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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간의 실종 2

6장 살인 신디케이트 큐팡(Q)

 

홍콩. 730. 오후.

저녁 여덟시까지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윤정님은 박동수가 꾸며 놓은 그들의 신혼 살림집을 둘러보기 위해 오홍채와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오홍채가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끌어내려 했으나 그녀는 마다했다.

오늘따라 웬지 센치한 기분에 젖어 있던 그녀가 항상 차창 밖으로만 바라보던 홍콩의 거리를 직접 거닐고 싶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녀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듯하여 오홍채는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불과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오홍채는 몰래 그들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리의 쇼윈도우를 통해 흘낏 바라본 사내는 뜻밖에도 홍콩 경시청의 주태복 경감이었다. 주경감은 자기 딴에는 신분을 감춘답시고 정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오홍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다짜고짜 주경감에게 아는 체를 했다.

"주경감님 아니십니까?"

"이거 참, 그만 들키고 말았군요."

머쓱한 얼굴로 멋적어하는 주경감에게 오홍채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왜 우리를 미행하십니까?"

주경감은 급히 두 팔을 훼훼 저었다.

"원 천만에, 미행이라뇨? 우린 오선생을 보호해 드리려는 겁니다."

"이거 보호가 아니라 사생활 침해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 그런 보호는 필요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리고 오홍채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주경감은 멋쩍어 머뭇거리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뒤따랐다. 오홍채는 못마땅한 얼굴로 정님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말 귀찮은 친구로군요. 어떡할까요? 저런 미행자를 꼬리에 달고 그 집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글쎄요....."

정님은 말꼬리를 흘렸다. 순간, 오홍채가 무심코 내뱉은 미행자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스치는 어떤 사건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오홍채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우선 구룡반도로 갑시다."

주경감은 여전히 그들을 따라왔다. 그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오홍채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고, 정님은 입을 꼭 다문 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바 구룡반도의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스카치와 진토닉을 한 잔씩 시킨 연후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생각이 났는데요, 혹시 기억나세요? 제가 처음 홍콩에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미행했던 차가 있었잖아요?"

"!"

오홍채의 입에서 생각난 듯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 차 번호를 아직 기억하세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오홍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모으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가만 있자, 그 차가.....독일의 명문 스포츠카 포르셰 90년식 신형이었는데.....차 색깔이.....무슨 색깔이었더라?"

"짙은 코발트색이었죠."

그녀가 거들어주자 오홍채는 무릎을 쳤다.

"맞습니다! 짙은 코발트색, 그리고 차 번호를 527X까지는 외웠었는데..... 아깝게도 마지막 끝자리 수는 미처 못 봤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차를 찾아내면 어떤 단서라도 잡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번호가 완전하지 않아서 장담은 못 합니다만, 차 색깔 때문에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먼저 그 차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 같아요."

"그나저나 내가 그 생각을 왜 진작 못했을까?"

오홍채가 차 번호를 기억해내고는 지난 일에 대해 탄식하는 모습을 정님이가 보고 나직하게 웃고 있을 때, 마담 매화가 그들의 자리로 다가왔다.

"어머나, 부러워라. 두 사람이 뭘 그리 정답게 소곤거리세요?"

마담은 언제나처럼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짓궂게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오홍채는 농담으로 그녀를 맞아들였다.

"왜요? 질투가 나십니까?"

"질투뿐이겠어요? 혼자 늙는 것도 서러운 판에."

"혼자 늙다니오?"

"정님씨 좀 봐요. 활짝 핀 꽃처럼 이렇게 예쁘니 나 같은 사람은 옆에 가만히 있어도 지레 늙어보이지 뭐예요?"

마담이 눈을 흘기며 투정을 부리는 시늉을 하자, 그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홀 안까지 따라 들어와 기웃거리던 주경감이 그들 좌석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나오시는군요. 좋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셨는데 합석 못할 것도 없죠. , 앉아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낯선 손님이 합석하자 마담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홍채가 술잔을 권하자, 주경감은 정중하게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공무중에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제가 질문 한 가지만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겠습니다."

"뭡니까?"

오홍채는 짜증스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주경감은 아랑곳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홍채씨가 양성국씨 뒷조사를 하고 다닌 모양이던데, 그 이유가 뭡니까?"

"하하.....뭘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뜻밖의 질문에 오홍채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주경감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마십시오. 양성국의 뒤를 캐고 다닌 이유만 밝혀 주시면 됩니다."

난처한 듯 입맛만 다시던 오홍채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양성국씨의 뒷조사를 한 건 사실입니다만, 누군가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부탁?"

", 양성국씨가 얼마 전에 서울에 갔다온 일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업관계로 양성국씨를 만났던 사람으로부터 양성국씨의 신용도 조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겁니다."

"그 부탁하신 분 성함은?"

"그건 사업상의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말씀드려 봐야 주경감님이 아실 만한 분도 아니구요."

주경감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다 싶어 오홍채는 쐐기를 박았다.

"사업을 하다 보면 그런 일이 왕왕 있는 거 아닙니까? 특히 국제적인 상거래에 있어선 필수적이죠. 만사가 불여튼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 두 분께 폐 많이 끼쳤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가십시오."

그리고 주경감은 선선히 물러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정님은 그 동안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어쩜 그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잘 하세요?"

"할 수 없죠. 사실대로 얘기했다간 경을 치게요?"

"어머, 경을 치다뇨?"

"생각해 보십쇼. 외국인이 자기 나라에서 수사를 벌이고 있는데 좋아할 경찰이 누가 있겠습니까? , 우리도 그만 일어날까요?"

오홍채는 정님을 재촉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윤정님과 오홍채는 휴양지로 유명한 홍콩섬 리프레스 만의 별장지대에 도착했다. 영국풍의 아담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주택가에 들어선 순간, 정님은 어렸을 때 읽었던 장난감 병정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집들이 얼핏 연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날고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주택가의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녀의 집은 주택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오홍채는 현관문을 따고는 열쇠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세요?"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의 베란다에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아담하게 꾸며진 거실의 분위기가 아늑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소파에 넋없이 앉은 채 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럼,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십시오. 전 회사에 가 있다가 저녁에 호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홍채가 돌아간 후 덩그렇게 혼자 남게되자, 그녀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왔다. 혼자 우두커니 남게 되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상념을 떨치려는 듯 일어나서 베란다의 창문을 열어젖히자, 남국의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가 한꺼번에 거실로 밀려들었다. 이 아름다운 바다, 마치 장난감처럼 귀여운 저택의 거실에 덩그렇게 혼자 있자니 쓸쓸함이 더했다. 떠오르는 동수의 환영을 떨치기 위해 정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베란다의 창문을 닫아버리고 방들을 둘러보았다.

(어머!)

서재로 보이는 방을 들어서는 순간 정님은 숨을 삼켰다. 서재의 책상 위에 매화 한 송이가 활짝 핀 채 꽃병에 담겨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생화가 아닌 조화였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활짝 핀 매화꽃 송이가 조금도 시들지 않아 이 저택에 누군가의 침입이 있었던 게 아닌가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그녀는 호텔 객실 앞에 테이프와 함께 매화꽃이 놓인 이후로는 매화가 조금도 고운 눈으로 보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매화가 홍콩의 국화라 하더라도 말이다. 왜 하필 매화가 이 방에 꽃혀 있을까? 정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사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그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님은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서재의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 있는 원서들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몇 권의 책을 뽑아보던 그녀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경제학을 전공한 동수씨가 왜 이런 책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과연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중국 관계의 책들이 온통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내용도 중국의 역사, 풍습, 경제, 지리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그리고 다시 몇 권의 책을 뽑아보아도 역시 이해가 안 갔다. 그녀가 펼쳐든 또 다른 책들은 농사법과 관련된 책자들이었다. 그것은 도무지 동수가 관심을 가지고 보았으리라곤 믿어지지 않는 내용의 책들이었다. 정님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에 맥을 놓고 말았다.

 

한편, 윤정님이 리프레스 만의 별장에서 의문 속에 싸인 시각에, 홍콩 시내의 모처에선 새로운 양상의 음모가 진행중이었다.

전화벨이 길게 울리자,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전화를 받았다.

", 해동상사입니다."

"나 퀸이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에 움찔 놀란 사내는 금방 부동자세가 되었다.

"로미오 바꿔!"

"지금.....출타중이십니다."

사내는 수화기에다 대고 연신 굽신거렸다.

"자네 몇번인가?"

"1번입니다."

"바로 자네였구먼! 그런 서툰 짓을 한 게!"

"무슨.....말씀이신지?"

두려움에 싸인 듯 사내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기 속에서 묵직한 질타가 실린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네이란 거리의 폭파사건은 1번이 책임자지?"

".....그렇습니다만."

"바로 그 미련한 짓 때문에 우리 5열에 금이 가고 있는 걸 몰라? 괜히 벌집을 들쑤셔서 홍콩 경시청이 뛰고 있잖나!"

"죄송합니다. 전 로미오의 지시로 경고만 준다는 게."

"오늘 저녁 여덟 시에 로미오는 내 전화를 대기해! 그리고 5번에게 주의를 줘. 땡벌이 5번을 캐고 있어!"

", 알겠습니다."

"일들 똑똑히 해! 쥴리엣이 날뛰고 있으니까 더욱 주의하도록!"

"!"

사내는 차렷 자세로 크게 대답했다.

"기억해 둬! 오늘 저녁 여덟시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사내는 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홍콩. 미라마 호텔. 730. 17:50.

미라마 호텔로 돌아와 객실로 들어오던 정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거실의 탁자 위에 매화꽃 한 송이와 테이프 한 개가 나란히 놓여 있지를 않는가. 그녀는 급히 수화기를 집어들고 전화의 후크를 두드렸다. 그리고 프런트를 통해 룸 담당자를 호출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계속하는 걸까? 그녀가 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도무지 끌리지 않는 의문에 싸여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세요."

미색의 호텔 제복을 미끈하게 받쳐 입은 담당직원이 들어오더니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오늘 누가 절 찾아왔나요?"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럼, 이 매화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이 테이프하고 매화는 누가 갖다 놨어요?"

", 그거 말입니까? 그게 이 방문 앞에 놓여져 있길래 손님이 떨어뜨린 걸로 알았습니다만, 혹시 아니라면....."

"됐어요. 그만 나가 보세요."

정님은 맥없이 손을 젓고 말았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룸 담당자는 다시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역시 그녀에게 남은 건 소득 없는 결말과 허전함뿐이었다.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정님은 가방을 뒤져 워크맨을 꺼내 카세트에 테이프를 끼워 작동시켜 보았다.

"여보, 나 동수야.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난 잘 있어. 정님씨가 홍콩에 갔다는 소식도 들었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건 내 소식을 경찰에 알리지

말라는 거야. 그렇잖으면 더 이상 연락할 방법이 없어져. 부탁해, 정님이....."

정님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린 듯 한동안 맥없이 앉아만 있었다.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할는지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서울. 시경강력계. 730. 18:00.

수사계장실의 문이 열리고 윤사장의 모습이 불쑥 나타나자, 마침 퇴근 준비를 서두르던 김석기는 놀란 눈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이게 누구야? 요즘은 한가한 모양이로구먼.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한 걸 보니."

"자네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들고 왔는데."

소파에 마주 앉기가 바쁘게 윤사장은 품속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게 뭔가?"

"홍콩에서 오홍채군이 보낸 보고서야."

"그래?"

김석기는 번뜩이는 눈으로 자세를 고쳐 앉더니 보고서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선 생기가 감돌았다.

"고맙네. 크게 도움이 되겠어."

"그렇다면 찾아온 보람은 있는 셈이군."

활기찬 김석기의 표정과는 달리 윤사장의 안색엔 어딘지 모르게 짙은 우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인가? 테이프 분석 결과 박동수가 서울의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결론 말일세."

"우리는 그렇게 믿네."

"....."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윤사장은 침통한 표정을 풀 줄 몰랐다.

"오늘날의 과학은 놀라울 정도라네. 음성 테스트나 음파를 잡아내는 기술은 거의 기초분야에 속할 정도라니까, 테이프 분석 결과에는 오차가 있을 수 없네. 그나저나 자네 회사에서 그 일급비밀인가 뭔가 정말 말해 줄 수 없겠나?"

 

홍콩. 쉐라톤 호텔. 730일 밤.

하나둘씩 네온사인이 점멸하는 어스름한 홍콩의 야경을 뚫고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윤정님은 차창 밖으로 흐르는 야경에 눈길을 주었다. 임선애라는 여인은 과연 얼마나 미인일까? 정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오홍채가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푹 빠져 있는 걸로 보아서 대단한 여자임은 분명한 듯했다. 입을 다문 채 핸들을 잡고 있는 오홍채의 표정도 어딘지 모르게 들뜬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침묵을 깨뜨렸다.

"쉐라톤 호텔은 어느 정도예요?"

"초특급 호텔입니다. 아마 홍콩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럼, 지난번에 제가 묵었던 레팔르스 베이 호텔과 비교하면?"

"그쪽은 영국풍의 고전적이고 귀족스런 호텔이니까 비교가 어렵죠. 이쪽은 신현대식 호텔이니까요."

"그런 호텔에서의 파티라니 굉장하겠네요?"

"아마 그렇겠죠. 저도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건 처음입니다."

"어머나!"

그들의 승용차가 어느새 쉐라톤 호텔의 주차장으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쉐라톤 호텔의 웅장한 자태를 올려다보면서 정님은 흥분될 정도로 설레었다.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질 화려한 파티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녀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파티장으로 들어서자 경음악의 상쾌한 음률이 귓가를 맴돌았다. 파티장은 참석한 하객들로 붐볐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오홍채는 위압감을 느꼈다.

아마도 홍콩 사회의 지도자나 유명 인사는 거의 다 참석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상류사회의 저명인사들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던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다. 바짝 붙어서 뒤따르던 정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임선애씨는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려운데요?"

"정말 굉장하군요. 홍콩의 상류층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아요."

"그런 모양입니다."

"혹시 오선생님이 알 만한 사람도 있나요?"

"."

"어머, 누구예요?"

오홍채는 당황스런 얼굴로 급히 손을 저었다.

", 제가 직접 알고 있다는 게 아니구요, 이곳 홍콩 신문이나 방송 등에 늘상 오르내리는 지명도 높은 인사들이 꽤 참석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큰 파티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릴 초청한 임선애씨는 어디 있죠?"

"지금 찾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자리는 정말 거북해요, 그만 나갈까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입장은 오홍채 역시 매한가지였다. 오홍채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거북스러워하는 정님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귀부인 차림의 여인이 그들 쪽을 향해 다가왔다.

오홍채는 두 눈을 꿈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에 금테안경을 쓰고 가슴이 패인 눈부신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아마 오늘 파티의 호스트인 듯 손님들을 접대하다가 낯선 모습으로 쭈삣거리는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온 모양이라고 오홍채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귀부인은 세련된 영어를 구사했다. 오홍채는 눈이 부신 듯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뛰어난 미인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국말로 바꿔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 이분이 윤정님씬가 보죠?"

"!"

순간, 오홍채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그는 그 여인을 알아보았다. 그 여인은 바로 그들을 초청한 장본인인 임선애였던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난 감쪽같이....."

"쉬잇!"

반가워서 아는 체하는 오홍채를 임선애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재빨리 명함 한 장을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빠르게 몇마디 지껄였다.

"나를 아는 척하지 마세요. 제 이름은 여기 적혀 있어요. 잠시 후 연락드릴게요. 그때 거기서 만나요."

나직하게, 그리고 쏜살같이 말을 내뱉은 임선애는 다시 홀을 꽉 메운 인파 속으로 묻혀들고 말았다. 오홍채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만을 지켜보았다. 정님이 가만히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명함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정신을 차리고 명함을 보던 오홍채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배어나왔다.

"제니퍼 코올 상회 매니저.....로즈메리?"

그것은 그들의 상식으로 얼토당토않는 엉뚱한 명함이었다. 정님이 나직하게 되물었다.

"로즈메리라구요?"

"여기선 로즈메리로 통하는 모양입니다."

"도무지 알쏭달쏭한 여자로군요."

", 그 폭파사건 이후로 새롭게 변신한 모양입니다."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기다려 보죠.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요. 저쪽으로 갈까요?"

그들은 파티장의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즈메리로 새롭게 변신한 임선애로부터 웨이터를 통해 쪽지가 전달된 것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 파티가 파장 무렵에 이르렀을 때였다.

__901호실에서 기다리세요.

쪽지에 적혀 있는 건 그 말뿐이었다. 오홍채와 윤정님은 파티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크리스탈 볼룸을 살짝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쉐라톤 호텔 901호실에 투숙하여 한참을 기다렸으나 금방 온다던 임선애는 좀처럼 나타날 줄 몰랐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그저 놀라운 듯 오홍채는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무료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정님은 그의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임선애씨의 새로운 신분이 너무 놀라워서요."

"제니퍼 코올 상회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물론이죠. 홍콩의 3대 재벌 중의 하납니다."

"어머나!"

오홍채의 말에 정님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니퍼 코올 상회는 영국계 재벌 그룹으로 홍콩 경제계의 빅 쓰리로서도 유명하지만, 영국 본토에서도 상당한 위세를 떨치는 모양이더군요."

"그런 회사의 매니저라면....."

"임선애씨가 그 회사의 사장은 아니겠지만, 사장 상담역이라든가 사장의 직책에 버금가는 신분은 된다고 봐야겠죠."

"세상에....."

정님은 새삼스럽게 감탄을 연발했다. 자기 또래의 나이거나 아니면 몇 살이나 더 먹었을까? 고작 그 정도의 나이에 제니퍼 코올 상회의 매니저라니, 그녀로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객실의 차임벨이 울리는가 싶더니 화사한 드레스 차림 그대로의 임선애가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홍채와 정님은 눈이 부신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반가움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호호호.....놀라셨지요?"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홍채는 급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자세한 이유는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그녀는 정님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정님씨."

"저두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앉으세요."

그녀는 주인처럼 자리를 권하더니 냉장고에서 캔맥주 세 통을 들고 와선 스스럼없이 그들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파티장에서 보았던 귀부인 같은 품위와 위엄과는 다른 거친 몸짓이었다.

"아휴, 억지웃음을 마냥 짓고 있으려니까 얼마나 피곤한지. , 우리 들면서 얘기해요."

그리고 그녀는 시원하게 캔맥주를 들이켰다. 오홍채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여전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눈치였다.

"변장술이 기가 막히는군요. 영판 딴 사람입니다. 제가 몰라볼 정도니까."

"호호호.....그런 사정이 있었어요."

깡통 하나를 완전히 비우고서야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궁금해 죽겠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속 시원히 좀 알려 주십시오."

"그래요,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시원시원하게 운을 떼었고, 그들은 긴장한 낯빛으로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선생님은 홍콩에 오신 지 얼마나 됐어요?"

"올해로 5년쨉니다."

"그럼, 그 사건은 잘 모르시겠군요."

"그 사건이라뇨?"

"벌써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제니퍼 상회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 말이에요."

"!"

오홍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고 계셔요?"

"풍문으로 들어서 어렴풋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건에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는 것두요?"

오홍채는 금시초문이란 듯 두 눈만을 껌벅였다.

"그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그리고 5천만 불이라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어요."

오홍채와 윤정님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10년 전에, 당시 스물두 살의 제니퍼양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어요. 그리고 거액의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 전화가 걸려와서 그녀나 유괴당한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요?"

"회사에서 대책을 세우고 경찰에 제보하느라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제니퍼양은 무참하게 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어 홍콩섬 교외에서 반라의 변사체로 발견되었지요."

"세상에, 그런 죽일 놈들이!"

정님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불같이 노한 제니퍼 사장은 천만 불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을 찾아 나섰고, 그게 매년 증액되어 지금은 5천만 불에 이르게 되었어요."

"홍콩 경시청은 뭘하구요?"

"속수무책이었죠."

"그런 선애씨는....."

그녀가 다시 그의 말을 잘랐다.

"앞으로는 메리라고 불러 주세요. 영국의 제니퍼 코올 본사에서 파견된 로즈메리예요."

"그럼, 진충부가 경영하는 광동이란 무청에 로즈메리가 침투해 있었던 것도....."

"그래요, 전 조방을 탐색해 볼 계획이었죠."

"그래서 알아냈습니까?"

"약간은."

"조방이 그 사건에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럼?"

"조방은 하수인이었어요. 조방의 능력으로 그런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까요. 조방은 홍콩의 폭력조직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조직이에요."

정님은 놀라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홍콩에는 살인 청부 신디케이트가 있어요."

