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리스티샤는 집에 돌아와 어깨에 걸쳤던 숄을 벗어 놓고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무를 넣어 불을 피우고 빨간 불꽃이 눈앞에서 춤추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양반한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야지! 그렇지 않아도 병석에 누워 있는데, 마음까지 괴롭혀선 안 돼.'
노파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아리스티샤는 남편 쪽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억울하게 유대인으로 취급되어 5년 동안이나 경찰과 헌병한테 갖은 학대를 받고 고생을 했을 이온을 생각했다.
'불쌍한 녀석! 유대인도 아닌데 그 고생을 하다니! 아이고, 분통 터지는 이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 한담! 정말 유대인이었다면 누가 체포될 때까지 집에서 그리 태평하게 있었겠어. 마음이 좋아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흠이란 말이야. 그 놈들의 매에 못 이겨 유대인이라고 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경찰 당국이 그 이를 유대인으로 인정한 거야!'
아리스티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도리가 없었다. 아들의 사진이 찍힌, 선거 포스터처럼 푸른 종이가 헌병대 게시판에 붙어 있다는 말만이라도 남편한테 알리지 않고는 배겨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온이 강아지처럼 바짝 말랐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가슴아파할 테니. 그렇지만 헌병 놈이 이온을 유대인이라고 고집하더라는 것만은 이야기 해 줘야지.'
"여보 얀쿠, 눈을 떠 봐요! 낮에 그렇게 자면 밤에 못 잘 텐데!"
아리스티샤는 남편을 깨울 생각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여전히 벽 쪽으로 돌아누워 대답이 없었다. 노인은 아리스티샤가 깨울 때 자는 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목을 길게 빼고 벽 쪽으로 향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지 않고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기가 싫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리스티샤는 자기가 때때로 남편에게 귀찮은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귀찮아도 자기는 남편의 마누라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얀쿠! 헌병 놈이 글쎄 당신을 유대인이라고 하더군요. 정신 나간 놈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내가 한바탕 해 주고 왔으니 걱정 말아요."
노인은 입을 약간 벌리고 있어 빙긋이 웃는 것 같았다. 아리스티샤는 자는 체하고 흉물을 떨고 있는 남편에게 충분히 익숙해 있는 듯 자기 쪽에서도 빙긋이 웃어 주었다. 35년 동안 같이 살면서 둘은 말다툼도 많이 했지만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악을 쓰며 대든 것도 남편이 너무나 순하고 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다. 아리스티샤는 정성껏 남편을 받들었다.
"얀쿠, 내일 아침에도 차도가 없으면 시내에 가서 의사를 불러 와야겠어요. 돼지 한 마리를 팔면 치료비는 될 거예요. 돼지야 다시사면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병부터 얼른 나아야지요."
노인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눈 좀 떠 봐요, 여보. 담배 한 대 드릴 테니. 당신 주려고 한 대 숨겨 둔 게 있다오."
그녀는 선반 위에 숨겨 놓았던 담배를 꺼냈다.
"당신 머리맡에 성냥이 있죠?"
그녀는 담배를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서면 물었다. 그 옛날 신혼 당시에 아침마다 그랬던 것처럼 자기 손으로 남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럴 때 아무리 잠이 덜 깨었어도 담배 냄새를 맡고 입술이라도 벌린다는 걸 아리스티샤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퉁퉁 부은 노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스티샤가 담배를 입에 갖다 대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생물과도 같아서 아리스티샤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웬일이세요, 얀쿠?"
노파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만졌다. 순간 싸늘한 감촉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일시에 전달되었다. 노파는 남편의 어깨를 끌어당겨 반듯이 뉘었다. 이마를 짚어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노인은 죽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기급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다가 돌아서서 죽은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던 것이다. 그녀는 조금 전에 남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려던 성냥을 그어 초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촛불을 베개 맡에 갖다 놓고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리 큰소리로 울부짖어도 거기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9
아리스티샤는 눈물이 마르도록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쉬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로 그녀는 계속 통곡했다. 이제 그녀는 죽은 사람 곁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래도 슬픔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마저 지쳐 버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리스티샤는 그때야 비로소 자기만이 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래도 울고 있는 동안엔 누군가가 자기 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왠지 억울해서 다시 울어보려 했지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다. 방안이 어두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에 불을 켰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 위에 물을 올리고 저녁 준비를 했다. 창문의 커튼도 내렸다.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앉아 있으려니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현기증이 나고 피곤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스티샤는 죽은 남편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밤부터 남편이 묻힐 때까지 계속 사흘 밤을 죽은 남편 곁에서 잤다. 소장의 말이 생각났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그녀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팔짱을 끼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난감했다. 물을 끓이고는 있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침대는 엉망이었으나 거기 누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슬픔과 고독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노파를 이끌어갈 것 같았다. 아주 망연해진 상태에서 노파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몸을 움직여도 외로운 감정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공연히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헌병이 다시 뭐라고 뇌까리는 것 같았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아리스티샤는 죽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이불을 들쳤다. 시체는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셔츠와 팬티를 훑어보았다. 올이 굵은 천으로 만든 팬티, 자기가 수십 번 빨고 다려 입혀 온 것이었다. 그녀는 팬티의 끈을 풀고 무릎 아래로 끌어내렸다. 시체의 빛깔은 보랏빛이었다.
"부끄러울 게 뭐람! 한평생 같이 산 내 남편인데!"
아리스티샤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둘이 한참 젊었던 그 시절에 남편이 알몸으로 자기 곁에 누웠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싱싱하던 육체는 지금 보랏빛이 되어 있었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아리스티샤의 귓전에 헌병의 말이 들려왔다. 그녀는 손을 배꼽 아래로 가져가 더듬어 내려갔다. 거기도 눈까풀이나 코나 입술처럼 보랏빛이었다. 차갑기도 했다. 아리스티샤는 순간 기겁을 하고 손을 거두었다. 급히 팬티를 올리고 이불을 덮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성호를 그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느님, 마침 그때 제 손을 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또 한 번 성호를 그었다.
"하마터면 저는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질 뻔했습니다. 큰 죄를 지을 뻔했지요. 하지만 전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분이 유대인이건 아니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니까요."
아리스티샤는 죽은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용서하세요, 여보.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않았고요. 얀쿠,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내가 그런 죄를 지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예요. 헌병과 관리 놈들이 내 머릿속에 죄를 넣어 준 거예요. 그 놈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어 불에 태워 죽여야 해요."
아리스티샤는 훌쩍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90
사병 요한 모리츠는 5명의 포로를 거느리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침 7시였다. 그의 집 앞을 지날 때 힐다가 아들 프란츠를 안고 창가에 서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힐다가 아이에게 하는 말소리가 요한에게까지 들렸다.
"저기 아버지 봐라. 철모를 쓰고 총을 메셨네!"
프란츠는 생후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총을 메고 포로들을 호송하는 군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 턱이 없다. 그런데도 힐다는 매일 아침 똑같은 광경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아이도 군인의 자식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 모리츠는 포로들을 호송하면서도 생각은 어린 자식과 힐다에게 가 있었다. 포로들은 거리를 빠져 나와서 목장을 지나갔다. 요한은 총을 어깨에 메고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강가의 다리 밑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들의 일터였다. 강물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강바닥에 이르자 포로들이 요한을 돌아보며 지껄였다. 여기까지 오면 아무도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살베 스크라베! 잘 잤나?"
포로 한 사람이 다정스럽게 요한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조세프였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다른 포로들과도 악수를 하고 총을 바윗돌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그러고 외투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 다섯 갑을 꺼냈다.
"아직도 자네 돈이 15마르크 남아 있어."
요한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세프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비누는 사지 못했어. 내일 가지고 오도록 해 보겠네."
그는 또 옆구리에 달린 자루같이 생긴 가방에서 빵을 한 덩이 꺼내어 조세프에게 주었다. 포로들은 땅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요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리 밑에서 작업을 시작한 후로 그들은 매일 아침 이렇게 반시간쯤 요한과 함께 웃고 떠들고 쉬었다. 그러고 나서는 점심때까지 일을 했다. 이 시간이 포로들이나 요한에게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주소로 프랑스에서 오는 그들의 편지를 전해 주기도 하고 담배나 빵, 그 밖의 그들이 바라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시내에서 사다 주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끝나면 일을 시작했다.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로들을 도왔다.
그는 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포로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불쌍한 포로들을 돕는 것이 즐거웠다. 5명의 포로들은 모두 육체노동하고는 거리가 먼 지식 계급 출신들이어서 이런 일에는 아주 서툴렀다. 요한은 그들에게 삽 쓰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이런 일에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장, 우리는 탈출할 생각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우리 다섯 사람 모두 탈출 할 작정이야."
요한과 단둘이 있게 되자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은 조세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자네들에게 뭘 잘못했나? 난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의를 다했어. 자네들은 내가 평생을 감옥에서 썩었으면 좋겠나 보군?"
하고 요한은 말했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네들이 탈출하는 것을 봐도 내가 총을 쏘지 못하리라는 걸 자네도 알 걸세. 난 자네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총을 쏘지 않으면 내가 대신 감옥살이를 해야 해. 나는 지금 자네의 말이 농담이기를 바라네."
"아냐, 농담이 아니야. 우린 꼭 탈출해야겠어. 그리고 자네도 감금되지 않는 방법이 있어."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네 명의 다른 포로들은 이쪽의 심각한 대화에 짐짓 관심이 없는 체 하고 그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대로 돌아가면 내 책임 부서를 바꿔 달라고 하겠네. 내일부터는 자네들을 만나지 않을 거야. 나는 자네들이 탈출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난 남을 죽이기도 싫고 또 나 자신이 감옥살이를 하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직 한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네. 그러니 내가 자네들에게 총을 겨누게 되기 전에 딴 곳으로 가겠다는 거야. 여하간 내일부터 난 자네들과 같이 오지 않겠어. 나와 같이 있지 않을 때 탈출하려거든 하라고. 자네들 마음대로 말이야."
"자넨 우리 계획을 왜 좀 더 들어보려 하지 않지?"
조세프가 말했다.
"자네도 우리와 같이 탈출하는 거야"
"난 탈출할 이유가 없어! 내겐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어. 그리고 난 포로가 아냐. 지금 내가 포로라면 탈출할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지금의 내 자유를 스스로 그르치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아. 자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로나 다름이 없어, 장. 단지 자네는 어깨에 총을 멘 포로고 우리들은 총이 없는 포로라는 것뿐이야. 이 점만 다를 뿐 우린 똑같아. 그러니 자네도 우리와 같이 탈출하자는 걸세."
"내일 아침부터는 절대로 자네들과 같이 오지 않겠네."
요한은 이렇게 말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개졌다.
"이봐 친구, 우린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자네가 그 돌격대의 군복을 입은 채 연합군에게 붙잡히면 이번엔 자네가 처벌을 받을 거라는 걸 모르겠나? 그렇게 되면 자네는 10년이나 20년은 감옥살이을 해야 해."
조세프가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말게. 연합군이 온다 해도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하등의 이유가 없네. 난 아무에게도 나쁜 짓을 안 했는걸. 라디오에서도 연합군은 공정하다던데 뭘."
요한이 말했다.
"그러나 장, 자네는 연합군의 적이야. 그것은 자네가 입고 있는 그 군복이 말해주지. 자네는 나의 조국 프랑스와 또 모든 연합군의 적이란 말일세."
"내가 프랑스의 적이라고? 나는 자네들에게 빵과 담배, 그리고 자네들이 원하는 걸 전부 사다 주었어. 그것이 프랑스의 적이어서 그랬다던가?"
요한 모리츠는 화가 치밀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졌다.
"자네들이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줄은 정말 몰랐어. 난 자네들을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네는 독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히틀러의 군인이야. 그걸 잊어서는 안 되네. 자네와 우리가 친하게 지내 온건 우리들끼리의 문제야. 그 관계를 떠나서 생각하면 자네는 우리의 적일 수밖에 없어."
"내가 맥주라도 한 병 생기면 독일 사람들과 같이 마시던가, 아니면 자네들과 함께 마시든가? 내가 부대에서 마시던가, 아니면 여기 이 다리 밑에 와서 자네들과 마시든가?"
요한은 골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대답 좀 해 봐, 조세프. 내가 지금 누구와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지? 내 가슴속에 있는 말을 누구한테 지껄이던가 말이야? 그 자들한테든가, 아니면 자네들한테든가? 난 부대에서도 그들과 말 한마디 주고받은 적이 없어. 내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곤 자네들뿐이야. 그건 내가 자네들 친구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네들은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독일 사람들 편이라고 자네가 방금 말했으니 말인데, 내가 독일 사람들과 친하게 얘기하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난 옛날에도 자네들 편이었고 지금도 오직 자네들 편이야!"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요한의 손은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네는 연합군이 나를 10년이나 징역살이를 시킬 거라고 했지? 나를 집어넣는 건 결국 프랑스 사람들이겠지. 그렇지?"
"그래. 만일 프랑스군이 들어오면 그들은 자네를 감옥에 집어놓을 거야."
조세프가 대답했다. 조세프는 이런 요한을 열심히 달래야 했다. 그는 자기의 진심을 요한에게 충분히 전달시키고 냉정한 판단으로 그가 자신들과 함께 행동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맘대로 하라지! 그렇다면 이 세상엔 정의라는 건 사라지고 없는 거야.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 자들이 와서 나를 총살한다 해도 난 미련이 없어. 자네들까지도 날 적으로 생각하는 판국에 내가 더 살아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나? 난 내일부터 이 다리 밑에 자네들과 함께 오지 않겠어. 탈출하고 싶거든 맘대로 해. 난 참견하지 않을 테니. 자네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거나 자네들을 체포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내 생명이 위협받는 일없이 자네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말이야. 도망치려는 포로를 도와서 탈출 시킨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난 자네들과 함께 탈출할 생각은 없어. 자네들 때문에 여생을 옥살이로 허송할 수야 없지."
"장, 제발 내 말 좀 들어보게. 문제는 탈출에만 있는 게 아냐. 우리들이 자네를 구해 주겠다는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우정에서 하는 말이야. 우린 자네를 프랑스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말일세."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는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몇 달 후엔 반드시 연합군이 들어오게 돼 있어. 그때 우리들이 자네 아내와 자식을 프랑스로 데려다 줄게. 나는 파리 교외에 농장을 가지고 있어. 자넨 거기서 살면 되잖아? 자네는 농사꾼 아냐. 농장을 일구어서 돈을 벌면 다음엔 땅도 사고 집도 지을 수 있지. 프랑스는 아름답고 인심도 좋은 나라야. 종전 후 패전국 독일에서 자넨 뭘 하겠다는 거지? 그러니 우리들과 함께 탈출하도록 하세."
"그럴 수는 없어. 난 안 가겠네."
요한이 말했다.
"우리가 자네 아내를 프랑스로 데려갈 때까지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남겨 두고 가겠네. 그녀를 위해 우리가 5천 마르크를 준비해 두었어. 몇 달 후엔 우리가 돌아와서 자네 아내를 데리고 갈 테니까 그 동안만 참으면 되는 거야. 만일 자네가 다섯 명의 프랑스 인 포로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프랑스는 자네에게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걸세. 어때 같이 가지 않겠나?"
요한 모리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 가서 소유하게 될 농장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사게 될 토지와 짓게 될 집과 그리고 힐다와 프란츠와 함께 살아갈 그 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또 아이들이 생기겠지. 계집애를 하나 낳으면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아리스티샤라고 지어야지.'
요한은 미래를 상상해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요한은 침울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탈출할 수 없어!"
그러나 요한의 말은 완강하지 못했다.
91
외출복 차림을 한 힐다가 대문까지 나와 요한을 맞았다. 영화 구경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요한은 자기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최근 전선의 전투 상황을 찍은 뉴스뿐이었다. 부서진 탱크, 타 버린 집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지도였다. 전선은 독일 국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요한은 말할 기력을 잃었다. 힐다는 요한의 우울을 막연히 이해하려 했다. 그런 힐다가 요한은 고마웠다. 자리에 들기 전에 요한은 요람에 누워 잠이 든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힐다와 함께 어린애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며 안식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힐다, 만일 독일이 항복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요한이 물었다.
"독일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아요!"
힐다의 자신만만한 대답이었다. 요한은 영화에 나온 전선의 전투 장면과 지도와 조세프와 그리고 요람 속의 아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힐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 지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난 포로가 되겠지. 그러면 당신과 아기는 어떻게 살아가지?"
"이기든가 아니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든가 둘 중의 하나예요. 독일 국민은 한 사람도 점령당한 독일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일 죽지 못하는 경우엔?"
요한이 물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단 말이에요!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어요."
힐다가 대답했다.
"그건 남자들이 할 일이고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오?"
"여자도 다를 것 없어요 만일 우리 독일이 전쟁에 진다면 나는 프란츠와 함께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전 하루도 살수가 없어요. 하지만 독일은 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 항복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이젠 그만 주무세요."
힐다는 모로 누우면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요한은 힐다와 프란츠를 생각했다. 그들은 요한과 공동의 운명이다 자기는 그들의 가장이다. 요한은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밤새 그는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하고 탱크가 자기 집 앞까지 다가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힐다가 총을 들고 요람 속에 있는 프란츠를 쏘아 죽이고 나서 자신도 자살하는 광경도 보였다. 요한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눈을 떴다.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창이 훤히 밝아 있었다. 힐다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요한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 나와 옷을 갈아입고 부대로 갔다. 요한은 어제 마음먹었던 책임 부서 변경을 상관에게 신청하지 않았다. 조세프와 다른 포로들은 그가 나타나자 아무 말도 않았으나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요한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리 밑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세프가
"살베 스크라베! 잘잤나?"
하고 소리쳤다. 순간 요한 모리츠의 뇌리에는 어젯밤에 꾼 여러 가지 꿈, 특히 힐다가 프란츠를 죽이고 자살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조세프, 만약 독일군이 항복하면 자넨 틀림없이 내 아내와 자식을 프랑스로 데려다 주겠나?"
요한이 물었다.
"물론 연합군이 들어오는 길로 우리가 달려와서 파리로 데려다 주겠네. 하느님께 맹세하겠네."
요한 모리츠는 총을 옆에 놓고 어제 영화관에서 돌아와 힐다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자네들이 늦게 도착해서 내 처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후라면 어떡하지?"
포로들은 연합군 선봉 부대와 함께 진격해 올 것을 약속했다. 요한의 두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글썽했다.
"자네들이 그 약속만 지켜 준다면 난 자네들과 같이 가겠네. 언제 탈출 하게나?"
"내일 아침에. 다른 날처럼 일하러 나와서 수용소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지금 자네는 프랑스를 위해서 영웅적인 결단을 내린 걸세. 프랑스 정부는 반드시 자네에게 훈장을 줄 거야."
조세프가 말했다.
