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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나 가슴에

가스나 가슴에

이국헌

 

가을비 쓸쓸하게 내린다.

부산 구포나루 밴취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언 듯 스치는 말쑥한 가스나가 쓸쓸히 비를 맞고 있었다.

강물에 뛰어 들려는 자세 같은 그런 기분을 느낀 동팔이가 자리에서 대뜸 일어나 달려갔다.

" 아가씨! 그러시면 아니 되지 ... , 내사 마, 다 시상 다 그런 게 아닌 기라. 쫌에만 차무이시소 "

"비 비 비도 오고 해서 우리 수수 술 한잔 하입시더. 그랍시더 우짤라요 아가씨?"

동팔이의 구사일생 작전이 당차고 황당했던지라 아가씨가 넋을 잠시 잃어버렸다가 말문이 숨통 터지듯 동팔이에게 화살이 꽂힌다.

" 이게 무쉰 소 소 소립니껴"

"자 자 자살이라뇨 이 양반이 미쳐빕나 마 시상 별 미친 놈 다 보네 끼네"

"이 양반아 나 알아?"

동팔이가 받아친다.

"보면 뭘러?"

"죽을라고 했잖아!"

"뭐여 이 양반이 헛소리하고 있구만."

가스나는 휭하니 발길을 돌렸다.

사실 자살하려고 하려다 들킨 눈치를 빼느라 총총걸음으로 내리치는 빗속을 가르며 달아났다.

동팔이가 그녈 놓치지 않았다. 뒤따르는 동팔이의 걸음걸이가 깡충거려 보였다. 하긴, 동팔이는 혼기 놓친 놈이라 처녀의 목숨 구하려다 되레 욕먹은 것이다. 은근히 화가 났다. 달아나는 그녈 내버려 둘 심사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의 몸을 건져 올릴 사람은 동팔이 뿐이었다. 현장 목격자가 동팔이 혼자이기에 순간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건져 낼 그가 아닌가 말이다. 이래도 죽을 목숨 저래도 죽을 목숨 이미 당겨진 시나위의 화살이 아닌가 말이다. 동팔이는 열심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구포역 방향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그녀가 육교를 오르는 사이 동팔이의 손아귀에서 그녀의 팔목이 잡혀 들었다.

"보이소 마! 그게 그런 것이 아인게 마 지 좀 보이소. 쪼게만 야기나 하입시더 야?"

동팔이는 사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자살이란 사연을 들어 볼 생각이었다. 죽은 자의 소원도 있었을 게고 산 자의 소원과 한이 있다면 혹이나 했다.

그녀는 동팔이의 손목을 확 뿌리치면서 일말의 대꾸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는 역 앞으로 단숨에 달아나 버렸다. 동팔이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동팔이는 몸을 가누며 뒤를 밟았다. 가을비가 차츰 굵어졌다. 길가의 아스팔트 위에서 빗물이 퉁겨 올랐다.

그녀는 역 대합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 봤다. 고개를 빼 들고 사람들 틈으로 동팔이를 봤으나 동팔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역 앞에는 즐비하게 사람들이 혼잡했다. 사람들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때,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 숲에서 동팔이의 얼굴이 가려졌다 나타난다.

그녀는 서울로 가는 무궁화 열차 시간표를 보더니 매표소 쪽으로다가 간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어느새 동팔이가 그녀의 세 번째 뒤에서 줄을 서 있었다. 이왕 치사 어디든지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가슴도 두근거렸지만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질 않았다. 그녀는 무궁화 열차 입석표를 사 들고 서울행 개표소에서 기다렸다. 15시 정각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차례대로 나아갔다. 동팔이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가을비가 철로에 차갑게 뜅겨 올랐다. 어디선가 날아왔는지 비둘기 한 쌍이 레일 위에 내려 앉았다가 기적 소리에 놀라 날아갔다. 흠뻑 젖은 기차는 숨을 고르듯이 승강장에 멈추었다. 기차의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내리고 뒤이어 승객들이 기차에 올랐다. 그녀는 4호 차량 안으로 들어갔다. 5호 차량 앞문에서 기웃거리는 동팔이의 눈빛이 빛나 보였다. 그녀가 4호 차량 끝줄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잖게 통로를 따라 한발 다가갔다. 무궁화 열차가 서서히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창문 가 사물들이 스쳐 지나고 있는 사이에 동팔이는 아무 말 없이 사람들 틈에 물끄러미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가을비가 점점 더 뿌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흩뿌려 치면서 흘러내리는 가운데 그녀의 모습이 유리창 앞에 언뜻 보였다. 자신의 모습도 반사되여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틈 사이로 역무원이 지나가고 뒤이어 커피를 파는 직원이 조그만 수레를 끌고 지나친다. 틈 사이를 용케도 빠져나가는 사이에 그녀와 간격이 좁혀졌다. 동팔이는 이제 그녀와 나란히 서 있게 되였다. 약간은 두근거렸다. 만일에 그녀가 고함이라도 친다면 망신거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것을 이미 알 만도 한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차 안은 정숙했다. 아무 말 없이 상념에 빠진 듯한 그녀를 조심스럽게 훔쳐보면서 때로는 가끔 헛기침을 해 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미동도 하질 않은 채 차창에 내려치는 빗방울만 바라만 보았다.

순간 그녀가 차창에 반사 되여 나오는 동팔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눈빛이 날리면서 동팔이의 옆을 바라보았다. 미행을 한 것을 알았다면 동팔이는 창피를 당할지도 모른다. 동팔이는 고개를 우측으로 돌렸다. 그녀가 혹 알아차렸는지도 모를지언정 묵묵히 서 있는 동팔이는 가슴이 아직도 두근거렸다. 기차 바퀴가 철로의 연결 부분을 지날 때마다 덜커덕 덜커덕 가슴 튀는 소리를 내었다. 괜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짝의 옷이 땀에 젖었다. 이마에도 땀이 흐른다. 기차가 가끔 흔들릴 때, 그런 가운데 때로는 흔들리는 차량 속에서 그녀의 어깨가 동팔이의 가슴에 닿았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팔은 미행하는 불안감을 조금씩 떨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태연한 자세로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 크질 않은 키에 알맞은 몸맵시이었을까? 긴 머리의 그녀는 곱게 열린 한 떨기 꽃이었다. 가끔씩 그녀의 향기가 동팔이의 가슴속에 빨려들었다. 그럴 적마다 동팔이는 먼 기억 속에 젖어 들곤 했다.

