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규동(1925~2011)

가노라면

가족

거지 시인 온다

검은 날개

경고

고향

곡예사(曲藝師)

그것도 현실은 현실이다

기다림

기러기

나비와 광장(廣場)

나체(裸體) 속을 뚫고 가는 무수(無數)한 구토(嘔吐)

내 가슴속에 기계(機械)가

너 갈 데로 가거라

노래

노을과 시

누님

눈 나리는 밤의 시(詩)

느릅나무에게

달아오를 아궁이를 위한 시

대위(對位)

두만강

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두보(杜甫)

모정

무등산

무서운 아이들

미궁에로의 지도

바다

바다의 기록(記錄)

밤의 신화(神話)

별이 달에게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분단(分斷)

불안의 속도(速度)

비망록

사랑

새해의 노래

송년(送年)

시법(詩法)

시의 천국

시인(詩人)의 검(劍)

아침의 예의

아침의 편지

아, 통일

안부

어린 손자에게

어머니는 다 용서하신다

어머님전(前) 상서(上書)

여름의 노래

열차를 기다려서

오는구나 봄이

위기(危機)를 담은 전차(電車)

유리씨즈

유모차를 끌며

육체로 들어간 진달래

의식의 나무

이카로스 비가(悲歌)

재판

전쟁과 나비

존재와 말

좋을 대로 해라

죽여주옵소서

진공회담(眞空會談)

진혼가

추억

침묵의 소리

테레타이프의 가을

통일의 빛살

포대(砲台)가 있는 풍경

하나의 세상

하늘과 태양만이 남아 있는 도시(都市)

한 시대

호남평야

환상가로(幻想街路)

환영의 거리

희망

희망을 위하여

BOILER 사건(事件)의 진상(眞狀)

3.1절에 부치는 노래

3월의 꿈

 

 

 

가노라면

김규동 

 

가노라면 쉴 데도 있을 테지

가노라면 까치가 우는 마을도 있을 테지

눈 위에는 짐승 발자국 두어 개

산 넘고 들을 건너

눈 덮인 길 가네

 

가노라면

맑은 햇빛 눈부시겠지

얼음이 녹고 눈이 녹을 테지

가노라면

달이 뜰 테지

여우가 달리는 오솔길도 나올 테지

꿈속에서처럼 멀리 기적소리 들릴 테지

빙긋 쳐다보고 웃는

길동무도 있을 테지

가노라면

얼음 밑을 기는 물소리도 만날 테지

 

가노라면

큰 산 큰 강물 긴 다리도 만날 테지

40년 걸은 이 길을

가노라면

아 가노라면

보고 싶던 산천 만나게 될 테지

새해의 흰 눈 밟고 또다시 가네

흰 길 가네

 

 

 

가족

김규동

 

 

둘은 가버리고

막내가 남았다

너도 이윽고 어디론가

가야 하겠지

빈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는다

하늘이 푸르구나

뭘 한다고 셋씩이나 낳아

이 고생 하느냐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이제 내 펜대의 사념도 침묵에 싸인다

얘들아

다 크고 나면 그저 이렇게 멋없느나

아직도 내 잔등에 가물거리는 것

너희들이 목마를 타던

고사리손의 감촉이고나.

 

 

 

거지 시인 온다

김규동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 저기 거지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렇잖아도 널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 시인이라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 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검은 날개

김규동

 

1초(秒)

2초(秒)

 

검은 날개여!

 

3초(秒)

4초(秒)

 

무거운 하늘의

회색(灰色) 뚜껑을 열어제끼고

모든 신(神)들은

세기(世紀)의 종말(終末) 위에

검은 화환(花環)을 뿌리며

지상(地上)의 희극(喜劇) 앞에

눈을 감는다.

 

쇠잔(衰殘)한 태양(太陽)처럼 또는

침묵(沈黙)한 해협(海峽)과도 같이.

 

이윽고

먼 하늘에 상장(喪章)처럼

날리는

오! 화려(華麗)한 그림자여

검은 날개여!

 

 

 

경고

김규동

 

노인은 곧

어린아이가 된다

떼쓰고 잘 넘어지는

 

숨이 차 꼼짝 못하다가

복도로 나가려다 현관에서 쓰러졌다

 

이마를 벽돌바닥에 찧었다

눈썹에서 출혈,

바른쪽 눈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의사가 말했다

눈에는 상처가 없는데 실명이라니

그 원인을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의사다

 

휴업중이라 했는데도

청탁서는 온다

한쪽 눈 앗아가며

그 누군가 단단히 경고하는가 보다

그 돼먹지 못한 시 이제 그만 쓰라고

 

인정사정없는 경고다.

 

 

 

고향(故鄕)

김규동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山)을 둘르고 돌아 앉아서

산(山)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포푸라 나무들이

목메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은 홰를 치며

한가히 고전(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곡예사(曲藝師)

김규동

 

가벼우나 슬픈 음악(音樂).

관객(觀客)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할 때,

곡예사(曲藝師)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아슬아슬한 새 기술(技術)을 부리기 위하여

파리한 얼굴의 여자(女子)와

표정 없는 구릿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과자를 먹으며

얼마나 신기한 기대(期待)를 보내는 관중(觀衆)들이었던가.

 

이런 상업(商業)일수록 인기가 있어야 하고

또 새로운 멋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곡예사(曲藝師)는

오늘도 위험(危險)한 공간(空間) 속에 살아야 한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에로

서로 옮겨 탄 순간(瞬間)과 순간(瞬間).

 

담배 연기 자욱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曲藝師)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女子)여

곡예사(曲藝師)에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生命)의 포말들을 삼키며

아 인간(人間)은

왜 이처럼 잔인(殘忍)해야만 하는가.

 

원폭(原爆)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氣流)―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 오리의 질서(秩序)가

오늘은 무한(無限)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그것도 현실은 현실이다

김규동

 

정도상의 소설「개 잡는 여자」를 읽은 날 밤에

이런 꿈을 꿨다

강도가 들이닥쳐

이 늙은 것이 현찰은 왜 한 푼도 없냐면서

비수로 가슴을 찔렀다

나는 피를 흘리며 대로를 질주하다

불야성을 이룬 어느 요리점 앞에서 쓰러졌다

그곳은 북경 아니면 상해 같은 대도시였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나를 일으켜 세웠는데

이 애들은 먹을 것 제대로 못 먹은

북한 어린이들이라 했다

우리는 유리창 밖에서 궁궐 같은

그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요리점 안에서는

점잖은 서양 손님 둘이

원숭이 요리를 맛보고 있다

산 원숭이를 붙들어다

요리사가 망치로 짐승의 정수리를 치니

골수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것을 두 서양 손님이 젓가락으로 집어 맛보는데

입에서는 원더풀 원더풀 하는 소리가 계속됐다

한 사람은 T. S. 엘리어트같이

머리를 깨끗이 빗어 올린 자이고

또 한 사람은 제임스 조이스같이

코밑에 노랑 수염을 기른 자였다

에즈라 파운드 영감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임꺽정에 나오는 돌석이같이

주먹만 한 돌을 그 집을 향해 날렸다

어디 맛 좀 봐라 이놈들

이렇게 외쳐대며 아이들이 돌을 던지자

요리점은 순식간에 박살났다

이윽고 이북 어린이들과 나는

밤하늘을 훨훨 날아

어느 자유의 섬나라로 탈주했다

그런데 우리들 등뒤에서

악쓰고 외쳐대는 여자 목소리가 있었으니

이 작자야 여자만 보면 그것밖에 생각 못 하는

개 같은 자야

내 손을 보아라 피 묻은 내 손을

나는 개 잡는 여자다

너도 어디 가서 돈이나 벌어오든지

그렇잖으면 썩 뒈져버려라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는

우리가 섬을 향해 날고 있는 동안

줄창 귓전을 때렸다.

 

 

 

기다림

김규동

  

기다리겠어요

목숨이야 있고 없고 기다리죠

 

하얀 다리에서

산굽이 돌아가는 까만 점이

안 보일 때까지

치맛자락 걷어 올려

눈물 닦으시던 분

 

그 분을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넋이야 있고 없고

해와 달을 의지해서라도 기다리겠어요

 

날아갑니다

휴전선을

흰 나비 한 마리.

 

 

 

기러기

김규동

 

얘야

숨을 죽이고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자

이북 고향에서 내려오는

저 새의 속삭임을

조심조심 밤하늘에 놓이는

이 울음은

내 어머님의 소식이요

네 삼촌과 고모의 안부도 전하는

고마운 말이다

두만강 끝에서

백두산을 스쳐 개마고원 금강산을 넘고

아득히 휴전선도 지나

한양 서울까지

조선의 깊은 하늘을 날으는

저 부드러운 숨결은

바람처럼 물처럼

가슴을 적셔주는구나

얘야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

형제들 애타게 기다리는 저 북으로

생각하면

끊어야 할 것이 어찌 한두 가지냐

수많은 것을 끊고

이 40년 통한의 슬픔 박차고

일어서야 한다

7천만이 한몸이 되어

이 죽음의 사슬을 끊자

독재와 억압, 착취와 분노의 어둠을 뚫고

외세에 묶인 설움의 세월을 청산하자

한라에서 백두까지

오 백두에서 한라까지

자주 해방의 날 이룩하자

얘야 숨을 죽이고 들어보아라

오늘 밤 북에서 오는 저 손님은

이제 때가 왔음을 일러주고 있다

통일의 밝은 빛이 트여옴을

알려주는구나

또 전하기를

백 살 난 내 어머님도 여태 살아 계시고

네 삼촌과 고모도

백두산 밑 그 옛 터에 잘들 살고 있단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누런 들가엔 겨례의 노랫소리 흥청거린다고

기러기 끼이욱 끼욱……

반가운 소식 전해주는구나.

 

 

 

나비와 광장(廣場)

김규동

 

현기증(眩氣症) 나는 활주로(滑走路)의

최후(最後)의 절정(絶頂)에서 흰 나비는

돌진(突進)의 방향(方向)을 잊어버리고

피묻은 육체(肉體)의 파편(破片)들을 굽어본다.

 

기계(機械)처럼 작열(灼熱)한 작은 심장(心臟)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虛妄)한 광장(廣場)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眼膜)을 차단(遮斷)하는 건

투명(透明)한 광선(光線)의 바다뿐이 없기에-

 

진공(眞空)의 해안(海岸)에서처럼 과묵(寡黙)한 묘지(墓地) 사이사이

숨가쁜 Z기(機)의 백선(白線)과 이동(移動)하는 계절(季節)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潮水)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未來)의 어느 지점(地点)에

아름다운 영토(領土)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滑走路)의 어느 지표(地標)에

화려(華麗)한 희망(希望)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神)도 기적(奇蹟)도 이미

승천(昇天)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流域)―

그 어느 마지막 종점(終点)을 향(向)하여 흰 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神話)와 더불어 대결(對決)하여 본다.

