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불같은 사랑
"그의 배가 내일 부두에 닿는다는 얘길 들었어 석탄 엔진으로 간다는그 배 말이야 아빠가 또 불같이 화를 낼 텐데"
에스텔이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수다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애써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이미 올리비아의 맥박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세관 사무실에서 일하는 제니퍼의 사촌이 말하더래 생각해 봐, 그의배가 겨우 한 달만에 캘커타와 런던 사이를 항해하는 걸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구 그는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깜짝깜짝놀라게 한다니까"
에스텔은 원래 사업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늘 개인적인 화제에만 매달렸다.
"하루라도 런던에 있어 봤으면 언니는 프레디와 결혼하면 런던에서 살게 되겠지?"
"난 프레디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아!"
그녀는 괜시리 화가 나서 이 한 마디를 남기고는 방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에스텔의 가벼운 입보다. 그녀를 더 화나게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내일 아침 프레디와의 산책 약속이었다. 아침부터 그 얼빠진 남자와 지루한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다니, 정말이지 그건 생각할수록 화나는 일이었다.
어제 버커스트 부인과 작별하고 나올 무렵이었다. 갑자기 이모가 프레디를 향해 소리쳤던 것이다.
"어때요., 프레디 우리 올리비아에겐 아침마다. 공원을 산책하는 습관이있는데 내일 아침 함께 아침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게"
프레디의 눈이 반짝 빛이 났고, 버커스트 부인의 얼굴에도 한자락 희망의 빛이 어리는 걸 보며 올리비아는 도저히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모에게 화가 나고, 무엇보다.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그녀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영광이지요. 제가 아침 일찍 공원으로 나가겠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상당히 흥분된 어조로 말을 하는 프레디를 보며,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버커스트부인을 보며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동트기 전의 어스름한 잿빛 풍경 속에서 프레디는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는데 혈색이 없는 핼쑥한 얼굴에 붉게 충혈된 눈은 그가무척 초조해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어디로 산책을 나가시겠어요?"
"저는 그냥 내키는 대로 매일 1마일 정도씩 달리고 있어요. 오늘은 식물원 쪽으로 가고 싶어요. 숲이 참 좋더군요."
그가 기쁜 듯 눈을 반짝이며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늘진 안색과 피곤에 찌든 듯한 두 눈, 꽤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는 꾸부정한 어깨를 보며 웬지 안 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캘커타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지역으로 변해 가는 스타우티 거리를 지나 관공서가 늘어서 있는 칼리카타 지역을 지나쳤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죠수아 경과 자이의 사무실이 있는 올리브 거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초로 개인 증기선을 성공적으로 귀환시킨 자이의 사업 수완을 생각하노라니 그녀는 프레디와의 동행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조금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식물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기분은 이미 유쾌하게 변해 있었다. 더구나 막상 프레디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유머러스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런던과 옥스포드에서의 탈선행위와 별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극성에 대해 무한정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이 이야기를 쏟아 내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는 어머니의 극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아들이고자 노력하는 듯했다. 신경과민에 가까운 자신에 대한 관심에 때론 신물이 난다고도 했으나 그것 때문에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고 말했다.
올리비아는 그와의 대화가 그런대로 부담없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방어태세를 늦추었다. 놀라운 것은, 프레디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자기에게 불합리한 내용이거나 자신의 비평이지 결코 다른 이에 대한 험담이나 악평은 끼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악의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오직 있다면 지나칠 만큼 자기자신에게 화살을 겨냥하는 겸손이 있을 뿐이었다. 실은 그 겸손이 자기비하에 가까운 것이 문제였지만.
그러나 올리비아의 그런 유쾌함도 짧은 순간으로 끝이 났다. 활기찬 산책을 마치고, 한숨 돌리기 위해 벤치에 막 앉으려는데 그가 말했던 것이다.
"올리비아 양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올리비아는 금세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예상되기에 그녀가 황망히 입을 열었다.
"제발 말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의 작은 턱이 갑자기 굳어지고 눈빛이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난 얘기해야 해요. 난 이 말을 마음속에서 꼭 발산시켜 버려야 해요.그렇지 않으면 난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그가 너무나 안돼 보여서 올리비아는 더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외면한 채,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난 그다지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난 사람들이 날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머리카락 한올만큼도 못한 인간이라는 걸 잘 알아요. 올리비아,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고, 총명하고 너무나 완벽해서"
목 안에서 말이 뒤엉켜 버린 듯 그가 심하게 기침을 한 다음에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덧붙였다.
"나는 당신을 어떤 힘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내 아내로 맞고 싶어요. 내 아내가 되어 주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마지막 말은 혼신의 힘을 다. 쏟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는 마치 밤길을 내내 달려온 사람처럼 지친 표정으로 벤치에 꺼지듯 앉았다.
이미 아침의 금빛 태양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그 활기찬 대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민과 곤혹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랑도 관심도 없는 남자로부터 이런 식으로 구혼을 받아도 가슴에 파문이 일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그녀는 잠시동안 침묵에 잠겼다.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상처 받기 쉬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덜 아픈 상처가 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게 위안이 될 거절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올리비아, 지금은 부디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당신이 차라리 아무 말씀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프레디의 말은 그녀를 안심시켰으나, 그는 더욱 처절한 표정이 되어 심지어 숨까지 헐떡거렸다.
"만약 당신이 거절하신다면, 난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겁니다. 내게 마음을 다.져 먹을 시간을 주신 다음에 거절해 주세요."
올리비아는 그 제안에 수긍하는 자신에게 비겁함을 느끼면서도 그런 집행유예에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올리비아가 억지로 밝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그가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엇이든지 말해 보세요."
"오늘 나눈 얘기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어머니에게나 저의 이모님에게도 말이에요."
"좋습니다. 당신의 대답이 있기 전까지 꼭 비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뭐죠.?"
올리비아가 다시 긴장하며 묻자, 그가 실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내놓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만은 나를 바보로 생각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동의해요. 거래가 성립되었군요.!"
그들의 악수와 협상은 잠시 후에 그들에게 다가온 말발굽의 소음 때문에 깨어졌다. 미끄러지듯 그들 앞으로 나타난 인도 전통 복장의 사내가 올리비아에게 불쑥 흰 봉투를 전달했다. 의아스런 표정으로 받아든 그 봉투에는 죠수아 경과 아더 랜섬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웬일이지? 걱정이 된 그녀가 재빨리 봉투를 찢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엔 아더 랜섬의 펜글씨가 급히 쓰여져 있었다.
'죠수아 경께서 급히 찾고 계십니다. 이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올리비아양을 에스코트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편지 내용의 전부였으므로 올리비아의 의아심은 더욱 깊어졌다.
"이모부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그렇지만 그 사내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듯 고개만 저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꿰뚫고 지나갔으나, 어떤 일이 생겼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않았다.
"가봐야겠어요. 이모부님이 이런 식으로 절 부르신 것을 보면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프레디를 남겨 놓고 올리비아는 급히 돌아섰다. 또 하루의 뜨거운 낮을 알리는 열대지방의 태양이 벌써 공원부근에 무수히 햇살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영국에서 최근에 도착한 죠수아 경의 배는 '수선화 호(號)'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2주 후로 예정된 새로운 항해를 위해 그 배는지금 짐이 하역되고 다시 선적되면서 반대편 기슭에 정박하고 있다.
우글리 강의 도도한 물결을 다리 아래로 굽어보면서 올리비아는 생각에잠겼다. 또 어떤 새로운 재앙이 이 아침의 호출을 불렀을까 또 어떤 도발이 죠수아 경의 가슴에 파문을 던졌을까
수선화 호에 오르기 위해서는 작은 범선을 타고 가야 했다. 워낙 거대한 선박이기 때문에 부두에서 멀찍이 멀어진 곳에 정박한 것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범선들 사이를 지루하게 헤쳐 나간 후에 목적지에 다다르자, 두 명의 선원이 올리비아가 사다리로 그 배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인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배에 올라 보는 것이기에 그녀는 긴장과 활기를 찾았다. 사다리의 반쯤 올랐을 때, 은빛으로 변한 햇살이 바닷물을 온통 하얀 색깔로 만들어 놓은 듯해서 그녀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몰려드는 어지러움을 이겨내려고 재빨리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상황에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듯했다. 뱃머리에 우뚝 선 기둥 꼭대기에 내걸린 장식이 그녀의 뇌리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것은 금빛의 삼지창 표식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오늘 아침에 그녀를 경악시킨 그 편지를 보낸 장본인이 자이임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오른 배도 수선화 호가 아니라 자이의 배인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또 나를 당황스럽게 했어요. 전 이모부님께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어요."
올리비아가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명백한 분노였다. 그녀를 배로 잡아끌어 올린 뒤에도 여전히 그녀의 손을 쥔 채 자이가 심술궂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당신의 이모부는 지금 매우 건재한 채로 침대 속에 있을 거요."
그의 손을 뿌리쳐 빼내며, 올리비아가 격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런 비열한 속임수를 써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인가요?"
"내게는, 당신이 그 얼간이 같은 친구에게 이끌려 새벽부터 공원을 어슬렁거릴 정도만큼은 용건이 있소 당신은 남편감을 찾아 아침부터 거리를 배회할 정도로 비참해진 거요?"
올리비아는 너무 분해서 거친 숨을 내쉬면서 배 난간에 기대었다. 삼지창의 날카로운 창끝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섬뜩한 모양에 작게 진저리를치며 그녀가 거칠게 내뱉었다.
"왜 그런 것이 당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왜 내가 당신의 그 비열한 염탐의 대상이 되어야 하죠.?"
"염탐이라고 했소?"
그가 화난 얼굴로 올리비아 앞에 우뚝 다가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소리쳤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소 하지만 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소. 알겠소?"
그가 한동안 삼킬 듯이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도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희미한 어둠이 그의 눈가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솟아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처럼 아픔이었다.
자이가 천천히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말을 한 것이 그런 아픔을 일시에 가라앉게 했다.
"이봐요. 당신은 사소한 논쟁으로 계속 시간을 허비하겠소, 아니면 내 배를 둘러보겠소?"
올리비아는 순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 냈다. 자이의 배! 에스텔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게 얘기했던, 석탄 엔진으로 런던과 캘커타 사이를 30일 만에 갈 수 있다는 그 놀라운 배에 와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분노를 거짓말처럼 잊어버리곤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배를 보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하리라 믿고 있었소 이 배에 오른 최초의 외부 방문객이란 영예가 당신에게 주어진 거요."
"정말 영광이군요. 제가 왜 이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올리비아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갑판으로 걸어갔다.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그녀는 점점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그의 접근, 그녀를 이곳에 끌어들인 계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이제부터 맞닥뜨리게 될 개인적 위험들이 그녀를 혼란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는 볼거리를 매우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쌓여 있고, 그것을 끌어내리느라 분주한 선원들의 발걸음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고, 수많은 밧줄과 깃발과 비릿한 바닷내음도 신기했다.
"이 배가 그렇게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쾌속선이군요."
그가 냉소를 머금었다.
"난 이 배가 왜 그런 파문을 일으키는지를 이해 못하오 자, 아침식사를 하겠소, 아니면 계속 배를 둘러보겠소?"
아침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내가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철저히 믿은 것일까. 그의 완벽한 계산에 놀라며 그녀가 대답했다.
"전 배를 계속 둘러보고 싶어요. 전 당신이 제게 준 영광을 충분히 누리고 싶거든요."
그는 아침식사를 하고 배를 둘러보아도 늦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으나 올리비아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어쩌면 그는 이 배를 소유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올리비아와 함께 누리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런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배는 '강가 호(號)'라고 명명되어 있었다. 거대하면서도 우아한 몸체에 층층으로 제작된 돛을 가지고 있는 강가 호는 빛나는 흰색으로 갑판위에 몇 문의 대포까지 정착되어 있어 올리비아를 놀라게 했다.
"이 대포는 30초 간격으로 발사될 수 있소 대포 없이 항해를 하는 건 자살행위요. 바다엔 악랄한 해적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이 보는 것처럼 강가 호는 무적이오 이 배에는 예기치 않은 뜻밖의 사고란 없소."
강가 호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동안 그의 태도는 점차 부드러워져 얼굴엔 미소까지 번졌다.
그러다.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그와 함께 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요소들이 오히려 그녀의 즐거움을 더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이모부 내외의 격렬한 증오와 많은 사람들의 배척을 알면서도 그와 이렇게 동행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는 건 뜻밖이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즐거웠고그와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은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용기를 얻어, 에스텔이 말한 적이 있는소문을 들춰냈다.
"당신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린 적이 한번 있었다던데, 사실인가요?"
"한번이라구? 날 무시하는군! 중국인들은 외국인의 머리엔 현상금을 더 걸죠. 그들은 외국인의 머리가 가보(家寶)라도 되듯이 벽에 거는 걸 좋아해요. 그들은 내 머리를 잘 생긴 박제로 만들어 진열하려고 생각한 것 같소"
"어떻게 벽에 걸리는 걸 피했죠.?"
"그 대신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더 유혹적이었거든!"
"돈으로 사면권을 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아주 양심적이고 훌륭한 거래였소. 동인도 회사는 아편과 더불어 자신의 양심까지 팔면서 이익을 얻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소!"
아편 얘기에,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빼앗긴 위탁 화물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까 하고 망설였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그가 자신의 짓이었다고 당당히 고백할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자, 밑으로 더 내려갑시다."
배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하면서, 그는 올리비아에게 낯선 용어들을 섞어 일장 연설을 계속 늘어 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숨막힐 정도로 정력적인 남자의 일터 안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숨이 찼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자신에 찬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 정도였다. 그의 풍요로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녀가 거의 참기 어려울 정도로 자극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자이 라벤던 사이를 이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대해서는 더이상 당황해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마음의 벽을 두드리는 게 들려왔다. 그래, 난 이 사람에게 매료되어 있고,난 그것을 거부할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게 나는 이 사람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자력과도 같은 힘에 끝도 없이 끌려갈 뿐이야.
"이 배가 뉴욕에서 처음 진수되었을 때만 해도, 이 배의 성공적인 항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그건 왜죠.?"
"혁명적이라 할 만한 선수(船首) 때문이죠. 즉 석탄 엔진의 장착 때문에 다른 배보다. 뱃머리가 훨씬 컸던 겁니다. 그러나 이 배가 불과 80일 만에 뉴욕에서 홍콩까지 달려오자 누구보다. 앞장 서 비난했던 영국인들이 찬사를 보내더군요. 그들은 심지어 선박 건축의 경이라고 추켜세웠죠."
"그렇다면 영국인들 역시 곧 이런 배를 만들려고 할 거예요."
"벌써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결코 이 배를 설계한 존 윌리스를능가하진 못할 거요. 그는 미국에서 첫째로 꼽는 선박 설계사죠."
그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갑판의 나무 판넬을 어루만지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더니 더욱 큰 음성으로 말했다.
"이 배는 움직이는 한 폭의 시(詩)라고 할 수 있소 자, 이제 배의 아름다움을 봤으니 반대로 추악한 것들도 보여 주겠소 그러면 당신은 왜 내가 이 아침부터 일에 매달려야 하는지를 알게 될 거요."
"추악한 것들이라구요? 이렇게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도 추악한 것이 존재할 수 있나요?"
씨익 웃으며 그가 앞장섰다. 배의 내부는 어두웠으며 수면 밑에 있어 느낌이 별로 안 좋은 냄새가 났다. 그들은 복도의 미로를 통해 거대한 조개 껍질같이 생긴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검은 보일러, 압력기계, 잡다한 각목들이 뒤엉켜 있었는데 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독가스를 내뿜고 있었다. 그 역겨운 냄새를 참다. 못해서 올리비아는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의 대가요. 보일러들이 풀가동되면시커먼 연기들이 분출되고, 용광로가 포효하듯이 소리를 지르며 타 들어가죠. 그뿐만이 아니오 선미(船尾) 아래 페달의 작동으로 인해서 귀를 멀게할 정도로 거센 소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열기는 지옥의 광란 같은 뜨거움이오"
그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두 눈만 허옇게 드러낸 사내 하나가 들어와 구석에 있던 삽을 들려고 하자 자이가 즉각 제지시켰다. 자이는 그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낮은 욕설을 퍼부으며 보일러를 세게 걷어찼다.
"저 사람들은 별과 바람과 신만을 죽어라 신봉하는 단순한 선원들이라오 나는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버리고, 대신에 엔지니어에 대해 경의를 표하라고 한다오. 이제 바다는 과거에 생각했던 공상 가득한 낭만의 세계가 아니오. 바다가 가진 그 제멋대로의 매력은 여전히 날 유혹하지만, 이제 바다는 혁명적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서서히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것이오."
바다에서의 삶이, 그것에 생명을 건 삶이 더이상 자신을 매료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고백에 그녀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렇게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삶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거죠."
올리비아의 신랄한 물음에 그가 혼잣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경주를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요."
"아니! 그러기엔 너무 늦었소"
그의 대답은 신속하고 날카로웠다. 보일러실의 매캐한 유독가스를 한동안 더 마신 후에, 자이가 천천히 다음 코스로 그녀를 안내하였다. 승무원들의 숙소와 주방 등은 생각했던 것보다. 청결하였다.
"전 당신이 고용인들을 잘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어요."
그녀가 감동해서 한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에는 가시가 들어있었다.
"왜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하는 거요? 당신은 그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저야 물론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선주들도 많잖아요?"
"그건 그들이 수챗구멍 속의 벌레들처럼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오난 그렇게 살았소 자, 갑시다."
그는 몸을 곧게 펴고,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흘깃 쳐다보더니 금세 쾌활한 표정이 되어 말을 했다.
"아침식사 시간이오 오늘 우리는 진짜 영국식 아침식사를 하게 될 거요."
실용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그의 선실은 개인의 방이라기보다는 사무실 같이 정리돼 있었다. 장식은 별로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이는 그의 방에 들어서면서 올리비아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의성격은 그가 겉으로 가지고 있는 줄기찬 증오심과 반항심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들이 흠잡을 데 없이 정결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들어왔지만 그녀는 잘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식사도 하지 않고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그 어색함을 이겨내려고 무의미한 대화를 애써 만들어 나가느라 그녀는 정성스레 준비된 식사를 제대로 맛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중국무역에 흥미를 느꼈을 때는 어떤 선박으로 항해했나요?"
"첫 번째 배는 폐선소에서 빌린 돛단배였소. 그 배에는 앞갑판에 녹슨 총 한 정이 달려 있었고, 작동되지 않는 소형 무기들이 수북이 널브러져 있었소."
과거에 대한 회상은 그의 기분을 한껏 좋은 상태로 만들어 이제까지 볼수 없었던 소년 같은 얼굴이 되게 하였다.
"처음부터 그런 배를 가지고 출항을 했지만 난 어떤 손해도 본 적이 없소 항해 때마다. 내 주머니는 두둑해졌으니까"
그가 만면의 미소를 머금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멋진 나날이었지"
"그런데 왜 돌아왔죠.?"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었다. 그의 눈이 조심스레 커져 갔고 부드러움도다시 석회석처럼 굳어 갔다.
"그건 인도가 내 고향이기 때문이오"
당신에겐 돌아올 어떤 고향도 없어요. 올리비아는 그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게 진실을 말해 줘요. 당신을 다시 올 수밖에 없게 만든 마음의 번민, 당신이 실현하고자 했던 그래서 반드시 인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이유가 뭔가요?
그러나 그녀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을 연결하는 선(線)은 여전히 가늘었다. 만일 그것이 툭 끊어진다면 그녀는 그의 삶 뒤편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공유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영원히 그의 인생과는 결별해야 되리라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의 비밀 속으로 뛰어들고픈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생길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나에 대해 알려고 하오, 올리비아?"
그의 입술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지는 느낌은 뺨을 달아오르게 할 만큼 오싹한 것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쾅쾅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알고 있는 게 너무 없기 때문이죠."
"왜 더 아는 게 필요한 거요?"
"그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자면?"
그녀는 힘들여 침을 꿀꺽 삼키고는 턱을 쳐들며 과감히 물었다.
"왜 그렇게 저의 이모부님을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죠.? 당신은 이모부님의 위탁판매품인 아편을 약탈했어요. 그렇죠.?"
그는 잠시 대꾸가 없었다. 신랄한 질문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이 분명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비장하게 그가 말문을 열었다.
"난 죽음을 파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소"
결국 그는 그녀가 던진 무례한 질문과 비난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약탈행위를 인정했다.
"당신은 아편중독자가 사는 소굴에 가본 적이 있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에 불안감이 흘렀다.
"당신은 가까운 사람 중에 아편중독자를 둔 적이 있소? 그에게 한 발짝두 발짝 죽음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참담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질문을 내던지는 그의 표정은 불 같은 격정을 담고 있었고 미미했지만 손을 떨기까지 했다. 올리비아가 몸을 굽혀 손을 그에게 얹으려 했지만, 그가 벌떡 일어서며 뿌리쳤다. 그녀는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간신히 말했다.
"전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 먼저 가서 그것을 경험으로 배워 봐요.! 그런 위선적이고 언변 좋은 비난으로 나를 책망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오?"
그의 고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한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이런 부당하고도 공격적인 언사에 대해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제가 스스로 당신에게 왔나요? 당신이 저를 여기 오도록 속임수를 썼잖아요?"
"속임수를 쓰긴 했지만 강요한 적은 없소!"
그가 목소리를 낮춰 차갑게 내뱉었다. 올리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차마 반박을 할 수조차 없었다.
"당신이 가고 싶었다면 언제든 여기서 떠날 수가 있었소!"
그가 뒤돌아 성큼성큼 선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당신의 사소한 호기심에 끌려 들어가기 싫소 올리비아, 난 질문당하는 건 딱 질색이오 특히 인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녀는 그의 오만한 말투에 굴욕을 느꼈다. 절규하듯이,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서 그녀가 그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난 멍청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내가 이해하려고 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가 돌아섰다. 그녀를 향해 서 있는 그의 얼굴엔 어느새 평형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입가에 잔잔히 머물고 있는 엷은 미소를 보며, 올리비아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아편을 약탈했냐고 물었소? 나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했소. 단지 그것뿐이오."