"그게 어딥니까?"

"아직 그것까지 파헤치지 못했어요."

"그게 어떤 조직이란 것두요?"

"그 단체의 이름은 알아요."

"뭡니까?"

오홍채의 조급한 물음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큐팡이라고 하더군요."

"큐팡?"

"(Q)! 그러니까 퀸을 가리키는 이니셜이에요. 그래서 큐방이라고 부르는데 이곳 발음으로는 큐팡이 되는 거죠."

"큐팡이라....."

오홍채는 가만히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지금까지 홍콩의 최대 폭력조직은 일명 유니온파라고 일컫는 유팡이었어요."

"유팡이라니, 이름이 희한하네요?"

정님은 그녀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듯 다가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유팡은 뜻밖에도 역사가 깊은 조직이더군요. 중국 본토가 공산화 되기 전에 두월생이라는 인물이 중국 대륙을 휘어잡고 있었어요. 지금도 80고령으로 대만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다는데, 그 두월생의 수하에서 친팡(靑幇)과 흔팡(紅幇)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위세를 떨쳤죠. 그 후 CC단과 비밀단체 남의사가 관계를 맺어 위력을 떨치다가 중공군에 쫓겨 국외로 탈출하면서 오늘날의 유팡이 되었던 거예요."

"그렇군요....."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홍채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유팡보다 더 무서운 게 큐팡이란 말입니까?"

"그렇죠. 큐팡은 그들 모든 폭력조직 위에 군림하고 있어요. 아니, 군림한다기보다 그런 조직들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좋겠네요. 사실 제가 오늘 두 분을 부른 것도 그 큐팡에 대한 문제로 상의를 좀 드릴까 해서예요."

"? 저희들한테요?"

정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오홍채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큐팡에 대해 보잘 것 없는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상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두 분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그런 거예요."

"우리가 뭐....."

오홍채 역시 똑같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냉정한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큐팡의 조직을 캐내고 분쇄하는 데 두 분의 협조가 필요해요."

"어머, 큐팡을 상대로 싸우라구요?"

"!"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요?"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구요."

"하지만.....큐팡이란 무시무시한 그런 조직과는....."

정님은 가당찮은 말이라고 발뺌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님의 아픈데를 정곡으로 찔러 왔다.

"그렇게 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박동수씨를 찾겠다고 나섰어요?"

"그건 이런 일과는 달라요."

"다를 것 없어요. 박동수씨의 실종도 큐팡의 소행이니까요."

"?"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정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십중팔구 큐팡과 관련되어 있어요. 오홍채씨는 진충부를 추적하다가 저와 만나지 않았던가요?"

"그렇습니다."

오홍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단적인 예 중의 하나예요."

"그렇다면, 큐팡이 왜 동수씨를 납치한 거죠?"

"무슨 이유에서 박동수씨를 납치했는지 그건 나도 몰라요. 그걸 우리가 이제부터 밝혀내자는 거예요."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공연히 노적가리에 불을 지르는 짓이나 다름없어요. 지금까지 큐팡이란 조직이 표면에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모든 사건들은 큐팡이라는 거대한 살인청부 신디케이트가 사주를 하여 하부 조직인 유팡이니 조방이니 하는 조무래기들이 저지른 소행이에요. 자기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예요. 큐팡은 어디까지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비밀결사단체일 뿐이에요."

오홍채가 급히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임선애씨.....아니, 메리양! 큐팡이라는 그 정체는 어떻게 밝혀낸 겁니까?"

"제가 큐팡의 요원 하나를 우리 쪽으로 전향시켰어요."

"그럼, 그 사람을 통해서 큐팡의 조직을 파헤칠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도 큐팡의 하부조직의 일개 조무래기일 뿐이었어요. 큐팡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구성되어서 한둘 소탕해 봐야 큐팡을 분쇄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돼요."

"그러니까 잘못 건드렸다간 오히려 놈들을 놀라게 해서 영영 지하로 잠적해 버릴 우려가 있다는 거로군요."

"바로 그거예요."

"그럼 놈들의 우두머리는 퀸입니까?"

"그래요."

"그 퀸의 정체는?"

"아무도 몰라요. 글자 그대로 여왕이라는 별명으로만 통할 뿐이죠. 얼굴을 본 사람도 없고, 만나 본 사람도 없대요."

"그래서야 어떻게 조직을 움직입니까?"

"전화를 통해서죠. 각 조직원마다 고유번호와 각자의 접선시각이 있어요. 그 시각에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있어요."

"이거야말로 한양에서 김서방을 찾는 격이로군."

기가 막히다는 듯 오홍채는 맥이 빠진 시늉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퀸을 찾아내야 해요. 그 퀸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퀸을 찾기 전에는 큐팡을 분쇄한다는 건 요원한 일이에요."

"퀸은 여잔가 보죠?"

"!"

큐팡에서 퀸의 위력은 어느 정돈가요?"

"절대적이에요. 아무튼 퀸을 배신하지 못해요. 모두들 얼굴도 모르는 퀸에 대해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더군요. 제게 사실을 털어놓은 그 요원도 미국으로 감쪽같이 피신시켜 준다는 조건하에서 사실을 털어놓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오선생님!"

정님이 깜짝 놀라 오홍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도 걱정 말라는 듯 그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하하하.....한번 해볼 만한 일 같은데요. 또 박동수씨를 찾자면 결국 우리도 거들지 않을 수 없구요."

그러나 정님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들의 힘만으로 역부족이긴 합니다만, 박동수씨를 찾는 일인데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고마워요. 제 뜻을 알아주시니."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앞으로는 메리양을 부를 때 로즈라고 부르겠습니다. 로즈와 연락을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드린 명함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요. 그 번호에 전화를 걸어서 암호를 대세요. 암호는 '알파가 오메가를 찾는다'예요. 그럼, 즉시 저하고 연결될 거예요."

"알파가 오메가를 찾는다.....꼭 간첩들 접선하는 것 같은데요?"

오홍채의 너스레에 모두들 한바탕 웃고 말았다.

"호호호.....큐팡과 싸우려면 이 정도의 조심성도 부족할 판이에요. , 이것 한 가지를 꼭 지켜주셔야 해요. 큐팡이나 저에 관한 문제는 누구한테라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 두 분의 부모님까지두요, 아시겠어요?"

그녀의 엄숙한 분위기에 눌린 듯 그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7장 두 번째의 살인

 

홍콩. 730. 23:00.

"나 퀸이다!"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울려오자, 사내는 움찔 놀라 부동자세를 취했다.

", 여왕님, 전 로미옵니다."

"쥴리엣은 어떻게 됐나?"

", 오늘 쉐라톤 호텔의 크리스탈 볼룸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것까진 확인했습니다만, 연회 도중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려서.....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등신 같은 놈! 그따위로 일을 처리하니까 우리의 5열에 금이 가고 있는 거야! 실종된 7번의 행방은 알아냈나?"

"죄송합니다만 아직은....."

사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통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미련한 놈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7번을 찾아! 그리고 배신의 기미가 보이면 즉각 제거해 버려!"

"알겠습니다."

"박동수는?"

"지독한 놈입니다. 거의 빈사지경인데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작전을 바꿔!"

"?"

"유화책으로 슬슬 구슬리란 말이야! 그리고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찮으니 일을 빨리 처리해야 돼!"

"알겠습니다."

"내일 통화시각은 열시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사내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 정청. 731. 9:00.

다음 날 아침, 오홍채는 관공서가 문을 여는 일과 개시 시각이되기가 무섭게 홍콩 정청으로 달려갔다. 사무관 왕동문이 허겁지겁 찾아온 오홍채를 놀란 눈길로 맞아들였다.

"아니, 오홍채씨가 웬일입니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것은 확실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금 바쁩니까?"

다짜고짜 묻는 말에 눌린 듯, 그렇지 않아도 왕동문의 큰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 바쁜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요?"

바쁘게 서두르는 오홍채의 표정에서 뭔가 큰일이라도 난 모양이라고 지레짐작을 한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쁘지 않으면 차나 한잔 합시다.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

"그럽시다."

왕동문은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앞장서서 구내매점으로 그를 안내했다. 홍콩 정청의 사무관 왕동문은 회사업무 관계로 드나들면서 죽이 잘 맞아 친분을 맺은, 홍콩에선 몇 안 되는 지기 중의 한 명이었다.

구내매점에서 오룡차 한 잔씩을 놓고 마주 앉아 급히 찾아온 사연을 털어놓자, 왕동문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527X까지만 알고 있는데 그 번호의 차량 소유주가 누군지 알아야겠다 이런 얘기 아니요?"

고작 그런 문제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서둘렀느냐는 힐난의 뜻이 그의 눈빛에 다분히 서려 있었다. 오홍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요!"

왕동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지는 않겠는데요. 527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차량번호가 한둘이 아닐 텐데, 끝자리뿐만 아니라 앞자리 부호도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포르셰 90년식 코발트색 스포츠카니까 뜻밖에 쉬울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일단 차량등록부에서 527이란 숫자가 들어가는 차량의 카드를 몽땅 뽑아보지요."

"고맙습니다, 왕형!"

"근데 이걸 어디에 쓸려는 거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왕동문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묻지 말아 주십시오. 나름대로 고충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절대 나쁜 일이 아닌 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차량의 소유주가 누군지 그것만 알면 되니까요."

"알겠소. 잠깐만 기다려 봐요."

왕동문이 카드를 뽑으러 간 사이에 오홍채는 오룡차를 한 잔 더 청해 마셨다. 중국의 특산물인 오룡차는 마신 뒤끝의 향긋한 입맛이 일품이었다. 왕동문이 다시 돌아온 것은 그가 네 잔째의 차를 청해 놓고 있을 때였다.

오홍채는 반색을 하며 그를 맞았다, 그의 활짝 웃는 모습에서 어쩐지 일이 잘 풀릴 듯한 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이구, 527이란 숫자가 들어가는 번호가 한두 대가 아닙니다. 무려 50대가 넘어요. 다행히 그중에서 90년식의 코발트색 포르셰는 불과 석 대뿐이었지만 말입니다. , 이게 그 카드를 복사한 겁니다."

왕동문은 엄살과 과장이 다분한 몸짓을 해보이며 석 장의 카드 복사본을 꺼내 놓았다.

"고맙소이다, 왕형!"

감격한 오홍채는 대뜸 그의 손부터 와락 움켜쥐었다. 면구스런 듯 그는 두 손을 훼훼 저었다.

"어디 카드부터 살펴봐요. 그 중에 알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아니?"

무심코 카드를 받아들던 오홍채가 눈을 크게 떴다. 세 사람의 명단중에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었다.

 

홍콩. 리프레스 만. 731. 10:50.

아침 일찍 미라마 호텔의 1층 레스토랑에서 몇 조각의 빵과 커피 한 잔인 브렉퍼스트로 간단한 아침을 때우고 호텔을 빠져나온 윤정님은 리프레스 만의 휴양지대에 있는 신혼 살림집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둔 집이라 가구들과 집기들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가 현관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매캐한 먼지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어제 처음 이 집을 찾아왔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냄새였다.

그녀는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어젖혔다. 진공청소기와 물걸레를 찾아내어 청소를 시작했다. 그녀가 부산을 떨며 대청소를 끝낸 집안은 몰라볼 만큼 깔끔하게 변해 있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청소를 할 때는 미처 몰랐으나, 일을 마치고 동수의 서재에 넋 없이 앉아 있자니 문득 청승맞은 느낌이 그녀의 의식을 짓눌러 왔다. 동수의 환영이 떠오르면서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상념을 떨치듯 고개를 저으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수씨는 지금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그가 큐팡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덩달아 나는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건지, 그것은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빠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동수의 업무가 큐팡과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짐작도 해보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위안이 되지 않는 그녀였다.

정님은 동수의 서가에 꽂혀 있는 이상한 원서들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았다. 도무지 남편의 전공과는 걸맞지 않는 원서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다. 이 책들은 도대체 뭘까? ? ? ? 그녀의 상념은 끝없이 이어졌고, 의문의 부피는 계속 커져 갔다.

그때, 현관 앞에서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오홍채가 불쑥 현관으로 들어섰다.

"정님씨!"

그의 안색은 흥분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홍콩 정청에 가신다더니요?"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사실을 한 가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활짝 웃어 보였다. 순간, 정님의 가슴은 크게 뛰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것 좀 보십쇼. 이 명단 말입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카드를 펼쳐 보였다. 정님은 조심스럽게 카드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예요?"

"527로 번호가 시작되는 승용차 중에서 90년식 코발트색 포르셰의 소유주들입니다. 그 명단의 첫번째 이름을 보십시오."

"어머, 양성국?"

그녀의 입에서 대뜸 탄성이 새어나왔다.

"하하.....그렇습니다. 바로 양성국입니다."

정님은 놀라운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성국이라면 사회사업가로서 덕망이 인정되어 그들의 수사선상에서 이미 제외되었던 인물이 아닌가.

"설마....."

정님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마터면 헛다리만 짚을 뻔했으니."

"전 정말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한 길도 안 되는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오홍채는 다시 서둘렀다.

", 그만 갑시다."

"어디루요?"

"여기서 마냥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야죠. 서울에 보고를 하고 나서 마담 매화를 찾아가 봅시다."

"매화 언니는 왜요?"

"양성국이 구룡반도의 단골이라잖습니까. 매화를 통해서 뭔가 얻을게 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오홍채는 먼저 현관을 나섰다. 정님은 다시 한번 문단속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오홍채의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순간, 승용차는 힘차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서울. 시경강력계. 731. 11:20.

따르르릉.....

계장실 집무책상의 직통전화가 요란하게 울었다. 김석기는 급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구내 교환전화기와 경비전화, 그리고 직통전화 등 석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으나, 통상적으로 직통전화를 받을 때 그는 남모르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직통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와 특히 가까운 극소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수화기에선 젊고 발랄한 윤정님의 목소리가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저예요, 아저씨."

", 정님양!"

"호호.....별일 없으시죠?"

"그래, 정님양도 별일 없겠지?"

"별일 없어요."

"?"

"양성국이 말예요."

"양성국? 양성국이 누구더라?"

그가 짐짓 의문스런 말투를 길게 끌자, 정님은 참을 수 없는 듯 급히 쏘아붙였다.

"아이 참, 벌써 잊으셨어요? 지난번에 저한테 부탁하셨잖아요. 동수씨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온 홍콩 사람 셋 중의 하나라구요."

", 그래, 그런데 그 친구는 벌써 수사선상에서 제외됐잖아?"

"아니예요, 이젠 그 사람도 유력한 용의자 중의 한 사람이에요."

"?"

"동수씨 실종사건에 양성국이 관련되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진작 말씀을 못 드렸는데, 우리가 처음 홍콩 오던 날 동수씨와 제가 탄 차를 미행하는 차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날이 바로 동수씨가 실종된 날이에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김석기가 불쑥 제동을 걸었다.

"잠깐, 양성국의 혐의 사실부터 먼저 얘기해 봐."

"양성국은 그날 우리를 미행했던 승용차의 소유주예요."

"?"

"이제 아시겠죠? 양성국을 다시 조사해야겠어요."

"이건 정말 뜻밖의 소득인데? 정님일 다시 봐야겠어. 그만하면 탐정 자격이 충분해."

"호호.....괜히 종이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공중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수고했어. 그럼, 나도 서울에서 양성국의 행적에 대해 추적해 볼 테니까, 정님양도 그쪽에서 알아낼 수 있을 만큼은 한번 알아봐."

"."

"그렇다고 무리하면 안 돼! 위험한 일엔 나서지 말구!"

"알고 있어요, 아저씨."

"이 전화, 정말 고마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김석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양성국이란 용의자의 출현에 수사는 뜻밖에 한 걸음 진전한 듯싶었던 것이다.

 

홍콩. 구룡반도. 731. 12:10.

"호호.....무슨 일일까? 이렇게 은밀하게 날 찾는 걸 보니.....설마 나하고 연애나 하자는 건 아닐 테구?"

대낮에 불쑥 구룡반도를 찾아온 오홍채와 윤정님이 대뜸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장소를 찾자, 마담도 그들을 뒤편의 아늑한 밀실로 안내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오홍채의 안면근육을 풀어줄 요량이었으나, 그는 더욱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마담."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채고 마담 역시 정색을 했다.

"그래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던 오홍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건 우리로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선 약속부터 한 가지 받아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나눈 말은 절대 외부에 흘려선 안 됩니다."

마담이 살짝 눈을 흘겼다.

"어머나, 섭섭해라. 마담 매화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여자로 보셨다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죄송합니다. 마담을 못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걸 강조하다 보니....."

"좋아요, 약속할께요. 비록 물장사만 10년째 하고 있지만, 입 무거운 거 하나는 소문난 여자예요."

"사실은, 양성국씨 말입니다."

"양성국씨?"

", 여기 구룡반도의 단골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래요, 그런데 양성국씨는 왜요?"

"바로 그 사람이 박동수씨 실종사건에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어머, 그럴 리가....."

마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서울의 수사본부에서도 양성국씨를 유력한 혐의자로 보고 인터폴에 협조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설마....."

그녀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순 그녀의 눈매 사이로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빠르게 스쳐 갔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난 그 양반만큼은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믿었는데....."

그녀는 낙담한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윤정님이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홍콩 경시청에서도 양성국씨를 뒤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 그게 확실한가요?"

"어제 여기서 보셨잖아요. 주경감이 이곳까지 쫓아와서 우리와 양성국씨의 관계를 추궁하던 일 말예요."

마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돼죠?"

"양성국씨에 대해서 마담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좀 들려주세요."

"어쩌나....."

얼핏 마담의 낯빛에서 수심이 스쳤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래야 그저 그런 것들뿐인데, 뭐랄까? 그 양반이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술집 마담이랑 단골손님이래 봐야 특별한 교류나 왕래가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요."

결국 마담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담 매화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던 오홍채와 정님은 실망만 안은 채 구룡반도를 나왔다.

 

서울. 731. 18:00.

한편, 서울의 수사본부에선 유력한 용의자인 양성국의 재등장으로 인해 아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양성국이 서울에서 남긴 행적을 뒤쫓느라 한바탕 뛰어다녔던 강이규 반장이 계장실에 나타난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김석기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어때? 뭐 좀 건졌나?"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반장이 퉁명스럽게 입을 떼었다.

"이거 이상한데요?"

"뭐가?"

"양성국이 말입니다, 입국 목적이 아주 불투명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양성국의 행적을 더듬어봤더니, 입국 후부터 줄곧 호텔에서만 죽치고 있다가 1주일 후에 출국한 걸로 나타났거든요."

그는 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관광을 다녔다거나 사업상의 목적으로 누굴 만난 사실도 없고?"

", 호텔 종업원들의 말을 빌리면,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답니다. 호텔의 지하 바에서 늘상 술에 빠져 있었다는 걸 보면 말입니다."

".....뭔가 괴로운 일이 있었다, 이런 얘긴가?"

"어쨌든 냄새는 강하게 풍기는데요?"

"뭐가?"

"진충부를 살해한 게 양성국일 가능성 말입니다."

"속단은 일러!"

"하지만 양성국의 출국 날짜를 보십시오. 바로 진충부가 살해된 그 다음날입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

"아니? 계장님은....."

강반장은 코를 실죽거렸다. 무언가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김석기는 냉정하게 머리를 저었다.

"섣부른 단정은 아직 일러. 수사를 할 때 그게 가장 위험한 거야. 혐의가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냉철하게 사태를 점검하고 지켜봐야지."

그 말이 또 불만인 듯 강반장은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단 양성국이 우리나라를 드나든 출입국 횟수를 체크해 보고, 그동안 양성국과 거래한 국내 사업자의 리스트를 뽑도록 해봐."

"....."

마지못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꾸를 하고 강반장은 계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와 엇갈리며 이번엔 윤사장이 헐레벌떡 계장실로 뛰어들었다.

"이봐, 홍콩에서 전화가 왔다면서?"

윤사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성급하게 그를 다그쳤다.

"숨이나 좀 돌리고 얘기해. 차 들겠나?"

"아니, 생각없어. 그보다 수사에 서광이 보인다는 건 무슨 소리야?"

김석기는 어이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원, 우물에 가서 숭늉 내놓으랄 친구로군. 그래, 그 땜에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 내 정신 좀 봐. 홍콩에서 회사 행랑편에 또 하나의 테이프를 보내 왔더군, , 바로 이거야."

주머지 속을 뒤적여 테이프를 건네주자, 김석기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게. 이 테이프를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내도록 조치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김석기는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홍콩. 미라마 호텔. 731. 13:45.

