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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 씨앗 단이

괭이밥 씨앗 단이

임정자

 

괭이밥 작은 씨앗들이 푸른 꼬투리 안에서 노래를 한다.

단단히 여물어라

단단히 여물어라

햇살아씨 내 문 두드리면

나는 바람 타고

멀리멀리 떠나야 하리.

노래는 우렁찼고, 씨앗들은 하루하루 여물어 갔다.

씨앗들이 알맞게 여문 어느 날, 해님은 기분 좋게 빛나고, 노란 치마저고리를 입은 햇살아씨들은 미끄럼을 타듯 빛살을 타고 땅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햇살 아씨들은 노랑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괭이밥 푸른 꼬투리를 뱅글뱅글 돌더니만, 가느다란 막대기로 꼬투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 그만 나오너라.

입은 옷 벗어 던지고

이제 그만 나오너라

바람이 널 기다린다.

괭이밥 씨앗들은 햇살 아씨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자 마음이 설레었다. 씨앗들이 들썩거리자 꼬투리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드디어 눈부신 하늘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씨앗들은 흰옷을 벗어 던지고 앞다투어 밖으로 퉁겨나갔다. 햇살 아씨들도 서둘러 제 짝꿍 씨앗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단단해 보이는 괭이밥 씨앗 한 톨에게도 햇살 아씨가 따라오며 속살거렸다.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찾아봐."

"날아갈 수 있는 만큼 날아가는 거야. 땅은 아주 넓다고."

씨앗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멀리 날아가지는 못했다. 바람이 동백나무를 휘돌아가다 씨앗을 동백나무 아래에 떨궈 놓았기 때문이다. 씨앗은 걱정스러웠다.

"햇살 아씨, 그늘이 지는데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 넌 아주 단단히 여문 씨앗이잖니? 난 널 단이라 부르고 싶어."

햇살아씨는 따스한 입김을 불어 씨앗을 어루만져 주었다. 괭이밥 씨앗 단이는 가슴이 발락발락 뛰었다.

햇살 아씨는 때가 되면 오겠다 하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추위가 한풀 꺾일 즈음 한 사람이 동백나무께로 다가왔다.

"이 나무는 아담한 것이 꽃도 탐스럽구먼. 집에 가져가 심으면 좋겠어."

사람은 동백나무 잔뿌리들을 상둥상둥 잘라내고는 새끼줄로 칭칭 동여매어 자루에 담았다. 둘레 흙은 손으로 싹싹 쓸어 자루에 함께 담았다. 그 바람에 단이도 흙에 쓸려 자루 속에 담겨졌다.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단이는 놀라 발버둥 쳤지만, 동백나무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져 낯선 도시로 가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것도 작은 화분 깊숙이 파묻혀 사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꺼운 흙은 하늘을 가렸고, 따사로운 햇살은 단이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먼길을 달려온 바람도 유리창에 부딪혀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싹을 틔울 수 있을까?"

단이는 햇살아씨가 온다는 때를 헤아려 보지만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뿌리가 상둥상둥 잘린 동백은 아파트로 온 날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떨어뜨렸다. 윤기 흐르던 잎사귀들도 하나둘 떨구어냈다. 그래도 상처가 낫지 않아 날마다 끙끙 앓았다. 단이는 동백이 걱정스러웠다.

"동백님! 꽃도 지고, 잎도 졌으니 어쩌면 좋아요?"

"잎이 떨어진다고 새잎이 안 나겠니? 뿌리가 살아나면 모두 새로 나고 피고 할 거야."

'동백님은 뿌리가 있으니까 희망을 가질 수 있구나. 하지만 난 뿌리도 잎도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희망을 갖고 살지?'

괭이밥 씨앗 단이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동백잎이 자꾸 지네. 물을 많이 줘야겠어."

어느 날 사람 말소리가 들리더니 화분 속으로 물이 주르르 흘러 들어왔다. 갑작스레 흘러 들어온 물은 순식간에 밑으로 빠져 버렸다. 그러나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화분 속을 떠돌아다녔다. 목이 말랐던 동백은 열심히 물을 빨아 마셨다. 단이 몸은 물에 조금 불었다.

그때 난데없이 단이 앞에 낯선 괴물이 나타났다. 둥글둥글하고 뭉글뭉글한 것이 꼭 물덩이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넌 누구야?"

