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배신의 나날
프레디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올리비아는 한 사람의 충직한 하녀처럼 정성을 다해 그를 섬겼다. 매일매일 온갖지혜를 동원하여 그를 섬기는 올리비아의 노력은, 비록 진실한 사랑을 기초로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봉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 불행하고도 불균형적인 결혼생활이 그런 봉사를 통해서나마 바로 잡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헌신적인 노력이 엉뚱하게도 올리비아를 캘커타 사회에서 가장 현명하고 이상적인 아내로 추앙받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항상 품위 있는 미소로 프레디의 친구들을 대하였고 맛있는 식사와 편안한 휴식처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들과 함께 폴로 경기를 구경하기도 하였으며 여자들끼리 모여 앉아 세상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등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금실 좋은 부부의 안주인 역을 성실히 해내었다.
그러나 실상 올리비아의 이런 노력은 힘겨운 것이었으며 자신의 존재 의미는 모두 잊어버려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침전되고 응고된 고통을 애써 누르고 부질없이 웃어야 하고 까닭 없이 명랑한 체 해야 되는 건 어떤 의미에선 또 다른 고통이었다.
올리비아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프레디는 신혼여행지에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여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는 조용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허리 없는 드레스 따위로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올리비아의 배가 불러왔을 때 버커스트 부인은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발표했다.
이 소식은 유럽인 사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프레디는 주위 친구들로부터 조롱 섞인 축하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빨리 애를 갖게 되다니, 자네는 재주도 참 좋아"
"결혼 전의 두 사람 사이가 수상하다구 이봐, 프레디! 사실을 밝히라구"
그러나 프레디는 씁쓸한 미소로 그들의 축하에 응대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그런 프레디의 모습을 지켜보며 쓰린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의 인생을 모조리 다 바칠 만큼 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여자일까.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며칠씩이나 보내야 했다.
그런 어느날, 평소에 프레디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친구 피터의 조롱 섞인 한 마디에 오랫동안 참아왔던 프레디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두지 못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야비한 말들을 내게 하는 거지?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군, 피터!"
흥분하는 프레디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피터는 호기심 가득한 교활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난 다 알고 있단 말이야 프레디 같은 얼간이하고 결혼을 결심했다면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피터는 음흉한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수심에 차 있는 프레디를 본 적이 없었기에 올리비아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
"불쌍한 프레디, 진실을 말해 주세요.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나요?"
그러나 프레디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오, 올리비아 그 누구도 우리의 약속을 갈라 놓거나 망칠 수는 없소. 당신은 내가 그리도 허약해 보이오? 피터가 했던 말은 잊어버려요. 명백한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뿐이오."
"나도 당신을 믿어요, 프레디 그런 당신께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감사따위는 바라지 않아"
프레디는 침통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올리비아를 노려보다가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감사 따위가 아니라구 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을 원해 당신의 가슴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랑 중에서 나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부분은 진정 없단 말이오?"
그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아니에요, 프레디 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구요."
그러나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말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되뇌임이 됐을뿐이다.
"당신 혹시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프레디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쥔 채 그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에요, 프레디"
올리비아는 마치 속마음을 펼쳐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가슴을 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해 본 적도 없어요. 내가 벌써 여러 번 설명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프레디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이를 사려 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만일 그 작자가 누구인지 알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놈을 죽이고 말겠어!"
미친 듯 괴로워하는 프레디를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다시금 그를 동정어린 마음으로 감쌌다. 동정이라구? 하지만 그녀에게 정녕 그를 동정할 자격의 한자락이라도 있단 말인가 질투이면서 격렬한 자기 비하이기도 한프레디의 이런 외침에 번번히 입을 다물며 다만 따뜻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감싸 주지만, 그녀가 매번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사소한 손길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질투 그렇다. 그것은 질투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육체에 악의씨를 배태시키고 사라진 남자에 대한 질투 프레디는 그런 질투 때문에라도 그녀가 절대로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한 적도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전에는 그를 죽도록 사랑했을 것이며 지금은 전만큼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녀가 자기를 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 작자를 사랑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이런 외줄타기와도 같은 불안한 결혼생활 중에도 올리비아는 가능한 한자주 이모와 이모부를 찾아뵈려고 노력하였다.
브리짓트 부인은 죠수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도에 대한 애착은 이미 식을 대로 식었기에 그녀의무관심 속에 집안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몇 개의 방은 굳게 잠겨져 있었으며 버려진 가구 위로는 뿌옇게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죠수아였다. 그는 영국으로의 이주를 노골적으로 싫어했으며 프레디와 올리비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계속 빠져드는 것 같았다. 화분을 엎어 놓고 앉아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부질없이 장미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그의 소일거리의 전부였다.
단정한 옷차림과 단호하면서 품격 있는 행동을 신사의 법도로 여겼던그는 이제 축 늘어져 보일 정도로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 게으르고 수심에 찬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이 죠수아 경에게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져 주길 원했지만 그것은 헛된 바램이었을 뿐, 그녀는 남편과의 감정의 골을메우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올리비아가 프레디와 결혼한 지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늦은 봄날의 그 이별은 올리비아와 브리짓트 이모를 각기 다른 의미의 슬픈 감정에 휘감기게 하였다.
불과 반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이별은 생각도 못했기에 올리비아는 가혹한 운명의 장난에 가슴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브리짓트 부인의 귀국 후, 올리비아는 죠수아 이모부를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오셔서 저희와 함께 살아요. 혼자 남겠다는 이모부의 생각에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그러나 올리비아의 이런 제시에 죠수아 경은 부드럽지만 즉각적인 태로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올리비아, 나 역시 많이 생각한 후 결정한 것이란다. 너의 시어머니, 버커스트 부인이 다른 누군가와 어울려 생활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아니겠지?"
죠수아는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자신의 서재에서 밤을 지새워 일기 같은 글을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사업에 관한 것뿐이죠"
랜섬이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 그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집을 세놓고 이곳으로 이주하기로 했소 두 늙은 외로운 남자가 굳이 따로 살 필요가 없지않겠어요? 우리 둘이 함께 산다면 재정적 부담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오."
브리짓트 부인은 떠나기 전에 올리비아가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버커스트 부인으로부터 듣고 기쁨에 찬 눈물을 흘렸었다.
"올리비아, 너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상세하게 편지하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것을 조목조목 말이다. 어떻게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다오."
그녀는 올리비아의 배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임신 개월 수에 비해 배가 너무 부른 것 같구나. 조만간 험프리스 박사님께 정밀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
올리비아는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저어 이모 제가 에스텔의 방과 그 애의 물건들을 가져도 될까요."
에스텔이 떠난 후, 브리짓트 부인은 그 누구도 그 방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에스텔을 철저히 자신의 인생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에스텔의 독립선언이 이모의 가슴엔 그렇게도 빼지 못할 못이 되었던 것일까. 그날도 브리짓트 부인은 단호히 대꾸했다.
"안 된다.! 그대로 남겨 두거라 너는 나중에 에스텔의 물건들을 자선단체에 기부해야 할 거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에게 집안 살림을 맡겨 놓은 후 한 번도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한 방관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의 지출에 대해 묻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집안 하인들을 위해 새로운 막사를 지어 주고 수리해 주는 일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성격에 놀라운 사고력으로 노년을 살아가는 버커스트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그녀에게 친구나 동료 같은 친근감이 느껴지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킨잘 이외에 올리비아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여자로, 올리비아로 하여금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은밀한 동지애를 느끼게도 해주었다. 그만큼 버커스트 부인은 사려 깊었고 믿을 만했으며 또 두려웠다. 가문의 혈통을 잇겠다는 노부인의 신념은 그처럼 모든 질곡과 모멸감을 무시할 만큼 견고한 것일까.
어느 날 아침, 자신에게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올리비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커스트 부인과 마주 앉았다.
"올리비아, 참 잘해 주고 있구나. 집안일로 너무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린 모두 네가 하찮은 집안일 따위로 너의 재능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올리비아는 시어머니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곧바로 알아채고 기쁨에 차서 대꾸했다.
"어머니, 너무나 감사해요. 사실 저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회사 일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반대하실까 봐 두려웠어요."
"얘야, 나는 찬성한단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야 내가 지배인인 윌리에게 부탁해 보마. 그가 여자의 능력을 무시하는 보수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동양과의 무역에 대해 그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시람은 없단다. 그가 너의 눈물을 금방 마르게 해줄 거다."
그녀는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올리비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 단단히 말해 두마"
"떠나기 전이라뇨?"
올리비아가 금방 창백해진 모습으로 물었다.
"어디로 떠나나요?"
버커스트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편지로 팔을 뻗었다.
"이것은 영국에 있는 우리 집안의 부동산 매니저에게서 온 것이란다. 프레디의 아버지가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는구나 병이 너무나 악화되어 호전되기는 어려울 듯싶다는구나"
그녀는 손으로 편지의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편지는 벌써 한 달 전에 도착한 것이란다."
"어머니, 설마 지금 바로 떠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의 도움없이 자신이 이 힘겨운 생활을 견디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가야만 한단다. 얘야! 네 시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으니 다음 주쯤에는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잠시 동안 버커스트 부인은 말이 없었다. 이대로 떠나기엔 마음의 부담이 너무 컸다.
"네게 닥쳐온 시련들을 함께 견뎌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겠구나. 나도 무척 마음이 아프단다. 혹시 출산에 대비해 생각해 둔 것이 있으면 말해 보렴."
"저는 출산 한 달 전쯤에 킬티나갈로 떠나겠어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스레 너무나 구차스럽게 여겨져 침울하게 대답했다.
"킨잘도 좋아할 거예요. 그녀는 저를 잘 돌보아 줄 거예요."
"잘됐구나, 얘야 네가 그처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니 나도 안심이 된다."
올리비아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무척 뵙고 싶어질 거예요."
"나도 그럴 거다. 아가"
올리비아의 손을 감싸 쥐며 버커스트 부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떠날 수 있다. 그래, 확신! 네가 내 아들 옆에서 그를 도와 너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나갈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네가 만일 우유부단하고 허약한 여자였다면, 나의 마음은 무척이나 무거웠을 게다. 그러나 너는 나를 대신해 프레디의 사업을 잘 도울 수 있을 거야."
이러한 믿음의 약속은 올리비아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올리비아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프레디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의 더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후, 시어머니와의 이별은 올리비아에게 상당한 괴로움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일부분을 떼어내는 듯한 허전함이었다.
"너의 아내에게 잘 해주거라"
버커스트 부인은 아들 프레디에게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며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애는 너보다. 훨씬 현명해"
프레디의 아버지 칼렙 버커스트가 1815년에 설립한 팔로샴 무역회사는 차(茶)의 자유무역 조치와 더불어 취해진 영국의 담배 생산 판매 독점화 조치 이후 번창일로를 걷고 있었다.
지금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윌리 도날드슨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의 스코틀랜드인이다. 그는 근면하고 빈틈없는 일 처리와 성실한 자세로 이미 오래전부터 팔로샴의 최고 운영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강한 통솔력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옛날 칼렙 버커스트에 의해 이루어진 팔로샴의 이익과 명성을 잘 유지시켜 나갔기에 그런 윌리에게 프레디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버커스트 부인의 예상대로 윌리는 올리비아의 회사개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경계했으며, 그녀의 탁월한 사업능력을 깨닫게 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올리비아는 이제까지 그가 보아 온 여느 여자들 하곤 너무나 달라 보였다. 그녀는 쓸데없는 농담이나 잡담 따위로 시간을 흘려보내지도 않았으며, 혼자 힘으로 상업적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고, 산적된 문제들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해결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윌리는 어느 날 저녁 아내 코넬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올리비아는 정말 똑똑해 그녀는 영리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야. 게다가 그 아름다운 용모 미국인이지만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토록 완벽한 여자가 어떻게 멍청이 같은 프레디와 결혼했느냐 하는 거야"
올리비아는 윌리가 자신을 적대감을 갖고 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그와 친해지려 애쓰지 않았다. 단지 그를 계속주시할 뿐이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일처리 능력과 예리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늘 퉁명스럽고 거칠었으며 때로는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내뱉는 무례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팔로샴 무역회사는 창업주인 칼렙 버커스트의 뜻에 따라 아무리 큰 이익이 보장된다. 해도 중국과의 아편 교역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칼렙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엄격한 생활을 하였으며, 이런 생활 방식 때문인지 담배 판매를 주력사업으로 하면서 부수적인 사업으로 하는 해외무역에 있어서는 단순한 생활용품 교류에 주력하는 편이었다. 팔로샴은 주로 면, 황마, 향료, 염료 등을 수출하였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엔 벵갈만 지역 일대에다. 인디고 염료를 재배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윌리는 인디고의 수출이 매년 천만 파운드에 이른다고 올리비아에게 설명해 주었다.
"칼렙은 칼렙은 신의 축복을 받은 운 좋은 사나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누구를 향한 조소인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올리비아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팔로샴은 30년대의 대변혁기 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번창일로를 걸은 탄탄한 회사죠 신의 도움으로 팔로샴 무역회사는 계속 번창해 나갈 겁니다. 그런데"
윌리가 스스로 말을 끊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야무진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 악마 같은 라벤던 때문에 골치란 말입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라벤던이란 이름을 들었지만, 올리비아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질문했다.
"라벤던의 회사와 거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요. 그들이 운영하는 창고를 임대해 우리의 물건을 보관하지요. 그건 그렇고, 자이 그놈은 정말 살인마 같은 놈입니다. 그러나 그놈도 면도는 하겠지요. 우리가 수입해 오는 면도기로 말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를 연상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놈이 당신의 이모부 죠수아와 랜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물론 내가 그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가 반드시 그놈을 처단하고 말 겁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말입니다."
그는 자이가 옆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죽이겠다는 살벌한 표정으로 천장을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사업 이야기로 돌아갔다.
프레디가 늘 정오까지 늦잠을 잤으므로 올리비아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이모부를 찾아가거나, 사무실로 아더 랜섬을 방문하였다.
어느 날 올리비아는 랜섬이 자신의 저택을 매각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유가 뭐죠? 그 집은 전망도 좋고 상당히 가치가 있는 좋은 집인데 그 집을 무척 아끼셨잖아요?"
"올리비아, 죠수아 경과 나는 점점 생활 형편이 나빠지고 있어요. 라벤던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우리와 거래를 하지 않으려 해요. 내가 전에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올리비아는 예전에 발락폴에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랜섬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에요, 랜섬 씨"
그녀가 자제력을 잃고 소리쳤다.
"도대체 자이는 이모부에게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 것이죠? 이미 충분히 보복한 것 같은데 지금의 이 상태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요?"
"그래요, 아직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요. 더 많은 불행과 희생을 원하지"
아더 랜섬은 라벤던의 보복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분노도 섞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죠수아 경과 나의 이름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고 있어요. 우리가 철저히 무너져 비참하게 파산선고를 받을 때까지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요. 나는 그걸 알고 있소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에요. 올리비아, 이제 더 이상 죠수아 경과 나의 신용은 이 캘커타에서 통하질 않아요. 펜워디 은행의 지불 할인도 정지되었고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홍차 무역도 어렵게 되었소. 런던으로 가야 할 홍차가 캘커타에 도착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걸 배에 실어 주지 않는답니다. 라벤던이 돌아왔을 때의 보복이 두려워서지"
라벤던이 돌아왔을 때 이 말은 한때 얼마나 올리비아를 괴롭혔던가 또 이 말은 한때 얼마나 그녀를 들뜨게도 했던가 그러나 지금 랜섬을 통해 듣는 그 말은 올리비아에게 어떤 감동의 충격도 주지 않았다. 단지 가슴 한구석에 운명의 잔해 같은 분노의 그림자만을 드리우게 할 뿐
"당신이 그렇게 낙담하는 이유를 이제는 저도 알 것 같아요."
올리비아는 애써 그 그림자를 떨쳐내며 랜섬에게 물었다.
"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아마 다른 방법이란 없을 것 같소. 10년 전이나 5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힘도 의욕도 없다오. 죠수아 경도 나도 이제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는 오랫동안 올리비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뻣뻣해진 다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죠수아 경과 나는, 지금은 비록 비참하게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요. 막대한 돈을 벌기도 했고 후회 없이 써 보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그래요, 이제는 물러날 때가 온 거요. 젊은 세대들이 무역업에 기운차게 뛰어들고 있어요. 아!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죠수아 경과 나는 일개 농부의 삶을 택하려 한다오. 우리 모두 그 선택에 만족하고 있어요."
랜섬의 넋두리와도 같은 말을 듣는 올리비아는 타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죠수아 경의 파산의 전적인 책임은 자이 라벤던의 흉계에 의한 것이었다. 인도를 떠나기 직전에 자이는 죠수아 경이 헤어나지 못하게끔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고, 이미 쇠락의 길로 치닫던 죠수아 경은 그의 흉계를 알면서도 서서히 그 함정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에스텔과의 동반 도피는 상황의 반전을 노리는 죠수아 경의 마지막 의욕까지도 꺾어놓는 치명타였다.
자이 라벤던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올리비아는 그를 향한 진정한 분노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로 파멸을 몰고 다니는 악마의 화신이란 말인가.'
그 무렵 자이의 회사는 심복인 란잔 모이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의 회사는 활발한 활동과 막대한 자금 동원을 통해 캘커타 시장경제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란잔 모이타는 벵갈 계통의 젊은이로 항상 말쑥한 인도 전통복장을 하고 다녔다. 모이타는 정기적으로 팔로샴의 사무실을 방문하곤 하였으나 올리비아는 그와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이타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올리비아에게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윌리의 부탁으로 라이터스 빌딩 내에 있는 존 주식회사를 방문하러 가던 올리비아는 인도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가마와 마주치게 되었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듯 멈춰서고 말았다. 가려진 휘장 너머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바로 수자타였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수자타의 검게 화장된 눈이 밑으로 내려가 올리비아의 볼록한 복부에 머물렀다. 일순, 수자타의 루비 같은 입술이 조소하는 듯한 웃음으로 차갑게 일그러졌다.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가마는 지나갔지만 수자타의 차가운 눈빛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은 올리비아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팔로샴의 무역회사에 몰두하는 올리비아에게 프레디는 여느 때처럼 또다시 불만을 터뜨렸다.
"올리비아, 당신은 무엇이 그리 바쁜 거지? 당신이 없으면 난 외롭다구 당신이 그리워 게다가 죠수아 경에겐 왜 그리 자주 가는 거지?"
"프레디 이모부는 지금 무척 외롭다구요. 게다가 내가 그를 찾아 갈때는 주로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땐데요."
올리비아는 쏟아지려는 신경질을 눌러 참으며 그를 설득해 나갔으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한 불만뿐이었다.
"외로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자주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내가 저녁에는 꼭 집에서 당신 곁에 있구요."
"그래도 당신이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 당신은 진정으로 나를 그리워해 본 적 있어? 내 마음의 반만큼이라도 말이야."
올리비아는 거의 한 시간 이상을 자신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부질없는 설득으로 허비해야 했다.
프레디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는 올리비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열정적으로 그녀를 향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프레디의 그런 애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의 나는 껍데기일 뿐, 나의 영혼을 다한 사랑이 아니라는 스스로의 다짐 아래서만 그를 받아들이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프레디에게 너무 많은 인생의 짐을 지워 준 것에 대한 보상심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거리의 여자와도 같은 비참함이 느껴지지만 올리비아는 참회의 마음으로 그의 헛된 욕망을 그렇게 근근이 채워 주곤 하였던 것이다.
프레디는 그런 올리비아에게 매번 자신의 사랑을 호언장담하며 만족한 얼굴로 그녀를 안았지만, 곧바로 얼음처럼 굳어 버리는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곤 어떤 진한 패배감 같은 걸 느끼는 듯했다.
자연히 그것에 대한 불만이 마음속에 자꾸만 쌓여져 가고 프레디의 얼굴엔 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질투와 증오가 뒤섞이는 표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매일 밤 올리비아는 자이 라벤던을 사랑했던 것의 반만큼이라도 프레디를 사랑해 주자 다짐했지만 그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스트랜드 가(街)를 따라 가끔씩 하는 마차 드라이브는 그녀의 유일한 여가생활이었다. 그 거리 남쪽 끝에 위치한 캘커타 항구는 항상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제각기 소유한 물건의 흥정을 위해 바삐 움직이느라 늘 붐볐다. 특히 새로운 배가 입항하여 선적물을 내릴 때는 더욱 분주해 마치 도시 전체가 이곳으로 옮겨 온 듯했다.
생동감 있는 분위기 속에서 선단(船團)에 쓰여진 여러 가지 표식들과 전시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올리비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삶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항구 주변을 거닐던 올리비아는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고 있는 영국 국기를 보며 문득 에스텔을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에스텔의 존재가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올리비아의 머릿속 시곗바늘을 8개월 전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그동안 그토록 잊고 싶었던 일들이 비수처럼 올리비아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녀는 지난 기억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무심코 영국 국기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군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서 각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녀는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올리비아는 군중들 사이에서 무언가로 굉장히 흥분해 있는 듯한 자이 라벤던의 부하 모이타를 발견하였다. 그는 손에 서류뭉치를 들고 세관원과 한참 동안 언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구경꾼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모이타는 갑자기 나타난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무척 놀라면서 곧 언쟁을 멈추곤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혼자 이곳에 계시면 너무 위험합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시죠 여기에 있는 날품팔이들은 예의라곤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거든요."
올리비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조차 모른 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의 안내를 따랐다.
"모이타 씨 오늘 당신 회사의 배들 중 하나가 입항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렇습니다, 부인"
그는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국 보스턴에서 들어오는 배죠 부인의 모국인 미국 말입니다."
그의 말은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 배는 면 청바지와 미국산 담뱃잎을 잔뜩 싣고 들어온답니다."
올리비아가 약간의 관심을 보이자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라벤던 소유의 범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올리비아는 그의 눈길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말을 뱉었다.
"모이타 씨 오늘 들어온 배를 좀 구경할 수 있을까요? 범선이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만이 유일하게 미국산 범선을 인도항에 취항시키죠."
모이타의 설명을 들은 올리비아의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희 회사는 여러 척의 범선을 소유하고 있죠. 저 배는 자누아 호입니다. 저희 회사의 그 유명한 범선인 강가 호는 지금 미국에 정박 중입니다."
미국이라구? 그럼 자이와 에스텔이 지금 미국에 있단 말인가? 현기증을 느끼며 올리비아는 모이타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뭉치를 토닥거렸다.
"뉴욕에서 우리 홍차는 팔로샴 회사 것만큼이나 잘 팔리고 있지요."
올리비아의 시선은 모이타가 들고 있는 서류뭉치에 고정되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현재 위치를 깨닫고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그 서류마저 빼앗아 읽어 보았을 것이다. 자이 라벤던에 관한 어떤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서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날로 번창한다니 정말 잘된 일이군요. 그러나 모이타 씨, 당신과 함께 내가 기뻐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 주세요."
모이타와의 만남 후 올리비아는 좀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작은 위안이 되는 사실은 자이의 측근인 모이타조차도 에스텔이 강가 호에 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캘커타와 같은 도시에서 이런 엄청난 비밀이 그래도 견고히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올리비아는 쓸쓸한 위안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회사로 출발하려는 올리비아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들었다. 하인이 가져온 메모에 의하면 그는 미국 국적의 범선 갈베스톤 호의 선장인 메디슨 튜커로, 하와이에 있는 올리비아의 아버지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올리비아는 계단을 나는 듯이 내려와 튜커 선장을 맞이했다.
"이렇게 몸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장님 하와이에서 저희 아버님을 만나보셨다구요."
"예, 그랬습니다. 버커스트 부인, 저는 하와이에서 그분의 결혼식에 참석했었지요.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고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당신의 이모님댁에 갔었지요."
"그러셨군요. 선장님이 하와이를 떠나실 때는 그 소식이 미처 아버지께 도착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버지에 관한 소식에 몸이 달은 그녀는 우선 그를 식당으로 안내하여 그와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푸짐한 식사를 들며 마음씨 좋은 선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올리비아는 홀딱 빠졌다. 결혼식은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거행됐다고 했다.
"샐리는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빨간색 화관을 썼죠. 샘은 감색 정장을 입었고, 샐리의 아이들도 모두 한껏 멋을 냈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즐거우셨을까를 생각하며 올리비아는 미소지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올리비아를 키우며 곤궁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정의와 진실을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임을 알기에 올리비아는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지가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 남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곤 했던 것이다.
그와 두 시간 이상을 이야기로 보내며 올리비아는 편지로는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쉴새없이 던졌으며 선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일일이 응답해 주었다.
그녀는 그를 조금이라도 더 머물게 하고 싶었다.
"선장님, 정말 감사해요. 그동안 제가 잊고 살아온 외부 세계의 이야기와 소식을 전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어차피 화물 선적을 끝내려면 오늘 하루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답니다."
"무슨 화물을 그렇게 멀리 운송하시나요?"
"대부분 하와이에서 영국의 캘톤으로 보내지는 산양 가죽들이죠. 중국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되는 비단도 있고, 모피 종류도 더러 있습니다. 나머지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죠."
"그래요?"
올리비아는 신중해졌다.
"영국에 들르신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요. 영국의 사우스템포 지방으로 갈 겁니다."
사우스템포! 올리비아는 이 한 마디를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내뱉었다. 며칠 전에 아더 랜섬을 만났을 때, 그는 영국 사우스템포 지방으로 가야 할 홍차가 있는데 선박을 구하지 못해 창고에서 썩어 가고 있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죠수아 경의 무역상품은 절대로 싣지 못하도록 캘커타 항구 전역에 엄명을 내린 사람이 자이 라벤던인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캘커타에 들어온 어떠한 배도 자이로부터 받을 보복이 두렵고, 자이 회사의 물품을 싣지 못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손실이 두려워 랜섬의 간청은 번번이 좌절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님 저에게 몇 분만 더 시간을 내주세요. 몇 가지 상의드릴 말씀이 남아서요."