구룡반도를 나온 정님은 오홍채와 헤어져 혼자 호텔로 돌아왔다. 객실로 들어선 그녀는 도어록의 잠금장치를 확인하고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실로 뛰어들었다.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홍콩의 후덥지근한 무더위는 서울에서 느끼던 더위와는 사뭇 달랐다. 요즘은 제법 면역이 되어 있었으나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치 사우나의 한증막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처럼 그녀는 땀에 젖어 있었고 피곤에 지쳐 있었다. 더구나 시원스럽게 가닥이 풀리지 않는 사건 수사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고 더욱 지치게 했다.

샤워기에서 뿜어나오는 차가운 물줄기를 한바탕 뒤집어쓰자 한결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조금은 정리가 되는 듯싶었다.

정님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거실로 걸어 나왔다.

냉장고에서 캔으로 된 세븐업을 한 통 꺼내 꼭지를 따고 단숨에 들이키자 목을 태우던 갈증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싶었다. 그녀는 무너지듯 소파에 몸을 뉜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에어컨에서 내뿜는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그녀는 가운의 옷깃을 여미며 팔짱을 꼈다.

피로가 한결 가신 듯한 쾌적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나갔다. 사회사업가에다 지역사회의 저명 인사로 소문난 양성국이 큐팡의 조직원의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어쨌든 뜻밖이었고, 그의 혐의점을 확고히 하기 위한 증거수집이 우선의 선결과제였다.

따르르릉.....

순간, 전화벨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려던 그녀의 상념을 끊어놓고 말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정님이냐?"

전화를 걸어온 건 그녀의 어머니인 송여사였다. 정님은 반가움에 수화기를 바짝 끌어당겼다.

"엄마!"

"그래, 그 동안 별일은 없니?"

", 엄마."

"그런데 무슨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좋은 소식이라니, 무슨?"

"낸들 아니? 느이 아빠가 흥분해서 설쳐대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있는 눈치더라만."

"아직은 아니야, 엄마."

"그러니? 난 또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송여사의 말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그녀는 어지간히 실망스런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엄마."

실망스런 기색을 눈치챈 정님이 한껏 희망적인 말을 늘어놓았으나 일그러진 어머니의 기분을 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어이그, 어느 세월에.....좋은 소식 기다리다가 처녀 하나 생짜로 늙어 버리겠다."

"엄마, 내가 어디 처녀유?"

"그럼 아니니? 신혼 첫날밤도 못 넘기고 신랑이 행방불명되었으니 엄연히 처녀지."

"하지만....."

"아서라. 난 네가 팔자에 없는 열녀노릇 하는 꼴 보고 싶지 않다."

"....."

"그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아직 모르겠어."

"어이그,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것아. 너까지 느이 아버지처럼 그러구 다니면 난 누굴 믿고 사니, ? 그런 사건일랑 경찰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줄 텐데, 네가 나서서 뭘 어떻게 찾는다구?"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럼 틀림없이 좋은 소식 전할 수 있을거야."

"으휴, 고집하군 꼭. 남편복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더니 정말 옛말 하나도 안 그르다, 쯧쯧....."

어울리지 않게 혀를 차는 송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님은 까르르 웃었다.

"호호.....우스워요, 엄마. 엄마가 복이 없는 사람이면 누가 복 받은 사람이우?"

"이것아! 복 있는 사람이 이렇게 허구헌날 애간장 태우고 사니?"

"알았어, 엄마. 그래, 엄만 복이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조그만 더 기다려 봐요. 내가 복이 철철 넘치도록 만들어 줄께."

"어이그, 대답은 막동이처럼 넓죽넓죽 잘도 하는구나. 이제 그만 끊는다."

송여사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입으로는 한껏 투정을 부리면서도 그녀는 정님의 애교가 짐짓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벨이 울렸다. 정님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

그러나 수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수화기 저쪽에서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것 보세요! 장난 전화라면 그만 끊으세요!"

"정님이!"

전화를 끊으려던 정님은 움찔 놀라더니 그 자리에서 못이 박힌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꿈속에서도 애타게 기다렸던 동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동수씨? 지금 거기가 어디예요? 동수씨!"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상대방에서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었다.

"동수씨! 동수씨....."

그녀가 전화기의 후크를 두드리며 애를 태워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전화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맥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던 그녀는 그만 설움이 복받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울었을까? 그녀의 서러움이 어지간히 해갈되어 갈 무렵, 호텔 객실의 차임벨이 울리며 오홍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부지런히 옷을 입고 매무새를 대충 다듬고는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던 오홍채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정님씨."

그녀가 급히 얼굴을 다듬었으나 부어오른 눈두덩만큼은 오홍채의 눈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님은 다시 서러움이 왈칵 치밀어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느라고 어깨를 들썩였다.

"진정하십시오, 정님씨.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참만에야 정신을 수습한 정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화가 왔었어요....."

"어디서요?"

그녀의 말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다급하게 재촉을 했다. 그녀는 또 한참만에 입을 떼었다.

"동수씨.....목소리가 들려왔어요."

"?"

형편없이 놀란 듯 오홍채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요? 전화로 무슨 말을 했습니까? 동수씨가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던가요?"

그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정님은 머리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오홍채는 실망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전화는 금방 끊어졌구요. 아마 누군가가 옆에서 강제로 끊은 것 같았어요."

오홍채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교환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어디서 걸려온 전환지."

"소용없어요."

"?"

"여기 전화는 DID방식이라 외부에서 교환을 거치지 않고 객실로 바로 연결되니까요."

"그렇군요."

오홍채는 낙담한 얼굴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후, 그들은 호텔 아래층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는 오홍채의 제의를 정님이 선선히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놓고선 마치 고사라도 지내듯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이 답답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뜻밖의 불청객이 불쑥 나타나 그나마의 분위기도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바로 여기들 계셨군요."

능청맞은 웃음을 얼굴 가득 담고 나타난 사람은 홍콩 경시청의 주태복 경감이었다.

"주경감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오홍채는 땡감을 씹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두 분을 찾아왔습니다."

"저희들을 왜요?"

"잠시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다짜고짜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 어서 일어 나십시오. 설마 여기서 소란을 피우실 생각은 아니겠죠?"

"나 원....."

오홍채와 정님은 마지못해 주경감을 따라 나섰다. 과연 호텔 현관 앞에는 순찰차 한 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주경감이 순찰차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 그는 조수석으로 올랐다.

"렛츠 고우! 사건 현장으로 가세!"

주경감의 지시로 순찰자는 사이렌을 울리며 급히 달려나갔다.

"아니, 사건 현장이라니?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스타페리 부두로 갑니다."

", 시청 앞 빅토리아 만의 스타페리 부두 말입니까?"

"그렇소."

"거긴 왜요?"

"스타페리 부두에서 변사체가 한 구 발견되었습니다."

"어머, 변사체라구요?"

순간, 정님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설마, 설마 동수씨가....."

"박동수씨는 아닙니다."

그 말에 정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뭡니까? 우리가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일에 따라가야 하는거죠?"

"관련이 있습니다. 양성국씨가 살해되었으니까요."

"?"

정님과 오홍채는 경악을 금치 못한 듯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양성국이 살해되다니,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함께 느꼈다.

그들이 사건현장에 당도했을 때 페리 부두는 앰블런스와 경찰 차량들, 그리고 구경 나온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주경감은 인파를 헤치며 그들을 안내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양성국의 변사체에는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보십시오."

주경감이 거적때기를 들어올리자 정님은 외면을 하고 말았다. 바닷물에 퉁퉁 불어 변색된 양성국의 사체를 똑바로 쳐다볼 마음의 여유는 조금도 생기지 않는 그녀였다. 몰려드는 인파를 정리하느라 연신 불어대는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주변의 소음과 어우러지며 분위기를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럼, 이쪽으로 따라 오십시오."

주경감은 그들을 현장과는 약간 떨어진 한적한 장소로 안내했다. 소음은 조금씩 잦아들고 힘찬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자, 정님은 메스꺼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묵묵히 뒤따르던 오홍채가 참을 수 없는 듯 주경감을 불러세웠다.

"주경감님!"

"?"

주경감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았다.

"왜 우리한테 이 현장을 보여주는 거죠? 그 저의가 뭡니까?"

"두 분이 이걸 보셔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홍채는 기가 막혀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그럼, 주경감님은 우리를....."

"속단은 하지 마십시오. 전 두 분이 양성국을 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지만 양성국의 사망 원인에는 두 분도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

"제 호의를 엉뚱하게 받아들이진 마십시오. 다만 며칠 후에 모든게 잠잠해지면 두 분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분 역시 제게 할 말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

굵은 안경테 속에서 주경감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한 오홍채는 아연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홍콩. 731. 16:00.

", 제니퍼 코올 상회입니다.!"

전화기의 신호가 떨어지자 젊은 여자의 또렷한 영어 발음이 전화선을 타고 울려왔다. 오홍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알파입니다. 오메가를 찾고 있는데요."

"그쪽 전화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전화를 끊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경감과 헤어져 회사 사무실로 돌아온 오홍채와 정님은 즉시 임선애와 통화를 해야 할 필요를 느껴 전화 통화를 시도했고, 여자의 지시대로 고분고분 따르자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다시 울려왔다.

"저예요."

역시 귀에 익은 임선애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 로즈....."

"날 찾았어요?"

", 급히 좀 만나야겠습니다."

"양성국씨 살해사건 때문인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오홍채는 깜짝 놀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그녀가 벌써 알고 있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울려왔다.

"호호호.....그건 큐팡의 소행이에요."

"큐팡이?"

",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양성국씨 역시 큐팡의 주요 간부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아니, 양성국씨가요?"

"그래요, 그렇다면 큐팡에서 양성국을 없앴다는 얘긴데, 그렇잖아도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조사하고 있던 참이에요."

"지금 좀 만납시다. 우린 한시가 급해요.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아아, 서두르지 마세요. 지금 시간은 곤란하고 오늘 밤이 어때요?"

"좋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세요."

"오늘 밤 여덟시, 홍콩 예술센터 앞 페리 부두로 나오세요."

"부두에서요?"

"홍콩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감상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낭만적 일 듯싶은데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오홍채의 얼굴은 어느새 희열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뭐래요?"

"오늘 저녁에 만나잡니다. 임선애씨를 만나면 실마리가 조금은 풀릴 것 같습니다."

정님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간신히 양성국이라는 끈을 하나 잡았나 했더니 이번에 그 사람마저 살해당하고....."

"조급하게 서둘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 조급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동수씨가 실종되더니 다음날 서울에 나타났고 살인사건이 벌어졌어요. 그 사건에 홍콩의 조방이 관련되었다 했더니 이번엔 큐팡이라는 더 큰 조직이 나타났어요. 그이는 여전히 행방불명이고, 테이프와 매화꽃만이 어디서 자꾸 날아들고요. 게다가 이젠 전화까지 걸려오는데 우린 그이의 행방도 몰라요. 간신히 사건에 연루된 혐의자를 찾아내고 그 뒤를 캐려는 순간, 이제 그 사람마저 죽어 버렸어요. 도대체 이렇게 많은 미스터리 가운데 속시원히 풀린 것은 한 건도 없어요. 차라리 이럴 바엔 경찰에 의뢰해서 공개수사를 펼치는 게 올바른 길 같아요."

"정님씨!"

정님은 그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격하게 털어놓고는 한숨만을 내쉬었다.

"알고 있습니다, 정님씨.....누구보다 답답한 정님씨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사필귀정이라지 않습니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법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흥분을 해서.....전 그만 호텔로 돌아가겠어요."

"그러세요. 전 서울 본사에 보고할 것도 있고 하니.....저녁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정님은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무기력증에 빠져 넋을 놓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어댔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러다 제풀에 끊어지겠지. 그러나 전화벨은 계속 끈질기게 울었다. 한참만에야 정님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정님이....."

순간,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동수씨!"

숨이 막혀 마음과는 달리 말은 더 이상 제대로 나와주지 않았다.

"그래, 나야 정님이."

"지금 어디 계세요, 동수씨?"

그녀는 애타게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동수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귓전에서 울려왔다.

"미안하오.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모르겠어. 난 지금 자유롭지가 못 해요."

"동수씨!"

"지금부터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 정님이."

", 말씀하세요."

"이 전화를 하게 된 것도 이곳에서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지난번에 테이프를 보낸 것도 그렇고. 그러나 그 사람의 도움은 어느 정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소. 그 사람 역시 조직원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요. 자칫 발각되는 날엔 나는 물론 그 사람도 온전치 못하게 될 거요. 그래서 부탁하니 당분간은 날 찾을 생각은 말아줘요."

"동수씨!"

"부탁이요. 그게 바로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요. 정님씨가 날 찾으러 다니면 다닐수록 내겐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소."

"....."

정님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해. 지금은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소. 부탁이요."

", 난 어떡해요, 동수씨?"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 다만 내가 여기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장인어른께 달려 있을 뿐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동수씨?"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아요. 다만....."

거기서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동수씨! 동수씨! 여보세요."

전화통을 붙들고 후크를 두드려대던 정님은 왈칵 오열을 쏟아 놓고 말았다.

 

홍콩. 구룡반도. 731. 19:10.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정말인가 봐.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드라이진에 토닉을 넣어 희석시키고 얼음을 몇 조각 띄워 칵테일을 만들며 마담 매화는 푸념처럼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마담이 건네주는 진토닉 잔을 오홍채는 한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어머나, 술을 그렇게 물처럼 마시면 어떡해요?"

마담이 급히 손을 뻗어 말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빈 잔을 탁자 위에 밀어놓았다.

"이제 갈증이 좀 풀리는데요."

"오선생님도 조심하셔야겠어요."

마담은 짓궂은 눈빛으로 핀잔을 주었다.

", 그렇잖아도 이젠 홍콩이 정나미가 떨어져서 떠날 생각입니다."

"어머나, 언제요?"

"본사에다 전통을 띄워 보냈습니다. 발령을 내달라구요. 하루이틀에 될 일은 아니겠지만 곧 명령이 떨어지겠죠, ."

"섭섭해서 어쩌나? 그 동안 오선생님과는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하하.....왜 이러실까? 매상 떨어질 게 걱정되시나?"

"어머머, 그렇게 남의 순정을 몰라줘도 되는 거예요?"

"얼씨구?"

오홍채의 익살맞은 표정에 그들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들은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웃어제꼈다. 한참만에 마담이 다시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그럼 정님씨는?"

"나랑 같이 돌아가야겠죠. 여기 남아 있어 봤자 혼자 힘으로 박동수씨를 찾아낼 수 있는 일도 아니구요."

"쯧쯧.....저렇게 딱한 일이....."

"아차! 이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오늘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걸 깜박 잊고, 이거 야단났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으니."

문득 손목시계를 보다가 깜짝 놀란 그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마담이 인사를 차릴 틈도 없이 한달음에 구룡반도를 달려 나갔다.

 

서울. 시경강력계. 731. 18:20.

"이거야말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꼴이로구먼."

윤사장이 들고 온 텔렉스 용지를 들여다보던 김석기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홍콩에서 날아온 텔렉스 용지에는 모종의 사건 경과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를 저으기 실망시키기에 혹한 내용이었다. 잠시 고심에 잠겨 있던 그는 이윽고 강반장을 계장실로 불러들였다.

"강반장, 인터폴에 조회하려던 양성국의 신원 조회건 말이야.....빨리 취소해. 이젠 필요없게 되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강반장은 두 눈만을 꿈벅거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빨리 일이나 해! 죽은 사람 붙들고 불알 만지겠어? 뭘 어쩌겠어?"

벼락 같은 호통으로 강반장을 쫓아내고 김석기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수사라는 게 맨날 놈들의 뒤통수만 쫓아가는 꼴이니, 정말 살맛 안 나는군! 제기랄!"

김석기의 표정을 살피던 윤사장은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님양은 어떻대?"

"아직은 괜찮은가봐."

"그만 돌아오게 하는 게 어때?"

".....?"

윤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내 예감인데, 어쩐지 홍콩 쪽의 사정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살벌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구 말이야. 자칫 잘못하다간....."

"이 사람!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말게."

윤사장이 펄쩍 뛰자 김석기는 정색을 하고 다가앉았다.

"농담이 아니야. 지금이라도 늦지 앉았어. 자네가 손을 써보게. 더 깊이 말려들기 전에."

"글쎄....."

"이 사람아."

"글쎄 내 마음도 자네하고 똑같아요. 근데 정님이 그애가 말을 들을까 그게 걱정이지."

"우격다짐으로 불러들여야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외동딸이라서, 귀하다고 응석받이로 키웠더니 고집이 황소고집이란 말이야."

"나 원!"

김석기는 어이가 없는 듯 물끄러미 윤사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8장 반격 개시

 

홍콩. 미라마 호텔. 731. 19:30.

객실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벌어진 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왔고, 손잡이를 밀었더니 문은 쉽게 안으로 밀렸다. 무심코 안으로 들어서던 오홍채는 뜻밖의 광경에 놀랐다.

정님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그의 귓전으로 강하게 울렸던 것이다. 술이 취한 그녀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객실 안에는 술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었다.

"그래요, 나 술 마셨어, 엄마. 미안해, 나 혼자 이렇게 마셔서.....? 대낮부터 마셨냐구? 물론, ? 있었지, 많이 있었어, 엄마.....기쁜 일도 있었구, 슬픈 일도 있었구.....? 당장 돌아오라구? 그건 안 돼, 엄마.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동수씨한테서 전화가 왔었단 말이야. 그런데 동수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어? 자기가 풀려나올 수 있는 건 오로지 아빠한테 달렸대요, 아빠한데. 이제 알겠수, 엄마? 이 모든 게 다 아빠 탓이라구요.....그만 끊어, 엄마."

그리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오홍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객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님씨!"

그를 발견한 정님은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어지간히 마신 듯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오홍채는 급히 그녀를 붙들어 자리에 앉혔다.

"호호호.....어서 오세요, 오선생님. 자요, 오선생님도 한 잔 하실래요?"

오홍채는 그녀가 그의 코 앞에 내민 술잔을 조심스럽게 받아 옆으로 치웠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님씨!"

"왜요? 나는 술 마시면 안 되나요?"

"안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됐잖아요? , 우리 같이 마셔요. 술을 먹으니까 괴로움이건 뭐건 다 잊을 수 있더라구요. 동수씨한테서 걸려온 전화도, 아빠도, 엄마도, 그리고 큐팡인지 뭔지 개나발 같은 것들도 모두 다 말예요."

오홍채는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또 전화가 왔습니까?"

"네에, 그래요. 당분간 자기를 찾지 말래요. 수사를 중지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이 위험하대요."

"그래서요?"

"별수 있나요? 수사를 포기해야죠. 안 그래요, 오선생님? 산 사람부터 우선 살려놔야 되잖겠어요? 그래서 전 포기하기로 했어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 그러니 술 마시는 것밖에 할 일이 더 있겠어요? , 안 마실래요? 그럼, 내가 마시죠."

그녀는 양주병을 집어들고 병째 나발을 불었다. 오홍채가 재빨리 병을 나꿔챘다. 그 통에 병은 그들의 손을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허우적대며 바닥에 뒹구는 술병을 집으려는 그녀를 오홍채가 잡아세웠다.

"정신 차려요, 정님씨!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늘 밤의 약속을 벌써 잊었습니까?"

"호호.....이 판국에 약속이 무슨 소용이에요."

"이러지 말아요, 정님씨! 정님씨한테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우리의 작전은 벌써 시작됐습니다. 곧 놈들의 정체가 백일하에 밝혀지고 동수씨도 구출할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박동수를 구출할 수 있다는 말에 정님은 술이 깨는 듯했다.

"방금.....뭐라고 하셨어요?"

"이제 우리가 놈들에게 반격을 한다는 얘깁니다. 벌써 시작됐어요. 오늘 밤부터요.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정님씨가 이 지경으로 취해 있으니."

순간, 정님은 위 속으로부터 울컥 치솟아오는 듯한 구토증을 느꼈다. 오홍채가 급히 그녀를 잡아 세웠다.

"이거 안 되겠습니다. 빨리 화장실로 가세요. 손가락을 입속에 넣어서 토하세요."

그녀가 화장실의 변기를 붙들고 웩웩거리며 구토를 하는 동안, 오홍채는 룸서비스를 통해 술 깨는 약을 급히 청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홍콩의 휘황한 야경 속을 달려나가는 오홍채의 승용차 조수석에 앉은 정님은 어느 정도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염려가 가시지 않는듯 오홍채가 힐끔힐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속은 좀 어떻습니까?"

