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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냉장고

김현영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카트린만도 못한 놈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도 그녀는 바게트빵의 속을 뜯어내고 있었다. 빵의 속살을 뜯는 그녀의 손놀림은 늘 최고의 운만을 점찍는 주사위를 던지듯 경쾌했다. 길이가 50센티는 되어 보이는 바게트의 뾰족한 끝을 잘라내고서 뜯어낸 속은 우묵한 그릇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바게트와 그릇 사이에선 와인빛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뾰족한 손톱이 비행하고 있었다. 바게트의 본체에서 이탈한 빵조각들이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정확히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 나는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그녀의, 다른 여자가 아닌 바로 그녀의 손톱이라는 와인색 비행기에 실려 막 생애 최고의 비행을 하고 있는 빵조각들에 대한 적의였다. 이제 그릇에 안전하게 착륙한 저 빵조각들은 황홀했던 비행을 다시금 떠올리며 곧 포근한 화상과도 같은 우유에 젖어들 테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우유에 적신 한 접시의 빵은 언제나 카트린의 것이었다. 카트린은 치와와다. 치와와는 애완견의 일종이고 애완견은 말 그대로 애완용 개를 가리킨다.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그러니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한마디로 키트린은 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카트린만도 못한 놈이다. 즉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다.

그녀는 녀석, 아니 년의 둥그런 눈동자와 기타 줄처럼 가느다란 늑골이 드러난 마른 몸집을 볼 때면 애처로운 아기 사슴을 보는 것만 같다며 아름다운 눈에 금방 눈물방울을 만들어 달곤 했다. 내게는 녀석 아니 년의 애처로움이 내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진주 같은 눈물방울을 안경인 양 쓰고 보면 카트린의 내숭이 바로 내숭이라는 이유로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왜 마음에는 늑골이 없는 걸까? 기타 줄이 다 뭐야. 거미줄보다 더 가는 늑골이 휑 드러난 내 마음을 그녀가 볼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나를 위해 주사위를 던져 한 접시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 대해 연민을 갖기에 나는 너무 강했다. 그녀의 주사위가 아무리 최고의 운만을 점 찍는다 해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뿐인 것을. 그녀는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런 그녀 앞에서 강하다는 건 확실히 개만도 못한 일이었다. 카트린의 밥을 만들고 나서 그녀는 바게트의 껍데기를 조금씩 뜯어 먹고 카페오레를 한 모금씩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유리로 만든 여왕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고 자비로워 보인다.

금방 구워서 속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바케트일수록 껍데기도 더 맛있어.

바게트의 껍데기를 뜯으며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파출부 아줌마가 아침에 우리 집으로 출근하면서 사 들고 오는 갓 구운 바게트와 카페오레 한잔이 그녀의 아침 식사였다. 입이 짧은 그녀에게 50센티짜리 바게트는 너무 길었다. 좀 작고 둥그스름한 바게트도 있었지만 그녀는 바게트는 길어야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옳은 소리를 했다. 길어서 매력적인 바게트는 그러나 삼분의 일 정도만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도 껍데기만. 게다가 매일 그날 구운 바게트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져녁나절이 되면 속은 속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데로 뜯긴 채 남은 바게트는 버림받은 시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곤 했다.

"이놈의 빵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네. 팥이 들었나 쨈이 들었나 빠다가 발라지길 했나. 것두 껍데기만 먹으니 그게 무슨 심보람. 돈 좀 있다고 유세하는 건지 뭔지..."

파출부 아줌마는 굳은 바게트를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아줌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전 세계 바게트에다 단팥을 듬뿍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게트에 단팥이 들어 있다면 아줌마는 남은 바게트를 쓰레기통에 처넣는 대신 아마 자기가 먹겠지. 단팥이 든 바게트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우스웠다. 그러나 그걸 먹는 아줌마를 생각하면 우습다기보다는 조금 슬픈 기분이었다. 나는 아줌마를 위해 바게트에 단팥을 넣고 싶다던 생각을, 역시 아줌마를 위해 금방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남은 바게트를 아줌마가 쓰레기통에 처넣기 전에 몰래 내 방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속을 조금 파서 사타구니에다 대고 거울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야릇했다. 바게트는 긴 게 매력적이야. 바게트에 찍힌 그녀의 손톱 자국은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나는 이어서 내 물건이 바게트만 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력 질주를 해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운동장 같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앉은 그녀는 조간신문을 읽으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트린은 식탁 위로 올라가서 우유에 적신 바게트의 속살을 핥아댄다. 내가 저렇게 식탁 위에 앉아 있으면 그녀는 머리도 쓰다듬어줄까? 카트린 같은 개만 올라갈 수 있는 식탁, 개들의 운동장,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내 마음은 한마디로 개 같았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깊이 파묻었던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구부렸다. 하리를 펴고 앉아도 등받이는 머리보다 20센티마터 더 높았다. 이런 의자에서는 식사를 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지.