"그런 말하지 말게. 자는 절대로 프랑스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요한은 말했다.
"난 힐다를 잘 알거든. 그 여자는 자기가 말한 건 꼭 실행하는 성미야. 만일 우리가 제때에 오지 않을 때엔 어린애를 안고 틀림없이 자살하고 말 거야. 그녀는 바윗덩어리처럼 고집이 세니까. 자넨 재가 프랑스를 위해 탈출한다고 생각하나? 자넨 배운 것도 많고 책도 많이 읽었으니 모든 걸 잘 알겠지. 난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나와 프랑스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네. 내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그들의 목숨을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난 단지 그들을 위해서 자네들과 함께 탈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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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얀 코르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아버지, 외교관 통신을 통해 몇 가지 적습니다. 이 편지 받으시고 즉시 회답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신변에 혹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요. 공연한 기우라고 웃어 버리셔도 좋고 신경 과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단 곧 회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이니까요. 제 소설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제 4장을 쓰고 있는데, 하얀 토끼가 죽은 지 세 시간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각에 전 세계의 기계노예는 자기들이 가는 길 위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하고, 빛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죽음을 두고 암흑 속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드라이얀 코르가 드림
1944년 8월 20일 달마티아 라구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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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가 사제는 드라이얀의 편지를 읽고 나서 곧 편을 들었다. 부부가 다 건강하고 판타나 마을도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요한 모리츠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걱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제가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고 있는데 조르주 다미앵 검사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사제의 집에서 이틀 정도 머무르다 갈 생각으로 온 것이다. 그는 거의 주말마다 이곳에 오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얀은 여기 일이 몹시 걱정되는 모양이야."
사제는 조금 전에 받아 본 편지를 검사에게 보여 주었다. 검사는 미소를 띤 표정으로 드라이얀의 편지를 읽었다.
"드라이얀은 시인입니다. 언제나 과장하는 버릇이 있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과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을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편 마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제가 유체부에게 편지를 부탁하자 우체부는 받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외국으로 가는 편지는 이제 받지 않습니다. 루마니아는 오늘 오후 6시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러시아 군에게 정복당했다고 국왕 폐하께서 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셨습니다!"
코르가 사제는 할 수 없이 편지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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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마을의 농부들은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관 안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제의 의견을 들으러 온 것이다. 농부들은 사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을에 퍼져 있는 불길한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러시아 군이 벌써 이웃 마을에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은 시골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남자들은 거리에서 마구 총살되었다는 무시무시한 행패의 소문이 파다했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가 발코니에 나타났다. 농부들은 근심에 싸여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외국인이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인인 까닭에 지급까지 우리를 지배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트교인들은 그 무엇이든 지상의 완전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국은 오직 하나, 천국뿐입니다."
사제가 농부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숲 속으로 들어가 숨어야 할까요? 아니면 점령군과 계속 싸워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젊은 농부가 물었다.
"교회는 크리스트교인에게 지상의 권력을 정복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쇠사슬로 묶어 달라고 스스로 손을 내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회는 우리들의 아내가 욕을 당하고 우리들의 집이 불살라지는 데도 팔짱 끼고 보고만 있으라는 건 설마 아니겠지요? 이럴 때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회라면 우린 지금부터라도 교회와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농부의 주장에 다른 농부들도 찬성했다. 코르가 사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모든 통치에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루마니아는 지금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에게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도 역시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에게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도 역시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이었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뒤 유대에서는 헤롯왕의 명령으로 수천 명의 어린애들의 목이 잘렸다는 걸 상기해 보십시오. 그 통치는 정말 잔인했습니다. 아마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만큼 잔인무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항하지 않으셨으며 누구에게 대항하라고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신부님, 신부님은 스탈린을 위해서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아까의 젊은 농부가 물었다.
"가령 신부님이 스탈린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면 그건 크리스트 인의 적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가 스탈린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지금까지 내가 국왕을 위해 기도해 온 것같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스탈린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가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벗어나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사제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더욱이 죄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사제에게 맡겨진 의무입니다."
"신부님은 스탈린을 위해 기도를 하세요. 그러나 우리들은 두 번 다시 교회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젊은 농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이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서, 또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숲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면 신부님은 주일마다 교회에서 우리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 주시겠습니까?"
"숲 속이건 산 속이건 나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 지간에 하느님의 보호를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하루에 두 차례씩 기도를 드릴 겁니다. 싸우는 사람들의 생명은 늘 위험 속에 빠져 있으므로, 사제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군중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날이면 신부님은 총살될 겁니다."
바실 아포스톨이 말했다.
"우리 크리스트 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뒤에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드리는 기도를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도 그 기도를 중단시키지는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숲 속으로 가겠습니다. 신부님은 출발하기 전에 우릴 위해 축복해 주시고 성령이 늘 우리와 함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싸우러 갑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인 조국 루마니아를 위해 싸우려는 겁니다."
바실 아포스톨이 말했다. 바실 아포스톨은 농부들을 몇 개의 편대로 나누었다. 대부분이 숲 속으로 피난 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마을에서도 으뜸가는 늠름한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여자들도 끼여 있었고, 아직 학교에 다니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안마당 잔디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코르가 사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나서 마당으로 내려가 한 사람 한사람 축복해 주었다.
"저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조르주 다미앵 검사가 말했다. 그는 사제 앞에 꿇어앉았다.
"저도 저 사람들과 같이 숲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울 생각입니다."
"교회는 축복을 원하는 사람에겐 누구를 막론하고 축복을 베풀어준다네."
하고 사제가 말했다.
"악한 행위를 범하려는 자에게도 축복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부님은 우리의 동기가 정당 한 것임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검사가 물었다.
"자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게, 다미앵! 자네의 행동이 진실한 마음의 충동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옳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니까."
조르주 다미앵 검사는 농부들이 한 것처럼 알렉산드를 코르가 사제의 손에 입을 맞추고 숲을 향해 떠나는 농부들과 함께 마당에서 나갔다. 방안에서는 사제의 아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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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이 마을을 떠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사제는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 때 이 마을 사람이 아닌 낯선 농부 두 사람이 노크도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왔다. 그들은 삼색 완장을 두르고 권총을 들고 있었다. 사제는 무기를 못 본 체하고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면사무소에서 나를 부르는 모양이군요."
사제는 옆방에 있는 아내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내에게 공포감을 주기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당신을 인민재판에 회부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한 농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제는 아내가 있는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며 사제는 책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을 나오기 전에 그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고 작별의 눈길을 던졌다. 두 농부는 사제의 양쪽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사제는 태연히 머리를 치켜들고 대문을 나섰다. 얼핏 보면 연행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사제는 태연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나 면사무소까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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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 의장은 마르크 골덴베르크였다. 그는 면사무소의 회의실, 그전 면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죄수처럼 빡빡 깎은 머리였다. 렌겔 노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이던 그를 며칠 전에 소련군이 석방시켜 준 것이다. 골덴베르크의 오른쪽에는 요한 모리츠의 어머니인 아리스티샤가 앉아 있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판타나에서 '제일 가난한 인민'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재판관으로 선정한 것이다. 왼쪽에는 몇 년 전에 도끼로 헌병을 죽였다는 이유로 재판관이 된 이온 칼루가루가 앉아 있었다.
코르가 사제는 세 명의 재판관에게 인사를 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사제를 빤해 쳐다볼 뿐 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아리스티샤의 칼루가루는 눈을 내리깔고 사제를 못 본 체했다. 그들은 사제가 오기 전에 이미 여러 사람을 재판하고 난 뒤였다. 면사무소의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세 명의 판사들과 삼색 완장을 두른 농부 두 사람뿐이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사제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을 물었다.
"사제란 직업이 아니오!"
골덴베르크가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구두장이는 구두를 만들고, 재단사는 옷을 만드오. 모든 노동자는 무언가 만들어 내고 있소. 그런데 사제가 만들어 내는 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아리스티샤와 칼루가루는 여전히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완장을 두른 두 농부는 사제 뒤에서 웃었다.
"당신은 아무 직업도 가지지 않았소! 아무 직업도 갖지 않았다는 건 하나의 죄악이오."
이렇게 말하는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얼굴은 레몬처럼 노랬다. 그의 얇은 입술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사제는 마르크의 아버지인 골덴베르크 영감의 입술도 저와 똑같이 얇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 영감의 입술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크의 입술은 긴장되어 있었다.
"어째서 인민 법정에 불려 나왔는지 그 이유를 아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물었다.
"모르겠소."
사제가 대답했다.
"반동분자의 전형적인 대답이군!"
마르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반동분자들은 늘 무엇 때문에 자기가 신판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잡아뗀단 말이야. 당신은 산으로 달아난 파시스트 도당을 조직한 사실을 인정하오?"
마르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도당을 조직한 일이 없소. 다만 마을의 젊은이들을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 집 뜰에서 기도를 드린 사실만은 인정하오."
"그러면 그 자들이 파시스트 도당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그 노상강도들의 고해 신부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 놈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느냐 말이오!"
"내가 기도를 드려 준 그 젊은이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돕고, 그들을 진리와 정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성모 마리아께 빌었던 거요."
하고 사제가 말했다.
"인민재판은 네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너는 공공질서를 문란케 하는 반란군을 조직했으므로 죄가 있다고 인정한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이렇게 말하자, 아리스티샤와 이온 칼루가루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마르크를 쳐다보았다. 골덴베르크는 서류에 무엇인가를 기재하느라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리스티샤와 이온 칼루가루는 사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코르가 사제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 새벽에 인민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한다!"
마르크가 말했다. 인민재판은 이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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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가 사제는 삼색 완장을 두른 농부 두 사람에게 끌려 면사무소의 마구간에 감금되었다. 그 속엔 숲으로 떠났던 조르주 다미앵이 숲에 이르기도 전에 붙잡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판타나 헌병 파견소 소장과 바실 아포스톨과 마을에서 부유한 여덟 명의 농부가 함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인민 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고 내일 새벽에 집행 당할 예정이었다. 마르크는 인민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한밤중에 한 명씩 끌려 나가 총살을 당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붉은 군대에 대한 집단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개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손으로 한 사람씩 목덜미에 총을 한 방씩 쏘아 처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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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지났을 때 아리스티샤는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요한 모리츠의 아내 스잔나였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아리스티샤는 러시아 군이 마을로 들어와 스잔나를 욕보인 거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소련군 선발대가 마을에 쳐들어오면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인민재판의 판사로 있는 자기의 며느리가 제일 먼저 그런 변을 당했다면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리스티샤는 문을 열고 물었다.
"코르가 신부님이 총살당하셨어요!"
스잔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내일 새벽에 교수형을 집행한다고 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신부님을 죽이진 못할 거야. 나도 마을의 판사야. 골덴베르크 혼자서 형을 집행하진 못해. 내일 아침에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심사를 해 보고 신부님을 석방시킬 생각이야. 칼루가루에게도 그 얘기를 했어. 그러니 신부 부인에게 가서 아무 걱정 말고 주무시라고 말씀드려라."
아리스티샤는 낙관적이었다.
"코르가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총살당하는 걸 보고 온 사람들이 저에게 알려 주었어요."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그녀는 스잔나와 같이 면사무소로 향했다. 그녀는 잠옷 바람이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두 여자는 말없이 길 한복판을 걸어갔다. 스잔나는 소리 없이 울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스잔나가 자꾸 뒤로 처지자 아리스티샤는 급한 성미에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다가 여러 번 며느리를 돌아보고 야단을 쳤다.
"넌 졸면서 걷는 거냐? 네 몸 속에 흐르는 건 피냐, 아니면 젖이냐?"
스잔나는 빨리 가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는걸 뭐. 누구도 이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단 말이야.'
면사무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구간으로 가 보자! 나는 재판관이니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어 보고 알권리가 있어."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마구간 속은 캄캄했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빗장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다 아리스티샤는 겁이 났다.
"성냥 안 가졌니?"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에게 물었다.
"없어요, 어머님."
"네가 뭘 가져 본 적이 있니? 시집올 때도 넌 빈손으로 왔으니까. 내 아들 같은 얼간이에게 걸렸기에 그런 빈털터리로 올 수 있었지 뭐냐!"
아리스티샤는 역정을 내며 말했다. 스잔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리스티샤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리스티샤는 사제의 죽음을 확인함에 있어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애꿎은 역정을 냄으로써 조금은 지연시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안에 누구 없소?"
아리스티샤가 외쳤다. 그녀는 마구간 문 앞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어머니. 마르크가 마구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어 거름구덩이 옆에서 총살해 버렸대요."
스잔나가 말했다.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 마! 아무러면 판사에게 통고도 없이 어떻게 형을 집행한 단 말이냐?"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스잔나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두 여자는 마당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총살당한 시체를 눈으로 찾아보았다.
"마당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봐라. 네가 꿈을 꾸었다고. 아마 다른 곳에 감금시켜 놓았겠지. 그런 걸 마을의 반동분자들이 마르크가 그들을 총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노파는 여전히 사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스잔나는 아리스티샤에게서 떨어져 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거름 구덩이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르가 사제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다. 총살하는 광경을 본 농부들이 마을에 퍼뜨린 이야기로는,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마구간에 있던 포로들을 한 사람씩 끌어내어 손목을 묶어 놓고 등 뒤에서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골덴베르크를 만나러 가자."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그때 스잔나가 비명을 지르며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리스티샤는 화가 벌컥 치밀어 스잔나에게 달려가
"바보 같으니라고! 또 뭐냐? 네 그림자와 부딪치기라도 했단 말이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말소리는 목구멍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스잔나가 쓰러져 있는 옆의 거름 구덩이를 따라 시체들이 즐비하게 나동그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티샤의 눈에 제일 먼저 스잔나의 발치께에 놓여 있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의 시체가 보였다. 거기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검정 옷을 입은 시체가 또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많은 시체가 그 근처에 잔뜩 널려 있었다.
"하느님!"
아리스티샤는 용기를 내기 위해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일어나라. 네가 도와야겠다."
그녀는 이렇게 명령조로 말했다. 시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만은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스잔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손을 잡았다. 두 여인은 몸을 구부리고서 시체를 하나하나 바로 뉘어 놓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체 아홉이 거름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었고, 셋은 구덩이 속에 빠져 있었다. 아리스키샤는 그중 한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그전 동장인 니콜라이 슈보타루 영감이야!"
그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슈보타루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그러고는 곧 일어서며 말했다.
"죽었구나!"
그리고 또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허리를 굽히고 또 다른 시체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몸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 심장이 멎었군. 이 사람은 콘스탄틴 솔로몬이야. 하느님, 이 영감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젊었을 때 내게 청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공연히 또 스잔나에게 역정을 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너도 좀 살펴보려무나! 바보같이 왜 아까부터 훌쩍거리기만 하는 거냐."
"전 못 하겠어요, 어머니. 무서워요."
"무섭기는 뭐가 무섭단 말이냐?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에다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지 들어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하느님에게 ' 이 영혼을 받아 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성호를 그으란 말이야. 알아들었냐?"
"네, 어머니. 그러나 무서워서.........."
스잔나가 이렇게 말하자 아리스티샤는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고! 너같이 못난 것을 데려온 그 녀석도 한심하지."
아리스티샤는 핀잔을 주고 또다시 시체를 살폈다.
"이사람은 가끔 코르가 신부님 댁에 오던 젊은 검사로구나. 드라이얀의 친구였지. 참 훌륭한 청년이었는데."
아리스티샤는 웃저고리를 헤치고 귀를 갖다 대고 한참 있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하느님, 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이 사람도 역시 죽었구나. 이 불쌍한 사람에게도 집에서 기다리는 처자가 있을 텐데."
다시 시체 곁으로 갔을 때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듯 했다. 드디어 코르가 사제의 시체를 찾은 것이다. 노파는 존경심과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사제복을 헤치고 귀를 대고 듣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얘야, 신부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
예측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스잔나는 사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니 너 정신이 돌았니? 신부님이 살아 계시다는데 기뻐하진 않고 왜 더 크게 울지? 얼마나 정확하게 심장이 뛰는지 가까이 와서 들어보렴."
스잔나는 무릎을 꿇었으나 감히 가슴에 귀를 대지 못하고 주저했다. 아리스티샤는 두 손으로 사제의 손을 움켜잡고 말했다.
"아직 온기가 있구나. 얘야, 네가 좀 만져 봐."
아리스티샤의 귀와 눈과 손은 사제의 체내에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지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손과 뺨의 온기와 심장의 고동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리스티샤의 감각으로는 그 이상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군. 가느다란 심장의 고동과 몸에 약간 남아 있는 온기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리스티샤는 그 고동과 온기가 너무도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명이 이 정도의 것이라면 정말 산다는 것이 허망하구나."
하고 그녀는 말했다. 주위는 무서운 정적에 싸여 있었다.
"신부님한테서는 향기로운 박하 냄새와 향냄새가 나는구나. 신부님 몸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 때문에 마치 교회에 온 것 같구나. 정말 교회에 온 것 같아."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사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즉시 죽지 않고 오랫동안 풀 위에서 꿈틀대며 괴로워했던 흔적이 시체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은 시체들은 돌처럼 차가웠다. 그들은 총알이 체내에 들어가자마자 숨진 사람들이었다. 아리스티샤는 치맛자락으로 연거푸 두 손을 문질러 댔다. 똑같은 동작을 무의식중에 반복하는 동안 노파는 자기의 무릎에 피가 잔뜩 묻어 있음을 알았다.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군. 내 손과 발을 저들이 흘린 피 가운데 들여놓다니. 죽은 사람의 피를 밟는 것은 큰 죄악인데......... 하지만 어두워서 그랬으니까 하느님도 용서해 주시겠지."
아리스티샤가 거름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다른 시체들을 살펴보는 동안 스잔나는 사제의 얼굴을 정성껏 닦고 있었다.
"상처는 어디냐?"
아리스티샤가 거름 구덩이에서 나와 다시 치맛자락에 손을 문지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어머니."
"넌 아는 게 하나도 없지. 너는 도대체 변변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어. 상처를 찾아서 피를 멎게 해야잖니. 그렇지 않으면 출혈이 심해서 생명을 건지기가 어려워지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아리스티샤는 피가 가장 많이 밴 곳을 손으로 더듬어 상처를 찾아냈다. 사제는 오른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피에 온통 젖어 있었다.
"상처를 싸맬 헝겊을 빨리 가져와!"
아리스티샤는 명령조로 말했다. 스잔나는 어디서 헝겊을 가져와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노파는 못 참겠다는 듯이 속옷이라도 찢으려고 치마를 걷어올 렸다. 그러나 손으로 살과 옷 사이를 아무리 더듬어도 속옷은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께 까지 치마를 치켜 올렸다.
"빌어먹을! 속치마는 대체 어디로 갔담!"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급하게 오느라고 속옷 입는 것도 잊었던 것이 생각났다.
"쯧쯧, 속치마를 빠뜨렸군!"