가을 기차 여행 속에서 그녀는 무슨 일로 서울행 열차를 탔을까? 동팔이는 물끄러미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중도에서 내릴까 아니면 청도를 지나 외간까지 가는 걸까. 그대로 서서 서울까지 가는 것일까. 동팔이는 그녀의 행적에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다.

혹이나 말이지 이 여자가 과연 어디까지 가는 걸까?

그러다가 혹시 몇 시간 전인 구포 강나루에서처럼 죽음을 깨닫고 몸을 날려 기차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건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동문이기 때문에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가짐이 유리창 앞에 반사되여 나오는 모습에서는 침착해 보였다. 차분한 몸가짐이였다.

밀양역에서 기차가 멈춰 섰다. 승객들이 다시금 촉촉한 어깨를 누비고 들어온다. 동팔이와 그녀의 사이가 느슨해진 틈이 밀착되었다. 그녀와의 사이를 좀처럼 떨어트릴 여유가 없는 행동반경이였다. 밀착되어 가는 기차 속에서 오늘따라 승객들이 빠듯했다. 기차 속의 온기가 차올랐다. 유리창에 물기가 흘러내리고 유리창 밖은 소낙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시금 기차가 밀려 나갔다. 안내 방송이 끝나고 부산해 보이는 차량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연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좋은 감정이라면 흠칫 미소도 지여 보였다. 동팔이는 그렇게 되길 바라는 눈치였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면 더더욱 좋았겠지. 더더욱이 앞자리의 할머니는 가끔씩 동팔이는 올려다보곤 했다가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도 가끔씩 보내주었다. 동팔은 미소를 머금는 듯 호시탐탐 옆눈질로 때로는 유리창을 빗대어 보기를 탐정 요원 같이 행동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가끔 고갤 돌리며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만지곤 했다. 보통은 소설을 읽는 모습이던지 아니면 시집 정도는 서서 볼 수 있는 여유를 보이는데 그녀는 참하게 서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앞자리의 신사는 그녀의 몸이 어깨에 와 닫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신사의 어깨를 건든다는 느낌을 주었는지 몸을 바로 잡는다. 동팔이가 그 신사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이들도 역시나 지금의 여자와 자기 사이에 연인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동팔이의 생각일 뿐 사실은 누구나 낯선 사람과 자리를 함께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몸을 잠시 풀었다가 다시 곧추 잡아 다리가 절였을까 끝자리 손받이에서 살짝 기대여 앉았다. 다리에 힘이 떨어진 듯 그녀는 다시 한쪽 다리를 주무른다. 앞자리의 신사는 허락해 주었다. 그 신사 어깨에 살짝 걸친 등이 좋았던지 신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그의 아내도 긴 여행을 위해서일까 전부터 눈을 감고 자는 듯 보였다.

그 사이에 동팔이는 이제야 그녀와의 얼굴이 마주치게 되여 있는 상황이었다. 순간 얼굴이 서로 올려다보이며 내려다보이는 모습이 되버렸다. 동팔이는 얼굴빛이 붉어져 버렸다. 달아오른 부끄럼일까 아니면 들 꼈다는 부끄럼일까 하는 사이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빛만 깜박일 뿐 처음 본 남자일 거라는 눈치였다. 그녀는 아직도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 마디 나누었던 사이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흘기며 내게 퍼부었던 소리까지 기억해야 할 그녀가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금 동팔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다음에 그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도 가끔씩 한 번쯤은 올려다보았다. 눈이 크고 휜 자위가 많아 보이는 그녀, 갈색 머리에 목선이 긴 여자, 이 여자의 나이는 얼추 시집가기 전인 나이, 그런 나이의 여자를 동팔은 무엇엔가 홀리고 있었다. 동팔이와 같은 나이라 싶은 듯, 그럴 때마다 처음 본 남자라고만 생각했는지 기별이 없는 여자, 아니면 그녀는 체념이라도 했는지 모를 눈치의 여자였다. 하기사 열차 속에서 동팔이의 얼굴을 알아차리고 혹이나 소리를 지른다면 무슨 창피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인 게다. 그래서 그녀는 한 수 높은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팔이의 의구심이 갈수록 깊어졌다.

기차가 옆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자 흔들림이 있었다. 몸이 쏠리면서 그녀의 걸터앉은 몸의 중심이 동팔이의 앞으로 쏠렸다. 그러다가 동팔이의 구두를 살짝 밟았다 놓았다. 동팔이는 끔찔했지만 그녀는 미안하다 눈치일 뿐 입가에 잔 미소만 스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기차가 오른쪽으로 쓸리자 이번엔 동팔이가 그녀의 어깨를 밀어 댔다. 그녀는 동팔이에게 오히려 미안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깜직한 모습이 입가에 띠였다. 카만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그리고 살짝 혀를 내밀었다. 동팔이는 그녀의 미소에 잠시 섬뜩한 순간을 기억해낸다. 깜직한 미소의 그녀는 동팔이가 그렇게 찾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팔은 아닐 것이라고 체념한다. 그러나 동팔의 마음은 생각과 달랐다.

그녀의 자리에서 스치는 지나가는 홍익 요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따듯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한잔을 거머쥐고 한 잔은 그녈 위해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양하는 눈치였으나 멈칫거리다가 커피잔을 받았다. 그리고는 눈인사를 주었다. 종이컵에 와 닫는 온기가 더더욱 좋아 보였다. 그 순간부터 서로의 이해 감정이 커피 한잔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눈인사를 주었다. 전혀 알아보질 않는 눈치를 깨달은 동팔이 가슴은 더더욱 뛰었다. 커피 맛이 달아나고 뜨겁던 커피 맛이 식어 갈 즈음 동팔이는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내리십니꺼?"

그녀는 동팔이 얼굴을 보면서

"서우울 예~"

동팔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다시 물었다.