점점 시선을 식탁 밑으로 떨구자 식탁 밑에 깔린 두툼한 러그 위로 그녀의 하얀 발이 보였다. 어느 틈에 슬리퍼에서 빠져나온 맨발은 핥고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그 발과 다리를 잇고 있는 한 뼘도 안 되는 발목, 살망한 종아리, 또 그 위로 계속 올라가면,,, 보지 않아도 다 보인다. 백자처럼 희고 투명하고, 매끄럽고, 차가운, 그녀.

아침 식탁에 그녀는 정장을 하고 앉는 일이 없었다. 나이트가운을 그대로 걸치고, 빗질 안 한 머리를 대강 틀어 올리고, 심지어 세수조차 안 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백제의 보물처럼 우아했다. 그런 그녀를 직시하다가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내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급하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살인자는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나 신발을 신었다. 고대 화랑으로부터 얼굴을 내밀고 걸어 내려가 문에 다가섰다. 그리고 안을 보았다...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 사랑하고 싶어, 그건 가슴 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그러나 당신은 결코 나를 따르지 않을 거야, 짐 모리슨이 짐승처럼 부르짖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나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필요 없었다. 가수들이 내 대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언제나 나보다 먼저 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내 생각들에는 도대체가 창의적인 것이라곤 없었다. 가수들이 노래를 하고, 그 노래를 내 귀가 접수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그 노래들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 귀는 아직은 어떤 노래에 대해서든 순수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내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이어폰을 꽂게 되더라도 나는 특별히 저항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침 식탁엔 언제나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기능성 음료 사업을 하는 아버지는 늘 우리보다 먼저 아침을 먹고 나가기 때문이었다. 철분 음료, 식이섬유 음료, 칼슘 음료... 이름만 들어서는 아버지가 만드는 음료들을 몽땅 장복한다면 건강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정도로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이 음료들의 맛은 기존에 있던 모모 음료수들, 혹은 드링크제와 성분도 맛도 똑같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음료들에서 참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포장뿐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에 시작했던 건 정력 보강 음료였다. 그게 생각 외로 히트를 치자 그다음부터는 이미 나온 음료를 비슷하게 베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사업가로서 능력이 있어서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다 운 좋게 공부 잘하는 놈 옆에 앉게 되어 커닝을 성공적으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커닝을 잘하는 것도 뛰어난 사업 수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자부심을 풀무질하여 커닝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하루에 한 번이나마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이젠 고생대의 기억처럼 까마득할 지경이니. 커닝을 했건 안 했건, 나는 아버지가 안쓰러울 때도 있었다. 가장이라는 게 뭔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아침 식탁에 앉은 나한테 통째로 내던지고 기능성 음료 따위에나 풍덩 빠져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건 사실이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까지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카트린의 머리만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잔소리라도 하지 않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내 아침 식사 습관이 맘에 들지 않아 아침마다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놈의 꽁치구이를 꼭 먹어야겠니? 생선이 그렇게 좋으면 더 맛있는 연어 스테이크를 먹어도 되잖니. 아줌마한테 말하면 금방 해줄 텐데 굳이 네가 아침부터 냄새를 피우는 이유가 뭐니?"

그 뒤에도 이어서 뭐라뭐라 쫑알대며 그녀의 귀여운 입은 계속 열려 있었지만 나는 딱 여기까지밖에 듣지 못했다. 내 귀는 이어폰으로 막혀 있었고 섹스 피스톨즈의 펑크 음악이 그녀의 잔소리들과 내 귀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불평대로, 내가 손수 구운 소금에 절인 꽁치구이가 나의 아침 식사였다. 나는 오늘도 꽁치구이 한 점에 맹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있고, 그녀는 바게트의 껍데기와 카페오레를 먹으며, 우스꽝스럽게 서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 그녀의 입은 쫑알대며 열려 있을 때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너무 섹시하다.

식사를 다 마쳤는지 그녀는 벗겨진 슬리퍼를 다시 발에 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카트린이 쫄랑쫄랑 따라갔다. 카트린이 그녀의 하얀 발뒤꿈치를 핥자 그녀는 가볍게 카트린을 안아 올렸다. 카트린 팔자가 정말 상팔자다. 그녀의 흰 가슴팍에 온몸을 묻을 수 있는 카트린.