"한결 좋아졌어요. 속을 다 비우고 나니까 술도 깨고....."

"그 정도라서 다행입니다."

"제가 실수가 많았죠?"

쑥스러운 듯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며 오홍채 역시 빙그레 웃었다.

"별말씀을.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오홍채는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페리 부두 앞 예술 센터의 주차장에 차를 밀어넣고 그들은 천천히 페리 부두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약속 장소인 페리 부두는 인적이 끊긴 채 고요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이따금씩 부두를 지나치는 데이트족의 모습만이 간간이 눈에 띌 뿐 임선애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 장소가 분명 여기예요?"

정님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

"이상하네. 잘못된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제시간에 나타날 겁니다."

그녀가 되묻자, 오홍채는 확신을 시켜주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깊은 어둠에 묻혀 있던 바다 쪽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쾌속정 한 척이 미끄러지듯이 부두에 닿았다. 쾌속정의 운전석에서 임선애가 손을 흔들었다.

"빨리 타세요!"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온 임선애가 다급하게 배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보십시오. 틀림없이 왔잖습니까?"

오홍채가 기쁨에 찬 소리를 지르자, 정님도 활짝 웃어 보였다. 임선애의 재촉으로 그들이 배에 오르자, 쾌속정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갔다.

바람같이 나타난 쾌속정이 오홍채와 윤정님을 태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부두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여러 개의 눈동자가 당황스런 빛을 보이는가 싶더니 허둥지둥 부두의 야간 조명등 아래로 뛰어나왔다. 그중에는 홍콩 경시청 주태복 경감의 난감한 모습도 있었다.

쾌속정은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달려나갔다. 생각도 않았던 뜻밖의 해후에 그들은 한껏 흥겨워했다.

"호호.....지금 기분이 어때요, 정님씨?"

"얼떨떨해요. 이렇게 배 위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로즈메리의 질문에 정님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는 이번엔 오홍채에게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오선생님, 이 망원경으로 부두를 한번 살펴보세요."

"아니, 이렇게 깜깜한 밤에 부두가 보입니까?"

"그건 적외선 망원경이에요."

내심 믿기지 않으면서도 망원경으로 부두를 살피던 오홍채의 입에서 대뜸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저 친구는?"

오홍채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자, 이번엔 정님이 망원경을 받아들고 부두를 살펴보았다.

"어머, 저 사람은 주경감 아니에요?"

그녀도 대뜸 탄성을 터뜨렸고, 로즈메리는 통쾌하게 웃어댔다.

"호호호.....그 표정이 아마 볼 만할 거예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으니 말예요."

"그런데 주경감이 우릴 미행하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오홍채가 미심쩍은 낯빛을 짓자, 그녀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주경감뿐만이 아니에요."

"?"

"잠자코 기다려 보세요, 잠시 후면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럼? 우릴 미행한 사람이 또 있었단 말인가요?"

이번엔 정님이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래요, 정님씨. 하지만 주경감은 우리가 그렇게 경계할 대상은 아니에요."

"그럼?"

"큐팡의 끄나불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어머나?"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오홍채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따분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동양의 반딧불 낭자라는 홍콩의 야경이나 감상해요.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까요. 어때요? 꽤 낭만적이죠?"

"정말 멋져요."

"호호호....."

정님이 맞장구를 치자 그녀는 다시 웃음을 흩날렸다. 쾌속정은 물살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어둠에 잠긴 바다를 달려나갔다.

 

서울. 731. 20:10.

한편, 바로 그 시각에 서울의 윤사장은 또 다른 방향에서 발생한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아내 송여사의 히스테리가 그를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게 얽어 매고 있었다.

"나 참,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거요? 왜 집에 들어온 사람을 잠도 못 자게 들들 볶고 이래?"

윤사장은 짜증을 겸한 하소연만을 할 뿐 달리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안 되겠어요. 정님이를 그냥 그대로 뒀다간 하나밖에 없는 애 잃어버리겠어요."

"글쎄, 날보고 어쩌라는 거야?"

"대책을 세워야죠, 대책을."

오늘 따라 아내는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벌써 10여분째 이 문제로 다투고 있는 중이었다.

"그 대책을 어떻게 세우냐니까?"

"데려와요. 안 오겠다면 억지로 끌고라도 와야 한다니까요."

"걔가 어디 한두 살 먹은 어린애요? 머리가 굵을 대로 굵은 애가 어디 우리 말만 듣겠느냐 이거요? 난 자신 없어."

"어이그, 당신이 못하겠다면 내가 할께요. 날 홍콩에 보내 주세요. 그럼, 머리 끄덩이를 잡아 끌고 올 테니까요."

"이런 주책바가지 같으니!"

"뭐예요?"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무식하게 하나. 아무리 딸이지만 말만한 처녀를 머리 끄덩이를 잡아 끌고 오겠다니?"

"그럼 어떡해요? 날보고 더 어쩌란 거예요? 난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그애가 어떤 애예요? 우리한테 그애 말고 또 누가 있어요? 그애가 홍콩에서 다 죽어가고 있어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윤사장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주책 그만 떨어! 멀쩡한 애가 죽긴 왜 죽어! 갑자기?"

"어이그, 이래서 내 속이 다 터진다니까요. 당신은 그 전화를 못 받아서 그래요. 그애가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뭐란 줄 아세요? 당신 탓이래요, 당신 탓! 당신 때문에 박서방이 그 지경이 되었다구요. 아시겠어요?"

"....."

"박서방이 그 지경이 되고 정님이까지 무슨 일 생겨서, 내가 입에 거품 무는 꼴 보려고 이러세요?"

"그래,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간에 날더러 어쩌라는 거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난 윤사장이 홍콩으로 전화를 넣어 보았으나 신호만 울릴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이구, 내 팔자야!"

결국 송여사는 자신의 터질 듯한 복장만 주먹으로 냅다 내지를 뿐이었다.

 

홍콩. 731. 21:10.

로즈메리가 운전하는 쾌속정은 홍콩섬을 한 바퀴 돌아 리프레스만의 간이 선착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도를 급격히 떨어뜨리며 쾌속정을 천천히 선착장에 밀어붙였다.

잠시 후, 그들 일행은 로즈메리가 예약해 놓은 레팔르시 베이 호텔의 특실에 당도했다. 호텔 객실에 들어서는 순간 정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은 바로 박동수와 함께 신혼여행의 첫밤을 보내기 위해 여장을 풀었던 그 호텔 방이 아닌가. 정님은 어쩐지 친근감이 들면서도 낯선 듯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회를 느꼈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고 오홍채가 불만스런 듯 토를 달았다.

"아니, 왜 하필 이 방을 잡았습니까? 여긴 정님씨한테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인데."

로즈메리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바로 그 때문이에요!"

"?"

"모든 사건은 이 방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뜻으로 이 방을 잡은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정님씨?"

"."

정님은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자리를 잡고 둘러앉자 로즈메리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오선생님."

"?"

"오늘 낮에 제가 부탁드렸던 일은?"

", 바람을 잡아 달라는 거 말입니까?"

"그래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바람은 잡아두었습니다."

"수고하였습니다. 그럼 정님씨."

", 말씀하세요."

그녀는 종횡무진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정님은 여전히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신혼 첫날밤에 이 방에서 여장을 풀었죠?"

"."

"그날 기억을 잘 더듬어 보세요. 무슨 일이 있었죠? 박동수씨와의 사이에 말예요."

윤정님은 기억을 더듬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커피솝에서 차를 마시고 방으로 올라왔어요. 그리고..... 서울의 부모님께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부 전화를 드렸고....."

"그러구요?"

"막 샤워를 하려던 차에 동수씨가 전화를 받고는 허둥지둥 뛰어나갔어요."

"그때, 정님씨는 어땠어요?"

"그이 표정이.....심상찮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왠지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구요."

"그래요, 첫 번째 의문은 바로 그것이에요. 첫날밤을 보내려던 신랑이 허겁지겁 뛰쳐나갔다면 그것은 아마 박동수씨의 사활이 걸린, 어쩌면 회사의 사활이 걸렸던 중대한 전화였을 거예요."

"네에....."

공감이 간다는 듯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후 동수씨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어디서였습니까?"

"바로, 이 방에서....."

"누구한테서요?"

"오선생님이....."

"그럼, 오선생님은 어디서 들었나요?"

"마담 매화가 그러더군요. 자기 집 종업원이 공항에서 허겁지겁 출국하는 박동수씨를 보았다구요."

"박동수씨의 출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우리들 중에서는 아무도 없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는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마담 매화의 입을 통해서 박동수씨의 귀국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확인을 해보니 공항의 출국자 명단에 박동수씨의 이름이 올라 있더라 이런 얘기죠?"

"."

"가령, 이렇게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박동수씨는 홍콩을 떠나지 않았고, 박동수씨를 대신해서 어떤 인물이 박동수씨로 위장하여 출국하였다?"

"?"

정님과 오홍채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리고 말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같은 비행기를 나란히 타고 간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살해되고 다른 한 사람은 실종되었잖아요?"

"그렇군요."

오홍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박동수씨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조방의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다녔다는 건 넌센스예요. 귀국한 박동수씨가 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의 어디에서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요."

"으음....."

오홍채의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만약 그런 추리가 성립한다면, 마담 매화는 중대한 위증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담 매화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요?"

"글쎄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그로서는 답변이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일단 다음 문제로 넘어가죠. 이번엔 양성국씨를 살펴보는데, 박동수씨가 실종되던 날 양성국의 차가 공항에서부터 두 분의 차를 미행했다구요?"

"."

"그리고 양성국은 실종된 박동수씨와 함께 같은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날아간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오홍채가 거들고 나서자, 그녀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점이에요! 박동수씨와 양성국, 진충부 이렇게 세 사람이 서울을 함께 날아갔는데, 진충부는 살해되고 박동수는 실종되었고, 돌아온 건 양성국 혼자였어요."

"정말 그래요."

정님이 다시 맞장구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양성국마저 살해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실마리는 거기서 또 끊어지고 만 셈이군요."

"끊어진 게 아니에요."

"그럼?"

"두 분은 양성국에 대한 혐의를 갖고 양성국의 뒤를 캐고 있었죠?"

"그렇습니다."

"양성국의 뒤를 캐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했나요? 곰곰히 잘 생각해 보세요."

오홍채는 가느다랗게 눈길을 모았다.

"그러니까.....양성국의 혐의점을 잡고.....바로 마담 매화를 찾아갔지요."

"왜 그랬죠?"

"양성국이 마담 매화의 단골손님이라고 해서요."

"누가 그런 소릴 했어요?"

"마담 매화가....."

"결국 그 말도 마담 매화의 입에서 나온 소리군요. 그 사실을 오선생님이 직접 확인해 본 건 아니죠?"

", 그렇습니다."

"그래서 소득은 있었나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럴 수밖에요. 도리어 이쪽의 정보를 누설해서 양성국만 제거 되었으니까요."

"?"

오홍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양성국에 대한 얘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한 일이 있나요?"

"아뇨....."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마담 매화뿐이었다는 말씀이죠?"

"....."

"결국 우리는 이번 사건의 곳곳에서 마담 매화와 부딪치고 있어요. 그만큼 마담 매화는 의문투성이의 여자예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죠."

순간, 오홍채가 급히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로즈, 오늘 낮에 나한테 지시했던 건 어찌된 것입니까? 왜 마담 매화를 찾아가서 바람을 잡으라고 했습니까?"

"그게 함정이에요. 마담 매화에 대한 꼬투리를 잡자면 그런 함정이 필요해요."

"그럼.....마담 매화가 퀸이라는 건가요?"

"아직 속단은 이르겠죠. 하지만 가능성은 높으니까 한번 주시해 볼 필요는 있어요."

그녀의 추리는 일목요연했고, 그녀의 시각은 탁월한 바 있었다. 정님과 오홍채는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직한 어조로 몇 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눈길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페리 부두에서 여러분을 감시한 눈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주경감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마담 매화의 심복인 그 집의 지배인 장태산이란 인물입니다. 이걸로 그동안 두 분은 마담 매화의 감시망 속에 있었던 게 분명해졌습니다."

", 그럴 리가....."

정님과 오홍채는 아연해진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서울. 수사본부. 81. 10:30.

서울의 수사본부에서도 사건 수사는 묘한 양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두번째 테이프 분석 결과가 수사본부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좀 엉뚱했다.

첫 번째 테이프와 두 번째 테이프의 배경에 깔린 소음이 동일한 날 녹음된 듯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게 아닌가. 그러니까 두 테이프의 배경 소음에는 '사랑의 진실'이라는 연속극의 줄거리가 미세하게 깔려 있었고, 그 내용이 연속극 한 회분의 줄거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사본부의 결론은 새롭게 내려졌다. 어쩌면 이 테이프는 박동수가 한국에 숨어 있다는 걸 위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테이프의 배경에 텔레비전 연속극을 깔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박동수의 대화 내용이 특별한 조건을 요청하거나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서울에서 오늘 방송된 TV프로가 불과 1주일 후엔 미국 전역에서 케이블 TV를 통해 버젓이 방송되는 사례를 살펴볼 때, 그 소음만으로 박동수의 현재 위치를 속단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따라서 박동수의 현재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셈이었다.

김석기는 이마를 한 손으로 괸 채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질 때 곧잘 나타나는 그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그 앞에서 강반장은 손가락만을 만지작거리며 무료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현재의 그는 김석기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강반장....."

김석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강반장은 고개를 쳐들었다.

"?"

"과장님 지금 방에 계시나?"

", 그런데 과장님은 왜요?"

"아무래도 사건 해결을 위해선 직접 홍콩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

"지금 이대로는 도무지 그 끝을 모르겠어."

"결재가 날까요?"

강반장의 낯빛은 어디까지나 회의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예가 없었잖습니까. 쥐꼬리만한 수사비로는 홍콩까지의 여비도 나오지 않을 테구요."

"그러니까 특별한 청을 넣어야지."

"만약 안 되면요?"

"휴가원을 내고 내 사비를 써서라도 다녀올 수밖에."

"아니, 계장님이 무슨 떼부자시라고....."

"낸들 어쩌겠나? 길이 그것밖에 없는걸."

강반장은 두 손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계장님도 어지간하십니다. 저 같으면 일찌감치 미제사건 딱지를 붙이고 손을 털겠습니다."

"이 사람이....."

", 사건의 주무대가 서울이 아닌데야 용빼는 재주가 없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그럴 수 없어."

"그 친구분 때문에요?"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야."

"그럼?"

"이 사건의 피해자는 외국인이야. 미제사건으로 처리하면 국위선양에도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 피해 당사자는 말이야 억울하게 외국에서 죽은 것만도 한이 맺힐 텐테 범인까지 잡아내지 못한다면 그 원혼이 어떻게 눈을 감겠나, 안 그런가?"

"하하.....계장님도 대단한 센티멘털리스트인데요?"

"이 사람이....."

김석기가 짐짓 얼굴을 부라리자 강반장이 얼굴을 쳐들었다.

"그런데 계장님!"

".....?"

"혹시 과장님한테서 홍콩 출장 결재가 나면 저도 좀 데려가 주십시오."

"자네도?"

", 우리가 언제 홍콩 구경 가보겠습니까? 이럴 때나 홍콩 관광 한번 해 보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예끼!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눈이 어둡구먼. 어쨌든 안 돼. 동기가 불순해서....."

"계장니임....."

"나 과장님 방에 다녀올께."

김석기가 문득 몸을 일으키는데 사무실 공용 전화의 벨이 크게 울렸다. 강반장이 전화를 대신 받더니 이내 그를 불러세웠다.

"계장님 전환데요."

그는 막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전화를 받았다.

"날세!"

윤사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 자네로구먼."

"지금 바쁜가?"

"아니, 크게 바쁠 건 없네만."

"나 좀 만나세. 긴히 할 얘기가 있어."

"그럼, 자네가 이리로 오지 그래?"

"아니야, 조용한 데서 만나고 싶어."

"그래? 그럼, 시간과 장소를 말하게나. 난 마땅한 장소를 아는 데가 없으니 말야."

"우이동의 청수산장이 어떨까?"

"아니, 그렇게 멀리?"

"그러니까 시간을 좀 넉넉히 내주게.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알았네."

김석기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나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사장의 그런 태도는 전에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콩. 레팔르스 베이 호텔. 81. 10:00.

다음날 아침, 로즈메리를 비롯한 오홍채와 윤정님은 레팔르스 호텔의 특실에서 다시 만나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정님은 어제의 충격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젠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오홍채가 그 말을 되받았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 매화꽃 말예요. 동수씨 서재에 꽂혀 있는 그 매화꽃, 그 매화는 마담의 상징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름이 당장 연상되는 그런 우둔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오홍채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을 노린지도 모르죠. 또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나 편집증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가 있어요. 무슨 일에도 자기를 표시하고 나타내고 싶어하거든요."

"혹시.....정님씨는 심리학을 전공하셨습니까?"

", 아동심리학이긴 하지만."

"어이쿠, 이거 제가 몰라 뵈었군요. 그러고 보니 아주 그럴듯한 말씀입니다."

오홍채의 넉살에 한바탕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어서 로즈메리가 재빨리 분위기의 가락을 잡아 나갔다.

"그래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양성국이 생전에 구룡반도의 단골이었다는 사실도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났어요."

"?"

"그걸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세무서에 신고된 양성국의 세무장부를 들춰 보도록 조치를 했어요. 그러나 수많은 술집 영수증 가운데 구룡반도의 영수증은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으음....."

오홍채의 꼭 다문 입에서 깊은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그렇다면 양성국은 생전에 마담 매화를 전혀 몰랐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요. 그런데 마담은 양성국이 자기 단골이며 선량한 인물이라고 극구 피알했거든요. 이것 역시 거짓말이었어요."

그녀의 질서 정연한 논리에 오홍채와 정님이는 함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담은 어제 저녁에 우리가 놓은 덫에 보기 좋게 걸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선 마담 매화가 가장 유력해 보이는데요?"

"하지만 이런 정도의 정황 증거로는, 마담이 우리가 찾는 큐팡의 퀸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어요."

"그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죠?"

"우선, 첫 번째로는 박동수씨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걸 알아내는 게 급선무예요. 과연 실제로 한국으로 날아갔는가, 아니면 우리의 추측대로 홍콩의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는가를 알아내야 해요."

"하지만 그걸 무슨 재주로....."

오홍채는 대뜸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야죠. 우리의 목표인 매화꽃이 나타날 때까지요. 그리고 두번째는 마담을 꼼짝 못하게 얽어 넣을 더욱 큰 덫을 만들어야 돼요."

"덫을?.....어떻게요?"

"우선 박동수씨의 출국을 목격했다고 나선 문제의 인물, 구룡반도의 지배인 장태산을 유인해 내는 겁니다."

"장태산을 말입니까?"

"가능할까요?"

오홍채와 정님은 이구동성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사태를 명약관화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로즈메리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웃음부터 흘렸다.

"호호호.....물론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죠. , 두 분은 제 계획을 들어보세요."

 

서울. 청수산장. 81. 저녁무렵.

"나 원, 빌어먹을 친구가 벌써 망령이 든 건 아닐 테고.....우리 사이에 사업상의 교제가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그런데 엉뚱하게 사람을 여기까지 끌어내다니....."

우이동의 청수산장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김석기는 내심 꺼림칙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확실히 이것은 전에 없던 파격적인 변화였다. 어쩌면 밀담 내용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윤사장이 불쑥 내밀지도 모르는 무리한 조건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서는 김석기였다.

그가 청수산장에 도착했을 때, 윤사장은 벌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 사람, 이게 무슨 난린가?"

"허허허, , 들어가세나."

윤사장은 김석기를 아늑한 내실로 안내했다. 청실이란 네임 플레이트가 걸린 그 방에는 커다른 교자상에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고, 팔걸이가 달린 좌석에 병풍의 산수화가 분위기를 돋우는, 제법 운치 있는 방이었다.

"어이구, 오늘 팔자에도 없는 호강을 하는구먼."

"허허허, 원 사람 허군."

김석기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어색함을 감추었고, 윤사장은 담담한 미소만을 띠울 뿐이었다. 서로 상석을 권하다가 떠밀리다시피 상석에 앉은 김석기는 좌석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나 자네한테 이렇게 한턱 얻어먹을 만큼 장한 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 사람아, 내가 자네한테 한턱 쓰면 어디가 덧나나?"

", 그런가?"

그들은 한바탕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바로 잡았다.