"서울? , 지도 서울 가는 길입니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해 주었다

", 네에 그러십니꺼"

동팔이의 물음에 간략히 대답해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고였다. 전혀 몰라보는 그녀의 가시적인 행동에 동팔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마에 땀이 솟아 있었다. 창밖이 점점 어두웠다. 그리고는 소낙비 더더욱 내리는 것 같았다. 때론 천둥이 치고 번개 빛이 번쩍거렸다. 가슴이 담담했던지 그녀는 손받이 끝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서야 신사의 어깨가 풀렸다. 동팔이도 순간 의심을 갖고 뒤를 따랐다. 동팔이는 그녀가 막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차량 밖의 소음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기차 레일에서 부서져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열차의 연결 부분 밑에서 새어 나왔다. 비릿한 냄새가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찬바람이 새들어오는 화장실 주변과 차량 문이 덜커덩거렸다. 그 속에서도 입석인 듯한 사람들이 서너 분 있었다. 가끔 담배를 피워 물다 버린 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꽁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긴 머릴 다듬어 올렸다. 동팔이는 말문을 열었다.

"피곤하지 안습니꺼."

"아입니더"

"헌데 아저씬 어데간다구 했습니꺼?"

"??"

"서울가는가베"

"지두 서울 갑니다."

"아이구야 마, 비도 오구 해서 서울 가서 볼 거두 있고 경복궁엘 가렵니다....."

말끝을 늘리고 있었다. 그녀는 경복궁이란 말에 꼬리 질문을 던진다.

"경복궁이라 했습니꺼"

"네에"

"그럽니꺼"

"지두 경복궁엘 가려고 했습니더"

그러더니 그녀는 함박웃음을 보였다.

"우째 경복궁을 가십니꺼 아가씨는요?"

"그냥요?"

동팔이가 짧은 꼬리로 말을 잡는다.

"으잉, 그냥요?"

"그냥요?"

"하하하"

둘이서 그만 웃어 버렸다.

가을비가 기차 뒤문 칸에 새들었다가 다시 돌아 나간다. 차가웠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뒤로 나가떨어지는 빗방울 빛과 도심의 풍경들이 숨 가쁘게 밀려 나갔다. 때로는 터널에 빨려 들어갔다가 한 참 만에 나올 때는 먼 기억을 훔쳐와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그들은 멀둥멀둥 차량 천장을 바라만 보았다

동팔이는 기차 천장을 보다가 문득 출입문 쪽에서 새들어오는 바람결에 몸부림치는 신문지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주워 들고 두 장을 펼쳤다. 그녀도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신문지를 펼 처서 깔고 앉았다. 약간은 젖은 듯한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그녀는 체면을 무시하고서 편한 자세 나란히 앉았다. 우연치고는 이상한 인연일까. 둘이는 다정한 자세로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말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 순간에 다시금 커피 판매 직원이 출입문을 열고 나왔다. 동팔이는 커피를 또다시 두 잔을 사들었다. 그녀는 동팔이가 건네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동팔이의 이름을 물어 왔다.

"김동팔입니다."

동팔이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도 곧바로 자기 소개를 했었다.

"김지숙 입니다."

동팔이는 이런 사유로 만나서 매우 반갑다고 말문을 연 다음 그녀의 이름자 하나만 귀담고서는 그녀에게 차분히 접근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

우선은 그가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이야기 대상에서 조심을 하기로 했다. 여기서 동팔이는 묘한 발동이 걸렸다. 느닷없는 작가의 발동이 걸린 동팔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 하나를 우스개 소리로 들려주었다.

"옛날에 시골의 가난한 아들 부자가 살었는데 그 아들은 성장하여 농촌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진 아들에게 서울에서는 열심히 둥글어야 잘 산다고 했답니다."

이야기를 조금 끌어 그녀에게 넌지시 조크를 주었다.

"한번 뒹굴어 보시면 ...하하하"

그때서야 그녀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호호 웃어 주었다. 실마리 하나를 푼 동팔이는 웃음이 끈기지 않기 위해서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옛이야기 중 사실인 것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 사귀던 한 여자를 못 잊어 한다는 이야기이었다. 아마도 그녀와 같은 모습의 여자라고 언뜻 말해주었다.

기차는 이제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가을비가 멈춘 것 같았다. 비에 젖은 사람들과 비에 젖어 있는 주변 사물들이 촉촉해 보였다. 이야기를 하던 중 손님들이 동대구역에 내리려고 미리서 나와 출입문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신문지를 들고서 화장실 쪽 세면대쪽으로 자릴 옮겼다. 거기에는 걸터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고 다시금 올라타고 있었다. 승객들이 그들의 모습을 흘기면서 각자의 자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시금 기차의 요동이 덜커덩거리고 점점 미끌리면서 줄기차게 내리던 가을비도 잠시 멈췄다가 다시금 내리는 것 같았다.

동팔이는 기억을 살려 계속 기차의 속도만큼이나 보조를 맞추면서 자신의 이야길 해주었다. 그리고 동팔이의 별명을 말해주었다. 동팔찌라고 말이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한번 웃더니 이런 거 아닌가요 했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옥팔찌를 문득 보고서는 놀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동팔찌가 어쩌면 그 옛날 그 동팔찌와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 느꼈다.