그녀의 뒷모습을 멍청이처럼 보고 있다가 그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내 앞에 놓인, 반쯤 파먹은 꽁치구이를 즉각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도 꽁치를 구워서 그녀 앞에서 보란 듯이 먹으리란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선지 나를 향해선지 알 수 없는 반감에 휩싸여 나는 냉동실에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꺼내 통째로 퍼먹기 시작했다. 초콜릿무스, 민트칩, 아몬드봉봉... 닥치는 대로 처넣은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마구 섞이는 바람에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입에서는 꽁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서연이 생일이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에 꽁치 냄새를 지워야 하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더욱 왕창왕창 퍼먹었다. 그런 나를 파출부 아줌마는 겁이 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가엾은 아줌마, 그녀가 먹는 바게트를 그녀처럼 먹고 싶겠지. 던킨 도넛을 우유에 적셔 먹는 그녀처럼. 벨기에산 비스킷을 블랙 커피와 함께 먹는 그녀처럼, 모든 것을 그녀처럼,,, 서연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줌마에게 단팥빵, 곰보빵, 그런 촌스런 이름을 가진 빵들을 잔뜩 사와야지. 나는 식당의 한구석, 아니 구석이라 하기엔 너무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집 냉장고를 노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냉장고는 700리터짜리로 초대형이었다. 500리터짜리도 충분히 컸지만 그녀는 700리터짜리를 고집했다. 잘 꾸며진 정원처럼 냉장고 안에 예쁜 음식과 재료들을 보기 좋게 넣어두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은 발상이었다. 그러나 내게 냉장고는 너무 컸다. "쥐라기 공원"이란 영화를 본 이후로 냉장고를 볼 때마다 나는 거대한 공룡을 떠올렸다. 덩치가 공룡만 한 냉장고에는 포만한 공룡의 뱃속처럼 언제나 음식이 그득했다. 스테이크용으로 알맞게 썰린 육고기와 물고기, 생크림 케이크, 와인, 키위, 토마토, 맬론, , 치즈, 베이컨, 버터, 래디시, 파슬리, 마요네즈, 푸딩, 타르타르 소스, 양상추, 레몬, 우유... 그런데도 변명을 하지만 나는 아줌마가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두려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밥도 없고 김치도 없다는 아줌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밖에서 식사를 하고, 그녀는 카나리아처럼 빵조각이나 과일을 조금 먹을 뿐이고, 카트린 역시 그녀를 닮아 그녀처럼 조금씩만 품위 있게 먹었다. ?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니까 이 집에선 사람이라기보단 폐기 처분할 낡은 가구에 불과했다. 그런 나를 위해서 내뜻대로 식탁을 차렸다간 나는 엄마처럼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나는 살기 위해 밥 따위는 먹지 않았다. 밥도 없고 김치도 없어서라고 변명하는 아줌마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저녁마다 꽁치를 사 와서 아침마다 그걸 먹는 것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줌마 두려워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나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보면 비위가 상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냉장고는 잘 가꿔진 어느 정원 못지않게 화려했지만 내게는 냉장고에 든 음식이 마치 공룡의 배설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버지는 저 공룡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 아름다운 그녀를 볼 시간도 없이 일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쓰러운 아버지가 더더욱 안쓰러워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아줌마가 하는 일이란 것도 공룡의 배가 조금이라도 비지 않게 꽉꽉 채워주고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유통 기간이 지난 식품을 제때에 배변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파출부

아줌마가 정원사나 실내장식가일지 몰라도 내 관점에서는 똥 치기와 다를 바 없었다. 똥 치기 파출마 아줌마, 때로는 똥 치는 일에 정말 진력이 나기도 하겠지, 나는 진심으로 아줌마를 동정했다.

"먹을 건 하나도 없구만, 죄다 버릴라고 이렇게 꽉꽉 채워둔담."

냉장고에 든 음식이 꼭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식을 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아줌마는 가끔 불평을 터뜨리곤 했다. 아줌마의 불평대로 음식의 가짓수는 많았지만 내가 찾는 그 하나는 언제나 냉장고에 없었다. 냉장고에는 쓸데없이 음식이 채워졌고 또 쓸데없이 버려졌다. 한때는 냉장고에 내가 찾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또 쓸데없이 버려졌었다. 내가 아침마다 기를 쓰고 꽁치를 먹는 건 꽁치가 바로 내가 찾는 그 하나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꽁치구이를 닮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꽁치도 없는 냉장고에 내가 찾는 그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바게트 껍데기를 뜯어먹는 그녀 앞에서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꽁치를 발라 먹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우고 거실로 나와보니 그녀는 어느새 해지 남방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머리에 묶은 녹색 스카프를 팔락이며 2층에 있는 그녀의 아틀리에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입은 그녀의 모습은 서연이보다도 더 어린 말괄량이 소녀처럼 보였다.

"그 애 누구야? 야구 모자 쓰고 너랑 같이 엄청나게 큰 캔버스 들고 가던 애 말야."

그녀는 화가였다. 언젠가 캔버스 사러 그녀와 함께 외출한 일이 있었는데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서연이가 보고는 앙살을 부려댔다. 닉스 청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녀는 서연이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귀여운 여자애의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기분으로 함께 돌아다녔다. 같이 물건도 사고, 밥도 먹고. 그렇다. 그녀와 나는 밥을 함께 먹었다. 비록 김밥이긴 했지만 나는 그녀가 밥도 먹는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엄마가 먹던 음식을 그녀도 먹을 수 있다고는 상상해보지 않았었다.