 

 

 

나체(裸體) 속을 뚫고 가는 무수(無數)한 구토(嘔吐)

김규동

 

스스로 운명(運命)의 전말을

알 수가 있는 것이라면

끝 모를 전진의 대열에서

낙오하여도 좋을 것을―

 

그러나

다행스러운 시간(時間)이 있어

'타이찌'섬의 토족처럼 태양(太陽)을 반기는 오후

메마른 육체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의 물결은 파도쳐 온다.

 

또다시 여름이 오는 강엔

지난해와 같은 권태로운 풍경이 걸리고

미운 나체(裸體)를 하고

사장에 누우면

바람결에 나부껴 오는 조고마한 행복의 그늘이 있다.

 

움직이는 것

모든 것이 정지할 줄 모르는

역학(力學) 위를 달리고

신경을 자극하는 것, '모-타보-트'의 소음뿐이다.

 

여기는 아세아(亞細亞)-

남북으로 갈리운 한반도의 서울,

가난과 무지와 폭력만이

강물 모양 도도히 흐르는 특수(特殊) 지역(地域).

 

허구 많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탄식과 고독이 익어가는

우리들의 생활 위에

덧없이 쌓여가는 계절의 속삭임이여

 

도무지 애착이 가지 않는 육체와 사상(思想)

한 마리 짐승처럼 늙어만 가는

하나의 실존(實存)을 돌아다 보며

새삼스러이 '까뮤'의 역설(逆說)을 긍정(肯定)해서가 아니건만

문득 서글픈 구토(嘔吐)를 느껴보는 오후가 있는 것이다.

 

 

 

내 가슴속에 기계(機械)가

김규동

 

바람 소리.

바람이 부는 날은

내 가슴 속에서도 소리가 난다.

 

금문도(金門島)를 폭격(爆擊)한 중공군(中共軍)의 미이그기(機)들.

하늘은 푸르고,

내 가슴 속에서 소리가 난다.

 

심(甚)한 신경쇠약증상(神經衰弱症狀)도

폐결핵(肺結核)도

생활(生活) 속에서 내가 안고 나온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

 

그런 것은

오늘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속력(速力)에 떠가는 하나의 '시튜에이션'

배후(背後)를 꾸밀 빛깔은

지금 내 손에 없다.

 

질서(秩序)와 크낙한 제국(帝國).

옛친구들은 그런 것을 찾아서

떠나기도 했고,

죽음과 탄생(誕生)이

긴 시간(時間)의 테두리를 수없이 돌아왔을 뿐,

 

나의 내부(內部)에선

지금 기계(機械)의 움직임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가 나고,

허무(虛無)라든가 공허(空虛)라든가

그런 것들이 빈번하게

긴 행렬(行列)을 짓고

소리를 내며 간다.

 

 

 

너 갈 데로 가거라

김규동

아들아이는

빈 책가방에 도시락만 달랑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학교에 가도

수업 시간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없고

한 시간이 천년 같다고 했어요

수학과 영어는

1학년 때부터

공부했어야 하는데

어느새 3학년

기초가 없으니 어느 과목도

다 모를 것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복도에 나가 벌을 서는 편이

마음 편하다 했지요

몰래 시간에 빠진 다음

뒷산에 올라가 낮잠을 자거나

거리를 여기저기 걸어 다녔어요

막노동하는 아버지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일만 열심히 했어요

뒤늦게 이 일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분통이 터져

당장 아이를 불잡아

때려죽이려 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 어깨를 짚더니

조용히 이야기했어요

참으로 조용히 말했어요

용식아, 알았다

그렇구나, 너 갈 데로 가거라

 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거라

이 애비도 그래서 일찍이

집을 뛰쳐나와 이렇게 평생을 살았단다

용식아 알았느냐

그러면서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는 그만 통곡하고 말았어요

 

 

 

노래

김규동

 

빗발이 듣는 세느강엔

둥둥 떠가는 가마니와 함께

황소 머리를 닮은

몇 개의 뿔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마 소리는

강심 깊이 잦아들고

피에 얼룩진 여러 개의 선언이

전봉준의 핏발선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노틀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나

거대한 아프리카코끼리를 몰고 온

앙드레 브르똥의 야유와 공격 때문에

세느강 황토 빛깔의 우수를

퍼담는 일을 종내 포기해야만 했다

엷은 입술에 빗물을 물고

보들레르가

콧소리로 모음자 발음만 하며

급진사상에 대하여

모종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떠올랐다

서둘러 흐르는 강심에

성난 뿔은 잠겨 가고

강변의 노점 책방은 닫혔는데

잉어들은 흙탕물 속에서도

빠리의 투명한 지성을

미인들의 회색빛 겨드랑 사이로

멀리멀리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월이 세느강에 흐르고

말하지 않는 죽음과 사랑도

긴 역사의 다리 아래를 흘렀다

흰 돌들과 늘어진 가로수를 스쳐

서편 하늘을 비껴가는

암울한 만가를 물결에 뒤섞으며.

 

 

 

노을과 시

김규동

 

혼자만 와서 불타는 저녁노을은

내게 있어 한 고통거리다

가슴을 헤치고

혼자만 와서 불타는 저녁노을을

원망하며 바라본다

노을 속에서는

언제나 우렁찬 만세 소리가 들리고

누님의 얼굴이 환히 비친다

이러한 때

노을은 신이 나서 붉은 물감을

함부로 칠하며

북을 치고 농부들같이 춤을 춘다

한 컵의 냉수를 마시고

오늘도 빈손으로 맞는 나의 저녁노을

저녁노을을 쳐다보는 사람은 벌써

도시에 없다.

 

 

 

누님

김규동

 

이북에

누님 두 분 계십니다

큰 누님은 이름이

김용금(金龍金)이고

작은누이는

김선옥(金鮮玉)이라 합니다

누구시든지 혹 소식 아시는 분은

안 계시는지요

이 넓은 천지지간에

손톱만큼이라도

소식 아시는 분

안 계실런지요

안 계실런지요

 

 

 

눈 나리는 밤의 시(詩)

김규동

 

고독(孤獨) 속에서는

낡은 서적(書籍)이 풍기던

곰팡이 내음새가 풍겼다.

 

벗은

'타이피스트' 아가씨처럼

경쾌(輕快)한 솜씨로

무한(無限)한 시(詩)를 써갔다.

 

먼 시간(時間)의 경과(經過) 뒤에 오는

피곤(疲困)과 같은 애수(哀愁).

부두(埠頭)가에서는 지금쯤

하얀마스트가

맥없이 깃발을 내리고 있으리.

 

숱한 어저께들처럼

검은 공간(空間)을 기웃거리는

1953년(年)의 얼굴 얼굴들.

 

여자(女子)들은 푸른 물굽이에 안기우며

출렁이는 해협(海峽)을 건너갔다고 한다.

때 묻은 활자(活字) 위에

함박눈처럼 나리는 밤의 침묵(沈黙)!

 

전쟁(戰爭)이 지나간 도시(都市)는

뭇 연대(年代)의 기억(記憶) 속에 잠들어가고,

 

모든 전사(戰士)들은

황폐(荒廢)한 화성(火星)의 평면(平面)에

그들의 대열(隊列)을 짓고 있을 뿐이다.

 

……눈이 나리는 밤!

……눈이 나리는 밤의 실내(室內)!

 

 

 

느릅나무에게

김규동

 

나무

너 느릅니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15 때 소련 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달아오를 아궁이를 위한 시

김규동

 

시가 안 되어

별짓 다 해보다

아궁이를 뜯었다

동서고금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이것저것

외워도 보고

그것을 쓸 때의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마감날은 지났는데 고민하던 끝에

아궁이를 뜯었다

앞집 아주머님네는

팔만 원 들여 온돌까지 뜯었지만

그런 것은 엄두도 못내고

만만한 아궁이를 뜯었다

시꺼먼 연탄을 두 장씩 삼켜 먹고도

얼음장인 이 온돌은 도대체 무엇이냐

검붉게 썩은 방바닥이 발이 시리다

저주스런 방이다

쌍말로 빌어먹을 온돌이다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해서 뜯어낸 다음

허리 아래 묻혔던 화로를

가슴팍까지 끌어올려서 묻고

급한 성미에 맨손으로

시멘트를 반죽해서

든든하게 발랐다

완전히 반나절이 걸렸다

이까짓 일을 하는 데 반나절이 걸린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시를 쓴다더니 뭘 하느냐고 놀랐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로

담배 한대 피워물고

무슨 커다란 자신이라도 선 것처럼

한마디 하였다

이젠 틀림없을 거요

어디 불 한번 넣어 보시오라고

밤낮 무슨 실험 같은 것이나 하고 사는

이런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사는 아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으나

마음은 새로이 안정을 얻은 듯싶었다

저녁에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다니는 큰아이가 퇴근하고 돌아와

모래 되어 쓰러진 애비 보고

한마디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이

족보에 없는 음악을 듣고 앉았는 것이

약간 서운하기는 했으나.

 

 

 

대위(對位)

김규동

 

하얀

페이브멘트 위에 뿌려지는

태양(太陽)의 조수(潮水)가

어린 담수어(淡水魚)와 같다고 하던

여자(女子)는

화성(火星)에의 비상(飛翔)이

그 마지막 염원(念願)이라 하였다.

 

사나이들은

예고(豫告)도 없이

섬광(閃光) 하는 전쟁(戰爭)의 태풍(颱風) 속에

아무렇게나

그들의 육체(肉體)를 잃어버리고,

 

'부루-스트'의 작품(作品)에서처럼

로켓의 포물선(抛物線)이

의식(意識)의 공간(空間)을 스쳐 갈 때

'이스라엘'의 백성(百姓)과도 같이

신(神)의 영광(榮光)을 찬양(讚揚)하는

우리들의 대열(隊列)엔

'도-바' 해협(海峽) 함대사령관(艦隊司令官)의

푸른 행운(幸運)이

영원(永遠)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전쟁(戰爭)의 탄도(彈道)를 날러간

어린 나비들은

원시림(原始林)의 정신(精神)을 넘어

찬란한 대위(對位)의 층계(層階)를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두만강

김규동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보련다.