사실 동팔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인 그해에 그 사귀던 여자도 그 팔찌로 인해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치 소설 같기도 한 지금의 장면이 어쩌면 툭 붉어져 나올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동팔이가 다시금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저는 인사동 골동품 점포에서 그 동팔찌를 훔친 절도범이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팔찌는 운명적으로 천생연분을 맺어 준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탐이 났습니다. 믿어지질 않겠지만 나는 그것을 훔쳐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이였죠. 그 인사동의 골동품 점포들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돌아다녔습니다. 주위의 환경을 탐색하고 몰래 들어가 동팔찌를 훔쳐 나왔지요. 그러나 그만 내 얼굴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놀랬습니다. 나는 이 골동품의 주인이 내가 사귀는 여자의 아버지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점포인 줄도 몰랐던 겁니다. 다만 그런 천생연분이 있다는 동팔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 그녀가 그런 물건이 있다는 말은 들었던 겁니다. 소문을 해 본 결과 인사동에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그것을 수중에 넣으려면 많은 액수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부르는 것이 돈일 수밖에 없는 거품 적인 것에 비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행운의 동팔찌를 내 수중에 넣기만 한다면 나는 나의 소원을 이룰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그다음 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의 선물로 훔쳐 온 동팔찌를 선물하려 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절도범으로 인상착의가 포착된 감시 카메라에 내 얼굴이 정확히 나왔던 겁니다. 그리고 사건 발단에 이르러 형사 고발까지 준비됐던 겁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의 집에 전화를 한 겁니다. 나의 위치가 드러나고 시간까지 노출되여 있었습니다. 선량한 절도범일까요?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지요. 아마 죄가 되는 줄 알면서도 범했던 나의 한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설마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동팔찌 하나에 운명을 건 절도범이 된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얼마나 실망을 할까 이었습니다. 허나 그녀가 흔쾌히 나와 준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만일 내가 절도범이라도 만나 줄 그런 여자이었습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곧바로 거실을 나가는 순간에 그는 그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었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놈을 지금 당장 잡아 처넣겠다는 엄한 소리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때 기절을 할 뻔했다 합니다. 하긴 그때 기절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 들었습니다. 그녀는 외부 출입을 근절 당하고 건장한 형사 두 분이 문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오해의 소지에서 들은 것이지만요. 나는 약속 시간이 다 된 그 사거리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호 대기에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한 여자가 긴 머리를 날리면서 뛰어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빨간 신호등이였는대도 그 여잔 막무가내로 차도로 뛰어나왔던 겁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를 알게 되었지요. 그녀가 전해 주는 한마디이었습니다. 싸늘하면서도 기억에 각인되는 외마디이었습니다. "동팔찌 도망가!" 멀리서 들였을 때의 소리이었지요. 동팔씨 도망가란 소리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보고 놀랬습니다. 형사들이 그녀의 뒤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뛰어 달렸던 겁니다.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사실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한 체포조였지요. 사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절도범이 이었나 봅니다. 절도범 하나를 잡기 위한 필사의 질주와 절도범인 애인을 필사적으로 도피시키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 속에서 모든 순간은 뒤범벅이 되였습니다.

시간은 여기서 멈춘 것 같았습니다. 영화의 슬로비디오 장면 같은 사실이 눈에 펼쳐졌습니다. 그들과 그녀의 차이는 간발의 차이 이었을까요. 신호를 무시한 그녀는 대형 트럭에 나가떨어지는 순간 나는 허공에 몸을 날렸습니다. 차량의 급제동을 밟는 파열음이 찢어지게 들렸습니다. 그 이후로의 기억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안 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끝인가 싶었고 그녀와 함께 저세상에서 못다 한 사랑을 이어가기를 염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이였으니까요..하지만 저는 기억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하려고 님을 만난는지 모르겠군요. 허허"

동팔이는 씁씁한 채 이야기를 털어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녀가 담배 연기에 콜록거리자 곧바로 비벼 껐다. 그녀가 입가에 손을 갖다 대면서 슬픈 이야기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겠노라 속삭여 주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아직도 커피가 남아 있었었다. 마저 한 입술 적신 후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사연을 투옥 털어 낸다. 그녀는 종이 커피 잔을 세면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동팔찌를 어루만지면서 동팔에게 말을 했다.

"아까 전에 이야기한 뒹굴어 볼래요 했지요..나도 한번은 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차도에 뛰어들어 나뒹굴어지는 꿈속을 지금도 꾸고 있습니다. 어쩌면 악몽일까 하기도 합니다. 제 이름은 김지숙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을 기억하는 건 오래지 않아요.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이죠. 금방 알아본 사람도 잠시면 잊어버리는 건망 증세가 있습니다. 건망증이라고 해야 하지요. 더 말한다면 기억 상실과 흡사합니다. 제가 그랬다고 하더군요. 부산이 집이 아닙니다. 간혹 부산말을 사용하는 것은 부산말이 좋았기 때문이죠. 글쎄요, 외할머니의 따뜻함 때문이죠. 부산에서 산 것은 제가 사고를 당한 날 일 년 전에 이곳 외할머니 집에 왔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육 년 살았습니다. 비만 오면 외로워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가을이면 더욱 그렇고요. 아니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아직도 집에서는 사람들을 몰래 동원해서 저의 안전을 지켜본답니다. 글쎄요, 보디가드라나 ...참 그러군요. 해서 저는 기차를 버스를 타고 막무가내 돌아다닙니다. 그들이 따라다니든지 말던지 상관치 않습니다. 그게 제게는 좋은지 안 좋은지는 모릅니다. , 기억을 찾아내기 위해서 아니면 기억을 버리기 위해서, 때론, 갈피를 못 잡기 때문에 기억을 잡으러 다니죠. 나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친구들 모두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때로는 졸업 사진이나 내 애인의 사진을 보와도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왜 내가 그들과 사진을 찍었으며 그곳에 갔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동팔씨가 구포나루에서 제게 한 말은 기억납니다. 자살을 할까 했지요. 그런 생각을 하려던 중 깜짝 놀랬습니다. 나의 은연중 자살 행각은 늘 엉뚱한 비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동팔찌라는 분의 얼굴을 곧바로 잊어버렸습니다. 놀라운 기억력이죠. 호호 그러나 무엇인가 님의 말투와 호소력이 제게 다가왔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동팔씨가 제게 접근하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었지요. 물론 첫인상에 님은 강도나 추잡스런 사람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갖었던 것이지요. 동팔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도 그런 과거가 자꾸 떠올려집니다. 나뒹군다는 이야기하며 어째서 그리고 지금도 제가 이렇게 소지하고 다니는 동팔찌를 왜 갖고 다닐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해결을 위한 방편은 하나도 풀리질 않았습니다. 허나 동팔씨가 말한 바와 같이 저도 그 무엇인가에 사연이 있다고 점쳐 봅니다. 제가 병원에 당도했을 때 이미 가망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허나 질긴 목숨이였나 봅니다. 제가 그랬다 합니다. 미친년처럼 신호등을 무시하고서 막 달려 나갔다고만 들었습니다. 왜 달려 나갔냐는 것은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진 안 했습니다."

동팔이가 말을 가로막는다.