"사진 찍기 좋은 음식은 맛이 없는 법이야."

엄마는 화려한 김밥을 졸라대는 내게 자신이 어려서 맛보았던, 노란 단무지 하나가 덜렁 들어 있던 김밥이 얼마나 맛있었나 얘기하고는 그 말끝에 이렇게 덧붙였었다. 엄마의 말에는 나도 동감했다. 김밥 맛은 사실 단무지 맛이니까.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 더 맛있다잖아요."

"그게 입으로 먹는 거냐? 눈을 먹는 거지."

엄마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나는 이미 눈으로 먹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눈으로 먹는 데 익숙한 그녀와 나는 치즈 김밥은 한 다발의 꽃처럼 예뻤다. 노란 물을 들이지 않은 단무지는 치즈. 달걀. 오리. 게맛살. . 우엉. 당근 등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단무지는 자신의 노란 물을 밥 전체에 물들여가며 김밥의 중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명태살로 만들었을지라도 꽃게처럼 화려한 색깔을 가진 게맛살이 더 중요한 재료였다. 치즈김밥. 참치김밥. 환상 김밥. 쇠고기 김밥. 누드김밥. 오징어 김밥... 김밥 이름이 무슨 이벤트 프로그램처럼 적혀 있는 김밥집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김밥을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엄마처럼 촌스러워 보인 건 아니었다. 노란 수선화 같은 치즈감밥을 먹는 그녀는 오히려 귀여웠다. 왜냐면 그것은 그녀의 이벤트였을뿐이니까.

"누구냐구? 대답해보라니까."

서연이의 앙살이 단순한 앙살로서의 수위를 넘자 나는 서연이의 오해를 풀어 주어야만 했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해도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야."

대답을 해놓고 나는 괜히 화가 났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엄마라고 불러보지 않았는데 서연이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썼던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호적에도 적혀 있는.

"어머어머, 정말? 정말이야? 좋겠다. 멋쟁이 엄마를 둬서. 네가 왜 이렇게 깔끔하고 세련됐나 했더니 다 엄마 덕분이었구나."

서연이는 오래도록 못 만난 자기 엄마를 만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좀 세련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그녀 덕분이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 키운 것은 나의 진짜 엄마였다.

엄마는 4년 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급체로 세상을 떠났다. 푸르딩딩한 입술 사이로 고구마가 삐져나온 엄마의 시체는 너무 희극적이어서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코미디가 죽음과 만나면 참혹하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급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죽었는데도 나는 엄마가 굶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매일 잠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먹어대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어 죽은 것만 같았다. 그때 꽁치라도 한 마리 구워서 같이 먹었더라면 엄마는 굶어 죽지 않았을 텐데. 나는 터무니없이 이런 후회까지 했다.

"오늘은 학원 안 가니?"

붓을 든 채로 2층에서 내려오며 그녀가 물었다. 토마토주스라도 마실 모양인가 보였다. 그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과일이든 야채든 생으로 갈아 마셨다.

"오늘은 일요일이예요."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 매력이 발산되지 않도록 한껏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젊은 나야 앞으로도 여자가 많겠지만 아버지는 그 나이에 어디서 그녀 같은 여자를 또 구하겠는가. 나는 부자간의 윤리로서가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더 큰 테두리 안에서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했다.

저렇게 열심히 그리고는 있지만 그녀는 별로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화랑에 나온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아버지가 사서 가까운 이들에게 선불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를 복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바게트, 카페오레, 코냑, 아틀리에, 카트린...을 발음하는 그녀의 입모양은 정말 프랑스 사람 같았으니까. 붓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나게 화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니까.

"그렇게 담배만 피고 있지 말고 그럼 독서실이라도 가든가. 사수를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장미의 가시를 조심하라고 했는가. 냉정한 그녀. 오늘도 어김없이 재수에 재수를 거듭하고 있는 나를 죄수처럼 몰아붙이는군. 나는 담배를 비벼 내 엉덩이를 힘껏 떼었다. 서연이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어차피 서둘러야 했다.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맥도날드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못생긴 산모처럼 보기 싫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원으로 뭘 먹지?"

맥도날드의 텔레비전 광고를 맥도날드에 앉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웠다. 광고에 등장하는 갈비, 설렁탕 등의 천 원어치는 먹다 버린 쓰레기처럼 형편없었다. 그 쓰레기 같은 천 원어치 뒤로 맥도날드 햄버거는 탐스럽게 떠올랐다. 백 원이 남기까지 한다며. 엄마가 지금 그 광고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생각을 바꾸고 나처럼 햄버거를 먹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저 창의 하늘처럼 흉한 모습을 매게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 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못생긴 산모는 애라도 낳지. 엄마는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배만 불렀다. 뱃속에 몹쓸 것들만 잔뜩 채워 넣어 결국엔 먹어도 먹어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 나는 흐린 하늘에 눈길을 던지며 또 이어폰을 꽂았다.

