세계네요.
세상의 막막한 벌판을 향해 돌을 던져봤자, 빙 돌아서 곧 내 이마 위로 떨어지는 돌. 결국 자신의 동지도 자신뿐이고 자신의 적 또한 자신뿐이라는 걸, 난 이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아요. 그래도 이 쓸쓸한 세상을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라고.
바람을 피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다르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고 보면 사랑은 늘 바람이지요.
그것이 호수의 잔물결이든, 자동차가 끼얹고 가는 탁한 거리의 빗물이든, 폭풍이든 종류는 다 다르겠지만. 우리들 삶 자체가 한 줄기 바람, 모래알 속의 먼지, 먼지 속의 티끌일진대 사람의 사랑이 뭐 별거겠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뜨겁거나 탄 것이 좋았어요. 화상도, 동상도 입을 염려가 없는 미지근함의 미덕에 관해서는 배우지 못했어요. 쉬익 끓다 마는 양은 냄비 같은 뜨거움이나, 부시시 공중으로 사라지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차가움 외에는 알지 못했어요. 그럴 바엔 미지근함을 조금 면한 따뜻한 물이었으면 좋겠어요.
가루로 된 감기약을 먹을 만큼의 따뜻한 물. 그런 사람이 그리워져요.
가끔 사람과 사람의 원근법에 대해 생각해봐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요즘은 이 오래된 정의가 꼭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까움이란 그저 습관적인 만남의 축적이어서 킬링 타임용 영화를 보듯, 혹은 있는 듯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서로를 더 이상 가깝게 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 이미 멀어진 거리 이상은 더 멀어지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눈으로 보듯 마음에서 더 가까워지는 대상도 없고, 눈에서 안 보이듯 마음에서 더욱 멀어지는 대상도 없는 것 같아요.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흔히 이야기하듯, 세월이 많이 지나 묵은 술처럼 익어서 편안해지고 더욱 돈독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낡은 기계의 수명처럼 오래될수록 삐걱거리고 덜컹거려서, 부품을 갈아주거나, 고물상에 팔거나, 그냥 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그런 종류의 것은_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부부든 연인이든 친구든 간에, 모든 관계에는 유효 기간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어요. 관계 통조림, 사랑 통조림, 우정 통조림, 추억 통조림 등등‥‥‥‥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요.
나는 하루에 여덟 시간 그림을 그리는 프로페셔널 화가예요.
대체로 프로페셔널이란 휴머니즘과는 동떨어진, 기계적인 세계지요. 청부 살인업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살인을 주저하거나, 손님을 골라가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상대하는 창녀라면, 그 역시 프로페셔널일 수 없지요.
프로페셔널 화가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기분 내킬 때 멋있는 선 하나 주욱 긋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피땀 흘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저녁이 되면 늘 맛있는 걸 만들어서 야금야금 혼자 먹어요. 정말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해요. 심플 라이프가 가장 진화된 삶의 형태라는 걸 아시는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쓸쓸해지는 건, 마음에 드는 사람뿐 아니라 사고 싶은 물건조차 없어진다는 거예요. 예전에 나는 목걸이며 귀고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거워서 더 이상 매달고 다닐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어요. '모든 물건이 무겁다, 무거운 것은 싫다, 옷조차 무겁다.'
눈이 지독히 나쁜 내가 안경조차 무거워서 쓰기 싫어졌다면 어찌해야 좋을지. 그냥 안 보이는 채로 걸어다녀요. 세부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직업 탓인지 윤곽을 알아보는 데는 귀신이지요. 나무는 안 보고 산만 본다, 정말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고흐가 지독한 난시였다는 걸 아세요? 그러니 중요한 건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지요. 누구나 다 대상을 통해 자기를 보는 법이니까요. 뭐니 뭐니 해도 죽는 일을 빼면 이 세상에 큰일은 하나도 없어요.
죽는 복은 타고나야 한다는데, 나는 딱 여든 살을 채운 날 자다가 꿈속에서 죽고 싶어요. 누군가 내 어깻죽지에 날개를 달아준다거나, 아주 편안한 안락의자를 선물한다거나, 하느님이 직접 왕림하시어 '이제는 푹 쉬어라' 하시며 내 손을 잡고 구름 속을 걸어가는, 그런 꿈속에서요.
오랫동안 죽음의 방식에 관해 생각해 왔어요. 누군가 적당한 때에 아무 고통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을 죽여준다면, 그는 정말 은인이지요.
문득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서른한 번째 자살을 도운 어떤 미국 의사가 생각나네요. 그는 때마다 재판에 회부되지만 증거와 동기가 확실해 늘 무죄로 풀려나는 괴짜 의사예요.
요즘 세상에 누가 남의 죽음에 끼어들고, 간섭하고, 책임지고 싶어하나요? 남의 삶이 그저 남의 일일 뿐이듯, 남의 죽음 또한 남의 일일 뿐이지요.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이처럼 냉정한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 직업을 소화해 내기 어려을 거예요.
매일 부딪치는 피와 상처와 고름과 죽음, 그 모든 고통들을 마치 자동차 수리공이 고장난 자동차를 고치듯, 잘 돌아가지 않는 기계의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 그렇게 냉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는 얼마나 불행한 존재일까요? 그러 나 그런 불행을 느끼는 만큼 그는 따뜻한 휴머니스트겠지요. 어쨌든 나는 그 의사가 몹시 마음에 들어요.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 또는 수명을 다했거나 아파서 죽은 사람들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은 사형수들이지요.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영문도 모른 태 죽어간 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나치는 6백만 명의 유태인을 죽였고, 캄보디아에서는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사람들을 대량 학살했고, 어떤 곳에서는 공산주의자라고 죽이고, 어떤 곳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죽이고, 또 어떤 곳에서는 바람을 폈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죽이기도 하고요.
죽이는 방법도 끝없이 발달해 왔어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인,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이는 데는 네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네요. 교수형에는 15분, 전기 의자로는 18분, 약물 주사로는 20분, 가스로 죽이는 데는 20분‥‥‥
요즘 가장 발달한 사형 방법은 사형수를 병원에 입원시키듯이 침대에 눕혀놓고 주사를 놓는 방법이래요. 원래는 나치가 유태 어린이들을 죽일 때 사용한 방법이라고 해요.
물론 이제는 사람이 주사를 놓지 않아요.전기 장치가 되어 있어서 버튼을 올리면 주사기가 작동을 하지요. 입원실같이 생긴 사형 집행실에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그 앞에 사형 집행 입회인들이 주욱 앉아 있게 되지요.
제일 간단한 건 관자놀이에 대고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일 테지만, 이제는 사람을 직접 죽일 수 있는 노동력이 없어요. 사형 집행도 다 컴퓨터로 처리되지요. 이 기계적인 시스템 앞에서는 슬퍼하거나 주저할 이유도 없어요. 오직 죽는 자와, 죽음을 집행하는 기계와 그 죽음을 바라보는 구경꾼들. 그러면 끝이지요.
아, 살고 싶어요. 아주 작은 낙이라도 그 낙을 실에 꿰어 양탄자를 만들어서 날아다니고 싶어요.
가루로 된 감기약을 먹을 만큼의 따뜻한 물인 당신, 제 넋두리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