"허허.....어쨌든 자네가 날짜 하나는 제대로 잡았구먼."

"무슨 소린가?"

", 어쩌면 며칠 내로 홍콩으로 날아갈 것 같아서."

"홍콩?"

"."

"그 사건 때문에?"

"이 사람아! 그 일이 아니면 비싼 돈 들여가며 홍콩까지 가겠나?" 순간, 윤사장이 활짝 웃으며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그거 잘 됐네, 정말 잘 됐어!"

"이 사람, 홍콩 구경은 내가 하는데 자네가 왜 좋아하구 그래?"

"사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것도 자네한테 그 부탁을 하려고 했던 거야."

"? 그럼, 자네도 날더러 홍콩을 다녀와 달라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밖에 없더구먼. 내가 직접 갈래도 짬이 잘 나지 않고, 그렇다고 우리 여편네를 보낼 수도 없고."

"? 자네 부인을 보내지 그래?"

"이 사람아, 정님이도 가서 돌아올 생각을 않는데, 모녀간에 죽이 맞아서 마누라까지 강원도 포수처럼 함흥차사가 되면 난 어쩌라구?"

"이 사람, 홀애비 되는 건 싫어서."

"예끼!"

그들은 화기애애한 웃음을 한바탕 웃고 나서 윤사장은 다시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하하하.....그건 농담이고."

"그래, 나한테 부탁하려던 건?"

"자네야 수사가 목적이겠지만 겸사겸사로 우리 정님이도 좀 돌봐주게. 아니면, 여기 서울로 쫓아 보내면 더욱 좋고."

"자네 말도 안 듣는다면서 내 말을 들을까?"

"나야 무정한 애비니까 그렇지만, 자네는 무서운 호랑이니까 경우가 다르지."

"예끼, 사람허군."

윤사장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정님이가 마음 고생이 심한가봐."

"그럴 테지."

"술이라곤 냄새도 못 맡던 애가 술에 취해서 괴로워하고 있으니. 게다가 그 에미가 그 사실을 알고는 사람을 들들 볶아. 자칫하다간 그 등살에 내가 제명에 다 못살겠어."

"원 사람두, 그만한 일루 무슨....."

"어쨌든 자네가 간다니까 천만다행이라고. 자네를 찾은 건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

"?"

". , 식기 전에 음식이나 들면서 얘기하지."

수저를 집어들면서 김석기는 얼핏 긴장감을 느꼈다. 이제야 본론으로 접어든다는 감이 잡혔다. 그러나 윤사장은 묵묵히 음식만 입에 넣을 뿐 좀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약간의 포만감을 느낄 때쯤 가만히 수저를 놓으며 윤사장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좀 엉뚱했다.

"자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어떻다고 생각하나?"

"글쎄, 난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서."

"자네 피부에 와 닿는 느낌대로만 말해 보게."

", 좀 어려운 것 같더구먼. 대기업들은 잘 모르겠지만 중소기업들은 자료난에 시달리고, 건설 쪽은 특히 어려운 것 같던데."

"바로 봤네, 사실 그대로야!"

"....."

"그 동안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해온 것은 사실이야. 선진국들이 200여 년에 걸쳐 이룩한 업적을 우리는 불과 20년이란 짧은 세월에 해냈으니까."

"....."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얘기들이었으나 김석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건설업계가 중동건설에서 한계에 부딪히듯 우리 경제 역시 지금 또 한번 용트림을 하고 새로운 도약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네."

"이 사람 나한테 딱딱한 경제학 강의나 하려고 불러 냈나?"

"들어보게.....그래서 나는 회사의 백년대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고, 고심한 끝에 우리의 사운을 걸고 만들어 낸 기획이 <실크로드 하이웨이 프로젝트>일세."

"실크로드 하이웨이 프로젝트?"

순간, 김석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사장이 회사의 기밀이라며 한사코 함구하던 비밀을 이제서야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감지한 김석기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라니, 그게 뭔가?"

"앞으로 세계 경제의 변수는 중국일세."

"중국?"

"그래, 중국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경제 시장일세."

"하지만 중국은 아직까지 우리와 미수교국이 아닌가?"

"정치와 경제를 혼동하지 말게. 그 둘은 엄연히 분리되어야 해."

"그렇지만."

"물론 그 때문에 우리 기업들엔 핸디캡이 많지. 그래서 직접무역보다는 삼각무역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자유경제 원칙이 세계적 추세이고 보면 중국이 개방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보네. 또 실제로 중국은 지금 개방정책을 펴나가고 있지 않나. 또한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연간 교역량이 30억 달러를 넘어선 지도 벌써 오래전이라네."

"호오....."

김석기는 감탄한 듯 눈을 빛내며 차츰 그의 얘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윤사장의 엄청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홍콩. 구룡반도. 83. .

정님과 오홍채가 며칠만에 <구룡반도>에 얼굴을 내밀자, 마담은 반색을 하며 그들을 반겼다.

"어머나! 어서 와요, 두 분."

"하하.....갑자기 왜 이렇게 반가워하실까?"

오홍채가 너스레를 떨자 마담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두 분이 요즘 깨가 쏟아지나 봐. 통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깨가 쏟아질 것까진 없지만 거창한 계획을 하나 꾸미고 있지요."

"어머, 축하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뜻에서 오늘은 제가 한잔 살께요. 어때요?"

"좋습니다! 외상이라면 황소라도 잡고,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마다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마담의 안내로 자리를 안채로 옮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는 무르익어 갔다. 서로의 중심은 내심 깊숙이 감춘 채.

"호호호....., 건배합시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술이 한숨에 들어가자 술잔을 놓으며 마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그 얘긴 뭐예요? 거창한 계획이 있다더니."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젠데, 마담이 알아서 뭘 어쩌려구?"

"어머, 내가 간섭 좀 하면 안 돼?"

"하하.....안 될 거야 없겠지만, 이건 좀 곤란한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하하....."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라면 말하지 말아요. 그런 문제로 의리 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마담하고 의리 상해서야 배겨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이 홍콩 바닥에서 말입니다. 하하하....."

"어이구, 얄미워라. 진작 그럴 것이지. 그게 뭐예요, 남의 애간장만 실컷 태운 일이? 귀동냥이나 좀 해요, 또 알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도 생길는지."

"사실은 뭐 별일은 아니구, 제가 업무 부서를 바꿨습니다."

"부서를 바꾸다니?"

"그 동안 제가 총무부를 맡아서 우리 회사 홍콩지사의 살림살이를 관리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엔 사장님 특별지시로 박동수씨가 하던 기획업무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럼, 박동수씨는?"

"박군이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다시 물려 줘야지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쩝니까? 회사란 게 개인 사정 때문에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허긴....."

"그러다 보니 요즘은 죽을 맛입니다."

"왜요?"

"그 기획업무란 것이 도무지 뭐가 뭔지 감을 잡을 수 있어야죠."

"호호호.....팔자에 없는 영전을 하셨군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월급쟁이 주제에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덜렁 집어치울 수도 없고."

"그래서요?"

"어쨌든 끙끙거리면서 업무파악을 해보려고 애는 쓰는데,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서울 본사로 들어가서 사장님께 면담 요청을 하려고 했더니 마카오에 가서 사람을 만나보라지 뭡니까."

"마카오?"

", 거기에 박동수씨와 함께 일을 추진하던 사람이 있대나 봐요."

"어머나, 그 사람은 누굴까? 마카오는 나도 금시초문인데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다시 연락을 해준댔으니까 기다려봐야죠."

"그럼, 정님씨도 함께 가나요?"

"물론이죠. 기왕 가는 김에 둘이서 관광이나 즐길 작정으로 그 계획을 짜던 중이었어요."

"오라.....그 거창한 계획이 바로 두 사람에게만 깨가 쏟아질 계획 이었군요."

"마음 있으시면 매화 언니도 함께 가세요. 가게는 하루 정도 문 닫으면 되잖아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정말 부럽네요. 나도 정님씨 같은 팔자나 되어 봤으면. 그나저나 마카오는 언제 가요?"

"글쎄요, 서울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으니까 그 사람 편에 무슨 소식이 있겠죠."

"어머, 서울에서 사람이?"

순간, 마담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발했다.

 

 

9장 폭풍전야

 

김포 국제공항. 84. 12:00.

케세이 퍼시픽 항공의 비즈니스 클라스 지정 좌석에 몸을 뉜 김석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루한 출국수속을 밟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으나 보딩패스에 지정된 항공기의 좌석을 찾아와 앉고 나니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싶었다.

게다가 출영을 한답시고 공항까지 따라 나온 윤사장과 송여사가 그의 피로를 더욱 가중시킨 셈이었다. 송여사는 공항에서 얼굴을 맞대면하면서부터 정님이를 서울로 쫓아 보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당부는 그가 입국장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윤사장이 주책없는 여편네를 제지하려 했으나, 송여사는 그저 막무가내였다. 김석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빠져나온 공항이었다.

기내에선 이륙준비를 하느라 승무원들이 부산하게 오갔다. 그리고 기장의 기내인사가 시작되면서 비행기는 서서히 큰 몸체를 움직여 활주로를 향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5분여 후에 김포공항 램프를 이륙한 케세이 퍼시픽 006기는 김포 상공을 크게 선회하더니 고도를 잡아 황해로 빠져나갔다.

홍콩까지는 4시간 30분을 날아가야 한다. 김석기는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으나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여객기가 정상 항로를 접어들자 승무원들은 기내식을 제공하기 위해 다시 바쁘게 통로를 오갔다.

김석기는 잠을 청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전에 들었던 윤사장의 이야기만이 왕왕 귓전을 크게 울렸다.

"여보게, 실크로드 하이웨이 프로젝트란 건 사실, 벌써 80년경에 일본의 어느 회사가 구상했던 계획일세."

"일본이?"

"그래."

"실크로드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뭔가?"

"실크로드 하이웨이 계획의 원래 명칭은 <유라시아 드라이브 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어."

"유라시아 드라이브 웨이?"

", 런던에서 동경까지 2만 킬로를 승용차로 달릴 수 있게 한다, 이런 얘기지."

"아니, 동경에서 런던까지 승용차로 달리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긴가?"

"하하.....그러니까 동경을 기점으로 해서 한반도를 통과하고 중국, 중동을 가로질러 런던에 도착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해 보겠다는 프로젝트일세."

"뭐야?"

"하하하....."

"정말 꿈 같은 이야기로군. 그래, 그 가능성은?"

"일본의 어느 토목회사 프로젝트팀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어."

"으음."

"이 계획의 최대 난점은 바다였지. 바로 대한 해협과 대마 해협, 그리고 도버 해협을 어떻게 건너가느냐 하는 게 큰 문제였어."

"그럼, 육로는 가능하다는 건가?"

", 육로는 실크로드를 비롯한 기존도로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구상이지."

"엄청나군."

"물론이지. 일본에서 한반도를 건너고 중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거쳐 도버 해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한다는 계획이니까 말일세."

"."

"대마 해협엔 해저 터널, 대한 해협은 해중 터널을 가설한다는 계획이었으니까 이것만 해도 사실 엄청나지."

"그런데 정말 가능한 이야긴가?"

"그래, 불가능한 건 아니야. 오늘날의 과학기술 앞에서는 말이야. 다만 엄청난 공사비와 너무나 긴 세월이 소요된다는 점이 큰 흠이었어."

"....."

"그리고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다른 그 밖의 문제로 통행 불가능한 지역이 많아 그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지만 말이야."

"백지화되다니?"

"그 계획은 계획으로서 끝났어."

"그럼, 자네 프로젝트는?"

"난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좀 다르다네. 지금은 그 계획이 불발로 끝났지만, 먼 훗날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거지. 아니, 반드시 이루어야 해. 인류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서라도 말일세."

"."

"무슨 뜻인지 알겠나?"

"짐작은 하겠네만 그게 자네 생전에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허허허, 난 내가 그렇게 복이 많은 놈이라고 생각치는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포석단계에 지나지 않아. 우선 중국과의 활발한 경제 교류를 성사시키는 것, 내가 노린 건 바로 그거야."

"어떤 식으로?"

"앞으로 이 지구는 틀림없이 식량난에 봉착하게 돼. 이게 내 확신일세."

"식량난?"

"자넨 지금 세계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글쎄....."

"지금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어. 그런데 세계 각국은 식량대책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실정이야. 왜냐? 이 지구라는 땅덩이가 제한되어 있다는 거지."

"도무지 무슨 소린지, 그런 게 자네의 사업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들어보게.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획기적인 식량증산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해 왔다네."

"."

"지난날의 세계경제는 석유가 전략 무기화되었는데, 앞으로 식량이 전략물자가 된다면 중국이란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 거대한 땅덩이와 엄청난 인구....."

"거참, 그런 시각으로 보니까 확실히 그것도 보통 문제는 아니로군."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관련학계의 학자들에게 많은 투자를 해왔어. 그리고 최근에 그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사건이 터진 거야. 박동수군 실종사건이."

"결실이라니?"

"좁은 면적에서 다수확을 보장하는 신품종 볍씨를 개발해낸 거야. 난 그 이름을 한국 B1호라고 붙였어."

"아니?"

"그리고 농약이 필요없는 무공해 볍씨 한국 33, 또 토질에 일대변혁을 가해 주는 화학복합비료, 그 외에도 신개발품이 많아."

", 이제야 알 것 같군. 자네가 왜 그렇게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그런데 이런 제품들의 개발에는 성공했다지만 아직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네."

"그런 또 왜 그런가?"

"난 이걸 중국땅에서 실험해 보고 싶었어. 중국의 만주 삼강평야에는 황금의 삼각지대라는 비옥한 평야가 있거든. 그러나 우리의 신개발품이 중국의 독특한 기후나 토질에 적합한지 어떤지 그것은 아무도 몰라. 막 실험단계에 접어들 순간에 이번 사건으로 주춤하는 참이니까."

"자네 그 계획은 지금도 변함이 없나?"

"물론, 내 평생의 꿈인데 어찌 포기를 할 수 있겠나."

"알겠네. 자네의 그 꿈을 참고로 삼겠네."

김석기는 시트를 제끼고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윤사장의 간절한 소망은 여전히 그의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있는 듯싶었다.

 

홍콩. 경시청. 84. 16:20.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주태복 경감은 무심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 홍콩 경시청 주태복 경감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태복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 그래요,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어리둥절한 듯 주경감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 84. 17:10.

"아저씨, 여기예요, 아저씨!"

카이탁 국제공항의 입국장 로비에서 인파에 떠밀려 쭈삣거리며 걸어나오던 김석기의 얼굴이 문득 환하게 밝아졌다. 환송객들 뒤편에서 손을 흔들어대는 정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한달음에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가워요, 아저씨."

"그래,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군. 난 혹시 길이 어긋나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정말 반갑군."

그들은 반가움이 앞서 남의 이목도 가리지 않고 덥썩 손을 마주 잡았다.

"참 인사드리세요, 오홍채씨."

"오홍채라고 합니다."

오홍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댁이 바로.....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가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가시죠."

그리고 오홍채는 단촐하게 들고 있는 김석기의 가방을 뺏다시피 받아들었다.

"우선 절 따라 오십시오. 계장님께 급히 소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이쪽 사정이 매우 급박해서요."

오홍채가 성큼성큼 앞장을 섰고 김석기와 정님은 그 뒤를 따라 공항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오홍채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공항 구역을 벗어나 홍콩의 도심을 달려나갔다. 한참이나 말없이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물에 눈길을 주고 있던 김석기가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머리 뒤꼭지를 따라붙던 골치 아픈 걱정거리를 슬그머니 늘어놓았다. 바로 송여사가 신신당부를 했던 그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정님은 그 말은 들은 척도 않았다.

", 우리 엄마는 내가 꼬부랑 할멈이 돼도 잔소리를 늘어놓을 분이시라니까."

"어허,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부모가 되어 보지 않으면 부모 심정을 몰라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

"그런 게 세대 차이라는 거예요. 자식도 하나의 인격체이고, 나이가 차면 당연히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하는 거예요. 이것만큼은 인정하셔야죠."

"꼭 그럴까?"

"아저씬 벌써 엄마하고 한편이 되셨군요."

"한통속이라서가 아니라 시각의 차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해."

"....."

"물론 세대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내리 사랑이야. 맹목적이 되고 말거든. 물론 정님이도 나중에 아이를 길러 보면 알게 되겠지만."

정님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짐짓 토라진 척하고 있었으나, 김석기의 말들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차안엔 잠시 서먹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때, 오홍채의 입에서 문득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기랄, 또 따라붙었군."

"그게 무슨 소린가?"

"미행자가 꽁무니에 따라붙었습니다."

"미행?"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얼핏 고개를 뒤로 돌리려던 김석기는 오홍채의 제지에 우뚝 굳고 말았다.

", 역시 홍콩에 도착한 기분이 나는군. 환영 인사치곤 제법 그럴듯 한데?"

"며칠만 계셔 보십시오. 정말 실감나실 겁니다."

"정말? 정말 기대가 큰데?"

"하하하.....나중에 후회는 마십시오."

"그나저나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저희들이 숙소를 잡아 두었습니다."

"아니, 내 숙소를 왜 자네들이?"

"사장님 특별지십니다."

"저런, 쓸데없는 일을. 나도 정당하게 타온 출장비가 있다네."

"아껴 두십시오."

"아니야, 그럼 계산을 내가 하도록 하지."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이쪽 성의가 있잖아요."

정님이 거들고 나섰으나 김석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공무원이 민폐를 끼칠 수야 있나."

"저희들한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라니?"

", 계장님은 지금 이 시간부터 서울에서 오신 수사계장님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동남 인터내셔널 서울 본사의 상무이사로서 업무차 홍콩에 들르신 겁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연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오홍채는 힐끗 백미러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도 설명이 필요합니까?"

"알겠네. 그런데 저렇게 미행자를 꼬리에 달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상관 없습니다. 이것도 저희들 각본에 들어 있는 일이니까요."

오홍채의 자신만만한 어투에 김석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정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호텔에 도착하면 아저씨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어요."

"누군데?"

"가 보시면 알아요."

"나 원, 홍콩에 와서 촌놈 다 되는군."

"어머, 아저씨두."

"사실이 그렇잖나? 홍콩에 오니까 자네들이 수사관처럼 보이고, 난 진짜 할일 없는 상무이사처럼 느껴지니까 하는 말이야."

그들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웃으며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승용차는 어느새 미라마 호텔 경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현관 앞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은 그들은 프런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객실로 올라갔다.

객실로 한 걸음 들어서던 김석기는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객실 한쪽에 곰처럼 웅크리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홍콩 경시청의 주태복 경감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도 안 계신 방에 제가 먼저 실례했습니다."

오홍채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제가 소개를 드리죠. 이분은 홍콩 경시청의 주태복 경감님이시고, 그리고 이분은 서울 시경에서 출장 오신 김석기 수사계장님이십니다."

"이거 몰라 뵈었습니다."

주경감이 다시 고개를 숙였고, 김석기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피차 마찬가지죠. 여기서 이렇게 주경감님을 뵈니까 제 수고가 많이 덜어진 셈입니다. 내일쯤 경시청으로 찾아 뵙고 부탁을 드릴 참이었는데요."

주경감이 문득 굵은 안경테 속의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혹시 서울에서 진충부 살인사건 수사를 담당하신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역시 제 예감이 맞았군요. 그럼 이렇게 오신 것도 그 사건 수사 때문에?"

"."

"어이쿠, 그럼 이번엔 제가 부탁을 드려야 할 차례로군요."

"?"

"그 진충부 살인사건 말입니다, 도대체 홍콩 사람이 서울에 가서 죽는 바람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정말 잘 오셨습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어머머, 두 분만 부탁을 주고 받으면 저희들은 뭐예요?"

정님의 때 아닌 투정에 좌중은 함빡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 모두 자리를 잡고 좌정하여 분위기가 잡히자 오홍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경감님, 혹시 제니퍼 카튼양의 살해범을 잡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니, 뭐요?"

주경감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오홍채의 엉뚱한 제안에 구미가 동하는 듯 그는 바싹 달라붙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은 벌써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아직 미제사건으로 남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인데, 오홍채씨가 범인을 안단 말이오?"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이구, 속 태우지 말고 시원시원하게 얘기 좀 해봐요."

주경감은 정말 애간장이 타는 듯 두 눈을 휘번뜩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오홍채는 지금까지의 앞뒤 사정을 장시간에 걸쳐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지금부터 벌일 작전의 세부 사항까지 일러주었으나 단 한 가지, 로즈메리에 관한 부분만은 비밀로 덮어두었다.

