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한 남자를 만났다(Olivia and Jai)
Rebecca Ryman
제1장 어둠 속의 운명
비까지 머금은 몬순 기후 탓으로 그 도시의 날씨는 무척 후텁지근하고 음산했다. 물 먹은 담요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오후의 하늘은 사람들을 인내의 최저 한계까지 끌어내리는 듯했다.
캘커타 시 도시를 가로지르는 우글리 강이 마치 거대한 공룡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처럼 흐르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쳐 버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브리짓트 템플우드 부인은 이 무더위 속에서도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굳은 자세와 기계적인 동작으로 부엌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흡사 성스런 의식을 치르고 있는 성직자와도 같았다.
그녀는 항상 그래 왔다. 비록 지금은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을지라도, 그녀는 여왕과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고 복종했던 영국 귀족 여성으로서의 확고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는 왕실에 충성심과 귀족으로서의 체통과 품위야말로 그녀를 이 미개의 땅 인도에서 온전히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녀 바바리언의 시중을 받으며 죠수아경(卿)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브리짓트 부인은 갑자기 주방에 뛰어들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한 하녀의 음성에 깜짝 놀라, 그만 손에 들고 있던 기름 주걱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님! 마님"
"도대체 무근 일이냐?"
"마님, 빨리요 빨리 나와 보세요!"
여전히 고함을 지르는 하녀의 갈색 얼굴은 놀라움에 질려 있었다.
"미국에서 오신 아가씨가 말에서 떨어지셨어요!"
하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브리짓트 부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오, 하나님! 신음처럼 이 말만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의 뒤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제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상상하면서 그녀가 부지런히 방갈로를 지나 정원에 이르렀을 때, 마침 도랑에 빠진 몸을 일으키고 있는 올리비아가 보였다. 올리비아 옆에는 마치 자기 잘못이 아닌 것을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쟈스민이라는 이름의 말이 고개를 흔들며 서 있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그녀의 기분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은, 도대체 올리비아를 도와 주는 것인지 아니면 엉큼하게 손을 움켜잡고 있는 것인지 모를 하인 아들녀석의 뻔뻔스러움이었다.
올리비아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일순 분노로 바뀌자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눈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올리비아가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인들 앞에서 결코 귀족을 야단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한참 동안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가 올리비아가 도랑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올리비아, 다치지 않았니?"
그녀가 진흙투성이가 된 엉망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싱긋 웃으며 활달하게 대꾸했다.
"그저 제 자존심만 약간 상처받았을 뿐이에요, 이모님"
그녀가 쟈스민을 힐끗 돌아다보고는 치마에 묻은 진흙을 툭툭 털어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정말 아차하는 순간이었어요. 전 쟈스민이 장애물을 쉽게 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거든요. 빌어먹을!"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순간 더욱 창백해졌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이 어린 숙녀의 상스러운 넋두리를 무시하기로 결심한 듯 얼른 얼굴을 펴고 는 다시 한번 물었다.
"걸을 수 있겠니?"
"무릎만 좀 다친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불안정하게 발을 딛고 일어서며 자신의 상처 부위가 어디까지인지 보기 위해 흠뻑 젖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녀는 매사에 엄하기로 소문이 난 이모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치맛자락을 비틀어 짜기 시작했다.
브리짓트 부인은 하인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허옇게 다리를 드러낸 채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지나 전율을 느꼈다. 하인들 중 그 누가 이렇게 백인 아가씨의 종아리를 직접 본 일이 있을 것인가 그들의 시선이 벌써 번들거리며 올리비아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 보며 그녀는 몸을 덜덜 떨었다.
"올리비아,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거라.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야겠구나 난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네게로 가마"
브리짓트 부인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 할 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는 에스텔의 금속성과도 같은 음성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브리짓트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에스텔은 곧 사태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엉망이 되어 버린 올리비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리를 꺾고 웃기 시작했다.
"그것 봐, 언니! 내가 말했었지, 쟈스민은 결코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없을 거라구"
너무 웃은 나머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으나 에스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종사촌 언니 올리비아를 놀려댔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야유에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없이 치맛자락을 내라곤 진흙이 묻은 손을탁탁 털어냈다.
"자, 됐어 에스텔, 그만해라 이제 언니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목욕할 수 있게 도와주거라. 상처도 좀 돌봐 주고"
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브리짓트 부인은 하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뭔가를 지시하고는 올리비아가 에스텔을 따라 집안으로 향하는 걸 지켜본 후에 부엌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올리비아의 상처는 경미한 것이었다. 부엌일을 대충 마치고 올라온 브리짓트 이모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짐을 하듯 한 번 더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갔다.
"올리비아, 이런 뜨거운 오후에 말을 타러 나간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 일이었다. 더구나 에스코트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는!"
붕대로 감겨진 다리와 핑크빛 도는 피부를 무명천으로 감싼 채 흐트러진 갈색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은 브리짓트 부인의 눈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였다. 더구나 이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불쑥 내뱉은 말은 그녀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하였다.
"이모님, 제가 말에서 떨어진 건 더운 날씨 탓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저도 이젠 이 지역에 대해 알 만큼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에스코트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구요."
"올리비아,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곳의 무더위는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열대의 날씨가 아니야 흰 피부를 가진 사람에겐 심한 피부병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는 더위란 말이야. 게다가 이곳에선 언제 어디서든지 난폭한 원주민들과 부딪칠 수가 있어."
에스텔이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소를 머금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아빠는 늘 올리비아 언니가 아주 멋진 승마 자세를 갖고 있다고 칭찬해 오셨어요. 언니가 낙마를 한 건 날씨 탓이 아니라."
브리짓트 부인의 성난 눈빛 때문에 에스텔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에스텔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금세 엄한 눈빛으로 바꾸며 다시 한번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올리비아, 명심해라 이곳 인도에서는 여자 혼자 다니는 게 정말 위험하단다. 이곳에서 백인 여성은, 특히 젊은 여성은 원주민들의 호기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항시 행동에 조심해야 돼. 그들이 언제 무례한 행동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야."
들마처럼 제멋대로인 조카에게 자신의 엄숙한 경고를 얼마나 더 되풀이해야 하나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으나 브리짓트 부인은 참을성 있게 이곳 인도에서의 조심스런 행동을 강조했다. 올리비아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 팔꿈치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모의 굳은 얼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모님, 이곳 주민들을 그렇게 편협된 눈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곳 주민들은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에요. 제가 이제까지 만나본 어떤 사람들보다도 그들은 제게 언제나 친절히 대해 주었고, 때론 달콤한 차까지 주었어요."
올리비아는 거리낌 없이 이모의 일그러진 시선을 마주 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 차는 아주 훌륭했어요!"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그렇게 더러운 소작농들의 차를 얻어 마시다니! 불결하고 예의도 모르는 손을 거친 그 더러운 차를 그녀는 정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 엉망으로 교육받았을까 영국에서 올바르게 양육되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다. 브리짓트 부인의 분노는 점차 이 어린 숙녀가 불쌍하다는, 일종의 동정과 연민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으며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생활이 다소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거다. 올리비아 더구나 네가 자라온 환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민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방관자적인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거란다. 우리를 보다 더 우월하게 하는 것은, 그리고 그 모든 걸 지탱케 하는 힘은 바로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배타성에서 나오는 거야 내 말을 알아듣겠니?"
"이모님, 그런 우월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더욱 확고히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아빠도 제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브리짓트 부인의 표정이 더 이상 이 아이 앞에서 부질없는 말들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는 식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그녀는 올리비아를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한 마디를 빼놓지 않았다.
"너의 아빠는 이상주의자로구나 게다가, 너의 아빠는 한 번도 이곳에 와 보지 않았어. 이곳 인도가 이교도 국가인데다.가 미신의 악취로 어지러운 나라라는 걸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끊고, 자신이 쓸데없는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화를 내며 올리비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는 어린 올리비아가 자신의 생각을 꽤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그런 습관 역시 여성다움이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면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믿기에, 브리짓트 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긴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 말을 했다.
"아무튼 앞으로 다시는 혼자서 승마할 생각은 말아라 이건 명령이야! 나는 네게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원주민들과의 최소한의 대화만을 허락한다."
브리짓트 부인은 말을 마치고 한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하다가, 옆에서 조소를 머금고 있는 외동딸 에스텔에게 매서운 시선을 보내곤 방을 나가버렸다. 올리비아가 에스텔에게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얼른 말했다.
"에스텔, 나는 네가 필요 이상으로 내 문제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아. 가끔 나는, 네가 꼭 내게 무슨 큰 문제가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아이 같더라!"
"언니! 나는 단지 엄마의 그 획일적이고 지독한 교육방법에 대해 항의하자는 것뿐이야 엄마의 그런 태도에 우리가 인내하고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구"
"그분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게 아니야 그분은 그저 자신의 생활 원칙을 갖고 계신 것뿐이야."
올리비아의 설명에 에스텔이 눈에 분노를 담고서 돌연 화살처럼 빠르게 대꾸했다.
"원칙? 언니는 그저 그 원칙 아래서 일 년만 참으면 되지만 난 평생 동안 거기에 매달려야만 된다구. 난 엄마의 그런 원칙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난 열여덟 살이 되면, 그때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그때가 되면"
에스텔은 이를 악물고 올리비아를 쏘아보다가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곱슬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사라 이모는 언니를 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어른으로 대해 주셨는데 왜 나의 엄마는 그러지 않는 것일까 자매간에 어떻게 그렇게 판이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 나는 먹는 음식조차도 엄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된다니까"
"에스텔, 우리집의 환경은 많이 다르잖니? 더구나 넌 지금껏 잘 지내왔잖니?"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사고(思考)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욕구불만의 응어리가 터져 버려 더 큰 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재빨리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에스텔, 배가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네 드레스를 그대로 그 배 안에 묵혀 둘 수는 없지 않겠니?"
에스텔의 안색이 금세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린 것처럼 밝아졌다. 에스텔은 다음 달로 다가온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그녀의 아빠이자 올리비아의 이모부인 죠수아 경이 외국에서 사 오기로 한 드레스와 파티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옥타브 올라간 재잘거림으로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눈을 감고서, 마치 에스텔의 수다에 떠밀려 들어가듯 자신의 그 친숙한 사념(思念)의 대홍수 속으로 빠져 갔다.
지난 60일! 이런 사막과도 같이 메마른 곳에서 유배와도 같은 나머지 삼백다섯 날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난 절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의 설득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울적한 심정이 되어 인도행을 결정했던 자신의 판단이 완전한 실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친숙해지려 애를 써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척박한 미개의 땅, 아무리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려 해도 마음으로 완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으며,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삶의 방식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의 바닷속을 그렇게 떠다녔다.
그때 브리짓트 부인도 현관 앞에 심은 부겐빌리아 나무의 가지자르기를 감독하는 일조차 거르면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래턱에 배어 있는 완고함과 딱딱함, 순진함으로 빛나는 담갈색의 두 눈동자, 눈부신 미소가 머무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그 애의 엄마 사라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조차도 인정하고 있는 아버지 샘의 머리를 올리비아가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그 소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분명 실용적이고 똑똑하고 어떤 고귀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샘의 무능력으로 사라가 죽었다고 믿어온 그녀는 샘의 그러한 이기적인 급진주의가 지극히 귀족적이어야 할 올리비아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올리비아의 자유분방함이 어느새 에스텔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모든 게 굳이 올리비아의 잘못은 아니지만 에스텔이 점차 반항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은 브리짓트 부인 자신을 무척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에스텔의 장래를 염려하며 에스텔이 적당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전에 올리비아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수백 번 가졌다.
저녁 식사 시간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새 거센 폭우로 변해 마구 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에스텔이 식탁에 앉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는 또 늦으실 건가요?"
"아버지께서는 사무실에서 아더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우리에게 먼저 먹으라고 하셨다."
"많이 늦으실 건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참, 오늘 제인 워킨스가 소식을 알려 왔는데 내일 아침에 드레스 두 벌을 가져온다는구나 미리 얘기해 두는데, 난 부라카나스의 파티를 위해 드레스 말고는 특별한 의상을 더 해줄 마음이 없다."
페워디 남작의 초대로 벌어질 부라카나스 파티는 매년 캘커타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드는 축제로, 올해의 파티는 일주일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들 모녀의 이야기가 파티 문제에 맞춰지자, 에스텔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지금 올리비아에게 매료되어 있는 프레디 버커스트가 튀어나왔다.
에스텔은 지금 그가 올리비아를 향한 상사병으로 멍청하게 변해 있다고 수다스럽게 떠벌려댔다. 에스텔의 말에 브리짓트 부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버커스트 씨가 올리비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잘된 일이야 참! 내가 마음이 바빠 잊고 있었구나. 좀 더 일찍 올리비아에게 말했어야 하는데 프레디 버커스트 씨가 다.음 주에 있을 파티에서 너를 에스코트해도 되겠냐고 묻기에 내가 기쁜 마음으로 응낙했다. 너도 거기에 불만은 없겠지?"
올리비아는 자신에게 홀딱 빠져 버렸다는 프레디를 생각하니 모든 게 짜증스럽게 여겨졌고, 이모의 이 같은 일방적인 승낙에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제가 꼭 그 파티에 가야만 하나요? 전 그런 파티에는 어린 소녀들이나 간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가 다.소 무례하게 대꾸하자 브리짓트 부인은 마음속으로 또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어린애는 무엇이 잘못된 거지? 아일랜드계 아버지의 거친 성격이 이 애를 이렇게도 무례하게 만들었나? 그래도 그녀는 꾹꾹 눌러 참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안 간다면 버커스트 씨가 실망할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니?"
"올리비아 언니는 프레디라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싫어 해요 엄마는 그걸 알아야 한다구요."
"난 대영제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적으로 이 미개한 식민지에서 견디어내고 있는 젊은이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아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대영제국은 그런 프레디 같은 자들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에스텔과 함께 낄낄거렸다.
"엄마, 걱정 좀 그만하세요. 올리비아 언니는요, 엄마가 그렇게 짝지어주려 애쓸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프레디가 이 지역에 있는 전도유망한 유일한 청년도 아니구요. 이제 그만 좀 해요, 엄마!"
브리짓트 부인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고, 그와 함께 납덩이 같은 침묵이 무섭게 공간을 내리눌렀다. 올리비아는 이모를 위해 억지로 미소까지 지으며 그 침묵을 깼다.
"이모님, 기꺼이 버커스트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그의 친절이 어쨌든 그렇게나마 받아들여지는구나."
사촌의 비양거림에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에게 탁자를 물러나겠다는 용서를 구하면서 베란다로 도망치듯이 나갔다.
미친 듯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번개가 하늘을 톱니 모양으로 찢어놓고 있었고 폭우가 세상을 온통 삼킬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원의 아카시아 나무가 격렬히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만약 이 캘커타에서 사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밤의 절망과도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베란다.의 좁은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그녀는 이 하늘과 땅과 물이 이루어내는 조화가 자신에게 주는 평안을 맘껏 누렸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그녀가 와 있는 이곳 언저리와 자신의 근본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숱한 거리 속에서도, 이런 대자연의 변함없는 생명력은 그녀에게 고향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고향!
순간, 그녀는 노스탤지어에 빠져들며 그리움의 고통에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애써 고향에의 아픈 그리움을 떨쳐내며 맹세했다.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난 울지 않을 것이다.
9시 무렵, 계속되던 폭풍우가 잠잠해지며 부드러운 바람이 대자연을 감싸기 시작했다. 열대 지방의 기적과도 같은 이런 기후 변화가 올리비아는 무엇보다. 좋게 느껴졌다.
죠수아 경의 도착과 함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하인들의 재빠른 움직임, 브리짓트 부인의 감독하에 저장실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동작들이 그러했으며 죠수아 경의 껄껄 웃는 소리와 에스텔의 시끄러운 재잘거림이 집안을 가득 채운 게 그러했다. 잠시 후 묵직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죠수아 경이 올리비아에게로 다가왔다.
"쟈스민이 오늘 너를 던져 버렸다며?"
"예"
올리비아는 벌써 이 사실을 고자질한 사촌에게 책망의 눈초리를 띄우며 죠수아 경의 가벼운 키스를 뺨에 받았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니?"
"다행스럽게도 그 도량이 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다행이라구?"
죠수아 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난 네 이모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너 역시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그는 잠시 곁에 있는 에스텔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올리비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린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단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너희 미국인들이 하는 것처럼 사무실에서 나와서 함께 해도 좋다. 난 그 점을 나름대로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니까"
에스텔이 팔에 매달리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올리비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제한된 식민지 사회의 좁은 범위 내에서 자극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뉴욕이나 시카고에서처럼 복잡하고 냉혈적인 상업의 세계이리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그녀는 이모부로부터 이미 동인도 회사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었다.
죤 컴퍼니와 바하드 컴퍼니로 대표되는 동인도 회사는 왕의 조령, 혹은 왕족들에 의해 점령된 인도지역 내에서의 각종 무역에 막대한 이윤을 창조하는 세계적인 무역회사로 인도 내 영국 기업의 요새라고 볼 수 있었다.
죠수아 경의 권유는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당장이라도 그 세계에로 뛰어들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올리비아의 관심은 죠수아 경을 기쁘게 하는 반면 이모에게는 괴로움을 던져 주었다. 저녁 식사 후 브리짓트는 그들의 방에서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여보, 난 당신이 그 어린애에게 이윤이나 추구하는 사업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 애에게 사업적 재능이 다분하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비상해 그 애가 원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구!"
"그 애 머리가 그렇게 좋다면, 좋은 영국인 신랑감을 찾는 데 쓰도록 하는 게 어때요? 그 아이는 이제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라구요! 결혼 적령기가 넘어 버린 스물셋이나 되는 애를 어쩌려구 그러는 거죠?"
올리비아의 결혼 문제에 관해서 특별히 예비해 둔 다른 의견이 없었기에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계속해서 늘어놓는 아내의 수다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의 사업적 재능을 키워 주겠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거의 열 시가 다 된 시간에 올리비아는 하녀가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따라 죠수아 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죠수아 경과 회사의 부하직원이자 오랜 심복인 아더 랜섬이 함께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차(茶) 조약에 관한 문제들이 거론되면서 시작되는 열띤 논쟁과 차 수송에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를 검토하는 대화 속에 올리비아는 곧 빠져들었다.
화려함과 잔인함이 간간이 드러나는 죠수아 경의 언변과 정확하면서도 다소 조심스러운 성격의 랜섬은 계속해서 차를 수입하는 문제와 석탄을 이용한 쾌속선의 이용 가능 여부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 속에 간간이 들려지는 '카라 칸타'라는 이름에 올리비아는 주목하다가 그다지 좋게 말해지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토론 속에 끼어들었다.
"이제껏 두 분의 대화 속에 등장한 '카라 칸타'란 사람이 누구죠?"
두 사람은 놀랐다. 그들은 올리비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도 선뜻 그녀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다가 잠시 후 죠수아 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저 사업 경쟁자일 뿐이다.!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야!"
죠수아 경의 무뚝뚝한 대답을 대신해 아더 랜섬이 서둘러 공손하게 대답했다.
"카라 칸타는 아주 무례한 악당 같은 놈이죠 캘커타에는 그런 되먹지 못한 작자들이 종종 있으니까."
조금 전 그들의 대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카라 칸타에 대한 증오와도 같은 느낌을 뒤로 하고, 올리비아는 방을 나섰다. 등을 돌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죠수아 경의 악의에 찬 증오의 표정으로 인해 올리비아는 얼어붙은 듯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무서운 감정의 폭발 그저 잠깐이면 지나갈 그런 폭발이었지만 거기에는 올리비아가 상상하기 어려운 추악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크로케 경기를 좋아하나요?"
프레디 버커스트가 그녀에게 물었다.