올리비아의 도전적인 태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순전히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그 도전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이 라벤던 앞에서는 매번 어쩔 수 없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야 말았던것이다.
뒤늦게지만, 또하나 확인한 것이 있다. 그녀의 굴복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그녀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호기심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녀의 접근으로부터 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그의 눈은 경계의 빛으로 가득했다.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눈을 손으로 훔쳤다.
"전 정말 혼란스러워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가 말해 줄까요?"
자이가 냉정이 말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그의 냉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프레디 버커스트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놀라움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고통이, 분노가, 실망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진정이오, 올리비아 당신의 이모는 당신을 위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한 거요. 프레디 버커스트는 비록 얼간이긴 하지만, 무척 선한 사람이오 그는 당신에게 잘해 줄 거요."
그녀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둔기로 머리 한쪽을 세게 얻어맞은 듯이 어지러웠고, 무엇보다. 마음이 부서지는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내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거죠.?"
그녀의 음성은 낮았지만 격분해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터무니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거요."
그녀가 자이에게로 걸어갔다. 휘청대고는 있지만, 분노 때문에 아직 침몰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평을 오히려 자부심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행동하는 당신의 태도에 정말 구역질이 나요. 당신이 지금까지 쌓은 부와 명성이 내겐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것 역시"
올리비아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삼킬 듯이 눈을 크게뜨고 버럭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프레디와 있어야만 당신은 안전해!"
"무엇으로부터 안전한 거죠.?"
"나로부터!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요, 올리비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이 허리 아래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왜 난 이런 얘기를 계속 들어야만 하죠.? 당신은 왜 내게 늘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는 거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려 했으나, 눈물은 기어이 뺨을 적시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끝내 흐르고 만 눈물엔 고통이 묻어 나왔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곳에, 본래부터 그런 수수께끼가 있어 왔기 때문이오"
그녀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냉정함과 완고함을 가지고 그가 내뱉었다.
"정확히 내가 있다는 그곳이 어디죠.?"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으며 자신의 품위를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있다는 경고가 있었으나 그녀는 그대로 멈출 수가없었다. 어떤 무서운 강박감에 쫓기듯 그녀는 계속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켰다.
"그곳은 바로 나의 내부에 있소"
이 말이 품고 있는 의미는 백 마디 채찍질보다. 훨씬 잔인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놀라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까지도 무시한 채 그가 몸을곧게 펴고는 뒷짐을 진 채 몇 걸음 걸었다.
"그래요, 난 이 아침에 당신을 이곳에 오도록 속임수를 썼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당신이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올바른 정신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소, 올리비아 매번 난 성급해지고,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거요. 난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여전히 날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그녀는 그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픈, 그의 교활하고 잔인하며 비굴한 갑옷을 확 잡아당기고픈, 그가 그녀로 하여금 마음의 껍데기를 발가벗도록 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의 껍데기를 벗겨 내고픈 격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움켜쥔 채, 단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을 뿐이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제가 담고 싶은,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어두운 부분이 있어요., 자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를 밖에 둔 채 문을 닫으려 하지 마세요. 자이,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요."
그녀에겐 자신의 마음을 덮어 가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프레디 버커스트가 거론되고, 그에게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해지는 상황 아래서그녀가 마음의 노출을 두려워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수자타 때문인가요?"
그녀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말에 마음이 황폐하게되어, 그녀는 더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수자타?"
놀라움에 그의 눈이 커졌다.
"아니오, 수자타 때문이 아니오. 당신이 이해할 만한 그 어떤 것 때문도아니오, 올리비아"
그가 갑자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마치 갑자기 발악을 하는 야수처럼 그가 올리비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게 더이상의 질문을 하지 말아요. 난 당신에게 대답을 할 수가 없소. 아니, 하지 않겠소!"
그의 암회색 눈동자가 화염에 휩싸인 듯했다. 올리비아는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나에 대해 갖는 호기심은 그건 고통이오 난 당신의 그 호기심이 불쾌해요., 알겠소? 난 불쾌해서 못 견디겠단 말이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선실 저 끝쪽 벽에 걸린 멋진 시계만이 빠르게 재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쿵쾅쿵쾅거리며 심장이 거친 소리로 뛰는 것도 가끔 들렸다. 그들 사이를 갈라 놓은 의심과 절대감은 아무런 해소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그 침묵의 납덩이 밑에 깔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의 두 눈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과 똑같이 어두움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한참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올리비아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멍한 상태에서깨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가 뭔가 잘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그녀 쪽으로 걸어와선 나지막이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올리비아"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선 채 조용히 뺨을 닦았다.
"늦었어요. 떠나야 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에게 마음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걸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지만, 더이상 노출시킨다는 건 두려웠다.
"올리비아, 난 당신이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소"
갑자기 그가 올리비아의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을 그녀의 눈 위에 대고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 내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순간에도 공허한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아주 부드럽게 그가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였다.
"당신은 정말 상처 받기 쉬운 여자인 것 같소"
그의 속삭임이 그녀의 머리칼에 파묻혔다. 그녀에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올리비아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그의 목에 댔다. 두툼한 그의 목덜미가 차갑게 느껴졌지만 소금기 밴 그의 피부는 그녀의 입술에 황홀함을 전해 주었다. 그녀의 관자놀이에다 대고 그가 무엇인가를 계속 속삭였지만 그녀는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올리비아,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당신은 무고한 희생자가 될 테니까"
희생자라구? 이 말만은 알아들었으나 그 말마저도 곧 이슬이 햇살에 의해 풀잎에서 사라지듯 그녀의 아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 그의 몸의 열기,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으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가 그녀를 황홀하게 했다. 쓰디쓴 기억이나 아픈 현실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지금 폭풍우에 맞서서, 결코 가져 보지 못했던 보금자리를 찾은 한 마리 작은 새였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시간이 그녀의 현재 의식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그가 자신의 목을 두르고있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풀어 내려 놓을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완전한 무의식상태였다.
아주 재빨리 그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감싼 채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가 뗐다.
"자, 이제 가요."
황홀함에서 깨어난 그녀가 눈을 떴다.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을 다시 회수해 갔다. 몸도, 마음도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다시 냉담한 사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조용히 그가 그녀를 이끌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안개 같은 그의 눈에는 이제 어떤 감정도 없는 듯했고 입술은 완고하게 다물어져 있어 그들을 이어 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하인 바하도르가 당신을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이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이 라벤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머리 뒤편에 있는 태양 때문에 그녀는 너무 눈이 부셔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올리비아!"
그녀가 사다리 로프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기도 전에 그가 급히 사라져 버렸다. 이별의 악수를 청하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 눈으로조차도 그녀를 바라보는 걸 거부하고 그는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녀의 눈엔 허망한 푸른 바다만 가득했다.
버커스트 부인 일행을 초대하는 일로 분주한 브리짓트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에스텔은 친구와 마차를 타러 나가려고 했던 약속 때문에 연신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에스텔의 머리 손질을 해주느라 올리비아는 그 수다스런 불평불만을 고스란히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귀찮아 죽겠어. 엄마는 도대체 왜 오늘 같은 날 버커스트 부인을 초대한 거지?"
"내일 그분이 떠나시니까 그러는 거야 만약 네가 오늘밤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면 이모님께 미리 허락을 받아야 될 거야"
"그걸 엄마가 허락할 것 같아? 어쨌든 나는 마차를 타러 나갈 거야. 엄마 몰래 뒷문으로 빠져 나갈 테니까!"
"그건 잘못이야, 에스텔 누굴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해"
올리비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에스텔 몰래 얼굴을 붉혔다. 내가 누구에게 이런 충고를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있으면서 에스텔에게 거짓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충고하다니.
올리비아의 생활은 거짓과 위선의 연속이었다. 프레디와의 아침 산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거짓된 삶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된 행동은 아침마다. 그녀에게 갈등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와 있으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남자로, 그녀가 여태 만나 본 사람 중에 요구 사항이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마음 편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있으면 오히려 올리비아는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차라리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이 라벤던을 향해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올리비아의 노력은 아주 작은 성공만을 거두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과 자기 비하의 휘감기는 굴욕감들을 그저 잠시 동안 억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냉정함과 오만함 때문에 그를 싫어했으면서도 아무런 사고의 여과도 없이 그를 마음속에 자리하게 한 자기 자신을 혐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감정의 메아리는 여전히 가슴을 흔들었고 희망의 불빛은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는 때로, 그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가냘픈 선이 연결돼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올리비아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올리비아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가 운명지운 것이지만 그녀는 결코 그것을 두 사람 관계의 끝이라 여길 수가 없었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버커스트 가족을 위한 파티엔 10여 명 정도의 손님이 참석했다. 프레디는 여전히 올리비아의 뒤를 쫓아다니며 마치 그녀의 하인 역할이라도 맡겠다는 태도였다.
"죠수아 경의 일은 어떤가요?"
프레디의 물음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어, 곧바로 두 사람의 첫 아침산책 때의 일을 상기시켰다. 사려 깊게도 프레디는 그 이후 줄곧 그 일에 대해 함구해 주었었다.
"아, 예 그것은 이모부님께서 어떤 사소한 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듣고 싶어했던 거였어요."
또다른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구나! 나는 벌써 자이 라벤던으로 인해서 얼마나많은 거짓말을 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게 될까
올리비아는 죄의식 때문에 거의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매번 그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의 접촉, 주고받는 시선, 그리고 희미한 미소 멀리서 두 사람의 표정을 세심히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가는 곳이면 바늘처럼 날카로운그 사람의 시선이 늘 따랐다. 그 사람은 바로 버커스트 부인이었다.
올리비아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아래층 응접실에서 끝내 마주쳤다. 그 짧은 둘만의 시간을 이용해서 버커스트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한 가지 빠뜨린 말이 있어요.,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내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혹시 올리비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그것은 실로 예상을 훨씬 벗어난 질문이었기에, 당황한 그녀는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잠시 올리비아의 얼굴을응시하던 버커스트 부인이 스스로 질문을 이끌어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지난번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려요. 만일 올리비아가 그게 사실이 아니라 재고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문제가 다르지만요."
"죄송합니다. 제가 저의 상황을 해명했어야 했는데"
정확히 무엇이 자신의 상황이며, 누구와 관련된 일의 해명인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녀는 또 한번 이렇게 얼버무렸다.
"어떤 해명도 필요치 않아요. 만약 올리비아가 그러고 싶다면, 그것은 이모님께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은 아직도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하게도, 그날 저녁 올리비아를 지탱해 준 것은 프레디였다. 어떤 주의도 대답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곳에 프레디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일은 우리가 한동안 여기를 떠나게 될 아침입니다. 내일, 당신과 말을 타고싶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의 침울한 어투에, 그녀는 거의 동의를 할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이별의 감정으로 잘못하다가는 키스까지 요구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얼른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독감 기운이 있거든요."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냈다.
"예 그럼 그만두기로 하죠."
그가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올리비아도 웃었다. 물론 프레디는 올리비아의 즐거움이 몇 주 동안이나마 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까닭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말을 타고 시(市) 동편에서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마라타 수로를 찾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프레디가 떠나 버렸기 때문에 올리비아는 속박에서 풀린 듯이 해방감을 느꼈다.
긴 수목들이 늘어선 오솔길은 새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천천히 말을 달리던 올리비아는 거대한 거미줄이 낮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얽혀 있는 걸 보며, 그 섬세함을 보려고 말고삐를 풀고 내려섰다.
검은빛의 큰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 위에 매달려 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그 개가 점점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느끼곤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젠가 이모가 말하기를, 인도엔 버려진 미친 개들이 무수히 많으니 한적한 길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쟈스민을 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서, 그녀가 발을 제대로 떼기도 전에 한 마리 커다란 개가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녀는 놀랐다. 눈앞이 캄캄해져 왔고, 다리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개가 그다지 호전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그녀 주위를 빙빙 맴돌 뿐, 몸을 건드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다음 순간 올리비아는 가슴의 벽이 뻥 뚫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개가 입에 물고 있던 무엇인가를 올리비아의 발 밑에 떨어뜨렸던 것이다.
모든 것이 비로소 확연해졌다. 그 개는 자이의 개였고, 발 밑에는 그날 강가 호에 놓고 온 그녀의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가슴만 구멍이 뚫린게 아니었다. 머리 속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목이 메이고 손이 떨려왔다.
더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갑자기 힘을 얻은 듯이 쟈스민에 황망히 올라타고는 개가 달려가는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개가 수로 옆의 숲 속으로 맹렬히 달려 나가는 걸 보는 그녀의 가슴은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행복감으로 당장 터져 버릴 갓만 같았다.
그는 숲 속의 둥근 바위 위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자이 옆에는 그의 애마인 사탄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풀을 뜯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는 거의 알아보기 힘든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그렇게 한참 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하다가, 부시시 일어서서 쟈스민의 고삐를 잡아 주며 그녀가 말에서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천천히 그에게 기대어 땅에 내려선 올리비아는 그의 얼굴에서 뭔가 감정의 편린이라도 찾아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팔을 열었고, 거기에 그녀는 미끄러지듯 안겨들었다. 그녀에게 기대어 그가 미세하게 몸을 떨며 뇌까렸다.
"올리비아, 날 용서해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쿵쾅쿵쾅 그의 심장은 그렇게 소리내어 고동치면서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 주고 있었다. 그녀 뺨에 닿은 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고르지 못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그의 셔츠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당신을 울렸소 날 용서해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얼굴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 그의 가슴으로부터 신선한 체취를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 동안의 비참함과 답답함이 황홀한 행복감 속에 잊혀져 갔다. 그가 격렬히 그녀의 목과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사람들은 내 속에 광기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들 말이 맞는지도 모르오. 난 정말, 내 속에 광기가"
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단지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으며, 더이상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오, 난 때로 나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광기에 빠질 때가 있소 올리비아,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하오"
"알고 있어요."
그녀는 간단히 그의 말을 수긍했다.
"알면서도 놀라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놀라지 않아요."
"올리비아, 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독을 갖고 있소"
그는 깊은 혼란에 빠진 듯 계속 그렇게 자기 비난의 말을 거듭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것들을 내쫓을 수 있어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아니오, 난 그것을 쫓아내길 원치 않아 그것이 없다면 난 존재할 수 없게 되니까 내 말을 알아듣겠소? 난 미쳤소!"
그가 갑자기 거칠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리를 꺾으며 웃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고뇌에 차 있었다.
"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이 그걸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제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샘솟는 사랑으로 인해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며 그녀가 말하자 그가 물기에 젖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소"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떤지는 제가 판단하도록 해줘요."
"그럴 수 없을 거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을 거요."
그렇다면 저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해줘요.!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입을 닫았다. 그를 궁지에 몰아 버림으로써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에 빠질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고통스런 회색빛 눈을 고정시킨 채 그녀를 무정하게 소외시키고 혼자만의 거대한 침묵 속으로 빠져 버렸어도 그녀는 그를 독촉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그의 내면에 깊숙이 틀어박힌 그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는 틈새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만큼 그의 비밀스런 침묵의 벽은 두텁기만 했던 것이다.
"당신은 너무 순결하여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오, 올리비아"
스스로 그 침묵의 벽을 허물며, 그러나 여전히 그녀와의 공유를 허락지 않을 고통을 담아 그가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 삶 속에, 철 지난 계절에 갑자기 몰아친 태풍처럼 들어왔소 난 내 근본이 뿌리째 뽑혀져 나가고 흔들리는 내 자신을 느끼고 있소. 이런 낯선 감정에 맞서 싸워야하다니, 난 정말 혼란스럽기만 하오"
올리비아는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듯한 그의 마음의 균형을 깨뜨릴까 숨을 죽이며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의 진실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몇 번이고 그것을 음미했다.
"그것들과의 싸움 필요가 있나요? 그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것이 불가능한 일인가요?"
"그건 정말이지 불가능한 일이오"
단정적인 말이었지만, 그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기에 그녀는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 역시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리고 뽑히는 걸 느껴요. 제가 느끼고있는 당신을 향한 감정들도 기실 제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당신 역시 저에게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폭풍처럼 찾아왔어요."
그녀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슬픔이 커다란 파도의 모습으로 그녀의 뇌리를 적시고 있었다.
"적어도 무엇인가 제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소, 난 무엇인가 당신에게 갚을 게 있소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의 생각 속에 나를 포함시킴으로써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다시 한번 경고를 해야 하는 빚이오 그것은 곧 내 의무도 된다고 생각하오"
"의무라구요?"
"나는 지금 그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단어도 생각해낼 수가 없소"
"그렇다면, 이 아침에 개를 보내서 저를 여기로 불러오도록 한 것도 의무감에서 나온 건가요?"
그가 당황해하며 애써 부인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또다른 혼란을 가중시키는 말일 뿐이었다.
"난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당신을 찾기 위해 나의 개를 보냈소 나로 인해 상처받은 당신의 두 눈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 기억은 내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함께 강요했고, 난 거기에 견딜 수가 없었소 그것은 그렇소,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것보다 훨씬 더 내가 싫어하는 감정들이오"
이제 두 사람은 숲 속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녀는 그의 어깨가 맥없이 떨구어지고, 열정이 담겨 있던 목소리도 점점 잦아들어 가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당신을 다시 보고 싶다는 비열한 욕구 때문에 당신을 여기로 부른 거요."
비열하다구요? 구름 사이로 뻗어 나온 강렬한 햇빛은 그녀를 빛의 세계속에 있도록 해주었으나 비열이라는 단어를 뇌까리는 그녀의 마음속엔 어떤 빛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포옹과 따스한 입술의 감촉을 갈망했지만단지 그가 자기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애써 만족하면서 말했다.
"그건 저도 원했던 거예요. 당신은 그걸 아셔야 해요."
그녀의 속삭임은 떨렸다. 지금 당장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멍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이제까지 나 스스로의 결단력에 의지해 수많은 결정을 내려왔소. 그중엔 많은 것이 잔인한 결정이었지 하지만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아주 중요한 결정 하나를 당신이 내려 주도록 요청해야겠소"
그녀는 다시 숨을 멈췄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으나 눈동자엔 차디찬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려주오. 반드시, 올리비아!"
냉기가 그녀를 휘감아 버렸다. 이처럼 잔인한 결정을 내게 내리라구? 다시는 이렇게 나란히 있을 수 없는 그런 결정을? 내게 자진해서 그의 입술을, 그 입술의 감촉을, 머리를 만지는 손의 접촉을, 이토록 감미로운눈빛을 하고 나를 응시하는 두 눈을 포기하라구?
그의 견고한 장벽 뒤에 숨겨진 그 공허하고 우울한 세계로 들어갈 수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내 일생을 사막으로 만들 결정을 내리란 말인가? 그런 결정은 내 생명의 한복판에 비수가 꽂히듯 엄청난 비극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 사람은 모른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그의 두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었다.
"전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당신을 볼 수 있는 한 어떤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올리비아의 몸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당신은 왜 그토록 자진해서 재앙을 불러들이려는 거요. 당신을 몰아대는 그런 고집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으나 그가 알아듣기에는 충분히 명료했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고집이에요."
'사랑'이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음미하는 그의 입엔 약간의 비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올리비아에게 있어 그 말은 얼마나 필사적인지,또 그녀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드러내 놓고 있는지 그는 도무지 인식하지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오 난 가끔나 자신에게조차도 비난을 받는다오. 나는 그렇소, 나는 정말 용서받기 힘든 사람이란 말이오"
"전 당신이 하겠다고 선택하는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어요."
"어떤 것도?"
"그래요, 어떤 것도요.!"
눈물이 차오름을 느끼며, 그녀가 격렬히 소리쳤다.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자랐던 한 소년의 가슴에, 이렇게 성인이되어서까지도 그의 가슴에 너무나 보편적인 말조차 알아듣지 못할 만큼큰 사막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나는 당신이 킬티나갈에서 나에 관한 많은 것을 들었으리라 믿소. 그 말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라도 알아들었더라도, 당신은 도저히 그런 말을할 수 없을 텐데 당신이 느끼는 것은 사랑이오, 아니면 동정이오?"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에조차도 그는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리쳐 울고 싶었다.
"제가 당신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다면, 그건 당신을 이 지경으로 가치없게 만드는 그 외곬수에 대한 동정이에요.!"
그의 팔이 그녀의 말의 힘에 밀려 내려오듯 어깨를 스쳐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더할 나위없이 부드럽게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올리비아,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약한 사람이오."
"당신이 약하다구요?"
"약할 뿐만 아니라 제 정신도 아니오 아주 나쁜 것들만으로 가득 채워진"
스스로 말을 끊으며,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으로부터 자꾸만 멀리 있을 수가 없게 해요.,올리비아"
그의 팔에 안긴 채, 자신의 힘으로 그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그가 가진 방어태세가 허물어져가고 있음을 즐거워하며 그녀가 물었다.
"왜 멀리 있으려고 하나요?"
"그것은 그것은 내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일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오. 난 누구한테 명령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의 말이 그녀의 감정을 할퀴었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품으로부터 벗어나며 말했다.
"난 당신한테 명령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생각할 때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명령하오. 내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언제든 당신 생각만 하라고 명령하는 거요."
이 말을 하고서,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런 피부의 스침이, 그 짧은 접촉이 그녀를 들뜨게 할 때 그가 난폭하게 내뱉었다.
"그런 감정은 내가 지금껏 알았던 그 어떤 여자보다 더 당신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오."
그리곤 그가 그녀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그의 포옹은 거칠고 폭력적인것이었지만, 여전히 달콤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는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그의 촉촉한 입술 역시 그녀에게 마술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 대해서 그녀가 꿈꿔왔던 모든 소망의 완성이었고, 그녀가 마음속의 비밀장소에서 그와 함께 유희했던 환상의 모든 것이었다.
"올리비아"
그가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뱉으며 애무를 계속하면서 힘들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알고나 있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를 말이오!"
