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손
김일제
S원(알콜중독자 치료시설)의 L원장은 요즘 무료한 시간이면 사무실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이가 55살을 넘기면서 세상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 너무 허전했다.
남편은 죽은 지 오래고 아이들은 장성했지만 곁에 있지를 않다.
사업을 도와줘야 할 나이가 지났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밖에는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정원에 심은 감나무는 감열매가 탐스럽게 커져 가고 있었고 코스모스도 한두 송이 피더니 요즘은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서 가는 허리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 코스모스 위를 한가하게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도 간간히 눈에 띄는 것이 여간 가을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서 정문 쪽을 바라보니 사무실 입구까지 깔아놓은 자잔한 차돌자갈이 가을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었다.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L원장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깡마른 손을 깍지끼고 허리를 뒤로 제쳤다.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허리가 뒤로 자빠지자 속옷을 입지 않은 듯 허리와 배꼽이 훤히 드러났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L원장은 그런 그가 지겨운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심심하단 말이야....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하고 혼자 한탄하듯이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1층에 자리 잡은 원장실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L원장은 창문을 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도 귀찮은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지나가는 사람이 볼 리가 없었다.
지금 지나가는 환우는 바로 K라는 여자였다.
나이로 보아서는 원장보다 2~3살 어린 여자였지만 빼어난 미모와 학력은 원장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었다.
통통한 몸집이었으나 167cm의 큰키에 알맞게 붙은 살은 나이보다 훨씬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가슴이 커서 뭇 사내 환우나 관리직 남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이쁘게 패인 볼우물은 뭇 남성들의 야릇한 호기심까지 자아내는 그런 매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그런 여인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런 여자가 L원장의 사무실 앞을 지나가니 유독 외로움을 타는 L원장의 눈에 번쩍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L원장은 급히 호출벨을 눌렀다.
금방 여비서 T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원장님 부르셨어요?”
하고 상냥하게 물었다.
L원장은
“그래요. T비서, 저기 지금 지나가는 저 환우를 좀 불러주세요.” 하고 말하면서 향기가 풍부한 블렉커피를 한잔 가져오라고 말했다.
L원장의 부름을 받은 K환우는 원장실을 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장님 저를 부르셨나유?” 하고 말했다.
L원장은 싱그러운 미소를 흘리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L원장의 쑥들어간 눈매가 반짝이고 있었다.
원장은 깡마른 손을 내밀면서 K의 곱고 부드러운 손을 힘있게 쥐었다.
K는 큰 가슴이 드러날까 봐 염려하여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고 원장이 권하는 쇼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누가 보아도 정말 여성다운 몸가짐이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L원장의 친절이 넘치고 자상한 대접에 마음이 한결 풀린 K는 옅은 미소까지 흘리고 있었으며 자상한 원장님의 후의에 감사한다고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록 환우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훤칠한 키에 볼륨 있는 중년 여인 특유의 넉넉함은 정말 한 인간의 정신을 매료시킬만한 것이었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그것은 정말 환상이었다.
특히 가슴이 풍성한 것이 가까이 가는 모든 사람들을 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K는 얼굴은 통통했지만 워낙 출중한 미모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더우기 그녀의 볼우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사람의 호기심과 여운을 남기게 했다.
L원장은 K에게 좋은 커피가 있으니 한잔하자고 하고는 여비서 T를 시켜서 향기로운 커피를 한잔 가져오라고 했다.
물론 자신과 K가 마실 커피를 말이다.
K는 L원장의 친철한 배려에 몸둘 바를 몰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K는 말했다.
“원장님 이렇게 저를 배려해주시고 보살펴주시니 여간 고맙지 않아요....죽어도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L원장은 “그런 것을 고맙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유.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런 것인데 무엇을 고맙다고 하신다는 말입니까.”하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 우리 환우들을 상담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인데유....뭘...”하고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이내 L원장의 T비서는 따끈한 커피를 2잔 가져왔다.
금빛 테두리가 반짝 반짝 빛나는 커피 잔에 커피잔에 담겨진 검은색 커피는 유난하게 정갈하고 맛깔나게 보였다.
T비서가 두 사람 앞에 두고 가는 찻잔에는 진한 커피향이 온방을 진동하게 했으며 그 커피향으로 인해서 정신이 아찔할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L원장은 갸날픈 손을 떨면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말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거기도 한잔 맛있게 드세요. 커피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내가 지난해 겨울에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아주 분위기 있는 커피집에서 맛을 보고 종업원에게 물어서 현지에서 주문한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L원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당신도 이 커피맛을 보면 아마도 미치도록 이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L원장의 권유로 K는 커피를 한입 마셨더니 진한 커피항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고 그 맛과 향을 음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K가 흐뭇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L원장은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L원장은 K를 자기 맞은편 자리에서 자기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라고 했다. 머뭇거리던 K는 용기를 내서 L원장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고 L원장은 K를 고즈넉하게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어쩌다가 이곳 알콜중독자 치료시설인 이곳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K는 말했다.