기회였다. 죠수아 경의 물품을 영국으로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설명받고 하인을 항구에 보냈던 아더 랜섬은 얼마 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예로우가 항구에 갔다왔어요. 그런데 갈베스톤 호는 수용 능력이 꽉차서 더 이상 선적할 수가 없다는군요."
"아니에요, 랜섬 씨 예로우카 튜커 선장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모든 문제가 달라질 거예요. 그분은 우리 아버지의 친한 친구분이시니 저의 부탁을 분명히 들어주실 거라구요."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결심이 서 있었다.
"즉시 대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탁송 전에 제가 랜섬 씨에게 위임장을 받고 홍차 값을 팔로샴 무역회사 이름으로 지불하겠습니다."
랜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세상에 윌리가 알면 노발대발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팔로샴을 개입시키다니"
"이것은 팔로샴과 아무 상관없어요. 모든 것은 제 개인의 것입니다. 램섬 씨 팔로샴에는 제 몫의 돈이 있어요. 제가 필요할 때는 프레디나 윌리의 동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돈 말이에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홍차는 창고에서 그대로 썩어 버리고 말 거예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올리비아의 말을 다. 듣고 나서도 랜섬은 그래도 개운치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군요, 올리비아 그러나 누구도 이번 무역이 반드시 흑자를 내리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해요. 더구나 자이 라벤던이 가만히 있을지"
"랜섬 씨 팔로샴 무역회사는 큰 회사입니다. 라벤던의 보복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그를 곤경에 빠뜨릴 겁니다."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할 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나 아더 램섬은 결국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윌리가 불같이 이는 화를 억누르며 올리비아와 마주 앉았다.
"당신은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소. 왜 죠수아의 일에 우리가 개입을 한단 말이오?"
"이건 팔로샴의 일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올리비아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너무도 차분히 말했다.
"이건 제 이모부가 경영하는 회사의 문제라구요. 팔로샴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팔로샴이 연루될 거요. 어쩔 수 없이 골치 아픈 일에 봉착하게 될 거라구요."
"골치 아픈 일이란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라벤던을 두려워하나요? 그는 일개 무례한 건달에 불과해요. 초인적인 힘을 지닌 마법사가 아니라구요."
"맞소. 그는 마법사는 아니오. 그러나 그는 집요하고 악랄해요. 자신의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고 마는 무서운 놈입니다. 그 자가 당신의 이모부를 어떻게 했는지 보고도 모르겠소?"
"그가 나의 이모부를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너무 소심해서 그의 이기적인 행동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기억하는 그는 다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한 인간에 불과해요. 나는 반드시 그를 제거할 겁니다. 다시는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올리비아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윌리를 노려보았다.
"추호라도 내가 나의 이모부 때문에 팔로샴 회사를 누를 끼친다면, 회사에서 당장 손을 떼겠어요. 아시겠어요? 윌리 씨, 제법 강한 분인 줄 알았더니 당신도 역시 겁 많고 소심한 상인에 불과하군요."
거칠게 화를 내며 올리비아는 그 방을 나갔다. 올리비아가 나간 후에도 윌리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깊은숨을 몰아쉰 그가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계집애가, 원 세상에'
무더위와 폭우가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캘커타에서 올리비아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배는 불러올 대로 불러 올라 아무리 세심하게 옷을 입어도 밖으로의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팔로샴 무역회사 일을 일시적이나마 그만두어야 했다.
그녀는 이제 킬티나갈의 킨잘에게로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왜 굳이 킬티나갈까지 가야 하는 거지?"
프레디가 침통하게 물었다.
"이 몸을 하고 캘커타 시의 이 지옥 같은 날씨를 견뎌야 한다니 끔찍해요. 더구나 험프리스 박사는 이제 너무 늙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어요."
올리비아가 구차하게 이유를 설명하자 프레디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지만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킨잘은 킬티나갈에 온 올리비아를 진심으로 반겼다.
"올리비아, 정말 잘 왔어요. 여기서 부디 마음 편히 지내길 빌어요. 당신의 집처럼 말이에요."
킬티나갈로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정말 오랜만에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다.
몇 주 동안 올리비아는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녀는 킨잘로부터 요가를 배웠고, 도서실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킨잘까지도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가장 즐겼던 것은 킨잘의 두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열두 살 먹은 타룬은 검은 눈빛을 지닌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그는 이 왕가의 법적 상속인으로 철저한 교육 아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쌓아가는 중이었다.
아홉 살짜리 소녀 타라는 아주 쾌활하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오빠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았지만 자주 응석을 부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인도에 온 후 처음으로 올리비아는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되찾았다. 모든 구속과 긴장이 사라졌다. 그녀는 인도의 시골이 풍기는 목가적 분위기에 흠뻑 젖은 채 한가로이 산책을 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볏짚을 나르는 농부들과도 마음을 터놓고 담소를 나눴다. 올리비아는 영원히 이런 평화로움과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바랬지만 그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자정이 조금 지난 한밤중에 아기를 출산했다. 몬순 지방의 사나운 폭풍우가 하늘을 뒤엎을 듯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고 사나운 바람만큼이나 격렬한 통증이 올리비아를 괴롭혔다. 고통의 파도는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그녀는 마치 칼로 살을 베어내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진통이 오는 동안 내내 올리비아는 계속적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 사이로 그녀를 달래는 킨잘의 목소리가 섞어져 나왔다.
"올리비아, 참아요. 고통이 길지는 않을 거예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깊게 더 깊게"
산파의 능숙한 손이 올리비아의 몸 위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그녀의 출산을 도왔고 킨잘의 다정한 목소리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제 마지막 한 번이야, 올리비아 최선을 다해 힘을 줘 봐요. 자, 이제 거의 끝났어요, 끝나간다구 자, 어서"
마지막으로 올리비아는 격렬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칼로 살을 째는 듯한 처절한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몸 밖으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는 것을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고통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죽음과도 같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러 시간이 흐른 후, 올리비아는 향긋한 꽃내음 속에서 잠을 깨었다. 올리비아와 주위에는 그녀의 회복을 바라는 이들이 보내온 많은 꽃과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출산을 도왔던 의사와 산파, 여종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던졌다.
"이제 끝났나요?"
올리비아는 있는 힘을 다해 단 한 마디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래요. 오래전에 끝났어요."
킨잘의 아름다운 얼굴이 올리비아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제 시작이에요. 예쁜 아들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여지껏 느껴 보지 못했던 뭉클한 감정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고통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킨잘이 작은 강보 하나를 올리비아의 옆에 가만히 놓아 주었다. 그녀가 그 강보를 향해 얼굴을 돌렸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는 붉은빛에 주름이 많이 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회색빛의 형형한 눈동자 그 눈빛은 아기의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약간 주저하며 손가락으로 아기의 볼을 만져 보았다. 비둘기의 솜털과 같은 부드러움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져 왔다. 그녀의 출산을 도왔던 산파가 올리비아의 앞섶을 젖혀 주었을 때, 약간 부끄러움을 느끼며 올리비아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갑자기 아기의 주름진 얼굴 사이로 조그만 입이 열리고 그녀의 젖꼭지를 강하게 빨기 시작했다.
자신의 품속에 있는 아기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올리비아는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올리비아에게 찾아들었다. 그것은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동이었다.
"눈물을 닦아요, 올리비아 프레디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앞에서 눈물을 보여선 안 돼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올리비아는 킨잘의 말을 듣고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얼마 후 프레디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베개로 등을 받친 채 앉아 있었고 머리는 단정히 땋은 채였다.
한동안 프레디는 강보 속의 아기를 아무런 감동의 빛도 없이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굽혀 아기의 뺨에 키스를 하는 그의 얼굴이 몹시도 창백해 보인다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고생 많았소, 올리비아 아직 회복이 안 된 것처럼 보이는군."
그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아니에요, 프레디 평소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여보 당신이 이렇게 와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든든해요."
그가 얼굴을 붉혔다.
"내가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소? 소식을 받자마자 곧장 달려왔소"
그는 올리비아로부터 손을 빼내며 아기의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아기가 정말 예쁘군, 그렇지 않소?"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 프레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올리비아가 그것을 가늠해 보기도 전에 그가 서둘러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소. 친구들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든"
상처받은 듯한 프레디의 얼굴이 올리비아를 괴롭혔다.
"프레디, 제발 며칠만 함께 머물러 주세요. 마하라자 영주님도 기뻐할 거예요. 그와 함께 당구나 오리 사냥도 즐길 수 있구요."
그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오, 올리비아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곤란을 겪는다구. 우리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거든"
그가 우울한 표정을 띤 채 올리비아의 등을 토닥거려 주곤 말없이 방을 빠져 나갔다. 자꾸만 처져가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되뇌었다.
"미안해요, 프레디 정말 미안해요."
프레디가 돌아간 후 올리비아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킨잘의 말처럼 하나의 고통이 끝나고 또 다른 고통이 찾아들었다. 그녀를 둘러싼 거짓과 허위들, 기괴한 결혼, 비밀스러운 출산, 지금 그녀에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전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얼굴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얼마나 더 세상을 속이며 살아갈 수 있을지 올리비아는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슬픈 목소리로 되뇌었다.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지 오, 하나님 라벤던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려 주시길"
이런 기도 속에서도 올리비아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들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브리짓트 부인과 죠수아 경, 그리고 아더랜섬에게 자신의 출산을 알리는 긴 편지를 쓰면서 올리비아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 주는 가족들을 속인다는 사실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기는 그녀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행복감을 주었지만 라벤던을 쏙 닮은 외모는 그녀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이 아이는 라벤던을 너무나 많이 닮았어요. 난 그것이 두려워요."
"올리비아, 백인종 중에도 회색빛 눈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많아요. 아무도 아기와 자이 라벤던을 연결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킨잘의 위로도 올리비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프레디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가 라벤던의 아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그 순간부터 이 아이와 나는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킨잘, 나는 그것이 정말 두려워요."
어느 날, 마하라자 영주가 올리비아의 방으로 찾아왔다. 마하라자는 올리비아가 출산을 위해 자신의 궁궐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의 말벗을 해주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려 애를 썼었다.
그들은 인도의 정치문제에 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누며 때론 열정적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신분의 차이와 격식을 버리고 서로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 중에는 자이 라벤던의 이야기가 자주 오르내렸다. 마하라자가 그녀와 라벤던의 관계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킨잘이 얼마나 비밀을 잘 지켰는지 올리비아는 알 것 같았다.
"올리비아, 정말 축하합니다. 아주 예쁜 아들을 얻었다.지요? 킨잘이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아이에게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고마워요. 이렇게 찾아 주시니 영광이군요."
그들은 차를 마시며 여느 때처럼 세상의 이야기들로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다. 올리비아의 사회생활에 대해 마하라자는 깊은 관심을 가진 듯했고 인도의 모든 여성들도 그녀처럼 자신의 재능을 펼치길 바란다는 말도 하였다.
"올리비아, 제가 돌아가기 전에 아기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영광을 가질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신다면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올리비아는 유모에게 아기를 데려 오도록 하였다.
"아기가 누구를 닮았나요? 어릴 적에는 알아보기가 무척 힘들죠 우리아이들도 그랬거든요."
유모가 아기를 데려오자 올리비아는 슬며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하라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들을 유심히 살폈다. 유모가 안고 있는 강보에서 나는 소리로 보아 아기는 깨어 있는 듯했다.
유모가 아기의 검은 머리칼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겼다. 마하라자가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유모로부터 아기를 받아 안았다.
잠시 동안 아기를 바라보던 마하라자의 눈빛이 서서히 당혹감으로 흔들리는 게 올리비아의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미소는 금세 얼어붙었고 괴로움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올리비아는 마하라자가 여전히 창백한모습을 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아기의 이마에 조심스러운 키스를 하고 마하라자가 유모의 손에 아기를 넘겨 주었다. 그는 가슴속에서 붉은색의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낸 후,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인도의 전통의식대로 금화 한 닢을 꺼내 포대기 속에 넣어 주었다.
"올리비아, 킨잘의 말대로 당신은 정말 용기 있는 여성이군요. 내가 그동안 당신의 용기를 과소평가한 듯싶습니다. 당신과 아기에게 신의 축복이 영원히 가득하길 빕니다."
올리비아의 미소가 굳어졌다.
"당신은 우리 모자에게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정말로 필요합니다. 내가 만일 당신이라면, 아기를 위해 자이를 용서할 겁니다."
"누구도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영주님, 저는 제 소신대로 살아 나갈 겁니다. 누구의 개입도 원하지 않습니다."
'영주'라는 공식 호칭이 가까웠던 두 사람의 사이를 순식간에 멀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하다가 쓸쓸한 미소와 함께 말을 했다.
"올리비아, 자이는 돌아올 겁니다."
"그가 돌아오건 그렇지 않건, 그것은 이제 제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는 매섭게 말을 되받아쳤다.
"영주님의 친구는 결코 제 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그래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게 다시 돌아오지 못해요. 영주님은 모르시겠지만, 자이는 죠수아 경의 딸이자 나의 이종사촌 동생인 에스텔을 데리고 유유히 이곳을 떠났답니다."
마하라자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배어 나왔다.
"올리비아, 자이의 복수 행각이 지나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정말 좋은 친구분을 갖고 있군요. 어느 누가 그런 패륜아를 위해 영주님처럼 그렇게 확실한 변호를 할 수 있겠어요. 부러울 지경이에요."
그녀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마하라자는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올리비아, 라벤던은 나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마하라자의 진실한 한 마디에 올리비아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냉소적인 말투가 갑자기 쑥스럽게 느껴졌다.
"알아요. 영주님과 킨잘의 사랑과 배려가 아니었더라면 전 아마 미쳐 버렸거나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늘 감사하고 있어요."
"올리비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친밀감을 갖고 있다면 내 말을 들어야 해요. 인도를 떠나세요. 인도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충고에 올리비아는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정리가 잘되지 않는군요. 무엇 때문에 제가 떠나야 하죠?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자이가 돌아오면 당신은 불행해질 거요."
"불행해진다구요? 무엇 때문에요. 그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상처도 줄수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마하라자가 동정어린 눈길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자이가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한 사람인지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자이는 자신의 아들이 버커스트의 성(姓)을 갖고 자라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당신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지도 모릅니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올리비아가 킬티나갈에서 돌아왔을 때 프레디는 집에 없었다. 대신 아이를 돌볼 메리 링이라는 유모가 올리비아를 맞았다.
메리 링은 브리짓트 이모가 적극 추천한 중년 여인으로 성격이 쾌활하고 아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메리 링 이외에도 집안일을 도와줄 늙은 하녀 한 명도 새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성격이 매우 쾌활했으며 나이에 비해 일도 잘하는 편이어서올리비아는 무척 안심이 되었다. 손님을 위해 마련되었던 이층방이 아이와 유모를 위해 새로이 개조되었다.
올리비아는 집에 돌아온 직후, 아들의 이름을 '아모스'라고 지었다.
킬티나갈에서 마하라자의 경고가 있은 후, 올리비아는 자이 라벤던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단순히 싫어하고 증오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가 거의 공포로 다가왔다. 마하라자의 말대로 인도를 떠나는 것만이 그의 마수에서 아모스를 지키고 자신도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프레디가 그날 저녁 만취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는데 뜻밖에도 올리비아에게 서슴지 않고 폭언을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걸 축하해, 내 사랑 축하의 의미로 내게 키스해 주지 않겠소?"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술기운 탓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 아들 어때? 잘 있겠지?"
그가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보던 올리비아는 모든 것을 못 들은 척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신혼여행지에서의 그 끔찍한 밤 이후 이렇게 만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올리비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나의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비애와 절망을 느끼며 올리비아가 간신히 대꾸하였다.
"아기는 잘 있어요, 프레디 신경써 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그만 쉬셔야죠"
"내 아들이 무슨 세례명을 받았지? 이봐, 내겐 분명히 알 권리가 있다구!"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아, 내 아들 후후, 나의 예쁜 아들 내가 그 애의 애비라구 그 애를 낳아 준 애비란 말이야"
프레디의 잔인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송곳이 되어 올리비아의 가슴을 찔러왔다. 견디기 힘든 통증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아픔을 참으며 힘들게 말을 했다.
"당신만 허락해 준다면 아이에게 아모스 씬이라는 세례명을 주려 해요."
"오, 아모스 아모스라"
그가 비웃듯이 허공을 향해 웃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그가 행동만큼 그렇게 실제로 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 전에 그 조그만 녀석의 얼굴을 다시 한번 봐두는 것이 좋겠지?"
그가 연거푸 딸꾹질을 해대며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사생아"
그의 말이 심한 타격으로 가슴을 쳐왔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아이는 이미 잠들었어요. 내일 아침에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머리가 아픈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괴로워하던 프레디는 올리비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올리비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래요, 프레디 당신의 괴로움을 알아요. 나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군요. 당신을 위해 좀더 잘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프레디는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잠든 프레디를 침대 위에 바로 누이고 깨끗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에 대한 연민이 올리비아의 가슴에 물결쳤으나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올리비아는 혼자였다. 프레디는 깨어난 지 오래인 듯 창가 옆에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와 접혀진 신문이 놓여 있었지만 어느 것에도 손댄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프레디 깬 지 오래됐나요? 기분이 좋아 보이질 않네요."
그의 창백한 두 눈이 그녀를 향해 서서히 선회했다. 무엇인가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올리비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아기를 보러 위층에 갔었소 그 아이는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더군"
그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메말라 있었다.
"나에게 지금 얘기해 봐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지?"
"프레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어요. 난이미"
"나에겐 중요한 문제야!"
프레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나에겐 중요한 문제라구 난 당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겼었다는 사실을지울 수가 없소 그것이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아나? 당신이 여기 이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이상 난 그것을 지울 수가 없소 잊을 수가 없다구!"
그의 말은 마치 상처입은 동물의 처절한 울음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고통을 덜어 주려고 올리비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프레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당신을 결코 속인 적이 없어요. 기만한 적도 없구요. 결혼 전에 난진실을 말했었고, 당신에게 나를 거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었잖아요?"
이 말에 내포된 오만함은 프레디보다는 올리비아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었다. 프레디를 결코 속인 적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녀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며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프레디가 힘없이 대꾸하였다.
"난 결코 당신을 거부할 수 없소, 올리비아"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프레디는 갑자기 올리비아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올리비아의 어깨를 쥐고 있는 그의 팔에 경련이 일어났다.
"지금 갑자기 내 눈앞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나타났어. 그건 나를 조롱하고 야유하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미워하게 만들고 있어 참을 수 없을 만큼"
올리비아는 갑자기 프레디가 자신의 허물을 덮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프레디! 이런 모습의 당신을 본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과거는 그냥 과거일 뿐이에요. 당신의 괴로움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결코 당신이 내게 보여 준 호의를 잊을수 없을 거예요."
"호의라고?"
프레디가 올리비아를 향해 소리쳤다.
"호의, 친절, 우정, 감사 세상에! 내가 준 것은 친절이나 호의 따위가 아니라구 그건 나의 마음이고 나의 사랑이고 나의 인생이었어. 그 보답으로 당신이 내게 준 것은 기껏해야 감사였고 잘 나빠진 동정 따위였지. 설마 오해라고 하진 않겠지? 난 이젠 당신의 그런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당신은 언제나 내게 빚지고 있다고 느낄 테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침대에서 나를 허락하는 것 아닌가? 난 이제 당신의 그 위선이 싫어졌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구"
그녀가 뭔가 할 말을 찾으려 입을 열 때 프레디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니 이젠 더 이상의 거짓말은 싫어. 나를 기만하는 짓은 그만두라구. 나를 당신의 피에로로 만들지 마. 난 지쳤어, 완전히 지쳐버렸다구."
프레디가 의자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눈이 절망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게 억지로 몸을 빼앗겼다는 당신의 말은 거짓이었어. 당신은 그를 사랑했을 거야 그래서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일 테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나? 그를 잊지 못해 괴로운가?"
올리비아는 절망감으로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수없이 했던 고백을 다시 한번 읊조리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프레디 결코 그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께 맹세해요."
그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올리비아는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좋아해요. 내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지 내 가슴을 도려내서 당신께 보여 드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과 애원으로 얼룩진 올리비아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프레디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일어서며 그녀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바보야 나도 그걸 안다구 그러나 이젠 당신의 어떤 말도 내게 위로가 되질 않아 너무 늦었어."
기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몸을 돌렸다.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구."
그날 이후, 프레디는 매일같이 만취된 상태로 돌아왔다. 아모스를 보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일도 다시는 없었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침묵이 그의 이런 모습은 최근 몇 개월 동안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겐 상당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올리비아 앞에 서서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는 그녀의 뺨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다.
"너를 놀라게 했다면 용서하거라, 올리비아 에스텔이 내가 여기에 꼭와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거든"
그는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너무나 아름답구나, 올리비아 이런 어둠 속에서도 말이다. 넌 너무나 매혹적이야"
올리비아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저 이모부님이 이렇게 와주신 것이 무척 기뻐요. 사실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두서가 없었다. 그녀의 겁에 질린 눈은 아더랜섬과 자이 라벤던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랜섬과 자이, 그들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모두 그 자리에 고정된 듯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죠수아 경은 아더 랜섬에게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악수를 나누었다. 랜섬의 얼굴도 라벤던의 얼굴만큼이나 굳어 있었다. 랜섬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죠수아는 아주 편안하고 밝은 표정으로 자이 라벤던을 향해 다가갔다.
"좋은 저녁이군, 자이 라벤던"
"안녕하십니까, 죠수아 경"
긴장이 극도의 냉기를 동반한 채 감돌았다. 그 두 사람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많은 군중 앞에서 부딪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둘의 만남은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던져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이는 숨도 쉬지 않는 듯 경직된 모습이었다. 오로지 그의 관자놀이 밑의 근육만이 그의 마음의 파동을 느끼게 해주는 것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두 눈은 잠시도 죠수아 경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그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그는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도 않았으며 내미는 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몇 분 동안의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다. 죠수아 경이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이자, 자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죠수아 경, 저는 당신이 알고 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런 악수 정도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죠수아 경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래 무엇인가가 있지 분명히 말이야 그런데 그것을 에스텔은 모르고 있었나 보지?"
올리비아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들을 자세히 들을 수가 없었다. 때로 라벤던의 얼굴 위로 놀라움과 분노의 표정들이 지나가는 듯했으며 때론 허탈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올리비아는 문득 방 한구석에 서 있는 에스텔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편인 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존은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에스텔의 옆에 꼭 붙어 서 있었는데 사전에 두 사람의 만남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퍽 태평스런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죠수아 경이 외투 주머니에서 장갑을 빼더니 자이의 발치에 힘껏 던졌다.
"내일 아침 6시 오터로니 탑에서 만나자 무기는 네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해라. 아더와 존이 증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갑 위로 쏟아졌다. 오랫동안 계속되던 침묵이 깨어지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술렁임 속엔 어떤 의미의 기대감도 섞여 있는 듯했다. 최근 캘커타에선 이렇다. 할 결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늦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스텔이 미친 듯이 달려와 아버지에게 몸을 던졌다.
"아니에요, 아빠! 아빠, 저를 믿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렸으며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 역시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빠, 저를 믿어 주시겠다고 맹세하셨잖아요. 아빠,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아빠, 아빠"
"존, 에스텔을 데려가거라"
죠수아는 에스텔을 흘끗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님"
존 역시 몹시 놀란 듯 선뜻 에스텔을 끌고 가지 못했다.
"에스텔을 데려가라니까"
죠수아의 목소리는 근엄했으며 그의 눈빛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냉정하게 빛났다. 반사적으로 존은 에스텔의 팔을 꽉 잡았다. 에스텔은 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에요. 나를 속였어!"
"가지, 에스텔"
존이 소리쳤다.
"아버님의 말씀을 따라야 해"
에스텔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올리비아를 향해 돌렸다. 그녀의 얼굴엔 애원의 빛이 가득했다.
"어서, 올리비아 언니 아빠를 멈추게 해 줘 제발 부탁이야 언니"
그녀의 마지막 말은 흐느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존은 아주 지친 듯한 모습으로 가까운 비상구를 통해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에스텔이 그런 소동을 벌이고 사라진 후에도 라벤던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태연자약하게 방향을 돌려 벽쪽에 놓여 있는 페치카 앞으로 한가로이 걸어갔다. 그는 팔꿈치를 벽난로에 기대고 발목을 서로 교차한 채 거만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죠수아 경의 결투 요청에 아주 대담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죠수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라벤던, 자네는 내게 기쁨을 주기를 거절하는군."
"죠수아 경, 아시겠지만 당신과의 결투는 제 인생의 단 하나의 목표랍니다. 그렇지만 이번 결투는 사양합니다."
죠수아 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라벤던을 향해 욕설을 퍼붓거나 힐책하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씨익 하고 웃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두꺼운 외투 주머니에서 파란 벨벳으로 싸여 있는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우리의 문제를 이곳에서 해결하는 수밖엔 목격자도 아주 많고"
죠수아는 재빠르게 외투를 벗어 랜섬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그 파란 벨벳 묶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라벤던은 그런 죠수아 경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여기서 말이오?"
"왜? 안 될 것도 없지 이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거야 안 그런가?"
라벤던의 회색빛 두 눈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죠수아 경이 들고 있는 것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콜트식 자동권총이었다. 죠수아 경이 총꾸러미를 라벤던에게 던졌다. 그는 반쯤 미소짓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연 것은 라벤던이었다.
"죠수아 경, 저는 이렇게 훌륭한 파티장에서 결투하는 것에 그리 익숙한 편이 못 된답니다. 이런 좋은 계획이 있으셨다면 제게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희미한 미소를 죠수아 경의 면전에 뿌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오늘 굉장히 신경 써서 비싼 옷을 입었거든요. 이 옷을 망치고 싶지 않은데요."