"... 난 또 사막을 걸어가고 있지. 무덥지만 난 쓰러지지 않아..."

엄마는 오래도록 방직공장에서 일한 탓에 청력이 약했다. 그래서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아버지는 무식한 사람이 목소리가 큰 거라며 엄마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엄마가 방직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법조계의 별>이 되고 싶어 했지만 엄마의 청력을 다 잡아먹도록 한 번도 고시에 패스하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사업가가 되기로 꿈을 바꿨다. 청력이 약해진 대신 목소리가 커진 엄마는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과일, 야채, 생선... 엄마는 닥치는 대로 팔았다. 아버지 역시 닥치는 대로 사업을 벌였지만 벌이는 족족 다 망했다. 그래도 나는 사업이 망한 집 아이 같지 않게 입성이 말끔했다. 너에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다. 기죽지 말고 살아야 해.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혹시라도 기가 죽을까 봐 엄마는 부지런히 나를 씻기고 입혔다. 아버지는 역시 사업가는 말끔해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라 영화배우처럼 멋진 옷만 입고 다녔다. 아버지와 나는 점점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점점 초라해졌다. 좌판에 앉은 여자는 좌판에 앉아 있는 여자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엄마의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적절하게 변신했던 엄마는 끝내 사모님으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몸뻬바지를 입고 전대를 두른 엄마의 모습과도 같은 우리 집 밥상에서부터 미리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자의 옷을 입고 거지의 밥을 먹으며 어쨌든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아버지의 정력 보강 음료가 크게 히트를 쳤던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좌판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는 그동안 못 해먹인 게 한이 되었는지 부지런히 음식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먹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사업 때문에 밖에서 별 희한한 음식을 먹고 들어왔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하디스, 웬디스, KFC, 코코스 등으로 돌아다니기 바빴다. 아버지와 나는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 주는 음식이 눈에 차지 않았다. 특별히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외국 음식에만 맛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밖에서 돌솥비빔밥이나 떡만두국 같은 것도 곧잘 먹었으니까 말한 음식을 보고 있으면 삶의 수준이 한 단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중학교 졸업식 때 점심을 먹으러 중국집에 갔을 때 엄마는 이름도 모르는 중국집이라기에... 얘는 자장면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그 두 마디만, 그것도 끝을 맺지 못하고 바보처럼 중얼거릴 뿐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고 아버지와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아버지는 몰라도 나는 그 눈빛을 분명히 보았다. 잠자코 먹기만 하면 좋을 것을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엄마가 짜증스러워서 나는 못 본 척하고 음식을 먹기만 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우리 부자의 욕망을 눈치챘는지 요리책을 보고 장식이 화려한 요리로 종목을 바꾸었다. 삼치 한 마리를 구워도 전과는 달랐다. x자로 칼집도 넣고 무채를 담은 접시에 구운 삼치를 올려놓고 파슬리로 장식까지 했다. 아무리 요리책에 나온 것과 똑같이 요리를 만들어내도 엄마가 하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리고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들은 그대로 쌓이기 시작했다. ...난 요구한 모든 것을 갖고 있어. 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는 않아. 난 이것을 엄마한테 배웠지...

"사람이 왔는데도 그렇게 음악만 듣고 있을 거야?"

시네드 오코너의 섹시한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져서 고개를 들어보니 서연이가 내 이어폰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 있었다. 까만 나시 티에 블루진 핫팬츠를 입은 서연이는 그녀만큼이나 섹시하고 귀여웠다.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세련되고, 섹시하고, 예쁘고, 귀여운 여자만 좋아하는 걸 보니.

"빨리 나가자. 내가 INVU에서 봐둔 미니스커트가 있거든. 그게 네가 줘야 할 내 생일 선물이야."

"햄버거는 무슨... 우리가 어린애니? 난 이제 스무 살이란 말야. 옷 사고 근사하게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리고 춤도 추러 가자, 빠알리."

서연이의 애교에 사지가 다 녹을 것 같아서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맥도날드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를 쏟든지 애를 낳든지, 저놈의 하늘을 정말 못 봐주겠는걸. 나는 오늘 날씨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서연이는 날씨야 어떻든 생일이라고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INVU에서 봐둔 미니스커트가 있다더니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는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게 많다고 다 입어보며 수선을 떨었다. 수선을 떠는 모습도 초코볼처럼 앙증맞았다. 나는 그 초코볼을 오도독 깨물어 먹고 싶은 심정을 참느라 잔뜩 흐린 하늘보다도 먼저 땀을 쏟고 있었다. 비처럼, 혹은 애를 낳는 산모처럼.