 

 

 

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김규동

 

가고 있을까

나의 작은 배

두만강에

 

반백년

비바람에

너 홀로

 

백두산 줄기

그 강가에

한줌 흙이 된 작은 배

 

 

 

두보(杜甫)

김규동

 

해는 졌습니다

강물이

슬피 웁니다

까마귀 집으로 돌아갑니다

손이 곱아

띠를 맬 수 없는데

옷은 짧아

바람이 시립니다

양식은 떨어져

막내둥이는 굶어 죽었고

전쟁은 계속됩니다

아득한 이 하늘가

묵어갈 잠자리는 있을는지.

 

 

 

모정

김규동

 

30년 동안

어머니는

아들이 밟고 간

38선 근처에 와서

서성거리다 돌아가신다

번개가 치는 그믐밤에도

날씨 좋은 날에도

아들의 그림자라도 볼까 하여

그렇게 하신다

살아 있는 목숨이라면

어찌하여 만날 수 없느냐

누가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이냐

잡초만 무성한 38선을

아무리 서성거려도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아득한 하늘끝 홀로 헤매다

돌아가신다

 

 

 

무등산

김규동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

 

 

 

무서운 아이들

김규동

 

대룡이는 혀가 짧아

말을 제대로 못했다

성문에서 뛰어내리다 혀를 깨물었다고 했다

큰 머리에 두어 군데 흉터가 있는데 거기만 머리털이 없었다

아이들은

대룡이를

대룡 대룡 똥대룡 하고 놀렸다

그러면 대룡이가 입을 헤벌리고 쫓아왔다

아이들은 달아나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뒤로 돌아가 막대기로 차기도 했다

대룡이는 어쩔 줄 모르고 멈춰서서 어허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히히 웃으며 잔인한 짓거리 저지르기 좋아하던 무서운 아이들

아이들은 여럿 함께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리고 때렸다

얻어맞으면서 그는 모를 소리 배앝으며 마구 울었다

대룡이는 코피를 흘렸다

아이들이 다 가버린 운동장 구석 같은 데서 흙투성이가 된 채 뒹굴며 그는 슬피 울었다

대룡이네 집은 어딘지 모르나 학교에서 아주 멀다고 했다

어스름 저녁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대룡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아이들 얼굴은 다 잊었으나 대룡이 피에 젖은 얼굴이 선히 보인다

나보다 윗반이던 검은 옷 입은 대룡이, 대룡이는 지금 이북에 살아 있을까

혀가 짧아 말을 더듬거리던 가엾은 대룡이

어서 통일이 되어 다만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보았으면.

 

 

 

미궁에로의 지도

김규동

 

영동시장 정류장에 내리셔서

서쪽으로 뚫린 지저분한 길에 들어서면

진로당과 신신육고간 간판이 보이고

장미 의상실과 또 만나요 다방 다음에는

인생철학관 백운당과

카페 러브포엠과 코롬보와 티파니

세느가 나란히 있고

피어리스 문방구점이고

수퍼 쌀상회 다음에는 칙칙이 만화 가게입니다

연탄 가게와 맞붙은 이 가게 앞 돌계단에서는

다섯 살에서부터 일곱 살쯤 된 애들이

만화책을 보거나

로보트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이 보입니다

정말 정신없이 놉니다

이 돌계단 옆을 왼쪽으로 꼬부라지면

셋째 집이 바로 여깁니다

찾으실 수 있겠나요

아이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바다

김규동

 

빈 몸으로 왔다

바다

그래도 고마워서

온몸으로 반기는 바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할 것이냐

말하여라 말하여라

망설임도 꾸밈도 없이

네 본연의 목소리로.

 

 

 

바다의 기록(記錄)

김규동

 

1 - 파도(波濤) 소리

비끼인 구름 사이에서도

벌들이 속삭이는 한밤.

 

빈대와 모기와

바람 한 점 들 리 없는

서울의 더위에 견디던 몸이

깊은 밤 파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네 살짜리가

'아버지, 기차가 이렇게 쿵쿵거려서 어떻게 내려!'

천막 밑까지 와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아직도 대천행(大川行) 기차(汽車) 속인 줄 알고

이런 잠꼬대를 하는 바다의

첫날밤이었다…….

 

 

2 - 저녁 바다

해는 천막(天幕) 등 뒤에서

떠올랐다가 수평선(水平線)에 진다.

 

붉은 석양 노을에 물드는 바다의 잔등

우물쭈물하다가는 저녁밥이 늦는다.

 

바람이 거세어

담배 불을 붙이지 못하는 언덕―

 

때마침 어두움이 내려온 바닷가를

양키 부부(夫婦)가 아득한 추억(追憶) 속에서처럼 말없이 걷는다.

 

 

3 - 아침의 풍속(風俗)

아침 여섯 시만 되면

시골 아주머님들이 삼십 리 길을 걸어

충청도(忠淸道) 사투리와 함께

김치와 조개를 팔러 온다.

 

물이 나간 사장은

아침의 운동객(運動客)을 즐겁게 하는 '그라운드'

경쾌(輕快)한 걸음걸이로 나타나는

버스 회사(會社) 사장(社長)의 골프가 멋진 격식(格式)을 갖춘다.

 

차츰 선명해지는

바다 저쪽의 조고만 섬들.

하늘은 쾌청(快晴)-남서풍(南西風)이 불고,

해안(海岸)에 모여 앉은 천막촌(天幕村)이

깃발처럼 퍼덕거린다.

 

 

4 - 바다의 마음

바다에서는 누구나 다

조금씩 흥분(興奮)해 있는가 보다.

나이 먹은 아주머니들도

여학생(女學生)들처럼 수다스러웁다.

 

파도를 안고 뛰어들었다가

파도에 밀려 쫓겨 나오는

여인(女人)들의 웃음소리

 

문득 잃어버렸던 청춘(靑春)이 복바쳐 올라

그 아무라도 붙잡고

소리쳐 외치고 싶은 마음의 충동(衝動)을 이기지 못한다.

 

 

5 – 조개껍질 이야기

조개 가루

하얗게 비낀 모래불,

조수(潮水)가 밀려 나간 아침과 저녁

분홍빛, 남빛, 초록빛

'러브레타'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少女)들이

바다의 패물인 구멍 뚫린

조개 껍질을 줍는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와 동생

또는 마음속의 귀한 사람에게

바다의 선물을 뵈여 주리라.

 

차츰 잔잔해지는 바다 물결

갑자기 구리빛 바위들이

푸른 요를 뚫고

머리를 치켜 든다.

 

오전(午前) 십일시(十一時)

젖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비-취 파라솔'이 점점(點點)히 늘어앉았다.

 

 

6 - 서정해안(抒情海岸)

시원한 해풍(海風),

푸른 바다가 하도 신기하여 아침저녁

짠물에 세수하고 머리를 감는다.

 

온화(溫和)한 날씨

쨍쨍한 햇빛에 피부가 익어가고,

잠을 청하지 않아도

저절로 잠이 들어 버리는 바다의 일과(日課)들

 

이 바다를 찾아오는

수많은 해수욕객(海水浴客)들 모양

떠들기 위함이 아니었거니

둥근 수평선(水平線)을 향하여

예민(銳敏)한 소년(少年)처럼

하얀 편지를 쓰는 것이다.

 

밤마다 쳐다보는

총총한 별빛-아 내가 언제 저런 별을 사랑했던 것일까.

 

넓은 하늘에 뿌려진

보석(寶石)의 아름다운 빛을 쳐다보며

새삼스러이 내가 걸어 온

가느다란 반생을 생각해 볼 때

회한(悔恨)과 쓰라림의 무성한 잡초(雜草)뿐-

너무나 초조하고 안타까운 생애의 추억 때문에

초생달이 어둑 침침한 밤 바닷가에 앉아

나부끼는 외로움을 견딘다.

 

 

 

밤의 신화(神話)

김규동

 

북소리. 나팔 소리. 다채로운 행진곡이 울려 오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갔다.

텅빈 대낮의 거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오는 것은 북을 치며 걸어오는 코끼리와 그 옆에 서서 피리와 나팔을 부는 광대들이었다.

코끼리가 어떻게 저런 음악을 연주하나? 나는 창피한 줄 모르고 아이들처럼 서서 당당히 행진해 오는 코끼리를 구경하였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자 어진 코끼리의 둥그런 눈이 껌벅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더욱 신이 나서 또 다른 악기에 떡떡 장단이 들어맞게 북을 쳐대었다.

이 거창한 행진의 뒤를 따르는 것은 아이들뿐― 아이들은 바지가 흘러내린 것도 모르고 어른의 걸음걸이로 또 달달거리면서 행진의 뒤를 따랐다. 코를 훌쩍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숨가쁨과 무한한 호기심이 빗기었다.

검은 가로수와 초연 냄새-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서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족도 동료도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만 혼자 이 거리에 나와 선 지금― 그러면 가족은 어찌된 것일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네가 좋아하는 코끼리가 나팔을 불면서 오고 있구나!

나는 비로소 오늘이 무슨 날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전쟁이 지금 바로 끝난게로나. 지금까지 나는 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 그러면 나의 혈육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 수많은 자동차와 사람과 세기의 문명은 어찌된 것일까.

그러자 이해 못 한 행진의 배경이라도 장식하는 듯 코끼리의 음악대가 걸어오던 저쪽 서편 하늘가에서 푸른 광선이 공중에 번쩍거렸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폭발하는 인간의 무기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등이란 것을 순간 나는 깨달았다.

코끼리의 악대가 지나가자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은 줄곧 코끼리와 광대를 따라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쉬지도 않고 따라가고 있었는데…….

 

 

 

별이 달에게

김규동

 

편지 못 쓰고

전화 못 해도

마음 변한 것이 아니라고

믿어주오

 

시간은 밤새

천 리나 멀리 가버렸구려

 

쑥 향기 그윽한 언덕에

이슬이 내려

적시오 가슴을

 

당신은 알 것이오

승자가 가는 길과

패자가 가는 길이

함께 있다는 것을

 

떨어지는 불덩이를 안고

비스듬히 나는 새

새는 죽어서

싸늘한 돌에 제 자태를 새겨놓았구려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김규동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 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 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분단(分斷)

김규동

 

이슬에 젖은

거울을 숨기고

두 개의 몸짓을 본다

이처럼 다른

두 얼굴이 나타내는 것

어둠의 끝이다

운명의 끝이다

우리 서로 쳐다본 채로 죽는

죽음의 빛이다

상승과 낙하가 하나가 되는

종말의 빛이다

페허에 막이 내리면

뿔이 달린 현실은

캄캄한 심장을 흔들어 놓는데.

 

 

 

불안(不安)의 속도(速度)

김규동

 

철(凸)렌즈를 쓰고

내가 거리를 간다.