죠수아는 라벤던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두 개의 권총을 미리 준비해 왔다. 모두 총알이 장전되어 있지.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자네에게 우선권을 주겠네. 모두 손질이 잘 돼 있는 최고급 총이지 자네가 원치 않는다면 나 혼자 이 총의 성능을 시험해 볼 수밖에."
무도회장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몇 명의 나약한 여인네들은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으로 인해 모두들 기절할 지경이었다. 연발 권총은 라벤던의 발 앞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라벤던은 그것을 잡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죠수아 경이 침묵을 참지 못한 채 계속 권총을 잡으라고 채근했다. 라벤던은 한참 동안 죠수아 경을 우두커니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죠수아 경, 당신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는 빌린 무기로는 결투를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여전히 빈틈이 없었다. 죠수아 경이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명령했다.
"라벤던, 권총을 잡아라!"
"아니오, 저는 당신과 같은 노인네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죠수아 경 역시 좀처럼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라벤던의 조소 어린 말에도 별다른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아래서 그의 통제 능력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네가 싸움에 응하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죽일 테다. 라벤던 너에게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라"
"꼭 그래야겠습니까?"
라벤던이 조소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죠수아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까요? 과연 나를 쏠 수 있을까요? 그럴 용기가 있는 겁니까? 하하하"
라벤던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은 너무나 이상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고통을 이기기 위한 웃음도 아니었으며 즐거움에서 나오는 웃음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악마의 웃음소리처럼 사람들에게 살벌한 두려움을 주었다.
"당신은 나를 쏠 수 없어요, 죠수아 경 당신은 영원히 나를 쏠 수 없을 겁니다."
죠수아 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자이 라벤던, 너는 틀렸다. 너의 판단력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 주겠다. 너는 모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죠수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좋아, 네가 선택한 길이 죽음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해주지. 그전에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셋을 셀 동안 총을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넌 네가 선택한 길을 가게 될 거다."
그때였다. 제3의 음성이 침묵의 한가운데로 끼어들었다.
"그만둬 그만!"
최면술에 걸린 듯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군중들 사이에서 한사람이 큰소리를 치며 뛰어나왔다. 치안판사 슬로컴이었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무기를 갖지 않은 사람을 쏠 수는 없소, 죠수아 경 이건 불법이오."
"이 일에 상관하지 말고 물러서!"
"물러서라고?"
슬로컴의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해 갔다.
"지금 물러서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소"
그의 얼굴빛은 거의 잿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대로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던 슬로컴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법을 집행하는 '성 그래셔스 머제스티'의 이름으로 이곳에서의 결투를 금하도다.!"
"허튼소리 집어치워, 슬로컴! 이것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법률 따위는 취미 없어."
죠수아 경은 그의 연발 권총을 슬로컴의 불룩한 배를 향해 겨누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거든 여기서 물러서라"
순간적인 공포가 모두의 마음을 덮쳤다. 슬로컴의 두 눈이 놀라서 커지고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 말 없이 슬로컴이 물러설 때 잠시 군중이 술렁거렸다.
"하나!"
죠수아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몸은 움직일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있는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사고력도 정지 상태였다.
"랜섬 씨 제발 제발 멈추게 해줘요."
움직이는 입술은 올리비아의 것이었지만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안 돼"
랜섬의 말은 뜻밖이었고 목소리는 차가웠다.
"어차피 한 번은 닥칠 일이오. 그대로 내버려 둬요."
"그러나 라벤던이 죽을 거예요. 라벤던이 죽을 거예요. 죽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그렇게 입속에서 대답도 없이 의미도 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녀의 혀는 납덩이가 달린 듯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놀랄 만큼의 용기로 그녀는 죠수아 경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라벤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뭔가라도 한번 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발짝을 내딛기도 전에 랜섬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안 돼요, 올리비아"
그의 말투가 보기 드물게 거칠어졌다.
"둘 중에 한 명은 오늘 죽어야 해요. 그래야 이 끈질긴 게임이 끝나는 거요. 그냥 내버려 둬요.!"
올리비아 바로 옆에 서 있는 누군가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그의 손이 경련으로 계속해서 떨리고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둘"
라벤던은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는 듯 자기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여유롭게 쓸어올렸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라벤던의 죽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랐다.왜 나는 그의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녀는 그러면서도 다시 그들에게로 가려고 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지탱해 주듯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는 윌리였다. 그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전하는 무언의 의사표시였다. 이것은 부인이 간섭하실 일이 아니오
"셋!"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사물이 숨을 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벤던이 싱긋 웃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죠수아 경? 또다시 용기가 없어진 겁니까?"
가시처럼 찌르는 말이 '셋'이라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죠수아의 연발 권총에서 굉장한 소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였다. 라벤던의 어깨 뒤로 벨기에산 유리거울이 산산조각이 난 채 부서진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곧이어 들려왔다.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천천히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소란도 가라앉고 차차 충격에서 벗어났다.
그때 연기 사이로 자이 라벤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꼿꼿이 선 채였다. 그는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띤 채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쏴 보시죠, 죠수아 경 이번엔 정확히 조준을 하십시오. 바로 이곳입니다."
라벤던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저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습니다."
천천히 죠수아 경이 다시 총을 들었다. 다시 한번 긴장이 감돌았다. 그가 다시 실수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랜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들은 모두 죠수아 경의 두 번째 저격으로 라벤던이 쓰러지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긴 시간이 지나갔다. 죠수아 경은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총을 잡고 있는 죠수아의 팔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왔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총구 앞에 선 라벤던은 오히려 도전적인 눈빛이었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죠수아 경의 시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듯한 무감각한 것이었다.
죠수아 경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지고, 곧이어 그것은 굉장한 소음을 내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음의 여운이 홀 안에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죠수아 경은 천천히 돌아서서 밖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밖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제6장 사랑과 증오
에스텔의 결혼 만찬에서 있었던 죠수아 경과 라벤던의 결투는 캘커타 시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캘커타 시의 이곳저곳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사건의 뒷이야기로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내곤 하였다.
올리비아는 오전을 침대에서 보냈다.
지난밤의 그 끔찍한 사건이 올리비아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녀는 자신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악마의 화신 같은 라벤던의 귀환, 그녀를 공포스럽게 했던 아모스에 대한 의심 죠수아의 어리석은 도전 그리고 죠수아와 라벤던을 동시에 초대한 에스텔의 그 설명할 수 없는 계략 등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올리비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라벤던이 이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는데 그의 실체를 잊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처사가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자이 라벤던이 아모스의 존재에 대해 뚜렷한 의심을 갖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때 위험스러운 순간이 있었지만 자신의 기지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음에 올리비아는 감사했다.
라벤던과 에스텔은 오늘 캘커타를 떠날 것이다. 라벤던은 아삼 지방으로 먼 무역 여행을 떠나고, 에스텔은 남편과 함께 인도 남부의 코운포어로 떠날 것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길로.
이제 그들은 올리비아의 인생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슬픔과 안도감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후에 올리비아를 방문한 아더 랜섬은 하룻밤 사이에 많이 늙어 보였다. 그는 침울해 보였으며 거대한 숙제를 안고 있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올리비아에게 인사의 키스를 하고 난 후에도 랜섬은 하녀가 두고 간 찻잔만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 어떤 대화도 그녀와 나누려 하지 않았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이 그토록 랜섬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물론 자신의 상관인 죠수아 경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것이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랜섬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젯밤의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를 걱정하면서도 올리비아는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달래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랜섬과 함께 그의 기나긴 침묵에 동참하며 그냥 앉아 있는 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녀 자신이 잘못된 인생행로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죠수아 경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신이 정해 놓은 운명의 굴레 때문에 죠수아 경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끝없는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죠수아 경은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을 어젯밤 라벤던과 함께 마감하고자 바랬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만을 샀을 뿐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것은 더 험난한 굴레를 죠수아 경 스스로의 발목에 채우고 만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그날 오후에, 에스텔의 남편인 존 스터그에게서 짧은 편지가 배달되어왔다. 그는 간단한 사연을 통해 캘커타를 떠나기 전에 올리비아를 만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전해 왔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에스텔의 남편을 굳이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온 하인을 통해 올리비아는 자신의 뜻을 존 스터그에게 전달하였다.
존 스터그가 보내온 편지 한쪽에는 에스텔이 적어 보낸 사연도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그것을 읽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그녀는 에스텔을 잊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에스텔이란 이름을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었다. 올리비아는 다시는 에스텔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아모스가 돌아온 것는 바로 그날이었다. 이제까지 느꼈던 괴로움과 피곤함을 모두 잊은 채 올리비아는 기쁨으로 들떠 아모스를 맞이했다. 아모스는 올리비아가 끌어안고 얼굴을 마구 비비고 하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애의 울음조차도 사랑스럽게 들렸다.
올리비아는 아모스를 끌어안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녀의 아모스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유모인 메리 링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모스는 비록 한 달간이었지만 많이 자랐다. 아모스는 이가 나기 시작했고 그윽한 회색빛 눈동자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메리 링은 아모스의 치아가 하얗게 나란히 나고 있음을 보여 주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공(功)인 양 자랑스러워했다.
그날 하루 내내 올리비아는 아모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모스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쁨을 안겨 주었다. 동그랗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뺨,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망울, 반짝반짝 윤이 흐르는 머리카락, 그리고 끝없는 옹알거림과 맑디맑은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만족감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올리비아는 다시는 아모스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애와 떨어지지 않겠노라고, 힘이 닿는 한 그 애를 보호하고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 올리비아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녀는 무엇보다. 힘을가다.듬어 하와이로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우선 그녀는 그녀의 물품 중 오래된 것들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기로 하였으며 직원들의 임금과 보너스 등을 당장 정산해 주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가족들에게 줄 선물의 목록을 짰으며 자신의 사무용 책상을 깨끗이 정리했다. 밀린 청구서를 지불하였으며, 누적된 문제점들은 가장 적절한 해결방안을 찾아 모두 처리하였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도 올리비아는 집안에 울려 퍼지는 메리 링의 노랫소리와 아모스의 웃음소리로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녀는 진정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아모스와 함께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아버지도 아모스를 안으며 기뻐하실 것이다. 비록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아이는 아닐지라도 이 세상 누구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으며 자랄 것이다. 괴로웠던 지난 일들도 이제는 모든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할퀴고 괴롭혔던 라벤던에 대한 미움, 에스텔에 대한 원망, 프레디에 대한 죄책감도 아모스의 얼굴을 보며 살아가는 세월 동안에 차츰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올리비아는 그동안 쌓여 있던 우편물을 정리하였다.
우편물의 대부분은 결혼 만찬에 초대되었던 사람들로부터 온 인사장들이었다. 올리비아는 그것들을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가능한 한 그날 밤의 기억에서 빨리 헤어나고 싶었다.
하나씩 하나씩 올리비아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함께 했던 자신만의 공간이었지만 올리비아는 조금의 섭섭함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기억들이 괴로움으로 다가올 뿐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서랍을 정리하고 있던 올리비아는 책상 맨 아랫서랍에 놓여 있던 낯익은 목걸이를 발견하였다. 일순, 그녀의 가슴이 쿵 하고 무너졌다. 동시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그것은 먼 옛날의 어느 밤에 강가 호 선실에서 자이 라벤던이 올리비아의 목에 걸어 주었던 은빛 목걸이였다. 올리비아는 그것이 거기에 놓여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올리비아는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이상 이런 싸구려 목걸이를 갖고 있을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자이 라벤던에 대한 끝없는 미련을 떨쳐 버리려는 그녀의 간절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밤, 올리비아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몹시 초조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인가가 맹렬히 그녀를 뒤쫓는 듯한 초조감의 격랑에 떠밀려 좀체로 그녀는 잠들 수 없었다.
그녀를 좀처럼 잠 못 이루게 하고, 끝없이 불안하게 하고, 가슴 아리게 하는 무엇 그것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그녀를 쉴 수 있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을 괴롭히는 그것을 찾아 방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을 잠 못 들게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은빛 목걸이 무엇인가를 끝없이 강요하는 듯한 강렬한 느낌 때문에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녀의 해맑은 핑크빛 피부에 비해 은빛 목걸이는 이곳저곳 바래고 칠이 벗겨진 볼품없는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이 가치 없는 목걸이가 무엇때문에 자신을 잠 못 들게 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듯
침대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침대 시트로 목걸이를 깨끗이 닦았다. 그것이, 그리고 그런 행위가 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재촉하는 마음 밑바닥의 모든 것이 비록 올리비아의 마음을 한없이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디와 결혼하면서, 당신은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그에게 넘겨 주었소"
자이 라벤던의 그 말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그것이 아모스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올리비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올리비아의 마음에 또다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녀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겐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올리비아는 목걸이를 자신의 옷가방 안에 던져 버렸다. 자기 스스로 포기했던 '나의 것,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시 찾겠다고 주장하는 자이라벤던의 뻔뻔스러움이 올리비아를 다시 격노케 하였다. 올리비아는 때가 되면 그 목걸이를 버려야겠다고 스스로의 마음에다. 큰 소리로 맹세하였다.
자이 라벤던은 올리비아를 '매춘부'라고 불렀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에 대해서, 그녀가 왜 프레디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채, 알려고 하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그는 그녀의 인생에다. 매춘부라고 낙인을 찍어 버렸던 것이다.
미국에서 가축의 엉덩이에 낙인을 찍듯, 인도에서 영국인의 사생아는 영원히 그 얼굴에 낙인이 찍힌다오 일찍이 그는 그의 삶에 찍혀 버린 거부할 수 없는 낙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이제 거친 손을 들어 그녀에게 낙인을 찍었다. '매춘부'라고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윌리가 물었다. 팔로샴 회사 사무실이었다.
"배 안의 식사는 정말 형편없답니다. 제가 약간의 마른 음식과 아모스를 위해 신선한 우유를 뽑아 줄 염소 두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윌리의 세심한 배려에 올리비아는 그동안 품었던 불안들이 모두 사라지고 진정으로 희망과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옴 느꼈다.
"아뇨, 윌리 씨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너무나 감사합니다."
윌리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를 느끼며 올리비아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모스에게 저녁을 먹일 시간이었다. 웃고 재잘거리며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아모스에게 저녁 식사를 먹이는 것을 올리비아는 특히 즐겼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올리비아는 절대로 뛰어다녀서는 안 된다는 닥터 험프리스의 경고도 무시한 채 서둘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뛰다시피 달려가 아모스가 즐겁게 놀고 있을 놀이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올리비아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에스텔이 그녀의 품에 아모스를 안고 앉아 무엇인가를 맛있게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텔! 에스텔"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쯤 캘커타를 떠나 코운포어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남편인 존 스터그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 광경은 그녀의 무서운 상상력이 만들어 놓은 연극 무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안전에서,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잊어버리고 싶었던 에스텔이 올리비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모스에게 직접 저녁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 믿을 수 있겠어? 요. 녀석이 나를 꼭 물고 있어 몇 개 안 되는 이빨로 너무나 귀엽지?"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모스에게 손가락을 물리는 장난을 쳤다. 올리비아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냉정한 미소를 띠며 그녀는 문 옆에 기대어 섰다.
"에스텔!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된 일인지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언니를 보러 왔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에스텔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언니를 만나려고 문을 막 들어서는데 이 녀석이 울고 있지 뭐야 나는 아모스가 돌아와 있는지도 몰랐거든 메리 링이 달래고 있더군. 저녁 먹일 시간이라고 하기에 내가 대신 먹이겠다고 했어. 언니 아모스는 너무 예뻐 안 그래?"
"너는 지금쯤 코운포어로 향하는 배 안에 있어야 할 텐데"
"내가 존을 졸랐어. 언니를 만나고 가겠다고 출발 일정을 조금 연기했어."
에스텔이 품에 안고 있던 아모스를 어르기 시작했다. 그런 에스텔을 보고 아모스는 천진난만하게도 자지러질 듯이 웃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벼락같이 소리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여기서 나가!"
올리비아의 눈빛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한 가지 두려움이 맹렬한 소용돌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제발 그것만은 올리비아는 에스텔에게서 재빨리 아모스를 빼앗아 안아 들었다.
"여기서 나가!"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네가 다시 한번 내 아들에게 손을 댄다면 나는 너를 죽여 버릴 테야"
천천히 에스텔이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도 올리비아만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용없어. 올리비아 언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언니 너무 늦었어. 나는 아모스의 아버지가 자이 라벤던이라는 것을 알아 숨기기엔 너무 늦었어. 아모스를 내게 돌려줘 그 아이에게 아직 저녁을 덜 먹였어. 배가 고플 거야."
그녀의 말을 확인이라도 해주듯이 아모스가 소리 내어 울며 올리비아 품에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에스텔이 아모스를 안기 위해 팔을 벌렸고, 올리비아는 귀신에 홀린 듯 에스텔에게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넘겨 주었다. 에스텔은 다시 방바닥에 주저앉아 오직 이것만이 자신의 의무인 양 묵묵히 아모스에게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끝없는 절망이 올리비아를 감쌌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실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올리비아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녀의 분노는 서서히 패배감으로 변해 갔다. 올리비아는 문 근처에 놓여 있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나를 보기 위해 출발을 늦추었다고? 나를 보려 한 이유가 뭐지?"
"존의 부탁 때문이야 존은 내가 올리비아 언니를 만나야 하고, 만나서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어."
에스텔의 목소리는 물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언니는 내게서 좀더 일찍 설명을 들었어야 했어.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어. 난 언니가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알아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는지"
갑자기 에스텔이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막아둔 봇물이 터지듯이 한없는 눈물을 쏟아 내며 서럽게 울었다.
"아모스"
그녀의 입에서 아모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올리비아 언니 나는 언니가 왜 그토록 나를 미워하는지 알고 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올리비아는 지친 모습으로 일어나 에스텔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에스텔 나는 단지 네가 이곳을 떠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야. 그냥 떠나 주기만 하면 돼 나를 제발 그냥 내버려 둬."
그러나 에스텔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자이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분신이 있다는 것을."
올리비아는 거대한 파도처럼 치솟는 분노로 온몸이 덜덜 떨려옴을 느꼈다. 분신이라구? 그 악마의 화신 같은 인간의 분신이라구?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언니는 아모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프레디와 결혼한 거야 언니의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을 테고, 마음속에선 아직도 자이를"
"닥쳐! 에스텔"
올리비아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에스텔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말을 계속해 갔다.
"언니 나는 너무나 바보였어. 자이가 언니의 인생을 그렇게 망쳐놓았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어."
"너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에스텔 이제 나는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아 지난 일은 지난 일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싶어. 그냥 잊고 싶을 뿐이야."
올리비아는 얼굴 가득 후회의 빛을 띠고 앉아 있는 에스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에스텔, 모든 것이 너무 늦었어.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언니, 내 이야기를 들어!"
에스텔이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갑자기 냉랭해졌고 두 눈은 푸르게 빛났다.
"언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니를 위해서 분명히 해 둘 것이 하나 있어. 자이와 나는 연인관계가 아니었어.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구. 맹세할 수 있어."
그녀가 시선을 떨군 채 얼굴을 붉혔다.
"우린 결코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어"
올리비아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가소롭다는 듯이 에스텔의 말을 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구? 에스텔, 너는 언젠가 나에게 편지를 했었어 그때 너는 벌써 그 편지 내용을 다 잊었단 말이니?"
"그래, 기억해"
냉정한 자세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에스텔이 계속해서 지난 시절의 그 사건 속으로 올리비아를 이끌고 들어갔다.
"나도 한때는 미친 듯이 그를 사랑했어. 아니 사랑한다고 믿었어 그가 제안한 사랑의 도피가 너무나 근사하게 생각되었어. 그리고 나는 자이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이가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나를 뉴욕이든 런던이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결코 그것이 사랑의 표현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거야."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구차한 변명에 불현듯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애써 자제했다. 에스텔이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나는 자이를 따라 강가 호로 갔어 그때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찬란한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어. 그러나 강가 호가 항해를 시작하면서 내 가슴속에 있던 모든 꿈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어. 자이가 변했던 거야 항해가 시작된 첫날 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아름다운 꿈을 꾸며 자이의 선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만해!"
올리비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에스텔 며칠 전 너는 내게 그것이 엄마 아빠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한 철없는 행동이었다고 말했었어. 그런데 이제 그만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아니, 언니 언니는 들어야만 해. 언니가 듣고 싶지 않더라도 나는 계속하겠어."
갑자기 문으로 달려간 에스텔은 방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가 버렸다.
"앉아, 언니 지난날의 모든 일들을 언니는 들어야만 해 언니가 듣지 않겠다면 내가 강제로 듣게 하겠어."
에스텔의 두 눈은 불타는 듯했으며 그녀의 두 뺨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어 아무것도"
올리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스텔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자이가 마침내 선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너무나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어. 그는 선실에 들어서자 창문에 걸려 있던 커튼을 마구 찢어대기 시작했어.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는 나를 한쪽 벽에 세워 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내게 말하기 시작했어. 그는 나를 경멸한다고 말했어. 나를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형편없는 아이라고 했어. 그는 나를 영국으로 데려가 엄마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했어. 그런 후에, 그는 나를 아주 이상한 시선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보았어.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 최소한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 아모스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하던 말을 멈추고 서둘러 아모스의 침대로 다가가더니 그 애의 손에 장난감을 쥐어 주었다.
아모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 속에 한없는 애정이 배어 있었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얼굴에 머물고 있는 그 한없이 따뜻한 애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시 창 쪽으로 다가온 에스텔은 창을 등진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화가 났어. 그가 너무도 냉정하게 나를 대했기 때문이야. 그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 뒤로 나를 선실에 가두어 버렸어. 목적지인 사우스템포에 도착할 때까지 난 그렇게 선실에 감금돼 있었어 배 안에서 나는 너무나 답답하고 불안했어.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 그런데 사우스템포에 도착하자, 그는 이번에는 너무나 상냥한 표정으로 돌변하여 선실의 자물쇠를 없애 주는 거였어."
계속된 이야기로 지쳤는지 에스텔은 얼음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자이는 나에게 세상의 수레바퀴 밑에 은폐되었던 모든 진실을 말해 주었어. 모든 것을 결코 믿을 수 없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 나는 캘커타로 돌아온 후 랜섬 아저씨에게 내가 들었던 것을 말해 주었어. 랜섬 아저씨는 모든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시더군."
유리컵을 들고 있는 에스텔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유리컵을 깨뜨리지 않게 위해 그것을 두 손으로 간신히 잡고서 탁자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왜 자이가 갑자기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난 죽을 것만 같았어. 아니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
에스텔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지만 두 뺨을 적시는 눈물엔 어느 때보다도 진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일들이 아주 많았어. 엄마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 내가 들어설 때면 황망히 말을 중단하곤 했던 두 분의 모습 그리고 또 생각이 나는 것은 식당에 붙어 있던 할머니의 초상화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올리비아의 두 눈이 문득 뭔가를 상기한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식당에 붙어 있던 템플우드 노부인의 초상화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 그 눈동자, 그 눈빛을 가진 사람을 올리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자이 라벤던, 그리고 아모스까지도
그렇다. 언젠가 식당 벽에 걸린 그 초상화의 액자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다가 그녀는 그것을 보았고, 느꼈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 엄청난 비밀을
"아모스의 눈과 자이의 눈"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결코 깰 수 없을 것만 같은 냉랭한 분위기였다. 한참 후 올리비아가 신음처럼 말을 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자이가 이모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감히 입 밖으로 내어지지 못했던 이야기가 드디어 밖으로 드러나 버렸다. 그것이 비록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할지라도 올리비아는 새로운 고통을 느꼈다. 울면서 에스텔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알고 있었군, 알고 있었어. 언니는 언제나 빈틈이 없군. 그렇지만 자이의 말 한마디는 내게 날벼락과 같았어.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에스텔은 새삼스럽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에스텔의 모습이 돌연 가엾게 여겨졌다. 그녀에게도 지금의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녀 역시 자이가 펼쳐 놓은 운명에 굴복한 가엾은 희생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자이가 왜 함께 도망치자고 나를 유혹했었는지 그 확실한 이유를 알았어. 자이는 우리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거야. 엄마 아빠에게 근친상간보다. 더 가혹한 복수는 없었겠지 그는 나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었어. 부모님이 나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었겠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 아빠가 내게 조금이라도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으로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진 않았을 텐데. 올리비아 언니 자이가 계획했던 복수는 이루어진 것 같아. 엄마와 아빠 모두가 나의 결백을 믿어 주지 않아.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내가 아무리 울면서 애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아. 자이는 많은 사람들이 확고하게 믿게 하기 위해 나를 선실에 가두고 시간을 끌었어. 사람들은 올리비아 언니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선실에 갇혀 있던 그 지옥 같은 순간들을 자이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상상했겠지. 엄마와 아빠는 평생 괴로워하며 지낼 거야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너무나 괴로워. 언니 미칠 것만 같아. 나를 믿어 주는 것은 존뿐이야. 그만이 나를 이해하고 믿어 줘."
에스텔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니, 언니도 나를 믿지 않겠지?"
에스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올리비아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말 속에는 진실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 모두를 믿어도 좋을지 올리비아는 얼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위선이 껍질을 벗는다. 해도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이 라벤던이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이었다.
올리비아의 오랜 침묵이 에스텔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언니,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아모스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이렇게 길게 언니에게 설명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아모스 때문이라도 진실은 밝혀져야 돼. 그래서 이야기한 것뿐이야."
에스텔은 그사이 잠들어 있는 아모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니, 아모스를 사랑해 줘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 물기로 젖어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다시 회복한 냉정한 얼굴로 에스텔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에스텔, 아모스의 성(姓)은 버커스트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옛날 내가 했던 그 한 번의 실수는 이미 잊혀졌어. 내가 이곳을 떠나면 모든 사람들이 나와 아모스를 잊을 거야.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알겠니?"