아리스티샤는 사제의 윗몸을 안아 일으켜 사제복을 벗기고 상처 입은 어깨를 들추어냈다.
"네 속옷을 벗어 줘, 스잔나!"
아리스티샤는 연거푸 상처의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신부님 몸에서 나는 박하 냄새와 향냄새가 정말 향긋하구나. 신부님의 몸이 어쩌면 꼭 교회 같으냐?"
아리스티샤는 감탄하며 스잔나를 돌아보았다. 스잔나는 겉옷을 벗고 나서 속옷을 벗고 있었다. 스잔나의 벌거벗은 알몸이 드러나자 노파는 노발대발했다.
"너 정신 나갔니! 신부님과 이 많은 남자들 시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벌거벗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구나!"
하고 아리스티샤는 소리를 질렀다.
"속옷을 벗으려면 어쩔 수 없어요."
스잔나가 대꾸했다.
"천한 계집같으니! 신부님과 시체들 앞에서 알몸뚱이를 내놓다니........."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변명을 못 들은 척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99
아리스티샤와 스잔나는 옥수수 밭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제의 몸을 풀밭에 뉘었다. 두 여자는 사제를 홑이불로 싸안듯이 그의 사제복으로 싸 가지고 마구간에서 여기까지 옮겨 온 것이다. 처음엔 앞뒤에서 사제복의 한쪽 끝을 잡고 마치 들것으로 운반하듯 옮겼다. 그러나 어찌 무거운지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걸음을 멈추고 쉴 때마다 아리스티샤는 허리를 굽혀 사제의 심장이 뛰는가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그러고는 또 걷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들것처럼 들고 걸을 수가 없어 사제복으로 싸서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아무쪼록 신부님이 도중에 돌아가시지 않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빨리 가자. 쉬느라고 너무 시간을 허비했어. 우린 내일이고 모레고 얼마든지 쉴 수 있을 테니 부지런히 움직이자."
아리스티사는 사제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 옮겨다 놓기가 무서웠다. 공산주의자들이 와서 찾아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만일 들키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한 번은 구해 드릴 수 있겠지만, 두 번째는 꼼짝 못 할 게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차라리 숲 속에 있는 젊은이들한테로 데리고 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어. 그들은 신부님을 간호해서 살려 낼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자들이 숲 속까지 들어가 찾아낼 리는 없으니까."
"그들 중에는 의사도 있어요. 우리가 그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구급약 상자와 붕대도 가지고 갔는데."
스잔나가 말했다.
"그들을 꼭 찾아야 해."
노파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숲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의 희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숲은 너무도 넓었다. 여기서 젊은이들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풀숲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하면 가급적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신부님을 숨겨야겠다. 그렇게라도 해 놓고 난 다음에 생각을 해 보자. 너는 신부님과 숲 속에 남아 있거라. 내가 마을에 다녀오마. 날이 밝기 전에 먹을 것과 물을 가져오겠다. 되도록 상처를 돌봐 줄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올 테니."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100
스잔나는 울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숲 속에 혼자 남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께 마을 젊은이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소리 없이 빌었다.
한 줄기 길이 숲을 따라 뻗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그 길을 건너기 전에 누가 지나치지나 않나 하고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여러 대의 자동차가 오고 있는 소리였다. 자동차는 불을 끄고 조심하느라고 엔진 소리도 낮춰서 은밀히 어둠 속을 지나는 것 같은데, 나직이 죽인 엔진 소리가 마치 말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자동차들은 언덕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 군의 자동차 행렬이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테니까, 우릴 볼 순 없을 거야."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자동차들은 오르막길의 마루턱까지 오자 멈추었다. 엔진 소리가 멈추자 적막이 어두운 공간을 덮었다. 어디선지 귀뚜라미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몇 명의 군인이 자동차에서 내려 나직한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두 여자는 잔뜩 긴장해 숨을 죽였다.
"독일 사람이에요!"
스잔나가 말했다. 아리스티샤도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옥수수 밭에 엎드린 자세로 기어서 그 행렬 가까이로 갔다.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 독일 사람이구나. 신부님의 상처를 좀 봐 달라고 해 보면 어떨까? 저 속엔 반드시 위생병이나 군의관이 있을 텐데.........."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두 여자는 용기를 내어 옥수수 밭에서 기어 나왔다.
"너 혹시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아니? 한마디만 하면 돼."
아리스티샤가 물었다.
"우리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우리를 적인 줄 알고 총을 쏠 거야."
"독일어라곤 한마디도 몰라요. 어쩌면 좋지요?"
스잔나가 미안하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행렬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몸을 붙이고 길 한가운데 나란히 섰다.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넌 나보다 젊으니까 독일어 한마디쯤은 기억할 수 있겠지. 독일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을 게 아니야? 네 아버지도 독일 말을 했지. 잘 생각해봐. 젊었을 땐 기억력도 좋았건만.........."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아요. 루마니아말로 하면 안 될까요?"
"루마니아말로 뭐라고 하겠다는 거냐? 저 사람들이 알아들을 게 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했다가 공산주의자로 오인되면 우리도 거름 구덩이의 그 시체 꼴이 되는 거야."
아리스티샤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 우리 그리스도라고 외쳐 보아요! 독일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트교 신자들이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적어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리스도란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럼 말해 보렴. 독일 사람들이 알아듣기만 한다면 너도 멍텅구리만은 아니라고 해 주지!"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하지만 저 혼자 어떻게 소리를 질러요. 어머니도 함께 해요."
두 여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동시에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낮게 외쳤지만 차츰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누구냐?"
군인의 날카롭고도 강압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여자들은 독일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계속 목소리를 합해 '그리스도!' 하고 외쳤다. 두 명의 군인이 여자들을 향해 걸어왔다. 아리스티샤는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오히려 스잔나가 아리스티샤보다 덜 긴장한 것 같았다. 독일 사람들은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 듣질 못했다. 두 여자는 옥수수 밭으로 가서 코르가 사제를 운반해 와서 길 한복판에 있는 자동차 앞에 놓았다. 독일 사람들은 램프에 불을 켜서 사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신부가 아냐?"
한 장교가 물었다.
"그리스도!"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볼셰비키가 쏘았소?"
하고 장교가 묻자, 아리스티샤는 그 장교가 부상자더러 볼셰비키가 아니냐고 묻는 줄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자신 있는 어조로
"그리스도!"
하고 되풀이했다. 독일군 대열은 후퇴하는 중이었다. 장교는 두 여자에게 사제를 옆으로 치우라고 손짓하고는 출발 명령을 내렸다. 아리스티샤는 장교의 손에 매달리며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고 열심히 간청했다.
자동차에 발동을 거는 소리를 듣자 아리스티샤는 당황했다. 독일 사람들이 출발하기 전에 붕대만이라도 얻어 사제에게 감아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체면을 불구하고 장교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최대의 경의를 표시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신부 살릴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원하는 게 뭐지?"
대열의 지휘관이 물었다.
"아마 시내까지 부상자를 데려다 달라는가 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정교의 신부 같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해 주지 않아! 우리들은 비록 패했지만 그래도 문화 국민이야! 의료 차에다 부상자를 실어. 빨리 싣고 어서 출발해.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아리스티샤와 스잔나는 군인들이 사제를 들것에다 싣고 이불로 덮는 걸 보았다. 이윽고 자동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리스티샤는 자신도 사제 곁에 태워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녀는 아랑곳없이 의료 차의 문을 닫아 버렸다. 자동차 행렬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잔나는 그 행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마치 구원을 청하듯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또 무슨 일이냐? 러시아 사람들이 네 울음소리를 듣고 이리로 달려오면 좋겠느냐?"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벌하실 거예요. 우리는 신부님을 독일 사람에게 넘겨줘선 안 되는 거였어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잖아요."
하고 스잔나가 말했다.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거지 뭐냐. 병원에 가시는 게 숲 속에 계시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텐데 뭐."
그러나 얼마 후에는 아리스티샤도 울기 시작했다. 노파는 아무래도 일을 그렇게 처리해 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던 것이다.
"독일군에게 사제님을 부탁하지 말걸 그랬나 보다! 우리들은 엄청난 죄를 지은거야. 우린 지옥으로 떨어져 불에 타 죽을 거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아무튼 독일 사람들에게 신부님을 넘겨 준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두 여자는 이제라도 쫓아가서 사제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한길은 멀리까지 텅 비어 조용했다. 두 여자는 마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아리스티샤는 면사무소로 붙들려 갔다. 아리스티샤는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고는 거름 구덩이에서 사제를 끌어내어 독일군에게 넘겨주었다고 자백했다. 아리스티샤는 즉시 거름 구덩이 옆에서 총살당했다. 스잔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을을 탈출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부하들이 그녀를 잡으러 갔을 때 요한모리츠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102
"내 생애 최고의 날이야."
조세프가 잠자리에 들면서 말했다. 요한 모리츠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한 프랑스 포로들은 몇 시간 전에 미군 전초선을 통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 모리츠와 조세프는 UNRRA(국제 연합 구제 부흥 사업국) 호텔에 들었다. 호화로운 방에서 그들은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포도주도 마시고 아주 값비싼 담배도 피웠다. 그리고 식량과 옷 등 일용품이 잔뜩 든 상자가 몇 개씩이나 이들에게 안겨졌다. 요한 모리츠는 양탄자 위에 차곡차곡 포개 놓은 상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새옷과 면도기, 구두, 비누, 담배까지 주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요한 모리츠를 보자마자 주었던 것이다. 그는 자랑스러웠다. 요한은 비로소 자기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는 것을 실감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가 한 일이 대수롭지 않다면 미군들이 이렇게 훌륭한 선물을 줄 리가 없지.'
요한은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다. 미군들은 요한에게 이름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프랑스 포로들의 탈출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요한은 추측했다. 미군들은 그가 겪은 고통과 그가 보여 준 용기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모두들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피곤했지만 요한 모리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주위를 자꾸만 둘러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이 자기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의자와 탁자도 양탄자 위의 물건들은 틀림없이 모두 요한 자신의 것이었다. 그가 강제 수용소에서 프랑스 인 다섯명을 탈출시킨 공로에 대한 보상이리라.
"우리들의 탈출은 완전한 것이었어!"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탈출 광경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그는 다섯명의 포로들을 앞세우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힐다는 여느때처럼 어린 것을 안고 창가에 나와
"저기 좀 봐. 총을 메고 군모를 쓴 사람이 바로 네 아빠란다."
하고 말하며 요한에게 손짓을 했다. 요한은 언제나처럼 웃어 보였다. 그들은 길을 따라 걸었지만 다른 날처럼 다리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리를 지나 계속해서 걸었고 요한은 어깨에 총을 멘 채 산기슭까지 포로들의 뒤를 따라갔던 것이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의 눈에는 군인 하나가 다섯명의 포로를 호송해 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나, 다리 위를 지날 때 그들은 이미 탈주자들이었다. 한 여자가 오랫동안 그를 주시하는 듯 보였기에 요한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몇 명 수상쩍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으나 요한 모리츠는 그들을 못 본 척해 버렸다.
그는 숲에서 포로들이 그를 위해서 가져온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조세프가 그의 총을 바위에 내려쳐서 부숴 버렸다. 그 조각이 튀어 요한을 때리는 순간 그는 자기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깨어져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난 후 프랑스 포로들은 그의 군복을 불태웠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군복이 불에 타는 걸 보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사람들의 기분이 상할까봐 꾹 참고 있었다. 군복이 타는 동안 그들은 뭐라고 자기들끼리 히틀러를 욕하고 있었다. 그래도 요한 모리츠는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1주일 내내 숲 속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을 빠져 나오던 그들은 길가에 있는 미군 지프를 보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기쁜 나머지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 지칠 대로 지치긴 했지만 그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춧구멍에 삼색 리본을 달았다. 요한에게도 같은 것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지프 앞으로 달려갔다. 미군들은 마치 그 곳에 이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 담배를 주고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이곳 호텔로 데려온 것이었다.
미군들은 매일 그들에게 갖가지 물품과 식사를 제공했다. 요한 모리츠는 마치 동화 속의 나라에나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자를 열어 물건을 확인하고, 또 조세프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꿈같은 현실을 실감하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위대하고도 뜻 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주어진 대가라고 생각했다.
조세프는 잠이 들었다. 요한 모리츠는 여기서 프랑스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장차 지을 집과 힐다와 프란츠를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프랑스로 모셔와야지."
요한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요한은 잠을 자면서도 계속 프랑스에 대한 꿈을 꾸었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가로 누워서 다가올 행복을 꿈꾸며 아침까지 달콤한 잠에 빠졌다.
103
요한 모리츠가 UNRRA에 온지 도 벌써 2주일이 지났다. 그는 미군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프랑스 인 5명을 탈출시켰는가를 얘기해 주었다. 미군들은 그에게 찬사를 늘어놓으며 탈출기를 쓰라고 권하기도 했다. 요한의 이야기를 신문에 발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양할 것이고 그는 화제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요한 모리츠는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자기가 공로를 세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연합군을 위해 공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고 연합군이 그걸 자랑으로 여기고 자기를 달갑게 생각해 주는데 만족했다.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UNRRA의 책임자가 요한 모리츠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요한 모리츠를 불러 탈출에 관한 얘기를 묻곤 했었다. 요한 모리츠는 당당하고 호기 있는 태도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임자는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담배 케이스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요한 모리츠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푸는 과분한 대접에 그저 감동할 따름이었다. 번번이 이런 대우를 받았으나 언제나 익숙하지 못한 그였다.
"당신은 이제 UNRRA에서 숙식할 수가 없소."
하고 책임자는 요한 모리츠의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방을 비워 주시오."
요한 모리츠는 사색이 되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정도로 미군들을 노엽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길거리로 내쫓는 건 아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탓인가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미군들은 여태까지 산더미 같은 선물을 요한에게 주었다. 그는 자기와 힐다 몫으로 여러 가지 물건이 든 상자 다섯 개를 장만했다. 미군들은 그에게 어린애가 있다는 걸 알자, 프란츠를 위한 장난감과 옷가지도 주었다. 그들은 프란츠와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조르다시피 해서 모두가 사진을 돌려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내쫓는 걸 보면 잘못을 저질러도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나 보다.'
"UNRRA는 오직 연합국의 시민만 보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연합국의 적이니 더 이상 돌봐 줄 수가 없소."
요한 모리츠는 탈출한 경위를 듣고 찬사를 아끼지 않던 미군들을 생각했다. 누구나 다 그가 연합군을 위해 중요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며 수많은 선물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요한 모리츠를 연합국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신은 연합국의 적이오!"
책임자는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연합국에 불리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저는 맹세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하고 요한 모리츠는 말했다.
"당신은 루마니아 사람이죠?"
책임자는 엄한 말투로 물었다.
"루마니아 사람은 연합국의 적이오. 당신은 루마니아 사람이니 말할 것도 없이 연합국의 적이 된단 말이오. UNRRA는 적국인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가 없소. 오늘로 당장 방을 비워 주시오."
요한 모리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방에서 나왔다. 차라리 부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총은 산산조각이 났고 군복은 불태워졌다. 민간인 복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요한 모리츠는 멍하니 서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104
요한 모리츠가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힐다는 곧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힐다의 어머니도 역시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 두 여인은 신문만 받은 것이 아니라 매도 맞았다. 그러나 신문관은 그들에게서 아무런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 헌병은 가택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뮐러 대령의 편지를 찾아냈다.
"그 분은 요한의 친구예요! 우리들한테 매달 200마르크씩 보내 준답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뿐만 아니라 우리들 생일 때에도 여러 가지 필수품과 담배까지 부쳐 주곤 해요."
힐다가 말했다. 헌병대는 도움이 될 정보를 입수할 생각으로 요한 모리츠의 탈출을 뮐러 대령에게 보고했다. 이틀 후 그들은 사령부로부터 한 장이 넘는 장문의 전보를 받았다. 뮐러 대령의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4세기 이래 요한 모리츠가 속해 있는 영웅족의 일원이 탈출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다. 요한 모리츠의 탈주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의 실종은 유괴나 암살의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다. 요한 모리츠의 실종은 영웅족의 역사상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므로,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 게르만 혈통 중 가장 용감하고 명예로운 종족의 일원을 탈출의 혐의로 더럽히지 말라. 요한 모리츠의 처자는 공식적으로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요한 모리츠를 찾을 때까지 그의 처자는 연구소에서 부양료를 받게 된다. 지방 헌병대는 그의 처자를 특별히 보호할 것이며, 조사 경과를 수시로 본관에게 보고하라. 요한 모리츠에 관계되는 새로운 정보는 사령부 전용 전신망을 통해서 본관에게 보고하라.
총사령부 뮐러 대령
헌병대의 책임자인 대위는 잔뜩 긴장했다.
"요한의 아내를 체포한 사실이 대령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24시간 이내에 징계 처분을 받고 전방으로 이송될 거야. 체포한 사실을 대령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그 아내에게 단단히 부탁해 놓는 게 좋겠어."
"그러면 조서는 어떻게 할까요?"
사건 담당 중위가 물었다.
"당장 종결시켜 버려. 총사령부와 대립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대위가 말했다.
"제기랄, 탈영병에 대한 조사를 못 하게 하는 건 역시 바보 같은 짓이야. 높은 분들은 꽤 아는 체하지만 간혹 우리보다 더 큰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단 말이야. 뮐러 대령은 학자이지. 나는 잡지에서 그가 쓴 논문을 더러 읽었어. 그는 저서도 몇 권 출간했지만 좀 지나치게 편협한 사람 같아. 요한 모리츠가 탈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의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야."
대위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는 힐다를 자기 자동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언제든지 자동차가 필요하시면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밤이든 낮이든 제 메르세데스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밖에도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부인께서 저희들에게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까봐 본보기를 보이려고 한 일입니다.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럼 우리 주인은 탈출한 것이 아닌가요? 무슨 특명을 띠고 파견된 건가요?"
힐다가 물었다.
"그것은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주인은 탈영한 건 아닙니다. 그 밖의 일은 비밀입니다.
힐다는 기뻐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날부터 그녀의 생활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변했다. 그녀는 요한이 총사령부의 특명을 띠고 어디론가 파견되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위가 내게 자동차까지 마음대로 쓰라고 할 까닭이 없지.'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창가에 기대서서 마치 모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신비에 찬 갖가지 장면 속에 처해 있을 남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이는 내가 경솔하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야. 나를 보잘 것 없는 여자로 알았던 거야. 그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 힘껏 노력해야겠다. '
그녀는 프란츠를 꼭 껴안았다.
"네 엄마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단다. 오직 요한 모리츠의 아내만이 이와 같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거란다."
105
"패전이라니,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 거리를 떠나 숲 속이나 시골로 피난을 갔어요. 그들이 그러는데, 소련군이 10킬로미터 밖에까지 왔다더군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났어요. 그러나 난 믿어지지 않았어요. 반드시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적의 선전일 거라 믿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예요. 독일은 전쟁에 지지 않아요."