 

활자(活字)처럼 다가와

나의 이마에

나의 가슴에

나의 관절(關節)에

나의 동자(瞳子) 안에

정면충돌(正面衝突)하는

중량(重量). 중량(重量). 중량(重量).

 

'절망(絶望)과 공포(恐怖) 아 끝없는 객혈(喀血)이리오'

 

만나면 모두

세균학자(細菌學者)처럼

싸늘한 체온(體溫)을

내 손의 표피(表皮) 위에 남겨 놓던

선수(選手)들을 차라리 피하면서

피하면서 가야 하는

철(凸)렌즈의 운명(運命) 속에

오늘도

태양(太陽)과 하늘만이

해골(骸骨)처럼

해골(骸骨)처럼

그렇게

남아 갔다.

 

 

 

비망록

김규동

 

프랑스 화장품 광고의

연지 찍은 여자의 입술의 장미

장미는 어두운 구멍이다

 

노인을 버리고 가는

버스 등 뒤의 스레트지붕의 달빛

달리는 달, 휴전선에도 달은 떴다

 

약속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사내의

손목시계의 경련

여자는 돌아서서 운다

 

동양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느라

진땀 흘리는

보도블록 틈새의 잡초의 진정성

 

초록은 혼미한 세상에 나와

무엇을 하자는 거냐

신발 끝에 묻어나는 지긋지긋한 감흥

 

탈북 소년에게 라면 아니고 밥을 줘라

쳐다뵈는 티브이의 너구리 달음박질

저 모르게 세계화로 달려 들어가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짝을 잘 찾아 달아나는 연애를

배추 뿌리 입에 문 아낙이 축복하였다

 

빈 머리에

한숨 한 덩어리 얹은 다음

곡괭이로 두루뭉실한 언덕을 다시 찍어본다

 

죄 없는 허공에 대고 미사일 쏘니

통일문제는 잠시 간데온데없이 되고

연사는 단상에서 내려오다 꽝 쓰러지고 말았다.

 

 

 

사랑

김규동

 

사랑을 해본 일 있으신가요

사랑을

소슬바람에 흐느끼는 나무이파리 같은

 

사랑을 해보셨는가요

기차가 시골 정거장 막 지나가는 것 같은

사랑을

 

사랑을 느껴보셨던가요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지 막막한

나날들을

 

이것이다 하고 골라잡은 것은

뜻밖에도 수심에 싸인

가을날 돌밭

 

사랑했노라

마지막 눈 감을 때

그가 허공에 대고 한 이 한마디는 이미 낡았다.

 

 

 

김규동

 

명산 아닌

그 산이

두어 점 구름 아래

조용히 누웠는 이름 없는 그 산이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햇살이 부서져

황금빛으로 물든

오솔길에는

빨갛게 익은 열구밥이

정물화같이

푸른 대기 가운데 고정되었다

 

바람과 짐승과 안개가

산 저편으로 잦아든 뒤

해 기울고

소달구지 하나 지나지 않는

신작로길이

영원처럼 멀었다

 

바다 우짖음 소리도

강물의 고요한 숨결도

알지 못하나

소박한 자태로 하여

쓸쓸한 기쁨 안겨주던 산

어린 나를 키워준 산이

탕아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시여

너의 고뇌와 눈물의 아름다움

그리워하지 않은 때 없으나

이룬 것 없이

죄만 쌓여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고향 하늘

   

아, 철없이 나선

유랑길

몸은 병들어 초라하기 짝이 없으나

받아주리라 용서해주리라 너만은

이름 없는 나의 산.

 

 

 

새해의 노래

김규동

 

새해에는

우리네 가슴

푸른 강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백두산 지리산에 내리는 함박눈이

온 천지에 펑펑 쏟아져

집과 길을 파묻기도 하고

새와 짐승과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지친 우리 걸음걸이도

새 힘이 솟게 하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 난 강토에 새봄이 오니

우리 마음 어찌 무심하랴

남녘에도 북녘에도

통일의 노래 애타게 울려 퍼지니

우리의 바람 하늘에 닿으리

억울한 분단의 세월 너무 길었나니

흩어진 형제들 만나봐야지

끊어진 다리 잇고 막힌 길 새로 헤쳐

그리운 님들 다시 찾아봐야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나 보세

하늘과 땅 사이

슬픔과 미련 사이

노여움과 원한 사이

그 모든 어둠과 설움 위에

화해와 해방의 빛 굽이치나니

이 고개 넘으면

좋은 세상 만나본다네

까치 까치설날은 우리의 새날

둘 아니고 하나인 햇님

산 넘고 물 건너

희망의 새날 맞아 어서 나가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 나가세.

 

 

 

송년(送年)

김규동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시법(詩法)

김규동

 

그러면 그렇지

있어 있다고

분명 시가 있다고

 

그가 이제야말로

시다운 시 쓴다며

문을 꽁꽁 닫고 들어앉은 지

나흘 만에

어디 붙들려 가 실컷 매 맞고 나온 사람같이

홀쭉해진 얼굴로

제가 만들었다는 비빔밥 한 그릇 들고 나와

푹푹 퍼먹는 것이었다

 

길고 짧은 것

다섯 편 써서 다섯 편 다

휴지통에 쑤셔 넣고 말이다.

 

 

 

시의 천국(天國)

김규동

 

한 편의 시는

연탄 한 개만 한 열기라도 있을까

한 백 리쯤 걸어도 끄떡없는

근력이 있을는지

뜻 없는 푸른 하늘 아래

조용히 흐르는

실의를 달래 수 있을런지

헐린 무허건물(無許建物)이

가축의 뼈다귀처럼 길가에 나딩구는 오후

바람은 풍경을 손질하느라고 분주한데

포켓의 먼지를 털며

말의 효력을 믿어서는 안 된다

흰 이마에 회의와 애탄의 불을 켜 들고

무거운 입술를 굳게 다문 고뇌의 증인

보들레르여

절망이 어떻게 빛을 볼 수 있었던가

울부짖는 바다는 저 혼자 단애에 부서지고

낮과 밤을 잇는 세계의 소식은 불꽃을 튀기지만

소리 없이 나의 시야(視野)를 적시는 빛

눈물이여

내 시의 천국엔 흰나비 한 마리.

 

 

 

시인(詩人)의 검(劍)

김규동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이다 - 헤겔

 

꽃을 흔들고

날아가는 새의 날음을 보기 위해

눈을 감을 것은 없다

오늘 살면 내일 살 일이 태산 같은 삶을

심장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어둠의 불빛 아래를 헤매일 것은 없다

괭이를 잡은 손과

펜을 쥔 손의 다름을 알기 위해

공해에 찌든 들판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은 없다

시인의 검은 치욕의 검이거니

가장 합리적인 웃음과 눈짓을 거부하고

자유를 가두는 운동을 미워하며

체제를 또한 믿지 않으리라

날개가 아니며

형태가 아니며

관념이 아니리니

숨 쉬는 자유와 만나는 자유를

백두산에서 한라산 끝까지

하나 되어 솟구칠 통일의 강을 노래하리라

피 흐르는 화목을 이뤄가리라

시인의 검은

묶인 것을 자르는 바람결이거니

화살보다 빠른 뇌성이거니

육중한 것 기름진 것을 모조리 불태우며

억압을 푸는 날랜 손이리라

난초잎에 비낀 달빛이 아니어라

가슴 깊이 파헤쳐진 국토에

시멘트에 묻혀 잠드는 철근더미를

한 맺힌 늑골이라 생각하자

조직이요 벽이라 느끼자

어둠이 짙으면 귀신 같은 흰 빛이 다가오리

죽은 자의 혼도 일어서는

나날의 놀라움으로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오늘의 암흑을 노래하자.

 

 

 

아침의 예의

김규동

 

40년 동안

시를 생각하며

살았다지만

고향 돌아갈 때

갖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홀가분한 것이

오히려 눈물겹다

그렇구나

그 아침이 오면

빈손으로 만나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랑할 것도 없이

자나 깨나 그리던

그리움 하나만으로 만나야 한다

만남과 화합

영원한 해방의 날에

하나가 되는 통일 말고

우리가 원했던 것이 또 무엇이더냐

한 많은 마음을 비우고

손을 깨끗이 씻자

그것만이 우리들의 만남을 위한

참 예절이거니.

 

 

 

아침의 편지

김규동

 

함경북도

우리 고향 아득한 마을

 

행준네 넓은 콩밭머리에

이 아침 장끼가 내렸는가 보아라

 

칙칙거리기만 하고

아직 못 가는 이 기차

 

해는 노루골 너머에서

몇 자쯤 떴는가 보아다오

 

 

 

아, 통일

김규동

 

이 손

더러우면

그 아침

못 맞으리

 

내 넋

흐리우면

그 하늘

쳐다 못 보리

 

반백 년 고행길 걸은

형제의 마디 굵은 손

잡지 못하리

이 손 더러우면

 

내 넋 흐리우면

아, 그것은

영원한 죽음.

 

 

 

안부

김규동

 

알려다오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분계선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한다면

땅속 깊이

바닷속 깊이

잠겨서라도 소리쳐다오

죽어서라도 외쳐다오

혼백끼리라도 만나서

이 원한 풀어보자고

너 혼자

낫게 살려 하지 마라

낫게 살려면 거짓말해야 하는구나

거짓말로 논문이 되겠느냐

시가 되겠느냐

끊어진 형제의 마음 이어지겠느냐

말을 많이 하지 마라

고상한 말보다는

앓음 소리가 더 확고한 말이구나

말로 통일이 되겠느냐

하늘은 멀고

땅은 어두우니

스산한 까마귀야

펄럭이는 독나비야

나는 믿고 싶다

온 세상 그 무엇보다도

뛰고 있는

이 심장의 고동 소리를.

 

 

 

어린 손자에게

김규동

 

얘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저건 잘못된 충무공이시다

장군님은

저렇게 무섭게 생긴

누굴 위협하는 분 아닐 거야

인자하고 따뜻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힘을 빌리는 자상하고 용기 있는 분일 게다 그러기에

민중의 처참 보다못해

나라를 구하고 스스로 나아가 화살 받으신 분

개선장군 소리 듣기를

죽음으로 사양한 분

배고픈 이에게 밥 주고

팔다리 다친 병사의 아픔 함께 운

인정 넘치신 분

장군님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아

자동차 악쓰며 쫓겨 달리는

이 넓은 길엔 계시지 않아

장군님은 남루한 옷 걸치고

팔도강산 외진 마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농민들 일손 도와주고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공장과 일터를 고루 돌며

형제들 손 잡아주고 있지

몸에 기름 끼얹고 한 몸 불태운

이 땅 젊은이들 영혼 붙들고 통곡하고 계셔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아

통일로 가는 이 싸움 속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등뼈 휘도록 일하고 계셔

커다란 칼 짚고

이 민중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위엄 가운데는 계시지 않아

얘야 이건 눈물 많으신 이순신 장군님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낮이나 밤이나 버티고 섰는

이분은 장군님과는 물론

우리 모두와 무관한

차고 음산한 쇠기둥이다.