"크로케? 글쎄요, 전 한 번도 그걸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프레디는 그 툭 튀어나온 눈으로 올리비아를 잠시 응시하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색다른 유머 감각을 지니셨군요. 모든 미국인들이 당신처럼 그렇게 재치가 뛰어난가요?"
"글쎄요 모든 미국인을 다. 만나 보지 못해 정확히 대답해 드릴 수가 없군요."
그녀는 냉정히 대답했다. 그녀가 부라카나스의 파티에 응해 프레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곳에 온 후 그는 줄곧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이 복잡한 파티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는 듯했다. 한 젊은이의 추근거림을 피해 달아난 에스텔조차 없는 파티장 안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올리비아는 자포자기한 심경으로 손님들 사이를 돌며 하는 짧은 대화조차도 고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무의미하고 일상적인 대화에 질려 있던 올리비아는 프레디가 잠깐 없는 틈을 타 베란다. 쪽으로 재빠르게 나갔다. 그 베란다는 정원 뒤쪽과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원은 황량했다. 어둠 저편으로 벽이 제방처럼 높게 쌓여져 있었고, 정교하게 단장된 철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스커트 자락을 잡아올리며 다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정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혼자 될 수 있음에 절대적인 감사를 느끼며 올리비아는 찬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가득한 별무리는 그 밤을 유난히 밝게 비치고 있는 둥근달과 함께 대자연의 순수함을 맘껏 토해내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올리비아는 강쪽으로 걸어가 샌들을 벗고 앉았다. 항상 그래왔듯이 올리비아는 밤의 고독이 주는 자유와 평안에 빠져 무한한 해방감에 도취되었다.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 오는 날 밤의 아빠와의 대화가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되살아났고, 그 아련한 추억에 의해 그녀는 다.시 대지의 경이로움과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보고픔을 느꼈다.
갑자기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수의처럼 뒤덮는 자기연민의 절망감 속에서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스스로 맹세한 서약을 깼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울었을까? 눈물이 거의 다. 마를 즈음 그녀는 한결 나아진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이 어둠 속에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두려움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강렬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느낌 속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 숲속의 흔들림이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처럼 반사적 행동으로 손을 주머니 쪽으로 가져가 소형 권총의 존재를 확인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이 목적인가? 그녀는 벌어질 수 있는 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마세요. 난 그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봤을 뿐입니다."
교양 있는 영어의 구사를 듣고 다소 안도감을 느끼던 올리비아는 그의 다음 물음으로 인해 정신이 굳어져옴을 느꼈다.
"왜 울고 계십니까?"
그럼 내가 우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단 말인가? 그녀는 마치 혼자만의 비밀을 들켜 버린 것 같아 화가 났다.
"제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 실수를 했군요. 전 저 혼자인 줄 알았어요."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오며 말을 했다
"우린 모두 혼자인 셈이죠.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거니까요."
의미 있는 한 마디였지만 올리비아는 화가 나고 당황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이 사람도 파티장으로부터 도망 나온 또 한 사람의 도망자인가?
"전 누군가 날 몰래 훔쳐보는 따위의 일을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만약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정말 사과를 드립니다. 맹세코 고의로 당신을 훔쳐본 것은 아닙니다. 맹세코 난 내가 고독을 느낄 때는 밤에 개와 함께 이곳에 가끔 산책을 나오거든요."
올리비아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소 강조하고 있는 고독이란 낱말도 놓치지 않았다.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당신은 저를 잘 모르니까요. 저의 고독은 저 자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뿐, 당신의 존재가 어떤 훼방이 된 건 아니니까요."
그의 조용함과 정중함 때문에 그에게 느꼈던 올리비아의 불쾌감은 어느새 호기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큰 키에 이런 파티에 잘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티장에 오신 건가요?"
그가 다소 냉소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캘커타는 참 이상한 곳이죠 그 규모나 상업적, 정치적 중요성으로는 수도로서 부족함이 없는데 사회적인 면에서는 시골 마을과 같거든요. 이런 시골 마을 같은 곳에서는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야 하는 단순함이 있죠"
어떤 개운치 않은 느낌이 섞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단언하듯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난 이런 점이 폐쇄된 공동사회와 같다는 생각을 늘 하죠."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허탈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그가 갖고 있는 감정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인지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고 애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올리비아는 자리가 불편해짐을 느꼈다, 그의 과묵함과 유난스런 정중함이 그녀에게 어색한 느낌을 안겨 주었기에 그녀는 곧 자리를 떠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다.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얼어붙듯 그 자리에 발을 붙이고 섰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먼저 해치지 않는 한 사람을 해치지는 않으니까요."
그 남자는 그녀를 조용히 안심시켰다. 잘 길들여진 개는 주인의 낮은 휘파람 소리를 따라 그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리비아는 덜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고는 겨우 말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날 놀라고 당황하게만 하는군요."
"내가 그렇게 당신을 놀라게 했다면, 당신은 내게 소형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인사말을 대신할 생각이셨나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제게 소형 권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죠?"
"지각 있는 미국여성들은 이런 불안정한 환경에서 거의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다시 웃었다. 올리비아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제가 미국인인 것은 또 어떻게 아시죠?"
그가 좀 더 편안하게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캘커타는 일개 마을이고, 헛소문이 아주 많은 곳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각 있는 백인 여성은 군계일학처럼 항상 돋보이는 법이구요."
올리비아는 그저 인사말처럼 들리는 그의 말속에, 대화가 불편하게도 개인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이 떠나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개가 다시 또 으르렁거렸기에 그녀는 재빨리 다시 앉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의 이 보호자에게 내가 갈 수 있도록 비켜달라고 지시해 줄 수 없나요?"
그는 개를 부르는 대신, 좀 더 편안한 자세가 되어 말했다.
"한두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없어진 당신을 찾고 있지 않아요, 지금 난 그걸 알고 있죠. 그리고 당신은 그 한두 사람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 혼자 있었던 거구요. 지금 당신이 급히 돌아가려는 것은 당신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을 이리로 끌고온 그들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그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지적이 매우 날카롭다는 사실에 경이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이모와 프레디는 아마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몸을 맡기다. 우연히 부딪친 이 익명의 사람이 뭔가 부정할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느낌으로 그녀는 불안해졌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다소 신중한 태도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제 이름을 알고 있죠?"
"물론"
"어떻게 저를 알고 있죠?"
"그저 사회적인 한 단면만을 알 뿐이죠. 엄격히 말해서, 그 누구도 진정으로 어느 누구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대답이군요."
그녀는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매우 정확한 얼버무림이거나 당신은 철학자와 사기꾼 중 어느 쪽이시죠.?"
그는 머리를 뒤로 제치면서 무엇인가 정말 유쾌한 듯 웃었다. 올리비아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와 함께 웃었다.
"당신은 종종 나조차도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군요! 어느 다른 한 사람이 될 수 없이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을 경험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해요. 지금은 내가 그저 철학자와 사기꾼 둘 다에 속해 있다고 말해 두죠. 상황에 따라 변화될 소지가 가득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비참할 정도로 냉소적인 기분이 드는군요."
"아마 냉소적인 인간이 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걸요."
그녀는 더욱 확고하게 말을 했다.
"또 전 당신의 말에 시시한 싸구려의 느낌도 받았어요. 제 아버지께서는 세상에 대한 냉소는 겁쟁이들이 자신을 숨기는 편리한 방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의 아버지는 행동없이 말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셨을 겁니다."
올리비아는 이렇듯 거리낌없이 말하는 익명의 남자에 의해 또 한 번 놀랐다.
"당신이 저의 아버지를 알고 계신가요? 어떻게"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재빨리 얼버무렸다.
"전 그분의 저서를 좀 읽었습니다."
"어디서요.? 인도에선가요?"
"샌프란시스코에서죠. 그분은 석탄광을 따라 일을 하는 광산 노동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셨더군요. 그분의 진실된 감정과 그 깊이가 나를 매우 감동시켰죠."
"당신은 미국에 대한 일차적인 지식들을 갖고 계셨군요."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져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따뜻해졌다
"당신은 미국에서 살았었나요?"
"예"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돌을 들어 강가에 던졌다. 이런 미묘한 그의 행동은 이제 그 화제를 끝내겠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당신을 그토록 불행하게 했나요.?"
"전 그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뿐 제가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날카로워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분은 아직도 신문기자와 같은 활동적인 일을 하고 계신가요?"
다소 건방진 뜻밖의 말이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정성을 다해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아주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죠. 최근엔 하와이에서 태평양 근처에서 일어난 노동자 대학살에 대한 보도를 하고 계세요. 그런 잔인한 학살을 금지할 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고 계시죠."
"그분은 그 희망없는 일을 가능하리라 믿고 매달리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원칙을 믿고 계실 뿐이에요. 저 역시 불가능한 일인 건 알지만 앉아 있기보다는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누구나가 하려는 것이 아닐지라도"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난 이길 승산이 있는 싸움만을 하죠. 이 세상은 패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니까요."
"자신이 항시 이긴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항상!"
"항상이라구요?"
그녀는 그의 그런 자신감에 소름이 끼쳤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겠군요. 아니면 자기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든지"
"난 행운 같은 것은 믿지 않아요. 망상 역시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구요. 나는 깨끗지 못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는 비웃음이 섞인 듯한 말을 늘어 놓고는 잠시 어두운 저쪽을 응시하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단한 위트를 가졌어요. 올리비아 양 난 당신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죠."
나에 대한 정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 이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나에 대한 어떤 정보들을 갖고 있다는 거죠?"
어듬 속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그가 담뱃불을 붙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는 짧은 순간 속에서 그의 핏기 없는 얼굴과 검은색 머리칼을 보았다. 창백한 그 얼굴이 풍기는 일말의 고독감이 웬지 모르게 그녀에게 슬픔으로 느껴질 때, 그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난 브리짓트 부인의 유일한 여동생이 당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당신이 일곱 살 때 사내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죠. 당신 부모님의 결혼은 브리짓트 부인 가족의 반대 때문에 아버지의 가족이 있는 놀포크에서 이루어졌고, 일 년 후 뉴오렌스에서 당신은 태어났죠. 그 사이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직업도 찾지 못했고 그 덕분에 생활은 대단히 어려움을 당했죠. 부인의 죽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 그는 당신을 캘리포니아 행 화물 열차에 태웠고, 자신은 새크라멘토에 도착해 마켄드릭이란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 당신의 집을 지었죠. 그 후 그분은 당신이 가축과 말을 기르는 일을 할 동안 그곳에서 집필을 하셨죠."
올리비아는 너무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후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외에 다른 것은 아! 그렇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놀랄 만한 기회를 주셨어요. 보수적 사고방식에 철저하게 물든 영국인 이모를 통해 당신에게 부자 영국인 신랑을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 바로 그것이죠.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가장 적절한 상대가 캘커타 내에서 가장 전도유망하고 친절한 청년인 프레디 버커스트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뭐 빼먹고 이야기한 것이 있나요?"
그는 궁리하듯 잠시 침묵했으나 곧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전부를 얘기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최소한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당신에 관한 정보의 전부일 뿐 분명 더 많은 무엇들이 존재하겠죠. 마을의 헛소문들이 완전한 것들이 아니기에"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올리비아는 자신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서 올리비아는 점점 마치 난폭한 일을 당한 듯한 느낌이 되었기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그가 미처 개의 행동을 통제할 틈도 없었다.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시 공격의 자세를 보였다. 그가 순간적으로 개의 목덜미를 붙들며 성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은 갑자기 일어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오만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선 때로 멍청한 이유가 되니까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채로 그녀는 몸을 떨며 그에게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사나운 동물에게 저를 이 자리에서 떠나가게 하라고 명령을 해주시겠어요?"
"왜요?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 불쾌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난 그저 당신을 우연히 만났던 사람으로 끝내고 싶어요."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발음조차 할 수 없었다.
"아, 그런 소리를 듣다니 정말 유감이군요. 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으로 당신과의 우연한 만남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올리비아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저를 그토록 계속해서 무시하는 거죠.? 당신은 그런 태도가 당신의 존재를 보다. 낫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는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내가 당신을 그렇게 무시하고 모욕한다고 느끼는 거죠.?"
그의 대꾸에 올리비아는 잠시 혼란해 하다.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그토록 비영국적인가요?"
"당신은 왜 내가 그렇다고 느끼는 거죠.? 어떠한 점이 그런가요?"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원주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원주민은 어떻게 보여야 합니까?"
이 간단한 물음에도 그녀는 그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예적이어야 합니까? 맹종해야 합니까? 백인 아가씨의 발밑에 겸손하고 비굴하게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에요.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그의 깊은 오해에 두려움을 느끼며, 개의 존재를 잊은 듯 발을 내딛었다. 즉시 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내가 그런 것을 의미한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마치 백합처럼 흰색에서부터 푸르고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거죠. 그 안에 내 색깔은 영국 계통의 흰색이 아니라는 거죠."
그는 숨을 내쉬며 얘기를 맺고는 개를 안심시켰다. 잠시 후, 그는 개를 먼저 보낸 후 결심이나 한듯 입을 열었다.
"내 안부를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에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내 이름은 자이 라벤던입니다."
그는 자르듯 자신을 밝힌 후 가벼운 인사와 함께 개의 뒤를 쫓아 빠른 동작으로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하던 올리비아의 눈에 힐끗 뒤돌아보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투명한 달빛처럼 맑게 고정되어 있는 눈은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의 창백한 얼굴과 숱 많은 검은 머리는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했다. 잠시 후, 올리비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던 석연치 않은 감정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를 끌어당기며 걸음을 정원 쪽으로 옮겼다. 에스텔이 그녀를 잡으며 물었다.
"어디 갔었어? 모든 사람들이 언니를 찾아 헤맸는데 엄마는 아주 제정신을 잃고 걱정하고 계셔."
"시끄럽게 굴지 마, 에스텔 난 그저 화장을 고치기 위해 잠시 나갔었던 것뿐이니까"
"어디에서? 정원에서? 난 언니가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다. 보았었다구."
에스텔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불쌍한 프레디를 내버려 두고 어디 갔다. 왔지? 그의 사랑을 시험해보고라도 싶었던 거야?"
"엉뚱한 소리 마! 난 그저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산보를 좀 했을 뿐이야!"
"글쎄 언니가 어디 있었던지 간에 내가 언니라면 서둘렀을 거야. 엄마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라도."
잘난 척이라도 하듯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서 있는 한 남자 친구의 팔에 안겨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한편, 언짢았던 이모의 기분을 맞추고, 또 자신이 비웠던 시간의 보상을 위해 폴카 리듬에 몸을 맡겼다.
자이 라벤던
강가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라고 접어두기엔 너무나 특별난 점이 많았다. 그에겐 그를 지배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자이 라벤던이란 특이한 이름! 앵글로색슨 계통의 이름도 아니고 또 인도 사람의 이름도 아니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였던가? 유럽인으로 보기엔 그의 태도가 너무 야만적이며 자유주의가 너무 뿌리 깊었다. 반면에 어떻게 인도 사람이 캘커타와 같은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백인 여성과 함께 뻔뻔스럽게 대화를 할 용기가 있을 수 있는가
아무튼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이 라벤던은 모든 면에서 이 지역에 부적합했다. 그녀는 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까지 그의 존재가 자신의 생각을 어수선하게 흔들어 놓는다는 사실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거의 늦은 밤이 되어 도착한 후 올리비아는 침실로 들어섰다가 갑자기 자이로부터 이모와 이모부에게로 전달되기를 요.청받은 비밀 메시지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의 안부 따위가 이모 부부에게 전해 주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국 침실을 나와 이모부에게 말을 전했다.
"저 잊을 뻔한 말이 있어요. 이모부 제가 오늘 저녁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이모부와 이모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어요."
"누군데?"
"자이 라벤던이라고 하던데요."
올리비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무언가 이상한 일에 홀린 듯 사람들이 얼음조각처럼 얼어붙었다. 램프로 가던 브리짓트 부인의 손이 멈춰졌고, 걸음을 옮기던 죠.수아 경의 다리가 마비된 듯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뭔가에 관해 얘기하고 있던 에스텔도 입을 벌린 채 공포스러운 듯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올리비아는 잘 이해도 못하면서 각각의 사람들을 당황스런 눈빛으로 주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남은 얘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의 목구멍 안에서 잊혀져야 된다는 판단을 했다.
그 침묵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눈에 띄는 긴장감으로 지속되었다. 처음 움직인 사람은 브리짓트 부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멈추었던 팔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뭐라고 했길래 그러지, 에스텔? 내가 한 말 중에 잘못된 것이 도대체 뭐지?"
브리짓트 부인이 몇 개의 알약을 먹고 침실로 돌아가고 죠.수아 경 역시 경직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부자유스러운 침묵은 올리비아에게는 참기 힘든 괴로움이 되었다. 에스텔이 그들 뒤에 있는 문을 살그머니 닫으며 말했다.
"언니는 그 이름을 언급하지 말았어야 해! 그건 이 집안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왜? 그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러는 거야?"
올리비아는 계속 이유를 몰라하며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몰라 아무도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니까 내가 아는 건 단지 모두 그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럼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따돌릴 만한 못된 짓을 한 거야? 무슨 사업과 관계있는 거야?"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부도덕하고 파렴치하다고들 그래 출신 성분이나 배경도 아주 나쁘고 게다가 그 역시 우리를 싫어해."
"우리를?"
"영국인들은 그가 우리를 인도에서 내쫓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해. 그는 제정신이 아닌가봐, 아마"
"그 사람이 영국인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영국인이었다면 우리에게 어쩌면 좋은 이미지를 줬을 거야 그는 혼혈아야."
에스텔이 갑자기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물었다.
"그와 무슨 얘기를 했어?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어진 거야?"
올리비아는 그런 사촌의 흥미를 무시하며 말했다.
"정말 이해가 안 가 그의 주변 환경과 배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거지?"
"그의 배경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심지어 캘커타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드라몬드 부인조차도 그는 아빠처럼 혼자 사업에 관계하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좋은 운송 수단을 갖고 있어 그 점 역시 다른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야"
"또 다른 이유는?"
"드라몬드 부인이 그러는데 그는 자신이 홍차를 야산에서 직접 재배한대. 언니도 알다시피 우리의 홍차는 중국에서 들여와 영국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홍차를 직접 미국으로 보낸단 말이야 그게 바로 모든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거야."
에스텔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아무도 인도에서 홍차를 재배해 성공적으로 어떤 장소로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카라 뭐라고 하더라?"
"맞아! 카라 칸타야 바로 자이 라벤던의 별명이야 그 사람이 언니에게 그걸 말해 줬어?"
"아니야 이모부님과 랜섬이 지난번에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야. 카라 칸타가 힌두계통의 사람임을 의미하는 거야?"
"응, 카라는 검다는 뜻이고 칸타는 바늘을 의미해 그는 갈가마귀처럼 검고 바늘같이 표독스러워."
"나도 그가 악한이고 모두들 대체로 그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이모가 왜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토록 놀라는지 잘 모르겠어 넌 알고 있니?"
에스텔은 잠시 주저했다.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영국인들이 아무리 그를 싫어해도 사업적으로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가 부리는 일꾼들은 부지런하고, 그들 모두 그를 존경해."
"그가 그렇게 사업상의 동반자라면 왜 오늘과 같은 파티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거지? 분명 초대했을 텐데."
"초대라고? 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긴 해. 하지만 모두 그에 대해 기대를 갖거나 파티를 베풀지는 않아. 폴리가 그러는데, 그는 지금 인디아 여자와 살고 있고 그 여자가 안주인 이래 게다가 지난번엔 어떤 낯선 여자가 찾아왔는데 열흘 동안이나 그와 함께 있었대, 글쎄"
올리비아는 그녀가 떠벌리는 이야기의 홍수에 제압된 듯했다.