"놀랍습니다, 오홍채씨. 어쩌면 그렇게....."

주태복은 정말 탄복한 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았다.

"어떻습니까? 저희들 작전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요, 동의하고말고요!"

주경감은 한껏 흥분했고, 기쁨에 들뜬 듯 대답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김석기는 웬지 못마땅한 얼굴로 오홍채를 나무랐다.

"이 사람, 그 이야기를 진작 해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내가 여기까지 출장을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어머, 더 잘 됐잖아요, 아저씨. 여기서 그 사건의 끝을 보고 가시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기왕 오신 김에 제 보디가드도 되어주시구요."

"이거 참, 홍콩까지 출장 와서 큰일하고 가는군. 겨우 보디가드라니."

김석기의 너스레에 또 한바탕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꾸륭. 84. 21:15.

사무실로 돌아온 오홍채는 즉시 로즈메리와의 통화를 시도하였다. 암호를 대자, 잠시 후에 그녀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오선생님?"

", 접니다."

"그쪽 진행은 어때요?"

"지시대로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어머, 지시라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오홍채의 얼굴이 문득 달아올랐다. 그녀의 정체를 까맣게 몰랐던 시기에 저지른 불장난이 얼핏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로즈, 이번 일에 경찰을 개입시켜도 괜찮을까요?"

"이쩔 수 없잖아요? 우리에겐 치안권이 없으니까요. 놈들을 잡아 족치는 건 경찰의 손을 빌려야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이 되는 거예요."

"그렇긴 합니다만."

"염려 마세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놈들만 일망타진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또 다른 용건이 있나요?"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뭐가요?"

"로즈의 정체 말입니다. 로즈는 어디 소속입니까? 그렇게 해서 로즈한테 돌아가는 이익이 뭡니까?"

"호호호.....서로 그런 건 묻지 않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오선생님과 저의 관계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럼 작전을 개시할 디데이가 되면 다시 연락드릴께요."

"아니 이봐요, 로즈....."

그러나 전화는 매정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구룡반도 내실. 84. 20:00.

바 구룡반도의 내실에서 마담 매화는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수화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시간을.....조금만 더 주시면....."

그러자 쇳소리처럼 탁한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시간! 시간! 시간! 도대체 그놈의 시간이란 게 얼마나 더 필요한거야?"

"죄송합니다."

그녀는 마치 상대가 눈앞에라도 있는 듯 수화기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더 이상은 기다릴 시간이 없소! 동남 인터내셔널의 한국B1호라는 신개발품이 벌써 중국 관리들의 손에 넘어가 있소!"

"어머, 그럴 리가....."

"명심하시오. 앞으로 1주일이요! 우리는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소!"

그리고 사내의 탁한 목소리는 사라졌다. 마담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손을 놀려 전화기의 보턴을 눌렀다. 신호가 떨어지고 상대가 나타나자, 그녀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퀸이다!"

 

미라마 호텔 .85. 22:30.

미라마 호텔의 지하 바에서 김석기와 주태복 경감은 술잔을 부딪쳤다. 그들은 마치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 반갑게 권커니 잣커니 술잔을 주고 받았다. 동업자라는 인식 때문인지 그들은 배짱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댄 채 서로의 고충을 토로하고 업무에 관한 이해를 서로 나누었다. 그들의 술자리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고, 다음날 밤에는 자리를 옮기면서 또 계속되었다.

김석기는 한가한 세월을 만난 사람처럼 느긋해 있었다. 모처럼 호강 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며칠이.

 

서울. 85. .

송여사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 석긴지 철긴지 하는 그 양반! 당신 친구 말예요. 사람이 어쩜 그 모양이에요?"

윤사장은 잠자리에 들다 말고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언제는 김선생님 어쩌구 하더니 갑자기 왜 그 양반으로 평가절하됐어?"

"이쁘게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예의를 차려도 차리지."

송여사는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이구, 변덕이 죽 끓듯 하는군. 그래, 석기 그 친구가 당신한테 뭘 어쨌다구 그래?"

"도대체 그렇게 무심한 사람이 어딨어요? 공항에서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냐구요?"

"이제 고작 이틀이야!"

"나한텐 하루가 열흘 같은데 고작이라구요?"

"그렇다고 전화 한 통도 못해요?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 그러니 안심 하라든지, 아니면 어떻게 하겠다든지, 말을 해 줘야지요, 말을."

"어이구, 가슴이....."

"답답한 건 나예요.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그놈의 홍콩은 무슨 꿀이 발렸는지, 가는 사람마다 강원도 포수가 되어 버리니."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 잠이나 잡시다. 내일 내가 그쪽 형편을 알아볼 테니까."

그리고 윤사장은 이불을 훌렁 뒤집어쓰고 말았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하는 건 그저 잠뿐인 게 그의 지론이었다.

 

홍콩. 리프레스 만의 별장. 86. 오전.

리프레스 만의 별장을 들어서던 정님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집안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도둑이 들어왔었나 봐요."

"가만 있어 봐!"

뒤따라 들어오던 김석기가 급히 그녀를 제치고 앞장을 서서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김석기는 본능적으로 현장감식을 하려는 듯 집안을 둘러보았다. 천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벽, 그리고 바닥까지 그는 세밀히 살폈다.

"정님양, 어디 낯선 게 떨어져 있나 한번 살펴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정님은 마지못해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모르겠어요. 너무 뒤죽박죽이 되어서....."

김석기는 한참만에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둑의 소행은 아니야!"

"?"

"누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집을 뒤진 것 같아."

"그럼?"

"물론 박동수의 실종과도 관련이 있겠지. 여기에 박동수군의 짐들이 있었나?"

"."

"어느 방이야?"

"저 방이 동수씨 서재예요."

김석기는 급히 정님이 가리키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방으로 한 걸음 들어서던 김석기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서재 역시 엉망진창으로 뒤헝클어져 있었던 것이다. 뒤따라 들어오던 정님은 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세상에.....누가 이런 짓을....."

"이건 박동수가 아직 무사하다는 증거야."

"어머?"

"놈들은 박동수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걸 얻어내지 못했어. 그래서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여기를 뒤진 거지."

"그럼, 동수씨는 아직 홍콩에 남아 있는 게 확실할까요?"

"그럴 확률이 높아."

정님은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김석기가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갈피를 몇 장 들쳐 보던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책이에요?"

그녀는 솔직하게 궁금증을 나타내었다.

"정님인 여기 있는 책들이 어떤 건지 전혀 몰랐어?"

", 동수씨의 전공과목과는 상관이 없는 책들이 많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책을 한번 봐."

그녀는 김석기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이건 화학책인데요?"

"책 뒷장에 적힌 메모 말이야."

그녀는 비로소 뒷장을 펼쳐 들고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깨알같이 적혀 있는 메모들을 읽어 나갔다.

"한국B9.....바이러스를 이용한 미생물 살충제.....벼멸구나 흰등멸구 .....애멸구, 끝동매미충, 이화명충 등.....해충의 세포속에서 증식 .....해충만 선택적으로 구충 효과를 지닌 농약.....근데 이게 무슨 소릴까요, 아저씨?"

그녀는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박동수가 실종된 이유 중의 하나지."

"?"

"그건 박동수군이 추진하던 프로젝트 중의 일부분이야. 이것만 보더라도 놈들은 동남 인터내셔널이 추진하던 실크로드 하이웨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게 누굴까요?"

"동남 그룹의 라이벌 기업일 수도 있고.....아니면 산업 스파이의 소행이거나.....혹시 프로젝트의 성격으로 봐선.....용공분자의 소행일 수도 있어."

"그럼, 북쪽 사람들 말인가요?"

"."

김석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샛노래지는가 싶더니 금방 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떡해요, 아저씨?"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야. 사람을 납치해 가는 수법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근데 이건 뭘까?"

바닥을 살피던 김석기가 이번엔 방바닥에서 자그마한 성냥갑 하나를 주웠다.

"바 구룡반도?"

그것은 바 구룡반도의 상호가 찍혀 있는 성냥이었다. 그녀가 금방 아는 체를 했다.

"동수씨가 단골로 다니던 술집이에요."

"그래? 좋다 말았군. 혹시 범인이 떨어뜨린 유류품인가 싶었더니. 그런데 꽤 오랫동안 주머니에 담고 있었던 모양이야. 성냥개비도 그리 많지 않고, 성냥갑이 반질반질하게 닳은 걸 보니."

문득 생각난 듯 정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 동수씨는 담배를 안 피워요!"

"?"

김석기의 놀란 눈빛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하실. 86. .

, 또옥.....물방울이 떨어지는 청량한 소음이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파고들면서 박동수는 어렴풋하게 의식이 깨어났다. 순간,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이 함께 수반되어 그의 얼굴은 참을 길 없는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전신은 양팔과 양다리가 자유롭지 못하게 결박된 채 나무침상위에 비끄러매어 있었고, 벌거벗겨진 상체는 지난 며칠간 집요하게 가해진 형벌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뱀꼬리처럼 흉칙하게 온몸을 휘감은 채찍 자국과 전기고문으로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문드러진 살갗은 차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몰골이었다.

박동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아스라히 쫓고 있었다. 나는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기어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와는 정반대로 그의 의식은 어느새 삶을 절반쯤은 포기한 채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 희망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오직 남은 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죽음에의 그림자뿐이었다.

레팔르스 베이 호텔을 나섰다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몇날 며칠이 흘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지난 며칠 전부터 집요하게 고문이 계속되는 걸로 보아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깨달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문과 형벌이 아무리 포악하고 악랄하다 해도 그로선 그들이 요구하는 프로젝트의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프로젝트의 포기는 바로 회사와 가정과 국가, 모두를 포기하는 일이며, 덩달아 실낱같이 유지되는 그의 생명마저 끝장이 난다는 절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의 정신력을 지탱시켜 준 의지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회사에 대한 의리뿐이었다.

아내의 활짝 웃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의 신체에 가해지는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던 그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의식은 점차 또렷하게 맑아왔다.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 보다, 그가 그렇게 예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샤넬 넘버5의 향수 냄새가 강력하게 그의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 냄새는 그의 코에 무척이나 익숙했던 향수였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강력한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눈동자를 쏘자 그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 눈앞에서 어렴풋하던 물체가 촛점이 맞는 순간, 그는 경악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당신은?"

동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살풍경한 지하실의 분위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고 서 있는 여인은 바로 마담 매화였던 것이다.

"마담....."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저예요, 박선생님."

"마담이 여길 어떻게....."

"저도 박선생님이 여기 계신 줄은 몰랐어요. 정님씨가 동수씨를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동수는 용기를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실에는 그들 두 사람외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어디요? 그리고 매화는 여길 어떻게 알고 왔소?"

"우연히 박선생님이 여기 계신 줄 알게 됐어요."

"여기가 어디냐니까!"

그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는 격해지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오랫동안 배를 탔던 기억이 있어서.....내가 서울까지 끌려온게 아닌가 확인하고 싶었던 거요.....서울에서 발간된 신문도 얼핏 보았소. 내가 살인범으로 몰려 있던데....."

"저도 대강 이야기를 들었어요. 박선생님은 밖으로 나가면 살인 용의자로 구속된다구요."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대로 남아 있다간 이 사람들 손에 죽어요. 박선생님, 이 사람들이 찾는 게 뭐죠? 속 시원하게 털어놔 버리고 저랑 같이 빠져나가요. 박선생님 안전에 대해선 제가 보증할께요. 그리고 우리 둘이서 멀리 외국으로 떠나요. 저한텐 모아둔 돈도 있어요. 제가 뒷바라지할께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둘이 살아요."

그녀의 애절한 호소에 그의 마음이 얼핏 동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요구하는 게 뭐요?"

"그건 동수씨가 잘 알 텐데요?"

"난 아무것도 몰라."

"정말인가요?"

"그렇소."

"그렇게 잡아떼지 말고 얘기해요. 이건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에요."

"모른다니까!"

"정말?!"

별안간 마담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도대체 마담은 누구 편이오? 왜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요?"

"! 정말 지독하시군!"

마담의 눈빛이 싸늘해지는가 싶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 거짓말쟁이! 당신 입으로 나한테 말해 놓고 이젠 나까지 속이려구 들어?"

"내가 무슨 말을 했단 말이오?"

"! 기억이 나지 않으시겠지? 지금으로부터 두어 달 전에 우리 가게에서 술이 만취돼 고꾸라져 자던 날,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성공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기뻐했지. 한국과 중국이 경제교류를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분명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매화....."

"그래, 당신을 납치한 사람은 바로 나야!"

"당신이.....!"

순간, 동수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충격으로 벌어진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배어나왔다.

"그랬었군.....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니.....하필 당신 같은 여자한테 .....!"

동수는 사력을 다해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순간, 그녀의 손바닥이 허공을 날더니 찰싹 하는 마찰음을 일으키며 동수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동수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마담 역시 부화가 돋는 듯 연달아 손을 날렸다. 그의 양쪽 뺨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녀는 난폭한 손놀림으로 그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 그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거친 손길이 동수의 사내를 와락 움켜잡았다.

그는 치욕감을 견딜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녀가 사내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가하며 비틀자, 동수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빨리 말해! 사내 구실도 못 하는 병신을 만들기 전에!"

동수의 꽉 다문 이빨 사이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개 같은 년! 차라리 죽여라!"

", 죽여 달라구! 좋아, 그게 소원이라면!"

마담은 핸드백에서 피스톨을 꺼내어 총구를 그의 관자노리에 바짝 들이밀었다.

"좋아! 소원대로 죽여 주지! 그러나 너 하나 죽는 걸로 이 일이 끝나지는 않아! 이번엔 네 마누라 그년을 잡아다가 족치고, 그 애비와 직접 협상을 할 테니까!"

", 안 돼!"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10장 종말

 

홍콩. 꾸륭. 87. 아침.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리자 오홍채는 급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저예요!"

상대는 로즈메리였다.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히는 순간, 오홍채는 벌써 후끈 달아오르는 스스로를 느꼈다.

", 로즈....."

그의 목소리도 덩달아 달착지근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은 냉정했다.

"작전을 개시해야겠어요."

오홍채는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되물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 우선 주경감한테 연락부터 하세요."

"알겠습니다.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데요?"

"?"

"장미와 매화의 싸움, 과연 이번 싸움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니까요."

"호호호, 그럼 기대해 보세요."

그리고 귓전을 울리는 낭랑한 웃음 소리만을 남기고 그녀는 사라졌다.

 

홍콩 부두. 87. 10:00.

스타페리 부두는 언제나처럼 인파가 넘쳐흘렀다. 정님과 오홍채, 그리고 김석기 세 사람이 부두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 소리, 그리고 선착장에 밀려와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인파의 각종 소음과 어울려 빚어내는 묘한 화음과 분위기가 신기한 듯, 김석기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여긴가, 스타페리 부두가?"

"."

"마카오행 여객선이 여기서 뜬다 이거지?"

", 저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홍콩 마카오 잔교가 있습니다. 거기서 모두 출발하죠."

"그럼, 나는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지."

"아니, 마카오에 함께 가시지 않구요?"

오홍채가 놀란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허허, 젊은이들 틈에 끼어서 눈총받고 싶지는 않다네."

"어머, 아저씨!"

정님이 투정을 부리듯 눈을 흘겼으나, 그는 손을 저었다.

"내 걱정은 말고 재미있게들 놀다가 오게. 난 여기 남아서 할 일이 있으니까."

"어디로 가실 겁니까?"

"허허허, 나도 나름대로 꿍꿍이 속이 다 있다네."

오홍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요. 제가 전화 한 통화 할 동안만 여기서 정님씨랑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오홍채는 급히 부두 건너편의 공중 전화박스로 뛰어들었다. 다이얼의 보턴을 누르자 금방 신호가 떨어졌다.

", 주태복입니다."

다행히 주경감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급히 말했다.

"저 오홍챕니다."

", 오선생님,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준비를 끝났습니다. 지금 스타페리 부두에 도착해 있습니다. 이제 곧 마카오 잔교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우리도 올 스탠바이 상태요. 안심하고 다녀오시오. 우리 요원들이 사방에서 당신들을 지켜줄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오우케이! 작전이 끝난 후에 봅시다."

오홍채의 입가로 남 모르는 미소가 흘렀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공중전화 박스를 걸어나왔다.

", 그럼 난 이만 가네."

"돌아와서 밤에 뵙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아저씨."

"허허허, 그래."

부두에서 김석기와 작별한 정님과 오홍채는 스타페리 부두의 마카오 잔교에서 출국 수속을 밟았다. 사열대가 다가오자 오홍채는 정님에게 사열을 받는 요령을 일러주었다.

"저처럼 따라 하세요. 여권과 출국 카드 그리고 승선권을 이렇게 포개세요."

정님은 금방 요령을 익혀서 따라 했다.

"이렇게요?"

"됐습니다. 차례가 되면 그대로 사열대에 제출만 하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과연 홍콩 출국 수속은 오홍채의 말마따나 간단하게 끝이 났다.

승선이 완료되고 출발신호가 울리자 페리호는 천천히 후진을 시작했다. 잠시 후 잔교를 완전히 벗어나자, 페리호는 크게 선회를 하여 선수를 공해상으로 돌리고 뱃고동을 크게 울리고는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마카오행 페리호의 뱃전에 선 정님은 점점 뒤로 멀어져 가는 홍콩섬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홍콩섬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어쩌다 일이 잘못 되면 홍콩섬엔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 후에 홍콩 섬은 까만 점으로 변하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페리호는 홍콩의 영해를 벗어나 망망대해 위에 있었다. 페리호의 우측 선상 멀리에서 길게 드러누운 중국 대륙이 그나마 보이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녀는 멀리 뻗어 있는 중국 대륙을 보았다. 배의 선수에 부딪친 파도의 파편이 포말처럼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에 뿌려졌다. 세찬 바람이 머리칼을 온통 뒤헝클어 놓았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웬지 모를 청량감이 그녀의 벅찬 가슴을 어느 정도는 식혀 주는 듯했다.

옆에 우뚝 서 있는 오홍채 역시 묵묵히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사건의 해결을 눈앞에 두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 그의 표정엔 약간의 우수마저 깃들어 있었다.

"오선생님....."

정님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 잘 될까요?"

오홍채는 싱긋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놈들이 걸려들지 않으면 우리 계획도 허사가 되잖아요."

"조금 전에 배를 탈 때 못 봤습니까?"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의 표정엔 여유가 한껏 배어 있었다.

"낯익은 한 놈이 분명 우리를 뒤따라 배에 올랐습니다. 틀림없이 구룡반도에서 얼핏 본 적이 있는 얼굴입니다."

"갑자기 무서워져요."

"힘을 내십시오. 제가 항상 정님씨 옆에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 주경감의 부하들이 물 샐 틈 없이 경호를 하고 있으니까요."

정님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막상 일을 한다니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이번엔 오홍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님씨."

"?"

"사건이 해결되면 금방 서울로 돌아가시겠죠?"

"."

"앞으로 홍콩이 쓸쓸해지겠군요."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짧은 기간이지만 제법 정이 들었는데, 갑자기 정님씨가 없는 홍콩을 생각하니까 삭막한 느낌이 들어서요."

정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홍채의 그런 기분은 그녀로선 정말 뜻밖이었다. 위험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위기의식을 느끼고 조바심하는 그녀와는 달리, 오홍채는 전혀 엉뚱한 문제를 가슴속에 품고 회한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엉뚱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마음에는 두지 마십시오."

어느새 오홍채는 낙천적이면서도 태평스런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 듯 얼굴에는 한입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서울. 태평로. 87. 11:00.

"사장님, 홍콩에서 김석기 계장님 전화인데요."

"? 빨리 연결시켜!"

인터폰에서 여비서의 목소리가 울려오자, 그는 펄쩍 뛰며 반색을 했다. 그리고 죽었던 마누라라도 살아 돌아온 양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이구, 이 사람, 마침 전화 잘했네."

"?"

"안 그래도 내가 지금 막 전화를 걸어보려던 참이었어."

"?"

"왜라니? 이거 참 답답한 사람이구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사람이 왜 그렇게 무심해?"

"내가?"

"자네 때문에 어젯밤에 마누라하고 한판 벌어질 뻔했다니까."

"저런, 내가 뭘 어쨌는데?"

"자네가 뭘 어쩐 게 아니라, 자네가 전화 한번 안 하고 소식 한자 없으니까 마누라가 답답하고 섭섭하고 뭐 그랬던 모양이야. 어쨌든 복잡했어."

"할 말이 없군."

"그래, 거긴 어때?"