 

 

 

어머니는 다 용서하신다

김규동

  

닭이나 먹는 옥수수를

어머니

남쪽 우리들이 보냅니다

아들의 불효를 용서하셨듯이

어머니

형제의 우둔함을 용서하세요

 

 

 

어머님전(前) 상서(上書)

김규동

 

솔개 한 마리

나즈막히 상공을 돌거든

어린 날의 모습같이

그가 지금

조그맣게 어딘가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움직이는 그림자는

영원에 가려

돌아오지 않지만

달빛에 묻어서라도

그 목소리는 돌아오는 것이라

여겨주세요

 

이제 생각하면

운명이라고 잊혀도 지건만

겨레의 허리에 감긴 사슬

너무나 무거우니

아직도 우리들은

조그맣게 조그맣게

걸어가고만 있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닿지 못하는

서투른 이 발걸음

죽은 자와 더불어 헤매어 봅니다

 

솔개 한 마리

빈 하늘을 돌거든

차가운 흙 속에서라도

어여삐 웃어주세요.

 

 

 

여름의 노래

김규동

 

덥다 책을 치우고

백두산 천지 사진을 건다

가긴 어딜 가

이마빡이 시리면 된다

백두산에서 일박하고

무산령을 넘는데

곰 한 마리 길을 막는다

하늘이 보이질 않는 자작나무 숲에서

산삼만 캐 먹은 큰 곰이구나

일행 중의 이야기꾼 갓바치 씨가

비스듬히 꽂히는 석양 빛살을

손등으로 가리고

천지개벽 통일주문을 외니

짐승은 꾸벅 절하고 달아났다

영특한 놈이다

내일은 묘향산에서 자게 된다

기암절벽에 감긴

흰 구름덩이도 만져질까

여름옷 걸친 채로

덜덜 떨며 깊은 산 정기를 마실 것이다

여기를 떠나면

금강산

소백산맥 가로질러

다음날은 지리산이구나

한라산이구나

아 길은 머나

신들린 발걸음이 하염없을 뿐.

 

 

 

열차(列車)를 기다려서

김규동

 

비 오는 어두움이 가슴에 아퍼

그럴 때마다 허망한 거리를 가며

당신의 모습을 찾습니다.

 

탄환에 쫓긴 사슴 모양

생활의 막다른 골목에서

불현듯이 그대 손길을 더듬어 봅니다.

 

북에 갔던 항공기의 편대들이

푸른 공간 위에 폭음을 굴릴 적마다

그대 모습을 어루만집니다.

 

다섯 해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꿈에 뵙는 당신의 그림자는

항시 환히 밝어……

 

육십오 세의 흰머리 날리시며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큰 우뢰 산하를 진동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인민의 눈동자

별빛처럼 타는 밤-

 

삶을 위한 싸움 속에

자유를 위한 신음 속에

우리 모두 대열져 섰거늘!

 

이윽고 목메인 평화의 아침이 열리면

그 무슨 주저도 없이 달려갈

아들들의 열차를 기다려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셔선 안 됩니다.

 

 

 

오는구나 봄이

김규동

 

다행한 일이다

봄이 오는 소릴 듣는 것은

지난겨울은

너무 춥고 스산하여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았거니

이제 강이 풀리고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니

희망, 기쁨

그런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라

희망이 없다면 무엇이 될 건가

여전히 캄캄한 세상 살아가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봄바람 살랑대는 거리에 서면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잔인하게 등골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통일하자

통일하자

외쳐댄 소리도

다시금 산울림되어 들려온다

이 혼란 속에도

구정이라

더러는 명절 기분을 내는데

북으로 달리는 기차 소리

영 들리지 않고

빈 소리 외쳐댄 몸이 차라리

형제와 조상님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하루하루 연명이나 하는 건

삶이 아니다

절대로 삶이 아니구나

삼천리강산 소리치고 일어설

그날 없이는

영광도 아니구나

사십 년 묵은

분단의 가시 철망

그대로 놓아둔 채

떨리는 봄소식 듣는 건

산뜻한 봄바람 속에

소스라쳐 놀라는 건

무엇 때문이냐

오 가고 싶고나 고향 가고 싶고나

북쪽 형제 있는 곳

가보고 싶어라

얼싸안고 울어보고 싶어라.

 

 

 

위기(危機)를 담은 전차(電車)

김규동

 

살아남았다는

기적(奇蹟)과 기적(奇蹟)의 틈바구니에서

창백한 문명(文明)의 위기(危機)에

서글픈 진단서(診斷書)를 쓴

'D. H. 로-렌스'의 얼굴을 닮아가며

오늘로 살벌(殺伐)한 전지(戰地)의 흙을 밟고

귀가(歸家)의 전차(電車)에 오른다.

 

신문(新聞)을 펼쳐 든 사람과

갈수록 괴로워지는 현실(現實) 때문에

말이 없는 청년(靑年)과

숱한 피곤(疲困)한 얼굴을 붙안은 사람들의 그림자

 

모두가 제각기

붙잡히지 않는 행복(幸福)을 서글피 여기며

밤의 어둠 속을 굴러가고 있을 때,

안전(眼前)에 어른거리는

내 가난한 가족(家族)들의 헐벗은 정경(情景)이

황폐한 지평(地平)에 쓸쓸하구나.

 

학문(學問)과 직업(職業)과 생활(生活).

또는 애정(愛情)과 죽음.

그 모든 세상의 위기(危機)를 한 몸에 지니고

그 속에서 오히려 살아 나갈 수 있는 가장 좁은 길을 찾는……

피에 젖은 정신(精神)의 쇠잔(衰殘)한 흐느낌이여

 

죽는다는 것-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기꺼운 웃음 머금고 행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휴매니티'일 것이나

그것은 또한 얼마나

건강(健康)한 체격(體格)을 요(要)하는 사상(思想)일 것인가.

 

나는 왜 '나'일 수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좀 더 안온(安溫)한 시대(時代)에 살았던

어린 정신(精神)의 귀족(貴族)인 '부루스트'처럼

흘러간 시대(時代)의 회상(回想)에 목메어 울 수도 없어

이 밤은

차창(車窓)에 불어드는 훈훈한 바람이

오히려 이마에 차다.

 

 

 

유리씨즈

김규동

 

성벽(城壁)처럼 드높은 하얀 벽(壁)에 펑하니 뚫려진 구형(矩形)의 창(窓)-창(窓) 아래 앉은 사람들은 할 일 없이 무슨 맛인지 모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날. 1955년(年)의 마감날- 하늘은 깊은 안개 모양으로 흐리고 검은 구름이 머루넝쿨처럼 엉켜져 있었다. 은행(銀行)과 상사(商社)에서는 이 해의 마지막 결산(決算)을 매기기에 분주하였으나 나는 무료히 1955년(年)의 뭇 기억(記憶)들을 내 두뇌(頭腦)의 강(江)물에 흘려보내며 한 포기의 서정(抒情)을 기르고 있었다.

- 마을에는 낡은 기왓장이 흩어지고 성긴 소나무 숲이 있는 공동묘지(共同墓地)에는 희스므레 흰 눈이 놓여져 있었다. 빈 정적(靜寂) 속에 이따금 들려오는 마을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 정미소(精米所)에서 울리는 발동기(發動機) 소리. 그런 소음(騷音)들의 이끼낀 권태(倦怠)속에서 나는 조용한 시간(時間)들을 키우면서 내 작은 생애(生涯)의 일기(日記)들을 정리(整理)하여 갔을 뿐이다-.

Gertrude Stein, Wyndham Lewis, Virginia Woolf, D.H. Lawrence, Oscar Wilde, James Joyce―

이런 사람들의 영상(映像)과 이들의 그리운 생애(生涯)…….

 

지금은 하루의 직책(職責)이 끝난 편안한 시간(時間), 장난감 기차(汽車)처럼 달리는 무전기(無電機)의 회화(會話)와 주(主)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라디오의 노래 소리가 흰 실내(室內)에 나와 함께 남아 있다. 이 정적(靜寂)의 광야(曠野)에서 나는 죽음처럼 싸늘한 내 정신(精神)의 화석(化石)을 매만지며 서글픈 연기자(演技者)- 오늘 하루의 괴로움들을 돌아다 본다. 아득히 멀어진 망각(忘却)의 언덕에 조약돌 모양 흩어진 갸냘픈 시체(屍體)여! 이미 부러진 연장과 맥이 풀린 나의 분장한 영상(映像)에 회색(灰色)빛 계절(季節)은 나부껴 오고―애인(愛人) 나타―리의 난잡(亂雜)한 소식(消息)이 오늘도 자살(自殺)을 못 해서 서글픈 나의 가슴에 한줄기 애수(哀愁)를 뿌리고 간다 ―임이여 사랑하는 임이여 그대가 마련하는 일과(日課) 속에 인형(人形)처럼 순종(順從)하였던 나는 당신의 위대(偉大)한 종이었습니다. 나에게 죄(罪)가 있다면 그대를 사랑했다는 죄(罪)밖에 또 무엇일까요? 너무나 무자비(無慈悲)했던 나의 임이여―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의 종말(終末)―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조용한 회상(回想)의 바다뿐이올시다.