올리비아가 에스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내게 열쇠를 돌려주지 않겠니?"
열쇠를 건네주는 에스텔의 손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결국 언니도 나를 믿지 않는군.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설명을 더 해야만 해 언니가 믿지 않더라도"
에스텔이 올리비아의 손을 뿌리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날 밤, 내가 아빠를 파티장으로 오게 한 것은 미친 짓이었어.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아빠는 맨 처음 나의 말을, 올리비아 언니에게 했던 그대로의 모든 고백을 순순히 믿는 것 같았어.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나 절망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에 그런 척하셨는지도 모르지. 아빠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내 권유대로 자이와 화해를 하겠다고 했어. 모든 원한을 씻어 버리겠다고 했어. 자이를 아들로 인정하겠다고 했어. 자이가 아빠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건 안 하건 관계없이 아빠의 말을 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 결과적으로 아빠는 단 한순간도 자이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어. 나는 아빠가 자이와 나눈 악수로 모든 오해가 풀려지리라 기대했었어. 너무나 어리석은 기대였지만 아빠가 그토록 자이를 미워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 모든 것이 나의 실수였어."
"그래 알고 있어 너는 자이와 아버지를 정말로 화해시키고 싶었겠지. 그러나 너는 자이를 잘못 생각한 거야. 복수의 화신인 그가 그렇게 순순히 화해의 악수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어."
"하지만 언니 내가 자이를 그 파티에 초대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어. 그것은"
에스텔이 말하려는 그 다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녀는 얼른 에스텔의 말을 끊었다.
"그만, 에스텔! 이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 그 일은 이제 그만 잊고 싶어 그만"
"그래 언니 자이에 대한 언니의 증오를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는 나의 오빠야 그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어. 특히 사랑에 관한 것을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나면 밝혀질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올리비아가 문을 연 채 에스텔이 나갈 수 있도록 비켜섰다.
"에스텔, 내일 코운포어로 떠나거라 네가 존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길 기원하겠다. 나는 아직도 이모부와 네가 행복하게 지내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단다. 잘 가라, 에스텔"
"알아, 언니가 왜 나로부터 자꾸 아모스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지를 언니는 자이가 아모스의 존재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거지? 내가 자이에게 그 사실을 알릴까 봐 두려운 거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올리비아와 에스텔을 동시에 뒤덮었다.
"언니가 그렇게 의식하는 것도 당연해 나도 부정하진 않겠어. 내가 지난 일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언니에겐 모욕이겠지. 그렇지만 언니 나는 아직껏 언니를 존경하고 있어. 언니에게 누가 되는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어. 자이는 아모스의 존재를 모를 거야 맹세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는 에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조심해 가거라 에스텔"
"하와이로 가는 여행이 즐겁기를 바라겠어. 잘 있어, 언니"
자고 있는 아모스를 한번 돌아본 후, 에스텔은 떠났다.
사흘 후, 에스틸과 존 그리고 죠수아 경을 태운 배가 코운포어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장의 편지가 올리비아에게 배달되었다. 그것은 존 스터그에게서 온 것이었다. 거기엔 짧지만 올리비아를 격렬하게 뒤흔드는 충격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죠수아 경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캘커타를 떠나 잠시 정박한 버드완이란 포구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마을의 한 목사가 읊는 기도문 속에서 십자가도 없이 땅속에 묻혔다고 했다. 간단한 사망진단서와 함께 죠수아 템플우드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존은 다음번 정박한 항구에서 그 소식을 전해 왔다. 그는 비슷한 내용을 아더 랜섬에게도 보냈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모든 것이 너무나 허탈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비집고 몰아쳐 왔다.
그녀는 이모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는 이모부가 그리웠다. 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그녀를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자신의 사업에 관한 한, 그리고 자이 라벤던에 관한 한 누구보다. 야비하고 냉혹한 이모부였으나 그는 언제나 올리비아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주었던 분이다.
올리비아는 아더 랜섬을 만나기 위해 템플우드 가를 방문했다. 주인을잃은 하인들은 수의를 덮어 놓은 듯 우울해 보였고 집안은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적막감으로 흡사 무덤 속 같았다.
랜섬은 집에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한적한 곳에서 자신의 가장 절친했던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터였다. 올리비아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즉시 에스텔에게 애도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죠수아 경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걸"
닥터 험프리스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뭐가 잘못된 건가요?"
올리비아는 떨리는 가슴을 가누며 간신히 그에게 물었다.
"아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 아니,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뭐, 사실은 그런 이야기지 물론 자세하게 검진을 해봐야겠지만 말이오."
"그래서 위험을 넘길 동안 저를 보고 이렇게 꼼짝 않고 누워있으란 말인가요?"
"한 달이면 될 거예요, 올리비아 그리 길지 않아요."
"한 달이라구요?"
올리비아는 새파랗게 질렸다.
"저는 다음 주에 배를 타야 해요."
"그래, 나도 들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몰라요. 하와이 여행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그는 눈썹을 치켜뜨고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설마 아기를 잃고 싶은 것은 아니겠죠?"
"그럼요. 물론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봐요, 올리비아 에스텔에게 연락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 애는 당신의 유일한 혈육이잖아요?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을 타고 간다면 에스텔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와 간호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분명한 의도도 밝히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험프리스가 돌아가자 올리비아는 밀려오는 절망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곳을 떠남으로써 자신의 암울했던 과거에 종말을 고하고 싶었던 계획이 한 달이나 뒤로 미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만일 만일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녀의 인생은 또다시 엉망이 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옛날처럼 킬티나갈로 숨어들어 한 달을 보낼 수도 없다. 마하라자의 친구인 라벤던이 그곳을 빈번하게 드나들기 때문이었다. 라벤던의 그 날카로운 눈에서 벗어나 올리비아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곳 캘커타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물론 아모스를 메리 링과 함께 하와이로 먼저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최후에 행해져야 하는 선택일 뿐이었다. 아모스와의 이별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라벤던은 아삼 지방의 여행에서 일정보다. 늦게 귀환할 예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도 올리비아에겐 위안이 되질 않았다. 그녀는 늘 그녀에게서 가혹하게 등을 돌리는 운명 때문에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올리비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간이 지옥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가끔 그녀를 방문하는 랜섬도 그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점점 더 침울해져 갔다.
그는 방문 때마다. 그날 발부된 신문들을 한 뭉텅이씩 사 들고 왔다. 그곳엔 한때 무역왕으로 추앙받던 죠수아 경에 관한 기사가 계속해서 실려 나오고 있었다. 랜섬은 그 기사들을 계속해서 읽음으로써 떠나 버린 친구에 대한 자신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직도 대부분의 기사들은 에스텔의 결혼만찬식 밤에 있었던 라벤던과 죠수아의 결투에 대해 싣고 있었다.
한때 용기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던 죠수아 경은 연발 권총을 사용한 자살로 그 오명을 깨끗이 벗을 수 있었고, 라벤던은 은근히 야비한 존재로 비난받고 있는 입장이었다.
신문들은 템플우드 가의 어린 죠수아에 대한 기사도 실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랜섬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다소 과장된 필체로 동화처럼 엮어놓곤 하였다. 랜섬은 그 문장들을 올리비아에게 크게 읽어 주곤 하였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신문기사를 읽어 주던 랜섬이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신문 읽기를 멈추고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이제 그만 에스텔을 용서해 줘요. 그 불쌍한 애는 부모를 모두 잃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결혼 만찬식 날 그 애가 비록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애의 인생도 어쩐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군."
랜섬의 말을 들으며 올리비아는 자신이 아직은 완전하게 에스텔을 용서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와 자이를 둘러싼 비극이 눈물겨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말속엔 몇 가지 의심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와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올리비아에게 새로운 괴로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화제를 바꾸었다.
"랜섬 씨 전에 집을 내놓으신 것은 팔렸나요?"
랜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라벤던이 돌아온 후 아무도 우리 집을 보러 오지 않아요."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죠수아 경이 죽고 없는 지금에도 라벤던의 복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랜섬 씨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자이 라벤던이 바라는 복수란 무엇인가요? 우리를 어디까지 몰고 갈 생각인가요? 이모부의 죽음으로도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요?"
"올리비아 너무 흥분하는 것 아닌가요. 건강을 조심해야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난 그래 난 그가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요. 자, 그 이야기는 접어 두고 저녁 식사나 들지 않겠어요?"
그들은 간단하게 카레스프와 호밀빵으로 저녁을 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갑자기 랜섬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죠수아는 총을 쏠 수 없었을 거요. 그럴 수가 없었던 거지 차라리 자신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뭐라구요?"
불쑥 말을 꺼낸 랜섬 때문에 몹시 놀란 올리비아가 되물었다. 한쪽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 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 라벤던의 그 의기양양함 그는 죠수아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으리라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었죠? 그 말은 옳았어요. 죠수아는 자신의 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거요."
그는 혼란스러운지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자이가 죠수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예 알고 있어요."
그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올리비아, 용서해요. 당신에게 진작 말을 해주려 했지만 이 모든 것이 죠수아와 브리짓트가 관계되는 일이다. 보니 그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죠수아와 자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어요."
그 순간, 올리비아의 마음속에 자이 라벤던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고 싶다는 갈망이 물결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이 라벤던의 인생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지 두렵기도 하였다. 그런 갈등의 틈바구니를 뚫고 랜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이를 그토록 미워했으면서도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연민? 아니야, 그건 아닐 거예요. 그런 값싼 동정이 아닌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이 죠수아의 마음속에 있었겠지요. 죠수아는 자이 라벤던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소. 왜냐하면 자이 라벤던이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에스텔을 더럽혔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지요. 에스텔은 극구 부인하였지만 죠수아는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소. 그런 부끄럼 때문에 거의 미쳐 가고 있었지. 죠수아는 라벤던을 죽이는 것만이 그 수치스러운 나날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오. 그러나 막상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을 때, 그의 마음속엔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들었을 겁니다. 올리비아, 지루하지 않다면 죠수아가 라벤던의 엄마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랜섬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죠수아가 그녀를 만난 것은 아삼 지방에서였지요. 그때 죠수아는 젊었었지. 그때 그는 아삼 지방에서 새로운 종류의 차나무를 찾아내기 위해 깊은 산 속을 돌아다니며 연구를 하는 중이었다오. 그는 이미 영국에서 브리짓트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혼자 인도에 와서 사업에 몰두하면서 브리짓트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이었소. 죠수아의 어머니인 템플우드 부인은 죠수아와 브리짓트를 위해 캘커타에 근사한 저택을 지어 놓고 있었고, 모든 것이 아무런 무리 없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죠."
랜섬은 지난 과거가 그대로 살아나는지 감회어린 표정으로 한동안 허공에 시선을 두다가 다. 부질없다는 듯이 긴 한숨을 뱉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소. 차나무를 찾기 위해 산속 깊이 들어갔던 죠수아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산속을 헤매게 되었던 거요. 정글 속으로 처음 들어갔던 그는 무척이나 당황했던 같았소. 그때 마치 거짓말처럼 한 소녀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던 겁니다. 그녀는 키가 몹시 컸고, 커다란 눈망울과 길고 아름다운 머리를 가졌었지죠. 수아의 표현에 의하면, 물의 요정 같았다고 하더군 죠수아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반해 버렸소. 그는 현재의 자신의 위치나 할 일, 아름다운 신부인 브리짓트와 근엄한 어머니, 그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오직 그녀에게만 몰두했었다고 했소. 그는 그녀와 며칠 동안 꿈같은 사랑을 나누었소, 모든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오. 어쨌든 그는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왔죠. 그때까지도 그는 꿈속에 젖어 있는 듯 늘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곤 했죠. 그 후 브리짓트가 인도에 도착했고, 그녀의 도착으로 인해 죠수아는 너무도 쉽게 아삼 지방의 물의 요정을 잊을 수 있었지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말이오."
올리비아는 숄을 끌어당겨 어깨를 덮었다. 순간, 그녀의 가방 안에 놓여 있을 은빛 목걸이가 떠올랐다.
"죠수아가 말한 물의 요정은 얄궂게도 그 지방 원주민 족장의 딸이었어요. 그녀가 백인과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그들 부족 사이에 돌자, 그녀는 엄격한 부족의 법률에 의해 추방되었소. 그녀가 갖고 있었던 것은 약간의 은 제품뿐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팔아 죠수아가 살고 있는 캘커타로 멀고도 험한 여행을 시작했죠. 그것은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여행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여행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물어물어 죠수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녀는 그때 거의 아기를 낳을 지경이었어요. 그러나 당사자인 죠수아는 이미 그녀를 잊은 상태였어요. 그녀를 본 순간 죠수아는 간담이 서늘해졌지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던 것 같소. 다행히 브리짓트와 템플우드 부인은 교회에 가고 집에 없었죠. 그럼에도 죠수아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당황해하는 것 같았어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고, 그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무런 판단도 서지 않는 듯했소. 나는 그녀를 황급히 하인 숙소로 옮기도록 지시했소. 그러나 그녀가 채 모습을 감추기도 전에 브리짓트와 죠수아의 어머니가 교회에서 돌아왔던 거요. 나는 그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젊은 정원사의 아내라고 둘러대었소. 두 사람 모두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날 밤,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바로 그 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던 거요. 죠수아의 아들이었어요. 세탁부의 아내와 딸이 산파 역할을 해주었죠."
목이 타는지 랜섬은 포도주 한 잔을 급히 마셨다.
"그녀의 아들은 아버지의 성(姓)을 가질 수 없는 혼혈아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태어난 셈이었소. 그 아기는 태어나면서 이미 자신이 비극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정말 몹시도 크게 울어 댔었죠. 그리고 그 애는 자신의 태생을 숨길 수 없는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모부의 어머니인 템플우드 부인을 말씀하시는군요. 저도 그 초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브리짓트 이모도 그 아이를 보았나요?"
"브리짓트는 몰랐어요. 그러나 템플우드 부인만은 속일 수 없었죠 자이를 보고 온 부인은 죠수아에게 그 소녀와 아이를 집에서 당장 내보내라고 말했죠. 처음에 죠수아는 거절했어요. 그들은 밤새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마침내 자이 라벤던을 하인들의 숙소가 있는 울타리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죠수아의 말에 템플우드 부인이 동의함으로써 그들은 논쟁을 끝낼 수 있었죠."
순간적으로 올리비아는 그들의 야비했던 결정에 놀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죠수아와 나는 자이를 보기 위해 하인들의 숙소를 찾아갔던 적이 있소. 죠수아는 자이를 보는 순간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소.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들이란 존재 때문이었는지 그는 몹시 당황한 듯이 보였죠. 나는 그때 죠수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을 지금도 기억한다오. 그는 아들을 얻은 기쁨과 아들로 인해 받을 사회적 지탄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하는 것 같았소. 그 뒤로 그는 몹시 우울해 보였고 늘 불행한 것 같았어요. 그에게 있어 사회적 체면은 중요한 것이었소.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하는 무역업자였기에 그를 둘러싼 나쁜 평판은 그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거요. 게다가 그는 브리짓트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죠. 그는 자신의 사생아로 인해 그녀와 헤어지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요."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올리비아는 좀더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어쩐지 랜섬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그럼 자이가 그 집에서 성장하는 동안 이모는 한 번도 자이를 만나지 못했다는 건가요? 어떻게 한 집 울타리 안에 함께 존재하면서 그럴 수가 있죠?"
"올리비아도 알다시피, 브리짓트는 원주민을 상당히 경멸하고 싫어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녀에게 있어 원주민들은 모두 사기꾼이었고, 도둑놈이었으며, 거짓말쟁이일 뿐이었죠. 그녀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보았다. 할지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요. 자이에겐 자라면서 한 가지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뚫어지게 보는 것이었소. 그는 죠수아의 서재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몇 시간씩 죠수아를 들여다보곤 했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오. 그날도 유리창 밖에 서 있다가 죠수아와 눈이 마주친 자이가 다급한 나머지 달아나다가 넘어지고 말았소. 까진 무릎 위로 피가 흘렀는데, 죠수아는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그의 피를 닦아 주고 무릎을 단단히 묶어 주었던 거요. 그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눈길이었다오. 그러나 내가 그 장면들을 줄곧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곧 소년을 밀쳐 버린 후 화가 난 듯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더군요.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부성애로 인해 몹시 고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그 뒤부터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난폭한 모습으로 자이를 대하기 시작했죠."
"라벤던은 이모부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언제 알았을까요?"
"글쎄요. 그것은 라벤던만이 아는 일이오."
"그의 어머니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하인들 중 누군가가 그들 중에도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요."
랜섬은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랜섬 씨, 궁금한 것이 있어요. 자이 라벤던이 그토록 죠수아 경을 미워한 것이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단지 자신을 버린 친아버지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아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랜섬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그래요, 그 대답에 모든 요점이 있는 것 같군요. 오늘 이토록 장황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는 여송연에 불을 붙이더니 깊고 길게 연기를 들이켰다. 그는 무엇인가 어려운 결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피어낸 담배꽁초들이 재떨이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 날 브리짓트 부인은 저녁 식사에 사용할 채소를 구하러 식료품 저장실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있던 자이와 부딪치게 되었지 근 8년이란 세월을 한 집에서 자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브리짓트는 자이와의 갑작스러운 부딪침 이후, 그 아이가 죠수아의 아들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어요. 아마도 그의 회색빛 눈동자 때문이었겠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매우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겠죠 그녀가 죠수아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거라 말했을 정도니까요."
고뇌에 쌓여 울부짖는 브리짓트 이모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날그날 밤, 죠수아는 미친 듯이 자이에게 채찍질을 해대었죠. 마치 성난 사자처럼 자신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어요. 어린 자이에게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거요. 그 채찍질은 비단 자이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애의 영혼까지 휘감아 버려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거요.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어요. 우리를 둘러싼 모든 불행은 아마도 그날 밤 싹텄을 겁니다. 브리짓트는 죠수아의 불륜과 그의 사생아, 몇 년을 두고 벌어진 기만 때문에 죠수아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했고, 결코 죠수아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브리짓트는 그날 밤 사라져 버린 자이가 어느 날 반드시 되돌아와 자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렸고, 그런 까닭에 그녀의 삶은 암흑으로, 암흑으로만 이어졌다오."
랜섬은 말을 중단하고 옆에 놓여 있던 물을 또다시 급히 마셔댔다. 무엇인가가 그를 몹시도 목마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정말로 자이가 되돌아왔죠. 그때 브리짓트의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소.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올리비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에스텔이 더렵혀졌건 아니건 간에 브리짓트는 그 애를 결코 딸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그만큼 그 애의 삶은 계속해서 불행할 것이라는 점이라오. 자이는 자신이 맹세했던 것처럼 브리짓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셈이죠. 딸과 남편 모두를 아! 내가 그것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었나요? 그래, 내가 그 이야기를 빠뜨리고 해주지 않았군요. 어느 날 갑자기 몇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라벤던이 모습을 나타낸 적이 있었지. 그날 그는 브리짓트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었소.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겠소. 당신의 가족을' 회고해 보면 그땐 에스텔이 막 태어난 때였고 아마도 자이는 그때부터 이미 에스텔을 그의 약속은 2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이루어지고 만 셈이지. 브리짓트에게서 끝내 에스텔을 빼앗았으니까."
올리비아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렇다면 자이의 뻔뻔스럽고 혐오스러운 배신행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망가져 버린 나의 인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라벤던은 나조차도 그의 복수 행로의 희생양으로 오래전부터 겨냥하고있었단 말인가. 이모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이 집안의 오랜 비극적 내력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나까지도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단 말인가.
"만약 그 후 자이가 한 사람의 불쌍한 혼혈아의 모습으로 캘커타에 돌아왔다면 죠수아는 관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러나 자이는 그렇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는 한 사람의 당당한 경쟁자로 돌아온 거요. 당시에 차 무역업계의 일인자가 되어 있던 죠수아에게 그는 도전장을 낸 것이죠. 나는 자이가 갑자기 사무실에 나타나 죠수아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리던 날처럼 그렇게 비틀거리고 당황하던 죠수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소. 우리 차 무역업계에서 자이의 존재는 마치 전설 같은 것이었지. 자이는 유럽과 인도 모두에서 놀라울 만한 신용을 얻음으로써 차의 수입과 수출 모두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소. 그것은 아마 그가 영국과 인도계의 혼혈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캘커타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투자자들에게 놀랄 만한 이익배당을 해주었기 때문에 모든 투자자들은 그에게 자신의 돈을 맡기지 못해 안달을 했어요. 그는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이미 캘커타의 창고업계와 선박업계를 석권해 나가기 시작했지. 그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선적할 물건들을 창고에 보관할 수 없었고 외국으로 물건을 운송할 수 없었어요."
한때 그녀는 랜섬으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이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그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킨잘로부터 들을 때는 가슴에 차오르는 동정심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과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죠수아가 꿈꾸었던 모든 야망들이 자이에 의해 무너지려 하고 있었어요. 그가 꿈꾸었던 미국으로의 차 수출, 소규모 무역업자들을 위한 개별포장 혁신, 그리고 원거리 무역을 위한 증기선의 확보 그 모든 것이죠. 수아의 힘에서가 아닌 자이에 의해 먼저 이루어지고 말았던 거요. 게다가 이전에 발견했던 차나무 농장에 죠수아는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어요. 차나무 재배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서 더 이상 비싼 값을 주고 차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고, 차와 함께 같이 들여와야만 하는 아편의 공포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지. 그러나 유럽인들의 노동력은 너무나 비쌌거든요. 더구나 차 재배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구할 수조차 없었답니다. 이때 라벤던이 이 일대에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던 거라오. 그는 자신의 동족인 이곳 원주민들을 이용하여 값싼 노동력으로 광대한 차 농장을 조성할수 있었어요. 그곳 원주민들은 대부분 차 재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값싸고 유효한 노동력들이었죠 죠수아는 라벤던을 질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한편으론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죠. 자신이 오랫동안 쌓아온 아성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거든요. 죠수아는 어떻게 하든 자이를 저지하고 싶었어요. 그의 남은 인생은 오직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죠."
올리비아는 지금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들과의 끝없는 사업경쟁 그것도 목숨을 건 경쟁이라니
"게다가 자이가 에스텔과 함께 이곳 캘커타를 떠나 버렸을 때, 죠수아는 그를 죽여야 한다고 결심했죠. 그러나 막상 그런 순간에 직면했을 때 그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어요. 아들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럴 수 없었던 거요. 그리고 죠수아는 그 순간 다시는 자신이 자이를 이길 수도 죽일 수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을 겁니다. 영원한 패배자로서"
또 한 번 그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물을 마셨다. 오랜 이야기에 지쳤을 법한데도 그는 고집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자이와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죠수아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복수가 멈추지 않는 것 당신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들 말이오."
그는 오랫동안 천장의 모서리 어느 한 곳을 응시하더니 마침내 모든 걸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감추었던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었어요. 그래, 맞아요. 자이는 죠수아만큼이나 나를 증오하고 미워했어요. 그것은 내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지. 한 번 더 우리는 옛날로 되돌아야겠군요. 죠수아가 한때 물의 요정이라고 말했던 자이의 엄마는 한 사람의 평범한 하인으로 변해가고 있었어요. 그녀를 둘러싼 신비감이 사라지자 죠수아의 눈에 그녀는 그저 비천한 원주민 여자일 뿐이었지. 죠수아는 자신이 저지른 죄업 때문에 그나마 그녀에게 다소간의 친절을 베풀 수 있었어요. 그러나 죠수아는 항상 불안했지. 그녀가 무의식중에라도 자신과의 비밀을 폭로할까 봐 전전긍긍했다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심지어는 자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어요. 철저히 침묵한 셈이죠. 자이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은 아마 자이만이 알고 있을 거요. 결국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죠수아를 위해 끝까지 비밀을 지킨 셈이랍니다."
올리비아는 랜섬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진정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이모부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요.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삶의 전부였지 그러나 죠수아는 끝없이 불안해했어요. 그녀가 비밀을 폭로할까 봐. 그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체면이 손상될까 봐 노심초사했던 거요. 그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예방책을 써야만 했어요. 우리는 그녀에게 아편을 쓰기 시작했소"
올리비아의 가슴이 쿵 하고 무너졌고, 동시에 랜섬의 시선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템플우드 부인의 지시에 따라 죠수아와 나는 우린 미친 사람 같았지. 그녀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소. 우리의 사주를 받은 하인 몇 명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아편을 주입시켰죠. 그녀를 아편중독이라는 굴레에 묶어 두기 위해 자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아편 없이는 단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중독자가 되어 있었어요. 물론 그 때문에 우리의 비밀은 지켜질 수 있었지만"
따뜻한 불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기로 인해 손끝이 몹시 차가워옴을 느꼈다.
랜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회한과 절망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뺨이 눈물로 젖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지 모르는지 벽의 한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부시시 일어나 의자 뒤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는 거울 앞으로 걸어가더니 코트를 입기 시작했다. 마치 중요한 일을 하듯 단추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끼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살아 있는 얼굴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요, 올리비아 그래서 죠수아와 내가 자이의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 우리는 우리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들어 순진무구한 그녀를 무자비하게 희생시켰어요. 어린 자이가 보는 앞에서 자이는 나를 증오하고 있어요. 난 그것을 알고 있지."
그는 두 손을 포켓 깊숙이 집어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많은 세월 동안 자이는 죽어간 엄마를 생각했을 겁니다. 고통에 가득차서 내가 그의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가 그걸 요구한다면 난 그렇게 할 결심이 되어 있다오."