힐다는 장교에게 말했다.
"몸을 씻게 대야에 물 좀 떠다 주십시오."
힐다와 얘기를 하고 있던 장교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가죽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군복 웃저고리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스웨터 차림이었다. 힐다는 장교의 일거일동을 눈으로 좇았다. 가죽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군복 단추를 끄르는 모습을 힐다는 몇 시간이든 지루한 줄 모르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면도를 하고 싶은데 더운물을 좀 가져다주시오."
장교는 의자 위에 놓인 가방을 열면서 말했다. 힐다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방에서 나왔다. 부엌 창문으로 문 앞에 세워 둔 군용차가 보였다. 힐다는 부엌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장교가 여기에 온 지는 불과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오래 전부터 알던 분같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힐다는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독일군 장교였다. 그는 옷을 좀 갈아입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자기 부하들한테 명령하듯 위압적인 말투로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뚜벅뚜벅 집안으로 들어왔다. 문지방에 서 있는 힐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가죽 코트에서는 바람과 먼지와 화약 냄새가 뒤범벅이 된 전진(戰塵)의 냄새의 냄새가 풍겼다. 힐다는 마치 그 냄새에 취한 사람처럼 뒤를 따랐다.
장교는 거인이라고 할 만큼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자기 집에라도 온 듯이 아주 익숙한 태도로 서슴지 않고 거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힐다는 문 앞에 서서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힐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군모를 벗자 은회색의 머리칼이 드러났다. 가죽 코트를 벗자 중위 계급장이 나타났다.
'예비역 장교로구나.'
힐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교는 몇 번인가 힐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눈길은 그녀에게 공정된 것이 아니라 딴 곳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힐다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교는 대답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웃저고리를 벗고 나서는 물과 대야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힐다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으라고 권하고 싶었다. 이 집에는 훌륭한 목욕탕이 있었다. 그러나 대야를 가져오라고 그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대야에 물을 받으며 힐다는 문 앞에 서 있는 자동차를 또 한 번 내다보았다. 자동차는 장교의 가죽 코트처럼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야를 가지고 힐다가 방으로 들어가자, 장교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거울을 가져다주시오."
장교가 말했다. 그는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몰에 있는 것 같았는데, 몹시 피곤해 보였다. 아마 잠이 와서 그러나 보다 하고 힐다는 생각했다. 그가 자야겠다고 하면 침실을 기꺼이 내주고 푹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난 며칠 동안 숱한 군인들이 힐다의 집 앞을 지나갔다. 사병과 장교들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세수를 한다든가 통조림을 데울 물을 좀 달라고도 했다. 힐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해 주었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어딘가에 파견되었을 요한 모리츠를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의 영웅적 행위를 본받아 자기도 조국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자리를 원하는 군인들에게는 이제껏 거실을 내주었었다. 그러나 이 장교에게는 침실을 내주고 자신은 거실의 긴 의자에서 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장교는 요한의 침대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침대를 택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요한이 면도할 때 쓰던 거울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수척한 목을 늘여 빼고 그는 방을 거닐었다. 거울을 걸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는 키가 너무 커서 탁자 위에 거울을 놓으면 몸을 구부려야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힐다에게 양손으로 거울을 들게 하고 얼굴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좀 더 높이!"
그는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그의 얼굴은 햇볕과 바람에 그을어 있었다. 두 뺨은 온통 다갈색 수염투성이였다. 힐다는 거울을 입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다시 이마 위까지 올렸다. 장교가 몸을 앞으로 숙였을 때 힐다는 그의 입김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거울을 꼭 붙잡고 서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좀 더 높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장교가 다시 말했다. 힐다는 자기 이마보다 더 높이 거울을 쳐들었다. 팔이 저렸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비누거품투성이의 갈색 수염을 싹싹 미는 규칙적인 소리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힐다는 두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코를 발름거리며 비누 냄새를 맡았다. 단순한 비누 냄새가 아니라 남자의 체취와 전쟁과 끝없는 행군의 냄새가 뒤섞인 것이었다. 가죽 코트에서 나던 냄새와 같은 냄새다. 장교는 그녀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면도하는 데만 열중했다. 면도가 끝나자 그는 두 손에 비누칠을 했다.
"셔츠 소매 좀 걷어 줘요."
장교가 말했다.
힐다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주었다. 살이 닿을까봐 조심했는데도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스쳤다. 그녀는 다시 전율을 느꼈다. 장교의 몸에서 풍기는 숲과 바람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찬 듯했다. 힐다는 이 냄새가 가구와 양탄자와 벽 속에 스며들어 영원히 가셔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냄새는 또 그녀의 옷과 피부와 머리칼과 속옷에까지 배어 들어서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시오."
힐다가 문을 닫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장교는 윗도리를 머리 위로 벗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는 옷에 덮여 보이지 않고 가슴만 보였다. 간호원이었던 힐다는 이제껏 수많은 남자들의 나체를 보아 왔지만 이런 가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힐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엌으로 가서 창문으로 자동차를 내다보았다. 아기는 잠들어 있었다. 힐다는 장교가 곧 출발할 것인지 아니면 떠나기 전에 한잠 잘 것인지 궁금했다.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그의 명령대로 해야 할 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장교가 부르기만 하면 곧 달려갈 태세로 신경을 쏟고 있었다.
"소련 사람들이 3킬로미터 밖에까지 왔대요! 부인은 그냥 여기 남아 있을 작정이에요?"
창문 아래를 지나가던 이웃 아낙네가 물었다.
"저는 이대로 있겠어요."
힐다는 관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힐다는 장교가 부르기만을 기다리다가 그가 왜 부르지 않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 큰 사나이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는 훈장이 잔뜩 달려 있었다. 힐다는 감격해서 문지방에 멈춰 섰다. 거인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 준 것이다. 방안은 바람과 전쟁과 가죽 냄새 대신에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인이 정말 순수한 독일 여성인지 알고 싶소. 용감한 독일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하고 장교가 말했다.
"저는 진정한 독일 여자예요! 뿐만 아니라 남편은 대 독일의 위대한...."
힐다는 남편에 대해 말하려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탁자 위에 아름다운 두 여자의 사진이 든 사진틀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남편의 이야기를 이 거인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들려주려고 했던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사진이 눈앞에 보이자 힐다는 비밀을 말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내 아내와 딸이오. 둘 다 죽어 버리고 말았소. 나는 이들을 무척 사랑했는데 이들은 나를 실망시켰다오. 아내와 딸이 나를 배반하고 말았단 말이오. 아내는 죽었지만 내 딸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보잘것없는 어떤 녀석은 따라갔으니 내게는 죽은 딸이나 마찬가지요."
장교가 말했다. 힐다는 두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라면 이런 분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여자의 사진 옆에는 가죽으로 테두리를 한 히틀러의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이제 총통도 돌아가셨소. 독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요. 지금까지 나는 총통과 독일을 위해 살아왔는데 둘 다 없어졌소. 젊었을 땐 말을 좋아했었소. 젊음이 넘치던 때였죠.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잃었소. 이젠, 내가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마누라도 딸도 총통도 조국도.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보오. 소련군은 반 시간 이내로 쳐들어올 것이오. 그 자들이 오기 전에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 의무를 완수하고 싶소."
힐다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녀는 그 큰 사람이 침실에서 잘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음식을 요구하면 무엇이든 대접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성장을 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어요. 그런데 어디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그녀는 장교의 군복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데도 가지 않소. 내가 수염을 밀고 몸을 씻고 정복을 입어서 어디로 떠나는 줄 알았소?"
그는 힐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자기가 갑자기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요한이 특사로 어디론가 파견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도 힐다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부탁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해 주시오.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만 독일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오! 내 아내는 이런 일을 못할 여자였소. 하지만 부인은 할 수 있다고 믿소.
그 여자는 그저 아내에 불과했고 너무 약했소. 나는 그녀에겐 이런 일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요. 당신과는 전혀 다르니까."
힐다는 그 거인이 자기 아내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일을 자기에게 부탁한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태워 주시오. 난 여기 이 천막 위에서 죽을 테니까."
마룻바닥엔 이미 군용 천막이 깔려 있었다. 방에 가득 찬 천막은 새것처럼 매우 깨끗했다.
"천막 끝을 잡아당겨 마당으로 끌고 가면 되오."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군용 수통을 탁자 아래서 끄집어냈다.
"여기에 휘발유가 들어 있소. 비행기에서 사용하던 거요. 나를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천막으로 싼 다음 그 위에 휘발유를 끼얹으시오. 그런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 됩니다."
장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호주머니에서 금빛 라이터를 꺼내 힐다에게 내밀었다.
"혹시 처음 붙인 불이 금세 꺼지거든 두 번째 수통의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시오. 그러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오. 소련 놈들은 재밖에 보지 못할 거요. 진정한 군인은 비록 실체일망정 적의 손에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독일 병사는 전통적으로 이런 방법을 취해 왔소. 이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그리고 시체까지 형태를 없애 버려 적군이 볼 수 있는 것은 검은 재뿐인 것이오."
장교는 이렇게 말하며 두 손을 비비 댔다. 힐다는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도 태우고 싶으면 나와 함께 태우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걸 간직할 이유는 없을 거요.
나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 루마니아 출신이니까."
힐다는 장교가 천막 위에 쓰러져 있는 장면을 상상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힐다는 이 장교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두렵소? 독일 여성이라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거요. 더구나 조국을 위하는 일엔 용감해지는 법이오. 한 병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조국에 충성을 다하는 길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나는 믿소."
"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다만 이 모든 것이 사실 같지 않아서 그래요. 소련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요. 독일이 전쟁에 졌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힐다가 말했다.
"그러나 이미 끝나고 말았소. 우리는 되찾을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잃고 말았소. 이 권총도 가죽 총집에 넣어 나와 함께 태워 주시오. 병사는 무기와 함께 묻히거나 태워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장교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장교는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듯 상념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끝났소."
이 말에 힐다는 기겁을 하고 눈을 치켜떴다. 그 큰 사나이가 자기 앞에서 자살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곧 자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장교는 총통의 사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힐다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와 군복에 꼭 낀 몸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대로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경례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팔을 내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팔을 들어서 이번엔 힐다에게 경례를 했다.
"안녕히 계시오. 동지에게 감사를 드리오. 나는 요르그 요르단 중위요. 그러나 내 이름을 딴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소. 이제부터 당신이 완수해야 할 일에 긍지를 가지시기 바라오. 군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는 건 독일 여성으로서 명예로운 일이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힐다와 악수를 했다. 최후의 악수답게 힘 있게 쥐었다.
"그럼 이제 혼자 있게 해 주시오. 총성이 나거든 곧 달려와 주시오. 안녕히!"
106
힐다는 부엌에 가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소련군 선발대 트럭이 집 앞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엌 창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때까지도 총성은 나지 않았다. 총성이 날 때까지 절대로 들어와선 안 된다는 장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머뭇거리던 힐다는 소련군 트럭을 보자 서둘러 부엌을 나왔다. 큰길을 지나가는 소련군 트럭이 벽을 뒤흔드는 바람에 무서워서 힐다는 더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교는 방 한가운데 펼쳐 놓은 천막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왜 총성이 들리지 않았을까?'
힐다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군모를 쓰고 똑바로 누워 있는 그는 총통의 사진에 경례라도 하다가 죽은 듯 단정히 누워 있었다. 얼굴은 검푸른 보랏빛이어서 잿가루가 덮인 듯했다. 오른쪽 뺨과 입, 코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피는 그다지 흐르지 않았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보일 뿐이었다. 힐다는 그 시체 곁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 가죽 총집에 넣었다. 그리고 그 덮개를 덮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총소리를 못 들은 것이 의아스러웠다. 어쨌든 군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줘야겠기에 힐다는 천막 끝을 잡아당겨 시체를 덮으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늠름한 얼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도무지 시체 곁에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아마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겠지.....'
힐다는 시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천막으로 거인의 얼굴을 덮었다. 살아 있을 때는 여느 사람과 다르게 보이더니, 그도 역시 죽고 나니 힐다가 지금까지 보아 온 많은 시체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힐다는 그가 면도를 하고 군복을 입었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의 숨결이 와 닿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들이 모두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졌다. 밖에서는 소련군의 트럭과 탱크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힐다는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기를 안고 정원의 작은 문으로 빠져나가 숲 속으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교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괜히 약속했어.' 힐다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체를 정원으로 운반할 수가 없었다. 문 앞을 지나가는 트럭과 탱크에 탄 소련군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 저녁때까지 기다려야지. 밤만 되면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태워 버리고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자.'
힐다는 아무 생각 없이 옆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자 집 안에 독일 장교의 시체가 있는 걸 소련군들이 알게 되면 붙들릴 위험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힐다는 옆방에 가서 아기를 안고 와 시체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열심히 생각했다.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없지.' 그녀는 궁리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에 빗장을 지르고 창문도 꼭꼭 닫아 걸었다. 이제 두세 시간만 기다리면 어두워질 것이다. 힐다에게는 시계가 없었다. 장교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던 것이 생각나 힐다는 손목을 잡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힐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새파랗게 질린 채 아이를 꼭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문 밖에서 소련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뒤뜰로 난 창문을 열었다.
'약속을 이행하기 전에는 도망칠 수 없어. 내 남편 요한은 영웅이야. 영웅의 아내가 비겁해서는 안 돼.'
힐다는 휘발유가 든 수통을 열고 천막 위에 끼얹었다. 이번에는 총대로 문을 치는 것이 마치 당장 부숴 버리고 뛰어들 것같이 들렸다. 힐다는 두 번째 수통을 열고 절반쯤 끼얹었다. 소련군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허둥지둥 뒤뜰로 난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창문을 뛰어넘은 다음 불을 켠 라이터를 방안에 집어던지면 불이 붙겠지. 그러면 약속은 이행한 것이 된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방안은 휘발유 냄새로 숨이 콱 막혔다. 아기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힐다는 다급해졌다. 그녀가 마당으로 뛰어내리려고 창문 난간을 넘어서는 것과 동시에 소련군은 어깨로 밀어 문을 열었다. 창문에서 정원 화단까지는 그다지 높지 않아서 힐다는 쉽게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소련군의 철모 세 개가 불쑥 창 밑에 나타났다.
뜰안에도 군인들이 있었다. 창에서 뛰어내리기엔 늦었다. 힐다는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휘발유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혀 아기는 요란스럽게 울었다. 그냥 뛰어내려 소련군을 밀치고 도망치리라 결심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들창 너머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잡았다. 힐다는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쳤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습격을 당했을 때 그녀는 무의식중에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기듯이 라이터를 눌렀다. 순간 화염이 방을 덮었다. 그것은 아주 뜨겁고도 격렬한 결말이었다.
어둠이 깃들었다. 다시는 밝은 날이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진한 어둠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요르그 요르단의 시체를 태운 불꽃은 요한 모리츠의 아내 힐다와 그의 아들 프란츠까지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송두리째 집을 휩쓸고 집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태워 버렸다. 장교가 갖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던 그의 아내와 요한의 첫 번째 아내인 스잔나 사진까지 몽땅 삼켜 버렸다. 짙은 어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격렬한 불꽃은 주위로 번져 갔다.
107
드라이얀 코르가 부부는 바이마르의 미국 군정관 브라운 소령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군정관님."
드라이얀이 말했다.
"루마니아가 손을 든 8월 23일, 제 처와 저는 우리 공사관 직원들과 함께 크로아티아 인에게 억류당했습니다. 외교 법규에 따라 모든 적국 대표와 같이 호텔에 억류된 것입니다. 다시 크로아티아가 티토의 빨치산에게 점령당했을 때, 우리들은 오스트리아로 옮겨졌다가 독일을 경유하여 마지막엔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송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아무도 우리를 감금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우리들은 서방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모두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서방측을 향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엘레오노라는 자기들이 걸어온 200킬로미터의 여로를 돌이켜보았다. 다리는 부어오르고 발바닥은 물집투성이였다.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왔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프랑스 점령 구역으로 들어오려고 수없는 산과 들을 지나왔습니다. 우리는 소련군이나 빨치산들에게 붙들리기는 싫었습니다. 그들에게 붙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요."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침착하게 말했다.
"왜 소련군과 빨치산을 겁냅니까?"
하고 군정관이 물었다.
"그들을 무서워하는 건 파시스트들뿐입니다.
소련군과 빨치산도 우리의 동맹국입니다.
우리와 함께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싸워 왔습니다."
"군정관님, 물론 당신은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도 볼셰비키 점령지역에 단 하루라도 부인을 머무르게 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불어넣는 잔인성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당신도 군복을 입고 든든한 호위병을 거느리지 않고서는 소련군 주둔지를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을 겁니다. 우리같이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최신식 미국 무기를 든 야만인 무리들 속에서 왜 도망쳐 왔는가를 물어 보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립니다."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뭘 원하십니까? 당신들은 독일에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당신들은 적국 시민으로 취급을 받아야 하고, 독일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독일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하고 군정관이 말했다.
"말하자면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지금 바이마르의 독일 여자들은 적어도 매주 한 번씩 부센발트 수용소의 변소를 청소하고 석방된 억류자의 속옷을 세탁해야 합니다. 당신은 외교관 가족인 제 아내에게도 이런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우리들은 미국과 연합국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연합국의 적국에 억류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당신을 찾아온 까닭은 이곳에 머무르게 해 달라는 허락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이곳에서 다시 떠날 수 있도록 허가라도 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막연히 거리를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잠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몸을 씻을 장소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 머물러 있을 수도 떠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말했다.
"당신들은 적국의 시민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불행에 관심이 없소. 당신들은 엄연히 루마니아 여권을 가지셨죠? 그러니까 적국 시민입니다."
하고 군정관이 말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는 연합국 측에 끼여 벌써 10개월 전부터 독일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우리들보다 군정관께서 더 잘 아실 줄 믿습니다. 8만 명의 루마니아 인이 연합국을 위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신들 편이 되어 싸우는 사람들이 당신들의 적국이란 말씀입니까?"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말했다.
"루마니아는 적국입니다."
하고 브라운 소령은 거듭 말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어 큰 소리로 읽었다.
"적국은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는 이렇게 읽고 나서 말했다.
"이렇게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소? 그러니까 당신들은 미국의 적입니다."