피곤(疲困)이 철사(鐵絲)처럼 감기는 이른 봄의 정오(正午)- 가족(家族)과 신화(神話)- 뭇 비극(悲劇)의 가시덤불 속을 왕래(往來)하며 행복(幸福)한 시민(市民)의 대열(隊列)속에 내 인생(人生)의 숙명(宿命)들을 돌아다 본다. 그러나 어두운 내 청각(聽覺)에 먼 바다 우짖음처럼 들려오는 위대(偉大)한 청춘(靑春)의 숨결이여― 뽀―드렐, 에드가․엘란․포우-, 아인슈타인, 키에르케고르. 도스트옙스키……그것은 죽지 않는 영원(永遠)한 장미(薔薇)- 빛 나는 기류(氣流)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유모차를 끌며

김규동

 

그 신문사 사장은

변변치 못한 사원을 보면

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나오느냐고 했다

유모차를 끌며 생각하니

아이 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저귀를 갈고 우유 먹이는 일

목욕시켜 잠재우는 일은

책 보고 원고 쓸 시간을

군말 없이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

공연히 떼쓰거나

마구 울어댈 때는 귀가 멍멍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되니

이 경황에 무슨 노랜들 부를 수 있겠느냐

순수가 어디 있고 고상한 지성이 어디 있냐

신기한 것은

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

때로 햇덩이 같은 웃음을

굴리는 일이로다

거친 피부에 닿는 너의 비둘기 같은 체온

어린것아 네게 있어선

모든 게 새롭고 황홀한 것이구나

남북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거리고 자랄

미국도 일본도 소련도

핵폭탄도 식민지도 모르고 자랄

통일조선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이 아이들 내일을 위해선

우리네 목숨쯤이야 초로 같은 것이면 어떠냐

탄환막이라도 되어주마

우리를 딛고 일어서라

우리 시대는 틀렸다지만

너희들은 기어이 통일된 나라 만나리라

숨 막히는 열기 속에 쫓겨 달리는

차량의 물결을 스쳐

미친 바람 넘실대는 거리를

삐걱이는 유모차를 끈다

통일을 만날 어린것을 태운

유모차 끄는 일은

시 쓰는 일을 미뤄두고라도

백번 눈물겹고 신나는 노동이구나.

 

 

 

육체로 들어간 진달래

김규동

 

먹었단 말입니다

연한 이파리

무지개 같은 진달래를

순이와 난 따 먹었어요

함경도의 3월은

아직 쌀쌀하나

허전한 육체에

꽃은 피로 녹아

하늘하늘 떨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평안도 약산 시인은

노래했으나

밟고 가다니 사치하잖아요

먹었단 말입니다

심장으로 들어가게 했지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리겠노라

전라도 강진 시인은 노래했으나

도대체 뭘 기다리란 말인가요

모란이 뭔지도 모르는 바람 센 땅에서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린 불붙 듯하는

진달래를 따 먹었어요

 

여름내 땀 흘려 농사짓고

겨울엔 이태준의 <문장> 잡지를 읽는

이름 없는 농부의 딸 순이와 나는

입술같이 연한

진달래 이파리를 따 먹었어요

 

순인 북에 있고

난 남쪽에 있으나

둘의 심장으로 들어간 진달래꽃만은

세월이 가도

고동치며 돌고 있답니다

사시사철 꽃은 피고 있답니다.

 

 

 

의식의 나무

김규동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부러지지 않고 서서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서서

우리가 죽은 뒤에도

말없이 서서

하늘로 뻗어 오르며

구름이 되고 빛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생각하는 나무여

아 부드러운 나무의 뼈.

 

 

 

이카로스 비가(悲歌)

김규동

 

낙하하지 않고는 심연을 알 수 없다

그때 비로소 의식은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단애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죽은 말소리와

끈질긴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한 자루 연필이나 짐짝처럼 구르며

임리한 물질인 스스로를 키워간다

어찌 코와 눈과 팔다리의 움직임만으로

뜨겁다든가 차다든가 하는

저 흐름의 흔적만으로

멸하여가는 것을 증명한다 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만으로 물질은 거기 보이고

우리의 오늘과 내일은 사라진다

우선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고통스런 반복과 뭉개진 인정 사이에서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단애에 울리는 파도 소리는 어둡고 차다

모순의 안과 밖에 흩어지는 언어

머리를 풀어 헤친 수목의 그늘이

쓰러진 생활의 잔해에

옛날처럼 따스한 속삭임의 몸짓을 보내나

지평선을 달리는 경직된 이성이

슬픔의 중심을 알 까닭이 없다

하여

산다는 것은 더욱 갇힌다는 것이고

어디를 바라봐도

약속처럼 매여 있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말의 집적에 눌려

타인같이 어두운 거울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꿔본다는 것이다

고독은 때로 관능적인 것이기도 하기에

물질과 물질이 부딪는 사소한 소음에도

이처럼 살벌한 꿈을 꾸게 되나 보다

이카로스여 날개여

그대와 우리 사이에 교감하는

이 흔들림의 선율은 무엇인가

가슴에 파고드는 이 침묵의 뜻은 무엇인가.

 

 

 

재판

김규동

 

의롭고 당당해야겠다 재판은

백해무익한 일을 밥먹듯 하면서도

뉘우치는 일 없으니

도대체 너는 무엇을 꿈꾸는 것이냐

소리지르지 마라

사람을 알기를 허수아비로 알고 있다

한 식구가 모여 앉아

지켜보는 적도 있으나

네가 기특해서인 줄 알면 잘못이다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죽어버리지 못해본다면 본다

너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나빠지는구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토록 불공평한 세상 이치를

당장 바로잡을 생각 하는 일 아니겠느냐

너는 여기에 잿가루를 뿌리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헛바람만 불어넣었다

목숨 부지하는 일도 어려운 판에

산더미 같은 호화상품 선전이 무엇이냐

이 나라 아이들은 모조리

직업 야구선수와 농구선수 되란 말이냐

못 먹고 못 배워도

분칠하고 서양 춤출 것이냐

무엇보다도 네게선

제국주의 냄새가 나서 질색이다

이만큼 한 침략에도 부족하여

무엇을 더 빼앗겠단 것이냐

그만 빼앗아라

그만 짓밟고 그만 속여라

오만한 목청 돋구어

노동에 지친 곤한 잠 깨우지 말며

어린것들 순박한 꿈 멍들게 하지 마라

두고 봐야 허황한 놀음이다

말이면 다 말이냐

너의 말장난질은 중형이 마땅하다

그만 쳐라 북을

너는 죄없는 백성들

귀한 시간 빼앗는 기세 좋은 도적이다

양놈 왜놈 합세하여 못살게 굴지 마라

분단을 영구화하지 마라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를

사랑하는 척도 하지 마라

여상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 너는

네모난 상자 속에 숨은 요사스런 적이구나

엄한 눈하고 시청료 받아먹는.

 

 

 

전쟁(戰爭)과 나비

김규동

 

능선(陵線)마다

나부껴 오는

검은 사정권(射程圈)

 

속력(速力)의 질주(疾走)는

나의

육체(肉體)의 부분(部分)들을

역사(轢死)시켰다.

 

때마침

흑인병사(黑人兵士)의 보행(步行)은

나의 환상(幻想) 속에

코뮤니즘과 같은

붉은 유혈(流血)을 전파(電波)하고

수술대(手術臺)에 누운 나는

창백(蒼白)한

나의 신경조직(神經組織)의

반사(反射)를 바라다본다.

 

광란(狂亂)하는 바다

파열(破裂)하는 빛깔 속에

낙하(落下)하여 가는

선수(選手)들의 포물선(抛物線)―

 

그럴 때마다

새하얀 광선(光線)을 쓰며

전쟁(戰爭)의 언덕을 올라오는

어린 나비들은

검은 영상(影像) 속에 마그네슘처럼

투명(透明)한 아침을 폭발(爆發)시키는 것이었다.

 

 

 

존재와 말

김규동

 

최서해가

상허에게

이형이 냉수 맛을 알려면

술이 좀 늘어야 할 텐데 하고

안타까워했다

 

이상은

폐병 말기의 김유정 보고

김형이 꼭 한달만 술을 끊는다면

병이 깨끗이 나을 텐데 하고 한숨지었다

 

6 · 25전쟁 때

오장환이 서울로 나와

제일 먼저 찾은 건

시인 김광균이었다

숨어 사는 옛 친구에게

그가 내민 것은

탱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자신의 시집이었다

 

김광균이 한마디 했다

여보게 그건 자네 주머니에 넣어두게

내가 지금 그런 걸 읽을 형편이 못 되네

하고 쓸쓸히 웃었다

 

5 · 16 군사 반란 때

까만 색안경 끼고

시청 앞에 선 박정희 장군을 두고

김수영과 나는 내기를 걸었다

수영은 미8군이 곧 나와

저 사람들을 진압할 것이라 장담하고

나는 미8군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점을 쳤다

지는 사람이 술을 사기로 했으나

내기에 진 수영이 종내 술은 사지 않고

박정희만 무서워하다가

먼저 가버렸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건

언제나

가냘픈 존재의 떨림이다.

 

 

 

좋을 대로 해라

김규동

 

천상병이 좋아한 것은 막걸리

공초 오상순은 그저 담배

문익환이 사랑한 것은 반독재집회

김정환은 철학과 맥주

에즈라 파운드가 좋아했던 것은 시경

말로가 흠모한 것은 영웅이다

정지용이 사랑한 것은 말을 만드는 일과 염소수염

이상이 그리워한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이병기가 사랑한 것은 난초

김기림은 지성을

권정생이 사랑한 것은 길가의 민들레꽃

김남천이 사랑한 것은 노동자 농민이고

임화가 사랑한 것은

맨발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아이들이다

여운형이 가장 좋아한 것은 대중을 만나는 일

손기정이 좋아하는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

김구가 사랑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애들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집에서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아

너무 괴로워하지는 마라

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만이 너 자신을 살리는 길이니라

천재는 거기 있다

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해라

 

 

 

죽여주옵소서

김규동

 

놀다 보니 다 가버렸어

산천도 사람도 다 가버렸어

 

제 가족 먹여 살린답시고

바쁜 체 돌아다니다 보니

빈 하늘 쳐다보며 쫓아다니다 보니

꽃 지고 해 지고 남은 건 그림자뿐

 

가버렸어

그 많은 시간 다 가버렸어

50년 세월 어디론가 다 가버렸어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에나 신경 쓰고 살다보니

아, 다 가버렸어 알맹이는 다 가버렸어

통일은 언제 되느냐

조국 통일은 과연 언제쯤 오느냐

 

북녘

내 어머니시여

놀다 놀다

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

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

 

 

 

진공회담(眞空會談)

김규동

 

- 무수한 교수시체(絞首屍體)와 이동(移動)하는 두개골(頭蓋骨)과 여자(女子)의 푸른 골반(骨盤)으로 형성(形成)된 벽(壁) 속에서 파수병(派守兵)은 거꾸로 서서 마태복음(馬太福音) 제3장(第三章)을 암송(暗誦)한다 -

 

프로이드 박사(博士)는 흰 까운에 하얀 마스크를 차고

간호원(看護員) 큐―리와 함께 층계(層階)를 올라오는 것이다.

 

'체온(體溫)은 영도(零度) 평온(平溫)입니다.'

 

- 처음 날은 황제(皇帝)의 결혼식(結婚式)에 영구차(靈柩車)를 타고 참석(參席)했습니다.

다음 날은 열차(列車)의 특등실(特等室)에서 여자(女子)를 강간한 일이 있습니다.

- 다음 날엔 애인(愛人) 나타-리의 유방(乳房)을 권총으로 사격(射擊)했지요.