랜섬은 자신의 지루한 이야기들을 들어 준 올리비아에게 치하의 말을 한 후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올리비아는 아직까지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새벽 3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근 몇 시간 동안 아야기를 나눈 셈이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실패, 좌절, 진실, 이런 것들 때문에 고민해 왔다. 자이 라벤던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가. 자이 라벤던이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면 그녀 역시 그래야 마땅하지 않는가. 자이가 아모스를 차지하려 한다면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그를 물리치면 되는 것이다.
서둘러 이곳을 떠날 필요도 없다. 당당히 맞서면 된다. 죠수아는 그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지만 그녀는 정확히 그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일 지금처럼 움츠려 있는 이런 모습을 아버지가 봤다면 나에게 무슨 말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녀의 가슴을 꽉 메우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덩어리들이 뭉클뭉클 무리를 지어 그녀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에스텔에게 또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였다. 버커스트 저택의 응접실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놓여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으로 만들어진 요정들, 금빛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별들, 여기저기 뿌려져 하얀 눈을 연상하게 하는 솜들과 여러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 등이 트리 위에 요란하게 걸려 있었다. 집안은 음악으로 가득 찼으며 식구들의 웃음소리도 쉬지 않고 들리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이행복한 가정을 연상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올리비아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캘커타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되는 셈이었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 이번 크리스마스는 남다른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에스텔이 이곳 버커스트 저택에 함께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급히 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올리비아가 보냈을 때, 에스텔은 곧바로 기쁨에 넘친 답장을 보내왔다. 몇 주일 동안 에스텔은 이곳에 머무를 터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에스텔은 올리비아의 품에 안겨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마치 낯선 거리에 홀로 버려져 갈 곳을 몰라 하던 어린아이가 비로소 쉴 곳을 찾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때 이후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이 올리비아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스텔은 놀랄 만큼 순종적이었으며 항상 조심스럽게 굴기 위해 노력했다. 에스텔은 또한 올리비아의 일을 돕기 위해 애썼고 경직되었던 올리비아의 감정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던 그들의 관계는 부드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만삭의 여인들이 흔히 느끼는 권태로움과 나른함에 빠지곤 하였으나 에스텔의 명랑한 재잘거림으로 잠시 동안 그것을 잊곤 하였다. 그만큼 에스텔은 변해 있었고, 성숙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며칠 후, 올리비아가 에스텔에게 말했다.
"에스텔, 이모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내게 말해 주지 않겠니?"
"아니, 언니 난 아직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에스텔은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스텔,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줘 너도 그래야만 평안을 찾을 수 있어 네 마음속에만 담겨 있는 그 이야기는 너를 계속해서 상처 입힐 뿐이야."
에스텔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뜨리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어 대었다. 죠수아 경의 처참한 자살과 그에 얽힌 비밀들 때문에 에스텔이 너무나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그만 질문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에스텔로부터 그녀가 자이 라벤던과 함께 보낸일 년이란 세월과 죠수아 경의 죽음과의 연관 관계를 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앞으로 올리비아가 자이 라벤던과 투쟁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 같은 것이었다.
자신을 엄마로부터 버림받게 하고, 끝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만든 장본인인 자이 라벤던을 에스텔이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하나의 혈육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올리비아는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 과정의 뒤편엔 반드시 어떤 또 다른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고 올리비아는 믿었던 것이다.
자이는 이제 얼마 후면 아삼 지방 순시를 끝내고 캘커타로 돌아올 터였다. 그러면 같은 사업 관할 구역에서 일하면서 올리비아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올리비아는 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심지어 '대결'이란 성격을 띠게 될지라도 말이다. 라벤던은 반드시 그녀에게 보복할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할 터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올리비아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댈 것이다.
그녀는 그와 싸우고, 그와의 싸움에서 버티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모스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날 저녁, 아모스의 겉옷을 만들어 주기 위해 뜨개질을 하고 있는 올리비아에게 에스텔이 다가왔다.
"내가 선실에서 풀려났을 때"
갑자기 말을 꺼낸 에스텔 때문에 올리비아는 뜨개질바늘을 놓칠 뻔했다.
"우리는 또 한 번 심한 말다툼을 했어. 나는 그의 어리석은 복수심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를 이야기했지. 지난 시절의 이야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은 공평치 않다고 말했어. 나의 설득때문이었을까, 갑자기 그가 미소지었고 그 후로부터 나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대해 주기 시작했지. 자이는 '여동생'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던져 주는 새로운 기쁨들을 누리는 것 같았어. 그것은 예전의 그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일 테니까. 혈육이라는 그런 기쁨 그런 어느 날이었지.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어. 나 역시 그에게 대들었지.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나를 거칠게 다루면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말했어."
그녀의 철없는 말에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스텔다운 발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니, 나는 단식투쟁은 하지 않았어. 배 안의 요리사를 유혹해서 몇 가지 마른 음식들을 침대 밑에 숨겨 두고 있었지. 그를 위해 내가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물론 자이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어. 그는 내가 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믿었지. 그는 무척 당황하는 것 같았어. 만약 내가 정말 죽어서 시체를 치우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어? 나흘 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쟁반 위에 음식을 담아 내 선실로 들어섰어. 나는 최소한 그가 부드러운 말로 나를 달래 줄 것이라 기대했지. 그러나 그는 그게 아니었어. 쟁반을 내 코 밑에 밀어 넣더니 권총을 꺼내 내 머리에 갖다 대었어. 그리고 그는 화가 난 음성으로 내게 말했어 '먹어라! 그러지 않으면 이 권총이 불을 뿜을 거다. 먹지 않으면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는 것을 하늘에다. 맹세할 수 있다.'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니, 에스텔?"
"물론 먹었지. 나는 그가 총으로 나를 위협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음식을 먹을 결심을 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말했어. 다시 한번 나를 무시하면 정말로 죽어 버리겠다고 했지. 나의 협박에 그는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런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심 무척 두려웠지. 그러나 그는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꼭 안아 주었어. 그런 후에 그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어. 내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말이야. 그리고 그는 나를 믿기 시작했어.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는 내게 많은 말을 해주었고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었지."
"그렇게 친절해진 자이 라벤던이 어째서 네가 한 통의 편지조차 부모님께 보내는 것을 막았단 말이냐?"
에스텔의 얼굴에서 황망히 미소가 사라지고 갑자기 어둠이 밀려들었다.
"올리비아 언니, 나는 몇 번이나 편지를 쓰려고 했는지 몰라. 그러나 나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어. 엄마 아빠는 나에게 한 번도 자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어. 모든 비밀을 알아 버린 그때 나는 편지에다 과연 무어라 써야 했을까?"
에스텔의 얼굴이 분노를 억제하느라 붉게 물들었다. 자이로부터 들었던 과거 속의 엄청난 비밀을 깊이깊이 숨기려고 했던 부모를 향한 분노 에스텔이 입술을 깨물며 한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하다가 거칠게 내뱉었다.
"엄마 아빠가 좀더 솔직히 모든 걸 말해 주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 말과 함께 다시 입을 다물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던 에스텔이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일까?"
올리비아는 갑자기 지금의 분위기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뜨개질에 전념하고자 했지만 마음의 평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뜨개질하던 것을 멈추고 그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녀는 갑자기 에스텔의 지난 이야기에 진력이 났고 자이 라베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지겨웠다. 에스텔의 모든 것이 자이 라벤던과 연관되어있는 것 같고 어느새 에스텔의 모든 사고와 의지가 자이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아서 불쾌감마저 일었다. 올리비아의 귀에 자이 라벤던의 이름이 자꾸만 언급되는 것은 흉칙한 독충이 그녀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에스텔"
그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올리비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쉬거라. 에스텔, 괴로웠던 기억은 잊어. 그것은 너의 영혼을 파괴하는 나쁜 생각들이야 이제 곧 너도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 하루쯤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하자."
에스텔은 그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닥터 험프리스가 올리비아의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장기여행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대신 그는 그녀가 다시 회사 일을 하는 것은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락한다는 말을 하였다.
올리비아는 기뻤다. 계속해서 집안에서만 지내는 것보다는 잠깐씩이지만 일을 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녀의 의견에 반대했다.
"올리비아 언니,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아기를 위해 좀 더 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올리비아는 말 없는 미소만으로 의견을 대신했다.
"올리비아 언니, 왜 프레디가 있는 영국으로 가지 않는 거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 프레디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밝힐 때가 아니었다. 에스텔이 자이와 가까운 것이 확실한 지금으로선 그럴 때가 아니라고 믿었다.
"프레디는 아모스의 아버지가 누구란 것을 알고 있어?"
"그래"
"그렇다면 프레디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않겠군."
그것은 빈틈없는 추론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성숙했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래, 맞아"
에스텔은 자신의 한때의 실수가 빚어낸 비극에 새삼스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올리비아 언니 정말 미안해.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옛날 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에스텔의 참담한 표정을 읽으며,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구? 정말 가끔 올리비아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옛날로, 아주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도록 운명 지워진 행로는 결과적으로 그녀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음을 알기에, 그녀는 이미 과거와의 단절 속에서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잊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얻어진 것은 아모스 하나만으로 족하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 다짐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에스텔, 우린 너만이 나쁘다고 비난한 적이 없어 우리 모두가 이 비극에서 공모자이면서 희생자라고 생각해"
"그래, 우리 모두가 다같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는 않아. 그것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나는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 모두를 잃었어.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게 엄마와 아빠에 대한 원망은 그대로 남아 있어. 왜 자이를 그렇게 몰인정하고 비열하게 대해야 했는지. 그들은 나만을 위해 주었지. 그것이 나를 눈뜬장님으로 만들었어. 세상의 진실을 바라볼 수 없는 그리고 그런 후에 엄마와 아빠는 나를 마치 더러운 짐승을 보듯 바라보았어. 나의 결백을 의심하였지. 마치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멀리했어. 나는결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올리비아는 에스텔이 아직도 그토록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없이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어떻게든 위로의 말을 건네 주려 했지만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질 않았다. 긴침묵 끝에 올리비아가 겨우 한 마디 해주었다.
"에스텔, 그렇지만 너는 오빠를 얻었잖니?"
"그래! 모든 사람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오빠, 언니조차 외면했던 오빠, 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치르고 오빠를 얻었어. 그래, 자이는 나의 오빠야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혈육이고"
윌리는 사무실로 돌아온 올리비아를 기쁜 마음으로 반겼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감춘 채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을 뿐이다.
그는 당분간 그녀가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에 그는 매우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올리비아가 좀 더 이곳에 머물러 주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최근의 업무 진척상황에 대해 그녀에게 보고했는데, 팔로샴의 최근 경영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 하여 올리비아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보고를 다. 끝낸 윌리의 얼굴에 갑자기 뭔가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윌리 씨, 뭔가 문제 되는 것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보세요."
"부인, 부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랜섬 씨를 재정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템플우드 가문과 랜섬 씨가 맡고 있는 죠수아 경의 회사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를 되살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윌리 씨, 그들은 아직 법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적이 없어요."
올리비아는 화가 났다.
"랜섬 씨는 아직도 많은 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최악의 경우 그것을 처분해서 우리의 손실을 막아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가 단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약간의 지원을 해주는 것뿐입니다."
"약간이라구요?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그의 차 농장도 조선소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심지어 그는 폐선이나 다름없는 수선화 호도 경매 처분하려 하고 있어요. 물론 라벤던 씨가 그것을 사려고 하고는 있습니다만"
"라벤던이?"
그녀는 멍한 눈으로 윌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삼 지방에서 돌아왔나요?"
"예"
그녀는 그가 캘커타로 되돌아올 것에 대비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귀환 소식을 듣자 그녀의 가슴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이 덜덜 떨려왔고 귀에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수선화 호의 경매에 그가 참가하려 한다구요?"
"예 소문이 그렇던데요."
"왜일까요? 그는 이미 여러 척의 쾌속 범선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무엇 때문에 폐선이나 다름없는 그 배를"
"아마도 불쏘시개로 사용하려는 모양이겠죠 그 배의 가격이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다른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엔 종잡을 수 없는 수많은 추측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
'자이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랜섬의 나쁜 상황을 이용해서 무언가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배를 다시 팔아 이익을 챙긴다.? 아니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런 폐선을 누가 다시 산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여기에는 자이의 어떤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상식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기괴한 발상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금전적인 이유와는 별개의 사연 때문에 그것을 사들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올리비아는 그 대답을 결국 기대하지도 않았던 통로를 통해 알아냈다. 그 대답을 전해 준 사람은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코운포어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예정보다. 훨씬 오랫동안 캘커타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존은 에스텔과 올리비아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오해의 벽이 허물어지기를 원했기에 에스텔의 캘커타 생활을 줄곧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존은 올리비아에게도 에스텔과의 사이가 호전되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별도로 보내 왔었다.
캘커타에서의 마지막 날 밤, 에스텔과 올리비아는 저녁 식사 후 함께 산책을 하였다. 1월의 밤은 상쾌한 기분을 안겨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원한 날씨였으며 그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가볍고 정겨웠다.
우글리 강변에는 희부연 물안개가 가득 끼어 있었고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자이를 만났어"
에스텔의 나지막한 고백에 올리비아는 희미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 같았어. 그날 밤의 그 돌발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무척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어."
어둠 속이었는데도 올리비아는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혹시 자이가 아모스에 대해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니?"
그날 밤 이후 그녀의 마음을 괴롭혀왔던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질문을 하는 올리비아 역시 떨고 있었다.
"언니, 왜 그런 생각을"
올리비아는 순간 자신이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아니야, 물론 아니야!"
에스텔이 상처받은 것 같았다.
"언니는 실제로는 내가 자이에게 그 얘길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거지? 언니,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군. 내가 그렇게 맹세했었는데"
너무나 미안한 심정으로 올리비아가 에스텔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뿌리쳤다.
"언니는 그 실수로 인해 내가 얼마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 모를 거야. 이제 그만 지난 일들을 잊어 줄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줄 수 없어?"
"그래, 에스텔 그래"
에스텔은 둥근 돌 위에 쓰러지듯 앉아 망연히 강가를 바라보았다.
"그래, 에스텔 지난 일을 잊을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구나."
"아니, 언니 노력하면 될 거야 그럴 수 있어."
"너는 자이에 대해 그의 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쉽게 잊으라고 말할 수 있겠니?"
에스텔이 실망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차가운 피가 흐르는 냉혈동물이야 그도 역시 지난 일은 잊어버려야 해"
그리고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올리비아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두 팔로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올리비아 언니, 내 말을 잘 들어 봐. 내가 하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야. 맹세해!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는 나를 여동생이라 부르는 것을상당히 어색해했어. 그의 엄마가 죽은 후, 아무도 가족이란 이름의 따독한 존재가 곁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거야. 그러나 그 후, 그는 진정으로 나를 여동생처럼 대해 주었어. 나를 보호하고 걱정해 주는 혈육으로서의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거야"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그토록 심하게 굴었던 것을 진정으로 후회하는 것 같았어. 물론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는 내가 존과 결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어.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였고 열심히 설득을 해주었지."
갑자기 에스텔이 말을 멈추곤 올리비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망울 속에 가라앉은 아픈 의미들이 올리비아의 가슴에 부서져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 우리는 그때 아프리카의 한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지. 그는 자신의 선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와도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어. 밤에는 갑판 위를 미친 사람처럼 헤매다녔고, 낮이 되면 또 그렇게 엄청난 고통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는 거였어. 너무나 무서운 그의 표정 때문에 아무도 그의 곁에 가려 하지 않았지."
그 밤들을 기억하면서, 에스텔은 더욱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별빛이 참 아름다웠지만 올리비아의 눈은 어둔 강변에 박혀 있었다.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 그를 위로해 주고 그와 아픔을 함께 하고 싶었어. 그러나 그에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았어. 그는 내가 곁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지 그에게 뭔가 절망스러운 일이 닥친 것 같았어. 그의 목소리는 상처 입은 맹수와 같았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어."
에스텔과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이와 내가 가까워지면서 그는 내게 우리 엄마와 아빠,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해주곤 했어. 그가 의도적으로 화제에서 제외하고 싶어 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언니였어."
"그만해, 에스텔 난 그의 이름을 듣고 있는 것조차 역겹구나. 그는 내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해"
"올리비아 언니 그는 달랐어. 올리비아 언니에 관해 내가 해주었던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그는 하나도 잊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어. 아주 사소한 것까지 말이야."
올리비아는 그녀의 말을 막고 싶었다. 짓이겨지는 가슴을 견디기엔 자신이 너무 연약한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이런 그녀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것이 내가 올리비아 언니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야. 나는 이곳에 돌아와 아모스를 보는 순간, 올리비아 언니를 향한 자이의 진정한 마음을 전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어. 아프리카 항구에서 그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은 캘커타로부터 전해져 온 언니의 결혼 소식 때문이었어."
올리비아는 주저앉고 싶었다. 쿵 끝내 가슴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 사이로 희부연 물안개처럼 고통의 그림자가 들이쳤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이는 영국에서 나와 존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열어 주었어. 그는 나의 혼수품과 결혼 의상, 그리고 가구들까지 모든 것을 최고급품으로 마련해 주었지. 마치 자신이 결혼하는 것처럼 존의 가족들도 모두 자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
에스텔의 두 눈에 눈물이 반짝이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그는 나에게 뭔가 보상을 하고 싶어 했어. 엄마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내게 뭔가 꼭 줘야겠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사람 같았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내가 가엾게 느껴진 것 같았어. 올리비아 언니, 그의 가슴속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어 난 그것을 언니에게 말해 주고 싶어 자이는 나의 오빠야 내가 자이를 용서했다면 언니도 그럴 수 없을까?"
에스텔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손이 올리비아의 손등 위에 얹어졌다.
그의 가슴에 흐른다는 따뜻한 인간의 피 그의 피가 흐르는 아모스
에스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용서보다 더 단호한 복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늘의 고통을 운명처럼 떠나보내며 모든 걸 다 용서하는 것도 현명한 일인지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올리비아 역시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며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용서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 몸부림친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단 두 마디였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아무것도 더 이상 없었다. 에스텔은 몹시 슬퍼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어 보였다.
"에스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면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가서 자야 할 시간이다. 너는 내일 먼 여행을 해야 하잖니."
"언니 한 가지만 더"
"아니, 에스텔 내일 아침에"
그녀는 더 이상 이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에스텔의 말이 그녀를 지치게 하고 있었다.
"언니, 내일은 말할 시간이 없어 아니 다시는 그럴 시간이 없을 거야"
에스텔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확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떠나고자 하는 올리비아의 팔을 잡았다.
"내가 선실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했지? 그때 나는 그곳에서 뭔가를 발견했어, 그의 선실은 검소하고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지. 나는 뭔가가 잔뜩 쌓여 있는 방구석에서 옷 뭉치 하나를 발견했어. 붉은색 얇은 벨벳으로 된 네모난 보자기였는데,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자이는 내게 몹시 화를 냈었어. 그리고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어. 그 안에는 기괴하게 생긴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지. 코와 발에 끼우는 은빛 링과 한 짝의 슬리퍼,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된 목각인형들 그런 것들은 내게 아빠의 수선화 호 뱃머리에 붙어있던 어떤 마스코트를 생각나게 했어. 그밖에 두 벌의 얇은 면 블라우스와 스커트 한 벌, 그리고 작게 포장된 아편 봉지가 있었어."
은빛 목걸이 그가 올리비아의 목에 걸어 주었던 은빛 목걸이, 그것 역시 그 보따리 속에 있었을 유품인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내게 소중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오. 자이는 그녀에게 그 은빛 목걸이를 주며 간절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했었다. 올리비아는 어느덧 옛날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엄마의 유품이었어. 그러나 그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 어리석게도 후에 나는 그 보따리에 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그는 내게 몹시 화를 냈어. 그는 미친 사람처럼 마구 나를 욕했고, 내가 끔찍하게 여겨진다는 말까지 했어. 나는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 같이 생각은 되었지만 무엇이 그를 그토록 화나게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어. 그는 며칠 동안 계속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사과했는지 몰라. 다시는 그 보따리에 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어.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에 관해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근데 내가 지금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이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연약한 면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야."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뭔가 그녀의 가슴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자이가 갑자기 수선화 호를 손에 넣으려는 이유가 수선화 호의 뱃머리에 장엄하게 붙어있는 거대한 목각 수호신
'그래 그거야!'
그녀는 서둘러 그의 사촌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스텔, 너의 말은 틀리지 않아. 그렇지만 자이 라벤던이란 이름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단지 나는 그가 아모스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울 뿐이야. 에스텔 내가 희생자라면 너 역시 희생자야. 난 네가 잘살기를 바라고 있어, 존과 행복하게 알겠지?"
"언니, 아모스는 자이의 아들이기도 해"
"아니, 아니야 나는 그를 결코 아모스의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어 아모스는 몇 번이나 말하지만 버커스트 가의 아들이야 그의 이름이 그를 안전하게 지켜 줄 거야 그리고 만약에 그가 다른 이름과 성(姓)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결코 라벤던은 아닐 거야"
에스텔은 절망스러운 한숨을 길게 뱉었다.
"언니, 자이는 아모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어 그런데도 그를 비난할 수 있어?"
"에스텔, 그는 한 번도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어."
"언니 역시 그가 알기를 원치 않았잖아."
계속되는 논쟁 속에서 올리비아는 이런 대화조차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언니, 자이에게 그의 아들에 관해 말해 줘. 그는 결코 언니에게서 아모스를 빼앗아 가지는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안 돼, 에스텔 만약 네가 그에게 얘기한다면 널 용서하지 않겠어."
에스텔은 더 이상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다음날 에스텔은 떠났다. 올리비아는 그녀가 떠나 버린 것이 기뻤다. 지난밤 그들이 나누었던 긴 이야기들은 서로에게 상처만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아의 가슴에 에스텔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던져 주고 떠났던 것이다. 이젠 자이 라벤던이 그녀를 괴롭힐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올리비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이의 가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은밀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된 것이었다.
며칠 뒤였다.
"제가 부인께 자이 라벤던이 돌아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올리비아가 사무실에 채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예 왜요?"
윌리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크게 뜬 두 눈으로 되물었다.
"그가 우리의 신용을 거부했어요. 모이타로부터 오늘 통지가 왔더군요.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배를 이용할 경우 모든 짐값을 미리 선불해 달라고 했어요."
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올리비아 역시 마음이 급속히 냉각되고 말았다. 자이 라벤던이 결국 올리비아를 향한 자신의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선박회사가 팔로샴의 신용을 거부했다면 다른 모든 거래처 역시 그럴 확률이 높았다. 올리비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더욱 거센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윌리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이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어 그에 대항한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자신의 고민을 내부에 숨긴 채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만약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그렇게 따라야죠. 미리 지불할 수밖에요."
윌리가 훨씬 더 나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우리 팔로샴의 능력을 보여 주는 거예요. 우리 이외에 다른 어떤 회사가 그런 능력을 지녔겠어요."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면서도 윌리의 얼굴엔 여전히 그늘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신중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우리 회사의 신용을 거부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마치 불이 점화된 것같이 벌컥 화를 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랜섬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 자이 라벤던을 격분시킨 거예요."
"윌리 씨,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어요. 우린 그냥 돈만 지불하면 되는 거예요. 우린 그럴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녀는 웃으면서 윌리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응시하다가 단정 짓듯이 말했다.
"우린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하면 돼요."
윌리는 그녀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는지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잠시 동안만이라구요? 어떻게 잠시 동안만이라고 못 박을 수 있죠?"
그녀는 윌리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아요. 해결방법을 생각해 봐야죠. 안 그런가요?"
올리비아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윌리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길로 그녀는 랜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랜섬 씨 수선화 호 경매에 자이 라벤던이 입찰 가격을 제시했나요?"
그는 올리비아가 수선화 호의 경매에 관해 이미 훤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상업적 능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그것을 궁금해하죠?"
"왜냐구요? 그가 왜 경매에 입찰했는지 궁금하지도 않나요? 다른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랜섬 씨는 정말로 그에게 그것을 팔 생각인가요?"
랜섬은 몸을 움츠리며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왜 안 되죠? 수선화 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요. 그 배는 더 이상 항해하기도 어렵고 나 역시 그것을 운영할 힘이 없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수선화 호를 타겠습니까? 쾌속선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난 자이의 제안을 받아 그것을 팔아 버릴 생각이오."
올리비아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수선화 호는 질 좋은 버마산 티크와 마호가니 나무, 그리고 수많은 놋쇠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요. 그렇죠?"
"수선화 호가 해체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수선화 호는 죠수아와 내게는 첫 배였소. 당당히 우리의 기를 꽂고 항해였던 죠수아와 나를 위해 처음으로 차를 운송해 주었던 배요. 후에 다른 여러 척의 배가 생겼지만 수선화 호만큼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던 배는 없었소. 그래요, 나는 자이 라벤던이 왜 이 배를 원하는지 모르오. 소문에 의하면 불쏘시개로 쓰고 싶어 한다지요.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관심이 없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요. 난 지쳐 있소, 올리비아"
"랜섬 씨 수선화 호를 고가(高價)에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올리비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랜섬은 여전히 기운이 없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러복이에요. 튜커 선장이 왔을 때, 만나봤던 미국인 말이에요. 튜커 선장이 예전에 저에게 말해 준 것이 있어요. 이제 그것이 진가를 발휘할 때가 된 거예요."
러복은 미국인 면화업자였다. 그는 인도와 미국을 오가며 면화 무역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원주민들을 고용하여 대규모 면화농장 건립을 추진하였지만 그다지 이익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튜커 선장이 인도에 왔을 때, 러복은 그와 함께 올리비아를 찾아와 같은 미국인으로서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튜커는 인도의 밀림지대에서 무한정으로 나오는 목재를 가지고 뭔가 사업을 벌이면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튜커의 생각이 무척 기발한 착상이라고 여겨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비록 러복은 그 자리에서 튜커의 말을 까맣게 잊었지만
이튿날, 올리비아는 당장 러복을 버커스트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러복 씨 저는 당신에게 아주 흥미가 많습니다. 저와 재미있는 거래를 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거래라구요?"