"이제 언니가 그 이름을 이 집에서 들먹일 수 없는 것이 이해가 돼?"
"넌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구나."
"난 그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말한 것뿐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인 걸 나 혼자만 특별히 알고 있는 일들은 아니야. 그런데 언니는 그에 대해 웬 호기심이 그렇게 많지?"
"난 그저 확실히 알고 싶은 거지 별 호기심은 없어 난 단지 내가 왜 그렇게 이모님을 괴롭게 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야 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언니라면 모든 것을 잊을 거야 엄마는 어쨌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에스텔이 하품을 하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내 생각에는 언니가 다시는 그를 만날 것 같지 않은데, 그렇지 않아?"
"글쎄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설명하기 힘든 조그만 후회와 아픔이 밀려왔다. 잠들 무렵,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이모에게 어떤 사과의 뜻을 전해야겠다고 올리비아는 결심했다.
이튿날 아침, 평소와는 달리 일찍 죠.수아 경이 직장에 간 후 침실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는 브리짓트 부인을 발견한 올리비아는 곧바로 사과를 했다
"저, 어젯밤 일을 사과드려요., 제가 어떤 식으로든 이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죄송해요. 그건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어요."
브리짓트 부인은 차를 든 손을 떨며 올리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나도 네 마음을 알아, 네가 잘못한 것도 없고 하지만, 이모부님이 너에게 나중에 하실 말씀이 있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고, 그 이상의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고향과 호놀루루로부터 올 우편물을 기다리는 것으로 참기 힘든 향수병을 달래고, 또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위로 삼던 일이 그날 하루 종일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의 생각은 자이 라벤던 주변에서 떠돌고 있었으며 그 생각의 대부분은 그의 실제적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서 흐르던 보이지 않는 어떤 불투명한 분위기였다.
순간적으로 보여졌던, 그의 거만함 속에 숨은 적개심이 올리비아를 혼란스럽게 했었다. 그 점이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녀는 자이 라벤던이 자신을 이토록 당혹스럽게 하는 이유가 미국에 있을 때 남자와 접해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긴 하루를 보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웬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흐를 때부터 예측했던 죠수아 경의 설교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평소와 같이 사업서류들로 뒤덮인 마호가니 책상에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는 이모부는 사적인 대화를 위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체격과 분위기는 커다란 책상과 더불어 그녀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이모부는 유머와 위트가 섞인 이야기들을 서두로 하여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풀어갔다. 몇 가지 러시아인들에 대한 냉소가 있은 후 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 일에 대한 얘기인데, 올리비아"
"저 이모부님 그 일에 대해서라면 정말 죄송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후회가 담긴 그녀의 말을 일소에 붙이며 그가 얼른 덧붙였다.
"넌 그저 순진한 생각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야 네가 어떻게 그 작자의 음흉한 속을 알 수 있었겠니?"
‘음흉하다구요? 그와의 몇 마디 대화 속에 그런 뜻이 내포될 수 있을까?’ 솟구치는 의문을 눌러 참으며 올리비아는 자신의 발언을 자제했다.
"그놈은 악당에 난봉꾼이고 협잡꾼이다. 그것도 일류급의! 그놈이 감히 너를 유혹하려 하다니"
"그는 절 유혹하지 않았어요. 그저 우연스럽게 만났을 뿐인걸요."
"그놈이 자기의 신분을 잊고 너에게 말을 걸었다는 그 자체가 나쁜 거야! 그놈은 권모술수에 능한 녀석이야 기회만 있으면 무슨 수단이라도 다 동원할 악당이야! 그래, 그놈이 너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했느냐?"
올리비아는 비웃는 듯한 이상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방어를 했다.
"예, 완벽하게 그뿐이었지 다른 아무것도 없었어요."
올리비아는 그와의 사이에 오간 가시 돋힌 대화들을 발설하면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래 무슨 얘기들을 나눴니?"
죠수아가 겉으로는 우려의 표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의혹이 넘치는 질문을 던질 때, 올리비아는 당혹감을 감추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저희는 그저 평범한 얘기들을 나눴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가 미국 언론계에 쓴 기사를 읽어 본 것 같았어요. 우리는 대부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죠수아는 긴장이 다소 풀리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놈은 항상 신사인 체한단다. 그런 점이 어제 너의 이모를 그토록 흥분시킨 것이고 너도 잘 알다시피 이모는 도덕성과 근면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품성으로 여기고 있잖니. 이런 면에서 그런 수준 낮은 깡패 같은 놈이 실제로 너와 허물없이 한담을 나누었다는 것이 이모에게는 큰 충격이었어. 너도 이해하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를 지켜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브리짓트가 정신을 잃은 것도 좀 지나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녀의 조그만 변덕이나 지나침을 받아 줘야 하지 않겠니?"
이모부가 솔직하고 명백하게 표현한 이모의 '변덕과 지나침'이란 말을 들으며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지금 이모가 왜 그렇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밝히지 않으려 함을 알아챘으나 다시 맞기 어려운 기회라 생각했기에 그 금기시된 이름을 무모하게 내뱉으며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 라벤던 그는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또 무얼 하는 사람이죠?"
"그는 차 사업을 하고 있다"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 속에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중국에서요?"
"아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차를 재배하고 있어!"
이모부에게서 보여지는 불쾌감을 애써 외면한 채, 또 어떤 진실을 알고 싶은 생각에 올리비아는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가 정말 그런 일을 하나요? 하지만 이모부님은 유럽계 경작인들이 심각한 노동 문제를 안고 있으며 중국산 차가 국내에서 재배되려면 적어도 수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는 토착 인도산 차나무를 재배하고 있어, 중국산이 아니라!"
"토착 인도산 차나무요? 전 차나무에 인도 원산지 것이 있는지 몰랐어요."
"사실 인디아에도 수백 년 동안 토착 차나무가 있어 왔어,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없지 그게 바로 저번에 라벤던이 우리 대화의 주제로 나온 이유란다."
그의 입이 불쾌하다는 듯이 뒤틀렸다.
"너의 이모가 바보스러우리만큼 감상적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우선 사과를 한다. 분명 넌 놀란 모습이었으니까 우리가 너를 놀라게 한 것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겠니?"
올리비아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복종했다.
"자, 이제 우리 불쾌한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어떨까?"
"예"
그녀는 자신의 절망감을 숨기며 기어드는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이모부가 온 얼굴에 미소를 띄며 물었다.
"얘야, 얘기 좀 해보렴. 우리와의 생활이 행복하니?"
"예 물론 행복해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시죠?"
"가끔 네가 그렇지 않은 것같아 보여서 하는 소리다. 네가 원하는 만큼 이곳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할까봐 그런 거야."
"아버님이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을 빼면 모든 게 아주 만족스러워요. 이모부님이 이렇게 친절히 돌보아 주시는데 무슨 불편함이 있겠어요?"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미국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이곳에 네가 적응을 아주 잘해가고 있다는 거야 우리 가족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너와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 특히 에스텔에 대한 문제는 우린 그애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웠어 늦게 본 자식이라 너무 애지중지했나봐 이제는 그애를 다루는 게 쉽지가 않아 브리짓트나 나 모두가 하지만 아무튼 이제 잘되어 나갈 거야 그렇지?"
"에스텔은 겨우 열여덟 살이고 앞으로도 잘되어 갈 거예요. 하지만 이모부님과 이모님 모두 에스텔을 다루는 방법을 숙고해 보시는 게 어떨지요? 에스텔은 지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척 독립적인 면을 보이고 있어요."
"독립적이라구?"
그가 놀라는 듯했다
"브리짓트는 그애가 벌써 많은 것을 혼자 처리하고 있다고 그러더군."
그는 껄껄 웃었다
"그 아이는 확실히 엄마에게 어려운 시간들을 안겨 주고 있어 하지만 난 이해해 그게 바로 딸이 가진 특권이 아닐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집안 문제라는 듯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 한번 얘기해 보렴 버커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니?"
"아뇨!"
올리비아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이모부와 죠수아 경이 눈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응시하다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 얘야 이모가 그 얘길 들으면, 무척 실망하겠구나! 이모는 너희 둘이 잘되길 바라고 있어 너 역시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전 그 점이 미칠 듯이 부담스러워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자이 라벤던을 떠올렸다. 왜 그 순간 그가 떠올랐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죠수아가 웃으며 버커스트 집안의 재산과 배경을 칭찬하는 걸 들으며 올리비아는 신랄하게 대꾸하였다.
"저는 버커스트에 대해 별 반감은 없어요. 하지만 그의 재산이나 배경 좋은 집안은 저에게 아무런 호감을 주지 못해요. 그는 이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익살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더군요."
죠수아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소리쳤다.
"너희 미국인들은 참 솔직해 하지만 난 네 이모가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구나 올리비아, 날 위해서라도 마음을 좀 편히 가져 주지 않겠니? 아무튼 난 너의 얘기에는 동의를 하니까."
그가 나오는 하품을 가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될 시간인 것 같다.
"절 이렇게 도덕적으로 재무장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제 얘기가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세요."
"그렇지는 않다. 올리비아! 넌 참 좋은 아이야 버커스트와 잘 어울릴것 같은데 내가 그러더라고 이모에게 전해 주렴. 네 아버지가 널 별 문제없이 키운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겠다. 네가 이렇듯 온순한 걸 보면 자, 또 다른 문제는"
그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발밑의 카펫을 쳐다 보았다
"이제 할 말이 별로 없구나 라벤던, 그놈이 다시는 너의 길을 방해하지는 못할 거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한동안 창문에 기대서서 부엉이의 울음 소리와 야간 경비원의 호루라기 소리를 들었다. 그런 후 책상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쓰던 편지를 마무리하고 일기를 썼다. 편지와 일기, 모두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지난밤, 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한동안 무엇을 더 추가해서 쓸 것인지를 생각한 끝에 망설임없이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에스텔 템블우드는 부모가 자식에 대한 희망을 거의 포기할 무렵인 결혼 15년 만에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할머니로부터 하사받았고, 또 할머니의 많은 면을 물려받았다. 죠수아 이모부의 어머니는 미망인이 된 후 캘커타로 아들을 데려와 죤 컴퍼니에 일자리를 얻게 했다. 죠수아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독재자처럼 가정을 이끌었고 며느리인 브리짓트 부인은 시어머니를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했다.
그 미망인의 죽음은 브리짓트 부인에게 안도의 한숨으로 찾아왔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시어머니를 존경했다는 사실은 죽은 여인의 초상화가 템플우드 집의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초상화에서 흘러나오는 엄한 눈초리는 그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조망하고 있는 듯해 보였고, 그것과 똑같은 눈빛이 성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에스텔의 눈에도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작은 행사에도 부딪치는 모녀의 의견대립을 올리비아는 대단한 인내심으로 중재했다. 음식물 등 여러 가지 준비가 수백 명의 손님을 위해 마련되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고 또 감사를 받지도 못할 이 집안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그저 이 큰 행사가 무사히 치뤄지기만을 기도했다.
그런데 에스텔의 성년식 축하파티가 열리는 동안 올리비아는 자신의 운명의 방향을 바꿀 또 하나의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매년 에스텔의 생일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몬순 기후의 태풍이 있는 막바지에 치러졌다.
화려하게 옷을 입고, 꽃으로 잘 장식된 잔디 위에서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 된 에스텔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한 사람의 숙녀였다. 놀랄 정도로 화려한 가문은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으며 부모에게 선물받은 값어치를 알 수 없는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도 그녀를 화사하게 보이는데 한몫했다. 더구나 완전한 균형미를 갖춘 에스텔의 성인과 같은 인사, 키스, 악수 등의 태도는 올리비아를 퍽 놀라게 했다.
그날 올리비아는 이모의 의지대로 허리를 꽉 죄는 화려한 옷에 굽 높은 샌들을 신었는데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놀라했다. 그녀를 위해 이모가 빌려 준 에메랄드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 등은 소박한 차림새에 익숙한 그녀에게 아주 생소한 우아함을 자아냈다.
올리비아는 그날 이모의 지시대로 하객들 사이를 오가며 짧은 대화와 즐거운 인사로 형식적 인사치레를 교묘히 처리해 나갔다. 흥겨운 파티에 걸맞는 상류층의 농담과 한담 속에 짧은 웃음을 흘리는 올리비아의 팔을 에스텔이 끌어당겼다. 나무 뒤쪽으로 올리비아를 데리고 간 에스텔이 다급한 듯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저 언니 존에 관한 얘긴데, 그가 마구간에서 내게 키스를 했어. 그게 당연한 걸까?"
"아니! 당연하다면 왜 마구간 같은 곳에서 키스를 하겠어?"
올리비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때 죠수아 경이 나타났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니, 얘야? 네가 보고 싶어할 것도 같은, 매력이 넘쳐흐르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의 목소리에 이상한 긴장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따분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임무와는 달리 어떤 자극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같은 기대감에 차 재빨리 동의했다. 그들은 정원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강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배치된 자리에 40대 초반의 남자가 하인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오, 고귀하신 마하라자 영주님! 저의 조카딸 올리비아 오렌키입니다, 올리비아는 영주님이 동경하던 미국에서 최근 도착했습니다. 올리비아, 인사드려라 킬티나갈의 마하라자 전하시다. 이곳 인디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고 계신 왕가의 한 분이시다"
'마하라자'라는 이름은 손님 목록에 없었고 이모 역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올리비아는 잠시 긴장한 모습으로 말없이 서 있다가 당혹감 속에서도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마하라자는 응대의 표시로 공손하게 웃으며 절을 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미스 오렌키, 난 당신 나라에 대해 강한 호기심과 열정을 갖고 있어요. 특히 그 특유의 용기와 근면에 대해서"
"우리가 용기가 있어 보인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영주님 하지만 근면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라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근면한 생활을 요구하고 있고 우린 정말 근면하게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아직은 생활이 불투명하니까"
그는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은 가끔씩 완곡한 은총을 주시기도 하죠.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겪어야 할 오늘의 시련 같은 것이죠."
"그래요. 영주님 말씀이 맞아요."
그들은 작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는 위압감을 주는 왕관과 왕가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상당히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보였다. 올리비아가 그에게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영주님, 아메리카에 대해 어떤 지식이 있으신가요?"
"슬프게도 없어요. 아직 운 나쁘게도 당신네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하지만 난 이곳에서 수많은 미국인 방문객들을 만나고 있죠. 또 미국의 신문을 보며 유쾌한 시간들을 갖고 있어요."
그는 뒤이어 다가올 미국의 선거에 대한 해박한 상식을 털어 놓았고 그밖에도 미국 사회 저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올리비아를 놀라게 하였다. 두 사람은 제방 곁의 포장길을 따라 거닐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치 풍토와 선거 일정에 관한 얘기들이 익어가면서 마하라자는 자연스럽게 올리비아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의 아버지가 매우 저명한 집필가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예, 맞아요. 저희 이모부님이 그러시던가요?"
"아니오, 한 친구에게서 들었어요. 캘커타는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알려지는 고장이니까요."
올리비아는 숨을 가다듬었다그에게 말한 사람을 추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제가 그 친구분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당신은 이미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자이 라벤던입니다."
그런 화제의 급변은 올리비아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만 한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 라벤던이 정말 자신에 대해 마하라자에게 얘기했단 말인가? 무엇을? 왜? 무엇때문에?
"아 그래요. 만나 본 것 같군요."
그녀는 시선을 강으로 던지며 물었다.
"영주님은 라벤던 씨를 아세요?"
그는 즉시 대답을 하지 않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자이 라벤던은 그 누구도 잘 모릅니다. 아마 그 자신조차도 잘 모를걸요. 다만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거죠."
그것은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언어의 형이상학 어쩌면 이렇게 그의 말투를 닮았을까.
"라벤던 씨는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는 없다고 말했었지요."
"엄밀히 말하면 그의 말이 옳죠."
이 대화의 흐름은 몇 주 동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애타는 심정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를 주었고 그녀는 또 그런 자신의 태도에 놀랐다.
"영주님께서는 그를 친구라 생각하시나요? 유럽의 사회에 만연한 그의 좋지 못한 평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물론! 하지만 그 평판이 그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는 오히려 그 사실을 즐기고 있어요. 그는 유럽인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실제로 그는 그런 평판을 만들려고 열심이에요. 그런 자신의 노력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큰 만족을 주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건 왜죠.? 세상 그 누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무뢰한이나 악한으로 따돌림당하는 것을 즐기겠어요?"
"그 '왜'라는 것에 대한 대답은 오직 라벤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의 동기 역시 그 사람만큼이나 불투명하니까요."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 역시 그게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군요."
부관이 그에게 담배를 권하기 위해 그들 사이로 다가왔기 때문에 잠시 침묵했고, 그로 인해 중단된 둘 사이의 분위기는 대단히 미묘해졌다. 마하라자가 대화의 실을 풀어내기 전까지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거닐었다/
"자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예요. 내가 그만큼 존경하는 친구도 없어요. 그건 그가 신들과도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난 가끔 자이 라벤던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녀는 문득 예전에 이모부와 랜섬이 하던 말 중에 그를 미친 개라 불렀던 게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어떤 강박관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듯이 자이 라벤던 역시 마찬가지죠."
마하라자는 제방 위 맨땅에다. 올리비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는 자신은 그 반대편 쪽에 앉았다.
"왜 그토록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거죠.?"
올리비아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갑자기 입안이 뒤말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말했다.
"그건 그와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에요. 그를 만난 순간 뭔가 색다른 느낌을 받았거든요. 전 라벤던 씨 같은 사람은 많이 만나 보질 못했어요."
"많이요?"
그는 웃었다. 그의 목소리 톤을 통해 올리비아는 자이 라벤던의 이야기가 끝이 날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그녀 마음속에 담긴 숱한 의문과 질문의 파도를 애써 삼킨 채 그녀는 평범한 화제로 돌아왔다.
대화를 통해 올리비아는 마하라자가 밝고 고상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가 누구와 어울리더라도 좋은 분위기를 이룰 것이라 느꼈다.
"올리비아가 잘 보살펴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주님"
그들이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오자, 죠수아 경이 즉시 그들과 합류했다.
"올리비아는 아주 총명하죠 제 생각엔 영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판단되는데요 이 아이의 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모든 면에서 솔직하거든요."
"예, 그래요 난 올리비아 양의 그런 솔직하고 신선한 면에 매료되었습니다."
마하라자가 시원스레 동의했다.
"이런 시간을 갖게 되어 정말 즐거웠어요."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겐 그렇게 편한 시간만은 아니었어요. 전에 한번도 영주님 같은 분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거든요. 제가 좀 더 정보나 지식을 갖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당신을 초대하는 영광을 갖고 싶은데요."
그가 죠수아 경에게 몸을 돌렸다.
"물론 당신과 브리짓트 부인, 그리고 그 발랄한 에스텔 아가씨도 함께요."
일요일 이른 아침
화이트 타운을 가로지르며 위치해서 도시 속의 공터로 불리우는 마이덤공원은 아침 일찍부터 승마자와 산책자, 그리고 보행자들로 가득 차서 매우 활기찬 모습이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집안이 혼잡해지기 전에 일어나 승마를 위해 집을 나섰다. 에스텔의 생일 파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브리짓트 부인과 가족, 하인 모두는 지난 밤의 고된 노동으로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를 틈타 올리비아는 쟈스민을타고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장미빛 햇살 속에서 저수지와 산보길을 지나자 곧 나타난장엄하고 우아한 건물들은 올리비아를 언제나처럼 한껏 매료시켰다. 고향에 대한 끝없는 향수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인도가 너무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미신의 존재와 놀라운 고대의 지혜, 신사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 잔인함과 동정심의 이상한 혼합체를 항시 볼 수 있었다.