드러이얀 코르가는 벌떡 일어났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애원하듯 군정관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루마니아가 1년 가까이 연합국 측에 합세해서 싸워 온 걸 신문에서 읽은 일도 없습니까? 그 동안 우리들이 독일에 억류당했다는 사실이 적힌 우리의 신분증명서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것이 못 된단 말씀입니까? 우리는 결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애원하듯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 바는 아니오. 내가 받은 지시에 따르면 루마니아는 분명히 미국의 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쓸데없는 얘기를 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했소.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적입니다. 아시겠어요? 만일 내가 당신들 수중에 떨어졌다면 총살을 당했지. 내가 지금 당신들과 얘기하는 것같이 내 얘기를 여유 있게 들어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의 지금 행위는 위법입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적과 토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이마르의 군정관 브라운 소령은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서방측의 생리야. 그들은 사실에 대해서나 개인에 대해서 무관심해. 그들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무엇이든 규정에만 따르려 하고 있어."
드라이안은 계단을 내려오며 이렇게 말했다.
"전 더 걷질 못하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노라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느라고 20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달리다시피 걸어왔건만...., 메카를 향하는 군중처럼 이 먼 길을 찾아왔건만...."
"후회를 해선 안 돼요, 노라. 어쨌든 소련군의 야만적인 공포에서 탈출해 온 것은 잘 한 일이오. 지금 이 시대의 인간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이란 아무데도 없어. 이 땅덩어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108
나흘 후,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다시 군정관을 찾아갔다. 바이마르에서 1주일만 더 묵게 해 달라고 청해 볼 생각이었다. 노라는 다리가 부어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고운 비단옷에 멋진 모자를 쓰고 하이힐을 신고 나섰다. 군정관을 만나고 싶다고 당번병에게 전하고 나서 드라이얀은 노라를 돌아보았다.
"파티에라도 초대받은 것 같은 차림인데...."
그녀는 웃어 보였다. 그 옷은 3년 전 어느 날 핀란드 대사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입었던 아주 멋진 옷이었다.
"군정관님께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당번병이 정중하게 말했다. 몇 분이 지났다. 노라는 흐뭇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다른 사병 하나가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군정관님에게 용무가 계신 루마니아 외교관이십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 군인은 사라졌다. 엘레오노라는 브라운 소령이 사실은 점잖고 예의바른 신사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기들을 몇 분 정도 기다리게 하면서도 그동안에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양해를 구하는 자세가 그녀를 조금 안심시켰다. 큰 건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군정 사령부의 홀은 매우 넓었다. 노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몸이 수척해져서 핀란드 대사를 방문할 때보다도 옷의 주름이 더 잘 잡혀져 우아한 것같이 보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두 번째 왔던 군인이 다시 와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미소를 머금고 거울 앞을 떠났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팔을 잡고 군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 군인은 전처럼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출입구 쪽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사병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프에 타라고 말했다.
"어디로 갑니까?"
드라이얀이 묻자 운전병은 다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지프는 미칱 듯이 속력을 내어 거리를 질주했다. 드라이얀은 안내하는 군인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역시 그의 동료가 그랬듯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드라이얀이 노라 쪽을 보았을 때 그녀는 두 손으로 모자 차양을 잡고 웃고 있었다. 노라는 전부터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드라이얀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면서도 일상적인 아내의 표정에 자신을 억지로 안심시키려 했다.
지프는 시가지가 끝나는 곳의 어느 돌담 앞에 멈춰 섰다. 제모를 쓴 위병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지프는 마당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같이 온 군인이 위병에게 봉투를 전하고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와 드라이얀에게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물었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노라는 독일어로 다시 수위한테 물었다.
"감옥이오."
이렇게 대답한 수위는 지프 쪽으로 다가와서 노라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노라는 군인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지프가 올 때와 같은 속력으로 재빨리 사라졌던 것이다.
노라는 드라이얀을 쳐다보았다. 그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철문은 그들을 받아들인 뒤 곧 닫혀 버렸다. 두 사람은 감옥 마당에 서 있었다.
109
드라이얀코르가는 즉시 1층 독방 5호실에, 노라는 4층 독방 2호실에 각각 수감 되었다.
'그들이 뭔가를 오해한 모양이지.'
드라이얀은 혼자 있게 되자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오해를 받았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던 그는 노라도 지금 자기처럼 독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미칠 것 같았다. 감옥의 복도에서 서로 헤어질 때 드라이얀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애정이 담긴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감시병이 그의 어깨를 난폭하게 낚아채어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고 말았다. 노라가 애원하듯 감시병을 쳐다보았으나 감시병은 그녀를 복도 저 쪽 구석으로 거칠게 떼밀었다. 그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나와 이름이 같고 얼굴이 닮은 어떤 죄인과 나를 혼동한 모양이야. 그런데 노라는 왜 붙잡혔을까?'
드라이얀 코르가는 간수를 부르기 위해 주먹으로 감방 문을 두드렸다.
'소련군한테는 체포될 것을 예측한 적도 있었다. 소련에서는 매끈한 손만 가져도 붙잡힐 이유가 충분하지. 그러므로 내 손을 보지도 않고 나를 붙잡아 가고, 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감금했다 해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거다. 소련에서는 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유없이 체포되고 암살되고 유형을 당하는 그런 사회를 피하기 위하여 200킬로미터나 걸어왔던 것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주먹이 아프도록 문을 두드렸다. 이제 와선 단순히 간수를 부르기 위한 것보다는 200킬로미터의 길을 뛰어온 자기 자신을―그보다도 부어오른 다리와 피가 나는 발을 이끌고 울면서 쫓아온 아내 노라의 고생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자기 자신을 벌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노라를 체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독일은 나치스 국가이며 반유대주의자들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오?"
나타난 간수가 물었다.
"소장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아내와 나는 어떤 착오로 수감된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처음엔 어떤 착오로 그들이 붙잡혔을 거라고 하더군요."
간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비웃지 마시오. 당장 소장한테 말해야겠소."
드라인얀이 말했다.
"소장 같은 건 없소. 당신은 미군에게 체포된 거요. 우리는 관리만 맡아 보고 있을 뿐이오. 하긴 우리들도 일종의 죄수에 불과하지만."
"그럼 미군한테라도 말해 보겠소!"
"매주 월요일에만 한 번씩 오게 되어 있소."
간수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바로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생각했다.
"그럼 내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당신들은 우리를 1주일 동안이나 이곳에 가둬 둘 작정이오?"
"나도 어쩔 도리가 없소. 몇 시간이고 문을 두드리든 지껄이든 당신 마음대로 해 보시오. 소용이 없을 테니까. 나로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소. 담당 미군은 다음 월요일에나 오게 되어 있소."
간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좋소.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해 두겠소. 이 일을 위사람에게 얘기하든지 아니면 혼자만 알고 있든지 맘대로 하시오. 나를 체포한 이유를 알기 위해 소장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음식은 물론 물도 건드리지 않겠소. 내가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오."
"단식 투쟁을 하겠다는 거요?"
"물도 마시지 않겠소!"
간수는 열쇠를 손에 든 채 잠깐 동안 감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드라이얀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하군! 당신은 가엾게도 아직 너무 젊구려!"
그러고는 자물쇠를 두 번 돌려 잠그고 사라졌다.
110
노라 베스트 역시 반 시간 동안이나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간수는 다가와서 문을 열지는 않고 문에 뚫린 구멍으로 감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계속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죄수는 감방문을 두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소."
간수는 이렇게 말하고 멀리 사라졌다.
노라는 침대에 축 늘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용수철에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이가 있을 텐네.' 하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문을 두드려 다른 이불을 하나 달라고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가 없는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금 문을 두드려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감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노라는 마음속으로 자기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기의 체포도 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혈통을 속이는 문서를 위조하고 돈으로 매수해서 호적을 고친 뒤로 그녀는 밤낮 붙잡혀 감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강박과념에 시달렸다. 매일같이 그녀는 경찰이 곧 잡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발각되어서 경찰에 체포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독일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경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녀의 서류는 모두 위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수년간은 체포되어 끌려갈 날만을 기다리는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그 시간이 온 거야. 내가 유대 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어. 이젠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게 됐어.' 하고 노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몹시 가슴이 떨렸다. 공포감으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루마니아에서 서류를 위조했다고 해서 미군이 나를 체포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그러나 이 이유밖에는 내가 체포될 까닭이 없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내가 체포된 이유가 있다면 그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죄인이니까 벌을 받아야 해. 이젠 그 벌을 받게 되었다. 가장 엄하고 잔인하게. 그러나 응당 받아야겠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오한이 나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처럼 가벼운 그녀의 속옷과 면사포같이 얇은 겉옷은 돌벽의 차디찬 습기를 막아 내지 못했다. 살갗을 통해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신장(腎臟)까지 떨리는 추위를 느꼈다. 신장뿐만 아니라 내장이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겉옷으로 무릎을 감쌌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침대에 앉는 것이 겁났다.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그녀는 와들와들 떨었다. 바깥은 따뜻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을 만난 듯 추위에 떨고 있는 노라에게는 바깥이 아무리 따뜻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조금이라도 몸을 녹이려고 감방 가운데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어졌다. 당장 보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다. 수백 개의 바늘 끝이 방광을 찌르는 듯이 팽창돼 도저히 근육을 억제할 수 없었다. 노라는 감방 안에 변기가 있다고 한 소설 대목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감방 안에는 침대와 작은 탁자, 그리고 창살이 달린 들창밖에 없었다. 노라는 문을 두드릴 생각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 변소에 가는 것쯤은 허락하겠지. 그 순간 독일인 간수의 목쉰 소리가 떠올랐다. '문을 자꾸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그년 쳐들었던 손을 내렸다. 겁이 나서 두드릴 수 없었다.
'두드려서는 안 될 때 내가 문을 두드린 것이 잘못이었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또 감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을 자꾸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이 말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동안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위험 신호다! 그녀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얇은 속치마가 차차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뜨뜻미지근하고 척척한 것이 허벅지에서부터 스타킹을 따라 구두 속까지 흘러내렸다.
그녀는 점점 더 쪼그리고 앉았다. 속옷이 젖어 하반신이 뜨뜻해짐에 따라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최상의 해방감과 쾌감이 그녀를 방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모든 근육과 털구멍과 힘줄이 느슨해졌다. 이러한 감정은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강한 것이었고 진정한 쾌감이었다. 그것은 쾌감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황홀한 경지였다. 그녀는 이 쾌감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녀는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을 온몸으로 맛볼 수 있었다.
노라는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소변만 보아 온 것처럼 느긋해졌다. 그러나 정작 흥건한 시멘트 바닥을 목격했을 때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일어나서 몸을 숨기듯이 감방 한쪽 구석으로 피해 갔다. 그것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감방의 시멘트 바닥은 온통 축축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오줌은 침대 밑에서 탁자 아래로 흘러 마침내 그녀의 발밑까지 젖어들었다. 그녀는 금지되어 있는 것을 범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 엄벌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간수의 음성이 위협하듯 그녀의 귓전에 울려왔다.
'당신은 처벌을 받을 거요!'
엘레오노라는 옷을 찢어서 바닥을 닦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소용없는 짓이다. 오줌은 너무 급히 흘러내려서 그녀가 입고 있는 종이같이 얇은 비단옷과 속옷으로는 도저히 다 흡수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귓전에는 쉴 새 없이 이런 말이 들려왔다.
'처벌을 받아야 해! 처벌을 받아야 해!'
아무래도 끝내는 발각되어 처벌을 받고야 말 것이다. 노라는 거미줄처럼 생긴 레이스 장갑을 낀 조그만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111
"당신들의 사정을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사과를 드립니다."
감옥 책임자인 골드스미스 하사가 말했다. 드라이얀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체포된 지 1주일이 지났다. 드라이얀은 침대에 누운 채로 이젠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이레 동안 그는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것이다. 골드스미스 하사는 두 사람의 소지품을 자기 차로 실어 왔다. 그는 노라의 짐도 손수 풀어 주고 두 사람에게 담배도 권했다. 무척 미안해하는 태도였다.
"내일 아침에 두 분은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제가 두 분의 숙소를 구해 드리고 또 제 차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걸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와 드라이얀 코르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르가 씨 부부는 체포된 것이 아냐. 단지 이 쪽의 착오로 구류 당했을 뿐이야.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에 머물러야 하니까 두 분을 한방으로 모시고 깨끗한 시트와 이불을 가져오게. 이 분들은 우리들의 손님이시니까. 알겠나? 깍듯이 대접해 드려."
골드스미스 하사는 간수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더니 약 반 시간 후에 무슨 꾸러미 한 개를 안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먹을 음식과 드라이얀을 위한 오렌지와 과일이었다. 그 곳을 떠나기 전에 하사는 거듭 사과를 하고 드라이얀과 약수까지 하고 갔다. 간수장은 기적이라도 보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미군이 와서 사과하리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미국은 문명인들이 사는 나라니까요."
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날 밤 신열이 있었으나 곧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잠수함을 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많은 흰 토끼를 보았는데, 토끼는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식은땀이 흘러서 잠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흰토끼가 다 죽어 버리면 아무런 희망이 없어.'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었지만 선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12
이튿날 아침, 골드스미스 하사는 오지 않았다. 노라는 하루 종일 골드스미스 하사를 기다렸다.
"필경 오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 거예요. 하지만 내일은 꼭 오겠죠."
그날 저녁때 노라가 말했다. 간수장도 이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골드스미스 하사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난 뒤 교체된 다른 하사가 감옥의 책임자로 왔다.
"나는 당신들에 관해 아무 얘기도 들은 바 없소!"
새로 취임한 감옥 책임자가 말했다.
"골드스미스 하사는 귀국하면서도 당신들에 대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회는 해 보지요. 다음 월요일에 그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나가 버렸다. 새로 온 하사는 붉은 머리칼에 얼굴이 온통 주근깨투성이인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간수장에게도 자기 이름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고, 사인조차도 읽어 볼 수 없을 정도로 했다. 뿐만 아니라 줄곧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1주일 후에 그는 약속대로 감옥에 오긴 했으나 사무실에만 몇 분쯤 머물렀을 뿐이었다. 드라이얀이 그를 만나러 갔을 때는 이미 그는 떠나 버린 뒤였다. 다시 1주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월요일에 온 하사는 불쾌한 낯빛이었다.
"조회해 보았더니 당신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수감된 거였소. 특별대우를 하라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소!"
하사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며 간수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도 좋아. 이들을 다시 독방에 분리시켜! 감옥 안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간수장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하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잘못된 지시가 아닌가 하고.
"알겠습니다. 보통 대우, 각각 독방에 수감, 예외는 없음."
복창하는 간수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113
"우리들을 떼놓으려 오나 봐요!"
복도에서 간수의 발소리가 들리자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드라이얀의 목에 매달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독방에 또 호자 갇혀 있을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겠어요!"
간수는 그들의 감방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고 열쇠를 달그락거렸다. 노라는 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왜 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라이얀도 알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5분 동안만이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여름에는 나도 이 직업을 그만둬야겠소. 이젠 늙었어요. 이 나이에 더 이상 숨바꼭질을 배울 수도 없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아요."
간수는 잠시 말을 끊더니 힘에 겨운 짐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듯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있던 그대로 두 분이 한 방에 있으시오. 문을 열어 놓을 테니까."
"하사가 명령을 취소했나요?"
노라가 물었다.
"취소한 것이 아닙니다."
간수는 이렇게 말한 뒤 열쇠 꾸러미를 달그락거리며 가 버렸다. 감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114
"미국인들은 대체 무슨 감정이 있을까요? 무슨 이유로 우리들을 6주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는지 모르겠어요."
노라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나쁜 감정 같은 것은 품고 있지 않아. 우리의 존재조차 의식하고 있지 않으니까."
드라이얀이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가 감옥에 갇힌 것을 그들이 알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노라가 물었다.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이 우리의 사정을 알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요. 절정에 도달한 서구 문명은 이제 개인 같은 건 염두에도 없어. 문명이 개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는 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야. 이 사회는 개인이 가진 약간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거든. 개인으로서 완벽한 인간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아. 죄도 없이 갇혀 있는 노라 당신, 그리고 나,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이젠 그들 자신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주 간단히, 우리는 단지 하나의 카테고리의 무한히 작은 분자로밖에는 존재해 있지 않다는 거지. 예컨대 당신은 독일 영토 안에서 체포된 한 사람의 적국 시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이것이 서양의 기계 사회를 한결같이 획일화 된 사회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특질이지. 또한 바로 그것이 그들 앞에 당신을 나타낼 수 있는 전부이고, 이 사회는 당신을 그러한 특징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아. 결국에 가서는 곱셈, 나눗셈 또는 뺄셈의 법칙에 따라서 당신이 소속된 집단을 대우하는 식으로 당신을 대우할 뿐이오. 당신은 루마니아의 한 부분이니까, 그 작은 분자 하나가 붙들린 셈이지. 당신이 체포된 원인은―또는 잘못이라 해도 좋겠지―당신이 루마니아라는 집단에 속한 때문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우리를 체포한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들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의심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벌써 석방되었을 거예요. 체포당한 이유를 모르니 더 괴롭군요.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이유가 있지.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땐 터무니없는 거야. 그러나 기계의 입장에서 볼 땐 아주 정당하지. 서구 사회는 인간을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들여다보고 있어. 그들의 눈엔 살과 피를 가지고 기쁨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보이지 않아. 그때문에 인간을 체포하여 감금하고 또 아무 때나 없애 버리는 일이 죄의식 없이도 이루어지는 거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면 응당 범죄가 되지만 서구 사회는 살아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그래서 누구를 붙잡는다든가 죽이는 경우에도 이 사회는 살아 있는 그 무엇을 붙잡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관념을 처벌하는 거요. 이 사회적 범죄는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성립되어 있지. 왜냐하면 기계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야. 인간을 개성 있는 생명체로 취급해 달라고 기계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우리를 체포한 정당하고도 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라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다만 인간을 기계의 법칙과 기준에 따르게 한다는 것은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오. 누군가를 물고기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라고 한다면 그는 몇 분도 못 가서 죽어 버릴 거고, 또한 물고기를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놓아도 마찬가지 결과가 오겠지. 서구는 지금 기계와 같은 사회를 만들어 놓고 인간을 그 사회 속에 살게 하면서 기계의 법칙에 순응해 나갈 것을 강요하고 있소. 어떤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가 성공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트럭과 크로노미터를 지배하는 것과 똑같은 법칙으로 인간을 지배한다는 건 인간을 죽이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인간은 서로 다르다. 나라와 나라도 서로 다르다. 지혜도 힘도 그 모든 것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자와할랄 네루의 말) 기계만이 종류에 따라서 똑같을 수 있지. 기계니까 부속품을 바꿔 넣을 수도 있고 분해하여 각각 중요한 요소나 중요한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거지. 만약 인간이 기계를 닮게 된다면 그때는 이 지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는 날이야."
노라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야."
드라이얀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신의 성미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즉 당신은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기계의 눈을 통해서 볼 때에만 존재하는 거야. 기계 사회는 야만 사회와 같아서 인간은 하등의 가치가 없는 개체에 불과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야. 그러니 사실 당신은 붙잡혀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무슨 뜻이죠?"