단이는 놀라 소리쳐 물었다.

"물클클클. 난 뭉글이다. 난 통통하게 살찐 씨를 좋아하지. 하지만 넌 아직 살이 덜 올랐어. 내가 널 알맞게 살찌워 주지."

뭉글이는 둥글둥글한 몸을 늘려 단이를 덮쳤다.

"안 돼! 너한테 잡아먹힐 순 없어."

단이는 있는 힘껏 뭉글이를 밀쳐 냈다.

"물클클클.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다."

뭉글이는 물컹물컹한 몸을 씰룩거리며 끈적끈적한 독액을 토해 냈다. 독액이 닿자 단이 몸은 조금씩 부풀어올랐다. 단이는 아픔에 겨워 저도 모르게 으아악!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 때였다.

"나쁜 놈! 내가 상대해 주겠다!"

동백이 소리쳤다. 동백은 하얀 뿌리를 쳐들고 괴물 뭉글이를 노려보았다. 뭉글이가 놀라 주춤 물러섰다. 단이는 그 틈을 이용해 몸을 비틀어 뭉글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뭉글이는 화가 나 소리쳤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마라."

"남의 일이라고? 네 놈이 단이를 해치운 다음 내게 덤벼들지 말란 보장이라도 있느냐?"

뭉글이는 순식간에 동백 뿌리에게 달려들었다. 동백은 뿌리를 흔들어 뭉글이를 떼 내려 했다. 괴물 뭉글이는 동백 뿌리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발칵발칵 독액을 토해냈다. 동백은 다른 뿌리를 들어 뭉글이 몸을 세차게 후려쳤다.

"뭉글이 네 놈은 물기가 없으면 죽고 말지. 당해 봐라."

동백은 비록 잘리고 병든 뿌리지만 있는 힘을 다해 화분 속에 있는 물기들을 빨아들였다.

"물클클클. 아무리 마셔대도 소용없다 이미 네 뿌리는 내 침에 썩고 있단 말이다. 끄윽!"

뭉글이는 동백 뿌리를 썩히고 갉아 먹어댔다. 단이는 자기 때문에 동백이 다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동백님은 이미 다친 몸이야. 그대로 놔 둬."

단이는 뭉글이를 동백 뿌리에서 떼어 내려 달려들었다.

"저리 비켜나 있어. 네 힘으론 어림도 없다구."

동백은 뿌리를 휘둘러 단이를 밀어 던졌다. 동백 뿌리들은 쉬지 않고 물을 빨아 마셨다. 마침내 화분 속이 보송보송해졌다. 넘치던 물들이 사라졌다.

물기가 사라지자 괴물 뭉글이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동백 뿌리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동백 뿌리 하나가 뭉글이의 고약한 침에 썩어 검게 변해 버렸다.

"괜찮아.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뭉글이와 싸우느라 지친 동백은 금세 잠에 빠졌다.

단이는 잠든 동백을 보면서 잊었던 꿈을 기억해냈다. 노란 꽃을 피우겠다는 꿈을.

시간이 흐르자 동백 뿌리는 온전히 살아났고, 둥그런 새잎이 돋아났다. 하지만 흙 속 깊이 묻힌 괭이밥 씨앗 단이는 싹을 틔우지 못했다.

단이는 점차 어둔 흙 속에서 사는 법에 익숙해졌다. 동백은 단이에게 세상이 내는 소리를 알려 주었다.

치칵치칵.

"저것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는 기계 소리야."

토도도톡톡.

"저 소리는 바깥세상을 적시는 빗소리지. "

"동백님, 잠깐만요. 저 소리, 저 노랫소리는……, 귀에 익은 저 노랫소리는……."

"그래, 햇살아씨들이 어린 씨앗들을 세상으로 불러내는 소리지."

"나를 부르던 햇살 아씨의 노래기도 해요."

단이는 짝꿍 햇살 아씨가 그리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어느 여름날.

"잎사귀 색깔이 왜 이렇게 칙칙하지?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사람은 화분을 번쩍 들어 유리창 밖 난간에 놓았다. 아파트 들머리 위 툭 튀어나온 난간이다. 단이와 동백은 기뻐 탄성을 내질렀다. 좀 뜨겁긴 했지만 햇빛이 있고,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동백은 이제 겨울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라며 꽃봉오리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조금만 더 따뜻하면 단이도 싹을 틔울 수 있을 거 같았다.