서연이는 톡톡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도 한 애였다. 요정의 얼굴, 요부의 몸매를 가진 비슷비슷한 애들이 같은 상표를 입고 먹고 마시고 있는 거리. 서연이는 그 애들과 같으면 같았지 결코 못 하지 않은 여자애다. 그애들과 똑같다고 하면 서연이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서연이도 그걸 안다. 그러니까 튀어보는 것이다. 똑같은 모양의 초코볼에 물감을 입히듯 맑은 날은 레드로, 흐린 날은 블랙으로, 또 어느 어둔 밤엔 야광색으로,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서연이의 생일이 아닌가. 늘 똑같은 날들에 각각 다른 색깔을 입히려면 이벤트를 기획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옐로 데이... 기획을 짜야 할 날들이 많지만 특히 생일 파티만큼 확실한 이벤트는 없다. 생일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비슷하게 쇼핑하고 비슷하게 식사하고 술 마시고 춤추게 되더라도 이벤트라 이름붙이면 그것은 특별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서연이는 오늘 이 거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서연이가 마음껏 튀도록 성심성의껏 도울 것이다.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서연이의 날씬한 몸매는 무엇을 입어도 다 잘 소화해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집의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세수를 안 해도, 머리를 안 빗어도 예쁜 그녀. 우아한 옷차림을 하면 더더욱 우아해지는 그녀. 무슨 옷을 입어도 시장에서 입던 몸빼 분위기가 나던 엄마와는 너무도 다른 그녀.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부터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 음식들을 엄마는 혼자서 깨끗이 다 먹어 치웠다. 나중에는 안 먹어서 남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엄마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삶은 감자, 삶은 옥수수, 삶은 달걀, 빈대떡, 찐빵, 오징어튀김, 잡채, 메밀묵... 엄마는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간식들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또 끊임없이 먹었다. 엄마가 피자나 레모네이드같이 내 입맛에 맞는 간식을 해주었더라면 내가 먹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그때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엄마가 처음엔 싫었다. 그리고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엄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간식만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아버지나 내가 없어도 하루 세 끼니를 꼭 챙겨 먹었다. 배추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김치란 김치는 있는 대로 담가놨다가 끼니때마다 한가득 늘어놓고 밥을 몇 그릇씩 비워냈다. 엄마는 불과 2주일 만에 9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불었다. 특히 허리부터 아랫배까지 오뚝이처럼 불룩해져서 집에 있는 옷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몸빼 말고는. 엄마는 내 고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사야만 했다. 유일하게 맞는 몸빼를 입고 엄마는 옷을 사러 나갔다.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마담 사이즈래도 아줌마한테는 안 맞을걸요. 안 팔아요, 당장 나가요. 옷가게 점원들은 엄마의 옷차림과 몸매를 보고 지극히 상식적인 소리들을 질러댔다. 아니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하지만 엄마가 옷을 사는 광경이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어때?"

서연이가 봐뒀다는 미니스커트는 스판 소재여서 엉덩이의 굴곡이 거의 그대로 드러났다.

"섹시해."

솔직한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서연이의 입이 튤립처럼 야하게 함빡 벌어졌다. 역시 솔직한 건 좋은 거다. 나는 서연이의 함박웃음에 답하는 의미에서 캘빈 클라인에 가서 야구 모자도 하나 사주었다. 야구 모자를 씌여 주며, 네가 야구 모자 쓴 게 우리 엄마보다도 더 귀엽다고 하자, 서연이는 기어지 내 볼에 뽀뽀까지 했다. 날씨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서연이 때문에 그나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와 내가 저녁을 먹으러 T.G.I. 프라이데이즈에 갔을 때는 4시였다.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린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서연이를 기다리게 해서 몹시 마음이 언짢았다. 그리고 더 언짢은 일이 있었다. 런던브로이, 화지타, 치킨 샐러드 등을 주문하고 나서 서연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사진도 찍어줄 직원들을 찾았으나 그들은 이미 다른 테이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세 테이블을 더 돌아야 우리 차례라는 것이었다. 또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은 서연이의 생일이다. 나는 그들이 다른 테이블에서 하던 것과 똑같이 서연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연이만을 축하해줘야 했다. 나는 자꾸 목울대를 넘어오려는 무엇인가를 삼키느라고 반주로 시킨 밀러 라이트를 급하게 들이켰다. 서연이의 흥이 깨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하며.

프라이데이즈의 유리벽 너머로 비구름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답답한 날씨였다. 빨리 비가 쏟아지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살이라도 해버릴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약속한 대로 술을 마시러 칵테일 바에 갔다. 서연이는 자기처럼 섹시한 이름을 가진 키스오브파이어를, 나는 블랙러시안을 마셨다.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며 급하게 칵테일을 마셔대더니 1시간도 안 돼서 서연이는 탁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일어나. 춤추러 가야지."

", , 그래, 그래... "

서연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응응거리기만 했다. 나는 난감해져서 혼자서 칵테일을 두 잔 더 마시고 다시 한번 서연이를 깨웠다.

날 두고 가지 마, 난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 난 스무 살이야.