"당신과 나는 벌써 6주일 전부터 감옥에 들어와 있지만, 감금당해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이야. 우리의 개인성은 서구 기계 사회에선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붙잡힐 수도 없고 또 붙잡힌 것도 아니라는 뜻이지."
드라이얀이 말했다.
"소용없어요. 그런 말은 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아요. 지금 갇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요. 뻔히 갇혀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군요. 그렇게라도 위안하려는 거예요?"
노라의 말에 드라이얀은 웃었다.
"맞아, 위안이지. 그것이 역사의 이 지체된 시간 속에서 단 하나의 가능한 위안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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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틀렸소."
간수가 코르가의 감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이 신문을 읽어 보시오. 튀링겐과 바이마르는 벌써 소련군의 수중에 넘어갔어요. 미군은 철수하고 붉은 군대가 이미 시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군인들을 트럭에 잔뜩 싣고 밤 사이에 쳐들어왔습니다. 미군은 겨우 군정 사령부 건물과 감옥, 그리고 민간 가옥 몇 채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헌병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요."
노라는 신문에 난 성명서를 읽어 보고는 드라이얀과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간수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감옥이 넘어갈 때는 물론 우리들도 함께 소련군에게 넘어가는가요?"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요. 오늘 저녁까지는 소련군이 인수하겠죠.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간수장이 말했다. 드라이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잠깐 동안 지나간 일을 더듬었다.
'탈출, 200킬로미터의 도보 여행, 소련, 공포, 강간, 시베리아, 노라의 상처투성이인 다리, 정치 위원, 감옥, 사슬에 묶인 채 노예처럼 인계되는 모습.....'
드라이얀은 고개를 들었다.
"노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숨길 것도 없으니 간수장 당신도 들어도 좋아요. 미군은 감옥에 우리를 가둔 채로 소련군에게 인계할 것이 분명하오. 이건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철로에 사람을 깔아 죽이고도 무심할 수 있는 기차와 같은 인간들이오. 서구인들은 죄악도 한 가지 차원으로 압축시켜 버렸소. 극도로 압축시킨 거지. 어쩌면 죄의식조차 전혀 안 느끼는지도 몰라. 그렇게 보면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죄가 있는 거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오. 내가 강조하는 것은 더 이상 환상이나 착각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거지. 지금이라도 우리는 곧 소련군의 수중에 넘겨질 운명에 있소. 말하자면 국가 기관의 명령이 전지 구상에 영향을 미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아야 할 잔인한 종족들에게 넘어가는 거요. 나는 로봇처럼 '단순화된 기계' 노릇은 참고 견딜 수가 있겠지만, 도저히 기계화된 야수와 맞서서 싸울 수는 없어. 소련군에게 넘겨지기 전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탈출하겠소. 그러다가 실패하면 자살해 버릴 작정이오."
드라이얀은 이렇게 말한 뒤 간수장을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가 탈출하는 걸 도와주겠소?"
"힘이 미치는 한은 도와 드리지요. 나도 실은 여길 떠날 생각입니다. 나는 오스트리아 인이오. 빈에 있는 내 집으로 돌아가렵니다."
하고 간수장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좋아요? 무서워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그편이 당신을 위해 낫겠어요. 드라이얀!"
노라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야."
드라이얀은 비장하게 말했다.
"우선 이곳을 떠나십시오. 못 갈 것도 없소. 벽이 포탄에 무너져 버렸으니 마당까지만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 장난처럼 쉬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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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까지 밧줄을 타고 내려갈 용기가 내겐 없어요. 당신은 남자니까 할 수 있겠지만, 난 무서워요."
노라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홑이불과 담요를 찢어서 밧줄을 만들고 있었다.
"무서울 것 없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당신을 묶어서 창문으로 내려 보내줄 테니까, 마당에 내려서거든 벽을 따라 살며시 돌아가서 언젠가 당신한테 얘기한 적이 있는 그 나무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드라이얀이 연결하고 있는 밧줄을 잡고 있던 노라는 고개를 흔들며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저히 못 하겠어요. 내가 내려가는 동안 누가 총을 쏘면 어떡해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제가 내려가는 동안에 총알이 날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하세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총을 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희망이 있을 것 같아."
드라이얀이 말했다.
"소련으로 가도 되잖아요?"
노라가 말했다.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독하지는 않을 거예요. 공산 치하에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 살 리가 없잖겠어요?"
"당신 말도 옳아.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어쩌면 서양 사람들보다 나은 생활을 할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의 판단은 의존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하긴 객관적인 진리는 없는 거지만, 모든 것이 주관적이야.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리를 외치지만 그것도 어쩌면 주관적인 판단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어. 나로서는 소비에트적인 낙원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소. 부질없는 고집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이 옳다고 봐요. 나 개인적으로는 볼가 강변의 동력화한 야수들의 손아귀에 잡혀 들어가기는 싫어. 주관에 몰입하다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 지금의 내가 아마 그럴 거야.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히 여기는 정신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삶을 원하지 않아. 예지를 가진 정신은 오직 삶만을 아낄 수는 없는 법이오. 나는 그다지 생명에 대해 애착을 느끼진 않아. 난 언제든지 생명을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생명을 버리지 않을 경우엔 가장 적합한 생활 조건에서 살고 싶어. 내 인생관이 옳지 않다고 지적해 봐야 소용없을 거요. 난 어떤 의견도 듣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라 혹은 저렇게 살아라 하고 지시를 한다든가,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생활 태도를 나에게 강요하는 건 절대로 반대야. 내 생명은 내 것이야. 내 생명은 집단 농장에도 공유 재산 제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나는 나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살 권리가 있어. 하지만 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는 걸 어떡해. 그리고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하고 시비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거야.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갈 테야. 누가 무어라 해도 소비에트식 생활 방식은 절대 반대야. 그것이 내 스스로 내 명을 재촉하는 이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노라는 울기 시작했다. 드라이얀은 여전히 밧줄을 연결하고 있었고 노라는 한쪽 끝을 힘껏 잡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마당의 초소를 떠났는지 살펴보구려."
드라이얀이 말했다. 노라는 복도를 나와 감방문 밖을 살폈다. 미군은 아직 있었다.
"5분마다 내다봐야 해. 미군과 소련군이 교체할 때가 가장 탈출하기에 좋아. 그 기회를 놓치면 그만이야."
드라이얀은 더 재빠른 손놀림으로 밧줄을 연결해 나갔다. 아침나절 내내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밧줄의 길이와 탄력이 충분한가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5분 만에 한 번씩 감옥의 초소를 살피러 갔다 와선 말했다.
"아직도 미군이야!"
이 사실은 그들을 기쁘게 했다. 미군 보초가 감옥을 경비하고 있는 한 아직 전부를 잃은 건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117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6시경에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감방에서 끌려 나와 죄수들과 함께 미군 트럭에 실렸다. 노라는 울음을 터뜨렸고, 드라이얀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소련군에게 우리를 양도하는 장소를 다른 곳으로 택한 모양이야. 트럭이 동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말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바이마르 시가는 소련군과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트럭에서 뛰어내릴까? 우린 틀림없이 소련군 감옥으로 옮겨지는 거야."
드라이얀은 노라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트럭은 시가를 벗어나 교외로 달렸다. 노라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을 쳐다보았다. 트럭은 분명히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을 지나게 될 거야. 당신이 먼저 뛰어내려서 숲 속에 숨어 있어. 내가 당신 뒤를 따라 뛰어내릴 테니."
노라는 울기만 했다.
"준비해!"
드라이얀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은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없어. 길가의 저 숲을 봐요. 이렇게 숨기 좋은 곳도 없어. 뛰어내리지 않겠소? 이것 봐, 트럭의 속도가 느려졌어!"
그는 노라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노라는 두 손으로 긴 의자를 움켜잡고 버티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못 하겠어요. 당신 혼자 가세요. 당신이 저를 여기에 두고 도망치더라도 저는 절대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노라 곁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떨구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숨기 좋은 숲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까는 등뒤에 있던 태양이 얼굴 정면에 떠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드라이얀은 눈을 크게 뜨고 앞뒤를 두리번거렸다.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을 태운 트럭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도 때로는 좋은 녀석들이군."
드라이얀은 노라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를 소련군에게 넘기지는 않을 모양이야."
"그럼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요?"
노라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묻자, 드라이얀은 다시 침울해졌다.
"아마 미군 감옥이겠지."
드라이얀은 방금 좋아했던 것이 멋쩍어졌다.
"미안해, 노라. 이 정도 일로 좋아하다니,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이송된다고 좋아하다니 내가 미쳤군. 하지만 이것이 서구에 사는 인간이 도달한 최후의 단계야. 두 개의 감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유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야."
118
"당신이 요한 모리츠요?"
미군 장교가 물었다. 그는 다정스럽게 웃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사령관님이 당신의 탈출 경위를 직접 들으시겠다고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수용소에서 다섯 명의 프랑스 포로를 구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요한 모리츠는 기뻐서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의 공로를 듣기 위해 장교가 그를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사령관까지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구나 하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제가 바로 요한 모리츠입니다."
"그럼 내 차를 타고 같이 갑시다."
요한 모리츠는 셔츠 바람이었으므로 웃옷을 입고 싶었다.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양말도 신고 싶었다. 그러나 장교는 급하다고 재촉했다.
"곧 돌아올 테니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대로 가도 괜찮소. 자동차로 데려다 주겠소."
두 사람은 지프에 올랐다. 숨길 것 없이 사실 그대로를 사령관에게 들려주리라고 요한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요한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사령관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벌써 사령관 앞에 앉아서 자기의 탈출 경로를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 지프는 커다란 석조 건물 앞에 멈추었다. 장교는 그대로 앉은 채 요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내려서 좀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요한 모리츠는 차에서 내렸다. 장교가 같이 가주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그가 곁에 있으면 얘기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그러나 지프는 곧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정문에 서 있던 보초가 마당으로 요한을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의 독일 경찰이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건물은 매우 지저분했다. 이런 누추한 집에 사령관이 살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감옥처럼 모든 창문에 쇠창살이 달려 있는 걸 보았다. 요한 모리츠는 물었다.
"여기가 사령관이 계신 곳인가요?"
그 말에 경찰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을 참으려야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요한을 지하실의 캄캄한 독방에 가두었다. 자물쇠를 두 번 돌려 잠그면서도 독일 경찰들은 포로가 던진 엉뚱한 질문이 우스워 계속 킬킬거리고 있었다.
119
코르가 사제의 아내 코리나 코르가는 한밤중에 면사무소로 불려갔다. 삼색 완장을 두른 두 농부가 데리러 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코리나 코르가는 조심스레 문을 잠그고 열쇠를 손에 쥐었다.
면사무소에는 열 명의 소련군이 농부들과 술상을 벌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포도주를 한 잔 권하면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제의 아내는 눈을 내리깔고 성 니콜라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군인들은 그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뿐더러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성 니콜라이에게 계속 기도를 드렸다. 군인 하나가 그녀의 가슴에 술을 부었다. 또 다른 군인은 그녀의 치마를 들추고 속옷에 술을 끼얹었다. 그래도 사제의 아내는 가만히 있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남편을 닮은 성 니콜라이에게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술좌석을 더욱 흥겹게 했다. 소련군과 농부들은 그녀의 머리 위며 속옷 속이며 치마 속에 술을 부었다. 겉옷과 속옷은 술에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군인들은 거친 동작으로 그녀를 마룻바닥에 사정없이 쓰러뜨렸다. 웃음소리가 크게 일었다. 사제의 아내는 옷도 몸도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다음엔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성 니콜라이가 물가에 서서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이런 봉변이 있은 다음 날, 코르가 사제의 아내 코리나는 닭장 속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0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올드루프 강제 수용소에서의 첫날밤,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어떻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체포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매트리스도 이불도 없는 딱딱한 나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무 바닥에 몸이 닿는 대로 허리며 팔꿈치며 전신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바이마르에서 타고 온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그들 부부는 격리되었다. 여자 수용소는 목재 건물이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방에는 30명가량의 여자들이 있었다. 노라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두워서 다른 여자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이 대개 젊은것으로 짐작되었다. 노라는 나무 침대에 드러누워 울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자정쯤 되었겠지. 여기 갇혀 있는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노라는 잠에서 깨어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때 방 저 쪽 구석에서 억지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노라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는 남자의 웃음소리였던 것이다.
'여자 수용소에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귀를 곤두세웠다. 확실히 남자였다. 이제 웃음은 그쳤지만 거칠게 신음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가 엉겨서 내는 가쁜 숨소리였다. 남자는 또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의 다른 쪽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라는 겁이 덜컥 났다. '남들이 사랑을 속삭이는데 왜 내가 무서워할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노라는 발작적으로 귀를 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눈을 감아도 환상만은 떠올랐다.
노라의 침대가 흔들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감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또 다른 남자들이 감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방 한복판에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지껄였다. 잠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노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방에 사내들과 여자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그들은 노라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 바람에 자기들의 사랑을 방해 당했다고 그녀를 사정없이 때릴는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짓을 했지. 큰 소리로 울지 말걸. 그들은 이제라도 나한테 달려들어서 죽도록 때릴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때려죽여도 난 할 말이 없어. 내가 소리를 질렀으니까.' 하고 노라는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 마룻바닥에서 뒹굴고 있다가 달아나는 사내들도 꽤 많았다. 노라는 그들의 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노라의 바로 옆 침대에서도 하나가 일어났지만, 노라는 그 남자의 소리도 못 들었던 것이다.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든 사내들은 키가 크고 검게 보였다.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남자들을 따라 나갔다가 곧 발끝으로 살짝살짝 들어와서 자리에 눕는 여자들도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여자들은 제각기 제자리에 가서 누웠다. 그런데 두 여자만 방 가운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서 있었는데 짧은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기대서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노라는 그녀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초콜릿을 핥아먹고 있었다.
노라는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여자가 제자리로 가서 잠들기를 바랐다. 자기가 먼저 잠들게 되면 그녀들이 자기를 때리거나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좀처럼 침대로 갈 낌새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 입맛을 다시며 초콜릿을 핥아먹고 있었다.
"아까 소리 지른 게 누구지? 저녁때 새로 들어온 빨간 머리지?"
한 여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세, 모르겠어. 그러나 잘 됐어. 한 차례 끝난 뒤였는데 또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
하고 다른 여자가 대답했다. 그 여자들은 계속 초콜릿을 먹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노라는 그들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두 여자는 헤어져서 각자 다른 구석으로 가 침대에 눕는 모양이었다. 침대 널빤지가 삐걱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야 잠을 잘 수 있으리라고 안심했던 노라는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아서 아무래도 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널브러져 잠이 들고, 방에는 이제 남자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술냄새와 땀냄새, 그리고 남자에게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가 섞여서 강하게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복합적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이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체포된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이런 숨이 막히는 곳에다 가두어 둘 리는 없을 테니까....'
그녀는 기침이 나오려고 했지만 손으로 입을 막고 참았다. 여자들이 깨어나 자기한테 대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21
올드루프 수용소의 이튿날 아침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눈을 뜨자 옆에 요한 모리츠가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밤새 함께 자고도 몰랐네! 자넨 어떻게 여길 왔나?"
드라이얀은 요한 모리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었다. 그는 사령관이 자기의 탈출 경위를 듣고 싶어 하니 같이 가자고 하던 장교의 이야기도 했다.
"글세, 사령관에게 가는 줄 알았는데, 그들이 나를 속인 거죠. 하기야 감방에 넣을 생각이면 나 같은 사람 속이기야 어렵지 않은 일이죠. 창문도 없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독방에 나는 8주간이나 갇혀 있었어요. 그동안 사령관이 나를 불러 주기를 줄곧 기다렸습니다만 통 소식이 없더니 결국 여기에 처박더군요."
요한은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나서 드라이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데를 오셨나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감금되어 있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맨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던 포로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황량한 들판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올드루프 강제 수용소는 1만 5천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하늘과 땅과 인간들뿐인 곳이었다. 철조망을 친 울타리 사방 구석에는 기관총을 손에 든 군인들이 탱크 곁에 서서 수용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판타나의 소식은 좀 들으셨습니까?"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선생님이 이런 곳에 와 계시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선생님과 제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밤새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122
올드루프 수용소 소장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안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기대에 부풀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보다도 내가 받는 고통을 알아주겠지. 같은 혈족이니까 나를 도와 줄 거야. 아마 머지 않아 석방될지도 몰라.'
노라는 수용소장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도와 달라고 애원해야지. 마치 오빠에게 부탁하듯이.'
소장실의 벽에는 독일 강제 수용소에서 찍어 둔 유대인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벽 전체에 가득 붙어 있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교수형으로 목을 늘어뜨린 채 죽은 사람들, 굶어 죽은 사람들, 줄무늬 작업복을 입은 포로들, 어지럽게 쌓인 시체더미, 교수대, 여자 시체들을 실은 트럭들을 찍은 것이었다.
노라는 지금 자기가 나치 독일의 유대 인 말살 수용소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동정을 구하는 표정으로 붉은 머리의 소장을 바라보았다. 학살과 굶주림, 가스실과 고문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당신의 누이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중위님!"
노라의 음성은 떨렸다. 목이 잠기고, 울음이 터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묻기 전에는 말할 권리가 없어."
장교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입술을 깨물고 묵묵히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중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읽고 나서 쌀쌀하게 물었다.
"네 이름은 엘레오노라 베스트 코르가, 틀림없지? 네 남편도 잡혔지? 그렇지?"
중위의 말투에 노라는 질려 버렸다. 그것은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친근한 말투는 결코 아니었다.
"네 남편은 반 연합 기구의 관리였지?"
"제 남편은 루마니아 왕국의 관리였습니다."
노라는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위는 얼굴이 빨개졌다. 노기가 서린 그 얼굴은 주근깨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루마니아 놈들은 지독하게 유대인을 배척했다지. 그렇지?"
하고 중위가 물었다. 그는 노라에게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루마니아에는 유대 인 강제 수용소가 있었지? 유대인들은 거기서 학살당하고 가스실에 감금되고 목이 잘리고 총살을 당했어. 유대인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중위는 제 흥분에 벌떡 일어섰다. 노라는 자기도 유대인이며 갖은 고생 끝에 위조 서류를 가지고 도망친 경위. 그리고 그 일로 해서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봐!"
장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노라 곁으로 다가왔다. 노라는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을 줄 알고 두 눈을 감고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전신이 떨려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말들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네 손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지 말해 봐! 대답하라니까! 말하지 않고 버틴다면 네 몸뚱일 가리가리 찢어 놓겠다. 네 손으로 유대인을 몇이나 죽였지?"
장교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노라는 그래도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 못 하겠어! 이젠 무서운 모양이로군, 오줌까지 싸는 걸 보니. 사람을 죽일 때는 무섭지 않았겠지?"
"저도, 저도 실은...."
노라가 더듬거리자 중위가 소리쳤다.