흔히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곳은 모순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이상한질병, 무더운 기후가 가져오는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에 삶은자주 대단히 비극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이곳 인도가봄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풍요.롭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젖곤 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쉬르퍼 시장은 붐비고 있었다. 비스듬한 천막 아래빽빽이 들어선 상점들이 진열해 놓은 대바구니, 청동으로 만들어진 우상들, 도자기와 주방용품들, 특별하게 전시된 신선한 꽃들은 올리비아를 충분히 들뜨게 했다.
그녀는 큰 힌두교 사원의 반대편에서 말을 내려, 길거리 한쪽에서 밀가루 반죽에 버터를 발라 커다.란 나무 탁자 위에 진열해 놓고 있는 한 과자가게 앞에 섰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인도 과자를 맛본 적이 없었기에 그 과자를 먹고 싶다.는 유혹과 싸워야 했다.
"철부지 아가씨! 내가 당신이라면 말이오, 기꺼이 한번 맛보겠소 그것들은 먹기에 더할 나위없이 안전한 거요."
올리비아는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녀에게 던져온 갑작스런 충고에 놀라아무런 대꾸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낯선 얼굴,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친숙한 낮은 음색의 목소리, 날카로운 눈동자, 자이 라벤던이었다.
"난 그 과자들을 보장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 양"
그녀의 침묵을 무시한 채 그는 돌아서서 그 과자 장사와 몇 마디 말을나누더니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진 과자 묶음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녀의팔꿈치를 가볍게 잡고 쟈스민의 고삐를 풀도록 했다.
"따라와요. 내가 당신이 편안히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해 드릴 테니"
올리비아는 아무 말없이 온순하게 거리를 가로질러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검은색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분별력을 되찾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거죠?"
문의 빗장을 벗기면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 집으로 가는 겁니다."
곧 그녀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당신은 이 근처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아무 대꾸도 없이, 입가의 미소도 지우지 않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 그녀는 더이상 묻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세련되게 꾸며진 안뜰을 지나자 서늘한 분수가 눈에 들어왔고, 아치형의베란다.를 지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요.?"
이층 발코니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정말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부딪쳐오는 그의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그들 사이에이미 전에 한번 흐른 바 있는 서먹함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조각 작품이그렇듯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해서 도려낸 듯한 그의 입술에 또다시 희미한미소가 나타났다.
"올리비아 양 한 가지 우스운 게 있어요. 우리가 지난번 우연히만났을 때, 당신은 대단히 훌륭하게 자기방어를 했는데 지금 당신은 용기를 어디다. 내버리고 이렇게 내게 두려움을 느끼는 거죠?"
그가 내뱉듯이 말을 남기곤 느린 걸음걸이로 먼저 들어갔고 올리비아는선택의 여지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의 그녀에 대한 예의범절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느꼈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이었기에 그녀는 다.소 흥분이 되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크고 넓은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가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혹시 의자가 더 좋겠습니까? 내가 듣기에 서양 여자들은 바닥에 앉는 것을 원시적이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던데"
"고마워요. 전 바닥에도 곧잘 앉아요."
"모든 서양 여성이 한결같이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보군요."
그의 비아냥거림이 순간 괴롭힘으로 느껴졌다. 그가 태연히 다.리를 편하게 쭉 뻗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침식사는 했나요.?"
"아뇨"
"잘됐군요."
그의 얼굴을 주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계속 바라보았다.
"당신은 제가 이모부와 이모에게 전한 당신의 안부가 그들에게 어떤 동요를 일으켰을까 걱정하지 않나요.?"
"안부를 보낸 확실한 이유가 그건데요.?"
그의 순수한 고백은 그녀를 더욱 괴롭게 했다.
"당신은 그것이 나에 대한 더러운 속임수나 야비한 전갈이라는 생각이들지 않나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더러운 속임수란 미국에서조차 생활의 일부인것입니다."
"난 달라요.! 네 이모부님에 대한 당신의 경쟁심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이 날 이용할 권리는 없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야비한 수단에 대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해요.!"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신사가 되기 위해 어떤 구속을 받길 원하진 않아요."
"당신은 정말 당신의 그 악의에 찬 평판을 즐기고 계신가요.? 정말 그래요.? 난 그게 그저 유치하고 심술궂은 짓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요."
"심술궂음은 때론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요."
그의 가벼운 말투 안에 그녀를 향한 감정의 편린들이 꾸밈없이 드러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 대한 그런 악의에 찬 평판을 믿지 않으므로, 아마 적어도 내 죄를 용서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요."
그의 얼굴에서 어느새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굳어진 강한 윤곽만이 남아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지금껏의 매력과 마찬가지로 올리비아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잃게 했다.
"라벤던 씨 솔직히 전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녀가 일부러 오만한 위엄을 갖추고 말하자 그가 즉시 반문했다.
"하지만 지난 밤 마하라자에게 털어 놓은 나에 대한 당신의 폭넓은 의구심으로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아마 당신은 지난번보다.는 지금이 나에대해 한층 더 잘 아는 것이 아닐까요.?"
올리비아는 상당한 자제력으로 놀라움을 참았다. 난 겨우 몇 시간 전에마하라자를 만났을 뿐이데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얘기들을 이미 들었단 말인가? 그녀는 이 고장에서 화살처럼 빠르게 퍼지는 소문의 속도에존경심마저 일었다.
"마하라자 영주가 당신에게 그러던가요.?"
"마하라자는 신사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소. 난 다른 정보통을가지고 있소"
그을린 얼굴이지만 다.소 창백한 표정, 그러면서도 무엇이든지 꿰뚫을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차가운 눈, 넓은 이마와 그 밑에 우뚝 자리잡고있는 매부리코, 이 모든 외모는 올리비아에게 그가 귀족처럼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옷차림이지만 그의 외모는 입은옷에 따라 매번 달라질 듯이 보였다.
라벤던이 그의 허리띠에 달려 있는 시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오후에 항해 예정이던 선박 중에 하나가 문제가 생겨 곧 나가 봐야겠는데요."
그의 긴급한 출발에 대해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실망을 느꼈다. 그때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난 '곧'이라고 말했지, '지금'이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아직아침식사를 위한 시간은 있어요."
그가 손가락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눈꺼풀을 반 정도 찡그리면서 불쑥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죠?"
"두려워한다구요.? 당신은 확실히 자만에 빠져 있군요.!"
"그럼 됐어요. 아무 생각없이 한 말입니다. 미안해요. 우리 중 누구도 이 만남을 당신의 친척들에게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나 역시 더이상전할 안부도 없어요."
그는 자신의 조소나 즐거움, 비난과 분노 등의 감정들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다소 안심이 되는군요."
올리비아도 빈정거리며 맞장구쳤다. 잠시 침묵 그러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응접실 구석을 둘러보며 가볍게 물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올리비아는 '당신은 차 수출업자지요?'라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확실하게 다.른 사람에게서 그의 정체에 대해 듣고 있다는 것을알려 주기 때문이었다.
"지금 알려진 바로는 건달, 도덕적 타락자, 바람둥이, 무법의 악당 등이죠 하지만 때에 따라 변하죠"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이 말들은 언젠가 이모부가 사용한 묘사와 흡사한 것들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불려지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즐겁나요?"
"자랑이나 즐거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확실한 것은 그런것들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라는거죠."
"그럼 당신과 관계있는 것은 무엇이죠.?"
라벤던은 어느 쪽이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소 난처해 하는 듯 보였지만 곧 그의 시선은 냉랭해졌다.
"아무것도 없어요."
미소가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공허한 듯이 보였다.
"아무것도 나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순간 올리비아는 어리석게도 그를 자극할 수 있는 어떤 것, 그 무엇을말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완전히 다.른 어조로 말했다.
"난 버커스트 마님이 이번만은 아들의 선택에 찬성할 것을 압니다. 그분은 대단한 정력과 활력을 갖춘 여성이죠."
"버커스트 마님이라구요?"
"프레디 선생의 어머니 말이오 그분은 돈과 명예, 그리고 프레디를 위한 단거리 출전선수죠. 나는 당신이 그 집에서 많은 경쟁의 연속을 발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에 비해, 나의 일상사에 관해 당신이그토록 많이 알고 있는 점이 놀랍군요."
그녀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는 것인지, 아니면 흥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가볍게 웃으며 한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당신이 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알려고 애를 쓰지 않았기 때문일 거요. 나에 관해 무엇이든 알고 싶다.면 내게 왜묻지 않나요?"
올리비아는 그의 여전한 어처구니없는 자만이 싫어졌다.
"내가 물었다.면, 당신이 얘기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어쨌든 물어볼 수는 있어요."
그녀는 그의 대꾸에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식사 시간이 되었다. 한 젊은 여인이 큰 은접시를 가지고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더 많은 하인들이 연이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올리비아의 시선은 곧 그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검고 윤이 나는 눈동자가 백단향처럼 매끄러운 피부에 박혀 있었다. 큰 귀에 자연적인 우아함을지닌 그 여인은 날씬하고 관능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으며, 올리비아 옆을스쳐가는 그녀의 몸동작 속에서 장미를 생각나게 하는 강한 향취가 풍겨왔다. 가벼운 오한이 올리비아의 몸에 전해져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여인이 자이 라벤던의 정부(情婦)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개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흐트러짐없이 말했다.
"당신이 본 것처럼 수자타는 최고의 요.리사죠.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가진 여인이기도 하죠."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자, 여인이 가볍게 미소지었지만 단지 그에게만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아가 곁눈질로 슬쩍 본 그녀의 모습은 수줍음과 요염이었지 사랑과 동경은 아니었다.
그녀가 탁자에 마지막 접시를 놓기 위해 몸을 굽힐 때 그녀의 얼굴을가리고 있는 얇은 차드르가 벗겨져 미끄러져서 가슴에 고정되었다. 당황함이나 주저함없이 라벤던은 차드르를 원래의 위치로 조정해 주기 위해서앞으로 다.가갔다. 그들 사이에 눈길이 오가고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빠른 행동, 빠르게 주고받는 눈길이었지만 올리비아에게는 어느 정도그들이 뚜렷한 관능적 감정을 주고받은 인상이어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주었다. 미소가 아직 그녀의 붉은 입술 위에 남아있었다. 수자타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한번도 올리비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곧 식사를 시작했고, 라벤던은 수자타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없이 식사 코스와 그 준비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이어 일에 대한 얘기만했고, 올리비아는 넋이 빠진 채로 듣고 있을 뿐 실상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가 바로 라벤던의 가정과 침대를 공유하는 여자인가? 그런상상이 그녀의 머리를 파고들었고, 그것이 그녀는 까닭 모르게 싫었다.
"뜨거울 때 드세요. 자레비스는 식으면 맛이 없어요."
그녀는 곧 현실로 돌아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웃으려 애쓰며 말했다.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전 단지 이곳이 어떤 곳인가 궁금했을 뿐인데요."
"그 수고는 내가 한 게 아니오 난 그저 주문만 했으니까 수자타는 손님을 기쁘게 하길 좋아합니다."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온 자신의 분별없는 결정을 후회했지만 이미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쨌든 음식은 맛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생각의 파도를 억지로 떨치며 계속 음식에 손을 내밀었다.
"오후에, 당신의 배는 중국으로 항해하나요?"
"아니오 난 더이상 중국과 교역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은 가장 큰 부를 약속해 주지 않나요?"
"난 이미 부자이고, 더이상은 필요없어요."
"사업에는 분명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가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다.른 것이에요. 내게 있어서 돈은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럼 목적이 뭐죠.?"
힐끗 그를 보았을 때, 갑자기 그가 뭔가 불편해 한다는 게 느껴졌다.그날 밤 강가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 듯했다.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근본적으로, 생존은 절대적인 환경에서 보장되는 겁니다."
올리비아는 일어서서 마하라자가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폭로하기를 거절했던 그의 '강박관념'을 떠올리며 다시금 놀랐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양미간을 좁히며 불쑥 말을 뱉었다.
"내게 말해 줘요. 당신의 이모부가 마하라자 영주에게 뇌물을 바친 게석탄 때문인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침착하고 온화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비록 내가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도없구요. 그분이 왜 석탄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했죠.?"
"그가 뇌물을 주건 안 주건 석탄을 얻을 수는 없을 거요. 당신 이모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판매를 막기 위해 마하라자와의 우정을 이용하겠다.는 그런 뜻인가요?당신 선박을 위한 석탄의 독점을 위해서?"
"아! 이제야 당신이 나에 관해 잘 알게 되었군요.!"
올리비아의 깨달음은 그에게 큰 만족을 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특별한 논쟁을 발전시키길 원치 않았다. 그녀를 당혹케 하는 것은 라벤던의 직업적 윤리관이 아니고 남자들이 갖는 그 저급한 이기심, 그리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모순되고, 그렇게 고집불통이고, 자기 의견에 대해 책임감이 없는 사람을 결코 만난 기억이 없다. 그녀는 수많은 질문을하고 싶었지만 하인이 손 씻을 물을 갖고 들어와 식탁을 치웠기에 기회를놓쳤다.
"저 때문에 아침식사가 즐겁지 못했겠네요."
"난 즐거웠어요. 난 당신처럼 일찍 일어나 승마와 운동하기를 즐기죠.그건 우리가 공통된 취미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잠시 말이 중단되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
그의 이야기가 끊긴 순간은 잠시였지만 언급되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찬 올리비아는 입이 바짝 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주시하는 그의 얼굴은 알 수 없는어떤 검정으로 일그러졌다.
"자, 우리 이제 서로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에 대한 막을 내리기로 합시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와요. 우리는 이제 나가야 해요. 안 그러면 내 배가 때를 놓치게되어 경쟁자들이 기뻐하게 될 테니 그 배는 던디에서 정시에 용선계약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약을 취소당할 테니까요."
그녀는 일어나면서 얼른 그로부터 팔을 뺐다. 그런 미미한 육체적 접촉조차도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재빨리 승마용 장화를 신으며 말했다.
"아침식사 대접에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당신은 아마 어디에도 없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즐겼을 겁니다."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다는 저의 감사와 평가를 수자타에게 전해 주세요."
"그녀는 감사를 기대하지 않아요. 그것이 그녀의 기쁨이니까"
그는 성급히 돌아서서 방을 걸어 나갔다. 올리비아는 천천히 뒤를 따라가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그는 몇 살일까? 단정하기는 불가능했지만 그의 몸에 충만한 활력과 에너지는 젊음의 한복판에 있는 남성의 절정기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 혹은 그의 눈빛 속에 숨어 있어 얼핏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는 세상의 피곤함을 간신히 숨기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나이이상의 세파를 헤치며 살아온 듯한 느낌을 안겨 줘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정원에서 그녀는 쟈스민 곁에 함께 있는 그의 애마를 보며 감탄했다.붉은 눈에 말꼬리를 사납게 흔드는 그 말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완벽한것이었다.
"이 말은 너무 사납고 훈련이 안 돼서 당신에게 매우 위험하겠는데요."
"그렇긴 해요. 그래서 내 두뇌가 필요한 거죠."
라벤던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게 애마의 이마를 애무하며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는데, 그것은 마치 인간적 친교를 맺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말에게 뭐라고 했나요?"
"사람과 말 사이에 한 약속은 신성한 것이죠. 그걸 묻는 것은 아주 무례한 일이에요. 이 말의 이름은 '사탄'인데, 가끔씩 이 녀석은 정말로 나쁜 짐승이 되죠. 그건 아마 자신의 이름에 대한 평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일 거예요."
"하지만 주인만큼은 무례하지 않을 거예요."
라벤던은 올리비아의 가혹한 말에 아주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작은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래요. 분명 그럴 겁니다."
그가 한동안 계속 웃다. 다시 말했다.
"나의 하인 바하도르가 멀찍이서 당신을 집까지 호위할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필요합니다."
그는 확고하게 즉시 복종을 요.구하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난 당신이 미국인이기에 도전과 독립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지금 내 행동은 그저 예의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세요."
올리비아는 아무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라벤던은 말이 떠나기 전에 올리비아가 말에 잘 앉았는지를 확인했다. 헤어지는 순간에, 올리비아는 아까부터 계속 입 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기어이 던졌다.
"당신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한 답례로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어요?"
조심스러움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대답만은 흔쾌했다.
"무엇이든지!"
"당신은 어느 정도는 유럽인의 피를 이어받았죠.? 당신이 부분적으로 속해 있는 인종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그녀는 그가 답을 해줄지가 의심스러웠다. 잠시 동안 그의 턱은 고정됐고 눈빛은 어두웠지만 곧 답을 했다.
"내가 그 인종에 부분적으로 속해 있기 때문에 미워할 권리가 있고, 그이유는"
잠시 말을 멈춘 동안, 그의 눈이 다시 냉랭해졌다.
"미국에서 가축의 엉덩이에 낙인을 찍듯, 인도에서 영국인의 사생아는 영원히 그 얼굴에 낙인이 찍힌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탄을 타고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도로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대답 안에 깃든 극도의 조소에 떨며 그녀는 잠시 움직이지 못했지만 바하도르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고 쟈스민을 앞으로 재촉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운명의 순간들을 규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올리비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이 라벤던과의 예기치못한 두 번째 만남이 자신을 매우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명백히 매혹당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지조차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 라벤던 그는 거칠고 고집세고 거만하며 증오와 냉소로 뒤틀려 있는남자였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그 순간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기 전에 비열한 행위를 과시하는데 있어 아무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올리비아를 사로잡았다. 몇 사람을 빼놓고는 한결같이 그를비난하고 있는데도 그의 영상은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그녀를 사로잡고있는 것이다.
안 돼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를 질책하고 책망하며 그를 거부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심적 동요.와 정신적 메마름이 어디서 왜 왔었는가를 생각하노라니 그녀는 진실로 그를 멀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시금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 모든 방향 감각의 상실 원인은 자이 라벤던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원했지만 이제 되살아난 외로움, 과거로부터의 이상한 소외감 때문에 그녀는 우연이든 아니든 다시는 자이 라벤던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브리짓트 이모님이 포트마우드에서 입항한 새로운 배와 그 배의 승객중 프레디 버커스트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올리비아와 에스텔에게 알리며 그곳으로 저녁에 드라이브 나갈 것을 권했다. 그건 바라던 일 중에하나였기에, 올리비아는 곧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갈 것을 결정했다.올리비아와 에스텔은 가끔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을 동반해 산책길에올랐지만 오늘 저녁에는 브리짓트 부인도 죠수아 경도 모두 선약이 있었다.
"잘됐어"
에스텔은 부모님의 부재가 기쁜 듯 말했다.
"언니, 우리 이제 그의 배를 보러 가자 그의 쾌속선 중의 하나가 오늘입항했거든"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이 라벤던을 피하기로 한 그녀의결정은 이렇듯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무의식적인흥분조차 느끼고 있었다.
"그 쾌속선은 홍콩에서 뉴욕까지 104일이 걸렸고, 뉴욕에서 캔턴까지겨우 81일밖에 안 걸렸어 이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야"
확실히 그것은 믿기 힘든 위업이었다. 에스텔의 왕성한 관심은 한층 더발전해 나갔다.
"수잔이 그러는데"
그녀는 마차에서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사람이 원주민 무희 출신의 아름다.운 정부에게 줄 드레스를 새로맞췄대, 글쎄"
"에스텔 난 네가 그런 값싼 소문들을 듣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올리비아의 비난은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웠다.
"값싼 것들이라구? 만일 내가 그런 소문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배울 수 있겠어, 언니?"