러복이 놀라면서 물었다.
"저와 말입니까?"
"그래요, 당신과요."
"어떤 거래를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제시하는 일은 당신이 주로 해오던 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거랍니다. 우선 첫째 수선화 호 경매에 입찰을 해주세요. 아주 높은 가격으로요."
러복이 급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높은 가격이라구요, 부인?"
높은 가격이란 말과 거래란 말이 동시에 그의 구미를 당기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이 빌어먹을 나라에 도착한 이후 들어 본 가장 멋진 말이기도 했다.
러복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신바람이 나서 그것을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는 올리비아의 제안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응낙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의도를 간략하고 명확하게 설명해 나갔다. 그녀가 설명을 마쳤을 때,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제서야 자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구라고 했습니까?"
러복이 물었다.
"의자나 탁자 뭐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래요, 러복 씨 가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그는 덩치가 컸으며 누런 이와 굵은 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너무나 낙천적인 성품에다, 우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놀라울만큼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내였다.
"이리오세요, 러복 씨"
올리비아는 그가 네 번째 술잔을 비우자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 드리겠어요."
그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살피고 검토하는데 몇 시간을 소비했다. 올리비아의 열띤 설명을 듣는 러복의 얼굴에 서서히 긍정의 빛이 떠올랐다.
"러복 씨, 이제까지 이곳 캘커타에서 이처럼 큰 규모의 무역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나에게 아이디어를 주신 분은 오랫동안 세계 시장을 돌며 무역업을 해오신 분이죠. 그는 유럽과 미국 시장의 거대한 잠재력을 말해 주었어요. 자, 어때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러복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럼요.! 부인, 제가 거절할 리가 있습니까?"
아더 랜섬은 러복보다 더욱 놀라는 것 같았다.
"가구라구요? 원 세상에 올리비아 나는 가구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랜섬 씨는 모르셔도 돼요."
올리비아가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러복 씨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 거예요. 랜섬 씨는 그저 그의 동업자만 되어 주시면 돼요. 물론 이윤은 동등하게 나누어 드리겠어요."
"그러나 러복은 면화업자로 알고 있는데 그가 가구 수출을 도맡아서 한단 말이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는 장사꾼이에요. 그는 이윤을 남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죠. 그래서 이 일도 하는 거예요. 그는 무역에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어요. 경험도 많구요. 튜커 선장은 제게 중국산 가구가 유럽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했어요. 아주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중국산 가구를 어떻게 조달하죠? 그일 역시 러복의 몫입니까?"
"그래요. 메리 링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전문적인 목수들이에요. 그들은 상하이에서 직접 가구 제조업을 배운 사람들이에요. 버커스트 집안의 고풍스러운 가구는 모두 그들의 작품이죠. 그들은 가구뿐만이 아니라 중국 도자기도 만들 수 있어요."
아더 랜섬은 아직도 올리비아의 계획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그냥 듣고만 계세요. 나머지는 러복이 모두 알아서 해줄 거예요."
올리비아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올리비아는 랜섬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죠수아와 랜섬이 경영하던 캔톤 무역회사는 이미 문을 닫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직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은행의 잔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땅도 채권업자들의 손에 곧 넘아갈 판국이었다.
그것은 곧 자이 라벤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죠수아의 손길이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망가뜨리고자 했던 자이의 오랜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었다. 랜섬은 이제 용기도 사라졌고 자신도 없었다.
"당신이 가져올 나무들 수선화 호도 바로 이 나무로 만들어졌죠. 그렇다면 당신은 수선화 호를 해체해서 가구를 만들 생각인 게로군요."
"아뇨, 랜섬 씨 수선화 호는 자이 라벤던에게 팔릴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두 배의 가격을 받아낼 거구요."
아더 랜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였다.
"아니면 3배를 받을 수도 있어요. 우리는 잠시 동안 수선화 호를 해체한다는 소문만 내면 되는 거예요. 러복이 알아서 할 거예요."
말을 마친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녀의 배를 세차게 차는 게 있었다. 그렇다. 그녀의 몸속엔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있는 것이다.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가슴이 행복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윌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인께서 자이 라벤던을 직접 만나러 간다구요? 그 깡패나 다름없는 인간을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안 될 것도 없어요. 라벤던 씨는 우리의 사업적인 동료예요. 나는 그를 충분히 만날 수 있어요. 나는 오늘 그에게 편지를 보낼 겁니다. 사전에 방문을 통보하기 위해서요. 그만하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셈이겠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에"
윌리는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라벤던 씨에게 우리의 신용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윌리는 올리비아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이 겁 없는 미국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당신을 모욕할 겁니다. 그가 거절한다면 어쩌려고 부인, 당신은 그가 얼마나 말을 거칠게 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천한 원주민 혼혈아예요. 그는 예의라고는 전혀 모르는 무뢰한이라구요."
"그가 나를 모욕할 거라구요? 왜죠?"
"당신은 지금 놀이를 가는 게 아니에요. 소풍을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홀로"
윌리는 몹시 화가 나는지 물고 있던 담배를 어적어적 씹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왜 우리의 신용을 무시해 버렸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결코 그것을 복구해 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어요. 올리비아, 당신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겁니다."
"아니에요. 라벤던 씨는 상당히 이성적인 분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나는 그의 이성에 호소하겠어요."
"이성이라구요?"
윌리는 말을 잃었다.
"그는 저에게 조금도 무례하게 굴지 않을 거예요. 그것만큼은 제가 확신해요. 저를 믿어 주세요."
그는 포기했다. 어떤 말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그는 그저 건성으로 말해 주었다.
"그래요, 최선을 다하세요. 일이 잘되기를 빌겠어요."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쏟아지는 태양 아래서, 자이의 심복인 란잔 모이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자이 라벤던의 회사 사무실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올리비아 버커스트였다.
"안녕하세요, 모이타 씨 자이 라벤던 씨를 뵈러 왔어요. 제가 왔다고 말씀드려 주시겠어요?"
그녀는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라벤던 씨가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어요."
모이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 음 사장님께 부인이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모이타가 서둘러 사라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당당한 아름다움과 세련미를 온몸으로 풍기며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외견상으로 보면 그녀는 확신에 찬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맹렬히 돌아가는 풍차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아까부터 두 다리가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지체된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 것 같았다. 그때 모이타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부인 사장님께선 바쁜 스케줄 때문에 오늘 도저히 시간을 내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부인께 죄송스런 마음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태도는 공손했고 유감스런 표정들을 적당하게 연출해 내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그녀의 발꿈치만을 응시하고 있어 그것이 거짓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제 생각엔 다른 좋은 날 면담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올리비아는 그의 거절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서 오히려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라벤던 씨가 몹시 바쁜 분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시간이 없습니다. 난 그를 꼭 만나야겠습니다."
그녀는 모이타를 밀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부인, 부인"
모이타는 계속해서 올리비아를 불렀다. 그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사장님은 지금 굉장히 바쁘십니다. 절대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부인, 오늘은 제발 그냥 돌아가 주세요."
"그가 바쁘건 바쁘지 않건 간에 나는 그를 꼭 만나봐야겠습니다. 내 용건은 매우 급한 거예요, 모이타 씨"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모든 시선이 올리비아와 모이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모이타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이곳 회사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제2의 실력자였다. 부하들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로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그래서 그가 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일 아침 다시 오시죠, 부인!"
"아뇨, 나는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겠어요."
방에 모여 있던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모이타는 당혹스러웠다.
"사장님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저쪽 방 끝에서 들렸다.
"그럴 필요 없어, 모이타 버커스트 부인을 만나도록 하지 내 방으로 안내해 드려"
자이 라벤던과의 만남을 올리비아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라벤던이 앞서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가 사라진 곳을 따라 걸어갔다.
라벤던의 사무실은 검소하고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다. 유일한 사치품은 방 한쪽에 마련된 유럽풍의 소파 정도였다.
먼저 도착해 집무용 책상에 앉아 있던 라벤던은 그녀가 도착해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았으며 그녀 역시 그랬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노여운 빛이 어리는 것 같았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였다.
모이타가 밖으로 나가자 올리비아는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 올려 모자 뒤에 고정시켰다. 그녀는 긴장을 풀기 위해 앉아 있던 의자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보았다.
"이 의자는 클리펜데일 제품인 모양이죠?"
그녀가 침착해지려 애쓰며 물었다.
"이런 외제가구를 들여놓다니, 당신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군요."
자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올리비아! 아니, 버커스트 부인! 설마 하찮은 의자를 논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니겠죠?"
그의 시선이 올리비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위로 쏟아졌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요?"
라벤던이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의 인생을 이미 형편없이 빗겨 가 버린 그에게서 치솟아 오르는 상념들을 억지로 지우며, 올리비아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저는 당신이 팔로샴 회사의 신용을 회복시켜 주길 바랍니다."
자이 라벤던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요?"
"그래요. 그게 내 용건의 전부예요."
그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간단히 대답해 드릴 수 있겠군요. 대답은 '노'예요. 당신은 사업에 관해 조금 더 배워야겠군요. 윌리가 당신을 특사로 파견하다니 우스운 일이군요."
"당신을 방문하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제 의견이었어요. 윌리 씨와는 별개예요."
"그렇다면 윌리는 당신의 사업수단이 얼마나 졸렬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그가 계속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자이 라벤던 씨 당신이 홧김에 우리 팔로샴 회사의 신용을 거부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디의 회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요. 저는 당신에게 그러니까 뭐 적당한 표현이 없을까 그래요, 제가 겸손하게 호소하면 당신이 충분히 결정을 번복할 분이라 믿고 왔어요."
라벤던은 고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노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탁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가에 드리워진 잔잔한 미소는 자이 라벤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을 넘어서 아예 무시해 버리는 태도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한번 내린 결정은 결코 번복하지 않소, 버커스트 부인"
"저는 오늘 이곳에 커다란 희망을 안고 왔습니다. 저의 희망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버커스트 부인 나를 조롱하지 마세요. 나는 사업적인 결단을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바꾸지는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그러나 당신은 이미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가고 있어요. 당신의 자기 과시는 너무나 유치하군요."
그녀는 그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지고 있는 것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한때 개인적으로 당신이 상당히 공정한 분이라고 믿었었어요. 물론 그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지만요."
그녀는 자세를 바꾸어, 자신의 손을 탁자 위에 얹은 채 라벤던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저는 당신이 수선화 호 경매에 입찰한 것을 알고 있어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올리비아가 바라던 바였다.
"그렇소!"
자이 라벤던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 척의 쾌속 범선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 무엇 때문에 수선화 호 같은 배를 구입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금 우습지 않나요?"
라벤던은 확실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당신의 철없는 호기심이건, 바보 같은 랜섬이 시킨 일이건 간에 당신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올리비아, 이제 돌아가 주시오 모이타가 당신을 배웅할 거요."
"저는 캘커타 전체가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을 대신해서 묻는 것뿐이에요. 물론 당신 말처럼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한 가지만 말해 두죠. 랜섬 씨는 수선화 호를 러복에게 팔 예정이에요."
"러복?"
그는 놀라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얼굴이었다.
"그래요, 하렘 러복 미국인 목화업자예요, 그는"
"나는 러복을 알고 있고, 설명은 필요없소. 내 생각엔 당신이 러복을 설득해서 사라고 한 것 같은데 아니오?"
올리비아는 경멸에 찬 비난을 퍼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분노가 느껴졌으나 방문 목적을 되새기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글쎄요. 제가 당신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뿐이에요. 러복은 수선화 호 매입 가격으로 상당한 금액을 제시했어요. 당신이 제시한 금액의 몇 배죠"
"러복은 배를 모르오!"
그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만약 나에게 좀 더 높은 금액을 얻어내려는 술책이라면 랜섬에게 전하시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라고 자, 우리의 용건은 끝난 것 같소. 돌아가요, 올리비아 내 사무실에서 나가 주시오."
"제가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릴까요? 러복은 수선화 호로 향해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쿡 하고 웃었다.
"러복은 수선화 호가 아주 좋은 목재를 이용해서 만든 배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는 배를 분해해서 가구를 만든다는군요. 어때요, 흥미 있는 일이죠?"
라벤던은 계속해서 침묵했지만, 그러나 그의 얼굴색은 점점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고뇌하고 있는 라벤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라벤던을 향해 칼을 뽑았다.
"수선화 호의 뱃머리엔 그 배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목각 조각품이 걸려있죠.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러복은 그것을 저택의 지붕을 장식하길 원하는 한 영국인에게 팔 생각인 것 같았어요. 그가 말하길 요즘 유럽인들은 그런 목재 조각품을 고가에 사들인다고 하더군요."
라벤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 보이는 창가에 섰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교만한 옆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확실히 떠올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은 가슴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창틀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런 자이의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의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과거로 빠져들고 있었다. 자이와의 사랑, 자이의 배신, 그리고 뜻밖의 이별 왜 우리는 이토록 서로를 상처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우리의 그 빛나던 맹세는 어디로 갔을까.
그때 올리비아의 상념을 깨뜨리며 자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사무실에서 당장 나가시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버커스트 부인 당신과 함께 더 이상 소모할 시간이 없소"
천천히, 하나씩하나씩 기억의 물거품들이 현실이라는 강물 위로 떠내려갔다. 올리비아는 순간적이나마 과거의 회상에 젖었던 자신을 경멸했다.
"그럼요, 라벤던 씨 제 볼일은 끝났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죠. 비록 회사의 신용은 되살리지 못했지만, 저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버커스트 부인 다시는 그럴싸한 핑계를 붙여 나를 찾아오는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말기 바라오."
열려진 창을 통해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의 하얀 모슬린 와이셔츠는 땀으로 인해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게 할 만큼의 통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죠? 저의 방문이 왜 그리 신경에 걸리시나요? 우리는 같은 사업가예요, 안 그런가요?"
그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해 소리쳤다.
"경고하겠소, 버커스트 부인 나를 당신의 그 유치한 게임의 상대로 끌어들이지 마시오. 그것이 당신을 즐겁게 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당신은 다치게 될 거요."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입가에서 이미 미소는 사라진 뒤였다.
"자이 라벤던 씨 당신이 만약 팔로샴 회사의 신용을 거부한다면 나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보복하겠어요. 당신의 경고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아요."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 나갔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으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참, 잊을 뻔했군요. 라벤던 씨, 저는 당신이 수선화 호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지만, 당신은 그것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제시한 금액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녀가 본 자이의 마지막 모습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그런 자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올리비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날 그녀의 방문은 대성공이었다.
프레디로부터 편지가 온 것은 이틀 뒤였다. 그의 편지는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평범해 보였지만 올리비아는 문자 사이사이에 내포된 그의 마음의 고통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의 편지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프레디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피로 쓰여진 것 같았다. 그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올리비아 나는 매일 아침 꿈을 꾼다오 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내 머리맡에 환한 웃음을 띠며 당신이 서 있는 꿈이오. 당신은 내게 가벼운 키스를 하고 따뜻한 차와 조간신문을 건네주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오늘 하루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리고 나는 알고 있소 이런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을'
올리비아는 울었다. 그의 고통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운명이 미워서 한없이 울었다. 그의 말대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광경들, 그런 헛된 환상을 그의 가슴에 심어 준 자신의 부질없는 결혼이 후회되어 또 울었다.
프레디의 편지에는 시어머니인 버커스트 부인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올리비아 프레디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인 너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지난번 편지에서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 모든 고통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 만들어 낸 것이지 네 탓은 결코 아니다. 난 너의 편지를 받은 후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올리비아, 프레디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단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면서 슬픔에 겨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그녀의 임신 소식을 알지 못했다. 버커스트 부인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프레디의 아기가 지금 그녀의 몸속에 있다.
그녀의 운명은 왜 이리 매 순간순간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뒤틀려버리는 것인지, 그녀는 자신의 굴절된 인생 행로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은 올리비아의 두 번째 임신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캘커타는 소문이 빠른 도시이다. 더구나 프레디의 친구인 피터 역시 그녀의 임신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두려웠다. 그들의 오해가 무서웠다.
올리비아는 그녀가 프레디와 버커스트 부인에게 모든 것을 직접 설명하고, 그 애가 프레디의 핏줄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한 프레디를 위해 버커스트 집안의 상속자가 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이 라벤던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돌이온 후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캘커타는 짧고 따뜻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곧바로 덥고 지루한 여름이 찾아들고 있었다.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머리 위로 선풍기가 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끔찍스러운 더위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날씨가 주는 괴로움만큼이나 올리비아의 마음 역시 괴로웠다. 그녀는 라벤던의 사무실을 빠져 나오며 승리를 확신했었다. 그녀는 자이 라벤던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선화 호를 매입하겠다는 연락을 곧바로 전해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면 그녀는 거만한 미소를 띠며 그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라벤던 측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초조했다. 그날 승리를 장담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윌리와 랜섬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올리비아는 가구 제작에 최선을 다했다.
러복은 이미 랜섬의 저택에 가구 제조를 위한 모든 설비를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가구 제조의 전문가들이 고용되어 중국 가구의 그림을 그리고 메리 링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주축으로 중국식 가구를 제작하고 있었다.
아더 랜섬은 그 광경에 익숙하지 않은 듯 늘 양미간에 고민의 흔적을 담고 다녔는데 그런 랜섬에게 러복은 커다란 목소리로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였다.
"걱정마세요, 랜섬 씨! 이 가구는 커다란 이윤을 낼 겁니다. 미국의 달러를 왕창 모아다가 드리겠습니다."
그때마다. 랜섬은 마지못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아와 러복은 이미 가구 제작에 상당한 승산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러복을 내세워서 장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구를 임대 해줄 계획이었다. 그 당시의 여객선은 선실에 절대적으로 가구가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부자들이 앞다투어 가구를 임대해 갈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선실에 가구를 들여놓고 여행 내내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여행지에 도착한 이후에는 러복이 지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인계해 주면 끝이었다.
결과적으로 러복은 많은 양의 가구를 선적해야 하는 금전적 부담을 줄인 채 그것들을 안전하고 무사하게 미국 시장까지 옮겨 가는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둘 현실로 드러나자 한때 올리비아의 계획에 의심을 품었던 랜섬조차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일은 티크와 마호가니 나무 원자재를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라벤던 측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올리비아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수선화 호를 해체해야 할 것 같소. 그 배만 해체하면 우린 일 년 분의 자재를 확보할 수 있어요. 난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무슨 근거로 그가 높은 가격으로 수선화 호를 매입하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템플우드 가의 정원에서 그들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저택의 정원은 주인을 잃은 채 아무도 제대로 손질해 주지 않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랜섬 씨 수선화 호는 지금 그대로 유지하셔야 해요. 라벤던은 우리의 요구를 분명히 받아들일 거예요. 전 확신하고 있어요."
올리비아는 조금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랜섬은 그녀의 신념이 과연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랜섬은 한숨을 쉬었다.
"올리비아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나에 대한 그의 복수심은 어쩌면 정당한 것인지도 모르오. 그 일에 당신을 개입시킬 순 없소 그는 팔로샴 회사도 그냥 두지 않을 거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못하게 할 거예요. 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랜섬 씨, 저를 믿어 주세요. 모든 일이 잘될 거예요. 약속해요."
랜섬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혼자서 랜턴을 들고 지하실의 한 구석진 방으로 몰래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기에 놓여진 굉장히 커다.란 물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휘장에 덮인 채로 한쪽 구석에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그녀는 휘장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랜턴을 비춰가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정성스레 다듬어진 목각 조각품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순수함, 그리고 순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랜섬 씨와 에스텔의 무심한 말 한마디를 근거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른다. 나의 직감력에 의존해서 일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올리비아는 자신이 자이의 사무실을 떠나려 할 때 스치듯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확신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내 생각은 틀림없을 거야 그는 나의 제안을 분명히 받아들일 거야. 그렇다면 이제 일을 재촉해야 하겠군. 서둘러야겠어"
이튿날 아침에 올리비아는 랜섬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손히 말했다.
"제 생각이 틀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저의 잘못된 판단이 너무나 일을 지연시킨 것 같습니다. 자, 여러분이 양해해 주신다면 러복 씨에게 부탁해서 수선화 호를 해체하겠습니다."
랜섬은 하룻밤 사이에 뒤바뀐 올리비아의 태도가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되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녀를 믿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의 마음속에 불안이 꿈틀거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그녀의 생각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곧 러복이 이끄는 목수들이 수선화 호 해체 작업을 위해 모였다. 그 배는 해안가에 놓여 있었는데, 한때 캘커타 제일의 선박이라는 화려한 명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이 낡고 부서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러복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작업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선화 호가 러복의 북소리와 목수들의 징소리로 곧 해제되려는 순간이었다. 이곳저곳에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좀처럼 볼 수 없던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랜섬은 두 사람의 일꾼을 고용해서 배 주위를 철저히 지키도록 지시했다. 배에서 나오는 목재들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정오가 되었을 때까지도 배의 선두 부분조차 분해하지 않은 상태였다. 올리비아가 이미 러복에게 지시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배에 손을 대지 말라고
올리비아는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작업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우아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만약 끝내 자이 라벤던이 외면한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였다. 라벤던 회사의 모이타가 편지 한 통을 들고 급히 달려오는 것이 멀리 보였다. 그는 아더 랜섬 앞으로 되어 있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있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한 것이어서 랜섬과 모이타 모두 놀라는 듯했다.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제7장 아버지와 아들
자이 라벤던이 거액의 돈을 들여 수선화 호를 사들였다는 뉴스는 캘커타 시를 들끓게 했다. 아더 랜섬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축하의 말을 들었지만 그를 걱정해주는 측 역시 만만치 않게 많았다. 그들은 자이 라벤던이 그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윌리는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도대체 왜 그가 그 폐선을 사들인 것인지 저에게 설명해 줄 수 없는 겁니까?"
올리비아는 사무실에서 자재 보유량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글쎄요. 별다르게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놀라고 있는 중이거든요."
윌리의 눈썹이 가닥가닥 일어나는 것 같았다.
"당신의 방문과 관계되지 않았나요? 나는 누군가가 라벤던을 협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비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윌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라벤던 씨를 협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무엇 때문에 그를 협박한단 말입니까? 나는 우리 회사의 신용을 되살리기 위해 방문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용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녀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리고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우리의 신용은 회복될 겁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이번 일로 이득을 본 것은 아더 랜섬입니다. 팔로샴이 아니라구요."
"그래요. 하지만 랜섬 씨는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놀라운 횡재에도 불구하고 랜섬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명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그는 그날 저녁 올리비아를 불렀다.
"자, 올리비아 이제는 내게 설명해 줄 때가 되었소. 왜 라벤던이 그 배를 살 수밖에 없었는지"
"랜섬 씨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라벤던이 원하는 것은 그 배가 아니에요. 그는 배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뱃머리에 장식돼 있는 조각품이죠"
"조각품이라구요?"
아더 랜섬은 올리비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물론 이것은 단순한 저의 상상일 뿐이지만 그 조각품은 라벤던의 어머니 작품 같았어요. 아닌가요? 랜섬 씨는 일전에 그녀가 나무로 조각하는 것을 즐겼다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랜섬의 눈이 감기고 먼 기억 속으로 생각을 던지는 것 같았다.
"랜섬 씨는 그녀의 손재주가 대단히 비상해서 조각품을 잘 만들었고, 언젠가 한 번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산 적도 있다고 했어요. 배의 마스코트로 장식하기 위해 제가 생각할 때, 그때가 아마 수선화 호를 건조하고 계실 때였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선반에 놓여 있는 유리잔을 꺼내 두 잔의 백포도주를 준비해선 그에게 한 잔을 내밀었다.
"제가 그 배의 경매에 관해 들었을 때, 저는 갑자기 그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 그 배를 보러 갔었지요. 수선화 호의 뱃머리에 놓여 있는 조각품은 아마추어의 것이 틀림없었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그것에는 놀라운 자연스러움이 있었어요. 저는 그것이 뛰어난 영감을 지닌 사람에 의해 조각되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사슴 가죽옷을 입은 여인의 신상(身像)이었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자이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어요."
랜섬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자이의 어머니는 정말 손재주가 비상했죠. 그날 죠수아와 내가 그녀로부터 조각품을 샀어요. 맞아, 그것은 한 여인의 신상이었어요. 우리는 그것을 그때 막 건조하고 있던 수선화 호에다. 장식하기로 했었죠. 이제 생각해 보니 당신은 내가 흘린 몇 마디의 말을 정말 대단하군요."
"아니에요. 사실은 그것에 대해 확신을 갖기는 힘들었어요. 제게 확신을 준 것은 에스텔이에요. 에스텔은 어느 날 자이가 어머니의 유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대요. 그 유품 중에는 여러 형상들의 나무인형들이 있었구요. 자이가 어머니의 유품에 대단히 집착을 하더라고 에스텔이 말하더군요. 저는 그것에서 확신을 얻었어요."
"그래, 그랬었군요. 그렇지만 만약 자이가 내게 그 장식품을 달라고 요청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텐데. 그 장식품 하나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가격을 치르고 배를 구입하다니"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성격에 랜섬 씨에게 부탁을 했겠어요?"
"그렇다면 그냥 가져가면 될 게 아니오? 두 명의 경비원을 배치하긴 했지만 그의 수단으론 못하는 일이 없을 텐데."
"라벤던은 수선화 호를 구입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게 될 줄 모르고 방심했겠죠. 헐값에 그것을 매입할 수 있는데 무엇하러 모험을 하겠어요. 그러나 제가 입찰 가격을 높여 놓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미 그 조각품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거든요."
"세상에"
랜섬이 소리쳤다.
"그것을 어떻게 옮길 수가 있었죠?"