"닥쳐! 나치의 더러운 매춘부야. 썩 꺼져 버려!"
중위가 주먹을 휘두르며 후려갈길 듯이 위협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123
드라이얀 코르가는 글을 쓰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가 옆에서 마치 자기가 연필자루를 잡기라도 한 듯이 손가락을 오그리고 그가 진주 알을 꿰듯 정성스레 써 내려가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글 같은 것을 쓸 만한 참을성이 없었다. 또 쓰기도 싫어했다. 그러나 드라이얀 코르가가 쓰는 것은 몇 시간이고 싫증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코르가 씨가 글을 쓰고 있는 자세는 마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 같단 말이야. 코르가 씨를 보고 있으면 포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언뜻 보기엔 맨발에 수염도 깎지 않고 구멍 뚫린 바지를 입은 포로에 지나지 않지만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영락없이 신사로 보이거든. 모자를 벗고 공손히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진단 말이야.'
요한은 드라이얀에 대해서 이렇게 느꼈다.
"자넨, 땅꾼 얘기를 들어 본 적 있나?"
드라이얀은 잠깐 손을 멈추고 물었다.
"네, 들은 적은 있어요."
"성다니엘은 사자 굴에 팽개쳐져 있었으나 사자들은 그를 잡아먹지 않았다네. 그가 사자들을 길들였으니까. 사람은 뱀이나 사자를 길들일 수 있어. 무솔리니도 자기 사무실에 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있었지. 그 놈들을 잘 훈련시켰던 거야. 사람은 어떤 사나운 짐승도 길들일 수 있어.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지구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동물이 나타났다네. 그 동물의 이름은 '시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숲 속이나 밀림의 사나운 짐승들보다도 더 잔인해. 그들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사생아로 퇴화 족속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강한 종족이라네. 겉모양은 인간과 흡사해서 가끔 구별이 어렵지만, 꼭 기계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금방 식별할 수 있어.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미터를 달고 있네. 그들은 야수와 같은 욕망을 지녔으면서도 진짜 야수는 아냐. 이 '시민'은 괴상한 잡종으로서 그들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네."
드라이얀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 시민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는 잠깐 마르크 골덴베르크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드라이얀이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마르크에 대한 생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작가야. 작가는 인간을 길들이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어. 아름다운,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인간에게 제시해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사람이지. 나는 시민을 길들이고 싶은 생각에서 작품을 하나 쓰기 시작했는데 제 4장까지 끝마쳤다네. 그런데 시민들이 나를 이렇게 감금시켜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질 못하고 있어. 제 5장은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형편이야. 더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네. 출판도 못하게 될 테니까. 나는 소설을 계속하는 대신에 시민을 길들이는 다른 글을 쓸 작정이야. 만일 그 일이 성공한다면 나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겠어. 자네에겐 내가 쓴 글을 읽어 주겠네. 이건 소설도 아니고 희곡도 아냐. 시민이란 종족은 도대체 문학을 싫어하거든. 그들이 좋아하는 단 하나의 형식이 있지. 그건 바로 '탄원서' 형식으로 쓰는 글이야. 시민들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읽느라고 허비할 시간이 없거든. 그들이 읽는 건 탄원서뿐이란 말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124
탄원서 제 1호
경제 문제(지방질에 대하여)
앞으로 나는 여러분들께 여러 장의 탄원서를 보내 드릴 작정입니다. 우선 경제 문제에 관한 것부터 언급하겠습니다. 당신들의 기계 문명은 물질주의의 바탕 위에 이루어졌습니다. 경제는 당신네들의 유일한 복음서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작가인데, 작가란 누구나 일종의 '증인'이지요. 증인으로서의 필수 조건은 공정성입니다. 따라서 나의 탄원서는 진리의 증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기하려는 것은 경제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지방질에 관한 것이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전 세계는 지방질의 결핍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내가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포로들은 땅바닥에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붙어서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을 좁게 만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용소 밖으로는 얼마든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곳에는 1만 5천 명이라는 인간이 밀집하여 붙어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서 있을 때는 약간 틈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누워 잘 때는 공간이 너무도 좁아져서 서로 몸을 포개듯이 해야 합니다. 내 경우만 두고 보더라도 밤새도록 두 다리를 펴고 잘 수가 없습니다. 내 옆에서 자는 사람들은 내 머리 위에 다리를 얹기도 합니다. 무겁긴 하지만 그들의 다리는 따뜻하므로 그냥 참고 자면 춥지 않게 잘 수 있습니다.
나는 왜 당신네들이 수용소의 공간을 이렇게 좁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포로들이 풀을 짓밟아 버릴 것을 염려해서 풀잎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풀은 값진 것이니까 밟아 죽이면 큰 손해가 나겠지요. 젖소가 뜯어먹는다면 우유라도 되어 나오겠지만, 죄수들이 밟아서는 조금도 이익 될 게 없지요. 한편, 울타리를 더 넓게 했다면 더 많은 가시 철조망이 필요했겠지요. 강철 값도 비싼데 단지 죄수들에게 좀 더 넓은 공간에서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경비를 낭비할 필요는 절대로 없었겠지요.
앞으로 겨울이 닥쳐오고 기온 차가 심해지면 많은 포로들이 죽을 겁니다. 혹은 그전에 죽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죄수들이 발을 펼 만한 공간이 생길 겁니다. 나는 당신네들이 수용소를 지으실 때 벌써 이 점을 계산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진 당신네들의 선견지명에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나는 취침 전에 베를린 대학 교수의 지방질에 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 탄원서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강연에서 얻은 문제들입니다. 그 교수는 우리가 수용소에서 먹는 수프 속에 콩알이 몇알 들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한 달 동안이나 계속 조사해서 평균을 내어 보았더니, 포로 한 사람이 하루에 두 번 먹는 수프 속에는 열 개의 콩알이 들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교수의 조교들도 따로 조사해 본 결과 교수의 계산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다음으로 그 교수는 수프에 든 감자껍질과 밀가루의 양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양은 물론 그 교수가 부엌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근사치로 계산해 본 것이었습니다.
천하가 인정하듯이 독일인들은 측량에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콩알에 관한 조사는 정확하리라 믿습니다. 독일인들은 끈기가 있고 또 빈틈없는 치밀한 민족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동안이나 조사해서 내린 결론이므로 누구나 이 연구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본래 독일 민족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연을 듣는 것을 즐기지요. 그것은 중세기 때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습관입니다. 교수는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수프를 여과시켜서 콩알을 계산했는가를 얘기한 다음 그 콩알 하나에 들어 있는 칼로리의 함량을 밝혔는데, 그 정확한 수치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그는 열 개의 콩알 속에 들어 있는 칼로리를 계산하고 감자껍질과 밀가루의 칼로리의 계수를 거기에다 합했습니다. 감자와 밀가루는 포로들의 수프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어쨌든 수용소의 포로 한 사람이 섭취하는 하루 평균 열량은 500칼로리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어떤 때엔 보다 적은 칼로리를 섭취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콩알이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은 수프를 먹게 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열다섯 개가 있기도 하고, 재수좋은 날은 열여덟 개까지 들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평균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수가 말하는 500칼로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부족한 열량이라는 점입니다. 그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종일 누워 지내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열량을 포로들은 눈을 뜨고서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최소한 하루에 1천 칼로리는 섭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500칼로리를 섭취한다 해도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부족한 500칼로리를 자기 몸 속에서 충당하여 움직이는 거지요. 몸 속에 비축되어 있는 생명의 재산을 조금씩 소모하는 것입니다. 결국 수용소에 올 때 지니고 온 축적되어 있는 자본에서 매일 500칼로리씩 빼내는 포로들은 한 달에 6파운드의 체중이 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것은 교수가 손수 만든 저울로 체중을 달아 본 평균치입니다. 손수 만들긴 했지만 그 저울은 꽤 정확했던 모양입니다. 6파운드, 즉 개개인의 포로가 칼로리로 소모하는 3킬로그램의 지방질을 합쳐 보니, 당신네의 빈틈없는 관리 하에 배치된 이 올드루프 소용소 한 곳에서만 해도 매달 4만 5천 킬로그램의 지방을 잃고 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지방질을 잔뜩 실은 트럭 다섯 대가 이 수용소에서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막대한 손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당신들의 그 기술적인 방법으로 무가치하게 사라지는 지방을 당신들이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아까운 것을 그냥 버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상이 내 탄원서의 목적입니다.
기계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당신들은 내 의견을 충분히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당신네 과학 연구원에 이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 줄 것으로 믿고 있겠습니다. 매달 4만 5천 킬로그램의 지방을 이렇게 손실시킨다는 건 문명인다운 태도가 아니지요. 다른 곳에도 수용소가 있을 것입니다. 독일에만도 몇 백 개나 수용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매일 산더미 같은 신선한 지방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수의 강연을 듣고 난 뒤 나는 욕지기가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습니다. 공기 속에서 나는 사람의 기름 냄새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소유의 이 수용소는 포로들의 고혈을 짜내는 거대한 압축기입니다. 나는 대기 속에서 그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만, 사무실에 계신 당신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그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하긴 당신의 옷에도 그 냄새가 스며 들었을 테지요. 바라건대, 당신의 아내나 혹은 밤마다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당신 애인에게 당신 머리나 살갗에서 사람의 기름 냄새가 나지 않는지 물어 봐 주십시오. 여자들의 후각은 남자들보다 더 섬세하므로, 그 냄새를 놓칠 리가 없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지금 또 내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구역질이 나서입니다. 당신들의 문명에 대해 나는 언제나 변함 없이 마음 속으로 더할 나위 없는 찬양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자원과 고등 기술로써 포로들의 지방질을 유용하게 사용하기를 탄원하는 바입니다. 나도 매달 3킬로그램의 지방을 당신들한테 제공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증 인
125
탄원서 제 2호
미학적인 문제(서구 기계 사회에 있어서의 이상적인 인간미에 대하여)
어젯밤 나는 어느 독일인 교수와 미학에 관한 토론을 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말다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거의 그렇듯이 독일인들도 아직 고전주의적인 미학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사회가 몰락한 이유이지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에는 당연히 거기에 맞는 현대적 의미의 미학이 뒤따라야 합니다.
독일인 교수는 수용소의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는 뼈만 앙상한 포로들을 보고 추하다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교수는 분명히 그리스 식 미학의 이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적 가치의 판단은 이미 낡은 것입니다. 전통에 도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미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내 눈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그들이 정말 살아 있는 예술품이기나 한 듯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나는 당신네 사회가 지금까지 어느 사회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고, 오직 미학적인 목적, 즉 우주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인간 육체에서 지방을 빼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독일 교수를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고집쟁이 독일 놈 들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나는 매일 '현대 서구에 있어서의 인간미의 개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생각입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라는 스위스 조각가는 당신들이 인체에서 살과 지방을 제거한 것처럼 조각 계에서 같은 원리와 이상으로써 남성미와 여성미를 실현했습니다. 이 조각가는 인간의 육체를 조각할 때 되도록 지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1차원적으로 줄어든 인체는 철사와 같은 굵기로 바싹 마른 기다란 형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증 인
126
"모리츠 군, 나는 지금까지 40통이 넘는 탄원서를 썼다네.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않도록 설득해 보려는 의도에서였지. 누가 보아도 내 탄원서는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어. 그것은 멋지고 옳은 것이었으나 결과는 헛수고였다네. 나는 법률 문체, 외교 문서체, 전보 문체, 심지어 광고 문체까지 모조리 동원했어. 때로는 감상적으로, 때로는 속되게, 또 때로는 애원하는 투로, 이렇게 다양하게 구사하여 내 앞에 놓인 이 절망적인 상태가 허락하는 한 온갖 수단을 총 동원해서 정의를 호소해 보았지. 오로지 진실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이 불쾌하게 여길 만큼 쓴 적도 있는데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어. 화도 내지 않아. 비굴할 정도로 허리도 굽혀 봤으나 가엾게 생각하지도 않아. 심지어 모욕적인 욕을 퍼부어도 까딱도 하지 않아. 그들을 웃기려고도 해 보고 호기심을 끌어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헛수고였네. 결국 나는 훌륭한 감정도 비천한 욕망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말일세. 이럴 줄 알았으면 돌멩이들에게나 말해 볼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어. 돌멩이는 감정이 없으니까 미워할 줄도 또 복수할 줄도 모를 테니 말이네. 그들에게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없어. 그들은 계획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일만 할 뿐이라네. 내가 혈서를 쓴다 해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가 지금까지 보낸 탄원서들처럼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말 걸세. 그것이 나의 피, 즉 따뜻한 사람의 피로 씌어졌다는 것도 알지 못 할거야. 바로 그것이 기계와 같은 시민의 인간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것이네."
"안됐군요, 선생님! 이젠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들에겐 무슨 말을 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 모리츠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난 계속 쓸 거야. 죽는 날까지 계속하겠어. 인간은 야수를 길들이기도 하거늘 시민이라고 안 될 게 있겠어?"
"탄원서로는 효과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할 것 같군요. 글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겁니다."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정신은 결코 패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인간이 획득한 승리는 모두 정신의 승리였어. 시민을 길들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정신이야. 그들을 길들이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하네. 우리가 그들에게 그걸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과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거든. 아마 뱀이나 사자를 길들이는 것보다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오늘처럼 낙관주의자가 된 적은 없다네. 이것은 타의에 의해 삶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만이 갖는 낙관이겠지만 말이야. 소설 '25시'에서 이 탄원서는 죽도록 괴로운 나의 마지막 발작이기도 해. 하지만 나는 그걸 꼭 쓰고 말겠네!"
127
탄원서 제 3호
경제 문제(자기 육체의 반, 또는 3분의 1밖에 소유하지 못한 포로들에 대해)
나흘 동안 나는 친구 한 사람과 같이 이 수용소 포로들 중에서 그들 신체의 반, 3분의 1, 또는 5분의 1밖에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빈틈없는 계산기인 내 친구는 아직도 통계를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서둘러서 탄원서를 쓰는 이유는 이 문제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신들은 매일 수만 마르크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와 같이 갇혀 있는 1만 5천 명의 포로들 가운데 적어도 3천 명은 완전한 신체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 중 약 200명 정도는 두 다리가 다 없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을 마치 파충류처럼 기어 다닙니다. 그리고 1천 200명 정도의 포로들은 다리가 하나 뿐 이거나 팔이 하나 뿐 입니다. 또 몇몇은 두 팔이 모두 절단된 불구자입니다. 이상은 겉으로 나타난 불구자들의 통계입니다.
그러나 포로 중에는 상당수가 내장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폐장이라든가 신장이라든가, 또는 여러 군데의 뼈가 절단되었습니다. 또 40명의 포로들은 아주 앞을 보지 못 합니다.
이 포로들은 모두가 나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붙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친구 요한 모리츠는 수용소의 팔다리가 없는 불구자들을 보면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니 요한 모리츠는 개화된 사람이 아니지요. 그로서는 모든 포로가 기계적으로 체포된 이상, 불구자라고 해서 석방 될 수 없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기계적으로 체포될 때는 불구라고 예외는 아니지요. 공평을 기하려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정의란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요.
이 수용소에는 팔 없는 교수 한 분이 계시는데, 전쟁터에서 두 팔을 잃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교수란 교수는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팔이 없다고 해서 그가 예외가 된다는 건 옳은 일이 아니지요. 체포되는 것과 팔이 없다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등의 관계도 없지요. 그는 교수이므로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의 훌륭한 문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불구자들과 온전한 사지를 갖춘 사람들이 똑같은 양의 음식을 받는다는 건 매우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의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육체의 부피에 정비례한 양의 식량을 할당 배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에 정부는 포로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확보하느라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포로라고 하면 완전한 신체를 갖춘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3천 명이나 되는 팔다리 없는 불구자를 모아서 그들의 손, 발, 눈, 그리고 폐를 헤아려 본다면 실제로는 최대한 2천 명의 포로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적어도 천 명의 식량을 절약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포로들의 신체에 붙어 있지도 않은 기관까지 먹이기 위해 돈을 낭비하십니까? 그런 후한 인심은 정말 쓸데없는 짓입니다.
나의 이러한 건의를 상부에 보고하면 당국에서는 매우 기쁘게 여기리라 믿습니다. 훈장이라도 받게 될지 누가 압니까? 또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국가 경제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됩니다. 식량 절감은 곧 돈의 절약이니까요. 문제는 돈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도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지고서 펜을 놓을까 합니다.
증 인
128
탄원서 제 4호
군사적 문제(성의 전환에 대하여)
굶주림으로 해서 이제 포로들은 당신들께 군사적인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익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군사적인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니 부디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체포되어서 매일 500칼로리만으로 살아온 포로들은 이젠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엔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면도를 하던 정상적인 사람들이, 수용소에 와서는 이틀에 한 번씩 수염을 깎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엔 1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두 번, 그러다가 결국엔 전혀 면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수염은 날이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이윽고 솜털처럼 되더니, 마침내 그 솜털마저 부드럽고 매끈매끈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목소리도 여자의 음성으로 변해 가는가 하면 가슴도 부풀어 올라 열세 살짜리 소녀의 가슴만 합니다. 몸가짐도 여성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국부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식이 요법으로(특히 식사의 양을 더욱 줄이신다면) 남자의 생식기는 모두 퇴화되어 여자의 것으로 바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사들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런 현상은 굶주림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영양실조는 호르몬 분비, 즉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을 많이 감소시키거나 거의 없애 버린다고 합니다. 더욱이 간의 호르몬 조절 기능 악화로 남성 호르몬은 무제한으로 파괴되지만 여성 호르몬은 계속 생성되기 때문에 인체 조직은 여성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네 문명에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야만적인 당신들의 적을 우리 포로들처럼 모두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하고 그들이 모두 여성화될 때까지 하루에 몇 백 칼로리씩만 공급해 준다면 전 세계는 당신들의 수중에 들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당신네 적국에는 남자란 씨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감히 대항해 올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위대하신 당신네 수뇌부가 나의 이 유용한 발견을 이용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당신네 문명이 현실적이고 특히 창의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참작해 보면 그와 반대되는 현상도 생기리라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싶어하는 당신네 조국의 여성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서 그들을 남성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동력이 점점 증대될 것 아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당신의 지휘 하에 있는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허용된 500칼로리의 식량을 좀더 줄여야 한다고 제의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로들은 보다 빠르게 여성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증 인
129
새벽 3시.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1만 5천 명의 포로들은 다른 수용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탱크와 트럭들이 수용소 주위에 집결되었다. 탱크와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일제히 커져서 수용소는 대낮처럼 밝았다. 모든 자동식 기관포가 영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포로들의 무리를 향해 일제히 겨누고 있었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요한 모리츠는 나란히 걸어 나왔다. 요한은 추워서 이를 덜덜 떨고 있었다. 수용소 정문에는 곤봉으로 무장한 2개 부대의 군대가 포로들을 세어 조를 편성하고 있었다.