"그쪽도 저와 흡사하군요. 허허"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죽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도 나와 같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답니다. 이것은 제 외할머니가 가끔씩 생각나면 들려주던 이야기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동팔찌에 대해서 옛이야기를 해 주셨던 겁니다. 그 이야기는 동팔씨도 들으면 운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 이야기는 외할머니의 18번 레퍼토리이었으니까요. 술 한잔 들어가면 라구요 노래를 자주 들으시고요. 더 한잔 들어가면 동팔찌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하나를 털어 내곤 한답니다. 그러나 동팔찌가 행운도 찾아 준다는 겁니다. 잊었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 주기도 하구 그런다는 이야기이었죠. 저는 그래서 늘 동팔찌를 소지하고 다닙니다. 언제 어디서 기억이란 싹이 난다면 나는 그 길로 날아갈 참입니다. 나의 기억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말입니다."

동팔이가 다시금 이야기를 보챈다.

"그 기억의 존재는 덕수궁이 이었죠? 아마..."

그녀는 팔찌를 한번 휘익 돌리더니 다시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잘 모릅니다. 서울이 고향이지만 난 그 교통사고를 당한 후 서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벌써 칠 년이 넘었군요. 호호 왜 서울을 떠나야 했는지 왜 부산으로 가야 했는지는 부모님들 때문이 이었지요. 저는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다가 이젠 조금씩 떠오릅니다. 그들이 제 부모님이구나 라고만 느낄 뿐 막연한 사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칠 년이라면 생각하면 짧다고 생각하겠지요. 이제 제 나이 스물일곱이 되었으니까...... 나와 헤어진 그분도 아마 저 보다 다섯 살이 많으니까 ..."

그러면서 그녀는 손가락을 세어보려 했다 엄지손가락을 구부렸다. 구부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부려 들지 않는다. 상처로 꿔 메진 탓일까 손이 고운데 라며 동팔은 눈여겨 보았다.

"서른둘이 되였겠네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동팔이의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였다. 왜냐하면 돌팔이의 나이와 같기 때문이다. 동팔이는 그 남자가 이 여자의 가슴에 못을 박아 놓고 사라진 못된 남자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존재의 남자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동팔이로서는 황당한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사실 자신의 이야기도 같으면서 그런 기억이 없는 자기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사고의 순간과 흡사하고 자신과 같은 이름의 동팔찌를 갖고 있는 이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한 이 여자는 사뭇 뭇 남자와 함께 그렇게 가까운 것 같은 친근감으로 연인들처럼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동팔이는 더더욱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느덧, 8시가 되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려면 이제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이 여자는 지금 무작정 상경하는 기억을 찾는 사냥꾼일 것이고 동팔이는 기억의 늪에서 덫을 뿌리는 자세가 아닌가 말이다. 경복궁을 기억하고 덕수궁을 기억하는 건만이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일 것인데 오늘은 그가 마포 강나루에서 취한 밤 그렇게 불러 보는 것이었다.

어느덧 긴 여행에서 서울역에 당도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승객들이 하나둘씩 출입문 쪽으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지숙과 동팔이도 준비를 했다. 긴 여행에서 지친 듯한 표정이 지숙이 눈가에 쏠렸다. 동팔이는 자숙에게 어딜 가고 싶냐고 말을 건넸다. 기억을 찾아 나서기는 늦은 밤이 인데 어디서 좀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 말을 건넸다. 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서울역에서 빠져나온 서울의 거리는 어지러웠다. 얼마 만인가 싶은 지숙의 서울 상경은 우연한 일이기도 하겠다. 동팔이가 살던 곳은 해방촌 산동네이었고 그리고 지숙이 살던 곳은 인사동 골동품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해방촌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남산이 보인다. 그 남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렸던 동팔이기에 지숙을 대리고 남산엘 가자고 했다. 동팔이가 남산엘 가자는 것도 기억을 더듬기 위함이였다. 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사동 골목길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지숙이 남산엘 가보자고 했다. 그러다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덕수궁이 좋은 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밤에 덕수궁을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아도 좋다는 지숙의 말이 이었다. 덕수궁에 관한 지숙의 뇌리가 지남철 같았다. 경복궁을 잠시 잊어버린 지숙의 잔존하는 뇌리는 사실 경복궁보다는 덕수궁에 더 친근감이 숨어 있었다. 동팔이가 경복궁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덕수궁에 대한 집착력이 강했었다. 예전에 동팔이와 그녀인 지숙과 소원을 빌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수도 없이 돌지 안 했던가. 하지만 그들은 이 기억에서 근접 할 수 있는 기회가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서울역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거리를 그들은 걸어갔다. 마치 옛 연인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덕수궁 뒤편으로 자리하고 있는 포장마차를 연상해 냈다. 동판의 옛 애인과 늘 즐겨 찾던 포장마차가 그리웠던 것일까. 은연중 기억이 났던 게다. 남대문을 돌아서 시청 쪽으로 향했다. 뾰쪽한 철탑이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일까 기억도 없다. 쥐도 새도 날아간 역사의 흔적에서 감추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동팔의 기억과 지숙의 기억에서는 그 뾰쪽한 철탑이 기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였으면 하는 은연중 마음이 이었다.

발길이 덕수궁 정면에 와닿았다. 그러나 지숙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말문을 연다.

"언젠가 많이 와본 곳 ..."

말꼬리가 또다시 사라진다.

"저도 많이 와 본 곳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떨 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많이 와 보았던 곳 언제이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자신감이 있고 친근감이 드는 그 어떤 거리의 모습과 풍경을 만나게 된다. 사실 그들의 기억이야 없겠지만 이곳은 그들의 데이트 장소이었다. 또한 돌담길을 걸을 때 동팔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지숙이였다. 자신의 아버지 점포를 숨기고서 어느 집에 가면 그 동팔찌가 있다고 말한 지숙이였다. 동팔찌가 소원을 이뤄준다고 했던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 없는 지숙인 게다. 그가 동팔찌에 관한 이야기만 없었다면 이렇게 불행한 시간을 그들이 보내고 있겠는가 말이다.