"네가 정말 세상 일을 배우고 싶다.면 책과 신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
"난 그런 일을 얘기하는 게 아냐, 언니 난 진짜 뉴스거리를 말하는 거야 어쨌든 수잔 어머니의 재단사가 그러는데 그는 많은 물건들을 진품고르듯 샀다는 거야"
"에스텔, 마차를 세우고 걷는 게 어떨까? 그냥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너무 좋은 저녁인데"
그녀는 에스텔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도로로 내려섰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에스텔의 어리석은 수다.가 불유쾌한 상상을 한번 더 불러일으킨 것이다. 수자타의 육감적인 육체, 라벤던의 쾌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녁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서서히 붉어지는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은 마치 붉은 홍학처럼 보였다. 산책길과 정원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기 좀 봐, 저 거대한 배!"
에스텔이 갑자기 올리비아의 팔에 매달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이 가리키는 지점을 보며 범선을 찾으려고 애썼다. 에스텔이 건네 준 오페라 안경에 초점을 맞출 때 올리비아의 눈에 거대한 산 같은 배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수선한 선박의 틈바구니에 세 개의 큰 돛대를 지닌 쾌속선이 거대함과 우아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어떤 다른 선박보다. 더 높게 우뚝 서 있었다. 올리비아가 물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뱃머리의 기묘한 특색이 저 배의 상징이니?"
"응 그건 '트리슐'이라고 하는 삼지창이야 이교도의 신神인 시바가사용한 것이라고 크리스톤이 말했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지?"
올리비아는 지난 번에 지나친 몇몇 힌두 사원 위에서 본 같은 형태의삼지창을 떠올리며 물었다.
"누가 알겠어?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것들을"
에스텔이 쾌속선 위를 살펴보기 위해 한참 두리번거리다. 무엇을 발견한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오, 저 사람!'하고 내뱉었다.
에스텔의 떨림은 곧 그녀에게도 전염되었다. 즉시 환상의 불꽃이 올리비아의 마음에 솟구쳤다. 쾌속선의 갑판 위에서 어딘가를 보고 있는 자이라벤던이 보였던 것이다.
"난 저 사람에 대해 또다른 것을 알았어"
에스텔의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환상을 방해했다. 그녀 자신의 유치함에당황하며, 그에 관한 또다른 소문이 알고 싶어 에스텔을 부추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큰소리로 묻고 말았다.
"무엇을?"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사람은 사생아(私生兒)래 그럼 어머니와아버지가 결혼도 하지 않고 그를 낳았다는 건데, 두려운 일이지 않아?"
그 소식은 올리비아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유럽인종과 아시아인종간의결합으로 태어난 유라시안들은 그 종족 자체가 대부분 서출의 형태로 태어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사생아들은 죄악의 씨앗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어"
"사생아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어 부정행위를 한 것은 우리 인간이지 신이 아니야 그런데 넌 누가 그의 아버지인지를 알고 있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의 아버지는 주정뱅이 영국인 선원이거나, 적어도 이 항구에 배를 대는 백인이었을 거래 어머니는 하녀 출신인데,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고는 도망쳤대"
"그의 아버지는 그후 돌아오지 않았니?"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드리몬드 부인의 말로는 자이 라벤던이 제일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래"
갑자기 말을 끊고 에스텔은 뭔가 두렵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느끼며 불쑥 내뱉었다.
"집에서 이모님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싫어하신다.면 나도 거론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게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모두 그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니까 그렇게 두려워하지 마, 에스텔!"
"하지만 난 그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언니가 물어 봐서 모든 것을 얘기했을 뿐이야"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는 억지로 그녀 마음속에 뒹구는 다른 모든 질문을 누르며 에스텔을 달래곤 막막한 심정으로 부두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이리 와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방파제에 무슨 소동이 벌어졌나 가 보자"
부두는 무질서했다. 이제 막 도착한 유럽인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왁자지껄한 소음 사이로 올리비아와 에스텔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기막힌 우연이군요. 오늘 우리 어머니가 도착하셨는데,며칠 후 두 분은 우리와 함께 점심을 하셔야 할 겁니다."
프레디 버커스트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를 본 순간, 까닭모를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올리비아는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이번이 어머님의 첫 번째 인도 방문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 아버님이 대영제국을 위해 일할 때 몇 해 동안 사셨죠. 이 저주 받은 나라를 마다. 않고 받아들이신 강한 분이시죠."
"언니는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어요., 버커스트 씨"
"정말입니까?"
그가 놀라운 듯 물었다.
"그럼, 두 분 다 다음 일요일에 톨리 클럽에서 있을 파티에 저와 함께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곳에서는 열광적인 폴로 게임이 있어요. 어머님께 말씀드려 부리짓트 부인에게도 초청의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올리비아는 화가 났지만 에스텔은 아무렇지 않은 둣 말했다.
"폴로 게임? 그건 바로 어제 올리비아 언니가 영국인들이 즐기는 야만적인 게임이라고 불평한 경기죠., 아마 하지만 설명을 좀 해주시면 언니도 그 경기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가 기쁨으로 얼굴이 자주빛이 되었다.
"경기의 세부사항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쁨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올리비아 양! 다음 일요일 오찬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잠깐만요."
올리비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에스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샤 로테를 봤어요. 저쪽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프레디 버커스트의 흠모하는 시선에 갇혀 올리비아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 오랫동안 그날 밤 당신을 홀로 둔 실수를 사과하고 싶었어요. 제가사과 편지를 썼어야 했는데 당신은 그날 저의 행동들을 무척 싫어하고 계시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전 다. 잊었는 걸요."
"그래요? 정말입니까? 난 당신이 날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랬어요."
프레디는 마치 천국이 열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난 결코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 자리를 빠져 나가기 위해 미친 듯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허사였다.
"저기, 저의 어머니가 보이는군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러면 일요일에 전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군요."
그가 급히 자리를 떴다.
톨리 클럽에서의 점심에 초대하는 편지가 브리짓트 부인에게 정식으로도착했다. 이모의 호들갑에 올리비아는 절망적인 느낌이 되었고, 그녀는버커스트 부인이 절대적으로 자신을 싫어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날 밤에 침실에서 브리짓트 부인은 그의 남편을 붙잡고 한바탕 수다.를 늘어 놓았다.
"여보 난 당신이 버커스트 가家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올리비아가 프레디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죠수아 경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버커스트는 걸어다.니는 바보의 표본이오 게다.가 내 간섭 때문에 그아이가 가질 새로울 만한 편견도 없고"
"좋아요. 저도 프레디가 지적(知的)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시인해요.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그가 그렇지 못한 것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는 여왕처럼 살 수 있다.구요."
"올리비아도 바보 같은 왕과 함께 사는 여왕이 되길 원하지는 않을 거요. 게다가 만일 내가 나의 딸을 위해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면, 질녀에게도 마찬가지인 거요. 난 어찌 되었든지 간에 아둔한 버커스트 가와동족이 되는 게 싫소."
"올리비아에게는 훌륭한 결혼이 필요해요. 난 그애를 말죽을 끓이는 카우보이와 결혼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려 보낼 수는 없어요. 올리비아는그애 아빠가 머리에 채워 준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아닌, 영국에서 버젓한사람들과 어울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해요. 당신은 그애의 생각을 모르나요?"
"여보, 그애를 그냥 내버려둬요.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면 시키지말아요. 올리비아는 기운을 내고 있고, 머리도 좋은 애야 그애가 우리와함께 있는 동안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줘요. 그애가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애의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 보냅시다. 그앤 그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그애는 영국이 아닌 신세계 태생이야 그걸 우선 받아들이고 시간이 되면 그애를 보내 줍시다."
"그애를 돌려 보낸다.구요? 진정이에요., 여보?"
"진정이오, 만일 그애가 원한다면"
"그애 같은 나이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몰라요. 사라가 샘과 도망쳤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나요? 그앤 배고픔과 고통, 그리고 무서운 질병을 통해 그걸 알았어요."
"사라는 샘과 행복했어, 당신의 관점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지는 말아요., 브리짓트 그것은 훌륭한 결혼이었소 가난했지만 훌륭했소 샘은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어"
갑자기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보, 난 이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요. 난 그렇게 해야만 해요. 난 사라에게 큰 상처를 줬어요. 만일 내가 없었으면 그앤 아직 살아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죠수아 경은 그녀의갑작스런 감정의 표출에 놀라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았다.
"자, 브리짓트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제 사라는 이미 죽었소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지는 말아요. 올리비아를 부유한 얼간이와 결혼시킨다고 해서 사라를살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소"
"그건 알아요. 하지만 난 적어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여보 만약 내가 사라의 결혼을 그토록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그앤 문명화된 안락한 런던에서 살았을 거고, 올리비아도 어엿한 귀족 가문의 숙녀로 자랐을 거예요."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야, 브리짓트 샘은 사라를 만나기 전부터 영국을 떠날 생각을 갖고 있었어 내가 그를 런던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말했었어 사라는 올리비아보다. 더 물질적 풍요.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녀는어디를 가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 샘을 따르는 게 행복이라고 믿고 있었어"
그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는 이상을 꿈꾸는 가난한 개혁운동자였지만 올리비아에게는 감탄스러울 만한 교육을 시켰어"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며 브리짓트가 말했다.
"난 사라를 사랑해요. 난 그애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내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내가 그애의 영혼과 더불어평안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리비아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적어도 난 올리비아에게 평생 잊지 못할 결혼식을 해주고 싶어요. 그게 사라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같아요."
"결혼을 원하지 않는 젊은 여자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어 브리짓트!"
그가 한숨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그애에게 강요를 한다구요?"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난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올리비아가 순전히 자신이 원해서 프레디와결혼하게 하려는 거예요."
죠수아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머리를 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브리짓트 부인의얼굴엔 공허가 가득했다.
"그가 그애와 만날 계획을 했던 것일까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올리비아는 그날 밤 그저 우연히 밖에 나갔던 것뿐이야!"
"자이는 악마의 화신이에요., 여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그는 하수구의 쥐새끼이고 분별력 없는 부랑아에 불과해, 브리짓트"
그는 분명히 화가 났다. 브리짓트의 붉은색 입술을 제외하고 그녀 얼굴에는 혈색도 움직임도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요. 당신은 그때 신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를 죽였어야 했어요.!"
그가 굳게 말했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거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느날 그가 모든 걸 폭로하면 어떻게 하죠.? 그때 당신의 나약해질 모습을 어떻게"
그는 화가 나서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거칠게 그녀를 떼어 놓고 의자 위에 있는 옷을 움켜잡은 그는 탈의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녀의두 눈에는 두려움과 증오가 섞여 있었다.
제2장 돌아오지 않는 시간
올리비아의 벵갈 행 여행은 무덥고 지루한 것이긴 했지만 캘커타에서외지로 나가는 최초의 경험이었기에 마음은 지극히 설레이고 있었다.
사실 캘커타는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분위기와 전역에 퍼져 있는 동인도회사의 영향력 등으로 짙은 유럽적 색채를 띄고 있어서 그녀에게 인도의향토적 특성을 알게 하기엔 부족한 것이었다.
지금 마차의 창밖으로 전개되는 시골 풍경은, 비록 그것이 얼핏 본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경이를 안겨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열대지방 특유의 강우기인 지금, 벵갈로 가는 길은 짙푸른 초원처럼 논이끝없이 펼쳐져 있고 간간이 야자수잎으로 엮은 지붕을 한 초가집이 한가로이 서 있었다.
올리비아 일행을 실은 마차는 무장한 승마 시종(侍從)까지 거느린 대행렬이었는데 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논에서 벼를 심고 있는 농부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초대한 장본인인 마하라자 영주가 기거하는 킬티나갈 궁전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녀의 가슴은 더욱 설레었다. 그녀가궁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명령을 받은 듯 제복을 입은 보초들이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그녀를 영접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궁전이었다. 그녀가 지나쳐온 농촌의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그 궁전은 작은 폭포를 이룬 것 같은 꽃들과 보리수 등으로 잘 손질된 화원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동화 속의 천국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차가 흰 대리석으로 된 현관 계단에 닿자, 시종들에 둘러싸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마하라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킬티나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올리비아 오렌키 양"
그가 올리비아가 마차에서 편안히 내릴 수 있도록 친히 다가서며 손을내밀었다. 그녀는 이런 지나친 격식과 예의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해 예의를 차렸다.
"어서 와요., 올리비아 양 당신을 누구보다. 먼저 제 아내 킨잘에게로모셔야겠어요. 그녀는 지금 당신을 기다.리느라 며칠 전부터 조바심을 치고 있어요. 아내는 사실 영어회화 연습을 위해 선생을 구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물론 그것만이 올리비아 양을 기다.리는 모든 이유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벵갈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여성은 많지 않은가요?"
"제 아내는 영국 여인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남자들 앞에 나타나지도 않구요."
이런 체계와 관습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에 당황해 하며, 그녀는 이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모는 프레디 버커스트의 식사 초대에 상당히 흥분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마하라자 영주의 초대장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 초대장엔 올리비아만을 특별히 초대하는 글이 간단히 적혀 있었는데 더욱 기이한 것은 초대날짜가 프레디의 날짜와 겹쳐서 이모에게는 상심과 고민을, 그리고 올리비아에겐 환희의 탈출구를 제공했던 것이다.
죠수아 경이 선뜻 마하라자 영주의 초대에 먼저 응해야 한다고 결정함으로써 버커스트 부인을 만나고자 하는 이모의 열렬한 희망을 무산시켜버렸다. 올리비아도 없이 이모와 에스텔만 초대에 응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이모는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원주민 여자들, 특히나 상류계급의 여자들은 지독한 권태에 빠져 있단다. 방구석에 처박힌 채 얼빠진 공상이나 하든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수다를 떠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라고나 할까"
영주의 아내 킨잘이 사는 궁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키가 크고 잎이 우거진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넓직하고 햇볕이 잘 드는 발코니에서서 올리비아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가 나타나자 서둘러 달려 나왔다.
"불편한 길을 달려오느라 장시간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휴식이 필요할텐데"
"아니에요, 목욕 정도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무더운 날씨에 땀을좀 흘린 것 말고는 별로 피곤하지 않아요."
킨잘은 30세 중반 정도에 좀 마른 체격에다 적당한 키, 거무스름하지만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빈틈없고 지적으로 보이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가 구사하는 영어는 영주만큼은 유창하지 못했지만 비교적 정확해서, 올리비아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잠시 동안의 한담이 끝난후에, 영주가 업무를 이유로 저녁식사를 약속하고는 자리를 뜨자 실내에는 두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할 얘기는 많은 것 같아요., 올리비아양"
그녀가 손짓으로 하녀를 부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숙소는 제 방의 바로 옆에 마련해 놨어요. 목욕물을 데워 놓았을 거예요. 당신이 이 집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제가 하녀와 필요한 몇 사람의 하인을 대기시켜 놓았으니 언제든 일을 시키도록 하세요."
올리비아는 이런 번거로움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일단 그들의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도의 전통 풍습이 손님에 대해이렇게 관대하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면 그 법도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올리비아를 위해 마련된 숙소는 향기로운 식물들로 채워져 있는 안뜰과접해 있어 꽤 매력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장소였다. 백색 대리석 벽과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천장, 아치형 창을 가진 실내의 곳곳에는 얼핏 보아도 세심한 배려가 깃든 흔적이 역력했다.
올리비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장미잎으로 향기를 낸 따뜻한물이 채워진 걸 보고는 자신에 대한 환영이 기대 이상이라는 사실에 두렵고 당황스러워졌다. 여성 취향의 화려한 목욕가운과 비단 슬리퍼 등을 보며 그녀는 이 모든 따뜻한 배려가 그녀 자신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모부의 대리인으로서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목욕 후에, 그녀는 킨잘의 거실로 안내되어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다시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이 제 집처럼 느껴져서 참 편안해요."
올리비아가 킨잘의 배려에 감사하며 서두를 꺼내곤, 여행 중에 보았던 광경들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런 사소한 질문에도 정성을 다해 답변해 주는 킨잘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날카로우면서도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대부분의 벵갈인들처럼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녀는 특히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올리비아를무척 편하게 해주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지금 킨잘에 관해 관찰을 하듯이 그녀 역시 올리비아를 세심히 관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킨잘은 올리비아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라도 꿰뚫어보겠다는 듯이 그 큰 눈동자로 세심히 올리비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하녀 하나가 점심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왔다. 킨잘은이웃한 방으로 그녀를 안내하며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부 인도식 식사를 준비했어요. 혹시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개의치 말고 말해 주세요."
"아뇨, 전 뭐든지 잘 먹어요."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이 라벤던과 우연히 함께 했던 인도식 아침식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낮은 의자의 쿠션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전통적인 자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킨잘의 세심한 설명에 따라 코스마다구분해서 사용하는 개인용 그릇을 이용해 인도 요.리의 재미를 즐겼다.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발코니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미국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기를 잘 다.룬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우린 사냥을 위해서만 무기를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사막이나 광산촌같은 무법지대를 여행하면서 무기없이 떠나는 미국인은 거의 없지요. 농장들이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도둑떼들의 위협도 있구요."
"소도둑이라고요?"
"예 밤에 소를 지키지 않으면 감쪽같이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빠는 제게 어릴 적부터 사격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의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인도 역시 우리 나름의 무법지대가 있거든요.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권총 다.루는 법을 배웠어요."
올리비아는 권총을 쥘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섬세하고 작은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사냥이나 사격이 남자만의 영역으로 엄격히 구분되는 인도에서 왕족의 후예가 사격을 배웠다는 것은 의외였다. 더구나킨잘은 자신이 권총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 이상의 긍지를 갖고있는 듯했다.
"인도 역사 속에는, 침략자들에게 남편을 잃은 왕후나 공주들이 그들과맞서 싸우기 위해 차드르를 벗어 던지고 전쟁터로 달려나간 경우가 아주많아요."
심지어 섬약하게까지 보이는 킨잘이 불의에 대항해 몸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올리비아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섬세한 얼굴의 어디에그런 단호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올리비아는 그것이 어쩌면 인도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심에서 나오는 힘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짐작만 할 뿐이었다.
"자, 이제 당신의 집안에 대해 얘기해 줘요. 올리비아 양, 전 당신의 집안이 농사를 지어 꽤 성공한 것으로 들었는데요."
"사실 미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땅이 있어요. 저의집의 경우엔 소를 기르죠. 최근 들여온 번식력이 강한 버팔로란 이름의소 이외에도 우리집의 낙인이 찍힌 소만 해도 수백 마리이니까요."
"그렇게 많은 소를 기르려면 인부들도 많이 필요할 텐데요."
"물론 그렇죠. 우리도 꽤 많은 수의 소몰이꾼을 고용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여행을 자주 다.니시기 때문에 그 모든 걸 감독하는 책임 중 많은 부분이 제 몫이에요."
"당신의 아버님은 작가라고 하던데, 그분은 주로 무엇에 대해 쓰시나요?"
"미국사회의 저변에 깔린 문제들, 즉 노예제도나 농장에서 열악한 근무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쓰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에 자각을 일깨우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문제를 풀어 나가도록하시는 거죠."
아버지에 관해 말할 적마다. 늘 그래왔듯이, 올리비아는 자부심에 차서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빠는 매사에 정의를 신봉하시죠. 지금은 하와이에서 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취재하고 계시구요."
그녀의 일상에 대한 킨잘의 끝없는 호기심이 질문되어질 때마다. 올리비아는 가능한 한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에게 집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즐거웠지만 동시에 이상스런 감정을 떨치기 어려웠다. 뭐랄까, 킨잘이 마치 올리비아의모든 것을 샅샅이 인터뷰한다고나 할까
발코니에서의 대화는 자리를 옮겨 울타리가 고르게 처진 산책로를 따라걸을 때도 계속되었다. 미국인들의 극히 사소한 일상사에서 정치제도와경제상황에 이르기까지 킨잘은 마치 상식에 굶주린 것처럼 무수한 질문을던졌다.