"보통 열 명 내지 열두 명이 타는 트럭에 60명은 실은 모양이야. 어떻게 할 작정이지? 자네는 인체 상호 불가침 법에 대해서 들어 봤나?"
드라이얀이 말했다. 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드라이얀은 첫 번째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있는 군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군인들은 처음에 20명을 올라타게 했다. 그것으로 더 이상 자리가 없을 만큼 꽉 찼다. 그러자 군인들은 트럭에 탄 포로들을 굵은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맞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몰렸다. 그러자 군인들은 서둘러 열 명 정도를 더 태우고 곤봉을 휘둘러 처넣었다. 그래서 약간의 공간이 생기자 군인들은 또 열 명을 태웠다.
이젠 어린애 하나도 더 탈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또다시 개머리판으로 포로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또 열 명이 트럭에 기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결국 60명의 포로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실렸다.
이젠 곤봉질도 끝났다. 트럭은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의 손을 잡고 트럭에 올랐다. 서로 떨어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요한, 절대적인 법칙이란 세상에 없는 건가봐. 물리학도 결국 불변의 법칙을 갖지 못하거든. 물리학에선 하나의 개체가 점유하는 공간을 두 개의 개체가 동시에 점유할 수 없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이 경우는 여섯 명이 단 한사람의 점유 공간을 점유하고 있거든. 이래도 물리학의 원리를 믿을 수 있겠어? 자네는 피카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없는데요, 선생님."
요한 모리츠는 짓눌리는 상태에서 숨 막히는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드라이얀은 키가 컸기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요한 모리츠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여러 사람의 가슴 사이에 꼭 끼여 있었다. 그의 짓눌린 가슴은 폐가 찌부러지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죽겠소!"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는 소리로 외쳤다. 꼼짝할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공기를 마시려고 콧구멍을 크게 벌려 보았지만 공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겠어요, 선생님!"
"대답해. 피카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없나?"
"없어요. 저는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아아, 숨 막혀. 아마 이대로 끝장이 나나 봐요."
드라이얀은 요한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자신의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드라이얀의 몸은 최소한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다만 키가 큰 덕분에 머리만은 솟아올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피카소는 유럽 사회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이 코만이라도 아니 콧구멍만이라도 좀 빼내 주십시오, 선생님. 절 도와주세요. 정말 죽겠어요!"
드라이얀은 약간의 틈이라도 내주려고 몸을 틀어 보았다. 요한의 머리가 그의 가슴께로 겨우 빠져 나왔다.
"피카소는 자네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라네. 이렇게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트럭에 타고 있는 모습을 말일세."
"저의 초상화를요? 잘 안 들려요. 귀가 꽉 막혀 버렸어요."
"그래, 자네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은 것같이 그렸지.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의 공간 속에 엉겨 붙은 모습이지. 어떤 사람은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다섯 개의 다리를 가졌으나 허파는 없다네. 자네만 하더라도 목소리는 있어도 입이 없잖나. 난 머리만 있지 몸은 없단 말이야. 트럭 위의 공간 속에 솟아 나온 머리.... 파리에서 내가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지. 그런데 지금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타고 있는 트럭을 그린 그림이었어. 아주 정확한 묘사야. 빠진 것 없이 세밀해. 그는 우리의 수용소도 그렸어. 사진을 찍듯이 사실 그대로를 그려 놓았어. 그야말로 피카소는 천재적인 화가야."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은 어둠이 깔려 있는 시골길을 달렸다. 드라이얀은 자기 주변의 포로들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몰골들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생과 사의 중간을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살았다가 다음 순간엔 죽어 있었다. 또 때로는 생과 사를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점유한 부채꼴에는 공간이라는 것은 없었다. 공간은 제거 당하여 죽어 있었다.
그들의 부채꼴 속에 있는 것은 경련뿐이었다. 눈이 경련을 일으키는가 하면 살도 피도 공기도 시간도 사상도 모두가 경련에 싸여 있었다. 인간은 형체와 정신을 상실하고, 허깨비 같은 인간만이 경련하고 있는 뿐이었다.
"숨쉴 수 있나?"
드라이얀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는 해요. 그것도 한쪽 콧구멍으로 말입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내 얘기나 듣게.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어떤 사실을 알려 줄 테니...."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용서하세요."
"들어야 해. 똑똑히 들어. 아주 중요한 거니까."
어떤 공포일지라도 한계가 있고
어떤 슬픔일지라도 그 종말이 있으니
살아가는 데 끝없이 슬퍼만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삶과는 관계없는 넋두리
이 세상은 간악과 불의가 끊임없으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악취와 괴이한 독벌레에 포위된 인간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집도 거리도 온 누리도 뒤덮고 있네.
"좀 더 크게 말하세요! 한마디도 안 들려요!"
요한이 말하자, 드라이얀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댔다.
대기를 깨끗이 하라! 하늘을 맑게 하라! 바람을 씻어라!
돌에서 돌을 추려 내고 팔에서 살갗을 도려내고 뼈에서 근육을 갉아 내어
그것들을 모두 씻어라!
돌멩이도 씻고, 뼈도 씻고, 뇌도 씻고, 영혼도 씻어라!
그 모든 걸 씻어라!
T. S. 엘리엇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요한이 말했다.
"선생님은 좋겠어요. 숨을 쉴 수가 있으니까요. 저는 질식할 것만 같아요!"
수용소 안에서는 몸집이 작은 사람일수록 덩치가 큰 사람보다 굶주림을 견디기가 쉬웠다. 그러나 60명을 한데 쑤셔 넣고 마치 괴물처럼 올드루프의 밤길을 달리는 이 트럭 위에서는 키가 작은 포로들은 숨을 쉬지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생님, 이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도무지 들리지 않으니까요."
"자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생명이 없어진다는 걸 알아야지...."
"뭘 들으란 말입니까?"
"그 독일인 교수가 돼먹지 않은 소리를 했거든. 그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으므로 벌을 받아 죽을 걸세."
드라이얀이 말했다.
"무슨 잘못을 범했는데요?"
"우리들의 지방과 살을 달아 본 교수 말일세. 그는 우리들의 고통의 양을 달아 볼 셈으로 아직 따뜻한 기름기를 달아보았단 말이야. 하지만 인간의 고통을 무게로 알아내지는 못하는 법이야. 생명이란 달 수 없는 거야. 감히 생명을 저울에 올리다니, 그런 놈은 극형에 처함이 마땅해!"
"안 들려요!"
"들리지 않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냐. 들리지 않더라도 죽을 때가 오면 죽게 되어 있어. 이 트럭의 운전병이나 보초들, 곤봉을 가진 사병들, 그리고 기관총을 가지고 우리들을 죽일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군인들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어. 누구도 듣지도 못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각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는 거야. 그들이 죽어가는 게 보이나?"
드라이얀이 크게 소리쳤다.
"눈이 가려져서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느끼지도 못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오직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에요."
"가장 중요한 본질을 느끼고 있군. 사람들 누구나가 자네와 똑같은 걸 느끼고 있어. 그런데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거든...."
드라이얀은 이번에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130
포로들은 다시 가축을 싣는 화차에 실렸다. 말 스무 필을 싣는 화차에 140명의 포로를 태웠다. 화차의 모든 문은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뒤에 붙은 화차에는 여자 포로 3천 명이 타고 있었다. 참으로 긴 열차였다. 드라이얀은 이런 긴 열차를 멀리서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마치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르는 행렬과도 같은 거야.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기계화된 것뿐이니, 우리는 기계의 힘으로 골고다를 기어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예수님은 두 강도 틈에 끼여 매발로 그 언덕을 올라가셨어. 자넨 왜 예수를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요한은 대답했다.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일부러 죄인 두 사람을 들러리로 세운 거야. 옛날부터 해 내려온 술책이지. 예수가 죄인이 아닌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예수만을 벌하지 못한 거야. 처형장에서 군중의 주의를 딴 곳으로 끌기 위해 강도들을 동반시킨 거야. 나나 자네나 내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좌우에 한 사람의 죄인을 달고 있어. 골고다의 방법과 똑같은 술책이야. 수효의 차가 있을 뿐이지.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의 경우는 죄 없는 한 사람이 죄인 두 사람 사이에 끼였지만, 지금은 만 명의 죄 없는 인간이 두 명의 죄인 틈에 끼여 든 셈이야. 그러나 그건 별로 큰 차이는 아닐세. 방법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니까. 더욱이 우리들은 기계가 조정해서 자동적으로 십자가에 오르게 되는 거야. 하지만 그런 수작은 위험한 걸세. 왜냐하면 일단 처형이 끝나고 나면 군중은 예수만을 기억하게 된단 말이야. 그건 어느 때고 마찬가지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형 집행이 자동적으로 되든 "
드라이얀 코르가는 창가로 다가섰다. 열차는 정거하고 있었다.
"뭐가 보입니까?"
요한이 물었다. 그의 눈은 창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정거장이야. 다른 기차도 들어와 있군."
"역시 포로 열차인가요?"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석방된 포로들이야. 독일에 노동자로 끌려 왔던 외국인들이 석방되었구먼."
드라이얀은 열차 주변에서 법석을 떠는 남녀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두들 담배를 피우는군."
드라이얀의 말을 듣고 요한 모리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여자가 열차에서 내리는군. 소시지가 든 흰빵을 먹고 있어."
드라이얀도 이 말을 하며 침을 삼켰다.
"나도 좀 봤으면.... 어쩌면 한 사람쯤 아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어느 나라 사람들이죠?"
"여러 나라야."
드라이얀은 화차 밖에 그려진 국가와 단추 구멍에 끼어 있는 작은 깃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버터 바른 빵을 먹고 있는 여자는 덴마크 여자로군. 그녀의 허벅지가 먹고 있는 빵처럼 하얀데.... 그 뒤에는 프랑스 여자가 있는데 아주 미인이야. 눈동자도 까맣고."
"그 여자 말고 다른 프랑스 사람은 없습니까?"
요한이 물었다.
"우리가 탄 이 화차 옆에 한 무리가 있네. 벨기에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이 섞여 있어."
드라이얀은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을 좀 봤으면 좋겠어요!"
요한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옛정이 되 살아났던 것이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의 허리를 잡아 약간 위로 치켜 올려 주었다.
"오, 프랑스 사람들이구나! 저기 이탈리아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조세프와 똑같은데요. 보이지요?"
요한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세프가 누구지?"
"제 친구 조세프 말예요.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제가 탈출시켜 준 친구 말입니다. 그 조세프가 지금 프랑스에 있다는 걸 아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저 사람이라고 믿겠는데요. 너무 똑같이 생겼어요! 저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 봐 주시겠어요?"
"뭐라고 하지?"
"무슨 말이든 해 보세요. 조세프와 기막히게 닮았군요. 무슨 말이든 한마디하고 싶은데 프랑스 말을 모르니까 답답해요. 프랑스까지 무사히 돌아가기 바란다고 말해 보세요."
요한은 프랑스 사람과 그냥 헤어지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다.
"보세요, 지금 막 우리 옆에 왔잖아요. 지금 뭐라고 말해 보세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독일어로 말을 붙였다.
"프랑스까지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요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정답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반가운 나머지 생기마저 감돌았다. 그가 누구이든 그리운 프랑스 사람임에 틀림없었으므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던 것이었다. 플랫폼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은 긴장된 얼굴로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조세프를 닮았다는 사나이가 프랑스 말로 하는 걸 들었다.
"저 나치 놈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지?"
플랫폼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창가에서 정답게 웃어 보이는 요한 모리츠를 적의에 찬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저 자식이 아마 담배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조세프 같다는 청년이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다 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구부려 돌멩이를 주워서는 요한 모리츠가 여전히 웃으며 내다보고 있는 창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돌은 창을 뚫고 들어와 화차 한복판에 떨어졌다. 포로 한 사람이 이 돌에 맞았다.
"자, 네 담배다! 너희 놈들 덕분에 나는 3년이나 고생했어!"
두 번째 돌멩이가 찻간의 벽을 때렸다. 그러나 이어 수많은 돌이 비 오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바닥에 엎드려 되도록 창에서 멀리 피했다. 돌멩이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마치 전쟁터에서 공격을 받듯이 화차 속은 저주와 아우성으로 온통 들끓었다.
플랫폼은 욕설과 아우성으로 요란스러웠다.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 아이들 소리. 모두가 격분한 목소리였다. 프랑스 말, 이탈리아 말, 소련 말, 덴마크 말, 노르웨이 말 등, 세계 각국어로 부르짖는 요란한 아우성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저주는 똑같이 격한 분노를 터뜨렸고, 요한 모리츠를 치려고 날아드는 돌멩이의 뒤를 따라오는 욕지거리는 비록 나라에 따라 발음은 다를지언정 다 똑같은 의미였다.나치의 개자식, 나치의 강도 살인마, 나치, 나치....
수송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내려 포로들이 탄 열차에 돌을 던졌다. 보초와 헌병이 달려와 질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군중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쩔쩔맸다. 사태가 너무 격해서 진정시킬 도리가 없었다. 범위가 점점 확대하고 사태가 더욱 험악해지자 헌병들이 공중에 대고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치들을 보호하려는 헌병에 대해서 해방된 노예들의 가슴속에서는 일제히 반항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요한 모리츠는 첫 번째 돌멩이가 귀를 스치고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창가에 붙어 서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군중들이 돌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을 때도 요한은 이 떠들썩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사 이해를 했다고 해도 그는 조세프를 닮은 프랑스 인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안에 있던 포로들이 돌 세례를 피하느라고 아우성을 칠 때에야 비로소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기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군중을 내다보았다. 그때 화차 속의 포로들이 요한의 다리를 창가에서 낚아채어 마룻바닥에 쓰러뜨렸다. 포로들은 요한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증오와 절망과 야수성을 띤 수천의 발들이 요한을 짓밟는 사이에도 우박 같은 돌멩이들이 끊임없이 포로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포로들은 요한이 플랫폼에 있는 석방된 포로들의 증오와 공격을 촉발해 놓은데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 그의 몸뚱이를 가리가리 찢어 놓고 싶었다. 모리츠를 깔아뭉개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묵시록에 나오는 수천 개의 다리를 가진 괴수였다. 밖에서도 수천 개의 팔을 가진 괴수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죽을 각오를 하고 나자 자기를 짓밟는 장화 바닥도 자기를 후려갈기는 주먹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맞아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고난과 고통의 생애였다. 코르가 사제와 판타나 교회와 성모 마리아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평화가 그의 몸과 마음에 깃들였다. 돌멩이가 화차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공격이 자기 한 사람을 향해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짓밟아 없애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다. 이제 그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살아나면 당장 온 세상이 끝장이 나기나 하는 것처럼, 아니면 퇴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단 하나의 죄인은 바로 자기, 요한 모리츠였다. 그래서 군중과 포로들은 누구나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헌병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요한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군중은 진정되지 않으리라. 헌병들 또한 요한을 죽이기 전에는 마음이 풀리지 않으리라.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된 군인들도 요한 모리츠가 가리가리 찢어지기 전에는 바다 건너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요한은 부득이 죽어야 할 몸이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요한은 혼미한 상태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는 프랑스 인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은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드라이얀 코르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탄 기차는 마치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르는 행렬과도 같은 거야.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기계화된 것뿐이니, 우리는 기계의 힘으로 골고다를 기어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생각되었다. 밤이 된 것 같았다. 깜깜한 어둠이 깃들었다.
131
요한 모리츠는 그 날 밤이 깊어서야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고 드라이얀 코르가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요한은 자기의 뺨이 누군가의 맨살에 맞닿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셔츠도 입지 않은 드라이얀의 어깨였다. 드라이얀이 왜 셔츠를 벗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물 좀 주세요."
요한 모리츠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드라이얀 코르가는 못 들은 척 묵살했다.
"물 좀 주세요. 목이 타요!"
요한 모리츠는 거듭 말했다. 그는 드라이얀의 품에 안긴 채로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동안에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 셔츠를 찢어 상처를 감아 주고 자리를 만들어 그의 다리를 뻗게 했다.
요한 모리츠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가끔 드라이얀은 요한의 가슴에 손을 얹어 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는 걸 확인했다. 손을 떼고 붕대 위에 귀를 대고 들어 보기도 했다. 때때로 요한의 심장이 너무나 희미하게 뛰어서 손으로는 잘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를 바싹 갖다 대도 심장의 고동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요한 모리츠는 의식을 되찾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 자신이 죽음의 늪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요한 모리츠는 물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그도 목이 탔던 것이다. 그러나 화차 속에서 무슨 수로 물을 구한단 말인가?
24시간 동안 포로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대소변을 보러 가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은 채 갇혀 있었다. 화차 안은 구린내와 지린내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으로 악취가 풍겼다. 화차 바닥은 오줌이 흘러 질퍽거렸다. 요한은 오줌 속에 누워 있었다. 요한도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오줌을 쌌다. 아직 눈은 뜨지 못하고 입술만을 간신히 달싹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 목이 타요!"
"안됐지만 물이 없어. 마실 거라곤 아무 것도 없네."
드라이얀은 요한의 입술만이라도 좀 축여 줄 궁리를 해 보았다. 그러나 마실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드라이얀은 칭기즈 칸의 군사들이 초원 지대를 통과할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떨어지면 타고 가던 말의 혈관을 칼로 따고 피를 빨아먹고 상처에 붕대를 매 준 다음 다시 떠났는데, 이렇게 몇날 며칠을 몇 방울의 뜨거운 피 외엔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드라이얀은 말의 피를 마시는 장면에 사로잡혀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피 몇 방울쯤 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피를 마시면 갈증도 해소되고 몸도 반드시 좋아질 것이다.
"아, 물 좀 줘요!"
요한 모리츠는 연거푸 애원했다.
"마실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네.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내 피밖에 없어. 그거라면 난 기쁜 마음으로 얼마든지 주겠네. 그러나 자넨 피를 마셔선 안 돼. 인간의 피를 마시는 자는 흡혈귀거든.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건 기계고 군중하고 악마야. 인간과 모양은 같아도 혼이 없는 인간 괴물이지."
"목이 타요!"
요한이 중얼거렸다.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자네는 피를 마셔선 안 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자네만이 인간의 피 맛을 본 적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야. 내 말이 들리나? 다른 자들은 모두 피를 마시고 흡혈귀가 되어 버렸어. 그들은 이제 인간이 아냐. 여기 있는 포로들, 보초들, 그리고 자네에게 돌을 던진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모두 인간이 아니야. 여기서 인간이라곤 단지 자네뿐일세. 자네는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 목이 타요!"
"알고 있어. 자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러나 저 자들처럼 흡혈귀로 살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겠지. 인간의 피를 마셔서는 안 돼. 내 말을 알아듣겠나?"
"목이 타 죽겠어요!"
요한 모리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