그가 이를 악무는 걸, 그의 피가 뜨겁게 요.동치는 걸, 그의 숨결이 폭풍처럼 거세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자신의 열망을 잠재우려 애쓰는지도 그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힘이 너무 강해서 눈물이 나오려 할정도로 아팠지만 참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이 짧은 한 마디 안에 들어 있는 수천 가지의 의미를 그는 알까 이런의구심 때문에 그녀는 급히 말을 보탰다.
"제가 가진 건 무엇이나 다. 당신 소유예요."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땀에 젖은 이마와 고집스러워 보이는 뺨, 그리고 굳게 닫은 입술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 때문에 오히려 더욱 단호해 보였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떨구어졌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두번 다.시 그 말을 하지 마오."
"진실이에요!"
"당신은 너무 쉽게 자신을 희생물로 만드는군!"
"그래도, 제 말은 모두 진실이에요."
그와는 더이상의 논쟁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차라리 가만히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돌을 집어들고서 거칠게 숲 속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의 개가 신바람이 나서 덤불 속으로 가서는 돌들을 물고와 그의 발 밑에 가져다. 놓았다.. 그의 발밑에 많은 돌들이 쌓이고, 개가 지쳐 헐떡일 때쯤 되어서야 그는 거칠게숨을 쉬며 그 의미 없는 일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상당한 자제력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오 아니면, 당신의 이모부가 하인을 시켜 경찰을 부르게 할거요."
올리비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쟈스민의 고삐를 풀어 그녀에게 돌아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또다시 불안에 빠졌다. 그는 분명 다.시 뒤로 퇴각해 버린 것 같았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두 눈이 도전적으로 빛났다. 그 사람처럼 아무 말없이 돌아선다는 건 그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우울한 눈이 그녀의 시야를가득 메웠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러길 원하오?"
"예, 진정으로!"
그가 시선을 알 수 없는 어느 곳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럼, 그렇게 되겠지."
"그게 언제쯤일까요.?"
"곧"
그녀는 벌써 불같이 이는 조바심을 억지로 참았다.
"얼마나 빨리요.?"
"아주 빨리"
"제가 어디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시죠?"
어리석은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재빨리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부드러움을 담아 즉시 대꾸하였다.
"난 당신이 어디 있는지 항상 알고 있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곤, 그가 쟈스민의 옆구리를 철썩 때렸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그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가 묵묵히 거기 그대로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리라는 걸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 어느 아침보다. 선명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자신의 결심이 결코 철회되어질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았다. 온갖 장애물들이, 위험과 함정들이 모두 하찮게만 여겨졌다. 그녀는 이 하나의 사람만으로 전세계를 가진 것처럼 자신만만해져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반환점에서 너무 멀리 지나 있는 것이었다.
올리비아와 자이의 게임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말대로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났다. 그후 그는 매일 아침그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있어 매일매일은 완벽하게 다듬어지길 기대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심정으로 시작되었고 또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녀는 그가 언제 나타날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그림자처럼 항시 나타났다. 그녀의 소재에 대한 그의 관찰은 정확했다. 그는 그녀가 하는 모든것, 그녀가 만나는 사람, 그녀가 떠올리는 생각 등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것만 같았다. 자의건 타의건 그녀는 항시 그의 초점거리 내에 있는 것 같았다.
단 한번도 그가 그녀를 못 찾아낸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마치 패배감과 환희를 동시에 맛보며 그녀에게 돌아오는, 둥지를 찾는 비둘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했다.
올리비아는 밤엔 태양이 더디 떠오름을 원망했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속에서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그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상황이 그녀로부터 그를 데려갈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는 그러는 가운데 참을성 있게 그의 다양한 기분들 모두를 알아채는 법을 배웠다. 그에 대한 그녀의 육감은 그의 보통 사람과 다른 부분, 미세한 근육의 떨림, 극히 제한된 입술의 경련 등으로부터 나오는 모든느낌을 모조리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해졌다.
그녀는 때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의 말투에도 익숙해 갔고, 그가대답을 회피할 때 캐묻지 않는 일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가불타는 듯한 광기로 그녀에게 무정하게 할 때도, 오히려 그녀는 비둘기날개처럼 부드러운 때를 기억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가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강하게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는 그것조차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황홀한 아침 시간에 도취되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마음껏 그를 만나고 또 만났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올리비아를 포함한 처녀들이 에스텔과 함께 뒤에 남는 것을 보고 브리짓트 부인이 죠수아 경에게 말했다.
"요.즈음 올리비아가 눈에 띌 정도로 좋아 보이지 않나요., 여보? 아마프레디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난 이곳에 프레디가 없기 때문에 저애가 그토록 활기에 찬 것 같은데"
그는 억지로 교회에 끌려온 게 불만인 듯 코웃음치며 냉랭히 말했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예요, 여보 올리비아가 프레디에게 호감을 갖고있어요. 프레디도 벌써 자기 농장에서 그애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구요."
"그건 프레디의 열렬함을 말할 뿐이지, 올리비아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잖아? 난 올리비아가 회답하는 것을 곤혹스러워 하지 않나 싶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에스텔에게 물어 봐야겠어요. 그리고, 여보 에스텔에 관한 얘기인데요, 난 정말로 저애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저애에게 좀 강경한 태도를 보여 주세요. 아주 강경한 태도 말이에요."
"당신은 내가 다른 걱정할 일들에 묻혀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런 사소한 일들로 내 시간을 허비하게 하다니 그애가 그렇게 함부로 뛰고 까불면 고삐를 조금만 늦춰요. 에스텔 같은 말괄량이에게는 그 방법이최고니까"
"고삐를 늦춰서 그 말도 안 되는 팬터마임을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지금 정신이 있으세요, 여보?"
"팬터마임? 무슨 팬터마임 말이오?"
하지만 죠수아 경은 그녀가 몇 번이고 말한 적이 있는 그 말을 다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생각에 잠겨 들고 있었다.
마하라자 영주로부터 킬티나갈의 축제기간 동안 다시 한번 그녀를 초대한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감격했으나 가능한 모든 변명을 담아 완곡하게 거절하는 회신을 보냈다. 지금 캘커타를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겐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마하라자로부터 듣게 될 자이에 관한 경고가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마음 저 밑바닥의 두려움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그는 나를 받아들였는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단 하나의 결단은 오직 현재를 제외한 시간들을 지워 버리는 일뿐이었다.
"당신을 이렇게 무사히 계속 만날 수 있다니, 캘커타도 그렇게 대단한도시는 아니군요.?"
"당신이 나를 만나는 것이 무사하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그가 한 말이 둘의 관계가 폭로될 위험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투를 다시 비꼬고 있음을 알아채고 화난 듯 말했다.
"그럼요."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똑똑하군."
이 아침, 그의 기분은 저조한 게 분명했다. 조바심과 안절부절못하는불안이 그의 몸짓에 간간이 섞여 있었다. 의아해 하는 올리비아에게, 그가 내심의 생각을 불쑥 말했다.
"프레디가 곧 돌아올 텐데, 그를 다시 만날 셈이오?"
"그를 피할 수는 없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프레디 버거스트에 관한 화제는 다.소 골치 아픈 문제였지만, 그가 평상시와는 다른 질문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그녀는 내심 기뻤다.
"당신은 그와 결혼할 생각이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을 때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가벼운 충동을 느꼈지만, 그의 태도가 이미 원래의 빗나간 언행 습관으로돌변해 버렸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뇨. 그것이 설령 당신이 제게 제의한 일이라 할지라도요. 당신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세요?"
그녀는 자신이 처한 유리한 위치를 적절히 이용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소."
그가 갑자기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들어 건너편에 서 있는 나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녹색의 잘 익은 열매가 굉장한 총성과 함께 사방에흩어졌다.
"난 그때 화가 나 있었소."
그녀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았다.
"당신은 지금 또 화가 나 있군요."
"나는 화나지 않았소"
그는 주먹 쥔 한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치며 외쳤다. 그는 곧 주먹을내리고 말했다.
"맞아! 난 지금 화가 나 있소 난 처음으로 내가 탐욕스럽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화가 나 난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소, 지금!"
그는 몹시 성이 나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용감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의 그 욕심에 그대로 빠지세요. 그걸 떨쳐 버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는 급히 머리를 저으며 물러섰다.
"아니, 그래선 안 돼 그럴 수는 없소! 당신은 내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소!"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녀는 오지 않을 반응을 기대하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그 말을 속삭였다. 그의 부드러움, 격앙된 고백, 키스와 애무, 그것들에 숨겨진 그의 그녀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말을 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말해 왔고, 지금 또 그 말을 했다.
"당신은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예요.!"
"나의 운명을 유혹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당신은 지금 나를 패배시키려고 하고 있는 혼란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그 혼돈들로 하여금 날 사랑하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열렬한 호소는 입밖에 내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것에도 패하는 것을 참을 수 없죠, 안 그래요.?"
"난 이제껏 어떤 것에도 저 본 적이 없소."
극도로 오만에 가득한 얼굴이 그녀 앞에서 빛났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소, 올리비아!"
그녀는 다시 참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
"전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어요. 당신의 그 소중한 시간의부스러기들을 제외하고는요."
"당신은 내게 요.구하지 않으면서 요.구하고 있소 난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소 내가 그러한 시간의 부스러기조차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 날 화나게 만든다는 거요."
"그렇다면 더이상 절 만나지 마세요.!"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저는 당신없이도 잘해 나갈 수 있어요. 자이, 제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 거예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럴 테지"
그는 넋이 나간 듯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격노에 휩싸인 그녀를 남겨두고 사탄의 안장에 올라 질풍같이 사라져 버렸다.
올리비아는 집으로 돌아오며 내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3일 동안 그녀가 자책과 상실감에 싸여 교외를 배회했지만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않았다.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4일째의 아침,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 다시는 그녀가 가는 것을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두 팔로 힘껏 안았다.
"내가 말했던 것은 다. 지워 버려요."
그는 떨리는 입술로 그녀의 얼굴에 격렬한 키스를 퍼부으면서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그 모든 말들을 모조리 지워 버려요. 올리비아, 날 용서해 주오 용서해 줘 "
그녀는 이미 용서했다. 그녀는 불행해 보이는 그의 상아빛 얼굴에 나타나는 모든 불행을 입맞춤으로 지워 없앴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오 내게는 이런 관계는 당신의 사랑은 나에 대해 자동 인형 같은 거요. 나는 그 자동 인형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아오 단지 나는 그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당황스러울 뿐이오당신은 당신이 지금 나를 화나게 만들어서 안됐다는 표정이군"
"제가 당신을 화나게 만든다.구요.?"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주는 것으로 수많은 다른 말들을 대신했다. 그들 어깨 위로 내리 퍼붓는 햇살에 눈부시게 빛을발하는 유리 팔찌였다.
"오 자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는 손수 그녀의 팔에 서툰 동작으로 끼워 주었다.
"난 당신이 내게 준 것에 비해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소 당신을 기쁘게 할 무엇이든지 말해 봐요. 보석, 황금 아름다.운 옷들 어떤 것이든지"
"당신의 일부를 주세요."
그녀는 손을 천천히 돌리면서 유리 팔찌들이 부딪치는 소리에 감격해했다.
"지금 주신 것으로 충분해요. 전 어떤 보석도 옷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난 여자들은 모두 보석이나 예쁜 옷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만나 왔던 여자들은 그것들을 좋아하겠죠 그들 속에 나를 끼워 넣지는 마세요.!"
"맙소사!"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배웠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 건방진 여자가 지금 와서 내게 교육이불완전한 것이었다고 하는군, 좋아!"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 코끝에 키스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소중한 시간의 일부를 내게 준 것에 대해, 그보답으로 당신에게 뭔가를 주고 싶소 말해 봐요."
제발 단 한번만 제게 말해 주세요. 단 한 번만,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시나요.?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말 대신에 그녀는 단지 미소만 지었다.
"전, 당신이 여성들에 대해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는 지난 삶에 대해알고 싶어요. 그것이면 당신이 진 빚을 갚기에 충분한 거예요."
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이 아침은 적어도 그가 자신의 삶 일부를 그녀에게 공개하는 드문 시간이었다. 세심하게 위장되어 있는 그의 세계의 가장자리로 올리비아는 넋을 잃은 채 빠져들었다.
유머 있고 매혹적인 말투로 그는 중국, 미국, 태평양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주친 여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언급으로그녀의 질투를 자아내며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얘기하며 즐거워했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비도덕적인 일을 한 것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해요."
"내가 만일 금욕적 생활을 유지했으면 당신이 더 기뻐했을까?"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맘을 먹고 있었다 해도,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은 안 해요."
"그렇지 않아 난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해내."
"그럼, 잘난 체도 안 하겠다고 마음먹어 보지 그러세요.?"
"당신은 항시 내게 불가능한 것만 요구하는군!"
완전무결한 아침이었다. 끝내기 싫은 이 아침의 만남임을 알리듯 그가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뺨에 대고 있는 그의 뺨은 거칠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관능적인 것이었다.
"제가 미국에 있었더라면 우리에게 이런 만남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올리비아 그래도 난 당신을 알았을 거요. 바람이 당신의 향기를 내게 실어다. 주었을 테니까 "
"제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을지라도요.?"
"당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올리비아, 나는 "
그 말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말하세요. 말하세요. 제발 내 사랑, 한번만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그는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그는 실낱같이 위태로운 자제력을 가지고 한줄기 키스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올리비아는 그가 남긴 잔해들을 쓸어모으며, 그것들에 마저도 가득한 감사를 느꼈다.
불확실한 방향으로 흐르는 구름처럼 그렇게 떠다니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사이, 올리비아는 집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채지 못하고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산책 후 돌아왔을 때, 이모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에 몸을 떨며 물었다.
"에스텔 때문인가요.?"
한참 후에 이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그애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올리비아 난 무엇을 해야 할지모르겠구나 그 사람은 끔찍한 사람이야 올리비아, 너도 알고 있지? 그 힐스라는 극단의 매니저 말이야 그 무식하고 교양 없는 남자에게 에스텔이 빠져 버린 것 같다. 에스텔이 기어코 그 무대에 서야겠다고 "
올리비아는 이모를 동정하면서도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모님, 이건 사춘기의 소녀가 거쳐 가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에요. 에스텔은 어려운 과도기를 잘 헤쳐 나갈 거예요. 우리가 모두 그랬던 것처럼 잘 극복할 거예요."
"너도 그랬다고? 올리비아, 난 네가 에스텔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한때는 걱정을 했었단다. 하지만 내가 틀렸구나 너는 그애에게 축복의 의미로 이곳에 온 거야 에스텔이 네가 가진 도덕적 힘의 일부라도 갖기만을 난 바랄 뿐이다. "
올리비아는 그 동안의 무심함과 이모의 괴로움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이제부터라도 에스텔이 빗나가지 않도록 자주 충고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그녀는 스트랜드 가(街)를 달리는 저녁 산책을 이용해 단도직입적으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에스텔, 넌 지금 너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니? 그리고 지금 이곳에 없는 너의 보이프랜드 존에게도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니?"
"흥, 엄마 아빠 모두 이제 내게는 관심조차 없어 이제 내가 죽든 살든관심이 없다.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빠는 언제나 사업상 바쁘시고, 엄마는"
"난 팬터마임을 할 거야. 이번엔 엄마도 날 막지 못해"
에스텔의 턱이 완강함으로 굳어졌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그분을 네 편에 서게 만들지 그러니? 이해를 시켜 보렴."
"아빠에게? 아빠는 지금 그 소중한 석탄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으시다구 내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구!"
"석탄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도 알잖니, 에스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자신의 딸보다.도 훨씬 중요.하지!"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전에 없던 것들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반짝이는 두 눈 대신 흐릿하고 맥빠진 눈동자가 긴장과 불안에 싸인 여윈 얼굴에 박혀 있었다. 에스텔도 분명히 이모만큼 불행해보였다. 올리비아는 재빨리 에스텔을 두 팔로 껴안았다.
"넌 절대로 절대로 아버지가 널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안 돼"
그녀는 에스텔이 가진 고통의 핵심을 알아차리면서 말했다.
"더이상은 날 사랑하지 않고 있어, 올리비아 언니 정말이야, 더 이상은 아니야 "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겉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야, 마음의 소리는 종종 침묵을 지키잖니? 그건 너도 알잖아?"
"그럴까?"
"물론이지 그런 소리는 눈을 감고 들어야 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
"오히려 네가 그것을 충분하게 만들어야 해, 에스텔"
에스텔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언니 말이 옳은 것 같아"
"나 역시 그것이 네게 충분해지도록 노력하겠어."
올리비아는 선뜻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그녀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조만간 이모부를 찾아가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무관심을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사흘 동안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자이 라벤던에 대한 불안과 억측이 그녀를 괴롭힘으로써 에스텔에 관한 그녀의 걱정은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안 올 것인가? 아니면 바쁜 것일까? 갑자기 내가 싫어진 것일까? 내가 그를 화나게 하고, 싫게 한 것이라면.
그녀는 새로운 공포들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이제 그는 마치 아편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그가 없이는 하루도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순간들이 늘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힘겨움 속에서도, 그의 변덕에 종속이 된 채 매번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에 대해 분노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이처럼 혼란스런 감정의 멍에를 씌울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를 밖에서 드러내 놓고 찾아볼 권리와확실한 대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그의 기분에 따라서 춤추는 행위들을 계속할 수도 없으며, 계속하지도 않을 것이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판단 속에서 그녀는 일찍 말을 타고 나가, 쉬르퍼 시장 부근에 있는 자이의 집 검은 대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수자타가 머물고 있는 집이었고, 자이의 안내로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화가 난 얼굴에 망설임을 담고서, 문을 열고 나온 낯선이에게 물었다.
"자이를 만나고 싶은데요."
"지금은 집에 계시지 않는데요."
올리비아는 전신의 무너짐을 느끼며 실망에 젖어 물었다.
"자이는 강가 호에 있나요."
"글쎄요."
"언제쯤 돌아오실 것 같나요.?"
"글쎄요."
올리비아는 그 남자가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는 것을 보며 그가 자이의 지시에 잘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그럼 그 여자는 집에 있나요.?"
그녀는 망설이던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그분은 떠나셨습니다."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 버렸다구? 그와 함께?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아마, 왔던 곳으로 갔겠죠"
올리비아는 더이상의 물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를 바보라 욕하며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녀는 홀로 강가에 앉아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자이 라벤던을 저주하고, 자신을 이렇게 되도록 용납한 자기 자신 또한 저주했다.
집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힌 그녀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며,그를 자신에게서 철저히 제거해 나가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카리히드 사원 근처에서 자이 라벤던은 바람처럼또다시 나타나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말을 타고 가는 바로옆을 질풍처럼 질러가는 사탄과 거기에 탄 그의 모습에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그는 태평스럽게 흘깃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를 쫓아안전하게 야외로 나오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들며 그가 자신을 버린게 아니라는 안도감에 훌쩍거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애정이 담긴 두 손과 위로의 말로 그녀를 달래면서도 불쑥 그 투박한 어투로 말을 뱉어냈다.
"어제 왜 날 찾아왔소?"
"왜냐고요.?"
올리비아는 어제 느꼈던 자신의 분노를 불현듯 상기하며 그의 품에서빠져 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제게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나요.?"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잘라 말했다.
"정확히 4일이 지났을 뿐이오"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 당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에게는 고작 4일이었을지 몰라도 제겐 40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구요."
"당신은 나에 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탈이오"
"당신은 이런 비참한 운명을 선택한 것이 바로 저라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소 그러니 그걸 택하도록 해요."
"제게 프레디와 결혼하라는 것은 정말 죽음과도 같은 삶의 길로 내모는것이에요. "
그가 시선을 먼 곳에 고정시킨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소, 올리비아 그러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을 해요."
그녀는 지금까지 그의 다양한 감정을 접해 보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전에 보았던 격노도, 가끔씩 튀어 나오던 부드러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안절부절도 아닌, 그녀의 가슴에 찬바람이 일게 하는 무관심이라는 것을알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데 있어 그로부터 받아야 되는, 그리고 그녀가 감수해야만 되는 모든 상황을 예비해 두고 있어왔지만 무관심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제 자신을 당신처럼 되도록 다짐하라는 건가요.? 세상을 향해 마음에독을 품고 대항하라는 건가요.?"
그의 무관심에 가슴이 찢긴 채, 그녀는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 알 수없는 베일을 벗겨낼 수 있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당신이 말하는 다짐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있어 난 그런 다짐의 일부일 뿐인가요.?"
그녀는 차라리 애원했다. 그녀 몸 속의 하나하나가 그를 향해 뻗쳐가서 팽팽해졌다.
"원인이 무엇이든 당신 고통의 반은 제 것이 될 거예요. 왜 제게 당신은 아직도 어둠만을 주시나요.?"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며 입술을 맞췄다.
"당신 삶의 한 자리를 제게 주세요, 자이'
그는 바로 대답하지도 않았으며 그녀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등줄기를 흐르는 그의 손끝에는 갈망의 무게만이 실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휘젓는 말을 뱉어내었다.
"당신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소 내 마음속에 당신은 지금쯤은 그것을 알아야 하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멈춰 서며 그세계 속의 모든 것이 화석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채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듯 불쑥 소리쳤다.
"나는 가야 하오."
"가다니, 어디를 간다는 거죠?"
"세관소에"
그녀는 그의 목에서 손을 풀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날드슨이 프레디에게 계속적인 번영을 약속할 위탁 판매품을 보내왔소 난 서류와 물품을 대조해야 하오 가끔 서류상의 물건과 실제 물품이 다.를 수가 있거든"
그녀는 오늘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감정의 일부분을 내보였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가 흔들리는 음성으로 고백한 말 중에서 이미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에 감격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고객에 대해 의심이 대단하군요. 프레디의 대리인이 아편에는 손을 대지 않는 걸 아시잖아요."
"틈이 보이면 그들은 모두 아편에 손을 대지"
"그들이 아편을 밀수해 유럽으로 가져간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어떻게요.?"