"아직은 별일 없어."

"아직이라니? 그럼, 곧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

", 어쩌면 홍콩이 발칵 뒤집힐지도 몰라."

"혹시 우리 정님이가 거기 관여하는 건 아니겠지?"

"벌써 했는걸."

"뭐야?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어쩔 수 없었어. 여기 와 보니 내가 할 일도 별로 없고, 내 위엄도 전혀 통하지 않더라구."

"이거 야단났군."

윤사장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늘 밤에 송여사로부터 치도곤을 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털이 곤두서지를 않는가.

"너무 걱정 말어. 뭐 별일이야 있을라구?"

"이 사람이 정말 태평스런 소리만 하고 있군!"

"그렇다고 걱정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까."

"이 사람아, 난 자네만 철통같이 믿고 있었는데.....그래, 어쨌든 좋아. 우리 정님이는 지금 어디 있나?"

"오늘 낮에 마카오로 갔어. 오홍채군이랑."

"뭐야?!"

결국 윤사장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도 김석기의 목소리는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사건은 해결을 향해 이제 내리막으로 치닫고 있어. 이번 마카오 계획만 잘 되면 이 사건도 끝장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어이쿠,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거야말로 점입가경이로군."

윤사장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 사람아! 우리 마누라가 그 소리를 들으면 까무러칠 판이야, 알겠나?"

"그래, 알아. 그래서 지금껏 연락도 못한 것 아닌가. 정님이 문제는 나도 어쩔 수 없었네, 이해해 주게."

"벌써 엎질러진 물인 걸 이해하지 않으면 어쩌겠나."

"그리고 기다린 김에 며칠만 더 기다리게. 정님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 두고."

"알겠네."

윤사장은 힘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 아내에게 둘러댈 말을 구상해 내자면 골머리를 한참 썩여야 할 판이었다.

 

마카오. 87. 11:00.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의 입국 절차도 홍콩 출국 절차만큼이나 간편했다. 입국 사열대를 빠져나온 오홍채는 정님의 승선권 한쪽 남은 것과 ED카드, 그리고 여권을 함께 챙겨 넣었다.

"이걸 잃어버리면 큰일납니다. 출국할 때 다시 써야 하니까요."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갑시다."

오홍채가 먼저 앞장을 섰다.

"어디부터 가죠?"

"우선, 천천히 시내 관광이나 하는 거죠."

"어머, 그럴 시간이 있어요?"

"뭐 관광이랄 것도 없을 겁니다. 마카오는 인구 30만의 소도시니까 두세 시간 돌아보면 그만이니까요."

"어머나, 고작 그것밖에 안 돼요?"

", 그래서 마카오 관광은 길어야 1박 코스고, 보통 한나절 코스로 끝납니다. 아침에 마카오에 와서 시내 관광하고, 포르투갈 요리로 점심 식사, 그리고 카지노에서 한판 벌이다가 저녁 배편으로 홍콩에 돌아가는 거죠."

오홍채는 정님을 안내하며 초라한 어촌의 포구를 연상시키는 마카오 부두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부두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불과 5분 남짓 걸렸을까? 택시가 마카오 시내의 번화가를 달릴 때, 정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나!"

"왜 그러십니까?"

"이제 보니까 마카오는 홍콩보다 중국적인 체취가 더 풍기네요."

"하하하, 그렇죠. 이게 바로 마카오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

정님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좋은데 그만큼 개발이 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낙후되어 있음을 상징하니까요. 마카오의 이 거리는 4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고 똑같다고 해요.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나라가 조선시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 우리 선조들이 머리에 상투 트고 양반타령을 하고 있을 때, 마카오는 벌써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 마카오 신사가 판을 치는 국제도시로서 찬란한 문화와 함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외관상으론 우리나라의 소도시보다 별반 나을 게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어쩜 그렇게 찬란했던 도시가 이렇게 쇠락할 정도로 영고성쇠를 거듭 했을까요?"

"그게 바로 포르투갈의 국력이 쇠퇴하고 홍콩을 거점으로 한 영국 세력이 번성하면서 맞은 마카오의 운명이죠. 이제 중국과의 영토반환 협상이 끝나고 지금의 포르투갈령에서 중국으로 귀속이 되면, 마카오의 운명은 또 변할 겁니다. 다시 번성할 지 더욱 쇠락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지금의 이 분위기는 매우 독특해서 마음에 들어요. 꼭 금병매의 무대 같기도 하구요."

"금병매요?"

"중국소설 있잖아요? 바람둥이 서문경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독특한 중국적 분위기가 서려 있잖아요?"

"하하하, 정님씨의 그 비유가 더 독특한데요."

"왜요?"

"이 좋은 분위기에다 왜 하필 바람둥이 서문경을 비교합니까?"

"어머, 그런가요?"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재의 위치도 잊은 채 시원하게 웃어제꼈다. 깜짝 놀란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택시 기사는 그들이 자신의 흉을 보고 웃지나 않는지 의심스런 모양이었다. 오홍채는 곧 택시 기사에게 그들이 원하는 코스를 일러주었다. 부두에서부터 줄곧 그들을 뒤따라온 차량이 백미러를 통해 흘깃 비쳤으나, 그는 짐짓 못 본 척했다.

"정님씨, 카지노엔 들어가 보셨습니까?"

"아뇨."

"그럼, 우리 두 사람의 오늘의 운세나 한번 점쳐 볼까요?"

"좋아요."

정님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말로만 듣던 카지노는 그녀에겐 늘상 궁금했던 세계 중의 하나였다.

마카오에서 역시 인상적인 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카지노뿐이었다. 시내 일주 택시 드라이브를 마친 그들은 가장 번화가에 자리잡은 리스보아 카지노 호텔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호랑이 아가리처럼 거대한 현관 위에 리스보아 카지노란 네온사인 간판이 그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홍채는 정님과 같이 호랑이굴 속 같은 쪽문을 밀고 빨려들 듯 카지노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구룡반도. 87. 오후.

대낮이어서 그런지 바 구룡반도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김석기는 벌써부터 스탠드 구석에 홀로 앉아 칵테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두 잔째의 진토닉을 청했을 때였다. 그제서야 낯선 손님을 발견한 듯 마담 매화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척 외로워 보이시네요. 혼자 오셨어요?"

"."

"앉아도 될까요?"

"허허허, 물론 환영합니다."

그는 짐짓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마담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못 뵙던 분이시네요."

"그럴 테지요. 마담이시오?"

"."

"과연 소문대로 미인이시군."

"어머!"

마담이 싫지 않은 눈빛으로 곱게 그를 흘겼다.

"우리 부하 직원들이 여길 소개해 줍디다. 자기들 단골집인데 좋은 집이라고."

"어머, 누굴까요?"

"마담 이름이.....무슨 꽃이름이던데, 늙지도 않아서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니....."

"매화예요."

"아 그래, 매화!"

"혹시 동남 인터내셔널에서 오신....."

"그래요, 나 김상무라고 합니다."

"어머나, 서울에서 상무님이 출장 오셨다더니 바로....."

마담은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허허허,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두요."

순간,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 김석기는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었다. 마담이 재빨리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그는 얼른 손을 들어 말렸다.

"성냥 있습니까?"

", 있어요."

"난 성냥이 좋습디다."

"호호호, 정말 특별한 분이시로군요. 유황 냄새 때문에 성냥을 싫어 하는 분도 많은데."

"대부분 그렇지요."

"성냥을 좋아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 보죠?"

"난 성냥 컬렉터예요. 지금까지 수집해 놓은 성냥갑이 3천 개는 족히 넘으니까요."

"어머나, 정말 굉장하시네요."

"허허허, 기왕이면 여기 성냥도 하나 얻어 가고 싶소이다만."

"그러세요. 하나가 아니라 아예 여러 개 드리지요. 마침 얼마 전에 성냥 디자인을 예쁘게 바꿨거든요."

그리고 마담은 바텐더에게 성냥을 요청했다. 순간, 김석기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목적은 바로 구룡반도의 성냥갑에 있었던 것이다.

 

마카오. 리스보아 카지노 호텔. 87. .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오후 여섯 시쯤 되었을 때, 블랙잭을 하고 있는 정님과 오홍채의 자리에는 칩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들이 짧은 시간에 뜻밖의 성적을 낸 건 오로지 오홍채의 갬블에 대한 요령 탓이기도 했다. 처음 카지노에 발을 들여 놓은 그들은 한동안은 게임을 하는 대신 구경만 하고 다녔다. 우선 카지노의 분위기부터 익히면서 승부 호흡을 마추자는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룰레트와 블랙잭, 키이노우, 베커라, 포커, 다이스, 슬롯 머신등 카지노의 모든 매장을 기웃거린 끝에 오홍채가 맨처음 승부를 건 것은 슬롯 머신이었다. 백 달러씩을 밑천으로 코인을 바꾼 그들은 우선 슬롯 머신과 씨름을 했다. 그 기계를 선정한 것도 오홍채였다. 어차피 운수소관인 노름이지만 그는 슬롯머신매장을 여러 바퀴 돌아다닌 끝에 가장 확률이 높아 보이는 기계를 어림짐작으로 찾아서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예감은 적중했고, 백 달러의 코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정님의 기계에서 잭팟(Jack Pot)이 터졌던 것이다. 거의 포기하고 있다가 요란한 음악이 터져나오자 정님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 기계의 배당상금은 3천 달러였다.

코인을 칩으로 바꾼 그들은 이번엔 블랙잭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오홍채는 과감하게 승부를 걸었고 그때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의 테이블에는 칩이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아마도 5만 달러는 족히 될 성싶었다.

손목시계가 630분을 경과하자, 오홍채는 단판승부를 걸었다. 그가 판돈 전부를 한 번에 걸겠다고 제의하자, 딜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일정액 이상의 엄청난 배팅은 룰에 저촉되는 모양이었다. 딜러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테이블의 상황을 설명하고 카지노 고위층의 허락을 얻고서야 딜러는 승낙을 했다. 상부로부터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제 도박장 내부의 관심은 온통 이 테이블에 쏠리고 있었다.

게임은 시작되었다. 오홍채는 심호흡을 했다. 딜러가 소유한 카드는 고작 20장 남짓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버려진 카드의 숫자 높낮이를 그는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과 오늘의 강한 운세를 믿었다. 옆자리에서 정님은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첫번째 받은 오픈 카드는 6이었다. 딜러는 킹.제기랄, 그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다음 히든 카드는 쟈니. 맙소사, 그의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바작바작 배어나왔다. 식스카드인 쟈니 카드의 합은 16이다. 흘깃 딜러의 표정을 살펴보니 약간은 긴장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포커 페이스다. 엄청난 판돈 앞에선 딜러 역시 마음의 동요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약간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 그의 표정으로 보아, 딜러의 카드는 안정권으로 접어든 눈치였다.

"힛 미!(한장 더!)"

그는 승부를 걸었다. 어차피 도박이 아닌가. 딜러의 오픈 카드가 킹인 이상 그는 불리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히든 카드가 7이상이라면 그냥 앉은 채로 당하고 마는 것이다. 딜러가 소유한 카드의 남은 숫자는 15장 남짓, 그중에 5이하의 숫자는 8. 50%의 확률에 그는 과감히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카드가 날아왔다. 숫자는 5, 합이 21이다. 이겼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패스!(필요 없소!)"

그는 내뱉듯 한 마디 던지고는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딜러가 자신의 히든 카드를 오픈시켰다. 숫자는 마담. 킹과 퀸이면 합이 20이다. 딜러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탄식과 함께 오홍채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보내는 축도 있었다.

숫자 21을 만드는 게임인 블랙잭에서 20이면 거의 승리 포인트이다.

오홍채는 천천히 손을 뻗어 히든 카드를 넘겼다. 쟈니 카드가 자랑스럽게 뒤집어졌다.

"투엔티원!"

순간, 딜러의 안색이 흙빛이 되면서 좌중에서 탄성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의 테이블에 놓인 칩이 금방 두 배로 불어났다. 오홍채는 미련없이 자리를 양보하고 몸을 일으켰다. 카지노 걸에게 칩을 돈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하자, 금방 지배인이 달려왔다. 그들은 귀빈실로 안내되었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현금으로 드릴까요, 수표로 드릴까요?"

지배인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었다.

"수표로 주시오!"

"어느 은행의 수표로 끊어 드릴까요?"

"한국은행의 수표로 주시오."

"알겠습니다."

지배인은 즉시 물러났다. 마카오의 카지노에선 세계 어느 나라의 은행수표를 요구하더라도 손님이 요구하는 수표를 발행해 준다.

잠시 후에, 그가 지배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수표의 금액에는 1245백 달러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카지노를 빠져나오자 밖은 짙은 어둠이 내려깔리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운수대통했습니다."

"오선생님 수완이 보통이 아니던데요?"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이 돈을 딴 건 오로지 정님씨 때문일 겁니다. 제가 신이 나서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구요. 그런 뜻에서 오늘의 불로소득은 정님씨에게 선물하겠습니다."

"어머, 그건 안 돼요."

"제 정성으로 알고 받아 주십시오."

"그럴 순 없어요."

길거리에서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결국 공평하게 둘이서 나누기로 합의를 보았다.

", 시간이 됐으니 슬슬 가 볼까요?"

그들은 제법 은밀한 동작을 취하며 해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몰래 뒤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전히 우릴 따라오고 있어요."

"됐습니다. 만사가 순조로운데요."

정님과 오홍채는 더욱 한적한 해변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은 끊어지고 사위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어머, 저 사람 제법 대담해졌어요."

과연 그림자처럼 그들을 따르던 미행자는 제법 대담하게 몸을 나타내어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됐습니다. 시작합시다!"

오홍채가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실랑이를 시작했다. 정님은 별안간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였다.

"어머나! 왜 이러세요, 오선생님.....싫어요. 사람 살려요."

그녀는 몸을 돌려 미행자를 향해 몸을 날렸고, 오홍채가 그 뒤를 쫓았다.

"여보세요! 도와주세요!"

그녀가 부르짓듯 외치자, 미행자는 눈을 빛내며 뛰어오는 오홍채를 막아섰다.

"이 자식이 연약한 여자를 넘보다니!"

미행자는 역시 장태산이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은 듯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잭나이프가 들려 있었고, 칼날은 달빛에 날카롭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가 막 칼을 휘두를 찰나였다. 오홍채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가스총이 그의 얼굴을 향해 분사되었다. 다음 순간, 거구의 장태산은 어이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오홍채는 품에서 손전등을 꺼내 바다를 향해 네 번을 깜박였다. 그리고 준비해 둔 강력접착 테이프로 장태산의 입을 봉하고 손발을 휘감았다.

그때, 요란한 엔진음이 울리며 쾌속정이 불쑥 나타났다.

"여기예요."

쾌속정의 엔진을 멈추며 로즈메리가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장태산을 쾌속정에 옮겨 싣고 사라진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해변은 다시 짙은 어둠과 고요 속으로 잠겨들었다.

 

구룡반도 내실. 88. 오전.

구룡반도의 내실에서 마담 매화는 전화통에다 악을 써댔다. 장태산의 실종은 그녀에게 엄청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으로 치부했던 그가 배신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사고다. 그녀는 절박한 위기감을 애ㄲ은 하부조직에 온통 퍼부었다.

"마카오에 들어간 장태산이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는 건 분명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속수무책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이야?!"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죄송하지 말고 즉시 장태산의 소재부터 확인해!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녀는 전화기가 부서져라 하고 수화기를 팽개치고 말았다.

"등신 같은 놈들!"

마담은 분을 삭이지 못해 이를 악물며 파르르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녀를 놀라게 한 일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좌불안석이 되어 홀을 서성이고 있을 때, 정님과 오홍채가 구룡반도로 불쑥 들어서지 않는가. 그녀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마담."

"안녕하세요, 매화 언니."

"어머나, 어서들 와요. 그래, 마카오 관광은 즐거웠구?"

그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홍채는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 즐거울 뻔했죠."

"? 무슨 일 있었어?"

", 별일은 아닙니다. 밤에 해변에 나갔다가 내가 잠깐 볼일을 보고 왔더니, 어떤 치한이 정님씨를 덮쳤지 뭡니까."

"저런, 그래서?"

"제가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놈과 싸워 결국 때려눕혔죠!"

"다친 사람은 없구요?"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그놈을 끌고 갔는데, 아마 거기 경찰에 넘겼겠죠."

"정말 큰일날 뻔했네. 세상에 그런 죽일 놈이 어딨어? 우리 정님씨 같이 착한 사람이 봉변을 당할 뻔했군. 근데 마카오 그 좁은 바닥 어디서 그랬어?"

마담은 한입으로는 연신 위로의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 사건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홍콩 경시청. 88. 오전.

한편, 정님과 오홍채가 매화를 붙들고 능청을 떨고 있을 즈음, 김석기는 홍콩 경시청에서 주태복 경감과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김석기가 자신이 입수한 구룡반도의 상호가 박힌 성냥갑 두 개를 증거물이라고 꺼내 놓자, 주경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낯빛을 지어 보였다.

"좀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성냥이 무슨 증거가 된다는 겁니까?"

"말씀드리죠. 여기 쓰다 남은 성냥은 며칠 전 박동수의 집에 칩입했던 사람이 흘린 성냥이고, 남은 하나는 내가 어제 마담 매화로부터 얻은 겁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같은 성냥이군요."

주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냥이 박동수의 집에 침입하여 집안을 뒤진 범인의 유류품이 확실한 이상, 범인은 바 구룡반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박동수가 사용하던 성냥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박동수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담 매화로부터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이 성냥은 불과 열흘 전에 새롭게 도안하여 만든 성냥입니다. 박동수가 실종된 후에 말입니다."

"그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수색영장을 발부해서 구룡반도를 뒤져 봅시다. 어쩌면 박동수가 그 집안의 내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수색영장을?"

"."

"범죄사실에 대한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요?"

"이보다 더 뚜렷한 심증이 어디 있습니까?"

주경감은 난색을 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섣불리 손을 댈 순 없습니다. 그 성냥도 그래요. 그 성냥은 술집 손님에게 서비스로 공급하는 판촉상품이라 그 집을 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질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 집 종업원이 사용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죠. 그런 빈약한 증거로 수색영장이 떨어질지도 의문이지만, 만약 수색했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면초가에 처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만 하실 겁니까?"

"....."

"이렇게 어물거리다가 혹시 놈들이 눈치를 채고 국외로 탈출해 버린다면? 그렇다면 이 사건뿐만이 아니라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마저 영원히 미궁에 빠져 버릴 겁니다."

주경감의 낯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이란 말에는 그도 동요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머리를 젓고 말았다.

"어쨌든 저도 심증만큼은 확실히 느끼고 있으니 차츰 방법을 연구하도록 해 봅시다."

"할 수 없군요. 이 문제는 주경감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잡아온 그 친구는 어떻게 됐습니까? 불었습니까?"

주경감이 금시초문이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뇨, 아직 신병을 인계받지 못했는데요?"

"?"

"오홍채씨 쪽에서 어딘가에 확보해 두고 있는 모양인데, 오늘 중으로 인계해 준다고 해서 연락을 기다리던 중입니다."

 

구룡반도 내실. 88. 14:30.

한참만에 신호가 떨어지자, 마담은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 퀸이다."

"마카오의 4번입니다."

"확인해 봤나?"

", 어젯밤에 그런 사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근 마을에서 들었는데 여자의 비명이 크게 들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데 5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경찰 쪽은?"

"신고된 사실이 없답니다."

"마카오 출입국 사무소는 확인해 봤나?"

", 아직 마카오를 떠나지 않은 듯합니다."

"애들을 풀어서 계속 찾아봐!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도대체 누군지?"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놓는 매화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등줄기로 차가운 오한이 스쳤다. 확실히 위기상황이다. 조직의 한쪽이 무너져 가는 게 틀림이 없다. 지난번에 7번이 실종되더니 이번엔 그녀가 믿었던 심복인 장태산까지 당했다면, 다음에는 바로 자신의 차례가 이닌가.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다시 재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녀는 본능적인 위기감에 손끝을 떨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상부에 알려야 한다. 신호가 떨어지더니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홍콩대학 정문 앞. 88. 18:00.

하이핑 로드(海防道)를 빠져나온 오홍채의 승용차는 좌회전하여 나탄로의 큰길을 달리다가 킹발리 로드(金色利道)를 달려나갔다. 구룡시의 복잡한 도심인 상업지구를 빠져나오는 동안 미행이 없는가를 수차 확인해 본 그들이었다.