한참 걷다 보니, 장미덩굴이 늘어진 꾸불꾸불한 숲이 나타났고 이어서보리수나무 사이로 장중하게 건축된 신전神殿이 나타났다. 올리비아의시선이 신전 꼭대기로 고정되었다. 거기엔 포트마우드 항에서 보았던 쾌속선의 삼지창 기둥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저건 무엇을 의미하죠.?"
"그건 힌두교의 숭배자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는 일종의 수호부적이에요. 원래는 시바의 무기인 트리슐로, 우리는 삶이 세 가지 힘으로 구성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시바는 힌두교의 파괴신으로, 사람들은 시바가 저 삼지창으로 세상을 파괴한다고 옛부터 믿어왔어요. 그것이 바로 자이 라벤던이 삼지창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죠."
올리비아의 뇌리에 폭발적인 충격이 부딪쳐왔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으나 입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자이 라벤던의 실체가 킨잘에 의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올리비아는 전율했고, 그 느낌은 오래 갔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가 파괴하려는 건 사물인가요., 아니면 사람인가요?"
"둘 다 아마 그는 끝내 자기 자신까지도 파괴하고 말 거예요."
누군가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았으나 너무나 격렬한 감정에휘말려 있느라 미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자이는 내부에 억제될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을 키우고 있어요. 그것이 그를 세상과 영원히 떼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그는 다른 방식으로는 살수도 없고, 아마 절대로 그렇게 살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가진 분노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이의 영혼 속엔 상상하기 힘든 파괴의 본능이 있어요. 이것이 그의이성을 점차 무너뜨려 악의와 증오로 나타나는 거예요. 난 정말 그가 그렇게 종착을 향해 무분별하게 달려나가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런데 올리비아 양, 자이에게 관심이 있나요?"
이 질문은 마하라자가 했던 것과 똑같았다.
"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전 그를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이에요."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설령 당신이 백 번을 만난다고 해도, 그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거예요. 남편이 그러더군요, 자이는 꼭 양파 같은 사람이라구요. 그에 대해이제 알겠다고 느낀 순간, 그는 뜻밖의 또다른 껍질로 돌변한다더군요."
킨잘이 웃었고, 올리비아 역시 씁쓸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이는 말했었다. 아무도 자신 이외의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매년 자이는 신성한 피의 맹세로 우리와 형제를 약속하지만 때때로 그는 미친 사람 같아요. 날 너무 놀라게 하거든요."
주술에 걸린 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내심 화가 났다.킨잘은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일조의 경고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인가
황혼이 깃들 무렵에 킨잘은 올리비아와 얘기를 나누느라 깜빡 잊고 있던 신전에서의 저녁 의식을 지내기 위해 자리를 떠나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멀리서 조용히 그녀의 의식을 지켜보는 올리비아의 가슴엔 숱한 생각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신전의 꼭대기에 있는 삼지창은 이미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자이가 파괴하려 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올리비아를 위한 저녁식사는 말할 수 없이 성대하였다. 인도의 전통적춤과 연주, 그리고 그 앞에서 벌어진 만찬은 이국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하는 것이었다.
마하라자 영주는 킬티나갈 궁에서 계획하고 있는 야심찬 계획과 구상에대해 일일이 설명해 주었는데, 단 두 가지 문제만은 끝까지 거론하지 않았다. 석탄 문제와 자이 라벤던 이 두 가지 화제가 계획된 의도 아래 일부러 빠진 것임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마하라자 영주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냥을 위한 베이스캠프는 정글 안의 요.지에 이미 설비되어 있습니다해가 뜨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려면, 우린 새벽녘에 출발해야 해요."
킬티나갈 궁으로의 초대장을 들고 온 마하라자 영주의 시종이 이미 그녀에게 사냥 계획을 전한 바 있었다. 영주가 직접 호랑이 사냥에 참석할것이며 가능하다면 올리비아도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의 황야에서 거침없이 성장했던 올리비아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야성이 불끈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거절할이유가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내일 새벽에 사냥길에 나서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나 오늘 하루 동안 벌어졌고, 보았고, 들었던 모든 일들에 의한 충격이 그녀를 쉽게잠들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저는 잠들기 전에 독서를 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이모부님께서 말씀하시기엔 영주님의 궁전에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다고 하던데 잠시책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올리비아의 부탁은 마하라자 영주를 기쁘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마하라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온갖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게 되어 진실로 기쁩니다. 당신에게도 행복한방문이 되길 바랍니다."
마하라자 영주가 이 말을 남기고, 올리비아가 맘껏 책을 볼 수 있게 배려하고는 돌아갔다.
습기를 머금은 황토 같은 아늑한 향기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올리비아는미끄러지듯 의자에 앉아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들었다. 어학과 역사에관한 책들이 주종을 이룬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 안에서 그녀는 문득 고향의 셜리 멕켄드릭 도서관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그 도서관의 구석에 앉아서 얼마나 많은 희망으로 가슴을 태우며 청춘의 한복판을 줄달음쳐 왔던가 책을 펼칠 때마다., 그 내용에 흠뻑 빠지면서 무슨 일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싶은 충동에 마음 졸이던 때는 또얼마나 많았던가
사실 그녀는 킬티나갈 궁에 도착한 이후부터 줄곧 무슨 일인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불안해 했었다. 어떤 재촉감이 그녀의 둥을 떠밀어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자 했었다.
옆방에서 11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아득한 여음이 귓가에 울릴 때, 그녀는 조용히 일어서서 의자를 단정히 정리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독서에 빠져 있느라 하루 종일 그녀를 짓누르던 불안감으로부터도꽤 멀리 벗어나 있던 그 순간, 멀리 떨어진 모퉁이에 그녀의 마음을 하루종일 흔들어댔던 사람의 환영(幻影) 같은 희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것이다.
가슴을 감싸듯 팔장을 끼고, 입구에 놓인 책상 위에 기댄 채 비스듬히서 있는 그가 처음 보였을 때, 올리비아는 애써 그것이 단순한 환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끝내 입을 열어 그녀를 향해 말을 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자이 라벤던! 올리비아의 가슴에 세찬 격랑이 휘몰아쳤다. 그가 천천히몸을 세우고는 다시 말을 했다.
"내가 오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나요?"
"아뇨!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즉시 대답했으나, 의외의 대꾸를 내뱉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확연해졌다. 죠수아 경이나 브리짓트 부인이 이 초대에 오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못을 박은 마하라자 영주의 통고, 킨잘의 긴 설명, 그리고 죠수아 경이 마하라자 영주의 비위를 맞출 천금의 기회를 놓친 걸 안타까워하며 올리비아를 환송하던 일도 떠올랐고, 프레디 버커스트의 초대장을 든 채 낭패해 하던 이모의 표정도 그 위에 겹쳐졌다.
그렇다. 이것은 자이 라벤던이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배후에서 마하라자를 조종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서는 그녀가 보았던 책들 중의 하나를 집어들며 물었다.
"읽어 본 책 중에서 유익한 내용이라도 발견했나요?"
"예, 아주 많아요."
그녀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훌륭한 도서관이에요."
"올리비아 양은 대단히 영특한 시림이군요. 그저 대충 읽어 보고도 배운 게 많다.니"
올리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대체 날 얼마 동안이나 지켜본 것일까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듯 올리비아가 재빨리 대꾸했다.
"당신은 늘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군가를 훔쳐보는 걸 매우 즐기시는군요."
이렇게 거침없이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갈밭 위를 달리는 마차바퀴처럼 뛰어대는 맥박을 느끼며 몹시 불안해졌다.
"당신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무분별한 행동에 광분하는 사람 같아요."
"아마 그럴 거요."
그가 거리낌없이 대답하고는 이런 분위기가 꽤나 유쾌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게 어때요? 너무 답답하지 않나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불쑥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일 있을 사냥에 함께 가실 건가요?"
"물론이죠.! 나를 위해 당신을 초대한 마하라자 영주의 배려에 기꺼이 답례를 해야 하니까!"
"당신을 위해 나를 초대한 거라구요?"
올리비아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서가(書架)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물었다.
"왜 그런 수고가 필요했는지 물어 봐도 될까요?"
이렇게 물으면서도, 마하라자나 그의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완전히파악될 수 없었던 것들이 갑자기 하나의 확연한 실체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나가는 그를 따르려 올리비아는매우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야 했다. 도서관을 나와 복도를 지나고, 어둠이 깃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중간쯤 왔을 때, 그가 갑작스레 멈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두 사람이 마주칠 뻔했다. 그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계급 출신이에요. 하지만, 웬지 우리 사이엔 어떤 친밀감이 느껴져요. 그러나 난 그런 친밀함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왜 그것을 느껴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이것은 나를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아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뜻밖의말들은 그녀의 깊은 곳에 헤아리기 힘든 큰 감명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저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해가 안 간다구요?"
그는 그녀의 거짓말에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 참 안됐군요."
올리비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우리는 정말 융화되기 힘든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저를 적으로 여기시나요?"
그가 대답도 없이 슬며시 외면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운 빠진 모습으로 그의 뒤를 쫓는 올리비아는 아직도 감명의 회오리 안에 있었다.그가 뭔가 확실히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친밀함'이란 언어를 사용해 두사람 사이의 현재 상태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라벤던 역시 첫 번째 만남 이후부터 줄곧 혼란의 느낌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인적이 끊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어떠한 접촉도 대화도 없었지만 올리비아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은느낌이 들었다. 소리 없는 의사소통과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통로가 이어둔 밤에도 강력한 빛을 발하며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포트마우드로 배를 보러 갔었어요."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에스텔과 함께 보았던 그의 쾌속 범선에 대해 언급하였다.
"다른 배들보다. 훨씬 더 눈에 잘 띄더군요."
"혼자 왔었나요?"
"저의 이종사촌인 에스텔과 함께요."
"아, 에스텔 템플우드 말이군요."
파이프 담배를 꺼내들며, 그가 에스텔에 관해 별다른 언급없이 간단히대꾸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시바의 삼지창을 상징물로 삼은 거죠.?"
"그건 왜 묻죠.?"
"그것은 당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인가요? 당신을 그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살벌한 경고인가요?"
"둘 다를 의미할지도 모르죠."
"그건 당신이 남을 위협하는 행동을 즐기고 있다는 걸 의미하나요?"
자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그에게 꼭 던지고 싶은 질문을 기어이 뱉어냈다.
"그 공포가 오히려 당신을 먼저 두려움에 떨지 않게 했나 하는 생각이들어요. 당신은 당신의 적들을 이겨왔나요? 그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나요?"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저만큼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걸어가더니 뭔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보입니까?"
그가 가리키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붉은색을 띠는 어떤 식물이었다.
"야생버섯이죠. 이것들은 특유의 발광체를 갖고 있어서 밤에도 빛을 발하는 겁니다. 놀랍죠.?"
그는 인도의 야생버섯에 관한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새로운 것이면 아무리 사소한 발견이라도 곧잘 넋을 잃곤 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나감추려고만 하는 이 양파 속 같은 남자의 중앙에 이르고픈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당신은 인도에서 교육을 받았나요?"
그가 어두운 하늘에 시선을 던지며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제도상으로나 내가 처한 환경으로나 학교문을 두드리기는 어려웠어요.모든 건 세상의 경험으로 대신했지요."
"그 경험이란 것도 인도에서였나요?"
"모든 곳에서 교육이란 제도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대개 비슷한 것이니까요."
언젠가 그녀의 아버지는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진실로 알게 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 그 자체라고 삶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오히려 삶 그자체이지 학교는 아니라고 학교는 다만 세상을 지나게 하는 차표 한 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어둠 속이었지만 그녀는 냉담하게 굳어 있는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그 눈빛은 그녀와 나머지 시간 동안 나란히 산책을 하고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어둔 밤길 내내 변하지 않고 있었다.
숙소에 가까이 다.다.르자 두 명의 하녀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라밴던이 나타나자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올리비아는 최소한 이곳에서는 라벤던과의 해후가 이모부 내외에게 보고될 위험성은 없으리라는 걸 느꼈다.
"엽총을 다루어 본 적이 있소?"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불쑥 물어왔다.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똑바로 쏠 줄은 알아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었느냐 하는 건 그 다음 문제지만요."
그가 올리비아의 대꾸에 큰 소리를 내어 웃었으므로, 그녀는 짧은 시간안에 어느새 따뜻해진 그의 눈빛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던 것이다.
"당신은 부모님으로부터 아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눈을 물려받았소 누구든 그 눈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그의 손은 차가웠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그녀의 뺨에 닿아 있었다.
"엄마는, 그분은"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작아져갔다. 그의 손이 올리비아의 뺨에서 조심스럽게 머리 쪽으로 옮겨갔다. 풍성한 그녀의 머리칼 속에 손을 묻으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대단히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진 여성이오 난 그걸 알 수 있소"
"저 역시 당신이 나비의 날개보다.도 더 연약한 날개짓으로 세파를 헤쳐나가고 있다는 걸 알아요. 당신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체하지만, 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가 한숨을 길게 쉬며 손을 떼더니 갑자기 돌아서며 떨리는 음성으로간단히 한 마디를 남겼다.
"당신 때문에 혼란스러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가 보군 좋은 밤 지내길"
올리비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어둠 속을 똑바로 응시한 채 한참 동안서 있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감각을 잃었으며 세상마저도 온통 정지되어있는 듯싶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그의 손끝의 감촉만은 낙인처럼 그녀의 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의 자이 라벤던은 그녀 삶의 궤도를 변경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23년 동안 온전히 평온케 하던 삶의 궤도가 그의 존재로 인해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듯 안정감을 잃고 있었다. 그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상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야성적인 본능의 소유자인 자이 라벤던이었다.
마하라자 영주 일행이 베이스 캠프로 사용할 오두막집은 정글 속 깊은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 막 떠오른 눈부신 아침해가 대자연을 생동감 있게 연출해 내고 있었다.
무장 기병대가 올리비아와 킨잘이 탄 마차를 호위했고, 사냥에 참가할 남자들은 처음부터 말을 탔다. 마하라자 영주와 라벤던은 총과 화약, 그물 등 사냥도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녀는 되도록 그들과 시선이 부딪치지 않도록 애를 썼다.
정글에 다.다를 무렵, 영주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의 말을 해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냥이 끝나면 멋진 시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라벤던에게 힐끗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여행은 아주 편했어요. 물론 말을 타는 것보다야 못하지만요."
"이해하십시오, 올리비아 양 당신에게 말을 타게 할 수는 없어요. 저의 백성들은 보수적이라 말을 탄 여성을 보는데 아직 익숙지 않거든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식사가 끝난 후에, 킨잘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자신은 직접 정글에 갈 수 없으므로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자신도 그녀와 함께 남겠다고 고집했으나 그것은 마하라자 영주에 의해거절되었다.
"몇 명이 사냥에 참가할 거죠.?"
"여덟 명입니다. 두 마리 코끼리에 두 명씩, 그리고 도보로 네 명이죠."
자이는 마하라자 영주와 함께 탈까?
코끼리 등 위에 설비된 상교(象轎)는 편안하게 올라 앉을 수 있게 되어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완벽하게 보장해 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제발 영주와 함께 타게 되기를 바라고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소망은 출발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코끼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깨어져 있었다. 마하라자 영주를 실은 코끼리가 킬티나갈 성의 깃발을 펄럭이며 앞서 걸어 나갈 때, 그녀는 영주 옆에 앉은 청년이 전형적인 무사 복장을 한 킬티나갈의 병사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자이가 당신과 함께 타고 가겠다고 했어요."
망연해 하는 그녀의 귓가에 킨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표정에 석연치 않은 빛이 감돌자 킨잘이 얼른 덧붙였다.
"당신은 그가 싫은가요?"
올리비아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여인은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말하길 원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녀는 자이가 타고 있는 코끼리 쪽으로걸어갔다.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코끼리는 너무 엄청난 체구여서그 위에 있는 자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 올리려 할 때, 그대로 그의손을 잡지 못하고 잠시 버둥거려야 할 정도였다.
장엄한 의식의 행렬이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두 마리의 코끼리와 앞뒤로 두 명씩 걸어가는 장대한 체격의 병사가이 행렬의 전부였지만 모든 사람의 눈엔 비장한 빛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정글의 무수한 나무 잎사귀 사이를 뚫고서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마하라자 영주의 병사들이 이미 선발대로 정글 깊숙이 들어가 호랑이를 영주가 있는 쪽으로 몰고 있는 것이었다.
라벤던은 때때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라이플 총을 앞쪽으로 겨냥한채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의 갈색 손은 무척 억센 듯 보였지만,놀랍게도 손가락은 매우 섬세하게 생겼다. 그를 훔쳐보는 게 스스로도 싫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계속 그를 쳐다보며 어젯밤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던 손을 떠올렸다. 한번의 몸짓과 아주 짧은 순간의 접촉 그럼에도 그녀는 밤새 잠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죠.?"
올리비아는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예기치 않은 질문을 불쑥불쑥 던지는 그의 태도에 이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저의 이모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그 대답을 할 의무가 제겐 없을 텐데요."
"아니오, 당신에겐 대답할 의무가 분명히 있소"
"그건 왜죠.?"
"그건, 내가 그걸 알고 싶기 때문이오"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올리비아가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어요. 대답이 되었나요?"
"미국 청년들은 혈기왕성하고 적극적이어서 당신처럼 아름답고 적령기에 있는 여자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정혼한 남자라도 있소?"
그의 날카로운 눈이 올리비아의 얼굴에 퍼져 나가는 홍조를 놓치지 않고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가 번지는 걸무시한 채 올리비아가 재빨리 물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나요?"
"그렇소"
"그곳에서 뭘 했죠.?"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해서 그녀를 조금 놀라게만들었다.
"많은 것들을 했소 일하고, 배우고, 돈도 벌었소"
"무엇을 배웠죠.?"
사냥의 제1원칙은 신중한 자세와 침묵, 그리고 예리한 시선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까부터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배운 게 무엇이냐고 묻는 올리비아에게 그가 다.소 거만하게 대꾸했다.
"내게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묻는 게 더 좋을 거요."
"그럼 당신은 미국에서 무엇을 배우지 않았나요?"
"나는 미국 대통령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소"
"그건 왜 하지 않았나요?"
"그것은 단지 내가 해볼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하려고 했다면, 난 반드시 했을 거요."
그가 숲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난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당신에게 이미 한 것 같은데, 기억하나요?"
자만심으로 꽉 찬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가 하늘을 향해 웃었다. 올리비아가 그의 오만함을 향해 뭔가 한 마디 해주고 싶어 막 고개를 돌려입을 여는 순간, 그가 갑자기 정글 어딘가를 향해 황급히 시선을 던지며긴장한 태도로 입을 다.무는 걸 보고 그녀 역시 정면을 응시하였다.
바로 조금 전에 야생의 정글을 뒤엎어 버릴 듯한 광란적이고 급박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었다. 그러나 이제 정글은 삽시간에 바닷속 같은 침묵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숨막히는 듯한 긴장의 시간이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그들 모두의 신경을 묶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정글 안쪽으로부터 천지를 삼켜 버릴 듯한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호랑이들이 최후의 무덤으로 찾아 들어오는 포효인 것이었다.
올리비아의 심장 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자이가 반쯤 일어서서 재빠른 동작으로 무기를 재점검했다. 그의 권총집에 들어 있는 신형 리벌버총을 힐끗 보며 올리비아는 이제 거의 생존의 가망성이 없어진 야수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
몰이꾼들은 이제 더이상 북을 칠 필요가 없었다. 네 명의 병사가 창을던질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호랑이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마리의 코끼리는 긴장한 채 사냥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긴장은 거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도 세상의 모든 새벽을 깨울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렸다. 야수들의 최후의 발악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잠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한동안 정글은 침묵의 바다. 그대로였다. 호랑이들이 분명히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는데도, 꽤 많은 시간의 경과에도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20분 정도 지나자 마침내끝이 났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싶던 목표물이 천천히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호랑이는 주의깊게 몸을 세우더니 주르르 미끄러지듯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엄숙하리만치 완전한 위용을 드러냈을 때, 지축을 흔드는총소리가 들렸다. 첫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매번 마하라자의 특권이었으므로 그가 호랑이의 심장을 향해 첫발을 쏘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총알은 호랑이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분노한호랑이가 정글이 흔들거릴 정도로 포효하는 순간, 영주의 탄식도 함께 터져 나왔다.