"간단했어요. 메리 링의 형제 한 명을 데려가 그 장식의 밑동을 톱으로 잘라내었죠. 그리고 그것을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어요. 물론 걱정하지 마세요. 라벤던이 돈을 모두 보내온 날, 그것을 잘 포장해서 보냈으니까요."
랜섬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을 라벤던에게 요구했었소? 조각품을 차지하려면 제시된 금액을 수용하라고"
"그랬어요. 저는 그날 우리 회사의 신용을 되살려 달라는 부탁을 하러 갔었죠. 그리고 수선화 호와 조각품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술잔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나를 위해 애쓴 것은 정말 고맙지만, 그가 당신에게 어떤 보복을 해올지 걱정이 되는군요."
"랜섬 씨 그는 그 물건을 원했고, 우리에게 적당한 가격을 지불한 후 가져간 것뿐이에요. 그것이 전부일 뿐이에요."
"올리비아, 그는 잔인한 사람이오. 그는 자신의 체면이 손상된 것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가 팔로샴에 어떤 보복을 가해올지 걱정되는군요. 당신은 나를 위해 너무나 노력해 주었지만 그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불안하기만 하군요."
"랜섬 씨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가 공격을 해오면 우리도 그에 맞서 대응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그는 마음의 불안까지 떨쳐 버리고 시원스레 웃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윌리와 마찬가지로 라벤던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라벤던은 정확히 사흘 후 팔로샴을 향해 보복의 화살을 쏘았다. 런던으로 보내기로 했던 팔로샴의 염료가 선적을 거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라벤던 회사의 쾌속 범선에 선적되어 런던으로 갈 팔로샴의 가장 중요한 수출 물품이었으며 대금은 이미 현찰로 지급된 상태였다.
모이타는 그날 아침 보내온 간단한 통고문을 통해 팔로샴의 모든 물품들은 앞으로 라벤던 회사의 범선을 사용할 수 없으며 창고 역시 이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그리고 라벤던은 팔로샴의 수화물에 대해 이미 지급받았던 모든 선적 대금도 동봉하여 보내왔다.
윌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자이 라벤던을 향해 퍼붓더니 갑자기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내가 뭐라 그랬어. 그렇게 경고했었건만"
마음속으로 그가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올리비아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선적을 일체 금지한다는 라벤던의 조치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만약 약속된 시간 내에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면 그들의 거래는 끝날 것이고 팔로샴의 타격은 실로 클 것이었다. 물론 다른 선박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격도 비쌀 뿐만 아니라 약속한 날짜를 정확히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벤던의 선박들은 놀라운 정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선박업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신용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사무실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낮의 더위는 형벌과 마찬가지여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괴로움을 주었다. 올리비아의 무명 드레스조차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방의 한구석에 놓여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잔을 떠다가 윌리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라벤던과 1년 동안 용선 계약이 돼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물건을 선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계약위반이에요. 그를 고소할 수는 없나요?"
올리비아의 질문에 윌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들과 맺은 계약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습니다. 우리의 물건이 포장 불량으로 라벤던 회사의 선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구요. 이번에 우리 염료가 누구의 농간이건 간에 포장 불량으로 판별난 것은 사실이에요. 그는 계약 파기의 조건으로 이 일을 걸고 넘어질 겁니다."
윌리는 매우 실망하고 좌절한 것처럼 보였다. 올리비아는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이 곧 부질없는 짓이란 것 깨닫고 그대로 물러났다.
그녀는 한낮의 더위를 조금도 가려 주지 못하는 대나무 창살을 통해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종려나무 잎사귀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어 좌우로 천천히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랜 생각 끝에, 그녀가 애써 부드러움을 찾으며 말을 했다. 그 말조차도 윌리에게는 어이가 없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염료들을 다시 포장하세요. 한 달 정도의 지연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윌리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부인,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모이타가 제게 말하기를"
"모이타의 말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다음 달부터 라벤던의 범선을 이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라벤던과 새 계약을 맺어야 할 거예요. 그들의 배 값은 너무 비싸요. 선박 화물에 대한 이중과세가 폐지된 지 2년이나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이것을 없애지 않고 있어요. 그는 마땅히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거예요."
윌리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올리비아가 과연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윌리 씨 나는 우리 팔로샴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글쎄요."
"우리는 사업을 좀 더 다양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어요. 무역업뿐만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릴 때가 된 거예요. 수익성을 높이고 지역사회도 발전시킬 수 있는 멋진 사업이 있어요."
윌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뭐죠?"
"호텔이에요."
"호텔"
윌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음성으로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호텔, 호텔이라
"대부라구요?"
고리대금업자 무지는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작부인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대부라고 하셨나요, 남작부인?"
그의 찢어진 두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그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고 있었다.
'거대한 팔로샴 회사의 안주인인 남작부인이 무엇 때문에 대부를 원하는 것일까? 아더 랜섬을 돕기 위해? 아니야, 그는 이번 경매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는데,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아첨하는 미소 뒤로 감추었다.
"에 부인 비천한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팔로샴과 비교한다면 너무나 하찮은 것입니다만,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대부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대부를 받는 것은 제 개인의 입장에서입니다. 팔로샴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올리비아는 교묘하게 물어오는 무지의 질문에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을 하였다.
"나는 우리 회사나 프레디를 이 일에 연관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해요."
무지가 기름지고 주름 잡힌 얼굴에 간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올 돈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때까지 쓰실 돈이 필요한 거죠?"
올리비아는 그가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곳 캘커타에 수많은 정보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가 말하는 영국으로부터 올 돈이란 런던 은행에 예치돼있는, 그녀의 결혼지참금 몫의 돈이었다. 브리짓트 이모가 그녀가 프레디와 결혼할 때 주었던 것으로, 그녀는 한 달 전에 그 돈의 송금을 은행에 신청했었다.
"그래요. 당신의 정보는 꽤나 정확하군요. 나는 정말 놀랐어요. 나는 중요한 일을 하나 하려 해요. 그래서 돈이 필요하죠"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고맙군요."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발표될 테니 무지 씨께 말을 해주어도 이상할 건 없겠죠. 저는 이곳 캘커타에 최고급 호텔을 지을 예정이랍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지금 있는 스펜서 호텔만으로는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관광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펜서 호텔을 능가하는 최고급호텔을 지을 예정이에요. 어때요? 훌륭한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호텔이라"
무지는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상업 도시로서, 그리고 동서양을 잇는 중간기착지 항구로서 이곳 캘커타에는 절대적으로 호텔이 모자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약이 올랐다. 어떻게 자신이 모르는 사이 그런 일들이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정보원들을 문책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렇다면 그 호텔은 남작부인의 개인소유가 되겠군요."
"그래요. 처음에는 그렇게 계획하고 있었어요. 물론 완공된 후에 투자가들을 모을 수도 있지만요."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긍정적인 사업계획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투자를 한다고 해도 실패할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아, 이런! 찾아오신 손님께 아무런 대접을 못 했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고리대금업자였다. 정치가나 사업가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돈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살인적인 이자율을 적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고리대금뿐만 아니라 간단한 무역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장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캘커타에서 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돈을 수급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제 예상입니다만, 호텔부지는 이미 정해졌겠죠?"
하인이 가져온 시원한 음료를 올리비아에게 권하며 그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는 죠수아 이모부를 기리기 위해 템플우드 저택에 호텔을 지을 생각입니다."
무지는 당황했다. 요즘 캘커타에는 예상하지 못할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면화업자인 러복과 아더 랜섬의 동업, 라벤던의 수선화 호 매입, 그리고 팔로샴 화사에 대한 라벤던의 선적 거부, 그리고 남작부인
모든 일에 이 아름다운 남작부인이 연관되어있었다. 놀랍게도 이 남작부인이 관여된 사업치고 실패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단지 하나, 팔로샴 회사의 염료를 라벤던이 선적 거부했는데 이 젊은 여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서 오히려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무지는 그의 투자가 가져다줄 손해와 이익을 따져 보았다. 과연 라벤던이 용납할까? 그러나 남작부인의 제안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고 그녀의 능력은 생각할수록 너무나 출중했다.
"템플우드 저택을 개량해서 호텔로"
무지는 서둘러 마음을 결정했다.
"아! 죠수아 템플우드 경 그분은 정말 점잖은 분이었죠. 그의 비극에 명복을 빌 뿐입니다."
그가 슬픔의 탄식을 하며 가식적인 고통의 표정을 짓는 바람에 올리비아는 거의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나 부인, 에 제가 부인께 거액의 돈을 대부해 드리려면 적당한 담보물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하시는 사업이니까 팔로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테고"
"알고 있어요, 무지 씨"
그녀는 주머니에서 자주색 천으로 포장된 상자를 무지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것이 나의 담보물입니다. 공인된 평가서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보석 감정을 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가 자지러질 듯이 놀라 소리쳤다.
"아닙니다.! 부인의 말 한마디면 충분해요,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는 이 보석이 다이아몬드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자신이 몇 년 전에 한번 보았던 경험이 있는 것임을 금세 깨달았다.
그 다이아몬드는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것이었으며 그가 대출해 줄 돈의 총액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다.
"돈은 내일 아침까지 마련해 놓죠, 부인"
그는 재빨리 영수증을 썼다.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그래요. 완벽하군요."
계약은 만족스럽게 체결되었다. 무지는 자꾸만 입이 벌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무지는 이미 호텔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만족해하며 다시 말했다.
"이번 라벤던 회사의 만행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짓이죠. 라벤던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에요."
무지가 억지로 분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무지가 라벤던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심지어는 그의 추종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무지 씨 당신의 그 한 마디가 제게 많은 위로가 되는군요."
올리비아는 눈을 한 번 찡긋해 보였다. 떠나려는 그녀에게 무지가 다시 물었다.
"이번 부동산 매매에 대해 아더 랜섬 씨와 에스텔 양은 찬성했나요?"
"물론이에요.!"
그것은 진실과 약간 다른 것이었다. 처음에 랜섬은 이번 일을 반대했었다. 올리비아의 간청을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그녀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지 사업계획 모두에 수긍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저택의 본채를 호텔로 개조하시는 겁니까?"
조그만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스쳤다.
"아니에요.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제게는 멋진 계획이 따로 있답니다."
올리비아가 이렇게 계획을 세운 일들을 착착 진행시켜 나갈 때, 아더 랜섬은 이곳 캘커타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코운포어로 행할 결심을하고 있었다.
이곳의 가구공장은 러복의 지휘 아래 잘 운영되고 있었으며 자금 역시 충분히 확보된 상태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쉴 때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호텔 신축공사와 때를 같이하여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홀가분하게 정리된 지금,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올리비아였다.
코운포어로 떠나기 전날 아더 랜섬은 올리비아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들은 인도식 스튜를 즐기면서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랜섬의 마음을 알아차린 올리비아는 애써 그를 위로하였다.
"걱정마세요, 랜섬 씨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올리비아,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나는 정말로 당신이 걱정됩니다. 당신이 정말로 용기 있고 지혜로운 여자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예요. 그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에요. 당신은 궁지에 몰린 우리 회사를 구해 주었고 우리 모두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죠 이제 그만 영국에 있는 프레디에게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이 편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미래를 영국에서 찾으세요. 이곳 팔로샴은 윌리에게 맡겨 버리고"
아더 랜섬은 올리비아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슬펐다. 자신을 친딸처럼 보살펴 주는 그를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참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랜섬 씨, 죄송해요. 프레디와 저는 헤어졌어요. 우리 사이는 다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멀어졌어요. 그동안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캘커타에 돌고 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올리비아와 프레디가 이혼했다는 랜섬은 목이 꽉 잠겨옴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차올라 그의 눈 역시 흐릿해져 갔다.
"그렇지만 올리비아, 당신 둘 사이엔 아모스가 있잖소 그를 위해서라도"
랜섬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올리비아를 설득하려고 했다.
"프레디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는 또 어쩌구, 두 아이 모두를 버리겠다는 것인가?"
"프레디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랜섬 씨"
올리비아는 그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이와 우연히 부딪쳤던 먼 옛날 어느 날로부터 시작해서 그와 나누었던 열화와도 같은 사랑의 밤까지도 그리고 아모스를 위해 프레디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숙명과 자이로부터 받은 배신의 칼날에 철저히 망가진 자신의 삶도
그녀는 긴 설명 끝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더 랜섬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 계속해서 침묵만을 지킬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의 벽을 올리비아가 깼다.
"걱정마세요, 랜섬 씨 저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올리비아, 당신의 고통에 대해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질 못하는군요. 나를 용서해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향한 자이의 복수심이 정말 두렵군요. 그를 너무 구석으로 몰지 말아요. 그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오. 나는 그의 보복이 무섭소"
그러나 올리비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이와 저는 정말 근사한 한 쌍이군요. 저 역시 잔인한 사람이거든요."
6월이 돌아왔다. 올리비아가 인도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6월이었다. 닥터 험프리스는 올리비아의 건강은 양호한 편이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다니기엔 충분하지 않다고 충고하였다.
"올리비아 당신은 이곳에 신생국가라도 하나 세울 생각입니까? 과로는 안 돼요. 절대 안정해야 한다구요. 바깥일은 남자들에게 맡기고, 이제 그만 쉬는 게 어떻겠소?"
"저는 일이 아주 즐거워요, 박사님 일을 하고 나면 오히려 가뿐해지거든요. 제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뭘 하겠어요."
"뭘 하냐구? 원 세상에 다른 여자들처럼 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장만하고, 뜨개질도 하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아마 조만간에 당신의 해산을 돕기 위해 에스텔이 도착할 거예요. 그녀가 기필코 당신을 집안에다. 묶어 놓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험프리스 박사의 간청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럴 작정이었다. 출산일이 가까워오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무실의 출근을 최대한 줄이고 모든 경영에서 일단 물러났다.
남은 시간 동안을 그는 아모스와 지냈다. 그녀의 사랑하는 아들은 하인의 아이가 아니고서는 특별한 놀이 친구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모스를 철저히 감추고 키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한다거나 쇼핑을 즐긴다거나 친구 집을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모스가 자라면서 점점 더 뚜렷이 자이 라벤던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소문들이 퍼지는 것이 두려웠다. 자이 라벤던과 함께 캘커타에 있는 지금,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면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템플우드 저택을 호텔로 개조하기 위한 준비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올리비아는 아모스와 메리 링을 데리고 그곳을 둘러보기를 즐겼다. 측량기사들이 땅의 넓이를 정확히 재기 위해 길다란 나무토막과 줄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저택 뒤의 울퉁불퉁한 길은 평평하게 메꾸어져 가고 있었다.
저명한 건축가들이 초청되어 초현대식 호텔을 짓기 위해 도면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팔로샴의 여러 직원들도 바쁘게 뛰고 있었다. 윌리는 계속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일만은 열심히 진행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올리비아는 러복에게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의 저속한 말투나 행동도 이제는 올리비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일을 추진하는 그의 능력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누런 이를 드러내며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곤 해서 올리비아는 낙천적이면서도 배짱이 두둑한 러복에게 일을 맡긴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에 늘 마음이 든든하였다.
어느 날 아침, 러복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라벤던에 관한 소식을 들어 보셨나요?"
"아뇨"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군요. 그가 매입한 수선화 호를 가지고 뭘 했는지 모르시죠? 그는 그것을 해변가에다. 그냥 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배에서 목재나 놋쇠 장식들을 떼어가려고 난리들이래요."
올리비아는 라벤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머리 장식이 떨어져 나간 수선화 호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라벤던의 마음을 침울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였다. 그녀가 떼어 온 목제 조각품은 다시 그 자리에 끼워질 수 있도록 조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기에 단지 그 밑둥을 톱으로 쓸었던 것이다. 그것만 이으며 곧바로 예전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게 말이다. 그러나 라벤던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수선화 호를 해변에 그대로 내버린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어리석음에 다시 한번 씁쓸히 웃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킨잘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6월의 한복판 어느 날이었다. 올리비아는 너무나 기뻐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올리비아의 두 번째 해산을 돌보아 주기 위해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서둘러 킬티나갈을 출발한 것이었다.
올리비아와 킨잘은 근 1년 만에 재회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 그들은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많은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너무 많았다.
그녀는 무엇보다. 아모스를 보고 싶어 했다. 이제 한 살을 더 먹은 아모스는 한층 더 잘생겨 보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재롱을 부리기도 할만큼 자라 있었다.
그들은 목이 마르고 잠길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킨잘의두 아이는 북부의 할머니 댁에 있다고 했다. 남편인 마하라자는 새로 제정된 법률을 검토하기 위해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날 저녁, 올리비아는 자신이 킨잘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킨잘, 저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주었어요. 사실 저는 당신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당신의 방문을 청하는 편지를 띄웠을 거예요. 당신에게 특별한 부탁이 있어요."
올리비아는 힘든 고백을 하는 사람처럼 몹시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저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제가 볼 수 없도록 즉시 제게서 떼어 놓아 줘요."
"아기를? 어디로"
"그냥 제가 볼 수 없는 곳이면 돼요. 그 아이를 당신이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아이가 조금 자라거든 적당한 유모와 함께 영국에 있는 프레디에게 데려다. 주었으면 해요. 모든 비용은 제가 책임질게요."
"올리비아 아이를 정말로 프레디에게 데려다. 줄 셈이에요? 어떻게 아이를 그렇게 떼어낼 수가 있어요. 난 그럴 수 없어요."
"킨잘 그것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 아이를 프레디에게 보내야만 저의 죄는 조금이나마 탕감될 수 있어요. 제발"
올리비아는 잠시 마음을 진정하는 듯 두 눈을 감았다.
"킨잘, 어차피 두 아이는 함께 키울 수가 없어요. 며칠 후면 에스텔이 도착할 거예요. 당신마저 저를 버리면 안 돼요. 저를 도와줘요. 제 힘이 돼 줘요."
"올리비아, 내 마음속에 있는 모성애가 그 일을 못 하게 하는군요. 미안해요."
"킨잘, 어차피 제 인생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져 있어요. 아무도 그것을 바로잡을 힘이 없어요.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야 해요. 전 이미 지쳐 버렸어요. 전 이대로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갈 거예요."
킨잘은 일 년 사이에 올리비아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맑고 순순했던 영혼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그녀의 솔직하고 명석했던 성격을 이토록 외고집의 비정한 여자로 변모하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킨잘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올리비아, 아이를 보내서는 안 돼요."
어느덧 킨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프레디를 잊어버려요. 그와 맺었던 악마 같은 계약도 라벤던도 잊어요. 복수를 향한 당신의 갈망은 당신의 영혼을 욕되게 할 뿐이에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요. 당신의 아버지가 있는 하와이로 돌아가라구요. 그동안 노력했지만 당신은 자이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질 못했어요. 이곳을 떠나요, 올리비아 제발 그곳에서 다시 사랑하고 다시 웃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자이를 잊으라구?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텐데. 이제 와서? 그럴 수 없어.'
올리비아는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그럴 수는 없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그에 대한 분노가 아직도 살아서꿈틀거리고, 이렇게 내 삶의 현주소가 처절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에스텔이 도착한 것은 랜섬이 코운포어로 떠난 지 일주일 뒤였다. 그녀는 처음 한동안 옛날처럼 그렇게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올리비아는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건 캘커타로 오는 도중에 아버지의 묘소에 들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의 불효,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연민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분노 등 등의 감정이 얽혀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에스텔의 우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활발했으며 올리비아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녀는 코운포어에서의 생활과 그곳 군인 부인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올리비아를 즐겁게 해주었다.
에스텔은 캘커타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옛친구들과 다시 친교를갖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이 괴로움을 잊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고요했던 버커스트 저택은 젊은이들이 질러대는 고함과 웃음소리로 다시금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낸 에스텔과 올리비아는 템플우드 저택에 세워질 호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니, 왜 갑자기 호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난 그게 몹시 궁금해"
"에스텔, 호텔 건설은 미래를 위해 확실한 투자가 될 거야"
"그래 언니 하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해 언니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잖아"
에스텔은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언니 그 집을 호텔로 개조하기엔 너무 작지 않을까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 에스텔 그래서 나는 새로운 건물을 지을 계획이란다."
"새 건물을? 어디에다.?"
"난 하인들의 숙소가 있던 곳에다. 지을 예정이야"
"그곳을 전부 허물어야겠군"
"당연하지. 아니면 어떻게 새 건물을 짓겠니"
에스텔은 올리비아의 설명을 듣고는 자신이 런던에서 자이와 함께 들러 식사했던 한 호텔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엄청나게 컸어. 뜨거운 타올과 향기 좋은 비누, 그리고 아름답게 치장된 벽유리 나는 그곳에서 달팽이 요리를 먹었어. 프랑스 요리지. 조금 징그러운 것이 흠이었지만 굉장히 맛이 있었어."
열심히 설명하던 에스텔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었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마음을 갑자기 할퀴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언니 아까 뭘라고 했지? 하인들의 숙소를 없앤다구? 그곳은 자이가 태어난 곳이야 그리고 그는 거기서 8년 동안 살았어."
"그랬던가? 나는 잘 모르는 일이야."
에스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곳이 헐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야 언니도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관련된 것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가지고 있어."
"글쎄다."
에스텔은 뒤늦게야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한 목소리였다.
"언니는 자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호텔을 짓는 거지? 하인들의 숙소를 없애기 위해 호텔 건설을 계획한 거야?"
"에스텔, 지나친 억측은 하지 말아라. 호텔은 전망이 좋은 사업이야 나는 팔로샴을 위해 호텔을 지을 뿐이야."
"그래? 나는 더 이상 언니를 믿을 수 없어"
에스텔이 올리비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는 랜섬 아저씨에게서 수선화 호의 경매 소식을 들었어. 언니의 승리에 대해서도 그때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어. 그러나 이번 일은 너무나 비인간적이야."
"에스텔,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일과 인간답게 사는 일은 때론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야. 나의 사업계획에 너의 불쌍한 오빠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만"
"언니 이번 일은 포기해."
에스텔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의 재산을 사용했어. 그리고 모든 정보를 바보 같은 내게서 얻어냈어. 언니,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아?"
올리비아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웃었다.
"에스텔, 너는 그 자랑스러운 오빠가 팔로샴 회사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혹시 듣지 못했니?"
에스텔은 금세 풀이 죽었다.
"랜섬 아저씨께 들었어."
"그렇다면 너는 내가 뒷전에 물러앉아 자이 라벤던이 프레디와 팔로샴 회사를 망가뜨려 가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거니?"
"아니야, 언니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자이는 내가 프레디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팔로샴을 괴롭히고 있어. 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자이처럼 자금도 없고 육체적인 힘도 없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정보뿐이야. 난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해. 에스텔, 쓸데없는 논쟁은 이제 그만 하자, 네게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우선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먹지 않겠니?"
에스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잔의 따뜻한 우유를 마신 후, 올리비아는 에스텔에게 해야 할 말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에스텔의 대답은 단 두 마디뿐이었다.
"뭐라구? 진심이야?"
"그래, 에스텔 너와 킨잘이 나를 도와주어야 해 아기가 태어나면 나에게서 일단 데려가다오. 내가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볼 수 없는, 처음부터 그리고 그 아이를 프레디에게 데려다주기 바래."
"올리비아 언니, 어떻게 그럴 수가"
에스텔은 올리비아를 안고 흐느꼈다.
"괜찮아, 에스텔 울지 말아라. 나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너와 킨잘만 믿는다. 내 부탁을 들어주겠지?"
"언니 그렇게 하겠어."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일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흐느껴 울면서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은 금요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월요일 아침에 템플우드 가의 하인 숙소를 철거하라는 명령을 러복이 고용한 현장 책임자 아브라함에게 내렸다. 그와 동시에 하인들을 이용해서 캘커타 시 전체에 소문을 퍼뜨렸다. 올리비아는 자이 라벤던 역시 오늘 안으로 그 소문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월요일이면 허물어질 하인들의 숙소를 한번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자이 라벤던이 태어났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산고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괴로움의 비명을 지르는 열일곱 먹은 원주민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겪었을 참담한 짧은 생과 어린 자이가 내면에 키웠을 적개심도 거기서 볼 수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팠다.
지루한 사흘이 흘렀다. 그러나 자이에게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사흘동안 잡념과 초조감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집안일을 해대었던 올리비아는 이제 집안에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초조감으로 입안이 타들어감을 느꼈다.
일요일 저녁, 올리비아는 혼자 건설 현장에 나가 보았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이곳은 자취도 없이 헐리는 것이다. 그녀의 가슴 가득 아픔이 밀려왔다. 그 아픔은 자이를 향한 연민의 감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는 자이 라벤던으로 인한 일종의 패배감 탓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소식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어떤 기별이 있어야 했다. 이 어둠만 밀려가면 곧바로 하인 숙소는 헐릴 것이기에 그녀는 모든 계략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긴 한숨과 함께 그녀는 패배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자이 라벤던, 그였다.
자이 라벤던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밀접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 만인지 올리비아는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자이는 아직 올리비아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베란다 구석의 물통 위에 앉아 턱을 고인 채 땅바닥에 긴 막대기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의 등 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후 올리비아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나는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요."
그의 등이 똑바로 펴졌다. 훅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올리비아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는 아직 뜻밖에 일어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당신의 집을 잘 봐두지 그래요. 내일이면 모든 것이 헐릴 텐데요."
한참 동안 자이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큰 눈만이 물끄러미 올리비아를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한 말이 주는 만족감에 속지 마시오, 올리비아 당신은 나와 싸울 수 없소"
"그래요? 왜죠?"
"나는 당신처럼 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오. 올리비아, 거리의 개들은 매우 교활하게 싸우지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고 야비하게 싸우지"
"모든 거리의 개들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에요. 때로는 잘 훈련된 작은 개들이 거리의 큰 잡종개들을 궁지에 몰아넣고는 하죠. 자이 라벤던 씨, 저를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에게서 배운 것이 아주 많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어요."