- 그다음 날 나는 커-피 깡통을 삼켜 버렸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 날 오후(午後)엔 대학(大學)의 하늘 닿는 고층(高層)에서 투신자살(投身自殺)을 기도(企圖)하였습니다.

 

'간호원(看護員) 큐―리! 외과실(外科室)에서 수술준비(手術準備)를 하십시오. 절단수술(切斷手術) 입니다.'

 

-절망(絶望)입니까? 프로이드박사(博士)……

 

간호원(看護員) 큐-리의 뒤를 따라

뚜걱

뚜걱

층계(層階)를 밟는

프로이드 박사(博士)의 두상(頭上)에서는

대리석(大理石) 원주(圓柱)에 부딪치는

유리컵처럼

찬란한 폭소(爆笑)가 터져나올 뿐이었다.

 

 

 

진혼가

김규동

 

통일을 못 보고

가는 벗

잠드시라

여기 대동강에서 떠온 물이 있고

한강수가 있다오

이 물로

그대 심장을 식히소서

 

 

 

추억

김규동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첫 시집을 낸 지

쉰해 가깝도록

그 빚을 갚지 못했다

시집이 팔리는 대로

수금을 해서는

박인환이랑 수영이랑 함께 술을 마셔버렸다

거짓말쟁이에게도

때로 눈물은 있다

 

 

 

침묵(沈黙)의 소리

김규동

 

도회(都會)의 밤을

전쟁(戰爭)처럼 소란케 하는

연기(煙氣)와 네온

 

밝은 불빛 아래 섰으면서도

두뇌(頭腦)의 폐허(廢墟) 위를

분류(奔流)처럼 스쳐가는 건 암흑(暗黑)의 강(江)이다.

 

잠든

어린아이들의 의식(意識) 속에도

흐르는 강(江)물

피를 흘리는

어린 애기의 잠꼬대를

잊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여

이 처절한

오늘의 소리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바다와 산맥(山脈),

미래(未來)가 응시(凝視)하는 과거(過去)에의 향수(鄕愁),

 

북국(北國)의 월야(月夜)를 지키는 수목(樹木)의 그늘처럼

쓸쓸한 인간(人間)의 지성(知性)과 애정(愛情)의 계곡에서

오늘의 치륜(齒輪)은

탄생(誕生)과 죽음을 한데 섞으며

새로운 싸움을 선언(宣言)하는 것이다.

 

한 장

스테판․말라르메의 달이 걸려 있는 천공(天空)

 

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운행(運行) 속을

아 이 밤을 침묵(沈黙)의 소리가 가고 있다.

 

 

 

테레타이프의 가을

김규동

 

소녀(少女)는 투명(透明)한 유리컵에

한줌의 서정(抒情)을 따라 놓고

거리의 바람 속에

종이조각처럼 사라져 갔다.

 

갑자기 현기증(眩氣症)이 남는 머리를

신문지(新聞紙)에 기대고

오늘의 일과(日課)를 헤아려 볼 때

성냥개비 같은

붓대에 매어달린 나의 가족(家族)들은

오늘의 천기(天氣)에 대하여

테레타이프처럼 시끄러운 불만(不滿)을 배앝기만 한다.

 

먼지 속에

퇴색(褪色)해 가는 나의 책장

떨어진 구두

오늘도 한국의 하늘은 높푸른 애수(哀愁)에 잠기고

파도(波濤) 모양 설레이는

계절(季節)의 소식(消息)은

아득한 먼 날의 비행운(飛行雲)처럼

쓸쓸한 원경(遠景)을 불러오고 있다.

 

 

 

통일의 빛살

김규동

 

하늘 위의 바다

일렁이는 구름밭 헤치고

드높이 솟은 바다

거대한 잔 받들어

하늘을 열고 땅을 열어

오천 년 역사를 이루었나니

백두산이여

천지, 넘치는 생명의 물이여

바람 소리 흐느껴

빛살 온누리에 나부끼고

그윽한 징소리 넘치게 울려퍼져

하나인 숨결 하나인 뜻

찬연히 이었나니

겨레의 맥박인 백두산이여

열두 개의 연봉 병풍처럼 둘러선

그 꼭대기

병사봉 벼랑 밑

삼십 리 둘레에 퍼진 검푸른 물은

송화강 흑룡강

두만강 압록강 끝까지

마를 줄 모르는 젖줄 되어 흐르나니

크도다 장하도다

우리의 산이여

자작나무 이깔나무 우거진 밀림 속

장백산 굽이굽이

겨레의 혼과 입김 면면히 스며

삼라만상 도도히 물결치는

장엄한 노래

백두산은 우리의 힘이고나

맑디맑은 천지물은

자유와 평화의 애틋한 샘이고나

마천령의 힘찬 숨결

남으로 길게 뻗어

함경산맥 개마고원 넘어

태백 차령의 준령 이루고

노령 소백의 큰 기둥

지리산에 닿아

다시 한라로 이어진 오직 하나인 혈맥

삼천리 강토 금 없이 연이은

하나인 땅이여 하늘이여

오, 통일과 만남의 산 백두산

희망과 평화의 바다

백두산 천지

온갖 슬픔 온갖 어둠 사르며

이제 새날이 밝는다

우리 모두 엎드려 큰절 올리나니

이제야말로

이 애절한 그리움과 염원 위에

통일과 행복의 날을 내려주소서

민족의 큰 산 백두산이여.

 

 

 

포대(砲台)가 있는 풍경(風景)

김규동

 

바다를 향한

옥상(屋上)의 대공포대(對空砲臺) 위에서

젊은 병사(兵士)는

해양천리(海洋千里) 먼 고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연막(煙幕)처럼

흰 구름 밀려가는

여름 하늘 아래를

갈 길을 잃은 짐승 마냥

사람들은 밀려가고 밀려오고,

투명(透明)한 바다의 행렬(行列)에 지친

적은 배들이

오후(午後)의 피곤한 그늘에

그 무엔가 그리움과 같은

기폭을 나부껴 올 때

 

포대(砲臺)를 지키고 선

이국병사(異國兵士)는

소리 없는

리라의 음성(音聲)에

귀 기울여 간다.

 

오! 리라여

한(恨) 많은

1953년(年)의 기류(氣流)는

얼마나 당신이 그리운

계절(季節)이었습니까?

 

바다와 하늘 사이를

신념(信念)처럼 내닫는

검은 포신(砲身).

 

지금

도시(都市)는

괴로운 투영(投影)을 안고

분주(奔走)한 일모(日暮) 속에

침전(沈澱)하여 가고 있다.

 

 

 

하나의 세상

김규동

 

쌀 반 되

시금치 한 단

두부 한 모

고추장 반 숟갈

애호박 한 개

일금 1,630원

둘이 먹을 밥을 짓는다

밥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내가 나를 찬찬히 돌이켜본다

공부도 해봤고

홀어머님께 불효도 저질렀으며

죽을 고비 몇 번 넘기고

일도 했다

두 눈이 침침한 이 나이 되도록

고향땅엔 종내 못 가고

40년의 길동무 대신

밥을 한다

젊어서는

발레리도 읽고 릴케도 에세닌도 애독했으나

정신분석이니

쉬르레알리즘 선언 따위도 흥미로웠으나

지금은

쌀을 안치고 불을 켜

군말 없이 밥 짓는 일에 애정을 바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고문과 분신과 한 맺힌 싸움으로

막내 아이보다 어린 젊은이들이 죽고

국토의 분단은 그대로인 채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나날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곰곰 생각해 본다

헛된 상상력은 허공중을 날고

두려움은 무겁게 쌓여

핵폭탄 깔린 땅에서

밥이 끓는 소리를 들으면

이것만은 믿을 수 있는 말을 전해주는데

남도 북도 없는 하나의 세상

그것은 아직도 아득히 머나

간소한 저녁상을 대하고 앉아

따뜻한 밥을 먹고 있노라면

갑자기 무엇인가 내게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가냘프게 그러나 또렷이

내 혈관 속에

그 무슨 커다란 기쁨이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있는 도시(都市)

김규동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소리에 젖어

오늘도 나는 이 거리에서

도대체(都大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계절(季節)을 잃은 남루를 걸치고

숱한 사람들속 사람에 부대끼며

수없는 시선(視線)에 사살(射殺)되면서

하늘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인제 저 푸른 하늘이 마시고 싶어

이렇게 가슴 태우며

오늘도 이 거리에서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이냐

 

간판(看板)이 커서 슬픈 거리여

빛깔이 짙어서 서글픈 도시(都市)여

 

츄-잉껌을 씹어

철사(鐵絲)처럼

가느러간 허리들이

색깔 검은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방금-

회색(灰色)의 지평(地平)을 넘어

달려온

그 하이야-가

초록빛 커-텐이 흘러나오는 이층(二層)집

여인(女人)들의 허리춤에

보석훈장(寶石勳章)을 채워줬담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흘러버릴 수 있는 소문(所聞)이란다.

 

그 어느 날

바닷가에서

가을이 비 오는 바닷가에서

갈매기가 그리는 애상(哀想)의 포물선(抛物線)에

흰 이마를 적시우며

젊은 소설가(小說家)는

그가 거느린 가족(家族)의 몰살을 기도(祈禱)하였고

나는 나대로

전(前)날-

컴컴한 와사등(瓦斯燈)의 지하실(地下室)에서

하-얀 환약(丸藥)을 삼키고 쓰러진

시인(詩人)의 손을 잡았던 것도

벌써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이야기여서

 

쇼-윈도의 추녀 밑에 멈춰 서면

그대와 나

이 거리에서

참말 떳떳한 몽유병자(夢遊病者)였구려.

 

오늘도 밀선(密船)은

홍콩[香港]에서

하와이에서

대만(臺灣)에서

파라솔처럼 팽팽한

하늘을 둘러쓰고

이 항구(港口)로 달려든다 하였지-

 

몰아치는

검은 바람을 안고

섬의

공장(工場) 굴뚝들은

폐마처럼 숨이 가쁘냐.

 

한 폭

정물(靜物)처럼

고요한 전함(戰艦)들이 뒹굴어 있는

오후(午後)의 해상(海上)에 그림자를 흘리며

비행기(飛行機)는 허망한 공간(空間)에서

내일(來日)이 권태롭구나.

 

파스포-드처럼 쉽게 통과(通過)하는

로-타리의 물결에 섞여-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음향(音響)에 젖어

저물어가는 태양(太陽)아래

아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간판(看板)이 커서 기울어진 거리여

아아 빛깔이 짙어 서글픈 도시(都市)여.