“참 원장님도 제가 그런 이야기라면 벌써 10번도 더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하자 L원장은 그래도 이왕 물은 것이니 한 번 더 이야기하자.”라고 했다.
K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커피는 바닥을 드러냈고 한껏 호기심이 발동한 L원장은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지난 시간을 음미하면서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L원장은 지금은 알콜중독자 수용시설의 원장으로 있지만 그녀는 불우했다.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나 친척 등 피붙이라고는 없이 자랐다.
그러던 그녀에게는 인생의 반전 기회가 소리 없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그녀가 꽃다운 나이 19살이 되던 해였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가 이제는 그 시설에서 보모로 새로운 직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보호받는 처지에서 보호해주는 처지로 바뀐 것이었다.
워낙 인물이 없고 배운 것이 없는 그녀였지만 뭇남자들에게 헤픈 웃음을 잘 흘리던 그녀는 고아원의 여자원장의 아들의 눈에 띈 것이었다.
제눈에 안경이라고 홀어머니 원장 밑에서 자란 원장아들은 J는 군대를 제대한 25살의 청년이었는데 그 나이에는 절구통이라도 안고 자빠질 나이인데다가 엄격하고 억새기로 소문난 어머니 밑에서 정을 느끼지 못하던 그 남자 J는 지금의 원장인 L에게 사랑과 정을 느끼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을 했고 곧이어서 딸 하나를 낳았다.
그때 낳은 딸이 지금 26살인 H인 것이다. L은 고아에서 고아원 보모로 다시 고아원 원장의 며느리로 급격하게 신분 상승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워낙 남자를 좋아하고 헤픈 여자였던 그녀는 같은 직장의 다른 남자 직원과 바람을 피웠고 남편인 여자원장의 아들은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다.
남편이 40대 중반에 세상을 뜨고 나니 참으로 난감한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딸은 아직도 1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힘든 시기였지만 어머니와는 달리 정숙하고 공부도 잘하고 인정도 많아서 어엿한 숙녀로 잘 자라 주었다.
그러는 세월 속에 시어머니는 고아원시설 운영을 중단하고 그 대신 알콜중독자 시설로 바꿔서 사업을 늘려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알콜중독자 수백 명을 수용하는 훌륭한 시설과 아름다운 환경을 보유한 국내 유수한 복지사업을 하는 지금의 S원이 되었던 것이고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운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S원의 원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지난 과거지사를 반추하던 L원장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서 정색을 하고 K의 손을 잡았다.
“이봐요. 다시 한번 지난 당신의 이야기를 마저 다 이야기해보란말이유...”하고 L원장은 말했다.
L원장의 조그맣고 까만 눈이 빛났다.
원장이 그 눈을 빛낼 때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힘 좋고 멋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L원장의 눈이 빛났다.
남자도 아닌 여자를 보고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예상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L원장은 늘 그 육감적이고 늘씬한 미모의 K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L원장 자신 외에는 T비서도 다른 환우들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K에게서 풍기는 강하고 진한 여자 냄새를 L원장은 혼자 조용히 느끼고 음미하고 미소 짓고 있었던 셈이었다.
L원장은 그 까만 눈을 반짝이면서 K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K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지방의 대도시 B시의 B여고를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이 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가는 서울대학교 법대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판사나 변호사로 일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완고한 부친은 여자가 남자들하고 같이 다니는 학교를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법을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남편을 잘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문학이나 가정학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래서 여자들만 가는 E대학을 갔고 전공도 도서관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졸업 후에 K가 취직한 곳은
주한 미국대사관이었고 거기서 그녀는 문정관을 만났다.
거기다가 그 남자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흑인이었다. 미국의 엘리트가 다니는 동부의 좋은 대학을 다녔지만 완고한 아버지가 결혼을 승낙할 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둘 사이에는 딸을 한 명 두게 되었고 마음이 돌아선 흑인 남자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소식이 없었다.
여자는 상심하여 술을 마시게 되었고 직장인 미국 대사관을 그만두고 나중에는 식당 종업원 청소부를 거치면서 와중에 폐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60대 남자를 만나서 동거도 했고 절망한 K는 술을 마시는 습관이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알콜중독자가 되어서 지금 이곳 알콜중독자 시설에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K는 L원장에게 독백하듯이 말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인 것 같아유. 남자를 만나는 것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니 말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삼종지도도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거서는 신랑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는 것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지금까지 10번도 더 들었던 K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있던 L원장은 잠시 깜빡 졸고 있었다.
K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기척에 놀란 L원장은 반짝이는 까만 눈을 깜빡이면서 저녁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자갈길을 바라보면서 L원장의 떨리는 손은 K환우의 풍만하고 큰 가슴을 슬며시 거미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거미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