자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한때 살았음 직한 숙소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놀랍게도 그는 파이프와 담배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올리비아는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단적인 증거였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이는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이 있을 때에도 이렇게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올리비아는 온몸이 서서히 떨려옴을 느꼈다. 그때 자이가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요. 왜 당신의 잘난 남편 곁으로 돌아가지 않지?"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당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예요."
"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건 전혀 개의치 않소"
그때 베란다.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의 갈라진 나무 틈 사이로 빗줄기가 스며들어왔다. 자이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 나는 당신이 영국이든 하와이든 간에 이곳을 떠나기를 바라오. 이곳에서 당신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그녀가 그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라벤던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이곳을 허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명심하시오."
"아뇨, 나는 할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저지할 수 없을 거예요. 명심하세요."
"올리비아, 이곳을 무너뜨리는 것이 나에게 대체 무슨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 거요?"
올리비아는 잠시 고심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죠"
자이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랫동안 그는 담배 맛을 즐기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올리비아 당신은 이곳을 내게 팔 생각을 하고 있소?"
올리비아는 이 싸움에서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아뇨 우리는 이곳에서 계속적인 수익을 올릴 거예요. 팔 생각은 없어요."
그녀의 뜻밖의 대답에도 자이는 전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게 원하는 것이 뭐요?"
그것은 자이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의미했다. 올리비아는 자꾸만 흥분되는 기분을 애써 눌러야만 했다.
"당신은 이미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 주시오"
"팔로샴의 신용을 회복해 주세요. 그리고 예전처럼 당신의 선박과 화물창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전부인가요?"
"나는 당신 회사가 새로운 화물 운임료를 책정하기를 원해요. 당신 회사의 운송료는 너무나 비싸니까요."
"그리고"
"팔로샴과 아더 랜섬의 회사를 그냥 두세요. 또다시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재미난 듯이 지켜보았다.
"그러면 그 모든 양보의 대가로 나는 무엇을 얻소?"
"만일 당신이 약속을 지킨다면 파괴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라벤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마음이 조급했다. 그로부터 확답을 들어야 했다. 그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매우 공정한 거래인 것 같군요."
그가 마침내 대답하였다. 올리비아는 자이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동의하시는 건가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니!"
"뭐라구요?"
올리비아는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헛된 바램이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소 나는 모든 것이 당신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당신의 끈기와 현명함에는 갈채를 보내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뻔했어요."
"자이 하지만 당신은 방금 공정한 거래라고 했잖아요."
"그랬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공정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오. 잊었나요?"
"나는 꼭 하고 말 거예요, 자이 당신에게 속임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거예요.!"
"아니 당신은 할 수 없을 거요. 내가 약속하지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이 자리에 존재할 거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분노가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나오질 않았다.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다음날 새벽, 올리비아는 윌리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밤새 계획한 것들을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윌리 씨, 우리 회사의 경비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죠?"
"약 200명 정도요. 왜죠?"
"그럼 라벤던의 회사는요?"
"글쎄요,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알았어요. 사무실과 우리 창고 주변의 경비를 두 배로 늘려 주세요."
"왜요?"
윌리가 얼굴 가득 의문을 담고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자이 라벤던 때문이에요. 우리 측 정보원에 의하면, 그가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미리 경계하는 것이 현명하겠죠? 특히 템플우드 저택 공사현장을 잘 지켜야 해요. 순찰을 두 배로 늘리세요. 그리고 공사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수상한 자에겐 발포해도 좋아요. 만일 사람이 더 필요하면 쓰세요. 그들에게 두 배의 임금을 제시하세요.!"
윌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한 가지 더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지금 당장 공사를 시작하라고 전하세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그녀를 지켜보던 에스텔이 아침 식탁에서 마주한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언니, 어젯밤에 라벤던을 만났지?"
"그래"
"그가 언니의 제의를 거절한 모양이지?"
"그래, 하지만 잠시야 철거가 시작되면 그는 내게 항복해 올 거야"
"과연 그럴까?"
그때 팔로샴 회사의 직원인 데니슨이 매우 급한 전갈이 있다.며 올리비아를 찾아왔다.
"마님, 아브라함 씨는 다음 주까지는 이곳에 올 수가 없다고 하는데요. 급한 스케줄이 잡혔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그녀는 분노에 싸여 데니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을 되찾고 공사 입찰에 응했던 다른 세 곳의 건설회사로 급히 데니슨을 파견하였다. 그녀는 공사비의 두 배를 지급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도록 데니슨에게 지시했다.
올리비아가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그는 고리대금업자 무지였다. 올리비아는 그가 결코 고객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잠시 놀랐다. 무지는 몹시 초조해 보였으며, 그녀가 나타나자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남작부인 말하기 정말 부끄럽습니다만"
무지는 뭔가가 대단히 불안한 듯이 계속 좌우를 살폈다.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요, 부인"
그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안쪽 호주머니에서 전에 올리비아가 저당 잡혔던 보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더 이상 부인의 담보물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죠?"
"갑자기 막대한 현금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문제인데, 자세한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고 저의 아내와 아이들을 살려 주세요, 제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저의 대출금을 돌려주세요.!"
"대출금? 물론 나는 대출금을 곧 갚을 겁니다. 영국에서 곧 돈이 도착할 거예요. 지금은 돈이 없어요. 호텔을 짓기 위해 준비자금으로 다. 써 버렸다구요. 차라리 그 보석을 팔아 가지세요. 대출금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받을 거예요. 됐죠?"
"아이구, 부인 살려 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럼 제가 보석을 팔아 당신의 대출금을 갚으란 말인가요?"
그는 그녀의 제안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자비로우신 부인, 그럼 저는 그렇게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올리비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자이의 흉계는 가히 조직적이고도 난폭했다. 호텔 공사에 필요한 모든 인력과 자금을 철저히 차단시켜 버림으로써 올리비아로 하여금 꼼짝 못 하도록 발을 묶어 버린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올리비아가 데니슨에게 물었다.
"그들에게 두 배의 공사비 이야기를 빠짐없이 했겠지요?"
"그럼요, 심지어는 원하는 금액을 모두 줄 수 있다고까지 했는 걸요."
"그들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던가요?"
데니슨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쏟아지는 분노로 올리비아는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데니슨이 가고 난 후, 윌리에게서 짧은 편지가 도착했다. 그 내용은 팔로샴에 고용된 일용직 근로자의 반 이상이 회사를 떠났으며 새로운 인원을 보충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더 이상 분개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되는 쪽은 자이 라벤던인 것이다. 이럴수록 그녀는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준비해야 했다.
"아모스, 아모스"
그는 아이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달콤한 감정을 느끼려는 듯했다.
"아모스 그애의 인생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거요. 그를 잘 보살펴주오 당신이 물론 잘하겠지만 말이오"
"그 애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에겐 엄연히 버커스트라는 성이 있어요. 당신처럼 사생아란 놀림을 받으며 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그 애를 당신과 같은 사생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프레디와 결혼했어요. 자이, 이젠 당신도 과거를 잊어요. 과거는 이미 죽었고 지나간 것이에요."
"나에겐 미래란 없소 나에겐 오직 과거뿐이오"
그의 절망이 아주 격정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내 아들의 얼굴을 아주 잠시만 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소. 그것이 내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알고 있소?"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나 역시 당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어요. 나도 사랑하는 아들을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영국으로 떠나 보냈어요. 영원히"
자이는 놀라는 것 같았지만 곧 조롱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거래군 그래 성(姓)을 빌려쓰는 대가로 아이를 낳아 준 것인가? 훌륭하군! 대단해!"
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편지 한 장에 나의 진심을 적었었소. 비록 그것이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시람의 운명이 한낱 종이쪽지 한 장에 의해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니 정말 우습군 그래"
그는 극도로 지쳐가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기운이 빠지는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가 함정에 빠진 야수처럼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올리비아, 나는 당신을 매춘부라고 매도했었소"
"그만둬요, 자이 아무 설명도 필요 없어요."
올리비아는 귀를 막고 싶었다. 그의 자기학대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자이가 허공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당신은 도망치지 못했나? 왜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나? 도망치고 숨어서 왜 나를 기다.리지 못했나?"
심한 좌절감 때문에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는 이곳저곳을 닥치는 대로 쳐대기 시작했다. 자기 손에 사정없이 피가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당신은 나를 믿지 못했나? 빌어먹을"
"왜냐구요? 당신은 내게 아무런 말도 주지 않았어요. 어느 날 아침 에스텔과 함께 달아나 버린 남자를 무조건 믿으라구요? 그때 내 뱃속엔 아모스가 있었어요. 그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구요. 내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했나요?"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천천히 분노를 삭히더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맞아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욕심일 뿐이야 모든 것이 내 잘못인데 공연히 그것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운 것 같소. 세상에 그런 사랑은 없소 동생을 데리고 도망쳐 버린 연인을 너그럽게 기다.려 줄 사랑은 없소 나는 이 지구의 시계 바늘을 모두 거꾸로 돌려놓고 싶었소.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소. 왜냐하면 당신을 잃었기 때문이오"
다시 한번 마음이 쓰렸는지 그가 비탄에 잠겨든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오. 난 정말 6개월 안에 돌아오고 싶었소. 그리고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소. 설마 당신이 프레디와 결혼할 줄은 정말 몰랐소.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소."
길게 숨을 내뱉으며 그가 말을 계속했다.
"당신을 포기하고 잊기 위해 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소.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지 만약 당신이 차라리 나를 피해 어디론가 잠적을 했었다면, 난 당신을 찾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 헤맸을 거요. 그러나 당신은 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뀐 것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것 당신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었겠소?"
올리비아는 그때 자신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온 이상 이곳을 마음대로 떠날 수 없으리라는 것도 느꼈다.
"자이"
그녀는 더 이상 자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인생길로 걸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것일 뿐이에요. 우리 두 사람의 잘못과 욕심, 그리고 자만심이 지금의 이 슬픈 현실을 만들어 냈어요. 나는 당신의 마음을 모두 믿지 못했고, 당신은 나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었죠."
우리? 우리라구 이 얼마나 간사한 표현인가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지금, 이 말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가 그러나 자이는그녀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지난 밤 꾸었던 악몽이 생각났다. 두 눈을 꼭 감았으나 그 환영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도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감정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었다. 어떤 괴상한 물체 안에 감금되어있는 것처럼 그녀는 온몸이 붕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올리비아는 그에게 졌다. 아니 한 번도 그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곁에 가고 싶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곁에 앉아 쉬고 싶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숨소리를 느끼며 그를 쉬게 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녀의 뇌리를 파고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그녀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숙명에 의해 제지받았던, 공유할 수 없었던 세월의 슬픔들을 그와 함께 보상받고 싶었다. 그를 사랑해 주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의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감정들이 일제히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흐트려놓고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걸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셔츠 밑으로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근육과 그의 향기 그의 단단한 턱과 부드러운 입술들 그의 활기찬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 눌려 있던 진실이 살아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있는가, 더 이상 감추고 억누를 필요가 있는가. 올리비아는 언제나 그녀의 가슴속에 있었으면서도 또 언제나 감취져 있어야만 되었던 진실의 언어를 기어이 내뱉고 말았다.
"자이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어렵게 뱉어진 올리비아의 고백에 대해 자이는 단숨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이별 의식이 너무 긴 것 같군!"
자이의 차가운 한 마디가 올리비아의 환상을 온통 깨뜨려 놓았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차가운 현실뿐이었다. 자이는 이성을 되찾은 것처럼 차분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단 한 가지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이별 의식을 끝내야 할 것 같소"
"... "
"우리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것이오."
"당신은 들어야 하오 당신은 모든 진실을 알고 그것을 기억했다가 아모스에게 전해야 하오 훗날 아모스가 모든 것을 이해할 만큼 성장한 후,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줘야 해 그것은 그 애의 잘못된 운명에 대한정답이며, 그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이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지만 그의 회색빛 눈동자만은 여전히 불꽃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그녀는 가치 없는 목숨으로 살다가 의미 없는 종말을 맞이했던 거요. 나를 대신해 맞은 그 가혹한 채찍질, 그건 죽음을 재촉하는 채찍에 다름아니었소. 팔 년 동안 그녀는 아편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지 못했소. 그녀의 피가 모두 아편으로 관통해 있는 것 같았소. 그녀의 몸은 굶주린 사람과 같이 아편을 원했고, 아편 외엔 아무것도 그녀를 만족시켜 줄 것이 없었소. 그녀는 음식에 대한 굶주림이 아니라 아편에 대한 굶주림과 함께 죽어갔던 것이오. 그러나 그녀의 심장과 정신은 그 이전에 이미 죽어 있었소. 그녀는 그때 스물넷도 안 되었소"
그는 모든 감정을 절제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상처 입은 말이라면 제발 하지 말아요."
"그래 맞아, 그것은 아픈 상처였소 그러나 난 아직도 말해야 할 것이 있소."
그의 손가락 끝이 옆에 놓여 있던 붉은 색 꾸러미로 공허하게 움직였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은 그 보따리가 그에게 여전히 특별한 느낌을 주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그 집에서 떠난 후, 우리는 길에서 노숙을 해야 했지. 그녀의 팔에 난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흘렀고, 아편이 필요했기에 그녀는 더욱 몸부림쳤지.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전에 그녀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소. 그날 밤이 그녀의 마지막 날 밤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소."
그가 일어났다. 그리곤 올리비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때 아편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았소. 그리고 내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소. 아편이라는 것은, 어린 나의 이해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소. 그런데 그녀에게 그토록 참혹한 아편을 끊임없이 주입 시킨 게 나의 아버지라니 그건 너무도 무서운, 나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지."
자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가 그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를 내심으로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소. 영국인의 점잖은 모습도 내겐 동경의 대상이었지. 그는 전형적인 영국인이었소. 나는 남몰래 숨어서 그 사람을 몇 시간 동안 계속 지켜보곤 하는 게 즐거웠었소. 그의 모든 작은 행동까지도 지켜보면서 혼자 있을 땐 그를 흉내 내기도 했었소. 내겐 그를 만져 보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소. 왜냐하면 영국인을 만져 보는 것이 나에겐 하나의 꿈이었으니까."
그가 잠시 말을 중단했다. 무슨 무서운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의 격량에 의해서 그의 목소리가 한 계단 뛰어올랐다.
"나는 한 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소. 나는 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었소. 그만큼 난 어렸었지 마침 지나가던 한 노인이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에게 말을 해주었소. 우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어머니를 강둑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들을 모았소. 그 나무들은 습기로 축축한 것들이었는데, 그것에 불을 붙이기까지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소. 나는 화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었소. 단지 장작더미가 불타기 시작했을 때, 내가 울기 시작했을 뿐이었지. 나는 그제서야 어머니가 내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요."
그의 그런 담담하고도 단조로운 음색에는 어떤 감정의 실오라기 하나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외면적으로는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때의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지금도 그 통증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제발 더 이상 얘기하지 말아요.!"
그녀는 애원했다.
"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는 싸늘히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 아이를 위해서 당신은 꼭 모든 것을 알아야 하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었소. 제발 내가 그 애에게 이 얼마 안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해주오.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의 마음은 편안해질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웃음이 낮은 목소리와 함께 입가에 드리워졌다가 곧 사라졌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기적이라오"
올리비아는 자신의 저항이 무의미하며, 그의 고집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 노인은 가버렸고 나는 혼자 남아야 했소. 그는 나에게 어머니의 유골을 남겨 놓고 간 것이오. 그것들은 재가 되어 함께 모아졌던 것이오. 나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그것을 강변에 뿌렸소. 그 열려진 바다를 향해 어머니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흩날려 사라져 갔소. 그 후, 나는 목욕을 하고 이발사에게로 가서 머리를 자르고 손톱도 잘랐소. 이것은 그 노인이 말해 준 것인데, 아마 화장할 때의 의식인 것 같았소.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떤 낯선 집에 누워있는 것을 알았소. 나는 그곳이 어디였는가 기억할 수가 없소. 나의 어머니가 죽은 지 많은 날들이 지나간 후일 거요. 그리고 그때 나는 믿을 수 없게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기억상실증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었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내 마음의 모든 기억이 깡그리 지워진 것이었소."
자이가 다시 말을 멈추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강물 위에 휘익 던졌다. 고요한 강변에 이상한 여음을 남기며 사라진 돌멩이 올리비아는 그것이 찬드라마니의 존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곳의 낯선 사람들은 내게 아주 친절하고 내 몸을 잘 치료해 주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 멍해 있었소. 그들이 어떻게 날 치료하고 있는지조차 몰랐소.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때, 나는 아삼 지방에서 온 어떤 여행자들과 만나게 되었지. 내가 그들의 사투리를 들었을 때,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기억들이 나에게 뭔가를 얘기해 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지방 어딘가에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소. 나는 무조건 아삼 지방을 향해 떠났소. 그러나 나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소.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소. 그때 내가 그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을 그 부족의 누군가가 발견했소. 그 사람이 차고 있던 그네들 부족의 목걸이를 알아차렸던 것이오. 그 목걸이는 그 노인이 우리 어머니를 태우기 전에, 내 어머니의 몸에서 떼어내 나에게 전해 준 것들 중의 하나였소. 얼마 후,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나의 할아버지였지. 그는 울었소"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더듬거렸다. 올리비아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그 노인의 참담했을 심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부서졌다.
"그는 내게 과분한 사랑을 주었지만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었고, 많은 슬픔이 그를 더욱 늙어가게 했소. 몇 년 후 그는 죽었소. 그가 눈을 감고 난 후, 그를 화장하기 위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이 나였소. 나는 그가 재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소. 그때, 그 타오르는 장작더미의 불길을 따라 잊었던 모든 기억이 내게로 되돌아 왔던 것이오. 내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고, 어디서, 왜 죽어갔는가에 대해서 모든 것이 기억났소. 나는 그 큰 집이 기억이 났소. 내가 태어났던 방, 그리고 아편이 뭉쳐진 그 작은 덩어리, 그녀의 몸에 가해지던 악랄한 매질,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모든 말까지 기억이 났소. 그리고 브리짓트와 템플우드 부인의 얼굴과 죠수아가 했던 매질이 기억났소"
떠오르는 달빛에 그의 눈이 오팔 보석과 같이 희미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자칼 한 마리가 구슬피 울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굳어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기억이 되살아난 그 순간에, 나는 증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처음 알 수 있었소. 그것은 정말 놀라운 감정이었소. 바로 그 순간 치솟아 오른 그 감정은 나의 인생 전부를 관통하고 지배하게 되었소. 내 할아버지가 그 장작더미와 함께 화장될 때 내 나이는 불과 열세 살이었소. 그때 나는 하늘에 맹세를 했었지. 다른 어떤 말도 그때의 나의 증오심을 대신하여 표현할 수는 없을 거요. 그 순간, 내 인생은 이미 운명지워져 있었소. 인간의 모든 운명의 선이 그의 손바닥에 그려진 것과 같이"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길은 이렇게 새겨져 있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오. 결코 거부될 수 없는 나의 운명일 뿐이오. 그 길을, 그 숙명의 길을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소."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결국 올리비아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도 말하고 싶어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참혹한 기억들은 어린 시절 그의 머릿속에 깊이깊이 새겨졌고, 그의 인생을 돌아가게 하는 축대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나의 이런 증오심에 늘 방해가 되었소. 당신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소."
그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더욱 창백하게 빛났다.
"당신은 나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진 정말 바보 같은 여자였소."
한 번 더 그녀를 응시하더니,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은빛 목걸이에 갖다대었다. 그것은 에스텔에 의해 그의 손에 전해진 것이었다. 그는 목걸이 끝에 매달린, 올리비아에게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했던 작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에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자, 봐요, 올리비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올리비아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처음에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어떤 미세한 것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거의 부피가 없는 작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나의 아버지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오. 몇 가닥의 머리카락 우리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했던 죠수아의 머리카락"
그가 딸깍 소리를 내면서 목걸이를 닫을 때, 올리비아는 심장 한쪽을 쿡 찌르는 날카로운 뭔가를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의 사랑의 증거물이자 그녀의 추억이었소 어머니는 이것을 사랑하고 아꼈소. 그랬기에 그것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녔지."
강가에 물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희미한 물안개 사이로 자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펴졌다.
"내 어머니의 순진무구한 사랑에 대한 보답이 겨우 이 머리카락 몇 개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소? 그 엄청난 굴종과 모멸과 그리고 아편 그 모든 것에 대한 보답이 머리카락 몇 개에 불과하다니, 올리비아, 이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소?"
올리비아는 분노로 굳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모든 것!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오. 나는 내가 했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소."
"그는 당신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어요."
"나는 아직도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 같소. 그래, 맞아 그는 나를 죽일 수도 있었소. 그 옛날 채찍으로 그리고 그날 밤엔 권총으로 난 오히려 그가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는 그의 첫 번째 총알을 고의적으로 실수했소"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나를 맞출 수도 있었을 거요. 그는 한 번도 실수해 본 적이 없는 명사수였으니까"
"당신 역시 그를 쏠 수 있었어요."
"그랬지"
그는 그에 관해 더 이상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죠수아에 대해 따뜻한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없었소. 단 한 번도 그는 하루 종일 우리 어머니를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소. 그 옆엔 늘 랜섬이 있었지."
그가 일어섰다. 그리곤 그녀의 곁을 떠나 어둠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두운 밤의 공허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그 절망적인 암흑에다. 대고 소리쳤다.
"내가 혼자였을 때, 낙담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혼란에 빠져 헤매이고 있을 때, 그때마다. 내 마음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소. 언젠가 딱 한 번 죠수아는 내게 '나의 아들'이란 호칭을 썼었소. 지금도 그 소리가 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소."
올리비아는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언젠가, 그리고 어디에선가, 아모스가 낙담하고 혼자라고 느꼈을 때,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인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왜 울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또 한 번의 교차로가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어두워서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가슴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비를 동반한 매서운 바람이었다. 그 폭풍우 속에서 누군가의 울부짖는 소리들이 올리비아를 괴롭게 했다. 그녀 자신이 그녀에게 내리는 명령들을 올리비아는 더 이상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말로 숙명에 의해서가 아닌, 그녀의 마음이 가리키고 있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결심을 할 순간인 것이다. 그녀가 꼭 가야할 길이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올리비아는 평온해지고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거대한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거기엔 조용한 평화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 그녀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그것이 이미 오래전에 운명 지워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자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결심한 것을 어쩌면 벌써 깨닫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제 떠나실 예정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곧"
"어디로요?"
"어디로 간다 해도 별 상관은 없겠지."
"당신은 도망가서 숨어 살면서 아모스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 생각인가요? 당신이 늘 겪었던 그 고통의 세월로 우리의 소중한 아모스를 내몰 생각인가요?"
"올리비아 나를 괴롭히지 말아요. 그 일에 관해 내겐 아무 선택권도 없음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올리비아가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말했다.
"제가 그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겠어요.!"
그들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마치 강조차 흐름을 멈춘 것 같았다. 그때 그 정적을 깨고 요동치는 것이 있었다. 그 소리는 자이의 심장으로부터 들려지는 것 같았다. 자이가 온 힘을 다. 기울여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아모스를 데리고 나와 함께 떠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요, 올리비아?'
"그래요.!"
자이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지? 무엇이 당신의 그 얼어붙은 마음을 바뀌게 한 거지?'
"왜냐구요?"
그녀가 그에게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나의 인생이 완성되지 않은 탓이겠죠. 아니면 아모스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그녀의 말이 목구멍 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녹이 슨 것처럼 매우 힘들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이 말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눈길만이 그렇게 얽힌 것은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그의 넓은 가슴에 쓰러지듯 뛰어들었고, 자이도 그녀를 반사적으로 포옹했다.
너무나 먼 길을 우회하여 지금 여기에 와 있지만, 그리고 그 여정(旅程)은 너무도 험난한 길이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이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상처 나게 하고, 서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그런 미움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증오와 비난과 환멸의 언어들은 강변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다. 실려 보냈다.
올리비아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그녀가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흘렸던 눈물의 색깔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삶의 뒤안길에서 허공을 향해 뿌렸던 그런 눈물도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웃고 있었다. 울면서 웃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이 라벤던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녀의 가슴속에서 더욱 진한 빛으로 타오르던 사랑이 있었음을 그것을 억누르고, 그것을 지워 버리려 몸부림치고, 그것을 회피하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자이는 더욱 큰 그림자로 그녀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이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의 한숨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이젠 그의 모든 것이 그녀 것이었다. 그의 체온, 그의 가슴, 그의 야망, 그의 절망과 비탄까지도 숙명에 의해 제지받았던, 그래서 함께 나눠 가질 수 없었던 세월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이면 올리비아에게 충분했다.
더구나 그녀에겐 아모스가 있었다. 그의 피가 흐르고,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물려받은 아모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두 사람의 따뜻한 사랑이 그녀에게 있는 한, 올리비아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잠시 후, 자이 라벤던이 그녀에게서 떨어지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발아래 놓여 있던 벨벳천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이는 한동안 그 꾸러미를 든 채 멍하니 강변 저쪽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이의 표정이 예전과 아주 다르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무한한 평화가 그의 볼에 내려앉아 있었고, 원망도 분노도 없는 편안함이 거기에 있었다.
잠시 후, 자이는 그 꾸러미를 강물에 힘껏 던져 버렸다. 그 물건이 물에 닿는 아주 작은 파열음이 났으나, 곧 대지의 침묵에 흡수되었다. 올리비아는 놀랐으나 그를 내버려 둔 채 그대로 있었다. 그가 던져 버린 어머니의 유품과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에, 그녀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이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손길로부터도 탈출하려는, 그를 얽매이고 있었던 비극의 굴레로부터도 벗어나려는, 그런 모든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건 올리비아와 함께 공유할 수 없었던 지난 2년의 세월과도 결별하는 의식이었다.
올리비아는 캘커타를 떠나지 않았다. 자이 라벤던과 아모스가 그녀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