"제기랄!"
거의 동시에 또 한발의 총성이 정글에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자이였고,이번의 발사는 거구의 짐승을 명중시켰다. 그가 재빨리 재장전을 하며 한번 더 겨냥을 하는 순간, 호랑이는 어느새 바위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내가 놈을 놓치다니, 제기랄!"
자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호랑이가 분노의 포효를 계속하며 고통에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뛰쳐 나왔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눈앞에전개되는 걸 보며 올리비아는 상교 안의 손잡이를 잡고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병사 넷이 거의동시에 호랑이에게 예리한 창을 던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은 눈깜짝할 사이에 호랑이의 몸을 꿰뚫었고, 고통에 못 이긴 호랑이는 다시 덤불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리비아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반쯤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다가 자신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단단히 잡아요.! 코끼리가 언제 날뛸지 모르니까!"
그러나 이미 코끼리의 행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흡사 나팔 소리 같은 이상한 괴성을 내며 두 마리 코끼리가 호랑이 쪽으로 달려 나갔다. 두 마리 코끼리들의 포위를 받고 있는 호랑이는 이제 총구로부터 불과 몇 피트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올리비아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를 절망스런 시선으로 응시하는 거대한 동물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기에 그녀의 모든 감각은 거의 마비되어 버린 듯했다. 그때였다. 라벤던의 목소리가 굳어 버린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당신이 정말 총을 쏠 수 있는지를 내게 보여 줄 차례요.!"
공포 속에서, 그녀는 자이 라벤던을 노려보았다. 미쳤어요? 그녀가 이글이글 타는 시선으로 이렇게 묻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빨리!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요?"
라벤던이 거칠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다른 손으로는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었다. 코끼리가 계속 움직이는 바람에 상교 안의 두사람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민첩했고, 그녀의 등이 그의 가슴에 밀칙돼 있는데도 조금도 부자연스런 동작이 아니었다. 그가 권총을 올리비아에게 건네 주며 냉정히 소리쳤다.
"자, 이제 녀석의 앞머리 부분을 겨냥해요."
주저하면서,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시선이 차갑게 그녀를 재촉하는 게 느껴져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들어올려 고통에 차 몸부림치고 있는 호랑이를 겨냥하였다.
"빨리 방아쇠를 당겨요.!"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호랑이를 향해 한 발의 총알을 발사하였다. 즉각적으로 조그만 공포감이 일었고,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녀는 자기가 호랑이를 명중시키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며 힘없이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호랑이의 두 눈 사이에 박힌 구멍에서 선혈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고, 절망의 눈빛을 허공에 던지며 짐승의 거대한 머리가 푹 꺾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아직 정글 안의 혈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놀란 코끼리가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상교 안에 뒤얽힌 채 나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 그들은 팔과 다리가 뒤얽힌 상태 그대로 질주하는 코끼리의 등 위에 있었다. 엄청난 속도감, 그리고 충격적인 흔들림, 여기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피비린 내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고, 그녀가 정신을 잃은 건 그 직후였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나무 밑의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사방은 조용히 정리돼 있었고, 그녀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빙 둘러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하녀가 건네 준 물을 마시고는 눈을 깜박였다. 폐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느끼는 순간, 자이의 걱정스런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소?"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잔의 물을 더 요구했다.
"당신은 기절을 했었소"
그의 음성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졌다.
"호랑이는 죽었나요?"
"훌륭했었소!"
그가 춤을 추고 있는 군중들을 가리키며 또 말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의 용맹성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요."
그의 눈빛 또한 너무 부드러워서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때 영주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사격솜씨였어요. 정말 훌륭해요., 올리비아 양"
그녀가 뭔가 변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입을 여는 순간, 자이가 재빨리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저길 봐요, 올리비아!"
살아 있을 적 모습만큼이나 눈부신 호랑이의 거대한 몸체가 풀밭에 함부로 누운 채로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노랗고 검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호랑이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동정심이 일었다.
"당신의 눈물을 호랑이 때문에 낭비할 필요는 없소 수많은 마을 주민이 저 녀석에게 희생되었으니까"
자이의 설명에 마하라자 영주가 동의의 뜻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올리비아에게 보냈다.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자, 잔치는 더욱 성대해졌다. 마하라자는 매우 기쁜 듯 더 크게 술잔치를 벌였고, 몇몇 흥분한 마을 사람들이 올리비아와 자이에게 화환을 씌우고는 그들을 에워싸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이는 그녀가 당황해 하고 뭔가 계속 변명하고자 하는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과의 파티가 끝난 후에도 올리비아와 자이, 그리고 영주 내외를 위한 파티는 베이스 캠프 안에서 계속되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나누며, 대부분의 시간은 사냥에 관한 얘기로 채워져 분위기는 매우 편안했다. 갑작스런 탈진상태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 않는 올리비아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간간이 모험담을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하라자가 갑자기 자이에게 말했다.
"자이, 왜 그렇게 급히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내일 아침에 출발을 하면 안 되겠나? 난 자네와 오늘밤에 할 이야기가 많아"
자이가 단호히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캘커타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영주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 문제의 내막을 캐어물었으나 자이는 다.만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그제서야 그가 한 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알게 되었다. 뜻밖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의 뭉게구름이 억제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가슴속에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한 시간 뒤, 올리비아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갈피를 겨우 추스르면서 베이스 캠프 아래쪽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 불시에 떠난다는 사실에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녀 스스로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 물음 때문에 그녀는 주체하기 힘든 곤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 부는대로 움직이는 바람개비처럼 변화무쌍한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기가 헤어나기 힘든 미로 속에 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개바다와도 같이 희미해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 투성이였다.
불가능해! 그녀는 그에게 매료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해 얼마나 많이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그렇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모부, 이모, 그리고 수자타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고 그의 오만함과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에게 쏠리는 마음의 고삐를 하루 빨리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만 해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상관없이, 마당에서 그가 떠나기 위한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그의 출발 모습을 볼 수 없게 될지도모른다는 생각에 우습게도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생각하였다. 그의 출발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고, 그를 한번 더 보려고 서두는 이런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먼 후일 언젠가 아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밖에 나가자, 때마침 한 발을 들어 말을 타려던 그가 동작을 멈추고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듣기로는, 올리비아 양의 가족 모두가 프레디 버커스트의 초대를 받아 발락폴을 방문할 계획이라는데"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이모님은 이모부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과 함께 거기에 가고 싶지 않잖소?"
그의 말은 정곡을 꿰뚫고 있었지만,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의 폭력과도 같은 확언을 부인하고 싶었다.
"아뇨! 난 가고 싶어요. 도대체 왜 내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죠.?"
"가고 싶다구요?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 친구에게서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만 해요. 그 프레디 버커스트에게서!"
그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며, 그녀가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은 그를 비난할 아무 권리가 없어요. 그런 무례함이야말로 바로내가 당신에게 화를 내는 이유란 걸 알아야 해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아주 가볍게 말을 받았다.
"글쎄, 만일 말이오, 만일 당신이 발락폴에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돼요. 그건 내가 약속하지!"
올리비아는 놀라움에 입을 벌린 채,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노려볼 뿐이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역설과 혼돈 속에서 되도록 현실을 직시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결코 이론적으로 따져질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단순히 그가 비정상적인 차원의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두 사람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유사함, 어떤 의미의 유대감이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열렬한 매력이있는 남자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모부의 적개심에 가까운 악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미 거부하기 힘든 커다란 그림자로 그녀의 내면을 장악해버린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제게 그 사람에 대해 말해 주세요."
늦은 밤이었지만, 그녀는 하녀를 통해 킨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킨잘은 올리비아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지 않았다.
"그렇게 하죠.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은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왜 그런 말을 하죠.?"
"왜냐하면 그건 자이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그 관심은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다. 올리비아에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하지만 그에 관해 알게 됨으로써 당신은 커다란 보상을 강요.받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커다랗고 파르스름한 눈동자 안에는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상'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 보기에 앞서서 올리비아는 다른 고려들은 불필요하다는 듯이 간단히 말했다.
"어쨌든 그에 대해 말해 줘요. 전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올리비아의 조급함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하녀를 불러 카펫과 쿠션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 시간을 요할 만큼 길기 때문이었다.
마하라자 영주의 부친은 킬티나갈 성의 황제와도 같은 신분임에도 민심의 동태와 생활상을 알아보려고 자주 신분을 숨기고 서민들 틈에 끼어 지냈다. 때로는 산간벽지를 여행하기도 하고, 간혹 허름한 옷을 입고 도시를 배회하기도 하면서 거기서 얻은 지혜를 정치에 반영하곤 했던 것이다.
하루는 여행길의 피로함을 풀기 위해 어느 초라한 여관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소년 하나를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남루한 옷차림에다. 몸도 매우 쇠약해 보였지만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진실한데다가 어찌나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지 단박에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혼혈아라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소년에겐 이상하게도사람을 잡아끄는 무엇이 있었다. 뭐랄까, 표정 속에 수많은 사연을 담은듯한, 그리고 맑은 눈빛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반항심 같은 것을 소년은 갖고 있었다.
영주가 소년을 불러 이름을 물었지만, 그 아이는 마치 이 간단한 질문에도 큰 모욕을 받기라도 한 듯이 굳은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대꾸하는것이었다.
영주는 소년의 태도와 그애가 처한 비천한 환경에 대한 동정심으로 동전 한 움큼을 주었는데, 이에 대해 소년은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동전을땅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소년이 내뱉은 대답은 영주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제가 일하지 않은 돈은 받지 않습니다. 전 거지가 아니니까요."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영위해 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토록 강한 자존심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소년의 오만함은 감동과 충격을주었다. 이 어린 소년의 어디에서 이런 독립적인 오만함이 나오는 것일까 또 이 소년의 무엇이 그토록 강한 자아를 만드는 것일까
그날 이후 영주는 자주 그 여관에 머물며 소년을 눈여겨보았다. 심지어그는 소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마다 하지 않았다. 몇 달이지난 후에야 소년의 태도는 차츰 부드러워졌고, 둘 사이에는 우정 같은 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좀체로 웃지 않았으며 자신의 출생에 관한얘기도 결코 하는 법이 없었다.
그 대신, 소년의 이야기는 거의 바다와 배, 그리고 드넓은 세상에 관한것들이었다. 영주가 킬티나갈에서의 취직이나 학교교육 등을 제의해도 소년은 매번 거절했다.
"그럼 넌 뭘하고 싶은 거지? 평생 이렇게 접시나 닦으며 살 예정은 아니겠지?"
그러자 소년은 평상시의 얼버무리는 답변 태도와는 달리 확신에 찬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전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렇게될 거예요."
"대단한 야망이로구나 하지만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최소한의 시작은 해야지"
"전 벌써 시작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실제로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면 능력의 개발이 필요하지 않겠니?"
"저에겐 손과 머리라는, 꽤 성능이 좋은 장비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두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뱉어내는 대답에는 뭔가 거부하기 힘든 설득력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소년은 이 말과 함께 매우 신중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때의 소년의 모습은 마치 전혀 다른 시간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낯선 표정이었다.단호하고 확신에 찬, 심지어 입고 있는 남루한 옷차림마저도 유별나게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는 제 목표를 실현시키는데 제 모든 생을 바칠 거예요."
영주는 또한 이 말을 뱉은 직후의 소년의 얼굴에 이상하리만치 노골적인 증오가 가득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애의 증오와 원한을 주의깊게보면서 영주가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소년은 더이상의 말을 회피한 채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영주가 다음 기회로 질문을 미루고, 두 달쯤 후에 다시 그 여관에 갔을 때는 이미 소년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여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그소년이 어디론가로 밀항했다는 소문의 편린만 영주에게 전할 뿐이었다.
킨잘의 긴긴 이야기가 끝났다. 올리비아는 쿠션에 비스듬히 기대어 맑은 하늘 가득히 흐르는 은하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흐르는눈물 때문에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없었다.
"그후에, 여러 해 동안 자이에 관한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없어요. 자이역시 인도엔 자신의 소식을 전할 친척이 있지도 않았대요. 그러다. 아버님이 몇 년 후에 돌아가셨으니 자이에 대해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기이한 우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이 모든 사연이 세월의흐름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예요."
그후 킬티나갈의 영주가 된 마하라자는 아버지에게 그 소년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긴 하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나마도 세월이 자이에 대한 기억마저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여관의 늙은 하인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와 12년 전의 일을 말하며 그때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노인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젊은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이 라벤던이었고, 그는 늙은 하인의 또렷한 기억력으로 인해 마하라자에게 안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하라자 영주는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되살려낸 접시닦기 소년의 이미지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모습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의심할 바 없는 자이 라벤던이라는 사실에는 확신이 섰다.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잘 차려입은 옷차림, 능숙한 신사도, 그리고 외국풍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마하라자 영주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라벤던도 고단하고 메마른 삶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친절했던 노인의 아들 마하라자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그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지요."
지금껏 장황한 설명을 한 사람은 킨잘이었는데 목이 바싹 마른 쪽은 올리비아였다. 자이가 걸어왔을 그 험난한 삶의 여정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가슴을 짓이겨 놓는 것 같았다. 그가 부딪쳤을 세상의 많은 장벽들이 얼마나 수없이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인가 그가 빠져 허우적거렸던 세상의 많은 함정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그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인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몰라요. 자이가 우리에게 말해줄 리가 없구요. 소문에는, 다만 영국인 선원이였다고 해요. 하지만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해요."
"그럼 그의 어머니는 누구죠.?"
그녀가 주스로 목을 축이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킨잘은 이미 그녀가 깊은 충격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이의 어머니는 산간지방에서 온 원주민이었다고 해요."
"그분은 돌아가셨나요?"
"언젠가 제 남편이 그걸 자이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매우 화를내며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래요. 그후, 다시는 그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던 거죠."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주 조금은 그의 고집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 그의 고집이야말로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의 자이를 지탱케 하는 거의 유일한 힘일 것이다.
"그는 미국 쪽으로 밀항을 했었나요?"
"두 번쯤 세계일주를 했다고 해요. 그때 항해술을 배웠구요. 그가 언젠가 말하더군요. 자신을 진정한 남자로 만든 곳이 바로 미국이라구요. 보스턴 상인이 그를 종업원으로 고용했는데, 그가 하도 열심히 일하자 결국동업자로 삼았대요. 그 상인의 이름이 바로 라벤던이었다고 해요."
"라벤던?"
"그래요. 그때까지도 자이는 아버지의 성과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자이'라는 이름 하나로 살아왔던 거죠."
묵직한 무엇이 목젖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자이'는 승리자란 뜻이죠. 당신은 그가 승리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아야 해요. 그것은 그조차도 감추지 않는 내부의 강박관념이기도 해요."
"그가 어렸을 때 말한 그 '목표'란 것은 실현되었을까?"
"그건 아직도 여전히 비밀스런 부분으로 남아 있어요. 자이는 농담처럼그 문제는 다 잊었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그 말을 믿으시나요?"
"아뇨. 만일 그 목표가 실현되었다면, 그가 여전히 그렇게 광기와 분노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킨잘이 쿠션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갑자기 한숨을 뱉었다.
"난 올리비아가 걱정돼요."
"무슨 뜻이죠.?"
올리비아가 반짝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젖은 눈망울로 물었다.
"올리비아, 내가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난 우리의우정을 생각해서 자이 라벤던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릴 의무를 느껴요."
모든 사람이 그런 말을 했었다. 이모부도, 마하라자 영주도, 심지어는 에스텔조차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이 라벤던 자신조차도
"그러나 내 말은, 영국인들이 그를 위험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달라요. 그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에요. 더구나 그에겐 수많은 여자들이 있어요. 그는 한결같이 그 여자들을 육체적 만족을 위해 이용할 뿐이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의 가슴 한쪽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고그 구멍으로 찬바람이 서슴없이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하기는, 자이만을 책망할 수는 없겠죠. 그는 부자이고, 매력적인 남자니까요."
"수자타처럼요?"
이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올리비아는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걸느꼈다.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한 번요."
올리비아는 짤막하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고, 그 말끝에 어리석게도 또다른 경솔한 질문을 덧붙였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었나요?"
"사랑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에요. 그는 처음부터 사랑이란 걸 인정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아요. 아마도 그는 영원히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킨잘이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지만, 올리비아의 귀에는 그저 피상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자이가 수자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것이 자신을 안도케 하는지 명확히 따져볼 생각도 없이, 그녀는 그 순간에 그와의 접촉 때 느꼈던 부드러운 숨결과 감촉,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 있던 구름만큼 흐릿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킨잘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슬며시 얼굴을 돌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말씀해 주신 것 모두를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왜 제게 그런경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솔직히, 전 그에게 관심이 있고 그의 환경이 남다르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가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뿐, 그에 대한 하찮은 관심 때문에 그의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녀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킨잘의 얼굴엔 어떤 감정의 파도도 비치지않았다.
"난 할 말을 다.했어요. 당신이 이곳에 온 게 나로선 정말 기쁘지만 이곳에 오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당신은 알아야 해요. 내가 지금껏 만나본 백인 여성들과는 달리 당신은 정말이지 너무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자예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무척 아프게 해요. 나의 말에 당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전 조금도 불쾌하지 않아요."
그녀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 대답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힘이 억지로 들어 있었다. 이미 그녀는 혼란스런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의 실체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지못한 채 제멋대로 떠돌고 있었다. 불쾌한 것이 아니라 불안했으며, 그녀를 움직였던 그의 매력들이 전부 자신의 헛된 상상력에서 나온 게 아닐까하는 혼돈이 세찬 회오리를 이루며 뇌리를 채웠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킬티나갈에서의 나머지 방문기간 동안 누구도 더이상은 자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 차라리 안도하였다.
매일처럼 반복되는 이모와 에스텔의 장황한 수다에 질려 버린 올리비아는 귀를 막은 채 한쪽 구석에서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읽다가 조용히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리움과 행복이 교차되는 심정이 되어 아버지의 편지를 다시펼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일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이 다가오는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은 그때마다 여전히 그녀를 목메이게 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취재 여행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부분은 한창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 관한 내용과 호놀루루가 태평양 지역의 항구도시로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역설이었는데 올리비아에게 보내는 아버지로서의 당부는 편지 말미에 아주적게 언급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모님이 네게 부여하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거라 네가 살아온 것들과는 다른 관습들로 인해 힘겨우리라는 건 잘 알지만, 매일 잠자리에 들 적마다. 어딘가에 너의 삶을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빠가 항시 네 마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렴'
읽을 적마다. 올리비아를 눈물나게 하는 이 대목이야말로 아버지가 언제나 그녀에게 들려 주던 다정한 한마디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접어 가슴에 소중히 품으며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녀가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이모가 들어왔다.
"올리비아, 버커스트 부인으로부터 내일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초대를 받았었는데 네게 말하는 걸 잊고 있었구나 오전 10시쯤 떠나면 될 거야"
잠시 브리짓트 부인을 응시하다., 올리비아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모님이 절 위해 애쓰시는 것에는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이모님께분명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는 버커스트 씨와의 결혼엔 아무 관심도없어요. 그에게 어떠한 희망을 주는, 그래서 그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행동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애야, 난 지금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저 사교적인 만남을 갖자는 것뿐이야 그 일에 대해서는 너도 별로 반대하지 않겠지?"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말해 줄 게 있다. 나는 네가 지난 주말에 몸이 아팠다고 했으니 킬티나갈에 갔던 것을 절대로 말해선 안 된다. 명심하겠지?"