"화물에 숨기거나, 안내원들이 몸에 지니고 가거나, 선원을 통해 숨겨가는 거요. 아무튼 밀수에는 숱한 방법들이 있소 유럽에도 아편 중독자들, 지독한 아편 소굴이 있소 그들이 어디서 아편을 얻는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그럼 혼자 이 세계를 떠맡으려는 거예요.?"
"아니, 전 세계의 반만이오 지금 현재로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자, 갑시다. 약속 시간을 놓치겠소 안 그러면 런던의 마약 소굴이 승리를 할 테니."
아편 거래에 대한 라벤던의 강박관념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애써 논쟁을 피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차 상자를 이용해아편을 밀수하는 걸 자이가 막으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죠수아 경이 그에게 그다지도 적개심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틀 후에, 라세라 축제의 종결을 알리는 침례식(浸禮式)이 있소 그것이 보고 싶소?"
올리비아는 기쁨으로 숨이 막혔다.
"예, 그래요. 조각상들이 어디에서 침수되지요.?"
"강의 위아래 쪽 돌층계에서 주로 밤에 행해지는데 퍽 다채롭지 불편함을 참을 수 있겠소?"
"그럼요. 불편하건 말건 전 참을 수 있어요."
"좋아, 내 마차가 밤에 당신집 모퉁이에서 기다릴 거요."
"몇 시에요?"
"어두워진 후부터 있을 테니 올 수 있을 때 와요."
"제 이모부님의 집을 알고 있나요?"
라벤던이 그녀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우며 크게 웃었다.
"캘커타에 사는 사람 중 누가 죠수아 경의 집을 모르겠소?"
올리비아가 말의 고삐를 잡았을 때, 그의 표정은 밝음을 잃고 다시 슬픔에 잠기는 듯했다.
"당신은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사람이오, 올리비아 나는 바라건데"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그런 행운을 바라는 게 아니라 불운을 비는거예요. 무엇이 오든, 오도록 내버려 두세요.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있어요."
그가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고 돌아섰을 때, 그때는 미처 깨닫지못했던 그 말이 집에 다다랐을 무렵에야 강하게 머리 속에 자리했다.
"나 역시 그럴 수 있기를 기원하오"
지금 당장에는 그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에는.
라세라 축제일이었다.
침례식은 내일 시작될 것이다. 자기들의 회교 사원 안에 모셔진, 10명의무장한 여신이 새겨진 거대한 조각상들이 이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며 사람들에 의해 침례의 의식에 동원될 것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열렬한 경배를 바칠 것이다.
먹을 것들과 함께 북소리를 비롯한 온갖 악기 소리, 웃음소리 등이 인도인 거주 지역에서 들려왔다. 에스텔의 집에서도 그 집에 속한 엄청난수의 하인들이 그들 나름의 제단을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하는 조각상을모셔왔다.
"이 소음, 소음! 이런 불경스런 의식들을 조용히 자기들끼리 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우리 모두 이렇게 시달려야 하는 거지?"
브리짓트 부인의 불만 섞인 넋두리에 올리비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말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걸요, 이모님 그들에게는 의미 있는 행사구요."
"일 년에 한 번뿐이라는 게 고마울 뿐이다. 아니면 우린 모두 귀머거리가 됐을 테니"
그녀는 이모의 계속된 트집에 질려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아카시아 나무가 아름답게 가지를 뻗은 곳 아래 자리를 잡고 폭풍의 언덕이라는,그녀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연애 소설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갔을까 정원 저 끝에 하인인 자하랄이 공손한 모습으로 서서는 그녀에게 저녁때 있을 자기들의 경배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진한 감동으로, 이모의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후에 사과 드릴 것을 결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 브론테의 격정적인 소설과 함께 그럭저럭 저녁이 되었다. 에스텔도 죠수아 경도 없는 식사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녀는 자하랄과 한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새삼 자신이 이제껏 하인 숙소에 정식으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무심함에 죄책감마저 느꼈다.
숙소에 들어서며, 그녀는 하인들의 숙소의 규모와 그 안에 있는 여자와 하인들의 숫자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저녁에 그들은 모두 새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수수한 분위기에서조차 호화로운 빛의 색채를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열광의 중심은 제단이었다. 요.란한 장식과 화려하고 잡다하게 세워진 우상은 10개의 각기 다른 종류의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매혹되었다. 어둠 속에서 치러지는 그들 의식의 경건함에는 입 밖으로 내어지지 않는 마음 찡한 행복감이 있어 보였다. 신앙심에 빛나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며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감동이 된 나머지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돈을 헌금한 후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녀가 집에 되돌아왔을 때 죠수아 경이 돌아와서 식사를 끝내고 서재에 있었다. 집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에스텔 때문에 속이 상한 탓인지 이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죠수아 경의 서재를 찾아 들어갔다.
"저, 이모부님 에스텔에 관한 얘기인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이모부님이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에스텔?"
그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곤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왜? 그애가 아픈가?"
"아뇨 에스텔은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완벽하게 건강해요."
그의 시선이 공허해지고, 그 눈동자에는 지금 그녀의 말 따위에는 별관심이 없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무관심 사이로 뛰어들었다.
"전 이모부님이 지금 어떤 일에 몰두하고 계신지 잘 알아요. 하지만 에스텔은 그렇지 못해요. 에스텔은 이모부님이 요즘 너무 바쁘신 이유로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자, 그게 아빠가 자기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이상 그앨 사랑하지 않는 거라구? 맙소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소리냐?"
그가 희미하게 동요.되는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하지만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불만을 이모님께 퍼붓고 있어요. 이모님은 지금 속수무책이세요. 전 이모부님께서 얘기할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해요."
"누구하고? 브리짓트하고?"
"아뇨, 에스텔하고요. 그앤 지금 팬터마임에 맘을 두고 있어요. 이모님은 그것을 적극 반대하시구요. 이모부님께서 이모님을 설득해서 허락을하도록 해주세요. 그것이 에스텔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숨을 돌린 후, 에스텔이 참가하려고 하는 팬터마임과 극단에 대해 소상히 말했다. 죠수아 경은 그녀가 말하는 동안 적어도 겉으로는 듣는 일에 전념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마친 후,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한참 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우리에게 거절을 했단다."
그것이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예? 뭐라구요.?"
올리비아는 이제껏의 화제와는 전혀 다른 죠수아 경의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본능처럼 곧 재빠른 반응을 보였다.
"이모부님의 제안을요.?"
"그래, 오늘 아침에 그의 공식적인 거절을 통보받았다."
그가 갑자기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 한 마리를 잡는데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어,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올리비아는 이모부님의 관심을 에스텔 쪽으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미칠 듯한 실망과 분노의 기분을 삭힐 시간을 주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의 이 깨달음이 그녀의 삶 속에서 내린 결정 중 두 번째로 나쁜 결정임을 몰랐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결정을 한 것이 바로내일 그녀 앞에 다가올 줄은 더욱 알지 못했다.
드디어, 침례식 날이 되었다.
죠수아 경이 집을 나간 직후, 어젯밤에 늦게 귀가한 탓으로 어머니와 다툰 에스텔이 또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에 아침 식탁에서 브리짓트 부인의 또 한 차례의 폭발이 예상되었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의 열망에 사로잡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아침 나절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한나절의 시간은 고정돼 있는 듯 그녀를 지겹게 했다. 그녀는 곤두서 있는 신경을 진정시키려고 한가로이 하인들의 숙소 근처를 배회하다. 몸서리쳐지는 광경들을 목격했다.
어젯밤엔 축제의 열기와 불빛 속에서 놓쳐 버렸던 하인들의 영락되고 박탈당한 생활의 현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물이 막힌 하수구에 모인 파리떼와 바퀴벌레, 흩어진 쓰레기들이 풍기는 악취 등은 마치 전쟁 후의 폐허를 연상하게 했으며,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쓰레기 더미로 몰려드는 어린이들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올리비아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분노했다. 왜 이들은 이런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주인이 보장해 주지 않는 건강한 삶이라 할지라도 왜 스스로 쟁취하려 하지 않는가? 그녀는 고향에 있는 가축들조차도 이들보다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인을 붙들고 물어 보려고 과감하게 숙소로 들어가 사방을 둘러봤다. 그녀가 들어간 방구석에 한 물체가 움직이려 애쓰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었다.
"어디가 아픈가요.?"
"예, 몸이 좀 안 좋아요."
"약은 먹고 있나요.? 병명은 알고 있어요.?"
"소용없어요. 곧 죽을 텐데요, 뭘"
좌절감에 몸을 떨고 있는 그녀에게 자하랄이 나타나며 말했다.
"가세요, 아가씨 이곳은 아가씨가 계실 곳이 못 됩니다. 마님께서 아시면 큰 일이에요. 마님은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시는 걸 싫어하세요."
올리비아는 또다른 분노를 느꼈다. 그의 말투는 그가 그녀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들의 세계에 끼지 말라는 경고같이 들렸다. 그녀는 무력감에 정원으로 몸을 옮겼다.
누구에 대한 분노인가? 사람들을 인간 취급조차 안 하는 이 집 사람들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이런 불공평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들을향한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이들의 실상에 그토록 무관심했던 한심한 자신을 향한 것인가?
저녁을 알리는 시계를 보면서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상기했다.
'세상은 잔인함, 불공평, 기근으로 가득 차 있단다. 만약 네가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거든 하여라. 하지만 해줄 수 없다면, 안락의자에 앉아서 동정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모욕하지는 말아라.'
실용주의 덕택인지, 피곤함에서 오는 건망증 때문인지, 올리비아는 사색의 시간을 잃었다. 이모부님도 에스텔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모와 식사를 마친 올리비아는 자이와 약속한 침례식 참관이라는 야간 모험을 위해적당히 양해를 구하고 식탁에서 물러났다.
시계 바늘이 11시 30분을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억제하며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다가 늦게서야 돌아오는 에스텔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에스텔이 잠들 때까지 15분 정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0분 남았다. 5분
그런데 그녀의 방문이 갑자기 열리며 에스텔이 걸어 들어왔다.
"언니가 여태 깨어 있어 정말 다행이야 언니에게 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어"
아, 하나님 지금은 안 돼요, 지금은 에스텔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는자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올리비아는 무엇에 쫓기듯 격렬한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초조감을 애써 감추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에스텔 난 막 자려던 참이었어 난 지금 무척 졸립거든 그 얘기는 내일 아침에 하면 안 되겠니?"
에스텔이 머뭇거렸다.
"에스텔, 만약 팬터마임에 관한 문제라면 내가 이미 아빠께 말씀을 드렸어"
"팬터마임에 대한 얘기가 아니야"
에스텔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올리비아를 침묵하게 했다. 이아이가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그때 복도에 걸려 있는 시계가 종을 쳤다. 자정이다.! 침례식은 자정 이후에도 계속될까? 자이의 마차가 기다.림에 지쳐 가 버리면 어쩌지? 그녀는 조급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에스텔, 난 지금 편두통, 아니 감기 아무튼 그런 것들로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에스텔, 미안하지만 내일 얘기하면 안 되겠니? 약속할게! 내일은 온종일 함께 얘기하자구나"
에스텔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빈정거렸다.
"좋아 그럼 내일 해 언니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해"
올리비아는 안도감에 에스텔의 빈정거림도 잊은 채 그애가 방을 나간 뒤를 이어 살금살금 뒤 유리창을 통해 대로로 통한 낮은 담을 넘어 재빨리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이미 자이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잊은 듯했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죠수아 경도 잊었고, 브리짓트 부인도 잊어 버렸다.
그녀가 운명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마차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진정 에스텔을 그렇게 대뜸 쫓아낸 일이 일생 중 가장 큰 실수였다는 것을 몰랐다. 그로 인해 그녀가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에 대해서도.
에스텔이 하고자 했던 말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올리비아가 귀담아들었더라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시계 바늘이 너무나 판이한 곳으로 향했으리라는 것을 그 순간의 그녀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녀가 떠 안고가야만 할 숙명을 위해 어쩌면 신(神)마저도 굳게 입을 다.물고 그 같은함정을 예비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차가 멈춰 선 선창가에서 보는 보름달은 세상을 삼키려는 듯 차갑게 월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밝게 빛나는 달빛 아래 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반짝이며 서 있었다. 정교하게 금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실크로 된옷을 입고 이전에 그녀가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는 강가호에서 내려진 대형보트 옆에 서 있었다.
차가운 월광 그늘 아래서 그는, 어느 명문 가문의 귀족처럼 보였다. 그의 귀족스러움과 누구든 그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몸짓 속에 올리비아의 숨결은 더 얽혀갔다. 그가 그녀를 보트에 오르는 것을 돕는 사이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꼭 두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 같군요."
"모두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겠지."
그의 얼굴은 달그림자를 등에 지고 있어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굳은 표정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단둘이 아니라는 점에 다소 실망했지만, 배가 미끄러져 나가면서 올리비아는 자신이 그의 숨결과 맥박의 박동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디로 가고 있죠?"
"침례식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그는 그녀가 미미하게 떨고 있음을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왜 숄을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았소?"
두꺼운 스커트와 울로 된 긴 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이 정도면 충분히 따스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생각은 했지만 잊어버렸어요."
그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숄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둘러 주었다. 올리비아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의 두 눈을 더듬었으나 그눈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밤은 웬지 그의 기분을 읽어 낼 수 없는 사실에 다소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침묵이 그녀에 대한 무관심은 아닐지라도 그의 긴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이 여전히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읽어내려고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에 따스함을 느꼈고, 최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숄의 따스함 속에서 육체적 안락함을 느끼며 불안감을 떨쳐 버렸다.
"당신도 집에서 침례의식을 치르나요.?"
"그렇소"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건가요.?"
"사람들의 기대 때문이오"
사람들이라구? 수자타 때문인가?
"내 직원들과, 뱃사람들 말이오 너무 가난해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지못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 주기 위해서 치르는 행사요."
"그 의식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원하나요.?"
"난 신에게 바칠 감사의 말도, 내 미래를 위한 어떤 선물에 대한 기대도 갖고 있지 않소 내 운명은 그저 내 자신의 것일 뿐이니까"
항시 느꼈던 것처럼 그의 냉소는 다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그가 그토록 잔인하게 다.져가는 고집과 자신 속에 숨겨 두는 비밀의 성채(城砦)를 습격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의 고집은 그녀가 느끼기에 그녀가 지금껏 보았던 그 누구의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게 풍족한 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그를 버린 아버지는 누구였을까?자이는 누구나가 느끼고 그리워하는 부정(父情)을 갈망해 본 적이 있을까? 그의 어머니는 책임질 수 없는 아이의 탄생을 저주하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정말 죽은 것일까?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을까? 그는 부모 중 누구에게 저 눈동자를 선물 받았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은 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그가 그녀의 생각의 잔해를 정확히 읽어내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부터 보게 될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말아요. 그래야 할이유가 있으니까!"
이유라구? 그녀는 꼬집어낼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이렇듯 언제나 바로 곁에 있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마음속 깊은 동굴로 너무 무정하게숨어 버려 그녀가 감히 끼어들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분명 자신이 느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를 느끼고 원하지만 고의로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잘 보도록 해요."
강의 본류로 올라가자 강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북소리가 심오한 메시지를 남기듯 둑 위를 맴돌았다.
북소리 속에서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경의에 휩싸여 침묵한 채 오랫동안 그 모든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강둑 가까이로 다가서 있어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과 조각상들의 세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매번 조각상이 물 속에 빠질 때마다. 낮은 신음소리들이 흘러나왔고, 그 거룩한 행사가 끝난 뒤에 그들은 둑 위로 물러 나가 한 번의 뒤돌아 봄도 없이 쏜살같이 흩어져 갔다.
올리비아는 자이와 조용히 앉아 라세라의 마지막 의식을 바라보다가,자신의 넋잃은 눈을 서서히 거두며 라벤던을 쳐다보았다. 그의 회색빛 두눈에는 너무나도 뚜렷한 어떤 물음이 담겨 있었기에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자이 라벤던은 그녀가 무엇인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무엇인가를 간절히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언젠가 쿠아툴리에서 이 조각상들이 대단한 배려와 헌신으로 제작되어지는 것을 봤어요."
이게 그가 원하고 있는 대답인가?
"그 조각상들이 제단에 올려져 있는 10일 동안은 사람들에 의해 퍽 소중히 다뤄지고 경건히 숭배되더군요."
"계속해요."
그녀의 고정된 시선 속에는 겹겹의 가면을 쓴 채 어둠 속에 묻힌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조각상이 물에 내려질 때 사람들은 모두 거칠고 조심성 없는 행동이었어요. 갈 때는 또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더군요."
"아!"
그가 알 수 없는 탄성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참기 힘든 속박에서풀려난 듯 재빨리 몸을 움직였는데, 달빛에 드러나는 그는 그녀가 한번도본 적이 없는 유령과 같은 낯선 모습이어서 문득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그의 목소리에는 냉랭함과 신중함이 섞여 있었다.
"당신이 말한 그것이 바로 이 침례식의 교훈이오. 그들은 사랑하지만 떨어져 초연한 채 있으라고 가르치는 거요. 서로가 필요할 때일수록 관계를 끊고 결코 후회하며 뒤돌아보지 말라고 가르치지."
올리비아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럴 수 있소 그래야만 하오 하지만 후회가 없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오"
그의 말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보시오."
그녀의 시선이 강가로 옮겨졌다. 그들의 거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침례 의식을 마친 사람들은 거의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사람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지금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숄의 느낌 속에서도 그녀는 알 수 없는 비극의 예감 때문에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힌두교인이라 생각하세요.?"
"내가 나 자신을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럼, 당신 역시 뒤도 안 돌아보고 저런 거부 의식을 할 수 있겠군요?"
"그래요."
한 치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회도 없이요?"
"그럼, 후회없이"
"그러면 고통도요?"
순간적인 망설임이 곧 대답으로 변했다.
"그렇소."
그가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는 자신이 혼자뿐인 차갑고 공기 없는 공간으로 내던져짐을 느꼈다. 무덤 속과도 같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메웠다. 그가 한 말의 엄청난 의미에 얼이 빠진 올리비아는 흩어져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배가 많은 선창에는 자이의 하인이 마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적이 끊어진 채 황량한 선창가에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그녀의 가슴에 퍼지고 있는 절망스런 종소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자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도와 주며 느낌 없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거요, 올리비아"
그 말은 사실 그가 이 밤 내내 그녀에게 하고 있던 것이었다. 메아리처럼 가슴에 퍼져가는 그 말이 실상은 오늘 밤 처음 만난 때부터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임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녀의 마비된 입술은 '왜'라는 단어를 만들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불쑥 사형선고를 내리곤 어둠 속으로 마차를 달려 나가자 그제서야 그녀가 소리쳤다.
"마차를 멈춰요.!"
요란한 말밥굽 소리가 그녀의 뒤늦은 절규를 삼켰다. 이처럼 잔인하고 부당한 선고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만, 그녀에겐 지금은 반항할 여력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사고력이 마비되어감을 느꼈다. 단 한 가지 끊임없이 떠오르는,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질문만을 빼놓고는.
왜?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입이 마르고건조한 채 칼칼했다. 간신히 눈을 뜨자 그녀에겐 안개 속에 가리워진 이모, 에스텔, 닥터 험프리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강제적으로 입으로 들어오며, 누군가 자신에게 자라고 명령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는 긴 잠을 잤다.
"기분이 나아졌니, 얘야?"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비치는 날씨 좋은 어느 아침에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며 눈을 뜬 올리비아의 눈에 걱정으로 주름진 이모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모는 그녀를 일으켜 침대에 앉힌 다.음 따뜻한 우유를 먹였다.
"감사한 일이구나 의식이 깨어서 험프리스 박사님이 심한 추위로 온 학질이라고 하셨단다. 열이 내렸으니 곧 괜찮아질 거야."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마셨다. 이모의 뒤에는 에스텔이올리비아와 단둘이 있게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는 에스텔을 보며 올리비아는 무엇인가 기억의 꼬리를 잡아 끌어올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단 한 가지, 라벤던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는 것 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탈진상태에 다시 빠져 잠 속에 묻혔다. 그러다. 테이블을정리하며 나는 유리컵 부딪치는 소리에 잠을 깬 그녀의 코끝에 향긋한 레몬차 향이 들어왔다.
"얘야, 기분이 어떠냐?"
죠수아 경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좋아졌어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린 목소리는 원래의 생기를 잃고 있었다.
"다행이다. 네 상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얼굴에 화색이돌고 안심을 해도 되겠구나."
그의 기분은 활기로 넘쳐 보였다.
"더이상 새벽 승마는 하지 말아라 적어도 상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못한다. 더이상 새벽 숭마는 못한다. 이제 새벽 승마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 정원산책을 허락받을 만큼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그녀는 마음이 이렇게 다 타 버린 상태에서도 다시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히려 회복하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올리비아가 회복되자 브리짓트 부인은 어느 날 오후 가구 경매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 경매는 아르메니안 사람들 집에서 열리는데 여러 가지 쓸 만한 것들이 있다. 더구나 난 정말 에스텔 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애 방은 지금 한심할 지경이야"
에스텔! 올리비아는 급격한 동요.를 일으키며 선명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에스텔은 지금 어디 있죠? 이모님! 전 이틀이나 그애를 못 봤어요."
"그애는 일주일 동안 프링글스에 갔단다. 너도 펜워시스에 있던 그 멋진 해군 대위를 기억하지? 그의 누이 앤이 애들을 데리고 왔어. 앤은 에스텔의 친구가 되어 줄 정도로 친절하거든. 에스텔이 가 버려서 싫으니,올리비아? 네가 아픈 동안에 그애는 굉장히 모범적으로 바뀌었단다."
"모범적으로 바뀌었다구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모범적으로 그애가 그 우스운 팬터마임에 대해 아빠가 꾸중을하자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만뒀다니까"
"이모부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물론이지 난 어쨌든 이렇게 일이 쉽게 끝나서 너무 안심이 된단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물음을 삼켰다.