중간중간 발음이 흐려지는 바람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서연이가 한 말을 정리하면 그랬다. 이건 오늘 내가 작성한 프로그램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서연이의 원대로 소모되기로 작정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이벤트군.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운 후 서연이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일으켜 세운 다음, 칵테일 바을 나왔다.

몸빼를 입고 나갔던 엄마가 사 들고 온 옷은 놀랍게도 동그라미만 여섯 개가 그려진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엄마는 백치처럼 웃으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동그라미만 여섯 개가 있는 가격표를 단 옷 같지 않게 엄마의 몸에 걸쳐진 그 옷은 몸빼바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현란한 꽃무늬도 그렇고, 펑퍼짐한 옷 모양새도 그렇고, 저녁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돼지 발에 웬 진주 목걸이냐고, 성경의 말씀까지 인용해가며 어머니를 나무랐다. 어울리지 않는 것도 모르고 꼴에 비싼 걸 걸치고는 싶었나 보지. 엄마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청력이 약해진 걸 최대한 이용해 아버지가 뭐라 하진 못 들은 체했다. 한마디 대꾸도 안 하고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드라마를 보며 껍질도 안 깐 다감을, 씨도 뱉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단감을 열 개 정도 먹고 나서는 꽈배기 도넛을 먹으며 엄마는 애국가 흘러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다음날에도 엄마는 새로 산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모양새를 살펴보았다. 입학식은 내일이에요. 나는 엄마가 입학식 날을 착각하고 옷을 입었는 줄 알고 엄마의 착각을 일깨우기 위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알아, 엄마는 간단히 내 말을 무시했다. 나쁜 년. 나는 이번에도 엄마가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말하려다가 착각했는 줄 알고 나쁜 놈이에요. 하고 잡아주려다가 엄마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잘 맞는데, 뭐가 어째? 나쁜 년. 엄마는 새 옷을 입은 채로 식당으로 가서 식탁 위에 올려진다 식은 고구마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나쁜, , , 켁켁, 켁켁켁, , , , 켁켁, , 켁켁켁... 식은 고구마를 제대로 씹지 않아 목이 메고 사금이 막히는지 엄마는 가슴을 두들겨가며 고구마도 씹고, 나쁜 연도 씹었다. 그러나 잘 씹으려는 엄마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고구마 덩어리와 나쁜 년이 했다는 말은 엄마의 이 사이레서 홋돌다가 목구멍에서 자꾸만 걸렸다. 결국 그것들은 목구멍만 막은 것이 아니라 엄마의 숨구멍까지 막고 말았다. 켁켁켁켁켁켁켁켁... 이것이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유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엄마를 묻던 날 몹시 울었다. 칙칙하게 내리던 비보다 더 칙칙하게. 왜 이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고 갔냐고, 나 혼자는 절대 풀 수 없다고.

"... 거짓 고향으로 이주시키고 이산가족을 만들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야... 날 매수할 수 없어. 엄마를 주든 관심이 없으니까. 내게 선 시티를 청하지 말아요. 난 출연하지 않을 테니까."

스티브 밴 젠트는 이어폰을 타고 와서 내 귀에다 이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나 난 관심이 있었다. 얼마를 주든 그 수수께끼를 풀 수만 있다면, 나는 비를 맞고 걸으며 스티브 밴 잰트를 들었다.

모텔에 방을 잡고 들어갔을 땐 일곱 시도 안 되었다. 비록 취중이긴 하지만 서연이는 스스로 옷을 벗었고 나는 내 것이 드디어 바게트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나를 갖고 싶지?"

"아니."

"왜지?"

"네가 나를 가져줘."

그러자 서연이는 까를 웃으며 내게로 달려들어 내 바게트의 속살을 카트린처럼 조금씩,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엄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를 주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무게에 눌려 나는 거의 푹발할 지경이었다.

"엄마. 흑흑흑."

서연이가 바게트의 마지막 속살을 다 뜯어 먹은 순간, 나는 속으로만 부르던 엄마를 기어이 입 밖으로 쏟아내고야 말았다. 서연이는 놀라서 둥그레진 눈으로 나는 쳐다보다가, 소태라도 씹은 듯 쓴 얼굴을 하고는 물소리도 요란하게 샤워를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너희 엄마는 이쁘고, 귀엽고, 섹시해, 됐니?"