'햇살 아씨가 말하던 때가 드디어 찾아왔어.'

단이는 하루하루를 설렘으로 보냈다.

그러나 화분 속은 자꾸 메말라갔다. 사람은 화분을 밖에 내논 뒤로 물 주는 걸 잊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설렘으로 들뜬 단이 가슴도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어쩌면 끝내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단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어딘가로 떠났지만, 화분은 뜨거운 햇빛을 고스란히 견뎌 내야 했다.

동백은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 잎사귀를 늘어뜨렸다. 단이는 갈증에 몸이 타들어 갔다. 이번에는 물빨이 괴물이 나타났다. 물빨이 괴물이 사마귀 다리처럼 가늘고 긴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가늘고 둥근 입이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치치치치치. 맛난 먹이가 있군."

물빨이는 고개를 돌려 치이익 휘파람을 한 번 불더니 동백뿌리에게로 다가갔다. 단이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동백님! 괴물이 나타났어요."

동백은 얼른 뿌리를 흔들어 괴물 물빨이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괴물 물빨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빨이는 긴 다리로 동백뿌리를 막아내며 흙을 헤치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길고 둥근 입을 동백 뿌리에 대고 뿌리가 품은 물을 쭉쭉 빨아들였다. 동백은 물빨이를 떨궈 내려 했지만 물빨이의 입은 동백 뿌리에 들러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뿌리는 빠른 속도로 말라갔다. 동백은 온 힘을 다해 뿌리를 흔들어 겨우 물빨이를 떨궈 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물빨이가 나타났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셀 수 없이 많은 물빨이들이 스물스물 기어와 동백 뿌리마다 찰싹찰싹 들러붙었다.

동백은 몸부림쳤지만, 괴물을 이겨내지 못했다.

"물이 필요해. 물만 닿으면 녹아 죽고 말 놈들인데. , 비가 왔으면……."

물빨이는 괭이밥 씨앗 단이에게도 달려들었다. 그러나 단이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 때문에 쉽게 물기를 빨아들이지 못했다. 그러자 물빨이는 기다란 다리 끝에 달린 갈퀴 발톱으로 단이의 껍질을 할퀴어댔다. 단이는 껍질이 찢기지 않도록 단단히 부여잡았다.

"비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해."

단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물빨이 갈퀴 발톱이 단이 몸에 상처를 내고 덧내자 결국 단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은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먹구름이 불처럼 타오르는 해님 앞을 막아서더니 굵은 소낙비를 좌락좌락 내리쏟았다. 온 누리를 적시는 세찬 빗줄기는 동백과 단이가 있는 화분에도 쏟아져 내렸다. 세차게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는 흙을 파헤치며 화분 속으로 속으로 스며들었다.

빗물은 상처 입은 단이 몸을 적시고, 말라 거죽만 남은 동백 뿌리를 적셨다. 그러자 단이 몸과 동백 뿌리에 착 들러붙어 있던 물빨이의 기다란 입이 녹았다. 물빨이들은 치지직 소리를 내며 녹더니 빗물과 함께 화분 밑으로 빠져나갔다.

소낙비도 그치고 해님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화분은 소낙비가 파헤쳐 놓은 흙이 튀어 더러워졌지만 괭이밥 씨앗 단이는 희미하게 해님의 빛살을 느낄 수 있었다. 촉촉해진 흙에 기대어 바람이 지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 무슨 소리가 들린다.

톡톡톡!

기다림은 끝났네.

하늘은 내 안에 있네.

햇살아씨 노랫소리이다. 가느다란 막대기로 단이를 덮은 흙을 두드리며 햇살아씨가 노래하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괭이밥 씨앗 단이는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모았다. 햇살아씨는 흙을 헤치고 들어가 단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물빨이 갈퀴 발톱에 상처 입은 껍질이 소르르 벗겨지더니 하얗디 하얀 괭이밥 싹이 비쭉 얼굴을 내밀었다. 단이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었다. 괭이밥 단이는 쑥쑥 자라났다. 한겨울 추위에도 화분을 가득 덮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동백나무에게 빨간 치마를 차려입은 햇살아씨가 찾아왔다. 동백나무도 빨간 동백꽃을 송이송이 피웠다. 가지마다 송이송이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