"저 역시 안심이에요. 에스텔이 마음을 잡고 이모님 말씀을 잘 듣게 되었다니 기뻐요."
"그앤 몇 주 만에 처음 내게 키스를 해주고 떠났단다. 내 속을 상하게해 미안하다고까지 히면서 말이야"
브리짓트 부인이 의자 위에 있는 숄을 집어들며 덧붙였다. 그 숄은 자이가 그날 밤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숄은 내가 본 것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것이야 크리스마스 선물로에스텔에게 이런 숄을 사주고 싶은데 그 장사를 부를 수 있겠니? 이건 정말 최고급품이야, 올리비아 이것 비싸니?"
올리비아는 잠든 척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에너지가 재충전되자 오히려 그녀는 숱한 고통의 의문 속으로 빠져 들었다.
왜 자이는 이런 식으로 한마디 경고조차 없이 날 버린 것일까? 그녀는지금까지 있어왔던 하나하나의 사건들에 대해 냉철히 자성해 보았다.
자이는 나의 사랑을 원치 않았다. 그저 내가 그에게 내 사랑을 떠 안겼을 뿐 그는 날 만나길 피했고, 난 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추적했다.그는 내게 수없이 경고를 했지만, 그것을 무시한 것도 나였다. 그가 마지못해 던진 감정의 파편과 순간적 입맞춤과 자제된 애무의 편린들을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받아들인 것도 나였다. 그래, 그가 날 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날 한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논리적 자기성찰도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진 못했다. 깊어만 가는 고뇌의 절망 속에서도 그도 역시 그녀를 사랑했으리라는 한 줄기 희망에 매달리고, 그 역시 지금 이 순간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리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점차 그녀는 그 고통을 참을 수 있게 되었고 절망감을 억제하면서,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어느날 오후, 마차 한 대가 시끄럽게 문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와섰다. 뜻밖에도 만취한 죠수아 경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주 멋지구나 정원처럼 네 뺨에도 붉은 장미가 핀 것 같구나"
그의 고함과도 같은 소리에 소년 하인 레만이 뛰어나오자, 그는 레만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비정상적이며 비인격적인 행동에 놀라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이모부님? 오늘은 웬지 이모부님답지 않으신 것"
"나답지 않다구?"
그는 잠시 어깨를 들썩여 보이고는 또다시 거침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똥 같은 머리를 가진 창녀의 아들놈! 내가 전에 그 썩어빠진 얼간이에게 말했었지 반드시 본때를 보이겠다구!"
올리비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이모부의 호통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세요?"
그는 올리비아의 물음엔 대답도 않고 때마침 하인이 가져다 준 쟁반을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죠수아 경은 취해 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듯 만취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의 횡설수설은 분명 불길한 것이었다. 그가 초점 없는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슬로컴이 이번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거야 이번엔 절대로 그냥끝내지 않을 거야."
"뭘 그냥 끝내지 않는다는 거죠?"
올리비아가 참을성없이 재차 물었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이모부님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녀는 이모부의 팔을 잡고 흔들며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올리비아의 물음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바로 그때, 마차가 서는 소리가 들리며 랜섬이 내려서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 그를 맞으며 말했다.
"오, 하나님 당신이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모부님은 지금 몹시 취하셔서"
"알고 있소. 그 때문에 왔지"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온종일 마셔댔소. 브리짓트 부인은 있나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잘됐군. 부인이 봤으면 기절했을 테니."
그가 막 마당을 가로지르려 할 때 그녀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막았다.
"왜 이모부님께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신 거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벌어졌죠? 그렇죠?"
그는 단순히 고개만을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갑자기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악명 높은 치안판사 슬로컴이 개입된이 일에는 자이와 관련된 어떤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요. 자이가 했던 그 말은 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시작과 끝을 도저히 맞춰 볼 수 없는 사건들에 무력감을 느끼며 방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던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침대로 옮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서재로 나와 랜섬을 만났다.
"이모부님은 잠이 드셨나요?"
"감기나 걸리지 않았으면 저런 바보 같으니!"
그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서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눈을 지그시 눌렀다. 올리비아는 질문을 잠시 보류했다.
"한 잔 하시겠어요, 랜섬 씨?"
"고마워요. 죠수아 경께서 이렇게 대취하기는 아주 오랜만이군."
목이 마른 듯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키는 랜섬에게 올리비아가 더 이상 못참고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세요, 랜섬 씨"
"죠수아 경께서 뭐라고 합디까?"
그의 목소리는 불안한 듯 떨렸다.
"아무것도 조리 있게 말씀하신 것이 없어요."
그는 구구한 변명보다. 책상 위의 신문을 집어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명확할 겁니다."
병이 나 있는 동안 신문을 접하지 않았던 그녀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킬티나갈 탄광 폭발로 1명 사망'
그녀는 빨리 나머지를 읽었다.
'며칠 전 발생한 이 폭발로 갱도가 무너져 경비원 한 명이 죽었다. 이일로 탄광은 사포타지가 계속되고 있으며, 경찰은 폭발에 쓰여진 다이너마이트 잔해를 찾기 위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폭발 당시 몇몇 증인들이 탄광 부근에서 말을 탄 괴한이 급히 사라지는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캘커타 거주자로 이 사건에 유력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현재 슬로컴 치안판사가 킬티나갈의 마하라자 영주에게 강력한 협조 요청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신문은 치안판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었다.
'5명의 증인들에 의해 확인된 그 유력한 용의자는 캘커타 관할권 내에 있다. 그래서 마하라자 영주는 곧 그를 고발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입이 바싹 타며, 몸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이 캘커타 거주자란 자이 라벤던을 말하는 건가요?"
"증인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증언했소"
"라벤던이 탄광을 폭파하고, 직원까지 죽였다구요?"
"라벤던은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해 복수심도 강하고 특히 영국인들에게는 그가 만약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일도 서슴치 않고 했을 거야. 그 탄광이 폭파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그 누구도 석탄을 얻지 못해."
그의 설명에 올리비아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성난 듯이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소, 그는 더구나 그는 이 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지. 영국인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보험금도 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야 누가 그 미친 녀석의 마음 속을 알겠어?"
"그가 무고한 경비원까지 죽이면서 그렇게 했다구요? 그런 생각은 해볼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맞아, 그게 그의 오산이었지. 침례식날 밤에는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놀 것으로 예상했거든.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랬지 하지만 그경비원은."
"침례식날 밤이라구요? 폭발이 그때 일어났나요?"
랜섬이 신문을 가리켰다.
"증인들은 라벤던이 그의 검은 말을 타고 탄광지대 밖으로 달려나가는것을 봤다고 증언했지."
올리비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신문을 집어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곤 나지막이 소리쳤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들 모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구요.!"
두 눈을 크게 뜨고 랜섬이 그녀를 한동안 조용히 주시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잔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올리비아 양? 부탁이오, 내게 말해 줘요. 죠수아 경께서 부지불식 간에 말을 했소?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난 모든 것을 듣고 싶소"
그녀는 그의 태도에 당황해 하며 애써 냉정을 찾았다.
"이모부님께서는 제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횡설수설하셨죠. 제게 라벤던이 어떤 건(件)으로 고발당할 지를 말씀해 주세요."
"라벤던은 마하라자 영주에 의해 고발될 겁니다. 아무리 동업자지만 고발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랜섬의 얼굴이 알 수 없는 초조감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랜섬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는 뭔가 대단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올리비아가 따지듯 물었다.
"이 일들에 대한 라벤던의 반응은 어떤가요?"
"그는 자신의 반응을 전혀 드러내 놓지 않고 있소"
"그럼 그는 이 일들이 꾸며진 일들임을 밝히려 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의 격렬한 반응을 주목하며 놀라운 듯 내뱉었다.
"무슨 이유로 그 일이 꾸며진 것이라는, 그토록 강한 확신을 갖고 있죠?"
이번엔 그녀에게 이미 답변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남자에 관한 소문들 때문이죠 랜섬 씨조차도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는 유난히 거만한 사람으로, 특히 거래에 있어서 정도를 벗어나는 짓은 안 하는 사람이라고 이런 점에서 그가 이런 섣부른 행동들을 했다고 믿기는 어려워요. 그가 그토록 서툴게 뒤처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다섯이나 되는 증인들의 눈에 빤히 확인되어지게 하는?"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그는 급한 나머지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저지르"
"그는 생사가 걸린 불리한 짓은 하지 않아요.!"
자신이 흥분한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애써 자제력을 되찾으며 말했다.
"전 지금 자명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어리석은 판사라도 능히 알아챌 수 있는 자명한 것을 이건 호기심인데, 랜섬 씨도 그가 죄가 있다고 믿나요?"
그의 얼굴이 즉각 굳어졌다.
"내가 어떻게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올리비아 양 중요한 것은 치안판사 슬로컴의 생각이오 그는 라벤던만큼이나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그는 마음속에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생각을 갖고 있소"
그의 어깨가 피로로 축 늘어졌다.
"많은 나쁜 음모들이 꾸며지고 있어 난 두렵소. 게다가 현재 진행되고있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난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오. 슬로컴은 사실이어떻든지, 그가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일을 만들 것이오. 이미 자이에게 불리한 여론들이 그를 부추기고 있어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는 정말 모르겠소."
또다시 그가 그의 이름을 무의식 중에 말했다. 올리비아는 랜섬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감지했지만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계속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라벤던이 앞으로 어떻게 반박할 것이라는 소문은 없나요?"
랜섬은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미친 개가 문제가 닥칠 때 도망가는 것을 봤소? 미친 개가 몽둥이를든 폭도를 만났을 때 달아나는 걸 봤소? 그런 개는 즐거이 그 폭도들과 맞서고 싸울 태세로 덤벼들지 그는 고소에 대한 반박도, 변론에 대한 수단에 대해서도 어떤 힌트도 주지 않고 있소 아마 언제라도 슬로컴이 오기만을 기다리겠지"
그가 손을 들어 체념의 몸짓을 했다.
"난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두렵고 불안해요. 그건 내가 이미 경험으로알고 있는 그의 복수심 때문이라오 자이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잘 다스리는 아이니까."
브리짓트 부인이 귀가했기 때문에 얘기는 끝이 났다. 랜섬은 죠수아 경이 대취한 이유를 애써 둘러댔고, 올리비아는 불안과 격노에 휩싸여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이 라벤던에게 올가미를 씌워 기어이 파멸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녀만이 오직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 그날 그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그녀가 그와 함께 있었으므로.
죠수아 경은 전날 밤의 행동을 기억하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냉정한 얼굴로 침묵만을 지키며 그 일에 관해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어제 일로 이모부 내외 사이에 설전이 오갔음을 예측하긴 했지만 그들을 화해시킬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자이와 놓인 상황이 어떻든 간에 자이의 위험에 관해 무관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일에 대한 명확한 상황을 알고 대처하기 위해 이모부를 찾아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중국 수나라 때의 종(鍾)을 닦다가 그녀를 보며 어제 일은 잊은 듯 반가운 기색을 했다.
"깨어 있었니? 그럼 이리 오너라 내가 이것을 닦는 동안 함께 얘기나할까?"
그녀는 책상 위로 다가서며 얘기의 실마리가 돼 줄 신문을 집어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하고 야만스런 일을 저지를 수 있죠? 이토록 형편없이 자기 위신을 추락시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요."
그의 관심이 여전히 그 청동 제품에 쏠려 있는 채로 흘리듯 말을 했다.
"분명, 누군가는 그럴 수 있겠지."
그녀는 신문을 읽는 체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았다.
"어둠 속에서 목격자들은 실수를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니면, 축제일이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 있었을 수도 있구요."
그의 무표정했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달은 보름달이었어. 술에 취해 있었건 아니건 실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녀는 무관심한 듯 애쓰면서도 가슴이 옥죄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엔 슬로컴 씨가 현장에 갔다고 써 있는데, 그가 거기서 중요한 뭔가를 찾아냈을까요?"
"내일 그가 오면 알게 되겠지."
이런 화제들에 이모부가 언짢아하고 있는 게 명백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시한 채 용감하게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었다.
"그렇다면 동기는요? 누군가 얘기한 것처럼 보험금 때문인가요? 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녀는 용의자가 라벤던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교묘히 시사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계속 얘기했다.
"사업가들 중의 몇몇 사람들은 가끔 참 놀라운 일들을 저지르는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도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미국에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작은 회사의 소유자들이 방화죄를 범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구요."
그녀의 말들에도 죠수아 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 사건은 그 폭발로 사람까지 죽었으니, 범인은 살인죄로도 기소가되겠군요."
죠수아 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서야 안경 너머로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넌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하구나, 얘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죠, 뭐 랜섬 씨는 이 일의 결과에 대해서 많은 추측과 논란이 생길 것이라고 하던데요. 만일 그 범인이 살인죄로 구속된다면 몇 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나요?"
그녀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고동쳤다. 그의 얼굴에 어렴풋한 변화가 일어나더니, 시선이 허공에 멍하니 머물렀다. 깊은 침묵을 주시하며 그의 내부의 변화에 대해 알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냉정을 되찾으며 침묵을 깼다.
"그래, 만약 슬로컴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적어도 십 년, 아니면 그 이상. 아마 그 사람은 그런 결정을 내릴 거야 그는 마하라자로 하여금 그를 고소하도록 유도할 테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죠?"
"어떻게라구? 머리 좋은 네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얘야, 킬티나갈은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었을지도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그런 상태와 거리가 멀단다. 지금 그곳에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하나도 없단다. 마하라자는 그의 백성의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우리를 통해 사야 한단다. 그게 바로 그에게 고도의 압력을 가할 수 있게 하는 키포인트지."
올리비아는 고통을 느끼면서 랜섬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 사건이 거짓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라벤던을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소.
고통의 무게에 위해, 올리비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묻고 싶었던 가장궁금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혐의를 받고 있는 그 캘커타 거주자란 카라 칸타를 의미하나요."
"그래"
"만약 그가 자신이 어떤 변론을 제시한다면요?"
"슬로컴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는 슬로컴이 받아들일 만한 어떤것도 제시할 수 없을 거야."
올리비아는 그의 확신에 찬 결론에 분노가 아닌 한기를 느꼈다. 그녀는 침착해지려 애쓰면서 어쩌면 자신의 전 생애가 걸려 있을지도 모를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제가 아는 한, 그 기소의 성공은 그 다.섯 명의 증인들에 달려 있겠군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용의자가 그날 밤 킬티나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할 수 있다면 사건은 어떻게 되죠?"
그의 두 눈이 의혹과 관심으로 번뜩였다. 그건 그녀의 어떤 질문보다도 더 그를 격노케 한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입증된다.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거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 있었으며, 그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그를 위한 철저한 사형이 준비돼 있었다. 나무가 구해지고, 로프가 이미 제자리에 준비된 채 집행인은 무기를 휘두를 준비를 마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서야 전 이모부님께서 원숭이 한 마리를 잡는 데는 한 가지 방법 이상의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 말의 진의를 알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경멸을 알아챘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그것을 설명했다. 해도 그것은 더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달빛 아래서 사공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사공의 손바닥에은화 몇 닢을 올려 놓았다.
"지금은 약속한 액수의 반을 드리고, 나머지 반은 내게 답장을 갖고 오셨을 때 드리겠어요."
그녀는 유창해진 힌두어로 뜻을 전했다. 사공의 눈을 가득 메웠던 졸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이 편지입니까, 아가씨? 잘 알겠습니다."
올리비아는 약속했던 첫번 몫을 그에게 주며 편지를 건넸다.
"꼭 답장을 갖다. 주시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저 그런데 라벤던이 베에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하죠?"
"아뇨, 그분은 분명 거기에 계실 거예요."
그녀는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 편지는 꼭 그분에게만 전해야 해요. 그분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전해 주어선 안 돼요. 알아들으셨죠?"
그 사공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올리비아를 혼자 남겨 두고는 한밤중에 밀려오는 졸음을 삼키며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작은 배가 강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올리비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밤의 바닷바람에 절망과도 같은 한기를 느꼈다. 그녀는 외투를 끌어당기며, 추위 속에서 그 사공이 돌아올 때까지 밤을 새우며 견딜 준비를 했다.
열 시도 채 안 된 시각이었지만 거리는 황폐한 사막처럼 공허했고, 길잃은 개들은 쓰레기통의 버려진 음식을 찾아 헤매며 배고픈 울음 소리를 발했다. 올리비아는 준비한 담요 위에 무릎을 바짝 조이고 치맛자락을 다리 앞으로 모으며 앉았다.
몸을 흔드는 추위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어둠 속을 가로질러 그 작은 배가 도착했을 만한 강가 호의 위치를 더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속에서도 그녀는 그 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갑판에서 밖으로 내비치는 불빛 하나조차도 확실하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딘가 저 어두움 속에 자이가 있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편지는 이모부의 복수심과 외고집이 가득 찬 승부 근성의 꿈을 뒤로 한 후에 즉각 그에게 쓰여진 것이었다.
지금 그 누구도 그녀가 살며시 집을 빠져 나온 사실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이제 그녀에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일이 되면 모든 캘커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후엔 그들의 편견과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상상력들이 그녀를 휘감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내일이 오면 그녀는 옥터로니 기념비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을 것이며 자이 라벤던을 향한 그녀의 사랑도 세상에 공표될 것이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살을 가르는 소리에 그녀는 순간 긴장했다. 그가 벌써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회신을 받아 가져오는 것일까? 하지만 되돌아온 사공의 손에는 그녀가 보낸 편지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편지는 뜯어 본 흔적조차 없이 보낼 때 그 모양 그대로였다.
"배에 그가 안 계셨나요?"
"예, 아가씨"
올리비아는 기대가 완전히 부서져내림을 느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해줬죠? 누구를 만나고 왔나요?"
"그분이 배에 안 계신다고 해서 갑판 위로는 올라가 보지 않았는 데요."
그가 주춤대며 말했다.
"그럼 누가 당신에게 그분이 배에 없다는 말을 했죠?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기억해요? 기억을 더듬어 봐요.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있을 거예요."
그녀는 거의 유일한 희망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생각해내려 애쓰다.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글쎄요. 도무지 생각이 나질"
"그의 하인 바하도르의 목소리가 아니던가요?"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맞아요. 그의 목소리였어요."
그는 종종 그 배에 고용되는 사공이었기에 바하도르의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남은 은화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걸 다. 드릴 테니 절 그 배로 데려다 주시고,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는 생각지 않은 제안에 놀라면서 은화를 보며 기뻐했다. 그녀는 다시 희망에 차서 환해진 얼굴로 이제 뭔가 될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갑판에 바하도르가 있다는 것은 자이 역시 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희망 속에서 두려움과 자신감이 교차되고 있는 그녀를 실은 작은 배는 강을 가로질러 다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분노를 느꼈다. 그는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조차 읽어보지 않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그는 혹시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닌 것에 대해 한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 한 장을 전하려는 나의 무모함을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좁혀지는 거리 속에 올리비아의 분노는 용기를 잃은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자이가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으며, 또 자신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그러다.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대담한 자신의 탈출이 주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배를 다시 되돌리고픈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이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다. 이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의 심장만이 큰 소리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함 속에서도 작은 배는 이미 강가 호에 닿아 있었다. 그쪽에서 먼저 알아채고는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 있소?"
사공이 올리비아를 쳐다보며,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올리비아가 작은 소리로 지시하자 그쪽을 향해 응답의 소리를 외쳤다.
"여자 한 분이 계십니다."
잠시 찰나적인 놀라움의 침묵이 있었다.
"그 여자분이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 배를 타고 싶어하세요."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무슨 용건인지요?"
"라벤던과 볼 일이 있으시답니다."
위로부터 속삭이는 듯한 의논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심장은 자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배 안에 있다!
"지금은 어떤 방문객도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올리비아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녀는 다시 사공에게 지시했다.
"이 여자분께서는 꼭 전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만약 5분 내에 사다리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닻을 연결한 사슬을 타고서라도 올라가시겠답니다."
의논의 소리가 좀 더 길게 들려오더니, 누군가 갑판 안쪽으로 들어가는발자국 소리와 함께 정적이 주위를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자신의 무모한 시도를 인정하며 한풀 기가 꺽인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환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밧줄이 아래로 내려왔고 그녀는 곧 도움을 받아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하도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과 놀라움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곧 존경을 담은 예를 갖춘 인사를 했다.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자이에게 내가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해 줘요."
그녀는 인도에서 명문가의 주인이 하인에게 말하는 듯한 어느 정도의 권위를 담아 말을 했다. 그녀는 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 하느님 그가 과연 나를 만나 줄까요? 그가 나의 뜻을 받아들여줄까요?
그녀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갑판 위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자기 자신에게 이 한밤의 방문 목적이 공식적임을 다짐했지만 다시 자이를 만난다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바하도르가 돌아와 그녀만큼 굳어진 얼굴로 자이의 말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찾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뵙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그는 당황함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러면 언제쯤 시간이 날지 알아봐 줘요. 난 서두르지 않겠어요."
그녀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난 밤새도록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바하도르가 자리를 뜬 후 그녀는 두 번이나 되는 거절로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굳게 다졌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이곳까지 왔는데 그를 못 만나고 갈 수는 없어!
얼마쯤 후, 바하도르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며 따라오라고 했다. 감격의 충동이 가슴을 쳤다. 낯익은 복도를 계속 걸으며 그녀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끝내 당신이 나를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나 역시 당신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당신과의 이 숙명을.
자이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올리바아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쓰고 있던 일을 계속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창백한 모습으로 문에 기대 선 채 그를응시했다. 자이가 휘갈겨 쓰고 있는 펜의 움직임만이 공허한 정적을 메웠다.
소매를 팔뚝까지 올린 그는 한 손으로는 뭔가를 쓰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있었다. 전등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는 듯 매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가 써내려 가고 있는 펜끝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담하게 책상 앞으로 나갔다. 가슴이 더이상 모멸감으로 황폐한 사막이 되기 전에 그에게 말을 던져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이 무슨 대단한 양보나 한 듯 계속 글을 쓰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올리바아, 당신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소. 당신이 나를 지금 얼마나 어렵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어렵게 하고 있다구? 겨우 이런 말뿐인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 그저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하려 했을 뿐이에요. 제가 온 용건부터얘기하죠 제가 온 이유는"
"난 당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그 귀족적인 제스처는, 당신에게는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불필요한 것이오."