서연이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하고 갔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서연이는 나의 이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귀여워. 아니야, 우리 엄마는 섹시해. 아니야, 그래, 아니야... 나는 담배를 빨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혼자 주워 삼켰다. 껍데기만 남은, 말라비틀어진 바게트가 팍, 부서졌다. 서연이가 나를 가져줄 수 없다는 걸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밖에 나오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는가 보았다. 나는 비가 내리는 음습한 골목에서 스티븐 밴 젠트를 귀에 꽂고 집을 향해 걸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벌써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이상한 일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하, 정전인 모양이군. 나는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도사 같은 표정으로 초인종 누르는 것을 멈추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 깨달음을 얻은 도사가 됐는지도 몰랐다. 늘 똑같은 날들 중에 하루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너무 많은 곳을, 그것도 금지된 곳만 찾아서 다녀온 이분이었다. 여행의 끝에 깨달음이 있으라. 비를 맞아선지 좀 추운 기분이 드는 것을 지워보려고 담배를 한 대 불며 나는 짐짓 도사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담배도 젖었는지 불이 붙지 않았다.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나는 불이 붙지 않는 담배를 어둠의 끝을 향해 던졌다. 온기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렇게 추위에 약하다니. 도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왜 집 앞에서 그러고 있냐? 택시라도 타고 올 것이지 비는 홀딱 맞고서."

어느 틈에 아버지가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성장한, 그래서 더 우아해진 그녀가 보라색 우산을 받쳐 들고 따라 나왔다. 밤 외출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머나, 다 젖었잖아. 어디서 뭘 했길래. 저녁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가. 오늘 아버지가 모처럼 일찍 들어오셔서 모나코에 가서 가재 요리 먹을 거거든."

아름다운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그녀. 밥상을 차려주진 못해도 늘 마음 속으로는 내 끼니를 염려하고 있었다니. 그녀의 친절에 어떻게 보답할까. 당장이라도 그녀를 쓰러뜨리고 우람한 바게트를 먹여줄까. 나는 정말 그렇게라도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열 달쯤 들어앉아 있다가 다시 나와서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엄마로 만들어 줄 수 없다면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엄청난 의무감이 내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그녀를 계속 이렇게 여자로 놔뒀다간, 어느 날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 내리찍은 도끼에 온몸을 찢기고야 말 것이다.

"발리 대답해. 갈 거야. 안 갈 거야?"

못 볼 것을 본 듯 아버지는 내 눈을 피하며 한껏 무뚝뚝한 어조로 다그쳤다.

"난 가재 같은 건 먹을 줄 몰라요."

내 대답에 아름답고 친절한 그녀는 실망한 눈빛이었다. 그래야지. 나를 사랑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내가 뭐라 그랬어. 쟤는 즈이 엄마를 닮아서 입맛이 촌스럽다니까. 그래도 어려선 안 그러더니 갈수록 똑같아져."

아버지가 자동차에 키를 꽂으며 말했다.

"얼마나 촌스러웠길래?"

"말도 마."

"당신이 너무 못해준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무 안됐잖아. 그 여자는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근데 당신 어떻게 같이 살았어? ?"

그녀는 나의 엄마가 얼마나 촌스러웠는가를, 그리고 촌스럽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자동차 문을 여는 아버지 뒤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고 귀여운 입을 쉬지 않고 쫑알대고 있는 그녀는, 절대, 아무것도...

그녀의 입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갑자기 허기가 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입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대문 안쪽으로 급하게 발길을 돌렸다.

"정전이야. 그러니까 무리하게 공부하려 하지 말고 그냥 푹 자. 알았지?"

그러나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들어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끝내 한 번 더 귀엽게 쫑알거렸다.

집 안은 정말 어두웠다.

나는 마치 빙하기의 밤 시간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생물이 얼어있고, 모든 빛이 죽어 있는. 바로크풍의 화려한 거실 가구들도 빛이 죽어 있는 곳에서는 그림자 하나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산모의 진통에 버금갈 만큼 격렬한 통증이 위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나는 라이터를 켜들고 빙하기 얼음 속에 숨어 있는 생물을 찾아 나선 탐사자처럼 식당을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어둠에 묻힌 냉장고가 정말 빙하기에 멸종한 공룡처럼 보였다. 너는 드디어 멸종했구나.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냉장고 문을 경쾌하게 열어젖혔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700리터 분량의 음식을 단숨에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두우니까 냉장고에 든 음식이 얼마나 아름답게 가꿔져 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냥 입으로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맨 처음 손에 잡힌 건 크로와상이었다. 먹기 싫었다. 나는 그것 역시 어둠 속으로 던져버렸다. 피자, 생크림 케이크, 와인, 햄버거 스테이크, 브라운 소스, 래몬 즙, 콩소메, 달걀 카나페, 감자 샐러드, 오리 피클... , 다 먹기 싫은 것들뿐이었다. 어느새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지만 나는 단 한 가지의 먹을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냉장고의 텅 빈 위장을 보자, 왠지 모르게 냉장고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파출부 아줌마가 먹다 두고 간 도시락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냉장고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위장보다 더 근사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냉장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냉장고 속은 의외로 따뜻해서 비에 젖은 몸에 금세 온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태아처럼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또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U2였다.

... 나는 나의 과거를 정복했지. 마침내 미래가 여기 있지. 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네. 내 바로 앞에 있는 파멸들은 곧 나를 놓치게 될 것이야. 사랑은 나를 구조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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