잠시 후, 구룡역에 도착한 정님과 오홍채는 승용차를 역전 주차장에 밀어 넣고 도보로 천천히 역전을 빠져나왔다.

로즈메리와의 시간 약속은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역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들에 뒤섞인 채 육교을 건넌 그들은 역전 광장에서 두어 블럭 떨어진 홍콩이공대학까지 걸었다.

대학 정문까지 도착하는 동안 정님은 별로 말이 없었다. 마카오를 다녀온 후부터 웬지 말수가 줄어든 그녀였다. 사건 해결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착잡함도 있었지만, 오홍채로부터 남성을 느끼고 있다는 게 더욱 정확한 이유였다. 그것은 마카오를 다녀오면서 일어난 심경의 변화였다.

(갑자기 정님씨가 없는 홍콩을 생각하니까 삭막한 느낌이 들어서요.)

마카오로 향하는 페리호의 선상에서 오홍채가 무심코 던진 말을 그녀의 잔잔한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편의 직장동료로만 평범하게 생각해 왔던 지금까지의 인식이 일제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내심 도리질을 해보았으나, 마음 한구석에서 은근히 치밀어오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마카오의 해변에서 장태산을 유인하기 위해 그의 품에 안겨 실랑이를 벌이는 쇼를 하면서도 실제로 묘한 감정을 느끼고 내심 놀랐던 그녀였다.

남편과 비교되는 남성으로서 오홍채가 부각된 것은 그녀의 감정 체계에서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혼란이기도 했다.

약속 장소인 홍콩이공대학 정문에서 5분여를 기다렸을까?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게 분명해요?"

", 이제 약속 시간이 거의 됐습니다."

오홍채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다시 대학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광장으로 눈을 돌렸다.

광장은 상당히 넓었고 시야는 탁 트여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정문을 드나드는 학생들 외엔 로즈메리는 커녕 그녀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때, 페리 부두와 구룡역을 관통하는 도로 쪽에서 앰블런스 한대가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들은 무심코 앰블런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대학 정문을 통과하여 학교 안으로 진입하려나보다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앰블런스는 그들을 향해 곧장 달려오더니 그들 앞에서 급정거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뜻밖에도 앰블런스에서 내린 건 간호원복 차림의 로즈메리였다.

"어머!"

"아니, 로즈!"

그들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들이 미처 물어볼 틈도 없이 로즈는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그들이 앰블런스의 뒷문으로 차에 오르자, 앰블런스는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나갔다.

로즈메리가 비로소 그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제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니까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감에겐 연락했나요?"

", 그 양반 갑자기 정신병원으로 나오라니까 놀랐는지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오홍채의 익살에 그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

"그런데 장태산은 어디 있습니까?"

"호호호.....바로 여기 잠들어 있잖아요."

로즈메리가 시트를 들치자, 과연 들것에는 장태산이 의식을 잃은 채 실려 있었다.

", 난 진짜 환자인 줄 알았더니."

오홍채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육초이 로드를 달린 앰블런스는 카이탁 국제공항으로 통하는 인터체인지를 유턴하더니 잠시 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종합병원으로 통과했고, 정신과 병동의 육중한 철문을 통과하고서야 겨우 멎었다. 앰블런스가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김석기와 주경감이 오홍채 일행을 반겼다. 그리고 그들 역시 기상천외하게 장태산이 들것에 실려나오는 장면을 놀란 눈으로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구룡반도. 88. 18:00.

<금일 휴업>이란 쪽지를 문 앞에 붙인 채 문이 굳게 닫힌 바 구룡반도 내부에선 많은 사람들이 마담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흔적은 깡그리 지워야 한다. 우리가 지하로 잠적한 뒤에 우리의 정체가 노출될 만한 건 나무 한 토막이라도 남아 있어선 안 돼!"

그녀는 몇 번이고 확인 작업을 반복하면서 소각 작업팀을 독려했다. 그리고 틈틈이 외부 조직과의 철수 후의 연결 작업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언제 철수를 하는 거죠?"

소각 작업 중이던 조직원이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즉시 철수한다. 지금 당장이 될지, 아니면 오늘 밤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당장 눈앞에 벼락이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냉혹한 어조와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퀸 엘리자베스 호스피털. 88. 21:45.

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의 특실에선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가운데 장태산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세 시간째 장태산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완강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주경감은 터져나오는 분통을 간신히 억누르며 차근차근 장태산을 달래고 있었다.

"이봐, 자네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

"이렇게 버티는 건 자네 신상에 전혀 이롭지 못해."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 모르겠는데요."

거만하게 허리를 뒤로 제낀 채 반항적인 말투지만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주경감은 이때다 싶어 그의 말꼬리를 물었다.

"자네가 카이탁 공항에서 출국하는 박동수를 봤다고 했지?"

"."

"왜 그런 거짓말을 했나?"

"아니, 거짓말이라뇨?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그는 눈알을 부라리며 대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잡아다 놓고 신문을 하시는 겁니까?"

그 뻔뻔스러운 태도에 주경감은 핏대를 올렸다.

"이 친구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이봐, 이 덜 떨어진 친구야! 그런다고 마담 매화가 널 구하러 달려올 것 같아? 잠시 후면 마담도 너와 똑같은 신세가 돼, 알겠나?"

"?"

순간 장태산은 찔끔했다. 주태복과 김석기는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었다. 주경감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윽박 질렀다.

"바른 대로 말해! 지금이 기회야. 그러면 자네는 정상참작을 해서 금방 풀어줄 수도 있어."

"....."

"매화가 그렇게 시켰지?"

"제가 봤다니까요! 카이탁 공항에서요. 박동수씨가 허겁지겁 뛰어 가길래 어딜 가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일순, 허물어질 듯싶던 그는 다시 완강한 저항만을 거듭했다. 순간,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석기가 별안간 탁자를 걷어차며 끼어들었다. 탁자가 요란하게 나뒹굴자 깜짝 놀란 그는 얼빠진 얼굴로 김석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엉터리 같은 친구야! 바 구룡반도 지하실에 갇혀 있는 박동수가 어떻게 출국을 해!"

"아니? 그걸 어떻게....."

별안간 혼을 빼놓고 서툰 영어로 대드는 김석기의 유도신문에 어이없이 말려들었던 장태산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표정에선 낭패한 기색이 역력히 배어나왔다. 김석기는 숨돌릴 틈도 없이 성냥갑을 그의 코 앞에 집어 던졌다.

"그건 자네의 성냥갑이야! 자네가 리프레스 만의 박동수 별장에 떨어뜨린 성냥갑! 거기 자네의 지문이 나와 있어!"

거짓말!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그는 꿀꺽 삼켰다. 그날 나는 장갑을 끼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다고 그 말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흐트러진 탁자를 똑바로 정리하고 나서 주경감이 다시 그와 마주 앉았다.

", 또 얘기해 볼까? 자네의 범죄사실에 대해서. 자네가 왜 여기 붙들려 왔는지 또 얘기를 해줄까?"

"....."

"이봐, 이제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얘기하세. 자네가 매화를 감싼다고 마담이 자넬 구해 줄 것 같은가? 천만에, 자네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 자신뿐이야. 설마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에다 박동수 납치사건!그걸 자네 혼자 다 뒤집어쓸 생각은 아니겠지?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으로 기소된다면, 자넨 아무리 종범이라고 우겨대도 교수형은 면할 수 없어. 그뿐만이 아냐. 양성국 살해사건, 진충부 살해사건, 큐팡과 관련된 사건을 모두 자네 혼자 뒤집어쓰게 돼. 마담이 달아나 버리면 말이야. 자네한테 이런 말은 하기 싫지만, 조금 전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바 구룡반도는 벌써 휴업이란 쪽지를 붙여놓고 문을 닫아 걸었다고 하더군. 아마 지금쯤 어딘가로 도망갈 궁리를 하거나 벌써 달아났는지도 모르지. 자네한테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까지 뒤집어 씌우고 말일세."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딨습니까? 난 제니퍼양 살해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장태산이 불쑥 볼멘 소리로 털어놓았다.

"그래, 그래서 신사적으로 사나이 대 사나이로 얘기해 보자는 거 아니야!"

"....."

순간 장태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주경감은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 나야. 바 구룡반도 수색영장이 떨어졌나? 나왔어? 그럼, 지금 즉시 구룡반도를 덮쳐! 문이 잠겨 있으면 부숴! 경찰 2개 중대를 동원해서 그 일대를 물샐틈없이 경비해! 혹시 포위망을 빠져나갈 경우를 생각해서 해안 봉쇄령도 발동시켜. 공항도 마찬가지야. 쥐새끼 한 마리도 내보내면 안 돼, 알겠나? , 수고해!"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물론 지금의 전화는 외부와 선이 연결되지 않은 장식용 소품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극은 멋들어지게 적중하여, 장태산은 거의 허물어지고 있었다.

"어때? 우리에게 협조하겠나? 큐팡은 이제 완전히 분쇄됐어!"

그리고 그는 불쑥 몸을 일으켰다.

", 나도 더 이상은 시간이 없어! 내가 이 방을 나가 버리면 이젠 자네조차 살아날 여지가 없게 돼!"

".....말씀드리겠습니다."

장태산은 드디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주태복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구룡반도. 88. 22:00.

조방의 연락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던 마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녀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장태산이 체포되어서 정신병원에 수용되다니?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조방 연락원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우리 요원 하나가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면회를 갔다가 우연히 주경감을 목격하고 그를 지켜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앰블런스가 도착하고 장태산이 들것에 실려 왔답니다. 그 조직원 말에 의하면, 그 후부터 삼엄한 경비가 세워져서 더 이상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고맙네!"

마담은 절망감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렇게 완벽한 조직을 구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비가 투자되었는지. 이제 막 뻗어나려는 순간 이런 꼴이 되다니. 그녀가 참담한 심경을 되삭이고 있을 때 현관을 지키던 조직원이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왔다.

"경찰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벌써 몇 번째 현관문을 두드리더니 이젠 아예 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고심하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할 수 없다. 더 이상 상부의 지시만을 기다릴 시간 여유가 없어. 지금 당장 철수한다. 모든 요원들은 지하실의 비밀통로 입구로 집합시켜!"

"어디로 가시려구요?"

"배를 타고 일단 홍콩 영해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공해상에서 상부와의 교신을 다시 시도해야겠다. , 서둘러!"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홍콩. 구룡반도. 88. 22:05.

홍콩 전역의 경찰에 비상망이 걸리고 각 지역을 순찰 중이던 순찰차들이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일제히 구룡반도로 몰려들었다. 홍콩 경시청의 순찰차들이 일시에 한 장소로 집결되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것은 홍콩 경시청이 생긴 이래 처음이랄 만큼 요란한 사건이었다. 벌써 꽤나 깊은 밤이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야경을 뚫고 요란하게 질주하는 패트롤카의 소음에 막 잠자리에 들려던 시민들마저 잠옷 차림으로 집을 뛰쳐나오거나 고개를 빼고 창밖을 내다보는 등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주태복 일행을 태운 패트롤카는 맹렬한 속도로 홍콩 시가지를 질주하였다. 그들의 차가 구룡반도에 도착했을 때는 홍콩 경시청의 기동 타격대를 실은 리무진과 함께 십여 대의 순찰차가 현장에 도착했거나 도착하고 있었다.

주경감은 신속히 기동타격대를 지휘하여 바 구룡반도를 덮쳤다.

"샅샅이 뒤져!"

그러나 그들이 문을 깨부수고 바를 덮쳤을 때, 구룡반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경찰이 건물 내부를 수색하는 동안, 정님과 오홍채는 순찰차 안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것은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김석기의 배려 때문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주경감은 무전기를 잡은 채 일사불란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주경감님! 쥐새끼 한 마리 없는데요?"

수색조의 조장이 뛰어와 1차 보고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놈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미리 감시를 세워두라고 했잖아!"

"명령대로 했습니다. 입초를 섰던 경비 담당의 말에 의하면, 현관으로는 아무도 빠져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기랄! 어딘가에 비밀 출입구가 있는 모양이로군. 벌써 눈치를 채고 튄 거야!"

"어떡할까요?"

"계속 수색해! 뭔가 단서가 나올 때까지!"

그때였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하실에서 시체가 한 구 발견되었습니다!"

"뭐야? 사람이 죽었어?"

순간, 정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급히 순찰차에서 뛰어내리려는 정님의 팔을 김석기가 콱 움켜쥐었다.

"가만있어! 흥분하면 안 돼!"

차에서 내린 주경감이 급히 구룡반도로 뛰어들었다. 바깥을 경비하던 경찰관들이 일시에 그 뒤를 따랐다.

"이것 놔요!"

"안 돼!"

"정님씨!"

"들어가 봐야 돼요!"

"정신 차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

그녀는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김석기와 오홍채의 완강한 완력 앞엔 움쩍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흐느낌만 들려올 뿐 차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한참 만에야 주경감이 돌아왔다. 그는 둔중한 자세로 앞자리에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정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누구죠? 죽은 사람이 누구냐구요?"

"....."

"동수씨죠? 그렇죠?"

이윽고 주경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동시에 정님은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며 실신을 하고 말았다.

 

홍콩역. 오버브릿지. 88. 23:09.

"여기는 본부다. 공항은 이상 없나? 오버."

"이상 없습니다, 오버."

"알았다. 지금 이시간부터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시킨다. 헬기는 물론 자가용 경비행기도 물론 포함된다, 알았나? 오버."

"알겠습니다, 오버!"

시내를 질주하는 순찰차에서 주경감은 무전으로 각 지역의 상황을 점검하고 일사불란한 지휘를 하고 있었다.

"1번 도로 나오라! 오버."

"여기는 1번 도로! 이상 없습니다, 오버."

"해안선 나오라! 해안선 나오라, 오버!"

홍콩 전역에는 1급비상경계망이 펼쳐졌고, 밤이 깊은 홍콩의 시가지에는 경찰차량들이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아마 홍콩 경시청의 가동인원은 총출동된 듯싶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김석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큐팡이란 일개 범죄조직을 분쇄하기 위해 홍콩 경시청이 이렇게 총동원된다는 사실이 도리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도 제니퍼 카튼양 살해사건이 그 원인이 아닐까 하고 김석기는 나름대로 짐작했다. 그동안 실추되었던 홍콩 경찰의 위상을 그들은 이번 기회에 일거에 쇄신해 버릴 기세였다.

병원으로 실려간 정님과 오홍채가 은근히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김석기는 흥미진진한 홍콩 경찰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일에 점점 몰두하고 있었다.

주경감과 김석기가 탄 순찰차가 구룡역의 오버브릿지를 넘어 페리부두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경시청의 지령통제실로부터 주경감에게 긴급 무전이 날아왔다.

"반장님! 여기는 지령통제실입니다. 해양경비대로부터의 긴급 보곱니다!

조금 전에 차이나 홍콩시티 해안을 빠져나가는 괴선박 한 척을 포착하고 그 뒤를 쫓고 있다는 보곱니다!"

"뭐야? 그 배를 놓치면 안 돼! 반드시 나포하도록! 혹시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차를 돌려! 차이나 홍콩시티다!"

큐 브레이크의 요란한 굉음과 함께 유턴을 한 순찰차는 지금까지 달려온 도로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나갔다.

 

홍콩 앞바다. 88. 23:12.

쾌속정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달려 나갔다.

"! ! 더 빨리!"

해양 경비정이 그들을 포착하고 뒤를 쫓자 마담은 발악하듯 악을 썼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엔진이 터져 버립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마담은 선원을 밀쳐내고 자신이 직접 조종간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위험합니다! 더 이상 달리면 배가 전복됩니다!"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구 있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엔진의 속도를 올렸다. 힐끗 돌아보니 그들을 추적하는 해양경비정과의 거리가 조금은 멀어진 듯싶었다. 마담은 얼핏 미소를 흘렸다. 그때, 경비정의 확성기에서 경고가 들려왔다.

"경고한다! 쾌속정은 즉시 그 자리에 정선하라! 서지 않으면 발포한다!"

"개새끼들! 모두 전투준비!"

마담이 다시 악을 썼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즉시 그 자리에 정지하라!"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쾌속정은 여전히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쌍안경으로 전망을 살피던 함장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 부함장이 근심스런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저놈들이 죽기 살기로 발악할 모양입니다. 자칫하다간 놓치겠는데요? 조금만 더 가면 영해를 벗어납니다. 더 이상 거리가 멀어지면 저 배를 시야에서 놓칠 수도 있구요."

"경고를 한 번 더 올려! 그리고 발포 준비를 해."

그러나 확성기에서 다시 한번 경고를 울렸을 때 도리어 야유나 하듯 쾌속정으로부터 기관 총알이 날아들었다.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포탄 장진! 발포!"

경비정의 포신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이 길게 꼬리를 이으며 밤하늘을 날았고 그중의 한 발이 쾌속정에 명중하였다.

순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쾌속정에서 폭발한 불기둥이 사방으로 흐트러지며 장엄하게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11장 에필로그

 

홍콩. 미라마 호텔. 811. 16:00.

호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정님이 방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타인의 출입을 금하고 전화마저 받지 않던 정님은 사흘 만에야 오홍채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들어오세요."

문 앞에서 오홍채는 멀거니 정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동안 몰라볼 정도로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충격이 어떠했는가는 그녀의 모습이 여실히 대변하고 있었다. 오홍채는 가슴이 저며오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얼굴이 몹시 상했군요."

"밉죠?.....제 얼굴이....."

역시 여성적인 본능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거울을 쳐다보며 자신의 몰골을 부끄러워했다. 오홍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문득 사랑스러웠다.

"어떻습니까? 모처럼 바람이나 쐬러 갈까요?"

"....."

"아니면 커피숍에 내려가서 차라도 한잔....."

"."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시했다.

"그럼, 나가시죠."

"잠깐만요.....얼굴을 좀 고쳐야겠어요."

 

잔잔한 클래식의 선율이 커피숍의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홍채는 주머니에 끼고 있던 신문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뭔데요?"

"신문입니다. 사우드 차이나 모닝 포스트 영자지 신문이에요. 마담 매화의 밝혀진 사실들이 거의 기사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요."

물끄러미 신문 뭉치를 내려다보던 정님이 한참 만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뇨, 보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신문을 포켓 속에 구겨 넣었다. 좌중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그녀가 다시 얼굴을 돌렸다.

"마담 매화의 배후 인물이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불행하게도 그 사실은 영원히 비밀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유일한 당사자인 마담이 발악하다가 포탄에 맞아 죽고 말았으니까요. 아무튼 악랄한 여자였습니다. 배가 포탄에 맞기 직전에 바닷속에 뛰어내려 살아남은 조무라기들의 말을 들어보니, 박동수씨의 머리에 총을 쏜 것도 그녀의 소행이더군요. 큐팡이란 조직은 분쇄되었습니다만, 그 원흉이랄 수 있는 배후세력을 밝히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마담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으며 누구를 위해 산업 스파이활동을 했는지 영영 밝혀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로즈메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사라졌습니다."

"?"

"마담 매화가 죽던 날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회사로 연락해 보시잖구요."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용하던 전화는 이미 폐쇄되었구요."

"세상에....."

"어쨌든 로즈메리는 미스터리투성이의 여자였어요. 비록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천사처럼 착한 여자였죠."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고맙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었고....."

"아마 로즈메리는 그걸 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홍채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서울로 돌아가겠어요."

"언제....."

"내일 당장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배어 있었다. 반면에 오홍채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져 있었다.

"알겠습니다.....즉시 수속을 밟아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무척 고마웠어요."

"별말씀을.....저도 곧 뒤따라 들어갈 생각입니다."

"어머, 회사는요?"

"본사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사표라도 내야죠."

".....그렇게까지."

"이젠 홍콩이 싫어졌습니다."

"....."

"정님씨가 안 계신 이곳이 무의미하기도 하구요."

"?"

"오해는 마십시오.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정님씨가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서울에서 다시 만나뵙고 싶습니다."

"....."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 출국장. 812. 13:00.

"그동안 수고 많았네."

김석기는 오홍채의 손을 힘차게 거머쥐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님씨....."

정님은 대답 대신 오홍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은 다시 공항 구내의 모습들을 살폈다. 원치 않았던 29일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하는 감회가 그녀의 눈빛에 다분히 서려 있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목례를 남기고 조용히 등을 돌렸다. 돌아서면서 김석기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오홍채도 따라서 손을 들었다.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정님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서는 그의 두 눈에서 얼핏 눈물이 비쳤다. 그리고 무심한 공항 구내의 아나운스먼트만이 왕왕거리며 허전하게 텅 빈 가슴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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