"부자연스럽다구요? 그럼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아무 말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기사도 정신에서 날 돕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면 당신은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소 듣기로는 아직 병에서 회복도 안 됐다던데."
"걱정인가요?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할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경멸 섞인 조소에도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화는 극도에 달했다.
"당신은 말을 할 때 상대방에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군요. 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거죠? 날 쳐다보는 게 그토록 두렵나요?"
그는 천천히 쓰기를 멈추며 펜을 내려 놓았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선실 안을 밝히는 등잔불의 희미함 속에서 그녀는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난 두려워하지 않소, 그 어느 것에도 난 당신이 날 걱정해 주는 것에 감사할 뿐, 다른 아무 것도 없소."
그가 다시 펜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당신도 이제 날 위해 더이상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소."
그녀는 지탱하기 어려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금 당신이 어떤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는지나 알고 있어요?"
"난 항시 무엇인가에 의해 갖가지 모함을 받지 지금 당신이 뭘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
"당신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있다구요.!"
"그렇군,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한 마디 부인도 없이 그렇게 인정하나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나 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그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설명했다.
"내 피난처는 이미 정해져 있소 그곳이 당신처럼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치는 곳은 아니지만 당신이 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도록 해줄 피난처, 당신의 명예는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고 그대로 지켜질 것이오."
"당신은 지금 내 명예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고집스러움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곳이 당신의 피난처인가요? 말해 줘요, 자이!"
"그게 어디든지 그건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오."
그의 이 한 마디는 그녀의 가슴을 있는 대로 들쑤시는 말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 때문에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 말의 의미는, 내가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오. 올리비아,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날 혼자 그냥 내버려 달라는 것이오."
그의 펜이 화가 난 듯 속도를 빨리 할수록 올리비아의 분노 역시 격앙되어져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무엇이든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분노로 가득 찬 그녀는 발을 구르며 다가가 그의 손에서 펜을 뺏어 있는 힘껏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들을 집어 던졌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이따위로 취급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감히 나를."
그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의 떨고 있는 몸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오, 하나님!"
그녀는 거칠게 돌아서며 그의 뺨을 때렸다.
"당신은 사형을 당해야 마땅해요!"
그는 그녀의 욕설에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손을 풀더니 조용히 마룻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모아 책상 위에 얹었다.
"이건 당신이 간섭할 문제들이 아니오, 올리비아 섣불리 불 속으로 뛰어들려 하지 말아요."
그녀는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분노 때문에, 그러나 그것보다는 가슴 속 가득한 애정 때문에 그녀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신이 치러야 할 전쟁이라면 그건 바로 내가 치러야 할 전쟁이기도 해요. 난 벌써 그 일을 내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난 지금 당신에게 이 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주고 있는 거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요."
그가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 번의 비밀스런 만남, 그리고 몇 번의 키스 난, 이런 것들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는 생각지 않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녀는 그가 던지고 있는 비수와도 같은 말의 잔인성에 상처받고 고통받았다.
"그게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이란 말이에요, 자이?"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올리비아, 난 내가 하는 말들로 인해 당신이 더이상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소!"
그는 그녀를 외면했다.
"아뇨! 당신 때문에 상처받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녕 아무것도"
그녀는 타는 눈빛으로 그의 앞에 다가섰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음에 대답할 수 있나요?"
그는 일단 그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물론이오. 만약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올리비아 당신은 아무런 의미도 내게 주지 못했소."
"난 믿을 수 없어요. 난 절대로 당신의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녀는 다시 터지는 격분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올리비아는 손을 들어 있는 힘껏 그의 뺨을 쳤다. 그가 사줬던 유리팔찌가 그의 얼굴에서 산산히 부서지며 그의 얼굴엔 피가 맺혔다. 그럼에도 자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회색빛 눈이 잠시 깜박이더니 느리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걸 견뎌내겠다고 한 약속의 의미인가? 만약에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당신이 그 선택에 포함될 수 있으려면 당신은 견뎌낼 게 아주 많소. 만약 견딜 수 있다면, 아무 말 말고 그냥 나가시오. 올리비아"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그를 내려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을 안 자이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시 그와 몸싸움을 하던 그녀가 힘없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찢어지는 듯이 소리질렀다.
"난 정말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는 재빨리 그녀를 잡아올리며 손목을 심하게 비틀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부릅뜬 두 눈이 그의 얼굴을 파고들자 그가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그녀를 놓고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지금 나를 나라고 생각하겠소, 올리비아 도대체 무엇이 당신에게 그럴 권리를 준 것이오? 지옥도 불사할 것 같은 용기, 억지로 캐묻고 대답하길 종용하고 왜 그토록 나의 일에 관계하려는 것이오? 난 당신의 그런 간섭이 지겹고 힘들어. 그 밑도 끝도 없는 호기심에 진절머리가 나. 난 당신의 그 굉장한 상상력이 지겹단 말이오, 올리비아!"
악의에 찬 그의 눈동자에는 잔인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
"당신은 내가 마치 모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묻고 있소. 난 당신에게 빚진 게 없소, 아무것도! 당신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소?"
그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 다시 서성대기 시작했다.
"난 당신을 미워하기 시작했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당신의 그 환상에 찬 머릿속에서 창작해낸 로맨틱한 상대에 불과하오. 그 창작들은 있지도 않는 것이며 존재해 본 적도 없소. 당신이 하고 있다고 믿는 그 사랑은망상에 불과해. 난 당신의 그 어줍잖은 망상이 점점 자라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더이상 느끼고 싶지 않소."
그는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주춤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 배에서 당장 내려요, 올리비아 아니면 내가 강제로 당신을 내려 놓겠소."
고통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내면의 감성이 지시하고 있는 보복을 시도하려고 고개를 수그리며 웃었다.
"자이, 당신은 거짓말쟁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냉정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난 내 확신에 대해 그것을 지킬용기를 갖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그날 밤의 당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리라는 것에 대해 불신하고 있지만, 동시에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의 명예를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어요."
그녀의 눈이 경멸과 멸시의 빛으로 반짝였다.
"만약 당신이 내 증언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고집하지는 않겠어요. 또 당신이 나를 더 만나지 않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겠어요. 물론 상처를 받겠지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건 간에 그것은 단지 당신이 당신안에 존재하는 나의 의미를 줄이고, 또 당신 감정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늘상 내뱉는 증오라는 감정은 당신 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아요. 그것 역시 거짓이라구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자이"
짧은 고통의 순간들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바다가 숨쉬고 있는 사실이 확실한 이상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당신의 모든 거짓으로 위장된 말들을 없애 버리겠어요. 당신께 약속하죠"
"여기서 이제 그만 나가지, 올리비아"
차갑고 냉정한 말이었다.
"예, 나가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먼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 인정해야 해요."
그가 마침내 마지막 한 치의 자제력마저 상실한 듯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그녀에게 다가와 그 큰 손으로 그녀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광기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숨통을 흔들고 조이는 모습 속에는 사람의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숨을 쉬려 노력했지만, 단지 눈앞에 검은 장막이 쳐지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짧은 고통의 의식 속에서도 딱딱한 조개껍질을 부수고 있는 듯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후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올리비아는 미세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차 호흡하기에 편안함을 느끼며 어렴풋한 의식의 한가닥을 잡고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녀의 입은 사향향기 속에 묻혀 있었고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왜 당신은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거요?"
그 소리는 도움을 갈망하는 탄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 이토록 날 고문하고 있는 거요, 올리비아"
자이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그의 다부진 몸이 그녀를 격정적으로 안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가 내부의 거친 악마 같은 것과 싸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묻었다.
"아무 말 말고 그대로 있어요, 자이"
그녀는 편안함에 파묻혀 사랑의 목소리로 그를 위로하며, 그의 그 악마같은 성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후 키스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가 또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서리쳤다.
"올리비아, 날 사랑해선 안 되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당신을 힘들게 하고, 삶을 낭비하는 일이 될 거요. 난 방금 당신을 죽일 뻔했소 내가 사랑받을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낼 더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하지만 난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는 또다른 증거를 당신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얼굴을 만졌다.
"당신은 있지도 않는 것을 내 눈 속에서 찾아내려 애쓰는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런 것이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해도, 날 위해서는 존재하고 있어요."
"가요, 제발 후회될 일을 저지르기 전에 빨리 떠나라구."
가라구?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녀는 궁금했다. 지금 그녀의 품 안에 자신의 전부를 갖고 있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후회할 것은 없을 거예요, 자이 난 이미 당신의 것이에요."
그는 자신의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화가 난 듯 그녀를 흔들어 댔다.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소 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이미 내게 무언가를 주고 있어요, 자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는 그의 이마에 서린 땀을 닦아 주었다.
그의 눈에서 그녀를 갈망하는 번뜩임이 일어나며, 그의 손이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의 베개 사이에 묻힌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갈망과 어떤 얽매임 같은 고집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도 꿈 속에 갇혀 있는 거요? 왜 메아리도 없는 이런 일에 허덕이는 거요?"
"우린 똑같아요. 단지 당신이 아직도 쓸데없는 망설임을 계속하고 있을뿐이에요."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의 태도에 더이상 속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장막을 헤치려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인 것을 내게 증명해 봐요, 자이라벤던!"
그녀의 도전적인 말의 회답은 빠르고 거칠었다. 그의 마지막 피난처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조심성을 내던지고 그의 팔에 그녀를 가둔 후 거칠게 단추를 뜯어내며 옷을 찢었다. 모든 망설임과 두려움을 버리고 그의 손이 불꽃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스쳤다.
그의 눈은 침대에 누운 그녀의 정교한 몸매에 취해 있었다. 길고 가는 다리, 넓게 조각된 가슴, 붉은 장미빛 같은 입술에 정열이 실린 애무가 쏟아졌다. 그의 눈이 지나치는 곳마다. 그의 입술이 따라갔고, 그 사랑으로그녀는 힘이 빠져갔다.
그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이 빨라지며 그녀의 신음소리도 높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움과 황홀함으로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올 어떤 혼란을 덮어 버리려는 듯 얼굴을 베개에 묻어 버렸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받쳐들고는 그의 혀로 그녀의 모든 달콤함을 마시며, 그 안에서 그녀에게 마실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곳엔 되돌아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치 않았다. 그들 사이에 남아 있었던 불편함들은 사랑의 전희(前戱)에 묻혀 만족스러움으로 변했다. 올리비아는 사랑의 느낌으로 충만해 있었고, 그녀를 원하는 그의 요구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모든 옷들을 벗어 버렸다. 그녀의 시야에 단단하고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질로 되어진 그의 몸이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올리비아가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떴을 때 자이는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어깨 위로 손을 가져가 뺨을 그의 가슴에 기대며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녀는 그의 목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그가 목에 걸고 있는 은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한번도 이런 평화스런 느낌, 이렇게 완전한 평온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 위에 키스를 했다.
"당신은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랑을 주고 있군."
피곤함이 섞인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헤아릴 수 없는 행복감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내 잘못인 것 같소"
"당신은 나를 완전한 여자로 만들었어요."
"아니, 그것은 꼭 이렇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오 이렇게 되어선 안 됐었는데"
고개를 돌린 그의 머리를 자신에게로 잡아 끌며 그녀가 말했다.
"아뇨, 꼭 이렇게 되어져야만 할 것들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린 이런 모습의 운명을 갖고 있었어요."
그의 한숨이 더욱 깊어갔다.
"날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오, 올리비아"
"이것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는 또 한번의 부드러운 키스를 그녀에게 해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소, 올리비아 당신은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을 곧 후회할 거요.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난받을 사람은 바로 나요. 나 자신이오!"
당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구요? 그것은 서로 같이 나누었던 것들이 아닌가요? 그런 질문들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그녀는 삼켰다.
"무슨 일을 행했건 그것은 내가 원해서 한 일들이에요. 자이,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그가 한숨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난 당신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의 내면의 고통과 갈등은 아직도 마무리 되어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는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나는 벌써 많이 가졌는 걸요. 당신은 내게 유일한 사람이에요, 자이 나의 행복한 순간들을 망치려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이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를 더욱 가까이 안으며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당신, 이 흉터는 어디에서 생긴 거죠?"
"싸움에서"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어깨부터 그 상처의 선을 따라 가슴 한복판까지 쭉 내려갔다.
"칼에 다친 상처인가요?"
그가 머뭇거리다. 간신히 말을 했다.
"아니, 채찍에 맞은 상처요."
작은 탄식과 더불어 그녀는 상처 하나하나에 키스를 했다.
"나의 입맞춤들로 당신의 모든 상처를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사랑을 무슨 만병통치약인 줄 알고 있군"
"예, 맞아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사랑받기를 허락해 준다면 말이에요."
올리비아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왜 그러는 거죠? 왜 당신은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그처럼이나 두려워하는 거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자이?"
그는 얼굴을 돌려 천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내 안에 있는 나를 허약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또 나의 정신을 딴 곳에 쏟게 하고, 나를 겁쟁이로 만들기 때문이오"
그는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내가 겸손해지는 것에 익숙치 않기 때문인가 보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사랑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어요. 나를 깎아내리고, 나의 정신을 빼앗고, 나를 공포에 떨게 해요. 난 당신이 원하는 모든 모습으로 변해가요. 하지만 이런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그런 시선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하다가 마치 어린애와 같이 흥분된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의 사랑은 정말로 특이한 것이오, 올리비아 순수하고, 아무것도바라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은 그런 진실한 사랑 난 이제껏 그런 사랑을 믿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의 그 사랑이 나를 좌절의 늪에 빠뜨리며, 날 당황하게 하고, 날 죽어가게 하고 있소."
그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맞아요. 난 여지껏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기적처럼 내 인생에 들어왔지. 하지만 당신은 그 사랑이 나를 좌절의 늪에 빠뜨리며, 날 당황하게 하고, 날 죽어가게 하고 있소."
그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맞아요. 난 여지껏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기적처럼 내 인생에 들어왔지 하지만 당신은 나의 추악함에서 일찍이 벗어나야 했소. 나와함께 했던 순간들은 당신에게 아주 나쁜 결과들만을 안겨다 줄 것이오."
그러면서도 그는 더욱 힘껏 그녀를 안았다.
"당신은,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요."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제게 말해 주세요, 제가 어떤 의미인지"
"난 당신에게 해줄 말이 없소 아무 말도"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간절한 눈빛 속에는 그녀에게 해줄 아무런 말도 없다는 방금 전의 얘기와는 달리 너무나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 그가 슬픈 미소와 함께 갑자기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은목걸이를 풀어 그녀에게 걸어 주었다.
"난 여지껏 이것을 제외하고는 내게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래서 난 당신에게 줄 것이 이것 밖에 없소."
그의 얼굴에 상념이 스쳤다.
"이것은 나의 어머니가 쓰시던 유품이오."
올리비아는 놀라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제껏 단 한번도 그의 입에 올려지지 않았던 어머니란 말이며, 뭔가 각오하고 전해 주는 선물의 의미속에는 굉장한 존엄성까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에 입맞춤을 한 뒤 뺨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말을 꺼내기엔 감동이 너무 컸다.
상자 모양으로 된 그 목걸이는 무거웠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고 열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막 열어 보려는 순간, 그가 그녀를 막았다.
"그것은 내 어머니가 남긴 것이오. 절대로 그것을 열어 보아선 안 되오 그것을 내게 약속해 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밤 그로부터 큰 보석을 받아든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사랑을 소유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촌 마무드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놀포크엔 지금 여름이 한창이라고 하는구나. 항구는 배들로 가득 차 있고, 휴일에는 소풍객들로 메워져 활기가 넘친다는 거야."
브리짓트 이모는 생각에 잠긴 듯 짧은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올리비아가 묵묵히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는 네가 그렇게 힘없이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리비아 넌 지금 심정이 꽤 복잡한 모양이구나 지금 침대에서 나온 거니?"
"예, 이모님 저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그렇다는 건 생각이 많기 때문이지."
벌써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강가 호에서 돌아온 후 9시간이나 수면을 취했는데도 그녀는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어젯밤의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밤의 사랑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헤어지는 순간 자이가 보였던 빛나던 눈물을 특히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나를 믿소? 그렇다면 나를 굳게 믿는다고 약속해 주오. 무슨 일이 우리 사이에 일어나더라도 굳게 나를 믿는다고.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자이가 그런 말끝에 덧붙이고 싶었던 다른 진실된 말이 분명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 비장해서 그녀는 그걸 캐어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고민 끝에 그와의 관계를 이모에게 털어 놓을 때가 왔다고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자이와의 일을 더이상 가슴 속에 숨겨둬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모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 말해 보거라"
"저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요. 제가 이모님께 정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닌데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잠시 멈추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용기를 주세요.! 브리짓트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알고 있단다., 얘야 그 이름을 밝히려 애쓰지 말아라, 올리비아 난 앞을 못 보는 장님이 아니니까! 그 청년이 왜 그토록 많은 편지를 보내왔겠니?"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네 시간을 가지면서, 그 시간 속에서 너의 것들을 만끽하도록 해. 그 다음에 내게 네가 어떻게 좋았고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말하거라,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당황한 느낌으로 이모를 응시했다.
프레디 버커스트! 올리비아는 그가 떠오르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모님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프레디라고 믿고 계신 것인가? 올리비아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이 집안의 가족들이 받을 충격들 때문에 면목이 없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을 굳히며, 그녀는 모든 것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신의 선택에 떳떳이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한 말들은 스캔들이 될 것이며, 나 역시 이 집에서 자연스레 나가야 할 것이다.
자이는 날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그녀의 온몸이 그를 향한 새로운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행복감에 젖은 채 헤어질 때 본 그의 눈물을 상기하고 그가 한 근심어린 약속들에 관해서 생각했다.
그래요, 난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그래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 결과가 얼마나 쓰고 견딜 수 없는 것이건 간에 난 더이상 이 비밀스런 사랑을 혼자서 부둥켜 안고 있지는 않겠어요.
"뭐가 필요.하니?"
이모는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올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이와 함께 차 한잔하며 얘기하면 좋을 텐데. 그이는 요즘 뭔가에 미쳐 있는 사람 같으니."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언급되자 기분이 언짢아짐을 느꼈다. 어젯밤 자이는 말했었다. 이 모든 음모의 뒤에는 죠수아 경이 음흉하게 도사린 채로 오직 자이를 파멸시킬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을 자이는 슬픈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들려 주었었다.
왜죠? 그녀가 물었을 때, 자이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을 꿰뚫을 듯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실은 은목걸이에 꽂히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열정에 찬 그의 눈빛만을 의식하느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죠, 왜 저의 이모부가 당신을 그렇게 악의에 찬 음모로 파멸시키려는 거죠? 올리비아의 물음만 공허하게 선실 안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다른 날보다. 일찍 귀가한 죠수아 경을 위해 올리비아는 찻잔을 들고 장미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이모님께서 이모부님께 차를 좀 갖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죠수아 경은 차를 옆으로 비껴 놓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비아, 넌 장미가 이천만 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아뇨."
"이것을 좀 보거라"
그는 그녀의 냉정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 이모가 작년에 프랑스에서 수입한 것들이지 굉장하지 않니?"
올리비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죠수아 경은 그 핏발처럼 붉은꽃들이 있는 오솔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뒤를 따라가던 올리비아에게 간교한 눈빛을 발하는 죠수아경이 무엇인가를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맥박이 갑자기 막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포들이 그녀에게 엄습했다. 그가 어떤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일까? 그녀는 과감하게 웃었다.
"전 슬로컴 씨가 킬티나갈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무슨 뉴스거리라도 있나요?"
"그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건데, 마하라자 영주가 더이상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거야 물론 그건 그의 특권이긴 하지."
"그럼, 그 유력한 범인으로 꼽히던 사람의 혐의는 풀린 건가요? 그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녀의 심장이 어떤 희망 속에서 심하게 고동쳤다.
"물론, 그는 책임을 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자유롭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뭔가 결정된 듯한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어떤 어려운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처럼 그녀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않고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녀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의자가 마련된 곳까지 걸어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며 말했다.
"증인 중의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도 가장 확실하던 증인이 말이다."
"예?"
"난 지금 네게 그가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거다, 올리비아"
"실종이라구요?"
그녀는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별다른 것은 없어 난 그저 그가 실종된 게 아니라면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올리비아는 거의 숨을 멈춘 채 물었다.
"죽었다구요? 삼촌이 그걸 어떻게 단정하실 수 있죠?"
"직감이지. 순수하고 단순한 직관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그는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 알다시피 라벤던이 그를 죽였어. 그가 죽이지 않은 게 차라리 이상하지."
"왜죠?"
그의 눈빛이 송곳처럼 그녀를 관통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떨쳐 낼수 없었다. 그의 암시는 끔찍할 정도로 명확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근거라구? 오, 그래 난 원주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그들 마음속에 있는 잔꾀도 게다가 라벤던의 마음은 마치 내 자신의 마음인 양 파악할 수가 있거든."
잔뜩 얼어서 올리비아는 기계적으로 물었다.
"그럼 그 증인의 시체를 찾은 그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언제쯤 그시체를 찾게 될까요?"
"그러면 라벤던은 교수형에 처해질 거다!"
그는 일어서서 어깨를 똑바로 펴며 얘기했다.
"내가 오늘 집에서 저녁을 할 수 없다고 이모에게 전해 주겠니?"