사실 그가 동팔이가 절도범이란 소리에 기절이라도 했다면 운명적 사고는 당하질 않았겠는가

지숙의 마음이 점점 동팔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사람. 스치는 바람결에 미소가 그녀의 가슴에 와닿아 불을 지펴 줄 것 같은 훈훈한 남자의 손길이 고아 보인 이 남자가 만일 그녀가 찾는 사람이였으면 간절했다. 자신의 불구를 숨겨주고 자신의 상처를 얼싸안아 줄 수 있는 이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지숙은 동팔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 동팔찌가 소원을 이뤄준다고 했던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 없는 지숙인 게다. 그가 동팔찌에 관한 이야기만 없었다면 이렇게 불행한 시간을 그들이 보내고 있겠는가 말이다.

지숙이 사늘한 추위를 느꼈다. 서울 거리가 가을비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동팔이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러자 지숙이 다시금 콜록거렸다. 그때 동팔이 언뜻 스치는 기억이 순간 왔다가 사라졌다. 그 애인이 그랬던 것 같았다. 그녀가 아팠던 시절이 있었다. 천식성 알레르기이었을 때 담배 연기만 맡아도 기침이 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그를 얼핏 기억해냈었다. 그리고는 담배꽁초를 비벼 끄곤 했었다. 지숙이 기차 안에서 담배꽁초를 본 순간도 아마 그의 뇌리에서 늘 비벼 끈 꽁초가 잔존해 있었을까. 그랬다면 보잘것없는 담배꽁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가끔씩 지숙은 생각해 내곤 했었다. 지숙에게 때론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던 그가 골똘히 생각 중일 때 습관적으로 머리끝을 비비 꼬는 그런 남자가 지숙의 애인이 아닐까 하고 기억을 붙잡고 늘어지다 잠들곤 했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콜록거리다가 발견한 미세한 실마리는 습관 하나에서 실마리가 풀려 지고 있었다.

동팔은 어느새 포장마차에 당도했다. 서로가 적적해서 이었을까 어항 속에서 산낙지가 꿈들 거리고 있었다. 동팔은 그것을 주문했다. 인심 좋은 할머니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이곳에서 십 년이 넘게 장사를 해온 베태랑이신 할머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일까? 그 할머니가 그들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놀라움에 반가움이 달아나기도 했다. 할머니는 안경을 지그시 땠다가 다시 고쳐 쓰시고서는 얼마 만이냐고 대뜸 큰소리를 쳤다. 지숙과 동팔이는 어리둥절했다. 무엇인가 잘 못 본 게 아닌가. 다른 사람 일 거라고 그랬다. 하지만 할머니의 눈썰미는 못 속였다. 기억력 하나로 포장마차를 일궈온 할머니가 아닌가. 서울의 애주가들은 거의 이 할머니를 알고 있다. 아마도 이 할머니 손맛에 술잔이 저절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산낙지는 여벌인 게다.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을 기똥차게 일궈온 양념구이가 일품인 게다. 석쇠로 살살 구워 올린 그 짜릿한 맛이야말로 잊었던 기억마저 되살린다는 그런 맛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 소굴로 들온 게지. 그나마 기억력이 대단한 이 할머니 앞에서 그들이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하긴 맞다고 해도 그들의 기억이 새로와질 순 없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동팔이가 머리를 극적이며 그의 머리 끝자락을 꼬고 있었다. 지숙이 그런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지숙이 웃는 모습을 보고 동팔이가 덩달아 웃었다.

"우리가 아는 할머니니까 인사나 하죠"

그랬다. 그들은 이곳의 단골이었고 때로는 차비까지 빌려 가기도 했다. 것이다. 술값이 떨어지면 외상 술도 마다 안 했다. 그런 그들을 할머니가 잊어버릴 리가 없던 게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상한 눈치를 알아차렸다. 소식은 들었다 한다. 형석이란 총각이 가끔씩 찾아와선 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혀끝을 끌 끌차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가만 가만 보자 니가 아마 김지숙이... 맞자 맞아 내 눈이 틀림없어 글구 니는 그래 동팔이 맞지...하하"

할머니의 기억력이 대단했다. 별명까지 집어내니 이들은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할머니가 발견한 두 연인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바보라고 할까 아니면 속 터진다고 해야 할까.

술잔에 연속으로 손이 올라갔다. 꺾어지는 잔 속에서 지숙은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급기야 지숙도 한잔을 꺾었다. 안주로 올라 온 닭똥집을 한 점 입에 물고 먼 기억 속에 우물거려 보았다. 만일에 이들이 부부였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이 만일에 결혼을 해서 사고가 났다면 그래서 기억 상실을 했다면 만일에 그들이 어느 날 어느 시간 때에 누군가를 찾고자 했다면 그 찾고자 했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서 엇갈려 지나친다면 모르고 산다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겠지. 다만 그리움은 고통을 준다는 것 그것일 게지. 이들이 그런 결과이었다. 차라리 모르고 산다면 그리고 긴 나날을 애써 고통으로만 산다면 차리리 만남을 기회로 다시 되살아난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게다.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끈질긴 목숨들 아닌가 말이다. 그들의 미묘한 손끝 하나에 감성이 오고 가는 것은 천생 연일 것이다. 우연은 사연을 나고 사연은 피치 못할 고독과 괴로움 속에서 인간의 최소한의 만남인 인연을 맺어 주는 것이 아닐까. 동팔은 생각을 정리했다. 또다시 술병이 올라오고 취기가 오른 동팔이의 말끝이 예리하게 지숙의 가슴을 찔렀다.

"당신은 내가 찾고자 하는 김지숙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기억에서 나를 잊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있습니다. 동팔찌를 기억하시면 압니다. 동팔찌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있지요. 어딘가에..."

지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생각을 끄집어냈었다.

"네에 하나 더 있어요. 한 개는 외할머니한테 있습니다."

동팔이는 가슴이 떨렸다. 그렇다 집요한 생각 끝에 지숙의 기억을 새긴다. 그 동팔찌에 관해서 이야긴데 제 친구가 그랬습니다. 이 동팔찌가 내 여자 친구 집에서 흠처온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는 그 동팔찌를 내 사랑하는 애인에게 선물하려다가 내 애인이 나를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급기야 나는 그 여잘 구하려다 동반 사고를 당한 게죠. 그 사람들이 바로 여기 당신과 나입니다. 당신은 김지숙 나이는 스물일곱 당신의 아버지는 골동품 주인 그리고 나를 고발한 아버지 나는 당신의 아버지의 절도범 김동팔입니다."