 

 

 

한 시대

김규동

 

작은 돌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돌을 피하여

달아나는 바람이

내게 와닿는 소리가 들린다

무겁고 어두운 겨울 속으로부터

뛰쳐나온 사내들은

대부분 온데간데 없다

날이 밝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하여

눈을 부비며 나서는 기둥과 벽이

음산한 삼림(森林)을 돌아

내게로 온다

타다 남은 마음의 공터에

불을 붙이면

죽음의 냄새는 심장 가까이 와서

새의 깃소리같이 파닥거린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물 위에 떨어진 달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한 시대의 기묘한 얼굴이

물속에 잠긴다

깊은 수심(水深)이다

손이 금속(金屬)에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호남평야

김규동

 

이 넓은 들판을

끝 닿은 데 없이 넓은 벌판을

새매 한 마리 날지 않고

아쉬움인가

어여쁜 눈물자죽 빛내며

해는 진다

나락은 모두 거둬들였으나

땀흘려 일한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착한 마음밖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텅 빈 들판에 남은 건

정지된 시간의 흐름이다

가슴에 넘치는 고요함이다

서울서 온 양복쟁이는

여기를 지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딴전만 부리는구나

딴소리만 드뇌이며 가는구나.

 

 

 

환상가로(幻想街路)

김규동

 

잊어버릴 수도 있고

또 사랑할 수도 있는

환상(幻想)의 언덕을 배회(徘徊)하며

친구와 더불어 나눈 우정(友情)이며 약속(約束)을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망각(忘却)할 수 있는 날은

경사(傾斜)의 가로(街路) 위에

회색(灰色)의 원경(遠景)이

지평선(地平線)처럼 다가들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

대열(隊列)처럼 우중충 서 있는

푸라타너스의 그늘에서

가로수(街路樹)가 우리들의 모자(帽子)라고 우기던

시인(詩人)은,

이상(李箱)의 천재(天才) 위에

노-란 아이로니를 굴리면서

오늘의 행운(幸運)을 쓸쓸히 웃어가고,

다방(茶房)과 주점(酒店)은

오늘도 항구(港口)의 저녁 노을처럼

서글픈 잡음(雜音)에 싸여

모-든 그런 것들의

신문보도(新聞報道)와 아울러

돌아오지 않는

연대(年代)의 해협(海峽) 위에 침전(沈澱)하여 갔을 뿐이다.

선수(選手)들은

지금-

아우성치는 도시(都市)의 반란(叛亂) 속에서

장미(薔薇)와 같은 편지(片紙) 조각을 뿌리며

회상(回想)의 층계(層階)를 밟고 있는 것이리.

 

총명한 밤의 장막(帳幕) 저쪽에서

끊임없는 미소(微笑)를 보내는

여자(女子)들의 푸른 나체(裸體)와 나체(裸體).

 

밀물처럼 밀려드는 전쟁(戰爭)의 소음(騷音) 속에

비둘기들은

「콕토-」의 화술(話術)과 같은

원주(圓周)를 그려 올리고

투명(透明)한 공간(空間)을 타고

하-얀 사선(斜線)을 긋는

쎄이버 젯트기(機)의 비행(飛行) 뒤에

나는

아득한 가로(街路)를 향하여 낙하(落下)하여 가는

나의 영상(映像)의 빈 대열(隊列)을 조감(鳥瞰)하고 있는 것이다.

 

 

 

환영의 거리

김규동

 

키가 좀 작고

턱밑에 염소수염 살짝 기른 분이

정지용 선생이고

스포츠형 머리에

도수 높은 검은 테 안경 낀 분은

<천변풍경>의 저자 구보 박태원 선생이시다

또 한 분

회색빛 중절모에 단장 가볍게 짚은

버쩍 마른 저 분

<날개>의 이상 선생이지

 

세 분이

약속이라도 한 듯

광화문통 한 신문사 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상 - 몰라보게 변했어요! 서울이

지용 - 암 변했고 말고

웬 영어간판은 이리 많아

마치 외국 온 것 같소그려

구보 -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가는구료

자동차와 빌딩의 대도시올시다

아하, 이 신문사의 건물은 옛 그대로고

이 현관문

옛날에 여기를 숱해 드나들었었지

광교다리 지나 서린동으로 해서

지용 - 인왕산은 저기

삼각산은 또 이쪽

보고 싶었다오 서울이

이번에 {시와시학}이

우리를 초청했소

창간 15주년에

그리로 가

젊은 시인들 만나보면 어떨까

다음에 다시 올 때는

편석촌 김기림과

상허 이태준도 함께 끌고 옵시다요

 

세 사람의 환영이

서서히 황혼의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데

현기증 일으킨

이상을 부축하고

천천히 지용을 따르는

구보의 뒷모습이

낡은 흑백사진처럼

흐려보였다

 

 

 

희망

김규동

 

아직 멀었다

끝까지 가야

 

이 파도 넘으면

보인다 끝이

 

노를 저어라

팔뚝에 힘을 넣자

 

어둠이 깊어야

빛살 찬연하나니.

 

 

 

희망을 위하여

김규동

 

아버지가 들어서자

아들아이는

두 달 전에 입고 나간

그 옷을 걸친 채로

머리를 떨구고 서 있었다

그래 몸은 어떠냐는 애비 말에

아버지 미안해요

하고 나직히 말했다

아이 옆에 섰던 어미가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중얼댔다

어미가 어떻게 해서

등록금 꾸려대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앞장은 왜 섰냐

하고 푸념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아버지는 새삼 저고리를 벗어 걸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했다

낙심 마라 인생은 길다

너희들이 만일 이 나라와

한몸뚱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막막할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부엌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이에게 어서 밥이나 줘요

울긴 왜 울어요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법이지

그러자

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에서는

뭐라고 주절대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의 스산한 울음 소리였다.

 

 

 

BOILER 사건(事件)의 진상(眞狀)

김규동

 

어둠과 BOILER―

뭇 물체(物體)의 형상(形象)을 헤아릴 길 없었음은 암흑(暗黑)했다는 까닭 이외(以外)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들과 인간(人間)과 인간(人間)들 속에서 시인(詩人)은 침전(沈澱)으로 굳어간 육체(肉體)를 BOILER의 어느 경사면(傾斜面)에 누이고 성좌(星座)와의 회화(會話)를 최후(最後)로 사랑하였다.

 

높아가는 고압전선(高壓電線)의 울음소리는 안개 어린 밤의 묘지(墓地)의 인광(燐光)처럼 배주(背柱)에 스며들고,

굶주려 넘어지는 생명(生命)들과 수없는 임종(臨終)의 눈 나리는 새벽.

향락(享樂)의 극치(極致)와 극치(極致)의 마찰(摩擦)에서 일어나는 뿌연 암모니아의 빛깔.

폐문(肺門)이 부은 바다와 하늘과 해쓱해진 산천(山川)과 태양(太陽). 그리고 다가오는 25시(時).

광선(光線)! '모든 운명(運命)의 전말(顚末)을 똑똑히 보라'

기관장(機關長)의 비명(悲鳴)과 그에 따르는 기관사(機關士)들의 아우성.

 

폭발(爆發)!

아-크등(燈)의 밝음 속에 시인(詩人)은 예감(豫感)을 육안(肉眼)으로 체험(體驗)했다.

BOILER엔 오! BOILER엔 모세혈관(毛細血管) 같은 무수한 절망(絶望)의 선(線)이 서려 있었던 것을-

 

죽음과 시체(屍體)의 시체(屍體)들의 시체(屍體)속에 시인(詩人)은 끄슬은 머리와 떨어진 팔다리의 상처(傷處) 그대로를 지니고 쓰러졌을 뿐,

 

태양(太陽)의 음악(音樂)과 바다의 광선(光線)

오! 새로운 바다의 광선(光線)과 태양(太陽)의 음악(音樂)만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始作)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3․1절(三․一節)에 부치는 노래

김규동

 

목메인 만세 소리

땅을 뚫고 터져 나오는 아우성 소리

아! 이 날은 다시 돌아오고,

삼천만 겨레의 흰 행렬(行列)이

거리와 하늘을 가고 있다.

 

얼마나 긴 인내(忍耐)의 세월이었던가.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그려

암흑(暗黑)과 형(刑)틀과 압박을 박차고

독재자의 총칼 앞에

분화처럼 일어서던 민족의 분노(憤怒)가

산하(山河)를 진동(震動)하고,

천추에 못잊을 겨레의 원한(怨恨)이

세기(世紀)의 하늘위에 산화(散華)하던 날―

하늘과 태양(太陽)

산천(山川)과 초목(草木)도

애달픈 슬픔 속에 잠겨 갔어라.

 

의(義)롭고 뜨거운 가슴마다

장미(薔薇) 모양 붉게 피는 선혈(鮮血)의 강(江)―

 

위대(偉大)한 민족의 의지(意志)는

하늘 높이 치솟고,

수천(數千)의 깃발은

독립(獨立)의 탑(塔)에 나부꼈노라.

얼마나 찬란한

민족의 제전(祭典)이었던가.

 

오래인 시간(時間)의 흐름

비록 우리들의 상흔(傷痕)을 스쳐갔다 하여도

꿈에도 잊힐 리 없는

그날의 추억(追憶)은

꺼질 줄 모르는 연정(戀情) 모양

민족의 혈관(血管) 속에 되살아 오거니……

삼월(三月)이여

너의 연가(戀歌) 속에

우리들의 대열(隊列)이 굽이쳐 간다.

 

그러나

아직도 못다 이룬 통일독립(統一獨立)의 여명(黎明)

삼․일(三․一)에 바친

민족의 넋과 기개(氣慨),

또 한번 다시 뭉쳐

금없는 민족의 내일(來日)을 이룩하리니,

 

위대(偉大)한 민족(民族)의 의지(意志)여

삼월(三月)달 샛바람 속에

그대 힘찬 승리(勝利)의 노래를

교향(交響)하여라

 

 

 

3월의 꿈

김규동

 

3월달이라면

해도 30리쯤 길어져서

게으른 여우가

허전한 시장기 느낄 때다

오 함경도의 산

첩첩준봉에

흰 이빨 드러낸 눈더미

아직 찬바람에

코끝이 시린데

끝없이 흐르는 두만강의 숨소리

너무 가깝다

느릅나무 검은 가지 사이로

멀리 바라보이는 개울가

버들꽃 늘어진 눈물겨움,

마른 풀 사르는 냄새 나는

신작로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저분은

누구의 어머님인가

외롭고 어여쁜 걸음걸이

어머님이시여 어머님이시여

햇빛이 희고 정다우니

진달래도 피지 않은 고향 산천에

바람에 날리는 봄이 왔나 봐요

봄이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