그가 자리를 뜬 후에도 올리비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잊고여전히 그곳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며 서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베란다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를 향해 행복이 가득 찬 음성으로 자신의 편지꾸러미 속에 쌓여진 화제들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정작 올리비아는 허공에 눈을 고정시킨 채 이모의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정말 끝도 없는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순간의 지체도 없이 자이에게 경고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모부는 이미 또다른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이가 도저히 빠져 나가지 못하는 올가미가 이모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브리짓트 이모가 노스탤지어에 빠진 심정 속에서 늘 말해 온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시작됐다. 올리비아는 평상시엔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들을 듣기 즐겼지만 오늘은 너무나 큰 좌절과 공포감이 억눌려 있기 때문에 결국 이모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자르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이층 자신의 방에 돌아가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며 급히 편지를 썼다. 물론 자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고, 그에게 연락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똑똑해 보이는 하인 소년에게 은화 한 닢과 편지를 건네며 몇 번에 걸쳐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 경고는 바로 방심하지 말고 그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이를 드러내 웃어 보이고는 민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는 불안으로 주저앉으며 그 편지가 늦지 않고 제때에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여전히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베란다로 다시 돌아갔다.
이제 거의 어두워졌다. 브리짓트 부인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편지 한 장을 읽고 있었다. 봉투의 글씨가 에스텔의 것이 분명하였기에 올리비아는 에스텔이 프링글스에서 머물 기간의 연장을 청해 온 것이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편안히 눈을 감고 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이모를 보았을 때, 이모는 그 편지를 쥔 채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곧 그 편지에 예상치 못한 어떤 불길한 내용들이 적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브리짓트 이모는 멍한 눈빛을 벽쪽으로 고정시킨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이모에게로 갔다.
"이모님?"
그녀는 가볍게 이모의 어깨를 쳤다.
"이모님, 괜찮으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그녀의 존재도, 그녀의 부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행복에 잠겼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진 채, 벽쪽 어딘가에 고정된 시선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숨조차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놀라움에 올리비아는 이모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제발, 이모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저를 좀 바라보세요. 뭐가 잘못된 거죠? 어디가 편찮으세요?"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편지가 손에서 떨어져 내리며 베란다. 밑 화단 곁으로 날려 갔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이모에게 공포를 나타내며 올리비아는 그곳으로 뛰어 내려가 편지를 집어들었다.
그건 분명 에스텔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진정 이모가 기대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편지를 쥔 올리비아의 손끝에도 미미한 경련이 전달됐다. 그 안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는 더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그 편지의 서두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 라벤던이 오늘 오후 강가 호를 타고 항해를 떠났다.
그리고 그 배엔 에스텔이 함께 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브리짓트 부인은 이미 위층으로 옮겨졌고 하인들은 각기 병원으로, 사무실에 있는 죠수아 경을 찾아서 올리비아가 건네준 메모를 가지고 뛰어 나갔다.
"제발 빨리와 주세요. 이모님이 많이 아프세요."
죠수아 경이 크게 놀랄까 봐 그녀는 대충의 사실만을 요약해 썼다. 그녀는 뭔가를 해야만 할 상황 하에서, 조용하고 절도 있게 일들을 지시해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텅빈 채 종잡을 수 없는 먹구름이 꿈틀거리는 혼란의 극단에 있었다. 자이가 에스텔과 함께? 그것이 갖는 엄청난 의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두 사람이 함께 캘커타를 빠져 나가 영국으로 향했다는 것, 에스텔은 연분홍빛 가슴으로 자이를 따라 바다.로 갔다는 것, 강가 호엔 그 두 사람만의 공간과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결국 올리비아는 자이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
그녀의 부름에 다행스럽게도 닥터 험프리스가 가장 빨리 도착했다. 침대 앞으로 다가선 그는 응급치료를 하면서 중얼중얼 불평을 했다. 그가그녀의 맥을 짚고는 말했다.
"특별히 나쁜 곳은 없군. 무슨 일로 이렇게 기절까지 한 거지? 어떤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라도?"
"이모님께서는 영국에서 온 사촌의 편지를 읽다가, 그 속에 매우 친한 친구분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보고는 실신하셨어요."
올리비아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닥터 험프리스는 안심이 된다는듯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정이 많으신 분이군. 우선 해야 할 응급조치는 다. 했으니 걱정하지는말아요."
그는 올리비아에게 브리짓트 부인을 도와 행할 몇몇의 지시를 하곤 방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죠수아 경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나 보지?"
"예, 하지만 곧 오실 거예요. 제가 전갈을 보냈거든요."
"죠수아 경에게도 그다지 큰 걱정은 말라고 전해 줘요."
빠른 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걸어가던 그가 진료가방을 마차에 집어 넣으며 물었다.
"이 조그만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로 가서 안 보이는 거지?"
지난 삼십 년 동안 캘커타에서 닥터 험프리스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고 태어난 유럽인 아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에스텔을 가장 귀여워했다.
"그앤 주말을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있어요."
의사가 가고 난 후에 올리비아는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무런 느낌으로도 다가오지 않는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 많은 거짓말이 이모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며, 에스텔의 사라짐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많은 거짓말이 필요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죠수아 이모부가 이 밤에 겪어야 할 큰 충격도 그녀에 의해 고려되어져야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모든 능력이 중단되어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죠수아 경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기분은 놀라움도 섞여 있었지만 오히려 화를 더 많이 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브리짓트는 내가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험프리스는 왔다 갔니?"
"예, 닥터 험프리스가 이모부님께 아무 걱정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심각한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심각한 것은 없다구?"
그의 기분이 다시 명랑해지며 음성이 높이 올라갔다.
"그럼 왜 나를 이렇게까지 불러들였느냐? 너의 전갈 때문에 나의 일이 얼마나 많은 지장을 받은 줄 알기나 하는 거냐?"
"예,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갈은 험프리스 박사가 오기 전에 보낸 것이에요."
올리비아는 그의 분노가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다. 그는 자이와 에스텔이 함께 떠난 강가 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그를 아래층으로 인도했다.
그의 표정에는 거만하다거나 경직되었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냐는, 질문이 가득 찬 눈을 치켜뜨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 없이 에스텔의 편지가 담긴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모의 방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그 이후, 그가 다시 집을 나서는 걸 알리는 말발굽 소리를 그녀는 들을 수가 없었다. 죠수아 경은 그날 저녁 그 집을 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커튼이 드리워졌을 무렵, 올리비아는 불면으로 인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들었다. 브리짓트 이모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망각의 강이란 은총 아래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평안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파라핀 전등이 서랍장을 낮게 비출 때 그녀는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명백한 자기 파괴의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주홍빛 날개끝을 가진 나방이 그 램프 주위를 날다 결국엔 땅바닥에 떨어져 뒤틀린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아무런 동정의 느낌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이와 에스텔!
그날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무거운 괘종시계는 그녀로 하여금 그 침묵의 순간들을 똑딱거리며 지나가게 해주고 있었다. 파라핀 전등이 파라핀 액(液)이 모자란 듯 바지직하며 사그라들고 있었고, 그로 인한주위의 어두움 때문에 그녀는 밤이 더 깊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심장의 고집센 박동만이 확고하게 그녀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실제의 그림자였고, 주변의 정적은 침묵의 강을 통해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것 같았다.
자이와 에스텔?
다행스러운 일일까? 가끔 잠이라는 것을 통해 그녀를 망각에 들어가게하고, 그것들은 어떤 깊어진 비현실성을 남기기도 하고 슬픔을 가시게도 하면서 크나큰 방향의 상실감을 던진다.
어떤 방망이가 위아래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녀는 꿈과 현실을 방황하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가 누구인지, 왜 그녀가 그러는지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와 에스텔
밤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정원은 이른아침의 새소리를 시작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일어서 무감각해진 팔다리에 힘을 주려는 둣 긴 기지개를 켰다. 브리짓트 이모는 아직까지 잠들어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녀를 깨우지 않고 대신 찬물로 세수를 한 후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죠수아 경은 말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정원 쪽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아 늦가을의 차가운 기운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옆에 차 쟁반을 놔 주고는 외투라도 걸쳐 주기 위해 그것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밤 동안 확 늙어 버린 듯했다.그의 눈동자는 물이 고여 있는 풀장처럼 보였고, 그 눈들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이모부는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약함으로 아침햇살 속에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아침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그런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잠겨 마치 장례식의 심각함처럼 장엄하게 차만 마셨다.
그때 죠수아 경의 긴 한숨 섞인 가벼운 경련을 보았다. 아무 말 없는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런 슬픔을 그냥 남겨둔 채로 쟁반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각각 그들 자신의 고독을 승화시킬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지금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 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누가 올리비아를 위해 울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루를 알리는 일상들은 아무 변화도 없다는 듯 시작되고 마무리 되었다. 그저 그 집의 하인들은 어두운 얼굴로 아무런 말 없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에 바빠 있었다.
오로지 한 소년만이 올리비아에게 자신의 전갈을 들고 갔을 때 강가 호는 이미 떠났었다고 얘기하며 편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그 봉투를 돌려받기 무섭게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래 난 알고 있었어."
브리짓트 부인이 쉴 새 없이 뒤척거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놓아 주며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에스텔?"
브리짓트 부인의 눈이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올리비아예요."
이모가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려고 애썼다. 올리비아는 닥터 험프리스가 설명한 몇몇 가지 약들을 섞어 그녀의 입에 떠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에스텔과 자이
점심식사 전에 닥터 험프리스가 다시 와 잠든 환자를 검진했다. 올리비아는 검진을 마친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일상적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특히 추문에 강한 사람으로 올리비아는 이 집안에 일어난 전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로 에스텔의 갑작스런 영국여행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가족들의 주치의로서, 템플우드 가의 오랜 친구로서 그는 이 집안의 일을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올리비아의 설명은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된 것들이었기에 그녀가 한 말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군요. 언제 그렇게 죠수아의 마음이 부드럽고 관대해졌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군요. 난 정말 에스텔을 귀여워했는데. 그래서 브리짓트가 그렇게 몸져 누운 거군. 아마 에스텔이 보고 싶어 그럴 거야 참, 존은 휴가여행 중인 것 같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군. 아무튼 죠수아는 안에 있나요? 오늘 아침 그의 사무실을 지나치다. 마차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
"예, 이모부님은 집에 계세요. 그런데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그래요. 이모부가 일어나면 전해 줘요. 일어나기가 힘들 때는 더운 목욕물에 몸을 담고 있으라고."
그는 검진가방을 집어들며 덧붙였다.
"올리비아, 이모부가 최근들어 계속 긴장한 상태에서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으니 잘 좀 보살펴 줘요. 그리고 그렇게 스트레스 쌓이는 일은 계속 생각지 말라고 전해 줘요."
올리비아는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부님도 이제는 알게 되셨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미소를 짓고, 즉석에서 만들어 낸 얘기들을 적절하게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점심시간 후에 랜섬이 가급적 빨리 오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오전에 그녀가 하인을 시켜 보낸 편지의 답신이었다.
죠수아 경에게 한 시간 전에 들여보낸 음식이 그대로 나왔고, 브리짓트 이모에겐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였다. 그녀는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진한 블랙커피로만 배를 채움으로 인해 오는 복통을 느꼈다.
에스텔의 도피 행각은 명백한 많은 장애물을 그녀 앞에 만들어 놓고 있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 템플우드 가에서 평화를 표면에 내걸고 그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일반인들의 의문일 것이다. 평화? 그녀는 자신이 사용한 이 평화라는 단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지었다. 평화라는 이름과 관련된 그 어떤 것이라도 이 집에서 다시 느낄 수 있게 될 것인가?
"제기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오후에 도착하여 올리비아로부터 사실을 전해 들은 아더 랜섬이 첫 번째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올리비아 앞에 우뚝 선 아더 랜섬은 잠시 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얼굴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연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땀에 젖은 이마를 닦는 그의 얼굴 표정은 실로 무서웠다.
"왜 나를 좀 더 일찍 부르지 않았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에스텔의 편지를 올리비아에게 되돌려 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구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은 정원으로 걸어나와 담 옆의 의자에 앉았다.
"랜섬 씨께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걸 알았기 때문에 연락이 좀 늦었어요. 놀라실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모부님께서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는 정말 고뇌에 찬 모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올리비아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랜섬 씨 전 랜섬 씨가 걱정을 하기 전에, 제가 이제껏 해왔던 모든 것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는 차근히 긴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견도 아무런 덧붙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이모의 증상을 포함한 올리비아의 설명을 듣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자세한 상황들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자이 라벤던, 그놈이 이런 악마 같은 짓을 하다니! 이런 음란한 짓을 꾸미다니"
그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이 라벤던, 분명히 그는 미친 게 틀림없어요. 그건 랜섬 씨와 이모부님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올리비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신이 지금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웠다. 랜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 그놈은 미쳤어. 그놈은 항시 미친놈 같았어. 복수가 어느 때는 물론 정당화될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방법은 안 돼. 이 방법은 안 된다구!"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강력히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다가 불쑥 내뱉었다.
"올리비아, 이런 짓보다. 더 나쁜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오?"
"아마 없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공평한 입장에서 얘기했다.
"아마라구? 이 사건으로 인해 가장 고통당하는 것은 순진한 에스텔과 브리짓트 부인이오"
그녀는 그가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에 울타리를 치고 대항하기도 이제는 힘겨웠다. 그가 너무 빨리 화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었거나.
"난 죠수아 경께 가봐야 겠소"
랜섬은 고통에 찬 얼굴로 일어서며 걸음을 옮겼다.
"난 그들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무엇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소. 올리비아 양, 당신이 지금은 이 집안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군요. 신께서 당신이 이 일을 굳건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을 믿어요."
올리비아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밤이 깊어 갔다. 아더 랜섬은 죠수아 경의 서재로 들어가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마 랜섬의 출현이 죠수아 경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으리라.
올리비아는 그 일에는 간섭을 않고 조용히 이모의 침대 곁에 앉아그녀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이모의 의식이 더이상 그렇게 잠을 자는 것으로 감정을 순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실제적으로 이모의 마음에 얼마큼의 상처가 있게 되어도 그것을 그렇게 가슴속에 담아 둔 채 밀린 숙제처럼 보류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스텔이 사라졌다. 아마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피상적이긴 하겠지만 어떤 충분한 연극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그런 충격들에 대한 치료의 시작일 것이다.
브리짓트 부인이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은 정말 가련했다.
그녀는 지금 바로 앞의 미래조차 있을 수가 없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감정을 냉정하게 유지한 채 태연히 앉아 갑자기 닥칠지 모를 위기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브리짓트 부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진정시켰다.
"여기 있어요, 여기요. 제가 바로 옆에 있어요."
브리짓트 부인은 굉장한 힘으로 올리비아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소리 질렀다.
"오! 내 아기 오, 나의 어린 아기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울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리에도 맞지 않는 말들을 계속하며 흐느꼈다. 올리비아는 다시 마음을 굳건하게 다지며 자리에 앉았다. 반드시 왔어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하다. 할지라도 왔어야 할 것이 온 것이다.
그녀의 이런 슬픔, 이런 슬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부정할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곧 광기를 담은 부르짖음을 시작했다. 곧 문이 열리며, 랜섬과 죠수아 경이 들어왔고 그 뒤엔 하인들이 줄지어서 있었다.
"에스텔을 내게 데려다 줘요, 여보 제발 내 아기 에스텔을 데려다 줘요.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라도 제발"
브리짓트 부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남편의 팔을 붙들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간청했다. 죠수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랜섬은 문을 닫고 창문께로 가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조리 없는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다가 얼굴을 베개에 묻고 가슴을 치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죠수아 경은 그 곁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난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랜섬이 그녀의 고통을 더이상 참고 볼 수 없다는 듯 침대 곁으로 다가서자 올리비아가 그것을 막았다.
"이모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랜섬 씨 지금 이모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건 간에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것만이 나중에 이모님께서 이 일을 받아들이게 할 유일한 방법이에요."
랜섬은 행동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로 돌아갔다. 브리짓트 부인의 격렬한 울부짖음을 보며 올리비아는 지금 자신이 눈물을 흘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했기에 그녀의 목은 타기 시작했고, 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죠수아 경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좌절감을 맛보면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울부짖는 여인이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것처럼 브리짓트 부인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보"
그녀는 뭔가에 찔린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침대 커버를 잡아당기며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오지 말아요. 들려요? 내 옆에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당신 난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 바로 당신 때문에 내 딸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당신의"
"조용히 해!"
그는 제정신이 돌아온 양 그녀 앞에 바로 서며 그 진실로 못나고 추악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무슨 말도 이 이상의 비난은 안 될 거요. 더이상 한 마디도 내 앞에서 지껄이지 마!"
올리비아 곁에 자리한 랜섬은 마치 숨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굳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큰 한숨을 내쉬던 브리짓트 부인은 마치 채찍으로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일순간이었지만 조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고, 죠수아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그들 사이에 올리비아가 기절할 만한 어떤 말들이 엮어 나왔다. 천천히, 침착해진 모습으로 브리짓트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 지금 조용하고 싶지 않아요.! 조용하지 않겠어요. 아니, 더이상은 침묵을 지키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이 되어 찌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서운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그날 내가 본 게 무엇이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은 악의 씨를 뿌리는 장면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손이 왜 거기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알아요.! 나는 그날 모든 것을 보았어요. 당신의 모든 것을"
그녀의 그 순진한 어린애와 같은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까지 내 인생마저도 기만해 왔어요.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그의 손바닥과 그녀의 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브리짓트 부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도 못한 채 쓰러졌고, 그런데도 발악과도 같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에 그 누구의 움직임도 없었다. 죠수아 경은 랜섬의 손길을 뿌리친 채 구겨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좀 주춤한 태도를 취했으나 얼굴빛이 거의 질려 갔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해 줘요."
다시 한번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그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방을 빠져나갔다. 브리짓트 부인이 신음 소리를 한동안 내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대화와 광경들로 가슴이 부서지듯 아파옴을 느꼈다. 그놈의 짐승 같은 자이 라벤던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단말마와도 같은 이 한 마디 외침이 그녀 스스로의 목소리로 그녀의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고맙게도 아더 랜섬은 하룻밤을 더 머무르라는 올리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그녀에게 집안의 기둥이 되라고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유지해서 그녀 자신을 버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난 후 그들은 통나무 장작이 타오르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식사를 거부한 채 조용히 방에 혼자 누워 있었으며, 죠수아 경은 서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랜섬은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일이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말했다.
"죠수아 경을 그대로, 그가 할 수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소"
랜섬은 또 한번의 충격 때문에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자이는 복수란 것을 잘못 가르침 받은 어린애처럼 사용하고 있어 그가 한 짓은 정말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일이야!"
"에스텔은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에스텔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경멸했다. 에스텔이 거의 절망적으로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에스텔은 무언으로 그녀의 도움을 원했었다. 그애는 그때 자이에 관해, 자이와의 탈출에 관해 올리비아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그애가 가장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올리비아가 에스텔이 하고자 했던 얘기들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의 운명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만약에 그녀가 이모부를 계속 설득하고 그가 그녀의 설득을 받아들여서 팬터마임 연극을 에스텔에게 하게 했더라면, 에스텔이 과연 그와 같이 극단적으로 반항적인 행동을 했었을까?
화가 나면서, 올리비아는 그녀가 하고 싶지 않았던 추측들로 눈을 번뜩였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 간에 그는 가고 없는 것이다. 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녀의 무모했던 사랑의 허탈한 뒷면만 낙엽처럼 남긴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간 것이다. 그녀는 일어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랜섬 씨께서도 좀 쉬세요."
올리비아의 눈동자는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닫혀질 것 같았던 그 눈동자는 그와 헤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바라는 지도 모른 채 물었다.
"브리짓트 이모님께서 말씀하시려던 그 말의 의미가 뭐죠? '나는 왜 당신의 손이 거기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아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랜섬은 두 눈을 감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얘기입니다. 올리비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좋겠어요."
"그것이 그토록 오래 전의 옛이야기라면 왜 여태껏 잊지를 않고 그렇게그 얘기를 하며 화를 내는 거죠?"
그는 잠시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마 당신이 맞을 거요. 너무 많은 거짓말이 너무 오랜 시간동안 숨겨져 왔소."
그는 장작 하나를 집어 불 속에 집어넣으며 우두커니 불을 쳐다보았다.
"죠수아 경이 언젠가 자이를 죽도록 때린 적이 한번 있소. 그때 자이는 여덟 살이었소 그분은 한번 매를 들면 그치지 않았지."
꿀꺽 침을 삼키며 그녀는 아더 랜섬을 바라보았다. 30년 넘게 죠수아경의 충직한 부하로 일하고 있는 그의 늙은 얼굴에 수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들 모두는 그날 뭔가가 일어날 것을 알았소. 죠수아 경은 그렇게 그를 때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채찍을 멈췄지."
20여 년 전의 먼 기억 속을 헤매며, 랜섬은 그의 머리를 슬프게 흔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난 오히려 그가 그때 채찍을 멈추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상처 그녀가 차갑게 느꼈던 상처가, 그녀가 자신의 사랑으로 지워주고 싶어서 수백 번 입맞춤을 해주었던 그 채찍의 상처가 다시금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 느껴졌다. 그녀는 그녀의 입술에 피가 흘러 비릿한 느낌이 스며들 때까지 깨물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 그의 그런 상처는 더이상 그녀 생활의 일부가 될수 없었다. 그녀의 삶으로부터 그가 매정하게 도망쳐 버렸기에
"내게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이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었는지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말을 했다.
랜섬은 우울하게 웃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모르는 일이겠지만, 사실 자이는 이 집에서 태어났소 그는 항시 복수심에 찬 그릇된 일만 벌이고 있는, 신의 잘못된 창작물중의 하나였지"
그는 타오르는 장작의 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듯 장작의 불빛이 뜨거짐에도 불구하고 얼음 위에 앉아 있듯 모든 게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는 뒤뜰에 있는 하인들이 사는 방에서 태어났소. 그의 어머니는 언덕 위에 있는 부족 출신의 소녀였지. 어느날 하인 하나가 그녀가 우리집 앞에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소. 게다가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지. 내가 하인들을 시켜 그녀에게 쉴 곳을 주라고 지시한 그날 그곳에서 그녀는 아이를 낳았소. 내 기억으론 그날 궂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어."