동팔은 술기가 막 피 돌 듯이 돌았다. 지숙이 얼핏 아버지가 골동품을 운영했다는 기억은 있다.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 같았다. 은비녀 숨겨 온 것 금비녀 숨겨 온 것 다 도둑맞고 동팔찌도 도둑맞아 사위 놈 배불려 놓았내라며 비아냥거린 노랫소리를 얼핏 기억해냈다. 그까짓 은비녀고 금비녀 고가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금비녀와 은비녀는 그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대대로 물려받은 수장품들이었다. 이조 오백 년을 떡 주물 듯이 주물은 왕들의 아낙들 중에 그 후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손때묻은 금비녀이었고 은비녀였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외할머니의 사연이 담겨져 내려온 동팔찌 내력인 것이다. 종놈이 주인집 외동딸을 사모하다 소원을 이루고자 동팔찌를 만들어 그 외동딸인 그녀에게 주자 그녀는 그 뒤로 그 종놈을 사모하고 급기야는 야반도주를 하다 붙잡혀 멍석말이로 매 맞아 죽었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그 동팔찌가 얼마나 효력이 있었느냐면 매 맞아 죽은 그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죽음을 딛고 일어나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자손 대대로 부를 누리고 살았다는 외할머니의 이야기이었던 게다. 그들이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의 외할머니의 것이었으니 지금의 외할머니는 그렇게 십팔 번 노래를 불렀던 게다.

그랬다. 그런 사실조차 기억해내질 못하던 지숙이 그때서야 술잔을 꺾어 들었다. 뇌리에서 스쳐 가는 도로 바닥의 타들어 가는 급브레이크 소리가 순간 귀청을 때렸다 울렸다. 그리고는 공중에 몸이 나르는 환상을 잡았고, 환청 되는 지숙은 더더욱 술기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정적이 오고 간 듯한 정점에서 사고 순간에 지숙은 누군가를 불렀다고 했다. 그 이름이 동팔씨 였다라고 한 점 술안주에 닭똥집을 깨물었다. 기억이 새로와지는 것일까. 기억이 싹을 뜨는 것일까. 엄동설한 지난 보리밭에서 눈속의 한 보리 싹처럼 고갤 내민 지숙은 연이어 술잔을 꺾었다. 그리고는, 머릴 흔들었다. 긴 머리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스칠 때 목덜미의 상처가 드러났다 사라진다.

"그때 그 사람이 만일 당신이라면 이름과 성이 같고 동팔찌에 대해 사연이 헝클어졌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칠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아픔과 고독과 기억의 저편 그늘에서 내 할 일을 묻어 버리고 기피하며 살아간 이 날들을 나는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만일 당신이 나의 애인이라면 당신은 나를 다시 찾으시랍니까? 이렇게 망가 저버린 .........조금은 미친 나의 모습에서 손거울을 내민 그대는 ..."

지숙의 가슴에서 한이 품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나의 이 상처 난 손과 절룩이는 다리와 가슴이 뭉그러져 도저히 결혼할 수 없는 상태의 나를 누가 다시 데려간답니까? 절룩이는 다리와 휘젓지 못하는 이 몸체를 누가 버팀목이 되여 사랑하겠습니까? 여자의 가장 소중한 가슴이 없는 이 여자를 누가 사랑하시겠어요? 당신이 만일 그 여자의 애인이 이었다면 동팔씨는 자신이 있습니까? 그대가 만일 빛이 되신다면? 빛으로 동팔찌를 울릴 수 있습니까?"

동팔은 머리끝 자락을 붙잡고서 일언지하에 지숙의 말끝을 자른다.

"나는 그때의 여자를 머릿속에서 지금의 당신이 만일 그때의 여자라면 다시 사랑하겠습니다."

동팔은 잘라 말했다. 사랑은 몸뚱이가 소중한 게 아니었다. 이때, 포장마차 할머니가 요리를 하다 멈추면서

"정신머리가 좋은 겨"

포장마차 할머니가 한 술 거든다. 그러면서 따듯한 어묵 국물을 한 사발 올려 준다.

"에그 국물 따닷하게 마시고들 야그 만이 나눠~~"

그리고는 할머닌 잠깐 나갔다가 돌아온다면서 에그 포장마차 문 닫았다고 맘 푹 놓고 있으란다. 그리고는 앞치를 걷어 올려 눈가를 훔치고 사라진다. 포장마차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러나 보이면 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술꾼들이 찾을 법한데 오늘은 아무도 찾아 들지 않는다.

할머니의 오댕국물이 시원스럽게 맛이 들었다. 동팔이가 한 숟가락 떠올려 지숙에게 떠넣어 주었다. 지숙이 사양하며 고개를 조금 빼더니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동팔이가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야윈 그녀의 등급은 살들이 손끝에 아렸다. 가느다란 허리와 오른쪽 팔을 재대로 올리질 못하는 그녀를 생각해 냈을 때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자신이 찾아다닌 이 여자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한 그렇게 미친놈처럼 헤매며 찾아다녔던 이 여자의 우연한 만남이 서럽고 애간장이 녹아드는 순간이였을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허덕이며 그리운 사람 찾으려고 애써 왔는가 말이다. 그러한 지숙을, 가련한 이 여자를 누가 버리겠는가. 동팔이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동팔찌를 달라고 했다. 그녀의 손에서 동팔찌가 주어졌다. 누군들 보잘것없는 녹슨 구리로 만든 팔찌 하나가 자신들을 헤매게 했을까. 그리고는 동팔은 그녀의 아픈 팔목에 동팔찌를 이제사 끼여 주었다.

지숙은 지그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자신이 찾았던 그 사람이 이처럼 변함이 없었다는 따스함일까. 지숙의 가슴속이 울음으로 떨려 있었다. 그러면서 동팔이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도 동팔찌가 찡하며 울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수년의 세월 속에서 이들의 사랑이 동팔찌의 혼이 어우러졌을까.

동팔이는 경상도 말로 몇 마디 거든다. 늘 어감이 좋다며 해대는 그런 말이다.