그날 오후에, 죠수아 경이 다른 날보다. 일찍 귀가를 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 집안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자 에스텔이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가 왜 저렇게 화가 나신 거죠.?"
브리짓트 부인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창백한 얼굴로 서서 서재로 통하는 문만을 응시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서재에 틀어 박혀 있었다. 에스텔의 식사 권유도 못 들은 체하고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고집하여 더욱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시간이 꽤 지나 밤이 깊어갈 무렵에 브리짓트 부인은 남편을 위한 음식을 쟁반에 준비해서는 올리비아를 불렀다.
"이모부께서는 아마도 사무실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너와 얘기하고 싶어할는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이모부께서 왜 저토록 화가 나셨는지 이유를 좀 알아 보렴"
사실 죠수아 경은 가족들에게 무척 관대하고 친절한 편이어서 좀체로 이런 일이 없었다. 아무리 사업상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집에 들어오면절대로 그 문제에 얽매어 가족들을 긴장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브리짓트 부인이 에스텔과 함께 몹시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재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커튼 사이로 겨우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으로 그의 윤곽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인기척을 듣고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지?"
"저예요. 이모님께서 드실 것을 좀 갖다. 드리라고 해서"
"고맙구나 앉아라, 올리비아"
달빛에 물든 그의 얼굴은 너무나 침울해 보였다. 게다가 가라앉아 버린 목소리가 더욱 그의 조심어린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신지"
한동안 그는 입을 다.문 채 어둠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만 하더니, 긴한숨과 함께 말했다.
"구프타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왔단다. 아편 위탁판매소가 운송 중에 약탈을 당했다는구나"
"약탈이라구요?"
구프타는 죠수아 경의 심복으로, 벵갈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북부 지방의 판매 대리인이다. 인도인이지만 평소에 죠수아 경에게 충성을 바치는사람으로 꽤 능력 있는 상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가 마차에 아편을 싣고 어떤 지역으로 운송하던 도중에 괴한들의 공격을 받고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모조리 탈취당했다는 것이다.
죠수아 경은 이 보고를 받고 즉시 뭔가 의혹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구프타가 물건을 잃었으나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아편을 탈취해가면서, 후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닌가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한, 이렇게 그들의 권위와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을 벌이는 인도인은 절대로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그것이 동인도 회사의 사업과 돈에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잡는 게 상례였다.
"구프타 그 녀석이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희미한 아픔이 올리비아의 가슴을 저몄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킬티나갈에서 그는 떠나기 전에 말했었다. 만약 당신이 발락폴에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지 않아도 돼요. 그건 내가 약속하죠.과연 그는 무엇을 믿고 감히 그런 단언을 했던가
"왜 구프타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이모부님은 항상 그를 충실한 심복으로 대하셨는데"
"왜냐구? 그건 뻔한 거야 원주민들의 충성심이란 몇 푼의 돈 앞에서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는 거야 더구나 상대가 영국인이라면 그들은 언제든 모습을 바꾸게 되지"
자이 라벤던 그는 왜 그 많은 영국인들 중에 하필 죠수아 경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을까 오래 전부터 가슴을 파고 들던 의문이 비로소 시퍼런날을 세운 비수가 되어 올리비아의 의식을 찔렀다.
"중국 광동(廣東)에 가면 아편은 거의 열 배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아편은 그렇게 확실히 확보해 놓을 가치가 있는 물건이란다. 중국인들과의 거래는 신용이 첫 번째인데,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그녀는 벵갈 일대에서 번창하고 있는 아편 재배에 대해 죠수아 경으로부터 수없이 많이 들어왔었다. 중국과의 해상무역에서 아편은 불가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산 차는 외국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어 중국 무역의 중추적인 물품이 되고 있었다. 그 반면 아편은 중국정부의 절대적인 유입 금지조치를 받고 있는 상품이지만 중국인들의 일상에 깊이 관계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두 물품의 교환무역이 동인도 회사의 주업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죠수아 경이 심지어 이 두 가지 물품의 이중무역 없이는 동인도 회사도, 영국왕실도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막대한 양의 차와 아편이 수출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편의 경우였다. 중국의 절대적 수입 금지정책은 아편을 은밀한 거래 아래 중국 대륙으로 유입되게 만들었고, 그만큼 중국 상인들은기밀과 신용을 첫째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을 모두 꿰뚫고 있는 범인은 죠수아 경의 사업에 치명타를 입힐 속셈으로 아편 운송 마차를 습격했고, 지금 범인의 계획대로 죠수아 경은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경찰은 범인을 잡을 만한 증거를 찾았나요?"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원주민들은 결코 밀고를 하지않을 테니까"
그의 입술이 분노로 비틀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올리비아는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마하라자 영주에게서 온 편지 내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격려가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킬티나갈 성의 금 장식 문양이 새겨진 종이를 꺼내 다시 한번 읽어 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격려가 되는구나 이 편지는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다."
"그분이 이모부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아직은 하지만 곧 때가 올 것이다. 혹시 그가 지난 주말에 네게무슨 얘기라도 했니?"
올리비아는 이미 킬티나갈에서의 일들을 모두 이모부 내외분께 설명을 했었다. 물론 자이 라벤던과의 일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지만
"그분은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욕심도 정도의 문제란다. 돈이란 아주 달콤한 유혹이고 그 역시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그는 지금 엄청난 돈이 필요해 지난 수년 동안 킬티나갈의 탄광 사업은 뾰족한 수익을 올리지 못했는데, 나는 탄광업 진출과 동시에 즉각적인 소득을 제시했어 문제는 가격의 차이인데, 그가 제시한 액수가 너무 높구나"
그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처한 입장을, 그리고 그에게 가해져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부님, 저희와 함께 발락폴로 가서 며칠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곳은 낚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 들었는데 그렇게 잠시 쉬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발락폴? 쓸데없는 소리! 나는 경찰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을 떠날수가 없어 네 이모가 에스텔과 널 데리고 갈 거다."
그가 천천히 한 묶음의 종이를 집어들자, 그녀는 그와의 대화가 끝났음을 눈치챘다.
그날 밤 늦게, 침대에 오르면서 그녀는 자이 라벤던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발락폴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안 가도 된다고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것을 약속한다고 했던 자이 쓰라린 감정이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그녀의 마음속을 뒤덮었다.
올리비아는 자이의 행동이 치솟은 복수심에 무분별한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수심 그러나 과연 무엇에 대한 복수심이란 말인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복수심이란 말인가
그날 밤도 그녀는 석연치 않은 꿈에 시달리면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버커스트 부인과의 다과를 겸한 대화는 그녀만의 일방적 주제 선택으로 점점 지루해져 갔다. 침묵 속에서 간간이 필요한 대답만을 하던 올리비아는 차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에스텔과 창가에 나란히 서서 작은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프레디는 그다지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지만 올리비아를 볼 때만큼은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 프레디가 취하고 있는 조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않아요. 하인이 너무 많은데다가 다루는 방법도 너무 관대한 면이 없지않아요."
그녀는 아들을 곁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비판했는데, 막상프레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다. 브리짓트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하였다.
"맞아요., 하인들은 엄격히 다루어야만 한다구요. 그들은 채찍을 맞아야더 빨리 달리는 한 마리 말과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내 아들은 또 돈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어요. 저 아이는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 그렇게 쉽게 돈을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저 애가 정말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요."
프레디는 명목상으로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보스였지만 좀처럼회사에 나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상 그가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윌리라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업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있고, 업무도 비교적 단순한 담배판매 대리점이었기 때문에 그가 굳이 회사에 나가 할 일도 없었다.
아무튼 프레디 버커스트는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뭇 여성들에게 지나치리만치 친절하고 어떤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는 좋은 성격에다. 그는 금상첨화격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결혼을 해야겠군요. 가정을 가지면 남자는 변하게 마련이니까요."
브리짓트 부인이 올리비아를 슬쩍 바라보며 단언할 때,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질끈 눈을 감았다. 에스텔은 응접실 구석구석을 관찰이라도 한다는 듯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실내의 대화 분위기에 따라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고 있어 얼마나 민감하게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올리비아 양, 대서양을 건너 먼 여로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는데 느낌이 어때요?"
마침내 버커스트 부인의 질문이 올리비아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두 중년부인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 지칠대로 지친 뒤였다.그녀는 공손한 웃음을 머금으며 짧게 좋다고만 대답했을 뿐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브리짓트 부인이 재빨리 올리비아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올리비아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에요. 많은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아이의 아버지도 자신의 일에 열심이라서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에 가 있답니다. 취재 여행이죠. 그래서 올리비아는 앞으로 1년 동안 저희와 함께 있을 예정이에요."
납득할 수 있다는 듯이 버커스트 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의 집은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실은 다른 곳에도 저택과 농장을 소유하고 있답니다."
올리비아는 이모의 거짓말에 분노와 놀라움으로 입을 벌렸지만, 이모는그녀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일 엄마만 생존해 있어도 올리비아를 신분에 맞는 사교모임에 자주 내보냈을 텐데, 이 아이는 엄마 대신 맡아야 할 많은 책임 때문에 그럴 기회를 좀체로 갖지 못했었죠."
그리고 몇 마디 더 입에 발린 거짓말을 보탠 후에, 이모는 프레디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민첩하게 일어섰다.
"프레디 씨, 에스텔과 제게 집을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버커스트 부인도, 그리고 올리비아도 브리짓트 부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각 알아차렸다.
"프레디, 뭐하고 있지? 어서 두 분을 안내해 드리려무나"
그들이 방을 빠져 나가자, 올리비아는 이모의 일방적인 언행에 격분했고 뒤이어 벌어질 버커스트 부인의 끔찍한 심문에 대해서는 눈에 띌 정도의 노여움을 가지고 기다렸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가 첫 인상으로 느꼈던 바 그대로 대단히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은 채 한동안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다가 불쑥 물어왔다.
"올리비아 양, 좀 더 살이 쪄야겠어요. 히프가 너무 작은 것 같아요. 좋은 번식력을 가진 종족은 결코 야위지 않았어요. 그 비밀은 바로 엉덩이에 있는 거예요. 올리비아 양, 이제 내게 호랑이 사냥이 기대한 만큼 잘됐는지 얘기해 주지 않겠어요?"
올리비아는 숨이 격렬히 차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내가 주말을 호랑이 사냥으로 보냈는지 알았을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모두는 때때로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할 때가 있으니까 만일 내가 올리비아였더라고 실속 없는 사람들과의 공허한 대화보다는 사냥을 택했을 거예요."
마침내 올리비아는 성실하게 지난 주말의 거짓말에 대해 사과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사냥을 무척 좋아합니다.부인의 말씀대로 알맹이도, 관심도 없는 대화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버커스트 부인의 입가에 뜻밖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빵을 올리비아에게 건네 주며 다시 말했다.
"캘커타에 대해선 어떻게 보았나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인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많은 불합리한 면도 지닌 나라예요."
"어떤 점이 그렇게 불합리하게 보였나요?"
"글쎄요. 인도 사회가 매우 폐쇄적이고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특히 여자들에겐 더욱 그렇죠. 저는 이런 환경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거든요."
버커스트 부인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녀의 얼굴과 온몸을 파고 들고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곳에서의 제 생활은 모든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요. 단지 저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저에게 가해지는 부자연성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 기회에 솔직히 털어놓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있었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다시는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의 상기된, 그리고 도전적인 얼굴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제가 너무 솔직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우리 미국인의 생활방식일 뿐이에요. 저는 이 기회에 저를 주인공으로 해놓고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도전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버커스트 부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머물고 있어 올리비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난 용기가 있으며 무엇이든 솔직하게 털어 놓는 여성을 좋아해요. 그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내 느낌으로 우리는 정말 잘 지낼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1년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건 사실인가요?"
"예,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기간을 연장한다.든지 하는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없겠군요."
올리비아의 뇌리에 자이 라벤던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곧 자신에게 화를 내며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인도에서의 생활도 즐겁지만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1년 이상 머무르긴 힘들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모가 말한 온갖 거짓들을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까지 격상된 인물로 묘사한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였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난 격식을 따지는 일 따위는 질색이니까 올리비아 양,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책임하리만치 대담한 질문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더 당황하였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물론 프레디는 올리비아 양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버커스트 부인은 잠시 한 순간이라도 흩어짐이 없는 태도로 올리비아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지 올리비아 양의 출중한 외모나 솔직한 성격을 보고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올리비아 양은 내 아들이 좋아하는 만큼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이에요., 내 말이 맞나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서 올리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근엄한 여인에게 가장 적절하게 대답하려면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 아들은, 솔직히 얘기해서 얼마든지 좋은 아내감을 얻을 수 있는 청년이에요.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외아들인데다가, 가업을 이어받아서 촉망받는 청년실업가로 발돋음할 수 있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은 입을 열 때가 아니었으며, 버커스트 부인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아이가 그다지 활동적이고 현명한 젊은이는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요."
"저 그것은"
버커스트 부인은 자신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려는 올리비아의 시도를 재빨리 제지하였다.
"올리비아, 내 아들의 이런 결점을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아이는 지적인 인물이 아닌 데다가 술주정뱅이에 의지가약한 사람이에요. 한때 이런 문제들이 나를 몹시도 괴롭힌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난 확실한 현실주의자니까요. 나는 그 아이가 만일 현명하지 못하고, 예의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그런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얼마 못 가 인생을 망치게 되리라는 걸 잘 알고있어요."
이미 버커스트 부인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고 근엄하던 얼굴엔 슬픈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지금 내 아들은 파멸로 달려가고 있어요.그 아이는 과다한 음주에 양심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고 거리의 매춘부들과 놀아나고 있어요. 하지만 난 어느 편이냐 하면, 남자란 바람둥이에 술주정뱅이라 해도 확실한 자기목표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프레디에게는 그런 목표도 설계도 아무것도 없어요. 무절제한 생활과 허약한 몸, 거기다 미래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올리비아는 충격을 받았다. 버커스트 부인으로부터 받았던 차갑고 엄숙한 인상은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지금 눈앞에는 한 어머니의 비참하고 절망스런 얼굴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프레디를 구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도움이 필요해요. 훌륭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여자 말이에요. 그 여자가 프레디를 사랑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를 잘 보살펴 주고, 그의 잘못을 이해해 주고, 그리고 후손을 이어 줄 그런 여자면 난 만족해요."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의 절망을 조금은 이해하면서도, 이 말에는강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한 능력과 좋은 성격을 가진 여자가 무엇이 답답해서 이런 최악의 거래에 동의를 할 것인가. 사랑이 결핍된 그런 결혼생활이 얼마나 유지될 것이며, 유지된다 한들 무슨 희망과 보람이 있겠는가. 올리비아의 마음을 꿰뚫듯이 버커스트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사랑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지만 물질은 항시 남아있는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적어도 이 인도땅에서 버커스트 가(家)의부인이란 칭호로 환영받지 못할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무슨일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올리비아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하였다.
"게다가 한 가지 빼놓은 사실이 있는데, 그건 그애가 무능력하긴 하지만 아주 착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아이의 아내가 되는 여자는 다른 아내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이 이해되나요?"
이해한다고 해도 함부로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깊은 숨을 들이키며 일어서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불쾌한 대화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모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몰아 넣었다는 사실에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며 그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인내하면서 다시 버커스트 부인 앞에 섰다.
"저에 대한 터무니없는 높은 평가에는 진실로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건분명 제게는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리고 전 부인께서 제안한 내용이 더확대되기 전에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말씀드려야겠습니다.저는 부인의 아드님에 대해서 추호도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같은 비열한 거래엔 모욕을 느낍니다. 제가 확실한 대답을 회피할수도 있겠으나 부인께서도 솔직한 걸 좋아하신다니 여기서 말씀드리지요. 저는 부인의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던 버커스트 부인의 표정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난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무엇하는 누구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요. 올리비아가 브리짓트 부인의 여동생의 딸이라는 것만으로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가문의 조건에 만족해요. 그저 올리비아가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에만 나의 관심은 쏠리고 있어요."
"하지만 부인께서는 그것마저도 전혀 모르시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은 점쟁이가 되는 법이에요. 한눈에 상대방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에요. 올리비아 양은 젊고 건강하며 무엇보다. 건전한 품성을 가진 여자예요. 자신만의 강한 의지와 자신감도 있구요. 난 올리비아를 처음 본 순간 알 수가 있었어요. 난 우리 가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 나의 비위나 맞추고 돈에만 신경을 쓰는 여자들에겐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올리비아는 자신이 자칫하면 헤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랜 생각 끝엔 겨우 한 마디 말만을 해주었다.
"부인께서 진저리를 친 많은 여성들 중에 적어도 그런 여성이 한 명쯤은 있겠지요."
결코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는 스스로 이 말이 버커스트 부인에게 비웃음의 충고로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리비아 양! 난 60이 넘었어요. 내가 농장 경영주의 며느리로 배운것이 있다면 그건 훌륭한 종마(種馬)를 골라내는 일일 거예요. 오늘 올리비아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브리짓트 부인처럼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웃지도 않았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세상에 자신의 며느리를 고르는데 이런 잣대를 가지고 있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아마 다른 여자들 같으면 지난 주말의 나의 초대를 결코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어떤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버커스트 부인이 쓸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설득되어질 리도 없지만, 올리비아는 부인의 이런 자상한 태도에 경계심을 느끼며 몸을 움찔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올리비아에게 그런 제의를 한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해요. 결코 나는 오늘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버커스트 부인의 용기와 솔직함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만한 부인에게 그건 결코 쉬운호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 대답이 부인의 기대에 어긋나 죄송합니다."
올리비아의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버커스트 부인은 그녀의 손을 꼭쥐며 간청하듯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올리비아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러나 올리비아, 부탁이 있어요. 오늘 내가 제안한 것을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해 줘요. 난 오늘 올리비아에게 내 속마음을 모두 털어 놨어요. 만일 더 생각해 본 후에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프레디나 나는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요. 프레디가 조만간 올리비아에게 구혼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분명 일을 망쳐놓을 것이기에 내가 먼저 언질을 준 거예요. 놀랍고 불쾌하겠지만, 날 용서해 줘요. 난 정말 겉치레엔 신물이 난 사람이에요."
버커스트 부인의 예리한 눈동자를 눈물이 희미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의 참담한 표정을 더이상 마주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프레디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그애는 여전히 나의 아들이고 난 그애를 무척 사랑해요. 그 아이가 하루하루 자신의 인생을 망쳐가는 걸 지켜본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내게 최악의 고문이에요."
올리비아는 부도덕하고 모욕적인 계획을 꾸미거나 연출해 내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버커스트 부인에게 동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제가 어떤 일로 해서든 부인을 위로해 드려야 되겠지만, 프레디 씨와의 일로 부인께 희망을 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올리비아 양, 나는 그저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그리고이 일은 당분간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해요. 브리짓트 부인은 화려한 걸 좋아하는 분이라 사정을 알면 분명히 올리비아를 재촉할 거예요. 그런 내가 원치 않아요."
에스텔을 앞세운 이모와 프레디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더이상 얘기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안도감이 밀려옴을 느끼며 이모를 향해일어섰다.
이모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고 있을 때, 그녀는 그들로부터 좀 멀찍이떨어져서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아직도 올리비아의 마음 밑바닥에 고여 있는 것은, 그래서 마음이 여전히 아픈 것은 결코 프레디 때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리비아는 그렇게 단호하고 매정하게 이 문제를 거절해 버린 자기 자신의 행동에 약간의 후회가 밀려옴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