그는 주머니 속에서 여송연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회복된 후에도 난 그녀를 그 아이와 함께 이 집에 머물게 했소.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마 난 한 명의 노예를 더 거느리게 될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아무튼 그녀는 정원에서 일을하기 시작했소. 내 기억에 그녀는 매우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일하는 솜씨도 아주 야무졌어요."
그는 자신이 주제를 다소 벗어나고 있음을 알고는 잔기침을 했고, 올리비아는 참담했을 자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문득 가슴이 아려와 억지로 기침을 했다.
"하인들이 그러더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우린 그녀를 그냥 마렌이라고 부르거나 정원수의 아내라고 불렀소."
올리비아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이 목에 걸린 목걸이로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이 라벤던은 그의 탄생에 관하여 말했었다. 그가 첫 번째 숨 쉰 것에 대하여, 그의 회색 눈이 처음 떠졌을 때에 관해 얘기해 주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니 그렇다면 자이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죠수아 경과 숙명의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그의 이모부에 대한 그칠 줄 몰랐던 증오와 복수심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작게 진저리를 쳤다. 무엇이 그를 복수의 화신이 되게 했던가를 짐작하기엔 아직 때가 일렀지만 그의 탄생의 비밀을 알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그녀는 그의 황폐했던 가슴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인이 거쳐갔던 숙소에서! 전 생애를 고통과 절망으로 보내고, 그것으로 야위어 갔던 그녀와 함께! 그녀는 결국 죽었는가? 그녀는 고향으로 왜다시 돌아갈 수 없었을까? 자이의 이름 없는 어머니는 어떻게 죽어 갔을까? 랜섬은 올리비아가 아무 말없이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난 그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소 심지어 어린애였을 때에도 그에게는 무언가 위협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 아인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가슴속에 비밀이 많아 보였다오. 그것이 바로 나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지. 정말로 자이는 결코 어린애가 아니였던 것 같소. 태어난 날로부터 그앤 성인이었던 것 같았다오. 그 아이에게는 그런 기묘한 섬뜩함이 있었소."
그는 자이가 마치 옆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약간 떨었다.
"그앤 내게 말을 건넨 적이 한번도 없었지. 한 번도 웃지도 않았소. 그 아인 오로지 저주, 원망스러움, 노여움이 들끓는 분노의 눈으로 항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소. 난 그애의 그런 시선이 싫었소. 그 시선 속에는 저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난 집에 있을 때에는 그애 어머니를 안채 가까이로는 오지 못하게 했소."
그는 다시 한번 잔기침을 한 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어느날 죠수아 경, 브리짓트 부인, 그리고 죠수아 경의 어머니가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집에 왔던 적이 있었소. 식사 후에 브리짓트 부인이 뭔가를 가지러 식료품 저장실에 갔다가, 그곳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있는그 소년과 마주쳤소. 그녀는 놀라 그애를 꾸짖으며 때렸지. 그때 그애가 미친 듯 브리짓트 부인에게로 달려들어 손에 피가 나도록 물었던 거요. 죠수아 경은 아내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애를 잡아다가 채찍으로 때렸고, 그애를 감싸는 그애 어머니까지 함께 때렸소.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 물론 그 아이도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며 성난 개처럼 달려들었지. 그애의 엄마는 그애를 대신해 맞으며 그애에게 그만 하라고 울부짖었소. 하지만 죠수아 경은 마치 사냥의 포획물처럼 자이를 다시 들어올려 미친 듯이 채찍을 가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주춤하며 물러섰소. 자이의 몸으로부터 뭔가를 발견했던 것이지. 브리짓트 부인은 구석에 울며 서 있었고, 죠수아 경의 어머니 스텔라 템플우드 부인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조용히 벽장에 기대어 서 있었지. 그런데 죠수아 경이 그렇게 포획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눈을 치켜 뜨며 냉정히 명령했다오. '그애를 죽여라, 죠수아, 사냥꾼은 잡은 포획물에 상처만을 남기는 법이 아니란다.' 그분은 항시 그처럼 정확하고 엄정하게 하인을 대하는 노인이었다오. 난 정말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소 그분은 정말 내가본 여성들 중 가장 냉정한 피를 갖고 계신 분이었소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지독한 분이셨지."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마에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거의 광적인 순간이었소. 난 그것을 말려야만 했으나, 그분은 아들을 통째로 조종하고 계셨지. 잠시 멍하던 그가 항시 그래 왔던 것처럼 그분의 말에 즉각적인 복종의 태세를 갖추었소. 그제서야 내가 그를 막았소. 내가 그를 막았던 게 옳은 일이었겠지?"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 나는 그것이 새삼스레 궁금하다오"
그는 다리를 한번 쭉 펴더니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던 술을 따라 마셨다.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애와 그애의 어머니 모두 사라졌지. 난 그때 아무것도 관여 않고 의사를 그들에게 보내기만 했었다오. 그 소년과 어머니 모두가 너무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만 했소. 하지만 그들은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이미 떠났고, 하인들을 풀어 백방으로 찾았지만 허사였소. 후에는"
그가 몸을 움츠렸다.
"난 고백할 게 있소 그건 내가 그들을 구제하지 않은 게 아니다라는 점이오 그 소년은 시작부터가 문젯거리였지. 훔치고, 거짓말하고, 줄기차게 나쁜 행동만 했지. 사실 난 그애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기뻤소. 게다가 그 사람들은 너무 거칠었어. 그들은 폭력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지. 그들은 필요에 따라 사람을 이용하고, 서로의 상처를 긁고 할퀴었소.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었던거요. 그래서 난 그들이 어디에선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했소."
그가 아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일은, 그 시절에는 사실 한치의 중요함도 없었던 그런 사건이었던것 같소."
올리비아는 불에 물을 끼얹으며 일어났다. 이제 빨갛게 타다 남은 연기에 그을린 재만이 남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는 불이 피워진 곳을 살핀 뒤, 재를 깨끗이 치웠다. 랜섬은 아무 말없이 그녀의 서두름 없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난로가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조용하고 고귀하게 자신을지키고 있군요."
올리비아는 힘들게 웃었다.
"그럼, 라벤던 씨를 잘게 부숴 버릴 도끼를 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저라는 뜻인가요?"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그가 서둘러 반박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에 대해 너무 강박관념을 갖고 있소. 그건 자이가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아마, 랜섬 씨 말씀이 맞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그에게 동의를 표했다.
"어떤 경우건 그는 우리 모두에게 몰인정한 사람으로 남겠군요."
잠시 후, 올리비아는 그녀의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무거운 피곤이 그녀의 머리를 오히려 가볍게 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자신을 피곤으로 지치게 하는 일들을 차라리 환영했다. 지치고 지쳐서 밤이 되면 쉽게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더 랜섬과의 얘기를 떠올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속으로 무섭게 속삭였다.
아직은 아니다. 아니, 아직은 아니기를 아직도 제대로 되어져야 할것들이 많았고, 깨진 사기 접시들을 다시 접합해 내는 것처럼 더 많은 얘기들의 조각을 붙여 모아야만 했다. 또 이 상황에서 새고 있는 구멍의 틀을 막아 줄 얘기들을 지어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얘기를 랜섬과 다시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잠들 수 없었다.
닥터 험프리스가 올리비아의 구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침묵으로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내뱉었다.
"글쎄, 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브리짓트가 단순히 친구의 죽음이나 에스텔이 휴가를 보내러 영국에 간 것에 충격을 받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나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게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올리비아, 넌 에스텔과 동행한 그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니?"
"에스텔은 누구에게도 비밀을 털어 놓지 않은 것 같아요. 나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는 걸요. 그애는 내가 말릴 것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도피행을 완전히 성공시키기 위해 비밀을 확실히 지킨 것 같아요."
그 순간에 의사는 올리비아의 정직함에 관해 아무 의심도 안 하는 것같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미심쩍은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 그런 멍청한 짓을. 그애는 아마 후회할 거야. 물론이지, 후회하구 말구"
그는 머리를 흔들며 숨을 한번 내쉬었다.
"죠수아 경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지?"
"매우 안 좋으세요. 계속 술만 드시고 계세요. 저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험프리스 선생님"
그녀는 가볍게 얼굴에 붉은 빛을 지으며 일부러 살짝 웃기까지 했다.
"이제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측에선 총체적인 판단을 위해, 어떤 필사적인 도피처가 필요.해요. 특히 브리짓트 이모님께서는, 이번 스캔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피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순간적인 작은 소문일지라도 그분의 명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구요."
그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씩 웃었다.
"올리비아, 요사이 의사들은 약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지. 나 때문에 뭘 걱정하지는 말아요. 물론 올리비아가 이런 일을 얼마나 쉬쉬하면서 지속해 나갈 수 있을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야. 하지만 걱정 말아요. 만약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그게 내 입에서 새나간 소리는 아닐 테니까."
그는 브리짓트 이모가 어떤 드문 이유로 충격을 받아 이상한 열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퍼뜨려 달라는 청은 거절했지만, 만약 누군가 그 소문을 먼저 퍼뜨린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막지 않는 한에서 도와 주겠다고 말했다.
죠수아 경의 경우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가 비교적 쉬웠다. 사업의 골칫거리들은 최근 그의 건강을 매우 악화시켰으며, 아내의 심각한 상황도 그를 더욱 가엾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딸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푹 쉬는 것이라고 하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올리비아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돌볼 틈이 없었다. 아니면 그녀 자신이 자신을 돌볼 틈을 만들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일상적인 힘든 일들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의 모든 일거리를 만들어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질문에 응답하며 새로운 거짓말과 변명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 자신에 사실은 그녀도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어떤 힘의 기둥이며, 덕을 갖춘 귀족이며, 이기심 없고 기지에 찬 여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칭송된다는 사실에 지겨움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희망을 잃어갔다. 그녀의 마음은 하루하루 재가 되어까맣게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울어야 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얼마나 많이 저를 필요로 하시나이까?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황폐한, 그리고 텅 비어 황막한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배신의 칼날은 날카로웠으며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그 상처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 킬티나갈의 밀림 속에서 그녀가 쏜 최후의 탄환에 선혈을 뿜으며 죽어갔던 호랑이처럼 그렇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이는 그렇게 그녀의 가슴에 배반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혼란과 절망의 와중에서 단지 하나의 기원만이 그녀를 미치지 않도록 돕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오고 있는 편지 다발과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로부터 오는 편지들이 그녀를 구원해 주는 등불 같은 것이었다.
그 편지들은 그녀의 중심점이 되어 주었으며, 그녀가 실재하고 있는 것을 확고하게 알게 해주었으며, 이 세계에서 그녀를 그나마 버티며 쉴 수 있게 했고, 그녀에게 이곳의 모든 게 끝이 났을 때 그 언젠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끝이 났을 때?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구출하기 위한 도피는 이런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운명으로부터의 도피여야 했다. 그러나 그 도피가 가능한 것인가?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중 하나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넌 여태까지 네 인생에 충격을 던진 어떤 남자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는데, 더이상 찾아볼 의사가 있기는 한 것인지 그런 일에 관해 답장을 좀해주련?'
이런 아이러니컬한 슬픈 질문 때문에 올리비아는 울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것들이 그녀에게 더이상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기에.
브리짓트 부인은 육체적으로는 회복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상태는 아직도 멍한 것 같았다. 그녀는 거의 말도 없었고 울거나 소리치는 일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여러 시간을 생각하며 보냈으며, 생존을 위한 최소량의 식사만 했고, 올리비아가 이끄는 대화에도 묵묵히 응답했다.
올리비아는 험프리스가 얘기했던 대로 최대한 부드럽게 이모에게 그동안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 얘기했다. 브리짓트 부인이 자기 의견에 대한 표시가 없었기에 그 이야기를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에스텔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었고, 튀어 나오는 에스텔의 이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자기 남편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외견상으로 그녀는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그저 초점 없는 눈만이 신체 부위를 떠나 존재하는 듯이 보였으며, 흥분을 억지로 자제하는 걸 나타내는 듯 손만이 그녀의 양 무릎 위에서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닥터 험프리스의 지시대로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이 따로 방을 쓰게 되어 죠수아 경의 물건들이 아래층으로 옮겨진 것은 에스텔이 떠난 지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그들에겐 모두 당분간은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해. 브리짓트 부인이 죠수아 경의 술 냄새를 견디기 힘들거든."
죠수아 경은 한번도 이층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마치 서재에 투옥된 사람 같았다. 이 쓰디쓴 상황이 온 후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은 서로 각자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중단했다.
발락폴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한 아더 랜섬의 결정은 그의 마음과 감정을 좀더 밝게 해보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나온 것 같았다.
"난 낚시를 하면서 휴일을 보낼 수 있겠군. 그곳은 매우 편안한 곳이지."
랜섬과 올리비아는 하루의 일과를 끝낸 후에 활활 타오르는 불가에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올리비아는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자신에게 힘든 일이었다면 그에게도 역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슬로컴이 이 지루한 일 전부에 대해 슬슬 막을 내릴 준비를 하더군."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새가 새장에서 날고 있는 한 굳이 그 새장을 지킬 필요.는 없는 거지."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며칠 전에 얘기되다가 중단된 어린 자이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한 육 년 정도 지난 어느날이었던 것 같소. 아니면, 조금 더 후에 그가 돌아온 거요, 어느날 갑자기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던 자이가 어느날 아침에 죠수아 경이 그가 문 앞에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나온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 서 있는 것을 보았지."
반사적으로 올리비아는 자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여덟 살, 그리고 육 년 그러면 열네 살 그는 분명 그때 여인숙에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그가 오늘 그런 식으로라도 돌아온다면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미친 듯 그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뭘 하고 있었죠?"
"아무것도! 그냥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오. 마차를 타고 집을 막나서려는 바로 그때, 죠수아 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애를 그저 바라만보았지.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처음에 죠수아 경은 그애를 그렇게 무시했지만, 자이는 매일 아침 문 앞에 와 서 있었다오. 죠수아 경은 지나가고, 그애는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런 의미 없고도 이상한 날들이 며칠 계속되자 죠수아 경은 그 눈빛을 아주 싫어했고, 급기야는 극도로 화를 내었지."
그의 말이 잠시 중단됐다. 그는 먼 옛날의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애는 우리집에서 팔 년이나 살았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조차도 알려 하지 않았소. 내게 그앤 항시 '그 아이' 아니면 '그 나쁜 놈'이라고 불릴 일만 생겼으니까 내가 그애의 이름을 알게 된 건 하인들이 그애 어머니가 그애를 '자이'라고 부른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나서라오."
"전 그 뜻이 '승리'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올리비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그에게 참으로 적당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그 후 잠을 못 자고 맞아야 하는 아침들이 죠수아 경에게 시작되었소. 죠수아 경은 두려워하며 그 소년에게 겁을 느꼈지. 하지만 소년은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소. 그런 어느날 죠수아 경이 마차 밖으로 소년을 향해 한 움큼의 동전을 집어 던졌소. 하지만 소년은 동전에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다가, 처음으로 죠수아 경의 마차 앞으로 다가가 서툴지만 연습된 영어로 얘기했소. '죠수아 템플우드 경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의 돈, 당신의 사업, 당신의 명성, 그리고 당신의 삶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다 갖고 갈 거예요!' 이렇게 외치고 도망치듯 사라진 그를 죠수아 경은 다시는 보지 못했어."
"그렇게 해서 또 한번의 6년이 지났겠군요."
"그래요.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소. 놀라운 모습으로 그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죠수아경의 사무실로 들이닥쳤어. 안하무인격의 건방지고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악마의 화신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어. 그 눈은 어린 시절의 증오보다도 차가운 냉정함과 확신 같은 것을 발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둣했지. 불과 20살 안팎의 그는 세련된 매너, 화려한 의복을 갖추고 자제된 모습으로 인사를 꾸벅하며 완벽하게 다듬어진 세련된 영어로 죠수아 경에게 말했지 '나는 당신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알려 주려고 온 것입니다. 죠수아 경! 난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그는 싱긋 웃더니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지."
랜섬은 일어서 창가로 가 문을 열고는 찬바람을 맞았다.
"올리비아, 난 그리 예민한 사람이 아니오. 죠수아 경 역시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말해 흔들렸소. 예상치 못한 그의 부활, 게다가 믿을 수 없는 그의 변신에 기분이 나빴고, 자이가 남기고 간 냄새에 우리는 섬뜩함을 느꼈던 거요. 그에게는 보통사람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냄새가 나고 있었소. 나는 그날 그가 몹시 무섭게 느껴졌소. 우린 그 후에 그가 자신을 라벤던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폭죽처럼 흩어지고 있는 장작 불빛을 보며, 올리비아는 그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연기되었던 숙명에 대해 실행을 하기 시작했지. 지금 그는 정말 확실하게 그 숙명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고 지금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은, 그 순진한 에스텔의 가치없는 운명이야."
고통이 밀려 오고, 아픈 감정의 잔물결이 홍수 같은 원한으로 살아 났다. 나의 운명엔 과연 누가 슬픔을 느껴 줄 것인가? 그녀는 마음속으로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처음으로 에스텔이 남겼던 편지를 읽으며 어떤 새로운 고통에 젖어들었다. 에스텔은 호기심이나 동정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그녀 속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고통의 물결을 터뜨릴 통로를 찾기 위해 도피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당한 분노 속에서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의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아빠!
엄마, 아빠가 이 편지를 읽으실 때 난 벵갈과 영국으로 가는 항해를 위해 자이 라벤던과 함께'
올리비아는 양심의 가책으로 후회하고 있는 두 단락을 건너뛰었다. 에스텔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자유를 지니지 못한 '새장 속의 새' 같은 느낌이 지겹고, 자기 한 사람에 대한 넘치는 사랑에 대해 타인들이 헐뜯고 증오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공평한 것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다음 장에서 에스텔은 자이 라벤던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명을 쓰는 것, 그리고 그의 강인한 성격과 강력한 반항심조차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이를 사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전 그게 전적으로 자랑스러워요, 그를 사랑하는 것이 나는 나의 인생을 그에게 맡기고 있어요. 나의 그런 믿음은 영원히 동요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전 열여덟이 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합니다.'
그 편지는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올리비아는 여지껏 발견하지 못했던 갈색 봉투 바닥에 접힌 또 하나의 편지, 즉 자신 앞으로 쓴 편지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노로 그것을 태울까도 생각했지만 읽는 것이 이미 칼로 찔린 상처가 아무는 속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읽어 내려갔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 그리고 나의 유일한 친구
올리비아 언니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어요. 언니는 내게 인생에 있어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어요. 언니로 인해 그에 관해 갖게 된 내 관심은 언제나 떠날 줄 몰랐으며, 또 언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그를 볼 수 있었어요.
경멸과 증오로 그를 보는 대신에 그를 어떻게 동정해야 하는가는 언니가 가르쳐 준 거예요. 그가 갖고 있는 감정들은 사람들에게 거부되었죠. 우리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의 이름은 내 온 가슴 속에서 당당히 메아리치고 있어요. 또그 메아리가 나의 가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구요. 내가 그의 이름으로 인해 이렇게 내 가슴을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난 언니에게 정말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나의 사랑하는 언니, 난 언니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넓은 마음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런데 언니가 내 말을 듣지 않으셨죠 아마 그게 더 좋았을지도 몰라요. 언니의 높은 이상, 그 책임감과 정직함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언니는 사실을 알고난 후 분명 날 설득해 단념시켰을 테니까요.
내가 자이를 덜 사랑하게 돼서가 아니라 언니의 그 논리에 맞는 소름끼치는 설득력 때문에 포기했을 거예요. 난 지금 쉬르퍼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자이의 멋지고 놀라운 집들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거든요. 잠시 후면 난 자이에게로 가야 해요. 언니, 우리가 언젠가 감탄했던 스트랜드 가에서 본 그 놀라운 쾌속 범선을 기억해요? 난 정말 언니가 그것을 보았으면 하고 바래요. 그것은 정말 굉장한 배예요. 우리는 일곱 개의 바다를 항해하기로 되어 있어요. 자이가 그렇게 말했죠. 난 정말 그것을 기다릴 수조차 없이 흥분되어 있어요, 올리비아 언니, 결국 난 넓은 곳, 넓은 세상으로 나가 그 넓은 세상의 비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의 것이 아닌, 나의 것 말이에요.
언니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난 아빠, 엄마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에 정말 고민하고 있답니다. 맑은 하늘에 낀 먹구름처럼 엄마, 아빠의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나는 언니의 지혜와 동정심,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베풀었던 사랑을 알아요. 그래서 언니가 날 대신해서 나의 엄마, 아빠에게 위로와 사랑을 전해 그분들이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믿어요.
언니는 언제까지나 내가 했던 딸 노릇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그분들과 함께 하실 거죠? 그분들은 언제까지나 언니가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언니도 언니의 아빠에게 언니가 충만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의 부모님들의 그런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 믿어요.
언니, 이 어처구니없는 동생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난 자이에게 언니에 관해 아주 많은 얘기를 했어요. 신은 언젠가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언니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실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언니도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언니, 이제 난 빨리 이 편지를 마쳐야 해요. 자이의 하인이 날 마차에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나의 사랑하는 언니, 안녕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기를 모든 것은 언니가 나에게 주었고, 나에게 가르쳤어요. 나는 언니에게 영원히 빚을 진거고, 난 그걸 언니에게 언제나 감사해요. 나는 항시 언니의 훌륭한 점들과 경쟁하려 했었어요. 그 경쟁이 결국 운명을 인도하는 횃불처럼 나를 바꿔 놓았어요. 내 인생도 언니처럼 밝아진 거죠. 언니가 이것을 읽고 있는 순간, 난 언니에게 언니 역시 언젠가 존경할 만한 사랑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언니 이제 정말 그만 써야겠어요.
그녀의 편지를 손에 들고 올리비아는 멍하니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녀 안의 모든 것은 정지 상태였다. 그녀는 태풍의 눈 안에 있었다. 세상이 어질어질한 게 내부적으로는 오로지 섬뜩할 만한 고요만 있었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누운 후 눈을 감았다. 덮인 눈꺼풀 위로 어둠이 깔렸다. 그녀의 인생도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