"가스나, 가슴에 품어달란 말 안 할낀가 가스나야~~"

그들은 주인 없는 포장마차를 나왔다. 오늘도 외상 술인가 보다. 지숙이 취중에 비틀거렸다. 무엇인가 느낌이 오는 듯이 잠시 가볼 게 있다며 헤어지자고 했다. 지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만일 내가 다시 이 포장마차에 오게 되면 나는 당신의 여자가 될 겁니다."라고 했다. 지숙의 진심 어린 말의 스침이 왠지 가슴에 차갑게 들려왔다. 동팔이는 지숙을 동행하고 싶었다. 지숙이 손을 저었다. 지숙이 다시금 말한다.

"동팔씨 위험할지도 몰라 빨리 피해! 내 말 잊지마!! 어서! 어서 가!"

그녀가 이곳에서 도망을 간들 이젠 다 아는 사실인데 다시 헤어진들 못 찾을 리 없다는 생각에 지숙과 헤어질 순간이 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몇몇 건장한 사람들이 지숙을 에워싸고 있었고, 지숙은 바동거렸다. 그중 세 명이 급작스럽게 동팔이 쪽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동팔은 저항할 자세를 취했다. 순간 덮치는 그들에게 역습을 당하는 꼴이 이었다. 그리고는 멱살을 부여잡고 주먹이 날라 왔다. 한꺼번에 날아온 주먹질과 발길질이 숨돌릴 틈도 없었다. 눈알이 빠지는 것 같았고 눈 속에서 전깃불이 튀기 시작했다. 동팔은 놈들을 상대로 주먹을 날렸다. 술에 취한 동팔이의 손길이 가볍고 느렸다. 어이없게 나가떨어진 동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당한 사건이었다. 또다시 그들이 달려들어 이번에는 발길질과 몽둥이로 내리쳤다. 동팔이의 눈빛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지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누굴까? 정신이 나가 버리고 그나마 귓가에 흔들리며 들리는 칙칙한 말투들 뿐

"다신 만나려고 하덜 마 도둑넘의 새끼 주제에..."

건장한 주먹들은 누군가의 사주에 일당을 벌고 간 것이다. 순간 떠올랐다. 그녀의 부모가 사주를 보낸 것일 거라 믿었다. 그녀의 부모가 두 눈을 뜨고 살고 있는 한 결혼은 어려운 게다. 죽을 때까지 결혼을 반대한다는 독살스런 그 부모님인 게다. 그녀의 어머니는 늘 그랬던 게다. 어디 상전을 엎어갈려고 그래. 종놈이 자식이..동팔이의 집안 내력이 붉어져 나오는 순간 이였다.

"종놈이면 어떤가? 이 세상 종들이 아니면 어느 누가 이 세상을 꾸려가지?"

동팔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피한다. 동팔은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 급습을 당한 처지를 황당하게 생각했다. ‘그래, 죽여도 좋다. 끝까지 찾아내는 거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휘파람 불며 돌담길 돌아 덕수궁 얼시구 바라보며 술 취한 동팔이는 담벼락에 다리를 벌리고 시원하게 갈겨댔다. 뱃가죽에 힘을 주며 오줌보의 물기를 펌푸하려 흥을 돋우는 것 같았다. 담쟁이덩굴이 파르르 떨더니 물줄기 흐르는 가운데로 내려앉는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인 듯 너의 즐겨 갈기는 오줌은 이제 여기서 종을 울려라.

"롯데리아 총소리를 울려라! 그대는 롯데 껌이 되였지 않는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팔이는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굴레방 다리를 지나 염리동을 향하는 것 같았다. 갈팡질팡 지우뚱 말뚱 엎어질 듯 말듯 헛소리 날리면서 뇌까린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깃 달까 말까 스치며 중심을 유지한 채 스치는 걸인들의 신경을 피하는 동팔이는 어딘지 모르게 목적을 향해 걸었다.

마포 강나루가 보였다. 동팔이는 취한 발길 쉼 없이 걸었던 게다. 성난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한강의 시더분한 잔물결에 분노가 사그라지는 걸까. 동팔이는 강나루 언덕배기 아래로 내려가 앉았다. 술기에 취한 눈빛에 잡히는 장돌을 들었다. 그리고는 힘껏 내던진다.

"가스나, 징말 징한 년이여!"

다시금 들어 올린 장돌을 더 멀리 던진다. 돌팔이는 어두운 강둑에서 나르는 보이질 않는 장돌에 순간 기억을 들춘다. 내던져진 힘의 굴레에서 기억이 되살아나는 가스나 이야기가 장돌에서 피어나는 게다. 동팔은 주변의 돌멩이를 다시금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던졌다. 조금 더 날아가면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이고 잘못 날아가면 육삼 빌딩이 아닌가. 그러나 그만한 돌팔매질은 동팔이의 소갈머리를 달래줄 그런 위력은 못 되었다. 한참을 강나루의 흐르는 물결을 내려다 보아왔다. 우연한 인연 속에서 가까스로 기억해낸 지숙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동팔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가 오줌을 누었던 자리 그 자리로 가는 중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했다. 만일 지숙이 기억의 일부분만이라도 되살아난다면 그는 올 것이다. 덕수궁이 눈앞에 보였다. 내달린 택시가 숨이 헐떡거린 듯 느껴졌다. 동팔은 발길이 떨렸다.

"죽어도 좋다. 맞아 죽어도 좋아 종놈이면 어떻구~~ 나에 사랑 지숙 나에게 총을 겨눠도 좋다!"

불 꺼진 포장마차가 보였다. 어득해진 주변 거리에서 누군가 꼬부려 앉아있었다.

"지숙이."

동팔은 입술을 흘치면서 두 주먹을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는 흔들어댔다. 소리 없는 자세다. 두 발을 벌이고 서서 다시 한번 한 손을 공기를 가루며 내리 그서 댔다. 승리의 기쁨처럼... 그런 모습을 본 지숙이 절룩이면서 약간은 어설픈 행동으로 동팔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숙은 이곳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동팔이는 얻어맞은 팔다리가 쑤신 것이 사라진 듯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기억의 늪에서 탈출해 성공한 것일까. 지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동팔이에게 더듬으며 말한다.

"가스나 가슴에 품어 바라. 춥다 안하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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